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Author : 박태견

    프롤로그 – 21세기의 세 가지 얼굴

    파워 그룹: 제 2의 신, 글로벌 미디어
  멀티미디어 황제 – 제럴드 M. 레빈
  독일의 숨겨진 소프트 파워 – 베르텔스만
  광고계의 절대군주 – 덴츠
  지상 최고의 이미지 – 소니
  글로벌 뉴스 왕국 – CNN
  창조적 혼란과 언론 – 로이터
  지구촌 영상축제 – MIP TV
  중남미 전파황제 – TV 글로보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자 – 앨 고어
  FCC의 젊은 혁명가 – 리드 헌트
  지구촌 전파경찰 – 무선통신국
  물류혁명의 견인차 – 바 코드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 – 미래형 컴퓨터

    파워그룹: 세계를 움직이는 황금의 마이더스
  마이더스의 손 – 조지 소로스
  화교 따이꿴 – 리 카싱
  할리우드 마피아 – 잭 발렌티
  식량 마피아 – 까길
  국제신용 심판관 – 무디스 투자서비스
  지상 최대 사교클럽 – 르네상스 그룹
  세계의 경영대학 – INSEAD
  제1세계 통상정책의 산실 – 다보스 포럼
  국제금융계 신경망 – SWIFT 네트워크
  개발도상국 경제고문관 – 제르리 삭스
  세계의 중앙은행 – 연방준비제도 공개시장위원회
  통합유럽의 금융센터 – 분데스방크 중앙협의회
  저팬 머니의 심장부 – 가부토 초
  세계최대의 민간은행 – 다이이치 간교
  일본의 파워와 그 한계 – 엔
  지구촌 일곱 난쟁이 – G7
  빚쟁이 잔치 – 파리클럽
  아프리카의 희망 – 바바칼 느쟈예
  대중화경제권의 기관차 – 광동성
  지구촌 용광로 – APEC
  오나시스 파워 – 아크티 미아울리 거리
  세계의 관문 – 뉴욕 공항
  오일! 아직도 무시 못할 절대파워 – ARAMCO
  당근과 채찍 – 러시아 에너지위원회

    파워 그룹: 21세기 첨단연구 파워
  리엔지니어링 혁명의 귀재 – 이나키 로페스
  일본은 죽었다 – 오마에 겐이치
  19세기의 반항이 만든 신화 – 마이크로소프트
  난지도 파워 –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지구촌 발명센터 – AT&T 벨 연구소
  타도! NASA – 아리안 스페이스
  입자물리학의 메카 – CERN
  뇌연구 G7 – 휴먼 프린티어
  최첨단 유전공학 센터 – 제넨테크
  일본의 천적 – 현대그룹
  소프트 그린 에너지 – 차세대 전지
  컴퓨터 해커 파워 – 스텔스 바이러스

    파워 그룹: 부드러운 힘의 시대, 글로벌 문학파워
  엔터테인먼트계의 대부 – 마이클 오비츠
  아파르헤이트를 부순 양심의 노래 – 조니 클레그
  지구촌 최대 지식창고 – 미국 의회도서관
  세계출판인의 축제마당 – 인터내셔널 북 페어
  세계과학의 심판관 – 주간 네이처
  음반계의 제1인자 – 폴리그램
  경매계의 250년 황제 – 소더비
  전위미술의 메카 – 뉴욕 현대미술박물관
  아시아의 할리우드 – 볼리우드
  통일유럽의 문화수도 – 베를린
  스포츠 중계 왕국 – TWI
  과학과 점의 만남 – 갤럽
  혼돈의 가공할 힘 – 카오스 이론

    파워 그룹: 글로벌 소비 폭발, 레포츠 소비파워
  프로스포츠계의 차르 – 마크 맥코맥
  파라다이스로 모십니다! – 클럽 메디테레네
  지금까지 판 햄버거, 800억 개 – 맥도널드
  글로벌 X세대의 절대우상 – 샤킬 오닐
  자동차업계의 막후 실세 – 국제자동차연맹
  패션계의 여왕 – 엘리트 에이전시
  축구스타의 이상향 – AC 밀란
  전자오락 왕국 – 닌텐도
  인스턴트 식품 제국 – 네슬레
  죽음의 전파자 – 필립 모리스

    파워그룹: 제3의 권력, 지구시민 파워
  슈바이처의 아들들 – 국경없는 의사들
  지구난민의 피난처 – 유엔 난민고등변무관사무소
  인권의 마지막 보루 – 피에르 사네
  힘 없는 자의 힘 – 아웅산 수지
  마야의 여왕 – 리고베르타 멘추
  중국의 눈엣가시 – 달라이 라마
  녹색지구 파수꾼 –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가이아의 분노 – 제임스 러블록
  환경문제는 곧 돈문제 – 지구환경기금
  외로운 핵폐기 감시자 – 국가원자력감시위원회

    파워 그룹: 검투사 시대 재현, 신 군사 파워
  날으는 백악관 – 미국공군 제1호기
  펜타곤의 비밀병기 – 국가안전보장국
  싱크 탱크의 숨겨진 저력 –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한반도 탈냉전 기폭제 – 영변
  동서군축 해결사 – 군비관리군축국
  유럽의 홀로서기 – 유럽연합군
  지상최대 군사동맹 – 북대서양조약기구
  판도라 상자 – KGB 아르히프
  죽음의 상인 – 러시아 국가방위산업위원회
  제3의 핵파워 – 우크라이나 공화국
  크림 반도의 뇌관 – 흑해함대
  아시아의 생명선 – 말래카 해협
  마지막 테러기지 – 수단 테러 훈련캠프
  국제분쟁 중재 파워 – 유엔사무국 군가고문위원회

    파워그룹: 해빙기의 시한폭탄, 원리주의 조직들
  교황의 비밀군대 – 오푸스 데이
  초보수 전도사 – 라디오 바티칸
  이슬람 원리주의 파워 – 무슬림 형제단
  가자의 성난 영웅들 – 하마스 운동
  알라의 젊은 사자들 – 메디나 대학
  신흥 신비주의 – 사이언톨로지교회
  휴거될 그날을 기다리며 – 루바비치 랍비
  뱅골의 시한폭탄 – 바라티야 자나타 당

    파워 그룹: 글로벌 마피아 사단
  핵무기 밀렵꾼 – 체첸 마피아
  방세옥의 후예들 – 삼합회
  지상최대의 코카인 제국 – 콜롬비아 카르텔
  마약전쟁의 야전사령관 – 리 브라운
  유럽연합의 범되 방패 – 유로폴
  프렌치 코넥션 – 발칸 루트
  지옥의 마약 – 크랙
  깨끗한 손 – 지안카를로 카셀리

    파워 그룹: 삶과 죽음의 파워
  지상최대 제약 공룡 – 머크 연구소
  인간 유전자지도 그리기 – 휴먼 게놈 프로젝트
  에이즈의 유일한 천적 – 콘돔
  에이즈 파수꾼 – 마이클 머슨
  더이상 인구는 자원이 아니다 – 중국 국가계획출산위원회
  인간에게는 나태권이 없다 – 바티칸 가족문제협의회

  1980년대 말 냉전 이데올로기가 표류를 시작한 바로 그 시점, 대체 이데올로기로서 급속히 일반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이 다름아닌 미래학이다. 앨빈 토플러 등 미국 경영, 경제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무수히 쏟아놓은 미래학 서적은, 그후 1990년대 탈냉전과 정보혁명의 융단폭격 아래 국내는 물론, 지구촌 전체적으로 변혁과 새 패러다임의 필요성이 절박해지면서 더욱 폭발적으로 읽혔다.
  "근육과 자본의 시대는 가고 두뇌의 시대가 왔다"는 ‘지력사회’출현, 제조업의 몰락과 정보산업의 폭발로 압축 가능한 제3차 산업혁명의 초고속진행, 초국가자본의 전일적 지구촌 지배와 이에 대항한 초국가시민 파워의 빅뱅, 권력의 새 중추가 될 엘리트 지식노동자군의 집단이기주의 표출, 계급갈등 종언 등 미래학자들이 그리는 21세기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고 급박했다. 특히 이들 미래학서들은 종전의 사회과학서 들과는 달리, 지구촌 곳곳의 살아 꿈틀대는 풍성한 실례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논거를 펼쳐서, 읽는 이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필자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그러나 웬만큼 미래학서 들을 훑고 정보홍수의 위압감에서 벗어나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 한계도 부분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미국 경영학자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상은 과연 가치 중립적이며 보편적인가.
정말 계급갈등은 소멸되고 엘리트 두뇌집단이 자본과 노동자군 위에 군림하게 될까. ‘제3의 물결’로 불리는 세기말의 초정보혁명은 과연 인류의 빈곤과 갈등, 대립을 해소하는 기폭제가 될 것인가. 또 그들이 자신의 논거로 인용하는 자료들을 과연 믿을만한 것들인가. 만에 하나, 자의적으로 이용한 부분은 없는가. ‘지금 이곳’의 우리 시각에서 전면 재검토해 봐야 할 의문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같은 의문들을 풀려고 하자, 무엇보다 크게 부딪쳤던 한계가 정보의 절대부족이었다. 과연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진행중인가. 권력이동이 급속히 진행될 격동의 21세기에 지구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구체적 주역’들은 누구일까. 미래학자들은 자신의 논법을 증명하기 위해 무수한 정보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보는 편린에 불과하여, 총체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목이 말랐다.
  그러던 중 1994년 초 한 낭보에 접했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 미국의 크리스찬 사어언스 모니터,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등 전세계의 30대 주요 신문과 잡지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제언론 신디케이트인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World Media Network가 공동 프로젝트로 탈냉전 지구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각 분야의 대표적 조직과 인물 127개를 ‘월드 파워센터’로 선정,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미래의 지구촌 주역을 가려내기 위한 범지구적 지적 탐구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에 학자중심의 로마 클럽 등이 행하던 범지구적 과제를 정보수집력과 동물적 후각이 한층 발달한 언론이 떠맡고 나선 것이다.
  현재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에 가입한 언론사는 모드 30개사이다. 이들은 모두 정치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 보도와 불편부당한 가치평가를 추구하는 정통언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기존의 대다수 국제언론 모임이 발행인, 편집인들의 친목모임적 성격이 강하거나 제1세계 언론 중심인데 반해, 이 네트워크는 제1세계 언론뿐 아니라 제3세계와 구동구권 언론들까지 골고루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 지구촌 언론의 공통 관심사와 인류의 보편과제를 공동 취재한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세기적 대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필자는 그후 수소문 끝에 외국의 한 라인을 통해 이들이 선정한 ‘127대 월드 파워센터’의 명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이상의 자료 입수는 불가능했다. 이때부터 국내외 자료 수집과 직접 취재,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한 기나긴 정보사냥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취재 목적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공부와 기사 작성을 위한 기초공사였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서 21세기를 재단하는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의 독특한 시각과 국내에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21세기 주역들의 움직임을 소개하면 ‘정보 빈곤’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내놓게 된 책은 바로 반년여에 걸친 이같은 정보사냥의 1차 결실이다.
  취재를 진행할수록 새삼 놀란 사실은 127대 파워센터의 가공할 파워와, 이들을 10개 파워집단으로 묶어낸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이들은 지존의 서방 중심적 미래학서 들이 간과한 지구촌 곳곳에 숨겨져 있는 미래파워들을 정확히 집어냈다. 또 현재 아무리 외형이 거대하다 할지라도 미래를 선도할 파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세력은 과감히 명단에서 배제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내노라 하는 울트라 제조업체들이 거의 이 명단에 끼이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들은 또 기존의 미래학자들이 주로 기업 연구에 치중해온 반면, 국제시민파워와 원리주의 세력, 신 군사파워, 심지어는 국제범죄단까지도 향후 지구촌을 움직여 나갈 핵심변수로 설정함으로써 말 그대로 지구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있었다. 탈고하고 나니 정말 몇 년만에 제대로 ‘큰 공부’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적일수록 부족한 게 많다. 127대 파워 가운데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체결로 해체된 런던그룹 같은 경우는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어 제외했고, 조사내용이 빈약한 몇몇 항목도 제외했다. 소살리토(미국), 미래공동체전망소위원회(벨기에), 아스트리드(영국), 이브라임 루고바(구 유고), 존 라울스(미국), 마리오 베타티(프랑스), 페트초라 수도원(러시아), 에디르 마세도(브라질) 등이 제외된 항목이다. 전적으로 필자의 과문 탓이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원고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작업내용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족하나마 이 정도 정보와 시각이라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을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미래학은 관념학이 아닌 현실학이어야 한다.
  ‘창조적 혼란’과 ‘파괴적 혼란’ 사이의 절대기로에 선 우리에게 이 책이 올곧은 좌표설정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천구백구십사년 십일월
  박태견

      프롤로그 – 21세기의 세 가지 얼굴

  "세계체제에 블랙홀이 나타나고 있다. 인류역사상 가장 진귀한 한가지 사건, 곧 권력의 본질 자체에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권력이동은 단지 권력을 이전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변질시키고 있다" – 앨빈 토플러

    자본 황금시대 개막
  "글로벌 시대의 주역은 세계200대 기업이다. 이들은 세계경기와 상관없이 부단히 팽창해 왔고 냉전종식 후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이들은 세계경제를 급속히 통합하는 동시에, 불황과 빈곤을 심화시키는 주역이다. 대통령으로 상징되던 종전의 중앙국가권력은 실권 없는 군주로 ‘신 봉건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프랑스 국제경제학자 프레데릭 클레르몽이 워싱턴DC 정책연구소의 존 카버너와 1994년 공동발표한 (지구자본주의 날개 아래에서) 라는 논문에서 1982년부터 10년 동안의 세계 200대 기업 변천사를 분석한 뒤 내린 21세기 전망이다.
  이들은 인류사상 최초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전세계를 관철하게 된 21세기는 ‘자본 황금시대’가 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는 3만 7천 개의 다국적기업과 17만 개의 자회사가 지배하고 있다. 또 세계기업 200개 중 172개를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5개국이 장악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세계의 경제성장 속도가 줄어들었음에도 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국적기업의 매출액은 1982년 이래 10년 동안 3조 달러에서 5조 9천억달러로 두 배나 늘었다. 세계 국가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4.2p에서 26.8p로 확대되었다.
  200대 다국적기업 가운데서도 진짜 실세는 제너럴모터스(GM)를 필두로 한 상위 10대 기업이다. 1992년에 이들 상위 10개사의 총이익은 348억 달러로, 11위 이하 나머지 190개 사의 이익을 모두 합한 368억 달러에 필적한 정도이다. 세계최대 기업인 GM보다 국내 총생산이 많은 국가는 지구상에 19개국 밖에 없다.
  국제정세 급변에 따른 세 가지 요인의 출현으로, 이들 200대 기업의 팽창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첫번째 요인은 사회주의 불럭의 해체와 자본주의화이다. 동유럽 사회주의 블럭이 해체되고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이 급속히 자본주의를 따라 시장경제 체제에 새로 30억 명이 편입되었다.
  두번째는 국제경쟁력을 이유로 한 각종 규제완화와 민영화이다. 전기, 가스, 광산, 철도, 항공, 전신전화 같은 공공부문이 급속히 민영화되어 다국적기업의 활동영역을 넓혀주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약화와 기존 복지국가 개념에 대한 비판이 이런 확장을 한층 쉽게 하고 있다.
  세번째는 정보기술의 급격한 혁신과 보급에 따른 자본 월경의 극대화이다. 국제외환시장에서 하루에 움직이는 투기성 자본은 지난 1986년 2,900억 달러이던 것이 1990년에는 7천억 달러로, 1994년에는 각국 통화당국의 통제가 불가능한 1조 3천억 달러로 폭증했다.
  이같이 급속하게 지리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글로벌화함에 따라, 가장 큰 이득을 보고 있는 집단은 GM 등 자동차의 빅3를 위시한 컴퓨터소프트웨어, 전자부품, 항공산업, 전기 같은 산업부문 회사들이다. 현재 이들 각부문의 상위 5개사는 전세계 생산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가격담합 위험이 대단히 켜졌다.
  다국적기업의 급성장은 과거와는 달리 고용증가로 이어지지 않아 잠재적으로 심각한 사회, 정치불안을 낳고 있다. 한 예로 세계 상위 500대 기업은 지난 10년 동안 이윤이 급증했음에도 매년 40만 명씩을 해고해왔다. 1994년 현재 1조 4천억 달러에 달하는 국제 누적채무도 해마다 6–8p씩 계속 늘어남에 따라 광대한 지역의 성장에 제동을 걸고 있다.
  세계경제는 급속히 통합되고 있으나, 부의 과대편중과 투기적 금융메커니즘으로 인해 불황과 빈곤이 심화되고 있다는 게 이들 두사람이 내린 최종 진단이자 엄중한 경고이다. 자본이 정치권력이나 국가주의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지구촌의 절대권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21세기의 첫번째 얼굴이다.
  이같은 자본 절대권력화 추세는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가 선정한 127대 파워센터 가운데 절반 이상이 메머드 자본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매머드 자본의 활동영역은 단지 제조업에 멈추지 않는다. 기존의 제조업과 금융부문의 ‘황금의 마이너스’들을 위시해 ‘제2의 신’으로 자리잡은 미디어 기업과 글로벌 레저스포츠, 소비 그룹, 다국적 문화산업체, 최첨단 연구기업 등 3, 4차산업 부문의 신흥자본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가공스런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3, 4차 정보산업 부문에서의 신장세는 대단해서, 이들은 기존 자동차나 가전, 컴퓨터, 건설 등 제조업 부문의 거인들을 하나씩 제치고, 지구촌에서 가장 힘있는 절대권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나 엑슨, IBM, 인텔, 마쓰시다 같은 공룡기업들이 127대 파워센터에서 예외없이 제외되고, 마이크로소프트나 닌텐도, 베르텔스만, 타임 워너 등이 대표적인 신 자본권력으로 선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들 자본은 또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변화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놀라운 기민성도 과시하고 있다. 환경과 인권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면 즉각 ‘그린산업’과 ‘인권산업’이라는 이미지 변신으로 대처하고, 개중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산업과 그린에너지산업을 창출해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새로운 고부가가치 창출체인 ‘지적 인자’에 과감히 일부 권력을 이양하면서까지 이들을 즉각 자신의 세포로 흡입한다.
  이같은 기민성이야말로 가공스런 부의 집중 반대편에 있는 자본의 또다른 얼굴이자 숨겨진 절대 파워이다.

    초국적 시민사회의 출현
  "과거 3세기 동안 벌어진 대규모 전쟁은 국가간 전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양상이 바뀔것이다. 이미 국가 자체가 예전의 국가가 아니다. 국내시장보다는 국지시장, 역내시장, 세계시장 쪽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새로운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 부분은 초국가 또는 초국적 부문이다. 정치적 의미의 국경은 분명 존재하나, 경제적 의미의 국경은 나날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미 돈과 사람, 정보, 총, 마약, 문화, 종교, 사상이 국경을 뚫고 봇물처럼 유입되고 있다. 국민국가의 쇠퇴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른바 ‘지구규모 경쟁조직’의 출현이다. EC 의 과학기술예측과장인 리카르도 페트레스는 21세기 중반에는 독일, 미국, 일본 같은 국민국가가 더이상 사회경제적 통일체도 아니며, 궁극적 정치형태를 갖춘 국가도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국가 대신 미국의 오렌지, 일본의 오사카, 프랑스의 리용 같은 지역이 유력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결정권을 쥐는 것은 도시나 지역정부와 결합한 초국가 기업일 것이다. 이런 경제단위가 ‘궁핍화된 인간사회’라는 바다 위에 표표히 떠 있는 하이테크 군도를 형성할 것이라는 게 페트레스의 예견이다.
  그가 지적한 초국가기업 외에도 또다른 세계규모의 세력이 출현해 세계역학 판도를 주도할 것이다. 되살아난 종교, 분노한 민족집단, 국제난민과 특정 이념집단이 어떤 때는 국가, 지역, 도시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국제무대에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밖에도 수많은 비국가, 비기업 연대조직이 역사무대의 전면에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무수한 초국적 전문가 조직, 로비스트, 동업자조합, 환경보호단체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비정부조직(NGO)은 국경을 넘어서 사람들을 완만하게 엮어내는 조직, 이른바 ‘피부’ 같은 것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의 세계체제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기존체제에 반대하는 초국가운동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의 반체제 운동은 네트워크와 위성 등 모든 최첨단 통신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이 운동에는 극단적 환경보호운동조직, 성서신봉자, 범죄조직, 테러리스트집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같은 조직들은 이미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초국적 시민사회의 일부가 되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전쟁과 반전쟁)에서 한 주장의 요지이다.
  한마디로 21세기의 지구촌 주역은 더이상 국내 자본이나 국가정치권력만이 아닐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같은 기존의 정치, 자본 권력을 견제하는 제3의 권력으로, NGO로 대표되는 지구시민 파워와 원리주의 세력, 국제범죄단(ICO), 글로벌 미디어 등 신 권력이 지구촌의 주역으로 자리매김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가 127대 파워센터 가운데 나머지 절반을 이들 초국적 시민권력에 배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요컨대 지금 지구촌에서는 ‘지구자본과 지구시민의 대결’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장대한 권력이동이 진행중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기적 권력이동이 과연 인류에게 평화와 번영을 선사할지, 전쟁과 파멸을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토플러 같은 미래학계의 거목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21세기가 최악의 경우 로마 말기에 출현했던 약육강식의 검투사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같은 새시대는 얼음이 녹는 해빙기의 아침과 같은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내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기존 권력체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초국적 시민사회의 출현, 바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21세기의 두번째 얼굴이다.

    경제 공동운명체의 소멸
  21세기는 동시에 과거 300여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국가주의 또는 국민국가의 쇠퇴기가 될 것이다. 21세기의 세번째 얼굴은 이른바 경제공동운명체의 급속한 쇠락이다.
  전직 하버드 대학 교수 로버트 라이시 미국 노동장관은 (국가가 할일)에서 18세기 이후 국민국가의 흥망성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8세기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는 애국자라는 말이 빈번히 쓰이기 시작했다. 애국심은 통치자에 대한 종전의 맹목적 충성심보다 더욱 강한 힘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입증되었다. 애국시민들이 조국을 위해 싸울 때는 용병들보다 더욱 용감했다. 그 결과 정부는 충성스럽고 교육받은 시민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훌륭한 시민의 양성이 국가의 주요목표가 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한 국가의 소속원들은 경제 공동운명체라는 ‘경제국가주의’가 더욱 보편화되었다. 생산 및 운송수단의 근대화가 분산되어 있던 지방경제를 국가규모로 연결 시켰고, 세계시장에서 국가간 경쟁을 더욱 첨예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가 출현했다. 폭발적인 생산성 향상은 과잉생산 – 공황 – 보호주의를 낳았고, 잉여상품의 잠재적 소비시장인 후진국 쟁탈전을 낳았다.
  20세기 초 경제 국가주의는 더욱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어, 국민들은 개인의 경제생활이 국가경쟁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가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칼 마르크스는 세계노동자의 단결은 주장했으나, 국가에 대한 충성은 노동계급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0년대 미국경제는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미국경제의 특징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였다. 미국의 거대기업은 대량생산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군대식 전문관리제도’를 도입했다. 후일 이런 모습은 일본과 한국에 이전되었다."
  그러나 라이시는 근대를 특징지어온 이런 경제 국민국가, 경제공동운명체 이데올로기가 20세기 말 그 허구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급속히 침몰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국민총생산, 무역수지, 경제성장률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지겹게 듣고 있다. 마치 ‘국가 스포츠’처럼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어떤 이는 널찍한 선실에서 지내고 어떤 이는 비좁은 선실에서 북적대나, 모두가 예외없이 국가경제의 부침에 따라 함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배의 논리는 일본, 독일, 한국경제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더 이상 국가경제라는 베에 함께 타고 있지 않다. 자본, 기술, 시설의 국가간 이동이 쉬워짐에 따라 우리기업, 우리자본, 우리제품, 우리기술, 우리경제라는 개념은 급속히 퇴색하고 있다. 기업의 수익률이 높아졌다 해서 반드시 그나라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이 순간에도 이윤추구를 위해 전세계를 누비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조국과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 국민국가’ ‘경제 국가주의’의 대체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이익 중심의 ‘초국가’ ‘탈국경’ ‘글로벌리즘’이 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자본의 급속한 국적성 상실, 제조업 사회에서 지식산업 사회로의 구조개편, 근육노동자에서 두뇌노동자로의 권력이동, 극소수 계층에로의 부의 편중심화, 공동체적 가치관의 몰락 등을 꼽는다.
  라이시는 이런 현상들 가운데서도 대단히 창의적이나 국가 등 기존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희박한 ‘두뇌노동자’들의 출현과 이들의 권력 독식을 가장 중요한 변화로 꼽는다. 그러나 그는 이들 미래주역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다.
  "문제는 전세계 두뇌노동자 20p와 육체노동자 80p 사이의 경제연관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 두뇌노동자는 자국 내 시장만 대상으로 하는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팔아 생활수준을 높이고 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경제 공동운명체라는 허구적 동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경제동맹에서 탈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들은 물론 시민으로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는 자신과 비슷한 소득의 시민들로만 구성된 공동체이다. 예를들면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세금이나 기부금을 공원이나 공공운동장에 투자하지 않고 골프, 테니스, 스케이트 클럽 등 멤버십 시설에 투자하고 있으며 콘도미니엄이나 빌리지촌 같은 거주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이같이 자신이 속한 국가나 시민들에게도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과연 전세계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자신의 부와 노력을 제공하려고 할까. 민족국가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국경 안에서의 상호의존과 안보라는 실제적 필요에서 생긴 국가주의는 급속히 소멸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이며, 다른 세계 주민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 고민하고, 정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경제 공동운명체의 소멸. 별로 달갑지 않은 21세기의 세번째 얼굴이다.

    최후의 싸움이 아닌 최초의 싸움
  레지스탕스 출신의 실천적 지성으로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프랑스의 대원로 정치, 사회학자 애드가 모랭(72)의 말로, 과연 우리는 21세기를 어떤 자세로 맞이 해야 할 것인가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든 지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의 지식은 근시안적이고 불완전하다. 오늘날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 기술, 산업이 낳은 문명은 개인을 무시한 차가움 때문에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붕괴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상실한 데다가 현재의 삶도 만족스럽지 않은 까닭에 민족과 종교라는 자신들의 ‘과거’로 자신들을 가두어놓고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문화와 민족의 다양성을 없애 동일화시키는 게 아니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통합시켜 나가는 것이다.
  현대는 지구상의 모든이들에게 식량과 일거리를 줌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대이다. 그러나 각종 장애로 이것이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뿌리가 지구에 있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외에도 같은 운명을 지닌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 기존의 폐쇄적 사고틀을 바꾸어야만 한다.
  21세기 세계는 모든 인류가 지구를 ‘공동의 고향’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 ‘지성’의 눈은 활짝 열어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세계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최후의 싸움 단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싸움 단계로 접어 들고 있다."

      Power Group I 제2의 신, 글로벌 미디어

  "미디어는 이제 제 2 의 신이 됐다." – 토니 슈와르츠

  "미디어는 이제 제 2 의 신이 됐다."
  세계적 미디어 전문가인 토니 슈와르츠가 얼마전 펴낸 (미디어, 제 2의 신Media, The Second God)이라는 저서에서 멀티미디어 혁명기에 진입한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정치, 교육, 종교, 사회, 광고, 개인생활에 끼칠 영향력을 다각적으로 분석한 뒤 내린 최종결론이다. ‘제 4 의 권부’ 불리던 종전의 파워단계에서 한 단계 더 수직상승해, 이제는 3부 권력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울트라 파워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제2의 신’ 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새 저서 (전쟁과 반전쟁 War &Antiwar)에서 그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현대 고도정보사회에서 미디어는 이제 그 어느 누구도 통제불가능한 절대권력이 됐다. 그런데 미디어라는 이 괴물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게는 사업수익만 중시될 뿐 책임감이 없다. 책임감 없는 절대권력, 이것이 바로 현대 미디어의 실체이다."
  제2의 신은 그러나 인간이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기존의 ‘닫힌 사회’를 ‘열린 사회’로 발전시키는 혁명적 기폭제도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미디어는 인간에게 일방적 정보와 가치만을 전달하던 바보상자였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멀티미디어시대에는 시청자가 미디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양대 특징은 ‘주문형’과 ‘개방성’이다. 정보 초고속도로망과 멀티미디어 시스템만 구축되면 시청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메뉴를 골라, 그 정보가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CIA 내부에 있든 간에 그것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같은 새 시대의 개막은 종전의 빈부, 지역, 인종, 신체장애의 장벽을 일거에 허물어 버리는 새로운 정보 민주복지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정보공개법으로 상징되는 정보민주화이다. 정치권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은 정보민주화를 꺼린다. 공개하면 시끄러워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철저히 은폐하려 하고, 혼자 알면 이득이 되는 정보도 숨긴다. 기업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몇몇 고위층만이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무기로 자신의 권위와 독점이익을 챙기려 든다. 또 교육계에서는 밀폐된 교단에서 낡은 정보로 획일적이고 교조적인 교육을 행하고 있다. 부패의 근본고리도 바로 정보 밀폐에 있다.
정보사회에서도 ‘닫힌 구조’가 유지되면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능가하는 정보 초독재자의 가혹한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경고이다. 조지오웰이 "1984"에서 예언한 가공할 정보조작이 현실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보민주화란 정치민주화와 동의어이다. 정수란 물처럼 바람처럼 막힘없이 흘러가야 인류에게 득이 되고 기업이나 국가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는 법이다.
멀티미디어시대의 도래는 다시 없는 기회이자 위기이다. 제2의 신이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이 되도록 하느냐, ‘초독재자’가 되도록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몫이다.

    POWER 001 멀티미디어 황제: 제럴드 M. 레빈

  "우리는 당연히 예술가와 언론인을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소비자들을 불러다 줄 테크놀로지에 좀더 친숙해지는 일이다."

  1993년 6월 암으로 사망한 전임 회장의 뒤를 이어 타임 위너 커뮤니케이션(TWC)의 회장에 취임한 제럴드 레빈(54)이 가장 먼저 터뜨린 일성이다. 세계최대 멀티미디어 기업인 타임 워너의 총수다운 방향제시이다. 외부와의 접촉을 즐기지 않는 학자풍의 그는 맨해튼가에 위치한 타임 워너 본사의 29층 화장실에 앉아 자신의 선언대로 멀티미디어혁명을 가장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선두자리를 고수하기 위한 야심찬 글로벌전략을 총괄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타임 워너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레빈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레빈의 적극적 제언을 전임 회장인 스티븐 로스가 받아들여, 지난 1989년 시사주간지 (타임)을 발행하는 굴지의 언론사인 타임사와, ‘배트맨’ ‘보디가드’ ‘JFK’ ‘말콤 X’등의 히트작을 잇따라 제작한 할리우드 제2의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 커뮤니케이션즈가 합병하여 타임워너라는 세계최대 멀티미디어그룹으로 재탄생했다. 레빈은 당시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미디어와 컴퓨터. 통신이 하나가 되는 멀티미디어시대가 10년 내로 반드시 올 것"이라는 혁명적 예언을 펴면서, 새 시대에 대한 대비로 타임워너의 대합병을 주장해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레빈의 예견대로 현재 타임 워너는 (타임) (피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 20여 종의 잡지 외에 영화, 유선TV, TV프로그램 제작, 레코드, 음악, 서적 등 미디어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문화상품을 왕성히 생산해대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레빈은 또 24시간 뉴스 전문방송 CNN의 주식도 19.4p나 사들였다. 그가 화장이 된 첫해인 1993년 타임 위너의 총매출액은 145억 4천만 달러(11조6천억원)에, 경상이익 28억 3천만 달러(2조 2600억원)을 기록해 이 분야 최대기록을 새웠다. 주가도 레빈의 회장 취임 후 1년동안 30p나 폭등했다.
  타임 워너는 이밖에 현재 미국을 위시해 유럽, 아시아, 중남미, 동구권등에 2천만 가구의 유료시청자를 확보해 ABC등 미국 3대방송보다도 많은 이익을 내고 잇는 매머드 위성 유선TV사인 홈 박스 오피스(HBO)도 소유하고 있다. 이 유선방송 역시 레빈이 워너브라더스에 갓 입사한 1975년에, 위성과 방송의 결합을 최초로 회사측에 제안함으로써 발족될 수 있었다. HBO 산하의 시내막스는 현재 20세기 폭스사, 콜롬비아 픽쳐스, 트라이 스타 픽쳐 등 헐리우드의 간판 영화제작사들과 장기계약을 맺고, 이들 영화사가 지난 수십년동안 제작해온 영화프로그램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 취임후 타임 워너의 계열사인 워너 브러더스를 통해 일본, 영국, 독일, 덴마크 등지에 200개가 넘는 자체 대형극장을 직접 짓거나 매입했다.
  타임 워너는 1991년 일본의 전자업체인 도시바와 무역상사 이토추에 이들이 10억 달러를 출자하는 조건으로 필름과 유선TV의 주식 12p를 분배했다. 타임워너가 미국 내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일본자본을 끌어들인 것은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따른 초기의 자금난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현재 이미 100억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는 타임 워너 측은 앞으로 현재의 HBO 유선망을 쌍방향대화가 가능한 멀티미디어망으로 대체하는 데에만 최소한 40억 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합작의 진짜 숨겨진 목적은 고화질TV 및 쌍방향TV 등 미래TV의 하드웨어 부문에 축적된 노하우가 많은 손을 잡음으로써 차세대 멀티미디어부문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데 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쌍방향 전자오락게임 시대를 대비해 닌텐도에 필적하는 일본의 세가와 손을 잡는가 하면. ‘쥐라기 공원’의 환상적인 3차원 공룡 컴퓨터 그래픽을 만들어낸 미국의 실리콘 그래픽, 미국 내 최대 장거리 전화회사인 AT&T, 지역전화회사인 U.S.웨스턴사 등과 잇따라 연합전선을 결성해 멀티미디어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벽하게 구축해냈다. 타임 워너는 또 미국의 3대방송중 하나인 NBC TV매입도 서두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애플 컴퓨터의 존 스컬리 등이 멀티미디어시대의 황제가 되기를 꿈꾸지만, 타임 워너를 좇아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호언 하고 있다.

    POWER 002 독일의 숨겨진 소프트 파워: 베르델스만

  대문호 괴테와 악성 베토벤을 낳은 나라.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는 제조업 강국으로만 명성이 높을뿐 정보, 미디어 산업에 관한 한은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나라가 다름아닌 독일이다. 하지만 전통은 하루아침에 쌓아지는게 아니듯, 하루아침에 사그라지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자랑 베르텔스만(Bertelesmann)이 이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독일의 최대 미디어그룹인 베르텔스만은 독일 민간방송 창립5년 만에 유럽의 기라성 같은 미디어그룹들을 모두 제치고 매출액 1위를 기록하는 신화를 창출했다. 1993년도 총매출액만 109억5,700만 달러(8조8천억 원)를 기록해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이나 타임 미러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제치고 (포춘)지가 선정한 1994년도 전세계 500대 기업 중 순수미디어분야에서 랭킹1위를 차지했다. 1993년도 순이익은 2억8,900만 달러에 달했으며, 현재 전체 계열사에 4만 8,00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베르텔스만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중견출판사에 불과했다. 베르텔스만의 창업주는 라인하스트 몬(Reinhard Mohn). 1929년에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39년 히틀러에 의해 전선으로 끌려나간 그는 1949년 미군의 포로가 돼 북아프리카와 미국의 캔자스주 등지에서 1946년까지 포로생활을 하는 비운을 겸해야만 했다. 히틀러로 인해 대학진학도 못하고 청춘을 전장에서 썩혀야 했던 그는 당연히 나치즘을 크게 혐오하고 그 대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크게 매료됐다. 특히 그는 포로생활 기간 중 자신에게 읽을거리를 꾸준히 공급해준 미군의 서적 통신판매조직 ‘이달의 책 클럽’ 제도에 홀딱 빠져 출판을 자신의 천직으로 정했다.
  독일로 귀국한 직후인 1947년 그는 귀터슬로라는 소도시에서 가업인 성서출판사를 물려받아 베르텔스만을 출범시켰다. 이때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보고 배운 서적 통신판매기법 등 선진적 기법을 최대한 활용하고 출판 외에 잡지, 레코드 등의 분야로 영역을 넓히며 꾸준히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같은 토대 구축에 이어 그는 1981년 베르텔스만 그룹을 발족시켰으며, 마침내 1986년 오랜 준비작업 끝에 독일 방송사상 최초로 방송위성을 이용한 민간방송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위성통신을 이용한 ‘RTL 플러스’의 첫 TV방송을 시작한 이래 베르텔스만은, ARD같은 기존의 공영방송 내용에 식상해 있던 시청자들의 폭발적 인기를 끌어 창립 5년 만인 1991년에 이르러서는 독일 전체 3천만 가구의 3분의 2를 시청자로 확보하는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텔스만은 현재 독일 내에 RTL, RTL2, 폭스, 프레미에레 유선TV등 4대 채널을 운영하는 외에 전세계 20여 개 국에 각종 미디어매체를 보유하는 거대 공룡그룹이 됐다. 방송내용은 주로 스포츠, 오락, 특집 기회물에 치중하고 있으나 때때로 비판적인 시사, 정치 프로그램을 방영해 정가를 바짝 긴장시키기도 한다.
  수입은 공영방송과는 달리 전적으로 광고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창업주 몬의 뜻에 따라 선진적 종업원 경영참여제를 도입하고 기업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작업을 다각적으로 진행하고 있어 독일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몬은 1991년부터 현역에서 물러나 베르텔스만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측면 지원사격만 하고 있다.
  한편 베르텔스만은 방송에만 국한하지 않고 음반과 출판등 미디어산업 전반으로 속속 사업영역을 넓혀가, "오락 분야에 관한 한 감히 우리와 맞설 상대가 없다."고 큰소리쳐온 미국의 절대야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RCA / 아리올라, 아리스타ARISTA 등의 레코드사를 보유하고 있는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의 경우 1992년도에 전속가수인 휘트니 휴스턴과 케니지를 각각 ‘빌보드차트’ 1, 2위에 랭크시키면서 24억 4천만 달러의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빅 히트앨범 ‘보디가드’는 영화의 빅 히트와 맞물리면서 2천만 장이나 팔려나가 음반판매사상 최고기록을 갱신 했다.
  또 베르텔스만의 계열 출판사인 미국의 밴텀 더블데이 델 그룹은 세계 최고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존 그리샴, 넌픽션작가인 빌 모이어스 등을 전속작가로 거느리면서 1992년 한 해 동안에만 6억 4천만 달러인 경이적 매출을 기록, 미국 전체 출판사 중 랭킹 2위를 차지했다. 이 해에 발표된 존 그리샴의 "의뢰인"은 2,200만 부나 팔려 출판사상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을 세웠고 최근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빌 모이어스 역시 넌픽션 부문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베르텔스만그룹은 스페인의 레코드사 플라사 이 하네스 등 스페인, 브라질, 미국 등 20여개 국에 레코드사와 라디오방송사, 출판사 등을 소유하고 있다.
  베르텔스만은 최근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미디어사업을 통해 취득한 최고급 정보를 무기삼아, 국제금융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미국의 무디스 투자서비스에 버금가는 세계적 권위의 신용평가기관을 독일에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중이다.

    POWER 003 광고계의 절대군주: 덴츠

  도쿄 스키지거리에 위치한 일본 광고대행회사 덴츠는 1993년 한해동안에만 1조 1,906억 엔(9조5천억 원)의 엄청난 매출액을 기록, 전세계 광고대행회사 중 당당히 랭킹 1위를 차지했다. 같은해 일본의 전체 광고비는 4조 4,175억 엔. 이 가운데 4분의 1을 덴츠 한 군데서 독식하다시피 한 것이다. 덴츠의 매출액은 랭킹 2위부터 10위까지의 나머지 대형 광고회사 전체의 매출액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이며, 덴츠는 또 이 기간중 1,457억 엔(1조1,500억 원)이라는 엄청난 매출이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덴츠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막 개막된 1901년 그후 신문, 잡지 등의 광고대행을 통해 꾸준히 사세를 확장하다가 2차대전 후 일본 광고기업 중 최초로 라디오, TV 광고를 개발하는 등 급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세계최대 광고대행사로 급성장했다. 현재 덴츠는 국내영업을 하는 일본 내 24개 지사 외에 세계 34개국의 45개 주요도시에 자회사를 두거나 미국의 Y&R 및 유럽의 HCM 같은 세계적 광고회사들과 제휴해 최첨단 다국적광고를 생산해내고 있다.
  덴츠의 광고는 국제광고계에서도 명성이 높아, 지난 5년간 칸국제광고페스티벌, 클리오상, 뉴욕페스티벌, 국제방송상(IBA) 등 4대 국제광고대회에서 132건이나 입상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광고제작은 각 기업이 극비리에 개발한 새 상품이나 사업 전개전략에 기초해 진행된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일본 대기업의 광고를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덴츠에는 자연스레 일본 재계의 최고기밀이 속속 쌓여, 그렇지 않아도 정확하기로 정평 높은 덴츠의 상황판단력과 정세분석 능력을 항상 최고로 유지시켜주고 있다. 일본 재계에서는 덴츠의 정보수집력과 정세분석력을 높이 평가해 덴츠에게 ‘그림자 정보성’ ‘스키지의 CIA’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있다.
  덴츠의 오늘날 성공을 가능케 한 기반은 ‘인재가 유일한 재산’이라는 덴츠의 창업이념이다. 창업 후 지금까지 평생고용 및 연공서열 원칙을 철저히 지켜온 덴츠는 현재 전체 일본기업 중 최고의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덴츠가 1993년도에 4천여 명의 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임금은 사원 1인당 1,593만 엔(1억 2,700만 원)이나 된다. 이같은 인건비 총액은 같은해 덴츠의 매출 총이익 1,457억 엔의 3분의 2에 달하는 액수다. 덴츠가 얼마나 인재를 아끼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덴츠는 이같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 전체매출의 1할 정도만 차지하고 있는 해외영업 수주를 대폭 늘리고, 이익률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다각적인 개혁조치를 취하고 있다. 덴츠는 이를 위해 현재 사내에 정보기술본부(ITC)를 설치해 멀티미디어시대의 도래에 대비한 전자도서관, 케이블방송, 위상TV, NHK TV와의 미디어 공동사업, 하이비전 등의 뉴미디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창업 후 처음으로 그룹을 5개 지역법인으로 분리해 독립채산제를 도입하는 등 경쟁체질을 강화하기 위한 리엔지니어링에도 열심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덴츠가 컴퓨터기법 등을 총동원해 제작한 최첨단 영상광고는 소비자들에게 호소력이 높아, 그룹 내에 광고회사를 갖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기업들조차 앞다퉈 이곳에 광고를 발주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덴츠가 미래 멀티미디어시대에 대비해 실험적으로 제작해 발표한 자동차 광고의 경우 소비자가 집에서 홈쇼핑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경우 자동차의 외양, 가격, 기능 등 기초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각부문 성능까지도 화면을 클로즈업해 입체적으로 상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밖에 3차원 입체가상현실 Virtual Reality 기법을 이용해 고속도로나 험악한 산길 등에서의 주행속도나 승차감 등을 고객이 구입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등 새로운 광고기법의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어 광고계의 최정상을 지키려는 덴츠의 자세는 다른 광고 업체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POWER 004 지상 최고의 이미지: 소니

  지난 1993년 미국의 전문 컨설팅회사가 전세계의 6천 개 유명 브랜드를 상대로 고객만족도 등 이미지 파워를 조사한 결과, 1위를 차지한 기업이 바로 일본의 소니(SONY)였다. 1994년 일본의 경제전문주간지 "다이아몬드"가 일본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가장 존경한 기업인과 이미지가 좋은 기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1991년 이래 모리다 아키오 소니회장(73)과 소니사가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일본 내 1,110개사를 대항으로 한 "니케이신문" 여론조사에서 21세기까지 비약적으로 성공할 기업으로 소니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취업전문지 "리쿠르트"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인기도 조사에서도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소니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최고의 이미지를 확보하고 있다.
  오늘날의 이같은 소니가 있기까지에는 모리다 아키오 회장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세일즈맨 출신답게 모리다 회장은 해외진출만이 소니와 일본의 살 길이라고 판단해 일본기업 중 가장 먼저 맹렬하게 다국적기업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오늘날 소니는 일본 이외 전세계 15개국에 40개의 생산거점과 8개의 연구개발거점을 확보하여 1993년 한 해에만 362억 5천만 달러(29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다국적기업이 됐다.
  현재 소니의 모든 회의에서는 국제어인 영어만 사용하고 있는데, 전체 12만 명의 종업원 중 55p가 외국인이고 전체매상의 75p를 해외시장에서 올리고 있을 정도로 소니의 국제화는 이미 오래전 완성됐다. 소니는 또 엔지니어를 중시하는 모리다 회장의 신념에 따라 신입회원 선발 때 출신대학을 묻지 않고 입사 후 자신의 희망대로 부서를 옮겨다닐 수 있는 자율배치제도를 실시하는 등 선진적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니는 가전부품에 관한 한 품질과 에프터서비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오디오, 비디오 부문에서는 단연 세계 최정상이다. 1979년 생산을 시작한 워크 맨은 단일품목으로는 세계최초로 1992년 말 1억대 판매고를 돌파하는 세기적 금자탑을 세웠고 1968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소니 컬러 TV도 현재까지 6천만 대 이상 판매했다.
  그러나 소니의 진짜 파워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숨겨져 있다. 모리다 회장은 한국, 중국, 대만 등 개도국의 맹추격으로 급속히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단순 하드웨어 제조업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첨단정보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1989년 11월 미국 할리우드의 간판인 콜롬비아 영화사(현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48억 달러에 사들여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로써 소니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워터 프론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드라큐라’ ‘울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세기적 흥행작을 비롯해 할리우드 최대의 필름도서관, 220개의 영화관, 그리고 2만 3천벌의 TV프로를 소유하게 됐다.
  모리다는 이 여세를 놀아 다국적 음반제작 및 판매회사인 소니뮤직을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머라이어 캐리, 신디 로퍼 등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300여 명의 유명 가수를 전속으로 거느리고 있는 소니 뮤직은 창립 4년여 만인 1993년에 44억 8천만달러의 매출을 기록, 전세계 음반시장의 2할 가까이를 장악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밖에 세계최대 전자오락왕국인 닌텐도 타도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저가품 소니 게임기를 무기로 전자오락게임시장에 뛰어드는 등 차세대 멀티미디어시대에 대비한 다중 포석에 총력을 쏟고 있다.
  모리다 회장은 1993년 갑자기 졸도해 병석에 눕기 전, 자신의 후계자격인 사장직에 도쿄 예술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 가서 바리톤가수로 활동하던 예술가 출신의 오가 노리오를 파격적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멀티미디어시대를 대비한 ‘과연 모리다다운’ 일대 도박이라고 입을 모았다.
  할리우드 진출과 오가 영입이라는 양대 승부수는 지금 와서 모리다가 당초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한 예로, 1993년도 전미국 영화 흥행수입 중 20p가 프랜시스 코플라, 스티븐 스필버그같은 최고의 감독을 총동원해 ‘드라큐라’ ‘후크’ ‘프리티 리그’ 등의 최고 흥행작을 양산한 소니사에게 돌아가 흥행수입 순위에서 소니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또 1993년도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오른 84개 작품 중 소니사 작품이 자그마치 30개를 차지, 전세계7대 영화 메이저 중 단연 1위를 차지했다. 1994년 들어 다소 경영이 악화되기는 했으나 소니의 파워를 무시하는 이들은 없다.
  할리우드 내에서의 소니 파워는 아카데미상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1993년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의상상은 ‘드라큐라’에서 의상을 맡은 일본의 여성 디자이너인 이시오카 에이코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서 중세의상을 훌륭하게 재현해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상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소니의 각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니는 이 영화 제작 계약시 코플라 감독에게 이시오카를 고용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한 작업 끝에 마침내 이시오카와 일본에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것이다.
  "이시오카가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만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수상식 전날 오가 노리노 소니사장이 보도진에게 한 말이다. 이미지 창출의 마술사 소니다운 오만함이었다.

    POWER 005 글로벌 뉴스 왕국: CNN

  평소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운 테드 터너(56)가 지난 1980년 6월 1일 전재산 1억 달러를 탁탁 털어넣어 미국 애틀란타에서 세계방송사상 최초로 24시간 위성뉴스 유선방송 CNN(Cable News Nstwork)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방송은 세계방송계의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ABC, NBC, CBS 등 기존의 미국 3대 공중파 방송에 비해 방송 베테랑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급료도 낮았으며, 방송장비 역시 기자들이 보내온 화면을 간신히 짜집기할 편집기 24대와 송수신 안테나 7개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뉴스 전문반송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기존 방송계의 고정관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 방송인들은 CNN을 ‘Chicken Noodle Network(닭고기 국수집)’이라고 조롱하며 테드 터너의 파산을 확신했다.
  그러나 일반대중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강한 정보욕과 지성에 승부수를 던진 CNN은 방송 시작5년 후에 흑자로 돌아서는 폭발적 급성장을 했다. CNN은 특히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에서 폭발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생중계로 독점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1989년 중국 천안문광장의 민주화운동과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 초 걸프전 당시 미국의 이라크 공습, 잇따른 소련군부의 쿠데타와 옐친의 탱크 위 항거 장면, 1993년 옐친의 러시아의회 포격장면,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방문 등 생중계 특종을 잇따라 보도함으로써 미국 3대 방송을 위협하는 세계적 미디어로 초고속성장을 거듭했다. 금세기 최대의 방송신화인 CNN
신화가 완성된 것이다.
  생생하면서도 신속한 현장보도로 CNN의 존재가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1991년 1월 걸프전 때 조지 부시 당시 미국대통령은 "CIA(중앙정보국)보다 CNN에서 얻는 정보가 더 많았다"고 토로했으며,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의장은 터너 회장과 만난자리에서 자신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CNN을 보는 열렬한 팬이라고 말했다. 1989년 12월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에는 소련 외무부가 공식 외교통로가 아닌 CNN 모스크바 지사를 찾아가 CNN 모스크바 지사를 찾아가 CNN 카메라 앞에서 미국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1991년 미국의 바그다드 폭격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CNN만 바그다드에 남아 그 참상을 촬영토록 허용했고, 1994년 카터의 방북 당시에도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CNN에게만 동행취재를 허용했다.
  현재 미국 국내 및 전세계에 29개 지국을 운영할 정도로 덩치가 커진 CNN의 정보수집력 또한 웬만한 국가의 중앙정보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신속정확하다. 한 예로 CNN은 북한당국이 1994년 7월8일 정오 김일성 주석의 사망소식을 발표하기 30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긴급비상취재에 돌입했다. 당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가 북한방송 발표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는 점과 비교하면 CNN의 취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내 뉴스를 주로 다루는 CNN, 국제뉴스 중심의 CNN 인터내셔널 등 시청자층을 특화한 4개의 뉴스 전문채널을 가동중인 CNN은 1993년 말 현재 연간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방송 시작 첫해에 170만 명에 불과하던 유료가입자 숫자도 지금은 전세계 95개국의 7,500만 가구에 달할 정도로 그 덩치가 커졌다. 또 전세계적으로 지명도도 크게 높아져 애틀란타에 위치한 CNN 본사는 매년 5만여 명의 전세계 관광객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뉴스제작 현장을 지켜보는 유명관광지가 됐다. 현재 전세계 29개 지국간에 자체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정도로 최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는 CNN은 1995년부터 전세계 상공에 띄워 올릴 15개의 자체 방송위성을 이용해 한층 촘촘한 전파 지구촌을 구축할 계획이다.
  얼마전 세계적 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폰디와 결혼해 세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한 터너 회장은 그 자신이 진보적 평화운동가 겸 환경보호운동가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현재 자신의 방송망을 통해 수많은 생태보호 프로그램을 방영중이며, 1980년대 말에는 동서냉전 해소를 위해 미국정부의 눈총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서 친선경기를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POWER 006 창조적 혼란과 언론: 로이터

  지구촌 최대 거미줄 뉴스 네트워크 로이터(Reuter) 통신은 현재 세계 79개국에 1,800여 명의 특파원을 주재시킨 뒤 세계 각지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각종 뉴스를 취재, 분초를 다퉈 이를 전세계 150개국 7천여 개 신문사에 판매하고 있다. 영국신문협회(PA)와 신문발행인협회가 공동 소유하고 있는 이 통신사는 AP, AFP, UPI 등 여타 ‘4천왕’들과는 달리 단지 사건기사 서비스만 하는 게 아니라 전세계 기업체들에게 최고급 금융, 경제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고 있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정보업체이기도 하다.
  로이터는 1994년 6월부터 퍼스널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주요기자회견 영상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는 서비스를 시작하여 통신과 방송사이의 장벽을 가장 먼저 허물어버렸다. 로이터의 이같은 시도는 언론부문에서 멀티미디어시대를 가장 앞서 개막한 것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 로이터는 1994년 10월부터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는 등 멀티미디어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여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이 문을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독일에서 출판업을 하던 유태계 파울 J.로이터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851년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거래소 부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전신사무소를 열었다. 처음에 그는 은행, 중개소, 기업체에 금융 관련정보를 제공하는 상업통신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 무렵 "모닝 애드버타이지" 등 영국의 일간신문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신문발행인들을 설득해 고객으로 가입시키면서 뉴스통신사로 변모해 나갔다. 그 후 당시 세계최대강국이던 ‘영국의 눈과 귀’로서 성장을 거듭해, 현재에는 AP, AFP, UPI 등 여타 세계 4대 통신사 중에서도 가장 뉴스가 빠르고 신뢰도가 높으며 특히 아시아 지역 뉴스에 정통한 매체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로이터 통신은 1925년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던 영국신문협회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며 1941년에는 완전히 영국신문협회 소유가 됐다. 영국신문협회는 같은 해 로이터 통신의 주식 절반을 런던 신문사주들의 대표기관인 신문발행인협회에 매각했고, 1947년에는 영국연방 산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신문협회로까지 회원자격을 확대함으로써 로이터는 명실상부한 영국연방의 공용정보센터가 됐다.
  1980년대 들어 로이터는 큰 위기를 맞았다. 신속성과 생생한 현장성을 무기로 앞세운 CNN 등 24시간 뉴스방송이 출연하는가 하면, 글로벌 시대를 맞아 각 기존언론매체들이 독자적 해외취재 네트워크를 크게 강화함에 따라 존재가치가 급속히 하락해, 경영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에 1991년 대대적 인사개편을 단행해 30년간 로이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자 피터 조브(53)를 사장에 전격 임명했다.
  조브는 사장 취임사에서 "로이터는 그동안 명성을 먹고 살았다"고 질타하며 ‘살을 깎는 경영혁신’과 ‘뉴스공급자보다 뉴스수요자를 중시하는 시각혁명’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조브는 기자들에게 관급기사에 안주하지 말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취재하라고 요구했고. 특히 세계최대 성장지대로 자리매김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에 대한 취재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인도, 콸라룸푸르, 일본, 자카르타 등지에서 오랜 기간 특파원 생활을 한 아시아통 조브의 이같은 경영전략은 그대로 적중해 로이터는 다시금 생동감 넘치는 정보산업체로 재탄생했다.
  영국의 최고 권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와 관련, 조브를 관행에 젖어 있던 늙은 로이터를 1990년대의 대표적 언론그룹으로 변화시킨 인물이라고 높게 평했다. 조브 사장의 혁신경영 중 특히 높게 평가된 대목은 철저한 인재제일주의이다. 기자출신답게 "통신사 조직은 창조적 혼란이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조브는 "통신사는 정예기자들이 모여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들이 최대한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경영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이라면서 취재여건 강화에 전력함으로써 기자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그 결과는 양질의 기사로 나타났다. ‘편집권 독립’과 ‘인간에 대한 투자’로 다시 태어난 로이터. 세계 언론계로부터 로이터가 4천왕 가운데 왕 중 왕으로 꼽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POWER 007 지구촌 영상축제: MIP TV

  해마다 5월 세계적 휴양도시 프랑스 칸에서는 할리우드의 유명스타 등 전세계 영화인이 한자리에 모여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영화제를 개최해, 전세계 영화팬들과 영화인들을 들뜨게 한다. 칸은 그러나 영화도시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영화제에 앞서 매년 4월 칸에서는 또하나의 장대한 지구촌 영상축제가 열린다. 세계최대 TV프로그램 견물시장인 MIP TV 축제가 그것이다.
  세계최대 규모와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MIP TV 축제에는 해마다 전세계 주요 방송사와 독립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수천여 점의 오락, 뉴스, 다큐멘타리, 교육 TV 프로그램이 빠짐없이 전시돼, 부산한 거래 끝에 각국 박송사 및 케이블 TV사로 팔려나가곤 한다. 이 자리는 단순한 거래장소가 아니다. 이 자리에 모여든 수만여 방송인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세계 TV업계의 최신 흐름을 체크해 가는 치열한 첩보전쟁터이며, 다채널 멀티미디어, 대화형 TV, 글로벌 위성방송 등 첨단시대에 방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방송인들의 진지한 세미나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4년 4월 MIP 축제 때부터 주최측은 멀티미디어시대를 주제로 한 전시장 MILIA를 별도로 개장, 방송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상제국임을 자처하면서도 자국 TV 프로를 팔려면 유럽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미국이 최근 자국 내에서 필라델피아 견본축제 등을 열어 TV 견본시장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아직은 MIP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게 방송계의 중론이다.
  제1회 MIP TV는 전세계적으로 TV시대가 활짝 문을 연 1963년 4월, 리드 미뎀 협회Reed Midem Organization의 노력으로 개막됐다. 그 후 20여 년간 매년 봄에만 한 차례씩 개최되던 중, 1980년대 들어 세계 주요방송사가 프로그램이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라는 시청자들의 비판을 수용해 프로그램 개편을 봄과 가을 두 차례씩 하기 시작함에 따라 1984년부터는 봄 축제와는 별도로 해마다 10월에 MIPCOM이라는 견본축제를 또 한 차례 개최하고 있다.
  1980년 말 지구촌을 강타한 탈냉전과 정보혁명의 여파로 글로벌시대가 본격 도래하자, TV 프로 제작도 더이상 자국시장만 바라보고 할 수 없게 됐다. 미국 방송사의 경우 자체제작한 드라마 수입의 25p 이상을 수출로 벌어들이고 있다. 유럽방송사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출용 프로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구미 방송사들은 드라마 제작 초반부터 철저한 해외 판매전략에 기초해 M / E 분리 제작(대사와 음악, 음향 분리제작)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해마다 MIP TV를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TV 견본시장에 빠짐없이 참여해 외국 방송사측에 집요한 판촉활동을 펴고 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드라마 한 편당 미국의 수출가는 최소한 편당 5천–1만 달러 선으로 한국 수출가의 10배 이상을 넘고 있다. 다른 아시아국가들도 우리와 엇비슷한 상황이어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따라 영상 및 방송, 전파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이런 역조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노회한 MIP측이 이같은 흐름을 놓칠 리 만무하다. 리드 미뎀 협회는 아시아 소비시장이 장차 최고의 황금시장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94년 11월 홍콩에서 3주간에 걸쳐 MIP-ASIA 견본시장을 개최한 것을 신호탄으로 대대적인 대아시아 판촉공세에 나섰다. 이런 파상공세가 계속된다면 멀지 않은 시점에, 서울에서도 MIP 축제를 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POWER 008 중남미 전파황제: TV 글로보

  전세계 TV방송계에서 미국의 ABC, NBC, CBS 3대방송 다음으로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 세계 4위의 방송국은 의외로 남아메리카 브라질의 최대 TV, 라디오 민간방송국인 TV 글로보(Globo)이다. 골든아워의 시청률이 자그마치 7할을 넘으며 확보된 시청자 숫자만 3,2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단막극이나 연속 멜로드라마. 게임프로 등 오락프로의 제작 능력이 대단해 그 프로그램들은 해마다 영어로 더빙돼 프랑스 MIP TV 견본시장 등을 거쳐 미국 및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 TV방송국으로 배포되고 있다.
  방송전문가들은 "오늘날 TV 글로보가 세계적 오락 프로덕션이 되기까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라질의 군부독재의 공헌이 지대하다"고 말한다. 수십여 년간에 걸친 가혹한 군사독재와 검열때문에 정치성이 강한 뉴스, 시사프로 제작에 제약이 많자, 방송인들이 그 대신 오락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한 결과 오늘날 이 분야에서는 세계최고 수준의 오락성을 확보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TV 프로듀서들이 수시로 TV 글로보 프로덕션을 찾아 오락프로그램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갈 정도록 TV 글로보의 오락성은 전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럼에도 세계 방송인들은 좀처럼 TV 글로보에 대해 언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글로보가 가진 자들의 편에만 서려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현재 브라질은 경제활동 인구의 10p 이상이 완전실업 상태에 놓여 있고, 전국민의 40p 이상이 절대극빈 생활로 고통받고 있다. 그럼에도 TV 글로보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보수 기득권층의 목소리만을 대변할 뿐이다. 특히 글로보는 1989년 대통령선서나 1994년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공연히 여권 후보의 선거운동에 앞장서 야당과 다수 지식인의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시청율과 방송의 권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유사시 미래의 미디어는 이런 기형적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게 다름아닌 TV 글로보이다.

