[SF] 스핑크스의 저주

Part I 죽음의 바이러스

1999년 10월 이집트.
  " 제임스 박사님, 좀 진척이 있어요? "
  짧은 반바지에 카키색 작업복 차림의 셜리 맥거번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 휘날리며 작업반원이 임시로 쓰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 글쎄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상으로 스핑크스는 정교하게 설계되었어요. 복원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  생각보다는 오래 걸릴 것 같군요. "
  제임스 박사라 불린 사람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책상에 내려놓고는 옆에 있는 콜라캔을 집어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적당히 그을린 구리빛 얼굴, 힘줄이 불거진 팔뚝의 그를 32세의 고고학 박사로는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다.
  " 제임스 박사님, 연구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박사님께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셨다면서요? 거기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고고학과가 생긴 후로 최고  점수로 졸업하시면서도 교수로 남으라는 것을 마다하고 스핑크스 복원 작업에 참여하셨다면서요? "
  제임스는 들고 있던 콜라캔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셜리의 코밑에 있는 주근깨가 그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 과연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이 박사님에게 있어서 케임브리지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달려올 만큼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나요?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
  셜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제임스에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그는 책상에 놓여있는 스핑크스 관련 도면을 쳐다볼  뿐이었다.
  " 제임스 박사님, 우리가 왜 이집트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자기들이 관리 소홀로  망가뜨린  스핑크스, 자기들이 자기 돈으로 고쳐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필이면 유네스코(UN교육과학문화기구) 중에서 가장 우수한  고고학자인 우리들이 이 더위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냐구요."
  셜리는 말을 마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줄자를  열려  있는 책상 서랍 안에다 탕-소리가 나도록 집어던졌다. 줄자는  서랍 모퉁이를 맞고 튕겨 제임스의 발밑에 떨어졌다.
  ‘ 깨나 괄괄한 여자로군. 하긴 스물 여섯이면 한창 팔팔할 때지. ‘
  제임스는 빙그레 웃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면서 천천히 발밑에 떨어진 줄자를 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 셜리양. 이 작업 이전에 이집트에 와본적이 있어요?  여행으로. "
  셜리는 그런것은 왜 묻느냐는듯한 얼굴로 제임스쪽을 돌아보았다.
  " 고등학교때요. 지금 우리가 보수하고  있는  스핑크스도 그때 구경했지요. 근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죠? "
  " 그때 스핑크스 바로 앞에 가서 사진을 찍었나요, 아니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나요? "
  제임스는 영문도 모르는 셜리를 미소띤  얼굴로  쳐다보며 계속 물음을 던졌다.
  " 당연히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었죠. 제 친구들은 스핑크스의 발가락에 앉아서 찍기까지 했는걸요. "
  " 스핑크스가 왜 이지경으로 부스러지고 금이 가고 엉망이 되었는지 알아요? 바로 셜리양같은 관광객들의 몸에서  나오는 땀과 진동,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들이  스핑크스 위에 올라타고 낙서를 하고 조각을 뜯어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이렇게 된거여요. "
  셜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 스핑크스를 망쳐놓은 것은 우리 서방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파괴한 인류의 문화 유산, 우리가 앞장서서 고쳐야  해요. "
  셜리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져 있었다. 그때였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들어온 것은.
  " 제임스 박사님, 빨리 나와보십시오.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막 앞에 위치한 스핑크스는 복구 기간동안 외부공기와 모래 바람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거대한 밥공기를 엎어놓은듯한 모양의 유리 도움으로 덮여져 있었다.  반투명의 큼직한 유리 도움의 입구에는 벌써부터 카메라를 든 기자들로 법석이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두 사람 앞으로 몰려오는 기자들을 경비요원들은 몸으로 밀쳐내며 제임스와 셜리를 도움 안으로 간신히 통과시켰다.
  " 무슨 일이지요? 이 난리법석이? "
  셜리가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기가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베이지색의 반소매 작업복을 입고 옆구리에 작은 측정 장비를 끼고 있는 남자가 두 사람 앞에 서더니 복원실로 안내했다. 더위에도 불구하고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남자는 복원실로 가는 동안에도 흥분된 어조로 계속 지껄였다.
  "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감마선 투시기인 X-7280으로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 구조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화면에 이상한 금속 반응이 나타났읍니다.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이집트인은 금속을 스핑크스의 건설재료로 사용할 만한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밀 조사해본 결과 머리 부분에 무언가 작은 금속 물체가 박혀져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
  제임스는 나무로 되어있는 복원실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유리 도움 속이라도 사막의 건조하고 더운 날씨에는  어쩔 수 없는 듯 문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 열리지 않았다.
  " 젠장, 관리반 사람들은 이런 문 하나 제대로 안  고쳐놓나? "
  휴대용 컴퓨터를 어깨에 맨 셜리는 이렇게 투덜대다가  제임스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듯이 팔에 안고 있는 서류바인더로 눈을 돌렸다. 제임스가 복원실에 들어서자  둥근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는 구석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아 정면에 있는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는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찍은 감마선 사진이  비쳐지고 있었다. 단상에 서있던 검은 머리의 작달막한 남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 감마선으로 조사해본 결과에 따르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는 적어도 가로 세로 높이 30cm이상되는 금속 상자가 들어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감마선으로 확인된 금속 반응이 니켈 같다는 조사반의 이야기입니다. "
  " 말도 안돼요. 스웨덴의 과학자 크론스테드가 니켈을 발견한 때는 1751년. 이 스핑크스와 쿠푸왕의 피라밋을  만들 기원전 3천년전에 인류가 알고 있던 금속이라고는 구리와 금,은이 전부란 말이어요. "
  셜리가 책상을 탕 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단상의 작달막한 남자는 셜리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셜리양의 말대로 스핑크스 당시의 이집트인이 니켈을 알고 있었을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겁니다. 곧 스핑크스 머리 부분의 정밀 조사가 시작됩니다. "
  남자는 책상위의 빨간 스위치를 눌러 스크린에 나타난 화면을 바꾸었다. 화면에 나타난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는 적색,청색,흑색의 여러가지 선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가장 손상이 가지 않게  잘라낼 수 있도록 컴퓨터로 분석한 화면입니다. 복원 1반은  레이저 절단기로 도면에 나타난대로 절단을 행하여 주십시오.  복원 2반은 잘라낸 조각과 안에서 나온 자료들을  기록,보존,분석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복원 작업의 총 지휘는 제임스 박사님이 맡아서 해주시겠읍니다. "
  " 내가? 흠, 영광인걸? "
  제임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앉은 모두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셜리는 어깨에 맨 작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서 스크리인에 나타나는 자료를 분주하게 입력하고 있었다.
  모두는 중앙 복도를 지나 스핑크스 앞에 섰다. 복원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꿈속에 나타날 정도로 많이 보아온 스핑크스였지만 제임스는 늘 하듯이 옷깃을 경건히 여미고 스핑크스 앞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셜리는 그러한 제임스를 이상한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4천년의 역사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 자, 작업을 시작합시다. "
  제임스가 들고 있던 회색 워키토키에 대고 소리쳤다. 베지색 작업복을 입고 있던 두 사람이 레이저  절단기를  들고는 유리 도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불꽃도 보이지 않는 4000도의 레이저가 워키토키를 타고  나오는 제임스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돌 위를 움직였다. 붉고 푸른 파이프에 투명한 긴 튜브가 얼기설기 감겨있는 기계가 잘라낸 돌조각 위에 에나멜 플라스틱을 스프레이처럼 뿌렸다. 금방 굳어지는 에나멜 플라스틱은 부서지기 쉬운 돌조각 위에 단단한 투명 보호막을 이루었고, 진공 크레인이 이 돌조각들을 손쉽게 들어내었다.
  " 저기다! 뭐가 보여요! "
  반투명의 유리 도움을 통해 비치는 사막의 햇살을 받아, 잘라낸 돌조각 사이로 금속성 반사광이 셜리의 눈에 띄였다. 곧 두 사람의 고고학자의 손에 의해 그 물체는 안전하게  땅에 내려졌다.
  " 제임스 박사님, 이건… "
  셜리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제임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환한 사막의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물체는 틀림없는 금속 상자였던 것이다. 구두 상자보다 약간 큰 그 금속상자는 보통의 스테인레스 상자와 거의 흡사하게  생겼지만, 표면에 나있는 거친 흠만이 이 상자가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4000년이나 잠자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흔히 이집트의 유물에서 발견되곤 하는 히에로글리프 같은 글자나 무늬는 하나도 쓰여져 있지 않았다. 곧  조사반이 달려와 사진을 찍고 갖가지 장비를 들이댔다.
  " 랜디 교수님, 이것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
  아까 단상에서 말하던 작달막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  금속 상자를 손에 들고는 천천히 열었다. 유물의 보존을 위해 반투명의 보호 장갑을 끼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은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랜디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작은 캡슈울을 몇 개 꺼냈다. 일동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유리가 아닙니까, 제임스 박사님! "
  제임스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랜디가 그의 손에 캡슈울 하나를 넘겨주었다. 제임스는 캡슈울을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캡슈울 안은 비어있는 것 같았다.
  " 정말 놀라와요. 고대 이집트인들이 금속과 유리를 사용하고 있었다니! "
  " 박사님, 저도 하나 줘보세요. "
  " 여기 있어요, 셜리양. 꼭 보호 장갑을 끼고 만져야 유물이 안 상합니다. "
  " 그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서야 어떻게 고고학자라 할 수 있나요. "
  셜리는 캡슈울을 하나 받아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녀가 다시 랜디에게 캡슐을 돌려주려고 할 때 입구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 빨리 감춰요. 기자들이 보면 곤란합니다. 아직 학술적으로 확인도 안된 것을 발표할 수는 없어요. "
  랜디는 캡슈울을 다시 금속 상자 안에 집어넣다 그만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4000년을 스핑크스의 머리속에서 잠자고 있던 캡슈울은 바닥의 돌멩이에 부딪쳐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아깝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기자들의  눈을  피하는게 우선이니까. ‘
  랜디는 황급히 남은 캡슈울을 금속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고는 유물을 정리해 보관하는 금고안에 밀어넣었다.  랜디가 금고문을 닫자마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성급한 몇몇 기자들의 마이크를 피하느라 제임스와 랜디는 몸부림을 쳐야했다.
  "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에서 금속 상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더우기 4000년전의 이집트인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던 니켈로 되어있다면서요? "
  유리 도움 안이었지만 사막의 뜨거운  열기속에서  무거운 비디오 카메라를 어깨에 메느라 구슬땀을 흘리면서 이 영훈기자는 무작정 제임스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 아직 확인 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스핑크스의  머리에서 무언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한 것은 고고학적인 조사가 끝나야 발표할 수 있어요. "
  " 하지만 박사님들이 발견하신 것은 인류  문명의  귀중한 유적입니다. 온 세계는 이 발견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요. 박사님께서 말씀하지지 못한다면 아가씨께서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
  사람들 틈바귀에 끼여있는 셜리를 발견한 영훈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르르 기자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녀의 팔에 안고 있던 서류 파일이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셜리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마이크를 신경질 난다는 듯이 팔로 툭 쳐버렸다. 영훈이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동안 셜리는 흩어진 서류를 집어서는 빼끔 열려있는 문으로 나가버렸다.
  기자들이 경비원들에 의해 쫓겨가듯이 물러나간 후에야 제임스와 랜디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휴, 이제야 물러나갔군. 하지만 제임스 박사님, 고대 이집트인이 니켈 금속과 유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임스는 짧은 작업복의 소매로 땀을 닦으며 랜디쪽을 돌아보았다.
  " 음… 자세한 것은 정밀 조사가 끝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할만한 발견을 한건지도 몰라요. "
  " 박사님,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죠? 독한 마늘 냄새같기도 하고… "
  세 사람은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 뭐 누군가가 마늘 섞인 음식을 흘렸나보죠.  별 일이야 있겠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셜리는 주위를 휘 둘러보고는 책상위에서 휴대용 컴퓨터를 들어 어깨에 메고 휘적거리며 문을 나섰다. 사라지는 그녀의 뮛모습에 대고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 마치 서부시대의 카우보이가 다시 나타난 것 같군. "

  셜리가 기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6시가 넘어서였다. 10월이지만 아직 더운  이집트의 더위를 먹었는지, 아까 너무나 엄청난 발견을 목격해서였는지 모르지만 피곤하고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주머니를 한참 뒤져서 간신히 아파트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여는 셜리에게 기둥 뒤의 검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허름한 청작업복 차림에 어깨에는 큼직한 비디오 카메라. 남자는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실례합니다.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
  셜리는 대꾸도 않고 열쇠로 문을 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힘껏 닫았다. 윽-하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셜리양을 잡으려던 영훈의 손이 문에 찧였다.
  " 끈질기시군요. 이 상처난 것좀 봐요. "
  셜리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문을 열었다. 영훈은 문틈에 찧여 약간 피나는 손가락을 아래로  떨구고 아파트 문을 들어섰다.
  " 이봐요, 난 지금 무척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구요.  발견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고 아까도 말했잖아요. "
  " 하지만 발견을 지켜본 사람은 제임스 박사님과 랜디 교수님, 그리고 셜리양뿐입니다. 몇마디라도 알려줄 수 있잖아요. "
  " 아이 참, 난 말할게 없다고 몇번이나… "
  셜리는 목 뒷부분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영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쓰러지는 셜리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는 맥없이 풀어져 있었다. 그는 셜리를 내려놓고 방안으로 들어가 전화기를 붙잡았다.

  " 이 금속상자는 예상대로 니켈로 되어있읍니다.  표면의 부식상태로 보아서는 4000년이 조금 넘을 것 같고요, 놀라운것은 상자의 표면가공이 레이저로 가공된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
  " 레이저? "
  랜디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임스 박사님보고 같이 남아있어달라고 할껄. ‘
  랜디는 결과에 너무도 놀라 숙소에 돌아간 제임스를 아쉬워했지만 연구원은 태연하게 보고서를 계속 읽어나갔다.
  " 상자는 부식되어있었지만, 표면의 니켈 결정 방향과 미세한 마무리 손질로 보아 레이저가 틀림없다는 것이 복원 2반 연구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더우기 안에 들어있는 캡슈울은 파이렉스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읍니다. "
  " 파이렉스가 뭐지요? "
  " 특별히 열에 강하도록 제작된  유리입니다. 시험관이나 비이커등의 과학 실험 기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유리이지요. 이집트인이 유리를, 그것도 파이렉스를 쓴다는게 믿어지지 않아서 몇번이나 실험을 했지만… "
  연구원은 눈 앞에 청록색과 빨간색, 그리고  갖가지 색의 빛의 점이 마구 날아다님과 동시에 뒷목이 뻣뻣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지만 보고서는 어느새 그의 손을 빠져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신이 넘어지는 쿵하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 셜리양,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펄펄하던 사람이? "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제임스는 얼굴에 온통 튜브와  의료기기를 뒤집어 쓴 셜리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다가, 옆에  멍하니 서있는 남자가 낮에 만났던 기자임을 깨닫고 험악한 눈길로 영훈을 노려보았다.
  " 당신은 도대체 여기 왜 서있는거요? 병원에까지  취재하러 왔소? 이 아픈 사람을 붙잡고? "
  영훈이 난처한 얼굴로 랜디를 돌아보았다.
  " 이 영훈 기자가 셜리양의 아파트에 찾아 간 것은 사실이지만 쓰러지는 그녀를 안아서 의료원으로 데려온 것도  바로 그입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셜리양은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
  제임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영훈에게 목례를 보냈지만 영훈은 살짝 웃어보이며  인사에 답했다. 랜디가 말을 이었다.
  " 이상한 일입니다. 복원 2반의 연구원인 어드벤트,  관리반의 아미르와 하지, 그리고 셜리양까지 이미  네명이  원인모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읍니다. 고열, 전신에  돋아나는 붉은반점, 그리고 혈중 포도당 농도의 급격한  하락.  특히 혈중 포도당 농도가 떨어지면 치명적이랍니다. 혈관에  포도당을 주입함으로서 일단 고비는 넘겼읍니다만 걱정이군요. "
  제임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집트에서 가장 멋있는  건물로 손꼽히는 이집트 국립 의료원의 창문 아래로는  한밤의 나일강이 수천년의 역사를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다리를 건너는 지하철의 불빛만이  파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제임스 박사님과 랜디 교수님이시죠?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바싹 마른 큰 키의 의사가 두 사람을 불렀다. ‘이집트  국립 의료원 바이러스 과장 낫산’이라는 파란 명찰이 그가  입은 하얀 가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낫산의 방은 여러가지 색의 작은 튜브와 현미경, 컴퓨터와 시험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푹신푹신한 갈색  소파에  앉은 두사람은 약간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낫산이 벽 한구석에 있는 컴퓨터 스크리인의 스위치를  넣었다. 화면에 직사각형 캔디 모양에 털이 잔뜩 나있는 회색 물이 보였다.
  " 두분이 보고 계시는 것은 셜리양과 아미르, 하지 세사람 몸에서 추출한 바이러스입니다. 어드벤트는 증세가 가벼워서인지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고요. 문제는  이집트  내에, 아니 전세계에 이러한 바이러스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 그렇다면 새로운 바이러스? "
  " WHO, 즉 세계 보건기구에 등록되어있는 어떤 바이러스도 이런 것은 없었읍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어떤 치료법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의료원 내의 모든  연구원들과 의사가 치료에 매달려있지만 회복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합니다. "
  " …… "
  " 뭔가 집히는 것은 없읍니까? 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거야 피라미드의 저주도 아니고… "
  삐리릭- 낫산의 책상위에 있는 화상 전화기에  파란  불이 켜졌다. 화면에는 제복을 입은 간호원의  얼굴이  나타났다. 간호원의 낮은 목소리가 약간의 잡음이 섞인 채  스피이커에서 흘러나왔다.
  " 아미르씨와 하지씨가 지금 막 숨을 거두었읍니다.  병세가 경미하던 어드벤트와 셜리양도 증세가  매우  악화되었고요. 사망하기 직전 아미르씨와 하지씨의 체온은 무려 43도였읍니다. "
  " 인터페론을 써보았나? 감마 글로블린도? "
  " 섬유아세포에서 추출한 인터페론을 대량 투여해보았읍니다만 전혀 효과가 없었읍니다. 또한 바이러스에 듣는 면역제제인 감마 글로블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읍니다. "
  낫산은 머리를 두 손으로 싸쥐었다. 새로운  바이러스병에 일차적으로 투여하는 인터페론과 감마 글로블린이 아무런 효험이 없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없다. 낫산이 이런 생각에 절망하고 있는데 책상위의 화상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그는 귀찮은듯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 임상 분석실입니다 ‘ 하는 약간은 쉰듯한 굵은 목소리가 스피이커에서 흘러나왔다.
  " 바이러스의 구조를 분석해냈습니다. 결과를 컴퓨터로 보내겠습니다. "
  낫산은 선반에 놓인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잔  따르더니 천천히 컴퓨터로 가서 스위치를 올렸다. 흡사 철골이 이리저리 얽히고 모서리마다 구슬같은 동그라미가 달려있는 이상한 모양이 화면에 나타났다. 낫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커피잔을 쥔 손이 휘청대면서 바닥에 흐른 커피가  제임스의 작업복까지 튀었다.
  " 무슨… 일입니까? "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낫산에게 물었다. 낫산이 고개를  휘휘저으며 말했다.
  "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보면 바이러스는  이물질이거든요. 인간의 면역 체계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즉각적인 공격을 가하고, 바이러스는 대부분의 경우에 퇴치가 됩니다. 이러한 면역 작용을 돕는 물질이 바로 인터페론과  감마글로블린이지요. 하지만 이번  바이러스는…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단백질과 똑같은 구조입니다. "
  " 인간의 단백질과 똑같은 구조라고요? "
  낫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따라서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
  삐리릭- 낫산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의 전화기는  무정하게도 또 울려대고 있었다.
  " 입원실입니다. 스핑크스 복원반에서 여섯명의 환자가 새로 발생했읍니다. 또, 치료중이던 어드벤트씨도  사망했읍니다. 사인은 간조직 파괴입니다. "
  " 무슨 소리야? 간조직 파괴라니? 간이 얼마나 튼튼한  장기인데 단 몇시간만에 파괴된단 말이야? "
  낫산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빽 질렀다. 상대편이 움찔하는 것이 화면을 지켜보는 제임스들에게도 보였다.
  " 저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분명히 어드벤트씨의 간세포의 95%가 그 기능을 상실했읍니다. 일부 세포는  원형질 분리를 일으켜 외형까지 파괴되었읍니다. 그리고  의료진에게까지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  의료진에 특수 마스크와 산소 호흡기를 지급했읍니다. "
  " 좋도록 하게. "
  낫산은 전화를 끊고 수화기를 책상 위에 탕-하고 팽개쳐버렸다. 밖에서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여직원이 양복  차림의 남자와 같이 서있었다.
  " 보건성 장관께서 오셨읍니다. "
  " …… "
  짙은 곤색의 양복 차림인 장관은 인사도 생략한  채  낫산 앞에 앉았다.
  "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괴질이라뇨? 더우기 발병한지 두시간만에 세 명이 숨지다니. "
  " 저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팽개쳐져 있는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낫산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화면 아랫쪽에 ‘아스완’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 여기는 아스완입니다. 아스완 시내에서 일곱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혈중 포도당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바이러스도 아닙니다. "
  " 혹시 그중 스핑크스 복원반원은 없는가? "
  " 두명은 스핑크스 복원반이고 다섯명은 그 가족입니다."
  랜디는 보고를 듣자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제임스가 급히 소리쳤다.
  " 빨리 의사를, 응급조치를! "

  여의도 종합 과학 단지의 중심부에 높이  솟은  111층짜리 바이오 타워의 78층에서는 혜진이 연방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컴퓨터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기호를 훑어내리는  그녀의 눈은 놀라움에 싸여있었다.
  "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설마 이럴수가… "
  쿵쿵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천천히 스크리인을 다시 확인했다.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는 상하로 격렬히 요동을 치고 있었다.
  " 이거 뇌파 그래프 아니오? 식물학 박사이신 혜진씨가 언제 동물 뇌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요? "
  커피잔을 들고 밖에서 들어오던 진현이 컴퓨터 스크리인에 나타난 화면을 보고 불쑥 참견했다. 혜진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책을 대충 펴면서 관심없는 듯이  심드렁한 말투로 진현의 말을 받았다.
  " 식물학자라고 동물쪽은 연구하지말라는  법이  있나요? 단지 참고로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
  " 연구하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
  진현은 짧게 깎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 왜 남의 책상머리에 걸터앉는 거여요? 예의도 없게시리."
  진현은 히죽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 아, 다른게 아니고요, 혜진씨가 들고 있는 책이 꺼꾸로 인쇄되어있다는 걸 말해드리려고요. "
  혜진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지금 책을 꺼꾸로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다닥 책을 내려놓았다. 진현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무슨 문제가 있군요, 혜진씨. 항상 냉정을 잃지않던  당신답지 않아요. 무슨 일이죠? 도와드릴께요. "
  진현은 감추고 있던 한쪽 손을 펴보였다. 그 손에는 1cm정도밖에는 안되는 파란 장미 세 송이가  쥐어있었다.  혜진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 참 아름답군요, 파란 장미라니. 더우기 이렇게 작은  장미는 본적이 없어요. 인공적으로 만든거죠? "
  " 사흘걸려서 만든 꽃이예요. 연구소 오기 전의 제 전공이 유전자 조작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혜진 당신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받아요. "
  " …… "
  진현은 혜진의 투피스 웃옷의 포켓에 장미를 꽂아주며  말했다.
  " 요즘 왠지 당신이 어두워보였어요. 환히 웃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
  " 고마와요. 당신이라면…  절 도와주세요. "
  혜진은 키보드를 눌러댔다. 화면에 새로운 수식과  그래프가 나타났다. 진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걷혀져갔다.
  " 이것은… "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이건 식물에서 측정한 생체전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식물 뇌파에요. "
  "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측정을… "
  혜진은 치렁치렁한 긴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올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CD (콤팩트  디스크)의 삼각형 스위치를 한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의 조용한  음악이  혜진의 목소리를 자욱이 감싸며 흘러나왔다.
  " 진현씨는 L-2-3-폴리글루타민산이라는 물질을  기억하시나요? "
  " L-2-3-폴리글루타민산이라면 동물의 두뇌활동을  촉진시키는 약품… 맞나요? "
  " 맞아요. 예전부터 글루타민산계통의 물질들이  두뇌활동에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었지요. 그래서 한동안 조미료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도 있었잖아요? 조미료의  주성분이 바로 글루타민산나트륨이거든요. 작년엔가 우리 바이오타워의 82층 생화학 연구팀이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발견해내서 노벨상후보에까지 올랐었지요. "
  혜진은 책상서랍에서 작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어 전원에 연결했다. 화면에는 곧 작은 생쥐들이 가득 나타났다.
  " 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 생쥐는 미로의 출구를  찾아내는 실험에서 보통의 생쥐에 비해 15배, 높은 곳에 매달린 치즈를 찾아먹는 실험에서는 28배라는 놀라운 향상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문제는… "
  그녀는 화면의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흰털이  복슬복슬한 생쥐가 갑자기 등을 땅에 대고 네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혜진은 낮고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L-2-3-폴리글루타민산은 워낙 독성이  강력한  물질이에요. 실험용으로 사용했던 47마리의 생쥐중에서 살아남은  생쥐는 단 두 마리뿐이었지요. 저는 그 연구논문을 읽고  과연 이 물질을 식물에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결과는 진현씨가 아까 보신 식물 뇌파였어요. "
  진현은 혜진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서 실험에  쓰인 흰쥐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거죠, 혜진씨? "
  그녀는 CD의 스위치를 눌러껐다. 기묘한 적막이 방안에 감돌았다. 혜진은 서랍에서 컴퓨터 디스크 한  개를  끄집어냈다.
  " 여기에 연구과정과 결과가 모두 들어있어요. 혹시  제가 엉뚱한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검토해주세요.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서 도저히 저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저 혼자 발표할 자신도 없고… "
  진현이 그녀의 손에서 디스크를 받아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마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고마와요, 정말… "
  진현은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말없이 일어나며 나지막히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사이몬과  가펑클의 ‘ Bridge over troubled water (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 였다.
  ‘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당신이 피곤할 때,  정말 보잘것 없는 존재라고 느낄때,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  그대의 눈물을 닦아주리다…) ‘

  특수 마스크를 쓴 구로자와와 낫산은 한 장의 사진을 놓고 고개를 맞대고 있었다. 전날 죽은 한 복원반원의 X선 단층촬영사진이었다.
  " 간조직은 완전히파괴되었습니다. 약 50%정도의  세포는 원형질 분리를 일으켜버렸고, 나머지는 아예 세포막  자체가 녹아버렸읍니다. 의사 생활 40년동안에 이렇게 무서운  병은 처음 봅니다. 사흘사이에 환자가 3289명에다 사망자가 258명이나 발생하다니… "
  구로자와도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 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바이러스 연구라면 세계 최고인 저희 동경  대학연구팀에서도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도대체 바이러스의 단백질 구조가 인간과 똑같다니 말이  됩니까, 말이… "
  구로자와는 특수 마스크의 입부분을 능숙하게 비틀어 열고는 담배 한 개비를 집어피웠다. 창문의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비친 담배 연기가 마치 지옥의 한구석을 연상케 했다.
  " 그건 그렇고 셜리양은 아직까지도 살아있습니까? "
  낫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초기의 발병자들은 거의 다 사망했는데 셜리양만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셜리양의 치료에  성공하고 나면 치료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구로자와는 장갑을 낀 손으로 핀셋을 사용해서 탁자에  놓인 상자속에서 작은 유리 캡슈울을 들어보였다.
  " 이 캡슈울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단  말이죠? 그리고 이 캡슈울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면서 바이러스가  퍼졌단 말씀이죠? "
  낫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갈색 특수 마스크를  쓴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영낙없는 화성인 같았다.
  " 확인결과 그 캡슈울에는 환자들의 몸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제는동경대학 연구팀이 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해내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
  구로자와는 한숨을 내어쉬며 캡슈울을 상자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이 캡슈울 몇개는 저희가 가져가서 연구해도 되죠? "
  " 물론이죠. 발견된 열두 개의 캡슈울중 한 개는  깨졌고, 구로자와씨가 가지고 계신 상자에 세 개, 나머지 여덟 개는 복원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개는 연구용으로 써도 좋다고 이미 복원팀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
  " 아, 그리고 이 바이러스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스핑크스 바이러스’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니까요. "
  " 그렇게 하시죠. 저희들의 솔직한 심정은 스핑크스의  저주라도 받은 듯한 느낌입니다. "
  낫산의 책상위에 있는 화상 전화기의 파란  불이  켜졌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으로 구로자와를 쳐다보았다.
  " 또 피해 상황 보고일겁니다. "
  화면에는 검은 양복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화면  밑에 ‘보건성’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네. 이집트에 관광왔던  관광객들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 일본과 미국, 한국, 독일에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고야. 당장 어떻게 해서던지 치료책을 찾아내!"
  제길, 누군 그러기 싫어 이러고 있나, 하며 낫산은 수화기를 집어던져버렸다. 사막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후두둑- 구름마저도 무겁게 느껴지는  10월의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혜진은 작은 화분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78층 창가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화분을 내려놓고 손벽을 딱 쳤다. 각종 파이프와  컴퓨터가 놓인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끼여있는 까아만 CD 오디오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인 Albononi의 Adagio가 튜브와 전선이 가득찬 방을 수면에 가득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감쌌다. 작은 전극을 들고온 코스모스에 꽂은 혜진은 컴퓨터에 나타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극의 무게로 축 늘어진 코스모스를 본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다.
  ‘ 비록 식물이지만 축 늘어져 있는 코스모스가 불쌍해. 연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따라가던 그녀는 뒷쪽에서 나는 발자국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 놀래기는… 난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한건데.  연구는 잘 되어가요? "
  진현은 들고 있던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쟁반에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홍차 두 잔과 비스켓 한  접시가 놓여있었다. 혜진이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아직까지는요. 부탁드린 것은 어떻게 됐어요? "
  " 예상대로예요. 그 그래프는 뇌파의 일종이라는 것이  확실해요. 다만 인간의 뇌파처럼 고등적인 생각을  할수  있는 뇌파는 아니고, 동물로 치면 개나 고양이  정도의  뇌파라고 할 수 있어요. "
  혜진은 쟁반으로 눈을 돌렸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홍차의 붉은 빛깔이 그녀의 목소리에 차분함을 더해주었다. 진현은 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CD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Albinoni의 Adagio에 귀를 기울이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를 가리켰다.
  " 지금 이 그래프는 베타파에요. 뇌파에는 알파,베타,델타 세가지 파가 있는데 베타파는 주로 기억과 수면에  관계하지요. 아마 Albinoni의 Adagio 음악때문에 그럴거여요.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진동수 자체가 베타파와  비슷해서  베타파의 생성을 돕지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도 바하의 음악이 베타파를 생성, 두뇌의 기억작용을 돕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코스모스도 우리처럼 이 음악을 듣고 있는거지요, 혜진씨. "
  혜진이 코스모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맞아요, 진현씨. 우리는 지금 인류  최초로  코스모스가 음악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거예요. "
  뒷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험 동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겠지 하는 생각에 무심히 흘려버린 진현은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홍찻잔을 집어들고는  화면에  열중하는 혜진의 옆 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얀색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까아만 우단 투피스 위로, 손질을 하지 않아 약간은  헝클어진 긴 생머리가 흘러내렸다. 방안의 희미한 조명에 싸늘하게 빛나고 있는 금테 안경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과 오똑한 콧날에 어울리지 않게 걸려 있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진현을 엄습했다. 이 방은 식물  연구실이라서 실험동물을 한마리도 키우지 않는 것이다. 뒤를 돌아다본 진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 이봐, 이 결과 조금이상한데? 검토 좀 해달라고. "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서 부드러운 천으로 닦으며 연구  2그룹의 마사다까는 옆에 있는 동료에게  두툼한  서류뭉치를 넘기다가 그만 의자가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지나가던 사나에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 마사다까씨는 일이 잘 되어가나요? 하긴 동경  대학에서도 자타가 인정하는 일벌레인 마사다까씨가 달라붙어서 안되는 일이 없었지만… "
  " 잘되면 사나에씨가 축하로 저녁이라도 사주시게요? "
  사나에는 픽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그럼 내기해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정체를 누가 더 먼저 파악하는지, 마사다까씨가 먼저 성공한다면 제가 저녁을 사고,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한다면 마사다까씨가 제 저녁을 사는거고요. 자신 있어요? "
  마사다까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밝은 베지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날씬한 사나에의 몸매에 저절로 눈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사다까는 너털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바라던 바죠. 두고 보세요, 이번에 바이러스의 특효약을 만들게되면 ‘사나에 백신’이라고 이름을 지을거예요. "
  주위의 연구원들이 일손을 잠시 놓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수군댔다.
  " 이거 원,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이네요? "
  마사다까의 옆자리에 앉은 미치꼬가 책상 위의 거울을  집어들면서 비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럼요, 이럴때 아니면 언제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을 하겠어요? 마사다까씨, ‘사나에 백신’을 빨리 발견하기를 빌겠어요. "
  뒷자리에 앉은 한 연구원이 다른 연구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웬일이야? 동경 대학 연구소내에서 콧대 높기로  소문난 사나에가 저런 소리를 다하고… 내일은 해가 동경만으로 지겠군. "
  사나에가 막 자리를 떠나려 할때 뒷쪽에서  굵은,  그러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흥미롭군요. 저도 좀 끼워주시면 안될까요? "
  모두 고개를 돌려 뒷쪽을 쳐다보았다. 와이셔츠 차림에 빨간 넥타이를 맨 사로나가가 팔짱을 낀채로 사나에에게  웃어보이고 있었다.
  " 자신만만하시군요, 사로나가씨. "
  " 저 또한 사나에 씨에게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는거랍니다. "
  주위가 다시 웅성해졌다. 마사다까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웃으며 사로나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사로나가씨의 능력은 잘 알고 있지요. 우리 한 번 잘 해봅시다. "
  사로나가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탁 쳐버렸다. 사나에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 가네다 마사다까. 조센징 3세지. 어떻게 운이 좋아 동경대학까지 왔나보지만 우리 일본인한테 이길순 없어.  너같은 조센징에게 본떼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정체는 내가 밝혀내고 만다. "
  사로나가는 말을 마치고 몸을 확 돌려 밖으로 나갔지만 마사다까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사나에가 새하얘진 얼굴로 마사다까를 쳐다보았다.
  " 괜찮아요? 마사다까씨? "
  "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전 가네다 마사다까란 일본  이름보다는 김 한석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더  원합니다.특히 사나에씨에게요. 사로나가씨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으니까 걱정마세요. "
  " 하지만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
  " 우리 한국인의 신화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동안 어두운 동굴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결국 100일을 훌륭히 기다린 곰은 예쁜  여자가  되지요. 사나에씨같은 미인 말입니다. "
  사나에가 볼에 홍조를 떠올렸고 어색했던 분위기는 조금씩 풀어져갔다.
  " 곰이 변해서 된 여자가 낳은 사람이 우리  배달  민족의 시조인 단군입니다. 사람이 되려고 100일이나 기다릴 수  있는 ‘은근과 끈기’가 우리 한국인의 정신입니다. 전 사로나가씨와 다시 우정을 회복할때까지 , 그리고 그가 우리  한국인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걱정말아요, 사나에씨. "
  그녀는 마사다까, 아니 김 한석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에 떴다. 평상시에는 곰처럼 순박하기만 한 마사다까가 오늘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마사다까는 의자에 고쳐앉고는 책상 위의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렸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해내기  위해서였다.

  특수 마스크를 쓴 영훈과 제임스는 셜리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건만 셜리의 병세는 나아질 줄을 몰랐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낫산이 힘없는 걸음 걸이로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 그래도 두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은게 다행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은 모두 병에 걸렸는데… 제임스  박사님, 랜디 교수님도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낫산은 말없이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공기 정화기까지 달린 특수 마스크를  쓰고 담배를 피고 있는 낫산의 모습은 화성인 바로 그것이었다.
  " 병세가 악화되어 미국으로 후송을 했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
  제임스가 낫산의 손을 잡았다. 며칠을 밤을 꼬박새운 낫산의 손목은 믿어지지 않을만큼 여위어있었다. 그때였다. 낫산의 허리에 찬 화상 전화기가 울린 것은.
  낫산은 황급히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보건성 장관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개져 있었다.
일본 동경 대학 연구팀이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아직은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때 아닌가? 곧 동경 대학 연구팀이 도착할걸세. "
  낫산은 스위치를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가 휘청했다. 영훈이 그를 부축해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 긴장이 풀렸었나봅니다. 고맙습니다. "
  일동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웃는 웃음이었다.

  " 축하해요. 마사다까씨. 자, 사나에 백신을 만든  기념이에요. "
  동경의 수중도시 해저 50m에 있는 ‘The  Blue  Ocean(푸른바다)’의 커다란 유리문을 들어선 사나에는 환히 웃으며  마사다까, 아니 김 한석에게 장미 꽃 한다발을  내밀었다.  꼭 끼는 검은 색 원피스에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연구소에서 볼때보다 더 키 크고 날씬해보였다. 한석은 수줍은 듯이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 아직은 유전자 구조를 발견한 것에 불과해요. 백신의 유전자 설계도는 되어있지만 아직 실제로 백신을 만들려면  좀더 있어야 해요. "
  사나에는 한석의 팔에 살짝 기댔다. 한석은 빙그레 웃으며 웨이터가 들고 온 메뉴판을 사나에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석의 앞에 도로 메뉴판을 펴놓았다.
  " 잊으셨나요? 내가 내기에서 져서 당신의 저녁을  사기로 했다는 걸. 나, 당신이 그만 좋아져버렸어. "
  ‘ 굉장히 대담한 아가씨 아니면 대단히  무드없는  아가씨 둘중 하나군. 아직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내가  좋아졌다는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나 역시 사나에가 맘에 드는걸. ‘
  한석은 이렇게 생각하며 바닷가재 요리를 시켰다.  사나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웨이타에게 이름도 어려운 요리를  주문했다.
  " 생각보다 세련되었군요, 당신. "
  한석은 피식 웃으며 사나에에게 물었다.
  " 신기하군, 우린 몇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좋아졌다는 말부터 하다니. 그렇다고 내가 사나에 눈에  뜨일만큼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
  한석은 말해놓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사나에는 그런 한석을 귀엽다는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석은 자신이 지금 사나에에게 말을 놓고 있고  그녀가 아무 꺼리낌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가벼운 흥분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사회에서는 꽤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말을 놓지 않는 것이  관례니까.
  " 신선했어요, 당신이란 사람이.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은 대부분 인텔리출신이라서 그런지  어딘지  자신만만해요, 다들 잘난체 하고. 하지만 항상 일에 열중하고 있는  당신은 왠지 신선한 느낌을 주었거든요. 그날 사로나가씨와의  일도 그렇고. 자,자 그런 재미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해요."
웨이터는 큰 쟁반으로 하나 가득 음식을 날라왔다. 사나에가 시킨 음식은 프랑스 요리인 것 같았다. 한석은 옆에 있는 신문을 잠깐 집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신문 하단의 작은  기사에 멈춰섰다.
  " 신문에 뭐가 났어요? "
  " 음, 저번 학술 회의 때 우리 연구소에  왔던  사람인데, 권 혜진이라는 한국 여자가 실종되었다는군. 그런데 같이 있던 남자 연구원은 살해당했다는거야. 식물 생체 전류에 관한 논문이 대단한 수준인데다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주목했었는데… "
  사나에는 그의 손에서 살며시 신문을 치워 내려놓았다.
  " 설마 골치아픈 연구 이야기를 여기서까지  꺼내시는  건 아니겠죠? 또 헤진씨라는 사람의 논문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
  그는 정색을 하며 사나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음, 연구 이야기라면 할 게 딱 하나 남아있어. 연구소에서는 나보고 이집트에 가서 백신을 만들래. 진짜로  ‘사나에백신’을 만들라는 얘기인데… 내일 출발해야 돼. "
  " 그렇게 빨리요? "
  입이 삐죽 나오는 사나에를 쳐다보며 그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 우리 연구소에서 네 명이 가는데 그중 한 사람은 컴퓨터 전문가여야 해. 내가 분석한 자료를 컴퓨터로  옮겨야  하니까. 그래서 사나에를 추천했어. 사나에는  우리  연구소에서 몇명 안되는 시뮬레이션 전문가잖아. "
  그녀는 식사를 하다말고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계속했다.
  " 처음에는 연구소에서도 여자를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내가 이 백신에 ‘사나에 백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까 두 손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허락해주더군. 이런  얘기 재미 없지? 식사나 계속하지. "
  사나에는 정색을 하고는 옆에 놓인 포도주 잔을  집어들었다.
  " 아뇨, 제가 태어나서 들은 가장 멋있고 신나는 이야기였어요. 우리 건배를 올려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와 사나에  백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 둘을 위해. "
  한석도 잔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잔에 부딪쳤다. 찰랑이는 보랏빛 액체가 유리 벽 바깥의 바다 풍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 뭐라고요? 백신을 만드는데… "
  한석을 마주 대한 낫산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한석은  그가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저희가 연구한 백신은 그대로 환자한테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사람 몸에 백신이 들어가서 거기서 항체가  생겨나는 거니까요. "
  " 그렇다면 인체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
  " 다른 방법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 말고 항체를  생성할 새로운 실험 동물을 찾는데는 적어도  1년은  걸릴겁니다. "
  " 항체를 형성할 사람에게 백신을 투여한다면  그  사람은 안전합니까?"
  " 컴퓨터 실험에서는 안전하다고 나왔지만 제  추측으로는 10%의 위험성은 있습니다. "
  낫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그러면 누가 지원자로 나서겠습니까? "
  " 그건 걱정마십시오. 실험 대상자는 바로 저니까요. 하루라도 빨리 항체를 만들어야  그만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
  문이 열리고 구둣발 소리와 함께 특수 마스크를 쓴 두사람이 들어왔다. 영훈과 제임스였다.
  " 마사다까씨보다는 제가 나을겁니다. 실험용으로요. "
  낫산은갑자기 나타난 영훈의 한마디에 어리둥절했다.
  " 일부러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셜리양의 병세가  사람을 하도 답답하게 해서 찾아와본 것입니다. 만약 마사다까씨가 죽기라도 한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아무도 고칠 수 없게 됩니다. 제가 그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도록  해주십시오."
  옆에 서있던 제임스가 영훈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 랜디 교수가 죽은 지금 이번 스핑크스 복원계획의  책임자는 접니다. 제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주세요. 더우기 이 영훈 기자는 젊습니다. "
  영훈이 제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 제임스 박사님,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대인들이 파이렉스 유리를 쓴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잖아요? 박사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이 수수께끼를 풀겠습니까? "
  그는 말을 마치자 말릴 겨를도 없이 특수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낫산의 안색이 확 변했다.
  " 이미 제 호흡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들어갔을겁니다. 이 국립 의료원은 이집트 전체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가장 많은 곳일테니까요. 마사다까씨, 빨리 서둘러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
  잠시 말이 없었다. 곧 한석이 천천히 일어섰다.
  " 하루만 기다려주세요.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
  나가려던 한석이 고개를 돌려 영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 저는 재일 한국인 3세 김 한석이라고 합니다.  마사다까는 일본명이지요. 같은 배달 민족으로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

  " 이정도면 됐나요? "
  사나에가 어깨 높이까지 올라오는 컴퓨터 출력 결과를  안고 한석의 컴퓨터실로 들어왔다. 한석은 화면에서 눈을 돌려 출력 결과를 검토했다. 종이를 읽던 한석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 무슨… 문제가 있나요? "
  " 백신은 완벽한데… 항체를 만들어낼 사람의 위험 확률이 15%로 증가했어. "
  " …… "
  한석은 컴퓨터 앞에서 몇 자 두들기더니 컴퓨터를  꺼버렸다. 
  " 이제 됐어. 네시간 내에 백신이 완성될  거야,  ‘사나에 백신’이. 고생많았지? "
  사나에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 자, 백신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있는데  우리  나가서 식사나 하지. 전통요리인 쿠샤리를 잘하는  집을  아는데… 사나에 입맛에도 맞을거야. "
  사나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국립 의료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는 나일강변에 세운 작은 건물로 갔다. 푸른색  유리로 만든 여섯 개의 기둥 위에 떠받쳐진 건물의 유리  바닥으로 나일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통 음식점답지 않게 멋있는 실내 장식이 사나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석은 입고 있던 여름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노란색  반팔 티셔츠가 구릿빛 억센 팔뚝에 무척 잘 어울렸다. 
  " 근데 여기 이름이 왜 ‘카지노 나일’이죠? 한 구석에서는 도박이라도 하는건가요? "
  한석은 껄껄대고 웃었다. 
  " 이집트에서는 카페를 카지노라고 한대. 원래는 전문  카페였는데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나봐. "
  그는 쿠사리 2인분을 시켰다. 쌀과 마카로니를 볶아  화끈한 고추 소스를 끼어얹어먹는 쿠사리는 매운 것을 못먹는 사나에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후식으로 나온 딸기 쥬스  잔을 잡은 그녀는 작은 종이를 품안에서 꺼내서는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당신이 분석해 낸  유전자중에서 실제로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는 100만분의 1밖에 되지 않거든요. 나머지는 필요 없는 부분일까요? "
  한석은 그녀가 건네주는 종이를 펴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 유전자라고 다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
  원래 유전자는 글씨가 가득 쓰여있는 긴 종이 테이프에 비교될 수 있다. 일렬로 쓰인 각각의 글씨가 유전정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데닌 (A), 구아닌 (G), 시토닌  (C), 티민 (T) 네개의 아미노산인데 이것이 A-T-G-T-G-C-A-… 하면 털달린 바이러스, G-C-A-T-A-G-C-…하면 아메바형  바이러스… 하는 식으로 특정 조합에 특정  유전자가  대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전체의  0.0001%, 즉 100만분의 1만이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아무 의미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더우기 그  의미없는  부분은 네개의 아미노산중 두개인 아데닌과 구아닌만 쓰고 있었다. 
  " 아무래도 이상해요. 유전자의 99.9999%가 네 개의  아미노산 중 두 개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어떤 인공적인  냄새가 강해요. "
  " 에이, 아무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야? "
  그는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리려 했지만 사나에는 말을 게속 이었다. 그녀가 흥분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한석은 의자에 똑바로 앉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스핑크스의 바이러스의 유전자의 길이가 사람의  유전자보다도 훨씬 길거든요. 당신이 밝혀낸 조합이 100만개, 이것만해도 바이러스의 유전자 길이로는 지나치게 긴데 전체  길이는 아미노산 1조개로 이루어져  있다고요.  생각해보세요. 100페이지 책 한 권의 뒷쪽에 필요없는 백지가 그 100만배인 1억장이 달려있는 것이라고요. 그것도 흑백 두가지 색의  점만이 찍혀있는. "
  " …… "
  " 당신이  알아낸  의미있는  유전자의  갯수는  정확하게 1018081개여요. 우연히도 이 숫자는 1009의 제곱이고 더우기 1009는 솟수이고요. 그리고 뒷부분에 붙은 의미없는  유전자의 갯수 1036488922561은 1018081의 제곱이고요. "
  사나에의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한 한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녀가 손에 쥐어준  종이를  펼쳐들은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전 1018081이라는 숫자에 착안해서  뒷부분의  의미없는 유전자를 1009개씩 잘라 가로 1009줄, 세로 1009줄의 그림을 만들었어요. 아데닌(A)는 흰 점, 구아닌(G)은  검은  점으로 해서요. 당신이 보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거에요. "
  " 이 그림은 무슨 설계 도면과 기록같은데!  그리고  여기 써있는 글자는 그리이스 문자 같아. "
  " 우리가 의미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1036488922561개의 유전자는 실제로는 1018081장의 암호  설계도면이었어요. "
  평소 느릿느릿한 성격에다 웬만한 일에는  침착성을  잃지 않는 한석이었지만 그는 몇년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드는 자신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그럼.. 사나에는 이게 무슨  설계도라고  생각하지?  설마… "
  " 맞아요, 당신의 생각과 똑같아요. "
  사나에는 한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어보였지만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어색하게 굳어있음을 한석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삐리릭- 옷걸이에 걸려있던 한석의 여름 양복  안주머니속에서 날카로운 호출음이 들려왔다.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하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일제히 둘을 돌아보았다. 그는  재빨리 휴대용 화상 전화기를 끄집어내어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발갛게 상기되어있는 낫산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 마사다까씨, 빨리 돌아오세요. 백신 합성이  끝났고  이 영훈씨도 옆에서 대기중입니다. "
  한석과 사나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급히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는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택시에 올라탄 한석은 아까 사나에의 말에  놀라서였는지 밀려오는 피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린 사나에도 졸고있는 한석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 손님, 국립 의료원에 다 왔습니다. " 
  고개를 든 한석이 후다닥 사나에를 깨워서 내리자, 의료원 현관에서부터 택시를 잡으러 뛰어온 검은 양복차림의 한  남자가 황급히 그들이 탔던 택시에 올라탔다. 
  " 미국 대사관요! 요금 두 배 드릴테니 전속력으로 몰아주세요! "
  " 옛써! ( Yes, Sir! ) "
  운전사는 휘파람을 한번 불더니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택시가 끽-소리를 내며 출발하면서  남자는  앞좌석 등받이에 쾅-하고 부딪쳤다. 제길, 하고 중얼거린 남자의 눈에 뒷좌석에 떨어져있는 종이 한장이 보였다. 종이를 집어든 남자의 눈빛이 빛나며 작은 휴대용 화상 전화기를  꺼내들고는 몇마디 지껄였다.
  " 안녕? 여기는 앞집 아저씨인데 지금 국립 의료원에 들어간 남녀 두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줄래? "

