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스핑크스의 저주

Part I 죽음의 바이러스

1999년 10월 이집트.
  " 제임스 박사님, 좀 진척이 있어요? "
  짧은 반바지에 카키색 작업복 차림의 셜리 맥거번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 휘날리며 작업반원이 임시로 쓰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 글쎄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상으로 스핑크스는 정교하게 설계되었어요. 복원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  생각보다는 오래 걸릴 것 같군요. "
  제임스 박사라 불린 사람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책상에 내려놓고는 옆에 있는 콜라캔을 집어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적당히 그을린 구리빛 얼굴, 힘줄이 불거진 팔뚝의 그를 32세의 고고학 박사로는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다.
  " 제임스 박사님, 연구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박사님께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셨다면서요? 거기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고고학과가 생긴 후로 최고  점수로 졸업하시면서도 교수로 남으라는 것을 마다하고 스핑크스 복원 작업에 참여하셨다면서요? "
  제임스는 들고 있던 콜라캔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셜리의 코밑에 있는 주근깨가 그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 과연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이 박사님에게 있어서 케임브리지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달려올 만큼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나요?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
  셜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제임스에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그는 책상에 놓여있는 스핑크스 관련 도면을 쳐다볼  뿐이었다.
  " 제임스 박사님, 우리가 왜 이집트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자기들이 관리 소홀로  망가뜨린  스핑크스, 자기들이 자기 돈으로 고쳐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필이면 유네스코(UN교육과학문화기구) 중에서 가장 우수한  고고학자인 우리들이 이 더위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냐구요."
  셜리는 말을 마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줄자를  열려  있는 책상 서랍 안에다 탕-소리가 나도록 집어던졌다. 줄자는  서랍 모퉁이를 맞고 튕겨 제임스의 발밑에 떨어졌다.
  ‘ 깨나 괄괄한 여자로군. 하긴 스물 여섯이면 한창 팔팔할 때지. ‘
  제임스는 빙그레 웃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면서 천천히 발밑에 떨어진 줄자를 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 셜리양. 이 작업 이전에 이집트에 와본적이 있어요?  여행으로. "
  셜리는 그런것은 왜 묻느냐는듯한 얼굴로 제임스쪽을 돌아보았다.
  " 고등학교때요. 지금 우리가 보수하고  있는  스핑크스도 그때 구경했지요. 근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죠? "
  " 그때 스핑크스 바로 앞에 가서 사진을 찍었나요, 아니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나요? "
  제임스는 영문도 모르는 셜리를 미소띤  얼굴로  쳐다보며 계속 물음을 던졌다.
  " 당연히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었죠. 제 친구들은 스핑크스의 발가락에 앉아서 찍기까지 했는걸요. "
  " 스핑크스가 왜 이지경으로 부스러지고 금이 가고 엉망이 되었는지 알아요? 바로 셜리양같은 관광객들의 몸에서  나오는 땀과 진동,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들이  스핑크스 위에 올라타고 낙서를 하고 조각을 뜯어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이렇게 된거여요. "
  셜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 스핑크스를 망쳐놓은 것은 우리 서방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파괴한 인류의 문화 유산, 우리가 앞장서서 고쳐야  해요. "
  셜리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져 있었다. 그때였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들어온 것은.
  " 제임스 박사님, 빨리 나와보십시오.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막 앞에 위치한 스핑크스는 복구 기간동안 외부공기와 모래 바람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거대한 밥공기를 엎어놓은듯한 모양의 유리 도움으로 덮여져 있었다.  반투명의 큼직한 유리 도움의 입구에는 벌써부터 카메라를 든 기자들로 법석이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두 사람 앞으로 몰려오는 기자들을 경비요원들은 몸으로 밀쳐내며 제임스와 셜리를 도움 안으로 간신히 통과시켰다.
  " 무슨 일이지요? 이 난리법석이? "
  셜리가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기가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베이지색의 반소매 작업복을 입고 옆구리에 작은 측정 장비를 끼고 있는 남자가 두 사람 앞에 서더니 복원실로 안내했다. 더위에도 불구하고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남자는 복원실로 가는 동안에도 흥분된 어조로 계속 지껄였다.
  "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감마선 투시기인 X-7280으로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 구조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화면에 이상한 금속 반응이 나타났읍니다.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이집트인은 금속을 스핑크스의 건설재료로 사용할 만한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밀 조사해본 결과 머리 부분에 무언가 작은 금속 물체가 박혀져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
  제임스는 나무로 되어있는 복원실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유리 도움 속이라도 사막의 건조하고 더운 날씨에는  어쩔 수 없는 듯 문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 열리지 않았다.
  " 젠장, 관리반 사람들은 이런 문 하나 제대로 안  고쳐놓나? "
  휴대용 컴퓨터를 어깨에 맨 셜리는 이렇게 투덜대다가  제임스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듯이 팔에 안고 있는 서류바인더로 눈을 돌렸다. 제임스가 복원실에 들어서자  둥근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는 구석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아 정면에 있는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는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찍은 감마선 사진이  비쳐지고 있었다. 단상에 서있던 검은 머리의 작달막한 남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 감마선으로 조사해본 결과에 따르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는 적어도 가로 세로 높이 30cm이상되는 금속 상자가 들어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감마선으로 확인된 금속 반응이 니켈 같다는 조사반의 이야기입니다. "
  " 말도 안돼요. 스웨덴의 과학자 크론스테드가 니켈을 발견한 때는 1751년. 이 스핑크스와 쿠푸왕의 피라밋을  만들 기원전 3천년전에 인류가 알고 있던 금속이라고는 구리와 금,은이 전부란 말이어요. "
  셜리가 책상을 탕 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단상의 작달막한 남자는 셜리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셜리양의 말대로 스핑크스 당시의 이집트인이 니켈을 알고 있었을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겁니다. 곧 스핑크스 머리 부분의 정밀 조사가 시작됩니다. "
  남자는 책상위의 빨간 스위치를 눌러 스크린에 나타난 화면을 바꾸었다. 화면에 나타난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는 적색,청색,흑색의 여러가지 선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가장 손상이 가지 않게  잘라낼 수 있도록 컴퓨터로 분석한 화면입니다. 복원 1반은  레이저 절단기로 도면에 나타난대로 절단을 행하여 주십시오.  복원 2반은 잘라낸 조각과 안에서 나온 자료들을  기록,보존,분석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복원 작업의 총 지휘는 제임스 박사님이 맡아서 해주시겠읍니다. "
  " 내가? 흠, 영광인걸? "
  제임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앉은 모두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셜리는 어깨에 맨 작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서 스크리인에 나타나는 자료를 분주하게 입력하고 있었다.
  모두는 중앙 복도를 지나 스핑크스 앞에 섰다. 복원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꿈속에 나타날 정도로 많이 보아온 스핑크스였지만 제임스는 늘 하듯이 옷깃을 경건히 여미고 스핑크스 앞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셜리는 그러한 제임스를 이상한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4천년의 역사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 자, 작업을 시작합시다. "
  제임스가 들고 있던 회색 워키토키에 대고 소리쳤다. 베지색 작업복을 입고 있던 두 사람이 레이저  절단기를  들고는 유리 도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불꽃도 보이지 않는 4000도의 레이저가 워키토키를 타고  나오는 제임스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돌 위를 움직였다. 붉고 푸른 파이프에 투명한 긴 튜브가 얼기설기 감겨있는 기계가 잘라낸 돌조각 위에 에나멜 플라스틱을 스프레이처럼 뿌렸다. 금방 굳어지는 에나멜 플라스틱은 부서지기 쉬운 돌조각 위에 단단한 투명 보호막을 이루었고, 진공 크레인이 이 돌조각들을 손쉽게 들어내었다.
  " 저기다! 뭐가 보여요! "
  반투명의 유리 도움을 통해 비치는 사막의 햇살을 받아, 잘라낸 돌조각 사이로 금속성 반사광이 셜리의 눈에 띄였다. 곧 두 사람의 고고학자의 손에 의해 그 물체는 안전하게  땅에 내려졌다.
  " 제임스 박사님, 이건… "
  셜리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제임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환한 사막의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물체는 틀림없는 금속 상자였던 것이다. 구두 상자보다 약간 큰 그 금속상자는 보통의 스테인레스 상자와 거의 흡사하게  생겼지만, 표면에 나있는 거친 흠만이 이 상자가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4000년이나 잠자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흔히 이집트의 유물에서 발견되곤 하는 히에로글리프 같은 글자나 무늬는 하나도 쓰여져 있지 않았다. 곧  조사반이 달려와 사진을 찍고 갖가지 장비를 들이댔다.
  " 랜디 교수님, 이것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
  아까 단상에서 말하던 작달막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  금속 상자를 손에 들고는 천천히 열었다. 유물의 보존을 위해 반투명의 보호 장갑을 끼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은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랜디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작은 캡슈울을 몇 개 꺼냈다. 일동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유리가 아닙니까, 제임스 박사님! "
  제임스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랜디가 그의 손에 캡슈울 하나를 넘겨주었다. 제임스는 캡슈울을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캡슈울 안은 비어있는 것 같았다.
  " 정말 놀라와요. 고대 이집트인들이 금속과 유리를 사용하고 있었다니! "
  " 박사님, 저도 하나 줘보세요. "
  " 여기 있어요, 셜리양. 꼭 보호 장갑을 끼고 만져야 유물이 안 상합니다. "
  " 그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서야 어떻게 고고학자라 할 수 있나요. "
  셜리는 캡슈울을 하나 받아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녀가 다시 랜디에게 캡슐을 돌려주려고 할 때 입구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 빨리 감춰요. 기자들이 보면 곤란합니다. 아직 학술적으로 확인도 안된 것을 발표할 수는 없어요. "
  랜디는 캡슈울을 다시 금속 상자 안에 집어넣다 그만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4000년을 스핑크스의 머리속에서 잠자고 있던 캡슈울은 바닥의 돌멩이에 부딪쳐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아깝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기자들의  눈을  피하는게 우선이니까. ‘
  랜디는 황급히 남은 캡슈울을 금속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고는 유물을 정리해 보관하는 금고안에 밀어넣었다.  랜디가 금고문을 닫자마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성급한 몇몇 기자들의 마이크를 피하느라 제임스와 랜디는 몸부림을 쳐야했다.
  "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에서 금속 상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더우기 4000년전의 이집트인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던 니켈로 되어있다면서요? "
  유리 도움 안이었지만 사막의 뜨거운  열기속에서  무거운 비디오 카메라를 어깨에 메느라 구슬땀을 흘리면서 이 영훈기자는 무작정 제임스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 아직 확인 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스핑크스의  머리에서 무언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한 것은 고고학적인 조사가 끝나야 발표할 수 있어요. "
  " 하지만 박사님들이 발견하신 것은 인류  문명의  귀중한 유적입니다. 온 세계는 이 발견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요. 박사님께서 말씀하지지 못한다면 아가씨께서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
  사람들 틈바귀에 끼여있는 셜리를 발견한 영훈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르르 기자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녀의 팔에 안고 있던 서류 파일이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셜리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마이크를 신경질 난다는 듯이 팔로 툭 쳐버렸다. 영훈이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동안 셜리는 흩어진 서류를 집어서는 빼끔 열려있는 문으로 나가버렸다.
  기자들이 경비원들에 의해 쫓겨가듯이 물러나간 후에야 제임스와 랜디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휴, 이제야 물러나갔군. 하지만 제임스 박사님, 고대 이집트인이 니켈 금속과 유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임스는 짧은 작업복의 소매로 땀을 닦으며 랜디쪽을 돌아보았다.
  " 음… 자세한 것은 정밀 조사가 끝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할만한 발견을 한건지도 몰라요. "
  " 박사님,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죠? 독한 마늘 냄새같기도 하고… "
  세 사람은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 뭐 누군가가 마늘 섞인 음식을 흘렸나보죠.  별 일이야 있겠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셜리는 주위를 휘 둘러보고는 책상위에서 휴대용 컴퓨터를 들어 어깨에 메고 휘적거리며 문을 나섰다. 사라지는 그녀의 뮛모습에 대고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 마치 서부시대의 카우보이가 다시 나타난 것 같군. "

  셜리가 기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6시가 넘어서였다. 10월이지만 아직 더운  이집트의 더위를 먹었는지, 아까 너무나 엄청난 발견을 목격해서였는지 모르지만 피곤하고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주머니를 한참 뒤져서 간신히 아파트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여는 셜리에게 기둥 뒤의 검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허름한 청작업복 차림에 어깨에는 큼직한 비디오 카메라. 남자는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실례합니다.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
  셜리는 대꾸도 않고 열쇠로 문을 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힘껏 닫았다. 윽-하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셜리양을 잡으려던 영훈의 손이 문에 찧였다.
  " 끈질기시군요. 이 상처난 것좀 봐요. "
  셜리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문을 열었다. 영훈은 문틈에 찧여 약간 피나는 손가락을 아래로  떨구고 아파트 문을 들어섰다.
  " 이봐요, 난 지금 무척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구요.  발견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고 아까도 말했잖아요. "
  " 하지만 발견을 지켜본 사람은 제임스 박사님과 랜디 교수님, 그리고 셜리양뿐입니다. 몇마디라도 알려줄 수 있잖아요. "
  " 아이 참, 난 말할게 없다고 몇번이나… "
  셜리는 목 뒷부분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영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쓰러지는 셜리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는 맥없이 풀어져 있었다. 그는 셜리를 내려놓고 방안으로 들어가 전화기를 붙잡았다.

  " 이 금속상자는 예상대로 니켈로 되어있읍니다.  표면의 부식상태로 보아서는 4000년이 조금 넘을 것 같고요, 놀라운것은 상자의 표면가공이 레이저로 가공된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
  " 레이저? "
  랜디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임스 박사님보고 같이 남아있어달라고 할껄. ‘
  랜디는 결과에 너무도 놀라 숙소에 돌아간 제임스를 아쉬워했지만 연구원은 태연하게 보고서를 계속 읽어나갔다.
  " 상자는 부식되어있었지만, 표면의 니켈 결정 방향과 미세한 마무리 손질로 보아 레이저가 틀림없다는 것이 복원 2반 연구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더우기 안에 들어있는 캡슈울은 파이렉스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읍니다. "
  " 파이렉스가 뭐지요? "
  " 특별히 열에 강하도록 제작된  유리입니다. 시험관이나 비이커등의 과학 실험 기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유리이지요. 이집트인이 유리를, 그것도 파이렉스를 쓴다는게 믿어지지 않아서 몇번이나 실험을 했지만… "
  연구원은 눈 앞에 청록색과 빨간색, 그리고  갖가지 색의 빛의 점이 마구 날아다님과 동시에 뒷목이 뻣뻣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지만 보고서는 어느새 그의 손을 빠져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신이 넘어지는 쿵하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 셜리양,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펄펄하던 사람이? "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제임스는 얼굴에 온통 튜브와  의료기기를 뒤집어 쓴 셜리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다가, 옆에  멍하니 서있는 남자가 낮에 만났던 기자임을 깨닫고 험악한 눈길로 영훈을 노려보았다.
  " 당신은 도대체 여기 왜 서있는거요? 병원에까지  취재하러 왔소? 이 아픈 사람을 붙잡고? "
  영훈이 난처한 얼굴로 랜디를 돌아보았다.
  " 이 영훈 기자가 셜리양의 아파트에 찾아 간 것은 사실이지만 쓰러지는 그녀를 안아서 의료원으로 데려온 것도  바로 그입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셜리양은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
  제임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영훈에게 목례를 보냈지만 영훈은 살짝 웃어보이며  인사에 답했다. 랜디가 말을 이었다.
  " 이상한 일입니다. 복원 2반의 연구원인 어드벤트,  관리반의 아미르와 하지, 그리고 셜리양까지 이미  네명이  원인모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읍니다. 고열, 전신에  돋아나는 붉은반점, 그리고 혈중 포도당 농도의 급격한  하락.  특히 혈중 포도당 농도가 떨어지면 치명적이랍니다. 혈관에  포도당을 주입함으로서 일단 고비는 넘겼읍니다만 걱정이군요. "
  제임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집트에서 가장 멋있는  건물로 손꼽히는 이집트 국립 의료원의 창문 아래로는  한밤의 나일강이 수천년의 역사를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다리를 건너는 지하철의 불빛만이  파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제임스 박사님과 랜디 교수님이시죠?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바싹 마른 큰 키의 의사가 두 사람을 불렀다. ‘이집트  국립 의료원 바이러스 과장 낫산’이라는 파란 명찰이 그가  입은 하얀 가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낫산의 방은 여러가지 색의 작은 튜브와 현미경, 컴퓨터와 시험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푹신푹신한 갈색  소파에  앉은 두사람은 약간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낫산이 벽 한구석에 있는 컴퓨터 스크리인의 스위치를  넣었다. 화면에 직사각형 캔디 모양에 털이 잔뜩 나있는 회색 물이 보였다.
  " 두분이 보고 계시는 것은 셜리양과 아미르, 하지 세사람 몸에서 추출한 바이러스입니다. 어드벤트는 증세가 가벼워서인지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고요. 문제는  이집트  내에, 아니 전세계에 이러한 바이러스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 그렇다면 새로운 바이러스? "
  " WHO, 즉 세계 보건기구에 등록되어있는 어떤 바이러스도 이런 것은 없었읍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어떤 치료법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의료원 내의 모든  연구원들과 의사가 치료에 매달려있지만 회복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합니다. "
  " …… "
  " 뭔가 집히는 것은 없읍니까? 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거야 피라미드의 저주도 아니고… "
  삐리릭- 낫산의 책상위에 있는 화상 전화기에  파란  불이 켜졌다. 화면에는 제복을 입은 간호원의  얼굴이  나타났다. 간호원의 낮은 목소리가 약간의 잡음이 섞인 채  스피이커에서 흘러나왔다.
  " 아미르씨와 하지씨가 지금 막 숨을 거두었읍니다.  병세가 경미하던 어드벤트와 셜리양도 증세가  매우  악화되었고요. 사망하기 직전 아미르씨와 하지씨의 체온은 무려 43도였읍니다. "
  " 인터페론을 써보았나? 감마 글로블린도? "
  " 섬유아세포에서 추출한 인터페론을 대량 투여해보았읍니다만 전혀 효과가 없었읍니다. 또한 바이러스에 듣는 면역제제인 감마 글로블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읍니다. "
  낫산은 머리를 두 손으로 싸쥐었다. 새로운  바이러스병에 일차적으로 투여하는 인터페론과 감마 글로블린이 아무런 효험이 없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없다. 낫산이 이런 생각에 절망하고 있는데 책상위의 화상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그는 귀찮은듯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 임상 분석실입니다 ‘ 하는 약간은 쉰듯한 굵은 목소리가 스피이커에서 흘러나왔다.
  " 바이러스의 구조를 분석해냈습니다. 결과를 컴퓨터로 보내겠습니다. "
  낫산은 선반에 놓인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잔  따르더니 천천히 컴퓨터로 가서 스위치를 올렸다. 흡사 철골이 이리저리 얽히고 모서리마다 구슬같은 동그라미가 달려있는 이상한 모양이 화면에 나타났다. 낫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커피잔을 쥔 손이 휘청대면서 바닥에 흐른 커피가  제임스의 작업복까지 튀었다.
  " 무슨… 일입니까? "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낫산에게 물었다. 낫산이 고개를  휘휘저으며 말했다.
  "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보면 바이러스는  이물질이거든요. 인간의 면역 체계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즉각적인 공격을 가하고, 바이러스는 대부분의 경우에 퇴치가 됩니다. 이러한 면역 작용을 돕는 물질이 바로 인터페론과  감마글로블린이지요. 하지만 이번  바이러스는…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단백질과 똑같은 구조입니다. "
  " 인간의 단백질과 똑같은 구조라고요? "
  낫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따라서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
  삐리릭- 낫산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의 전화기는  무정하게도 또 울려대고 있었다.
  " 입원실입니다. 스핑크스 복원반에서 여섯명의 환자가 새로 발생했읍니다. 또, 치료중이던 어드벤트씨도  사망했읍니다. 사인은 간조직 파괴입니다. "
  " 무슨 소리야? 간조직 파괴라니? 간이 얼마나 튼튼한  장기인데 단 몇시간만에 파괴된단 말이야? "
  낫산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빽 질렀다. 상대편이 움찔하는 것이 화면을 지켜보는 제임스들에게도 보였다.
  " 저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분명히 어드벤트씨의 간세포의 95%가 그 기능을 상실했읍니다. 일부 세포는  원형질 분리를 일으켜 외형까지 파괴되었읍니다. 그리고  의료진에게까지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  의료진에 특수 마스크와 산소 호흡기를 지급했읍니다. "
  " 좋도록 하게. "
  낫산은 전화를 끊고 수화기를 책상 위에 탕-하고 팽개쳐버렸다. 밖에서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여직원이 양복  차림의 남자와 같이 서있었다.
  " 보건성 장관께서 오셨읍니다. "
  " …… "
  짙은 곤색의 양복 차림인 장관은 인사도 생략한  채  낫산 앞에 앉았다.
  "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괴질이라뇨? 더우기 발병한지 두시간만에 세 명이 숨지다니. "
  " 저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팽개쳐져 있는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낫산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화면 아랫쪽에 ‘아스완’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 여기는 아스완입니다. 아스완 시내에서 일곱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혈중 포도당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바이러스도 아닙니다. "
  " 혹시 그중 스핑크스 복원반원은 없는가? "
  " 두명은 스핑크스 복원반이고 다섯명은 그 가족입니다."
  랜디는 보고를 듣자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제임스가 급히 소리쳤다.
  " 빨리 의사를, 응급조치를! "

  여의도 종합 과학 단지의 중심부에 높이  솟은  111층짜리 바이오 타워의 78층에서는 혜진이 연방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컴퓨터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기호를 훑어내리는  그녀의 눈은 놀라움에 싸여있었다.
  "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설마 이럴수가… "
  쿵쿵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천천히 스크리인을 다시 확인했다.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는 상하로 격렬히 요동을 치고 있었다.
  " 이거 뇌파 그래프 아니오? 식물학 박사이신 혜진씨가 언제 동물 뇌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요? "
  커피잔을 들고 밖에서 들어오던 진현이 컴퓨터 스크리인에 나타난 화면을 보고 불쑥 참견했다. 혜진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책을 대충 펴면서 관심없는 듯이  심드렁한 말투로 진현의 말을 받았다.
  " 식물학자라고 동물쪽은 연구하지말라는  법이  있나요? 단지 참고로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
  " 연구하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
  진현은 짧게 깎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 왜 남의 책상머리에 걸터앉는 거여요? 예의도 없게시리."
  진현은 히죽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 아, 다른게 아니고요, 혜진씨가 들고 있는 책이 꺼꾸로 인쇄되어있다는 걸 말해드리려고요. "
  혜진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지금 책을 꺼꾸로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다닥 책을 내려놓았다. 진현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무슨 문제가 있군요, 혜진씨. 항상 냉정을 잃지않던  당신답지 않아요. 무슨 일이죠? 도와드릴께요. "
  진현은 감추고 있던 한쪽 손을 펴보였다. 그 손에는 1cm정도밖에는 안되는 파란 장미 세 송이가  쥐어있었다.  혜진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 참 아름답군요, 파란 장미라니. 더우기 이렇게 작은  장미는 본적이 없어요. 인공적으로 만든거죠? "
  " 사흘걸려서 만든 꽃이예요. 연구소 오기 전의 제 전공이 유전자 조작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혜진 당신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받아요. "
  " …… "
  진현은 혜진의 투피스 웃옷의 포켓에 장미를 꽂아주며  말했다.
  " 요즘 왠지 당신이 어두워보였어요. 환히 웃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
  " 고마와요. 당신이라면…  절 도와주세요. "
  혜진은 키보드를 눌러댔다. 화면에 새로운 수식과  그래프가 나타났다. 진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걷혀져갔다.
  " 이것은… "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이건 식물에서 측정한 생체전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식물 뇌파에요. "
  "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측정을… "
  혜진은 치렁치렁한 긴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올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CD (콤팩트  디스크)의 삼각형 스위치를 한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의 조용한  음악이  혜진의 목소리를 자욱이 감싸며 흘러나왔다.
  " 진현씨는 L-2-3-폴리글루타민산이라는 물질을  기억하시나요? "
  " L-2-3-폴리글루타민산이라면 동물의 두뇌활동을  촉진시키는 약품… 맞나요? "
  " 맞아요. 예전부터 글루타민산계통의 물질들이  두뇌활동에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었지요. 그래서 한동안 조미료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도 있었잖아요? 조미료의  주성분이 바로 글루타민산나트륨이거든요. 작년엔가 우리 바이오타워의 82층 생화학 연구팀이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발견해내서 노벨상후보에까지 올랐었지요. "
  혜진은 책상서랍에서 작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어 전원에 연결했다. 화면에는 곧 작은 생쥐들이 가득 나타났다.
  " 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 생쥐는 미로의 출구를  찾아내는 실험에서 보통의 생쥐에 비해 15배, 높은 곳에 매달린 치즈를 찾아먹는 실험에서는 28배라는 놀라운 향상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문제는… "
  그녀는 화면의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흰털이  복슬복슬한 생쥐가 갑자기 등을 땅에 대고 네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혜진은 낮고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L-2-3-폴리글루타민산은 워낙 독성이  강력한  물질이에요. 실험용으로 사용했던 47마리의 생쥐중에서 살아남은  생쥐는 단 두 마리뿐이었지요. 저는 그 연구논문을 읽고  과연 이 물질을 식물에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결과는 진현씨가 아까 보신 식물 뇌파였어요. "
  진현은 혜진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서 실험에  쓰인 흰쥐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거죠, 혜진씨? "
  그녀는 CD의 스위치를 눌러껐다. 기묘한 적막이 방안에 감돌았다. 혜진은 서랍에서 컴퓨터 디스크 한  개를  끄집어냈다.
  " 여기에 연구과정과 결과가 모두 들어있어요. 혹시  제가 엉뚱한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검토해주세요.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서 도저히 저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저 혼자 발표할 자신도 없고… "
  진현이 그녀의 손에서 디스크를 받아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마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고마와요, 정말… "
  진현은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말없이 일어나며 나지막히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사이몬과  가펑클의 ‘ Bridge over troubled water (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 ‘ 였다.
  ‘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당신이 피곤할 때,  정말 보잘것 없는 존재라고 느낄때,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  그대의 눈물을 닦아주리다…) ‘

  특수 마스크를 쓴 구로자와와 낫산은 한 장의 사진을 놓고 고개를 맞대고 있었다. 전날 죽은 한 복원반원의 X선 단층촬영사진이었다.
  " 간조직은 완전히파괴되었습니다. 약 50%정도의  세포는 원형질 분리를 일으켜버렸고, 나머지는 아예 세포막  자체가 녹아버렸읍니다. 의사 생활 40년동안에 이렇게 무서운  병은 처음 봅니다. 사흘사이에 환자가 3289명에다 사망자가 258명이나 발생하다니… "
  구로자와도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 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바이러스 연구라면 세계 최고인 저희 동경  대학연구팀에서도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도대체 바이러스의 단백질 구조가 인간과 똑같다니 말이  됩니까, 말이… "
  구로자와는 특수 마스크의 입부분을 능숙하게 비틀어 열고는 담배 한 개비를 집어피웠다. 창문의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비친 담배 연기가 마치 지옥의 한구석을 연상케 했다.
  " 그건 그렇고 셜리양은 아직까지도 살아있습니까? "
  낫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초기의 발병자들은 거의 다 사망했는데 셜리양만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셜리양의 치료에  성공하고 나면 치료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구로자와는 장갑을 낀 손으로 핀셋을 사용해서 탁자에  놓인 상자속에서 작은 유리 캡슈울을 들어보였다.
  " 이 캡슈울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단  말이죠? 그리고 이 캡슈울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면서 바이러스가  퍼졌단 말씀이죠? "
  낫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갈색 특수 마스크를  쓴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영낙없는 화성인 같았다.
  " 확인결과 그 캡슈울에는 환자들의 몸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제는동경대학 연구팀이 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해내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
  구로자와는 한숨을 내어쉬며 캡슈울을 상자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이 캡슈울 몇개는 저희가 가져가서 연구해도 되죠? "
  " 물론이죠. 발견된 열두 개의 캡슈울중 한 개는  깨졌고, 구로자와씨가 가지고 계신 상자에 세 개, 나머지 여덟 개는 복원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개는 연구용으로 써도 좋다고 이미 복원팀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
  " 아, 그리고 이 바이러스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스핑크스 바이러스’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니까요. "
  " 그렇게 하시죠. 저희들의 솔직한 심정은 스핑크스의  저주라도 받은 듯한 느낌입니다. "
  낫산의 책상위에 있는 화상 전화기의 파란  불이  켜졌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으로 구로자와를 쳐다보았다.
  " 또 피해 상황 보고일겁니다. "
  화면에는 검은 양복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화면  밑에 ‘보건성’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네. 이집트에 관광왔던  관광객들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 일본과 미국, 한국, 독일에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고야. 당장 어떻게 해서던지 치료책을 찾아내!"
  제길, 누군 그러기 싫어 이러고 있나, 하며 낫산은 수화기를 집어던져버렸다. 사막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후두둑- 구름마저도 무겁게 느껴지는  10월의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혜진은 작은 화분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78층 창가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화분을 내려놓고 손벽을 딱 쳤다. 각종 파이프와  컴퓨터가 놓인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끼여있는 까아만 CD 오디오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인 Albononi의 Adagio가 튜브와 전선이 가득찬 방을 수면에 가득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감쌌다. 작은 전극을 들고온 코스모스에 꽂은 혜진은 컴퓨터에 나타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극의 무게로 축 늘어진 코스모스를 본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다.
  ‘ 비록 식물이지만 축 늘어져 있는 코스모스가 불쌍해. 연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따라가던 그녀는 뒷쪽에서 나는 발자국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 놀래기는… 난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한건데.  연구는 잘 되어가요? "
  진현은 들고 있던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쟁반에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홍차 두 잔과 비스켓 한  접시가 놓여있었다. 혜진이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아직까지는요. 부탁드린 것은 어떻게 됐어요? "
  " 예상대로예요. 그 그래프는 뇌파의 일종이라는 것이  확실해요. 다만 인간의 뇌파처럼 고등적인 생각을  할수  있는 뇌파는 아니고, 동물로 치면 개나 고양이  정도의  뇌파라고 할 수 있어요. "
  혜진은 쟁반으로 눈을 돌렸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홍차의 붉은 빛깔이 그녀의 목소리에 차분함을 더해주었다. 진현은 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CD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Albinoni의 Adagio에 귀를 기울이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를 가리켰다.
  " 지금 이 그래프는 베타파에요. 뇌파에는 알파,베타,델타 세가지 파가 있는데 베타파는 주로 기억과 수면에  관계하지요. 아마 Albinoni의 Adagio 음악때문에 그럴거여요.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진동수 자체가 베타파와  비슷해서  베타파의 생성을 돕지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도 바하의 음악이 베타파를 생성, 두뇌의 기억작용을 돕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코스모스도 우리처럼 이 음악을 듣고 있는거지요, 혜진씨. "
  혜진이 코스모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맞아요, 진현씨. 우리는 지금 인류  최초로  코스모스가 음악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거예요. "
  뒷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험 동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겠지 하는 생각에 무심히 흘려버린 진현은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홍찻잔을 집어들고는  화면에  열중하는 혜진의 옆 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얀색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까아만 우단 투피스 위로, 손질을 하지 않아 약간은  헝클어진 긴 생머리가 흘러내렸다. 방안의 희미한 조명에 싸늘하게 빛나고 있는 금테 안경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과 오똑한 콧날에 어울리지 않게 걸려 있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진현을 엄습했다. 이 방은 식물  연구실이라서 실험동물을 한마리도 키우지 않는 것이다. 뒤를 돌아다본 진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 이봐, 이 결과 조금이상한데? 검토 좀 해달라고. "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서 부드러운 천으로 닦으며 연구  2그룹의 마사다까는 옆에 있는 동료에게  두툼한  서류뭉치를 넘기다가 그만 의자가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지나가던 사나에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 마사다까씨는 일이 잘 되어가나요? 하긴 동경  대학에서도 자타가 인정하는 일벌레인 마사다까씨가 달라붙어서 안되는 일이 없었지만… "
  " 잘되면 사나에씨가 축하로 저녁이라도 사주시게요? "
  사나에는 픽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그럼 내기해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정체를 누가 더 먼저 파악하는지, 마사다까씨가 먼저 성공한다면 제가 저녁을 사고,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한다면 마사다까씨가 제 저녁을 사는거고요. 자신 있어요? "
  마사다까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밝은 베지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날씬한 사나에의 몸매에 저절로 눈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사다까는 너털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바라던 바죠. 두고 보세요, 이번에 바이러스의 특효약을 만들게되면 ‘사나에 백신’이라고 이름을 지을거예요. "
  주위의 연구원들이 일손을 잠시 놓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수군댔다.
  " 이거 원,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이네요? "
  마사다까의 옆자리에 앉은 미치꼬가 책상 위의 거울을  집어들면서 비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럼요, 이럴때 아니면 언제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을 하겠어요? 마사다까씨, ‘사나에 백신’을 빨리 발견하기를 빌겠어요. "
  뒷자리에 앉은 한 연구원이 다른 연구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웬일이야? 동경 대학 연구소내에서 콧대 높기로  소문난 사나에가 저런 소리를 다하고… 내일은 해가 동경만으로 지겠군. "
  사나에가 막 자리를 떠나려 할때 뒷쪽에서  굵은,  그러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흥미롭군요. 저도 좀 끼워주시면 안될까요? "
  모두 고개를 돌려 뒷쪽을 쳐다보았다. 와이셔츠 차림에 빨간 넥타이를 맨 사로나가가 팔짱을 낀채로 사나에에게  웃어보이고 있었다.
  " 자신만만하시군요, 사로나가씨. "
  " 저 또한 사나에 씨에게 공개적인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는거랍니다. "
  주위가 다시 웅성해졌다. 마사다까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웃으며 사로나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사로나가씨의 능력은 잘 알고 있지요. 우리 한 번 잘 해봅시다. "
  사로나가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탁 쳐버렸다. 사나에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 가네다 마사다까. 조센징 3세지. 어떻게 운이 좋아 동경대학까지 왔나보지만 우리 일본인한테 이길순 없어.  너같은 조센징에게 본떼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정체는 내가 밝혀내고 만다. "
  사로나가는 말을 마치고 몸을 확 돌려 밖으로 나갔지만 마사다까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사나에가 새하얘진 얼굴로 마사다까를 쳐다보았다.
  " 괜찮아요? 마사다까씨? "
  "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전 가네다 마사다까란 일본  이름보다는 김 한석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더  원합니다.특히 사나에씨에게요. 사로나가씨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으니까 걱정마세요. "
  " 하지만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
  " 우리 한국인의 신화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동안 어두운 동굴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결국 100일을 훌륭히 기다린 곰은 예쁜  여자가  되지요. 사나에씨같은 미인 말입니다. "
  사나에가 볼에 홍조를 떠올렸고 어색했던 분위기는 조금씩 풀어져갔다.
  " 곰이 변해서 된 여자가 낳은 사람이 우리  배달  민족의 시조인 단군입니다. 사람이 되려고 100일이나 기다릴 수  있는 ‘은근과 끈기’가 우리 한국인의 정신입니다. 전 사로나가씨와 다시 우정을 회복할때까지 , 그리고 그가 우리  한국인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걱정말아요, 사나에씨. "
  그녀는 마사다까, 아니 김 한석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에 떴다. 평상시에는 곰처럼 순박하기만 한 마사다까가 오늘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마사다까는 의자에 고쳐앉고는 책상 위의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렸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해내기  위해서였다.

  특수 마스크를 쓴 영훈과 제임스는 셜리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건만 셜리의 병세는 나아질 줄을 몰랐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낫산이 힘없는 걸음 걸이로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 그래도 두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은게 다행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은 모두 병에 걸렸는데… 제임스  박사님, 랜디 교수님도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낫산은 말없이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입에 물었다. 공기 정화기까지 달린 특수 마스크를  쓰고 담배를 피고 있는 낫산의 모습은 화성인 바로 그것이었다.
  " 병세가 악화되어 미국으로 후송을 했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
  제임스가 낫산의 손을 잡았다. 며칠을 밤을 꼬박새운 낫산의 손목은 믿어지지 않을만큼 여위어있었다. 그때였다. 낫산의 허리에 찬 화상 전화기가 울린 것은.
  낫산은 황급히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보건성 장관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개져 있었다.
일본 동경 대학 연구팀이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네. 아직은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때 아닌가? 곧 동경 대학 연구팀이 도착할걸세. "
  낫산은 스위치를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가 휘청했다. 영훈이 그를 부축해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 긴장이 풀렸었나봅니다. 고맙습니다. "
  일동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웃는 웃음이었다.

  " 축하해요. 마사다까씨. 자, 사나에 백신을 만든  기념이에요. "
  동경의 수중도시 해저 50m에 있는 ‘The  Blue  Ocean(푸른바다)’의 커다란 유리문을 들어선 사나에는 환히 웃으며  마사다까, 아니 김 한석에게 장미 꽃 한다발을  내밀었다.  꼭 끼는 검은 색 원피스에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연구소에서 볼때보다 더 키 크고 날씬해보였다. 한석은 수줍은 듯이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 아직은 유전자 구조를 발견한 것에 불과해요. 백신의 유전자 설계도는 되어있지만 아직 실제로 백신을 만들려면  좀더 있어야 해요. "
  사나에는 한석의 팔에 살짝 기댔다. 한석은 빙그레 웃으며 웨이터가 들고 온 메뉴판을 사나에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석의 앞에 도로 메뉴판을 펴놓았다.
  " 잊으셨나요? 내가 내기에서 져서 당신의 저녁을  사기로 했다는 걸. 나, 당신이 그만 좋아져버렸어. "
  ‘ 굉장히 대담한 아가씨 아니면 대단히  무드없는  아가씨 둘중 하나군. 아직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내가  좋아졌다는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나 역시 사나에가 맘에 드는걸. ‘
  한석은 이렇게 생각하며 바닷가재 요리를 시켰다.  사나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웨이타에게 이름도 어려운 요리를  주문했다.
  " 생각보다 세련되었군요, 당신. "
  한석은 피식 웃으며 사나에에게 물었다.
  " 신기하군, 우린 몇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좋아졌다는 말부터 하다니. 그렇다고 내가 사나에 눈에  뜨일만큼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
  한석은 말해놓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사나에는 그런 한석을 귀엽다는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석은 자신이 지금 사나에에게 말을 놓고 있고  그녀가 아무 꺼리낌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가벼운 흥분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사회에서는 꽤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말을 놓지 않는 것이  관례니까.
  " 신선했어요, 당신이란 사람이.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은 대부분 인텔리출신이라서 그런지  어딘지  자신만만해요, 다들 잘난체 하고. 하지만 항상 일에 열중하고 있는  당신은 왠지 신선한 느낌을 주었거든요. 그날 사로나가씨와의  일도 그렇고. 자,자 그런 재미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해요."
웨이터는 큰 쟁반으로 하나 가득 음식을 날라왔다. 사나에가 시킨 음식은 프랑스 요리인 것 같았다. 한석은 옆에 있는 신문을 잠깐 집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신문 하단의 작은  기사에 멈춰섰다.
  " 신문에 뭐가 났어요? "
  " 음, 저번 학술 회의 때 우리 연구소에  왔던  사람인데, 권 혜진이라는 한국 여자가 실종되었다는군. 그런데 같이 있던 남자 연구원은 살해당했다는거야. 식물 생체 전류에 관한 논문이 대단한 수준인데다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주목했었는데… "
  사나에는 그의 손에서 살며시 신문을 치워 내려놓았다.
  " 설마 골치아픈 연구 이야기를 여기서까지  꺼내시는  건 아니겠죠? 또 헤진씨라는 사람의 논문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
  그는 정색을 하며 사나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음, 연구 이야기라면 할 게 딱 하나 남아있어. 연구소에서는 나보고 이집트에 가서 백신을 만들래. 진짜로  ‘사나에백신’을 만들라는 얘기인데… 내일 출발해야 돼. "
  " 그렇게 빨리요? "
  입이 삐죽 나오는 사나에를 쳐다보며 그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 우리 연구소에서 네 명이 가는데 그중 한 사람은 컴퓨터 전문가여야 해. 내가 분석한 자료를 컴퓨터로  옮겨야  하니까. 그래서 사나에를 추천했어. 사나에는  우리  연구소에서 몇명 안되는 시뮬레이션 전문가잖아. "
  그녀는 식사를 하다말고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계속했다.
  " 처음에는 연구소에서도 여자를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내가 이 백신에 ‘사나에 백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까 두 손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허락해주더군. 이런  얘기 재미 없지? 식사나 계속하지. "
  사나에는 정색을 하고는 옆에 놓인 포도주 잔을  집어들었다.
  " 아뇨, 제가 태어나서 들은 가장 멋있고 신나는 이야기였어요. 우리 건배를 올려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와 사나에  백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 둘을 위해. "
  한석도 잔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잔에 부딪쳤다. 찰랑이는 보랏빛 액체가 유리 벽 바깥의 바다 풍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 뭐라고요? 백신을 만드는데… "
  한석을 마주 대한 낫산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한석은  그가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저희가 연구한 백신은 그대로 환자한테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사람 몸에 백신이 들어가서 거기서 항체가  생겨나는 거니까요. "
  " 그렇다면 인체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
  " 다른 방법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 말고 항체를  생성할 새로운 실험 동물을 찾는데는 적어도  1년은  걸릴겁니다. "
  " 항체를 형성할 사람에게 백신을 투여한다면  그  사람은 안전합니까?"
  " 컴퓨터 실험에서는 안전하다고 나왔지만 제  추측으로는 10%의 위험성은 있습니다. "
  낫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그러면 누가 지원자로 나서겠습니까? "
  " 그건 걱정마십시오. 실험 대상자는 바로 저니까요. 하루라도 빨리 항체를 만들어야  그만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
  문이 열리고 구둣발 소리와 함께 특수 마스크를 쓴 두사람이 들어왔다. 영훈과 제임스였다.
  " 마사다까씨보다는 제가 나을겁니다. 실험용으로요. "
  낫산은갑자기 나타난 영훈의 한마디에 어리둥절했다.
  " 일부러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셜리양의 병세가  사람을 하도 답답하게 해서 찾아와본 것입니다. 만약 마사다까씨가 죽기라도 한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아무도 고칠 수 없게 됩니다. 제가 그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도록  해주십시오."
  옆에 서있던 제임스가 영훈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 랜디 교수가 죽은 지금 이번 스핑크스 복원계획의  책임자는 접니다. 제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주세요. 더우기 이 영훈 기자는 젊습니다. "
  영훈이 제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 제임스 박사님,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대인들이 파이렉스 유리를 쓴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잖아요? 박사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이 수수께끼를 풀겠습니까? "
  그는 말을 마치자 말릴 겨를도 없이 특수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낫산의 안색이 확 변했다.
  " 이미 제 호흡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들어갔을겁니다. 이 국립 의료원은 이집트 전체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가장 많은 곳일테니까요. 마사다까씨, 빨리 서둘러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
  잠시 말이 없었다. 곧 한석이 천천히 일어섰다.
  " 하루만 기다려주세요.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
  나가려던 한석이 고개를 돌려 영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 저는 재일 한국인 3세 김 한석이라고 합니다.  마사다까는 일본명이지요. 같은 배달 민족으로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

  " 이정도면 됐나요? "
  사나에가 어깨 높이까지 올라오는 컴퓨터 출력 결과를  안고 한석의 컴퓨터실로 들어왔다. 한석은 화면에서 눈을 돌려 출력 결과를 검토했다. 종이를 읽던 한석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 무슨… 문제가 있나요? "
  " 백신은 완벽한데… 항체를 만들어낼 사람의 위험 확률이 15%로 증가했어. "
  " …… "
  한석은 컴퓨터 앞에서 몇 자 두들기더니 컴퓨터를  꺼버렸다. 
  " 이제 됐어. 네시간 내에 백신이 완성될  거야,  ‘사나에 백신’이. 고생많았지? "
  사나에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 자, 백신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있는데  우리  나가서 식사나 하지. 전통요리인 쿠샤리를 잘하는  집을  아는데… 사나에 입맛에도 맞을거야. "
  사나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국립 의료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는 나일강변에 세운 작은 건물로 갔다. 푸른색  유리로 만든 여섯 개의 기둥 위에 떠받쳐진 건물의 유리  바닥으로 나일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통 음식점답지 않게 멋있는 실내 장식이 사나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석은 입고 있던 여름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노란색  반팔 티셔츠가 구릿빛 억센 팔뚝에 무척 잘 어울렸다. 
  " 근데 여기 이름이 왜 ‘카지노 나일’이죠? 한 구석에서는 도박이라도 하는건가요? "
  한석은 껄껄대고 웃었다. 
  " 이집트에서는 카페를 카지노라고 한대. 원래는 전문  카페였는데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나봐. "
  그는 쿠사리 2인분을 시켰다. 쌀과 마카로니를 볶아  화끈한 고추 소스를 끼어얹어먹는 쿠사리는 매운 것을 못먹는 사나에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후식으로 나온 딸기 쥬스  잔을 잡은 그녀는 작은 종이를 품안에서 꺼내서는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당신이 분석해 낸  유전자중에서 실제로 바이러스의 유전정보는 100만분의 1밖에 되지 않거든요. 나머지는 필요 없는 부분일까요? "
  한석은 그녀가 건네주는 종이를 펴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 유전자라고 다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
  원래 유전자는 글씨가 가득 쓰여있는 긴 종이 테이프에 비교될 수 있다. 일렬로 쓰인 각각의 글씨가 유전정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데닌 (A), 구아닌 (G), 시토닌  (C), 티민 (T) 네개의 아미노산인데 이것이 A-T-G-T-G-C-A-… 하면 털달린 바이러스, G-C-A-T-A-G-C-…하면 아메바형  바이러스… 하는 식으로 특정 조합에 특정  유전자가  대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전체의  0.0001%, 즉 100만분의 1만이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아무 의미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더우기 그  의미없는  부분은 네개의 아미노산중 두개인 아데닌과 구아닌만 쓰고 있었다. 
  " 아무래도 이상해요. 유전자의 99.9999%가 네 개의  아미노산 중 두 개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어떤 인공적인  냄새가 강해요. "
  " 에이, 아무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야? "
  그는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리려 했지만 사나에는 말을 게속 이었다. 그녀가 흥분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한석은 의자에 똑바로 앉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스핑크스의 바이러스의 유전자의 길이가 사람의  유전자보다도 훨씬 길거든요. 당신이 밝혀낸 조합이 100만개, 이것만해도 바이러스의 유전자 길이로는 지나치게 긴데 전체  길이는 아미노산 1조개로 이루어져  있다고요.  생각해보세요. 100페이지 책 한 권의 뒷쪽에 필요없는 백지가 그 100만배인 1억장이 달려있는 것이라고요. 그것도 흑백 두가지 색의  점만이 찍혀있는. "
  " …… "
  " 당신이  알아낸  의미있는  유전자의  갯수는  정확하게 1018081개여요. 우연히도 이 숫자는 1009의 제곱이고 더우기 1009는 솟수이고요. 그리고 뒷부분에 붙은 의미없는  유전자의 갯수 1036488922561은 1018081의 제곱이고요. "
  사나에의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한 한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녀가 손에 쥐어준  종이를  펼쳐들은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전 1018081이라는 숫자에 착안해서  뒷부분의  의미없는 유전자를 1009개씩 잘라 가로 1009줄, 세로 1009줄의 그림을 만들었어요. 아데닌(A)는 흰 점, 구아닌(G)은  검은  점으로 해서요. 당신이 보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거에요. "
  " 이 그림은 무슨 설계 도면과 기록같은데!  그리고  여기 써있는 글자는 그리이스 문자 같아. "
  " 우리가 의미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1036488922561개의 유전자는 실제로는 1018081장의 암호  설계도면이었어요. "
  평소 느릿느릿한 성격에다 웬만한 일에는  침착성을  잃지 않는 한석이었지만 그는 몇년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드는 자신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그럼.. 사나에는 이게 무슨  설계도라고  생각하지?  설마… "
  " 맞아요, 당신의 생각과 똑같아요. "
  사나에는 한석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볍게 웃어보였지만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어색하게 굳어있음을 한석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삐리릭- 옷걸이에 걸려있던 한석의 여름 양복  안주머니속에서 날카로운 호출음이 들려왔다.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하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일제히 둘을 돌아보았다. 그는  재빨리 휴대용 화상 전화기를 끄집어내어 스위치를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발갛게 상기되어있는 낫산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 마사다까씨, 빨리 돌아오세요. 백신 합성이  끝났고  이 영훈씨도 옆에서 대기중입니다. "
  한석과 사나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급히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는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택시에 올라탄 한석은 아까 사나에의 말에  놀라서였는지 밀려오는 피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린 사나에도 졸고있는 한석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 손님, 국립 의료원에 다 왔습니다. " 
  고개를 든 한석이 후다닥 사나에를 깨워서 내리자, 의료원 현관에서부터 택시를 잡으러 뛰어온 검은 양복차림의 한  남자가 황급히 그들이 탔던 택시에 올라탔다. 
  " 미국 대사관요! 요금 두 배 드릴테니 전속력으로 몰아주세요! "
  " 옛써! ( Yes, Sir! ) "
  운전사는 휘파람을 한번 불더니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택시가 끽-소리를 내며 출발하면서  남자는  앞좌석 등받이에 쾅-하고 부딪쳤다. 제길, 하고 중얼거린 남자의 눈에 뒷좌석에 떨어져있는 종이 한장이 보였다. 종이를 집어든 남자의 눈빛이 빛나며 작은 휴대용 화상 전화기를  꺼내들고는 몇마디 지껄였다.
  " 안녕? 여기는 앞집 아저씨인데 지금 국립 의료원에 들어간 남녀 두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줄래? "

  투명 튜브의 꼭대기에서 붉은 혈액이 한방울씩 떨어져  아래에 고여 있는 노란색의 액체에 조금씩  섞였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이 영훈의 팔에는 비닐 튜브와 전선이  또아리를 튼 뱀처럼 얼기설기 얽혀져 있었고, 옆 침대에는  창백한 얼굴의 셜리가 깨어날줄을 모르고 누워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특수 마스크를 쓴 한석과 사나에, 낫산은 구석에  설치된 측정기계의 숫자를 읽고 컴퓨터로 분석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임스만 셜리의 머리맡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영훈씨의 혈압, 맥박 정상. 백혈구 수 이상 없음. 현재 체온 36.75도. 망상 세포계및 T 임파구의 활성 양호. "
  화면에 느릿느릿 나타나는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간호원의 목소리만이 뇌파측정기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신호음에  섞여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서 환호성이 올랐다. 
  " 셜리양의 망상 세포계 활성 증가,  정상의  75%수준까지 회복. T 임파구는 정상의 72%. 혈중 포도당 농도 천천히  상승하고 있음. "
  낫산의 얼굴에서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나에가  한석을 돌아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셜리의 뇌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처럼 평탄했던 셜리의 뇌파 그래프가 상히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혈중 암모니아 및 아세틸콜린의 농도 감소. 간세포가 기능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셜리양의 체온은 39.2도에서 38.0도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
  영훈이 천천히 눈을 뜨며 의료진에게 웃어보였다. 
  " 다행히 효과가 있는 것 같군요. 이만하면 저도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될 값어치가 있죠? "
  낫산이 영훈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주었다. 
  " 영훈씨에게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용기있는 행동이었습니다. "
  " 누구든 나서야 하는 일이었는걸요. 항체는 충분히  확보했습니까? "
  영훈이 방금 주사바늘을 뽑은 팔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일어서서 낫산에게 물었다. 낫산은 영훈의 침대 기둥 뒤에  서있는, 노란색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여섯 개의 작은  튜브를 가리켰다.
  " 영훈씨 덕분에 약 8000명분의 항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영훈은 튜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 와, 저많은 액체가 다 제 몸 속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
  한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을 열고 파란색 액체가  들어있는 주사 약병을 꺼냈다. 
  " 이 파란색 액체가 제가 개발한 백신입니다.  이  백신을 영훈씨 몸에 투여해서 저쪽의 노란색 항체를 만들어  낸거지요. 영훈씨의 몸이 거대한 화학공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
  계기판을 읽어내려가는 간호원의 목소리가 흥분에 떨고 있었다. 
  " 셜리양의 현재 체온 36.9도. 망상세포계 활성 정상 수준 회복. T 임파구와 항체 E,F 정상의 95%. 혈중  암모니아  및 아세틸콜린의 농도도 정상 수준으로 감소. 혈중 포도당 농도도 정상의 89%까지 회복되었습니다. 뇌파에서 알파파  검출. 천천히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오고 있습니다. "
  침대 시트밖으로 삐죽 나와있는 셜리의 야윈 팔이 조금 흔들렸다. 제임스가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잡았다. 헝클어진 부시시한 머리를 힘겹게 쳐들며 셜리는 침대 시트를 천천히 걷었다. 쳐다보고 있던 일동이 환호성을 올렸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여기는… "
  영훈이 그녀의 앞으로 한발자국 나아갔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은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던 셜리가 영훈을 보자 소리를 빽질렀다. 
  " 맞아요, 당신이 내 집까지 찾아왔지요. 그리고 난  쓰러졌고… 병원까지도 따라와서 취재를 할 작정인가요? "
  영훈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옆에 서있던 제임스가 재빨리 그녀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셜리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걸려있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 그러고보니 벌써 열흘이 지났네…  내가  열흘동안이나 누워있었다는건가? "
  제임스는 얼마전까지만해도 팔팔하게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내고는 피식 웃음을 웃었다. 셜리는 영훈과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아직 목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절 구해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영훈씨가 그자리에 와주지 않았다면 전… "
  영훈은 몸을 돌려 한석과 사나에를 가리켰다. 
  " 전 아무것도 한게 없어요. 주사 한 대 맞고 누워 있었을 뿐인걸요. 셜리양을 살려낸 것은 바로 이분들이세요. "
  셜리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넘기고 한석과 사나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석은 그녀의 인사에 목례로 답하고는 유리병에 들어있는 항체를 낫산에게 넘겼다. 
  " 이 항체면 모든 환자를 구할 수 있을겁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
  삐- 하는 신호음과 함께 화상 전화기에 보건성 장관이  나타났다. 화면안의 장관이 고개를 숙여 한석에게  인사를  했다. 
  " ‘스핑크스 바이러스’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 온  이집트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
  " 원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더이상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만 바랄뿐입니다. "
  " 그쪽이 정리되면 대통령궁으로 와주시겠습니까?  대통령 각하와 정부요인들이 마사다까씨의 노고에 감사드리려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
  한석은 슬쩍 사나에쪽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곧  들고있던 서류로 눈을 돌렸지만 그녀가 약간 입을 실룩거리는 것을 한석은 놓치지 않았다. 
  "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내일이면 안되겠습니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
  사나에가 고개를 한석쪽으로 돌려보이며 웃어보였다. 
  " 그렇게 하세요. 내일 꼭 대통령궁으로 들려주십시오. 정말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전화가 끊어지자 낫산이 혀를 끌끌찼다. 
  " 제길, 언제는 소리만 버럭버럭지르더니… "
  한석은 책상위에 놓여있는 책과 컴퓨터 출력을 천천히  챙겨서 책꽂이에 꽂더니 가방을 집어들었다. 
  "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전화를 듣고있었던 영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 아니, 아까 전화에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
  " 물론 해야 할 일이 있지요. 다만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사나에, 같이 나가서 저녁이나 먹지 않겠어? "
  한석은 사나에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숙이고는 가볍게 끄덕거렸다. 낫산이 나가려는 한석과  사나에를 붙잡았다. 
  " 잠깐만요, 드릴 것이 있는데… "
  낫산은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더니 작은 나무 목걸이를 꺼냈다. 
  " 이건 이집트 제 4왕조때의 유물입니다. 원래는 피라밋의 부장품이었는데 도굴되었다가 저희 조상에게 팔린  것  같아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마스코트입니다. "
  " 이런 귀중한 것을 제게… "
  " 이건 과학자로서 당신에 대한 존경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받아주시겠죠? "
  " 물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설사 이집트 정부에서  금으로 만든 투탄카멘왕의 목걸이를 갖다줘도 낫산씨 선물의 100분의 1 값어치도 안될 것입니다. 저도 정부라는데서  표시하는 의례적인 감사는 싫거든요, 평상시에는 잔소리나 하고… "
  한석은 낫산을 향해 한눈을 깜빡거리고는  사나에와  함께 문을 나섰다. 나일강의 밤바람은 생각보다는 쌀쌀했다. 한석은 손안에 쥔 나무 목걸이를 강변의 가로등 빛에 비추어보았다. 머리부분에 두건을 쓰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사나에의 목에 천천히 그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 수천년 된 목걸이답지 않게 세련된 모습이네요. "
  한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고대 인류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가졌을지도 몰라. 이번 스핑크스 바이러스만 해도 그래.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발견된 곳이 어딘지 알아?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이야. 그것도 유리 캡슈울에 담겨서. "
  " 유리… "
  " 이상하지 않아? 4000년전의 이집트인이 유리를 쓰고  있었다니. "
  " 그럴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많잖아요. 스핑크스 바이러스에서 나온 그 설계도도 그렇고… "
  사나에는 한석이 걸어준 목걸이를 들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 조금은 무섭기조차 했다. 
  " 이 목걸이에 있는 신이 누구죠? "
  " 지구의 여신인 이시스 여신상이야. 이시스는 신비를 상징하기 때문에 항상 머리를 두건으로 가리고 있지. "
  " 지구의 여신이 신비를 상징… "
  한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강둑에 걸터 앉았다. 
  "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신비  투성이야. 대서양에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 대륙…  지금도  대서양 해저에는 그때의 석조 도로 일부분이 잠겨있어.  또  중국의 고비 사막에는 모래가 녹아 뭉친 유리질 모래가 넓은 지역에 퍼져있어. 수천년전에 그렇게 넓은 지역의 모래를 녹여 유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원자폭탄 뿐이야. "
  찰싹하는 물결치는 소리와 돌멩이가 구르는  낮은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
  " 하긴, 나도 뭐가 뭔지 몰라. 빨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
  퍽-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방을 집어드는 한석의 어깨를 궤뚫었다. 사나에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한석은 자신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퍽- 하는 소리가 두 번 더 나고 주위는 잠잠해졌다. 
  낮은 구둣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타난 남자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땅에 떨어진 피묻은 한석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는 땅위에 뒹구는 한석과 사나에의 몸을 발로  차  강물로 밀어넣고는, 어깨에 맨 통에서 호스를 꺼내 강둑에  뿌렸다. 쏴아하는 파란 거품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허리에 찬 화상 전화기를 꺼내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 안녕, 여기는 앞집 아저씨인데, 부탁한 물건을 찾아왔다고 말해줄래? "
  사내가 돌아간 나일강에는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이시스의 나무 목걸이만이 물결따라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Part II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 999]

  1999년 11월 1일. 워싱턴. 
  백악관 앞의 잔디밭에는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평화롭게 졸고 있었지만 창가에 서서 뒷짐지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대통령 칠리 로빈스의 마음은 별로 편안하지 못했다.  삐-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걸린 인터폰에 비서의 얼굴이 나타났다. 
  " 대통령 각하, MEDUSA의 중역들과 CIA  팀이  도착했습니다. "
  " 들어오시라고 해. "
  대통령은 천천히 일어나 문가로 걸어나갔다. 문이  열리며 양복을 입은 세사람의 남자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까만 스커트에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큰 키의 여자가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들어왔다. 남자중 한사람은 짙은 남색 양복에 흰 머리였고 다른 두사람은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들어온 네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 저는 CIA 극비기술 담당인 코드네임 아리오네입니다. 미리 보고드린 극비문서 C-60-70A-2867때문에 왔습니다. "
  ‘ 쩝, 비밀요원들이 저렇게 예뻐서야 남의 눈에  확  뜨일것 아닌가? ‘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는 대통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오네는 같이 온 세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 왼쪽은 MEDUSA의 회장 포풀리스 아론씨, 가운데는 AI 담당 중역 골덴트 미첼씨고 오른쪽은 광 컴퓨터 개발 담당  중역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씨입니다. 데이비드씨께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릴 것입니다. "
  칠리는 일행을 회의용 탁자로 안내했다. 비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 한국 특산 설록차랍니다. 그전까지는 중국 차를  마셨었는데 기분 전환도 할겸 바꾸어봤지요. 맛이 독특한 것  같아요. " 
  칠리는 탁자 위의 서류로 눈길을 돌리더니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이 부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제5 세대  컴퓨터라니요? 그리고 이것이 나한테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중요한 사항인가요? "
  데이비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 제5 세대 컴퓨터라는 것은 한마디로 ‘생각하는  컴퓨터’입니다. 폰 노이만 박사가 처음 연구한 컴퓨터는 진공관으로 구성된 제1 세대 컴퓨터입니다. 제2 세대는 트랜지스터,  제 3세대는 IC, 이런 식으로 컴퓨터는 발전을 해오고 있죠. 현재의 컴퓨터는 VLSI로 이루어지는 제4세대 컴퓨터인데  미래의 컴퓨터는 생각하는 기능을 갖춘 컴퓨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5 세대 컴퓨터죠. "
  " 그러면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인 MEDUSA가  제5  세대 컴퓨터를 발명했다는 것입니까? "
  " 저희 MEDUSA는 오랫동안 매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광 컴퓨터 개발에 노력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CIA에서 입수한 설계도를 분석한 결과 그것이 엄청난 용량의 제5 세대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 CIA가 설계도를 입수하다니요? 어디서요? 소련에서 말입니까? "
  아리오네가 고개를 흔들고는 대답했다. 
  " 아닙니다. 얼마전에 보도된 스핑크스 바이러스 있지  않습니까? 그 백신을 개발해낸 사람들은 동경대학  연구팀인데 이 사람들이 그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하다가 유전자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는 것을 발견해냈습니다. "
  "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면이라…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 컴퓨터를 설계했단 말입니까? "
  아리오네는 손을 들어 긴 머릿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들어 조금 입에 댔다. 
  " 설계도면은 그리이스 글자로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에  해독이 쉬웠습니다만 그리이스인이 설계했을리는  없고,  저희 CIA의 추측으로는 외계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외계인… " 
  아리오네는 찻잔을 힐끔 들여다보고 남은 차를 다  마셔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는  한국의 DACOM(Digital Advanced COMputer)에서  만들고  있는  호돌-721과  일본의  SONI  (Super Operational Network & Information)의 니혼-A3,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유리 III정도인데 성능은 거의 같습니다. CIA와  MEDUSA의  연구진이 같이 분석한 바로는 이번에 발견된 설계도의 컴퓨터는  호돌-721의 약 1000만배정도의 위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더우기 이 컴퓨터는 레이저를 사용하는광 컴퓨터입니다.  지구상에는 이런 과학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 그렇다면 내게 보고하러 온 이유는? "
  "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컴퓨터는 외계인이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우기 설계도를 입수한 것은 CIA고요.  잘못하면 의회에서 들고나올지도 모르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라… 제작하는데 대통령 각하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
  대통령은 곰곰히 생각했다. 잘못하면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컴퓨터의 제작을 허가했다고 정치적 생명에 손상이  올지도 모른다. 
  " 이설계도를 발견한 동경 대학 연구팀이 가만있을까? 설계도를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들인데… "
  아리오네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 동경대학 연구팀중 이 설계도를 발견한 사람은 마사다까와 사나에라는 두 연구원뿐인데 이미 청소반의 손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습니다. "
  " 쯧쯧… 심한 짓을 했구만. "
  조용히 듣고 있던 MEDUSA의 회장 포풀리스 아론이 말했다. 
  " 한국이 호돌-721을 국방상의 이유로 팔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그보다 못한 기종인 호돌-720을 쓰고  있는데도 연간 3조달러가 넘는 돈을 한국에 주고 있습니다. 호돌-721의 1000만배이면 지금 미국내의 모든 컴퓨터를 다  합친것보다도 큰 용량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미국 전 지역의 모든 활동을 전산화 할 수 있습니다. 예산 절감은 물론 미국을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웃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고 탁자에 놓인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는 서류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종이 맨 밑에다가 큼직하게싸인을 했다.
  " 좋습니다. 허가하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작비는 정부 예산에서 지원할테니 사용료는 받지 마십시오. 또한 다른 나라에도 개방해야 합니다. "
  포풀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 외계인이 만든 것을 CIA가 살인까지 해가면서  설계도를 빼와서 컴퓨터를 만들고는 엄청난 사용료를  받는다는  것을 밖에서 알아보십시오. 국가적인 망신이고 MEDUSA회사도 끝장날겁니다. 어차피 많은 이익을 올리는 MEDUSA니까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제작해보세요. 그런 컴퓨터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MEDUSA는 엄청난  이익일테니까요. "
  포풀리스가 끄덕대고는 대통령이 서명한 서류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제작하는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
  골덴트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 약 40-50일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크리스마스
에는 새로 만든 슈퍼 컴퓨터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인류에게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겠군요, 하하. "
  대통령은 늦가을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가지로 시선
을 던졌다.

  12월 24일. 뉴욕.
  오래간만에 눈발이 휘날리자 거리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복잡하기로 소문난 뉴욕의 도로에서도 자동차  클락션을 울려대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는 시민들로 뉴욕은 완전한 축제분위기였다. 아리오네는 퀸즈에 있는 자신의  집 창문을 열고 흩날리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외출준비를 하고 서랍을 열었다. 지갑을 찾던 그녀의 손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그것은 옥으로 된 작은  버선 모양의 브로우치였다. 오래전에 소꼽친구 파라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두고는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녀는 브로우치를 주머니속에 집어넣고는 투피스 위에 코트를 걸쳐입고 춥지않게 머플러를 목에 감고 집을 나와 튜브 열차를  탔다. 튜브 열차의 차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은 그녀에게 모처럼의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아리오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눈은  무척이나  포근했다. 얼어붙은 호숫가 위에 하얗게 쌓인 눈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집앞에 작은 눈사람을 세우는건 언제나 어린 아리오네와  소꼽친구 파라의 몫이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나뭇가지는 마치 솜사탕으로 만든 나무 같았고,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다 지치면 교회의 나무게단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옮겨오면서부터는  눈구경하기도  쉬운일은 아니었고 더우기 거의 매년 겨울마다 해외출장을 나가는  바람에 지금 내리는 눈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아리오네는 주머니 속의  브로우치를  만지작거리며 어린시절의 자신과 파라를 회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벼운 떨림과 함께 튜브 열차는 페트로 섬에 섰고,  문이 열리면서 아리오네는 사람들 틈에 섞여  천천히  출구쪽으로 빠져나갔다. 더욱 말끔해진 자유의 여신상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페트로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에서는 무장경찰이 일일히 출입증을 체크하고 있었다. 아리오네는 펠리칸 주식회사 -  실제로는 CIA가 위장한 – 사원증을 보여주었다. 자유의 여신상 앞에는 이미 세계 각국의 보도진들이 자유의 여신상  보수공사와 새로운 슈퍼 컴퓨터의 공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 KBC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보수공사가 끝난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인터뷰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누군가가 아리오네 앞에 마이크를 불쑥 내밀었다.  후줄근한 겨울 파카에 별로 깨끗해보이지 않는 거친 털목도리를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그러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에  맑고 시원한 눈을 가진 남자가 어깨에 비디오 카메라를 메고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새로 단장한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뿐이에요. "
  " 이번에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MEDUSA에서  자유의 여신상에 세계 최고 용량을 가진 [스핑크스  999]라는  슈퍼 컴퓨터를 설치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념물인 자유의 여신상에 그런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아리오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려다 그의 얼굴이  꽤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 뭐, 컴퓨터를 설치하는거야 자유니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죠. 그러고보니 혹시 이집트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 생체실험을 자청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한 분 아니신가요? "
  영훈은 머리를 긁적긁적대더니 웃었다. 
  " 쑥스럽네요. 하지만 미인이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
  아리오네는 피식 웃고는 자리를 떠났지만 ‘스핑크스  바이러스’사건의 관련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하 출입구로 들어갔다. 특수 티탄강철로  만들어진 복도는 설사 대포를 들고와도 부서지지 않을것처럼  튼튼해보였다. 몇명의 엔지니어들과 CIA요원이 입구에서 그녀를 맞았다. 
  " 저를 잘 따라오세요. 이곳은 미로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한번 길을 잃으면 찾지 못합니다. "
  " 왜 미로로 만들었죠? 보안때문에 그랬나요? "
  안내하는 CIA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스핑크스 999는 어쩌면 미국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지도 모를 슈퍼 컴퓨터입니다. 따라서 스핑크스는 5중으로 된 특수 티탄합금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24시간 무장경비원이 경비하게 됩니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건물 전체도 각종 경비장치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지요. 한가지 재미있는건 이 건물의 경비장치는 모두 스핑크스에 연결되어있어요.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거지요. "
  " 자신이 자신을 지킨다… "
  " 스핑크스는 살아있는 컴퓨터여요. 아직 완전하게 가동시켜보지는 않았지만 스핑크스는 분명히 생각을 합니다.  지난번에 경비장치를 끄려고 했더니 ‘나는  안전하게  살고싶다. 경비장치를 끄지 마시오. ‘라는 메세지가 출력됐어요. "
  " 설마 컴퓨터에게 생존욕구까지…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컴퓨터… "
  안내하는 CIA요원은 신나서 계속 지껄여댔지만 아리오네는 그말이 귀에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방은 한변이 30m정도 되는  정육면체 모양이었다. 가운데에는 까아만 흑요석 덩어리같이 생긴 육각 기둥이 유리관 속에 들어있었고, 관에서 수십개의 튜브와 전기줄이 나와 그 옆에 서있는 다른 전자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문 앞에는 가로세로 3m정도 되는  레이저  홀로그래피 스크리인이 설치되어있었고, 납작한 상자를  여러개  겹쌓은 모양의 기계 장치가 서너개 뒷쪽에 설치되어있었다.  흑요석처럼 보이는 육각기둥이 바로 엄청난 양의 전자 소자가 결합한 스핑크스의 본체인 것 같았다.
  뒷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칠리  대통령과 MEDUSA 회장인 포풀리스 아론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핑크스 앞에 설치된 작은 컴퓨터 단말기 앞으로 갔다. 단말기의 받침대는 하나의 은빛 강철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었고, 자그마한 스피이커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 지금부터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 999의 가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
  대통령과 포풀리스는 단말기에 설치된 빨간  단추를  눌렀다.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방안의 조명이 환해지더니  스피이커에서 조용한 플루우트 소리가 들려왔다. 웬 플루우트 소리인가 멍하니 생각하던 아리오네는 그 소리가 플루우트와  비슷하지만 플루우트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고등학교때 오케스트라도 했었던 그녀는 그 소리가 어떤  관악기 소리도 아니라고 느꼈다. 화면에 느릿느릿 글자가 나타났다. 
  ‘ 대통령 각하, 포풀리스 아론 회장님, 스핑크스 999를 탄생시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제  탄생을 스스로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전자음악입니다. ‘
  듣고있던 아리오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음악까지 작곡하는 컴퓨터…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음악을 듣고 있는 대통령과 포풀리스의 얼굴은 무척  흡족해보였다.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 보시다시피 스핑크스 999는 고등사고능력을 갖춘 뛰어난 컴퓨터입니다. 이번에는 스핑크스의 연산능력을  보시겠습니다. "
  문앞에 설치된 홀로그래피 스크리인에는 미국의 지도가 나타났다. 대도시에 해당하는 곳에는 붉고 푸른  점이  여러개 모여있었고, 그밖의 곳에도 몇개의 반짝이는 점들이  있었고 이 점들을 잇는 선들이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 지금 여러분이 보고있는 화면은 현재 스핑크스가 제어하고 있는 교통체계입니다. 미국의 모든 비행기와 열차,  튜브 열차와 자동차, 각 도시의 신호등과 톨게이트를 스핑크스 혼
자서 제어, 혼잡이 생기지 않도록 조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결되어있는 것은 전력망과 상하수도 통제, 교통망, 도서대출망과 범죄자 신원조회망, 컴퓨터 통신망과 경찰  기동순찰차 지령망, 행정 전산망과 국가 예산및 회계 시스템등  모두 257개입니다. 이정도를 처리하려면 세계 최고의 슈퍼 컴퓨터인 호돌-721로도 100대가량 있어야 가능합니다만 스핑크스는 아직 자신의 처리능력의 10만분의 1정도밖에는 가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
  참석자들은 스핑크스의 엄청난 용량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회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스핑크스는 곧 셰계 각국의 컴퓨터와 연결이 될  예정이며, 전세계를 스핑크스라는 하나의 컴퓨터로 통제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멍하니 넋빠진 채로 듣고 있던 아리오네를 누가 뒤에서 툭툭 쳤다. 돌아다보니 극비 기술과의 과장인 영카우였다.  40이 넘은 나이에도 갓 스물이 되어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그는 손에 한변이 30cm정도 되는 금속상자를 들고 있었다. 
  " 보관하고 있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나왔던 문제의  금속상자야. "
  바이러스라는 말에 아리오네는 순간 손을 움찔했다.  상자는 그녀의 손에서 바닥에 떨어졌다. 
  " 철저하게 소독했으니까 바이러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
  " 이걸 왜 제게… "
  " 오늘 날짜로 아리오네는 저 스핑크스 999를 담당하게 됐어. 스핑크스에 관련된 모든 정보는 다  아리오네의  소관이야. "
  " 저는 저 컴퓨터가 기분나빠요. 컴퓨터가 생각을 하고 작곡을 하고… 귀신들린 것 같다니까요. "
  " 이건 상부의 명령이야. 우리 세계에서 명령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
  " …… "
  영카우는 곧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리오네는  바닥에 떨어진 금속상자를 집어들고 어깨에 맨 쇼핑백안에 집어넣었다. 
  나가기 전에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스핑크스  999를 바라보았다. 음악을 작곡하고  생존욕구까지  갖춘  컴퓨터… 어쩌면 우리는 또 하나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들떠있는 시민들 사이로 사라졌다.

  악-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혜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은 땀이 송글송글 그녀의 콧등에 맺혀있었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방 구석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휴, 꿈이었구나. 그런데 벌써 여덟시야? ‘
  희미한 빛이 커어튼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어튼을 걷었다. 내려다보이는 창밖은  온통 하얀 색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지. ‘
  휘파람으로 캐롤을 불러대던 그녀는 꿈속에 나타났던 피흘리는 진현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구역질과 어지러움에 그녀는 휘청대며 침대  모서리를 잡았다. 
  벌써 두달 전의 일이지만 혜진에게 있어 그날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었다. 갑자기 총구를 들이대며  나타난 검은 그림자. 괴한에게 대들었다가 왼쪽 가슴에서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털썩 쓰러져버린 진현의 모습. 그리고 총을  겨눈 괴한에 의해 마취제가 든 수건으로 입막음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던 자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온몸이 묶인 채로 조그만 쌍발 비행기의 뒷좌석에 눕혀져 있었고 곧  이  비밀 연구실로 끌려온 것이다. 그녀를 납치하고 진현을 죽인 자들이 CIA라는 것을 안건 그 사흘 뒤였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조금 있다가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아리오네가 들어왔다. 
  " 안색이 안 좋아요. 어디 아파요? "
  혜진은 내미는 아리오네의 손을 탁 뿌리쳤다.  아리오네는 초췌한 혜진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직접 한 舅 아니지만 진현을 죽이고 혜진을 이곳  비밀 연구실까지 데려온 것은 분명 아리오네가 속해있는 CIA의 짓이었다. 눈 앞에서 좋아했던 남자 연구원의 죽음을 지켜본 혜진의 심정을 아리오네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침대 시트 위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혜진은 상자를 집어들었다. 은색  포장지에 얇은 빨간 리본을 풀자 그 안에서는 옥으로 된 작은 버선 모양의 브로치가 나왔다. 브로치에는 조그만 카드가 같이 들어있었다. 
  ‘ Merry Christmas! 이 브로치가 혜진씨에게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아리오네 ‘
  혜진은 브로치에 힘없는 눈길을 돌렸다. 
  ‘ 하긴 아리오네야 무슨 책임이 있겠어. ‘
  그녀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가서는 버선 모양의 브로치를 투피스 웃옷에 달았다. 거울앞에서 한숨을  푸-하고 내쉰 그녀는 이 곳에 끌려와서 짧게 커트한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는 방문을 나섰다. 
  연구실에 들어선 혜진은 서랍안에서 CD(컴팩트 디스크) 한 장을 끄집어 내서는 오른쪽 선반에 놓㈏獵 전축에  밀어넣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중에서  ‘아침’이  상쾌한 박하향기처럼 방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녀의  우울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혜진은 전날 시작한 실험의 결과를 살폈다. 결과는 역시였다. 이곳으로 납치된 후 두달동안에 실시한  일련의  실험은 모두 식물뇌파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L-2-3-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 후의 식물은 ‘감정’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온도가 그 식물의 성장온도보다 아주 높거나 낮을때의 식물뇌파는 고통받 인간의 뇌파와 거의 흡사했고, 알맞은 온도를 유지해주었을 때는 유쾌한 인간의 뇌파와,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듬뿍 담겨있는 영양비료를 주었을때는 배불러 기분좋게 누워있는 인간의 뇌파와, 필수 영양소가 결핍되게 했을때는 배고플 때의 인간의 뇌파와 거의 일치했다. 
  그녀는 L-2-3-폴리글루타민산이 동물에서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엄청난 독성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소나무와 장미, 모든 식물이  L-2-3-폴리글루타민산을 투여한지 사흘에서 일주일 ㅅ돋 시들었다. 
  CIA는 곤란을 표명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일종의 ‘식물 컴퓨터’였다. 식물의 뇌파반응을 이용, 다음세대의  컴퓨터를 개발하려고 혜진을 이곳까지 납치해온 것이었다.  모처럼 만든 식물 컴퓨터가 죽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들은 혜진에게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치할 물질을 만들 것을 요구해왔다. 
  혜진은 L-2-3-폴리글루타민산과 비슷한  화학구조를  가진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약 30가지정도의 물질이  화학구조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흰 실험가운은 노랗고 붉은 얼룩으로 물들었고, 강한 산 염기를 만져야 하는 그녀의 고운 손은 설겆이하는 식당아줌마의  그것만큼이나  거칠어졌다.  헤진은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체할 물질을  찾는데  스핑크스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실험실은 어제 완성된  스핑크스에 접속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 – CIA의 비밀 실험실은 스핑크스가 설치된 자유의 여신상과 이어져 있었다 -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뵉壙㈌별 해야 할 일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지만  스핑크스에게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스핑크스는 뉴욕의 도시개발계획을 담당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뉴욕의  교통난, 주택난, 소음공해,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데는 몇 분  정도의 계산도 필요치 않았다. 스핑크스는 뉴욕을 여섯개의 큰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마다 상가지구와 업무지구,  주거지구와 튜브열차를 균형있게 배치했다. 스핑크스의 계산대로 뉴욕시의 인구는 점차 분산되어 교통망은 안정되어갔고 소음과  공해도 따라서 줄어갔다. 스핑크스는 인구의 이동방향을  예상하고 그곳에 대단위 산업시설과 주거시설, 교통망을  확충해 나갔다. 무질서했던 도로망와 시가지는 점차 반듯하고  계획적인 것으로 되어나갔고, 뉴욕의 큰 문제점중의 하나였던 휴식공간의 부재도 해결되기 시작했다. 
  스핑크스는 뉴욕의 심장부에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가진 100층짜리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뉴요크만에 해저 30층, 해상 70층의 해상도시 건설도  추진했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아파트는 강도 10의 지진에도 邈サ프 않고 어떤 화재시에도 5분내에 진화할 수 있었고, 해상도시는 10m의 파도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건축학자들은 스핑크스가 설계해내는 마술과도 같은 건물들에 그저 입을 벌릴 수 밖에는 없었다. 
  다음으로 스핑크스가 손댄 일은 알라스카 개발계획이었다. 스핑크스는 자원탐사용 특수 인공위성을  발사,  알라스카에 묻혀있는 새로운 석유, 철광, 그밖의 많은 자원을 찾아냈다. 스핑크스는 이들이 가장 잘 수송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시와 도로망, 통신망을 건설했다. 이 계획은 미뮈“ 약 50조 달러라는 막대한 이익을 남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스핑크스가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스핑크스 전용 공장을 설립했다. 놀랍게도 스핑크스는 자체 생산기능이 있어 용량이 부족할 때는 스스로  보조컴퓨터를 만들어내어 자신에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스핑크스는  전용공장에서 경비하는 수리용 로보트와 경비용 로보트를 만들어냈고 스핑크스 2호기와 3호기를 만들어, 자유의 여신상 지하에 있는 스핑크스 격납고에 설치하였다. 단백질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살아있는 생물과 다를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곧 캐나다가 스핑크스의 사용신청을 했고, 캐나다의  모든 컴퓨터망이 스핑크스와 연결되었다. 스핑크스는 여기서도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연구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광통신망을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 설치,  1달러정도의 요금으로 미국과 캐나다 어디든지 통신할 수 있도록 해내었다. 통신요금이 엄청나게 싸지자 미국과 캐나다는 한 나라처럼 되어버렸고, 교역량의 증대와 더불어 엄청난  산업발달을 가져왔다. 
  스핑크스는 점차 세계를 기아와 가난, 공해에서  구원해낼 유일한 구세주처럼 여겨졌다. 유럽 공동체(EC)는 EC의  본부컴퓨터로 쓸 슈퍼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스핑크스를 EC의 본부 컴퓨터로 쓰기로 결정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스핑크스와 자국의 컴퓨터 망을 연결했고,  다른 EC국가들도 스핑크스의 연결신청을 내놓고 연결작업이  완료되기만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미국의 시시주간지 ‘타임’지는 1998년의 ‘올해의  인물’로 스핑크스를 선정했고, 세계 4대 통신사가 뽑은 ‘세계 10대뉴스’의 1위는 모두 스핑크스의 등장이었다. 1998년말 현재 스핑크스에 연결된 나라는 125개국으로, 세계 50위 이내에  드는 선진국중 스핑크스에 자국의 컴퓨터망을  연결하지  않은 나라는 소련과 일본, 한국뿐이었다. 
  소련은 일찌기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유리 III라는 슈퍼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분야에서 소련의 기술은 미국을 조금 앞지르고 있었는데, 스핑크스의 등장으로 유리 III는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소련이 스핑크스에 자국의 컴퓨터망을 연결하지 않은 이유는 군사상의 이유였다. 아직까지도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주도해나가는 소련은 자국의 무기쳬계가 들어있는 컴퓨터망을 스핑크스에 연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돌-721과 니혼-A3라는 슈퍼 컴퓨터를 가진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군사상의 이유가 있었지만 이들  나라가 연결을 거부한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슈퍼 컴퓨터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과학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스핑크스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역전된 것이다. 일본의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연구하던 고온 초전도체를 스핑크스는 단  몇 시간의  계산으로  만들어냈고, 그 초전도체는 세계 각국의 튜브 열차에 쓰이게 되었다.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한국이 국력을  기울여 연구하던 1G DRAM도 스핑크스는 며칠간의 계산 끝에  완벽히 만들어냈고, 그 결과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치명타를  맞고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의 선진국이라는  자존심과 국민감정은 한국과 일본이 스핑크스에 접속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양국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다음 해 2월 CIA 비밀 연구실.
  " 좀 쉬어가면서 하지 그래요? "
  아리오네는 바바리를 문 옆 구석의 옷걸이에 걸어 놓고 커피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혜진은 앉아 있던  컴퓨터 앞에서 몸을 일으켜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조그만 찻잔이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소꼽 장난감 같이 느껴졌다. 
  기묘한 관계. 혜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리오네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분명 진현을 죽이고  혜진을 이곳까지 납치해 온 CIA의 한 요원인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혜진을 24시간 감시하는 여자가 아니던가. 그런 여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웃고 떠들고 위로를 받다니……  혜진은 자신의 블라우스 가슴에 달려 있는 작은 브로치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어때요? 일은 좀 진척이 있나요? "
  아리오네가 한 손으로 커피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혜진은 컴퓨터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작은 종이 조각을 집어 아리오네에게 내밀었다. 종이 조각에는 여러가지 화학명과  원소  기호, 구조식이 빽빽이 적혀 있었고, 대여섯개의 물질에  빨간 줄이 쳐져 있었다. 
  " 가장 가능성이 많은 여섯 개의  신물질인데  스핑크스를 사용해서 조사한 결과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별되었어요. 이젠 더 이상 시험해볼 물질도 없는데…… "
  아리오네는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혜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물질 분석에 스핑크스를 사용했다고요? "
  " 네.  연구실은 스핑크스 바로 밑 층에 있잖아요? 지난 주에 스핑크스의 접속 단자를 설치했어요. 기억 안나세요? "
  아리오네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 착각이시겠죠. 이 방은 스핑크스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
  혜진은 커피잔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으로 갔다. 거기에는 컴퓨터와 연결된 작은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이걸 누가 설치했죠? "
  " 스핑크스 정비 로보트요. 로보트 두 대가 와서 한참  동안이나 공사를 했는걸요. "
  " 이상한 일이군요. 스핑크스 담당은 바로 전데……  분명히 이 방은 스핑크스와 연결 공사를 한 적이 없어요. 또한 스핑크스의 사용 기록에도 이 연구실에서 사용한 기록은  없고요. "
  아리오네는 마시다 만 커피잔을 그냥  내려놓고  옷걸이에 걸었던 바바리를 다시 걸쳤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팔이  잘 들어가지 않아 혜진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 생각해보니 중요한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네요. 시간 나면 다시 들리죠. "
  아리오네는 허겁지겁 실험실을 나갔고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찻잔을 치우는 혜진의 귀에도, 책상 밑에  설치된 작은 마이크에도 들렸다. 그리고 실험실 8미터 위에 있는 컴퓨터의 연산 회로가 무서운 속도로 동작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자유의 여신상 내의 CIA 극비 기술과.
  ‘ 오늘도 또 집에 들어가기는 어렵겠군. ‘
  코넬 대학교 전기 공학과를 졸업한 영카우는  랭리의  CIA 본부에 들어온 후 12년 동안이나 극비 기술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 임무는 KGB가 눈에 불을 켜고 입수하려  애쓰고 있는 미국의 극비 기술을 지키는 것이었다. 1년 전  극비기술과가 뉴욕으로 옮겨 오고 그가 과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그는 소련으로 넘어갈 뻔 했던 수많은 군사 과학 기밀을  안전하게 지켜냈다. 최근에 적발한 것만 해도  잠수함  탐지를 위한 새로운 음향 탐지기, 인공 위성에 이용되는 초고해상도 적외선 카메라 등 부지기수였다. 
  ‘ 휴…… ‘
  영카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라이터를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산더미 같은 서류가 그를 불쌍하다 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끝없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영카우가 읽어야 할  기술의 목록은 점점 많아졌고, 그의 사무실에 불이 켜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는 플로리다의 별장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겨울이면 두  아들을 데리고 연례 행사처럼 플로리다로 가곤 했지만 그녀의 엄청난 낭비벽에 영카우는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그는 편지꽂이에 꽂혀 있는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컴퓨터로 깨끗하게 인쇄된 겉봉에는 ‘씨티뱅크 워싱 지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는 내용물을 펴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편지꽂이에 집어넣었다. 그는 꽁초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탁! 갑자기 방안의 불이 꺼졌다. 
  ‘ 스위치에 이상이 있나? ‘
  영카우는 천천히 일어나 스위치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정전이었는지 불은 다시 켜졌지만 곧 꺼졌다. 
  ‘ 제기랄, 컴파니(CIA의 별칭)의 전기 사정이 이렇게 나쁜가? ‘
  그는 인터폰을 들어 관리실과 연락 하려 했지만  인터폰마저 불통이었다. 
  ‘ 전기가 완전히 나갔나보군. ‘ 
  읽던 서류를 챙기던 영카우는 컴파니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5대 씩이나 24시간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조명이 다시 깜빡깜빡 거리며 꺼졌다 켜졌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컴파니의 다른 방은 불이 켜진 채였다. 
  영카우는 반사적으로 총을 찾았지만 서랍  안에는  무기가 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콜트 사에서 여성 첩보원들을 위해서 燭括 27구경 콜트를 개발해, 시험용으로 아리오네에게 지급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카우는  아리오네의 서랍 속에서 27구경 콜트를 꺼내, 들이닥칠 지도  모를 침입자를 경계했지만 위협의 그림자는 없었다. 방안의  불은 길게, 짧게 제멋대로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 길게, 짧게…… ‘
  그는 컴파니의 통신 교육 강의를 기억해내고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메모지 한 장에 무언가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그는 익숙한 솜씨로 모오스 부호를 받아 적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TURN ON PC ? ‘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켰다. 영카우의 오랜 벗은 반짝거리는 화면에서 줄줄이 글자를 토해내며 그를  반겼다. 화면을 읽어가던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화면에  나타난 내용은 편지꽂이에 꽂혀 있던 씨티뱅크의  예금  청구서였기 때문이었다. 
  화면에는 계속해서 아내의 씀씀이를 메우기 위해 그가  유용한 극비 기술과의 예산이 조목조목 づ립뎬. 영카우는 책상을 꽝 내리쳤다. 
  ‘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제길, 난  이제 끝장이군. ‘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에는  깜빡거리는  글자가 천천히 나타났다. 쳐다보는 영카우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는 한참동안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푸-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글자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영카우는 아까 끄집어 낸 27구경 콜트를 움켜 쥐고는 컴퓨터 터미널에 [Yes]라고 쳐넣고는 문을 나섰다. 0.1초 후  영카우가 쳐넣은 세 글자는 컴퓨터 메모리에 들어가 있었다.

  다음날 상원 의사당. 
  2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의사당 앞과 기자실은 세계 각국의 보도진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세계의 무력 균형을 바꾸어 놓을 역사적인 안건인 방위 구조 전면 개편안이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위 구조 개편안에는 스핑크스가 만들어 낸 새로운  첩보 위성과 공격용 킬러 위성등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많은 안건이 있었지만 기자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미국의 무기 체계 자체를 스핑크스에 연결하는 일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무기 체계를 컴퓨터의 판단에 맡기는 셈이 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대체적인 여론은  환영쪽이었다. 엄청난 예산 절감이라는 잇점에 못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지난 3개월 동안 스핑크스의  업적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의사당 밖에는 새로운 방위 구조 개편을 지지하는  데모대가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실직자와 저소득층이었다. 국방 예산이 감소하면 그만큼  그들에 돌아오는 사회 보장 연금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스페이스는 플래시 세례를 피하며 간신히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에는 특별 위원회의 13인 위원이 모두 모여  위원장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사봉을  두드려 희의 시작을 선포했다. 
  회의는 무려 15시간 동안 정회 없이  계속되었다.  일체의 보도진의 출입을 통제하고 비공개로 진행된 이 회의는  스핑크스가 발견된 경위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룬 업적, 또한 스핑크스가 미국의 무기 체계를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 기술적 타당성 등 6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지만 찬반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찬성은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의  데이비드 상원 의원 쪽이고, 반대는 공화당의 스페이스 위원장 쪽이었다. 민주당은 이미 국방 예산 절감으로 국민 복지쪽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할 수 있다는 당론을 확정했고, 공화당은  기계에게 국방을 맡긴다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기 때문에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享  세  차례의 표결을 거쳤지만 찬반 양쪽 어느쪽도 결의에 필요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아까 먹은 토스트가 좀 잘못 되었는지 위원장  스페이스는 속이 거북해져 사회를 부위원장에게 맡기고 화장실로  갔다. 15시간이나 되는 마라톤 회의 탓인지  신경은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 제길, 기계에게 국가 방위를 맡긴다는 게 말이 돼? "
  스페이스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칸막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안에 사람 있습니다. "
  밖에서 데모대의 함성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 빌어먹을 시위대  같으니.  차라리  공산당을  지지하지 그…… "
  소음기를 낀 27구경 콜트의 총탄이 문짝을 뚫고  스페이스의 목에 박혔지만, 총성은 곧 시위대의 함성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림자는 세 발을 더 쏘고 유유히 사라졌다.

  상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스페이스  위원장을  애도하는 뜻에서 사흘간 모든 일정을 중단했고, 장례식 다음날 속개된 회의에서는 방위 구조 개편안이 세 시간만에 통과되었다. 곧 세계 전역에서 미국의 과학 기술자들은  스핑크스와  미국의 무기 체계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MEDUSA의 AI담당 중역인 골덴트 미첼은 칼테크(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인공 지능 연구소에서 스핑크스가 있는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회사 전용 세스나 경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는 여러 차례의 출장으로 낯익은 조종사가 그를  반겨주었다. 
  " 안개가 이렇게 짙은데 괜찮겠어요? "
  " 걱정 없습니다. "
  조종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 스핑크스가 새로이 설치한 항공기 유도  시스템은  어떤 날씨에도 안전한 이착륙을 약속해 줍니다. "
  골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세스나  기  뒷쪽의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맸다. 이런 짙은 안개에서  비행기의 이착륙을 가능하게 하는 걸 봐도 스핑크스는 인류의 구세주였고, 자신은 그 구세주의 탄생을 몸소 알려온 미카엘  천사였다. 
  이륙 때의 작은 충격이 비행기 죄석을 통해 그의 몸에  전해 왔다. 그는 MEDUSA와 칼테크의 연구진들이 합동으로 수행하기로 한, 흥미 있는 연구 계획의 초안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 계획은 스핑크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수행, 더욱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으로, 필요에 따라서는  스핑크스의 일부를 분해하고 개조하는 계획도 있었다. 
  골덴트는 며칠 동안의 칼테크 일정으로 인해 몹시  피곤했다. 그는 팔걸이 아랫쪽의 레버를 제껴 의자를 뒤로  눕히고는 잠을 청했다.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바하의  ‘성 마태 수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컴퓨터와 함께 지낸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았다. 예일  대학에서 인공 지능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35년,  인공  지능 분야에서 걸어다니는 백과 사전이란 소리를 듣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스핑크스의 연구 뿐이었다. 
  조종사는 짙은 안개 속을 날고 있었지만 연방 휘파람을 불어댔다. 새로 설치한 항공기 유도 장치는 이륙 직후부터  착륙 직전까지 비행기를 자동으로 조종해주기 때문에  그는 그저 비행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비행기 끼리의 충돌 위험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조종사가 좀 더 주의 깊었다면 세스나 기가 지금 항로를  이탈해서, 막 뉴욕 공항을 이륙하는 보잉 757  여객기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비행기 시트가 잠자기에 적당하지 않았는지, 조종사의  외마디 소리 때문이었는지 골덴트는 다시 눈을 떴다. 뿌연  안개로 뒤덮인 창문으로 그가 마지막 본 것은 정면으로 날아오는 보잉 757기의 거대한 날개였다.

  MEDUSA의 광 컴퓨터 개발 담당 중역인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은 플로리다의 별장에서 모닝 커피를  끓이며  스핑크스의 레이저 데이터 변환 기술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 의사가 동맥 경화에 안 좋으니까 크림은 넣지 말라고 했지. ‘
  데이비드는 오래간만에 휘파람까지 지어가며 커피를  잔에 채웠다. 동맥 경화 증세로 3년전에 입원 한 후로는 팔  힘이 예전 같지 않아 커피잔에 커피를 채우는 일도 두 손에  힘을 꽉 주어야만 가능했다. 
  그는 그래도 스핑크스가 새로이 개발한 가정용 응급  시스템 때문에 플로리다의 따뜻한 햇볕을 즐길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이 가정용 응급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데이비드는 단층 촬영기와 뇌신경 외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서 20km 바깥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화상 전화가 요란한 신호음을 내며 울렸다. 화면에는 MEDUSA의 비서실장이 나타났다. 
  " 어제 밤 11시경 뉴욕으로 가던 우리 회사  소속  세스나 경비행기가 뉴욕 공항의 유도 시스템의 고장으로 보잉 757기와 정면 충돌했습니다. 비행기 안에 타고 계시던 골덴트  미첼씨와 조종사가 그자리에서 사망하셨습니다. "
  골덴트가 죽다니…… 딸각 하며 그의  손에서  커피잔이 미끄러졌다. 왼쪽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서 그는 서둘러 응급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헬멧을 뒤집어 쓰고 팔찌를  팔목에 비끄러맸다. 응급 시스템은 뇌파 검사와 심전도, 맥박과  체온을 측정해서 적당한 농도의 안정제를  팔찌의  주사바늘을 통해 그의 혈관에 투여해 줄 것이다. 
  안정제 덕분인지 답답했던 가슴이 차차 풀려왔다. 순간 데이비드는 뒷골이 뻣뻣해짐을 느꼈고 몇 초 후에는  뒷머리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응급  시스템은 그의 맥박이 약해짐에 따라 비상 경보음을 울렸고 정확히 2시간 15분 후에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의 전문의가 헬리콥터를 타고 달려왔다. 
  " 응급 시스템이 미쳤었나보군, 치사량의 열 배가 넘는 에피네플린 을 투여하다니. 아직 단 한 건의 고장 보고도 없던 응급 시스템인데…… "
  의사는 데이비드의 몸에서 헬멧과 팔찌를 벗기며,  허공을 응시한 채로 부릅뜬 그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 지그문트 박사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새로운  자동차를 몰고 나오셨네요. "
  " 오, 마리안느. 어제 새로 구입한 자동차야.  스핑크스가 설계했다는 자동차 유도 장치가 달려있지. "
  지그문트는 길 가장자리에 잠깐 차를 세우고 지도  학생인 마리안느에게 인사를 했다. 마리안느는 신기하다는 듯이  본넷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 한번 타보겠어, 마리안느? "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리안느는 짧은 치마에 조심하면서 지그문트의 옆 좌석에 앉았다. 흘러내리는 금테 안경을 한 손으로 추켜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턱수염을 살짝 쓰다듬으면서 지그문트는 자동차를 천천히 가속시켰다. 
  " 병렬 처리 컴퓨터 쪽의 연구는 잘 되어가나,  마리안느? "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다 박사님 덕분이죠. 병렬 처리 컴퓨터의 세계 최고  권위자이신 박사님께 지도받는데 연구가 진척이 안 될리가  있나요? "
  지그문트는 쑥스럽다는 듯이 너털 웃음을  지었지만  병렬 처리 컴퓨터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동안 독일 최고의 명문 공대인 아헨 공과 대학에서 그가  키워낸 제자들만으로도 웬만한 연구소 열 개는 채울  수  있을 정도니까……
  " 그런데 이 자동차에는 자동 유도 장치가 달려 있다고요? "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들 아랫쪽의 작은 컴퓨터 스크린을 가리켰다. 
  " 이 빨간 단추를 누르고 화면에 나타난 대로 목적지를 입력시키면 되지. 일단 자동으로 놓으면 핸들을 놓고서도 달릴 수 있어. 모든 조종은 스핑크스가 알아서 해주니까. "
  그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화면에는 아헨 공과 대학의  구내 지도가 나타났다. 
  " 일단 기숙사까지만 자동 조종으로 가볼까? "
  지그문트는 익숙한 솜씨로 자동 조종을 기숙사로 맞추고는 두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두 사람이 탄 자동차는  꼬불꼬불한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여 갔다. 
  " 박사님이 운전하는 거보다도 낫네요? 승차감도 훨씬  좋고…… "
  뒷쪽에서 한 떼의 대학생이 탄 자동차가 요란한 노랫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뚜껑이 없는 지이프 차에 여섯 명이 기타 하나씩 메고는 반쯤 찢어진 낡은 옷차림으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저 옷차림 하고는…… 그런데 저 녀석들도 자동  유도 자동차인 모양이지? 운전사가핸들을 놓고  플라잉  브이 를 치고 있는 걸 보니 말이야. "
  지이프가 추월을 하려는지 중앙선을 넘어 옆 차선으로  튀어 나왔다. 마리안느는 걱정스런 눈으로 지이프를  쳐다보았다. 
  " 저렇게 중앙선을 넘어 추월을 하려면  위험할텐데…… "
  자동 유도 자동차는 절대로 중앙선을 넘지 못하게 유도 된다는 것을 지그문트가 기억해 낸 것은 지이프가 그의 자동차 옆구리를 들이받고 부러진 핸들이 그의 가슴을 궤뚫은  직전이었다.

  아리오네는 극비 기술과의 자기 책상에 앉아,  앞에  놓인 두 권의 두툼한 서류 뭉치를 검토했다. 한 권은 지난 한  달간 의문의 사고로 실종되거나 사망한  과학자들의  기록이었다. 인공 지능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이자 MEDUSA의 중역인 골덴트 미첼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광 컴퓨터의 새로운 구조를 제시한 MEDUSA의 데이비드 골드시타인은 가정용 응급 시스템의 오동작으로 인해 죽었다. 병렬 처리 컴퓨터의 대가인 칼 지그문트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컴퓨터의 초고속 기억 장치에 쓰이는 갈륨 비소 반도체 를 집대성한 한국의  이 재성 교수는 연구실의 컴퓨터가 폭발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등 한 달 사이에 컴퓨터  분야에서만 열세명의 과학자가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의문의 사고는 컴퓨터 분야 뿐 아니라 생물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인간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 다음번 노벨  의학상이 유력시 되던 록펠러 의과 대학의 연구진은 액체 질소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전원 몰사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가 사고  직후에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는 것이다. 연구진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과 닮았으며, 유전자를  잘 조작하면 인간의 잠재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아리오네는 책상 서랍을 열고 조그만 컵을 꺼내어 옆에 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서랍을 닫으려던 그녀는 자신의 27구경 콜트 권총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 이상하다, 난 권총을 쓴 적이 없는데? ‘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책상 서랍을 뒤지던 그녀는 원래 권총을 놓아두는 서랍의 바로 아랫쪽 서랍에서 자신의  27구경 콜트를 찾아냈다. 
  ‘ 난 항상 권총을 윗 서랍에 두는데……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나? ‘
  그녀는 커피잔을 든 채로 보고서를 계속 읽어갔다. 이집트 최고의 바이러스 연구자인 낫산은 전자  현미경의  고장으로 인한 고전압에 감전사했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의 유전 공학 연구진은 학술 회의 참가차 공항으로 향하던 중 튜브  열차의 사고로 14명이 사망하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리오네는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눈으로훑어 내려갔다. 
  ‘ 컴퓨터와 유전 공학의 전문가들을 제거하려는 일련의 계획으로 추정됨. KGB나 모사드 , MI6 , 기타 다른 첩보  기관이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음. ‘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아리오네는 두번째의 서류 뭉치를 폈다. 그것은 스핑크스의 사용 기록이었다.  그녀는  기록을 세밀히 조사하다가 기록에서 일부분을 삭제한 흔적을 발견했다. 교묘히 위장했지만 그것은 분명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서 사용한 기록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CIA에서는 혜진의 비밀 연구실과 스핑크스를 연결한  적이 없다. 스핑크스가 혼자서 정비 로보트를 시켜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 접속 장치를 설치했고, 혜진이 스핑크스를 사용한 기록을 지워버렸다. ‘
  아리오네는 마구 헝클어지는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로 끼워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에 아리오네는 놀라서 멈칫거렸다.
  ‘ 설마…… 어떤 이유에서 스핑크스가 혜진을  감시하려는 것은 아닐까? ‘
  아리오네는 책상 아랫쪽에 달린 큰 서랍을 잡아  당겼지만 자물쇠가 잠겨있는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 세 겹으로 잠근 자물쇠를 열고 한 변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금속 상자를 꺼냈다.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담겨  있던 캡슈울이 들어 있던 상자였다. 
  ‘ 도대체 알 수 없는 상자야. 수천년 전의 이집트  인들이 어떻게 니켈과 티탄으로 된 상자를 만들어냈지? ‘
  그녀는 좀 더 조사해 볼 생각으로 상자를 어깨에 메고  있는 백에 집어 넣고는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혜진의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 또 들렸군요, 아리오네. "
  아리오네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눈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혜진은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리오네는 여러가지 실험  기재와  전선, 파이프가 어지러이 얽혀있는 뒷쪽을 세밀히 살폈다.  15분만에 그녀는 책상 밑에서 작은 무선  마이크를  찾아냈다. 한 눈으로 보기에도 CIA나 다른 첩보기관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어깨에 든 백에서 까맣고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꺼낸 아리오네는 상자에서 안테나를 뽑고 다이알을 돌렸다.  예상대로 무선 마이크에서 발사되는 전파는 스핑크스가 있는  방을 향하고 있었다. 
  " 뭐 이상한 것이 있어요? "
  혜진은 놀란 눈으로 아리오네를  쳐다보았다.  아리오네는 책상 밑에서 떼어낸 무선 마이크를 혜진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 이 방은 감시 받고 있어요, 혜진씨. 스핑크스가 이 방에 설치한 무선 마이크입니다. "
  갑자기 출입문 오른쪽에 놓여있는 모니터가  딸각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리오네는 어깨에 메고 있던 백을 힘껏  모니터에 집어던지고는 혜진을 밀어 엎드리게 하고 자신도  엎드렸다. 백에 맞은 모니터는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두꺼운 유리가 펑-하고 폭발하여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뒤이어 방안에 있던 컴퓨터 단말기와 조직 배양기, 원심 분리기가 잇달아 폭발하며 불꽃이 솟았다. 웬일인지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스프링쿨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와르르 소리와 함께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불 붙은 부스러기가 두 사람의 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엉금엉금  기어가던 혜진의 무릎 위로 불깅에 뜨겁게 달구어진 철제 앵글이 덮쳤다. 혜진의 비명소리를 들은 아리오네가  불길  속을 헤치고 기어와서 앵글을 치워 주었다. 
  아리오네는 몸으로 혜진을 감싸고 출입문으로 뛰었다.  불길은 맹렬한 속도로 번져나갔지만 두 사람이 방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 좀 더 먼저였다.

방 안

  " 초능력? "
  혜진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 새로 발견된 물질은 아테니움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리스 신화의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서 따온 거죠. 아테니움을 투여한 동물은 지능만 증가하는게 아니라 투시 능력을  갖추게 돼요. "
  " 투시 능력? "
  아리오네는 놀라서 소리쳤다. 
  "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는 후각과 시각,청각을 모두  봉쇄해버려도 먹이를 찾아내곤 해요. 특히 벽으로 가로막아 놓아도 벽을 궤뚫어 보고 먹이를 발견하죠. "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이 물질의 발견을 두려워 했단  말인가? 아리오네는 무서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혜진은  말을 이었다. 
  "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스핑크스는 아테니움의 발견을 두려워 해서 거짓 분석을 보내온 것 같아요. 스핑크스가  분석한 자료에는 아테니움이 가장 형편없는  물질로  나타났거든요. "
  아리오네는 혜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구석의 불탄부스러기에서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잿더미를 휘저었다. 아직도 뜨거운 그  쇠붙이는 아까 모니터를 향해 집어던진 백속에 들어있던 문제의  금속 상자였다.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금속 상자. 
  혜진은 아리오네가 금속상자를 집어드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 전 아리오네가 들어오기 조금 전에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아테니움의 분자 구조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 와 거의 흡사해요. "
  아리오네는 혜진의 말중에 ‘스핑크스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 금속 상자를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혜진은 아리오네를 돌아다 보더니 금속 상자에 눈길을  돌렸다. 
  " 혜진씨,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드릴께요.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는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에서 나온 설계도 대로 만든 거여요. "
  " …… "
  아리오네는 떨어뜨렸던 상자를 집어들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원래 한 변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상자  모양이었던 금속 상자가 원판 형으로 바뀌어 있고, 겉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가 씌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글자는 희미해서  잘 읽혀지지 않았다.
  " 이상하다, 불에 녹았나? 원래 이건 정육면체 모양의  상자였고 겉에는 글씨가 하나도 없었는데…… 이 상자가  바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상자였어요. "
  혜진은 아리오네에게서 금속상자, 아니 이제는 원판형으로 바뀐 물체를 받아들었다. 
  " 아직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
  순간 혜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 혹시 이 금속 상자는 형상 기억 합금이 아닐까요? "
  " 형상 기억 합금이 뭐죠? "
  혜진은 아리오네에게 형상 기억 합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형상 기억 합금은 쉽게 말해서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물질이예요. 니켈과 티탄으로 된 니티놀이라는 합금인데, 예를 들어 용수철 모양의 니티놀을 곧게 편  다음  가열하면 과거의 모습인 용수철로 되돌아가요. 지금의 화재  때  금속 상자가 가열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
  혜진은 물이 담겨있는 대야 속에 금속판을 집어넣었다. 차가와진 금속판은 곧 금속 상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 맞아요, 이 금속 상자의 주 성분은 니켈과 티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면 이 상자를 가열하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겠군요. "
  혜진은 타다 남은 책상 밑에서 작은 알콜 램프를 끄집어냈다. 램프는 재를 뒤집어 쓰긴 했지만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알콜 램프에 불을 붙여 금속 상자를 가열했다. 금속  상자는 천천히 원판형으로 변했고, 표면에는 이상한 글씨들이  나타나더니 더욱 뚜렷해졌다. 아리오네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 이 금속 상자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글씨는 슈퍼 컴퓨터  스핑크스에  대한 어떤 기록이 아닐까요? "
  아리오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것 같네요. 하옇던 혜진씨 조심하세요. 스핑크스는 이제부터 우리 둘을 노릴테니까요. "
  " 도대체 스핑크스가 왜 우리를 노릴까요? "
  " 스핑크스는 나중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제거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혜진씨가 발견한  아테니움이 스핑크스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것만은 분명해요. "
  "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없애야지요.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컴퓨터가 존재한다면…… "
  아리오네는 혜진을 쳐다보았다. 
  " 하지만 증거가 있어요? 거기다 스핑크스는 인류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만약  스핑크스가  없어진다면 인류 활동의 90%는 정지하고 말거여요. 모든 교통기관은 스톱되고, 공장의 생산은 중지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거여요. 스핑크스가 실제로 인류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인지 좀 더 두고 봐요. 어쨌던 혜진씨는 조심하세요. "
  아리오네는 불탄 연구실의 정리를 다른 CIA 요원에게 맡기고 극비 기술과로 갔다. 과장인 영카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 아랫층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거야? "
  " 아직 확인 되지 않은 것이지만 스핑크스는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그녀는 혜진의 방에서 있었던 일과 최근 1년간 일어난  의문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하지만 혜진이 발견한 아테니움과, 형상 기억 합금으로 이루어진 금속 상자에서 발견된 글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영카우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 놀랍군. 하지만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게.  그리고  우리 둘이서 대책을 세워 보자구. 만약 아리오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리오네도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혜진의 비밀  연구실도 경비를 서도록 하지. "
  아리오네는 자신의 27구경 콜트를 꺼내려 서랍을 열었지만 사랍은 비어있었다. 
  ‘ 내가 딴데다 두었나? ‘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던 아리오네는 결국 권총을 찾지 못하고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영카우는 전화기를 들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 저쪽에서 들려왔다. 
  " FBI 특별 수사반입니다. "
  전화가 끝나자 영카우는 방 구석에 있는 컴퓨터에  무엇인가를 입력시켰다. 
  ‘ 극비 기술과 코드네임 아리오네가 스핑크스의 정체를 알아냈음. 주의 깊은 관찰 바람. 아리오네에 대한 모든 자료는 J-OY-PQ-199-0-621에 있음. ‘
  놀랍게도 수신자는 스핑크스였다.

  바깥은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휘몰아 치기라도 할듯이 험상궂은 날씨였다. 튜브 열차를 타러 역으로 향하던 그녀  앞을 두터운 바바리를 입은 세 남자가 가로막았다. 
  " 아리오네씨죠? "
  " 네, 그런데요? "
  " FBI입니다. 당신을 스페이스 상원 의원 살해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부를 권리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
  남자들은 능숙한 솜씨로 아리오네에게 수갑을 채웠다.  정확히 한 시간 후 아리오네는 뉴욕 교외의 FBI  안전  가옥에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27구경 콜트를 그녀의 코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 이 27구경 콜트, 당신 것이 맞지요? "
  아리오네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 총은 제 것 맞습니다. 당신들이 이미 조회해  보았겠지만 난 컴파니(CIA의 별칭)에서 일하고 있어요. 컴파니 식구들이 총을 가지고 다니는 건 당연하지요. "
  "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27구경 콜트에 살해됐습니다.  이 27구경 콜트는 여성 첩보원들을 위해 특수 제작되었고, 시험용으로 당신에게 지급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구경 콜트를 지급받은 사람은 10명도 안되고, 그중  스페이스  의원이 살해되던 날 미국 내에 있던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
  아리오네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스핑크스에 의한 무기 체계의 통제를 반대하던 스페이스  상원의원이  의사당 내 의원 화장실에서 살해당했다는 기사는 얼핏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누명이야……
  " 우리는 당신의 27구경 콜트를 조사해보았습니다.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네 발의 총탄을 맞았는데, 당신 권총의 탄창에도 네 발이 비어있었습니다. "
  " …… "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음모를  꾸민걸까? 그러고 보니 스페이스 상원 의원은 스핑크스에게 무기를 맡기자는데 결사 반대를 해 왔다고 한다. 이번 일에도 스핑크스가 관련되어 있는게 아닐까? 어쨌던 아리오네는 FBI요원들의 심문을 맞받아치기로 했다. 
  " 목격자는 있습니까? "
  " 피해자가 화장실에서 죽었기 때문에 살해 현장을 본  목격자는 없습니다. 사건 직전과 직후에 화장실을 출입한 사람들은 당신 정도의 키, 즉 약 170센티미터에  바바리를  입고 있던 사람이 화장실 안에서 용무를 보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바리를 입고 있는 170센티미터  정도의  사람이 화장실을 뛰쳐나가는 것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목격자들이 본 바바리는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
  됐다, 빠져 나갈 구멍이 있다, 하고 아리오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당신들은 바바리를 입은 키 170센티미터의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
  "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한 음절 한 음절씩 똑똑 끊어서  말했다. 
  " 그렇다면 당신들은 바보군요. 어느 곳의 화장실도  남녀 따로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국회  의사당도  마찬가지죠. 저같은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면 목격자들이 기억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
  " …… "
  " 변장을 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남자처럼  서서 용무를 볼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죠? 당연히  그날  스페이스 상원 의원을 죽인 키 170센티미터에 바바리를  입은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
  " …… "
  " FBI가 이렇게 어리석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
  FBI 수사 요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아리오네를 안전 가옥 밖으로 내보내 주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아리오네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차츰차츰 스핑크스는 그녀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Part III [유기]의 수수께끼

  2000년 3월. 구려시.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삼삼오오 모인 구려 중학교  3학년 6반 학생들은 제각기 웅성거리고 떠들고 있었다.  복도에 나가 있던 한 학생이 뛰어 들어오며 ‘ 허 병도 선생님 오신다 ‘고 외치자 학생들은 우루르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아직도 두툼한 파란 파카를 입은 교사가 교탁 앞에 섰다.  3월이지만 아직도 눈이 채 녹지 않은 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도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
  " 안녕하세요, 여러분? "
  병도는 학생의 인사를 받고는 교실 뒷쪽에 설치된  레이저 비디오를 켰다. 화면에는 고구려의 지도와 함께 오늘의 수업내용이 순서대로 나와 있었다. 
  " 오늘은 고구려의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구려시가 옛날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지요? "
  병도는 한국이 막 통일되던 5년 전을 생각했다. 김 일성의 갑작스런 죽음과 북한 군부의 반란으로 북한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고, 이미 한인 자치 구역을 형성하고  있던  길림성과 요령성의 수비군도 반란에 가담했다. 한국 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길림성과 요령성을 대한민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북한 전역과 길림성, 요령성을 신속히 장악한  한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무기와  훈련, 사기등 모든 면에서 우세한 한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사태가 악화되기를 원치 않은 중국 정부는 길림성과  요령성을 한국에 매각하는 형태로 사태를 수습했고, 한국은 고구려 이래로 잃어버렸던 만주 땅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 흔히 고구려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보다 매우 뒤떨어진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
  레이저 비디오에는 1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불상이 나타났다. 병도는 지휘봉으로 화면에 나타난 불상을 가리켰다. 
  " 화면에 보이는 것은 국보  118번인  금동미륵반가상입니다. 크기는 17.2센티미터로 작지만 고구려의 미술이 이미 수준급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병도는 손에 들고 있는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레이저 비디오에는 다음 화면이 나타났다. 약간은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풍기는 불상이었다. 
  " 이 것은 국보 85호인  금동신묘명삼존불입니다.  장수왕 때 만들어진 불상으로, 삼국시대의 미술이 결코 중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선생님의 설명이  아니어도, 옛 고구려의 수도에서 태어난 학생들이라  삼국시대의 역사는 눈 감고도 줄줄 욀 수 있었다. 병도는  다음  화면을 가리켰다. 도깨비 같은, 그러나 약간은  익살스러운  모습의 기왓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 이것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구려  와당입니다. 와당은 그당시 쓰이던 기와의 이름이지요. "
  뒷쪽에서 학생 하나가 쭈삣쭈삣 손을 들었다. 학급에서 장난꾸러기로 유명한 최 세영이었다. 
  " 저, 그 도깨비 그림 같은 것이 고구려의  기와  맞아요? 저번에 친구와 산책 갔을 때 그런게 많이 있는 곳을 봤어요. "
  " 세영이, 오늘은 만우절이 아냐, 그런 말로 선생님을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병도는 피식 웃어넘겼다. 세영의 장난은 학교 내에서도 알아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세영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세영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 그럼 좋아. 이번 학기에 예정되어 있는 야외 조사는  세영이가 보았다는 와당이 있는 곳으로 하지. 이번 주  토요일 아침 9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도록. "

  토요일 아침, 병도는 두툼한 등산복에 장갑으로 완전 무장을 한 6반 학생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 갔다. 한 학기에 한번씩 있는 야외 조사를 병도는 제일  좋아했다.  학생들에게 실제로 역사를 느끼게 하고 보여 주는 야외 조사야 말로  병도가 늘 주장하는 ‘산 교육’이기 때문이다. 많은 인원을  통솔해서 산에 오르다 보니 가끔씩 다치는 학생이 생기고 그때마다 곤욕을 치루기는 했지만 조사를 끝내고 감동받은  학생들의 눈빛만으로도 병도는 충분히 보람을 느끼곤 했다. 
  " 세영이는 언제부터 이런 산 속으로 산책을 다녔지? "
  세영의 얼굴이 귀밑에까지 빨개졌다. 
  " 너, 여자 친구하고 산책 나갔었구나, 맞지? "
  병도는 피식 웃었다. 세영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같이 웃었다. 그가 항상 학생들을 이해 한다는 것을 세영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영은 작은 언덕 앞에 섰다. 언덕 한 쪽에  흙으로  덮인 돌 무더기가 있고, 주위에는 와당이 흩어져 있었다.  병도는 와당을 자세히 보았다. 장수왕 때쯤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 생각보다 대단한걸? 어쩌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
  " 선생님, 이리 와보세요. 이 돌무더기는 무슨 무덤  같아요. "
  학생의 외침에 병도는 그리로 달려갔다. 돌 무더기를 덮고 있는 흙을 헤집자 큰 돌벽 밑에 조그마한 돌판이 있었다. 
  ‘   永樂  王之   ‘
  몇 글자 알아볼 수 없었지만 [永樂]이란 단어를 발견한 그는 어마어마한 발견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永樂大王은 바로 광개토 대왕! 그는 1600년만에 우리나라 최고의  정복자였던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한성대 고고학과의 이 동윤 교수와 국립 박물관장 안 기중박사는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끝내고 무덤을 덮은 흙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제거해 나갔다. 두 사람이 유물 발굴에  몸담은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처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옆에서는 발견자인 병도와 세영이 발굴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 선생님, 왜 저렇게 손으로 천천히 해요? 드릴로 푹 파헤치면 안되나요? "
  " 유물 조사는 원칙적으로 손으로 해야 해.  기계를  쓰면 유물을 상하게 하기 쉽거든. "
  흙이 다 걷히고 피라밋 모양의 돌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구에 있는 장군총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컸다. 흙에 파묻혀 있을 때는 작아 보였지만 높이는 15미터가 족히 넘을 듯 했다. 
  발굴반은 돌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네 시간쯤의 작업 후에 발굴반은 묘실에 도달해, 유리 섬유 케이블이 달린 소형  카메라를 안에 들이밀었다. 화면을 보던 발굴반은  순간적으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화면에 나타난 건 누렇게 변한  종이 뭉치 – 바로 고구려 시대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묘실에 들어간 안 기중 박사는 불활성 기체가  들어  있는 상자에 재빨리 책을 집어 넣었다. 연구실로  돌아가  적당한 보존 처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상자에 집어 넣고  한숨을 돌린 안 기중 박사는 책 밑에 이상한 문자가 빽빽이 적혀있고 하얀 녹이 슨 작은 은판이 있는 것을 보았다.
  ‘ 은에 생기는 녹은 하얀 색이 아닌데 이상하군. ‘
  특수 장갑을 낀 손으로 은판을 집던 그는  놀라움에  그만 들고 있던 은판을 떨어뜨렸다. 은판인 줄 알았던 판은  바로 알루미늄이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의 과학자  외르스테드가 처음으로 알루미늄을 발견 한 때는 1825년,  광개토  대왕이 죽은 지 1400년 후의 일이다.

  주 ) RNA : 리보핵산. DNA와 더불어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는 물질.

  " 네, 들어오십시오. "
  영훈이 방문을 들어서자 건장한 체격의 이 동윤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요즘 젊은  사람들보다도  더욱 다부진 몸집이었지만, 머리에 허옇게 인 백발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비디오 카메라를 세워  놓고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들이댔다. 
  "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입니다. 역사적인 발굴을  지휘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
  " 이젠 할 일을 다한 기분입니다. 죽기전에 고구려 유적을 한 번 발굴해 보는게 소원이었쨉,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광개토 대왕릉을 발굴하게 되다니, 이젠 여한이 없습니다. "
  " 이번 발굴의 최대 성과는 어디에 있을까요? "
  교수는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조그마한 책을 들어 보였다. 
  " 아직까지 꿈만 같지만, 우리는 전설로만 알려져 있던 고구려의 역사책인 [유기] 100권을 발굴해 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것은 모조품이지만, 1600년이 넘은 책이 무덤  속에서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지요. 이번 발굴된 광개토  대왕릉은 통풍이 아주 좋아서 책의 망 상태가 극히  양호합니다. 물론 1600년 동안 책이 찢어지고, 부분적으로는 썩었습니다. 습기로 인해 종이는 검게 변해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
  " 그러면 책의 내용은 어떻게 읽었지요? "
  교수는 조그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에는 병원에서 쓰는 X선 촬영기를 축소한 것 같이 생긴 기계의 사진이 있었다. 
  " 이 기계가 바로 감마선 단층 촬영기입니다. 먹과 종이는 감마선의 투과 정도가 다르거든요. 눈으로는 검게 변해 알아 볼 수 없는 종이도 이 기계灌 깨끗이 보이지요. "
  " 그러면 이번에 발굴한 [유기] 100권의 내용은  어떤겁니까? "
  교수는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레이저 비디오를  켰다. 화면에는 우리나라의 지도가 나타났다. 
  "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해서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었습니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에 나오는 낙랑은 바로 이 한사군이지요. 하지만 고구려의 정사(正史)인 [유기]에는 도리어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
  " 예? 고조선이 한나라를 이겼다고요? "
  영훈은 상체를 앞으로 일으키며 말했다. 
  "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사책의 3분의 1정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
  교수는 비디오 화면상의 우리나라 지도를 가리켰다.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까지 배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지방에  그려져 있었다. 영훈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 원래 위만조선은 중국계 이주민들이 동이족 ,  즉  우리 민족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동이족은 위만정권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내전을 틈타 한나라가 침략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이족은 치열하게 항거한 끝에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나라의 침략도 물리쳤습니다. "
  " 그럼 우리가 배운 한사군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 그건 중국 역사책의 왜곡이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낙랑 4군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역사책은  모두  ‘춘추필법’이란 원칙에 따라 적혀지는데,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을 높이고  다른 나라를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적혀진 역사책이 정확할 리가 없지요. 더우기 중국  근처의  나라중 중국과 문화적, 군사적으로 맞설 나라는 우리 민족밖에 없었고, 따라서 우리의 역사, 특히 고대사는 많이 깎여지고 왜곡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우리의 역사책이 없어 중국의 역사책이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에 [유기]가 발견됨으로 해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지배했었고, 백제가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좁은 한반도에 갇혀 지냈던 것이  아니라 거대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국 민족과  힘을  겨루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열리는 국제 고고학회에서 [유기]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집니다.  회의가 끝나면 동북 아시아의 역사는 3분의 1 정도가 새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
  영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짧은 캇트 머리에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젊은 여자가 찻잔을 내왔다. 
  " 혜선아, 인사하렴. 이쪽은 KBC 방송의 이  영훈  기자시고, 이쪽은 제 조카 혜선입니다. " 
  여자는 고개를 숙여 목례를 보냈다. 스물 조금  넘었을까.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꽤 참한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도리어 귀여워 보였다. 영훈은 가벼운  칭찬을  건넸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런 미인 조카를  두신줄은 몰랐는데요. "
  찻잔을 영훈의 앞에 놓은 그녀는 보조의자를 끌어다  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 영훈씨 이름은 그전에 들어서 알고 있지요.  이집트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 사건때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을 자청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분이시죠? "
  영훈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쑥스러운지 동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런데 이번에 광개토 대왕릉에서 금속판이  발견되었다고요? "
  교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혜선이 후다닥 뛰어나가 걸레를 집어와 닦았다. 겸연쩍어 하는 표정으로 교수가 말했다. 
  " 그건 발굴반에서도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
  "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여기 오기 전에,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최 세영군을 만나 보았습니다. 감추려는  눈치였지만 결국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
  " …… "
  교수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형광등을 켰다. 영훈은 교수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혜선은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니다, 혜선아.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어차피 네  전공하고 관련이 있는거니까. "
  전공이라고? 어리둥절해 하는 영훈에게 교수가 설명했다. 
  " 혜선이는 고대 유적의 과학 분석을 연구하지요.  우리 대학 재료공학과에서 감마선 투시를 연구했고, 지금은  고고학과 대학원 과정에 있습니다. [유기]의 감마선 단층 촬영을 한 사람도 바로 혜선입니다. "
  " 그럼 지금 대학원생이십니까? 전 고등 학교를 갓 졸업한 줄 알았어요. 굉장히 어리게 보여요. "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영훈은 혜선에게 말했다. 교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영훈 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 이미 알고 계시다니까 말씀을 드리지만 절대로 이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됩니다. 보도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영훈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세워 놓은  비디오 카메라의 스위치를 껐다. 
  " 사실은 나도 영훈씨 같은 사람과 의논을 하고  싶었습니다. 영훈씨는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을 취재하셨었죠? "
  " 예, 그때 정체 모를 금속 상자에서 바이러스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저도 죽을 뻔 했었죠. "
  영훈이 우쭐거리며 대답했지만 교수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가끔씩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간밤을 꼬박 새웠음이 분명했다. "
  " 그때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던 금속 상자는  니켈과 티탄의 합금이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 예, 하지만 그 당시 복원반은 아직까지도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에도 보도 되지  않았고요. "
  " 복원반의 제임스 박사는 내 오랜 친구입니다. 그는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었어요. 4000년 전의  이집트인은  도저히 니켈을 쓸 수 없습니다. 도저히 고고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거죠. "
  " …… "
  영훈은 어느새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교수와 영훈은 1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 이 금속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된 금속판은 알루미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구려인들이 19세기에  발견해  낸 알루미늄을 사용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있습니까? 제임스 박사나 내가 발표할 수 없었던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다. "
  영훈은 고개를 돌려 탁자를 바라보았다. 소박한 갈색의 나무 탁자는 오래 써서 가장자리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칠이 벗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리던  그는 교수의 다음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 하지만 왜 알루미늄 판이 광개토 대왕릉에 묻혀  있었는지를 어쩌면 설명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
  교수는 ‘어쩌면’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 ‘어쩌면’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가설이 공상 과학 소설에나 나옴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혼란이 올지도 모릅니다. "
  똑똑 –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어번 나고, 짙은 빨강 머리의 외국인이 들어왔다. 큰 키에 청색 겨울 양복을 입은 남자는 교수에게 뭐라고 말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영훈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교수는 뭐라고 남자에게 말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순간 남자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까  교수가 엎지른 차 때문인 것 같았다. 간신히 책상 모서리를 짚은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요셉이라고 지난번 회의에서 만났던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 교수입니다. 이스라엘에 교환 교수로  간  적이 있어 히브리 말을 조금 한 것이 인사를 한 계기가 됐죠.  지금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습니다. "
  교수는 몇 년전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자신의 기억력이 흐뭇했지만, 교수의 기억력이 좀  더  좋았다면 지난번 만났을 때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오른쪽 뺨의 검은 점이 없어졌다는데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교수는 한자가 빽빽히 인쇄된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한자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영훈이었지만 종이에 씌여진 것은 낯선 글자 뿐이었다. 뒷면에는 손으로 정성 들여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뒷면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 교수님, 설마… "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훈은 천천히  소리내어 글을 읽어 내려 갔다. 
  " 신라국 본기 5권. 내물왕  42년 5월 계림 앞바다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사흘 동안 없어지지 않다. 하늘을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아다니다 두 마리가 땅 떨어져 죽다. 죽은 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친 채 나와, 왕궁으로 모시고 극진히 치료했으나 일 주일 만에 죽다. 근처의 나뭇군이 글씨가 적힌 이상한 하얀 쇠 거울을 신선의 선물이라며 왕에게 바치다.  쇠로 만든 새가 떨어져 죽은 근처에서 팔 없는 아이가  태어나다. 왕은 신이 노한 탓이라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만 머리가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다. 왕은 신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탓이라 여겨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산을 불태우다. 내물왕 42년 7월. 계림 앞바다에 다시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이상한 짐승들이 바다 속을 들락날락하고 섬을 만들다. 섬은 바다에 닷새 동안 떠 있다 가라 앉다.  "
  " 그럼 그 하얀 쇠 거울이 바로  알루미늄  금속판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광개토 대왕릉에 와 있죠? "
  " 계속해서 읽어 보세요. "
  혜선도 어안이 벙벙해져 영훈이 들고 있는 종이를 넘겨 볼 뿐이었다. 그는 계속 읽어 나갔다. 
  " 고구려국 본기 27권. 영락 10년  군사 5만을 신라에  보내어 왜구를 무찌르다. 신라의 내물왕이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은덕을 칭송하고, 쇠로 만든 하얀 거울을 바치다. 계림에 떨어져 죽은 쇠로 만든 커다란 새의 알이라고  사신이  말하다. "
  " 그걸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훈씨? "
  혜선이 불안한 표정으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한 개비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푸우- 하고 연기를 내뿜은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 믿을 수 없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죠.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은 핵무기의 폭발입니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는 물론 비행기나 우주선일테고요. 팔 없는 아이는 핵  폭발의 방사능으로 인한 기형아일겁니다. 그 금속판은  비행기의 추락한 잔해에서 발견 되었을테고요, 내물왕은  고구려에 그 금속판을 공물로 바쳤을겁니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경주 근처에서 싸움이라도 별였다는 건가요? "
  영훈은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교수를 쳐다 보았다. 교수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였다. 
  " 내 생각도 똑같아요, 영훈씨. "
  교수는 어느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있었다.  혜선이 ’20년 동안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면 어떻게 해요’하고  말렸지만 교수는 불 붙인 담배를 깊숙히 한 모금 빨고는 길게 내 뿜었다.
  " 교수님이 발표를 못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영훈과 혜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정작 문제는 그 다음 줄입니다. 쇠로 만든 짐승들이  바다 속에 섬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경주 앞바다에는 외계인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말이 됩니다. "
  " 설마…… "
  영훈과 혜선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교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말을 이었다. 
  " 믿고 싶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이만하면 금속판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아시겠죠?  금속판이 없다면 단순한 신라의 신화로 해석될 수  있지만,  금속판이 공개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지 모릅니다. 또  하나,  만약 알루미늄 판을 사용하는 외계인이 경주 앞바다에 유적을  만들었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들어 있던 금속판도 역시  외계인이 만든 것일 수 있습求. 그렇다면…… 스핑크스 컴퓨터 역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며칠 전에  제임스 박사와 통화했는데, 박사가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한 금속 상자도, 이번에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도 외계인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었다. 아직 차가운 바깥 공기가 영훈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비디오  카메라를 챙겼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 비밀은 꼭 지키지요. "
  " 고맙습니다. 영훈씨는 금속판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세번째이자 마지막 사람입니다. "
  영훈은 혜선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실을 나갔지만,  교수의 말은 책상 모서리에 붙어 있는 도청 장치를 통해 그곳으로부터 10킬로미터 떨어진 차 안에 앉아 있는, 금속판의  비밀을 알고 있는 네번째 사람의 녹음기에 모조리 녹음되었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 라울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에 든 칵테일 잔에 담긴 싱가폴 슬링의 붉은 빛이 방안의 조명을 받아 탁하고 답답하게 보였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무관이 들어와 방문자가 있음을 알렸다. 라울은 응접실로 나갔다. 혈색 좋은 검은 머리의 요하난이 서 있었다. 
  라울은 요하난을 잘 알고 있었다. 라울이 프린스턴 대학의 테니스 클럽의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요하난은  예일  대학의 테니스 클럽에 있어 빈번히 만났었다. 라울이 두달 전  이스라엘에 부임했을 때 요하난은 특수 부대의 지휘관이었고, 한달 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텔 아비브에서 미국인 학교 스쿨버스를 습격하여 인질극을 벌였을 때 라울은  CIA의  첩보 위성과 도청 장치를 사용해 요하난을 도왔다. 물론 요하난은 라울의 도움으로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인질을  구출했고, 그 공로로 모사드로 옮겨갔다. 
  " 지난번 텔 아비브 사건 때는 정말 고마왔네. 자네  덕에 모사드로 옮겨갈 수도 있었고. "
  라울은 활짝 웃으며 얼음통에서 요하난의 잔에 얼음 한 조각을 넣어 주었다. 
  " 자네와 나는 대학 때부터 만난 친구 사이 아닌가. 또 우리같이 특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서로 돕고 사는거고. "
  요하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 자네가 흥미 있어할 정보를 하나 가져 왔네. 얼마  전에 설치된 스핑크스 컴퓨터 있잖나. 그 컴퓨터가  발견된  곳이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에 있던 금속 상자였다며? "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하난의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 우리 모사드는 스핑크스를 외계인이 만든 컴퓨터로 추정하고 있네. 고대 이집트 인이 니켈을 사용할 리는  없는거니까. 그런데 그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어. 교수로 위장한 우리 요원이 알아낸 건데 한국의 역사학자가 역시 외계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금속판을 발견해 냈다는군. 그  금속판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속판과 같이 발견된  역사책에는 분명 외계인의 침입으로 보이는 구절로 그  금속판을 설명하고 있다네. 스핑크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잘하면 제 2의 스핑크스를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라울은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그는 요하난에게 물었다. 
  " 흥미 있는 정보군. CIA가 좋아하겠군. 그런데 이런 정보를 왜 나한테 알려주나? 자네 기관이 빼돌려 제2의 스핑크스를 만들면 훨씬 좋을텐데. "
  " 사실 우리도 그 정보를 검토했지만 우리는 설계도를  입수해도 만들 과학력이 없어. 또한 자네에게 진 신세도  갚을 겸. 우리 세계에서는 언제나 ‘기브 앤드 테이크’ 아닌가. "
  " 고맙네. 서로 도우며 사는거지. "

  예루살렘의 미국 대사관에서 두 사람이 건배를 하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혜선이 감마선 단층 촬영기로 알루미늄 금속판을 조사하고 있었다.
  " 큰아버지, 이 금속판에 씌여진 글은 읽을 수 없나요? "
  동윤은 고개를 저었다. 혜선은 신기한 듯이 들여다 보다가 금속판을 단층 촬영기 안으로 밀어넣었다. 곧 쉿-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 안을 진공으로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 조심스럽게 다워야 한다. 귀중한 거니까 상하면  큰일이야. "
  " 물론 알고 있어요, 큰아버지. "
  혜선은 장난스럽게 동윤에게 윙크해 보이고는 단추를 눌렀다. 화면에 빽빽이 숫자가 나타났고, 혜선은 키보드를  연방 두드렸다. 화면에 가로로 하얀 줄이 나타나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더니 흐릿하게 형체가 나타났다. 혜선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동윤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로 혜선을 쳐다보았다. 혜선의 손가락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무슨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한 구석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 큰아버지, 이 부분에는 방사능이 있어요. "
  혜선은 화상 전화기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눌렀다. 초조한 가운데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이 받는  소리가  들렸다. 
  " 호상이니? 나 혜선이야. 급하게 이리로 좀 와줄래? "
  " 야, 지금이 몇 시인줄 알아? 새벽 1시야, 1시. 넌 이 시간까지 집에도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니? "
  투덜대던 호상은 혜선의 얼굴이 굳어져 있는 걸 보자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챘다. 
  " 나 장난하는 거 아냐. 네가 꼭 와서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래. 여기 큰아버지도 와 계셔. "
  " 알았어. 그런데 지금 자동차가  있나  모르겠는데…… 하옇던 갈께. "
  전화가 끊어지자 동윤은 혜선에게 물었다. 
  " 방사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
  " 감마선 단층 장치는 방사능 동위 원소의 방사능  중에서 감마선을 이용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촬영하고자 하는  물체에 방사능이 있으면 그 감마선 때문에 화면이 뿌옇게 나와요. 그리고 여기는 무슨 전자 회로 같고…… "
  " …… "
  동윤은 자신의 생각이 차츰차츰 맞아 간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있다 호상이 졸린 눈을 비비며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 큰아버지, 제 친구 호상이에요. 호상아, 인사드려. "
  "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권 호상이라고 합니다. 혜선이랑은 아주 친한 친구죠. "
  혜선은 호상을 화면 앞으로 데리고 가서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화면을 가리켰다. 
  " 지금 보이는 거는 감마선 단층 촬영을 한 건데, 혹시 뭐를 찍은 건지 알겠니? "
  호상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화면을  노려보다가  한참만에 무릎을 탁 쳤다. 
  " 이건 일종의 전파 수신기야. 그런데 이렇게  묘한  거는 처음 본다. 알루미늄 판 속에다 만든  수신기라……  혹시 이거 스파이들 쓰는 무전기 아니니? "
  호상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마치 용수철처럼 보이는 주위로 수많은 작은 네모꼴이 모여 있었다. 
  " 이 용수철처럼 보이는 거는 코일이야. 전파를  수신하는 핵심적인 부분이지. 그리고 이 네모꼴은 무슨  트랜지스터처럼 보이고. 어라? 전원이 없네? 무슨 건전지처럼 보이는게 있어야 하는데? "
  호상은 고개를 흔들다가 뿌옇게 흐려진 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회로 상으로 보면 아마 이게 전지인 것 같은데,  이렇게 기묘한 전지는 처음 봐. "
  " 거기는 방사능이 있어. 약한 방사능이지만. "
  방사능? 하며 호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럼 원자력 전지라도 쓰나 보지. 하옇던  이거는  전파 수신기가 맞아. "
  멍하니 서있던 동윤을 돌아다 본 혜선이 설명을 했다. 
  " 호상이는 전자 공학을 전공하거든요. 화면에 전자  회로같은 부분이 있어서 불렀어요. "
  " 그런데 호상군, 이 알루미늄 판 속의 회로가 지금도  전파를 송수신할 수 있나 확인 할 수 있어요? "
  " 뭐 뜯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교수님. "
  " 뜯어? 안되고, 아주 귀중한 판이에요. "
  동윤은 뜯는다는 호상의 말에 질겁을 했다. 
  " 안 뜯고도 방법이 있죠. "
  호상은 주머니 속에서 자그마한 테스터 를 꺼내고는, 책상 위에 놓인 철사를 꺼내서 둘둘 말아 고리를 만들어 알루미늄 판 위에 놓고 철사의 전류를 재기 시작했다. 테스터의  바늘이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 맞습니다. 교수님. 이 금속판에서는 약한 전파를 발사하고 있군요. "
  주 ) 동이족(東夷族) :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 큰(大) 활(弓)을 잘 쓴다고 해서 大+弓인 夷자를  썼다. 흔히 ‘오랑캐 夷’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잘못 된  말이고, 실제는 ‘우리 민족 夷’라고 불러야 옳다. 우리 민족이  오랑캐가 아니니까 말이다.

  " 안 기중 박사님이십니까? 여기는 이 동윤입니다. "
  " 안녕하세요, 이 교수님? 요즘도 바쁘시죠? "
  화면 안의 기중은 동윤을 보고 무척 반가와하는 듯  했다. 동윤은 흥분을 감추고 평상시처럼 볼펜을 돌리면서  말했다. 교수씩이나 되어서 볼펜을 돌린다고 주위에서  핀잔도  많이 듣지만, 전화 받을 때마다 볼펜을 돌리는 것은 그의 고칠 수 없는 습관이었다. 
  " 항상 하는 일도 없이 바쁘죠, 뭐. 시간  있으시면  평양 냉면이나 먹으러 가지 않겠습니까? 할 이야기도 있고요. "
  " 평양 냉면이요? 제가 냉면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 번에 같이 갔던 데로 하지요. 대동강가에 있는  수상 식당 아시죠? 참, 그리고 그 금속판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거기에 씌여져 있는 글자를 해독할 수 없을까 해서요. "
  동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속을 정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3초 후 그 곳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동차  안에서 한 미국인이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평양으로 향하는 통일 고속도로를 달리는 이 동윤  교수의 마음은 별로 편하지 못했다. 하늘도 교수의 마음처럼 찌뿌드하기만 했다. 후두둑-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쳤다. 비에 젖은 고속도로가 미끌미끌한데다 앞에 가는 화물차가 기름통을 가득 실어 시야를 가려 운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 제기랄, 저 앞의 차는 왜 이리 운전을 거칠게 해? "
  끼익- 앞 차가 급정거를 하면서 싣고 있던 기름통이  굴러 떨어졌다. 교수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꺾어서 피했지만  기름통은 도로에 떨어져 기름이 사방으로 흘렀다. 바퀴가 기름에 닿자 차는 뱅그르르 회전했고 난간을 뚫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1주일 후 아리오네는 문제의 알루미늄 판과 [유기]의 영어 번역판을 넘겨 받았다.

  2000년 4월. 아틀란타. 
  세계 고고학회가 열리고 있는 조지아 주 아틀란타의 한 호텔 회의장은 회의 시작 전부터 몹시도 술렁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견된 [유기]라는 역사책으로 인해  동북  아시아의 역사를 대폭 수정해야 한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이번 고고학회에서 이집트의 새로운 피라밋이 공개 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 때문이기도 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왕의 무덤은 도굴 당한 채였다. 이번에 도굴되지 않은 새로운 피라밋 발견된다면 그  고고학적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우기 투탄카멘이  힘없는 소년왕이었던데 비해 이번 피라밋은 세력있는 왕의  무덤이라 부장품도 엄청나게 많다는 텔리비젼의 보도였다. 
  제임스 세계 고고학회 회장이 들어오자 술렁임이  멎었다. 스핑크스의 복원 작업을 지휘하기도 했던 그는 이집트  문명 권위자였다. 
  " 이 자리에 계신 수많은 고고학자 여러분. 저는 이  대회의 개막을 선언하며 여러분에게 두 가지의 큰 발견을 보고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한국의 고구려 왕조에서 최고의 정복왕으로 일컬어진 광개토 대왕릉의 발굴 소식이고, 두번째는 미국 고고학회가 이집트에서 새로운 피라밋을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
  안 기중 박사가 연단에 나와 섰다. 그는 검은 양복에 하얀 리본을 달고 있었다. 
  " 발굴 작업을 지휘했던 이 동윤 교수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시는바람에 제가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고고학자였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기중은 묵념을 올린 후 발굴 경위와 [유기]의 내용을 발표했다. 곧 장내는 술렁임으로 가득 찼다. 일본이  백제의  반 식민지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일본 대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지만 [유기]의 내용은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기중의 발표가 끝난 후 미국 고고학회장 알피니스트가  나와서 새로운 피라밋의 발견을 보고했다. 
  "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에는 세계 최고의  슈퍼  컴퓨터인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인공위성이  찍은  적외선 사진을 분석하던 중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  근처에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피라밋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미국 고고학회는 이집트 정부와 교섭 끝에 2월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 바로 어제 발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발굴된 유물을 보시겠습니다. "
  조명이 꺼지고 레이저 비디오의 커다란 스크린이 천장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화면에 나타난 유물은,  장식이  화려하고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투탄카멘 왕의 부장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간 방안에 탄성이 가득 찼다. 화면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비춰지고 있었다. 더우기 미이라는 유리관 안에 들어 있었다.
  " 지금 보시는 장면은 새로운 피라밋에서 발견한 미이라입니다. 유물을 분석한 스핑크스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미이라는 지금까지의 미이라와 다른 종류의  약물을  사용해서 머리카락이 파랗게 변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미이라는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
  듣고 있던 기중도 너무나 놀라운 발견이라 입이 벌어졌다. 고대 이집트 인들이 유리로 둥그런 관을 만들어 그 안에  미이라를 보관하다니. 
  " 미이라의 보존 상태는 극히 양호합니다. 자세한 자료는 스핑크스가 미이라의 조사를 끝내야 알 수 있습니다. "
  기중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 그럼 이번 발굴의 조사는 어느 정도나 스핑크스가  담당했나요? "
  알피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거의 전부를 스핑크스가 담당했습니다. 피라밋의 위치를 제일 처음 발견한 것도 스핑크스였고, 실제로  발굴  작업을 전개한 것도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특수 로보트였습니다.  스핑크스의 분석으로는 지난번 스핑크스의 보수  공사  때처럼 강력한 바이러스가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기계로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피라밋 안에서는 27구의 미이라를  발견했으며, 미이라는 전부 스핑크스가 특수 제작한 유리 방에 격리되어 과학적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미이라에서는  예상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에 의한 조사는 현재 불가능합니다. "
  고고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피니스트는  말을  이었다. 
  " 스핑크스의 추산으로는 약 한 달간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4000년 전의 이집트인들이 유리로 관을 만들고 미이라를 보관할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지만, 이집트의 고대 문명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도로 발달했었음은 틀림없습니다. "

  알피니스트가 새로운 피라밋과 미이라의 발견을  발표하고 있는 동안, 아틀란타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의 CIA 극비 기술과에서는 아리오네가 두 장의 금속판을 비교하고 있었다. 한 장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발견된 금속 상자가 변한 판이고, 다른 한 장은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두 판에 씌여진 문자가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언어라는 것을 알아냈다. 
  ‘ 뭔가가 있어. 스핑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일지도 몰라. ‘
  아리오네는 금속판에 씌여진 문자를 해석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현존하는 어떤 문자와도 닮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언어학자들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만 했다. 
  아리오네는 아랫층의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 내려가서,  혜진의 신상에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요 며칠동안 아리오네의 주위에서 이상한  사고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사흘 전에는 멀쩡하던 그녀의 집 변압기가 폭발했다. 다행히 소화기로 일찍 불을 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전기 회사는 전기 공급을 제어하는 스핑크스의 실수로  일시에  고전압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틀 전에는 그녀가 타려던 택시가 자동 조종으로 유도되는 트럭과 부딪치는 교통 사고가 났다. 택시를 타려다가 자동 조종인 것을 보고 내려서 다른 택시로 바꿔 타길 천만 다행이었다. 
  아리오네는 장비실에 들려 주문한 작은 기계 장치를  찾아왔다. 장비실의 담당자는 기계와 방탄복을 내 주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긴 했지만 이런 이상한  목적의 기계는 처음 봅니다. 아마 두 시간 정도는 심장과 뇌파가 멈춘 채 가사 상태로 있을 수 있을 겁니다. "
  " 그리고 부탁드린 물질은요? "
  " 여기는 장비실이라 기계 종류만 다루고, 부탁하신  물질은 Z-127호실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
  장비실을 나온 그녀는 Z-127호실의 ‘혈액 분석실’이란  팻말을 올려다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카우는 푸석푸석한 머리에 구겨진 잠바  차림으로  극비 기술과의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항상  단정한  정장에 세련된 외모로 유명하던 그가 몇 달 전부터 멍한 얼굴에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데 대해서 극비 기술과의  직원들은 많은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부인과 사이가 나빠 거의 별거 상태라는 게 공통된 추측이었지만 그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은 썰렁하기만 했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컴퓨터의 터미널을 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앞에서 살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컴퓨터를 켜기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화면에는 스핑크스의  메세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 …… "
  전에도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 메세지처럼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책상 서랍을 뒤져 오렌지 쥬스 깡통을 따 단숨에 들이킨 그는 아리오네의 서랍을 열었다. 스페이스 상원 의원 살인 사건의 유력한 증거물로 FBI가 그녀의  27구경 콜트를 가져가 버린 후라, 대신 38구경 콜트가 탄창과  함께 놓여 있었다.
  삐리릭- 화상 전화기의 소리가 빈 사무실 안을 울렸다. 영카우는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아리오네였다. 
  " 아직도 퇴근 안하셨네요. 처리하실 일이 많은가보죠? "
  " 응, 응, 그럴 일이 있어서. "
  당황해 하는 영카우의 귀에 아리오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호출 신호에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일이죠? "
  " 곧 처리해줘야 할 일이 있어. 긴급을 요하는 일이야. X5지점의 안전 가옥 알지? "
  화면속의 아리오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곧 그리로 가지요. "
  " 7시에 기다리겠어. "

  X5지점의 안전 가옥은 뉴욕 맨하탄의 미드 타운에 있었다. 스핑크스가 뉴욕의 도시 계획을 담당한 후 미드 타운에는 대규모의 고층 건물이 들어섰지만, 5층 정도의 낮은 건물도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CIA는 뉴욕 시내에 대여섯  곳의  안전 가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안전 가옥은 주로 CIA가  망명자를 조사하거나 중요한 회의를 여는데 쓰고 있었다. 영카우는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잡은 안전 가옥의 길가로 난 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미 증거가 될만한 도청  장치와 감시 장치는 제거해 버렸다. 
  아직도 쌀쌀한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아리오네는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미행자는 전혀 없었다. 계단을 천천히  오른 아리오네는 초인종을 눌렀다. 영카우가 천천히 문을 열자 그녀는 현관을 들어섰다.
  " 바깥이 추운가 보군. 아직도 바바리를 입고  다니는  걸 보니. "
  " 글쎄요, 춥기는 꽤 춥네요. "
  바바리를 옷걸이에 걸던 아리오네는 영카우의 손에 38구경 콜트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뒷걸음 쳤다. 
  " 과장님, 설마…… "
  " 아리오네는 스핑크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 스핑크스는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을 싫어하거든. "
  " 스핑크스가 과장님한테 절 없애라고 시키던가요? "
  " 그런 걸 알 필요는 없겠지, 아리오네? "
  " 역시…… 스페이스 상원 의원을 죽인 사람도 과장님이었군요. "
  " 스핑크스는 영리한 컴퓨터야.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지. "
  아리오네의 머릿속에 얼마전에 영카우의 편지 꽂이에서 본 예금 청구서가 떠올랐다. 그의 부인이 수입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예금 구좌는 항상  부족했다. 그는 그 부족을 메우기 위해 공금을 몰래 빼서 쓰곤  했지만 아리오네는 그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덮어 두었다. 사실을 밝히면 그는 금방 빈털털이가 될 것이고, 첩보원이 돈이 없어 쩔쩔맨다는 것은  적에게 매수를 당하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퇴직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영카우는 퇴직시키기에는 미국의 극비 기술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 과장님, 스핑크스가 당신을 협박했군요, 예금 구좌를 가지고, 그렇죠? "
  "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
  영카우는 순간 놀랐지만 다시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알고 있다니 놀랍군. 스핑크스는 내가 유용한 예산을 밝히며 협박과 회유를 하더군. 자기 말을 들으면 부족한  구좌도 메워주겠다며 말이야. "
  " 과장님, 스핑크스는 무서운 컴퓨터여요. 무슨 목적인 지는 모르지만 자기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있어요. 이대로 놔두다가는 인류는 스핑크스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리고 말아요. "
  " 잘도 지껄여 대는군.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아. "
  " 이 비열한 자식! "
  영카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더니 얼굴이 벌게졌다.  얼굴에 핏줄이 솟는 것을 본 아리오네는 쾌재를 불렀다. 
  ‘ 됐다. 흥분하기 시작한다. ‘
  아리오네는 갖은 욕설로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신경질을 내다 들고 있는 권총을 창 밖을 향해 쏘았다. 소음기가 달려 있는 권총이지만 콜트의 발사음은 조용한 아파트  안에서 꽤 크게 들렸다. 순간적으로 아리오네는  문쪽으로  뛰어나가 손잡이를 열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나갔다. 평상시 같으면 영카우 같은 명사수에게서 도저히 도망갈 수  없었겠지만 이미 자제력을 잃은 영카우는 그녀가 뛰쳐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계단 위에서 탄창이 비도록 그녀에게 쏘았다. 
  악! 소리와 함께 그녀는 현관 앞에서 고꾸라졌다.  총알을 맞은 그녀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졌다.  영카우는 따라 내려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은 그녀가 흘린 피로 젖어 있었다. 그는 휴대용 응급 장치로 뇌파와 심장 박동을 체크했지만 이미 숨이 끊긴 그녀의  뇌파와  심장 박동은 멎어 있었고, 그 결과는 무선으로 자유의 여신상  내에 있는 스핑크스에 기록되었다. 
  후다닥- 주위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에 영카우는  재빨리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인파 사이로  스며들었다.  물론 38구경 콜트 권총을 그녀의 손에 쥐어 놓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제 아리오네의 죽음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주 ) 왕가의 계곡 : 피라밋이 도굴을 많이 당하자  이집트 왕들은 깊숙한 산 골짜기의 절벽을 깎아 무덤을 만들고는 계곡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이 곳이 지금 룩소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왕가의 계곡이다.