    POWER 009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자: 앨 고어

  "정보야말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영자원이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은 물론이고 국가경제의 안정과 안전보장을 위해서라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정보이다. 세계시장과 국제경쟁에서 정보를 창출, 조작, 관리, 이용하는 기술의 개발이 미국의 중요전략이 됐다. 이런 기술을 개발하면 미국기업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높은 보수를 주는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아울러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그 결과 국민의 생활수준도 착실하게 향상시킬 수 있다."
  엘 고어Ale Gore가 1993년 9월 수천 명의 정보업계 대표들을 모아놓고 그 유명한 ‘정보 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건설을 위한 행동계획’을 발표하며 한 연설 중 일부이다.
  스스로를 정보사냥꾼이라고 부를 만큼 평소 정보통신혁명의 진행과정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온 미국의 앨 고어(46)는 1993년 1월 미국부통령이 되자, 자신이 십여 년간 준비해온 매머드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21세기 패권장악’과 ‘텔레데모크라시 실현’을 위해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이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평소 주장해온 ‘정보 초고속도로’, 곧 ‘미국정보기반(NII)’ 건설작업이 그것이다.
  정보 초고속도로란 한마디로 광섬유통신망과 디지털 기술, 기가비트급 울트라 컴퓨터 등 정보기술혁명의 3대 성과물을 하나로 결합해 미국의 모든 가정, 학교, 기업, 연구소, 정부기관 등에 미국이 선진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최고급 정보자원을 무한정 염가로 공급해줌으로써 미국의 국제경쟁력을 비약적으로 높이자는 야심찬 구상이다.
  "아울러 정보 초고속도로는 미국을 21세기의 최강국으로 만들 것이다. 미국기업은 이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국제시장에서 승리하고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경제성장을 실현할 것이다. 아울러 국민들이 취직이나 취학을 할 때 지리적 조건, 신체적 장애, 경제사장 등의 제약을 크게 완화하여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어젠다’ 중에서)
  고어는 또 이런 기본망이 구축되면 멀티미디어시대를 앞당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빈부나 인종, 지역, 신체장애의 차별 없이 모두가 뛰어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의료, 유통, 레저 등 인간의 복지생활도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행동할 때이다. 정보 초고속도로만 건설되면 21세기의 학생들은 장소나 거리, 재산의 많고 적음, 신체적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최고의 학교, 최고의 교사로부터 최상의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 가정과 직장은 네트워크로 연결돼 살고 싶은 곳에서 편히 살면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의료 서비스도 지금처럼 병원에 가 지루하게 줄서서 기다리지 않고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게 된다."(‘어젠다’중에서)
  고어는 1993년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5대 원칙을 천명했다. #1 모든 국민에게 좋은 서비스를 낮은 가격으로 #2 경쟁의 촉진과 유지 #3 정보 네트워크로의 자유로운 접근 #4 가진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정보이용 차별 방지 #5 탄력적 규제환경 창출.
  고어는 이 가운데서도 네번째 원칙, 즉 빈부격차를 초월한 정보의 고른 이용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고 핵심원칙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청사진이 완성된 것이다.
  오랜 설득과정을 거쳐 여론의 공감을 얻은 고어는 구체적으로 오는 2000년까지 우선 1천억 달러(80조 원)를 투자해, 현재 3천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지상최대의 정보통신망 인터네트보다 100배나
전송능력을 강화한 울트라 광통신망을 미국의 모든 기업, 가정, 학교, 연구소에 깔기 위한 구체적 작업에 착수했다.
  고어의 이런 구상에 대해 정보통신 및 멀티미디어 관련업계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열렬했다. 한 예로 광통신망 구축과 관련, 미국의 지역 전산전화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7대 벨사가 오는 2015년까지 4,500억 달러(260조 원)를 투자하겠다는 매머드 청사진을 밝혔다. 여타 방송사, 통신사, 케이블TV, 소프트웨어업자, 컴퓨터업자 등의 반응도 이들 못지않았다. 이들은 대신 현재 방송과 통신간 상호참여를 금지하고 있는 독점금지법을 완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어는 1994년 이들 민간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방송사가 통신사업에 참여할 수 있고 전화전신회사들 역시 방송사업에 참여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종전의 독점금지법 조항을 대폭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의회는 기꺼이 이를 통과시켰다. 정부와 기업, 의회가 21세기 패권을 위해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고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광통신망을 지구 규모로 확대해 지구촌의 모든 대륙을 잇는 ‘지구촌 정보 초고속도로’, 즉 ‘지구정보기반GII’도 깔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해 1994년 7월 서방선진 7개국 정상이 모인 나폴리 서미트에서 이에 대한 기본합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고어의 이같은 구상은 GII를 명분으로 내세워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앞선 미국 정보산업체의 첨단 기술을 전세계의 표준 정보기술로 만듦으로써 건설시 최소한 수백조 원대의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될 GII 건설공사를 미국이 독점하는 동시에, 21세기 세계경제도 계속 주도하겠다는 야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어서 전세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POWER 010 FCC의 젊은 혁명가: 리드 헌트

  "필요하다면 대통령도 갈아치울 수 있다."
  평소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세상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ABC, CBS, NBC 등 미국의 3대방송사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고만장한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천적이 있다. 바로 지난 1934년 커뮤니케이션법에 근거해 설립된 미국 통신행정의 최고핵심기관인 연방통신위원회이다. 준정부, 준사법 기관인 FCC는 TV, 라디오, 유선 TV, 통신위성 등의 국내외 통신과 요금을 규제하는 절대권한을 가지고, 대중의 필요 및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방송을 하거나 독점금지법 등을 위반했을 경우에 즉각 방송국 면허를 취소시킬 수 있다.
  한 예로 1994년 들어서는 미국 내 12개 TV사를 인수해 기존의 3대방송사를 능가하는 폭스 TV 네트워크를 구축한 ‘미디어계의 조스’ 루퍼트 머독이 FCC의 도마 위에 올라 엄격한 독점금지법 위법 심사를 받기 시작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FCC는 이에 앞서 1993년 미국의 3대 방송사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을 신설하지 않을 경우 즉각 방송사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각 방송사가 앞다퉈 어린이프로를 신설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미국 방송, 통신, 미디어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84년에는 독점금지법을 적용해 당시 세계최대 통신기업이던 AT&T사를 8개로 분리해, AT&T는 장기통신업무만 취급토록 하고 단거리 지역통신은 7개의 베이비 벨사가 운영토록 하는 경쟁체제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전화요금을 60p나 인하시키고 통신서비스를 대폭 개선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5명으로 구성되는 FCC위원은 임기 7년으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며, 조직은 방송국, 케이블 TV국, 공중전기 통신국, 개인서비스국, 현장운영국으로 구성돼 있다. 현 FCC 위원장은 앨 고어 부통령의 절친한 죽마고우이자 빌 클린턴 대통령의 예일 대학교 동창이며, 반트러스트법 전문 법조인으로 유명한 46세의 리드 헌트(Reed Hundt)이다. 1993년 11월 그의 부임 후 FCC는 미국정부가 정력적으로 추진중인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추진본부로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헌트 위원장은 1994년부터 고어 부통령의 정보 초고속도로 구상에 발맞춰 장거리통신과 단거리통신, 통신과 방송간의 상호불침범 장벽을 부숨으로써 업자간 경쟁력을 최대한 촉진시키는 혁명조치를 정력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고어가 제시한 정보 초고속도로 구상의 핵심브레인 역할을 해온 헌트는 "정보 초고속도로를 정부가 아닌 민간의 힘으로 구축하겠다"면서 이 부문에 경쟁원리를 도입, 차세대 정보혁명을 자신의 임기 내에 완료시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현재 4조 5천억 달러(3,600조 원)의 누적 재정채무에 시달리는 정부에게 수천억 달러대의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한 정보 초고속도고 건설을 의존하려 하다가는 이 구상의 실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우리(FCC)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일자리가 없어지도록 하는 데 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완전한 경쟁시장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업자들은 우리의 통제를 받던 시절보다 훨씬 더 일을 열심히 할 게 틀림없다." 각종 행정규제를 무기삼아 업계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의 타성을 평소 크게 혐오해온 헌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그의 이같이 강력한 경쟁체질 강화정책은 미국의회의 공감을 얻어, 1994년 6월 미국의회는 방송과 유선방송, 통신의 장벽을 해체하는 일련의 경쟁법안들을 통과시켰다.
  헌트 위원장은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자본주의 신봉자도 아니다. 그는 "자본의 눈에는 본디 사리사욕만 보일 뿐 공익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전권은 자본가들에게 맡기되, 그 성과물이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정부가 할 일"이라는 게 그의 확고부동한 신념이다. 이런 원리원칙에 따라 그는 1994년 2월 6,500만 가구가 애용하고 있는 유선TV의 시청료를 7p나 강제인하시켰다.
  이는 불과 5개월 전 10p를 인하시킨 데 이어 곧바로 단행된 조치여서 업계의 저항은 대단했다. 한 예로 정부의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 구상에 호응해 그 무렵 매머드 유선 방송국 TCI를 210억 달러에 사들이는 세기적 협상을 진행중이던 지역전화회사 벨 아틀랜틱은 헌트의 시청료 인하 조치에 반발해 즉각 이 협상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헌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정보혁명의 혜택이 있는 이들에게만 돌아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요금인하는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단행한 당연한 조치이다.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이 정말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된다면 추진할 값어치도 없을 것이다. 싫으면 관둬라."
  헌트의 이같은 배짱은 시민, 소비단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미국 정보통신업자들은 헌트에게 굴복해 속속 정보 초고속도로건설에 재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정부 재원도 가급적 국민세금이 아닌 민간자본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아래 봉이 김선달식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세웠다. 1994년 가을 사상 최초로 대화형 무선호출용 주파수대 전파를 미국통신회사 및 휴대용 전화회사들에 100억 달러에 판 것이다.
  헌트가 있기에 고어가 있을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평가는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POWER 011 지구촌 전파경찰: 무선통신국

  세기말 정보 혁명기를 맞아 전세계적으로 불붙은 ‘전파전쟁’ ‘우주주권전쟁’ ‘멀티미디어 전쟁’의 결정적 칼자루를 쥔 기관이 바로 UN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핵심부처인 무선통신국(Radio Communication Office)이다.
  1865년 유럽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의해 세워진 만국전신연합의 후신으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ITU에는 현재 전세계 184개국과 389개 방송통신관련 기업 및 법인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ITU의 핵심부처인 무선통신국이 지금까지 해온 대표적 주요업무로는 국제적인 주파수의 할당, 전기통신기술의 세계적 표준화, 정지 인공위성의 궤도위치 선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국제적 고도정보화 사회가 도래하자 기존의 전기통신 분야의 국제 룰이 한계를 잇따라 드러내면서 각종 정치, 경제마찰을 빚고 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적도 상공의 인공위성 정지궤도를 둘러싼 각국간의 치열한 우주주권 전쟁이다. 1994년 9월 현재 지상으로부터 3만 6천km 떨어진 적도 상공에는 모두 140개의 정지위성이 있다. 사실상 초만원 상태이다. 그럼에도 새로 위성, 전파사업에 뛰어든 각국은 계속해서 적도상공에 새로운 위성을 띄워 올리려 하고 있다. 특히 동경 120도에서 130도 주변에 이미 30여 개의 위성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오는 2000년까지 최소한 20개가 새로 진입될 예정이다.
  적도가 이처럼 선호받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발사기지가 적도에 가까울수록 로켓 발사시 지구 자전현상의 도움을 받아 연료가 적게 들어 발사비가 적게 먹힌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적도에 위성이 정지해야 가장 넓은 반경을 가시청권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앞에 말한 동남아 적도 상공의 경우 이 공간에 정지된 위성은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서쪽으로는 중동지역을 지나 서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커버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적도 상공을 선점하기 위한 외교분쟁이 그칠 날이 없는데,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 일본과 인도네시아, 통가왕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에 수차례 팽팽한 우주주권 전쟁이 불붙은 바 있다.
  이처럼 나날이 정지위성 궤도를 둘러싼 국제분쟁이 심화되자, 국제사회는 ITU야말로 이런 새로운 상황전개에 걸맞는 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국제기구라며 그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ITU 무선통신국은 이미 오래전 이런 우주주권 전쟁을 예견해, 지난 1988년 모든 적도 상공에 각국이 최소한 1개의 정지위성을 띄울 수 있는 권한을 보증하는 협정을 의결한 바 있다.
  ITU의 존재가치는 최근 미국의 주도 아래 전세계적으로 추진중인 지구촌 정보 초고속도로, 즉 지구정보기반(GII) 건설을 둘러싼 국제마찰속에서 한층 두드러지고 있다. 1994년 9월 일본 교토에서 4년 만에 열린 ITU 총회의 참가국들은 그해 3월 앨 고어 미국부통령이 부에노스아이레스 ITU 개발회의에서 제안한 GII 건설이야말로 ‘급속한 광통신망과 디지털 통신기술을 활용한 통신기반의 고도화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환경을 보존하면서 고른 경제발전을 가능케 할 견인차’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위해 전세계가 합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정작 문제가 된 대목은 이 지구 규모의 GII 건설의 주체가 과연 누가 될 것인가였다.
  각종 차세대 통신시스템 개발, 위성을 이용한 휴대전화 시스템 구상 등에서 단연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이에 자국의 앞선 기술을 ITU 총회에서 세계표준기술로 인정받아 앞으로 수백, 수천조 원대가 조성될 천문학적 규모의 GII 건설시장 및 기기시장을 독식하려 했다. 반면 미국의 독주를 우려한 유럽과 일본은 ITU내의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는 세계전기통신 정책회의를 신설해 여기서 모든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ITU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정보시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파 교통경찰’로서의 ITU 역할이 증대하리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POWER 012 물류혁명의 견인차: 바 코드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도, 소매업체와 식료품 제조업체들로 구성된 기호선정위원회라는 자그마한 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컴퓨터 거인인 IBM 등과 오랜 협의를 거쳐 마침내 1973년 4월 3일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장사진과 회계상의 착오를 해결하기 위한 유통업계의 단일 표준부호 제정에 합의했다. 이 합의의 산물이 바로 오늘날 만국 제품코드라 불리며 재고 제로의 경영혁신과 대대적 가격파괴를 가능케한 물류혁명의 견인차 바 코드였다.
  이때부터 유통업자들은 상품 표면에 흑백 막대로 표시된 바 코드에서 제조업지명, 상품명, 가격 등을 광학적 독해장치로 읽어냄으로써 계산대앞의 고객 대기시간과 계산착오를 줄이는 동시에, 비로소 전체 물동량을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바 코드의 경우 현재는 주로 슈퍼마켓, 백화점, 서점 등에서 매출 정보관리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신용카드에 응용돼 현금없는 신용사회의 도래를 앞당기고 공장에서도 바 코드 생산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사용범위가 급속히 넓혀지고 있다.
  예전에는 바 코드 해석을 위해 주로 핸드 스캐너가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레이저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레이저식은 데이터의 입력이 쉽기 때문에 식료품이나 잡지, 서적, 의료품 등의 가격표시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업자들은 이를 통해 수시로 전체 매출을 집계해 새로운 생산 및 유통 대책을 세우고 정보당국은 이를 기초로 과세기준을 작성하고 있다.
  현대 유통업계의 헤게모니는 누가 바 코드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의 산물의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80년대 말 불붙기 시작해 현재 극성기에 도달한 미국 유통업체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의 유통업계는 거대체인망 시어즈와 K마트가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바 코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월마트가 출현하면서 상황은 180도 뒤바뀌었다.
  신흥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당시 10만에 달하던 중간 도매상들을 제치고 전국 체인망과 본사를 잇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상품의 바코드를 통해 집계한 상품의 인기도, 매출액, 수익성, 운송 흐름 등 최신 정보를 자체 통신위성과 초대형 슈퍼컴퓨터,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의 체인 슈퍼마켓에 즉각 서비스했다. 이들은 또 자체통신위성을 통해 상품을 수송하고 있는 1만 8천 대의 트레일러의 움직임을 추적, 물건이 점포에 도착할 시간까지도 정확히 알려주었다. 월마트는 또 미국 전역에 대형 물류센터를 건립, 상품 운반비 및 재고분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제품의 값을 크게 낮추었다.
  미국 슈퍼마켓들의 경우 비록 매장은 거대하지만 세계최대 소비시장을 겨냥해 전세계로부터 쉴새없이 몰려드는 신상품으로 인해 매장당 평균 2만 2천여 종의 상품이 진열되고 있을 정도로 항상 진열 공간이 태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잘 팔리는 상품의 목록 등 각종 데이터와 상품을 값싸게 신속히 제공해줌으로써 유통업계의 수익률을 크게 높여주는 월마트의 출현은 슈퍼마켓업자들을 열광시켰고, 당연히 이들은 속속 시어즈 등 기존의 체인에서 이탈해 월마트 산하로 옮겨왔다.
  그 결과 1992년을 분기점으로 월마트는 시어즈와 K마트 등 경쟁사를 제치고 산하에 2,500여 개의 체인을 거느리고 연가 700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세계최대 체인망으로 부동의 자리를 굳히게 됐다. 바코드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의 결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 월마트는 단지 유통업계의 황제로 군림할 뿐 아니라 기존의 콧대 높던 제조업체들을 정보유통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시키면서 이들의 생명줄까지 쥔 울트라 파워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제조업체들이 고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얻고 싶어하는 각종 고급 유통정보를 한손에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보산업의 제조업 지배’라는 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물류혁명을 촉발시킨 바 코드의 발명가는 현대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제롬 레멀슨(71)이다. 미국 네바다주 출신의 레멀슨은 바 코드를 비롯해 반도체, 전기전자, 자동차 부문에 500여개나 되는 핵심적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세계의 대형 기계, 전기 메이커들로부터 연간 5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특허권료를 거둬들이고 있다. 초기에는 모토롤라 등 다국적기업들이 레멀슨의 특허권료 지불요구를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했으나. 전세계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화되면서 속속 그의 발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레멀슨은 1993년 한국의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 3사에 대해서도 컴퓨터 이미지 분석(CIA)과 레이저디스크 기술 등 모두 33개 품목의 기술특허권을 주장, 이들로부터 10년간(1986–1995) 수출분에 대한 특허사용료 2,100만 달러를 받아냈다. 현재는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대우전자 등과도 특허권 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OWER 013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 미래형 컴퓨터

  전문가들은 조만간 출현할 대표적 미래형 컴퓨터로 사람의 말로 작동되는 음성 인지 컴퓨터, 입고 다니는 바디탑 컴퓨터, 키보드가 아닌 펜으로 명령하는 펜 컴퓨터 등을 꼽고 있다. 전세계 컴퓨터업계는 전문지식 없이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조작이 간단하고 자그마하면서도 가벼운 컴퓨터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한 연구성과가 축적된 상태이다.
  현재 미국과 일본이 선두경합을 벌이고 있는 음성 인지 컴퓨터는 사용자가 컴퓨터를 향해 말만 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말을 글자로 바꿔 작동되는 시스템으로, 이미 미국의 스핑크스 바이브로스는 1천 단어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일본의 아트 및 NEC는 각각 1천 자와 1,800여 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각각 개발해놓은 상태이다.
  일본 NEC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바디탑 컴퓨터는 어깨나 허리, 손목에 장착할 수 있는 웨어러블(입는) 컴퓨터로, 1차로 1995년 실용화를 목표로 개발중이다. 현재 개발을 눈앞에 둔 바디탑은 전체무게가 1kg 미만인 응급 의료진 또는 구급요원의 휴대용 컴퓨터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키보드 대신 전자펜으로 명령어를 입력하는 컴퓨터는 이미 부분적으로 실용화돼 일상생활에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1994년 10월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 신경망학회(APNNA) 주최로 열린 94 신경회로망 국제학술대회에서는 14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사람 뇌의 정보처리원리를 모방한 신경망(Neuro) 컴퓨터도 선보였다. 사람의
두뇌처럼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하며, 스스로 학습해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을 갖춘 이 신경망 컴퓨터가 완성되면 정보처리 속도가 대폭 빨라질 뿐 아니라, 흘려쓴 필기체같이 모호한 자료도 정확히 처리하고 일부 기능이 손상돼도 나머지 기능은 장애를 받지 않게 되는 등 종전의 컴퓨터 성능에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컴퓨터가 주식투자를 대행하고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시대도 도래할 전망이다.
  이밖에 최근 들어서는 일본, 미국 등 서방국가가 공동으로 박테리아 크기의 생물체 분자소자에 의해 구성, 작동되는 바이오 컴퓨터(생물 컴퓨터) 연구개발에 착수하는 등 종전의 상식을 뛰어넘는 최첨단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시청각, 후각기능까지 갖출 것으로 예상되는 이 바이오 컴퓨터가 개발된다면, 단지 컴퓨터 혁명에 멈추지 않고 사이보그(인조인간) 제작까지도 현실화되는 거대한 파급효과를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Power Group II 세계를 움직이는 황금의 마이너스

  "초국가기업은 궁핍화된 인간사회라는 바다 위에 표표히 떠 있는 하이테크 군도를 형성할 것이다." – 리카르도 페트레스

  인류역사상 최초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전세계의 경제를 완전 지배하게 된 지금, 금융시장은 각국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골리앗이 됐다. 바야흐로 ‘자본 황금시대’가 활짝 막을 홀린것이다.
  동서 냉전종식 후 사회주의권의 30억 인구가 새로 시장경제권에 편입되었고 1990년대 들어서만 증권시장 등 자본시장을 신설한 개발도상국만 50개국이 넘을 정도이다. 모두가 돈을 빌려다 자국경제를 일으키는데 총력을 쏟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전세계적으로 자본에 대한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금융자본은 그 어느 때보다 가공할 힘을 지니게 됐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본은 정치권력의 통제로부터 급속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민간자본은 통신과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마음대로 왕래하고 있다.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단기이익에 집착하는 이들 자본은 가장 큰 이익이 보장되는 곳에서만 잠시 발길을 멈출 뿐이다. 사실상의 세계은행인 미국연방 준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팬 이사장은 "지금 세계금융 시장은 칸막이가 없는 거대한 유조선과 같다. 한쪽에 구멍이 뚫리면 전체가 무방비로 침몰할 위험이 크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3조 달러 가까운 천문학적 투자자본이 1일 평균 1조 달러가 거래될 정도로 부지런히 세계각지를 휘젓고 다녔다. 이들의 행보는 나날이 빨라져, 1994년에는 하루 평균 1조 3천억 달러가 국경을 넘나들며 투기행각을 벌여 국제외환시장과 증시, 선물시장을 교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 해소와 경제성장 지속을 위해 외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 각국은 이들 자본에게 자국의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이른바 ‘악마에게 혼을 파는 계약’을 속속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의 자본은 정치권력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정부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은행 등 제1금융권이 그들의 주된 자금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증시, 채권시장 등 제2금융권이 그들의 주된 공급원이 됐다.
  1990년만 해도 은행융자를 통한 자본이 4,680억 달러이고 주식, 채권시장을 통해 모금된 자본은 7,560억 달러였다. 그러나 1993년 들어서는 은행융자 자본이 5,550억 달러에 달했다. 자본이 더이상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 투기성 이동자본의 주축을 위태위태한 아메리칸 머니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국제금융시장의 중핵이었던 1970년대의 오일 머니나 1980년대의 저팬머니는 흑자국의 여유있는 돈들이었다. 따라서 단기차익보다는 장기적 이익을 찾아 돈이 움직였다. 그러나 1990년대 국제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아메리칸 머니는 4조5천억 달러의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이 외국에서 빌려 온 돈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장기투자에는 관심이 없고 단기 환차익에만 관심이 있다. 자칫 한번 돈의 흐름이 엉키게 되면 전세계 시장경제는 일순간에 가공스러운 금융공황에 빠질 위험이 크다.
  마이너스들이 지배하는 ‘자본 황금시대’의 도래. 이는 어쩌면 이미 인류가 결코 건너서는 안 될 루비콘 강을 건너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적신호인지도 모른다.

    POWER 014 마이너스의 손: 조지 소로스

  신만이 그 흐름을 아는 곳이라 불리는 한 세계가 있다.
  케인즈 등 고금의 석학들이 내세운 빼어난 경제이론들이 도통 먹혀들지 않고, 한순간 삐꺽하면 전세계 경제가 삽시간에 금융공황에 휩싸일 정도의 천문학적 거금이 겁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세기말적 투기장인 국제외환시장이 바로 그곳이다. 외환전문가들은 현재 뉴욕, 런던, 도쿄 등 3대 외환시장을 위시한 전세계 외환시장에서 하루 평균 1조 3천억 달러(1,040조 원)의 돈이 숨가쁘게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복마전 같은 이 투기판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한 인물이 있다. ‘마이너스의 손’ ‘중앙은행 킬러’ ‘유태금융 마피아’라 불리고 있는 미국 최대 투자신탁회사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회장이 바로 그이다. 서방에서는 장바구니 주식투자를 하는 주부라 할지라도 월스트리트의 검은 황제인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모든 경제관련 언론매체들이 그의 행적을 24시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투자가들은 소로스가 투자한 주식이나 채권, 외화라면 아무리 그것이 위태위태한 상황에 놓여 있는 물건이라도 앞다투어 사들인다. 소로스를 뒤따라 투자를 하면 손해 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로스의 판단과 정보에 대한 서방 금융계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뉴욕의 기업정보지 "파이낸셜 월드"는 얼마전 1993년도 월 스트리트 100대 고소득자 명단을 발표했다. 전세계 펀드 매니저들의 연가 최종성적표라 할 수 있는 이 리스트에서 올해도 랭킹 1위를 차지한 이는 역시 소로스였다. 이 발표에 따르면 그가 1993년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은 자그마치 11억 달러(8,800억 원)나 됐다. 소로스 혼자서 벌어들인 이 수입은 같은 해 유엔 가입국 중 하위 빈국 42개국의 국내총생산(GNP) 전체를 합친 수치보다도 큰 액수였다. 소로스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문제의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헝가리에서 보낸 그는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와 연이은 공산화를 피해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 반전체주의 철학가로 유명한 당대 석학 칼 포터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그가 월 스트리트에 진출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때부터 만 17년 동안 월 스트리트에서 허드렛일부터 배우면서 펀드 매니저 경력을 충실히 쌓아갔다.
  이제 홀로서기를 할 때라고 판단한 소로스는 1969년 퀀텀이라는 투자신탁회사를 세웠다. 마침내 소로스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퀀텀은 창립 첫해부터 가공할 급성장을 거듭해서, 지난 19년간 퀀텀이 자사에 돈을 맡긴 투자가들에게 매해 나눠준 평균수익률은 자그마치 35p나 됐다. 국제외환 위기가 심화된 1992, 1993년도에는 잇따라 60p가 넘는 경이적 수익률을 올려, 이 분야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기까지 했다. 발족당시 4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자본금도 지금은 2만 1,500달러를 호가할 정도로 됐다. 은행금리가 아무리 높아도 한 자리 숫자를 넘지 않는 서방에서는 전무후무한 급신장이 아닐 수 없다. 소로스는 현재 이처럼 비대해진 퀀텀의 전체주식중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1981년 초 영국의 권위 있는 투자전문지 "국제 투자가"는 소로스를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머니 매니저’로 선정, 그의 빼어난 투자역량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92년 영국인들은 소로스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그해 9월 영국중앙은행은 유럽통화기금(ERM) 으로부터의 파운드화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ERM 잔류시 파운드화가 독일의 마르크화 등에 비해 형편없이 낮게 평가돼 상당한 국익 손실이 불가피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세좋게 ERM을 이탈했던 영국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에 백기를 들고 무조건 복귀해야 했다. 소로스의 농간 때문이었다.
  소로스는 파운드화의 ERM 이탈로 빚어진 유럽통화 위기가 결국 영국의 패배로 끝날 것으로 일찌감치 판단했다. 이때부터 그는 끌어들일 수 있는 자본을 총동원해, ‘파운드 팔자’와 ‘마르크 사자’주문을 연신 내면서 파운드화 폭락을 주도해 났다. 이 기간중 그가 직접 동원한 자본은 자그마치 100억 달러를 넘었으며, 그는 불과 한 달 동안의 환투기를 통해 간단히 10억 달러 이상을 챙긴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다름아닌 영국 중앙은행 금고에 차곡히 쌓여 있던 알토란 같은 영국의 국부였다. 이 사건 후 영국인들이 소로스를 ‘파운드화를 망가뜨린 악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또 1993년 이후에는 미국의 엔고 공세에 편승해 일본주식시장의 보험주 등을 집중매입해 경이적인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는 이어 금융산업이 낙후한 한국증권시장에도 뛰어들어 1994년 상반기에만 3억달러의 주식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국내 금융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기도 하다.
  앞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소로스의 주요 관심사는 더이상 주식도 채권도 곡물도 아닌 환투기가 됐다. 이것만큼 큰 이문이 남는 돈장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금융계는 2차대전 후 40여 년간 세계경제가 절대군주로 군림해온 미국이 채무국으로 전락한 1985년을 분기점으로 일대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소련과의 무한대 군비확장경쟁으로 골병이 든 미국은 1985년 들어 채무국으로 전락한 이외에도 거의 모든 제조업 부문에서 일본에게 추월당했다. 이에 미국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소련과 서둘러 냉전을 끝내고 일본에 대해서는 플라자합의라는 엔고공세를 전개함으로써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한번 기울기 시작한 경제는 쉽게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과거 40여년간 국제기축통화 역할을 단단히 해오던 달러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지구규모의 국제통화위기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같은 범지구적 통화혼란을 능구렁이 같은 소로스가 놓칠 리 없다. 투기꾼에게는 남의 위기가 바로 더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로스는 거래금의 몇 퍼센트에 불과한 위탁증거금으로 몇 십배의 거래를 행하는 선물거래나 일정기간 뒤 통화를 지정한 가격으로 매매하는 옵션 등의 금융파생상품을 개발해내는가 하면, 이들 금융파생상품을 교묘히 조합해 투자자금의 위험도를 헤지 펀드(유한책임 투자신탁) 같은 기발한 투기방식을 잇달라 개발해내고 있다. 현재 전세계 금융계는 700–800종의 헤지 펀드 거래가 통용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소로스의 퀀텀그룹이 개발했다. 그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SEC)가 헤지펀드는 너무 위험하다고 제약을 가하자, 곧 헤지 펀드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없는 네달란드에 새 매장을 차려 전세계를 상대로 한 환투기를 계속하는 등 최근의 글로텔리제이션 (지구촌화)을 최대한 활용해 교묘히 법망을 피하여 부단히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한동안 소로스를 국제통화위기의 제 1 주범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망으로 옭아매려던 각국 정부도 근래 들어서는 이를 포기하고, 도리어 그와 가능한 한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소로스의 막강한 정보 수집력과 날카로운 판단력, 그리고 전세계적인 정치경제적 영양력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방선진 7개국(G7)의 모임인 ‘G7 평의회’는 몇 해 전부터 G7과는 무관한 소로스를 정식멤버로 추대해 해마다 그를 회의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와 미국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이사회(FRB)의 최고층들도 핫라인을 통해 소로스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주기로 인색하기로 소문난 미국의 MIT대학도 최근 그에게 경제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밖에 새로 시장경쟁를 도입한 까닭에 심한 자금란을 겪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도 그와 줄을 잇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데, 현재 소로스는 알바니아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동구권의 18개 재단에 3억 달러 이상을 희사하면서 향후 또하나의 거대한 투자대상으로 떠오르는 ‘처녀지 개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소로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투기꾼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극히 냉소적이다. 현대경제를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나 하는 잠꼬대라는 식이다. 실제로 소로스는 얼마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MIT대학에 제출한 논문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기존의 모든 경제이론이 파기된 불가측정의 시대’로 규정한 뒤, 고전적 의미에서의 투자와 투기간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그는 과거에는 엔화가 상세를 보이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돈이 모여들고, 그러면 어느 적정선이 지난 뒤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엔화는 자동적으로 약세로 돌아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들어서는 돈이 몰릴수록 엔화는 실력 이상의 초강세로 폭등을 거듭해 도저히 앞날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예측불허의 시대에는 멍청히 않아 있다가는 판판이 깨지기 십상이라며, 자신처럼 끊임없이 변화에 대응할 때에만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로스다운 논법이다.
  이같은 논법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그의 체험이 큰 힘이 됐다. 펀드매니저에게는 단지 동물적 감각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고급정보 수집력과 정확한 판단력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요건이다. 이를 입증해주는 대표적 예가 소로스의 지난 1987년 실패담이다. 블랙 프라이데이로 불리는 당시 월스트리트의 주가 대폭락으로 소로스는 자그마치 7억 달러의 천문학적 손실을 입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못지않은 정보수집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소로스는 당연히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 조만간 주가가 대폭락하리라는 사실을 정확히 예견했었다. 그러나 그 폭락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될 것으로 잘못 짚는 바람에 생애 최대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 구겨진 체면을 1992년 유럽통화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며칠 만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간신히 만회할 수 있었다.
  펀드 매니저들은 외환시장의 흐름은 신만이 안다고 말한다. 이론이 사라진 국제외환시장에서 24시간 격돌하는 펀드 매니저. 이들은 어쩌면 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이들은 신의 경지에 올라섰다. 소로스가 보여주듯, 한 개인이 지구상의 못사는 나라 42개국이 연간 생산해내는 부가가치의 총합과 같은 수준인 11억 달러를 한 해 동안에 간단히 벌어들이는 단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로스로 대표되는 이들 국제적 펀드 매니저들이 치부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전쟁와중에 무수한 민초들의 희생 위에 치부하는 죽음의 상인들과 같은 치부방식을 즐기고 있다.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는 정보시대에는 두뇌가 곧 자본이라 말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두뇌가 곧 자본이라는 이런 주장이 소로스류의 치부행위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이런 주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두뇌노동이든 근육노동이든 정당한 (노동)이 제값을 받는 세상만이 진정 건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소로스류가 활개치는 현재의 세계경제는 크게 병든사회임에 분명하다.

    POWER 015 화교 따이꿴: 리 카싱

  "나의 첫째 가는 즐거움은 사력을 다해 일한 뒤 그 대가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홍콩 드림’을 실현한 리 카싱이 평소 즐겨 하는 말이다. 얼핏 들으면 수전노 같은 속물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러나 분명 그에게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며 이런 말을 한다고 그를 속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국민학교 문앞에도 안가본 그는 화교 특유의 동물적인 상술로 지구상에 깨알같이 흩어져 있는 5,500만 명의 화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개인자산만 70억 달러(5조 6천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을 존중하는 화교사회에서는 그를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이름 앞에 과거 황제를 부를 때에나 사용하던 최고의 극존칭인 따이꿴을 붙일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열강의 침탈과 내전으로 중국대륙이 대혼란기에 빠진 1928년 광동성 조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전란을 피해 12세 때 홀홀단신으로 홍콩에 건너왔다. 무학인 까닭에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던 그는 시계줄과 혁대 행상부터 시작하여, 1950년 어렵게 7천달러의 돈을 모은뒤 이를 밑천으로 플라스틱 빗과 인조꽃을 만드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으로 기업경영에 착수했다.
  그후 그는 홍콩 붐을 예리하게 간파하고서,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땅을 헐값에 사들인 뒤 아파트를 지어 비싼 값에 되파는 방식으로 오늘날과 같은 천문학적 거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축재과정에서 결코 땅 투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땅을 팔거나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아파트 분양권 등을 나누어줌으로써 몇 배로 보답했다. 그는 남의 돈을 빌려 돈을 버는 이른바 OPM 경영의 귀재였던 셈이다.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1994년 화교 최대재벌로 70억 달러를 모은 리 카싱을 꼽았고, (포춘)지는 그를 1993년도 세계 랭킹 제16위로 뽑았다.
  그의 양대 기업은 홍콩 최대부동산회사인 장강실업과 허치슨 왐포아이며, 부동산 이외에도 컨테이너 터미널, 전력, 통신, 호텔, 유통업 등 다양한 업종에 손을 뻗치고 있다.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그의 그룹 주식은 홍콩 전체 상장주식 총시가의 15p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
  그럼에도 그의 도박정신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는 1991년 차남 리처드 리의 도박 같은 아이디어를 전격 수용해 아시아 최초로 24시간 위성 채널 홍콩 스타 TV를 발족시켰다. 당시 세계의 모든 방송인들은 리 카싱이 쪽박을 찰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시아 전역에 폭발적 위성방송 붐을 일으켰고, 1993년에는 이를 투자액의 6배가 넘는 5억 2,500만 달러를 받고 오스트레일리아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미련없이 팔아넘기는 뛰어난 상술을 보임으로써 연달아 세계를 감탄케 했다. 그는 아직도 스타 TV의 전체지분 중 3분의 1을 움켜쥐고 있다.
  후계자를 길러내는 방법도 화교황제답게 독특하다. 차남 리처드 리의 어린 시절 회고담 한 토막이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아버지는 나를 그룹 중역회의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의자 하나가 주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는 나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맨로 파크에 있는 한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좁은 숙소 하나만 빌려주었을 뿐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했다. 졸업 후에는 다른 회사에서 샐러리맨을 해야 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1990년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나를 홍콩으로 불러들였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때를 대비해 내가 오랜 기간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가 바로 스타 TV 구상이었고, 아버지는 두말 않고 거액을 내주었다."
  리 카싱은 과거에는 유럽과 북미에 주로 투자했으나 중국 붐이 일기 시작한 1992년부터는 재빨리 중국 투자로 방향을 선회해, 1993년 말 현재까지 4백억 홍콩달러(4조 원)를 중국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100여 건의 대중국 투자계획도 추진중이다. 그는 특히 1994년 초 중국 건설부의 홍콩 자회사와 함께 홍콩상장기업인 투자전문회사 엠페라 인베스트먼트를 사들였다. 중국의 부동산 매매를 주된 업무로 하고 있는 이 회사를 사들임으로써 리 카싱은 중국 부동산 진출의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밖에 중국 최고실력자 덩샤오핑과 수시로 독대하는 유일한 남자로도 유명하다. 덩의 차남 덩쯔팡이 회장을 맡고 있는 상하이 국영기업과 함께 홍콩의 대형완구회사를 사들이고, 덩의 장녀인 화가 덩린이 해마다 홍콩에서 여는 전시회에 반드시 참석해 일부러 비싼값에 그림을 사주는 등 덩씨 집안과의 친분은 여러 화교재벌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화교파워는 리 카싱만이 아니다. 1994년 (포브스)는 리 카싱의 뒤를 바짝 위협하는 화교 10대 재벌로 월터 쿼(홍콩, 65억 달러), 차이 완린(대만, 63억 달러), 세도노 살림(인도네시아, 60억 달러), 림 고봉(말레이시아, 50억 달러), 리 샤우키(홍콩, 50억 달러), 우 둥친(대만, 48억 달러), 프라조고 팡케스투(인도네시아, 45억 달러) 등을 꼽기도 했다. 이들 화교 파워야말로 오늘날 중국대륙에서 진행중인 거대한 경제혁명을 가능케 하는 기관차에 다름 아니다.

    POWER 016 할리우드 마피아: 잭 발렌티

  잭 발렌티(Jack Valenti). 일반인에게는 더없이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세계 영화계에서 그는 더없이 막강한 권력을 한손에 움켜쥔 할리우드 마피아 대부로 통하고 있다. 장장 30여 년간 미국영화협회와 미국영화TV 제작자협회 회장직 등 요직을 독식하면서 탁월한 웅변과 로비능력을 무기로 할리우드영화의 세계진출을 주도함으로써 할리우드를 오늘날의 지구촌 영상제국으로 키워낸 어둠속의 제1공신이 바로 잭 발렌티이기 때문이다.
  1921년 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휴스턴 대학과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마친 뒤 2차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할리우드에 뛰어들어 광고업계, 영화수출업계 등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다음 미국영화협회 등 이익단체 일에 적극 나섬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할리우드의 대부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는 1966년 미국 영화협회와 미국영화TV 제작협회 회장직을 맡은 이래 지금까지 근 30년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1967년 이래 미국 필름연구소 소장직도 겸임하고 있는 그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대통령) (신념을 갖고 말하라) 같은 케네디 추모서를 내기도 했다. 케네디의 뉴 프런티어 이상을 그나름대로 할리우드 육성을 통해 구현해낸 셈이다.
  현재 미국영화계는 영화 제작편수만 갖고 따지면 전세계의 6p 밖에 제작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실제 극장점유율은 자그마치 80p 를 웃돌고 전체 수익의 50p 이상을 거둬가고 있을 정도로 막가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한 예로 1993년 제작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쥐라기 공원)이 거둔 수익은 한국이 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했을 때 거둘 수 있는 수익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미국영화계의 총수역을 맡고 있는 발렌티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세계 영화시장의 완전 석권을 위해 외국정부들에 대해 현재 다각도로 압력을 집어넣고 있다.
  그는 특히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정에 프랑스가 막판까지 영화시장 개방을 거절하자 할리우드 간부들을 이끌고 직접 협상장에 나타나 미키 캔터 무역대표부대표 등 미국정부 협상대표에게 고압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미국영화는 현재 100개 이상의 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경쟁에서 완전히 이기기 위해서는 이에 만족하지 말고, 미국의 비밀병기 즉 ‘초특급 영상무기’가 전세계의 극장과 안방 화면을 완전점령하도록 해야 한다"는 노골적 주장을 펴기도 했다.
  비록 당시 프랑스의 결사 항전으로 발렌티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실패했으나 199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발렌티가 이끄는 할리우드 사단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빌 클린턴과 집권 민주당측은 각국과의 쌍무협상을 통해 할리우드의 요구를 최대한 관철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발렌티는 그러나 미국정부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이끄는 미국영화협회를 주축으로 해 영화판매협회, 소프트웨어연맹, 출판인협회, 음악출판인협회, 레코드사업협회 등과 함께 미국 국제 지적재산권연맹 (IIPA)을 구축해, 한국 등 신흥공업국가들에 대해 지금 이 순간에도 집요한 영상시장 개방압력을 가하고 있다. 발렌티는 미국영화와 비디오를 부단복제하고 있는 외국의 해적판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비디오 G맨이라고 불리는 자체 조사원을 수시로 현지에 파견, 실태를 조사한 뒤 이를 당국에 고발조치하거나 불법복제 현황을 집계해 미국정부가 이를 통상압력의 근거자료로 사용토록 제출하고 있다.

    POWER 017 식량 마피아: 카길

  농가 숫자는 불과 전인구의 2p인 200만 호에 불과하나, 국제 곡물 및 사료시자앙의 5할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최강의 농업국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독하게 마음먹고 20년간 식량수출을 금지하면 미국이외의 국가는 모조리 처참하게 멸망할 것이라는’ 이라는 통계가 있을정도로 미국이 지닌 식량 파워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런 미국의 식량파워를 대표하는 콘 손이 다름아닌 미국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악명높은 카길(Cargill)이다.
  세계최대 농업종합상사인 카길은 1865년 창업후 1993년도 매출액이 500억 달러(40조 원)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을 계속해왔다. 카길사를 설립한 카길가와 맥릴런가가 자손 75명에게 주식을 분산함에 따라 현재 미국 기업 중 개인소유 비중이 가장 높다. 한국 등 전세계 54개국에 100여 개 자회사의 800여 개 공장, 5만 7천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해, 밀가루, 옥수수, 콩, 쌀, 식용유, 오렌지 농축액, 육류, 맥도널드 햄버거용 통닭 등 대단위 곡물산지에는 직접 대규모 자본진출도 하고 있다. 총수입의 30p는 농산품 가공생산에서 거둬들이고 있으며, 미국 내 외형 3위의 통조림 자회사인 엑셀사는 농산물 가공품 외에 철강, 비료, 소금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카길사의 최대강점은 각국 정부보다 먼저 각국의 농사 작황을 파악할 정도로 기민한 정보력에 있다. 이들은 인공위성과 자회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기초로 흉작이 들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해당 곡물을 매점매석한 뒤 가격을 폭등시키는 수법으로 막대한 차익을 챙기고 있다. 이들은 또한 전직 관료 등 로비스트를 동원해 미국정부를 매수하거나 외국 독재정권과 결탁해 검은 정치자금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면서 부당한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한 예로 1993년 전세계 농민의 분노를 산 미국측 우르과이라운드 협정안의 경우, 한때 미국 농무차관을 지낸 카길사의 고위임원 앰스태시가 작성한 초안이 그대로 미국정부안으로 겉장만 바뀌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장에 제출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카길을 선두로 한 분계, 드레페스, 인터콘티낸털, 쿡 등 미국의 5대 곡물 메이저는 국제 곡물수출시장 상권의 90p를 장악하고 있다. 카길 주도하에 미국 수출곡물협회라는 압력단체를 결성하고 있는 이들 곡물 메이저등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과정에 빌 클린턴 미국 정부에 다각적 로비를 펼쳐 한국의 쌀시장 개방을 관철시킴에 따라 국내 농민들의 원성을 한몸에 모으기도 했다.
  쌀을 제외한 한국의 식량자금률은 1994년 현재 20p를 약간 웃돌 뿐이다. 어느덧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생명선이 카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 카길의 범지구적 영향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식량부족에 따른 곡물가 폭등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정확한 정보 수집력과 분석적으로 명성높은 워싱턴 월드 위치 연구소의 세스터 브라운 소장은 21세기의 식량사정을 이렇게 전망하고 있다.
  "1950년부터 1984년까지 34년 사이에 세계의 곡물 수확량은 매년 3p씩 늘어 1인당 40p 정도 공급량이 늘었다. 그러나 1984년 이후에는 수확 신장률이 1p로 줄어들어, 인구 증가율 2p에 못미치고 있다. 그 결과 1994년도의 1인당 공급량은 1984년보다 도리어 10p 줄어들었다.
  생산량 정체의 원인은 농지 감소, 수자원 고갈, 한계에 봉착한 화학비료 효율 등이다. 이는 미국, 중국, 인도 등 3대 생산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제약이다. 세계 경작지 면적은 1950년부터 1981년 사이에 24p 늘어났으나, 그후에는 공장용지와 도시시설로 전용되면서 줄어들고 있다. 또 지하수의 과잉계발로 미국 남서부와 중국 북부, 인도 펀잡의 대곡창지대는 물부족을 겪고 있다. 아울러 토양 침식, 오존층 파괴, 온난화 같은 환경파괴도 식량 생산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현재 세계 경작지에서는 연간 240억 톤의 표토가 침식되고 있다.
  무엇보다 큰 변수는 급속한 공업화, 소득향상을 실현중인 중국의 12억 인구가 금세기말 세계의 식량수급에 미칠 영향이다. 소득이 늘수록 곡물에서 육류로 소비패턴이 바뀐다. 그러면 엄청난 곡물이 사료로 소비된다. 국내에서 증산한다 할지라도 농지면적, 수자원, 비료효과라는 3대 장벽에 부딪쳐 결국은 조만간 거대한 식량수입국이 될 것이다. 쌀, 밀가루, 기타 곡물류 순서로 세계의 식량 가격을 중국이 크게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브라운 소장의 전망이 들어맞는다면 21세기 카킬의 식량 파워는 과거의 석유 파워나 핵 파워를 능가하는 거대한 것이 될 게 확실하다.

    POWER 018 국제신용 심판관: 무디스 투자서비스

  미국의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사 소속인 무디스 투자서비스(Mody’s Investors Services)는 외형상 일개 신용평가기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각국 정부 및 기업이 그 어떤 정치권력이나 군사력보다 무디스가 수시로 발표하는 성적표를 가장 두려워할 정도로, 무디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다.
  오늘날 무디스를 세계최대 신용기관으로 우뚝 서게 만든 가장 큰 강점은 CIA나 KGB를 능가하는 세계최고의 정보 수집력이다. 전세계 곳곳에 심어놓은 비밀 네트워크를 통해 각종 기밀을 수집하는 무디스의 정보 파악력은 ‘국제금융계의 최대 기밀’로 일컬어지는 스위스은행들의 준비금 실태까지 정확히 파악해 해마다 이들에 대한 신용평가점수를 매기고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세계적 권위의 무디소로부터 낮은 신용평가를 받은 기업은 국제금융 시장에서 자금을 끌어다 쓸 때 우수기업보다 높은 추가금리를 부담해야 하는 치명적 불이익을 받는다. 한 예로 한국의 경우, 정치권력과 재계의 불협화음이 극에 달했던 1992년, 1993년에 한국 기업의 안정성에 대한 무디스의 낮은 신용평가로 해당 대기업뿐 아니라 모든 한국기업들이 국제금융조달시 특별고금리 따위의 커다란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이에 전세계 기업들은 무디스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맹렬한 로비를 펼치고 있다.
  무디스는 단지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뿐 아니라, 매년 11월 초 발표하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각국의 정세와 경제상황 등을 종합해 국가신용등급을 매기기도 한다. 이런 국가신용등급은 곧바로 국제금융계에서 차관 도입조건 또는 도입금리를 결정짓는 주요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무디스는 1994년 연례보고서에서 한국과 관련해 한국은 탁월한 경제성장으로 지난 1990년 4월 획득한 장기부채신용등급 A1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나,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이에 따른 한국으로서의 급속한 통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디스는 이어 한국은 숙련된 노동력과 높은 저축률 등으로 세계 주요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한국의 평균임금이 계속 오르고 있는 만큼 한국은 이제 국제무대에서 가격보다 첨단기술로 경쟁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무디스에 필적하는 국제적 신용평가기관으로는 미국 언론그룹 맥그로힐사가 취재 과정에 취득한 막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경영하고 있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 S & P가 있을 정도이다.

    POWER 019 지상최대 사교클럽: 르네상스 그룹

  르네상스 그룹은 US뉴스 & 월드 리포트의 데이비드 거겐 편집국장에서부터 빌 클린턴, 힐러리 로담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정치가,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이 총집결한 사교 모임으로 명성이 높다. 미국 내 명망가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가입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사교클럽이 바로 이 르네상스이다.
  각 파트별로 주마다 한 차례씩 빈번히 정례모임을 갖는 것 이외에 연말에는 최고급 호텔 등을 전세내어 전체 회원이 모이는 대대적 새해맞이 축하모임을 소집해 온세상에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 부부는 이곳 정규 멤버로서 만 10년째 바쁜 일정 속에서도 새해맞이 모임에 꼭 모습을 나타내어 왔다.
  1980년대 초 미국에는 한무리의 야심만만한 신진 엘리트 집단이 출현했다. 여러모로 악명(?)높은 여피족이었다. ‘미이즘(Me-ism)’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킬 정도로 자신의 이익과 가정만을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최고학부 출신의 여피족은 뉴욕의 월 스트리트를 중심무대로 하여 무자비한 기업사냥(기업 인수합병)을 감행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초호화판 소비생활을 세상에 과시하여, 뜻있는 미국인들을 개탄케 했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큰 절대권력을 쥐고 싶어했고, 이런 야망이 모야 탄생한 것이 다름아닌 르네상스그룹이다. 이들은 단순한 친목도모 차원을 뛰어넘어 상호정보교환, 이익증진, 사회적 영향력 확장을 위해 조직적으로 이 클럽을 키워나갔고, 그 결과 마침내 지금에 이르러서는 르네상스를 미국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가입하기를 원하는 세계최고의 ‘슈퍼 사교클럽’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여피족은 원래 1980년대에는 골수 공화당 지지파들이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최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여론의 풍향을 누구보다도 재빨리 읽을 줄 알았다. 세상이 바뀔 때를 대비해,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등 민주당 소장파들과도 줄을 맺어왔던 이들은 냉전종식과 미국의 경제난으로 더이상 공화당 람보정권이 집권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감지하여, 재빨리 정치노선을 바꾸었다.
  이 그룹은 199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기간중 정치권 내 세대교체라는 깃발 아래 언론 및 지식인 그룹을 총동원해 ‘클린턴 대통령만들기’에 적극 나섬으로써, 초기에 플라워즈 스캔들 등 각종 악재 때문에 클린턴에게 불리하던 여론을 되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치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그후 이들은 표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수시로 대통령의 개인 고문자격으로서 미국의 국내외 정책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워싱턴에서는 이들을 ‘클린턴의 새도 캐비넷(그림자 내각)’이라고 부를 정도다.

    POWER 020 세계의 경영대학: INSEAD

  프랑스 파리 서쪽 퐁텐블로에 위치한 유럽경영학연구소(European in-stitude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곧 INSEAD는 전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권위 있는 전문경영인 양성소답게 해마다 1월 전세계로 부터 30세에서 50세 사이의 신입생 450여 명만 엄선해 차원 높은 중견경영인 수업을 시키고 있다.
과거에 명성이 높던 미국의 하버드 대학 MBA(경영 석사) 과정을 비롯해 전세계의 MBA는 최근 들어 세계 경제계에서 수업내용이 지나치게 아카데믹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제기됨에 따라 인기와 신뢰도가 크게 줄어들어 입학생 모집에 애를 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수업료가 2만 7,500여 달러로, 전세계 MBA 가운데에서 가장 비싼 이곳만은 1994년 신입생 모집 때에도 2,500여 명이 지망할 정도로 인기와 신뢰도가 변함이 없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곳 졸업생들의 능력에 대한 세계 대기업들의 신뢰도가 대단해, 이곳만 졸업하면 취직과 동시에 미국 하버드 대학이나 스탠포드 MBA 졸업생의 연봉 6만여 달러 보다 훨씬 많은 평균 7만 달러의 연봉을 받들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들어 유럽 금융계에서 명망이 높은 안토니오 보르제스 전 포르투갈 은행 부총재가 새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유럽경영학연구소는 또 한차례 대대적 변화를 겪고 있다. 보르제스 학장은 취임 후 즉각 최첨단 멀티미이어 기법을 이용한 커리큘럼 개편 등 전면적 개혁작업에 착수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그가 중점적으로 손을 댄 부분은 교육 커리큘럼 분야이다. 기존의 낡은 교육시스템을 가지고서는 냉전종식후 급속히 진행중인 국제화와 정보혁명 시대에 앞서 나갈 수 있는 만능 경영인을 키워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보르제스 총재는 이에 ‘최신 산업 마케팅 전략(AIMS)’라는 새 커리큘럼을 확정, INDUSTRAT라 불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이용해 학생들이 유럽 최고의 경영인들로 구성된 교수진들의 도움을 얻어 각종 복잡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유럽 통합과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라 다국적기업의 대대적 사업영역 확장, 기업 인수합병이 왕성해지는 데 부응해 다양한 외국어 교육과 새로운 기업경영 기법, 국제법 지식 등을 집중적으로 기르치고 있다. 또한 환투기자본의 출현으로 대단히 불안정해진 국제금융시장에 적극 대처토록 하기 위해 파생금융상품 등 새 금융기법 전수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밖에 짬짬이 각 사업현장에 실습근무를 시킴으로써 생생한 현장감각도 키워주고 있다.
  INSEAD 교육의 또다른 특징은 각국에서 온 학생들을 골고루 한 반에 섞어 팀워크를 키우게 함으로써 이들이 비즈니스 세계에 진출해서도 서로 힘이 될 수 있는 ‘국제적 커넥션’을 구축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같은 독특한 교육방식은 학생들의 외국어 능력을 단기간에 배양하는가 하면, 다른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높여 이들이 장차 기업을 대표하여 해외로 진출했을 때 불필요한 문화충돌을 최소화하는 부수이익도 얻고 있다.
  최근 INSEAD에는 기존 서구권의 경영자 지망생들 외에 새로운 시장경제하에서 자본주의 경영을 배우려는 러시아 등 동구권의 신흥기업가들이 앞다퉈 모여들고 있어,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해 세계최고의 고급경영인 배출학교라는 명성이 유지될 전망이다.