  투명 튜브의 꼭대기에서 붉은 혈액이 한방울씩 떨어져  아래에 고여 있는 노란색의 액체에 조금씩  섞였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이 영훈의 팔에는 비닐 튜브와 전선이  또아리를 튼 뱀처럼 얼기설기 얽혀져 있었고, 옆 침대에는  창백한 얼굴의 셜리가 깨어날줄을 모르고 누워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특수 마스크를 쓴 한석과 사나에, 낫산은 구석에  설치된 측정기계의 숫자를 읽고 컴퓨터로 분석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임스만 셜리의 머리맡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영훈씨의 혈압, 맥박 정상. 백혈구 수 이상 없음. 현재 체온 36.75도. 망상 세포계및 T 임파구의 활성 양호. "
  화면에 느릿느릿 나타나는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간호원의 목소리만이 뇌파측정기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신호음에  섞여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서 환호성이 올랐다. 
  " 셜리양의 망상 세포계 활성 증가,  정상의  75%수준까지 회복. T 임파구는 정상의 72%. 혈중 포도당 농도 천천히  상승하고 있음. "
  낫산의 얼굴에서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나에가  한석을 돌아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셜리의 뇌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처럼 평탄했던 셜리의 뇌파 그래프가 상히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혈중 암모니아 및 아세틸콜린의 농도 감소. 간세포가 기능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셜리양의 체온은 39.2도에서 38.0도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
  영훈이 천천히 눈을 뜨며 의료진에게 웃어보였다. 
  " 다행히 효과가 있는 것 같군요. 이만하면 저도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될 값어치가 있죠? "
  낫산이 영훈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주었다. 
  " 영훈씨에게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용기있는 행동이었습니다. "
  " 누구든 나서야 하는 일이었는걸요. 항체는 충분히  확보했습니까? "
  영훈이 방금 주사바늘을 뽑은 팔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서서 낫산에게 물었다. 낫산은 영훈의 침대 기둥 뒤에  서있는, 노란색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여섯 개의 작은  튜브를 가리켰다.
  " 영훈씨 덕분에 약 8000명분의 항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영훈은 튜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 와, 저많은 액체가 다 제 몸 속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
  한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을 열고 파란색 액체가  들어있는 주사 약병을 꺼냈다. 
  " 이 파란색 액체가 제가 개발한 백신입니다.  이  백신을 영훈씨 몸에 투여해서 저쪽의 노란색 항체를 만들어  낸거지요. 영훈씨의 몸이 거대한 화학공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
  계기판을 읽어내려가는 간호원의 목소리가 흥분에 떨고 있었다. 
  " 셜리양의 현재 체온 36.9도. 망상세포계 활성 정상 수준 회복. T 임파구와 항체 E,F 정상의 95%. 혈중  암모니아  및 아세틸콜린의 농도도 정상 수준으로 감소. 혈중 포도당 농도도 정상의 89%까지 회복되었습니다. 뇌파에서 알파파  검출. 천천히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오고 있습니다. "
  침대 시트밖으로 삐죽 나와있는 셜리의 야윈 팔이 조금 흔들렸다. 제임스가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잡았다. 헝클어진 부시시한 머리를 힘겹게 쳐들며 셜리는 침대 시트를 천천히 걷었다. 쳐다보고 있던 일동이 환호성을 올렸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여기는… "
  영훈이 그녀의 앞으로 한발자국 나아갔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은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던 셜리가 영훈을 보자 소리를 빽질렀다. 
  " 맞아요, 당신이 내 집까지 찾아왔지요. 그리고 난  쓰러졌고… 병원까지도 따라와서 취재를 할 작정인가요? "
  영훈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옆에 서있던 제임스가 재빨리 그녀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셜리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걸려있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 그러고보니 벌써 열흘이 지났네…  내가  열흘동안이나 누워있었다는건가? "
  제임스는 얼마전까지만해도 팔팔하게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내고는 피식 웃음을 웃었다. 셜리는 영훈과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아직 목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절 구해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영훈씨가 그자리에 와주지 않았다면 전… "
  영훈은 몸을 돌려 한석과 사나에를 가리켰다. 
  " 전 아무것도 한게 없어요. 주사 한 대 맞고 누워 있었을 뿐인걸요. 셜리양을 살려낸 것은 바로 이분들이세요. "
  셜리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넘기고 한석과 사나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석은 그녀의 인사에 목례로 답하고는 유리병에 들어있는 항체를 낫산에게 넘겼다. 
  " 이 항체면 모든 환자를 구할 수 있을겁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
  삐- 하는 신호음과 함께 화상 전화기에 보건성 장관이  나타났다. 화면안의 장관이 고개를 숙여 한석에게  인사를  했다. 
  " ‘스핑크스 바이러스’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 온  이집트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
  " 원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더이상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만 바랄뿐입니다. "
  " 그쪽이 정리되면 대통령궁으로 와주시겠습니까?  대통령 각하와 정부요인들이 마사다까씨의 노고에 감사드리려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
  한석은 슬쩍 사나에쪽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곧  들고있던 서류로 눈을 돌렸지만 그녀가 약간 입을 실룩거리는 것을 한석은 놓치지 않았다. 
  "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내일이면 안되겠습니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
  사나에가 고개를 한석쪽으로 돌려보이며 웃어보였다. 
  " 그렇게 하세요. 내일 꼭 대통령궁으로 들려주십시오. 정말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전화가 끊어지자 낫산이 혀를 끌끌찼다. 
  " 제길, 언제는 소리만 버럭버럭지르더니… "
  한석은 책상위에 놓여있는 책과 컴퓨터 출력을 천천히  챙겨서 책꽂이에 꽂더니 가방을 집어들었다. 
  "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전화를 듣고있었던 영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 아니, 아까 전화에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
  " 물론 해야 할 일이 있지요. 다만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사나에, 같이 나가서 저녁이나 먹지 않겠어? "
  한석은 사나에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숙이고는 가볍게 끄덕거렸다. 낫산이 나가려는 한석과  사나에를 붙잡았다. 
  " 잠깐만요, 드릴 것이 있는데… "
  낫산은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더니 작은 나무 목걸이를 꺼냈다. 
  " 이건 이집트 제 4왕조때의 유물입니다. 원래는 피라밋의 부장품이었는데 도굴되었다가 저희 조상에게 팔린  것  같아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마스코트입니다. "
  " 이런 귀중한 것을 제게… "
  " 이건 과학자로서 당신에 대한 존경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받아주시겠죠? "
  " 물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설사 이집트 정부에서  금으로 만든 투탄카멘왕의 목걸이를 갖다줘도 낫산씨 선물의 100분의 1 값어치도 안될 것입니다. 저도 정부라는데서  표시하는 의례적인 감사는 싫거든요, 평상시에는 잔소리나 하고… "
  한석은 낫산을 향해 한눈을 깜빡거리고는  사나에와  함께 문을 나섰다. 나일강의 밤바람은 생각보다는 쌀쌀했다. 한석은 손안에 쥔 나무 목걸이를 강변의 가로등 빛에 비추어보았다. 머리부분에 두건을 쓰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사나에의 목에 천천히 그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 수천년 된 목걸이답지 않게 세련된 모습이네요. "
  한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고대 인류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가졌을지도 몰라. 이번 스핑크스 바이러스만 해도 그래.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발견된 곳이 어딘지 알아?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이야. 그것도 유리 캡슈울에 담겨서. "
  " 유리… "
  " 이상하지 않아? 4000년전의 이집트인이 유리를 쓰고  있었다니. "
  " 그럴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많잖아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에서 나온 그 설계도도 그렇고… "
  사나에는 한석이 걸어준 목걸이를 들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 조금은 무섭기조차 했다. 
  " 이 목걸이에 있는 신이 누구죠? "
  " 지구의 여신인 이시스 여신상이야. 이시스는 신비를 상징하기 때문에 항상 머리를 두건으로 가리고 있지. "
  " 지구의 여신이 신비를 상징… "
  한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강둑에 걸터 앉았다. 
  "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신비  투성이야. 대서양에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 대륙…  지금도  대서양 해저에는 그때의 석조 도로 일부분이 잠겨있어.  또  중국의 고비 사막에는 모래가 녹아 뭉친 유리질 모래가 넓은 지역에 퍼져있어. 수천년전에 그렇게 넓은 지역의 모래를 녹여 유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원자폭탄 뿐이야. "
  찰싹하는 물결치는 소리와 돌멩이가 구르는  낮은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
  " 하긴, 나도 뭐가 뭔지 몰라. 빨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
  퍽-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방을 집어드는 한석의 어깨를 궤뚫었다. 사나에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한석은 자신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퍽- 하는 소리가 두 번 더 나고 주위는 잠잠해졌다. 
  낮은 구둣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타난 남자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땅에 떨어진 피묻은 한석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는 땅위에 뒹구는 한석과 사나에의 몸을 발로  차  강물로 밀어넣고는, 어깨에 맨 통에서 호스를 꺼내 강둑에  뿌렸다. 쏴아하는 파란 거품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허리에 찬 화상 전화기를 꺼내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 안녕, 여기는 앞집 아저씨인데, 부탁한 물건을 찾아왔다고 말해줄래? "
  사내가 돌아간 나일강에는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이시스의 나무 목걸이만이 물결따라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Part II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 999]

  1999년 11월 1일. 워싱턴. 
  백악관 앞의 잔디밭에는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평화롭게 졸고 있었지만 창가에 서서 뒷짐지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대통령 칠리 로빈스의 마음은 별로 편안하지 못했다.  삐-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걸린 인터폰에 비서의 얼굴이 나타났다. 
  " 대통령 각하, MEDUSA의 중역들과 CIA  팀이  도착했습니다. "
  " 들어오시라고 해. "
  대통령은 천천히 일어나 문가로 걸어나갔다. 문이  열리며 양복을 입은 세사람의 남자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까만 스커트에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큰 키의 여자가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들어왔다. 남자중 한사람은 짙은 남색 양복에 흰 머리였고 다른 두사람은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들어온 네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 저는 CIA 극비기술 담당인 코드네임 아리오네입니다. 미리 보고드린 극비문서 C-60-70A-2867때문에 왔습니다. "
  ‘ 쩝, 비밀요원들이 저렇게 예뻐서야 남의 눈에  확  뜨일것 아닌가? ‘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는 대통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오네는 같이 온 세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 왼쪽은 MEDUSA의 회장 포풀리스 아론씨, 가운데는 AI 담당 중역 골덴트 미첼씨고 오른쪽은 광 컴퓨터 개발 담당  중역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씨입니다. 데이비드씨께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릴 것입니다. "
  칠리는 일행을 회의용 탁자로 안내했다. 비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 한국 특산 설록차랍니다. 그전까지는 중국 차를  마셨었는데 기분 전환도 할겸 바꾸어봤지요. 맛이 독특한 것  같아요. " 
  칠리는 탁자 위의 서류로 눈길을 돌리더니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이 부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제5 세대  컴퓨터라니요? 그리고 이것이 나한테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중요한 사항인가요? "
  데이비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 제5 세대 컴퓨터라는 것은 한마디로 ‘생각하는  컴퓨터’입니다. 폰 노이만 박사가 처음 연구한 컴퓨터는 진공관으로 구성된 제1 세대 컴퓨터입니다. 제2 세대는 트랜지스터,  제 3세대는 IC, 이런 식으로 컴퓨터는 발전을 해오고 있죠. 현재의 컴퓨터는 VLSI로 이루어지는 제4세대 컴퓨터인데  미래의 컴퓨터는 생각하는 기능을 갖춘 컴퓨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5 세대 컴퓨터죠. "
  " 그러면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인 MEDUSA가  제5  세대 컴퓨터를 발명했다는 것입니까? "
  " 저희 MEDUSA는 오랫동안 매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광 컴퓨터 개발에 노력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CIA에서 입수한 설계도를 분석한 결과 그것이 엄청난 용량의 제5 세대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 CIA가 설계도를 입수하다니요? 어디서요? 소련에서 말입니까? "
  아리오네가 고개를 흔들고는 대답했다. 
  " 아닙니다. 얼마전에 보도된 스핑크스 바이러스 있지  않습니까? 그 백신을 개발해낸 사람들은 동경대학  연구팀인데 이 사람들이 그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하다가 유전자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는 것을 발견해냈습니다. "
  "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 컴퓨터를 설계했단 말입니까? "
  아리오네는 손을 들어 긴 머릿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들어 조금 입에 댔다. 
  " 설계도면은 그리이스 글자로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에  해독이 쉬웠습니다만 그리이스인이 설계했을리는  없고,  저희 CIA의 추측으로는 외계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외계인… " 
  아리오네는 찻잔을 힐끔 들여다보고 남은 차를 다  마셔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는  한국의 DACOM(Digital Advanced COMputer)에서  만들고  있는  호돌-721과  일본의  SONI  (Super Operational Network & Information)의 니혼-A3,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유리 III정도인데 성능은 거의 같습니다. CIA와  MEDUSA의  연구진이 같이 분석한 바로는 이번에 발견된 설계도의 컴퓨터는  호돌-721의 약 1000만배정도의 위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더우기 이 컴퓨터는 레이저를 사용하는광 컴퓨터입니다.  지구상에는 이런 과학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 그렇다면 내게 보고하러 온 이유는? "
  "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컴퓨터는 외계인이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우기 설계도를 입수한 것은 CIA고요.  잘못하면 의회에서 들고나올지도 모르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라… 제작하는데 대통령 각하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
  대통령은 곰곰히 생각했다. 잘못하면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컴퓨터의 제작을 허가했다고 정치적 생명에 손상이  올지도 모른다. 
  " 이설계도를 발견한 동경 대학 연구팀이 가만있을까? 설계도를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들인데… "
  아리오네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 동경대학 연구팀중 이 설계도를 발견한 사람은 마사다까와 사나에라는 두 연구원뿐인데 이미 청소반의 손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습니다. "
  " 쯧쯧… 심한 짓을 했구만. "
  조용히 듣고 있던 MEDUSA의 회장 포풀리스 아론이 말했다. 
  " 한국이 호돌-721을 국방상의 이유로 팔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그보다 못한 기종인 호돌-720을 쓰고  있는데도 연간 3조달러가 넘는 돈을 한국에 주고 있습니다. 호돌-721의 1000만배이면 지금 미국내의 모든 컴퓨터를 다  합친것보다도 큰 용량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미국 전 지역의 모든 활동을 전산화 할 수 있습니다. 예산 절감은 물론 미국을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웃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고 탁자에 놓인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는 서류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종이 맨 밑에다가 큼직하게싸인을 했다.
  " 좋습니다. 허가하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작비는 정부 예산에서 지원할테니 사용료는 받지 마십시오. 또한 다른 나라에도 개방해야 합니다. "
  포풀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 외계인이 만든 것을 CIA가 살인까지 해가면서  설계도를 빼와서 컴퓨터를 만들고는 엄청난 사용료를  받는다는  것을 밖에서 알아보십시오. 국가적인 망신이고 MEDUSA회사도 끝장날겁니다. 어차피 많은 이익을 올리는 MEDUSA니까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제작해보세요. 그런 컴퓨터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MEDUSA는 엄청난  이익일테니까요. "
  포풀리스가 끄덕대고는 대통령이 서명한 서류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제작하는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
  골덴트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 약 40-50일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크리스마스
에는 새로 만든 슈퍼 컴퓨터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인류에게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겠군요, 하하. "
  대통령은 늦가을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가지로 시선
을 던졌다.

  12월 24일. 뉴욕.
  오래간만에 눈발이 휘날리자 거리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복잡하기로 소문난 뉴욕의 도로에서도 자동차  클락션을 울려대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는 시민들로 뉴욕은 완전한 축제분위기였다. 아리오네는 퀸즈에 있는 자신의  집 창문을 열고 흩날리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외출준비를 하고 서랍을 열었다. 지갑을 찾던 그녀의 손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그것은 옥으로 된 작은  버선 모양의 브로우치였다. 오래전에 소꼽친구 파라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두고는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녀는 브로우치를 주머니속에 집어넣고는 투피스 위에 코트를 걸쳐입고 춥지않게 머플러를 목에 감고 집을 나와 튜브 열차를  탔다. 튜브 열차의 차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은 그녀에게 모처럼의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아리오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눈은  무척이나  포근했다. 얼어붙은 호숫가 위에 하얗게 쌓인 눈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집앞에 작은 눈사람을 세우는건 언제나 어린 아리오네와  소꼽친구 파라의 몫이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나뭇가지는 마치 솜사탕으로 만든 나무 같았고,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다 지치면 교회의 나무게단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옮겨오면서부터는  눈구경하기도  쉬운일은 아니었고 더우기 거의 매년 겨울마다 해외출장을 나가는  바람에 지금 내리는 눈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아리오네는 주머니 속의  브로우치를  만지작거리며 어린시절의 자신과 파라를 회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벼운 떨림과 함께 튜브 열차는 페트로 섬에 섰고,  문이 열리면서 아리오네는 사람들 틈에 섞여  천천히  출구쪽으로 빠져나갔다. 더욱 말끔해진 자유의 여신상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페트로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에서는 무장경찰이 일일히 출입증을 체크하고 있었다. 아리오네는 펠리칸 주식회사 -  실제로는 CIA가 위장한 – 사원증을 보여주었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는 이미 세계 각국의 보도진들이 자유의 여신상  보수공사와 새로운 슈퍼 컴퓨터의 공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 KBC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보수공사가 끝난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인터뷰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누군가가 아리오네 앞에 마이크를 불쑥 내밀었다.  후줄근한 겨울 파카에 별로 깨끗해보이지 않는 거친 털목도리를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그러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에  맑고 시원한 눈을 가진 남자가 어깨에 비디오 카메라를 메고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새로 단장한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뿐이에요. "
  " 이번에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MEDUSA에서  자유의 여신상에 세계 최고 용량을 가진 [스핑크스  999]라는  슈퍼 컴퓨터를 설치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념물인 자유의 여신상에 그런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아리오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려다 그의 얼굴이  꽤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 뭐, 컴퓨터를 설치하는거야 자유니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죠. 그러고보니 혹시 이집트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 생체실험을 자청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한 분 아니신가요? "
  영훈은 머리를 긁적긁적대더니 웃었다. 
  " 쑥스럽네요. 하지만 미인이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
  아리오네는 피식 웃고는 자리를 떠났지만 ‘스핑크스  바이러스’사건의 관련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하 출입구로 들어갔다. 특수 티탄강철로  만들어진 복도는 설사 대포를 들고와도 부서지지 않을것처럼  튼튼해보였다. 몇명의 엔지니어들과 CIA요원이 입구에서 그녀를 맞았다. 
  " 저를 잘 따라오세요. 이곳은 미로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한번 길을 잃으면 찾지 못합니다. "
  " 왜 미로로 만들었죠? 보안때문에 그랬나요? "
  안내하는 CIA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스핑크스 999는 어쩌면 미국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지도 모를 슈퍼 컴퓨터입니다. 따라서 스핑크스는 5중으로 된 특수 티탄합금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24시간 무장경비원이 경비하게 됩니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건물 전체도 각종 경비장치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지요. 한가지 재미있는건 이 건물의 경비장치는 모두 스핑크스에 연결되어있어요.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거지요. "
  " 자신이 자신을 지킨다… "
  " 스핑크스는 살아있는 컴퓨터여요. 아직 완전하게 가동시켜보지는 않았지만 스핑크스는 분명히 생각을 합니다.  지난번에 경비장치를 끄려고 했더니 ‘나는  안전하게  살고싶다. 경비장치를 끄지 마시오. ‘라는 메세지가 출력됐어요. "
  " 설마 컴퓨터에게 생존욕구까지…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컴퓨터… "
  안내하는 CIA요원은 신나서 계속 지껄여댔지만 아리오네는 그말이 귀에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방은 한변이 30m정도 되는  정육면체 모양이었다. 가운데에는 까아만 흑요석 덩어리같이 생긴 육각 기둥이 유리관 속에 들어있었고, 관에서 수십개의 튜브와 전기줄이 나와 그 옆에 서있는 다른 전자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문 앞에는 가로세로 3m정도 되는  레이저  홀로그래피 스크리인이 설치되어있었고, 납작한 상자를  여러개  겹쌓은 모양의 기계 장치가 서너개 뒷쪽에 설치되어있었다.  흑요석처럼 보이는 육각기둥이 바로 엄청난 양의 전자 소자가 결합한 스핑크스의 본체인 것 같았다.
  뒷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칠리  대통령과 MEDUSA 회장인 포풀리스 아론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핑크스 앞에 설치된 작은 컴퓨터 단말기 앞으로 갔다. 단말기의 받침대는 하나의 은빛 강철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었고, 자그마한 스피이커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 지금부터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 999의 가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
  대통령과 포풀리스는 단말기에 설치된 빨간  단추를  눌렀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방안의 조명이 환해지더니  스피이커에서 조용한 플루우트 소리가 들려왔다. 웬 플루우트 소리인가 멍하니 생각하던 아리오네는 그 소리가 플루우트와  비슷하지만 플루우트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고등학교때 오케스트라도 했었던 그녀는 그 소리가 어떤  관악기 소리도 아니라고 느꼈다. 화면에 느릿느릿 글자가 나타났다. 
  ‘ 대통령 각하, 포풀리스 아론 회장님, 스핑크스 999를 탄생시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제  탄생을 스스로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전자음악입니다. ‘
  듣고있던 아리오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음악까지 작곡하는 컴퓨터…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음악을 듣고 있는 대통령과 포풀리스의 얼굴은 무척  흡족해보였다.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 보시다시피 스핑크스 999는 고등사고능력을 갖춘 뛰어난 컴퓨터입니다. 이번에는 스핑크스의 연산능력을  보시겠습니다. "
  문앞에 설치된 홀로그래피 스크리인에는 미국의 지도가 나타났다. 대도시에 해당하는 곳에는 붉고 푸른  점이  여러개 모여있었고, 그밖의 곳에도 몇개의 반짝이는 점들이  있었고 이 점들을 잇는 선들이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 지금 여러분이 보고있는 화면은 현재 스핑크스가 제어하고 있는 교통체계입니다. 미국의 모든 비행기와 열차,  튜브 열차와 자동차, 각 도시의 신호등과 톨게이트를 스핑크스 혼
자서 제어, 혼잡이 생기지 않도록 조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결되어있는 것은 전력망과 상하수도 통제, 교통망, 도서대출망과 범죄자 신원조회망, 컴퓨터 통신망과 경찰  기동순찰차 지령망, 행정 전산망과 국가 예산및 회계 시스템등  모두 257개입니다. 이정도를 처리하려면 세계 최고의 슈퍼 컴퓨터인 호돌-721로도 100대가량 있어야 가능합니다만 스핑크스는 아직 자신의 처리능력의 10만분의 1정도밖에는 가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
  참석자들은 스핑크스의 엄청난 용량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회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스핑크스는 곧 셰계 각국의 컴퓨터와 연결이 될  예정이며, 전세계를 스핑크스라는 하나의 컴퓨터로 통제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멍하니 넋빠진 채로 듣고 있던 아리오네를 누가 뒤에서 툭툭 쳤다. 돌아다보니 극비 기술과의 과장인 영카우였다.  40이 넘은 나이에도 갓 스물이 되어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그는 손에 한변이 30cm정도 되는 금속상자를 들고 있었다. 
  " 보관하고 있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나왔던 문제의  금속상자야. "
  바이러스라는 말에 아리오네는 순간 손을 움찔했다.  상자는 그녀의 손에서 바닥에 떨어졌다. 
  " 철저하게 소독했으니까 바이러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
  " 이걸 왜 제게… "
  " 오늘 날짜로 아리오네는 저 스핑크스 999를 담당하게 됐어. 스핑크스에 관련된 모든 정보는 다  아리오네의  소관이야. "
  " 저는 저 컴퓨터가 기분나빠요. 컴퓨터가 생각을 하고 작곡을 하고… 귀신들린 것 같다니까요. "
  " 이건 상부의 명령이야. 우리 세계에서 명령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
  " …… "
  영카우는 곧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리오네는  바닥에 떨어진 금속상자를 집어들고 어깨에 맨 쇼핑백안에 집어넣었다. 
  나가기 전에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스핑크스  999를 바라보았다. 음악을 작곡하고  생존욕구까지  갖춘  컴퓨터… 어쩌면 우리는 또 하나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들떠있는 시민들 사이로 사라졌다.

  악-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혜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은 땀이 송글송글 그녀의 콧등에 맺혀있었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방 구석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휴, 꿈이었구나. 그런데 벌써 여덟시야? ‘
  희미한 빛이 커어튼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어튼을 걷었다. 내려다보이는 창밖은  온통 하얀 색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지. ‘
  휘파람으로 캐롤을 불러대던 그녀는 꿈속에 나타났던 피흘리는 진현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구역질과 어지러움에 그녀는 휘청대며 침대  모서리를 잡았다. 
  벌써 두달 전의 일이지만 혜진에게 있어 그날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었다. 갑자기 총구를 들이대며  나타난 검은 그림자. 괴한에게 대들었다가 왼쪽 가슴에서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털썩 쓰러져버린 진현의 모습. 그리고 총을  겨눈 괴한에 의해 마취제가 든 수건으로 입막음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던 자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온몸이 묶인 채로 조그만 쌍발 비행기의 뒷좌석에 눕혀져 있었고 곧  이  비밀 연구실로 끌려온 것이다. 그녀를 납치하고 진현을 죽인 자들이 CIA라는 것을 안건 그 사흘 뒤였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조금 있다가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아리오네가 들어왔다. 
  " 안색이 안 좋아요. 어디 아파요? "
  혜진은 내미는 아리오네의 손을 탁 뿌리쳤다.  아리오네는 초췌한 혜진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직접 한 舅 아니지만 진현을 죽이고 혜진을 이곳  비밀 연구실까지 데려온 것은 분명 아리오네가 속해있는 CIA의 짓이었다. 눈 앞에서 좋아했던 남자 연구원의 죽음을 지켜본 혜진의 심정을 아리오네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침대 시트 위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혜진은 상자를 집어들었다. 은색  포장지에 얇은 빨간 리본을 풀자 그 안에서는 옥으로 된 작은 버선 모양의 브로치가 나왔다. 브로치에는 조그만 카드가 같이 들어있었다. 
  ‘ Merry Christmas! 이 브로치가 혜진씨에게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아리오네 ‘
  혜진은 브로치에 힘없는 눈길을 돌렸다. 
  ‘ 하긴 아리오네야 무슨 책임이 있겠어. ‘
  그녀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가서는 버선 모양의 브로치를 투피스 웃옷에 달았다. 거울앞에서 한숨을  푸-하고 내쉰 그녀는 이 곳에 끌려와서 짧게 커트한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는 방문을 나섰다. 
  연구실에 들어선 혜진은 서랍안에서 CD(컴팩트 디스크) 한 장을 끄집어 내서는 오른쪽 선반에 놓㈏獵 전축에  밀어넣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중에서  ‘아침’이  상쾌한 박하향기처럼 방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녀의  우울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혜진은 전날 시작한 실험의 결과를 살폈다. 결과는 역시였다. 이곳으로 납치된 후 두달동안에 실시한  일련의  실험은 모두 식물뇌파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L-2-3-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 후의 식물은 ‘감정’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온도가 그 식물의 성장온도보다 아주 높거나 낮을때의 식물뇌파는 고통받 인간의 뇌파와 거의 흡사했고,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었을 때는 유쾌한 인간의 뇌파와,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듬뿍 담겨있는 영양비료를 주었을때는 배불러 기분좋게 누워있는 인간의 뇌파와, 필수 영양소가 결핍되게 했을때는 배고플 때의 인간의 뇌파와 거의 일치했다. 
  그녀는 L-2-3-폴리글루타민산이 동물에서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엄청난 독성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소나무와 장미, 모든 식물이  L-2-3-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지 사흘에서 일주일 ㅅ돋 시들었다. 
  CIA는 곤란을 표명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일종의 ‘식물 컴퓨터’였다. 식물의 뇌파반응을 이용, 다음세대의  컴퓨터를 개발하려고 혜진을 이곳까지 납치해온 것이었다.  모처럼 만든 식물 컴퓨터가 죽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들은 혜진에게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치할 물질을 만들 것을 요구해왔다. 
  혜진은 L-2-3-폴리글루타민산과 비슷한  화학구조를  가진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약 30가지정도의 물질이  화학구조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흰 실험가운은 노랗고 붉은 얼룩으로 물들었고, 강한 산 염기를 만져야 하는 그녀의 고운 손은 설겆이하는 식당아줌마의  그것만큼이나  거칠어졌다.  헤진은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체할 물질을  찾는데  스핑크스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실험실은 어제 완성된  스핑크스에 접속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 – CIA의 비밀 실험실은 스핑크스가 설치된 자유의 여신상과 이어져 있었다 -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뵉壙㈌별 해야 할 일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지만  스핑크스에게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스핑크스는 뉴욕의 도시개발계획을 담당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뉴욕의  교통난, 주택난, 소음공해,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데는 몇 분  정도의 계산도 필요치 않았다. 스핑크스는 뉴욕을 여섯개의 큰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마다 상가지구와 업무지구,  주거지구와 튜브열차를 균형있게 배치했다. 스핑크스의 계산대로 뉴욕시의 인구는 점차 분산되어 교통망은 안정되어갔고 소음과  공해도 따라서 줄어갔다. 스핑크스는 인구의 이동방향을  예상하고 그곳에 대단위 산업시설과 주거시설, 교통망을  확충해 나갔다. 무질서했던 도로망와 시가지는 점차 반듯하고  계획적인 것으로 되어나갔고, 뉴욕의 큰 문제점중의 하나였던 휴식공간의 부재도 해결되기 시작했다. 
  스핑크스는 뉴욕의 심장부에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가진 100층짜리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뉴요크만에 해저 30층, 해상 70층의 해상도시 건설도  추진했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아파트는 강도 10의 지진에도 邈サ프 않고 어떤 화재시에도 5분내에 진화할 수 있었고, 해상도시는 10m의 파도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건축학자들은 스핑크스가 설계해내는 마술과도 같은 건물들에 그저 입을 벌릴 수 밖에는 없었다. 
  다음으로 스핑크스가 손댄 일은 알라스카 개발계획이었다. 스핑크스는 자원탐사용 특수 인공위성을  발사,  알라스카에 묻혀있는 새로운 석유, 철광, 그밖의 많은 자원을 찾아냈다. 스핑크스는 이들이 가장 잘 수송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시와 도로망, 통신망을 건설했다. 이 계획은 미뮈“ 약 50조 달러라는 막대한 이익을 남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스핑크스가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스핑크스 전용 공장을 설립했다. 놀랍게도 스핑크스는 자체 생산기능이 있어 용량이 부족할 때는 스스로  보조컴퓨터를 만들어내어 자신에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스핑크스는  전용공장에서 경비하는 수리용 로보트와 경비용 로보트를 만들어냈고 스핑크스 2호기와 3호기를 만들어, 자유의 여신상 지하에 있는 스핑크스 격납고에 설치하였다. 단백질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살아있는 생물과 다를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곧 캐나다가 스핑크스의 사용신청을 했고, 캐나다의  모든 컴퓨터망이 스핑크스와 연결되었다. 스핑크스는 여기서도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연구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광통신망을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 설치,  1달러정도의 요금으로 미국과 캐나다 어디든지 통신할 수 있도록 해내었다. 통신요금이 엄청나게 싸지자 미국과 캐나다는 한 나라처럼 되어버렸고, 교역량의 증대와 더불어 엄청난  산업발달을 가져왔다. 
  스핑크스는 점차 세계를 기아와 가난, 공해에서  구원해낼 유일한 구세주처럼 여겨졌다. 유럽 공동체(EC)는 EC의  본부컴퓨터로 쓸 슈퍼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스핑크스를 EC의 본부 컴퓨터로 쓰기로 결정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스핑크스와 자국의 컴퓨터 망을 연결했고,  다른 EC국가들도 스핑크스의 연결신청을 내놓고 연결작업이  완료되기만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미국의 시시주간지 ‘타임’지는 1998년의 ‘올해의  인물’로 스핑크스를 선정했고, 세계 4대 통신사가 뽑은 ‘세계 10대뉴스’의 1위는 모두 스핑크스의 등장이었다. 1998년말 현재 스핑크스에 연결된 나라는 125개국으로, 세계 50위 이내에  드는 선진국중 스핑크스에 자국의 컴퓨터망을  연결하지  않은 나라는 소련과 일본, 한국뿐이었다. 
  소련은 일찌기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유리 III라는 슈퍼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분야에서 소련의 기술은 미국을 조금 앞지르고 있었는데, 스핑크스의 등장으로 유리 III는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소련이 스핑크스에 자국의 컴퓨터망을 연결하지 않은 이유는 군사상의 이유였다. 아직까지도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주도해나가는 소련은 자국의 무기쳬계가 들어있는 컴퓨터망을 스핑크스에 연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돌-721과 니혼-A3라는 슈퍼 컴퓨터를 가진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군사상의 이유가 있었지만 이들  나라가 연결을 거부한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슈퍼 컴퓨터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과학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스핑크스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역전된 것이다. 일본의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연구하던 고온 초전도체를 스핑크스는 단  몇 시간의  계산으로  만들어냈고, 그 초전도체는 세계 각국의 튜브 열차에 쓰이게 되었다.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한국이 국력을  기울여 연구하던 1G DRAM도 스핑크스는 며칠간의 계산 끝에  완벽히 만들어냈고, 그 결과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치명타를  맞고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의 선진국이라는  자존심과 국민감정은 한국과 일본이 스핑크스에 접속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양국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다음 해 2월 CIA 비밀 연구실.
  " 좀 쉬어가면서 하지 그래요? "
  아리오네는 바바리를 문 옆 구석의 옷걸이에 걸어 놓고 커피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혜진은 앉아 있던  컴퓨터 앞에서 몸을 일으켜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조그만 찻잔이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소꼽 장난감 같이 느껴졌다. 
  기묘한 관계. 혜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리오네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분명 진현을 죽이고  혜진을 이곳까지 납치해 온 CIA의 한 요원인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혜진을 24시간 감시하는 여자가 아니던가. 그런 여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웃고 떠들고 위로를 받다니……  혜진은 자신의 블라우스 가슴에 달려 있는 작은 브로치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어때요? 일은 좀 진척이 있나요? "
  아리오네가 한 손으로 커피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혜진은 컴퓨터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작은 종이 조각을 집어 아리오네에게 내밀었다. 종이 조각에는 여러가지 화학명과  원소  기호, 구조식이 빽빽이 적혀 있었고, 대여섯개의 물질에  빨간 줄이 쳐져 있었다. 
  " 가장 가능성이 많은 여섯 개의  신물질인데  스핑크스를 사용해서 조사한 결과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별되었어요. 이젠 더 이상 시험해볼 물질도 없는데…… "
  아리오네는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혜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물질 분석에 스핑크스를 사용했다고요? "
  " 네.  연구실은 스핑크스 바로 밑 층에 있잖아요? 지난 주에 스핑크스의 접속 단자를 설치했어요. 기억 안나세요? "
  아리오네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 착각이시겠죠. 이 방은 스핑크스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
  혜진은 커피잔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으로 갔다. 거기에는 컴퓨터와 연결된 작은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이걸 누가 설치했죠? "
  " 스핑크스 정비 로보트요. 로보트 두 대가 와서 한참  동안이나 공사를 했는걸요. "
  " 이상한 일이군요. 스핑크스 담당은 바로 전데……  분명히 이 방은 스핑크스와 연결 공사를 한 적이 없어요. 또한 스핑크스의 사용 기록에도 이 연구실에서 사용한 기록은  없고요. "
  아리오네는 마시다 만 커피잔을 그냥  내려놓고  옷걸이에 걸었던 바바리를 다시 걸쳤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팔이  잘 들어가지 않아 혜진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 생각해보니 중요한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네요. 시간 나면 다시 들리죠. "
  아리오네는 허겁지겁 실험실을 나갔고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찻잔을 치우는 혜진의 귀에도, 책상 밑에  설치된 작은 마이크에도 들렸다. 그리고 실험실 8미터 위에 있는 컴퓨터의 연산 회로가 무서운 속도로 동작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자유의 여신상 내의 CIA 극비 기술과.
  ‘ 오늘도 또 집에 들어가기는 어렵겠군. ‘
  코넬 대학교 전기 공학과를 졸업한 영카우는  랭리의  CIA 본부에 들어온 후 12년 동안이나 극비 기술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 임무는 KGB가 눈에 불을 켜고 입수하려  애쓰고 있는 미국의 극비 기술을 지키는 것이었다. 1년 전  극비기술과가 뉴욕으로 옮겨 오고 그가 과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그는 소련으로 넘어갈 뻔 했던 수많은 군사 과학 기밀을  안전하게 지켜냈다. 최근에 적발한 것만 해도  잠수함  탐지를 위한 새로운 음향 탐지기, 인공 위성에 이용되는 초고해상도 적외선 카메라 등 부지기수였다. 
  ‘ 휴…… ‘
  영카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라이터를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산더미 같은 서류가 그를 불쌍하다 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끝없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영카우가 읽어야 할  기술의 목록은 점점 많아졌고, 그의 사무실에 불이 켜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는 플로리다의 별장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겨울이면 두  아들을 데리고 연례 행사처럼 플로리다로 가곤 했지만 그녀의 엄청난 낭비벽에 영카우는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그는 편지꽂이에 꽂혀 있는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컴퓨터로 깨끗하게 인쇄된 겉봉에는 ‘씨티뱅크 워싱 지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는 내용물을 펴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편지꽂이에 집어넣었다. 그는 꽁초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탁! 갑자기 방안의 불이 꺼졌다. 
  ‘ 스위치에 이상이 있나? ‘
  영카우는 천천히 일어나 스위치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정전이었는지 불은 다시 켜졌지만 곧 꺼졌다. 
  ‘ 제기랄, 컴파니(CIA의 별칭)의 전기 사정이 이렇게 나쁜가? ‘
  그는 인터폰을 들어 관리실과 연락 하려 했지만  인터폰마저 불통이었다. 
  ‘ 전기가 완전히 나갔나보군. ‘ 
  읽던 서류를 챙기던 영카우는 컴파니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5대 씩이나 24시간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조명이 다시 깜빡깜빡 거리며 꺼졌다 켜졌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컴파니의 다른 방은 불이 켜진 채였다. 
  영카우는 반사적으로 총을 찾았지만 서랍  안에는  무기가 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콜트 사에서 여성 첩보원들을 위해서 燭括 27구경 콜트를 개발해, 시험용으로 아리오네에게 지급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카우는  아리오네의 서랍 속에서 27구경 콜트를 꺼내, 들이닥칠 지도  모를 침입자를 경계했지만 위협의 그림자는 없었다. 방안의  불은 길게, 짧게 제멋대로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 길게, 짧게…… ‘
  그는 컴파니의 통신 교육 강의를 기억해내고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메모지 한 장에 무언가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그는 익숙한 솜씨로 모오스 부호를 받아 적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TURN ON PC ? ‘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켰다. 영카우의 오랜 벗은 반짝거리는 화면에서 줄줄이 글자를 토해내며 그를  반겼다. 화면을 읽어가던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화면에  나타난 내용은 편지꽂이에 꽂혀 있던 씨티뱅크의  예금  청구서였기 때문이었다. 
  화면에는 계속해서 아내의 씀씀이를 메우기 위해 그가  유용한 극비 기술과의 예산이 조목조목 づ립뎬. 영카우는 책상을 꽝 내리쳤다. 
  ‘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제길, 난  이제 끝장이군. ‘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에는  깜빡거리는  글자가 천천히 나타났다. 쳐다보는 영카우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는 한참동안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푸-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글자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영카우는 아까 끄집어 낸 27구경 콜트를 움켜 쥐고는 컴퓨터 터미널에 [Yes]라고 쳐넣고는 문을 나섰다. 0.1초 후  영카우가 쳐넣은 세 글자는 컴퓨터 메모리에 들어가 있었다.

  다음날 상원 의사당. 
  2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의사당 앞과 기자실은 세계 각국의 보도진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세계의 무력 균형을 바꾸어 놓을 역사적인 안건인 방위 구조 전면 개편안이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위 구조 개편안에는 스핑크스가 만들어 낸 새로운  첩보 위성과 공격용 킬러 위성등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많은 안건이 있었지만 기자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미국의 무기 체계 자체를 스핑크스에 연결하는 일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무기 체계를 컴퓨터의 판단에 맡기는 셈이 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대체적인 여론은  환영쪽이었다. 엄청난 예산 절감이라는 잇점에 못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지난 3개월 동안 스핑크스의  업적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의사당 밖에는 새로운 방위 구조 개편을 지지하는  데모대가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실직자와 저소득층이었다. 국방 예산이 감소하면 그만큼  그들에 돌아오는 사회 보장 연금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스페이스는 플래시 세례를 피하며 간신히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에는 특별 위원회의 13인 위원이 모두 모여  위원장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사봉을  두드려 희의 시작을 선포했다. 
  회의는 무려 15시간 동안 정회 없이  계속되었다.  일체의 보도진의 출입을 통제하고 비공개로 진행된 이 회의는  스핑크스가 발견된 경위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룬 업적, 또한 스핑크스가 미국의 무기 체계를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 기술적 타당성 등 6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지만 찬반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찬성은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의  데이비드 상원 의원 쪽이고, 반대는 공화당의 스페이스 위원장 쪽이었다. 민주당은 이미 국방 예산 절감으로 국민 복지쪽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할 수 있다는 당론을 확정했고, 공화당은  기계에게 국방을 맡긴다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기 때문에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享  세  차례의 표결을 거쳤지만 찬반 양쪽 어느쪽도 결의에 필요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아까 먹은 토스트가 좀 잘못 되었는지 위원장  스페이스는 속이 거북해져 사회를 부위원장에게 맡기고 화장실로  갔다. 15시간이나 되는 마라톤 회의 탓인지  신경은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 제길, 기계에게 국가 방위를 맡긴다는 게 말이 돼? "
  스페이스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칸막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안에 사람 있습니다. "
  밖에서 데모대의 함성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 빌어먹을 시위대  같으니.  차라리  공산당을  지지하지 그…… "
  소음기를 낀 27구경 콜트의 총탄이 문짝을 뚫고  스페이스의 목에 박혔지만, 총성은 곧 시위대의 함성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림자는 세 발을 더 쏘고 유유히 사라졌다.

  상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스페이스  위원장을  애도하는 뜻에서 사흘간 모든 일정을 중단했고, 장례식 다음날 속개된 회의에서는 방위 구조 개편안이 세 시간만에 통과되었다. 곧 세계 전역에서 미국의 과학 기술자들은  스핑크스와  미국의 무기 체계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MEDUSA의 AI담당 중역인 골덴트 미첼은 칼테크(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인공 지능 연구소에서 스핑크스가 있는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회사 전용 세스나 경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는 여러 차례의 출장으로 낯익은 조종사가 그를  반겨주었다. 
  " 안개가 이렇게 짙은데 괜찮겠어요? "
  " 걱정 없습니다. "
  조종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 스핑크스가 새로이 설치한 항공기 유도  시스템은  어떤 날씨에도 안전한 이착륙을 약속해 줍니다. "
  골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세스나  기  뒷쪽의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맸다. 이런 짙은 안개에서  비행기의 이착륙을 가능하게 하는 걸 봐도 스핑크스는 인류의 구세주였고, 자신은 그 구세주의 탄생을 몸소 알려온 미카엘  천사였다. 
  이륙 때의 작은 충격이 비행기 죄석을 통해 그의 몸에  전해 왔다. 그는 MEDUSA와 칼테크의 연구진들이 합동으로 수행하기로 한, 흥미 있는 연구 계획의 초안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 계획은 스핑크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수행, 더욱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으로, 필요에 따라서는  스핑크스의 일부를 분해하고 개조하는 계획도 있었다. 
  골덴트는 며칠 동안의 칼테크 일정으로 인해 몹시  피곤했다. 그는 팔걸이 아랫쪽의 레버를 제껴 의자를 뒤로  눕히고는 잠을 청했다.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바하의  ‘성 마태 수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컴퓨터와 함께 지낸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았다. 예일  대학에서 인공 지능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35년,  인공  지능 분야에서 걸어다니는 백과 사전이란 소리를 듣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스핑크스의 연구 뿐이었다. 
  조종사는 짙은 안개 속을 날고 있었지만 연방 휘파람을 불어댔다. 새로 설치한 항공기 유도 장치는 이륙 직후부터  착륙 직전까지 비행기를 자동으로 조종해주기 때문에  그는 그저 비행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비행기 끼리의 충돌 위험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조종사가 좀 더 주의 깊었다면 세스나 기가 지금 항로를  이탈해서, 막 뉴욕 공항을 이륙하는 보잉 757  여객기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비행기 시트가 잠자기에 적당하지 않았는지, 조종사의  외마디 소리 때문이었는지 골덴트는 다시 눈을 떴다. 뿌연  안개로 뒤덮인 창문으로 그가 마지막 본 것은 정면으로 날아오는 보잉 757기의 거대한 날개였다.

  MEDUSA의 광 컴퓨터 개발 담당 중역인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은 플로리다의 별장에서 모닝 커피를  끓이며  스핑크스의 레이저 데이터 변환 기술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 의사가 동맥 경화에 안 좋으니까 크림은 넣지 말라고 했지. ‘
  데이비드는 오래간만에 휘파람까지 지어가며 커피를  잔에 채웠다. 동맥 경화 증세로 3년전에 입원 한 후로는 팔  힘이 예전 같지 않아 커피잔에 커피를 채우는 일도 두 손에  힘을 꽉 주어야만 가능했다. 
  그는 그래도 스핑크스가 새로이 개발한 가정용 응급  시스템 때문에 플로리다의 따뜻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이 가정용 응급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데이비드는 단층 촬영기와 뇌신경 외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서 20km 바깥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화상 전화가 요란한 신호음을 내며 울렸다. 화면에는 MEDUSA의 비서실장이 나타났다. 
  " 어제 밤 11시경 뉴욕으로 가던 우리 회사  소속  세스나 경비행기가 뉴욕 공항의 유도 시스템의 고장으로 보잉 757기와 정면 충돌했습니다. 비행기 안에 타고 계시던 골덴트  미첼씨와 조종사가 그자리에서 사망하셨습니다. "
  골덴트가 죽다니…… 딸각 하며 그의  손에서  커피잔이 미끄러졌다. 왼쪽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서 그는 서둘러 응급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헬멧을 뒤집어 쓰고 팔찌를  팔목에 비끄러맸다. 응급 시스템은 뇌파 검사와 심전도, 맥박과  체온을 측정해서 적당한 농도의 안정제를  팔찌의  주사바늘을 통해 그의 혈관에 투여해 줄 것이다. 
  안정제 덕분인지 답답했던 가슴이 차차 풀려왔다. 순간 데이비드는 뒷골이 뻣뻣해짐을 느꼈고 몇 초 후에는  뒷머리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응급  시스템은 그의 맥박이 약해짐에 따라 비상 경보음을 울렸고 정확히 2시간 15분 후에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의 전문의가 헬리콥터를 타고 달려왔다. 
  " 응급 시스템이 미쳤었나보군, 치사량의 열 배가 넘는 에피네플린 을 투여하다니. 아직 단 한 건의 고장 보고도 없던 응급 시스템인데…… "
  의사는 데이비드의 몸에서 헬멧과 팔찌를 벗기며,  허공을 응시한 채로 부릅뜬 그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 지그문트 박사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로운  자동차를 몰고 나오셨네요. "
  " 오, 마리안느. 어제 새로 구입한 자동차야.  스핑크스가 설계했다는 자동차 유도 장치가 달려있지. "
  지그문트는 길 가장자리에 잠깐 차를 세우고 지도  학생인 마리안느에게 인사를 했다. 마리안느는 신기하다는 듯이  본넷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 한번 타보겠어, 마리안느? "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리안느는 짧은 치마에 조심하면서 지그문트의 옆 좌석에 앉았다. 흘러내리는 금테 안경을 한 손으로 추켜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턱수염을 살짝 쓰다듬으면서 지그문트는 자동차를 천천히 가속시켰다. 
  " 병렬 처리 컴퓨터 쪽의 연구는 잘 되어가나,  마리안느? "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다 박사님 덕분이죠. 병렬 처리 컴퓨터의 세계 최고  권위자이신 박사님께 지도받는데 연구가 진척이 안 될리가  있나요? "
  지그문트는 쑥스럽다는 듯이 너털 웃음을  지었지만  병렬 처리 컴퓨터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동안 독일 최고의 명문 공대인 아헨 공과 대학에서 그가  키워낸 제자들만으로도 웬만한 연구소 열 개는 채울  수  있을 정도니까……
  " 그런데 이 자동차에는 자동 유도 장치가 달려 있다고요? "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들 아랫쪽의 작은 컴퓨터 스크린을 가리켰다. 
  " 이 빨간 단추를 누르고 화면에 나타난 대로 목적지를 입력시키면 되지. 일단 자동으로 놓으면 핸들을 놓고서도 달릴 수 있어. 모든 조종은 스핑크스가 알아서 해주니까. "
  그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화면에는 아헨 공과 대학의  구내 지도가 나타났다. 
  " 일단 기숙사까지만 자동 조종으로 가볼까? "
  지그문트는 익숙한 솜씨로 자동 조종을 기숙사로 맞추고는 두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두 사람이 탄 자동차는  꼬불꼬불한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여 갔다. 
  " 박사님이 운전하는 거보다도 낫네요? 승차감도 훨씬  좋고…… "
  뒷쪽에서 한 떼의 대학생이 탄 자동차가 요란한 노랫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뚜껑이 없는 지이프 차에 여섯 명이 기타 하나씩 메고는 반쯤 찢어진 낡은 옷차림으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저 옷차림 하고는…… 그런데 저 녀석들도 자동  유도 자동차인 모양이지? 운전사가핸들을 놓고  플라잉  브이 를 치고 있는 걸 보니 말이야. "
  지이프가 추월을 하려는지 중앙선을 넘어 옆 차선으로  튀어 나왔다. 마리안느는 걱정스런 눈으로 지이프를  쳐다보았다. 
  " 저렇게 중앙선을 넘어 추월을 하려면  위험할텐데…… "
  자동 유도 자동차는 절대로 중앙선을 넘지 못하게 유도 된다는 것을 지그문트가 기억해 낸 것은 지이프가 그의 자동차 옆구리를 들이받고 부러진 핸들이 그의 가슴을 궤뚫은  직전이었다.