Part IV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

  " 이 사진 봤나? 요즘 다들 이 미이라들 때문에 난리라고. 우리 방송국도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나? "
  KBC 방송국의 25층 기자실에서 보도국장 박 범진은 영훈에게 작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 이게 뭡니까, 국장님? 무슨 영화 같은데,  SF  영화입니까? "
  범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 자네는 취재에만 바쁘고 다른 신문도 안보고 사나? 이집트에서 새로이 발견된 미이라라네. "
  영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아, 그 미이라요, 그런데 무슨 미이라가 머리가  이렇게 파래요? 그래서 처음에는 영화 장면인줄 알았지 뭡니까? "
  " 글쎄, 스핑크스의 말로는 미이라의 제작에 쓰인  약품이 보통과 달라 머리카락이 화학 반응 끝에 파랗게  변색되었다고 하더군. "
  " 스핑크스요? 스핑크스가 이 미이라의 발견에도 관련  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
  범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 이번 미이라는 스핑크스가 만든 인공 위성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미이라의 발굴 작업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조사까지 전부 스핑크스가 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언론이 취재 할 수 없었다는군. "
  " 조사까지요? "
  "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경우가 있지 않나. 이번에도  같은 이집트 계통의 미이라니까 혹시 바이러스가 있을 지 몰라 일체의 인간의 접근을 금지한다더군. 하옇던 자네는 이걸 취재해보게. "
  영훈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사진을 받아들었다. 
  " 이 사진에 보니 유리관에 담겨 있는데, 이 유리관은 스핑크스가 보호 벽으로 설치 한 것입니까? "
  범진은 글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든 책을  찾아보고 말했다. 
  " 이건 이 미이라가 발견 될 때부터 들어 있었다는데?  그래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는군. 고대  이집트인들이 유리를 쓰다니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지. "
  고대 이집트 인들이 유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영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알았습니다. 국장님, 제가 취재하도록 하죠. "
  영훈은 곧장 전화기를 붙잡고 평양의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를 호출했다. 갸름한 얼굴에 가운데로 가름마를 탄 남자가 영훈에게 인삿말을 던졌다. 
  " 오랜만이야, 영훈이. 대학 졸업하고 얼마만이지? 텔레비젼에서는 자주 봤어. 특히 지난번 스핑크스  바이러스  사건 때는 온 나라 안이 자네 이름으로 떠들썩 했지. "
  " 쑥스럽게 왜 그래, 승규.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지. "
  " 술? 그거 좋지. 우리 대학 다닐 때 같이 어울려 좀 많이 마셨어? 항상 술독에 빠져서 살았잖아. "
  영훈은 오래간만에 그의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승규와의 우정은 물론 두터웠지만 끝은 별로 좋진않았다. 1학년 때부터 대학 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던 영훈은 취재 대상으로 만났던 경민에게 정을 느꼈다. 경민은 불우  청소년을  가르치는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승규는 그녀와 같은 야학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자와 취재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대학생으로서 영훈과 경민, 승규는 마음이 잘 통했다. 그 자리에서 의기  투합한 그들은 방과 후만 되면 만나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패거리로 발전했지만 문제는 영훈 뿐만 아니라 승규도 같이 경민을 사랑하고있었다는 거였다. 영훈은 승규와  포장마차에서 정신을 잃을만큼 술을 퍼마시고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고 미련없이 경민을 포기했다. 그리고 군대를 지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특수 부대로 차출됐고, 웬만한  첩보  요원에 버금가는 훈련을 받고 제대했다. 
  영훈은 특수 부대에서의 기억을 다시는  돌이켜보고  싶지 않았다. 가상 적진으로 침투하는 훈련, 적의 요인을  들키지 않고 사살하는 방법, 특수 부대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살아남는가에 대한 강의그 이상의 어느 것도 아니었다. 경민을 포기한 충격으로 지원한  부대였지만 3년은 꾸역꾸역 지나갔고, 제대 후 영훈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승규와 경민의 신혼 살림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 경민씨는 잘 있지? "
  화면 속의 승규가 어색하게 웃었다. 
  " 응, 지금 둘째 애를 가졌어. 자네는 아직 결혼도 안했다고 들었는데. "
  " 아직 결혼 안했지. 뭐 나같은 남자가 인기 있을 리가 있겠어. "
  영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화학 약품으로 파래질 수 있어? 미이라를 만든다던가 해서 말이야. "
  " 미이라? 아, 얼마 전에 스핑크스가  발견했다는  미이라 말이지? 글쎄, 나도 그게 이상해.  우리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머리카락 분석도 하는데 어떤  약품으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을 파랗게 할 수는 없어. 파랗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파란 페인트를 칠하는 것 뿐이야. "
  생각대로군. 뭔가 냄새가 나는걸? 영훈은 질문을 더  던졌다. 
  " 머리카락도 오래 되면 뭔가가 달라지지 않겠나? "
  "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머리카락의 검은 색은 멜라닌이라는 물질 때문이야. 그런데 이  멜라닌은 화학적, 물리적으로 아주 안정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색깔이 빠지지 않아. 사진에서 본 미이라의 색깔은 밝은  파랑색이거든. 설사 머리카락에 파란 물감을  들였어도,  원래 있던 검은 색깔하고 섞여서 칙칙한 파랑이 되어야 하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 "
  영훈은 언제 한번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는 승규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자신의 분신인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기술의 발달로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멘 그의 등을 누가 툭 쳤다. 하마터면 고꾸라질뻔한 영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베지색 바바리 차림의 소연이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영훈은 카메라를 내려  놓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연은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수습 기자로 입사해서  올 1월에 정식 기자가 되었다. 수습 기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몇 차례의 특종을 터뜨렸고, 그 덕분에 KBC 방송국  내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영훈은 그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취재 태도 때문이었다.
  소연은 수습 기자 때부터 일선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수습 기자 때는  선배들의 잔 심부름이나,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젖혀두고 굵직굵직한 사건들만을 취재했다. 원래부터 취재에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그녀인지라, 새로운 21세기형 마약 제조등 서너건의 특종을 터뜨렸고 곧 정식 기자가  되었지만 영훈은 그녀를 별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영훈 그  자신은 기자가 된 지 6년이 넘었고 숱한 특종을 터뜨렸지만  아직도 기자실의 잔 심부름을 솔선해서 하고 있는 터였다. 
  " 소연씨, 그렇게 사람을 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잖아요? "
  " 넘어지라고 친건데요,뭐. "
  소연은 서류 뭉치를 두 팔로 안은 채 생글생글 웃으며  영훈에게 말했다. 
  " 영훈씨, 이번 스핑크스 취재는 공동으로 할  생각  없어요? "
  ‘웃기는군. 수습 기자를 마친지 한 달도  안되는데…… ‘
  영훈은 그녀를 무시하며 나갔지만, 소연은 그런 그를 팔짱을 낀 채 노려보았다. 
  ‘ 두고 봐. 꼭 영훈씨한테서 인정을 받고 말테니까. ‘
  소연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데는 영훈을 의식한 탓이  컸다. 21세기형 마약 제조 사건때 방송국 내의 모든 기자가 그녀를 칭찬했지만, 유독 영훈만은 그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대학 신문사 선배였던 영훈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기자가 된 지 6년 동안에 영훈이 터뜨린 특종은 같은 기간에 다른 기자 전부가 발굴한 특종보다도 많았다. 소연은 누구보다도 영훈의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영훈은 그녀에게  냉랭하게 대하기만 했다. 그 후부터의 소연의 모든 행동은 단지 영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소연은 창문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취재 노트를 옆에 끼고 방송국 문을 나섰다.

  MIT의 잡스 연구소의 꼭대기 층에서는 MIT내에서도 몇  명 없는 한국인 교수 중의 한 사람인 이 영상이 자신이 직접 설계한 ‘진도개’라는 이름의 컴퓨터를 시험하고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인 apple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이름을 딴 잡스 연구소는 푸른 사과 모양의 유리 건물로, MIT의 컴퓨터 공학과가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연구소중 가장 최신식이었다.  영상은 이 연구소에서 컴퓨터 보안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다.
  대형 컴퓨터 내에 해커나 컴퓨터 바이러스가 침입, 컴퓨터를 못쓰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요즈음은 새로 나온 컴퓨터를 시험할 때 반드시 보안 테스트를 한다. 즉 컴퓨터를 침입하는 기술을 지닌 침입 전용 컴퓨터를 가지고,  새로 나온 컴퓨터가 어느 정도까지  견뎌내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진도개’는 이러한 보안 테스트에 쓰이는 침입 전용 컴퓨터로, 영리한 진도개처럼 24시간 내에 웬만한  컴퓨터는 다 뚫고 들어간다. 
  레이저 디스크를 집어넣으려던 영상은 어리둥절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진도개’ 컴퓨터 안에  침입했다는 신호였다. 
  ‘ 이거 또 컴퓨터 바이러스인가? 아니면 우리 학생들의 장난인가? ‘
  MIT에는 세계 어느 대학보다 많은 해커가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그 해커의 대부분은 단지 자신이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학생들이었다. 영상 자신도 학교 다닐때 해커 노릇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지금 ‘진도개’에  침입한 해커가 어떤 짓을 하는지 흥미를 느끼고 관찰했다. ‘진도개’는 침입하거나 이를 방지하는데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이기 때문에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상은 침입자가 보호망을 뚫고 들어오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손목 시계를  지켜보았다. 뛰어난 해커가 ‘진도개’를 뚫고 들어오는데에도  약 다섯시간 정도니까 마음만 먹으면 그 침입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추적할 수 있었다. 다음순간 영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침입자는 다섯 겹으로 장치된 보호 프로그램을 단 몇 초만에 깨버리고  루트에 침투해서 ‘진도개’의 모든 프로그램을 지워버리고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걸린 시간은 단 54초. 
  영상은 침입자의 흔적을 찾으려 연구소 내의 모든  프로그램과 화일을 뒤졌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일급의  해커라도 어느 한 구석에는 처리하지 못한 증거가 남기 마련인데 이번의 침입자는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어가듯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영상은 패킷 교환기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시간에 ‘진도개’에 접속된 사용자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패킷 교환 회선은 컴퓨터끼리 접속을 하는 전화선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가짜 번호로 들어왔더라도 접속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장난 전화가 왔을 때 가짜  번호일망정 전화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패킷 교환기에 기록이 남지 않았다면 연구소 내부인의 소행이거나 ( 연구소 내의 접속은 패킷  교환기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 아니면 패킷 교환기의 기록도 지워버릴 수  있는 자의 소행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부인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잡스 연구소 안에는 ‘진도개’를 뚫고 들어올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패킷 교환기의 기록은 스핑크스가 직접 제어하고 있는데 스핑크스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대던 영상에게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설마…… ‘
  삐리릭- 하고 울리는 화상 전화기의 신경질적인  신호음이 영상의 생각을 어지럽혔다. 
  " 제길, 누구야? "
  투덜거리며 켠 화면에는 영훈이 비디오 카메라를 든 채 서 있었다. 
  " 영상이, 오랜만이야. 여기 잡스 연구소 앞인데  바쁘지 않으면 잠깐 나올 수 없어? 물어볼 일이 있어서 그래. "
‘ 이 녀석, 불쑥 나타나 사람 놀래키는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 ‘
  영상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로비에서는 등에 비디오 카메라를 짊어지고 한쪽 어깨에는 큼직한 가방을  멘 영훈이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 이 근처에 취재 나올 일이 있었거든. 온 김에 널 좀  만나보고 가려고. 물어볼 것도 있었고. 지금 바빠? "
  영상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 조금. 방금 우리 컴퓨터가 침입을 받았거든. 그래서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보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컴퓨터야 될대로 되라지,뭐. "
  " 아니, 네 컴퓨터가 침입을 받다니, 네가 하는 일이 그런 침입을 막는 일이라며?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 "
  " 망할 놈의 스핑크스. 아무래도 그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애. 다른 사람은 내 컴퓨터를 뚫고 들어올 능력이 없어. 하지만 그 놈의 쇳덩어리가 무슨 이유로 내  컴퓨터에 침입을 했지? "
  영훈은 영상을 끌고 근처의 작은 술집으로  갔다.  탁자에 앉자마자 영훈은 스핑크스의 대해 영상이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영상은 영훈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컴퓨터인 스핑크스에 대해서 컴퓨터 학자들조차 너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핑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MEDUSA 회사의 데이비드 골드시타인과 골덴트 미첼은 사고로 죽었고, 기타 스핑크스의 설치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도 대부분 사고로 죽었다. 스핑크스가 인류를 떡 주무르듯 하고  있지만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이다. 
  영훈은 스핑크스가 발견되게 된 경위를 ‘스핑크스  바이러스’때부터 차근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유전자 속에 슈퍼 컴퓨터의 설계도가 들어있는 것을  CIA가 가로채었고, CIA와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 설계도가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번에 스핑크스가  만들었다는 푸른 머리카락의 미이라도 뭔가 수상하다……
  " 사실은 스핑크스 때문에 너한테 부탁을 하러 왔어. "
  영훈은 영상의 귀에 대고 몇마디 중얼거렸다.  영상은  옷 소매를 약건 걷어올리고 팔짱을 낀 채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어제만 찾아왔어도 그런 부탁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오늘 일로 인해서 나 역시 궁금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한 번 해보자. "
  문이 열리고 얇은 베지색 바바리 차림의 날씬한  아가씨가 들어왔다. 영상은 문가를 힐끔 쳐다보고는 탁자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 제길, 그림의 떡이군. "
  " 영상이, 피곤해? 그럼 일어나자. 아까 부탁한 거 할려면 준비할 일도 많잖아. "
  비디오 카메라를 챙기며 일어나려는 영훈의 등을 툭 쳤다. 소연이었다. 
  " 한참 찾았어요, 영훈씨. "
  영훈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 여길 어떻게 찾았어요, 소연씨? 여기 있다고 누가  가르쳐 줬어요? "
  " 본사에서요. 이번 스핑크스가 발견한 미이라는 공동  취재 하래요. "
  소연은 바바리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종이  조각을  내밀었다. ‘보도국장 박범진’이라는 싸인은 볼 필요도 없었다. 
  " 미안하지만 소연씨, 이번 취재만은 나한테 맡겨줘요. 이유는 한국에 돌아가서 말해드릴께요. "
  소연은 팔짱을 낀 채 영훈을 노려보았다. 
  " 그럴 수는 없어요, 영훈씨. 이건 KBC  본사  보도국에서 시킨 일이에요. "
  " 하옇던 공동 취재는 안됩니다. 보도국장님께는 좀  있다가 제가 사표 써가지고 간다고 전해줘요. "
  영상과 영훈은 천천히 일어서서 잡스 연구소에 있는  영상의 연구실로 향했다.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소연을 뒤로  남긴 채.

  아직도 불에 탄 자국을 흉하게 남기고 있는 실험실 안에서 혜진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리오네의 사망 소식은 큰 충격이었지만 아리오네를 죽인 것이 스핑크스임에 틀림 없고 혜진의 연구가 스핑크스에게 약점이 될만한 것이기에 아리오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연구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책상 위의 오래된 탁상시계는 힘겨운 몸짓으로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아테니움 때문일거야. 스핑크스가 나를 노리는 것은. ‘
  아테니움을 잘만 연구하면 스핑크스의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했다. 방안의 모든 컴퓨터는 스핑크스와의 접속을 끊고, 수시로 방안에 도청장치가 있나 점검했다. 스핑크스를 이용할 수 없어서 용량이 작은 방안의 컴퓨터만을 사용하자니 계산량이 많고  속도가 느려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스핑크스와 접속을 재개한다면 스핑크스는 다시 한번 컴퓨터를  폭파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L-2-3-폴리글루타민산을 대체할 새로운 물질인 아테니움은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어떤 생물체도 몇 시간 안에  죽게 만드는 L-2-3-폴리글루타민산과는 달리  아테니움은  아무런 독성도 없으며, 아테니움을 투여한 식물은 강력한 식물 뇌파를 나타내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동물 실험에서였다.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는 눈과 귀,코를 가려도 미로 뒷쪽의  먹이를 손쉽게 찾아내곤 했다. 일종의 투시력이 생긴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었다. 
  혜진은 아테니움을 투여한 동물과 식물의  유전자  구조를 검사했다. 예상대로 아테니움은 유전자에 직접 작용,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
  혜진은 옆에 있는 장정에게 유전자 분석 결과를 내밀었다. 실험실의 폭발과 아리오네의 죽음 이후 CIA에서 혜진을 돕기 위해 파견한 중국계 생물학자인 장정은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유전자 분석을 전공했다. 혜진이 곤경에 처해있을 때마다 온화하고 인정이 넘치는 미소로, 29살밖에는 안되는 젊은 나이지만 마치 그녀의 아버지처럼 그녀를 따뜻이 감싸주곤  했다. 평소에는 그저 사람 좋게만 보이지만, 일을 할 때는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중국 사람을  보는 듯했다. 
  " 분명히 유전자가 변하긴 변했네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마치 망가졌던 유전자가 고쳐진 것처럼 보여요. "
  혜진은 장정의 말이 이해가 안가서 다시 한번 물었다. 
  " 망가진 유전자가 고쳐졌다뇨? 무슨 뜻이지요? "
  "  유전자에는  저마다의  뜻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A-G-C-T-T…G-A 는 개구리의 꼬리가 없어지게 하는 유전자, G-T-A-A…T-C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게 하는  유전자,  뭐 이런 식이거든요. 하지만 유전자가 전부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 정보가 담겨져 있는 부분은 유전자의  20%정도이고, 나머지는 별 뜻이 없는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이를테면 80% 부분은 망가진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생물에게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지요.  "
  " 그건 저도 알아요. "
  " 끝까지 들어봐요. 아테니움이 바꾸어 놓은 유전자는  별 뜻이 없는 80%의 유전자 부분입니다. 정상적인 20%의 유전자는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아무 뜻이 없는  유전자에서  유전 정보를 만들어 냈으니 일종의 유전자 수리제라고도 할 수 있겠죠. "
  " 유전자 수리제라고요? "
  장정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테니움은 망가졌던 유전  정보를 되살려내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
  " 유전 정보를 되살려 낸다…… "
  " 혜진씨, 유전 정보를 되살려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
  " 글쎄요? "
  장정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채 연구실 한쪽에  놓여  있는 소파에 몸을 털썩 던졌다. 
  " 망가진 유전 정보를 되살려 낸다는 것은 결국  과거에는 그런 유전자가 존재했었다는 말이 돼요. 아테니움을  투여한 쥐가 투시력을 가지고, 아테니움을 투여한 식물이 뇌파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은…… "
  혜진이 장정의 말을 이었다. 
  " 예전에는 쥐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었고, 식물이  뇌파를 가지고 있었다…… "
  " 맞아요. 옛날에는 투시력이 시각과 같은 보통  감각이었고, 식물도 뇌파를 가지고 있었어요. 어떤 이유에선지 투시력의 유전자나 식물 뇌파의 유전자가 파괴되어버린  거여요. "
  " 어떤 이유…… "
  혜진의 머릿속에 소름끼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 장정씨, 아테니움은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와 구조면에서 비슷하다는 걸 알고 계시죠? "
  " 알고 있죠. 근데 왜요? "
  " 혹시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아테니움의 반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
  " 반대 작용이라뇨, 혜진씨? "
  평소 약간 멍한 얼굴에 느릿느릿 움짓이던 장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가 뭔가에 몰두했다는 신호였다. 
  " 그러니까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투시력의 유전자와 식물 뇌파의 유전자를 파괴시킨 ‘어떤 이유’가 아닐까 해서요.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유전자를 파괴하고, 아테니움은 그  유전자를 되살리는거죠. "
  장정은 볼펜을 손에 들고 종이에 간단한 그림을 몇개 그렸다. 유전자 계통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는 혜진이지만  장정이 종이에 쓴 기호는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기호였다. 
  "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군요. 제가 조사해 볼께요.  스핑크스를 사용하면 30초정도면 될거여요. "
  " 안돼요, 스핑크스를 사용하면! "
  혜진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정은 눈이 휘둥그래져 그녀를 돌아보았다. 
  "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스핑크스를 사용할 수 없어요. 자세한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방안에 있는 다른 컴퓨터를 사용해 주세요. "
  장정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 그러죠, 지금이 오전 12시니까 내일 새벽 1시나  되어야 끝나겠는데요? "
  " 좋아요, 장정씨, 아테니움이 되살린 유전자와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꼭 알아봐주세요. "
  장정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지만 혜진에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가 유전자를 파괴하고, 아테니움이 그 유전자를 원래대로 회복시킨다면  스핑크스가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은 파괴된 유전자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왜 스핑크스라는 컴퓨터는 파괴된 유전자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 한단 말인가. 비록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컴퓨터이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고,  인간을 더욱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많은 명령을 차질없이  수행하고 있는데……

  혜진이 자유의 여신상 지하의 비밀 연구실에서 생각에  골몰하다 의자에 기댄 채 선잠이 들 무렵 실험실 30미터  위에 설치되어 있는 변압실에는 적외선 차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조그만 휴대용 컴퓨터와 소형 레이저 절단기를 가지고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중 키가 큰 사람의 어깨에는 큼직한  군용 가방이 얹혀 있었다. 
  작은 쪽의 사람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키 큰남자의 가방에서 파이프와 코일이 얼기설기 얽힌 장치를 꺼내어, 15400볼트의 고압이  걸려있는  변압기의 제어 장치에 끼워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쪽의 사람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는 것을 군용  가방의 남자가 나꾸어챘다. 
  " 우리가 이곳의 경비장치에 걸리지 않고 있는 것은  적외선 차폐복 때문이라고. 24시간 적외선 감지장치가  감시하고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는 격이지. "
  " 자네 특수 부대에 있었다더니 그런 쪽으로는  도사구만. 어쨌던 1단계는 성공했어. 이제 2단계로 ‘불개미’들을  풀어놓아야지. "
  " 불개미? "
  적외선 차폐복은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침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무선으로  교환한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찍찍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차폐복 안의 헬멧에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 응, 어제 내가 만든 작은 프로그램인데, 개미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서 자체 방어장치를 무력화 시키지. 일종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도 볼 수 있어. "
  작은 쪽의 사내는 말을 마치고는 휴대용  컴퓨터를  켰다. 화면을 보며 몇 자 두드리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압실에서 내부로 통하는 5중 티탄 합금의 육중한 철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 안쪽은 미로로 되어있군. 조심해. 길을  잃으면  끝장이야. "
  두 사람은 티탄 합금으로 된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소리가 나지 않는 특수 신발창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체 방어장치가 ‘불개미’ 바이러스로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복도를 지나갈 수 있었다.  키  큰 쪽의 사람이 부시럭거리며 군용 가방에서 조그마한 총을  꺼냈다. 희미한 복도의 조명을 받아 싸늘하게  빛나는  권총은 은성-52였다. 보통 권총으로는 엄청나게 큰 52구경이지만 특수부대용으로 설계된 총이라 명중률도 좋고, 크기도 별로 크지 않았다. 특히 구경이 커서 파괴력은 으뜸이었다. 
  " 빌어먹을, 제대 후에 다시는 이 총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작은 쪽의 사내는 손목에 찬 컴퓨터 화면을  보며  복잡한 미로를 천천히 헤쳐나가고 있었다. 복도 양  끝에는  강력한 레이저 장치와 어떠한 화재도 진압할 수 있는 액체 헬륨 소화장치가 달려있었지만, 달갑지 않은 두 명의 침입자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 과연 스핑크스군. 내가 집어넣은  ‘불개미’  바이러스를 발견했어. "
  키 작은 남자가 손목의 휴대용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복도의 무시무시한 레이저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걸렸나? "
  " ‘불개미’ 바이러스의 특징은 엄청난 번식력이야. 한 시간이면 300만개 정도는 복사되어 컴퓨터 기억장치  여기저기를 뛰어다녀. 거기다가 중간에 돌연변이를 해서 아무리 스핑크스라 해도 ‘불개미’바이러스를 없애고 방어장치를 다시 가동시키는데는 시간이 꽤 걸리지. 우린 아직까지 안전해.  그건 그렇고 이 스핑크스의 방어 시설은 대단해. 웬만한  사람은 도저히 접근 할 수 없어. "
  " 그런데 아까 변압실에 설치한 기계는 뭔가? "
  " 스핑크스는 자체 방어장치를 너무나 완벽하게  해놓아서 물리적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었어. 침입하려면 먼저 컴퓨터 기억장치에 ‘불개미’바이러스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외부의 통신 시설로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 뚫고 들어갈 수 없더라고. 그래서 생각해 낸게 전력 공급장치야. "
  두 사람은 복도의 갈림길에 와 있었다. 손목에 찬  컴퓨터 화면에 표시된 스핑크스 내의 지도를 보면 두  사람은  지금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 있는 방에서 30미터 이내에 와 있었다. 
  " 아무리 강력한 컴퓨터도 약점은 있어. 어차피 기계란 전기로 움직이는 것 아니야. 난 스핑크스로 들어가는 전력선에 코일을 감아, 자기장을 걸어서 스핑크스 내로  신호를  보냈지. 다른 것은 철저하게 감시하는 스핑크스지만  전력선으로 들어오는 전기 신호는 검사를 하지 않더군. 그 방법으로  스핑크스의 기억장치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어. "

  두 사람이 들어가고 난 변압실로 짧은 머리의 여자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숨어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적외선 차폐복을 입고 있었지만 헬멧은 쓰지 않은 채였다. 살금살금 열린 문으로 들어가던 그녀의 발꿈치에무엇인가가  걸렸다. 약간의 전기 스파크가 튀었지만 경비 사이렌도,  써치라이트도 비쳐지지 않았다. 여자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 구석 구석에는 육중한 철문이 몇 개씩 달려 있고, 숫자와 이상한 암호로 되어있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혜진의  비밀  연구실이었지만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갑자기 손목의  컴퓨터가  삐익삐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자는 화면을 쳐다보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자네 혹시 미행당했나? "
  " 미행? 무슨 미행? "
  " 제길, 우리 뒤로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다가 우리가 변압실에 설치한 기계들을 망가뜨렸어. 그 바람에 강력한 전력이 스핑크스 내로 흘러들어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를 일부 지워버렸어. "
  " 그건 별 상관이 없잖아. "
  사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적외선 차폐복의  헬멧속으로도 사내가 겁에 질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그 전력이 우리 ‘불개미’바이러스까지 같이 지워버렸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자체 방어장치가 작동할거야. "
  화면에는 계속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키  작은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이거 골때리는군. 몇 개 남지 않은  ‘불개미’바이러스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와 직접 연결이 되었어. 이제  스핑크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바로 이 화면에 표시가 되네. "
  " 그게 무슨 말이야? "
  "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손목에 차고 있는  컴퓨터와 스핑크스의 기억장치가 짬뽕이 된거지. 내 컴퓨터에서  입력되는 모든 정보가 스핑크스에 입력이 되고,  또 스핑크스가 입력하는 모든 정보가 나한테로 오게 되지. "
  " 그거 잘 됐군. 스핑크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 도망가는데는 일단 도움이 되겠지. 어쨌던 숨어야겠어. 자체 방어장치가 가동하면 우린 1분안에 구운 통닭, 아니 구운 통사람이 되어버릴거야. "
  키 작은 쪽의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면을 계속 들여다 보았다.
  " 영훈이, 안 소연이라는 여자 아나? 스핑크스가 침입자의 신원을 파악했는데 안 소연이라는 여자군. 스핑크스가  파악하는 모든 정보는 이 화면으로 바로 들어오거든. 이런,  KBC 방송국의 기자로 되어 있잖아? "
  영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군용  가방을 떨어뜨릴 뻔 했다. 
  " 뭐야? 안 소연? 제길…… 어떻게 된  거야?  여기까지 날 쫓아오다니. 아까 자네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날  쫓아왔던 바로 그 여자야. 이 말썽 꾸러기. "
  영훈은 허겁지겁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서 뒤었다.  영문도 모르는 영상이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 뭐하는거야? 우리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자네  잘못하면 취재는 커녕 살아서 나가지도 못하게 돼. "
  " 그렇다고 소연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

  소연은 복도를 들어섰지만 거듭되는 미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컴퓨터로 스핑크스 내의 지도를 파악했던 영훈들과는 달라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 뭐 찾아 보면 길이 나오겠지. ‘
  순간 발 밑에서 번쩍하는 빛과 함께 쾅하는  폭음이  터졌고, 그녀의 몸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소연의 실수로  과도한 전력이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 흘러 ‘불개미’ 바이러스가 다 없어지고 방어장치가 가동된 것이지만 소연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천장에 달린 레이저가 그녀를  향해 발사되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위험이 닥친긋을 깨달은  그녀는 지그자그 형태로 뛰며 복도를 달아났다. 중학교때까지 체조선수를 해서 뛰고 구르는데는 이골이  나있는  소연이지만 지금처럼 결사적인 때는 없었다. 적어도  ‘열심히  연습할께요’ 란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 소연씨, 이리로! "
  영훈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나와 고함을 질렀다. 소연은 무작정 그리로 내닫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서 한숨을 돌리고서야 그녀는 영훈이 분노로 불그락푸르락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 일단은 나가서 이야기 해요, 말썽꾸러기 아가씨. "
  영훈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끌듯이 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핑크스의 방어장치도 아직은 완벽히 가동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훈과 영상, 소연은 뒹굴고 뛰면서 간신히  레이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 이봐, 영훈. 이놈의 스핑크스가 약간은 미친  것  같애. 지금 나오고 있는 데이터를 한번 보게나. "
  " ‘역자장 포’?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영훈은 화면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 ‘인류 말살 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런 단어들이 스핑크스의 기억장치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 "
  확실히 미치기는 미쳐버린 모양이었다. 꼭 닫혀  있던  각 방문도, 스핑크스의 제어가 풀리자 전부 열려버렸다.
" 제길, 완전히 스핑크스가 미쳐 버렸군. 이봐,  스핑크스의 방어장치에 걸린 사람이 우리 말고 하나가 더 있는데? 우리와 같이 적외선 차폐복을 입고 변압실로 들어왔어. 이  침입자는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앙이야. 미로  안에서도 헤메지 않고 잘 찾고 있거든. "
  " 우리말고 스핑크스에 쫓기는 사람이 더 있다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자네는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  빨리  뛰지 않고 뭐해? "
  영훈이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영상에게  소리쳤다.  세 사람은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아니…… "
  세 사람의 눈앞에는 SF 소설에서나 봄직한 이상한 각종 무기들이 벽장 가득 쌓여 있었다. 대체적인 모양은 총  같았지만, 흔히 쓰는 군용 총이 아닌, 마치 SF 영화를  찍기  위한 소품인 광선총 같이 생겼다. 
  " 뭐하고 있어? 이대로 죽을거야?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총으로는 레이저를 부술 수 없으니까 이걸 한번  써보자고. 어떻게 쏘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거나 눌러봐. "
  영훈은 손에 든 은성-52를 들어 벽장의 유리를 깨고는  손에 집히는 광선총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빛의 섬광이 총구에서 뻗어나가 5중으로 된 티탄 합금에 구멍을 뚫었다. 
  " 바로 이거야! "
  세 사람은 총 한 자루씩을 꺼내, 복도의 레이저 장치를 겨누었다. 정상적으로 방어장치가 작동되고  있다면  영훈쯤을 해치우는 데 10초도 안걸리겠지만 스핑크스가 조금 이상하게 동작하고 있기 때문에 영훈들이 쏘아대는 광선총에 파괴되고 있었다. 영훈은 혹시 예비로 쓰일 지 몰라서 두세 자루의 총을 군용 가방에 쑤셔넣었다. 
  " 일단 나가는 출입구를 찾아봅시다. 이거 스핑크스가  조금 맛이 가는 바람에 미로의 지도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잖아. 저 문인거 같기는 한데…… "
  영상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소연과 영상이  먼저 복두 끝까지 뛰어가고 영훈이 뒤에서 엄호사격을  하기로 했다. 특수 부대에서도 명사수로 꼽혔던 영훈의 사격에 레이저 방어장치는 맥없이 부서지고, 세 사람은 복도 끝의  문을 들어설 수 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소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이럴수가…… "

  세 사람이 스핑크스의 레이저 공격에 쫓기고 있을 때 스핑크스 컴퓨터의 8미터 지하에 있는 혜진의 비밀 연구실에서는 장정이 두툼한 종이를 끼고 헐떡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 맞아요, 혜진씨, 예측했던 결과대로에요.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스핑크스 바이러스’의 RNA는 유전자를 파괴하는 작용을 하고, 아테니움은 스핑크스가 파괴한 유전자를  복구하는 작용을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의 유전자에서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작용되었었다는 흔적을 발견했어요. "
  " 인간의 유전자에 작용했었다고요? "
  혜진은 놀라서 소리쳤다. 놀람에 가득찬 그녀의  목소리는 복도 밖에 설치된 스핑크스의 고성능  도청기에  감지되기에 충분했다. 장정은 말을 이었다. 
  " 과거 어느 시점엔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했었어요. 인간은 스핑크스 바이러스에 죽어가면서도 면역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대부분의 유전자가 파괴되었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중에서 우리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80%의 부분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한 후유증의 흔적이에요. 이건 제 추측이 아니라 컴퓨터의 분석 결과입니다. "
  혜진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인간이 스핑크스 바이러스에 대해 면역을 가지게 되었다면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왜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
  " 아, 그건…… "
  장정도 목이 타는지 꿀꺽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 인간은 계속 진화합니다. 또한 환경에 적응하고요. 바이러스가 없어져서 병이 생길 기회가 없어지니까 원래  있었던 면역 기능이 퇴화한거죠. "
  " …… "
  " 더욱 놀라운 것은 파괴되기 전의 인간의  유전자입니다. 파괴되기 전의 유전자를 컴퓨터가 역으로 추적해 냈어요. 이걸 좀 보세요. "
  장정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먼젓번에 장정이 그려보였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 씌어 있었다. 
  " 장정씨, 이게 뭐죠? 전 이런 기호를 읽을  줄  모르잖아요. "
  " 아 참 그렇군요. 제가 설명해드릴께요. 이건…… "
  탕! 소리와 함께 장정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았다.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장정의 몸뚱아리 너머로 권총을 든  영카우의 모습이 보였다. 
  " 아무래도 당신은 죽어주어야 겠군요. 스핑크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요. "
  " 당신은…… 누구죠? "
  " 극비 기술과의 과장 영카우입니다. 한국의 유전공학  연구소에서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죠. "
  " 당신이 진현을 죽이고 나를 여기까지…… "
  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영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진에게 계속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원래 우리 CIA에서는 식물 뇌파의 연구를 책임져야 했지만 당신은 너무 엉뚱한 것을 알아버렸어요.  이봐,  아가씨. 때로는 너무 많이 아는 것이 건강에 해롭단 말이야.  마지막 기도나 올리…… "
  영카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가 둔탁한 물체로 뒤통수를 갈겼기 때문이었다. 영카우가 쓰러진 뒤로 검은 적외선 차폐복을 입은 사람이 혜진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검은 옷의 침입자가 헬멧을 벗는 것을 보고  공포는 놀람으로 바뀌었다. 
  " 아니, 당신은…… 어떻게 된 거죠? "
  "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일단은 빨리 달아나야 해요. 이 사람은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얼마후면 깨어날거여요. "
  침입자는 쓰러진 영카우를 내려다 보다가  혜진의  손목을 잡아끌고 복도로 나갔다. 순간 징-하는 소리가 복도 양 끝에서 들려왔다. 5중 티탄 합금으로 만든 문이 복도 양쪽을  차단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탈출구가 막히고 만 것이다.

  맨 처음 문을 들어선 소연은 까무라칠듯 펄쩍 뛰었다가 곧 문 뒷쪽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 들어온 영상과 영훈이  웬일인가 보다가 눈앞 벌어진 너무 어마어마한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안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발견된 유리관이 놓여 있었다. 몇 개는 비어 있고, 몇  개에는 미이라가 들어 있는 채로 갖가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방안에 설치된 여러가지 기계를 다루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미이라! 피라밋에서 발견된 미이라가 파란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걸어다니고, 기계를 사용해서 유리관  속에서 동료 미이라를 깨우고 있지 않은가.  
  영훈들이 문 뒷쪽에서 숨어서 엿보는 동안 미이라는  벽의 레버를 당겼다. 분홍색 빛이 유리관 안에 가득차고, 빛이 사라진 후에 천천히 유리관이 열리면서 새로운 미이라가  제발로 걸어나와 먼저의 미이라의 손을 잡았다.  소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영훈은 이 와중에도 군용 가방에서 작은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미이라를 찍기 시작했다. 
  방안에도 삐익-하는 소리가 났다. 미이라들은 벽의 스크린을 쳐다보더니 벽장에 설치된 레이저 광선총을  꺼내들었다. 스크린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영훈은 그 문자가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한 수수께끼의  알루미늄판에 씌여 있었던 글자와 같은 종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이라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음의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들아다 보더니 문가로 걸어나왔다. 세  사람은 황급히 복도로 도망나와 다시 뛰기 시작했다. 
  " 제길, 막다른 골목이잖아! " 
  영상은 신음소리를 냈지만 영훈은 세 사람의 광선총을  모아 쥐고 벽을 겨누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벽은 녹아흘러 구멍이 뚫리고 세 사람은 그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 제길, 나가는 복도가 막혔어요. 내  권총으로는  어림도 없어! "
  검은 적외선 차폐복의 침입자는 쾅하고 닫히는  5중  티탄합금의 문을 쳐다보다가 다시 실험실로 들어와 들고 있던 권총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두 사람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바깥에서 비상 사이렌 소리와 쿵하는 크고  작은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 스핑크스 내에 무슨 문제가 있나봐요. 이 사이렌 소리와 폭발음은…… "
  감자기 두 사람이 앉아 있던 맞은 편 벅이 펑- 소리와  함께 흔들리더니 크게 구멍이 뚫렸다. 두꺼운 벽이 뚫린  자리에서는 연기와 함께 아직도 녹은 쇳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 구멍 사이로 세 사람이 뛰어들었다. 혜진은 재빨리  아까 팽개쳐진 총을 주워 겨누었지만 영훈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그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아까 혜진의 방에서 영카우를 해치웠던 사람이 싸울 태세를 갖추었지만 영훈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 당신은 KBC 방송국의 이 영훈 기자! 도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거야? "
  " 나를 아는 당신이야 말로 누구요? "
  " 당신을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죠. 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 
  영훈은 광선 총구를 늦추지 않았지만, 적어도 푸른 머리카락의 미이라보다는 안전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 당신들은 스핑크스 편이요, 아니면 그 반대요? 우린  지금 스핑크스에게 쫓기고 있어요. "
  " 우리도 스핑크스에게 쫓기고 있어요. "
  " 그렇다면 이걸 받아요. 우린 저들과 싸울 무기는 있지만 이 미로에서 나가는 길 몰라요. "
  영훈은 군용 가방 안에서 여분으로 준비한 광선총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던졌다. 
  " 우린 이 안의 길은 알지만 이미 늦었어요. 복도는  티탄 합금의 셔터로 차단되었는걸요? "
  " 우리가 벽을 뚫고 들어온걸 못봤어요? 당신들이 들고 있는 총은 위력이 어마어마한거요. 제길,  저놈의  스핑크스만 없으면 멋진 SF 영화를 찍을 수 있는건데…… "
  영훈과 영상, 소연은 복도를 가로 막고 있는 셔터에  대고 광선총을 쏘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셔터는 꿈쩍도 않았다. 영훈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돌았다. 
  " 저 셔터는 5중 티탄합금에다 텅스텐,  특수  세라믹까지 섞인 거여요. 당신들이 뚫고 들어온  벽과는  달라요.  섭씨 4000도의 고열에도 꿈쩍하지 않아요. "
  " 빌어먹을…… 미이라 놈들이 쫓아와요! "
  소연이 세 사람이 들어온 벽의 구멍을 가리켰다. 영훈들이 들고 있는 광선총과 똑같은 모양의 총을 들고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 셋이 이쪽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 미안해요, 영훈씨. 내가 철없이 영훈씨를  쫓아  오지만 않았어도…… "
  소연이 영훈을 쳐다 보며 울상을 지었지만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제길, 저 여자가 장치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텐데. 그 장치는 꽤 잘 만든 거였거든. 맞아! ‘
  순간 영상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손목의 단추를 누르고 소리쳤다. 
  " 모두들 엎드려요. 이제 곧 큰 폭발이 있을테니까. "
  다들 영문을 모른 채 엎드리자 마자 큰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쫓아오던 미이라들도 잠시 주춤킹홱. 갑자기 건물 전체의 조명이 꺼지면서 복도를 가로막았던  거대한  셔터가 스르르 열렸다. 
  " 마술 같군. 어떻게 한거지? "
  복도를 내닫으며 영훈이 영상에게 물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영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영훈이, 자넨 원래부터 말썽꾸러기였잖아. 자네가  스핑크스의 내부를 쳐들어 가자고 하기에 혹시 몰라서 아까 변압실에 설치했던 장치 속에다 작은 폭탄을 달았다네.  MIT에서는 작은 폭발물도 연구하거든. 변압기가 폭발하면  곧  예비 전원으로 바뀌겠지만, 바뀌는 동안만은 전력 공급이 없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셔터가 열리는거지. 봐.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서 셔터가 도로 내려오고 있잖아. "
  영상의 말대로 나갔던 조명이 다시 들어오면서 셔터가  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 저기 출구가 보인다! "
  혜진의 안내로 간신히 미로를 빠져나온 영훈들의 앞에  밖으로 난 작은 유리창이 보였다. 혜진이  광선총을  유리창에 겨누고 쏘았다. 팡-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튀고 다섯 명은 깨어진 창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뒤쫓아온 미이라들의 광선총 사격을 간신히 피하며 다섯 명은  캄캄한 뉴욕의 밤거리로 사라졌다.

Part V 돌아온 아틀란티스 인

  2000년 5월 27일. 비가 막 개어 파릇파릇한 하늘을 쳐다보며 로스알라모스 국립 원자력 연구소의  연구원인  제다이는 연구소로 향하는 돌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젖은 땅의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파다닥 뛰어나와 제다이의 앞을 가로질렀다. 
  제임스 타일이라는 이㎱ 연구소 사람들이 제다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오랜만에 생각해내고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항상 고독한 표정에 얼굴에 큰 흉터까지 있어서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 고독한 기사 제다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제다이가 정말로 쓰라린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연구소 내에 아무도 없었다.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1996년의 비극을……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갠 날이었다. 국립 원자력 통제  쎈터의 통제실에 근무하던 제다이는 1000 킬로미터 떨어진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를 조정하여 제어봉 을  원자로에 투입했다. 보통 제어봉의 조정은 각 원자력 발전소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지만, 원자로가 불안정할 때는 안정될  때까지 국립 원자력 통제 쎈터에서 통제하곤  했다.  제다이는 통제 쎈터 내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원자로 안정  전문가였고 그해따라 불안정한 원자로가 많아서 제다이는 거의  여섯달 째 매일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야만 했다.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는 제다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년沮 통제 쎈터에서 근무하던 씬디가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씬디와 그는 일주일 후면 결혼할 계획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제어봉을 집어넣은 그는 잠깐  바깥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비 갠 뒤의  가을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지난 6개월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그는 벤치에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5분 후 팜워크의 원자력 발전소는 제어봉의 고장으로 인한 과열로 폭발을 일으켰다. 사고로  128명이 죽고 주민 6만5천명이 대피했다. 물론  사망자  명단에는 씬디 월터슨의 이름도 있었다. 
  사고 후 열린 청문회에서는 제다이의 과실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어봉의 고장은 통제 쎈터에서의  조작  미숙이 아니라 제어봉을 움직이는 유압 장치의 고장이었고,  제다이의 유일한 실수는 자리를 비우고 잠이 드는  바람에  고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었지만, 그것도 6개월 동안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일어난 현상이므로  제다이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통제 쎈터에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얼마 후에 통제 쎈터 소장을  맡겼지만  제다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수는 아니라 해도, 그날 벤치에서 깜빡 졸지만 않았어도 씬디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강박 관념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통제 쎈터 소장직을 물러나고 잠적해버렸다. 
  이름도 바꾸고 수염까지 기른 제다이는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로 옮겨왔다. 다시는 원자력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가 통제 쎈터 소장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평연구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씬디 때문이었다.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없어야 겠다는 생각에 폭발의 위험이  전혀  없는 핵융합을 연구하러 로스알라모스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씬디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연구에 전념했던 그는 평연구원임에도 핵융합의 기초 실험에 성공했고, 1년 이내에 실제로 핵융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되어 있었다. 
  연구소로 올라가는 길은 아직도 한참이 남아  있었다.  옛 생각에 발길이 무거워진 그의 눈에 산아랫쪽의 액체 질소 저장탱크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들어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액체 질소가 사방으로 튀고 근처 건물의 유리창은 충격파에 산산조각 깨져나갔다. 부서진 저장탱크의 조각은 3층  건물 높이로 튀어 제다이의 발밑에 툭 떨어졌다. 제다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엎드렸다. 
  비상 사이렌이 전 연구소 내에 울리고, 항시 대기하고  있던 미 육군 특수 부대가 M-75 신경가스총과 M-81 우라늄  기관포를 들고 연구소 내의 수색을 개시했다. 1998년에 개발된 M-81은 A-10 공격기의 우라늄기관포를 소형으로 만들어 우라늄으로 겉을 싼 철갑탄을 발사, 웬만한 탱크의 철판도  손쉽게 뚫어버리는 막강한 위력을 지닌 무기로, 1997년에 만들어진 M-75 신경가스총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도 몇군데의  특수부대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요란하던 사이렌 소리가 순간 뚝 그쳤다. 아직까지도 엎드려 있는 제다이는 비상사태가 해제된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즉각 비상용 전원이 공급되었지만, 이 또한 어찌된 일인지 금방 중단되어버리고 말았다. 연구소 전체에 동력이 끊긴 상황에서도 배치된 특수부대는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펑크 스타일로 다듬은 머리를 흩만지며 특수부대장 FLYFOX는 연구소의 컴퓨터 쎈터 아래층에 지휘본부를 마련하고  대원들을 지휘했다. 상황은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연구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런 비상 상황인데도 그는  우왕좌왕 지나가는 여자들의 다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워낙 여자를 좋아해서 1991년의 쿠웨이트 침공때도 특수부대에서 쫓겨날 뻔한 FLYFOX이지만, 유격전에서의 빈틈없는  전쟁 수행 능력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서 이곳  로스알라모스 경비 특수부대의 부대장을 맡게 된 것이었다. 
  요란한 총성소리와 함께 수소 저장  탱크쪽에서  대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FLYFOX는 연구소 내의 경비상황을  알려주는 컴퓨터 스크린을 켰지만, 스크린은 고장인지  작동하지 않았다. 
  " 제길, 망할 놈의 컴퓨터 같으니라고! "
  그는 욕설과 함께 뵀㈇걋 걷어차고 구식 무전기를 켰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부하 대원의 목소리는 차라리 신음소리에 가까왔다. 
  " 뭐?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 광선총을 쓰고  있다고?  이봐, 스타워즈를 연구하는 여기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도  광선총은 없어! 지금 장난하는 줄 아나? "
  FLYFOX의 호통은 곧 그쳤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무전 보고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부하 대원들과 적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번쩍하는 섬광 속에 비친 적의 머리카락은 놀랍게도 파란 색이었다. 
  엎드린 제다이의 머리 위로 파란 섬광이 교차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은빛 광선총을 든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들은 저항하는 특수부대원들을 물리치면서 점차 연구소의  심장부로 다가갔다. 제다이는 엉금엉금 기어서 연구소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FLYFOX는 권총을 빼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특수부대원들은 M-81 우라늄 기관포로 맞섰지만, 침입자들이 입고 있는 얇은 은회색의 복장은 기관포탄에 맞아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 저런 개새끼. 도대체 저건 괴물이야, 뭐야? "
  FLYFOX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미국 최강의  특수부대원들조차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부하들은 차례로 쓰러져 갔고, 이제 FLYFOX의 곁에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이었다. 
  살아남은 다섯 명의 대원과 FLYFOX는 연구소의 컴퓨터  쎈터로 피신했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대부분 피신했는지  보이지 않고 빨강 머리의 컴퓨터 오퍼레이터 한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리 와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자고. 저 놈들은 도대 어떻게 된 놈들이기에 우라늄 기관포를 맞고도 까딱도  않는거야? "
  FLYFOX와 다섯 명의 대원들은 컴퓨터 쎈터의 문 앞에다 책상이며 의자를 쌓아 올려 바리케이트를  만들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성능 폭약을 바리케이트에 설치했다. 
  " 이봐, 당신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거야? 저 파란 머리카락의 괴물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우린 다  죽을거야.  빨리 와서 바리케이트를 만드는 걸 도우라고. "
  FLYFOX는 특수부대원들을 바라보고 있던 컴퓨터  오퍼레이터에게 소리팁嗤 이 빨강 머리의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웃기만 할 뿐이었다. 
  " 야,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 빨리 와서 이걸  들란 말이야! "
  소리를 버럭 지르던 FLYFOX는 순간 자리에 얼어붙는  듯했다. 빨강머리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다름아닌 은빛  광선총이기 때문이었다. 
  " 다들 머리에 손을 올려! "
  FLYFOX와 다섯 명의 대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올렸다. 곧이어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들이 바리케이트를  치우고는 컴퓨터 쎈터에 들어왔다. 괴인간들은 바리케이트를  만들려고 쌓아놓았던 책상과 걸상을 발로 걷어찼다.  괴인간들의 발에 채인 걸상 하나가 손들고 서있던 FLYFOX의 정강이에 맞았다. 욱신거리는 아픔에 FLYFOX는 잠시 휘청거렸고  괴인간들은 그의 움직임에 놀란듯 광선총을 들이댔다. 코앞에 겨눠진 광선총 앞에 FLYFOX는 정강이의 아픔을 억지로  참아가며 다시 손들고 항복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 상황은 끝났습니다. 로스알라모스의 핵무기와  플라즈마포, 레이저 발생기는 안전 장치를 풀고 곧 동작시킬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모든 컴퓨터는 보안장치를  풀고  스핑크스가 제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
  빨강 머리의 컴퓨터 오퍼레이터는 주머니에서 작은 스프레이를 꺼내어 얼굴에 뿌리고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아나갔다. 변장을 하느라 살짝 덮어씌워졌던 껍질을  벗겨내자  분홍빛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이 드러났고 빨강머리 가발을  벗어버리자 파란 머리카락이 출렁댔다. 
  변장을 다 지운 컴퓨터 오퍼레이터는 들어온 파란  머리카락의 괴인간에게 보고를 했다. 괴인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화면에 막 몸을 기울이는 순간 FLYFOX는 발 앞에 놓였던 걸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괴인간 하나와 빨강 머리가  걸상에 다리를 맞아 고꾸라졌다. 특수부대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진 광선총을  집어들어  괴인간들에게 겨누어 쏘아댔다. 잘못 쏜 한 발이 컴퓨터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크린이 폭발했다. 파지직하는 전기  스파크와 함께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괴인간 하나가 몸을 돌이키며 이상한 접시 같은 것을 들이대며 단추를 누르자 순간 마지막 FLYFOX들의  눈앞에  팍하는 불꽃이 튀며 돌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온몸에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왔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괴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로 합성된 음인듯 괴인간들이 내는 이상한 억양의 말은 놀랍게도 영어였다. 
  " 더 이상의 희생을 원치 않아 단지 시각을 멈추고 온몸을 마비시켰을 뿐이다. 너희 지구인의  과학력으로  우리들에게 대적한다는 것이 우스울 뿐이다. 테리는 빨리  태평양  상의 미 공군 1호기와 교신을 하도록. "
  테리라 불린 컴퓨터 오퍼레이터, 아니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변장했던 괴인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지지 않은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테리가 메인 스위치를 돌려 모든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순간 출입구 맞은 편의 침입자 감시장치가 찢어질듯한 싸이렌 소리를 내며 동작했다. 화면에는 컴퓨터 기억장치에서 자료를 빼내 달아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 누군가가 이 연구소에서 자료를 빼내  달아나고  있습니다. 제거할까요, 싸이버? "
  두목으로 보이는 싸이버라는 괴인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놔 둬,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 세계가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될텐데… 그보다 빨리 스핑크스를 통해 상황 점검을  해봐. "
  싸이버와 다른 괴인간들이 스핑크스를 통한  상황  점검에 열중한 동안 핵융합에 대한 자료를 모두 복사한 제다이는 경비 장치가 모두 파괴된 연구소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17시 32분 콜로라도 스프링스. 
  바위산을 뚫고 깊은 지하에 건설된 북미 대륙 방공 사령부(NORAD) 의 종합 상황실에서 자그마한 키의 마이클 오즈본은 약간 벗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핑키]의 대형 스크린  앞에 앉았다. NORAD는 모두 14대의 호돌-720 슈퍼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데 각각마다 [큐티], [세레자], [핑키]같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마이클이 담당하고 있던 [핑키]는 그중 첫번째 컴퓨터로 스핑크스 컴퓨터의 직접 통제를 받아 미국의  모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발사를 지휘한다. 
  살벌한 전쟁을 지휘하는 컴퓨터일수록 이름이  여성다워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NORAD의 컴퓨터에 [큐티], [세레자], [핑키]와 같이 여성적인 이름을  붙인 것도 마이클의 발상이었다. NORAD내의 모든 컴퓨터를  지휘하고 있는 마이클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테크)의  교수직을 떠나 NORAD에 온 것은 1995년 봄으로, 사랑하던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마이클은  자신이 담당하게 된 컴퓨터에 아내의 애칭인 [핑키]라는 이름을  붙이고 죽은 아내를 대하듯이 아꼈다. 눈을 감고도  NORAD내의 모든 컴퓨터의 회로도를 줄줄 외우는  마이클을  주위사람은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지만 그가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열을 컴퓨터에 쏟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
  두번째 컴퓨터인 [큐티]를 담당하는 로즈 무어가 작은  쟁반에 찻잔 두개를 담아 마이클의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로즈는  마이클이 오기전에 NORAD의 컴퓨터를 책임지던 사람이었다. 로즈의 일을 빼앗아 자신이 넘겨받게된 마이클은 로즈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이클이 부임한 첫날부터  그에게 더없이 친절히 대해주었다. 
  " 바닥에 깔린 전기줄 조심해요.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즈는 케이블에 걸려 휘청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귀퉁이에 삐딱하게 놓여 있던 커피잔이 쏟아지며 모니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 미안해요. 컴퓨터에 커피가 쏟아져  경고음이  울리는군요. "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컴퓨터의 스위치를 끄려던 로즈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버렸다.  [핑키]의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Secret-Code A. 핵 안전장치 전면 개방. 파에톤 작전 수행 시작. countdown - 200초 ]
  마이클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파에톤 작전]은 유사시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계획  시나리오였다.

  17시 33분 대서양 상공 12000미터. 
  영국 방문차 대서양 상공을 날으는 미 공군 1호기의  중간 부분에 자리잡은 대통령 집무실의 푹신한 안락 의자에  몸을 파묻고 졸고 있었던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는 비서관이 황급히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는 어빈 스타일 국무장관과 포인트 합참의장등 기내의 수행  인원은 거의 모여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모여 있고. "
  " 그게… 스크린을 좀 봐주십시오. "
  칠리는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들은 분홍빛 피부에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투는  전자오락기에서 흘러나오는 합성음같은 이상한 억양이었다. 
  " 지구인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이 땅에 살기 3만년 전에 지구를 지배하고 있던 아틀란티스의 유민입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쓰고 있던 스핑크스 컴퓨터도 실은  우리가  쓰고 있던 컴퓨터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아틀란티스 인은 핵전쟁이 시작되어 멸망의 위기를 맞자 소수의 인원을 미이라 상태로 만들어 동면시키고 그 관리를 컴퓨터에 맡겼습니다. 컴퓨터 자신은 핵 전쟁때 파괴되었지만 그 설계도는  스핑크스 바이러스 안에 보관되어 있다가 지구인이 다시 만들었고, 가동된 스핑크스는 곧 우리들을 동면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
  으음, 하고 칠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빈 스타일 국무 장관이 대통령 칠리에게 설명했다. 
  " 지금 아틀란티스인들의 방송은 전 세계 언어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미 스핑크스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통신망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
  " 이제 우리들이 동면에서 깨어났으므로 이 시간 이후  세계는 우리 아틀란티스 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만약 우리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책임지지 못함을 미리 경고합니다. "
  저 개새끼들… 하고 사람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대통령 칠리는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 처음에 MEDUSA에서 스핑크스 컴퓨터의 설계도를  가져왔을 때 조심했어야 하는건데… ‘
  " 대통령 각하,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의 긴급 연락입니다. "
  어빈 국무장관이 청색 전화기를 내밀었다. 핫-라인을 통해 흘러나오는 키리로프의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미국 대통령 각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칠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아틀란티스 인의  다음 말이 칠리의 귓전을 때렸다. 
  " 지구인 여러분, 현재 지구상에서 우리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소련 세나라뿐입니다.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이제부터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포인트 합참의장은 백색 전화를 들고 콜로라도의  NORAD를 호출했지만 전화에서는 지지직-하는 잡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핵공격시에도 끊어지지 않는 비상 통신망이 일시에 중단이 된 것이다. 공군 1호기 안의 기술자들은 통신을 재개시키려 애썼지만 아틀란티스 인으로부터 들어오는  전파  이외의 어떤 통신도 끊어져버렸다. 
  화면에 미국의 미사일 기지가 비춰지자 칠리는 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틀란티스 인들이 하고자 하는 짓이  너무도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 인들은 본보기로  소련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었다.

  17시 35분 북미 방공 사령부 (NORAD).
  [ 파에톤 작전 1단계. 포세이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 35기 발사 준비. 
공격 목표 : 모스크바       (좌표 10204217-97126335)
                레닌그라드     (좌표 87293827-37264818)
                타시켄트       (좌표 38273482-33712561)
                노보쿠츠네스크 (좌표 38278199-38272379)
                키에프         (좌표 71527291-10364381)    countdown - 60초]
  " 이건 말도 안돼요. 컴퓨터의 고장이 틀림 없어요. "
  로즈는 후다닥 뛰어[큐티] 앞에 앉았지만 [큐티]의  모니터도 마찬가지였다. [세레자]도,[샤뜨]도, NORAD의 모든  컴퓨터가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명령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핑키]의 윗쪽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램프들을  쳐다보았다. 대통령으로부터의 핵공격 명령을 나타내는 빨간  램프는 켜져 있지 않았다. 마이클은 가만히 서서 컴퓨터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쉴새없이 여러가지  생각이  회전했다. 
  ‘ 대통령으로부터의 핵공격 명령이 없이 파에톤 작전이 수행되고 있다는 말은NORAD의 모든 컴퓨터가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이들을 제어하고 있는 스핑크스가 고장이 났던가  둘중의 하나야. ‘
  그는 머릿속에서 NORAD의 모든 컴퓨터가 일시에 고장날 확률을 계산했다. 약 12억분의 1.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고장이 틀림없어. 
  마이클은 스핑크스에서 NORAD로 들어오는 통신 회선을  차단하려 스위치를 눌렀지만, 화면에는 [차단 불가]라는  말이 표시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컴퓨터의 전원 공급을 중단시키려 했지만 이것 역시 [차단 불가]라는 표시가  나올  뿐이었다. 
  " 이놈의 스핑크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
  [ 인공 위성 유도 개시. 좌표 수정 끝. countdown - 35초 ]
  ‘ 그렇지, 외부 컴퓨터와의 통신 회선은 207호실에  있어.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이클은 옆에 있던 경비원의  권총을 빼어들고 복도를 내달았다. 207호의 자동문에 인식카드를 집어넣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NORAD내의  스피이커는 25초전을 알리고 있었다. 
  징-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캐비넷을 닥치는대로  열었다. 컴퓨터끼리 이어주는 노랗고 파란색의 광통신망이 캐비넷 안에 어지러이 얽혀있었다. 마이클은 손에 들고  있는  총으로 연결 부분을 마구 갈겨댔다. 텅 빈 방안에 울려퍼지는  총소리가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탄창이 비어  더이상 발사되지 않는 권총을 내던지자 207호 여기저기서 전기 불꽃이 튀었다. 
  ‘ 이제 스핑크스와 NORAD 컴퓨터와의 연결은 끊어졌어. ‘
  그는 서둘러 자리에 돌아왔지만 [핑키]의 스크린에는 세줄이 덧붙여져 있을 따름이었다. 
  [ 발사구 개방. countdown - 5초   스핑크스와의 통신을 차단하려 시도하지 말 것. 차단 시도시에는 NORAD를 먼저 폭파시키겠음. ]
  그제서야 마이클은 스핑크스와 NORAD와의 통신 회선이 7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17시 37분 미 공군 1호기. 
  "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 각하, 우리나라에 설치되어  있는 스핑크스 컴퓨터가 아틀란티스 인의 제어를 받아 우리나라의 핵 미사일을 소련에 발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속히 방어행동을 취해주십시오. 아울러 이번 핵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의사와 무관한 행동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
  과연 미국 대통령다운 말이었다. 칠리는 그 와중에서도 미국이 받을 보복 공격을 피하려 ‘미국 의사와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나 핫-라인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련 대통령의 목소리는 냉랭하기만 했다.
  " 미국 대통령 각하, 어떠한 이유에서건 우리 소련이 미국의 핵 미사일 공격을 받았을 경우 우리는 즉각적인 보복  공격에 들어갈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핵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미국을 기록할 것입니다. "
  화면에 커다랗게 [발사]라는 글자와 함께 미사일 격납고에서 핵 미사일이 치솟았다. 발사의 화염과 짙은 연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칠리는 이마를 싸쥐었다. 
  ‘ 오, 신이여… ‘

  17시 38분 키에프의 소련 방공망 사령부. 
  천정에 매달린 700개의 각종 모니터와 램프는 쉴새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련 방공군 사령관 이바노비치 장군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소련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서른 다섯개의 노란색 점이 소련 지도 안에서 반짝였다.  미국 포세이든 미사일의 예상 목표였다. 
  벽면마다 가득 설치된 70여대의 소련 슈퍼컴퓨터 유리 III는 계산 결과를 계속 출력해냈다. 키에프 컴퓨터 센터의  책임자 마르첸코는 미국의 핵미사일을 중간에서 격추시킬 요격 미사일(ABM)의 궤도를 산출해내기 시작했다. 
  [ 케팔로스 작전 시작. 요격 미사일 105기 발사 준비 완료. 목표 고도 7000미터. ]
  그리이스 신화에서 무엇이든지 따라가서 맞춘다는  전설의 창 이름을 딴 케팔로스 작전은 미국의 핵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폭파시키는 작전이다. 핵미사일 하나당 세발씩의  요격 미사일(ABM)을 발사하기 때문에 서른  다섯발의  핵미사일을 전부 요격시킬 가능성은 이론상으로는 100%이지만, 케팔로스 작전이 실전에 응용되기는 처음이기 때문에 마르첸코의 가슴은 불안하기만 했다. 
  이바노비치의 가슴에서 훈장이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시끌한 소리와 섞여 기분나쁘게 들렸다. 그의 손가락은 커다란 붉은 단추에 닿아 있었다. 대통령 키리로프는 미국의 핵미사일이 한 발이라도 소련 영토에 떨어진다면 즉각  반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었다. 이바노비치가 단추를 누르는  순간 300발의 핵미사일이 미리 선정해 놓은 미국의 각  목적지에 발사된다. 미리 선정된 공격목표에는 스핑크스가  위치한 뉴욕도 들어 있었다. 
  [ 적 핵미사일은 포세이든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탄두의 위력 20메가톤. 속도 마하 20. 코스모스 9871호, 7282호, 1912호 적 핵미사일 추적  개시.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 발사. ]
  화면에 요격 미사일의 발사 장면이  나타나자  마르첸코는 일부러 마이크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케팔로스 작전은 틀림없어. 명중률은 100%야. "
  그러나 이바노비치도, 마르첸코도 서른 다섯발을 다  요격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시 39분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
  "좌표 10204217-97126335. 입력 완료. " 
  귀에 이어폰을 꽂은 아틀란티스인 테리는 컴퓨터를  조작, 플라즈마 포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플라즈마 포가  가리키는 방향은 소련 상공이었다.

  17시 39분 30초 유타주 육군 무기 실험장.
  기지의 요원들이 퇴근하고 경비임무를 맡은 특수 부대원들은 시원한 한줄기 바람에 피곤을 이기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한 대원의 귀에 낮지만 뚜렷한 윙-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쳐다봤다. 
  뉘엇뉘엇 져가는 햇살을 받으며 사막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쇠로 된 도움이 달린 거대한 구조물이 솟아올라왔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새로운 신무기 시험장치였다. 도움이  갈라지며 파이프가 삐죽삐죽 솟은 거대한 안테나 같은 물건이  튀어나왔다. 그는 영문을 모른채 기지내에 비상을 걸었지만 기지내의 모든 통신망은 끊긴지 오래였다.

  17시 39분 40초 소련 상공 35000킬로미터.
  소련 상공을 감시하고  있던  소련의  군사위성  코스모스 9871호는 키에프 방공망 사령부의 제어에 따라 레이더를  소련 상공으로 날아가는 서른 다섯발의 핵미사일에 맞췄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은 코스모스 9871호의 레이더가 유도하는 대로 미국의 핵 미사일을 요격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만약 9871호가 고장난다 할지라도 7282호와 1912호가 예비로 대기고 있기 때문에 케팔로스의 요격은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순간 35000킬로미터 아랫쪽의 지구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빛났다. 정확하게 0.12초후 소련의 군사위성 코스모스  9871호는 로스알라모스에서 발사된 플라즈마 포에 의해 금속조각으로 변해버렸다. 키에프의 제어장치는  케팔로스  미사일의 제어를 코스모스 7282호로 옮겼지만 코스모스 7282호와 1912호는 유타주의 육군 무기 시험장에서 발사된 역자장포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17시 40분 키에프의 소련방공망 사령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소련 지도에서 서른 다섯개의  노란색 점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슈퍼컴퓨터 유리 III의 모니터에는 느릿느릿 글자가 나타났다.
  [코스모스 9871호와 7282호, 1912호 기능 상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의 제어를 수행할 수 없음. 지상 유도로 바꿈. ]
  마르첸코에 있어서 그 의미는 명확했다. 인공위성의  유도에서 지상 레이더의 유도로 바뀌었다는 말은 요격률이  100%에서 25%로 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2분 이내에  적어도 스물 여섯발의 핵미사일이 소련 곳곳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르첸코는 키보드를 꽝 내리쳤다.

  17시 41분 미 공군 1호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공군 대령이 대통령 칠리에게  보고했다. 
  " 스핑크스는 소련의 요격망을 파괴했습니다. 사용된 무기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던 플라즈마포와 유타주에서 연구하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무기입니다. "
  "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무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모르는 신무기가 있단 말인가? "
  칠리는역정을 냈지만 대령은 조용히 답했다. 
  " 유타주에서 연구하고 있던 신무기는 스핑크스가  설계한 것입니다. 스핑크스가 그 무기를 설치할 때는 인공위성 조종용 레이더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광선무기인 것  같습니다. "
  " 제기랄, 스핑크스에게 완전히 속았군. 어쨌던 소련의 요격망이 파괴되면 결과는 어떻게 되나? "
  대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옆에 있던  공군  대위가 대신 설명했다. 
  " 인공위성을 이용한 요격망이 파괴되었으므로 최소한  스물 여섯발 이상의 핵미사일이 소련에 떨어집니다. 물론 소련의 반격이 예상되고요. "
  " 즉각 미국내에 핵전쟁 경보를 내려. 소련의 반격이 있다면 우리 국민도 대피시켜야 할 것 아닌가. "
  칠리는 소리쳤지만 대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 아까 아틀란티스 인이 우리의 핵미사일을 발사시켰을 때부터 경보를 내리려 했습니다만 스핑크스가 모든 통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경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
  칠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 즉각 소련 대통령을 연결해. "

  17시 42분 레닌그라드.
  " 저것 봐요. 축제도 아닌데 어디서 저렇게 멋있는 불꽃놀이를 한담? "
  오후의 산보를 나갔던 시민들은 머리위에서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이  미국의 포세이든 핵미사일을 격추시키는 장면이었다. 붉은색과 보라색의 섬광이 지평선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두터운 외투깃을 여민 시민들은 때아닌 불꽃놀이를 구경하려 밖으로 나왔다. 불꽃놀이가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눈에 띄게 밝은 꼬리를 띠는 별 하나가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수백년의 문화를 자랑하던 레닌그라드는 4초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7시 44분 모스크바.
  케팔로스 요격 미사일은 12발의 포세이든 핵미사일을 격추했지만 레닌그라드와 타시켄트, 노보쿠츠네스크는 23발의 핵미사일을 맞고 전멸했다. 모스크바와 키에프는 다행히  무사했다. 크레믈린의 지하 방공호에 대피해 있던 키리로프 소련 대통령은 칠리 미국 대통령의 연락을 받았다. 
  " 이 엄청난 상황은 모두 스핑크스가 한 짓입니다.그러나 미국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으므로 미국도 책임을 지고 소련의 보복 공격을 감수하겠습니다. 단, 소련의 보복 공격은 뉴욕으로 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
  " 우리는 세개의 대도시를 잃고 고작 뉴욕 한군데만  보복 공격을 하란말입니까? "
  언성을 높였던 키리로프는 칠리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뉴욕은 스핑크스가 있는 곳이다. 미국의 무기  체계는 모두 스핑크스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미국 정부는 소련이  뉴욕을 공격해서라도 스핑크스를 파괴해주기를 바라고 있는것이다. 키리로프는 키에프로 통하는 통신망의 마이크를  붙잡았다.

  17시 46분 키에프 소련 방공망 사령부.
  헤드폰을 쓴 마르첸코는 70여대의 슈퍼 컴퓨터 유리 III를 집중적으로 제어했다. 옆에서는 이바노비치 장군이 근심스런 얼굴로 마르첸코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거대한 미국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 위에 놓인 화살표가 미국의  동해안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 케오스 작전 시작.  대륙간 탄도탄 (ICBM) 250기 발사 준비 완료. 공격목표 : 뉴욕 (좌표 28163818-29173838) ]
  케오스 작전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후의 보복공격  작전이다. 지구가 처음 생길 때의 혼돈을 의미하는 케오스(혼돈)처럼 250발의 핵미사일은 미국을 혼돈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녔다. 화면에는 아직 피해를 입지 않은 소련의  미사일 발사기지가 나타났다. 
  갑자기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왼쪽의 스크린이  켜졌다. 아틀란티스 인의 메시지였다. 
  " 저는 아틀란티스 인의 대표자인 싸이버입니다. 우리  아틀란티스 인과 스핑크스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미리 경고했지만 소련은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스핑크스를 파괴시키려 뉴욕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고를 무시한 댓가로 소련은  멸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저 빌어먹을 미이라 놈들 같으니라고… 이바노비치가  중얼거렸지만 마르첸코는 침착하게 핵미사일의 발사  스위치를 눌렀다. TNT화약 125억톤에 해당하는 250발의 핵미사일이 뉴욕을 향해 날아올랐다.

  17시 47분 유타주 육군 무기 시험장.
  사막의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솟아오른 금속 도움  안에는 거대한 반구형 안테나가 소련 상공을 겨누고 있었다. 안테나 아랫쪽의 레이더 스크린에는 파란 머리카락의 아틀란티스인 한명이 앉아 열심히 기계를 조작하고 있었다.  섭씨  30도를 윗도는 더위속에서도 아틀란티스 인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레이더에 미국 상공을 향해 날아오는 핵미사일이 표시되었다. 그는 느릿느릿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  도움에 설치되어 있는 안테나의 끝부분이 보라색 섬광을 발하기  시작했고, 도움 자체도 격렬한 진동으로 흔들렸다. 보라색  섬광은 이미 알라스카 상공을 날고 있는 소련의 핵미사일을 겨냥하고 있었다. 
  미국 전역의 레이더망과 통신망, 그리고 대부분의  전자기기들은 17시 47분부터 3분간 작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유타주의 특수 안테나에서 발사한 강력한  전파 때문이었다.

  17시 48분 키에프 소련 방공망 사령부. 
  스크린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마르첸코는 화면에 나타난 파란 화살표가 일순간에 멈춰진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화면 아랫쪽에 표시된 핵미사일의 방향은 놀랍게도 서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 뭐야? 기계 고장이야? 뉴욕으로 날아가는 핵미사일의 방향이 어떻게 해서 서쪽을 향할 수 있단 말이야? "
  마르첸코는 컴퓨터를 다시 한번 점검했지만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핵미사일이 서쪽 – 미국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방향 – 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파란 화살표는  천천히 소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정에 매달린 빨간색의 커다란 램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램프 아랫쪽의 화면에 표시된  메세지를  보는 순간 사령부의 모든 요원은 그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 케오스 작전에 이상 발생. 모든 핵미사일의 유도장치 고장. 핵미사일은 현재 소련을 향해 날아오고 있음. ]
  마르첸코는 구석쪽의 보조 컴퓨터에 달려있는  자폭장치를 미친듯이 눌렀지만 화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 무슨 일이야? 마르첸코 대령? "
  이바노비치 장군이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사색이 된채  간신히 몇마디만 대답하고는 다시 컴퓨터에 매달렸다. 
  "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이 도로 우리쪽으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자폭장치도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1분후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이 소련땅에 명중해서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
  고개를 약간 숙였던 이바노비치가 놀라서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코끝에 간신히 걸려있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는 안경을 주울 생각도 안하고 소련을 향해 날아오는 파란색 화살표를 응시했다.
  ‘ 아틀란티스 인의 과학력은 우리가 발사한 핵미사일을 도로 되돌릴 수 있는 정도란말인가 … ‘
  이바노비치는 혼잣말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250발의  소련 미사일 중에서 키에프에 떨어진 첫번째 핵미사일이 바로  방공망 사령부에 명중했기 때문이었다.

  17시 51분 미 공군 1호기.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는 화면에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장면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스핑크스가 설계한 특수 군사위성은 모스크바 상공에 치솟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핵폭발에서 방사능으로 죽는 사람이 50퍼센트가  안된다는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핵폭발시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은 버섯구름을 일으키는 핵폭풍이다.
  핵폭발이 일어나면 우선 강력한 방사능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곧 핵폭발에서 일어나는 열선이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강력한 열로 폭발지점의 공기는 순간적으로  위로 치솟아 버섯구름을 만들고, 폭발지점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진공상태를 메우려 중심을 향해 엄청난 폭풍이 불게되는데 이것이 핵폭풍이다. 칠리와 미국정부의  요인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버섯 구름이 조금 작아지면서 화면에는 모스크바의 시가지가 나타났다. 10센티미터 크기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적외선 카메라에 잡힌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은 온통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의 무더기뿐이었다. 군데군데 검은 연기를  내뿜으머 타고 있는 가로수와 집들이 눈에 띄었다. 시체는  타서 증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건물의 앙상한 철골이 트위스트를 추듯 이리저리 휘어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령의 정적만이 감도는  거대한 공동묘지 모스크바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검은색이었다. 
  " 왜 검은색 빗방울이… "
  칠리의 물음에 포인트 합참의장이 대답했다. 
  " 이 검은 빗방울은 일명 ‘죽음의 비’라고 불리웁니다. 폭발시의 열로 인해 흙과 콘크리트, 기타 폭발중심에 있던  물질은 가루 상태가 되어 버섯구름을 타고  올라갑니다.  또한 스트론튬 등의 방사능 낙진도 역시 버섯구름을 타고  올라갔다가 상공에서 비에 섞여 떨어집니다. 이 비에는 방사능  낙진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이 비를 맞으면 원자병에 걸리게 됩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경우에도 생존자들의 대부분이 이 ‘죽음의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에 물집이 잡히는 등의 원자병에 걸렸습니다. "
  " 음… "
  화면에는 소련의 대도시가 계속해서 비춰졌다. 모스크바와 고르키, 레닌그라드, 민스크와 키에프,타시켄트와 알마아타, 노보시비르스크, 볼고그라드, 도네츠크, 스베르들로프스크등 소련의 대부분의 대도시는 250발의 핵미사일을맞고  전멸했다. 대부분의 콤비나아트(소련의 공업지대)와 유전,  광산지대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칠리는 소련의 추가 핵공격을 두려워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소련은 아직도 발사할 수 있는  핵미사일이 남아있었고 모스크바의 지하 방공호에 있던 소련  지도부와 발사장비도 무사했지만, 핵미사일을 발사해봐야 스핑크스가 다시 소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제어할 것이라는  생각에 소련 지도부는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스핑크스에게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주 ) 북미 방공 사령부 (NORAD) : 미국 전역의 방공  레이다망과 요격 미사일망을 지휘하여 적의 핵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지켜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지하 깊숙히 설치되어 있어 어떠한 핵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며 미국 전역에 배치되어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요격  미사일(ABM)의 발사를 통제 지휘한다.

  태평양 해저에는 수많은 원자력 잠수함이  자신의  존재를 숨긴채 수개월씩 잠수해 있다. 미국의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공격 잠수함 [폴리스]호도 그중 하나였다. 
  원자력 잠수함이 수개월씩 잠수해 있는 이유는 적의  감시망을 피하려는 때문이었다. 해저에 잠수해 있는 원자력 잠수함은 잠망경을 올리려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는 한  인공위성이나 소나(수중 음파 탐지기)로도 잘 포착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미사일을 적재한 원자력 잠수함은  기습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의 하나였다. 
  원자력 잠수함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잠수함의 통신은 ELF라고 불리우는 초저주파를 이용하게  된다.  물이 전파를 흡수하기 때문에 전파 통신은 수중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FM전파가 1초당 9천만번, TV전파가  10억번정도의 진동을 하는데 비해서 ELF는 1초에 고작 3번  정도로 아주 느린 전파이기 때문에 물속으로도 전파된다. 
  [폴리스]호의 선장 마틴은 선장실의 쇠로 만든 조그만  선반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19시 05분. 정기  교신시간인 8시를 무려 한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그는 책상위의  단추를 눌러 통신실을 호출했다.
  " 사령부에서의 연락이 아직 없나? "
  " 이상합니다, 함장님. 우리뿐 아니라 소련 사령부도 자신들의 잠수함에 통신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잠수함의  통신장비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
  마틴은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렸다. 통신에 대비해 꺼내놓았던 검은 표지의 암호책이 펼쳐진 채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암호책에는 알파벳이 아무렇게나 순서가 뒤바뀌어  배열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각각의 암호에 해당되는  단어가  씌여져 있었다. 암호책은 6개월만에 한번씩 교체되며, 모든  원자력 잠수함은 같은 암호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섞여있는 알파벳이 마치 월트 디즈니의 그림맞추기 같아보였다. 
  ‘ 소련 잠수함도 통신이 멈춰졌다… ‘
  잠수함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짙은 커피를 한모금 홀짝 들이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정기적인 통신이 끊긴 것은 해군이 원자력 잠수함을 가지게  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두뇌는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다. 
  ‘ 소련 잠수함과 미국 잠수함에 기계 고장으로 동시에  통신이 끊겼을 리는 없어. ‘
  기계 고장이 아니라면 도저히 통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에서 핵전쟁이 일어나  모두 전멸한걸까. 하지만 지상에서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제일  먼저 원자력 잠수함에 핵미사일 발사 명령이 내려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 마틴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결단을내렸다. 
  " 전 기관 정지. 해면으로 부상해서 사령부와 교신한다. "
  [폴리스]호는 해면에 떠올랐지만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다. 사령부와 함대 지휘부, 통제소 어느곳도 [폴리스]호의  교신에 응답하지 않았다. 순간 마틴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 초단파 교신을 해보게. 아마추어 무선국이 쓰는  주파수로. "
  통신장교는 아마추어 무선국과 왜 교신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명령에 따랐다. 곧 그는 희미한 교신을 잡을 수 있었다. 잡음에 섞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영어였지만  소련 악센트를 띠고 있었다. 
  [ 여기는 고르키, 여기는 고르키... 우리는 핵미사일로... 모두 날아가버렸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빌어먹을 스핑크스... ]
  ‘ 핵미사일로? 그렇다면 핵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스핑크스라는 말은 또 뭐야? 홀로비전이라도 켜볼까? ‘
  마틴은 아들을 주려 사놓았던 소형 홀로비전을 꺼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미국 대통령  칠리  로빈스였다. 화면속의 대통령은 울먹이고 있었다. 
  "여러분이 보신대로 이제 인류는 아틀란티스 인과 스핑크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영원하리라 믿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인류가 다시  지구를 되찾으리라고… "
  칠리는 말을 맺지 못했다. 곧 화면에는 아틀란티스인 싸이버가 나타났다. 
  " 지구인 여러분,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스핑크스 컴퓨터를 통해서 지구는 한개의 국가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도 징기스칸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우리 아틀란티스인이 이루는 것입니다. 온 지구가 하나가 될 통일국가의 이름은 그리이스 신화에서 신들이 살았던 땅 [올림포스]가 될 것입니다. 지구인 여러분, 우리 아틀란티스인의 지배 아래서 행복을 누려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은 10여분간 계속되었다. 마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임무는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출해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해군  사관학교  때 배운 간단한 격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공격은 최상의 방어. ‘
  또하나의 격언이 마틴에게 생각났다. 이 말은 마틴이 써야 할 작전이 무엇인가도 가르쳐 주었다. 
  ‘ 적의 적은 우리의 편. ‘
  그는 다시 잠수명령을 내렸다. 초음파를 발사해서 적 잠수함을 찾는 능동형 소나를 사용해 근처에 있는 잠수함을 찾았다. 곧 500마일 이내에 있는 5척의 잠수함이 포착되었다. 마틴은 수동형 소나를 통해서 들려오는 엔진 소음을  컴퓨터에 넣고 분석했다. [폴리스]호에 설치되어 있는 호돌-712  컴퓨터는 엔진 소음이 어떤 잠수함의 것인지 손쉽게 분석해냈다.

  [ 좌표 26-75X: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좌표 26-83Z: 미국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15메가톤급 켄타우르스 핵미사일 15기.

    좌표 27-15A: 미국 오케아노스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15메가톤급 켄타우르스 핵미사일 15기.

    좌표 27-76Y: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좌표 27-91C: 소련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적재 무기: 20메가톤급 케팔로스 핵미사일 24기.]

  마틴은 26-83Z와  27-15A에  있는  잠수함을  잘  알았다. 26-83Z는 해군 사관학교 동기인 루터스의  [디트로이트]호이고 27-15A는 함대 상급자인 엘핀의  [뉴요커]호였다.  [폴리스]호까지 세척의 오케아노스급 잠수함에 45기의 켄타우르스 핵미사일을 확보하게 된다. 소련 잠수함까지 합치면  여섯척의 잠수함에 117기의 핵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폴리스]호는 [디트로이트]호와 [뉴요커]에게  ELF통신을  보냈다.

  좌표 27-76Y 지점에 잠수하고 있는 소련의 알마아타급  원자력 잠수함 [붉은 광장]호의 통신실에서는 통신장교 로마노프가 함장 이반과 같이 통신장비에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스핑크스에게 항복한 소련 지도부의 홀로비전 방송이 잠수함 안에서 수신되었지만 로마노프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핑-핑- 갑자기 에너지를 실은 초음파가 잠수함 벽을  때렸다. 근처의 잠수함에서 나오는 능동 소나의 송신파였다.  함장 이반은 소나를 살폈다. 세척의 미국 잠수함이 일제히 [붉은 광장]호에 소나를 발사하고 있었다. 
  능동 소나는 초음파를 발사하여 반사파가 오는 시간을  측정해서 거리를 재기 때문에 정확하지만, 상대방이 그 초음파의 충격을 듣기 때문에 ‘나 여기있소’하고 광고하는 셈도 된다. 그래서 적이 이쪽을 이미 발견했을 때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데 웬일인지 미국 잠수함은 [붉은 광장]호에 능동 소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상하군요, 로마노프 동지, 미국의 잠수함이  우리에게 소나를 발사하다니. "
  로마노프는 함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길게, 짧게  울려오는 소나의 초음파 충격은 분명 모르스 부호였다. 그는  황급히 종이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다 적은 로마노프는 꽉  움켜쥔 종이를 함장 이반에게 내밀었다. 첫줄을 읽은 이반의  눈동자가 커졌다.
  [ 소련 잠수함에게, 여기는 미국 잠수함 [폴리스]호… 긴급제안이 있다… ]
  그는 마지막 줄을 거듭해서 여섯번 읽고는 모든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좁은 장교실은 금방 사람으로  만원이  되었다. 토론은 짧게 이루어졌고 장교들은 거수로 의사를 표시했다. 
  미사일 발사 권한을 가진 다섯명의 장교들은 모두  찬성했다. 미국의 잠수함과 마찬가지로 다섯명의 장교가 모두 동의하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지문 인식기에  갖다대야  발사가 가능하다. 한두사람의 판단 실수로 어이없는 핵전쟁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통신장교 로마노프는  곧  [폴리스]호에 답신을 보냈다. 
  [ 귀함의 제안을 수락함. 좌표 81-91Z로 항해하겠음. ]
  세척의 소련 잠수함과 세척의 미국 잠수함은 좌표  81-91Z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좌표 81-91Z는뉴욕 앞바다였다.

  원자력 잠수함은 그 특성상 아무에게도 탐지되지 않게  숨어서 공격이 가능하다. 더우기 스핑크스가 있는 뉴욕은 해안가에 면해있다. 뉴욕 근처까지 여섯척의 잠수함이 가서  117발의 핵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중 하나만 명중하더라도 스핑크스를 박살 낼 수 있다. 미사일이 발사되고 뉴욕에  명중할때까지의 시간은 15초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스핑크스라 하더라도 15초 동안에 117발의 핵미사일을 다 격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스핑크스만 부숴버린다면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하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은 뉴욕 앞바다 150미터 해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잠수함 내의 컴퓨터는 용량이 초과될 정도로 가동됐고, 핵미사일은 모두 하나의 목표에  맞춰졌다.  좁은 공간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의 체온과 컴퓨터가 가동되면서 내뿜는 열이 합쳐져, 좁은 공격통제실 안은 후끈후끈했다. 
  소련 잠수함 [붉은 광장]호의 공격통제실에는 함장과 정치장교를 비롯한 다섯명의 장교가 발사대에 나란히 앉았다. 함장의 나즈막한 구령에 따라 다섯명의 장교는 일제히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지문 인식기에 갖다댔다. 머리위의 붉은  램프가 깜빡깜빡거리자 장교들의 등에서도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곧 둔탁한 충격이 잠수함 벽을 타고 전해왔다.  117발의 핵미사일이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뉴욕 상공에 고정되어 있던 군사위성 팔라스 182호는 뉴욕 앞바다를 감시하고 있었다. 팔라스 182호에 실려있던 적외선 카메라는 뉴욕 앞바다 한부분의 수온이 2~3도가량 높아져 있는 것을 발견해서 자동적으로 그 데이터를 스핑크스에  송신했다. 스핑크스는 방출되는 열량에서 해저 150미터에  5~6척의 잠수함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곧 스핑크스는 유타주 무기시험장에 설치해놓은 스핑크스의 신무기를  가동시켰다. 
  117발의 핵미사일은 뉴욕 상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같은 시간에 유타주 무기시험장에서 발사된 타원형의 이상한 물체도 마하 20의 속력으로 뉴욕 상공으로 발사되었다. 플로리다주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형의 물체가 뉴욕 앞바다로 발사되었다. 
  스핑크스가 발사한 타원형의 물체는 [폴리스]호를  비롯한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에서 발사된  핵미사일보다  1초정도 먼저 도달했다. 스핑크스에서 보내진 전파에 따라  타원형의 물체는 보랏빛 섬광을 내며 폭발했다. 순간 핵미사일은 타원형의 역자장폭탄에서 나온 강력한 역자장을  정통으로  받았다. 금속원자를 결합시키고 있던 자유전자는 강력한  역자장에 의해 한방향으로 급속히 움직였고, 금속원자는  응집력을 잃고 원자상태로 흩어져버렸다. 날아가던 핵미사일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금속가루로 흩어져, 대기에 섞여 날아가버렸다.
  케이프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회색  구형의  물체는 [폴리스]호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 바닷물에 닿자 구형 물체에서 작은 안테나가  몇개  튀어나왔고, 물체는 곧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공격통제실의 커다란 레이더 스크리인을  쳐다보던  [폴리스]호의 함장 마틴은 잠수함 바깥쪽에서 우지직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 스핑크스의 공격인가? ‘ 
  다음순간 그는 공격통제실의 벽이 그를 향해서 맹렬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잠수함 벽이 종이장처럼  짜부러졌지만 바닷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을 내리누른 것은 엄청난 얼음덩이였다. 
  회색 구형의 물체는 바닷속 10미터에서 폭발했다.  주위의 열에너지를 순식간에 흡수하는 냉각폭탄은 반경 1킬로미터의 바닷물을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여섯척의 원자력 잠수함과, 근처에 있던 몇척의 선박은  아이스크림  속의 건포도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잠수함의 외벽은 얼음의  압력에 나뭇잎처럼 납작해지고, 선박의 갑판은 번데기처럼  주름잡혀버렸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타이거 특공대 – 미 육군의 공식명칭은 육군 제 115  특수부대였지만 이 부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타이거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 부대장 존  스타인웨이 대령은 훈련지휘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와서 아틀란티스인의 방송을 들었다. 모스크바에 핵미사일이 떨어지고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지만 존은 자신의 임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존 자신도 외계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될줄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의 임무는 미국을 위협하는  모든  적의 격퇴였다. 
  그는 휴대용 무전기로 기지 전체에 비상을 걸었다. 통신은 두절되었지만 스핑크스도 휴대용 무전기의 통신은  방해하지 못했다. 5분내에 타이거 특공대의 모든 군인들이 공격준비를 마치고 공격용 에어크래프트에 탑승했다. 공기를 아래로  내뿜어 그 힘으로 추진되어 물이든 땅이든 가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에어크래프트는 특공대의 수송수단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존은 자신이 스핑크스를 쳐부수고 장군으로 진급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사방에서 지구를 구한 영웅이라고 떠받들  것이고 곧 육군 참모총장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을 꿈꿀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의  타이거 특공대는 뉴욕시 근교에 위치해 있었다. 
  그와 부하 참모들은 타이거 특공대의 무기를 점검했다. 타이거 특공대는 보통의 특수부대와 달랐다. 세계대전시  모스크바로 진격해 소련 대통령과 지도부를 생포하는 것이  타이거 특공대의 임무였다. 따라서 타이거 특공대가 미국 최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스핑크스가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가까이 가면서 존과  타이거 특공대원들은 스핑크스의 공격이 전혀  없는데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다못해 정찰용  로봇이라도  나타나야 하는게 아닌가. 특공대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형 핵기관총을 움켜쥐었다. 
  " 우리가 기관총에 핵폭탄을 장진해 다닌다는걸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을거야. 그나저나 기관총알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핵폭탄은 어떻게 만든거지? "
  긴장감을 떨쳐버리려 한 대원이 중얼거렸다. 
  " 핵폭탄은 폭발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크기가 있는데 방사능원소의 원자번호가 커지면서 최소한의 크기가 작아져.  이걸 임계질량이라 부르는데 원자번호 92인 우라늄은 10킬로그램인데 반해서 원자번호 95인 아메리슘은 단 5그램으로도 훌륭한 핵폭탄이 될 수 있지. "
  전에 물리 선생을 했었다는 특공대의  상사가  대답했지만 특공대원들의 눈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스핑크스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스핑크스는 정찰로봇을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뉴욕의 교통을  제어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한 교통통제용 텔레비전 카메라가 스핑크스의 충실한 감시자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특공대는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페트로 섬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스핑크스는 아무런 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존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너무나  평온했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그에게는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쉭-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후추냄새가 특공대를감쌌다. 이건 뭐야,하고 중사가 말했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손등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부어오른 팔뚝과 다리의 압력에 못이겨, 질긴 군복이 후두둑 튿어졌다. 특공대장  존은 쓰러진 한 대원을 일으켰지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차라리 피범벅이 된 고깃덩어리였다. 곧 존도 골수를 궤뚫는 고통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대원들의 노출된 피부는  흐느적거려, 마치 고깃간의 돼지고기와 비슷하게 보였고  토해놓은 토사물과 배설물에 범벅이된 대원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형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틀란티스인에 대한 인류의 저항은 꽤나 완강했지만 많은 희생자만 남겼다. 세계에 퍼져있던 미국군과 소련군, 그밖의 각 나라의 군대가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공격을 가해왔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의  인공위성은 이미 스핑크스에게 장악되었고, 세계  어느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도 모두 이들 인공위성에게 탐지되어 스핑크스에게 진압되었다. 스핑크스는 이미 반경 수킬로미터내의 바닷물을  거대한 빙산으로 만들어버리는 냉각폭탄, 금속을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역자장포, 사람을 단백질의 덩어리로 분해해버리는 무서운 화학무기를 만들어놓았고, 아틀란티스인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나라에게는 상공의 오존층을 파괴해버렸다. 
  오존층이 파괴된 나라는 자외선때문에 농작물이  말라죽고 산의 나무는 자라지 않았으며 사람과 동물은 자외선에  살갗이 타서 피부암에 걸려 죽어갔다. 스핑크스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플로리다주, 텍사스주,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은 오존층의 파괴를 받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소련은 핵미사일로  전멸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3억 인구중 5천만도 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원자병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한국도 한달씩이나 저항했다. 스핑크스의 접속을 거부했던 한국은 오존층이 뚫리는 대신 사람을 녹여버리는 화학무기의 공격을 받았다. 1억이 넘던 한국 인구는  7천만까지  감소했고, 결국 한국정부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처음에는 한국처럼 저항했지만, 이틀도 못가서  아틀란티스인에게 항복했다. 더우기 항복 후에는 스스로  스핑크스의 앞잡이가 되어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협력했다.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홀로비전 화면에 나타난지 한달후인 6월 25일에 최후까지 저항하던 한국정부가  스핑크스에게 항복함으로서 아틀란티스인은 전 지구를 점령했다.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점령하고  [올림포스]라는  이름의 세계국가 – 사실은 아틀란티스인의 식민지 -  를  건설했다. 세계는 300여개의 작은 지구로 나누어졌고 각각의 지구는 세자리 번호로 표시되었다. 가장 먼저 항복하고  스핑크스에게 협조적이었던 일본은 001지구, 소련은 유럽지역이  128지구, 시베리아 지역은 129지구로  나뉘었다.  미국은  서부지역이 231에서 237지구로 나뉘었고, 중부는 238지구에서  241지구, 동부는 242지구에서 249지구로 나뉘었다. 끝까지 버텼던  한국은 337지구가 되었다. 
  각 지구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이고 평등했다. 각  지구의 행정은 [코스모스]라는 이름의 통치기구가 담당했다.  [코스모스]의 우두머리는 스핑크스가 파견한 총독이었으며 아틀란티스인이었다. 지구인은 부총독자리를  맡았으며,  협조적인 지구인이 주로 부총독 자리를 맡았다. 그리이스 신화의 전쟁의 신 이름을 딴 [아레스]라는 비밀경찰도 결성되었는데, 주로 아틀란티스인에게 협조적인 일본인과 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아레스]는 스핑크스에게 반항하는  지구인을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은 재판없이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외계인에게 점령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인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스핑크스는 지구인이 복종하지  않을때는 가혹한 복수를 가했지만, 일단 지배에 협조하면 지구인의 생활이 나아지도록 최대한 도왔다. 스핑크스는 인류가 걱정했던 공해문제를 해결했으며, 방사능 오염이 없이  원자력을 얻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유전공학을 이용, 쌀과 밀의 생산을 다섯배로 늘렸으며, 내성을 갖지 않고  효과가  10배나 뛰어난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했다. 불과 1년안에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Part VI 문무왕릉의 비밀

  2001년 8월 21일 문무왕 수중릉. 
  햇살은 금방이라도 살갗을 태울듯이 이글거렸지만, 바닷물은 맨살로는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차고 맑았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만 같은 낡은 모터보트에 탄 다섯명은 보트 한구석에 놓여있던 잠수복을 집어들었다. 
  " 이번이 벌써 스물여섯번째 잠수예요. 우리는 괜한  고생을 하는 것 아닌가요? 수백년전의 [유기]라는 역사책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
  소연은 이렇게 투덜거렸지만 잠수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금발머리의 여자는 묵묵히 자기 잠수복에  압축공기탱크를  달 뿐이었다. 옆에 있던 혜진이 소연을 달랬다. 
  " 그래도 스핑크스를 무찌를 희망은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스핑크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던 자유의 여신상 지하에서의 일을 잊지는 않았겠죠? 더우기 소연씨와  나의  조국인 한국은 아틀란티스인에게 끝까지 버티다  무려  3천만명이나 희생당했어요. 물론 희생자중에는 나의 부모님과 동생도  포함되어 있어요. 소연씨의 아버님도 돌아가셨잖아요? "
  소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압축공기탱크를 다 단  금발머리의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수장비를 최종점검했다. MIT에서 수많은 컴퓨터를 다루었던 영상은 보트 한구석에  설치된 휴대용 컴퓨터를 조작해서 수온과 깊이를 측정했다.  영훈은 잠수복을 다 입고 잠수모만 벗은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연은 그런 그를 보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노래가 나오나요, 영훈씨? "
  영훈은 고개를 돌려 소연을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 스핑크스가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노래를  못부를테니까 미리 불러둬야지, 안그래? "
  영훈은 소연을 향해 한번 웃어보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은 그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채였다. 
  ‘ 과연 이 금속판은 어떤 구실일까. 외계인의  비밀기지의 열쇠일까. ‘
  생각의 늪에 빠져있던 영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 영상이, 이 금속판에서 전파가 나오나 확인해주게. "
  영상은 작은 테스터를 이리저리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약한 전파가 나오고 있어. 그런데 그게 왜? "
  " 영상이, 지금부터 내가 이 금속판을 이리저리  돌려볼테니 전파의 크기가 달라지나 봐주게. "
  영훈은 반소매 셔츠자락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은  후 금속판을 이리저리 돌렸다. 곧 영상의 손이  금속판을  잡았다. 
  " 바로 이 방향이야. 방향이 맞으니까 엄청난 전파가 튀어나오는데? "
  " 바로 그걸세. 이건 외계인의 비밀기지를 가리켜주는  방향탐지기야. 목표에 가까와지고 방향이 맞을수록 더욱 큰 전파를 내뿜는. "
  일동의 입에서 환성이 올랐지만 소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영훈은 소연을 제외한 세명에게 잠수복을  입으라고 하고는 자신도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 이번에도 또 내가 빠지는건가요? "
  소연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영훈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누군가는 이 배를 지켜야 할 것 아냐? "
  ‘ 소연, 우리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란말이야. 난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귀여운 꼬마아가씨야. 네가 날 따라 스핑크스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널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거고. ‘
  ‘ 흥, 처음부터 영훈씨는 날 탐탁치 않게 여겼던거야. ‘
  영훈은 아틀란티스인이 쓰던 은빛 광선총을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수중에서도 쓸수 있는 초음파  무전기도  함께였다. 금발머리의 여자는 초음파 무전기를 집어들어 자신의 잠수복 안에 달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그녀는 왼팔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혜진이 그녀를 부축해 셔츠를 벗기고 그녀의 왼팔을 살폈다. 다친지 오래되어보이는  꽤  큰 흉터가 남아있었다. 
  " 나를 스핑크스에게서 구출하려다 다친 상처… 왜  그동안 말을 안했어요? "
  " 괜찮아요. 가끔씩 상처가 다시금 아파오곤  해요.  조금 쉬면 금방 괜찮아질거여요. "
  영상은 금발머리의 여자에게 작은 나침반 같은 장치를  내밀었다. 
  " 이건 뭔가요? "
  " 잠수한 우리를 찾아낼 수 있는 추적장치입니다.  우리의 잠수복에서 발사되는 전파를 찾아 방향을 가리켜주죠.  만약 우리가 수중에서 구조신호를 보낸다면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
  영훈과 혜진, 영상은 잠수복을 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보트의 수중음파탐지기는 세사람의 위치를 화면에 표시했다. 소연은 금발머리의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 어떻게 여기가 외계인의 비밀기지라고 생각했죠, 아리오네? "
  아리오네는 왼팔을 약간 문지르며 소연을  향해  웃어보였다. 
  " 우리 CIA는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유기]  역사책의 내용을 입수했어요. 거기에는 신라 내물왕 42년 5월에  경주 앞바다에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다가 떨어져 죽고 그  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한 그 자리에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짐승들이 섬을 만들었고, 그 섬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되어  있어요. 아까 영훈씨가 들고 있던 금속판은 바로 그때 발견되어서 고구려에 바쳐진 거여요. 우리 CIA는 [유기]의 그 구절이 외계인들의 비밀기지 건설 현장을 묘사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
  아리오네는 수중음파탐지기를 쳐다보았다. 잠수한  세사람을 나타내는 세개의 파란 점은 정상적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 나는 스핑크스가 나와 혜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혜진씨는 아테니움이라는 물질때문에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어떤 이유때문에 노리는걸까?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스핑크스가 나를 노리는 것은 바로 그 금속판이었어요. 그 금속판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어떤 비밀기지의 열쇠인거죠. "
  물결이 조금씩 높게 일었다. 닻도 없이 서있는 작은  모터보트는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심한 것은 아니었다. 
  " 스핑크스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스핑크스를 따돌릴 궁리를 했어요. 그래서 인공혈액과 뇌파정지기를 만들었지요. 스핑크스의 명령에 따라  나를 죽이려 했던 영카우는 내 주머니 안에 있던 인공혈액 주머니가 터져서 흘러나오자 내가 피를 흘리고 죽은 줄  알았지요. 나는 뇌파정지기를 사용해서 인공적으로 뇌파와  심장박동을 정지시켰지요. 영카우는 내 심장박동과 뇌파를 휴대용  응급장치로 재서 스핑크스에게 보냈고, 스핑크스는 내가  완전히 죽은 것으로 알았죠. 그 덕분에 나는  스핑크스의  감시에서 벗어나 혜진씨를 보호할 수 있었죠. 혜진씨를  구하러  가는 바로 그 시간에 영훈씨와 소연씨, 영상씨가 스핑크스에 침입했고 우리는 스핑크스의 비밀을 알아냈지요. "
  물결이 점점 더 세져갔다. 아리오네는 보트 조종간 아랫쪽에 눈에 띄지 않게 달려있는 작은 단추를  눌렀다.  징-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 덮개가 튀어나와 보트 전체를 감쌌다.  이제 어떤 파도가 덮쳐도 배안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 그나 저나 이렇게 파도가 점점  높아지는데  영훈씨들이 걱정이군요. "
  배 오른쪽에 설치된 시계가 잠수 한시간을 가리켰다. 영훈이 가져간 잠수장비는 두시간까지 버틸 수 있다. 예비  산소탱크까지 사용하면 두시간 반은 괜찮을 것이다. 
  " 나는 원래 CIA 소속이었기 때문에 기밀  자료에  접근이 가능했지요. 스핑크스는 나를 살해하려 한 후에 세개의 인공위성을 발사했어요. 놀랍게도 이 인공위성은 모두 경주 앞바다, 그것도 문무왕 수중릉을 감시하도록 되어있었어요. 아무런 과학적 군사적 가치가 없는 문무왕 수중릉을 왜 스핑크스가 세개의 인공위성을 보내 감시하겠어요? 스핑크스가  두려워하는 뭔가가 여기 있는게 틀림이 없어요. "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오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았다. 
  " [삼국유사]에 보면 신문왕때 푸른용이 섬을 떠받들고 감포 앞바다에 나타나 신문왕에게 피리를 바쳤다고 되어  있어요. [유기]의 기록과 [삼국유사] 모두 갑자기 나타난 섬, 그리고 쇠로 만든 새나 용의 이야기가 나와요. 바로  그자리에 신라의 문무왕이 수중릉을 만들었고요. 물론 문무왕이야  미신적인 요소에서 수중릉을 만들었지만, 만약 외계인의  비밀기지가 경주 앞바다에 있다면 문무왕 수중릉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많아요. "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영훈에게  삐쳐있었던 소연도 그들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계는 잠수 한시간 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예비 산소탱크까지 포함해서 한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올 시간을 알리려고 초음파 무전기를 켰던  소연은 무전기에서 칙칙-하는 잡음밖에 들을 수 없었다.  수중음파탐지기를 쳐다보던 아리오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세사람을 나타내야 할 파란 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닷속은 생각보다는 맑지 않았다. 이미 스물다섯번의  잠수에 익숙해져 있는 영훈들이지만 이번의 잠수는 조금  색달랐다. 영상은 손에 작은 전파계를 들고  금속판에서  나오는 전파를 점검했다. 예상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갈수록  전파는 점점 강해졌다.
  전파는 바닷속 100미터로 잠수할 때까지 강해졌다. 그들이 입고 있는 특수 잠수복은 150미터까지 괜찮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영훈은 초음파 무전기로 영상을 불렀다. 그러나 무전기에서는 삑삑거리는 잡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 고장인가? 이상하군. ‘
  영훈은 손짓으로 영상을 불렀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들이 가진 다른 통신장비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디에선가 전파장애가 있는걸까? 설마 스핑크스의 공격은 아니겠지? ‘
  영훈은 바다위의 소연과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무전기는 계속 이상한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영훈은 초음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상당히 규칙적임을 알아차렸다. 길게, 짧게 들려오는 삑삑거리는 소리는 모르스부호와 비슷했지만 모르스부호는 아니었다. 모르스부호는 긴  소리 ( — )와 짧은 소리(  )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소리는 아주 긴소리, 중간소리, 짧은 소리의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 이 근처에 외계인의 기지가 있음에 틀림이 없어. ‘
  부지직- 소리를 내며 영상이 들고 있던  전파계가  망가졌다. 너무센 전파가 방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조금씩 밝아졌다. 
  ‘ 이 깊은 해저에 빛이 있을 리가 없는데… ‘ 
  영훈은 푸른빛이 자신이 들고 있던 금속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향을 바꾸니 빛은 점점 약해졌다. 그는 빛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점점 깊이 잠수해갔다. 영훈과 교신이 되지 않았지만 영상과 혜진도 영훈의 뜻을 알고 같이  잠수를 계속했다. 잠수복에 설치되어 있는 노란색의  심도계는 붉은 핑크빛으로 변해있었다. 해저 120미터였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던 곳에는 강력한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모든 전자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심도계도 12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잠수하고 있던 곳은 해저 170미터였다. 
  영훈은 갑자기 온몸을 쥐어뜯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무겁게 내리눌리는 기분이었다.  영상과 혜진도 영훈보다는 약했지만 온몸에 압력을 느꼈다.  눈앞에는 거대한 해저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는  길게  자란 해초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영훈은 동굴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희미하게 반짝이는것을 보았다. 분명 금속성 반사광이었다. 
  ‘ 일단 위치를 알았으니까 돌아가서 좀더 강력한 잠수장비로 바꾼 후에 오는 것이 나을거야. ‘
  영상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보았다. 잠수 2시간째. 여기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30분안에 돌아가기는  힘들다. 그는 혜진과 영훈에게 시계를 들어보였다. 아직도  고통은 계속되었고 통신은 두절되었지만 영훈과  혜진은  영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도 산소부족으로 죽지않고 돌아갈  수  있을 확률은 20%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는  영훈과  혜진에게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어차피 죽을 확률이 많으니 그냥 동굴 탐사를 계속하겠냐고 묻고 있었다. 영훈과 혜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해저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훈의 손안에 있던 금속판이 푸른빛에서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잠수하고 있던 깊이는 이미 해저  200미터를 넘어섰다. 영훈들은 엄청난 압력을 몸으로  느꼈다.  온몸의 피가 모두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해저동굴을  10미터정도 남겨놓고 그들은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리오네와 혜진은 수평선을 초조히  응시했다.  잠수한지 이미 세시간, 그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잠수복을 준비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이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리오네와 혜진은 네시간정도 버틸 수  있는  산소탱크를 집어넣었다.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빼앗은 광선총도  세심하게 방수처리를 한 다음 어깨에 메었다. 투명덮개를 열고 잠수준비를 하던 소연은 수평선 너머에서 두개의 검은 점을 발견했다. 
  " 저거봐요. 혹시 영훈씨들이 아닌가요? "
  순간 지평선쪽에서 섬광이 번쩍였고 그녀들 근처의 바닷물이 높게 튀어올랐다. 광선총 공격이었다. 아리오네가  CIA의 정보원답게 소연을 밀쳐내며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들이 타고 있던 보트는 큰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부서진 조각들이 후두둑 튀어 바닷물로 떨어졌다.  아리오네는 방수처리가 되어있는 광선총을 꺼내어 응사했다. 
  검은 점은 이쪽으로계속 다가왔다. 지구인이 타고있는 호버크래프트였다. 비밀경찰 [아레스]의 공격임에 틀림없었다. 한척의 호버크래프트가 아리오네와 소연이 쏜 광선총에 맞아 폭발했지만 다른 한척은 계속 공격을 가해왔다. 
  " 도대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맞아, 스핑크스는 문무왕 수중릉 상공에 세개의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있었지. "
  아리오네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호버크래프트와 광선총 공격을 주고받았다. 소연이 몸을 비틀며 쏜 광선총이 호버크래프트의 엔진부분에 맞아 큰 폭발을 일으켰다.  타고 있던 [아레스]대원의 팔이 폭발로 날아가 소연의 눈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높이 질렀다. 잘라진  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소연의 얼굴에 묻었다. 소연은 공포에 질려서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리오네는 그런 소연을 마구 흔들었다. 
  다시 은빛 섬광이 반짝이며 그녀들 뒷쪽에 떠있던  보트의 잔해가 다시 폭발했다. [아레스] 한명이 살아서 헤엄치며 이쪽으로 광선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소연과 아리오네도  얼굴만 물밖으로 내밀고 광선총으로 응사했다.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소나기를 마구 뿌려댔다. 한편으로는 높이 일렁이는 파도와 싸우며 소연들은 [아레스] 대원과 계속 맞싸웠다. 차가운 동해 바닷물에 오래 있으려니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두워진 하늘때문에 공격목표인 [아레스]대원이 잘  보이지 않았다. 광선총 발사의 섬광으로 적의 위치를 간신히  알 뿐이었다. 
  " 소연씨, 잠깐 사격을 멈추어보세요. "
  이쪽에서의 사격이 멈추자 [아레스] 대원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쪽도 이쪽의 위치를 광선총 발사의  섬광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쪽의 사격이 멈춰지자 이쪽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라오네와 소연은 천천히 물밑으로  잠수했다가 옆으로 한참 이동한 다음에 떠올랐다.  소나기가  오는 바다에서는 이쪽도 [아레스]대원을 찾지 못했지만 그도 이쪽의 위치는 모르고 있다. 
  ‘ 제길, 어디 있는거야? ‘
  [아레스] 대원은 신경질적으로 주위에 광선총을  난사했지만, 발사의 섬광을 포착한아리오네와 소연이  그를  조준해 사격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리오네와 소연은 천천히 물속으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비록 영훈들이 잠수한지 네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들로서는 영훈들이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리오네는 영상에게서 받았던 나침반 모양의 추적장치를 작동시켰다.

  Part VII 무우대륙과 초자아 컴퓨터 [엑스컬리버]

  ‘ 여기가 어디지? ‘
  영훈은 고개를 들었다. 물기에 젖어 있었지만 해저동굴 안에는 분명 물이 빠지고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붉은  색으로 빛나는 금속판은 아직도 영훈의 주먹에 쥐어진 채였다. 그는 잠수장비를 벗어제치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영상과 혜진은 보이지 않았다. 
  ‘ 다들 죽었단 말인가? ‘
  영훈은 해저동굴 안을 자세히 살폈다. 동굴은 S자  형태로 바닷속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왔고, S자의 중간부터는 물이 없이 공기가 가득 차있었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바닥은  거친 바위에 돌멩이가 조금 흩어져 있었고, 사람이 살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지만 견디지  못할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세웠다. 동굴안에 바람이 있는가 느끼려는 것이다. 약하지만 동굴안의 공간 안쪽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잠수복의 주머니에서 조명등과 광선총을 꺼냈다.
  동굴 안쪽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광선총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고 안쯕으로 낮은 포복을 하고  기어갔다. 전에 특수부대에서 받은 훈련이 이처럼  도움될줄은 몰랐다. 
  안쪽으로 조금 기어들어가니 길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신음소리는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그는 왼쪽 길에 표시를 해놓고 오른쪽으로 포복을 계속했다.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주 희미한 빛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 두줄기가 가로로 비치고 있었다. 
  ‘ 침입자 탐지기인가? ‘
  그는 돌멩이를 하나 들어 빛줄기에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돌멩이는 순간적으로 빨갛게 달구어 떨어졌다. 땅에 떨어져 검게 그을린 돌멩이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났다. 
  ‘ 하마터면 오징어 통구이가 될뻔했군. 그러나 이곳을  어떻게 지나가지? ‘
  그는 주위의 벽을 천천히 만졌다. 흙이 달라붙은 동굴  벽 한쪽이 약간 움푹파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벽에 달라붙은 흙과 마른 해초를 뜯어냈다. 곧 금속으로 된 인터폰 모양의 물체가 나타났다. 물체의 가운데에는 길다란  홈이  파여 있었다.
쥐고 있던 금속판을 천천히 홈에 밀어넣었다.  징-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를 가로지르던 열선이 끊겼
다. 그는 다시한번 돌멩이를 던졌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통과했다. 
  ‘ 이 금속판이 이곳의 열쇠 구실을 하는 모양이군. ‘
  그는 다시 포복을 하기 시작했다. 배를  완전히  땅바닥에 깔고 움직이던 그의 손바닥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금속성의 조그만 압력스위치였다. 그는 특수부대의 훈련  당시에 압력스위치에 대해서 배운 것을 기억하려 애썼다. 
  ‘압력스위치는 지뢰등에 쓰이는 스위치로, 압력의 변화에 따라 폭탄등을 폭파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이  압력스위치는 누를때는 괜찮고, 눌렀다가 떼는 순간에 작동을 하므로,  이런 스위치를 눌렀을 때는 일단 누른 채로  가만히  있는채로 압력스위치를 분해해야 합니다. ‘
  그는 스위치를 누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 지뢰도 아니고 외계인이 만든 압력스위치를 어떻게 분해한다? ‘
  신음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다. 영훈은 한손으로는  압력스위치를 누른 채 다른 손을 더듬어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손을 빼내며 동시에 압력스위치  위에  돌멩이를 얹었다.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살며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는 다시한번 주위를  살폈다.  신음소리는 모퉁이 저쪽에서 나고 있었다. 광선총을 빼들고 모퉁이를 돌아선 그는 아랫쪽에 있던 주먹만한 돌멩이에 걸려  고꾸라졌다. 
  그의 발에 걸린 돌멩이는 데굴데굴 구르며 영훈이 다른 돌멩이로 막아놓았던 압력스위치쪽으로 굴러갔다. 영훈은 순간적으로 둥그렇게 웅크리며 모퉁이 뒷쪽으로 몸을 던졌다. 탄력성있는 고무공처럼 그의 몸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굴러가던 돌멩이가 압력스위치에 맞았다. 곧 동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오래된 암석으로 된 동굴의 돌 부스러기가 그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그의 머리위를 지나가는 희미한 빛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금속판을  홈에 밀어넣었고 광선은 곧 사라졌다. 
  또 다시 두갈래 길이 나왔다. 영훈은 귀를 기울였지만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갈림길에 표시를하고 왼쪽을 선택했다. 한 20미터정도 갔을까, 벽은 막혀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징-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지나온 동굴위에서 암석문이 내리닫히고 있었다. 그는 발을 모았다가 최대한의 탄력을 가지고 내려오는 문에 몸을  던졌지만 문이 닫히는 것이 조금 먼저였다. 그의 머리가 암석으로  된 벽에 부딫쳤다. 머리를 만진 그의 손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만져졌다. 피였다. 
  ‘ 제기랄. ‘ 
  아랫쪽에서 쉿-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뿌연 연기가 바닥에서 위쪽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 독가스! ‘
  그는 차오르고 있는 가스가 독가스라고 느꼈다. 영훈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들어왔던 동굴은 암석문으로  막혀있었고, 나머지는 동굴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갈데라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는 광선총을 벽에 들이대고  최대출력으로 쏘았다. 쾅-소리와 함께 암석문이 날라갔지만, 그  뒷쪽에는 
정체를 알수 없는 푸른빛 합금벽이 버티고 있었다. 
  ‘ 원래 이 통로는 외계인들이 쓰던 통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도 금속판을 넣어서 열 수  있게  해놓았을 것이다.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30초. 그 안에 찾아내야 한다. ‘
  점점 숨이 가빠왔다. 그는 벽을 있는대로 더듬었지만,  금속판이 들어갈만한 홈은 아무곳에도 없었다.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왔다. 물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영훈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작은 숨을 들이켰다.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많이 들이키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영훈은 땅바닥에 뒹굴었다.  뿌연 연기는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뒹굴던 그의 손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벽에 붙은 흙을 재빨리  떼어내니 작은 홈이 나타났다. 빨간색의 램프가 켜져있었다. 
  눈앞이 희미해졌다. 반쯤 장님이 된채 그는 손끝의 감촉만으로 금속판을 홈에 밀어넣었다. 그는 보지 못했지만,  빨간색의 램프는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막다른 곳으로 보였던 끝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건가? ‘
  의식을 차린그는 주위를 살폈다. 저만치  옆쪽에  혜진과 영상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팔에 큰 화상을 입고 있었다. 두사람은 영훈이 들어온 곳과 다른 출입구를 통과하다가 열선에 팔을 다친 모양이었다. 혜진은 고개를  들어  영훈을 알아보았지만 워낙 큰 부상이라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두사람이 쓰러진 곳 뒤쪽으로는 엄청난 양의 기계가  가득차 있었다.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우주선 안이 보통 이렇게 생겼지만, 사진으로 본 스핑크스보다도 더 많은 기계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튜브같이 생긴 기계도 몇개 있었고, 한쪽 벽면은 각종 스크린으로 가득차 있었다. 
  영훈은 쓰러진 두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워낙  피를  많이 흘려 두사람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영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들릴락말락하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 이 방안에 있는… 건 거의 다  컴퓨…터일세.  그것도 내…가 본 컴퓨터중…에서는 최고의 것…이야.  물론  스핑…크스보다는 못…하지만. 나와 혜진씨는… 이미… 틀렸어… 자네가 이걸… 작동해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에게서 지…구를 구해주게… "
  영상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금속으로 된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과다한 출혈로 인한  쇼크 때문에 두사람의 몸은 끊임없는 경련을 일으켰다. 
  영훈은 스핑크스가 있던 자유의 여신상에서 도망친  1년을 생각했다. 영훈들이 스핑크스의 정체를 안 다음날로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를 점령하고 [올림포스]라는  아틀란티스인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영훈과 영상, 혜진,  아리오네, 소연은 비밀경찰 [아레스]에게 쉴새없이 쫓기면서도  어딘가에 있을 고대인의 비밀기지를 찾으려 애썼다.  지구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간신히 찾았건만 영상과 혜진 두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훈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스핑크스 내부에서의  위기도 같이 헤쳐나온 두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영훈을 괴롭혔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쥐고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 스핑크스는 뭐고 아틀란티스인은 또 뭐야! 도대체  뭔데 이제 나타나서 우리 지구인을 괴롭히는 거야!  이  빌어먹을 비밀기지는 또 뭐냔말이다! "
  영훈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이때까지 간신히  버텨오던 의지가 죽어가는 두사람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그는 머리 한구석에서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 지구인이여... 당신은 이 기지의 주인입니다. 주 컴퓨터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
  영훈은 잽싸게 주위를돌아보았지만,  사람이라고는  그들 세사람밖에 없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오는 느낌이었다.
  [ 지구인이여. [엑스컬리버]는 당신의 정신에 감응하는 컴퓨터입니다. 명령은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텔레파시로 조종하는 정신감응 컴퓨터! 지구인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었고, 스핑크스조차 이룩하지 못한 고도의  기술! 어쩌면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이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엑스컬리버, 먼저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
  [ 제 1번, 3번 의료튜브를 이용하면  됩니다.  1600년동안 작동하지 않아서 2번과 4번은 고장이지만 1번과 3번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완치에는 3시간정도면 될  것입니다. ]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튜브같이 생긴 기계가 열렸다.  그는 쓰러진 두사람을 튜브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곧  유리관 안으로 각종 전선과 주사바늘이 꽂혔고, 황갈색 액체가 관을 가득 채웠다. 
  " 엑스컬리버, 대답하라. 너의 정체를, 그리고 이  기지의 정체를. 또 왜 네가 내 명령에 따르는지를."
  두사람을 튜브에 넣은 영훈은 털썩 주저앉으며 엑스컬리버에게 물었다. 그의 정면에 있던 가장 큰  스크린이  켜졌다. 화면에는 동그라미안에 M자를 넣은 문양이 나타났다. 
  ‘ 저건 무우대륙의 문양! 그렇다면 이곳은 전설에  나오는 무우인의 기지란 말인가. ‘
  그는 기자 시험을 볼 때 공부했던 무우대륙에 대한 지식을 다시 기억했다. 태평양에 있었다는 전설의 대륙 무우.  동그라미 속에 M자를 넣은   모양의 문양이 태평양 해저의  고대 유적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은 대서양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태평양에도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무우대륙이 존재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영훈은 스핑크스에 침입했을 때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빼냈던 단어들을 기억해냈다. ‘역자장포’,'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인류 말살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라는 단어들이었다. 분명히 스핑크스는 무우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화면에는 커다란 지도 한장이 비춰졌지만  화면에  나타난 지도는 지금의 세계지도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지금보다 조금 가까이 붙어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 사이에 인도만한 크기의 대륙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에 그린란드보다 더 큰 땅덩어리가  표시
되어 있었다.  
  " 이건? "
  [ 약 3만년 전의 지구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 사이에 있었던 것이 우리 무우인이 살던 무우대륙이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었던 것이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이 있던 아틀란티스 대륙입니다. 엑스컬리버는 무우인이 세운 비밀기지의 주 컴퓨터입니다. ]
  " 비밀기지? "
  엑스컬리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많은 우주선과 미사일, 그밖에  영훈이 알지 못하는 신무기들이 불을 뿜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몇대의 우주선에는 영훈이 스핑크스 안에서 본 파란 머리카락의 미이라가 타고 있었다. 다른쪽의 우주선은  무우인이 타고 있었다.  
  날아가던 우주선에 광선포가 사격을 개시했다. 보랏빛  광선이 하늘을 갈랐다. 광선에 맞은 우주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로 흩어져 버렸다. 영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 저건 역자장포! ‘
  영훈은 역자장포를 본적이 있었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소련의 핵미사일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은 역자장포로  간단히 물리쳤던 것이다. 
  가슴에    문양이 그려진 붉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광선총을 들고 돌격해 들어갔다. 놀랍게도 무우인의  전사들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대단한 기술이군,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늘을  날다니. 중력을 제어하는 것일까? ‘
  영훈이 감탄하는 동안 화면에서는 쉭-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황색의 가스가 뿌려졌다. 광선총을 쏠 기회도 없이  무우인들의 살갗은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올랐고, 곧 녹아  흘러내렸다. 쓰러진 그들은 토사물과 배설물을 쏟아냈다. 살갗이 몽땅 녹아버려, 붉은 기가 도는 단백질  덩어리로  변해버린 이들이 얼마전까지 인간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 저건 단백질분해 바이러스! ‘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뽑아냈던 단어들이 점점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류 말살계획’과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란 말은? 그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엑스컬리버의 설명이 이어졌다.
  [ 무우인은 지구인의 직계조상으로 약 20만년전에 처음 지구에 나타났고, 무우대륙에서 문명을 형성한 것은 약  4만년 전의 일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3만년전에 무우대륙은 최고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현재 지구인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핵융합 에너지의 합성에 이미  성공했고,  정신으로 감응하는 정신감응컴퓨터를 만드는데도 성공했습니다. ]
  화면에 거대한 컴퓨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방에 설치되어 있는 엑스컬리버의 열배쯤 되어보이는 큰 규모의  컴퓨터가 세개 설치되어 있었다. 
  [ 세개의 컴퓨터는 서로 이어져 하나의  컴퓨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우대륙의 주 컴퓨터의 이름은  [에호바]입니다. ]
  영훈은 뒤통수를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에호바]는 [여호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 아틀란티스 대륙의 주 컴퓨터였고, 아틀란티스가 멸망한 후 바이러스의 유전자 속에 숨었다가 스핑크스로 부활한  컴퓨터의 이름은 [싸이탄]입니다. [싸이탄]의 능력은 [에호바]의 천배에 달합니다. ]
  이제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싸이탄]은 [사탄], 바로 성경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이 아닌가.
  [ 놀라셨지요. 세계에 퍼져 있는 홍수의 전설은  아틀란티스 대륙과 무우대륙의 멸망이 전해진 것입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무우인에게서 [에호바]란 단어가 전해져 기독교의 신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인간의 조상인 무우인을 멸망시킨 [싸이탄], 즉 [사탄]은 악마의 이름이 되었지요.  아틀란티스와 무우의 대전쟁이 전설로 내려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
  뒷쪽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영훈의 뒷편 오른쪽에  있던 세개의 화면이 일제히 켜졌다. 영훈이 들어온 해저동굴로 잠수복을 입은 두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신감응으로  전해오는 엑스컬리버의 음성이 영훈에게 들렸다.
[ 침입자 발생. 침입자에게서 생명반응 있음.  지구인으로 추측. 3,7,8번 방어장치 작동. 전원 사살하겠음. ]
  화면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훈은 그들이 입고 있던 잠수복을 알아보았다. 분명히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소연과 아리오네였다. 
  " 멈춰, 엑스컬리버. 저들은 우리의 동지다. 스핑크스에게서 쫓기고 있단 말이야. "
  등 뒤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조그만 소리가 나며  엑스컬리버의 소리가 들려왔다.
  [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의 주인인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방어장치를 해제하고 침입자를 컴퓨터실로  안내합니다.  12번 동굴에서 물을 뺌. 4번, 9번 출입구 개방.  ]
  ‘ 소연과 아리오네가 왜 해상에서 이리로 들어오려는걸까? 혹시라도 스핑크스의 비밀경찰 [아레스]가 우리를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두사람이 무사한 것에, 특히 소연이 안전하다는데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는 의료튜브 안을 살폈다. 유리관을 채웠던 황갈색 액체는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두사람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출혈은 멎었고, 상처도 점차 아물고 있었다. 엑스컬리버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 기원전 3만년전에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에 정착하고는 급속히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나타나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운나쁘게도 그들의 과학력은 우리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
  ‘ 음… ‘
  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광선총을 겨누며 들이닥쳤다. 영훈은 무의식적으로 손을들었다가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렸다. 소연과 아리오네였다. 두사람은 방안의 컴퓨터 시설과 영훈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했다.  영훈은 두사람에게 엑스컬리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리오네의 얼굴이 어두워져갔다. 
  ‘ 스핑크스가 이곳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핑크스가 두려워하는 어떤 것이 이곳에 숨어있을 줄 알았어. 이곳에만 오면 스핑크스를 이길 무기가 있을줄만 알았는데 , 엑스컬리버를 만든 무우인들도 스핑크스에게 멸망했다면  엑스컬리버를 가지고 스핑크스에게 이길 수가 없잖아. ‘
  의료튜브쪽에서 작은 물체가 튀기는듯한 톡톡-하는 소리가 긴장한 영훈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의료튜브안의 액체는 짙은 파란색으로 바뀌어있었고, 언제  다쳤느냔듯이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었다. 곧 튜브의  문이  열리며 혜진과 영상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리오네와 소연이 달려가 그들을 안아일으켰다. 축늘어진 눈까풀을 약간 떨며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구만. "
  영훈은 혜진과 영상에게 다시 설명했다. 해저동굴에  들어와서 엑스컬리버를 발견한 이야기,  엑스컬리버에게서  들은 아틀란티스인과 무우인의 전쟁이야기…
  엑스컬리버는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영훈을 제외한  나머지 네사람도 정신감응으로 엑스컬리버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아틀란티스인은 무우인에 대해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무우의 과학력도 발달했지만, 엄청나게 발달한 무기를 지닌 아틀란티스인의 공격에 우리 무우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우의 전사들은  [싸이탄]의  역자장포와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무우의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사방으로 튀기며 불기둥은 하늘을 궤뚫었다. 잠시후 아틀란티스  대륙에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곳곳의 산봉우리는 용암을 내뿜고, 일렁이는 바다는 커다란 땅덩어리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듯이 높은 파도로 사방을 휩쓸었다. 잠시후, 아직  연기를 내뿜고 있는몇개의 섬을 남긴채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 무우대륙의 동력은 [에호바]가 제어하는 핵융합  반응로였습니다. 어떠한 공격수단도 먹혀들어가지 않자 무우인들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무우대륙의 핵융합 반응로에서 나오는 동력을 모두 모아 거대한 에너지빔으로 바꾸어  아틀란티스를 폭발시키려 했던거죠.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틀란티스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를 싣고  무우대륙으로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3000발의 수소폭탄을 실은 미사일과 함께였죠. ]
  ‘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 ‘
  영훈은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부르튼 입술을 한손으로 매만지던 그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에서 빼낸 단어중에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 아까의 전투장면에서 무우의 전사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셨겠죠? 그들은 특수한 장비가 있어서  하늘을  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우인들은 원래부터 하늘을 날 수  있었고, 텔레파시와 투시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너지 빔을 투사해 물체를 파괴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또한 그때만 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포유류는 모두  투시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 초능력? ‘
  엑스컬리버는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믿어지지 않겠지만, 무우인은 누구나 원래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구인에게는 초능력이지만,  무우인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보통 감각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무우인에게 있었던 능력이 그  후손인 지구인에게서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핑크스의 전신인 [싸이탄]이 만들어낸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포유류도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의  후유증으로 투시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
  듣고 있던 혜진이 펄쩍 뛰었다. 스핑크스가 혜진과 그녀를 노렸던 가장 큰 이유는 혜진이 인간의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시키는 아테니움을 발견했고, 영카우의  손에  죽은  장정은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과거에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했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던가. 더우기 인간 유전자의 80%는  스핑크스 바이러스가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한 흔적이었다. 
  혜진은 천천히 CIA의 비밀 연구실에서 연구했던 결과를 되새겼다. 스핑크스 바이러스는 인간의 유전자를 파괴했고, 혜진이 발견한 아테니움은 파괴된 유전자를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 아테니움을 투여해서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한  동물은 투시력을 지니게 되었다. 장정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과거의 망가진 유전 정보를 되살려낸 쥐가 투시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은 과거에는 투시력이 시각이나 후각과  같은 보통 감각이었다는 말이 돼요. 어떠한 이유에선지 투시력의 유전자가 파괴되었던거죠. ‘
  혜진은 엑스컬리버의 말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스핑크스의 전신이었던 [싸이탄]은 지구인의 조상인  무우인의 유전자를 파괴했고, 지구인은 그 파괴된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혜진이 입을 열었다.  
  " 우리들 지구인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능력의 3%도 다 쓰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가진 능력중에서 3%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스핑크스, 아니 [싸이탄]이 지구인의 유전자를 대부분 파괴해버려서 그랬던 거여요.  유리겔러같은 초능력자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파괴되었기 때문에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유전자를 되살리는 아테니움이  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아시겠어요? "
  " …… "
  " 아테니움은 파괴된 유전자를 복구한다. 그렇다면 아테니움을 투여한 사람은 과거의 무우인처럼  텔레파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고, 투시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하늘을 날고 에너지 빔을 투사해 공격할 수도 있지요. 스핑크스는 이것을 두려워 했던 거여요. "
  " …… "
  심장이 약한 아리오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영카우와 스핑크스를 속이려 인공적으로 심장박동을 정지시켜 죽은척한 후로 그녀의 심장은 별로 튼튼한 편이 못되었다.  엑스컬리버는 계속 설명해나갔다. 
  [ 무우인들은 주 컴퓨터 [에호바]를 움직여 핵융합 반응로에서 나오는 동력을 모두 모아 아틀란티스로  발사했고,  그 에너지를 직통으로 받은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았습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주 컴퓨터 [싸이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우대륙  역시  아틀란티스에서 발사한 3000발의 수소폭탄을 맞고 날아가버렸습니다. 무우인은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에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의 유전자도 파괴되었습니다. 아틀란티스와 무우의  전쟁은  서로의 철저한 멸망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

  화면에는 다시 지구지도가 나타났다. 아틀란티스와 무우대륙이 모두 사라진 현재의 지구지도에 푸른점이 반짝였다. 지구의 남쪽 끝, 남극대륙이었다. 
  [ 아틀란티스와의 전쟁에서 무우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우인은 남극에 비밀기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동력이  문제였습니다. 남극의 비밀기지에 설치했던 핵융합장치가 고장나자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겁니다. 남극기지에는  [에호바]와 같은 거대한 컴퓨터가 없었던겁니다. 그래서 남극 비밀기지의 무우인은 전원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언젠가는  핵융합장치를 고칠 기술을 지구인이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남극대륙이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같은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렸다. 거대한  얼음평원은  쭉쭉 갈라지고, 갈라진 크레바스 사이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아령 모양의 두대의 큰 우주선과 납작한 원반  모양의  작은 우주선 다섯대가 날아오르자마자 갈라진 틈에서 시뻘건 용암이 넘쳐흘렀다. 얼음이 녹아 끓어 발생하는 수증기로 얼음평원은 뿌옇게 뒤덮였고, 수증기 틈사이로 보이는 용암은 마치 악마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수증기와 용암으로 뒤덮인  남극대륙을 뒤로하고, 일곱대의 우주선은 북쪽으로 향했다. 
  [ 서기 397년에 발생한 남극의 화산폭발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완전히 파괴했지만, 기지의 자동방어시스템은 비상용 탈출우주선을 발진시켰습니다. 동면장치가 파괴되는  바람에 동면중이던 대부분의 무우인이 죽고 겨우 여섯명만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일곱대의 우주선은 한국의  동해로  향했습니다. 운나쁘게도 그때 동해 해상에는 강력한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여섯명의 무우인이 탄 두대의 우주선은 태풍의 중심부에 형성된 강한 난기류에 휘말려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
  영훈들이 방금전까지 보트를 타던 문무왕 수중릉 앞바다가 나타났다. 아령 모양의 두대의 우주선에서 각종  건설기계와 로봇이 나와 작은 해상기지를 만들었다. 모두 완성되자 섬으로 위장한 해상기지는 천천히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 추락한 두대의 우주선에 타고 있던  여섯명의  무우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머지 우주선에 실려있던 컴퓨터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였습니다. 남극기지가 파괴되면  자동적으로 탈출우주선을 발사해 다른곳에 제 2의 비밀기지를  만들도록 프로그램되어있었던 겁니다. 물론 남극기지의  주  컴퓨터인 엑스컬리버도 이곳으로 이동해왔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동해의 비밀기지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
  영훈은 이동윤 교수가 보여준 [유기]의 내용을 다시  기억했다. 
  ‘ 내물왕 42년 5월 계림 앞바다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버섯 모양의 큰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사흘  동안  없어지지 않다. 하늘을 쇠로 만든 커다란 새가 날아 다니다 두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다. 죽은 새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친 채 나와, 왕궁으로 모시고 극진히 치료했으나 일 주일 만에 죽다. 근처의 나뭇군이 글씨가 적힌 이상한 하얀 쇠 거울을 신선의 선물이라며 왕에게 바치다. 쇠로 만든 새가  떨어져 죽은 근처에서 팔 없는 아이가 태어나다. 왕은 신이 노한 탓이라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만 머리가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다. 왕은 신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탓이라 여겨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산을 불태우다. 내물왕 42년  7월.  계림 앞바다에 다시 괴이한 일이 벌어지다. 쇠로 만든 커다란  새와 이상한 짐승들이 바다 속을 들락날락하고  섬을  만들다. 섬은 바다에 닷새 동안 떠 있다 가라 앉다. ‘
  영훈은 스물여섯차례나 이 비밀기지를 찾으려  잠수했지만 막상 [유기]의 내용이 사실로 다가오자 무서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금속판에 눈길을 돌렸다.
  [ 당신이 들고 있는 금속판은 이기지의 컴퓨터를  시동하기 위한 시동장치로, 추락한 두대의 우주선에 타고있던 여섯사람의 무우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 금속판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진 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
  " [엑스컬리버], 너도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컴퓨터인가? "
  [ 그렇습니다. 엑스컬리버는 [에호바]나 [싸이탄]과  같이 생각하는 초자아 컴퓨터입니다. 바이러스 속에 숨어있던 [싸이탄]의 설계도를 그대로 만든 스핑크스 컴퓨터도 역시 초자아 컴퓨터입니다. 그러나 [싸이탄]은 [에호바]의 천배의  성능을 지녔습니다. 엑스컬리버의 능력은  [에호바]의  십분의 일입니다. ]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능력은 엑스컬리버의 만배… 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엑스컬리버로 스핑크스를 이길  수는 없어…
  화면에는 동해의 비밀기지를 건설하는 장면이 계속 비춰지고 있었다. 해상기지를 건설하고 고압선을 배선하고 지하 굴착작업을 하는 작업용 로봇을 보는 순간 영훈은 로봇의 얼굴이 굉장히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푹 꺼진 눈자위에  뚜렷한 콧날, 날카로운 입매와 턱선. 
  ‘ 저건 틀림없는 이스터 섬의 모아이! ‘
  영훈은 KBC방송에 있었을 때 이스터섬의 기획취재를  담당한 적이 있다. 섬 전체가 모래로 이루어진 볼품없는  이스터섬에 군데군데 누워있는 붉은 화산석으로 만든 거대한 석상. 큰 것은 20미터가 넘는 석상들은 해안가에서 바다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다. 섬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석상을 만들만한 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를 타고 나가야  돌을  구할 수 있는 모래섬에서 고대 이스터인들은 무슨 이유로  거대한 석상인 모아이를 세웠을까? 
  이스터섬의 전설에 따르면 모아이는 스스로 서서 걸어다녔다고 한다. 기획취재때 같이 갔던 고고학  교수는  외계인이 세운 고대 문명의 유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영훈은 믿지  않았었다. 
  [ 태평양에 있는 폴리네시아 군도는 무우대륙이  아틀란티스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을 때 가라앉지 않은 몇 안되는  땅입니다. 무우대륙이 가라앉았어도 소수의 무우인들은 이스터 섬을 비롯한 폴리네시아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된 무우인에게 있어 예전의 무우문명은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무우인의  후예인 이스터인들은 그들의 선조가 사용했다는  로봇의  모양을 딴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습니다. 무우에서는 로봇을 '무우의 움직임'이라는 뜻의 [무우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무우이]라는 이름은 [모아이]로 바뀌었지요. ]
  영훈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30년간 배워왔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영훈에게 더욱 낯익은 장면이 나타났다. 잉카문명의 전설의 유적 마추피추였다. 마야인이 세웠던 쿠쿨칸의  피라밋과 티칼 신전도 비춰졌다. 
  [ 무우인은 태평양 연안으로 흩어져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신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야의 신은 '날개달린 뱀'이란 뜻을 가진  '쿠쿨칸'이란 신인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하늘을 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잉카는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 태양신도  사람의 모습에 하늘을 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무우인이  초능력으로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기억이 잉카와 마야에서 하늘을 나는 신의 전설로 바뀐 것입니다. ]
  " 설마… "
  소연은 머리를 가로저었지만 엑스컬리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나 강한 충격에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훈도 엑스컬리버의 설명에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차 있었다. 뉴욕의 스핑크스 컴퓨터에 침입했을 때 영상과 그는 스핑크스의  기억장치속에서 많은 단어를 빼냈다. ‘역자장포’,'단백질 분해 바이러스’, ‘인류 말살계획’, ‘무우인의 반격’, ‘실험용  인류 탈출, 제거에 실패’,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이라는 단어들이었다. 그 단어의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은 엑스컬리버의 설명으로 드러났다. 아틀란티스인들은  무우인과의 싸움때 ‘역자장포’와 ‘단백질 분해  바이러스’를  사용했고, ‘무우인의 반격’때 ‘유전자 파괴계획 성공리에  수행’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단어인 ‘인류  말살계획’과  ‘실험용 인류 탈출,제거에 실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네사람이 엑스컬리버의 설명을 듣는 동안 혜진은 엑스컬리버가 놓여있는 컴퓨터실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치료했던 의료튜브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유리관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튜브의  안쪽에  정밀한 자기장 발생장치가 달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류가 자력선을 치료목적으로 이용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고대 중국의 의학자들은 머리를 동쪽에 두고 자면  건강에 좋다고 하였는데, 신체를 지구자기의 방향에  맞춰  자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자석으로 목걸이나  벨트를 만들어 지니고 다니거나 자석요, 자석베게를 만들어서 치료에 이용하기도 했다. 몇년전인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이든 부모님께 최대의 효도는 자석요를 선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97년 노벨 의학상은 강력한 자기장에서  세포의  성질이 달라지는 사실을 발견한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진에게 돌아갔다. 지구자기의 수만배 자기장을 걸어주면,  분열능력과 파괴된 세포가 회복되는 능력이 놀랄만큼 커진다는  것이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진에 의해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혜진도 유전공학연구소에 있을때 자기장 실험장치를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장을 제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기장의 방향과 세기를 정확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세포에  있어서 치명적이 될 수도 있었다. 유전공학 연구소의 실험은 파괴된 많은 세포를 회복시켰지만, 정상적인 세포가 자기장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래서 연구진들은 강력한 자기장으로 인간을 치료하는 방법은 개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튜브 안에 투입되는 액체는 세포를 치유시키는 효소를  함유하고 있었다. 의료튜브는 엑스컬리버에 의해 정밀하게  제어되는 강력한 자기장과, 파괴된 세포를 치유시키는  효소를 가지고 혜진과 영상을 치료했던 것이다. 혜진은 무우인의 생물학과 의학수준에 새삼 놀랐다. 
  ‘ 자력선! ‘
  무우인이 자력선을 고도의 기술로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혜진에게 기발한 생각을 제공했다. 여기에 한두가지만 결합시킬 수 있다면… 
  그녀는 컴퓨터실 뒷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향했다. 문앞에 서자 문이 스르르 열렸고,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컴퓨터실에 있던 기계들과 달리 이곳의  기계들은  파이프와 시험관, 압력튜브와 색깔있는 여러가지 액체가 말라붙은  자동플라스크로 가득차 있었다. 고대 무우인의 생화학  실험실이었던듯 싶었다. 
  튜브 뒷쪽에는 계기판과 여러개의 관이  연결된  사각형의 기계가 보였다. 스무개의 시험관이 달려있고 작은 컴퓨터 화면이 튀어나와 있는 장치는 분명 자동 유전자 분석장치였다.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와 CIA의 비밀 연구실에도 그런  장치가 있었지만 무우인의 자동 유전자 분석장치는 한국과  미국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나아보였다. 화학분석에 필요한 풍차모양의 원심분리기와 0.00001%의 미량성분도 검출해낼 수 있는 크로마토그래피 장치도 있었다. 구석을 들여다 본 혜진은 그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버렸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실험장치는 DNA의 재료인  뉴클레오티드를 인공적으로 이어주는 효소인 DNA 폴리머라제와 리가제를 사용해서 컴퓨터가 설계한대로 유전자를 합성해주는 인공 유전자 합성장치였다! 인공 유전자 합성장치는 유전공학의  최첨단을 걷는 일본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한 장치였다. 
  ‘ 이정도의 실험장비만 있으면 파괴된 인간의 유전자를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어. 문제는 옛날 무우인의 유전자  견본을 구하는건데… ‘
  혜진은 납작한 선반위에 있던 플라스크에 눈길이 갔다. 수천년이 지난 플라스크 밑바닥에는 말라붙은 검붉은 찌꺼기가 남아있었다. 건조해 부스럼딱지처럼 말라붙은 찌꺼기는 틀림없는 인간의 피였다. 
  ‘ 무우인의 피! 그렇다면 여기서 무우인의 유전자  견본을 추출할 수 있어. 스핑크스가 가장 두려워하던 건 인간이  초능력을 가지고 스핑크스를 공격해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장비를 가지고  무우인들은  왜 유전자를 고치지 못했을까? ‘
  [ 스핑크스가 뿌린 바이러스가 유전자 파괴  바이러스라는것을 알아차린 것은 무우대륙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무우인들이 남극기지로 대피한 후였습니다. 남극기지안의 무우인중에서는 유전공학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남극기지의 무우인은 유전자를 복구하려 갖은 시도를 다 해보았지만, 전문가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성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혜진씨가 보고 있는 장비는 무우인들이 유전자를 복구하려 설계한  실험장치들입니다. ]
  " 엑스컬리버, 너는 나의 마음을 읽는구나! "
  갑자기 엑스컬리버의 소리가 들려오자 혜진은 허공에 대고 부르짖었다. 
  [ 엑스컬리버는 정신감응 컴퓨터입니다. 혜진씨가  텔레파시를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혜진씨가  생각하는 어떠한 생각도 제게 바로 입력이 됩니다. ]
  " …… "
  [ 혜진씨 정도라면 유전자 복구작업을 할 수 있겠지만, 현재 이 기지의 동력장치는 고장이 난 상태입니다. 비상용  원자로를 가동시켜서 엑스컬리버는 움직이고 있지만  기지안의 다른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주 동력장치인  핵융합  반응로를 가동시켜야 합니다. 엑스컬리버의 능력으로는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없습니다. ]
  " 핵융합 반응로를… 지구인의 손으로는  도저히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없어. 이젠 끝이야… "
  혜진은 얼굴을 싸쥐고 주저앉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리오네였다. 
  " 지구인의 손으로도 핵융합 반응로를 고칠 수 있어요. 기운을 내세요, 혜진씨. "
  " 우리 지구인이 핵융합에 성공했다는  말씀인가요?  믿을 수 없어요. 용기를 주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
  " 사실이에요. 우리는 동력을 얻어 이 기지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될거여요. "
  아리오네는 긴 금발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담갈색의 눈으로 혜진을 바라보았다. 
  " 곧 우리는 스핑크스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