    POWER 021 제1세계 통상정책의 산실: 다보스 포럼

  스위스 동북부 오스트리아와 접경한 산악 기슭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 다보스, 사시사철 은빛 눈으로 뒤덮여 있는 스키 유향촌인 이곳에는 평소 전세계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로 크게 붐빈다. 그러나 단 한 번 매년 1월말, 이곳에는 스위스군경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다. 지구촌을 움직이는 거물 정치인과 경제 석학, 금융인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평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들이 일제히 이곳에 모여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이곳에서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세계경제포럼, 일면 ‘다보스포럼 The Davos Forum’에서 그해 세계 통상정책의 흐름을 앞서 읽는 동시에 세계경영의 노하우를 얻어가기 위해서이다. 이 포럼은 그만큼 해마다 전세계 곳곳에서 수천여 차례 열리는 각종 정규포럼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와 비중을 자랑하고 참석자들의 면면도 대단하다.
  여기에는 각국의 정치지도자와 경제책임자를 비롯해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같은 국제금융기관 관계자, 다국적기업 총수, 경제학, 정치학, 철학, 예술 등 각분야의 세계 석학, 언론인등이 대거 참가해 세계경제 전망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업전략방향, 새 과학기술의 가능성, 지역분쟁 타결방안 등 지구촌의 모둔 현안을 놓고 열띤 토론과 설전을 벌인다. 글로벌시대에서는 더이상 경제가 정치, 군사, 외교, 문화와 별개 문제가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역사현장이 바로 다보스 포럼인 것이다. 이밖에 다보스 포럼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 최고급정보를 교환하는 동시에 막후 정치협상을 벌이고 고급 국제로비인맥을 서로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냉전종식 후 기존의 세계질서가 전례없이 크게 요동치면서 다보스포럼의 진가는 더없이 큰 빛을 발하고 있다. 한 예로 1994년 1월 다보스 포럼에는 헬무트 콜 독일 총리를 위시해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라오 인도 총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 체르노미르첸 러시아 총리, 하산 요르단 왕세자 등 60여개국의 정부 지도자와 정부 대표단, 경제학자, 다국적기업 대표 등 800여 명이 대거 참석했다.
  외형적으로는 세계 권력지도를 뒤바꾸는 정치협상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포럼에 참석한 아라파트 PLO의장과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별도로 단독회담을 갖고 2월 안에 역사적 평화자치협정에 서명키로 하는 역사적 합의를 도출해 전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또 체르노미르진 러시아총리와 독립국가연합(CIS) 총리들은 (경제동맹) 재구축에 합의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 및 여타 아시아 지도자들은 인도 대륙 일대를 중국을 능가하는 지상최대의 제조업기지, 곧 (제 2의 중국)으로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다보스 포럼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주최측의 기조발표 및 토론 과정을 통해 드러난 제1세계의 새로운 글로벌 통상정책의 방향이었다. 이번 포럼의 대주제는 ‘세계경제의 기본적 가정에 대한 재정의’였다.
  클라우스 슈바브 다보스 포럼 의장은 닷새간의 마라톤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세계 경제전문가들에게 위촉해 작성한 ‘국제경제력에 대한 연례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국가간 경쟁력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1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보고서는 이어 "세계경제가 전후 최악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 서서히 장기 회복기에 들어서고 있으나, 저임금을 무기로 내세운 개발도상국의 대대적 무역공세로 선진국은 산업공동화와 대량실업의 위기를 맞고 있다"면서 개발도상국의 저가품 물량 공세를 비판하였다.
  일본의 무역흑자가 세계불황의 주범이라고 질타했던 1993년 포럼과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였다. 1993년 포럼에는 "세계경제전쟁 Head to Head"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레스터 서로 미국 MIT 대학 교수, 빌 클린턴 미국정권의 엔고 공세를 배후에서 주도한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소장 등 미국측 논객들이 나서서 구미의 입장에 서서 일본의 보호주의를 맹렬히 규탄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공격타깃이 최근 지구촌의 최대생산기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동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으로 바뀐 것이다. 지난 1년간의 집요한 엔고 공세를 통해 일본의 상승세를 결정적으로 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에 다보스포럼은 일본의 뒤를 있는 새로운 위협으로서 동아시아를 선정, 완전시장개방과 공정무역 공세를 시작했고 실제로 그해 세계 통상정책은 남북간 통상분쟁이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다보스 포럼의 개발도상국 공세는 그러나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1992년 포럼 때에도 브리튼 당시 EC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우루과이 라운드(UR)나 환경라운드(GR) 공세에 이어 경쟁정책라운드(CR)의 필요성을 강조해, 개발도상국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CR은 한마디로 개발도상국의 자국산업 보호주의정책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리튼은 담합에 따른 가격, 물량 조절과 입찰조작, 모기업과 하청기업간 연계에 의한 선진국기업의 시장진입 방해, 독점적 공기업의 지위 남용, 반덤핑 남발에 의한 경쟁제한 등을 구체적인 불공정 사례로 들며, 선진국들이 일치단결해 이같은 불공정을 시정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런 주장은 실제 요즈음 들어 하나씩 현실적 압력으로 출현해, 개발도상국들을 비명지르게 하고 있다.
  다보스 포럼, 이곳이야말로 개발도상국들을 견제하는 구미 제1세계의 가공할 싱크 탱크인 셈이다.

    POWER 022 국제금융계 신경망: SWIFT 네트워크

  1960년대 후반 들어 유럽과 미국의 은행들은 국가간 자금결제 등 국제은행업무가 날로 폭증함에 따라 이 업무의 표준화 및 자동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구미의 60개의 대형은행은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공동개발, 표준양식 확정, 암호체계 개발을 통한 보안성 제고, 전송시간 단축 등을 위한 공동연구반을 만들어 수년간 금융기관 전용 국제네트워크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73년 5월 마침내 유럽과 북미 대륙을 잇는 국제은행간 금융통신협회(Society of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 곧 SWIFT가 탄생했다. 각국 주요은행들을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해 은행 상호간 자금, 송금업무 등을 위한 데이터 통신교환 등을 주된 업무로 발족한 비영리조직인 이 스위프트에는 발족당시 서방 15개국에서 239개 은행이 참여했다.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 컴퓨터 시스템은 4년 여의 시험가동기간을 거쳐 1977년 5월부터 본격가동되기 시작했으며, 1993년 6월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89개국에서 정회원 2,087개 은행과 준회원 1,802개 은행이 참여하는 지구촌 최대 금융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1992년 3월 금융결제원이 이와 접속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32개 주요은행이 정회원으로, 31개 외환은행 해외지점이 준회원으로 가입해 국제금융 거래와 관련된 각종 메시지 교환, 국가간 자금결제를 하고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으로 세계의 모든 금융시장은 완전개방이 불가피해졌다. 돈의 국경이 깨진 미래의 SWIFT는 ‘지구촌 금융의 신경망’으로서 한층 그 가공할 위세를 과시할 게 분명하다.

    POWER 023 개발동상국 경제고문관: 제프리 삭스

  ‘경제학을 안락한 순수경제이론 영역에서 험난하고 복잡한 정치영역으로 이끌어낸 존 케인스와 버금가는 거물.’
  이 말은 흔히 국제 경제학계 및 금융계에서 미국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의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39) 교수를 일컬을 때 쓰는 최고의 찬사이다. 현재 제3세계 및 동구권 경제개발정책 결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폴 크루그먼 MIT 대 교수(41), 로렌스 서머즈 하버드 대 교수 검 세계은행 부총재(39)와 함께 미국경제학계의 ‘3대 슈퍼스타’로 불리고 있다. 그는 학부시절부터 대학원 수업을 듣고 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원시절부터 전세계의 주목을 끄는 논문을 잇따라 발표해온 세계적 경제학 천재로서 20대부터 국제경제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미국 디트로이트 시의 유명한 노동인권 변호사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제3세계와 사회주의권에 평소 관심이 많던 그는 29세에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된 이래 1985년 남미 볼리비아의 경제자문으로 살인적 인플레를 진압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부터는 러시아, 폴란드, 몽골 등 채무문제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직접 들어가 대통령 경제고문 자격으로 그 나라 정부의 입장에 서서 경제정책을 입안하거나 국제통화기금(IMF) 대응책을 세워주고 있다. 그는 IMF나 주요 선진국들이 채무국에 대해 취하고 있는 우월주의적 정책을 일관되게 신랄하게 비판하고 채무경감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들은 그에 대한 강한 동지적 유대감을 느끼고 있으며 유엔 등 국제기구도 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는 특히 러시아와 폴란드 등 구 사회주의 블럭의 시장경제 도입을 돕기 위해 1991년부터 3년간 학교를 쉬기도 했다. 그는 1991년 소련 경제학자들과 함께, 향후 7년간 소련의 자유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급진적 ‘소련 경제개혁대강’을 작성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경제고문으로서 가격자유화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가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여줘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던 폴란드와는 달리, 1994년 1월 러시아가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반개혁으로 선회하자 즉각 경제고문직에서 사임했다. 러시아 외에 폴란드에서도 대통령 경제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싱크 탱크로 평가된다.
  삭스는 1994년 10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1940년대 만들어진 브레튼우드 체제, 즉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GATT의 기존 한계를 극복할 청사진을 제시해 세계경제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기술혁명과 국가이데올로기 붕괴가 함께 작동한 결과, 세계경제는 지금 상품교역뿐 아니라 서비스, 금융, 다국적생산 교역을 통해 급속히 하나로 통합돼가고 있다.
  중국의 시장경제도입으로 10억 명이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1991년 경제개방정책을 도입한 인도의 9억 명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오랜 기간 경기침체로 고통받던 라틴 아메리카의 4억 5천만 명도 세계시스템과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경제성장과 저인플레의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구사회주의 세계는 아직 혼란에 빠져 있으나 폴란드, 체코, 에스토니아 등은 이미 성장으로 진입해 세계경제와의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IMF 등 국제기구는 새로운 상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를 책임맡고 있는 IMF는 1971년 고정환율제가 깨지면서 오래전 그 기능을 상실했다.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IBRD는 런던클럽이나 파리클럽 같은 다국적 빚쟁이 모임들에 의해 그 역할이 교란되고 있다.
  IMF와 IBRD, 그리고 GATT의 후계자인 세계무역기구(WTO)는 요즈음의 범지구적 통합화 과정에 새로운 각오로 중차대한 시대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 등 구 사회주의권의 개혁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IBRD의 과감한 외채탕감과 자금제공을 통해 아프리카 등의 최빈국들을 절망적 질병과 내전, 사회자본 붕괴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동시에 WTO를 중심으로 국제교역에서 공정한 시민정신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국제법의 틀을 지금보다 더욱 확대해야 할 것이다."
  그가 쓴 "지구 연계(Global Linkages)"라는 저서는 냉전종식 후 글로벌 경제하에서 각국이 갖춰야 할 사고방식 및 구체적 대처방안을 제시한 명저로 이름이 높다.

    POWER 024 세계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동 공개시장위원회

  미국 연방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산하기구인 연방준비제도 공개시장위원회(The Market Committee of the Federal Reserve, 약 FOMC)는 통화공급과 금리 인상과 인하 같은 공개시장 조작은 책임맡아 행함으로써 미국내 경제계뿐 아니라 전세계 경제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학자들 중에는 FOMC를 산하기구로 두고 있는 FRB를 세계의 중앙은행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이 기구의 국제적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 위원회는 7명의 FRB 이사와 5명의 연방은행 총재로 구성되며 의장은 FRB 의장이 경임하고 있다. 실무적 공개시장 조작은 뉴욕연방은행 총재가 실시한다. FRB 이사 7명은 대통령이 임명한 뒤 미국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취임할 수 있다. 재임은 불가능하나 임기는 14년으로 안정돼 있다. 의장, 부의장은 이사들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 4년으로 재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기구는 한국, 일본 등에서는 달리 전통적으로 행정부로부터 독립성이 강해 임명권자인 대통령조차 그 앞에서는 쩔쩔맬 지경이다.
  현재 의장은 1987년부터 앨런 그리스핀(68)이 맡고 있다. 그린스핀은 원래 공화당 지지자였으나 1992년 말 클린턴 대통령당선자와의 독대 후 입장을 바꿔 정권출범시 미국의 재정적자 감축안 작성에 깊게 관여하는 등 경제고문으로서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지금도 수시로 클린턴정부 수뇌부와 만나 미국의 국내외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FOMC의 미국 내 이자율 결정 같은 공개시장 조작은 그 영향력이 단지 미국 내 경제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예로 최근 폭등을 거듭해 일본경제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고 상대적으로 한국 등에게는 활로를 뚫어 준 엔고는 미국의 금리인상 여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 정부가 무한정 달러화를 사들였음에도 폭등을 거듭하다가 1994년 7월 FOMC가 금리를 0.5p 인상하자 엔화는 비로소 폭등행진을 멈출 수 있었다.

    POWER 025 통합유럽의 금융센터: 분데스방크 중앙협의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분데스방크 중앙협의회(centural council of the Bundesbank)는 단순한 독일연방의 중앙은행 센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실상의 유럽중앙은행으로서 유럽 각국의 통화정책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럽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분데스방크 은행장직은 30여 년간 장기집권하면서 경제대국 독일 건설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쇠고집’ 헬무트 슐레진거의 뒤를 이어 1993년 9월부터 한스 티트마이어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분데스방크는 특히 국내 정치권력의 입김을 일체 배제할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독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자율적 통화정책을 집행하기로 세계정치가들 사이에 악명높다. 한 예로 1994년 7월 달러당 엔화 환율을 ‘마의 100대’선 이하로 붕괴시킨 미국의 가공스런 엔고공세를 틈타 전세계 환투기 자본이 국제금융계를 붕괴 일보직전까지 몰고 가자, 미국과 일본이 분데스방크측에 달러화 매입과 독일 금리인하 등을 강요했음에도 "금리인하는 통독 후유증에 시달리는 독일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끝내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1992년 영국의 유럽통화기금(EMI) 이탈로 초래된 유럽통화 위기 때도 흔들림없이 독일국익 수호노선을 관철해 끝내 영국을 무릎꿇게 만들기도 했다.
  마르크화는 이미 유럽에서 달러화를 제치고 기축통화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미 흑해에서 아랄 해,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까지 ‘마르크 경제권’이 들어선 게 현실이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일본 및 독일의 우익들이 "앞으로 우랄 산맥의 동쪽은 엔 블럭, 서쪽은 마르크 블럭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을 정도로 유럽 내에서 마르크 경제권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엄청나다. 분데스방크는 독일통일을 위해 구 소련측에 700억 달러 상당의 천문학적 마르크화를 지원해 러시아 등의 생명선을 단단히 거머쥔 데 이어 체코, 헝가리 등에서도 여태껏 투자된 전체 외자 중 5할 이상을 마르크화가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동부 및 중부 유럽의 경제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태이다. 벌써 발트 3국 등 동유럽에서는 마르크화가 자국 통화와 함께 국내 통화로서 사용될 정도로 마르크 블럭은 완성 직전의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분데스방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차제에 마르크화를 서부 유럽, 즉 유럽연합(EU)의 통일화폐로 만들려는 야심찬 작업도 착착 진행중이다. 분데스방크는 수년에 걸친 유럽 각국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지난 1993년 미래 통합유럽 중앙은행의 전신격인 유럽통화기금 본부를, 분데스방크 본점이 위치한 프랑크푸르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그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당시 금융전문가들을 이로써 "분데스방크가 유럽중앙은행이 되고, 마르크화가 유럽통화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가 됐다."라고 평했다.
  한편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던 헬무트 슐레진거 전 분데스방크 총재는 국내 금융인들에게 "한국의 경제가 계속 견고히 성장,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이 최우선 선결과제"라는 귀중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정치권력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경제대국 독일을 가능케 하고 독일 통일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는 그의 고백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때이다.

    POWER 026 저팬 머니의 심장부: 가부토 초

  한국의 여의도 증권가처럼 도쿄 증권거래소 등 주요 금융기관들이 즐비하게 운집해 있는 도쿄 도심의 가부토 초 거리. 이곳을 국제금융인들은 보통 ‘아시아의 윌 스트리트’라고 부르고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8년 주식시장으로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 그후 110여 년이 지난 1994년 5월 말 현재에 이르러 이곳은 외국법인을 포함해 모두 7,182개사의 증권이 상장돼 있는 세계적 금융센터로 발돋움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을 거듭한 가부토 초는 1990년대 들어 1부의 상장 주가총액이 런던 증시를 제치고 뉴욕 증시에 이어 세계 제 2위를 차지했다. 또 1993년 한해 동안에만 이곳에서는 자그마치 86조 8,800억 엔어치의 엄청난 주식이 거래됐다. 당시 일본 정계와 재계는 이곳을 아시아 엔화 블럭의 심장부로 삼아 ‘달러화 대신 엔화를 세계경제권의 기축통화로 만든다’는 거대한 야심을 키우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특히 미국이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한 지난 1985년, 가부토 초는 공공연히 ‘반자아’를 외치며 샴페인은 터뜨렸다. 앞으로 몇 년만 더 몰아붙이면 마지막 라이벌인 뉴욕 증시마저 제치고 20세기 안에 가부토 초가 세계최대 증시가 되는 가능하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음이 그후 입증됐다.
  1989년을 정점으로 주가와 땅값이 대폭락하면서 거품경제가 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가부토 초도 동반 침몰하기 시작했다. 버블 파열의 충격은 엄청났다. 버블 파원로 도쿄 증시에서만 자그마치 2조 5천억 달러의 천문학적 거금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이뿐이 아니다. 야쿠자와 유명증권사의 야합 사실 등 한심한 전근대성마저 속속 노출됐다. 설상가상으로 상장조건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수수료 등이 살인적으로 높아 도저히 도쿄 증시에서는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국제금융계의 평소 불만에도 폭팔했다. 그 결과 최근 들어서는 1990년 이후 4년 연속 적자결산을 하고 제 2 위 자리를 다시 런던 증시에게 빼앗기는가 하면, 외국 은행 및 증권사들이 도쿄 증시에서 속속 이탈하는 등 가공할 공동화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 대장성 출신의 오바 도모미쓰 국제금융센터 이사장은 가부토 초 공동화의 원흉은 살인적 수수료와 인건비 등 높은 비용, 변칙적 금융기법에 대한 엄격한 행정제재, 높은 세금 등 세 가지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한 예로 도쿄 증시에서 2천만 엔 이상의 소득을 올렸을 경우 투자자는 법인세와 소득세, 지방세 등 소득의 총 65p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반면 홍콩에서는 16.5p만 내면 되는 점을 꼽으면서, 이런 제약이 계속된다면 가부토 초는 조만간 흉가가 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가부토 초의 이같은 몰락세를 틈타 21세기의 아시아 금융센타가 되기를 희망해온 싱가포르와 홍콩, 상아이 등은 앞다퉈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하면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아시아 금융 파워의 무게 중심이 조만간 ‘엔화’에서 ‘중국 원화’로 이동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POWER 027 세계최대의 민간은행: 다이이치 간교

  다이이치 간교 은행은 1985년 이래 지금까지 총예금, 총자산잔고에서 내리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으로서 일본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다이이치 간교는, 1971년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은행이 되자는 의미에서 ‘하트 은행’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창립된 이래 일본의 경제성장과 발맞춰 초고속 성장과 금융기업의 인수합병을 거듭, 1993년 3월 말 현재에 이르러서는 예금잔고 40조 엔(300조 원), 총자산 54조엔으로 전 세계 금융기관 중 랭킹 1위를 차지하는 울트라 금융파워가 됐다. 다이이치 간교는 그럼에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정부의 독점금지법 위반 판정에 따라 보류되고 있으나 1992년 이래 끈질기게 산와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는 등 덩치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
  일본 내 400개 지점을 비롯해 전세계 주요 경제거점에 거미망을 촘촘히 구축해 놓고 있는 다이이치 간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이미 전체 외환결제의 4할을 엔화로 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상 엔 블럭에 편입된 동남아 등지에서 금융황제로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이이치 간교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일본의 다른 어떤 은행보다도 공평한 인사제도와 인재중용정신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 예로 1992년 거품이 꺼지면서 불량채권 과다보유 등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일본 금융계는 보너스를 줄이고 과다인원을 대거 해고하는등 가혹한 군살빼기에 착수했다. 그러나 단 한 곳, 다이이치 간교만은 은행의 수익이 오르지 않는 것은 최고경영진의 잘못이라며 임원 일부의 보너스만 줄였을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종전과 같은 최고의 대우를 계속했다. 일본 금융계 샐러리맨들의 여론 조사 결과 ‘다이이치 간교가 제일 이상적 직장’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밖에 다이이치는 다른 은행들과는 달리 중앙근무 행원과 지방근무 행원들간, 간부와 평사원간 임금 격차가 거의 없는 공평한 인사제도와 퇴직 때의 두둑한 퇴직금 지급으로 모든 일본 은행원들의 최고의 경외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다이이치 간교가 오늘날 세계최대 민간은행이 된 비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POWER 028 일본의 파워와 그 한계: 엔

  1994년 5월 일본 대장성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1993년 말 현재 대외 순자산은 6,108억 달러 (490조 원)로, 1991년 이래 3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대외자산은 1982년 이래 단 한 차례도 줄지 않고 수직으로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엔고로 상징되는 미국의 환율공세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 엔파워의 저력은 변함없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
  일본 정부와 민간기업이 해외에 갖고 있는 자산에서 부채를 뺀 대외 순자산은 민간기업의 직접투자와 대외중권투자의 증가로 전년도보다 18.9p나 급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대외자산의 8할 이상은 민간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말 일본의 대외자산 총액은 2조 1,808억달러(1,745조원)로, 이역시 전년대비 7.1p가 증가됐다. 이 가운데 투자기간 1년 이상의 장기자산은 1조 4,129억 달러, 단기자산은 7,118억 달러를 차지했다.
  서방선진 7개국 가운데 일본 다음으로 대외순자산이 많은 나라는 독일로, 2,576억 달러를 차지해 일본의 40p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나머지 국가 중 순자산국은 375억 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뿐이며, 5,213억 달러의 순부채로 고민하는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2,379억 달러), 이탈리아(1,241억 달러), 프랑스(664억 달러)가 모두 순부채국이다. 더욱이 1990년에 일본을 제치고 제 1위를 차지했던 독일의 대외 순자산이 1991년 통일의 여파로 급속히 줄어들고 있어, 당분간 G7 중 감히 일본의 독주를 막을 나라는 없을 전망이다.
  그러나 국제경제 무대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일본 최대 경제전문지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얼마전 미쓰비시 은행의 고위 외환딜러의 말을 인용해 일본이 직면한 금융위기를 이렇게 정의한적이 있다.
  "1970년대는 오일 머니, 1980년대는 저팬 머니 시대였던 데 반해, 1990년대는 아메리칸 머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소로스 머니 시대가 됐다. 그런데 이 아메리칸 머니 시개는 과거와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하나는, 과거에는 중동 산유국이든 일본이든 모두가 무역흑자국이었던 데 반해 현재의 미국은 재정수지와 무역수지 모두가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지금까지 총누적액이 4조 5천억 달러에 달할 만큼 살인적이다. 요컨대 아메리칸 머니는 적자국인 미국을 회전무대로 부단히 유출입을 거듭하는 까닭에 항상 세계기축통화(달러화)의 불안요인을 내포하고 것이다.
  다른하나는, 현재의 아메리칸 머니가 금융파생상품 등으로 중무장한 투기성이 강한 자금이라는 점이다. 과거 오일 머니나 제팬 머니가 기본적으로 장기투자였던 데 반해, 아메리칸 머니는 환차익을 노리며 전세계시장을 부단히 누비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이 이렇게 위태위태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일본금융시장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논리화에 뛰어난 일본인다운 논리정연한 상황분석이다. 실제로 아메리칸 머니의 환투기가 본격화되면서, 1980년대 중반 한때 전 세계 10대 상위은행 중 9개를 차지할 정도로 욱일승천하던 일본 금융계는 최근 들어 세계최대 수신고를 자랑하는 다이이치 간교 은행을 비롯해 모든 금융기관이 예외없이 막대한 환손실을 입으며 크게 휘청대고 있다. 한때 도쿄 증시에 모여들었던 외국계 자본은 일제히 런던과 뉴욕, 싱가포르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1980년대 말 월 스트리트 등 세계금융계 금융기관들은 겨우 일본상장주나 만질 정도로 사실상 개점 휴업상태에 놓여 있다. ‘조만간 엔화를 달러화 대신 세계기축통화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던 일본의 자신감은 지금 그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특히 미국이 1994년부터 무역적자 해소 차원에서 집요하게 가하고 있는 엔고 압력으로 일본 금융권 전체가 크게 골병들고 있다. 엔고 파동을 틈탄 미국 환투기 전문가들의 파상 공세에 대처할 전문인력이 거의 전무한 때문이다. 게다가, 그나마 극소수 존재하던 일본인 환 달러들마저 연봉제 등 인센티브를 앞세운 외국계 금융기관에게 모조리 뺏겨버린 까닭에 어려움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일본인들로 부터 ‘검은 눈의 외국인’이라고 비판받는 외국계 금융기관 소속 일본인 딜러는 도쿄 외환시장에만 삼사백 명 존재하는데 이들은 거액의 환차익을 챙겨 국외로 반출하고 있다.
  이는 제조업에만 신경썼을뿐, 각종 규제 및 보호장치로 온실 안에서 금융업을 키워온 ‘제조업 만능국가’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밖에 없다.

    POWER 029 지구촌 일곱 난쟁이: G7

  ‘오일 쇼크로 파탄지경에 처한 에너지난과 범지구적 경제불황에 공동대처하자’는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의 긴급제안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이탈리아 등 6개국 정상이 1975년 11월 프랑스에 모였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서방 선진국들의 최고위 정례협의체인 G7(Group Seven)의 출범이었다. 1976년 제2차 회담 때 캐나다가 참가하면서부터 회담의 공식 명칭이 G7(서방 7개선진국) 정상회담으로 굳어졌다. 1994년 제20회 회담부터는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정치부문 회담의 정식 멤버로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해 실제로는 ‘G8 정상회담’이 됐다.
  G7에는 별도의 상설 사무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해마다 한 차례씩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당면한 최대 국제현안을 주제로 회의를 주최하고 있다. 두 차례 오일 쇼크를 넘긴 뒤 G7이 한 최대역할로는 소비에트 연방해체 후 붕괴직전의 절대위기에 몰린 러시아에 240억 달러라는 거액을 지원, 러시아 경제에 회생의 돌파구를 뚫어준 일을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1994년 7월 회의에서는 최근 달러화 폭락으로 위기가 고조된 국제금융시장 안정방안과 두 자리 숫자에 달하는 유럽의 실업해소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1985년을 분기점으로 미국이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자, 중앙은행총재 회담도 함께 열어 국제통화정책을 상호 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회원국 각국의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지구 규모로 경제전쟁이 확대되자, 알맹이 있는 합의가 거의 도출되지 않고 있으며 선진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아예 완전 행방 불명되어 버렸다. 이에 최근 한편에서는 G7 회담을 일곱난쟁이들의 국제적 정치쇼라고 혹평하면서 G7의 즉각 해체를 주장하는 G7 무용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한편 세계은행이 1994년 발표한 보고서 (2020년 세계전망)은 오는 2020년이 되면 각국 국내총생산(GDP) 순위판도가 크게 뒤바뀌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G7의 구성 멤버들도 재편될 것으로 전망하여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는 2020년 GDP 순위에서 상위7개국에 들어갈 나라들은 중국을 선두로 미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독일, 한국 순이었다. 이 보고서는 이어 현재의 G7 가입국중 프랑스는 9위, 이탈리아는 12위, 영국은 14위로 전락할 것이며, 캐나다의 경우는 아예 세계15대 경제강국의 순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전망이 맞는다면 우리도 21세기에는 G7의 구성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POWER 030 빚쟁이 잔치: 파리 클럽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치를 떠는 국제고리대금업자들의 모임이 서방 선진국 정부들로 구성된 차관상환협상단, 이른바 파리 클럽The Paris Club이다. 해마다 프랑스 파리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차관 재상환 협상을 벌이는 까닭에 파리 클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채권은행들의 모임인 런던 클럽, 즉 IMF(국제통화기금), BIS(국제결제은행) 등과 밀접히 연계해 특정국 정부채무(정부채무 및 정부보증채무)의 변제 및 상환기간 연기 등에 관해 재교섭을 벌이고 있다. 파리 클럽은 채무국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액수가 런던 클럽의 두 배 이상이 되기 때문에 발언권이 휠씬 더 강하다.
  최근 파리 클럽에서는 상환기간 연기(리스케줄)와 채무삭감을 연계한 여러 종류의 구제조건을 갖춰, 채권국이 유리한 조건에서 하나를 고르게 하는 ‘메뉴 어프로치’방식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1994년 현재 국제누적채무 총액은 1조 5천억 달러나 되고 게다가 해마다 6–8p의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어, 변제능력이 부족한 제3세계에 대한 파리 클럽의 입김은 나날이 거세질 전망이다.
  그러나 1994년 유엔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가난한 채무국들은 그동안 도입한 장기차관보다 무려 1,470억 달러나 많은 금액을 부유한 채권국들에게 이미 이자로 지급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파리 클럽이 국제무대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 모임’ 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POWER 031 아프리카의 희망: 바바칼 느쟈예

  바바칼 느쟈예 Babacar N’Diaye(57)는 지난 1985년 부터 10년간 아프리카 개발은행(ADB)총재직을 맡고 있는 아프리카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네갈의 금융가이다. 그는 지난 1984년에는 런던의 경제 권위지 (파이낸셜 리뷰)가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금융인에게 주는 ‘올해의 은행가’ 상을 받기도 하였다.
  ADB는 1964년 열린 아프리카 각국 제무장관회의에서 아프리카 개발은행 협정안을 채택한 뒤 그해 11월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정식 발족했다. ADB는 가맹국의 경제, 사회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융자, 개발계획 작성, 개발에 필요한 외자 및 기술원조 조달 업무를 주목적으로 설립됐다.
  식민지로부터의 독립 후 낫세르 민족주의로 대표되던 ‘제3 세계 자주자립’ 바람이 드세던 창립 초기에는 아프리카 이외 국가의 가입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 지역에 비해 경제개발이 크게 뒤지자 1979년 5월 총회에서 외자 조달을 위해 서방 선진국의 가입도 허용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킨 결과, 현재는 역내 51개국과 한국, 미국, 일본등 역외 25개국등 모두 76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있다. ADB의 본부는 아비쟌에 있고, 현재 자본금은 229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느쟈예는 아프리카 개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은 국제금융을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아프리카는 국제자본을 매료시킬 만한 거대한 프로젝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과거 십수 년간 같은 몰락의 늪에 빠져 있던 남미는 새로운 의욕적 개발 프로젝트를 제시해, 1993년 한해 동안 1인당 190달러의 외자를 도입한 반면, 아프리카는 1인당 8달러의 형편없는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느쟈예 총재는 이에 지난 10여 년간 다른 대륙의 개발도상국들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반면 아프리카 유독 ‘제 3 세계의 제3 세계’로 전락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과감한 외자도입과 대륙 단위의 대규모 경제개발 프로젝트 추진만이 아프리카가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1994년 아프리카 내 최대 산업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평화적 흑백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서방의 자금지원 및 기업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한층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방금융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느쟈예야말로 ‘아프리카 탈빈곤’의 칼자루를 쥔 인물이다

    POWER 032 대중화경제권의 기관차: 광동성

  중국의 국부 쑨원이 태어난 ‘인민혁명의 고장’ 광동성. 이 혁명의 고장이 지금와서는 중국이 21세기의 세계패권을 겨냥해 경제혁명을 맹렬히 추진중인 ‘대중화경제권(CEA)의 중핵’으로 전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1979년 덩샤요핑의 개방노선에 따라 외국자본 및 기술 도입을 위해 중국대륙 내에 최초로 4개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이 4대 특구 중 심천, 주해, 산두 3곳이 바로 산동성 내에 위치한 도시이고, 나머지 한 곳인 하문은 바로 산동성 옆 복건성의 도시였다. 중국정부가 산동성을 최초의 경제특구로 선정한것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5,500만 명의 화교 중 3분의 2이상이 바로 이곳 광동성 출신이기 때문에 이곳을 개방하면 최소한 3천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교자본을 끌어들이기가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예측은 그대로 적중해 풍성한 화교자본의 유입에 힘입은 광동성은 ‘중국경제혁명의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으며 1979년 이래 연평균 12.4p의 초고속 GNP성장을 해왔으며, 수출도 13년 사이에 72배나 늘었다. 특히 1989년부터는 화교자본 외에 전세계 자본이 집결하는 아시아 최대의 성장센터로 세계경제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지역의 성장을 주도하는 도시는 심천과 광주를 위시한 16개 대외 개방 도시로, 이 중에서는 심천은 제2의 홍콩으로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1992년 7월 심천에 대해 독자적으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입법권을 부여하는 파격적 특례조치를 취했다. 이는 심천이 정치 수도인 북경에 버금가는 중국의 경제수도로서 굳게 자리매김 됐음을 의미한다.
  광동성 및 그와 인접한 복건성은 이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4대 신흥공업국(NICS)의 뒤를 바짝 좇는 아시아의 다섯번째 용으로 자리 매김됐다. 두 성의 인구는 중국 전체의 8p에 불과하나, 공업생산은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수송설비에서부터 인적 자원까지 제반 산업기반을 골고루 구비하고 있는 광동성의 수도 상해가 중국, 더 나아가 아시아 최대의 성장 거점이자 금융센터가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중국은 광동성이 21세기 세계경제를 제패할 ‘대중화경제권’의 센터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쥬산린 광동성자은 ‘광동성은 앞으로도 최소한 12p대의 성장을 거듭해오는 2010년에는 최소한 1인당 GNP가 남한, 대만과 엇비슷한 1만 6천 달러가 될 것’이라면서 광동성의 미래를 자신하고 있다.

    POWER 033 지구촌 용광로: APEC

  "금세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공산주의의 흥망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보다 더욱 커다란 세계적 변혁은 아시아 각국의 공업국으로의 변신이었다. 우리 유럽은 대서양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해왔으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핵을 갖지 않고서도 경제력으로 힘을 떨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아시아가 세계의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1950년에 불과 4p였다. 이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20p가 됐고, 앞으로 10년 뒤에는 30p가 될 것이다. 이미 북미와 유럽에 이어 세번째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는 아시아 – 태평양지역은 앞으로도 급성장을 계속해 조만간 세계 제1의 경제센터가 될 것이 확실하다."
  철의 여성이라 불리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가 1994년 10월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뒤늦게 나마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처의 깨달음은 뒤늦은 감이 있다. 아태 국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11월 태평양 연안의 17개 국가들은 호크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의 제창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에 모여 1980년대 중반 이후 ‘지구촌 최대의 생산소비 기지’로 급성장한 아태국가들의 상호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제1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각료회의(APEC)를 개최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태동하던 유럽연합 움직임과 우루과이라운드 출범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모임인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는 기념비적인 모임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3년, 군사패권을 중시하던 공화당에서 실리주의적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미국은 자국을 수입대국에서 수출대국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적극적 제안에 따라 회의 참석자를 종전의 경제각료에서 각국 정상으로 격상시켜, 그해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제1차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앞으로 매년 한 차례씩 정례정상회의를 갖기로 합의했고, 1994년 11월에는 18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정상회의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
  APEC의 자문기구인 저명인사그룹 (EPG)회의는 1994년 8월 자카르타 서미트에 앞서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는 2020년까지 APEC의 역내무역 완전자유화를 실현하라고 주문했다. 이 보고서는 역내 각국이 2000년부터 시작해 향후 20년 동안 국가간 무역장벽을 철폐하는 동시에, 자주적 투자협정의 체결, APEC분쟁조정 시스템 구축, 제품 규격의 통일과 상호인증 등을 실현하면 장차 APEC이 유럽연합(EU)이나 북미 자유무역지대(NAFTA)를 능가하는 지구촌 최대 경제블럭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은 ‘오는 2010년까지 미국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내 선진국, 2020년까지 태국 등 개발도상국이 자국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적잖은 잡음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저명인사그룹이 제시한 이 청사진이 그 밑바탕에 미국측 이해를 중점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있었다. 현재 저명인사그룹 회의 의장직은 미국의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 소장이 맡고 있다. 그런데 이 버그스텐은 ‘미일간 무역적자 해소책으로 엔고 공세를 주도해 ‘1달러당 100엔’이라는 마의 장벽을 깨뜨린 인물이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도 ‘APEC을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 현재 일본에게 뒤져 있는 이 지역의 미국경제 국익을 최대한 확장해야 한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1994년 제2차 정상회의에서 끝내 자국안을 관철시켰다.
  미국의 이런 속셈을 잘 아는 일본은 이미 자국의 경제 식민지화된 동남아국가연합 (ASEAN)을 동원해 완전무역 자유화에 반대하고,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경제회의 (EAEC)설립을 부추기는 맹렬한 반대공장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 당연히 미국은 태평양을 분단시키려는 거냐고 반격을 가하는 등 APEC의 주도권을 둘러싼 미일의 막후 신경전은 나날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이같이 가뜩이나 긴장감이 팽팽한 APEC 내 역학관계는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신생 중국’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세계최대의 제조업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미일간 헤게모니 다툼을 최대한 이용해, 과거 19세기까지 아시아의 황제로 군림하던 전통적인 중화경제권(CEA)을 재건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94년 현재 아시아태평양지역은 역내 인구 22억 명, 역내 총생산액이 12조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시장으로 우뚝 섰다.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세계패권의 향방이 갈릴게 분명하다. 그 결과 앞으로 APEC는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선점하려는 미, 일, 중 아태 3극의 치열한 패권 다툼장이 될 게 확실하다. 한국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봉변을 안 당하려면 지혜로운 등거리 외교를 펼쳐야 할 때이다.

    POWER 034 오나시스 파워: 아크티 미아울리 거리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불과 10km 떨어진 지점에는 그리스 바다의 관문인 항구도시 피레우스가 있다. 이곳은 기원전 490년 테미스토클레우스에 의해 아테네 외항으로 건설된 이래 아테네를 지키는 군항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상업항으로서 줄곧 그리스 경제의 심장부 역할을 해왔다. 이 피레우스 중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다름아닌 아크티 미아울리 거리(Akti Miaouli Avenue)이다. 해안에 접한 이 거리가 유명한 것은 단지 풍광이 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이곳에 세계최대 해운회사들의 본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유럽연합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만 해운업만 줄곧 세계 최정상을 지키고 있다. 영국의 로이드 선급협회에 따르면 1992년말 현재 그리스 해운회사들은 대형 탱커선 306척을 비롯해 벌크선 4백척, 일반화물선 357척 등 2천여 척의 각종 대형화물선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선복량으로 따지면 총 2,574만 톤(G / T). 이는 전세계 선박량 가운데 5.8p를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수치로, 그리스는 선박량 확보 측면에서 러시아, 일본, 노르웨이. 미국 등의 강력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 선박들이 전세계 바다 위를 누비기까지에는 단연 아리스토텔리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1906년 터키 이즈미르의 부유한 담배상인들의 아들로 태어난 오나시스는 1922년 그리스로 건너와 양털, 피혁, 담배 등의 수입상을 하며 재산을 불려가던 중 1931년에는 고선박을 사들여 직접 해운업에 뛰어들었고, 1939년에는 그리스 최초의 대형 탱크의 선주가 됐다. 그는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중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 진영의 물자수송을 돕는 대신, 소득세 면제 등의 각종 특혜를 따내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2차대전 뒤에는 불필요해진 대형수송선 등을 민간에게 불허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미국의 잉여선박처리법을 이용하여, 전시형 유조선과 리버티선 등을 대거 헐값에 사들이는가 하면 미국 베슬리헴 조선소에 6척의 대형 탱크를 발주하는 등 선복량 증가에 전력을 다하였다.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은 선대를 다수 확보하고 있던 오나시스에게 또 한 차례 떼돈을 긁어모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오나시스를 부동의 세계선박왕으로 자리매김한 결정적 사건은 한국전쟁 종전 다음해인 1954년 세계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체결한 석유독점 운송계약이다. 한국전쟁이 끝나 배들을 놀려야 할 절대위기에 처한 오나시스를 구한 이 세기적 계약 체결은 당시 세계 해운업계와 석유업계에 큰 쇼크로 받아들여졌고, 이로써 오나시스는 ‘바다의 타이쿤’으로서 절대위상을 굳히게 됐다.
  한국전쟁으로 큰 돈을 번 오나시스는 한국의 중공업 발전과도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1972년 단지 울산 백사장만 확보하고 있던 한국의 현대중공업 (당시 현대조선)에 배포 크게 30만 톤급의 대형유조선 제작을 의뢰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이 세계1위 조선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이가 바로 오나시스의 처남이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렵게 만든 대형유조선 1호는 그후 오나시스 선단에 소속되어 전세계의 바다를 누볐다.
  오나시스는 1968년 존 F.케네디의 미망인인 재클린과 결혼하는 등 살아 생전 온갖 염문을 뿌리다가 1975년 사망했다. 그후 그의 막강한 해상선단은 딸에게 물려졌고, 이들 선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5대양을 쉼없이 누비고 있다.

    POWER 035 세계의 관문: 뉴욕 공항

  세계최대 도시 뉴욕. 이 뉴욕의 얼굴은 뭐니뭐니 해도 존F.케네디(JFK), 라과르디아(LGA), 뉴아크(EWR), 테트폴로 등 4대 공항이다. 뉴욕 도시권에 위치한 이들 4대 공항은 인구는 불과 870만 명에 불과하나 세계 최대 경제도시이자 금융 센터이며 출판, 미술, 연극, 광고, 패션, 음악 등 정보산업의 중심지로서 지상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인적, 물적 국제물동량이 많은 뉴욕의 국제 관문 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다.
  이 중에서도 총면적이 1,995ha에 달하는 광활한 JFK는 단연 뉴욕의 얼굴이자. 동으로는 유럽, 서로는 아시아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대 중계지로서 전세계로 나가고 들어오는 각국 승객들과 화물로 24시간 쉴새없이 북적대고 있다. 해마다 12만 회나 국제선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JFK공항을 거쳐가는 여객 숫자는 연간 2천만 명, 국제선의 화물 취급량만 100만 톤에 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의 핵심공항답게 뉴욕 공항은 국가가 아닌 민간 항공자본에 의해 독자적으로 건설, 관리, 운영되고 있는게 큰 특징이다. 뉴욕 공항을 최대거점 (허브 에어포트)으로 삼고 있는 미국의 주요 항공사들은 당연히 보다 많은 터미널과 활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자본을 투자해 경영주체로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의 KAL 등 외국항공사들도 신개축시 거액을 출자해 보다 많은 쿼터를 따내려 애쓰고 있다.
  현재 뉴욕 공항이 안고 있는 최대 약점은 확장의 여지가 더 이상 없어 나날이 폭증하는 물동량을 소화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공항측은 그러나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종전의 비행기표 검색 대신 손을 감지기에 넣어 통관절차를 간소화하는 첨단장치를 설치하는 등 기술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POWER 036 오일! 아직도 무시 못할 절대파워: ARAMCO

  지난 1938년 미국 석유회사가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최초로 석유를 파내기 시작한 이래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세계를 뒤흔드는 석유 파워에 뒤늦게 눈뜬 사우디정부는 1980년 들어 이들 셸 등 서방의 석유회사를 하루아침에 국유화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회사가 바로 아람코ARAMCO이다.
  아람코는 1994년 현재, 혼자서 해마다 세계 원유의 9p인 960만 배럴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세계 매장량의 4분의 1을 확보하고 있다. 아람코는 사우디의 수출과 세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동10개 산유국의 결집체인 아랍석유수출기구(OAPEC)의 수장으로서 지구촌 에너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파워를 갖고 있다.
  한때 세계경제 전문가들은 석유의 시대는 갔다고 진단하였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를 경험한 서방 선진국들이 앞다퉈 에너지 효율 을 높이는 생에너지 전략을 추구한 결과, 석유의존도가 급속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동남아를 시작으로 1990년 들어 중국, 인도, 중남미 등에서 거대한 제조업 붐이 일면서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다.
  석유 수출국이던 중국이 1992년 석유 수입국으로 돌아설 정도로 범지구적인 개발 붐에 힘입어 석유 소비가 급속히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람코가 중심이 된 OAPEC는 이에 1994년 연례보고서를 통해 현재 하루 2,150만 배럴 수준인 석유 생산량을 오는 2000년에는 2,820만 배럴로 700만 배럴이나 높이기로 결정했다. 또다시 오일 파워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람코의 시대는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이다.

    POWER 037 당근과 채찍: 러시아 에너지위원회

  석유는 천연가스와 함께 러시아 최대의 외화 획득원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서부, 볼가 강 유역, 우랄 산맥, 중앙아시아 등의 산지에서 연간 240조 원어치의 석유를 캐내 이 가운데 2할 이상을 수출함으로써 힘겹게 경제파탄을 막고 있다. 특히 1970년대 2차례 오일 쇼크 때 세계최대 석유산출국인 소련은 중동에 못지않은 엄청난 반사 이익을 보았다. 당시 소련 국민의 연평균 소득이 구미국가를 바짝 추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석유의 힘이었다. 1980년대 중반 과잉 생산으로 석유 및 천연가스 가격이 폭락하는 시점과 발맞춰 소련 경제가 급속히 몰락, 해체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한동안 사용가치가 사라진 듯 보이던 석유, 천연가스가 또다시 러시아의 강력한 체제방어 무기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 에너지 자원을 12개국으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LS)을 유지해 나가는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의 분리독립 선언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 내리자, 더이상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군주로 행세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한순간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일개 후진국으로 전락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러시아에게는 자국 외 11개의 구 연방 국가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맬 결정적인 무기가 있었다. 바로 석유, 천연가스였다.
  러시아의 반격은 1992년 9월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에너지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공화국간 에너지위원회 The Inter-Republican Energy Committee, 약칭 러시아위원회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연방소속 공화국들에게 우호가격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도 물물교환 형태로 에너지를 공급해왔다. 그러나 공화국들이 잇따라 등을 돌리자 러시아 에너지위원회는 "러시아의 에너지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명분 아래 천연가스 및 석유 수출가격을 10배 이상 대폭 인상했다. 러시아는 분리독립 이후에도 러시아 루블화를 계속 사용하는 국가들에게는 10배만 인상하고, 독자화폐를 발행해 러시아로 부터의 완전독립을 요구하는 공화국에게는 20배를 인상했다.
  러시아의 이같은 자원 무기화는 당장 주변국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가뜩이나 시장경제로의 이행에 따라 경제 불안이 극심한 마당에 하루아침에 에너지값이 10배 또는 20배나 오르니, 이들로서는 도저히 견딜 재주가 없었다. 이른바 유라시아 오일쇼크가 강타한 것이다. 이에 러시아의 대서방 수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90p 이상이 자국영토를 통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경우 한때 파이프라인을 봉쇄하는등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는 모두 무릎을 끓는 수밖에 없었다.
  1993년 5월 발트 3국을 제외한 나머지 공화국들은 루블화를 공동화폐로 인정하고 단일관세정책을 채택하는 등, 러시아의 경제지배를 인정하는 경제동맹 창설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경제동맹에 합류한 11개국에 대해 석유 및 천연가스를 국제시가의 45p에 해당하는 저가로 계속 공급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 값은 반드시 현찰로 지불하도록 했다.
  러시아는 그후에도 에너지를 계속 독립국가연합 소속국가들을 다스리는 채찍이자 당근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한 예로 러시아 에너지위원회는 1994년 9월 우크라이나에 대해 하루 2억m세제곱씩 공급하던 천연가스를 1억 3천만m세제곱 으로 크게 줄였다. 우크라이나가 천연가스 값을 제때 현찰로 갚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연간 2천p의 살인적 인플레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크라이나로서는 피눈물나는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정부가 흑해 함대, 핵무기 관할권 문제 등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오랜 대립에서 하나씩 무릎을 꿇어가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ower Group III 21세기 첨단 연구 파워

  "21세기에는 제조업이 더이상 부가가치 산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2.7차산업과 4차산업이 중심이 돼야 한다." – 세키모토 다다히로

  자본 황금시대, 자본 만능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한다. 자본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력이 급속히 무력화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보면 과거 정치권력의 보호막 아래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던 자본의 안전성이 급속히 와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본간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해진 적자생존 시대, 곧 자본간 무한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노동자들이 새로운 지식 노동사회의 출현에 뼈를 깎는 대응을 강요받고 있듯, 기업들도 끊임없는 리엔지니어링과 자기혁신, 발상혁명을 강요받고 있다. 전세계 다국적기업 사이에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대량감원, 생산자동화, 기구 축소, 생산기지 해외이전 등 기업의 생존 노력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격렬하고 가혹하다.
  도전은 단순히 같은 업종의 라이벌에게서만 제기되고 있지 않다. 정보 통신 혁명의 성과물을 앞장서서 받아들인 유통업계는 대대적 가격파괴 공세를 통해 제조업을 자신의 하청기지로 종속시키려 들고 있다. 나날이 그 힘이 커지고 있는 비정부조직(NGO)들은 기업에 대해 거센 환경보호 압력, 인권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20세기 기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제조업이었다. 그러나 금세기 말에 폭발한 정보통신 기술혁명과 생명공학의 발달은 제조업의 뿌리를 통째로 뒤흔들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으로 상징되는 고부가가치 정보산업체가 기존의 거인들을 하나씩 도태시켜 나가고 있으며, 생명공학, 우주공학, 환경산업 등 21세기 첨단산업이 무서운 속도로 기존 재계의 헤게모니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이같이 급변하는 기업환경은 분명 예전에 기업들이 경험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롭고 드센 도전들이다. 도전은 그러나 항시 응전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지금 전세계 기업과 두뇌들 사이에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대응전략을 세우기 위한 노력이 대단히 왕성하다.
  그런 노력은 여러 형태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 예로 제조업의 위기 돌파방안을 고민해온 세키모코 다다히고 일본전기회장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다.
  "21세기 제조업이 더이상 부가가치 산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2.7차산업과 4차산업이 중심이 돼야 한다. 농업 1차, 제조업 2차, 서비스업 3차로 구분하던 콜린 클라크 박사의 고전적 산업분류 방식은 지금 같은 정보사회에는 더이상 적절한 잣대가 못 된다. 3차산업을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상업, 금융, 보험, 수송 등을 3차산업으로 규정하면 좋을 것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자동차는 디자인 개발과 컴퓨터에 의한 생산성 고양, 철강은 프로그램 생산이라는 2.5차산업화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2.5차산업도 더이상 대안이 못 된다. 21세기에는 멀티미디어 중심의 산업구조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 지식, 서비스로 인해 보다 부가가치가 높아진 2.7차산업을 일으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제조업 만능주의와 정보산업 만능주의라는 양극단적 사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대목이 많은 새로운 패러다임 중 하나이다.
  새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사고틀과 대응양식을 필요로 하며 이런 새로운 생존방식을 개발한 기업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런 증거들은 많다. 한 예로 지금 21세기를 이끌 미래 파워들은 ‘신 국공합작 전술’을 절묘히 구사하기 시작했다. 웨이스트 매니지먼트(WMX)를 필두로 한 환경산업체들은 민간환경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환경운동이 거셀수록 자신들의 이익기반이 넓혀지기 때문이다. 또 리바이스 등 다국적기업에게 인권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환경보호운동을 선도하는 그린기업의 이미지를 얻으려는 노력들도 경쟁적으로 진행 중이다.
  21세기를 주도할 기업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그들은 결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새 잣대를 변화와 반 변화라 할때, 21세기를 주도할 미래 파워들이야말로 또다른 의미에서 진보세력들이라 할 수 있다.

    POWER 038 리엔지니어링 혁명의 귀재: 이나키 로페스

  1993년 3월 전세계 자동차업계는 예기치 못한 소식으로 발칵 뒤집혔다. 세계최대 자동차메이커(전세계 매출액 1위)인 미국 제너럴 모터스(GM)의 유럽담당 최고경영자직을 맡고 있던 호세 이그나시오 로페스 데 아리오르투아Jose Ignacio Lopez de Arriortua가 GM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유럽최대 자동차 메이커인 독일 폴크크바겐(매출액 4위)의 부회장 겸 생산담당 이사로 전격 스카우트되어 간 것이다.
  영어권에서 이나키 로페스Inaki Lopez로 불리는 그는 GM 재직시절 납품가 대폭인하 등 단호한 경영혁신을 통해 GM 자동차의 유럽 판매가를 30p나 낮춰 매출을 크게 신장시킴으로써, 1992년 150억 달러의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한 GM이 1993년 30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핵심인물이다. 당시 세계재계에서는 이같은 경영혁신 결과를 ‘로페스 혁명’이라 부르며 놀라워했다.
  로페스를 잡아두기 위해 마지막까지 온갖 회유책을 쓰던 GM은 그가 끝내 폴크스바겐으로 옮겨가자, 그가 앞으로 3년 동안 폴크스바겐 등 그 어떤 자동차 경쟁사들에게도 근무할 수 없도록 다각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로페스를 산업스파이 혐의로 법원에 제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제는 유럽을 위해 일할 때’라는 그의 고집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출신 전문경영인으로 평소 비즈니스계에서 ‘리엔지니어링의 차르(경영혁신의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경영혁신에 관한 한 세계최고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그의 진가는 폴크스바겐 이적 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92년 사상 최고수준인 15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폴크스바겐으로 옮겨간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1천여 개에 달하던 폴크스바겐의 부품공급 협력업체들을 과감히 계열화시켜 60개로 통폐합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2, 3p의 경영개선에는 관심없다. 최소한 40–50p의 도약적 개선은 이룩해야 성이 찬다"는 그다운 조치였다.
  그는 또 노동조합과의 단체협상을 통해 경영정상화를 위해 불가피한 3만 명의 잉여인력을 해고하는 대신, 노동자의 주당 근무시간을 36시간에서 28.5시간으로 줄이는 주4일 근무제를 제시해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폴크스바겐의 인건비 부담을 크게 줄이기도 했다. 이밖에 생산라인등을 대대적으로 재편해 일부 파트에서는 종전에 1주일 걸리던 작업시간을 45분으로 줄이는가 하면, 일본식 적기생산방식을 도입해 재고율도 크게 낮췄다.
  그는 이런 일련의 개혁작업을 책상위가 아닌 현장에서 시작했다. 생산현장에서 거의 살다시피하면서 일선 생산자들과의 토론과 협의를 거쳐 진행해 현장의 두터운 신임을 쌓아갔다. 폴크스바겐측은 로페스가 이적 1년 만에 과거 폴크스바겐 전체 임직원이 단행한 경영혁신보다도 많은 일을 해냈다며 그에게 크게 감사했다.
  이처럼 혁명적 리엔지니어링을 추진하는 로페스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는 대단하여 그가 이적한 1993년도에 폴크스바겐은 여전히 2억 8천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음에도 주가는 81p나 폭등했다. 이같은 일반의 두터운 신뢰에 보답하듯 로페스는 이적한 지 1년도 안 된 1994년, 폴크스바겐의 영업실적을 흑자로 돌려놓았다.
  애국심이 대단한 로페스의 최대 꿈은 모국이 스페인에 유럽최대 규모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유치해 유럽 2등국인 자국을 유럽의 핵심적 제조업국가로 키우는 일이다. 그는 엔고 등으로 일본 자동차의 유럽시장 잠식이 주춤하고 유럽통합으로 대도약의 계기가 마련된 지금이야말로, 1980년대 후반 이래 사양길에 접어든 유럽 자동차산업을 회생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임금경쟁력을 갖춘 스페인에 유럽최대 자동차 조립공장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경기침체기에 빠져 있는 게 아니다. 혁명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기회를 잃는다면, 우리는 일본과 미국, 심지어는 한국에게까지 뒤지는 2등시민으로 영원히 전락할 것이다."
  유럽을 향한 로페스의 엄중한 경고이다.

    POWER 039 일본은 죽었다: 오마에 겐이치

  "그자는 매국노다."
  "아니다. 그야말로 위기의 일본을 구제할 유일한 지성이다."
  오마에 겐이치에 대한 일본 사회의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평가이다. 오마에의 체제개혁론이 그만큼 혁명적이며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에는 19세기 말의 메이지유신, 1920년대 중반의 쇼와유신을 뒤이을 제3차 유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오마에 겐이치(51)가 1992년 2월2일 ‘헤이세이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 유신모임’이라는 개혁 시민운동단체를 발족시키면서 터뜨린 일성이다. 그는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될 뻔한 일본이 식민제국이 될 수 있었고, 1930년대 쇼와유신을 통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즉 ‘일본 주식회사’의 원형을 창출함으로써 오늘날 같은 초경제강국 일본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마에는 지금까지 일본을 버티어 온 일본 주식회사가 앞으로는 일본열도를 침몰시키는 어뢰로 작용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제3의 유신 즉 헤이세이유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국제경쟁력이 약한 산업은 시장봉쇄로 온실 속에서 보호하고 강한 기업은 온갖 특혜를 주어 수출기업화시킨 호송선단 방식, 연공서열과 평생고용으로 대표되는 일본고용 신화, 관료, 기업, 정치가의 철저한 철의 3각동맹, 뿌리깊은 정보서비스업 경시와 제조업 숭배, 무조건적 상명하복을 강요해온 교육과 기업풍토, 암기위주의 입시교육 등 과거에 일본의 신화라 불리던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 일본을 국제 고아로 만들고 정보고도화 사회의 낙오생으로 만들었으며, 국가는 부자이나 국민은 고물가에 시달리는 거렁뱅이로 만들었다." 오마에의 가차없는 진단이다.
  그는 이어 "이같은 악마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일본의 내수시장을 전면개방해 약육강식의 경쟁 속에서 기업체질을 크게 강화하고, 관료-정치가-기업인을 잇는 정경유착을 타파하며, 중앙집권국가인 일본을 10개 지방자치국가로 분리재편하는 혁명적 결단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이런 구조혁명은 "정계, 관료계, 재계 등 기득권층에게 맡겨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따라서 시민의 자발적 개혁역량 결집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권력의 무게중심을 종전의 생산자에게 소비자에게로 옮겨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 기득권층이 오마에의 이름만 들어도 매국노, 비국민이라고 분노하는 반면, 지식인을 비롯한 다수 시민들은 그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같은 독특한 주장을 펴는 오마에의 경력은 상당히 이채롭다. 그는 원래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 도쿄공업대학원을 거쳐 미국의 MIT대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국제적 핵전문 물리학자였다. 1970년 귀국 후에는 히다치 제작소 원자력개발부 기사로서 고속증식로 설계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72년 뜻을 바꿔 세계최대 기업 컨설팅회사인 맥킨지 그룹으로 전직, 맥킨지 일본지사인 맥킨지 저팬의 회장으로서 해마다 20차례 이상 한국등에 외국출장을 나가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을 벌여 국제적인 기업 컨설턴트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일본인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미국 여성과 결혼해 현재 슬하에 두자녀를 두고 있다. 당연히 그의 국제결혼에 대한 부모들의 반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부모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뒤 결혼을 강행했다. ‘국제결혼을 반대하는 행위는 국제화시대에 어긋나는 시대착오적 섬나라 근성’이라는 게 편지의 요지였다. 국제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재미난 일화이다.
  맥킨지 회장으로 전혀 아쉬울 게 없던 그가 1992년 ‘헤이세이 유신모임’을 만들면서 체계개혁에 적극 나섰다. 앞서 밝혔듯 이대로 가만 있다가는 일본열도의 침몰은 불을 보듯 훤하다는 절대적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의 정력적 활동에 힘없이 1994년 말 현재 헤이세이 모임은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 등 7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그 조직이 비대해졌다. 그러나 오마에는 이에 만족치 않고 이 숫자를 100만 명 선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1994년 7월 아예 맥킨지사를 그만두기까지 했다.
  "나는 일본이 근본적으로 바뀔 때까지 헤이세이 모임을 계속 확대조직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최소한 두 차례 총선을 치르면 내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뒤 나는 다시 기업자문이라는 일상적인 본업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가 기회만 있으면 하는 말이다.
  오마에는 자신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끊임없이 책과 글로 써내는 왕성한 논객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그가 쓴 대표적 저서만 (이단자의 시대) (격론, 일본 대개조안) (헤이세이 유신) (국경 없는 세계) (신국부론) (세계를 보는 법, 생각하는 법) (이상국가) 등 50여 권에 달한다. 그는 동시에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지 등 외국의 주요언론에도 부지런히 자신의 생각을 기고해, 모리다 아키오 소니그룹 회장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개방론자로 국제적 명성이 높다.
  오마에의 혁명적 패러다임을 과연 떼거리 집단의식이 강한 일본사회가 수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마에의 출현, 그 자체가 일본국가주의와 일본형 경영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의 울림이라는 점만은 그 누구도 부인 못하는 진실이다.