  아리오네는 극비 기술과의 자기 책상에 앉아,  앞에  놓인 두 권의 두툼한 서류 뭉치를 검토했다. 한 권은 지난 한  달간 의문의 사고로 실종되거나 사망한  과학자들의  기록이었다. 인공 지능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이자 MEDUSA의 중역인 골덴트 미첼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광 컴퓨터의 새로운 구조를 제시한 MEDUSA의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은 가정용 응급 시스템의 오동작으로 인해 죽었다. 병렬 처리 컴퓨터의 대가인 칼 지그문트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컴퓨터의 초고속 기억 장치에 쓰이는 갈륨 비소 반도체 를 집대성한 한국의  이 재성 교수는 연구실의 컴퓨터가 폭발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등 한 달 사이에 컴퓨터  분야에서만 열세명의 과학자가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의문의 사고는 컴퓨터 분야 뿐 아니라 생물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인간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 다음번 노벨  의학상이 유력시 되던 록펠러 의과 대학의 연구진은 액체 질소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전원 몰사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가 사고  직후에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는 것이다. 연구진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과 닮았으며, 유전자를  잘 조작하면 인간의 잠재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리오네는 책상 서랍을 열고 조그만 컵을 꺼내어 옆에 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서랍을 닫으려던 그녀는 자신의 27구경 콜트 권총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 이상하다, 난 권총을 쓴 적이 없는데? ‘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책상 서랍을 뒤지던 그녀는 원래 권총을 놓아두는 서랍의 바로 아랫쪽 서랍에서 자신의  27구경 콜트를 찾아냈다. 
  ‘ 난 항상 권총을 윗 서랍에 두는데……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나? ‘
  그녀는 커피잔을 든 채로 보고서를 계속 읽어갔다. 이집트 최고의 바이러스 연구자인 낫산은 전자  현미경의  고장으로 인한 고전압에 감전사했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의 유전 공학 연구진은 학술 회의 참가차 공항으로 향하던 중 튜브  열차의 사고로 14명이 사망하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리오네는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눈으로훑어 내려갔다. 
  ‘ 컴퓨터와 유전 공학의 전문가들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계획으로 추정됨. KGB나 모사드 , MI6 , 기타 다른 첩보  기관이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음. ‘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아리오네는 두번째의 서류 뭉치를 폈다. 그것은 스핑크스의 사용 기록이었다.  그녀는  기록을 세밀히 조사하다가 기록에서 일부분을 삭제한 흔적을 발견했다. 교묘히 위장했지만 그것은 분명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서 사용한 기록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CIA에서는 혜진의 비밀 연구실과 스핑크스를 연결한  적이 없다. 스핑크스가 혼자서 정비 로보트를 시켜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 접속 장치를 설치했고, 혜진이 스핑크스를 사용한 기록을 지워버렸다. ‘
  아리오네는 마구 헝클어지는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로 끼워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에 아리오네는 놀라서 멈칫거렸다.
  ‘ 설마…… 어떤 이유에서 스핑크스가 혜진을  감시하려는 것은 아닐까? ‘
  아리오네는 책상 아랫쪽에 달린 큰 서랍을 잡아  당겼지만 자물쇠가 잠겨있는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 세 겹으로 잠근 자물쇠를 열고 한 변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금속 상자를 꺼냈다.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담겨  있던 캡슈울이 들어 있던 상자였다. 
  ‘ 도대체 알 수 없는 상자야. 수천년 전의 이집트  인들이 어떻게 니켈과 티탄으로 된 상자를 만들어냈지? ‘
  그녀는 좀 더 조사해 볼 생각으로 상자를 어깨에 메고  있는 백에 집어 넣고는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혜진의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 또 들렸군요, 아리오네. "
  아리오네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눈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혜진은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리오네는 여러가지 실험  기재와  전선, 파이프가 어지러이 얽혀있는 뒷쪽을 세밀히 살폈다.  15분만에 그녀는 책상 밑에서 작은 무선  마이크를  찾아냈다. 한 눈으로 보기에도 CIA나 다른 첩보기관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어깨에 든 백에서 까맣고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꺼낸 아리오네는 상자에서 안테나를 뽑고 다이알을 돌렸다.  예상대로 무선 마이크에서 발사되는 전파는 스핑크스가 있는  방을 향하고 있었다. 
  " 뭐 이상한 것이 있어요? "
  혜진은 놀란 눈으로 아리오네를  쳐다보았다.  아리오네는 책상 밑에서 떼어낸 무선 마이크를 혜진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 이 방은 감시 받고 있어요, 혜진씨. 스핑크스가 이 방에 설치한 무선 마이크입니다. "
  갑자기 출입문 오른쪽에 놓여있는 모니터가  딸각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리오네는 어깨에 메고 있던 백을 힘껏  모니터에 집어던지고는 혜진을 밀어 엎드리게 하고 자신도  엎드렸다. 백에 맞은 모니터는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두꺼운 유리가 펑-하고 폭발하여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뒤이어 방안에 있던 컴퓨터 단말기와 조직 배양기, 원심 분리기가 잇달아 폭발하며 불꽃이 솟았다. 웬일인지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스프링쿨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와르르 소리와 함께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불 붙은 부스러기가 두 사람의 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엉금엉금  기어가던 혜진의 무릎 위로 불깅에 뜨겁게 달구어진 철제 앵글이 덮쳤다. 혜진의 비명소리를 들은 아리오네가  불길  속을 헤치고 기어와서 앵글을 치워 주었다. 
  아리오네는 몸으로 혜진을 감싸고 출입문으로 뛰었다.  불길은 맹렬한 속도로 번져나갔지만 두 사람이 방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 좀 더 먼저였다.

방 안

  " 초능력? "
  혜진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 새로 발견된 물질은 아테니움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리스 신화의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서 따온 거죠. 아테니움을 투여한 동물은 지능만 증가하는게 아니라 투시 능력을  갖추게 돼요. "
  " 투시 능력? "
  아리오네는 놀라서 소리쳤다. 
  "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는 후각과 시각,청각을 모두  봉쇄해버려도 먹이를 찾아내곤 해요. 특히 벽으로 가로막아 놓아도 벽을 궤뚫어 보고 먹이를 발견하죠. "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이 물질의 발견을 두려워 했단  말인가? 아리오네는 무서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혜진은  말을 이었다. 
  "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스핑크스는 아테니움의 발견을 두려워 해서 거짓 분석을 보내온 것 같아요. 스핑크스가  분석한 자료에는 아테니움이 가장 형편없는  물질로  나타났거든요. "
  아리오네는 혜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구석의 불탄부스러기에서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잿더미를 휘저었다. 아직도 뜨거운 그  쇠붙이는 아까 모니터를 향해 집어던진 백속에 들어있던 문제의  금속 상자였다.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금속 상자. 
  혜진은 아리오네가 금속상자를 집어드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 전 아리오네가 들어오기 조금 전에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아테니움의 분자 구조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 와 거의 흡사해요. "
  아리오네는 혜진의 말중에 ‘스핑크스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 금속 상자를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혜진은 아리오네를 돌아다 보더니 금속 상자에 눈길을  돌렸다. 
  " 혜진씨,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드릴께요.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는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에서 나온 설계도 대로 만든 거여요. "
  " …… "
  아리오네는 떨어뜨렸던 상자를 집어들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원래 한 변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상자  모양이었던 금속 상자가 원판 형으로 바뀌어 있고, 겉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가 씌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글자는 희미해서  잘 읽혀지지 않았다.
  " 이상하다, 불에 녹았나? 원래 이건 정육면체 모양의  상자였고 겉에는 글씨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 상자가  바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상자였어요. "
  혜진은 아리오네에게서 금속상자, 아니 이제는 원판형으로 바뀐 물체를 받아들었다. 
  " 아직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
  순간 혜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 혹시 이 금속 상자는 형상 기억 합금이 아닐까요? "
  " 형상 기억 합금이 뭐죠? "
  혜진은 아리오네에게 형상 기억 합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형상 기억 합금은 쉽게 말해서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물질이예요. 니켈과 티탄으로 된 니티놀이라는 합금인데, 예를 들어 용수철 모양의 니티놀을 곧게 편  다음  가열하면 과거의 모습인 용수철로 되돌아가요. 지금의 화재  때  금속 상자가 가열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
  혜진은 물이 담겨있는 대야 속에 금속판을 집어넣었다. 차가와진 금속판은 곧 금속 상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 맞아요, 이 금속 상자의 주 성분은 니켈과 티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면 이 상자를 가열하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겠군요. "
  혜진은 타다 남은 책상 밑에서 작은 알콜 램프를 끄집어냈다. 램프는 재를 뒤집어 쓰긴 했지만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알콜 램프에 불을 붙여 금속 상자를 가열했다. 금속  상자는 천천히 원판형으로 변했고, 표면에는 이상한 글씨들이  나타나더니 더욱 뚜렷해졌다. 아리오네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 이 금속 상자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글씨는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에  대한 어떤 기록이 아닐까요? "
  아리오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것 같네요. 하옇던 혜진씨 조심하세요. 스핑크스는 이제부터 우리 둘을 노릴테니까요. "
  " 도대체 스핑크스가 왜 우리를 노릴까요? "
  " 스핑크스는 나중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제거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혜진씨가 발견한  아테니움이 스핑크스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것만은 분명해요. "
  "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없애야지요.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컴퓨터가 존재한다면…… "
  아리오네는 혜진을 쳐다보았다. 
  " 하지만 증거가 있어요? 거기다 스핑크스는 인류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만약  스핑크스가  없어진다면 인류 활동의 90%는 정지하고 말거여요. 모든 교통기관은 스톱되고, 공장의 생산은 중지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거여요. 스핑크스가 실제로 인류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인지 좀 더 두고 봐요. 어쨌던 혜진씨는 조심하세요. "
  아리오네는 불탄 연구실의 정리를 다른 CIA 요원에게 맡기고 극비 기술과로 갔다. 과장인 영카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 아랫층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거야? "
  " 아직 확인 되지 않은 것이지만 스핑크스는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그녀는 혜진의 방에서 있었던 일과 최근 1년간 일어난  의문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하지만 혜진이 발견한 아테니움과, 형상 기억 합금으로 이루어진 금속 상자에서 발견된 글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영카우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 놀랍군. 하지만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게.  그리고  우리 둘이서 대책을 세워 보자구. 만약 아리오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리오네도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혜진의 비밀  연구실도 경비를 서도록 하지. "
  아리오네는 자신의 27구경 콜트를 꺼내려 서랍을 열었지만 사랍은 비어있었다. 
  ‘ 내가 딴데다 두었나? ‘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던 아리오네는 결국 권총을 찾지 못하고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영카우는 전화기를 들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 저쪽에서 들려왔다. 
  " FBI 특별 수사반입니다. "
  전화가 끝나자 영카우는 방 구석에 있는 컴퓨터에  무엇인가를 입력시켰다. 
  ‘ 극비 기술과 코드네임 아리오네가 스핑크스의 정체를 알아냈음. 주의 깊은 관찰 바람. 아리오네에 대한 모든 자료는 J-OY-PQ-199-0-621에 있음. ‘
  놀랍게도 수신자는 스핑크스였다.

  바깥은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휘몰아 치기라도 할듯이 험상궂은 날씨였다. 튜브 열차를 타러 역으로 향하던 그녀  앞을 두터운 바바리를 입은 세 남자가 가로막았다. 
  " 아리오네씨죠? "
  " 네, 그런데요? "
  " FBI입니다. 당신을 스페이스 상원 의원 살해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부를 권리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
  남자들은 능숙한 솜씨로 아리오네에게 수갑을 채웠다.  정확히 한 시간 후 아리오네는 뉴욕 교외의 FBI  안전  가옥에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27구경 콜트를 그녀의 코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 이 27구경 콜트, 당신 것이 맞지요? "
  아리오네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 총은 제 것 맞습니다. 당신들이 이미 조회해  보았겠지만 난 컴파니(CIA의 별칭)에서 일하고 있어요. 컴파니 식구들이 총을 가지고 다니는 건 당연하지요. "
  "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27구경 콜트에 살해됐습니다.  이 27구경 콜트는 여성 첩보원들을 위해 특수 제작되었고, 시험용으로 당신에게 지급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구경 콜트를 지급받은 사람은 10명도 안되고, 그중  스페이스  의원이 살해되던 날 미국 내에 있던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
  아리오네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스핑크스에 의한 무기 체계의 통제를 반대하던 스페이스  상원의원이  의사당 내 의원 화장실에서 살해당했다는 기사는 얼핏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누명이야……
  " 우리는 당신의 27구경 콜트를 조사해보았습니다.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네 발의 총탄을 맞았는데, 당신 권총의 탄창에도 네 발이 비어있었습니다. "
  " …… "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음모를  꾸민걸까? 그러고 보니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스핑크스에게 무기를 맡기자는데 결사 반대를 해 왔다고 한다. 이번 일에도 스핑크스가 관련되어 있는게 아닐까? 어쨌던 아리오네는 FBI요원들의 심문을 맞받아치기로 했다. 
  " 목격자는 있습니까? "
  " 피해자가 화장실에서 죽었기 때문에 살해 현장을 본  목격자는 없습니다. 사건 직전과 직후에 화장실을 출입한 사람들은 당신 정도의 키, 즉 약 170센티미터에  바바리를  입고 있던 사람이 화장실 안에서 용무를 보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바리를 입고 있는 170센티미터  정도의  사람이 화장실을 뛰쳐나가는 것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목격자들이 본 바바리는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
  됐다, 빠져 나갈 구멍이 있다, 하고 아리오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당신들은 바바리를 입은 키 170센티미터의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
  "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한 음절 한 음절씩 똑똑 끊어서  말했다. 
  " 그렇다면 당신들은 바보군요. 어느 곳의 화장실도  남녀 따로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국회  의사당도  마찬가지죠. 저같은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면 목격자들이 기억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
  " …… "
  " 변장을 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남자처럼  서서 용무를 볼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죠? 당연히  그날  스페이스 상원 의원을 죽인 키 170센티미터에 바바리를  입은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
  " …… "
  " FBI가 이렇게 어리석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
  FBI 수사 요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아리오네를 안전 가옥 밖으로 내보내 주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아리오네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차츰차츰 스핑크스는 그녀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Part III [유기]의 수수께끼

  2000년 3월. 구려시.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삼삼오오 모인 구려 중학교  3학년 6반 학생들은 제각기 웅성거리고 떠들고 있었다.  복도에 나가 있던 한 학생이 뛰어 들어오며 ‘ 허 병도 선생님 오신다 ‘고 외치자 학생들은 우루르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아직도 두툼한 파란 파카를 입은 교사가 교탁 앞에 섰다.  3월이지만 아직도 눈이 채 녹지 않은 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도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
  " 안녕하세요, 여러분? "
  병도는 학생의 인사를 받고는 교실 뒷쪽에 설치된  레이저 비디오를 켰다. 화면에는 고구려의 지도와 함께 오늘의 수업내용이 순서대로 나와 있었다. 
  " 오늘은 고구려의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구려시가 옛날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지요? "
  병도는 한국이 막 통일되던 5년 전을 생각했다. 김 일성의 갑작스런 죽음과 북한 군부의 반란으로 북한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고, 이미 한인 자치 구역을 형성하고  있던  길림성과 요령성의 수비군도 반란에 가담했다. 한국 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길림성과 요령성을 대한민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북한 전역과 길림성, 요령성을 신속히 장악한  한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무기와  훈련, 사기등 모든 면에서 우세한 한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사태가 악화되기를 원치 않은 중국 정부는 길림성과  요령성을 한국에 매각하는 형태로 사태를 수습했고, 한국은 고구려 이래로 잃어버렸던 만주 땅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 흔히 고구려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보다 매우 뒤떨어진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
  레이저 비디오에는 1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불상이 나타났다. 병도는 지휘봉으로 화면에 나타난 불상을 가리켰다. 
  " 화면에 보이는 것은 국보  118번인  금동미륵반가상입니다. 크기는 17.2센티미터로 작지만 고구려의 미술이 이미 수준급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병도는 손에 들고 있는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레이저 비디오에는 다음 화면이 나타났다. 약간은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풍기는 불상이었다. 
  " 이 것은 국보 85호인  금동신묘명삼존불입니다.  장수왕 때 만들어진 불상으로, 삼국시대의 미술이 결코 중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선생님의 설명이  아니어도, 옛 고구려의 수도에서 태어난 학생들이라  삼국시대의 역사는 눈 감고도 줄줄 욀 수 있었다. 병도는  다음  화면을 가리켰다. 도깨비 같은, 그러나 약간은  익살스러운  모습의 기왓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 이것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구려  와당입니다. 와당은 그당시 쓰이던 기와의 이름이지요. "
  뒷쪽에서 학생 하나가 쭈삣쭈삣 손을 들었다. 학급에서 장난꾸러기로 유명한 최 세영이었다. 
  " 저, 그 도깨비 그림 같은 것이 고구려의  기와  맞아요? 저번에 친구와 산책 갔을 때 그런게 많이 있는 곳을 봤어요. "
  " 세영이, 오늘은 만우절이 아냐, 그런 말로 선생님을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병도는 피식 웃어넘겼다. 세영의 장난은 학교 내에서도 알아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세영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세영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 그럼 좋아. 이번 학기에 예정되어 있는 야외 조사는  세영이가 보았다는 와당이 있는 곳으로 하지. 이번 주  토요일 아침 9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도록. "

  토요일 아침, 병도는 두툼한 등산복에 장갑으로 완전 무장을 한 6반 학생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 갔다. 한 학기에 한번씩 있는 야외 조사를 병도는 제일  좋아했다.  학생들에게 실제로 역사를 느끼게 하고 보여 주는 야외 조사야 말로  병도가 늘 주장하는 ‘산 교육’이기 때문이다. 많은 인원을  통솔해서 산에 오르다 보니 가끔씩 다치는 학생이 생기고 그때마다 곤욕을 치루기는 했지만 조사를 끝내고 감동받은  학생들의 눈빛만으로도 병도는 충분히 보람을 느끼곤 했다. 
  " 세영이는 언제부터 이런 산 속으로 산책을 다녔지? "
  세영의 얼굴이 귀밑에까지 빨개졌다. 
  " 너, 여자 친구하고 산책 나갔었구나, 맞지? "
  병도는 피식 웃었다. 세영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같이 웃었다. 그가 항상 학생들을 이해 한다는 것을 세영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영은 작은 언덕 앞에 섰다. 언덕 한 쪽에  흙으로  덮인 돌 무더기가 있고, 주위에는 와당이 흩어져 있었다.  병도는 와당을 자세히 보았다. 장수왕 때쯤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 생각보다 대단한걸? 어쩌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
  " 선생님, 이리 와보세요. 이 돌무더기는 무슨 무덤  같아요. "
  학생의 외침에 병도는 그리로 달려갔다. 돌 무더기를 덮고 있는 흙을 헤집자 큰 돌벽 밑에 조그마한 돌판이 있었다. 
  ‘   永樂  王之   ‘
  몇 글자 알아볼 수 없었지만 [永樂]이란 단어를 발견한 그는 어마어마한 발견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永樂大王은 바로 광개토 대왕! 그는 1600년만에 우리나라 최고의  정복자였던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한성대 고고학과의 이 동윤 교수와 국립 박물관장 안 기중박사는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끝내고 무덤을 덮은 흙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제거해 나갔다. 두 사람이 유물 발굴에  몸담은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처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옆에서는 발견자인 병도와 세영이 발굴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 선생님, 왜 저렇게 손으로 천천히 해요? 드릴로 푹 파헤치면 안되나요? "
  " 유물 조사는 원칙적으로 손으로 해야 해.  기계를  쓰면 유물을 상하게 하기 쉽거든. "
  흙이 다 걷히고 피라밋 모양의 돌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구에 있는 장군총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컸다. 흙에 파묻혀 있을 때는 작아 보였지만 높이는 15미터가 족히 넘을 듯 했다. 
  발굴반은 돌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네 시간쯤의 작업 후에 발굴반은 묘실에 도달해, 유리 섬유 케이블이 달린 소형  카메라를 안에 들이밀었다. 화면을 보던 발굴반은  순간적으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화면에 나타난 건 누렇게 변한  종이 뭉치 – 바로 고구려 시대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묘실에 들어간 안 기중 박사는 불활성 기체가  들어  있는 상자에 재빨리 책을 집어 넣었다. 연구실로  돌아가  적당한 보존 처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상자에 집어 넣고  한숨을 돌린 안 기중 박사는 책 밑에 이상한 문자가 빽빽이 적혀있고 하얀 녹이 슨 작은 은판이 있는 것을 보았다.
  ‘ 은에 생기는 녹은 하얀 색이 아닌데 이상하군. ‘
  특수 장갑을 낀 손으로 은판을 집던 그는  놀라움에  그만 들고 있던 은판을 떨어뜨렸다. 은판인 줄 알았던 판은  바로 알루미늄이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의 과학자  외르스테드가 처음으로 알루미늄을 발견 한 때는 1825년,  광개토  대왕이 죽은 지 1400년 후의 일이다.

  주 ) RNA : 리보핵산. DNA와 더불어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는 물질.

  " 네, 들어오십시오. "
  영훈이 방문을 들어서자 건장한 체격의 이 동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요즘 젊은  사람들보다도  더욱 다부진 몸집이었지만, 머리에 허옇게 인 백발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비디오 카메라를 세워  놓고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들이댔다. 
  "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역사적인 발굴을  지휘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
  " 이젠 할 일을 다한 기분입니다. 죽기전에 고구려 유적을 한 번 발굴해 보는게 소원이었쨉,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광개토 대왕릉을 발굴하게 되다니, 이젠 여한이 없습니다. "
  " 이번 발굴의 최대 성과는 어디에 있을까요? "
  교수는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조그마한 책을 들어 보였다. 
  " 아직까지 꿈만 같지만, 우리는 전설로만 알려져 있던 고구려의 역사책인 [유기] 100권을 발굴해 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것은 모조품이지만, 1600년이 넘은 책이 무덤  속에서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지요. 이번 발굴된 광개토  대왕릉은 통풍이 아주 좋아서 책의 망 상태가 극히  양호합니다. 물론 1600년 동안 책이 찢어지고, 부분적으로는 썩었습니다. 습기로 인해 종이는 검게 변해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
  " 그러면 책의 내용은 어떻게 읽었지요? "
  교수는 조그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에는 병원에서 쓰는 X선 촬영기를 축소한 것 같이 생긴 기계의 사진이 있었다. 
  " 이 기계가 바로 감마선 단층 촬영기입니다. 먹과 종이는 감마선의 투과 정도가 다르거든요. 눈으로는 검게 변해 알아 볼 수 없는 종이도 이 기계灌 깨끗이 보이지요. "
  " 그러면 이번에 발굴한 [유기] 100권의 내용은  어떤겁니까? "
  교수는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레이저 비디오를  켰다. 화면에는 우리나라의 지도가 나타났다. 
  "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해서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었습니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에 나오는 낙랑은 바로 이 한사군이지요. 하지만 고구려의 정사(正史)인 [유기]에는 도리어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
  " 예? 고조선이 한나라를 이겼다고요? "
  영훈은 상체를 앞으로 일으키며 말했다. 
  "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사책의 3분의 1정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
  교수는 비디오 화면상의 우리나라 지도를 가리켰다.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까지 배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지방에  그려져 있었다. 영훈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 원래 위만조선은 중국계 이주민들이 동이족 ,  즉  우리 민족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동이족은 위만정권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내전을 틈타 한나라가 침략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이족은 치열하게 항거한 끝에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나라의 침략도 물리쳤습니다. "
  " 그럼 우리가 배운 한사군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 그건 중국 역사책의 왜곡이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낙랑 4군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역사책은  모두  ‘춘추필법’이란 원칙에 따라 적혀지는데,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을 높이고  다른 나라를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적혀진 역사책이 정확할 리가 없지요. 더우기 중국  근처의  나라중 중국과 문화적, 군사적으로 맞설 나라는 우리 민족밖에 없었고, 따라서 우리의 역사, 특히 고대사는 많이 깎여지고 왜곡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우리의 역사책이 없어 중국의 역사책이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에 [유기]가 발견됨으로 해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지배했었고, 백제가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좁은 한반도에 갇혀 지냈던 것이  아니라 거대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국 민족과  힘을  겨루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열리는 국제 고고학회에서 [유기]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집니다.  회의가 끝나면 동북 아시아의 역사는 3분의 1 정도가 새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
  영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짧은 캇트 머리에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젊은 여자가 찻잔을 내왔다. 
  " 혜선아, 인사하렴. 이쪽은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시고, 이쪽은 제 조카 혜선입니다. " 
  여자는 고개를 숙여 목례를 보냈다. 스물 조금  넘었을까.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꽤 참한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도리어 귀여워 보였다. 영훈은 가벼운  칭찬을  건넸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런 미인 조카를  두신줄은 몰랐는데요. "
  찻잔을 영훈의 앞에 놓은 그녀는 보조의자를 끌어다  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 영훈씨 이름은 그전에 들어서 알고 있지요.  이집트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 사건때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을 자청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분이시죠? "
  영훈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쑥스러운지 동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런데 이번에 광개토 대왕릉에서 금속판이  발견되었다고요? "
  교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혜선이 후다닥 뛰어나가 걸레를 집어와 닦았다. 겸연쩍어 하는 표정으로 교수가 말했다. 
  " 그건 발굴반에서도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
  "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여기 오기 전에,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최 세영군을 만나 보았습니다. 감추려는  눈치였지만 결국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
  " …… "
  교수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형광등을 켰다. 영훈은 교수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혜선은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니다, 혜선아.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어차피 네  전공하고 관련이 있는거니까. "
  전공이라고? 어리둥절해 하는 영훈에게 교수가 설명했다. 
  " 혜선이는 고대 유적의 과학 분석을 연구하지요.  우리 대학 재료공학과에서 감마선 투시를 연구했고, 지금은  고고학과 대학원 과정에 있습니다. [유기]의 감마선 단층 촬영을 한 사람도 바로 혜선입니다. "
  " 그럼 지금 대학원생이십니까? 전 고등 학교를 갓 졸업한 줄 알았어요. 굉장히 어리게 보여요. "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영훈은 혜선에게 말했다. 교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영훈 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 이미 알고 계시다니까 말씀을 드리지만 절대로 이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됩니다. 보도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영훈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세워 놓은  비디오 카메라의 스위치를 껐다. 
  " 사실은 나도 영훈씨 같은 사람과 의논을 하고  싶었습니다. 영훈씨는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을 취재하셨었죠? "
  " 예, 그때 정체 모를 금속 상자에서 바이러스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저도 죽을 뻔 했었죠. "
  영훈이 우쭐거리며 대답했지만 교수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가끔씩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간밤을 꼬박 새웠음이 분명했다. "
  " 그때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던 금속 상자는  니켈과 티탄의 합금이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 예, 하지만 그 당시 복원반은 아직까지도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에도 보도 되지  않았고요. "
  " 복원반의 제임스 박사는 내 오랜 친구입니다. 그는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었어요. 4000년 전의  이집트인은  도저히 니켈을 쓸 수 없습니다. 도저히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거죠. "
  " …… "
  영훈은 어느새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교수와 영훈은 1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 이 금속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된 금속판은 알루미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구려인들이 19세기에  발견해  낸 알루미늄을 사용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있습니까? 제임스 박사나 내가 발표할 수 없었던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다. "
  영훈은 고개를 돌려 탁자를 바라보았다. 소박한 갈색의 나무 탁자는 오래 써서 가장자리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칠이 벗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리던  그는 교수의 다음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 하지만 왜 알루미늄 판이 광개토 대왕릉에 묻혀  있었는지를 어쩌면 설명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
  교수는 ‘어쩌면’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 ‘어쩌면’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가설이 공상 과학 소설에나 나옴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혼란이 올지도 모릅니다. "
  똑똑 –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어번 나고, 짙은 빨강 머리의 외국인이 들어왔다. 큰 키에 청색 겨울 양복을 입은 남자는 교수에게 뭐라고 말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영훈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교수는 뭐라고 남자에게 말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순간 남자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까  교수가 엎지른 차 때문인 것 같았다. 간신히 책상 모서리를 짚은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요셉이라고 지난번 회의에서 만났던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 교수입니다. 이스라엘에 교환 교수로  간  적이 있어 히브리 말을 조금 한 것이 인사를 한 계기가 됐죠.  지금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습니다. "
  교수는 몇 년전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자신의 기억력이 흐뭇했지만, 교수의 기억력이 좀  더  좋았다면 지난번 만났을 때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오른쪽 뺨의 검은 점이 없어졌다는데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교수는 한자가 빽빽히 인쇄된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한자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영훈이었지만 종이에 씌여진 것은 낯선 글자 뿐이었다. 뒷면에는 손으로 정성 들여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뒷면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 교수님, 설마… "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훈은 천천히  소리내어 글을 읽어 내려 갔다. 
  " 신라국 본기 5권. 내물왕  42년 5월 계림 앞바다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사흘 동안 없어지지 않다. 하늘을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아다니다 두 마리가 땅 떨어져 죽다. 죽은 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친 채 나와, 왕궁으로 모시고 극진히 치료했으나 일 주일 만에 죽다. 근처의 나뭇군이 글씨가 적힌 이상한 하얀 쇠 거울을 신선의 선물이라며 왕에게 바치다.  쇠로 만든 새가 떨어져 죽은 근처에서 팔 없는 아이가  태어나다. 왕은 신이 노한 탓이라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만 머리가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다. 왕은 신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탓이라 여겨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산을 불태우다. 내물왕 42년 7월. 계림 앞바다에 다시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이상한 짐승들이 바다 속을 들락날락하고 섬을 만들다. 섬은 바다에 닷새 동안 떠 있다 가라 앉다.  "
  " 그럼 그 하얀 쇠 거울이 바로  알루미늄  금속판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광개토 대왕릉에 와 있죠? "
  " 계속해서 읽어 보세요. "
  혜선도 어안이 벙벙해져 영훈이 들고 있는 종이를 넘겨 볼 뿐이었다. 그는 계속 읽어 나갔다. 
  " 고구려국 본기 27권. 영락 10년  군사 5만을 신라에  보내어 왜구를 무찌르다. 신라의 내물왕이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은덕을 칭송하고, 쇠로 만든 하얀 거울을 바치다. 계림에 떨어져 죽은 쇠로 만든 커다란 새의 알이라고  사신이  말하다. "
  " 그걸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훈씨? "
  혜선이 불안한 표정으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한 개비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푸우- 하고 연기를 내뿜은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 믿을 수 없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죠.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은 핵무기의 폭발입니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는 물론 비행기나 우주선일테고요. 팔 없는 아이는 핵  폭발의 방사능으로 인한 기형아일겁니다. 그 금속판은  비행기의 추락한 잔해에서 발견 되었을테고요, 내물왕은  고구려에 그 금속판을 공물로 바쳤을겁니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경주 근처에서 싸움이라도 별였다는 건가요? "
  영훈은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교수를 쳐다 보았다. 교수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였다. 
  " 내 생각도 똑같아요, 영훈씨. "
  교수는 어느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있었다.  혜선이 ’20년 동안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면 어떻게 해요’하고  말렸지만 교수는 불 붙인 담배를 깊숙히 한 모금 빨고는 길게 내 뿜었다.
  " 교수님이 발표를 못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영훈과 혜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정작 문제는 그 다음 줄입니다. 쇠로 만든 짐승들이  바다 속에 섬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경주 앞바다에는 외계인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말이 됩니다. "
  " 설마…… "
  영훈과 혜선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교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말을 이었다. 
  " 믿고 싶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이만하면 금속판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아시겠죠?  금속판이 없다면 단순한 신라의 신화로 해석될 수  있지만,  금속판이 공개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지 모릅니다. 또  하나,  만약 알루미늄 판을 사용하는 외계인이 경주 앞바다에 유적을  만들었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 있던 금속판도 역시  외계인이 만든 것일 수 있습求. 그렇다면…… 스핑크스 컴퓨터 역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며칠 전에  제임스 박사와 통화했는데, 박사가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한 금속 상자도, 이번에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도 외계인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었다. 아직 차가운 바깥 공기가 영훈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비디오  카메라를 챙겼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 비밀은 꼭 지키지요. "
  " 고맙습니다. 영훈씨는 금속판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세번째이자 마지막 사람입니다. "
  영훈은 혜선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실을 나갔지만,  교수의 말은 책상 모서리에 붙어 있는 도청 장치를 통해 그곳으로부터 10킬로미터 떨어진 차 안에 앉아 있는, 금속판의  비밀을 알고 있는 네번째 사람의 녹음기에 모조리 녹음되었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 라울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에 든 칵테일 잔에 담긴 싱가폴 슬링의 붉은 빛이 방안의 조명을 받아 탁하고 답답하게 보였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무관이 들어와 방문자가 있음을 알렸다. 라울은 응접실로 나갔다. 혈색 좋은 검은 머리의 요하난이 서 있었다. 
  라울은 요하난을 잘 알고 있었다. 라울이 프린스턴 대학의 테니스 클럽의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요하난은  예일  대학의 테니스 클럽에 있어 빈번히 만났었다. 라울이 두달 전  이스라엘에 부임했을 때 요하난은 특수 부대의 지휘관이었고, 한달 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텔 아비브에서 미국인 학교 스쿨버스를 습격하여 인질극을 벌였을 때 라울은  CIA의  첩보 위성과 도청 장치를 사용해 요하난을 도왔다. 물론 요하난은 라울의 도움으로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인질을  구출했고, 그 공로로 모사드로 옮겨갔다. 
  " 지난번 텔 아비브 사건 때는 정말 고마왔네. 자네  덕에 모사드로 옮겨갈 수도 있었고. "
  라울은 활짝 웃으며 얼음통에서 요하난의 잔에 얼음 한 조각을 넣어 주었다. 
  " 자네와 나는 대학 때부터 만난 친구 사이 아닌가. 또 우리같이 특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서로 돕고 사는거고. "
  요하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 자네가 흥미 있어할 정보를 하나 가져 왔네. 얼마  전에 설치된 스핑크스 컴퓨터 있잖나. 그 컴퓨터가  발견된  곳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 있던 금속 상자였다며? "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하난의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 우리 모사드는 스핑크스를 외계인이 만든 컴퓨터로 추정하고 있네. 고대 이집트 인이 니켈을 사용할 리는  없는거니까. 그런데 그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어. 교수로 위장한 우리 요원이 알아낸 건데 한국의 역사학자가 역시 외계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금속판을 발견해 냈다는군. 그  금속판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속판과 같이 발견된  역사책에는 분명 외계인의 침입으로 보이는 구절로 그  금속판을 설명하고 있다네. 스핑크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잘하면 제 2의 스핑크스를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라울은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그는 요하난에게 물었다. 
  " 흥미 있는 정보군. CIA가 좋아하겠군. 그런데 이런 정보를 왜 나한테 알려주나? 자네 기관이 빼돌려 제2의 스핑크스를 만들면 훨씬 좋을텐데. "
  " 사실 우리도 그 정보를 검토했지만 우리는 설계도를  입수해도 만들 과학력이 없어. 또한 자네에게 진 신세도  갚을 겸. 우리 세계에서는 언제나 ‘기브 앤드 테이크’ 아닌가. "
  " 고맙네. 서로 도우며 사는거지. "

  예루살렘의 미국 대사관에서 두 사람이 건배를 하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혜선이 감마선 단층 촬영기로 알루미늄 금속판을 조사하고 있었다.
  " 큰아버지, 이 금속판에 씌여진 글은 읽을 수 없나요? "
  동윤은 고개를 저었다. 혜선은 신기한 듯이 들여다 보다가 금속판을 단층 촬영기 안으로 밀어넣었다. 곧 쉿-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 안을 진공으로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 조심스럽게 다워야 한다. 귀중한 거니까 상하면  큰일이야. "
  " 물론 알고 있어요, 큰아버지. "
  혜선은 장난스럽게 동윤에게 윙크해 보이고는 단추를 눌렀다. 화면에 빽빽이 숫자가 나타났고, 혜선은 키보드를  연방 두드렸다. 화면에 가로로 하얀 줄이 나타나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더니 흐릿하게 형체가 나타났다. 혜선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동윤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로 혜선을 쳐다보았다. 혜선의 손가락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무슨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한 구석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 큰아버지, 이 부분에는 방사능이 있어요. "
  혜선은 화상 전화기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눌렀다. 초조한 가운데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이 받는  소리가  들렸다. 
  " 호상이니? 나 혜선이야. 급하게 이리로 좀 와줄래? "
  " 야, 지금이 몇 시인줄 알아? 새벽 1시야, 1시. 넌 이 시간까지 집에도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니? "
  투덜대던 호상은 혜선의 얼굴이 굳어져 있는 걸 보자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챘다. 
  " 나 장난하는 거 아냐. 네가 꼭 와서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래. 여기 큰아버지도 와 계셔. "
  " 알았어. 그런데 지금 자동차가  있나  모르겠는데…… 하옇던 갈께. "
  전화가 끊어지자 동윤은 혜선에게 물었다. 
  " 방사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
  " 감마선 단층 장치는 방사능 동위 원소의 방사능  중에서 감마선을 이용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촬영하고자 하는  물체에 방사능이 있으면 그 감마선 때문에 화면이 뿌옇게 나와요. 그리고 여기는 무슨 전자 회로 같고…… "
  " …… "
  동윤은 자신의 생각이 차츰차츰 맞아 간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있다 호상이 졸린 눈을 비비며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 큰아버지, 제 친구 호상이에요. 호상아, 인사드려. "
  "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권 호상이라고 합니다. 혜선이랑은 아주 친한 친구죠. "
  혜선은 호상을 화면 앞으로 데리고 가서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화면을 가리켰다. 
  " 지금 보이는 거는 감마선 단층 촬영을 한 건데, 혹시 뭐를 찍은 건지 알겠니? "
  호상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화면을  노려보다가  한참만에 무릎을 탁 쳤다. 
  " 이건 일종의 전파 수신기야. 그런데 이렇게  묘한  거는 처음 본다. 알루미늄 판 속에다 만든  수신기라……  혹시 이거 스파이들 쓰는 무전기 아니니? "
  호상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마치 용수철처럼 보이는 주위로 수많은 작은 네모꼴이 모여 있었다. 
  " 이 용수철처럼 보이는 거는 코일이야. 전파를  수신하는 핵심적인 부분이지. 그리고 이 네모꼴은 무슨  트랜지스터처럼 보이고. 어라? 전원이 없네? 무슨 건전지처럼 보이는게 있어야 하는데? "
  호상은 고개를 흔들다가 뿌옇게 흐려진 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회로 상으로 보면 아마 이게 전지인 것 같은데,  이렇게 기묘한 전지는 처음 봐. "
  " 거기는 방사능이 있어. 약한 방사능이지만. "
  방사능? 하며 호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럼 원자력 전지라도 쓰나 보지. 하옇던  이거는  전파 수신기가 맞아. "
  멍하니 서있던 동윤을 돌아다 본 혜선이 설명을 했다. 
  " 호상이는 전자 공학을 전공하거든요. 화면에 전자  회로같은 부분이 있어서 불렀어요. "
  " 그런데 호상군, 이 알루미늄 판 속의 회로가 지금도  전파를 송수신할 수 있나 확인 할 수 있어요? "
  " 뭐 뜯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교수님. "
  " 뜯어? 안되고, 아주 귀중한 판이에요. "
  동윤은 뜯는다는 호상의 말에 질겁을 했다. 
  " 안 뜯고도 방법이 있죠. "
  호상은 주머니 속에서 자그마한 테스터 를 꺼내고는, 책상 위에 놓인 철사를 꺼내서 둘둘 말아 고리를 만들어 알루미늄 판 위에 놓고 철사의 전류를 재기 시작했다. 테스터의  바늘이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 맞습니다. 교수님. 이 금속판에서는 약한 전파를 발사하고 있군요. "
  주 ) 동이족(東夷族) :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 큰(大) 활(弓)을 잘 쓴다고 해서 大+弓인 夷자를  썼다. 흔히 ‘오랑캐 夷’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잘못 된  말이고, 실제는 ‘우리 민족 夷’라고 불러야 옳다. 우리 민족이  오랑캐가 아니니까 말이다.

  " 안 기중 박사님이십니까? 여기는 이 동윤입니다. "
  " 안녕하세요, 이 교수님? 요즘도 바쁘시죠? "
  화면 안의 기중은 동윤을 보고 무척 반가와하는 듯  했다. 동윤은 흥분을 감추고 평상시처럼 볼펜을 돌리면서  말했다. 교수씩이나 되어서 볼펜을 돌린다고 주위에서  핀잔도  많이 듣지만, 전화 받을 때마다 볼펜을 돌리는 것은 그의 고칠 수 없는 습관이었다. 
  " 항상 하는 일도 없이 바쁘죠, 뭐. 시간  있으시면  평양 냉면이나 먹으러 가지 않겠습니까? 할 이야기도 있고요. "
  " 평양 냉면이요? 제가 냉면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 번에 같이 갔던 데로 하지요. 대동강가에 있는  수상 식당 아시죠? 참, 그리고 그 금속판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거기에 씌여져 있는 글자를 해독할 수 없을까 해서요. "
  동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속을 정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3초 후 그 곳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동차  안에서 한 미국인이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평양으로 향하는 통일 고속도로를 달리는 이 동윤  교수의 마음은 별로 편하지 못했다. 하늘도 교수의 마음처럼 찌뿌드하기만 했다. 후두둑-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쳤다. 비에 젖은 고속도로가 미끌미끌한데다 앞에 가는 화물차가 기름통을 가득 실어 시야를 가려 운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 제기랄, 저 앞의 차는 왜 이리 운전을 거칠게 해? "
  끼익- 앞 차가 급정거를 하면서 싣고 있던 기름통이  굴러 떨어졌다. 교수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꺾어서 피했지만  기름통은 도로에 떨어져 기름이 사방으로 흘렀다. 바퀴가 기름에 닿자 차는 뱅그르르 회전했고 난간을 뚫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1주일 후 아리오네는 문제의 알루미늄 판과 [유기]의 영어 번역판을 넘겨 받았다.

  2000년 4월. 아틀란타. 
  세계 고고학회가 열리고 있는 조지아 주 아틀란타의 한 호텔 회의장은 회의 시작 전부터 몹시도 술렁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견된 [유기]라는 역사책으로 인해  동북  아시아의 역사를 대폭 수정해야 한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이번 고고학회에서 이집트의 새로운 피라밋이 공개 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 때문이기도 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왕의 무덤은 도굴 당한 채였다. 이번에 도굴되지 않은 새로운 피라밋 발견된다면 그  고고학적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우기 투탄카멘이  힘없는 소년왕이었던데 비해 이번 피라밋은 세력있는 왕의  무덤이라 부장품도 엄청나게 많다는 텔리비젼의 보도였다. 
  제임스 세계 고고학회 회장이 들어오자 술렁임이  멎었다.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을 지휘하기도 했던 그는 이집트  문명 권위자였다. 
  " 이 자리에 계신 수많은 고고학자 여러분. 저는 이  대회의 개막을 선언하며 여러분에게 두 가지의 큰 발견을 보고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한국의 고구려 왕조에서 최고의 정복왕으로 일컬어진 광개토 대왕릉의 발굴 소식이고, 두번째는 미국 고고학회가 이집트에서 새로운 피라밋을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
  안 기중 박사가 연단에 나와 섰다. 그는 검은 양복에 하얀 리본을 달고 있었다. 
  " 발굴 작업을 지휘했던 이 동윤 교수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시는바람에 제가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고고학자였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기중은 묵념을 올린 후 발굴 경위와 [유기]의 내용을 발표했다. 곧 장내는 술렁임으로 가득 찼다. 일본이  백제의  반 식민지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일본 대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지만 [유기]의 내용은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기중의 발표가 끝난 후 미국 고고학회장 알피니스트가  나와서 새로운 피라밋의 발견을 보고했다. 
  "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에는 세계 최고의  슈퍼  컴퓨터인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인공위성이  찍은  적외선 사진을 분석하던 중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  근처에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피라밋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미국 고고학회는 이집트 정부와 교섭 끝에 2월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 바로 어제 발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발굴된 유물을 보시겠습니다. "
  조명이 꺼지고 레이저 비디오의 커다란 스크린이 천장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화면에 나타난 유물은,  장식이  화려하고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투탄카멘 왕의 부장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간 방안에 탄성이 가득 찼다. 화면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비춰지고 있었다. 더우기 미이라는 유리관 안에 들어 있었다.
  " 지금 보시는 장면은 새로운 피라밋에서 발견한 미이라입니다. 유물을 분석한 스핑크스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미이라는 지금까지의 미이라와 다른 종류의  약물을  사용해서 머리카락이 파랗게 변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미이라는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
  듣고 있던 기중도 너무나 놀라운 발견이라 입이 벌어졌다. 고대 이집트 인들이 유리로 둥그런 관을 만들어 그 안에  미이라를 보관하다니. 
  " 미이라의 보존 상태는 극히 양호합니다. 자세한 자료는 스핑크스가 미이라의 조사를 끝내야 알 수 있습니다. "
  기중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 그럼 이번 발굴의 조사는 어느 정도나 스핑크스가  담당했나요? "
  알피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거의 전부를 스핑크스가 담당했습니다. 피라밋의 위치를 제일 처음 발견한 것도 스핑크스였고, 실제로  발굴  작업을 전개한 것도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특수 로보트였습니다.  스핑크스의 분석으로는 지난번 스핑크스의 보수  공사  때처럼 강력한 바이러스가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기계로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피라밋 안에서는 27구의 미이라를  발견했으며, 미이라는 전부 스핑크스가 특수 제작한 유리 방에 격리되어 과학적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미이라에서는  예상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에 의한 조사는 현재 불가능합니다. "
  고고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피니스트는  말을  이었다. 
  " 스핑크스의 추산으로는 약 한 달간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4000년 전의 이집트인들이 유리로 관을 만들고 미이라를 보관할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지만, 이집트의 고대 문명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도로 발달했었음은 틀림없습니다. "

  알피니스트가 새로운 피라밋과 미이라의 발견을  발표하고 있는 동안, 아틀란타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의 CIA 극비 기술과에서는 아리오네가 두 장의 금속판을 비교하고 있었다. 한 장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발견된 금속 상자가 변한 판이고, 다른 한 장은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두 판에 씌여진 문자가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언어라는 것을 알아냈다. 
  ‘ 뭔가가 있어. 스핑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일지도 몰라. ‘
  아리오네는 금속판에 씌여진 문자를 해석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현존하는 어떤 문자와도 닮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언어학자들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만 했다. 
  아리오네는 아랫층의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 내려가서,  혜진의 신상에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요 며칠동안 아리오네의 주위에서 이상한  사고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사흘 전에는 멀쩡하던 그녀의 집 변압기가 폭발했다. 다행히 소화기로 일찍 불을 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전기 회사는 전기 공급을 제어하는 스핑크스의 실수로  일시에  고전압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틀 전에는 그녀가 타려던 택시가 자동 조종으로 유도되는 트럭과 부딪치는 교통 사고가 났다. 택시를 타려다가 자동 조종인 것을 보고 내려서 다른 택시로 바꿔 타길 천만 다행이었다. 
  아리오네는 장비실에 들려 주문한 작은 기계 장치를  찾아왔다. 장비실의 담당자는 기계와 방탄복을 내 주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긴 했지만 이런 이상한  목적의 기계는 처음 봅니다. 아마 두 시간 정도는 심장과 뇌파가 멈춘 채 가사 상태로 있을 수 있을 겁니다. "
  " 그리고 부탁드린 물질은요? "
  " 여기는 장비실이라 기계 종류만 다루고, 부탁하신  물질은 Z-127호실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
  장비실을 나온 그녀는 Z-127호실의 ‘혈액 분석실’이란  팻말을 올려다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카우는 푸석푸석한 머리에 구겨진 잠바  차림으로  극비 기술과의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항상  단정한  정장에 세련된 외모로 유명하던 그가 몇 달 전부터 멍한 얼굴에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데 대해서 극비 기술과의  직원들은 많은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부인과 사이가 나빠 거의 별거 상태라는 게 공통된 추측이었지만 그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은 썰렁하기만 했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컴퓨터의 터미널을 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앞에서 살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컴퓨터를 켜기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화면에는 스핑크스의  메세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 …… "
  전에도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 메세지처럼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책상 서랍을 뒤져 오렌지 쥬스 깡통을 따 단숨에 들이킨 그는 아리오네의 서랍을 열었다. 스페이스 상원 의원 살인 사건의 유력한 증거물로 FBI가 그녀의  27구경 콜트를 가져가 버린 후라, 대신 38구경 콜트가 탄창과  함께 놓여 있었다.
  삐리릭- 화상 전화기의 소리가 빈 사무실 안을 울렸다. 영카우는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아리오네였다. 
  " 아직도 퇴근 안하셨네요. 처리하실 일이 많은가보죠? "
  " 응, 응, 그럴 일이 있어서. "
  당황해 하는 영카우의 귀에 아리오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호출 신호에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일이죠? "
  " 곧 처리해줘야 할 일이 있어. 긴급을 요하는 일이야. X5지점의 안전 가옥 알지? "
  화면속의 아리오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곧 그리로 가지요. "
  " 7시에 기다리겠어. "

  X5지점의 안전 가옥은 뉴욕 맨하탄의 미드 타운에 있었다. 스핑크스가 뉴욕의 도시 계획을 담당한 후 미드 타운에는 대규모의 고층 건물이 들어섰지만, 5층 정도의 낮은 건물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CIA는 뉴욕 시내에 대여섯  곳의  안전 가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안전 가옥은 주로 CIA가  망명자를 조사하거나 중요한 회의를 여는데 쓰고 있었다. 영카우는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잡은 안전 가옥의 길가로 난 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미 증거가 될만한 도청  장치와 감시 장치는 제거해 버렸다. 
  아직도 쌀쌀한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아리오네는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미행자는 전혀 없었다. 계단을 천천히  오른 아리오네는 초인종을 눌렀다. 영카우가 천천히 문을 열자 그녀는 현관을 들어섰다.
  " 바깥이 추운가 보군. 아직도 바바리를 입고  다니는  걸 보니. "
  " 글쎄요, 춥기는 꽤 춥네요. "
  바바리를 옷걸이에 걸던 아리오네는 영카우의 손에 38구경 콜트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뒷걸음 쳤다. 
  " 과장님, 설마…… "
  " 아리오네는 스핑크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 스핑크스는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을 싫어하거든. "
  " 스핑크스가 과장님한테 절 없애라고 시키던가요? "
  " 그런 걸 알 필요는 없겠지, 아리오네? "
  " 역시…… 스페이스 상원 의원을 죽인 사람도 과장님이었군요. "
  " 스핑크스는 영리한 컴퓨터야.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지. "
  아리오네의 머릿속에 얼마전에 영카우의 편지 꽂이에서 본 예금 청구서가 떠올랐다. 그의 부인이 수입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예금 구좌는 항상  부족했다. 그는 그 부족을 메우기 위해 공금을 몰래 빼서 쓰곤  했지만 아리오네는 그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덮어 두었다. 사실을 밝히면 그는 금방 빈털털이가 될 것이고, 첩보원이 돈이 없어 쩔쩔맨다는 것은  적에게 매수를 당하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퇴직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영카우는 퇴직시키기에는 미국의 극비 기술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 과장님, 스핑크스가 당신을 협박했군요, 예금 구좌를 가지고, 그렇죠? "
  "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
  영카우는 순간 놀랐지만 다시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알고 있다니 놀랍군. 스핑크스는 내가 유용한 예산을 밝히며 협박과 회유를 하더군. 자기 말을 들으면 부족한  구좌도 메워주겠다며 말이야. "
  " 과장님, 스핑크스는 무서운 컴퓨터여요. 무슨 목적인 지는 모르지만 자기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있어요. 이대로 놔두다가는 인류는 스핑크스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리고 말아요. "
  " 잘도 지껄여 대는군.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아. "
  " 이 비열한 자식! "
  영카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더니 얼굴이 벌게졌다.  얼굴에 핏줄이 솟는 것을 본 아리오네는 쾌재를 불렀다. 
  ‘ 됐다. 흥분하기 시작한다. ‘
  아리오네는 갖은 욕설로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신경질을 내다 들고 있는 권총을 창 밖을 향해 쏘았다. 소음기가 달려 있는 권총이지만 콜트의 발사음은 조용한 아파트  안에서 꽤 크게 들렸다. 순간적으로 아리오네는  문쪽으로  뛰어나가 손잡이를 열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나갔다. 평상시 같으면 영카우 같은 명사수에게서 도저히 도망갈 수  없었겠지만 이미 자제력을 잃은 영카우는 그녀가 뛰쳐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계단 위에서 탄창이 비도록 그녀에게 쏘았다. 
  악! 소리와 함께 그녀는 현관 앞에서 고꾸라졌다.  총알을 맞은 그녀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졌다.  영카우는 따라 내려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은 그녀가 흘린 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휴대용 응급 장치로 뇌파와 심장 박동을 체크했지만 이미 숨이 끊긴 그녀의  뇌파와  심장 박동은 멎어 있었고, 그 결과는 무선으로 자유의 여신상  내에 있는 스핑크스에 기록되었다. 
  후다닥- 주위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에 영카우는  재빨리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인파 사이로  스며들었다.  물론 38구경 콜트 권총을 그녀의 손에 쥐어 놓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제 아리오네의 죽음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주 ) 왕가의 계곡 : 피라밋이 도굴을 많이 당하자  이집트 왕들은 깊숙한 산 골짜기의 절벽을 깎아 무덤을 만들고는 계곡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이 곳이 지금 룩소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왕가의 계곡이다.