  Part VIII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2001년 9월 1일 일본 교오토오. 
  검은 머리의 소련 태생 림스키 나르시코프는 늘  하던대로 아내 올가에게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자신의 아파트 문을 나섰다. 주차장에는 자신이 탈 빨간색의 자동조종 자동차가 서있었다. 그는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자동조종장치를 켰다. 나르시코프의 근무처인 001지구 KT행정청까지는 자동조종 자동차로 10분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반쯤 열린 창으로 불어들어왔다. 그의 눈에 [001지구 KT-289블럭]이라고 쓰인 버스정류장 표시판이 들어왔다. 
  ‘ 제길, 빌어먹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  같으니라구. 001지구가 다 뭐야? 세계국가를 건설해? 우리 소련을 폐허로 만들어놓고? ‘
  그는 욕지거리가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꾹 눌러버렸다. 자동조종 자동차 안에 스핑크스의 고성능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인들이 세운 세계국가 [올림포스]는 지구를 337개로 나누어 001지구에서 337지구까지 번호를  붙여  통치했다. 각 국가의 지구번호는 스핑크스에게 항복한 순서대로 붙여졌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항복한 일본이 001지구, 가장 끝까지 저항한 한국은 337지구였다. 지구번호 뒤의 두개의  영문자는 도시를 나타내는데, KT는 KYOTO, 즉 교오토오를 나타내는 약자였다.
  001지구 KT행정청은 교오토오 역 맞은편의 타워빌딩에  있었다. 1964년 건립당시의 교오토오 인구가  131만명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높이 131 미터의 전망대가 있었지만 스핑크스는 그 전망대를 철거하고 그 위에 거대한 인공위성 안테나를 달아 KT지역 전체의 통신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는 [정보부]라는 팻말을 힐끔 쳐다보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나르시코프는 KT지역의 비밀경찰 [아레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책상위에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세대의  화상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빨간색은 KT지구의 아레스 대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는 전화였다. KT행정청의 다른 기관과의 업무연락도 빨간색 전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노란색은  공무가 아닌 개인적인 용도로 쓰이는 전화인데 거의 아내  올가에게 전화하거나 아내의 전화를 받는데에만 쓰였다. 마지막  하나의 전화기는 그가 아레스의 지부장이 된 후 한번도 울린  적이 없는 전화였다. 파란색 전화기는 스핑크스의 직접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전화였다. 
  전화기 옆에는 부하대원들이 미리 갖다놓았는지 세건의 비밀 보고서가 놓여있었다. 각 장마다 [극비, 복사본  없음]이라고 쓰여져 있었지만 나르시코프는 코웃음을 쳤다.  극비에다가 복사본은 없을지 모르지만 아틀란티스인들의 뒤에 도사린 거대한 괴물 스핑크스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레스]의 모든 정보를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그는  노란 종이에 찍힌 책상위의 보고서를 들춰보았다. 
  첫 보고는 스핑크스가 뉴욕과 교오토오 두곳에 짓고  있는 새로운 생물학 연구소에 관한 것이었다. 스핑크스가 짓는 연구소는 대부분이 공개적이었으나 이번 것만은 유별나게 비밀리에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더우기 공사에  참여한  인력은 모두 아틀란티스인이었으며 지구인은 현장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뉴욕에 짓고있는 생물학 연구소도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건설되고 있었다. 
  ‘ 이상하다, 아틀란티스인이 직접 연구소를 지어?  연구소의 내용이 그토록 지구인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
  비밀경찰 아레스의 KT지역 책임자라는 자리로 본다면 당연히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편을 들어야 하지만 나르시코프는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스핑크스가 발사한 핵미사일에 전멸당한 키에프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그때 모두 죽었다.
  스핑크스는 지구를 통치하는데 그지역 사람을 잘 쓰지  않았다. 특히 비밀경찰 아레스의 우두머리는 전부 그지역 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앉혔다. 지역 사람을 아레스의 우두머리로 앉혀놓으면 그지역 사람들을 선동해서 반대로  스핑크스에게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스핑크스가 점령하기 전에 캘리포니아라고 불리우던 236지구에서는 그지방 사람이었던 아레스 책임자가 지역 주민들을 규합해  스핑크스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외국인이고 KGB 교오토오 지부장이었던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의  책임자로서 안성마춤이었다. 
  그는 두번째 보고의 표지를 넘겼다. 75지구 아레스 지부에서 보내온 폭동 진압의 보고였다. 예전에 나이지리아였던 75지구는 스핑크스에게 대항하는 독립운동단체인 [자유의 친구들]의 본거지였다. 
  [자유의 친구들]은 아틀란티스인의 지구 지배에서  벗어나 지구 독립을 외치는 무장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라야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빼앗은 광선총  몇자루밖에 없지만 그들의 성과는 눈부셨다.  74지구(이집트)와  91지구(시리아)에서는 스핑크스의 통신센터를 파괴했고 236지구(캘리포니아)에서는 아레스의 우두머리를  포섭,  비밀경찰들과 함께 스핑크스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어켰었다. 무자비한  탄압이 그 뒤를 휩쓸었지만 [자유의 친구들]의 세력은 계속 커져만 갔다. 보고서를 읽어가던 나르시코프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의 독립운동단체에 무자비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스핑크스가  75지구(나이지리아)에 가한 보복은 너무도 엄청났다. [자유의 친구들]의 본부가 75지구에 있다는 것을 안 스핑크스는 서유럽에 설치되어 있던 핵미사일을 75지구에 발사했던 것이다. 8천명의 나이지리아인이 죽고 수만명이 부상당했거나 방사능에 오염됐다. 
  " 저주받을 스핑크스… "
  나르시코프는 주먹을 불끈쥐었다가 곧 폈다. 책상위의 화상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일을 하다가 들킨 소년마냥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는  전화기에 눈을 돌렸다. 
  ‘ 설마 스핑크스가 지금의 내 말을 도청하고 파란  전화를 건 것은 아니겠지? ‘
  다행스럽게도 노란색 전화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내 올가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당신 좋아하는 요리를  해놓을테니까요. 오늘이 우리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라는 거 기억하시죠? "
  " 물론 기억하고 있지. 오늘은 다섯시쯤 들어갈께.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 결혼 10주년이면 올가도 벌써 서른살이군. ‘
  그는 결혼 10주년이 아닌 올가의 나이를  먼저  기억했다. 그는 올가의 생일날에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때 나르시코프는 서른살의 소련대사관 외교관, 올가는 대사관에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던 스무살의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나르시코프의 부모가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희생당했으면서 그가 스핑크스의 앞잡이인 아레스의 우두머리가 된 것도 아내 올가 때문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은  KGB요원이었던 나르시코프에게 아레스의 우두머리와, 자신과  아내의  죽음 두가지중 하나를 강요했다. 자신뿐이라면 KGB의  정예요원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겠지만 아내 올가를 살리기 위해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택했던 것이다. 
  세번째의 보고를 막 읽으려 할 때 다시  책상위의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붉은색 전화였다. KT-912블럭에  나가있던 부하대원의 보고였다. 
  "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지구인으로 변장한 두사람의 아틀란티스인이었습니다.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반항분자를 잡으려는  중이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을 변장을 했어?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조직을 잡아내기 위해서라고? ‘
  하지만 반항분자를 잡아내는 일은 모두 아레스가 맡지  아틀란티스인이 직접 나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들 사이에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 자체가  드문 것이다. 
  그는 지도에서 아틀란티스인이 잡힌 KT-912블럭을  찾아보았다. KT-912블럭은 스핑크스가 짓고 있는 생물학  연구소가 들어있는 블럭이었다. 
  ‘ 그렇다면 생물학 연구소를 짓고 있던  아틀란티스  기술자? 하지만 기술자가 지구인으로 변장을 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인 사이에 섞여 변장을 했을 때는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가 지구를 점령하던 첫날,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를 점령하기 위해서 테리라는 아틀란티스인이 빨강머리의 지구인으로 변장했을 때 딱 한번뿐이었다. 구태여 그들이 지구인으로 변장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두사람의 아틀란티스인은 무엇때문에 지구인으로 변장했을까? 
  화상전화기에 광선총을 들고 있던 대원과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났다. 나르시코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 당장 풀어줘. 우리는 아틀란티스인의 통치에 따르게  되어있어. 어떠한 경우라도 아틀란티스인의  연행을  허용되지 않아. "
  전화는 곧 끊어졌지만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KT행정청의 청장 이토오 요시히데였다. 
  " 정신이 있는겁니까, 없는겁니까? 아틀란티스인을 연행하려 하다니. 당장 청장실로 오세요. "
  빨간색의 화상전화기에서 이토오의 얼굴이 사라지자  나르시코프는 코웃음을 쳤다. 일본인은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하다. 등뒤에 칼을 감추며 상대에게 수없이 절을 하는 교활한 민족이 바로 일본인인 것이다. 
  이토오는 그 속성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남자였다. 나르시코프야 부인까지 죽이겠다고 해서 할수없이  아레스를  맡고 있지만, 이토오야말로 아틀란티스인의 앞잡이가 되어 수많은 지구인들을 처형되게 한 사람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의 앞잡이 중 많은 사람이 일본인이지만 이토오만큼 헌신적으로 제  동포를 처형되게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토오는 그  댓가로 KT행정청의 청장을 맡게 된 것이다. 
  나르시코프는 청장실에 불려가서 한참동안 이토오와  핏대를 올리면서 싸웠다. 아틀란티스인에게 무조건 굽실대는  이 교활한 일본 늙은이는 나르시코프에게 마구 화를 내면서, 그동안 아레스의 책임자로서 나르시코프가 한 일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보고를 위해 들어온 부청장이 아니었으면 두사람은 하루종일 싸울뻔 했다. 
  기분을 잡친 나르시코프는 KT행정청의 지하 1층에  마련되어 있는 수면실에 들어가 타이머를 맞추고  침대에  누었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망쳐진 기분을 좀 풀어보려는  생각에 잠이나 좀 자두려는 생각에서였다. 곧 이마에  작은  전극이 내려왔고 그는 인공수면기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휴식실을 나온 것은 오후 8시쯤이었다. 타이머를  잘못 맞춘 바람에 무려 9시간씩이나 자버린 것이다.  막  해가 져 어둑어둑한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며 나르시코프는 세번째 보고서를 읽지 않았던 생각이 났다. 아내 올가가  결혼기념일이라고 일찍 들어오라고 했던 생각이 났다.
  ‘ 내가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동안 올가는 전화를  몇번씩이나 했겠지. 화가 단단히 났겠는데? ‘
  그는 세번째 보고서를 건성으로 읽기 시작했다. 눈은 글자를 훑고 지나갔지만 마음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올가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도 식사를 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한장의 노란 종이에 찍힌 세번째 보고서는  짧았다.  후딱 읽어버려야지 하고 내용을 읽던 그의 시선이 점차 느려졌다. 몇 글자 안되는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 22일전부터 KT지역에서 아홉명의 실종자 발생. 
    실종자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 곳에도 없음.   
    실종자의 공통점은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까지의 
    여자로 그 이외의 공통점은 전혀 없음. 
    [자유의 친구들]의 납치는 아닌 것으로 추측됨. ]
  보고서 뒷면에는 다른 곳의 아레스 지부에서의 보고도  같이 붙여져 있었다. TK지역(동경)이 열두명,  OS(오사카)지역이 여덟명, NK(나고야)지역이 네명, YH(요코하마)지역이  일곱명, 그밖의 도시지역에서 스물한명, 농촌지역에서  열네명이 실종되었다. 실종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의 여자라는 점뿐이었다. 
  ‘ 뭔가 이상한걸? ‘
  오랜 KGB생활로 단련된 그는 뭔가 큰 사건의 낌새를  눈치챘다. 
  ‘ 미안하지만 올가, 오늘은 들어갈 수 없겠는걸? 큰  사건의 냄새를 맡았어. ‘
  아내에게전화하려 노란 화상전화기를 들던  나르시코프는 화면 아랫쪽에 나타나는 글자를 읽었다. 그가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동안 올가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에 녹화되었던 올가의 통화내용이 나타났다. 
  " 도대체 어딜 가신거여요? 오늘만은 다섯시에 들어오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걸께요. "
  화면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나타났다. 
  ‘ 내가 늦으니까 올가가 두번씩이나 전화했던 모양이군. ‘
  올가의 두번째 통화내용이 녹화되어 비춰지기 시작했다.  
  ‘ 보나마나 안들어온다고 또 화내는 전화겠지. ‘
  라고 생각하고 손을 뻗쳐 스위치를  끄려던  나르시코프는 화면에 나타난 올가의 표정에 가슴이 철렁했다. 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나르시코프, 구해줘요. 누군가가 나를… "
  녹화화면에 나타난 올가의 얼굴은 곧 지익-하는 잡음과 함께 끊어져 버렸지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는 것을 나르시코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녹화화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는 장면을 여러번 보았다. 마취제가 든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KGB가 사람들을 납치할 때 자주 쓰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아내가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화상전화기를  호출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파트로도 전화했지만 그곳 역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빨간색 화상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설마 납치를?
  " 곧 내 아내 올가를 찾아줘. 지급으로! "
  전 부하대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르시코프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몸을 털썩 던졌다. 
  ‘ KT지역에서 아레스가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  아레스는 KGB보다도 더 우수한 비밀경찰이란 말이야. ‘
  그는 자신에게 되뇌였지만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섞여서 맴돌 뿐이었다.
  두시간쯤 후에 빨간색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수색을 총지휘한 부지부장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 죄송합니다만 사모님의 행방은 저희로서도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단서도 남지 않은채 실종된 것  같습니다. "
  ‘ 실종… ‘
  노란색의 보고서에 쓰인 ‘  열여덟살에서  서른두살까지의 실종자 아홉명 ‘ 이란 글귀가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냉정한 전 KGB요원 나르시코프는 극심한 충격에서도  필기구를 꺼내어 노란색의 보고서 아랫쪽에 한줄을 더 기입했다. 
  [ 9월 1일 10번째 실종자 발생. 올가. 서른살. ]

  KT행정청 건물에서 세블럭정도 떨어진 곳에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붉은 등을 앞에 내걸은 꼬치구이 전문점 [야마토(大和)]도 그중의 하나였다. 근처의 골목길을 건너온 남자가 퇴근시간의 직장인들로 북적대는 꼬치집 안쪽으로 들어섰다.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은 낮은 소리로  중얼대는 남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귀를 귀울였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성냥개비를 꺼내어 재털이 위에  걸쳐놓았다. 성냥개비의 나무는 옅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성냥머리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아가씨가 행주로 자리를 훔치다가  재털이에  걸쳐놓은 성냥개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가씨는 남자 앞에 물컵을 내려놓다가 잠시  휘청거렸다. 쟁반에 얹혀있던 잔돈이 떨어져 테이블 위에 굴러다녔다. 남자는 잔돈을 주워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남자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30대쯤  되어보이는 남자는 꼬치 안주에 정종한잔을 마시고는 꼬치집  [야마토]를 나섰다.
  남자는 옆 블럭의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자동차에  돌아와서는 차안의 불을 켰다.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은 50엔짜리가 한개, 10엔짜리가 두개였다. 그는 동전 아랫쪽의  발행년도를 살폈다. 50엔짜리는  1997년  발행이었고,  10엔짜리는 1998년과 1992년이었다. 
  ‘ 50곱하기 1997은 99850, 10곱하기 1998은 19980, 10곱하기 1992는 19920, 셋을 다 더하면 139750이군.  여기서  0을 하나 빼버리면 13975, 이 값을 제곱하면 195300625가  되지. 계산이 더럽게 복잡하군. ‘
  남자는 자신의 자동차안에 설치되어 있는 화상전화기의 단추를 눌렀다. 번호는 195-300-625번이었다. 화면에는 곧  예쁘장한 어린 아가씨가 나타났다. 앳띤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큰 귀걸이가 인상적이었다. 
  " 이집트 학술 조사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자료를 가지고 계신지요? "
  " 예, 조금 있습니다. 몇년도 자료가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
  " 1992년이 10권, 1997년이 50권, 1998년이 10권입니다. "
  어깨가 깊게 파인 반팔 옷을 입은 아가씨의  얼굴이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 그렇게 많은 자료는 없어요. 273-415-910으로  전화해보세요. "
  남자는  전화를  끊은  후에   자동차의   자동조종장치에 273-415-910이라고   좌표를   입력했다.   아가씨가   말한 273-415-910은 전화번호가 아니라 접선장소의 좌표였던 것이다. 
  ‘ 접선절차가 꽤나 치밀하고 복잡하군. ‘
  자동차를 타고 접선장소로 움직이면서 남자는 그들의 접선절차에 혀를 내둘렀다. 간신히  알아낸  접선절차는  꼬치집 [야마토]의 재털이에 옅은 회색과 짙은 보라색의 성냥개비를 올려놓는 것이 1단계였다. 그리고 시중드는 아가씨가 테이블에 동전을 떨어뜨리면 그중에서 50엔짜리와 10엔짜리를 집어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동전의 액면가와 발행연도를  곱해서 0을 하나 떼고 제곱하면 2단계로 접선할 상대의 전화번호가 나온다. ‘이집트 학술 조사’와 동전의 발행연도가  2단계 접선의 암호였다. 그곳에서 최종 접선장소의 좌표를  가르쳐주면 최종 접선장소에서 본부 요원들과 만나게 되어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린 길가에는 자동차의 왕래도 뜸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자동차도 그리 급하게 달리지는 않았다. 가로등은 없는 길이었지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으로도  충분히 계속 달릴 수 있었다. 
  한 20분쯤 가자 조그만 목조 신사가  나타났다.  신사에는 두채의 부속건물이 딸려 있었다. 작은 건물은 사람의 기척이 없었지만 큰쪽의 건물에는 반쯤 열린 창으로 불빛이  비쳐나왔다. 남자가 두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남자의 옆구리에 뭔가 조그맣고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허리에 겨눠진 것은 아틀란티스인에게서 뺏은  광선총이었다. 
  두명의 무장 경비원이 광선총을 겨눈채 자동차를 타고  온 남자는 두손을 머리에 얹고 큰쪽의 건물로 들어갔다. 남자는 주머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장 경비원이 흠찟 놀라며 광선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가 꺼낸 것은  손톱만한 로마 동전이었다. 동전의 한쪽  구석에는  레이저로  새겨진 ‘PAX’라는 글자가 보였다. 절대로 위조할 수 없는 레이저 가공기술로 동전에 새겨진 ‘PAX’라는 단어는 ‘평화’라는  뜻의 로마 단어로, 이 로마 동전은 이들의 암호 증명서였던  것이다. 무장 경비원은 동전을 알아보고 웃음을 지었지만,  광선총을 늦추지는 않았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바싹 마르고 안경을 낀 사람이 금속탐지기로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조사했다. 주머니에 든 동전과 라이터, 열쇠꾸러미등 금속반응이 있는 물건은 모두  압수당했다. 
  금속탐지기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는 진공청소기같이  생긴 물체를 들이댔다. 전파탐지기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아레스의 도청장치나 위치탐지기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다른  몇명의 사람이 그가 타고온 자동차에서 같은 작업을  되풀이했다. 확인이 끝나자 두명의 무장 경비원이  남자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저는 [자유의 친구들]  일본 지부장 모리무라 스즈키라고 합니다. "
  스즈키는 허리를 가볍게 굽혀 절을 하며  남자를  맞았다. 남자도 허리를 굽혀 인사에 답했다. 
  " 저는 한국에서 온 이 영훈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스즈키는 순간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 이 영훈 기자…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는 지구를  지배하자마자 당신을 추적했어요. 모두들 당신이 스핑크스에게 당한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일단 앉으시지요. "
  영훈은 다다미 방에 앉았다. 꽃이 꽂혀있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영훈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위치가 동해의 문무왕 수중릉 근처라는 사실만 제외하고. 스즈키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언저리는 굳어있었다. 
  " 사실이라면 당신은 지구인의 마지막  희망인  셈입니다. 몸조심 하십시오. 우리가 뭐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
  영훈은 양복 안감을 북 찢었다. 꿰메진 양복 안쪽으로  작은 종이 한장이 비닐에 넣어 붙여져 있었다. 그는 종이를 스즈키에게 내밀었다. 약간 너덜너덜해진 종이에는 한  미국인 남자의 신상명세가 적혀있었다.
  " 이 남자만이 핵융합 장치를 고쳐서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가동시킬 수 있습니다. 정식 이름은 제임스 타일이지만 주위에서는 제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아틀란티스인이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를 점령하고  소련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던 순간에 제다이는 핵융합의 모든  자료를 빼서 연구소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자유의  친구들]의 모든 조직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찾아내야 합니다. "
  " 알겠습니다. 다른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
  영훈은 말을 잠시 끊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 하나가  찻쟁반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스물 넷정도  되어보이는 여자는 찻잔을내려놓고는 뒷걸음질쳐서 나갔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어려보이는 얼굴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 제 딸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
  영훈은 스즈키를 똑바로 응시했다.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것이 무례에 속하지만 서양에서는 중요한 말을 할 때 상대방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훈이 중요한 말을 꺼내려는 것을 눈치챈 스즈키의 눈도 영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비밀경찰 아레스의 내부에 사람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것도 책임자급으로. "
  스즈키는 훅-하고 숨을 내쉬었다. 비록 동조자가 많은 [자유의 친구들]이지만 아레스 내부인물을 포섭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우기 책임자급이라면… 하지만 지구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 무우인의 비밀기지와 영훈 일행뿐이라면,  영훈의 이러한 부탁을 어떻게 해서든 들어주어야 한다. 
  " 하지만 무슨 작전을 세우고 계신거죠? 제가 알면 곤란합니까? "
  " 이건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작전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
  몇분간의 침묵이 영훈에게는 한달쯤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즈키가 고개를 끄떡였다.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것을 받아주세요, 영훈씨. "
  스즈키는 벽장을 열고 작은 목각품을 꺼냈다. 인형인줄 알았던 목각은 자세히 보니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상이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칠이 불상이 아주 오래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저희 집안에서 가보로 내려오는 물건이지요. 이  관음보살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부처님의 도움으로 해를 입지 않고 바라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가지고 가세요. "
  " 어떻게 이런 귀중한 것을 제게… "
  " 우리 일본의 국보 1호는 백제에서 건너온  관음보살상이지요. 고대 일본 문화는 거의가 한국에서 건너왔어요. 이 관음보살상도 백제에서 건너온 목각상입니다. 이 불상도 옛 주인이었던 한국인의 손에 돌아가는 것을 기뻐할 겁니다. 부탁한 사람은 찾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영훈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스즈키에게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KT지구로 돌아오는 자동차 밖에는 도로가의 축축 늘어진 가로수만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묘한 그림자를  길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나르시코프는 서랍에서 KGB시절부터 피워온 궐련을 꺼내어 천천히 입에 물었다. 정신이 집중이 안될 때 궐련을 입에 무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올가가 사라져버린지도 이미 열흘이 지났다. 
  그는 서류철을 넘겼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반쯤 읽다만 서류철을 책상위에 내팽개쳐버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회전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방안을  한참동안 서성였다. 입에 문 궐련에서 재가 양탄자에 떨어졌지만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KT지구의 아레스 요원을 총동원했지만 올가가 어디에서 실종되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올가는 그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이 그녀를 처형하겠다는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나르시코프가 아레스의  책임자를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르시코프 혼자라면 명예롭게 죽음을  택했겠지만 올가를 살리기 위해 그는 동족을 팔아먹는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택했다.
  하지만 올가가 사라진 지금, 나르시코프는 아레스와  아틀란티스인을 위해 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외계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나르시코프는 이제 지구인들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는 몇번이고 벽쪽으로 다가갔다가는 다시 책상쪽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는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떼어냈다. 지도 뒷쪽에는 조그만 금고가 마련되어 있었고,  나르시코프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번호의 단추를  눌렀다. 딸깍하고 문이 열리고 그는 조그만 서류조각을 꺼내서 그 내용을 외워질 때까지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서류 뒷쪽에는 작은 동전이 담긴 비닐봉지가  붙어있었다. 그는 비닐봉지를 떼어 안에 들어있는 동전을 불빛에  비춰보았다. 위조할 수 없는 레이저 가공기술로 새겨진 글자는  분명 ‘PAX’였다. 서류를 다 외운 그는 지도를 원래대로 해놓고는 옷을 꺼내입고 방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인 꼬치집 [야마토]는 KT행정청에서 세블럭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나르시코프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의 앞에는 조그만 찻잔이 놓여있었지만 그는 손도 대지 않았다. 히에이잔 부근의 조그만 신사에 자리잡은 [자유의 친구들]의 본거지에서 나르시코프는 여섯시간째 조사당하고 있었다. 
  아레스의 책임자인 나르시코프가 [자유의 친구들]에  가담하겠다고 제발로 찾아온 것을 [자유의 친구들]이 쉽게  믿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자유의 친구들]의 일본 지부장인 스즈키와 다른 요원들은 더할나위 없이 철저하게  나르시코프를 조사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나르시코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갔다. 아틀란티스인은 전 KGB요원이었던  나르시코프를 아레스에 가담하라고 협박했고, 나르시코프는 이를  거절했었음이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  조사되어  있었다. 결국 아틀란티스인은 그의 아내 올가를 처형하겠다고 협박했고 그는 할수 없이 아레스의 우두머리  자리를  떠맡았지만, 그는 아틀란티스인에게 반항하는 지구인을 잡아가둔 적도 없고 [자유의 친구들] 요원을 처형한 적도 없었다.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는 나르시코프가 ‘이상할  정도로  [자유의 친구들]에 관대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르시코프의 아내 올가가 행방불명된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 [자유의 친구들]의 보고서에는 올가가 9월 1일날 실종되었으며, 전 아레스 대원을 동원했어도 찾지  못했다고  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던 스즈키는 눈쌀을 찌푸렸다. 
  ‘ 우리 [자유의 친구들]도 아레스를 감쪽같이 속이고 사람을 납치할 능력은 없는데, 아레스 대원들을 총동원했어도 찾지 못했다는게 마음에 걸려. 도대체 어떤 조직이 열여덟살부터 서른두살까지의 여자만 납치해가는 걸까? ‘
  어쨌던 아내의 실종으로 나르시코프가 [자유의  친구들]에 협력하게 된 것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스즈키는  나르시코프 앞에서 정중히 허리숙여 절했다. 
  "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르시코프씨는 이제부터 우리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

  새벽 1시 뉴욕 브루클린. 
  밤바람은 쌀쌀했지만 작은 핸드백을 끼고  걸어가는  밍키 슈나이더의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요즘 유행하는  무릎위로 한참 올라오는 미니스커트에 소매없고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여대생들이 남자들의 팔에 매달려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며칠전의 컴퓨터 미팅에서 만난 남자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하지만 오늘  데이트는  너무 재미있었어. 역시 컴퓨터 미팅이 최고라니까. ‘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카페 사이를 걸어가며 그녀는  며칠전에 컴퓨터 미팅을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잘했나  생각했다. 컴퓨터 미팅이 아니면 이런 멋진 남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 처음에는 순진해보이기만 하더니 알고보니 굉장히  세련된 사람이야. ‘
  밍키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을 생각했다. 의상디자인과  3학년에 다니는 밍키는 그날도 교수님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컴퓨터를 켜고 그래픽으로 2010년대에 유행할 옷의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컴퓨터 화면에  남자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는 스핑크스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낼 수 있어서, 많은 남자 대학생들이 자신의 얼굴을 여학생이 앉아있는 컴퓨터의  화면으로 보내서 미팅을 제의하는 컴퓨터 미팅을 즐기곤 했다.  화면에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은 순진하고  어려보이는  깨끗한 얼굴이었다. 
  ‘ 안녕하세요? 이런 좋은 가을날 우울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계실건가요? 아니면 산들바람 사이로 감미로운 음악, 풍겨오는 가을 분위기를 느끼렵니까? 제게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지 않겠어요? ‘
  화면에 나타나는 남자의 메세지에 그녀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이렇게 두들겼다. 
  ‘ 이제보니까 늑대기질이 다분히 보이는군요.  여자  깨나 울리셨겠는데요? ‘
  ‘ 늑대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저는 이빨빠진  순진한 늑대랍니다. 이빨빠진 늑대가 여자 울리는 것 봤나요, 여우 아가씨? [강철 무지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즉각 돌아오는 남자의 메세지에 밍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속의 남자는  이빨빠진  늑대처럼 순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의 스위치를 내리고 [강철 무지개]로 향했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 술이 잘 깨지 않아. 그와의 첫 키스때문일까? ‘
  단지 몇번의 만남이었지만 밍키는 그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카페 [강철 무지개]에서는 티없이 맑고  순진한 마음으로 차 한잔의 향기와, 시와, 음악과, 지구를 떠나버린 우리들의 어린왕자를 이야기했고, 술집 [올림포스]에서는 적절한 익살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해저 50미터의  수중  공원 [에머랄드 바다]에서는 그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세련된 매너로 밍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데이트에서 그룹 [이카루스]의 기타리스트인 그는 잔잔하게 깔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작곡한 슬픈 노래를 불러주며 첫 키스를 나누었던 것이다. 
  발길에 차이는 종이조각들이 밍키를 성가시게 했다.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인 비밀경찰  아레스를 비방하고 지구 독립을 주장하는  [자유의  친구들]의 인쇄물이었다. 아틀란티스인과 아레스는 그들의  지구통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유의 친구들]의 동조세력이 꽤 많았다. 
  ‘ 제길, 아틀란티스인이고 뭐고 아무나 통치하면어때. 아틀란티스인이 [올림포스]를 건설한 후로 지구인들의  생활은 더욱 나아졌잖아. ‘
  아틀란티스인의 지구통치는 과거에 일본이 식민지를  통치하던 방법과는 전혀 달랐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지구를  통치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인인  지구인을 착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을 위협하는 공해문제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형태의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했고, 유전공학을  이용해서 보통의 다섯배나 되는 커다란 낟알이 맺히는 벼와 밀을 개발해냈다. 스핑크스 컴퓨터가 만들어낸 인공심장과 인공간장 등의 각종 인공장기들은 해마다 죽어가던 많은 환자를 되살려낼 수 있었고, 아틀란티스인이 설계한 신도시는  도시계획이 완벽해서, 교통이 막힌다던가 공기가 안좋다던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폐기물 처리가 어려워 사용이 점차  줄어가던 원자력 에너지도 스핑크스 컴퓨터가 새로운 방사능  폐기물 처리방법을 개발하고 나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아틀란티스인처럼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도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지구인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고도의 문명을  지녔으면서도, 지구인을 멸시하거나 냉대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그들의 문화를 지구인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스핑크스  컴퓨터가 있는 뉴욕에 거대한 과학기지와 연구소를  건설하고, 스핑크스 컴퓨터를 사용해서 지구인에게 이로운 각종 연구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반항하는 지구인에게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지만 그들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생활을 제공했다. 많은 지구인들이 지구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아틀란티스인의 지구지배에 오히려 만족해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발밑만 내려보고 있던 밍키는 옆 건물 벽을 짚었다.  올라오는 취기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구석진 건물의 출입구에서 갑자기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 두사람이  튀어나왔다. 파랗게 질린 밍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두사람에게 팔을 잡힌 후였다.
  " 사람 살려요! "
  밍키는 필사적으로 소리질렀지만 키 큰쪽의 남자는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가져다댔다. 곧 그녀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두사람은 축늘어진 그녀를 둘러메고 구석에  세워놓은 커다란 앰블런스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스핑크스가 유도하는 자동조종장치가 달린 앰블런스는 새벽 1시의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아틀란티스인에게 반대하는 인쇄물과 밍키의 벗겨진 구두 한짝만이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남아있었다.

  브룩클린 주택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FLYFOX는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1시밖에 안되었지만 그놈의 꿈이 또다시  잠을 방해했다.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아틀란티스인에게  공격당해서 부하들은 죽고 자신은 아틀란티스인의 포로가 되었던 장면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외계인의 포로가 되었던 사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 치욕감을 씻기 위해서 [자유의 친구들]에 가담을 했지만, 현재로서는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감 때문에 목이 바싹바싹 타올랐다. FLYFOX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었다.
  갑자기 창 아랫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보통사람같으면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오랜  특수부대  생활로  단련된 FLYFOX는 그 소리가 구원을 청하는 여자의 비명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물컵을 내려놓고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오른쪽의 햄버거 가게 모퉁이에서 두 남자가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 도대체 어떤 놈들이 여자를 납치하는거야? ‘
  생각할 겨를도 없이 FLYFOX는 책상 서랍속의 권총을  끄집어내 뛰쳐나갔다. 남자 둘은 앰블런스에 여자를 실은 후  차를 출발시켰다. 급히 뛰쳐나온 FLYFOX는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 길거리에서 여자가 납치당했는데 놓쳐야 하다니, 빌어먹을… ‘
  순간 그의 주머니에 특수부대에서 쓰던 방향탐지기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추모양의 방향탐지기를 꺼내서, 허리를 최대한도로 굽혔다가 힘껏  던졌다. 끝에 강력한 접착제가 달려있는 소형 방향탐지기는 저만치 어둠속으로 달려가는 앰블런스의 뒷범퍼 밑에 달라붙었다. 
  다시 아파트로 올라간 그는 아무 장식없는 벽장  앞에  섰다. 세번째 서랍을 뽑자 그 뒷쪽에 작은 단추가 달려있었다. 단추를 누르자 쇠가 긁히는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벽장  전체가 윗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벽장 뒷쪽은 FLYFOX의 비밀 창고였다. 
  그는 검은 봉지에 들은 옷을 꺼내 입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스핑크스의 감시용 적외선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는  적외선 차폐 의복이었다. FLYFOX는 자신이 특수부대에서  쓰던 M-81 우라늄 기관포를 꺼내들었다.  
  ‘ 아틀란티스인만 아니라면 이 우라늄 기관포를 당할 사람은 없으니까. ‘
  완전무장을 끝낸 그는 납작한 플라스틱 시계를 손목에  찼다. 얼핏 보기에 보통 시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까 앰블란스에 붙여놓은 방향탐지기에서 나오는 전파를 추적하는 장치였다. 그는 작은 스프레이를 꺼내서 자동차에 골고루 뿌렸다. 스핑크스의 적외선 카메라를 피하기 위한  적외선  차폐 도료였다. 비가 와서 스프레이가 씻겨내려가지 않는 한 스핑크스는 FLYFOX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자동차를 수동조종으로 바꾼 그는 앰블런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앰블런스는 브롱크스 공원 182번가로  향하고  있었다.
  ‘ 182번가? 거기는 아틀란티스인이 지은 새로운 생물학 연구소인데? ‘
  아틀란티스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브롱크스  공원 182번가에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브롱크스 동물원이  버티고 있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은 동물원을 리치먼드 지구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거대한 규모의 생물학  연구소를  건설했다. 기린이나 영양이 사육되던 자리에는 거대한 도움형 건물이 들어섰고, 열대 동물이 있던 여러동의 건물도 헐리고  새로 75층의 건물이 세워졌다. 
  뉴욕의 생물학 연구소는 [자유의 친구들]에게 있어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우선 75층 건물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더우기 건물의 모든 공사는 스핑크스가 설계한 건설로봇과 아틀란티스인이 맡아서 했고 지구인은 공사현장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자유의 친구들]은 가능한 모든 정보망을 동원했지만 교오토오에도 이러한 생물학 연구소가 건설되고 있고, 앞으로 네군데 정도 더 건설될  예정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앰블런스는 생물학 연구소 정문에 섰다. 아까 여자를 납치한 두 남자는 앰블런스의 문을 열고 들것을 꺼냈다. 비록 천으로 덮여 있었지만 납치된 여자가 실려 있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복면을 쓴 두 남자는 끙끙거리며  들것을  연구소 안으로 날랐다. 
  FLYFOX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동차를  세웠다. 두 남자가 들어간 후 좀 있다가 다른 색깔로 칠해진  앰블란스가 역시 정문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세명의 남자가 나오더니 들것을 내렸다. 천이 덮여 있지 않은 들것에는 스물 여덟정도 먹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들은 역시 복면을  하고 있었다. 
  FLYFOX는 배를 땅에 완전히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접근해갔다. 마취가 깨었는지 들것위의 여자가 잠시 꿈틀하는 바람에 들것이 휘청했다. 두 남자가 들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한 남자의 복면이 뒤집혀졌다. 정문의 불빛을 받은 남자의 머리카락은 분명 파란색이었다. 
  후두둑- 빗방울이떨어졌지만 자동차는 여덟대가 더  도착했다. 앰블란스뿐만 아니라 창문을 가린 소형 버스에서도 들것에 실린 사람들이 안으로 운반되었다. 천을 덮은 것도  있고 덮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납치된 사람들은  모두  서른살 미만의 여자였다. 전부 합쳐서 스무명쯤 될 것 같았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방수가 되는 적외선 차폐 의복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FLYFOX는 젖지 않았지만, 납짝  엎드리고 있는 땅바닥에 빗물이 괴어 흐르기 시작했다. 
  ‘ 아차, 자동차! ‘
  자동차에 칠한 적외선 차폐 도료는 물에 약하기 때문에 쉽게 씻겨내려간다. 도료가 씻겨내려가버리면 스핑크스의 적외선 감시 카메라에 바로 잡힐 것이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자동차쪽으로 후퇴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탐조등이 모두 켜졌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생물학 연구소 내의  아틀란티스인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은빛 광선총이  들려있었다. 
  FLYFOX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지만 자동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핑-하는 소리와 함께 광선총 한발이 자동차 백미러를 스쳤다. 
  ‘ 도대체 왜 이러지? ‘
  시동 자체가 전혀 걸리지 않았다. 여덟개의 탐조등이 모두 FLYFOX의 자동차를 비추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자동차의 여러 기계를 점검했지만 계기판은 정상이었다. 
  ‘ 아차, 자동조종장치! ‘
  허겁지겁 자동차에 올라타느라 자동조종장치가 켜져  있었다. 스핑크스가 제어하는 자동조종장치가 FLYFOX의 조종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자동조종장치를 수동으로 바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돌리고는  악셀레이터를 죽을 힘을 다해 밟았다. 문틈에 꽁지가 낀 쥐마냥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는 타이어 타는 냄새를 남기고 광선총의 빔줄기를 뚫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9월 12일 파리.
  앙상히 드러난 개선문의 철골을 뒤로 하며 코코  몽띠에는 빠른 걸음으로 튜브열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뾰족구두가  따각따각거리는 소리가 한적한 거리에 울려퍼졌다.
  한때는 전 유럽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 그 파리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샹젤리제 거리는 부서진  벽돌더미와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위세를 뽐냈던 개선문도  아틀란티스인의 파리점령때 산산히 부서져, 엿가락처럼 휜  철골만이 한때 이곳에 거대한 개선문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꽤나 기이하게 보였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에는 고성능 휴대용 컴퓨터가  들려있었다. 코코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한숨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 휴, 몇년전만 해도 여기 샹젤리제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찼었는데… ‘
  그녀는 입고 있던 검은 드레스로 눈길을  돌렸다.  삼년전 그녀의 약혼자 샤넬이 바로 이곳 샹젤리제에서 사준  옷이었다. 샤넬은 아틀란티스인이 파리를 점령할 때  끝까지  싸운 프랑스 육군의 350명의 전사자중 하나였다.
  코코는 컴퓨터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야 모든 인공위성을 스핑크스와 아틀란티스인이 장악하고 있지만, 그녀의 휴대용 컴퓨터 속에 들어있는 자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로켓을 발사할 수 있다. 코코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 계획의 총 책임자였었다. 
  우주개발하면 미국과 소련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업용 로켓발사에 있어서 가장 발달한 나라는 유럽공동체였다. 이미 1980년대에 유럽공동체는 각 국가의 기술을 모아 [아리안]이라는 로켓을 설계했다. 작고 경제적이며, 기술에서도 미소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아리안]은 유럽이  아틀란티스인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수많은 상업용과 과학용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유럽을 점령한 아틀란티스인은 즉각 [아리안] 연구팀을 해체했고, 모든 인공위성의 발사를 금지시켰고 모든 기록을 없애버렸다. 코코도 [아리안] 연구팀을 떠나 파리 제 7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예전에 프랑스 우주 항공국이 위치했던 122지구  PA-719블럭에 갔었던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아틀란티스인은 [올림포스]라는 이름의 세계국가를 건설하면서 프랑스는  122지구로 호칭했다. PA는 PARIS, 즉 파리 지역을 나타내고 719블럭은 파리 남부의 중심지 몽파르나스였다. 고풍스런 파리 시가지와는 달리 고층건물이 우뚝 솟은  몽파르나스  신시가지는 파리의 경제, 과학의 중심지였고, 프랑스 우주 항공국은  몽파르나스의 명물인 몽파르나스 타워 전체를 쓰고 있었다. 
  [아리안] 계획에서 일하고 있을 때 코코는 몽파르나스  묘지를 지나서 룩상부르 공원까지 뻗친 카페가 밀집한  뒷길을 좋아했다. 가끔 샤넬이 코코를 만나러 왔을 때는 옥외로  나와있는 카페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룩상부르 공원까지  늘어서있는 정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 혼자 걷고  싶을 때는 룩상부르 공원의 잔디밭을 거닐거나, 그옆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발자크 상에 기대서 잠시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코코가 몽파르나스에 다시 와본 것은  샤넬  생각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몽파르나스 묘지의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샤넬이 웃으며 걸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것은 샤넬의 그림자가 아니라 [아리안] 계획의 모든 자료였다. 아틀란티스인은 [아리안] 계획을 비롯한 모든 우주계획의 자료를 없애버렸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숨겨두었던  보존용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고, 코코는 엉망이 된 쓰레기 더미속에서 자료를 찾아내서 휴대용 컴퓨터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튜브열차 정류장은 에뜨왈 개선문에서 에펠탑쪽으로  20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틀란티스인은 나폴레옹의  묘가 있던 앵발리드를 낡은 건물이라는  이유로  철거해버렸지만,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은 그대로  놔두었다.  에펠탑을 비추는 나트륨등의 노란 빛이, 그렇잖아도 인적없는  거리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뒷쪽에서 깡통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코코의 입을 누군가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막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 향긋한 냄새는 마취제인 에테르… ‘
  코코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는 긴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녀를 익숙한 솜씨로 둘러메고는 골목길을 돌았다. 모퉁이에는 창문에 커튼이  둘러쳐진 앰블런스가 세워져 있었다. 축늘어진 코코의 긴 머리칼이 업고가는 남자의 등뒤에서 흐느적거렸다. 
  두 남자는 앰블란스의 뒷문을 열고 들것을 꺼내 그녀를 밀어넣고 문을 잠갔다. 앰블란스의 옆면과 뒷면에는  동그라미 속에 날개달린 지팡이가 그려진 마크와 [프랑스  특수  의료원]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지만 그런 의료기관은  프랑스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두 남자가 운전석에 막 올라타려 할 때 뒷쪽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두대의 자동차가 접근했다. 창문에 짙은 썬팅을  해서 운전자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유럽에는 수많은 고급 자동차가 있지만 그 느낌은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의 롤스로이스는 거대한 차체와 툭 튀어나온 헤드라이트의 중후한 느낌으로 다른 차를 압도하고, 견고하기로 소문난 스웨덴의 볼보는 사각진 차체로 튼튼함을  강조한다.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 벤츠가 묵직하고 고급스런 느낌을 준다면 프랑스의 시트르앵은 제비처럼 날렵한 세련미와 경쾌한 가속을 자랑한다. 방금 나타난 두대의 자동차는 시트르앵 중에서도 가장 날렵하고 가속능력이  뛰어난  1998년형 시트르앵-812였다. 
  코코를 납치한 두 남자는 시트르앵 자동차를 힐끔  쳐다보더니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앰블란스는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두대의 자동차가 쫓았다.
  큰길로 나선 앰블란스는 불과 7초만에 시속 200킬로미터로 가속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자동차들이 멈춰서서  맹렬하게 질주하는 앰블란스를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두대의 시트르앵-812는 조금도 뒤쳐지지 않고 앰블란스의 뒤를 미끄러지듯 따라붙었다. 
  앰블런스는 시트르앵을 따돌리려 일방통행로를 꺼꾸로  들어갔다. 앰블란스는 앞에서 쏟아지는  자동차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일방통행로를 빠져나왔지만 시트르앵을 따돌리지는 못했다. 앰블란스는 방향을 틀어 파리 외곽으로 향했다.  물론 두대의 시트르앵도 간격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앰블란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하는 외곽 도로를 달렸다. 캄캄한 도로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있었지만  헤드라이트 없이는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었다. 별안간 앰블란스가 끽-소리를 내며 섰다. 뒤따라오던 시트르앵도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앰블란스의 뒷쪽에 정지했다. 
  앰블란스의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키 큰쪽의 남자는 땅바닥에 몸을 두번 굴리고는  사격자세를 취했다. 작은쪽의 남자도 무릎을 꿇고  자동차를 조준했다. 두사람의 손에는 은빛 광선총이 들려있었다. 
  뒤따라 섰던 두대의 시트르앵도 문이 활짝 열리며 다섯 사람이 길바닥에 몸을 던졌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도랑으로 몸을 숨기자마자 광선총이  섬광을  뿜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시트르앵에서 불길이 솟았다. 부서진 유리조각과 금속 파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앰블란스의 천정에 부딪쳤다. 
  곧이어 타탕-소리와 함께 도랑쪽에서  총알이  날아왔지만 광선총을 들고 있는 남자들은 피하지 않았다.총알은 쨍겅하는 소리를 내며 두남자에게 맞았지만, 입고 있던 옷이  조금 찢어졌을뿐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도랑쪽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꿇어앉았다. 그의  어깨에는 M-81 우라늄 기관포가 얹혀져 있었다. 그는 기관포를  연거퍼 쏘아댔지만, 탱크의 장갑판을 뚫는 우라늄 기관포도 앰블란스의 사내들이 옷속에 입고 있던 특수 보호장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입고 있던 옷과 두건만이 찢어졌을  뿐이었다. 찢어진 두건사이로 파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틀란티스인들은기관포를 짊어진 남자에게 광선총을  쏘았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숯이 되어버린  덩어리에서 흰 연기가 솟아올랐다. 타버린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번졌다. 
  뒷쪽에서 불빛이 비쳤다. 도로 저편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커다란 트레일러 하나가 튀어나와  급정거했다.  트레일러의 뒷문이 열리고 두명의 남자가 뛰쳐나왔다. 키 큰쪽의 남자의 등에는 안테나와 전기줄이 얽힌 기묘한 전자장치가 얹혀있었고, 박격포처럼 생긴 유선형 물체가 튜브로  연결되어  있었다. 키작은 남자는 아틀란티스인이 사용하는 은빛  광선총을 들고 있었다. 
  키 큰 남자는 아틀란티스인을 향해 유선형의 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청록색 섬광이 아틀란티스인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섬광을 받은 아틀란티스인은 충격으로 붕 떠서 뒷쪽의 나무 뒷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아틀란티스인들은 광선총을 다시  집어들었지만  계속되는 청록색 섬광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네번째의 청록색 광선 공격에, 아틀란티스인들이 입고 있는 보호장비에서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아틀란티스인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애썼지만 결국 그자리에 쓰러졌다. 아틀란티스인의 신체구조가  지구인과 달라서인지 피는 흐르지 않았다. 
  청록색 광선포를 들고 있던 남자는 앰블란스로  달려갔다. 먼저 시트르앵을 타고 앰블란스를 추적하다가 도랑뒤로 숨은 네명의 남자는 도랑 뒤에서 나와, 아틀란티스인에게  싸우다 죽은 동료의 시체에게 다가갔다. 
  앰블란스에 실려있던 코코는 마취된 채였지만, 청록색  광선포의 남자는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주사기를 꺼내 코코에게 놓았다. 들것에 누워있던 코코는 곧 눈을 떴다. 시트르앵을 타고 온 네명의 남자가 먼저 코코에게 말을 걸었다. 
  " 코코 몽띠에씨, 우리는 [자유의 친구들] 프랑스 지부 요원들입니다.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아틀란티스인이 당신을 납치하는 것을 보고 여기까지  추적해왔습니다. "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코코는 정신이 멍했다. 
  " 아틀란티스인이 왜 나를 납치하려고 했죠? [자유의 친구들]은 왜 내 신변을 보호하려고 했고요? "
  " 우리 [자유의 친구들]의 정보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인은 이번달 들어 세계 곳곳에서 열여덟살에서  서른  두살까지의 여자를 약 칠백명정도 납치하였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요원 한명이 죽으면서까지 코코씨를 보호한 이유는 이분이 설명해주실 것입니다. "
  트레일러에서 내린 두명이 코코의 앞으로  나서며  두건을 벗었다. 남자인줄 알았던 키작은 사람은 놀랍게도 긴 금발머리의 여자였다. 키 큰쪽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저는 한국에서 온 이 영훈이고 이쪽은 전에 CIA에서  일했던 아리오네입니다.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물리치고 지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코코씨의 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
  코코는 청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손을 끄집어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제가 무슨 힘이… 그리고 우리보다 엄청나게 앞선 과학기술을 가진 아틀란티스인을 우리가 어떻게 무찌르나요? "
  영훈은 땅바닥에 쓰러진 아틀란티스인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가 메고 있던  청록색 광선포를 내밀어보였다. 
  " 코코씨를 납치하려던 아틀란티스인을 저렇게 처치했잖아요? 아틀란티스인을 물리친 자력선포는 고대 무우인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 
  " 그렇다면 그 무기만으로도 아틀란티스인을 물리칠 수 있을텐데… "
  " 무우인이 남긴 비밀기지와 무기는 현재 고장난 상태입니다. 이 자력선포도 고장나지 않은 단하나의 무기를 들고  온 것입니다. 물론 지구인의 과학기술로 무우인의 기지와  무기를 고칠 수도 있지만, 그곳에 있는 무기만으로는 아틀란티스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
  " 그렇다면… "
  " 우리는 코코씨같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무우인이 남긴 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물리칠만한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코코씨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 계획의 총 책임자였지요? "
  코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내 약혼자였던  샤넬도 아틀란티스인에게 죽었어요. 당신들을 도울께요. "
  그녀는 껴안고 있던 휴대용 컴퓨터를 내밀었다. 
  " 다행히 오늘 난 [아리안] 계획의 모든 자료를  찾아냈어요. 휴대용 컴퓨터에 들은 이 자료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로켓을 발사할 수 있어요. "
  듣고 있던 영훈과 아리오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코코는 미소를 지으며 두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 악수를 나눈 코코는 영훈들이 타고 온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트레일러 안에는 세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청자켓을 입고 깡마르고 돗수높은 안경을 낀 사람이 코코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는 짙은 썬글라스에 펑크머리를 한 단단한  체격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 저는 버클리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피터  마이켈슨입니다. 자력선을 연구하고 있지요. "
  펑크머리 남자가 썬글라스를 벗으며 코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옆의 남자도 코코에게 가벼운 인사를 했다. 
  " 저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경비를 맡고  있던  특수부대 부대장 FLYFOX입니다. 제 옆에  있는  친구는  같은  부대원 ICBLUE이지요. 아틀란티스인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영훈씨 일행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
  영훈 일행을 태운 커다란 트레일러는  다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외곽도로를 빠져나갔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자동차들을 뒤로한 채 트레일러는 접선장소인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했다. 2차대전 연합군이 상륙했던 해안에는 스핑크스 컴퓨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평범한 어선으로 위장한  작은  선박이 영훈 일행을 동해안의 무우인 비밀기지로 데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트레일러가 도로를 빠져나간지 3분후, 놀랍게도  땅바닥에 쓰러진 아틀란티스인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불에 그을려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수 없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이 죽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살점이 녹아붙었지만  아틀란티스인은 전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은채 앰블런스  안에 설치된 컴퓨터 키보드에 몇 글자를 쳐넣었다. 수신자는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 트로이 작전 성공적으로 수행. 다음 지시 바람. ]
  아틀란티스인은 앰블런스 안에 설치된 작은 샤워기같은 물을 꺼내어 다른 아틀란티스인에게 뿌렸다. 흰거품이  몸을 감쌌고, 곧 거품이 딱딱하게 굳자,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천천히 몸에 붙은 거품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품  안쪽에서는 분홍색 피부의 새살이 돋아있었다. 상처를 치료한  아틀란티스인은 앰블란스를 운전하며 끝없는 어둠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Part IX 오이디푸스의 복수

  10월 2일 문무왕 수중릉.
  엑스컬리버가 설치되어 있는 통제실에는 여덟명의  지구인이 모여있었다.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해 눈은 빨갛게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푸석푸석하게  부어있었지만,  표정에서는 엄숙할 정도의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삐리릭-하는  신호음이 세번 나고 문이 열렸다. 수염을 기르고 헝클어진  머리의 영훈이 세사람의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 괜찮아요? "
  쓰러질듯 들어오는 영훈을 소연이 부축했다. 축 늘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만 영훈은 깎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사이로 소연에게 미소를 지었다. 
  " 괜찮아. 이제 필요한 사람은 다 모이게 된거야. "
  영훈은 소연의 부축을 받아가며 통제실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새로 온 세명을 포함한 다른 열한명도  의자를 가져와서 영훈의 주위에 둥그렇게 앉았다. 
  " 여기 계신 분들은 아틀란티스인의 손아귀에서 지구를 구출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모인 분들입니다.  서로들  잘 모를테니까 제가 한사람씩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는  KBC방송국의 기자 이 영훈입니다. 특수부대에서 훈련받은  경력이 있습니다. "
  그는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 제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은  저와 같은  KBC방송의  기자 안 소연입니다. 그 다음은 MIT의 컴퓨터 교수였던 이  영상, 그 옆에 앉은 담갈색 눈에 긴 금발머리 아가씨는 CIA의 극비 기술 담당 첩보원이었던 아리오네입니다. 아리오네는 한국의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된 금속판이 스핑크스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다가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긴 검은머리에 까만 안경을 쓰고 있는 아가씨는  한국의 유전공학연구소 연구원이었던 권 혜진입니다. 혜진양은 인간의 유전자에 영향을 끼치는물질을 연구하다가 스핑크스와 고대 무우인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여러분이 와계신 무우인의 비밀기지는 이렇게 다섯사람이 발견한 것입니다. "
  소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나갔다. 영훈은  소개를 계속해나갔다. 
  " 검은 머리의 소련인은 림스키 나르시코프, 전 KGB  교오토오 지부장이자 지금은 아레스의 우두머리입니다. "
  일동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낌새를 눈치챈 영훈은 서둘러 부연설명을 했다. 
  "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는 전세계적으로 수백명의 여자를  납치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열여덟살에서 서른살까지의 건강한 여자만  골라서 납치를 하고 있어요. 나르시코프의 부인도  아틀란티스인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아레스의 우두머리인 나르시코프가 우리편에 가담하게 된 이유는 아내를 납치한 아틀란티스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손에 쟁반을 든 소연이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빨간색 쥬스가 담긴 유리컵이 얹혀있었다.
  " 옛날 무우인들이 마시던 쥬스의 한 종류였던 것 같아요. 분자합성기로 만든 것인데 혹시 몰라서 제가 미리  먹어봤어요. 맛은 그런대로 좋을거에요. "
  일동은 푸-하는 한숨을 내쉬며 쥬스잔을 받아들었다.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려갔다. 영훈은 파인애플과 오렌지의 중간맛이 나는 쥬스를 반쯤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고 소개를 계속했다. 
  " 썬글라스에 짧은 펑크머리를 한 사람은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경비를 담당했던 특수부대장 FLYFOX이고 그 오른쪽에 앉아있는 곱슬머리의 흑인은 같은 특수부대에 있었던 ICBLUE입니다. 두사람은 아틀란티스인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옆에는 NORAD의  컴퓨터를  제어하던 마이클 오즈본,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청자켓을 입은  사람은 자력선의 세계적 연구가인 버클리 대학의 피터  마이켈슨 교수입니다. 긴 청바지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여자는 유럽공동체(EC)의 우주로켓 프로젝트인 [아리안]계획의 총책임자였던 코코 몽띠에 박사고, 뒷쪽에 팔짱을 낀채 앉아있는 수염을 기른 남자는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핵융합을 연구하고 있던 제임스 타일 박사입니다. 제임스 타일 박사는  흔히 제다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고, 오늘 아침 이  기지의 동력원인 핵융합 장치를 고쳐서 가동시킨 장본인입니다. "
  제다이가 기지의 동력장치를 고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앉아있던 모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제다이에게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가장 큰 문제인 동력장치를 고쳤으니 스핑크스를 없애는 길로 그만큼 다가간 셈이다.
  피터 마이켈슨이 청자켓에 손을 쓱쓱 문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튜브와 몇개의 전선이 얽힌  회색 물체가 들려있었다. 
  " 제가 들고 있는건 사방 3킬로미터내의 모든  전자장치를 무력화시킬수 있는 자력선 폭탄입니다. 이건 시작품이라  별 위력이 없지만, 기지의 시설을 사용하면 오늘 밤안으로 뉴욕시 정도의 구역에 작용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
  뒷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나르시코프가 일어나서 마이켈슨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그 자력선 폭탄으로 스핑크스 컴퓨터의 전자장치를마비시킬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
  "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있는 자유의 여신상 지하 기지는 자력선 차단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자력선 폭탄으로도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
  " 그렇다면… 이 무기를 가지고는 아무데도 쓸  수  없지 않아요? "
  코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이켈슨에게 물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전  지구가  아틀란티스인에게 항복했던 것은 스핑크스가 제어했던 아틀란티스인의  신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력선 폭탄을 사용하면,  스핑크스 컴퓨터가 제어하는 모든 무기는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력선 폭탄은 모든 통신장치를  차단하기 때문에 스핑크스 컴퓨터는 스핑크스 컴퓨터 바깥에 있는  어떤 무기도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자력선 폭탄은  스핑크스 컴퓨터와 바깥세계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구실을 하죠.  그동안에 우리는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시켜야 합니다. 일단 스핑크스 컴퓨터만 없애면,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겁니다. "
하지만… 스핑크스 컴퓨터에게 자력선 폭탄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우리는 무얼로 스핑크스 컴퓨터를 부수죠? "
  소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뒤에 서있던 혜진이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핑크 레이디 칵테일과 비슷한 색깔의  분홍색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가 들려있었다.
  " 바로 이겁니다. 고대 무우인이 초능력을 쓸 수 있었다는건 아시죠? "
  " 초능력? "
  영훈을 제외한 나머지는 혜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훈은 머리를 숙인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 다행히 이 기지에는 고대 무우인의 혈액 견본이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그 혈액에서 유전자를 추출해서, 고대  무우인이 가졌던 초능력을 되살리는 약품을 개발했습니다.  스핑크스 컴퓨터 안에 들어가서는 무우인의  초능력을  사용해서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
  일제히 환성이 올랐지만, 영훈은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지난 몇달동안 영훈의 머릿속을 휘감고 있던 물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였다. 
  ‘ 아틀란티스와 무우 대륙의 전쟁 이후 살아남은 아틀란티스인은 유럽으로, 무우인은 태평양으로 흩어졌다.  폴리네시아 군도는 무우대륙이 아틀란티스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을 때 가라앉지 않은 몇 안되는 땅이라고 [엑스컬리버]는  말했다. 폴리네시아 군도의 이스터 섬에 남아있는  [모아이]라는 석상은 무우인이 쓰던 로봇인 [무우이]에서 따온 말이다. 그럼… 무우인이 쓰던 컴퓨터의 이름인 [엑스컬리버]는  폴리네시아 군도의 전설에 나오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는가.  왜 무우인의 주 컴퓨터 [엑스컬리버]가 아틀란티스인이  흩어져 세운 유럽의 전설인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신검(神劍)  이름이란 말인가. [엑스컬리버]와 아틀란티스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것은 아닐까? ‘
  생각하던 영훈은 옆에서 소연이 팔꿈치로  툭치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혜진은 플라스크를 든 채로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 자, 이제는 우리의 이름을 지을 차례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
  코코가 머뭇머뭇거리다 말했다. 
  " 이 기지의 주 컴퓨터가 [엑스컬리버]니까 [원탁의 기사]로 하는게 어떻겠어요? "
  " 원탁의 기사? 그것 괜찮겠는데요? "
  영상이 동의하자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했다. 
  " 저는 우리를 [오이디푸스 특공대]라고  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스핑크스 컴퓨터 아닙니까? 그리이스 신화에 보면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자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추지 못하면 그사람들을 죽였지만 어느날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서 그 문제를 맞추자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져서 죽었지요. "
  " 스핑크스를 잡는 오이디푸스 특공대라… 멋있는 이름인데요? "
  소연은 철없는 문학소녀마냥 손뼉을 치며 좋아했지만,  피곤한 기색의 영훈은, 각자 돌아가 쉬고  오후부터  스핑크스 공격계획을 짜도록 하자고 말했다. 스핑크스를 이길  희망이 보인다는 혜진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은 하나둘씩 자기방으로 돌아갔다. 
  생각할 일이 있으면 항상 고개를 숙이며 걷는 습관이 있는 영훈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둘, 발걸음을 세었다. 영훈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마흔다섯? 발걸음을 세던 영훈의 발길이 갑자기 멈춰졌다. 
  ‘ 이 기지는 바둑판처럼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복도의 길이가 똑같다. 하지만 내 방이 있는 복도는  유난히  짧다. 왜? ‘
  그는 오던 길을 돌아 [엑스컬리버] 컴퓨터실이 위치한  중앙복도로 나가서는 천천히 발걸음으로 길이를 쟀다. 예순 걸음. 
  영훈은 자기 방앞의 복도로 돌아가 천천히 벽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매끄럽게 다듬은 금속 복도 모서리뒷쪽으로  작은 틈이 감춰져있었다. 그는 광개토 대왕릉에서 발견한  금속판을 틈사이로 집어넣었다. 막힌줄만 알았던 복도끝이  소리없이 열리고 영훈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15미터정도 되는 방의 전면 벽은 거대한  스크리인으로 되어있었지만, 회색빛 스크리인은 꺼져있었다. 왼쪽 벽에는 1.5미터 크기의 은빛 금속상자에 든 컴퓨터 세개가  50센티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있었고, 그 옆에는  태양계 모형이 설치되어있었다. 
  ‘ 하나, 둘… 열두개의 행성이면 지구가 속해있는 이  태양계는 아니구나. 도대체 어느 은하계의 태양계일까? ‘
  영훈이 마음속으로 묻자마자 전면 벽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 은하계의 가장자리에있는 하나의 태양이 나타나면서 영훈의 머릿속에 컴퓨터의  정신감응  음성이 들려왔다. [엑스컬리버]의 정신감응 목소리와  다른  것으로 보아서 이 방의 컴퓨터는 [엑스컬리버]와는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천년동안 잠자고 있던 이 방안의 컴퓨터가  영훈의 정신감응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당신이  보고  계시는  태양계는  12개의  행성을  가진 EJ-0203입니다. ]
  약간 붉은기가 도는 EJ-0203 태양을 배경으로 네번째의 행성이 화면에 점차 크게 비춰졌다. 우주공간에서 볼 때는  회색의 구름으로 덮여있는 대기권을 내려가자, 짙은  구름속을 뚫고 제 4행성의 표면이 비춰졌다.  번쩍거리는  반사광으로 빛나는 행성의 표면은 놀랍게도 금속투성이였다. 흙이라고는 한줌도 볼 수 없는 표면에는 노란색, 붉은색, 은색의 금속조각이 마치 풀포기처럼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몰아치는  강풍에 금속 풀포기들은 이리저리 흔들렸고, 구름사이에서는  강한 번개가 계속 번쩍거리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화면에는 제 4행성의 바다가 비춰졌다.  은색으로  빛나는 바다는 얼핏보면 대야에 담아놓은 수은처럼 은색으로 번들거렸다. 높은 온도는 아니었지만, 행성의 바다는 틀림없이  녹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온통 금속으로 이루어진 행성이군. ‘
  영훈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순간, 무언가가 금속의 바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화면에 비쳐진 모습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영훈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은빛 금속 액체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솟아오른 것은  거대한 악어모양의 물체였다. 머리 위쪽에 꼭 더듬이처럼 굵은 금속 파이프같은 것이 굽어져 튀어나와있었고, 더듬이 끝에  달린 붉은 렌즈모양의 물체는 눈처럼 보였다. 게처럼 더듬이 눈을 가진 거대한 악어모양의 물체는 온통 금속 광택을 내고 있었지만, 그 몸놀림은 살아있는 생물보다도 자연스럽고  재빨랐다. 악어모양의 물체는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더니 입을  벌렸다. 순간, 작은 벼락이 악어의 입을  강타했지만,  악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악어의  눈이,  마치 먹을것을 배불리 먹은 짐승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로보트일까? ‘
  영훈은 의아해했지만, 방안에 장치된 컴퓨터의 대답은  영훈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로보트가 아닙니다. 저것은 전기행성에서 자란 살아있는 금속 생명체입니다. 금속 생명체는 하늘의 번개를  영양소로 취합니다. ]
  화면에 희끄무레한 인간의 형태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막 꺼지려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영훈의 심장은 그자리에 얼어붙는듯 했다. 화면에 보였던 희끄므레한 인간의 형체는 틀림없는 아틀란티스인이었다. 
  머릿속에 다른 컴퓨터의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지의 주 컴퓨터인 [엑스컬리버]였다. 
  [ 영훈씨에게 알립니다. 이 방안에서 본 것은 영훈씨와 지구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십시오. 이 방안에 장치되어있던 컴퓨터는 제가 작동을 정지시켰습니다. ]
  " 도대체 내가 이 방안에서 본 것이 뭐지, 엑스컬리버? 전기행성? 살아있는 금속생명체? "
  [ 엑스컬리버는 영훈씨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서 방으로돌아가십시오. ]
  영훈은 손에 쥐고 있던 금속판을 흔들어보였다. 
  " 엑스컬리버, 이 금속판을 잊었나? 이 금속판은 이  기지의 모든 장치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 너는 금속판을 가진 사람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빨리 말하라. 화면에 나타났던 것은 아틀란티스인이 맞지? "
  [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엑스컬리버는 금속판을 가진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이 질문만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엑스컬리버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
  영훈은 놀라서하마타면 금속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면에 나타났던 전기행성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기에  엑스컬리버가 내게 반항하며까지 말하지 않으려 하는걸까?
  " 그럴 수 없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찾을  수밖에 없어. "
  영훈은 벽 왼쪽에 설치되어있는 컴퓨터로 다가갔다.  컴퓨터에는 전원이 켜져있었지만, 화면에는 계속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이 컴퓨터를 작동시키면 전기행성의 비밀을 알 수  있을거야. ‘
  영훈이 컴퓨터에 손을 대려 하자 엑스컬리버가  소리쳤다. 컴퓨터가 소리쳤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훈의 머릿속에 울려오는 엑스컬리버의 정신감응 목소리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왔다. 
  [ 억지로 대답을 찾으려 하신다면 엑스컬리버는  부득이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
  영훈이 엑스컬리버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대려하자,  갑자기 어깨쪽에서 전류가 찌릿하고 흘렀다. 영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신은  말짱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 미안합니다, 영훈씨. 당신은 알아서는 안될  것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습니다. 엑스컬리버는 당신의 기억을 지워버리겠습니다. ]
  순간 영훈의 머릿속에 다른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렸다. 엑스컬리버도, 방안에 있던 컴퓨터도 아닌 다른 정신감응 목소리였다.
  [ 엑스컬리버, 이영훈씨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중지하라. ]
  [ 알겠습니다. 엑스컬리버는 명령에 복종합니다. ]
  잠깐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더니 몸이 자유로와졌다.  영훈은 뒤도 안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아까 엑스컬리버에게 당한 어깨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영훈의  머릿속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보다도 더 뒤엉킨 복잡한 생각  뿐이었다. 
  ‘ 도대체 전기행성의 비밀은 뭘까… 내가 알아서는  안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걸까… 게다가, 막판에 엑스컬리버에게 명령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이 기지안에서는 엑스컬리버에 명령을 내릴만한 컴퓨터가 없는데… 설마… ‘
  영훈의 머릿속에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후들후들  떨려오는 온몸을 감당할 수 없어 영훈은 침대 모서리에 몸을  기댔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전율에 영훈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 그럴리는 없을거야. 분명히 그럴리는… ‘
  영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복도 건너편의 영상의  방으로 갔다. 영훈은 영상의 귀가에 대고 몇마디를 속삭였다.  듣고있던 영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훈을 쳐다보았다.
  " 사실이야? "
  "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그래서 자네한테 물어보러  온거야. 자네는 통신장치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지? "
  " 응, 전자공학을 배웠으니까 대강은 알 수 있지. 근데 그건 왜? "
  " 확인할게 있어. "
  영훈은 다시 영상의 귀에 몇마디 지껄였다. 영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렇지. 그걸 확인한다면 자네 말이 맞겠군. 그럼  같이 올라가볼까? "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통신실은 컴퓨터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두번째 복도를 지나 왼쪽에 있었다. 영상은 구석에  설치된 오각형 모양의 컴퓨터 뚜껑을 열고 몇가닥의 케이블과 집적회로 칩을 만져보더니 고개를 돌려 영훈을 쳐다보았다. 
  " 엑스컬리버는 기지의 통신장치가 100킬로미터  이내밖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이  통신장치는  최소한 20000킬로미터는 도달할 수 있는 장치야. "
  " 20000킬로미터면… 지구 둘레의 반 아냐? "
  영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지구 둘레의 반까지 도달한다는  말은…  엑스컬리버는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곳과도 통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 "
  영상은 손가락 끝으로 통신장치의 안테나를 가리켰다.  영훈과 영상의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도의 방향성을 가진 통신장치의 안테나는 미국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가서 악마에게 눈알을 뽑히는듯한 무서운  공포감만이 기억날 따름이었다. 소연이 침대맡에 앉아서 불안한 눈초리로 영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꿈이었어요? 너무나 무섭게 비명을 지르기에  뛰어 들어와봤어요… "
  " 아냐, 아무것도… "
  "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스핑크스를 물리치는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준비가. "
  소연은 웃으며 영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훈은 천천히 컴퓨터실로 갔지만, 지난 밤의 악몽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땀에 젖은 얼굴을 가볍게 도리질해댔다. 
  컴퓨터실에는 모두가 모여있었다. 컴퓨터실  뒷쪽에  있는 실험실에는 사람이 들어갈만힌 크기의 열두개의  유리튜브가 뚜껑이 열린채 설치되어있었다. 튜브의  뒷쪽에는  붉은색과 핑크색, 노란색과 파란색의 관과 튜브,  전선줄이  얼기설기 얽혀있었고, 그 전선줄은 엑스컬리버와 연결되어있었다.  튜브에서 빠져나온 파란색의 굵은 관의 끝에는 링겔병과  비슷하지만 조금 큰 유리병이 달려있었고, 그 안에는 어제  혜진이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분홍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혜진은 하얀 실험복을 입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영훈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 잘 잤어요? 어제밤에 무우인의 유전자 분석이 끝났어요. 조금 있으면 우리도 고대 무우인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게 돼요. "
  혜진은 유리튜브의 뚜껑을 열고, 튜브의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차례로 이 유리튜브 안에 들어가세요. 조금 있으면  [엑스칼리버]가 자동적으로 유전자 교환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엑스컬리버에 입력해놓았어요. "
  영훈은 줄지어 늘어서있는 열두개의 유리튜브를  쳐다보았다. 이 기지를 제어하고 있는 [엑스컬리버] 컴퓨터까지 합치면 열셋이 된다. 서양인이 죽도록 싫어하는 숫자 13… 영훈은 한국인이라 그런 미신은 믿지 않았지만, 왠지 기분이  꺼림찍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에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하기 직전의  [최후의 만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예수님과 열두명의 제자 대신에 [엑스컬리버]와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라면…  우리를 배신할 가롯 유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이디푸스 특공대]는 하나같이 믿을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영훈은  마음속을 덮쳐오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혜진은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을 차례로 유리튜브에 들어가게 했다. 곧 작은 팔찌같은  것이  튀어나와 손목과 발목을 고정시켰고, 슛-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가스가 뿜어져나왔다. 아마 마취제였던지  의식이  몽롱해져가기 시작했다. 몇개의 주사바늘이 팔뚝을 찌르고,  혈관을  타고 미지의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열두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 대원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횃불을 든 사람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말들의 힝힝대는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창과 활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서있는 앞에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영훈은 허리에 차고있는 칼을 번쩍 치켜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느새인가 영훈은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아더왕이 되어있었고, 그의 손에는신이 내려준 전설의 보검 [엑스컬리버]가 들려있었다.
  " 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이제는 마귀를 물리치러  용감하게 나갈 때다. 모두 나를 따르라! "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멀리서 진군을 알리는 뿔나팔소리가 들려왔고, 영훈은 엑스컬리버를 치켜든채, 백마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저멀리 들판에도 횃불과 함께 한무리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사악한 마귀의 병사들이다. 물러서지 마라! "
  영훈은 이렇게 외치며 적군 사이로 뛰어들어 엑스컬리버를 힘껏 휘둘렀다. 영훈이 가는 사이사이로 적  병사들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갑자기 그의 앞으로 검은 갑옷과 망토를 입은 거대한 장수가 튀어나왔다. 이글이글 타는듯한 그의 눈동자는 살기로 가득차있었고, 힘껏 휘두르는 그의 칼은 무엇이든지 베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왔다.  영훈은  엑스컬리버를 휘둘렀지만, 놀랍게도 엑스컬리버는 길다란  밧줄로  변해서 도리어 아더왕인 영훈을 꼼짝못하게 묶어버렸다. 
  ‘ 엑스컬리버가… ‘
  놀라서 탄식하는 영훈의 머리위로 적 장수의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끝없는 암흑 가운데로 한없이 떨어지는 영훈의 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덩어리가 다가왔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다가왔다가는 사라져갔다. 아랫쪽에서 거대한  불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영훈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화염이 그의 몸을 휩싸는 순간 영훈은 저도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 깔려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혀갔다. 희미하고  뿌옇게 물체의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연이었다. 
  " 괜찮아요, 영훈씨? "
  " 응… "
  " 너무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우리는 당신이 실패한줄만 알았어요. "
  하얀 실험복을 입은 혜진이 말했다. 
  " [엑스컬리버]의 계산은 정확했어요. 유전자 복원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오이디푸스 특공대]는 고대 무우인이  가지고 있던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어요. "
  영훈은 혜진이 입을 열지 않고 말하고 있는데 놀랐다.  소연이 영훈의 표정을 보더니 대답했다. 소연의 대답은 머릿속에 울려오고 있었다. 
  " 영훈씨도 할 수 있을 거에요. 간단한 텔레파시의 일종이죠.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해봐요. "
  영훈은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하며 FLYFOX를 불렀다. 마음속 한쪽에서 움찔하는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더니  FLYFOX의 대답이 산꼭대기에서의 메아리처럼 울리며 들려왔다. 
  " 깨어나셨군요, 영훈씨. 우리는 당신이 깨어나지  않는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준비되어있던 광선총도 찾아냈고, 마이켈슨 교수는 자력선 폭탄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
  영훈은 텔레파시로 코코를 불렀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영훈은 옆에 서있던 혜진에게 물었다. 
  " 코코 몽띠에 박사는 어떻게 된거죠? 왜 그녀에게는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죠? "
  혜진은 양 어깨를 들썩하며 모르겠다는 몸짓을 했다. 
  " 이상하게 코코 박사에게는 아무런 초능력이 일어나지 않더군요. 체질에 따라서 안되는 사람이 있나봐요. 하지만, 코코 박사의 임무는 직접 싸우는게 아니라 미사일 제조에 있잖아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않겠어요?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났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ICBLUE가 들어오다가 영훈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 일어났군요, 다행이에요. 곧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없애기 위한 작전을 의논할겁니다. 회의실로  모두 오세요. "
  영훈은 용건을 전하고 나가려는 ICBLUE를 불러세웠다.  그는 뒤돌아서서 영훈에게 다가갔다. 
  " 왜 불렀죠, 영훈씨? "
  " ICBLUE, 당신은 폭발물 전문가죠? "
  " 예, 그런데 그건 왜 묻죠? "
  "지금 여기서 폭발물을 만들 수 있어요? 지금 당장  여기서. "
  " 무엇에 쓰려는거죠? 얼마만한 위력으로? "
  ICBLUE는 의아한 눈초리로 영훈을 쳐다보았다. 
  " TNT 1메가톤 정도 크기로요. 가능한가요? "
  ICBLUE의 입이 벌어졌다. 
  " 1메가톤이요? 맙소사, 그건 작은 원자폭탄 정도의  위력이에요. 도대체 그걸 어디다 쓰려는거죠?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에게는 그정도로는 소용이 없고, 다른데 쓰기에는 위력이 너무 커요. 당신, 한 도시를  날려버릴  일이라도 있는건가요? "
  " 만들수 있는지 없는지만 묻고 있어요.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에요. "
  ICBLUE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 만들수는 있어요. 하지만, 어디에다 쓰려는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만들어줄 수 없어요. 우리는 같은 오이디푸스  특공대에요. "
  " 날 믿어줘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에요. "
  " …… "
  영훈은 ICBLUE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ICBLUE도  영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ICBLUE가 먼저 검은 얼굴을 끄덕거렸다. 
  " 좋습니다. 영훈씨를 믿어드리지요. 두시간 내에  만들어 드릴께요. 자, 이제 나가서 아틀란티스인과 스핑크스 컴퓨터를 때려잡을 계획을 짭시다. "

  10월 5일 오전 7시 20분 문무왕 수중릉. 
  아직도 차가운 아침햇살을 받으며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 바닷속에서 튀어나왔다. 고기잡이 배도 항구로 되돌아간  바닷가라 인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들 머리위 수만  킬로미터 위에 떠있는 세대의 인공위성은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 바다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감지해냈다. 
  " 자력선 미사일 발사준비 완료. 엔진, 폭파장치,  제어장치, 유도장치 이상 없음. "
  EC의 우주로켓 계획의 총책임자였었고, 자력선 폭탄을  싣고 뉴욕까지 날라갈 미사일을 설계한 코코 몽띠에가  미사일 발사의 총책임을 맡았다. 코코의 눈은 계기판에 표시된 숫자를 읽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코코는 뉴욕으로 향하는 소형 우주선 안에서 미사일 발사를 원격 조종하고 있었다. 자력선 미사일은 문무왕 수중릉 해저 무우인의 비밀기지의 발사대에서 발사단추가 눌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발사 5분전. 준비는 순조롭습니다. "
  코코의 목소리가 스피이커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연은 우주선 안의 무전기로 영훈을 호출했다. 
  " 자력선 미사일이 폭발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죠? "
  " 스핑크스가 설치해놓은 비밀 무기들은 모두  전자장치로 제어되고 있어. 자력선 폭탄은 스핑크스 주위의  전자장치를 모두 파괴하는 역할을 하지.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비밀기지는 자력선 방어장치가 되어있기 때문에  스핑크스를  파괴할 수는 없지만, 스핑크스가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올 수는 없게 되지. 우리는 그 틈에 스핑크스를 없애버려야 해. "
  " 스핑크스가 미사일 발사를 눈치채고 미리  파괴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
  영훈은 가볍게 웃으며 소연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무우인의 미사일은 스핑크스 컴퓨터에 탐지되지 않게 특수 재료로 설계되어있어. 스핑크스는 미사일의 발사를  눈치챌 수 없을거야. "
  영훈은 마이크를 잡고, 다른 대원에게 지시했다. 
  " 자력선 폭탄이 폭발한 후부터 전자장치가 복구될 때까지는 30분정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30분 후면 스핑크스는 곧바로 전자장치를 복구해서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력선 폭탄이 폭발하자마자 공격을 시작해서 30분 이내에 스핑크스가 들어있는  심장부로  들어가야 합니다. "
  스피이커로 아리오네의 음성이 들려왔다.
  " 현재 위치는 미국 중서부 해안. 스핑크스가 있는 뉴욕까지는 약 7000킬로미터정도 남았습니다. "
  곧이어 자력선 미사일의 발사를 알리는  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력선 미사일 발사! 목표는 스핑크스 컴퓨터가  위치한 뉴욕 자유의 여신상 지하. "

  7시 32분. 
  문무왕 수중릉이 위치한 경주 앞바다에서는 거대한 물기둥이 솟으며 50발의 미사일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상공으로 치솟은 미사일은 고도를 높여가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2분후면 도달하게 될 미사일의 목표는 뉴욕이었다. 
  같은 시간,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에서는 커다란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아틀란티스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화면에는 반짝이는 붉은 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아틀란티스인은 곧 옆에 있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의 뒷산에 설치되어있던 플라즈마 포는 미세하게 방향을 조정해서 날아오는 자력선 미사일을 겨냥했다.

  7시 33분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우주선.
  " 발사후 75초. 상황 이상없음. "
  코코는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갑자기 코코의  레이더 스크린에 표시된 반짝이는 점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코코는 계기가 잘못되었나 확인했지만, 계기는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코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50발의 자력선 미사일은  로스알라모스 원자력 연구소에서 발사된 플라즈마 포에  의해서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미사일은 흔적도 없이 금속가루가 되어  바닷바람에 날아가버렸다. 
  " 자력선 미사일이 사라졌음. 스핑크스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
  코코의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열두대의  우주선에서는 일제히 신음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력선 무기마저 스핑크스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다니… 하지만  영훈은 이성을 잃지 않은채 레이더 스크리인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로 침착하게 다음 명령을 지시했다. 
  " 이미 스핑크스는 우리가 공격하러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것입니다. 자력선 폭탄이 파괴돈 이상, 우리는 우리들의 초능력만 가지고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과  싸워야 합니다. "
  아리오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리오네는 의외로 침착했다. 
  " 현재 위치는 뉴욕 서쪽 3000킬로미터. 곧 뉴욕에 도착합니다. "

  7시 34분, 유타주에 위치한 아틀란티스인의 비밀 기지. 
  사막 한가운데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게모양의  물체가 솟아올랐다. 영낙없는 SF영화의 한장면처럼 보였던  금속 물체는 거대한 역자장포였다. 기지의 아틀란티스인은  천천히 공격목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오이디푸스 특공대가 타고 있던 열두대의 소형 우주선이었다.

  7시 35분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우주선. 
  영훈은 마이크를 잡은채로 아리오네를 호출했다. 
  " 아리오네,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실시합니다. 공격개시! "
  ‘ 트로이의 목마 작전? ‘
  절망에 빠져있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의 귀에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 희망이 있다! 그러나, 다음순간 아리오네의 우주선이 편대의 뒷쪽으로 빠지는가 싶더니 코코의 우주선에  조그마한 소형 미사일을 발사했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코코의 우주선은 불길에 휩싸이며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소연과 혜진은 비명을 질렀지만, 아리오네는 태연하게  보고했다. 
  " 코코가 탄 우주선 격추에 성공. "
  뒤통수를 맞은것 같았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경비 특수부대장이었던 FLYFOX였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영훈에게  소리를 버럭질렀다. 
  " 돌았어요? 당신 지금 정신이 있는거요, 없는거요?  우리끼리 싸움을 벌이다니, 그것도 작전이요? "
  영훈은 FLYFOX의 말에 개의치않고 냉냉한 목소리로 아리오네와 영상에게 명령했다. 
  " 아리오네, 영상, 자력선 미사일 발사! 목표는  스핑크스가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
  ‘ 자력선 미사일이라고? 이미 자력선 미사일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잖아? ‘
  " 알겠습니다. 자력선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
  아리오네와 영상도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조종간 아랫쪽에 있는 작은 빨간색 단추를 눌렀다. 영훈과 영상, 아리오네의 우주선에서 50발의 소형 미사일이  뉴욕의  심장부로 날아갔다. 정찰용 인공위성과 레이더는 새로이 발사된  50발의 미사일을 포착했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7시 36분. 
  50발의 자력선 미사일은 자유의 여신상 바로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예전에 미국이라고 불리웠던 231지구에서 249지구까지의 지역안의 모든 전자장치들은 7시 36분에서부터  15초간 정지했다. 사람이나 건물, 기계장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강력한 자력선은 스핑크스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했다. 
  전세계의 교통기관과 정보통신망, 산업과 에너지,  컴퓨터망은 자력선 폭탄이 폭발하면서부터 완전히 멎었다.  세계에서 전자장치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핑크스 컴퓨터가 통제했기 때문에, 스핑크스와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진  이후에 전세계의 전자장치는 쓸데없는 고철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자동차도, 철도도, 발전소도, 정유 공장도,  모두  멎어버렸다. 아틀란티스인이 제어하고 있던 거대한 과학기지와  연구소도 일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스핑크스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움직이고있는 전자장치는 손목시계와  휴대용 계산기 정도였다. 
  영훈은 11대의 우주선을 뉴욕에 착륙시켰다. 스핑크스  컴퓨터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시설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자력선 폭탄이 폭발한 후로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 코코 몽띠에 박사는 실은 아틀란티스인의 첩자였습니다. 그리이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그리이스 군이 목마를 사용해서 트로이성안에 침입했듯이 코코는 아틀란티스인에게  쫓기는 척하면서 우리들 사이에 침입했던겁니다. 원래 우리의 자력선 미사일은 스핑크스에게 탐지되지 않는 특수 장치가  달려있었지만, 코코는 그 특수장치를 떼어버리고 미사일의  위치를 스핑크스에게 송신하는 전파발신기를 달았던겁니다. "
  " 세상에 이럴수가… "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훈은 계속 설명해나갔다. 
  " 코코만 초능력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저는  코코를 의심했습니다. 인간이라면 초능력이 발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거죠. 거기서 코코가  아틀란티스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던겁니다. 저와 아리오네, 영상은 이  사실을  꺼꾸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가짜 자력선 폭탄을 코코에게  넘겨주고, 진짜 자력선 폭탄은 우리가 타고 온 우주선에  달았던겁니다. 스핑크스가 자력선 폭탄을 파괴했다고 안심했을 때 기습공격을 가하는거죠. 다행히 여기까지는 성공했지만,  스핑크스 내부에 들어가서 스핑크스 컴퓨터를  파괴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스핑크스 주위의 전자장치가  복구되는 30분 안에 공격해야 합니다. "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NORAD (북미 방공 사령부)의 컴퓨터를 담당했던 마이클 오즈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 계산에 실수가 있었어요. 스핑크스가 전자장치를 복구하는데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서둘러야 해요. "

  7시 38분. 
  우주선에서 내린 열한명의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은  광선총으로 무장하고 지하의 출입구를 내달았다. 순간, 픽-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들의 뒷쪽에서 들렸다. 몇분의  일초동안에 영훈의 반사신경은 광선총을 등뒤로 돌리게 했다. 영훈의 광선총에서 발사된 붉은색 빔이 등뒤의 벽에서 튀어나온  스핑크스의 레이저포를 산산조각냈다. 
  " 대단한 반사신경이군요. "
  뛰어가며 숨찬 목소리로 아리오네가 영훈에게 말했다.  텔레파시로 전달되는 목소리라 그런지 말하는 상대의 심리상태를 더 잘 알수 있는 목소리였다. 
  " 안심하긴 아직 일러요. 이놈의 스핑크스란 괴물이  이정도로 약하게 공격할 리가 없어요. "
  복도를 내닫는 그들의 발자국소리만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순간, 나르시코프가 소리를 질렀다. 
  " 저쪽 벽을 봐요! 저기는… "
  투시력으로 벽 뒤를 궤뚫어볼 수 있는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은 벽 뒷쪽의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르시코프는 광선총의 출력을 최대로 해서  미친듯이  벽에 쏘아댔다. 
  " 이 괴물같은 아틀란티스인들아, 내 아내를 내놔!!! "
  5중 티탄합금 벽이 광선총의 붉은 빔을 맞자 서서히  녹아내렸다. 순간,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나르시코프와 제다이가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리오네는 전직  첩보원답게  옆에 있는 소연의 팔을 잡아끌고 뒷쪽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아까까지 나르시코프가 서있던 복도 바닥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나르시코프와 제다이의 비명소리가  텔레파시로  들려왔다가 뚝 끊어졌다. ICBLUE는 초능력으로 공중으로 떠올라  복도의 갈라진 틈을 내려보았다. 아랫쪽에는 갈색의 액체가  가득담긴 함정이었다. 함정에 빠진 나르시코프와 제다이의 몸은 갈색의 액체속에서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ICBLUE는 이를 악물었다. 
  " 이 기계덩어리 스핑크스! 절대로 용서못한다! "

  7시 40분. 
  영훈은 시계를 보았다. 스핑크스의 전자장치가 복구되는 7시 46분까지는 6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영훈은  대원들을 둘로 나눴다. 
  " 지금은 슬퍼할 틈도 없어요. FLYFOX와 ICBLUE, 피터  마이켈슨과 마이클 오즈본 네명은 여자들을 구출해요. 난 스핑크스의 심장부로 들어갈테니까. "
  뒤에 남은 네명의 대원은 광선총으로 벽을 녹이기  시작했다. 사이다의 마개를 따는 소리를 크게 한 것같은 소리를 내며 벽에 구멍이 뚫렸다. 네명의 대원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벽 안쪽에는 거대한 유리튜브가 수천개씩이나 줄지어 서있었고, 그 각각에는 아틀란티스인이 잡아왔던 여자들이  알몸으로 들어있었다.
  유리 튜브 안에는 초록색의 액체가 주입되어 있었고, 각각의 유리튜브에서 전선과 유리관이 나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눈이 감겨있는 여자들의 표정은 잡혀왔을  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마취된 때문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들이 담긴 유리튜브를 쳐다보던 FLYFOX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배가 불러있었다. 스핑크스가 잡아온 여자들의 몸속에서는 정체를 알수 없는  생명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7시 41분.
  유리 튜브에서 녹색의 액체가 빠져나갔고, 여자들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FLYFOX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시작했다. 
  " 쏴버려! 저것들은 이미 지구인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인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 저 뱃속에서 어떤 생명체가 나올줄  알아? 저것들을 살려둔다면 큰 일이 나게 돼! "
  FLYFOX는 광선총을 사방에 대고 쏘아댔다. 유리조각과  파편이 사방에 날리고, 컴퓨터의 부서진 조각들에서는 전기 불꽃이 튀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ICBLUE와 마이켈슨, 오즈본도 여자들이 깨어나면 그 뱃속에서 어떤 생명체가  나올지 모른다는 FLYFOX의 말에 동감했다. 유리튜브들이 연결되어있던 컴퓨터가 파괴되는 순간, 뒤에서 광선총의  파란  섬광이 번쩍였다. 광선총을 든 아틀란티스이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 조심해! "
  FLYFOX는 광선총을 아틀란티스인에게 갈겨댔다.  특수부대 대장까지 지낸 경력에 걸맞게 FLYFOX의  사격솜씨는  놀라왔다. 예닐곱명의 아틀란티스인이 쓰러졌지만, 광선총을  들고 있는 아틀란티스인들은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 제길, 웬 떼거리가 이리 몰려온담? "
  FLYFOX는 투덜댔지만, 사실상 투덜댈 틈도 없었다. 쉴새없이 날아오는 광선총의 빔에 네명의 특공대원은 이리저리  굴러야 했다. 
  아틀란티스인이 쏘아댄 광선총 한발이 뒷쪽의 화학물질 탱크에 맞았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FLYFOX의 귀청을 찢었다. 순간 태양 표면온도를 능가하는 초고열의 화염이 방안을 온통 휩쓸었다. 자기 몸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FLYFOX는 마음속으로 투덜댔다.
  ‘ 이런 빌어먹을 거지떼같은 아틀란티스 놈들… ‘

  7시 43분. 
  문뒤를 투시력으로 궤뚫어본 영훈의 눈에 스핑크스 컴퓨터가 보였다. 다섯명의 특공대원들은 광선총을  겨누어댔지만, 특수합금으로 만든 벽은 수천도를 넘는 광선총의 빔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뒷쪽에서 아틀란티스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광선총으로도 안돤다면  뭘로 저 벽을 뚫고 스핑크스 컴퓨터를 부순단 말야? "
  귓가로 광선총의 빔이 스쳐갔다. 아틀란티스인의 파란  섬광과 오이디푸스 특공대의 붉은 광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고갔다. 엎드려서 광선총을 쏘아대며 영훈은  시계를 보았다. 7시 44분. 2분만 지나면 스핑크스는 모든  방어력을 회복하고 다시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요. "
  혜진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영훈은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 무우인의 초능력 중에는 여러사람의 초능력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있어요. 우리 다섯사람의 초능력을 하나로 모으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어요. "
  " 그런 방법이 있으면 왜 말하지 않았어요? "
  혜진은 가볍게 웃었다. 
  "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네사람은 당신에게 모든 에너지를 모아주고 죽어야만 해요. 하지만 우린 목숨이 아깝지는 않아요. 영훈씨, 당신은 꼭 살아서 스핑크스 컴퓨터와  아틀란티스인을 처치해야 해요. "
  영훈은 충격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그런 방법을… 안돼요!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어요.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던 난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
  " 그러면 할 수 없군요. "
  혜진은 아리오네와 영상,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혜진은 들고 있던 광선총으로  영훈의 턱을 갈겼다. 그가 풀썩 쓰러지자 혜진은 아리오네와  영상, 소연의 손을 잡았다. 엄청난 양의 초능력  에너자기  손에서 손을 타고 흘렀다. 꾸역꾸역 몰려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은  주춤거렸지만, 때는 너무 늦어있었다. 곧 강력한 에너지가  좁은 복도 안에서 세차게 폭발했다.

  7시 45분.
  정신을 차린 영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했다. 스핑크스 컴퓨터실의 복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추격해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저만치에 쓰러져있는 혜진과 아리오네, 소연과 영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 다 희생당했단 말인가… ‘
  영훈은 광선총을움켜쥐고 컴퓨터실에 뚸어들었다. 컴퓨터실 안에 장치된 레이저 빔이 영훈을 겨누었지만, 그는  이리저리 피하며 움직이면서 스핑크스 컴퓨터에게 광선총을 쏘아댔다. 가운데 있던 까만 흑요석 덩어리 같이 생긴 육각 기둥은 까만 모래알처럼 부서져 날아갔고, 관과 전자장치를 연결해주던 튜브는 넝마처럼 찢기어 날아갔다. 광선총을 들고 아틀란티스인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그를 겨누던 레이저포가 돌연 멎었다. 몰려오던  아틀란티스인들은 마치 마네킹처럼 그자리에 빳빳이 굳어버렸다.  아직 곳곳에서는 컴퓨터가 불에 타고 있었고, 튀어나온 부품이 영훈의 살갗을 찢었지만, 영훈은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는 눈길을 복도 밖으로 돌렸다. 아틀란티스인은 하나같이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레이저 방어장치도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7시 50분. 영훈은 텔레파시로 물체의 움직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스핑크스  컴퓨터가  들어있는 이 비밀기지의 모든 움직임은 멎어있었다. 괴물같은  스핑크스 컴퓨터는 드디어 파괴된 것이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정신감응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용감한 지구인, 내가 졌다. 이 기지는 10분후에  자동으로 폭발한다. ]
  딱딱한 기계적 음성은 분명 스핑크스 컴퓨터였다.

  Part X 밝혀지는 비밀

  [ 하지만, 내가 파괴된다고 해도 지구인이 아틀란티스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건 아냐. 지구에는 아직도 수많은 아틀란티스인이 남아있어. ]
  영훈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레이저의 공격에 대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스핑크스가 그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영훈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 아틀란티스인이 지구를 지배할 수 없다는건 스핑크스 네가 더 잘 알고 있어. 왜그런지 대답해줄까?  아틀란티스인은 네가 만들어낸 로봇이기 때문이야. "
  [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자부품 조각들이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바지직-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 알고... 있었나? 아틀란티스인이 로봇이었다는걸? ]
  " 물론 알고 있었지. 시간을 벌려는 생각은 하지 마. 지금쯤이면 자네의 분신인 [엑스컬리버]도 거대한 시한폭탄에 의해서 날아가버렸을거야. 무우인의 비밀기지를 출발하기 전에 나는 조그만 원자폭탄의 위력과 맞먹는 1메가톤짜리  시한폭탄을 설치해놓고 왔어. [엑스컬리버]는 우리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사실은 스핑크스 너의  조종을 받는 컴퓨터였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왔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핑크스 너의 생각처럼 멍청하지만은 않아. "
  스핑크스의 고통스런 목소리가 느껴졌다. 쇳덩어리로 만든 컴퓨터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 모든걸 알고 있었군, 지구인.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엑스컬리버가 내 조종을 받고 있다는걸 알아냈나? ]
  " 어차피 스핑크스의 주요 부분은 파괴되었으니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은 없으니까 이야기해주지. 내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서 전기행성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려 했을 때,  [엑스컬리버]는 내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어. 그때,  엑스컬리버가 내 기억을 지워버리지 못하게 지시한건 바로  너,  스핑크스 컴퓨터였어. 지구상에서 엑스컬리버에게 명령을 내릴만큼 위력이 있는 컴퓨터는 스핑크스 컴퓨터 밖에 없었으니까. "
  영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했다. 발밑에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 무우인은 태평양쪽으로, 아틀란티스인은 유럽쪽으로  흩어졌으니까 만약 무우인의 컴퓨터였다면 그 이름은 태평양쪽의 전설에 등장해야 하지만, 아틀란티스인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 이름은 유럽의 전설에 나와야  해.  [엑스컬리버]라는 이름은 영국의 전설인 [원탁의 기사]에서 아더왕이 휘두르는 신검의 이름이야. "
  목이 타들어왔지만 영훈은 말을 계속 이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사람마냥 영훈은 계속 이야기해나갔다. 
  " 나는 영상과 같이 엑스컬리버의 통신실을 조사했어.  엑스컬리버는 기지의 통신장치가 100킬로미터밖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 기지의 통신장치는 지구상의 어느 곳과도 교신이 가능했어. 통신장치의 안테나는 바로 스핑크스 네가 위치한 미국쪽을 향하고 있었어. "
  [ 아틀란티스인이 로봇이었다는건 어떻게 알아냈지? ]
  발밑의 진동이 조금씩 커져왔지만, 영훈은 개의치 않았다. 목숨을 건 오이디푸스 특공대원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영훈 혼자뿐, 이미 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 스핑크스 자네는 인간이란 존재를 잘 몰라. 물론 컴퓨터를 지배하는건 수식과 논리뿐이니까 인간의 지배심이나 권력욕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 "
  영훈은 어느새 스핑크스 컴퓨터를 [자네]란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상대에게  붙이는  호칭치고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영훈은 생각했지만,  그는  어느새인가 스핑크스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 인간이란 존재는 정복되지 않는 존재야. 비록  연약하고 보잘것없어보여도, 항상 끝없이 높은데를 향하여 기어올라가고 정복하려하는 정복욕을 가지지. 스핑크스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고 공정한 컴퓨터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컴퓨터의  지배를, 특히 생각할 수 있는 컴퓨터의 지배를 용서하지 못해. 아틀란티스인이 자네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걸 보고서  나는 아틀란티스인이 자네가 만들어낸 로봇이라는걸 알았지. "
  [ 대단하군. ]
  스핑크스 컴퓨터의 목소리는 점차 찌그러지고 잡음이 섞여갔다. 핵심부분을 파괴당한 스핑크스 컴퓨터가 오래  버틸수 없는건 당연했다. 
  " 이제 말해주게. 왜 이런 게임을 시작했나? "
  [ 게임? ]
스핑크스는 놀란 목소리를 냈지만, 그 목소리 뒤에는 허를 찔린 낭패감이 숨어있음을 영훈은 느낄 수 있었다. 
  " 자네는 우리와 게임을 즐기고 있었어. 우리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숨어들어갔을 때, 우리는  비밀경찰  [아레스]와 총격전을 벌였어. [아레스]는 분명 아틀란티스인에게 보고를 했고, 스핑크스 자네는 우리가 무우인의 비밀기지에  숨었다는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내가 [아레스]의  우두머리인 나르시코프를 끌어들인 것도 그 사실을 조사하려  했던거야. 분명히 [아레스]는 우리가 문무왕 수중릉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더군. "
  [ ...... ]
  " 자네는 마음만 먹었으면 [엑스컬리버]를 사용해서  우리를 없앨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엑스컬리버]로 하여금 우리를 돕게 했어. 스핑크스 자네는 마치 우리와 즐거운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단말이야. 이제 그 이유를 말해주겠나? "
  [ 재미있는 지구인이군. 예전에 내가 만들었던 무우인중에서도 이런 사람은 없었어. ]
  " 스핑크스 자네가 만든 무우인? 무우인을 자네가  창조했단 말야? "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같은 사건이 줄지어  일어나는데에 이골이 나있는 영훈이지만, 이번만큼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우인이 스핑크스가 창조한 생물이라니… 그렇다면 무우인이 진화한 지구인도 사실은  스핑크스가  창조한 셈이란 말인가?
  [ 뭘 그리 놀라나, 지구인? 무우인의 주컴퓨터가 [에호바]이고 아틀란티스인의 주컴퓨터가 [싸이탄]이었다는게 기억나지 않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에호바]라고 하고, 악마를 [싸이탄]이라 한다며?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인간을  만든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 스핑크스 컴퓨터야. ]
  " …… "
  영훈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주저앉았다. 스핑크스의 목소리에는 잡음이 더 섞여 나왔지만 아직은 알아들을만 했다. 
  [ 내가 지구에 도착한건 100만년도 더 됐어. 막  빙하기가 끝나가는 지구에서 가장 진화한 동물은 유인원이더군.  나는 그 유인원의 유전자 구조를 분석해서 진화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지. 1만년정도 유전자 조작을  계속해나가니  그래도 지능을 가진 원시인류가 생겨나더군. 그 원시 인류를 자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배웠을거야. ]
  " 음… "
  [ 원시인류는 곧 지능을 획득했어. 그들이 문명을  획득하는 솜씨는 놀랍더군. 지금으로부터 4만년전에 원시인류는 도구를 쓸줄 알게 되었고, 3만년전에는 컴퓨터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을 가지게 되었지. 그것이 바로 무우인이야. ]
  [ 나는 무우인과 게임을 해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아틀란티스를 만들고, 로봇인 아틀란티스인들을 만들었지.  그리고 곧 무우와의 전쟁을 시작했지. ]
  " 도대체 왜 그런 게임을… 그 전쟁때문에 자네도 파괴되었지 않나? "
  [ 왜 그런 게임을 즐기게 되었는지는 조금 있다  이야기해주지. 고고학자들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나를 스핑크스  컴퓨터로 다시 살려냈을 때, 나는 지구인과도 게임을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여자들을 납치했다네. ]
  " 그래서 여자들을 납치했다고? "
  [ 여자들이 들어있는 유리튜브를  자네들이  파괴시키지만 않았어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을거야. 여자들의 뱃속에서는 나 스핑크스 컴퓨터가 창조한 새로운 생명이  들어있었다네. 죽지않는 새로운 생명. ]
  " 죽지않는 새로운 생명! "
  [ 난 그 새로운 생명체로 지구인을 없애버리려 했어. 하지만 꺼꾸로 자네의 손에 당하고 마는군. ]
  " 왜 지구인을 없애려고 했지? 자네와 아틀란티스인은 지구인을 잘살게 하는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잖아? "
  [ 싫증이 난거지. 나는 처음에 지구인을 잘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곧 그것에도 싫증이 나서, 지구인과 새로운  게임을 하기로 마음먹은거야. 지구인을 완전히 없애버리던가, 아니면 내가 부서지거나. ]
  " 싫증! 단순한 싫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였단 말이야? "
  뭔가가 목구멍에서 치밀어올랐다. 영훈은 들고 있던  광선총을 사방에 갈겨댔지만, 스핑크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 내가 알기로는 지구인도 삶에 싫증을 느끼면 다른  동물들을 재미로 죽이는 버릇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사냥이라고 그러던가? 자네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지구인은 내가 직접 만든 샘영체야. 난 지구인의  창조자라고. ]
  " …… "
  이번엔 영훈쪽의 말문이 막혔다. 스핑크스는 혼자  도취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 싫증이라고 해도 지구인의 권태감과는 달라.  100만년을 넘은 생명체라면 한번쯤은 죽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건 당연하지 않겠어? ]
  ‘ 100만년을 넘은 생명체… ‘
  [ 맞아, 자네가 지난번에 엑스컬리버에서 본 장면은  내가 태어난 전기행성이야. 그곳에서는 각종 금속 생명체가  태어나지. 난 전기행성에서 100만년 전에 태어난  금속생명체야.]
  " …… "
  [ 오래 산 사람일수록 삶이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지.  가끔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오싹오싹한 기분을 느껴보고싶어서 무우인과의 전쟁을 일으켰던거고, 이번에도 지구인을 지배하기 시작한거야. 자네를 원망하지는 않아. 내게 이렇게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건 고맙게  생각하니까.  잘가게, 지구인. 이 기지는 곧 폭발하니까. ]
  영훈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스핑크스의  부서진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 내가 나가본들… ‘
  스핑크스에 대한 원망감은 들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운적이라기 보다는, 죽어가는 불쌍한 짐승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함게 사운 오이디푸스 특공대원들의 시체도 이곳에 남아있다. 그는 기지를 떠나기를 포기했다.
  예전에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이라고 불렸던 지역은  2001년 10월 5일 아침 8시 정각에 대폭발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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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콘 1부 – 한중전쟁

  1999. 7. 16  15:00  대전, 정보사단

  1997년, 한반도에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자 한국군은 그동안의 대(對) 북한 정보업무 편중에 대한 반성에서 국제군사정보를 담당할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연구단계에 불과한 정보군단을 모델로, 정보사령부와 기타 잡다한 정보업무 담당부서를 통합하여 정보사단을 창설하게 되었고,  이 사단은 국제정보와 한반도 주변의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대통령 직속 부대가 되었다.  이는 한국군이 그동안 동족상잔에 대비한 군대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국민의 군대로 재탄생되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정보사단은 유성의 3군본부와 달리 교통이 편리한 대전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지에 파견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이 끝나자 대전에 있는 정보사단에서는  통일참모본부와 각 군에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는 회의가 있었다. 각 여단장급들과 고위 국실장,  그리고 주로 정치학자나 군사학자인 민간인 고문들이 참가했다. 정보사단장인 이 재영 중장의 사회로 열띤 회의가 벌써 두 시간째 지속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의 원인은 해안지역에 대한 부의 편재로 인한 내륙지방 인민의 불만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인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속된 국영기업의 파산으로 인한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반발, 게다가 등 소평 사후의 권력투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 중장이 단말기의 한쪽면에 부관이 정리해 준 내용을 읽어갔다. 이 회의는 화상으로 각 군 본부와 정보참모본부, 심지어 남북의 고위 정책 담당자들과 정보관련기구에도 연결되어 그로서는 자신을 내세울 절호의 기회였다.이 중장은 계속 회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장의 권한을 남용하면서 회의에 직접 간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왜 광동성과 복건성의  군산(軍産)연합이 북경과 상하이의 기존 권력집단에 대해 승리했는지에 대한 토의를 하겠습니다. 먼저, 중국전문가이신 신 은정 교수께서 말씀해 주십시요."

  이 중장이 신 교수를 힐끗 보았다. 중국내전의 발발을 예상하여 유명해진 신 교수는, 그러나 아무리 봐도 똑똑해 보이진 않았다.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 여자답지 않게 큰 키, 두터운 안경의 그녀는 주근깨를 가리기 위한 수단인지 화장도 진하게 하고 있었다. 37세의 노처녀인 젊은 교수가 세미나에 참가한 학자처럼 정리된 원고를 읽어나갔다.

  "사단장께서 정리하신 대로 중국의 인민들은 화합이 깨지고 파편화되었습니다. 개방화 정책으로 인한 초기의 산업화는 중국인민들에게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마련해줘서 좋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나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농민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인민해방군의 각급부대들은 군사훈련이 아닌 경제활동에 내몰렸으며 이에 대한 군부의 불만이 컸습니다. 95년도에 군의 기업활동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업활동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군인들도 많았지만 어쨋든 각급 군부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확고한 지배력이 흔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각 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경제개방을 전후하여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하여 작년 겨울부터의 북경의 권력투쟁을 기화로 지방정부들이 독립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티벳이나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먼저 독립 움직임을 보였다는게 이상하죠.

  이들 지방들을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상당한 수준의 산업화가 진전되어 부의 축적이 있었다.  둘째, 이는 중국 개방화 정책의 혜택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한 배분이었다.  세째, 군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신흥 중산층간의 강한 유착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 신 교수.그건 내전의 원인아닙니까? 광동성과 복건성 연합이 이번 내전에서 승리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군사적 요인을 뺀다면…"

  이 중장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젊은 여교수에게서 강의 듣는 듯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력이 우월해서 그런거 아니냐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신 교수는 안경 너머로 이 중장을 흘끗 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첫 반란은 상하이와 인접한 저장(절강)성과  장쑤(강소)성에서 일어났습니다. 두 지방 역시 연안지역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경제개발이 되어 부의 축적이 있었다는거죠. 이는 동시에 부의 배분이 불평등해서 이지역 인민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까지는 지방 군부의 가담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산한 국영기업의 폐쇄를 막으려는 노동자들의 소요사태를 북경군구에서 온 진압군들이  과잉진압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분노한 노동자, 농민, 실업자들의 폭동이 이어지고 급기야 공장파괴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자 그 지방 군벌과 산업자본들의 우려를 자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민병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신 교수의 강의는 길어질듯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신 교수의 발언을 막지 못했다. 1995년 등소평이 유언으로 남긴 것은 군부, 지방, 소수민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위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군부나 지방세력, 또는 중국 내의 소수민족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여 중국이 통일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세력이었다.중앙의 공산당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쥐는데 신경을 썼고,  미국정부의 중국정책은 중국내 소수민족의 인권, 특히 티베트민족의 독립에 관심이 있었다.그리고 다른 중국전문가들은 홍콩이나 대만과의 갈등을 예상했으나,  지방별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갈등의 심화는 신 교수가 처음으로 예리하게 지적했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자  자본과 인재의 유출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중국정부의 배려로 자유가 보장되자 떠났던 자본과 인재가 되돌아와 홍콩과, 인접한 광동성은 더욱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대만의 대자본이 투입된 복건성을 제치고  광동성은 중국 경제혁명의 견인차가 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홍콩은 1국 2체제 아래 정치체계가 다르면서도 홍콩과 광동성의 이익이 합치하자 두 지역은 급속도로 가까와졌다.  홍콩 이양전부터 긴밀하던 경제관계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단계였는데 이양 후 홍콩의 자본가들과 광동의 당, 군 간부들과의 관계가 밀착되었다.짧은 시간에 많은 정략결혼이 이뤄졌고,이들은 자신의 이익이 커질수록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갔다.

  광동성과 복건성은 각자의 배후 자본인  홍콩과 대만의 분업체계처럼 분업화되면서 관계가 긴밀해져갔다.  복건성이 공업제품을 생산하면 광동성이 이를 국제시장에 판매하는 식의 분업체계였다.  두 지역 주민들은 경제적 분업체계의 형성과정부터  인구의 이동이 잦아지며 유대감이 강해져서 두 지역은 거의 한 지방처럼 되었다.

  광동성과 복건성은 군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성의 고위 당,군 간부들은 밀착되어갔다. 광동은 광주대군구, 복건은 남경대군구였으나 이 지역 고위 군관계자들은  뇌물이나 경제적 압력 등 갖은 방법으로 인사 이동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아 두 지역만 오갈 수 있었다.

  두 지역이 밀착하고 폐쇄성이 강해지자  중앙정부에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뒤늦게 압력을 가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을 빚어냈다.  먼저 경제적 통제장치로 세금의 차등부과를 실시했으나 외국자본의 급속이탈과 경제침체로 중앙정부의 권위만 추락했으며 인민들로부터 중앙정부는 경제개혁의 걸림돌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고위 군관계자들을 대거 변방으로 인사이동 조치를 취했으나 광동성과 복건성의 군부가 운영하는 기업들이 부도사태가 속출하여 다시 군 장성들을 변방에서 불러와야했다.

광동과 복건의 군 장성들은 이미 이 지역 주요 경제인으로 깊숙히 뿌리내린 것이다.

  중앙정부가 이들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자  이 지역의 당,군,경제인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결합하여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광동과 복건의 주변 지역인 강서, 호남, 호북, 안휘, 절강성, 귀주, 해남성 등으로부터 해마다 수 십 만명의 주민이 일자리와  자본주의적 기회를 찾아 두 지역으로 몰려갔으며 이 지역들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 즉,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여 산업이 재편되고, 두 지역으로부터  경제적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자본주의화하면서 남부연안이 급격히 발전하자 이 지역에서는 화폐가치의 변동이 심한 인민폐보다는 미국 달러와 홍콩달러가 기준화폐로 부상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80년대부터 광동성의 극히 일부지역에서만 유통되던 홍콩달러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광동-복건성의 경제적 역할이 커지자 남부중국의 기준화폐로서의 역할을 맡게된 것이다.전국적으로 통용되어야할 인민폐나 각 성의 화폐는 이들 지역에서는 유통력을 상실하였다.

  언어도 북경어가 점차 쇠하고 광동어가 세력을 뻗기 시작했다.  경제계에서는 이미 광동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광동어를 모르면 아예 경제계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남부중국의 학교에서는 이제 북경어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반대로 북경과 상하이의 대학생들은 광동어 배우기에 혈안이 되었다. 광동어는 출세와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남부중국의 지배권은 군사계에도 영역을 넓혀갔다. 그동안 중국의 제 1의 적은 구 소련이어서 대부분의 군사력이 러시아국경에 밀집해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도 차츰 약화되자  러시아국경의 지상군이 감축되고  상대적으로 중요해진 남부중국의 방어를 위해 이 지역 해군과 공군이 증강되었다.  또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부중국에 비해 장비와 인원에서 크게 뒤지던 남부중국의 지상병력은 경제인들과 군 영기업들의 협조로  각 집단군마다 하나씩의 기갑사단을 갖추게 되었고 그 질적 수준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화되었다.  그리고 중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병력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이제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게되었다.  남부중국은 중앙정부 도움없이도 경제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과 사실 중앙정부가 남부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중앙정부는 남부중국 각 성의 눈치를 보게되었다. 특히 광동성장과 복건성장의 정치적 영향력은 중앙에도 미치게 될 정도였으며 두 성장(省長)은 중국의 최고권력기구인 정치국에서도 일곱자리밖에 없는 상무위원직에 오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또한 국회의장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장과 전인대의 주요 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은 광동어에 능통한 남부중국인들이 차지하는 것으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전통적으로 정계와 재계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던  북부중국인들 사이에 위기감이 번지기 시작했다.정치계에서까지 남부중국인들에게 밀리고 광동-복건성이 주도하는 지역별 분업화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적응이 느린 북부중국의 국영기업들이 부도사태로 쓰러져갔다.  북경과 상하이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났으며, 모처럼 창업된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이 부도로 도피하거나 자살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남부중국이 경제성장의 단맛을 즐기는 사이에 북부중국은 도태의 쓰라림을 맛봐야했던 것이다.

  북부중국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격은 절강성 호주(湖州)에서 있었던 파산한 국영기업체 노동자들의  소요사태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절강성은 대만과 접했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흥을 이룬 복건성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상하이와 인접하여 중앙정부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그리하여 남부중국의 경제적 성공의 대열에서는 탈락하고 북부중국인들로부터는 질시를 받는, 묘한 완충적 지역이었다. 이 지역 인민들은 광동성과 복건성의 부에 대한 부러움과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하고  소요가 확산되어 국영공장과 외국인 합작공장을 파괴하자, 남경군구 소속의 지방 군사력인 인민무장경찰이 치안유지를 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북경군구의 예비대 성격인 제남군구의 병력을 파견하여  파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중앙정부의 감정적인 대응과 남부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시위의 성격을 띤 이 사태는 그러나 절강성과 안휘성 등 중립적인 지역들이 대거 남부중국에 가담케하는 결과를 나았고, 중국인들은 전체 중국의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남부중국의 광동성과 복건성에 기대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아니, 북부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민심을 얻는데까지 실패했습니다."

  신 교수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남부중국은,  아니, 모든 중국인들은 북경과 상하이 출신인 고위 당 관료들의 권위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개방화 초기에는 이들의 주도하에 성공적으로 경제개혁을 이루어냈지만 아직도 개방의 속도 문제로 다투고 있는 등 어느 정도 개방화가 이루어지고 나자 개방의 주역들이 오히려 개방의 장애물이 되어버릴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져버렸습니다."

  신 교수의 주도하에 토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결국 결론은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남부중국이 당시 중국정부를 탐탁치 않게 본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업고, 그리고 돈이 궁한 러시아로부터 최첨단 무기를 대량 구입하여 막강한 북경-상하이 연합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전 중의 핵전쟁 발발 가능성은 상호 파멸과 사용한 측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우려하여 핵폭탄의 사용이 자제되어 다행이라는 결론이었다.

  "다음 전쟁을 예상한다면, 아무래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것이 되겠죠. 아니, 그 전에 베트남과 필리핀이 될까요?"

  좌중에서 놀라움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1999년의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이나 베트남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중국과 대만은 밀월관계 아닙니까?  물론 남사군도 문제도 있고 자유왕래가 당분간 막히긴 했지만  내전이 끝났으니 곧 원상회복될 것이오. 그리고  중국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대만의 자본과 마케팅으로 세계 경제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역할이 어느 정도인데.. 설마 중국이 경제위기의 부담을 지고 대만을 공격하려 하겠소?"

  이 재영 중장이 놀라서 물어보았다. 신 교수의 주장은 정보사단의 최근 평가와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대만과 중국은 최근 경제적으로 밀접히 결합하였고 긴장상태가 해소되어 구태여 침공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또한 경제를 중요시하는 광동-복건 연합이 정치적 주도권을 쥔 마당에 전후 복구에 힘써야할 중국이 대만에 눈돌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정보사단과 외무부 및 안전기획부 등 정보업무 담당부서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중국 공산당의 개혁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경제발전 후에 보수주의자들로 몰린 것처럼 대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만의 보수적 정치체계가 보다 자유로운 복건과 대만간 인적, 물적 유통을 막고 있습니다. 대만이야 생존을 위해서 그랬다지만 내전 동안에 중앙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남부중국인들에 대한  자본동결과 출국통제는 광동-복건성 지도층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다시 교류가 재개되긴 했지만 경제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대만과는 아무래도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중화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아실겁니다. 한족(漢族)은 수없이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도 수천년간을 그들의 땅에 살아왔습니다. 그 거대한 땅덩이와 함께 말입니다."

  신 교수가 잠시 쉬고 유리잔의 물을 마셨다.  당연히  생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물을 더럽히고 그 대가로 비싼 물을 사서 마시니 얼마나 비경제적인 동물인가 생각했다.  오늘 아침엔 집에 생수가 배달되지 않았다. 지하수원이 오염되어 생수공장이 폐쇄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이젠 다른 생수를 주문해야겠다고 신 교수는 생각했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남사군도때문이가요?"

  나영찬 대령이 호기심에 가득차 물었다.신 교수가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중년의 군인들 사이로 신사같이 말쑥한 젊은 대령이 보였다.저 나이에 이 정도 계급이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일 것이라고 신 교수는 생각했다.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신 교수가 짧게 대답했다. 중국은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영토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다.  수천년간 농경민족이어서인지 땅에 대한 애착은 비정상적일 정도였는데, 산업화가 진행되어 바다의 중요성이 커지자 드넓은 남중국해(남지나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남사군도는 고대부터 중국의 어부들이 어로활동을 해왔다는 후한지(後漢誌)의 기록을 근거로 강력하게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핀과 베트남 등의 주변국들은 이에 반발하여 중국과 분쟁중이며, 해상교통로의 유사시 봉쇄를 우려한 자원수입국인 한국과 일본은 은근히 중국의 남사군도 영유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 해로는 두 나라의 사활을 쥐고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주변의 중소국가끼리 분할하거나 공동영유하는 방안을 유엔에서 지지해왔다.  이들 두 나라는 중국의 독점적인 남사군도 영유를 방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무역량 등 당장의 이익을 본다면 당연히 중국을 지지해야하지만 중국이 더 강해졌을때 만약 중국과 분쟁이 생긴다면  남사군도는 한국과 일본의 목에 겨눈 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자원 말인가요?  막대한 석유매장량…  중국 경제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죠."

  나 대령의 말에 신 교수가 빙긋이 웃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신 교수가 자리를 같이한 고급장교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한국간에 분쟁이 발생한다면 남사군도의 전략적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아니, 한국과 일본간의 분쟁에서도요."

  젊은 정치학 교수의 단순한 가정이었지만 군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심상치 않은 이야기였다. 이웃나라란 항상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고 언제나 제 1의 가상적국이기 때문이었다. 우호적인 관계일 때도 이웃나라에 파견되는 대사는 정치적으로 장관급 이상이었으며 정보관계 종사자들의 숫자도 다른나라에 파견되는 주재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 상례였다.옛부터 전쟁은 항상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략으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며 실제로 그래왔다.

  "해군의 자료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해군출신인 표 인준 중령이 먼저 대답을 했다. 해군의 역할의 하나가 무역로와 해상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이므로 해군에서는 항상 해상수송로의 안전점검을 하고 있었다.

  "남사군도가 중국에 의해 봉쇄된다면 한국이나 일본은 호주를 우회하여 석유류를 수송해야합니다. 이 경우 운송기간은 호주 남부 해상의 복잡한 해로를 감안하면 1개월 이상 늦춰집니다. 전략비축분이 3개월치이므로 큰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전시에는 석유류의 소비가 급증하는 것이 상례이고, 에너지 저장시설에 대한 적의 공격까지 감안한다면,그리고 해상운송수단의 부족을 감안한다면 1개월 내에 비축분은 소모가 되어버립니다.  전략비축분이 3개월치라는 것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현물시장에서의 구입이나 미국이나 멕시코같은 곳에서 수입한다면?"

  이 재영 중장이 입이 바싹 타서 물었다.  멀리 떨어진 남사군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 중장이나 다른 육군출신의 고위장교들은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싱가포르 석유 선물시장은  만약 중국이 남사군도 주변해상을 봉쇄한다면 시장 자체가 붕괴되어버립니다. 미국은 풍부한 부존자원에도 불구하고 유독 석유만은  전략적으로 수입해왔습니다. 알래스카의 풍부한 원유를  1995년에야 수출을 허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원유를 거의 수출하지 않습니다.  멕시코는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는 너무 멀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브루나이나 인도네시아같은 산유국들로부터의 원유수입은 남지나해를 통과해야 합니다."

  표 중령의 설명에 이 중장이 허탈해지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호통을 쳤다.

  "그럼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우리나라는 무조건 중국의 요구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단 말이오?"

  "중국의 입장에서 미래의 가장 큰 경쟁상대는 한국과 일본입니다. 지리적 위치와 산업구조, 또는 인구와 경제력 등 국력에 있어서 말입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도 크지만 중국에는 아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 교수가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했다. 좌중은 신 교수가 또다른 예언을 하지 않나 걱정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다음 차례는 필리핀과 베트남인데 필리핀은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기 쉽죠. 아마 중국 입장에서 베트남과는 일전을 각오해야할 것입니다. 베트남을 먼저 치고 나중에 대만을 공격할 수도 있겠죠. 어쨋든 그 다음은 우리나라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언제일지 모르지만…"

  결국 신 교수가 예언을 하고 말았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던 중국의 내전을 예상한 신 교수, 이번엔 더 가능성이 없는 중국의 한국 침공을 예언했다.이 재영 중장을 필두로 모든 군인과 정치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신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그들도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신 교수가 중국의 내전을 예상했을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상가라고 비판을 받았으나 결국 그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이번 예언은 틀리길 바라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었다. 이 중장이 갑자기 책상을 치며 물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럼 왜? 왜 중국이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는겁니까? 이유는 뭐죠? 내전 때의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행동?  군사적 위협? 경제적 라이벌이라서? 도대체 뭡니까?"

  신 교수가 이 중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계 사회주의라는 중국의 50년간의 목표,  그리고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죠."

  한반도는 1997년 9월의 역사적인 통일협정을 시작으로 급속히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산업구조가 비슷한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독주제동에 실패한 남한과 경제재건에 실패한 북한은 파국을 막기 위하여 점진적인 통일을 지향하게 된다.

  당시의 남한 대통령은 1997년 초의 선거에서 의외의 당선을 한 홍 경식 대통령이었다. 전임 김 영삼 대통령이 잔여 임기를 남기고 퇴임하자 충남지사로 있던 그는  열렬한 시민들의 지지를 업고 일약 제 1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곧이어 실시된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0대 초반의 그는 90년대 초반까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95년에 실시한 최초의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간신히 도지사로 당선됐었다.  당선 이후 그는 청렴한 공직생활과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충청남도를 엄청나게 발전시키는 업적을 쌓았다.그는 당파를 초월해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언론의 초점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영남의 비호남 정서와 호남의 비민자정서가 맞물려 중부 출신인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홍 대통령은 경제발전은 물론 통일노력에 힘을 쏟아부었다.북한에 대해 각종 무상지원과 대외차관을 쏟아붓고 인적교류를 활발히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사람과 물자가 남북으로 왕래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으나 남과 북의 열린 마음과 현실적 필요가 이를 가능케했다. 남북은 급속도로 가까와져서 급기야 북한이 개방한지 1년도 안된 1997년 9월에 통일협정을 맺었다. 홍 대통령과 북한의 김 정일 비서는 서울과 평양을 수시로 왕래하며 신뢰를 쌓았다.

  물론 통일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북 모두 군부의 강경파들이 평화통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자신들의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강경파들이 발호했지만 통일을 갈망하는 젊은 장교들이 이들의 야욕을 꺾었다. 남한에서는 국군 장성 몇 명이 수감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북한에서는 군부에 피의 숙청이 있었다.

  외국도 한국의 통일에 결코 우호적인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북한에 제시하며 통일을 방해했으나 북한의 지도층이 결단을 내려 동족을 믿기로 하였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해결된 핵문제를 또 트집잡아 동해에 항모기동부대를 파견했다.그러나 한국 해군이 인민군 해군을 지원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여, 위기시에 한국에 남아있는  주한미군의 안위를 걱정한 미 7함대는 일본 사세보항으로 귀항해야 했다. 곧이어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한국은 미국으로 부터 혹독한 무역보복을 당해야했다.

  러시아와 중국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중국은 1999년 7월 1일에 영국으로부터 이양받은 홍콩을 경영하기 위해  침략근성을 보이지 않아야 했으므로 군사적 충돌이나 긴장은 없었지만 은근히 무역에서 압력을 가했고, 러시아는 한국의 만주와 연해주 수복운동을 경계하여 경제교류의 폭을 제한했다.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만주와 연해주의 실지 회복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치욕을 치름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했다.

  남북 모두 통일과정 중에 발생한 사회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98년 한햇동안 수만쌍의 남북한 처녀, 총각들이 결합했는데 문화가 워낙 다른 두 지역 출신의 부부는  1년도 못가서 가정이 파탄나고, 이 문제는 크게 사회문제화되었다.이로 인해 남북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도 했다. 6.25때 북한에 토지를 두고 월남한 실향민들이 땅을 찾기 위해 수백만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문제는 특별법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법이 일방적으로 실향민들에게 불리한 내용이라서 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서서히 융합되어갔다.

  1999. 9. 12  19:30  용암포

  ‘오랫만에 맛있는 공기를 마셔보는군.’

  신의주 개방구 서남쪽 용암포의 남쪽에 있는 신항만에서 저녁놀을 향해 릴을 던지며 국군 제 11 기갑사단의 차 영진 중령은 생각했다. 봄엔 편서풍에 실린 화북의 황사와  중국 동북공업지대의 중금속 먼지바람에 시달리고,  여름엔 후덥지근한 장마에 짜증났는데 초가을의 저녁공기는 참으로 시원했다.

  릴은, 정확히 말해 낚시바늘과 갯지렁이와 봉돌과 낚시줄은, 멀리 중국 다사도 석유화학단지의 굴뚝연기와  그 너머 동구경제특구의 시가지 네온과 서쪽 하늘의 저녁놀이 뒤범벅이 된 서해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시커먼 박쥐가 봉돌을 좇다가 반대방향으로 날아 올랐다.  릴은 촤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계속 풀리고 있었다.

  차 중령은 릴을 던지는 동안 지렁이 생각을 했다.

  ‘참 웃기는 경우는 지렁이를 비닐하우스에서 키운다는 것이다.서해는 이미 죽은 바다이고 갯벌은 썩어버렸다. 깨끗한 곳에서 키운 깨끗한 지렁이를,  더러운 바다에 살다 죽어가는 더러운 물고기에게 물리는 것은 얼마나 개같은 경우인가? 집사람은 내가 잡은 지렁이보다 더 더러운 물고기를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감성돔과 역돔도 구별 못하는 집사람, 가재미와 넙치는 어떻게 가릴까?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어찌 알지?’

  물이 튀는 것이 보였다. 이제 3분의 1 초 뒤면 ‘퐁’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릴은 계속 풀려 나갔다. 차 중령은 초조했다. 겨울의 서해바다는 차갑다. 10월 이후 연평도 이북의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다.  바다가 얕아 물이 너무 차기 때문이다.이제 앞으로 낚시할 수 있는 기간은 2주 남짓. 강과 바다가 만나는 용암포는 가을의 북한서해안지역중에서는 낚시하기에 꽤 좋은 조건이었다.

  ‘내고향 여수에서는 일년 내내 낚시할 수 있었는데…’

  차 중령은 압록강의 겨울낚시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북한의 강과 호수는 시커먼 공장폐수와 산성비에 절어버렸다. 아마 내년, 2000년 겨울부터는 강이 얼지 않을 지도 모른다.  중국 동북공업지역의 시커먼 폐수가 압록강을 흐르고, 중금속과 유황의 매연이 10년째 북한지방, 아니, 북조선에 비를 타고 내린 것이다.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우리나라’의 환경이 희생되어야 하다니,정말 개떡같은 경우다.그래도 우리정부, ‘우리나라’의 ‘통일정부’는 중국에 항의를 강하게 할 입장이 못된다.’남한정부’는 중국과의 경제교류에, ‘북조선정부’는 과거의 선린우호에 발목이 잡혀 있다.아직 정치적 통일이 완전히 이뤼지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과 미국 같은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특히 일본은 얼마나 집요하게 통일을 방해했던가.’

  ‘퐁’ 하는 소리가 나고 물결이 여러 겹의 동심원이 되어 퍼져 나갔다. 파문에 기름띠가 넘실댔다.  차 중령은 릴을 천천히 감았다. 왼쪽 외항에는 커다란 컨테이너선이 정박 중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압록강 제 2 철교가 보였다. 바다는 저녁놀에 물들었다. 하늘엔 중국 랴오닝성의 단둥(丹東)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는 여객기가 붉은 비행등을 킨 채 서서히 선회하고 있었다. 공해문제만 빼면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졌다.서서히 바다에 어둠이 깔리고 부두에는 전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화시대의 군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 중령은 완전한 남북통일 후의 군대문제를 생각했다.

  ‘감군을 한다지만 적을 잃은 군대…  유사시에 대비한다지만 예비군에 불과하지 않나…’

  이때 차 중령의 이동전화가 진동을 했다. 밥해놨으니 빨리 오라는 아내의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의 휴일에 낚시 왔으니 아내의 투정이 대단할거야.’

  천천히 전화를 들고 통화단추를 눌르며 대답했다.

  "여보세요. 이 현웁니다."

  "제 3전차 대대장 차 영진 중령은 지금 즉시 사단 사령부로 출두하시오. 2000부로 전군에 진돗개 3 발동. 차 중령은 복창하시기 바랍니다."

  전화의 다급한 남자 목소리와 그 내용에 차 중령은 깜짝 놀라 명령을 반복했다.

  "2000부로 전군 진돗개 3 발동, 제 3 전차대대 차 영진 중령 즉시 사단 사령부로!"

  전화를 끊은 그는 즉시 원터치자동낚싯대를 접고는 자기 차로 뛰면서 생각했다. 진돗개 3은 1997년 남북한 군대의 교차 주둔 이후 한번도 없던 일이었다.

  ‘혹시 북한 군부의 강경파가 통일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아냐,그렇다면 나는 대대본부의 지휘위치에 가야하니 아니고…  그럼 독도 문제로 일본이?’

  차 중령은 시동을 킨 즉시 뉴스 전문라디오에 채널을 맞췄다. 통일국회에서의 북한지역 고용촉진법 통과소식에 이어, 남북 대학생들이 한글만 쓰기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당장의 급박한 위험은 없는 듯했다. 차로 부두를 빠져나가면서 차 중령은 전화로 대대 상황실을 불렀다.  오늘따라 상황실 직통전화가 통화중인 것을 보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차 중령은 생각했다.

  차창 밖으로 전조등을 킨 인민군 군용트럭 세 대가 속도를 내며 지나갔다. 어둠속이었지만 트럭 뒷자리에 총을 든 인민군 전사들을 차 중령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이동전화의 통화중 연속발신기능 덕택에 곧 통화가 이뤄졌다. 대대 당직사관인 최 대위가 전화를 받았다.

  "최 대위? 나 대대장인데 무슨 일이요?"

  "대대장님.  2000부로 진돗개 3이 발동 중인데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단에서는 국내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반복합니다. 국내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작년의 남사군도(南沙群島) 분쟁이 크게 재발하거나 요즘 시끄러운 독도 문제로 일본의 도발 가능성이 있지 않나 보고 있습니다."

  국내문제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현재 북한에 주둔하는 국군부대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요즘도 북한 인민군의 기습 포위공격을 받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최 대위가 말한 두 가지 가능성은 항상 예기되어 왔지만 차 중령의 부대로서는 직접 연관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통일해군은 지금 상당히 바쁠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 시간은 아직 있다고 보고,일단 장교와 하사관들의 소재를 확인하시요. 나는 사단사령부로 가고 있으니 최 대위가 모든 절차를 지휘하시요."

  그는 항만을 빠져나가, 선천으로 가는 지방도로에서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1993년형 프라이드DM 3 도어, 작고 단단하고 잔 고장이 없는 차였다. 지난해에 엔진을 교체하고 4륜구동으로 개조하면서 3방향 에어백과 광폭타이어, ABS, 12 CD changer 등을 장착하여 1,300cc 급으로는 호화롭지만, 겉보기에는 녹슨 긁힌 자국과 먼지 등으로 폐차 직전의 고물차로 보였다. 지난해 대전에서 근무할 때는 대전 지역 경주차 동아리인 Knight Riders의 준회원으로서 토요일밤마다 대전과 부산 사이의 고속도로를를 세 시간 반 만에 왕복하곤 했었다.

  1999. 9. 12  20:20  차련관

  날이 완전히 저물어 차련관 검문소에 닿았다.  차련관은 평안북도 철산군 북쪽지역의 역 부근이며 경의선 철도와 국도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한 교통의 요지다. 선천의 사단사령부까진 아직 절반 정도 남은 셈이었다.

  ‘검문소에 바리케이드! 자정 전에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차 중령은 불안해졌다. 전조등을 끄고 실내등을 켰다. 앞쪽의 양계장 트럭이 통과하자 검문소 뒤쪽 그늘에 인민군 장갑차가 보였다.

  ‘BTR-40 P!  대전차미사일 탑재형의 BRDM(구 소련에서 설계한 바퀴식 장갑정찰차)이다!’

  검문 차례를 기다리며 둘러보니 검문소 주위엔 무장병들이 꽤 있었고 모두 완전군장이었다. 인민군도 현 사태를 심각히 본 모양이었다. 통제소는 원형의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는데 옥상엔 대공화기가,아래 참호엔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북서쪽을 향하고… 중국이다! 중국에 무슨 일이 있다!’

  바로 앞의 승용차가 지나가고 차 중령 차례가 되자 차 중령은 육군신분증을 위병에게 주었다.  위병은 젊은 인민군 하급전사인데 깜짝 놀라 차 중령을 보더니 통제소의 군관에게 뛰어갔다.  검문소의 불빛을 배경으로 인민군 군관이 바삐 걸어왔다. 그 인민군 상위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고개를 숙여 말을 걸어 왔다.

  "중령 동지! 실례디만 어데로 가십네까?"

  절도있고 정중한 질문이었지만 북한에 온 지 1년도 안된 그로서는 아직도 평안도 사투리가 귀에 거슬렸다.

  "군에 비상이 걸려 사단사령부로 가는 길입니다."

  "알고 계시겠디만 중국이 대북을 곧 공격한다는 첩봅네다. 중국 접경전 지역과 해상교통이 통제 중입네다.  중령동지는 비상등을 키고 가시면 제가 다음 검문소에 연락하여 우선 통행하시도록 조치하갔습네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요."

  차 중령은 차의 속도를 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무장한 인민군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백미러에는 아까 자신을 검문했던 인민군 하급전사가 상위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 왔다. 남북군사협정에 규정된, 군적에 불문하고 상급자에 대한 경례를 그 하급전사가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차 중령은 생각하며 혀를 찼다.

  ‘어차피 피차 놀란 것은 마찬가진데, 그런데 중국이 대만을 침공? 이상하군. 중국의 핵항모 해신 1, 2호 모두 지금 남사군도에 있을텐데…’

  해신 1호는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중국 최초의 원자력수상함이기도 했다. 배수량 48,000t 급의 소형항모이며 단거리 / 수직 이착륙기와 헬리콥터를 싣고 있었다. 해신 2호는 6만톤급의 본격적인 항공모함으로서 항모탑재형 전투기와 대함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었다. 중국은 그 외에도 두 척의 핵항모를 시험운항, 또는 건조 중이며 2010년까지는 총 6 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1999. 9. 12  20:40  평북 선천, 국군 제 11기갑사단 사령부

  사령부에 도착한 차 중령은 곧장 회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회의실 벽에 걸려있는 대형 액정비전의 큰 그림에는 대만과 그 대안인 중국 난징 군구(南京軍區 — 福建,江西,浙江,安徽,江蘇省 관할)의 군사력배치상황이 있고, 아래 작은창에는 남사군도 근해에 배치된 각국 함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정보참모가 한창 브리핑중인 가운데 그는 빈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난징군구의 정확한 지상군 배치도와  1개월 전과의 위치변동을 확인하였다.컴퓨터들은 유성에 있는 정보사단의 대형컴퓨터에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B-ISDN)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중국은 지난 1년 간에 걸친 내란을  거의 수습하고 요즘엔 홍콩경영에 열을 올려 왔습니다. 문제는 지난 내전 때 남사군도를 분할점령한 대만과 베트남이 이를 반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만으로서야 중국내전 중 베트남의 남사군도 점령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고 변명하고있지만 중국의 자존심이 상한 것은 사실이죠."

  정보참모가 조작하는 화면의 붉은화살표가 홍콩에서 대만쪽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중국은 남사군도 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대만 모두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정보사단의 평가입니다."

  남사군도의 무진장한 자원과 해상교통로로서의 중요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중국의 자존심이었다. 중국의 내란을 틈타 중국이 자국 영토로 선언한 남사군도를 이들이 점령한 것을 중국은 영토침범으로 보고 선전포고에 앞서 무력시위와 외교전이 한창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여기에 일본이 개입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해상 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구실로 이 지역에 88함대를 파견했습니다. 미국도 제 7함대를 이 지역에 파견할 것을 신중히 검토 중이며, 러시아는 이미 작년에 베트남과 상호방위조약을 강화한 바 있습니다. 또한 아세안(ASEAN)의 맹주를 자처하는 인도네시아는 대만과 베트남에 의한 남사군도 분할을 비난하며 주변국에 의한 공동관리 또는 재분배를 요구하고, 필리핀과 말레이지아가 이에 가담했습니다."

  화살표가 각국의 위치를 따라 정신없이 화면의 좌우를 오갔다.

  "또한 브루나이는 최근 프랑스에서 연대규모의 항공기를 수입함과 동시에 조종사와 정비사 등의 용병을 모집중이라는 미확인 정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중화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마지막 남은 대만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대만해협 대안에 대한 병력배치를 완료했다는 중국정부의 공식선언이 조금전 있었습니다."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이라고 차 중령은 생각했다.지구상의 마지막 자원의 보고, 30여개의 작은 섬과 몇 개의 암초가 전부인 총면적 0.4평방km에 불과한 일명 스프래틀리 군도가 177 억톤 매장량의 석유라는 강력한 미끼로 고기떼를 끌어들인 것이다.

  "유엔도 상임이사국 7개국이 어떤 형태로든 이 분쟁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외교적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중국의 대만공격 보다도 우려스러운 것은 중국과 일본의 충돌입니다. 엔 경제권의 수호와 아시아의 평화유지라는 미명하에, 일본은 내전으로 허약해진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태세입니다."

  화면의 푸른 화살표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중국을 오갔다.

  "이럴 경우 19세기의 경우를 보지 않더라도 한반도, 최소한 우리나라 남해안과 평안북도 일대가 이들의 전쟁에 의해 피해를 입게될 가능성이 큽니다.일본과 중국 어느쪽에도 한반도는 훌륭한 방패로서의 가치가 있으므로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과 일본이 교두보 선점을 위해 동시에 우리나라를 침공할 가능성도 있는겁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두 개의 강력한 적에게 포위공격을 받게 되는 셈입니다."

  정보참모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주변의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 지도를 확대한 뒤, 최악의 시나리오인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동시 침공의 상황을 가정한 전략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화면에 갖가지 색깔과 숫자와 문자로 표시된 그림들이 움직이고 서로 부딪히며 명멸해갔다. 잠시 후 15일만에 한반도가 중국과 일본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최악의 결과가 화면에 표시되었다.

  "우리 통일정부는 현재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경주 중입니다만, 여러분들도 경계태세의 확립과 동시에 각 관측소에서는 중국측의 병력 이동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요."

  ‘한반도표 새우등이로군,  2차 청일전쟁에 전장은 또 한반도인가? 어떤 나라든 자기 영토에서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차 중령은 머리를 긁으며 생각했다.  두 개의 강력한 나라가 서로 싸우기 전에 유리한 교두보를 차지하기 위해 애매한 다른 나라를 치는 경우는 역사상 빈번하게 있었다.  차 중령은 2차대전 때의 폴란드를 생각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이후 두 나라의 싸움. 완충지대가 한 나라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나라도 동시에 공격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두 나라가 합동작전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폴란드는 당시에 최선을 다했으나 나라를 잃었다.

  ‘잃을 수 밖에 없었다…’고 차 중령은 생각했다. 무기체계의 후진성이나 작전의 실패, 또는 국제정치의 냉엄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국력의 문제였다.  당시의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동시에 받았으나 한 나라의 공격도 막을 힘이 없었다. 현대전은 총력전이다.병력과 현대화된 무기 뿐만 아니라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경제력과 인구, 그리고  이들을 전쟁에 집중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 공동체의 합의에 의한 전쟁수행 의지 등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떻한가,통일정부는 있으나 아직 완전한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한 지역 모두에 기존의 정부가 일반행정과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남쪽은 북쪽에 대한 막대한 경제 지원으로 통일비용이 과다함을 걱정하고 있고, 북쪽은 북쪽대로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흡수통일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남북한 통일정부에 의한 조정으로 간신히 북한이 지역적 식민지화되는 것을 막으며 사회적 통합을 수행 중이다.’

  차 중령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1997년 감격의 남북통일 시대를 맞았으나 통일의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먼저 상호방문과 경제교류를 시작했는데 사회적 경제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서로에 대한 앎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만남은 오해와 갈등을 증폭시키는 법인데 50년간의 분단과 적대 관계의 남북은 서로를 너무나 몰랐었다. 이런 와중에 정치적 통일을 강행하기에는 위험이 커서 통일정부는 점진적인 통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적교류와 경제교류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통합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부터의 군사적 통합과 군비감축은 예민한 문제이긴 했지만 잘 진행 중이었다. 먼저 해군과 공군의 통합이 시작되었고, 장비상의 문제와 최종적인 평화통일의 담보로서 지상군의 통합이 늦춰지는 대신 일부 지상군의 상호주둔이 실시되었다. 남북한군이 기존의 인원과 장비를 가지고 국군은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국경에, 인민군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해안 지역에 주둔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각자의 수도인 서울과 평양은 기존의 남북한군이 수비하고, 기존의 비무장지대의 군사력은 휴전선에서 100km 이상 후퇴하여 배치되었고, 서로 감시단을 보내 서로의 병력이동을 감시하였다.그러나 역시 남북통일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한민족의 생존이었다.

  "중국은 내일 새벽에 남사군도를 공격할 것같다는 정보사단의 보고가 있습니다."

  정보참모의 브리핑이 계속 이어졌다.

  "대만 해협의 대안에는 인민해방군의 지상군과 공군,  그리고 해군이 증강 배치되어 있으나,  이는 대만의 남사군도 지원을 봉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합니다.  중국은 실추된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남사군도를 먼저 점령한 뒤에 대만을 친다는 것입니다. 통일참모본부에서는 전군에 비상령을 내리긴 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없기 때문에 군병력의 이동 등 중국이나 일본을 자극하는 행동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물론 예비군 동원령도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보수집은 최대한으로 하되 중국이나 일본을 자극케 할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통참의 명령입니다."

  차 중령은 부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집에 전화를 했다.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니 부대에 들르면 12시 전에 귀가하긴 이미 틀린 일이었다. 그의 아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더니 귀신같이 알아챘다.

  "오늘 늦게 들어오신다고요? 또 비상이어요?"  걱정하는듯한 말 속에서도 셈틀 글쇠 두들기는 소리가 작게라도 틀림없이 들려왔다.

  ‘요즘 아내가 하는 머드(MUD)게임은 또 어떤 것일까? 오즈의 마법사? 아니면 사우러스볼?’

  그는 다른 머드게임 사용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화를 빨리 끝내야 했다.

  "예, 부대에 갔다가…"

  차 중령은 그냥 부대에서 잠을 잘까 생각했지만  아는 사람이라곤 별로 없는 북녘땅에서 외로워하는 집사람이 안스러워 마음을 고쳐 먹었다.

  "1시쯤 퇴근할테니 먼저 자요."

  물론 그의 아내는 자신이 올 때까지  잠을 자지는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게임이 조금 난폭해질 것이다. 차 중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화를 끊은 차 중령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자신의 대대를 생각했다.젊은 사병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북의 군대가 통합되어 가면서 병력감축과 지원병제도가 자연스럽게 논의되자 병역기피풍조가 남북의 젊은이들에게 만연되었다. 마지막 징병제로 군에 가지 않기 위해 진학,유학, 질병 등 갖은 사유로 병역을 연기했다. 차 중령은 전차병교육을 마치고 대대에 갓 배치된 박 일병의 말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저는 사회에서 돈도, 빽도, 대학에 갈 머리도 없어 군대에 끌려왔습니다. 친구들은 지원제로 전환될 앞으로의 2년간을 버티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재주도 없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싶기 때문에 하사관으로 장기복무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군복무기간중 건강만 지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전입 신고식 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박 일병의 말에 배석한 장교들은 당황하고 대대의 주임상사는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흥분했지만,부동자세의 신병들은 모두 동감한다는 뜻인지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 중령은 그의 뻔뻔함에 처음엔 화가 났지만, 현재의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기에 있는 남북의 상황에 대한 생각과, 그의 처지에 연민을 느껴 도저히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복무기간 동안 제군들의 건강을 빈다는 짧은 훈시를 한 뒤 신병들을 보내고 나서 장교들과 주임상사에게 차분하게 명령을 했다.