    POWER 040 19세기의 반항이 만든 신화: 마이크로 소프트

  컴퓨터 단말기를 만지는 이들이라면 코흘리개 꼬마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이름이 빌 게이츠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게이츠가 바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도도한 사시를 앞세워 실리콘 밸리에 회사를 설립한 지 꼭 10년 만에 절대 거인 IBM의 아성을 무너뜨린 세계 컴퓨터계의 살아 있는 신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창업주이기 때문이다.
  기존 권위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던 빌 게이츠가 더이상 배울 게 없다면서 하버드 대학을 중퇴한 뒤 20여 명의 친구 및 직원들로 회사를 설립한 것은 그가 19살이던 1975년의 일이다. 그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시애틀 본사 근무자만 1만 5천여 명이나 되고 1993년 한 해에만 39억 1,8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거둬들인 세계적 대기업이 됐다. 지난 5년간 미국기업 중 최고치인 연평균 46.6p의 성장률과 43.6p의 기록적 이익신장률을 기록했으며, 마진율만 25.1p에 달하고 있다. 이 회사의 기본 소프트웨어 MS-DOS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퍼스널컴퓨터에 장치돼 있다. 1985년에는 복잡한 명령어 대신 그림문자를 이용해 컴퓨터 작동을 쉽게 만든 윈도즈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의 기본 소프트웨어 분야에 관한 한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빌 게이츠(38)는 남들이 데이트에 열중하던 10대 후반에 컴퓨터 산업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덕에 1994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개인 자산만 93억 5천만 달러가 넘는 미국 제1의 갑부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50세가 되는 해 자신의 재산 중 95p를 자선단체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평소 비행기도 일반석만 이용하고 점심도 주로 햄버거로 때울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혼식 때 아무도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결혼식 장소인 하와이의 거의 모든 호텔과 렌터카를 예약해버릴 정도로 괴팍한 일면도 가지고 있다.
  게이츠는 24시간 일에 빠져 있는 일 중독증 환자로도 유명하다. 보통 새벽 두세 시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런 탓에 자연스레 마이크로소프트 내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칭호인 ‘엔지니어(기술인)’가 됐다. 게이츠는 또 자만을 가장 경계한다. 그는 졸부들의 패망 원인인 자기민족을 경계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죄)라는 비망록을 쓰기도 했다. 이 비망록에 가장 먼저 오른 게 강적 노벨사에게 통신망 건설시장을 빼앗긴 참담한 실패담이다.
  그는 부하 직원들에 대해서도 예스맨을 가장 싫어하고 자신에 맞서 논쟁을 벌이는 이들을 좋아하는가 하면, 자기 회사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백미러 없는 초고속 자동차에 비유하는 등 30대 회장다운 젊은 패기를 보이고 있다. 또 시애틀 부근 레드머드 숲속에 위치한 본사가 사원들로 부터 캠퍼스라 불릴 정도로 그는 자유분방하며 창조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캠퍼스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때만이 세계최고의 지적 창조물이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캠퍼스 기업답게 직원 1만 5천여 명의 평균 연령이 31세에 불과할 정도로 마이크로스프트사는 항상 젊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같은 야심만만한 빌 게이츠가 1994년 중반 남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초대형 ‘글로벌 인터네트’ 구상을 밝혀 다시 한번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미국최대 이동통신회사인 매코 셀룰러 커뮤니케이션과 손잡고 90억 달러를 공동투자해 ‘텔데식’이라는 회사를 세운 뒤, 세계 상공에 840개의 소형 통신위성을 발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는 2001년 부터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집안의 전화선을 통해 영화나 CATV, 비디오 같은 영상 서비스뿐 아니라, 데이터 통신, 대화형 영상회의, 재택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시스템은 위성들이 기존의 통신 위성 궤도 3만 6천Km 상공을 돌게 되기 때문에, 전파가 지상에 미치는 거리가 짧고 통신 누수율도 낮아 한층 또렷한 영상과 음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지금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계의 황제에 만족하지 않고 21세기 멀티미디어시대의 황제까지 되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결코 명예욕이나 돈 욕심 때문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황제자리가 뒤바뀔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이 초고속 정보 세계에서 현재의 성취에 안주해, 가장 먼저 시대 변화를 좇아가지 않다가는 그 자신이 1990년대 말의 IBM으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OWER 041 난지도 파워: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환경파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류에게 더없이 심각한 위협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게는 더없이 신바람나는 돈벌이가 되고 있기도 한다. 이같은 자본주의 아이러니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무섭게 부를 축적하고 있는 신흥 미래기업이 미국의 웨이스트 매니지먼트(WMX)사이다.
  과거 모든 기업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만 주력했다. 이른바 동맥 기업들이었다. 반면 WMX는 정반대 부문에 눈을 돌렸다. 새로운 것들이 출현하면 할수록 이에 정비례해 헌 것들은 무서운 속도로 쓰레기로 내팽개쳐졌다. 누군가가 이 쓰레기를 처리해야만 한다. 이른바 정맥 기업의 탄생이다. 이같은 발상혁명에 의해 출현한 WMX야말로 ‘난지도에서 금맥을 찾아낸 혁명적 기업’이다.
  WMX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세계최대 폐기물처리 기업체로 이 회사의 1993년도 매출액은 사상 최초로 100억달러(8조원)를 돌파했다. 이 회사의 종업원 숫자만도 6만 2천 명이나 된다. 미국 비즈니스계는 WMX를 범세계적 환경보호 추세에 힘입어 오는 21세기에도 초고속성장을 거듭할 초우량 미래기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WMX측도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에는 자사 매출액이 ‘지금보다 10배나 늘어난 1천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WMX는 단순히 폐기물을 운반, 처리할 뿐 아니라, 대형 쓰레기 소각로를 비롯해 발전소 및 공장의 탈황탈진 장치 등 각종 최첨단 폐기물 처리장치 및 환경오염방지 설비를 제작해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으며, 미생물을 이용한 폐기물처리 등 첨단기술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WMX는 특히 엄청난 분량의 쓰레기를 흙과 같은 크기로 압축 처리하는 기술 등 폐기물 처리분야에서 세계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WMX는 1970년대 미국 환경보호국(EPA)이 오염 정화조치를 취해야 할 경우 이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을 기업 등 책임당사자에게 청구할 수 있는 강력한 환경법규를 제정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81년도에 7억 7천만 달러에 불과하던 매출액이 1993년에는 100억 달러를 돌파 할 정도로 가공할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 (OECD)는 현재 2천억 달러 규모인 전세계 환경산업 매출액이 오는 2000년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3천억 달러, 많게는 6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WMX는 이 가운데 최소한 1천억 달러를 자신들이 독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WMX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최근 민간 환경단체들과 연대해 환경 산업시장 규모를 최대한 넓히기 위한 각종 로비 공세에도 열심이다. 한 예로 이 회사는 1993년 ‘시에라 클럽’ ‘내셔널 어드본’같이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환경단체들을 막후에서 동원해 의회에 집중적으로 압력을 가함으로써 환경업체의 시설과 폐기물 처리기준을 크게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고체폐기물 처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통과되자 첨단 폐기물 처리시설을 새로 갖출 재력이 없는 영세 폐기물 처리기업들은 연쇄도산했고, WMX의 사업영역은 그만큼 넓어졌다.
  WMX는 미국에서 로비로 짭짤한 재미를 보자 최근에는 전세계를 적용대상으로 하는 엄격한 ‘국제표준 환경보호규정 제정’을 로비의 제1 목표로 설정하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를 위해 WMX의 임원 10여 명은 미국정부, 의회의 환경관련 위원회에 정례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세계적 환경보호단체인 세계 야생생물 기금협회 (WMX)로 부터 임원을 영입하기도 하는 등 백악관과 의회, 환경단체에 맹렬한 로비 공세를 펼치고 있다. 제2의 우루과이라운드라 불리며 개발도상국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고 있는 그린라운드의 막후 주역이 다름아닌 WMX인 것이다.
  WMX는 1991년 영국에 3억 4천만 달러를 투자해 자회사인 WMI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의 주요 환경시장 공략에도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WMX는 이미 유럽에서만 1993년 한해 동안 14억 6천만 달러의 경이적 매출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 보인 WMX의 기동성과 창의력은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영국에서는 차량 측면에도 쓰레기를 실을 수 있는 신형 차량을 투입해 인건비를 대폭 절약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좁은 골목이 많은 점을 고려해 삼륜트럭을 투입함으로써 쓰레기 수거시간을 대폭 줄였다. 홍콩에서는 5억 달러를 들여 최첨단 쓰레기 처리장과 매립장을 건설했으며, 대만에서는 60억 달러에 달하는 폐기물 처리시설 건설 공사의 상당 액수를 수주하였다. 최근에는 중국시장 및 한국시장 진출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환경운동의 위협을 받던 자본이 역으로 환경운동을 주도하는 아이러니컬한 시대의 개막 이 시대를 개막시킨 WMX야말로 자본의 시대 적응력이 얼마나 대단하며, 그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POWER 042 지구촌 발명센터: AT & T 벨 연구소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국보 제1호가 뭐냐"고 물으면, 열이면 아홉이 즉각 하는 답이 "그야, 벨 연구소"라는 말이다.
  미국 뉴저지주의 머리 힐에 위치한 벨 연구소 Bell Laboratory는 세계 최대 통신회사인 AT & T사의 소유이다. 이 연구소의 지난 70년 역사는 ‘지구촌 최대 발명센터’라는 명성에 걸맞게 장대하다. 벨 연구소는 1925년에 설립된 이래 이제껏 7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평균 하루 한 건씩의 특허와 연간 1만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정보통신, 화학, 물리, 수학, 소재학 분야의 연구 활동을 주도 하고 있다. ‘미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가과학 메달도 5개나 받았고, 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국가기술 메달 역시 4차례나 수상했다. 미국의 그 어떤 연구소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위업이다.
  벨 연구소는 세계최고 명성의 과학연구소답게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9개국에 30여 개의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 중 16개 연구소가 본사가 있는 뉴저지주에 밀집해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응용연구를 중점적으로 하는 ‘홈델 연구소’와 순수연구를 주로 하는 ‘머리 힐 연구소’가 전체 연구소의 양대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벨의 연구원 숫자는 AT & T 전체직원의 10p에 달하는 2만 5천명이나 되며, 이 중 4천여 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이다. 이 연구소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최고 명문대학의 상위권 졸업장과 추천서를 구비한 뒤 엄격한 인터뷰 테스트와 서류심사를 거쳐야 한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보다 어렵다고 말들 할 정도이다. 벨 연구소에서 한 해 동안 사용되는 예산은 우리나라 전체의 연구개발비의 절반에 달하는 30억 달러(2조 4천억 원)나 된다. 이 중 10p는 다른 나라나 기업들로부터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비아냥받는 순수기초학문 연구에 과감하게 투입하고 있다.
  벨 연구소의 캐치프레이즈는 도도하게도 ‘세계 최초, 세계 최고’이다. 벨 연구소의 과학두뇌들은 이같은 캐치프레이즈대로 20세기 전자혁명을 몰고온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비롯해 레이저, 태양건전지, 방광 2극진공관, 디지털스위칭, 팩시밀리, 통신위성, 디지털컴퓨터, 장거리 TV전송시설, 인공후두, 유성동작영화 등의 발명에서 모두 세계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현재까지 확보해둔 특허 건수만 2만 3천여 건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노벨상 대신 상품을 창출하라는 경영진의 독촉에 따라 종전의 자유롭던 개발연구자 위주 방침을 바꿔 200여 개의 합동팀을 만들어 신기술의 상품화에 주력하고 있다. 마침내 눈앞의 결실을 중시하는 일본풍이 벨 연구소에까지 밀어닥친 것이다. 미국 한편에서는 이런 실리주의적 연구방침 전환이 "과학세계에 ‘신 암흑시대’를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크게 우려하기도 한다.

    POWER 043 타도! NASA: 아리안 스페이스

  "미국인에게 미우주항공국(NASA)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리안 스페이스 Arianspace 가 있다."
  유럽인들이 한결같이 가슴을 쭉 펴며 하는 자랑이다.
  아리안 스페이스는 실제로 유럽의 자존심이 되기에 충분하다. 아리안 스페이스는 전세계 상업위성의 55p를 독점적으로 쏘아올리고 있는 세계최대 로켓 발사회사이다. 스페이스는 1970년대 중반 우주공학기술이 발달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12개국의 52개사가 합작 투자하여 ‘타도! NASA’라는 야심찬 목표 아래 설립되었다. 그 무렵 위성발사와 우주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에게 언제까지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에 따른 결단이었다.
  아리안 스페이스는 시행착오 끝에 1979년 12월 첫번째 시험발사에 성공한 이래 1994년 1월 현재까지 모두 63차례 로켓을 발사해 이 가운데 57차례를 성공시키는 최고의 기술력을 과시함으로써 위성발사에 관한한 미국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최정상을 차지했다. 1992년 한국의 첫 인공위성 우리별 1호에 이어 1993년 우리별 2호를 띄워올린 것도 바로 아리안 스페이스의 아리안 4로켓이었다.
  아리안 스페이스는 이미 1996년까지 앞으로 3년 동안 총 30억 달러 규모의 39개 위성을 쏘아올리기로 주문을 받아놓은 상태이다. 이에 따라 아리안 스페이스는 당초 매달 1회로 잡혀 있던 발사계획을 3주일마다 1회씩 발사키로 재조정했다. 또 연구개발 작업에도 박차를 가해 오는 1996년에는 현재의 아리안 4호보다 성능을 크게 개선한 아리안 5호를 새로 사용할 예정이다. 아리안 5호는 현재 4.5t 이하 위성만 실을 수 있는 4호에 비해 6–7t 의 위성을 실을 수 있으며, 유인우주선도 실을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성능이 뛰어나다.
  우주항공산업은 원래 냉전시절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개된 무한대 군비경쟁이 낳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사생아였다. 그러나 탈냉전시대를 맞이해 이제 우주항공산업은 한 나라 경제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선도산업으로 그 위상을 굳게 재정립했다.
  인공위성이 인류 최초로 발사된 것은 지난 1957년 10월 소련에 의해서였다. 소련이 먼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이에 크게 충격받은 미국은 서둘러 그 다음에 엑스플로러 위성을 발사했고, 이때부터 미-소는 장장 30여 년에 걸쳐 해마다 평균 120–160개의 위성을 발사하는 극히 소모적 경쟁을 벌였다. 구체적으로 1994년 7월 현재까지 발사된 위성 숫자는 4,511개 그런데 이 가운데 68.5p인 3,046개를 군사위성이 차지했을 정도로 양국간 군비경쟁은 치열하였고 그 만큼 소모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냉전종식과 범지구적 정보통신혁명을 계기로 군사위성 대신 상업용 방송통신위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비대한 군사산업체들이 우주항공산업을 독점해온 미국이나 소련은 이같은 시대의 변화에 기민히 대처할 수 없었고, 이 틈새를 유럽의 아리안 스페이스가 집요히 파고드는 시간차 공격을 펼침으로써 오늘과 같이 상업용 위성발사 부문에서 최고정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아리안 스페이스가 우주항공산업의 최정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곧 유럽의 첨단기술이 세계 최정상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과거 로켓은 대형화를 추구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소형, 경량, 고기능화로 그 방향이 바뀌었다.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반도체기술, 컴퓨터, 로보트 기술이 필요한데, 아리안 스페이스는 유럽 각국의 기술적 강점을 하나로 결합해냄으로써 단기간에 이같은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더욱이 우주항공 기술은 조만간 자동차, 가전, 이동통신 같은 모든 민수 산업 부문으로 전파돼 유럽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도약시킬 것이 확실하다. 유럽 대자본들이 유럽통합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아리안 스페이스의 대성공이 하나의 결정적 자극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아리안 스페이스에도 위기는 시작됐다. 냉전종식의 결과 군수산업 시장이 대거 몰락함에 따라 심각한 경영난에 처한 제너럴 다이내믹, 맥도널 더글라스, 마틴 마리에타 등 미국의 우주항공업체가 맹추격을 시작하고 일본도 1994년 8월, 100p 자국 독자기술로 개발한 H-2 로켓 발사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우주항공 시장에의 참여를 선언했다. 더욱 커다란 충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러시아, 중국 등 우주강국이 아리안 스페이스 발사비의 30–50p 밖에 안 되는 저가격을 무기로 로켓 발사시장에 뛰어든 사실이다.
  ‘기술은 기술로, 가격도 기술로 이긴다’
  최근의 여러 도전에 대해 아리안 스페이스가 고민 끝에 내린 최종결론이다. 평소 "유럽통합은 곧 기술통합을 의미한다. 영국의 기초과학, 독일의 제조업, 프랑스의 통합기술 등 유럽의 과학이 한데 뭉치면 미국도 일본도 겁날게 없다" 고 주장해온 아리안 스페이스다운 도도한 결론이다.

    POWER 044 입자물리학의 메카: CERN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 위치한 유럽합동 원자핵연구소 (CERN)는 유럽이 과학대국 미국을 능가하는 몇몇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세계최대의 소립자물리연구 실험센터인 CERN은, 전세계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반드시 이곳에서 근무해 보기를 원할 정도로 그 명성과 권위가 대단하다. 또 이 연구소가 해마다 세계의 최고 입자 물리학자들에게 주는 고에너지 입자물리학상은 세계물리학계에서 노벨물리학상에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 연구소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파워는, 전자석을 이용해 하전 소립자를 최대한 가속, 이를 충돌시킴으로써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를 찾아내고자 하는 물리학자들의 영원한 꿈을 실현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장치인 세계최대규모의 대형가속기 LEP(전자, 양전자 충돌장치)가 이곳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이 기계는 유럽 14개국이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7억 8천만 달러(6,240억 원)를 투자해 6년 만에 완성한 뒤 지난 1989년부터 쉼없이 가동시키고 있다.
  이곳에서는 원자핵과 소립자에 관한 각종 실험과 연구가 행해지고 있는데, 원형터널 형태로 만들어진 이 대형가속기는 원 둘레만 27Km, 직경이 3.8Km에 달할 정도로 그규모가 엄청나다. 당연히 유지비도 엄청난데, 한 예로 이 실험장치를 가동하는데 드는 전력량만 해도 스위스 제네바시 전체가 사용하는 전력 소비량과 맞먹을 정도이다.
  이 LEP를 개발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1992년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파리 고등물리화학 학과의 조르주 샤르팍 교수(70)이다. CERN 소속 최고 원로학자이기도 한 샤르팍 교수는 1968년 입자검출장치인 ‘다중선 비례계수기’를 발명해 입자 충돌과정의 모든 자료를 곧바로 컴퓨터에 연결시킬수 있게 함으로써 데이터 분석속도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이 장치는 그후 20여 년 동안 계속 발전돼 대형가속기들의 필수장치가 됐으며, 이의 발전에 힘입어 현대 입자물리학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새로운 소립자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1976년과 1984년 새로운 입자 발견으로 노벨상을 탄 이론물리학자들의 업적은 샤르팍 교수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대형가속기 건설에는 광활한 부지와 막대한 건설비, 실험비가 소요되는 까닭에 전세계에서 이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CERN외에 미국의 국립페르미 연구소와 스텐포드 대학의 SLAC, 독일의 전자 싱크로트론 연구소(DESY)뿐이다. 유럽연합측은 세계최대 규모의 CERN을 앞세워, 최근 재정난으로 기초 연구예산을 대폭 감축하는 등 소립자 물리연구에 소홀해진 미국을 차제에 멀찌감치 뿌리치고 21세기에도 세계선두를 계속 고수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연구가 계속되면 우주와 지구의 탄생에 얽힌 비밀과 물질의 근원을 파헤칠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POWER 045 뇌연구 G7: 휴먼 프런티어

  휴먼 프런티어 Human Frontier는 서방선진 7개국이 합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뇌연구 대형프로젝트로, 세계과학계에서 뇌의 G7이라 불린다.
  1984년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총리가 제창하고 1987년 서방7개 선진국의 정상이 참가한 베네치아 서미트에서 정식으로 채택됨에 따라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세계적 신경생물학 연구센터가 있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 사무국이 있다. 일본은 세계 최고선두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최첨단 생명공학 정보를 얻기 위해 자국 연구원들을 상주시킨다는 전제조건 아래 연구비의 70p를 부담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본격 작동되기 시작한 지난 1990년, 조시 당시 미국대통령은 ‘1990년대는 뇌의 10년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인간 등 모든 생명체의 기능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198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제1회 평의원 회의를 개최하면서 본격적 연구활동에 착수했다. 전세계 생명공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까닭에 조만간 놀라운 연구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일본이 연구비용의 대부분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장차 연구성과물의 이용권을 둘러싸고 국가간 갈등이 예상된다.
  30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 정교한 뇌의 신비가 밝혀지면, 21세기에 도래할 고령화사회의 최대질병이 될 노인질환인 치매의 치료에서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인지형 로봇이나 미래형 컴퓨터 개발에 이르기까지 각 부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POWER 046 최첨단 유전공학 센터: 제넨테크

  미국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에 연구소 및 본사가 있는 제넨테크Genentech 는 아직 외형은 작지만 유전공학에 관한 한 최선두를 달리는 미국의 간판급 벤처기업이다. 미국인들은 이 회사가 21세기 미국경제를 이끌어 갈 최고의 하이테크기업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제넨테크는 1993년 한 해 동안 6억 4,900만 달러의 매출액과 5,8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같은 이익은 아직 규모는 적으나 전년대비 200p나 급성장한 놀라운 수치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같은 이는 21세기 미국을 이끌 양대산업으로,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차세대 정보산업과 제넨테크로 대표되는 유전공학을 꼽고 있다.
  제넨테크는 지난 1979년 벤처 기업가인 로버트 스와슨과 유전공학자인 허버트 보이어가 손을 잡고 설립했다. 보이어는 그동안 대형 제약회사들이 쳐다보지도 않던 화학물질들을 주목했다. 해마다 제조업체들은 수천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을 개발해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 화학물질이야말로 바로 혈압을 낮추고 병균과 싸우는 인간 단백질의 보고, 그 자체이다. 제넨테크는 이들 신 화학물질에 주목해, 최소한의 개발비용을 들여 최첨단 성장호로몬제와 심장치료제를 개발해내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제넨테크는 마침내 1994년 6월 ‘지난 3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온 인간 단백질을 새로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세계최고 권위의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혈소판을 만들어내는 이 단백질의 획기적 발견으로 제넨테크측은 무수한 암환자와 심장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신약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신약이 개발되면 연간 1천만 명이 불치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할 것이며, 신약의 연간 매출액만 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울러 이번 인간 단백질의 발견은 인체의 가장 큰 신비인 혈구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도 획기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제넨테크는 이 밖에 암과 에이즈 치료제 및 예방약 등 여타 불치병 연구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POWER 047 일본의 천적: 현대그룹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가 아시아의 무수한 거대 제조업체 중에서 유독 한국의 현대그룹을 탈냉전 세계를 움직이는 신진파워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현대그룹은 한국경제 성공의 국가적 상징으로서, 자동차, 선박, 반도체 등 30여 개분야에서 세계최대의 제조업대국 일본과 치열한 제품경쟁, 기술경쟁을 벌이며 연간 500억 달러 이상의 놀라운 사업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언론도 참여한 이번 선정작업에서 현대가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들을 제치고 꼽힌 더 본질적인 이유는 "현대가 일본의 하청공장화된 여타 아시아 기업들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히 일본기업과 경쟁하는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좀더 구조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에 일개 건설업체에 불과하던 현대는 1970년대 들어 당시 제3공화국에 의해 정권안보 및 국가생존 차원에서 단행된 중화학 수출 공업화의 선발주자로 나서면서 연 30p 이상의 놀라운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특히 현대는 1973년 말 오일쇼크로 중화학 공업화가 백지화될 절대위기에, 거대한 오일 머니가 집결된 중동의 메머드 건설현장으로 가장 먼저 뛰어들어 오일 머니의 물줄기를 일부 한국으로 환류시킴으로써 당시 외환 부족으로 자칫 남미가 될지도 모를 절대위기에 봉착한 한국경제를 되살리고, 공염불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중화학 공업화를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사업부문이 세계무대에서 일본과의 철저한 경쟁체제를 구축하고 있어, 한국이 오늘날 대만이나 동남아 여타국가들처럼 ‘일본의 구조적 하청기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는 견인차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는 점이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반도체, 건설 등 일본이 앞장서서 약진하고 있는 사업부문에 과감히 뛰어든 현대는 처음부터 기존의 국내 대기업들과는 달리 내수시장이 아닌 국제수출시장을 겨냥해 사업을 일구었고, 그 결과 국제무대에서 끊임없이 일본과 격돌하면서 한국의 국제 경쟁력을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환율전쟁을 비롯한 미국과 일본간의 각종 치열한 무역전쟁 와중에서 일본의 하청기지화된 여타 동남아국가들이 액면상의 외채 급증등 여러 불이익을 겪고 있는 반면, 한국이 상대적으로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 경쟁적 한일 산업구조가 구축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1994년 현재 종업원 숫자만 18만명에 이르고 1993년도 매출액이 580억 달러를 돌파한 현대는 그룹 산하의 30개 기술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국형 표준모델 및 첨단기술 개발을 통한 기술 자립화를 서두르고 있다. 자동차와 선박 등에서 입증됐듯 한국형 표준모델과 자체기술 확보만이 살 길임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현대는 그룹의 무게중심을 중국 등 개도국의 맹추격으로 급속히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제조업 일변도에서 탈피해 위성산업, 광통신산업 등 멀티미디어로 상징되는 고부가가치 창출산업으로 이동시키는 방안도 적극 모색중이다. 한 예로 현대는 미국의 로랄과 퀄컴사를 중심으로 한 국제 위성 통신망 구축 콘소시엄인 ‘글로벌
스타’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는 1998년까지 18억 달러를 투자해 지상 1,400Km 상공에 48개의 통신위성을 확보하여 1998년 말 서비스에 들어간다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에 데이콤과 함께 한국측 대표로 참여해 이미 중국, 인도, 태국, 헝가리, 칠레 등 5개국에 대한 독점서비스권을 확보한 상태이다.
  과연 현대가 포드식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중시하던 종전의 제조업 마인드에서 벗어나 다품종 소량생산과 두뇌 중시주의로 요약가능한 창발적 소프트 마인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대목이야말로 현대, 더 나아가 한국경제가 과연 일본경제의 그늘과 중국의 맹추격에서 벗어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POWER 048 소프트 그린 에너지: 차세대 전지

  모든 전자제품에 필수불가결한 전지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전 엉뚱하게도 개구리 해부대 위에서 시작됐다.
  1789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자 L.갈바니는 금속판 위에서 개구리 해부를 하던 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금속 해부용 칼을 대는 순간 마취된 개구리의 다리가 파르륵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여러 물질을 이용해 실험해본 결과, 금속 종류에 따라 경련의 정도가 다르고 절연체에서는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현상을 개구리 신경 속에 있는 전기가 방전하는 것으로 단정, 이를 동물전기라고 이름붙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 한 이탈리아 물리학자가 있었다. 훗날 ‘전지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알렉산드로 볼타였다. 파비아 대학에 재직중이던 그는 1796년 갈바니의 논문을 보고 실험을 거듭한 결과, 개구리 다리 대신 소금물이나 산에 적신 천을 구리와 아연 2종류로 된 금속판 사이에 번갈아 끼워놓고 몇 층으로 겹쳐 쌓아서 전기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볼타의 파일’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전지이다. 볼타는 이 장치를 더욱 개량해 묽은 황산에 아연과 은 또는 구리막대를 끼어 넣어 오늘날의 일반전지와 흡사한 원통형의 전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이용해 물의 전기분해에도 성공했다. 그는 1800년 파리에서 나폴레옹 1세가 보는 앞에서 이 실험을 성공시켜 상금과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후 전지는 무수한 개량과정을 거쳐 1880년 프랑스의 르 크랑세가 망간 건전지의 실용화에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후 전지는 전기제품과 하이테크제품을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사용가능하게 한 그림자 주역으로서 인류의 삶을 매우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 때 전지는 극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환경운동이 발달한 결과, 건전지 내부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한 수은이 인체에 극히 위험한 환경오염 물질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전세계 소비자 단체들은 건전지를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 비난하기 시작했고 각국 정부들은 전지 내의 수은 함유량을 환경보존 차원에서 1차 무역규제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 문제의 수은전지는 더이상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궁지에 몰린 전지 제조업체들이 수은 대체물질 개발에 주력한 결과, 버튼형 공기 아연전지 등 오염도가 적은 대체품이 잇따라 개발됐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전지는 그 중요성을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지는 더이상 전기제품의 오염물이 아니라, 차세대 하이테크 사회의 근간이 되는 전략부품인 동시에 환경오염을 크게 줄이는 데 필수적인 핵심부품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산업계와 사회 전반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이테크 제품의 생명은 소형화, 경량화, 고성능화 3가지에 달려 있다. 업계는 반도체 등의 개발을 통해 꾸준히 이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모든 제품의 에너지 공급원인 전지를 소형, 경량, 고성능화 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이같은 목표달성이 불가능한 시점이 됐다. 이에 산업계는 기존 전지의 성능이 장기간 유지되도록 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충전만 하면 되풀이해 사용할 수 있는 2차 배터리 및 고성능 배터리, 태양전지 등 차세대 소프트 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환경운동가들은 여러 차세대 배터리 중에서도 앞으로 전기 자동차의 보급을 가능케 할 고성능 베터리 개발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고성능 배터리만 개발되면 대기오염의 주범인 현재의 가솔린 자동차가 사라지고 전기자동차 시대가 활짝 문을 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전세계 자동차 메이커는 나날이 거세지는 그린라운드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자동차용 고성능 배터리 개발에 필사적이다. 그 결과 1993년까지만 해도 충전에 8시간이나 걸리고 주행속도도 시속 80Km 정도며 주행거리도 100Km에 불과하던 고성능 배터리는 최근 들어서는 충전시간이 단 10분밖에 안 걸리고, 최고 주행속도가 시속 200Km까지 나오며 한번 충전시 주행 거리도 400Km가 될 정도로 그성능이 크게 개선됐다. 자동차업계에서는 앞으로 1996년 까지는 완전히 실용가능한 고성능 배터리가 개발될 것이며, 20세기가 가기 전에 전기자동차 시대가 활짝 막을 올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POWER 049 컴퓨터 해커 파워: 스텔스 바이러스

  어떤 백신 프로그램으로도 예방 또는 감염경로를 확인할 수 없는 최악의 컴퓨터 바이러스들을 일컫는 말이 스텔스 바이러스The stealth Virus이다. 스텔스 바이러스야말로, 핵무기보다도 무서운, 정보 초고속사회의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
  예상 밖으로 스텔스 바이러스의 최대 주산지는 불가리아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매주 평균 1–2개의 새로운 컴퓨터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있을 정도이다. 불가리아가 컴퓨터 바이러스의 천국이 된 것은 1980년대 컴퓨터 육성정책에 의한 양산된 젊은 프로그래머들이 탈냉전의 혼란스러운 정치격동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컴퓨터 사용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스텔스 바이러스 1호는 1988년 11월 10일, 당시 27살이던 불가리아 청년 프레발스키의 방에서 탄생됐다. 그는 이 바이러스를 넉 달 동안 50차례의 손질을 거쳐 완성했다. 초기에 이름이 없던 이 바이러스는 감염시 컴퓨터에서 양키 두들이라는 록음악이 흘러나옴에 따라 ‘양키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텔스 바이러스 2호는 1991년 5월에 출현했다. 당시 소피아 대학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하던 26살의 ‘어둠속의 복수자'(아직까지도 실명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그해 3월 국제 전자 게시판인 ‘피도네트’에 "그동안 보내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답하기 위해 어떤 백신 프로그램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바이러스를 곧 선보이겠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정확히 두달 뒤의 ‘어둠속의 복수자’는 자그마치 40억 가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공포의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 이 바이러스에게는 ‘돌연변이 엔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스텔스 바이러스 3호는 그로부터 몇 달 뒤 역시 정치혼란기에 빠져 있는 옆나라 러시아에서 출현했다. ‘사생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이러스는 컴퓨터에 감염되는 순간, 5천부터 카운터를 시작해 제로가 될 때까지 하드 디스크의 모든 자료를 야금야금 남김없이 파괴해버린다.
  스텔스 바이러스야말로 정보시대의 에이즈로서, 21세기 정보사회의 최대위협이자 부단히 극복해야 할 최악의 장애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해커라는 강력한 적의 출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첨단 소프트웨어 기술의 부단한 발전을 채찍질하는 최고의 자극일지도 모른다.

      Power Group IV 부드러운 힘의 시대, 글로벌 문화 파워

  "결국은 부드러운 힘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조셉나이

  "결국은 부드러운 힘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미국의 조셉 나이 하버드 대학 교수가 21세기 세계 판도를 읽으며 한 말이다. 이는 앞으로 도래할 21세기는 과거 20세기처럼 총칼이나 제품이 아니라,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리라는 예언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법칙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양철학의 기본골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세기 아시아를 비참한 식민지로 만든 서구제국주의의 강력한 물질문명은 이런 가르침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었다. 더욱이 2차대전 후 일본을 선두주자로 하고 한국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동남아, 중국으로 이어진 거대한 ‘아시아 제조업 생산 기지화’ 신드롬은 강한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정한 파워인양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때 일본이 ‘이제는 미국을 따라잡았다’며 샴페인을 터뜨렸던 것도, 한국 등 여타 아시아 제조업 국가군이 이와 유사한 자만심을 가졌던 것도 강함이 부드러움을 이긴다는 전도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아시아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를 처절히 체험하기 시작했다.
  현재 아시아에는 세계 굴지의 제조업체들이 기라성같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세계의 문화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글로벌 문화센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세울 만한 게 없다. 기껏 과거 선조들의 문화유산에 의존해 유서깊은 문화대국임을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어거지에 불과하다. 진정한 문화 파워란 단절적이거나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하는 ‘지금, 이곳’의 시대정신을 과거와 함께 녹여 미래의 시대정신을 창출하는 문화 용광로가 있을 때에만 창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재 지구촌의 문화 중심은 분명 아시아가 아닌, 미국과 유럽이다. 현재 구미는 영화, 음악, 연극, 미술, 출판, 과학, 도서관, 경매, TV, 여론조사, 스포츠, 학술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오랜 문화 전통과 빼어난 상술, 최첨단 정보 과학으로 중무장한 독보적 문화 파워 센터, 문화 용광로를 구축해놓고 있다. 냉정히 말한다면 지구촌 제조업 생산기지 아시아는 지금 구미의 문화식민지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다.
  문화는 창조이다. 모방이나 복제만으로는 결코 창조적 문화, 고부가가치 문화를 생산해낼 수 없다. 20세기 아시아는 모방을 통한 추월이라는 일본식 제조업 마인드에 깊이 매몰돼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21세기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은 모방-추월 공식에서 창출할 수 없다. 창의적이고, 도발적이며,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무엇보다도 체제 도전적인 문제정신이 한 사회 안에 가득할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문화는 꽃 피울 수 있는 법이다. 문화란 곧 창조적 혼란의 결실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제조업 마인드는 그곳이 생산 현장이든 사무실이든 학교이든 간에 일체의 혼란을 배격하고 있다. 집단주의적 사고와 표준적 노동력을 중시한다. 여기서 이탈하는 것은 그들이 낙오생이든 천재이든 간에 집단에서 철처히 배재해버린다. 연탄공장의 컨베이어에서 불량품을 빼내 부순 뒤 이를 다시 표준품으로 만드는 식이다. 아시아 전역에 팽배한 개발독재도 이같은 군대식 마인드를 더없이 선호하고 있다.
  아시아에게 제조업 생산기지 자리를 빼앗긴 구미는 지금 문화산업과 정보산업으로 대표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21세기의 승부를 걸려 하고 있다. 지금의 추세가 변함없이 계속되다가는 아시아는 구미의 싸구려 제조품 하청기지, 문화산업 식민지로 전락할 게 불을 보듯 훤하다.
  부드러운 것과 약한 것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며, 곧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다"라고 말한 성현들의 지혜를 겸허하게 되새김질해야 할 때이다.

    POWER 050 엔터테인먼트계의 대부: 마이클 오비츠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 등 할리우드의 화려한 슈퍼스타들, ‘ET’ ‘쥐라기 공원’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심지어는 고 리처드 닉슨 전 미국대통령 등 부와 명예를 두 손에 거머쥐고 있어 그 누구도 겁낼 게 없어 보이던 지구촌 스타들이 단 한 사람 앞에서만은 주눅이 들어 옴쭉달싹 못했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의 그 한 사람이 바로 현재 세계최대 쇼 비지니스 대행사인 CAA (Creative Artist Agency)를 이끌고 있는 마이클 오비츠Michael Ovitz 회장이다.
  오비츠가 오늘날 할리우드의 황제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왕성한 모험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6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다니던 중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학교 근처에 있던 영화사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관광 가이드로 일하게 된것을 계기로 엔터테인먼트계와 첫인연을 맺게 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22살의 젊은 나이로 비벌리 힐스의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으로 쇼 비즈니스 대행업계에 뛰어들어 다각적으로 경험과 인맥을 축적해 나갔다. 그러다가 일에 자신이 붙자 29살이 되던 1975년 회사를 그만두고 동료 3명과 함께 CAA를 전격 창립, 이를 오늘날과 같은 세계최대의 엔터테인먼트 대행사로 키워냈다. 할리우드는 1980년대 중반 이래 완전히 그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CAA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 외에 극작가, 감독, 프로듀서, 사회 저명인사들이 빠짐없이 가입해 오비츠에게 출연 교섭, 영화제작비 조달, 광고출연, 이미지 관리, 홍보 등을 모두 의뢰하고 있다. 아니 의뢰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만치 할리우드 내에서 오비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반항이란 곧 에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무수한 영화잡지들은 해마다 여론조사에서 그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로 꼽고 있으며, 영화인들은 할리우드를 오비츠 왕국이라 부를 정도이다.
  오비츠는 쇼 비즈니스를 대행만 하는게 아니라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을 팔고 사는 문제도 모두 그의 관할이다. 미국 내의 거센 비난 여론을 물리치고 지난 1989년 일본의 세계적 가전업체 소니가 48억 달러의 거금을 내고 콜롬비아 영화사와 트라이 스타 영화사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어 1991년 일본의 가전업체 마쓰시다가 MCA사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비츠의 중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오비츠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세기적 매매를 중개하면서 배우와 감독들도 끼어넣기로 팔아넘기는 방식으로 저팬 머니를 최대한 긁어냈다.
  1994년 10월에는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붐을 계기로 벨사 등 3개 전기 통신회사들을 부추겨 3천만 가구에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하는 컨소시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최근 오비츠의 철옹성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비츠의 율법을 깨는 선상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94년 10월 전격 단행된 세계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독립 프로덕션 설립이다. 제프리 카젠버그, 데이비드 제펜 등 동료흥행감독들과 손잡고 단행한 이 선상반란은 오비츠에게 대단한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더이상 오비츠의 사슬에 묶여 있기를 거부했음에도 제작자들이 앞다퉈 투자하기를 원하는 이들 실력파들을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할리우드의 이 비정한 철칙이 이제 오비츠에게도 다가온 셈이다. 그러나 스필버그 사단이 단기간에 오비츠를 능가하는 절대파워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영화인들은 드물다. 오비츠의 아성은 그만큼 거대하다. 과연 누가 제2의 오비츠가 될 것인가, 지금 할리우드는 숨죽여 주목하고 있다.

    POWER 051 아파르트헤이트를 부순 양심의 노래: 조니 클레그

  신이 가장 많은 축복을 내렸다는 다이아몬드와 황금의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러나 이곳은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지구 야만의 산 현장이었다. 500만 명의 영국계 및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3천만 흑인 토착민들을 철저히 착취하고 모멸했다. 흑인들은 자신의 땅과 일자리를 모두 백인에게 뺏겼으며, 백인들이 사는 거주지나 술집, 공원 근처에 얼씬할 수 없었다. 나이어린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한꺼번에 수백명씩 소웨토의 백주대로에서 학살됐으며, 끊임없는 고문과 탄압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백인들은 600여 평 이상의 유럽풍 전원주택에서 비버리힐즈식 삶을 즐겼으나, 흑인들은 수돗물이 안 나오고 하수구도 없으며 전기도 안 들어오는 3평 미만의 함석집에서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그것도 장장 342년 동안이나.
  이 남아공에서 당연히 백인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남아공 백인 양심세력의 표상으로 불리는 세계적 록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기타 연주자인 조니 클레그Johnny Clegg만은 흑인들로부터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클레그, 그도 원래는 평범한 한 백인에 불과했다. 1953년 오스트레일리아 록데일에서 태어난 짐바브웨를 거쳐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남아공으로 이주해 온 그는 아프리카의 장대한 자연과 원주민들의 토속문화에 크게 매료돼 인류학자가 되기로 결심, 비터바털스란트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까지 땄고 강의도 맡았다.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라, 과거 남아프리카에 거대한 통일왕국을 건설했던 줄루족에게서 14살 때부터 그들의 신명 넘치는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그들의 말도 익혔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의 궤도를 180도 바꾸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흑인들의 저항운동을 은밀히 돕던 스승 데이비드 웹스터가 남아공의 백인 비밀경찰에게 무참하게 암살된 것이다. 클레그는 분노에 몸을 떨며 책을 내팽개쳤다. 그 대신 자신의 평소 취미였던 노래와 기타를 무기로 잔혹한 백인 정권과의 길고도 외로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항 정치가수로 변신한 그는 ‘남아공 백인의 만행에 대한 세계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식’이라는 판단 아래, 그때부터 유럽과 미국 등 서방세계를 순회하며 남아공의 참상을 고발하는 노래를 통해 인류에게 흑인들의 아파프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 ‘철폐투쟁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외로운 투쟁을 하는 클레그 옆에는 언제나 한 친구가 있어 큰 힘이 되었다. 다름아닌 줄루족 출신의 기타 명연주자인 시포 맥추누Sipho Mcchunu였다. 줄루족이 모여 사는 나탈주 출신의 시포는, 여느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에게 땅을 뺏긴 뒤 강제로 이주돼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만든 기타를 들고서 짬짬이 클럽을 돌며 연주를 하던 거리의 예술가였다. 16살 때 서로 만나 더없는 친구가 된 클레그와 시포는 그후 클레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에 나서자 1976년 함께 밴드 ‘줄루카’를 조직, 전세계를 돌며 줄루풍의 신명나는 음악과 춤을 무기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투쟁을 벌여 나갔다. 시포는 그후 1987년 생활고에 시달려 농장일을 하기 위해 음악을 그만둘 때까지 클레그의 둘도 없는 동지로 활약했다.
  이들이 낸 첫 앨범 ‘지구인Universal Man ‘은 이들을 일약 세계적 록그룹으로 만들었고, 이어 나온 ‘아프리카의 기도’ ‘사파리에 흩어져서’ ‘네 땅 위에 우뚝 서라’ ‘제 3세계의 아이’ 등은 연속 세계적인 히트를 했다.
  특히 백인의 야만적 정치폭력을 신랄하게 고발하면서 30여 년간 옥중생활을 하고 있는 넬슨 만델라를 찬양했기 때문에 남아공에서 금지곡이 된 그의 대표작 ‘아심노난가 Asimnonanga’는 1980년대 말 파리와 런던, 베를린과 뮌헨 등 유럽 전역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했다. 그의 야외공연장에는 수십만 명의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이 노래는 유럽 대학가의 최대 인기가요가 되었다. 이는 342년간 계속된 남아공의 야만적 백인지배를 종식시키는데 일조한 거대한 세계여론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90년에 데 클레르크 정권 출범 후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의장이 석방되고 아파르트헤이트 악법이 철폐되자 그는 마지막 앨범 ‘잔혹과 광란, 그리고 아름다운 세계’를 낸 뒤 조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조용히 고향에 묻혀 아내가 하는 아동복 가게 일만 돕고 지냈다. 자신이 할 시대적 역할은 끝났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직 그가 할 일은 남아 있었다. 흑백정권 교체의 격동기에 처한 남아공이 흑백공존의 평화 메시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1993년 오랜 침묵을 깨고 ‘열기와 먼지, 그리고 꿈’과 같은 그 특유의 휴머니즘과 화해정신이 가득한 신작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다시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를 사랑하는 전세계 팬들을 열광시켰다.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1994년 남아공은 온갖 진통을 이겨내고 평화적 흑백정권 교체의 위업을 실현했다.
  양심의 노래를 부르는 조니 클레그가 있다는 사실, 과거 남아공 백인들을 분노케 하던 존재가 이제는 백인들의 부끄러운 양심에 유일한 위안이 되는 시대가 왔다. 결국 철권보다는 부드러운 노래의 힘이 휠씬 강했음을 클레크는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유신시절 한국에서 김민기와 김지하가 그러했듯이

    POWER 052 지구촌 최대 지식창고: 미국 의회도서관

  "민주적 입법기관은 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전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미국 제2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제국의 철칙이다. 제퍼슨의 이 철학에 기초해 1800년 설립된 지상에서 가장 방대한 도서관이 바로 미국 의회도서관 The Library Congress이다. 이곳에는 전세계에서 수집한 2천만 권의 장서를 비롯해 논문, 정기간행물, 지도, 사진, 그림등 총 1억 400여만 점의 각종 자료가 보관돼 있다.
  워싱턴 의사당과 지하로 연결된 본관과 제퍼슨 빌딩, 매디슨 빌딩 등 모두 3개의 건물로 구성된 의회도서관에는 5천여 명의 전문요원이 사서국, 의회조사국, 법률도서관, 일반조사국, 저작권국 등에서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외에, 일반 국민에게 정보제공 서비스를 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국가대표 도서관으로서 일반 국민 누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의회도서관의 모든 자료는 국민세금으로 구입한 것으로 자료 대여에 따른 수수료를 일절 받지 않고 있다.
  17개 부서로 구성된 사서국에서는 1,800여 명의 직원이 도서관 비치 자료입수와 목록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사서국은 이미 전세계 600개 주요 도서관에 소장된 2천여 만 권의 장서목록을 전산카드화 해 놓은 상태로, 전 세계인들은 누구나 세계최대 학술 통신망인 인터네트에 들어가 의회도서관 온라인 정보서비스 LOCIS 란 이름으로 이를 이용할 수 있다.
  사서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94년 10월부터 앨 고어 자료를 모두 디지털 도서관건설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밝힌 ‘디지털 도서관을 향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사업계획에 따르면 우선 사용빈도가 높은 자료들부터 매년 100만 점씩 연차적으로 디지털화해, 궁극적으로는 1억여 점의 소장자료를 모두 디지털 자료화할 예정이다. 사서국은 1단계 작업을 2000년까지 완료한 다음 이를 전세계에 공개할 계획이다.
  의회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다. CIA가 행정부를 위해 행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정보 수집, 분석 작업을 독자적으로 행하고 있는 의회의 CIA 이기도 하다. 850여명의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는 의회 조사국(CRS)에서는 미국의회의 모든 의원, 위원회, 소위원회가 필요로 하는 입법 참고자료의 작성, 조사, 연구 업무를 돕는다. 행정부 등 국내외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에게 용역을 주어 매년 45만 건 이상의 조사와 보고서 작성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또 일본 도쿄 등 세계 주요도시에 ‘회색문서 수집사무소’를 설치해, 정작 공개는 됐어도 입수하기 힘든 회색문서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작업을 거쳐 완성된 보고서는 미국의 대내외 정책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예로 CRS는 1994년 7월 27일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김영삼정부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중간평가를 해 청화대측을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다.
  법률도서관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200만 권의 법률도서 및 각국의 헌법조약집, 재판기록, 각종 결의문 등이 소장돼 있다. 일반조사국에서는 데이터 정리기술 등을 개발하고, 저작권국에서는 미국 내에서 발간되는 모든 자료를 전산화해 상하원에 1500여 대의 컴퓨터 터미널로 연결해 놓았다.
  의회도서관은 현재 일본, 중국, 러시아, 중남미의 희귀자료를 해당국가 못지않게 소장하고 있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지난 1984년부터 10여 명의 직원을 이곳에 상주시키며 미군정하의 모든 사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복사해 가기도 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지난 1990년에 한국과를 신설해 한국관련 자료도 본격적으로 수집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회도서관장이 "한국보다 우리가 한국 사료를 더많이 갖고 있다."고 자랑했을 정도로, 이미 이곳에 수집된 한국관련 자료는 엄청난 규모에 달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야말로 곧 제국의 싱크 탱크이다.

    POWER 053 세계출판인의 축제마당: 인터내셔널 북 페어

  매년 10월 독일 프랑크 푸르트에는 독일 서적유통협회 주최로 맥밀란, 펭귄, 이와나미 등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출판사, 편집인들과 작가, 유통업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책의 올림픽으로 명성높은 인터내셔널 북 페어 INTEMATINAL BOOK FAIR를 개최한다. 이곳은 단순한 출판물 거래장소가 아니라, 세계 지성계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출판 및 저술 방향을 결정 짓는 지구촌 쇼 윈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여느 출판 행사와는 달리 매년 각기 다른 테마로 열리는 게 큰 특징이다. 예컨대 1992년도에는 멕시코의 출판문화를 주제로 열렸으며, 1993년에는 플랜더스와 네덜란드를 주제로, 1994년에는 브라질을 주제로 열렸다. 해마다 전시회에는 전세계 100여 개국의 8천여 개 출판사가 자신들이 만든 35만여 종의 책들을 산더미같이 출품하며, 평균25만 명의 이상의 관람인들이 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이때마다 인구 150만 명의 프랑크푸르트는 모든 호텔과 민박시설이 동나는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곤 한다. 1994년 대회에는 105개국 8,628개사가 참가해, 열띤 판촉전을 벌였다.
  이곳에 모인 각국 출판인들은 세계의 출판추세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서 팔릴 만한 책을 골라 출판권을 사고팔고, 작가와의 저작권과 각종 아이디어를 흥정하며, 자국 문화를 홍보한다. 심사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 출판물에 대해서는 독일서적유통협회가 ‘평화의 상’을 수여한다.
  인터내셔널 북 페어는 1993년 제 45회 대회부터 독일통일의 여세를 몰아 과거 사회주의권 최대의 책 축제장이던 라이프치히 북 페어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한층 내용이 풍성해졌다. ‘프랑크푸르트는 전자화로 간다.’는 캐치프래이즈를 걸고 전자출판사들이 CD롬과 CD-I등 멀티미디어 상품을 대거 출품했을 뿐만 아니라, 소니 같은 세계적 전자회사들까지 디스크맨등 각종 전자출판물들을 앞다퉈 출품해 출판계의 거대한 변화를 가늠케 하고 있다.
  전시회에 출품되는 멀티미디어 출판상품들도 기존의 백과사전류에서 벗어나 관광, 요리, 종교, 스포츠, 섹스, 학술, 어학등 전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출판인들은 오는 2000년까지 멀티미디어 상품의 출판시장 점유율이 최소한 18p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더욱이 멀티미디어 상품 출품국도 미국, 유럽, 일본 등 서방선진국 중심에서 벗어나 싱가포르, 홍콩, 브라질, 이스라엘 등으로 다양화돼 이같은 추세가 범지구적 현상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한편 인터내셔널 북 페어 외에 해마다 전세계에서 매년 열리는 150개의 국제 전문전시회 중 116개가 독일에서 개최되고 있을 정도로, 독일은 전세계 전시문화 파워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POWER 054 세계과학의 심판관: 주간 네이처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은 비록 2차대전 이후 미국에게 밀려 지금은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으나, 순수과학에 관해서는 아직도 세계 최정상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영국에 옥스포드와 캐임브리지로 대표되는 장구한 학문전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나, 또하나 125년의 장엄한 역사를 가진 종합과학 전문지 (주간 네이처 NATURE WEEKLY) 같은 세계적 권위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네이처)는 미국의 (사이언스 SCIENCE)와 함께 저널리즘계의 양대산맥으로서 전세계의 과학 연구방향을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이처)에 연구논문이나 소개기사가 실리지 않고는 노벨상을 탈 수 없다"는 속설이 생겨날 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 받고 있어, 과학 분야에 몸을 담은 연구자라면 누구나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이 잡지에 자신이 논문이 실리는 것을 일생일대의 소원으로 삼고 있다. 편집장을 1966년부터 고집스럽기로 유명한 존 머독스가 맡아, 엄정한 논문 선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네이처)에 게재되기를 희망하여 매주 전세계로부터 답지하는 논문은 200여편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로 실리는 논문은 17편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90p는 필자들에게 곧바로 되돌려지고 있다. 엄정한 심사를 생명으로 하는 (네이처)는 해당 분야의 최고 석학들로 논문평가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이곳에 글을 보내는 전세계 대학과 연구소의 170만 연구가들의 논문을 일일이 심사하고 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는 논문은 절대 게재하지 않으며, 일단 게재된 논문이라 할지라도 후일 자료 해석에 잘못이 있었거나 검증이 불확실했다고 판단되는 글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잘못된 부분을 다시 쓰도록 요구한다. 만약 필자가 이에 불응하는 경우에는 공개비판 기사를 게재해, 사실상 학자로서의 인생을 마감시킨다. 또 서로 상반되는 견해에 대해서는 지면을 아끼지 않고 객관적 상호비평과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기도 하다.
  머독스 편집장은 그러나 최근 과학계의 풍토에 불만이 많다. "요즘 과학자들은 과거처럼 순수과학에 집착하지 못하고, 연구가 성공하면 곧바로 막대한 돈벌이가 될 수 있는 학문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게 그의 불만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다가는 또 한 차례 반과학과 무지, 맹신이 난무하던 중세의 암흑기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게 그가 세계 과학자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경고이다.
  과학분야의 엄정한 최종심판관, 이것이 (네이처)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문화파워이자 참 실력이다.

    POWER 055 음반계의 제 1인자: 폴리그램

  폴리그램POLYGRAM은 1993년도에 전세계 레코드, CD시장 점유율이 19p로 급신장하면서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세계 음반업계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세계 레코드 시장 규모는 연간 300억 달러(24조 원)에 달한다. 폴리그램은 네덜란드의 세계적 가전제품 메이커 필립스가 전체주식 75p를 갖고 있는 까닭에 본사를 네덜란드 바른에 두고 있으나 마케팅을 총괄하는 사업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폴리그램은 U2, 존 보비, 나나 무스쿠리, 롤링 스톤즈, 아바, 비지스, 에이스 오브 베이스, 라이오넬 리치, 톰 존스, 브라이언 애덤승, 스팅, 익스트림, 스티비 원더, 엘튼 존 같은 세계적 톱가수와 그룹들을 자사 전속으로 확보하고 있는 외에, 최근에는 아시아와 남미 민속음악에까지 레퍼터리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클래식 부문에서 필립스 클래식스등 세계 3대 클래식 레이블(상표) 모두를 보유하면서 전세계 매출액의 절반을 장악할 정도로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베를린 필 하모니, 빈 필 하모니 등 세계 정상급 악단과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세계적 성악가는 거의 빠짐없이 폴리그램과 장기 전속계약을 맺고 있다.
  또한 폴리그램은 네덜란드의 토코를 비롯해 포노그램, 런던 아일랜드(영국), 포리돌(독일), 모타운, AT&T(미국) 등 주요 레이블을 비롯해 모두 20여 개의 레이블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세계에 35개의 지사를 갖고 있다. 또 각국 레코드사와 라이센스를 맺어 음반 제작과 판매에 관한 한 지구촌 최대의 거미망을 구축해놓고 있다.
  또 폴리그램은 1993년 20여 편의 영화와 TV드라마까지 제작하는 등 영상분야로의 진출도 본격화하고 있다. 알랜 레비 폴리그램 회장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같이 적은 돈을 투자한 영화가 1억 3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순이익을 올려 전체 그룹수익의 14.7p를 차지하자, 앞으로는 영화제작에 본격 투자하겠다는 다부진 의욕을 펼쳐 보이고 있다.
  폴리그램의 최대 강점은 모기업인 유럽 최대의 가전 메이커 필립스의 기술개발을 음반제작 및 판매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891년 전구회사로 출발한 필립스는 1962년 카세트테이프를 개발해 1차 음반 산업 혁명을 몰고온 데 이어, 1982년에는 콤팩트디스크(CD) 역시 가장 먼저 개발해 2차 음반산업 혁명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카세트테이프와 CD의 기능을 결합한 디지털 콤팩트디스크(DCC)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현재 필립스는 세계 60개국에 현지법인을 두고 46개국에 275개의 생산 공장을 갖춘 네덜란드의 간판기업으로 성장했다. 부단한 기술혁신 노력이 일군 결실이다. 이같은 필립스의 신기술은 곧바로 폴리그램의 제품에 응용되어 제품화하고 있으며,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폴리그램 역시 필립스의 돈줄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음반계에서는 폴리그램을 선두로 소니, 워너, EMI, BMG 등 5개사를 빅 5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전세계 음반시장의 80p이상을 장악하고 끊임없는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다.

    POWER 056 경매계의 250년 황제: 소더비

  런던의 크리스티와 함께 전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의 90p를 장악하고 있는 세계최대의 고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 SODERBY’S 는 한 해 동안에 평균 10억 파운드 (1조 2천억 원) 이상의 천문학적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다. 소더비는 경매를 성사시키면서 낙찰가의 10–15p를 수수료로 받아 간단히 연간 1억 파운드(1,200억원)이상의 엄청난 알짜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다.
  1744년 영국의 서적판매업자 사뮤엘 베이커가 설립한 유서깊은 소더비는 1994년으로 창립 250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펼치기도 했다. 소더비란 이름은 창업주 베이커의 조카로서 1778년 베이커가 사망하자 그의 사업을 승계해 탁월한 상술로 사세를 세계 규모로 크게 확장시킨 존 소더비의 이름에서 땄다.
  런던 본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소더비 경매장에서는 매주 닷새 동안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반까지 연간 270여 차례의 세기적 고미술품 경매가 열리고 있다. 경매에 참여하는 주고객은 각국 중앙박물관, 고미술품 수집가, 다국적 기업, 공공재단 등으로 이들은 거금을 아끼지 않고 소더비가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전세계에서 긁어온 고미술품을 신속히 사들이고 있다. 이들 고객을 위해 소더비가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도감과 캐털로그는, 19세기 프랑스의 루이 나폴레옹 황제가 정기구독하면서 이를 보고 고미술품을 구입했을 정도로 세계최고의 권위와 감별력을 자랑하고 있다.
  1983년 미국인 사업가 피터 윌슨이 소더비와 합작으로 (소더비 국제 부동산)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다국적 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는 본부인 뉴욕 맨해튼가를 비롯해 북미, 중남미, 유럽,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40개국에 전문매장을 갖춘 세계적 경매센터로 발돋움했다. 이밖에 한국 등 역사적 전통이 깊은 나라들에도 경매정보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현지사무소들을 세워놓고 있다. 소더비 국제부동산은 전세계의 고미술품 외에도 고성, 가구, 보석, 유명인사의 유품 등 거래 가능한 모든 물품을 취급하는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고 있다.
  끊임없이 고객을 관심을 끌 만한 새 상품을 찾고 있는 소더비는 최근 한국의 고미술품들에 대해서도 남다른 집착을 보이고 있다. 소더비는 지난 몇 년간 라이벌인 크리스티와 함께 경쟁적으로 한국 고미술품 공략을 본격화한 결과, 1994년 4월 그동안 국제경매시장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청화백자접시 한 점을 뉴욕경매에서 308만 달러(24억 원)라는 기록적 가격에 낙찰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4년 10월에는 두달 뒤 국제경매에 부칠 한국 고미술품들을 국내 고객에게 선보이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소더비는 문화재 반출에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어 물량 확보가 쉽지 않은 한국시장 공략을 위해,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고미술품을 수집해 간 구미의 퇴역 군장성이나 전직 외교관들, 또는 일본 고미술상이나 소장가들을 상대로 치열한 한국 물량 확보 전쟁을 펼치고 있다. 인사동에 소더비 매장이 문을 열 날도 멀지 않은 듯 싶다.