Part IV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

  " 이 사진 봤나? 요즘 다들 이 미이라들 때문에 난리라고. 우리 방송국도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나? "
  KBC 방송국의 25층 기자실에서 보도국장 박 범진은 영훈에게 작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 이게 뭡니까, 국장님? 무슨 영화 같은데,  SF  영화입니까? "
  범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 자네는 취재에만 바쁘고 다른 신문도 안보고 사나? 이집트에서 새로이 발견된 미이라라네. "
  영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아, 그 미이라요, 그런데 무슨 미이라가 머리가  이렇게 파래요? 그래서 처음에는 영화 장면인줄 알았지 뭡니까? "
  " 글쎄, 스핑크스의 말로는 미이라의 제작에 쓰인  약품이 보통과 달라 머리카락이 화학 반응 끝에 파랗게  변색되었다고 하더군. "
  " 스핑크스요? 스핑크스가 이 미이라의 발견에도 관련  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
  범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 이번 미이라는 스핑크스가 만든 인공 위성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미이라의 발굴 작업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조사까지 전부 스핑크스가 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언론이 취재 할 수 없었다는군. "
  " 조사까지요? "
  "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경우가 있지 않나. 이번에도  같은 이집트 계통의 미이라니까 혹시 바이러스가 있을 지 몰라 일체의 인간의 접근을 금지한다더군. 하옇던 자네는 이걸 취재해보게. "
  영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사진을 받아들었다. 
  " 이 사진에 보니 유리관에 담겨 있는데, 이 유리관은 스핑크스가 보호 벽으로 설치 한 것입니까? "
  범진은 글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든 책을  찾아보고 말했다. 
  " 이건 이 미이라가 발견 될 때부터 들어 있었다는데?  그래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는군. 고대  이집트인들이 유리를 쓰다니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지. "
  고대 이집트 인들이 유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영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알았습니다. 국장님, 제가 취재하도록 하죠. "
  영훈은 곧장 전화기를 붙잡고 평양의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를 호출했다. 갸름한 얼굴에 가운데로 가름마를 탄 남자가 영훈에게 인삿말을 던졌다. 
  " 오랜만이야, 영훈이. 대학 졸업하고 얼마만이지? 텔레비젼에서는 자주 봤어. 특히 지난번 스핑크스  바이러스  사건 때는 온 나라 안이 자네 이름으로 떠들썩 했지. "
  " 쑥스럽게 왜 그래, 승규.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지. "
  " 술? 그거 좋지. 우리 대학 다닐 때 같이 어울려 좀 많이 마셨어? 항상 술독에 빠져서 살았잖아. "
  영훈은 오래간만에 그의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승규와의 우정은 물론 두터웠지만 끝은 별로 좋진않았다. 1학년 때부터 대학 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던 영훈은 취재 대상으로 만났던 경민에게 정을 느꼈다. 경민은 불우  청소년을  가르치는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승규는 그녀와 같은 야학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자와 취재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대학생으로서 영훈과 경민, 승규는 마음이 잘 통했다. 그 자리에서 의기  투합한 그들은 방과 후만 되면 만나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패거리로 발전했지만 문제는 영훈 뿐만 아니라 승규도 같이 경민을 사랑하고있었다는 거였다. 영훈은 승규와  포장마차에서 정신을 잃을만큼 술을 퍼마시고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미련없이 경민을 포기했다. 그리고 군대를 지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특수 부대로 차출됐고, 웬만한  첩보  요원에 버금가는 훈련을 받고 제대했다. 
  영훈은 특수 부대에서의 기억을 다시는  돌이켜보고  싶지 않았다. 가상 적진으로 침투하는 훈련, 적의 요인을  들키지 않고 사살하는 방법, 특수 부대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살아남는가에 대한 강의그 이상의 어느 것도 아니었다. 경민을 포기한 충격으로 지원한  부대였지만 3년은 꾸역꾸역 지나갔고, 제대 후 영훈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승규와 경민의 신혼 살림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 경민씨는 잘 있지? "
  화면 속의 승규가 어색하게 웃었다. 
  " 응, 지금 둘째 애를 가졌어. 자네는 아직 결혼도 안했다고 들었는데. "
  " 아직 결혼 안했지. 뭐 나같은 남자가 인기 있을 리가 있겠어. "
  영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화학 약품으로 파래질 수 있어? 미이라를 만든다던가 해서 말이야. "
  " 미이라? 아, 얼마 전에 스핑크스가  발견했다는  미이라 말이지? 글쎄, 나도 그게 이상해.  우리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머리카락 분석도 하는데 어떤  약품으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을 파랗게 할 수는 없어. 파랗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파란 페인트를 칠하는 것 뿐이야. "
  생각대로군. 뭔가 냄새가 나는걸? 영훈은 질문을 더  던졌다. 
  " 머리카락도 오래 되면 뭔가가 달라지지 않겠나? "
  "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머리카락의 검은 색은 멜라닌이라는 물질 때문이야. 그런데 이  멜라닌은 화학적, 물리적으로 아주 안정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색깔이 빠지지 않아. 사진에서 본 미이라의 색깔은 밝은  파랑색이거든. 설사 머리카락에 파란 물감을  들였어도,  원래 있던 검은 색깔하고 섞여서 칙칙한 파랑이 되어야 하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 "
  영훈은 언제 한번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는 승규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자신의 분신인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기술의 발달로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멘 그의 등을 누가 툭 쳤다. 하마터면 고꾸라질뻔한 영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베지색 바바리 차림의 소연이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영훈은 카메라를 내려  놓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연은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수습 기자로 입사해서  올 1월에 정식 기자가 되었다. 수습 기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몇 차례의 특종을 터뜨렸고, 그 덕분에 KBC 방송국  내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영훈은 그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취재 태도 때문이었다.
  소연은 수습 기자 때부터 일선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수습 기자 때는  선배들의 잔 심부름이나,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젖혀두고 굵직굵직한 사건들만을 취재했다. 원래부터 취재에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그녀인지라, 새로운 21세기형 마약 제조등 서너건의 특종을 터뜨렸고 곧 정식 기자가  되었지만 영훈은 그녀를 별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영훈 그  자신은 기자가 된 지 6년이 넘었고 숱한 특종을 터뜨렸지만  아직도 기자실의 잔 심부름을 솔선해서 하고 있는 터였다. 
  " 소연씨, 그렇게 사람을 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잖아요? "
  " 넘어지라고 친건데요,뭐. "
  소연은 서류 뭉치를 두 팔로 안은 채 생글생글 웃으며  영훈에게 말했다. 
  " 영훈씨, 이번 스핑크스 취재는 공동으로 할  생각  없어요? "
  ‘웃기는군. 수습 기자를 마친지 한 달도  안되는데…… ‘
  영훈은 그녀를 무시하며 나갔지만, 소연은 그런 그를 팔짱을 낀 채 노려보았다. 
  ‘ 두고 봐. 꼭 영훈씨한테서 인정을 받고 말테니까. ‘
  소연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데는 영훈을 의식한 탓이  컸다. 21세기형 마약 제조 사건때 방송국 내의 모든 기자가 그녀를 칭찬했지만, 유독 영훈만은 그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대학 신문사 선배였던 영훈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기자가 된 지 6년 동안에 영훈이 터뜨린 특종은 같은 기간에 다른 기자 전부가 발굴한 특종보다도 많았다. 소연은 누구보다도 영훈의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영훈은 그녀에게  냉랭하게 대하기만 했다. 그 후부터의 소연의 모든 행동은 단지 영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소연은 창문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취재 노트를 옆에 끼고 방송국 문을 나섰다.

  MIT의 잡스 연구소의 꼭대기 층에서는 MIT내에서도 몇  명 없는 한국인 교수 중의 한 사람인 이 영상이 자신이 직접 설계한 ‘진도개’라는 이름의 컴퓨터를 시험하고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인 apple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이름을 딴 잡스 연구소는 푸른 사과 모양의 유리 건물로, MIT의 컴퓨터 공학과가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연구소중 가장 최신식이었다.  영상은 이 연구소에서 컴퓨터 보안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다.
  대형 컴퓨터 내에 해커나 컴퓨터 바이러스가 침입, 컴퓨터를 못쓰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요즈음은 새로 나온 컴퓨터를 시험할 때 반드시 보안 테스트를 한다. 즉 컴퓨터를 침입하는 기술을 지닌 침입 전용 컴퓨터를 가지고,  새로 나온 컴퓨터가 어느 정도까지  견뎌내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진도개’는 이러한 보안 테스트에 쓰이는 침입 전용 컴퓨터로, 영리한 진도개처럼 24시간 내에 웬만한  컴퓨터는 다 뚫고 들어간다. 
  레이저 디스크를 집어넣으려던 영상은 어리둥절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진도개’ 컴퓨터 안에  침입했다는 신호였다. 
  ‘ 이거 또 컴퓨터 바이러스인가? 아니면 우리 학생들의 장난인가? ‘
  MIT에는 세계 어느 대학보다 많은 해커가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그 해커의 대부분은 단지 자신이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학생들이었다. 영상 자신도 학교 다닐때 해커 노릇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지금 ‘진도개’에  침입한 해커가 어떤 짓을 하는지 흥미를 느끼고 관찰했다. ‘진도개’는 침입하거나 이를 방지하는데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이기 때문에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상은 침입자가 보호망을 뚫고 들어오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손목 시계를  지켜보았다. 뛰어난 해커가 ‘진도개’를 뚫고 들어오는데에도  약 다섯시간 정도니까 마음만 먹으면 그 침입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추적할 수 있었다. 다음순간 영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침입자는 다섯 겹으로 장치된 보호 프로그램을 단 몇 초만에 깨버리고  루트에 침투해서 ‘진도개’의 모든 프로그램을 지워버리고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걸린 시간은 단 54초. 
  영상은 침입자의 흔적을 찾으려 연구소 내의 모든  프로그램과 화일을 뒤졌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일급의  해커라도 어느 한 구석에는 처리하지 못한 증거가 남기 마련인데 이번의 침입자는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어가듯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영상은 패킷 교환기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시간에 ‘진도개’에 접속된 사용자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패킷 교환 회선은 컴퓨터끼리 접속을 하는 전화선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가짜 번호로 들어왔더라도 접속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장난 전화가 왔을 때 가짜  번호일망정 전화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패킷 교환기에 기록이 남지 않았다면 연구소 내부인의 소행이거나 ( 연구소 내의 접속은 패킷  교환기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 아니면 패킷 교환기의 기록도 지워버릴 수  있는 자의 소행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부인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잡스 연구소 안에는 ‘진도개’를 뚫고 들어올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패킷 교환기의 기록은 스핑크스가 직접 제어하고 있는데 스핑크스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대던 영상에게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설마…… ‘
  삐리릭- 하고 울리는 화상 전화기의 신경질적인  신호음이 영상의 생각을 어지럽혔다. 
  " 제길, 누구야? "
  투덜거리며 켠 화면에는 영훈이 비디오 카메라를 든 채 서 있었다. 
  " 영상이, 오랜만이야. 여기 잡스 연구소 앞인데  바쁘지 않으면 잠깐 나올 수 없어? 물어볼 일이 있어서 그래. "
‘ 이 녀석, 불쑥 나타나 사람 놀래키는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 ‘
  영상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로비에서는 등에 비디오 카메라를 짊어지고 한쪽 어깨에는 큼직한 가방을  멘 영훈이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 이 근처에 취재 나올 일이 있었거든. 온 김에 널 좀  만나보고 가려고. 물어볼 것도 있었고. 지금 바빠? "
  영상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 조금. 방금 우리 컴퓨터가 침입을 받았거든. 그래서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보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컴퓨터야 될대로 되라지,뭐. "
  " 아니, 네 컴퓨터가 침입을 받다니, 네가 하는 일이 그런 침입을 막는 일이라며?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 "
  " 망할 놈의 스핑크스. 아무래도 그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애. 다른 사람은 내 컴퓨터를 뚫고 들어올 능력이 없어. 하지만 그 놈의 쇳덩어리가 무슨 이유로 내  컴퓨터에 침입을 했지? "
  영훈은 영상을 끌고 근처의 작은 술집으로  갔다.  탁자에 앉자마자 영훈은 스핑크스의 대해 영상이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영상은 영훈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컴퓨터인 스핑크스에 대해서 컴퓨터 학자들조차 너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핑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MEDUSA 회사의 데이비드 골드시타인과 골덴트 미첼은 사고로 죽었고, 기타 스핑크스의 설치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도 대부분 사고로 죽었다. 스핑크스가 인류를 떡 주무르듯 하고  있지만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이다. 
  영훈은 스핑크스가 발견되게 된 경위를 ‘스핑크스  바이러스’때부터 차근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 속에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가 들어있는 것을  CIA가 가로채었고, CIA와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 설계도가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번에 스핑크스가  만들었다는 푸른 머리카락의 미이라도 뭔가 수상하다……
  " 사실은 스핑크스 때문에 너한테 부탁을 하러 왔어. "
  영훈은 영상의 귀에 대고 몇마디 중얼거렸다.  영상은  옷 소매를 약건 걷어올리고 팔짱을 낀 채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어제만 찾아왔어도 그런 부탁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오늘 일로 인해서 나 역시 궁금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한 번 해보자. "
  문이 열리고 얇은 베지색 바바리 차림의 날씬한  아가씨가 들어왔다. 영상은 문가를 힐끔 쳐다보고는 탁자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 제길, 그림의 떡이군. "
  " 영상이, 피곤해? 그럼 일어나자. 아까 부탁한 거 할려면 준비할 일도 많잖아. "
  비디오 카메라를 챙기며 일어나려는 영훈의 등을 툭 쳤다. 소연이었다. 
  " 한참 찾았어요, 영훈씨. "
  영훈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 여길 어떻게 찾았어요, 소연씨? 여기 있다고 누가  가르쳐 줬어요? "
  " 본사에서요. 이번 스핑크스가 발견한 미이라는 공동  취재 하래요. "
  소연은 바바리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종이  조각을  내밀었다. ‘보도국장 박범진’이라는 싸인은 볼 필요도 없었다. 
  " 미안하지만 소연씨, 이번 취재만은 나한테 맡겨줘요. 이유는 한국에 돌아가서 말해드릴께요. "
  소연은 팔짱을 낀 채 영훈을 노려보았다. 
  " 그럴 수는 없어요, 영훈씨. 이건 KBC  본사  보도국에서 시킨 일이에요. "
  " 하옇던 공동 취재는 안됩니다. 보도국장님께는 좀  있다가 제가 사표 써가지고 간다고 전해줘요. "
  영상과 영훈은 천천히 일어서서 잡스 연구소에 있는  영상의 연구실로 향했다.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소연을 뒤로  남긴 채.

  아직도 불에 탄 자국을 흉하게 남기고 있는 실험실 안에서 혜진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리오네의 사망 소식은 큰 충격이었지만 아리오네를 죽인 것이 스핑크스임에 틀림 없고 혜진의 연구가 스핑크스에게 약점이 될만한 것이기에 아리오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연구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책상 위의 오래된 탁상시계는 힘겨운 몸짓으로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아테니움 때문일거야. 스핑크스가 나를 노리는 것은. ‘
  아테니움을 잘만 연구하면 스핑크스의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했다. 방안의 모든 컴퓨터는 스핑크스와의 접속을 끊고, 수시로 방안에 도청장치가 있나 점검했다. 스핑크스를 이용할 수 없어서 용량이 작은 방안의 컴퓨터만을 사용하자니 계산량이 많고  속도가 느려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스핑크스와 접속을 재개한다면 스핑크스는 다시 한번 컴퓨터를  폭파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체할 새로운 물질인 아테니움은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어떤 생물체도 몇 시간 안에  죽게 만드는 L-2-3-폴리글루타민산과는 달리  아테니움은  아무런 독성도 없으며, 아테니움을 투여한 식물은 강력한 식물 뇌파를 나타내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동물 실험에서였다.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는 눈과 귀,코를 가려도 미로 뒷쪽의  먹이를 손쉽게 찾아내곤 했다. 일종의 투시력이 생긴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었다. 
  혜진은 아테니움을 투여한 동물과 식물의  유전자  구조를 검사했다. 예상대로 아테니움은 유전자에 직접 작용,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
  혜진은 옆에 있는 장정에게 유전자 분석 결과를 내밀었다. 실험실의 폭발과 아리오네의 죽음 이후 CIA에서 혜진을 돕기 위해 파견한 중국계 생물학자인 장정은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유전자 분석을 전공했다. 혜진이 곤경에 처해있을 때마다 온화하고 인정이 넘치는 미소로, 29살밖에는 안되는 젊은 나이지만 마치 그녀의 아버지처럼 그녀를 따뜻이 감싸주곤  했다. 평소에는 그저 사람 좋게만 보이지만, 일을 할 때는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중국 사람을  보는 듯했다. 
  " 분명히 유전자가 변하긴 변했네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마치 망가졌던 유전자가 고쳐진 것처럼 보여요. "
  혜진은 장정의 말이 이해가 안가서 다시 한번 물었다. 
  " 망가진 유전자가 고쳐졌다뇨? 무슨 뜻이지요? "
  "  유전자에는  저마다의  뜻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A-G-C-T-T…G-A 는 개구리의 꼬리가 없어지게 하는 유전자, G-T-A-A…T-C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게 하는  유전자,  뭐 이런 식이거든요. 하지만 유전자가 전부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 정보가 담겨져 있는 부분은 유전자의  20%정도이고, 나머지는 별 뜻이 없는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이를테면 80% 부분은 망가진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생물에게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지요.  "
  " 그건 저도 알아요. "
  " 끝까지 들어봐요. 아테니움이 바꾸어 놓은 유전자는  별 뜻이 없는 80%의 유전자 부분입니다. 정상적인 20%의 유전자는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아무 뜻이 없는  유전자에서  유전 정보를 만들어 냈으니 일종의 유전자 수리제라고도 할 수 있겠죠. "
  " 유전자 수리제라고요? "
  장정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테니움은 망가졌던 유전  정보를 되살려내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
  " 유전 정보를 되살려 낸다…… "
  " 혜진씨, 유전 정보를 되살려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
  " 글쎄요? "
  장정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채 연구실 한쪽에  놓여  있는 소파에 몸을 털썩 던졌다. 
  " 망가진 유전 정보를 되살려 낸다는 것은 결국  과거에는 그런 유전자가 존재했었다는 말이 돼요.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가 투시력을 가지고, 아테니움을 투여한 식물이 뇌파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은…… "
  혜진이 장정의 말을 이었다. 
  " 예전에는 쥐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었고, 식물이  뇌파를 가지고 있었다…… "
  " 맞아요. 옛날에는 투시력이 시각과 같은 보통  감각이었고, 식물도 뇌파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떤 이유에선지 투시력의 유전자나 식물 뇌파의 유전자가 파괴되어버린  거여요. "
  " 어떤 이유…… "
  혜진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 장정씨, 아테니움은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와 구조면에서 비슷하다는 걸 알고 계시죠? "
  " 알고 있죠. 근데 왜요? "
  " 혹시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아테니움의 반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
  " 반대 작용이라뇨, 혜진씨? "
  평소 약간 멍한 얼굴에 느릿느릿 움짓이던 장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가 뭔가에 몰두했다는 신호였다. 
  " 그러니까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투시력의 유전자와 식물 뇌파의 유전자를 파괴시킨 ‘어떤 이유’가 아닐까 해서요.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유전자를 파괴하고, 아테니움은 그  유전자를 되살리는거죠. "
  장정은 볼펜을 손에 들고 종이에 간단한 그림을 몇개 그렸다. 유전자 계통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는 혜진이지만  장정이 종이에 쓴 기호는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기호였다. 
  "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군요. 제가 조사해 볼께요.  스핑크스를 사용하면 30초정도면 될거여요. "
  " 안돼요, 스핑크스를 사용하면! "
  혜진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정은 눈이 휘둥그래져 그녀를 돌아보았다. 
  "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스핑크스를 사용할 수 없어요. 자세한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방안에 있는 다른 컴퓨터를 사용해 주세요. "
  장정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 그러죠, 지금이 오전 12시니까 내일 새벽 1시나  되어야 끝나겠는데요? "
  " 좋아요, 장정씨, 아테니움이 되살린 유전자와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꼭 알아봐주세요. "
  장정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지만 혜진에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가 유전자를 파괴하고, 아테니움이 그 유전자를 원래대로 회복시킨다면  스핑크스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은 파괴된 유전자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왜 스핑크스라는 컴퓨터는 파괴된 유전자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비록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컴퓨터이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고,  인간을 더욱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많은 명령을 차질없이  수행하고 있는데……

  혜진이 자유의 여신상 지하의 비밀 연구실에서 생각에  골몰하다 의자에 기댄 채 선잠이 들 무렵 실험실 30미터  위에 설치되어 있는 변압실에는 적외선 차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조그만 휴대용 컴퓨터와 소형 레이저 절단기를 가지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중 키가 큰 사람의 어깨에는 큼직한  군용 가방이 얹혀 있었다. 
  작은 쪽의 사람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키 큰남자의 가방에서 파이프와 코일이 얼기설기 얽힌 장치를 꺼내어, 15400볼트의 고압이  걸려있는  변압기의 제어 장치에 끼워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쪽의 사람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는 것을 군용  가방의 남자가 나꾸어챘다. 
  " 우리가 이곳의 경비장치에 걸리지 않고 있는 것은  적외선 차폐복 때문이라고. 24시간 적외선 감지장치가  감시하고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는 격이지. "
  " 자네 특수 부대에 있었다더니 그런 쪽으로는  도사구만. 어쨌던 1단계는 성공했어. 이제 2단계로 ‘불개미’들을  풀어놓아야지. "
  " 불개미? "
  적외선 차폐복은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침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무선으로  교환한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찍찍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차폐복 안의 헬멧에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 응, 어제 내가 만든 작은 프로그램인데, 개미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서 자체 방어장치를 무력화 시키지. 일종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도 볼 수 있어. "
  작은 쪽의 사내는 말을 마치고는 휴대용  컴퓨터를  켰다. 화면을 보며 몇 자 두드리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압실에서 내부로 통하는 5중 티탄 합금의 육중한 철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 안쪽은 미로로 되어있군. 조심해. 길을  잃으면  끝장이야. "
  두 사람은 티탄 합금으로 된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소리가 나지 않는 특수 신발창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체 방어장치가 ‘불개미’ 바이러스로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복도를 지나갈 수 있었다.  키  큰 쪽의 사람이 부시럭거리며 군용 가방에서 조그마한 총을  꺼냈다. 희미한 복도의 조명을 받아 싸늘하게  빛나는  권총은 은성-52였다. 보통 권총으로는 엄청나게 큰 52구경이지만 특수부대용으로 설계된 총이라 명중률도 좋고, 크기도 별로 크지 않았다. 특히 구경이 커서 파괴력은 으뜸이었다. 
  " 빌어먹을, 제대 후에 다시는 이 총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작은 쪽의 사내는 손목에 찬 컴퓨터 화면을  보며  복잡한 미로를 천천히 헤쳐나가고 있었다. 복도 양  끝에는  강력한 레이저 장치와 어떠한 화재도 진압할 수 있는 액체 헬륨 소화장치가 달려있었지만, 달갑지 않은 두 명의 침입자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 과연 스핑크스군. 내가 집어넣은  ‘불개미’  바이러스를 발견했어. "
  키 작은 남자가 손목의 휴대용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복도의 무시무시한 레이저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걸렸나? "
  " ‘불개미’ 바이러스의 특징은 엄청난 번식력이야. 한 시간이면 300만개 정도는 복사되어 컴퓨터 기억장치  여기저기를 뛰어다녀. 거기다가 중간에 돌연변이를 해서 아무리 스핑크스라 해도 ‘불개미’바이러스를 없애고 방어장치를 다시 가동시키는데는 시간이 꽤 걸리지. 우린 아직까지 안전해.  그건 그렇고 이 스핑크스의 방어 시설은 대단해. 웬만한  사람은 도저히 접근 할 수 없어. "
  " 그런데 아까 변압실에 설치한 기계는 뭔가? "
  " 스핑크스는 자체 방어장치를 너무나 완벽하게  해놓아서 물리적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었어. 침입하려면 먼저 컴퓨터 기억장치에 ‘불개미’바이러스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외부의 통신 시설로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 뚫고 들어갈 수 없더라고. 그래서 생각해 낸게 전력 공급장치야. "
  두 사람은 복도의 갈림길에 와 있었다. 손목에 찬  컴퓨터 화면에 표시된 스핑크스 내의 지도를 보면 두  사람은  지금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 있는 방에서 30미터 이내에 와 있었다. 
  " 아무리 강력한 컴퓨터도 약점은 있어. 어차피 기계란 전기로 움직이는 것 아니야. 난 스핑크스로 들어가는 전력선에 코일을 감아, 자기장을 걸어서 스핑크스 내로  신호를  보냈지. 다른 것은 철저하게 감시하는 스핑크스지만  전력선으로 들어오는 전기 신호는 검사를 하지 않더군. 그 방법으로  스핑크스의 기억장치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어. "

  두 사람이 들어가고 난 변압실로 짧은 머리의 여자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숨어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적외선 차폐복을 입고 있었지만 헬멧은 쓰지 않은 채였다. 살금살금 열린 문으로 들어가던 그녀의 발꿈치에무엇인가가  걸렸다. 약간의 전기 스파크가 튀었지만 경비 사이렌도,  써치라이트도 비쳐지지 않았다. 여자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 구석 구석에는 육중한 철문이 몇 개씩 달려 있고, 숫자와 이상한 암호로 되어있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혜진의  비밀  연구실이었지만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갑자기 손목의  컴퓨터가  삐익삐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화면을 쳐다보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자네 혹시 미행당했나? "
  " 미행? 무슨 미행? "
  " 제길, 우리 뒤로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다가 우리가 변압실에 설치한 기계들을 망가뜨렸어. 그 바람에 강력한 전력이 스핑크스 내로 흘러들어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를 일부 지워버렸어. "
  " 그건 별 상관이 없잖아. "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적외선 차폐복의  헬멧속으로도 사내가 겁에 질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그 전력이 우리 ‘불개미’바이러스까지 같이 지워버렸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자체 방어장치가 작동할거야. "
  화면에는 계속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키  작은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이거 골때리는군. 몇 개 남지 않은  ‘불개미’바이러스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와 직접 연결이 되었어. 이제  스핑크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바로 이 화면에 표시가 되네. "
  " 그게 무슨 말이야? "
  "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손목에 차고 있는  컴퓨터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가 짬뽕이 된거지. 내 컴퓨터에서  입력되는 모든 정보가 스핑크스에 입력이 되고,  또 스핑크스가 입력하는 모든 정보가 나한테로 오게 되지. "
  " 그거 잘 됐군. 스핑크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 도망가는데는 일단 도움이 되겠지. 어쨌던 숨어야겠어. 자체 방어장치가 가동하면 우린 1분안에 구운 통닭, 아니 구운 통사람이 되어버릴거야. "
  키 작은 쪽의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면을 계속 들여다 보았다.
  " 영훈이, 안 소연이라는 여자 아나? 스핑크스가 침입자의 신원을 파악했는데 안 소연이라는 여자군. 스핑크스가  파악하는 모든 정보는 이 화면으로 바로 들어오거든. 이런,  KBC 방송국의 기자로 되어 있잖아? "
  영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군용  가방을 떨어뜨릴 뻔 했다. 
  " 뭐야? 안 소연? 제길…… 어떻게 된  거야?  여기까지 날 쫓아오다니. 아까 자네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날  쫓아왔던 바로 그 여자야. 이 말썽 꾸러기. "
  영훈은 허겁지겁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서 뒤었다.  영문도 모르는 영상이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 뭐하는거야? 우리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자네  잘못하면 취재는 커녕 살아서 나가지도 못하게 돼. "
  " 그렇다고 소연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

  소연은 복도를 들어섰지만 거듭되는 미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컴퓨터로 스핑크스 내의 지도를 파악했던 영훈들과는 달라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 뭐 찾아 보면 길이 나오겠지. ‘
  순간 발 밑에서 번쩍하는 빛과 함께 쾅하는  폭음이  터졌고, 그녀의 몸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소연의 실수로  과도한 전력이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 흘러 ‘불개미’ 바이러스가 다 없어지고 방어장치가 가동된 것이지만 소연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천장에 달린 레이저가 그녀를  향해 발사되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위험이 닥친긋을 깨달은  그녀는 지그자그 형태로 뛰며 복도를 달아났다. 중학교때까지 체조선수를 해서 뛰고 구르는데는 이골이  나있는  소연이지만 지금처럼 결사적인 때는 없었다. 적어도  ‘열심히  연습할께요’ 란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 소연씨, 이리로! "
  영훈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나와 고함을 질렀다. 소연은 무작정 그리로 내닫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서 한숨을 돌리고서야 그녀는 영훈이 분노로 불그락푸르락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 일단은 나가서 이야기 해요, 말썽꾸러기 아가씨. "
  영훈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끌듯이 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핑크스의 방어장치도 아직은 완벽히 가동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훈과 영상, 소연은 뒹굴고 뛰면서 간신히  레이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 이봐, 영훈. 이놈의 스핑크스가 약간은 미친  것  같애. 지금 나오고 있는 데이터를 한번 보게나. "
  " ‘역자장 포’?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영훈은 화면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 ‘인류 말살 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런 단어들이 스핑크스의 기억장치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 "
  확실히 미치기는 미쳐버린 모양이었다. 꼭 닫혀  있던  각 방문도, 스핑크스의 제어가 풀리자 전부 열려버렸다.
" 제길, 완전히 스핑크스가 미쳐 버렸군. 이봐,  스핑크스의 방어장치에 걸린 사람이 우리 말고 하나가 더 있는데? 우리와 같이 적외선 차폐복을 입고 변압실로 들어왔어. 이  침입자는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앙이야. 미로  안에서도 헤메지 않고 잘 찾고 있거든. "
  " 우리말고 스핑크스에 쫓기는 사람이 더 있다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자네는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  빨리  뛰지 않고 뭐해? "
  영훈이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영상에게  소리쳤다.  세 사람은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아니…… "
  세 사람의 눈앞에는 SF 소설에서나 봄직한 이상한 각종 무기들이 벽장 가득 쌓여 있었다. 대체적인 모양은 총  같았지만, 흔히 쓰는 군용 총이 아닌, 마치 SF 영화를  찍기  위한 소품인 광선총 같이 생겼다. 
  " 뭐하고 있어? 이대로 죽을거야?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총으로는 레이저를 부술 수 없으니까 이걸 한번  써보자고. 어떻게 쏘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거나 눌러봐. "
  영훈은 손에 든 은성-52를 들어 벽장의 유리를 깨고는  손에 집히는 광선총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빛의 섬광이 총구에서 뻗어나가 5중으로 된 티탄 합금에 구멍을 뚫었다. 
  " 바로 이거야! "
  세 사람은 총 한 자루씩을 꺼내, 복도의 레이저 장치를 겨누었다. 정상적으로 방어장치가 작동되고  있다면  영훈쯤을 해치우는 데 10초도 안걸리겠지만 스핑크스가 조금 이상하게 동작하고 있기 때문에 영훈들이 쏘아대는 광선총에 파괴되고 있었다. 영훈은 혹시 예비로 쓰일 지 몰라서 두세 자루의 총을 군용 가방에 쑤셔넣었다. 
  " 일단 나가는 출입구를 찾아봅시다. 이거 스핑크스가  조금 맛이 가는 바람에 미로의 지도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잖아. 저 문인거 같기는 한데…… "
  영상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소연과 영상이  먼저 복두 끝까지 뛰어가고 영훈이 뒤에서 엄호사격을  하기로 했다. 특수 부대에서도 명사수로 꼽혔던 영훈의 사격에 레이저 방어장치는 맥없이 부서지고, 세 사람은 복도 끝의  문을 들어설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소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이럴수가…… "

  세 사람이 스핑크스의 레이저 공격에 쫓기고 있을 때 스핑크스 컴퓨터의 8미터 지하에 있는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서는 장정이 두툼한 종이를 끼고 헐떡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 맞아요, 혜진씨, 예측했던 결과대로에요.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는 유전자를 파괴하는 작용을 하고, 아테니움은 스핑크스가 파괴한 유전자를  복구하는 작용을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의 유전자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작용되었었다는 흔적을 발견했어요. "
  " 인간의 유전자에 작용했었다고요? "
  혜진은 놀라서 소리쳤다. 놀람에 가득찬 그녀의  목소리는 복도 밖에 설치된 스핑크스의 고성능  도청기에  감지되기에 충분했다. 장정은 말을 이었다. 
  " 과거 어느 시점엔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했었어요. 인간은 스핑크스 바이러스에 죽어가면서도 면역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대부분의 유전자가 파괴되었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중에서 우리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80%의 부분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한 후유증의 흔적이에요. 이건 제 추측이 아니라 컴퓨터의 분석 결과입니다. "
  혜진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인간이 스핑크스 바이러스에 대해 면역을 가지게 되었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왜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
  " 아, 그건…… "
  장정도 목이 타는지 꿀꺽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 인간은 계속 진화합니다. 또한 환경에 적응하고요. 바이러스가 없어져서 병이 생길 기회가 없어지니까 원래  있었던 면역 기능이 퇴화한거죠. "
  " …… "
  " 더욱 놀라운 것은 파괴되기 전의 인간의  유전자입니다. 파괴되기 전의 유전자를 컴퓨터가 역으로 추적해 냈어요. 이걸 좀 보세요. "
  장정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먼젓번에 장정이 그려보였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 씌어 있었다. 
  " 장정씨, 이게 뭐죠? 전 이런 기호를 읽을  줄  모르잖아요. "
  " 아 참 그렇군요. 제가 설명해드릴께요. 이건…… "
  탕! 소리와 함께 장정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았다.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장정의 몸뚱아리 너머로 권총을 든  영카우의 모습이 보였다. 
  " 아무래도 당신은 죽어주어야 겠군요. 스핑크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요. "
  " 당신은…… 누구죠? "
  " 극비 기술과의 과장 영카우입니다. 한국의 유전공학  연구소에서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죠. "
  " 당신이 진현을 죽이고 나를 여기까지…… "
  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영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진에게 계속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원래 우리 CIA에서는 식물 뇌파의 연구를 책임져야 했지만 당신은 너무 엉뚱한 것을 알아버렸어요.  이봐,  아가씨. 때로는 너무 많이 아는 것이 건강에 해롭단 말이야.  마지막 기도나 올리…… "
  영카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가 둔탁한 물체로 뒤통수를 갈겼기 때문이었다. 영카우가 쓰러진 뒤로 검은 적외선 차폐복을 입은 사람이 혜진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검은 옷의 침입자가 헬멧을 벗는 것을 보고  공포는 놀람으로 바뀌었다. 
  " 아니, 당신은…… 어떻게 된 거죠? "
  "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일단은 빨리 달아나야 해요. 이 사람은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얼마후면 깨어날거여요. "
  침입자는 쓰러진 영카우를 내려다 보다가  혜진의  손목을 잡아끌고 복도로 나갔다. 순간 징-하는 소리가 복도 양 끝에서 들려왔다. 5중 티탄 합금으로 만든 문이 복도 양쪽을  차단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탈출구가 막히고 만 것이다.

  맨 처음 문을 들어선 소연은 까무라칠듯 펄쩍 뛰었다가 곧 문 뒷쪽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 들어온 영상과 영훈이  웬일인가 보다가 눈앞 벌어진 너무 어마어마한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안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발견된 유리관이 놓여 있었다. 몇 개는 비어 있고, 몇  개에는 미이라가 들어 있는 채로 갖가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방안에 설치된 여러가지 기계를 다루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미이라! 피라밋에서 발견된 미이라가 파란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걸어다니고, 기계를 사용해서 유리관  속에서 동료 미이라를 깨우고 있지 않은가.  
  영훈들이 문 뒷쪽에서 숨어서 엿보는 동안 미이라는  벽의 레버를 당겼다. 분홍색 빛이 유리관 안에 가득차고, 빛이 사라진 후에 천천히 유리관이 열리면서 새로운 미이라가  제발로 걸어나와 먼저의 미이라의 손을 잡았다.  소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영훈은 이 와중에도 군용 가방에서 작은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미이라를 찍기 시작했다. 
  방안에도 삐익-하는 소리가 났다. 미이라들은 벽의 스크린을 쳐다보더니 벽장에 설치된 레이저 광선총을  꺼내들었다. 스크린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영훈은 그 문자가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한 수수께끼의  알루미늄판에 씌여 있었던 글자와 같은 종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이라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음의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들아다 보더니 문가로 걸어나왔다. 세  사람은 황급히 복도로 도망나와 다시 뛰기 시작했다. 
  " 제길, 막다른 골목이잖아! " 
  영상은 신음소리를 냈지만 영훈은 세 사람의 광선총을  모아 쥐고 벽을 겨누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벽은 녹아흘러 구멍이 뚫리고 세 사람은 그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 제길, 나가는 복도가 막혔어요. 내  권총으로는  어림도 없어! "
  검은 적외선 차폐복의 침입자는 쾅하고 닫히는  5중  티탄합금의 문을 쳐다보다가 다시 실험실로 들어와 들고 있던 권총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두 사람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바깥에서 비상 사이렌 소리와 쿵하는 크고  작은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 스핑크스 내에 무슨 문제가 있나봐요. 이 사이렌 소리와 폭발음은…… "
  감자기 두 사람이 앉아 있던 맞은 편 벅이 펑- 소리와  함께 흔들리더니 크게 구멍이 뚫렸다. 두꺼운 벽이 뚫린  자리에서는 연기와 함께 아직도 녹은 쇳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 구멍 사이로 세 사람이 뛰어들었다. 혜진은 재빨리  아까 팽개쳐진 총을 주워 겨누었지만 영훈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그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아까 혜진의 방에서 영카우를 해치웠던 사람이 싸울 태세를 갖추었지만 영훈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 당신은 KBC 방송국의 이 영훈 기자! 도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거야? "
  " 나를 아는 당신이야 말로 누구요? "
  " 당신을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죠. 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 
  영훈은 광선 총구를 늦추지 않았지만, 적어도 푸른 머리카락의 미이라보다는 안전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 당신들은 스핑크스 편이요, 아니면 그 반대요? 우린  지금 스핑크스에게 쫓기고 있어요. "
  " 우리도 스핑크스에게 쫓기고 있어요. "
  " 그렇다면 이걸 받아요. 우린 저들과 싸울 무기는 있지만 이 미로에서 나가는 길 몰라요. "
  영훈은 군용 가방 안에서 여분으로 준비한 광선총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던졌다. 
  " 우린 이 안의 길은 알지만 이미 늦었어요. 복도는  티탄 합금의 셔터로 차단되었는걸요? "
  " 우리가 벽을 뚫고 들어온걸 못봤어요? 당신들이 들고 있는 총은 위력이 어마어마한거요. 제길,  저놈의  스핑크스만 없으면 멋진 SF 영화를 찍을 수 있는건데…… "
  영훈과 영상, 소연은 복도를 가로 막고 있는 셔터에  대고 광선총을 쏘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셔터는 꿈쩍도 않았다. 영훈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돌았다. 
  " 저 셔터는 5중 티탄합금에다 텅스텐,  특수  세라믹까지 섞인 거여요. 당신들이 뚫고 들어온  벽과는  달라요.  섭씨 4000도의 고열에도 꿈쩍하지 않아요. "
  " 빌어먹을…… 미이라 놈들이 쫓아와요! "
  소연이 세 사람이 들어온 벽의 구멍을 가리켰다. 영훈들이 들고 있는 광선총과 똑같은 모양의 총을 들고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 셋이 이쪽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 미안해요, 영훈씨. 내가 철없이 영훈씨를  쫓아  오지만 않았어도…… "
  소연이 영훈을 쳐다 보며 울상을 지었지만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제길, 저 여자가 장치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텐데. 그 장치는 꽤 잘 만든 거였거든. 맞아! ‘
  순간 영상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손목의 단추를 누르고 소리쳤다. 
  " 모두들 엎드려요. 이제 곧 큰 폭발이 있을테니까. "
  다들 영문을 모른 채 엎드리자 마자 큰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쫓아오던 미이라들도 잠시 주춤킹홱. 갑자기 건물 전체의 조명이 꺼지면서 복도를 가로막았던  거대한  셔터가 스르르 열렸다. 
  " 마술 같군. 어떻게 한거지? "
  복도를 내닫으며 영훈이 영상에게 물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영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영훈이, 자넨 원래부터 말썽꾸러기였잖아. 자네가  스핑크스의 내부를 쳐들어 가자고 하기에 혹시 몰라서 아까 변압실에 설치했던 장치 속에다 작은 폭탄을 달았다네.  MIT에서는 작은 폭발물도 연구하거든. 변압기가 폭발하면  곧  예비 전원으로 바뀌겠지만, 바뀌는 동안만은 전력 공급이 없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셔터가 열리는거지. 봐.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서 셔터가 도로 내려오고 있잖아. "
  영상의 말대로 나갔던 조명이 다시 들어오면서 셔터가  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 저기 출구가 보인다! "
  혜진의 안내로 간신히 미로를 빠져나온 영훈들의 앞에  밖으로 난 작은 유리창이 보였다. 혜진이  광선총을  유리창에 겨누고 쏘았다. 팡-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튀고 다섯 명은 깨어진 창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뒤쫓아온 미이라들의 광선총 사격을 간신히 피하며 다섯 명은  캄캄한 뉴욕의 밤거리로 사라졌다.