  "그들의 정신상태가 썩었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길 바라오.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봐요.앞으로 2년간은 저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여러분들이 겪었던 그런 고분고분한 신병들은 이젠 없을 것이요.  그들에게 잘 해주시요."

  1999. 9. 12  24:00  국군 제 11 기갑사단 제 3 전차대대본부

  대대본부에 도착한 그는 장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장교와 하사관의 위치파악과 연락방법을 논의했다. 아직은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없으므로 휴가장병의 귀대나 전차의 방어지역 전진배치 등을 금하고 다만 장교들은 중국과 대만의 분쟁을 주시하라고 지시했다.만일에 대비하여 중국군의 무기 및 작전체계를 숙지해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젊은 장교들은 정보사단과 연결된 단말기를 두둘길 것이고 나이든 하사관들은 또 젊은 사병들을 못살게 굴 것이라고 차 중령은 생각했다.

  ‘저 고집스런 늙은이들, 빨리 단말기 사용법이나 익힐것이지..’

  그러나 늙은이의 머리와 용기는 한계가 있었다.  인원과 장비 점검을 마치고 탄약과 식량의 추가 보급을 상의한 뒤  상황실장인 최 대위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의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저 달이 차면 …’  그는 올해 추석에도 고향에 가긴 틀렸다고 생각했다. ‘올해도 부모님께는 ISDN으로 인사드릴 수밖에 없겠군. 부모님이 ISDN 사용법에 익숙해지셨으면 좋겠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조카의 도움 없이는 전화 한 통화도 못하시는  부모님의 시대에 뒤떨어짐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너무 빠른 사회 발전 속도에 자신도 낙오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타기가 무서워 아직도 아파트 6층을 걸어 다니시는 외할머니도 생각이 났다.

  ‘언젠가는 내 자신도 시대에 뒤떨어져 문명발전의 혜택을 포기하는 날이 오겠지…’

     난사군도(南沙群島)

  남사군도는 남지나해 남단의 한 군도로 30여개의 작은 섬과 40여개의 암초 및 산호초로 이루어진 총면적 0.4 평방 km의 작은 군도이다. 일명 스프래틀리 군도. 동쪽은 필리핀, 서쪽은 베트남, 남쪽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동으로는 필리핀,  그리고 북으로는 중국과 대만이 있으며 동아시아로 가는 해상로가 바로 옆에 있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천혜의 해상요충인 곳이다.

  그러나 그 지정학적 위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의 매장량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쿠웨이트 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르는, 추정 10억에서 177 억톤의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1968년부터 주변 각국은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섬들을 점령한 후 자국 영토로 선언하였다.

  2차대전 후 일본군으로부터 장계석이 인계받아 남사군도 최대의 섬인 타이핑(일명,이투 아바)섬에 주둔 중인 대만을 비롯, 중국과 베트남,말레이시아와 필리핀 등이 산호초섬이나 암초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싸워왔고, 항상 국지전의 위험이 있던 곳이다.

  베트남은 1985년부터 석유개발을 시작, 연간 540 만톤의 석유를 생산하여 일약 산유국 대열에 끼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유 수출액이 쌀수 출액을 초과하여,이 돈으로 90년대 베트남 경제의 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사군도를 둘러싼 주변국간의 갈등이 커지고,동남아시아 주요국들간의 군비경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광둥과 푸젠의 연안 지방정부들이 각 지방정부와 군부의 내란을 평정한 후, 다시 이 섬들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먼저 중국내란 중 대만과 베트남이 강제 점령한 섬들의 반환과 배상을 요구했으며,남사군도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남사군도가 자국 해안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자국 영토임을 선언했고, 대만은 45 년 일본군에게서 인수했다는 점을 내세워 기득권을 주장했다. 외교전과 함께 공중과 해상에서의 무력시위가 계속된 1999년 여름의 남사군도 근해는, 바다에 낚시대 하나 드리울 틈이 없을 정도로  각국 군함들로 초만원이 되어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1999. 9. 13  05:50  남사군도 타이핑섬

   남사군도 최대의 섬인 이곳 타이핑섬엔 1개 대대의 대만 해병대뿐만 아니라 해군 항공대와 대함미사일부대, 대공부대 등이 전투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겨우 0.4평방킬로미터도 안되는 좁은 이 섬은 너무 혼잡하여 오히려 전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어제는 이륙중이던 F-14 전투기와 대잠헬리콥터가 충돌하여 헬리콥터 조종사들이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활주로 동쪽 끝의 지하 벙커에서는  중국해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레이더관제관과 통신장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갑자기 한쪽 구석에 있는 OTH 해상감시레이더 담당 하사관이 비명을 질렀다.

  "해신 2호 침로 변경, 현재 방위 0-1-2, 거리 20해리, 침로는 2-2-0! 속력 30노트! 기타 다수의 수상함정 남진중! 전투속도입니다!"

  "서사군도 상공에 다수의 항공기 출현, 숫자는 점점 늘어납니다. 현재 약 23기!"

  레이더 관제사관도 그 하사관에 지지 않을 큰 목소리로 보고했다.

   "26기로 증가!"

  ‘올것이 왔다…’

  타이핑섬 수비대 사령관인  리 회이 대령은 남사군도 분쟁에 대한 최신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서사군도에서 중국군 경폭격기들이 다수 이륙하여 대만 함대 공격,  타이핑섬을 구원하려는 동사군도의 대만 전투기 부대를 중국항모에서 출동한 전투기가 요격,중국 해병대의 타이핑섬 상륙,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은 중국해병대에 의해 대만의 타이핑 수비대 전멸, 최악의 경우 중국에 의한 대만 침공…

  ‘그러나 이 섬은 우리 자유중국에 너무나 절실하다.’

  리 대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전 수비대 대공전투위치로,항공관제관 전투기 발진! 통신병은 현 상황을 제 2함대와 동사군도 수비사령관에 보고하라.  조기경보기의 보고는 없나?"

  곧 모든 수비대원이 전투위치에 배치되었다.  보조연료탱크와 중거리 대공미사일을 가득 실은 전투기들이 차례로 이륙하고  지상의 대공미사일은 모두 북쪽을 향했다.  대만의 제 2함대는 기함인 이지스 순양함의 지휘하에 모두 북쪽으로 전속 항진하며 중국 경폭격기의 대함미사일 발사에 대비한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남사군도의 대만 정예 요격기부대는  찬란한 아침햇살을 오른편 하늘로부터 받으며 서서히 편대를 짜며 남하해갔다. 대만 최초로 미국제 F-14전투기로 구성된 타이핑 주둔 제 12전투비행단의 제 1대대장인 창 중령은 아침에 화장실도 못간 채 긴급출동한 것에 대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짜식들, 아침이나 먹거든 시작할 것이지…’

  이제 당분간 아침 단잠과 식사 후의 담배를 곁들인 여유있는 홍차 한 잔,그리고 비행대기시간의 동료들과의 돈내기 포커는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살아 남더라도 말야…’

  창 중령은 타이페이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해 냈다.  미인이며 중학교 수학선생인 부인, 소학교 2학년인데 벌써 웬만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10살배기 딸… 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비록 내란으로 피폐해지긴 했지만  중국의 막강한 군사력은 대만인들에게는 악몽 자체였다. 하방감시 레이다에 중국함대가 나타났다.

  ‘곧 전투기도 몰려 오겠지..’

  창 대령은 북쪽 하늘을 보았다.

  이제 전쟁을 믿지 않는 아시아인은 없게 되었다. 대만의 직선 총통에서부터 타이난 요트공장의 노동자들, 남사군도 근해에 배치된 일본해상 자위대 제 2호위함대 승무원들, 호지밍시 근교의 기지에서 긴급 발진한 베트남 전투기의 조종사들, 캄란만에서 출동하는 러시아 순양함 프룬제의 승무원들, 베트남에 현지공장을 둔 한국의 어느 종합상사 회장.  모두 중국과 대만의 전쟁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유럽과 미국의 일반시민들도 위성중계TV 앞에 모여들었다.

  전쟁을 막으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대만의 패배와 중국복속은 기정사실이었다.  이제는 대만 복속 후의 아시아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가 관심일 뿐이었으며,이 지역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이번 기회에 아시아에서의 자국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틈을 노리는 부류도 있었다.  남사군도 해역에 해군을 파견한 일본과 미국이 그들이었다.

  1999. 9. 13  06:00  대만 후아리옌(花蓮) 지하공군기지

  대만 북동부의 후아리옌의 지하공군기지에서는 계속해서 미라쥬 전투기가 이륙했다. 태평양연안의 작은 항구도시인 후아리옌의 교외에 있는 이 기지는 극동 지역 최대의 지하공군 기지로,  대만정부가 7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으로 1993년 겨울에 완공한 대만 영공수호의 상징이었다.이곳에는 1993년 미국에서 수입한 F-16전투기와, 지난해인 1998년 중국의 내란을 기화로 대만에 대한 외국의 무기판매를 중국이 견제하지 못하자 미국에서 F/A-18 전투공격기를 대량수입하여 후아리옌 지하기지에 집중 배치하였다.  각 활주로별로 전투기들이 이륙준비에 바빴다.

  대만에서 자체개발한 슝펭3 대함미사일을 양날개에 실은 프랑스제 미라쥬 전투기는 1993년 수입한 것이었다.  미라쥬가 이륙하면 곧이어 미제 F-16 전투기와 F/A-18 전투공격기가 이륙할 차례였다.  물론 목표는 타이핑섬을 공격하는 중국함대와 경폭격기대였다.미라쥬와 F/A-18이 함대를 공격하고 F-16이 상공 엄호를 할 계획이었다. 물론 중국해군의 명백한 도발이 있기전의 선제공격은 억제된 상태였다.

  1999. 9. 13  06:30  대만 후아리옌 근해

  후아리옌의 동남방 20km 해상에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항해 중이었다. 5만톤의 원자력화물선인 이 배는 선체를 검게 칠하고 앞부분에 흰색 페인트로 흑환(黑丸)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었다. 선미에는 일장기가 바람에 날리고 갑판에는 컨테이너가 만재되어 있었다. 원자력상선 구로마루는 일본이 상업적 목적의 핵 이용을 시작한 1996년에 건조되어, 이듬해부터는 자매선 20여척을 만들어 세계의 항로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 중의 두 척을 중국이 비밀리에 매입하여 개조한 후 일본에 잠시 기항, 구로마루와 목적지를 바꿔치기하여 이 배로 선체를 위장하여 후아리옌항을 향하고 있었다.

  선교에는 보통의 상선보다 많은 선원들이 있었다.한 모니터에 중국의 통신위성으로부터 받은 남사군도의 각 군별 항공기와 함대의 위치가 그려진 자료가 영상에 나타났다.  영상에는 후아리옌에서 이륙한 대만 전투기들이 거의 남사군도 해역 상공에 도착하고 있었다. 선장이 함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작전 2호 발령!"

  짧게 외친 그의 말은 분명 중국어였다.이 배의 선장은 중국해방군 해군 북해함대 사령관인 리 소장이었다.그리고 이 거대한 상선의 배 밑에는 로미오급(중국 해군의 제식명 033식) 재래식잠수함 40여척이 배터리를 이용한 무음항해를 하고있었다. 상선으로부터 전기와 산소를 공급받고, 통신선을 통해 사령관의 명령을 받으며, 또한 수상의 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장시간의 무음장항이 가능했다.

  물론 많은 잠수함들이 좁은 수중공간에서 잠항하기때문에 잠항 중 잠수함끼리의 충돌을 막기 위해 상선에 있는 잠항통제사관이 땀을 흘리며 교통정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상선의 통제관과 잠수함들은 모의훈련과 실전 훈련을 거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같은 시간 대만 남부의 최대 항구인 까오슝의 앞바다에는 구로마루의 자매선인 원자력상선 호오류가 항구를 향하고 있었다. 자동차 운반선인 호오류는 명목상 2천대의 일본산 전기자동차를 까오슝항에 하역하기 위해 대만영해에 진입하였으나, 호오류도 역시 구로마루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 위해 중국해군에 의해 개조된 배였다.호오류는 입항 직전 이미 잠수함들을 떼어 놓았다.

  작전 2호는 공격 예정시간 전에 대만의 해안에 도달하여, 잠수함들이 각각의 임무에 맞춰 자신의 공격위치로 출발하는 것이다. 공격예정 1시간전이었다. 먼저 상륙부대를 태운 잠수함 10 여 척이 호위잠수함의 유도를 받으며 출발했다.  그리고 상선의 호위를 맡아 대함미사일을 탑재한 공격형 잠수함들은 각자가 맡은 책임해역으로 흩어졌다.

  대만정부로서는 전쟁 전에 최대한의 물자를 비축해야 하기 때문에 해상의 항로는 대만에 식량과 생필품, 또는 군수품을 실은 각국의 화물선으로 붐볐다. 화물선은 상당히 큰 소음을 내므로 대만의 구축함과 대잠 초계기는 이런 해역에서 무음잠항하는 중국해군의  잠수함을 포착할 수는 없었다.  더우기 대만해협과 남사군도가 더 중요한 해역이기 때문에 이런 통상항로에는 대잠초계를 강화할 수도 없었다.후아리옌 항구 앞의 푸른 바다 속은 중국 잠수함들로 붐볐다.

  같은 시간, 남사군도 70 km 북방, 피어리 크로스 암초지대 상공

  ‘이제, 조금만 더…’

  해상 30 미터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대만 공군의 F/A-18 대함공격대 30여기의 편대장인 왕 대령은 무척 초조했다.대함미사일 발사 전 저공비행 중에는 레이더 사용과 편대기 사이의 통신이 봉쇄된다.후방 100여km 상공에서 선회중인 레이더 조기경보기 덕분에 적함대의 위치는 잘 알 수 있었지만 미사일공격 전에는 적 요격기 편대의 위치와 왕 대령이 지휘하는 편대기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간간이 고도 일만 미터에서 중국해군의 조기경보기가 발신하는 레이더파가 기체를 스쳐갔다.

  ‘이제 중국함대도 우리의 접근을 눈치챘을 것이다.’

  왕 대령의 기체 하부에는 중거리 공대함 미사일인 하픈(HARPOON) 2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공대함 하픈은 개발 초기에는 INS(관성유도장치)에 의한 중거리유도와 액티브레이더호밍에 의한 단거리유도의 2단계 유도를 거쳤으나 목표물의 전자방해전, 특히 soft kill(채프나 레이더 발신미끼에 의한 오인 유도)의 발달에 따라 단거리 유도방식에는 TV 유도방식 등의 광학적 유도와, 기존 액티브 레이더호밍을 강화한 주파수도 약 액티브 레이더 호밍의 복합적 유도방식이 많이 이용되었다.조기경보기로부터 목표의 위치에 대한 데이터가 계속 수신되고 있었다.

  ‘어차피 장거리 함대공미사일은 저공을 비행하는 기체에는 발사할 수 없다. 이제 목표까지 80 km! 사정거리가 되고도 남는데 왜 발사 명령을 내리지 않는거야?’

  왕 대령 뿐만 아니라 다른 조종사들도 초초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몇 분 후에는 중국전투기들의 요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적 수상함의 단거리 함대공미사일의 사정에 들어 올 것이다.F/A-18은 전투기로서도 훌륭하지만 무거운 하픈 공대함미사일을 2기나 장착한 상태에서는 30년전 개발된 미그 23의 상대도 안될 것이 뻔했다.더구나 상대는 러시아제 미그 29가 아닌가?  그렇다고 관제기의 명령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미사일을 발사할 수도 없는 일,더 이상 참지 못한 왕 대령이 무선봉쇄를 해제하고 관제기 역할을 하고 있는 조기경보기를 불러냈다.

  "여기는 갈매기 6호! 도대체 왜 명령을 내리지 않는거야?"

  "갈매기 6호. 여기는 죠나단. 즉시 무선 봉쇄하시요.목표의 움직임이 있습니다.목표는 3-2-6으로 선회중! 이를 목표의 아군에 대한 적대행위 중지로 인정하고 남사군도 파견함대 사령관과 협의 중입니다. 반복합니다. 목표의 위치 변경 중. 항로를 유지하고 무선봉쇄를 지속하시요."

  왕 대령은 무선을 끊었다.2시 방향 상공에 중국해군의 함재기인 미그 29기 4대가 편대를 지어 서서히 나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군. 저놈들이 왜 우릴 공격하지 않지?’

  왕 대령의 F/A-18 편대 뒤를 따르던 미라쥬 전폭기 편대는 이미 동사 군도에의 착륙을 명령받고 귀환중이었다.

  1999. 9. 13  06:40  웨스트 리프 해역, 대만해군 프리깃함 쳉쿵

  대만 해군의 남사군도 파견함대 기함인 미사일 프리깃함 쳉쿵의 전투 함교에서는 중국해군 함대와 중국 전투기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느라 부산했다. 큰 전자전 콘솔에 앉은 전자전 사관이 모니터를 계속 주시하며 함대사령관에게 보고했다.

  "목표 1, 진로 3-2-6. 목표 2, 진로 3-8-0. 목표 3, 진로 0-9-0!  레이더와 전자전 자료 일치합니다."

  "죠나단의 평가와 물까마귀 1호의 육안관측 모두 일치합니다."

  연이어 통신사관이 보고했다.  죠나단은 공중조기경보기, 물까마귀는 함대 소속의 초계기의 암호명이었다.

  "죠나단에서는 갈매기들의 진로변경을 계속 건의하고 있습니다."

  사령관은 고민했다. 중국이 이대로 돌아가는가… 다행이지만 이상했다.

  "일단 갈매기들은 후아리옌기지로 돌려보내. 독응은 동사기지로 유도하라. 목표와의 접근을 최대한 회피하라. 계속 경계 유지!"

  명령을 마친 사령관은 대만 해군본부와의 직통 화상전화를 들었다.전화는 위성경유로 즉시 타이페이의 해군본부 지하벙커에 연결되었다.

  "제 2함대 사령관입니다. 총장님! 목표가 진로를 바꿨습니다.단순 시위로 보입니다."

  사령관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늙은 해군총장은 잇따른 밤샘으로 더욱 초췌해 보였다. 대만해군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국부군 린 허우 제독이다.경험과 합리,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으로 오늘의 대만해군을 이끈 군인이었다.늙은 제독이 고뇌하듯 입술을 깨물더니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제독. 지금 적의 잠수함대가 보이질 않소. 해협에도, 남사군도 근해에도 없단 말이오.하이난(海南島) 해협 부근에서 간간이 부상하여 항해하는 잠수함이 보이지만 몇 척의 밍급 고물들 뿐이오. 4개 잠수함 전대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동시에 보이지 않소.특히 시아급과 한급 핵잠수함, 게다가 숫자가 가장 많은 로미오급 재래식 잠수함들의 소재가 불분명하단 말이오. 그리고 해협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니 제독은 2함대를 이끌고 돌아와 주시오."

  ‘그럼 남사군도는 포기하란 말입니까? 우리 대만의 보고(寶庫)를?’

  라는 말이 목젖에까지 올라왔지만, 석유보다는 국가의 존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2함대사령관은 해군총장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미라쥬는 동사에 배치해도 좋소."

  늙은 총장이 부하의 걱정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부족하긴 했지만 F-16과 미라쥬가 동사군도의 기지에 있으면  남사의 F-14와 함께 중국해군의 항공모함 2척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함대사령관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제독은 함대의 대공전투경계를 해제하고 서둘러 대만남안의 항구이며 제 2함대의 모항인 쪼잉(까오슝 북쪽 항구)을 향해 항진할 것을 명했다.

  1993. 9. 13  07:30  후아리옌 동쪽 해상, 원자력 컨테이너선 구로마루

  "선장님! 창고가 보입니다. 좌전방 9 km!"

  망원경으로 해상을 감시하던 사관이  전방에서 커다란 화물선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함장에게 보고했다.통신사관이 통신전문을 들고 부리나케 뛰어왔다.

  중국해군 북해함대 사령관 리 소장은  베이징의 당 중앙군사위로부터 위성경유로 타전된 짤막한 명령서를 손에 쥐었다.  명령서의 전문은 단 두 자로 되어있었다.

  ‘공격’

  공격명령서를 받은 리 소장은 지체없이 작전 3호를 발령했다. 작전 3호는 후아리옌 공군기지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다. 후아리옌에서 이륙했던 대만의 F-16 전투기편대와 미라쥬 전투기편대가 동사군도의 대만 기지에 착륙한 것을 알고 리 소장은 월척을 손에서 놓친 듯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베리아 선적의 화물선 허미즈(Hermes)는 마주오는 항로에서 구로마루를 발견하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이 배는 후아리옌항에 컨테이너를 하역하고 다음 항구인 싱가폴로 가는 예정항로상에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허미즈는 큰 원을 그리며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구로마루의 갑판에 있던 수십개의 위장용 빈 컨테이너들이  기중기와 불도져에 의해 바다로 던져졌다.이들은 플라스틱으로 가볍게 만든 것들이었다.  몇 개의 컨테이너는 외각을 해체하자 속에 대함미사일과 대공 미사일 발사기가 나타났다.  선미(船尾)의 컨테이너를 해체하니 예인용 소나(SONAR)가 드러났고 승무원들이 기중기를 조작하여 이를 물속에 넣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이 배의 승무원들은 이 한 순간을 위해 몇달씩 연습했던 것이다. 불과 10분 만에 모든 것이 다 정리되었다.

  갑판 중앙의 세 부분이 소리없이 내려앉았다.잠시 후 그 부분이 다시 올라올 때에는 러시아의 수호이-27K 를 본딴 중국해군의 함재전투기 섬(殲)-15형 3기가 공대지미사일과  공대공미사일로 무장한 채 나타났다. 구로마루는 중국해군의 위장항공모함이었던 것이다!

  구로마루는 올초에 칭다오(靑島) 조선소에서 비밀리에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받았다.선수에는 대지공격용 순항미사일과 대함미사일 수직발사기, 선미에는 대공미사일 수직발사기가 만들어졌다.배 중앙의 공간에는 함재기 격납고와 수리시설,보급창 등이 만들어졌고 배의 외측은 고강도 장갑판이 덧대어졌다. 선수의 활주로는 스키점프대로서 경사를 이뤄 단거리 이륙이 가능하도록 개조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원자력 상선 구로마루는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항공모함 해신 3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렇나 위장을 위해 배의 전체적인 윤곽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첫번째 전투기가 증기사출기에 의해 시속 250km로 가속되어 이륙했다. 쌍발엔진인 이 섬-15형 함재기는 주익 앞의 대형 카나드를 약간 올린채 급 가속했다. 갑판작업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 전투기를 전송했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전투기도 이륙하자, 다시 엘리베이터에 의해 올려진 다른 전투기들이 사출기로 옮겨졌다.  수호이 27-K의 특징인 주익과 연결된 두 개의 대형 수직미익이 남국의 햇살에 반짝였다.

  갑판작업원들의 함성을 들으며 리 소장은 젊었을 때 군사학원에서 본 미국영화가 생각났다. 진주만을 습격하기 위해 일본의 항모에서 이륙하는 뇌격기 조종사들에게도 갑판원들이 함성을 지르지 않던가?  리 소장은 다시 생각했다.

  ‘우린 이긴다. 대만은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나 어쨌든 동족을 공격한다는 것이 리 소장의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군인은 외적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1999. 9. 13  07:40  까오슝(高雄)

  같은 시간, 구로마루와 같이 중국해군에 의해 개조된 원자력 상선 호오류는 작은 예인선들에 끌려 까오슝항에 들어왔다. 입출항 서류절차는 먼저 상륙한 일본인 항해장이 맡아서 끝냈고 밀수품을 검사하는 세관검사는 세관원을 매수하여 갑판 1층의 위장용 일제전기자동차 몇 대만 형식적으로 조사한 뒤 검사를 끝마쳤다.드디어 입항허가가 내려지고 자동차하역 전용항만에 배를 계류시켰다.본격적으로 하역준비가 시작되었다.

  까오슝은 대만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인구는 약 150만명인 타이완 제 2의 도시이다. 개발이 비교적 늦게 되어 중국이나 대만 특유의 고풍스런 유적은 없지만,  남국풍의 온화하고 깨끗한 도시이며 대만 최고의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까오슝항은 10만톤급의 선박이 정박가능할 정도로 항구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으며 세계 10대항 중에 꼽힐 정도로 큰 항구이다. 까오슝항 바로 북쪽에는 대만 해군 함대의 모항인 쪼잉항이 있어서 까오슝항에도 대만해군 함정들의 출입이 잦았다.  전쟁위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에 외국 선적의 화물선들은 약간 서두르는 기색이 보였다.

  드디어 하역시키기 위해 배 우현의 브리지 세 개가 동시에 내려왔다. 소형트럭 몇 대에 분승한 항구의 노무자들이 일본산 전기자동차를 하역시키기 위해 각 브리지에 도착하여 하차했다. 그들이 브리지로 걸어 올라가려고 할 때, 갑자기 컴컴한 배안에서 수많은 차량들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반장님, 일본놈들이 하역전문 운전사까지 데려온 모양인데요?"

  한 젊은 노무자가 기가 막힌 듯 자동차 전용 항만의 하역반장에게 물었다.

  "그럴리가? 서류에는…"

  반장이 잠시 서류를 펼쳐 보던 중 배안에서 나는 엔진음을 듣고는 경악했다.

  "잠깐, 저 소리는 전기자동차가 아냐.  디젤엔진, 그것도 군용장갑차 엔진음이다. 나온다! 모두 피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 소련제 BMP-1 보병전투차의 중국 복제품인 WZ-501 보병전투차가 배와 부두를 연결한 브리지에 나타났다.보병 전투차 위에는 73밀리 포탑의 해치를 열고 올라와 대공기총을 잡고있는 인민해방군 전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노무자들을 보더니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총구를 그들에게 돌리고는 쏘는 시늉을 했다.장난스럽게도 입으로는 총소리를 냈다.

  "팡!  팡!"

  항만노무자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세 개의 브리지에서는 수 십 대의 보병전투차와 이의 변형인 WZ-504 대전차 미사일 탑재차, 90식 APC, (APC : Armoured Personnel Carrier, 장갑병력수송차 또는 장갑차), 소

형인 62식 경전차, 그리고 기관총을 탑재한 사륜구동차들이 몰려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배 위에는 지상공격용 헬기들이 떼지어 날아올랐고,갑판 위에는 위장막을 치우자 대공무기들이 나타났다. 이어 중국 해병대원들이 완전무장한 채 상륙하여 예정된 위치로 달려갔다.

  ‘쿠아앙! 콰광!’

  자동차 전용부두의 바깥쪽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대만 해군 함정들이 연이어 폭발했다.  호오류를 따라 까오슝항에 숨어들어온 중국 해군 잠수함들이 어뢰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먼저 고속미사일공격정 ‘룽 창’이 어뢰 한 발에 산산조각이 나고, MWV-50급 소해정 한 척이 침몰했다. 해양경찰대 소속의 경비정 PP-823과  세관 소속의 ‘호 싱’도 어뢰를 맞고 불에 타며 침몰 중이었다.

  하늘에는 항구 바깥에서 날아온 중국 해군의 잠수함 발사 미사일들이 소우산(壽山) 군사기지의 공격목표를 찾아날아다녔다.항구는 계속된 폭발 소리와 사이렌 소리,  헬기와 장갑차의 소음과 총소리들로 시끄러웠다.  먼저 항무국(港務局)을 점령한 중국 해병대는 일부는 도로를 따라 소우산 군사기지로 가고 일부는 中山三路를 통해 까오슝 남동쪽에 있는 까오슝 국제공항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해갔다.  중국해병대는 항구시설을 모두 점령하자 시내 점령에 나섰다. 까오슝 북쪽의 쪼잉항도 하늘과 바다, 육지의 입체적인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안전한 항로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는 어선들 사이에 숨어 대만 해양 경찰대 소속 PCL 경비정 한 척이 40 밀리 포를 연속 발사하며 호오류에 접근해 왔다. 호오류의 측면에 포탄이 관통하며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러나 호오류의 상공에 있던 호위용 헬기가 발사한 대함미사일 한방을 맞고 그 경비정은 순식간에 폭발하며 침몰하였다.

  폭발하는 경비정에서 튕겨져 나온 12.7밀리 기총사수 왕 하사는 중상을 입은채 물위에 떠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참 푸르다고 생각했다. 상처의 출혈이 심했으나 고통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으나 자신 외에는 생존자가 없었다. 위장상선에서 방금 막 발사된 미사일의 연기가 보였다. 문득 자신이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매우 졸렸다.꿈인지 몰라도 까오슝항의 해군 관사에 있는 어린 딸이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왔다.

  ‘아빠. 이번 일요일엔 꼭 놀이동산에 가는거지?’

  왕 하사는 미소를 지었다. 딸의 웃는 얼굴이 까오슝항의 하늘에 보였다.왕 하사는 이번 일요일엔 꼭 딸과 함께 놀이동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999. 9. 13  07:45  까오슝항 북서쪽 소우산(壽山) 365고지

  해상감시 레이더와 대공미사일 기지가 있는, 까오슝항을 내려다 보고있는 소우산의 정상 365고지에서는 잠수함에서 상륙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특수부대인 권단(拳團)과 기지수비대간의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미리 준비하고 급습한 권단의 공격에 기지수비대는 항복하고 기지는 쉽게 권단이 장악했다. 공격지원을 하기로 한 중국 해병대는 권단이 점령한 후에야 소우산 기슭에 도착할 정도로  권단의 공격은 신속했다.

  기지 점령 즉시 권단과 동행한 인민해방군 공군의 전업기술군관과 사 병들이 대만이 자체개발한 텐궁(天弓) 3호 대공미사일을 점검하고 일부는 해상감시 레이더를 조작했다.  이 고지는 중국군의 까오슝항 점령과 이후의 방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기능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소우산 기지가 점령됨으로써 대만 남단 근해의 모든 해상의 움직임들이 까오슝 서남방 150 km 해상의 중국해군 동해함대의 주력 수상부대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1993. 9. 13  07:50  까오슝공항

  까오슝 항구 남동쪽에는 까오슝 국제공항이 있다. 방금 막 착륙한 타이쭝(臺中)발 여객기에서 내린 승객들은 까오슝항에서 들려오는 연이은 폭음을 듣고 놀랐다. 까오슝항이 있는 방향에 치솟는 검은 연기와 불꽃들, 기관총소리와 폭발하는 소리들… 사람들은 한순간 멍청히 서 있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았고, 이를 신호로 까오슝 공항의 사람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앞은 다투어 이륙 준비 중인 여객기로 몰려갔다.남사군도의 위기가 지나갔다는 뉴스를 듣고 안도하며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가려던 생각이 처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공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까오슝은 전쟁터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헬리콥터 소리가 항구쪽 상공에서 들려왔다 항구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 사이로 수십대의 군용헬기들이 까오슝공항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가려 하자 대합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헬기 몇 대가 공항관제탑과 청사 앞에 착륙하고 헬기에서 완전무장한 중국인민해방군 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임무와 공항내부를 잘 알고있는 듯 곧바로 맡은 구역을 향해 뛰어갔다.

  공항 보안요원들과 경찰 몇 명이 저지하려 했으나 지난 1년간의 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중국 정규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갑작스런 습격에 당황한 그들은 빈약한 무기로나마 싸우려고 했으나 차례로 쓰러져갔다.공항청사를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민간인들이 총탄을 피해 바닥에 엎드리거나 구석에 웅크린채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공항경비경찰인 우 경사는 청사의 기둥 뒤에 숨어 중국군 병사들에게 소총을 발사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째 맞히는 순간 중국군 병사의 자동화기가 자신을 향해 불을 뿜는 것을 보았다.  큰 충격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 목이 메이고 울컥하며 선혈이 솟구쳤다. 깨끗한 제복이 피로 더럽혀졌을거라고 생각하니 불쾌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공항청사의 커다란 기둥이 점점 희미해져 보였다.어제 저녁 이 기둥 옆에 서 있던 싱가폴항공의 젊고 매력적인 스튜어디스가 생각났다. 동그란 눈으로 우 경사를 쳐다보던 그 스튜어디스… 참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귀여운 눈…

  5분도 채 되지 않아 공항청사에는 중국의 오성홍기가 올려졌다.

  1999. 9. 13  07:50  후아리옌 근해의 해신 3호

  전투기 50여대가 모두 이륙하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먼저 제공권을 장악할 전투기와  대만의 대공미사일 발사대와 레이더를 공격할 공격기가 이륙한 후에 지상공격용 전폭기들이 이륙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투기로서는 최초의 함재형전투기인 수호이-27K를 본뜬  섬(殲)-15 전투기였다. 각자 맡은 바 임무대로 장비를 싣고 이륙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후아리옌 근해의 하늘은 순식간에 중국전투기들로 메워졌다.

  중국함재기들이 편대를 형성하여 후아리옌 공군기지쪽으로 출발한 직후, 리 소장은 대지공격용 순항미사일의 연속발사를 명했다. 이미 좌표가 입력된 순항미사일들이 꼬리를 물며 발사되었다. 함수의 수직발사기에서 연속발사된 순항미사일은 상승 후 다시 고도를 내려 해상 10 미터의 아슬아슬한 고도와 마하 3의 빠른 속도로 후아리옌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이런 기술은 1995년까지 상상도 못하는 기술이었다. 파도를 스치듯 낮게 날아가는 대함미사일은 이때까지 마하 이하의 속도였으나 획기적인 레이더기술의 발달로 이 미사일은 마하 3을 시현할 수 있었다. 이어 해군 특전대를 태운 헬기들이 날아올랐다.

  전투기들이 모두 이륙하자 구로마루는 속도를 줄이고 허미즈(Hermes)가 접근해오길 기다렸다.  화물선 허미즈와 15노트의 속도로 완전히 속도가 같아진 후 허미즈의 기중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중기의 철선끝에는 컨테이너가 있었고 이를 같은 속도로 항행하는 구로마루에게 넘겼다. 구로마루의 작은 기중기가 이를 다시 엘리베이터 위에 올렸고 그 엘리베이터는 즉시 아래로 내려갔다. 이 같은 작업이 몇 회나 계속되었다. 허미즈는 구로마루, 즉, 해신 3호의 위장보급선이었다. 큰바다에서는 파도가 높기 때문에 보급 중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기 위하여 두 척의 배가 같은 속도로 항진하며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해신 3호의 밑에 있다가 후아리옌 근해로 숨어들어온 로미오급 잠수함 20여 척이 일제히 잠망경 심도까지 부상하여  후아리옌 공군기지와 주변의 대만 지상군 기지를 목표로 533 밀리 어뢰발사관을 통해 순항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바다위를 항해중인 배에서 보았다면 사방에서 흰 물기둥이 솟구쳐서 깜짝 놀랐을 것이다. 미사일 발사를 마친 중국의 재래식 잠수함들은 다시 잠수하여 전파수신기가 달린 슈노켈을 올린채 해신 3호와 허미즈가 있는 동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1999. 9. 13  08:00  후아리옌 공군기지

  새벽의 전 항공기 출격에 이은 F/A-18 편대의 착륙과 정비에 눈코 뜰 새 없던 후아리옌 지하공군기지에 다시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적 항공기에 의한 공습경보였다.후아리옌은 상대적으로 후방이기 때문에 적 항공기에 의한 기지 급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여 모두 당황했다.

  조종사들이 허겁지겁 이륙 대기 중인 전투기에 올라탔다. 남사군도로 출격할 때 탑재한 대함미사일은 이미 제거되어 있었기 때문에 F/A-18은 이제는 전투기가 되어 하늘을 날으려는 참이었다.조종사들이 헬맷을 쓰자 이어폰을 통해 놀라운 정보가 전해졌다.적 항공기는 대륙이 있는 서쪽이 아니라 바다가 있는 동쪽에서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적이 이미 기지에서 10 킬로미터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이었다.

  첫번째 비행기가 이륙도 하기 전에 순항미사일들이 몰려왔다.기지 자체 방어시설들인 대공 발칸포와 대공미사일들이 연속 발사되었다. 대공 방어망의 틈을 뚫고 들어온 미사일들이 입구 근처에 작열했다.  굉음과 진동이 기지를 휩쓸었다. 그러나 지하기지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 준비된 전투기부터 서둘러 이륙했다.  지하기지는 전투기들의 굉음과 미사일 폭발음, 그리고 관제탑의 확성기 소리에 휩싸였다.

  같은 시간, 기지 옆 바위틈

  "자네 오리사냥 해본 적 있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해병대 제 11여단 방공대대 소속의 장바오 중위가 바위틈에 숨어 휴대형 대공미사일의 발사를  준비 중인 한 병사에게 물었다.  이들은 전날 밤에 야음을 틈타 잠수함으로부터 상륙한 선발대였다. 이들 말고도 세 곳의 후아리옌기지 활주로 입구 주변과 후아리옌기지로 통하는 고속도로 주변에 중국 해병대원들이 매복중이었다.

  "아니요…"

  젊은 병사는 중위를 힐끗 쳐다본 후 계속 사격자세를 유지했다. 병사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중위는 신나게 떠벌였다.

  "오리들이 모인 물가에 살금살금 다가가서, 먼저 물 위에 떠 있는 놈들에게 총을 쏘는거야.정말 맞히기 쉽겠지? 이런걸 미국놈들은 sitting duck이라 하여 아주 맞히기 쉬운 목표를 표현하지. 그러면 총소리에 놀란 다른 오리들이 날아가는데, 뚱뚱한 오리는 바로 물 위로 날 수 없어. 그놈들은 수면 위를 차고 날아야 하거든. 비행속도를 내기 위해서 일직선으로 말야. 이것도 정말 쉬운 표적이지… 대공화기를 피해 저공침투하는 적기를 요격하는 것 보다는 말야."

  주위에서 미사일 발사 준비 중인 병사들이 키들거렸다.

  ‘오리와 값비싼 전투기를 비교하다니…’

  "아무리 최신예 전투기라도 일단 순항 속도에 도달해야 제 값을 한단 말야! 이륙 중인 전투기는 오리와 다름없이 공격에 취약하다구. 너희들은 전투기를 격추시키는게 아니고 오리를 쏘는거야.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알았나?"

  "예!"

  주변의 병사들이 낮지만 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이들은 내전을 겪은 고참 병사들이었다. 중위만 해도 휴대형 미사일로 초음속기 3대와 헬기 7대를 격추시킨 베테랑이었다.

  이 때 기지의 미사일발사대에서는 대공미사일이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제 2파인 중국제 순항미사일들이 지하 활주로 입구 근처에서 작열하기 시작했다.

  "나온다! 순서대로 사격!"

  이륙하는 전투기 1기에 2기의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다른 활주로 주변에 잠복 중인 동료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첫번째로 이륙한 전투기는 불시에 습격한 미사일에 동체를 맞고 공중폭발하였다.기지 관제탑에서 즉각 휴대형 미사일 공격의 경보를 울리고 후속기들은 대공미사일의 위협에 대비,이륙 후 즉시 회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륙 후 속도가 아직 붙지 않은 전투기들은 절반이 넘게 안전 고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바다에 추락하였다.

  이를 본 기지 경비대는 대공화기의 절반을 미사일요격에서 지상의 위협 제거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30밀리 대공발칸포가 바위틈을 휩쓸었다. 파편이 사방에 튀고 중국 해병대원  몇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나뒹굴었다. 이를 본 장 중위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공포와 미사일 공격조들은 도대체 뭐하는거야!"

  같은 시간,  후아리옌 기지 상공

  대공화기의 지원에 힘입어 딩 쯔린 대위의 전투기가 안전하게 기지를 이륙했다.이륙 후 일단 고도를 올리던 딩 대위는 주변의 광경에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하늘이 온통 순항미사일로 뒤덮였다. 커다란 순항 미사일 사이사이에 작은 대레이더미사일이 끼어 있었고, 이것들이 레이더와 대공미사일 발사기들을 공격했다.바위산의 암벽을 뚫어 만든 활주로 세 개 중 하나가  순항미사일의 폭발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마침 그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오던 전투기 한 대가 폭풍에 휩쓸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다에 추락하여 폭발했다.

  그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간 딩 대위는 갑자기 울리는 레이더 유도미사일의 경계음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즉시 급상승 후 채프를 뿌리며 급강하를 했다. 미사일이 기체 우측을 지나며 폭발했다.폭발 전에 급선회를 한 덕택에 딩 대위의 기체는 큰 손상이 없었으나 놀라움과 흥분에 자기도 모르게 숨이 막히며 손이 떨렸다. 그로서는 최초의 실전이었다.

  딩 대위는 정신을 차리고 레이더를 봤다. 모니터에는  중국의 섬(殲) -15형 함재기 형태의 공격목표 50여기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순항미사일들이 표시되었다.가장 가까운 적은 벌써 5킬로미터 전방 상공에 있었다.뒤쪽에서는 아군 전투기들이 속속 이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활주로가 다시 붕괴되었다. 이제 활주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딩 대위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적기 두대에 사이드와인더 L형 공대공미사일 한 발씩을 발사했다. 발사 직후 적의 적외선유도 미사일의 경보가 울렸다. 세 군데에서 발사된 모두 네 발의 열추적 미사일이  딩 대위의 기체를 노리고 쇄도해 왔다. 딩 대위는 즉시 급강하하며 플래어를 연속 발사했다. 우측으로 급선회한 후 다시 급상승하며 하늘에 큰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는 숨이 막힐 듯한 중력을 느끼며 갑자기 모든 것이 붉게 보였다.  딩 대위는 이 현상이 피가 머리로 몰려 일어나는 레드 아웃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이렇게 심하게 겪은 것은 처음이라 무척 놀라웠다. 다시 같은 방향을 돌며 급강하를 하는데도 아직 두 발의 미사일이 추적해왔다. 급강하하니 다시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갑자기 졸려왔다.

  딩 대위는 어둠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갔다.그의 비행기는 선회가 풀리고 수평비행이 되었다. 미사일이 계속 추적해왔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타이베이에 계신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1993년부터 대륙방문이 허용되자 그렇게 자주 들르시던 고향인 푸젠(福建)성을 대륙의 내전 이후 중국과 대만 사이의 갈등으로 못가시게 되자 매일 황혼 무렵 바닷가 서쪽하늘을 보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소원은 이제 풀릴거라 생각하며 딩 대위는 고통을 잊은채 미소지었다.

  공중분해되며 추락하는 딩 대위의 전투기를 보며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소속의 장 준센 소좌는 혀를 찼다.

  "바보같은 녀석, 미사일을 회피하기 위해 급선회할 때는 속도를 낮춰 선회반경을 줄여야지… 그리고 그 정도의 G에도 못견디다니 역시 실전 경험이 없어…"

  고도 8천 피트에 이른 왕 대령은 더 이상의 상승을 지속할 수 없었다. 마하 3.5인 반능동레이더유도방식의 PL-12 미사일이 날아왔다. 이 미사일은 꼬리에 연기를 끌지 않기때문에 육안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약 300미터의 거리에서 왕대령은 급선회를 하고 추격중인 3기의 적기를 향해 천검(Sky Sword)-III 능동레이더유도 미사일 3발을 발사했다.  적기가 회피행동에 들어가자 레이더 유도가 없어진 반능동형유도형의 적 미사일은 목표를 잃고 멀어져갔다. 중국제 PL-12는 속도는 빨랐으나 목표에 명중되기까지 계속 전투기가 목표를 레이더로 비춰야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제 내 차례다!’

   이렇게 속으로 외친 왕 대령은 회피행동을 하느라 정신없는 적기들 사이로 전투기를 몰았다.  이미 적기 한 대는 미사일에 맞아 폭발했고, 한 대는 엔진 바로 뒤에서 미사일이 폭발하여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적 조종사가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왕 대령은 겨우 미사일을 피한 다른 적기의 배후를 잡았다.

  "죽음의 6시 방향, 데드 식스다. 받아라!"

  왕 대령은 아군 편대원들과 불의의 기습을 받은 지상요원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어쨋든 그는 적기가 회피행동을 취하기 직전에 M-61 A1 20밀리 기관포를 적기가 산산조각이 나도록 퍼부었다. 그러나 뒤에 또 다른 전투기가 따라오고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간신히 이륙한 10여대의 대만 전투기들은 중국 전투기의 숫적 우세에 밀려 하나씩 격추당하고 있었다.거리가 너무 가까와 미사일을 발사하지 못하자 접근전(dog fighting)이 되었는데 중국내란에서 목숨을 건 실전 경험이 있는 중국 전투기조종사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기지의 지원과 아군기의 후속 발진이 없다는 것을 안  절망적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운 대만 조종사들은 모두 최후를 맞았다.

  공중전에서 세 대의 적기를 격추시키고 마지막으로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대만공군의 왕 대령은  기지 앞 바다쪽에 잠수함이 부상하여 상륙정을 발진시키는 것을 보았다. 세 척의 중국 재래식 잠수함에서 나온 WZ-551 수륙양용장갑차와 상륙주정들이 파도를 헤치며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후추안급(중국 제식명 025식) 구식 고속어뢰정 수 십 척이 나타나 이들의 상륙을 엄호했다.

  1999. 9. 13  08:20  후아리옌 기지

  후아리옌 공군기지는 이미 불바다가 되었다.적의 미사일 공격은 끝났지만, 조금 전에 중국 전투기가 발사하여 지하기지 안에서 폭발한 정밀 유도미사일이 이륙 대기 중인 전투기와 주변의 폭탄들을 연쇄 폭발시켰다. 이미 기지의 통신 지휘체계는 마비되었다. 기지사령관은 깨어진 관제탑의 창문 너머로 아비규환이 된 활주로를 보며 생각했다.

  ‘이미 패배한 전투다.  문제는 이 기지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

  사령관은 자폭스위치를 보았다. 사령관의 눈치를 보던 주변의 관제원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사령관의 눈길을 피했다. 극도의 패배감이 젊은 관제원 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전투의 승패를 떠나서 관제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생각해야 했다.과연 적의 총에 죽을 것인가, 아니면 자폭할 것인가가 그들이 선택할 전부였다.

  기지 수비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선통화를 하더니 기지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적의 지상부대가 기지내에 돌입할 기세입니다."

  기지 사령관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수비대장을 보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걸 막는 건 자네의 임무가 아닌가?’ 라는 표정이었다.

  먼저 중국군의 헬기부대가 기지 앞에 도착했다. 전투기와 공격헬기의 공중엄호를 받으며 착륙한 수송헬기에서 중국군해병대가 잽싼 몸짓으로 내려 기지로 뛰어들어갔다.기지수비대는 이미 전멸하여 저항은 거의 없었다. 지휘관을 선두로 해병대원들이 관제실 쪽으로 뛰어올라갔다.기지 사령관이 중국해군 해병대의 난입을 보고 황급히 자폭 스위치를 눌렀으나 불발이었다. 기지에 침투한 적의 첩자에 의해 자폭장치는 이미 제거된 것이다.  기지사령관이 분노로 치를 떨며 권총집으로 손이 갔다. 손이 분노와 공포로 부들부들 떨렸다.관제실로 통하는 통로에서 자동화기의 연속 발사음과 비명이 들렸다.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냈을 때 중국 해병대들이 관제실로 뛰어 들어왔다. 수 십 개의 자동소총 총구가 관제원들의 손발을 얼어붙게 했다.

  기지사령관의 손에 권총이 들려진 것을 보고도 해병대 지휘관은 그에게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기지사령관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얼떨결에 그에게 거수경례로 답했다.  경례를 마친 중국 해병대 지휘관이 기지사령관에게 짤막하게 선언했다.

  "인민해방군은 1999년 9월 13일 0830시부로 귀 성(省)의 후아리옌 공군기지를 접수합니다."

  1999. 9. 13  08:25  후아리옌 항구 컨테이너 야적장

  후아리옌은 타이완의 동쪽에 위치한 해안 관광도시이다. 옛 유적들과 멋진 풍광,  대만 고산족인 아미족의 춤 등으로 유명한 이 도시는 타이페이와 까오슝 모두에 항공로와 철로로 연결되어 있다.

  북쪽 공군기지쪽에서 폭발음이 연이어 났다. 노무자들은 모두 어쩔줄 몰라했으나 컨테이너들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후아리옌 항구는 약간 한적한 항구이기 때문에 컨테이너 야적장은 3층 높이로 낮게 배열되었는데, 맨 아래층 컨테이너들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모두 60 여개의 컨테이너 여기저기서 군용 사륜구동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중국 해병대원들이었다.  대공화기와 대전차미사일, 무반동포등을 각기 장착한 사륜구동차들이 몰려나오고, 컨테이너 위층에서는 보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제부터 뜨거운 컨테이너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국군들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이들은 항구를 모두 접수하자 민간 공항과 시내의 관청가를 점령해 들어갔다.  일부는 해안로와 부전로(府前路)를 따라 후아리옌현경찰국(花蓮縣警察局)과 후아리옌현정부(花蓮縣政府)를 점령해 나가고,일부는 역과 교량, 그리고 도로교차점을 점령했다. 후아리옌 교외의 대만 군부대는 아직 진입해오지 않아서 점령은 수월한 편이었다.

  1999. 9. 13  08:40  타이페이, 합동참모본부

  "후아리옌 공군기지 연락 두절!"

  "까오슝 공항 실함! 쪼잉항 실함, 적 해병대와 아군 구원부대 조우!"

  "적 함대 까오슝항 서남방 100 km까지 접근! 제 1함대 전투 개시!"

  "적 대규모 편대 출격, 타이페이로 향함"

  "200여기의 미사일 적색선 접근, 추정침로 타이페이, 도착 10분전!"

  "1함대 구축함 난양, 잠수함 발사 미사일에 피침… 현재 1함대는 함대함, 공대함, 잠수함 발사 미사일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거의 동시에 들어오는 끔직한 정보의 양은 점점 늘고 있었다. 수많은 대형 모니터는 적과 아군의 위치와 이동상황을 표시했다.처리할 정보가 너무 많아 오히려 사령부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그러니까 공산군은…"   참모총감이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묻힌 채 말했다.  "남쪽 끝과 동쪽 끝에 동시에 상륙한 것이군…  까오슝과 후아리옌이면 우리 군의 가장 중요한 해군과 공군기지 아닌가?"

  "하지만…" 옆의 젊은 참모부장이 말했다. "해군과 공군의 대부분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격할 수 있습니다."

  참모총감이 참모부장을 힐끗 보곤  화나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친구야! 타이페이와 타이쭝까지 공격받는 판국에  해군과 공군은 어디서 보급 받게 할텐가? 동사군도에서?"

  참모부장이 변명하듯 중국군의 전술을 비난했다. "민간상선을 개조한 항공모함과 상륙함을 쓰다니 적은 너무 비겁했습니다."

  "쯧쯧.." 참모총감이 위치가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대형 모니터의 적과 아군위치를 보며 젊은 부관을 나무랬다.

  "아냐, 훌륭한 전술이야. 우리가 그런 술책에 당하다니…  주의했으면 막을 수 있는건데… 근데 적의 주공은 어디를 목표로한 것일까? 수도인 타이페이를 우선적으로 공격하지 않는게 이상하군…"

  이 순간은 선택을 강요당하는 순간이었다. 방어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병력을 이동해야하는 것,  잠시 후 결심한 듯한 참모총감이 연속적으로 명령을 발하기 시작했다.

  "2함대는 1함대를 지원하라!  동사의 항공기는 즉시 전원 출격, 타이페이 상공을 방어하라! 예비역 재소집 현황은?   후아리옌 구원군을 재파견하고 까오슝항과 공항은 제 24 사단의 지원하에 재탈환하도록 명한다!"

  통신사관들이 바빠졌다.  동사군도 주둔군 사령관의 항의가 거셌으나 본토가 침략받는 급박한 와중에 그의 주장이 먹혀들리도 만무했다.

  갑자기 지하벙커 안에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적의 미사일이 적색선을 돌파하여 수도 타이페이와 참모부가  곧 미사일 공격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모니터에는 대만의 미사일요격 미사일들이 중국의 지대지 미사일을 향해 날고 있었다.요격미사일이 놓친 지대지미사일은 대만 공군의 최신예 청풍전투기 부대가 요격하기 위해 위해 각 공군기지에서는 속속 전투기들이 이륙했다.청풍(淸風)은 개발당시에 IDF라고 불렸던, 대만이 자체개발한 세계최고로 비싼 전투기이다. F-5 전투기를 개량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대만의 전투기 제조기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그러나 이 전투기들이 모두 타이페이에 대한 미사일공격의 요격임무에 나섰기 때문에 후아리옌 구원군은 어떠한 공중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99. 9. 13  11:00  후아리옌 북방 12km, 고속도로 주변

  "여기는 물고기 3호, M-48 H 전차 1개 여단 규모가 북진중!"

  고속도로 주변 야산 잡목림에 이틀째 매복중인 중국 해병대 수색대가 임시사령부가 있는 후아리옌 공군기지에 무선보고를 했다. M-48 H 전차는 미육군 전차 M-48 A5를 원형으로 했다고 대만군부가 주장하지만, 더 강력한 전차인 후속 M-60 A3의 차체에 화기관제장치(CFS)를 컴퓨터화하여 포탑만 M-48인, 구식 미육군 M-48전차의 전혀 새로운 파생형이었다.

  후아리옌기지와 후아리옌시에 상륙한 중국 해병대는 합쳐도 1개 연대병력이 채 못되었다. 잠수함과 항모로부터 상륙한 병력은 후아리옌기지의 수비에도 벅찼고,  후아리옌 시내를 점령한 병력은 간신히 대만군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는 정도였는데, 후속병력이 도착할 때까지는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멀리 대만의 동부 간선철도인 북회선(北廻線)을 달리는 열차 자강호(自强號)가 보였다. 급하게 후아리옌을 빠져나간듯 허둥대는 모습이었으나 민간인들이 워낙 많이 탄 듯  속도는 별로 높아보이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급하게 이동중인 기갑부대는 중국 해병 포병대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203mm(8인치) 자주포에서 발사된 포탄은 잡목림에 숨은 수색대의 레이저 유도를 받아 하나씩 먹이를 차지했다.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고 각 전차들은 엄폐물을 찾아 숨었지만  정밀하게 레이저로 유도되는 포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포탄이 날아오는 반대쪽 언덕위에 구 소련산 카모프 공격헬기가 나타났다. 강력한 로켓포와 개틀링포로 미제 M-113 APC와 흡사한 외형의 대만제 보병전투차들을 쓸었다. 간간히 보병전투차에서 쿠엔 우 대전차유도미사일과 스팅어 대공미사일을 날렸지만 그 때마다 헬기들은 언덕 뒤로 숨어버렸다. 대공자주포는 이미 레이저 유도포탄에 맞아 찌그러진채 불타고 있었다.

  중국의 공격헬기들이 숨어서 미사일을 쏘는 언덕 뒤쪽으로 대만 공군의 공격헬기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뒤에서 쏘아대는 대공미사일에 견딜 수 없어 중국 헬기들이 급상승하자 이번엔 전차여단에서 대공 미사일을 쏘아댔다. 카모프 헬기들은 적외선유도 미사일에 대응하여 배기구 냉각장치를 가동시켰으나 22.5mm 대공포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맷집좋은 공격헬기들이 하나씩 격추당할 때 이번엔 재급유를 마친 중국의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몇대는 도망가는 대만 헬기들을 좇고, 나머지는 전차여단에 돌입했다. 섬-15함재기의 공격기들은 이미 지상공격을 위한 장비를 무장하고 있었다.먼저 대공포와 대공미사일을 갖춘 보병전투차들을 20mm 기관포로 격파한 후 전차는 천천히 한대씩 로켓포로 파괴시켰다.후속하는 기계화보병과 포병중대, 보급부대 등은 집속폭탄을 투하하여 휩쓸었다.대만에서 개발한 XT-69형 155밀리 자주곡사포들이 12.7밀리 대공기총을 쏘아댔으나, 기총의 위치가 오른쪽 뒤라는 것을 아는 중국 파일럿들이 자주곡사포의 전방 좌측을 공격하자 대공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휴대형대공미사일들이 하늘로 날고 살아남은 장갑차의 대공포가 불을 뿜었지만, 공중지원을 못받은 전차여단은  적 지상군의 얼굴도 못본 채 이동중에 전멸당했다.

  1999. 9. 13  15:30  까오슝 서남방 80 km 해상, 티엔 탄

  제 1함대의 기함인 신예 쾅후아급 프리깃함 티엔 탄의 함교에서는 함대의 전투지휘보다는 사방에서 쇄도해오는 대함 미사일의 회피에 더 바쁜 입장이었다.  1998년에 취역한 이 최신예 군함은 대만의 해군증강계획에 따라 동급 2척이 제작되었다.  함 중앙에 슝펭 2 대함미사일 발사기,  함수에 48기의 SM-2 대공미사일을 연속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 발사관이 갖춰져 있었다.  어찌보면 소형의 이지스(Aegis)함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상황은 대형 이지스 순양함인 타이컨디로거급의 방어력도 넘기는 대량공격이었다. 함대방위에 이 군함 1척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멀리 서쪽 수평선상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츙샨 피침! 함대함 미사일에 맞았습니다!"

  관측사관이 외쳤다. 츙샨은 프랑스의 라파예트급과 같은 함으로서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까오슝 조선소에서 무기가 탑재된 함이었다. 근거리 대공망을 책임진 3500톤급 프리깃함인데 자매함  6척 외에도 이와 비슷한 설계로 1500톤급의 코르벳함 10척이 만들어졌었다.  이제 어느 함의 차례인지 뻔했다. 적 함대의 주 공격목표는 제 1함대의 기함인 바로 이 배였다.

  "적 위치 판명되었나?"

  함장이 복수심에 일그러진 얼굴로 수상전투 담당사관에게 물었다.

  "아직입니다. 까오슝항쪽의 해상수색 레이더기지가 점령당해서… 아군 정찰기는 또 격추되었습니다.타이페이가 미사일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공중지원도 힘든 상태입니다. E-2C는 타이페이 상공과 동사군도에 있습니다.동사군도의 E-2C는 급거 북상중이지만, 도착하려면 아직 20분은 더 걸릴겁니다."

  ’20분이면 우리 함대는 전멸이야.’

  함장이 고민에 쌓였다.갑자기 함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함수의 캐니스터에서 대공미사일 스탠더드 SM-2 미사일이 3연속 발사되었다. 적의 대함미사일 3발이 본함의 침로에 접근하여 요격하기 위한 것이다.

  "할 수 없다. 헬리콥터를 날려!  헬기의 유도에 따라 공격한다!"

  즉시 전자전 장비를 갖춘 시콜스키사의 S-70C 대잠헬리콥터가 상공을 날았다. 이미 초계기는 모두 격추된 상태였다.  대잠수함전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프리깃함으로서는 위성의 데이터에 따라 수평선 뒤에 숨어서 공격하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더 급했다.  또한 적기의 스탠드오프공격은 무시하기로 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적 미사일에서 대량으로 발사하는 함대함미사일이었다.

  같은 시각, 함재헬기

  티엔 탄의 탑재헬기가 급상승했다.적의 대함 미사일을 피해 선회하는 아군함대의 움직임이 보였다. 벌써 수는 많이 줄어있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침몰하는 배는  조금 전에 함대함 미사일에 명중한 대만 프리게이트함 츙샨이었다.

  계속 상승하자 멀리 적 함대의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되었다. 기함과 연계된 APS-707 해상감시 레이더가 적 함대의 위치를 모니터에 표시했다. 일단 탑재하고 있던 하픈 2발을 적 함대에 날렸다. 레이더 경보장치가 울리더니 적 공격기의 2차 공격편대가 다가왔다.이들은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고는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미사일에 아군이 또 얼마나 희생될지…’

  기장이 생각했다.  기함에 자료를 전송하는 중에 멀리 적함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대공미사일입니다!"

  부기장이 공포에 질려 외쳤다.

  "계속 상승 해!"

  기장이 통신사를 겸한 부기장에게 외쳤다. 대잠공격을 주로하는 함재헬기로서는 대공 미사일에 대응할 어떤 무기도 없었다.  고공에서는 숨을 곳도, 헬기의 속도로서는 피할 수도 없었다.  미사일이 연기를 끌고 날아왔다. 헬기는 계속 상승하면서 적 함대에 대한 더 정확한 데이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날아오는 미사일에 ECM을 걸었으나 미사일은 정확히 헬기를 향해 날아왔다.

  ‘초음속 전투기라면 저정도의 미사일은 피할텐데…’

  기장은 해군항공대에 입대하였으나  성적이 나빠 전투기 조종사가 되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미사일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미사일… 전투기라면 피할 수 있는데…’

  같은 시각,  대만 1함대 기함 티엔 탄

  "자료가 입력되었습니다. 발사명령을 내려주십시요! 목표물 20개 포착!"

  그 때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고 굉음이 울려왔다.  헬기가 산산조각이 난 채 해상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공대함미사일의 경보가 울렸다.함이 크게 기울어지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대공미사일과 대공포가 탄막을 형성하고 곧이어 채프가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

  "발사!"

  프리깃함의 중앙에서 함대함미사일이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 발사기가 2연장 2개인 슝펭 2 대함미사일 발사기에서 도합 20기의 함대함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함수에서는 SM-2 대공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했다. Mk-41 VLS(다연장 미사일 발사기)가 쉴 새 없이 미사일을 뿜어냈다. 다른 함에서도 해상의 목표를 향해 대함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판 차오에서 보고입니다.  1-8-7, 심도 50, 거리 2,400에 적 잠수함 발견, 현재 탑재헬기와 함께 공격중이라고 합니다."

  통신사관이 함장에게 보고했다.  아니, 보고라기 보다는 외침에 가까왔다. 그 정도의 심도에서 접근하는 잠수함이라면 미사일탑재 잠수함이 틀림없고, 그 잠수함의 공격목표가 무엇인지는 뻔했기 때문이었다.

  "적 잠수함, 본함에서도 소나에 잡힙니다. 급속접근중!"

  "적 미사일 6기 접근! 대공미사일 발사!"

  대공전 담당사관이 적 잔여 미사일에 대한 요격명령을 내렸다.  함장은 대공전을 그에게 완전히 맡기고 대잠수함전에 신경써야 했다.

  "적 잠수함, 미사일 발사! 총 4기!"

  "판 차오에서 Mk-46 발사! 목표까지 32초!"

  "아, 적 잠수함 반전!  방위 1-8-5, 침로 1-8-0, 30노트! 급속잠항중입니다! 판 차오에서 발사한 어뢰는 목표를 잡을 수 없습니다."

  4100톤급 프리깃함 판 차오에서 발사한 Mk-46 어뢰가 40 노트의 속도로 목표 해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잠수함이 사라진 뒤였다.판차오에서 유선 유도로 어뢰의 방향을 수정했으나 잠수함에서 발사한 허수아비에 헛되이 충돌했다.

  "914 로양!  적 잠수함의 추정침로에 아스록 발사하라! 1차 수색심도 500! 그건 원자력함이야!"

  함장을 겸한 함대사령관이 주변의 구축함에게 명령했다. 1944년에 미해군으로 취역하여 함령이 다하자  대만에 팔려온 이 알렌 섬너급 구식 구축함이 대잠로켓 2기를 발사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수평선을 넘어 날아오는 대함미사일의 3기의 궤적을 발견했다. 티엔 탄은 단거리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며 요격에 나섰지만  초음속의 대함미사일을 막지는 못했다. 미사일 3기가 함에 접근해왔다.

  1999. 9. 13  16:00  대만해군 제 2함대 기함 쳉쿵

  "대잠헬기에서 보고, 3-5-4에 잠수함! 거리 3,500 심도 50, 침로 0-9-2, 속도 29노트!"

  "병기사용 자유! 즉각 공격하라!"

  대잠수함전 담당사관은 피아구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헬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2함대는 1함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북진중이었다.수상함의 소나는 이미 기능이 떨어진 채 대잠헬기와 초계기만의 도움으로 중국군 잠수함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속도가 처지는 중국의 재래식 잠수함이라면  함대의 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함교에서는 함대사령관이 타이페이의 해군총감과 화상전화 중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해군본부의 화상전화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초췌해 보일거라고 생각했다.

  "까오슝과 후아리옌은 점령당했소. 쪼잉의 함대사령부도 점령당했소."

  순간 함교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중국군이 상륙했다는 것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전쟁이 시작된 것 만으로도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이었으나, 이렇게 패배의 순간이 빨리 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해군으로서는 까오슝 바로 북쪽의 군항 쪼잉이 함락당한 것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규모의 적이지만 수복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오. 귀 함대는 가능한 빨리 1함대와 합류하기 바라오.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1함대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소."

  "5분 후부터 함대함미사일의 사정거리입니다. 적 잠수함의 방해가 만만치 않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함대 사령관은 전략에서는 졌지만 전술에서는 어느정도 자유중국 해군의 명예를 회복하리라 결심했다. 이제 멋지게 지는 일만 남은 것이다.

  "죠나단에서 보고! 방위 0-2-5,  15마일에서 잠수함 발사미사일 다수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고도 30, 속도 마하 2! 순항미사일입니다!"

  핵공격의 가능성이 있는 순항미사일의  경보를 받은 함대사령관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 한 발의 핵공격으로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는데 다수의 미사일을 발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핵공격이라면 요격을 하더라도 폭풍에 휩쓸려 살아남지 못한다. 사령관은 위성수신 공격이 틀림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 미사일로는 요격이 곤란한 고도였다.

  "대공화기 사용자유! 채프 발사! 전 함대에 연락하라!"

  채프가 발사되기도 전에 레이더 유도 대공발칸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북동쪽 하늘에 수 십 개의 까만 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들이 점점 커졌다. 고도가 워낙 낮아 대공포의 포탄은 헛되이 바다에 떨어지기 일쑤였고 그럴때마다 바다에 하얀 물보라가 튀었다.가장 북쪽에 위치한 라파예트급 프리깃함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초계기와 헬기가 미사일 발사 예상 해역으로 급파되었으나 이미 늦은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렇다고 계속 미사일공격을 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함에서는 채프와 플레어, 그리고 레이더전파를 발사하는 복합 미끼로켓이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  각 함은 회피행동을 시작했으나 계속 북쪽으로 항진해야했기 때문에 회피행동에는 제약이 따랐다.  또 한 척의 구식 기어링급 구축함 라이양이 굉음을 울리고 침몰해갔다.

  검은 점이 하얀 점들이 되더니 다가왔다.  CIWS 대공발칸포가 두개를 잡고 하나는 미끼로켓을 좇아 함미를 스쳐갔다. 일단 적 잠수함대의 공격은 끝났다.  이제 반격할 순간이라고 함대사령관은 생각했으나 1함대의 구조가 우선이었다.

  "조나단에서 적 함대 포착, 자료 입력 완료!"

  수상전 사관의 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적기 내습! 죠나단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발사!"

  일각의 여유도 없었다. 한 척의 함정이라도 구하는 것이 패배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길이었다.순식간에 함 중앙의 수직발사관에서 슝펭 2 대함미사일이 연속 발사되고,  남은 목표는 뒤따르고 있는 동급의 프리게이트함 유페이에서 발사를 했다.  함에서 발사된 미사일들은 일정 고도에 이르자 하강을 하고 마하 0.85의 속도로 적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같은 시간,  조기경보기 죠나단

  "데이터링크 확인! 함대에서 대함미사일 발사!"

  "적기 10시방향에서 초음속으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수호이 27형으로 확인! 30초후 적 미사일의 사정권에 들어갑니다."

  "피닉스 연속 발사!"

  관제관으로서의 임무를 저버린채 임 소령은 흥분해있었다. 세계 최초로 조기경보기가 초음속전투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전자기술의 발달로 조기경보기에 탑재한 각종 전자기기의 부피가 적어지자, 추가연료의 탑재외에도 대만해군은 조기경보기의 자위와 보조공격을 위해 대함대공무기를 탑재시켰다. 피닉스가 비록 구형이지만 사정거리가 길어 유리한 전투가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비싼 미사일을 구입한 것이다.

  기체에서 모두 세발의 피닉스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적 전투기 1기당 1기씩 목표를 찾아 날아갔다. 죠나단은 크게 선회하여 반대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날았다. 조금이라도 적기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었다.

  "목표 포착! … 아! 한대는 회피했습니다."

  전자전사관이 거의 목이 쉰채로 외쳤다.  그 한대도 줄행랑을 놓을것이라고 임 소령은 생각했다.

  "적기 미사일 발사! 사정권이 아닌데…"

  전자전 사관이 의아해했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혹시 적기의 조종사가 화가 나서 사정거리 밖에서 미사일을 발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더를 보는 하사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미사일 접근! 거리 3500!!"

  전자전사관이 경악했고 기장은 서둘러 회피행동을 시작했다.  채프와 플레어를 연속발사하고 급강하를 시작했다. 그러나 적의 미사일은 의외로 빨랐다. 그리고 정확했다.

  임 소령은 동기들에 비하면 늦게 결혼했다. 대만의 엘리트 코스는 영어회화와 미국유학이 필수였다.그는 임관 후에 미국유학을 다녀오고 대만 상류층 처녀들과 다양하게 연애를 즐겼다. 그는 여자들의 가슴에 특히 탐닉했다. 털없는 원숭이라는 책의 저자가 여자의 가슴은 인간의 성행위 체위가 정상위로 바뀐 후,여성들이 성적 신호를 강화하기 위해 유방이 엉덩이를 자기모방해서 커졌다는 주장에 크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왜 인간 여자의 젖가슴은 다른 포유류와 달리 크고 엉덩이를 닮았을까, 아기에게 젖을 주기위한 것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크다고 임 소령도 공감했다.

  연애생활이 끝날 무렵, 임 소령은 지성이 없는 섹시한 여자들에게 흥미를 잃고 과거는 있지만 머리가 있는 여성을 선택했다.그러나 그 여자는 너무 냉담했다. 결혼하지 말고 그냥 만나자는 그녀를 설득하는데 임소령은 여러가지 수단을 써야했다. 심지어 임지에 있을 때 바람 피워도 좋다,  내가 싫어지면 이혼에 동의하겠다는 등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성적 자제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 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았다.아니면 생활의 일부로서 중요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임 소령은 투덜거렸다.

  전쟁이 발발한 지금,  그녀는 이미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국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전쟁이 그녀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을 바라지 않겠다.’

  조기경보기 조나단은 공중폭발을 일으키고  잔해는 불에 타며 바다로 추락해갔다.

  같은 시간,  제 2함대 기함 쳉쿵

  "적함 5척 격침,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깃함 2척입니다."

  전투함교 여기저기에서 짧은 환호가 들려왔다.

  "대규모 적 편대 스탠드오프 공격진형입니다! 방위 3-2-4 거리 35000, 고도 200!"

  만족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1함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사일 발사기에서는 대함미사일을 재장전하고 있었다.

  "대공미사일 연속 발사!"

  1함대와 2함대의 차이점은  2함대는 아직 적의 위치에 관한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초계기가 2기나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조기경보기인 조나단은 격추되었지만 적 전투기 2기를 격추시켜 적 전투기가 초계기를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하는 효과를 낳았다.  지금까지의 손해를 어느 정도 회복하고 이제 공세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함수의 SM-3 대공미사일들이 연속 발사되었다. 다른 함정에서도 적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연기를 끌지않는 이 미사일을 적기들이 회피하지 못할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 적기가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격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정거리에 있어서 전투기 발사 공대함 미사일보다 함에 탑재한 함대공미사일이 더 길다는 것이 전투에서 극명한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적기는 아군 함대에서 대공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모를 것이다!’

  2함대의 1함대 구원으로 전세는 호전되어 갔다.  잘하면 약간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이끌어 낼 수 있지않나 하는,  일개 함대사령관으로서는 주제넘는 생각까지 했다.

  "우현 어뢰 3기 급속 접근! 거리 500!!! 명중합니다!"

  소나담당자인 젊은 준위가 경악성을 발했다.  중국의 잠수함 몇 척이 출력을 줄이고 이 해역에서 대기했던 것이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발사된 이 어뢰들은 피할 수 없었다.  함장이 급선회를 명하기도 전에 함체에 진동과 연속적인 폭발음이 울렸다.

  "기관실 파손, 침수! 4 곳에 화재 발생!"

  "침몰합니다!"

  ‘패했다. 육지와 바다, 하늘 모두에서 패했다. 이제 우리 자유중국은 어떻게 될것인가. 중국의 하나의 성(省)으로 전락하는가… ‘

  함장은 배가 침몰하는 위기에서도 기분이 차분해졌다.어느 정도의 희생이 있어도 통일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자신이 통일의 주체측이 아닌 반대편에 섰지만,  주어진 여건하에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함대 지휘권은 유페이의 장 대령에게 맡긴다.기함은 퇴함하니 장 대령의 지휘와 판단을 존중하도록!"

  함장은 동급의 프리깃함인 유페이의 함장 장 대령에게  함대지휘권을 맡기고 서둘러 침몰하는 배에서  퇴함을 지휘했다.  부상자부터 퇴함을 하는데 함내에 폭발이 계속되었다. 2함대의 기함 쳉쿵은 함수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1999. 9. 13  16:30  타이페이 합동참모본부

  "이 정도면,"

  참모총감이 얼굴을 감싸쥐며 신음하듯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참패다. 아마 적은 방어가 집중된 타이중과 타이페이를 피해 대만 곳곳에 상륙할 것이다.이미 해군과 공군은 거의 전멸해서 더 이상의 전투는 학살에 불과하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이제 패전 후의 뒷처리가 문제라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걱정들이 더 컸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해협에 2개 함대가 있고 다수의 청풍 전투기가 있습니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아직 개전 하루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부관이 강력히 항의하자 총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는 그들까지 죽일 셈인가?"

  총감이 부관을 노려보자 부관이 고개를 숙였다.총감이 피곤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총통께 화상전화를… 연결하도록… "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므로 총감은 총통께 항복을 진언할 것이리라.

  화면에 나온 총통도 이미 내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총통과 총감은 말을 잊은채 한동안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미안해하는 총감의 얼굴을 보고 안스러운듯 총통이 먼저 말을 꺼냈다.

  "총감, 수고하셨소. 패전 뒷처리는 내가 책임지겠소. 총감도 계속 도와주시오."

  "각하!"

  "부하들의 안위는 총감이 책임을 지시길 바라오.  총감이 무책임하지 않다는건 잘 알고있소."

  총통은 늙은 참모총감이 혹시나 자살할까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이제 총통이나 총감이나 일급전범이 되어 수모를 당할 것이다.그렇다고 만약 자기들이 도망가거나 자살하는 경우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전범의 책임까지 떠넘기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북경과 연락해보겠소. 부디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각하! 죄송합니다.!"

  기어코 늙은 군인은 눈물을 뿌렸다.

  1999. 9. 13  17:30  남사군도 타이핑 섬

  "긴급전문입니다!"

  통신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충격으로 얼굴이 심하게 경련하는 모습이 모두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타이페이는 항복했습니다.  총통과 북경과의 화상회담이 진행중입니다. 참모총감의 명령입니다. 1800시를 기하여 무조건 항복…개인적 행동을 일체 삼가라는 명령입니다."

  리 회이 대령이 의자에 앉은채 고개를 숙이고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20년간 군문에 종사해온 그로서는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군들에게 총살이야 당하지 않겠지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까지는 포로수용소 생활과  중국군의 신문 등을 당해야한다는 생각에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이제 자유로운 공기와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넓은 곳에서 숨을 크게 들이키고 싶어졌다. 왠지 슬프지는 않았다.  부하나 가족도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자유를 잃는게 안타까왔다.

  리 대령은 천천히 지하벙커를 빠져나왔다. 경비병 두명이 수근거리다가 리 대령을 보고는 당황한듯 경례를 붙였다.이미 기지 내에 패전사실이 퍼져있었다. 해병대원,항공요원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수근대고 있었다. 기지의 기능은 일거에 마비되었다. 핵폭탄이 터져도 이 정도의 피해는 받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패전은 기정사실이었지만 너무 허무하게 지는 게 안타까왔다. 30만의 육군, 각 10만의 해군과 공군은 무엇 때문에 있었는가 한탄스러웠고 50년간 분단되어 민족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게 안타까왔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해가 뉘엇뉘엇 서쪽 수평선으로 천천히 기울어갔다. 밖에 나오니 끈끈한 공기때문에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환한 햇살이 눈부셔 좋다는 생각이었다.

  벙커쪽에서 통신병이 달려왔다.동사군도에 중국해군이 상륙했다는 전언과 함께 전문을 읽는 리 대령이 당혹스러워졌다.이제 대만해군, 공식적으로 자유중국 해군은 없어진 것이었다.

  남사군도 타이핑섬에 주둔하는 모든 부대원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해군 해병대로 전입한다. 대만성 해군 대령 리 회이는 인민해방군 해군 상교에 임명하며 기지 사령에 보한다. 현 위치에서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울것.  – 인민해방군 해군 총사령   해군상장  자오 윈

  리 회이 상교는 휘하 부대원의 동요를 막고 지휘권을 장악,계속 기지 및 영해 방어 임무에 임할 것. 모든 명령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남해함대사령부로부터 받는다. 보급은 예정대로 될것임. 금일 1900시에 남해함대 분함대의 타이핑섬 상륙이 있을 예정. 경거망동을 금한다. – 인민해방군 해군 남해함대 사령  해군소장  롱 이런

  해군상교라면 대만해군으로서는 해군대령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 또는 강등이 되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중국군이 상륙하기 전까지의 회유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어쨋든 리 대령, 아니 이제 인민해방군의 해군상교가 된 그는 패전처리에 부심했다. 부대의 병력과 장비, 보급품을 재확인하고 부대의 임무와 상황에 대해 설명할 차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있으니 어쨋든 시간이 빨리가서 좋았다.

  어느새 190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적도에 가까운 이곳은 아직 해가 지지 않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남해함대의 제 2 분함대가 구축함 탑재 대잠헬기 2대를 선도로 하여 나타났다.이제 소속이 바뀐 구 대만 해군 해병대원들은 활주로에 정렬하여 이들을 맞고 있었다.거대한 러시아제 대잠헬기 카모프(Ka-27)가 활주로에 착륙하자 거기서 중국군 몇 명이 내렸다.  다행히 중국군들은 자동소총을 대만군에게 겨누지는 않았다. 리 상교가 헬기로 뛰어갔다.

  "타이핑 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 상교가 중국군 군관을 보며 어색하게 경례를 했다.  그 군관의 복장을 보니 의외로 장성급 군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롱 소장님이십니까?"

  "그렇소, 리 상교."

  그 중국군 군관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남해함대 사령인 롱 이런 소장이었다. 롱 소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만나서 반갑소."

  롱 소장이 손을 내밀었다. 리 상교는 롱 소장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리 상교가 롱 소장 일행을 안내하여 구 대만 해병대원들이 도열한 연병장으로 갔다. 군악대가 환영식용 군가를 연주했다.

  롱 소장이 연병장 앞에 걸린 대만의 청천백일기를 보고는  수행한 부관에게 눈짓을 했다.  부관이 상자에서 붉은 깃발을 꺼내 이를 리 상교의 부관에게 건내주었다. 부관이 붉은 기를 보더니 이를 헌병에게 주자 헌병 두 명이 청천백일기를 하강하기 시작했다.  군악대가 마지막 대만 국가를 연주하자 대만 해병대원들이 경례를 하고, 중국 해군의 롱 소장도 경례를 했다. 리 상교로서는 착잡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어서 대만 해병대원들에 의해 중국의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석양에 게양되는 붉은 오성홍기는 그동안 흘린 피보다 더 붉어보였다.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1995년에 시작된 메콩강 유역 종합개발을 시발로 메콩강이 지나는 중국의 윈난(雲南)성, 미얀마, 타이, 라오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었다.이 개발사업에는 일본, 미국, 프랑스와 함께 한국도 원조공여국으로 참가하였으며 도로, 교량 등 사회기반시설의 건설과 수자원과 농업개발, 역내 무역증진 등으로  이 지역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중국은 인도양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특히 미얀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윈난성의 쿤밍에서 미얀마의 라쇼를 거쳐 인도양에 이르는 도로의 건설을 중국이 적극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중국이 점차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미얀마의 정치 ,경제위기가 계속되자 중국의 미얀마에 대한 원조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같은 사회주의권인 두 나라의 관계가 긴밀해져서 미얀마의 정치는 북경의 입김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다.카렌족 등 소수민족의 지속적 항쟁과 민중의 봉기를 막지 못한 미얀마 정부는 결국 몇 차례의 군사정변을 거쳐  중국의 허수아비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도양에 접한 미얀마의 영토 각지에 중국군의 해군과 공국기지가 건설되었으나 모두 미얀마의 방위를 위한 것으로 설명되어졌다.그러나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는 중국의 인도양진출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자국의 정치적 혼란과 정치격변, 베트남의 위협에 대응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주변국중 최강자인 중국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더우기 중국의 경제원조가 잇따르자 두 나라의 국민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이들 두 나라는 중국의 속국의 위치로 떨어졌다.

  제 3세계동맹이 깨진 마당에 인도는 더 이상 국제적 압력을 동원하여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인도양에 진출한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여 인도도 차츰 군사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나 워낙 경제력 격차가 커서 중국의 압력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파키스탄이나 네팔, 방글라데시 등 인도주변국들도 중국의 압력에 차츰 굴복해 들어갔다.이제 중국은 거대한 인도양을 껴안을 수 있었고,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커져서 드디어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어깨를 함께하는  초강대국의 하나로 부상했다.

  인도차이나 주변국들을 복속한  중국의 입장에서 눈에 거슬리는 유일한 적은 베트남이었다. 인도네시아는 경제개발에 여념이 없었고 필리핀은 미국의 지원이 끊긴 이후 연속된 경제불황으로  파국이 계속되어 밖으로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베트남과는 80년대 중반 남사군도를 사이에 두고 소규모 해전이 일어나긴 했지만 전력이라고 할 수 없는 베트남 해군은 일격에 전멸을 피하지 못했다.베트남 해군이 절치부심하여 해군을 키워왔으나 막강한 중국의 함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육군은 다양한 현대전의 실전경험, 그리고 베트남인의 자존심과 투쟁정신으로 중국 지상군보다 강하다고 평가되어왔지만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중국에 복속되어 병력의 분산을 초래케되어 약체화되었다.

  베트남 주변국을 복속한 중국은 대만을 점령한 직후, 여세를 몰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해 베트남을 침공하고, 바다를 통한 세 곳의 상륙전의 성공으로 단숨에 베트남 전역을 휩쓸었다.  10여년간의 베트남 경제개혁 정책인 도이모이의 성과가 잿더미가 될 것을 우려한  베트남 정부는 중국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미군에 대항했던 것처럼 베트콩을 조직하여 싸웠으나  민중들의 호응이 뒷받침되지 못한 전쟁은 길게 끌 수가 없었다.베트남의 독립과 베트콩들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중국의 선전에 무장독립단체들이 하나씩 투항했다.

  베트남의 패망을 본 남사군도 주변국들은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었었다.한편으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싱가포르는 신속배치군을 2배로 늘리고 무기체계도 대폭 현대화시켰다. 말레이시아는 미국에 F-18 D 전투기 20 여기를 발주하였고 인도네시아는 영국에 소형 항공모함를 주문했다. 동남아 모든 국가들은 이제 중국의 위협에 밤잠을 못이루게 되었다.

  필리핀은 그간의 경제적 피폐로 말미암아  남사군도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해군력이 없었다.  필리핀은 마지막까지 남사군도의 유전을 지키려 하였으나 결국 중국의 무력시위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남중국해는 드디어 완전히 중국의 호수가 되었다.

  중국은 내전수습과 경제발전, 그리고 대만 점령으로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음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를 제패하여 세계제국으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중국의 침략주의를 경계하여 일본도 재무장의 길을 걷게되어 수많은 함정과 항공기를 제작하는 등,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1999. 11. 16  13:30  대전, 정보사단 종합상황실

  "현재 5개의 장갑사단이 안둥에 집결했습니다. 주력은 제 13합성집단군의 3개 장갑사단이지만, 심양군구 내 다른 집단군의 장갑사단과 오토바이사단, 포병사단, 2개 고사포여단 등이 집결했습니다.특기할만한 점은 심양군구, 즉 동북 3성의 나머지 병력이 모두 서진하고 있으며 북경 군구의 병력은 동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신이 전하는 바가 맞다면, 이는 전형적인 내전직전의 병력이동 양상입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침입 기도는 절대 아니며 중국에 새로운 내전이 일어났다고 보아야합니다.항공전력과 해상전력은 아직까지 별 이동이 없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공군과 해군의 관망 속에 각 군구간의 알력, 특히 심양군구의 반란으로 보여집니다."

  종합상황실의 정보분석 반장인 나 영찬 대령이 대형 스크린의 만주지역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그러나 그도 약간의 의심을 한 상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국제정보를 담당하는 제 2 정보여단의 김 호근 준장이 반박했다.

  "하지만 나 대령, 중국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고 선전포고도 없이 동남아 각국을 정복했소. 우리나라라고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소.나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치기 위한 군사행동이라고 봐요. 도대체 왜 다른 곳도 아닌 신의주 바로 건너편의 안둥(安東)에 대규모 기갑부대가 집결했겠소? 그리고 이번 새로운 내전의 이유가 뭡니까? 군구간의 압력이란 늘 있어왔으나,  이것이 저번 내전에서도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잖소?"

  "심양군구의 고 휘 중장은 아시다시피 기동전의 대가입니다. 심양 서쪽에 3개 사단이 있지만 주력은 안둥의 5개 사단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와의 국경인 안둥에 주둔시키면 중앙군의 공습이 용이하지 않아 주력을 지킬 수 있다고 본 것이 아닐까요? 작년의 내전에서 고 중장은 적의 주력에게 소모전을 강요하다가,  마지막까지 아껴둔 기갑부대로 화려한 적진 중앙돌파를 성공시켰습니다.  내전의 이유는 고 중장과 일부 정치 국원과의 갈등,  또는 고 중장의 정치적 야심이라고 한 미국정보기관의 평가가 옳을 듯합니다.  지난 내전이 중국 각 지역의 부의 편재에 원인이 있었다면, 이번 내전은 권력의 재분배에 대한 일부의 불만이라고 봅니다."

  나 대령이 자신감 있게 발언했다. 나 대령 자신도 바로 전 보직이 전차연대 연대장 아닌가? 누구보다도 고 중장의 전략을 많이 안다고 자신하는 나 대령이었다.

  고 중장은 지난해의 중국내전에서 난징군구의 장갑집단군을 지휘하여 단 10일만에 베이징을 점령한, 중국 내전의 최고 영웅이었다. 신정부의 신임으로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군구의 사령이 된 것이 작년 말이었다.심양군구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지린(吉林)성, 랴오닝(遼寧)성의 만주지역 3개 성을 관할 하는 1급 군구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 중국이 우리를 침공한다면? 그리고 중국의 해군과 공군은 비상시에는 1급 군구 소속이란 말이오.해군과 공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오. 정말로 내전이 일어났다면 이들이 관망만 할 이유가 없소."

  김 준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민족의 생존이 걸린 중대한 문제일수도 있었다.

  "우리는 150 만의 대군과 현대적 무기가 있소. 중국은 대만과 동남아 몇 나라를 제압했지만 결코 우리를 넘보지는 못할거요."

  조용히 듣기만 하던 종합상황실장 최 용묵 소장이 나섰다. 최 소장은 병력 보다는 현대화된 장비와 새로운 전략이 전장을 주도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은 병력이 700만이 넘습니다. 준군사력인 인민 무장경찰이나 각 지방의 민병대를 뺀 숫자입니다. 이들은 내전을 겪으며 실전을 쌓았고 동남아 각국과의 전쟁에서 확인된 바로도 무기체계의 비약적인 질적향상이 있었습니다."

  김 준장이 단말기를 조작하여 중국과 대만의 해상전에 관한 데이터를 스크린에 올렸다.

  "대만과의 전쟁을 보십시요! 중국해군의 무기체계는 완전히 현대화되었을뿐만 아니라 전략,전술체계도 다른 군사강국에 못지 않습니다."

  "중국은 내전을 겪었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곤 아직 재래식무기의 병력위주 편성이요. 게다가 중국의 경제력으로는 우리를 공격할 수 없어요. 물론 해,공군의 전력이 상당히 증강된 것은 사실이지만 육군의 경우 아직 장비가 낙후되었고…"

  육군대학 교수 경력이 있는 최 소장이 긴 강의를 시작하려는 무렵 조기경보연대에서 화상통신으로 연락이 왔다. 현재 북경에서 심양에 걸친 선의 상공에는 항공기들의 격렬한 움직임이 있으며, 아마도 두 군구 전투기들 사이에서 공중전이 발발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북경주재대사관 무관의 연락이 왔는데 북경 시내 요소요소에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중국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밝혀졌소. 중국은 당분간 우리나라를 침공할 수는 없게된 것이오. 비상경계 해제를 건의하겠소."

  이 재영 정보사단장이 결론을 내리고  서둘러 개성의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러 떠났다. 정보사단 참모회의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구성원들은 허탈하게 각 부서로 돌아갔다.

  ‘이로써 긴 대기는 끝났다. 이제 집에 가서 푹 쉬어야지’

  승용차의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고는 이 중장의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었다.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있는 여군비서의 다리가 참 예뻐보였다. 여군이 이 중장을 돌아보더니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1999. 11. 16  19:00  평안북도 선천, 차 중령의 사택

  오랜만에 비상이 풀려 차 영진 중령은 집에 일찍 돌아와서 쉬고 있었다.집사람은 차 중령이 일찍 귀가한 것이 신기한 모양으로 이것저것 따져물었다.

  "중국에 내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면서요?  심양군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혹시 위장작전 아녀요? 우리나라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는 중국의 작전일지도…"

  "지금 북경에선 공습경보가 내리고 시내 여기저기 스커드 E형 미사일이떨어지고 있대요. 실제상황이 틀림없을겁니다."

  차 중령도 약간 의심을 했지만 설마 수도에 미사일을 폭파시키면서까지 중국이 위장작전을 쓰지는 않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생각이 달랐다.

  "중국이 개발한 스커드 E형 미사일은 명중율이 굉장히 높아요. 한 지역의 특정 건물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다고요. 그런데 아직까지 북경 중심부의 중요건물이 피격되지는 않았어요. 물론 중남해의 공산당 건물에 명중은 했지만 주요인물들의 생사는 불확실해요. 미리 피할 수도 있고요."

  차 중령의 아내는 대학때부터 각종 시뮬레이션 게임과 머드게임을 많이 했기때문에 군사적 지식이 풍부했다.두 사람이 만난 것도 그래픽 온라인 게임인 ‘에어 워 2000′에서 였다.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몇 사람씩 편을 짜서 공중전을 하는 게임이다. 차 중령이 조종술과 근접공중전의 대가라면,  그의 아내는 적의 무기체계를 파악하여 작전을 세우는 작전통이었다.  그들의 팀은 국내는 물론 통신게임 인구가 많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유명했다. 매일같이 그들의 인터넷 메일함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도전장이 쌓였다. 그 중에는 현직 공군 조종사들의 팀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팀 그린 윙스(GREEN WINGS)는 무적이었다.그들 부부는 2년 전에 팀원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나 차차 사랑이 익어갔다. 아니,  게임 중에서 벌써 사랑이 싹터 그들의 만남은 단지 사랑의 불을 댕겼을 뿐이었다.

  1년 전에 결혼하여 아직 아이는 없었고 그의 부인은 결혼후에도 컴퓨터 통신게임을 즐겼다. 대대장으로서 임지를 북한 지역으로 옮긴 차 중령은 바쁜 와중에도 자주 같이 게임을 하곤 했다.오늘같이 일찍 퇴근을 한 날은 당연히 부부가 같이 통신 게임을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게임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무기체계가 중국내전과 동남아 정복을 통하면서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오. 그들의 병력은 내전후에도 700만이 넘어요.그러나 우리나라는 동남아의 약소국들과 달라요.지난 몇 십 년간의 휴전을 통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쌓은 강군이란 말이오. 게다가 요즘의 통일과정에서 군사력은 배증했으니 중국이라한들 쉽게 침공할 수는 없을 것이오."

  차 중령은 통일참모본부에서 시달된 정보분석집을 외우듯 말을 했다. 사실 그로서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서 자주 만났던 심양의 조선족들과는 보름이 넘게 연락을 못하고 있었다.중국측에서 통신망이 차단된 것이다.기술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중령도 의심하고 있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 어떤 이익이 있죠?"

  그의 젊은 아내가 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중령으로서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영토적 야심, 한반도라는 땅의 넓이보다는 그동안 공유했던 서해를 독점하고 나아가서 러시아나 일본과의 대결에서 매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어요. 최소한 일본은 중국의 눈치를 보게될 것이오. 일본이 중국에 우호적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으면, 세계 역학구도에서 미국의 입지가 많이 약화되고 러시아가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

  차 중령은 대답하면서 깜짝 놀라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이 되는 길은,그리고 세계 사회주의를 이루는 제 일보는 우리나라를 점령하는 거여요. 중국의 지방별 부의 편재로 인한 내전을 종식하고, 남사군도와 동남아를 점령하여 정치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다진 지금 더욱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이는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열강의 식민지 다툼이나,  2차대전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경제불황 타개책과 거의 같아요.  중국은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 모두에서 우리나라를 필요로 해요.일본의 투자유치를 위해서도 말여요."

  차 중령의 아내는 역시 객관적이고 냉정했다.그린 윙스의 작전참모인 그녀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대학원까지 마쳤다.그녀의 주요관심사는 국제정치와 전쟁 분야였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우리나라를…유사이래 중국의 침략은 잦았으나 아직 한번도 우리나라를 점령한 적은 없어요. 우리는 싸웠고 또한 항상 이겼소."

  "그건 국력을 기울여 우리나라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가 있어요.  19세기 까지는 조공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자본주의 경제를 위장한 중국으로서는 더욱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해요. 일본의 경제투자는 중국으로서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중국이 침공한 나라는 모두 일본의 자본투자가 많은 지역이었어요.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중국의 부강은 곧 동북아의 안정을 해친다는 입장에서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자제해왔어요.  지금 일본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에 대한 종주권이 중국에 의해 위태해진다는 뜻이죠.  중국이 일본까지 침공하지는 않겠지만 일본에 대한 압력을 위해서도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생각할 수는 있지 않겠어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었다. 차 중령으로서는 아내의 단순한 걱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국제정치에 대한 그의 아내의 생각을 존중해왔었다. 그러나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에 수긍을 하고는 있지만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공한다니…

  그의 아내가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차 중령은 티비를 켜서 뉴스 전문 채널을 선택했다. 뉴스에서는 중국의 내전에 대한 보도 일색이었다. 전화를 들어 육군사관학교의 2기 후배인 이 현우 소령과 통화했다.

  11. 16  19:30  대전, 정보사단 통신정보대대

  "예, 선배님. 맞습니다…  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선배님."

  국내외 뉴스와 정보통신을 통해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통신정보대대의 야간당직인 이 현우 소령은 육사 선배인 차 중령과의 통화를 끊고 고민에 빠졌다. 차 선배는 정말 훌륭한 정보참모를 두었다는 부러움도 생겼다. 차 선배를 통해 형수님의 의견을 듣고보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중국내전에 대한 국내외 TV 뉴스를 보면 미사일 공격을 당한 북경시내 뿐만 아니라 병력 이동상황과 중앙군의 전과까지도 자세히 보도되었다.중국의 지난번 내전과 동남아전쟁 때는 볼 수 었었던 생생한 전투장면들도 화면에 보였다.

  사무실에서는 세계 주요뉴스채널마다 담당자가 붙어서 녹화하며 중요 정보를 체크하고 있었다. 수 십 개의 영상 대부분이 중국의 내전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국의 주요 뉴스채널을 담당한 TV뉴스소대 제 3반장인 김 선영 중위가 갑자기 긴장했다.  김 중위가 긴장했을 때의 버릇인 입술 깨물기가 시작되었다. 차 중령이 그녀의 섹시한 입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저 화면은 가짜입니다."

  CNN 뉴스를 보던 김 중위가 단언했다.  이 소령도 중국측이 자기들의 내전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을 외국에 보여주는 것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차에 김 중위가 녹화한 테이프를 주자, 이 소령이 테이프를 다시 돌려보았다.  장면은 정부군과 심양군의 전투장면인데 화면설명에는 정부군의 종군기자가 찍어 CNN에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음… 좋소. 김 중위, 내가 먼저 지적해 보겠소."

  한번 본 다음 테이프를 다시 재생시키며 이 소령이 말했다.화면은 중앙군이 심양군구 관할의 한 소도시를 점령하는 과정이었다.  도로에 중앙군의 전차와 보병들이 산개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불타는 전차와 보병장갑차, 시체들…  그 무엇을 보아도 이상할게 없는 화면이었다.

  "파편에 의해 죽거나 불에 탄 시체가 하나도 없소. 저 장갑차의 해치에 쓰러져 있는 시체도 총상이오.  파괴된 전차 옆에 쓰러져 있는 것도 폭발 파편이나 폭풍에 의해 죽은 시체가 아니오. 나는 법의학자는 아니지만 의심을 하며 보니 모든게 의심되는군요.  저기 건물에서 저격하고 있는 심양군의 얼굴이 너무 깨끗하군요.  시가전 상황에서는 저런 얼굴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저 포로들의 얼굴에는 분노감이 나타나 있군요. 이번 내전의 이유는 잘 모르지만 중앙군과 심양군 사병들이 서로 적개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봐요.  전투중에 가혹행위가 있더라도 공포나 수치심은 나타날 망정 분노는 표출되지 않아요. 아마 분노하는 표정을 지으라고 교육을 받은 모양이오. 전쟁심리학을 전공한 내가 본 건 이 정도요. 김 중위는?"

  김 선영 중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령님은 역시 군인이시군요."

  "네? 무슨 말이오?" 이 소령은 당황했다.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저는 그렇게 자세히는 못봤어요. 소령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렇군요. 맞아요. 저 화면은 연출된거여요."

  "그런데 김 중위는 저 화면이 가짜인줄 어떻게 알았소?"

  "화면이 흔들리지 않았어요. 정지해 있는 중계차나 레일 위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며 찍은거죠. 전투 종료 후라면 이해가 가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건 아니잖아요."

  여군인 김 중위는 너무도 간단히 지적했다. 차 소령이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 상황에서 아무리 용감한 종군기자라고 해도 자신을 은폐하지 않고 촬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왜 중앙군이 저 화면을 외신에 제공했냐는 거죠."

  이 소령은 선채로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출구로 뛰어나가면서 김 대위에게 외쳤다.

  "나는 상황실에 이 테이프를 보고하겠소. 김 중위는 무기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무엇이 정말 잘못되었는지 상세히 분석하시오."

  1999. 11. 16  20:00  정보사단 종합상황실

  사단 상황실 정보분석반장인 나 영찬 대령은 고민했다.  내전이 진행되는 중국 만주지역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사단의 각 부서에서 수집되는 정보들은 한결같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더불어 중국측이 우리나라의 정보수집활동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의심이 가는 내용들이었다. 야간 당직을 맡은 장교들이 고민에 쌓인 모습들이었다.

  먼저 만주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전파방해 문제였다. 전쟁지역에 대한 광대역 전파방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범위와 정도가 너무 심해 그 지역에 대한 전파정보는 거의 수집이 힘들었다.  또한 만주지역에 파견된 지사원(첩보활동 인원)들의 보고가 전무했다. 무선 보고가 끊겼을뿐 아니라 인적 왕래가 차단되어 도저히 정보수집이 안되었다.  정찰기에 의한 정보수집도 중국의 전파방해에 의해 차단되었고 심지어 한만 국경지역의 유선전화마저 불통이었다. 광대역 전파방해가 유선통신까지 방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각 부서의 보고는  또한 중국 중앙군이 외신에 제공한 영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혔고,  중앙군과 심양군이 내전을 벌일만한 특단의 사유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해왔다.  심양군구 사령인 고 중장의 인물 분석을 담당한 심리과에서도 고 중장이 반란을 일으킨데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했다.

  미국의 정찰위성을 통해 받는 정보는 갑자기 미국측의 사정이라며 질과 양에서 대폭적인 감축이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한국 종합상사 직원들의 안부를 알지 못해 소재확인을 요구하는 민원도 쇄도했다.

  갑자기 만주지역에 대한 정보는 블랙박스 안에 담겨버린 상황이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의심이 갔다. 그것도 단지 중국이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그러나 비상을 해제한 몇 시간만에 다시 비상을 걸어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다고 나 대령은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있다고 봅니다. 내일 아침에 각 단위부대장들이 출근한 후에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각 부서 당직께서는 재검토, 분석하여 일단 단위부대장들에게 보고해 주십시요."

  갑자기 이 소령이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만약! 만약에 중국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사행동의 목표는 어딘지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봐요,이 소령! 중국은 지난 내전중에도 내전 당사자 양쪽 모두 우리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소.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공할 뚜렷한 이유가 없단 말이오."

  "중국의 모험적인 정권이 지금까지 몇 나라를 침공했습니까?  침공하기 전에 뚜렷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동남아 어느 나라가 효율적으로 자기 나라를 방위했습니까? 중국은 군사적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10년 전의 재래식 군대가 아닌 현대적인 군대란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만주지역에 수십개 사단이 이동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 주십시요. 과연 내전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훈련일수도 있지 않소? 중국의 가장 큰 적은 아직까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가 바로 북쪽에 위협으로 남아있는데  어찌 우리나라를 칠 수 있단 말이오?"

  "러시아는 경제 실패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지만 중국은 내전 상황에서도 오히려 경제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발전 과정에서의 여러 모순들을 점차적으로 개선했고,  지금은 더 많은 욕구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국제정치적 희생양으로서 더할 나위없는 좋은 상대란 말입니다."

  "좋소. 그것을 당신의 부대장에게 그렇게 보고하시요. 단, 내일 아침에 말이오."

  "중국이 당장 침공해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안북도 지역만이라도 비상경계를 시작해야합니다. 전차 5개 사단이 압록강 바로 너머에 있는 상황입니다.만약 오늘 밤중으로 침공해 온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아까 저녁때만 해도 차 소령의 부대도 비상경계해제에 동의했소. 그런데 몇시간만에 번복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더 이상 논란은 필요 없소.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내일 아침에 토의합시다. 이상으로 해산입니다."

  이 소령은 나 대령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령으로서도 오늘밤에야 설마 하는 생각으로 다시 자기 부대로 복귀했다.

  1999. 11.16  23:00  신의주 서쪽 용암포, 압록강 하구 해양감시소

  압록강이 바다와 만나며 이룬 삼각주인  용암포 서쪽 신우평(信遇平) 너른 들의 북쪽에 거대한 대형 유조선 세 척이 해상감시 레이더에 잡혔다.  만조 때 대형 화물선이 입항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유조선이 이런 얕은 바다에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라 해양감시소의 인민군들은 그 배들을 신기한듯 쳐다 보고 있었다.  북한의 신우평과 중국 단둥(丹東) 공업단지 사이의 밤바다 위에 떠있는 세 척의 유조선은 마치 커다란 괴물같았다.

  등대와 비슷한 모양을 한 해양감시소의 꼭대기 망루에 야간당직인 인민군의 이 태영 중위가 5km 서쪽의 유조선들을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이 해상은 수심이 낮아 아무리 만조라고 해도 유조선처럼 흘수가 깊은 배는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대형화물선의 입항도 압록강 하구의 준설작업이 이뤄진 1998년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만조 평균수심이 1 미터밖에 되지 않고 중국측에서 준설한 물길도 깊어 봐야 6미터 남짓한 이곳 갯벌에, 흘수가 10 미터가 넘는 유조선의 입항은 상상도 못했었다.

  준설작업은 중국의 자본으로 이뤄졌고  남북한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단둥항의 이익만을 위한 준설이었기 때문이다.  신의주 북쪽의 압록강 너머 단둥시는 공업단지가 세워진 90년대 이래 10년간  급성장을 한 신흥공업도시이며 작년에 항구를 대대적으로 확장했었다. 북한이 영유권을 갖고 있는 삼각주인 황초평(黃草平)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쓰는 압록강 지류의 물길이 좁아 화물선이 단둥시에 직접 하역을 못하자 단둥시에서는 황초평과 용암포 사이인 압록강 본류의 준설을 제안했으나 신의주시에서 이를 거부를 했었다. 쌍둥이 국경도시이긴 하지만 단둥시에서 나오는 공해물질이 너무 과다해 신의주시는 북한 최고의 공해도시라는 악명을 듣고있기 때문이었다.

  이 중위가 그 배들은 다시 보니 이상하게도 모두 항해등을 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상부에 보고할까 말까 망설이는 차에 유조선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한 척은 신우평에 남아있었으나 천천히 선회했고, 두 척이 용암포로 다가왔다. 유조선들이 움직이자 유조선들에 가려있던 대형화물선 여러 척이 보였다.화물선들도 역시 항해등을 켜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국제항해조례에 정면으로 위배된 행위였다.

  "유조선이 왜 이쪽으로 오는 기야? 길고 저 많은 배들이 항해등을 켜지 않다니… 이 낮은 곳에 유조선이 어케… 도대체…?  최 전사, 상부에 즉시 보고하라우야!"

  불안해진 이 중위가 명령을 내리고 최 전사가 복창하기도 전에  해양 감시소가 암흑 속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이었다.  남북한의 전력체계가 통합된 이후 한번도 있지 않은 정전이 일어난 것이다.

  "유선도 불통입네다. 뭔가 이상…"

  최 전사가 어둠 속에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이 울렸다. 직감적으로 적의 침입을 알아챈 이 중위가 권총을 빼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얼굴이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인민군 전사답게 가슴의 고통보다는 의문과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자책감이 더 컸다.

  ‘도대체 왜… 누가? 설마 중국이?’

  11. 16  23:05  신의주, 압록강 철교 남단 검문소

  신의주 철교에 근무하는 허 전사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곳도 국경인지라 밤 9시 이후에는 통행이 통제되었다.가끔 단둥시로부터의 귀가가 늦은 북한 출신의 보따리 장수들이 밤 9시 약간 넘어 승용차로 도착해서는 통행세로 양주나 음식을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런 늦은 시간엔 그런 재미도 없었다.

  검문소 통제소 안에 있는 중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안쪽 내무반에서는 소대장을 포함한 인민군들이 남조선 TV방송을 보고 있는 모양인지 시끌벅적했다. 같이 근무하는 하사는 차단기 뒤쪽에 앉아 달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허 전사는 모든 것이 항상 같은 인민군 생활이 지겨워졌다.

  입대하지 않은 고향 친구들은 남조선의  서울에 가서 한몫 단단히 잡은 모양이었다. 중장비 기술자인 친구 조 남철은 서울에 작지만 아파트도 가지고 있었다. 지난 휴가 때 서울 구경도 할 겸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었는데 서울의 밤은 정말 놀랄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고층빌딩, 자동차, 인파… 그곳에 사는 친구가 정말 부러웠다.

  친구에게 듣기로는 남조선에서는 농부가 천대받는다고 했었다.  공화국에서도 말로는 농부가 우대받지만 사실 골시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친구의 말로는 시베리아나 만주에 있는 농장이나 건설현장의 인부로 가면 몫돈을 쥔다는데 거길 가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제대하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다. 통일이 되면서 군 병력을 감축한다는데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협동농장의 선희가 생각나 종종 같이 부르던 노래를 작은소리로 불렀다.

  뻐꾹새가 노래하는 곳

  사랑하는 내 고향일세…

  로동으로 행복을 열고

  로동으로 꽃이 피는 곳…

  철교 북쪽에서 헤드라이트를 킨 차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 피우고 있는 하사를 부른 다음 총을 어깨에 맨 채 그 트럭이 오길 기다렸다. 차단기 앞에 트럭이 서자 허 전사가 트럭 운전석 쪽으로 갔다.  운전사가 양주나 다른 물건을 주면 통과시킬 생각이었는데 운전사가 알겠다는 듯이 웃더니 조수석 밑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뭔가 잔뜩 기대하던 허 전사와 하사가 마지막으로 본것은 섬뜩한 섬광이었다.

  트럭 뒤쪽에서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하고 총을 든 괴한들이 뛰어내렸다.스털링 L34A1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그들이 통제소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졸다가 반쯤 깬 중사가 개슴츠레한 눈으로 무슨 일인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기관단총을 연사하여 중사가 계속 잠들도록 했다.안쪽에서 TV소리가 들렸다. 괴한들이 문을 서서히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인민군 몇 명은 자고 있고 나머지는 TV를 보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천천히 내무반으로 걸어들어가 한명씩 기관단총을 쏘았다. 소음기관단총의 총소리는 TV소리에 묻혀 밖에까지 들리지 않았다. TV에서는 쇼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세 명의 젊은 여자들이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지휘관인듯한 남자가 화면을 흘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전차의 우르렁거리는 소리가 내무반 안쪽까지 들려왔다.

  11. 16  23:10  용암포 앞바다

  감시자가 사라진 해상에 대형 유조선들과 화물선들이 해상 발레를 시작했다. 유조선 두 척이 일렬로 늘어서자 신우평과 용암포를 잇는 기다란 다리가 되었다.유조선들은 선수와 선미에 대형 다리를 내려 다른 배와 연결했다. 용암포의 항만경비대와 해관은 이미 중국의 해병수색대에 의해 제압된 상태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해상쇼를 이어나갔다. 일전에 중국측이 바다와 단둥을 연결하는 대규모 준설작업을 할 때  중국이 북한 몰래 용암포 앞 압록강 하구의 준설까지 했었다.  이 작업에는 수십척의 소형잠수함이 동원됐었다. 조그마한 포구인 용암포에 닿은 선두의 유조선에서 선수(船首)가 열렸다.

  대형유조선의 선수가 양쪽으로 갈라지자 전차와 APC들이 굉음을 울리며 내려왔고, 이들은 내리자마자 각자 맡은 위치로 달려나갔다. 보병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군은 대만상륙전에서 너무 소수가 상륙하여 작전에 어려움을 겪자 한반도 상륙전에서는 대규모 부대를 한번에 상륙시키고,또한 병력증강을 계속하기 위해 유조선과 화물선을 다리로 쓴 것이다.  충분한 병력이 항구와 그 주변에 배치된 것을 확인하자 중국측은 즉시 대기중이던 6척의 3천톤급 전차양륙함을 항구 주변의 갯벌에 접안시켰다.  각 전차양륙함으로부터 수십대의 전차들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의 상륙과정을 숨어서 본 부두노동자 한 사람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지 고민했다. 항만경비대는 이미 적에게 당했을거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다면 중국군이 이렇듯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상륙하지는 못할것이리라.

  ‘최선의 방법은…’

  노무자는 호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그가 숨은 창고는 보세품이 가득 쌓인 창고라서 불이 잘 붙을 것이며, 시내에서도 이 불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불에 타 죽을까? 아니면 중국군에게 사살될까?’

  불을 내지만 않으면 자신은 민간인이므로 중국군에게 잡혀도 별 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떤 기관도 중국군의 신의주 상륙을 아직 알지 못할것이며 빨리 알릴수록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에 불이 잘 붙을 만한 종이들을 모았다.

  "이런 젠장, 누가 불을? 그래서 샅샅이 수색하라고 명령했잖아!"

   리 중장이 용암포에 정박한 유조선의 선교에서  중국 해병대 사단장에게 무선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항만 보세창고의 불빛으로 불을 켜지 않은 선교 안까지 환했다.불길은 바닷바람을 타고 옆 창고까지 옮겨 붙었다.

  리 중장은  대만상륙전에서 위장 원자력 컨테이너선인 항모로 후아리옌을 점령한 중국해군 북해함대 사령관이었다.용암포 점령전 선봉을 맡은 해병대들의 실수에 위신이 깎인 듯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용암포 점령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해군의 제지가 없었으므로 육군도 아직은 모를 것이다. 신의주도 이미 우리 중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국군 부대가 우리를 막으려고 오는 길은 이미 우리의 수중에 있다. 나는 또하나의 상륙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군인으로서 침략군의 선봉이 된 것은 부끄럽지만 국가의 명령이다. 이제 주도권을 육군에 넘겨주면 된다.’

  1999. 11. 17  00:10  대전 정보사단 종합상황실

  "신의주시와 인근 일대에 현재 2 시간째 정전사태입니다. 유무선통신도 일체 불통입니다.  그 지역 군부대들과 용암포의 항구경비대도 연락이 두절된지 오래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당직사령 중의 한 명이 나 대령에게 보고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 대령이 그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한전과 한국통신에 더 자세한 걸 문의하고, 연락이 되는 군부대에 연락해서 차량으로 확인하도록 해!  혹시 해군이나 공군에서 연락 온 것은 없나? 중국군의 병력이동 현황은?"

  "알겠습니다! 중국 해군과 공군의 이동은 없습니다. 다만 단둥지역에 있는 중국군의 이동상황은 현재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다.아직도 전파방해가 심하고 통신 두절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알았다. 그리고, 음… 알겠네. 아까 내 명령 실행하도록! 참, 그리고 전파방해원의 위치를 확인해봐. 혹시 만주지역의 전파방해로 신의주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예! 단결!"

  젊은 중위가 돌아가자 나 대령은 고민에 빠졌다.  비상을 걸 것인가, 아니면 긴급부서장 회의만 열것인가.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중국의 침략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나 대령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도대체 최첨단 정보처리장치가 있으면 뭐하나,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데…’

  "전파방해원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단둥 북방 50km, 다이렌 남동방 80km, 신의주 동북방 30km입니다.모두 항공기에 의한 광대역 전파방해입니다. 이전과는 다릅니다! 그 원의 중심에는…"

  보고를 하던 하사관이 멈칫하더니 자기 앞의 콘솔을 조작하여 상황실 중앙스크린에 한반도 북부지도와 전파 방해원의 위치를 나타낸  자료를 전시했다.

  "그 원의 중심은 신의주입니다!"

  하사관이 경악했다.  그는 이를 중국의 신의주 침공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 대령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단둥의 고 중장 휘하의 전차부대에 대한 중앙군의 공습일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단둥과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지 않은가? 고 중장의 작전을 잘아는 과거의 동료들이 고 중장 부대의 주력이 있는 단둥을 치려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동요하는 상황실 부원들을 진정시키고 나 대령은 각종 화상전화와 대형컴퓨터, 통신장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갑자기 자신의 콘솔에 붙은 화상전화가 켜졌다.  나타난 얼굴은 국제뉴스를 취급하는 부서의 이 소령이었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당황스런 얼굴이었는데, 경례고 뭐고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방금 중국으로부터 뉴스가 들어왔습니다.  당 주석의 연설인데 정치 국원과 군사위원들의 서명이 된 것입니다.  내용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불만토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명한 군사위원 중에 심양군구의 고 중장,  아니 승진하여 고 상장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뭐요? 고 중장은 이번 군사반란의 주모자! 그럼 반란은 가짜란 말이오?"

  나 대령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마 병력이동을 위장하기 위한 책동인듯…"

  이 소령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군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확연하지 않은가. 나 대령은 갑자기 머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비상! 각군 1급비상경계! 대 중국방어전 실전배치하라! 박 준위, 즉시 통일참모본부에 연락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평안도 지역 각군 비상 출동대기! 신의주 부근에 어떤 부대인가?  즉각 신의주 진입을 명하라! 만약 신의주에 외국군이 진주하였다면 즉각 교전하여 섬멸하라. 반복한다. 교전 후 섬멸하라! 공군은 신의주 상공을 정찰하도록 연락하라!"

  종합상황실이 갑자기 바쁘게 돌아갔다. 5분 내에 비상령이 각 하급부대까지 전달되었고 신의주 남방의 인민군 제 9사단 병력이 출동을 시작했다.  공군에서는 정찰기를 띄웠으나 신의주 시가 전체가 암흑에 쌓여 정찰헬기를 더 띄우기로 하였다. 용암포쪽을 정찰한 정찰기조종사의 보고에 의하면 항구쪽에 커다란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항구 밖에 거대한 선박들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다시 이 소령이 보고를 했다. 군사전문가, 그리고 법의학자들로 이루어진 팀이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시체로 보인 것은 사실 시체가 아니며, 화면 전체가 다 연출에 의한 것,  즉, 조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뉴스, 외신에 전달된 화상, 모두 중국의 거짓 선전이었습니다!"

  "아까 중국공산당 주석의 연설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없소?"

  "지난 중국 내전시 한국과 일본의 행태에 대한 비난만 있었습니다.중국의 내전을 부채질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일뿐 선전포고와 유사한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한국내 민간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주 연변족들과의 민족통합운동,  또는 만주회복운동을 침략운동으로 비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전부터 그래왔던 것이고, 다만 중앙군사위원들까지 서명에 참가했다는 것이 이상할 뿐입니다."

  "알겠소. 모든 촉각을 중국으로 향하도록."

  "알겠습니다. 단결!"

  이 소령은 이제 자기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나 대령은 믿어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더 강력하게 주장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설마 하루 정도야 어떨까 했는데 바로 그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 소령은 난감해졌다.중국과 초유의 현대전이 벌어진 것이다.중국은 핵보유국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11. 17  00:30  신의주 동남방 9km, 와이동 4차선 국도

  "이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디, 무신 중국군이 우릴 침략한다고, 부관! 내 전투복 달라우야. 정보사단 아새끼들 중국내전에 겁먹었구만!"

  인민군 제 9 사단 사단장인 노 영일 소장이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승용차로 쫓아와 이동중인 자기 부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첨병 부대는 배치했간?"

  경황중에도 노 소장은 부대이동의 원칙을 잊지 않았다.

  "설마 신의주에 무신 일이 있갔시요?"

  부사단장인 대좌가 얼버무렸다. 아무리 부대 이동이라고는 하나 평화시에 자기나라 안을 이동하는데 웬 첨병부대냐 싶었다.

  "기래도 배치하라우. 신의주와 위화도의 부대에서 연락이 없지 않아? 선두부대에서 차출해 신의주 정찰을 시키도록 하라우! 근데 와 이 시간에 지나가는 차량이 하나도 없디?"

  부대의 전진이 잠시 멈추고  보병전투차를 중심으로 첨병소대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이어 첨병중대, 이어서 제 33연대의 본대가 뒤를 따랐다.

  사단 주력이 신의주 시내 진입로인 연상동 고개  아래에 이르자 신의주 시가에 진입한 첨병소대로부터 연락병이 왔다. 신의주에 접근할수록 극심한 중국의 전파방해로 무선통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앞으로는 왼쪽에 신의주비행장의 불빛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신의주 시내에는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안보입네다.  단, 신의주 비행장쪽에 화재가 났다는데 거그에 차량과 사람들이 다수 목격되어 첨병소대가 그쪽으로 이동했습네다. 시내에는 인민도, 사회안전부 요원도, 움직이는 차량도 없습네다."

  "기래, 첨병중대는 시가에 진입했간?  좀 더 정밀정찰을 하도록!  전 부대 사주경계 철저토록! 이봐, 무전병! 상급부대와 연락 안돼?"

  "안됩니다! 모든 주파수대가 전파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무전병이 필사적으로 사용가능 영역대의 주파수를 찾고 있었다. 전파의 그늘 지역도 아닌데 이렇게 무선이 안되는 경우는 처음이라  북녘에는 이미 초겨울의 날씨인데도 땀을 뻘뻘흘리며 무전기를 조작했다.

  사단장은 조금 전과 다르게 긴장이 되어 있었다.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른쪽을 보니 작은 산그림자가 있었다. 인가 하나 없는 작은 야산이다. 그 밑으로는 경의선 철길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만약 적이 매복하고 있다면?’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사단장의 뇌리를 스쳤다.

  "부사단장, 중대 병력을 차출하여 저 산을 점령하도록 명령하라우."

  부사단장은 갑자기 이게 웬 전쟁놀음인가 싶었다.겁쟁이 사단장과 주로 남한 국군으로 이뤄진 정보사단의 명령에 인민군들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 따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통일이 되고 나서, 아니, 아직 통일과정 중에, 자랑스런 전통을 가진 인민군이 지휘계통이나 작전, 정보, 병참 모든 분야에서 남조선 국군들에게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특히 통일참모본부와 정보사단이 맘에 들지 않았다. 국군이 거의 모든 실권을 쥐다시피한 정보사단은 걸핏하면 평안북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이제는 짜증내는 단계가 지나 인민군 하급전사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중국은 지난 1950 년의 통일전쟁후 몇 십 년간 인민공화국의 최고 우호국이었으며 작년 중국의 내전에서도 우호적으로 지내지 않았는가? 남한 정부 지도자나 군 지도자들은  아직도 중국을 적국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인민군 장교들은 불만이었다.

  부사단장이 보병 1개 중대를 차출하여 야산의 점령을 명하자 보병들이 투덜거리며 야산을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신의주 상공을 정찰하던 통일공군의 정찰기 한대가 중국군의 대공 미사일에 격추된 것이다. 야산 쪽에서도 커다란 불꽃이 여러개가 피어 올랐다. 동시에 여러개의 기관총이 이쪽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었다.

  주로 보병전투차와 병력수송트럭들로 이루어진 대열의 곳곳에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캄캄하던 야산이 온갖 화기의 불꽃으로 번쩍거렸다. 전차들이 순식간에 파괴당하고  인민군 보병들이 정신없이 엄폐할 곳을 찾아 뛰는 동안 몇 대 남지도 않은 전차와 보병전투차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사격! 숨디만 말고 사격하라우!"

  사단장이 부하들을 닥달했으나 급작스런 적의 기습에 모두들 제 살길찾기에만 찾았다. 미리 기다려서 준비하고, 게다가 높은 위치에서 쏘아대는 적들앞에 막강한 인민군 제 9사단의 전사들이 힘없이 쓰러져갔다. 이름없는 적의 매복은 그 야산에만 있지 않았다.인민군 9사단의 기다란 행렬의 사방 곳곳에 대전차미사일과 각종 총탄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미 포병대는 전멸당했고, 전차와 보병전투차는 몇 대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북쪽 상공으로부터 헬리콥터들이 떼지어 날아왔다. 상공의 위험이 없음을 확인한 중국군 헬기사단의  공격헬기들이 인민군의 흐트러진 대열에 로켓탄 세례를 퍼부었다.

  "사단장님! 저건 중국의 프랑스제 가젤 헬리꼽땁니다! 중국군이 틀림없습니다!"

  부사단장의 외침을 듣고 공격헬기들을 확인한 노 소장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형제국이었던 중국이 정말로 침공한 것이다. 헬기에서 발사한 기관포가 주변을 쓸고 갔다. 한 병사가 러시아제 휴대형 SA-16 대공 미사일을 발사해서 중국 헬기 한대를 공중 폭파시켰다.여기저기 숨어있던 인민군들 사이에 환성이 터져나왔다.

  "사단장님! 왼쪽 논길에 전차부대가 나타났습니다!"

  헬기의 기총소사에도 불구하고 포탄구덩이에 숨어서 야시경으로 주변을 살피던 부관이 외쳤다.

  "쏘련 T-72 땅크, 아니! 저건 중국에서 개량한 해병대용  무적 5호전차입니다!"

  노 소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전력이라고 할 수 없는 패잔병들이 군데군데 숨어서 소총사격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널부러진 인민군 전사들의 시체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단병력이 전멸할 쯤에야 적이 중국 해병대라는 것을 안 자신의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이제 자신은 중국군의 침공을 상부에 알리는데 주력할지,아니면 소탕전의 비극을 막아 부하들을 한명이라도 살릴지의 선택으로 고민했다. 중국제 전차들의 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1999. 11. 17  00:40  서울, 청와대

  정보사단의 비상령 발동은 평안북도 일대에만 국한되었다. 물론 서해 함대의 감시가 강화되고 공군 정찰기들이 출격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중(韓中)국경에 한해서였다.  몇 번 계속된 비상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듯 청와대를 지키는 93경비대대의 경비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청와대 내부와 외부의 경비는 평소처럼 청와대 경호실과 일반 교통경찰에게 맡기고 경비대대의 88전차와 K-200 보병전투차들은 차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승용차가 라이트를 킨 채 천천히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 진입로로 들어섰다.  바리케이드 옆에 서있던 교통경찰이 차를 세우고 플레시로 차안을 비쳐보긴 했지만 판에 박은듯한 형식적인 관찰이었다. 뒷좌석에는 넥타이를 풀어헤친 두 명의 중년남자와 한 명의 젊은이가 몸을 시트 깊숙히 묻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차 안에는 술냄새가 진동했다. 코를 감싸쥔 교통경찰이 혹시 운전자도 술을 마시지 않았나 운전사를 보고는 그대로 통과시켰다.

  승용차가 청와대 앞길로 들어섰다. 반대쪽 차도에서는 편의점에 물건을 납품하는 트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이 청와대 앞에 마주치자 갑자기 트럭이 서더니  뒷문이 열리고 검은복면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사람들을 내린 차는 그대로 가던 방향으로 지나가고 승용차는 정문 경비실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굳게 닫힌 청와대 정문 앞에는 의무경찰 두 명이 입초를 서고 있었다. 갑자기 차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뛰어오자 그들에게 K-2소총을 겨눴으나 미리 준비한 검은옷들이 빨랐다. 의경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총구에서 뿜어진 화염 뿐이었다. 청와대 정문 경비실의 책임자인 종로경찰서 소속의 경위가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으며 비상벨을 누르려했으나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온 복면들에게 사살당했다. 이들은 소음기가 달린 기관단총을 쏘아서 총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복면들이 의자에 앉아 코를 골고 있는 다른 경찰을 보더니 칼을 꺼내 가슴을 쑤셨다. 잠자던 경찰은 잠시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칼을 뽑자 시체에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의 사나이가 경비실 안으로 들어오자 복면 중의 한 사람이 경례를 했다. 검은색 가죽가방에서 경찰복을 꺼내 입으며 중년의 사나이가 경례를 한 검은 복면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청와대 내부로 통하는 경비실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중년의 사나이가 밖을 보니 같이 승용차를 타고온 사람들중 운전사와 뒷좌석의 청년이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시체들을 화장실 안쪽으로 치우고 자신은 의자에 앉았다.밖에 트럭의 전조등이 보이고 또다시 여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들이 총을 쥔 채 경비실 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신문수송트럭은 사람들이 다 내린 후 다시 가던 방향으로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사륜구동차에서 중장비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내리자 이 행렬은 끝이 났다. 경비실과 그 앞쪽에 10여명의 사나이들이 총을 움켜쥔채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11. 17  00:45  서울, 한남대교

  한남대교 중간부분의 교각 아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위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때마다 미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림자 하나가 줄을 타고 교각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발이 물에 닿자 등에 줄에 몸을 의지한 채 거꾸로 섰다.  등에 진 가방을 벗어 이를 어제 미리 작업을 해둔 수면 아래 교각의 틈 사이에 넣었다. 차가운 강물이 느껴졌다.가방에서 가느다란 안테나를 뽑아 물 위까지 오게했다. 다시 바로 서서 익숙한 솜씨로 줄을 타고 올라갔다. 그림자들은 주변을 살피며 다리 위의 인도로 올라섰다. 승용차가 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들이 대교중간에 고장 경광등을 밝힌 채 주차중이던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미리 시동을 키고 있던 검은색 승용차가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 서있던 빨간색 스포츠카도 라이트를 켠 채 이 승용차를 뒤따랐고 잠시 후 또 한대의 사륜구동차가 이들을 따랐다.

  이들이 한남대교를 벗어난 10분 후에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한남대교와 옆의 동호대교 철교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폭음이 고요하던 서울 시내를 울리고 주변 아파트의 유리창들이 깨져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후에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그리고 성산대교와 당산철교도 폭음과 함께 무너졌다. 1999년 11월 17일 새벽 1시였다.

  11. 17  01:00  부산, 부산항

  늦가을 밤의 차가운 바다 바람이 부는 부산항 제 3부두와 4부두에 정박 중인 수 십 척의 화물선들은 야간 하역작업을 하느라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다.중앙부두 바로 뒤의 부산역에는 새벽 0시 55분에 도착한 서울발 새마을 열차에서 인파가 쏟아지고 있었다. 2부두 쪽의 광복동에서는 아직도 유흥가가 영업을 하는지 불빛이 영롱하게 물 위에 비쳤다.

  갑자기 물 표면에 거품이 일더니 작은 막대기가 솔아 올랐다. 막대기가 잠시 회전을 하더니 한 곳에 멈췄다.물살이 일고 막대기가 진동하며 떨더니 수중에 무엇인가 고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그 물체들은 어뢰가 되어 제 7부두의 군함들에게 접근했다.  제 7부두는 미군이 전용항으로 쓰다가 한국 해군에게 넘긴 항만인데 한국 해군에서는 연안경비용 소형 함정들의 정박지로 쓰면서 화물선들에게도 정박을 허용하고 있었다.

  연이은 폭발음과 함께 초계함 두 척이 순식간에 침몰했다. 대형 상선 한 척은 화재에 쌓인 채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갑작스런 폭음에 놀란 부산 항만경비대에 비상이 걸렸다. 써치라이트가 하늘과 바다를 스치며 침입자를 찾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림자 없는 침입자의 자취를 찾을 수 는 없었다.

  또 다시 어뢰공격이 시작되어 제 3, 4, 5 부두의 상선들이 연이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곡물하역작업 중인 벌크선과 커다란 컨테이너선이 당했다. 다시 옆에 정박중이던 대형선박이 침몰했다. 곧이어 제 3부두 반대쪽인 연합철강 앞에 있는 부두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고철을 가득 실은 2만톤급 대형화물선이 굉음을 울리며 침몰했다.

  제 5부두 안쪽에 정박중이던 항만소방서의 소방선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했다.초계정과 연안경비정들도 써치라이트를 미친 듯 물위에 좌우로 비치며 적을 찾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도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바다 위를 스치듯 저공으로 날며 12대의 시 해리어가 연안여객선터미널 상공을 지나 부산시청과 남포동 중심가의 상가, 그리고  부산호텔과 타워호텔에 폭탄을 투하하더니 용두산공원 위를 지나 북동쪽 하늘로 날아갔다. 그 비행기들의 아래에는 충무공의 동상이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전투기들이 음속에 가까운 속력을 내어 구덕산을 넘어 김해 국제공항 상공에 도착했다.이들은 부산항의 참상을 연락받고 막 대공경계를 시작한 공항경비대의 써치라이트를 무시하고  활주로를 따라 양옆으로 줄줄이 서있는 여객기들에게 30밀리 기관포를 쏘기 시작했다.  연료를 가득 채우고 새벽에 일본으로 출항할 예정이던 국제선 아시아나 항공기가 불길에 휩싸였다. 바로 옆의 일본항공 소속의 여객기도 당했다.

  당황한 공항경비대가 급히 나이키 지대공미사일을 쏘았으나 저공으로 공격중인 시 헤리어들은 이를 비웃듯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발칸 대공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으나 한 대를 노리고 공격하면 다른 전투기에 당하기 일쑤였다.마지막으로 공항 연료저장고에 시 헤리어가 발사한 매브릭 미사일이 명중하자 휘발성이 강한 항공유가 연속 폭발하기 시작하여 공항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화했다.

  부산시내와 김해공항을 습격한 시 해리어들은 폭탄과 포탄을 모두 사용하자 남동쪽 바다 방향으로 날아갔다. 오륙도에서 남동방향으로 계속 3분쯤 비행하자 바다 위에 등불 몇개가 깜박였다.해리어들이 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등불 위로 내려앉았다.해리어들이 수직착륙을 마치고 날개를 접자 바닥이 꺼지며 비행기들이 잠수함 안으로 사라졌다.  잠수함들이 잠수하고나서야 울산방향에서 날아온 한국공군의 F-16들이 잠수함들이 사라진 바다의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11. 17  01:00  광주, 광산구

  광주 하남공업단지 일대가 일순간의 정전으로 암흑에 휩싸였다. 정전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업단지 일대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처음에는 작았던 불길이 점점 커졌다. 가스관이 폭발하여 강력한 불길을 밤하늘로 뿜어냈다.주변 공장과 건물에도 불길이 옮아붙었다.즉각 소방차들이 출동해서 진화에 나섰으나 강한 불길을 잡지는 못했다.

  11. 17  01:00  서울, 청와대

  고요하던 늦가을 밤, 청와대 뒷쪽 산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청와대 뒷쪽 북악산을 경비하던 95경비대대 소속의 군인들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접근하는 그림자들을 발견하고 수하를 했으나 이들이 불응하자 바로 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참호에서 사격하던 군인 두 명은 뒤쪽으로 돌아온 다른 그림자들에게 즉각 사살당했다.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일어서더니 청와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청와대 경호실에  비상이 걸리고 숙직중이던 경호원들이 벽장에서 K-1 기관단총을 꺼내 무장하고 복도로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복도로 나가자마자 2층까지 침입한 복면들에게 사살당했다. 비상벨 소리를 들은 복면들이 다급해졌다.  이들은 대통령 침실이 있는 봉황실까지 뛰기 시작했다.  청와대 본관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고 본관 밖에서도 총성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괴한들과 경호원들과의 총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경복궁의 93 경비대대가 즉각 출동하여 K-200 보병전투차를 앞세우고 대부분 트럭으로 청와대 정문을 향했다. 그러나 당연히 문을 열어줄 줄 알았던 경비실 경찰들이 사격을 해오자 당황했다. 이들은 기관총과 RPG 등의 중화기로 무장하고 경비대대를 공격한 것이다. 경비실까지 점거당한 줄을 깨달은 대대장이 하차하여 사격을 명령했다. 뒤늦게 따라온 전차 한 대가 경비실을 향해 주포 한 발을 발사하자  경비실의 저항은 잠잠해졌다.

  "대통령 시해음모다. 우리는 대통령을 보호한다. 앞으로!"

  대대장이 지프에 타며 공격을 명령했다.대대장 옆의 통신장교는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에서 호출하는 무선에 대답하고 병력지원 요청하기 바빴다. 청와대 경호실은 유,무선이 모두 불통되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88전차를 선두로 정문을 열고 경비대대가 막 청와대에 진입한 순간에 청와대 앞 도로에 승용차들이 오더니 차안에서 로켓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대대장을 뒤따르던 트럭 두 대가 당했으나 보병전투차의 기관포가 이 승용차들을 걸레처럼 찢어발겼다. 대대장은 정문에 전차 두 대와 보병 1개 소대를 남겨놓고 청와대 안으로 들어갔다.

  청와대 대통령 침실 바로 앞 복도는 복면괴한들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시체가 가득 쌓여있었다. 아직도 총성이 계속 울리고 수류탄과 RPG로켓탄의 폭발음이 가득했다. 대통령은 침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손에는 권총 한자루를 쥐고 있었다. 영부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고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적은 도대체 누군가? 혹시…북한인가?"

  "아직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각하!"

  경호실 차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약에 북한이라면… 생각하고도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 이상의 악몽이 연출될 것이 분명했다.

  실장은 괴한들과의 총격전에서 이미 사망했다는 보고가 왔었다. 경호원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감소했고, 이곳도 별로 못버틸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마지막 남은 경호원들은 10여명도 채 되지 않았다. 묵직한 자동소총의 연사음이 들리더니 침실 밖의 거실 문 뒤에 숨어서 사격을 하던 경호원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권총은 어떻게 쏘는 것인가? 난 육군병장 출신이라…"

  대통령이 권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홍 대통령은 사병으로 제대하여 권총 사격연습을 받지 않았다. 대통령은 권총이 의외로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전장치는 해제했으니 방아쇠만 당기면 됩니다.  그러나 그 권총은 호신용이 아닙니다, 각하!"

  경호실 차장이 대통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통령이 이해가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기관단총의 연사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할것 같습니다. 각하…"

  차장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자신의 임기중에 통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다.

  "몰려옵니다~~~~~~~ "

  경호실의 고참인 조 과장이 거실에서 침실쪽으로 외쳤다.  조 과장은 이미 3군데에 총탄을 맞았으나 악착같이 적을 막고 있었다. 차장이 침실을 나선 후에 총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빨리! 대통령이 위험하다!"

  93 경비대대의 대대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지휘하여 본관 앞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두 곳으로부터 기관총 공격을 당했으나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그들을 잠재워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복면의 괴한들은 경비대대가 청와대 안까지 전차 등의 중화기를 들여올 줄은 계산 못한 모양이었다. 현관 안쪽에서 기관단총의 발사 섬광이 보였다.

  "전차, 현관에 집중사격! 모두 3층으로 뛰어간다. 돌격!"

  전차 3대가 주포를 발사하고 보병전투차들이 기관포를 연사한 직후에 대대장을 선두로 대대원들이 현관으로 뛰어들어갔다.  대대원들은 모두 본관의 지리를 숙지하고 있어서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수 십 번의 도상훈련과 실제연습을 거친 이들은  각 소단위 부대장들의 지휘를 받아 계단을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각 층마다 복병들이 숨어서 이들을 저지했으나 수를 앞세운 그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우리의 적은 시간이다. 급하다, 돌격!"

  대대장의 독려는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대통령의 목숨이 지금 이 시간까지 붙어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지만 최단시간 내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대대장이 복도를 돌다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숨었다. 뒤따르던 부관이 수류탄을 던지고 폭발 후에 뛰쳐나가 자동소총을 연사했다.  모두들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군이 오고있다. 끝까지 버텨라. 각하를 보호하라!"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거실로 뛰어들어온 괴한 한 명을 사살하며 차장이 외쳤다. 경호실 차장의 왼쪽 팔은 아래로 축 쳐져 있었고 양복은 핏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경호원은 자신을 포함해 3명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차장이 남은 실탄 수를 세어 보았다.

  대통령은 거실 안쪽에 있는 침실의 침대뒤에 숨어서 권총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 젊은 나이에 할일도 다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침실 밖의 거실에서는 총소리가 이어졌으나 화력에서 앞선 괴한들의 상대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RPG의 폭음이 울리고 거실쪽의 벽이 무너졌다. 출입문의 저항이 거세자 시한폭탄을 준비하지 못한 괴한들 중 한 명이 복도에서 벽을 향해 RPG를 쏜 것이다.  물론 RPG를 발사한 괴한도 몸이 산산히 찢어졌으나 거실 안쪽의 경호원들도 1명이 죽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뚫려진 구멍으로 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쏟아져 들어왔다.

  차장의 비명소리가 밀실까지 들려왔다. 차장은 대통령인 자기를 지키지 못해서 억울한지, 아니면 죽어서 억울한지 매우 한을 품은듯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되었다. 대통령이 서서히 권총을 머리에 댔다. 이 한발이 자신의 운명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영부인이 울며 말렸으나 대통령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 이용당하는 수치를 겪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일 이라는 생각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대통령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북한이라면 자신을 죽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남북한의 수뇌는 통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수시로 만났었다.북한의 군부강경파들도 자신이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갔어도 별 움직임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의 군 장성들이나 극우파들도 통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암살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홍 대통령은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안전한 상황이었다.

  밖에서는 총성이 연이어 울리더니 일순간에 딱 멈췄다.드디어 완전히 끝난 모양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젊을 때부터 같이 고생하던 영부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각하! 어디 계십니까? 저희가 왔습니다!"

  응접실에서는 더 이상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괴한들이 자신을 생포하기 위한 술책인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93 경비대대장입니다. 각하,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말소리와 동시에 군인 몇 명이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총을 이리저리 겨누다가 대통령을 보고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거수경례를 했다.

  "93 경비대대의 박 철민 중령입니다, 각하! 무고하셔서 다행입니다."

  대통령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머리를 겨눴던 권총을 내리자 영부인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기절하고 말았다. 대통령이 쓰러진 부인을 물끄러미 보더니 박 중령에게 물었다.

  "고맙네, 박 중령. 근데 적은 누구였나?"

  대통령은 박 중령의 고뇌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10여분간 전투를 치렀으면서도 적의 실체를 파악 못하고 있는 지휘관의 표정은 복잡했다.

  "각하! 적은 전원 사살되거나 자폭했습니다. 포로는 없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우리 동포가 아니며, 공산권의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럼 중국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각하!  유전자 검사를 하면 확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들어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또다른 의문이 들었다. 대통령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혹시 북한의 주석과 통화를 할 수 있겠나? 이곳 전화는 다 두절됐다네."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대대장을 따라온 젊은 통신장교가 군기가 바짝 든 채 대답한 후 즉시 국방부를 호출했다. 국방부와 북한의 인민무력부간의 회선이 열리고 다시 평양의 주석궁에 연결됐다. 통신장교가 군용무전기의 커다란 송수화기를 대통령에게 주었다.

  "대통령이오. 주석님은 지금 주무십니까?"

  대통령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듣더니 ‘알겠소’ 라는 짧은 대답만 하고는 송수화기를 통신장교에게 다시 넘겼다.

  "북한의 주석은 조금 전에 암살당했다네.  중국군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하는군.지금 당장 계엄령을 발동하고 삼군총장을 소집하여 비상각의를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말에 깜짝 놀란 대대장과 통신장교는  한 번도 못해본 경호실과 비서실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바쁘게 되었다.

  1999. 11. 17  01:00  개성, 통일참모본부

  정보사단의 비상경계령이 내려진지 50분도 안되어 개성의 통일참모본부 작전상황실에 통일참모본부 참모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승용차로 오는 도중에 부관들로부터 대충 상황을 브리핑 받았으나 정보들이 너무 모호해서 궁금한 점이 많아  작전상황실장인 구 국군 공군의 양 석민 중장에게 질문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이제 이 종식 차수님만 오시면 브리핑과 작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중장이 부관의 보고를 받고 장중을 향해 외쳤다.

  "차수님이 입장하십니다. 전체 차렷!"

  통참참모 모두가 기립한 직후 통일참모본부 의장이며 통일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인 이 차수가 입장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정한 그는 명색뿐인 직함이 싫었다.  그는 지금도 자랑스런 조국해방 전쟁(한국동란)의 젊은 하급전사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평시에는 사무실에만 앉아 있어야하는 이 일이 싫어 퇴역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렇게 되면 다음 의장은 국군 출신의 장성이 임명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부하 인민군 장성들을 생각하여서라도 퇴역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었다.그리고 통일과정 중이라서 군복과 계급체계가 아직 그대로 인데 자신이 국군의 고참 육군대장 취급을 받는 것이 불만스럽기도 했다.

  "차수님께 대하여 경례!"

  "통-일!"

  주로 장성들로 이뤄진 통일참모본부 참모들이지만 아직  서로가 서먹서먹해서인지 군 장성들치곤 꽤 군기가 들어있었다. 이 차수가 짧게 답례하고 중앙의 자리에 앉자 기립했던 장성들이 기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모두 자리에 앉았다.  대형 스크린 앞에 양 중장이 서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화면에는 신의주 부근 지도가 나타났다.

  "정보사단은 신의주 지역의 이상 단전, 유무선 통신 불통, 그리고 중국공산당 주석의 선언문을 계기로 비상경계령을 발동하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었던 심양군구 사령 고 중장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위원으로서, 게다가 승진한 인민해방군 상장으로서 주석의 선언문에 서명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지만 일단 신의주의 상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화면에는 전파방해원의 현재 위치와 평안북도의 통신불통지역이 표시되고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중국의 전파방해원의 변동이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지상시설에 의한 광대역 전파방해였으나 지금은 다수의 항공기에 의한 전파방해입니다. 중심지역도 상당히 남하해서 평안북도 대부분이 전파방해의 영향을 받아 무선이 불통인 상황입니다.그리고 유선전화도 무슨 이유인지 평안북도 대부분이 불통입니다."

  화면에 인민군 9사단의 주둔지와 이동 경로가 나타났다. 화살표가 시간에 따라 주둔지로부터 신의주쪽으로 한방향으로 쭉 흐르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인민군 제 9사단이 신의주로 진주해 갔습니다만 0030 현재 무선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10분 전부터는 주둔지의 사단상황실과도 연락이 안되는 상태입니다."

  장내에 잠시 술렁거림이 있었다. 양 중장이 잠시 쉬었다가 브리핑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아군 정찰기 한대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찰헬기 두 대도 소식이 없습니다.정찰기의 경우 소요 연료량을 계산해본 결과 이미 10분전에는 연료부족 상황이므로 추락,  또는 불시착했다고 봐

야합니다."

  "기럼 적은 중국이오?"

  구 인민군 해군 상장인 박 정석 상장이 뻔한 질문을 했다.  그로서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50 년간의 형제국이 일순간에 적국으로 돌변한 것이다.

  ‘비록 중국의 내전과 한반도 통일로 변화는 많았지만 사람은 같지 않은가? 북해함대 사령 리 소장,  아니, 대만 점령전에서 수훈을 세워 이제 중장이 된 그 사람도 나하고 오랜 친구사이인데…’

  중국과 북한의 오랜 군사교류를 통해 고급장교들끼리는  상당히 친숙해진 사이가 되었고 특히 리 소장은 서로 해군장비의 낙후성에 대해 울분을 토하다 같이 술잔을 기울인 적도 많아져 비슷한 연배인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었다.박 상장이 보기에는 리 중장은 상당히 전략가다운 면모가 많아 보였다.  만약 본토에서 대만을 친다면, 자신의 계획대로 하면 일주일 내에 대만을 점령할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해낸 것이다.

  "그렇습니다."

  양 중장의 짧은 대답은 인민군 장성들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무거운 압력으로 다가왔다. 보다 큰 문제는 중국의 군사력이었다. 이렇게 큰 나라와 싸운다니 자신이 들지 않았다.

  "중국의 정규군 병력은 700만으로 추산됩니다. 육군 600만,전략 방공부대를 포함한 공군 60만, 해군 40만, 기타 준군사력인 인민무장경찰이 700만, 그리고 예비군으로 볼 수 있는 민병이 있습니다. 현재 가용병력 총 1천 9백만명입니다."

  말 안해도 잘 알지 않느냐는 투로 양 중장이 짧게 설명했다.

  "현재 평안북도  신천에 주둔중인 국군 제 11 기갑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동시에, 인민군 제 15사단과 인민군 항공 3사단에서 비상 출동 대기 중입니다. 전시 교전권 부여에 대한 제청을 해주십시요."

  양 중장이 자위 이외의 공격권을 각 군이 가질 수 있도록 참모본부에 요청했다.  중국의 침공이 확실시 된다면 이제 국군과 인민군의 통일군대는 한반도 내에서의 침략군 격퇴임무 외에도 중국본토에 대한 공격권을 가지게 된다.

  이 즈음의 군에 대한 교전권의 부여체계는 통일참모본부가 남북의 수반이 공동 위원장인 통일군사위원회의에 제청하여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주석이 군 지휘권을 통일참모본부에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남북총선거에 의해 구성된 통일의회는 있지만, 아직 통일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지 않아  이 경우에 최고사령관은 임시로 통일참모본부 의장이며 통일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즉 이 종식 차수가 된다. 평화시에는 명색뿐인 통일참모본부 의장에서 이 차수는 일약 통일한국군의  최고사령관이 되는 것이다.

  이 차수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150여만의 대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전시에! 게다가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닌, 외국의 적의 침략에 대한 방어전쟁이 아닌가?  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잠깐 기다리시요!"

  위원중의 한명인 국군의 정 지수 육군대장이 제동을 걸었다.

  "교전권 부여는 군사위의 제청상황인데 아직 남북의 국방장관과 합참의장께서 참가를 안하셨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적의 확실한 정보도 모르지 않습니까? 만약 만주지역의 불안을 계기로 평안북도 주둔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통일군사위원회는 남북의 수반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남북 국방장관(북의경우는 국방부장)과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들,그리고 남북 군을 대표하는 통일참모본부의 고위직들이 참가하는 회의체였다.  정 대장의 내심은 사실 막중한 군지휘권을 인민군 출신의 이 차수가 맡는 것이 못내 미덥지 못한 것이었다.

  "좋소, 양 중장. 군사위원 모두에게 화상회의를 준비하도록!"

  이 차수도 이 미묘한 문제를 어떻게 풀지 난감했다.통일군사위원회와 통일참모본부,  게다가 통일 과정이라 남북의 합참본부와 각군 본부 등이 산재해있어 지휘권의 일원화를 기하기 어려웠다.  남북의 통일과정, 그 하부과정인 군사력 통일과정에 있어서  아직 통일참모본부는 명색뿐이며 합의체일 뿐, 실권이 없었다.  아직 실권은 남북의 각 군사기구에 있어서 당연히 반발이 예상되었다. 사실 이 차수의 경우 퇴역대상 군인을 위한 명예직으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는데  통일과정 중의 법률적 빈틈을 이용하여 그가 군 최고지휘관으로 임명되니 모두들 반발이 심할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통일참모본부에 소속된 각 군 장성들은 자신들의 임무는 서로에게 유리한 남북 군통합 형태를 유도해 내는 것으로 생각했지 실전에서의 참모 역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양 중장의 부하들이 화상회의를 위해 준비하는 동안  통일참모본부의 군사위원들은 법률적 해석을 둘러싼 논란과  각 소속군 참모총장들과의 연락을 위해 소란스러웠다.

  "피양으로부터 급전입네다!"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보는 사람들을 불안케 했다.

  "주석께서 서거하셨습네다. 주석궁이 중국군 권단의 습격을 받았습네다. 주석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놓티 않았다 합네다!"

  "뭐요? 그게 사실이오?"

  남북을 가리지 않고 장성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곧이어 한국 육군의 정 지수 대장도 놀란 얼굴로 보고했다.

  "청와대도 중국 특수부대에 습격을 당해서 대통령 각하께서 암살직전에 구출됐다고 합니다."