    POWER 057 전위마술의 메카: 뉴욕 현대미술박물관

  1929년 뉴욕 미드타운에 ‘예술의 생활화’를 캐치프레이즈로 설립된 세계최고의 현대미술박물관 Museum of Modem Art은 미국의 현대미술계는 물론, 전세계의 실험적 전위 미술계의 흐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미술박물관의 존재를 자랑스러워하는 뉴욕 현지인들은 이를 MOMA (Museum of Modem Art)라는 애칭으로 즐겨 부른다.
  뉴욕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회화나 조각, 소묘 같은 그리스, 이집트,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작품들을 전시하는 반면, 모마에서는 이같은 고전적 미술작품과 세계의 명품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외에도 사진, 디자인, 영화, 포스터, 가구, 장식미술, 공업 및 상품 디자인, 건축 등 현대미술의 거의 모든 장르의 작품을 중심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모마의 필름 보관소는 세계최고의 영화창고로 명성이 높다. 영화 왕국 미국의 현대미술 아트센터답게 전세계에서 제작된 영화 중 작품성이 뛰어난 1만 3천 벌의 프린트를 보관하고 있으며, 수시로 유명 영화배우나 명감독의 영화작품 주간을 설정해 그들의 작품을 상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영화 초창기의 상영시간 5분짜리 무성영화에서부터 최근의 할리우드 흥행작 및 제3세계 영화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거의 모든 영화 필름이 빠짐없이 구비돼 있어 전세계 영화산업 관계자 및 영화학도, 영화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모마는 또 매년 4월 ‘뉴 필름, 뉴 디렉터’라는 행사를 주관해 전세계의 새로운 영화작품과 감독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뉴욕 영화제에 버금가는 행사로 평가되는 이 영화제에는 해마다 전세계의 신인감독들이 자신의 문제작을 출품하고 있으며, 박물관측은 이 중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20여편의 작품을 선정해 그들의 작품을 일반에게 소개한다. 여기서 소개돼 관객의 호평을 받은 작품들은 자동적으로 모마 필름 보관소에 영구보관된다.
  모마는 또 단순히 전위적 작품들을 전시만 할 뿐 아니라 실용적인 디자인의 생활용품과 그릇 등을 관람객에게 팔기도 하고,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말 그대로 모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종합예술 레저타운인 셈이다. 박물관에서는 전위적 작품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록, 제스퍼 존스, 앤디 워홀 같은 역대 거장들의 컬랙션도 마련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올드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1992년 10월부터는 4개월간 획기적인 ‘마티스 회고전’을 열어 전세계로부터 90만 명의 관람객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다른 미술관들과 마찬가지로 모마도 재정난으로 골머리를 앓고있다. 그동안 스폰서 역할을 해오던 대기업들이 경기 침체를 이유로 박물관측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거나 대폭 줄이기 시작, 1991년 이후 연간 200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모마는 1994년부터 1억 달러 모금을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펼치는 한편, 나날이 대형화되고 있는 현대 미술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제2전시관 설립을 서두르는 등 다각적 자구노력을 펼치고 있으나 단기간에 재정난이 호전될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상업주의의 파고에 신음하기는 모마도 결코 예외가 아닌 셈이다.

    POWER 058 아시아의 할리우드: 볼리우드

  볼리우드 Bollywood는 인도 최대도시 봄베이와 미국의 영화 메카 할리우드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이다. 이는 연간 20억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세계 최대 영화생산, 소비기지를 일컫는 단어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봄베이 영화단지에 위치한 굴 샨라이를 위시한 150여 개의 영화사는 해마다 900편 이상 배급되고 있는 인도 영화의 3분의 1을 제작해내어, 이를 인도 내 1만 3천여 개 영화관에 배급하고 있다. 제작 편수만 보면 영상왕국인 미국 할리우드의 2배에 달하여, 인건비가 절대적으로 낮은 9억 인구 대국의 영화단지 답게 연간 250여만 명의 풍성한 인력을 영화제작에 사용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매주 7천만 명이 극장을 찾아 볼리우드의 작품을 비롯해 각국 영화를 시청할 정도로 영화열기가 높다. 또 영화 스타는 대중들로부터 신과 동일한 대우를 받고 있어, 정계에 진출하는 영화 스타들은 그들이 어떤 정책을 내세우든 선거에서 한결같이 몰표를 얻어 당선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의석이 불과 3석에 불과하던 군소정당인 인도인민당은 대중의 이같은 속성을 교묘히 이용해 1991년 총선에 영화배우들을 대거 자당 후보로 공천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인도의 제1야당이 되기도 했다.
  볼리우드 영화의 평균 수준은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들보다 상당히 뒤떨어지지만, 워낙 영화인이 많다 보니 제3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 칭송받는 1992년 아카데미상 수상자 고 샤트야지트 레이나 감독이나 국제영화제에서 7차례나 수상한 고 팔라크시난 감독 같은 세기적 명감독을 배출하기도 했다.
  볼리우드 영화의 주된 수출지역은 아시아와 북미, 중동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인건비를 위시한 제작비가 워낙 낮은 까닭에 볼리우드는 해마다 불과 2억 달러를 투자하여, 연간 최소한 20억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알짜수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과연 볼리우드가 계속해 지금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최근 들어 구미의 불법 비디오가 인도에 연간 5만여 개 정도 대량 유입돼 낮은 관람료로 공공장소에서 상영되는가 하면, 자극적인 서구 오락문화로 무장한 ‘스타 TV’나 ‘지 TV’ 같은 글로벌 위성 TV와 유선 TV가 인도 대륙을 융단 폭격하여 매일 평균 2천만 가구가 이를 시청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중산층은 요즘 들어서는 일요일날 외출을 삼가고 스타 TV를 보느라 TV 수상기 앞에 매달려 있을 정도로 서방 전파의 파괴력은 실로 가공스럽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경험한 까닭에 웬만한 이들은 영어에 능통한 점도 서방문화가 급속히 침투할 수 있는 한 요인으로 풀이되고 있다.
  마침내 볼리우드에도 다른 나라 영화계가 앞서 처절히 경험했던 할리우드와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POWER 059 통일유럽의 문화수도: 베를린

  나치 지배와 2차대전 때의 파괴로 많은 손상을 입었음에도 파리 등을 제치고 현대 유럽의 문화 문화수도로 급부상하고 있는 독일의 베를린Berlin. 그러나 오늘날의 베를린으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1945년 동서베를린으로 분단된 뒤에도 양 진영이 경쟁적으로 문화진흥에 힘써온 결과, 1989년 통일 후 양대진영 문화의 정화를 활짝 꽃피우기에 이르른 것이다. 오는 1998년 정식으로 통일독일의 수도가 되면 마르크 파워의 지원사격 아래 명실상부한 유럽의 수도가 될 것이 확실하다.
  베를린은 우선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최대의 박물관 도시이다. 독일 전체에 존재하는 3천여 개의 박물관 중 프로이센 문화국립박물관, 기술 교통박물관, 사진박물관 등 국제적 명성이 높은 각종 전문박물관이 즐비하다. 이들 박물관의 각종 전시물은 2차대전 와중에도 문화재를 지키려는 독일박물관협회의 헌신적 노력으로 거의 완벽하게 보관돼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악성 베토벤의 나라답게 독일은 전국에 195개의 전문 오케스트라와 정부지원을 받는 95개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이 가운데 세계 정상의 음악가들이 지휘봉을 잡기를 원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도이체 오페라, 도이체 슈타스오페라 같은 국제적 오페라 하우스가 모두 베를린에 모여 있다.
  베를린은 이밖에 매년 세계 3대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를 개최하는 국제영화도시로도 유명하다. 1951년부터 시작된 베를린 영화제는 상업성을 중시하는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는 달리 비상업적이고 진보적이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을 세워놓고 있어, 그 어떤 영화제보다도 제 3세계 영화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높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강대진 감독의 역작 ‘마부’가 은곰상을 수상한 것도 바로 이 영화제에서의 일이다.
  베를린은 동시에 국제적 학술, 연구센터이기도 하다. 200여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인문사회과학의 메카인 훔볼트 대학, 빌헬름 대학, 알렉산더 대학을 비롯해 첨단과학의 본산인 기술대학, 자유대학 등이 즐비하다. 이밖에 한 마이스터 원자물리학연구소, 하인리히 헤르츠 커뮤니케이션 기술연구소, 프로시안 문화유산재단같은 국제적 연구소들이 모두 베를린에 위치하고 있다. 오는 1998년 연방정부와 국회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오면 막강한 마르크화와 장구한 문화전통으로 중무장한 베를린은 통일독일은 물론, 명실상부한 유럽의 심장부가 될 것이 분명하다.

    POWER 060 스포츠 중계 왕국 TWI

  ‘세계 프로스포츠계의 차르(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마크H.멕코맥은 1966년 ‘TV 와 스포츠를 결합시키자’는 절묘한 착상을 구체적 실천에 옮겼다. 대중 우민화의 3대 병기로 일컬어지는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등 이른바 3s 중 두 가지를 결합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스포츠전문 방송사가 오늘날 전세계 스포츠중계를 독점하고 있는 트랜스 월드 인터내셔널 Trans World International, 곧 TWI이다.
  TWI는 골프, 테니스, 농구, 카레이스, 육상, 체조, 하키, 복싱, 미식축구, 야구, 스키, 스케이팅 등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는 모조리 경기장면은 독점적으로 촬영, 이 프로그램의 중계권을 전세계 방송사에 파는 뛰어난 상술로 단기간에 미디어 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TWI가 단기간에 이같은 위치에 오르기까지에는 TWI의 모회사에서 전세계 프로스포츠 선수들을 전속선수로서 완전 장악하고 있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그룹(IMG)이 배후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TWI는 현재 뉴욕, 로스엔젤레스, 런던에 프로그램 제작국을 두고 있는 외에 뉴욕, 런던, 동경 등 전세계 12개 주요도시에 프로그램 판매사무소를 두고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은 스포츠 중계 TV 프로그램인 ‘트랜스 월드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 생중계 및 녹화 프로그램을 전세계 방송사에 팔고 있다. TWI가 맨 처음 시작한 사업은 유명 골프선수들의 필름 판매이다. TWI는 모사인 IMG소속 스타인 아놀드 팔머, 게이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등의 유명 경기장면을 편집해 이를 세계 방송사에 판매했다.
  그후 TWI는 1973년 캔디드 프로덕션과 손을 잡고 TV 프로그램 ‘슈퍼 스타’를 미국의 ABC 방송에 판 것으로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계 대행 사업을 본격화했다. 현재 TWI는 각 주요경기 생중계 및 녹화방송 외에도 ‘지프 슈퍼스타와 슈퍼팀’ ‘너트라스위트 월드 프로 스케이팅 챔피언십’ ‘마지막 도전’ ‘유럽 PGA 투어’ ‘아메리칸 글라디에이터’ ‘지상최고 역사’ ‘아이비 리그 풋볼’ ‘스포츠 포럼’등 연간 100종 이상의 각종 스포츠 엔터테이먼트 프로그램을 전세계 방송사에 공급하고 있다. TWI는 또 1968년 국제스키 연맹의 전권 위임을 시작으로 전세계 30여 개의 주요 스포츠 협회들로부터 아예 프로 제작 및 중계권 판매 등 업무 일체를 위임받아 놓고 있기도 하다. 현재 TWI가 독점적으로 중계권을 확보하고 있는 주요 대회만 해도 세계최고 권위의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테니스, 영국 오픈 골프대회, U.S.오픈 대회, 전미 풋볼 리그, PGA 챔피언십, 국제스키연맹 (FIS) 스키대회, 오렌지볼, U.S. 스키대회, NCAA 농구 챔피언십, 마스터 골프 토너먼트, 국제 배트민턴 연맹대회, 세계복싱연맹 (AIBA)대회, 조니 워커 세계 골프 챔피언십, 앨링턴 국제 육상대회 등 엄청나다.
  1980년대 들어 유럽에서 위성방송 다채널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자 TWI는 한층 바빠졌다. 영국위성방송(BSB)사의 경우 하루 13시간씩 하는 스포츠 전문 채널의 제작 및 운영권을 아예 TWI의 자회사 방송국인 챔피언 TV측에 모두 맡겨 버렸다. TWI는 또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BSB 스카이 방송사에도 일주일에 몇 시간씩 스포츠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다.
  TWI는 개별 스포츠 종목만 취급하는 게 아니다. 1980년대 들어 TWI는 스포츠 중계에 관한 한 세계최고인 제작, 판매 노하우를 무기로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막후 협상을 벌인 결과, 천문학적 액수의 각종 올림픽 중계권도 패키지로 모조리 손에 넣어버렸다. 1988년 캘거리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을 시작으로 88 서울 올림픽,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등의 생생한 경기 장 면은 모두 TWI의 손을 거쳐 전세계로 위성 중계된 것들이다. 최근 TWI는 스포츠 이외의 영역으로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식의 중계권 및 판매 대행권을 따내는 등 급속히 그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POWER 061 과학과 점의 만남: 갤럽

  나날이 시민 여론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지금 지구촌에서는 여론의 향배를 사전에 조사하는 일이 정치나 경제 모든 부문에서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 결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기라성같이 많은 여론조사 기간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여론조사 기관을 꼽으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조지 갤럽 Georgy H.Gallup이 창업한 갤럽Gallup을 가장 먼저 꼽는다.
  1901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출생한 조지 갤럽은 아이오와 주립대학을 거쳐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0년간 노스 웨스턴,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 매스컴 및 광고학 강의를 하는 평범한 학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32년 장모 올라 밀러가 아이오와 주지사에 입후보하면서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계기가 마련됐다. ‘어떻게 장모를 도울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과학적 선거 여론조사 방식을 동원, 정확한 예측 및 그에 따른 선거운동방식 변경으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던 장모를 당당히 당선시킴으로써, 그 무렵까지만 해도 주먹구구식으로 선거운동과 선거예측을 해온 미국 정치권과 언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당시 T.브라운이 개발한 표본조사이론을 응용해 표본대상의 성별과 소득, 정치적 견해, 지방색 등을 일일이 면접 조사를 거쳐 확인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 인구의 단면도를 작성해 이를 여론조사의 표본으로 활용하는 과학적 방법을 개발해 사용했다. 이것이 오늘날 ‘갤럽 여론조사’로 불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과학적 여론조사 방식이다.
  이때부터 자신의 과학적 여론조사 방식에 대해 큰 자신을 얻은 그는 1935년 미국 여론연구소 (AIPO: 갤럽의 정식명칭)를 창립, 초대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면서 각종 정치, 사회, 시사문제에 대한 여론조사 활동을 본격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1939년에는 시청자 조사연구소(ARI)를 창립해 라디오 프로의 청취율, 영화 관객의 반응 등을 세밀하게 조사해 미국이 오늘날 지상최대 엔터테인먼트 왕국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창립 후 갤럽연구소는 매주마다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미국 국내 및 한국 등 전세계에 깔려 있는 네트워크를 동원해 정치, 경제, 사회문제 등 그때마다 일반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현안들에 대한 여론 조사결과를 발표해오고 있다. 1992년 말 빌 클린턴 민주당후보가 당선된 미국대통령 선거 등 역대 11차례에 걸친 미국대통령 선거에서도 평균오차 1.2p의 정확한 예측을 해 그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예측을 점쟁이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일, 이것이야말로 갤럽이 인류사회에 남긴 거대한 족적인 셈이다.

    POWER 062 혼돈의 가공할 힘: 카오스 이론

  "중국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몇 번 날개짓을 하면 그 다음날 이로 인해 미국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기조차 한 이 말이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기둥이 되는 핵심 철학 중 하나인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이다. 지난 1963년 미국의 수학자 겸 기상학자인 E.N.로렌츠 박사가 이 이론에 기초해 장기 기상예보의 예측 불가성을 주장한 이래, 카오스 이론은 과거 수천 년 과학기술의 방향을 틀어버릴 만큼 기상학, 수학, 물리학, 경제학, 사회학 등 모든 학문분야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오고 있다. 로렌츠는 ‘단 3개의 변수가 역관계를 형성하기만 해도 정확한 미래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과학계에서는 이 카오스 이론을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에 이어 20세기 물리학이 낳은 3대 업적 중 하나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마이클 크리이튼은 이 이론을 그의 대표적인 소설 ‘쥬라기 공원’의 기저 논리로 이용해 일반인들이 이 이론에 친숙해지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카오스는 말 그대로 ‘혼돈’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이런 혼돈을 과학적 탐구 대상에서 배제했었다. 그러나 로렌츠의 문제제기 이후 세계 과학자들은 이런 수수께끼들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질서와 규칙을 찾아내어 이를 해석하려는 사고의 대전환이다. 한 예로 대표적 카오스 이론가인 제임스 요크는 "혼돈은 도처에 존재하나 보기와는 달리 안정된 상태이며 구조적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런 노력은 최근 잇따라 성과를 거두기 시작해 컴퓨터의 도움 아래 각 부문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무질서 속에서 일정한 규칙들을 속속 발견 해내고 있다. 이런 발견은 인공로봇, 반도체, 소프트웨어, 가전제품 등의 개발에서부터 기상예측, 통신암호, 생체현상연구, 영상 디지털, 건강진단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용되고 있다.

      Power Group V 글로벌 소비 폭발, 레포츠 소비파워

  "내 나이 25살이 되는 오는 1996년, 1억 달러를 벌어 보이겠다." – 샤킬 오닐

  탈냉전과 정보통신혁명은 비로소 지구촌을 하나의 단일 소비시장으로 만들었다. 동서 양진영을 잇는 이같은 단일 소비시장이 형성된 것은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더욱이 과거에 소비력이 거의 없던 제 3세계가 제조업의 생산기지화가 됨으로써 지구촌의 소비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리제이션이 진행될수록 이에 비례해 지구촌의 소비패턴은 더욱 단일화되고 대규모화될 것이다. ‘글로벌 X세대’의 출현이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지금 지구촌에는 단일한 문화와 사고, 소비성향으로 무장한 글로벌 X세대가 소비의 주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음악과 스포츠라는 국제어를 공유하고 있으며 ‘컴퓨터 마인드’로 중무장한 이들은 다국적 자본과 다국적 전파가 유도하는 대로 같은 음식과 옷, 가전제품을 대량 소비하고 있다. 범지구적 규모로 ‘자본 – 전파 – 소비’의 거대한 코넥션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전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춘)은 ‘지구촌 최대시장, 10대’라는 특집을 통해 지구촌 소비시장의 새 흐름을 분석한 적이 있다.
  "미국 인구의 14p를 차지하는 2,800만 명의 10대가 1993년 한 해 동안 쓴 돈은 570억 달러(46조원). 이들은 전체 영화 티켓의 27p를 사들였고, 비디오 대여고객 중 25p를 차지했다. 청바지를 사는 데 15억 달러를 쓰고, 운동화 구입에 30억 달러를 썼다. 미국보다 청소년층이 두터운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4,200만 10대나 멕시코, 브라질 등 남미의 5,700만 10대, 유럽의 5천만 10대의 소비성향도 결코 미국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 10대는 기성세대와 여러모로 다르다. 위성TV를 통해 쏟아지는 다국적 월경전파와 다국적 비디오 게임, 퍼스널 컴퓨터의 세례를 듬뿍 받은 인류 최초의 ‘컴퓨터 마인드 세대’인 이들은 국경개념이나 애국심이 대단히 희박하다. 이들은 또 깊이 생각지 않고 선택을 서둘러 하는 조급성을 가지고 있다. 다국적 자본들이 이처럼 공략하기 쉬운 고객은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국적 자본은 다국적 월경전파를 주된 공략무기로 이용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 바이어컴사의 음악전문방송 MTV는 미국의 10대뿐 아니라, 유럽의 5,900만 가구, 아시아의 1억 가구가 시청하고 있다. 글로벌 X세대는 이를 보고서 유명가수의 노래, 옷, 신발, 머리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이들은 MTV에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리바이스, 존슨 앤 존슨, 펩시, 애플 컴퓨터 등 200여 다국적 기업의 제품을 폭발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35세 이상의 소비자들이 자국 음식과 패션을 선호하는 반면, 이들10대는 국제적 브랜드를 선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촌 X 세대만 범지구적 소비 신드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기성세대도 글로벌 소비 열풍에 휘말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 중산층의 신들린 듯한 해외여행붐, 골프열기, 패션열풍, 레저붐만 보아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다. 21세기 세계를 지배할 마이더스의 대열에 레포츠그룹, 패션 그룹, 인스턴트 그룹이 속속 가담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세계관광 여행협회(WTTC)의 조사에 따르면 40년 전에 2,500만 명에 불과하던 해외여행자가 1992년에는 4억 8천만 명으로 폭증했다. 이런 급증세는 앞으로도 계속돼, 오는 2000년에는 6억 6천만명, 2010년에는 9억 4천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또 세계의 관광여행업 매출액도 1994년 현재 3조 4천억 달러이던 것이 2005년에는 7조 9천억 달러로 크게 늘고, 이 업종 종사자 숫자도 1994년 2억 명이던 것이 2005년 3억 4천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게 세계관광협회의 전망이다. WTTC는 앞으로 관광이 세계의 국내총생산(GNP)과 고용자 숫자 가운데 10p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소비 빅뱅이 범지구적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구촌 전체 가족이 이런 글로벌 소비에 동참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유엔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지구촌 전체 인구의 6분의 1만이 이런 소비에 동참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6분의 5는 갈망과 적의가 교차하는 눈길로 이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게 유엔의 우울한 전망이다. 글로벌 소비시대의 개막, 이는 ‘범지구적 박탈감’을 양산하는 촉매가 될지도 모른다. 

    POWER 063 프로 스포츠계의 차르: 마크 맥코맥

  1994년 9월, 전세계 프로골프 챔피언십에서 92차례나 우승을 거둔 ‘골프계의 신화’ 아놀드 팔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전기가 출간돼 전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끈 대목은 이 책의 첫 장인 ‘맥코맥과 악의 제국’이었다. 팔머 같은 세계최고의 골프스타조차 평소 맥코맥의 전횡에 얼마나 시달려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해프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총본부를 두고 전세계 19개국의 48개의 지사를 두고 있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그룹 Internation Management Group, 약칭 IMG를 이끄는 마크 H.맥코맥 Mark H.McCormack 회장은 프로 스포츠계의 살아 있는 신과 다름없는 절대없는 절대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현재 그의 밑에는 닉 팔도, 버나드 랭거, 콜린 몽고메리, 게리 플레이어, 레이 플로이드, 낸시 로페즈, 아이언 우스먼, 닉 프라이스, 밀러 바버, 칩 백 등 기라성 같은 세계최고 골퍼들이 빠짐없이 전속돼 있다. 이들은 맥코맥이 짜주는 일정에 따라 군말없이 세계 골프장을 돌며 대회를 빛내야만 한다. 모든 전속 선수들의 일정은 최소한 앞으로 2년 동안 언제, 어느 대회에 참석해야 하며, 언제 개인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 까지 빽빽이 잡혀 있을 정도이다.
  저항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골프계를 떠날 각오 없이 그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회한 맥코맥은 전세계 골퍼 등 인기 스포츠맨들의 등급을 매기는 전문회사 소니 랭킹이라는 통제장치를 만들어, IMG사에 소속되지 않은 골퍼나 여타 선수들은 제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도 랭킹에서 삭제하는 혹독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IMG에 소속된 골퍼나 여타 선수들은 스포츠계를 떠날 비장한 각오를 하기 전에는 맥코맥이 주관하지 않는 대회에 감히 출전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종속된 생활을 있다. 맥코맥과 원수가 되고서도 살아있는 프로선수는, 1992년 맥코맥과 대판 싸운 뒤 IMG사를 결연히 떠난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보급 프로 골퍼 그랙 노만 정도가 있을 뿐이다.
  프로 골프뿐이 아니다. 그의 휘하에는 최근 브룩 실즈와 세기적 염문을 뿌리고 있는 안드레 아가시를 비롯해, 크리스 에버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아이번 린들, 제니퍼 카프리아티, 짐 쿠리에 등 세계 최강의 프로 테니스 선수들도 빠짐없이 소속되어 있다. 맥코맥은 이들 외에도 유명대회들을 주최하고 있다. 맥코맥은 이들을 내세워 프랑크푸르트 프로테니스 대회(APT)등 전세계의 유명대회들을 주최하고 있다. 맥코맥은 이들 외에도 유명 사이클선수들을 확보해 프랑스의 국제 나이스 트라이애슬론 (3종경기)등도 개최하는가 하면, 미식축구, 프로농구, 야구, 축구, 자동차레이스, 아이스 하키, 스케이팅, 스키, 체조, 복싱, 하키, 육상, 수영등 모든 대중스포츠 종목에 막강한 IMG스타군단을 구축해놓고 있다. 예컨대 세계적 자동차경주 레이서인 에디 치버, 재키 스튜워드, 블록 에이츠를 위시해, 미식축구의 조 몬타나, 존 오퍼달, 러셀워커, 하키의 웨인 그레츠키와 브레트 헐, 야구의 마이크 그림스키와 댄메이얼, 미치 리치몬드 등이 모두IMG에 전속돼 있다. 이들 프로선수들의 신세도 프로골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IMG는 이들 유명선수의 게임 섭외를 도맡아하면서 그들이 대회에 참석할 때 받는 출연료의 25p와 상금의 10p를 매니저비로 꼬박꼬박 챙긴다. 그러나 IMG의 진짜 타깃은 이같은 잔챙이 수수료가 아니다. 이들 최고 유명선수들을 무기로 전세계 각종 유명대회를 주관함으로써 생기는 천문학적 액수의 TV방영권과 스포츠용품 업체등 각국의 다국적 대기업들이 내놓는 두둑한 협찬비용이다.
  30여년에 걸친 집요한 작업 결과 현재에 이르러서는 윔블던대회,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테니스, 브리티스 오픈, 내셔널 풋볼 리그, 마스타, U.S.오픈, PGA챔피언십, 오렌지볼, 뉴욕마라톤, 팬 암 게임, 내셔널하키 리그, NCAA농구 챔피언십, 마스터 골프토너먼트, APT투어 등 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유명 스포츠 대회의 TV 중계권이 예외없이 IMG의 수중에 들어와 있다. 전세계의 수십여 스포츠협회는 아예 IMG에게 모든 행사 협찬사 섭외와 TV중계권을 위탁해놓고 있을 정도이다. 사상 초유의 글로벌 스포츠왕국이 완성된 것이다.
  이같은 초대형 스포츠왕국 IMG는 한 골프광의 기발한 착상과 집념의 산물이다.
  윌리엄 메리 대학과 예일 종합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서도 자나깨나 골프 생각에만 빠져 있던 골프광 맥코맥은 1962년 ‘스포츠와 TV를 결합시키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절묘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곧바로 이를 실행에 옮겨 IMG사를 창립했다. 어린 시절 골프를 배운 이래 대학 재학시절에도 학내 골프팀의 주전선수로 활약했을 정도로 열렬한 골프팬이었던 맥코맥이 마침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IMG 창립 당시 맥코맥의 나이는 32살에 불과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골프란 단지 상류층들만이 인적드문 들판에서 호젓하게 즐기던 유한계층의 친목 스포츠였을 뿐, 통일된 경기방식이나 토너먼트와 같은 흥미있는 경기방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맥코맥은 그러나 골프가 내포하고 있던 대중 스포츠로서의 대단한 오락성과 미래의 잠재적 골프인구인 중산층의 폭발적 증가, 그리고 대기업들의 투자가능성에 주목했다.
  ‘최선을 다하라, 사업을 배워라, 그리고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철학을 갖고 있던 그는 자신의 골프 및 법률 전문지식을 무기로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우선 천재 골퍼 아놀드 팔머와 손을 잡고 당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골퍼들을 대거 자사에 전속시킨 뒤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한 새 경기방식을 개발하는 동시에, 스포츠용품 메이커 및 그밖의 다국적 기업들과 협상을 벌여 각종 골프대회를 엮어 나갔다.
  그 무렵 최고의 구매력을 갖고 있는 골프인구들을 겨냥, 앞다퉈 대회개최를 추진하기 시작한 다국적기업들은 세계최고 골프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맥코맥의 도움 없이는 권위 있는 골프대회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싫든 좋든 그와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영국의 도요다 세계챔피언십, 자마이카의 조니 워커 세계 골프챔피언십 등은 모두 맥코맥과의 협상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던 골프대회들이다. 맥코맥은 자신과 계약한 대회에는 반드시 세계 상위급 골프 10여 명을 참석시켜 대회를 빛냈다.
  그는 이와 동시에 1966년 스포츠경기 TV중계 전문 제작 및 보급을 주업으로 하는 TWI방송사를 설립, 전세계 각국 방송사에 자신들이 제작한 대회를 독점적으로 배급함으로써 단기간에 골프를 중산층이 가장 애호하는 대충 스포츠로 만들었다. TWI는 그후 골프에 만족하지 않고 미식축구, 농구, 야구, 육상, 체조, 빙상경기 등 모든 종목의 경기를 독점적으로 중계했고, 1980년 들어서는 88서울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동, 하계올림픽 경기의 중계권마저 장악해버렸다.
  맥코맥의 최근 관심사는 황금시장인 아시아의 공략이다. 맥코맥은 전세계 다국적기업들이 지구촌 최대의 생산기지 겸 소비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아시아를 선점하기 위해 자사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점을 교묘히 이용, 이들을 스폰서로 끌어들이면서 각종 스포츠경기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1994년 한 해 동안에만 IMG사는 베트남 호지민에서의 하이네켄 배드민턴 월드컵대회, 중국 베이징에서의 나이키 후프 히어로 농구대회, 싱가포르에서의 엡슨 싱가폴 오픈 골프대회, 대만에서의 월드컵 테이블 테니스 대회 등 14개의 빅 이벤트를 개최했다.
  맥코맥은 이처럼 자신의 법률지식과 뛰어난 섭외력을 무기로 사세를 키워나가는 한편, 1964년부터는 BBC방송의 골프 해설을 맡아 지금까지 30년간 해박한 골프지식과 비화를 무기로 세계 골프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기도 한다. 그는 또 틈틈이 자신의 경험을 (프로골프 세계) (멋진 프로골프 세계)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서 당신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 (법률가 세계의 가공할 진실) (성공 비결) (110p 해결책) 같은 책으로 엮어내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는 등 다방면에서 팔방미인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는 또 IMG 아티스트라는 엔터테인먼트 흥행사를 만들어 그 산하에 전속 오케스트라단을 운영하면서 연간 35회 이상 세계공연을 도는가 하면, 전속 오페라단을 통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아이다) (카르멘) (토스카)같은 세기적 흥행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이밖에 그는 3개의 모델대행사를 운영하고 출판업에도 손을 대 나브라틸로바, 코너 등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전기를 독점적으로 발행하는 등 돈이 될 만한 사업에는 모조리 손을 대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기로 유명한 맥코맥은, 1994년 영국의 브리티시 스카이 방송사, 홍콩의 스타 TV사 등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24시간 글로벌 위성방송을 하고 있는 미디어계의 황제 루퍼트 머독과 손을 잡고 미국 최고골퍼 대 전세계 유명 골퍼들 사이의 빅 이벤트를 개최하여, 사흘 동안 이를 전세계에 동시 생중계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프로 스포츠의 위력을 잘 아는 머독이나 세계적 신발메이커인 나이키사의 필 나이트 회장 등은 IMG사를 사들이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를 내걸며 온갖 추파를 던지고 있으나 맥코맥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다.

    POWER 064 파라다이스로 모십니다!: 클럽 메디테레네

  ‘인간을 위한 레저’를 표방하는 클럽 메디레네(지중해)는 연간 200만명의 관광객들에게 지상최고의 휴식을 제공하는 세계최대의 프랑스 관광여행사로서, 영어권에서는 약칭 클럽 메드Club Med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클럽 메드의 창업자인 질베르 트리기노 등 50여 명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2차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참화로 입은 정신적 상처를 휴식과 레저생활의 활성화로 치유하기 위한 비영리 활동을 펼치기로 약속했다. 1950년 이들은 그 첫사업으로 스페인 마주르카 섬에 텐트 바캉스촌 ‘아르카디아’를 만들고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글로벌 바캉스 빌리지(지구 바캉스촌)’ 구상이 첫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업수완이 뛰어난 질베르는 1953년 기존의 비영리 친선조직의 성격을 개조해 영리기업인 ‘클럽 메드’로 재설립하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56년 스위스 레잔에 스키 바캉스촌을 열었다. 이어 그는 1965년 세계적 관광휴양지 모로코에 최초로 200개 객실과 각종 현대식 시설을 갖춘 대형 바캉스촌을 세우면서 사업을 완전히 본궤도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후 팽창을 거듭한 결과 현재의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등 아시아 8개국을 비롯해 전세계 35개국의 유명해안 및 산악지대에 134개소의 바캉스 빌리지를 직영하고, 각지역 문화유적지에 10개의 빌라촌, 휴일용 빌라 107개, 시티클럽 등을 갖고 있는 세계최대의 레저 파워로 급성장했다. 이와는 별도로 호텔업에도 진출해 세계12위를 마크하는가 하면, 자체 항공회사도 보유하고 있는 등 레저산업을 입체화, 일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클럽 메드는 세계를 4대 구역으로 나눈 뒤 이들 지역4그룹이 각각 그 지역의 사업을 총괄토록 하고 있다. 현재 클럽 메드의 총경영은 창업자 질베르의 아들인 세르주 트리가노가 1989년 부터 책임맡아 하고 있다.
  클럽 메드는 현재 일하는 종업원 숫자만 2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으며 해마다 이 클럽을 이용하는 관광객 숫자도 200만 명을 넘어섰고, 해마다 15p이상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클럽 메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 성장지대로 급부상한 아시아의 관광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1997년까지 한국 설악산과 베트남에 바캉스 빌리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클럽 메드가 운영하는 바캉스촌의 특징은 TV나 신문, 전화 등 문명의 이기를 일절 비치하지 않고, 여행객들이 가능한 한 자연 속에서 최대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여행 상품들과는 달리 손님이 계약만 하면 비행기 예약부터 목적지의 공항에 내려 빌리지에 들어오기까지, 또 그후 일단 빌리지에 들어오면 그 내부에서 스포츠, 문화, 취미, 쇼핑활동을 모두 불편없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등 여행 전과정을 클럽측이 맡아 패키지로 해주고 있다. 클럽 내에서는 또 세계 각국의 고급요리와 수십여 종의 레포츠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아울러 각 빌리지는 가능한 한 그 나라의 전통건축양식을 가미해 세움으로써 이국적 풍취를 더해 주고 있다.
  클럽 메드는 바캉스촌과는 별도로 1990년부터 2척의 초호화요트 ‘사랑의 유람선’도 운항시키고 있다. ‘클럽 메드2’로 이름붙여진 길이 187m, 무게 1만 4,500t의 세계에게 가장 큰 이 요트들은 카리브해와 남태평양등지를 순항하며 여러 휴양지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게 하고 있다. 밤에만 주로 항해하는 이 유람선에서 이용객들은 밤에는 각종 쇼와 레저활동, 그리고 낮에는 경관이 뛰어난 해변에서 관광, 해수욕, 윈드서핑을 즐긴다. 클럽 메드는 레저계의 황제답게 레저의 개념을 또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POWER 065 지금까지 판 햄버거, 800억 개: 맥 도널드

  "누가 감히 우리를 추월할 것인가. 21세기에도 우리는 패스트푸드 업계 톱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것이다."
  맥도널드 McDonald’s 창업주 레이 크록의 호연한 호언이다.
  지상에서 가장 간단한 음식인 햄버거를 전략무기로 내세워 지난 1955년에 설립된 맥도널드는 1994년 현재 미국 내 9,500개를 포함해 전세계 66개국에 1만 4천여 개의 직영업소를 갖고 있는 세계최대의 체인
레스토랑으로 발전했다. 맥도널드는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자그마치 73억달러 (5조 8,400원) 어치의 햄버거를 팔아 이 중 10억달러 (8천억원)를 순이익으로 남겼다. 맥도널드는 전세계매장을 잇는 20가지의 독자적 초고속 정보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각종 수집, 분석해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따라 판매전략을 신속히 마련하여 집행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중국, 러시아 등 구사회주의권의 시장경제 도입과 우루과이라운드 체결에 따른 각국의 시장개방으로 맥도널드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의 베이징,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 새로 맥도널드가 진출한 도시에서는 다른 음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편임에도 손님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설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맥도널드측은 이런 추세로 볼 때 20세기 말에 현재의 매출액을 두배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식품 중 하나인 맥도널드는 1994년 현재까지 모두 800억 개의 햄버거를 판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경제전문가들 가운데에는 각국 경제를 비교하는 집표로서 빅맨(맥도널드의 대표적 대형 햄버거)의 판매 가격을 사용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로 맥도널드는 이미 지구촌의 기본 음식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해온 맥도널드도 그러나 최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를 경쟁가들에게 선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식의 것이 아니다. 대중들의 환경인식 고양에 따른 패스트푸드 자체에 대한 경계심 및 기피심리 확대가 바로 위기의 핵심이다.
  맥도널드는 그동안 여러 차례 환경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여러 환경운동 단체들에 의해 제기된 스티롤 유해논쟁이었다. 당시 맥도널드는 햄버거 포장물로 연간 7천만 톤의 스티롤을 사용하던 세계 제 1의 스티롤 소비회사였다. 그런데 ‘유해 폐기물 정보교환을 위한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스티롤 생산에 사용되는 염화불화탄소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맥도널드는 이에 스티롤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다음에도 맥도널드가 햄버거 용지 수거에 성실치 않다면서, 햄버거 포장지 쓰레기를 맥도널드 사장에게 우편물로 보내는 운동이 펼쳐졌다. 결국 이번에도 맥도널드는 1988년 이 압력에 굴복, 포장재를 수거해 단열재를 만드는 재활용 프로그램을 작동하겠다고 발표해야만 했다.
  그후 1994년 들어서는 맥도널드의 햄버거용 고기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됐다는 영국 소비단체의 고발에 시달리는 등 끊임없는 환경압력으로 맥도널드는 애써 키워온 이미지 파워에 적잖은 상처를 입고 있다.

    POWER 066 글로벌 X세대의 절대우상: 샤킬 오닐

  미국을 움직이는 3대 스포츠는 미식축구(NFL), 야구(MLB), 농구(NBA)이다. 흑인 샤킬 오닐 Shaquille O’Neal은 이 가운데 모든 게임들이 17개국이 생중계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기 높은 NBA농구에게 신화적 활악상을 보이고 있다.
  1992년초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올랜드 매직 팀에 7년간 4천만 달러(320억 원)의 천문학적 계약액으로 전격 스카우트된 오닐은 그해 시즌에서 맹활약해 NBA 루키(신인왕)로 뽑힌 데 이어, 1993년 들어서는 만년 중위권에 머물던 팀을 창단 후 최초로 NBA 플레이오프에까지 끌어올리는 경이적 활약상을 보였다. 오닐은 1993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그해 한 해에만 5,200만 달러(416억 원)의 천문학적 거금을 벌어들임으로써 전세계 청소년, 이른바 글로벌 X세대들의 존경스러움을 한몸에 받는 절대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216Cm, 137Kg의 거구로 찍어내리는 오닐의 덩크슛은 경기 도중 농구골대를 두개나 박살냈을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나, 팬들은 그에게 ‘괴물센터’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라이벌 매직 존슨이 에이즈에 걸려 은퇴하고 잇따라 마이클 조단마저 1993년 은퇴한 후에도 감히 경쟁자가 없는 독보적 존재로서 농구 코트를 휘젓고 있다. 게임당 그의 평균 득점력은 28.9점으로, 29.2점을 기록한 데이비드 로빈슨에 이어 역대 랭킹2위를 차지하고 있다.
  재주가 많은 오닐은 연봉 외에 광고, CD, 영화, 출판 등을 통해서도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의 주된 수입원은 바로 광고 출연으로 연봉의 3배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는 현재 리복, 펩시콜라, 스폴딩 등 세계적 다국적기업들과 광고전속 계약을 맺어 있어, 한국 내 TV나 신문 광고에서도 자주 그의 모습을 접할 수 있을 정도다. 오닐과 계약을 맺은 의류업체 리복은 그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미국 내 청바지 판매량의 25p를 장악하는 폭발적 점유율 신상을 기록하고 있다. 오닐을 모델로 쓴 펩시 콜라는 마이클 조단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코카 콜라를 물리치고 다시금 미국 내 판매시장을 석권했다.
  오닐은 이밖에 자신이 작사한 랩음악 ‘샤크 디젤’이라는 CD음반을 출판해 전미국 빌보드 히트차트에 오르고 100만 장이나 파는가 하면 책을 쓰기도 하는 등 X세대다운 팔방미인의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블루 칩스’라는 영화에 닉 놀테와 함께 출연해 뛰어난 연기력으로 영화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기도 한 오닐은 영화사측으로부터 할리우드 최고 액션스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함께 ‘터미네이터3’에 출연해달라는 끈질긴 섭외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오닐은 자신이 터미네이터로서 주연을 맡을 때만 출연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미국 경영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오닐은 연봉 330만 달러 외에 CM 출연료 960만 달러, CD 및 비디오 저작권료 125만 달러, 영화 출연료 100만 달러 등 모두 5,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오닐은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25살이 되는 해인 오는 1996년에는 한해 동안에 1억 달러를 벌어 보이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음악 스튜디오 및 9개의 거실이 달린 550만 달러짜리 초호화 저택에서 전자오락게임과 영화보기를 즐기되 술은 한방울도 입에 안대는 오닐, 그야말로 팔방미인을 좋아하고 대단히 변덕스러우며 소비성량이 강한 글로벌X세대를 대표하는 우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를 오늘날의 지구촌 우상으로 만든 배후는 다름아닌 다국적 스포츠용품 및 의류업체들과 엔터테인먼트계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 앞서 무수한 스포츠 우상들이 ‘효용가치’가 다하자 매몰차게 버림받고 쓸쓸히 은막에서 사라져 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 또한 한 시대의 보랏빛 물거품 인생일 가능성이 크다.

    POWER 067 자동차업계의 막후 실세: 국제자동차연맹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달리는 쇼윈도’라 불리는 자동차가 한 국가의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품질 좋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나라가 바로 경제부국이다. 주택 다음으로 가장 비싼 내구성 소비재인 자동차가 외국의 길거리를 누비면서 그 나라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으면, 가전제품 등 여타 소비제품도 덩달아 품질을 인정받아 불티나게 수출되곤 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도요다 등 자동차 ‘빅5’ 때문이었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한국의 삼성그룹 같은 대기업이 자동차산업 진출에 그룹의 사활을 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모든 나라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의 생산 및 판매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가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자동차연맹 The International AUtomobile Federation, 곧 FIA이다. 국제자동차연맹은
각국의 민감한 이해가 걸려 있는 기구인 만큼 애당초 유엔산하기구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쟝 마르 발레스토르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FIA는 그 산하에 국제자동차 스포츠연맹 FISA을 두고서 전세계의 자동차 경주를 총괄하고 있다.
  FIA회장이 회장직을 겸직하는 국제자동차 스포츠연맹은 해마다 ‘달리는 실험실’이라 불리는 각종 자동차경주를 세계 곳곳에서 주최하면서, 각국에서 새로 개발된 자동차 성능에 대한 공인심사 Homologation를 함으로써 신종 자동차의 생산량과 판매량을 사실상 결정짓고 있다. FIA야말로 말 그대로 전세계 자동차산업 위에 우뚝 군림하는 절대군주인 셈이다. 이밖에 산하기구인 국제 스포츠연맹도 자동차경주 선수들의 자동차경주 참가자격을 결정하는 인정서와 국제경주면허를 발급하는 등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FIA는 사막, 계곡, 늪지, 포장도로 등 험로를 달려야 하는 까닭에 지옥의 랠리라 불리는 악명높은 1,300Km구간의 파리-다카르 랠리를 위시해 유럽, 아프리카, 남미, 호주, 뉴질랜드를 무대로 연중10차례 열리는 월드 랠리 챔피언십 (WRC)시리즈 등 전세계 주요 랠리를 예외없이 주관하고 있다. FIA는 이밖에 타원형 서킷 코스에서 스피드를 겨루는 카 레이스 등의 경기 규칙을 정하고 대회를 주관하면서, 참여한 차들에게 우승한 차는 생산에 착수할 경우 전세계 자동차시장에서 대량판매가 확실히 보장되는 최고의 부가가치를 얻고 있다.
  실제로 이들 자동차대회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는 예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심각한 영업난으로 부도 위기에 직면했던 프랑스의 푸즈는 지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지옥의 랠리’로 불리는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3년 연속우승하자 판매율이 급신장해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일본의 혼다는 1965년과 1967년 이 랠리에서 우승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세계 정상의 자동차메이커로 발돋움할 수 있다. 뒤늦게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일본의 미쓰비시는 이 대회에서 6번 고배를 마시고 7번째 우승, 간신히 세계 유수의 자동차메이커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영향력이 엄청나다 보니, 각 자동차메이커는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기술개발 투자비와 참가비를 아끼지 않고 앞다투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자동차 메이커들은 대회에서 우승하면 곧바로 경주에 참여한 고성능 차량 엔진의 성능을 일반용으로 낮춰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는 게 관례이다.
  스포츠와 자본의 교묘한 결합. FIA의 가공할 파워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다.

    POWER 068 패션계의 여왕: 엘리트 에이전시

  (보그)나 (엘르) 같은 세계적 패션잡지의 표지를 언제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나오미 캠벨, 클라우디아 시퍼, 신디 크로포드, 파울리나 포리츠코바 등 글로벌 슈퍼모델들. ‘현대판 신델렐라’ 또는 ‘세계의 인형’이라 불리며 뭇 여성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이들 세계적 슈퍼모델들의 필수조건은 신장 175Cm이상, 몸무게 55Kg이하, 나이는 28세 이하이어야 한다.
  슈퍼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외양만 중요한 게 아니다. 할리우드 배우 못지않은 뛰어난 개성과 연기력도 갖추어야 한다. 엘리트 에이전시 창업주인 프랑스의 존 카사블랑카 John Casablancas가 "스타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카사블랑카는 현재 세계최대 모델대행사인 엘리트 에이전시The Elite Agency를 비롯해 전세계 11개국에 포드 에이전시, 시카고 에이전시 등 18개 모델 대행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모델을 발굴해 엄격히 훈련시켜 슈퍼모델로 만든 뒤 이들 ‘모델 사단’을 앞세워 세계 패션업계 및 광고업계, 의류업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다. 현재 세계 유명모델 중 90p가 예외없이 엘리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있다.
  엘리트 에이전시는 카사블랑카가 28세 되던 해인 지난 1969년 세계패션중심지 파리 엘리제 거리에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고서, 북구 스칸디나비아계 모델들의 대행업무를 맡는 데에서부터 첫 업무를 시작했다. 카상블랑카는 각종 모델선발대회 등을 열거나 세계 각지의 미인선발대회를 돌면서 나이 어린 무명모델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는 독특한 경영으로 급속히 사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성높은 대회는 엘리트 에이전시가 지난 1978년부터 해마다 9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열고 있는 세계슈퍼모델 선발대회이다. 이 대회의 참가조건은 앞에서 말한 신장 175Cm이상, 몸무게 55Kg이하. 이 대회에는 42개국에서 예선을 거쳐 선발된 신인 모델 72명이 본선에 진출, 그 해의 월드 슈퍼모델을 선발한다.
  카사블랑카는 자신의 일을 새로운 ‘미의 정의’라고 즐겨 표현한다. 즉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고 새로운 미인상을 창출해내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남들이 기피하던 흑인모델 나오미캠벨을 15세 때 발굴에 세계 톱모델로 끌어올렸고, 할리우드 인기배우 리처드 기어와 결혼한 신디 크로프트는 10세 때 발굴해 오늘의 슈퍼 히로인으로 키워냈다. 파울리나 포르츠코바 역시 14세 폴란드에서 그가 발굴해낸 보물이다. 린다 에반젤리스티는 나이아가라 미인대회에서 픽업해 파리의 세기적 톱모델로 만들었다.
  카사블랑카는 무명의 모델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신인모델들을 훈련시켜 패션쇼에 출연시키는 대가로 받는 수수료는 출연료의 3–4p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이 슈퍼모델이 되면 출연료 중 20p를 수수료로 바쳐야 한다. 철저히 투자한 뒤 거둬들이는 상술이다. 엘리트 에이전시는 이같은 수수료로만 1993년 한 해 동안 8,500만 달러 (680억 원)를 벌어들였다.
  지상최고의 미의 왕국을 건설한 카사블랑카답게 그의 심미안은 상당히 독특하다. 스스로를 ‘여성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그는 자신은 ‘선정적이면서도 우아하고 분별력이 뛰어난 여성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세계각국 모델들 중 ‘미국모델이 카메라 앞에서 가장 적극적이어서 좋다’고 말하고, 그 다음으로는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자기표현이 솔직한 프랑스 모델들을 꼽고 있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기운명을 개척, 신비의 문명을 만들어 나가게끔 돕는 게 내 일"이라고 말하는 카사블랑카, 세계 최고의 모델조련사다운 철학이다.
  엘리트 에이전시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발족으로 한국등 아시아 황금 모델 시장이 완전 개방되는 것을 계기로 전세계 모델시장을 완전 장악한다는 야심찬 계획 아래, 현지 시장조사 및 모델 수출, 현지 모델 개발 등을 서두르고 있다. 엘리트 에이전시가 이끄는 세계슈퍼 모델들이 한국 패션쇼장과 TV광고화면을 누비는 모습을 볼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POWER 069 축구스타의 이상향: AC 밀란

  1993년 유럽 챔피언컵 축구 결승전의 방영권은 전세계 100여개국에 팔려 나갔다. 이 경기의 최종 승지는 이탈리아 리그의 우승팀이기도 한 AC밀란 AC Milan팀. 연간 1억 5천만 달러(1,200억 원)의 매머드 예산과 1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기라성 같은 국제축구스타들을 확보하고 있는 세계적 축구명문다운 빼어난 전적이었다. AC밀란은 그후에도 이탈리아 리그를 3연패하는 가공할 전력을 과시했다.
  AC밀란으로 상징되는 이탈리아의 프로축구는 전세계 최고스타들이 세계최고의 연봉을 받으며 경합을 벌이는 ‘모든 프로선수들의 영원한 유토피아’이다. 때문에 월드컵을 통해 월드 스타로 부상한 선수들은 어김없이 이탈리아 축구무대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네덜란드의 루드 굴리트, 독일의 안드레아스 뮐러, 위르겐 콜러, 토마스 헤슬러, 콜롬비아의 아스프리야, 크로아티아의 알렌 복시치 등이 현재 이탈리아의 프로팀에서 공을 차고 있다.
  1994년 미국 댈러스 월드컵에 출전한 24개국 선수 528명의 궁극적 타깃도 이탈리아 1부 프로팀 진출이었으며, 실제로 월드컵이 끝난 직후 독일의 스트라이커 클린스만, 브라질의 골키퍼 타파렐, 네덜란드의 굴리트, 루마니아 하지, 나이지리아의 올리세 등 국제적 스타로 급부상한 10여 명이 예외없이 이탈리아로 이적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의 18개 축구명문 중에서도 최근 모든 유럽대회 우승컵을 휩쓸다시피 하는 AC밀란은 모든 선수들의 최대 유토피아로 꼽히고 있다.
  AC밀란 파워의 원천은 이 팀의 소유주가 세계적 자동차메이커 피아트 그룹에 이어 이탈리아의 제 2의 재벌로 군림하고 있는 문제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데 있다. 베를루스코니라는, 연간매출액만 10조 리라(5조원)에 달하고 국영 TV3개 채널을 비롯한 영화, 출판, 보험, 소매 등 300여 개의 계열사에, 그곳에 종사하는 사원 숫자만 4만 명이나 되는 유럽굴지의 미디어재벌 피닌베스트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1992년부터 시작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개혁돌풍에 위기감을 느낀 극우세력 및 기득권층의 전폭적 지지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언론매체를 통한 대중여론 조작에 힘입어 1994년 총선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 그해 4월에 이탈리아의 총리로 취임한 이탈리아 최대의 ‘정경 복합권력’이기도 하다.
  그는 이탈리아 재벌 1위인 피
  AC밀란을 사들인 뒤, 1992년에는 신인 지안루이지 렌티니를 영입하기 위해 222억 리라(110억 원)를 지불했을 정도로 이 팀을 세계 최강의 축구팀으로 만들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1994년 미국 댈러스 월드컵에 진출해 결승전까지 오른 이탈리아 대표팀 중 7명이 이 팀 소속일 정도로 AC밀란의 전력은 엄청나게 강화됐고, 이같은 AC밀란의 파워 상승은 1994년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AC밀란은 곧 현대 여론조작 사회에서 스포츠 파워로 직결될 수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기도 하다.

    POWER 070 전자오락 왕국: 닌텐도

  1890년 창업한 ‘백년기업’ 닌텐도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화투나 트럼프 따위를 만들던 일개 영세기업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과학과 오락을 결합시키자’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발상혁명에 따라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지난 1982년 12월 패미컴과 게임 소프트 제1호인 동키 콩을 탄생시켰다. 이 동키 콩이 바로 후일 마리오로 불리며 닌텐도의 이름을 전세계에 떨치게 한 화제의 게임 주인공이다. 그후 닌텐도는 1988년 전자오락기 게임보이를 개발하는 등 히트 제품을 계속 내놓아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27개국에 모두 9,400만 대의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을 판매한 세계최대 전자오락기 및 전자오락 소프트웨어 제조회사로 발돋움했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글로벌 게임왕국을 완성한 것이다.
  일본의 유서깊은 문화도시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닌텐도는 1994년 3월 결산에서 1,684억 엔(1조2,500억 원)의 경상이익을 거둬 소니, 마쓰시다 등 쟁쟁한 가전재벌들을 모두 제치고 도요다 자동차, NIT(일본전신전화)등에 이어 일본 제6위의 수익을 기록했다. 또 일본경제종합지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규모, 수익성, 성장성, 자기자본경영도 4개부문을 종합해 점수를 매긴 결과, 1991년부터 4년 연속으로 일본 내 전체기업 중 최우량기업으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 닌텐도는 강력한 라이벌인 일본의 세가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전세계 가정용 TV게임 시장의 95p를 독점하고 있다. 특히 닌텐도가 최근 개발한 16메가비트 게임기 ‘슈퍼 패미컴’의 경우는 전세계 시장의 80p를 독점하고 있다.
  하드웨어 기기보다 나날이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해온 닌텐도는 ‘마리오 게임’으로 대표되는 전자오락 소프트웨어를 잇따라 빅히트시킴으로써 골치아프고 딱딱한 이미지를 풍기던 ‘컴퓨터를 청소년의 친근한 벗’으로 만드는 공헌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닌텐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나 경쟁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아 그 앞길이 종전처럼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평소 닌텐도는 제품을 생산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는 미국 기업들과는 달리, 사전 시장조사를 안하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재미있으면 다른 사람도 틀림없이 재미있어 하게 마련이라는 자신만만한 ‘재미 철학’에 기초해 기업을 운영해 왔고, 실제로 지금까지는 이 전략이 그대로 적중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닌텐도의 바로 이같은 재미 철학이 비난과 위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교육성을 결여한 채 자극적인 재미만 추구한 까닭에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닌텐도의 약점을 간파한 미국의 후발 전자오락 소프트업계 가교육성Education과 오락성Entertanment을 결합시킨 이른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상품을 집중개발, 학부모들의 열띤 성원을 받음에 따라 닌텐도의 위기감은 한층 커지고 있다.
  이밖에 마쓰시다, 소니, NEC 등 일본의 거대 가전메이커들이 앞다퉈 32비트 게임기를 앞세워 3차원 입체오락 등 차세대 전자오락 부문에서 닌텐도를 앞지르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 안팎에서의 도전이 드세지고 있다.
  이에 닌텐드는 21세기의 생존을 겨냥해 최근 위성방송 사업에 적극 뛰어 들었다. 현재 닌텐도는 위성 디지털 음악방송을 전문으로 하던 위성방송회사 센트 기가에 1993부터 대주주로 참여, 1995년 2월 아시아전역에 데이타 위성방송을 시작한다는 목표 아래 작업을 맹렬히 추진중이다.
  데이터 위성방송이란 영화나 뉴스를 주로 내보내던 종전의 위성방송과는 달리 디지탈 신호로 컴퓨터, 컴퓨터 소프트, 정지화면, 전자출판물, 전자우편 등을 각 가정에 보내는 새로운 통신수단이자 대중화된 미국의 경우는 현재 청소년 1인당 컴퓨터게임 팩을 구입하는 데 매달 30달러를 사용할 정도로 잠재적 시장규모가 엄청나다. 닌텐도가 일단 움직이자 닌텐도의 최대 라이벌인 일본 세가가 데이터 위성방송 참여를 적극 추진하는 가하면, 일본 유수의 대기업들도 잇따라 위성방송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 흔한 사시나 사가조차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기풍을 중시하는 까닭에 평소 규율을 중시해온 일본 제조업체들로부터 ‘사생아’라는 비아냥을 받아온 닌텐도, 이 닌텐도가 지금 와서는 미국에 비해 창의적 정보산업 기반이 취약해 열도침몰의 절대위기에 몰린 ‘일본의 등대’가 되고 있다.

