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인가

출처 : http://www.mediamob.co.kr/magie/blog.aspx?id=198266

저는 안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기독교인들이 저를 안티로 만들어 주시는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겠지. 그러나 성경이 꼭 진리라고 볼수는 없어.” 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어린시절 저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어느 아주머니.
1989년도로 기억합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는 작지만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일요일에 예배가 끝나면 그 교회에서 낮잠자는게 참 좋았었습니다(지금 많은 교회들에서는 참 어려운것 같더군요, 가끔 교회라는곳에 갈일이 있어서 가봤었습니다만 교회가 성경을 공부하는 곳이지, 낮잠자는 곳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어찌보면 맞는 말입니다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만나서 교회에서 결혼식도 올리고 참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있었는데, 두살짜리 아이를 데려와 애가 자주 울어서 예배에 방해가 될까봐 데리고는 왔지만 교회까지 데리고 오기가 미안했나봅니다.
그래서 차안에 두고 예배를 보러 내려왔었던 거죠(지금 생각해도, 부모가 잘못한것은 맞습니다).
여름이고, 그당시에는 차에 에어컨은 흔하지 않았고.. 아이는 질식사로 숨졌습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어느 아주머니, “쯧쯧, 이게 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거여…”
사실 그 아주머니가, “왜 교회에 애를 데려왔어? 시끄럽게” 라고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믿음을 얻기란 쉽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교회, 가서 뭐합니까? 보상심리인가요? “일요일 쉬지도 못하고 교회 꼬박꼬박 다니는데 천국 가야지” 라는 마음입니까?
내세가 현재보다 중요하다면 지금 죽어도 좋겠군요? 혹시, 못죽어서 안달입니까?

‘교회를 다녀보자’ 생각하고, 다른 교회를 갔습니다.
안식일이라며 빵과 포도주를 교회에서 나누어 줬는데 ‘우리 문화에 맞추어 파전에 막걸리로 해도 괜찮지 않느냐’는 물음에, 3시간동안 설교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문화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성경은 왜 번역본을 보나요? 그렇게 따지면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문을 보는게 맞습니다.

자기가 보고 느낀것을 이야기하는것 뿐인데, 입을 찢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현대만 마녀사냥도 아니고..
한문장 한문장 따져가며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아니, 자신이) 옳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한국의 교인들은 “그럴수도 있겠군요”라는 전제를 절대 안 깔고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내말이 옳다”입니다. 그것만큼 무식해 보이는것도 없는데.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사람은 미숙한 존재입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요?

아래 퍼온 글은 상당히 오래된 글입니다.  KIDS 라고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생긴 초기 게시판중 하나입니다.  가장 오래된 게시판 중 하나입니다.
글을 쓰신 분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http://www.antiyesu.net/bbs/board.php?bo_table=402&wr_id=231&page=10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7년11월22일(토) 02시57분19초 ROK
제 목(Title): 예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인가

몇몇 분들께서 마가 12:28-34와 누가 10:25-37을 인용하시며 예수의 ‘이웃 사랑’을 언급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 계명이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고등학교 윤리 시험을 볼 때 ‘기독교 = 사랑의 종교’라고 쓰면 정답으로 인정받는 것이 상식인 모양이죠.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는 말은 누가 한 것입니까? 마가는 이것이 예수의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반대입니다. 율법학자가 영생의 조건이 될 만한 계명을 묻자 예수는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는 말은 율법학자의 대답이지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명백히 같은 사건에 기원을 둔 전승이 이처럼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은 복음서 문학의 엄밀성 문제에 관한 편집사적 연구에서 취급할 만한 흥미로운 문제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그런 모순-버그?-을 지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요컨대 그것을 예수가 말했든 율법학자가 말했든 대국적인 줄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예수 아닌 다른 사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점입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라고 예수가 그랬으니 율법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대답을 했을 법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보다 조금 더 미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주해서를 뒤져 보면 예외 없이 이 구절이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의 인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틀림없이 구약을 뒤져 봅니다. 그리고 나서 ‘정말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정을 조금이라도 공부하신 분이라면 이런 싸구려 주해서를 그냥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애국가 1절 가사정도는 알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라기보다는 신앙 고백)로서 알고 있는 ‘쉐마’라는 기도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쉐마는 ‘들어라’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서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의 연속된 송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첫머리는 이렇게 생겼지요.