  참모들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김 대장이 모니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부산항과 인천항이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적으로부터 공격당했습니다. 그리고 김해공항이 적기의 공습을 받았고 서울의 한강 교각 5개가 무너졌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광주의 하남공단에 대화재가 발생했으며 고속도로와 철로 몇 군데가 폭발로 유실되었습니다.본격적인 침공 직전의 양상입니다!"

  "이북에서도 곳곳에서 공격을 받았습네다. 남포, 흥남, 김책(성진), 청진, 김형권(풍산)시 등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네다."

  김 대장이 아직도 주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듯 말을 더듬거렸다. 인민군 장성들은 개전 초기부터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중국은 확실히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통일한국은 중국을 막을 힘이 없었다.

  11. 17  01:20  신의주, 연상동(신의주 시가 동남방 4 km)

  "전투가 끝났습니다. 전과확인 중이며 빠져나간 적들은 없습니다. 현재 소탕전이 진행중입니다. 아직까지 포로는 별로 없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제 2 해병사(사단) 사령 천 위안 대좌가 부관의 보고를 받고 미소지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인민군 9사단이 먼저 신의주쪽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도로 주변에 해병대 2개 사단이 잠복하여 인민군의 사단병력을 별 손해없이 섬멸한 것이다. 다만 헬기 사단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헬기사단은 필요도 없었는데…’

  중국군은 전통적으로 전술적 임무의 완수보다는  적 주력의 섬멸전을 선호했다.모택동의 말대로 적의 열손가락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손가락 하나를 절단하는 것이 낫다는 식이다. 국공내전의 홍군은 遼瀋,淮海,平津 등의 3대 작전에서 철저한 포위섬멸전을 감행함으로써 국부군과의 전력비를 역전시켜 내전을 승리로 이끈바 있었다.국공내전후 50년이 지났지만 이 전략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어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베트남전, 기타의 전쟁에서도 자주 이용되었으며,  또한 아직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작전이었다.전력이 약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승리를 노리는 중국 군부는 계속 이 섬멸전을 선호하고 있었다.

  "주석으로부터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이번 승리를 축하한다는 전문이 왔습니다. 그리고 국군 제 11기갑사단이 북진중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우리 인민해방군의 3개 장갑사단이 도하를 마쳤다는 연락입니다."

  연락군관이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보고했다. 적의 1개 기갑사단쯤 아군의 3개 장갑사단과 헬기사단,그리고 막강한 공군의 힘으로 이번 인민군 9사단처럼 전멸시키면 될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는 연락군관 뿐만 아니라 모든 인민해방군 장졸들의 사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천 대좌도 흐뭇했다. 서전을 멋진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이번 한반도 점령전은 매우 쉽게 풀릴 것이며, 또한 자신이 조금만 더 공을 세운다면 대망의 소장 진급도 바라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후 집단군 사령과 군구사령, 나중에는 군사위 위원, 또한 시류만 잘 타면 정치국에도 진출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도로를 정리하고 다음 지점으로 이동한다.  우리 장갑사단의 진로를 깨끗이 비워라. 물론 장갑사단들이 싸울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부하들이 호쾌하게 웃어댔다. 현대전으로 와서 주력 전차부대의 위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보병의 대전차미사일 뿐만 아니라 항공기들의 활약이 전차의 효용을 감소시킨 것이다.그러나 전차부대의 집중적 운용은 항상 전장에서의 승리를 보장했으며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중국군의 경기계화부대인 오토바이사단의 전차수와 장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 한국군의 기갑사단은 중국군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1999. 11. 17  01:50  제주시 서남방 100km 해상

  별빛도 없는 검은 바다 위로  항해등을 켜지 않은 수십척의 대형선박들이 밀물처럼 서서히 제주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의 항적을 따라 야광충들만이 파도 속에서 빛의 아우성을 질러댈 뿐, 선박들은 어떠한 소리나 빛을 내는 법이 없었다. 전파도 완벽하게 관제하여 항해는 단지 위성항법 시스팀에 의해 이뤄질 뿐이었다.

  갑자기 이 배들의 서쪽 하늘에서 대규모 비행물체들이 나타났다.이들은 배들을 본체만체  저공으로 스치고 그대로 지나쳐 제주도를 향해 날았다. 도합 100여기의 대규모 전폭기 집단인 이들은 이 배들을 단지 이정표나 체크 포인트로만 여겼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제주도 한라산 정상 바로 서쪽 부근인 윗새오름(1714미터)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곳에는 군사용 뿐만 아니라 항해용 레이더 기지가 있었는데, 레이더가 이 전투기들을 발견하자마자 대(對)레이더 미사일인 미제 STANDARD ARM에 의해 상부에 보고도 못하고 일격에 파괴되어 버렸다.

  02:00  제주항

  제주시의 항구인 산지항에 정박중인 여러 척의 한국해군 군함들에 비상이 걸렸다.  갑자기 한라산 레이더기지가 섬광과 함께 사라지자 누군지는 모르지만 적이 나타난줄 직감한 제주 분함대 사령관 김 성우 준장이 비상출동 명령을 내린 것이다.  중국의 침공위협이 있다며 정보사단이 발령한 비상경계령과  대통령의 비상계엄 하에서도 함대를 전투배치하지 않고 경계만 강화시킨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지프로 자신의 지휘함인 한국형 구축함으로 가던 중 그 배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그는 차를 세운채 구축함이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한국 해군이 대양해군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번째 시도인 한국형 구축함 KDX-2000, 10척 중 3번째로 건조된 만재배수량 3900톤의 효종함이 중국 핵잠수함이 발사한 대함 미사일 한 발에 그대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마스트의 AWS-6A 돌핀 해상수색레이더만이 무참히 찌그러진채 물위에 남아있었다.효종함은 효종이 실패한 북벌을 아쉬워하여 붙인 이름이었는데 중국의 한급 핵잠수함의 공격에 반격도 못해본채 가라앉은 것이다. 김 준장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파괴된 것은 한국형 구축함 뿐만이 아니었다.  2300톤의 소형 울산급 프리깃함 FF 958 제주함(1990년 취역)과 포항급 코르벳함인 1200톤급의 781번함 남원함(1991 취역)까지 가라앉고 있었다. 3척의 비교적 신형함이 침몰하고 남아있는 것은 겨우 두 척의 백구급 쾌속미사일정 밖에 없었다.  제주도 서쪽해상에서 초계중인 청주함으로부터는 무선연락이 끊긴지 30분이 넘었다.생각해보니 초계기도 연락이 없었다. 비상경계령을 너무 무시했다는 후회가 일어났다.

  불바다가 된 제주항에 갑자기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써치라이트가 하늘을 갈랐다. 임박한 공습을 말해주는 것이었다.김 준장이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 있는 출항직전의 백구 59호(PGM 589)에 승선했다.승무원들은 전쟁의 공포와 함께 분함대 사령관의 승선에 바짝 긴장해 있었지만  승무원들이 긴장할수록 김 준장의 자괴감이 깊어갔다.

  서쪽 하늘에서 수 십 대의 전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김 준장은 백구 59호의 정장에게 전투기들을 피해 즉시 항구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뒤로는 같은 급인 백구 61호(PGM 591)가 따랐다.선내 등화관제를 실시하며 나가는데도  폭발하는 항구시설과 함정들 때문에 사방이 환했다. 미그기 한 대가 막 항구를 빠져나온 백구 61호에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바다에 물보라가 튀고 잠시 후 백구 61호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항구 근처에 있는 몇 개의  오름(한라산 자락의 분화구 언덕)에 배치되어 있는 대공발칸포가 불을 뿜었다.공격을 마치고 막 상승하던 그 미그 23형 전투기는 발칸포의 십자포화에 맞아 미익 쪽에서 불을 뿜으며 바다로 추락했다.

  그러나 곧이어 호위 전투기들이 오름에 있는 발칸포 진지들을 공습하기 시작하여 5분도 안되어 항구 주변의 대공진지들은 침묵을 지켰다.대공포 덕택에 전투기의 공격을 받지않고  항구 밖으로 나간 백구 59호는 서쪽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보인 김 준장의 얼굴에는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간단히 남해함대 사령부에 적 내습 보고를 마친 김 준장은 복수에 불타는 눈빛으로 서쪽 바다를 응시했다.

  제주시 서쪽인 도두동의 제주공항에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새벽에 서울과 부산으로 비행할 여객기 몇 대와 공항 부대시설이 불에 타는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전투기 몇 대와 초계기도 있다는 생각이 김 준장의 뇌리를 스쳤다. 갑작스런 소리에 하늘을 보니 수 십 대의 대형 수송기들이 저공비행으로 제주시와 한라산을 향하고 있었다.

  02:25 제주항 기점 서쪽 20 킬로미터 해상

  먼저 SPS-58 대공수색 레이더에 적으로 추정되는 초계기들이 잡히고, 잠시 후 캐나다제 HC-75 해상수색 레이더에 대규모 함정군이 걸렸다.김 준장은 이를 즉시 진해의 해군사령부에 연락하고  전파관제를 실시하였다. 초계기들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30 노트의 속력으로 20분간 이동해서 다시 서진하였다.  과연 멀리 검은 바다 위로 거대한 함정들의 대군이 보였다.실루엣을 보니 중국해군의 루다급 구축함과 지앙후이급 프리깃함들이었다. 백구급 미사일정은 즉시 시동을 끄고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어선들이 오징어 채낚기 작업을 하고 있어서 들킬 염려는 없어보였다. 집어등은 엄청난 촉광으로 고기떼를 끌어들이지만 주변을 밝히지는 않는다.

  "정장, 하픈은 4발 다 있겠지?"

  "그렇습니다. 육안수색결과를 미사일에 입력시키겠습니다."

  "아니야, 적은 상륙부대다. 조금 더 기다려.적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김 준장은 복수심에 불타 이성을 잃고 무작정 공격하는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적함대의 핵심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멀리 수평선상으로 구축함과 프리깃함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흘러갔다.  10분쯤 기다리자 훨씬 대형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항모와 전차양륙함 및 수송함들입니다!"

  백구의 정장이 망원경으로 중국함대를 보다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거대한 함체는 바다를 압도하는 듯이 보였고, 주변의 프리깃함과 수송함들은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작아보였다.  어선들을 발견한 호위프리깃함에서 대잠헬기 한 대가 이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 준장은 자신이 적을 공격하면 저 어선들의 운명은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서는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표는 양륙함과 수송함이다. 항모는 아깝지만, 자체 대공화기가 있을 것이다. 목표입력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라.  포는 적 항모를 향해 발사준비! 대공전 준비!"

  발사진동이 선체를 울리고 선미의 네 발의 하픈이 연속발사되었다.발사 즉시 백구 59호는 16,800 마력의 TF-35 개스터빈을 발진시켜 방향을 동쪽으로 선회하며 이탈리아 오토 멜라라사의 76밀리 포를 쏘아댔다.포탄이 검은 하늘을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꿈결처럼 천천히 날아가 거대한 해신 1호의 흘수선 부근에 명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침수될 정도의 높이는 아니었고 항모 안에서 연속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픈은 계속 하늘 높이 상승하다가 급강하하여  수면 바로 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항모 해신 1호와 수송함들의 레이더들이 일제히 켜지자 수 십개의 레이더에서 발사된 전파가 백구 59호를 스쳤다.

  "미사일 접근, 목표 1에 2,500 미터 남았습니다. 곧 명중합니다!"

  하픈을 처음 발사해 본 정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하픈 미사일이 마하 0.9의 속도로 천천히 목표에 접근하는 모습이 레이더 스크린에 보였다. 동시에 거대한 불빛과 보다 작은 불빛, 그리고 고속으로 움직이는 불빛으로부터 작지만 훨씬 더 환하게 빛나는 불빛이 떨어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바깥을 보니 중국 항모에서 대공포가 하늘을 향해 불을 뿜고 있었다.

  "그래, 적함대의 반응이 너무 늦었어. 수직발사기를 갖춘 대공미사일 시스팀이라도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면…"

  김 준장이 명중을 확신하자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하픈과 목표의 위치가 합해졌다.

  "목표 1명중! 적이 우리를 목표로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레이더를 맡은 수병이 김 준장과 정장을 동시에 바라보며 말하자 김 준장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

  "침로 2-0-0, 최대속도로! 디코이 발사!"

  전차양륙함 한 척이 불타오르는 모습이 어두운 수평선상에 보였다.양륙함은 탄두무게 227 킬로그램의 미사일에 맞자 크게 폭발하였으나, 즉시 침몰하지는 않고 불에 타고 있었다.그 불길을 배경으로 미사일이 날아왔다.  백구 59호가 Loral RBOC Mk-33 미끼로켓을 사출했다.  로켓은 불을 뿜으며 강력한 레이더 전파를 발사하여 대함미사일을 꼬였다.  두 발의 레이더 유도형 대함미사일이 미끼로켓을 스치고 멀어져 갔다.미사일정의 작은 선체도 적 미사일 회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목표 2 명중, 목표 4 명중! 목표 3은 빗나갔습니다!"

  김 준장은 화가 났다. 한 발에 30억원이나 주고 산 비싼 미사일이 순발력도 별로 좋지 않은 수송함에 빗나가다니, 역시 대함 미사일은 탄두의 위력은 작지만  싸고도 명중율이 높은 엑조세가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평선상에 두 개의 불빛이 추가된 모습이 김 준장의 망원경에 보였다.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중국의 대함미사일이 또 날아왔다.

  "미사일! 레이더 호밍이 아닙니다. 하나는 텔레비전 유도방식입니다. 접근합니다."

  미사일정의 선미에 탑재된 30 밀리 포와 12.7밀리 대공기총이 접근하는 미사일을 향해 연속 발사했으나 이를 막지는 못했다. 어선들 사이로 도망하던 백구 59호에 미사일이 섬광과 연기를 뿜으며 접근했다.미사일이 명중하자 섬광이 번쩍이더니 300 톤도안되는 이 작은 미사일정은 단번에 두 조각이 나버렸다.  중국의 대잠헬기가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선들이 급작스런 전투에 놀라 그물을 끊고 뿔뿔히 흩어졌다.그러나 어선들의 속도는 미사일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지는 못했다.한 척씩 미사일 세례를 받아 침몰해갔다. 중국 함대 주변의 해상에는 어느새 한 척의 어선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백구 59호의 미사일공격을 받은 3100 톤급 유칸급 전차양륙함은 서서히 침몰하고 두 척의 샨급 수송함은 다른 함정들에 예인되어 제주항 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 중 한척이 연속 폭발하자 포기하고 한 척만 진화를 하여 계속 제주도 쪽으로 항진해 갔다. 중국함대가 떠나간 해상에는 수 백 구에 이르는 중국 상륙부대원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02:40 제주항

  제주도를 지키는 육군 92연대 병력에 비상이 걸렸다. 전사한 제주 분함대 사령관 김 성우 준장이 해군사령부에 보고한 바로는  대규모의 함대와 상륙함들이 제주항을 향한다는 것이고,  바다와 하늘을 빼앗긴 상태에서 제주도를 지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주도는 한국의 땅이었고, 군인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긴급소집된 예비군까지 중요 거점의 방어에 나섰다. 그 때 하늘을 가득 메운 수송기들이 보였다.중국 공군기들의 1차 공습에서 살아남은 대공포들이 하늘을 향해 불을 뿜고 남제주군에 있는 대공기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몇 대의 수송기가 한라산 자락으로 추락하였으나 대공기지는 즉시 중국전투기들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하늘이 갑자기 함박눈이 온듯 하얀 물체들로 채워졌다.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02:40 개성, 통일참모본부

  "진해에 있는 해군사령부의 보고입니다. 중국군이 제주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이며 제주도에 파견된 분함대는 이미 전멸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남해함대인 제 3함대는 급거 출동하여 제주도로 항진하고 있습니다. 부산 근해에서 초계기가 적 잠수함 5척을 포착하여 지금까지 3척을 격침시켰습니다."

  한국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이 보고하자 참모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북한 공산당 주석의 암살과  인민군 9사단의 연락두절까지는 아직 긴가민가 했지만 제주도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에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은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이었다!

  "중국이 확실하오? 우리측 피해는?"

  "제주항에 정박중인 남해함대 제주 분함대가 크게 당했습니다.중국전투기의 공격으로 제주공항의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레이더기지와 대공기지 몇 군데도 파괴되었습니다. 분함대 사령관인 김 성우 준장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항 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대규모 적 함대가 제주도쪽으로 항진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심 중장이 다른 참모들의 질문에 답하다가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보고했다.

  "김 준장이 몸소 백구급 미사일정을 이끌고 중국 함대를 공격해 양륙함과 수송함 세 척을 명중시켰다고 합니다. 현재는 소식이 끊긴 상태입니다."

  전투중 연락이 끊긴 상황이라면 전사가 거의 확실했다. 인민군 9사단장의 생사가 불명하므로, 김 준장은 확인된 최초의 장성급 전사자가 되는 셈이었다. 참모들이 신음성을 발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비관이 퍼져나갔다.  한국 육군 정 지수 대장의 부관이 정 대장의 통신용 단말기를 급히 조작하고 손으로 짚었다.  정 대장이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급히 읽었나갔다.

  "제주도 상공에 대규모 수송기 편대가 나타나 공수부대를 낙하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점령전!"

  박 정석 상장이 비명을 질렀다. 중국의 목표가 한국 점령이라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중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점령하려는 의도가 명확해졌다.

  "공군의 준비 태세는 어떻소?"

  이 차수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참모들을 힐난하듯 한국 공군의 이 호석 중장에게 물었다.

  "불행하게도…"

  이 중장이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한국 공군에는 야간해상전을 수행할만한 전투비행단이 없습니다. 물론 공중전이야 수행할 수 있지만, 야간 저공침투를 할 수 있는  장비나 대함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일단 광주비행장에서 1개 대대의 전투기가 출격은 했지만 요격임무만을 위한 것입니다.  야간 대함 능력은 강릉의 비행단에만 있습니다만,  항속거리상 전투시간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럼 적 상륙부대를 격퇴할 전력이 없다는 것이오?"

  이 차수가 놀라 되물었다.  현대전에서 전투기들은 전천후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가? 이것은 전투기 성능과 댓수에서 빠졌지만 한국 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었다.

  "제 3함대도 부산에서 출발했으나 아직… 새벽까지는 제주도에 주둔중인 제 92연대가 버텨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만약 중국군에 점령당했을 때 우리가 이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 지수 대장이 비관론을 폈다. 한국군에도 해병대라는 상륙공격부대가 있지만 이때까지 수송수단을 미군에 의존해온 한국군은 독자적인 상륙작전 능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리고 상륙작전은 완벽한 제해권과 제공권을 보유했을 때만 가능한 작전이 아닌가?

  02:45  추자도 상공

  광주에서 출격한 제 5 전투비행단 소속의  전투기들이 급거 제주시를 향하고 있었다. 대함무기가 없는 전투기들은 중국함대의 영해침범을 알고서도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공습중인 중국전투기에 대한 요격 임무를 맡고 출발했으나, 중간에 중국 수송기들이 공수병력을 투하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목표를 이 수송기로 정했다.

  24기의 F-16 전투기들이 편대진형을 갖추고 남쪽으로 향하던 중에 강력한 레이더의 전파를 탐지했다. 미사일 유도용의 주파수였다. 즉시 전투기 내부에 미사일 경보가 울리고 조종사는 발신지를 추적했다.

  "편대장님, 적 전투기는 보이지 않고 미사일만 날아오고 있습니다.전파원은 1시 방향 60 km, 제주도 서쪽 20 km 해상, 조기경보기입니다!"

  "이럴수가! 미사일은 미제 스패로우입니다. 40여기 접근 중!"

  아군기를 향해 오는 미사일이 반능동 레이더 유도방식(SAR)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미사일을 발사한 적기에서 유도하는 것이 아니고 훨씬 후방의 조기경보기에서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은 편대장은 당황이 되었다. 이 상태라면 아군기는 미사일의 목표가 될 뿐, 어떠한 공격도 할 수 없었다.

  "저공 비행으로 피하면서 적기를 찾아!"

  "옵니다!"

  편대장이 채프를 뿌리며 급강하를 시작하자  전투기들이 편대장을 따랐으나 뒤늦게 강하를 시작한 전투기 3기가 공중폭발했다.1기는 정통으로 명중하고 2기는 미익 바로 20미터 후방에서 폭발한 섬광에 빨려들어가 전투기가 산산히 부서졌다.

  "분산한다. 브라보대는 우측으로 선회하라!"

  한 무리의 전투기들이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향했다.새로운 미사일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한국 전투기들은 조심성있게 남진했다.

  "0시 30분 방향 적 발견! 30 km 전방 저고도에 30여기입니다. 적은!"

  "적기 기종 확인했나? 뭔가?"

  편대장이 브라보대(隊) 박 소령에게 묻자 박 소령이 기가 막히다는듯 말을 이었다.

  "이럴수가… 미그-29입니다."

  최강의 방공요격기라는 미그-29!  F-16의 조종사들이 전율했다.

  "기수를 낮춰! 저고도로 접근한다."

  상대적으로 날렵한 F-16전투기로서는 근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미그-29 전투기들도 폭격기의 요격전 뿐만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는 최고급 전투기였다.

  "미사일 접근!"

  브라보대의 박 소령은 이 한마디만 마치고 연락이 끊겼다.편대장인 최 중령이 심각해졌다. 서쪽의 미그기를 상대해야될지, 아니면 명령대로 제주도를 지원해야될지 몰랐다. 최 중령은 명령도 중요했으나 아군의 위험을 못본 척 할 수는 없었다.

  "우측으로 선회. 공격한다. 목표 입력되는 대로 공격하라!"

  최 중령의 본대가 서쪽으로 선회하며 기수를 올리자 레이더 스코프에 적기와 아군기가 근접전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아군기는 3기밖에 남지 않았다. F-16 전투기들은 스패로우 공대공 미사일 2기씩을 발사하고 접근한 후 다시 사이드와인더 2발씩을 발사하고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7기의 적기가 공중폭발하거나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그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최 중령은 막 아군기 공격을 마치고 기수를 올린 미그기를 포착해 사이드와인더를 날렸다.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바로 우측으로 선회하여 또다른 목표에 기관포를 퍼부었다.근접전을 감안하여 설계한 F-16은 미그-29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군기의 숫자를 세어보니 자신을 포함하여 5기밖에 남지 않았다. 적기는 아직 15기나 있었다. 후방감시 레이더의 요란한 경보가 울리고 바로 뒤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1999. 11. 17  02:10  평안북도 신의주 상공

  평양 북쪽 순안비행장에서 긴급발진한 통일공군소속의 MIG-29와 F-16의 혼성부대가 신의주 상공으로 급파되었다. 미그기들이 상공엄호를 맡고 F-16은 지상공격을 하는 식의 편성이었다. 남북 혼성부대 최초의 실전이라 서로에 대한 신뢰의 끈이 약해 편대장인 인민군 출신의 김 강환 상좌는 적에 대한 걱정보다는 아군에 대한 걱정이 더 많았다.

  신의주와 건너편 만주의 안둥 상공에는 전파방해가 심해 적기가 있는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레이더의 유효범위가 극히 제한된 가운데 적 미사일의 경보가 울렸다.약 40km 전방에서 발견되어 아직 여유는 있었다.

  "지상공격대는 저공비행으로 신의주를 수색하라.  상공엄호조는 나를 따른다. 가자!"

  F-16 대대가 기수를 내려 저공비행을 시작하자, 이를 확인한 김 상좌의 전투기가 애프터 버너를 가동시키며 순식간에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공격하는 적기는 의외로 미제 F-14로 판명되었고, 그 후방에서 처음 보는 유형의 레이더 전파가 발사되고 있었다.  미사일은 톰캣이 자랑하는 AIM-54C 피닉스였다.

  마하 4의 미사일들이 접근해오자 미그기들이 즉시 미사일에 ECM을 걸고 방향을 바꾸었다.  미그의 전자전과 고기동에 의해 피닉스 미사일은 단 한발도 목표를 잡지 못하고  편대 사이사이를 지나 공중에서 헛되이 작렬했다. 미그기들이 급상승하여 적을 노리고 사정거리 30km의 R-40TD(나토 코드 AA-6 Acrid)를 발사한 후 즉시 급강하했다.  미사일들이 마하 4.5의 속도로 날아갔다.인민군의 미그기들은 어느새 국경을 넘고 있었다.

  미사일의 접근을 발견하지 못한 톰캣의 조종사들은  선두 전투기들이 공중폭발하고 나서야 놀라 급선회하며 하늘에 채프로 수를 놓았다.  톰캣의 미사일경보는 아직 울리지도 않았다. 미사일로부터 멀어지려 했으나 미사일이 너무 빨랐다. 하늘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R-40TD는 중거리미사일치고는 의외로 적외선 유도방식이었다.

  "매복입니다! 미사일 밭으로 들어왔습니다!"

  살아남은 톰캣에 접근하던 편대장의 헬멧 이어폰에 비명이 이어졌다. 그의 미그기에도 미사일경보가 울렸다.  김 상좌가 기수를 급히 올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불붙은 젓가락 모양의 작은 미사일들이 지상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지옥의 겁화마냥 이들이 전투기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암람(AMRAAM :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입니다!  하지만 아래쪽엔 적기가 없는데요…"

  조종사 교환제에 의해 미그-29를 몰게된  한국공군의 이 승철 대위가 비명을 질렀다. 공대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는데도 발사체인 적기는 보이지 않았다. 미사일에 ECM을 걸었으나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미그 몇대가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지상을 향해 날았다.

  "이기 AdSAM이야! 전파방해 중지, 지상에 접근하지 말라우!"

  김 상좌가 놀라 외쳤다.Ad-SAM은 원래는 공대공미사일인 AMRAAM을 지대공미사일로 쓰는 시스팀이다. 능동유도방식인 AMRAAM은 저공침투하는 적기에 효과적인 미사일이기도 하다. 적기가 전파교란을 실시할 때도 3개 포대의 레이더가 방해전파의 방향을 탐지하여 이를 컴퓨터가 자동으로 삼각측정하여 대처할수 있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미사일에 대한 미그의 ECM은 오히려 미사일이 표적을 잡는데 도움을 주는 격이었다.  중국의 톰캣 편대가 미사일 회피에 정신없는 미그기에 접근해왔다.

  "살려야돼! 미그기를 살려야돼!"

  김 상좌는 이 비싼 전투기들이 속절없이 격추되는 것이 아까왔다. 지금 이 순간은 부하 조종사들보다는 전투기를 지켜야했다.  그의 바램은 절망이 되었다. 미익 바로 뒤에서 미사일이 폭발하고 김 상좌는 자동으로 사출되어 낙하산이 펼쳐졌다. 분한 마음을 주체 못하고 그는 가슴에 달린 주낙하산의 케이프웨이를 떼어버렸다. 원형 낙하산이 중심을 잃고 바다의 해파리처럼 하늘을 떠다녔다.검은 땅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북한에 두 개 밖에 없는 미그-29 전투비행대대 중 하나인 이 미그 편대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F-16이 구원하러 왔다. 이 대위가 전송해준 자료를 토대로 F-16 전투기들이 야산을 넘자마자 미사일발사대가 있는 들판에 집속폭탄을 투하했다.  Ad-SAM 체계의 대응보다는 폭탄의 폭발이 빨랐다. F-16들이 톰캣편대를 향하여 자위용 사이드와인더를 날리고  즉시 남쪽 산을 넘어 예상되는 공격을 회피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미그기들이 팰콘의 뒤를 따랐다. 다시 그 뒤로 암람과 피닉스가 떼지어 날아왔다.

  1999. 11. 17  02:30  서울, 청와대

  대통령이 소집한 비상각료회의에 소집된 장관급과 군사령관들이 승용차를 타고 허겁지겁 청와대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상황은 대충 들어서 알았지만 청와대 정문에 서있는 전차들과 장관의 승용차에 총을 겨누는 험악한 표정의 군인들을 보고 다시 한번 몸이 얼어붙었다.

  승용차가 본관 앞까지 가는 동안 사방에 국군과 경호원, 또는 괴한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이 경숙 교육부장관은 본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전차포에 의해 처참하게 찢어진 괴한들의 시체를 보고 까무라쳐 경복궁 옆의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몇몇 장관들은 계단을 오르는 길에 널려있는 팔다리와 내장을 보며 구토했다.

  대통령 침실이 있는 3층의 상황은 더 심했다.  일부 병력이 치우고는 있었지만 수십구의 시체와 핏자국에서 나오는 비린내가  진동하여 웬만한 비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통과하기도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이 살아난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며 통산부장관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부하들이 아직 산쪽으로 달아난 괴한들을 추적 중이라서 홍 대통령의 안위를 염려한 93경비대대장 박 중령은 대통령이 침실을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게 제지하고 있었다. 또한 경호원과 비서실직원들도 신분파악이 끝날 때까지는 3층에 접근도 못했다.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된 마당에 믿을 것은 없었다. 삼청공원쪽에서는 가끔씩이지만 아직도 총성이 이어졌다.

  "전쟁이오. 중국의 침공이오."

  확대각료회의의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대통령침실 밖의 거실에 모이자 대통령이 선언했다. 장관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승용차로 오면서 상황을 브리핑 받았지만 그때까지는 위기상황으로만 알고 있었다. 폭파된 한강다리에 막혀 돌고돌아 간신히 청와대에 도착하는 동안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보고를 듣고 장관들은 기가 막혔다.  전국이 중국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았고 특히 부산은 공습까지 당했다.이제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같았다.

  "지금 평안북도의 통신이 마비된 상황이지만, 통일참모본부에 따르면 신의주로 출동했던  인민군 1개 사단이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오. 지금 한만(韓滿)국경에서는 공중전이 한창이요. 국경부근의 대공미사일 기지에서 중국기를 요격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 지역들은 다 점령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설명을 하자 장관들은 한숨만 쉬었다. 대통령이 긴급선포할 비상계엄령에 대해 장관들의 형식적인 심의가 끝나고, 계엄사령관을 정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국방부장관이 당연히 육군참모총장인 황보 영 육군대장을 천거했다. 뒷자리에 배석한 황보 대장이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며 전쟁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승인하려는 순간 93경비대대의 박 중령에게서 메모가 전달되었다.대통령이 모시라는 손짓을 하자 박 중령이 밖으로 나갔다.

  "북쪽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의 말에 장관들이 일제히 출입문쪽을 보자 그쪽에는 커다란 모자를 쓴 인민군 장성이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이가 80대는 되어보였다.  북한에서도 중국처럼 나이 많은 노인들이 고위직을 점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안녕하십네까, 각하! 다행입네다."

  "주석의 서거에 애도를 표합니다. 얼마나 고초가 많으시오. 자, 자리에 앉으시오."

  홍 대통령이 대통령 바로 옆 자리에 그를 앉히고 격려하자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네다. 그래도 각하께서 무사하셔서 불행중 다행입네다."

  그는 인민군 총참모장 최 광 차수였다.최 광은 1963년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승진했다가 반혁명음모를 묵인했다는 혐의로 1969년 탄광노동자로 숙청된 뒤에도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김일성을 감동시켜 1988년 총참모장 자리에 다시 오른 고지식한 인물이다.  최 광 차수가 북한 당주석의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주석은 중국의 동향에 대해 고위 군간부들과 함께 심야대책회의를 하던 중 중국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직접 총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함께 있던 사회안전부장 백 계림,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 봉률, 호위총국장 이 을호, 평양지역사령관 주 도일 등 최고위 군간부들도 모두 군인다운 최후를 마쳤다고 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기가 막히다는듯 속으로 혀를 찼다.

  "각하께서 계엄령을 선포하신다는데 계엄사령관으로 뉘기를 지명하셨습네까?"

  홍 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육군참모총장인 황보 대장으로 정했다고 하자 최 차수가 표정을 바꾸더니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진언했다.

  "이제 중국과의 한판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네다.  남북이 각각의 군령체계를 가질 경우 혼란은 필연적입네다. 차라리 군권을 통일참모본부에 몰아주시는 거이 어떻습네까?"

  "안됩니다!"

  국방부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장관은 긴장 때문인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왜 안된다는 것이오?"

  최 차수가 장관을 노려보자 장관이 말을 더듬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각하! 통일참모본부는 남북군대의 통합을 위한 임시적인 기구입니다. 전쟁을 지휘할만한 인원과 시설도 없고 그들은 그럴만한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통일수반이 나오기 전까지의 비상시에는 통참이 군령권을 가지기로 합의하지 않았소? 동지는 북남합의를 무시할 생각이오?  의장이 인민군이라고 그렇다면 당장 남쪽에서 의장을 차지하기요."

  최 차수가 소리를 지르자  국방장관이 땀을 흘리며 대통령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절대 안됩니다, 각하!"

  "음… 통일참모본부의 의장이 인민군의 그… 누구더라…"

  "이 종식 차수입니다, 각하!"

  황보 대장이 대통령의 질문에 답하며 설명을 했다.

  "진정한 군인이라고 할만한 분입니다. 수십년간 야전군 지휘관으로만 일생을 보낸 분입니다. 그리고… 통일참모본부는 합의체이므로 의장이 어디 출신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각하."

  황보 대장이 육사선배인 국방장관을 힐끗보며 그에게 기합 한번 받을 각오를 단단히 했다. 장관은 그 나이에도 육사 후배들에게 쪼인트를 까는 버릇이 있었다.며칠전 술자리에서 술버릇이 안좋다고 구둣발에 채인 정강이는 아직도 시퍼랬다.

  "그렇게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군지휘권을 믿고 맡기겠소. 북쪽에서도 물론 군지휘권을 수여하겠죠?"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자칫하다간 국군 전체가 인민군에게 접수될 수도 있는 위험한 결단이었지만, 중국의 침공에 대처하는 데는 남북 모두의 결집된 힘이 필요했다. 대통령은 동족을 믿기로 했다. 국방장관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대통령을 보았다. 3년전만 해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만한 결정이었다.

  "물론입네다. 감사합네다, 각하."

  최 차수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을 보았다.  젊은 대통령이 의외로 배포가 굉장히 컸다.이런 지도자가 있고 남북이 힘을 합치면 잘하면 중국을 막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자, 이제 중국의 침략에 맞서  어떻게 우리가 대응해야할 지 토의해 봅시다. 아니, 최 차수도 같이 계세요."

  대통령이 물러나려는 최 차수를 붙들고 다시 비상각의가 진행되었다.

  1999. 11. 17  06:00  평안북도 선천 북방 10km 지점

  차 영진 중령은 불안해졌다. 적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고속으로 부대를 이동시켜도 될까 걱정되었다. 사단장은 통일참모본부의 성화에 이끌려 무작정 부대를 이끌고 신의주로 북진하고 있었다. 구 국군의 3개 밖에 안되는 기갑사단중의 하나인 제 11 기갑사단은 K-1 전차 150여대와 신형 KIFV(한국군 보병 전투차량) 및 그 파생형 장갑전투차량 200여대로 구성되어 화력과 기동력면에서 한국군 최고를 자랑하는 부대였다.  물론 미국이나 러시아, 바로 옆의 일본에 비하면 전차의 장비수는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한반도 내에서는 최고의 수준이었다. 한참 고속이동하던 부대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대대장님, 사단장님의 명령입니다. 인민군 제 9사단, 전멸 추정. 부대 현 위치에서 대기, 사주경계."

  포수 겸 통신병의 보고를 받은 차 중령은 K-1 전차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동녘엔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둘러 가더니 결국 전멸했군. 우리 사단도 마찬가지 아닐까…’

  차 중령은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자국 영토이지만 적이 어디까지 밀고들어왔는지는 전혀 정보가 없었다. 차 중령은 휘하 부대원들을 지휘,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주변 야산들은 장갑정찰차를 보내 모두 수색했다. 이 지역은 아직 적이 오지 않은 것으로 사단장에게 보고했다.차 중령이 지도를 보니 산 너머에 널따란 평원이 있었다. 기갑사단에게는 좁은 도로보다는 넓은 평원이 제격이었다.  선천(宣川)은 서해안 평야지대중에서도 비교적 산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원래 국군 제 11기갑사단은 선천 남방 5km의 150미터 고지인 독상산 아래 평야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진을 하다보니  전차부대로서는 불리한 산지 지역으로 자꾸 들어가고 있었으나 선천 시가지를 지나 농건동에 이르자 넓은 평야지역이 나타났다. 사단장은 아마 그 벌판을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설마 벌써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포수가 차 중령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차 중령은 해치 아래의 포수를 보며 씩 웃었다.

  "신의주에서 여기까진 한 시간 거리라네.  인민군 9사단이 출동한 것은 벌써 6시간 전이야. 그리고 적의 특수부대가 있을지도 모르고…"

  차 중령의 말을 들은 포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전투하면서 그렇게 빨리 전진해 올 수 있단 말인가?

  "명령입니다. 신속 전진하여 3 km 전방의 국도 우측 평원에 배치하라는 명령입니다."

  차 중령은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신속히 부대를 이동시켜 마을에 전차엄폐호를 만들어 전차를 엄폐시켰다. 차 중령의 3대대는 우익에 배치되어 부대 후퇴시 엄호를 담당하기로 했다.

  하늘엔 계속 사단 소속의 정찰헬기들이 날아다녔다. 이상하게 헬기들이 자꾸 땅에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차 중령이 놀라 무전으로 사령부를 불렀으나 무선이 불통이었다.  차 중령은 급히 전령을 사단본부로 보내고 연락용 유선전화망을 깔기 시작했다.  대대 소속의 전차를 무선으로 불러보니 다행히 연락이 되었다.  각 전차중대장들에게 적의 전파방해에 대비한 지휘체계의 확립을 당부했다.

  대대전령이 돌아와서 보고하길, 현재 광대역전파방해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차 중령은 급히 전차엄폐호를 더 깊이 파도록 하고 나무로 위장시켰다. 공중엔 한국공군의 전투기 1개 중대가 편대비행을 하며 기갑사단을 엄호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갑자기 하늘이 시끄러워졌다.전투기들이 회피기동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차 중령의 눈에 아직 적의 미사일은 보이지 않았다. 전투기들이 모두 고도를 낮춰 비행하는 중에 상공에 적의 대편대가 나타났다.숫적으로 3배나 많은 중국전투기들이 보였다. 통일한국공군의 전투기대가 미사일을 발사하며 적 편대에 돌입했다.기갑사단의 대공부대는 서로 얽혀 싸우는 전투기들에게 미사일 한 발 쏘지 못하고  사태를 주시해야만 했다. 역시 숫적으로 밀리는 한국공군이 패퇴하기 시작했다.

  차 중령은 총격전의 수학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9명의 청색분대와 6명의 적색분대가 교전에 들어간다. 병력수는 50% 차이, 명중율 등이 1/3로 같은 조건이라고 보면 1회의 사격후에 청색분대는 7명, 적색분대는 3명이 남는다. 두번째 일제사격 후에는 6대 1. 병력수 50%의 차이는 수적 열세인 쪽에 파멸적인 결과를 낳는다. 9 대 6의 병력비율은 실제 전투에 있어서는 그의 제곱인 81 대 36의 전력비율이 되는 것이다.하늘은 중국의 것이 되었다.

  드디어 중국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수십대의 수호이 24 전폭기들이 섬형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공습은 치열했다.  기갑사단이 전 화력을 동원해 공중의 침략자와 싸웠으나  전투기와 전차의 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전투기들이 대공미사일 탑재차량들을 공격한 후 전폭기들이 전차에 대한 공격을 가해왔다.

  한국형 보병전투차(KIFV)의 차체에 대공미사일을 적재한 천마와,험비(HMMWV)의 스팅거 4발로 이뤄진 어벤저 대공사격망은 그 수가 부족하여 대규모의 공습에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어갔다. 대공망이 무너지자 속도가 느린 대형의 K-1전차들은 중국 전투기들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파괴되었다.

  천지사방에 폭음이 메아리쳤다.  중국의 비행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때 제 11 기갑사단에 남은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전차와 수 백대의 고철 뿐이었다. 제 11기갑사단의 포병연대가 격추시킨 적기는 5대에 불과했다.

  중국 전투기들이 물러나자 평원 저편  세파발쪽에 중국군의 전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3개의 중국군 기갑사단이 밀어닥쳤다. 제 11 기갑사단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참모들이 방어전을 고집했다.  공습을 받아 피해는 입었지만 미리 도착하여 준비한 한국군이 유리하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적 전차는 구식 69형의 개량형일 뿐입니다. 이동사격이 안됩니다."

  작전참모인 대령이 주장하자 다른 참모들도 거들었다.

  "곧 물러난 우리 공군이 다시 올것입니다.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현재 적 선두전차 거리 2,200미터입니다."

  사단장은 위생병이 부상당한 머리를 붕대로 감싸는 중 생각에 잠겼다. 지금 물러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조금이라도 전과를 올리고 싶었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중국군 전차들을 보며 사단장이 말했다.

  "좋아. 공격한다. 그 전에 우리의 피해상황 파악은 끝났나?"

  "87기갑연대 중에서 전차 절반 파손, 103기계화연대 전투차량 2/3 대파, 105 기계화연대 전투차량 절반 파손, 포병 연대 전멸입니다.  포병 연대장 전사."

  부사단장이 비통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사단장이 기가 막혔으나 예상된 수치일 뿐이었다. 미국의 기갑사단 편제와 달리 한국군의 기갑사단은 3개의 전차대대와  2개의 기계화연대로 구성되었다. 전차의 수가 너무 적었다.

  "각 연대에 전달하라. 즉시 사격 개시!"

  차 중령의 제 3전차대대는 공습에 대비하여 엄폐와 은폐를 제대로 한 덕에 45대의 전차중 7대만 피해를 입었다. 5대 전파, 1대 포사격 불능, 1대는 운행불능이었다.  중국군의 전차가 다가오자 사격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차 중령이 바로 명령을 수행했다.

  "사격개시!"

  차 중령이 해치 위에서 마이크로폰으로 휘하의 전차들에 명령했다.기갑사단의 모든 전차가 포문을 열었고 대전차 KIFV에서 TOW-2 대전차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굉음이 울리고 불꽃이 중국군 전차들을 향해 날았다. 중국군 전차부대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불꽃이 피어났다. 중국전차들이 연막탄을 쏘기 시작하자 들판이 온통 뿌옇게 변했다.중국전차들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10시 방향의 선두전차에 한방 먹여!"

  차 중령이 개별 전차의 전투에 직접 간여했다. 무기와 기술이 비슷한 경우 전술과 사기가 전투의 향방을 가름짓는다. 차 중령은 포탄과 미사일의 우박을 피하며 돌진해오는 그 전차가 신경쓰였다. 게다가 그 전차가 향하는 곳은 사단사령부가 있는 쪽이었다.

  거대한 포탑이 서서히 선회했다.  포수가 적 전차에 조준경의 중심을 맞추자 레이저가 발사되어 컴퓨터가 적 전차와의 거리와 속도를 계산하고 바람의 방향을 계산, 오차를 수정하여 자동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명중!"

  포수가 외쳤다. 차 중령이 망원경으로 그 위치를 보니 또다른 전차가 연기를 헤치고 드러났다.  아니, 한두대가 아니었다. 중국군은 숫적 우세를 십분 발휘하여 인해전술로 밀고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인해전술은 아니고, 공습으로 약해진 한국군의 좌익을 집중공격하는 것이었다.

  "적은 사선진이다. 전 전차는 12시 좌측으로만 사격하라!"

  차 중령이 다급해졌다. 중국군이 집중공격하는 쪽엔 공습으로 전멸하다시피한 제 1 기갑대대와 103 기계화연대가 있었는데 사실상 전력이라고 할 수 없는 병력이 있을 뿐이었다.  방어진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차 중령이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과의 무선통신은 또 전파방해로 불가능했고 유선은 적 포격으로 끊겼는지 먹통이었다.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중국 전차들이 좌익의 진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전원 전진! 반시계방향으로 전진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

  기갑사단 본부의 상황은 풍전등화였다. 애초에 구식 69형으로 알았던 중국군의 전차는 이동사격이 가능한 신형 85-II M형이었다.  이 전차의 포탑은 이 모델 전 중국전차들의 일반적 양식인  주조식이 아닌 용접식이고 복합장갑을 갖추고 있다.또한 이들은 대전차미사일에 대비하여 차체 전면에 능동반응장갑까지 갖추고 있었다.능동반응장갑은 전차의 HOT 탄이나 대전차미사일이 전차에 명중했을 때, 탄두가 장갑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폭발을 일으켜 탄두를 날려버리는 방어장치이다.

  전차포를 쏘아 명중시켜도 중국 전차가 파괴되지 않자 한국군 전차병들 사이에서 가벼운 전율이 일어났다.  말로만 듣던 반응장갑의 위력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전차원들이 공포에 휩싸여 조준이 흩트러지자 이틈을 노려 중국군의 전차들이 쇄도해왔다.

  공습으로 약해진 1 기갑대대와 103 기계화연대는 압도적인 수의 중국전차들이 몰려오자 망연자실해졌다. 이미 예비부대는 없었고 다른 부대도 자신의 앞에 있는 적과 싸우기에도 바빴다.남아있던 전차는 거의 파괴되고 보병전투차의 대전차미사일도 떨어져 본대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3대의 중국전차가 드디어 진지를 넘어 들어와 지원부대 뿐인 본대를 유린했다. 125 밀리 강선포의 위력은 전차포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강했다. 기갑보병들이 LAW로 전차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중국전차에서 기관총 사격을 하여 많은 국군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차 중령 대대의 전차들이 일제히 전차 엄폐호를 뛰쳐나갔다.  좌측의 전차들은 천천히,우측의 전차들은 속도를 빨리하여 전진하며 전면의 양동부대를 격파하자 주공(主攻)의 측면이 대대의 정면에 보였다.

  "일제 사격!"

  휘하의 전차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같이 따라나선 105 기계화연대의 잔존 병력도 보병전투차에서 중국 전차군을 향해 미사일을 퍼부었다. 평지에 몸을 드러내는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모두들 좌익이 돌파당하고 후퇴도 못하는 위기에 빠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전차들이 하나씩 불덩이가 되었다.  가끔 포탑을 선회하여 이 중령의 대대에 반격하는 중국 전차들도 있었지만, 포탑을 90도 회전 시키는 6초와 조준시간 5초, 합계 11초 사이에 제 3전차대대의 전투조준 사격으로 곧바로 침묵해갔다.

  중국의 전차부대와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차 중령이 대대 무전기를 통해 그동안의 표적중앙 조준에서 표적하단 조준을 명했다.  차 중령도 자신의 전차에서 발사한 포탄이  빗나가고 나서야  조준방식을 바꿀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표적 중앙을 조준했을 때 거리 400에서 800미터까지는 포탄이 표적의 상부를 최고 80 센티미터나 통과하여 불명중구간이 생긴다. 이 차이는 웃기게도 FCS(화기관제)컴퓨터에 입력되어있지 않았다.

  중국 전차들이 갑작스런 측면의 공격에 놀라서인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물러나면서 제 3 전차대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자 평지에 노출된 차 중령 휘하 전차의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다.

  차 중령 바로 옆의 K-1 전차가 불덩이가 되어 폭발했다.차 중령의 전차에도 적의 주포가 명중되었으나 포탄은 포탑 상부에 맞고 튀어나갔다. 계속되는 전차의 피해보고가 이어졌다. 차 중령의 전차대를 따라온 105 기계화연대의 피해는 특히 컸다.애초에 전차와 보병전투차는 상대가 안되는 것이었지만 아군 전차대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던 105 기계화연대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적이 물러나자 차 중령도 진형을 갖춰 서서히 진지로 후퇴했다.

  차 중령이 망원경으로 본진과 좌익을 살펴보았다. 남아있는 아군전차는 거의 없었고 많은 보병전투차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전령을 사단본부에 보내 현황을 물었다.

  잠시 후 돌아온 전령은 사단장의 전사소식을 전해왔다.지휘체계가 전멸하고 남아있는 영관급 장교도 드문 편이라고 했다.  또한, 좌익과 본진은 사단 작전참모인 한 중령이 지휘를 맡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리고 한 중령의 명령은 즉시 본부로 오라는 것이었다.지휘체계와 통신체계가 무너진 제 11기갑사단은 부대라고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차 중령의 뇌리를 스쳤다.

  차 중령은 보병전투차를 타고 사단본부가 있던 쪽으로 달렸다.  가는 길 곳곳에 불에 타고 있는 K-1 전차와 K-200보병전투차, 그리고 보병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팔다리가 날아가거나 눈을 잃은 젊은 병사들의 비명이 차 중령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몇 년씩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젊은 군인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한 것이다. 아니, 젊음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죽어간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사단본부에 도착하니 한 중령이 왼쪽팔을 붕대에 감고 지휘하고 있었다.  차 중령이 보니 그의 붕대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고 이상하게 팔이 짧아 보였다. 한 중령이 씩 웃었다.

  "아직 참을만 하다네."

  차 중령의 사관학교 1기 선배인 한 중령은 전차대원답지 않게 185 센티나 되는 큰 체구에 사람좋은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왼팔은 손목아래가 절단이 되었는데 지혈만 하고 진통제로 버텨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조금 전엔 고마왔네. 자네쪽 상황은 어때?"

  차 중령은 기가 막혔다. 지휘할 사람이 없어서 중상자가 지휘하다니. 한 중령은 사단내에 영관급이 별로 남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차 중령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임시로 사단을 지휘하기로 자청한 것이었다.  아직 전투력이 남아있는 차 중령이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패전수습에 불과한 사단장 역할을 맡은 것이다.

  "선배님…"

  차 중령은 목이 매어왔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므로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갔다.

  "제 3 전차대대는 아직 전차 27대가 남아있습니다.  105기계화연대는 보병전투차 52대와 자주박격포 3문, APC 7대입니다."

  "음… 사단 전력의 대부분이군… 수고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차 중령이 한 중령을 쳐다보았다.  그는 후퇴를 생각한 것이었다. 이 중령이 한숨을 쉬며 말을했다.

  "지금 아군의 증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절망적입니다. 적은 현재 우리보다 최소 10배나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후퇴하여 아군 증원 병력과 합류하시는게… 지금 적의 공격을 막을 병력이 없습니다."

  패배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한 중령이 차 중령을 패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대신 짐을 진 상태였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 중령이 본부의 다른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젊은 중위, 대위들이 각기 연대와 대대를 맡는 상황이었다. 수십명이었던 사단의 영관급 장교들은  일부 군의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사하여 비슷한 숫자의 전쟁미망인들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모두 부대로 돌아가서 후퇴준비를 하도록, 차 중령이 후위를 맡아주겠나?"

  한 중령이 쑥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차 중령에게 부탁하듯 명령했다. 차 중령이 그러마고 거수경례를 붙이며 본부를 나서자  그의 등뒤로 한 중령이 덧붙였다.

  "우리 사단의 전력은 자네가 지휘하는 병력이 대부분이네. 나머진 부상자부대에 불과해. 사단이 해체되지 않도록 병력을 아껴주게."

  한 중령의 말뜻을 이해한 차 중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대의 후퇴를 위해 무리하게 방어전을 고수하지 말라는 것이 한 중령의 뜻이었다. 이 중령이 고개를 푹 숙인채 막사를 나와 보병전투차로 돌아갔다.

  차 중령은 돌아가는 길에 막강했던 때의 부대를 떠올렸다. 국군 중에서 최정예의 기갑부대로서 5개의 보병사단을 능가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자랑하던 때가 바로 어제같았다.  그러나 적의 공습과 전차부대와의 격돌 한번에 졸지에 부상자부대로 전락하여 한 중령이 사단해체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해버린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전사자 수습과 후퇴준비에 바쁜 젊은 병사들의 어두운 얼굴들을 보아야했다.

  대대에 도착해 보니 부대 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어쨋든 제 3전차대대는 적의 공격을 물리치지 않았는가? 차 중령이 지휘체계를 점검하고 후퇴준비를 명령했다. 준비작업 틈틈히 중국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중국군은 급작스런 패퇴에 놀랐는지 아니면 한국군의 후퇴를 기다리는지 공격해올 기미가 안보였다. 가끔 로켓탄이 수십발씩 날아왔으나 피해를 입을래야 입을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 1전차대대가 선두를 서고 제 103기계화연대가 보병전투차 위에 시체를 가득 쌓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바로 뒤따르는 보급부대는 탄약 등 보급품을 모두 버리고 부상병들을 가득 싣고 있었다. 차 중령의 부하들이 다른 부대 보병전투차 위의 시체들을 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어 제 2전차대대와 포병연대의 잔존 병력들,그리고 제 105기계화연대가 후퇴를 시작했다. 이제 제 3전차대대의 차례였으나 갑자기 관측병이 적의 공격을 보고 해왔다.

  차 중령이 전차의 해치 위에서 보니 중국 전차들은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몰려오고 있었다. 포격도 없이 아군 진지를 점령하려고 오는 중국군들을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으나 패배한 부상병 부대를 가만 내버려두는게 이상했다.

  ‘중국군이 저렇게 신사적이었던가?’

  사관학교에서 각 군의 전략을 공부할 때, 중국군은 전술적 거점의 점령보다 중요시하는 것이 적 부대의 소멸이라고 배웠다.1개의 사단을 패퇴시키는 것보다 더 성공이라고 보는 것이 1개 연대의 섬멸, 또는 포로화였다. 중국군이 이렇게 신사적으로 패배한 부대가 후퇴하도록 내버려 둘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차 중령은 중국군의 헬기사단에 대한 생각이 얼핏 들었다. 미군이 헬기의 기동성과 화력을 이용한 공중보병 위주의 기병사단을 운영함에 비해 중국군은 서유럽 국가들처럼 대전차공격과 대지공격을 위주로 한 공격헬기사단을 운용하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 장갑집단군의 휘하에는 공군으로부터 배속된 헬기사단이 편제되어 있었다.차 중령이 즉시 대공방어 태세를 명령하고 통신차를 불렀다.통신대대의 통신차 6대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통신차가 차 중령의 전차 옆에 서서 가능한 모든 주파수를 찾아 상급부대에 연락했다.

  통신차의 무전병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중국측의 전파방해를 뚫고 무궁화 6호 위성채널을 통해 통일참모본부와 연결했다.참모본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하여 참모회의에 직접 연결했다.차 중령이 무전기를 받아 보고했다.

  "단결! 제 11 기갑사단 제 3 전차대대 차 영진 중령입니다. 중국군의 공습과 장갑군단의 공격으로 현재 거의 전멸, 후퇴중입니다. 적 헬기사단의 공습을 막아주십시요."

  "사단장은 어떻게 되었나?"

  무전기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사단장이나 연대장은 어떡하고 중령이 보고하느냐는 뜻이 담겨있었다.

  "사단 지휘부는 현재 전멸, 영관급은 저와 한 일석 중령,  그리고 군의관 2명 뿐입니다. 그리고 한 일석 중령은 현재 중상입니다."

  차 중령은 보고하면서도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우치지 못한 통일참모본부에 울화통이 터졌다.언제 중국군의 헬기사단이 공격을 가해 후퇴하는 사단의 머리위로 기관포와 로켓포를 쏘아댈지 모르는 판에 격에 맞는 직급을 찾는 군 장성들의 썩어빠진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우리 공군은 전 영공에 걸쳐 교전 중이라서 전투기를 빼내기가 어렵다. 현재 모든 국경에서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쪽에는 음… 잠깐 기다려."

  무전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화난 외침도 들려왔다.잠시 후 화가 난 듯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 중령이 분노한 듯 무전기를 응시했다. 차 중령이 무전기를 땅에 내던질 것을 걱정한 무전병이 전전긍긍했다.

  "그쪽에는 전투기 1개 대대를 보내 후퇴를 엄호하겠다.  꼭 살아오도록. 참, 나는 육군의 정 지수 대장이다."

  "감사합니다. 단결!"

  의외로 호의적인 대답을 받고 차 중령은 잠시 멍해졌다. 무전기를 무전병에게 건내고 부대의 후퇴를 독려했다. 자꾸 뒷머리가 근질근질하여 북쪽 하늘을 힐끔거렸다.중국군의 헬기사단은 꼭 올것이며 후퇴하는 기갑사단을 내버려둘리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북쪽 하늘에 굉음과 함께 수십대의 헬기들이 나타났다.  후퇴하던 대열이 뿔뿔이 흩어져 대공방어 태세에 들어갔으나 적기를 격추시킨다기 보다는 표적을 분산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대대의 모든 전차의 포탑에서 전차장들이 12.7 밀리 기총을 발사하여 탄막을 펼쳤으나 중국군의 무장공격헬기들은 기체의 장갑을 믿는지 전차대 상공에 돌입하여 대전차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차와 공격헬기의 싸움은  20 대 1의 비율로 공격헬기가 유리하다는것이 각국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고 또한 각종 시뮬레이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격헬기의 가격이 전차에 비해 훨씬 비싸더라도 대전차전에서의 효용 때문에 각국의 군대에서는 공격헬기를 갖추길 원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군의 헬기는 수에 있어서도 제 3 전차대대의 전차의 수를 압도했다. 차 중령은 대대의 전멸을 예상했으나 앞서 출발한 기계화연대들의 안위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차 중령이 직접 기총을 잡아 쏘면서도 집에 있는 아내가 자꾸 떠올랐다. 젊은 전쟁미망인이 될 아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죽는 자신은 괜찮지만 아내가 고생할까 걱정되었다.  아내가 빨리 자신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난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어 모습을 한 헬기들이 사방에서 공격해왔다.  멀리서 AT-6같은 대전차 유도미사일을 쏘아도 될텐데 중국군은 용맹성을 과시하려는 듯 접근해와서는 80밀리 로켓탄을 퍼부어대며 2A42 30밀리 기관포도 마구 쏘아댔다. 초구속도 초속 980미터의 막강한 위력을 가진 기관포가 비교적 얇은 K-1 전차의 상부장갑을 뚫었다.워낙 장갑이 튼튼한 러시아제 하복(Havoc) 공격헬기(Mi-28)들은 기총탄 몇 발 맞고는 꿈적도 안했는데 차 중령은 교묘히 헬기의 로터를 노려 3대를 격추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주변을 보니 자신의 부하들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전차가 헬기에 대적하기에는 너무 무력했다.

  "각 중대는 인원점검하라! 몇대 남았나? 가능한 남쪽으로는 기동하지 말라. 맞아도 우리가 맞는거야!"

  차 중령이 사격 중에도  자신의 부대를 지휘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차 중령의 물음에 연이어 각 중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중대장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고 소위가 보고하는 중대,심지어 중사가 보고하는 중대도 있었다. 아직은 12대의 전차가 남아있었다.

  ‘대규모 공격헬기부대의 공격을 받고도 아직도 12대나!’

  차 중령은 자신이 했던 시뮬레이션 게임을 생각했다.  게임에서 자신이 탄 전투기는 가상 적인 수십대의 헬기들을 파리 잡듯 하지 않았던가. 단 한대의 전투기가 아쉬워지는 판이었다. 정 대장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을 보니 또 한대의 K-1 전차가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하고 있었다.

  이제 제 3 전차대대는 거의 전멸하고 대부분의 중국군 헬기들은 기계화연대를 추격해갔다.  차 중령은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아군을 추격해가는 헬기들의 뒤에 기총을 퍼부었다. 그러나 적 헬기들은 거의 전멸한 차 중령의 대대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무시하고 남쪽으로 날아가고 곧이어 남쪽 산 너머에서 연이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대대장님! 남쪽에는 부상자들을 가득 실은 105 기계화연대가…"

  포수인 박 중사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헬멧의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차 중령도 경악했다.인원면에선 더 많으나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부대가 압도적인 화력의 공격헬기사단의 공격을 받는 것이었다. 차 중령은 해치를 주먹으로 치며 신음성을 흘렸다. 아군이 살육 당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갑자기 남쪽에서 들리던 폭발음이 전투기의 폭음으로 바뀌었다. 아군 전투기가 도착한 것이다. 편대는 막강한 중국공군기들을 피해 저공비행을 하여 늦게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중국군 헬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허둥지둥 북쪽으로 도망쳐오는 중국군 헬기들을 이 중령이 볼 수 있었는데  곧이어 나타난 F-16의 사이드와인더와 기관포 공격에 연달아 추락해갔다.

  차 중령이 남은 전차를 지휘하여 와우동 고개를 넘었다. 지리를 살펴 남은 전차를 적 기갑부대에  대비한 방어배치를 하고 나서 남쪽 산길을 살피니 사방에 파괴된 보병전투차와 한국군의 시체들, 그리고 추락하여 파괴당한 중국군 헬기들의 잔해가 널려있었다. 염려대로 역시 전투기들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남쪽에 보이는 선천시가는 중국군의 포화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피난가는 민간인 행렬도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경의선 철길과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차 중령은 왜 그럴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F-16 전투기들은 헬기들을 전멸시키자  산을 넘어 중국군 기갑부대를 향했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며 쳐내려오던 중국군 기갑부대는 하늘로부터의 불벼락을 맞아야했다.대지공격에 막강한 위력을 나타내는 F-16 전투기들이 대공무기가 별로 없는 중국군 전차들을 하나씩 파괴해갔다.이 중령이 산 위에서 보니 중국군의 전차들은 대공사격도 못한채 허둥지둥 흩어지고 있었다. 제 3 전차대대의 잔존 승무원들이 해치 위로 몸을 내밀어 구경하더니 함성을 질러댔다.

  러시아제 30 밀리 2연장 자주대공포인 ZSU-30-2가 움직이며 대공사격을 가했으나 저공침투한 F-16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자주대공포마저 파괴되자 중국 장갑집단군은 대책없이 파괴되어 갔다. 차 중령도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전쟁은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어요.  승자든 패자든,  살아남은 자든 죽은 자든 모두 비참해지죠. 전쟁을 정치의 수단, 또는 적에 대한 이쪽 정치의 강요로 생각지 말아야 하고,  군대는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것만이 이상적이죠. 전쟁은 게임이 아녀요.’

  1999. 11. 17  06:10  평안남도, 남포항

  통일해군 서해함대의 기항지인 남포항에 새벽부터 비상이 걸렸다. 통일참모본부의 훈령에 의하면, 신의주지역에 중국군이 월경 침공하여 아군과 교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제주도가 공격을 받고 있으니, 압록강 부근 해역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교전이면 교전이지 교전 추정은 또 뭔가!"

  서해함대 사령관인 김 종순 중장이 투덜거렸다.어차피 대부분의 함대 소속 군함들은 02시부터 전투초계중이었다.  이들을 집결시켜 압록강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서해상의 초계를 강화하느냐를 판단해야하는데 초계기들로부터 들어온 정보로는 서해상에 중국해군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보고이고 보면, 압록강쪽으로 가서 함포사격으로 아군 지상군을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관이 대형스크린에 서해 북쪽의 해도를 확대한 영상을 비췄다.중국 다이렌에는 중국해군의 몇몇  구축함들이 기항하고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신의주해역에 나온 중국해군은 미사일구축함 2척 등 규모는 얼마되지 않았다. 물론 이 해역에는 가장 먼저 도착한 아군의 미사일구축함 대전함도 있었다.  단지 중국 해군의 잠수함들이 문제였는데 얕은 서해 바다에서는 잠수함의 발견이 쉬워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집결지는 북위 39도 32분 동경 124도 30분 정도가 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 중장이 살펴보니 그곳은 평안북도 철산군 남쪽에 몇 개의 섬이 있는 얕은 해역이었다. 신의주 서남방 40 km정도에 있는 그곳은 아군함대가 집결하기에도, 지상군을 지원하기에도 좋은 위치였다.

  "전 함대 집결토록 연락해.  참, 충북함은 계속 초계임무를 수행하도록 내버려 둬. 혹시 모르니깐.  그리고 대전함은 현 위치에 대기시키도록!"

  "옛! 연락하겠습니다."

  김 중장은 충북함에 대해 생각했다. 외국에선 프리깃함으로 분류되는 한국해군의 미사일구축함, 함령이 50년이 넘은 고물이었지만 그래도 인민군의 여느 함정보다도 배수량이 크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 전자전용 장비와 무기체계가 고도화되어 인민군이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서해함대의 기함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대공, 대함, 대공전에서 통일 서해함대 최강의 함인 이 함정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중국해군의 도발에 대비하여 서해상을 계속 초계하도록 두기로 했다.

  자신은 동급의 전북함에 타기로 결정했다.충북함과 같은 미군이 1945년경에 취역한 낡아빠진 기어링급 구축함이었지만, 1998 년의 대대적인 개수를 거쳐 대공미사일도 탑재한 막강한 함이 되었다.  인민군 출신인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령관은 통신체계가 잘된 함정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고 생존성이 높은 함정이기때문에 자신이 그 함정에 승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신의 비겁함을 부하들이 눈치챌까 두려웠다.

  창문을 열고 동트기 전의 항구를 살펴보았다. 벌써 초겨울의 북녘 하늘엔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각 함정들이 불을 밝히고 출동준비에 부산한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전쟁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11. 17  06:40  신의주 서남방 50km 해역

  한국군으로부터 배속받은 구식 초계기 P-3C 오라이언들이  함대 선두로 날았다. 바로 뒤에는 한국 구축함에서 발진한 대잠헬기 4 대가 따르며, 있을지도 모를 바다 속의 위협에 대비했다.  중국의 영해에 가까운 해역이라  중국 공격기들의 공습에 대비한 대공진형으로 함대를 편성해 전진했다. 동쪽 수평선 섬 사이로 뜨는 일출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전쟁통에도 불구하고 고깃배 세 척이 이른 아침부터 조업이 한참이었다.  아니, 밤새 어로작업을 하고 이제야 항구로 돌아가려고 그물을 걷는 모습이라고 김 중장은 생각했다. 어렸을 적 바닷가에서 동무들과 놀던 기억이 새로왔다. 바닷가에서 놀다가 지나가는 배를 보며 손을 흔들었지만 배는 아이들을 못본 척 지나갔었다. 그게 안타까와서 김 중장이 승선 중에는 꼭 망원경으로 해안에 아이들이 있나 살피고,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 기적을 크게 울려주곤 했었다.

  북진할수록 전파방해의 강도가 강해졌다. 아니, 강해진다고 초계기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함대는 완벽한 전파관제를 하고 함정끼리의 연락은 점멸등으로만 하고 있었다. 목표해역까지 5마일, 20노트의 속도로는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가면서 소형 경비정들까지 함대에 합류해왔다.  2척의 울산급 프리게이트함, 3척의 포항급 코르벳함,기타 30여척의 초계정과 경비정들이 이번 작전에 참가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이는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어서 함대운용에 애를 먹어야했다.

  김 중장으로서 속상한 것은 한국 해군의 신형구축함은 모두 남해함대와 동해함대로 빼돌려 자기 휘하엔 한 척도 없다는 것이었다.중국은 해군이 상대적으로 낙후했으므로  중국의 위협에 대비한 서해함대는 구식 미제 기어링급이나 알렌 섬너급의 구축함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이는 인민군 수중에 비싼 한국형 구축함을 맡기지 않으려는 한국군의 술책으로 보였다.

  김 중장은 중국의 해군전술을 생각했다.  연안해군에서 대양해군으로 발돋움한 중국해군은 내전과 대만 침공을 계기로 전술과 무기체계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고 생각했다. 미 지상군의 공륙전을 빼다박은 항공기 운용기술은 배울만했다.  그리고 중국의 잠수함들은 특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재래식 잠수함 100여척뿐만 아니라 핵잠수함도 10여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김 중장은 불현듯 핵미사일이 생각나서 몸을 떨었다.

  ‘중국 잠수함에서 핵어뢰 한발만 발사하면 함대 전멸…’

  이런 생각이 들자 함대를 더 넓게 분산할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대잠초계망을 넓히다가는 적 잠수함이 함대 중간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날엔 함대에 치명상을 입게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핵에 대한 우려는 떨쳐버렸다.

  ‘중국은 핵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11. 17  07:00  개성, 통일참모본부

  "중국은 핵을 사용하지는 않을겁니다."

  "당연하죠. 통상전력만으로도 우리의 몇배인데…"

  인민군 장성의 말에 양 중장이 가볍게 응수했다. 참모본부 최고의 고민은 중국이 혹시나 핵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였는데,  대부분의 참모들과 군사전문가, 또는 정치학자들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중국이 먼저 침공한 경우, 또는 최소한 중국 국경의 일부가 침공당한 경우라도 중국은 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북경을 점령할 정도가 된다면,그래도 중국이 핵을 쓰지 않을까요?"

  토론을 지켜보던 이 차수가 미소를 지었다. 젊은 사람이라 패기가 있다고 양 중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니, 남조선의 자유분방함이 저런 사나이의 기백을 키워준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의 젊은이들은 너무 패기가 없어… 하고 이 종식 차수는 자신의 젊은 날들을 떠올렸다.

  조국해방전쟁 직전에 의용군으로 소집되어  군사훈련을 훈련받던 일, 치열했던 전쟁,미군 비행기들의 잔인한 폭격,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했던 일들… 그러나 요즘의 공화국 젊은이들은 사회주의에 안주하고, 최근의 통일과정에서는 남조선에 대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기백을 잃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 문제는  우리가 일단 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난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우선 적의 위치와 규모부터… 제주도는 어떻게 되었소?"

  이 종식 차수가 의장답게 급박한 문제를 제기했다.

  "중국 해병대가 북제주항에 상륙하여 현재 치열하게 교전중이라고 합니다. 제 2함대는 아직 제주해역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제주 상공에서는 현재 공중전이 치열하답니다. 적기 25기 격추에 아군기 피해 17기 입니다."

  양 중장이 종합하여 보고했다. 아직 지켜볼 일이었다.

  11. 17  07:10  신의주 서남방 40km 해상, 전북함

  "초계기로부터 보고, 추정 적 잠수함 발견!"

  대잠전 사관이 적 잠수함의 위치를 해도상에 표시하며 보고했다.전북함의 함장인 장 태석 중령이 해도를 보니 철산군 가도의 부속 섬이었는데 섬 뒤쪽의 수심은 50m에 불과했다.

  "아니, 이런 수심에 어떻게 잠수함이?"

  "초계기로부터의 육안발견 보고입니다.  오라이언이 대잠폭뢰를 투하할 수 있도록 교전명령을 내려 주십시요. 대잠경보 발령!"

  대잠사관이 냉철한 어조로 물은 다음 함대에 비상을 걸었다.  함장이 함대사령관의 눈치를 보았다. 김 중장도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당연히 공격해야합니다. 영해 안쪽입니다. 잠수함은 우리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 중령이 함대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김 중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전쟁이 일어난게 확인이 안되었는데 적 잠수함이라니, 자신은 공격명령을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초계기로부터 보고, 적 잠수함 이동중! 음파 탐지했습니다. 함종 파악! 밍급으로 분류됐습니다."

  무선병이 서둘러 보고했다. 밍급은 잠수배수량 2100톤급으로, 70년대에 취역한 구식의 소형 재래식 잠수함이지만,  현대화 프로그램에 따라 최신의 전자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의 공식 제식명은 035식 잠수함으로, 9척이 동해함대(한국에서 보면 서해)에 소속되어 있다.

  "아! 잠수함에서 전파 발사!"

  무선병에 이어 전자전 사관이 고개를 돌려 사령관을 채근했다.  적이 만약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  미사일 요격체계가 허술한 함대 입장에서는 큰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잠수함의 전파는 함대를 미사일로 공격하기 위한 레이더파일 수도 있고, 자기편에 함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연락용 주파수대일 수도 있었다. 양쪽 모두 함대에는 위험했다.  무선병은 잠수함이 발신한 전파가 연락용 주파수라는 것을 알았으나 일부러 보고하지 않았다.

  "공격을 허가한다."

  김 중장의 일성이 터져나왔다.

  "공격하라!"

  대잠사관이 함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초계기에 연락했다.

  "초계기에서 어뢰발사, 현재 수중항주중! 잠수함은 3-2-5로 도주중… 어뢰와의 거리 600…, 명중합니다!"

  무선병이 야구중계하듯이 보고했다.  잠수함이 함대의 소너에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전북함의 대잠팀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 명중!"

  이번에는 무선병의 보고보다 소나 담당 하사관의 보고가 빨랐다.

  "초계기에서 보고, 적 잠수함에 어뢰 명중, 해상에 부유물 다수,  기름띠 누출! 확실하게 명중한 것으로 확인!"

  무선병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추가 보고를 했다. 첫 전투에서의 승리는 뭔가 좋은 것을 예고하는듯 했다.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승무원들의 사기가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김 중장은 생각했다. 잘 모르는 상대와의 첫 전투, 특히 그것도 강한 것으로 생각되던 적이 별거 아니란 것을 부하들이 알게된 것은  다음 전투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잠초계를 강화하라. 무선병은 통일참모본부에 보고를!"

  김 중장은 내해 깊숙히까지 중국 해군의 잠수함이 왔다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어차피 현재 우리 해군의 능력으로는 중국 잠수함들의 영해 침범을 사전에 막을 능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전략목표인 군항 등에 대한 방어와 함대 방어, 그리고 중요 물자수송에 투입되는 상선들을 보호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아까 잠수함에서 발사한 전파는 뭔가?"

  김 중장이 궁금해서 물었다. 워낙 경황중이어서 초계기에서도 보고를 못한 것이다.

  "해주 상공의 E-2C에서 연락입니다. 신의주 상공에 추정 적 항공기 1개 사단, 침로 2-3-0! 현재 아군 요격부대 출동, 접전 직전!"

  또다른 무선병의 보고에 모두들 놀랐다.  그 침로의 연장선에는 바로 자기들 함대가 놓여있었다. 40 km라면 초음속기의 속도로는 2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아니,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기 충분한 거리이기도 했다.함대의 위치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만 있으면.

  "대공경계 발령! 모든 함대 반전, 분산, 대공 요격태세를 갖추라!"

  김 중장이 분노했다. 중국은 잠수함 전대를 서해 연안에 침투시켜 무음잠행케하여 아군 함대의 위치를 찾은 것이었다.잠수함의 보고와 전북함의 무선을 도청한 적은 쉽게 함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의주지역의 이상사태에 대해 아군 해군이 집결하여 접근할 것이라는 것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방어력이 취약한 함대 입장에서는 미리 준비된 함정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했다.  전북함이 급히 방향을 틀었다. 다른 함정들도 좌우로 돌려 오던 방향으로 침로를 바꿨다.

  "대전함에서의 보고입니다. 적 항공부대 접근,  적 미사일구축함 2척 접근중!"

  무선병들의 보고가 연이었다.

  "대전함은 선제 공격하라! 대전함이 위험해, 공격 후 그 해역을 탈출하도록!"

  김 중장이 급박하게 명령했다.함대의 모든 대공미사일 발사기와 대공포가 북동쪽을 향해 돌아갔다.

  11. 17  07:20  신의주 서남방 30km, 대전함

  대전함의 함장 이 완호 중령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다. 신의주에 대한 대규모의 상륙전이 예상되어  적 상륙부대를 습격하기 위한  위치를 잡기 위해 적의 공격권에 너무 많이 들어서 버린 것이었다.지금은 적의 공대함, 함대함, 지대함의 모든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직 발견 못한 적 잠수함이 자신의 배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난감해졌다.

  함대의 기함에서 급전이 날아왔다.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이었다. 레이다에는 적기들이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이 중령은 잠시 생각했다.적은 자신의 함정보다는 함대를 노릴 것이므로 적기들이 조금 더 가까이 온 후에 대공미사일을 발사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 180도. 전속반전!"

  함장의 명령에 따라 함이 급반전했다. 대전함은 점점 속도를 내어 중국 구축함이 있는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거리 15km, 적 위치 변함 없습니다. 멈췄습니다!"

  해상레이더를 담담한 준위가 외쳤다. 여기서 적은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것인가 이 중령이 자문했다.  적 구축함에 접근할수록 공대함미사일에 대한 위협을 줄이는 대신, 적함의 함대함 미사일에 공격당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이 중령은 다시 한번 중국 구축함들의 무기체계를 검토했다.

  ‘루다급 구축함 지난, 만재배수량 3670톤,  HY-2 장거리 대함 미사일에 YJ-1 잉지(鷹擊) 중거리 대함 미사일, 어뢰, 대공방어는 2연장 25밀리 대공포 4문에 탑재 헬기는 하르빈 Z-9A…  같은 급 구축함 카이펭, 배수량 3300톤, 지난호와 대동소이…  탑재헬기 대신 크로타일 대공미사일… 지난은 대함, 카이펭은 대공이라… 서로 보완관계로군.’

  "대공미사일은 적함의 예상되는 대함미사일 공격에 대비하라. 적함과의 거리는?"

  "지난 12 km, 카이펭 14 km입니다. 아, 목표들 반대쪽으로 급속이동! 현재 20노트로 계속 가속중입니다. 도주 중입니다!"

  적은 아무래도 공대함미사일로 공격할 모양이라고  이 중령은 생각했다.해상전에서는 아무래도 대전함이 유리하다고 중국해군 지휘부에서도 판단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속 추격하라. 적기의 거리는?"

  "현재 북동쪽 25 km입니다. 고도 2천미터, 현재 음속돌파!"

  "하픈 4기 발사! 각 목표마다 2기씩 발사하라. 발사와 동시에 ECM 실시!"

  함장의 명령에 따라 함 중앙에 있는 8연장 미사일발사기에서 하픈 함대함 미사일이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 하얀 꼬리를 물고 날아올랐다가 방향을 틀어 적함을 향해 날아가는 하픈미사일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적함은 이 미사일을 피하지 못할것이라고 이 중령은 단언했다.

  대전함(DD-918)은 충북함과 같이 기어링급 구축함으로서 1945년에 진수되어 함령이 50년을 훨씬 넘어가는 구식 함정이었다. 통일해군에서는 이런 대형함을 퇴역시키기 아까와서 엔진을 교체하고 탑재 병장을 대폭 교체하여 현대 해상전에 적합한 수준까지 개조했다.  그러나 함령이 지나치게 많아 잦은 고장을 일으켰고 완벽한 수준의 구축함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함이었다. 그러나 전년도의 개조로 인해 중국의 미사일 구축함보다는 해상전에서 유리한 입장이었다.

  "대공미사일 연속발사! 3기를 제외한 전 미사일을 발사하라."

  대함미사일의 발사를 확인한 함장이 명령했다. 적기들은 틀림없이 함대를 노릴 것이므로 적의 공격 전에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아군함대에 대한 피해를 줄이자는 생각이었다. 함수의 수직발사기에서 12기의 시스패로 대공미사일이 연속적으로 발사되었다. 시 스패로 대공미사일은 16기가 1조로 되어있는 수직발사 미사일시스팀인데 발사기 하나는 미사일 재장전을 위한 기중기가 탑재되어 있어 실제로 대전함은 1회에 최대 15기의 함대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었다.

  "적기 미사일 발사, 현재 50기.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사일담당 하사관이 비명을 질렀다.  함장은 이 모든 미사일이 전부 대전함을 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틀림없이 대전함을 노린 미사일도 있을 것이다!

  "하픈 목표 2 km 남았습니다. 아, 적함에서 채프발사. 적함의 위치가 레이더에서 흐려 지고 있습니다. 카이펭에서 미사일 발사! 하픈에 접근합니다."

  "좋았어, 이제 크로타일로는 하픈을 잡지 못해! 하픈 2기 추가발사하라."

  함장의 명령에 함이 진동하며 대함미사일이 추가로 발사되었다. 적함을 일단 따라 잡으면 항공기들이 발사한 공대함미사일의 방패막이 되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공대함미사일 접근, 0-5-5, 현재 200기, 그중 12기는 본함을 향하고 있습니다! 거리 12 km!"

  레이더 담담하사관이 울부짓듯 외쳤다. 함장은 만약 함이 살아돌아간다면 저 겁쟁이 대공레이더 담당하사관을 갈아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프 발사"

  "카이펭 명중! 2기 모두 맞았습니다. 지난 명중! 한 발은 빗나갔습니다. 적 미사일 1기 접근중. 6km!"

  해상레이더를 담당한 준위가 외쳤다. 이제 해상의 위협은 제거되었으니 상공의 위협에만 대비하면 된다고 함장은 생각했다.채프로켓이 발사되어 함 주위는 수많은 알미늄 박판으로 뒤덮였다.

  "우현 미사일 접근! 지대함미사일입니다! 거리 3km!"

  항해장교가 망원경을 들고 외쳤다.  함장이 급히 우현쪽을 보니 수평선 위에 까만 물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지대함미사일이었다.이것들은 저공으로 날아와서 보이기 직전까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틱스형 지대함미사일이었다.

  "대공방어! 우현으로 오는 놈들부터 요격하라!"

  함미에 있는 20 mm CIWS가 불을 뿜었다. 가장 최근에 장비한 이 레이더와 연계된 대공포가 제 위력을 내줄지가 함장으로선 불안했다.그리고 함에서 발사한 채프 때문에 레이더의 기능이 떨어져있는 상태여서 과연 R2D2로 불리는 이 짱구같이 머리가 큰 팔랑크스 벌컨 개틀링포가  기능을 제대로 다해줄지 의문이었다. 대공포와 함께 단장속사포도 미사일요격에 가세했다.  수 십 발의 포탄이 미사일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공대함 미사일 11기 급속 접근, 거리 5 km!"

  "대공미사일 발사! 공대함 미사일만 요격하라.  채프 2기 추가 발사! 좌현 90도 급선회! 왼쪽에 보이는 섬 뒤로 숨어!"

  함장은 함에 배치된 모든 무기를 써버릴 생각이었다. 이 해역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곤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현재로서 대전함은 공대함, 지대함, 함대함 미사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적 잠수함까지 가세한다면… 아니,  적 잠수함은 있다고 해도 본함을 공격할 필요도 없겠지…’

  "함대함미사일 2km까지 접근. 아!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빗나갑니다."

  레이더 담당 하사관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어차피 구형인 중국의 응격 함대함 미사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함장은 생각했다. 문제는 공대함미사일이었다.  비교적 명중율이 높은데다가 채프에 얼마나 속아줄지가 불투명했다. 게다가 커다란 함대공 미사일에는 잘 맞지 않을 것이분명했다.

  대전함에서 그 전에 발사한 대공미사일에 중국군의 항공기 7 대가 명중했다. 12기를 발사했으니 반타작은 한 셈이었다. 순발력이 별로 없는 함대공미사일로서는 괜찮은 전과였다. 하지만 적기는 구형 미그-19기의 개량형인 싸구려 J-5 공격기에 불과했다. 이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소속인데 총 600기의 해군 전투기 중에서도 현대 공중전에 적응하기 어려워지자 주로 대함미사일 발사체로서만 활동했다.

  대전함이 좌로 급선회를 하며 연이어 채프로켓을 발사했다. 평소같으면 금방 도착할 듯하던 작은 섬이 너무나 멀어보였다. 대전함은 최고속도로 항진했다.

  "공대함 미사일 쇄도!! 10기 접근! 거리 1000!"

  대공레이더 하사관이 거의 비명을 질러댔다. 상황판단과 명령 내리기에 바쁜 함장이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디코이 사출!"

  함 전체를 진동시키며 레이더 전파와 다량의 적외선을 발산하는 미끼로켓이 발사되었다. 채프가 대량의 알미늄 박지나 유리섬유에 알미늄을 코팅하여 레이더파를 반사하는  수동적인 미사일 방어 도구라면 디코이 로켓은 레이더파와 적외선을 강하게 내는 적극적인 방어수단이다. 드디어 대전함이 섬 어귀에 도착했지만  중국군 미사일도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하였다. CIWS가 미친듯이 불을 뿜었다.  함장이 돌진해오는 미사일을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좌현 미사일 접근!"

  11. 17  07:40  전북함

  "대전함으로부터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통신사관이 보고하자 함대사령관이 물었다.

  "전파관제중이었나?"

  "아닙니다. 적 공대함미사일의 요격을 위해 레이더를 가동중이었습니다. 적 미사일 접근중, 거리 6700."

  함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함대사령관 김 중장이 잠시 창밖을 보더니 명령을 내렸다.

  "섬들 사이에 숨어. 적기들은 다 돌아갔나?"

  "미사일 발사 후 돌아갔다는 보고입니다. 아군 요격기들은 적기와 교전하지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미사일은 엑조세의 중국형으로 추정됩니다만, 현재는 액티브 호밍을 하지 않고 관성유도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섬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방어할 수 있습니다. 섬에 접근중입니다."

  통신사관에 이어 함장이 종합해서 보고했다. 함대사령관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자꾸 서쪽 하늘을 쳐다 보곤 다시 섬들을 보았다. 먼저 선발대로 도착한 고속경비정과 포항급 코르벳함이  철산군 가도와 대화도 중간의 섬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두 척 모두 섬 사이의 해역에 들어가자 마자 섬광을 발하며 폭발해버렸다.

  "목표해역에 기뢰 다수! 앗! 부천함과 백구 53호 피침!"

  소나 담당 하사관이 뒤늦게 기뢰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부천함과 경비정은 앞서 갔음에도 소나의 성능이 떨어져 기뢰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격침되고 말았다.배수량 1,220톤의 부천함이 두 조각이 되어 바다 속으로 침몰해 들어갔다. 해군 현대화계획에 따라 1990년에 건조된 신형 코르벳함인 부천함을 잃자 함대사령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미사일 접근! 거리 3200!"

  "초계기를 섬 사이로 보내 적 잠수함을 찾아! 소해정 선두,모두 일렬 종대로! 레이더 기구 발사!"

  김 중장은 미사일이 접근해오자 함대에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각오하고 연이어 명령을 발했다. 점멸등과 수기가 바삐 다른 함정들에 연락을 보내자 함대는 순식간에 일렬종대 대형을 이뤄 섬 사이로 들어갔다. 함대에 두척뿐인 소형 군산급 소해정(MSC-268/219)들이 선두에 나서서 기뢰가 없는쪽으로 함대를 유도했다.

  북쪽 하늘에서는 수많은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프랑스제 엑조세를 복사한 것과 같은 비어(飛魚) 미사일들이  수면을 헤치듯 낮게 떠서 섬쪽을 향했다. 그러나 이미 함대는 섬 사이로 숨어들어가서 목표를 찾지 못하자 레이더에 크게 비친 섬이나 채프의 구름, 또는 레이다발사체인 미끼로켓을 향해 날아가 헛되이 작렬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이 예상한 그대로이며 해전은 중국 잠수함들을 만나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잠수함 세 척을 발견했습니다. 본 함에서 3-2-0, 3-9-5, 0-5-7에 각 한 척, 각기 거리 1500에서 1700, 심도 20미터!"

  "현재 이 해역에 아군 잠수함의 활동 보고된 바 없음!"

  대함미사일을 피하고 기뢰를 피하며 함대가 섬 사이를 빠져나오기 직전에 초계기의 보고를 받은 대잠전사관에 이어 통신사관이 연이어 보고했다. 함대사령관은 먼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이 섬들 사이의 평균수심은 40미터가 채되지 않았다. 한강이나 대동강에 잠수함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기사용 허가, 각함 공격하라!"

  함대에서 아스록 대잠로켓과 어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북함은 적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인 35노트까지 가속했다.이 속도면 함에 탑재한 소나가 기능을 상실할 정도였지만 적 잠수함의  위치파악은 초계기에 의존해도 충분했다. 당장은 어뢰로부터의 회피가 중요했다.  모든 함대가 예상되는 적의 어뢰공격에 대한 회피행동을 개시하며 중국 잠수함을 공격했다.

  "전방을 향해 포 사격 개시! 기뢰부설 잠수함들입니다. 제독님."

  갑자기 장 중령이 외쳤다. 잠수함의 심도가 워낙 낮아 함에 탑재한 2기의 127 밀리(54구경, 5인치) Mk-45 단장포가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격을 명령한 것이다.  Mk-45는 매분 20발의 발사속도를 갖는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127밀리 단장포뿐 아니라 CIWS까지 사격에 가세했다.  전북함에서 발사한 포탄으로 바다 표면이 온통 하얗게 튀었다.

  미리 해역에 대기했던 중국 잠수함들이었지만  워낙 빠른 서해함대의 대응에 놀라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침몰해갔다.  이 잠수함들은 대함 미사일을 갖추지 않고 어뢰공격과 기뢰부설을 전문으로 하는 통상형 잠수함이었는데 섬 사이의 기뢰부설을 마치고 섬들을 빠져나오는 입구에서 서해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함이 공격하기 전에 미리 발견한 덕에 위기는 넘겼지만 그래도 중국 잠수함과의 접전은 함대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장 중령은 한국해군의 209급 잠수함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다.

  초계기와 탑재헬기들은 갑작스러운 아군 함대의 포 사격에 놀라 기수를 올렸다. 대잠전은 적 잠수함이 발산하는 음파를 파악하여 적의 위치를 잡아 공격해야 되는데 이처럼  해상에 포를 발사하여 잠수함을 공격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전북함의 탑재헬기인 영국제 알루트 III이 음파탐지를 포기하고 자기변화탐지기(MAD)로만 적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초계기 오라이언이 투하한 소너부이에 잠수함이 발견되자 어뢰를 발사했다.첫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사한 어뢰가 잠수함에 명중하여 바다 표면이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

  잠시 후 초계기의 어뢰공격에 1척, 전북함의 127밀리 단장속사포에 1척, 울산급 프리깃함인 서울함의 Mk-46 어뢰공격에 1척 등으로 해서 섬 주변 해역의 잠수함 3척은 모두 침몰시켰다. 김 중장은 국군 해군의 대잠능력에 놀랐다. 인민군 해군은 잠수함에 많이 의존하고, 대형함이 없이 어뢰정이나 미사일고속정 등만 유지했기 때문에 대잠능력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초계기로부터 보고,  0-1-0, 거리 5,000에서 7,000에 적 잠수함 5척 발견!"

  통신병이 외치자 함장인 장 중령이 적의 연속된  공격에 대응하여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방향으로 아스록 대잠미사일 발사! 감속 20노트로, 침로 0-1-0"

  김 중장이 미처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전황이 시급하여 장 중령이 함장의 권한으로써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 중장은 비로서 함대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냈다.  함대 소속의 대잠 헬리콥터들이 목표해역으로 비행해갔다.

  "목표 1, 0-1-0, 거리 5500, 20노트의 속도로 2-2-5로 진행.  잠망경 심도, 발사! 목표 2, 0-1-5, 거리…"

  대잠전(ASW)사관이 각 공격목표에 대한 해석치를 내며 공격을 지휘했다. 함미의 8연장 아스록 대잠미사일발사기에서 로켓이 연속발사되었다. 기어링급 구축함들은 원래 Mk-46 대잠어뢰발사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해군 증강계획에 따라 차차 아스록 대잠로켓을 갖추게 되었다.

  해역의 심도가 낮아서인지,아니면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서인지 어쨋든 중국의 잠수함들은 모두 잠망경 심도에 머물고 있었다.마지막 8번째 대잠 로켓을 막 발사한 순간 전북함의 함수가 섬광에 쌓이더니 충격파가 전해져왔다. 폭발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전북함의 감속이 너무 늦어져 아직까지 소나기능이 회복되지 못해 미처 기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김 중장은 충격에 정신이 없었다. 겨우 일어나 상황을 보니 대부분의 함교 요원들은 벌써 자신의 전투위치에 있었다.

  "기뢰에 피함됐습니다. 함수가 침수 중! 화재발생!"

  "침몰한 적 잠수함 주변에도 기뢰가 있었습니다. 속았습니다!"

  대잠전사관이 분통을 터뜨렸다. 함대사령관 김 중장과 다른 사관들은 쓰러졌다가 바로 일어났지만 장 중령은 일어나지 못했다.충격파에 쓸려 5 미터를 날아갔는데 머리를 벽에 부딪혀 그만 뇌진탕으로 쓰러진 것이다.

  "함장님 전사! 의무병!"

  이제서야 함장의 이상을 깨달은 항해사관이 비명을 질렀다.그러나 의무병을 부르기에는 함이 너무 위태했다.  만재배수량 3,470톤의 전북함은 함수부터 침몰해가기 시작했다.

  아스록 대잠미사일은 전북함으로부터 발사되어 약 5km를 날자 추진을 멈추고 탄두부분에서 낙하산이 펼쳐져 바다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착수한 다음 어뢰가 되어 목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중국잠수함은 너무 놀랐다. 설마 한국함대가 이렇게 빨리 대응해오리라고는 예상 못한 것이다. 중국잠수함들도 서둘러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수한지 너무 오래되어 핵탑재 전략잠수함의 역할을 하기 부적합하다는 중국해군 지휘부의 판단에 따라 최근부터는 공격형잠수함으로 역할이 바뀐 한급 핵잠수함들이었다.

  중국 한급 잠수함 405함은 목표에 대한 데이터를 최종 입력하고 잉지(응격 : 鷹擊)레이더 호밍 미사일을 막 발사하려는 순간에 전북함이 발사한 어뢰가 돌진해왔다. 405함의 함장은 미사일 발사를 포기하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이 해역의 심도는 너무 낮았다. 어쨋든 최고속도를 명했지만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잠수함은 어뢰의 속도보다는 훨씬 느려서 점점 거리가 좁혀져왔다. 함장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부상! 허수아비 2기 발사!"

  즉시 부상을 시도하고  어뢰 회피용 소음발생장치를 발사했으나 이미 늦었다.  어뢰는 도망가는 잠수함의 스크루 부분에 명중해 함미가 산산조각이 났다. 불행한 중국의 5천톤급 핵잠수함은 공격도 못해보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다른 네 척의 중국 잠수함도 운명은 마찬가지였다.  한 척은 간신히 전북함의 어뢰를 피했지만 해역 상공에서 선회중인 대잠헬기의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디핑소나를 바다 속에 넣고 정확한 잠수함의 위치를 찾고 있던 전혀 군용헬기 같지 않은 모습을 갖춘 MD-500D 헬기가 필사적으로 도주중인 잠수함에 앞부분이 납작한 Mk-46 어뢰를 발사하여 잠수함의 기능을 상실시켰다.옆구리에 어뢰를 맞고도 필사적으로 부상을 시도했으나 서울함의 76밀리 단장포가 불을 뿜었다.

  구명정 안에서 함대 사령관 김 중장은 침몰해가는 전북함을 바라보았다. 기습당한 함대치고는 잘 싸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함장인 장 중령의 시신을 수습치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천천히 일어서서 함미만 남은 전북함에 거수경례를 올렸다.  다른 사관들과 수병들도 같이 거수 경례를 했다.잘 싸워준 전북함과 함장 장 중령을 생각했으며 다가올 싸움은 더 치열할 것이란 걱정이 앞섰다.어쨋든 자신들은 승패를 떠나 살아 남은자들이었다. 산 자는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 서울함이 승무원들의 구조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11. 17. 11:00  평안북도 선천, 와우동 고개

  전투기들이 한바탕 중국군 전차부대를 휩쓸고 돌아가자, 이번엔 한국군이 얻어맞을 차례였다. 다연장 로켓포의 포탄이 고개 근처 사방에 낙하하기 시작했다.  차 중령이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수많은 전차가 고개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저기 앞에 국도 위의 철교를 파괴시킬 수 있겠나?"

  차 중령이 포수인 박 중사에게 묻자 박 중사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이미 군대밥 10년에 그 정도의 생각은 있는 사람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거리는 2200미터, 이미 확인했습니다."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철길과 국도가 와우동 고개 아래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었는데 철교는 국도를 가로질러 위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철교를 파괴하면 국도까지 막혀서 일시라도 전차부대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좋다. 전 전차, 철교에 대해 집중 사격!"

  차 중령이 명령을 내리자 제 11기갑사단의 마지막 남은 6대의 전차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철교 아래 국도를 통해 중국군 전차들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3발의 포탄이 철교에 명중하자 철교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중국군 전차들은 철교의 잔해를 넘어 계속 접근해 오고있었다.

  이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차 중령 휘하의 전차들은 아군과 민간인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최후의 결전에 대비해서 전차와 포탄수를 점검하고 있는 중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선두의 중국전차 몇 대가 동시에 폭발한 것이다. 중국군 전차부대의 전진이 갑자기 멎었고 차 중령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전방 1500 미터 정도의 길가 숲속에 인민군 군복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이 소형 대전차무기로 선두의 전차를 파괴한 것이다.뒤쪽의 전차에서 이들을 발견했는지 12.7 밀리 대공기총을 난사했다. 인민군들이 쓰러져갔다. 차 중령이 보기에 이들은 훈련이 덜된 부대같아 보였다.은폐가 부족하고 움직임이 활발치 못한 것으로 보아 신병들인지도 몰랐다. 갑자기 차 중령의 전차 뒤에 사륜구동차 한 대가 와서 정지했다.

  "동무는 뉘기요?"

차 중령이 놀라서 뒤돌아 보자 사륜구동차에는 중년의 군인이 타고 있었는데, 계급에 비해 어쩐지 나이가 너무 들어보였고 군인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혹시 인민군 부대가 근처에 있는지 기대에 부풀었다. 차 중령이 일단 경례를 하고 대답했다.

  "국군 제 11기갑사단 차 영진 중령입니다. 실례지만 대좌님의 소속은 어떻게 되십니까?"

  "기렇소? 내레 선천군 당위원장이며 노농적위대 선천지구 사령 홍 종규 대좌요. 수고가 많으시오."

  자신을 홍 대좌라고 밝힌 중년이 사륜구동차에서 내려 전차로 기어올라 왔다.  차 중령이 다시 망원경으로 보니 숲속의 인민군들은 거의 전멸하고 중국군 전차들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이번에는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홍 대좌도 망원경으로 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단도저격조래 죄 전멸했구만."

  차 중령이 눈이 커지며 홍 대좌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대좌님 부하들의 작전이었습니까? 정규군이 아니었군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패해서 이렇게 군복을 입으시다니…"

  차 중령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홍 대좌가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아니디오. 전쟁이 터졌으니끼니 우리도 이젠 군인 아니갔시요?  참, 동지가 정규군 중령이니끼니 우리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받아 주시구래. 이건 규정이야오."

  "아닙니다.  저는 계급도 낮고 패해서 부하들을 다 잃었으니 홍 대좌께서 당연히 저희까지 지휘해 주셔야죠."

  차 중령이 당황해서 홍 대좌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그러나 홍 대좌는 규정을 들먹이며 막무가내였다.  만약 자신이 지휘권을 행사할 경우 군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며 한사코 지휘권을 강요했다.

  "그럼 혹시 병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대전차무기는 충분합니까?  일단 저들을 물리칠지 후퇴할지 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홍 대좌가 차 중령을 혐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 중령이 당황하자 홍 대좌가 자신의 의무라는 듯 설명을 했다.

  "우리 35 예비연대는 병력은 3,500명이고 대전차무기는 분대마다 RPG-7이 두 개씩 있습네다. 길고 2개 대대의 교도대가 후퇴를 못해서 지금 저의 지휘를 받고 있습네다. 하지만 후퇴는 못합네다. 우리는 침략자로부터 고장을 지킬 뿐입네다."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만 17~45세 까지의 남자(여자는 17~30세)는 동원예비군격인 교도대에 편성되고, 46~60세 까지는 노농적위대에 소속된다.  노농적위대의 지휘관은 소속 직장의 당책임비서가, 부지휘관과 참모장은 사회안전부과장과 당군사부장이 당연직으로 맡는다.교도대는 해당지역 위수담당 정규군 군단장의 관할하에 있으며 장비도 정규군 보병사단의 80% 수준이다.

  "그걸로는 저 막강한 중국군 장갑집단군을 막지 못합니다. 일단 저들을 통과시키고 후속 보병부대나 보급부대를 공격하는게 어떻습니까?"

  홍 대좌가 불만스럽지만 지휘권자의 명령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갔습네다.  사단장님은 목숨을 아까와 하는 분이 아니니끼니 작전상 놈들을 통과시키겠습니다. 통신병! 떼놈 땅크들을 통과시키라우!"

  차 중령은 상당히 당황했다.  어떻게 자신이 이들의 사단장이란 말인가? 홍 대좌의 말로 미뤄볼 때 그는 중국군과 11 기갑사단의 전투를 지켜본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서는 불만에 가득찬 홍 대좌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연대장도 아니고 사단장인지 궁금해졌다. 나머지 인민군의 예비군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했다.차 중령이 홍 대좌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홍 대좌가 깜박 잊었다는 듯 설명을 했다.

  "선천지구 노농적위대는 전쟁이 터지면 자동적으로 제 35 예비연대가 됩네다. 그리고 지휘관은 당연히 중좌 이상의 현역군인이 맡게 되어 있으며 저는 참모장으로서 차 중령 동지를 보필하게 됩네다. 다른 명령이 있으시면 받갔습네다."

  홍 대좌가 정식으로 차 중령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차 중령은 이들을 중국 장갑집단군의 무자비한 학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홍 대좌의 요청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차 중령도 정식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지휘권을 받아들인다는 표시였다.

  "일단 매복한 저격조를 후퇴시키시오.  그리고 우리 전차들이 숨을만한 곳은 있겠습니까?"

  아무리 현역장교가 지휘하게 되어 있다지만  아무래도 상관을 부하로 둔다는 것은 껄끄러웠다. 나이도 20년 정도나 차이나지 않는가?

  "알갔습네다. 통신병 연락하라우! 저를 따라 오시디오."

  홍 대좌의 사륜구동차를 선두로 전차 6대가 따라갔다. 중국군은 한국군 전차들이 고개에서 지키고, 보병들이 계속 숲속에 매복해 있는줄 알고 전진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신중한 정찰을 거쳐 중국군 전차들이  차 중령의 전차들이 있던 고개를 점령하고 나서야 국군들이 모두 후퇴해버린 것을 알고 땅을 쳤으나 이미 늦었다.차 중령의 전차들은 자국을 모두 지우면서 후퇴하여 결코 이들을 찾지 못했다.

  중국군 전차들이 선천 시가에 진입했다.  상당한 정도의 저항을 예상한 중국군 전차들은 장갑정찰대를 앞세워 신중히 접근했는데 의외로 시내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다는 정찰대의 보고가 왔다. 선천 점령 보다는 통과가 우선인 장갑집단군은 소수의 병력만 주둔시키고 즉시 남하를 재개했다. 장갑집단군 외에도 2개의 집단군 병력이 따랐다. 긴 차량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11. 17  11:35  선천 남서쪽 3 km, 대목산

  홍 대좌의 사륜구동차는 중국 전차들의 관측을 피하며 쾌속 전진해갔다. 속도가 느린 국군 전차들로서는 그의 차량을 따라가기도 바빴다.몇 개의 간선도로를 가로지르고 산길을 오르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평안북도를 가로지르는 적유령산맥이 서해바다를 만나 끝나는 곳이  바로 대목산이다.  해발 349 미터로서 해안의 산 치고는 상당히 높은 편이며 산세가 매우 가파르다. 사륜구동차가 서자 홍 대좌가 내렸다.

  "다 왔습네다. 이곳이 지휘본붑네다. 지금 지휘관들이 대기하고 있으니끼니 신고를 받으시라우요."

  차 중령이 전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곳에 뭐가 있나 궁금해 하는데 홍 대좌가 덤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 중령이 부하들을 사주경계 시키고 따라 들어갔다.

  덤불 속은 의외로 컴컴했고 조금 걸어들어가자 방공호처럼 생긴 문이 있었는데 문 옆에 앳된 소년처럼 생긴 인민군 병사 두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의외로 전기불이 있었고 속은 상당히 깊었다.홍 대좌가 차 중령을 흘끗 보더니 설명을 해주었다. "이 대목산이래 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선천을 방위하기 위해 요새로 만들어졌습네다. 처음 보시갔디만 이 요새는 1개 사단이 1년 동안 독자적으로 전투할 수 있는 무기와 식량이 있습네다.  자, 여기가 지휘본붑네다."

  차 중령이 들어서자 기다리던 지휘관들이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나이들이 다양한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군 장교도 몇 명 보였다.  차 중령이 경례를 하고 모두 홍 대좌의 구령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차 중령 동지는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선천을 끝까지 방위하는 도중 우리 35 예비연대의 연대장이 되셨습네다. 현재 중앙과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전시법에 따라 현역군관 중 최고 계급의 차 중령님이 제 35 예비연대장 겸 철산군, 선천군, 귀성군 등 3개군을 합한 사단의 사령이 되셨습네다."

  차 중령은 또 한번 놀랐다.전쟁이 발발한지 하루도 안되어 이렇게 자발적으로 예비군을 조직하고,  사전에 이 정도까지 준비하는 북한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어떻게 된겁니까? 저는 남쪽 출신이라 잘 모르는데요."

  "1997년, 당의 지도로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서 의용군 조직의 개편이 있었습네다. 가까운 신의주시, 의주군, 용천군이 합해서 1개 사단이 되어 국경을 수호하고,  우리는 3개군이 합해 이들을 지원하게 되어 있습네다.신의주시와 그 부근은 아마도 떼놈들에게 점령이 되었을테니 이제 우리 3개군이 중국을 막는 최전선이 됩네다.아마 다른 군이나 시에서도 우리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입네다.  먼저 사단장 동지께 이 대목산 요새를 소개하갔습네다."

  스스로를 참모장으로 낮춘 늙은 대좌가 환등기를 켜더니 설명을 했다. 요새는 거미줄같은 동굴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곳곳에 포좌와 대공미사일 발사기가 있었다.차 중령은 이를 보면서 이 요새가 해군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북한이 미국과 한국의 상륙전에 대비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했다. 의외로 단단히 만들어져 있었고,  장기 고립상태에서도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연대 작전참모라며 자신을 소개한 젊은 소좌가 나서더니 대목산 주변의 현재 중국군 이동현황, 그리고 임시로 배속된 교도대들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모두 유격전에 입각하여 편성된 조직들로 이 지역 민간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작전과 병기 보유현황을 설명했다.  현재 휘하 부대들은 도로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차 중령은 고민했다.훈련과 장비가 빈약한 민간인들을 현대전에 동원할 경우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그러나 정규군에게만 이 전쟁을 맡길 경우 오래지않아 이 전쟁은 통일한국의 패배로 끝날 것은 당연하며, 동시에 독립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참모들과 지휘관들을 둘러보니 갑작스런 전쟁에 당황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지만 조국을 지킨다는 확고한 결의가 보였다.

  "좋습니다. 적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후손들이 중국어를 강제로 배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꼭 이길 수 있도록 싸워 나갑시다. 이만 회의는 마치고 저를 관측소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적의 침공을 조금이라도 늦춰야죠. 전투를 시작합시다."

  장교들이 서둘러 자신의 전투위치를 향해 달려갔다.

  11. 17  11:55  선천, 대목산 요새 관측소

  차 중령이 홍 대좌의 안내를 받아 승강기를 통해 산 꼭대기의 관측소에 도착했다.관측소에는 포병 관측장교와 대공지휘관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민간인 부대치고는 훈련상태나 기강은 좋아보였다.

  망원경을 통해 동쪽을 보니 경의선과 함께 고속도로가 남동쪽을 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엔 무수한 숫자의 중국제 전차와 보병전투차, 그리고 수많은 트럭 행렬이 보였다. 홍 대좌가 거들었다.

  "요새포는 막강합네다.  도로의 위치에 대한 자료는 이미 입력되었습네다.그리고 도로 주변에는 이미 2개 대대의 유격부대가 진지에 은폐해 있습네다. 기저 명령만 내려 주시라우요."

  차 중령이 망원경으로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인민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전투전까지는 철저히 위장하는 것은 인민군의 전투교범의 제 1항이었고,  이는 예비군격인 노농적위대에도 적용되어 있었다. 위장은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소, 공격하시오."

  차 중령은 인민군 민간인부대의 작전과 훈련상태를 보고 싶었다.과연 이들이 한국의 일반예비군처럼 형식적인 훈련만 했는지, 아니면 실전에서도 훌륭히 전투를 수행할지 궁금했다.

  155밀리 대구경의 요새포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도로 주변에서 불꽃이 튀었다.홍 대좌의 부대배치는 완벽해서 나무랄데가 없었다. 이 요새와 민간인부대들이 중국군 장갑집단군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동을 지연시킬 정도는 되어보였다.

  대목산 산그늘에 숨어있던 구 소련제 122밀리 다연장로켓포의 변형인 BM-11 다연장로켓포대가 불을 뿜었다.  15발씩 두 번에 나눠 사격할 수 있는 이 다연장포는 보다 대구경의 다연장포가 북한에서 생산되자 일선 부대에서 물러나 이런 후방지역의 예비군부대에까지 운용되었다.  구식 4톤짜리 트럭에 탑재되어 있는 다연장포가 30발씩을 쏘고 나서 즉각 재장전에 들어갔다.다연장포의 단점이라면 재장전에 몇 분 씩이나 소요된다는 것이다.

  요새포와 다연장로켓포,  그리고 도로 주변 야산에 잠복하고 있던 적 위대의 일제사격 한번에  도로상에 움직이는 것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차 중령이 망원경으로 살펴보다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로에는 수많은 중국제 69형 전차들과 90형 병력수송차,구 소련제 BMP-1형의 복사품인 WZ-500 계열의 각종 보병전투차들, 그리고 병력수송용 트럭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중국군 보병들은 하차할 시간 여유도 없이 당했다. 와우동에서 선천 남쪽 삼소리까지의 약 3 km 구간의 중국군이 전멸당했다. 약 1개 연대의 병력이었다.

  선천 시가에서는 중국 점령군과 적위대간의 시가전이 한창이었다. 교도대의 일부 병력은 선천에 남아 점령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도로에서 포성이 울리자 순식간에 이들을 기습하여 기선을 제압했다.1개 중대의 중국군을 사살하거나 포획했다. 교도대원들이 포로들을 대목산 요새로 호송했다.

  이동 중인 중국군을 섬멸한  노농적위대와 교도대는 전시규정에 따라 도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고속도로까지 파괴했다. 특히 교량과 터널은 제 1의 목표가 되어 철저히 부서졌다.이들은 작전을 마치자 마치 유령처럼 산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야 중국 헬기들이 도착하여 도로주변을 비행했으나 이미 살아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후속하는 중국군 집단군에서 선천시에 신경질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선천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천의 북쪽에서 내려오던 중국군들은 대목산요새에서 포격을 하는 것을 산그늘에 가려서 보지 못한채 당했다.

  "훌륭합니다. 대단해요."

  "선두에 중국군 전차를 까부시지 못한거래 분통할 뿐입네다."

  차 중령의 칭찬에 홍 대좌가 부끄러워 했다.

  "아닙니다. 전차만으로 전쟁을 할 수는 없죠. 중국 침략군은 이제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제 36, 37 예비연대 연대장들께서 도착했습네다."

  차 중령과 홍 대좌가 전투를 마치고 평가를 하고 있을 때  손님이 도착했다. 이들은 인근 철산군과 귀성군의 당 서기 겸 노농적위대 사령들로서 예비역 상좌들이었다. 제 11 기갑사단의 패전 소식을 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요새로 오던 중에 35예비연대의 승리를 지켜봐서 이들은 꽤나 들떠 있었다.

  "우리도 이번 전쟁에서 큰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꼭 침략군을 몰아 내야합니다."

  36 예비연대장이 군당 서기답게 열변을 토했다. 차 중령이 이들과 함께 길고 긴 회의를 시작했다. 중국군의 남진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했다.

  차 중령을 따라온 제 11 기갑사단 최후의 전차병들은 전차를 땅속 엄폐호에 감추고 18 시간만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후에 인민군들이 담배를 주었으나 맛이 이상해 전차병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피웠다.

  1999. 11. 17  11:30  개성, 통일참모본부

  "제 11기갑사단까지 당했습니다.  적은 이미 선천까지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일단 11 기갑사단의 잔존 병력은 모두 후퇴했지만 제 3 전차대대 병력은 적 기갑부대를 막다가 점령지에 남은 것같습니다.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통일참모본부 상황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갑사단의 참패에 이어 사단의 안전한 후퇴를 위해 자신을 던진 제 3전차대대 대원들의 최후를 생각했다. 살아서 봐야한다고 명령했지만 차 중령은 명령불복종죄를 지었다고 정 대장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제 6 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들은 중국 공격헬기들을 처치하고 중국군 장갑군단에 폭격을 가해 제 11기갑사단이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나타난 중국군 전투기들에 의해 모두 격추됐습니다."

  참모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군대가 패배하여 사기가 저하된 지휘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모두 침통해 하고 있었다.

  "현재 적 지상군의 주 침공로는 지도를 보시다시피…"

  양 석민 중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단말기를 조작하여 대형 스크린에 북한지역을 비췄다. 세 개의 커다란 붉은 색 화살표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고 피아 구분이 된 부대의 위치와 규모가 비쳐졌다.

  "이렇고, 역시 적의 주공(主攻)은  신의주에서 평양을 따라가는 길에 있는 부대들입니다. 혜산과 회령쪽으로 오는 적들은 조공에 불과합니다. 혜산과 회령쪽 아군이 후퇴는 하고 있지만 이는 전선의 균형을 위한 것이며 그쪽은 아직 큰 피해를 입은바 없습니다. 적의 공중공격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입니다."

  양 중장이 잠시 자료를 살핀 후에 보고를 이어갔다.

  "현재는 중국측의 광대역 전파방해가 걷혔다는 보고입니다. 중국측도 부대간 연락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전파방해가 불가능하겠죠.  단발적이나마 만주지역과 북경 부근의 우리측 정보원들로부터 무선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보사단의 보고에 의하면 침공한 적 주력은 제 16병단 예하의 장갑집단군과 몇개 혼성집단군이라고 합니다. 2개의 헬기사단과 3개 전투비행사단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후속부대로는 심양과 단둥에 2개 병단의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일부는 국경을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1개 병단의 병력 수는 얼마나 됩니까?"

  중국군의 체계를 잘 모르는  구 국군의 이 호석 공군중장이 묻자, 양 중장이 잠시 자료를 검색하더니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시의 중국군 집단군은 3개 보병사단과 각 1개씩의 기갑여단, 포병여단, 그리고 고사포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만, 내전중에 기갑부대를 강화하여 기갑여단이 기갑사단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지역에 따른 편제도 각기 달라 수비사단이 몇개 포함되는가 하면 기계화부대인 오토바이 사단이 편제에 들어있기도 합니다. 1개 병단은 몇개의 집단군을 합한 것으로, 또한, 병단이 몇개 모여 야전군이 됩니다."

  "총 병력은 얼마나 되오?"

  이 종식 차수가 오랫만에 끼어들었다. 이 차수가 보기에 적의 편제도 모르는 장군을 교육하는데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신의주에서 월경한 16병단과 만포쪽의 3병단, 혜산쪽의 제 5병단이 주력이며 선공부대인데, 단둥과 심양에서 월경 준비중인 2개 병단을 합쳐 중국측은 제 5야전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간단히 5野라고 합니다만, 지상군 총병력 6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양 중장이 답변하자 모두들 갸우뚱했다. 이 차수가 거듭 물었다.

  "설마 그 정도 병력으로 우리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갔디. 후속 병력이 또 있다는 말인데…"

  "예. 이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친위군격인 베이징군구와 지난(제남)군 구 소속의 부대입니다. 심양군구의 집단군들과 남부지방에서 올라와 심양군구에 배속된 부대들이 후위 지원부대라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만주지역에만 중국군 150만 정도가 있습니다. 이미 월경하여 전투에 돌입한 부대를 합하면 약 200만명이 됩니다. 물론 병참 등 지원부대는 빼고 말씀입니다."

  모두들 기가 막혔다. 중국은 한국을 점령하기로 이미 마음 먹은것 같았고 이를 막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란 생각들이 들었다.이 차수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농을 건넸다.

  "이 정도 병력이면 중국이 핵을 쓰지는 않갔구만."

  모두들 웃었으나 쓴웃음일 뿐이었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중국이 핵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즐겨 자랑하는 인구 핵폭탄, 또는 이번 상황에서는 인해전술같은 병력의 핵폭탄이었다.

  "전시비상동원체제는 잘되고 있소?"

  이 차수의 질문에 양 중장이 신속히 답변했다.

  "예! 예비군동원령이 내려 남북 모두 40개 예비사단이 편성중입니다. 그리고 향토예비군과 민방위 소집도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경제계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단 중화학공업 기업들의 비상전시체계에 따른 개편은 잘 이뤄지고 있으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사재기를 막기 위해서는 배급제를 실시해야되는데, 정부는 시장경제의 붕괴를 우려하여 일반 소비재의 배급제를 실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공식적인 전쟁발표가 나가자마자 암시장이 형성되었답니다.  또한 이중국적자들이 서둘러 출국하고 있어서 상당수의 기술인력이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음, 어느 나라나 있는 문제고… 우리측 대응태세는 어드렇소? 아무래도 저 장갑집단군이 문젠데…"

  "영변에 본부를 둔 인민군 425 기계화군단이 적의 장갑집단군에 맞서 북진 중입니다. 해주의 815 기계화군단도 도로를 따라 북진 중입니다."

  "해군은 어드렇소? 제주도 상황은?"

  이 차수의 물음에 인민군 박 상장이 보고했다.

  "중국은 현재 아군 서해함대에 대한 공격을 진행중입니다. 주로 공대함공격을 가하고 있는데 우리측 피해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작전해역에 대한 서로간의 전자전이 극심합니다. 우리 함대는 현재 전파관제 상황입니다."

  자신의 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부의 명령이나 보고도 당분간이나마 묵살할 수 있는 것이 함장, 또는 함대사령관의 권한이었다. 통일참모본부는 해군에 대해서는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간간히 해주상공의 조기경보기가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명령을 할 수도 없었다.

  "제주도는 현재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점령당했고 한라산 산정 일대도 대부분 중국군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공중지원부대가 출동했지만 적의 항공기들에 의해 제지당해 제주도에는 접근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군의 정 대장이 분통을 터뜨리며 보고했다.  참모들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개전 후 최초로 도 하나가 점령당한 것이다.이제 남부지방까지 중국 공군기들의 공습권에 들게 되었다는 걱정이 들었다. 제주도가 함락되면 한반도는 남, 서, 북의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참모들이 눈길을 이 호석 국군 공군중장에게 돌렸다. 이 중장이 질문을 받지는 않았어도 뭔가 말을 해야되는 상황에 처했다.

  "현재 서로 제공권을 장악하기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만,솔직히 아군이 불리한게 사실입니다. 항공기나 조종사의 질적수준을 떠나 숫적으로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적기의 요격에도 급급하여 지상지원공격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비역조종사들을 소집하긴 했지만 항공기 수는 절대부족한 상황입니다. 전투기의 긴급수입을 제안합니다."

  "해군함정, 특히 대잠수함전을 수행할 프리깃함들도 긴급수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거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군수물자 수입요청이 빗발쳤다.  게다가 남북간의 기종이나 함종이 서로 달라 서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종류의 군용물자 수입을 위해 남북간의 참모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우리 해군은 공군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대함 미사일의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대공미사일을 탑재한 다수의 대잠 프리깃함을 수입해야합니다. 아니면 이지스함을…"

  "이 기회에 차라리 소형항모를 수입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전투기래 공중전에 유리한  러시아제 수호이-27이나 미그-29를 수입하는거래 낫갔디 않갔습네까?"

  "아닙니다. 러시아제는 레이더가 약해 지나치게 지상관제에 의존해야 하므로, 레이더가 우수하고 기동성이 좋으며 대지공격능력도 있는 F-18이 더 좋습니다."

  "그만 하라우요!"

  이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참모들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벌써 신무기 도입의 환상에 빠져있었다.

  "무기 도입은 나중에 토의를 거친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적을 막을 방안을 연구합세다."

  좌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압도적인 중국의 공세를 꺾을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공군이 중국 장갑집단군에 대한 폭격을 하자니 압도적인 수의 중국 전투기때문에 불가능하고,해군도 밀리는 상황이고, 지상군도 숫적인 면에서 불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낙후한 무기를 무시하던 참모들도 중국측과의 전투 이후에는, 그들의 무기체계와 높은 운용기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은 내전 과정을 통해 무기체계가 비약적으로 현대화되었고 군인들도 정예화되었던 것이다.

  "오늘 오전동안의 양측 공군기들의 피해입니다."

  침묵을 깨고 공군의 이 호석 중장이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적기 격추 65기, 아군기 피격 49기입니다."

  "음… 공군조종사들의 기량이 뛰어났군요."

  제 11기갑사단의 패배로 풀이 죽은 육군의 정 지수 대장이 비꼬자 이 중장이 책상을 치며 외쳤다.

  "하지만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에선 24 대 43입니다. 나머지 중국 전투기들은 대공미사일이나 대공포에 의해 격추시켰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조만간 우리나라 공군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차수가 가만 있다가 참지 못하여 질문을 했다.

  "왜 기렇게 차이가 나오? 무기면에서는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데…"

  "조종사의 기량도 크게 차이는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상관제입니다. 중국이 전자전기와 관제기를 동원해 전투기를 지휘함에 반해 우리는 주로 지상관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아군기의 레이더 성능이 우수하고, 조종사의 재량에 맡기는 경우 유리한 점도 있지만 관제기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공중전에서는 훨씬 유리합니다.그리고 저공침투해 오는 중국전투기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평양이나 서울이 지금도 공습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해결책은?"

  이 차수가 강한 평안도 억양으로 냉엄하게 물었다.

  "조기경보관제기를 더 띄워야합니다.  최소한 4대는 더 수입해야합니다. 그리고 각 군에 분산되어 있는 레이더 기지를 통합 운용해야합니다. 현재로서는 적기 동향에 대한 실시간 정보처리가 불가능합니다.이는 현실에서 전투기의 격추비율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좋소."

  이 차수가 대안을 내놓았다.

  "남쪽은 조기경보기를 몇 대 더 구입하기오. 북측의 레이다기지 관할권은 모두 남쪽에 주갔소."

  참모들이 깜짝 놀라 이 차수를 쳐다보았다.  북한지역 레이더 기지의 관할권을 넘긴다는 말은, 북한이 대량보유한 미그기가 특성상 지상관제에 크게 의존하므로 인민군 공군기의 지휘권을 국군에게 주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인민군 장성들이 얼굴에까지 불만을 드러냈지만 늙은 병사 이 차수 앞에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호석 중장이 이 차수의 뜻밖의 결정에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대지공격기 A-10이 30대쯤 됩니다만…"

  그는 인민군 장성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중국 장갑집단군 공격에 이들 공격기들을 425 기계화군단에 배속시키면 어떨까요? 단,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면 안되니 전투기들의 엄중한 호위하에 말입니다."

  이 중장이 제안하자 모두들 받아들였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식으로 빨리 남북 군체계를 상호 통합해야 중국이라는 강적을 상대할 수 있을겝니다."

  조금전 이 중장의 반박에 기분이 나빠졌던 정 대장도 역시 나라를 생각하는 군인이라 이 중장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며 북한지역에 주둔중인 국군 5개 사단의 지휘권을 모두 북측에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남북 군 통합에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해오던  정 대장이 통합에 적극 동참하자 인민군 장성들도 이제야 국군 장성들을 신뢰하기 시작하여 남북의 참모들이 서로의 권할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인 남북 군대의 실질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해함대에서 보고입니다."

  참모들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전멸하지나 않았을까 걱정한 함대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 어떻게 되었소? 우리측 피해는?"

  인민군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묻자 통신장교는 이것이 승리인지 패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전문을 읽어나갔다.

  "서해함대 대전함 대파, 대전함은 중국 미사일구축함 2척을 침몰시켰고, 적 공격기 7기를 격추시켰습니다.0750에 전북함 피침, 전북함과 함대는 적 잠수함 6척을 침몰시켰습니다. 그 중 3척은 한급 핵잠수함이라고 합니다.  기타 피해는 초계정과 미사일 고속정 한척 침몰입니다. 전 북함의 함장 장 중령은 전사했습니다. 함대사령관 김 중장은 장 중령의 추서와 아울러 한국형구축함들의 서해함대 편입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0930에 적 재래식 잠수함 추정 격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적 잠수함들 때문에 보고가 늦어졌다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참모들이 실의에 빠졌다. 중국 잠수함 7척과 구축함 2척의 격침은 큰 전과였으나 서해함대의 기함인 전북함이 침몰했고 대전함도 대파되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대등하거나 약간 우세한 전과는 패배나 다름없었다. 중국 잠수함은 100여척이 넘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한국해군은 중국이라는 대해에 빠진 잉크 한방울에 불과했다. 중국과 전쟁을 치뤘던 역사상의 다른 이민족들처럼…

  "이거 안되겠군요."

  한국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이 말을 꺼냈다. 한국해군의 입장에서 지금까지는 인민군 해군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서해함대에 귀중한 한국형 구축함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발등의 불을 먼저 꺼야할 입장이었다.

  "현재 동해함대에 배속중인 한국형구축함 3척 모두와 시험항해중인 2척, 그리고 건조가 거의 끝난 1척 모두를 서해함대에 배속시키겠습니다. 물론 국군 해군본부의 심의를 거쳐야 되지만. 그리고 초계기 다수와 함께 209급 잠수함 4척을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제주도 방어전이 끝난 후라는 조건이 붙겠지만 말입니다.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최초의 중형 항공모함 이순신함이 현재 무기장착중입니다.앞으로 한달 이내에는 옥포 조선소에서 진수될 예정입니다.  물론 작업진척을 더 빨리 해야겠죠."

  심 중장은 이순신함을 쓸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부정적이었다.결국 한국형구축함들로 88함대를 구성하여 항모를 호위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다. 이제 상당 기간 동안 한국은 원양해군으로 진출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의 침공을 막아내더라도…

  "고맙소. 심 동지!"

  박 정석 상장이 그동안 꺼려왔던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동지라는 호칭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제 합심해서 적을 몰아내고 나면 통일의 길은 더 빨라질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침공을 막아내고 나서의 일이었다. 참모들 누구나 중국을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이때만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1999. 11. 17  11:30  제주도 남제주군, 92연대 본부

  "백록담이 떨어졌습니다!  현재 1대대 3중대가 적 공정부대와 치열한 전투중이라는 보곱니다."

  "2대대가 제주항에서 후퇴했습니다.  제주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92연대의 연대장인 노 영기 대령은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주항의 중국 해병대 상륙과 한라산정의 공수부대의 강하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백록담의 레이더 기지는 이미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서귀포시의 원래 기지에서 한라산 국립공원 내의 흙붉은오름(1391미터)으로 이동 중이던 대공미사일 포대와 지대함 미사일 발사기들마저 중국 공수부대에게 파괴당했다.  이제 적의 후속 공습과 상륙에 대한 방비책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급히 예비군을 소집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수적 열세보다는 장비와 훈련의 열세가 더 컸다.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상 예비군들은 주로 방위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중화기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어 작전에 더욱 애를 먹어야했다. 92연대에는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고, 대전차병기는 더더욱 없었다. 6.25때 북한의 전차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국군처럼 105밀리 곡사포로 중국의 경전차와 맞서야 했다.

  11. 17  11:35  제주, 민오름

  제주시를 내려보는 민오름(251 미터)에 포대를 긴급배치한 92연대 소속 포병중대의 포대장 박 일우 대위는 망원경으로 북제주항을 둘러보았다. 제주시가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제주항의 전투가 사그러들자 중국군들은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상륙작업을 하고 있었다.  2 척의 유칸급 전차양륙함에서 62식과 63식 경전차들이 쏟아지고 있었다.포병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중국에는 63식 수륙양용 경전차가 1200대, 62식 경전차가 800대나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대만 상륙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만과 비슷한 섬인 제주도 공격에 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박 대위는 적 상륙함대보다는 상륙부대를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상륙한 중국 전차들이 제주시를 평정한 후 사방으로 갈라져 진격하였다. 박 대위가 망원경으로 보니 50여대의 전차가 제주 종합경기장 앞을 지나 연동의 신시가지쪽으로 가고 있었다.  전차의 기다란 행렬 뒤로는 73밀리 활강포를 갖춘 WZ-501 보병전투차와  YW-534 APC 수십대가 따랐다. 포대가 있는 민오름에서 사격하기 좋게 옆으로 길게 늘어선 모습이었다. 거리는 약 700 미터.

  포대장 박 대위의 지휘하에 4문의 105 밀리 곡사포가 일제 사격을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포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곡사포에 의한 대전차 직사사격 훈련이 부족하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중국제 경전차들 사이의 맨땅에만 죽어라고 쏘아대고 있었다.  자기들을 공격하는 포병의 위치를 파악하자 중국군 전차들이 횡대로 넓게 산개하여 민오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실전 경험이 없는 포병대원들이 당황했다.1950년대에 개발된 63식 경전차와 T-59전차의 축소판 같은 모습을 한 62식 경전차들이 전차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제주도 병사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리드를 정하고 쏴라. 전차나 군함이나 원리는 같아!"

  박 대위가 부하들을 다그쳤으나 좌표를 입력받아 사격하는 곡사와 조준기를 보며 사격하는 직사는 질적으로 달랐다. 박 대위가 직접 사격을 했다.  첫 탄은 중국 전차 위로 빗나갔으나  두번째 사격에서 신중하게 중국 전차를 조준기의 하단 위로 맞춰 쏘았다.차체 앞부분이 납작한 63식 경전차의 포탑에 포탄이 명중하자  이 작은 전차는 화염을 뿜어대며 폭발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하지만 수십대의 전차와 보병전투차 및 APC들이 방어진지가 있는 민오름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포병대와 함께 이동해온 현역 1개 소대와 예비군 1개 중대,그리고 제 주시에서 도망쳐온 소수의 패잔병들로 구성된 한국군은  중국군 전차들의 치열한 포격을 몸으로만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전차 무기가 없는 것이다. 한국군에 대전차무기가 빈약한 것을 확인한 중국군 보병전투차와 APC의 보병들은 하차도 하지 않은 채 몰려왔다.

  105 밀리 곡사포의 직사에 익숙해진  포병들이 전차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경장갑의 소형전차들은 포탄에 맞았다하면 파괴되었다.  중국 전차들이 반격을 시작하여  일제사격하자 1 문의 곡사포가 파괴되고 다른 곡사포 진지가 붕괴되었다. 포병들이 돌무더기 위에 쓰러졌다.  거리는 점점 좁혀들어 서로간의 거리가 약 200미터가 되었다.

  한국군 병사 중의 한명이 M-203 유탄발사기를 갖춘 K-2 자동소총으로 중국전차를 조준했다.  설마 장갑차가 아닌 전차에 효과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심정에서  HEDP탄을 장전하고 쏘았는데, 전차에 명중하더니 의외로 전차가 섬광을 일으키며 폭발해 버렸다. 다른 병사들도 따라서 유탄을 쏘기 시작했다.  중국군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잇달아 파괴되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중국군 보병들이 보병전투차와 APC에서 하차하여  한국군 진지에 사격을 가했다. 피아간의 거리는 10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사격 개시!"

  현역 소대장이 명령하자  한국군과 예비군들이 정신을 차리고 중국군 해병대를 향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향해, 그것도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의 보병은 좋은 표적이 되었다. 견디다 못한 중국 전차들이 연막탄을 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원들도 따라서 후퇴했다. 들판엔 17대의 전차와 APC가 불타고 있었다.

  "휴, 겨우 물리쳤군… 각 포대 보고하라!"

  포대장인 박 대위가 외치며 포가 있던 자리들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한 포대가 있던 자리는 포신만 덩그라니 놓여있었고,  다른 곳을 보니 포는 온전한데 포병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예비군들이 부상당한 부하들을 민오름 뒤쪽 계곡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박 대위가 치를 떨고 있는데 소대장과 예비군 중대장이 왔다.

  "보병은 절반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예비군들의 피해가 큽니다."

  소대장이 박 대위에게 보고하자 나이든 예비군 중대장이 어두운 얼굴을 했다. 현역과는 달리 예비군의 경우, 전사자만큼 전쟁미망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예비군을 동원하는 경우 피해가 막대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병력이 부족한 판에 예비군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라동(吾羅洞)에 병원이 있습니다. 부상병들을 옮기지요."

  "견인트럭으로 옮기시오. 이제 포도 하나밖에 안남았으니 트럭 세 대를 다 써도 좋습니다."

  예비군 중대장의 건의에 박 대위가 트럭의 사용을 허가했다.  한번의 전투에서 전사 107명, 중상 54명의 피해를 입었다. 남아있는 병력은 약 100명 남짓했다. 박 대위가 16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3대의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을 보니 중국 전차들이 다시 공격할 기세로 전진해왔다. 예비군들을 포대에 충원하여 포 2문을 준비시키며 박 대위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멀어져가는 트럭 행렬을 보았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그 트럭을 탔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리라는 생각을 한 순간 트럭들이 갑자기 폭발했다.

  "뭐야! 중상자들이 탄 트럭이!"

  국군과 예비군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중국군 전차들이 포격을 시작해서 사방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일어선 그들은 몸을 숨기지도 않았다. 박 대위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저들은 부상병들이 아닌가. 도대체 왜, 누가!"

  박 대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살인마들을 발견한 것이다.그들은 중국 공수부대원들로서 대공 미사일 기지가 있던 어승생 고지(1169 미터)와 노루생이(611 미터) 및 거문오름(438 미터)을 점령하고 제주시 외곽도로인 16번 도로와 한라산 국립공원 아래 아라동(我羅洞)에서  제주시로 통하는 11번 도로의 교차점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한국군 트럭을 발견하고 공격한 것이다. 이들은 트럭에 탄 병력이 원래 중상자라는 것을 몰랐으나 트럭이 파괴된 후 확인사살을 위해 도로로 나온 것이다.

  "포 돌려! 저것들을 쏴라!"

  박 대위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소대장과 예비군 중대장이 말렸으나 그가 권총을 허공에 쏘아대며 부하들이 포구를 돌리게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도로에 널부러져 있는 한국군과 예비군 중상자들을 하나씩 쏘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시체가 된 그들을 쏘고 있는 것이었다.이들은 민오름에 국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고, 중국군 전차들이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설마 민오름의 국군이 자기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사격!"

  105 밀리 포 2문이 동시에 불을 뿜고 이에 M-60 기관총 두 정이 가세했다.  약 900 미터의 거리에서 국군들을 깔보듯 시체들에 총질을 하던 중국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중국군들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몇 발을 더 쏘게한 박 대위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듯 씩씩거렸다.

  "거리 500까지 접근했습니다."

  소대장이 포대장의 각성을 촉구했다.  박 대위가 포를 원위치에 배치하도록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서둘러 임시 참호로 뛰어가 전방을 살폈다. 소 방목장이었던 벌판이 연막탄으로 뿌옇게 되어 보이지 않았다.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들이 사격을 시작하고 소총은 사정거리 때문에 아직 대기중이었다.

  전차의 굉음 사이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위가 연막탄의 연기사이로 하늘을 보자 앞부분이 강아지의 코처럼 새까맣고 뾰족한 헬기들이 보였다.

  "헬기다! 중국 공격헬기야!"

  "우린 대공무기가 없습니다!"

  "유탄발사기로라도 쏴! 접근을 막아!"

  포대장이 외치는 소리는 폭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돌담 위로 헬기에서 발사한 2A42 30밀리 기관포의 파편이 튀었다. 현역들이 머리 위의 헬기에 소총을 연사했으나 중무장한 러시아제 Mi-28 하보크헬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수많은 국군과 예비군들이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두 대밖에 남지않은 포는 헬기에서 발사한 9M-114 대전차미사일(나토명 AT-6스파이럴)에 부서졌다.

  "기관총은 뭐해?"

  박 대위가 기관총 진지로 뛰어가서 보니 병사들은 머리가 으깨어진채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총열이 땅바닥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병사는 총열교환 중에 공격당한 것같았다.  기존의 캘리버 50 중기관총이 총열 교환하는데 드는 시간이 47초임에 반해 한국산인 K-6는 신속총열교환식이어서 소요시간은 5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병사들은 그 5초 사이에 당한 것이다.박 대위가 새로운 총열을 부착하고 K-6 중기관총을 헬기를 향해 돌렸다. 바로 옆의 10미터 상공에 있는 헬기에 죽어라고 쏘아댔다. 대부분의 탄알은 막강한 헬기의 장갑에 튕겨져 나갔지만  몇 발이 테일 로터에 박혔다. 7톤짜리 대형헬기가 빙빙 돌며 땅 위에 주저앉았다.

  박 대위가 총구를 다른 헬기로 돌리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굉음이 울려왔다. 전차였다! 중국의 소형 62식 경전차가 돌담을 무너뜨리고 넘어왔다. 박 대위는 즉시 기관포를 전차를 향해 쏘았다. 총알이 장갑에 맞고 사방으로 튀었다. 갑자기 전차가 폭발했다. 전차의 5미터 앞에서 쏴대던 박 대위가 멍하니 서있는데 누군가 그를 끌고 참호로 뛰었다.  박 대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예비군 중대장이었다. 아마 고씨나 부씨, 아니면 양씨가 틀림없는 이 제주도 출신 예비군중대장은 온몸에 치열한 전투를 치른 자국이 역력했다. 옷은 찢겨지고 피로 얼룩졌다.

  "방금 그것이 마지막 LAW입니다. 우린 패했습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 한라산으로 들어갑시다."

  박 대위가 끄덕거렸다. 전시교범대로 유격전을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다.전차에 대고 중기관총을 쏘아댄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명이나 남았습니까?"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은 현역 14명과 예비군 20명 정도입니다.소대장도 전사했습니다. 지금은 좀 더 줄었겠죠."

  박 대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 박 대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갑시다. 중대장님."

  "예. 가죠. 박 대위님!"

  예비군중대장이 참호에서 일어나다 말고 주저앉았다. 박 대위의 상체가 보이지 않았다. 돌담을 넘어온 중국전차가 포를 쏘았는데 때마침 일어선 박 대위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다.  예비군중대장이 토하기 시작했다.

  1999. 11. 17  13:30  서울, 서초동

  "이거 살벌하군요. 전쟁이라…"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 위치한 종합광고대행사 아름기획의 AE인 변 승찬 대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작된 광고제작회의에서 일손을 놓고 있는 제작팀들과 한중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들의 귀에 광고의 임팩트(impact)니 타깃 오디언스(target audience)니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을 것이 뻔해서, 변 대리는 일단 제작팀은 모았지만 제작회의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팀원들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모두들 망연자실해 있었다.

  변 대리는 출근 전에 TV뉴스를 보고 전쟁이 일어난 줄 알았다.  밤에 폭음이 울리고 총성 비슷한 것이 울려 잠을 깼지만 어디서 가스가 폭발하거나 교통사고가 난 줄 알고 다시 잤다.  출근하기 위해 승용차를 몰고 오는데 한남대교가 날아가고, 다른 한강다리 몇 개도 무너져 나머지 다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게다가 중무장한 계엄군에 의한 검문검색도 심해서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변 대리는 일반예비군이지?"

  친하게 지내는 그래픽 디자이너 황 부장이 묻자 변 대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아직 동원예비군이었다.  평상시에는 예비군 훈련가서 바쁜 회사업무를 잊고 며칠 푹 쉬는 것은 좋았지만, 이제 그는 언제 소집되어 전선으로 달려가야할 지 모르는 신세였다.

  "동원이야? 이 카피 큰일났네."

  PD인 강 차장이 카피라이터 이 진을 보고 웃었다. 이 진의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강 차장님, 그러지 마요. 장난이 아니라구요.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이면…쩝."

  변 대리가 심각하게 이야기하자 다른 사람들도 한숨을 쉬었다.도대체 중국이라는 큰 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물론 한반도 주변 강국 어느 나라와 싸워서 유리한 나라가 있을까만…  그가 이 진을 보니 그녀는 걱정이 태산같은 얼굴이었다.언제 전선으로 갈 지 모를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같았다.그녀가 고개를 들고 변 대리를 보자 그가 외면했다.

  "회의 시작하시죠. 쇼는 계속되야 한다는데… "

  ‘The show must go on.’을 외치는 변 대리의 주재로 제작회의가 시작되었다. 직급은 낮더라도 그의 직무는 AE(광고기획)였다.광고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며 광고의 제작과 매체집행은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진다. 오늘 제작회의건은 하늘식품의 식빵 신제품의 TV-CF와 Radio-CM,신문과 잡지 등 4대매체 동시 런칭광고(신제품 출시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집중광고)였다.마케터(MKTer)인 선우 차장이 소비자조사를 바탕으로 마케팅계획을 설명하고 있을 때, 변 대리가 맡은 또다른 광고주인 예삐화 장품의 박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즉시 TV광고를 전면중지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변 대리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휴대용전화기에 소리쳤다. 팀원들이 말도 못하고 변대리의 얼굴만 쳐다봤다.

  "아니, 기껏 정규물과 임시물 SA급 시간대(시청율 높은 시간대)를 잡아줬는데 두 달도 안하고 중지를 해요? 안됩니다. 광고공사에서 안받아 준다고요."

  변 대리의 말에도 박 과장은 막무가내였다.회장이 해외로 도피했는데 누가 광고료를 결제해주냐는 소리였다. 변 대리가 심각해졌다.  판매를 광고에 주로 의존하는 화장품회사가 광고를 중지한다면  다른 광고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대행사의 종말입니다…"

  변 대리가 휴대용전화기를 끄며 팀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여차하면 회사 때려치우고 사무실 차릴 궁리만 하는 아줌마인 CD(Creative Director) 황 부장, 회사 최고의 노총각인 PD 강 차장, 멋쟁이 마케터(Marketing Planner) 선우 차장, 본업보다는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하는 GD(Graphic Designer) 최 대리, CW(Copywriter) 이 진,  Audio PD 박 승렬 등 9명의 회의 참가자들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산업은 국가위기시에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전쟁이 길어진다면 광고대행사는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제작팀원들 사이에 퍼졌다.더우기 전쟁에 패해 중국에 점령당한다면… 변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AE(광고기획)는 회사에서 할 일이 많은 편이다.

  "잠시만요… 보고 좀 하고 오죠."

  평시에는 애국자연 하며 설치던 사람들이  변란시에는 꼬리를 감추는 일은 흔하다. 6.25직전에 북침통일을 외치던 자들이나 조선시대의 대부분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1999년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도망가기 바빴다.정오 뉴스시간에 김포공항의 상황을 방영했는데 아비규환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신들과는 상관도 없다는 모습들이었다.결국 잃을 것도 별로 없는 민초들만 전쟁터에 끌려갈 것이다.

  국장에게 보고한 변 대리는 전무실에 가보았으나 전무는 안보이고 국장, 본부장급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본부장 중의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전무의 회전의자에 눕다시피 하고 앉아있었다. 아무리 전무 본인이 없다지만 너무한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변 대리 왔나? 자네 광고주도 광고 내려달라는 소리지?"

  매체국장의 한마디에 변 대리가 맥이 풀렸다.  광고중지 요청은 그의 광고주인 예삐화장품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광고주들도 기존에 집행되는 광고를 중지시키기 바빴다.

  "전무님은 안계십니까?"

  "전무님은 일본으로 튀고 사장님은 미국으로 튀었지. 우린 어디로 튈까? 제주도가 점령됐다는데 거기로 도망갈 수도 없고… 하하"

  전무실을 나서는 변 대리에게 집에서 전화가 왔다.어머니가 걱정스런 말투로 소집영장이 왔다고 전했다. 소집일은 오늘 오후였다. 바로 집으로 가겠다며 전화를 끊고 상관인 기획부장에게 업무인계를 한 다음, 그와 함께 회의실로 돌아왔다.

  "저는 당분간 출근을 못합니다. 집에 소집영장이 와서…  팩스로 휴직계를 제출하겠습니다. 제 업무는 부장님이 인수하셨습니다.일도 없겠지만… 제가 없는 동안 건강히 잘 계시기 바랍니다."

  놀란 팀원들이 몸조심하라며 변 대리와 악수를 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설 때 이 진이 배웅해주었다.그녀가 울락말락 하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말고… 서울이 폭격당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요."

  자신을 먼저 걱정해주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은 그 자리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는 그녀를 달래고 차에 올라탔다.그로서는 마지막으로 운전하게 될지도 모를 빨간색 지프(Jeep) 랭글리의 시동을 켰다.

  갑자기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퍼졌다.  변 대리가 즉시 라디오를 키니 민방위본부에서 알리는 소리가 났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국민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14시 15분 현재 공습경보! 이 상황은 훈련이 아닙니다. 국민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가까운 방공호나 대피소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상황입니다. 현재 서해 상공에 중국 전투기로 보이는 다수의 항공기가 접근 중입니다…"

  1999. 11. 17  14:20  인천 서쪽, 서해 상공

  공습경보가 발령되자 수원의 전투비행단에서 즉각 F-16전투기 1개 대대와 F-5 1개 대대가 서해 상공으로 출격했다. 저공으로 목표상공에 도달하자 적은 1개 연대의 F/A-18 전폭기라고 조기경보기가 알려왔다. 적편대와의 거리는 아직 100km 정도 남았다.

  "F/A-18… 적은 전투기인지 폭격기인지 지금 상태에서는 모른다. 아마 절반은 호위, 절반은 폭격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아직은 접근한다. 전파관제를 지속하라."

  편대장의 명령이 김 종구 중위의 헬멧을 통해 전해졌다.그는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는 파일럿이 멋있게 보여서 공군조종사가 되었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강남의 집에서 가까운 수원비행장에 배치되자 그의 천성인 끼를 발휘하여 오렌지족이 되었다.  토요일에 외박을 나오면 스포츠카인 페라리를 몰고 강남의 넓은 도로를 질주했다. 그를 따르는 여자도 많았다. 상대에 따라 돈 많은 대학원생이나 공군조종사로 신분을 바꿔가며 도시의 사냥을 했다.

  사관학교 시절 시작한 컴퓨터 통신의 볼링 동호회에서는 시삽을 맡고 있었다. 음흉한 그는 여자가 가장 많은 볼링동호회에서 잘난 용모와 세련된 매너로 여자회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시삽이 되었다.  동호회에서도 그의 끼가 발휘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래 그의 아이디는 환경을 뜻하는 envir였다.

  조기경보기로부터 목표에 대한 데이터가 입력되며 스패로우가 발사대 기상태가 되었다. 김 중위는 적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F/A-18의 최대행 동반경은 740km에 불과하다. 이런 항공기로 서울을 폭격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규모 적의 지대지미사일 발견! 목표 수정, 미사일을 요격하라!"

  조기경보기에서 관제관이 소리쳤다.  수정된 데이터가 입력되자 관제관의 명령에 따라 전투기들이 일제히 미사일을 발사했다.  서울 상공의 수호를 책임진 관제관으로서는  당연히 지대지미사일의 공격을 무시 못하겠지만 한국공군의 F-16 편대는 상대적으로 고속인 F/A-18을 맞아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F/A-18이 중거리 대공무기가 없어진 F-16 편대에 스패로우를 날렸다. 1기당 2기의 미사일이 발사되자 한국 공군기들이 일제히 레이더를 키고 채프를 뿌리며 급기동으로 미사일을 회피했다. 그러나 미사일은 F-16기들을 무시하고 후속하는 F-5 편대를 향해 날고 있었다.  F-5 편대는 아직 스패로우가 남아있었으나 F-16이 목표를 가려 미사일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미사일의 접근을 모르고 있다가 F-16이 회피하여 빈 하늘에서 미사일이 날아오자 F-5 편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 번의 공격에 11기의 F-5가 추락했다.

  F/A-18 전투기들이 편대가 흩어진 F-16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F/A-18은 2기 1조가 되어 F-16 전투기 한 대에 미사일 4발씩을 발사하여 이들이 피할 공간을 주지 않았다. 곧이어 긴급연락을 받고 온 F-5 전투기들이 F-16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F-5들은 성능에 비해 최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F-16들이 위기를 넘기자 정신을 차려 F/A-18들에 역습을 가했다.

  김 종구 중위는 사이드와인더로 한 대,기관포로 한 대를 격추하고 좌측으로 급선회하며 추격하는 적기의 공격을 피했다. 급강하하여 적기를 따돌리고 오히려 다른 적기의 꼬리를 잡았다. 김 중위가 기관포를 쏘았다. 적개심보다는 공포 때문에 적기가 산산조각이 되도록  계속 발사했다.

  성능 뿐만 아니라 숫적으로도 우위에 서있는 중국 전투기들이 의외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국공군은 애프터 버너까지 가동하며 급속히 전장을 이탈하여 서쪽으로 날아가는 적기들을 쫓지도 못했다.  기지로 돌아가는 중에 그들은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다.중국의 미사일 공격에 서울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F/A-18의 서해상공 출현은 지대지미사일 공격을 돕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었다.

  김 중위는 당분간 외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강남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워둔 페라리가 썩고 있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그의 침대도…

  1999. 11. 17  18:00  평안북도 정주

  중국군 전차부대의 선발대는 어느덧 정주까지 밀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이 지나가자 구성시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 제 16사단이 통일참모본부의 명령을 받들어 황급히 후퇴하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사단병력은 중국군 전차들을 뒤따르는 형국이 되었다. 멀리 보이는 중국제 T-85 II형 전차는 인민군 전차들과 구별되지 않아서 인민군들은 이들을 후퇴하는 인민군 전차대로 착각했다.

  인민군 16사단의 상공을 지나던 중국군 정찰기는 이 부대가 중국군인 줄 알고 병단사령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인민군도 이 미그-23 유형의 전투기를 후퇴를 엄호하는 인민군 전투기로 잘못 알았다.  어쨋든 인민군 16사단은 적의 공격을 받지않고 정주 남쪽의 운전(평북 남단의 서해안 지역)까지 올 수 있었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교도대와 노농적위대는 안주지역으로 먼저 후퇴했으나, 피난민들을 먼저 보내느라 길이 막히고 장비가 많은 이들의 후퇴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앞서 진행하는 전차부대가 청천강의 지류중 하나인  대령강의 교각을 지날 무렵  멋도 모르고 뒤따르던  사단사령부는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선두에서 진행하던 연대의 전령으로부터 놀랄만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무시기? 남반부 아새끼래 전차대를 공격해?"