    POWER 071 인스턴트식품제국: 네슬레

  1865년 알프스 산자락에 앙리 네슬레라는 스위스의 한 식품가공기술자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자그마한 식품가공회사 네슬레Nestle’s를 차렸을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 회사가 120년이 지난 오늘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식품을 생산해내는 세계최대의 다국적 식품회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현재 지상에서 네슬레와 엇비슷하게 겨룰 수 있는 식품업체는 미국의 필립 모리스, 영국의 유니레버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네슬레는 식품업계의 절대패자로 우뚝 섰다.
  창업 초기 유아분유와 이유식 같은 유아식품 개발에서 시작해 꾸준히 생산품목을 다양화하면서 사세를 확장시켜온 네슬레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5개 대륙에 423개의 공장과 200여 개의 회사를 경영하는 초국가 기업이 됐다. 네슬레의 사업은 98p가 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네슬레의 헬무흐 마우허 회장은 1990년대 말까지 연평균 70p의 초고속 성장을 계속해 연평균 매상고를 750억 달러선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네슬레에서는 청량음료, 생수, 곡물과 우유 가공식품, 커피, 초콜릿, 과자류, 아이스크림, 냉동식품, 포도주, 다이어트식품, 인스턴트 조리식품, 라면, 향신료, 유아용 화장품, 애완동물 사료, 부엌 요리용품, 의약품등 식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먹거리와 관련상품을 빠짐없이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 눈에 익숙한 네슬레의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네슬레 커피, 마일로, 커피 메이트, 커피 프리마, 스토우퍼, 네슬레 아이스크림, 마요네즈 토미, 라비올리, 나폴레테나 등을 꼽을 수 있다.
  네슬레는 지난 10년간 기업 인수합병(M&A)에도 열을 올려, 미국 유가공업체인 카네이션, 이탈리아 식품회사인 부이토니 파스타, 영국 제과업체인 로운트리, 프랑스 생수회사인 페리에, 이탈리아 생수회사 산펠리그리노 등의 경영권을 잇따라 인수했다. 이밖에 1991년부터는 코카 콜라와 합작으로 즉석차와 커피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네슬레의 최대 자랑거리는 그 어떤 경쟁사보다도 방대한 연구진이다. 20개 그룹으로 나누어진 연구센터와 연구개발팀이 눈부신 연구개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인력만 2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전세계적인 자연식품 선호 추세에 따라 종전에 인공향료 같은 인위적 식품자원보다는 천연자원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POWER 072 죽음의 전파자: 필립 모리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품 브랜드 가운데 가장 지명도와 무형적 지적 자산 가치가 높다는 ‘말보로’. 이 말보로 담배를 생산해내는 미국의 담배및 식품 제조회사 필립 모리스The Phlip Morris는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509억 달러(40조 7,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해 세계 500대 기업 중 당당히 랭킹 14위를 차지했다. 필립 모리스가 같은해 순이익으로 남긴 액수는 44억 달러로, 여러 경쟁사 가운데 단연 최고를 기록했다. 필립스의 자산액은 1994년 현재 610억 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미디어 재벌 루퍼트머독, 시티그룹의 존 리드 회장, 운송 재벌 로저 팬스크 등 미국 내외의 쟁쟁한 거물들이 대거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연간 담배에 의해 질병으로 죽은 이가 교통사고 사망자의 12.5배에 달한다는 끔찍한 통계를 앞세운 범세계적 금연운동으로 미국 등 구미의 흡연인구가 급속히 줄고 있음에도, 필립 모리스는 미국 정부의 집요한 제3세계 시장 개방압력에 힘입어 지난 5년간 연평균 18.5p의 높은 매출신장률과 36.7p의 폭발적 이윤신장률을 기록했다. 말보로를 선두주자로 하는 미국의 담배수출은 지난 1987년 167억 달러에서 1992년 288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는데, 한국 등에 대한 미국정부의 거센 담배시장 개방압력이 있기까지에는 필립 모리스의 막후 로비가 결정적 작용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필립 모리스는 또 ‘담배 = 죽음의 전파자’라는 나쁜 이미지를 순화시키기 위해 지난 30여 년 동안 메트로폴리턴 미술관, 블루클린 음악아카데미, 국제사진 센터 등 뉴욕 문화계에 해마다 수백만 달러의 후원금을 지원해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1994년 9월 뉴욕 시의회가 모든 음식점과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금지시키는 금연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다급해진 필립 모리스는 그동안 후원해온 예술단체들에게 의회 로비를 강요해 뉴욕의 예술인들을 고민에 빠뜨리기도 했다.
  필립 모리스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대적 기업인수합병을 꼽을 수 있다. 세계적 금연추세를 볼 때 앞으로 담배장사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필립 모리스는 담배사업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현금을 무기로 1980년대 중반부터 극비리에 대대적인 기업인수합병에 착수했다. 첫 사냥타깃이 된 것은 멕스웰 하우스 커피 등을 생산하고 있던 제너럴 푸드, 초대형 식품회사로서 최고의 명성과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던 제너럴 푸드는 막대한 현찰을 앞세운 필립 모리스의 집요한 공세에 1985년에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필립 모리스는 이어 1987년에는 역시 유가공업계에서 최고의 블랜드를 자랑하던 크라프트마저 흡수, 이를 제너럴 푸드와 합병시킴으로써 거대식품제국 크라프트제너럴 푸드 KGF를 완성시켰다. 필립 모리스가 1985년부터 10년간 인수합병에 투자한 총액은 250억 달러(20조 원)나 된다.
  담배를 주종으로 하는 필립 모리스의 전략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단행된 이같은 인수합병은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둬, 새로 인수한 이들 식품회사의 매출액은 현재 5개 회사로 구성된 필립 모리스 그룹의 전체 매출액 중 60p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또 인수합병이 거세게 진행된 지난 10년간 필립 모리스의 주식 가격도 10배나 올랐다.
  필립 모리스는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선두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난해 말보로 등 자사 담배제품 가격을 40p나 대폭인하하는 파상공세를 전개, 경쟁사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Power Group VI 제3의 권력, 지구시민 파워

  "제 1섹터인 정부, 제2섹터인 기업을 견제하는 제3섹터로서 NGO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 – 레스터 솔로몬

  냉전종식 후 기존의 미국과 소련, 양극을 대체하는 신흥파워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제2의 신’이 된 미디어재벌, 초국가기업, 금융투기자본, 국제범죄조직단 (ICO), 원리주의세력 등 혼탁한 ‘해빙기의 위기’ ‘자본의 황금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이에 맞서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만 개의 자생적 비정부조직(NGO)이 세계무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장대한 ‘지구시민 파워’의 출현, ‘범지구적 연대혁명’의 시작이다. 학자들은 이같은 NGO의 폭발적 증가가 19세기 후반 국민국가 출현이 세계에 던진 것과 같은 충격을 21세기에 던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미 NGO는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됐다. 현재 전세계 공공개발원조의 10p(80억 달러)가 NGO를 통해 집행되고 있다. 미국이 행하는 대외원조 중 4분의 1은 NGO 몫이며, 성인 2명 중 1명은 매주 3시간 이상 사회봉사 등 비영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27만 5천 개에 달하는 영국 민간자선단체들의 연간 총수익은 국내총샌산(GDP)의 5p를 웃돌고 있다. 1960년대까지 1만 1천 개에 불과하던 프랑스의 민간단체는 1987년 한 해에만 5만 4천 개로 늘어났다.
  NGO는 또한 더이상 배부른 서방의 점유물이 아니다. NGO는 도리어 개도국에서 더욱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최근 칠레에서는 2만 3천 개, 필리핀에서는 2만 1천 개, 아르헨티나에서는 2천 개의 NGO가 새로 조직됐다. 캄보디아에서는 15만 명 이상이 NGO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475개 이상의 NGO들이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다. 체제이행기의 혼란을 겪고 있는 동구권도 예외가 아니다. 헝가리에서는 1992년 한 해에만 6천 개의 재단과 1만 1천 개의 민간단체가 새로 등록했고, 폴란드에서도 같은 시기에 수천 개의 NGO가 출현했다.
  현재 이들 NGO는 실업, 소비, 여권 같은 국내 복지문제뿐 아니라 환경보호나 난민구호, 인권보호 같은 범지구적 사안에 이르기까지 관여 안하는 것이 없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레스터 솔로몬 정책연구소 소장이 제1섹터인 정부, 제2섹터인 기업을 견제하는 제3섹터로서 NGO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지금 지구촌에서는 기존의 세계 역학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장대한 대실험이 진행중인 것이다.
  "우리는 경제, 금융, 정보, 마약거래, 실업의 글로벌리제이션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최초의 세대이다. 우리는 동시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지구를 관리하는 문제를 놓고 지구 규모로 걱정하고, 원자력의 안전성과 환경파괴에 대해 집단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최초의 세대이기도 하다."
  지난 7월 나폴리에서의 서방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에 맞서 같은 장소에서 열린 NGO들의 모임인 ‘지구의 작은이들’에서 채택된 성명의 첫대목이다. 그러나 기존의 권력구조는 이같은 새 상황 앞에 무기력할 뿐이다. 범세계적으로 정당과 정부에 대한 신뢰는 나날이 줄고, 투표를 통한 압력행사도 반짝 효과만 볼 뿐이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나날이 낮아지고 있다. 이런 힘의 공백을 NGO가 급속히 장악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에섹스 대학의 케빈 보일 인권 센터소장은 이와 관련해, "NGO는 이제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날실과 씨실의 일부가 되었다"고 평한다.
  특히 최근에 NGO의 활동이 부쩍 왕성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세 가지 위기와 두 가지 혁명적 변화를 꼽는다.
  첫번째 위기는 복지국가론을 주장해온 자본주의권이나 노동자 천국을 외쳐온 사회주의권 양측 모두의 공약이행 실패이다. 두번째는 남북 빈부격차 확대에 따른 제3세계권의 몰락, 그리고 마지막 위기는 범지구적 규모의 환경오염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 1980년대에 일어난 극적인 정보통신혁명과 대중의 교육수준 및 문자해독률의 향상이라는 2대 혁명적 변화 또한 NGO가 비약적 성장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 교수는 (비영리조직의 경영)이라는 저서에서 "지금 사회적 책임을 지는 정부의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었고, 40년 전과는 달리 비영리조직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면서 지구시민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근 서방이 주도하는 국제적 NGO들이 환경, 노동문제, 대외원조, 국제분쟁 등에서 서방국가와 다국적자본의 이해를 우회적으로 대변하는 ‘신식민주주의의 첨병’으로 본디 성격이 변질되고 있다는 비난도 제기되기 시작하여, 시민파워의 향배가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POWER 073 슈바이처의 아들들: 국경 없는 의사들

  1960년대 말 아프리카의 비아프라 내전과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대홍수 때 곤경에 처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현지에 파견됐던 프랑스의 젊은 의사들은 가장 기초적인 의료품조차 없어 수십만 명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목불인견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후 모국에 돌아온 이들은 수차례 모임을 갖고 인류양심의 소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거듭 고민했고, 마침내 1971년 뜻을 같이하는 50명의 의사가 모여 파리에 자그마한 비정부조직(NGO)을 발족시켰다. 이 조직이 바로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힘있는 인도주의 의료조직으로 우뚝 선 ‘국경 없는 의사들Medecins Sans Fromtieres’ 곧 MSF이다.
  슈바이처의 인도주의 정신을 표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인종이나 종의 차별 없이 전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료 의료봉사를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밖에 제3세계의 현지 의료인 교육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계간으로 (국경 없는 의사들)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MSF 설립 후 입국불허 등 각종 정치적 압력에 굴함이 없이 죽어도 좋다는 비장한 각오 아래 의료함을 걸머지고 총알이 쌩쌩 오가는 국경을 넘나들며 슈바이처의 가르침을 실천해왔다. 프랑스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프랑스 전 인도주의 원조담당장관 베르나르 쿠스너 같은 사람은 의사 수업을 마친 뒤 곧바로 지옥의 전쟁터로 나가 비아프라와 베트남,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보스니아, 소말리아의 가설 병원에서 25년을 보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슈바이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후 이 취지에 공감한 각국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잇따라 가입해 지금은 벨기에에 총본부를 두고 유럽 7개국에 지부와 20개의 사무국, 5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국제적 민간구호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해마다 대형종합병원 3개의 의료진 규모와 맞먹는 2천명 이상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재해 및 분쟁지역으로 파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 1만여 명의 의료진을 80개국 이상에 파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국제 적십자사나 유엔 아동보호기금 같은 기구들도 현장에서 이들의 구호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예산은 연간 200여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보잘 것 없다. 그대신 이들은 활동에 필요한 재원의 3분의 1을 유엔난민 고등변무관사무소 (UNHCR)와 유럽연합(EU) 등 국제기구로부터 지원받고 나머지 3분의 2는 전세계 개별 후원자들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MSF의 발표에 따르면 개별 후원자 숫자만 1994년 현재 175만 명에 달하고 있다.
  MSF가 오늘날 의료부분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NGO가 되기까지에는 주변 여러 집단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유럽의 항공회사들은 이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무료항공권을 제공했고, 광고대행회사들은 무상으로 광고를 실어주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꾸준히 회원을 늘려 나가던 MSF는 특히 1970년대 베트남전 당시 난민캠프에서 보여준 이념을 초월한 헌신적 봉사자세가 국제사회의 높은 평가를 얻어 오늘날과 같은 국제단체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들은 지금도 르완다, 소말리아, 사라예보, 잠비아, 쿠르드 등 세기말적 참극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에 달려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함이 없이 총알 속에서 묵묵히 슈바이처의 길을 걷고 있다.

    POWER 074 지구난민의 피난처: 유엔 난민고등변무관사무소

  유엔의 ‘난민 지위에 관한 조약’은 국적, 인종, 종교, 정치산조 등에 의해 박해를 받거나 받을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 국외로 도망가, 자신이 소속된 국적국가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국외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난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엔 난민고등변무관 사무소(UNHCR)는 전란과정에 오갈 데 없어진 이들 난민을 구제하자는 휴머니즘 아래 1951년 유엔 총회에서 난민 지위에 관한 조약이 의결되면서 정식 발족, 왕성한 활동을 펼침으로써 1954년과 1981년에 두 차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내전기에는 주로 베트남, 캄보디아 등 사회주의권에서 자본주의진영으로 탈출해오는 난민들에 대한 구호활동만 펼쳐 동구권으로부터 자본주의진영의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냉전종식 후에야 비로소 당초 발족이념대로 인종분규나 지역분규, 내부정쟁, 종교분규로 인한 난민 구호에 전념하기 시작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국제사회의 난민 구제활동은 1921년 탐험가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난센을 고등변무관으로 하는 러시아 난민고등변무관을 국제연맹 산하에 설치해,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때 발생한 백러시아계 난민을 도운 게 최초의 일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유엔 산하에 국제난민기관(IRO)이 창설됐다가 UNHCR로 정식 발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1951년의 난민 조약과 1967년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에 기초해 활동하고 있는 UNHCR은 난민들을 캠프 안에서 보호하는 구호활동외에 난민의 모국과 정치협상을 벌여 이들의 귀환을 돕고 귀환시 정착금을 지원하며 분쟁지역의 지뢰, 질병을 제거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UNHCR은 46개의 국가 및 지역 대표들로 구성된 집행위원회 본부가 위치한 제네바 외에 전세계 113개국에 192개의 현지 사무소를 두고서 국제적십자사, 국경 없는 의사들, 아이들을 구하자Save the Children 등과 같은 국제민간 구호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난민구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UNHCR은 1992년을 ‘난민 귀환의 해’로 정해 캄보디아 및 모잠비크의 난민, 남아프리카 정치범 등 전세계 20여개국의 난민 300만 명을 귀환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이 중 240만 명을 귀환시키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냉전종식 후 UNHCR은 더이상 난민이 발생하지 않아 기구를 해체해도 될 것으로 낙관했었다.
  그러나 최근 270만 명의 난민을 양산한 유고내전을 비롯해 200만 명의 난민을 만든 르완다 분쟁, 소말리아내전 같이 냉전종식 후 우후죽순격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인종분쟁과 구 사회주의권 국가 분해로 인해 난민의 절대숫자는 도리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UNHCR의 집계에 따르면 1989년 이래 여지껏 발생한 82건의 대규모 무력분쟁 중 국가간 전쟁은 단 3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전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희생자의 90p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이다.
  UNHCR가 1994년 발표한 (세계난민백서)에 따르면, 1974년에 240만 명에 불과하던 국제난민이 10년 뒤인 1984년에는 1,050만 명, 다시 그로부터 10년뒤인 1994년에는 2,3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국경을 탈출하지 못한 채 국내에서 방황하고 있는 국내 난민 2,600만 명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4,900만 명에 달해, 전세계 55억 인구 중 114명당 1명이 처참한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이처럼 난민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국가이기주의에 빠진 선진국들은 국내 경기침체를 이유로 난민구제에 필요한 자금 염출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순수행정비용을 제외한 구호경비 전액을 각국의 자발적 기여금에 의존하고 있는 UNHCR로서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UNHCR의 1993년도 예산은 13억 달러에 불과했다.

    POWER 075 인권의 마지막 보루: 피에르 사네

  아프리카 세네갈의 검은 인권운동가 피에르 사네 Pierre Sane가 1992년 10월 1,200여명의 기라성 같은 출마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국제사면위원회)의 사무총장에 뽑히자, 전세계 언론은
정말 깜짝 놀랐다. 엠네스티 창립 후 제3 세계에서 사무총장이 선출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의 사네가 사무총장에 선출된 소식을 접한 세계언론들은 비로소 엠네스티가 서방 선진국 중심의 인권단체라는 종전의 자기 한계를 극복하여, 말 그대로 지구촌 전체를 대표하는 인권단체로 발돋움했다면서 그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1948년 세네갈에서 태어난 사네는 영국에 건너가 런던 경제스쿨을 졸업한 뒤 인권운동에 뛰어들어, 1992년 10월 엠네스티 사무총장이 되기 전까지 캐나다 오타와에 위치한 국제개발 연구센터 등에서 피압박국가의 인권 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온 국제인권운동가로 오래전부터 인권운동권에 그 이름을 떨쳤다. 인권에 대한 헌신적 열정이 그를 오늘날의 요직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인권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엠네스티는 1961년 영국변호사 피터 베넨슨Peter Benebson의 주장으로 탄생했다. 포르투칼에서 2명의 학생이 술집에서 단지 "자유를 위해 건배"라는 말을 한 죄로 체포되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영국의 옵서버, 프랑스의 르몽드 등 구미의 유수한 일간지에 ‘잊혀진 죄수들’이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해, 이들을 위해 국제사회가 일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호소는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그해에 양심수를 대변하는 기관을 4개국에 세울 수 있었다.
  정치, 종교 등의 신념과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투옥, 구금, 억압을 당하고 있는 모든 양심수 석방을 활동목표로 삼고 있는 엠네스티는 창립 후 지금까지 2만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뛰어난 업적을 쌓아 올렸다. 또 지금까지 4만 753건을 해결했다. 국제사회는 그 노력을 높게 평가해 1977년 엠네스티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현재 런던 이스턴가 1번지에 본부를 두고 43개국에 4,349개 지부를 운영중인 엠네스티의 전체 회원숫자는 한국 등 151개국의 11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한국에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 철권통치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1973년 지부가 설립돼 군부독재시절 양십수들위 인권보호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도 70개국의 8천여 자원봉사자들과 4천여 개의 자발적 봉사조직이 전세계 정치범 7,700여 면의 즉각석방과 인권보호를 타깃으로 분주히 뛰고 있으며, 해마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레포트)라 불리는 각국별 인권백서와 소식지인 (엠네스티 뉴스레터)를 수시로 발표하고 있다. 1994년에는 극단적 폐쇄사회인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납북인사 등의 명단을 최초로 밝혀냄으로써 정보기관 이상의 빼어난 정보수집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엠네스티는 2년마다 국제대의원회의를 개최해, 대의원회의에서 선출된 9명의 국제집행위원이 업무를 총괄집행토록 하는 엄격한 민주적 운영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단체가 특정정파나 이데올로기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엠네스티는 죄수가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가를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오직 문제삼는 것은 정치적 약자인 이들의 개별인권이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가이다. 이념전쟁이 한창이던 과거 냉전기에도 엠네스티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노선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제사회는 엠네스티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 1977년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데 이어, 1978년에는 유엔인권상을 수여했다.
  엠네스티는 1994년 7월 발표한 (1993년 연례보고서)를 통해 현재 전 세계 63개국의 감옥에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구금된 10만 명의 양심수들이 있으며, 61개국에서 정치적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보고서에서 이같은 사실을 폭로한 엠네스티는 이밖에 112개국에서 수감자에 대한 고문과 학대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분노했다. 엠네스티는 한국과 관련해서도 민간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300명의 정치범이 옥중에 있다며 비판했다. 피에르사네 총장은 특히 이 보고서를 통해 최근 들어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독재정권의 탄압이 집중되고 있다면서, 지난 9년간 끌어온 ‘인권운동가 보호선언’을 이제 완결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네 총장은 특히 최근 탈냉전 후 지역, 인종 분쟁이 폭발하면서 범세계적으로 인권침해가 양산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현재 보스니아에 설치돼 있는 ‘국제전쟁 범죄법정’을 상설기구화시켜 모든 전쟁범죄를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는 또 요즘 선진국과 개도국간에 일고 있는 치열한 인권논쟁과 관련, 각국 정부가 세계인권선언을 자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은 특히 강대국에게 크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대국은 약소국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제재를 하면서도 정작 중국 같은 강대국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뼈아픈 지적이다.

    POWER 076 힘 없는 자의 힘: 아웅산 수지

  "그녀는 힘 없는 사람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이다."
  세계적 문호이자 시민운동가로 유명한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1991년 자신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명되자, 그 영예를 아웅산 수지Aun Saun Suu Kyi 여사에게 돌리며 한 찬사이다.
  미얀마(구 버마)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고 아웅산 장군의 장녀로 현재 네윈 군부의 온갖 박해에도 굴복함이 없이 도도하게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는 아웅산수지 여사(49). 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녀는 미얀마 최고 명문의 가냘픈 한 여인에 불과했다.
  15세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간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모교의 영국인 교수 미카엘 에어리스(현재 미국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와 국제결혼해 두 아들을 키우며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1988년 모국에 있던 노모가 병으로 자리에 줍자, 그녀는 모친의 간병을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귀국 당시까지만 해도 그녀는 모국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해 3월부터 사반세기에 걸친 네윈 군부의 철권통치에 분노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미얀마 민중의 전국적인 대봉기와 총파업이 발생했다. 그러자 군부는 친위 쿠데타로 맞섰으며, 이 과정에서 348명(시민측 주장 1천여명)의 시민이 길거리에서 총칼로 무참하게 학살됐다. 미얀마의 ‘광주 학살’이 진행된 것이다.
  이처럼 잔혹한 군부의 탄압과정을 목격한 수지여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마침내 그녀는 그해 8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이 투쟁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그해 9월 재야와 야당의 연대조직인 전국민주연맹 (NLD)의 의장직을 맡은 그녀는 당시 야당들조차 감히 이름을 들먹이지 못하던 군부 독재자 네윈을 정면에서 공박함으로써 일약 미얀마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녀는 당연히 군부에 의해 파괴분자로 낙인찍혀 체포됐고, 1989년 7월부터 양군의 잉야 호수 주변 가택에 연금된 이래 지금까지 만 5년이 지나도록 외부인과의 접촉이 일체 금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반독재투쟁은 총칼로도 철조망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다. 1990년 5월 총선에 즈음해 아웅산 수지를 지도자로 내세운 민족민주연맹(NLD)은 군부의 공포 분위기 아래서도 그녀의 초상화 한장을 앞세우고 전국을 누벼 485석 중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군부는 총선결과를 인정치 않고 지금까지 군사독재를 계속하고 있다. 그녀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군부의 출국금지로 가족이 대신 상을 받아야 했다.
  1993년 리고베르타 멘추, 고르바초프, 달라이 라마, 투투 주교, 오스카 아리아스 등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14명은 아웅산 수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방콕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1994년에도 아웅산 수지의 무조건 석방을 촉구하는 연대성명을 재차 발표했다. 서방의 엠바고(경제봉쇄)와 인권공세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미얀마 군부는 최근 수지 여사와 대화를 재개하여 당면한 정치, 경제위기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군부는 연금 5년 만인 1994년 9월 최초로 수지 여사와 공개리에 직접 만나 그녀의 국외망명을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녀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1988년 총선결과대로 민간에게 즉각 권력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도 1994년 말부터 수지 여사의 석방을 위해 국무부 고위관리가 네윈 군부와 접촉하는 등 본격적인 외교공세에 나섰다.
  특히 미국은 미얀마의 풍요로운 천연자원을 겨냥해 양국관계 개선을 서두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한 예로 미국정부는 미얀마 군사정권이 인권회복을 비롯한 민주화계획과 마약단속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큼 성의있는 태도를 보일 경우 양국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겠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국무부의 하버드 동아태 차관보는 지난 1988년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로 4명의 고위급 정부사절단을 이끌고 1994년 11월 초 미얀마를 방문, 칸니운트 중장 및 온 기아우 외무장관 등과 만나 미국측의 이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특히 5년간 자택 연금상태에 있는 아웅산 수지 여사가 석방될 경우 미국은 미얀마와 건설적 협력관계를 수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미얀마측의 즉각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으나 외교전문가들은 이번 미국의 미얀마 방문을 계기로 조만간 양국관계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선 이번 미국측 방문은 지난 10월 미국을 방문한 돈 지 미얀마 무역장관의 초청으로 성사됐으며, 미얀마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최대 걸림돌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연금해제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전향적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는 현재 수지 여사의 해외망명을 제안하고 있으나 수지 여사가 이를 강력히 거절함에 따라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조건 아래 가능한 한 빨리 그녀의 가택연금을 푸는 방안을 모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미국정부도 미얀마의 풍요로운 석유 및 가스 자원을 겨냥해 최근 투자를 급속히 추진중인 미국기업들의 압력에 의해 미얀마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어 양국관계는 조만간 개선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서방 관측통들은 궁지에 몰린 미얀마 군부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수지 여사의 활동 재개를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미얀마에 제 2의 코라손 아키노 정권이 출범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인간을 부패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권력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휘두르는 자들을 부패시키며, 권력의 횡포에 대한 두려움은 이에 복종하는 자들을 부패시킵니다."
  수지 여사가 1991년 군부의 방해로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참석 못하게 되자 아들을 통해 대신 읽게 한 지구촌에 보내는 감동적 평화 메시지 중 일부이나, 그녀야말로 ‘힘 없는 자의 힘’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강력한 증인인 셈이다.

    POWER 077 마야의 여왕: 리고베르타 멘추

  1959년 과테말라의 마야족 인디오 원주민들이 모여사는 키체주의 오지 치멕마을에서 태어난 리고베르타 멘추Rigoberta Menchu가 지난 1992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전세계인들은 "멘추가 누구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다수에게는 낯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일생은 노벨평화상을 받기에 충분한 가시밭길 투쟁사, 바로 그것이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8살부터 백인의 대농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원주민들의 자결권에 일찌감치 눈떴다. 특히 그녀의 정치적 각성에는 부친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과테말라 군부의 폭정에 대항해 농민단결위원회 (CUC)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녀의 부친 빈센트 멘추는 그후 게릴라들과의 연대 아래 농민과 과테말라 전체인구의 53p를 차지하고 있던 인디오들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벌였다. 자연스럽게 멘추와 그녀의 오빠들도 부친을 따라 이 투쟁대열에 가담했다.
  특히 그녀는 당시 남미를 휩쓸던 해방신학에 접하면서 사회개혁과 여성인권에 대해 크게 눈뜨게 되었다. 이후 멘추는 수도 과테말라 시티에 가서 하녀 생활을 하며 압제자들과 싸우기 위해 모욕을 참으며 압제자들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귀동냥으로 배웠다. 그녀는 1979년부터 부친이 이끌던 CUC에 가입해 원주민 인권운동에 본격 나섰다.
  그러던 중 1980년 1월 31일 농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돌려달라며 동료들과 함께 콰테말라 시티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을 점령했던 그녀의 부친이 비참하게 학살됐다. 또 그녀의 오빠는 16세가 되던 해 보안군에 의해 고문을 당한 뒤 산 채로 불에 태워졌으며, 그녀의 어머니 또한 보안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나무에 묶여 학살됐다. 그녀 또한 정부전복을 도모하고 있다는 군부의 누명을 쓰고 학살되기 직전인 1981년에 멕시코로 망명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부친의 뒤를 이어 CUC와 콰테말라 야당대표연합의 지도자로서 미주대륙에 사는 3천만 인디오들의 인권 쟁취를 위해 맹렬히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니카라과의 좌익 산디니스트 게릴라를 비롯해 당시 남미를 휩쓸던 각지의 게릴라투쟁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그녀의 헌신적 투쟁에 감명받은 남미인들은 작달막한 키에다가 별로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은 그녀에게 ‘마야의 여왕’이라는 최고의 애칭을 붙여주었다.
  1983년 그녀는 군부에 의해 30만 명이나 학살된 인디오의 비극과 자신 가족의 투쟁사를 담은 (나, 리고베르타 멘추) 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출간 직후 11개 외국어로 번역된 이 책에서 멘추는 자신의 어린 시절 그녀 가족을 포함한 인디오들이 처참하게 학살되는 장면을 생생히 묘사해, 그 실상을 모르던 전세계 지성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책을 본 세계지성들은 과테말라 등 해당국가들에게 인디오 학대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일제히 촉구하고 나서는 등 전세계로 알려지면서 세계인을 감동시켜 그녀는 1990년 유네스코 평화교육상, 1991년 프랑스 자유인권옹호 위원회상을 수상한 데 이어 마침내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정부는 그녀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 1986년 과테말라에 민간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그녀에 대한 귀국조치는 상당기간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1987년 이후에야 치열한 투쟁 끝에 겨우 4차례 조국을 잠시 방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유엔원주민 문제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그녀는 UN이 선포한 ‘국제원 주민의 해’인 1993년에는 UN 친권대사 자격으로 일본, 브라질 등 원주민과 혼혈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 세계각지를 돌며 2억 명에 달하는 원주민의 권리 보호, 인종동화 및 말살정책 철폐를 호소했다. 그는 또 최근 정부와 기업의 개발 드라이브로 인해 원주민 고유의 문화와 생활을 보존해온 자연과 환경이 급속히 파괴돼 원주민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면서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가장 잔인한 탄압과 박해를 받은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녀는 사회 및 정치활동을 함에 있어 항상 투쟁의 최종목표가 평화라는 점을 잊지 않아왔다."
  노벨 평화위원회의 프란시스 세예르스타트 위원장이 1992년 10월 멘추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면서 한 말이다. 남미대륙의 자랑스런 딸 멘추에게 걸맞는 찬사였다.

    POWER 078 중국의 눈엣가시: 달라이 라마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600만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유명한 달라이 라마The Dalai Lama 14세는 1935년 티베트 동북부 탄셀에서 대단히 가난한 농부의 16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그는 라모 톰드프라고 이름 붙여진 평범한 시골 벌거숭이에 불과했다.
  톰드프가 세 살이 되던 1938년 그의 운명을 뒤바꿀 한무리의 라마승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1933년 말 사망한 달라이 라마 13세의 전생자를 찾아 티베트 일대를 수년간 헤매던 탐색대 일행이었다. 티베트에서는 1391년에 태어난 초대 달라이 라마 이후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얼마 후 아기의 몸을 빌어 환생한다는 토속신앙이 받들어지고 있다. 톰드프는 집을 찾아온 아마승들에게 달라이 라마 13세의 전생을 전에 본듯 소상히 말했다고 한다. 여러 확인절차를 거쳐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결론 내려진 그는 네 살이 되던 1939년 라마승들에 의해 포탈라 궁전으로 옮겨져 제14대 달라이 라마에 정식 취임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모든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평온히 생활하던 그의 운명은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또다시 뒤바뀌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대륙의 완전한 통일을 이유로 1950년 10월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초기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티베트인들의 거센 독립운동을 자제시키면서 가능하면 대화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1954년 마오찌뚱 중국 국가주석과의 만남 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베이징으로 달라이 라마를 부른 자리에서 마오주석은 "종교는 독이다. 종교는 우선 민족을 쇠락케 하고, 국가의 진보를 막는다"고 경멸하면서 말했다. 이때부터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전역에서 격렬히 진행되던 게릴라 독립투쟁을 암묵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1959년 중국 주둔군은 달라이 라마를 중국사령부로 호위 없이 오라고 초대했다. 티베트인들은 이 초청이 달라이 라마를 잡아 자신들의 저항을 원천봉쇄하려는 음모로 해석하여, 수주간에 걸쳐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소요가 확대되자 중국군은 무력탄압에 나섰고 그해 3월 17일 밤 당시 23세였던 달라이 라마를 승복을 벗고 티베트군 병사복장으로 위장해 성을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 소식이 전해지자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그 뒤를 따라 인도로 망명했다. 10만 추종자들과 함께 인도 북부 고원도시 다람살라에 망명정부 사무실을 차린 달라이 라마는 그때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테베트 망명 정부를 이끌며 끈질기게 비폭력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해 중국정부에 대한 국제여론이 대단히 나빠진 외부상황 덕에 그는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유베지에서 자유) (1990년) 같은 저서를 낸 그는 수시로 전세계를 돌며 북경 올림픽 개최 반대와 같은 반중국 투쟁을 전개중이다. 그는 지난 1988년 외교권은 중국에 위임하고 티베트는 완전한 자치를 획득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스트라블 제안’을 한 바 있으며, 앞으로 50년 내에 티베트의 독립이 달성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정부는 골치거리인 그를 귀국시켜 국내에서 콘트롤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막후에서 그와 협상을 벌였으나, 티베트의 완전자치를 귀국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그의 고집으로 인해 결렬되곤 했다.
  국제 전문가들은 해안 공업지대와 내륙 농촌지역간 소득격차가 10배 이상 벌여질 정도로 불균등 발전을 하고 있는 중국이 조만간 이 문제로 커다란 정치적 내분을 겪을 것이며, 이럴 경우 내륙의 소수민족들은 달라이 라마를 간판으로 내세워 1980년 말 소련에서처럼 거센 분리 독립 운동을 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POWER 079 녹색지구 파수꾼: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1971년 캐나다 환경운동단체 ‘해일을 만들지 말라'(당시 회원숫자 12명) 소속 회원 3명이 미국의 알래스카 암치카 핵실험에 반대하는 격렬한 해상시위를 벌였다. 그린피스 Greenpeace International라는 이름을 세상에 최초로 신고한 반핵시위였다. 그린피스란 당시 이들이 핵실험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했던 자그마한 낡은 배 이름으로, 세계언론은 이때부터 이들을 그린피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출범 당시 회원숫자가 12명에 불과하던 그린피스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반의 상상을 넘어서는 거대한 환경파워로 급성장했다. 그린피스는 현재 전세계 31개국에 43개 지부를 두고 전세계 158개국에 400만 명(그 중 3분의 1이 독일인)의 회원과 첨단장비로 무장한 8척의 선박, 월급을 받는 1,300여 명의 상근직원을 갖추고 있다. 자금력도 대단해 그린피스는 회원들의 순수 기부금만으로도 연간 1억 5천만 달러(1,200억원)의 천문학적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그린피스의 회장직은 1992년부터 이사회에서 선출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청년 환경운동가 폴 길딩(34)이 맡고 있다. 이사회 밑에는 해양, 정치, 캠페인 분과 등 실무를 집행하는 6개 전문분과가 설치돼 24시간 전세계의 환경을 감시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는 그린피스는 인공위성을 통해 신속한 자료수집을 한 뒤 이를 런던 지부에 있는 통신분과로 넘겨 분석하는 최첨단 형태의 환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 이들 뒤에는 이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해주는 ‘그림자 과학자 그룹’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으며, 1993년 러시아의 동해 핵폐기물 방류 때 일본이 그러했듯이 각국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급 정보를 비밀리에 제공해주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린피스는 또 이처럼 환경정보를 (그린와이어)라는 일간 소식지 형태를 빌려 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그린피스는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아무리 과격한 투쟁방식이라도 사양 안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핵연료의 수송을 막기 위해 철길 위에 쇠사슬로 온몸을 묶고 눕는가 하면, 일본의 고래사냥을 막기 위해 포경선의 작살 앞에 몸을 내던지기도 했다.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에 항의해 개선문에 밧줄로 매달리고, 유엔본부 깃대 위에 몸을 묶고 미국정부의 반환경정책을 규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72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모투로아 환초 근처에서 프랑스 군함에 의해 자행된 그린피스 핵실험 감시 선박의 대파 사건, 1985년 역시 동일장소에서 프랑스 첩보기관에 의해 자행된 그린피스의 레인보우 워리어호의 격침 등을 꼽을 수 있다. 1993년 일본의 플루토늄 해상수입 감시 때도 해상자위대 군함의 의도적 충돌로 인해 배가 침몰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특히 배가 격침되는 과정에서 한 명의 그린피스 대원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한 1985년 레인보우 워리어호 사건은 국제적 공분을 크게 사게 되어 프랑스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은 사임위기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린피스는 이제 지상의 그 어떤 정부나 다국적 기업도 무시 못할 막강한 환경파워가 됐다. 그러나 최근 제3세계 환경운동권 일각에서는 그린피스의 주요 활동방향이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최대 기부금 제공국가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결정되고 있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린피스가 앞으로 넘어야 할 큰 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

    POWER 080 가이아의 분노: 제임스 러블록

  영국인들의 자부심 중 하나인 보헤미안풍의 텁수룩한 생태학자 제임스 러블록 James E. Lovelock은 생태학Ecology을 최초로 창시해 국제적 생태계 보호운동의 이론적인 틀과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세기적 대학자로서 환경운동가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1919년 영국 하트퍼드셔에서 태어난 러블록은 맨체스터 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의학, 생물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미국의 하버드, 휴스턴, 예일 대학, 미국우주공화국(NASA) 제트 추진연구소에서 경력을 쌓은 뒤 1964년부터는 일체 연구소와 결별하고 지금껏 시골 고향집에 파묻혀 재야 과학자로서 지구 생태계 보호를 위해 다각도로 활동중이다. 그는 자신이 시골생활을 하는 이유를 학회나 대학, 연구센터에 의존하게 되면 동료나 상사로부터 사회적 압력을 받아 도그마나 파벌주의에 빠져들어 과학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상상력이 메말라 버리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연구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자신이 발명한 DDT등 살충제의 유무를 체크하는 데 쓰이는 전자계수기 같은 특허품의 사용료를 통해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는 1972년에 지구는 생명체와 무생명체인 대기, 해양, 대지가 하나로 엉켜 부단히 상호작용하며 적합한 생존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유명한 가이아GAIA 학설을 제창하여, 전세계에 커다란 지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러블록이 지구를 가리키며 사용한 가이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 여신은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이에게는 도움을 주나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보복을 한다. 이처럼 인간이 가이아의 허파인 열대림과 대양 훼손, 오존층 파괴, 살충제 확산, 유전자 조작 등과 같은 파괴행위를 계속할 경우에는 절대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게 러블록의 준엄한 충고이다.
  그는 자신이 지구를 ‘하나를 인간’으로 보는 독특한 가이아 이론을 창출하게 된 것은 1969년 달 탐사 때 최초로 전체 모습을 인류 앞에 드러낸 온통 녹색인 신비한 지구를 목격하는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경영자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다른 생물로부터 뽑힌 노동조합의 임원일 뿐이다. 모든 생물이 이 노동조합의 일원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내키는 대로 이 지구와 동료들을 이용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다."
  러블록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이다.
  그는 그러나 여타 환경운동가들이 즐겨 외치는 핵발전소 건설 반대 등은 19세기 러다이트(기계파괴운동 단체)류의 반과학주의적 사고가 낳은 그릇된 환경운동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원자력발전보다는 탄산가스 등을 양산하는 화력발전 쪽이 오히려 환경오염을 더 심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처럼 작금의 환경운동 방식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러블럭은 심지어 세계를 통틀어 지금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태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너댓 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러블록은 자신의 이같은 생각을 (가이아, 1979), (거대한 소멸, 1983), (가이아 시대, 1988), (가이아-실천적 지구치료의학, 1991) 같은 저서를 통해 꾸준히 전세계에 보급시켜왔다. 생태학 보호운동에 끼친 그의 공로를 높게 평가한 네들란드 왕립예술과학 아카데미는 1990년 그에게 암스테르담 환경상, UN은 글로벌 500 환경상을 각각 수여했다. 그는 현재 영국최고 석학들만 가입할 수 있는 영국왕립학회 회원인 동시에 해양생물학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POWER 081 환경문제는 곧 돈문제: 지구환경기금

  1980년대 미국 국무성과 환경평의회가 각계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수년간 조사연구 끝에 발표한 ‘2000년의 환경 및 자원에 대한 보고서’는 현상태로 계속 나가다가는 오는 2000년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종자 중 15–20p가 전멸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특히 그 가운데 2분의 1은 열대림의 파괴 때문에 멸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 예언이 맞는다면 인류는 조만간 6,500만 년 전 공룡의 멸망이래 최대규모의 종자의 절멸을 맞게 될 것이다.
  또 시에라 클럽 등 세계적 환경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미 지난 1950년부터 1983년 사이에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삼림 중 38p, 아프리카의 삼림 중 24p가 소멸됐다. 이런 자연의 황폐화 속도는 19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다가는 아프리카 비사막지대 중 5분의 2가 사막화될 위험이 크다. 이미 중, 동유럽에서는 산성비와 대기, 수질 오염으로 생물이 오염돼 평균수명이 짧아지고 있으며, 남북극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최대 생산지대로 발돋움한 중국과 동아시아의 오존층은 구멍이 뚫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극심한 남북간 빈부격차로 인해 선진국과 개도국은 서로에게 책임만 떠넘길 뿐 공동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년간에 걸친 남북간의 환경논쟁 끝에 지구촌은 마침내 지난 1991년 지구환경기금(GEF) 창립에 합의했다. 지구환경기금의 3대 주체는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환경기구(UNEP), 그리고 세계은행(IBRD)이다. 이들 기구는 현재 미국 워싱턴에 중앙사무국을 두고서 녹색 지구를 지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이들 3개 국제기구 중에서도 특히 중심적 역할을 하는 기구가 UNEP이다. UNEP는 1972년 유엔이 환경문제를 주체로 사상최초로 개최한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에서 발족된 지구환경보호 전담기구로, 환경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커다란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유명하다. UNEP는 발족 후 북서태평양, 지중해, 걸프만 등의 환경보호계획 수립을 비롯해 환경운동 비정부조직(NGO)의 지원, 환경실태 공동조사 등 다각적 활동을 펼쳐왔다. 이런 노력의 연속선상에서 지구환경기금 창설에 앞장섬으로써 선진국과 개도국간 가교 역할을 자임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환경문제는 곧 돈문제’라는 현실적 인식에서 출발한 지구환경기금은 기후 변화, 생태계 파괴, 해양 오염, 오존층 파괴 등 지구촌의 4대 환경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금 조달과 분배를 자신의 주업무로 설정, 이를 위해 매년 한 차례 지구환경기금 회의를 소집하고 있다. 기금 규모는 아직 20억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으나, 1992년 리우 국제환경회의 이후 그 규모를 45–50억 달러로 높이기로 잠정합의된 상태이다.
  선진국들로부터 환경보호 압력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등 개도국들은 기금 규모에 대한 불만이 대단하다. 리우 환경회의에서 77그룹이 중심이 된 개도국은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연간 1,25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경제개발협력기구 (OECD)가 중심이 된 선진국이 해마다 국내총생산(GNP)의 0.7p를 공적개발원조(ODA) 명목으로 출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현재 이 정도 규모의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는 북구 3국과 네덜란드뿐이다. 리우 환경회의에서 선진국은 명분싸움에서 밀려 마지못해 이 요구를 원칙적으로 수용했으나 아직까지 이를 실행에 옮길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환경문제는 곧 돈문제라는 인식에 행동이 뒤따라야 할 때이다.

    POWER 082 외로운 핵폐기 감시자: 국가원자력감시위원회

  러시아의 국가원자력 감시위원회 State Committee of Nuclear Security는 녹색지구를 위협하는 핵오염의 주범 중 하나인 러시아 당국의 핵폐기물 투기행위, 핵물질 보관 등을 집중 감시, 견재하는 러시아 내 최대의 핵감시기구로서, 러시아의 핵오염이 새로운 국제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그 역할에 큰 기대가 쏠리고 있는 기구다.
  국가원자력감시위원회는 명백한 한계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대한의 정치력을 발휘해 환경보호를 위해 노력중이다. 한 예로 1994년 8월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2천리터의 액체 방사능 폐기물을 동해에 재차 투기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을 이 위원회에 요청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1993년 10월 900리터의 폐기물을 동해에 폐기했다가 한국, 일본 등 주변국과 그린피스 등 국제환경단체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던 전례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현재 러시아 핵잠수함 해체과정에서 발생해 블라디보스크에 2만미터나 쌓여 있는 핵폐기물을 대책 없이 계속 방치했다가는 군부 등의 핵폐기물 방류 주장을 계속 거절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협상을 거쳐 현재 일본의 자금지원 아래 핵폐기물 저장소를 러시아에 건설중이다.
  국가원자력감시위원회의 최근 골치거리는 미국과의 전력핵 감축, 즉 START 협정 체결 후 러시아 내에 무더기로 쌓이고 있는 핵물질의 안전한 보관방식이다.
  현재 러시아에는 핵탄두 형태의 농축 우라늄이 500톤, 플라토늄이 100톤. 그리고 순수한 농축 우라늄이 200톤가량 저장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핵물질이 최근들어 국제 범죄단의 주된 타깃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 붕괴 후 이미 유럽에서만 러시아로부터 밀반출되는 핵물질이 300건 이상 적발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련 붕괴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군인이나 연구원 등이 이같은 핵물질 밀반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옐친 대통령의 엄명 아래 최근 국가원자력감시위원회는 이를 막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중이나, 과연 얼마만큼의 예방효과를 가질 수 있을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 위원회에서 1992년까지 핵시설 감시국장으로 근무했던 쿠즈네초프는 1994년 8월 외국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러시아의 핵물질 도난 사태를 상세히 밝힌 뒤, 러시아에는 핵물질을 물리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명확한 국가적 방침이 없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알자마스 16과 같은 폐쇄도시와 의학연구소 등이 국가원자력 감시위원회의 감시대상에서 빠져 있는 점, 모든 방사능물질을 망라한 리스트조차 작성돼 있지 않은 점 등을 꼽으며 쥐꼬리만한 봉급조차 제때 못 받고 있는 연구원들이 범죄조직의 유혹을 받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는 또 방사능 핵물질의 저장상태가 대단히 나쁘다면서, 우리야노프스키에 있는 지하 액체방사능 폐기물 저장소의 경우는 그동안 지진을 수반하는 자그마한 폴발이 3차례나 일어나는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국가원자력 감시위원회가 혼자서 책임지기에는 러시아의 핵오염은 너무나 힘겨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Power Group VII 검투사 시대 재현, 신 군사 파워

  "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 레온 트로츠키
  미국 후버 연구소의 프안시스 후쿠야마는 지난 1989년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 직전에 펴낸 저서 (역사의 증언)에서 사회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얼마 안 거서 동구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따라서 그의 주가는 한동안 상종가를 쳤다. 후쿠야마는 소련이 사라진 만큼 앞으로 지구촌은 정의로운 유일 초강국 미국의 지도 아래 더이상 분쟁이 없는 유토피아 생활을 할 것이며, 따라서 투쟁의 역사는 끝났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안 돼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났다. 투쟁의 역사가 끝나기는 커녕 오히려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거대한 포연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는 "역사의 종언? 후쿠야마의 종언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계속된 동서냉전으로 인해 새우신세가 된 우리 한민족은 더없이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전세계적 규모로 보면 냉전기간중 세계는 비록 끊임없이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나, 냉전 진입기에 발생한 한국정쟁을 예외로 한다면 냉전기 동안 동서 양진영이 격돌하는 전면전을 치른 적은 없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제1세계가 교묘하게 제3세계를 국지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전쟁주변 부화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냉전종식은 그러나 기존의 세계군사지도를 밑둥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선 소련이 소멸하자 유럽의 홀로서기가 본격 작동됐다. ‘로스케 고 홈!’에 이어 ‘양키 고 홈!’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통합유럽은 군사 헤게모니 상실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독일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유럽연합군 창설을 강행했다.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의 군사 헤게모니는 위협받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도 골치 아픈 터에 가공할 만한 경제성장을 무기로 삼은 중국의 외교, 군사 파워가 폭발했다. 신생 중국의 출현은 미국에게 ‘중국이냐, 일본이냐’는 파트너 설정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적성국이라고 설정했던 북한, 이라크 등 이른바 7적의 도전도 거세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은 핵 카드라는 절묘한 승부수를 꺼내듦으로써 미국의 벌목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았다. 북한이 배수진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를 모방해 쿠바는 난민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볼모로 미국과 대화를 강요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중동 전역에서는 호메이니의 후예들이 코란과 총을 흔들며 반미 원리주의를 외치기 시작했으며, 사라예보와 아프리카에서는 세기말적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다. 또 현재의 몰락에 분노하고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구 소련 지역에서는 슬라브민족주의가 서서히 꿈틀대고 있다.
  이미 과거의 동서 패권 구도, 그리고 미국의 울트라 파워 구도도 사라졌다. 미국은 더이상 실속없는 세계헌병 노릇은 안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미국 국익에 일치하는 국제정치 게임에만 관여하겠다는 의미이다.
  "전쟁은 외교의 물리적 표현이고, 외교는 또다른 형태의 전쟁이다." 클라우제비치의 (전쟁혼)이래 국제정치의 근간이 돼 온 철학이다. 과연 지금 새로 그려지고 있는 지구촌의 군사지도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몇 가지 사실은 있다. 과거 냉전 때와 같이 패권이 한두군데로 집중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한때 세간에 회자되던 미국 – 일본 – 유럽간 3극 구도도 이미 물건너간 이야기이다. 요컨대 다자산 다극구도가 미래 군사지도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또 향후 군사역학의 결정력은 더이상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21세기는 군사전쟁이 아닌 경제전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일 사가들이 21세기를 ‘검투사들의 시대’라고 다시 이름붙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POWER 083 날으는 백악관: 미국공군 제1호기

  광화문 제1번지가 청와대이듯, 세계 최강의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미국공군의 제1호기 Air Force One는 미국 최고권력을 상징한다. 미국공군 1호기야말로 ‘날으는 백악관’이라 불리는 대통령 전용기이기 때문이다.
  제1호기는 소련 붕괴 후 최소한 군사력에 관한 한 지구유일의 초강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최고통수권자가 타는 비행기답게 세계 최첨단 항공, 군수, 정보산업 기술이 총집결돼 있다. 세계최대 방위산업체인 미국 보잉사가 제작한 이 비행기는 안에는 전세계 어느 지역과도 즉각 통화가 가능하고 데이트 통신도 가능한 85대의 전화 등 최첨단 전자장비가 갖춰져 있다. 이밖에 7개의 욕실과 영화관, 회의실, 기자실, 수술실 등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다.
  이 비행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4억 1천만 달러(330억원)가 들었다. 백악관은 조지 부시 대통령 재임시절인 1991년 미국의 냉전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과거 20여 년간 사용해온 220인승 보잉 707기를 최신형 452인용 보잉 747기로 교체했다. 이 비행기는 중간 급유 없이도 2,200km나 날 수 있고 공중 급유도 가능해, 유사시 몇 달 동안이라도 지상에 착륙하지 않고 공중에서 전쟁을 총지휘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운항시간당 소요 경비만 4만여 달러(3,200만 원)나 들어간다.
  이 비행기에는 또 핵전쟁 발발 등 유사시에 대비해 미사일 방어체제와 핵폭발에도 견딜 수 있는 특수 방어장치 및 보호장치가 돼 있으며, 24시간 내내 미국공군의 엄호를 받고 있다. 또 미국대통령 외유시에는 이 비행기에 반드시 핵가방을 든 비밀요원들이 함께 탑승해, 유사시 전세계를 상대로 공중에서 핵전쟁을 지휘하도록 돼 있다. 말 그대로 지구촌을 누리는 ‘날으는 백악관’이다.
  이 날으는 백악관이 요즘 더없이 분주해졌다. 냉전 후유증이 지구촌 곳곳에서 폭발하면서 미국의 절대패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냉전이 끝나자 자신들이 지구촌의 유일 초강국으로 영원히 자리매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과거 반세기 냉전으로 인해 골병들기는 소련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몇 년 동안 미국은 세계유일의 핵무기 보유국이었고, 세계 돈의 72p를 장악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무한대 군비확장 경쟁이 모든 것을 망쳤다.
  연간 3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국방예산은 미국을 재정적자 4조 5천억 달러를 짊어진 지구촌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고, 따라서 서둘러 냉전을 끝낸 미국에게는 국제경쟁력 회복이라는 경제전쟁만이 지상 목표가 되어 버렸다. 미국에게는 더이상 국제전을 치를 여력도, 의지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국의 이런 치명적 약점을 간파한 이른바 미국의 적성국들은 차례로 미국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이미 북한은 핵카드를 사용해 50년 냉전의 고도에서 탈출하는 동시에 동북아 탈냉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미국에게 패전의 굴욕감을 안겨준 베트남도 일본이 선점하고 있는 동남아에 진출거점을 마련하고 싶어하는 미국의 속셈을 간파하고서, 상호 외교 대표부를 설치에 합의했다. 이어 쿠바는 난민을 무기로 미국의 엠바고를 풀려 하고 있으며, 미얀마는 아웅산 수지 여사, 그리고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볼모로 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
  이런 파상공세에 현재 미국은 한발짝씩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미국의 패배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보다 커다란 목적 달성을 위한 일보 양보로 보는 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미국은 지금 전세계 경제시장 재탈환을 위해 기업과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활동서 가장 중요한 점은 비경제적 이유에서의 적대세력을 존속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클린턴 미국정부는 이런 경제철칙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미국 군사파워의 약화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절대적 군사우위는 앞으로 최소한 25년간은 유지될 것이라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지배적 관측이다. 강력한 군사력의 확보야말로 경제패권 탈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하는 점을 제국경영 노하우가 풍부한 미국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OWER 084 펜타곤의 비밀병기: 국가안전보장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은 미국 중앙정보부(CIA)보다 더 막대한 정보수집, 분석능력을 자랑하는 미국 펜타곤(국방부) 특별활동국 소속 정보기관으로 그 실체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메릴랜드주 포트 조지미드에 위치한 본부의 근무자 숫자가 2만 4천명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며 한국 등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전세계 곳곳에 방대한 첩보 네트워크를 구축해놓고 있다. 연간 예산도 CIA의 연간예산 280억 달러의 2배에 달하는 535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소련과의 동서냉전이 극도로 고조된 1952년에 설립된 이래 CIA와 함께 미국 첩보공작의 양대 주출 역할을 하고있다. CIA가 주로 첩보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휴민트 HUMINT 방식을 택하고 있는 반면, NSA는 주로 위성촬영, 적외선촬영, 전파감청 등과 같이 최첨단장비를 이용하는 시전트 SIGENT 방식에 의존해 정보 수집을 하고 있다.
  현재 NSA는 전세계 주요 분쟁지역의 상공에 띄워놓은 키 홀(KH)등 20개의 고성능 화상정찰위성을 통해 지상에 있는 약 15CM크기의 작은 물체, 예컨대 지상에서 운행중인 자동차의 번호판까지 정확히 읽어내고 있다.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북한의 영변 핵개발단지도 24시간 내내 키 홀 첩보위성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
  NSA는 첩보위성 등을 이용한 무선전파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지하에 흐르는 미액한 자장을 수십 킬로미터밖에 설치한 지하 감청기를 이용해 역으로 해석하여 그 통화내용을 감청해낼 정도로 가공스런 정보수집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NSA는 이렇게 수집한 각종 정보의 해독 및 적성국의 암호분석, 암호의 작성, 관리 등을 하고 있다.
  NSA의 활동은 CIA의 경우보다 더 중요한 기밀로서 보호받고 있으며, 육군안전국 및 해군, 공군의 통신정보기구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감독권과 업무조정권을 행사하고 있다.
  NSA는 또 창립 직후인 지난 1947년 서방국가들끼리 은밀히 체결한 ‘UKUSA 안전보장조약’이라는 비밀협정에 의해 영국의 정보통신본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정보기관 및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첩보기구와 제휴해 서로 취득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각국의 국내법 때문에 하기 힘든 첩보활동을 서로 대신해 집행중이다.
  이같은 국제공작은 때때로 NSA의 두터운 베일을 한꺼풀 벗겨내는 결과도 낳고 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지난 1994년 캐나다 정보기관 CSE소속 전직 요원인 마이클 프로스트가 저서 (스파이 세계)에서 폭로한 가공스러운 NSA의 워싱턴 소재 해외공간 도청실태이다. 이들은 도청을 위해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동물까지도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11월 1일자 (워싱턴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프로스트는 CDS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NSA 요원들과 합동작전이나 훈련을 하던 중 NSA의 도청실태를 알게 됐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NSA는 비둘기 가슴에 미세한 도청장치를 이식한 뒤 러시아 외교관들의 대화를 일일이 도청해왔다. 심지어 이들 비둘기의 날개에는 고감도 음성송신장치와 안테나까지도 부착돼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날짐승인 까닭에 러시아 요원들의 의심을 전혀 받지 않은 이들 비둘기는 러시아 대사관 창가를 수시로 드나들며 대사관 직원들의 대화를 도청해왔다. 특히 대사관 사무실의 유리창이 하루종일 열려 있는 여름철에는 대단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게 프로스트의 전언이다.
  NSA는 이밖에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생긴 고감도 도청장치들을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의 벤치 밑에 떨어뜨려 놓아, 대사를 비롯한 고위관리들이 주고받는 은밀한 이야기까지도 샅샅이 도청했다.
  한편 NSA는 역대 한국정권 수뇌부에게도 여간 골머리 아픈 존재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초법적 장기집권과 핵무기 개발 강행으로 인해 미국정부와 더없이 관계가 불편했던 고 박정희대통령의 경우 당시 터져나온 청와대 도청사건 등을 통해 자신이 미국의 24시간 도청을 받고 있다고 판단, 일거수일투족에 극히 조심을 해야만 했다. 그는 따라서 측근들과 극비 대화를 나눌 때에는 청와대 건물 안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면서, 대화장소를 반드시 도청이 어려운 잔디밭 등으로 옮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당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여긴 상대가 NSA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NSA는 냉전종식기를 맞이해서는 활동반경을 경제분야로까지 넓혀, 미국의 국익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외국의 기업체와 단체들을 감시대상 명단에 포함시켜 이들에 대한 감청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 명단에는 외국의 금융기관과 석유회사, 곡물 메이저, 다국적 기업들이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OWER 085 싱크 탱크의 숨겨진 저력: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제국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허술한 존재가 아닌 만큼 하룻밤 사이에 허망하게 무너지는 법은 없다. 제국의 밑바닥에는 제국이 돼보지 못한 나라들은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위기극복의 지적 파워가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최근 종전의 카리스마를 급격히 잃고 있기는 하나, 미국은 여전히 20세기 말 최강의 파워임에 분명하다.
  미국의 지적 파워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대단하다. 미국에는 현재 1,200여 개의 크고 작은 싱크 탱크(두뇌집단)가 끊임없이 각종 정책을 양산해내고 있다. 이들 집단은 한 연구소에 많게는 1천여 명의 세계적 전문 요원을 고용, 연간 수백억 원의 연구비를 사용하며 제국 경영에 필요한 각종 정책을 제언한다. 전세계 정부 및 자본들이 앞다퉈 이들 싱크 탱크에 거액의 후원금과 연구비를 지원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이끌어내려 애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들 싱크 탱크 가운데에서도 특히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은 1993년 1월 빌 클린턴 민주당진영이 12년 만에 정권을 재탈환한 후 미국의 국내외 정책결정과정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후 두뇌로 유명하다.
  1911년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거금이던 사재 2억 3,600만 달러를 출자해 설립한 카네기 재단은 미국 내 최고역사를 자랑하는 두뇌집단으로서, 역대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국내외 정책결정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역사적으로 보수적 공화당보다는 진보적 민주당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레이건-부시로 이어지는 1980년대에는 공화당의 싱크 탱크 역할을 한 극우성향의 헤리티지 재단과 치밀한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카네기 재단은 1992년 말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 (세계의 변혁)이라는 두툼한 정책보고서를 통해, 더이상 실속없는 세계헌병 역할 대신 미국의 경제이익을 정책 결정의 최우선 척도로 삼는 실리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냉전시절 정책적으로 고립시켜왔던 북한, 베트남, 쿠바 같은 과거의 적성국가를 국제무대로 끌어내 포용함으로써 연간 3천억 달러에 달하는 살인적인 국방비를 대폭 줄이고, 그대신 이를 미국의 국제경쟁력 제고비용으로 전용해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카네기 재단의 이런 제안은 클린턴 정부에 대폭 수용됐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원스턴 로드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 등 카네기 인맥을 대거 요직에 기용했다.
  카네기 재단은 특히 북한핵 위기와 관련하여, 일관되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타결을 주장하는 실리주의적 비둘기파 입장에 서서 펜타곤(국방부), CIA, 헤리티지 재단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내 매파들과 치열하게 설전을 전개, 클린턴정부로 하여금 대화노선을 견지토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네기측은 1980년대 말부터 한시해 조평통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의 미국방문을 주선하고 샐릭 해리슨 수석연구원 등 재단소속 고위직 연구원들이 수시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주석과 독대하는 등 상호이해를 두터이 쌓아왔다.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카네기측은 그동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미국정부는 젊은 경제관료의 지지를 받으며 경제개혁을 추진중인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대북한 고립화노선을 철폐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북미수교를 실현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이런 까닭에 카네기 재단에 대한 북한당국의 신뢰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네기측은 1994년 6월 북-미 회담이 전쟁 일보직전의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샐릭 해리슨 수석연구원 등을 평양에 파견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최대 후견인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화특사로 끌어내 평양에서 김일성 북한주석과 단독회담케 함으로써 북한핵 위기 타결의 결정적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는 또 19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에서 역사적인 ‘핵타결 기본합의문’에 서명하는 날,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서울의 매파를 조심하라’는 글에서 북미 합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미국정부는 북한과 정치, 경제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양정권의 붕괴를 부추기려는 한국정부 내 강경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한국정부측을 자극하기도 했다.
  카네기측은 자신들이 한반도 평화협정의 중재자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한반도 탈냉전을 선사한 평화의 비둘기로 기록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굳게 바탕한 것이기 때문이다.