Part V 돌아온 아틀란티스 인

  2000년 5월 27일. 비가 막 개어 파릇파릇한 하늘을 쳐다보며 로스알라모스 국립 원자력 연구소의  연구원인  제다이는 연구소로 향하는 돌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젖은 땅의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파다닥 뛰어나와 제다이의 앞을 가로질렀다. 
  제임스 타일이라는 이㎱ 연구소 사람들이 제다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오랜만에 생각해내고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항상 고독한 표정에 얼굴에 큰 흉터까지 있어서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 고독한 기사 제다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제다이가 정말로 쓰라린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연구소 내에 아무도 없었다.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1996년의 비극을……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갠 날이었다. 국립 원자력 통제  쎈터의 통제실에 근무하던 제다이는 1000 킬로미터 떨어진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를 조정하여 제어봉 을  원자로에 투입했다. 보통 제어봉의 조정은 각 원자력 발전소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지만, 원자로가 불안정할 때는 안정될  때까지 국립 원자력 통제 쎈터에서 통제하곤  했다.  제다이는 통제 쎈터 내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원자로 안정  전문가였고 그해따라 불안정한 원자로가 많아서 제다이는 거의  여섯달 째 매일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야만 했다.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는 제다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년沮 통제 쎈터에서 근무하던 씬디가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씬디와 그는 일주일 후면 결혼할 계획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제어봉을 집어넣은 그는 잠깐  바깥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비 갠 뒤의  가을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지난 6개월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그는 벤치에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5분 후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는 제어봉의 고장으로 인한 과열로 폭발을 일으켰다. 사고로  128명이 죽고 주민 6만5천명이 대피했다. 물론  사망자  명단에는 씬디 월터슨의 이름도 있었다. 
  사고 후 열린 청문회에서는 제다이의 과실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어봉의 고장은 통제 쎈터에서의  조작  미숙이 아니라 제어봉을 움직이는 유압 장치의 고장이었고,  제다이의 유일한 실수는 자리를 비우고 잠이 드는  바람에  고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었지만, 그것도 6개월 동안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일어난 현상이므로  제다이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통제 쎈터에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얼마 후에 통제 쎈터 소장을  맡겼지만  제다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수는 아니라 해도, 그날 벤치에서 깜빡 졸지만 않았어도 씬디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강박 관념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통제 쎈터 소장직을 물러나고 잠적해버렸다. 
  이름도 바꾸고 수염까지 기른 제다이는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로 옮겨왔다. 다시는 원자력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가 통제 쎈터 소장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평연구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씬디 때문이었다.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없어야 겠다는 생각에 폭발의 위험이  전혀  없는 핵융합을 연구하러 로스알라모스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씬디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연구에 전념했던 그는 평연구원임에도 핵융합의 기초 실험에 성공했고, 1년 이내에 실제로 핵융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되어 있었다. 
  연구소로 올라가는 길은 아직도 한참이 남아  있었다.  옛 생각에 발길이 무거워진 그의 눈에 산아랫쪽의 액체 질소 저장탱크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들어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액체 질소가 사방으로 튀고 근처 건물의 유리창은 충격파에 산산조각 깨져나갔다. 부서진 저장탱크의 조각은 3층  건물 높이로 튀어 제다이의 발밑에 툭 떨어졌다. 제다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엎드렸다. 
  비상 사이렌이 전 연구소 내에 울리고, 항시 대기하고  있던 미 육군 특수 부대가 M-75 신경가스총과 M-81 우라늄  기관포를 들고 연구소 내의 수색을 개시했다. 1998년에 개발된 M-81은 A-10 공격기의 우라늄기관포를 소형으로 만들어 우라늄으로 겉을 싼 철갑탄을 발사, 웬만한 탱크의 철판도  손쉽게 뚫어버리는 막강한 위력을 지닌 무기로, 1997년에 만들어진 M-75 신경가스총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도 몇군데의  특수부대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요란하던 사이렌 소리가 순간 뚝 그쳤다. 아직까지도 엎드려 있는 제다이는 비상사태가 해제된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즉각 비상용 전원이 공급되었지만, 이 또한 어찌된 일인지 금방 중단되어버리고 말았다. 연구소 전체에 동력이 끊긴 상황에서도 배치된 특수부대는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펑크 스타일로 다듬은 머리를 흩만지며 특수부대장 FLYFOX는 연구소의 컴퓨터 쎈터 아래층에 지휘본부를 마련하고  대원들을 지휘했다. 상황은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연구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런 비상 상황인데도 그는  우왕좌왕 지나가는 여자들의 다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워낙 여자를 좋아해서 1991년의 쿠웨이트 침공때도 특수부대에서 쫓겨날 뻔한 FLYFOX이지만, 유격전에서의 빈틈없는  전쟁 수행 능력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서 이곳  로스알라모스 경비 특수부대의 부대장을 맡게 된 것이었다. 
  요란한 총성소리와 함께 수소 저장  탱크쪽에서  대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FLYFOX는 연구소 내의 경비상황을  알려주는 컴퓨터 스크린을 켰지만, 스크린은 고장인지  작동하지 않았다. 
  " 제길, 망할 놈의 컴퓨터 같으니라고! "
  그는 욕설과 함께 뵀㈇걋 걷어차고 구식 무전기를 켰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부하 대원의 목소리는 차라리 신음소리에 가까왔다. 
  " 뭐?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 광선총을 쓰고  있다고?  이봐, 스타워즈를 연구하는 여기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도  광선총은 없어! 지금 장난하는 줄 아나? "
  FLYFOX의 호통은 곧 그쳤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무전 보고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부하 대원들과 적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번쩍하는 섬광 속에 비친 적의 머리카락은 놀랍게도 파란 색이었다. 
  엎드린 제다이의 머리 위로 파란 섬광이 교차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은빛 광선총을 든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들은 저항하는 특수부대원들을 물리치면서 점차 연구소의  심장부로 다가갔다. 제다이는 엉금엉금 기어서 연구소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FLYFOX는 권총을 빼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특수부대원들은 M-81 우라늄 기관포로 맞섰지만, 침입자들이 입고 있는 얇은 은회색의 복장은 기관포탄에 맞아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 저런 개새끼. 도대체 저건 괴물이야, 뭐야? "
  FLYFOX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미국 최강의  특수부대원들조차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부하들은 차례로 쓰러져 갔고, 이제 FLYFOX의 곁에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이었다. 
  살아남은 다섯 명의 대원과 FLYFOX는 연구소의 컴퓨터  쎈터로 피신했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대부분 피신했는지  보이지 않고 빨강 머리의 컴퓨터 오퍼레이터 한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리 와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자고. 저 놈들은 도대 어떻게 된 놈들이기에 우라늄 기관포를 맞고도 까딱도  않는거야? "
  FLYFOX와 다섯 명의 대원들은 컴퓨터 쎈터의 문 앞에다 책상이며 의자를 쌓아 올려 바리케이트를  만들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성능 폭약을 바리케이트에 설치했다. 
  " 이봐, 당신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거야? 저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우린 다  죽을거야.  빨리 와서 바리케이트를 만드는 걸 도우라고. "
  FLYFOX는 특수부대원들을 바라보고 있던 컴퓨터  오퍼레이터에게 소리팁嗤 이 빨강 머리의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웃기만 할 뿐이었다. 
  " 야,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 빨리 와서 이걸  들란 말이야! "
  소리를 버럭 지르던 FLYFOX는 순간 자리에 얼어붙는  듯했다. 빨강머리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다름아닌 은빛  광선총이기 때문이었다. 
  " 다들 머리에 손을 올려! "
  FLYFOX와 다섯 명의 대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올렸다. 곧이어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들이 바리케이트를  치우고는 컴퓨터 쎈터에 들어왔다. 괴인간들은 바리케이트를  만들려고 쌓아놓았던 책상과 걸상을 발로 걷어찼다.  괴인간들의 발에 채인 걸상 하나가 손들고 서있던 FLYFOX의 정강이에 맞았다. 욱신거리는 아픔에 FLYFOX는 잠시 휘청거렸고  괴인간들은 그의 움직임에 놀란듯 광선총을 들이댔다. 코앞에 겨눠진 광선총 앞에 FLYFOX는 정강이의 아픔을 억지로  참아가며 다시 손들고 항복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 상황은 끝났습니다. 로스알라모스의 핵무기와  플라즈마포, 레이저 발생기는 안전 장치를 풀고 곧 동작시킬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모든 컴퓨터는 보안장치를  풀고  스핑크스가 제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
  빨강 머리의 컴퓨터 오퍼레이터는 주머니에서 작은 스프레이를 꺼내어 얼굴에 뿌리고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아나갔다. 변장을 하느라 살짝 덮어씌워졌던 껍질을  벗겨내자  분홍빛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이 드러났고 빨강머리 가발을  벗어버리자 파란 머리카락이 출렁댔다. 
  변장을 다 지운 컴퓨터 오퍼레이터는 들어온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에게 보고를 했다. 괴인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화면에 막 몸을 기울이는 순간 FLYFOX는 발 앞에 놓였던 걸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괴인간 하나와 빨강 머리가  걸상에 다리를 맞아 고꾸라졌다. 특수부대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진 광선총을  집어들어  괴인간들에게 겨누어 쏘아댔다. 잘못 쏜 한 발이 컴퓨터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크린이 폭발했다. 파지직하는 전기  스파크와 함께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괴인간 하나가 몸을 돌이키며 이상한 접시 같은 것을 들이대며 단추를 누르자 순간 마지막 FLYFOX들의  눈앞에  팍하는 불꽃이 튀며 돌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온몸에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왔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괴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로 합성된 음인듯 괴인간들이 내는 이상한 억양의 말은 놀랍게도 영어였다. 
  " 더 이상의 희생을 원치 않아 단지 시각을 멈추고 온몸을 마비시켰을 뿐이다. 너희 지구인의  과학력으로  우리들에게 대적한다는 것이 우스울 뿐이다. 테리는 빨리  태평양  상의 미 공군 1호기와 교신을 하도록. "
  테리라 불린 컴퓨터 오퍼레이터, 아니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변장했던 괴인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지지 않은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테리가 메인 스위치를 돌려 모든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순간 출입구 맞은 편의 침입자 감시장치가 찢어질듯한 싸이렌 소리를 내며 동작했다. 화면에는 컴퓨터 기억장치에서 자료를 빼내 달아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 누군가가 이 연구소에서 자료를 빼내  달아나고  있습니다. 제거할까요, 싸이버? "
  두목으로 보이는 싸이버라는 괴인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놔 둬,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 세계가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될텐데… 그보다 빨리 스핑크스를 통해 상황 점검을  해봐. "
  싸이버와 다른 괴인간들이 스핑크스를 통한  상황  점검에 열중한 동안 핵융합에 대한 자료를 모두 복사한 제다이는 경비 장치가 모두 파괴된 연구소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17시 32분 콜로라도 스프링스. 
  바위산을 뚫고 깊은 지하에 건설된 북미 대륙 방공 사령부(NORAD) 의 종합 상황실에서 자그마한 키의 마이클 오즈본은 약간 벗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핑키]의 대형 스크린  앞에 앉았다. NORAD는 모두 14대의 호돌-720 슈퍼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데 각각마다 [큐티], [세레자], [핑키]같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마이클이 담당하고 있던 [핑키]는 그중 첫번째 컴퓨터로 스핑크스 컴퓨터의 직접 통제를 받아 미국의  모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발사를 지휘한다. 
  살벌한 전쟁을 지휘하는 컴퓨터일수록 이름이  여성다워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NORAD의 컴퓨터에 [큐티], [세레자], [핑키]와 같이 여성적인 이름을  붙인 것도 마이클의 발상이었다. NORAD내의 모든 컴퓨터를  지휘하고 있는 마이클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테크)의  교수직을 떠나 NORAD에 온 것은 1995년 봄으로, 사랑하던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마이클은  자신이 담당하게 된 컴퓨터에 아내의 애칭인 [핑키]라는 이름을  붙이고 죽은 아내를 대하듯이 아꼈다. 눈을 감고도  NORAD내의 모든 컴퓨터의 회로도를 줄줄 외우는  마이클을  주위사람은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지만 그가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열을 컴퓨터에 쏟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
  두번째 컴퓨터인 [큐티]를 담당하는 로즈 무어가 작은  쟁반에 찻잔 두개를 담아 마이클의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로즈는  마이클이 오기전에 NORAD의 컴퓨터를 책임지던 사람이었다. 로즈의 일을 빼앗아 자신이 넘겨받게된 마이클은 로즈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이클이 부임한 첫날부터  그에게 더없이 친절히 대해주었다. 
  " 바닥에 깔린 전기줄 조심해요.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즈는 케이블에 걸려 휘청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귀퉁이에 삐딱하게 놓여 있던 커피잔이 쏟아지며 모니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 미안해요. 컴퓨터에 커피가 쏟아져  경고음이  울리는군요. "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컴퓨터의 스위치를 끄려던 로즈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버렸다.  [핑키]의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Secret-Code A. 핵 안전장치 전면 개방. 파에톤 작전 수행 시작. countdown – 200초 ]
  마이클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파에톤 작전]은 유사시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계획  시나리오였다.

  17시 33분 대서양 상공 12000미터. 
  영국 방문차 대서양 상공을 날으는 미 공군 1호기의  중간 부분에 자리잡은 대통령 집무실의 푹신한 안락 의자에  몸을 파묻고 졸고 있었던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는 비서관이 황급히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는 어빈 스타일 국무장관과 포인트 합참의장등 기내의 수행  인원은 거의 모여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모여 있고. "
  " 그게… 스크린을 좀 봐주십시오. "
  칠리는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들은 분홍빛 피부에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투는  전자오락기에서 흘러나오는 합성음같은 이상한 억양이었다. 
  " 지구인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이 땅에 살기 3만년 전에 지구를 지배하고 있던 아틀란티스의 유민입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쓰고 있던 스핑크스 컴퓨터도 실은  우리가  쓰고 있던 컴퓨터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아틀란티스 인은 핵전쟁이 시작되어 멸망의 위기를 맞자 소수의 인원을 미이라 상태로 만들어 동면시키고 그 관리를 컴퓨터에 맡겼습니다. 컴퓨터 자신은 핵 전쟁때 파괴되었지만 그 설계도는  스핑크스 바이러스 안에 보관되어 있다가 지구인이 다시 만들었고, 가동된 스핑크스는 곧 우리들을 동면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
  으음, 하고 칠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빈 스타일 국무 장관이 대통령 칠리에게 설명했다. 
  " 지금 아틀란티스인들의 방송은 전 세계 언어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미 스핑크스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통신망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
  " 이제 우리들이 동면에서 깨어났으므로 이 시간 이후  세계는 우리 아틀란티스 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만약 우리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책임지지 못함을 미리 경고합니다. "
  저 개새끼들… 하고 사람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대통령 칠리는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 처음에 MEDUSA에서 스핑크스 컴퓨터의 설계도를  가져왔을 때 조심했어야 하는건데… ‘
  " 대통령 각하,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의 긴급 연락입니다. "
  어빈 국무장관이 청색 전화기를 내밀었다. 핫-라인을 통해 흘러나오는 키리로프의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미국 대통령 각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칠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아틀란티스 인의  다음 말이 칠리의 귓전을 때렸다. 
  " 지구인 여러분, 현재 지구상에서 우리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소련 세나라뿐입니다.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이제부터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포인트 합참의장은 백색 전화를 들고 콜로라도의  NORAD를 호출했지만 전화에서는 지지직-하는 잡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핵공격시에도 끊어지지 않는 비상 통신망이 일시에 중단이 된 것이다. 공군 1호기 안의 기술자들은 통신을 재개시키려 애썼지만 아틀란티스 인으로부터 들어오는  전파  이외의 어떤 통신도 끊어져버렸다. 
  화면에 미국의 미사일 기지가 비춰지자 칠리는 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틀란티스 인들이 하고자 하는 짓이  너무도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 인들은 본보기로  소련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었다.

  17시 35분 북미 방공 사령부 (NORAD).
  [ 파에톤 작전 1단계. 포세이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 35기 발사 준비. 
공격 목표 : 모스크바       (좌표 10204217-97126335)
                레닌그라드     (좌표 87293827-37264818)
                타시켄트       (좌표 38273482-33712561)
                노보쿠츠네스크 (좌표 38278199-38272379)
                키에프         (좌표 71527291-10364381)    countdown – 60초]
  " 이건 말도 안돼요. 컴퓨터의 고장이 틀림 없어요. "
  로즈는 후다닥 뛰어[큐티] 앞에 앉았지만 [큐티]의  모니터도 마찬가지였다. [세레자]도,[샤뜨]도, NORAD의 모든  컴퓨터가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명령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핑키]의 윗쪽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램프들을  쳐다보았다. 대통령으로부터의 핵공격 명령을 나타내는 빨간  램프는 켜져 있지 않았다. 마이클은 가만히 서서 컴퓨터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쉴새없이 여러가지  생각이  회전했다. 
  ‘ 대통령으로부터의 핵공격 명령이 없이 파에톤 작전이 수행되고 있다는 말은NORAD의 모든 컴퓨터가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이들을 제어하고 있는 스핑크스가 고장이 났던가  둘중의 하나야. ‘
  그는 머릿속에서 NORAD의 모든 컴퓨터가 일시에 고장날 확률을 계산했다. 약 12억분의 1.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고장이 틀림없어. 
  마이클은 스핑크스에서 NORAD로 들어오는 통신 회선을  차단하려 스위치를 눌렀지만, 화면에는 [차단 불가]라는  말이 표시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컴퓨터의 전원 공급을 중단시키려 했지만 이것 역시 [차단 불가]라는 표시가  나올  뿐이었다. 
  " 이놈의 스핑크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
  [ 인공 위성 유도 개시. 좌표 수정 끝. countdown – 35초 ]
  ‘ 그렇지, 외부 컴퓨터와의 통신 회선은 207호실에  있어.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이클은 옆에 있던 경비원의  권총을 빼어들고 복도를 내달았다. 207호의 자동문에 인식카드를 집어넣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NORAD내의  스피이커는 25초전을 알리고 있었다. 
  징-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캐비넷을 닥치는대로  열었다. 컴퓨터끼리 이어주는 노랗고 파란색의 광통신망이 캐비넷 안에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마이클은 손에 들고  있는  총으로 연결 부분을 마구 갈겨댔다. 텅 빈 방안에 울려퍼지는  총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탄창이 비어  더이상 발사되지 않는 권총을 내던지자 207호 여기저기서 전기 불꽃이 튀었다. 
  ‘ 이제 스핑크스와 NORAD 컴퓨터와의 연결은 끊어졌어. ‘
  그는 서둘러 자리에 돌아왔지만 [핑키]의 스크린에는 세줄이 덧붙여져 있을 따름이었다. 
  [ 발사구 개방. countdown – 5초   스핑크스와의 통신을 차단하려 시도하지 말 것. 차단 시도시에는 NORAD를 먼저 폭파시키겠음. ]
  그제서야 마이클은 스핑크스와 NORAD와의 통신 회선이 7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17시 37분 미 공군 1호기. 
  "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 각하, 우리나라에 설치되어  있는 스핑크스 컴퓨터가 아틀란티스 인의 제어를 받아 우리나라의 핵 미사일을 소련에 발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속히 방어행동을 취해주십시오. 아울러 이번 핵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의사와 무관한 행동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
  과연 미국 대통령다운 말이었다. 칠리는 그 와중에서도 미국이 받을 보복 공격을 피하려 ‘미국 의사와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나 핫-라인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련 대통령의 목소리는 냉랭하기만 했다.
  " 미국 대통령 각하, 어떠한 이유에서건 우리 소련이 미국의 핵 미사일 공격을 받았을 경우 우리는 즉각적인 보복  공격에 들어갈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핵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미국을 기록할 것입니다. "
  화면에 커다랗게 [발사]라는 글자와 함께 미사일 격납고에서 핵 미사일이 치솟았다. 발사의 화염과 짙은 연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칠리는 이마를 싸쥐었다. 
  ‘ 오, 신이여… ‘

  17시 38분 키에프의 소련 방공망 사령부. 
  천정에 매달린 700개의 각종 모니터와 램프는 쉴새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련 방공군 사령관 이바노비치 장군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소련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서른 다섯개의 노란색 점이 소련 지도 안에서 반짝였다.  미국 포세이든 미사일의 예상 목표였다. 
  벽면마다 가득 설치된 70여대의 소련 슈퍼컴퓨터 유리 III는 계산 결과를 계속 출력해냈다. 키에프 컴퓨터 센터의  책임자 마르첸코는 미국의 핵미사일을 중간에서 격추시킬 요격 미사일(ABM)의 궤도를 산출해내기 시작했다. 
  [ 케팔로스 작전 시작. 요격 미사일 105기 발사 준비 완료. 목표 고도 7000미터. ]
  그리이스 신화에서 무엇이든지 따라가서 맞춘다는  전설의 창 이름을 딴 케팔로스 작전은 미국의 핵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폭파시키는 작전이다. 핵미사일 하나당 세발씩의  요격 미사일(ABM)을 발사하기 때문에 서른  다섯발의  핵미사일을 전부 요격시킬 가능성은 이론상으로는 100%이지만, 케팔로스 작전이 실전에 응용되기는 처음이기 때문에 마르첸코의 가슴은 불안하기만 했다. 
  이바노비치의 가슴에서 훈장이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시끌한 소리와 섞여 기분나쁘게 들렸다. 그의 손가락은 커다란 붉은 단추에 닿아 있었다. 대통령 키리로프는 미국의 핵미사일이 한 발이라도 소련 영토에 떨어진다면 즉각  반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었다. 이바노비치가 단추를 누르는  순간 300발의 핵미사일이 미리 선정해 놓은 미국의 각  목적지에 발사된다. 미리 선정된 공격목표에는 스핑크스가  위치한 뉴욕도 들어 있었다. 
  [ 적 핵미사일은 포세이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탄두의 위력 20메가톤. 속도 마하 20. 코스모스 9871호, 7282호, 1912호 적 핵미사일 추적  개시.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 발사. ]
  화면에 요격 미사일의 발사 장면이  나타나자  마르첸코는 일부러 마이크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케팔로스 작전은 틀림없어. 명중률은 100%야. "
  그러나 이바노비치도, 마르첸코도 서른 다섯발을 다  요격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시 39분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
  "좌표 10204217-97126335. 입력 완료. " 
  귀에 이어폰을 꽂은 아틀란티스인 테리는 컴퓨터를  조작, 플라즈마 포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플라즈마 포가  가리키는 방향은 소련 상공이었다.

  17시 39분 30초 유타주 육군 무기 실험장.
  기지의 요원들이 퇴근하고 경비임무를 맡은 특수 부대원들은 시원한 한줄기 바람에 피곤을 이기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한 대원의 귀에 낮지만 뚜렷한 윙-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쳐다봤다. 
  뉘엇뉘엇 져가는 햇살을 받으며 사막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쇠로 된 도움이 달린 거대한 구조물이 솟아올라왔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새로운 신무기 시험장치였다. 도움이  갈라지며 파이프가 삐죽삐죽 솟은 거대한 안테나 같은 물건이  튀어나왔다. 그는 영문을 모른채 기지내에 비상을 걸었지만 기지내의 모든 통신망은 끊긴지 오래였다.

  17시 39분 40초 소련 상공 35000킬로미터.
  소련 상공을 감시하고  있던  소련의  군사위성  코스모스 9871호는 키에프 방공망 사령부의 제어에 따라 레이더를  소련 상공으로 날아가는 서른 다섯발의 핵미사일에 맞췄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은 코스모스 9871호의 레이더가 유도하는 대로 미국의 핵 미사일을 요격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만약 9871호가 고장난다 할지라도 7282호와 1912호가 예비로 대기고 있기 때문에 케팔로스의 요격은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순간 35000킬로미터 아랫쪽의 지구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빛났다. 정확하게 0.12초후 소련의 군사위성 코스모스  9871호는 로스알라모스에서 발사된 플라즈마 포에 의해 금속조각으로 변해버렸다. 키에프의 제어장치는  케팔로스  미사일의 제어를 코스모스 7282호로 옮겼지만 코스모스 7282호와 1912호는 유타주의 육군 무기 시험장에서 발사된 역자장포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17시 40분 키에프의 소련방공망 사령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소련 지도에서 서른 다섯개의  노란색 점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슈퍼컴퓨터 유리 III의 모니터에는 느릿느릿 글자가 나타났다.
  [코스모스 9871호와 7282호, 1912호 기능 상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의 제어를 수행할 수 없음. 지상 유도로 바꿈. ]
  마르첸코에 있어서 그 의미는 명확했다. 인공위성의  유도에서 지상 레이더의 유도로 바뀌었다는 말은 요격률이  100%에서 25%로 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2분 이내에  적어도 스물 여섯발의 핵미사일이 소련 곳곳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르첸코는 키보드를 꽝 내리쳤다.

  17시 41분 미 공군 1호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공군 대령이 대통령 칠리에게  보고했다. 
  " 스핑크스는 소련의 요격망을 파괴했습니다. 사용된 무기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던 플라즈마포와 유타주에서 연구하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무기입니다. "
  "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무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모르는 신무기가 있단 말인가? "
  칠리는역정을 냈지만 대령은 조용히 답했다. 
  " 유타주에서 연구하고 있던 신무기는 스핑크스가  설계한 것입니다. 스핑크스가 그 무기를 설치할 때는 인공위성 조종용 레이더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광선무기인 것  같습니다. "
  " 제기랄, 스핑크스에게 완전히 속았군. 어쨌던 소련의 요격망이 파괴되면 결과는 어떻게 되나? "
  대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옆에 있던  공군  대위가 대신 설명했다. 
  " 인공위성을 이용한 요격망이 파괴되었으므로 최소한  스물 여섯발 이상의 핵미사일이 소련에 떨어집니다. 물론 소련의 반격이 예상되고요. "
  " 즉각 미국내에 핵전쟁 경보를 내려. 소련의 반격이 있다면 우리 국민도 대피시켜야 할 것 아닌가. "
  칠리는 소리쳤지만 대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 아까 아틀란티스 인이 우리의 핵미사일을 발사시켰을 때부터 경보를 내리려 했습니다만 스핑크스가 모든 통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경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
  칠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 즉각 소련 대통령을 연결해. "

  17시 42분 레닌그라드.
  " 저것 봐요. 축제도 아닌데 어디서 저렇게 멋있는 불꽃놀이를 한담? "
  오후의 산보를 나갔던 시민들은 머리위에서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이  미국의 포세이든 핵미사일을 격추시키는 장면이었다. 붉은색과 보라색의 섬광이 지평선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두터운 외투깃을 여민 시민들은 때아닌 불꽃놀이를 구경하려 밖으로 나왔다. 불꽃놀이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눈에 띄게 밝은 꼬리를 띠는 별 하나가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수백년의 문화를 자랑하던 레닌그라드는 4초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7시 44분 모스크바.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은 12발의 포세이든 핵미사일을 격추했지만 레닌그라드와 타시켄트, 노보쿠츠네스크는 23발의 핵미사일을 맞고 전멸했다. 모스크바와 키에프는 다행히  무사했다. 크레믈린의 지하 방공호에 대피해 있던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은 칠리 미국 대통령의 연락을 받았다. 
  " 이 엄청난 상황은 모두 스핑크스가 한 짓입니다.그러나 미국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으므로 미국도 책임을 지고 소련의 보복 공격을 감수하겠습니다. 단, 소련의 보복 공격은 뉴욕으로 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
  " 우리는 세개의 대도시를 잃고 고작 뉴욕 한군데만  보복 공격을 하란말입니까? "
  언성을 높였던 키리로프는 칠리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뉴욕은 스핑크스가 있는 곳이다. 미국의 무기  체계는 모두 스핑크스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미국 정부는 소련이  뉴욕을 공격해서라도 스핑크스를 파괴해주기를 바라고 있는것이다. 키리로프는 키에프로 통하는 통신망의 마이크를  붙잡았다.

  17시 46분 키에프 소련 방공망 사령부.
  헤드폰을 쓴 마르첸코는 70여대의 슈퍼 컴퓨터 유리 III를 집중적으로 제어했다. 옆에서는 이바노비치 장군이 근심스런 얼굴로 마르첸코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거대한 미국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 위에 놓인 화살표가 미국의  동해안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 케오스 작전 시작.  대륙간 탄도탄 (ICBM) 250기 발사 준비 완료. 공격목표 : 뉴욕 (좌표 28163818-29173838) ]
  케오스 작전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후의 보복공격  작전이다. 지구가 처음 생길 때의 혼돈을 의미하는 케오스(혼돈)처럼 250발의 핵미사일은 미국을 혼돈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녔다. 화면에는 아직 피해를 입지 않은 소련의  미사일 발사기지가 나타났다. 
  갑자기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왼쪽의 스크린이  켜졌다. 아틀란티스 인의 메시지였다. 
  " 저는 아틀란티스 인의 대표자인 싸이버입니다. 우리  아틀란티스 인과 스핑크스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미리 경고했지만 소련은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스핑크스를 파괴시키려 뉴욕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고를 무시한 댓가로 소련은  멸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저 빌어먹을 미이라 놈들 같으니라고… 이바노비치가  중얼거렸지만 마르첸코는 침착하게 핵미사일의 발사  스위치를 눌렀다. TNT화약 125억톤에 해당하는 250발의 핵미사일이 뉴욕을 향해 날아올랐다.

  17시 47분 유타주 육군 무기 시험장.
  사막의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솟아오른 금속 도움  안에는 거대한 반구형 안테나가 소련 상공을 겨누고 있었다. 안테나 아랫쪽의 레이더 스크린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아틀란티스인 한명이 앉아 열심히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다.  섭씨  30도를 윗도는 더위속에서도 아틀란티스 인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레이더에 미국 상공을 향해 날아오는 핵미사일이 표시되었다. 그는 느릿느릿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  도움에 설치되어 있는 안테나의 끝부분이 보라색 섬광을 발하기  시작했고, 도움 자체도 격렬한 진동으로 흔들렸다. 보라색  섬광은 이미 알라스카 상공을 날고 있는 소련의 핵미사일을 겨냥하고 있었다. 
  미국 전역의 레이더망과 통신망, 그리고 대부분의  전자기기들은 17시 47분부터 3분간 작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유타주의 특수 안테나에서 발사한 강력한  전파 때문이었다.

  17시 48분 키에프 소련 방공망 사령부. 
  스크린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마르첸코는 화면에 나타난 파란 화살표가 일순간에 멈춰진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화면 아랫쪽에 표시된 핵미사일의 방향은 놀랍게도 서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 뭐야? 기계 고장이야? 뉴욕으로 날아가는 핵미사일의 방향이 어떻게 해서 서쪽을 향할 수 있단 말이야? "
  마르첸코는 컴퓨터를 다시 한번 점검했지만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핵미사일이 서쪽 – 미국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방향 – 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파란 화살표는  천천히 소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정에 매달린 빨간색의 커다란 램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램프 아랫쪽의 화면에 표시된  메세지를  보는 순간 사령부의 모든 요원은 그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 케오스 작전에 이상 발생. 모든 핵미사일의 유도장치 고장. 핵미사일은 현재 소련을 향해 날아오고 있음. ]
  마르첸코는 구석쪽의 보조 컴퓨터에 달려있는  자폭장치를 미친듯이 눌렀지만 화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 무슨 일이야? 마르첸코 대령? "
  이바노비치 장군이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사색이 된채  간신히 몇마디만 대답하고는 다시 컴퓨터에 매달렸다. 
  "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이 도로 우리쪽으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자폭장치도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1분후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이 소련땅에 명중해서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
  고개를 약간 숙였던 이바노비치가 놀라서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코끝에 간신히 걸려있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는 안경을 주울 생각도 안하고 소련을 향해 날아오는 파란색 화살표를 응시했다.
  ‘ 아틀란티스 인의 과학력은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을 도로 되돌릴 수 있는 정도란말인가 … ‘
  이바노비치는 혼잣말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250발의  소련 미사일 중에서 키에프에 떨어진 첫번째 핵미사일이 바로  방공망 사령부에 명중했기 때문이었다.

  17시 51분 미 공군 1호기.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는 화면에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장면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특수 군사위성은 모스크바 상공에 치솟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핵폭발에서 방사능으로 죽는 사람이 50퍼센트가  안된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핵폭발시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은 버섯구름을 일으키는 핵폭풍이다.
  핵폭발이 일어나면 우선 강력한 방사능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곧 핵폭발에서 일어나는 열선이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강력한 열로 폭발지점의 공기는 순간적으로  위로 치솟아 버섯구름을 만들고, 폭발지점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진공상태를 메우려 중심을 향해 엄청난 폭풍이 불게되는데 이것이 핵폭풍이다. 칠리와 미국정부의  요인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버섯 구름이 조금 작아지면서 화면에는 모스크바의 시가지가 나타났다. 10센티미터 크기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적외선 카메라에 잡힌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은 온통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의 무더기뿐이었다. 군데군데 검은 연기를  내뿜으머 타고 있는 가로수와 집들이 눈에 띄었다. 시체는  타서 증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건물의 앙상한 철골이 트위스트를 추듯 이리저리 휘어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령의 정적만이 감도는  거대한 공동묘지 모스크바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검은색이었다. 
  " 왜 검은색 빗방울이… "
  칠리의 물음에 포인트 합참의장이 대답했다. 
  " 이 검은 빗방울은 일명 ‘죽음의 비’라고 불리웁니다. 폭발시의 열로 인해 흙과 콘크리트, 기타 폭발중심에 있던  물질은 가루 상태가 되어 버섯구름을 타고  올라갑니다.  또한 스트론튬 등의 방사능 낙진도 역시 버섯구름을 타고  올라갔다가 상공에서 비에 섞여 떨어집니다. 이 비에는 방사능  낙진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이 비를 맞으면 원자병에 걸리게 됩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경우에도 생존자들의 대부분이 이 ‘죽음의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에 물집이 잡히는 등의 원자병에 걸렸습니다. "
  " 음… "
  화면에는 소련의 대도시가 계속해서 비춰졌다. 모스크바와 고르키, 레닌그라드, 민스크와 키에프,타시켄트와 알마아타, 노보시비르스크, 볼고그라드, 도네츠크, 스베르들로프스크등 소련의 대부분의 대도시는 250발의 핵미사일을맞고  전멸했다. 대부분의 콤비나아트(소련의 공업지대)와 유전,  광산지대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칠리는 소련의 추가 핵공격을 두려워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소련은 아직도 발사할 수 있는  핵미사일이 남아있었고 모스크바의 지하 방공호에 있던 소련  지도부와 발사장비도 무사했지만, 핵미사일을 발사해봐야 스핑크스가 다시 소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제어할 것이라는  생각에 소련 지도부는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스핑크스에게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주 ) 북미 방공 사령부 (NORAD) : 미국 전역의 방공  레이다망과 요격 미사일망을 지휘하여 적의 핵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지켜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지하 깊숙히 설치되어 있어 어떠한 핵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며 미국 전역에 배치되어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요격  미사일(ABM)의 발사를 통제 지휘한다.

  태평양 해저에는 수많은 원자력 잠수함이  자신의  존재를 숨긴채 수개월씩 잠수해 있다. 미국의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공격 잠수함 [폴리스]호도 그중 하나였다. 
  원자력 잠수함이 수개월씩 잠수해 있는 이유는 적의  감시망을 피하려는 때문이었다. 해저에 잠수해 있는 원자력 잠수함은 잠망경을 올리려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는 한  인공위성이나 소나(수중 음파 탐지기)로도 잘 포착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미사일을 적재한 원자력 잠수함은  기습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의 하나였다. 
  원자력 잠수함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잠수함의 통신은 ELF라고 불리우는 초저주파를 이용하게  된다.  물이 전파를 흡수하기 때문에 전파 통신은 수중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FM전파가 1초당 9천만번, TV전파가  10억번정도의 진동을 하는데 비해서 ELF는 1초에 고작 3번  정도로 아주 느린 전파이기 때문에 물속으로도 전파된다. 
  [폴리스]호의 선장 마틴은 선장실의 쇠로 만든 조그만  선반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19시 05분. 정기  교신시간인 8시를 무려 한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그는 책상위의  단추를 눌러 통신실을 호출했다.
  " 사령부에서의 연락이 아직 없나? "
  " 이상합니다, 함장님. 우리뿐 아니라 소련 사령부도 자신들의 잠수함에 통신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잠수함의  통신장비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
  마틴은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렸다. 통신에 대비해 꺼내놓았던 검은 표지의 암호책이 펼쳐진 채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암호책에는 알파벳이 아무렇게나 순서가 뒤바뀌어  배열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각각의 암호에 해당되는  단어가  씌여져 있었다. 암호책은 6개월만에 한번씩 교체되며, 모든  원자력 잠수함은 같은 암호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섞여있는 알파벳이 마치 월트 디즈니의 그림맞추기 같아보였다. 
  ‘ 소련 잠수함도 통신이 멈춰졌다… ‘
  잠수함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짙은 커피를 한모금 홀짝 들이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정기적인 통신이 끊긴 것은 해군이 원자력 잠수함을 가지게  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두뇌는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다. 
  ‘ 소련 잠수함과 미국 잠수함에 기계 고장으로 동시에  통신이 끊겼을 리는 없어. ‘
  기계 고장이 아니라면 도저히 통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에서 핵전쟁이 일어나  모두 전멸한걸까. 하지만 지상에서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제일  먼저 원자력 잠수함에 핵미사일 발사 명령이 내려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 마틴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결단을내렸다. 
  " 전 기관 정지. 해면으로 부상해서 사령부와 교신한다. "
  [폴리스]호는 해면에 떠올랐지만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다. 사령부와 함대 지휘부, 통제소 어느곳도 [폴리스]호의  교신에 응답하지 않았다. 순간 마틴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 초단파 교신을 해보게. 아마추어 무선국이 쓰는  주파수로. "
  통신장교는 아마추어 무선국과 왜 교신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명령에 따랐다. 곧 그는 희미한 교신을 잡을 수 있었다. 잡음에 섞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영어였지만  소련 악센트를 띠고 있었다. 
  [ 여기는 고르키, 여기는 고르키… 우리는 핵미사일로… 모두 날아가버렸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빌어먹을 스핑크스… ]
  ‘ 핵미사일로? 그렇다면 핵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스핑크스라는 말은 또 뭐야? 홀로비전이라도 켜볼까? ‘
  마틴은 아들을 주려 사놓았던 소형 홀로비전을 꺼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였다. 화면속의 대통령은 울먹이고 있었다. 
  "여러분이 보신대로 이제 인류는 아틀란티스 인과 스핑크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영원하리라 믿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인류가 다시  지구를 되찾으리라고… "
  칠리는 말을 맺지 못했다. 곧 화면에는 아틀란티스인 싸이버가 나타났다. 
  " 지구인 여러분,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스핑크스 컴퓨터를 통해서 지구는 한개의 국가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도 징기스칸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우리 아틀란티스인이 이루는 것입니다. 온 지구가 하나가 될 통일국가의 이름은 그리이스 신화에서 신들이 살았던 땅 [올림포스]가 될 것입니다. 지구인 여러분, 우리 아틀란티스인의 지배 아래서 행복을 누려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은 10여분간 계속되었다. 마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임무는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출해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해군  사관학교  때 배운 간단한 격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공격은 최상의 방어. ‘
  또하나의 격언이 마틴에게 생각났다. 이 말은 마틴이 써야 할 작전이 무엇인가도 가르쳐 주었다. 
  ‘ 적의 적은 우리의 편. ‘
  그는 다시 잠수명령을 내렸다. 초음파를 발사해서 적 잠수함을 찾는 능동형 소나를 사용해 근처에 있는 잠수함을 찾았다. 곧 500마일 이내에 있는 5척의 잠수함이 포착되었다. 마틴은 수동형 소나를 통해서 들려오는 엔진 소음을  컴퓨터에 넣고 분석했다. [폴리스]호에 설치되어 있는 호돌-712  컴퓨터는 엔진 소음이 어떤 잠수함의 것인지 손쉽게 분석해냈다.

  [ 좌표 26-75X: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좌표 26-83Z: 미국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15메가톤급 켄타우르스 핵미사일 15기.

    좌표 27-15A: 미국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15메가톤급 켄타우르스 핵미사일 15기.

    좌표 27-76Y: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좌표 27-91C: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마틴은 26-83Z와  27-15A에  있는  잠수함을  잘  알았다. 26-83Z는 해군 사관학교 동기인 루터스의  [디트로이트]호이고 27-15A는 함대 상급자인 엘핀의  [뉴요커]호였다.  [폴리스]호까지 세척의 오케아노스급 잠수함에 45기의 켄타우르스 핵미사일을 확보하게 된다. 소련 잠수함까지 합치면  여섯척의 잠수함에 117기의 핵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폴리스]호는 [디트로이트]호와 [뉴요커]에게  ELF통신을  보냈다.

  좌표 27-76Y 지점에 잠수하고 있는 소련의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붉은 광장]호의 통신실에서는 통신장교 로마노프가 함장 이반과 같이 통신장비에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스핑크스에게 항복한 소련 지도부의 홀로비전 방송이 잠수함 안에서 수신되었지만 로마노프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핑-핑- 갑자기 에너지를 실은 초음파가 잠수함 벽을  때렸다. 근처의 잠수함에서 나오는 능동 소나의 송신파였다.  함장 이반은 소나를 살폈다. 세척의 미국 잠수함이 일제히 [붉은 광장]호에 소나를 발사하고 있었다. 
  능동 소나는 초음파를 발사하여 반사파가 오는 시간을  측정해서 거리를 재기 때문에 정확하지만, 상대방이 그 초음파의 충격을 듣기 때문에 ‘나 여기있소’하고 광고하는 셈도 된다. 그래서 적이 이쪽을 이미 발견했을 때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데 웬일인지 미국 잠수함은 [붉은 광장]호에 능동 소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상하군요, 로마노프 동지, 미국의 잠수함이  우리에게 소나를 발사하다니. "
  로마노프는 함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길게, 짧게  울려오는 소나의 초음파 충격은 분명 모르스 부호였다. 그는  황급히 종이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다 적은 로마노프는 꽉  움켜쥔 종이를 함장 이반에게 내밀었다. 첫줄을 읽은 이반의  눈동자가 커졌다.
  [ 소련 잠수함에게, 여기는 미국 잠수함 [폴리스]호… 긴급제안이 있다… ]
  그는 마지막 줄을 거듭해서 여섯번 읽고는 모든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좁은 장교실은 금방 사람으로  만원이  되었다. 토론은 짧게 이루어졌고 장교들은 거수로 의사를 표시했다. 
  미사일 발사 권한을 가진 다섯명의 장교들은 모두  찬성했다. 미국의 잠수함과 마찬가지로 다섯명의 장교가 모두 동의하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지문 인식기에  갖다대야  발사가 가능하다. 한두사람의 판단 실수로 어이없는 핵전쟁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통신장교 로마노프는  곧  [폴리스]호에 답신을 보냈다. 
  [ 귀함의 제안을 수락함. 좌표 81-91Z로 항해하겠음. ]
  세척의 소련 잠수함과 세척의 미국 잠수함은 좌표  81-91Z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좌표 81-91Z는뉴욕 앞바다였다.

  원자력 잠수함은 그 특성상 아무에게도 탐지되지 않게  숨어서 공격이 가능하다. 더우기 스핑크스가 있는 뉴욕은 해안가에 면해있다. 뉴욕 근처까지 여섯척의 잠수함이 가서  117발의 핵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중 하나만 명중하더라도 스핑크스를 박살 낼 수 있다. 미사일이 발사되고 뉴욕에  명중할때까지의 시간은 15초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스핑크스라 하더라도 15초 동안에 117발의 핵미사일을 다 격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스핑크스만 부숴버린다면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하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은 뉴욕 앞바다 150미터 해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잠수함 내의 컴퓨터는 용량이 초과될 정도로 가동됐고, 핵미사일은 모두 하나의 목표에  맞춰졌다.  좁은 공간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의 체온과 컴퓨터가 가동되면서 내뿜는 열이 합쳐져, 좁은 공격통제실 안은 후끈후끈했다. 
  소련 잠수함 [붉은 광장]호의 공격통제실에는 함장과 정치장교를 비롯한 다섯명의 장교가 발사대에 나란히 앉았다. 함장의 나즈막한 구령에 따라 다섯명의 장교는 일제히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지문 인식기에 갖다댔다. 머리위의 붉은  램프가 깜빡깜빡거리자 장교들의 등에서도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곧 둔탁한 충격이 잠수함 벽을 타고 전해왔다.  117발의 핵미사일이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뉴욕 상공에 고정되어 있던 군사위성 팔라스 182호는 뉴욕 앞바다를 감시하고 있었다. 팔라스 182호에 실려있던 적외선 카메라는 뉴욕 앞바다 한부분의 수온이 2~3도가량 높아져 있는 것을 발견해서 자동적으로 그 데이터를 스핑크스에  송신했다. 스핑크스는 방출되는 열량에서 해저 150미터에  5~6척의 잠수함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곧 스핑크스는 유타주 무기시험장에 설치해놓은 스핑크스의 신무기를  가동시켰다. 
  117발의 핵미사일은 뉴욕 상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같은 시간에 유타주 무기시험장에서 발사된 타원형의 이상한 물체도 마하 20의 속력으로 뉴욕 상공으로 발사되었다. 플로리다주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형의 물체가 뉴욕 앞바다로 발사되었다. 
  스핑크스가 발사한 타원형의 물체는 [폴리스]호를  비롯한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에서 발사된  핵미사일보다  1초정도 먼저 도달했다. 스핑크스에서 보내진 전파에 따라  타원형의 물체는 보랏빛 섬광을 내며 폭발했다. 순간 핵미사일은 타원형의 역자장폭탄에서 나온 강력한 역자장을  정통으로  받았다. 금속원자를 결합시키고 있던 자유전자는 강력한  역자장에 의해 한방향으로 급속히 움직였고, 금속원자는  응집력을 잃고 원자상태로 흩어져버렸다. 날아가던 핵미사일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금속가루로 흩어져, 대기에 섞여 날아가버렸다.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회색  구형의  물체는 [폴리스]호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 바닷물에 닿자 구형 물체에서 작은 안테나가  몇개  튀어나왔고, 물체는 곧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공격통제실의 커다란 레이더 스크리인을  쳐다보던  [폴리스]호의 함장 마틴은 잠수함 바깥쪽에서 우지직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 스핑크스의 공격인가? ‘ 
  다음순간 그는 공격통제실의 벽이 그를 향해서 맹렬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잠수함 벽이 종이장처럼  짜부러졌지만 바닷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을 내리누른 것은 엄청난 얼음덩이였다. 
  회색 구형의 물체는 바닷속 10미터에서 폭발했다.  주위의 열에너지를 순식간에 흡수하는 냉각폭탄은 반경 1킬로미터의 바닷물을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과, 근처에 있던 몇척의 선박은  아이스크림  속의 건포도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잠수함의 외벽은 얼음의  압력에 나뭇잎처럼 납작해지고, 선박의 갑판은 번데기처럼  주름잡혀버렸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타이거 특공대 – 미 육군의 공식명칭은 육군 제 115  특수부대였지만 이 부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타이거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 부대장 존  스타인웨이 대령은 훈련지휘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와서 아틀란티스인의 방송을 들었다. 모스크바에 핵미사일이 떨어지고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지만 존은 자신의 임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존 자신도 외계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될줄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의 임무는 미국을 위협하는  모든  적의 격퇴였다. 
  그는 휴대용 무전기로 기지 전체에 비상을 걸었다. 통신은 두절되었지만 스핑크스도 휴대용 무전기의 통신은  방해하지 못했다. 5분내에 타이거 특공대의 모든 군인들이 공격준비를 마치고 공격용 에어크래프트에 탑승했다. 공기를 아래로  내뿜어 그 힘으로 추진되어 물이든 땅이든 가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에어크래프트는 특공대의 수송수단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존은 자신이 스핑크스를 쳐부수고 장군으로 진급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사방에서 지구를 구한 영웅이라고 떠받들  것이고 곧 육군 참모총장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을 꿈꿀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의  타이거 특공대는 뉴욕시 근교에 위치해 있었다. 
  그와 부하 참모들은 타이거 특공대의 무기를 점검했다. 타이거 특공대는 보통의 특수부대와 달랐다. 세계대전시  모스크바로 진격해 소련 대통령과 지도부를 생포하는 것이  타이거 특공대의 임무였다. 따라서 타이거 특공대가 미국 최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스핑크스가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가까이 가면서 존과  타이거 특공대원들은 스핑크스의 공격이 전혀  없는데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다못해 정찰용  로봇이라도  나타나야 하는게 아닌가. 특공대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형 핵기관총을 움켜쥐었다. 
  " 우리가 기관총에 핵폭탄을 장진해 다닌다는걸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을거야. 그나저나 기관총알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핵폭탄은 어떻게 만든거지? "
  긴장감을 떨쳐버리려 한 대원이 중얼거렸다. 
  " 핵폭탄은 폭발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크기가 있는데 방사능원소의 원자번호가 커지면서 최소한의 크기가 작아져.  이걸 임계질량이라 부르는데 원자번호 92인 우라늄은 10킬로그램인데 반해서 원자번호 95인 아메리슘은 단 5그램으로도 훌륭한 핵폭탄이 될 수 있지. "
  전에 물리 선생을 했었다는 특공대의  상사가  대답했지만 특공대원들의 눈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스핑크스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스핑크스는 정찰로봇을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뉴욕의 교통을  제어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한 교통통제용 텔레비전 카메라가 스핑크스의 충실한 감시자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특공대는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페트로 섬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스핑크스는 아무런 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존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너무나  평온했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그에게는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쉭-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후추냄새가 특공대를감쌌다. 이건 뭐야,하고 중사가 말했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손등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부어오른 팔뚝과 다리의 압력에 못이겨, 질긴 군복이 후두둑 튿어졌다. 특공대장  존은 쓰러진 한 대원을 일으켰지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차라리 피범벅이 된 고깃덩어리였다. 곧 존도 골수를 궤뚫는 고통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대원들의 노출된 피부는  흐느적거려, 마치 고깃간의 돼지고기와 비슷하게 보였고  토해놓은 토사물과 배설물에 범벅이된 대원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형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틀란티스인에 대한 인류의 저항은 꽤나 완강했지만 많은 희생자만 남겼다. 세계에 퍼져있던 미국군과 소련군, 그밖의 각 나라의 군대가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공격을 가해왔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의  인공위성은 이미 스핑크스에게 장악되었고, 세계  어느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도 모두 이들 인공위성에게 탐지되어 스핑크스에게 진압되었다. 스핑크스는 이미 반경 수킬로미터내의 바닷물을  거대한 빙산으로 만들어버리는 냉각폭탄, 금속을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역자장포, 사람을 단백질의 덩어리로 분해해버리는 무서운 화학무기를 만들어놓았고, 아틀란티스인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에게는 상공의 오존층을 파괴해버렸다. 
  오존층이 파괴된 나라는 자외선때문에 농작물이  말라죽고 산의 나무는 자라지 않았으며 사람과 동물은 자외선에  살갗이 타서 피부암에 걸려 죽어갔다. 스핑크스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플로리다주, 텍사스주,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은 오존층의 파괴를 받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소련은 핵미사일로  전멸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3억 인구중 5천만도 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원자병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한국도 한달씩이나 저항했다. 스핑크스의 접속을 거부했던 한국은 오존층이 뚫리는 대신 사람을 녹여버리는 화학무기의 공격을 받았다. 1억이 넘던 한국 인구는  7천만까지  감소했고, 결국 한국정부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처음에는 한국처럼 저항했지만, 이틀도 못가서  아틀란티스인에게 항복했다. 더우기 항복 후에는 스스로  스핑크스의 앞잡이가 되어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협력했다.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홀로비전 화면에 나타난지 한달후인 6월 25일에 최후까지 저항하던 한국정부가  스핑크스에게 항복함으로서 아틀란티스인은 전 지구를 점령했다.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점령하고  [올림포스]라는  이름의 세계국가 – 사실은 아틀란티스인의 식민지 -  를  건설했다. 세계는 300여개의 작은 지구로 나누어졌고 각각의 지구는 세자리 번호로 표시되었다. 가장 먼저 항복하고  스핑크스에게 협조적이었던 일본은 001지구, 소련은 유럽지역이  128지구, 시베리아 지역은 129지구로  나뉘었다.  미국은  서부지역이 231에서 237지구로 나뉘었고, 중부는 238지구에서  241지구, 동부는 242지구에서 249지구로 나뉘었다. 끝까지 버텼던  한국은 337지구가 되었다. 
  각 지구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이고 평등했다. 각  지구의 행정은 [코스모스]라는 이름의 통치기구가 담당했다.  [코스모스]의 우두머리는 스핑크스가 파견한 총독이었으며 아틀란티스인이었다. 지구인은 부총독자리를  맡았으며,  협조적인 지구인이 주로 부총독 자리를 맡았다. 그리이스 신화의 전쟁의 신 이름을 딴 [아레스]라는 비밀경찰도 결성되었는데, 주로 아틀란티스인에게 협조적인 일본인과 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아레스]는 스핑크스에게 반항하는  지구인을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은 재판없이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외계인에게 점령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인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스핑크스는 지구인이 복종하지  않을때는 가혹한 복수를 가했지만, 일단 지배에 협조하면 지구인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최대한 도왔다. 스핑크스는 인류가 걱정했던 공해문제를 해결했으며, 방사능 오염이 없이  원자력을 얻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유전공학을 이용, 쌀과 밀의 생산을 다섯배로 늘렸으며, 내성을 갖지 않고  효과가  10배나 뛰어난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했다. 불과 1년안에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Part VI 문무왕릉의 비밀