  "예, 대전차무기 종류가 남반부 거이 틀림없습네다."

  "이~~것들이, 포병은 즉시 전개하라~이…"

  인민군 16사단의 사단장인 백 계림 소장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했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인 그는 아버지를 한국전쟁에서 잃은 전쟁 2세대로서, 한국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북한을 침공하기 위한 한국군의 조작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던 차에 한국군이 전차대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다.

  인민군 16사단의 포병대가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포격을 위해 횡으로 전개하고 사격준비를 하는 동안, 선두의 연대병력은 전차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차량에서 하차하여 전차대가 엄폐하고 있는 강둑으로 뛰어갔다. 사방에 포탄이 떨어져 파편이 튀었다.  강둑에 도착한 인민군 연대장은 망원경을 꺼내 강 건너를 보았다. 벌써 날은 어두워졌고 연막탄에 가려 시계는 흐렸으나  틀림없이 한국군들이 이쪽으로 포와 미사일을 발사하고있었다.

  "국방군 12사단이다!"

  연대장은 국군 제12사단이 영변 북쪽인 평북 운산에 주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역시 북한지역에 주둔한 국군이 뭔가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다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전차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위해 옆에서 포를 쏘고 있는 전차의 조종석쪽 해치를 권총으로 두둘겼다.  연대장도 못본 신형전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해치가 열리고  전차원용 헬멧을 쓴 운전병이 고개를 내밀었다.

  "동무는 오데 소속…"

  말을 하던 연대장이 깜짝 놀랐다. 섬광에 비친 그 운전병의 계급장에 붙은 것은 틀림없는 중국군의 휘장이었다. 전차병도 깜짝 놀라 해치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연대장의 권총이 빨랐다.

  "수류탄 까 집어 넣라우! 중국군이야!"

  연대장이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하자 하급전사 한명이 방망이 수류탄을 전차 해치 안으로 밀어넣고 몸을 숙였다.잠시 후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전차가 화기에 휩싸였다. 연대장을 따라온 통신병이 이 사실을 즉시 사단장과 연대소속의 대대에 알렸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단장은 통일참모본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대령강의 다리를 지키는 12사단으로 부터의 보고로는 전방에 중국 전차들이 나타나서 전투중이라는 내용이고, 16사단은 남방에 아군전차대를 국군이 공격하고 있다고 하니 둘중에 하나는 잘못된 정보라는 뜻이었다.  선두의 연대장으로부터 급전이 들어왔다. 중국전차들과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통일참모본부는 즉시 12사단을 불러 중국전차대와 같이 있는 보병들은 인민군이니 보병에 대한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16사단장이 놀라서 지휘차를 타고 강둑쪽으로 내달렸다.

  사단장이 본 것은 혼란의 극치였으며,  결과는 오해로 비롯된 파멸로 나타났다. 전차대 사이사이에서 남쪽을 향해 사격중이던 인민군 보병들이 우군으로 알았던 전차대와 전투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대전차무기가 빈약한 인민군들은 일방적으로 살육당했다.중국전차들이 인민군들을 깔아뭉갰다. 사격할 필요도 없었다. RPG로 몇 대의 중국 전차를 파괴하며 간신히 버티던 인민군들이 결국 강둑을 넘어 강으로 뛰어들었다.

  16사단에 소속된 대전차병기들이 모조리 전투지역으로 출동했다. 1개 전차대대와 대전차무기를 탑재한 장갑차,그리고 사단소속 공격헬기들이 투입되었다.  중국군 전차들은 1개 연대로 파악되었으나 병력의 우열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사단의 전 화력을 투입하여 중국 전차부대를 대령강 상류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중국 전차들이 인민군 선두의 연대병력과 분리되자 인민군과 국군의 포병이 사격을 개시했다.

  중국의 전폭기편대와 인민군의 공격기편대가  동시에 전장 상공에 도달했다. 양쪽 모두 지상목표보다 공중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호위기들끼리 싸우고 공격기들도 공중전에 가세했다. 국군의 지대공미사일 지원을 받은 인민군 항공기들이 중국군 비행기들을 몰아내고 나서 중국전차들을 공격했다.여기에 국군과 인민군의 포격, 그리고 대전차미사일이 가세해서 중국 전차연대를 괴멸시켰다.

  국군과 인민군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순간 선발대의 전멸을 확인한 중국 장갑집단군의 포병들이 사격을 개시했다. 대령강 양안의 모래밭에 포연이 자욱했다.  인민군 16사단은 서둘러 강을 건너 국군의 방어진에 다달았다.

  1999. 11. 17  19:00  평안남도 신안주, 청천강 다리

  통일참모본부는 국군과 인민군들에게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했다. 박천까지 중국군에게 점령당해서 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중국 전차부대에 대한 방어선을 청천강으로 정하고 모든 병력을 후퇴시키고 민간인도 소개했다.

  도로를 따라 피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이 있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된 피난민들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원예비군격인 교도대나 민방위와 흡사하나 이보다 전투력이 있는 조직인 노농적위대에 입대하여 인민군 현역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포격과 중국군 전투기들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었다.도로 위에서 서둘러 남으로 향하던 민간인 차량들이 대량으로 파괴되었다.  사방에 비명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도로 밖으로 뛰었다.도로는 붉은 피로 포장이 되었고 순식간에 불타는 승용차와 시체로 통행불능이 되었다.

  인민군 16사단의 사단장인 백 소장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중국군의 포격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후퇴가 만만치 않았다.  국군 12사단이 먼저 후퇴를 하고 인민군 16사단이 뒤를 따르는데  국군은 피난민의 안전을 고려하여 너무 천천히 후퇴했다. 백 소장이 지휘차로 먼저 달려가 도로관제원들을 닥달했다. 트럭으로 후퇴하던 국군들이 구경난 듯 보고 있었다. 백 소장이 화가 나서 권총을 빼들고 도로관제를 맡은 정치보위부 소속의 하급군관 한명을 즉결처분했다.  놀란 도로관제 담당 군관이 민간인들을 도로에서 벗어나게 했다.민간인들이 총을 들이댄 이들의 서슬에 놀라 길 옆에 차량을 버리고 걸어갔다. 남쪽에 신안주시의 불빛이 보였다.

  박천을 뺏긴 통일한국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넘어갔다.  이미 도착하여 방어진을 구축중인 후방부대와  정주 등에서 후퇴한 부대, 그리고 민간인 피난민들로 안주는 혼잡했다.중국은 공격전에 사전 정지라도 하려는 듯 전 포병을 동원하여 안주와 신안주일대에 포탄을 퍼부어댔는데 피난이 늦은 민간인들의  머리 위에 무차별로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제 저녁에야 도착한 서부전선 사령관격인 전 상현 상장은 부대배치를 마치고 참모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웠다. 동쪽은 묘향산맥, 서쪽은 청천강으로 삼은 방어선은 자신이 보기에도 믿음직해 보였다.

  1999. 11. 18  17:00  평안남도 안주 용연리, 안주지구 방어사령부

  "엄청나군요. 포탄이 비오듯 쏟아진다는게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쨋든 잘들 오셨소."

  안주지구 방위 사령관으로는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인민군의 유명한 전 상현 서부전선 사령관이 겸임하고 그 휘하에는 인민군 820 기계화군단과 제 4군단, 제 2군단, 제 7군단, 그리고 북한지역에 배치되었던 국군 제 12사단이 배속되었다. 지금은 각 부대의 배치상황 보고와 방어작전 계획 전달을 위해 각 예하부대의 지휘관들이 사령부가 있는 안주 시가 뒤의 용연리(龍淵里)에 모인 것이다.

  용연리는 안주의 남동쪽 산인 167고지 대조봉을 북쪽에 두고 있는 자그마한 부락이다.  중국측의 포격이 워낙 치열해 교통이 발달한 안주나 신안주에 사령부를 설치할 수 없어 이 곳에 설치했는데, 인근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대조봉에 레이더기지와 송신기지를 설치할 수 있어서 유리하기도 했다.

  "동지들도 잘 알다시피 이곳이 뚫리면 막강한 중국군 장갑군단들때문에 평양까지 바로 밀리게 되오.  안주 뒤에는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지형이 전혀 없는 평야로 이뤄져 적 기갑부대와의 싸움은 우리가 상당히 불리하게 된단 말이오.  우리 합심하여 안주를 지켜내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중국군을 상대로 오늘날 다시 한번 재현해봅세다."

  수나라 백만대군을 상대로 대승한 살수대첩, 그러나 현 상황은 적 보급선의 확장을 노려 적을 유인한 것이 아니라,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패해 밀려온 상황이었다. 그러니 을지문덕 장군같은 사전준비나 작전은 일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통일참모본부는 인민군 9사단과 국군 제 11기갑사단이 각개격파 당하고 후방부대의 병력 이동이 느려지자 사실상 평안북도를 포기하고 청천강과 묘향산을 이은 선을 방어선으로 삼은 것이다.  정주(定州)와 박천(博川)에서 일부 있었던 저항은 사실은 청천강 방어선의 확고한 진지구축을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다.

  "적 주공은 정보보고에 의하면 아무래도…"

  전 상장이 벽에 걸려진 대형지도를 지휘봉으로 지적하며 직접 설명했다. 북위 39도 40분에 걸쳐있는 청천강 주변지역의 2만 5천분의 1 지도였는데 현재 중국군의 병력과 위치가 상세히 기입되어 있었다.

  "신안주 바로 앞에 있는 원일리(元一里)가 될듯하오.  동쪽 백돌고개쪽과 서쪽 북일리(北一里) 앞에는 섬들이 있는데 사구와 개활지라 적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하지 않는 한 엄두를 못낼 것이오. 그리고 안주보다는 도로망이 발달해있는 신안주(新安州)를 점령하는 거이 적의 일차 목표인듯 싶소. 그리고, 원일리 앞 청천강의 다리 세 개는 이미 파괴되었소. 중국측이 우리군의 후퇴를 방해하기 위해 먼저 파괴한 것으로 보아 적은 충분한 가교부대가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오."

  그가 잠시 국군 12사단의 공병장교에게 눈을 돌려 질문을 던졌다. 중국군의 도하예상지점이 원일리라는 것은 모두가 수긍하여  반대가 없었다. 그 공병장교가 대답할 때까지는.

  "동무가 청천강 도하전을 감행한다면 전투중 가교를 설치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그 공병장교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설명을 했다.

  "강폭은 원일리 앞이 77 미터이니 이 곳에 리본부교를 설치한다면 약 40분이 소요됩니다.아군의 화력과 공중지원을 충분히 받는다고 해도 가교 하나 건설하는데 숙련된 공병 1개 대대는 희생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중국의 공병책임자나 작전책임자라면 원일리를 도하지점으로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 상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젊은 국군 공병장교를 쳐다보았다. 인민군 작전참모들도 마찬가지로 건방지기까지한 국군의 장교를 응시하였다. 전 상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젊은 공병장교에게 물었다.

  "만약 동무에게 중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있다면 어딜 선택하갔소?"

  공병장교가 즉시 대답을 했다.

  "여기 동쪽 용전(龍田)과 도회(都會) 사이의 강입니다.  가장 강폭이 좁고 남쪽이 산지라 수비측 입장에서는 방어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곳은 기갑부대가 운신하기 어려운 곳이 아니오? 적은 중국 장갑집단군인데 어찌 그런 곳을 선택하겠소?  스스로의 기동성을 제한하고 싶은 기갑부대장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인민군 820기계화군단의 군단장인 인민군 중장이 힐난했다.그러나 국군의 공병장교인 김 대식 중령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이 지역을 도하하려면 공격측이나 방어측, 양자 모두 기동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강폭이 워낙 좁아서 중(重) 강습교량(Heavy Assault Bridge)차량 하나면 충분합니다. 최근에 제작된 강습교량은 예전의 전차탑재교량(AVLB)과  달리 성능이 대폭 향상되어 길이가 30미터가 넘어, 강폭이 25 미터인 이 지역에선 충분합니다. 설치시간도 5분이면 되니 간단합니다. 중강습교량은 70톤의 하중을 버틸 수 있으므로 적 전차들은 충분히 사격을 하며 도강할 수 있습니다."

  김 중령은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곰곰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숫자를 외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인 모양이다.

  "그리고 북쪽의 사구로된 개활지로는 적 기갑부대가 산개하여 공격해올 수 있으며, 공격 전에는 이 언덕 뒤에 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어는 어떻습니까?  남쪽 지역은 산지라서 전차 부대나 포병을 배치하기 힘든 곳입니다. 배치할 수 있는 병력 수에도 제한이 있게 되죠. 그리고, 일단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면 여기 이 도로를 따라 진격, 안주를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중국군 장갑집단군에 중국 해병사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 주목해 주십시요.  이들의 전차는 수륙양용입니다."

  김 중령은 자신의 전공을 넘는 문제에 너무 아는 척 하는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말, 다 해버리자는 식의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중국제 전차는 러시아제와 마찬가지로 슈노켈을 장비하고 있어서 수심 5미터 정도는 충분히 도하할 수 있습니다만,슈노켈 제거 후 정상 운행까지는 2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그러나 수륙양용은 다릅니다. 수중 도하가 아닌 수상 도하이며 도하중 전투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적의 규모로 보아 장갑집단군을 필두로한 작전기동군입니다.  종심방어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예비부대의 확보가 필요합니다.  예비부대는 특히 전차부대로 이뤄져야합니다."

  김 중령의 설명에 모두가 수긍하는 눈치였으나  예비병력으로 돌릴만한 기갑병력이 부족했다. 작전기동군은 적의 종심방어선을 돌파하여 전략목표를 탈취하기 위해 신속한 기동력을 가진 기갑부대를 위주로 편성된 부대를 말한다.  이는 구 소련이 서유럽과 전쟁을 벌였을 때 전략의 기본개념인데 중국에서 이를 빌어와서 한반도에서 써보려는 것이다. 반박했던 중장이 재차 질문했다.

  "방위사령관이신 전 상장님이나 기갑부대의 장군인 본관이 다 원일리를 도하지점으로 예측했소. 그리고 중국군 장갑집단군의 지휘부도 기갑부대출신일 것이오. 공격전에 상당수가 포에 격파될 이런 개활지보다는 강둑이 있는 원일리 앞쪽이 낫다고 봅니다만,전차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하기위해서 그들도 원일리를 택하지 않겠소?"

  "원일리의 북쪽 대안은 여북리(余北里)군요. 논으로 이뤄진 개활지입니다. 강둑이 있다고는 하지만, 포격관측은 높은 고지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직접 사격에 대한 방어 외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적 기갑부대는 도하 전에 2 km나 포격에 노출이 됩니다. 이런 포격에 남아날 기갑부대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방어측도 적의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보게되겠지만, 그래도 방어는 상대적으로 수월해 보입니다.

  제가 중국 기갑부대의 지휘관은 아니지만 저라면 절대 원일리를 도하지점으로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병대대장이 아닌 공격측의 기갑부대장이라면 말씀입니다."

  "음…  그렇다면 적이 안주를 공격하려면 상당히 우회를 해야하는데 과연 기갑부대인 적이 산지쪽으로 우회를 할까?"

  전 상장이 젊은 김 중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이젠 폐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회의 바로 남쪽은 산이지만 도회에서 안주로 가는 길 옆의 산으로 표시된 등고선은 산이 아닙니다.  제가 올 때 보니 밭으로 개간이 됐더군요. 그리고 가장 높은 지역이어야 겨우 해발 87미터 고지일 뿐입니다. 그것도 완만한 능선으로 되어 있어서 전차대로서는 평지나 다름없는 지역입니다."

  "적에게 해병기갑사단이 있다면…"

  조용히 있던 12 사단장인 최 소장이 김 중령의 말을 이었다.

  "백돌고개쪽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는 최대 수심이 4 미터라고 되어있지만 지금이 갈수기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중국의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가교 등의 인공물 없이도  충분히 도하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현재 포병과 백돌고개쪽의 위치를 보면 포병의 포 사격 지원이 상당히 어렵겠습니다. 사령부가 있는 대조봉은 겨우 167고지밖에 안되지만, 우리 포병이 너무 가까이 배치되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상당한 고각사격이 되겠군요."

  최 소장이 포병여단장을 보자 포병여단장이 끄덕거렸다.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사각(死角)이 생기게 됩니다. 분산 배치를 했기 때문에 사각은 상당히 줄였습니다만 집중포화는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급속사격도 힘들어집니다. 잘못하면 사령부에 오발할 수도 있습니다."

  기타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고 방어작전은 대폭 수정되었다.포병의 배치를 분산시켜서 백돌고개 앞쪽의 사각을 대폭 줄이고, 다른 부대의 대전차병기들을 상당수 12사단쪽으로 양도했다. 후방에서는 속속 대형 치누크 헬기를 통한 대전차무기의 보급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대전차병기의 부족은 없었다.  드디어 결정은 내려지게 되었다. 박 상장이 명령을 내렸다.

  "좋소. 주 방어진지는 도회로 하겠소. 전 포병대가 국군 12사단을 지원할 것이오. 포병여단장은 당장 관측장교를 도회에 파견하시오.  하지만 적의 주 공격목표는 결국 신안주이기 때문에 820 기계화는 원일리에 배치하겠소. 12사단에서 필요한 것은?"

  국국 제 12사단장인 최 선일 소장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자신으로서는 치욕이라고 느꼈다. 거의 산악부대였던 자신의 사단을 평지에 몰아넣은 육군본부가 저주스러웠다. 처음 자신의 부대가 북한으로 이동배치받을 때도 북한과의 상황이 안좋을 경우  쉽게 포기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북한에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었다.

  "저희 사단은 통일 전의 원래 주둔지가 강원도 산골이라 전차와 대전차병기가 부족합니다. 적의 주공이 기갑부대라면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부대로 방비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알겠소. 전차 1개 여단을 12사단에 배속하겠소."

  전 상장으로서도 국군 12사단의 장비와 규모를 익히 아는지라 호쾌히 부대를 떼어주었다.  남북이 서로의 지역에 자신의 군대를 교차 주둔시켰으나 유사시에 대비하여 그 주둔부대의 병력과 장비를 파악하는 정보업무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 적이 있었으며 전 상장도 북한 지역에 주둔하는 모든 국군부대의 화력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 소장도 걱정이 되었다.  인민군과의 최초의 합동작전인 것도 문제였으나 인민군의 구식 T-62 전차가 최신식 중국전차들과의 전투에서 제대로 전과를 올려줄지가 걱정이었다. 전차 1개 여단을 지원받았음에도 자신의 부대가 적의 주 공격목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되었다. 최 소장과 국군 참모들의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11. 18 19:50, 신안주시 북쪽 2 km 원일리 방어진

  "옵니다. 수 백 대의 땅크입니다."

  "기래? 어디 보자우."

  하급전사를 제치고 초소장이 열영상장치를 통해 전방을 보니 과연 어둠을 헤치고 수 백 대의 중국제 전차들이 몰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군의 포격 때문에 우렁찬 전차 엔진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틀림없는 중국제 전차였다.

  "본부 나오라우. 여기는 올빼미 여덟. 중국 전차부대 발견. 위치는….. 223887, 수백대의 중국제 땅크! 포 사격 바란다."

  초소장인 인민군하사가 적의 무차별 포격에 머리를 숙이고 5만분의 1 지도의 좌표를 찾아 무선으로 본부에 보고했다.그러나 즉시 포격지원을 해줄 줄 알았던 본부에서는 엉뚱한 질문을 퍼부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라. 적 전차부대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하사는 화가 났다. 도대체 본부는 뭘 묻는 것인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땅크가 수 백 대다. 강 건너편 논에 깔린 거이 다 땅크다.정 의심스러우면 직접 와서 보라우!"

  "알았다. 즉시 포격지원을 하겠다."

  같은 시각, 용연리 사령부

  "대규모의 적 전차부대가 원일리 건너 여북리에 나타나서 진군해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포격을 허가해 주십시요."

  참모의 보고에 전 상장은  딜레마에 빠졌다.  적의 주공이 과연 어느 쪽인가.낮의 회의에서는 국군의 젊은 공병대 장교의 말을 믿고 적의 주공이 도회가 될 것으로 예상하여 작전계획을 수정하고 부대를 재배치했었다. 그러나 적은 역시 자신의 애초 예상대로 여북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 수백대의 적 전차가 과연 적의 주력인가,  적의 주공이라면 즉시 포격 등의 모든 수단방법으로 방어해야 하는데 만약 적의 조공일뿐이라면 포병대의 위치만 가르쳐주고 적의 주공에는 지원을 못하게되는 꼴이 되고말 것이다.

  "적의 주공인가?"

  "예, 원일리쪽의 모든 청음, 관측초소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수백대의 전차라고 합니다. 적의 전차가 전원 투입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적 포병대의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원일리 일대의 방어진지는 적의 포격으로 엉망이 되고 있습니다."

  전 상장은 중국군의 지휘관이 성격이 급하고 인민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이렇다면 자신의 처음 주장대로 원일리쪽의 방비를 중시해야 했다.너무 머리를 쓰다보니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포격을 개시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회의 전차여단은 어떻게 할까요?"

  전 상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현 위치에서 즉시 이동 가능하게 대기하도록 명령을 내려."

  "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그 참모가 명령전달을 위해 돌아가자 국군 항공관제장교가 보고를 했다.

  "현재 상공에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적은 일반적인 중국제 섬형 전투기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수입한 미그-29가 주력입니다. 아군이 상당히 밀리고 있지만  적 항공기의 지상공격은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기래야지. 잘 하고 있구만."

  항공관제 장교는 전 상장의 말에 상당히 섭섭했지만, 그래도 아군 전투기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싸워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상군은 직접 적의 폭격을 받기 전까지는  공군의 고마움은 모르는 법이었다.  관제장교가 레이더를 보니 아군 전투기들의 수가 많이 줄어있었다.

  레이더에서 또 한대의 F-5 전투기가 사라졌다. 비교적 대형의 러시아제 공대공미사일은 전투기를 철저히 파괴시켜 조종사가 탈출할 틈이 없을 것으로 그는 생각했다.미사일의 명중율이 높아진 현대에도 러시아는 적 전투기의 철저파괴를 신념으로 삼아 대형이며 소수의 미사일을 장착하는 것이 전통이었고 중국도 미사일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전술을 많이 베꼈다. 항공관제 장교가 보니 또 한 대의 미그-23 전투기가 없어졌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아군 항공대가 전멸할 것같아 걱정되었다.

  1999. 11. 18  20:00  원일리

  "대대장 동지, 아군의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기럼 고개 팍 숙이고 있으라우."

  예광탄과 함께 인민군의 중포와 전차포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강 건너 여북리의 논에  화염이 솔구쳐 올랐다.  여기저기에 파괴된 전차가 나뒹굴었으나 중국 전차들은 무슨 일인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계속 몰려왔다.  대대장은 잠망경식 야시경으로 계속 접근해 오는 중국군들을 관찰하며 상급 부대에 무전기로 보고를 했다.

  일정 거리에 이르자 원일리 방어진의 대전차화기들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중국의 포와 전차포, 인민군의 포와 대전차병기들의 포탄 세례의 교환은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중국군은 필사적으로 리본부교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인민군의 기관총 사격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 820 기계화군단의 방어진인 원일리에서는 도망치는 적을 향해 사격이 계속되었는데 한 군관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적진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더니 경악을 했다. 위험한 상황이 물러가고, 후퇴하는 중국군 진열에 조명탄이 연이어 발사되자 이제야 적군을 제대로 본 것이다.

  "대대장 동지! 적 전차는 몇대 안됩니다. 대부분 장갑차입니다. 전차도 구식 T-72…"

  "메이 어드레? 기럼 적 땅크들은 다 어데로 갔나? 본부 부르라우!"

  같은 시각,  용연리 사령부

  "뭐야? 장갑차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아까는 전차 수백대라고 하지 않았나?"

  작전참모 한 사람이 수화기를 대고 호통을 쳤다. 참모의 통화 모습을 본 전 상장이 얼어붙었다. 아군 포병대의 위치를 노출시키고 나자 원일리로 오던 중국군 부대가 주공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으니  앞으로의 전투는 힘들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갑자기 사령부 상공에 전폭기의 폭음이 들려왔다.  수많은 중국 공군 소속 비행기들이 인민군의 대공 감시망을 피해 저공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항공! 항공!"

  사령부 건물 밖에선 이제야 공습을 알리는 경보가 울려퍼졌다.지상의 각종 대공화기가 불을 뿜었으나 이미 늦었다. 사령부가 있는 대조봉 일대와 포병여단이 있는 남쪽의 장상리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계속 안주상공 남쪽에서 선회하던 국군과 인민군 전투기들이 맞서 싸웠으나 전투기 수에 있어서도 압도당해 이미 제공권은 상실했고,  중국 지상군의 대공미사일이 무서워 직접 아군상공에 도달하여 중국폭격기를 요격하지 못하자 인민군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인민군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가 지자마자 주둔지 전역에 기름통을 놓고 불을 질러 놓았다. 야간공습을 한 중국기들은 조종사들이 야간감시고글(NVG)을 착용해서 목표물을 탐지하고 있었는데, 이 기름통의 불들이 야간감시고글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중국기들은 할 수 없이 관성유도장치에 의한 폭격만을 감행하고 정밀유도 폭격은 포기했다. 게다가 인민군의 주둔지와 송신기의 위치가 달랐으므로, 사전에 선정된 제한된 목표만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포병만이 포 사격으로 인하여 어쩔수 없이 위치가 노출되어 중국 공격기들의 집중적인 공습을 받아 분산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막심했다.

  "대규모 적 전차부대 발견! 위치는 도회리 전방입니다."

  통신병이 경악성을 토했다. 역시 적의 주력은 강폭이 짧은 도회리 쪽으로 공격해왔다. 전 상장은 당황했다. 지원할 병력도, 포병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전선에서 적의 포화가 빗발치고 보병과 기갑부대에 의한 단속적인 공격이 있는 판에 얼마 안되는 예비병력을 도회리쪽으로만 투입할 수도 없었다.

  "포병대에 연락해봐! 피해상황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 뛰어갔다와서 보고해!  그리고 남은 포가 있으면 당장 12 사단을 지원하라고 전해!"

  이미 인민군과 국군의 구별은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인민군과 국군을 명확히 나눠서 부르지 않았던가.

  "사령관 동지. 12사단장의 무선보고입니다."

  박 상장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통신기를 들었다. 국군 제 12사단장인 최 선일 소장의 침울한 목소리가 폭발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내용은 뻔하지 않은가.

  "사단장, 사수하시오."

  전 상장은 이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그로서는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를 자인하기는 싫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참을 수 없게 된 전 상장이 덧붙였다.

  "내레 바로 가갔소."

  전 상장은 아직도 중국의  폭격과 포격이 계속되는 와중에 자신의 장갑지휘차에 올라탔다. 운전병에게는 최고속도로 12사단 사령부로 갈 것을 명했다. 운전병이 야간고글을 쓴 채 달렸으나 곳곳에 섬광과 불길이 치솟자 야간고글을 벗은채 질주했다. 사방에 인민군들의 파괴된 전차와 불타는 장갑차들이 보였다.

   저 안에는 우리 젊은 인민군들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전 상장이 중국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올랐다.수없이 많은 자신의 부하들이, 전우들이, 젊은이들이 죽고 있는 것이다. 미그-29 전투기가 차량 행렬을 향해 다가왔으나, 호위 BMP에서 휴대형 대공미사일을 발사하자 전투기는 즉시 도망가 버렸다.  도회리에 다가갈수록 포성과 총성이 요란했다.

  1999. 11. 18  20:25  안주시 동쪽 도회리, 12사단 전방지휘소

  "단결!"

  경비병이 전 상장 일행을 보더니 받들어총 자세를 취했다.  인민군의 복장은 중국군과 비슷해 오인사격이 많아 초소 경비병들은 항상 주의를 다해야했다. 경비병이 지하벙커로 전 상장 일행을 안내했다.

  "상황은 어떻소?"

  최 선일 소장은 경례를 하는둥마는둥 하더니 계속 모니터들을 주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일제 사격!"

  사방에서 포성이 울려퍼졌다.  전 상장은 이 소리가 반지하벙커인 사단 전방지휘소에 적의 포탄이 맞은것이 아닌가 움찔했다. 전 상장이 궁금해서 모니터를 보니 파괴된 수십대의 전차가 화면 가득히 보였다. 도회리의 강 건너 용전리 서쪽의 논과 밭엔 수많은 중국제 전차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공중에선 인민군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하느라 지상지원공격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전투기들의 공기를 찢는듯한 소리와 기관포 발사음이 지하 지휘호에까지 들려왔다. 전 상장의 호통을 들은 공군 관제관이 인민군과 한국군 전투기들을 접적 상공까지 유도해서  중국의 지대공미사일에 의한 피해가 늘어났다.  중국의 구식 J계열의 공격기들은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적 전차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한고비를 넘겼는지 최 소장이 전 상장 일행을 전자상황판으로 안내했다.10여명의 소위와 중위들이 정찰대와 하급부대의 보고를 받아 적정을 표시하기 바빴다.

  "현재 적의 3차에 달한 공격을 분쇄했습니다.  특히 이 앞의 강에 가교를 건설하려는 기도가 2차에 걸쳐 있었습니다. 중국군은 아군에 대한 포격을 가하며 수륙양용전차로 먼저 밀고 왔습니다만 격퇴했습니다. 문제는 가교인데  중국군은 한번에 6개가 넘는 AVLB(미 육군의 가위식 중강습교량)를 설치하곤 합니다.계속 파괴해도 끝이 없습니다. 강폭이 짧고 수심이 깊은 곳은 폭이 20미터밖에 안되어  가교전차 하나만으로 다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김 중령의 지적이 옳았습니다.  아까는 1개 대대의 적 전차가 도하해서 몰아내는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과연 중국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중국은 한국을 침공하기 전에 한국의 지리에 대한 소상한 사전조사가 있었다.  위성사진을 통한 분석이나 한국 국립지리원에 대한 첩보행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의 왜국첩자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공작원들을 한국에 파견하여 지형지물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전략적으로 중요한 청천강과 대동강, 한강 등은 아주 상세한 지리조사가 있었다.

  12사단의 공병감인 김 중령은 상황판을 보며 시무룩해져 있었다.그의 얼굴은 이미 전세는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진작 그의 말을 믿고 이 지역에 더 많은 증원을 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판단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어떻소?"

  김 중령을 흘끗 보고나서 전 상장이 묻자 최 소장이 즉답했다.

  "적의 규모가 너무 큽니다.  우리 사단 앞에만 적 2개 집단군이 있지 않나 추산될 정도입니다.현재 파괴한 적 전차만 100대가 넘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차가 공격때마다 몰려오곤 합니다. 아군은 현재 병력 30%와 장비 50%의 손실을 보고있습니다.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병력 30%의 피해라면 1~2차 대전 유럽전선이라면 벌써 적에게 항복하거나 후퇴해야할 정도의 피해상황이었다.후퇴할 기회가 있을 때 후퇴한다고 해도 이는 지휘관의 무능을 탓할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전투의 중심지였다. 전멸을 하더라도 후퇴는 할 수 없었다.

  "지원을 하겠소.  하지만 전 지역에 걸쳐 적이 파상공격을 해오기 때문에 전차부대의 지원은 어렵고 보병 1개 사단을 지원해 주겠소."

  "적 전차의 수는 엄청납니다. 전차부대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 전차 주력의 차종이 뭔지 아십니까?  러시아제 T-90입니다."

  전 상장이 깜짝 놀랐다. T-90은 러시아가 1993년에 실전 배치한 최신형 전차였다.  레이저 경보장치와 적외선 재머가 장착되어 있어 대전차 미사일에 대한 방어가 강화되었고, 능동반응장갑은 APFSDS(철갑탄의 일종)나 HEAT탄(성형작약탄)의 피탄에도 끄떡없었다. 기타 많은 러시아의 과학기술이 집약된 최신형의 전차였고 이를 방어할 무기나 전술은 서방 여러나라에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이런 상황에 중국이 집단군 규모의 T-90을 보유했다는 것은 통일한국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중국군에 T-90이… 그리고 어떻게…"

  전 상장이 깜짝 놀라 묻자  최 소장이 계속 명령을 내리는 중간에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먼저 기총으로 예광탄을 쏴서 능동반응장갑을 파괴하고, 저격병들이 적외선 재머를 쏘아 부숩니다.  그 후에 대전차미사일을 발사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적 전차 하나 파괴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병간의 협동이 있어야 됩니다. 자, 또 온다. 준비…"

  중국군 전차들이 몰려온다는 부관의 경고에 최 소장이 상황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 소장은 중앙의 대형스크린보다는 좌측의 지상레이더를 신뢰하는 눈치였다.  전자전에 익숙치 못한 전 상장이 보기에도 수백대의 움직이는 차량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령관 동지, 백돌고개가 뚫렸습니다!"

  지휘부를 따라온 통신병이 외쳤다. 백돌고개는 안주 시가와 도회리의 중간에 위치한 지점으로 청천강이 갑자기 넓어져 폭 2 km, 길이 6 km의 사구와 삼각주가 있는 지역의 남쪽 중심지이기도 하다.  백돌고개가 적에게 점령된다면, 중국은 도회리와 안주시의 연락로를 차단하고 인민군 사령부까지 넘볼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쪽 적 병력은?"

  "아군 4군단이 맞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비병력까지 모조리 투입했는데도 막지 못했습니다.  약 1개군단의 기갑부대와 2개군단의 기계화혼성부대로 추정된답니다."

  인민군은 중국군의 주공으로 예상되는 원일리 일대에 820 기계화군단을 배치하고 좌측 낙만리(樂萬里) 지역에 2군단, 우측 안주시가와 백돌고개쪽에 4군단을 배치하고 가장 우측 도회에는 국군 제 12사단을 배치했었다. 그러나 중국군 기계화 부대는 도회리와 백돌고개쪽을 주공으로 잡은 것이고, 폭이 짧은 안주전선에 방어군의 몇배나 되는 병력을 배치한 것이다.

  "820기계화에서 1개 사단을 빼내 백돌고개로 돌려! 그리고 7군단에서 2개 사단은 즉시 이쪽으로 이동시키도록! 아니, 이동 대기!"

  전 상장은 당황했다. 패배는 이제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얼마나 아군의 피해를 적게하느냐가  작전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전 상장은 이왕 이렇게 된바에 원일리의 820 기계화군단을 도하시켜 백돌고개로 공격해오는 중국군의 배후를 쳐버릴까 하다가 기계화군단의 큰 피해를 우려하여 후퇴하기로 작심했다.

  1999. 11. 18  20:35  백돌고개, 인민군 전초기지

  "전부 뚫렸습니다. 적 전차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다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젠 장갑차와 보병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셀 수가 없이 많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만 대충 쏴도 다 맞겠습니다.근데 포격은 왜 안해주는겁니까?"

  인민군의 한 문철 중위가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이 전초기지는 인민군 4군단의 최일선에 있는 관측기지인데  중국군의 전진이 워낙 빨라 미처 후퇴하지도 못하고 아직까지 관측보고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중사가 소대장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없이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한 중위는 전방을 잠시 주시하더니 무전기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포격지원이 늦은데 대해 불만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적 보병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담에 봅시다, 사단장 동지!"

  한 중위와 그의 소대원들은 이제 결전을 위한 준비를 했다. 몰려오는 중국군을 향해 기관총과 드래곤 2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적외선 유선유도방식의 드래곤이 날 때마다 장갑이 얇은 보병전투차 한대씩을 날려버렸다. 보병전투차에서 보병들이 급히 하차했다.이제 보병들은 인민군이 숨어있는 언덕까지 엄폐물도 없이 뛰어와야만 했다.

  한 중위는 미제인 드래곤 미사일이 역시 미제인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인민군과 중국군이 서로 미제의 무기로 싸우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미제(米帝)는 조중(朝中) 공동의 적이 아니었던가?

  한 중위의 신호에 따라 매설된 지뢰를 연속적으로 폭파시키자 하늘까지 붉게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웬만한 총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중국군들이 처음에는 약간 당황하더니  인민군들이 소수인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있게 몰려왔다.

  수십대의 미제 M2A2 브래들리 보병전투차가 25 밀리 기관포를 난사하며 인민군들이 있는 언덕으로 몰려왔다. 소대에 할당된 8개의 대전차미사일은 이미 다 소비했다. 이제 남아있는 대전차무기라고는 몇 개의 RPG-7밖에 없었다. 이제는 후퇴할 수도 없는 한 중위의 소대는 결전을 각오했다.

  중국군의 보병전투차가 접근하면서 기관포를 쏘아댔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옆에서 기관총을 쏘던 전사가 쓰러졌다. RPG를 들고 있던 중사가 참호 위로 스치는 기관포탄의 각도를 보고 있다가 한순간 벌떡 일어났다. 거리는 60미터도 안되었다. 야광물질을 칠한 조준기 안에 보병전투차의 기관포 섬광이 잡혔다. 한 중위가 방아쇠를 당기자 강한 힘으로 포탄이 날았다.  포탄은 정확히 보병전투차의 포탑에 명중해 포탑을 종이 찢듯이 날려버렸다.

  옆에 있던 한 중위가 환성을 지르자 중사가 씩 웃었다.  웃으면서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 중위가 중사를 멍하니 보다가 기관총을 잡고 쏘기 시작했다. 쏘면서 곁눈질로 소대의 상황을 보니 인원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적은 셀 수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중위가 신호탄을 쏘고 머리를 숨기자  각 분대의 크레모어를 맡은 하급전사들이 일제히 격발기를 눌렀다.참호 위로 크레모어의 후폭풍이 지나갔다. 그의 철모와 군복에 먼지가 쌓였다.  중위가 다시 머리를 내밀고 보니 중국군 보병들은 보이지 않고 보병전투차들이 겁먹은듯 정지해 있었다. 어떤 전사가 RPG를 발사해서 보병전투차 한대를 파괴하자 보병 전투차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살아서 돌아가는 중국군 보병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

  "후퇴~ 남쪽으로 움직이라~~~우!"

  만신창이가 된 인민군들이 슬금슬금 참호에서 기어나왔다. 이들은 부상당한 동료들에게 수류탄 하나씩을 안겨주고 2차 공격을 피해 언덕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부상자들이 씩 웃었다. 조금 이따가 보자는 뜻이었다.

  100미터쯤 걸어 내려가다가 굉음에 놀라 소대가 있던 언덕을 보니 언덕은 이미 불바다가 되고 있었고 하늘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전투기 2대가 선회하고 있었다.저공으로 소대 위를 지나쳤으나 소대원들은 중국군인척 하고 태연히 남쪽으로 걸어갔다. 전투기들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뚝을 넘어 갈대밭에 엎드린 채 길을 보니 수많은 중국군 장갑차와 보병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 중위가 소대를 도로를 따라 횡으로 산개시키고 분대장들을 불렀다.

  "공격하갔소. 준비들 하기요."

  분대장들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었다. 분대장들이 돌아가자 한 중위가 발사신호를 했다. 소대원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던지며 RPG와 소총을 발사했다. 불시에 기습당한 중국군들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났다. 근거리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RPG의 명중율이 높아 여기저기 장갑차들이 파괴되고 보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야간이라 중국군은  인민군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규모부대가 공격하는 줄 지레 겁먹고 도망가기 바빴다.

  한 중위의 신호로 소대원들이 길로 내려와 중국군의 시체들로부터 탄창과 RPG를 챙겼다. 인민군과 중국군의 무기체계가 비슷해서 편리했다. 길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어느 야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산에 오르자 멀리 포성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산길의 경사가 심해 숨이 가빴으나 한 중위는 시원한 밤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땀이 식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11. 18. 20:50  안주시 서쪽 2km 용흥리(龍興里)

  청천강 남쪽 지역은 치열한 전투와 부대의 이동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밤인데다가 서로의 무기체계가 비슷한 것이 많아 각종 오발 사고가 잦았는데 인민군 통신망의 붕괴는 안주전역 최악의 오인전투를 빚었다.

  인민군 820 기계화군단의 주 진지인 원일리에서 제 4군단의 방어진으로 이동하던 제 3기계화사단은 예비로 돌려진 제 7군단의 주방어진지인 문봉리 앞 용흥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7군단 수뇌부는 제 4군단의 방어선이 돌파되었다는 보고는 받았으나 820 기계화군단에서 제 4군단쪽으로 1개 사단을 이동시킨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다. 중국군 장갑집단군의 공격을 예상하여 바짝 긴장한 인민군 제 7군단 15사단은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빠르게 이동중인 제 3 기계화 사단의 전차대열을 발견하자 중국군으로 오인하여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계화사단도 7군단 병력을 전선을 뚫고 전진해온 중국군으로 오인하여 즉각 반격을 실시하였다.

  이는 더 큰 결과를 빚었는데, 비록 방어선은 뚫렸으나 820기계화군단의 지원을 기다리며 절망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던 4 군단의 사기를 크게 꺾어버렸다. 후방에서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방어란 더더욱 어려웠다. 그것이 우군끼리의 오인전투라는 사실을 생각못한 4군단 지휘부는 즉각 후퇴를 결심하였다.

  11. 18. 21:00 도회리, 12사단 지휘벙커

  "뭐야? 7군단 북방에 적 전차가 있고 3기계화 남쪽에 적 부대가 있다니? 오인이야! 즉각 전투중지시켜! 통제소는 도대체 뭐했어?"

  전 상장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의 공세가 덜한 군단에서 병력을 빼내 뚫린 곳을 막으려하던 차에, 오인전투라는 최악의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그것도 단 한대의 전차가 아쉬운 판에…

  "4군단은 후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4군단 후퇴병력과 중국군 전차들이 뒤섞인 상황입니다."

  전 상장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창피해서 12사단 지휘부를 흘끗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전투지휘에만 여념이 없었다.  비슷한 숫자의 적을 소수인 이들은 막고 있고 인민군들은 더 많은 숫자로도 막지 못한 사실이 부끄러웠다.

  "오인전투를 중지시키고 이들을 같이 배치해. 후퇴하는 4군단은 안주시에서 시가전을 실시하라고 전하라. 물론 지휘체계는 붕괴되었겠지만."

  전 상장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무전병이 각 군단으로 연락했다. 참모장이 4군단의 패배하여 후퇴하고 있다는 내용도 전하라고 거들었다.

  "동지의 생각은 어떻소?"

  전 상장이 김 중령에게 자문을 구했다. 공병감에 불과했지만 현 상황에서는 가장 믿음직한 인물로 보였다. 김 중령의 눈이 강하게 빛나더니 전 상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820 기계화군단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후퇴도 어렵습니다. 방법은 알고 계시겠지만…"

  김 중령도 전 상장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전 상장은 앞으로의 전쟁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가 없었다.

  "중국은 거의 무한할 정도의 자원을 투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중국의 헬기사단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대공방어망이 극도로 취약해진 상태입니다.부대가 후퇴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상장이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김 중령은 기계화군단 하나를 희생시켜 전 부대의 후퇴를 종용하는데 자신의 입장에서는 병력보다는 전차를 아껴야할 상황이었다.

  "4군단과 12사단이 지연방어를 하고 나머지는 후퇴명령을 내리겠소."

  전 상장이 결정을 하고 부관에게 예하부대에의 전달을 지시했다.  무전병이 열심히 명령을 전달하는 동안  두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김 중령이 놀란 눈을 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최 소장은 두 사람을 흘끗 보더니 계속 전투지휘를 했다. 최 소장이 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차 한 대라도 구하려면 우측의 12사단이 적 장갑집단군을 막고, 후퇴한 4군단이 안주에서 시가전을 펼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것 같았다. 김 중령도 이해는 못할 바가 아니었으나, 820 기계화군단을 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중국에는 무한정할 정도의 자원이 있지만 우린 없소. 아직 남아있는 전차를 후속부대에 무사히 전달해 주는 것을 나의 임무로 알겠소. 불만은 있겠지만 이해해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저희 사단에 배속된 전차 중 2개 대대는 빼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이 지역이 너무 붐벼서 전투에 지장이 있단 말씀입니다. 하하!"

  전 상장의 부탁에 최 소장은 나머지 전차도 빼내가길 원했다. 그리고 조금 더 있겠다는 전 상장을 상황이 급박하다며 억지로 문 밖까지 배웅했다.

  "저희도 막다가 안되면 후퇴하겠습니다.빨리 제 2방어선을 구축해 주시죠.  저희 사단은 일단 예비로 돌려주셔야 됩니다. 좀 쉬어야 될테니까요."

  최 소장이 억지로 웃음을 띄었다.늙은 전 상장의 주름진 얼굴도 억지로 미소를 짓느라 일그러졌다.지휘벙커 밖에서 전 상장이 김 중령의 손을 잡고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연료 저장소가 중국군의 포격에 명중해 폭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건승을 빕니다. 사령관 동지!"

  김 중령이 멋지게 거수경례를 붙였다.전 상장이 김 중령의 왼손을 잡고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부탁하네. 자네와 최 소장 둘 다 꼭 필요해.자네들 부대는 잃더라도 자네들을 내 참모로 두겠네. 자네들 말을 안들어서 미안하네.  꼭 살아 돌아와주게. 명령일세."

  최 소장과 김 중령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거수경례를 했다.  꼭 돌아가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다시금 중국군 전차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11. 18. 21:30 안주시 남동쪽 8km, 매암산 아래 비포장도로

  완벽한 등화관제를 하고, 적외선 서치라이트를 켠 보병전투차를 선두로 전 상장의 전선 사령부와 전차 2개 대대가  안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통하는 산길을 달렸다.도회리의 서쪽인 백돌고개는 이미 중국군에게 점령당했으므로 예비도로인 이곳으로 우회한 것이나, 전 상장은 이미 패배를 예견하여 후퇴에 중점을 둔 부대이동을 시켰다. 야시경으로 고속도로를 살펴보니 이미 도로는 후퇴하는 인민군전차와 각종 차량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뒤에서 섬광이 비쳐서 보니 북쪽과 북동쪽에 커다란 불길이 솟아나고 있었다. 북쪽은 4군단이 패한 백돌고개이고 북동쪽은 12사단이 있는 도회리이다. 백돌고개의 불길은 잦아들고 있는 반면에 도회리쪽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12 사단의 병사들이 목숨을 바치며 침략군을 저지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북서쪽 안주시에서는 인민군 4군단의 병력들이 절망적인 저항을 하고 있는지  시가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계속되던 총성이 잦아들어갔다. 전 상장이 후퇴를 종용했다.

  11. 18. 21:40  도회리, 12사단 지휘부

  "김 중령! 늦기 전에 쓰는게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만, 어떻소?"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단장님!"

  최 소장의 질문에 김 중령이 묘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그동안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김 중령이 부하 공병장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발사! 아니아니…. 이럴 땐 투하라고 하던가? 어쨋든 그거… 알잖아. 풀어!"

  김 중령이 말을 더듬자 급박한 상황에서도 부하인 공병장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하긴 자신도 적당한 말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김 중령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24시간 동안 작업한 것의 성과를 이제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김 중령이 작전을 실시하자 사단장이 투덜거렸다.

  "이제 우린 후퇴준비나 해야겠어. 사령부나 다른 부대도 다 후퇴했겠지. 천 대령, 후퇴지휘를 하시오. 나는 마지막까지 상황을 보고 떠나겠소. 참, 고속도로나 국도는 피하고 산길로 이동해야겠소."

  11. 18. 21:42 도회리 앞 청천강

  아직 불타고 있는 수륙양용전차들 사이로 물위에 검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 해군에게서 긴급 공수받은 소형 기뢰였다. 근접신관이 제거된 이 기뢰들은  천천히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약 3개 대대의 중국제 63식 수륙양용 경전차들이 도강을 하자 가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육중한 T-90 전차들이 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한 대씩 밖에 못지나는 중강습교량보다는 다수의 전차와 보병들이 함께 건널 수 있는 리본형 부교를 선호하는 중국군이 이제 막 3 개의 부교를 건설하여 수많은 전차와 보병전투차를 도강시키고 있을 때 가장 상류의 부교가 섬광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파편보다는 수압에 의한 파괴원리를 가진 기뢰는 기뢰가 직접 닿은 부분 뿐만 아니라 물에 떠있는 부교 전체를 파괴시켰다.  도강 중이던 전차 4대와 수많은 보병들이 물에 빠졌다. 부상당한 보병들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강물이 흘러 부교의 잔해들이 중간 지점의 부교로 흘러갔다.  가교전차의 가교는 직접 물위에 떠있지 않고 공중에 걸쳐있기 때문에 기뢰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부교의 경우는 물위에 떠있기 때문에 기뢰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두번째 부교가 날아가고 또 수많은 차량들이 물에 쓸려갔다.

  11. 18. 21:43  도회리, 12사단 지휘부

  "현재 두 개 성공입니다. 어떻습니까?  살수대첩하고 비슷합니까?"

  "예끼 이 사람아. 을지문덕 장군은 이겼지만 우리는 아니잖은가?"

  김 중령이 장난스럽게 보고하자 최 소장이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지역이 지역인만큼  김 중령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상해 이를 실현한 것이다.

  "어쨋든 중국군은 지금 당황하겠죠. 보십시요. 세번째 부교에서는 후속차량들이 가교에 진입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5초 후, 자 보십시요."

  최 소장이 중앙스크린을 보니  역시 정확한 시간에 세번째 부교도 날아가버렸다. 최 소장이 탄식을 했다.

  "강 폭이 좀 더 넓거나, 중국군이 가교가 아니라 주로 부교로 도강을 시도했으면 자넨 제 2의 을지문덕 장군이 될뻔했네. 중국군에게 가교전차의 수가 저렇게 많다니… 아깝군. 어쨋든 시간은 좀 더 벌었다고 볼 수 있지. 참, 나머지 기뢰는 어떻게 된건가?"

  "아마 중국군의 수륙양용전차를 파괴하든지 바다로 흘러 중국까지 건너가서 중국 군함을 파괴할 것입니다. 하하!"

  최 소장과 김 중령 뿐만 아니라 지휘부내의  모든 장병들이 오랜만에 파안대소를 했다.

  "자, 챙길건 다 챙겼겠지? 가자고."

  사단 사령부가 후퇴를 시작하자 마지막까지 중국군 전차들을 막던 제 2연대도 천천히 후퇴를 시작했다. 호되게 당한 중국군 전차들은 매복이 있을까 무서워 함부로 추적을 하지 못했다.  12사단은 제 2 방어진지로 천천히 후퇴했다.

  도회리 남쪽 매암산의 세 봉우리는 안주시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고지였고, 그 외에도 중요한 고지마다 1개 중대씩 배치했다. 12사단 병사들은 전투에 지쳤지만, 적의 도하작전 방어보다는 고지 방어작전에 자신이 있었다. 익숙한 강원도 보다는 산이 낮았지만 그래도 12사단으로서는 유리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믿는게 더 있었다.

  11. 18. 22:30  매암산 서산봉(451 미터) 12사단 지휘부

  "대규모 헬기부대입니다. 안주시로 진입중!"

  정상에 있는 대공진지에서 촬영한 화상이 유선을 통해 지휘부 스크린에 중계되었다.수 십 대의 공격헬기가 안주시 곳곳의 건물에 로켓포 공격을 가했고,  더 많은 수의 병력수송헬기들이 안주시 남쪽에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4군단은 후퇴할 기회도 없군요."

  "후퇴할 생각이 아예 없었지."

  김 중령의 평가에 사단장 최 소장이 토를 달았다. 인민군 4군단이 방어를 담당한 백돌고개가 뚫리자 일부는 바로 남쪽인 원풍리로 후퇴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사령관인 전 상장의 명령에 따라 안주시에서 시가전을 전개하고 있었다.그러나 대규모 전차부대와 헬기부대의 협공을 받은 인민군 4군단은 서서히 붕괴되었다.

  "항복할 생각도 없군."

  최 소장이 속으로 인민군 4군단 병사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 때 통신병이 바짝 긴장하더니 사단장인 최 소장에게 보고했다.

  "적 기갑부대 서상리 진입, 331고지와 262고지에서 공격중입니다. 병력은 1개 전차연대와 2개 기계화연대… 포병은 없지만 사단편성입니다."

  도회리 남쪽 매암산 주봉은 12사단 지휘부가 있는 서산봉이고, 그 북쪽에 331고지, 북서쪽에 262고지가 있는데, 각 1개 대대씩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그러나 대대병력이라도 병력 수에서는 2개 중대 밖에 되지 않은 부상자와 지친 병사들 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전차무기는 거의 떨어진 상황이었다.

  국군 12사단 병력은 고지마다 넓게 분산해 있었다.4개 군단이 방어를 하던 곳을  피해를 입은 1개 사단이 방어를 하자니 병력은 몹시 부족했지만,  방어가 목적이 아니고 후퇴하는 본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만큼 병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안주쪽이 아니라 백돌고개를 뚫은 놈들입니다."

  작전참모 천 대령이 지적을 했다.  중국군은 아직 전선을 재정비하지 못한 채 각개약진하고 있었던 것이다.러시아의 작전기동군 개념은 적의 종심방어선을 돌파한 후, 전차를 위주로한 기갑부대가 깊숙히 침입하여 전략적 목표를 탈취하는 것이므로 이들의 이동은 신속했다.

  "안주를 뚫은 적 기갑부대는  각 부대간 연계 없이 평양까지 밀고 갈것입니다. 각개격파에는 좋은 상황입니다.  대전차무기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천 대령이 큰 고기를 놓친 듯 아쉬워했다.

  "우린 그냥 시간만 끌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겠지.  작전기동군이라는 거 참 이상해. 왜 보전합동의 원칙까지 깨가며.. 무전병! 적 전차부대는 적당히 보내도록 연락해. 고지 점령전을 하지는 않을거야. 우리는 뒤에 따라오는 보병을 친다. 탄약을 아끼도록!"

  사단장이 무전병에게 명령했다.후퇴는 하지 않되 적극적인 전투는 피하라는 명령이었다.  어차피 전차부대로는 이런 산악지대를 점령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 전차들은 단지 안주-평양간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이 길로 온 것 뿐이었다.

  "우린 후퇴 안합니까?"

  김 중령이 의아한 듯 사단장에게 물었다. 사단장이 실실 웃었다.

  "우린 어차피 수송수단이 없잖은가?  적은 기동력이 우수한 전차부대인데. 우리가 후퇴한들 바로 따라 잡히겠지."

  사단장의 대답에 김 중령은 그럼 어떡할거냐고 묻는 눈을 했다. 사단장이 낄낄댔다.

  "그냥 버텨 보는거지 뭐. 전차도 없고 포병도 별로 없으니 이동은 쉽겠군. 참, 김 중령!"

  "예! 사단장님."

  "자넨 부상자 병력을 이끌고 후퇴해주게. 산길로 가야할거야. 사단이 보유한 트럭을 다 주겠네."

  김 중령은 사단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유격전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규군으로서  후퇴할 수 있는데도 유격전을 펼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공병대는 필요없으니 공병대도 같이 후퇴하게.  중장비도 다 가지고 가면 되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공병대는 전투 공병입니다. 일반 보병전투에도 충분히 투입할 수 있습니다."

  "명령일세. 적 전차가 오기 전에 떠나게."

  사단장 최 소장의 명령은 단호했다.

  김 중령은 공병대대와 부상자 부대의 후퇴를 준비했다.  선두에 대전차미사일을 탑재한 보병전투차를 세우고 중간에 앰뷸런스와 부상병들을 가득 실은 트럭, 뒤에 공병대대의 중장비가 따르게 했다.산길로 후퇴를 하면서도 김 중령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매암산의 봉우리들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헬기부대입니다!"

  천마계획에 따라 한국형 보병전투차에 대공미사일을 탑재한 차량에서 무선 보고가 왔다.김 중령이 북서쪽 하늘을 보니 수 십 대의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사격명령을 재촉하는 대공포 소대장에게 김 중령은 짤막하게 응답했다.

  "자네 같으면 우릴 공격하겠나? 고속도로를 보게."

  11.18  23:00  신의주-평양 고속도로상

  신안주 남쪽을 달리는 신의주–평양간 고속도로에는 후퇴하는 인민군 차량들로 만원이었다. 전차와 자주포,수송트럭과 보급부대의 차량이 뒤섞여있는 판에 중국군의 포격이 더해져 아비규환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갑자기 포격이 멈추더니 중국의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A-5C 대지공격기와 이를 호위하는 MIG-23과 비슷한 F-9 전투기였다.  도로 주변에 후퇴 엄호를 위해 배치된 대공 미사일차들이 수 십 발의 미사일을 쏘아댔지만 중국 전투기들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공으로 날아와서 집속폭탄을 투하하고 부리나케 남쪽 산을 넘어 도망가고, 이를 다른 전투기들이 뒤이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면서도 공중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는데,  이는 지상전과는 달리 현재 공중전의 최전선은 평양상공이기 때문이었다. 인민군과 국군의 전투기들은 만주와 산둥반도에서 날아오는  전투기들을 요격하기에도 바빴다.

  전투기들이 돌아가자 헬기들이 나타났다. 공격헬기들이 대공미사일차량들을 먼저 공격하고, 대공미사일의 사격이 멈추자 차량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인민군들이 차량을 버리고 산속으로 뿔뿔히 도망쳤다.

  헬리콥터들이 공격을 마치고 북쪽 하늘로 날아가자 이번엔 중국군 전차부대가 후퇴하는 인민군 후미 부대를 덮쳤다.  인민군들은 파괴된 차량들을 헤집고 후퇴를 해야했는데,  도로상에 파괴된 차량이 너무 많아 추격하는 중국군들의 추격까지 방해했다.

  11. 18. 23:10  매암산 서산봉(451 미터) 12사단 지휘부

  "사단장님! 중국군 보병들이 고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단장이 조용히 앉아 모니터에 나온 상황을 살펴보았다.중국군 전차들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했으나  중국군의 2개 기계화연대는 후환을 남기지 않기위해서인지, 아니면 공격당한데 대한 보복인지 국군들이 있는 331고지와 262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영국과 합작하여 개발한 NVH-1 보병전투차와 대형 바퀴 6개가 달린 WZ-551 APC에서 기관포사격을 하는 동안, 이들 차량에서 하차한 보병들이 떼지어 고지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두 고지는  경사가 급하여 공격측에 절대로 유리하지 않은 지형이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차를 믿은 중국군 사단장은 밀어붙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기에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고지 정상 부근에서 국군 12사단의 중기관총이 불을 뿜어대자 헉헉대며 고지를 오르던 중국군 보병들이 낙엽처럼 쓰러져갔다.양쪽에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위치로 보면 중국군이 훨씬 불리했으나 병력이 워낙 많았다. 보병전투차와 APC의 화력지원을 받아 보병들이 정상 부근까지 진출하는 모습을 본 국군 12사단장이 명령을 내렸다.

  "좀 도와줘."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서산봉에 있는 국군 포병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보병중대가 보유한 박격포까지 가세하자 서상리 분지 일대는 거대한 불꽃놀이판이 되었다. 조명탄은 필요도 없었다.  갑작스런 포격에 놀란 중국군은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보병뿐인줄 알고 공격했다가 포병을 갖춘 대규모부대라는 사실을 알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됐어. 우리도 후퇴한다. 제 3진지로!"

  사령부가 이삿짐을 꾸리느라 바빠졌다.  도회리와  서상리에 이어 더 남쪽의 용봉산(363 미터) 고지로 후퇴하는 것이다. 국군 12사단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뒤늦게 날아온 중국군 헬기들은 아무도 없는 서상봉과 그 북쪽의 2개의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 병사들은 빚 때문에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처럼 무기와 탄약을 이고지고 산길을 걸어 후퇴했다.  산악용 대공 미사일차 험비 몇 대가 적외선 서치라이트를 킨 채 대열을 인도했다.

  12사단장 최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는데  중국군의 정찰헬기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헬기는 개미떼처럼 일렬로 이동하는 국군의 긴 행렬을 숲에 가려 보지 못했다.  그러나  헬기의 저공비행을 공습으로 착각하여 당황한 험비의 대공발칸포가 불을 뿜었다.헬기는 수십 발의 포탄을 맞고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저런, 빨리 이동해! 구보로 3진지까지 뛴다. 실시!"

  사단장이 부하들을 독촉했다. 아마도 중국군은 틀림없이 추락하는 헬기의 섬광과 하늘을 가르는 대공포탄의 궤적을 보았을 것일라고 생각했다.  사단장이 소대장 시절 이후 실로 오랜만에 구보로 산길을 뛰었다. 얼마 뛰지도 못하고 기진맥진했지만 흐르는 땀을 늦가을의 바람이 씻어주어 상쾌했다.

  사단장이 지친 몸을 이끌고 제 3진지의 지휘소에 도착했을 때 중국군의 대규모 헬기부대가 용봉산 상공을 가득 메웠다.  몇 대 남지도 않은 대공발칸포가 밤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남아있던 마지막 대공미사일들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몇 대의 헬기가 추락하자 중국 헬기들이 로켓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산 정상을 불바다로 만들려는듯 이들의 로켓탄 사격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1999. 11. 18  09:30(뉴욕 시간)  뉴욕

  중국이 한국 국경을 넘어 침공해오자 뉴욕시간으로 다음날 오전 한국측의 요청에 의해 긴급유엔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동 제안으로 열린 유엔총회는,  그러나 한국인들이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껴야하는 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한국은,  특히 남조선은 우리 중국의 만주지역을 침공해야된다는 주장을 하는 호전적인 제국주의적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들 주장대로 조선족이 많이살고 있다는 만주는 수천년간 중국의 땅이며 조선족은 아직도 소수에 불과합니다.그럼에도 그들은 민족통합운동 또는 고구려 고토회복이니 만주수복운동이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거리며 호시탐탐 만주지역을 노려왔습니다. 자, 이것이 증거입니다."

  중국대표가 발언권을 얻어 열변을 토하다가 잠시 비디오를 틀었다.그것에는 중국 내란 중 서울에서 우익단체들이 만주수복을 결의하며 궐기대회를 하는 광경이 담겨 있었다. 또한 민족선각자인척 하는 자들이 쓴 책들의 문제되는 내용들,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 내란 중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중국 내전 중 한국이 만주지역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비밀문건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조선의 혜산이라는 지역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 희생자는 대부분이 우리 중국동포였습니다.그리고 중국 단둥에서 일어난 조선인들의 폭동도 우리 중국의 체제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조선인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남조선은 우리 중국의 불행했던 내전시기를 이용하여 양측에 무기와 군수품을 팔며  내전기간의 연장을 획책하였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국인들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유엔주재 중국대사의 연설은 반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지만, 큰나라 중국답게 다른 수많은 작은 나라들을 설득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최근에 중국과 적대시한 동남아국가들은 중국의 눈치를 봐야했으므로 침묵을 지켰고,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중국을 지지했고 다른 수많은 아시아,아프리카의 후진국들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보다는 아직은 낙후한 중국에 심정적 공감을 표시했다.

  "그말이 사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킬만한 원인은 안되지 않소? 왜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았는데 침략한 것이오?"

  한국대사가 반박을 하자 중국대사가 바로 맞받아쳤다.

  "역시 그럴줄 알았소. 여러분! 이 화면을 보십시요. 한국의 침략행위를 보여줄 결정적 증거입니다. 11월 12일자로 되어 있습니다."

  화면이 움직이자 어느 시가지가 나왔고, 곳곳에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어 사방에 널려진 참혹한 시체들,그리고 총검으로 그 시체들을 찌르며 웃는 모습의 군인들이 보였다.  각국 대사들이 화면을 보고 신음성을 흘렸다.

  "우리 기자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것이오. 저 군인들을 보시오. 틀림없는 한국군이오.단둥의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우리 국경을 넘은 한국군들이 단둥 시내에 들어와 중국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소. 이것을 보고도 거짓말하겠소?"

  "이건 명백한 조작이오! 한국군은 월경한 적이 없소!"

  한국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으나  중국대사는 콧방귀를 뀌였다.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보고도 조작이라니, 한국대사는 한국군이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댈 수 있소?"

  한국 대사는 말문이 막혔다.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어찌 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금 전에 무관이 브리핑한 내용이 퍼뜩 생각났다.

  "아시아 각국이, 물론 주일 미군도 포함되지만,  중국측의 최근 며칠간에 걸친 지독한 전파방해를 감지했소.이는 각국의 위성통신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었소. 이는 중국이 한국을 침공하기 위한 사전준비가 아니란 말이오?"

  "그것은 한국군의 공습을 막기 위한 조처였소. 우리는 전쟁준비가 되지 않아서 미제 전투기로 무장한 한국군의 공습을 막기 어려웠기때문이오. 자, 아까 그 화면의 날짜를 보시오. 비서관!"

  중국 대사가 변명을 하며 비서를 불렀다. 대사의 비서가 비디오를 조작하자 다시 같은 화면이 흘렀다. 화면 아래에 날짜가 표시되었는데 틀림없이 중국이 전파방해를 시작한 날이었다.

  "저 화면은 조작이오. 전쟁 5일 전에 그 화면을 찍었다면 왜 그리 오랫동안 저 화면을 공개하지 않았소?"

  한국대사가 묻자 중국대사가 대답했다.

  "전쟁은 이미 그 때 시작되었소. 우리는 5일에 걸쳐 월경한 침략군을 몰아내고 부대를 이동배치해 이제야 한국국경에 다다른 것이오. 우리는 확실하게 승리를 담보할 때까지는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살까봐 저 화면을 공개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침략군을 몰아내어 공개하는 것이오."

  중국이 체면을 중시한다는 것은 단지 유엔대사들 뿐만 아니라 외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중국 대사의 대답에 각국 대사들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중국대사가 각국 대사들의 눈치를 보더니 드디어 선언을 했다.

  "침략국은 자국이 공격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오. 이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경우요.  한국은 침략국이므로 우리 중국은 한국을 공격할 국제법적 권리가 있으며, 이는 침략이 아닌 자위권에 불과하오. 또한, 한국을 돕는 국가는 중국의 적으로 간주하겠소."

  각국 대사들이 웅성거렸다. 일본과 독일대사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유엔헌장에 적국조항이 삭제되지 않아 잠자코 듣고 있기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대사는 이미 한국과 무기 수출 계약을 한 상태라 상당히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중국 시장은 세계 어느 나라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 제안한 중국의 한반도 내외국군대 철수에 대한 유엔결의안은 결국 부결되었고,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이 제출한 한국규탄결의안이 통과되었다.한중간의 전쟁문제는 안보리 상임이사회에 넘겨졌으나, 중국이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인 한 한국과 북한이 호소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11. 18. 11:00  워싱턴, 중국대사관

  "고맙습니다, 대사. 각하께서도 귀국 정부에 심심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최근 미국 시민들도 중국에 매우 호의적입니다."

  미 국방부의 군수담당 차관보인 윌리엄 제프리가 고개 숙여 중국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틀전,즉, 한중간의 전쟁이 나기 하루 전에 중국은 미국의 군사비 감축정책으로 인해 중단될 위기에 처했던 항공모함 2척과 순양함 3척의 건조가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이들 수상함들의 구매계약을 미국과 맺은 것이다. 또한 감산과 함께 대량으로 노동자를 해고해야 할 위기에 처한 항공 방위산업체들의 경영에도 숨통이 트였다. 중국이 각종 항공기들을 미국에 대량 주문한 것이다.

  2000년에 있을 예정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내 불경기로 인기하락중인 현직 대통령 제임스의 재선을 위한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중국대사는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지난 9월에도 상당수의 전투기와 수상함정을 미국에서 수입했다.미국은 군사교관단과 함께 훈련용 시설까지 중국에 공수해와서 열심히 중국군을 가르쳐주었다.  미국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팔기만 하던 때는 지난 것이다.

  "아니죠. 귀국의 훌륭한 무기들을 계속 수입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중국은 자주국방을 위해 더 많은 미국제 무기를 수입할 예정입니다만…"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대사! 각하께도 이 기쁜 소식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상품을 원하신지 여쭤도 실례가 안되겠습니까?"

  제프리 차관보는 신이 났다. 처음에 제프리 차관보는 중국과 한국 양쪽에 무기를 판매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중국의 구매량이 엄청난 규모로 밝혀졌다. 97년 한반도 위기 때 판매한 무기량과 98년에 시작된 중국내전에서 중국에 판매한 무기수출량보다 훨씬 많은 주문을 했다.그 전에도 중국은 항모 2척과 신형전투기 등 대량의 무기를 구입했다.

  국방성은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에만 무기를 판매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는 대통령과 의회의 양해를 미리 받았기 때문이어서 문제는 전혀 없었다. 무기 판매보다는 생산이 더 급할 정도로 중국으로부터 주문받은 무기구매의 규모는 컸다.

  11. 18  10:10  미국 LA, 반전 전사 집단, PEACE

  "중국이 또 미국에서 항공모함과 미사일순양함 및 신예전투기의 구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거의 결정이 되었습니다.  의회에서도 반대는 없을거라고 합니다. 또한 더 많은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미국이 노력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중국은 아마도 계속 영토 확장정책을 추진할 것입니다."

  로스엔젤리스의 남부 교외 휴양지 별장에서 각색의 인종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캄캄한 실내에서는 한반도 지도가 영상기로 벽에 비쳐지고 있었는데 중국군과 한국군의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정보위원이며 암호명을 짜르라고 밝힌 중년 남자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실내가 어두워서 잘 안보였지만  모두들 각양각색의 외양을 하고, 다양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중국은 한국에게 너무 강한 상대입니다.  우리가 개입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듭니다만… 사태의 확산만 막기로 합시다."

  아랍계 복장을 한 사나이가 말하자  팔짱을 끼고 있던 말레이계의 여인이 책상위에 얹었던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런 식이면 우리 모임의 의미가 없죠.  우린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우리는 중국이 동남아 각국을 침공하고 있을 때 국제여론만 동원하는 등 거의 방관만 하고 있었어요. 결과는 어땠나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킨다는 우리 모임의 취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그린피스에서도 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중국은 10여척의 핵잠수함이 있으며 또한 핵미사일도 많습니다. 핵전쟁 가능성이 아직은 적지만 중국이 불리해졌을 경우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반도 해상 봉쇄시에 연이어 발생할  유조선 침몰과 원유 유출 사태를 생각하면…, 휴… 끔찍하군요.  물론 한반도 산림과 환경의 피폐화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의 존망을 건 전면전에서 누가 환경 파괴를 염두에 두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린피스에 소속을 둔 스웨덴의 쏘르가 말하자 위원들 모두가 심각해졌다.

  "그렇소. 우리 모임은 비밀결사기구이긴 하지만 더 이상 우리의 안위만을 위해 침묵할  수는 없소.  이제 우리가 나설 때 입니다. 싱께서는 준비가 되셨습니까?"

  의장인 카를이 싱을 지목하자 모두가 싱이라고 불린 인도인을 주목했다. 터번을 쓰고 수염을 잔뜩 기른 전형적인 시크교도인 그는 반전전사 집단인 PEACE의 무력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칼등이 휘어진 회교도 칼을 하나 쥐어 주면 더더욱 시크교 전사같아 보일 사람이었다.

  "안됩니다! 무력을 쓰다뇨.  우리는 비폭력주의를 일차적인 분쟁해결 원칙으로 신봉해오지 않았습니까? 96년의 보스니아 내전 개입이나 훨씬 이전의 미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가장 최근의 부룬디 개입도 그렇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면 아무리 목적이 숭고하더라도 아픔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갑자기 모잠비크 출신인 젊은 학자풍의 흑인이 일어나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자 위원들이 놀라며 동요를 일으켰다.  싱이 위원들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매의 그것 자체였다.

  "그래도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구해왔습니다.  가장 최소한의 희생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그들의 배고픔을 덜어줬습니다. 유엔이나 다른 국제기구들이 머뭇거릴 때 우린 항상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왜 반전전사입니까?   평화적인 수단을 동원할 때도 있지만 그 수단이 실패하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입니다."

  싱이 중국의 침략행위를 평화적인 수단으로 막지 못한 위원들을 질타하듯 위원들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쟁 전에는  비폭력적인 방법만 동원하고,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무력수단을 동원해왔습니다. 이는 전에 케네디를 암살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극도로 약화시킨 정책적 오류를 비판하면서 정착된 우리 모임의 일관된  정책결정이었는데  저는 이에 반대를 표하고자 합니다."

  모든 위원들이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PEACE로서는 가장 큰 실책이라고 평가된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당시로서는 미국과 소련간의 전쟁을 막고 미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오히려 미국 군산복합체의 힘을 강화해주어 냉전을 격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 조직에서는 케네디 암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는데, 모잠비크의 흑인이 이 금기를 깨뜨리고 싱이 이 금기에 정면으로 반대를 한 것이다.

  "전쟁 징후가 보이면 정치,경제적 수단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막아야합니다. 전쟁이 일단 발발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인명과 환경 피해가 오고 맙니다.  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은 전쟁 발발 이후에는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사전에 막아야 합니다."

  "좋소."

  카를이 다른 위원들의 반박을 사전에 제지하면서 싱에게 물었다.

  "그럼 싱의 생각은 어떻소?  우리의 정책은 추후에 검토하기로 하고, 일단 한반도 사태에 대한 싱의 준비를 설명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카를."

  싱은 의장인 카를을 무한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스페인 출신의 의사인 그는 촉망받는 젊은 외과의사였으나 남미 멕시코 원주민을 위한 의료 구호활동을 하다가 반정부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여러가지 이름을 쓰면서 치열하게 원주민과 농민의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활동이 힘들고, 원주민들과 농민들의 의식이 깨이자 현지인들에게 지도권을 넘기고 자신은 고국에 돌아와  산 호세 대학 의학부에서 교수를 하고 있었다. 그는 10여년 전에 PEACE 위원들의 추천으로 이 조직의 무력부문 위원을 맡다가 최근에 의장이 되었다.  싱은 카를이 무력부문 위원일 때 그의 무장조직의 하나에서 대장을 하고 있었으니,  실제로는 싱은 카를의 부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상하관계 때문에 카를을 존경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종을 떠난 인류애 때문이었다.

  "한반도 지역 주변을 살펴보겠습니다.다들 아시겠지만 지정학적 요건을 먼저 검토하겠습니다."

  싱이 화면을 확대하여 한반도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까지 넓은 지역을 보이게 하였다.

  "저는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한 목적은 다른데 있다고 봅니다. 중국과 한국과의 전쟁 뿐이라면 의외로 쉬운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중국이 한반도를 차지한 후의 상황을 보면…"

  싱이 단말기를 눌러서 중국과 한국을 같은 색깔로 표시했다.  중국이 한국을 점령했을 경우의 동아시아 지도가 되는 셈이다. 이미 점령한 대만과 베트남,그리고 베트남 점령 이후 중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동남아 여러 나라를 계속 같은 색깔로 표시해가자, 중국은 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이 되어있었다.

  "한반도는 작지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국이 중국에게 점령되면 일본은 버틸 수 없게 됩니다.일본이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면 중국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태평양에서도 대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은 중국이 꾸준히 관심을 둔 지역입니다. 원래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이죠. 한국을 점령하면 시베리아 지역은 중국이 쉽게 공략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약체화도 염두에 두시죠. 이를 보면 중국은 짧게는 일본, 길게는 러시아나 미국과의 한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세계대전입니다."

  위원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이는 정보위원인 짜르의 정보를 넘어서는 판단이었다.

  "핵전력에서 중국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생각입니다."

  짜르가 단언하자 싱이 고개를 흔들었다.

  "중국인의 인내심과 장기적인 안목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위원 중에도 중국인이 계신데…"

  위원들이 재정부문을 맡고 있는 창 위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창이 약간 당황하며 용무늬가 새겨진 비단옷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1949년 중국혁명이후 중국은 왜 티베트를 침공했습니까?"

  싱의 질문에 창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티베트는 원래 중국의 영토였소."

  창이 한마디로 싱의 질문을 일축하자 싱이 껄껄거리며 웃고나서 반문했다.

  "티베트의 수천년 역사 중에서 도대체 몇 년 간이나 중국의 영토인적이 있나요? 처음으로 점령한 13 세기는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몽고족인 원나라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문화적으로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죠?"

  창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중국은 티베트인들을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지 않았소.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자치권도 주고 소득수준도 중국 내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오.  티베트는 승려가 지배하는 봉건 국가였소. 조상의 해골을 불경스럽게도 여러가지 목적으로 사용하는 열등하고 비위생적인 민족이란 말이오.  어쨋든 저도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의 문화를 개혁할 필요가…"

  "현실을 직시하시오. 남의 나라의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경우가 어디 있소? 영토적 야심 아닌가요?"

  미국인인 맥스는 팔짱을 낀 채  싱과 창의 말다툼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해도 아메리카 인디언이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인구에 있어서도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제 미국은 백인들의 땅이었다. 그리고 맥스는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면 국가방위에 유리하기 때문이오."

  창이 실토하자 싱이 더욱 몰아붙였다.

  "국가 방위라뇨? 어느 나라의 침공에 대비한 것입니까?  주변에 있는 네팔인가요? 아니면 부탄? 이 나라들이 중국을 침략할 정도가 됩니까?"

  창이 묵묵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나라 인도요.물론 아직까지는 인도의 국력이 약해 위험은 없지만, 인도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요.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면  히말라야 산맥을 배경으로 중국을 인도의 침략으로 부터 지켜 내기가 쉽죠. 그리고 티베트는 인도와 비슷한 문화권이니 두 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소."

  싱이 이제야 화난 얼굴을 풀고 미소를 띄우며 위원들에게 말했다.

  "중국은 100년 후에 인도가 국력이 강해져 중국에 침략해올까 두려워 그 100년 전에 티베트를 미리 점령할 정도로  미래를 보는 안목이 넓습니다. 1997년의 홍콩 반환만 해도 그렇습니다. 19세기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어느 누가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게 반환하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이번 한국 침공도 그렇습니다.  물론 중국은 아직 시베리아에 대한 영토반환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만,수 십 년 이내에 반드시 시베리아를 수중에 넣을 것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확장정책을 본다면 그 시기는 더 빨라 질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홍콩반환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고 반드시 무력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핵전쟁입니다. 자존심 강한 러시아가 중국에게 영토를 할양하거나 알래스카처럼 돈에 팔지는 않을 것입니다."

  짜르가 잠시 창과 싱을 보고 말을 꺼냈다.

  "그렇소. 아직도 러,중 국경에선 조그만 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소. 러시아 군사력의 반 이상이 이 국경에 배치되어 있소.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이오만… 하긴 요즘은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쨋든 싱의 의견에 이어 제가 한마디 더 덧붙이죠. 한국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인데…"

  짜르가 일어나 싱을 대신해 지도를 보면서 설명했다.  전직 소련 KGB 제 1총국의 군사정보 담당자였던 그는 군사적 식견이 뛰어나 조직의 정보위원이 되었다.

  "한국을 중국이 점령한다면,아니, 최소한 세력권 안에 두기라도 한다면 일본은 쉽게 중국에 굴복하게 됩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해주 지역의  블라디보스톡은 이 지역 유일의 부동항입니다.  한국이 중국에게 점령되면 중국은 직접 블라디보스톡을 삼면에서 포위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게 되며, 이는 러시아에 치명적입니다. 러시아가 왜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 십 년간 고심했는지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중국은 넓은 러, 중 국경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바다로부터 공격을 해올 수 있습니다.이렇게 되면 러시아로서는 러시아의 영토인 시베리아를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위험한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위원들이 러시아의 위험한 결단이라는 말에 부르르 떨었다.이는 핵전쟁을 의미함이 분명했기 때문이다.한반도는 주변 모든 나라의 완충지대라는 사실을 위원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면 일본과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위험했다. 미국이 태평양을 잃으면 한낱 지역국가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짜르가 지도의 일본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일본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중국입장에서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공할 줄 알고 선수를 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한국 정도는 점령할 정도의 군사적 역량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 지도가 바뀝니다."

  짜르가 일본과 한반도의 지도를 같은 색으로 바꾸자 이번에는 일본이 태평양의 대제국이 되었다.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남부 가고시마에서 오끼나와를 포함한 난세이 제도가 대만까지 뻗어 중국을 완벽하게 해상으로부터 봉쇄해 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면 필리핀군도와 더불어  중국이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히게 된다. 대만해협 남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곳은 물길이 사납기로 유명하다.  중국은 대만 남쪽의 좁은 바시해협을 통해서만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데, 이 해협은 유사시에 1개 함대, 또는 잠수함 몇척만으로 봉쇄될 수 있는 극히 취약한 곳이다.

  "그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중국의 한반도 점령을 저지해야겠습니다. 군사부문 뿐만 아니라  우리 조직의 최고 역량을 동원해서 점령을 막읍시다. 한반도 점령은 중국의 세계 정복의 전초전이라 생각하고 우리 조직의 사활을 걸고 막아야합니다."

  카를 의장이 말하면서 싱을 눈짓으로 불렀다. 싱이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우면서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전투는 세 국면에서 진행됩니다.  물론 각 부문의 위원께서도 잘 해 주시리라 믿으며 우리는 목숨을 걸고 중국과 싸울 것입니다. 첫째는 암살부대의 투입입니다. 중국의 한반도 점령지대 주요 군 인사 뿐만 아니라 북경의 정치인들도 대상입니다. 그 암살 대상은 짜르께서 넘겨 주셨습니다. 두번째는 용병부대의 한반도 투입입니다.  유엔군의 파병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용병부대의 투입은 주의를 요합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번째는 중국 해안의 해상봉쇄입니다.  소속 잠수함과 비행기들을 동원해 중국의 해상로를 철저히 봉쇄하겠습니다. 원유의 유입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해상교통과 외국선의 통과,  미국의 무기 인도까지 봉쇄할 계획입니다."

  위원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과 한숨이 흘렀다. 싱은 중국에 대해 전면전을 작정한 것이며 위원들은 이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세계정복을 꾀하는 나라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미리 제재를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을 건드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그렇다면 전면전인데… 우리 조직의 전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그리고 중국의 군사력을 상대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쏘르가 묻자 싱이 답변을 해야했다.위원들 간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으며 만장일치로 결정을 하는 것이 이 조직의 규약이었다.

  "1997년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로부터 신형 전투항모 1척과 퇴역한 미국의 강습상륙함 1척을 우리 조직에서 빼냈습니다.물론 짜르 위원과 창 위원께서 상당한 노력을 하셔서 공작이 성공했습니다. 전투함은 미사일 순양함 2척과 구축함 및 프리깃함 6척, 기타 상륙함과 수송함이 있으며 잠수함은 12척입니다. 전투기와 초계기, 정찰기 및 탑재헬기 등을 합하면 항공기는 95기가 있습니다.

  지상전력은 현재 지원병들이 1개 여단이 있고 구르카 여단과 다른 용병 부대를 동원하면 2개 사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함대와 지상전부대는 대만 북동쪽의 센카쿠제도 부근의 해상에서 훈련중입니다만 이들의 군사적 능력은 충분하기 때문에 중국의 전술과 무 기체계, 그리고 언어에 대한 교육만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투입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한국군과의 지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이오? 짜르."

  카를이 묻자 짜르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의 통일참모본부와 협의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저희 요구를 안들을리 있겠습니까? 우리 부대의 지휘권은 우리가 계속 가지기로 하고 정보와 작전면에서 서로 협의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함대와 지상부대는 한국군에 소속됩니다. 참모본부에서 연락관 파견을 요청하더군요."

  "위원회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런 결정을 했단 말이오?  너무 독단적이지 않소?"

  창 위원이 투덜대며 항의했다.  아무리 평화를 위한다고 해도 자신의 조국에 칼을 들이대는 것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은 자본과 여론을 동원하여 중국의 타국 침략을 막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의 조국은 세계평화를 자꾸 위협하는 행위를 지속했다. 이제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조국에 어느 정도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중국은 결국 한국을 점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떨치지 못했다.

  "이 전쟁은 우리 조직 50여년 역사상 처음으로 대외에 우리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전쟁이 될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 조직의 와해를 위한 공작을 할 지 모르니, 이에 대비하여 보안을 철저히 하여 주십시요. 나머지 세부사항은 무력위원과 정보위원,  그리고 자금담당위원이 저와 함께 세부 계획을 작성해주시고, 이만 회의를 마칩시다. 준비가 끝나면 바로 선전포고를 하겠습니다."

  카를이 폐회를 선언하자 모두들 하나 둘씩 회의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가를 곰곰히 씹으며 각자의 차로 걸어갔다.

  11. 18. 11:10   워싱턴, 중국 대사관

  "올해 안에 필요한 무기 목록은 이것입니다. 인도 기일까지 적혀있으니 꼭 지켜주시고…"

  중국대사가 제프리 차관보에게 서류를 건네자  차관보가 잽싸게 받아 읽더니만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판매규모 300억 달러, 전년도 미국 무기 총수출액의 두배가 넘는 규모였다. 그것도 부가가치가 높은 신형 전투기와 이지스 순양함 위주의 구매의향서였는데 중국은 50% 선불, 인도와 동시에 잔금 지불의 좋은  구매조건을 제시하여 차관보의 환심을 샀다.

  "대사, 인도기일은 어떻한 일이 있더라도 꼭 지키겠습니다.  물론 최고의 품질도 보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재 진수를 마치고 무기장착이 끝난 함정들을 우선 인도하겠습니다. 전투기는 현역에 배치되어있는 것들을 우선 인도하고 신형기가 제작되는 대로 바로 교체해드리겠습니다."

  제프리 차관보는 목이 멜듯한 목소리로 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무릎꿇고 절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제는… 우리 조종사와 해군이 이런 좋은 무기들을 다루려면 훈련을 충분히 받아야 할텐데 말이오."

  대사가 차관보를 힐끗 보면서 말을 꺼냈다. 중국 대사의 요구가 명확히 뭘 뜻하는건지  차관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즉시 이 엄청난 구매자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다.

  "당연히 저희쪽에서 교관단을 보내 드려야죠. 무기 인도 전에 귀국의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이 충분히 무기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저번의 경우처럼 저희가 교육을 맡겠습니다.  교육과 훈련에 필요한 시뮬레이션 기자재 등은 저희가 직접 수송해서 가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요."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미국의 생산자는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가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며 거래인 간의 의리도 지키는 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도 상거래이긴 하지만… 어떻소? 차관보.  설마 우리의 경쟁자에게 같은 상품을 팔지는 않겠죠? 그쪽은 얼마나 구매를 요청했나요?"

  제프리 차관보의 등줄기에 갑자기 땀이 흘렀지만 이는 미리 예상되었던 질문이어서 긴장이 오래 가진 않았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이 큰 손님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물론 한국에서 조기경보기와 전투기, 그리고 해군함정 몇 척을 주문했습니다만 아마 인도까진 상당 기간이 걸리지 않나 싶군요.  설계부터 차근차근 해야하니까요."

  중국 대사가 호쾌하게 웃어댔다.

  "그렇죠. 미국 무기의 품질이 우수한만큼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껄껄"

  11. 18. 11:30   워싱턴, 한국대사관

  "미국은 우리의 중고 무기 수입계약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새걸로 사가라는 것인데 이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 해군 제 5함대가 해체되어 항공모함 2척과 미사일 순양함 4척, 기타  수상함 몇 척이 예비역으로 돌려졌습니다. 그리고 3개 항공단도 최근에 예비로 돌려졌는데 잉여무기가 없다는 것은… 신품을 구입하려면 몇 개월, 아니 몇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여기에는 분명히 중국의 농간이 숨어 있습니다."

  대사관실에서 1등 참사관인  이 현종이 흥분을 하며 대사에게 말하자 대사는 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창밖으론 거리에 단풍이 지고 있었다.  무관인 한 영순 대령도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약한 나라에서 태어난 설움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말고도 영국과 프랑스에 무기 구입을 의뢰했지만, 이 무기들이 한국에 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중국이 해상봉쇄를 하면 남지나해를 어떻게 통과하겠습니까?   호주와 일본쪽으로 돌아서 오면 된다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고…  미국에서 구매해야만 태평양을 통해 안전하게 한국으로 수송할 수 있습니다."

  이 현종 참사관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도입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며 대사의 분발을 촉구했다. 김 동현 주미대사가 서류 보따리를 챙겨서 방을 나갔다. 참사관이 따라 나섰다. 외교관들은 전투는 하지 않았지만 이 참사관은 차라리 목숨 걸고 전투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기를 빨리 보내달라는 본국의 훈령이  매 시간마다 비명이 되어 대사관으로 날아들고 중국이 한국의 땅을 점령하는 평수만큼 자신들은 피가 마르는 것이다.

  11. 18  10:00  인도 북부,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인 텐진 테트론은  다람살라의 초라한 임시정부 집무실에서 고민에 빠졌다.모든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절대 비폭력을 외쳤지만, 중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할수록 티베트의 독립은 멀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진 테트론은 어린 시절에 본 장대한 티베트 고원을 회상했다. 챵탕(羌塘:북쪽이라는 뜻의 티베트말, 중국이름으로 짱베이:藏北)고원의 광활한 초원에서 방목되는 야크의 무리,  멀리 보이는 눈덮힌 흰산, 일년 내내 불어오는 차가운 서풍.

  그는 어릴 적에 부친의 장례식을 보았다. 승려들이 북을 울리며 부친의 시체를 메고 언덕위로 올라갔다.  도중에 친척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그는 몰래 다른 길로 따라갔다. 언덕 위에서는 승려들이 날이선 돌칼로 새들이 먹기 좋게 부친의 시체를 해부하고 있었다.한 젊은 승려가 커다란 돌을 내려쳐 두개골을 부수자 안구와 뇌수가 튀었다.  어린 그는 이 끔직한 광경을 보고 눈을 감았지만, 부친의 시체가 우주의 원소가 되어 되돌아 가고 혼은 하늘높이 날아가 또다른 윤회를 시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5세에 그는 승려가 되기 위해 라사(拉薩)의 부다라궁(布達拉宮)으로 들어갔다.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첸 라마와 함께 1,300년간 티베트 민중의 정신적 지도자인 관음보살의 화신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기도 한 부다라궁에서 불교를 연구했다. 1959년, 중국의 세번째 침공으로 14대 달라이 라마는 추종자들과 함께 걸어서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티베트 내에서 일어난 몇 번의 민중봉기, 특히 89년의 봉기에서는 8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중국군에게 학살당했었다.  달라이 라마는 아직도 비폭력을 외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텐진 총리는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세력과 은근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총리는 이제 일어설 때라는 확신이 생겼다. 티베트 독립은 달라이 라마의 노벨상 수상보다는 총에 의해 쟁취해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이었다. 더 늦출 수는 없었다.  텐진 테트론은 티베트 독립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악마가 영혼을 팔라고 해도 팔 수 있었다. 총리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인도 다람살라에는 실제로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고, 95년 현재 총리직은 텐진 테트론이 수행하고 있다. 89년의 티베트 민중봉기 때 8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으며,그래도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와 같은 비폭력 노선을 고집하며 무장독립운동을 반대해 왔다.  달라이 라마는 198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99. 11. 18. 22:00  전라남도 여천군 안도, 남고지

  "아따, 행임도 참. 전쟁이 나서 난린디 낚시대를 다 갖고 오요?"

  "아 이놈아, 묵어야 살 거 아니냐?  자꾸 그러믄 감생이(감성돔의 전라도 사투리) 낚아도 니는 안줘뿐다 이."

  "아고야~ 시방 감생이 낚을라고요? 저 건너 연도에 총소리 나는거 안들리요? 지끔 낚시할 때요? 때가…"

  "선배님들 제발 조용해 주십시요."

  여수 남쪽의 큰 섬인 돌산도 남단에서 30분쯤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다도해의 끝 부분에 안도라는 섬이 있다.지금 이곳에는 95연대 해안 1대대 3중대 병력이 여수시에서 소집된 예비군과 함께 안도를 방어하기 위해 긴급투입되었다.

  현역병 1명에 예비군 2명씩 안도를 빙 둘러싼 해안초소별로 배치되었는데 예비군들의 군기는 말이 아니었다.  전쟁이 터져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비군들은 현역병들의 통제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역병이 제지할라치면 당장에 싸가지 어쩌고 하면서 웃통벗고 달라드는 예비군들 때문에 중대장은  적 공격에 대한 방어에 신경쓰기보다는 예비군에 의해 사고가 터질까봐서 안절부절했다.

  저 멀리 연도(鳶島)에서는 아직도 한국군 1개 소대 및 예비군들과 중국 해병대간의 전투가 치열했다.이미 18:00시에 섬의 북단인 역포와 서쪽의 토명포에 상륙한 중국 해병대는, 비록 장비면에서는 뒤지나 섬 구석구석을 알고있는 예비군들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훈련을 받고 숫적으로도 우세한 중국 해병대들이 섬의 대부분을 장악해갔다.

  "선배님, 낚시는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적이 바로 앞에 있지 않습니까?"

  현역병인 강 의섭 일병이 단호하게 제지했으나  예비군 병장인 김 의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낚시바늘에 크릴 새우 몇 마리를 꿰었다. 턱수염이 제멋대로 자란 모습이라 40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아직 20대 후반의 총각이었다.

  "니가 국민핵교 다닐 때 나는 전방에서 뺑이쳤다이~. 니보다 나가 더 잘 안다. 가만 앉어서 떼놈들이 오는지 망이나 잘 보랑께.이 새비가 왜 이리 안끼진대?"

  김씨는 절벽 위의 참호에서 나가지도 않은채 낚시대의 탄성을 이용해 줄을 던졌다. 크릴새우가 바늘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케미 라이트(화학 약품을 배합한 형광물질)가 허공을 가르며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연도에서 총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이들은 늦가을의 내림 감성돔 낚시꾼들로 보일 것이다.

  김씨는 찌없는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을 찾아 찌와 봉돌이 없이 미끼만 던져서 미끼가 파도에 쓸려다니면 의심 많은 감성돔도 별로 의심하지 않고 미끼를 문다는 가정하에  여수 지역의 낚시꾼들이 자주 써먹는 낚시법이었다.

  "행임은 연도 사람들이 걱정도 안되요?"

  같은 동네 동생인 방 영훈이 핀잔을 주었다.연도가 중국군에 완전 점령되면 안도 차례라는 것은 너무도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낚시를 하는 김씨가 부럽기도 하고 너무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다.

  "연도는 벌써 끝장나뿌렀다. 여그도 얼마 못버티꺼여.어차피 우린 소모품 아니겄냐. 시간만 끌믄 되겄지.근디 오운이 니 헤엄칠 줄 알겄지, 이~?"

  김씨는 방씨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낚시대 끝만 주시하며 물었다. 낚시대 끝의 작은 케미 라이트가 스타라이트라는 상표명에 걸맞게 밤하늘의 작은 별처럼 어둡게 빛났다. 그것은 파도에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며 깜박였다.

  "아따, 나가 뱃놈 아니요. 헤엄은 칠 줄 아요만, 머달라고요?"

  상대적으로 젊은 방씨가 김씨에게 물었다.  강 일병도 궁금하다는 듯 김씨를 쳐다보았다.  김씨는 돌아보지도 않고 낚시대 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안도는 째끄낭께 도망갈 데도 없을 것이다. 싸우다 안대믄 금오도로 튀야지 어쩌겄냐. 강 일병도 헤엄칠 줄 안당가?"

  강 일병이 머뭇거리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강 일병은 서울 출신이라 수영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에 살면 다들 수영을 잘 한다더니 정말 그런가 싶었다.

  김씨가 갑자기 긴장을 했다.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던 초리끝이 한 템포 빨리, 작게 움직였던 것이다. 강 일병과 방씨도 초리끝을 보았다. 밤에 다섯 칸(약 9미터)짜리 낚시대의 끝을 본다는 것은 낚시 문외한들은 힘들어서 두 사람은 자꾸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낚시대 전체가 휘었다.  감성돔이 미끼를 물고 바다쪽으로 도망가자 김씨가 낚시대를 챈 것이다. 김씨가 낚시대를 바로 세우자 낚시대 초리끝이 김씨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김씨와 고기간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갸~ 총소리가 멈처뿌렀다! 인자 우리 차례구만 이~ "

  김씨는 고기와 실랑이 하면서도 연도쪽에도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이다. 강 일병이 서둘러 크레모어를 다시 점검했다.

  "삐까리(감성돔 새끼의 전라도 사투리)여~ 30 쎈치도 안되겄는디."

  김씨가 조심조심 낚시대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줄을 잡고 끌어올리자 하얀 비늘의 감성돔이 펄떡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감성돔은 성체로 성장한 후에도 성전환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동물이며, 맛이 좋고 낚시할 때 손맛이 좋아 낚시꾼들이 즐겨 잡는 어종이다.11월에는 월동을 위해 감성돔들이 피둥피둥 살이 찐 상태로  남해 먼바다로 나가는데, 낚시꾼들은 이 시기를 노려 감성돔 낚시를 많이 한다.

  "아따, 고놈 참 먹음직스럽구마 이~  쐬주하고 초장에 그냥, 카~~ "

  방씨가 고기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전쟁만 아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갑자기 밤하늘의 유성처럼 수 십 개의 노란 불빛이 남쪽 바다에서 날아왔다.

  "숙여! 포탄이다."

  김씨가 낚시대를 세워 쥔 채 몸을 참호 속으로 숨겼다. 방씨와 강 일병도 멋도 모르고 따라 숨었다.  잠시 후 밤하늘을 찢는듯한 폭음이 섬 전체에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절벽 사이에 돌로 만든 이 참호의 30미터쯤 위쪽에도 포탄이 작렬했다. 돌이 굴러 내려왔다.

  "아까 본께 10분 동안 함포사격하든디 이번엔 어쩔랑가 모르겄네 이~ 오운아, 한번 내다 바라. 갠찮다."

  김씨가  낚시대를 접으며 방씨에게 말했으나  방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참호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포격이 잠잠해지자 김씨가 고개를 내밀고 바다 위를 살폈다. 어두운 밤바다 위에는 수 십 척의 상륙정들이 악몽속의 유령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85톤의 유친급 상륙정과 128톤의 유난급 상륙정들이었다.

  "온다!"

  중국 해병대는 안도의 남쪽 포구인 이야만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연도 9 km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작도(鵲島) 근처에 중국군 남해함대의 대부분이 몰려 있었다.  중국 항공모함 해신 2호에서 출격한 전투기와 헬기가 안도를 무차별 폭격했으며,  함대의 함포도 가만있지 않았다.특히 이야만의 방파제는 중국군 전투기들이 철저히 공격했다. 그들은 폭탄을 투하하지는 않고 주로 기관포로 공격을 했다. 방파제에 불꽃이 튀자 장비가 변변찮은 예비군들이 무수히 쓰러졌다.

  안도 이야만의 동쪽 남고지에 있는 참호에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 않고 있었다. 중국의 대군 앞에 자신들만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참호 안에 던져진 감성돔이 펄떡였다.

  "우리 해군하고 공군은 머하는 거시여? 짱께가 이로코롬 들어와 뿌러도 되는것이랑가?"

  김씨가 투덜거렸다.  그로서는 아직 한국의 공군기 한 대, 경비정 한 척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따~ 서구지에 있는 것들 큰일나뿌렀네요.  중국놈들, 정말 징하게 싸 제끼요 이~."

  방씨가 함포의 집중 공격을 받는  이야만 서쪽의 서구지를 보고 한탄했다.  강 일병은 처음엔 웬 달구지 이름을 동네에 붙이나 하고 웃었으나, 서구지나 남고지의 고지, 또는 구지는  곶(串)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라도 사투리는 희안해서 명사의 모음까지 바꿔버린다. 강 일병이 3개월 전까지 근무했던 여천군의 한구미라는 작은 포구는 그 동네 사람들은 행귀미라고 불렀다. 모음조화에 역행동화가 너무 강하게 언어에 작용하는 것 같았다.

  안도의 한국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섬에 접근해오는 상륙주정과 수륙양용차에 박격포를 쏘아댔다.  몇 안되는 해안의 M-60 기관총들도 불을 뿜었다. 바다에 하얀 물보라가 튀었으나 중국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 모습이었다. 박격포로 움직이는 상륙주정을 명중시키는 것은 황소가 뒷걸음질에 쥐를 잡는 확률과 비슷했다. 박격포를 쏘는 한국군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지금 밖에 포를 쏠 기회가 없어서 아낌없이 쏘고 있었다.

  뜻밖에도 쥐가 잡혔다.수 십 발을 발사하다 보니 어쩌다가 운없는 상륙주정 한 척에 명중한 것이다. 섬쪽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그 상륙주정은 같은 자리에서 몇 바퀴 빙빙 돌더니 침몰해버렸다. 그러나 중국군 상륙주정의 수는 너무 많았다.  대부분이 이야만의 방파제에 도착했다. 호위하던 몇 척의 고속어뢰정은 섬 주위를 돌면서  섬에 사격을 가했다.

  이야만의 방파제에서는 중국 전투기들에 의해 공격당했던  예비군 소대가 방어를 하고 있었다. 방파제보다 더 높은 유난급 상륙주정에서 발사하는 기관포에 예비군들은 방파제 뒤에 숨어 꼼짝을 못했다. 몇 명의 예비군이 겁에 질려 방파제 안쪽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중국군 해병대원들이  상륙하자 예비군들이 사격을 개시했다. 서구지와 동고지의 높은 지대에서  쏘는 기관총들이 합세해 해병대원들을 쓰러뜨렸다. 예비군들이 수류탄을 굴렸다. 수류탄은 폭 7 미터의 방파제를 굴러 반대쪽으로 떨어지며 폭발했다. 중국군들도 수류탄을 반대쪽으로 굴리기 시작했다.숫적으로 우세한 중국군들이 방파제를 차츰 점령해가며 방파제 안쪽의 항구마을로 접근했다. 일부는 동쪽의 남고지쪽으로 전진했다.

  "이거 안대겄당께. 어차피 이쪽으론 상륙 안학겅께 우리도 고지로 올라가서 싸우더라고."

  김씨가 제안하자 현역병인 강 일병이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 없이는 죽어도 참호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김씨는 총소리가 가까와지는 것으로 봐서 아군이 밀리니 증원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둘은 서로의 주장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러믄 한 명만 올라가서 망보는 것이 어떠까요? 질 밑에 있응께 좀 불안하당께요."

  방씨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강 일병도 동의를 해서 방씨가 참호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방위 출신의 방씨가 투덜거리며 바위절벽을 타고 올라갔다.남고지 꼭대기에서 연이어 들리던 기관총 사격음이 그곳에서 난 폭음과 함께 멈추더니  근처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서구지 쪽에서만 총성이 울렸다.

  갑자기 방씨가 올라간 절벽에서 M-16의 연속 사격음이 들려왔다.아카보 소총의 연사음도 들렸다.수류탄의 폭음이 이어졌다. 김씨와 강 일병이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행임~ 빨랑 오랑께요. 중국군이요. 나 좀 살리주씨요!"

  방씨의 비명이 들리자 두 사람은 허겁지겁 바위절벽을 탔다.올라가보니 작은 해송 밑에 방씨가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 일병이 서쪽을 향해 총을 쏘는 동안 김씨가 방씨를 끌어 안았다.

  "히히~ 시방 두 놈 잡았당께로. 헉~ 컥!"

  달빛 아래에서 방씨를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었다.배에서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김씨가 보기에 방씨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방씨는 목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 감생이… 동네 점빵에서 쐬주에다가… 히히… 흐억!"

  방씨가 선혈을 왈칵 쏟았다. 김씨도 참호 안에 버리고온 감성돔 생각이 났다. 아직 살아서 퍼득대고 있을 감성돔을 생각하니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초장이 있어야지, 임마. 날로 묵냐?"

  방씨가 미소를 지었다.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행임은… 낚시꾼이… 초장도 준비…. 안해오요?"

  방씨가 김씨를 비웃으며 김씨의 팔을 잡은 손을 서서히 내렸다.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김씨는 방씨의 죽음보다도 전쟁통에 예비군으로 소집되면서도 낚시대는 가져왔는데  초장을 준비해오지 않은 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해 보였다.그러나 방씨가 아직 듣고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낚시꾼은 묵을라고 괴기를 잡는 거이 아니지 이~. 니는 돈벌라고 배 타냐?’

  수풀 사이에 숨어있던 강 일병이 소총을 연사했다. 김씨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가오는 적을 향해 소총을 쏘았다. 오솔길을 따라 소리없이 접근해오던 중국군 몇 명이 쓰러졌다.  중국군이 응사를 했으나 김씨와 강 일병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사격을 한번 하고는 꼭 자리를 이동했다. 달빛에 보이는 중국군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강 일병이 뛰어가다가 중국군이 발사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김씨가 수류탄을 던져 중국군의 추격을 견제하며 쓰러진 강 일병을 보았다. 강 일병은 총탄을 가슴에 맞고 즉사했다. 김씨는 강 일병이 고통을 당하지 않고 죽은 것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강 일병의 몸에서 탄창을 집었다.중국 해병대원들이 일제 사격을 하며 뛰어왔다. 갑자기 이들이 비명을 지르더니 땅바닥에 넘어졌다.김씨가 후퇴중에도 나무 사이에 낚시줄을 연결한 것이다. 김씨는 코가 깨져 정신이 없는 해병대원들이 일어서고 있을 때 다시 수류탄 한 발을 더 던지고 북쪽으로 내달렸다. 잠시후 폭음이 일어나고 곧이어 중국군들의 욕지기가 들려왔다.

  11. 18  23:30  개성, 통일참모본부

  "안주에서 보고입니다. 중국군 3개 이상의 장갑집단군이 방어선을 뚫고 남진 중이라고 합니다.인민군과 국군의 연합부대는 안주전선에서 후퇴중입니다.  인민군 4군단은 고립되어 있고,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통신실과 연결된 단말기로  급전을 읽은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보고했다.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회의실 바로 옆의 통신실에서 통신장교가 뛰어왔다.양 중장이 통신지를 나꿔채듯 뺏아 읽었다.

  "제 7군단과 820 기계화군단이 후퇴 중  대규모 공습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입니다.  공중지원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상현 상장은 공습으로 전사했습니다."

  참모들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직 중국 전투기들에 의한 평양 공습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전선에 돌릴 전투기의 여유가 없었다. 여수를 지원해야 할 울산의 전투기까지 평양방어에 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여수를 포기하죠."

  "안됩니다. 적에게 제 2전선을 허용하면 끝장입니다."

  "그래도 후퇴하는 우리 군을 엄호해야 되지 않소? 몇 개 안되는 기계화군단이 당하고 있어요. 전차가 없으면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단 말이오."

  후퇴하는 인민군들의 공중엄호 문제로 참모들이 다투고 있을 때 한국 육군 정 지수 대장의 통신용 단말기가 울렸다.또다른 급전이 들어온 것이다. 정 대장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놀라지도 않으며 보고했다.

  "현재 돌산도 바로 앞의 금오도까지 점령당했습니다.중국 전투기들이 여수시를 폭격하여 한국화약 공장이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정 대장이 상황보고를 하자 몹시 피곤한 모습을 한 이 차수가 물었다.

   왜 하필 여수디요?

  인민군 해군 박 정석 상장이 그깟 소도시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듯 물었다. 국군 장성들이 공화국 수도인 평양보다 남반부 소도시를 더 중요시하는 것같아 불쾌했다.

  "여수시 북쪽 여천공단엔 커다란 화학공장과 비료공장이 있다네."

  이 차수가 부하 장성의 불만을 눈치채고 설명해주었다. 양 중장이 부연설명을 했다.

  "거기엔 자동차 공장도 있고 바로 그 위 광양에는 포항제철도 있습니다. 포항제철의 광양제철소지요.  게다가 서울까지 가는 송유관도 있습니다. 평양이 심리적으로 중요하다면 여수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입니다. 우린 둘 다 잃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2전선이라면… 우린 또다른 전선을 유지할 병력과 장비가 없습니다."

  박 상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차수가 물었다.

  "남해함대의 위치는 어디오?"

  "지금 경남 통영 욕지도 남쪽 5 km 해상입니다.  적의 함재기에 의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심 현식 중장이 보고하자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되뇌었다.

  "만약 여수와 순천이 점령당하면… 어려운 싸움이 되겠습니다."

  양 중장이 회의실 앞쪽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 비친 상황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힘없는 손짓으로 상황판을 짚어나갔다.

  "31사단 2개 연대 병력이 순천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경남의 53 사단 병력도 속속 이동중입니다. 01:00시에 김해와 광주비행장에서 항공기들이 여수 상공으로 출동할 예정입니다."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나 전과를 올려주느냐가 문제였다.  중국 해군의 대공 방어력은 너무 강했던 것이다.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은 궁금한 점도 풀리고  서해에 중국해군의 위협도 없는지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며칠밤 잠을 못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김 대장."

  "예, 차수님!"

  이 종식 차수가 깊이 한숨을 쉬더니 인민군 육군의 김 대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김 대장이 눈치를 채고 깊이 고뇌하는 듯 했다. 잠시 후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격여단과 정찰연대를 투입하겠습니다. 후퇴전에 이들 부대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반격전에 쓸 생각이었습니다만, 평양이 위험하니 할 수 없죠. 하지만 우리가 반격을 할 때는 어려운 전쟁이 될 것입니다."

  한국군 출신의 참모들이 의아해했다.  북한의 특수전 부대를 잘 알고 있는 정 지수 대장 마저 그깟 소규모 부대가지고 되게 생색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 차수 등의 인민군 참모들에게는 패를 다 보여주고 도박하는 기분이었다.

  1999. 11. 19. 00:15  전라남도 여천군 안도, 동고지

  김씨가 헐떡거리며 동고지의 중대본부가 있던 곳을 보았다. 전기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백금만의 모래사장을 헉헉대며 걸어 동고지로 가던 김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모래사장의 북쪽 방파제 겸 선착장에 대형 배들이 많이 보였다.  배 안에서는 불이 켜진채로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형의 중장비를 하역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중국군이다!’

  놀란 김씨의 발이 얼어 붙었다. 뒤쪽 산에서는 아직도 자기를 쫓아오는 중국군들의 총성이 들리고 있었다. 앞쪽 넓은 모래사장에는 네 명의 군인들이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도저히 국군이나 예비군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김씨는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무거웠고 다리와 심장은 떨렸다.달이 구름에 가려 윤곽만 보이고 있었다.

  중국군들은 기관총을 바다쪽으로 거치한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전투는 거의 끝났으므로 긴장도 풀린 상태였다.  숲속에서 나는 총소리도 조만간 끝나서 다음 상륙을 위해 전 부대가 이곳에 모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걸어오는 사람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 숲속으로 대변을 보러간 중사가 틀림없었다. 중사가 이상하게 총구를 들이댄 채로 걸어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 것을 보았다.

  중국군이 기다리던 중사는 총소리가 나고 사람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뒤를 보던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는데, 불행한 분대원들 있는 곳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서워서 숲을 나가지 못했다.  땅에 앉은 자세 그대로 설사가 나오자 그 소리에 중사가 깜짝 놀라 엎드렸다.

  ‘니기미, 니기미!’

  김씨는 총을 쏜 후 서쪽 숲으로 뛰었다.방파제의 배들에서 김씨를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 기관총의 탄알이 사방에 튀었다. 숲으로 뛰어들고 나서는 박박 기었다. 어디에도 아군은 없고 중국군 투성이었다. 기어가는데 앞에 뭔가 비린내를 짙게 풍기는 물체가 닿았다.어둠 속에서 보니 어느 예비군의 시체였다. 누군지 몰라도 평소에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이 섬까지 와서 외롭게 죽은 것이다.

  김씨가 시체를 타고 넘어갔다.이제 배에서 기관총을 쏘는 중국군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라 일단 안심했으나  총격이 이어지자 무릎이 까지도록 계속 기어갔다. 모래밭쪽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갑작스런 총격에 놀란 중국해군이 숲에서 나온 중국군을 한국군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한 것이다.

  ‘여기는 당산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무당을 뜻하는 당골래, 또는 당골네는 대학 다니던 친구가 단군이 변한 말이라고 가르쳐주었다.당산은 무당이 굿을 하던데서 비롯된 이름이었다.아마도 어부들은 바다가 무서워서 여기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한 모양이다.  작년 여름에 이곳에 낚시하러 왔을 때 무당이 굿을 하는 것도 보았다. 그 더운 날에 땀도 흘리지 않으며 펄쩍펄쩍 뛰며 굿거리를 하는 중년의 무당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굿을 한 당골네는 중국군이 침공해올줄 알았으까?’

  김씨가 허튼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에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북서쪽에 있는 금오도는 무슨 일인지 조용했다. 지원사격도 안해주어 섭섭했다.

  ‘금오도에 있는 것들은 중국군이 상륙해 올 줄도 모른당가? 즈그들도 금시 당하껀디…’

  바위를 타고 내려가 해변에 도착했다. 파도가 밀려올 뿐 이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김씨가 한숨을 내리쉬며 총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군화를 벗었다. 발을 바닷물에 넣어보니 의외로 따뜻했다. 파도가 맨발을 간지럽혔다. 금오도의 남동쪽 우실포까지는 1 킬로미터는 족히 되어보였다. 김씨가 바위를 내려가 가슴까지 물에 들어갔다.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11. 19  00:30  전남 여수시 국동, 바다아파트 15동 207호

  "어무니, 긍께 빨랑 피난 가야된당께요."

  "안대! 우리 새끼 아직 안들어왔는디 머덜라고 나가 피난가긋냐? 나는 안간당께. 느그들이나 얼릉 가 바라."

  "아따, 어무이도. 으하는 예비군이니께 군인들하고 같이 싸우고 있당께요. 전쟁이 다 끝나야 돌아오죠 이~. 인자 가장께요."

  노파는 막내 아들이 빨리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여수에만 살았기 때문에 6.25의 참화를 겪진 않았지만 여순반란사건을 겪어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당시 여수에서 빨갱이로 몰린 젊은이들은 모두 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수에는 67세에서 70대 초반의 남자는 외지인으로 보면 맞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여수시민이 입은 피해는 심각했다.골목마다 넘쳐나는 수많은 처참한 시체들을  본 기억이 아직도 꿈에 악몽으로 나타나는 노파였다. 그 악몽의 시체들 사이에 늦게 본 작은 아들이 끼어있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고~~~ 전쟁 나가믄 죽는거여. 애고 내 새끼 으하야~~~ "

  노파가 통곡을 해댔다.  노파의 곡소리는 집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행기와 대공포 소리보다 컸다.

  "어매~ 어무이, 재수없게. 으하가 왜 죽는다 그르요? 걱정 마씨요.으하는 살아 오껑께."

  중년의 큰아들이 노파를 억지로 집밖으로 끌어냈다. 노파는 대성통곡을 하면서도 순순히 큰아들과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노파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무서워서 타지 못하고 꼭대기층이라도 걸어서 다니자, 큰 아들은 노모를 위해 2층으로 이사했다.노파의 큰아들은 동생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서 온 전화로 듣기로는 동생이 있던 안도는 이미 점령당했다고 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아내가 자동차에 시동을 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뒷자리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고교생 딸이 창밖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매~~~~~ 나 팔자야. 으하는 어직 장개도 못갔는디, 아이고~ "

  큰아들이 노모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운전석에 앉은 큰아들은 백미러로 모친의 상태를 살피며 차를 시내쪽으로 몰았다.온 시가지가 불에 타고 있었다. 도로에 돌들이 굴러 떨어져 있었으나 점점 속도를 냈다.

  11. 19. 00:50  경상남도 통영군 욕지도 남쪽 해상

  3척의 군함이 밤바다 위에서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군함들은 엔진을 정지한 채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두 척은 이미 침몰했습니다. 2척 대파, 1척 반파입니다."

  한국 해군 남해함대의 기함인 율곡함의 함교에서 대공전 사관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함대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중국의 대함미사일의 사정거리 아슬아슬한 곳에서 섬 사이에 숨어 대함미사일을 발사한다는 작전은 크게 빗나갔다. 중국 함대의 항공모함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남해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구식 기어링급 구축함 경기함(DD-923)과 역시 구식인 한국 해군의 유일한 알렌 섬너급 구축함인 대구함(DD-917), 울산급 프리깃함인 마산함(FF-955)과 경북함(FF-956),  그리고 분통 터지게도 최신예 한국형구축함인 퇴계함이 침몰 당하거나 운행불능이 되었다.

  특히 퇴계함의 대파는 충격이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대공방어망을 갖춘  퇴계함이 초전에 대파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퇴계함이 쇄도하는 중국의 대함미사일에  시 스패로(Sea Sparrow) 대공미사일 16발을 모두 발사한 다음에, 채프의 구름이 적 미사일의 레이더에 대한 방벽을 두르고 2기의 30 밀리 골키퍼(Goalkeeper) 대공포가 요격에 나섰지만, 몰려오는 대함미사일의 숫자는 함대의 대공방어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기함인 율곡함은 반응이 신속한 수직발사기 체계를 갖춘 대공미사일 SM-2의 덕을 톡톡히 입었다.방어망을 뚫고 온 미사일도 300미터 전방에서 20 밀리 개틀링건이 간신히 명중시켜, 미사일 파편에 의한 약간의 손해만 입은 상태였다.

  퇴계함이 명중한 다음에야 중국 대함 미사일의 최종유도가 적외선 유도방식인 잉지(鷹擊)-2 대함미사일이라는 것을 간파한 대공사관이 플래어를 대량으로 발사하고 함대를 정지시켰으나, 이미 늦어 5척의 대형함이 중국 함대를 공격도 못해보고 파괴당한 것이다. 모함을 잃은 퇴계함의 슈퍼 링크스(Super Lynx) 헬리콥터가  기함인 동급의 율곡함에 착륙하여 급유를 받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위에서는 소방선들이 퇴계함의 불길을 잡고 있었다.

  "적 함대의 위치는 아직 파악 못했나? 01시부로 예정된 아군기들과의 공조체제 유지는?"

  함대사령관은 냉정하다기 보다는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율곡함의 함장이 보고했다.

  "적 함대 위치 완전 파악됐습니다.하픈을 갖춘 모든 함정에서 데이터 입력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거리는 40km, 항모 1척과 구축함 7척, 프리깃함 9척, 기타 대형양륙함 등 20척입니다."

  함장의 보고를 들은 함대사령관 윤 도선 소장은 분통이 터졌다. 한국 해군의 대함미사일인 하픈의 사정거리는 130km, 중국함대의 수상타격력의 핵인 레이더 유도 대함미사일 잉지(鷹擊)-1의 사정거리는 겨우 40km이다. 그러나 중국함대는 함재기와 제주도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을 이용해 공대함미사일로 한국 해군의 남해함대를 공격한 것이다.

  함장이 자신을 놀리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 윤 소장은 불쾌했다. 함장은 중국 함재기들의 공격권에 접근하지 말고, 명중율은 떨어지더라도 원거리에서 공격하길 권고했었다.  함대사령관은 자신의 고집대로 접근하다가 당했다고 생각하니 더 부끄러웠다. 그러나 자신이 함대사령관인 것이다.

  "아군 공격기 편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순천 상공에 도달,발사 직전입니다."

  통신병이 보고하자 함대사령관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이미 함대의 위치는 서로 노출되었으니 이제 공격만이 남은 것이다. 아군 공격기 편대보다 함대의 미사일이 더 많은 전과를 올려주기를  바라면서 함대용 통신기의 마이크를 잡았다.

  "전 함대 대함미사일 발사!"

  율곡함에서 하픈 함대함 미사일이 8발 연속 발사되었다.  탑재헬기인 웨스트랜드社의 슈퍼 링크스에서도 밤하늘에 2기의 하픈을 발사했다.평상시의 탑재무기인 4발의 시 스쿠아(Sea Skua) 대함미사일 대신 오늘은 보다 대형인 하픈을 발사했는데,발사순간 앞부분이 뾰죽한 링크스 헬기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함정에서도 동시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함대에 소속된 2척의 포항급 코르벳함에서는 보다 소형의 엑조세를 발사했다. 엑조세는 사정거리가 42 km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직선코스를 취했다.욕지도의 상공에 불꽃놀이가 벌어진듯 바다 위 하늘이 찬란했다.

  11. 19  01:00  전남 여천군 연도 동쪽 바다

  상륙전 지원에 바쁜 중국 함대에 먼저 대공 경보가 울렸다. 여수시에서 40km 북쪽인 순천의 바닷가(광양만) 상공에서 발사된 48기의 하픈이 발사순간  제주도 상공에서 비행중인 중국 조기경보기의 레이더에 잡혔다. 즉시 미사일 요격 체제에 들어간 중국 함대는 함재기들을 출격시켰다. 요격지점인 여수 남쪽 해상에 도달하자 한국 공군의 F-16기들이 발사한 공대함미사일이 오기도 전에 중국 전투기들을 노리고 돌산도의 최고봉인 천왕산(385 미터)에서 대공미사일이 날아왔다. 여수시가 폭격을 당하는 동안에도 숨죽이고 있던 대공미사일 기지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선 것이다.

  중국 전투기들이 갑자기 날아온 대공미사일을 피해 뿔뿔히 흩어지고, 미사일 요격편대의 호위를 맡은 전투기들이 미사일 기지를 향해 날았다. 상공에서 3개의 불꽃이 피어날 때 천왕산 정상 부근에서도 불꽃이 일어났다.  이때 공대함 미사일들이 중국군의 대규모 편대 아래를 통과하여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중국 전투기들은 공대함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비행하면 함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함대에 미사일 공격을 보고하고  한국 공군기들을 노려 북진했다. 갑작스런 지대공미사일의 출현으로 중국 전투기들은 임무인 대함미사일 격추를 하나도 못해낸 것이다.

  중국 함대 북쪽에서 하픈이 날아왔다. 함대에 경보가 다시 울리고 구축함들이 대공방어에 임했다. 루다급 구축함 카이펭의 후미에 있는 8연장 대공미사일 발사기에서  크로타일 단거리 대공미사일이 연속 발사되었다. 지앙웨이급 프리깃함 화이난과 통링에서는 PL-9 단거리 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한국 해군이 능력을 넘는 공대함 공격을 받았듯이 이들도 역시 대공방어력을 넘는 미사일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공대함 미사일의 접근과 동시에 함대함 미사일의 경보가 울린 것이다. 파도 위를 스치듯 날아오는 하픈과 엑조세의 대군을  제주도 상공의 조기경보기나 함대의 초계기 모두가 발견을 하지 못했다. 중국 함대는 북쪽과 동쪽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의 십자포화에 걸려들었다. 함대가 최종방어에 돌입하여 채프로켓을 마구 쏘아올리고 20밀리 대공포가 불을 뿜었으나 미사일을 막지는 못했다.

  가장 먼저 북쪽 해상에서 대공방어에 임하던 카이펭이 하픈에 명중했다. 227 kg의 탄두가 이 불행한 3700톤급 구축함의 흘수선을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함수부분이 두쪽이 나고 폭발이 이어졌다. 화이난과 통링의 두 프리깃함은 공대함 하픈에 명중한 후  함대함 하픈까지 명중하자 곧바로 침몰했다.다른 루다급 구축함 주하이와 지앙후이급 프리깃함 마오밍도 각각 2발의 하픈을 맞고 침몰중이었다.

  해신 2호는 악착같이 버텼다. 4기의 20밀리 개틀링건이 3기의 하픈을 요격했으나 최종 돌입코스가 복잡한 엑조세는 막지 못했다.함수 부분에 명중해 순간적으로 개틀링건의 사격관제장치가  작동을 멈춘 순간 다른 3기의 하픈이 쇄도해 왔다.  해신 2호가 연속 불길을 뿜으며 폭발했다. 그러나 해신 2호는 덩지에 걸맞게 이 정도의 타격에 침몰하지는 않았다. 함체의 7군데로부터 침수가 되며 항행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늦가을의 밤바다 위에 화재가 발생한 5척의 중국군함이 표류하고 있었고 바다 밑에는 모두 7척의 중국군함이 진흙바닥 위에 가라 앉아 있었다.

  11. 19. 01:10  전라남도 구례군 상공

  항모의 대파 소식을 들듣 화가 난 중국 전투기들은  한국 전투기들을 좇아 순천을 지나 지리산 상공에 다달았다. 오는 도중 경상남도의 남해군과 전라남도의 승주군에서 날아온 구식 나이키(Nike) 지대공미사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러시아제 수호이-27을 함재용으로 개발한 수호이-27K는 애프터 버너를 가동하여 순식간에 F-16을 따라잡았다.

  공대공미사일의 사정거리에 F-16이 들어오자 막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순간 수호이 편대의 뒤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편대의 후미에서 따라오던 3대의 수호이가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고 있었다.  불길 사이로 수십 개의 작은 불빛이 날아오는 것이  수호이 전투기의 조종사들에게 보였다. 신형 중거리 대공미사일인 암람(AMRAAM)이었다. 이제서야 후방감시레이더가 미사일 경보를 발했다.  그리고 20여기의 F-16 전투기가 레이더에 나타났다.  이들은 광주비행장에서 출격하여 수호이 전투기들이 올 때까지 지리산 뒤쪽에 숨어있던 매복부대였다.

  도망가던 F-16들도 선회하여 단거리 사이드와인더를 발사하고는 다시 동쪽으로 비행했다. 수호이 전투기들은 도망가는 F-16들을 포기하고 미사일을 피하기 바빴다. 그 사이에 5기의 수호이가 격추되었다.미사일을 피하느라 신경을 못쓴 사이에 광주에서 출격한  이 F-16 전투기들이 수호이 편대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지리산 상공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대형의 수호이들은 근접전에서는 별로 잇점을 발휘하지 못했다. 예산이 부족해 미사일 사격훈련보다는 근접전훈련을  더 많이한 한국공군 조종사들의 날렵한 F-16 전투기들이 계속 킬 마크(kill mark)를 올렸다. 연료가 떨어진 수호이 전투기들은 눈물을 뿌리며 제주도 상공으로 후퇴했다.

  후퇴할 때 F-16이 날린 미사일에 2대가 추락하긴 했지만 속도가 빠른 수호이 전투기들은 F-16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해신 2호가 표류중인 여수 근해를 피해 수호이 편대는 보성군 상공을 지나 제주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연료는 약간의 여유가 남아있었으나 또다른 공중전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이때 정면에서 F-5의 편대가 나타났다.

  목포비행장은 전쟁이 나고 제주도가 중국에 점령당하자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한 공군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다.  목포에서 출격한 12기의 F-5는 각각 2발의 스패로우를 발사하며 계속 날아왔다.중국 전투기들의 편대장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하지 말고 회피하라! 연료가 없어!"

  편대장은 최강의 전투기인 수호이-27K가  소형의 저성능인 F-5전투기에 쫓긴다는 것에 자존심 상했으나, 한 대의 전투기라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처음 항모인 해신 2호에서 출격할 때는 50기였으나 지금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  제주도까지 날아가야 하는데 연료가 아슬아슬한 지금 싸구려인 F-5를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수호이 전투기들이 편대장의 명령에 따라 저공비행에 들어갔다.  F-5 전투기들이 악랄하게 뒤쫓았다. 또다시 7기의 수호이가 화염에 휩싸여 보성군의 너른 차밭에 추락했다.

  11. 19. 01:15  경상남도 통영군 욕지도 남쪽 해상

  남해 함대 사령관 윤 도선 소장은 함교 밖에서 예인선에 끌려가는 퇴계함을 보고 있었다. 퇴계함의 함장은 전사하고 그 외에도 37명이 전사, 53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내가 저 함에 탑승했엇다면…’

  퇴계함은 97년에 취역한 한국형구축함의 2번함이었으며 6개월 전까지 남해함대의 기함이었다. 3번함인 율곡함부터는 대공미사일을 SM-2로 바꿨지만, 먼저 건조된 퇴계함은 그대로 골키퍼 30밀리 대공포와 시 스패로 대공미사일을 쓰고 있었다.

  ‘결정적인 차이야…’

  윤 소장은 작년에 퇴계함을 수리할 때 대공미사일 체계도 바꾸기를 건의했었다. 그러나 예산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것은 이러한 결과로 나타났다. 발사한 미사일의 전과가 궁금하여 함교 안으로 들어왔다.

  "12척 격침 및 대파입니다. 해신 2호는 항행불능입니다."

  함대의 통신장교가 보고했다. 공군과의 합동작전 치고는 시원치 않은 결과였다.

  "적의 대공방어망은?"

  재공격을 결심한 사령관이 통신장교에게 물었다.  통신장교가 작전장교와 상의하여 보고했다.

  "단거리 대공미사일을 갖춘 구축함과 프리깃함은 모두 격침되거나 대파되었습니다.  대파된 적함에 다시 명중할 우려도 있지만 함재기가 없어진 지금 적 함대의 대공방어망은 사실상 분쇄되었습니다. 현재 적 잔여함대의 위치가 파악되었습니다.조기경보기에 따르면 아직 제주도에서 중국전투기가 출격하지 않고 있답니다."

  통신장교의 보고를 들은 함대사령관은 연도 동쪽의 작도에 파견된 해군 UDT 부대원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방수처리된 통신기를 보유한 UDT 대원들은 무인도인 작도의 해변에 숨어 중국함대의 위치를 보고하고 있었다.  중국의 헬기들이 작도를 수색했지만 그들은 당연히 발견되지 않았다. 섬이 아닌, 섬에 부속된 바닷속 바위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공격하라."

  남해함대에서 또다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첫번째 공격을 교훈삼아 먼저 포항급 코르벳함들의 엑조세가 먼저 발사되고,  그 이후에 하픈이 발사되었다.엑조세는 파괴력에 있어서 하픈에 못미치지만 뛰어난 시 스키밍(sea skimming) 능력은 공격받는 함대의 대공망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100 여발에 가까운 엑조세와 하픈이 벌거벗은 중국 함대를 향해 날아갔다.

  11. 19  01:30  개성, 통일참모본부

  "제 15 전투비행단의 보고입니다. 3파에 걸친 공격으로 적기 50대 중 42대를 격추했습니다. 아군 피해는 F-16이 5기, F-5가 3기입니다."

  "남해함대의 보고입니다. 적 함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침투조에 의하면 중국함대가 있던 해상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탑재헬기들이 소형 대함미사일을 싣고 적 소형함정들에 대한 소탕전에 들어갔습니다."

  이 호석 공군 중장과  심 현식 해군 중장의 보고에  참모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실로 오랜만의 승리였다.

  "제주도를 탈환해야 되는데…  우리는 수송능력이 없어서 힘듭니다. 제주도로부터의 공습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는 피스쪽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양 중장이 한숨을 쉬었다. 외국군에게 영토를 잃고 이를 다른 외국군에게 수복시켜 달라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피스의 연락관 짜르가 한국인들을 안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참모들은 제주도로부터의 공습은 계속 문제되겠지만 이제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상륙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그래도 이게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피스의 전력은 잘 모르지만 짜르가 설명한 장비와 인원이라면 제주도 수복은 걱정없어 보였다. 중국본토에서 지원하러 오는 적기는 한국군이 맡기로 합의했다. 심 중장이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된 작전을 설명했다.

  "안주쪽이 더 걱정이군요."

  이 차수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진 것을 본 정 지수 대장이 큰일이라는 듯 참모들을 보며 말했다.

  11. 19  01:35  전남 여천군 금오도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 금오도에 도착한  김 의화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오랜만에 헤엄을 치니 몹시 힘들었다. 바위틈에서 보니 해상에는 불타는 중국 함선들이 있었고 섬의 해변에서는 어뢰정과 상륙주정들이 중국 해병대원들을 탑승시키키 바빴다. 중국군이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씨는 기껏 도망친 금오도도 중국군에 점령당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중국군이 많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금오도의 남쪽 포구인 십장을 피해 직포쪽으로 걸었다.

  중국군의 총에 맞고 죽어간 방씨가 생각났다. 강 일병도 용감한 군인이었다. 어떡할까 생각하다가 일단 민가를 찾아 옷을 구해입기로 했다. 남해바다라고는 하나 밤바다는 너무 추웠다.  게다가 자신은 수영을 하여 물에 젖지 않았는가?  상체를 숙이고 조심조심 직포의 마을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 어두운 길가에 국군의 시체  2구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포로가 된 후 사살당했는지 양손이 뒤로 묶여있었다.김씨가 주변을 살피다가 K-2소총과 탄창을 주워 탄띠에 가득 채웠다.  팬티 차림에 탄띠를 매고 총을 든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문득 시체를 돌아보고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니기미, 나가 왜 미안하다냐? 살아서? 나도 싸울만큼 싸왔다고…’

  길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잽싸게 수풀 속으로 숨었다.잠시 후 어둠 속에서 중국 해병대원들의 후퇴하는 행렬이 보였다.  가시가 맨살을 찔렀다.

  ‘나가 느그들을 기냥 보내믄 사람이 아니지 이~~ ‘

  중국군 1개 분대가 김씨가 숨어있는 숲을 지나갔다.김씨가 살짝 길로 내려와서 수류탄 2개의 안전핀을 벗기고 하나씩 중국군을 향해 높이 던졌다.하나는 땅에서, 하나는 공중에서 폭발했다. 발포를 하려고 했으나 이미 저항하는 중국군은 없었다.  길 한쪽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김씨가 부상당한 중국군을 발견하고 쏠까 말까 망서렸다.  마음 속에서 방씨와 강 일병이 쏘라고 채근했다.김씨는 차마 쏘지 못하고 숲으로 다시 들어갔다. 바닥의 돌이 발을 찔렀다.

  이젠 어떡할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총소리가 멈춘 이 섬은 전쟁터 치고는 너무 조용했다. 달이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풀을 뜯어 자리를 만들고 차분히 앉아서 생각했다. 이 섬엔 국군도 없고 돌산도까지 헤엄쳐 가기는 너무 멀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으실으실 몸이 떨렸는데 섬 모기들이 살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남해안 섬모기는 12월까지 활동하는 놈들이다.  두 개의 섬에서 싸웠으면서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는 자면서 모기에게 피를 빨리고 있었다. 그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1999. 11. 19  07:00  동지나해, 제주도 남방 80 km

  짙푸른 동지나해를 헤치며 함대가 조용히 북상하고 있었다. 러시아식의 대형 전투항모 1척과, 보다 소형이지만 항모라고 부를 수 있는 미국식 강습상륙함 1척, 그리고 최신형 순양함과 프리깃함들, 양륙함, 기타 지원함으로 구성된 이 군함들의 마스트에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푸른색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기가 아닌 반전전사 그룹 피스의 깃발이었다. 평화를 사랑하며 2차대전 때문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일단의 지식인 그룹에서 출발한 반전그룹 피스는,  어느덧 군대를 보유할 정도로 세력을 신장하여 국가들간의 전쟁에 간섭하려는 것이다.

  상륙함 갑판에 나온 병사들은 가지각색의 인종으로 구성되었다. 인종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이들의 구성은 과연 언어소통이 될까 걱정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은 피스 소속의 국제지원병과 용병들이었다. 국제지원병들은  세계평화에 대한 관심이 있을 정도의 지성인들이라 외국어에 능숙했으며, 용병들은 어떠한 언어에도 잘 적응했다. 네팔 출신의 구르카용병들도 그들의 직업상 당연히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모국에서의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도 프로였다.

  네팔 국민은 네와르족, 구릉족, 마가르족과 히말라야 등반에서 뺄 수 없는 존재인 셰르파족으로 구성되어있다. 현재의 샤하왕조는 인도의 크샤트리아(무사계급) 출신이며 구릉족이다. 유명한 구르카용병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협력했던 구릉족이 주축이 된 용감한 전사들이다. 네팔에 구르카족이라는 부족은 없으며, 단지 구릉족의 전사들이 중심이된 용병이 바로 구르카용병이다.

  2차 대전 중 이태리 전선에서의 구르카 용병들은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  총알이 떨어지자 공격해오는 독일군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끝까지 싸웠다. 이들에게 전장은 신이 부여해주신 직장이었으며 나중에 용병이 될 후세들의 보다 나은 작업환경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인도의 시크교도들이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것으로 유명하다면 구르카 용병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군인들로 이름이 났다. 구르카용병들은 산업이 낙후한 네팔에서는 농업과 관광산업에 이어서 제 3의 외화 수입원이 되고 있다. 홍콩정청의 주요 시설 경비에는 이들 구르카 용병을 썼다.

  함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하고 있었다. 이들의 유도는 2기의 조기경계 경보기가 맡았고, 초계기와 대잠헬기들이 바다속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여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1999. 11. 18  16:05 (워싱턴 시각)  미국 워싱턴, 호텔 플라자

  오후가 되자 호텔 플라자 1층에 있는 컨셉션룸은  각국의 보도진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결코 과장하는 법이 없던 그린피스가 웬일로 중대선언을 한다고 통보해서 각국 특파원들은 그린피스가 이번 한중전쟁에 관련하여 어떤 깜짝 놀랄만한 시위를 하지 않을까 예측되었다.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한중전쟁은 하나의 재미있는 게임에 불과했고 여기에 환경단체의 시위까지 가세한다면 아주 훌륭한 볼거리를 시청자들에게 줄 것 같아서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관심이 컸다.

  시간이 되자 그린피스 관계자들이 나타났다. 그린피스 의장인 프라타 야콥손이 먼저 간단히 인사를 했는데 그는 바로 반전전사 그룹 PEACE의 로스엔젤리스 회의 때 모습을 보인 쏘르였다.  쏘르는 한중전쟁이 불러올 환경재앙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며  중국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포기할 것을  촉구했다.연설을 마치자 그는 의자에 앉아있던 단단한 체구의 중년 신사를 소개했다.

  "이 분은 저희 그린피스의 상급단체인 PEACE의 의장이신 미스터 카를 입니다. 이번 한중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하고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신 것입니다. 미스터 카를!"

  기자들이 웅성거렸다.국제민간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다른 단체의 하부조직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고 PEACE라는 조직은 들어 보지도 못한 단체였다.  또한, 이들이 중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여러분…"

  카를이 보도진들의 흥분을 가라않히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고 보도진들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ENG의 조명이 비치고, 이미 어떤 기자는 휴대전화로 본사에 특종을 송고하고 있었다. 유선방송인 CNN은 즉시 생방송을 개시했다. 카를이 묵묵히 준비된 원고를 읽어나갔다.

  "우리 반전전사 그룹 PEACE는 오늘부터 침략군 중국에 대항해 한국과 연합하여 전쟁을 수행키로 하였습니다.이를 위해 한국에 전투병력을 급파하였고, 해군과 공군도 한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의 불빛이 연이어 터지자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안경을 고쳐쓰고 계속 읽어나갔다.

  "이들은 의용병과 일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앞으로의 계속된 중국의 침략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이번 참전이 이루어진 것을  무척 슬프게 생각합니다. 이만 발표를 마칩니다."

  카를이 발표를 마치자 기자들이 질문공세를 퍼부어대기 시작했고, 일부는 특별방송이나 호외를 준비하기 위해 본사에 연락하여 기자회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카를께 질문입니다. 이 조직은 언제 생겼죠? 인적 구성은?"

  "병력수는? 무장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군에 배속되어 작전할 계획인가요?"

  "NGO(Non-Government Organization : 비정부기구)가 국가간의 전쟁에 개입해도 됩니까?"

  "혹시 동지나해에 있는 소속 미확인 함대가 피스의 함대입니까?"

  "미국은 중국에 대규모로 무기를 판매하고 있는데, 혹시 미국과 충돌하지 않을까요?"

  기자들이 카를에게 몰려와 질문공세를 퍼붓자 카를이 딱 한 마디만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회견장을 떠났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여러분의 직업이고,이 비밀을 지키는 것이 저의 책임입니다. 이만, 안녕히!"

  "잠깐만요.  피스에서 돕더라도 한국은 결국 중국에게 점령되지 않을까요?"

  당돌한 여기자의 질문에 카를이 멈춰서서 그 여기자를 보았다. CNN의 유명한 흑인 민완기자 캐럴 골드버그였다.금발의 흑진주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름다운 금발과 멋진 흑갈색의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녀는 미모보다는 능력으로 방송계에서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아가씨는 어쩔 수 없이 강간당할 위기에서는 저항을 포기하오? 끝까지 항거해야 하지 않겠소? 내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봤다 칩시다. 그럼 나는 강간범이 무서워 아가씨를 버리고 도망가야 옳겠소? "

  여기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카를이 다른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사무실로 돌아가 세계전도를 펴서 중국이 한국을 점령할 경우 세계지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 보시오.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오."

  1999. 11. 19  07:20  남지나해, 남사군도 근해

  북반구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적도 부근인 이곳은 아직도 여름이었다. 아니, 남지나해는 상하(常夏)의 바다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순항하는 중국해군의 지앙후이급 프리깃함 안슐함은 남지나해를 통해 북진하는 상선과 유조선들을 임검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어제 밤에는 정선명령을 무시하고 도주하던 한국상선 한척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격침시켰다.한국으로 향하는 상선이나 유조선은 모두 나포와 격침의 대상이 되었다.  이 해역을 지나 한국방향으로 항해하던 선박들은 중국의 위협과 20배로 뛴 전쟁지역 보험료를 감당하지 못해  호주 남쪽으로 우회하든지 한국행을 포기해야 했다.

  안슐함의 승무원들은 따분하기는 하지만 위험이 별로 없는 이 임무를 좋아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조선 남부에 상륙작전 중이던 남해함대가 크게 당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들은 승무원들은,  조선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조선의 전황이 더 나빠져 자신들의 함정도 조선전쟁에 투입되지 않기를 바랐다.

  멀리 미국 텍사코사의 거대한 석유시추선이 보였다. 필리핀과 계약했던 석유회사들은 모두 철수하거나 중국과 재계약을 해야했다.중국은 이제 원유수출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최근 남사군도 곳곳에서 유징이 발견되어 다국적 삭유회사들의 중국방문이 잦아지고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었다.

  안슐함에서 갑자기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함이 속력을 내고 우측으로 급선회하면서 6기의 중국제 2연장 37밀리 대공포가 허공으로 불을 뿜었다.  수심이 얕은 이 해역에서 좌초될 걱정은 접어둔 채 전투속도로 내달렸다. 함이 순식간에 섬광에 쌓인 채 폭발했다.함교부분이 완전히 날아간 이 1700톤급 프리깃함은 불에 타며 서서히 함수부터 침몰했다. 주변 해상에는 어떠한 배도 보이지 않았는데 안슐함이 갑작스런 미사일공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다.

  침몰하는 프리깃함의 북쪽 35km 바다 속에  한 척의 잠수함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중국의 한국 해상 봉쇄에 맞서 반전전사 그룹 ‘피스’ 가 역으로 중국 해상 봉쇄에 나선 것이다.

  1999. 11. 19  07:40  제주시, 중국 인민해방군 제 5해병사 사령부

  "레이더 기지에서 보고입니다. 제주도 남방 53 km 지점에 정체불명의 선단 계속 북상 중! 침로는 서귀포이며 함대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통신원이 보고하자 사단장인 톈 대좌가 의아해 했다.

  "어느 나라 함대야? 규모는?"

  "모르겠습니다.  한라산의 레이더로는 파악이 힘들다고 합니다. 모두 15척의 대형 선박이 나타났습니다. 초계기를 날려 보시는 것이…"

  사단장이 툴툴거렸다. 조선반도 남쪽에서 상륙작전을 하던 함대가 전멸당해 제주도를 지켜줄 해군함정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해군 전투기들은 제주도와 조선반도 남쪽 사이의 바다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 중이었다.

  ‘남중국해의 일부라고 하지…’

  사단장이 한반도 남해의 국제적 명칭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전에는 F-16 전투기 한 대가 중국의 대공망을 뚫고 날아와  중국전투기들이 출격 채비 중인 제주공항의 활주로에 마인릿(ISCB-1 MINELET)폭탄을 투하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공항 수비대의 대공미사일이 발사되어 F-16은 바다로 추락했지만,  활주로 두 개가 못쓰게 되고 전투기 3기가 파괴되었다. 지금도 활주로에는 1분에 하나의 비율로 소형 자폭탄이 폭발하고 있어서 복구에 나선 공병대는 활주로에 접근도 못했다.

  "조선에는 예비함대가 없으니 미국이나 일본함대겠지. 아마 돌아갈거야. 그리고 초계기는 지금 바빠!"

  사단장이 미국은 이 전쟁에서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일본은 이 상황에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부에서는 일본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으나 전세가 상당한 정도까지 기울지 않으면 일본이 절대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정보분석을 했고 사단장도 이를 믿고 있었다.

  사단장은 초계기가 보내온 한국 남해함대의 위치를  상황판과 대조하며, 한중간의 공중전 상황도 관심있게 보고 있었다. 조선의 남해함대는 중국의 공군이 무서워 제주도에 접근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투기는 문제였다. 방금 또 한 대의 수호이가 조기경보기의 지원을 받는 한국공군의 AMRAAM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이 상황에서 초계기를 남쪽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조기경보기가 없는 지금 초계기는 제주도를 지키고 있는 제 5해병사에 있어서 목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1999. 11. 19  07:45  남지나해, 제주도 남방 50 km

  "출격!"

  피스함대 항모의 함교에서  아침해를 바라보며 거친 구렛나루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의 전사 싱이 외쳤다. 중국의 한국침공을 미리 예상하여 남지나 해상의 무인도 사이에 숨어 있던  반전전사 그룹 피스의 함대는 급거 수송기편으로 날아온 싱을 사령관으로 맞아 한반도를 향해 북진중이었다.

  한국의 통일참모본부에 연락관으로 가있던 짜르로부터 한국군이 제주도 수복을 요청해왔다는 사실을 새벽에 알려왔다.중국에 대한 해상봉쇄에 나서기 전에 지상병력의 한반도 상륙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피스함대는 함대와 지상병력이 분리되지 않고 작전을 할 수 있어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제주도 점령전에서의 작전지휘권이 일원화되었고 함대가 보유중인 화력과 병력으로는 제주도를 쉽게 점령할 것으로 보였다.

  싱이 통일참모본부에서 보내온  제주도의 세밀한 지도와 중국군 현황을 다시 검토했다. 제주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해병대 1개 사단병력이 주둔중이었으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전투기들이었다.제주공항에 있는 1개 연대의 전투기뿐 아니라 상하이에 기지를 둔 해군항공대의 전투기들이 날마다 한반도 남쪽 지방을 폭격하고 있었다.

  여천의 한국비료 공장뿐 아니라 옥포의 대우조선소도 당했다. 보병전투차와 대공포차를 생산하는 광주의 아시아자동차 공장과 K-1전차를 생산하는 창원의 현대중공업 공장이 중국 전투기들의 폭격에 호되게 당해서 전차와 보병전투차를  빨리 보내달라는 전선으로부터의 빗발치는 수요를 이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싱이 보기에 장기전으로 가다가는 한국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중국에는 아직 무한정의 병력과 장비가 있는 반면 한국군의 전력은 사흘만에 거의 바닥이 난 것이다.특히 해군과 공군의 소모가 심했다. 이들은 장기간의 교육기간이 필요하다는 참모의 설명이 없더라도 한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문제는 제주도였다. 중국 산둥반도로부터 출격하는 전투기들은  항속거리의 제한 때문에 한반도에 사실상의 위협이 되지 못했으나 제주도에서 출격하는 전투기들은 달랐다.그리고 상하이쪽에서 출격한 중국 해군소속의 공격기들은 제주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재급유한후 한반도 남부를 폭격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97년의 미군철수 후 해병대의 수송수단이 부족해 제주도 상륙작전은 엄두도 못냈다.  민간인 배들을 징발할 수 있었으나 속도가 느린 배들로 상륙작전을 펼치다가는 막대한 손해가 예상되어 통일참모본부에서도 아예 포기하고 있었다.  이 때 피스가 나선 것이다.

  항모의 스키점프대를 박차고 첫번째 전투기가 이륙했다.  7만톤급 러시아제 항모에서 미그-29를 함재형으로 개량한 러시아제 전투기가 이륙한 것이다. 좌측의 경사갑판에서도 두번째 전투기가 잇달아 날았다. 두개의 비행갑판에서 모두 24기의 미그전투기가 이륙한 후 미국제 F/A-18 편대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토네이도 전폭기 편대가 이륙했다.

  러시아에서 본격항모 제 3호로서 제작되었으나  경제사정상 취역하지 못했던 이 불운한 항공모함은 다국적인들의 손에 넘어가 다국적의 전투기를 이륙시키고 있었다.통상동력의 쿠즈네초프급과 달리 이 항모는 러시아 최초의 본격적인 원자력항모였으며, 기존의 4만 5천톤급이 아니라 진짜 ‘본격 항모’라고 부를만한 7만톤급의 대형함이었다.러시아의 항모 건조 사상에 맞게 이 항모도 자체무장은 대단했다. 함대함, 함대공, 대잠로켓 등, 현대 해상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무기가 탑재되어 있었다.

  뒤따르던 강습양륙함에서 20여기의 시 헤리어 전투기를 날렸다. 선두의 미그기가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발사되는 레이더 전파를 잡아 대(對) 레이더미사일(ARM)을 날렸다.

  11. 19  07:50  제주시, 중국 제 5해병사 사령부

  "남쪽에서 미사일이 날아옵니다! 레이더 파괴용 미사일입니다.레이더는 즉시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제주도 40 km 남쪽에 전투기 70여기입니다!"