‘들어라, 너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율법학자도, 예수도, 또 주위의 구경꾼조차 이 구절을 신명기의 한 구절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쉐마의 한 구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기도는 지식인만의 것이 아닌 모든 유대인의 필수 교양에 속하는 ‘쉬운’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문적인 공부를 하신 분들이라면 유대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 정도는 갖추셨을 테니 제가 이렇게 구구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

목회자이신 Symond님께서야 당연히 아실 테고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황혁기씨나 홍병희씨도 당연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발언은 예수의 공생애를 전후한 시기의 유대교 문학에서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랍비 아키바는 (홍병희씨가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명상 문학에 단골로 등장하는 유대교 랍비입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죠.)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야말로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포괄적인 기본 계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 두 족장의 예언’이라는 문서에 속하는 ‘잇사갈의 유언’에는 ‘아들들아,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주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고 ‘단의 유언’에도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주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여 왔다. 아들들아, 너희도 그와 같이 하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컨대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시 유대교 문화의 ‘상식’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랑이 기독교만의 고유한 것으로서 크게 거론되어야 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거죠.

여기까지는 또 괜찮다고 칩시다. 예수는 사랑의 전도사였습니까? 안타깝게도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는 사랑, 사랑 읊어대면서 사랑이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할 만큼 단순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언동의 본질을 잘 추상하여 포착해 보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자신은 ‘사랑’ 이라는 단어를 별로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경 검색용 프로그램이라도 구해서 한 번 뒤져 보십시오. (편리한 세상이죠? staire가 끙끙대며 성경을 뒤지던 시절에 비하면…) ‘좋아하다’, ‘귀여워하다’라는 정도의 가벼운 의미로 쓴 용례를 제외한다면 예수가 본격적으로 사랑을 언급하는 것은 마태 5:43-44의 유명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과 앞에서 인용한 마가 12장, 누가 10장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더우기 마가와 누가의 ‘사랑’ 이야기는 예수의 말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대 사회의 누구나 암송하고 있는 쉐마의 구절이라고 본다면 예수의 사랑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이외에는 이렇다할 것이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마태 5:43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5:44의 도입구로서는 그럴듯합니다만 구약의 어디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호교론적 신학자들이 꽤나 애를 먹는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태의 의도적인 가필이었을까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의 그 뒷 부분을 잘 읽어보라는 ‘문맥론자’가 등장할 때가 된 거죠. 확실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건조한 교설보다는 훨씬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예수는 ‘이웃의 범위를 전 인류로 확대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든 것일까요?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사제’와 ‘레위 사람’에 대한 비판일 뿐입니다. (레위 사람이 어떤 계급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사마리아인은 팔레스타인에서 계속 차별을 받아 온 집단입니다. BC 128년 사마리아가 유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 차별은 구체적인 색채를 띠게 됩니다. 헤롯 왕조가 들어선 뒤 사마리아시(원래는 도시 이름이지만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이름으로 나중에 바뀌었습니다.)는 로마풍으로 개조되어 이름도 로마 황제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바스테로 바뀌고 사마리아시 한가운데 로마 신전까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헤롯이 만년에 예루살렘 신전 입구에 금독수리상을 장식했을 때에는 폭동에 가까운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성도’가 모욕을 당했으니 소동이 일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사마리아는 이미 타락한 곳이며 이방화한 곳이니 이같은 취급을 받아도 아무런 말썽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 취급을 받지도 못할 정도로 차별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당연히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차별의식을 뒤집어 놓은 컴플렉스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보라, 사마리아 사람들조차도 이같이 훌륭한 일을 하지 않느냐. 하물며 너희들은…’ 이런 사고방식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차별의 연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가 17:11-19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이야기 역시 이러한 전도된 차별의식의 수준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문제에 관한 한 예수의 발상은 이런 정도의 선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마리아인 아닌 자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마리아인의 일을 생각할 때 품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는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활동하지 않았고 예수의 ‘제자’ 또는 지지자인 민중들 속에서도 사마리아인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마가 3:8의 기사가 그 증거입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예수는 ‘사랑’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 고유의 전통의 궤 안에서일 뿐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사제 계급에 대한 성토는 될 수 있어도 사마리아인에 대한 성심 깊은 애정에서 나온 발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인류 보편의 가치입니다. 결코 기독교만이 사랑을 말할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에는 저도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유교도, 불교도, 이슬람도, 그밖의 수많은 종교들도, 심지어는 종교 아닌 다른 가치관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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