    POWER 086 한반도 탈냉전 기폭제: 영변

  영변의 약산의 진달래 꽃…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김소월 시인이 이렇게 애잔한 ‘진달래꽃’을 읊었던 곳 정도로 한민족에게만 그 이름이 알려졌던 평안북도 영변 이곳이 지금은 20세기 냉전의 마지막 뇌관인 동시에, 동북아 탈냉전의 시발점으로 전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파워센터로 급부상했다.
  1990년 4월 미국 국방부는 영변에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핵연료 재처리시설이 완성직전의 단계에 있다면서, 그 증거로 이 일대 시설들을 찍은 한 장의 위성촬영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미국의 동북아 헤게모니를 위협하던 남-북한, 북-일의 과속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핵카드를 먼저 뽑아든 미국의 노림수는 분명 동북아 냉전 존속이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1990년대 초 6공 정권 등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되던 동북아의 자생적 탈냉전은 그 싹이 잘렸다.
  초반 북한은 미국의 공세에 밀려 장기간의 실랑이 끝에 1992년 1월 핵확산 금지조약에 서명한 데 이어 그해 5월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수용했다. 핵사찰은 6회에 걸쳐 7개 시설에 대해 실시됐는데, 1993년 2월 IAEA는 이것만 갖고는 불충분하다면서 원래 사찰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던 2개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이것이 결정적 불씨가 됐다. 북한은 이들 시설들은 핵과 무관한 군사시설이라며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과 미국은 종전에 중단한다고 발표했던 팀 스피리드 훈련 재개를 선언했고, 이에 대응해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하는 동시에 준전시태세 돌입을 선언했다. 당시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초긴장 상태까지 고조됐다. 그럼에도 그 무렵까지만 해도 북한은 객관적으로 미국의 외교공세에 밀리는 수세였다.
  그러나 1993년 미국에서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고, 중국대륙에서 중화경제권(CEO)이 그 가공할 모습을 드러내면서 핵카드의 주도권은 하루아침에 북한 쪽으로 넘어갔다. 핵카드를 정면에 내세워 ‘제2차 한국전쟁이냐, 한반도 탈냉전이냐’를 묻는 북한의 배수진 앞에 한반도 주변 4강과 한국은 아연했고 이때부터 길고 지루한 줄다리기, 충성 없는 외교전쟁이 막을 울렸다. 북한의 꺼내든 핵카드는 애시당초 물리적 전쟁용이 아니었다. 냉전의 고도에서 고사당하지 않기 위한 외교전 카드였다.
  12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미국의 빌 클린턴 민주당정권은 애당초 전쟁 같은 물리적 해결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경제이익이었고, 따라서 미국의 거대시장인 중화경제권이 등장한 동아시아에서 실속없는 제2의 걸프전을 치를 의사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의 핵개발을 방치할 경우 일본, 한국, 대만 등이 잇따라 핵무장에 나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헤게모니는 붕괴되고 만다. 미국의 선택은 애시당초 대화를 통한 타협밖에 없었다. 북한이 일전불사의 배수진을 치고 나오자 1993년 6월 미국은 차관급의 제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을 개최했고, 이에 북한은 회담에서 NPT 탈퇴 유보를 선언했다. 영변이라는 핵카드로 마침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후 협상은 미국 내 비둘기파(백악관 국무부)와 매파(국방부, CIA)간의 갈등과 한국의 북-미 직거래 반발, 북한의 김일성주석 사망 등으로 여러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와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마침내 1994년 8월 13일 제 3단계 제네바 고위급회담에서 북-미 양국은 사실상의 수교전단계를 의미하는 외교대표부 상호 설치와 경수로 건설지원 등 경제교류 강화로 요약가능한 획기적 관계개선에 합의했다. 마침내 제2차 한국전쟁에서 한반도 탈냉전으로 한반도 역사가 큰 물줄기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4년여에 걸친 남북한과 미국이 기본합의문에 서명함으로써 그 장대한 스펙터클의 한 막을 내렸다.
  이번 동북아 외교 전쟁에서 가장 큰 실속을 챙긴 나라는 중국이었다. 평양과 워싱턴 모두 협상과정에서 장애에 봉착하면 중국에 SOS를 보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은 일본을 멀찌감치 제치고 동북아의 외교중심으로 자리매김됐다. 반면 상황을 주관적으로 읽은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은 외교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과정이 어떠했든 이제 동북아에 탈냉전의 씨앗은 뿌려졌다. 이미 북미, 북일 수교는 급박하게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앞으로의 과정이 순탄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엔파위를 앞세워 일본이 한반도 패권에 뛰어들고 러시아도 지분을 요구하는 등 또 한 차례 치열한 외교전쟁이 전개될 전망이다. 남북한간 대결구도가 쉽게 해소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대결구도가 계속되면 탈냉전은 2개의 한국을 고착시키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얼음이 녹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자연세계의 교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똑똑하게 민족의 공익을 추구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POWER 087 동서군축 해결사: 군비관리군축국

  "세계 전체로 볼 때 총 생산의 약 5p가 군비확장에 소모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낭비이다. 연간 3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국방비는 민간이 이용해야 할 약 4,500억 달러의 자원을 소모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구개발 요원의 약 절반이 군수행산 부문에 고용되었다. 과거에는 민간기술이 군사적 기술개발에서의 파급효과에 의해 개선되었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군사기술 쪽이 민간의 기술적 성과에 의존하고 있다. 군사비를 늘리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낡은 주장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1972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캐네스 애로우 Kenneth Arrow 미국 스탠퍼드 대학 명예교수가 1994년 9월 일본의 유엔 대학 홀에서 열린 ‘군축과 안보의 경제학’이라는 심포지움에서 행한 기조연설 중 일부이다.
  애로우 교수가 명쾌하게 지적했듯 더 이상 군축은 평화운동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각국의 사활이 걸린 최대 경제현안이 됐다. 특히 1980년대 상반기 서로 무한대 군비확장 경쟁을 벌이다가 일본에게 세계경제 헤게모니를 뺏긴 미국이나, 아예 소비에트 연방마저 해체돼 2류국가로 전락해버린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군축은 더 없이 절박한 현실문제일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의 여러 정부기관 중 가장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기관이 바로 미국과 구 소련의 핵무기 해체 협상 등을 주관해 온 군비관리군축국 The U.S. Agency for Disarmament, 곧 ACDA이다. 1961년 군축연구와 입안의 중심기관으로서 국방부로부터 독립한 군축 최고전문가 집단인 ACDAD의 현재 최고책임자는 토마스 클레엄 군장으로, 그는 구 동구사회주의권과의 핵무기 감축협상 외에 제3세계의 군축업무도 총괄책임맡고 있다.
  ACDA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구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협상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은 일이다. 1987년 레이건 미국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중거리 핵무기(INF)를 3년 내에 완전 폐기하기로 합의하여, 양진영이 모두 2,612기의 핵무기를 폐기했다. 이어 1993년 1월에는 부시 미국대통령과 엘친 러시아대통령이 양국 모두 전략핵무기 숫자를 오는 2003년 까지 3–3,500기로 줄이기로 하는 START 2 협정에 서명했다. ACDA는 START협정에 기초해 1991년 말 분리독립한 우크라이나 공화국에게 경제원조를 해주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도 모두 해체키로 했다. 이 모든 협정의 체결이 바로 ‘그림자 평화군단’인 ACDA의 작품이다.
  핵군축 외에도 핵확산금지(NPT), 생화학무기 폐기교섭, 각국의 무기장비 동향 감시 같은 다각적 업무를 맡고 있는 ACDA는 1994년 초부터 본격화된 북한과의 고위급 핵협상에도 미국 대표단 내 실무진의 일원으로 반드시 동석하고 있다. 1994년 10월 17일 북한과 제네바에서 역사적 북미 관계개선 협정을 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 국무부의 로버트 갈루치 북핵대사도 이곳, ACDA출신이다.
  이들은 또 1994년 9월 중순 제네바에서 핵무기에 버금가는 대량살상무기의 엄격히 규제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80개 국가들은 1972년 체결된 생물학무기 금지협약을 위반한 의혹을 사는 국가들에 대해 즉각 임시진상조사위를 설치해 진상을 엄격히 조사하도록 하자는 군비관리군축국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드는 역사적 군축실무를 묵묵히 행하고 있는 ACDA. 이들이야 말로 진정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평화의 사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3세계 일각에서는 이들이 미국의 군사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약소국의 정당한 군사적 자위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군축이 내포하고 있는 야누스의 두 얼굴은 동시에 ACDA의 두 얼굴이기도 하다.

    POWER 088 유럽의 홀로서기: 유럽연합군

  1992년 5월 22일 프랑스 라 로셀에서 만난 유럽의 양대 강국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의 콜 총리는 장기적으로 현재 미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군사기구인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를 대체할 유럽독자군 Eurocorps 창설에 전격 합의하고 이를 위한 전단계로 우선 독불 합동군을 창설키로 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독불합동군 창설은 1991년 12월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핵심 조항 중 하나인 유럽연합의 공동안보정책의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 유럽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독불합동군 창설을 강행함으로써 유럽은 비로소 2차대전 후 47년간 계속된 미국의 방위우산에서 벗어나 독자방위체제로 가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마침내 유럽에서도 미국의 절대 헤게모니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이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19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탈냉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집요하게 계속돼왔다.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진 지금 왜 미군의 유럽주둔이 계속 필요한가라는 대중적 정서에 호소해서 독일과 프랑스는 집요하게 유럽연합군 창설을 추진해왔고, 그 결과 1990년 10월 최초로 4,200명의 독불혼성여단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유지를 원하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과 프랑스의 결합을 우려한 영국은 이에 크게 반발했으나 결국 이같은 움직임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1992년 로셀 협정에 따른 독불합동군은 이같은 기존의 독불혼성여단에 양국이 각각 1개 사단씩을 추가하는 형태로 구성됐다. 프랑스는 1개 기갑사단을, 독일은 2개 기계화사단을 배속시켜 전체 숫자를 3만 5천 명으로 크게 늘렸다. 통합본부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 두기로 했다.
  1995년부터 공시활동에 들어가는 독불합동군은 단지 활동범위를 유럽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있다. 유럽방위는 물론, 지구촌 전역의 평화유지를 위해 언제 어느 곳에라도 출병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4년 독일군의 유럽 밖 군사행동을 엄격히 규제해온 독일의회도 1994년 독일군의 유럽 밖 군사행동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울러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이 독불합동군을 확대발전시켜 유럽연합군을 창설한다는 데에 이미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는 만큼, 유럽연합군이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대체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POWER 089 지상최대 군사동맹: 북대서양 조약기구

  지난 1989년 소련 붕괴로 둥구권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기구 (WTO)가 해체되자 다들 이번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가 죽을 차례라고 말했다. 적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의미에서 였다. 실제로 나토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미국은 한때 36만 명에 달하던 유럽주둔 미군을 1994년 말까지 15만 명으로 절반 이상이나 줄였고, 이를 10만 명 미만으로 줄일 생각이다. 캐나다는 아예 유럽에서 자국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나토는 2차대전 후 소련이 중심이 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대적하기 위해 1950년 12월 미국의 주도 아래 북미와 유럽의 12개국이 참여해 유럽의 방패로서 발족했다. 이 군사동맹은 1949년 4월 워싱턴에서 조인된 북대서양조약에 근거해 창립된 까닭에 북대서양조약기구라고 불리게 됐다. 그후 그리스, 터키, 서독, 스페인 등이 잇따라 가입해 회원국 숫자는 16개국으로 크게 늘어나, 통합사령본부가 위차한 벨기에의 브뤼셀은 명실상부한 유럽방위의 심장으로 군리해왔다.
  그러나 냉전종식으로 나토는 존재이유 자체를 의심받는 절대위기를 맞게 됐다. 특히 미국의 방위우산에서 벗어나 유럽의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독일. 프랑스의 유럽연합군 건설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그 위기는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미국은 1992년 나토 산하에 기존 회원국 외에 구소련의 독립국가연합과 중동부 유럽, 발트 3국까지 참여하는 북대서양 협력회(NACC)를 발족시킨 뒤 이를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나토 가입시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과 독자적 유럽연합군 창설을 희망하는 독일, 프랑스 등의 반발로 이 구상은 제대로 말도 꺼내기 전에 좌절됐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동구권의 나토가입 희망국들에게 일단 옵저버 자격을 부여해 군사훈련과 평화유지활동 등을 같이한 뒤 일정기간이 지나면 가입을 허용하자는 평화동반자협정(PEP) 체결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초기에 냉담한 반응을 받았으나, 1994년 6월 러시아의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현실화됐다. 초기에는 이 협정에 강력히 반대하던 러시아도 국제사회의 핵무기와 안보문제에 대한 서방 강대국들의 사전협의 대상국이라는 특수지위를 인정받자 기꺼이 이 제안을 수용했다. 동구권을 끌어들임으로써 나토에게 새로운 존재의의를 부여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관철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향후 10년 이상 유럽에 주둔하며 유럽의 홀로서기를 견제할 명분을 확보하게 됐다.
  1994년 말 현재 PEP에 가입한 구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국 숫자는 모두 19개국에 이르고 있어, 이들을 흡수통합한 나토는 미국의 의도대로 탈냉전시대의 지구촌 최대군사동맹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94년 9월 러시아 등 구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국과 나토 가입국 13개국은 폴란드 서부에서 평화동반자 협정에 따른 첫 합동훈련을 펼침으로써, 새삼 유럽의 냉전종식을 실감케 했다.

    POWER 090 판도라 상자: KGB 아르히프

  모스크바 도심에 위치한 크렘린 국비문서 보관소인 KGB 아르히프 Archives에는 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KGB)를 비롯해 군 문서보관소,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각 지구당, 외무부의 1급 핵심자료가 말 그대로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역사는 그대로 보존해야 힘이 된다는 제국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이 관례에 따라 보리스 옐칠 러시아대통령도 얼마전 기밀자료 두 트럭분을 이곳에 추가했다. 이곳이야말로 20세기 세계사를 주도해온 냉전의 판도라 상자인 셈이다. 이곳의 자료가 완전공개되면 당연히 전세계는 엄청난 정치적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판도라 상자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재정난에 몰린 러시아당국은 거액의 차관제공 및 사용료를 전체로 이곳 자료를 서방국가에 공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이 대단히 바빠졌다. 이곳 자료가 공개될 경우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대단할지 잘 아는 프랑스는 1992년 2월 재빨리 35억 프랑(6,500억 원)의 원조를 러시아에 제공하는 반대급부로 1873년에서
1915년 사이 80년 동안의 러시아-프랑스 관련 비밀자료를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또한 체코는 1991년 하벨 정권 성립후 러시아와의 국교재개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 과정과 1968년 체코 민주화 진압 관련 기밀자료를 넘겨받았다. 이밖에 미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과 일본 등 아시아 각국들도 비밀리에 이곳에 소장된 자국관련 자료를 마이콜 필름으로 복사해 갔다.
  최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옛 KGB 요원들은 이곳에 보관된 자료중 1차로 러시아 국내 관련자료를 모아 (안보서비스)라는 이름의 격월간 잡지를 출간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밖에 1992년 3월부터 연구목적의 열람이 허용된 구 공산당중앙 문서보관소인 러시아 현대사 자료보관소 및 연구센터도 뚜껑이 열리기 시작한 세계최대의 판도라 상자로 명성높다. 모스크바 푸슈킨 거리 15번지에 위치한 6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에 위치한 이 자료실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현재까지 수집한 전세계의 기밀문건 150만 점과 장장 8,600m의 마이크로 필름 등 총 7천만 건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열람료와 복사비만 내면 세계 어떤 기관이나 학자라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한국관련 자료로는 주로 지난 1920년부터 1945년까지의 코민테른의 한반도 관련 결정사항과 회의록,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관계자료 등 구 소련정치국의 극비문서들이 무더기로 보관돼 있어, 한반도 현대사 연구가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어리석은 정치권력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역사의 무서운 진리를 보여주는 곳. 이곳이 바로 아르히프이다.

    POWER 091 죽음의 상인: 러시아 국가방위산업위회

러시아는 1991년 말 소련 해체 후 2년여 동안 군사예산을 자그마치 70p나 삭감했다. 러시아의 1994년도 군사지출은 현재의 국제환율로 따질때 200억 달러(160조 원)로, 같은 해 2,700억 달러를 기록한 미국의 13분의 1도 채 안 된다. 미국과 지구촌의 군사패권을 다투던 1980년대 중반까지의 소련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몰락상이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여 개에 달하는 매머드 군수산업체의 민수산업으로의 전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민수산업으로의 전환비용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국영기업의 민영화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군수산업은 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군수산업의 민영화에 거액을 투자해 보았자 뚜렷한 사업전망이 안 보인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당국은 대규모 실업사태와 군부의 반발 등을 우려해 공장폐쇄 등의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어정쩡한 상황 아래서 군수산업을 총괄하고 있는 러시아 국가방위산업 위원회 State Committe for Defense Industries가 궁여지책으로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 제3국으로의 대대적 무기수출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드난 카쇼기 등 종전의 쟁쟁한 무기상들을 제치고 직접 ‘죽음의 상인’으로 변신, 세계무기시장에 출현한 것이다. 그 결과 1994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전체수출액의 3할을 무기수출이 차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는 전체 수출액 가운데 석유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러시아의 첨단무기는 과거 반세기 동안 미국과 세계패권을 다투던 초군사강국 러시아답게 초고성능을 자랑할 뿐 아니라 가격도 다른 나라 같은 기종의 절반밖에 안 될 정도로 저렴해 각국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의 무기수출은 전세계 2위로서 현재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로 나가면 몇 년 안에 미국을 앞지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국가방위산업 위원회는 자국의 무기 수출을 늘리기 위해 수시로 국내외에서 무기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람회에 소개되는 무기들 중에는 어떤 나라 레이더망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평소 미국이 자랑해온 스텔스기를 포착해내는 신형 레이더를 비롯해, 영국이 ‘기적의 탱크’라고 감탄을 금치못하며 대당 500만 달러에 사들인 T-80 신형탱크, 미국의 스팅거 미사일보다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입증된 이글라 미사일 등 최첨단 무기들이 즐비해 각국 국망관계자들을 크게 유혹하고 있다. 러시아는 또 무기들이 산더미같은 외채 탕감수단으로도 이용하기 시작, 외채 중 절반을 무기로 갚는 방안을 한국과 논의하는 등 서방국가들과 다각적인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방위산업체들은 펜타곤을 동원해 한국 등 군사동맹국들의 러시아 무기수입을 막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실리주의 외교로 전통적 동맹관계가 크게 금가고 있는 지금, 과연 그같은 미국의 노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

    POWER 092 제3의 핵 파워: 우크라이나 공화국

  1991년 12월 1일 유권자 90p의 적극 찬성으로 소련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전격 선언해, 거목 소비에트 연방을 붕괴시킨 신흥 우크라이나 공화국 The Republic of Ukraine. 얼마전까지 인구 5,300만명의 농업국가에 불과했으나, 분리독립할 대 구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의 4분의 1을 자국 영토 내에 보유하고 있던 까닭에 군사력에 관한 한 미국,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숫자의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제 3국의 핵강국으로 하루아침에 부상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 흑해함대와 핵무기 관할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극한적 신경전을 벌이고, 그 와중에 민족간 갈등마저 심해져 자칫 잘못하면 핵전쟁까지 수반하는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될지도 모를 지구촌의 신흥 화약고가 됐다.
  분리 독립 후 핵무기 폐기를 둘러싸고 미국, 러시아와 2년여에 걸친 실랑이를 벌여온 우크라이나는 마침내 1994년 1월 초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엘친 대통령,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구 소련 전략무기를 폐기하는 3개국 성명에 서명했다. 성명의 요지는 제1차 전략무기삭감 조약 (START 1)에 관한 1992년의 리스본의 정서에 기초해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핵탄두를 앞으로 7년 내에 러시아로 이송해 폐기한 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대륙간 탄도미사일 SS19(미사일 1개당 핵탄두 6개씩 장착) 130기, SS24(미사일 한 개당 핵탄두 10개) 46기 등 176기(핵탄두 1,240개)와 공중발사 크루즈미사일 등 모두 1,768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게 7억 5천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하고, 러시아는 핵탄두 해체 때 생기는 고농축 우라늄을 원자력발전소 연료로 우크라이나측에 공급하기로 했다. 핵카드로 미국의 경제원조를 얻어낸 이같은 외교술은 영변의 핵개발을 앞세워 미국과의 수교와 경제원조를 얻어내려는 최근 북한 외교정책의 원형이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간신히 핵무기 제거의 큰 틀이 마련되긴 했으나 과연 합의한 대로 해체 과정이 순탄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간 갈등이 대단히 첨예해서, 유사시 핵무기를 앞세워 민족분쟁이 발생할 위험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전세계에 미치는 파장은 유고슬라비아 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각할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전체 주민의 7할이 러시아인인 크림반도 등의 동부지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독립해 러시아와 재통합하기를 강력히 희망하는 반면, 우크라이나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부지역은 민족독립국가 유지를 주장하고 있어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우리나라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 긴장과 대립이 오래 지속돼왔다. 초원지대에 자리잡은 우크라이나는 9세기경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키에프 공국이라는 통일국가를 세웠다. 러시아가 국가를 형성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러나 키에프 공국이 몽고의 침입으로 붕괴한 뒤 17세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러시아는 이때부터 맏형 노릇을 하며 우크라이나를 아우 취급해왔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러나 자신들이 유라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굽히지 않아 왔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자부심은 1933년 대기근 때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곡창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해서 5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발생하면서 씻을 수 없는 적대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분쟁의 불씨는 이처럼 오랜 기간 해묵은 것이다.
  그러나 1994년 7월 대통령에 새로 뽑힌 쿠츠미는 러시아와의 경제동맹 구축, 러시아인의 이중국적의 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런 노선을 취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파탄 일보직전의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었다. 자국에서 에너지원이 거의 안 나는 까닭에 천연가스, 석유 등을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우크라이나는 분리독립 후 러시아의 ‘자원 무기화’ 정책에 따른 에너지 공급 축소 및 가격인상으로 인해 해마다 2천p대의 살인적인 인플레와 연간 30p대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국가경제가 크게 위태롭게 되었다. 1933년에는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구 출생률이 5p 줄어든 반면 사망률은 6p나 높아지기도 했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쿠츠마의 이런 친러정책에 대해 서부 민족주의진영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 러시아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면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정정불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긴장도를 더해가고 있다.

    POWER 093 크림반도의 뇌관: 흑해함대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흑해연안 크림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세바스트폴리 항은 언제나 일촉즉발의 극한적 위기감이 맴돌고 있다. 이곳을 모항으로 삼고 있는 흑해함대 The Black Sea Fleet의 주도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공화국 사이의 신경전이 지난 몇 년간 대단하기 때문이다.
  ‘소련의 호수’로 불리던 흑해를 주 활동무대로 하는 흑해함대는 발트, 북방, 태평양 함대와 함께 세계 최강 전력을 자랑하는 구 소련 해군의 4대 주력함대 중 하나였다. 흑해함대는 특히 4대 함대 중 겨울철에 유일하게 얼지 않는 바다이자 구 소련으로부터 남쪽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창구인 흑해에 위치하고 있어, 그 전략적 중요성은 다른 함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흑해함대는 이미 핵탄두를 탑재하고 있거나 언제라도 탑재가능한 핵잠수함과 함정 380여 척, 전투기 330여 대, 7만 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맞은편 지중해에 배치돼 있는 미국해군 제6함대에 대한 24시간 경계와 연안 방어를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
  1783년 창설된 흑해함대는 1830년대 이래 이 지역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해왔다. 특히 1905년 당시 이 함대에 소속돼 있던 전함 포춈킨호 대원들이 일으킨 선상반란은 전국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흑해함대에 아조프 해의 해군을 통합시켜 오늘날과 같은 위용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분리독립을 강행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둘러싼 양국간 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측은 흑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트폴리 항구가 엄연히 자국영토 내에 있는 만큼 흑해함대는 자국 소속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해함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러시아 정부는 다른 곳은 몰라도 세바스트폴리 항구만은 러시아 영토로서 결코 우크라이나에 양도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양국간 갈등은 성명전 차원에서 멈추지 않았다. 평소 우크라이나계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 온 흑해함대(44p가 러시아계)의 러시아계 군인들은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고 크게 반발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흑해함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고 전투기를 몰고 러시아로 탈출하는 병사들도 속속 생겨났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측은 러시아계가 장악하고 있는 선박들을 습격해 관할권을 무력으로 탈환하는 등 전면전 일보직전의 아슬아슬한 위기가 끊임없이 계속돼왔다.
  이에 1992년 8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정상회담을 열어 흑해함대를 1995년까지 공동지휘하에 두되 3년 안에 이를 분할키로 잠정합의했다. 이어 1993년 6월에는 러시아 해군이 세바스트폴리항을 계속 이용하기로
했으며, 그해 9월에는 우크라이나가 지분을 갖고 있는 함대의 절반을 러시아측에 팔기로 합의했다.
  1994년 7월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선출된 쿠츠마는 러시아와의 화해를 통해서만 침몰직전의 우크라이나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면서,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공급받는 반대급부로 러시아측에 세바스트폴리 항구를 임대형태로 분할하자는 진일보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러시아측은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의회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계 군인 대다수와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크림 반도의 지방의회는 여전히 러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등 내부 반발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타협안이 순탄히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세바스트폴리항에 정박중인 함선들은 함장의 정치노선에 따라 구 소련 해군깃발, 우크라이나 해군깃발, 제정 러시아시절 깃발 등 3가지 깃발을 각기 내걸고 있다. 또 이 항구에의 외부인 출입은 철저히 봉쇄되어 허가증이 있어야만 이 도시에 거주하거나 통행하는 게 가능하다. 이같은 살풍경이야말로 흑해함대의 어지러운 현주소를 말해주는 대표적 상징이다.

    POWER 094 아시아의 생명선: 말래카 해협

  세계 최대 석유산지인 중동지역과 세계 최대 제조업지대인 동아시아를 잇는 해상로의 요충이 바로 말래카 해협(Strait of Malacca)이다. 말래카 해협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끼고 도는 대해협으로 길이가 장장 1천km나 되나 폭이 가장 좁은 곳은 8.5km밖에 안 될 정도여서 배가 지나기에 여간 아슬아슬한 게 아니다. 암초가 많고 수심이 23m이하인 곳이 99개소나 될 정도로 험난하며 적도 인근이라 기상조건도 좋지 않다. 해적들의 출몰도 잦다. 그러나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입해 쓰는 석유의 90p 이상이 이곳을 거칠 정도로 전략적 중요성이 절대적이다.
  이 해협은 국제법상 공해로서 어느 나라 선박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 하루 평균 2천 척의 선박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을 정도로 지구상 어느 해협보다 붐비며, 통과시간도 21시간이나 걸리다 보니 유조선 충돌, 침몰, 해적 출현 등 각종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이에 말레이시아 등 주변 3개국은 이 지역의 안전보장을 이유로 통과 선박들에게 통행료를 물리는 방안을 추진중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와 사우디 아라비아 등 산유국, 그리고 선박업체들의 대표기구인 국제해운회의소 등의 강한 반발로 아직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중국의 군사대국화,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 등으로 전략적 중요성이 한층 커진 이 지역의 헤게모니 선점을 위해 1992년 1월 말래카 해협과 인접한 싱가포르로 미국 제 7함대(태평양 함대) 소속 병참기지를 이동시켰다. 이곳이 막히면 그대로 질식사할 수 밖에 없는 일본 또한 유사시 해상자위대가 직접 이곳으로 출동한다는 공격적인 시 라인 (Sea Line) 방어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중국 역시 제 1의 가상적인 일본과의 무력분쟁이 발생할 때에는 자국군대로 가장 먼저 이곳을 봉쇄한다는 비상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등, 유사시 말래카 해협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3대 열강이 격돌하는 최악의 화약고가 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같은 최악의 사태가 발발해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것을 우려한 동남아국가연합 (ASEAN)은 현재 미국, 일본, 유럽연합, 캐나다,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세안이 참가하고 있는 아세안 확대 외무장관회담 (PMC)을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까지 참여하는 아시아 지역 포럼으로 확대개편해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에 버금가는 지역안보체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있으나, 이 지역의 헤게모니 선점을 노리는 주요 열강들의 외면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POWER 095 마지막 테러기지: 수단 테러 훈련캠프

  미국연방수사국(FBI)은 1993년 6월 25일 뉴욕 UN본부 폭파 테러 미수사건으로 미국에 주재하고 있는 수단인 6명을 체포했다. 당시 미국언론은 수단 외교관도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후인 그해 8월 18일 미국 국무부는 수단이 이슬람 과격파인 헤즈볼라, 파타하 혁명평의회(압 니달 구룹) 등 테러조직에게 국내에서의 훈련과 활동을 허용하고 있다면서 수단을 테러 지원국가로 공식 규정한 뒤 수단에 대한 일련의 보복조치를 취했다. 테러 지원국가란 미국이 현재 ‘테러 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이라크 등 6개국에 버금가는 위험국가라는 의미로서 이때부터 수단은 차관도입 등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다.
  또 미국정부는 1993년 미군을 비참하게 물러나게 만든 소말리아 민족주의자 아이티드 장군에게 수단이 지대지 미사일 등의 무기를 제공해 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단은 서방국가들의 뇌리에 리비아, 시리아 등의 뒤를 잇는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로 급속히 각인돼가고 있다.
  수단의 이같은 과격한 인상은 이슬람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1989년 6월 민족 이슬람전선(NIF)과 연대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바실 장군은 구후 NIF의 노선대로 이슬람화를 과감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바실 정권은 집권 직후인 1990년 9월 제 3세계의 최대 반미국가인 리비아와 4년 뒤 연합국가를 수립한다는 통합선언에 서명했다. 또 이란과는 1991년 군사, 경제협력 확대에 합의해 이란으로부터 2천 명의 이란혁명 방위대와 무기 지원을 받고, 이라크와는 1993년 공업기술인력 교환각서에 서명하는 등 반미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밖에 아랍 원리주의 테러조직에 대해 훈련장소와 도피처, 자금, 무기를 제공하는 등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아왔다.
  이처럼 수단이 과격파 지원을 본격화하자 당연히 미국, 이집트 등과의 관계는 더없이 악화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자국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수단에 대한 일체의 자금지원을 중단시키는 강경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다. 또 1992년 7월 튀니지가 수단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알제리는 1993년 3월 수단 주재 대사를 소환하는 등 친서방 아랍국가들과의 관계도 크게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수단은 냉전종식과 중동평화협정 체결에 따라 그 입지가 급속히 좁혀지고 미국의 자금봉쇄에 따라 외채가 크게 누적되는 등 경제난이 가중되자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수단은 1994년 8월 지난 19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급습 등을 주도한 국제 테러계의 살아있는 신화 카를로스(일명 자칼)를 잡아 프랑스측에 넘기고, 미국 등 서방국가에게 그 댓가로 테러 지원국가 해제를 요구하는 등 대서방 화해노선으로 급전환하기 시작했다. 후세인 술리만 아브 살리 수단 외무장관은 1994년 9월 말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역사상 가장 위험한 테러분자인 카를로스를 체포함으로써 수단정부가 국제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종전의 의혹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히 입증했다면서 수단에 대한 국제경제봉쇄를 해제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수단 국제 테러리즘 캠프도 이제 폐업할 때가 된 셈이다.

    POWER 096 국제분쟁 중재 파워: 유엔사무국 군사고문위원회

  동서냉전 종식 후 국제분쟁 해결사로서의 위상이 높아진 유엔은 1993년에 한 해 동안에만 12개국에서의 평화유지활동(PKO)을 위해 35억 달러(2조 8천억원)의 예산과 7만명 이상의 요원을 분쟁지역에 동원했다.
  이같은 활동의 중추는 사무총장의 군사고문과 그를 보좌하는 스탭 40명으로 구성된 유엔사무국 군사고문위원회 (Military committee of the UN General Secretary)이다. 이들은 24시간 근무체제로 수시로 현장과 연락을 취하면서 각지의 PKO물자보급과 정보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이 기구는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의 빈번한 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탈냉전기에는 이들의 단 한 차례 거부권 행사도 없어 비로소 군사고문위원회가 인종, 영토분쟁 같은 ‘냉전 후유증’의 주도적 해결사로서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에 PKO군과 감시단은 27개 지역에 파견되어 이 중 캄보디아 등 15개 지역에서는 이미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하여, 현재는 유고슬라비아 등 12개 지역에서만 활동중이다.
  그러나 냉전종식 후 국내경제가 파탄지경에 처한 러시아가 PKO활동에 필요한 분담금을 거의 못 내고 미국도 국내불황을 이유로 이리저리 경비를 체납하고 있어 구호활동에 결정적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 이에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1994년 현재 누적 체납액이 37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유엔 창립 50주년이 되는 오는 1995년 유엔기구를 전면 개편하여, 현재 유엔 연 예산의 11p를 부담하고 있는 경제강국 일본과 독일에게 미국 규모의 분담금 (전체의 25p 부담) 갹출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이들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내심 경제력에 걸맞는 군사외교력 확보를 갈망해 온 일본과 독일은 당연히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본과 독일의 팽창주의로 인해 뼈저린 침탈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던 국가들은 갈리 총장의 이같은 노력이 여우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 

      VIII 해빙기의 시한폭탄, 원리주의 조직들

  "범지구적 경제근대화와 사회변화는 민족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약화시켰고, 그 공백을 종교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와 유태교, 힌두교, 이슬람교에서의 원리주의 확산이 그 증거이다." – 사무엘 헌팅턴

  ‘얼음이 녹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어린아이도 경험상 아는 해빙기의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은 자연세계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냉전종식 후 해빙기의 아침을 맞는 인류가 지금 몸살 앓고 있는 냉전 후유증보다 이같은 법칙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예도 찾아내기 힘들다.
  탈냉전은 인류에게 핵전쟁 위협으로부터의 해방과 사상의 자유를 선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탈냉전은 이와 동시에 미국과 소련이 지배하던 과거 냉전기에 깊게 숨겨져 있던 온갖 모순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탈냉전의 후유증이다. 그럼에도 소련 해체 후 지구촌 유일 초강국으로 자리매김된 미국은 ‘더이상 실속없는 지구촌 헌병 노릇은 못하겠다’고 발뺌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이익 방어만 하겠다는 뜻이다. 일본, 중국 등 신흥 경제강대국은 이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 하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범지구적 규모의 아노미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됐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3차례 범지구적 규모의 격렬한 분극화를 경험했다. 1차세계대전 직후의 소수민족 독립과 2차세계대전 직후의 식민지 해방, 그리고 동서냉전이라 불려온 ‘사실상의 3차세계대전’종식 후인 바로 지금 이 때가 그 순간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 권력지도가 전면적으로 다시 그려지는 중차대한 격동기를 반세기 만에 다시금 맞이한 것이다.
  과거 냉전하의 세계 질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 되었다. 약소국들은 미소 양극의 ‘주변부 대리전’을 치러야 했고, 그 와중에 제 3세계 민초들의 무수한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까지도 마지막 냉전의 굴레에 꽁꽁 묶여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냉전종식 후 세계 질서가 반드시 전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되 때로는 가파른 언덕을 만나 반동의 암흑기가 재도래하는 경우도 있음을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반동을 여러가지 형태로 목격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제사회를 불안케 만들고 있는 움직임은 기존의 국가 및 국제 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원리주의 세력의 우후죽순격 출현이다.
  원리주의는 한마디로 근대 국민국가 출현 이전에 존재했던 구질서로의 복귀를 외친다. 부조리하고 부패한 현질서에 대한 역사반동이다. 바티칸의 절대교조주의,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 인도의 힌두지상주의, 유태인의 선민주의 등에서부터 동양의 신비주의를 도용한 구미의 사이언톨로지에 이르기까지 지금 지구촌에는 온갖 과거의 제신이 아노미 상태에 놓여 있는 새시대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다.
  제신 부활의 토양은 다름아닌 ‘지금 이곳’의 모순구조이다.
  나날이 심화되는 제 1세계 중심의 세계질서, 한줌도 안 되는 지배층의 무한 특권과 부의 불평등 분배, 엘리트 집단에게로의 사회권력 집중 등 각종 부조리와 모순이 제신 부활의 가장 확실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원리주의 집단이 나름대로 그 사회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원리주의는 엄격한 집단규율과 절대복종, 이질적 가치에 대한 거부반응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제 3세계에서는 원리주의가 반외세독립운동의 가장 효율적 무기로서 역사발전의 촉매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 1세계에서 출현하거나 종파세력이 주도하는 원리주의 운동은 패권 쟁탈이라는 반 역사성에 기초하고 있다. 외양상 같은 원리주의의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함의는 정반대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과연 원리주의가 미래시대의 기관차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개인의 창발성과 다양성 발전, 상향성 민주화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은 또 한 차례 거센 원리주의 돌풍에 휘말려들고 있다. 과연 이 원리주의가 역사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유의미할지는 의심스럽다.

    POWER 097 교황의 비밀군대: 오푸스 데이

  라틴어로 ‘신의 뜻’을 의미하는 오푸스 데이(Opus Dei)는 전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다종다양한 조직에 극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극우 비밀결사체로, 정확한 실체는 설립된 지 7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유럽 언론들의 집요한 추적에 따르면 1994년 현재 전체 회원 숫자는 발생지인 스페인의 2만여 명을 비롯해 이탈리아 6천 명, 포르투칼 2,500명 등 전세계에 걸쳐 8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 주요국가를 비롯해 동구권 및 아시아의 가톨릭 국가에도 빠짐없이 비밀회원들을 확보해놓고 있다. 더욱이 이들 회원 대다수는 가톨릭 고위성직자, 외교관, 대학교수, 의사, 언론인, 법조인 등 그 나라의 상류층 구성원들이어서, 오푸스 데이는 이들을 이용해 어둠속에서 각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 회원의 3대 의무는 절대 복종, 절대 비밀, 절대 금욕이다. 중세 지하조직의 파시스트적 절대 율법을 맹종하고 있는 이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나 바티칸 고위층과의 막역한 친분을 이용해 바티칸과 전세계 가톨릭 내에서 절대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유럽언론들은 이들을 ‘교황의 비밀군대’ ‘성 마피아’ ‘가톨릭의 어둠의 세력’이라고 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
  문제의 오푸스 데이는 1928년 스페인 시골교구에서 과도한 공명심때문에 축출된 호세 에스크리바 신부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들어가 빈민가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탄생했다. 그후 스페인 전역으로 비밀리에 지하세포를 확장해 나가던 중 1936년 민주주의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간에 전면적인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발생하자 파시스트들을 이끌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진영에 재빨리 가담했다. 그는 스페인내전 발발 후 근거지를 프랑코 사령부가 있던 부르고스로 옮기는 동시에, 추종자들을 동원해 당시 유럽의 민주주의 진영이 적극 지원했던 스페인 인민전선 타도에 앞장서서 혁혁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프랑코의 절대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39년 인민전선이 진압되자 당연히 에스크리바의 세상이 활짝 열렸다. 그는 1929년 바티칸의 존립을 인정받은 뒤 무솔리니를 적극 지원하던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 연대해 ‘성스러운 가톨릭’의 이름으로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대가로 오푸스 데이 회원들을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으로 권력 심층부에 대거 진출시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 내각의 주요장관직이 모조리 오푸스 데이 회원들에게 장악되다시피 했다. 오푸스 데이가 권력을 잡자 당연히 기업들과 출세지향적 지식인들은 주변에 벌떼같이 모여들었고, 이 과정에서 오푸스 데이는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양손에 움켜쥐게 되었다.
  권력과 부를 함께 장악한 오푸스 데이는 이것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대표적 작업이 대학 설립이다. 오푸스 데이는 프랑코 총통의 전폭적 지원 아래 1952년 스페인 팜플로나에 나바레 대학을 설립했다. 3천여 그루의 고목들이 즐비한 115ha의 방대한 초원 위에 세워진 이 대학은 오푸스 데이 전위부대 양산의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학비가 전액 무료인데다가 매달 풍족한 생활비가 지원됐고, 졸업 후에는 자신이 원하는 병원이나 관공서, 기업에 대부분 취직이 가능했다. 이 대학은 지금도 1,100여명의 교수가 1만 8천여명의 학생을 맡아 오푸스 데이 이념을 집요하게 주입하고 있으며, 교내 곳곳에 설립자인 에스크리바 신부의 사진이 걸려있다.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 안에서의 교세 확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의 최종 타깃은 바티칸이었고, 바티칸을 통한 전세계 가톨릭 지배였다. 그러나 1963년 즉위한 교황 바오로 6세는 상당히 진보적이어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푸스 데이는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바타칸 추기경들을 하나둘 포섭해 나갔고, 마침내 기회는 왔다. 바오로 6세가 1978년 사망한 것이다. 이때부터 오푸스 데이는 보수적 인물을 교황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그 결과 마침내 당시 폴란드 크라크스의 대주교로서 우익성향이 대단히 강한 요한 바오르 2세를 교황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요한 바오르 2세가 교황에 선출되자 오푸스 데이는 마음놓고 세력을 전세계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푸스 데이는 특히 1970년대 중남미 등 제3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한 전투적 ‘해방 신학’이 출현하자 스스로를 보수 우익의 방패라고 자처하며 앞장서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바티칸 및 전세계 가톨릭 보구진영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오푸스 데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대단한 요한 바오르 2세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 공작에도 깊이 관여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여세를 모아 이 지역에 세포조직을 급속히 심어 나가고 있다.
  1992년 5월 바티칸 광장 앞에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내 양심세력의 격렬한 반대를 묵살하고, 지난 1975년 사망한 오푸스 데이 창시자 에스크리바 신부에게 성인 다음 가는 품계인 복자 시호를 내렸다. 오푸스 데이의 오랜 지원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들에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최고의 면죄부를 선사한 것이다. 에스크리바의 뒤를 이어 1975년 이래 지금까지 오푸스 데이 수장직을 맡고 있는 알바로 델 포르틸로 추기경은 이 기념식장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황의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 어쩌면 그는 속으로 ‘이제 전세계 가톨릭 장악이라는 최종 목표달성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POWER 098 초보수 전도사: 라디오 바티칸

  전세계 10억 명의 가톨릭 신자를 시청자로 하는 이른바 지구촌 최대의 전파교회가 바로 바티칸 시티 한복판에 본부를 두고 있는 라디오 바티칸 Radio Vatican이다. 1931년 개국한 이래 35개국 언어로 전세계를 향해 하루 24시간 내내 단파방송을 계속하고 있다. 송신국은 바티칸이 워낙 자그마한 탓에 불가피하게 이탈리아 영토인 산타 마리아 디 갈레리아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솔리니 시절부터 바티칸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는 이 송신탑이 위치한 일대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해주고 있다.
  라디오 바티칸의 최대강점은 청취거리가 수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단파(3–30MHZ)를 선교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파방송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 네덜란드에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동인도 식민지에 자국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단파방송을 개발했다. 그러자 소련,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이 앞다퉈 자기 체제의 우월성과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단파방송을 시작했고, 1931년 바티칸도 재빨리 이 흐름에 가담함에 따라 오늘날의 라디오 바티칸이 탄생하게 됐다. 단파방송은 특히 1934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파시즘 이념선전 도구로 본격 사용하면서부터,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정치 도구로서 전세계에서 널리 애용되기 시작했다
  라디오 바티칸의 애초 설립목적은 교황의 가르침과 가톨릭 교계의 소식을 신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티칸 지도부의 정치성이 강화되면서 여타 단파방송들과 마찬가지로 각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대처방안을 선전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해졌다. 특히 1990년대 초에는 유럽냉전의 탈냉전 과정에 깊게 관여하여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던 폴란드 등 동구 사회주의권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봉기 참여를 부추김으로써 사회주의 붕괴를 앞당기기도 했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지난 몇 년간 동구권에서 일어난 변화들은 대체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라디오 바티칸은 또 이에 앞서 1970, 1980년대에는 해방신학을 창출한 남미 가톨릭과 치열한 노선투쟁을 벌인 초보수적 바티칸 교황청 수뇌부의 ‘입’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라디오 바티칸은 인구 1천여 명의 초미니 도시에 불과한 바티칸이 전세계 10억 신자를 조정할 수 있게 해주는 지구촌 종교네트워크로서, 바티칸의 존립은 이 방송 덕분에 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냉전종식 후 미국의 소리, 라디아 티라나, 라디오 프라하, 라디오 모스크바, 라디오 리버트 등 기존의 단파방송이 방송시간을 대폭 단축하거나 아예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최근 들어 동서냉전때 극성기를 맞이했던 단파방송 시대가 급속히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어, 일각에서는 라디오 바티칸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각에서는 아직 전세계 160개국에 1,600여 개의 단파방송국이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앞으로 수십 년동안 단파방송 시대는 지속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되든 단파방송 시대가 끝나는 날, 바티칸은 상당한 시련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POWER 099 이슬람 원리주의 파워: 무슬림 형제단

  유럽의 제국주의가 아랍을 유린하던 1928년, 이집트의 회교 율법학자이자 국민학교 교사이던 하산 아르반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이집트에 무슬림 형제단 Moslem Brotherhood을 창설했다. 그후 이 조직은 중동 전역으로 확산을 거듭한 결과,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회교도들의 생활규범과 정치원리를 지배하는 대표적 원리주의 세력으로 뿌리를 굳게 내리게 됐다.
  19세기 말 실존했던 이슬람의 대사상가인 아프가니와 무하마드 압둘라의 원리주의 사상을 철저히 승계하고 있는 이들은 근대화 정책과 서구형 정치, 사회 양식을 거부하고 이슬람 교도가 마땅히 따라야 할 신조, 도덕, 행동양식을 규정한 샤리아(이슬람법)의 엄격한 집행을 통해 지상에 마호메드의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재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발족 당시에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에 대항했으나 제2 차 세계대전 후에는 공격 타깃을 미국과 부패한 아랍 제국으로 바꾸었다. 나세르 정권 시절에는 아랍민족주의의 위세에 눌려 한동안 무력화됐으나 나세르 사망 후 다시 되살아나, 1981년 이스라엘과 펑화협정을 체결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이슬람의 배반자라는 이름 아래 백주대낮에 암살해 세계를 경악케 하기도했다.
  1970년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에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의 급진적 이슬람 원리주의조직인 ‘하마스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14만 명의 변호사가 가맹하고 있는 변호사회를 비롯해 의사회와 기술자단체 등 지식인 사회에서 절대적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아랍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대거 가입했다.
  이들은 1992년 3월 호스니 무라바크 이집트 대통령이 450여 명의 무슬림 형제단을 사살하자, 자마이슬라미야 같은 무장단체들은 즉각 무라바크에 대한 성전을 선포한 뒤 집요한 테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현재 이집트 전체 국가수입의 절반을 공급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에 대한 테러를 조직적으로 단행해, 이집트 국가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대해 무바라크는 무슬림 형제단을 소멸시키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한 가혹한 소탕작전으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중동에 보편화돼 있는 정부부패, 오직, 빈부격차, 정치적 차별구조, 친미 사대주의가 계속 존재하는 한 무슬림 형제단의 대중적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이다.

    POWER 100 가자의 성난 영웅들: 하마스 운동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가혹한 지배를 받아온 팔레스타인 피점령지구 가자. 당연히 이곳에 사는 팔레스타인의 젊은 아들들은 앞을 다퉈 총과 화염병을 들고 나섰다. 이들 독립투쟁 조직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집단이 순니파들이 결성한 이슬람 원리주의조직인 하마스The Hamas Movement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독립기구(PLO)와 이스라엘이 자치협정을 맺어 서서히 중동의 시한폭탄으로서 파괴력을 전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하마스는 지난 1987년 12월 가자지구에서 자연발생적인 인티파나 민중봉기가 발생한 뒤 팔레스타인 청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이스라엘 점령 아래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의 즉각 완전해방’을 캐치프레이즈로 비타협적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란 ‘이슬람 저항운동’의 아랍어 머리문자를 딴 것으로, 그 안에는 ‘열정’이라는 뜻도 내포돼 있다. 이들은 1988년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가 결의한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을 타협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1991년 말부터 개시돼 1994년 5월 팔레스타인들의 자치권을 승인한 중동평화 협정 역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마스의 주력 테러부대는 1988년 세이크 아메드 야신(58)이 창설한 이제딘 알 카샴 여단이다. 20대와 30대 초반이 주축을 이루는 이들의 숫자는 수백여 명에 불과하나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 3–4명 단위의 지하 세포조직을 구축하여 팔레스타인 대중의 보호막 아래 자살공격 등 집요한 게릴라전을 펴고 있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인 야신은 1989년 체포되기 전까지 사지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병석에 누워 일일이 투쟁을 지휘하고 투쟁자금을 국내외에서 모금하는 불멸의 신화를 남겨, 현재 종신형을 받고 복역중이면서도 팔레스타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다.
  하마스에 대한 팔레스타인 대중의 지지는 대단해서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 가운데 최소한 30p가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며 그들을 ‘가자의 자랑스런 영웅들’로 추앙하고 있다. 또 가자지구 내 이슬람 대학 학생 등 청년 지식인들도 하마스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상당수가 하마스와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다. 하마스와 대중의 관계는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의 관계인 셈이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분쇄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마스는 특히 별도의 군사기지 없이 대중의 집을 교묘히 옮겨다니고 이중첩자가 침투할 수 없게 3–4명 단위로 조직을 운영하는 철저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기로 유명하다. 하마스는 또 새 요원을 받아들일 때 장시간에 걸쳐 면밀한 심사과정을 거치며, 새 가입자는 최하위급에서 전단 살포 등의 일만 맡기다가 신뢰도가 입증된 요원에게만 비로소 무기와 자금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팔레스타인인을 테러로 응징하는 외에, 이스라엘군과 치안부대에 대한 습격과 서방인 유괴를 부단히 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에 1992년 12월 415명의 하마스 추종자들을 가자지구로부터 국외로 강제추방했으나, 이들이 남부 레바논의 황야에서 캠프생활을 하면서 무기한 항의투쟁을 벌이자 국제적 비난여론이 일어 도리어 궁지에 몰리게 됐다. UN 안보리는 1993년 2월 추방자 전원복귀를 의결했고, 이스라엘은 결국 그해 9월 유엔의 압력에 굴복해 이들을 다시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마스는 지금도 중동평화협정을 체결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을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해 부단히 암살하려 하고 있으며, 1994년 10월부터는 이스라엘군 병사를 납치해 살해하고 텔아비브 한가운데에서 버스에 대한 폭탄테러를 단행해 수십여 명을 몰살시키는 등 이스라엘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나섰다. 이에 이스라엘도 하마스 지도자를 납치하고 1994년 10월 요르단과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등 강경한 하마스 말살작전으로 맞서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하마스에 대한 대대적 예비검속에 나서는 등 무력진압을 추진중이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출범에 따른 일반의 기대로 다소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나, 아라파트 자치정부가 전인구의 50p가 실업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경제난 등 뿌리깊은 가자의 가난과 절망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하마스의 대중적 영향력은 다시금 급속히 확산될 게 확실하다. 또 중동평화가 뿌리를 내릴 경우 민주화 욕구가 폭발할 것을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회교 왕조국가들과 원리주의를 추종하는 이란 정부 등이 은밀히 하마스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어, 하마스는 앞으로도 계속해 ‘중동의 뇌관’으로 작동할 것으로 읽힌다.