  통신병이 백록담 정상의 레이더기지로부터의 급전을 받아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의 얼굴이 노래졌다.

  "그럴리가… 조선에 또다른 함대가? 그리고 항모가? 설마, 그럴리가 없어!"

  "레이더 기지가 파괴됐습니다."

  통신병이 급박하게 보고했다.  사단장은 한국공군과 공중전을 벌이고 있는 전투기 편대를 남쪽으로 돌릴까 고민했다. 즉시 상하이에 있는 해군 항공대에 지원해달라는 급전을 띄운 다음,  공항에 남아있는 전투기들을 모두 출격시켰다. 하나 밖에 없는 활주로에서 전투기를 모두 발진시키는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광주와 여수비행장에서 출격한 한국 공군과 대치 중인 1개 대대를 뺀 나머지 제주공항의 중국전투기들이 백록담을 넘어 남쪽을 향했다. 이들은 7시간 전에 여수쪽을 치던 중국함대와 함재기들이  전멸당하자 제주도를 방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급파된 해군항공대였다.모두 24기의 최신예 수호이-27 전투기들이 남쪽 상공에서 다양한 유형의 전투기편대를 레이더로 포착하고 공격준비를 했다.

  그러나 불행한 중국 전투기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미사일을 먼저 막아야 했다. 서방의 분류번호 AA-12인 러시아제 RVV-AYe 중거리 미사일이 중국전투기들을 향해 날아왔다.사정거리 90km인 이 미사일은 적외선 유도방식의 대공미사일만 탑재하고 있던  중국 전투기들의 사정거리 훨씬 밖에서 날아왔다.  능동형 미사일이 아닌 것을 확인한 중국 조종사들은 일단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하기에 바빴는데 격자형 핀이 달려있고 12.5 G의 고기동까지 가능한  이 미사일을 전투기의 순발력만으로 피할 수 있다는 오해는 참혹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이 가능한 전투기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 미사일은 능동형 공대공미사일이었다. 관성유도로 적기가 피할 수 없는 거리까지 접근하여  액티브 레이더가 최종 작동하는 AA-12는 같은 러시아에서 만든 수호이-27 전투기들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수호이 전투기들이 채프를 뿌리며 최고속도로 제주도쪽으로 도망갔으나, AA-12미사일은 채프의 효과 한계 주파수인 20기가 헤르츠를 넘는 30기가 헤르츠의 주파수를 발산하며 채프의 구름을 뚫고 전투기를 포착하여 마하 3의 속도로 수호이 전투기들에 명중했다.

  어떤 전투기는 뒤에서 접근하는 미사일을 간신히 피했으나 미익의 20미터 오른쪽에서 18 kg의 탄두가 작렬하여 그 전투기를 찢어발겼다. 마지막 남은 수호이의 조종사는 겁에 질려 미사일에 명중도 하기 전에 스스로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아서 조종석에서 사출한 직후 그의 전투기는 미사일에 명중되어 공중에서 산산조각났다.

  미그-29 전투기들은 수호이 전투기들이 모두 격추되자 북쪽으로 계속 날았다. 백록담을 넘자마자 제주공항이 보였다.  활주로에 전투기는 없고 몇 대의 수송기만 조그맣게 보였다.편대비행에서 벗어난 미그-29 전투기 한 대가 30밀리 기관포를 쏘자 수송기들이 연이어 불길에 쌓여 폭발했다.  이제서야 공습을 알아차린 MT-LB 대공미사일차가 내습하는 전투기를 노렸으나 이 대공차량이 SA-13 Gopher 대공미사일을 발사하기도 전에 뒤따라온 F/A-18 전폭기가 클러스터 폭탄을 관제탑 주위에 투하했다. 수 백 개의 자폭탄이 관제탑 주위에 흩어지며 관제탑과 대공차량을 불태웠다. 활주로 주변의 대공포들이 사격을 시작했으나 초저공으로 습격하는 다수의 전투기들은 막지 못했다.

  제주도 북쪽 해상에서 한국 공군기들과 일진일퇴를 하던 중국 전투기들이 초계기로부터 비상연락을 받고 급거 제주공항을 향했다. 후퇴하는 편대를 향해 한국 전투기들이 발사한 여러 발의 AMRAAM (신형 중거리공대공미사일)이 날아왔으나  수호이들이 동시에 급선회하여  전파방해를 실시했다.  마하 4의 AMRAAM은 ECM(전자전) 장비가 월등한 수호이 전투기들을 격추시키지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했다. 이상하게 한국공군의 F-16들이 북쪽으로 돌아갔다.  수호이들이 다시 제주도를 향해 날았다.

  중국 전투기들이 제주공항 상공에 도착했으나 적기는 보이지 않았다. 비행장을 보니 활주로는 멀쩡했지만 관제탑이 날아가 버렸다.수송기 몇 대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고, 대공미사일 발사기는 하나도 남지 않고 당했다.  초계기에 연락해보니 관제탑과 연락이 안된다는 말 뿐이었다. 편대장이 적기를 수색하기 위해 고도를 높였다.

  갑자기 수호이 편대의 바로 아래 한라산 남쪽으로부터 미그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나타나자마자 적외선으로 유도되는 AA-6 Acrid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했는데, 이 미사일들은 마하 4.5의 속도로 날아와 수호이 전투기들이 피할 틈도 주지 않았다.어떤 수호이 조종사가 겨우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탄두중량 38kg의 거대한 탄두가 전투기 바로 뒤에서 폭발해 주익이 부러져 추락했다.  이 조종사가 사출기어를 당겼으나 캐노피가 열리지 않았다. 날개를 잃은 전투기는 빙빙 돌며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남해의 짙푸른 바다가 조종사의 동공에 점점 확대되었다.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한 미그기들이 몇 대 남지 않은 수호이를 향해 쇄도했다. 임무중량 18톤에 불과한 미그-29 전투기들은 25톤의 수호이보다 근접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게다가 미그기의 조종사들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 조종사들이었다. 중국내전과 동남아침공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중국의 수호이 조종사들도 그들의 다년간 실전 경험에 바탕을 둔 잔재주에는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폭탄을 투하하고나서 전투기로 변신한 F/A-18 호넷편대까지 근접공중전에 가세했다. 격추 댓수에 따라 보너스를 받는 용병들의 공격은 악랄했다. 먹이를 두고 싸우는 악어처럼 한 대의 중국전투기를 향해 3대의 피스 소속 전투기들이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고 있던 수호이편대는 숫적으로도 압도되어 괴멸되어 갔다.  이제 제주도 상공은 국제용병들의 하늘이 되었다.

  서쪽으로 도망가던 초계기는 한국공군의 F-5 전투기에 나포당해 강제로 목포공항에 유도되었다.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나온 중국 조종사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선의 또다른 함대와 항모의 존재에 대해 2함대 사령부에 보고는 했지만 사령이 믿지주지 않았다. 조선이 의외로 강해 어쩌면 이 전쟁은 오래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얼마 않있어 중국군은 조선반도를 점령할 것이며 아군이 자신을 석방시켜 주길 기대하며 포로로서는 비교적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1999. 11. 19  08:30  제주도 남제주군

  지상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호넷 편대가 한라산정에 배치된 대공포와 대공미사일 발사기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다음, 토네이도가 지상시 설물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수직이착륙기인 시 헤리어 전투기들이 30밀리 아덴포로  장갑이 얇은 중국의 T-62 경전차와 T-63 수륙양용 경전차들을 대량으로 살육하기 시작했다.  전차부대 엄호를 위해 날아온 카모프 헬기는 도저히 시 헤리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중국 제 5 해병사는 이제 보병만 남게 되었다.이들을 향해 한국군 패잔병과 예비군들이 달려들었다. 예상 상륙지점인 서귀포로 향하던 중국 군 구원부대는 아귀처럼 악착같이 공격해오는 이들을 맞아 싸우느라 도로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은 빛나는 투쟁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서귀포에서는 헬기들의 엄호를 받는 용병들이 상륙전을 개시했다. 헬기강습병들이 서귀항에 교두보를 마련하자 새섬을 지나 카페리터미널에 접안한 양륙함들이 60톤급의 육중한 이스라엘제 메르카바 전차들과, 역시 대형인 이탈리아제 신형 아리아떼 전차들을 하역했다.  전차들은 상륙한 즉시 부두로를 따라 진군해갔다.  이미 중국군이 발사하는 포성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남국호텔이 있는 중정로에서 총성이 울렸으나 산발적인 전투는 곧 끝나고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은 순식간에 용병들의 손에 떨어졌다.

  서귀포에서 후퇴하는 중국 해병대를  그동안 산속에 숨어있던 제주도 92연대소속의 한국군과 예비군들이 포위했다. 아무리 패전을 경험한 군대라지만 이들의 행위는 너무 잔인했다.포로가 된 중국군을 산 채로 포를 떴다. 전신주에 묶인 채 대검으로 난자당하는 중국군들의 비명과 신음이 제주도의 아침을 가득 메웠다.

  11. 19  08:35  제주도 120 km 남서해상

  아침 햇살이 파도에 눈부시게 반사되기 시작한 아침의 서해바다 위에 작은 유람선이 유유히 잔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한중전쟁의 한복판인 서해상에 이 유람선은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이 배는 한국 해군에 징발되어 작전 중이었다. 선수의 갑판에는 대형 프리게이트함에서나 볼 수 있는 Mk-48 다연장 시 스패로우 대공미사일 발사기가 있었고,  선교에서는 한국 해군복장을 한 군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어젯밤 졸지에 징발당한 이 배의 선주 겸 선장만이 졸린 눈을 꿈뻑였다.

  "왔습니다. 조기경보기로부터 데이터가 옵니다."

  통신병이 대공사관에게 보고했다. 목포 상공에는 한국 공군의 F-5 전투기들에 의해 엄중 호위되고 있는 E-2C 조기경보기가 상하이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중국의 전투기들을 레이더로 추적하고 있었다.한국 해군함정들의 대공미사일 시스템의 지위를  신형인 스탠더드 미사일 시스템에 물려준 이 구식 미사일을 유람선에서 발사하면, 조기경보기가 무선지령으로 중국 전투기에 이 미사일들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3번에 걸친 시뮬레이션에서는 성공했으나 실전에서 어찌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4발의 미사일이 연속 발사되었다. 수평선 멀리 다른 유람선에서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 스패로우 대공미사일은 대공미사일 치고는 아주 낮은 고도로 서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11. 19  08:40  제주도 155 km 남서해상

  상하이에서 출격한 90여기의  F/A-18 전폭기들이 동쪽을 향해 고속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중국 조종사들은 제주도의 해병사단으로부터 긴급 구조요청을 받고 출격하기는 했으나 아직 제주도가 적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완전한 저공침투비행은 하지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900피트의 고도를 잡아 비행하고 있었다. 상하이 동쪽 상공의 조기경보기는 편대의 진로에 아무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한반도 남서쪽인 목포 상공에 한국군의 조기경보기가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러나 진로 중에 한국군 전투기나 전투함의 활동은 없다는 것이 확인되어 전투기들은 전혀 경계를 하지 않고 비행했다.

  선두의 조종사가 해면 위에 이상한 물체들이 고속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저고도로 비행하는 이 물체들을 보자 이것들이 혹시 대함미사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대공미사일은 당연히 미사일 자체나 발사체인 군함과 전투기에서 레이더파를 발산할 것이고 이 레이더파가 전투기의 미사일 경보체계를 시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대공미사일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육안으로 확인하자는 생각에서 뒤따르는 편대에 무선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물체 중 하나가 급상승 하더니 자신의 전투기로 다가왔다.  조종사가 급히 선회를 시도했으나 마하 3.5의 시 스패로를 피하기는 너무 가까왔다.

  선도기인 F/A-18이 추락하는 하늘 아래로 시 스패로 미사일들이 서쪽을 향해 날았다. 편대장이 미사일을 본 것은 3 km 전방이었다.

  "대공미사일 경보!"

  편대장이 얼떨결에 편대용 주파수로 경보를 발했다. 미사일의 유형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플레어를 연속 발사하고 기수를 남쪽으로 꺾었다. 그러나 미사일은 사방에서 날아왔다.시 스패로는 AR(active RADAR homing : 능동 레이더 유도)이나 IR(적외선 유도) 방식이 아닌 SAR(반능동 레이더 유도)방식이기 때문에 미사일을 향한 잼(jam-전파방해)이나 플레어는 소용이 없었다.  시 스패로 미사일들이 급상승하며 편대로 파고 들어 폭발했다.  조종사들이 미사일의 유형을 확인하고는 조기경보기를 향해 ECM을 걸었으나 0.1초 단위로 주파수도약을 하며 추격해오는 미사일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편대장은 얼떨떨해졌다. 갑자기 날아온 미사일에 의해 편대의 절반을 잃은 것이다. 틀림없이 해상에는 적함이 없다고 조기경보기가 확인하여 주었다. 그렇다면 미사일은 어디서 날아온 것인가? 바로 앞에서 전투기 한 대가 공중폭발했다.화염에 휩싸인 전투기가 오른쪽으로 추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설마 한국에 잠수함 발사 대공미사일 시스템이 있는 것일까?’

  편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대공미사일을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나라는 러시아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손실기의 숫자를 조기경보기에 보고 한 편대장은 계속 동쪽을 향해 날았다. 갑자기 날아드는 미사일이 무서워 편대를 2만 피트의 고공으로 비행하도록 명령했다. 편대장은 조기경보기를 믿지 않게된 것이다.직접 레이더를 가동시키고 미사일이나 적기를 경계했다.

  편대가 상승하는 중에 또다시 미사일의 대군이 날아왔다. 저공으로부터 솟구치는 미사일들은 위에서 보니 전봇대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전투기들이 채프를 하늘 가득 뿌렸으나 미사일은 채프의 구름을 뚫고 올라왔다. 편대장은 평생 처음 겪는 공포를 맛보았다.

  1999. 11. 19  08:50  서울, 신촌

  "야~ 이거 된다."

  "진짜! 근데 머해? 빨리 카피하지."

  "응. 그래그래. 잠깐… "

  "더 좋은거 없을까?"

  신촌의 하숙촌에서 대학생 두 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런 전쟁통에 지방 출신 학생들이 고향에 돌아가거나 군에 입대하지 않고  하숙방에 쳐박혀 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드 좀비(통신게임 사용 중독자)들도 이때만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 살 길 찾느라 바쁜 판이었는데 이들은 이틀 밤을 새가며 컴퓨터로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결실을 본 것이다.

  "음… 접속만 어렵지 중국군 중앙 컴도 별거 아니네?"

  "일단 카피나 빨리 해. 아직도 보안시스템 작동 안하지?  에구… 넘 꼬졌당~ 추적도 안하네?  잼없게."

  한 학생이 마우스를 누르자 파일이 계속 복사됐다.  화면에는 중국식 약자가 가득했다. 막강한 64비트 운영체제인 윈도우즈99인 이들의 컴퓨터는 화면에 뜬 파일들을 압축하여 순식간에 복사했다.

  "히히~  우린 지금 중국 공산당 주석 아이디로 들어간거니까 누가 의심하겠어? 의심한 놈이 더 의심받겠다. 글고 유니콘은 접속중에는 추적을 안받자나. 나중에 추적받는 경우도 드물고…"

  "히~ 글치… 추적당하는 재미로 딴 소프트만 쓰다 보니까… 잉? 근데 이건 또 머야? 또 다른 패스워드가 필요한데? 한자로 1급기밀사항이 라고 되어있군."

  "음냐… 그래봐야 이 유니콘2를 한번 더 가동시키면.. 이번엔 몇 분이나 걸릴까?  자, 그동안 라면이나 하나씩 뽀개지 모~ "

  "잉? 먹을 새가 어딨어? 벌써 나왔는데…"

  "에구… 정말 잼없다. 너무 쉽네."

  "어? 저건 뭐야. 에구…  중국식 한자 약자는 넘 어려버. 북조선… 안주.. 점령… 뭐.. 보고."

  "뭐? 안주가 점령됐어? 테레비에서 보니까 국군과 인민군이 연합해서 안주에서 철통같이 중국군을 막고 있다던데?  설마 점령됐나?"

  "안주가 어디야?"

  "어휴~ 뉴스 좀 봐라. 청천강 바로 남쪽에 있는 북한 도시야.이게 무너지면 평양까지 바로라든데… 쩝. 졌나부다~ 잉~ 우리도 군대 끌려가게 생겼다~~ "

  "에구… 어쨋든 이 놈도 카피하고…  저기, 편제라고 되어 있는 것도…"

  "그래 머… 우리 컴 용량은 크니까.  음… 카피해도 기록은 안되는군. 걱정없어. 나중에도 얼마든지 이 아이디로 접속된다구."

  "됐다. 그럼 이걸 한 번 개성으로 날려보자구.  통일참모본부가 거기 있지?"

  "그려… 일단 몇 개 더 카피하고… 근데 전화번호를 어서 찾아?"

  "전화번호부에 있겠지.  일단 인터넷 나와서 ISDN으로 찾아봐.그러구나서 접속하지 머….."

  이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다뤄서 이제 웬만한 프로그램은 꿰차고 있었고 가끔 재미로 해킹을 하는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이들은 컴퓨터 해킹의 천재들은 아니지만 웬만한 네트웍에서는 충분히 기량을 발휘하는 중급 해커들이었는데 남의 자료를 삭제한다든지 하는 피해를 주는 크래킹은 절대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하자  이들은 어떻게든 중국의 전산망에 침입하여 나라지키기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수많은 기라성같은 해커들도  중국군의 전산망에 침입하려 했으나 중국군이 외국에 대해 전산망을 폐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각 통신망에서는 중국 컴퓨터 해킹을 목표로 정보교환이 활발했으나 누구도 열쇠를 찾지 못했는데, 이들 두 대학생들이 최초로 중국군 전산망을 해킹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들이 해킹을 한 툴은 유니콘 2라는 일종의 바이러스 컴퓨터였다.접속한 통신망의 호스트에 가상의 미니어처 컴퓨터를 만들고,  이를 통해 다시 인터넷의 서비스인  월드와이드 웹과 다른 몇 개의 통신망을 통해 해킹 대상이 되는 컴퓨터에 침입하는 장치였다.  통신망 중간중간의 또 다른 슈퍼컴퓨터에 가상 컴퓨터를 만들어가며 해킹 대상 컴퓨터에 접근하면, 역추적해도 중간의 슈퍼컴퓨터만 알 수 있고 처음 접속한 컴퓨터를 찾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적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전의 유니콘 1과는 달리 호스트 컴퓨터의 바이러스 백신을 파괴하지도 않기 때문에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폐쇄됐는데?"

  "전화번호는 맞는데…쩝… 전시라서 그러나부다.  그럼 이 자료 어떡하지?"

  그동안 공개되었던 통일참모본부와 국방부, 정보사단 등 국방관계 기관들이 전쟁이 나면서 기밀자료유출을 우려하여 국내외 통신망으로부터의 접속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 기관들은 중국 해커들의 침입을 막느라 바빴다.

  "그럼 이걸 들고가야 되겠네…쩝"

  "으으으…. 종이값만 해도 엄청 나겠다."

  "타이틀로 들고 가면 되지 머… 근데 거기에 컴이 있을까? 있더라도 시디롬은 없을텐데…"

  "크… 그럼 근처에서 디스켓으로 카피해야지 머…  문방구라도…"

  "으… 설마 아무리 군대가 후졌다고 해도 문방구 컴보다 후지랴?"

  "냠…  군바리들이 워낙 무식해서 재작년에 386을 대량 구입한거 몰라? 그 꼬진걸 칼라라고 바가지 쓰고…쩝"

  "잉? 이건 386에선 안돌아가는데…"

  "할 수 없지 머… 통일참모본부까지 해킹할 수는 없고… 근데 이런 판국에 개성 가는 차가 있으려나…"

  "으윽! 통일참모본부까지 가게? 그냥 국방부나 육군본부에 가면 되잖아?"

  "아니…작전권은 다 통일참모본부에 있대, 임시지만… 그리구 지금 북한지역에서 전투중이니 인민군 출신 군인들이 더 급하잖아?  직접 들고 가자고."

  "할 수 없지. 그럼 광모형 차 빌려서 가지 머…"

  "빌려 줄려나? 사정 이야기 해 보고…"

  11. 19  11:10  개성

  중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통일로 이곳저곳에 새로운 군 검문소가 새로 많이 생겼다.개전 첫날의 테러를 막지 못한데 대한 반성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중국군 특수부대의 이렇다할만한 활동은 없었다. 한국군과 경찰, 안기부에서 이들을 철저히 추적하여 체포했기 때문이다. 중국 특수부대는 완전 소멸한 것으로 보였다.

  군인이나 민간인 모두들 잔뜩 긴장한 모습들이었는데 완전 군장을 한 수많은 군인들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학생들이 걱정했다. 그러나 곧 자신들의 차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산시부터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군 차량들 때문에 한참 기다렸다가 갈 수 있었다.이들이 개성에 도착한 것은 서울에서 출발한지 두 시간만이었다.

  통일참모본부는 개성 북쪽 외곽의 산 아래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송악산이 보였다. 임시 기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의 역할에 비해 규모가 너무 작아보였다. 입구쪽에 전차 몇대가 있었고 총을 든 군인들이 바리케이드 뒤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국군과 인민군들이 함께 있었는데 대학생들이 차를 길 옆에 세우고, 국군 중에서도 대학교를 다니다 온 듯한 군인을 찾아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서울에서 왔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여긴 민간인출입 통제지역입니다."

  김 준태가 그 안경쓴 군인을 보니 인텔리같아 보였다.과연 말투도 진짜 군인같지는 않았으나 완전무장한 전투복에,어깨에는 육군 상병 계급장이 붙어서인지 의젓해 보였다.

  "저희가 중국군 컴퓨터에 침입했는데… 혹시 최 상병님 해킹이 뭔지 아세요?"

  김 준태가 그 군인의 명찰을 보며 물어보니  최 상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중국군 컴퓨터를 해킹했다고요? 전시라 국제통신을 외국에 대해 폐쇄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의 유명한 해커들이 시도했지만 안된다고 들었는데…"

  김 준태와 구 성회는 서로 얼굴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 이 군인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눴는데 최 상병은 울산공대 화공과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고 했다.

  "형, 그럼 우리를 높은 사람에게 소개시켜 줘요.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면 더 좋고요."

  서로 인사를 하고 나서 구 성회가 부탁하자 최 상병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군대도 전산화가 많이 됐지만 높은 사람들은 워낙 꼴통이거든. 도대체 무슨 말이 통해야지… 참모본부에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참! 우리 소대장님이 컴퓨터를 좀 하고 참모들이 누군지는 아니까 잠깐 기다려 봐요."

  최 상병이 통제소 문 밖에서 안쪽에 앉아 있는 장교와 한참 이야기하더니 두 대학생을 손짓으로 불렀다. 대학생들이 뛰어가 통제소 안을 들여다 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정말입니까? 중국군 컴퓨터를 해킹하다니… 접속은 어떻게 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료를 뽑을 수 있습니까?"

  대학생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의외로 군인들도 컴퓨터 문맹은 아니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나이든 인민군 하사관은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의 아이디와 비번을 압니다. 모든 자료를 뽑을 수 있어요.  저희들을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데려가 주시면 바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소대장이 그들의 진심을 믿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기다려 보십시요. 제가 양 중장님께 전화해보죠."

  "예. 빨리요. 중국군이 청천강 방어선을 뚫었다죠?  안주에서 우리군에 큰 피해가 났더군요."

  구 성회의 말을 듣더니 소대장이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통일참모본부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로 미루어 그런 낌새를 받았을 뿐인 군사기밀이었다. 소대장이 참모본부 회의실로 사용중인 상황실로 전화를 하여 양 중장을 찾았다.

  "통일! 정문 통제소의 박 중윕니다."

  소대장이 바짝 긴장하며 통화를 했다. 중위와 중장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이다. 방위 정도 되면 중장에게 경례도 안하지만.. 잠시 통화가 되더니 소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양 중장님이 두 분을 모셔 오랍니다. 설명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11. 19  11:20  개성, 통일참모본부 상황실

  "뭔가?"

  양 석민 중장이 짜증나듯 전화기에 대고 외쳤다.  청천강에서의 패배로 전군이 후퇴 위기에 몰리고 중국군 장갑집단군들이 전선을 돌파하여 남진하고 있는 판에 정문 경비실에서의 전화는 짜증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이 이어지고는 양 중장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래? 그럼 신원조회 한 다음 바로 들여보내."

  주변의 참모들이 궁금해서 물으니 양 중장이 미소를 지었다.

  "직접 한 번 들어보시지요. 서울에서 대학생 두 명이 왔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 컴퓨터에 침입했다는군요."

  인민군 출신 참모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해했고 국군출신 참모들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이윽고 젊은 학생 두 명이 경비실  박 중위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왔는데 뭇 장성들을 보곤 무척 위축된 듯한 표정이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양 중장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물었지만  학생들은 주눅이 들어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희들은 연세대학교 학생들입니다만… 저는 신문방송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구 성회이고 이 친구는 금속공학과 4학년 김 준태입니다."

  재수생은 아무래도 티를 낸다는 생각이 들어  구 성회가 약간 쑥스러워졌다.

  "그래, 자네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 컴퓨터에 침입했다고? 그러면 거기 컴퓨터는 어떻던가? 자료를 빼낼 수 있나? 어떤게 있던가? 그리고 컴퓨터 전문가들도 침입 못했다는데 어떻게 들어갔지?"

  양 중장이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정보사단의 내노라는 컴퓨터 전문가들도 침입 못한 중국군 전산망이었다.  전시가 되자 중국의 모든 컴퓨터들이 국제통신망과의 연락을 끊어서 침투해 볼 기회도 없다는 것이 정보사단의 보고였는데 어떻게 침입했는지 궁금했다. 한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중국은 중국본토 뿐만 아니라 홍콩과 대만까지 국제통신망을 폐쇄하여 세계 경제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각지에 금융공황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그리고 각국 주재 대사관과 국제기구와의 통신망도 끊었다.  중국은 이런 손해를 감수하고도 통신망을 차단할 정도로 컴퓨터 보안에 철저했다.

  "저희들은 최근에 중국에 항복한 베트남의 행정컴퓨터망을 통해 침입했습니다. 중국은 기밀유출을 우려해 국제전산망과 연결되는 모든 컴퓨터망을 차단했습니다만, 베트남 주둔군을 빼먹었더군요."

  이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국내 컴퓨터통신망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미국과 일본을 거쳐  베트남에 주재하는 일본 상사의 한 현지공장에 침입한 후 베트남 행정전산망에 들어가고, 다시 중국군 점령부대의 한 군부대 컴퓨터를 통해 중국군 컴퓨터망에 침입했다고 알려주었다.그러나 어려운 이야기는 대충 빼고 넘어갔다.

  "베트남의 그 중국군 부대 컴퓨터를 관리하는 자는 사실 컴퓨터 해킹에 대해 거의 초심자입니다. 물론 프로그래머, 또는 전산망 관리자로서는 훌륭하지만 보안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인민군 참모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패배 후 전선유지에 골몰하던 정말 중차대한 회의를 미루고 진지하게 듣고 있는 양 중장의 표정을 살피며 궁금해했다.

  "어쨋든 저희들은 중국군의 전산망에 침입했고  정보를 빼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청천강 전역에서의  아군 피해까지 기록되었더군요."

  참모들이 깜짝 놀랐다. 아군의 가장 큰 패배로서 국내 및 외국언론에는 한마디도 노출이 안된 것인데 어떻게  이 대학생들이 안단 말인가? 해외언론도 중국군 커뮤니케의 불확실한 기사를 받아 단지 한국군이 패해서 후퇴했을거라는 추측기사 밖에 쓴 것이 없었다. 미국 언론의 경우 비교적 자신있게 한국군의 패배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물론 이는 CIA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한 보도였다.  그리고 CIA도 위성 정보를 분석하여 몇 시간 전에야 알아낸 극비정보였다. 다른 대학생이 탁자 중앙의 컴퓨터를 살피더니 시디 롬을 넣고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인민군 제 4군단 섬멸, 인민군 제 2군단 및 820 기계화군단 대파 및 후퇴, 국군 제 12사단 패주.. 사살 3만 2천 7백 5십 6명, 포로 1만 3천 8백 12명. 전차 247대 및 장갑차 453대 파괴 또는 노획.전투기 27대 격추, 맞습니까? "

  참모들이 벌떡 일어났다.전사자와 행방불명자의 수가 약간 틀릴뿐 거의 정확했다. 그렇다면 행방불명자의 일부는 적의 포로가 되거나 산 속으로 도망쳐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사 3만 2천이라면 6.25때 55일간의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희생된 국군 전사자 3만 4천 명과 비슷한 숫자였으며, 그 정도로 인민군의 피해는 컸다. 김 준태가 계속 읽어 내려갔다.

  "중국군 전사 1만 8천 287명, 부상 3만 천 67명, 전차 171대 파괴,장갑차량 216대 파괴 및 피해. 전투기 21대와 헬기 54대 손실."

  "어떻게 그걸… 그렇다면 틀림없군. 그럼 혹시 중국군의 작전계획도 있나?"

  이 종식 차수가 구경만 하다가 놀라 물었다.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적의 전략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구 성회가 자료를 검색하더니 읽기 시작했다.

  "인민해방군 제 16병단에 대한 중앙군사위의 명령.16병단 소속 제 13 장갑집단군은 경의선을 따라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며 평양으로 직진하고 제 15장갑집단군은 조선반도 서해안을 따라 강서군과 용강군을 점령하라. 제 16장갑집단군은 순천으로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물리친 후 평양을 공격한다. 각 장갑집단군은 2개의 일반 집단군과 동행한다. 귀 부대의 뒤에서는  막강한 인민해방군과 10억 인민이 귀 부대를 지원할 것이다. 이상,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이… 누구인데 못읽겠습니다."

  인민군 해군상장이 자신의 단말기에 나온 중국식 약자를 보더니 리루이환이라고 말해주었다. 컴퓨터와 연결된 각자의 단말기의 내용을 읽은 참모들이 기가 막혀서 입을 열지 못했다.  중국군 부대들의 이동방향과 공격 예상 방향에 대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CD-ROM 타이틀 한 장이 현재의 상황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었다.

  "양 중장, 적 부대의 상황을 다시 설명하시오."

  "화면 준비"

  이 차수의 명령에  양 중장이 배석한 참모부 소속 초급장교들에게 명령했다.  화면이 평안남도 일대의 지도를 비추고 그곳에는 붉은 화살표가 남진하고 있었다.

  "우측에 순천을 향하는 화살표의 규모가 잘못되었습니다. 1개 여단이 아니고 집단군입니다.즉시 현지 사령관을 호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순천의 우리 병력으로는 막지 못합니다. 공중지원이나 병력지원을…"

  참모들이 바삐 현지 사령관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평양뿐만 아니라 순천까지 위험하고, 이렇게 되면 함경남북도에서 싸우고 있는 남북한의 연합군이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적의 병력 상황은 저희가…"

  잠시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서먹서먹하게 서 있던 대학생들이 말하자 이들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잠시 전화선 좀 빌릴까요?"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믿어준 참모들이 고마와서인지 자신을 내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하사관으로부터 전화선을 받아들고는 자신들의 랩탑 컴퓨터에 연결하고 이를 다시 회의실의 대형 모니터와 연결했다. 참모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 쳐다 보았다.

  "중국군 컴퓨터에 있는 내용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혹시 중국어 전문가가 계시면 더 좋은데요. 중국식 약자가 많아서…"

  구 성회가 랩탑컴퓨터를 키자 대형화면이 컴퓨터 화상의 내용과 같은 내용을 보여주었다. 참모들이 서로 얼굴을 보더니 이야기했다.

  "우리 인민군들은 다들 중국어를 아니 걱정말게. 혹시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우리 부하들이  점검해봐도 되겠나?  물론 원본은 돌려 주겠네."

  참모들이 이들에게 굉장한 호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이들 정도면 유성의 정보사단보다 훨씬 정확하고 방대한 정보를  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구 성회가 타이틀을 정보 담당 장교에게 주었다.  김 준태는 몇 개의 통신망을 통해 천천히 중국군 중앙컴퓨터망에 접근하고 있었다.

  "자네들 현지 입대하지 않겠나? 우리 참모본부로 말이야."

  양 중장이 제의하자 다른 인민군 장군도 대학생들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인민군에 입대하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이 차수가 그 말을 듣더니 화를 벌컥 내었다.

  "이 마당에 국군이면 어떻고 인민군이면 어떤가? 그리고 구분할 필요가 어디 있나?"

  이 차수가 장군들을 나무란 후 대학생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차피 대학생들에게도 곧 전시 동원령이 내려질텐데…  지금 바로 입대해 주게. 계급은.. 양 중장, 어느 정도 계급까지 줄 수 있소? 소좌, 아니, 소령 정도 줄 수 있겠소?"

  "자네들 컴퓨터 기사 자격증 있나?"

  양중장이 대학생들에게 묻자 대학생들은 없다고 답했다. 해킹 실력과 자격증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는게  이들 대학생들의 평소 생각이었다.

  "차수님, 이들은 자격이 없는 기술전문가이지만 기술하사관으로 특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좀…"

  "무슨 소린가? 소령은 되어야지. 아니면 인민군에서 데려가겠네."

  "하지만 이들은 남한 대학생들이고 우리 군 규정상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장군들이 입대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동안 계급에는 관심이 없는 이 대학생들은 어느새 북경의 중국 인민해방군 중앙컴퓨터 안에 침입하고 있었다.

  "자, 지금 들어왔습니다. 알고 싶은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요. 시간여유는 많으니 하나씩요."

  "그럼 중국군 공군의 이동 배치 상황과 규모를 먼저…"

  "아니, 현재 중국 해군의 작전 계획을.."

  "먼저 지상군 집단군별 위치를 더 자세히…"

  남북의 각군 참모들이 저마다 관심있는 내용을 요구하여 실내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구 성회가 화면을 검색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을 출발할 때 없었던 화일이 있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강한 구 성회가 화일을 열람했다.

  "제주도가? 제주도를 수복하고 있군요?"

  김 준태가 깜짝 놀라 물었다. 화면에 중국군의 피해가 표시되었다.자그마치 100대가 넘는 중국 전투기들의 피해상황이 표시되어 있었다. 현재 소속을 알 수 없는 항모부대에서  제주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있다는 급보도 나왔다.

  "우리나라에 항모가 있었습니까? 메르카바는 이스라엘제 아닙니까?"

  구 성회가 신기한듯 묻자 참모들이 씩 웃었다.

  "아니라네. ‘피스’라는 반전 전사집단 소속이지.  우리와 연합하기로 했네. 그리고 제주도는 이미 수복했고…"

  이 차수가 나서서 직접 설명했다. 피스에서 파견된 짜르가 씨익 웃었다. 참모들로서는 이제 제주도는 일단 한숨 돌린 눈치였다.이제 북쪽의 위협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급박했다.

  "아…  엘빈 토플러의 전쟁과 반전쟁이라는 책에 나온 그 반전 전사요?"

  김 준태가 한국인 장성들 사이에 앉아있는  푸른 눈의 사나이를 보고 한국어로 묻자  짜르가 엘빈 토플러라는  말만 듣고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관인 인 한수 중위가 정확한 의미가 아니라며 피스에 대해 대충 설명해 주었다. 양 중장이 서둘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는가? 아니라면 자네들이 찾기 쉬운 정보부터 찾아주게. 참, 이걸 바로 정보사단에 연결해 정보사단에서 분석할 수 있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군님."

  두 대학생이 중국군의 정보를 대량으로 빼내기 시작했다.육해공군 병력배치 현황과 작전계획, 중국이 가지고 있는 아군에 대한 정보,  첩보부대의 비밀사항들, 보급계획 및 일정, 심지어는 참전하고 있는 중국군 사병들의 신상정보까지 빼내었다.

  "중국군 제 16병단 소속 제 13장갑집단군의 현재 위치와 진로는 이렇습니다."

  양 중장이 대학생 해커들이 중국군 컴퓨터에서 빼낸 정보와 항공정보, 그리고 전자전 정찰기가 중국군의 통신을 도청하여 분석한 내용을 종합하여 화면에 표시했다. 제 13장갑집단군은 안주 회전에서도 예비부대로 빼돌린 만큼 아직 대부분의 전력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적의 주공입니다. 우리측 정찰기와 전자전기들이 수십차례나 출격했지만 적의 대공미사일과 전투기들의 요격 때문에 접근도 못할 정도로 이들에 대한 공중 보호막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들을 막을 방안을 연구해야됩니다."

  "역시 전차의 최고의 적은 항공기입니다. 우리 공군의 전폭기와 공격 헬기, 그리고 A-10 공격기들을 동원하면 쉽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의 항공우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이건 어렵지요."

  "평야이니까 대규모의 포격이 괜찮을겁니다."

  "땅크에는 땅크가 최고디오."

  이 차수가 묵묵히 듣고 있더니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아까 새벽에 동원하기로 한 저격여단의 대전차대대로 막아보는게 어떻소? "

  이 차수의 말에 인민군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국군참모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아니, 겨우 1개 대대로 어떻게 적을 막습니까? 아무리 대전차대대가 전문 전투집단이지만 적의 규모는 1개 집단군,  즉 우리측 군단 규모를 훨씬 넘습니다. 너무 무리하는거 아닐까요.  괜히 시간낭비할까 두렵습니다."

  국군의 정 지수 대장이 반발하고 나서자, 다른 국군 참모들도 끼어들어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이들의 주장은 아무리 대전차대대가 효율적인 대전차 방어부대라도 적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영국 기갑사단의 대전차연대처럼 사단규모의 전투에서 전술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어도 집단군을 상대로하는 전략적인 임무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이 차수가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에게 대전차대대에 대한 브리핑을 시켰다.

  "우리 인민군의 정규전 특수부대인 저격여단에는 몇가지 특수전 대대들이 있습니다. 전투 목적에 따른 병과별로 대대가 구성되어 있는데 부대구성은 시가전 대대, 야간전 대대, 대전차 대대, 산악전 대대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들 중 대전차 대대는 대전차 방어가 주목적인 대대로 전차중대,  장갑차 중대, 포병중대, 공병중대, 대전차포중대 및 대공포소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들 모두 대 전차전의 최고 전문가들입니다. 물론 적이 집단군이라는 대규모이긴 하지만 실제로 중국 장갑집단군과 맞부딪힐 경우는 승패를 장담할 수는 없으며, 아무리 이들의 능력을 낮춰 잡아도 최소한 3일 정도는 적을 막아낼 수 있을것입니다. 몇 년전만 해도 이들 대전차대대는 개성 전면의  국군 기갑사단에 맞서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는데에 주목해 주십시요."

  "아니, 그러면 인민군은 유사시에 우리 국군 제 1 기갑사단을 대전차 대대에 맡길 생각이었소?"

  정 대장이 비꼬듯 말하자 김 대장도 맞받았다.

  "국군이 북침할 경우 우리 인민군은 대전차대대로 국군 제 1기갑사단을 섬멸시키고 815 기계화군단과 820 기계화군단으로 서울을 점령할 계획이었소. 내 말은, 우리 인민군 부대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오."

  "그러나 적은 집단군이오.  1개 대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할 정도의 시간만 벌어주면 되겠죠.  저는 대전차대대의 투입을 찬성합니다.  전선을 유지할 시간만 좀 더 벌면 좋겠습니다. 후방의 부대가 배치될때까지 아직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국군의 정 대장도 화를 내며 찬성했으나 그는 극히 냉소적이었다.

  1999. 11. 19  11:30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요새

  "철산시 북방 차련관 일대에서 적 집단군 병력 남하중!"

  "적 집단군 병력 구성시 통과중입니다."

  요새 사령부와 같은 굴을 쓰는 통신실에서 연속 보고했다.  상황판을 담당한 여군들이 무표정하게 적 병력의 규모와 위치를 나타내는 표지를 상황판에 붙이고 있었다. 차 영진 중령은 중앙 모니터에 비친 평안북도 지도만 유심히 보고 있었다.

  "홍 대좌님, 혹시 정주군에도 연대가 있습니까? 박천군은요?"

  차 중령이 조용히 묻자 홍 종규 대좌가 부동자세를 취한 채 대답했다. 홍 대좌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렸으나  그로서는 상급자에 대한 당연한 의무였다. 차 중령으로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각 군별로 최소 1개 연대씩 당연히 조직됩네다. 길티만 그쪽 예비연대와는 개전 첫날 이래 무선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네다."

  차 중령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만 중국군의 병력이 계속 한반도에 투입되는 지금,  각 군과의 연계가 없으면 효율적으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중령은 정주군 및 박천군과의 무선연락망을 구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의 전투력으로 보아서 병력의 결집이 이뤄진다면 큰 전력이 될 것같았고 잘하면 전선의 상급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1. 19  11:40  평안북도 만포진

  중국과 국경을 접한 압록강의 만포를 점령한 중국인민해방군 제 11병단은 자강도 (평안북도의 북동쪽 지역) 강계와 전천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인민군이 방어하던 희천을 하루 밤낮의 공방전 끝에 점령했다. 희천은 묘향산맥 바로 북쪽에 위치하여 묘향산맥을 넘어 평안남도를 넘보고, 함경남북도와 양강도의  통일한국군을 배면에서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인민군의 저항이 거셌으나, 제공권을 가진 중국 공군의 강력한 지원으로 인민군은 어제 묘향산 방어선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8일부터 방어선을 지키던 인민군의 진지를 넘어 이들은 안주방어선이 뚫려 위기에 몰린 덕천 방면의 방위를 위해 이동했다.

  만포 남쪽의 국도를 따라 중국군 보급부대의 차량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철로는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파괴하고 떠났지만 국도를 따라 이어진 철로에서는 중국군 공병대가 보수작업을 하기 바빴다.  탄약과 식량, 연료 등의 보급품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남으로 이동해갔다.

  이런 모습을 영어로 bumper to bumper라고 인민군 저격여단 산악전 2대대 3중대의 조 부현 중사가 씨익 웃었다.  조 중사는 해발 637미터의 후고산봉 기슭에서 부하들과 함께  중국군 수송부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 중사는 작년에 졸업한 하사관학교 고등과정에서 전에 배웠던 러시아어 대신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러시아어나 중국어는 말할 수 있는 군인이나 인민들이 워낙 많았고,  영어가 제대 후에도 도움이 될것같아 자신은 영어를 선택한 것이다. 2년 후엔 제대하여 나진, 선봉 지구에서 외화벌이 일꾼으로 일하고 싶었는데 이번 전쟁으로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대부분의 외국계 자본이 중국의 침공을 보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조 중사는 국도를 내려보는 산 위에 서서 망원경으로  중국군 보급부대의 규모를 살폈으나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규모를 모르는 적을 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대규모의 보급부대라면 선두쪽을 치는게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찬찬히 부하들을 살펴보았다.

  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트럭들을 노리고 있는 고속 유탄포의 사수 김 하사, 북쪽을 맡은 기관총 사수 리 전사, 드라구노프 저격총을 바위 위에 거치하고 적의 지휘관급을 노리는 민 하사 등,  모두들 표정은 평온해보였다.  입대한지 1년이 안된 박 전사만이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인민군이면서도 특이하게 검은 헬멧을 쓰고 검은 가죽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이 인민군에서 제일 멋진 군복을 입은 대원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직은 늦가을이라 낮에는 통풍이 안되는 이 군복을 입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이 군복은 방풍을 위해 입는 특이한 경우였다. 산악전 2대대 3중대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단도저격조라면 공격해오는 적의 주력을 기습하고 도주하여  적의 공격의 맥을 끊는 역할을 해야했다. 그러나 그들이 여단장에게 받은 임무는 적의 공격부대는 관찰만 하고 적의 보급부대만 치라는 것이었다. 전파방해나 전파추적의 위험때문에 연락은 비둘기를 이용했는데 지금까지 적 공격부대를 정찰하고 날려보낸 비둘기가 열 마리가 넘었다.비둘기가 남으면 구워먹겠는데,  적의 대규모 병력이동이 너무 많아 결국 비둘기 맛을 보지 못해서 아까왔다. 헬멧을 장시간 쓰고 있어서인지 그의 이마엔 땀이 흘러 내렸다.

  "준비!"

  도로 반대편에 매설한 크레모어의 격발장치를 맡은 표 전사의 손가락이 움찔하는게 보였다. 적이 양면 포위공격으로 오인하도록 크레모어는 아군이 매복한 반대쪽에 매설한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의 한마디면 이 계곡이 총성과 폭파음에 뒤흔들릴 것이다.

  "공격!"

  조 중사가 헬멧의 무전기를 통해 분대원들에게 명령을 발했다.  먼저 김 하사의 40mm K-4B 고속유탄포가 불을 뿜었고, 이어서 다른 분대원들의 무기로부터도 적에게  총탄이 퍼부어졌다.  대부분이 보급품을 실은 트럭과 병력수송 장갑차인 중국군 수송대는 고속 유탄포의 제물이 되었다. 차량대열 곳곳에 화염이 솟구쳤다. 과연 계곡에서 울리는 반향음은 컸다.

  보병과 차량 운전병들이 차에서 빠져 나오자 이번엔 더 큰 재앙이 그들을 기다렸다. 30미터마다 설치된 크레모어가 2km에 거쳐 연속 폭발한 것이다.수송대와 호위대의 장교급들은 여지없이 민 하사의 저격총에 쓰러졌다.리 전사의 K-3 분대지원 기관총도 끊임없이 탄피를 쏟아내며 불을 뿜었다.

  ‘어차피 일부분이다. 적이 너무 많아. 그리고 길게 늘어서 있어서 사정거리가… 그래도 일단은 성공이다.’

  조 중사가 적의 피해상황을 살펴보았다. 고속유탄포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중국군의 트럭과, 트럭들의 사이사이에 낀 장갑차들은  파멸을 면치 못했다. 탄약을 가득 실은 트럭이 폭발하자 주변의 트럭들도 연쇄폭발하고, 연료를 실은 트럭은 폭발하며 주변 도로 위를 불타는 연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공격권 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선두의 2 km에 걸친 적의 보급부대는 전멸시켰지만 뒤에 있는 보급부대가 마음에 걸렸다.  그냥 후퇴할까 생각했지만 그들이 전선에 도착하면 아군과 인민들의 피해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정 중사가 결심을 했다.

  "전원 탑승, 뒤쪽 놈들도 친다!"

  헬멧에 딸린 헤드폰을 통해 명령을 내리자 주변에 흩어져있던 부하들이 산 뒤쪽으로 내달렸다. 조 중사도 뛰어갔다. 바로 산 뒤쪽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탔다.  김 하사가 30 킬로그램이나 되는 고속유탄포를 들고 헐떡이면서 가장 나중에 탑승했다.

  "북쪽으로! 가자!"

  모두 시동을 키고 작은 산길을 달려갔다.  이들 분대원들은 산악전 2대대 제 3중대인 오토바이 중대의 일부였다.  중대원 전원이 산악용 모터사이클을 타고 어떤 산이든지 오를 수 있었다. 지난 여름에는 중대훈련 코스로 백두산을 등정했는데,비가 온 후 땅이 질퍽거리고 길이 없는 코스를 택해 낙오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성공적으로 등정했다.

  이런 야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 중사는 생각했다. 물이 마른 개울을 건널 때는 분대원들이 기분이 좋았는지 공연히 점프를 했다. 약 3킬로미터의 산길을 북쪽으로 달려 어제 보아둔 장소에 도착했다. 조 중사는 땅바닥에 오토바이를 눕혀둔 채 총과 탄띠를 매고 뛰어갔다.다른 분대원들도 어제 답사때 지정된 자신의 위치로 뛰어갔다.

  조 중사가 M-16과 같은 규격의 K-3 분대지원기관총용 탄띠를 리 전사에게 건네주고 망원경으로 적의 동태을 살폈다.  갑작스런 기습에 적은 아직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몇 대의 호위용 경전차가 길에서 내려와 감자밭을 달리고 있었다. 보병전투차 10여 대가 그 뒤를 따랐다.  보급부대의 트럭 운전병들은 소총을 들고 차에서 내린 채 삼삼오오 모여 불에 타고 있는 트럭대열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 그곳에 있는줄 아는 모양이군.’

  절호의 기회라고 조 중사는 생각했다. 이제 또 치고, 북으로 가서 한 번 더 칠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됐나?"

  조 중사가 김 하사와 리 전사를 쳐다보았다. 고속유탄포의 유효 사정거리는 1500 미터, 분대지원 기관총은 800 미터라고 조 중사는 배웠다. 그러나 우수한 사수라면 사정거리를 약간 더 길게 하는 법이다. 그렇게 보면 김 하사와 리 전사는 유능한 사수였다.그러나 저격여단의 모든 전사는 다 유능한 사수라고 그는 생각했다. 모두가 몇가기 무기에 숙달되

었고, 특히 자신의 무기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난 가을에 있었던 통일사격대회에서는 모든 총기분야에서 저격여단의 사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었었다. 특히 인민군에게 인도된지 얼마 안된 고속유탄포나 분대지원 기관총, 스팅거 대공미사일 등의 사격부문에서도 저격여단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국군 장성들이 혀를 내둘렀다.

  헤드폰을 통해 분대원들의 복창이 이어졌다.첫 공격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두번째도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공격!"

  명령을 내리자 동시에 사격을 시작했다.  중국군 보급부대의 대열 곳곳에 폭발 섬광이 튀었다. 전멸한 선두 대열만 쳐다보던 후속 보급부대들은 급작스런 공격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 도망갔다.  사륜구동차 뒤에 숨은 중국군 군관이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 장교는 곧 민 하사의 저격에 쓰러졌다. 조 중사도 저격총으로 보급부대를 쏘다가 총구를 경전차와 장갑차가 갔던 쪽으로 돌려보았다.

  SVD 드라구노프 저격총에 장착된 PSO-1 망원조준경 안에 T-62 경전차 해치 위로 상체를 내민 중국군 군관의 모습이 보였다. 무척 화가 난 모습으로 이쪽을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인민군의 위치를 이제야 파악한 모양이었다.  조 중사가 거리를 재어 조준한 후 방아쇠를 당기자 그 군관은 머리에서 피가 튀며 뒤로 쓰러졌다.  다른 경전차의 운전수에게도 한방, 또다른 보병전투차로 옮겨 기관포 사수들에게 한 방씩 쏘았다.그러자 경전차와 보병전투차 해치 위에 있던  기관포 사수들이 해치를 닫고 숨어버렸다. 경전차의 85밀리 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당황했는지 실력이 없었는지 포탄은 형편없이 빗나갔다.  조 중사가 느긋하게 7.62밀리 10발들이 탄창을 갈아끼웠다.

  조 중사가 다시 보급부대 쪽을 보니 대충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또 북쪽으로 가서 한 번 더 칠까 하다가 지나친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다. 더 북쪽의 보급부대들을 망원경으로 살피니 호송대의 일부가 차에서 내려 산 위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진작 그랬어야지. 꼭 당하고 나서 후회한다니까…’

  조 중사가 천천히 일어섰다. 부하들은 목표를 찾지 못해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가자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는 노동자들처럼 천천히 장비를 챙겨 모터 사이클에 탑승했다. 분대원들이 자신의 장비를 들고 올 때, 표 전사는 그들이 있던 곳 주변에 크레모어를 설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누군가 가느다란 이 철사줄을 건드리면  주변을 800개의 쇠구슬이 초토화시킬 것이다. 분대원들의 표정은 시원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듯했다.

  "탄약 아끼라우. 전쟁은 계속되니끼."

  산악용 모터사이클의 시동을 걸며 조 중사가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집이 아니고 임시 아지트이지만…

  이 같은 일을 다른 소대의 다른 분대들도 할 것이다. 아니, 산악전 2대대의 모든 대원들이 이 임무를 받았다.산악전 1대대는 중대단위로 요지를 방어하고,  2대대는 분대단위로 흩어져 적의 보급부대를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 하사는 다른 대대원들도,  아니 모든 인민군과 국군들이 자기 분대원들처럼 잘 싸워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을 이리저리 돌면서, 가끔가다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추적대의 추격을 따돌리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아지트 부근에는 부비트랩을 설치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의 비트(비밀 아지트)는 서쪽으로 5 km나 떨어져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생각해 보았다.  통일이 된 후로 군대 급식은 아주 좋아졌다.  주,부식을 모두 한국군이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원래 엘리트 부대인 저격여단 병사들이 보기에도 급식이 월등히 향상되어 좋았다. 하지만 전투급식인 레이션은 금방 질려버린다.

  11. 19  12:00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대안

  산악전 2대대 1중대의 한 분대인 김 동현 중사와 부하들은 이틀째 산 위에서 평북선 철로(수풍에서 정주까지의 철도)를  살피고 있었다.  그 철도에는 어제 폭발물을 은밀히 매설하여 공격기회만 노리고 있었다.위치는 내리막 급경사가 한번 꺾이는 곳,일단 폭발물이 터지면 기차가 급정거를 해도 소용없이 열차 모두가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철길 아래를 파고 폭발물을 매설하였기 때문에 몇 번 왔던 중국군 철도 경비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중국군의 공격헬기가 철도 주변의 산들을 훑어보았으나 워낙 위장이 철저해 그들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했다.

  X세대라고 까부는 최 전사는 바위에 등을 기댄채 CD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마 Ce Soir Je Dors Pas라는 제목의 발음도 하기 힘든 음악일 것이다.저 놈은 그 곡만 하루종일 반복해서 듣는다, 라고 김 중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흰눈이 쌓이면 그의 음악은 The Famous Blue Raincoat로 바뀌는 것도 알고 있었다.

  김 중사는 원래 정찰연대의 폭발물 전문가로서 작년에 저격여단에 배속되어 분대장 임무를 수행해왔다. 폭파 대상에 따라 화약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의 부하들은 그의 가르침을 잘 따라주어 이제 분대원 모두가 폭발물 전문가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함흥에 살고 있는 가족이 걱정되었으나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  이제 적지에 몇 명씩 흩어진 저격여단의 산악전 대대원들도 모두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후퇴하는 급한 상황에서 도마뱀 꼬리 떼듯 산악전 2대대를 적지에 남겨두었으나  본대의 후퇴를 위한 희생이 아닌,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이틀간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여단장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방어전을 맡은 산악전 1대대는 이미 상당한 피해를 봤을거라는 생각도 했다.

  ‘아니, 이미 전멸했을지도…’

  식량은 15일치가 임시 아지트에 있었다.  이를 다 먹고 굶주릴지, 아니면 그 전에 분대 전원이 전멸하거나 중국군의 포로가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사이에 전쟁이 끝날지도…’

  앞날 뿐만 아니라 생존이 불투명했으나 이것은 군인의 일이었다.  전쟁에 대비하여 키워지는 군인은 적의 침략을 막기위해 싸워야 했다. 게다가 저격여단은 정찰연대와 함께 인민군 엘리트 중의 엘리트,  그동안의 밥값을 충분히 하리라 마음먹었다.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3 km 북방 산위에 있는 전초기지에서 빛이 반짝였다.  모르스 부호로 된 그 거울 반사빛은 50량을 단 열차가 오고있다는 내용이었다. 화물은 주로 전차와 자주포이며 유개차엔 탄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도 있었다. 가만히 들으니 기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 십 대의 기차를 그냥 보냈다.  이 기차들은 구성시를 통해 평안남도의 안주까지 가서 전선 부대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그러나 이제 여단장의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게다가 전차부대의 호송열차라면 공격의 우선순위는 상당히 높았다. 김 중사는 이들을 치기로 결심했다.

  "준비."

  김 중사가 짤막하게 명령하자 기폭장치를 맡고 있는 전사가 안전장치를 제거했다. 여러 상황이 예상되었으나 폭발물이 매설된 이 구간은 경사가 심하므로 기차들이 시속 30 km로 감속을 한다는 것을 관찰로써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열차가 폭발구간의 50 미터 전방에 왔을 때 폭파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열차가 북쪽 산굽이를 돌아 나오는 것이 망원경에 잡혔다. 과연 전차와 자주포였다.각 유개차에는 전차 2대와 자주포 1대가탑재되어 있고 무개차가 40량이니 모두 80대의 전차와 40대의 자주포가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거의 1개 기계화연대분에 해당하는 장비들이었다.

  전차와 자주포에는 승무원이 그대로 탑승하고 있었고,대공포 몇 문과 경비병도 몇 명 보였다.  뒤에 딸린 10량의 화물칸은 창문이 없고 문이 밖에서 채워진 것으로 보아 모두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객차도 세 대나 있었는데 모두 중국군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연이은 승전에 고무된 듯 웃고 떠드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폭약이 매설된 곳 50미터 전방에 이르자 김 중사의 별다른 명령없이도 하급전사가 기폭장치를 작동시켰다. 섬광과 함께 철도의 일부분이 날아가고 나서야 폭음이 들려왔다.  철도는 받침목뿐만 아니라 자갈로 쌓은 기반도 같이 절벽쪽으로 무너져서 기관사가 급제동을 했으나 열차가 하나씩 절벽으로 떨어져갔다. 차례차례, 모두 55량의 열차가 곤두박질했다. 절벽 아래에 두대의 기관차가 떨어지고 그 위에 연이어 다른 차량들이 떨어져 부서져갔다. 뒷부분의 탄약열차가 떨어지자 충격에 탄약이 연쇄폭발하기 시작했다.객차에서 튕겨나온 극소수의 중국군들도 폭발에 휘말려 모두 죽었다.

  엎드린 채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살피던 김 중사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떨며 일어났다. 중국군의 화물열차에 타고 있던 중국군 전원이 사망한 것이다. 물론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탄약이 못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같이 이 광경을 본 전사 한 명이 자신의 소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총을 쏠 기회는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한 방 쏴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분대는 총을 쏠 기회가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과묵한 이들은 김 중사를 선두로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이제 제 2의 목표로 이동할 때였다. 산길을 따라 송평이 있는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제 3의 목표인 수풍발전소 폭파는 분대의 전멸을 각오해야할 지도 모를 어려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단풍이 거의 진 늦가을 정오, 햇빛이 따사롭게 내려쬐고 있었다.

  11. 19  15:30  경기도 동두천

  아름기획의 변 승찬 대리는 즉시 전방에 투입되지 않고  동두천의 육군기갑학교에 배속되었다. 군복무 중 K-1 전차 포수였던 그는 당연히 K-1 전차에 타게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러시아제 T-80 전차교육을 받게 되었다. 1995년 하반기에 러시아에서 돌려받을 차관 대신에 들여왔다가 원래의 목적인 대전차교육에 투입되지도 않고 창고에 처박혀있던 230대의 T-80을 주축으로,  미군이 철수한 이후 한국군에게 인도된 동두천기지에서 새로운 기갑사단이 창설되었다. 교관단 중에는 인민군 군관들이 꽤 있었다. 변 대리가 복무 중에는 적으로 대했던 그들에게서 전차교육을 받게되어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도 오전의 학과수업에 이어 실습이 이어졌다.  변 승찬은 러시아제 전차의 일반적인 달걀형 포탑과 포탑 뒤에 달고 다니는 연료 드럼통을 보고 혹시나 한국공군에게 오인 폭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125밀리 2A46 활강포는 처음 쏘게 되었는데 K-1전차와는 화기관제장치가 너무 달라 적응하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통일참모본부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어쩔 수 없이 이 전차들을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전차의 질이나 보급체계의 통일성 같은 것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에 바가지를 씌운, 부산항 창고에 쳐박혀 있던 M-1 에이브람스 전차들로도  새로운 전차사단을 창설하고 있었다. 물론 약간의 구식 M-48도 가세하였다. 이들 기갑사단들은 현역과 예비군이 섞여있었다.

  11. 19  16:30  개성, 통일참모본부

  "의외로 적의 남진 속도가 느립니다."

  개전 후 이틀간 뜬 눈으로 노심초사하다가 처음으로 4시간 동안 눈을 붙인 참모들이 부시시한 몰골로 양 석민 중장의 브리핑을 들었다.양 중장은 아직 잠을 못잔 듯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중국군의 3개 병단은 안주 이남으로 계속 내려오고는 있지만 속도가 많이 느려졌습니다.후속 부대들의 위치도 불분명합니다. 중국군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기건 인민들의 노농적위대와 저격여단이 막고 있어서 기래요."

  양 중장의 의문을 이해하겠다는 투로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말했다.  그는 정규군으로써 적을 막지 못하고 예비군과 특수부대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자존심을 강하게 건드려서인지 자괴감에 쌓인 채 설명했다.

  "삼팔 이북서껀 신의주까라 죄 노농적위대가 조직되,인민군 예비부대래 되는 거디요. 후퇴하지 못하고 적 점령지역에 남은 예비부대들의 활약이 대단할 깁니다.길고 저격여단은 개전 첫날 북쪽으로 향했디요. 이들의 위치는 아무도 모릅네다."

  "저런… 그러면 그들의 피해가 엄청 클텐데요."

  국군의 정 지수 대장이 걱정하는 투로 말하자 김 대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반부 향토예비군보담 훨 낫디요."

  한국 예비군들의 훈련상태를 잘 아는 인민군 장성들이 웃었다.  국군장성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나왔다.아직은 패전을 하고 있었지만 제주도 수복이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제주도와 여천군 예비군들은 잘 싸웠지요.  그건 그렇고, 우리는 이제 적 장갑군단의 공격을 막아야… 묘향산 쪽이 버텨줘야 우리 군이 함경도에서 후퇴할 수 있는데요…"

  정 대장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김 대장을 쳐다보았다. 김 대장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1999. 11. 19  14:00  함경남도 동백산(2096m) 기슭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계곡을 덮은 초겨울의 낭림산맥에 요란한 진동음이 들려왔다.비포장길의 자갈을 부수며 거대한 중국제 T-72 전차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오고 있습니다."

  "규모는?"

  "드래곤 플라이의 정찰에 의하면 전차연대를 선두로한 보병 3개 사단이라고 합니다."

  작전참모가 보고하자 인민군 제 2사단의 사단장인 강 일섭 소장이 망원경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산지라서 전차의 기동이 좋지 못하니, 아마 전차연대는 자주포 이상의 역할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되었다.

  A-37B 드래곤 플라이(Dragon Fly)는  전방 항공통제 및 대지공격기로 쓰이는 경항공기인데, 한국군에서는 지상전 지원을 위한 정찰기로도 쓰고 있었다.  전후 복좌식에 짧은 동체와 긴 날개의 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비행기를 한국군은 장난스럽게도 용팔이로 부르고 있었다.

  사단장은 미국에서 수입한  JSTARS(지상목표탐지 공격용 레이더 시스팀)를 갖춘 E-8C 조인트 스타즈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한국에 두 대밖에 없는 그 비행기는 안주 남쪽의 대규모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이쪽은 신경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게 엉망이었다. 전쟁 전에 세웠던 계획은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항공지원은 없네?"

  "예. 안주가 뚫린 후로 엉망입니다. 평양이 위험하다고 합니다."

  안주가 점령된 마당에 사실 이곳을 방어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동쪽 함경도에 있는 인민군부대들이 후퇴할 때까지 시간만 벌어주면 되는 작전이었다. 강 소장은 부대가 얼마나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하루…? 강 소장이 빙긋 웃었다. 자신은 하루살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항공지원이나 병력지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대공무기와 대전차무기 체계가 너무 빈약하다고 느꼈다.동백산 정상 부근의 전방지휘소에서 사단장은 시시각각 들어오는 적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기 바빴다.  포격을 시작할까 하다가 아직 기다리기로 했다.  괜히 적에게 포병의 위치만 알려줬다가 안주회전의 재판이 될까 두려워서였다. 중국군에게 어떤 신병기가 있는지 몰라도 적은 아군 포병대를 초반에 섬멸한다는 정보도 있고 해서 사단장은 아직 포병대를 아끼기로 했다. 전쟁은 길어질지도 몰랐다.

  계곡에 정찰헬기 두대가 나타나서 남쪽으로 접근해왔다. 보병들이 헬기를 발견하고 즉각 적외선 유도식의 휴대형 대공미사일을 날렸으나 배기상향편향장치(엔진배기구가 위를 향해 배기열이  로터의 바람에 의해 분산되는 구조)때문인지, 아니면 상부에 장착된 적외선 대항 비콘 때문인지, 어쨋든 미사일은 명중하지 않았다. 이 프랑스제 SA 342M 가젤 헬기들은 대공포를 피해 능선 뒤에서 마스트장착 조준장치만 내놓고 방어선 곳곳을 정찰한 후 돌아갔다.

  사단장이 허탈하게 헬기가 사라진 북쪽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측 대남리의 1539 고지를 맡은 3연대에서 급전이 왔다.

  "200여 대의 헤리콥타가 남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이쪽 방어선은 그들의 공습에 초토화되었습니다. 메뚜기떼처럼 시커멓게 몰려 다닙니다."

  "뭐야? 혹시 강습헬기는 봤나? 모조리 공격헬기는 아니디?"

  "잘… 경황이 없어서… 확인은 못했습니다."

  사단장 강 소장이 혀를 찼다. 아마 그 연대장은 겁에 질려 지휘소 안에 쳐박혀 있었으리라.사단장이 사주 대공경계를 명령하려고 부관을 부르는 순간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항공! 남쪽에서 헤리콥타가 시커멓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항공관측병의 외침을 듣지 않아도 지휘소 안이 대규모의 헬기 소리에 진동했다.  사단장이 밖으로 나가서 남쪽을 보니 멀리 해발 1720미터의 마대령을 넘어 수많은 헬기가 이곳 동백산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봐도 기종이 확인이 안되는 먼 거리였으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온 산이 헬기 소리에 진동했다.  갑자기 또다른 대공경보가 울렸다. 고사포대대장이 지휘소 밖으로 뛰쳐나와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흥남 상공의 조기경보기로부터 연락입니다! F-5 유형의 대규모 전투기 편대가 저공침투로 접근중이랍니다."

  "대공배치 변경, 미사일은 북쪽, 대공포는 남쪽으로!"

  "알겠습니다."

  대대장이 연락을 위해 지휘소로 뛰어들어간 순간  방어선 상공에 F-5기들이 떼지어 날아올랐다.이미 정찰헬기로부터 연락받았는지 대공포좌와 대공미사일 진지를 정확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량 소형의 전투기라지만 그래도 폭격이었다. 능선이 화염에 휩싸였고,  동시에 지상에서 미사일이 꼬리를 물고 발사되었다.

  이들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 노획한 전투기 중 일부였다. 대만공군,이제는 없어진 중화민국의 조종사들은 한달간의 사상교육을 받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다. 조종사들은 어떻게든 전과를 올리기 위해 발악했다. 이것이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대공미사일과 대공포의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전투기들이 방어선을 유린했다.

  동쪽 하늘에서 또다른 F-5 전투기 편대가 나타났다. 사단장이 레이더병의 보고를 받고 새파랗게 질렸지만 이들은 동백산을 지키는 인민군을 돕기 위해 강릉비행장으로부터 출격한 한국공군이었다.같은 기종인 F-5이기 때문인지 한국공군은 근접전을 회피했다. 거리 20km에서 한국군의 F-5에서 미사일이 계속 발사되었다.

  F-5기 성능개량사업에 의해 항법장비와 레이더장비가 대폭 개량된 한국공군의  F-5E는 동체 하부의 파일런에서 스패로우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지상공격을 위한 출격을 하느라 자위용 사이드와인더밖에 없는 중국의 F-5는 2만피트의 고공에서 공격해오는 한국공군에 당할 수 밖에 없었다.강력한 APQ-159 레이더가 F-5에게 그동안 없었던 룩다운 능력을 주었고 M/L-STD-1553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통합된 사격조준장치가 미사일의 명중율을 높였다.  게다가 이들은 조기경보기의 유도까지 받을 수 있어 유리했다. 또 한 대의 F-5가 지상으로 추락하여 폭발했다.

  지상지원 공격기들의 상공을 엄호하던 중국군의 또다른 F-5기 편대가 한국공군을 노리고 날아왔으나, 미사일을 모두 발사한 한국공군은 미련없이 남쪽으로 도망갔다. 공군본부에서는 전투기의 손실이 점점 커지자 꼭 필요한 상황 외에는 근접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통일 한국 전투기의 숫자는 점점 줄고 있었다.공중전이 꼭 필요한 상황이 너무 잦은 것이다. 한국 공군기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중국군의 헬기들이 공중폭격으로 엉망이 된 방어선 상공에 도달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개발한 유로콥터 타이거의  호위 및 화력지원용 기종인 HAP 헬기들이 먼저 기수에 장착된 Giat 30mm 기관포로 참호선을 쓸었다.  곧이어 나타난 대전차형인 독일제 PAH-2들이 HOT 미사일로 방어선 곳곳에 배치된 전차와 중화기진지를 공격했다. 60여기의 공격헬기는 소리만으로도 위력적이어서 인민군들은 감히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민군들은 조만간 헬기들이 공격을 마치고 돌아가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뒤이어 따라온, 60년대에 중국에서 생산된 구식 선풍 25호와 Mi-4 헬기들이 방어선 곳곳에 착륙하더니 헬기에서 중국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참호에서 떨고있는 인민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손을 들고 나오는 인민군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사단장인 강 소장도 중국군 헬기강습병에 의해  지휘소 밖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중국 헬기에서 중국군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능선 남쪽으로 도망간 인민군들은 더 운이 없는 편이었다.타이거 공격헬기들은 도망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단풍이 지고 난 동백산 남쪽의 급경사 계곡은 다시 한번 화염과 인민군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낙엽이 져도 숲이 비교적 울창해서 하늘의 사냥꾼을 피할 수 있었던 동백산 동쪽, 북골령으로 도주한 소수의 인민군들만이 함흥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퇴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전투도 하지 않고 도로를 따라 남진해 온 중국군 제 39집단군은 전차부대를 선두로 동백산을 넘어 함흥쪽으로 진출했다.  이들의 머리 위에는 급유와 무기장착을 마친 공격헬기들이 상공을 엄호했다.이들의 앞길에는 어떠한 방해물도 없었다. 전차와 헬기, 그리고 자동차화 보병으로 구성된 기동력있는 이 부대는 저녁무렵 함흥평야의 젖줄인 성천강을 볼 수 있었다.

  한중 양국이 안주 남쪽에 전투기와 전력을 집중배치하는 동안 동해안쪽은 상대적으로 이렇다할 큰 전투가 없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후퇴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중국군은 상대적으로 수월해 보이는 함경도쪽을 공격했다. 이제 함흥이 중국군에게 점령될 경우, 함경남도에 대부분 몰려있는 인민군 2개 군단은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1999. 11. 19  16:45 평안남도 순천

  "패들락! 패들락!"

  김 종구 중위는 계속 패들락을 외치고 있었다. 그의 애기(愛機) 선영이는 지금 중국 공군 J-5 공격기의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 낙후한 공격기는 의외로 끈질기게 김 중위의 기관포 사격을 잘 피했다. 암람과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은 모두 써버린지 오래고, 지금은 기관포밖에 없었다. 그것도 1초분만이 남아있었다.

  "상태 양호. 걱정 말고 빨리 해치우기나 하라고."

  윙맨을 맡아 김 중위의 전투기를 뒤에서 엄호하고 있는 곽 대위가 재촉했다.  그러나 김 중위로서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이 5분간의 짧은 공중전에서 지금까지 모두 6기의 전투기를 잃어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은 미그-21의 중국산인 섬(殲)-7 전투기 50여기와, 미그-19의 중국산 파생형인 J-5 공격기 30여기였다. 저공비행으로 전장에 도착한 F-16 편대가 순천의 인민군을 공습중이던 J-5를 노리자, 상공에서 이들을 엄호하던 섬-7 전투기들이 덮쳐서 지금은 근접전 양상이 되었다.  성능은 F-16이 훨씬 앞섰지만 숫자에서 압도하는 중국의 고물 전투기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방금 격추된 이 소령만 해도 전년도의 최우수 전투기 조종사인 탑건이었다. 중국군 조종사들의 실전감각이 성능의 차이를 좁혔다.

  마침내 김 중위의 기관포가 J-5를 잡고 우측으로 급선회했다.  J-5가 공중에서 멋지게 폭발했다.  김 중위가 한숨을 쉬려는데 갑자기 눈앞에 섬-7 전투기가 기관포를 쏘며 뒤로 스쳐갔다. 김 중위가 급히 공중제비를 하여 그 전투기의 꼬리를 잡았다. 즉시 200미터 바로 뒤에서 기관포를 퍼부었다. 미그는 엔진에 몇 발을 맞고 불을 뿜었다. 조종사가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서야 윙맨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자신도 목표를 공격할 때 패들락을 외치지 못했다. 패들락은 "I’m Padlocked", 즉, 선도기에 의한 목표발견의 신호였고, 동시에 선도기가 적기를 공격하는 동안 자신의 엄호를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김 중위가 뒤를 돌아봤다.  곽 대위의 전투기가 보이지 않았다. 무선으로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김 중위는 즉시 전장 상공을 이탈해 남쪽으로 비행했다. 곽 대위는 김 중위의 후미를 엄호하다가 중국군 전투기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한 PL-9 적외선 미사일에 당한 것이다.남은 아군 전투기는 얼마 없었다.

  고도를 올리자 F-5 편대가 북쪽으로 급히 비행하는 모습이 보였다.한국공군의 지휘부는 너무 적은 수의 F-16을 보낸 것을 후회하여 급히 30여대의 F-5를 증파했는데, 그 사이에 아까운 F-16만 당한 것이다. 연료계를 보니 이미 빙고상태가 지나 수원비행장으로 귀환할 수 없었다. 가까운 평양 북쪽 순안비행장을 무선으로 불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 비행장은 순항미사일의 공격을 받았는지 사방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미그-23 전투기들이 이륙했다. 하나 남은 활주로에서 미그기들이 출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김 중위는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는 전투기인 선영이의 콘솔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어쨋든 오늘도 그는 살아남은 것이다!

  급유를 마치고 수원비행장으로 돌아오자 자신이  한국공군 통틀어 세 번째의 에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편대기 12대 중에서 살아남은 조종사는 김 중위를 빼고 4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2명은 격추되어 낙하산으로 비상탈출했는데,  전장 한복판에 떨어져 아직 구조를 못하고 있었다. 수원에 돌아온 F-16은 떠날 때의 16대에서 2대로 줄어있었다. 인민군에게 구조된 편대장 최 소령은 헬기로 귀환중이었다.

  조종사 휴게실에 들어와 푹신한 의자에 앉은 그는  오늘도 잠을 못이룰 것같았다.  전쟁 개시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동료들이 죽어갔다.  자신의 차례는 언제 올까 두려웠다.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으니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빨간색 페라리가 생각났다. 여자친구들도…

  1999. 11. 19  21:00  필리핀 상공

  대한항공 소속의 여객기 KAL 638기가 필리핀 루손섬의 동쪽 200km 해상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는 호주 시드니에서 이륙했는데 기내에는 승객이 한명도 없었다.  승객 의자가 모두 치워진 이 여객기는 대만과 남사군도가 중국에 점령된 후 붕괴된 싱가포르 무기시장을 대신해 시드니에서 열린 무기시장에서, 각종 미사일을 구입하여 한국을 향하고 있었다.

  기존의 호주-한국 노선은 크게 동쪽으로 옮겨졌다.  어제는 한국에서 호주로 향하던 여객기가  중국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승객 전원이 몰살당했다. 국제항공기구(ICAO)가 중국의 범죄행위를 규탄했지만 중국정부는 이 행위는 국가안보를 위한 정당한 활동이라고 반박했다.

  KAL 638은 항공등도 키지 않은 채  여객기로서는 엄청나게 낮은 고도인 고도 1000피트로 북쪽을 향해 비행했다. 비행기 아래쪽 해상에는 흰 항적을 끌고 있는 선단이 보였는데 그 선단도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참치냉동선 동원 139호

  장 봉수 선장의 동원 139호는 최고 속도로 북쪽을 향했다.  서사모아에 기항중이던 그의 배는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즉시 냉동창고를 모두 비우고 필리핀 루손섬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공산반군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소총과 수류탄 등 소화기를  가내생산하고 있는 집들을 돌며 이들 무기를 값을 가리지 않고 매입했다. 그의 사정을 들은 무기중개인이 국제무기상인 호세를 소개해주어 그로부터 대량의 지대공 및 함대함 미사일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 선장은 돈이 부족했다. 선단의 비상시를 대비해 회사에서 입금해준 그의 아메리카 뱅크 계좌의 예금잔액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본사의 회장을 설득하여 대금을 송금시키고 이를 호세에게 주었다.그가 루손섬을 떠날 때 호세는 신의의 상징으로 자기가 소지하고 있던 콜트 38구경 권총을 장 선장에게 주었다.  무기에 이상이 있으면 다시 돌아와 그 권총으로 자신을 쏘라는 의미였다.

  장 선장이 한국으로 향하는 중에 중국 잠수함에 의해 두 척의 어선을 잃었다.  중국 잠수함들은 한국 상선들이 기존 항로를 크게 우회한다는 사실을 알고 필리핀 근해까지 침범하여  한국 국적의 배를 공격하는 것이다. 장 선장은 배를 잃고 나서야 선미에 일본의 국기를 게양했다.

  1999. 11. 19

  일본 정부는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하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가장 먼저 내각이 한 일은 일반산업의 방위산업체로의 전환이었다. 자동차를 만들던 공장라인은 장갑차 등의 군용차를 생산했고 조선소의 도크는 모두 함정 건조에 사용되었다.  미쯔비시 중공업 공장에 있는 전투기 생산라인의 수가 매일 두배씩 늘어났다. 군사전문가들도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로 일본은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예비역 자위관들이 소집되었으나 아직 징병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 징병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반도에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일본 수상의 제의를 한국의 홍 대통령이 거절했다.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는 한국민의 감정상 너무 꺼림칙했던 것이다.그리고 일본의 야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일본의 88함대는 대마도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해군의 남해함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개의 구축함대를 부산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정부가 일본에 한국으로의 무기 수출을 요구하자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다만, 계속해서 일본 자위대의 파견을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작전권은 일본이 가지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한국과 일본의 협상은 계속되었으나 지지부진했다.

  1999. 11. 19  23:30  평안남도 안주 동남방 8km, 매암산 기슭

  중국군은 안주를 점령하자 계속 남하해갔다. 안주에는 포병대와 수송부대 등의 지원부대와 2개 사단의 예비병력만 남게 되었다.제공권을 가진 중국군은 여유가 있었다.  한국군의 야간공습을 우려하여 이동은 주간으로 한정하고 밤에는 쉬었다. 1951년과는 반대의 양상이었다.

  매암산 아래의 분지에는 중국군 제 212사단이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주둔중이었다. 중국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아직까지는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어서 예비병력은 넘쳐나고 있었다. 병력보다는 물자의 소모가 예상외로 심했는데 이는 병력소모가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숙영지 주변에 철조망이나 지뢰 등의 매설도 없이 주둔하는 212사단은 지나친 자신감에서였는지 경계도 허술했지만  전시 야외주둔의 원칙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달이 기울자 숲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든 중국군 초병이 적외선 야시장치로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숲과 참호 앞의 개활지 모두 온도차가 거의 나지 않았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초병은 다시 총을 내리고 고개를 숙여 담배를 피워 물었다.한달째 계속된 야외훈련과 잦은 부대이동,  가족에의 편지 금지 등 모든 것이 이상했는데, 그 후에 부대가 압록강철교를 건너서야  중국이 한국을 침공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예비부대라 아직까지 전투가 없었지만 적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와서 만나본 적이라고는 얼이 빠져있는 피난민들과  초췌한 몰골의 부상당한 인민군 포로밖에 없었다.

  전쟁은 의외로 쉽게 끝나  한 달 안으로는 집에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시 전쟁이 터지니 군인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이 많아져서 좋았다. 한달 전에 받은, 화남 지방의 농촌에 사는 가족의 편지에는 홍수로 먹을게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몇 년 간 계속 홍수 아니면 가뭄이라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기근이 심했으며 굶주린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참호 안에서 담배를 깊이 빨고 얼굴을 참호 밖으로 냈다.적은 없겠지만 혹시나 야간당직군관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들키면 큰일이라 주위를 둘러 보았다.역시 아무도 없었다. 같은 근무조인 중사는 계속 곯아떨어져 있었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이제 교대 시간이 30분 남았으니 아직 자려면 멀었다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숨이 멈춰질 때 쾌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숨을 들이쉴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목이 뜨뜻한 것으로 메워졌다. 감각이 없다. 캄캄한 밤이 더욱 까매져서 아무것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어지러워서 그런가 생각했다. 무척 졸렸다.

  중국군 초병 두명을 해치운 검은 그림자들이 참호의 기관총을 반대쪽으로 설치했다. 50 미터 간격으로 하나씩 있는 참호마다 검은 그림자들이 기어들어갔다. 이들은 적외선 반사 흡수율이 수풀과 거의 같은 DBDU 위장복을 입어서 적외선 감시장치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다른 그림자들은 이미 중국군의 야전막사로 기어들기 시작했다. 초병들을 해치우고 불 켜진 막사를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이 켜진 막사의 수가 점점 줄었들었다.  마침내 부대 전체가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가장 먼저 212 사단의 이상을 발견한 것은 집단군 사령부의 통신병이었다. 정기적으로 통신을 유지해야 되는데 212사단 통신병의 보고가 끊어진 것이다. 이런 이상은 가끔 있기 때문에 넘어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전시상황이라 당직사령에게 보고를 했다.

  신안주시 남쪽의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 주둔 중인 214 사단의 전령이 투덜거리며 트럭을 타고 212사단의 주둔지로 가 보았다. 지도에 주둔지로 표시된 곳은 이상하게 캄캄했다.사단병력이 주둔하는 곳이라면 야간 등화관제를 실시하지 않을 경우 도시처럼 환해야되는데 불빛이 전혀 없었고 적막만이 감싸고 있었다.

  전령이 사단 주둔지가 바뀌었나  생각하여 무선으로 집단군 사령부에 보고했지만 당직사령의 호통만 들어야했다. 운전병이 막사가 있다고 알려와서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막사는 많은데 불빛이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둔지 입구의 바리케이드 근처에도 중국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낌새가 들어 무선으로 집단군 당직사령에게 계속 보고했다. 이 시간에도 일부 전선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고 점령지역에서도 패잔병 및  게릴라 소탕작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당직사령은 신경이 날카로와져 계속 호통을 쳤다. 왜 아무도 없냐고 질책했는데 전령 입장에서는 난감했다.

  "젠장, 아무도 없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전령이 무전기를 손으로 막고  투덜거렸다.  운전병은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군기빠진 당나라 군대라 하더라도  전시에 이런 경우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수많은 막사에 초병 하나 나와 있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집단군 당직사령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채근했다. 전령도 이상한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으나 명령이 명령인지라 무전기를 둘러매고  손전등을 소총에 맨 채 차에서 내렸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추고 있는 막사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무전병이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무전기에서는 어떻게 된거냐고 당직사령인 군관이 계속 호통을 쳤다.

  "막사… 안입니다. 이상하게… 병사들이… 자고 있습니다. 모두.. 흔들어 깨워보겠습니다. 이봐! 일어나!"

  1999. 11. 20  00:15  평남 개천, 중국군 16병단 25집단군 사령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군관이 참다 못해 소리질렀다.

  "도대체 어찌 된거야? 212 사단 전체가 나자빠져 자고 있단 말야? 초병도 안세우고?"

  "으…"

  군관은 잠시 침묵 후에 무전기에서 전령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들어야했다.

  "다, 다 죽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사들도, 총을 들고 문에 기대고 있는 병사도 다… 옆 막사에 가보겠습니다."

  집단군의 군수참모이며 오늘밤 야간사령인 추 대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사단 전체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다 죽었단 말인가?  옆 막사에도 시체만 있다는 전령의 비명에 가까운 보고를 받고 참을 수가 없었다. 즉시 214 사단에 비상을 걸어 212 사단 주둔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의 매복이 예상되니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곤히 자고 있던 집단군 사령도 깨워 보고했다. 212 사단 전체가 야습을 당해 전멸했으니 적 1개 사단 병력 정도가 후방에 남아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214 사단에 이어 집단군 사령(正職–사령관)이 집단군 직속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212사단의 주둔지인 매암산 아래쪽으로 출발했다. 먼저 도착한 214 사단장의 무선보고가 왔다.

  "212 사단은 없어졌습니다. 남은 건 1만여구의 시체와 철저히 부서져서 사용불가능한 장비 뿐입니다. 곳곳에 휴발유가 뿌려져있습니다.아마 불을 지르려다 황급히 도망친것같습니다."

  집단군 사령은 숨이 멈출 지경이었다.  한반도 침공작전 이래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건 처음이었다. 아니, 아시아 각국 침공작전을 펼친 이래 처음이었으며 더우기 한명 남기지 않고 몰살당한 것 또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적은 어떻게 그 많은 병사들을 죽였나?  총소리는 없었지 않은가."

  "예. 저도 방금 도착해서 몇 십 구 안봤지만  대부분 칼이나 송곳 종류, 또는 신경가스에 당했습니다. 일부 소음총에 의한 사망도 있지만.."

  갑자기 무선에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리며 사단장의 말이 끊겼다.정직은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212 사단에 이어 214 사단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이런 지경에 다음날로 예정된 집단군 전체의 이동은 의미가 없었다.  집단군 휘하 5개의 사단 중에서 벌써 2개를 잃었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적지의 점령도 의미가 없었다.공격하고 점령해봐야 이렇게 적이 자기 세상인듯 활개 치지 않는가. 사령이 멍청하게 무전기를 보고 있는데  무전기에서 다시 사단장의 무선 보고가 흘러나왔다.

  "당했습니다.  적은 단발적인 부비트랩을 쓰지 않고 212 사단 숙영지 전체에 대규모 지뢰원을 조성했습니다.지금 피해상황을 조사중입니다만 크게 당한 것같습니다. 한 방에 날아갔습니다.  남은 인원이 얼마 없습니다!"

  정직은 분노와 공포에 몸을 떨었다.적은 아군이 전멸한 212사단의 주둔지에 대규모 부대가 정찰하러 올 것을  미리 알고 지뢰밭을 만들어서 214 사단까지 날려버린 것이다. 서둘러 도착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자신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같이 몰려왔다.그러나 자신의 직분을 잊지는 않았다. 즉시 집단군 통신실을 무선으로 호출했다. 통신차에 있는 3개의 강력한 무선 안테나가 산지에서도 신안주시의 집단군 사령부에 무선 신호를 보냈다.

  "전 집단군에 비상을 걸어! 적은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하나 남김없이 사살하도록 전하라. 빨리 가!"

  집단군 사령은 직속 연대의 길을 재촉했다.저 멀리 212사단의 주둔지였던 곳이 불길에 쌓여있었다.저곳에는 자신의 또다른 부대인 214 사단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무한궤도를 갖춘 YW-531 H APC의 파생형인 85식 장갑 지휘차에서 머리를 내밀고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던 사령은 북쪽 262고지 쪽에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얼핏 느꼈다.순간적으로 위함을 느껴 지휘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갑자기 목에 큰 충격이 와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해치에 몸을 걸친 채 부대행렬 곳곳에 섬광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했다. 목에서 계속 뭔가가 흘러 나오는 느낌이 이어졌다.

  새벽에 심양에 본부를 둔 조선공격군 예하 16병단 사령부에 당중앙군 사위로부터 기다란 제목의 전문이 도착했다.

  < 금번 16병단 25집단군 예하 212 사단과 214 사단, 집단군 사령부 직속 자동차화연대의 참상에 관한 군사위 정보분석소위의 보고사항과 조선공격군에 대한 군사위의 명령 >

      이번 참상은 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소속의 특수부대인 저격여단 야간전대대의 소행으로 추정됨.절대 인민군이나 남조선군의 패잔병집단이 아님.야간전대대는 야간전 전문 전투부대로서의 특수훈련을 이수, 무기도 무음무기를 주로 사용하며 백병전에 능함.달빛이 전혀 없는 암흑상태의 야간에도 10미터 이상 떨어진 상대방의 명찰을 인식할 정도임. 참고로 저격여단은 전원이 각종 무기와 폭발물의 전문가들임. 적이 소수라고 무시하는 행동을 절대 하지 말것.  주간에 적 발견지 반경 40km 이내를 포위, 추적하여 섬멸할 것이며 이들과의 야간전은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회피할 것. 이상.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리루이환

  1999. 11. 20  05:00  평안남도 개천군

  비상이 걸린 중국군 제 16병단 사령부가  북경으로부터 온 전문을 받은 바로 그 시간에 인민군 야간전 대대의 병사들은 산길을 타고 동쪽으로 40여 킬로미터를 행군하여 안주로 향하는 25집단군과 엇갈려 개천군에 있는 용린사(龍麟寺) 남쪽 숲속에 도착, 나무 밑둥을 파고 들어가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자고 있었다.  새벽이란 이들에게는 암흑의 시작을 뜻했다. 너무 밝아 활동을 못하는 것이다.

  밤에만 활동하므로 자신들을 드랴큘라라고 자조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밤이 좋았다. 부득이한 이유로 낮에 전투를 수행해야할 경우에는 야간전투시 일반보병이 착용하는 야시경처럼 자신들은 광량조절필터가 달린 안경을 착용해 햇빛으로부터 자신들의 눈을 보호해야만 했다. 무덤 뒤쪽에서는 대대장이 중대장들을 모아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기러니끼, 우린 여기 집단군 사령부를 공격하는기야. 집단군 사령이 아까 우리에게 뒈졌다는구만. 동무들 어제 뎡말 수고 많았어.여단장 동지와 통일참모본부에서 칭찬이 대단해."

  나이든 대대장이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부하 군관들을 격려했다.군관이라면 당연히 평양말인 문화어를 써야함에도 대대장은 말 배우는 것과 동시에 진급도 포기해 버렸다. 대대장이 부하 통솔 잘하고 전투지휘 잘하면 되지 꼭 애써가며 평양말을 배워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는 자신의 사투리를 고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대대장이 통일참모본부로부터 전송된 자료를 지도와 대조했다.

  "이 지점이구만. 보급상태는 어때?"

  적진 한복판에서의 보급문제는 심각했다. 어제밤 큰 전투를 치르면서 자체보유한 탄약과 폭발물을 다 써버렸는데 다행히 전투보급 체계가 같은 중국군으로부터 많은 무기를 노획할 수 있었다. 212사단의 주둔지에 매설한 지뢰도 212사단의 무기고에서 노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간전대대 고유의 보급품은 조달할 수 없었다.

  1999. 11. 20  05:00  서해상, 북위 37도, 동경 125도

  서해의 짙은 새벽 안개를 해치며  대규모의 선단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회색으로 선체를 칠한 배들은 꿈결처럼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고 있었는데 선두의 배 마스트에는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오성홍기!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함대가 서해 바다를 새까맣게 메우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항공모함 2척, 미사일 순양함 5척, 미사일 구축함 8척, 프리깃함 12척 등 배수량이 큰 대형함만 27척에 각종 미사일고속정과 어뢰정, 소해정 등 중국 해군의  최신예함들로 함대를 구성하여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수많은 수송함과 전차양륙함이 따랐다. 또한 바다 속에는 중국 해군의 수 십 척의 잠수함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11. 20  05:30  개성, 통일참모본부

  "대규모 함대입니다.  서해상에 수십척의 중국 함선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륙전이 아닌가합니다."

  고단한 새벽잠을 깬 참모들이 투덜대며 자리에 대충 앉자, 양 중장이 청천벽력 같은 말로 서두를 꺼냈다. 그의 다소 당황한듯한 설명을 듣고 모두들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겨우 병력을 동원하여 막강한 중국 지상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판에,  또다른 상륙전이라면 가용자원이 딸리는 통일 한국군으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을것같았다.

  "적 함대는 어떻소?  규모는?"

  이 차수가 묻자 양 중장이 이제야 생각난듯 화면을 켰다.

  "적 함대의 현재 위치는 덕적군도 남서방 100 km 정도입니다. 해주만 상공에 떠 있는 조기경보기의 보고로는 대형함이 30여척이라고 보고 하고 있습니다.  함종은 아직 안밝혀졌지만 아군 정찰기가 다수 떴으므로 곧 밝혀질 것으로 보입니다. 위치로 보나 규모로 보나 상륙부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덕적군도라면 인천 서쪽 아니오? 그럼 혹시 인천쪽으로 상륙하는 걸까?"

  이 차수가 매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들의 접근을 제지한다는 것은 현재 거의 파산상태에 있는 서해함대나 남북한 공군의 능력으로서는 무리였다.  상륙을 허용하고 지상에서 싸우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 보였다.

  "적 함대의 위치로 봐서는 인천은 아닐 것으로 봅니다.  현재 아군은 서울에서 평양 사이의 지대에 대부분이 몰려있으므로 아마도 적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태안반도나 아산만 쪽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음… 평양보다는 서울이 더 위험하게 됐구만… 이거 원…"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혀를 찼다. 전에 묘향산과 청천강 방어선이 안주전투의 대참패로 뚫리고 평양이 위험해졌을 때 국군 참모들은 평양을 포기하고 멸악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자고 주장했었다. 중국 장갑집단군의 위력이 워낙 막강해서  평야지대에서는 방어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국군 참모들의 주장이었지만, 인민군 입장에서 수도인 평양을 내준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이야기였다.  대전차 대대와 남쪽 대학생들의 컴퓨터 실력 덕분에 평양 실함의 위기를 넘기자마자  이젠 서울이 위험해진 것이다.  인민군 장성 입장으로서는 남쪽이 북쪽을 도운 것처럼 이번엔 북쪽이 남쪽을 도울 수도 없었다. 어쨋든 아직 북쪽에선 중국군들과 전투중이며 회복하지 못한 지역이 더 많았기때문이다.

  "현재 충청남도의 병력은 어떻소?"

  한국 공군의 이 호석 중장이 물었다.  양 중장이 자료를 찾아 화면에 덧붙였다.

  "향토사단이 하나 있습니다.  주로 해안방어 임무라서 기갑이나 항공 전력은 없습니다. 예비사단 2개는 지금 편성이 끝났고… 이건 원래 동부전선에 투입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취소해야 되겠죠. 그리고 현재 지원가능한 공군 비행장은 대전밖에 없습니다.  다른 비행장의 전투비행단은 현재 정수 미달입니다. 현재 제 8전투비행단이 주로 평양상공의 요격임무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서부전선의 항공지원이 취약해지겠군요."

  "아무래도 중국군은 우리측 전선의 강화를 방지하기 위해 제 2전선을 구축하려는 것 같습니다.  여수에 상륙하려던 것처럼 우리측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반도의 협소한 지형상 중국군의 대규모 병력이 운신할 폭이 좁아  중국측으로서는 전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력의 우위를 십분 발휘하지 못하자 통일한국군의 전선강화를 막을 목적으로 서해안에 상륙전을 시도하여 북쪽 전선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하려는 것이 중국의 목적이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자 참모부 소속 중위가 받아  전화를 양 중장에게 넘겼다.  양 중장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루만 빨리 알았으면 이런 위기가 오지 않았지. 왜 이제야 말하나? 지금 서해안으로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단 말일세. 그래.. 응… 자네들도 빨리 와주게."

  참모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 양 중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 대학생들, 아니,  컴퓨터 전문가 소령들이 이제야 중국군의 상륙 계획을 알아냈다는군요. 하루만 빨리 알았어도 어떻게 막아 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방법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병력이 없잖소? 해군도 동원하기 힘들고…"

  "우리 서해함대는 다들 평안남도 서쪽 바다에 몰려 있습니다. 남해함대는 제주도에 대한 중국의 재공격을 막기 위해  제주도 서해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해함대는 함경도쪽의 후퇴작전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충청도 서해안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너무 허술했습니다."

  국군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중국의 군사력은 거의 무진장할 정도라며 모두들 걱정했다.

  "그러면 제주근해에 배치된 남해함대의 일부를 태안반도 근해로 이동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요?"

  양 중장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심 중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최고 순항속도로 이동한다고 해도 최소한 16 시간은 걸립니다. 남서해안의 항로가 원래…  그리고 남해함대에서 군함을 빼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 중국의 다른 함대와 대치중이라는 보고입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함대로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는 무리입니다.  다른 방법을 연구해야합니다. 물론 단 하나의 희망이 있긴하지만…"

  "단 하나의 희망이라뇨? 그게 뭡니까?"

  박 정석 상장이 묻자 심 중장이 대답했다.

  "그 해역에는 우리 209급 잠수함 2척이 있습니다.  이들의 활약을 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공군은 대함전 능력이 어느 정도 될까요?"

  심 중장이 겨우 2척의 잠수함으로 어찌 해보겠다는 자신의 의견이 쑥스러운듯 말미를 돌렸다. 이 호석 중장이 공군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현재 남북의 공군력은 전쟁 전의 절반 수준입니다. 격추 및 파손,또는 정비 중이라서 실제 가용 전력은 전쟁 전의 전투기와 공격기 합계 1천 5백대에서 현재 800대 정도입니다. 특히 F-16의 손실이 큽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신예전투기들을 상대로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성능이 떨어지는 F-4나  F-5를 투입하기도 무리입니다. 미그-23은 더욱 힘들고요."

  "음……"

  참모들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일단 전북의 32사단을 충청도 해안으로 돌리고,  북쪽으로 이동중인 전남의 예비 61사단을 긴급배치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해군이나 공군의 지원은 힘들것으로 보이는데…"

  양 중장이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지만 이는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육군의 막대한 피해를 각오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을 참모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역상륙은 어떨까요?  일단 상륙을 허용하고 적의 상륙지점에 우리가 역상륙하면…"

  심 중장이 안을 내놓았으나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일단 해군력이 강하지 못한 통일한국군으로서는 역상륙할 자원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역상륙은 상륙병력 전원의 전멸을 각오해야할 정도로 위험한 작전이다. 세계전사상 역상륙이 시도된 적은 많았지만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물론 적의 군수물자에 대한 타격을 목적으로 한다면 별개의 문제였지만, 상륙하는 측에서도 항상 역상륙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상륙전의 일반교리였다.

  "일단 소규모 부대로 역상륙은 시도합시다.그래야 상당수 상륙병력을 해안에 묶어둘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죠."

  참모들이 한국해군 UDT의 역상륙에 대한 안을 통과시킬 때 대학생 해커들, 이제 육군 소령이 된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일단 컴퓨터와 회의실 중앙의 대형 모니터를 연결시킨 후, 구 성회 소령이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인민해방군 해군의 경우 디렉토리가 달라서 찾는데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현재 상륙부대의 위치와 규모입니다. 보시죠."

  구 소령이 화면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장치를 가동시키자 화면에 중국군 상륙부대의 위치가 나타났다.  곧이어 다시 상륙부대의 규모와 소속 함정들의 제원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해신 시리즈 전투항모 한 척과 미국의 니미츠급 대형항모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상전투함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동해함대의 전력 거의 전부입니다."

  심 중장이 놀라 외쳤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중국 해군에 수입되어 시험 운항을 마치고 처음으로 작전에 참가했는데,  놀랍게도 수심이 낮은 서해로 온 것이다.

  "중국의 공격형 잠수함이 모두 동원된 듯합니다. 원잠인 한급 외에도 킬로급과 로미오급 등의 재래식이 60척이나 되는군요."

  박 상장도 놀라며 말했다.  참모들의 벌린 입들이 다물어지지 못하고 있을 때 심 중장이 조용히 말했다.

  "흘수가 깊은 항모들은 해안 30km까지 밖에 접근을 못합니다. 상륙부대의 약점을 찾을 수도 있겠는데요.  항모부대와 상륙부대는 분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해역에 섬들이 많으니 공군기를 적절히 이용하여 상륙부대에 공대함 미사일을 날리면…"

  "그럽시다.  일단 지상군이 해안에 배치될 때까지 공군이 막는데까지는 막아봐야죠."

  이 호석 중장이 동의를 표하자 참모들이 모두 찬성하고  곧 통일참모본부의 명의로 공군에 명령을 내렸다.

  "당 군사위의 명령서에 따르면 상륙지점은 아산만입니다만,주요 공격 목표는 서울로 되어있습니다.상륙병력은 1차로 6개 사단이며 추가로 12개 사단이 지원될 예정이랍니다. 선발 6개 사단 중 1개 사단은 해병 기갑사단입니다."

  구 소령이 말하자 참모들이 시름에 잠겼다. 중국군은 제 2 전선의 구축을 염두에 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라는 위기감이 참모들 사이에 번졌다.

  "차라리 남포쪽으로 올 것이지…"

  박 상장이 한탄하자 국군 장성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다음에 말씀 드리리다. 우리 인민군은 해군이 약해보였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것이오. 다음에 말씀 드리리다."

  국군 장성들은 박 상장이 무슨 큰소리를 치나 했지만 이 차수는 빙긋 웃었다.

  "일단 1차 상륙병력을 철저히 때려부셔야 적의 2차 상륙 기도가 좌절될 것이오. 이 6개 사단을 막을 방도를 세웁시다. 가용병력은 어떻소?"

  이 차수가 얼른 말을 돌려 묻자 양 중장이 다시 설명했다.

  "충남 33사단, 충북 35사단, 전북 32사단,전남 31사단 등 향토사단이 있고, 편성과 이동중인 전남의 61,62 예비사단, 전북 63,64 예비사단과 충남북의 65,66,67 예비사단 까지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비사단이라 장비가 형편없습니다. 잘못하면 대량살육 당하고 적의 서울 진입을 허용할 수도… 국군 수방사 예하 기갑사단 하나를 동원해야 합니다."

  "안되오.수방사 예하 병력은 지금 대부분 최전선에 있고 수도 인근에 배치된 부대는 제 1기갑사단 하나밖에 없소. 창설과 교육중인 기갑사단 2개를 빼면 최후의 예비부대란 말이오.  이 부대까지 소모해 버리면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해나가라는 말이오?"

  정 지수 대장이 계속 듣고만 있다가  마지막 보루인 제 1 기갑사단의 출동에는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이 시간에도 중국 해군의 상륙부대는 점점 아산만에 접근하고 있었다.

  11. 20  06:10  백아도 남서쪽 10km 해역, 한국해군 잠수함 장보고함

  "소나에서 발령소로! 몰려옵니다. 2-5-5, 거리 30에서 45km, 대형 수상함 다수!"

  일반적으로 수심이 얕은 해역에서는 패시브 소나의 유효거리가 길다. 그러나 긴만큼 정확한 거리의 측정이 어려워진다. 대양상에서의 패시브 소나의 최대 유효탐지 거리는 약 80해리이며, 구형 하푼(HARPOON)의 사정거리도 이와 동일하다. 지금 장보고함에서는 소나 유효탐지 거리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측정하고 있지만, 수심이 얕은 해역에서는 거리 측정의 부정확성 때문에 함장이 발사를 망설이고 있었다.

  "미속 전진, 3-0-0, 삼각측정을 한다. 적 잠수함의 활동도 잡히나?"

  함장 서 승원 소령이 잠망경을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해군 사령부를 경유한 통일참모본부의 명령으로는 적 상륙부대 중에서도 항공모함이나 미사일 순양함 등의 대형 함정보다는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함을 노리라는 명령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차양륙함이라면 최고의 목표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함장으로서는 적 잠수함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되었다.

  "인근 해역에 잠수함의 활동은 없습니다."

  소나실로부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전진 미속, 3-0-0"

  부함장인 김 철진 대위가 복창하자 잠수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 해군 잠수함부대로는 최초의 전투작전 투입이었고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승무원들이 모두 바짝 긴장을 하고 각종 계기를 주시했다.

  "항공기의 레이더 전파를 잡았습니다. 초계기의 해상수색 레이더입니다. 3-1-4에 거리 12km, 아! 또 있습니다.  2-0-9, 거리 15km! IL-28의 대잠공격형입니다."

  전파분석반에서 초계기의 존재를 알려왔다.중국의 해상초계기가 이렇듯 한반도에 접근한 것은 전쟁 발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국은 IL-28 경폭격기를 대잠용으로 개발한 바 있다.그 정도의 거리라면 초계기의 레이더에 잠수함의 잠망경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며 안심하던 함장이 잠망경을 보더니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2-3-5에 적 항공기 다수! 잠수한다. 다운트림 최대!"

  함장이 잠망경을 내리고 뛰어내려왔다.  함내에 비상이 걸리고 적 비행기의 육안수색으로부터 피하고자 최고의 속도로 잠수를 시작했다.

  "적 항공기를 식별해 봐. 기종은?"

  "섬-15형 함재전투기입니다. 총 4기. 거리가 멀어 탑재무기의 실루엣이 불명확하지만 해상초계라기보다는 백아도 폭격이 목적이 아닐까요?"

  전자전 사관이 비디오를 되돌리며 함장에게 보고했다. 덕적군도의 한 섬인 백아도에는 해군 레이다 기지가 있으니 중국군의 목표가 될만했다.

  "좋아, 적 함대의 해석치는 나왔나?"

  아군이 공격받건말건 일단 잠수함이 공격목표가 아닌 것이 서 소령으로서는 다행스러웠다. 어쨋든 임무는 하고 볼 일이었다.

  "선두의 미사일 구축함과 소해정들의 데이터는 나왔습니다만, 항모와 수송함들은 뒤쪽에 있어서 신호들이 뒤섞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좀 더 전진을 해서 알아보는게 낫겠습니다."

  발사관제관이 보고하자 함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전진을 명했다. 잠수함이 수중 15노트의 속도로 천천히 적 함대를 향해 나아갔다.

  11. 20  06:20  대전 제 8 전투비행단

  브리핑실에 가득 모인 전투기 조종사들이 한국 공군 최초의 대함공격을 준비하면서 바짝 긴장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전투기와 공격기의 구분이 거의 없는 한국공군으로서는 특히 대함 공격의 실적이 전무했다. 그래도 하픈이라도 있으니 기관포로 간첩선을 막던  옛날보다는 상황이 좋아진 편이었다. 모두가 최초의 대함미사일 공격을 앞두고 들뜬 채 단장의 설명을 들었다.

  "가장 위험한 것이 이 섬형 함재기들이다."

  단장이 화면에 러시아 수호이 27의 함재형 개량형인 수호이 27K의 중국형인 섬(殲)-15호 전투기를 비쳤다.

  "산뚱 반도로부터 출격하는 해군 공격기와 전투기들도 있지만 거리상 체공시간이 짧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항모에서 바로 출격하고,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이들의 추력대 중량비가 기존 수호이-27K와는 상대가 안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미국에서 엔진을 개량했다는 보고도 있다.  이것은 직접 이들과 교전한 조종사들로부터 얻은 정보이다."

  브리핑실에 신음 소리가 퍼져나갔다.  소문대로 과연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중국을 편든다는 말이 맞았다. 거대한 적인 중국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절대 밝지 못했다.

  "우리는 이 함재전투기를 상대하는게 아니라 적함을 공격하는 것이다. 모두 착각 말도록!"

  비행단장인 진 권휘 준장이 비행복을 입은 채 적 함대의 진형을 설명하며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적 함대 진형은 포클랜드 전쟁 당시, 산 카를로스 상륙작전 때의 영국함대의 방공진형과 같다. 제 1진은 전투기의 CAP(전투공중초계), 2진은 미사일구축함의 광역대공미사일망, 3진은 프리깃함들에 의한 단거리 SAM과 근접화기이다. 가장 후미에 적 항모와 양륙함 등의 대형함정들이 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양륙함과 수송함이 된다.제군들이 적 항모를 공격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적 상륙 저지이다. 이번 우리의 작전은…"

  진 준장의 작전 브리핑에 조종사들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더니 금방 정색을 하고 주목했다. 어쨋든 목숨을 건 작전이었다.

  "1대대는 적기의 유인과 요격을 맡는다. 2대대는 역시 대함공격이다. 2대대는 내가 직접 지휘한다. 자, 가자!"

  전투조종사들이 브리핑실을 뛰쳐나가 각자의 전투기에 올랐다. 몇 번의 공중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며칠전의 자신들이 아니었다.가끔 조종사들이 전투중 손을 보기도 하는데 인간을 죽인 것은 자신의 손이 아니었으며, 역시 그들의 손은 피묻은 더러운 손도 아니었다.

  이미 무장을 끝낸 F-16 전투기들이 한대씩 날아오르기 시작했다.아침 햇살이 눈부신 하늘을 천천히 날아오르는 전투기들은  이동하는 철새처럼 평화로와 보였다.

  11. 20  06:30  백아도 남서쪽 20km 해역, 한국해군 잠수함 장보고함

  "소나에서 발령소로! 2-0-9, 거리 15마일에 대형함정군.  1-8-5의 선두 집단과는 배수량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잠수함들은 전방에 배치. 대형함정 음문해독 중… 2-0-2에 루다급 구축함 키닝, 2-0-8… 이건!"

  "무슨 일이야?"

  소나원이 비명을 지르자 함장이 소나실로 뛰어갔다. 소나원이 가리키고 있는 음문 그래프는 함장은 본 적도 없는 초대형 수상함이었다.  서 소령이 마른 침을 삼켰다.

  "혹시 이건 9만톤급 원자력항모?"

  함장이 소나원의 표정을 살폈다.  제발 자신의 판단이 틀리길 바라면서 그를 봤지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중국에 없는 줄로 알았던 9만톤급 항모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곧 출동할 한국 공군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상부에 보고할 것도 없이 이 핵항모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했다.

  "퇴역했던 니미츠입니다. 96년 림팩(RIMPAC) 훈련 때 봤습니다. 아니, 모의전투를 치뤘습니다."

  서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자신은 구축함의 대잠사관으로서 바로 이 장보고함을 쫓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함이 승리했고, 잠수함의 가상 미사일공격 결과 니미츠는 침몰로 판정되어  미국 해군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속도가 느린 통상형 잠수함에 의한 핵항모의 침몰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RIMPAC은 사실상 구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환태평양 군사훈련이었는데, 적 잠수함과 장거리 폭격기, 각종 수상함의 대함 미사일에 대한 방어를 하며 상륙부대를 목표해역까지 도달시키는 훈련이었다.  격년제로 실시되며 한국도 빠짐없이 참가했지만,통일이 되면서 북한의 주장에 따라 한국은 불참하게 되었다.

  "그 때 이 중령님은 3개의 허수아비를 발사했었지. 모두가 깜짝 놀랐어. 진짜를 다시 찾는데 5분이 걸렸고, 그 때는 이미 4기의 미사일공격을 받은 후였거든.  그리고 최종평가 때 이 방법에는 대책이 없다고 했지. 좋아, 우리도 이 방법을 쓰지."

  서 소령이 씩 웃으며 유선유도어뢰에 장보고함의 음문을 입력할 것을 지시했다. 발사관제관인 고 중위가 신중하게 음문 데이터를 입력시키는 사이 서 소령이 한마디 했다.

  "미국이 중국에 대량의 무기를 팔았다는데 설마 핵항모까지 팔아치울 줄을 몰랐어.아마 미국은 선전 때문에라도 통상형 잠수함에 가상격침된 기록이 있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을거야. 우린 똑같은 방법을 쓴다. 물론 이 수심에 온도층은 존재하지 않지만 방법이 있지. 1,2,3,4번관 어뢰장전! 5,6,7,8번관 하픈 장전!"

  고 중위가 데이터 입력을 보고하자 서 소령이 함내가 떠나갈 듯 외쳤다.

  "자, 돌격! 우리의 존재를 알린다. 수중항주 25 노트."

  서 소령은 부함장의 복창이나 어뢰와 미사일의 장전확인도 없이 바로 최고속도를 명했다. 갑자기 선체가 골재채취장의 덤프트럭 소리를 내더니 속도가 가해졌다. 209급 재래식 잠수함이 낼 수 있는 최고속도인 25노트로 5킬로미터쯤 항주하자 서 소령이 명령을 내렸다.

  "1번 어뢰, 목표 1번함, 어뢰의 초속(初速)은 25노트, 발사와 동시에 10도 좌현으로, 함을 20노트로 감속!"

  잠수함 승무원들이 갑작스런 명령의 홍수에 휩쓸렸다. 함장을 통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명령을 주고받기 바빴다.

  "1번 어뢰 발사 완료!"

  "감속 20노트, 심도 80!"

  "1번 발사관 어뢰 장전."

  명령과 복창이 혼선을 이룬 가운데 부함장이 확인에 바빴다. 한국 잠수함 승무원들에게 있어서 96년 림팩에서의 니미츠 격침은 당시 함장인 이 중령과 함께 신화로 남아 누구나 이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함장이 시계를 보더니 손을 천천히 치켜 올렸고, 이를 본 승무원들이 다음 행동을 준비했다.

  "3번 어뢰, 목표 2번함, 어뢰의 초속은 여전히 25노트,  발사와 동시에 10도 좌현, 함은 15노트로 감속!"

  다시 한번 함내에 일단의 혼란이 오고,  이내 다시 잠잠해 지더니 모두들 함장의 치켜든 손을 보았다.

  "4번 어뢰, 목표 3번함, 초속 25노트, 발사와 동시에 10노트로 감속, 우현 전타!"

  장보고함이 4번 어뢰를 발사하고 무음잠항에 들어가며 천천히 부상했다. 항해사관은 이해역을 손바닥 들여보듯 잘 알고 있었다. 좌전방 1km에 암초가 있고, 이것이 장보고함을 지켜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3발의 어뢰는 긴 와이어를 끌고 장보고함의 음향을 발하며 수중을 항주했다. 중국해군은 다가오는 잠수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즉각 프리게이트함과 대잠헬기들을 어뢰쪽으로 보냈다.

  "어뢰 수중항주중, 1번함까지 2300, 2번함 3100,3번함 2700! 적함 접근 중, 회피행동은 없습니다!"

  중국 프리깃함들은 발사된 어뢰들과  3개의 어뢰가 발사된 지점을 연결한 장보고함의 추정위치를 쫓고 있었으나, 장보고함은 이미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아직 속고 있군. 좋다. 잠망경 올려, 발사준비."

  함장이 명령하자 전기적 작동에 의해 잠망경과 함께 전파수신 안테나가 물 위로 올라갔다. 전자전 하사관이 주변해역의 레이더파를 잡은 후 소나와 레이더의 자료를 대조하여 적함과 항공기들의 위치를 수정 보고 했다. 함장이 잠망경으로 주변 항공기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동안 발사관제관이 목표 데이터를 최종 입력하고 발사준비를 마쳤다.  중국 함정들이 추적하던 물체가 잠수함이 아니라 어뢰라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회피행동에 들어가서 소나의 데이터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대신에 무선데이터를 참고로 데이터를 입력하여 목표에 대한  데이터는 더 정확해졌다. 발사절차에 따라 복창이 이어졌다.

  "5,6,7,8번관 연속 발사! 발사 즉시 재장전하여 동일 목표에 대해 발사! 어뢰는 최종속도로!"

  11. 20  06:35  같은 수역, 한국해군 이천함

  "소나에서 발령소로. 잠수함 접근 중! 방위 3-1-4, 거리 3800."

  소나원은 잠수함의 심도를 빼고 보고했다. 최고 수심이 1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이 해역에서 심도는 의미없는 숫자였다.

  "음… 대기."

  이천함은 해저에 함을 눕히고 한 시간째 꼼짝 않고 있었다.패시브 소나로 수면 위의 상황을 계속 살피고 있었는데, 중국 수상함정들의 수가 워낙 많아 공격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프리깃함이 연속적으로 탐신음을 발사하고 초계기들이 청음소나를 투하했다. 움직이면 바로 들켜서 공격도 못하고 당할 상황이라  이천함은 중국의 대규모 함대를 바로 머리 위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중국함대가 다 지나가자 속도가 느린 잠수함이 온 것이다. 함장은 잠수함을 공격할까, 아니면 기다렸다가 수상함정들을 공격할 기회를 노릴까 고민했다.

  "함형을 확인해봐."

  함장이 소나원에게 명령하자 소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잠수함의 소리와 중국 잠수함의 특징이 기록된 화일을 비교했다. 계속 소리와 음문 그래프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미오급입니다. 현재 거리 3200. 속도는 10노트입니다."

  함장은 중국의 로미오급 잠수함에 대해 생각했다.해군에서 발간한 대잠수함전용 기밀문서에는  중국의 로미오급(중국 해군의 제식명 033급) 잠수함은 대잠전 능력이 없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탑재병장은 단지 14기의 SEAT-60 패시브 호밍 어뢰 뿐이었는데 이 어뢰로는 잠수함을 공격할 수 없었다.  최고 속도는 수중 13노트, 장보고함과 같은 209급 잠수함인 이천함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속도였다.

  함장은 고민했다. 대형전투함정이 당연히 공격 우선순위가 높지만,적 잠수함을 내버려두기도 아쉬웠다. 게다가 이 잠수함은 이천함의 존재도 모르지 않는가.그리고 어차피 중국 함대는 이천함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더더욱 공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조금 전 중국함대가 머리 위로 지나갈 때 함장이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아 승무원들의 불만이 커졌다는 것이다.함장으로서는 승무원들에게 겁장이로 비쳐지기도 싫었다. 움직이기로 했다!

  "거리 1500이 되면 어뢰 2기 발사. 발사 후 즉시 3-0-2로 항진한다."

  좁은 잠수함이 갑자기 바빠졌다. 승무원들이 어뢰발사 준비와 이어서 있을 잠수함의 이동 준비에 바빴다.

  "발사!"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어뢰가 발사되었다.  좌우현에서 각각 한 발씩 발사된 어뢰는 35노트의 속도로 중국 잠수함을 향해 직진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되어 중국 잠수함은 피할 사이도 없었다.

  "가자, 항속 15노트."

  "명중!"

  함장의 항진 명령과 소나원의 보고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곧이어 어뢰에 명중된 중국 잠수함에서 나는 폭음이 이천함을 때렸다.이천함은 서서히 속도를 내어  침몰한 중국 잠수함 옆을 지나쳐 서쪽으로 항주했다. 커다란 폭발음이 얕은 서해바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수심이 워낙 얕아 해저로부터의 반향이 심했다. 이천함은 이 소음의 그늘에 숨어 중국 프리깃함과 초계기를 피했다.

  11. 19  06:35  서해상

  늦가을 서해의 차가운 바다 위로 물보라가 뿜어져 올라왔다.4발의 하푼미사일이 부스터에 의한 추진력을 받으며 상승하다가 곧 날개가 펴지며 수면비행에 돌입했다.  잠시 후 다시 4발의 미사일이 수면으로 나오고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다. 장보고함은 목표포착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바다 속으로 숨었다.

  수면 위 3 미터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하픈 미사일들은 같은 목표를 향하여 날아갔다.  중국 함대는 잠수함으로부터 미사일이 발사된 것을 확인하고 초계기와 대잠헬기들을 처음 미사일이 발사된 해역으로 급파하는 동시에 회피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사일들은 저고도로 날기 때문에 발사된 순간만 잡히고 지금은 레이더에 걸리지 않았다.

  11. 20  06:37  장보고함

  "2-3-5에 수중폭발음! 잠수함이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소나원이 보고하자 서 소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위치에는 장보고함의 자매함인 이천함이 숨어있는 것을 함장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중국 구축함이나 초계기의 공격을 이천함이 피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 소령의 해군 사관학교 동기인 이천함의 함장은 국산함의 성능이 더 좋다며 서 소령을 놀리곤  했었다.장보고함이 독일의 키일 조선소에서 건조됨에 반해 이천함은 옥포의 대우조선소에서 건조된 것이다.성능의 차이가 조선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천함의 함장은 항상 자신의 함이 더 좋다고 우기곤 했었다. 취역 연도가 1년의 차이가 나므로 그 사이에 건조기술이 더 발달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건조된 함들과는 성능 차이가 많이 나서  자매함으로 부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이천함의 함장을 못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 소령의 가슴이 아팠다.

  "어뢰는 어떻게 됐나?"

  함장 서 소령이 묻자 어뢰와 적함을 추적하던 소나병이 보고했다.

  "1번 목표 거리 400, 급속 접근 중! 목표1 디코이(decoy : 회피용 미끼) 발사. 어뢰 최종속도 진입! 시간상으로는 벌써 명중했을겁니다. 아! 명중!"

  수중에서의 음파의 속도는 공중에서보다 훨씬 빠르지만, 거리가 워낙 멀기 때문에 소나에 잡히는 거리와 실제의 거리는 차이가 있게 된다.이번에도 같은 경우이다. 장보고함의 소나에 목표접근으로 표시된 어뢰는 이미 최종속도인 35노트의 빠른 속도로 목표와 충돌했다.

  장보고함의 승무원들이 무음잠항중이라 소리는 못내지만 주먹을 쥐고 흔드는 등 몸짓으로 환호를 질렀다.  어뢰는 쟝후이급 프리깃함 깡딩에 명중했다. 260 kg의 탄두가 함의 강판을 뚫고 작렬했다.

  "2번함은 어뢰 회피, 어뢰가 다시 돌아서 접근합니다. 아! 명중!"

  다시 승무원들 사이에 무언의 환호가 오가는 사이, 서 소령은 미사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한국해군 잠수함 최초의 적함 공격과 성공,이것은 자신의 잠수함으로 이뤄졌지만, 하픈의 명중 여부가 더 궁금했다.하픈 미사일이 워낙 비싸 자신은 실제로 발사한 경험도 없었던 것이다.

  11. 20  06:40  서해상

  장보고함에서 발사한 하픈 미사일 8기는  마하 0.85의 아음속의 속도로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하픈 대함미사일은 비록 실전배치는 오래되었지만 아직 더 이상의 좋은 무기가 나오지 않아 당당히 현역을 지키고 있었다.

  하픈과 비교되는 엑조세 미사일은 명중율에서는 신뢰할만 했지만, 지연신관 조작법이 워낙 까다로와 포클랜드해전에서의 영국함 셰필드호의 경우처럼 탄두가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셰필드호는 미사일의 연료가 폭발하여 화재로 침몰하긴 했지만,동시에 이 미사일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그리고 엑조세와 달리 하픈만이 한국 잠수함에서 발사할 수 있었다.

  관성유도로 20여 킬로미터를 날아간 하픈 미사일들이 급상승했다. 목표를 찾기 위해 레이더를 발진시키며 돌입을 하는데, 이는 동시에 미사일 요격을 막기 위한 회피 기동이기도 해서 이를 격추시키기는  상당히 어렵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소속의 항공모함 해신 6호, 즉, 미국 해군 니미츠의 다른 이름인 이 대형 함정은 한국 공군기의 내습에 대비해 함재기들을 이륙시키고 있었다. 속도는 30노트 정도로 빨랐지만, 함재기 출격을 위해 직선 코스를 취하고 있어서 하픈 미사일의 컴퓨터에 입력된 데이터와 오차가 거의 없었다.근접방어화기인 CIWS가 이제야 미사일의 돌입을 발견하고 자동으로 사격을 개시했지만 급강하하는 미사일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미사일은 바로 돌진하여 거대한 항공모함의 흘수선을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그 바람에 이륙중이던 F/A-18 전폭기가 중심을 잃고 바다에 추락했고, 항공모함은 큰 화재에 휩싸이게 되었다. 연이어 다른 3발의 하픈이 날아왔는데 CIWS는 이미 기능이 마비되어 미사일을 막지 못했다.

  하픈이 계속 명중하며 폭발이 이어졌다.  거대한 항모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9만톤급의 거대한 항공모함이라도 탄두중량 500 파운드의 연속된 폭발력은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해역에 있던 프리깃함이 항모를 구하려고 달려왔지만 계속 날아온 4발의 다른 하픈이 해신 6호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거대한 이 항모는 함수로부터 바다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승무원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그들의 머리 위로 함재기와 탑재 헬기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11. 20  06:45  서해 상공

  "통참으로부터 연락이다. 적 항모중 1척은 니미츠급 핵항모다!  적의 함재기는 약 90대로 봐야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수호이-27K와 F/A-18로 밝혀졌다."

  진 준장이 무선으로 상황을 설명하자 무선을 통해 여기저기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적의 덩지가 너무 크고,예상한 적기의 수가 많아질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적기와 교전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대형 수상함정들이다. 작전은 속행한다."

  진 준장이 부하 파일럿들을 격려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어쩌면 계획 자체를 다시 수립해야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공격하기로 작정했다.

  "풍속 20, 풍향 3-2-5, 좋다. 1번 작전 개시!"

  전투기들이 일제히 공대함 하픈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발사를 마친 전투기들은 반전하여 대전 비행장쪽으로 돌아가면서  공중에 수많은 물체를 뿌렸다. 이 물체들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거대한 알루미늄 풍선이 되어 서풍을 타고 육지쪽으로 이동했다.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은 나머지 반의 전투기들은 다시 저공비행을 하여 서해상으로 돌아갔다.

  11. 20  06:47  장보고함

  "4번 어뢰는 빗나갔습니다.  아, 연속폭발음! 하픈 명중! 또 명중! 4번의 폭발음이 있었습니다. 다 맞았습니다!"

  소나병의 외침을 필두로 승무원들이 잠수함이 떠나갈듯  환성을 질렀다. 여기에는 과묵한 서 소령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는 의자 위로 뛰어 올라가 만세까지 불렀다. 스스로 무음잠항의 원칙을 깬 것이다.

  "목표, 침수음이 들립니다. 속도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미사일 발사 해역에 수중항주 중인 어뢰 다수!"

  소나병이 보고하자 서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국 항모는 최소한 항행불능이 되었을 것으고 보았다. 그리고 하픈을 발사한 후 즉시 잠수함의 위치를 옮긴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대잠헬기에서 발사한 어뢰는 5노트로 수중항주 중인 음파어뢰를 쫓고 있었다.서 소령으로서는 중국의 대잠헬기는 걱정할 것이 못되었다. 다만 MAD(자기 탐지장치)를 갖춘 초계기가 걱정이었지만, MAD의 탐지거리는 너무 짧았다.

  "샴페인이 없어서 아깝군.  이봐, 함내에 종이컵 커피라도 한잔씩 돌려, 그걸로라도 건배를 해야지."

  함장이 주방에 연락하자 주방장이  커피와 생수를 승무원들에게 따라 주었다. 모두들 진짜 술을 받듯이 좋아했다.

  "자, 우리의 승리를 기념하여 건배! 원샷!"

  서 소령이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단 숨에 마셨다.  술잔을 마신 것처럼 종이컵을 거꾸로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털었다. 승무원들이 배를 잡으며 웃고 자신들도 따라했다. 모두들 술이 아니라 승리에 취한 것이다.

  "자, 우리 몫은 넘게 했다.  하지만 아직 사냥감이 듬뿍 있으니 그냥 가기도 아깝다.  하픈은 없지만 어뢰가 많이 남았으니 다 쓰기로 한다. 적 함대 뒤로 돌아 돌아간다. 침로 2-5-1, 심도 200, 미속 전진."

  승무원들이 이성을 찾아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잠수함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 속도로는 적 함대를 따라가기도 힘들지만 저들도 무작정 한반도에 접근하지는 못할거야. 또 다른 기회가 있겠지."

  "소나에서 발령소로, 적 잠수함 발견, 2-1-4에 1척, 2-0-9에 한 척입니다. 거리 7000~9000 사이. 모두 원자력잠수함입니다."

  소나원의 말에 모두들 바짝 긴장했다. 원자력잠수함의 속력과 무장은 통상형잠수함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원자력잠수함은 핵무장 잠수함일 가능성도 있었다. 함대가 위험할 경우 중국군이 핵을 쓰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처리했으니 중국군이 핵을 쓸 리가 없어.  핵을 쓰려면 벌써 썼을테고… 상관없다. 미속전진!"

  서해의 특징은 리아스식 해안답게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해역에 섬과 암초가 많다는 것이다.바다가 얕기 때문에 잠수함의 패시브소나의 성능은 향상되지만 섬과 암초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이럴 경우 이 해역을 잘 알고 있는 쪽이 승리하기 마련이었다.

  11. 20  06:48  서해 상공

  제 8 전투비행단의  전투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중국 상륙함대에 접근했다. 고공에는 수많은 알루미늄 풍선들이 적의 레이다를 속여주기를 바라면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해주상공의 조기경보기 E-2C에서의 지령이 수신되었다. 파일럿들이 자신의 미사일의 목표를 신중히 수정하여 입력했다. 갑자기 조기경보기로부터 다른 연락이 왔다. 중국의 거대한 항공모함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어쨌거나 잘됐군. 어차피 항모는 목표도 아닌데…’

  김 준장이 갑자기 사라진 중국 항모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단지 목표 상공에 적의 함재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지금이다. 발사!"

  진 준장의 한마디에 F-16전투기들이 일제히 오토맷(Otomat)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오토맷은 엑조세와 거의 같은 크기의 미사일인데 발달형인 Mk-2의 경우 data-link  장치를 미사일에 탑재하여 중간 유도가 가능하게 된다. 모두 48기의 오토맷 Mk-2, 개발국인 이태리에서 테세오라고 부르는 이 대함 미사일들이  터보팬을 가동하여 중국함대에 접근하고 있었다.

  먼저 발사한 24기의 하픈은  중국군 상륙함대의 대공미사일망을 구성하는 구축함대를 피해 크게 남쪽으로 돌아 다시 북쪽으로 선회, 수송함과 양륙함들을 노리고 쇄도해 들어갔다.

  대형 핵항모 해신 6호가 격침되어 승무원 구조와 한국군 잠수함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 중국함대 남쪽 해상에 미사일들이 나타났다.  하픈은 수면 위를 스치듯 나는 sea-skimming 방식으로 목표에 접근하기 때문에 목표 3킬로미터 이상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공중전투초계에 임했던 전투기들은 알루미늄 풍선을 추격하고 있었고, 나머지 전투기들은 이미 해신 6호와 함께 가라앉았다.초계기들은 모두 미사일을 발사한 잠수함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한 상태여서,  남쪽에서 몰려 오는 하픈을 발견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이 날은 중국함대 최악의 날이었다. 먼저, 호주에서 구입한 퇴역항모 멜버른을 개조한 소형 재래식 추진 항공모함 해신 4호가 하픈의 세례를 받았다. 3천톤급의 전차양륙함과 수송부대를 실은 류칸급 및 샨급 대형 수송함들도 하픈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24발의 하픈 중 21발이 목표에 명중해 폭발했다. 해신 4호는 바로 침몰하지 않았으나 전차양륙함과 수송함들에게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6척의 전차양륙함과 11척의 수송함이 침몰하거나 대파됐다.

  대형항모인 해신 6호가 침몰하자 함대지휘권은  해신 4호로 옮겼으나 해신 4호마저 피습된 지금 지휘부는 완전 붕괴되었다.개별 함정들이 후퇴를 결심할 즈음에 오토맷 대함미사일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구축함을 향하는 듯했으나 미사일구축함들이 대공미사일을 발사하자 크게 남쪽으로 선회하여 요격미사일을 피하고,  앞서의 하픈과 같은 코스를 취하여 남아있는 양륙함과 수송함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토맷 미사일들이 해신 4호의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나머지 양륙함과 수송함도 남김없이 서해바다에 수장시켰다. 항모들을 호위하던 프리깃함들만이 덩그러니 이 해역에 떠있었다.  이제는 보호할 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해야했다.  전투기의 호위가 없는 프리깃함이 적의 영해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했다.갑자기 썰렁함을 느낀 구축함과 프리깃함들이 전속력을 내어 서쪽으로 항진했다.

  11. 20  06:55  장보고함

  "수상에 폭발음 다수! 아마도 공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침몰중인 함정 다수, 엔진 정지 중인 함정도 많습니다."

  소나원이 신중한 목소리로 함장에게 보고했다.  서 소령은 이 기회에 적 함대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당장 인근 해역에 있는 중국 잠수함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장보고함은 5노트의 속도로 서서히 서쪽으로 나아갔다. 원자력잠수함들은 장보고함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수상함정들의 재난을 구경하는지, 신경질적으로 부상과 잠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나에서 발령소로! 해상에서는 지금 카레이스 중입니다. 목표 잠수함들도 급속히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서 소령이 무슨 일인가 소나원에게 다가와서 수상항주를 지켜보았다. 수 십 개의 밝은 점들이 대잠경계 속도까지 무시한 채 서쪽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전투기가 없는 항모부대의 운명이란 뻔했다. 도망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서 소령이 이들을 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다시 목표들을 살펴보았다.

  "잠깐, 핵잠수함 한 척이 급속 접근중입니다.  1-7-5, 속력 30 노트, 거리 2700. 2-5-0 방향으로 이동중입니다.  이 속도라면 소나의 기능은 상실할텐데요."

  소나원이 설명하자 서 소령이 시큰둥해지며 말을 했다.

  "좋아, 통과시켜. 대신에 도망가는 엉덩이를 걷어 차주지. 어뢰는 준비됐지?"

  서 소령은 맹수와 사냥꾼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났다.사냥꾼이 도망가는 맷돼지를 향해 총을 쏘았으나, 맷돼지는 쓰러지지 않고 계속 도망갔다. 맷돼지가 총에 맞은 장소에 갔으나 핏자국이 없어서 동료 사냥꾼은 맷돼지가 총에 맞지 않았다며 포기했다.그러나 주인공 사냥꾼은 명중됐다고 생각하여 계속 추적해보니 맷돼지가 쓰러져있었다. 맷돼지는 항문에 총알을 맞아서 즉시 피를 흘리지 않고 도망갔으나, 총알이 관통하여 내장을 휘저은 것이다.

  그러나 맷돼지와 달리 잠수함에 있어서 추진부가 밀집한 뒤쪽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곳이다.  잠수함의 선체는 일반 수상함정보다 두껍고 이중선체가 최근 잠수함 건조의 일반적인 사상이다.  옆구리에 533밀리 어뢰를 맞고도 침몰하지 않는 경우는 충분히 예상되어 왔다. 그러나 뒷부분에 한 방 맞으면  아무리 강한 러시아제 타이푼급 잠수함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발사관 모두에 어뢰가 장전되어 있습니다. 발사관 주수 완료. 하픈은 이제 없잖습니까?"

  어뢰반에서 퉁명스럽게 보고하자 서 소령이 투덜거렸다. 깜박한 것이 아니라 확인해 본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부함장인 김 철진 대위가 조언을 했다.

  "저 잠수함을 공격한 후 수상함정들을 공격하시죠. 이번 기회에 최대한 적 함대에 피해를 주어야합니다."

  부함장은 이 기회에 적 함대를 괴멸시켜 구축함의 숫자를 줄여놓아야 다음 작전에서도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 척의 구축함에 쫓기는 것은 잠수함 승무원들로서는 악몽이었다.

  "거리 1500, 이 코스라면 우현 500미터를 통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소나원이 보고하자 잠수함의 정지를 명한  서 소령이 잠수함 공격 후 급속 부상할 것을 명령했다.  관제반원들은 중국 수상함대에 대한 공격에 대비해 각 목표함정들의 해석치를 내고 있었다.

  "거리 500! 계속 같은 코스입니다."

  "전방에 그대로 발사하면 됩니다. 확실합니다."

  소나원과 발사관제관의 보고에 따라 서 소령이 발사와 동시에 급속부상을 명했다.  잠수함이 어뢰 두 발을 발사한 후 급속히 물을 배출시키며 잠망경 심도로 부상했다.

  "잠수함 명중! 침몰중!"

  "목표 데이터 입력 중!"

  "E-2C에서 초장파 무선명령입니다. 적 함대의 데이타를 주겠답니다."

  소나원이 적 잠수함에의 명중을 보고하고  발사관제관이 데이타를 입력 중에 통신사관이 급전을 전했다.전자전기에서 목표 데이터를 제공해 준다면 잠수함으로서는 소나에 의한 부정확한 목표입력을 피할 수도 있고,  또한 레이더를 가동시킴으로써 적 초계기와 대잠헬기에 의한 발견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

  "좋아, 다운트림 최대, 통신 케이블 방출하라!  근데 하픈은 이제 없잖아?"

  깊은 수중에 있는 잠수함에는 원칙적으로 전파가 도달하지 않는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결과,  파장이 긴 전파(장파)는 얕은 해역에 있는 잠수함과의 연락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장파는 대량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없기 때문에 급한 경우에 잠수함을 해상으로 불러내는 역할만 했다.  잠수함에 전파를 발사하는 시설은 작년 전라남도 해남의 평야에 만들어졌다.  장보고함에서 수신용 케이블이 나와 수면 위로 올라갔다.

  "목표 데이터 받았습니다. 자동입력 완료!"

  "좋아, 발사!"

  함이 울리고 8개의 발사관 중  7개로부터 SUT Mod 2, 533밀리 유선유도 어뢰가 발사되었다.

  11. 20  07:00  한국 해군 잠수함 이천함

  "소나에서 발령소로! 현재 12척의 구축함과 프리깃함이 급속 서진 중입니다. 우리쪽으로 다가옵니다."

  소나원이 이제 제법 긴장이 풀린 듯 천천히 보고했다.이제 자신은 전투를 겪은 고참인 것이다. 로미오급 재래식 잠수함 2척을 격침시키는데 자신의 귀가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좋아, 근처에 적 잠수함이 없으니 이제 함대를 공격한다. 잠망경 심도로!"

  이천함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해상에 적 초계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파수신기가 달린 통신케이블을 방출했는데  의외로 한국군이 쓰는 주파수대의 전파가 잡혔다.

  "조기경보기로부터 적 군함들의 위치에 관한 데이터입니다!"

  통신원이 보고하자 함장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위험하게 해면으로 부상하여 레이더 전파를 발신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전 발사관 하픈 장전! 아니, 7,8번관은 남겨둬. 아직 중국 잠수함은 많을테니까."

  함장이 명령하자 어뢰원들이 하픈을 발사관에 장전하고 발사관제관은 목표 데이터를 입력했다. 발사 준비완료의 신호가 두 곳으로부터 왔다.

  "하픈 전기 발사!"

  약 1200톤의 이천함이 연속 진동했다.  잠수한 상태로 하픈 미사일을 연속 발사했다. 하픈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치솟다가 수면비행에 들어갔다. 함장은 적함의 전파방해를 우려하여 조기경보기에 의한 중간 유도를 하지 않고 하픈 자체의 관성유도와 최종유도인 레이더유도를 믿기로 했다. 이천함이 나머지 2발의 하픈을 더 발사하고 깊이 잠항을 시작했다.

  "명중! 명중! 또 명중!"

  소나원이 신이나서 떠들었다. 장보고함에 의한 해신 6호의 침몰과 한국공군기의 공습으로 나머지 항모인  해신 4호 및 수송함과 양륙함들이 모조리 침몰하자 중국 구축함들은 도망가기 바빴는데, 전혀 엉뚱하게도 전진하던 방향에서 하픈 미사일이 날아오자 중국의 수상함들은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소나원이 계속된 승전보를 전했다.

  그러나 이천함은 바다를 낮게 가로지르며  중국의 초계기가 날아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구식 IL-28 경폭격기를 중국이 대잠수함용으로 개발한 하얼빈 H-5  대잠전기가 이천함을 발견하고 어뢰를 투하했다.  어뢰 두 발이 승리에 들떠있는 이천함의 함미쪽으로 고속 접근했다.

  1999. 11. 20  06:30  평안북도 평원군 영유(永柔) 북동쪽 10km, 어파

  어파는 안주군에서 평원군으로 넘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안주평야의 너른 들이 묘향산맥의 자락에 의해 끝나고 다시 평원군의 드넓은 평야가 시작되는 곳이다. 경의선이 남쪽으로 평양을 향해 뻗어 있고 평양과 남포로 가는 도로가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새벽녘에 정찰 나갔던 대대 수색대로부터 적의 대규모 전차부대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왔다.  부대 진지로부터 북동쪽 9km, 전차부대의 통상 진격속도로 15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대대 지휘부가 정확한 위치를 지도에서 찾고 있을 때, 수색대는 적 헬기정찰부대와 교전 중이라는 짤막한 교신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영유로 가는 도로 주변의 구릉 지역에 위치한 대전차진지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대대장 배 윤성 중좌는 천천히 부근 지역을 망원경으로 둘러보았다. 새벽안개가 온 들녘에 자욱했을 뿐, 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적은 전자전부대가 있습니다. 전자전 부대가 우리측 전파를 잡아 수색대와 위장진지의 위치를 파악한 모양입니다.본 진지에서 직접 교신을 하지 않은게 다행입니다. 그러나 위장진지는 곧 불바다가 되겠죠."

  옆에 있던 작전참모가  곧 닥쳐올 전투가 두려운지 대대장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대대장이 불만스러운지 툴툴거렸다.

  배 중좌는 산악지형에서 전차부대를 공격할까 했지만, 적에게 강력한 헬기부대의 지원이 있다는 정보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전차부대가 너른 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전을 세웠다. 어제 후퇴해온 국군 12사단의 공병대와 함께 두 개의 진지와 수많은 대전차호를 건설했다. 그리고 완벽한 승리를 위한 몇 개의 함정도…  모자라는 자재는 국군 수송부대가 헬기와 트럭으로 긴급지원을 해주어 어젯밤에야 겨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안주전투에 참가했던 국군 12사단 소속의 공병감인  김 대식 중령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그의 말을 들으면 왜 안주전투에서 패배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방어전에서의 전차부대 제 일의 임무는 적 전차부대와의 교전 아닌가?  그러나 안주의 인민군 전차부대는 적 전차부대와 교전할 기회도 없었다. 김 중령과 그의 공병대대는 부상자 부대를 계속 남하시킨후 대전차대대와 함께 대전차호를 건설하고  중국의 러시아제 T-90전차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전수해 주었다.

  전방 우측 3 km에 위치한 위장진지의 중대장에게서 유선연락이 왔다. 적의 규모는 1개 전차사단과 2개 기계화사단이라는 보고였다.  지금 공격준비를 위해 전개 중이라는데, 중대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위장진지 앞의 논에 전개한 적은 4km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통일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서에는 중국 장갑집단군에 러시아제 신형 T-90 전차가 300대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집단군 소속의 공격헬기부대도 무시 못할 정도의 숫자가 있었다. 어쩌면 적을 격퇴시키기 전에 자신들이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했다.  적보다 준비보다 많았으니 우리가 유리하다. 일단은…’

  갑자기 상공에 초음속 전투기의 굉음이 들렸으나, 즉시 남쪽으로부터 대공 미사일이 날아와 그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미그-23 유형인 그 전투기 조종석 바로 위에서 미사일이 폭발하여 기체가 중심을 잃고 산 위로 추락했다.폭발에 당했는지 조종사가 탈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만 벌써 세 대째군.’

  다시 아무 것도 없게된 텅빈 하늘을 보며 배 중좌가 중얼거렸다.  새벽부터 상공엔 어떠한 항공기도 볼 수 없었다. 서로가 정찰기를 발진시키기도 했지만 대공망이 워낙 치밀해  이 지역 상공에 비행기가 떴다하면 즉시 격추되었다.  가끔 저렇게 저공침투 해오는 비행기도 있었지만 목적을 당설하지는 못했다.

  배 중좌는 감청컴퓨터(여러곳에 감청기를 설치하여 들리는 소리와 진동을 종합하여 적의 규모와 위치를 판단하는 장치)가 적 전차부대의 규모와 배치를 추정한 지도를 보았다. 선두에 전차사단, 좌우 후방에 2개의 기계화사단을 배치한 것이 중대장의 보고와 일치했다.  그러나 아직 적 포병대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가속하여 시속 55 km의 속도로 전진해 오고 있습니다."

  기술 하사관이 헤드폰을 쓰고 중국군 전차부대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그가 다른 감청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지우고 논길 옆의 감청기 하나를 골라 집중적으로 음을 증폭했다. 기기를 조심스레 조작해 가며 듣더니 갑자기 대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보고했다.

  "틀림없는 T-90 전차의 엔진음입니다. 840마력짜리 V-84 디젤 엔진입니다. 그러나 무게는 좀 덜 나가는 것같습니다.원래 T-90의 전투중량은 약 46.5톤입니다만,  포탄 적재량을 줄였든지 능동반응장갑을 줄였든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차의 기동성을 향상시키고자 할 때는 이런 방법을 종종 쓰는 것으로 압니다."

  기술하사관이 잠시 헤드폰의 소리와 감청컴퓨터의 음문그래프에 신경을 집중하더니 말을 이었다. "감소된 중량이 약 2톤정도,이동시 소리의 차이를 들어보면 아마도 전장부의 반응장갑을 일부 제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두 기갑정찰대대의 전차들은 마인롤러 미부착 상태입니다!"

  마인롤러(mineclearing roller)는 전차 앞부분에  매다는 지뢰제거기이다.  러시아 전차들에 처음 장착됐는데 이의 효용이 입증되어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의 주력전차들에 많이 채용되었다. 그런데 중국전차들은 무슨 이유인지 마인롤러를 부착하지 않았다.  기갑정찰대까지 마인롤러가 없다는 것은 중국군이 기동전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통일한국군을 우습게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배 중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원래는 잠수함의 소나병인 기술하사관의 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소리만 듣고도 전차의 무게를 추정하는 그 하사관의 귀는 남들과 다르게 생겼나 해서였는데, 아무리 봐도 별 차이는 없어보였다.

  "전진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일까요?  T-90은 그 전의 모델과 비교해 추력 대 중량비에 있어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어쨋든 잘 됐군요. 마인롤러 미부착에 전면 반응장갑 일부 제거라…"

  작전참모가 씨익 웃었다. 배 중좌도 참모를 보고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젠장맞을 공중지원은 없답니다. 요격에도 바쁘다는 설명입니다. 하긴, 이 지역 빼고는 전 전선에 걸쳐 제공권을 상실했습니다만…  잘하면 A-10 몇대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중국 전투기들의 교대시간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아군의 포병대와 항공병력은 이 전투를 지원할 능력이 없었다.  단지 적 공격기들만 요격해주겠다는 답신이었다. 통일참모본부는 아군병력의 배치를 위해  적 장갑집단군의 공격을 단 하루라도,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대전차대대가 지연시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단지 일말의 양심인지 A-10 공격기 몇대를 전투 시작 후에 보내준다는 지원약속만이 있을뿐이었다. 물론 이는 약속에 불과하다고 배 중좌는 생각했다.  현재 통일참모본부의 실권을 쥔 국군 장성들은 대전차대대의 능력을 몰랐다.  저격여단을 러시아의 저격사단처럼 일반 보병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저격이라는 말을 북한에서는 적 공격의 예봉을 꺾어 방어한다는 뜻으로 쓴다.

  포병과 미사일, 공격헬기의 지원은 막강한 중국군 장갑집단군의 능력을 배가시켜주어 통일참모본부는 이들의 막강한 공격력을 여러차례  맛보아야만했다. 순천은 아직 점령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강력한 공격을 막고 있는 인민군들의 피해가 너무 커서,  통일참모본부는 순천을 포기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영유 서쪽으로 진출한 장갑집단군은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통일한국군이  서해안까지 방어선을 형성하기도 전에 빠져나가 남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 지상군이 포위해서 이들의 진격이 멈춘 순간 통일한국군의 공군기들이 쉴새없이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졸지에 포위당한 이 중국군 부대는 이미 어젯밤부터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어선이 뚫린 인민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했다. 이들을 막느라 벌써 2개의 사단을 소모했다.  하늘에서는 치열한 공중전이 계속되었다.

  통참으로서도 중국군의 주력인  제 13 합성장갑집단군만은 꼭 막아야 한다는 의견의 합치를 본 바 있다. 그러나 통참이 대전차대대를 지원하고 싶어도 가용 자원이 빈약하여 할 수가 없었다.아직도 순천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강서군을 향해 돌진중인 중국 장갑집단군을 막는데 지상군 3개 군단과 해군 서해함대,  그리고 공군이 총동원되어 막고 있었다.  중국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 앞에서 통일한국군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남쪽 영유에서는 인민군과 국군이 급히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유명한 인민군의 815기계화군단과 2개 군단, 그리고 국군의 제 9기갑사단과 제 2군단이 긴급배치되었다. 그러나 방어선을 견고히 하는데에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815기계화군단의 2개 전차여단은 서쪽의 중국군을 막는데 차출되어 실제 군단병력이 되지 않았다. 이곳 영유가 떨어지면 평양 북쪽의 순안비행장이 중국군의 포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되므로 평양까지 위험했다.

  위장진지와 적의 거리는 약 2 km, 적은 이미 위장진지의 위치를 눈치챘을 것이 당연하고, 적의 선공으로 아침의 전투는 시작될 것이라고 배 중좌는 생각했다.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제 T-90 전차에서 발사되는 125 밀리포의 소리였다. 곧이어 위장진지에 있는 이 소좌의 보고가 무선으로 흘러나왔다.  적은 3개부대 전체가 사격을 시작했으며, 적의 전차들은 이동하면서 사격하는데도 명중율이 놀랍도록 높다는 보고였다. 또한 지대지미사일이 낙하하고 있다는 보고가 왔다.  위장진지의 중대장인 이 한욱 소좌가 명령을 발하는 소리와  포탄과 미사일이 작렬하는 소리가 대대무전기에까지 들려왔다. 이제 그의 역량에 따라 이 전투의 성공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11. 20  07:00  위장진지

  이 한욱 소좌는 적의 포탄세례에 귀가 멍해졌다. 야산의 능선 3 km에 걸친 위장진지 곳곳에 적의 파멸적인 포격이 가해진 것이다. 특히 전선 후방 멀리로부터 날아오는 중국 정밀기계수출입공사의  305밀리 M-1B와 WS-1 다연장로켓탄의 위력은 가공할만한 것이어서, 긴 방어선에 분산배치되어 있는 인민군들이 저항한번 제대로 못한 채 쓰러져갔다.배치받은 구형 T-62 전차 9대 중에서 겨우 4대만 남았다.나머지 장갑차들은 엄폐호에 숨어 있었다.장갑집단군 소속 중국군 포병연대의 83형 152밀리 자주곡사포도 이 파티에 참가했다.