  2001년 8월 21일 문무왕 수중릉. 
  햇살은 금방이라도 살갗을 태울듯이 이글거렸지만, 바닷물은 맨살로는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차고 맑았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만 같은 낡은 모터보트에 탄 다섯명은 보트 한구석에 놓여있던 잠수복을 집어들었다. 
  " 이번이 벌써 스물여섯번째 잠수예요. 우리는 괜한  고생을 하는 것 아닌가요? 수백년전의 [유기]라는 역사책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
  소연은 이렇게 투덜거렸지만 잠수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금발머리의 여자는 묵묵히 자기 잠수복에  압축공기탱크를  달 뿐이었다. 옆에 있던 혜진이 소연을 달랬다. 
  " 그래도 스핑크스를 무찌를 희망은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스핑크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던 자유의 여신상 지하에서의 일을 잊지는 않았겠죠? 더우기 소연씨와  나의  조국인 한국은 아틀란티스인에게 끝까지 버티다  무려  3천만명이나 희생당했어요. 물론 희생자중에는 나의 부모님과 동생도  포함되어 있어요. 소연씨의 아버님도 돌아가셨잖아요? "
  소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압축공기탱크를 다 단  금발머리의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수장비를 최종점검했다. MIT에서 수많은 컴퓨터를 다루었던 영상은 보트 한구석에  설치된 휴대용 컴퓨터를 조작해서 수온과 깊이를 측정했다.  영훈은 잠수복을 다 입고 잠수모만 벗은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연은 그런 그를 보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노래가 나오나요, 영훈씨? "
  영훈은 고개를 돌려 소연을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 스핑크스가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노래를  못부를테니까 미리 불러둬야지, 안그래? "
  영훈은 소연을 향해 한번 웃어보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은 그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채였다. 
  ‘ 과연 이 금속판은 어떤 구실일까. 외계인의  비밀기지의 열쇠일까. ‘
  생각의 늪에 빠져있던 영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영상이, 이 금속판에서 전파가 나오나 확인해주게. "
  영상은 작은 테스터를 이리저리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약한 전파가 나오고 있어. 그런데 그게 왜? "
  " 영상이, 지금부터 내가 이 금속판을 이리저리  돌려볼테니 전파의 크기가 달라지나 봐주게. "
  영훈은 반소매 셔츠자락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은  후 금속판을 이리저리 돌렸다. 곧 영상의 손이  금속판을  잡았다. 
  " 바로 이 방향이야. 방향이 맞으니까 엄청난 전파가 튀어나오는데? "
  " 바로 그걸세. 이건 외계인의 비밀기지를 가리켜주는  방향탐지기야. 목표에 가까와지고 방향이 맞을수록 더욱 큰 전파를 내뿜는. "
  일동의 입에서 환성이 올랐지만 소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영훈은 소연을 제외한 세명에게 잠수복을  입으라고 하고는 자신도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 이번에도 또 내가 빠지는건가요? "
  소연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영훈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누군가는 이 배를 지켜야 할 것 아냐? "
  ‘ 소연, 우리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란말이야. 난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귀여운 꼬마아가씨야. 네가 날 따라 스핑크스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널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거고. ‘
  ‘ 흥, 처음부터 영훈씨는 날 탐탁치 않게 여겼던거야. ‘
  영훈은 아틀란티스인이 쓰던 은빛 광선총을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수중에서도 쓸수 있는 초음파  무전기도  함께였다. 금발머리의 여자는 초음파 무전기를 집어들어 자신의 잠수복 안에 달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그녀는 왼팔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혜진이 그녀를 부축해 셔츠를 벗기고 그녀의 왼팔을 살폈다. 다친지 오래되어보이는  꽤  큰 흉터가 남아있었다. 
  " 나를 스핑크스에게서 구출하려다 다친 상처… 왜  그동안 말을 안했어요? "
  " 괜찮아요. 가끔씩 상처가 다시금 아파오곤  해요.  조금 쉬면 금방 괜찮아질거여요. "
  영상은 금발머리의 여자에게 작은 나침반 같은 장치를  내밀었다. 
  " 이건 뭔가요? "
  " 잠수한 우리를 찾아낼 수 있는 추적장치입니다.  우리의 잠수복에서 발사되는 전파를 찾아 방향을 가리켜주죠.  만약 우리가 수중에서 구조신호를 보낸다면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
  영훈과 혜진, 영상은 잠수복을 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보트의 수중음파탐지기는 세사람의 위치를 화면에 표시했다. 소연은 금발머리의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 어떻게 여기가 외계인의 비밀기지라고 생각했죠, 아리오네? "
  아리오네는 왼팔을 약간 문지르며 소연을  향해  웃어보였다. 
  " 우리 CIA는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유기]  역사책의 내용을 입수했어요. 거기에는 신라 내물왕 42년 5월에  경주 앞바다에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다가 떨어져 죽고 그  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한 그 자리에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짐승들이 섬을 만들었고, 그 섬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되어  있어요. 아까 영훈씨가 들고 있던 금속판은 바로 그때 발견되어서 고구려에 바쳐진 거여요. 우리 CIA는 [유기]의 그 구절이 외계인들의 비밀기지 건설 현장을 묘사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
  아리오네는 수중음파탐지기를 쳐다보았다. 잠수한  세사람을 나타내는 세개의 파란 점은 정상적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 나는 스핑크스가 나와 혜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혜진씨는 아테니움이라는 물질때문에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어떤 이유때문에 노리는걸까?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스핑크스가 나를 노리는 것은 바로 그 금속판이었어요. 그 금속판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어떤 비밀기지의 열쇠인거죠. "
  물결이 조금씩 높게 일었다. 닻도 없이 서있는 작은  모터보트는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심한 것은 아니었다. 
  " 스핑크스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스핑크스를 따돌릴 궁리를 했어요. 그래서 인공혈액과 뇌파정지기를 만들었지요. 스핑크스의 명령에 따라  나를 죽이려 했던 영카우는 내 주머니 안에 있던 인공혈액 주머니가 터져서 흘러나오자 내가 피를 흘리고 죽은 줄  알았지요. 나는 뇌파정지기를 사용해서 인공적으로 뇌파와  심장박동을 정지시켰지요. 영카우는 내 심장박동과 뇌파를 휴대용  응급장치로 재서 스핑크스에게 보냈고, 스핑크스는 내가  완전히 죽은 것으로 알았죠. 그 덕분에 나는  스핑크스의  감시에서 벗어나 혜진씨를 보호할 수 있었죠. 혜진씨를  구하러  가는 바로 그 시간에 영훈씨와 소연씨, 영상씨가 스핑크스에 침입했고 우리는 스핑크스의 비밀을 알아냈지요. "
  물결이 점점 더 세져갔다. 아리오네는 보트 조종간 아랫쪽에 눈에 띄지 않게 달려있는 작은 단추를  눌렀다.  징-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 덮개가 튀어나와 보트 전체를 감쌌다.  이제 어떤 파도가 덮쳐도 배안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 그나 저나 이렇게 파도가 점점  높아지는데  영훈씨들이 걱정이군요. "
  배 오른쪽에 설치된 시계가 잠수 한시간을 가리켰다. 영훈이 가져간 잠수장비는 두시간까지 버틸 수 있다. 예비  산소탱크까지 사용하면 두시간 반은 괜찮을 것이다. 
  " 나는 원래 CIA 소속이었기 때문에 기밀  자료에  접근이 가능했지요. 스핑크스는 나를 살해하려 한 후에 세개의 인공위성을 발사했어요. 놀랍게도 이 인공위성은 모두 경주 앞바다, 그것도 문무왕 수중릉을 감시하도록 되어있었어요. 아무런 과학적 군사적 가치가 없는 문무왕 수중릉을 왜 스핑크스가 세개의 인공위성을 보내 감시하겠어요? 스핑크스가  두려워하는 뭔가가 여기 있는게 틀림이 없어요. "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오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았다. 
  " [삼국유사]에 보면 신문왕때 푸른용이 섬을 떠받들고 감포 앞바다에 나타나 신문왕에게 피리를 바쳤다고 되어  있어요. [유기]의 기록과 [삼국유사] 모두 갑자기 나타난 섬, 그리고 쇠로 만든 새나 용의 이야기가 나와요. 바로  그자리에 신라의 문무왕이 수중릉을 만들었고요. 물론 문무왕이야  미신적인 요소에서 수중릉을 만들었지만, 만약 외계인의  비밀기지가 경주 앞바다에 있다면 문무왕 수중릉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많아요. "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영훈에게  삐쳐있었던 소연도 그들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계는 잠수 한시간 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예비 산소탱크까지 포함해서 한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올 시간을 알리려고 초음파 무전기를 켰던  소연은 무전기에서 칙칙-하는 잡음밖에 들을 수 없었다.  수중음파탐지기를 쳐다보던 아리오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세사람을 나타내야 할 파란 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닷속은 생각보다는 맑지 않았다. 이미 스물다섯번의  잠수에 익숙해져 있는 영훈들이지만 이번의 잠수는 조금  색달랐다. 영상은 손에 작은 전파계를 들고  금속판에서  나오는 전파를 점검했다. 예상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갈수록  전파는 점점 강해졌다.
  전파는 바닷속 100미터로 잠수할 때까지 강해졌다. 그들이 입고 있는 특수 잠수복은 150미터까지 괜찮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영훈은 초음파 무전기로 영상을 불렀다. 그러나 무전기에서는 삑삑거리는 잡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 고장인가? 이상하군. ‘
  영훈은 손짓으로 영상을 불렀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들이 가진 다른 통신장비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디에선가 전파장애가 있는걸까? 설마 스핑크스의 공격은 아니겠지? ‘
  영훈은 바다위의 소연과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무전기는 계속 이상한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영훈은 초음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상당히 규칙적임을 알아차렸다. 길게, 짧게 들려오는 삑삑거리는 소리는 모르스부호와 비슷했지만 모르스부호는 아니었다. 모르스부호는 긴  소리 ( — )와 짧은 소리(  )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소리는 아주 긴소리, 중간소리, 짧은 소리의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 이 근처에 외계인의 기지가 있음에 틀림이 없어. ‘
  부지직- 소리를 내며 영상이 들고 있던  전파계가  망가졌다. 너무센 전파가 방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조금씩 밝아졌다. 
  ‘ 이 깊은 해저에 빛이 있을 리가 없는데… ‘ 
  영훈은 푸른빛이 자신이 들고 있던 금속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향을 바꾸니 빛은 점점 약해졌다. 그는 빛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점점 깊이 잠수해갔다. 영훈과 교신이 되지 않았지만 영상과 혜진도 영훈의 뜻을 알고 같이  잠수를 계속했다. 잠수복에 설치되어 있는 노란색의  심도계는 붉은 핑크빛으로 변해있었다. 해저 120미터였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던 곳에는 강력한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모든 전자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심도계도 12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잠수하고 있던 곳은 해저 170미터였다. 
  영훈은 갑자기 온몸을 쥐어뜯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무겁게 내리눌리는 기분이었다.  영상과 혜진도 영훈보다는 약했지만 온몸에 압력을 느꼈다.  눈앞에는 거대한 해저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는  길게  자란 해초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영훈은 동굴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희미하게 반짝이는것을 보았다. 분명 금속성 반사광이었다. 
  ‘ 일단 위치를 알았으니까 돌아가서 좀더 강력한 잠수장비로 바꾼 후에 오는 것이 나을거야. ‘
  영상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보았다. 잠수 2시간째. 여기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30분안에 돌아가기는  힘들다. 그는 혜진과 영훈에게 시계를 들어보였다. 아직도  고통은 계속되었고 통신은 두절되었지만 영훈과  혜진은  영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도 산소부족으로 죽지않고 돌아갈  수  있을 확률은 20%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는  영훈과  혜진에게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어차피 죽을 확률이 많으니 그냥 동굴 탐사를 계속하겠냐고 묻고 있었다. 영훈과 혜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해저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훈의 손안에 있던 금속판이 푸른빛에서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잠수하고 있던 깊이는 이미 해저  200미터를 넘어섰다. 영훈들은 엄청난 압력을 몸으로  느꼈다.  온몸의 피가 모두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해저동굴을  10미터정도 남겨놓고 그들은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리오네와 혜진은 수평선을 초조히  응시했다.  잠수한지 이미 세시간, 그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잠수복을 준비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이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리오네와 혜진은 네시간정도 버틸 수  있는  산소탱크를 집어넣었다.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빼앗은 광선총도  세심하게 방수처리를 한 다음 어깨에 메었다. 투명덮개를 열고 잠수준비를 하던 소연은 수평선 너머에서 두개의 검은 점을 발견했다. 
  " 저거봐요. 혹시 영훈씨들이 아닌가요? "
  순간 지평선쪽에서 섬광이 번쩍였고 그녀들 근처의 바닷물이 높게 튀어올랐다. 광선총 공격이었다. 아리오네가  CIA의 정보원답게 소연을 밀쳐내며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들이 타고 있던 보트는 큰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부서진 조각들이 후두둑 튀어 바닷물로 떨어졌다.  아리오네는 방수처리가 되어있는 광선총을 꺼내어 응사했다. 
  검은 점은 이쪽으로계속 다가왔다. 지구인이 타고있는 호버크래프트였다. 비밀경찰 [아레스]의 공격임에 틀림없었다. 한척의 호버크래프트가 아리오네와 소연이 쏜 광선총에 맞아 폭발했지만 다른 한척은 계속 공격을 가해왔다. 
  " 도대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맞아, 스핑크스는 문무왕 수중릉 상공에 세개의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있었지. "
  아리오네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호버크래프트와 광선총 공격을 주고받았다. 소연이 몸을 비틀며 쏜 광선총이 호버크래프트의 엔진부분에 맞아 큰 폭발을 일으켰다.  타고 있던 [아레스]대원의 팔이 폭발로 날아가 소연의 눈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높이 질렀다. 잘라진  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소연의 얼굴에 묻었다. 소연은 공포에 질려서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리오네는 그런 소연을 마구 흔들었다. 
  다시 은빛 섬광이 반짝이며 그녀들 뒷쪽에 떠있던  보트의 잔해가 다시 폭발했다. [아레스] 한명이 살아서 헤엄치며 이쪽으로 광선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소연과 아리오네도  얼굴만 물밖으로 내밀고 광선총으로 응사했다.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소나기를 마구 뿌려댔다. 한편으로는 높이 일렁이는 파도와 싸우며 소연들은 [아레스] 대원과 계속 맞싸웠다. 차가운 동해 바닷물에 오래 있으려니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두워진 하늘때문에 공격목표인 [아레스]대원이 잘  보이지 않았다. 광선총 발사의 섬광으로 적의 위치를 간신히  알 뿐이었다. 
  " 소연씨, 잠깐 사격을 멈추어보세요. "
  이쪽에서의 사격이 멈추자 [아레스] 대원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쪽도 이쪽의 위치를 광선총 발사의  섬광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쪽의 사격이 멈춰지자 이쪽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라오네와 소연은 천천히 물밑으로  잠수했다가 옆으로 한참 이동한 다음에 떠올랐다.  소나기가  오는 바다에서는 이쪽도 [아레스]대원을 찾지 못했지만 그도 이쪽의 위치는 모르고 있다. 
  ‘ 제길, 어디 있는거야? ‘
  [아레스] 대원은 신경질적으로 주위에 광선총을  난사했지만, 발사의 섬광을 포착한아리오네와 소연이  그를  조준해 사격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리오네와 소연은 천천히 물속으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비록 영훈들이 잠수한지 네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들로서는 영훈들이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리오네는 영상에게서 받았던 나침반 모양의 추적장치를 작동시켰다.

  Part VII 무우대륙과 초자아 컴퓨터 [엑스컬리버]

  ‘ 여기가 어디지? ‘
  영훈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에 젖어 있었지만 해저동굴 안에는 분명 물이 빠지고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붉은  색으로 빛나는 금속판은 아직도 영훈의 주먹에 쥐어진 채였다. 그는 잠수장비를 벗어제치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영상과 혜진은 보이지 않았다. 
  ‘ 다들 죽었단 말인가? ‘
  영훈은 해저동굴 안을 자세히 살폈다. 동굴은 S자  형태로 바닷속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왔고, S자의 중간부터는 물이 없이 공기가 가득 차있었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바닥은  거친 바위에 돌멩이가 조금 흩어져 있었고, 사람이 살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지만 견디지  못할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세웠다. 동굴안에 바람이 있는가 느끼려는 것이다. 약하지만 동굴안의 공간 안쪽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잠수복의 주머니에서 조명등과 광선총을 꺼냈다.
  동굴 안쪽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광선총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고 안쯕으로 낮은 포복을 하고  기어갔다. 전에 특수부대에서 받은 훈련이 이처럼  도움될줄은 몰랐다. 
  안쪽으로 조금 기어들어가니 길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신음소리는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그는 왼쪽 길에 표시를 해놓고 오른쪽으로 포복을 계속했다.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주 희미한 빛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 두줄기가 가로로 비치고 있었다. 
  ‘ 침입자 탐지기인가? ‘
  그는 돌멩이를 하나 들어 빛줄기에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돌멩이는 순간적으로 빨갛게 달구어 떨어졌다. 땅에 떨어져 검게 그을린 돌멩이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났다. 
  ‘ 하마터면 오징어 통구이가 될뻔했군. 그러나 이곳을  어떻게 지나가지? ‘
  그는 주위의 벽을 천천히 만졌다. 흙이 달라붙은 동굴  벽 한쪽이 약간 움푹파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벽에 달라붙은 흙과 마른 해초를 뜯어냈다. 곧 금속으로 된 인터폰 모양의 물체가 나타났다. 물체의 가운데에는 길다란  홈이  파여 있었다.
쥐고 있던 금속판을 천천히 홈에 밀어넣었다.  징-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를 가로지르던 열선이 끊겼
다. 그는 다시한번 돌멩이를 던졌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통과했다. 
  ‘ 이 금속판이 이곳의 열쇠 구실을 하는 모양이군. ‘
  그는 다시 포복을 하기 시작했다. 배를  완전히  땅바닥에 깔고 움직이던 그의 손바닥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금속성의 조그만 압력스위치였다. 그는 특수부대의 훈련  당시에 압력스위치에 대해서 배운 것을 기억하려 애썼다. 
  ‘압력스위치는 지뢰등에 쓰이는 스위치로, 압력의 변화에 따라 폭탄등을 폭파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이  압력스위치는 누를때는 괜찮고, 눌렀다가 떼는 순간에 작동을 하므로,  이런 스위치를 눌렀을 때는 일단 누른 채로  가만히  있는채로 압력스위치를 분해해야 합니다. ‘
  그는 스위치를 누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 지뢰도 아니고 외계인이 만든 압력스위치를 어떻게 분해한다? ‘
  신음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다. 영훈은 한손으로는  압력스위치를 누른 채 다른 손을 더듬어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손을 빼내며 동시에 압력스위치  위에  돌멩이를 얹었다.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살며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는 다시한번 주위를  살폈다.  신음소리는 모퉁이 저쪽에서 나고 있었다. 광선총을 빼들고 모퉁이를 돌아선 그는 아랫쪽에 있던 주먹만한 돌멩이에 걸려  고꾸라졌다. 
  그의 발에 걸린 돌멩이는 데굴데굴 구르며 영훈이 다른 돌멩이로 막아놓았던 압력스위치쪽으로 굴러갔다. 영훈은 순간적으로 둥그렇게 웅크리며 모퉁이 뒷쪽으로 몸을 던졌다. 탄력성있는 고무공처럼 그의 몸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굴러가던 돌멩이가 압력스위치에 맞았다. 곧 동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오래된 암석으로 된 동굴의 돌 부스러기가 그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그의 머리위를 지나가는 희미한 빛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금속판을  홈에 밀어넣었고 광선은 곧 사라졌다. 
  또 다시 두갈래 길이 나왔다. 영훈은 귀를 기울였지만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갈림길에 표시를하고 왼쪽을 선택했다. 한 20미터정도 갔을까, 벽은 막혀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징-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지나온 동굴위에서 암석문이 내리닫히고 있었다. 그는 발을 모았다가 최대한의 탄력을 가지고 내려오는 문에 몸을  던졌지만 문이 닫히는 것이 조금 먼저였다. 그의 머리가 암석으로  된 벽에 부딫쳤다. 머리를 만진 그의 손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만져졌다. 피였다. 
  ‘ 제기랄. ‘ 
  아랫쪽에서 쉿-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뿌연 연기가 바닥에서 위쪽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 독가스! ‘
  그는 차오르고 있는 가스가 독가스라고 느꼈다. 영훈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들어왔던 동굴은 암석문으로  막혀있었고, 나머지는 동굴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갈데라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는 광선총을 벽에 들이대고  최대출력으로 쏘았다. 쾅-소리와 함께 암석문이 날라갔지만, 그  뒷쪽에는 
정체를 알수 없는 푸른빛 합금벽이 버티고 있었다. 
  ‘ 원래 이 통로는 외계인들이 쓰던 통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도 금속판을 넣어서 열 수  있게  해놓았을 것이다.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30초. 그 안에 찾아내야 한다. ‘
  점점 숨이 가빠왔다. 그는 벽을 있는대로 더듬었지만,  금속판이 들어갈만한 홈은 아무곳에도 없었다.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왔다. 물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영훈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작은 숨을 들이켰다.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많이 들이키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영훈은 땅바닥에 뒹굴었다.  뿌연 연기는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뒹굴던 그의 손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벽에 붙은 흙을 재빨리  떼어내니 작은 홈이 나타났다. 빨간색의 램프가 켜져있었다. 
  눈앞이 희미해졌다. 반쯤 장님이 된채 그는 손끝의 감촉만으로 금속판을 홈에 밀어넣었다. 그는 보지 못했지만,  빨간색의 램프는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막다른 곳으로 보였던 끝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건가? ‘
  의식을 차린그는 주위를 살폈다. 저만치  옆쪽에  혜진과 영상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팔에 큰 화상을 입고 있었다. 두사람은 영훈이 들어온 곳과 다른 출입구를 통과하다가 열선에 팔을 다친 모양이었다. 혜진은 고개를  들어  영훈을 알아보았지만 워낙 큰 부상이라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두사람이 쓰러진 곳 뒤쪽으로는 엄청난 양의 기계가  가득차 있었다.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우주선 안이 보통 이렇게 생겼지만, 사진으로 본 스핑크스보다도 더 많은 기계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튜브같이 생긴 기계도 몇개 있었고, 한쪽 벽면은 각종 스크린으로 가득차 있었다. 
  영훈은 쓰러진 두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워낙  피를  많이 흘려 두사람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영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들릴락말락하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 이 방안에 있는… 건 거의 다  컴퓨…터일세.  그것도 내…가 본 컴퓨터중…에서는 최고의 것…이야.  물론  스핑…크스보다는 못…하지만. 나와 혜진씨는… 이미… 틀렸어… 자네가 이걸… 작동해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에게서 지…구를 구해주게… "
  영상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금속으로 된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과다한 출혈로 인한  쇼크 때문에 두사람의 몸은 끊임없는 경련을 일으켰다. 
  영훈은 스핑크스가 있던 자유의 여신상에서 도망친  1년을 생각했다. 영훈들이 스핑크스의 정체를 안 다음날로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점령하고 [올림포스]라는  아틀란티스인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영훈과 영상, 혜진,  아리오네, 소연은 비밀경찰 [아레스]에게 쉴새없이 쫓기면서도  어딘가에 있을 고대인의 비밀기지를 찾으려 애썼다.  지구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간신히 찾았건만 영상과 혜진 두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훈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스핑크스 내부에서의  위기도 같이 헤쳐나온 두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영훈을 괴롭혔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쥐고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 스핑크스는 뭐고 아틀란티스인은 또 뭐야! 도대체  뭔데 이제 나타나서 우리 지구인을 괴롭히는 거야!  이  빌어먹을 비밀기지는 또 뭐냔말이다! "
  영훈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이때까지 간신히  버텨오던 의지가 죽어가는 두사람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그는 머리 한구석에서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 지구인이여… 당신은 이 기지의 주인입니다. 주 컴퓨터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
  영훈은 잽싸게 주위를돌아보았지만,  사람이라고는  그들 세사람밖에 없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오는 느낌이었다.
  [ 지구인이여. [엑스컬리버]는 당신의 정신에 감응하는 컴퓨터입니다. 명령은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텔레파시로 조종하는 정신감응 컴퓨터! 지구인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었고, 스핑크스조차 이룩하지 못한 고도의  기술! 어쩌면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이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엑스컬리버, 먼저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
  [ 제 1번, 3번 의료튜브를 이용하면  됩니다.  1600년동안 작동하지 않아서 2번과 4번은 고장이지만 1번과 3번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완치에는 3시간정도면 될  것입니다. ]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튜브같이 생긴 기계가 열렸다.  그는 쓰러진 두사람을 튜브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곧  유리관 안으로 각종 전선과 주사바늘이 꽂혔고, 황갈색 액체가 관을 가득 채웠다. 
  " 엑스컬리버, 대답하라. 너의 정체를, 그리고 이  기지의 정체를. 또 왜 네가 내 명령에 따르는지를."
  두사람을 튜브에 넣은 영훈은 털썩 주저앉으며 엑스컬리버에게 물었다. 그의 정면에 있던 가장 큰  스크린이  켜졌다. 화면에는 동그라미안에 M자를 넣은 문양이 나타났다. 
  ‘ 저건 무우대륙의 문양! 그렇다면 이곳은 전설에  나오는 무우인의 기지란 말인가. ‘
  그는 기자 시험을 볼 때 공부했던 무우대륙에 대한 지식을 다시 기억했다. 태평양에 있었다는 전설의 대륙 무우.  동그라미 속에 M자를 넣은   모양의 문양이 태평양 해저의  고대 유적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은 대서양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태평양에도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무우대륙이 존재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영훈은 스핑크스에 침입했을 때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빼냈던 단어들을 기억해냈다. ‘역자장포’,’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인류 말살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라는 단어들이었다. 분명히 스핑크스는 무우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화면에는 커다란 지도 한장이 비춰졌지만  화면에  나타난 지도는 지금의 세계지도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지금보다 조금 가까이 붙어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 사이에 인도만한 크기의 대륙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에 그린란드보다 더 큰 땅덩어리가  표시
되어 있었다.  
  " 이건? "
  [ 약 3만년 전의 지구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 사이에 있었던 것이 우리 무우인이 살던 무우대륙이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었던 것이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이 있던 아틀란티스 대륙입니다. 엑스컬리버는 무우인이 세운 비밀기지의 주 컴퓨터입니다. ]
  " 비밀기지? "
  엑스컬리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많은 우주선과 미사일, 그밖에  영훈이 알지 못하는 신무기들이 불을 뿜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몇대의 우주선에는 영훈이 스핑크스 안에서 본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타고 있었다. 다른쪽의 우주선은  무우인이 타고 있었다.  
  날아가던 우주선에 광선포가 사격을 개시했다. 보랏빛  광선이 하늘을 갈랐다. 광선에 맞은 우주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로 흩어져 버렸다. 영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 저건 역자장포! ‘
  영훈은 역자장포를 본적이 있었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소련의 핵미사일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역자장포로  간단히 물리쳤던 것이다. 
  가슴에    문양이 그려진 붉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광선총을 들고 돌격해 들어갔다. 놀랍게도 무우인의  전사들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대단한 기술이군,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늘을  날다니. 중력을 제어하는 것일까? ‘
  영훈이 감탄하는 동안 화면에서는 쉭-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황색의 가스가 뿌려졌다. 광선총을 쏠 기회도 없이  무우인들의 살갗은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올랐고, 곧 녹아  흘러내렸다. 쓰러진 그들은 토사물과 배설물을 쏟아냈다. 살갗이 몽땅 녹아버려, 붉은 기가 도는 단백질  덩어리로  변해버린 이들이 얼마전까지 인간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 저건 단백질분해 바이러스! ‘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뽑아냈던 단어들이 점점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류 말살계획’과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란 말은? 그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엑스컬리버의 설명이 이어졌다.
  [ 무우인은 지구인의 직계조상으로 약 20만년전에 처음 지구에 나타났고, 무우대륙에서 문명을 형성한 것은 약  4만년 전의 일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3만년전에 무우대륙은 최고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현재 지구인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핵융합 에너지의 합성에 이미  성공했고,  정신으로 감응하는 정신감응컴퓨터를 만드는데도 성공했습니다. ]
  화면에 거대한 컴퓨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방에 설치되어 있는 엑스컬리버의 열배쯤 되어보이는 큰 규모의  컴퓨터가 세개 설치되어 있었다. 
  [ 세개의 컴퓨터는 서로 이어져 하나의  컴퓨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우대륙의 주 컴퓨터의 이름은  [에호바]입니다. ]
  영훈은 뒤통수를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에호바]는 [여호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 아틀란티스 대륙의 주 컴퓨터였고, 아틀란티스가 멸망한 후 바이러스의 유전자 속에 숨었다가 스핑크스로 부활한  컴퓨터의 이름은 [싸이탄]입니다. [싸이탄]의 능력은 [에호바]의 천배에 달합니다. ]
  이제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싸이탄]은 [사탄], 바로 성경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이 아닌가.
  [ 놀라셨지요. 세계에 퍼져 있는 홍수의 전설은  아틀란티스 대륙과 무우대륙의 멸망이 전해진 것입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무우인에게서 [에호바]란 단어가 전해져 기독교의 신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인간의 조상인 무우인을 멸망시킨 [싸이탄], 즉 [사탄]은 악마의 이름이 되었지요.  아틀란티스와 무우의 대전쟁이 전설로 내려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
  뒷쪽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영훈의 뒷편 오른쪽에  있던 세개의 화면이 일제히 켜졌다. 영훈이 들어온 해저동굴로 잠수복을 입은 두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신감응으로  전해오는 엑스컬리버의 음성이 영훈에게 들렸다.
[ 침입자 발생. 침입자에게서 생명반응 있음.  지구인으로 추측. 3,7,8번 방어장치 작동. 전원 사살하겠음. ]
  화면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훈은 그들이 입고 있던 잠수복을 알아보았다. 분명히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소연과 아리오네였다. 
  " 멈춰, 엑스컬리버. 저들은 우리의 동지다. 스핑크스에게서 쫓기고 있단 말이야. "
  등 뒤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조그만 소리가 나며  엑스컬리버의 소리가 들려왔다.
  [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의 주인인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방어장치를 해제하고 침입자를 컴퓨터실로  안내합니다.  12번 동굴에서 물을 뺌. 4번, 9번 출입구 개방.  ]
  ‘ 소연과 아리오네가 왜 해상에서 이리로 들어오려는걸까? 혹시라도 스핑크스의 비밀경찰 [아레스]가 우리를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두사람이 무사한 것에, 특히 소연이 안전하다는데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는 의료튜브 안을 살폈다. 유리관을 채웠던 황갈색 액체는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두사람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출혈은 멎었고, 상처도 점차 아물고 있었다. 엑스컬리버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 기원전 3만년전에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에 정착하고는 급속히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나타나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운나쁘게도 그들의 과학력은 우리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
  ‘ 음… ‘
  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광선총을 겨누며 들이닥쳤다. 영훈은 무의식적으로 손을들었다가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렸다. 소연과 아리오네였다. 두사람은 방안의 컴퓨터 시설과 영훈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했다.  영훈은 두사람에게 엑스컬리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리오네의 얼굴이 어두워져갔다. 
  ‘ 스핑크스가 이곳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핑크스가 두려워하는 어떤 것이 이곳에 숨어있을 줄 알았어. 이곳에만 오면 스핑크스를 이길 무기가 있을줄만 알았는데 , 엑스컬리버를 만든 무우인들도 스핑크스에게 멸망했다면  엑스컬리버를 가지고 스핑크스에게 이길 수가 없잖아. ‘
  의료튜브쪽에서 작은 물체가 튀기는듯한 톡톡-하는 소리가 긴장한 영훈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의료튜브안의 액체는 짙은 파란색으로 바뀌어있었고, 언제  다쳤느냔듯이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었다. 곧 튜브의  문이  열리며 혜진과 영상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리오네와 소연이 달려가 그들을 안아일으켰다. 축늘어진 눈까풀을 약간 떨며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구만. "
  영훈은 혜진과 영상에게 다시 설명했다. 해저동굴에  들어와서 엑스컬리버를 발견한 이야기,  엑스컬리버에게서  들은 아틀란티스인과 무우인의 전쟁이야기…
  엑스컬리버는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영훈을 제외한  나머지 네사람도 정신감응으로 엑스컬리버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아틀란티스인은 무우인에 대해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무우의 과학력도 발달했지만, 엄청나게 발달한 무기를 지닌 아틀란티스인의 공격에 우리 무우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우의 전사들은  [싸이탄]의  역자장포와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무우의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사방으로 튀기며 불기둥은 하늘을 궤뚫었다. 잠시후 아틀란티스  대륙에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곳곳의 산봉우리는 용암을 내뿜고, 일렁이는 바다는 커다란 땅덩어리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듯이 높은 파도로 사방을 휩쓸었다. 잠시후, 아직  연기를 내뿜고 있는몇개의 섬을 남긴채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 무우대륙의 동력은 [에호바]가 제어하는 핵융합  반응로였습니다. 어떠한 공격수단도 먹혀들어가지 않자 무우인들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무우대륙의 핵융합 반응로에서 나오는 동력을 모두 모아 거대한 에너지빔으로 바꾸어  아틀란티스를 폭발시키려 했던거죠.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틀란티스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를 싣고  무우대륙으로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3000발의 수소폭탄을 실은 미사일과 함께였죠. ]
  ‘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 ‘
  영훈은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부르튼 입술을 한손으로 매만지던 그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빼낸 단어중에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 아까의 전투장면에서 무우의 전사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셨겠죠? 그들은 특수한 장비가 있어서  하늘을  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우인들은 원래부터 하늘을 날 수  있었고, 텔레파시와 투시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너지 빔을 투사해 물체를 파괴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또한 그때만 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유류는 모두  투시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 초능력? ‘
  엑스컬리버는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믿어지지 않겠지만, 무우인은 누구나 원래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구인에게는 초능력이지만,  무우인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보통 감각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무우인에게 있었던 능력이 그  후손인 지구인에게서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핑크스의 전신인 [싸이탄]이 만들어낸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포유류도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의  후유증으로 투시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
  듣고 있던 혜진이 펄쩍 뛰었다. 스핑크스가 혜진과 그녀를 노렸던 가장 큰 이유는 혜진이 인간의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시키는 아테니움을 발견했고, 영카우의  손에  죽은  장정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과거에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했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던가. 더우기 인간 유전자의 80%는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한 흔적이었다. 
  혜진은 천천히 CIA의 비밀 연구실에서 연구했던 결과를 되새겼다.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했고, 혜진이 발견한 아테니움은 파괴된 유전자를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 아테니움을 투여해서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한  동물은 투시력을 지니게 되었다. 장정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과거의 망가진 유전 정보를 되살려낸 쥐가 투시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은 과거에는 투시력이 시각이나 후각과  같은 보통 감각이었다는 말이 돼요. 어떠한 이유에선지 투시력의 유전자가 파괴되었던거죠. ‘
  혜진은 엑스컬리버의 말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스핑크스의 전신이었던 [싸이탄]은 지구인의 조상인  무우인의 유전자를 파괴했고, 지구인은 그 파괴된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혜진이 입을 열었다.  
  " 우리들 지구인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능력의 3%도 다 쓰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가진 능력중에서 3%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스핑크스, 아니 [싸이탄]이 지구인의 유전자를 대부분 파괴해버려서 그랬던 거여요.  유리겔러같은 초능력자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파괴되었기 때문에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유전자를 되살리는 아테니움이  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아시겠어요? "
  " …… "
  " 아테니움은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한다. 그렇다면 아테니움을 투여한 사람은 과거의 무우인처럼  텔레파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고, 투시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하늘을 날고 에너지 빔을 투사해 공격할 수도 있지요. 스핑크스는 이것을 두려워 했던 거여요. "
  " …… "
  심장이 약한 아리오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영카우와 스핑크스를 속이려 인공적으로 심장박동을 정지시켜 죽은척한 후로 그녀의 심장은 별로 튼튼한 편이 못되었다.  엑스컬리버는 계속 설명해나갔다. 
  [ 무우인들은 주 컴퓨터 [에호바]를 움직여 핵융합 반응로에서 나오는 동력을 모두 모아 아틀란티스로  발사했고,  그 에너지를 직통으로 받은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았습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주 컴퓨터 [싸이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우대륙  역시  아틀란티스에서 발사한 3000발의 수소폭탄을 맞고 날아가버렸습니다. 무우인은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에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의 유전자도 파괴되었습니다. 아틀란티스와 무우의  전쟁은  서로의 철저한 멸망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

  화면에는 다시 지구지도가 나타났다. 아틀란티스와 무우대륙이 모두 사라진 현재의 지구지도에 푸른점이 반짝였다. 지구의 남쪽 끝, 남극대륙이었다. 
  [ 아틀란티스와의 전쟁에서 무우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우인은 남극에 비밀기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동력이  문제였습니다. 남극의 비밀기지에 설치했던 핵융합장치가 고장나자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겁니다. 남극기지에는  [에호바]와 같은 거대한 컴퓨터가 없었던겁니다. 그래서 남극 비밀기지의 무우인은 전원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언젠가는  핵융합장치를 고칠 기술을 지구인이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남극대륙이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같은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렸다. 거대한  얼음평원은  쭉쭉 갈라지고, 갈라진 크레바스 사이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아령 모양의 두대의 큰 우주선과 납작한 원반  모양의  작은 우주선 다섯대가 날아오르자마자 갈라진 틈에서 시뻘건 용암이 넘쳐흘렀다. 얼음이 녹아 끓어 발생하는 수증기로 얼음평원은 뿌옇게 뒤덮였고, 수증기 틈사이로 보이는 용암은 마치 악마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수증기와 용암으로 뒤덮인  남극대륙을 뒤로하고, 일곱대의 우주선은 북쪽으로 향했다. 
  [ 서기 397년에 발생한 남극의 화산폭발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완전히 파괴했지만, 기지의 자동방어시스템은 비상용 탈출우주선을 발진시켰습니다. 동면장치가 파괴되는  바람에 동면중이던 대부분의 무우인이 죽고 겨우 여섯명만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일곱대의 우주선은 한국의  동해로  향했습니다. 운나쁘게도 그때 동해 해상에는 강력한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여섯명의 무우인이 탄 두대의 우주선은 태풍의 중심부에 형성된 강한 난기류에 휘말려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
  영훈들이 방금전까지 보트를 타던 문무왕 수중릉 앞바다가 나타났다. 아령 모양의 두대의 우주선에서 각종  건설기계와 로봇이 나와 작은 해상기지를 만들었다. 모두 완성되자 섬으로 위장한 해상기지는 천천히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 추락한 두대의 우주선에 타고 있던  여섯명의  무우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머지 우주선에 실려있던 컴퓨터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였습니다. 남극기지가 파괴되면  자동적으로 탈출우주선을 발사해 다른곳에 제 2의 비밀기지를  만들도록 프로그램되어있었던 겁니다. 물론 남극기지의  주  컴퓨터인 엑스컬리버도 이곳으로 이동해왔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동해의 비밀기지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
  영훈은 이동윤 교수가 보여준 [유기]의 내용을 다시  기억했다. 
  ‘ 내물왕 42년 5월 계림 앞바다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사흘  동안  없어지지 않다. 하늘을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아 다니다 두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다. 죽은 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친 채 나와, 왕궁으로 모시고 극진히 치료했으나 일 주일 만에 죽다. 근처의 나뭇군이 글씨가 적힌 이상한 하얀 쇠 거울을 신선의 선물이라며 왕에게 바치다. 쇠로 만든 새가  떨어져 죽은 근처에서 팔 없는 아이가 태어나다. 왕은 신이 노한 탓이라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만 머리가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다. 왕은 신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탓이라 여겨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산을 불태우다. 내물왕 42년  7월.  계림 앞바다에 다시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이상한 짐승들이 바다 속을 들락날락하고  섬을  만들다. 섬은 바다에 닷새 동안 떠 있다 가라 앉다. ‘
  영훈은 스물여섯차례나 이 비밀기지를 찾으려  잠수했지만 막상 [유기]의 내용이 사실로 다가오자 무서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금속판에 눈길을 돌렸다.
  [ 당신이 들고 있는 금속판은 이기지의 컴퓨터를  시동하기 위한 시동장치로, 추락한 두대의 우주선에 타고있던 여섯사람의 무우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 금속판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진 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
  " [엑스컬리버], 너도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컴퓨터인가? "
  [ 그렇습니다. 엑스컬리버는 [에호바]나 [싸이탄]과  같이 생각하는 초자아 컴퓨터입니다. 바이러스 속에 숨어있던 [싸이탄]의 설계도를 그대로 만든 스핑크스 컴퓨터도 역시 초자아 컴퓨터입니다. 그러나 [싸이탄]은 [에호바]의 천배의  성능을 지녔습니다. 엑스컬리버의 능력은  [에호바]의  십분의 일입니다. ]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능력은 엑스컬리버의 만배… 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엑스컬리버로 스핑크스를 이길  수는 없어…
  화면에는 동해의 비밀기지를 건설하는 장면이 계속 비춰지고 있었다. 해상기지를 건설하고 고압선을 배선하고 지하 굴착작업을 하는 작업용 로봇을 보는 순간 영훈은 로봇의 얼굴이 굉장히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푹 꺼진 눈자위에  뚜렷한 콧날, 날카로운 입매와 턱선. 
  ‘ 저건 틀림없는 이스터 섬의 모아이! ‘
  영훈은 KBC방송에 있었을 때 이스터섬의 기획취재를  담당한 적이 있다. 섬 전체가 모래로 이루어진 볼품없는  이스터섬에 군데군데 누워있는 붉은 화산석으로 만든 거대한 석상. 큰 것은 20미터가 넘는 석상들은 해안가에서 바다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다. 섬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석상을 만들만한 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를 타고 나가야  돌을  구할 수 있는 모래섬에서 고대 이스터인들은 무슨 이유로  거대한 석상인 모아이를 세웠을까? 
  이스터섬의 전설에 따르면 모아이는 스스로 서서 걸어다녔다고 한다. 기획취재때 같이 갔던 고고학  교수는  외계인이 세운 고대 문명의 유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영훈은 믿지  않았었다. 
  [ 태평양에 있는 폴리네시아 군도는 무우대륙이  아틀란티스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을 때 가라앉지 않은 몇 안되는  땅입니다. 무우대륙이 가라앉았어도 소수의 무우인들은 이스터 섬을 비롯한 폴리네시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된 무우인에게 있어 예전의 무우문명은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무우인의  후예인 이스터인들은 그들의 선조가 사용했다는  로봇의  모양을 딴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습니다. 무우에서는 로봇을 ‘무우의 움직임’이라는 뜻의 [무우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무우이]라는 이름은 [모아이]로 바뀌었지요. ]
  영훈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30년간 배워왔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영훈에게 더욱 낯익은 장면이 나타났다. 잉카문명의 전설의 유적 마추피추였다. 마야인이 세웠던 쿠쿨칸의  피라밋과 티칼 신전도 비춰졌다. 
  [ 무우인은 태평양 연안으로 흩어져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신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야의 신은 ‘날개달린 뱀’이란 뜻을 가진  ‘쿠쿨칸’이란 신인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하늘을 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잉카는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 태양신도  사람의 모습에 하늘을 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무우인이  초능력으로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기억이 잉카와 마야에서 하늘을 나는 신의 전설로 바뀐 것입니다. ]
  " 설마… "
  소연은 머리를 가로저었지만 엑스컬리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나 강한 충격에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훈도 엑스컬리버의 설명에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차 있었다. 뉴욕의 스핑크스 컴퓨터에 침입했을 때 영상과 그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속에서 많은 단어를 빼냈다. ‘역자장포’,’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인류 말살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라는 단어들이었다. 그 단어의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은 엑스컬리버의 설명으로 드러났다. 아틀란티스인들은  무우인과의 싸움때 ‘역자장포’와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를  사용했고, ‘무우인의 반격’때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단어인 ‘인류  말살계획’과  ‘실험용 인류 탈출,제거에 실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네사람이 엑스컬리버의 설명을 듣는 동안 혜진은 엑스컬리버가 놓여있는 컴퓨터실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치료했던 의료튜브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유리관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튜브의  안쪽에  정밀한 자기장 발생장치가 달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류가 자력선을 치료목적으로 이용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고대 중국의 의학자들은 머리를 동쪽에 두고 자면  건강에 좋다고 하였는데, 신체를 지구자기의 방향에  맞춰  자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자석으로 목걸이나  벨트를 만들어 지니고 다니거나 자석요, 자석베게를 만들어서 치료에 이용하기도 했다. 몇년전인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이든 부모님께 최대의 효도는 자석요를 선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97년 노벨 의학상은 강력한 자기장에서  세포의  성질이 달라지는 사실을 발견한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진에게 돌아갔다. 지구자기의 수만배 자기장을 걸어주면,  분열능력과 파괴된 세포가 회복되는 능력이 놀랄만큼 커진다는  것이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진에 의해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혜진도 유전공학연구소에 있을때 자기장 실험장치를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장을 제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기장의 방향과 세기를 정확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세포에  있어서 치명적이 될 수도 있었다. 유전공학 연구소의 실험은 파괴된 많은 세포를 회복시켰지만, 정상적인 세포가 자기장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래서 연구진들은 강력한 자기장으로 인간을 치료하는 방법은 개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튜브 안에 투입되는 액체는 세포를 치유시키는 효소를  함유하고 있었다. 의료튜브는 엑스컬리버에 의해 정밀하게  제어되는 강력한 자기장과, 파괴된 세포를 치유시키는  효소를 가지고 혜진과 영상을 치료했던 것이다. 혜진은 무우인의 생물학과 의학수준에 새삼 놀랐다. 
  ‘ 자력선! ‘
  무우인이 자력선을 고도의 기술로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혜진에게 기발한 생각을 제공했다. 여기에 한두가지만 결합시킬 수 있다면… 
  그녀는 컴퓨터실 뒷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향했다. 문앞에 서자 문이 스르르 열렸고,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컴퓨터실에 있던 기계들과 달리 이곳의  기계들은  파이프와 시험관, 압력튜브와 색깔있는 여러가지 액체가 말라붙은  자동플라스크로 가득차 있었다. 고대 무우인의 생화학  실험실이었던듯 싶었다. 
  튜브 뒷쪽에는 계기판과 여러개의 관이  연결된  사각형의 기계가 보였다. 스무개의 시험관이 달려있고 작은 컴퓨터 화면이 튀어나와 있는 장치는 분명 자동 유전자 분석장치였다.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와 CIA의 비밀 연구실에도 그런  장치가 있었지만 무우인의 자동 유전자 분석장치는 한국과  미국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나아보였다. 화학분석에 필요한 풍차모양의 원심분리기와 0.00001%의 미량성분도 검출해낼 수 있는 크로마토그래피 장치도 있었다. 구석을 들여다 본 혜진은 그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버렸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실험장치는 DNA의 재료인  뉴클레오티드를 인공적으로 이어주는 효소인 DNA 폴리머라제와 리가제를 사용해서 컴퓨터가 설계한대로 유전자를 합성해주는 인공 유전자 합성장치였다! 인공 유전자 합성장치는 유전공학의  최첨단을 걷는 일본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한 장치였다. 
  ‘ 이정도의 실험장비만 있으면 파괴된 인간의 유전자를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어. 문제는 옛날 무우인의 유전자  견본을 구하는건데… ‘
  혜진은 납작한 선반위에 있던 플라스크에 눈길이 갔다. 수천년이 지난 플라스크 밑바닥에는 말라붙은 검붉은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건조해 부스럼딱지처럼 말라붙은 찌꺼기는 틀림없는 인간의 피였다. 
  ‘ 무우인의 피! 그렇다면 여기서 무우인의 유전자  견본을 추출할 수 있어. 스핑크스가 가장 두려워하던 건 인간이  초능력을 가지고 스핑크스를 공격해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장비를 가지고  무우인들은  왜 유전자를 고치지 못했을까? ‘
  [ 스핑크스가 뿌린 바이러스가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라는것을 알아차린 것은 무우대륙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무우인들이 남극기지로 대피한 후였습니다. 남극기지안의 무우인중에서는 유전공학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남극기지의 무우인은 유전자를 복구하려 갖은 시도를 다 해보았지만, 전문가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성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혜진씨가 보고 있는 장비는 무우인들이 유전자를 복구하려 설계한  실험장치들입니다. ]
  " 엑스컬리버, 너는 나의 마음을 읽는구나! "
  갑자기 엑스컬리버의 소리가 들려오자 혜진은 허공에 대고 부르짖었다. 
  [ 엑스컬리버는 정신감응 컴퓨터입니다. 혜진씨가  텔레파시를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혜진씨가  생각하는 어떠한 생각도 제게 바로 입력이 됩니다. ]
  " …… "
  [ 혜진씨 정도라면 유전자 복구작업을 할 수 있겠지만, 현재 이 기지의 동력장치는 고장이 난 상태입니다. 비상용  원자로를 가동시켜서 엑스컬리버는 움직이고 있지만  기지안의 다른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주 동력장치인  핵융합  반응로를 가동시켜야 합니다. 엑스컬리버의 능력으로는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없습니다. ]
  " 핵융합 반응로를… 지구인의 손으로는  도저히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없어. 이젠 끝이야… "
  혜진은 얼굴을 싸쥐고 주저앉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리오네였다. 
  " 지구인의 손으로도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있어요. 기운을 내세요, 혜진씨. "
  " 우리 지구인이 핵융합에 성공했다는  말씀인가요?  믿을 수 없어요. 용기를 주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
  " 사실이에요. 우리는 동력을 얻어 이 기지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될거여요. "
  아리오네는 긴 금발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담갈색의 눈으로 혜진을 바라보았다. 
  " 곧 우리는 스핑크스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