    POWER 101 알라의 젊은 사자들: 메디나 대학

  영국의 주간지 ‘선데이 타임스’는 1994년 7월 말 사우디아라비아 전직 대사관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체 핵보유를 위해 지난 1975년부터 추진해온 ’20년 비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의 핵개발 계획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폭로했다. 이 신문은 사우디가 지난 1975년부터 핵무기 입수를 위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자금을 지원한 데 이어, 1989년에는 사우디 지도자들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500만 달러를 지원했다면서, 후세인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핵무기 개발시 자국이 개발한 핵기술을 사우디와 공유키로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사우디는 평소 아랍권 21개 국가의 수장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소련 붕괴 후 자율권이 크게 신장된 중부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인도 등의 이슬람 신도들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한 경제원조 및 코란 보급 등 각종 물밑 공작을 집요하게 전개하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 같은 영국 사학자는 냉전종식 후 범지구 규모로 전개될 새로운 갈등 형태를 서방 기독교문화권과 중동 이슬람주의간 제2의 십자군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로, 최근 사우디의 심상치 않은 물밑 움직임에 대한 서방권의 의구심은 대단하다.
  그러나 사우디의 팽창주의는 이란 등 다른 아랍국가들과는 출발점을 달리한다. 제2의 이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우디왕실의 위기감이 팽창주의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실의 존립을 위협하는 내부의 압력을 팽창주의 외교정책을 통해 희석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1930년대에 히틀러가 사용했던 통치방식과 유사하다.
  사우디 왕실로 하여금 이같은 노선을 택하도록 위기감을 심어준 집단이 있다. 바로 이슬람의 절대성자인 메디아(아랍어로는 알 마디나)에 1961년 설립된 이슬랍 국립대학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메디아는 메카와 함께 전세계 이슬람신도들이 평생동안 한 차례라도 순례하기를 원하는 절대성지로, 예언자의 모스크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을 비롯해 우마르 같은 역대 이슬랍 성자들의 무덤과 유적이 즐비하다. 사우디 정부는 과도한 순례객 쇄도에 따른 성지 훼손과 서로 먼저 들어가려다가 1,426명이 압사한 1990년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연간 외국인 순례자 숫자를 100만 명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사우디 내국인들도 100만 명 이상 참배할 수 없다.
  이같은 이슬람의 절대성지 메디나 한가운데 위치한 이슬람 대학, 세칭 메디나 대학 Medina University은 자연스레 사우디는 물론, 세계 전역의 이슬람신자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결정짓는 메시지를 꾸준히 생산해내고 있다. 메디나 대학의 메시지는 코란의 정신에 철저히 기초해 있다. 이들은 무슬림 형제단 등 과격 원리주의 세력과는 일정 부분 맥을 달리하면서도, 현재의 친미적이고 왕족중심적인 중동질서에 대해서는 더없이 비판적이다.
  메디나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하고 유명 성직자와 법조인들이 함께 참여한 사우디의 최대 반정부세력 ‘이슬람의 각성’은 1991년 4월 파드 사우디국왕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사우디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들은 이 질의서에서 신의 법률 (이슬람법)과 모순되는 외교정책의 철회, 부의 공정 분배, 반민주적 현행법령의 전면개정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이슬람형 종정 일치 민주주의’로 요약가능한 이들 요구는 1991년 초 걸프전 이후 이슬람 지식인 사이에 급속히 팽배한 기존의 굴욕적 친미외교 노선에 대한 반발이 동인이 된 것이다.
  이들은 그후에도 서독대학에서 물리학상을 받은 모하메드 마시리 교수를 위원장으로 삼는 합법적 권리 수호위원회(CDLR)와 같은 반정부조직을 결성하는 등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걸프전 참전 대가로 100억 달러의 미국 무기를 사들인 사우디 왕가의 굴욕외교를 비판하는가 하면, 1994년을 기점으로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략한 사우디 정부의 경제 실정 등을 공격하는 이들의 활약은 정부기본법 제정, 자문위원회 설치 같은 개량적 민주화 정도만 허용하려는 사우디 왕가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
  특히 이들의 움직임은 메디나 대학생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어 앞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신학부 출신이 주축을 이루는 이들 대학생이 저항세력의 첨병이 되고 있는 원인은 두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하나는 심각한 실업난이다. 과거 이들은 졸업 후 사우디 관료기구에 흡수돼 우대를 받았어나, 원유가 폭락 등으로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이들은 무더기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우디 정부는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신학부 규모를 축소하는 실업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사우디 왕가가 외국에서 초빙해 종교교육을 맡긴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시리아의 무슬림 동포단 지지자와 이집트의 원리주의 세력 지지자가 끼여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학부 학생들에게 암암리에 이슬람 지상주의를 주입, 이들을 사우디 저항세력의 첨병이자 전파자로 만들어 나갔다.
  사우디 왕가는 이처럼 반정부 수위가 급속히 높아지자 1994년 9월 메디나 그룹을 추종하는 1,500여 명을 검속해 이 가운데 평소 미국 오락영화 등을 퇴폐문화라고 비판해온 종교지도자로 유명한 사팔 알 하와리 등 110명을 1979년 이래 최초로 공식 구속하는 등 초강경책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저항세력의 발언권은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동평화로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정에 실패한 사우디 왕조는 결국 이란 팔레비 왕조의 뒤를 잇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는 소리도 나올 지경이다.
  한편 서방국가들은 메디나 출신 지식인들이 득세할 경우 그동안 물밑에서만 추진돼온 이슬람 팽창주의가 더욱 노골화되는 한편, 기층 민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 등 급진원리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제2의 십자군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POWER 102 신흥 신비주의: 사이언톨로지 교회

  1950년 당시 미국 문단을 풍미하던 공산과학(SF) 소설작가 론허버드 (S.Ron Hubbard)는 그 무렵 극성기를 맞이한 미국의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에 염증을 느껴 자신을 교주로 하는 하나의 신비주의적 신흥종교를 창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수시로 미국과 유럽 사회를 수시로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이언톨로지 교회(Scientology Church) 일명 ‘과학교’의 효시이드.
  이 종교집단은 지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를 부정하고 자기수양과 정신요법을 중시하는 동양적 정신과학의 실현체로서 출발, 초기에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사회활동을 펴기도 했다. 한 예로 사이언톨로지는 창립 초기인 지난 1969년에는 산하에 시민인권위원회 (CCHIR)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해, 당시 정신병동에서 자행되던 환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억압상황과 정신질환 치료제 프로젝의 부작용을 홍보하는 거센 사회운동을 벌여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여론화 과정을 거쳐 사이언톨로지는 미국은 물론 서방세계 전역으로 급속히 교세를 넓혀, 현재에는 영국의 사이언톨로지 국제연맹 본부를 중심으로 전세계 65개국에 700여 개의 조직을 운영하고, 1천여만 명의 추종자를 확보한 거대한 종교파워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세가 급속히 비대해지면서 여타 신흥종교가 그러하듯 점차 사이비 종교단체로 변모해갔다. ‘타임’ ‘월 스트리트 저널’ 등 미국의 유수 언론들은 사이언톨로지를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신도들에게 가혹한 린치를 일삼는 탐욕스러운 사이비 종교라고 비판하는 폭로기사를 수시로 싣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이언톨로지측은 신문광고 형식을 빌려 과거 1950년대 매카시즘 시절 매카시의 전위부대로서 반공 극우의 앞장을 섰던 타임지의 낯 뜨거운 과거와 오보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하는 등 만만치 않은 역공으로 맞서서 미국언론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에서만 야기되고 있는 게 아니다. 유럽 각국도 사이언톨로지로 골머리를 앓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독일에서는 사이언톨로지의 횡포에 따른 사회문제가 잇따르자 1994년 들어 연방정부 차원에서 사이언톨로지를 불법화시키는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1970년에 최초로 독일에 상륙한 사이언톨로지 교회는 현재 200만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을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다. 그러나 교세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신자들의 재산을 강제로 헌금받아 부동산 투기를 하는 등 불법을 자행해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독일의 16개 주정부의 내무장관들은 1994년 10월 총선에 앞서 긴급모임을 갖고 사이언톨로지는 종교가 아니라 기업범죄이며, 자신의 신자들에게 광적인 테러를 가하는 정치적 음모집단이라고 규정한 뒤, 총선 후 출범하는 새 정부는 이 광적 집단을 불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같은 결의에 대해 모든 정당은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사이언톨로지측은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유수언론에 전면광고를 싣는 예의 수법을 동원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주장의 요지는 팽창주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는 헬무트 콜 독일정권이 그런 움직임을 경계하는 미국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미국 정부의 미움을 사고있는 우리를 마치 과거에 히틀러가 소수민족에게 자행했던 것처럼 대규모로 학살하려 하고 있다는 엉뚱한 궤변이었다. 그러나 독일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네오 나치주의자들과 함께 사이언톨로지를 독일을 좀먹는 양대 악으로 규정하고,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히고 있어, 앞으로 양진영 사이의 격돌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POWER 103 휴거될 그날을 기다리며: 루바비치 랍비

  메시아주의와 유태 선민사상을 신봉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유태교 초신비주의 세력이 포진해 있는 곳은 바로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초현대식 도시인 뉴욕 한복판이다. 루바비치 랍비(Lubavitch Rabbi)들은 이곳 뉴욕의 브루클린에 총본부를 두고, 메시아에 의해 휴거(하늘로 들려짐)될 그날을 열심히 기다리고 있다.
  18세기 중엽 슬라브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한무리의 유태인 초보수주의자들이 러시아의 루바비치에서 메시아의 부활을 준비하자는 이른바 현실 초월주의적 ‘루바비치 운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50여 년이 지난 지금, 루바비치 랍비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세계 38개국에 30여만 명의 신도와 1,800여 개의 랍비학교와 사무소를 보유하는 초거대 종교조직으로 급성장했다. 세계 금융을 장악하고 있는 유태인 금융 마피아들을 다수 신자로 확보하고 있는 까닭에, 루바비치 랍비는 연간 헌금액수만 1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자금력이 대단하다. 그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크라운 하이트 거리에 총본부를 두고서, 전세계 유태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다. 종파 운영은 6명의 원로 랍비들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에서 맡고 있으며 현재의 위원장직은 아브라함 샘토프가 맡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조직의 실제 지도자는 이들 원로 랍비들이 아니라 ‘레베’라고 불리는 루바비치 출신 랍비들이다. 1994년 6월 지난 43년간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해온 메나헴 멘델 슈니어슨이 92살의 고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7대에 걸쳐 직계 자손이 레베직을 계승해온 이들 루바비치 랍비들은, 스스로 살아 있는 메시아로 행세하며 절대적 영향력을 행세해왔다. 하지만 슈니어슨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급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최근 후계문제를 둘렀고 혼란과 내분이 적지않다.
  이들 루바비치 산도들은 1세기부터 5세가까지 4백여 년에 걸쳐 쓰여진 ‘탈무드’의 핵심 가르침인 유태 율법과 모시아크 ‘메시아’ 부활사상을 다른 대다수 유태인들이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이를 문자 그대로 철저히 신봉하고 있다. 탈무드는 유태 달력으로 오는 6000년(양력 2240년)에 모시아크가 지상에 부활해 악의 무리들을 징계하고 선민들을 중심으로 해서 정신적으로 완전한 세상을 실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탈무드의 예언보다 훨씬 빨리 모시아크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선민인 자신들과 그들의 집은 휴거당해 완전한 이상향인 예루살렘으로 순식간에 옮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들은 그런 조짐으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 러시아 유태인들의 이스라엘로의 대이주, 걸프전쟁 발발 등을 들고 있다. 또 슈니어슨 사망 직후 그가 예수처럼 사흘 뒤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라며 사흘 밤낮 동안 무덤 주위를 지키는 등 소란을 피우다가 크게 낙담하는가 하면, 백악관과 미국의회에 고인이 된 슈니어슨에게 명예 메달을 수여하라고 청원했다가 거절당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이들의 전매특허인 휴거사상은 전세계의 사이비 기독교 신흥종교에게 단골메뉴로 차용되어, 얼마전 한국에서도 한 차례 큰 소동을 불러 일으켰듯이 지구촌 사회혼란의 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POWER 104 벵골의 시한폭탄: 바라티야 자나타 당

  1980년 초반까지만 해도 볼품없는 일개 군소정당이던 바라티야 자나타 당 Bharatiya Janata Party이 오늘날 인도 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해, 9억 인도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집단이 된 데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폭발한 힌두교 지상주의가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 바라티야 자나타란 ‘인도 인민당’이라는 의미로 외부세계에는 약칭 BIP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힌두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까닭에 인도 안의 소수파(전체인구의 12p)인 회교도와 무력충돌이 잦다. 그리고 상층부 카스트계급의 입장을 대변해 반민주적인 카스트 계급제도의 엄격한 집행을 주장하고 있어, 마하트마 간디 이후 나름대로 민주주의 전통을 착실히 뿌리내려온 인도의 민주화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최대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
  인도인민당의 급부상은 엉뚱하게도 TV 드라마로 인해 가능했다. 지난 1987년 인도 국영TV는 힌두교 라마신에 대한 대하 시리즈 ‘라마야나 (라마왕 이야기)’를 방영, 인도 전역에 힌두 복고주의를 거세게 부활시켰다. 평소 힌두 원리주의의 부활을 주장해온 인도인민당은 약삭빠르게 이 열기에 편승했고, 그 결과 종전에 3석에 불과하던 국회의원 숫자를 크게 늘려 1991년 총선에서 일약 제1 야당으로 급부상했다. 과거 300여 년간의 이슬람 지배와 영국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라마 라즈아 (라마의 왕국)’ 건설에 매진하자고 주장한 인도인민당은 라마신 TV극에 출연했던 인기 남녀 탤런트와 배우들을 대거 자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해 이들을 무더기 당선시킴으로써, 인구 1억 명이 넘는 인도 내 최대 주인 우타르 프라데시를 비롯해 3개주의 총리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인도 대중의 심리를 교활히 이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후 인도인민당은 지식인들의 우려대로 인도 사회를 극단적인 혼란과 유혈사태로 몰고 나갔다. 이들은 1990년 10월 자신의 지지기반인 프라데시에 있는 바브리 마스지드 회교사원을 ‘민족의 용단’ 등 산하 5개 행동단체와 1만 명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습격하게 하여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당시 인도인민당은 16세기에 세워진 이 사원의 터가 라마신의 탄생지인 만큼 재탈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했다.
  인도인민당은 1992년 12월에 또다시 문제의 바브리 회교사원을 습격해 3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는 참극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인도인민당의 산하 행동단체가 불법화되고 인도인민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3개주 총리가 해임되었으며 당 지도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은 1993년 말 총선에서 수도 뉴 델리 등에서 압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들은 1994년부터는 우루과이라운드 반대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가 하면,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핵폭탄 제조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끝내 이를 관철시키는 등 급속히 투쟁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또 1994년 8월에는 후블리시의 회교도 기도장소에 인도 국기를 내걸려다가 사흘간 경찰과 무력충돌을 벌이는가 하면, 10월에는 회교도가 다수인 카르나타키주에서 TV방송의 힌두어 전용을 주장하며 회교도와 충돌해 수십 명을 살상하는 등 사회불안을 통해 정권을 탈환하고자 하는 전술을 조직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인도인민당은 지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 때 50만 명의 희생자를 냈던 힌두교와 회교간 대참사를 재연시킬지도 모를 벵골의 시한폭탄으로서, 최근 ‘제2의 중국이 되자’ 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모처럼 경제 도약의 나래를 펴고 있는 인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Power Group IX 글로버 마피아 사단

  ‘현재 마피아는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민, 주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더이상 마피아 소탕이란 범죄수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다.’ – 지안카를로 카셀리

  국경 해체의 축복(?) 아래 체첸 마피아, 차이나 트라이어드, 프렌치 코넥션 등 범지구적 규모의 신 마피아들이 지구 곳곳에서 불쑥불쑥 솟아 오르고 있다. 가공할 ‘글로벌 마피아 시대’ 의 개막이다.
  냉전종식으로 옛 공산국가들은 완전한 치안 진공상태에 빠졌다. 또 지구 규모의 자유무역과 정보혁명에 따른 고성능 통신장비 덕분에 외국에서 마약을 밀매하고 돈세탁하기가 한층 쉬워졌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전략정보센터의 추계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조직 범죄계가 한 해 동안에 거둬들이는 수익은 적게 잡아도 1조 달러(800조 원)에 달한다. 이는 미국정부의 연간 예산과 맞먹고, 한국정부 예산의 14.5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블랙 머니이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993년 12월 ‘글로벌 마피아’라는 특집을 통해 신 마피아의 폭증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발달이다. 컴퓨터에 의한 송금체제는 수십억 달러를 전세계에 송금하는 데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팩스와 휴대용 전화기가 암호화돼 있어 호출을 추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날아오는 마약조직 비행기들은 레이더 교란과 도청방지용 통신방해 장치를 갖추고있다.
  둘째는 공산권의 몰락이다.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이윤동기가 되살아나 약체 정부와 뒤엉키면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선언한 중국정부는 스스로 풀어놓은 범죄와 부패의 마귀를 규제 못해 쩔쩔매고있다.
  셋째는 국경 기능의 약화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련, 동유럽, 중국인들은 출국 비자를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요즘은 체코 매춘부들이 이탈리아 리비에라에서 돈을 벌고, 미국행 중국이민들은 헝가리를 경유해 빠져나가며 남미 마약조직은 나이지리아에서 마약운반책을 모집한다. 서유럽에서는 사람과 돈, 상품, 무기 등이 국경 없이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넷째는 부자나라들의 마약소비 급증이다. 마약의 이윤은 엄청나고 그돈이 세계금융계를 돌아다니며 부패를 부채질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매년 마약을 통해 벌어들인 850억 달러가 금융시장을 통해 세탁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마약, 매춘, 청부폭력, 도박 같은 고전적 범죄에 이어 세계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물질 거래, 이민 수출, 민영화기업 인수합병 등까지도 서슴없이 행하는 초권력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글로벌 마피아 과연 누가 이들 국제범죄조직 (ICO)의 대약진을 막을 것인가.
  ‘깨끗한 손’과 ‘지구시민’의 강철 연대가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POWER 105 핵무기 밀렵꾼: 체첸 마피아

  1991년 말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는 수천여 개의 신흥 범죄조직이 우후죽순격으로 솟아났다. 새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독소와 체제이행기의 대혼란이 어우러져 독버섯을 양산한 것이다. 이들 수천여 신흥 범죄조직중 철의 규율과 잔혹한 범죄수법으로 중무장한 러시아 최대의 패밀리가 바로 최근 국제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체첸 마피아(Chechen Mafia)이다.
  체첸 마피아단원들은 한결같이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 산악지대에 위치한 인구 50만 명의 자그마한 체첸 공화국 출신들이다. 이들은 약 3천 명의 핵심 단원들이 모스크바에서 3명의 대부 아래 패밀리를 형성해 매춘, 살인, 조직폭력, 사기, 마약, 자동차 판매 등 손댈 수 있는 모든 범죄분야에서 잔혹한 수법으로써 절대적 세력을 구축해놓고 있다. 이들은 또 러시아 외에도 전세계 29개국의 지하세계에 조직망을 뻗쳐놓고 있으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러시아 정부와 무력충돌을 벌이고 있는 체첸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투쟁 자금을 원조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내무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0년에 780개에 불과하던 러시아 범죄조직은 1994년 들어 그보다 7배나 많은 5,700개로 폭증했다. 이들 단체의 핵심 조직원만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냉전종식 후 일자리를 잃은 전직 KGB 요원과 군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약 15만 정의 불법무기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해마다 총기 살인이 전년대비 40p 이상씩 폭증하고 있다.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이들 러시아 마피아는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영화되기 시작한 러시아 기업의 30p, 은행의 25p를 수중에 넣는 등 러시아 국민총생산 (GNP)의 15p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최근 들어서는 외국계 기업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외국기업이 진출하면 우선 기업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기업측에 ‘크리샤’ 라는 세금을 요구한다. 이 압력이 먹혀들면 다음에는 마피아 단원을 고용하라고 하고, 이들이 일단 고용되면 삽시간에 기업경영을 독점해 버리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피해가 잇따름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조차 이들 마피아와 깊숙이 연루돼 있어, 그대로 기업을 빼앗기기 일쑤다.
  체첸 등 러시아 마피아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최근 들어서는 핵물질과 핵무기 탈취에도 적극 나선 것으로 알려져, 단순범죄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심각한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의 후리 FBI국장은 1994년 5월 미국 상원 정부활동위원회 증언에서 체첸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범죄조직이 구 소련 지역에 엄청나게 남아 있는 핵무기와 플루토늄, 우라늄을 쉽게 손에 넣어 이를 테러국가 및 테러집단에게 팔아넘길 힘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러시아 마피아의 주 타깃은 1,500개에 달하는 러시아 전술 핵탄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FBI는 이같은 세계안보상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지부를 설치해, 범죄를 수사하는 동시에 러시아 수사관을 육성키로 했다. 독일 정보기관(BND)도 미, 러 공동수사에 참여하기 위해 법률개정을 추진중이다.
  인터폴 (Interpol: 국제 형사경찰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의 세인트 페테스부르그 부근 핵시설에서는 이미 2kg의 고농축 우라늄이 행방불명됐고 모스크바 근교 원자력부 산하 공장에서 3kg이 분실되는 등, 지금까지 러시아에서만 3백여건의 핵분실 사고가 발생했다. 관계당국은 이 사고가 체첸 마피아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핵물질 외에도 희귀금속과 석유같은 전략물자 밀수도 하고 있다.
  한편 이들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중부 유럽의 일부를 장악한 데 이어, 미국 주요도시에까지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FBI는 1994년 발생한 미국 동부의 가솔린 세금 사기사건과 로스앤젤레스의 10억 달러 의료보험 사기사건을 대표적 예로 꼽고 있다. 이밖에 이들은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 미국의 마피아 등과 손을 잡고 전세계적 범죄망을 구축하고 있다.

    POWER 106 방세옥의 후예들: 삼합회

  영어권에서 트라이어드 Triad로 더 유명한 삼합회는 이탈리아의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처럼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계 범죄조직을 일컫는 이름이다. 중화경제권의 출현과 비례해 전세계 범죄계 세력 판도를 뒤바꾸는 디크호스로 급부상하고 있는 이들은 50–60개 방계조직에 정예 조직원만 10만 명에 달한다. 홍콩에 근거를 둔 신의안, 14K, 홍화단, 대만에 근거를 둔 죽연방, 사해방, 천도맹 등이 모두 대표적인 삼합회 방계조직들로, 그들의 작혹한 범죄수법 앞에서는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일본 야쿠자들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정도이다.
  삼합회는 크게 홍콩, 대만, 중국계의 3개파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도 단연 홍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5천만명의 화교세계와 차이나타운을 주요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남아의 헤로인 밀매로부터 상아 밀수, 도박, 청부살인, 매춘, 갈취 등 상상가능한 모든 범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국제무대에서는 ‘범죄의 슈퍼마켓’이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본토의 중국인들을 1인당 2–3만달러씩 받고 중남미와 유럽을 경유해 미국, 캐나다 등지로 밀입국시키는 사업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다. 얼마전부터는 체첸 마피아 등 러시아 범죄조직들과 손잡고 플루토늄 같은 핵물질 밀매에까지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국제사회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삼합회의 출발점은 지난 1674년 청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복건성의 소림사 승려들이 조직한 천지회라는 게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청황제는 승려들의 무예가 뛰어나고 대중의 신망이 두터운 소림사를 위협하는 반체제 세력으로 인식, 화공작전으로 소림사와 승려들을 섬멸했다. 그때 간신히 살아남은 5명의 승려가 중국 전역에 5개의 지부를 세워 반청 지하투쟁을 전개하면서 오늘날 삼합회의 기초를 세웠다고 이들 차이나갱들은 주장하고 있다.
  삼합회란 이름은 당시 천지회의 깃발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며, ‘천, 지, 인이 하나로 합쳤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삼합회 조직원들은 요즘 홍콩 무협영화를 통해 국내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소림사 생존 승려 5인의 지도자 방세옥을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고 있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이들은 청조멸망 후 이권에 따라 때로는 외세와 야합하는 때로는 반목하는 범죄조직으로 전락했으며, 오늘날 중국의 경제, 정치 파워가 급신장함에 따라 마피아 등을 뛰어넘는 전세계 최대의 범죄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오는 1997년 중국으로의 홍콩반환을 앞두고 홍콩 전역에 조성된 정치 불안심리를 이용해 최근 조직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POWER 107 지상최대의 코가인 제국: 콜롬비아 카르텔

  남미 원산의 코카나무 잎에서 추출한 천연마약인 코카인은 양귀비에서 산출하는 헤로인과 더불어 세계마약의 양대 여왕으로, 국제범죄조직의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코카인의 세계최대 산지가 바로 콜롬비아의 험악한 안데스 산악지대이다.
  메데인 카르텔, 칼리 카르텔 등 양대 마약조직은 1970년대부터 이 콜롬비아 산악지대에 거대 미국시장을 겨냥해 세계최대 코카인 생산농장을 조성한 뒤, 시칠리아계 마피아 등 각국의 범죄조직들과 결탁해 전세계에서 소비하는 코카인의 100p 전량을 독점적으로 생산, 공급하기 시작했다.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콜롬비아의 농민들은 기꺼이 코카나무 재배에 동참했고, 체제 전복 투쟁을 벌이고 있는 좌익 게릴라들 또한 이에 동참했다.
  콜롬비아 카르텔이 출현하자 미국은 하루아침에 사상 최악의 마약오염지대로 변해버렸다. 미국의 마약중독자는 최고 극성기이던 1979년의 경우 자그마치 2,4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미국인구 2억 4천여만 명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로, 미국은 더이상 이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고, 이때부터 코카인 생산을 방관해 온 콜롬비아 정부측에 각종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정부는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미국의 전폭적 지원 아래 군대를 동원해 이들 양대 카르텔 중 주류인 메데인 카르텔과 10년에 걸친 치열한 마약정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밀림 산악지대에 조성된 코카나무 밭을 불태우고 마약범들이 코카인 수송에 사용하는 활주로를 폭파해 나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이 너무나 컸다. 엄청난 전쟁비용 외에도 콜롬비아는 마약전쟁 기간 동안 마약범들의 무차별 보복테러로 1천여 명의 경찰과 3명의 대통령후보, 1명의 검찰총장, 2명의 각료와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1991년 6월 메데인의 두목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에스코바르가 1992년 7월 부하들과 함께 유유히 감옥을 탈출해 다시 한번 세계를 경악케 했다. 그러나 콜롬비아정부는 1993년 11월 에스코바르를 길거리에서 사살함으로써 메테인과의 10년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에스코바르 사망 후 메데인 카르텔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그러나 그 혼란기를 틈타 이번에는 두번째 마약세력이던 칼리 카르텔이 전세계 코카인의 80p를 공급할 정도로 급성장해 결국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은 주인만 바뀐 결과가 됐다. 더욱이 새로운 마약 지배자로 군림한 칼리 카르텔은 에스코바르가 즐겨 사용하던 무차별 테러전술 대신 휠씬 효과가 좋은 뇌물전술로 두터운 보호막을 치고 있어 이전에 비해 더욱 소탕이 어려워진 상태이다.
  1994년 6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에르네스토 삼페르 피사노가, 당선 후 4개의 각료진을 칼라측에 배분한다는 조건 아래 칼리 카르텔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 선거운동을 했다고 콜롬비아 언론들이 폭로할 정도로, 최근 이들과 정치권의 유착관계는 대단히 긴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약 카르텔의 재건에 불만이 많은 미국측도, 그동안 콜롬비아 정부가 펼쳐온 마약전쟁은 칼리 카르텔이 최대 라이벌 에스코바르를 제거하기 위해 극비리에 대준 자금과 정보로 에스코바르를 제거해준 청부살인 행위에 불과했다면서 콜롬비아정부와 칼리 카르텔의 검은 뒷거래를 비난하고 있다. 10년간의 치열한 마약전쟁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카르텔은 변함없이 건재해 있는 셈이다.
  한편 세계최대 코카인 소비시장인 미국의 수입과 분배권 역시 1970년대 중반부터 남부 플로리다에 근거를 둔 5대 콜롬비아 패밀리에 완전장악돼 있는 상태이다. 이들은 중국, 러시아의 신생 범죄조직들과 손잡고 북아메리카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까지 코카인을 공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콜롬비아 산악지대에서 새로이 헤로인 생산에까지 착수하는 등 도리어 종전보다도 세력을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미국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POWER 108 마약전쟁의 야전사령관: 리 브라운

  중남미, 동남아, 러시아를 상대로 전세계적 마약전쟁을 전개중인 리 브라운 Lee.P.Brown 미국 마약통제정책국 국장만큼 마약범죄조직들이 증오하는 대상도 없을 것이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코카인 최대산지인 콜롬비아에서 세계 마약조직의 양대산맥 가운데 하나인 메데인 카르텔과의 치열한 마약전쟁을 진두지휘해서 끝내 메데인을 무력화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브라운 국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94년부터는 직접 동남아를 돌며 미얀마 국경산악의 황금 삼각지대, 일명 ‘차이나 화이트’에 포진하고 있는 또다른 마약왕국 샨 연합사령군(SURA)의 소탕계획을 적극 추진중이다. 현재 마약왕 쿤사가 지배하고 있는 황금 삼각지대에서는 전세계 소비량의 절반에 달하는 연간 3천 톤의 헤로인 원료인 아편이 생산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는 헤로인의 60p가 이곳에서 정제된 후 방콕과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비밀리에 유입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 황금 삼각지대 주변 3개국이 군사행동까지 포함하는 단호한 마약전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브라운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수지 구금을 이유로 미국이 1989년부터 미얀마에 대해 행하고 있는 무기 및 군수품 금수 조치를 해제하면 쿤사를 소탕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미얀마측은 1990년 이래 중국으로부터 10억 달러어치의 제트기와 탱크 등을 구입했으나 이것들로는 험악한 산악지대에 포진한 쿤사를 소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금수조치에 따른 극심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미국측도 이에 대한 타협안을 모색중이어서 조만간 황금 삼각지대에서 제2차 마약전쟁이 펼쳐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샨 연합사령관은 쿤사의 지휘 아래 미사일까지 갖춘 3만여 명의 군사력으로 중무장하고, 태국, 미얀마 등 주변국의 군부와 경찰을 검은 돈으로 촘촘히 매수해놓고 있다. 더욱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과도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소탕은 쉽지 않으리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브라운 국장의 걱정거리는 황금 삼각지대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냉전종식의 후유증으로서 공권력이 마비된 구 소련의 카자흐 공화국, 트르쿠멘, 아프가니스탄 남부 등 최소한 전세계 12개국이 새로운 헤로인 생산지대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 국장은 1994년 9월 29일 미국 하원 사범위원회에서 행한 증언에서 미국 길거리에서 팔리고 있는 헤로인의 순도가 중전의 평균 7p에서 36p로 크게 높아졌으며, 뉴욕에서도 순도 95p의 헤로인도 거래되고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는 또 이처럼 순도가 높아졌음에도 헤로인 판매가격이 종전의 1g당 100–200달러에서 거의 절반으로 폭락하여 싸구려 크랙 등과 같아졌다고 말했다.
  브라운 국장은 이같은 현상이 ‘황금 삼각지대’나 ‘황금의 초생달 지대’같은 종전의 헤로인 산지 외에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한 아프가니스탄 남부, 구 소련의 카자흐, 트르쿠멘 등에서 새로 헤로인이 양산되기 시작해 과잉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면서, 이에 신속히 대처하지 못할 경우 미국은 또다시 지구촌 최대의 마약 오염지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범지구적인 마약 생산지 확산을 무장헬기와 총칼로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이들 절대빈곤 지역에 대한 제1 세계의 경제원조와 건전한 경제재건을 통해 막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브라운 국장은 분명한 답을 하지 못했다. ‘빈곤’과 ‘마약’이라는 악의 순환고리를 끊을 만한 힘과 재량권이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었다.

    POWER 109 유럽연합의 범죄 방패: 유로폴

  프랑스 경찰에 따르면 1993년 12월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로 유럽의 국경검문이 폐지된 요즘, 이탈리아 마피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범죄자들은 의도적으로 범죄행위를 분산해 몇 개의 나라가 연루되도록 함으로써 수사당국이 분쟁 때문에 꼼짝 못하게 만드는 신종수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범죄단들이 지구촌화 추세에 발맞춰 범죄의 글로벌리제이션을 작동시킨 것이다.
  유럽경찰국은 이런 급변하는 상황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연합(EU) 역내의 사법 및 경찰업무를 총괄하는 조직이다. 이 조직은 1994년 1월 1일 유럽연합 출범에 발맞춰 그해 2월 1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정식 발족하여 본격적인 업무에 착수했다, 신생조직으로 아직 여러가지 점에서 취약한 유로폴은 당분간 산하 유럽마약국(EDU)을 중심으로 마약거래와 돈 세탁 같은 마약수사에 전념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최근 동유럽의 치안 공백을 이용해 발칸 루트를 통해 유입량이 폭증하고 있는 헤로인 차단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유로폴은 이같은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유럽연합측에 유럽 공동의 돈세탁 방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유로폴은 각국 언어에 능통한 수사인력과 조직이 정비되는 대로 동구권 와해 이후 폭증하고 있는 불법체류자 및 위장망명자를 색출해 역외로 추방하는 일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최근 러시아 등 동구권에서 빈발해 전 세계 안보를 크게 위협하는 핵물질 유출 범죄. 이탈리아 마피아의 제조업 기업화 같은 조직범죄 전반을 취급하여 유럽연합의 경찰센터로서 자리잡을 예정이다. 유로폴은 이를 위해 각국 경찰조직 외에 영국의 M.I.6 같은 각국 정보기관들의 도움을
얻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추진중이며, 1992년 이래 이탈리아 검찰이 외롭게 벌이고 있는 마피아와의 전쟁도 적극적으로 측면 지원하고 있다.

    POWER 110 프렌치 코넥션: 발칸 루트

  유럽으로 마약을 반입하는 최대 루트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발칸반도의 불가리아를 중간 경유지로 하는 이른바 ‘발칸 루트’이다.
  1970년대에 이 루트에 자금을 대고 배포까지 독점했던 미국계 마피아가, 1980년대 들어 미연방수사국(FBI)의 집중수사로 큰 타격을 입고 여기서 손을 떼자, 그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터키계 마약조직과 레바논계 마약조직, 최근에는 중국계 삼합회 같은 신흥조직들까지 무더기로 가담해 불꽃 튀기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중국계의 경우 미국의 밀입국자들을 운반책으로 이용해 순식간에 유명해진 스네이크 헤드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이밖에 신흥 마약유통 전문조직인 백지선등이 급속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 루트를 통해 서유럽에 유입되는 헤로인 양은 전체수요의 3분의 1에 불과했으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불가리아 등 동구권의 공권력이 사실상 마비된 1990년대 들어서는 그 양이 전체의 3분의 2 이상으로 폭증했다. 1994년 2월 발족한 유로폴이 자신들의 제 1차 과제로 발칸 루트 소탕을 설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럽에 유입되는 헤로인의 약 75p는 중앙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황금의 초생달 지대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다. 초생달 지역에서 제조된 헤로인은 세칭 ‘프렌치 코넥션’ 이라고도 불리는 이 발칸 루트를 통해 파리를 경유해서 유럽 전역은 물론,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까지 배포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 외에 아프가니스탄 남부, 구 소련의 카자흐, 트르쿠멘에서도 헤로인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국제범죄조직들 사이에서 발칸 루트의 주가는 한층 폭등하고 있다.
  발칸 루트는 동시에 인접국의 불안정한 치안 때문에 국제범죄단이 즐겨 찾는 돈 세탁소로도 악명 높다. 동유럽의 붕괴를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즐거워했던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단견이었나를, 요즘 서유럽 사람들은 발칸 루트의 중흥을 보고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POWER 111 지옥의 마약: 크랙

  1980년대 중반 뉴욕경찰청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고순도 코카인 ‘크랙CRACK’이 폭발적으로 애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코카인 분말에 탈취제와 물을 섞어 열을 가하면 약 15분 되에 흰 고형물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악명 높은 크랙이다. 크랙은 헤로인 등 다른 천연산 마약에 비해 워낙 값이 싼 까닭에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어, 도시빈민은 물론이고 경제력이 약한 청소년들까지도 무서운 속도로 마약중독자로 만들었다.
  종래에는 코카인을 주로 포도당 주사액에 섞어 주사기로 주입했던 데 반해, 크랙은 코카인 덩어리를 태워 담배처럼 그 연기를 직접 들이마신다. 따라서 주사기를 사용할 때 우려되던 에이즈나 간염 등에 감염될 위험이 없고, 주사자국도 안 남아 단속될 위험성이 크게 줄었다. 따라서 출현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마약 중독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대단히 연소성이 강한 코카인 덩어리가 ‘탁, 탁’ (영어로 ‘크랙, 크랙’)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가기 때문에 크랙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마약은 다른 마약에 비해 순도가 높고 연기가 직접 폐로 흡입되는 까닭에, 대단히 빨리 환각성분이 작용해 흡입 후 4–6초 안에 바로 효과가 나타나며, 5–6분 동안 강한 환각상태가 계속된다. 일단 환각상태에 빠지면 자기도취, 환상, 탈진감, 성적 흥분 등으로 꿈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환각 정도가 심한 만큼 부작용도 대단히 심각하다. 다른 마약들과는 달리 환각 상태에서 깨어나면 곧바로 흡입하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며, 이런식으로 며칠만 지내면 완전히 골수 마약중독자가 돼버려 치유불능의 상태가 되고 만다.
  미국 보건후생국(HHS)이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1993년 말 현재 미국의 마약 사용자는 1,17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 숫자는 마약 사용이 최극성기에 달했던 지난 1979년의 2,400만 명보다는 크게 줄어든 수치이나, 1990년대 들어 다시금 증가세로 돌아서 마약당국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정기적으로 마약을 투입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골수 마약중독자가 급증하고 있어 문제다. 미국 마약통제 정책국의 리 브라운 국장은 1994년 현재 크랙 등 코카인 중독자가 210만 명으로, 헤로인 중독자 60만 명의 3배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하며, 특히 최근 들어서는 청소년 중독자가 급증하고 있어 미국의 장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정부가 국제 마약 카르텔들과의 전쟁을 자국의 내정문제로 설정, 총력을 쏟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POWER 112 깨끗한 손: 지안카를로 카셀리

  지금 이탈리아 국민은 마피아와 비장한 전쟁을 진행중이다. 마피아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중해로 싹 쓸어내 버리지 않고서는 이탈리아의 재생이란 절대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판단에서다.
  이탈리아 상인협회는 1994년 7월 이탈리아 마피아의 수입 내역을 자체조사한 보고서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마피아의 1993년도 한 해 총수입은 694억 달러(55조 6천억 원)나 됐다. 한국의 연간 예산을 크게 웃도는 엄청난 액수다.
  마피아의 최대수입원은 고리대금업이다. 1993년 한 해에만 이 사업에 100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해, 수입이 전년보다 37p나 늘어났을 정도로 큰 재미를 보았다. 마피아는 지하경제뿐 아니라 지상경제계에서도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건물관련 산업의 20–22p, 농산물 도매시장의 24p, 대형 슈퍼마켓 판매의 14p를 차지하고 잇다. 마피아는 이탈리아 지배에만 만족하지 않고 공산주의 몰락 후 치안 공백상태에 빠진 동유럽에까지 진출, 의류산업 등의 분야에서 이미 독점적 위치를 확보한 상태이다. 말 그대로 국가권력과 맞먹는 거대한 독립왕국을 유럽 곳곳에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 말로 ‘아름다움’ 또는 ‘자부심’을 뜻하는 마피아는 원래 19세기 말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초 먹을 것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시칠리안들이 잔혹한 수법과 강고한 단결력을 앞세워 세계최대 범죄조직인 마피아를 결성했고, 이 범죄조직 결성방식과 범죄수법이 그대로 모국인 이탈리아에 이식되면서 오늘날 500개의 단체에 2만 명의 정예요원으로 구성된 거대한 범죄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하경제가 전체경제의 40p를 차지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지하의 제왕인 마피아는 곧 지상의 제왕이었고, 따라서 정계, 관료계, 경찰, 재계는 모두 마피아의 꼭두가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년왕국을 구가할 것 같던 이탈리아 마피아도 1992년 이래 밑둥부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마니 풀리테 운동은 마피아의 본거지인 시칠리아 섬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불붙었다. 그 주역은 팔레르모 시 검찰총장인 지안카를로 카셀리였다. 1992년 카셀리 총장은 마피아를 ‘국가 속의 국가’로 규정하고 마피아와의 무한전쟁을 선포했다.
  "현재 마피아는 국가의 3요소인 영토와 주민, 그리고 주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더이상 마피아 소탕이란 범죄 수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국가간 전쟁이다. 이탈리아가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마피아가 소멸할 것인가. 어느 한쪽이 지상에서 소멸할 때까지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카셀리가 이처럼 분노한 것은 그를 도와 마피아 소탕에 앞장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지오바니 팔코너 판사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판사가 1992년 5월과 7월 잇따라 마피아들의 폭탄테러로 무참히 희생됐기 때문이다. 의로운 두 법조인의 죽음에 충격받은 이탈리아 국민은 전국적 가두시위로 마피아와 부패한 정치권, 재계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고, 카셀리 총장은 두 친구의 무덤 앞에서 피눈물로 마피아와의 무한전쟁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황금시장 소탕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카셀리의 집요한 마피아 소탕 작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전자감시체제와 끄나풀을 이용해 미국 마피아를 무력화시킨 미국연방수사국의 노하우를 전수 받은 카셀리는 우선 마피아 지하세계에 극비리에 자신의 세포를 하나씩 심어 나갔다. 성과는 속속 나타났다.
  1993년 1월 15일 마침내 카셀리는 마피아 끄나풀의 도움을 얻어 마피아의 황제, 테러의 대부로 불리던 마피아 1인자 살바토레 리나를 검거하는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다. 영화 ‘대부’로 유명해진 콜레오네 집안의 지도자 겸 이탈리아 마피아 집행부인 ‘쿠오폴’의 의장인 리나의 체포는 마피아 기반을 통째로 흔들었다. 카셀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피아의 씨를 완전히 말리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전개, 1994년 2월에는 마피아 킬러로부터 의사, 변호사 등 이탈리아 고위층에 포진하고 있던 마피아 고위층 조직원 76명을 체포하는 성과도 올렸다. 여기에는 앞서 붙잡힌 리나의 처남 등 콜레오네 집안의 핵심분자들이 다수 끼여 있었다. 이처럼 카셀리의 작전으로 1994년 현재 마피아단원은 4천여 명이나 체포됐고, 그 중에는 40여 년간 이탈리아 정계를 주물러온 안드레오니 전 총리 등 정계와 재계의 최고 상층부 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카셀리 총장은 400여 년 역사의 마피아가 무솔리니 이후 제2의 시련기를 맞고 있으며, 무솔리니 때는 용케 빠져 나왔지만 이제는 안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그는 그 근거로 과거에는 국민들이 마피아의 보복을 두려워해 마피아 검거에 극히 비협조적이었으나, 이제는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마피아 소탕에 협조하고 있는 점을 꼽았다. 유럽이 통합되어 가는 마당에 타국민들로부터 ‘유럽의 범죄왕국’ 이라는 비아냥을 더이상 들을 수는 없다는 국민적 합의가 도출되고 있다는 게 카셀리의 주장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탈리아에서 거대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마피아가 하루아침에 붕괴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최근 마피아들이 사업기반을 이탈리아에서 동유럽으로 대거 이전하기 시작한 점이나, ‘마니 풀리테’ 운동이 베를루스코니 극우정권의 탄압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이제 이탈리아 마피아의 황금시대도 서서히 막이 내려가고 있음은 부정 못할 현실이다.

      Power Group X 삶과 죽음의 파워

  "21세기를 앞두고 인류사회가 직면한 최대시련은 ‘인구의 힘’이 분출시킬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술의 힘’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 폴 케네디

  미국 예일 대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 교수는 토플러 같은 여느 미래학자들과는 달리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다. 과연 인간이 과학의 발전이 가져다 줄 번영과 풍요를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지, 인간의 속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구가 자연의 포용능력 이상으로 너무 늘어나면 기아, 식량과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 공개충돌, 전쟁, 그리고 질병이 번져서 인구가 줄어든다던 맬더스의 냉소적 인구이론이 21세기에 가장 처참한 형태로 재현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과연 인간이 반 공동체적 속물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21세기를 앞두고 인류사회가 직면한 최대 시련은 ‘인구의 힘’이 분출시킨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술의 힘’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영양실조, 굶주림, 자원감소, 불안, 강제이민, 군사충돌 같은 맬더스의 인구론적 올가미 증대현상으로부터 인류의 가난한 4분의 3을 해방시키기 위한 효율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해결책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낙관론자들은 미래를 희망적으로 본다. 천연자원은 갈수록 줄기만 하는 절대량을 가진 게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자원들이 인간의 발명력과 노력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기술은 새로운 자원을 만들어내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석유 같은 1차산품이 품귀현상을 빚게 되면 새로운 매장지를 발견하게 되거나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찾게 된다. 또 세계의 식량사정이 경종을 울려야 할 지경에 이르면 생명공학에 의한 획기적 발명으로 농업생산성이 현저하게 높아진다는 등이 그 낙관론의 근거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중미, 남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에이레, 소련의 주변부, 아프리카 동북부 등 빈곤한 인구폭발 지역에는 억눌린 사회적 경제적 기대를 품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고, 그들의 숫자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사회불안이 인구증가와 똑 같은 속도로 증대되면 과연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게 될 것인가."
  케네디 교수가 (21세기 준비)에서 토로한 해답 없는 물음이며 한 휴머니스트의 고민이다.
  그의 고민대로 지금 인류는 의학과 생명공학의 거대한 약진으로 모든 인류가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일보직전 단계에 와 있으나, 안타깝게도 과학 발전의 혜택은 이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윤추구를 지상목적으로 삼고 있는 자본이 그 발전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이나 의학은 인류에게 결코 위협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여타 기술혁명이 그러했듯이 최근의 기술혁명도 승자와 패자를 동시에 낳고 있다. 승자, 즉 새로운 제품을 내놓고 있는 이들은 다국적 제약회사나 선진국의 생명공학회사, 농약회사들이다. 이들은 패자인 개도국의 배고픈 이들이나 환자, 농민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새 의약품이나 호르몬, 종자, 비료를 개발비의 몇 배 가는 비싼 값을 내놓고 가져가라고 말한다. 일종의 ‘생물학적 제국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속물성을 비웃는 맬더스의 인구이론이 21세기 지구촌 위에서 끝내 작용할 것인가. 인류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POWER 113 지상최대의 제약 공룡: 머크 연구소

  미국 제약회사 머크는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105억 달러(8조 4천억원)의 매출액을 기록 전세계 수만여 동종 업체들 가운데에서 또다시 매출부문 랭킹 1위를 차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약업계의 황제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미국 뉴저지 주의 화이트하우스 스테이션에 본사를 두고 있는 머크는 1994년으로 창립 103주년을 맞이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간판기업 중 하나이며, 전체 매출액 가운데 45p를 외국시장에서 올리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다국적기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머크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1993년 7월 대형 약품공급회사인 메르코를 66억 달러(5조 3천억 원)라는 천문학적 거금으로 사들이는 등 기업의 덩치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
  머크가 이처럼 세계 최정상을 지키는 이유는 연 매출액의 10p를 연구개발비로 다시 쏟아붓는 철두철미한 연구개발 태도다. 이 회사는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전세계 50여 개 현지법인과 8개 연구소의 연구활동에 매출액의 12p에 달하는 12억 달러(9,6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 이는 머크의 경쟁사인 여타 매머드 제약업체의 평균적 연구개발비 투자비율을 두 배 이상이나 앞서는 엄청난 투자였다. 동시에 이 액수는 한국 100대 제약기업의 같은 기간 총연구개발비 1,049억 원의 9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이기도 하다. 머크는 일반 제약회사와는 달리 심장질환, 전립선질환, 골다공증, 전염병, 안과계통, 에이즈 등 6개 부문을 집중 공략대상으로 설정해 전문가들을 대거 양성하여 신약 개발의 선두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의 권위 있는 경영전문지 (포춘)은 이같은 머크의 개발노력을 높이 평가해 이 회사를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7년 연속 선정하기도 했다.
  머크 연구소는 1980년대 중반에 프리막신, 바소텍, 펩시드, 메바콜, 프릴로섹 등 5대 신약을 개발해, 각 약품당 해마다 5억 달러 이상의 매상을 올리며 연간 매출액 성장률만 30p를 웃도는 제약계의 전무후무한 신화를 창조해냈다. 1990년대 들어서도 전립선 수축제 프로스칼, 정신분열증 치료제 로시암을 개발해내는 등 연구활동을 왕성하게 계속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1987년 개발해낸 콜레스테롤 치료제 메바콜과 1985년 개발된 심장혈관 치료제는 지금까지도 머크의 연간 전체 매출액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금세기 최고의 빅히트 의약품으로 유명하다. 머크는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서도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어, 이 제품이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는 1995년 말부터는 본격 시판에 들어갈 계획이다.
  제약업계의 공룡 머크는 1994년 9월 세계 10위 의약품 시장인 한국에도 미국본사가 100p출자한 한국현지법인 한국 MSD를 설립하여 직접 시장공략에 나섰다. 머크는 종전에 자사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던 녹십자, 동아제약, 중외제약 등 국내 제약회사를 제치고 1995년 하반기부터 생산 판매에 직접 나서기로 함으로써 자체 연구개발 노력이 부족한 한국제약계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전망이다.

    POWER 114 인간 유전자 지도 그리기: 휴먼 게놈 프로젝트

  휴먼게놈 HUMAN GENOME이란 인간의 피부색, 키, 얼굴 등 겉모습은 물론 지능이나 정신세계까지 결정짓는 유전자의 청사진, 즉 ‘인간 유전자 지도’를 가리킨다. 과학자들은 이같은 휴먼 게놈을 건축물에 비유해 쉽게 설명하곤 한다. 즉 게놈은 완성된 건물이고, 유전자는 각각의 벽면이며, 염기쌍은 벽돌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30억 개나 되는 염기쌍으로 구성되는 복잡한 염기 배열순서를 모두 밝혀내 인간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는 게 서방선진국이 합동으로 추진중인 휴먼 게놈 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다. 현재까지 밝혀진 유전자 정보는 고작 5천여 개에 불과하다. 지구촌의 유전공학자들이 국경을 초월해 손을 잡아야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전공학의 꽃’이라 불리는 휴먼 게놈을 규명하려는 이 프로젝트는 일본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휴먼 프런티어 프로젝트와 함께 유전공학 연구분야의 양대산맥으로 불리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1970년대 중반부터 그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다가 그후 1990년대에 정식 발족시킨 국제지구인 인간유전자 기구 (HUGO: Human Genome Organization) 를 중심으로 미국 외에 유럽, 일본 등 15개국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유전정보 연구성과를 서로 교환하고 있다. 오는 2005년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젝트 추진에는 최소한 30억 달러(2조 4천억 원)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휴먼 게놈 프로젝트의 산파역활을 한 나라는 미국이다. 정보산업과 함께 유전공학을 21세기 미국을 이끌어갈 양대 리딩 인더스트리 (Leading Industry: 선도산업)로 보고 있는 미국정부는 지난 1990년 10월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월터 길버트 박사의 ‘휴먼 게놈 연구 글로벌화’ 주창에 크게 자극받았다. 이에 미국 에너지부와 국립보건원은 합동으로 오는 2005년까지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5–10만개의 유전자를 비롯해 유전정보를 구성하는 30억 개의 인간유전자 구성 염기쌍 정보와 배열순서를 모두 밝혀내기 위한 휴먼 게놈 프로젝트에 가장 먼저 착수했고, 다른 서방국가들도 잇따라 이에 동참했다.
  30억 개의 염기쌍을 하나의 글자로 쳐서 책을 만든다면 5천 권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 되고, 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읽는다 해도 생에의 3분의 1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5년 계획대로 인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면 암이나 몽고병 같은 4천여 종의 불치병 치료와 새 의약품 제조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가장 앞서 연구에 착수했음에도 정작 가장 먼저 빼어난 연구성과를 거두고 있는 곳은 프랑스이다. 파리에 위치한 인간다형현상 연구소는 미국보다 짧은 연구역사에도 불구하고 1992년 10월 인간 염색체 가운데 21Q의 구조를 가장 먼저 해독함에 따라 영국의 세계적 과학전문 권위지 (네이처)로부터 인간의 달 착륙에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업적을 거두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한편 휴먼 게놈 연구는 세계의 공룡 제약업체들이 가장 주역하고 있는 최첨단 연구부문이기도 하다. 머크, 스미스클라인 비첨, 휴먼 게놈 사이언스(HGS)등이 현재 이 연구에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문제는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게 확실한 휴먼 게놈의 연구성과를 개별회사가 독점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공동의 자산으로 공개할 것인가이다. 이런 예민한 쟁점은 현재 휴먼 게놈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는 각국 정부들 사이에도 잠재해 있다.
  1994년 10월 미국 워싱턴 시에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들이 한곳에 모여 유전자 정보의 소유방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의 머크는 유전자 정보를 축적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이를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머크의 수석연구원이 에드워드 스콜닉은 정보를 공개하면 불필요한 유전자 연구 중복투자를 없애고 신약 개발을 촉진시킬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에 반해 1993년 5월 유전자 연구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HGS측에 앞으로 10년간 1억 2,500만 파운드(1조 5,800백억 원)를 지원키로 계약맺은 영국의 스미스클라인 비첨은 펄쩍 뛰며 공유화에 반대했다.
  과연 이같은 논쟁이 앞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날로 치열해지는 자본들의 전쟁을 볼 때, 과연 머크식의 이상적 공리주의가 득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POWER 115 에이즈의 유일한 천적: 콘돔

  미국 농구의 슈퍼스타 매직 존슨이 1992년 ‘현대판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 (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 사실을 고백하자, 그날 즉각 뉴욕증시의 콘돔Condom 제조업체 주가가 일제히 폭등했다. 이처럼 1980년대 들어 에이즈가 창궐하자 그에 비례해 콘돔 판매량도 급증해, 1991년 한 해 동안에만 전세계에서는 1986년도의 두 배에 달하는 25억 개의 콘돔이 팔렸고 폭발적 증가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994년 2월 서울대 가정의학과 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성인의 70p가 에이즈는 악수나 포옹만 해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방 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상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에이즈는 정액이나 혈액을 통해서만 감염된다. 어찌 보면 에이즈는 인간의 그릇된 성생활에 대한 신의 분노이자 마지막 적색경고인 셈이다. 따라서 선진각국의 의약업계가 매년 천문학적 연구비를 쏟아부어 에이즈 치료제 및 예방약 개발에 진력하고 있음에도, 18세기에 발명된 가장 간단한 콘돔보다 뛰어난 에이즈 방어 수단은 아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콘돔 발명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존재한다. 문헌에 따르면 17세기경부터 동물의 창자나 물고기의 막을 이용한 콘돔류의 성병 예방도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초기 제품은 성능이 크게 뒤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던 둥 18세기 들어 콘돔이라는 한 영국인이 국왕 찰스 2세를 위해 정교한 성병 예방도구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이같은 기구는 예외없이 콘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같은 고무제품은 화학혁명이 일어난 1840년부터 생산되기 시작돼, 1930년대가 돼서야 대량 생산체제에 들어갔다.
  에이즈는 금세기에만 이미 800만 명의 생명을 빼앗았으며, 1994년 7월 현재 1,600만 명인 감염자 숫자가 오는 2000년에는 최소한 1억 1천만 명으로 폭증할 것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내다보고 있다. 마이클 머슨 WHO 에이즈 방역계획 사무국장은 매일 6천 명이 에이즈에 새로 감염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2000년경에는 1억 1천만 명에 달할 에이즈 환자의 90p가 개발도상국,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WHO의 주장에 따르면 1994년 현재 환자 발생 순위는 아프리카(1 천만 명), 아시아(250만 명), 남미(200만 명), 북미(100만 명), 서유럽(50만 명) 순으로, 주로 가난한 나라들을 중심축으로 에이즈가 무서운 속도로 창궐하고 있다.
  WHO의 K.헌트는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서는 임산부의 25–30p가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가공할 보고서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앞으로 몇 년 안에 에이즈를 치료하는 방법이 마련되지 않으면 아프리카 대륙의 높은 출생률은 사망률의 상승에 의해 제지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는 아주 비관적으로 볼 경우 2010년경에는 아프리카의 인구증가율이 절대감소로 반전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의료인들조차 있다.
  현재 전세계 의약계는 에이즈 치료제와 예방약 개발에 천문학적 연구 개발비를 쏟아붓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설령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된다 할지라도 그 혜택이 가난한 나라의 환자나 보균자들에게까지 고루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천문학적 개발비가 쏟아부어지고 있는 만큼 의약품 값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기 대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앞으로 21세기 들어 획기적인 에이즈 치료제와 예방약이 개발된다 할지라고, 콘돔은 여전히 지상에서 가장 예방효과가 뛰어난 에이즈 방어 수단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짙다.

    POWER 116 에이즈 파수꾼: 마이클 머슨

  요즘 세계 의료계에서 세계보건기구의 에이즈 방역계획 사무국장인 마이클 머슨 Michael Merson보다 바쁜 사람도 없다. 에이즈와의 전쟁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985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제1회 에이즈국제회의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에이즈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세기말의 역병’인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고 있다.
  그는 또 WHO에 에이즈 방역기금을 조성해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태국, 필리핀 등에 전문가들을 파견하는가 하면 현지 보건전문가들을 불러들여 방역대책도 교육시키고 있다. 이밖에 과학자들뿐 아니라 교육가, 언론인, 민간단체 관계자 등 각계 전문가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범지구적 에이즈 퇴치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머슨 국장은 지난 1988년말 에이즈에 대한 범지구적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유엔을 설득해 매년 12월 1일을 ‘세계 에이즈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에이즈는 198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로 환자가 보고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3년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몬타니에 박사에 의해 직경 2만분의 1mm의 HIV(에이즈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그후 15년만에 전세계로 급속히 번져나가 WHO의 추계에 따르면 1994년 7월 현재 13세 이상의 세계전체 인구 중 1,600만 명이 에이즈바이러스에 감염됐고 환자숫자가 400만 명을 돌파했다. 이같은 숫자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60p나 폭증한 것이다.
  현재 가장 감염이 심한 지역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1천만 명)이나, 10년 전 아프리카의 감염 확대와 똑같은 현상이 지금 아시아(250만 명) 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머슨 국장은 현재의 가공할 감염 확산속도를 볼 때 아시아의 감염자 숫자는 오는 2000년경 현재의 4배인 1천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아시아인들의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1994년 8월 제10회 에이즈 국제회의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국가들이 매년 15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면서, 만약 이런 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매춘천국인 태국의 경우 오는 2000년에는 연간 110억 달러의 천문학적 경제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한편 최근 들어 한국도 더이상 에이즈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 1992년 방한한 제임스 친 WHO 에이즈 감시예측 평가단장은 현재 확산 속도로 볼 때 1990년대 말이 되면 한국의 감염자 숫자가 최소한 5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에이즈는 우리 주변에도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새롭게 해야 할 때이고, 그런 면에서 날로 번창하고 있는 매춘산업에 대한 범국가적 제동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POWER 117 더이상 인구는 자원이 아니다: 중국 국가계획 출산위원회

  지난 1979년부터 ‘한 자녀 갖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의 가족계획 주무당국인 국가계획 출산위원회 (The State Family Planning Commission)는 오는 2000년까지 중국 인구를 12억 명으로 묶는다는 목표 아래 지상에서 가장 단호한 인구정책을 추진중이다.
  인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한 마오쩌뚱의 인구무기화 정책 때문에 1950년대 초부터 1976년 그의 사망 때까지 중국의 인구는 기하급수로 폭증했고,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도 그의 사후에나 겨우 사용가능할 정도였다. 폭발적 인구증가의 압력을 느낀 중국정부는 1979년 부터서야 뒤늦게 민주화요구로 진통을 겪고 있는 티베트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 강력한 한 자녀 갖기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당국은 한 자녀만 갖겠다고 맹세하는 신혼부부에게 토지와 돈을 주며, 불임수술을 할 경우에는 추가로 돈을 지급하고 있다. 반면에 2명 이상 자녀를 낳을 경우에는 출산 후 7년 동안 매년 72–192달러의 벌금을 내게 하고, 네번째 자녀에 대해서는 1천 달러의 벌금을 추가하는 중징계를 내리고 있다. 국영기업에서는 산아제한 수행 여부가 일선 작업반의 주요 근무평가 기준이다. 또 감숙성과 요녕성에서는 정신박약자들에게 출산을 금지시켜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강력한 인구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동양의 남아선호 사상, 벌금을 우습게 아는 도시 신흥중산층의 이탈 등의 복합적 이유로 중국인구는 아직도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실시된 1990년 인구 센서스에서 중국인구는 이미 11억 3,300만 명을 기록했다. 인구 센서스에 참가하지 않은 인구가 최소한 5천만 명에 달한다는 정부의 추산까지 합치면, 1994년 현재 이미 중국인구는 인구억제 마지노선인 12억 명을 돌파한 게 확실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당국은 앞으로의 인구 증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낙관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결과, 많은 자녀를 낳는 것보다는 한 자녀일지라도 훌륭하게 키워내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현재 3억 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늘어난 도시인들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어나는 까닭에 여러 자녀를 부양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자녀는 곧 노동력이고 최대자산이었기에 많은 자녀를 두는 게 최상의 목표였다. 그러나 현대 산업화사회, 더 나아가 21세기에 도래할 고도정보화 사회에서는 양보다는 질, 근육노동력보다는 두뇌노동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될 게 확실하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최선책은 곧 경제성장인 셈이다.

    POWER 118 인간에게는 낙태권이 없다: 바티칸 가족문제 협의회

  중국 국가계획 출산위원회가 가장 강력한 인구억제기구라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낙태와 피임 같은 인구억제정책에 대해 전세계에서 가장 초보수적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는 집단이 바로 가톨릭의 인구정책센터인 가족문제 협의회 Family Council이다.
  투르히조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국 주교들이 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는 이 조직은, UN같은 국제기구나 여성단체 등이 인구폭발 방지와 경제발전, 여권신장 등을 이유로 제 3 세계 빈국들에 산아제한 정책을 강요하는 행위는, 선진국들의 경제적, 금융적 이익 보호를 위한 문화적 제국주의, 생태적 제국주의라 맹비난하고 있다. 또 이들은 최근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찬반 논쟁이 치열한 낙태권에 대해서도 강간을 당해 임신하는 최악의 경우라도 결코 낙태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기본적 인공피임이나 임신중절 행위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바티칸은 1994년 9월 UN 인구기금 (UNFPA)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향후 20년간 지구인구를 72억 명 수준으로 억제키 위해 10년 만에 ‘국제인구, 개발회의’를 개최하자, 이에 앞서 추기경 비상회의를 소집해 UN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전세계 114명의 추기경이 참석해 교황청에서 회의를 가진 뒤 발표한 결의문에서 카톨릭측은 낙태, 성적방임, 왜곡된 가족개념 등이 인권으로 선포되거나 젊은이들의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되며, 낙태 같은 생명파괴 행위가 합리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위한 방편으로 제시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번 UN 인구회의가 낙태를 조장하고, 동성연애자들에게 결혼과 자녀입양을 허용함으로써 전통적 가족개념을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며 즉각 회의 개최를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의 후 전세계 모든 국가원수들에게 이같은 결의내용을 담은 개인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바티칸의 주장에 대해 상당수 가톨릭국가뿐 아니라 이슬람 원리주의국가들도 지지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선택을 위한 카톨릭인’ 모임의 프란시스 키슬링 회장은 1994년 7월 조사보고서를 통해, 교황의 모국이자 인구의 95p가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서는 낙태가 합법화돼 있고 신자의 1할만이 교황의 지시에 동의하고 있으며, 인구의 93p가 신자인 멕시코에서도 국민의 88p가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전세계 가톨릭국가의 실태를 밝히면서 바티칸의 지시에 정면 반발하는 등 적잖은 가톨릭국가에서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카이로 인구회의를 조직한 유엔인구기금의 나피스 사디크 사무국장도 세계인구는 현재 연간 9천만 명 이상 증가하고 있고, 특히 심각한 것은 이 중 93p가 개도국에서 출산돼 빈곤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피임조차 하지 말라는 바티칸의 주장은 극단적인 교조주의라고 비난했다.
  일각에서는 바티칸의 보수적 인구정책이 나날이 위축되는 교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교황청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가톨릭신자 숫자는 1978년의 7억 4,900만 명에서 1990년 9억 2,800만 명으로 약 23p가 늘었다. 그러나 예수회의 데벨라 신문정보연구 소장은 30년 전에는 매주 일요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숫자가 전체의 70–80p에 달했으나, 최근에는 20–30p로 격감하고 있다면서 내용적으로는 가톨릭이 절대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그 요인으로 가족관계의 이완, 가치관의 다양화와 가톨릭의 극보수화 등이 지적되는데, 특히 바티칸측은 인공피임과 인공중절이 건전한 가족관계와 신앙생활을 해치고 있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인구와 권력간의 미묘한 상관관계. 이것이 바티칸 인구정책의 또다른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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