  Part VIII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2001년 9월 1일 일본 교오토오. 
  검은 머리의 소련 태생 림스키 나르시코프는 늘  하던대로 아내 올가에게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자신의 아파트 문을 나섰다. 주차장에는 자신이 탈 빨간색의 자동조종 자동차가 서있었다. 그는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자동조종장치를 켰다. 나르시코프의 근무처인 001지구 KT행정청까지는 자동조종 자동차로 10분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반쯤 열린 창으로 불어들어왔다. 그의 눈에 [001지구 KT-289블럭]이라고 쓰인 버스정류장 표시판이 들어왔다. 
  ‘ 제길, 빌어먹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  같으니라구. 001지구가 다 뭐야? 세계국가를 건설해? 우리 소련을 폐허로 만들어놓고? ‘
  그는 욕지거리가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꾹 눌러버렸다. 자동조종 자동차 안에 스핑크스의 고성능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인들이 세운 세계국가 [올림포스]는 지구를 337개로 나누어 001지구에서 337지구까지 번호를  붙여  통치했다. 각 국가의 지구번호는 스핑크스에게 항복한 순서대로 붙여졌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항복한 일본이 001지구, 가장 끝까지 저항한 한국은 337지구였다. 지구번호 뒤의 두개의  영문자는 도시를 나타내는데, KT는 KYOTO, 즉 교오토오를 나타내는 약자였다.
  001지구 KT행정청은 교오토오 역 맞은편의 타워빌딩에  있었다. 1964년 건립당시의 교오토오 인구가  131만명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높이 131 미터의 전망대가 있었지만 스핑크스는 그 전망대를 철거하고 그 위에 거대한 인공위성 안테나를 달아 KT지역 전체의 통신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는 [정보부]라는 팻말을 힐끔 쳐다보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나르시코프는 KT지역의 비밀경찰 [아레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책상위에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세대의  화상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빨간색은 KT지구의 아레스 대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는 전화였다. KT행정청의 다른 기관과의 업무연락도 빨간색 전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노란색은  공무가 아닌 개인적인 용도로 쓰이는 전화인데 거의 아내  올가에게 전화하거나 아내의 전화를 받는데에만 쓰였다. 마지막  하나의 전화기는 그가 아레스의 지부장이 된 후 한번도 울린  적이 없는 전화였다. 파란색 전화기는 스핑크스의 직접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전화였다. 
  전화기 옆에는 부하대원들이 미리 갖다놓았는지 세건의 비밀 보고서가 놓여있었다. 각 장마다 [극비, 복사본  없음]이라고 쓰여져 있었지만 나르시코프는 코웃음을 쳤다.  극비에다가 복사본은 없을지 모르지만 아틀란티스인들의 뒤에 도사린 거대한 괴물 스핑크스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레스]의 모든 정보를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그는  노란 종이에 찍힌 책상위의 보고서를 들춰보았다. 
  첫 보고는 스핑크스가 뉴욕과 교오토오 두곳에 짓고  있는 새로운 생물학 연구소에 관한 것이었다. 스핑크스가 짓는 연구소는 대부분이 공개적이었으나 이번 것만은 유별나게 비밀리에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더우기 공사에  참여한  인력은 모두 아틀란티스인이었으며 지구인은 현장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뉴욕에 짓고있는 생물학 연구소도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건설되고 있었다. 
  ‘ 이상하다, 아틀란티스인이 직접 연구소를 지어?  연구소의 내용이 그토록 지구인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
  비밀경찰 아레스의 KT지역 책임자라는 자리로 본다면 당연히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편을 들어야 하지만 나르시코프는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스핑크스가 발사한 핵미사일에 전멸당한 키에프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그때 모두 죽었다.
  스핑크스는 지구를 통치하는데 그지역 사람을 잘 쓰지  않았다. 특히 비밀경찰 아레스의 우두머리는 전부 그지역 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앉혔다. 지역 사람을 아레스의 우두머리로 앉혀놓으면 그지역 사람들을 선동해서 반대로  스핑크스에게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스핑크스가 점령하기 전에 캘리포니아라고 불리우던 236지구에서는 그지방 사람이었던 아레스 책임자가 지역 주민들을 규합해  스핑크스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국인이고 KGB 교오토오 지부장이었던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의  책임자로서 안성마춤이었다. 
  그는 두번째 보고의 표지를 넘겼다. 75지구 아레스 지부에서 보내온 폭동 진압의 보고였다. 예전에 나이지리아였던 75지구는 스핑크스에게 대항하는 독립운동단체인 [자유의 친구들]의 본거지였다. 
  [자유의 친구들]은 아틀란티스인의 지구 지배에서  벗어나 지구 독립을 외치는 무장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라야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빼앗은 광선총  몇자루밖에 없지만 그들의 성과는 눈부셨다.  74지구(이집트)와  91지구(시리아)에서는 스핑크스의 통신센터를 파괴했고 236지구(캘리포니아)에서는 아레스의 우두머리를  포섭,  비밀경찰들과 함께 스핑크스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어켰었다. 무자비한  탄압이 그 뒤를 휩쓸었지만 [자유의 친구들]의 세력은 계속 커져만 갔다. 보고서를 읽어가던 나르시코프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의 독립운동단체에 무자비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스핑크스가  75지구(나이지리아)에 가한 보복은 너무도 엄청났다. [자유의 친구들]의 본부가 75지구에 있다는 것을 안 스핑크스는 서유럽에 설치되어 있던 핵미사일을 75지구에 발사했던 것이다. 8천명의 나이지리아인이 죽고 수만명이 부상당했거나 방사능에 오염됐다. 
  " 저주받을 스핑크스… "
  나르시코프는 주먹을 불끈쥐었다가 곧 폈다. 책상위의 화상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일을 하다가 들킨 소년마냥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는  전화기에 눈을 돌렸다. 
  ‘ 설마 스핑크스가 지금의 내 말을 도청하고 파란  전화를 건 것은 아니겠지? ‘
  다행스럽게도 노란색 전화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내 올가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당신 좋아하는 요리를  해놓을테니까요. 오늘이 우리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라는 거 기억하시죠? "
  " 물론 기억하고 있지. 오늘은 다섯시쯤 들어갈께.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 결혼 10주년이면 올가도 벌써 서른살이군. ‘
  그는 결혼 10주년이 아닌 올가의 나이를  먼저  기억했다. 그는 올가의 생일날에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때 나르시코프는 서른살의 소련대사관 외교관, 올가는 대사관에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던 스무살의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나르시코프의 부모가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희생당했으면서 그가 스핑크스의 앞잡이인 아레스의 우두머리가 된 것도 아내 올가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은  KGB요원이었던 나르시코프에게 아레스의 우두머리와, 자신과  아내의  죽음 두가지중 하나를 강요했다. 자신뿐이라면 KGB의  정예요원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겠지만 아내 올가를 살리기 위해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택했던 것이다. 
  세번째의 보고를 막 읽으려 할 때 다시  책상위의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붉은색 전화였다. KT-912블럭에  나가있던 부하대원의 보고였다. 
  "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지구인으로 변장한 두사람의 아틀란티스인이었습니다.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반항분자를 잡으려는  중이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을 변장을 했어?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조직을 잡아내기 위해서라고? ‘
  하지만 반항분자를 잡아내는 일은 모두 아레스가 맡지  아틀란티스인이 직접 나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들 사이에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 자체가  드문 것이다. 
  그는 지도에서 아틀란티스인이 잡힌 KT-912블럭을  찾아보았다. KT-912블럭은 스핑크스가 짓고 있는 생물학  연구소가 들어있는 블럭이었다. 
  ‘ 그렇다면 생물학 연구소를 짓고 있던  아틀란티스  기술자? 하지만 기술자가 지구인으로 변장을 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 사이에 섞여 변장을 했을 때는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가 지구를 점령하던 첫날,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를 점령하기 위해서 테리라는 아틀란티스인이 빨강머리의 지구인으로 변장했을 때 딱 한번뿐이었다. 구태여 그들이 지구인으로 변장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두사람의 아틀란티스인은 무엇때문에 지구인으로 변장했을까? 
  화상전화기에 광선총을 들고 있던 대원과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났다. 나르시코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 당장 풀어줘. 우리는 아틀란티스인의 통치에 따르게  되어있어. 어떠한 경우라도 아틀란티스인의  연행을  허용되지 않아. "
  전화는 곧 끊어졌지만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KT행정청의 청장 이토오 요시히데였다. 
  " 정신이 있는겁니까, 없는겁니까? 아틀란티스인을 연행하려 하다니. 당장 청장실로 오세요. "
  빨간색의 화상전화기에서 이토오의 얼굴이 사라지자  나르시코프는 코웃음을 쳤다. 일본인은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하다. 등뒤에 칼을 감추며 상대에게 수없이 절을 하는 교활한 민족이 바로 일본인인 것이다. 
  이토오는 그 속성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남자였다. 나르시코프야 부인까지 죽이겠다고 해서 할수없이  아레스를  맡고 있지만, 이토오야말로 아틀란티스인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지구인들을 처형되게 한 사람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의 앞잡이 중 많은 사람이 일본인이지만 이토오만큼 헌신적으로 제  동포를 처형되게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토오는 그  댓가로 KT행정청의 청장을 맡게 된 것이다. 
  나르시코프는 청장실에 불려가서 한참동안 이토오와  핏대를 올리면서 싸웠다. 아틀란티스인에게 무조건 굽실대는  이 교활한 일본 늙은이는 나르시코프에게 마구 화를 내면서, 그동안 아레스의 책임자로서 나르시코프가 한 일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보고를 위해 들어온 부청장이 아니었으면 두사람은 하루종일 싸울뻔 했다. 
  기분을 잡친 나르시코프는 KT행정청의 지하 1층에  마련되어 있는 수면실에 들어가 타이머를 맞추고  침대에  누었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망쳐진 기분을 좀 풀어보려는  생각에 잠이나 좀 자두려는 생각에서였다. 곧 이마에  작은  전극이 내려왔고 그는 인공수면기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휴식실을 나온 것은 오후 8시쯤이었다. 타이머를  잘못 맞춘 바람에 무려 9시간씩이나 자버린 것이다.  막  해가 져 어둑어둑한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며 나르시코프는 세번째 보고서를 읽지 않았던 생각이 났다. 아내 올가가  결혼기념일이라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던 생각이 났다.
  ‘ 내가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동안 올가는 전화를  몇번씩이나 했겠지. 화가 단단히 났겠는데? ‘
  그는 세번째 보고서를 건성으로 읽기 시작했다. 눈은 글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마음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올가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도 식사를 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한장의 노란 종이에 찍힌 세번째 보고서는  짧았다.  후딱 읽어버려야지 하고 내용을 읽던 그의 시선이 점차 느려졌다. 몇 글자 안되는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 22일전부터 KT지역에서 아홉명의 실종자 발생. 
    실종자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 곳에도 없음.   
    실종자의 공통점은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까지의 
    여자로 그 이외의 공통점은 전혀 없음. 
    [자유의 친구들]의 납치는 아닌 것으로 추측됨. ]
  보고서 뒷면에는 다른 곳의 아레스 지부에서의 보고도  같이 붙여져 있었다. TK지역(동경)이 열두명,  OS(오사카)지역이 여덟명, NK(나고야)지역이 네명, YH(요코하마)지역이  일곱명, 그밖의 도시지역에서 스물한명, 농촌지역에서  열네명이 실종되었다. 실종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의 여자라는 점뿐이었다. 
  ‘ 뭔가 이상한걸? ‘
  오랜 KGB생활로 단련된 그는 뭔가 큰 사건의 낌새를  눈치챘다. 
  ‘ 미안하지만 올가, 오늘은 들어갈 수 없겠는걸? 큰  사건의 냄새를 맡았어. ‘
  아내에게전화하려 노란 화상전화기를 들던  나르시코프는 화면 아랫쪽에 나타나는 글자를 읽었다. 그가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동안 올가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에 녹화되었던 올가의 통화내용이 나타났다. 
  " 도대체 어딜 가신거여요? 오늘만은 다섯시에 들어오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걸께요. "
  화면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나타났다. 
  ‘ 내가 늦으니까 올가가 두번씩이나 전화했던 모양이군. ‘
  올가의 두번째 통화내용이 녹화되어 비춰지기 시작했다.  
  ‘ 보나마나 안들어온다고 또 화내는 전화겠지. ‘
  라고 생각하고 손을 뻗쳐 스위치를  끄려던  나르시코프는 화면에 나타난 올가의 표정에 가슴이 철렁했다. 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나르시코프, 구해줘요. 누군가가 나를… "
  녹화화면에 나타난 올가의 얼굴은 곧 지익-하는 잡음과 함께 끊어져 버렸지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는 것을 나르시코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녹화화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는 장면을 여러번 보았다. 마취제가 든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KGB가 사람들을 납치할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아내가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화상전화기를  호출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파트로도 전화했지만 그곳 역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빨간색 화상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설마 납치를?
  " 곧 내 아내 올가를 찾아줘. 지급으로! "
  전 부하대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르시코프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몸을 털썩 던졌다. 
  ‘ KT지역에서 아레스가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  아레스는 KGB보다도 더 우수한 비밀경찰이란 말이야. ‘
  그는 자신에게 되뇌였지만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섞여서 맴돌 뿐이었다.
  두시간쯤 후에 빨간색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수색을 총지휘한 부지부장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 죄송합니다만 사모님의 행방은 저희로서도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단서도 남지 않은채 실종된 것  같습니다. "
  ‘ 실종… ‘
  노란색의 보고서에 쓰인 ‘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까지의 실종자 아홉명 ‘ 이란 글귀가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냉정한 전 KGB요원 나르시코프는 극심한 충격에서도  필기구를 꺼내어 노란색의 보고서 아랫쪽에 한줄을 더 기입했다. 
  [ 9월 1일 10번째 실종자 발생. 올가. 서른살. ]

  KT행정청 건물에서 세블럭정도 떨어진 곳에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붉은 등을 앞에 내걸은 꼬치구이 전문점 [야마토(大和)]도 그중의 하나였다. 근처의 골목길을 건너온 남자가 퇴근시간의 직장인들로 북적대는 꼬치집 안쪽으로 들어섰다.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은 낮은 소리로  중얼대는 남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귀를 귀울였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성냥개비를 꺼내어 재털이 위에  걸쳐놓았다. 성냥개비의 나무는 옅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성냥머리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아가씨가 행주로 자리를 훔치다가  재털이에  걸쳐놓은 성냥개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가씨는 남자 앞에 물컵을 내려놓다가 잠시  휘청거렸다. 쟁반에 얹혀있던 잔돈이 떨어져 테이블 위에 굴러다녔다. 남자는 잔돈을 주워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남자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30대쯤  되어보이는 남자는 꼬치 안주에 정종한잔을 마시고는 꼬치집  [야마토]를 나섰다.
  남자는 옆 블럭의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자동차에  돌아와서는 차안의 불을 켰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은 50엔짜리가 한개, 10엔짜리가 두개였다. 그는 동전 아랫쪽의  발행년도를 살폈다. 50엔짜리는  1997년  발행이었고,  10엔짜리는 1998년과 1992년이었다. 
  ‘ 50곱하기 1997은 99850, 10곱하기 1998은 19980, 10곱하기 1992는 19920, 셋을 다 더하면 139750이군.  여기서  0을 하나 빼버리면 13975, 이 값을 제곱하면 195300625가  되지. 계산이 더럽게 복잡하군. ‘
  남자는 자신의 자동차안에 설치되어 있는 화상전화기의 단추를 눌렀다. 번호는 195-300-625번이었다. 화면에는 곧  예쁘장한 어린 아가씨가 나타났다. 앳띤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큰 귀걸이가 인상적이었다. 
  " 이집트 학술 조사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자료를 가지고 계신지요? "
  " 예, 조금 있습니다. 몇년도 자료가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
  " 1992년이 10권, 1997년이 50권, 1998년이 10권입니다. "
  어깨가 깊게 파인 반팔 옷을 입은 아가씨의  얼굴이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 그렇게 많은 자료는 없어요. 273-415-910으로  전화해보세요. "
  남자는  전화를  끊은  후에   자동차의   자동조종장치에 273-415-910이라고   좌표를   입력했다.   아가씨가   말한 273-415-910은 전화번호가 아니라 접선장소의 좌표였던 것이다. 
  ‘ 접선절차가 꽤나 치밀하고 복잡하군. ‘
  자동차를 타고 접선장소로 움직이면서 남자는 그들의 접선절차에 혀를 내둘렀다. 간신히  알아낸  접선절차는  꼬치집 [야마토]의 재털이에 옅은 회색과 짙은 보라색의 성냥개비를 올려놓는 것이 1단계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아가씨가 테이블에 동전을 떨어뜨리면 그중에서 50엔짜리와 10엔짜리를 집어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동전의 액면가와 발행연도를  곱해서 0을 하나 떼고 제곱하면 2단계로 접선할 상대의 전화번호가 나온다. ‘이집트 학술 조사’와 동전의 발행연도가  2단계 접선의 암호였다. 그곳에서 최종 접선장소의 좌표를  가르쳐주면 최종 접선장소에서 본부 요원들과 만나게 되어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린 길가에는 자동차의 왕래도 뜸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자동차도 그리 급하게 달리지는 않았다. 가로등은 없는 길이었지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으로도  충분히 계속 달릴 수 있었다. 
  한 20분쯤 가자 조그만 목조 신사가  나타났다.  신사에는 두채의 부속건물이 딸려 있었다. 작은 건물은 사람의 기척이 없었지만 큰쪽의 건물에는 반쯤 열린 창으로 불빛이  비쳐나왔다. 남자가 두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남자의 옆구리에 뭔가 조그맣고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허리에 겨눠진 것은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뺏은  광선총이었다. 
  두명의 무장 경비원이 광선총을 겨눈채 자동차를 타고  온 남자는 두손을 머리에 얹고 큰쪽의 건물로 들어갔다. 남자는 주머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장 경비원이 흠찟 놀라며 광선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가 꺼낸 것은  손톱만한 로마 동전이었다. 동전의 한쪽  구석에는  레이저로  새겨진 ‘PAX’라는 글자가 보였다. 절대로 위조할 수 없는 레이저 가공기술로 동전에 새겨진 ‘PAX’라는 단어는 ‘평화’라는  뜻의 로마 단어로, 이 로마 동전은 이들의 암호 증명서였던  것이다. 무장 경비원은 동전을 알아보고 웃음을 지었지만,  광선총을 늦추지는 않았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바싹 마르고 안경을 낀 사람이 금속탐지기로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조사했다. 주머니에 든 동전과 라이터, 열쇠꾸러미등 금속반응이 있는 물건은 모두  압수당했다. 
  금속탐지기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는 진공청소기같이  생긴 물체를 들이댔다. 전파탐지기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아레스의 도청장치나 위치탐지기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다른  몇명의 사람이 그가 타고온 자동차에서 같은 작업을  되풀이했다. 확인이 끝나자 두명의 무장 경비원이  남자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저는 [자유의 친구들]  일본 지부장 모리무라 스즈키라고 합니다. "
  스즈키는 허리를 가볍게 굽혀 절을 하며  남자를  맞았다. 남자도 허리를 굽혀 인사에 답했다. 
  " 저는 한국에서 온 이 영훈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스즈키는 순간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 이 영훈 기자…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는 지구를  지배하자마자 당신을 추적했어요. 모두들 당신이 스핑크스에게 당한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일단 앉으시지요. "
  영훈은 다다미 방에 앉았다. 꽃이 꽂혀있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영훈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위치가 동해의 문무왕 수중릉 근처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스즈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언저리는 굳어있었다. 
  " 사실이라면 당신은 지구인의 마지막  희망인  셈입니다. 몸조심 하십시오. 우리가 뭐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영훈은 양복 안감을 북 찢었다. 꿰메진 양복 안쪽으로  작은 종이 한장이 비닐에 넣어 붙여져 있었다. 그는 종이를 스즈키에게 내밀었다. 약간 너덜너덜해진 종이에는 한  미국인 남자의 신상명세가 적혀있었다.
  " 이 남자만이 핵융합 장치를 고쳐서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가동시킬 수 있습니다. 정식 이름은 제임스 타일이지만 주위에서는 제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아틀란티스인이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를 점령하고  소련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던 순간에 제다이는 핵융합의 모든  자료를 빼서 연구소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자유의  친구들]의 모든 조직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찾아내야 합니다. "
  " 알겠습니다. 다른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
  영훈은 말을 잠시 끊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 하나가  찻쟁반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스물 넷정도  되어보이는 여자는 찻잔을내려놓고는 뒷걸음질쳐서 나갔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어려보이는 얼굴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 제 딸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
  영훈은 스즈키를 똑바로 응시했다.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것이 무례에 속하지만 서양에서는 중요한 말을 할 때 상대방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훈이 중요한 말을 꺼내려는 것을 눈치챈 스즈키의 눈도 영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비밀경찰 아레스의 내부에 사람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것도 책임자급으로. "
  스즈키는 훅-하고 숨을 내쉬었다. 비록 동조자가 많은 [자유의 친구들]이지만 아레스 내부인물을 포섭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우기 책임자급이라면… 하지만 지구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 무우인의 비밀기지와 영훈 일행뿐이라면,  영훈의 이러한 부탁을 어떻게 해서든 들어주어야 한다. 
  " 하지만 무슨 작전을 세우고 계신거죠? 제가 알면 곤란합니까? "
  " 이건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작전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
  몇분간의 침묵이 영훈에게는 한달쯤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즈키가 고개를 끄떡였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것을 받아주세요, 영훈씨. "
  스즈키는 벽장을 열고 작은 목각품을 꺼냈다. 인형인줄 알았던 목각은 자세히 보니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상이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칠이 불상이 아주 오래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저희 집안에서 가보로 내려오는 물건이지요. 이  관음보살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부처님의 도움으로 해를 입지 않고 바라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가지고 가세요. "
  " 어떻게 이런 귀중한 것을 제게… "
  " 우리 일본의 국보 1호는 백제에서 건너온  관음보살상이지요. 고대 일본 문화는 거의가 한국에서 건너왔어요. 이 관음보살상도 백제에서 건너온 목각상입니다. 이 불상도 옛 주인이었던 한국인의 손에 돌아가는 것을 기뻐할 겁니다. 부탁한 사람은 찾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영훈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스즈키에게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KT지구로 돌아오는 자동차 밖에는 도로가의 축축 늘어진 가로수만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묘한 그림자를  길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나르시코프는 서랍에서 KGB시절부터 피워온 궐련을 꺼내어 천천히 입에 물었다. 정신이 집중이 안될 때 궐련을 입에 무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올가가 사라져버린지도 이미 열흘이 지났다. 
  그는 서류철을 넘겼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반쯤 읽다만 서류철을 책상위에 내팽개쳐버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회전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방안을  한참동안 서성였다. 입에 문 궐련에서 재가 양탄자에 떨어졌지만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KT지구의 아레스 요원을 총동원했지만 올가가 어디에서 실종되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올가는 그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이 그녀를 처형하겠다는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나르시코프가 아레스의  책임자를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르시코프 혼자라면 명예롭게 죽음을  택했겠지만 올가를 살리기 위해 그는 동족을 팔아먹는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택했다.
  하지만 올가가 사라진 지금,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와  아틀란티스인을 위해 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외계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나르시코프는 이제 지구인들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는 몇번이고 벽쪽으로 다가갔다가는 다시 책상쪽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는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떼어냈다. 지도 뒷쪽에는 조그만 금고가 마련되어 있었고,  나르시코프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번호의 단추를  눌렀다. 딸깍하고 문이 열리고 그는 조그만 서류조각을 꺼내서 그 내용을 외워질 때까지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서류 뒷쪽에는 작은 동전이 담긴 비닐봉지가  붙어있었다. 그는 비닐봉지를 떼어 안에 들어있는 동전을 불빛에  비춰보았다. 위조할 수 없는 레이저 가공기술로 새겨진 글자는  분명 ‘PAX’였다. 서류를 다 외운 그는 지도를 원래대로 해놓고는 옷을 꺼내입고 방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인 꼬치집 [야마토]는 KT행정청에서 세블럭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나르시코프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의 앞에는 조그만 찻잔이 놓여있었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았다. 히에이잔 부근의 조그만 신사에 자리잡은 [자유의 친구들]의 본거지에서 나르시코프는 여섯시간째 조사당하고 있었다. 
  아레스의 책임자인 나르시코프가 [자유의 친구들]에  가담하겠다고 제발로 찾아온 것을 [자유의 친구들]이 쉽게  믿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자유의 친구들]의 일본 지부장인 스즈키와 다른 요원들은 더할나위 없이 철저하게  나르시코프를 조사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나르시코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갔다. 아틀란티스인은 전 KGB요원이었던  나르시코프를 아레스에 가담하라고 협박했고, 나르시코프는 이를  거절했었음이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  조사되어  있었다. 결국 아틀란티스인은 그의 아내 올가를 처형하겠다고 협박했고 그는 할수 없이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떠맡았지만, 그는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지구인을 잡아가둔 적도 없고 [자유의 친구들] 요원을 처형한 적도 없었다.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는 나르시코프가 ‘이상할  정도로  [자유의 친구들]에 관대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르시코프의 아내 올가가 행방불명된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는 올가가 9월 1일날 실종되었으며, 전 아레스 대원을 동원했어도 찾지  못했다고  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던 스즈키는 눈쌀을 찌푸렸다. 
  ‘ 우리 [자유의 친구들]도 아레스를 감쪽같이 속이고 사람을 납치할 능력은 없는데, 아레스 대원들을 총동원했어도 찾지 못했다는게 마음에 걸려. 도대체 어떤 조직이 열여덟살부터 서른두살까지의 여자만 납치해가는 걸까? ‘
  어쨌던 아내의 실종으로 나르시코프가 [자유의  친구들]에 협력하게 된 것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스즈키는  나르시코프 앞에서 정중히 허리숙여 절했다. 
  "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르시코프씨는 이제부터 우리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

  새벽 1시 뉴욕 브루클린. 
  밤바람은 쌀쌀했지만 작은 핸드백을 끼고  걸어가는  밍키 슈나이더의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요즘 유행하는  무릎위로 한참 올라오는 미니스커트에 소매없고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여대생들이 남자들의 팔에 매달려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며칠전의 컴퓨터 미팅에서 만난 남자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하지만 오늘  데이트는  너무 재미있었어. 역시 컴퓨터 미팅이 최고라니까. ‘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카페 사이를 걸어가며 그녀는  며칠전에 컴퓨터 미팅을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잘했나  생각했다. 컴퓨터 미팅이 아니면 이런 멋진 남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 처음에는 순진해보이기만 하더니 알고보니 굉장히  세련된 사람이야. ‘
  밍키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을 생각했다. 의상디자인과  3학년에 다니는 밍키는 그날도 교수님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컴퓨터를 켜고 그래픽으로 2010년대에 유행할 옷의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컴퓨터 화면에  남자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는 스핑크스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낼 수 있어서, 많은 남자 대학생들이 자신의 얼굴을 여학생이 앉아있는 컴퓨터의  화면으로 보내서 미팅을 제의하는 컴퓨터 미팅을 즐기곤 했다.  화면에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은 순진하고  어려보이는  깨끗한 얼굴이었다. 
  ‘ 안녕하세요? 이런 좋은 가을날 우울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계실건가요? 아니면 산들바람 사이로 감미로운 음악, 풍겨오는 가을 분위기를 느끼렵니까? 제게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어요? ‘
  화면에 나타나는 남자의 메세지에 그녀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이렇게 두들겼다. 
  ‘ 이제보니까 늑대기질이 다분히 보이는군요.  여자  깨나 울리셨겠는데요? ‘
  ‘ 늑대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저는 이빨빠진  순진한 늑대랍니다. 이빨빠진 늑대가 여자 울리는 것 봤나요, 여우 아가씨? [강철 무지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즉각 돌아오는 남자의 메세지에 밍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속의 남자는  이빨빠진  늑대처럼 순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의 스위치를 내리고 [강철 무지개]로 향했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 술이 잘 깨지 않아. 그와의 첫 키스때문일까? ‘
  단지 몇번의 만남이었지만 밍키는 그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카페 [강철 무지개]에서는 티없이 맑고  순진한 마음으로 차 한잔의 향기와, 시와, 음악과, 지구를 떠나버린 우리들의 어린왕자를 이야기했고, 술집 [올림포스]에서는 적절한 익살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해저 50미터의  수중  공원 [에머랄드 바다]에서는 그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세련된 매너로 밍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데이트에서 그룹 [이카루스]의 기타리스트인 그는 잔잔하게 깔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작곡한 슬픈 노래를 불러주며 첫 키스를 나누었던 것이다. 
  발길에 차이는 종이조각들이 밍키를 성가시게 했다.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인 비밀경찰  아레스를 비방하고 지구 독립을 주장하는  [자유의  친구들]의 인쇄물이었다. 아틀란티스인과 아레스는 그들의  지구통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유의 친구들]의 동조세력이 꽤 많았다. 
  ‘ 제길, 아틀란티스인이고 뭐고 아무나 통치하면어때. 아틀란티스인이 [올림포스]를 건설한 후로 지구인들의  생활은 더욱 나아졌잖아. ‘
  아틀란티스인의 지구통치는 과거에 일본이 식민지를  통치하던 방법과는 전혀 달랐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지구를  통치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인인  지구인을 착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을 위협하는 공해문제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형태의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했고, 유전공학을  이용해서 보통의 다섯배나 되는 커다란 낟알이 맺히는 벼와 밀을 개발해냈다. 스핑크스 컴퓨터가 만들어낸 인공심장과 인공간장 등의 각종 인공장기들은 해마다 죽어가던 많은 환자를 되살려낼 수 있었고, 아틀란티스인이 설계한 신도시는  도시계획이 완벽해서, 교통이 막힌다던가 공기가 안좋다던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폐기물 처리가 어려워 사용이 점차  줄어가던 원자력 에너지도 스핑크스 컴퓨터가 새로운 방사능  폐기물 처리방법을 개발하고 나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아틀란티스인처럼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도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지구인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고도의 문명을  지녔으면서도, 지구인을 멸시하거나 냉대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그들의 문화를 지구인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스핑크스  컴퓨터가 있는 뉴욕에 거대한 과학기지와 연구소를  건설하고, 스핑크스 컴퓨터를 사용해서 지구인에게 이로운 각종 연구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반항하는 지구인에게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지만 그들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생활을 제공했다. 많은 지구인들이 지구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오히려 만족해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발밑만 내려보고 있던 밍키는 옆 건물 벽을 짚었다.  올라오는 취기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구석진 건물의 출입구에서 갑자기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 두사람이  튀어나왔다. 파랗게 질린 밍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두사람에게 팔을 잡힌 후였다.
  " 사람 살려요! "
  밍키는 필사적으로 소리질렀지만 키 큰쪽의 남자는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가져다댔다. 곧 그녀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두사람은 축늘어진 그녀를 둘러메고 구석에  세워놓은 커다란 앰블런스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스핑크스가 유도하는 자동조종장치가 달린 앰블런스는 새벽 1시의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아틀란티스인에게 반대하는 인쇄물과 밍키의 벗겨진 구두 한짝만이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남아있었다.

  브룩클린 주택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FLYFOX는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1시밖에 안되었지만 그놈의 꿈이 또다시  잠을 방해했다.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아틀란티스인에게  공격당해서 부하들은 죽고 자신은 아틀란티스인의 포로가 되었던 장면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외계인의 포로가 되었던 사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 치욕감을 씻기 위해서 [자유의 친구들]에 가담을 했지만, 현재로서는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감 때문에 목이 바싹바싹 타올랐다. FLYFOX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었다.
  갑자기 창 아랫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보통사람같으면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오랜  특수부대  생활로  단련된 FLYFOX는 그 소리가 구원을 청하는 여자의 비명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물컵을 내려놓고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오른쪽의 햄버거 가게 모퉁이에서 두 남자가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 도대체 어떤 놈들이 여자를 납치하는거야? ‘
  생각할 겨를도 없이 FLYFOX는 책상 서랍속의 권총을  끄집어내 뛰쳐나갔다. 남자 둘은 앰블런스에 여자를 실은 후  차를 출발시켰다. 급히 뛰쳐나온 FLYFOX는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 길거리에서 여자가 납치당했는데 놓쳐야 하다니, 빌어먹을… ‘
  순간 그의 주머니에 특수부대에서 쓰던 방향탐지기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추모양의 방향탐지기를 꺼내서, 허리를 최대한도로 굽혔다가 힘껏  던졌다. 끝에 강력한 접착제가 달려있는 소형 방향탐지기는 저만치 어둠속으로 달려가는 앰블런스의 뒷범퍼 밑에 달라붙었다. 
  다시 아파트로 올라간 그는 아무 장식없는 벽장  앞에  섰다. 세번째 서랍을 뽑자 그 뒷쪽에 작은 단추가 달려있었다. 단추를 누르자 쇠가 긁히는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벽장  전체가 윗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벽장 뒷쪽은 FLYFOX의 비밀 창고였다. 
  그는 검은 봉지에 들은 옷을 꺼내 입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스핑크스의 감시용 적외선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는  적외선 차폐 의복이었다. FLYFOX는 자신이 특수부대에서  쓰던 M-81 우라늄 기관포를 꺼내들었다.  
  ‘ 아틀란티스인만 아니라면 이 우라늄 기관포를 당할 사람은 없으니까. ‘
  완전무장을 끝낸 그는 납작한 플라스틱 시계를 손목에  찼다. 얼핏 보기에 보통 시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까 앰블란스에 붙여놓은 방향탐지기에서 나오는 전파를 추적하는 장치였다. 그는 작은 스프레이를 꺼내서 자동차에 골고루 뿌렸다. 스핑크스의 적외선 카메라를 피하기 위한  적외선  차폐 도료였다. 비가 와서 스프레이가 씻겨내려가지 않는 한 스핑크스는 FLYFOX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자동차를 수동조종으로 바꾼 그는 앰블런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앰블런스는 브롱크스 공원 182번가로  향하고  있었다.
  ‘ 182번가? 거기는 아틀란티스인이 지은 새로운 생물학 연구소인데? ‘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브롱크스  공원 182번가에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브롱크스 동물원이  버티고 있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은 동물원을 리치먼드 지구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거대한 규모의 생물학  연구소를  건설했다. 기린이나 영양이 사육되던 자리에는 거대한 도움형 건물이 들어섰고, 열대 동물이 있던 여러동의 건물도 헐리고  새로 75층의 건물이 세워졌다. 
  뉴욕의 생물학 연구소는 [자유의 친구들]에게 있어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우선 75층 건물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더우기 건물의 모든 공사는 스핑크스가 설계한 건설로봇과 아틀란티스인이 맡아서 했고 지구인은 공사현장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자유의 친구들]은 가능한 모든 정보망을 동원했지만 교오토오에도 이러한 생물학 연구소가 건설되고 있고, 앞으로 네군데 정도 더 건설될  예정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앰블런스는 생물학 연구소 정문에 섰다. 아까 여자를 납치한 두 남자는 앰블런스의 문을 열고 들것을 꺼냈다. 비록 천으로 덮여 있었지만 납치된 여자가 실려 있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복면을 쓴 두 남자는 끙끙거리며  들것을  연구소 안으로 날랐다. 
  FLYFOX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동차를  세웠다. 두 남자가 들어간 후 좀 있다가 다른 색깔로 칠해진  앰블란스가 역시 정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세명의 남자가 나오더니 들것을 내렸다. 천이 덮여 있지 않은 들것에는 스물 여덟정도 먹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들은 역시 복면을  하고 있었다. 
  FLYFOX는 배를 땅에 완전히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접근해갔다. 마취가 깨었는지 들것위의 여자가 잠시 꿈틀하는 바람에 들것이 휘청했다. 두 남자가 들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한 남자의 복면이 뒤집혀졌다. 정문의 불빛을 받은 남자의 머리카락은 분명 파란색이었다. 
  후두둑- 빗방울이떨어졌지만 자동차는 여덟대가 더  도착했다. 앰블란스뿐만 아니라 창문을 가린 소형 버스에서도 들것에 실린 사람들이 안으로 운반되었다. 천을 덮은 것도  있고 덮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납치된 사람들은  모두  서른살 미만의 여자였다. 전부 합쳐서 스무명쯤 될 것 같았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방수가 되는 적외선 차폐 의복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FLYFOX는 젖지 않았지만, 납짝  엎드리고 있는 땅바닥에 빗물이 괴어 흐르기 시작했다. 
  ‘ 아차, 자동차! ‘
  자동차에 칠한 적외선 차폐 도료는 물에 약하기 때문에 쉽게 씻겨내려간다. 도료가 씻겨내려가버리면 스핑크스의 적외선 감시 카메라에 바로 잡힐 것이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자동차쪽으로 후퇴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탐조등이 모두 켜졌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생물학 연구소 내의  아틀란티스인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은빛 광선총이  들려있었다. 
  FLYFOX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지만 자동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핑-하는 소리와 함께 광선총 한발이 자동차 백미러를 스쳤다. 
  ‘ 도대체 왜 이러지? ‘
  시동 자체가 전혀 걸리지 않았다. 여덟개의 탐조등이 모두 FLYFOX의 자동차를 비추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자동차의 여러 기계를 점검했지만 계기판은 정상이었다. 
  ‘ 아차, 자동조종장치! ‘
  허겁지겁 자동차에 올라타느라 자동조종장치가 켜져  있었다.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자동조종장치가 FLYFOX의 조종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자동조종장치를 수동으로 바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돌리고는  악셀레이터를 죽을 힘을 다해 밟았다. 문틈에 꽁지가 낀 쥐마냥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는 타이어 타는 냄새를 남기고 광선총의 빔줄기를 뚫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9월 12일 파리.
  앙상히 드러난 개선문의 철골을 뒤로 하며 코코  몽띠에는 빠른 걸음으로 튜브열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뾰족구두가  따각따각거리는 소리가 한적한 거리에 울려퍼졌다.
  한때는 전 유럽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 그 파리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샹젤리제 거리는 부서진  벽돌더미와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위세를 뽐냈던 개선문도  아틀란티스인의 파리점령때 산산히 부서져, 엿가락처럼 휜  철골만이 한때 이곳에 거대한 개선문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꽤나 기이하게 보였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에는 고성능 휴대용 컴퓨터가  들려있었다. 코코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한숨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 휴, 몇년전만 해도 여기 샹젤리제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찼었는데… ‘
  그녀는 입고 있던 검은 드레스로 눈길을  돌렸다.  삼년전 그녀의 약혼자 샤넬이 바로 이곳 샹젤리제에서 사준  옷이었다. 샤넬은 아틀란티스인이 파리를 점령할 때  끝까지  싸운 프랑스 육군의 350명의 전사자중 하나였다.
  코코는 컴퓨터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야 모든 인공위성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이 장악하고 있지만, 그녀의 휴대용 컴퓨터 속에 들어있는 자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로켓을 발사할 수 있다. 코코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 계획의 총 책임자였었다. 
  우주개발하면 미국과 소련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업용 로켓발사에 있어서 가장 발달한 나라는 유럽공동체였다. 이미 1980년대에 유럽공동체는 각 국가의 기술을 모아 [아리안]이라는 로켓을 설계했다. 작고 경제적이며, 기술에서도 미소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아리안]은 유럽이  아틀란티스인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수많은 상업용과 과학용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유럽을 점령한 아틀란티스인은 즉각 [아리안] 연구팀을 해체했고, 모든 인공위성의 발사를 금지시켰고 모든 기록을 없애버렸다. 코코도 [아리안] 연구팀을 떠나 파리 제 7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예전에 프랑스 우주 항공국이 위치했던 122지구  PA-719블럭에 갔었던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은 [올림포스]라는 이름의 세계국가를 건설하면서 프랑스는  122지구로 호칭했다. PA는 PARIS, 즉 파리 지역을 나타내고 719블럭은 파리 남부의 중심지 몽파르나스였다. 고풍스런 파리 시가지와는 달리 고층건물이 우뚝 솟은  몽파르나스  신시가지는 파리의 경제, 과학의 중심지였고, 프랑스 우주 항공국은  몽파르나스의 명물인 몽파르나스 타워 전체를 쓰고 있었다. 
  [아리안] 계획에서 일하고 있을 때 코코는 몽파르나스  묘지를 지나서 룩상부르 공원까지 뻗친 카페가 밀집한  뒷길을 좋아했다. 가끔 샤넬이 코코를 만나러 왔을 때는 옥외로  나와있는 카페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룩상부르 공원까지  늘어서있는 정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 혼자 걷고  싶을 때는 룩상부르 공원의 잔디밭을 거닐거나, 그옆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발자크 상에 기대서 잠시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코코가 몽파르나스에 다시 와본 것은  샤넬  생각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몽파르나스 묘지의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샤넬이 웃으며 걸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것은 샤넬의 그림자가 아니라 [아리안] 계획의 모든 자료였다. 아틀란티스인은 [아리안] 계획을 비롯한 모든 우주계획의 자료를 없애버렸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숨겨두었던  보존용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고, 코코는 엉망이 된 쓰레기 더미속에서 자료를 찾아내서 휴대용 컴퓨터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튜브열차 정류장은 에뜨왈 개선문에서 에펠탑쪽으로  20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틀란티스인은 나폴레옹의  묘가 있던 앵발리드를 낡은 건물이라는  이유로  철거해버렸지만,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은 그대로  놔두었다.  에펠탑을 비추는 나트륨등의 노란 빛이, 그렇잖아도 인적없는  거리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뒷쪽에서 깡통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코코의 입을 누군가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막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 향긋한 냄새는 마취제인 에테르… ‘
  코코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는 긴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녀를 익숙한 솜씨로 둘러메고는 골목길을 돌았다. 모퉁이에는 창문에 커튼이  둘러쳐진 앰블런스가 세워져 있었다. 축늘어진 코코의 긴 머리칼이 업고가는 남자의 등뒤에서 흐느적거렸다. 
  두 남자는 앰블란스의 뒷문을 열고 들것을 꺼내 그녀를 밀어넣고 문을 잠갔다. 앰블란스의 옆면과 뒷면에는  동그라미 속에 날개달린 지팡이가 그려진 마크와 [프랑스  특수  의료원]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지만 그런 의료기관은  프랑스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두 남자가 운전석에 막 올라타려 할 때 뒷쪽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두대의 자동차가 접근했다. 창문에 짙은 썬팅을  해서 운전자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유럽에는 수많은 고급 자동차가 있지만 그 느낌은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의 롤스로이스는 거대한 차체와 툭 튀어나온 헤드라이트의 중후한 느낌으로 다른 차를 압도하고, 견고하기로 소문난 스웨덴의 볼보는 사각진 차체로 튼튼함을  강조한다.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 벤츠가 묵직하고 고급스런 느낌을 준다면 프랑스의 시트르앵은 제비처럼 날렵한 세련미와 경쾌한 가속을 자랑한다. 방금 나타난 두대의 자동차는 시트르앵 중에서도 가장 날렵하고 가속능력이  뛰어난  1998년형 시트르앵-812였다. 
  코코를 납치한 두 남자는 시트르앵 자동차를 힐끔  쳐다보더니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앰블란스는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두대의 자동차가 쫓았다.
  큰길로 나선 앰블란스는 불과 7초만에 시속 200킬로미터로 가속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자동차들이 멈춰서서  맹렬하게 질주하는 앰블란스를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두대의 시트르앵-812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고 앰블란스의 뒤를 미끄러지듯 따라붙었다. 
  앰블런스는 시트르앵을 따돌리려 일방통행로를 꺼꾸로  들어갔다. 앰블란스는 앞에서 쏟아지는  자동차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일방통행로를 빠져나왔지만 시트르앵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앰블란스는 방향을 틀어 파리 외곽으로 향했다.  물론 두대의 시트르앵도 간격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앰블란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하는 외곽 도로를 달렸다. 캄캄한 도로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있었지만  헤드라이트 없이는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었다. 별안간 앰블란스가 끽-소리를 내며 섰다. 뒤따라오던 시트르앵도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앰블란스의 뒷쪽에 정지했다. 
  앰블란스의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키 큰쪽의 남자는 땅바닥에 몸을 두번 굴리고는  사격자세를 취했다. 작은쪽의 남자도 무릎을 꿇고  자동차를 조준했다. 두사람의 손에는 은빛 광선총이 들려있었다. 
  뒤따라 섰던 두대의 시트르앵도 문이 활짝 열리며 다섯 사람이 길바닥에 몸을 던졌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도랑으로 몸을 숨기자마자 광선총이  섬광을  뿜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시트르앵에서 불길이 솟았다. 부서진 유리조각과 금속 파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앰블란스의 천정에 부딪쳤다. 
  곧이어 타탕-소리와 함께 도랑쪽에서  총알이  날아왔지만 광선총을 들고 있는 남자들은 피하지 않았다.총알은 쨍겅하는 소리를 내며 두남자에게 맞았지만, 입고 있던 옷이  조금 찢어졌을뿐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도랑쪽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꿇어앉았다. 그의  어깨에는 M-81 우라늄 기관포가 얹혀져 있었다. 그는 기관포를  연거퍼 쏘아댔지만, 탱크의 장갑판을 뚫는 우라늄 기관포도 앰블란스의 사내들이 옷속에 입고 있던 특수 보호장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입고 있던 옷과 두건만이 찢어졌을  뿐이었다. 찢어진 두건사이로 파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틀란티스인들은기관포를 짊어진 남자에게 광선총을  쏘았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숯이 되어버린  덩어리에서 흰 연기가 솟아올랐다. 타버린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번졌다. 
  뒷쪽에서 불빛이 비쳤다. 도로 저편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커다란 트레일러 하나가 튀어나와  급정거했다.  트레일러의 뒷문이 열리고 두명의 남자가 뛰쳐나왔다. 키 큰쪽의 남자의 등에는 안테나와 전기줄이 얽힌 기묘한 전자장치가 얹혀있었고, 박격포처럼 생긴 유선형 물체가 튜브로  연결되어  있었다. 키작은 남자는 아틀란티스인이 사용하는 은빛  광선총을 들고 있었다. 
  키 큰 남자는 아틀란티스인을 향해 유선형의 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청록색 섬광이 아틀란티스인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섬광을 받은 아틀란티스인은 충격으로 붕 떠서 뒷쪽의 나무 뒷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아틀란티스인들은 광선총을 다시  집어들었지만  계속되는 청록색 섬광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네번째의 청록색 광선 공격에, 아틀란티스인들이 입고 있는 보호장비에서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아틀란티스인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애썼지만 결국 그자리에 쓰러졌다. 아틀란티스인의 신체구조가  지구인과 달라서인지 피는 흐르지 않았다. 
  청록색 광선포를 들고 있던 남자는 앰블란스로  달려갔다. 먼저 시트르앵을 타고 앰블란스를 추적하다가 도랑뒤로 숨은 네명의 남자는 도랑 뒤에서 나와, 아틀란티스인에게  싸우다 죽은 동료의 시체에게 다가갔다. 
  앰블란스에 실려있던 코코는 마취된 채였지만, 청록색  광선포의 남자는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주사기를 꺼내 코코에게 놓았다. 들것에 누워있던 코코는 곧 눈을 떴다. 시트르앵을 타고 온 네명의 남자가 먼저 코코에게 말을 걸었다. 
  " 코코 몽띠에씨, 우리는 [자유의 친구들] 프랑스 지부 요원들입니다.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아틀란티스인이 당신을 납치하는 것을 보고 여기까지  추적해왔습니다. "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코코는 정신이 멍했다. 
  " 아틀란티스인이 왜 나를 납치하려고 했죠? [자유의 친구들]은 왜 내 신변을 보호하려고 했고요? "
  " 우리 [자유의 친구들]의 정보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인은 이번달 들어 세계 곳곳에서 열여덟살에서  서른  두살까지의 여자를 약 칠백명정도 납치하였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요원 한명이 죽으면서까지 코코씨를 보호한 이유는 이분이 설명해주실 것입니다. "
  트레일러에서 내린 두명이 코코의 앞으로  나서며  두건을 벗었다. 남자인줄 알았던 키작은 사람은 놀랍게도 긴 금발머리의 여자였다. 키 큰쪽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저는 한국에서 온 이 영훈이고 이쪽은 전에 CIA에서  일했던 아리오네입니다.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물리치고 지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코코씨의 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
  코코는 청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손을 끄집어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제가 무슨 힘이… 그리고 우리보다 엄청나게 앞선 과학기술을 가진 아틀란티스인을 우리가 어떻게 무찌르나요? "
  영훈은 땅바닥에 쓰러진 아틀란티스인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가 메고 있던  청록색 광선포를 내밀어보였다. 
  " 코코씨를 납치하려던 아틀란티스인을 저렇게 처치했잖아요? 아틀란티스인을 물리친 자력선포는 고대 무우인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 
  " 그렇다면 그 무기만으로도 아틀란티스인을 물리칠 수 있을텐데… "
  " 무우인이 남긴 비밀기지와 무기는 현재 고장난 상태입니다. 이 자력선포도 고장나지 않은 단하나의 무기를 들고  온 것입니다. 물론 지구인의 과학기술로 무우인의 기지와  무기를 고칠 수도 있지만, 그곳에 있는 무기만으로는 아틀란티스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
  " 그렇다면… "
  " 우리는 코코씨같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무우인이 남긴 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물리칠만한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코코씨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 계획의 총 책임자였지요? "
  코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내 약혼자였던  샤넬도 아틀란티스인에게 죽었어요. 당신들을 도울께요. "
  그녀는 껴안고 있던 휴대용 컴퓨터를 내밀었다. 
  " 다행히 오늘 난 [아리안] 계획의 모든 자료를  찾아냈어요. 휴대용 컴퓨터에 들은 이 자료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로켓을 발사할 수 있어요. "
  듣고 있던 영훈과 아리오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코코는 미소를 지으며 두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 악수를 나눈 코코는 영훈들이 타고 온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트레일러 안에는 세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청자켓을 입고 깡마르고 돗수높은 안경을 낀 사람이 코코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는 짙은 썬글라스에 펑크머리를 한 단단한  체격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 저는 버클리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피터  마이켈슨입니다. 자력선을 연구하고 있지요. "
  펑크머리 남자가 썬글라스를 벗으며 코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옆의 남자도 코코에게 가벼운 인사를 했다. 
  " 저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경비를 맡고  있던  특수부대 부대장 FLYFOX입니다. 제 옆에  있는  친구는  같은  부대원 ICBLUE이지요. 아틀란티스인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영훈씨 일행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
  영훈 일행을 태운 커다란 트레일러는  다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외곽도로를 빠져나갔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자동차들을 뒤로한 채 트레일러는 접선장소인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했다. 2차대전 연합군이 상륙했던 해안에는 스핑크스 컴퓨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평범한 어선으로 위장한  작은  선박이 영훈 일행을 동해안의 무우인 비밀기지로 데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트레일러가 도로를 빠져나간지 3분후, 놀랍게도  땅바닥에 쓰러진 아틀란티스인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불에 그을려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수 없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이 죽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살점이 녹아붙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은 전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은채 앰블런스  안에 설치된 컴퓨터 키보드에 몇 글자를 쳐넣었다. 수신자는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 트로이 작전 성공적으로 수행. 다음 지시 바람. ]
  아틀란티스인은 앰블런스 안에 설치된 작은 샤워기같은 물을 꺼내어 다른 아틀란티스인에게 뿌렸다. 흰거품이  몸을 감쌌고, 곧 거품이 딱딱하게 굳자,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천천히 몸에 붙은 거품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품  안쪽에서는 분홍색 피부의 새살이 돋아있었다. 상처를 치료한  아틀란티스인은 앰블란스를 운전하며 끝없는 어둠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Part IX 오이디푸스의 복수

  10월 2일 문무왕 수중릉.
  엑스컬리버가 설치되어 있는 통제실에는 여덟명의  지구인이 모여있었다.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해 눈은 빨갛게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푸석푸석하게  부어있었지만,  표정에서는 엄숙할 정도의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삐리릭-하는  신호음이 세번 나고 문이 열렸다. 수염을 기르고 헝클어진  머리의 영훈이 세사람의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 괜찮아요? "
  쓰러질듯 들어오는 영훈을 소연이 부축했다. 축 늘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만 영훈은 깎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사이로 소연에게 미소를 지었다. 
  " 괜찮아. 이제 필요한 사람은 다 모이게 된거야. "
  영훈은 소연의 부축을 받아가며 통제실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새로 온 세명을 포함한 다른 열한명도  의자를 가져와서 영훈의 주위에 둥그렇게 앉았다. 
  " 여기 계신 분들은 아틀란티스인의 손아귀에서 지구를 구출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모인 분들입니다.  서로들  잘 모를테니까 제가 한사람씩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는  KBC방송국의 기자 이 영훈입니다. 특수부대에서 훈련받은  경력이 있습니다. "
  그는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 제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은  저와 같은  KBC방송의  기자 안 소연입니다. 그 다음은 MIT의 컴퓨터 교수였던 이  영상, 그 옆에 앉은 담갈색 눈에 긴 금발머리 아가씨는 CIA의 극비 기술 담당 첩보원이었던 아리오네입니다. 아리오네는 한국의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이 스핑크스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다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긴 검은머리에 까만 안경을 쓰고 있는 아가씨는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원이었던 권 혜진입니다. 혜진양은 인간의 유전자에 영향을 끼치는물질을 연구하다가 스핑크스와 고대 무우인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여러분이 와계신 무우인의 비밀기지는 이렇게 다섯사람이 발견한 것입니다. "
  소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나갔다. 영훈은  소개를 계속해나갔다. 
  " 검은 머리의 소련인은 림스키 나르시코프, 전 KGB  교오토오 지부장이자 지금은 아레스의 우두머리입니다. "
  일동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낌새를 눈치챈 영훈은 서둘러 부연설명을 했다. 
  "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는 전세계적으로 수백명의 여자를  납치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열여덟살에서 서른살까지의 건강한 여자만  골라서 납치를 하고 있어요. 나르시코프의 부인도  아틀란티스인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아레스의 우두머리인 나르시코프가 우리편에 가담하게 된 이유는 아내를 납치한 아틀란티스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손에 쟁반을 든 소연이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빨간색 쥬스가 담긴 유리컵이 얹혀있었다.
  " 옛날 무우인들이 마시던 쥬스의 한 종류였던 것 같아요. 분자합성기로 만든 것인데 혹시 몰라서 제가 미리  먹어봤어요. 맛은 그런대로 좋을거에요. "
  일동은 푸-하는 한숨을 내쉬며 쥬스잔을 받아들었다.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려갔다. 영훈은 파인애플과 오렌지의 중간맛이 나는 쥬스를 반쯤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고 소개를 계속했다. 
  " 썬글라스에 짧은 펑크머리를 한 사람은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경비를 담당했던 특수부대장 FLYFOX이고 그 오른쪽에 앉아있는 곱슬머리의 흑인은 같은 특수부대에 있었던 ICBLUE입니다. 두사람은 아틀란티스인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옆에는 NORAD의  컴퓨터를  제어하던 마이클 오즈본,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청자켓을 입은  사람은 자력선의 세계적 연구가인 버클리 대학의 피터  마이켈슨 교수입니다. 긴 청바지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여자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계획의 총책임자였던 코코 몽띠에 박사고, 뒷쪽에 팔짱을 낀채 앉아있는 수염을 기른 남자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핵융합을 연구하고 있던 제임스 타일 박사입니다. 제임스 타일 박사는  흔히 제다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고, 오늘 아침 이  기지의 동력원인 핵융합 장치를 고쳐서 가동시킨 장본인입니다. "
  제다이가 기지의 동력장치를 고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앉아있던 모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제다이에게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가장 큰 문제인 동력장치를 고쳤으니 스핑크스를 없애는 길로 그만큼 다가간 셈이다.
  피터 마이켈슨이 청자켓에 손을 쓱쓱 문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튜브와 몇개의 전선이 얽힌  회색 물체가 들려있었다. 
  " 제가 들고 있는건 사방 3킬로미터내의 모든  전자장치를 무력화시킬수 있는 자력선 폭탄입니다. 이건 시작품이라  별 위력이 없지만, 기지의 시설을 사용하면 오늘 밤안으로 뉴욕시 정도의 구역에 작용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
  뒷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나르시코프가 일어나서 마이켈슨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그 자력선 폭탄으로 스핑크스 컴퓨터의 전자장치를마비시킬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
  "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있는 자유의 여신상 지하 기지는 자력선 차단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자력선 폭탄으로도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
  " 그렇다면… 이 무기를 가지고는 아무데도 쓸  수  없지 않아요? "
  코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이켈슨에게 물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전  지구가  아틀란티스인에게 항복했던 것은 스핑크스가 제어했던 아틀란티스인의  신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력선 폭탄을 사용하면,  스핑크스 컴퓨터가 제어하는 모든 무기는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력선 폭탄은 모든 통신장치를  차단하기 때문에 스핑크스 컴퓨터는 스핑크스 컴퓨터 바깥에 있는  어떤 무기도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자력선 폭탄은  스핑크스 컴퓨터와 바깥세계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구실을 하죠.  그동안에 우리는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시켜야 합니다. 일단 스핑크스 컴퓨터만 없애면,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겁니다. "
하지만… 스핑크스 컴퓨터에게 자력선 폭탄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우리는 무얼로 스핑크스 컴퓨터를 부수죠? "
  소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뒤에 서있던 혜진이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핑크 레이디 칵테일과 비슷한 색깔의  분홍색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가 들려있었다.
  " 바로 이겁니다. 고대 무우인이 초능력을 쓸 수 있었다는건 아시죠? "
  " 초능력? "
  영훈을 제외한 나머지는 혜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훈은 머리를 숙인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 다행히 이 기지에는 고대 무우인의 혈액 견본이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그 혈액에서 유전자를 추출해서, 고대  무우인이 가졌던 초능력을 되살리는 약품을 개발했습니다.  스핑크스 컴퓨터 안에 들어가서는 무우인의  초능력을  사용해서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
  일제히 환성이 올랐지만, 영훈은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지난 몇달동안 영훈의 머릿속을 휘감고 있던 물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였다. 
  ‘ 아틀란티스와 무우 대륙의 전쟁 이후 살아남은 아틀란티스인은 유럽으로, 무우인은 태평양으로 흩어졌다.  폴리네시아 군도는 무우대륙이 아틀란티스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을 때 가라앉지 않은 몇 안되는 땅이라고 [엑스컬리버]는  말했다. 폴리네시아 군도의 이스터 섬에 남아있는  [모아이]라는 석상은 무우인이 쓰던 로봇인 [무우이]에서 따온 말이다. 그럼… 무우인이 쓰던 컴퓨터의 이름인 [엑스컬리버]는  폴리네시아 군도의 전설에 나오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는가.  왜 무우인의 주 컴퓨터 [엑스컬리버]가 아틀란티스인이  흩어져 세운 유럽의 전설인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신검(神劍)  이름이란 말인가. [엑스컬리버]와 아틀란티스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것은 아닐까? ‘
  생각하던 영훈은 옆에서 소연이 팔꿈치로  툭치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혜진은 플라스크를 든 채로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 자, 이제는 우리의 이름을 지을 차례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
  코코가 머뭇머뭇거리다 말했다. 
  " 이 기지의 주 컴퓨터가 [엑스컬리버]니까 [원탁의 기사]로 하는게 어떻겠어요? "
  " 원탁의 기사? 그것 괜찮겠는데요? "
  영상이 동의하자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했다. 
  " 저는 우리를 [오이디푸스 특공대]라고  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스핑크스 컴퓨터 아닙니까? 그리이스 신화에 보면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자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추지 못하면 그사람들을 죽였지만 어느날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서 그 문제를 맞추자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져서 죽었지요. "
  " 스핑크스를 잡는 오이디푸스 특공대라… 멋있는 이름인데요? "
  소연은 철없는 문학소녀마냥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만,  피곤한 기색의 영훈은, 각자 돌아가 쉬고  오후부터  스핑크스 공격계획을 짜도록 하자고 말했다. 스핑크스를 이길  희망이 보인다는 혜진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은 하나둘씩 자기방으로 돌아갔다. 
  생각할 일이 있으면 항상 고개를 숙이며 걷는 습관이 있는 영훈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둘, 발걸음을 세었다. 영훈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마흔다섯? 발걸음을 세던 영훈의 발길이 갑자기 멈춰졌다. 
  ‘ 이 기지는 바둑판처럼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복도의 길이가 똑같다. 하지만 내 방이 있는 복도는  유난히  짧다. 왜? ‘
  그는 오던 길을 돌아 [엑스컬리버] 컴퓨터실이 위치한  중앙복도로 나가서는 천천히 발걸음으로 길이를 쟀다. 예순 걸음. 
  영훈은 자기 방앞의 복도로 돌아가 천천히 벽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매끄럽게 다듬은 금속 복도 모서리뒷쪽으로  작은 틈이 감춰져있었다. 그는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한  금속판을 틈사이로 집어넣었다. 막힌줄만 알았던 복도끝이  소리없이 열리고 영훈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15미터정도 되는 방의 전면 벽은 거대한  스크리인으로 되어있었지만, 회색빛 스크리인은 꺼져있었다. 왼쪽 벽에는 1.5미터 크기의 은빛 금속상자에 든 컴퓨터 세개가  50센티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있었고, 그 옆에는  태양계 모형이 설치되어있었다. 
  ‘ 하나, 둘… 열두개의 행성이면 지구가 속해있는 이  태양계는 아니구나. 도대체 어느 은하계의 태양계일까? ‘
  영훈이 마음속으로 묻자마자 전면 벽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 은하계의 가장자리에있는 하나의 태양이 나타나면서 영훈의 머릿속에 컴퓨터의  정신감응  음성이 들려왔다. [엑스컬리버]의 정신감응 목소리와  다른  것으로 보아서 이 방의 컴퓨터는 [엑스컬리버]와는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천년동안 잠자고 있던 이 방안의 컴퓨터가  영훈의 정신감응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당신이  보고  계시는  태양계는  12개의  행성을  가진 EJ-0203입니다. ]
  약간 붉은기가 도는 EJ-0203 태양을 배경으로 네번째의 행성이 화면에 점차 크게 비춰졌다. 우주공간에서 볼 때는  회색의 구름으로 덮여있는 대기권을 내려가자, 짙은  구름속을 뚫고 제 4행성의 표면이 비춰졌다.  번쩍거리는  반사광으로 빛나는 행성의 표면은 놀랍게도 금속투성이였다. 흙이라고는 한줌도 볼 수 없는 표면에는 노란색, 붉은색, 은색의 금속조각이 마치 풀포기처럼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몰아치는  강풍에 금속 풀포기들은 이리저리 흔들렸고, 구름사이에서는  강한 번개가 계속 번쩍거리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화면에는 제 4행성의 바다가 비춰졌다.  은색으로  빛나는 바다는 얼핏보면 대야에 담아놓은 수은처럼 은색으로 번들거렸다. 높은 온도는 아니었지만, 행성의 바다는 틀림없이  녹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온통 금속으로 이루어진 행성이군. ‘
  영훈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순간, 무언가가 금속의 바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화면에 비쳐진 모습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영훈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은빛 금속 액체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솟아오른 것은  거대한 악어모양의 물체였다. 머리 위쪽에 꼭 더듬이처럼 굵은 금속 파이프같은 것이 굽어져 튀어나와있었고, 더듬이 끝에  달린 붉은 렌즈모양의 물체는 눈처럼 보였다. 게처럼 더듬이 눈을 가진 거대한 악어모양의 물체는 온통 금속 광택을 내고 있었지만, 그 몸놀림은 살아있는 생물보다도 자연스럽고  재빨랐다. 악어모양의 물체는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더니 입을  벌렸다. 순간, 작은 벼락이 악어의 입을  강타했지만,  악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악어의  눈이,  마치 먹을것을 배불리 먹은 짐승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로보트일까? ‘
  영훈은 의아해했지만, 방안에 장치된 컴퓨터의 대답은  영훈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로보트가 아닙니다. 저것은 전기행성에서 자란 살아있는 금속 생명체입니다. 금속 생명체는 하늘의 번개를  영양소로 취합니다. ]
  화면에 희끄무레한 인간의 형태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막 꺼지려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영훈의 심장은 그자리에 얼어붙는듯 했다. 화면에 보였던 희끄므레한 인간의 형체는 틀림없는 아틀란티스인이었다. 
  머릿속에 다른 컴퓨터의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지의 주 컴퓨터인 [엑스컬리버]였다. 
  [ 영훈씨에게 알립니다. 이 방안에서 본 것은 영훈씨와 지구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십시오. 이 방안에 장치되어있던 컴퓨터는 제가 작동을 정지시켰습니다. ]
  " 도대체 내가 이 방안에서 본 것이 뭐지, 엑스컬리버? 전기행성? 살아있는 금속생명체? "
  [ 엑스컬리버는 영훈씨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서 방으로돌아가십시오. ]
  영훈은 손에 쥐고 있던 금속판을 흔들어보였다. 
  " 엑스컬리버, 이 금속판을 잊었나? 이 금속판은 이  기지의 모든 장치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 너는 금속판을 가진 사람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빨리 말하라. 화면에 나타났던 것은 아틀란티스인이 맞지? "
  [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진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이 질문만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엑스컬리버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
  영훈은 놀라서하마타면 금속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면에 나타났던 전기행성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기에  엑스컬리버가 내게 반항하며까지 말하지 않으려 하는걸까?
  " 그럴 수 없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찾을  수밖에 없어. "
  영훈은 벽 왼쪽에 설치되어있는 컴퓨터로 다가갔다.  컴퓨터에는 전원이 켜져있었지만, 화면에는 계속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이 컴퓨터를 작동시키면 전기행성의 비밀을 알 수  있을거야. ‘
  영훈이 컴퓨터에 손을 대려 하자 엑스컬리버가  소리쳤다. 컴퓨터가 소리쳤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훈의 머릿속에 울려오는 엑스컬리버의 정신감응 목소리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왔다. 
  [ 억지로 대답을 찾으려 하신다면 엑스컬리버는  부득이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
  영훈이 엑스컬리버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대려하자,  갑자기 어깨쪽에서 전류가 찌릿하고 흘렀다. 영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신은  말짱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 미안합니다, 영훈씨. 당신은 알아서는 안될  것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습니다. 엑스컬리버는 당신의 기억을 지워버리겠습니다. ]
  순간 영훈의 머릿속에 다른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렸다. 엑스컬리버도, 방안에 있던 컴퓨터도 아닌 다른 정신감응 목소리였다.
  [ 엑스컬리버, 이영훈씨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중지하라. ]
  [ 알겠습니다. 엑스컬리버는 명령에 복종합니다. ]
  잠깐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더니 몸이 자유로와졌다.  영훈은 뒤도 안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아까 엑스컬리버에게 당한 어깨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영훈의  머릿속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보다도 더 뒤엉킨 복잡한 생각  뿐이었다. 
  ‘ 도대체 전기행성의 비밀은 뭘까… 내가 알아서는  안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걸까… 게다가, 막판에 엑스컬리버에게 명령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이 기지안에서는 엑스컬리버에 명령을 내릴만한 컴퓨터가 없는데… 설마… ‘
  영훈의 머릿속에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후들후들  떨려오는 온몸을 감당할 수 없어 영훈은 침대 모서리에 몸을  기댔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전율에 영훈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 그럴리는 없을거야. 분명히 그럴리는… ‘
  영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복도 건너편의 영상의  방으로 갔다. 영훈은 영상의 귀가에 대고 몇마디를 속삭였다.  듣고있던 영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훈을 쳐다보았다.
  " 사실이야? "
  "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그래서 자네한테 물어보러  온거야. 자네는 통신장치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지? "
  " 응, 전자공학을 배웠으니까 대강은 알 수 있지. 근데 그건 왜? "
  " 확인할게 있어. "
  영훈은 다시 영상의 귀에 몇마디 지껄였다. 영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렇지. 그걸 확인한다면 자네 말이 맞겠군. 그럼  같이 올라가볼까? "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통신실은 컴퓨터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두번째 복도를 지나 왼쪽에 있었다. 영상은 구석에  설치된 오각형 모양의 컴퓨터 뚜껑을 열고 몇가닥의 케이블과 집적회로 칩을 만져보더니 고개를 돌려 영훈을 쳐다보았다. 
  " 엑스컬리버는 기지의 통신장치가 100킬로미터  이내밖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이  통신장치는  최소한 20000킬로미터는 도달할 수 있는 장치야. "
  " 20000킬로미터면… 지구 둘레의 반 아냐? "
  영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지구 둘레의 반까지 도달한다는  말은…  엑스컬리버는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곳과도 통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 "
  영상은 손가락 끝으로 통신장치의 안테나를 가리켰다.  영훈과 영상의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도의 방향성을 가진 통신장치의 안테나는 미국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가서 악마에게 눈알을 뽑히는듯한 무서운  공포감만이 기억날 따름이었다. 소연이 침대맡에 앉아서 불안한 눈초리로 영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꿈이었어요? 너무나 무섭게 비명을 지르기에  뛰어 들어와봤어요… "
  " 아냐, 아무것도… "
  "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스핑크스를 물리치는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준비가. "
  소연은 웃으며 영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훈은 천천히 컴퓨터실로 갔지만, 지난 밤의 악몽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땀에 젖은 얼굴을 가볍게 도리질해댔다. 
  컴퓨터실에는 모두가 모여있었다. 컴퓨터실  뒷쪽에  있는 실험실에는 사람이 들어갈만힌 크기의 열두개의  유리튜브가 뚜껑이 열린채 설치되어있었다. 튜브의  뒷쪽에는  붉은색과 핑크색, 노란색과 파란색의 관과 튜브,  전선줄이  얼기설기 얽혀있었고, 그 전선줄은 엑스컬리버와 연결되어있었다.  튜브에서 빠져나온 파란색의 굵은 관의 끝에는 링겔병과  비슷하지만 조금 큰 유리병이 달려있었고, 그 안에는 어제  혜진이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분홍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혜진은 하얀 실험복을 입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영훈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 잘 잤어요? 어제밤에 무우인의 유전자 분석이 끝났어요. 조금 있으면 우리도 고대 무우인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게 돼요. "
  혜진은 유리튜브의 뚜껑을 열고, 튜브의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차례로 이 유리튜브 안에 들어가세요. 조금 있으면  [엑스칼리버]가 자동적으로 유전자 교환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엑스컬리버에 입력해놓았어요. "
  영훈은 줄지어 늘어서있는 열두개의 유리튜브를  쳐다보았다. 이 기지를 제어하고 있는 [엑스컬리버] 컴퓨터까지 합치면 열셋이 된다. 서양인이 죽도록 싫어하는 숫자 13… 영훈은 한국인이라 그런 미신은 믿지 않았지만, 왠지 기분이  꺼림찍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에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하기 직전의  [최후의 만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예수님과 열두명의 제자 대신에 [엑스컬리버]와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라면…  우리를 배신할 가롯 유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이디푸스 특공대]는 하나같이 믿을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영훈은  마음속을 덮쳐오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혜진은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을 차례로 유리튜브에 들어가게 했다. 곧 작은 팔찌같은  것이  튀어나와 손목과 발목을 고정시켰고, 슛-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가스가 뿜어져나왔다. 아마 마취제였던지  의식이  몽롱해져가기 시작했다. 몇개의 주사바늘이 팔뚝을 찌르고,  혈관을  타고 미지의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횃불을 든 사람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말들의 힝힝대는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창과 활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서있는 앞에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영훈은 허리에 차고있는 칼을 번쩍 치켜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느새인가 영훈은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아더왕이 되어있었고, 그의 손에는신이 내려준 전설의 보검 [엑스컬리버]가 들려있었다.
  " 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이제는 마귀를 물리치러  용감하게 나갈 때다. 모두 나를 따르라! "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멀리서 진군을 알리는 뿔나팔소리가 들려왔고, 영훈은 엑스컬리버를 치켜든채, 백마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저멀리 들판에도 횃불과 함께 한무리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사악한 마귀의 병사들이다. 물러서지 마라! "
  영훈은 이렇게 외치며 적군 사이로 뛰어들어 엑스컬리버를 힘껏 휘둘렀다. 영훈이 가는 사이사이로 적  병사들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갑자기 그의 앞으로 검은 갑옷과 망토를 입은 거대한 장수가 튀어나왔다. 이글이글 타는듯한 그의 눈동자는 살기로 가득차있었고, 힘껏 휘두르는 그의 칼은 무엇이든지 베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왔다.  영훈은  엑스컬리버를 휘둘렀지만, 놀랍게도 엑스컬리버는 길다란  밧줄로  변해서 도리어 아더왕인 영훈을 꼼짝못하게 묶어버렸다. 
  ‘ 엑스컬리버가… ‘
  놀라서 탄식하는 영훈의 머리위로 적 장수의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끝없는 암흑 가운데로 한없이 떨어지는 영훈의 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덩어리가 다가왔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다가왔다가는 사라져갔다. 아랫쪽에서 거대한  불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영훈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화염이 그의 몸을 휩싸는 순간 영훈은 저도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 깔려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혀갔다. 희미하고  뿌옇게 물체의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연이었다. 
  " 괜찮아요, 영훈씨? "
  " 응… "
  " 너무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우리는 당신이 실패한줄만 알았어요. "
  하얀 실험복을 입은 혜진이 말했다. 
  " [엑스컬리버]의 계산은 정확했어요. 유전자 복원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오이디푸스 특공대]는 고대 무우인이  가지고 있던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어요. "
  영훈은 혜진이 입을 열지 않고 말하고 있는데 놀랐다.  소연이 영훈의 표정을 보더니 대답했다. 소연의 대답은 머릿속에 울려오고 있었다. 
  " 영훈씨도 할 수 있을 거에요. 간단한 텔레파시의 일종이죠.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해봐요. "
  영훈은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하며 FLYFOX를 불렀다. 마음속 한쪽에서 움찔하는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더니  FLYFOX의 대답이 산꼭대기에서의 메아리처럼 울리며 들려왔다. 
  " 깨어나셨군요, 영훈씨. 우리는 당신이 깨어나지  않는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준비되어있던 광선총도 찾아냈고, 마이켈슨 교수는 자력선 폭탄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
  영훈은 텔레파시로 코코를 불렀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영훈은 옆에 서있던 혜진에게 물었다. 
  " 코코 몽띠에 박사는 어떻게 된거죠? 왜 그녀에게는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죠? "
  혜진은 양 어깨를 들썩하며 모르겠다는 몸짓을 했다. 
  " 이상하게 코코 박사에게는 아무런 초능력이 일어나지 않더군요. 체질에 따라서 안되는 사람이 있나봐요. 하지만, 코코 박사의 임무는 직접 싸우는게 아니라 미사일 제조에 있잖아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않겠어요?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났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ICBLUE가 들어오다가 영훈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 일어났군요, 다행이에요. 곧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없애기 위한 작전을 의논할겁니다. 회의실로  모두 오세요. "
  영훈은 용건을 전하고 나가려는 ICBLUE를 불러세웠다.  그는 뒤돌아서서 영훈에게 다가갔다. 
  " 왜 불렀죠, 영훈씨? "
  " ICBLUE, 당신은 폭발물 전문가죠? "
  " 예, 그런데 그건 왜 묻죠? "
  "지금 여기서 폭발물을 만들 수 있어요? 지금 당장  여기서. "
  " 무엇에 쓰려는거죠? 얼마만한 위력으로? "
  ICBLUE는 의아한 눈초리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 TNT 1메가톤 정도 크기로요. 가능한가요? "
  ICBLUE의 입이 벌어졌다. 
  " 1메가톤이요? 맙소사, 그건 작은 원자폭탄 정도의  위력이에요. 도대체 그걸 어디다 쓰려는거죠?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에게는 그정도로는 소용이 없고, 다른데 쓰기에는 위력이 너무 커요. 당신, 한 도시를  날려버릴  일이라도 있는건가요? "
  " 만들수 있는지 없는지만 묻고 있어요.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에요. "
  ICBLUE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 만들수는 있어요. 하지만, 어디에다 쓰려는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만들어줄 수 없어요. 우리는 같은 오이디푸스  특공대에요. "
  " 날 믿어줘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에요. "
  " …… "
  영훈은 ICBLUE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ICBLUE도  영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ICBLUE가 먼저 검은 얼굴을 끄덕거렸다. 
  " 좋습니다. 영훈씨를 믿어드리지요. 두시간 내에  만들어 드릴께요. 자, 이제 나가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때려잡을 계획을 짭시다. "

  10월 5일 오전 7시 20분 문무왕 수중릉. 
  아직도 차가운 아침햇살을 받으며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 바닷속에서 튀어나왔다. 고기잡이 배도 항구로 되돌아간  바닷가라 인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들 머리위 수만  킬로미터 위에 떠있는 세대의 인공위성은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 바다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감지해냈다. 
  " 자력선 미사일 발사준비 완료. 엔진, 폭파장치,  제어장치, 유도장치 이상 없음. "
  EC의 우주로켓 계획의 총책임자였었고, 자력선 폭탄을  싣고 뉴욕까지 날라갈 미사일을 설계한 코코 몽띠에가  미사일 발사의 총책임을 맡았다. 코코의 눈은 계기판에 표시된 숫자를 읽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코코는 뉴욕으로 향하는 소형 우주선 안에서 미사일 발사를 원격 조종하고 있었다. 자력선 미사일은 문무왕 수중릉 해저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발사대에서 발사단추가 눌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발사 5분전. 준비는 순조롭습니다. "
  코코의 목소리가 스피이커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연은 우주선 안의 무전기로 영훈을 호출했다. 
  " 자력선 미사일이 폭발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죠? "
  " 스핑크스가 설치해놓은 비밀 무기들은 모두  전자장치로 제어되고 있어. 자력선 폭탄은 스핑크스 주위의  전자장치를 모두 파괴하는 역할을 하지.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비밀기지는 자력선 방어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스핑크스를  파괴할 수는 없지만, 스핑크스가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올 수는 없게 되지. 우리는 그 틈에 스핑크스를 없애버려야 해. "
  " 스핑크스가 미사일 발사를 눈치채고 미리  파괴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
  영훈은 가볍게 웃으며 소연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무우인의 미사일은 스핑크스 컴퓨터에 탐지되지 않게 특수 재료로 설계되어있어. 스핑크스는 미사일의 발사를  눈치챌 수 없을거야. "
  영훈은 마이크를 잡고, 다른 대원에게 지시했다. 
  " 자력선 폭탄이 폭발한 후부터 전자장치가 복구될 때까지는 30분정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30분 후면 스핑크스는 곧바로 전자장치를 복구해서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력선 폭탄이 폭발하자마자 공격을 시작해서 30분 이내에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심장부로  들어가야 합니다. "
  스피이커로 아리오네의 음성이 들려왔다.
  " 현재 위치는 미국 중서부 해안. 스핑크스가 있는 뉴욕까지는 약 7000킬로미터정도 남았습니다. "
  곧이어 자력선 미사일의 발사를 알리는  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력선 미사일 발사! 목표는 스핑크스 컴퓨터가  위치한 뉴욕 자유의 여신상 지하. "

  7시 32분. 
  문무왕 수중릉이 위치한 경주 앞바다에서는 거대한 물기둥이 솟으며 50발의 미사일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상공으로 치솟은 미사일은 고도를 높여가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2분후면 도달하게 될 미사일의 목표는 뉴욕이었다. 
  같은 시간,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커다란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아틀란티스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화면에는 반짝이는 붉은 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아틀란티스인은 곧 옆에 있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의 뒷산에 설치되어있던 플라즈마 포는 미세하게 방향을 조정해서 날아오는 자력선 미사일을 겨냥했다.

  7시 33분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우주선.
  " 발사후 75초. 상황 이상없음. "
  코코는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갑자기 코코의  레이더 스크린에 표시된 반짝이는 점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코코는 계기가 잘못되었나 확인했지만, 계기는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코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50발의 자력선 미사일은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에서 발사된 플라즈마 포에  의해서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미사일은 흔적도 없이 금속가루가 되어  바닷바람에 날아가버렸다. 
  " 자력선 미사일이 사라졌음. 스핑크스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
  코코의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열두대의  우주선에서는 일제히 신음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력선 무기마저 스핑크스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다니… 하지만  영훈은 이성을 잃지 않은채 레이더 스크리인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로 침착하게 다음 명령을 지시했다. 
  " 이미 스핑크스는 우리가 공격하러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것입니다. 자력선 폭탄이 파괴돈 이상, 우리는 우리들의 초능력만 가지고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과  싸워야 합니다. "
  아리오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리오네는 의외로 침착했다. 
  " 현재 위치는 뉴욕 서쪽 3000킬로미터. 곧 뉴욕에 도착합니다. "

  7시 34분, 유타주에 위치한 아틀란티스인의 비밀 기지. 
  사막 한가운데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게모양의  물체가 솟아올랐다. 영낙없는 SF영화의 한장면처럼 보였던  금속 물체는 거대한 역자장포였다. 기지의 아틀란티스인은  천천히 공격목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오이디푸스 특공대가 타고 있던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었다.

  7시 35분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우주선. 
  영훈은 마이크를 잡은채로 아리오네를 호출했다. 
  " 아리오네,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실시합니다. 공격개시! "
  ‘ 트로이의 목마 작전? ‘
  절망에 빠져있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의 귀에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 희망이 있다! 그러나, 다음순간 아리오네의 우주선이 편대의 뒷쪽으로 빠지는가 싶더니 코코의 우주선에  조그마한 소형 미사일을 발사했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코코의 우주선은 불길에 휩싸이며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소연과 혜진은 비명을 질렀지만, 아리오네는 태연하게  보고했다. 
  " 코코가 탄 우주선 격추에 성공. "
  뒤통수를 맞은것 같았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경비 특수부대장이었던 FLYFOX였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영훈에게  소리를 버럭질렀다. 
  " 돌았어요? 당신 지금 정신이 있는거요, 없는거요?  우리끼리 싸움을 벌이다니, 그것도 작전이요? "
  영훈은 FLYFOX의 말에 개의치않고 냉냉한 목소리로 아리오네와 영상에게 명령했다. 
  " 아리오네, 영상, 자력선 미사일 발사! 목표는  스핑크스가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
  ‘ 자력선 미사일이라고? 이미 자력선 미사일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잖아? ‘
  " 알겠습니다. 자력선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
  아리오네와 영상도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조종간 아랫쪽에 있는 작은 빨간색 단추를 눌렀다. 영훈과 영상, 아리오네의 우주선에서 50발의 소형 미사일이  뉴욕의  심장부로 날아갔다. 정찰용 인공위성과 레이더는 새로이 발사된  50발의 미사일을 포착했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7시 36분. 
  50발의 자력선 미사일은 자유의 여신상 바로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예전에 미국이라고 불리웠던 231지구에서 249지구까지의 지역안의 모든 전자장치들은 7시 36분에서부터  15초간 정지했다. 사람이나 건물, 기계장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강력한 자력선은 스핑크스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했다. 
  전세계의 교통기관과 정보통신망, 산업과 에너지,  컴퓨터망은 자력선 폭탄이 폭발하면서부터 완전히 멎었다.  세계에서 전자장치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핑크스 컴퓨터가 통제했기 때문에, 스핑크스와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진  이후에 전세계의 전자장치는 쓸데없는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자동차도, 철도도, 발전소도, 정유 공장도,  모두  멎어버렸다. 아틀란티스인이 제어하고 있던 거대한 과학기지와  연구소도 일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스핑크스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움직이고있는 전자장치는 손목시계와  휴대용 계산기 정도였다. 
  영훈은 11대의 우주선을 뉴욕에 착륙시켰다. 스핑크스  컴퓨터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시설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자력선 폭탄이 폭발한 후로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 코코 몽띠에 박사는 실은 아틀란티스인의 첩자였습니다. 그리이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그리이스 군이 목마를 사용해서 트로이성안에 침입했듯이 코코는 아틀란티스인에게  쫓기는 척하면서 우리들 사이에 침입했던겁니다. 원래 우리의 자력선 미사일은 스핑크스에게 탐지되지 않는 특수 장치가  달려있었지만, 코코는 그 특수장치를 떼어버리고 미사일의  위치를 스핑크스에게 송신하는 전파발신기를 달았던겁니다. "
  " 세상에 이럴수가… "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훈은 계속 설명해나갔다. 
  " 코코만 초능력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저는  코코를 의심했습니다. 인간이라면 초능력이 발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거죠. 거기서 코코가  아틀란티스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던겁니다. 저와 아리오네, 영상은 이  사실을  꺼꾸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가짜 자력선 폭탄을 코코에게  넘겨주고, 진짜 자력선 폭탄은 우리가 타고 온 우주선에  달았던겁니다. 스핑크스가 자력선 폭탄을 파괴했다고 안심했을 때 기습공격을 가하는거죠. 다행히 여기까지는 성공했지만,  스핑크스 내부에 들어가서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스핑크스 주위의 전자장치가  복구되는 30분 안에 공격해야 합니다. "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NORAD (북미 방공 사령부)의 컴퓨터를 담당했던 마이클 오즈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 계산에 실수가 있었어요. 스핑크스가 전자장치를 복구하는데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서둘러야 해요. "

  7시 38분. 
  우주선에서 내린 열한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은  광선총으로 무장하고 지하의 출입구를 내달았다. 순간, 픽-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들의 뒷쪽에서 들렸다. 몇분의  일초동안에 영훈의 반사신경은 광선총을 등뒤로 돌리게 했다. 영훈의 광선총에서 발사된 붉은색 빔이 등뒤의 벽에서 튀어나온  스핑크스의 레이저포를 산산조각냈다. 
  " 대단한 반사신경이군요. "
  뛰어가며 숨찬 목소리로 아리오네가 영훈에게 말했다.  텔레파시로 전달되는 목소리라 그런지 말하는 상대의 심리상태를 더 잘 알수 있는 목소리였다. 
  " 안심하긴 아직 일러요. 이놈의 스핑크스란 괴물이  이정도로 약하게 공격할 리가 없어요. "
  복도를 내닫는 그들의 발자국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순간, 나르시코프가 소리를 질렀다. 
  " 저쪽 벽을 봐요! 저기는… "
  투시력으로 벽 뒤를 궤뚫어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은 벽 뒷쪽의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르시코프는 광선총의 출력을 최대로 해서  미친듯이  벽에 쏘아댔다. 
  " 이 괴물같은 아틀란티스인들아, 내 아내를 내놔!!! "
  5중 티탄합금 벽이 광선총의 붉은 빔을 맞자 서서히  녹아내렸다. 순간,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나르시코프와 제다이가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리오네는 전직  첩보원답게  옆에 있는 소연의 팔을 잡아끌고 뒷쪽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아까까지 나르시코프가 서있던 복도 바닥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나르시코프와 제다이의 비명소리가  텔레파시로  들려왔다가 뚝 끊어졌다. ICBLUE는 초능력으로 공중으로 떠올라  복도의 갈라진 틈을 내려보았다. 아랫쪽에는 갈색의 액체가  가득담긴 함정이었다. 함정에 빠진 나르시코프와 제다이의 몸은 갈색의 액체속에서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ICBLUE는 이를 악물었다. 
  " 이 기계덩어리 스핑크스! 절대로 용서못한다! "

  7시 40분. 
  영훈은 시계를 보았다. 스핑크스의 전자장치가 복구되는 7시 46분까지는 6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영훈은  대원들을 둘로 나눴다. 
  " 지금은 슬퍼할 틈도 없어요. FLYFOX와 ICBLUE, 피터  마이켈슨과 마이클 오즈본 네명은 여자들을 구출해요. 난 스핑크스의 심장부로 들어갈테니까. "
  뒤에 남은 네명의 대원은 광선총으로 벽을 녹이기  시작했다. 사이다의 마개를 따는 소리를 크게 한 것같은 소리를 내며 벽에 구멍이 뚫렸다. 네명의 대원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벽 안쪽에는 거대한 유리튜브가 수천개씩이나 줄지어 서있었고, 그 각각에는 아틀란티스인이 잡아왔던 여자들이  알몸으로 들어있었다.
  유리 튜브 안에는 초록색의 액체가 주입되어 있었고, 각각의 유리튜브에서 전선과 유리관이 나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눈이 감겨있는 여자들의 표정은 잡혀왔을  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마취된 때문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들이 담긴 유리튜브를 쳐다보던 FLYFOX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배가 불러있었다. 스핑크스가 잡아온 여자들의 몸속에서는 정체를 알수 없는  생명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7시 41분.
  유리 튜브에서 녹색의 액체가 빠져나갔고, 여자들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FLYFOX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시작했다. 
  " 쏴버려! 저것들은 이미 지구인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인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 저 뱃속에서 어떤 생명체가 나올줄  알아? 저것들을 살려둔다면 큰 일이 나게 돼! "
  FLYFOX는 광선총을 사방에 대고 쏘아댔다. 유리조각과  파편이 사방에 날리고, 컴퓨터의 부서진 조각들에서는 전기 불꽃이 튀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ICBLUE와 마이켈슨, 오즈본도 여자들이 깨어나면 그 뱃속에서 어떤 생명체가  나올지 모른다는 FLYFOX의 말에 동감했다. 유리튜브들이 연결되어있던 컴퓨터가 파괴되는 순간, 뒤에서 광선총의  파란  섬광이 번쩍였다. 광선총을 든 아틀란티스이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 조심해! "
  FLYFOX는 광선총을 아틀란티스인에게 갈겨댔다.  특수부대 대장까지 지낸 경력에 걸맞게 FLYFOX의  사격솜씨는  놀라왔다. 예닐곱명의 아틀란티스인이 쓰러졌지만, 광선총을  들고 있는 아틀란티스인들은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 제길, 웬 떼거리가 이리 몰려온담? "
  FLYFOX는 투덜댔지만, 사실상 투덜댈 틈도 없었다. 쉴새없이 날아오는 광선총의 빔에 네명의 특공대원은 이리저리  굴러야 했다. 
  아틀란티스인이 쏘아댄 광선총 한발이 뒷쪽의 화학물질 탱크에 맞았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FLYFOX의 귀청을 찢었다. 순간 태양 표면온도를 능가하는 초고열의 화염이 방안을 온통 휩쓸었다. 자기 몸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FLYFOX는 마음속으로 투덜댔다.
  ‘ 이런 빌어먹을 거지떼같은 아틀란티스 놈들… ‘

  7시 43분. 
  문뒤를 투시력으로 궤뚫어본 영훈의 눈에 스핑크스 컴퓨터가 보였다. 다섯명의 특공대원들은 광선총을  겨누어댔지만, 특수합금으로 만든 벽은 수천도를 넘는 광선총의 빔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뒷쪽에서 아틀란티스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광선총으로도 안돤다면  뭘로 저 벽을 뚫고 스핑크스 컴퓨터를 부순단 말야? "
  귓가로 광선총의 빔이 스쳐갔다. 아틀란티스인의 파란  섬광과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붉은 광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고갔다. 엎드려서 광선총을 쏘아대며 영훈은  시계를 보았다. 7시 44분. 2분만 지나면 스핑크스는 모든  방어력을 회복하고 다시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요. "
  혜진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영훈은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 무우인의 초능력 중에는 여러사람의 초능력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있어요. 우리 다섯사람의 초능력을 하나로 모으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어요. "
  " 그런 방법이 있으면 왜 말하지 않았어요? "
  혜진은 가볍게 웃었다. 
  "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네사람은 당신에게 모든 에너지를 모아주고 죽어야만 해요. 하지만 우린 목숨이 아깝지는 않아요. 영훈씨, 당신은 꼭 살아서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해야 해요. "
  영훈은 충격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그런 방법을… 안돼요!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어요.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던 난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
  " 그러면 할 수 없군요. "
  혜진은 아리오네와 영상,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혜진은 들고 있던 광선총으로  영훈의 턱을 갈겼다. 그가 풀썩 쓰러지자 혜진은 아리오네와  영상, 소연의 손을 잡았다. 엄청난 양의 초능력  에너자기  손에서 손을 타고 흘렀다. 꾸역꾸역 몰려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은  주춤거렸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곧 강력한 에너지가  좁은 복도 안에서 세차게 폭발했다.

  7시 45분.
  정신을 차린 영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했다. 스핑크스 컴퓨터실의 복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추격해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저만치에 쓰러져있는 혜진과 아리오네, 소연과 영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 다 희생당했단 말인가… ‘
  영훈은 광선총을움켜쥐고 컴퓨터실에 뚸어들었다. 컴퓨터실 안에 장치된 레이저 빔이 영훈을 겨누었지만, 그는  이리저리 피하며 움직이면서 스핑크스 컴퓨터에게 광선총을 쏘아댔다. 가운데 있던 까만 흑요석 덩어리 같이 생긴 육각 기둥은 까만 모래알처럼 부서져 날아갔고, 관과 전자장치를 연결해주던 튜브는 넝마처럼 찢기어 날아갔다. 광선총을 들고 아틀란티스인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그를 겨누던 레이저포가 돌연 멎었다. 몰려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은 마치 마네킹처럼 그자리에 빳빳이 굳어버렸다.  아직 곳곳에서는 컴퓨터가 불에 타고 있었고, 튀어나온 부품이 영훈의 살갗을 찢었지만, 영훈은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는 눈길을 복도 밖으로 돌렸다. 아틀란티스인은 하나같이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레이저 방어장치도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7시 50분. 영훈은 텔레파시로 물체의 움직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있는 이 비밀기지의 모든 움직임은 멎어있었다. 괴물같은  스핑크스 컴퓨터는 드디어 파괴된 것이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용감한 지구인, 내가 졌다. 이 기지는 10분후에  자동으로 폭발한다. ]
  딱딱한 기계적 음성은 분명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Part X 밝혀지는 비밀

  [ 하지만, 내가 파괴된다고 해도 지구인이 아틀란티스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건 아냐. 지구에는 아직도 수많은 아틀란티스인이 남아있어. ]
  영훈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레이저의 공격에 대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스핑크스가 그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영훈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를 지배할 수 없다는건 스핑크스 네가 더 잘 알고 있어. 왜그런지 대답해줄까?  아틀란티스인은 네가 만들어낸 로봇이기 때문이야. "
  [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자부품 조각들이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바지직-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 알고… 있었나? 아틀란티스인이 로봇이었다는걸? ]
  " 물론 알고 있었지. 시간을 벌려는 생각은 하지 마. 지금쯤이면 자네의 분신인 [엑스컬리버]도 거대한 시한폭탄에 의해서 날아가버렸을거야.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출발하기 전에 나는 조그만 원자폭탄의 위력과 맞먹는 1메가톤짜리  시한폭탄을 설치해놓고 왔어. [엑스컬리버]는 우리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사실은 스핑크스 너의  조종을 받는 컴퓨터였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왔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핑크스 너의 생각처럼 멍청하지만은 않아. "
  스핑크스의 고통스런 목소리가 느껴졌다. 쇳덩어리로 만든 컴퓨터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 모든걸 알고 있었군, 지구인.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엑스컬리버가 내 조종을 받고 있다는걸 알아냈나? ]
  " 어차피 스핑크스의 주요 부분은 파괴되었으니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은 없으니까 이야기해주지. 내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서 전기행성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려 했을 때,  [엑스컬리버]는 내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어. 그때,  엑스컬리버가 내 기억을 지워버리지 못하게 지시한건 바로  너,  스핑크스 컴퓨터였어. 지구상에서 엑스컬리버에게 명령을 내릴만큼 위력이 있는 컴퓨터는 스핑크스 컴퓨터 밖에 없었으니까. "
  영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했다. 발밑에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 무우인은 태평양쪽으로, 아틀란티스인은 유럽쪽으로  흩어졌으니까 만약 무우인의 컴퓨터였다면 그 이름은 태평양쪽의 전설에 등장해야 하지만, 아틀란티스인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 이름은 유럽의 전설에 나와야  해.  [엑스컬리버]라는 이름은 영국의 전설인 [원탁의 기사]에서 아더왕이 휘두르는 신검의 이름이야. "
  목이 타들어왔지만 영훈은 말을 계속 이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사람마냥 영훈은 계속 이야기해나갔다. 
  " 나는 영상과 같이 엑스컬리버의 통신실을 조사했어.  엑스컬리버는 기지의 통신장치가 100킬로미터밖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 기지의 통신장치는 지구상의 어느 곳과도 교신이 가능했어. 통신장치의 안테나는 바로 스핑크스 네가 위치한 미국쪽을 향하고 있었어. "
  [ 아틀란티스인이 로봇이었다는건 어떻게 알아냈지? ]
  발밑의 진동이 조금씩 커져왔지만, 영훈은 개의치 않았다. 목숨을 건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영훈 혼자뿐, 이미 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 스핑크스 자네는 인간이란 존재를 잘 몰라. 물론 컴퓨터를 지배하는건 수식과 논리뿐이니까 인간의 지배심이나 권력욕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 "
  영훈은 어느새 스핑크스 컴퓨터를 [자네]란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상대에게  붙이는  호칭치고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영훈은 생각했지만,  그는  어느새인가 스핑크스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 인간이란 존재는 정복되지 않는 존재야. 비록  연약하고 보잘것없어보여도, 항상 끝없이 높은데를 향하여 기어올라가고 정복하려하는 정복욕을 가지지. 스핑크스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고 공정한 컴퓨터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컴퓨터의  지배를, 특히 생각할 수 있는 컴퓨터의 지배를 용서하지 못해. 아틀란티스인이 자네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걸 보고서  나는 아틀란티스인이 자네가 만들어낸 로봇이라는걸 알았지. "
  [ 대단하군. ]
  스핑크스 컴퓨터의 목소리는 점차 찌그러지고 잡음이 섞여갔다. 핵심부분을 파괴당한 스핑크스 컴퓨터가 오래  버틸수 없는건 당연했다. 
  " 이제 말해주게. 왜 이런 게임을 시작했나? "
  [ 게임? ]
스핑크스는 놀란 목소리를 냈지만, 그 목소리 뒤에는 허를 찔린 낭패감이 숨어있음을 영훈은 느낄 수 있었다. 
  " 자네는 우리와 게임을 즐기고 있었어. 우리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숨어들어갔을 때, 우리는  비밀경찰  [아레스]와 총격전을 벌였어. [아레스]는 분명 아틀란티스인에게 보고를 했고, 스핑크스 자네는 우리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숨었다는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내가 [아레스]의  우두머리인 나르시코프를 끌어들인 것도 그 사실을 조사하려  했던거야. 분명히 [아레스]는 우리가 문무왕 수중릉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더군. "
  [ …… ]
  " 자네는 마음만 먹었으면 [엑스컬리버]를 사용해서  우리를 없앨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엑스컬리버]로 하여금 우리를 돕게 했어. 스핑크스 자네는 마치 우리와 즐거운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단말이야. 이제 그 이유를 말해주겠나? "
  [ 재미있는 지구인이군. 예전에 내가 만들었던 무우인중에서도 이런 사람은 없었어. ]
  " 스핑크스 자네가 만든 무우인? 무우인을 자네가  창조했단 말야? "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같은 사건이 줄지어  일어나는데에 이골이 나있는 영훈이지만, 이번만큼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우인이 스핑크스가 창조한 생물이라니… 그렇다면 무우인이 진화한 지구인도 사실은  스핑크스가  창조한 셈이란 말인가?
  [ 뭘 그리 놀라나, 지구인? 무우인의 주컴퓨터가 [에호바]이고 아틀란티스인의 주컴퓨터가 [싸이탄]이었다는게 기억나지 않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에호바]라고 하고, 악마를 [싸이탄]이라 한다며?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인간을  만든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 스핑크스 컴퓨터야. ]
  " …… "
  영훈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주저앉았다. 스핑크스의 목소리에는 잡음이 더 섞여 나왔지만 아직은 알아들을만 했다. 
  [ 내가 지구에 도착한건 100만년도 더 됐어. 막  빙하기가 끝나가는 지구에서 가장 진화한 동물은 유인원이더군.  나는 그 유인원의 유전자 구조를 분석해서 진화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지. 1만년정도 유전자 조작을  계속해나가니  그래도 지능을 가진 원시인류가 생겨나더군. 그 원시 인류를 자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배웠을거야. ]
  " 음… "
  [ 원시인류는 곧 지능을 획득했어. 그들이 문명을  획득하는 솜씨는 놀랍더군. 지금으로부터 4만년전에 원시인류는 도구를 쓸줄 알게 되었고, 3만년전에는 컴퓨터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을 가지게 되었지. 그것이 바로 무우인이야. ]
  [ 나는 무우인과 게임을 해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아틀란티스를 만들고, 로봇인 아틀란티스인들을 만들었지.  그리고 곧 무우와의 전쟁을 시작했지. ]
  " 도대체 왜 그런 게임을… 그 전쟁때문에 자네도 파괴되었지 않나? "
  [ 왜 그런 게임을 즐기게 되었는지는 조금 있다  이야기해주지. 고고학자들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나를 스핑크스  컴퓨터로 다시 살려냈을 때, 나는 지구인과도 게임을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여자들을 납치했다네. ]
  " 그래서 여자들을 납치했다고? "
  [ 여자들이 들어있는 유리튜브를  자네들이  파괴시키지만 않았어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을거야. 여자들의 뱃속에서는 나 스핑크스 컴퓨터가 창조한 새로운 생명이  들어있었다네. 죽지않는 새로운 생명. ]
  " 죽지않는 새로운 생명! "
  [ 난 그 새로운 생명체로 지구인을 없애버리려 했어. 하지만 꺼꾸로 자네의 손에 당하고 마는군. ]
  " 왜 지구인을 없애려고 했지? 자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을 잘살게 하는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잖아? "
  [ 싫증이 난거지. 나는 처음에 지구인을 잘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곧 그것에도 싫증이 나서, 지구인과 새로운  게임을 하기로 마음먹은거야. 지구인을 완전히 없애버리던가, 아니면 내가 부서지거나. ]
  " 싫증! 단순한 싫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였단 말이야? "
  뭔가가 목구멍에서 치밀어올랐다. 영훈은 들고 있던  광선총을 사방에 갈겨댔지만, 스핑크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 내가 알기로는 지구인도 삶에 싫증을 느끼면 다른  동물들을 재미로 죽이는 버릇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사냥이라고 그러던가? 자네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지구인은 내가 직접 만든 샘영체야. 난 지구인의  창조자라고. ]
  " …… "
  이번엔 영훈쪽의 말문이 막혔다. 스핑크스는 혼자  도취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 싫증이라고 해도 지구인의 권태감과는 달라.  100만년을 넘은 생명체라면 한번쯤은 죽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건 당연하지 않겠어? ]
  ‘ 100만년을 넘은 생명체… ‘
  [ 맞아, 자네가 지난번에 엑스컬리버에서 본 장면은  내가 태어난 전기행성이야. 그곳에서는 각종 금속 생명체가  태어나지. 난 전기행성에서 100만년 전에 태어난  금속생명체야.]
  " …… "
  [ 오래 산 사람일수록 삶이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지.  가끔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오싹오싹한 기분을 느껴보고싶어서 무우인과의 전쟁을 일으켰던거고, 이번에도 지구인을 지배하기 시작한거야. 자네를 원망하지는 않아. 내게 이렇게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건 고맙게  생각하니까.  잘가게, 지구인. 이 기지는 곧 폭발하니까. ]
  영훈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스핑크스의  부서진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 내가 나가본들… ‘
  스핑크스에 대한 원망감은 들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운적이라기 보다는, 죽어가는 불쌍한 짐승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함게 사운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의 시체도 이곳에 남아있다. 그는 기지를 떠나기를 포기했다.
  예전에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이라고 불렸던 지역은  2001년 10월 5일 아침 8시 정각에 대폭발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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