  이 소좌가 대대용 무전기를 쳐다 보았다. 적의 포격이 시작되자 마자 전화선이 끊겼기때문에 무전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본 진지의 위치가 탄로날까봐 대대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자신의 중대를 위장진지에 미끼로 배치하고 수신만 하는 대대장이 혐오스러져서 무전기에 대고 감자 바위를 먹였다.거짓 후퇴를 하여 적의 본대를 유인, 포위섬멸한다는 고전적인 작전은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미끼가 되는 부대장의 심정은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적이 유인된다는 보장도 없으며, 포위해도 섬멸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 소좌가 보기에도 적은 너무 많았다.

  중국군이 전방 2 km까지 접근해오자 대전차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발사한 대전차 HEAT탄(성형작약탄)은 전차 포탑의 반응장갑에 명중하자마자 반응장갑이 터지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인민군의 구식 T-62전차가 발사한 철갑(APFSDS)탄도 중국 전차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나갔다. 피탄경시를 중요시한 달걀 형태의 러시아제 전차가 그렇듯이 전차포와 대전차포는 정면에 정확히 명중하지 않으면 중국 장갑집단군이 자랑하는 T-90전차의 장갑을 뚫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반응장갑 때문에 대전차미사일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 소좌가 소이탄 발사를 명령했다.각 장갑차의 12.7밀리 기총과 구경이 더 작은 기관총에서 발사되는 소이탄이 대낮의 하늘을 더욱 밝게 밝혔다. 중국 전차에 소이탄이 맞자 전차 앞부분의 반응장갑이 터져나갔다.소이탄은 8000도의 고열로 전차의 장갑을 뚫는 성형작약탄에는 훨씬 못미치만 상당한 정도의 고열을 내어 능동반응장갑의 폭발을 유도해냈다. T-90의 적외선 재머도 이들의 뺄 수 없는 공격목표였다. 각 전차의 레이저경보장치도 철저히 부쉈다. 저격여단답게 보병들의 사격은 정확했다.

  어느 정도 사격한 후 전차와 장갑차를 서서히 후퇴 시켰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본 중국군의 전진속도가 빨라졌다. 이를 본 이 소좌가 보병들 전원을 장갑차와 보병전투차에 탑승시키고 재빨리 후퇴해갔다.

  중국군의 전차부대는 단숨에 인민군 위장진지를 짓밟고 넘어 넓은 들로 나왔다.  그동안 산간지역의 좁은 도로만 달려서 스트레스가 쌓인듯 중국군 전차들은 최고속도로 벌판을 질주해갔다. 후퇴하는 인민군 보병 전투차들에 포화를 퍼부으면서, 이제 중국 장갑집단군은 전차부대의 최대 강점인 기동전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전차사단 뒤로는 기계화사단들이 따르고 있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면서도 중국 전차들의 능동반응장갑과 조준기 등을 악착같이 파괴하고 있었다.

  1999. 11. 20  07:15  대전차대대 주진지

  드넓은 평야에 수백대의 전차와 그보다 많은 수의 장갑차들이 질주하는 모습은 대전차진지의 인민군들 눈에도 장관이었다. 대전차 진지에서는 이들의 술래잡기가 옆쪽으로 보였다.중국군의 전차들은 전차포로 인민군을 쏘기보다는 위협해서 세우려는 기세였다.아니면 인민군의 주 진지까지 인민군을 총발받이로 몰아 공격하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진지에서 망원경으로  이들의 경주를 지켜보던  배 중좌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국군 12사단의 김 중령에게 눈짓을 보내자 김중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몇 대 남지도 않은 인민군의 T-62전차들이 제 2진지에 도착하여 엄폐호에 숨고 115밀리 활강포로 사격을 시작하자 미리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또다른 중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배 중좌가 치켜들었던 손을 아래로 힘껏 내렸다.

   "1번 눌러!"

  배 중좌의 일성이 터져나왔다.  대대장 옆에 대기한 폭파조가 1번 스위치를 누르자 벌판을 달리던 중국군 전차 수 십 대가 갑자기 땅속으로 꺼져들어갔다.

  1번 스위치는 어제 들판 수 십 군데에 중장비를 동원하여  넓고 깊게 땅을 파고 위장해서 만든, 대전차호의 위를 덮은 강철판의 지지대를 붕괴시키는 기폭장치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래가 텅빈 강철판을 통과할 때 적 전차에서 느끼는 소리와 진동을 같게 하는 것이었는데 공병대는 1미터 두께의 흙을 철판 위에 쌓아 부족하나마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작업을 마치자 배 중좌는 12사단 공병대와 교도대원들에게 후퇴를 종용해서 지금은 김 중령과 폭파조만 남아 있었다.

  수십대의 전차가 땅속으로 사라지자 뒤따르던 전차들과 보병전투차들이 놀라 급정거를 했다.  급정거를 했으나 미쳐 서지 못한 전차와 보병전투차 몇 대도 관성의 힘에 의해 빨려들어가듯 대전차호에 빠져들어갔다. 땅속으로 꺼져들어간 전차들은 5미터나 되는 깊은 함정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2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생존하는 전차는 20세기 말이 되도록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전차 승무원들이 파괴된 전차의 유독성 가스를 피해 기어나왔으나 함정을 기어나오자마자 후퇴한 인민군들이 발사한 기관총 세례에 몰살당했다.

  "포격 개시!  발사!  2번 눌러!"

  중국군 전차부대가 정지한 것을 확인한  배 중좌의 명령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먼저 한국군으로부터 인도받은 K-200 보병전투차의 파생형인 박격포차에서 원격레이더로 자동조준되는 107밀리 중박격포를 수 십 발 연속 발사했다. 전차들은 박격포 포탄을 무시했지만, 이 포탄은 의외로 대전차용 성형작약탄이었다. 중국 전차의 포탑이나 차체 위에 명중하자 고온의 액체화한 금속이 전차 윗부분의  얇은 장갑을 뚫고 들어가 순식간에 전차 내부를 불태웠다.  레이더로 조준되는 박격포탄은 이것이 과연 미사일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정확하게 중국 전차들을 노렸다.

  후방에서는 포병중대가 MLRS와 한국군 155밀리 M109A2 자주포를 통해 SADARM(Sense and Destroy Armor)을 발사했다.발사 후 이중모드로 밀리미터파나 적외선 탐지기로 표적을 탐지하고 표적 상부에 명중하는 무게 11.7kg의 SADRAM은 155밀리 포탄에 2발,  MLRS로켓탄에 6발씩 운반되어 중국군 전차 상공에서 분리되어 전차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대전차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로 배속된  다른 포병중대는 북한 고유의 자주포인 170밀리 곡산형 자주포로 중국 기계화사단의 보병전투차들을 노렸다.

  K-200의 또다른 파생형인 20 밀리 대공 발칸포차가 전차들을 향해 불을 뿜었고, 구식 러시아제 BRDM에서는 새거(Sagger) 대전차 미사일이나 신형인 AT-7 SAXHORN 대전차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능동장갑이 없고 장갑이 얇은 전차의 옆 부분이나,  있더라도 이미 후퇴하던 이 소좌 중대의 소이기관총탄 사격에  능동장갑이 파괴된 전차들은 미사일의 관통을 막지 못했다.

  3대의 독일제 전차파괴차 판저예거(Panzer jager, KW)는 깊숙한 참호속에 숨어 20미터 길이의 미사일플랫폼만 내놓고 연속사격을 하는 모습이 공사장의 굴삭기를 연상케했다.  또한 21세기형 전차라고 불리는 미국 TCM사의 무포탑전차는 포신만 위로 내밀고 피탄면적을 최소로 한 채 105밀리 자동장전 속사포로 중국군 전차를 연속 파괴했다.이 전차는 연전에 한국지형 테스트용으로 미국에서 왔다가 사격통제장치의 불량문제로 개발 자체가 연기되었는데 이를 한국정부가 싸게 사 들인 것이었다. 개발당시에 이 전차는 대용연구차량(SRV)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각종 장갑차량과 사륜구동차에서는 밀란과 드래곤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보병들도 대전차무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보병들은 휴대형인 90밀리 무반동총과 3.5인치 대전차 로켓포, LAW, 심지어 유효 사거리가 11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M-31 대전차 고폭총류탄까지 총동원하여 전차와 장갑차량들을 공격했다.

  특히 대공발칸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공포는 특성상 초구속도가 높아 전차 파괴에도 큰 효과를 발휘하는데, 이는 2차대전 당시 독일 전선과 아프리카 전선에서 대공포들이  대전차포로 자주 활용된 사실로써도 그 효용을 알 수 있다.  발칸포의 대전차공격은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즐겨 썼던 수법이다.

  보병과 동시에 주진지 뒤쪽에서  무장헬기 4대가 떠올라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MD500D의 대전차 개량형인 이 헬기들은 미사일 발사 즉시 언덕 뒤에 숨어,  로터 아래 마스트에 장착한 조준장치로 미사일을 유도했다. 80년대 말에 북한이 밀수입한 이 미국제 헬기는 절반이 대전차용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 미사일 4발을 쏜 후에는 즉시 진지 뒤에 착륙해서 미사일을 재보급받고 다시 이륙했다.

  중국군 전차부대의 전진을 막는 강력한 저항에 놀란 중국군 전차들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오는 방향의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판저예거의 미사일플랫폼과 무포탑전차에 탑재된 작은 면적의 전차포뿐이었다. 보병들은 모두 잠망경을 통해 미사일을 유도하거나 사격 즉시 몸을 숨겼고, 대공발칸포는 3중의 견고한 콘크리트 토치카에서 사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토치카는 지연신관을 가진 미사일만이 파괴할 수 있었다.

  중국 전차들이 일제히 언덕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으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포화를 뚫고 전진하자니 또 어떠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선뜻 인민군들이 숨어 있는 언덕으로 전진하지도 못했다. 계속 숨어서 쏘는 인민군들의 미사일에  못견디게 된 중국군이 후퇴를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야 중국군 포병들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나  횡으로 전개한 포병의 위치에서 볼 때는 종적으로 길게 연결된 인민군 진지에 대한 포격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단지 본대의 후퇴를 위한 엄호사격에 불과했다.  후퇴하는 전차들이 속도를 높였고 이들을 각종 포화와 미사일이 따랐다.또 다시 땅이 무너지고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빠졌으나 이들은 미사일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후퇴하는 전차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전차 지뢰였다. 전진해올 때는 작동하지 않게  인민군들이 기폭장치를 해제했다가 스위치를 누르자 기폭장치가 작동하여 대전차지뢰의 효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또 다시 많은 수의 중국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파괴되었다.

  후퇴하면 지뢰탐지기에 드러나지 않는 플라스틱 대전차지뢰,  가만히 정지해있자니 각종 포화의 제물이 되기 십상이었고 전진하다가는 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꼼짝 못하게 된 중국군 지휘부는 헬기부대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중국 장갑집단군 사령은 헬기가 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전차가 SADARM의 우박을 맞고 폭발했다. 레이저경보장치는 사령의 전차가 미사일에 포착되었다는 경고를 발했다. 집단군 사령은 급해졌다.자존심까지 내팽개친 구원요청 독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령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소수이지만 강력한 적의 저항이다. 제발 빨리 와!"

  제 13 장갑집단군의 사령인 창 밍윈 소장은 중국내전때 남경군 고 중장의 휘하에서 장갑사단장을 했던 인물이었다.북경을 공략할 때는 좌익을 맡아 북경군구의 방어진을 돌파하여  가장 먼저 북경 외곽에 도착하는 명예를 안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대망의 별을 달게 되었다. 조선정벌은 그에게 있어서 또다른 기회였다.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전차에 충격이 가해졌다.  포탑 오른쪽에 동전만한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열파가 쏟아져 들어와 포탑 안을 휘감았다.창 소장의 뇌리에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막내딸이 떠올랐다.  사기꾼같은 미국놈 마이클. 백인과 결혼한 유색인종 신부의 비참함을 자주 들어서 말렸으나 막내는 막무가내였다. 딸과의 전화연락이 끊긴지 1년이 넘었다. 제발 행복하기를…

  3분이 안되어 약 30대의 러시아제 Mi-24 하인드 공격헬기가 대기하고 있던 산 뒤로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대전차 대대에 배속된 인민군 고사포 소대에서  SA-16 GIMLET 휴대형 대공미사일을 발사하여 10여대를 격추시키자  중국군 헬기들은 겁을 먹고 즉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가버렸다.공격헬기들을 뒤따라온 중국군 공중기동여단은 강력한 대공부대의 존재를 연락받고 공격헬기들을 뒤따라 도망갔다.  공격헬기가 당하는 판에  자체 장갑이 빈약한 수송헬기들의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공격헬기들의 활약을 잔뜩 기대하던 중국 전차탑승원들이 망연자실했다.

  전진할 수도, 후퇴하기도 어려워 망설이던 장갑사단장은 가만히 있자니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지뢰에 의한 피해를 감수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짧은 시간에 150여 대의 전차와 더 많은 수의 보병전투차를 잃은 중국 장갑집단군은  조금 전에 점령했던 인민군의 위장진지 뒤로 후퇴했다. 후퇴하면서도 인민군의 미사일공격과 지뢰에 의한 피해는 늘어갔다. 지뢰에 의해 전차궤도가 절단되어 꼼짝할 수 없게된 전차의 승무원들이 전차를 뛰쳐 나왔지만, 이들이 다른 전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인민군의 기관포가 작렬하여 이들을 휩쓸었다.

  제 2진지에서는 이 한욱 소좌가 중국군의 포화에 의해 잃은 왼쪽팔을 오른손으로 들고 계속 사격하라고 외쳤다.피투성이가 된 중대장은 방어진 위에 우뚝 서서 그 팔을 지휘봉처럼 흔들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의무병이 그를 참호로 끌어들이는 순간 근처에서 20여발의 로켓탄이 작렬했다. 잠시후 먼지와 연기가 걷혔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1999. 11. 20  07:25  위장진지

  직격포화를 피해 숨어들어간 인민군의 위장진지, 그곳에는 계속 전진해온 보급부대와 기계화부대의 후속부대, 그리고 후퇴해온 전차와 보병전투차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이 언덕 그늘을 벗어나는 즉시 인민군의 미사일이 날아오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가장 바깥쪽의 전차 또 한 대가 인민군의 헬기에서 발사된 대전차미사일에 파괴되었다.  이 모습을 본 바깥쪽 전차들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사단장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설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장진지는 또다른 재앙의 서곡이었다. 능선의 뒤쪽, 위장 진지에서 보면 전면, 2미터 깊이의 땅 속에 대형 유조탱크 3개와 LPG가스 탱크 2개가 숨겨져 있었다. 지상에 위장되어 있는 수십개의 가스 노즐이 눈에 보이지 않으며 공기보다 1.5배 무거운 액화 프로판가스를 공기중에 스프링쿨러처럼 빙빙 돌며 뿜어냈다. 다른 수 십 개의 파이프에서 배관이 터지자 휘발유가 사방에 분수처럼 쏟아졌다.

  이것을 본 중국군 전차 부대원들은 공포에 질려버렸다.사방 수백미터에 걸친 휘발유와 가스의 벌판, 이곳이 자기들의 무덤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전차도 장갑차도 휘발유에 흥건히 젖었고 프로판가스 냄새가 천지에 진동했다.전차병들이 즉시 시동을 끄고 전차에서 내려 북쪽으로 줄달음질 쳤다.이들의 뒤를 보병전투차를 버린 기계화보병들이 따라 뛰었다.

  "발사!"

  배 중좌의 짤막한 명령에 자주 박격포차에서 단 한발의 중박격포탄을 발사했다. 국군 12사단의 공병감 김 중령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어제 하루종일 중장비를 동원하여 유조탱크와 LPG탱크를 매설하고 대전차 참호를 파느라고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죽어간 전우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오늘 죽을 중국군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중국 전투기 편대의 짧은 교대시간을  이용해 대전차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공군의 부 영철 소령은 자신의 애기인  A-10 썬더볼트II 공격기를 몰아 급히 전장 상공에 도착했다. 부 소령은 지상을 보곤 깜짝 놀랐다.  컴퓨터에 입력된 지도상에 있는 벌판에는 수백대의 중국군 전차와 장갑차들이 파괴된채 불타고 있었고, 그너머 능선 북쪽에는 지금 아수라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벌판에서 파괴된 숫자보다 더 많은 중국군 전차와 장갑차들이 뒤집힌 채 화염에 휩싸여 차례로 폭발하고 있었다.  불타는 보병전투차와 사륜구동차에서 뛰쳐나온 중국군들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땅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불길이 한순간에 사람을 재로 바꾸어 놓았다. 부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처참한 전장은 그로서도 처음 보았다.  수많은 전사를 읽고 전쟁영화를 보았으나 이런 장면은 상상도 못했었다.

  "3시방향에 적 차량부대!"

  부기장의 외침에 문득 정신을 차려 기수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뒤따라 오던 2대의 공격기와, 호위 겸 지원공격을 위해 동행한 F-4E 팬텀 4기도 같은 방향으로 선회했다.  눈앞에서 부대가 전멸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기하고 있던  중국군 포병연대와 후속 보급부대는 하늘로부터 또다른 공포를 맛보아야 했다.

  공격기들이 30밀리 어벤저를 쏘며 집속폭탄을 투하했다. 다양한 구경의 장갑자주포와 단거리용인 83형 122밀리 40연장로켓포를 탑재한 트럭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대공자주포가 이제야 하늘을 향해 불을 뿜어댔으나 1초도 쏘기 전에 팬텀기에 당했다. 자주포가 필사적으로 언덕 너머로 도망가려했으나  A-10의 어벤저포에 10여 발을 관통당하자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팬텀의 집속폭탄은 수많은 자폭탄으로 나뉘어 수송트럭 대열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연속 폭발했다. 공격기들이 서너 차례 공격과 선회를 반복하자  지상에는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중국군의 제 13 합성장갑집단군은 궤멸당했다.

  11. 20  07:50  개성, 통일참모본부

  "급전입니다. 대전차대대가 적의 장갑집단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젊은 통신장교가 통일참모본부 종합상황실로 급히 뛰어들어와 보고하자 상황판을 보며 분주하게 토의하고 하급부대에 명령을 내리던 참모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어렵게 유지하던 방어선이 장갑집단군에 뚫려 전군 후퇴라는 뼈아픈 작업을 수행 중이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한 시간 전 서해에서 중국 상륙함대를 전멸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들떠있던 참모들에게는 경사가 겹친 듯한 기쁜 표정들이었다.  이제 반격하여 적을 몰아내고 잃었던 땅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이들의 눈빛에 나타났다.

  "좀 더 자세히, 어떻게 겨우 1개대대가 집단군을 섬멸했나?"

  오랜만의 쾌거에 국군의 양 석민 중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통신장교를 채근했다.이 종식 차수는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니, 그로서도 기대 이상의 전과였다. 대규모 적 기갑부대에 대한 방어전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저격여단 대전차대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긴 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국군 출신 참모들은 기쁘지만 믿기 어렵다는 표정들을,  인민군 장성들은 당연하다는 듯 자랑스럽게 그동안 축 쳐졌던 어깨를 활짝 폈다.모두들 통신장교가 전통문을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차호, 각종 대전차미사일, 대전차 지뢰, 그리고 특이하게도…, 초대형 지하유류탱크와 LPG 가스탱크를 이용했습니다. 아군 지상공격기에서 촬영한 화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대전차대대의 보고는 암호문으로 적 격퇴, 부대 위치를 전진시킨다, 보급요망,이라는 짤막한 것뿐이었습니다. 전과보고는 공격기들의 촬영에 의한 것입니다."

  통신장교는 국군과 인민군의 묘한 경쟁관계를 의식하여  인민군 대전차대대의 보고가 국군의 확인에 의한 객관적인 전과라는 것을 확인시키며 영상장치를 작동시켰다.

  화면에는 벌판에서 파괴된 수많은 전차와 장갑차들, 대전차호에 빠져 연기가 새나오는 전차들,그리고 인민군 위장진지의 북쪽에서 불타고 있는 아비규환의 장면들이 나타났다. 잠시 후 화면이 급히 오른쪽으로 돌아가더니 중국군의 포병연대를 비추고, 공격기들이 무차별 공격하는 장면이 보였다. 잠시 후에는 중국군 포병대가 있던 곳이 파괴된 차량들의 잔해로 바뀌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위장진지 전면에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전차와 장갑차들,  그리고 그 너머 벌판에 파괴된 전차들을 비추었다. 그리고 북쪽의 산에는 추락하여 불에 타고 있는 중국군의 공격 헬기 잔해들이 보였다.

  "공격기의 부 영철 소령이 촬영한 자료를 컴퓨터로 검색해보니, 이번 전투의 전과는 적 전차 파괴 273대, 장갑차와 보병전투차 526대,그리고 자주포와 트럭 등이 310대입니다만, 촬영되지 않은 전과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들의 전과는 중국군 최정예 장갑집단군인 신예 T-90 전차부대를 상대로 올렸다는 것입니다."

  통신장교가 해설까지 해가며 컴퓨터용지에 쓰인 내용을 읽었다.

  "엄청나군요. 전쟁 시작 이래 지상전에서의 최대의 전과입니다. 저격 여단 대전차대대라… 우리쪽도 그런 부대를 만들고 싶군요. 물론 야간 전대대와 같은 저격여단의 다른 부대도 말입니다."

  양 중장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민군 장성들의 어깨가 한껏 치켜 올려졌다.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군 장갑집단군에 공격기와 기갑사단으로 맞서기를 주장하던 국군 참모들은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진작에 인민군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리 대전차대대를  투입했더라면 전황이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투기들을 빼내 상공을 엄호해준  공군의 이 호석 중장께 감사하오.그리고 포병사령관 김 은수 소장은 정말 노고가 많았소.  그리고 안주방어선에서 패배한 부대의 명예는 이번 12사단 공병대의 활약으로 회복되었다고 봅니다."

  이 차수는 국군의 지원부대들을 차례로 격려하였다.  이들의 지원 없이는 대전차대대의 전과는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이 차수가 함으로써 국군 장성들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종식 차수가 근엄한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반격을 할 때요. 모든 작전은 반격을 염두에 두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시오. 특히 강서군으로 향한 놈들은 전열이 정비되는 대로 곧 공격하시오. 그리고 함경도쪽의 후퇴는 보류하시오. 반격이요!"

  "예! 차수님."

  국군이건 인민군이건 가리지 않고 이 차수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중국군의 최강 합성장갑집단군에 대해 단 1개 대대의 소규모이지만 전문화된 부대를 배치하고,  특히 후방에 대공 미사일부대와 공군 요격기 부대를 집중배치해  압도적인 중국군의 항공우세에 대항해 일부지역이지만 제한적인 항공우세를 달성하여  대전차 대대에 대한 공중엄호를 철저히하여 대부대가 밀집한 것으로 중국군 지휘부가 오판하게끔 한 이 차수의 전술에 무궁한 찬사를 마음속으로 보냈다. 이제 전술이 아닌 전략차원에서도 이 차수의 능력이 발휘되길 바랐다.

  1999. 11. 20  10:50  함경남도 흥남

  "우린 앉아서 죽으란 말이야?"

  함경남도에 고립된 제 3군단의 군단장인 진 진형 중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백산을 점령한 중국군 39집단군이 강력한 헬기사단과 공중기동여단을 앞세운 기동전으로 순식간에 흥남 서쪽인 정평까지 점령하자, 중국군을 상대하며 천천히 후퇴하던 인민군 3군단과 5군단은 퇴로가 차단되어 함흥 남쪽의 흥남 해안가에 대부분 몰려있었다. 급히 달려온 동해함대에 의해 일부 철수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와서 반격이라니 장난같지도 않았다.  부두에는 철수준비를 마친 1개 사단 병력의 보병들이 초조하게 배에 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북쪽의 중국군은 거리가 멀었고 남쪽의 중국군에게는 포병이 없어 주변에 포탄이 낙하하는 불상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그러나 후퇴하지 못하면 중국군에게 죽거나 포로가 될 운명이어서 이들은 초조했다.

  "서부전선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군단장 동지!"

  "기래도 여기는 사정이 다르잖아. 완전 포위된 상태야~ "

  참모장이 반격을 종용하는데 상공에 한국군의 F-5 전투기들이 북쪽을 향해 날았다. 군단장이 비행기들을 보는 동안 참모장이 설명했다.

  "남쪽 정평에는 이미 폭격을 시작했고  구원군이 신속히 북진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은 겨우 어제 방어선을 뚫었기 때문에 아직 견고한 포위망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쪽에서 공격하면 포위 공격이 된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물론 항공우세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만…"

  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남쪽 바다 상공에서 미그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헬기 한 대가 날아왔다. 대공부대가 일순 긴장하다가 긴급연락을 받고 경계를 해제했다. 그러나 대공포는 헬기의 움직임을 계속 따라갔다. 대공포의 조준기 안에 흥남부두에 착륙하는 헬기가 잡혔다.

  "뉘기야?"

  군단장은 이렇게 불리한 전황에서  미그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고 오는 사람이 누군가 궁금했다.  진작 공중지원을 해줬으면 피해가 적었을 것이라는 불만이 쌓인 판에, 이 헬기의 출현은 별로 기분 좋은 것이 못 되었다.

  군단장이 있는 곳의 50미터 북쪽에 착륙한 Mi-8 수송헬기에서 일단의 장교들이 내렸다. 부두경비를 맡은 병력이 누군지 확인하러 달려갔다가 얼어붙으며 경례를 했다. 장교들이 군단장쪽으로 걸어왔다.군단장의 눈이 점점 크게 떠졌다.

  "차수 동지!"

  "진 중장, 수고 많으시구레."

  "어드렇게 이곳까지 오셨습네까? 포위당한 위험한 곳에 말입네다."

  이 종식 차수가 빙긋이 웃었다.

  "진 중장의 군단이 포위한 거이 아이었소?"

  "차수 동지…"

  "서부전선은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소. 이제 동부전선만 잘되면 우리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알갔습네다. 기래도 무전으로 하시지 일케 직접…"

  "나도 인민군의 사기를 한 번 보고 싶기도 해서 이렇게 왔소."

  이 차수가 후퇴를 위해 동해함대를 기다리며 힘없이 앉아있던 인민군 들을 둘러 보았다. 갑작스런 이 차수의 등장을 보고 모두들 웅성거렸다. 패배한 전쟁터를 방문한 군 최고지휘부의 존재는 이들의 사기를 급격히 올렸다.이제 이들은 그동안의 잊혀진 부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차수는 다른 정치지도자도 아닌,  인민군들의 존경받는 어른이며 현역 군인이었다.

  "동무들!"

  이 차수가 나이답지 않게 쩌렁거리는 목소리로 인민군 장병들에게 외쳤다.

  "남반부 해군은 남해와 서해 해전에서 중국군을 크게 무찔렀고, 평양 북쪽 서부전선에서는 우리 인민군들이  적 장갑집단군들을 섬멸하고 있소. 이제 이곳에서만 승리하면 우리 땅을 다 찾을 수 있소. 동무들의 2세와, 동무들의 가족과, 동무들의 미래를 위해 침략자들을 몰아냅시다!"

  인민군들이 벌떡 일어나 몰아내자를 연호했다.

  "싸우자!"

  함성이 해일이 되어 산을 넘었다. 이들은 어제의 후퇴만 하던 부대가 아니었다. 모두가 전의에 불타올랐다. 국군이나 서부전선의 인민군에게 더 이상 뒤지고 싶지 않았다. 함대에의 승함에 대비해 포장했던 무장을 다시 풀었다.

  군단장이 임시 지휘소로 쓰는 막사로 이 차수 일행을 안내했다. 이들은 정평을 점령하기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함경남도 신포와 북청에 남아있는 인민군 5사단은 김책(성진)시 쪽으로 북진시키고, 함흥 북쪽 신흥의 인민군 8사단은 개마고원쪽으로 이동시켰다. 후퇴하던 인민군 3사단의 갑작스런 역습에 혜산에서부터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천천히 남진해오던 중국군 제 5병단은 당황하여 황급히 전선을 축소시켰다.

  함흥 비행장에 속속 착륙하는 허큘리스 수송기로부터  한국군의 제 3 공수여단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부대를 정비한 후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함흥 서쪽의 성천강쪽으로 향했다.정평 남쪽의 영흥으로부터 인민군 제 9 기계화군단과 보병 2개 사단이 투입되어 전투에 임하고 있었고,  낭림산맥의 백산으로부터 후퇴중이던 1개 사단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정평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정평을 점령한 중국군은 3배 나 많은 병력에 역으로 포위되었다.이날은 지금까지의 한중전쟁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된, 하루 3만발의 포탄이 동해안의 조그만 읍인 정평에 집중되었다.

  1999. 11. 20  14:20  함경남도 정평

  중국 공중기동여단의 헬기들은 한국 전투기들의 계속되는 전투초계에 의해 이륙도 못하고 있었다.  기동성이 제한된 이들은 일반보병보다 무력한 존재였다.  이 집단군에 하나밖에 없는 중국 전차연대는, 비록 구식이지만 공격기와 포격의 지원을 받는  제 9기계화군단의 T-64에 의해 격파되고 있었다. 정평을 구원하러온 중국군 전투기들은 갑자기 육,해,공에 형성된 엄중한 대공방어망을 뚫기에 벅찼다.  대부분이 정평 북쪽 상공에서 미사일과 남북 전투기들에 의해 요격되어 압록강을 넘어 도망갔다.

  최초로 정평 북쪽에서 인민군 제 9기계화군단과 3군단 병력이 만나서 서로 부둥켜 안고 만세를 불렀다.국군 제 3공수여단이 북쪽으로부터 정평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해 시가전이 전개되었다.하늘로부터 인민군 제 11공정경보병여단이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시내 곳곳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바다쪽에서는 동해함대의 엄호를 받으며 인민군 제 27상륙경보병여단이 통일한국군 최초의 상륙전을 시작했다. 정평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 27상륙경보병여단 소속의 박 철용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정평 동쪽 언덕에 도달했다. 상륙전 때 적의 상륙저지 움직임은 전혀 없어서 피해를 입지 않고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망원경으로 정평을 살펴보니 이미 시내 곳곳에 불이 나고 있었고  사방에서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과연 저곳에 소대원을 투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기동전 위주의 편제인 중국 집단군은  대부분이 보병전투차나 장갑차에 탑승한 기계화보병들이고, 인민군 2개 군단을 포위하기 위해 이곳을 점령했기 때문에 상륙전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다.중국군은 갑작스런 대규모 포위공격에 놀라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돌아온 정찰병들이 정평 동쪽의 인민학교 운동장에  중국군 지휘부로 보이는 부대가 있다고 했다. 즉시 중대장에게 보고한 박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그 인민학교 뒤쪽 주택가에 도착했다. 큰길쪽에는 급히 동쪽 해안으로 향하는 1개 대대의 중국군 기계화부대가 보였다.이들이 통과하기까지 숨어서 기다렸다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3층건물로 박 소위와 몇 명이 올라갔다.

  학교 뒤의 3층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니 2층짜리 학교건물 옥상에는 파괴된 대공포좌가 보였고 운동장에도 파괴된 전차 2대가 불타고 있었다. 복도에는 중국군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구식 장갑차가 두 대… 지휘차 한 대와 무선차, 파괴된 전력차… 경비병력은 강화된 1개 소대 정도…’

  박 소위는 건물 안에 있는 확실한 병력은 모르나 중국 지휘부는 전투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가정하고 일단 이곳을 공격하기로 정했다.  중대본부는 수색대인지 패잔병인지 모르나 일단의 적 보병부대와 조우하여 교전중이라고 전해했다. 중대장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준비를 했다.

  선발대인 독고 중사의 분대가 학교 뒷담을 넘었다. 초병은 보이지 않았으나 조심하며 뒷문쪽으로 접근했다.  독고 중사가 안을 보니 앞문쪽에만 경비병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독고 중사가 신호를 하자 다음 분대가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박 소위가 안을 살핀 후에 분대의 공격진행 방향을 지정했다.  1개 분대는 건물 우측의 창문 아래쪽으로 보냈다.

  박 소위가 손을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다시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폈다.  마지막으로 엄지손가락을 펴자 소대원 전원이 건물로 돌입했다. 1분대는 정문쪽의 경비병 두 명을 사살하고 운동장의 중국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3분대가 2층으로 뛰어올라간 것을 확인한 1분대원들이 장갑차들을 향해 중국제인 69-1식 RPG를 발사했다. 후폭풍이 건물 현관에 불어닥치고 장갑차는 화염에 휩싸였다.

  3분대원들이 2층에 도착한 순간,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란 중국군 세명이 총을 들고 교실을 뛰쳐나왔으나 그들은 즉각 사살당했다.  유리창과 출입문을 통해 방망이수류탄을 던지고, 이 초 후에 수류탄이 연속폭발하자 인민군들이 일제히 교실로 뛰어들었다. 상당히 고위장교들로 보이는 중국군들이 머리를 바닥에 박고 엎드려 있었고 두 명은 배에서 내장과 피가 쏟어져 나오며 죽어가고 있었다.  분대장이 중앙탁자에 있는 지도를 보고는 즉시 무전기로 소대장을 불렀다. 그가 유리창을 통해 창문 밖을 보니 중국군 지원부대가 교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박 전사! 기관총!"

  분대장이 외치자 뒤따라온 기관총 사수가 즉시 운동장쪽 교실 창문에 PK경기관총을 거치하고 중국군들을 향해 기관총을 연사했다. 교문에 10여구의 시체가 쌓이자  물러난 중국군이 학교의 담을 대신한 화단 뒤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창문 아래쪽으로 갔던 2분대는 창문을 넘어 복도를 통해  교실쪽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모든 물체에 대해 자동사격을 가했다. 통신장교인듯한 권총을 쥔 중국군이 쓰러지자 뒤쪽 벽면에 핏자국이 튀었다. 중국군 한 명이 분대장인 독고 중사를 향해 자동소총을 쏘려했으나, 같이 온 하급전사의 사격이 빨랐다.  그 중국군은 머리와 가슴에 한 발씩을 맞고 뒤로 꺼꾸러졌다.  통신용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나머지 중국군들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하급전사들이 포로들의 몸수색을 하고 있을 때 독고 중사가 소대장에게 상황이 끝났음을 알리는 무전신호로 무전기를 두번 툭툭 쳤다.

  1999. 11. 20  15:30  인천광역시, 영종도 국제공항

  여객기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이착륙을 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하느라 아우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중국적자들이었고 얼굴이 알려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97년의 위기때 북진통일을 부르짖던 여당지도자와 99년 만주수복운동위원회의 위원장의 얼굴도 보였다. 이들은 어줍잖은 영어를 쓰며 항공사에 좌석을 강요했으며, 외국항공사에는 특별기의 증편을 요구했다. 하지만 외국항공사들은 전쟁이 벌어진 한국상공에 진입하는 자체를 꺼렸다.

  한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자국민을 철수시키기 위해 계속 특별기를 파견했다.  한 대학교의 총장은 비행기트랩에서 미국군인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미군에 의해 떠밀려졌다.  특별수송을 담당한 미군들은 본국에서 미국인 백인과, 이들과 동행하는 동양계 미국인들만 탑승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돈 들여서 어렵게 구한 미국 영주권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트랩으로 오르려는 총장의 눈앞에 그 미군이 권총을 들이밀었다.

  의외로 외국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다.대부분이 젊은 학생들이었다. 유럽에서 온 여객기에서는 단체 배낭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인지 색색의 배낭을 매고있는 학생들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젊은이들의 깔깔거리는 모습은 사라진 채 어두운 얼굴로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여객기는 평소의 러시아와 중국을 통과하는 항로가 막히자 알래스카를 통해 왔는데,  일본이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기들의 이륙을 지연시켜서 도착이 하루 더 늦어졌다. 학생들은 즉시 공항버스를 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서울로 향하는 공항버스 위로 초음속 전투기들이 지나갔다.

  쟈카르타에서 출발한 보잉 767 여객기가 활주로에 내렸다.  새털라이트(원형)식 탑승장에 내린 코오롱 엔지니어링의 백 창흠은 서둘러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인도네시아에 석유화학공장 플랜트를 건설하다 전쟁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한 그는 택시를 잡아 타고 분당으로 향했다.

  1999. 11. 20  16:30  북위 31도, 동경 126도 해상 (동지나해)

  이 지역은 제주도와 중국 상하이, 그리고 일본 가고시마와 정확히 같은 거리에 있는 해상이다. 중국에 4,000대나 있는 구식 미그-19형 전투기의 항속거리 아슬아슬한 이곳 해상에 반전전사그룹 피스의 함대가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 중국 공격기들이 내습했으나 미리 탐지한 함대는 조기경보기와 막강한 러시아제 대공시스팀의 합동작전으로  이들의 공격을 피해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항모에서 발사된 사정거리 450km의 SS-N-19 함대함 및 함대지 겸용 미사일과, 러시아로부터 항모와 같이 구입한 슬라바급 순양함에서 발사된 사정거리 550km의 SS-N-12함대지미사일이 상하이와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그리고 난징(南京)의 공항과 시내 중심부를 향해 발사되었다.한국군으로서는 중국 본토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었고, 중국도 전쟁의 피해지역이 될 수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전략적 공격이었다.

  목표해상에 도착한 함대가  보급선에서 미사일을 전달받아 다시 재장전을 하는 중에 공격준비를 마친 항모탑재 전투기와 공격기들이 이륙을 시작했다. 공격기로 쓰이는 수호이-25UT 프록풋이 먼저 날았고, 이어서 전투기 겸 공격기인 F/A-18, 마지막으로 MiG-29K 편대가 날아올랐다.

  거대한 러시아제 항공모함의 동쪽 15km 해상에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 물기둥 상공을 P-3C 오라이언이 스치듯 날았다. 또 한 척의 중국 잠수함이 초계기에 잡혀 침몰한 것이다.  함장인 루시쵸프가 함교를 통해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살펴보았다.

  2개 함대가 거의 전멸한 중국 해군은 의외로 힘이 없어보였다.  아직 막강한 북해함대가 남아있었지만 함장으로서는 그들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적이라고는 몇 대의 수호이-27K에 의한 호위를 받는 16기의 구형 J-6 공격기와  두 척의 한급 원자력잠수함 밖에 없었다.  공격기들은 구식 잉지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곤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 발사된 32발의 미사일 중 함재전투기가 절반을, 슬라바급 순양함의 SA-N-6 장거리 대공미사일이 나머지 절반을 잡았다. 최종방어는 필요도 없었다. 도망가던 중국 전투기들도 10여기가 함재전투기들에 의해 격추되었다.  중국군은 당분간 같은 작전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함장이 생각했다.

  잠수함은 함대에 접근하던 중에 초계기와  탑재헬기에 의해 어이없이 당했다.  수중속도가 25노트 밖에 되지 않는 개조되기 전의 이 한급 원자력 잠수함들은 함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너무 서두른 것이 실수였다. 잠수함의 존재를 확인한 초계기가 전파관제하에 접근하는 중에, 바보같은 잠수함 함장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부상했는데  그 순간 초계기의 하픈에 당했다. 어뢰도 아닌 대함미사일에 당한 어처구니 없는 경우였는데 이것은 부상해야만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한급 잠수함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다른 한 척은 초계기와 헬기들에 의해 포위된 채  필사적으로 도망다니다가 결국 방금 침몰했다. 초계기는 잠수함 바로 위에서 폭뢰를 투하하여 두번째 탄이 잠수함 바로 옆에서 폭발했다. 잠수함의 함체에 균열이 생기고 누수가 시작되는 소리가 초계기에 잡혔다. 점점 심해에 가라앉다가 결국 함체가 찌그러들며 폭발했다.  항모의 함장 루시쵸프는 이 해역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편으로는 최근의 발전된 기술에 의해 침몰한 잠수함 원자로의 용융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루시쵸프는 원래 러시아 해군 소속의 중형 항공모함인  쿠츠네쵸프의 함장이었다.  나이가 들어 퇴역하자마자 정보업무상 몇 번 마주쳤던 짜르로부터 용병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바다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뱃놈은 어쩔 수 없어.’

  초계기인 오라이언이 항모에 착륙했다. 함장은 러시아제인 매이나 베어 F에 더 믿음이 갔지만, 오라이언의 승무원들은 의외로 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상기지 발진형인 다른 것보다는 함재형인 오라이언이 훨씬 낫긴 했다.  피스의 함대는 한국 해군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륙함과 함께 사령관인 싱은 서해상에 남았다. 지상군 병력은 이미 한국의 목포에 상륙하여 북으로 이동중이었다. 이들은 조만간 평양 북쪽의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피스 함대에 맡겨진 임무는 중국  해상봉쇄와 함께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었다.

  ‘방어전을 위한 공격이라…’

  함장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한국군 입장에서야 한반도 전선에서의 제공권을 잡기 위해서도 당연히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 싶겠지만, 만약 중국이 핵을 사용한다면…  핵을 보유한 국가가 외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자국영토 안을 침공한 적에게 핵공격을 하는 경우 핵의 선제 사용에 대한 부담은 훨씬 작아진다. 함장은 절대 함대를 중국연해에 접근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공해상에 함대를 전개한 채 공격기로만 중국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어차피 해상에는 목표로 삼을만한 중국함대가 보이지 않았다.

  1999. 11. 20  16:50  중국 상하이 상공

  "2시 방향에 중국 전투기 편대 출현, 접근 중."

  호주 출신의 용병 조종사 맥스가 함대 상공의 조기경보기로부터 받은 자료를 검토하며 동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신은 미그-29를 몰고 공격기 편대를 엄호하는 것이 임무였다.고도 3만 피트의 미그기에서 멀리 보이는 상하이는 불에 타고 있는지 검은 연기가 시내 곳곳에서 치솟고 있었다. 조기경보기에서는 함대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공항과 전투기 기지, 산꼭대기의 레이더 기지,  그리고 항만과 시내 곳곳의 목표에 명중되었다고 전해왔다.  그리고 상하이 상공의 미그기는 미그-23의 중국제인 J-8 Finback이라고 알려왔다.

  중국의 미그들과 40km까지 접근했다.  레이더의 성능이 떨어지는 J-8 이라면 지상레이더기지의 관제에 따라야하므로 지상레이더 기지가 파괴되어 관제를 상실한 지금  중국의 미그기들은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미그-29 편대 아래에서 선회하고 있던 F/A-18 전투기들이 AMRAAM공대공미사일 8발씩을 발사했다.  조기경보기로부터 수신되는 맥스의 레이더 정보에는 암람과 미그-23이 점점 접근하고 있었다. 맥스는 중국인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멋있는 디자인의 미그-23이 파괴될 생각을 하니 정말 아까왔다.

  중국 요격기 편대는 미사일과의 거리 약 9km에서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회피하기 시작했으나 총 192기의 미사일이 90기의 미그를 노리고 쇄도했다. 미사일을 모두 발사하여 벌거벗은 F/A-18은 미사일배달부의 역할을 마치자 전과확인도 하지 않고 항모로 돌아갔다. 피스의 미그-29와 중국 전투기들의 거리가 15km로 접근했을 때에야 상공에 미사일이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60여기의 J-8 전투기들도 보이지 않았다. 화재에 휩싸인 넓은 상하이 시내 곳곳에  추락하는 중국 전투기들로 인해 새로운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차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으나 30여곳 이상에서 발생한 화재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중국 전투기의 조종사들이 겨우 미사일을 피했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편대를 재정비하고 있을 때 미그-29 전투기들이 공격해왔다.처음 중국 전투기들이 감지한 것은 전투기의 대공 레이더였고 다음은 공대공미사일의 레이더였다.중국 전투기들의 오른쪽에서 하늘을 가득 채우며 미사일이 날아오고 그 뒤로 미그-29 전투기들이 보였다.  놀란 중국 조종사들이 급히 선회하며 본능적으로 채프를 뿌렸으나 미그-29에서 발사된 AA-10 알라모 대공미사일의 절반은 적외선 추적방식이었다.

  상하이 상공에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지상의 중국인들은 도대체 누가 이겼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궁금증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목숨이었다. 시민들이 짐을 꾸리고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상하이의 모든 도로가 피난민들로 메워졌다. 도시는 순식간에 그 기능을 마비했다.

  중국 전투기들의 편대장은 자기 편이 7기로 줄었을 때에야 도망칠 것을 생각했지만 이미 자신의 전투기 뒤에는  미그-29 전투기가 따라붙고 있었다. 전투기 어디에 맞았는지 조종이 제대로 안되었다. 또다시 미그-29에서 발사된 기관포탄이 번쩍이며 편대장기의 진로 앞으로 스쳐갔다.

  수호이-25UT 프록풋(Forgfoot) 편대가 저공비행으로 상하이에 도달했다.  공격기 편대의 북쪽에는 거대한 양쯔(揚子)강이 바다와 만나는 만 입구가 보였다. 장강(長江)으로 불리는 이 강은 칭하이성(靑海省)의 탕굴라산맥 북쪽에서 발원하여  티베트, 윈난(雲南), 쓰촨(四川),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장시(江西), 안후이(安徽), 장쑤(江蘇)를  거치고 상하이에 이르러 동지나해로 흐르는 길이 6,300km의 대하(大河)이다.이 강의 광대한 유역에는 중국 총인구의 4분의 1인 약 2억 2천만명이 살고 있다.

  바다 위를 스치듯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수호이들이  항구와 조선소를 맹폭격하기 시작했다.  상선과 유조선이 가장 먼저 당하고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무너졌다.  침몰하는 유조선이 흘린 중유가 항만 해상을 가득 메웠다. 상하이의 바다가 불타고 있었다.항만 폭격을 마친 공격기들은 시내쪽으로 향해 날아가 나머지 폭탄을 투하하고 지대공 미사일을 피하며 동쪽으로 달아났다. 공격기들의 작전시간은 단 5분에 불과했다.

  수호이-25UT의 폭격이 끝나자 상공에서 엄호하며 가끔 지상의 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던 미그-29들도 동쪽으로 돌아갔다.  난징 방향에서 급히 출격한 200여기의 미그-19기들은 이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1999. 11. 20  17:20  동지나해, 피스함대의 항공모함 함교

  "미국 함대입니다!  1-5-4에 항모를 포함한 기동부대입니다."

  함교 밖으로 전투기들의 착함을 지켜보던 함장이 급히 자신의 지휘콘솔에 앉아 중앙레이더 화상을 보니 십 여 척의 대형함들이 급속 서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상수색레이더와 대공레이더, 그리고 조기경보기의 레이더영상이 컴퓨터에 의해 조합된 이 레이더 화상에는 뜻밖에도 항공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들의 200km 동쪽 해상에 E-3C 센트리 조기경보기 한 대만이 보였다.

  "기동부대가 아냐. 상공에 전투기가 없고 함의 숫자도 부족하다.함종을 확인할 수 있나?"

  통신장교가 조기경보기와 한참 통신을 하더니 항모 1척과 타이컨디로 거급 미사일순양함 2척, 알레이 버크급 미사일구축함 4척, 그리고 기타 수송선과 보급선이 몇 척 있다고 알려왔다.

  "침로 2-5-0, 30노트. 짜르를 부탁하네."

  함장 루시쵸프가 함대를 급히 남서쪽으로 돌리고  개성 통일참모본부에 파견되어 있는 짜르를 불렀다.  짜르와 통일참모본부의 참모들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9. 11. 20  17:25  개성, 통일참모본부

  "공격하면 안됩니다! 미국이 참전할 수도…"

  육군의 김 병수 대장이 호전적이고 막강한 미국과의 전쟁을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국과의 전쟁은 상상만 해도 공포 그 자체였다. 미국과의 전쟁은 최악의 경우 민족의 말살까지 고려해야 했다.

  "공격해야 됩니다.그 무기가 중국의 손에 들어가면 겨우 반전에 성공한 우리 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주장했다.그는 최근 미국이 해외에 파병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며 수송함대에의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중앙화면에 나온 루시쵸프도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수송중인 무기는 어떤 종류입니까?"

  양 석민 중장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루시쵸프에게 물었다.영어라면 양 중장보다 훨씬 더 더듬거리는 루시쵸프를 대신해 짜르가 설명했다.

  "초대형급 항모 1척과 여기에 탑재된 신형 항공기 90대,  타이컨디로거급 이지스순양함 2척과 그보다 소형의 이지스구축함인 알레이 버크급 4척입니다.  3척의 수송선에는 신형인 F/A-18E 및 F-15 전투기 200여기가 탑재되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의외로 빨리 왔군요, 계획은 알았지만… 아마 미국 7함대에서 빼돌린 물량 같습니다. 중국이 상당히 급해졌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참모들이 질려버렸다. 중국은 초반에 신형전투기와 2개 함대가 거의 소모되자, 구형의 전투기와 군함을 투입하기 보다는 신형이며 전투력이 막강한 무기체계를 급히 미국에서 도입한 것이다.  미국은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본 사세보항에 기항 중인 항모와 일본 각지에 배치된 주일미군의 전투기들을 급히 빼돌렸다.  태평양 해상에는 지금도 다른 수송함대가 신형 전투기를 가득 싣고 빠른 속도로 중국을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를…"

  동부전선에서 정평 점령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이 종식 차수가 부관에게 지시했다. 북한 인민군의 군 지휘권을 최 광 차수에게서 완전히 이양받은 이 차수는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한국 대통령의 결재만 받으면 되었다. 부관이 화상통신을 준비하는 동안 이 차수가 참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정도의 무기라면… 우린 파멸이오."

  참모들이 고개를 숙였다. 평양을 아슬아슬하게 방어하고 이제야 반전을 시작한 통일한국군에게 제공권은 중요했다. 수많은 전투기 파일럿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제공권을 장악한 지금도  압도적인 수의 구형 중국 전투기들에 의해 제공권이 위태로왔다. 소형의 한국형 구축함으로 간신히 버티고 약간의 기략으로 중국의 2개 주력함대를 격파한  통일해군도 이지스순양함 2척과 이지스구축함 4척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화면에 홍 대통령이 나오자 참모들이 기립했다. 이 차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각하, 미국의 초대형 원자력항모와 이지스순양함 6척이 제주도 남해상에서 중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피스의 짜르 참모는 이를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기판매로 보고 있습니다.  또다른 수송대가 태평양에서 중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무기들이 중국에 넘어가면 우리는 전쟁에 지게 됩니다. 이들을 공격할 기회는 지금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격할 경우 각하는 미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요."

  비상각의를 진행중이던 대통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주변에서는 아마 국방장관이나 한국군의 육해공 참모총장들이  대통령에게 공격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지 시끄러웠다.  이 차수가 대통령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대통령이 한숨을 길게 쉬는 모습이 보였다.

  "이 차수의 생각대로 하시오. 뒷감당은 우리 정치인들이 해야지 어떻겠소. 질 수는 없고… 걱정마시오…"

  대통령이 이 차수에게는 걱정말라고 했지만, 자신은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각하, 안됩니다!"

  비상각의에 참가한 국무위원들과 참모총장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차수는 그들의 눈이 아마도 살기를 띄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대통령이 화상전화를 급히 끊었다.이 차수는 부관에게 대통령 이외에 국군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 또는 국방장관의 통화를 거부하라고 부관에게 지시했다.아직 화상통신을 끊지 않은 루시쵸프는 고뇌하는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다.

  "그들을 공격하시오. 혹시 전투기의 지원이 필요하오?"

  통역인 인 한수 중위를 통해 이 차수의 뜻을 전달하자 짜르와 루시쵸프의 표정이 환해졌다.  짜르와 루시쵸프는 피스 함대로만 미국 수송함대를 공격하는 경우, 한국과 미국과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정부가 피스함대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한국은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이 차수의 한마디가 그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 공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시쵸프가 연신 고개를 숙이자 이 차수가 고개를 저어 만류했다.

  "아니오, 어려운 임무를 맡아주어 고맙소. 은혜를 잊지 않으리다."

  1999. 11. 20  18:30  동지나해 해상

  미 항모 죠지 워싱턴은 중국영해를 향해 급속히 서진하고 있었다. 이 초대형 항모를 호위하며 2척의 타이컨디로거급과 4척의 알레이 버크급, 그리고 6척의 수송선과 2척의 보급선은  북쪽 해상에 피스 소속의 함대가 있다는 사실을 위성정보를 통해 알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협을 피해 중국해군 지상발진 전투기들의 호위가 가능한 해역으로 급히 함대를 몰고 있었다.

  죠지 워싱턴은 1990년에 건조된 미국의 원자력 항공모함이다. 만재배수량 10만 2천톤, 전장 332미터의 이 거대한 항공모함은 평소에 탑재하던 전자전기와 초계기를 육상기지로 돌리고 대신 F-14와 F/A-18 전투기로 갑판과 격납고를 가득 채우고, 이들을 중국에 인도하기 위해 항해중이었다. 상공의 호위는 다만 함재전투기와 일본의 육상기지에서 발진한 E-3C AWACS만이 담당하고 있었다.

  "피스 함대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레이더 담당장교가 함장에게 보고했다. 함장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대 수상전 경보를 해제했다.이륙 직전의 함재전투기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애당초 피스 함대가 우리를 상대하려는 것은 무리였죠."

  함대의 대잠전을 지휘하는 맥과이어 준장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피스함대를 비웃었다.  해상수색레이더를 담당하는 하사관은 아까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함장이 그의 등을 툭 치며 물었다.

  "자네 왜 그래? 아까부터."

  하사관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한참 고민하더니 하사관이 레이더 화상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접근하고 있는 두 척의 참치잡이 어선 말씀인데요…"

  "그게 뭐 어때서? 아까 우리 전투기가 비무장인 것을 확인했잖은가? 중국 선적이고…"

  "예… 하지만 이들의 진로가 수상쩍습니다. 우리 함대 양 옆으로 통과할 예정입니다."

  "우하하!  어선들이 갑자기 하픈으로 공격할까봐 겁나나? 이봐, 이들과의 거리는 5km 이상씩 떨어져 있다구.  그리고 하픈이란게 아무 배에나 다 장착되는 것도 아니고… 혹시나 발사한다고 해도 우리의 대공방어망을 뚫을 수는 없지. 걱정 말게나."

  함장이 걱정 말라고 했지만  하사관은 계속 이 어선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아무래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척의 어선이 미국 함대의 남쪽과 북쪽 해상을 완전히 지나쳤습니다."

  하사관이 보고하자 함장이 그것 보라는 듯 하사관을 나무랐다.

  "어선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북쪽의 피스 함대나 감시하라고.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한국은 우리를 그냥 통과시키지? 지금밖에 공격할 기회도 없고 이 무기가 중국에게 넘어가면…"

  함장이 극비로된 수송선의 화물에 대해 생각했다.  수송선 세척에 나뉘어 실린 각 96기의 F-14와 F/A-18 전투기, 그리고 다른 수송선 3척에 있는 A-10 공격기와 아파치 헬기들… 이 화물은 중국의 육해공 전력을 한단계 상승시킬만한 양의 엄청난 무기였다.  한국이 지금 저지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전선은 붕괴될 것이 확실했다.

  "한국이야 당연히 중국보다 우리 미국이 무섭겠죠. 설마 우릴 공격하겠습니까?"

  맥과이어 준장이 말하는 순간 함교 밖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함장이 함교 밖 해상을 보는 순간에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고 충격파가 이어졌다.

  "안지오가 당했습니다! 무엇에 당했는지 모릅니다. 퇴함하겠답니다!"

  통신사관이 타이컨디로거급 순양함  안지오의 함장 말을 그대로 전했다.안지오는 1993년에 건조된 최신형 이지스함인데 중국에 인도되는 함대의 전면 북쪽 해상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함장의 얼굴이 쟈빛으로 변했다. 해가 진 해상에 또다른 섬광이 빛났다.  항해사관이 남서쪽 해상을 보며 외쳤다.

  "러셀도 당했습니다."

  러셀은 1995년에 건조된 최신형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함이다. 타이컨 디로거급보다 약간 소형이지만 그 공격능력은 거의 같다. 다만, 타이컨 디로거의 탑재헬기가 2대임에 반해  알레이 버크급은 헬기가 없다는 차이가 있다.

  "도대체 적은 어떤 방법으로 공격하는거야?"

  함장이 물었으나 이는 함교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의문점이었다.갑자기 항공모함이 진동하며 크게 흔들렸다. 충격에 함장과 함교요원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함장이 먼저 일어나 함의 상태를 살폈다. 함의 곳곳에서 피해를 보고해왔다. 다시 한번의 충격파가 함을 뒤흔들었다. 다시 쓰러졌다가 일어난 함장이 마이크에 대고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전투기 발진!"

  그러나 그는 이착함 관제사관으로부터 절망적인 보고를 받았다.

  "발진할 수 없습니다. 기관실과 원자로 측벽이 당했습니다!"

  "수송선 두척이 침몰중입니다!"

  "DDG-55 스타웃, 공격을 받고 침몰중!"

  "CG-60 노르망디 대파, 운행불능!"

  계속하여 참담한 보고가 이어졌다.  남아있는 것은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함 두 척밖에 없었으나 언제 당할지 알 수 없었다.수송선은 동쪽으로 도망가고 있었으나 속도가 너무 느렸다. 피스의 헬기 두 대가 이 수송선을 추격했다. 함장이 중얼거렸다.

  "기뢰야… 참치 어선 두척과 연결된 낚시줄에 기뢰를 달았어…"

  함장은 한국이 과연 미국과 대적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통신병이 함장에게 피스의 함장이 통신에 나왔다고 보고했다.  피스 항모의 함장은 함대를 당장 제주도쪽으로 돌리라고 협박했다.  함대 상공에는 언제 왔는지 미그-29 전투기들이 저공비행으로 날아 남쪽으로 지나갔다.함장이 본국에 보고하는 순간 헬기 한 대가 접근해왔다.

  1999. 11. 20  19:10  서울, 논현동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신 승주씨는 입대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소집영장에 적힌 소집날짜는 11월 19일로 되어있으니 하루가 늦은 셈이었다.  아내는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흐느끼고 있는지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서둘러 속옷과 세면도구를 챙기고 집을 나서려다 TV뉴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잠시 TV를 보니 위험한 전선에는 빠짐없이 등장하여 전선 상황을 시청자에게 알려 이번 전쟁통에 가장 용감한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린다는 박 영범 기자가 화면에 나와있었다. 화면에는 위성중계 생방송이라는 자막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기자는 지금 평안남도 순천지구 전선에 나와있습니다. 해가 진 지금도 전투가 한창입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자랑스런 국군과 인민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카메라가 잠시 포격이 빗발치고 있는 앞쪽 산을 비쳤다. 조명탄과 포탄의 폭발 섬광 사이로 인민군의 전차와 보병들이 산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네 대의 F-4 팬텀기들이 고지 정상 부근에 집속폭탄을 투하하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고지 여러 곳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른 불빛이 전투기를 따라갔다.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며 굉음이 들렸다.화면에는 카메라가 있는 참호 이쪽 저쪽이 흔들리며 보였다. 한국군 소속의 군인들이 치열한 포격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진정이 되더니 다시 기자가 나타났다. 기자 주위에는 흰눈이 나부끼고 있었다.

  [중국군은 서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동부전선에서도 우리 군의 반격작전이 훌륭하게 수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시청자들께 이미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만, 서부전선은 더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기자가 있는 이곳 서부전선 모 기지는 지금도 중국군 포격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용감한 우리 국군과 인민군의 전진을 끝까지,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보도할 것을...]

  다시 섬광이 비치며 카메라가 흔들렸다.  신 승주는 대단한 기자들이라며 감탄했다. 군인들도 포격이 무서워 참호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기자들은 너무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다시 화면이 안정이 되고 화면 중심에 박 기자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나타났다. 이마가 약간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박 기자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가리고 말을 이었다.

  [저희 KBS는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국군과 인민군의 자랑스런 모습을 시청자 여러분께 신속하게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 지금 흰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반격하는 우리 통일한국군의 승리를 축하하듯 첫눈이...]

  화면이 갑자기 밝아지고 잠시 후에는 화면이 까맣게 되면서 칙칙거렸다.  화면에 앵커인 중년의 남자 아나운서를 중심으로 보도본부가 비쳐졌다. 남자 아나운서는 당황하는 표정이었고, 옆의 여자 아나운서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다가 자리를 박차고 오른쪽으로 뛰어나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PD가 급히 남자 아나운서의 상체를 잡고 있던 2번 카메라로 바꾸었다.

  "박 기자! 박 기자! 박 영범 기자 나와주세요."

  앵커가 애타게 박 기자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앵커가 침통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전선의 박 영범 기자가 연결이 안되고 있습니다.그가 안전하기를 빕니다. 지금까지 본 방송국의 기자 세 명을 포함해 모두 24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이번 전쟁중에 사망, 또는 실종됐습니다. 잠시 카메라를 미국 대사관으로 돌려 주한 미국대사의 기자회견을 듣겠습니다.현장에 이 승 기자 나와주세요. 이 승 기자?"

  [예, 여기는 미국 대사관 기자회견장입니다...]

  화면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북적거리는 회견장을 배경으로 젊은 기자가 나타나 방금 전에 끝난 미국대사의 기자회견 소식을 전했다.

  "미국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데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해군이 미국의 해군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5척을 대파했으며,  이들을 모처로 납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승주는 다시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선 아내는 그 때까지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신 승주도 말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두 사람이 섰다.

  "걱정말아요. 우리가 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들어가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1999. 11. 20  19:30  개성, 통일참모본부

  "눈이 오고 있습니다!  첫눈입니다."

  이 호석 중장이 창가로 뛰어가  창밖의 함박눈을 보며 어린애처럼 외쳤다.  참모들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첫눈을 보고 싶었지만 체면때문에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이 차수가 창가로 가서 눈내리는 연병장을 보자 참모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갔다.  전쟁 와중에도 모두 환하게 웃었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눈 내리기 시작한지 꽤 시간이 된 모양으로 가로등에 비치는 참모본부의 연병장에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참모들은 마음같아서는 연병장으로 뛰어가  눈을 마음껏 맞으며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조금 전에 피스함대가 중국으로 향하던 미국함대를 나포해 제주도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와서 모두들 들떠있어서 이 차수가 한마디 할 때까지는 눈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모두들 잘해주었소.  이제 눈이 내렸으니 적의 공격은 눈에 띄게 약해질 것이오. 우리 군의 보급부대는 월동장비가 되어있겠죠?"

  참모들이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지금 내리고 있는 폭설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보았다. 회의가 시작되고 정 지수 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중국군의 현재 주력은 제남(濟南)군구와 남경(南京)군구의 병력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겨울에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선천의 차 중령이 보낸 보고에도 월동장비 노획에 대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차 영진 중령이 지휘하는 노농적위대와 교도대는 간신히 북한 전파망과 연결되어 간간히 무선교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동하면서 무선 교신을 하기 때문에 아직 중국군에게 추적당하지 않고 있었다.  통일참모본부는 피점령지역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장투쟁을 하는 민간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들은 단순한 유격대가 아니라 중국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있는 대단한 부대였다.  중국은 도로사정이 열악한 개마고원쪽으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정 대장은 제 11기갑사단의 후퇴전에서 세운 공과 현재의 감투정신을 육군본부에 보고해서 차 중령의 대령 승진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적은 월동장비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겠지만, 11월에 눈이 온다는 생각을 미처 못한 모양 입니다."

  박 정석 상장도 낙관적인 견해를 밝혔으나 김 병수 대장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인민군도… 겨울에는 기동이 극도로 제한됩니다. 도로 사정도 길티만 전차래 다들 낡아서…"

  "그건 걱정마시오.  우리가 전차구난차와 민간에서 징발한 불도져 등을 보내 드리겠소. 현재 전선으로 이동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건 차수님이 어제 아침에 제게 말씀하셔서 준비한 것입니다만…  차수님의 신경통은 정확한 모양입니다. 하하.  일기예보에는 일주일간 눈이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정 지수 대장의 말에 참모들이 호쾌하게 웃었다. 20세기가 거의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도 과학적인 일기예보보다 노인의 신경통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차수도 싫지는 않은 듯 투덜거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양 중장이 뭔가 꾸미는 것같은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알아도 되겠소?"

  정 대장이 참모들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에  양 중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양 중장이 최근 참모본부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정 대장이 한번 찔러본 것인데 의외로 양 중장이 웃으며 순순히 털어놨다.

  "첫째는… 하하하. 이 눈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차수님의 신경통이 도진 것이 아니죠."

  양 중장이 참다못해 배를 잡고 웃었다.이 차수도 결국 껄껄거리며 웃었다. 사정을 몰랐던 참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요? 그럼 인공강우? 아니, 눈이니 강설이군. 이게 우리 기술로 된단 말이오?"

  김 병수 대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피스의 짜르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도 인공강우는 계속 시험해왔지만 정확한 지점에 정확한 강수량을 보장하지 못해 기상이변이 속출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 바로 인공강수였다.잘못하면 한 곳에 집중호우, 다른 곳에는 가뭄을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웬만한 상황에서는 실시하지 않는 시험이었다. 양 중장이 참모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예, 평안북도 선천과 구성쪽은 차 중령과 저격여단이 훌륭하게 보급선을 차단하고 있지만, 중국은 만포-강계-희천을 연결하는 선에 보급선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고지대들인만큼 폭설의 영향은 더 커질 것입니다. 아마 산발적인 보급부대 폭격보다는 훨씬 효과가 크겠죠. 그렇게 되길 기대합니다만,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중앙기상대는 이 지역에서 30cm 이상의 적설량을 예보하고 있습니다.아까 낮에 서해상으로 출격한 수송기 편대가 그들입니다. 고공에서 넓은 구름대에 요오드화은과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눈의 씨앗을 살포한 것이죠."

  "음… 훌륭하오. 그럼 두번째는 무엇이오? 양 중장…"

  기상상황을 중요시하는 공군 출신인 양 중장이 낼만한 아이디어였고, 이를 중앙기상대와 과학기술원의 전산팀,그리고 공군 CN-235M 수송기들이 합작하여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다. 양 중장이 두번째 질문에 대답하려다가  참모들의 부관들과 통신팀원들을 상황실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했다.양 중장이 짜르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를 믿기로 했는지 대답을 시작했다.

  "두번째는 중국군의 중앙컴퓨터에 관한 것입니다. 구 소령과 김 소령 들어오게!"

  양 중장이 인터폰을 눌러 두 대학생 해커들을 불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나타나 브리핑석에 서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참모들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소령들이 설명을 마치자 양 중장이 요약을 했다.

  "그렇니까 우리는 중국의 중앙전산망을 통해 핵미사일의 발사 암호를 알 수 있으며, 미사일기지에 우리측 요원들을 침투시킬 수 있습니다.그리고 중요한 전황에서  중국군의 전산망을 두번에 걸쳐 마비시킬 수 있고, 이 사이에 우리가 전략적인  공격목표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 민족은 절멸이오, 절멸!  이,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은…"

  정 지수 대장이 그 위험을 생각하며 몸서리쳤다.양 중장이 무거운 어조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중국의 선제 핵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한반도에 침입한 중국군들은 지금 위기에 봉착했으며,  그들의 위기감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계속 상승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이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더라도, 우리가 실지를 모두 회복하게 되면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그전에 미리 막아야 합니다."

  정 대장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왼쪽 벽면에 걸려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상통신을 위한 화면인데 지금은 꺼져있었다. 정 대장이 조용히 참모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대통령이 결정해야할 상황이오. 어쩌면 이것은 중국군 400만 대군의 침공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 있소.그리고 우리 군 요원 뿐만 아니라 다른 정보기관도 관여되어 있는 일이니,  우리의 권한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참모본부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합니다. 적 지대지 미사일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화상통신은 안되오. 일단…"

  이 차수가 나섰다.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을 벗어던지고 차라리 전선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본관의 상관이신 최 광 차수가  대통령 각하를 면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민군에는 차수 위에 원수, 그 위에 대원수가 있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고나서 대원수 자리는 지금까지 공석이 되어 있었고,  원수인 김 정일은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았는데,  3명의 원수가 모두 죽은 지금 인민군 총참모장인 최 광 차수가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 광 차수는 사실상의 군 지휘권을 이 차수에게 모두 위임한 상태였고, 전쟁 수행 중의 정치적인 문제는 홍 대통령에게 거의 일임했다. 자신은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한 북한쪽의 동원문제만 관할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실권을 거의 상실했지만, 그의 양보 덕택에 군 지휘권과 전쟁수행을 위한 행정이 비교적 무리없이 일원화될 수 있었다.

  참모들이 침묵했다. 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이 호석 공군중장이 나섰다.

  "독립된 방공부대가 없는 우리 군의 실정으로 볼 때, 이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일단의 미사일 요격 능력이 있는 전투기로 편성된 요격기부대와 지대공미사일부대를 통합시켜 참모본부 직할로 배치해야 합니다."

  참모들이 끄덕거리고 이 문제들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1999. 11. 20  21:20  평안남도, 안주 남쪽 15km

  중국의 전투기들은 미그-29와 수호이-27 등의 극소수 신예 전천후 전투기들을 제외하고는 폭설 때문에 출격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한국 공군의 전투기들이 전선을 넘어 중국군의 보급로 곳곳을 공습하고 있었다. 통일한국군의 지상군 병력은 폭설과 저격여단의 보급로 차단작전에 의해 갑자기 급속도로 약화된  중국군 방어선 곳곳을 뚫고 천천히 북진하고 있었다.

  국군 제 61 동원사단은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중국군 장갑집단군을 전멸시킨 인민군 815 기계화군단을 따라 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개전 첫날인 11월 17일에 긴급소집된 예비군들이 주축이 되어 이뤄진 61사단은 이틀 동안의 교육과 훈련을 마친 다음, 아침에 기차로 광주를 출발해서 평양에서 트럭으로 갈아타고 오늘 오후에야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양 북쪽인 영유를 통과할 때는 불에 타고 파괴된 수많은 중국군 전차의 잔해들을 보고 이곳이 전쟁터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침에 끝난 전투여서인지 아직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전차도 보였다.  언덕 너머에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전차와 각종 차량,  그리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불에 탄 시체들이 온 들녘을 메웠다.  대부분이 동원예비군들인 61사단 병사들은 중국군 대신에 자신들이 저 모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들판을 내리는 눈이 덮고 있었다.  상공에는 전투기들이 저공비행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또 안주다! 우린 안주로 간다."

  어느 병사가 외치자 트럭에 탄 다른 병사들 사이에 잠시 술렁임이 일어났다. 개전 이틀째에 안주와 신안주 지역에서 큰 전투가 일어나 그곳 전선을 지키던  인민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이제 한국군과 인민군이 힘을 합해 안주 지역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18일과 다른 점이라면 통일한국군이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며,중국군은 순천쪽에서 후퇴한 인민해방군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 배수진을 치며 맞서려 한다는 점 뿐이었다.  이곳에서 다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들이 신안주가 보이는 안주평야의 부서진 한다리(大橋)역 부근에 도착하여 포격이 쏟아지는 이곳에 전개를 시작한 것은 자정이 넘어설 무렵이었다. 이제 1999년 11월 21일이 시작되었다.

  1999. 11. 21  00:30  평안남도 안주 상공

  한국 공군 소속 F-16 전투기의 파일럿인 김 종구 중위는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전쟁이 시작된 11월 17일 새벽에 비상이 떨어진 이후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된 출격 때문에 전투기조종사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적 지대공미사일도 아니고, 적 전투기도 아닌, 쏟아지는 졸음과 피곤이었다.조종사들은 전투기가 점검을 받는 중인 두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잠깐씩 눈을 붙일 수 있었으나, 나머지 시간은 계속되는 요격과 공중지원, 또는 상공엄호임무 등으로 출격하느라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시간이 훨씬 더 적었다.

  수원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F-16 전투기 12대는 지상지원을 하는 F-4E 팬텀기와 A-10공격기들의 상공엄호임무를 맡아 고공에서 적 전투기들을 요격하고 있었다. 뜻밖에 중국의 미그-29 전투기들은 한국 공군의 F-16 전투기들이 두려웠는지,아니면 이 비싼 전투기들의 급속한 소모에 놀라 몸을 사리는지 지상전투가 계속되는 안주 상공에는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안주전선에서는 팬텀기와 A-10공격기들이 신나게 중국군 진지를 두둘기고 있었다.  김 중위는 공격기 편대의 조종사들이 부러웠다.

  중국군의 지대공미사일은 이미 소모되었는지 지상의 포화는 대공자주포의 사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도 곧 팬텀기들에 의해 박살이 나서 지상으로부터의 위협은 사라지게 되었다. 폭격을 마친 공격기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상공에서 보였다.

  편대장의 지시에 따라 중국 전투기들을 향해 각각 4발씩의 암람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전투기 레이더의 조준에 따라 한 발씩 북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레이더를 보니 중국 전투기들이 미사일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회피운동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미사일에 전투기 하나가 잡혔다. 그러나 그 뿐, 중국 전투기들은 저공으로 피하며 북쪽으로 도망갔다.편대장기의 선도로 편대는 수원기지를 향해 비행했다. F-16이 빠진 상공을 인민군의 MiG-23이 대신했다.

  1999. 11. 21  07:30  동해, 독도

  "소속미상의 대규모 함대 접근! 남동쪽 35 km 해상입니다."

  레이더를 맡은 곽 상경이 외쳤다.  독도 경비대장인  안 국선 경위가 레이더를 보니 오른쪽 아래 구석에 수많은 휘점이 보였다. 미국이나 러시아의 대규모 함대가 독도 해역을 통과할 때도 이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아직 영해침범까지는 아니었지만 경제수역을 침범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사전통고 없는 함대의 침범이라니…

  안 경위가 긴장을 하며 곽 수경이 앉은 옆의  통신장비에서 마이크를 들고 통신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여기는 물개, 호박엿 나와라, 오버."

  안 경위가 몇 번 부르자 울릉도의 해군파견반이 무선에 나왔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울릉도 호바~악엿. 무슨 일인가? 오~바."

  울릉도의 무선병이 뱀장수 흉내내듯 목소리를 낮게 깔고 발음을 길게 내었다. 안 경위는 이게 무슨 장난인가 화가 났지만 상황이 급했다. 속으로는 콜사인을 이따위로 정한 해군들에게 욕을 하고 있었다.

  "동남방 35 km 해상에 대규모 함대 급속 접근중! 우리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항공정찰을 요청한다, 오버."

  "알았다. 오버!"

  무선병도 긴장해서 즉각 응답을 하고는 울릉도 해군 파견대장에게 보고했다.  파견대장은 북평의 제 1함대 사령부에 보고하고 함대사령관은 즉시 울릉도 서쪽에서 초계중인 제 12구축함대를 불렀다.구축함대의 함재헬기 2대가 동쪽을 향해 날았다.

  "헬기가 보입니다, 대장님!"

  관측을 맡은 김 수경이 무전기로 수비대장에게 보고했다.  안 경위가 막사 밖으로 나와서 서쪽하늘을 보니 슈퍼 링스 헬기 두 대가 급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헬기들이 독도 상공에서 안심하라는듯 한바퀴 선회를 한 다음에 고도를 높이고 남동쪽으로 날았다.

  1999. 11. 21  08:10  슈퍼 링스

  "수색 시작."

  기장이 적당한 고도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부기장에게 레이더 해상수색을 명했다. 부기장이 기기를 조작하는 중에도 기장은 계속 고도를 높였다. 레이더경보기의 수신음이 삑삑거리기 시작한 거리는 목표에서 약 60 km였다.

  "1만톤급 순양함이 세 척입니다.  기타 다양한 배수량의 함정이 12척에 달하고 있습니다.목표에서 발하는 레이더 전파는 콩고(金鋼)급의 공중수색레이더에서 나온 것입니다.  F밴드인데요?  목표상공에는 헬기가 10여대 떠 있습니다."

  "그럼 또 일본인가?"

  부기장이 보고하자 기장이 기도 안찬다는 듯 말했다.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도 해상에 함대를 연례행사처럼 파견하고 있었다. 올해는 그 빈도수가 많다는 것을 기장도 알고 있었으나 설마 무슨 일이 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국제통신주파수를 이용하여 영해침입의 경고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부기장이 레이더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미사일입니다! SM-2MR형 미사일 2기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부기장이 경악을 했다. 부기장의 외침에 기장은 바로 헬기를 급강하시켰다. 따라오던 다른 헬기도 즉시 강하했다.

  "미친 놈들이… 즉시 함대에 보고하라."

  통신사를 겸한 옆자리의 부기장이 제 12구축함대를 불러서 상황을 보고했다.함대에서는 돌발적 상황에 놀란듯 헬기들에게 지시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미사일이 마하 2의 속도로 접근했다.  헬기는 레이더를 끄고 저공비행으로, 가능한 서쪽으로 급속히 비행했다. 잠시 후 미사일이 날아왔지만, 중간유도인 관성유도 후에는 발사체의 전파에 의한 최종유도를 받아야하는 이 미사일들은  본함의 레이더에서 헬기들이 사라지자 목표를 잃고 서쪽으로 얼마쯤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자폭했다.

  "우리도 한방 쏠까요?"

  부기장이 하픈에 일본함대의 위치를 입력시켰다. 물론 구축함 탑재헬기 기장의 권한을 넘는 문제이니  기장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공격받기만 하고 반격을 못하는 것이 분했다.  사정거리만으로 보면 하픈을 장비한 헬기쪽이 훨씬 유리했다.  대공미사일의 사정거리 밖에서 사정거리가 더 긴 하픈을 날리고 헬기는 도망칠 수 있기때문이다.

  기장이 기다리던 함대로부터의 명령이 내려졌다. 계통을 통해 보고중이니 위협적인 행동을 자제하라는 것이 명령이었다.  이럴 경우 어디까지 보고하는지는 뻔했다. 진해의 해군사령부에서는 합참과 국방부에 보고하고, 국방부는 청와대에 보고할 것이다.  합참은 또 이 문제를 개성의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게 되는 것이 현재의 명령 및 보고계통이었다.

  기장은 일본 이지스함의 대공미사일 사정거리 아슬아슬한 곳인 약 75km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일본함대를 레이더로 수색했다.  여차하면 대함미사일을 날리겠다는 위협이었다. 함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을 들은 부기장이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해를 침범하기 전에는 절대 공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또 다시 대공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말입니다.지금 제 12구축함대가 급거 동진 중입니다."

  부기장이 기가 막힌듯 힘없이 말했다.부기장이 레이더로 보니 일본의 함대는 한국 영해 아슬아슬한 곳까지 접근했다가 급선회했다. 부기장은 일본함대가 영해로 들어오길 내심 기대했지만  기대가 무너지자 짜증이 났다. 거리는 약 50km가 되었으나 기장은 더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영해를 침범할 경우 응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장은 고도를 약간 올려 하픈의 발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사일! 총 4기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기장이 부기장의 외침을 듣자마자 고도를 내리고 잽싸게 서쪽으로 도망갔다.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명령이 명령인지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헬기는 이미 최고속도에 도달해 있었다. 기수가 뾰족하게 생긴 슈퍼 링스 헬기가 수면을 스치듯 날고 있었다.

  "시 킹(Sea King)의 레이더입니다! 데이터링크가 되었을지도…!"

  부기장의 비명이 들려왔다. 기장이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급히 급상승하며 채프를 뿌리고는 급강하했다.이지스함의 대공미사일은 기본적으로 반능동 레이더 유도(Semi Active Homing)를 한다. 대공미사일이나 적기 등, 함대에 접근하는 복수의 위협에 대비하여 우수한 레이더로 복수추적을 하여 격파하는 능력이 있는 이지스함은  대공미사일을 능동유도에 맡길 수가 없다. 같은 목표를 다수의 미사일이 공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이더 전파가 미치지 못하는 수평선 아래로 목표가 숨어버릴 경우 반능동유도를 할 수 없는데, 이럴 경우 탑재헬기에서 레이더를 발사하여 데이터 링크로 자료를 이지스함에 송신을 하면 이지스함이 대공미사일을 유도하게 된다. 한국 헬기들은 일본함대의 탑재헬기인 시 킹 때문에 이제 수평선 아래로 숨을 수가 없게 되었다.

  "1기 회피, 또 접근합니다!"

  부기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기장은 미사일을 피하면 꼭 하픈을 발사하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군법회의에 불려가더라도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만약 자신이 일본의 미사일에 맞아 전사하면 일본은 자신이 일본함대를 먼저 공격했다고 생떼를 부리거나  국제사회에서의 힘을 이용하여 얼버무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분했다. 그리고 그는 미사일의 영공침해도 틀림없는  영토침범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른쪽 상공에 섬광이 번쩍였다.편대기인 헬기가 미사일에 맞아 공중 폭발한 것이다. 기장이 급선회 및 급상승을 하여 간신히 미사일을 따돌렸다.그는 헬기를 급하게 조정하여 고도를 올렸다. 이미 기장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발사!"

  기장이 명령하자 부기장이 얼떨결에 2발의 하픈을 발사했다.  영국의 웨스트랜드사에서 제작한 슈퍼 링스의 한국해군 인도분중  초기형은 시 스쿠아(Sea Scua) 대함미사일 4기를 장착했다.  그러나 이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짧고 탄두의 위력도 약해서, 대양해군으로 발돋움하던 한국해군은 다른 나라들처럼 1997 년부터는 하픈을 탑재할 수 있도록  헬기를 개조했다. 하픈이 목표를 향해 날았다.

  "함대사령관이 나왔습니다. 하픈을 발사했다고 난리인데요?"

  부기장이 보고하자 기장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기미, 지랄하지 말라 그래. 우린 죽기만 하란 말야? 내 말 그대로 전해."

  황당해진 부기장이 기장의 말을 동해함대인 제 1함대사령관에게 그대로 전하는중 부기장이 경악을 했다.

  "적 전투기가 나타났습니다! 미사일 경보!"

  저공으로 한국 영공을 침입한 일본의 F-15J 전투기 두대가 남쪽 상공에서 나타나 가시거리 훨씬 밖에서 한국해군의 헬기에 스패로우 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4발의 스패로우는 채프를 이미 다 써버린 슈퍼 링스 헬기로 쇄도해왔다. 마지막 수단으로 ECM(전자전)을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헬기로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저공비행중이던 헬기가 그대로 물속에 기체를 쳐박았다. 기장은 일본의 미사일에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미사일들이 목표를 잃고 침몰하는 헬기 위를 스쳐 지나갔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부기장은 실신해 있었다.  기장이 문을 열고 헤엄쳐서 자동으로 펼쳐진 구명보트를 끌고서 다시 헬기로 돌아가 부기장을 옮기는 중에 일본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F-15J 전투기가 물 위에 아직 떠있는 헬기에 기관포를 마구 쏘아댔다.  해면에 하얗게 물보라가 튀었다. 수 십 발의 포화를 뒤집어 쓴 슈퍼 링스 헬기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폭발 순간의 강력한 폭풍이 구명보트를 뒤집었다. 전투기들이 상공을 몇 번 선회하더니 동쪽으로 날아갔다.  빈 구명보트 근처에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슈퍼 링스에서 발사된 2기의 하픈은 목표점을 향해 저공으로 날고 있었다.  목표가 입력된 하픈은 관성유도에 의해 마하 0.9의 속도로 순항했다. 목표 전방 5km에서 급상승하여 레이더를 키고 가장 큰 목표를 향해 자동적으로 돌입했다.

  미쯔비시 조선소에서 건조된 콩고급 2번함인 기리시마가 하픈의 요격에 나섰다. 기리시마 함미의 수직발사기에서 스탠더드 SM 2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하픈의 궤도가 급강하하자 스탠더드는 모두 빗나갔다. 일본의 함대에서 마지막 방어수단인 채프로켓을 발사하며  팰렁크스 대공포를 연사했다. 그러나 레이더로 자동유도되는 대공포도 고도를 급격하게 바꾸며 날아오는 10평방센티미터의 작은 표적을 맞추지는 못했다. 하픈은 탄막을 뚫고 기리시마의 함교에 명중했다. 폭발의 충격이 함을 휩쓸고 대화재가 발생했으나 침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함은 순식간에 전투불능이 되었다.  각종 관제장치를 통제하는 컴퓨터가 있는 함교와 3차원레이더를 잃은 이지스함은 물위에 떠있는 고철과 다름없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수병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북쪽에서 항주중이던 시라네급 구축함 구라마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 함미의 헬기 플랫폼을 위로부터 뚫고  들어간 하픈은 함의 가장 밑바닥에서 폭발했다. 선체의 상부는 화재, 하부는 침수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구라마는 함미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다.  붉은 원을 그린 헬기들이 함대 위로 날았다.

  1999. 11. 21  08:25  제 12구축함대 기함 강원함

  헬기로부터의 보고가 끊기자  동해함대의 분함대인 제 12구축함대 사령관 이 승호 해군준장이 당황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마당에 일본과 이런 사태가 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일본이 이 사태를 이용해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으며, 일본의 의도대로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슈퍼 링스로부터 받은 자료를 검토해 보니, 독도 부근의 일본함대는 한국동해함대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통일참모본부에서 호출입니다."

  통신사관이 회선을 넘겼다.이 준장이 상황을 보고하자 잠시 회의하는 듯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더니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차수요.지금 우리는 일본과 일전을 겨룰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소. 참으시오. 귀항하시오.]

  "차수님…그들은 영공과 영해를 침범했습니다… 그리고 독도가 위험합니다. 일본 함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준장은 설마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이 또 터지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찢기고 마오. 분쟁 방지에 모든 력량을 동원하시오. 독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상황에서 우리는 참을 수 밖에 없소.]

  "… 알겠습니다. 차수님. 하지만 저들은 그냥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준장이 통신기를 놓고 함대에 귀항을 명령하자마자 바로 독도에서 연락이 왔다. 이 준장이 받았으나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돌아가면 어떡합니까? 저들은 계속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방금 전투기들이 기총소사를 했고 헬기와 일본함대가 접근중입니다. 전사 한 명에 부상자가 두 명입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중상입니다!]

  "안 경위. 상부에서는 현재 일본과의 일전을 회피하기로 결정했소.귀관이 나라와 겨레를 생각한다면… 응사하지 않기를 바라오."

  [우린 죽어도 좋소! 하지만 독도를 포기할 생각이란 말이오? 설마!]

  안 국선 경위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있었다. 갑자기 회선 연결상태가 악화되더니 무선이 중간에 자꾸 끊겼다.

  [일본 헬... 치직~ 미사.. 칙!]

  이 준장이 통신기 옆의 기둥을 주먹으로 쳤다.주먹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통신기에는 잡음이 잔뜩 실린 채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통신실의 수병들이 따라부르기 시작하더니 함내에 퍼져 울렸다. 원래는 코믹한 리듬의 노래였지만 지금은 장엄하게 들렸다.

  1999. 11. 21  08:30  독도, 서도(西島)

  "함대에서는 우리더러 응사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명령했다."

  안 경위가 침통한 목소리로 상부의 명령을 부하들에게 전했다.  바깥에서는 일본 전투기에서 투하한 폭탄과 일본함대의 함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연이어 작렬하고 있었다. 관측소에 있다가 중상을 입고 독도 서도의 남쪽 동굴로 후송된 김 수경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독도의 다른 섬인 동도에 나가있는 대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기있는 전투경찰들은 아무도 몰랐다.통신실과 식량창고를 겸한 레이더실이 폭격에 파괴되고 내무반으로 쓰는 막사도 불에 타고 있었다. 한국 해군이 구원을 오지 않는다면 이들은 죽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포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냥 죽기는 억울합니다. 싸워야합니다, 대장님!"

  곽 상경이 주장하자 다른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안 경위도 끄덕였다.

  "그럼 우린 싸우다 죽기로 하지, 헬기 소리가 들린다. 나갈 준비!"

  전투경찰대원들이 자신의 화기를 점검했다. K-2 자동소총과 탄알 108발이 전부였지만 최소한 두 명의 일본군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헬기가 섬 이곳저곳에 내리고 일본어로 외치는 소리와 군화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군화소리가 점점 동굴로 접근했다.

  "나가자!"

  안 경위가 선두에 나서서 눈에 보이는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향해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바로 뒤따라 나선 곽 상경도 자동으로 긁었다.해변 자갈밭에서 수색중이던 일본 육상자위대의 공정단 소속의 자위대원들이 갑작스런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란 절벽 위의 일본군들이 아래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저격수 출신의 피 수경이 무릎쏴 자세로 한 발에 한명씩 쓰러뜨렸다. 총에 맞은 일본군들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자위대의 응사가 시작되자 엄폐물이 없는 자갈밭에 있던 대원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일본 해군의 무장헬기가 동굴 앞쪽에 나타나 포위된 한국 전투경찰을 향해 기관포를 쏘아댔다.

  1999. 11. 21  08:40  평안남도, 안주

  한국 61사단병력은 인민군 815 기계화군단의 엄호를 받으며 신안주를 차츰차츰 조금씩 점령하고 있었다. 중국의 대부분 기갑전력은 한국공군의 공격기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청천강 북쪽의 포병대도 거의 전멸했다. 단지 일단의 패잔병들이 후퇴시기를 놓치고 신안주 시내에 숨어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새벽의 치열했던 전투에 비하면 지금은 무척 평화롭다고 할 수 있었다.

  새벽에 중국군 1개 집단군의 5개 사단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1개 장갑사단을 선두로 한꺼번에 밀고 내려온 그들에게  하마터면 방어선이 무너질뻔 했으나,815 기계화군단이 중국 장갑사단을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여기에는 저격여단의 대전차대대가 합세하고 한국군의 야간전 장비를 갖춘 A-10 공격기도 가세했다.  중국 보병사단들은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왔으나 개활지에서의 인해전술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무수한 인민 해방군이 통일한국군의 기관총에 쓰러졌다. 중국군 공격의 중심이 되었던 국군 61동원사단의 중앙병력이 천천히 후퇴하며 중국군을 유인했다. 대부분이 보병뿐인 중국군은 자루에 담긴 쥐처럼 몰살당했다.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계속 전진해왔다.

  투입된 병력수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었으나, 이는 같은 조건에서의 병력 수 차이가 중요한 것이지 은폐,엄폐물이 전혀 없는 개활지에서의 인해전술을 중국군에게 막대한 손실만 강요했다. 중국군은 한국전쟁 때의 인해전술은  모두 산악지형에서 상대를 포위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전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강행하다가 크게 패배한 것이다. 1개 보병분대의 화력이 2차대전 때 소대 병력의 화력보다 강한 지금,  인해전술은 견고한 평야의 방어선 돌파작전에는 적합치 않았다.

  안주의 너른 들녘에는 3백여대의 중국제 전차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고, 중국군의 시체가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쌓였다.  부상자 후송과 진지 정비를 끝내고 61동원사단 병력이 늦은 아침식사를 시작했다.들녘에 가득한 피비린내와  아직도 파괴된 전차에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 때문에 비위가 약한 군인들이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는데, 어떤 예비군이 ‘비료 안줘도 내년 농사 잘되겠다’고 농담을 하자 모두들 그 자리에서 토하고 말았다. 쌍방의 포격전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안주 주변에는 쌓여있는 눈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포탄에 눈이 녹아 다시 얼음이 되었다.

  안주를 점령하고나서 간밤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815 기계화군단과 국군 61사단, 인민군 보병 3개 사단이 보급과 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빠지고, 대신  국군 제 9기갑사단, 보병 3사단, 63동원사단, 해병 1사단, 그리고 평양지역 방위군의 일부인 인민군의 제 2사단과 5사단이 투입되었다.  통일한국군으로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전선에서의 병력교대였다. 이는 한국군이 드디어 병력에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으며,  중국군의 이동과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청천강 유역으로 전진하는 제 9기갑사단의 전차 안에서 전차대원들이 페리스코프를 통해 청천강을 보았다. 청천강에는 부서진 리본형 부교의 잔해만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 가고 있었다. 백돌고개 앞의 습지 곳곳에는 후퇴하다가 죽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시체들이 노총각 재떨이의 담배 꽁초처럼 구겨진채 버려져 있었다. 9기갑사단의 전차들이 보병과 포병, 그리고 전투기들의 지원을 받으며 서서히 바닥이 마른 백돌고개 앞쪽의 청천강을 건너고 있었다.

  1999. 11. 21  09:30  일본 통막회의

  "저는 조선이 막강한 중국의 침공을 막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조선은 분명히 전력 외의 다른 뭔가가 있습니다. 이런 조선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군을 반도에서 몰아내면 조선군은 틀림없이 열도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병력이 훨씬 열세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자위대 통합막료회의(統合幕僚會議) 회의실에서 항공막료장(航空幕僚長)인 야마다 마사오(山田正雄) 공장(空將)이 해상자위대의 독도점령에 우려를 표했다. 독도의 점령은 자위대로서 보면 실지회복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일본의 영토인 독도를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식민지에 불과했던 한국이 강점했다는 인식을 가진 일본인들은 이번 자위대의 독도 점령을 환영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국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으므로,  결국 한국은 독도를 일본에 양보하게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방위청의 방위국에서 파견된 사토 가쓰미(佐藤勝巳) 조사 제 2과장이 씩 웃으며 한국이 이번 전쟁에서 우세한 이유를 설명했다.  조사 2과는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부서이며, 각국에 파견되어 있는 방위주재관(대사관의 무관)들이 외무성을 경유하여 보내오는 정보와 문서를 분석, 번역하는 임무를 맡는다.

  "조선이 중국에게 이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조선은 중국의 군사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력편성이나 이동상황, 작전계획까지 조선군이 손바닥 들여보듯 훤히 아는데  이기지 못하면 더 이상하겠죠."

  "아니, 그게 무슨 뜻이오?  중국 군사위원회에 첩자라도 있다는 것이오?"

  육막장(陸幕長) 출신인 오부치 게이조(小淵蕙三) 의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토 과장에게 물었다.  다른 막장들도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사토 과장이 의기양양하게 한국이 유리한 이유를 설명했다.

  "조선의 해커들이 11월 19일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중앙컴퓨터에 침입했습니다.중앙컴퓨터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회의록이나 작전명령, 이동계획 등이 모두 입력되어 있으니, 조선군은 가만히 앉아서도 중국군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쉬운 전쟁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위대 장성들이 이제야 이해하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애국심이 투철하고 전략에 뛰어나더라도, 압도적인 중국군 병력과 신무기 앞에서는 일주일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군사전문가들의 의견이었는데, 상황은 반대로 되어 한국군이 중국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있었으니 이들이 의문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평가한 군사전문가도 있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자, 화면을 보십시요."

  사토 과장이 자신의 콘솔을 조작하여 중앙화면을 켰다.  현재 중국군의 병력과 무기체계가 화면에 떴다.  그가 키를 몇번 치니 한중전쟁 직전과 현재의 상황이 비교되었다. 해군의 경우는 심각해서 현재 절반 정도의 전력 밖에 남지 않았으며,  함대로서의 전력을 갖춘 것은 북경 근처의 해역을 책임지는 북해함대 밖에 없었다.

  "중국군은 조선에 패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일본은 조선에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조선의 군사자료까지 모두 입수했으니까요."

  사토 과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막료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토 과장은 대학생 해커들이 중국군 중앙컴퓨터에 침범할 때 일본 통신망의 슈퍼컴퓨터에 미니어쳐를 설치했는데, 정보 2과의 컴퓨터전문가들이 이를 파악해 한국군이 알고 있는 중국군의 자료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한국의 자료까지 입수할 수 있었다.그러나 육해공의 막료장들은 정규군이 아닌 자가 정보만을 믿고 설치는 것이 보기 싫은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에게 전쟁은 저런 민간인이 아닌, 충성심이 강한 군인에 의해 승리가 쟁취되어야 한다는 신앙같은 믿음이 있었다.

  "정보가 아니더라도… 우리 대일본군은 그깟 중국보다 훨씬 강하오. 그리고 지금 조선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느라 전력이 바닥이 난 상태요. 지금이 조선을 정벌하기 쉬운 가장 절호의 타이밍이란 말이오.  육상자위대의 예비자위관들은 이미 소집된 상태고, 중공업은 이미 군수체제로 전환했소.  이제 징병제만 실시하면 되는데 왜 내각은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소?  중국이 아직 반도에 남아있을 때 실시해야 중국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분이 설텐데 말입니다."

  최근에 육막장(陸上自衛隊 幕僚長)이 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 육장(陸將)이 투덜거렸다.

  "중국과 충돌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경우는 삼국이 서로 싸우는 상황이므로 두 나라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라리 중국이 완전 패배한 다음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국과의 전쟁으로 허약해진 한국군은  우리 육상자위대의 전시동원체제가 완전히 갖춰진 다음에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야마다 공장(空將)이 특유의 신중론을 폈으나, 가만 앉아있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해장(海將)이 책상을 탕탕 두들기며 소리쳤다.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조선을 정벌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중국도 우리의 공격을 반길 것입니다.  최소한 반도의 남쪽 절반이라도 우리가 차지해야 합니다."

  "어허~~~ "

  오부치 통막의장이 하토야마 해장을 만류했다. 하토야마 해장은 독도의 한국군과 헬기들이 먼저 공격해서 반격에 나섰다고 주장 했으나, 이를 곧이 들을 의장은 아니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는 수많은 정보분석과 사전준비가 필요한 법인데 소장파 장성들이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수상과 내각은 일단 한국에 일본함대가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일본이 영해를 침범했다며 그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어쨋든 독도는 지금도 일본 해상자위대가 점유하고 있었고, 내각은 계속 시간을 끌고 있었다. 죽도(竹島)에 영원히 히노마루(일장기)가 휘날리게 하고 싶은 것이 모든 일본인의 바램이었다.

  "선전(宣戰)의 권한은 중의원에 있으니 기다리시오.  그리고 더 이상의 도발은 자제하기 바라오. 겨우 헬기 두 대 격추하고 우리 함대는 두 척이나 당하지 않았소?  그것도 2천억엔 짜리 이지스함이라니… 도대체 손익계산이 어떻게 된 것이오?  엄청난 손해가 아니냔 말이오."

  의장이 날카롭게 하토야마 해장을 질타했다. 해장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의장은 소장파 자위관들 때문에 군에 대한 문민우위의 원칙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전환점마다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국민을 불행에 빠뜨렸었다. 의장은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도 독도를 회복하길 바랐다. 패전 이후 지금까지 지켜온 전수방위(專守防衛)의 원칙을,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꼭 지키고 싶었다.

  의장이 갑자기 생각난듯 인민군이 보유한 중거리 유도탄의 현황을 물었다. 핵탑재가 가능한 스커드형 미사일의 파생형인 노동 1,2호나 대포동 미사일 등은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야마다 공장은 일본열도의 전역방위체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지금 이 미사일을 완벽하게 요격할 수는 없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해장은 북한에 핵이 없으니 그 정도의 피해는 감수하자고 주장했다. 오부치 의장은 도쿄에 미사일이 낙하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시절 도쿄 상공을 비행하는 미군 B-29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1999. 11. 21  10:30  황해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통일참모본부는 일본의 독도 무력점령을 국민들에게 감추려고 했으나 이미 통신이 국제화한 이때,  이런 문제는 절대로 비밀로 지킬 수 없었다. 독도가 일본에 강점되었다는 소식이 국제전화와 컴퓨터통신망을 통해 순식간에 국민들 사이에 퍼졌고, 독도수비대원들이 한국군의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홀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이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과 중국을 싸잡아 비난했으며,  저항 한번 없이 독도를 순순히 내준 군 지휘부를 격렬히 비판했다. 컴퓨터 통신망에는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의 갖가지 격문이 뜨고,  언론사에도 국민의 의견이 빗발쳤다.  일본의 독도 점령은 의외로 국민의 의분을 자아내어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일단 중국군을 몰아내고 보자는 여론이 급속도로 형성되어 예비군 소집 대상도 아닌 나이든 남자들과  젊은 여자들의 군입대가 급속히 늘어났다. 각지의 임시모병소와 군부대 앞에는 입영지원자들이 쇄도했다.국방부는 일단 전선에 여유가 생긴 상황이므로, 이들이 가진 기술과 건강 상태 등을 따져 선택적으로 입영을 허가했다.  이들을 철저히 교육시킨 다음 전황을 보아가며 전선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한국전쟁 때처럼 총 한방 쏘아보지 않고 전선에 배치되는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각 지방의 공업단지들은  급속히 군수산업으로 전환되어 속속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의류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즉시 군복 생산에 들어갔다.  피스의 함대가 중국에 대한 역해상봉쇄를 실시한 다음부터 말레이시아 등의 항구에서 대기하던 화물선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원료나 원자재난은 해결되었다.

  참모본부 상황실의 좌측 통신용 화면에 대통령이 나타났다.그동안 묵묵히 통일참모본부를 옹호해왔으며 신중하기로 유명한 홍 대통령도  그런 결정을 한 참모본부에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통일참모본부에 독도의 무력회복을 명령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차수가 허허 웃으며 대통령의 불평을 들어주고 있었다. 이 차수는 대통령을 보며 육군병장 출신의 젊은 사람치고는  상황판단이 냉철하다며 감탄했다.  이 차수는 대통령에게 전혀 설명할 필요도 없었으며, 대통령은 미리 보고하지 않은 것만 이 차수를 탓할 뿐이었다.

  "씁쓸한 비난의 화살이로군요."

  홍 대통령과의 화상통신이 끊기자마자 양 중장이 투덜거렸다.

  "내래… 약소국에서 태어난 사실에 비애를 느낍네다."

  김 병수 대장도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은 일본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일본은 너무 비겁하군요. 언젠가 꼭 죄과를 치룰겁니다."

  "그건 그렇고… 준비는 잘되어 가오?"

  이 차수는 이미 예상했다는듯,  홍 대통령의 불만같은 것은 신경쓰지도 않고 양 중장을 보며 준비상황을 체크하길 바랬다.치밀한 양 중장이 훈련상황과 침입예정루트를 참모들에게 보고했다.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거려 동의를 표했다. 정 지수 대장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도대체 이 작전 자체가 두려웠다. 대통령의 결정은 삼군총장과 합참의장,국방부 등의 라인은 비밀유지를 위해 소외시킨 채,  통일참모본부의 건의 형식을 빌어 홍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망설이는 대통령을 인민군의 최고실력자이며 참모장인 최 광 차수, 아니,  오늘 아침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산당 중앙상무위원회에 의해 원수로 추대된, 최광 원수가 설득하여 겨우 재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암호명 [장마]라고 명명된 이 작전에는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와 인민군의 정찰연대가 동원되었고, 이들의 호송은 한국해군의 잠수함대가, 그리고 루트 개척은 해군 UDT가 맡았다.  그들은 정규군은 아니지만 이번 한중전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중요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모든 한국인의 미래를 건 건곤일척의 승부수였다.

  1999. 11. 21  11:10  경기도, 동두천기지

   선천에서 패배한 국군 제 11 기갑사단의 잔여병력과, 안주에서 크게 당한 인민군 820 기계화군단의 일부 병력을 기간병력으로 하고, 남북의 전차대원출신 예비군들을 소집하여 긴급편성된 통일한국군 지상군의 첫 번째 부대인 제 1기갑사단이 러시아제 T-80 전차를 선두로 기지 정문을 지나 도로에 나섰다.  제 1 기갑사단은 각각 전차 51대로 이뤄진 4개의 전차대대, 155밀리 자주곡사포와 MLRS로 이루어진 포병연대, K-200보병 전투차가 중심이된 2개의 기계화보병연대, MD-500의 정찰형과 전차공격형 헬기로 이뤄진 항공대대,  그리고 기타 공병단과 기갑정찰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흘간의 교육과 훈련으로  예비군이며 광고회사의 대리였던 변 승재는 부족하나마 어느 정도 러시아제 화기관제장치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변 승재는 전차 안에서 바깥을 보며, 혹시나 한국군이 오인해서 전차를 공격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부산에서 편성된 제 2기갑사단은 미국산 M-1A1 에이브럼스 전차로 편성이 되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깐깐한 인민군 군관을 전차장으로 모시지 않아도 될테니…’

  이제 다시 군으로 돌아가 변 하사가 된 변 승재는  포탑 위에 상체를 내밀고 있는 전차장을 힐끗 돌아보았다. 전차중대장인 그는 현역이라는데도 나이가 40은 되어보였다. 자기 말로는 전사출신 군관이라고 했다. 한국군으로 치면  이등병이 계속 군문에 종사하여 대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변 하사가 끔찍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 1 기갑사단은 북으로 전진해 임진강을 건너 전곡에 도착, 다시 서쪽으로 계속 달려서 개성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사리원과 평양을 거쳐 안주로 향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안주는 이미 통일한국군이 수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30대의 전차와 450대의 보병전투차, 그리고 기타 자주포와 보급트럭 등의 긴 행렬로 이뤄진 제 1기갑사단은  한 지점을 지나가는 데에 3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1999. 11. 21  13:50  평안북도, 박천 남방 10km

  폭설은 중국군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전진하는 통일한국군에게도 방해물이 되었다.선두에 선 해병 1사단의 전투공병단이 불도져로 눈을 밀어내며 전진했다.  전쟁이후 첫 전투참가인 이들은 웬 노가다냐며 투덜거리며 도로의 눈을 밀어냈다.  공병단 앞에는 수색중대가 정찰을 하고 있었으나 적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많던 중국군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공에 F-16의 호위를 받는 팬텀기들이 굉음을 울리며 북쪽 상공으로 날아갔다.  곧이어 대공포화 소리와 함께 폭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병 1사단은 이제 곧 전선에 도착하는 것이다.

  "적은 평안북도의 운전, 박천, 영변, 희천을 방어선으로 고착시킬 태세입니다. 그 이남의 적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우리 사단의 목표인 박천에서 선두 부대가 강력한 적의 반격에 직면했습니다."

  이동지휘차 안에서 작전참모가 사단장에게 통일참모본부로부터 온 작전계획서를 설명했다. 사단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통참은 우리 사단이 너무 돌출해 있으니  잠시 대기하라는 명령입니다.평남의 개천을 점령한 아군 2군단은 아직 청천강을 도하하지 못했습니다. 군단사령부에서는 박천의 반포위를 명했으나 공격은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반포위하면 당연히 전투가 개시되는 법…  어떻게 기다리기만 하라는건가?  음… 선두 부대를 철수시키게. 기다리기로 하지."

  사단장의 명령에 박천 남쪽을 공격중이던  해병 1사단의 선두 대대가 투덜거리며 철수했다.  해병 1사단의 병사들은 언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연신 북쪽을 쳐다봤다.  저곳에 자신의 뼈를 묻을지도 몰랐으나 승리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전선에 긴장감이 쌓인 적막이 찾아왔다.눈은 산과 들을 덮으며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1999. 11. 21  22:40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

  밤이 되자 다시 저격여단 야간전대대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특수부대는 정찰병들이 곽산 인근에 대규모 중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알려오자 이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이동중이었다.  본대가 정찰대와 만나기로한 야산에 도착하자 대기하던 정찰병들이 왔다. 어둠 속에 보이는 그들은 눈밭 위에서 하얀 위장복을 입고 꿈결 속의 유령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대원들이 그들의 접근을 막고 수하를 했다.

  "암호!"

  "내가 잠들면 누가 밤을 노래하리."

  구 소련 페레스트로이카의 대중문화적 선구자인 락 스타 빅토르 최의 노랫가사는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암호였다. 암호치고는 엄청나게 길었지만, 대신에 상대방의 억양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용되었다. 정찰병들이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적 부대는 보병 1개 여단입니다. 전차 등의 중화기는 없지만 경계는 비교적 엄중합니다."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간전대대가 위명을 떨침에 따라 중국군 부대는 대낮보다는 밤에 경계를 더 철저히 해서  야간전대대가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달이 완전히 지므로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둠은 이들의 신앙이었다.  아직도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초겨울의 눈 치고는 상당히 오래 내렸다.  대대장이 내뿜는 입김이 하얗게 서려올랐다.

  대대장이 정찰병을 따라 야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망원경으로 중국군 주둔지를 보니 부대 주변이 대낮같이 환했다.

  "야, 이기 눈부셔 못보갔구만."

  "감도를 줄이십시요. 대대장 동지."

  대대장이 망원경의 광량조정장치를 조절하여 어둡게 했다. 이들은 어둠에 더 익숙하므로 밤에도 일반 망원경으로 본다. 인공적인 조명이 있는 곳을 볼 때는 망원경으로 들어가는 빛의 양을 줄여 볼 수 밖에 없었다.

  "저것들, 잘 때도 불을 안끄고 잡니다. 막사 주변을 철조망으로 치고 30미터마다 전등이 달린 전봇대가 하나씩 있습니다."

  정찰병이 말하자 대대장이 끄덕거렸다.

  "20메다마다 참호에 두 명씩 있구만. 이 간나이…  쓰…"

  "꼭 우릴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1개 대대는 순찰활동하고 있습니다."

  "길타고 안티기도… 어제 그놈들보단 낫디만… 가자우."

  대대장이 중대장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전멸은 못시키더라도 타격을 주자는 의견이 다수였다.대대장도 전선에서 피흘리고 있을 동지들을 생각하니 초조했다. 결국 공격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이윽고 달이 기울자 야간전대대 대원들이 움직였다.달없는 밤의 움직임이었지만 이들은 신중했다. 어제의 실패가 모두를 신중하게 했다.

  어제는 적 부대에 접근중 청음초소의 중국군 초병들에게 발각되어 공격도 못해보고 후퇴했었다.  선발대가 중국군 초소에 접근하던 중에 한 대원이 살얼음을 잘못 밟아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난 것이다. 중국군의 주둔지에 비상이 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그러나 미처 공격진형을 갖추지 못한 야간전대대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적의 추격을 피해 약 30km를 북쪽으로 후퇴한 후에, 대대장이 처음 소리를 낸 대원을 즉결심판했다. 소음권총에 의한 총살이었다. 그 대원은 자결을 간청했지만 대대장이 들어주지 않았다.대대장이 권총을 뽑아 그의 머리에 대고 한 발을 쏘았다. 다른 부하들이 즉시 땅을 파고 시체를 묻었다.그리고 그 위에 눈과 썩어가는 낙엽을 덮어 위장했다.

  이 부대가 정주에 나타난 것은,  중국군의 추격도 피하고 상대적으로 경계가 덜한 청천강 북쪽의 적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여단본부와의 무선은 끊어진지 이틀이 지났고, 임시 비트가 적에게 탄로나서 휴대한 비상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어제의 야습이 성공했더라면 대원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아니,  그들의 식으로는 밤새도록 굶고 있었다.

  대원들이 중국군 주둔지로 1분에 1미터씩 조심조심 접근했다.적의 야시경이나 적외선 스코프에는 걸리지 않는다. 소리만 안내면 되었다. 선발대가 전등이 약 100미터 가량 설치되어있지 않은 캄캄한 참호 앞쪽으로 갔다.  참호 밖에는 워낙 추워서 그런지 중국군 경비병이 총을 메고 나와 발운동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전사가 뛰어가 경비병들을 덮쳤다. 참호 밖의 경비병은 목이 부러지고, 참호 안의 경비병은 도끼에 머리를 맞고 죽었다. 참호를 점령한 전사들이 신호를 했다.

  선발대인 소대가 천천히 참호로 가고, 이를 확인한 본대도 서서히 움직였다. 대대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중국군 주둔지로 접근해 가는데 갑자기 조명탄이 올랐다. 조명탄은 선발대가 접근 중인 참호 앞이 아니라 본대 위로 떨어졌다.

  "함정이야!"

  사방에서 기관총 소리가 콩볶듯 들려왔다. 전차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조명탄을 정면으로 본 대대원 몇명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전차포가 이들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여 대대는 섬광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야간전대대는 창설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중국군 특수부대인 권단 제 3려(여단급)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고 이들을 청천강 이남에서 부터 추격해와서, 이 곳에 위장 주둔지를 만들어 놓고 매복한 것이다.  이들은 최첨단 대인레이더를 탑재한 보병전투차 3대와 헬기, 전차 등 완벽한 준비를 하고 이들을 맞았다.대인레이더는 기존의 대인레이더와 달리 적외선레이더 중에서도 고감도의 도플러식 레이더였다.  대용량의 컴퓨터가 있어야 이동하는 데이터에 대한 발견과 처리가 가능한 이 레이더는 미국이 최근 개발한 신무기여서 야간전대대의 적외선 흡수 전투복은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권단은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부대였다. 부대 이름부터가 권단(拳團)인 특수부대였다.

  야간전대대원들은 일단 야간고글의 광량조절장치를 조작해 최대한 어둡게했다.  다시 수 십 발의 조명탄이 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써치라이트를 킨 헬기들까지 가세해 공중에서 기관포를 쏘아댔다. 대원들은 눈을 다칠까봐 헬기를 향해 응사하지도 못했다.  아까운 대원들이 낙엽처럼 쓰러져가는 모습이 대대장의 핏대선 눈에 보였다. 이들이 이 정도로 어둠에 적응하기까지는 5년 이상의 훈련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이 모두 쓰러지면 인민군은 최소한 5년 동안은 제대로 된 야간전대대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대장 동지,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승에서 뵙자고요."

  부관이 대대장을 측은한 눈으로 보았다.대대장도 이제 끝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고 싶었다.  대원들이 대대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응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이제 당분간 밤에 나다닐 수 없게 되었다. 암적응을 하려면 최소한 사흘의 야간훈련이 필요했다. 물론 살아남더라도…

  대대장이 주위를 살펴 적의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디인가 확인하고 돌격을 외치려는 순간 다른 폭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상공의 헬기들이 공중폭발하며 추락했다.  헬기들이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혼란에 빠져 사격을 멈추고 급상승해서 적을 찾으려 했으나  사격하기 더 좋은 위치만 내준 꼴이었다.다시 5대의 헬기가 추락하고 칠흑같은 하늘에는 더 이상 비행하는 물체는 없었다. 이제 공격은 전차에 행해졌다. 중국제 T-82들이 허망하게 폭발했다. 권단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우군입니다. 대대장 동지!"

  "기다리라우. 이런 곳에 아군이 있을리가…"

  대대장이 주변을 둘러보자  소총의 사정거리 넘어 멀리 전차 몇 대와 구형의 장갑차들이 보였다. 전차는 국군의 K-1인 88전차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장갑차는 인민군의 BRDM이었다. 하지만 병력은 별로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대대장이 안팎으로 포위된 중국군에 응사하며 상황을 살펴 보았다.

  "이 지역에 남반부 땅크라니,  길고 겨우 저 인원으로 역포위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중국군 권단은 사방에서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탄에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대대장은 자신이 중국군 지휘관이라면 이 상황에서 결코 후퇴하지 않겠지만 중국군들은 후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중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막사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그들이 떠난 곳에는 수 십 대의 전차와 보병전투차가 불타고 있었다. 중국군이 후퇴한 반대방향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나 꼭 자신들을 부르는 불빛같아서 그 쪽 언덕으로 움직였다. 중국군을 공격했던 부대는 계속 전투중이었다.

  "귀관은 누구십니까?"

  비교적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한국어라서 대대장이 기뻐 어쩔줄 몰랐다.  주변에는 참모로 보이는 몇몇이 전투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저격여단 야간전대대장 황보 일 중좝네다!"

  대대장이 부동자세로 경례하며  어둠 속의 사나이를 보았으나 어두워서보이지 않았다. 야간전대대원이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못알아 본다는 것은 치욕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야간고글의 광량조절장치를 아주 감도가 낮게 조정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조절하여 보니 엉뚱하게도 자신 앞에 국군 중령이 있었다.

  "저는 제 11기갑사단 제 3전차대대장 차 영진 중령이며 현재는… 홍 대좌, 우리 사단 이름이 뭡니까?"

  차 영진 중령이 홍 대좌를 불렀다.홍 대좌가 씩 웃더니 아직 사단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차 영진 부대가 어떻갔시요? 이미 사단병력을 훨씬 넘어버렸으니 사단이라는 명칭도 못쓰갔습네다."

  차 중령이 아연실색했다. 북한은 항일빨치산 시절부터 유명한 지휘관의 이름을 부대에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  우수한 부대일수록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부대이름으로 삼았으며, 부대원들은 이를 명예로 받아들였다.  북한의 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부대 이름에 부대장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 주석만이 할 수 있었고,  이럴 경우 그 부대는 집단 영웅칭호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 주석은 11월 17일 새벽에 중국군 특수부대에 의해 죽어서 현재 북한에는 당 주석이 공석이므로, 부대장 이름을 부대 이름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차 중령은 자신의 이름을 부대 이름으로 삼기는 싫었다.

  "그건 안되고… 우리 부대 이름은 북부군으로 하죠."

  그가 사관학교 생도시절에 재미깊게 읽은 소설인 남부군을 따서 북부군이 어떻냐는 의견을 내자 참모들이 좋다고 맞장구쳤다.  중국군 점령 지역인 북부지방에서 활동하는 유격부대이니 그들에게 북부군이라는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그리고 부대 규모를 상당히 과장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지금도 이들의 부대는 보병 1개 사단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의주와 안주 사이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중국군은 병참선을 멀리 만포, 강계, 희천으로 우회시켰으나 지금은 폭설로 인해 보급부대가 산간지방 곳곳에 고립되었다.  고립된 중국군 보급부대는 인민군 저격여단과 피점령지역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패잔병들과 민간인 유격부대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긴데… 저 종간나이들을 어드레케 할겁네까?"

  야간전대대장인 황보 중좌가 중국군 주둔지를 가리켰다. 주둔지에 맹렬한 박격포 공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차 중령이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만 했다.

  "전멸시켜야죠. 저들은 특수부대입니다."

  "어드러케요?"

  황보 중좌가 놀라서 물었다.  아무리 봐도 병력은 얼마 없어보이는데 어떻게 적을 친단 말인가? 중국군 주둔지의 전등은 이미 꺼져서 캄캄한 가운데 예광탄과 포탄만이 꼬리에 불을 끌며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지금 공격은 단지 양동작전일 뿐입니다.  한곳에 몰아넣었으니 이제 전멸시키면 됩니다. 참, 황보 중좌님의 혁혁한 전과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차 중령이 잠시 중국군 주둔지 주변을 망원경으로 살피더니  황보 중좌를 지휘차량 쪽으로 안내했다. 차 중령이 황보 중좌의 부하들을 이쪽으로 이동시키라고 하자 인민군들이 야간전대대원들을 중국군 주둔지가 안보이는 쪽으로 이동시켰다.

  "야간전대대의 위명은 이번 전쟁 중에 익히 들어왔습니다. 섬광에 귀중한 눈을 노출시켜서는 안되겠죠."

  황보 중좌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차 중령을 보니  그는 씩 웃고 있었다.  그 직후에 섬광이 번쩍이더니 엄청난 폭음이 계속 울려왔다. 땅이 큰 지진이 난 것처럼 울렸다.  황보 중좌가 놀라 언덕위로 올라가서 주둔지쪽을 보니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고  황량한 벌판만이 불에 타고 있었다.

  "이기… 어드레케 된깁네까? 내레 꼭 무시기 마술을 본… 혹시… 전술핵입네까?"

  "아닙니다. 밤에만 가능한 트릭… 아니, 속임수죠."

  차 중령이 정정했다. 인민군들은 한국군이 영어를 자주 쓰는 데에 불만이 많다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차 중령도 교육 당시에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자신도 실수를 한 것이다.

  "헬리콥터에서 MK82-0 SLICK이라는 대형폭탄을 투하했습니다. 폭발력이 굉장하죠? 원래는 활주로를 건설하려고 준비해둔 폭탄이랍니다.이걸 중국군들 머리에 몇 발 떨어뜨린거죠."

  황보 중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헬기에 대한 대공사격을 막고 중국군을 한곳에 몰아넣기위해 지금까지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을 한 것이다.  대대장은 한 수 앞을 보며 전술을 짜고 아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적을 순식간에 일망타진하는 차 중령이  보통 군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황보 중좌는 자신의 처지를 불현듯 깨달았다.  야간전대대는 중국 특수부대의 주요 표적이 되어 계속 쫓기고  보급품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오늘 일을 보니 자신의 대대는 거의 한계상황에 다달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을 따라가면 일단 부대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듯 했다.

  "저… 저를 휘하에 두실 수는 없겠습네까?"

  "아이고, 휘하라뇨. 같이 협력합시다."

  "감사합네다. 대장 동지!"

  저격여단은 그동안 외로웠다. 여단과의 연락이 끊겨 전황을 알 수 없는데다가 추격까지 받고 식량도 떨어져 비참한 상황에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차 중령의 부대와 황보 중좌의 대대가 차량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차 중령의 부하들은 의외로 많았다. 구석구석에서 계속 꾸물거리며 기어나왔다. 자신의 부대원보다 10배는 더 많아 보였다.황보 중좌는 이 많은 병력이  자신의 눈을 속이고 매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차량은 꼬리를 물고 계속 북으로 달렸다. 황보 중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에 중국군은 없습네까?  이렇게 차도로 다녀도 되는겁네까?"

  황보 중좌와 같은 지휘차에 탄 차 중령이 설명했다.  차 중령의 부대는 예비군이지만  효과적인 유격전을 수행하여 정주 북쪽의 몇 개 군이 해방구가 되었다는 것과,아까 전멸시킨 중국 권단은 이 지역을 잘 모르기 때문에 겁도 없이 들어왔다는 설명이었다.  야간전대대가 먼저 공격하여 자신도 당황했다는 말도 해주었다.

  "물론 밤에만 해방구이지 낮에는 중국전투기들 때문에 차도로 이동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대공무기가 빈약하니까요…"

  황보 중좌가 그래도 이게 어디냐는듯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한가지 의문을 풀고 싶어 차 중령에게 물었다.

  "지휘관 동지의 부대는 중국군이 공격을 안합네까? 저흰 계속 추적을 당해왔습네다만…"

  "아…  평안북도 동쪽 지역의 중국군 병참선에 2개 집단군이 경비중이라고 합니다.중국군은 아마도 전선보다는 후방이 더 껄끄러웠던 모양이죠. 하지만 이쪽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신의주 남쪽까지는 경계하지 않고 차량으로 움직입니다.  청천강을 돌파해서 남쪽의 전선과 연결 해볼까 했는데 아직은 힘들겠습니다. 위성수신 텔리비전을 보면 전황이 상당히 호전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직…"

  선천이 가까와질수록 차 중령은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제대로 피난을 갔을까, 혹시 무슨 안좋은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고민되었다.  선천 북쪽의 민간인은 중국군의 신속한 점령에 모두 점령지에 남았으나, 선천 남쪽의 민간인들은 제 11 기갑사단이 중국군을 막는 동안 피난을 갈 수 있었다.

   아마 서울의 친정에 가 있겠지… 전쟁이 빨리 끝나야…

  선두의 차량행렬이 선천 남쪽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인민군 초소에서 불빛으로  요새에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언덕에서 보이는 선천 시가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차 중령이 한숨을 쉬자 황보 중좌가 그의 눈치를 보았다.

  1999. 11. 22  01:30  평안북도, 선천

  이윽고 선천의 부대가 선천의 대목산에 도착하여  부대전체가 차량째 지하 차고로 들어갔다. 황보 중좌가 이 요새의 시설을 보고 감탄했다.

  "하하! 인민군이 만든 요새입니다. 모르셨군요?"

  차 중령이 유쾌하게 웃자 황보 중좌가 쑥스러워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예비역 군관들이 황보 중좌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차 중령도 좋아했는데, 나이든 노농적위대나 훈련이 부족한 교도대원들 보다는 이들 특수부대원들이 들어와 부대의 전력에 크게 보탬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기 누기야?  황보 일 동무!"

  회의실 문이 열리고 반백의 군관이 들어왔다.  황보 중좌와 야간전대대의 중대장들이 즉시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여단장 동지!"

  그는 저격여단장 최 대좌였다. 황보 중좌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래, 고생했구만. 동무."

  최 대좌가 황보 중좌의 어깨를 치고 자리에 앉았다.  계속 자신을 보고있는 황보 중좌에게 설명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최 대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레 묘향산에서 산악전 1대대와 함께 죽도록 싸우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지비.우리 사단장 동지께서 워낙 영명하셔서 이번 전쟁은 아마 우리가 이길거야~. 동무들도 걱정말라우."

  최 대좌가 호쾌하게 웃었다. 최 대좌는 인민군이고 차 중령보다 계급도 높았지만 이미 차 중령이 사단장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급자가 있더라도 규정상 차 중령이 계속 사단장을 하게 되었다.  최 대좌는 처음엔 하급자인 국군 장교의 명령을 받는 것이 싫었지만  계속 전투를 치뤄본 결과, 차 중령은 대단히 훌륭한 전술가라는 판단이 서서 충심으로 그를 받들고 있었다.

  야간전대대의 사병들은 실로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숙소를 배정받은 그들은 아직 잘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요새를 구경하고 보초들에게 최근 전황을 물으며 신나게 떠들었다.초병들은 광도가 낮은 전등불빛에도 눈부셔서 색안경을 쓰고 있는 그들이 신기하게 보였지만, 초병근무중에도 웃고 떠들 수 있어서 좋았다. 북부군이나 새로 배속된 야간전대대나 실로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리는 밤이었다.

  1999. 11. 22  13:50  평안북도 만포 9km 남방 독로강변

  "분대장 동지, 완전 포위당했습니다."

  무수한 전투를 치렀으나 아직은 신병 티를 벗지 못한 박 전사가 급하게 외쳤다. 크레모어 등 폭발물을 맡은 표 전사는 이미 전사했고, 고속 유탄포의 김 하사는 가슴에 총상을 입어 중상이었다.산악용 오토바이가 세 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 저격여단 산악전대대 3중대 중에서 조 부현 하사가 지휘하는 분대는 종말을 맞고 있었다. 만포 남쪽,이들에게는 북쪽인 성동의 분지에서 중국군이 총격을 가했고,  강건너 양가동에서는 전차가 이쪽을 향해 포를 쏘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공격헬기 3대가 비행하며 이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독로강은 평안북도에 있는 적유령산맥에서 발원하여  강계를 지나 만포남쪽에서 급선회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압록강에 이르는 강이다. 높은 산 사이의 계곡을 흐르기 때문에 평소에는 물살이 빨랐으나  지금은 얼음이 꽁꽁 얼어있었다. 그 강 건너편에도 중국군이 우글대고 있었다.

  이들은 19일에 전투를 시작한 이후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20일부터 중국군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고 있었다.  도살자라고 불리우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특수조직인 2027부대의 1개 대대가  이들을 노리고 있었다. 전문 트랙커훈련을 이수한 이들은 산악용 오토바이의 궤적을 좇아 첫날에 바로 오토바이 분대의 아지트를 찾아냈고, 이후 이틀간의 치열한 추격 끝에 결국 이들을 포위망에 몰아넣었다.  2077부대는 산악용 오토바이에 탑승한 대원들뿐만 아니라 10마리의 군견과 전문 트래커등이 추적을 하고, 상공에서는 헬기가 엄호하며 철저히 추적해서 이들을 잡을 수 있었다.

  리 전사는 계속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민 하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스팅거를 발사해 하인드 헬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들이 있는 곳 남쪽의 녹번동에서 인민해방군 중대병력이 천천히 독로강의 얼음을 건너왔다. 중국전차의 주포에 리 전사가 날아가고 헬기의 로켓포에 민 하사가 갈갈이 찢겼다.이제 분대장인 조 중사와 신병인 박 전사, 그리고 중상을 입은 김 하사만이 남았다. 탄알도 점점 떨어졌다.

  부하들을 보며 조 중사가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어차피 항복해도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많은 피해를 중국군에게 입혔다.전선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제발 통일한국군이 중국군을 몰아내길 바랬다.

  "착검하고 탑승! 남쪽으로 간다. 돌격~~~ "

  박 전사가 김 하사를 부축하여 오토바이에 태우고 자신도 탔다.세 명의 전사가 오토바이의 굉음을 울리며 중국군을 향해 돌진했다.  인민해방군의 총격이 시작되었다.  세 명의 인민군은 오토바이의 앞바퀴를 든채 속도를 올렸다. 중국군들에게 접근하며 괴성을 질렀다.  중국군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1999. 11. 22  15:00  개성, 통일참모본부

  "이번엔 평양쪽입니다. 중국… 대단한 나라입니다."

  양 석민 중장이 한탄을 했다.  참모들이 무슨 소린가 바라보았다. 양 중장이 중앙의 화면을 켰다. 서해안과 평안북도의 지도가 나타났다. 유능한 컴퓨터 해커인 구 성회와 김 준태가 미리 북해함대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양 중장에게 보고하고,양 중장은 조기경보기를 동원하여 이들의 움직임을 세밀히 포착할 수 있었다.  산동반도에 있는 중국 북해함대의 기항지인 웨이하이 웨이 앞바다에 모인 중국해군의 연합함대는 당의 명령대로 평양 서쪽인 남포를 향해 직진했다. 전황을 다시 중국의 의도대로 이끌겠다는 당 지도부의 강력한 의사표현인 동시에 중국해군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작전이었다.  동해함대와 남해함대에서 남아있는 구축함등의 대형함정들을 모두 긁어모아 이 작전에 모두 투입했다.

  "중국의 북해함대입니다. 남포 서쪽 150 km 해상입니다. 역시 상륙부대로 보여집니다."

  양 중장이 화면에 중국 북해함대의 편성표를 올렸다.  항모 2척과 구축함 등 각종 전투함 20 여척, 잠수함과 상륙함, 수송함 등이었다.

  "대만 상륙전에서 유명해진 린 훼이 중장이 지휘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어떤 기책을 쓸지 주의해야 합니다."

  참모들이 술렁거렸다. 중국은 2개 함대로 각각 남해안의 여수와 서해안의 태안반도를 노렸으나 한국군은 방어전의 유리함을 업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한국군의 남해함대와 서해함대도 이미 전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숫자는 어느 정도 갖춰져있지만 신형인 대형함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동해함대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던 한국형구축함들은 독도 문제가 발생하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동해바다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공군은 더 처참한 지경이었다.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F-4 팬텀까지 요격임무에 동원되었다. 피스 함대가 동지나해로 떠나간 지금,  참모들은 그들을 붙잡아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중국함대를 막을 전력이 별로 없었다.

  "걱정 마시라우요. 남포는 까딱 업시요.  남포 인근해에 적 잠수함들의 정찰활동이 많다는 걸 알고도 냅뒀시요."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큰소리 쳤다.  이 종식 차수도 느긋한 표정이었다.  국군 참모들은 영문을 몰라 인민군 참모들의 눈치를 보았다.

  "중국은 상륙지점을 잘못선택한 것이오.  물론 남포는 평양을 공략하기 위한 가장 좋은 위치이긴 하지만 우리 공화국을 잘못봤소. 아, 미안 하외다. 우리나라 말이오."

  이 차수가 즉각 정정하며 말을 이었다.

  "이틀 전에 적이 태안반도쪽으로 상륙하려 할 때  박 상장의 말을 기억하시오?  차라리 남포로 오라는 말을…  이제 인민군 해군의 력량을 보게될 것이오."

  박 상장이 자세한 설명을 하자 국군 참모들도 한시름 놓았다. 그렇지만 인민군의 준비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작전이 제대로 먹힐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통일참모본부는 적의 상륙부대에 대한 합동공격작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11. 22  18:00  평안남도 남포 서쪽 60km 해상

  서해안의 낙조를 배경으로 수많은 중국 함정들이 동진하고 있었다.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북해함대의 사령인 린 훼이 중장은 항모 해신 3호의 함교에서 한국군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정말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막강한 인민해방군의 동해함대와 남해함대가 어이없이 당했다. 자신도 당할지 모르지만 한국에 항공기와 대형 함정들의 숫자가 상당수 감소했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남포 서쪽 해상은 중국에서 발진한 지상기지 출격 항공기들의 충분한 항속거리 내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통일한국의 서해함대는 지상군을 지원하는지 몇 시간째 평안남도 안주 서쪽 해상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군인은 마땅히 적국의 침공에 대해  국가를 방위하는 데에 최고의 존재가치를 가진다. 린 중장은 한국군, 특히 오랜 친구인 박 정석 상장이 부러웠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신은 침략을 위해 싸우므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니 일단 이기고 볼 일이라며 마음을 다졌다.

  5만톤급의 중형항모 해신 3호는 대만 상륙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군함이다. 호위함 없이 항모 단독으로 출전하여 수 십 척의 잠수함들을 대만의 해안선까지 도달케 하였고 후아리옌 공군기지를 점령했다. 대만군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공격해온 해신 3호에 의해 사기가 땅에 떨어져 이후의 전투에서도 일패도지했다. 이번엔 상선으로 위장하지 않고 당당히  호위함들을 거느리고 상륙작전을 지휘하며 한반도 서해안으로 항진했다.

  해상에는 다수의 프리깃함과 구축함들이  예상되는 한국 잠수함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초계중이었고 상공에도 여러대의 헬기와 초계기들이 잠수함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태안반도에 해병대를 상륙시키려던 중국 동해함대가 한국군의 잠수함들에 의해  허망하게 전멸한 사실은 들어서 잘 알고 있었고, 린 중장은 이들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다.  그는 함대를 한국군의 잠수함공격에 취약했던 동해함대의 대공진형이 아닌, 러시아식 대잠진형을 택했다.

  초계기와 헬기,또는 잠수함과 구축함들이 함대가 진행하는 해역을 격자식으로 세밀하게 나누어 방어를 전담하고 있었다.이 해역에 은밀하게 숨어있을 한국해군의 209급 잠수함이라도 단 한번의 공격 밖에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함대의 가장 선두에는 기뢰전용 수색헬기와  소해정들이 항로를 열었다.  그러나 아직 해안선에서 멀어서인지 인민군이 설치한 기뢰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적과 접촉해보지 못하고 해안에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함대 승무원들의 긴장을 가중시켰다.

  "아직 적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적함도, 적기도 안보입니다. 해주 상공에 조기경보기만 떠 있습니다."

  함장의 말에 린 중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한의 수도가 위협받고 있으므로 최소한 인민군은 함대와 공격기편대를 보낼 줄 알았으나 하늘과 해상엔 아무런 위협이 없었다.함대를 호위하는 잠수함들로부터도 위협에 대한 보고가 없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도 차라리 잘됐군. 함대는 해안 30km까지만 접근시키고 상륙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석도(席島)와 초도(椒島)의 상황은?"

  린 중장이 남포항으로 가는 길의 섬들에 대한 상륙전 상황을 묻자 작전참모가 상황판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섬을 수비하는 인민군들의 저항은 의외로 약하며, 조만간 점령할 수 있다는 보고였다. 린 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남해함대와 동해함대의 패배를 교훈삼아 린 중장은 극히 신중하게 한국해안에 접근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상륙지점 근처의 섬은 무조건 점령했고, 적 잠수함이 없다고 확인된 후에야 함대를 전진시켰다. 함대가 해안에 점점 가까와졌다.

  상공에는 미그기의 중국식개량형인 각종 섬형(殲型) 전투기와 공격기들이 이미 어두워진 동쪽하늘을 향해 날았다.  상륙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해안폭격을 목적으로 요동반도에서 발진한 대규모 편대였다. 함대는 어느새 해안에서 30km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직 인민군의 대응은 없었다. 지대함 미사일의 공격도 없었다. 함대를 호위하며 상공을 선회중인 전투기나 조기경보기에서는 아직 어떤 공격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해왔다.

  린 중장이 점점 불안해졌다.준비성이 대단한 박 정석 상장이 있는 통일한국군이 이렇게 무력하게 중국의 상륙을 방치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는 박 상장은 전투의 승패는 이미 전투 전에 결판난다는 전쟁관을 갖고 있는 전략우위의 전략가였다. 린 중장이 함대의 해상 초계를 강화시켰다. 마지막까지 항모 갑판에 남아있던  초계기 두 대도 긴급 전투발진 시켰다.  산둥반도의 칭다오와 웨이하이 웨이, 랴오둥반도의 다이렌에서 출격한 초계기들이 함대 상공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해안상공에서는 중국 공격기들과 인민군 전투기들간의 격렬한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지대공 미사일의 도움을 받은 인민군이 약간 우세한 전과를 나타냈지만 상륙목표 해안에 대한 폭격은 성공리에 수행했다는 보고가 왔다.드디어 LCAC(공기부양식의 고속상륙주정)와 LCU(다용도 상륙 주정)들이 함대를 떠나 해안으로 향했다.  상공에는 미국식 강습양륙함인 해신 6호에서 이륙한 헤리어-2와 공격헬기들이 이들을 엄호했다.

  잠시 후 해안을 공습한 편대가 함대 상공을 지나 서쪽으로 날아갔다. 공격 전보다 눈에 띄게 숫자가 많이 줄어있었다.  린 중장은 개전 초부터 지금까지 출격한 통일한국 전투기들의 숫자를 컴퓨터로 조회해 보았다. 전투기들은 하루에 최소한 7회의 출격을 했다는 계산이 나왔다. 격추된 전투기들을 감안하면  통일한국군의 조종사들이 거의 살인적인 중노동을 한 결과였다. 이륙 전에 전투기의 정비도 완벽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친 짓이다. 조선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린 중장은 역시 전쟁의 대원칙이  이번 전쟁에도 들어맞고 있다고 생각했다.이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전쟁에서는 결국 병력이 적은 쪽이 지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무기나 절세의 전략가가 나오더라도 병력의 압도적인 열세는 극복하지 못하는 법이다.

  목표해안에는 아직 인민군들의 항공기들이 떠있었다.  그러나 공중전에 대비한 요격기들이기 때문에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되지 않는다고 린 중장은 생각했다.  작전참모가 적기 편대에 대한 함대공미사일 공격을 건의했으나 린 중장은 공대함미사일을 갖춘 공격기들의 위협에 대처하거나, LCAC들이 상공으로부터 위협받을 때에 대비해 대공미사일을 아끼자며 그 건의를 묵살했다.  상륙부대는 해안까지 10km가 남았다. 드디어 해안 방어부대의 미사일공격과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국 함대도 지원포격을 시작했다.

  "수중에 어뢰 다수! 접근중입니다, 1-8-5, 거리 1200…1000! 초고속입니다! 어뢰의 수는 35기로 증가!"

  소나담당 전업군사(專業軍士)가 외치자 대잠지휘관이 깜짝 놀랐다.함장이 즉시 항해군관에게 회피운동을 지시하고 전업군사에게 물었다.

  "적 잠수함은 없었잖아. 어떻게 된거야?  발사점은?"

  "어뢰 3기 300미터까지 접근중, 탐신음파 발신 중! 본함을 향합니다! 발사점은 암초쪽입니다만 잠수함은 없었습니다.수중항주중인 어뢰의 총 수 42기로 증가! 선두 어뢰, 본함에서 100미터! 충돌합니다!"

  함대사령관 린 중장도 깜짝 놀랐다. 어뢰의 속도가 너무 빨라 대응시간이 절대부족했다.

  "막아라! 허수아비 발사! "

  함장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소나병이 끝까지 헤드폰을 끼고 어뢰와의 거리를 불렀다.

  "쿠앙!! 쾅! 쾅!"

  어뢰 세 발이 연이어 폭발하자 충격이 항공모함을 뒤흔들었다.물기둥이 200미터나 솟구치고 항모는 금방 화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함내의 방화시스팀이 자동적으로 작동해서 격납고와 원자로실에 있는 수병들은 불벼락 다음에 물벼락을 맞아야했다. 아슬아슬하게 갑판 끝에 걸려있던 탑재기인 수호이-27K 한 대가 결국 바다로 떨어졌다. 린 중장이 쓰러졌다가 통신담당 군사장(軍士長)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났다.

  "적 어뢰의 최종속도는 300노트로 추산됩니다. 스퀄입니다!"

  폭발의 와중에 고막이 터진 소나담당 전업군사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보고했다. 함대사령관이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려했으나  함내상황을 보여주는 시스팀은 다운되었다. 린 중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각 부서는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남아있는 프리깃함을 발사지점으로 보내! 헬기와 초계기도…"

  함대사령관이 함교의 깨어진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보니 이미 함대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있었다. 보이는 군함마다 모두 화염에 휩싸여있었다.  숫자가 많이 모자랐다. 남아있는 함정이 별로 없었다. 대잠헬기들이 항공등을 깜빡이며 급하게 남쪽을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잠전지휘관이 침통하게 보고했다.

  "스퀄은 러시아가 1995년에 개발한 로켓추진식 어뢰입니다.너무 빨라서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게다가 일반적인 533밀리가 아니라 650밀리나 되는 대형어뢰입니다. 함대는 거의…"

  스퀄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항공연구소에서 1995년에 개발한 초고속 어뢰이다.개발 당시에는 속도가 약 200노트(시속 360 km)에 유도장치가 없었으나, 나중에 유도장치를 부착하고 속력도 300노트(시속 540 km)까지 올렸다. 서방세계의 어뢰가 보통 35~60노트인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속도의 어뢰이다.  300노트라면 초속 150미터로서, 음속의 반이 약간 안되는 정도의 빠르기이다.

  제인연감의 군사정보 관계자는 이 미사일이  물과의 접촉을 제거함으로써 속력향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개발자인 러시아의 항공 연구소에서는 물속에 진공의 관을 형성해 그 안을 이 미사일 어뢰가 날게된다고 밝혀 제인측의 추정을 확인했다. 이 어뢰는 러시아의 신형 아쿨라(Acula)급이나 시에라급,  빅터-3형 공격잠수함의 탑재용으로 개발되어 구경이 650밀리나 되는 대형어뢰이다.  아쿨라(Acula)급이나 시에라급, 타이픈급, 델타-IV형, 빅터-3형 및 오스카-2형 잠수함들은 530밀리 외에도 650밀리 발사관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 웨이크(wake:항적) 추적방식의 80형 어뢰를 장착한다. 이것도 탄두가 450kg이나 되며 속도는 50노트인 막강한 어뢰인데, 스퀄은 아예 어뢰의 상식을 뒤집은 어마어마한 어뢰이다. 이 스퀄이 남포 앞바다를 휘젓고 있었다.

  "수송함 및 보급함 12척 침몰, 3척이 화재, 구축함 6척 침몰에 4척이 대파되고 프리깃함 9척 침몰에 2척이 대파입니다. 예비항모 해신 6호도 어뢰 3발을 맞고 침몰했습니다.  피해를 입지 않은 함은 마오밍과 후앙시 등 프리깃함 두 척과 구축함 한 척 뿐입니다. 잠수함들은 아직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본함은 5곳이 침수되어 운항불능입니다."

  대잠지휘관이 보고하자 린 중장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으로 북해함대뿐만 아니라  한중전쟁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동해함대와 남해함대의 잔여 함정까지 총동원했는데 통일한국군의 단 한번의 공격에 함대가 거의 전멸한 것이다.미국에서 수입하려던 초대형 항모와 이지스함들이 피스의 함대에 나포된 지금 인민해방군의 해상전력은 이제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게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방금 침몰한 해신 6호는 미국에서 비싸게 구입한 3만 9천톤급 강습상륙함 벨로우드(Belleau Wood)였으며,약 1,900명의 해병이 타고 있었다. 다른 침몰한 수송함에 승선한 해병대원들과 함께 이들을 잃은 중국함대는  추가 상륙병력이 단숨에 바닥이 나버린 상태가 되었다.

  아직도 함내에서는 진화작업이 한참이었다.  원자력 항공모함이 아닌 재래형 항모였다면 벌써 연료에 인화되어 폭발했을 것이다.  함장이 해군사령관인 창 리엔츙 상장(上長)에게 급보를 전하고 있는 중에 함대에 대공경보가 울렸다. 함대 상공에 있던 조기경보기가 대공경보를 함대에 전했는데, 적은 요격기들 뿐이니 헬기와 상륙주정들을 공격할 것같다는 보고였다. 그래도 전투기들이 20 km까지 접근하여 함대사령관은 신경이 쓰였다.  즉시 대공미사일 지원을 해주기로 하고 상륙부대는 계속 전진시켰다.  자체 무장이 약한 상륙부대는 바다를 통해 후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륙하는 쪽이 안전해보였다. 항모와 남아있는 프리깃함에서 대공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이었다.

  "함재기를 발진 시킬 수 없나?"

  연료가 떨어져가는 함재기들을 회수하고 교대할 항공기들을 출격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린 중장은 답답한 대답을 들어야했다.

  "동력실 외벽을 관통당해서 원자로를 정지시켰습니다.  증기사출기를 쓸 수도 없고 본함이 운행불능이기 때문에 이륙하는 전투기에 추진력을 줄 수도 없습니다. 함재기의 이륙은 불가합니다."

  함대사령관의 질문에 함장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곧이어 통신담당 군사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고했다.

  "어뢰발사 해역에 적 잠수함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잠수함에서 발사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뭔가? 혹시…"

  린 중장은 갑자기 수중에 장치된 어뢰 플랫폼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북한의 무기체계는 없으니 그럴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러시아제인 아쿨라급이나 시에라급 공격잠수함의 가능성도 생각했으나 북한의 재정상태로 봐서 이런 신형함의 구입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미사일 다수! 적기들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현재 45기, 숫자 증가 중! 52, 55… 목표는 본 함대입니다!"

  레이더병의 보고에 함대사령관 리 중장이 경악했다. 중국군 항공대와 공중전을 벌인 인민군 전투기들이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했단 말인가?

  "요격하라. 근데 어떻게 된거야? 적은 요격기들이었잖아?"

  함대사령관의 호통에 통신담당 군사장이 조기경보기를 불렀다.  조기경보기의 책임자가 당황한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공에서는 수호이-27K 전투기들이 대함미사일을 향해 대공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게... 몇 대씩 구월산 뒤로 들어갔다 나오길래 별 상관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아마 산 뒤에서 요격기를 공격기로 교체한 모양입니다. 같은 미그-21과 23이고 숫자도 같아서 바뀐줄 몰랐습니다.]

  해안에 있던 통일한국군 전투기들은 조기경보기의 지시에 따라 1개중대씩 차례로 남쪽으로 선회하며, 해주에서 출격하여 저공으로 비행해온 공격기들과 구월산 뒤에서 바꿔치기 한 것이다.  공중전을 벌였던 전투기들은 이미 해주비행장에 착륙하여 2차 출격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사일 발사!"

  린 중장의 명령에 따라 함미의 수직발사기에서 대공 미사일들이 공대함 미사일을 노리고 연속 발사되었다. 약 30여기를 발사한 순간 또다시 어뢰 경보가 울렸다.

  "어뢰! 아까와 같은 형입니다. 2기 접근 중! 거리 900, 700, 400…"

  고막이 터진 소나 담당 하사관 대신 그 자리에 앉은 군관이 보고하자 함대사령관을 포함한 함교요원 모두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채 벽에 붙어있는 물체를 잡았다. 이미 어뢰의 회피는 포기하고 폭발 충격에 대비한 것이다.

  다시 한번 굉음이 울리고 함내에 정전이 되어 캄캄해졌다.  컴퓨터와 레이더가 모두 작동이 중지되자 항공모함의 전파 유도를 받아 날아가던 미사일들의 레이더 시커가 자동으로 켜지고, 미사일은 진행방향 상공에 있던 상륙주정 위의 중국군 헬기들을 향했다.  반능동 유도방식인 미국의 SM-2대공미사일을 중국군이 유사시에 대비해 능동-반능동 방식의 혼합방식으로 개조한 것이 잘못이었다.  20여기의 헬기와 헤리어, 나중에 출발한 상륙거점 확보용 수직이착륙 항공기 MV-22A Osprey 10여기가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자기편 미사일에 당했다.

  인민군의 전투기들은 미사일발사를 마치자 상륙주정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모두 돌아가버렸다. 항모가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졌다. 항모는 점점 침몰하고 있었다.린 중장이 기울어진 함교 유리창을 통해 동쪽 하늘을 보니 그곳에선 수 십 개의 불빛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함재기들이 발사한 미사일에 요격되었는지  섬광이 일어났다.

  "전원 퇴함하라! 본국에 구원을 요청하라. 연락이 되는 함을 찾아 상륙주정들도 후퇴하라고 일러. 철저한 함정이다!"

  린 중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 명의 군관이 함대사령관의 명령을 전하러 아래쪽으로 뛰어갔다.비상전원이 있는 캣워크(cat walk:비행갑판 바로 옆의 작은 공간)의 점멸등이 급하게 깜빡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까지 침몰하지 않고 바다 위에 떠있는 항공모함과 몇 척의 프리깃함에 미사일이 쇄도했다.  이 모습을 본 린 중장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이렇게 침략자는 응징을 당해야지.  하지만 만약 조선이 중국을 역으로 침략한다면 마찬가지로 응징을 받을 것이다. 박 상장도 알고 있겠지만…’

  거대한 항모에 섬광이 번쩍였다.

  1999. 11. 22  19:50  개성, 통일참모본부

  "중국의 북해함대는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수중의 어뢰플랫폼과 공군의 2차에 걸친 공습으로 함대와 상륙부대,그리고 전투기들을 모조리 수장시켰습니다. 이제 해군력에서는 우리가 앞설 수도 있습니다. 적은 항모가 하나도 없으며, 구축함과 프리깃함의 수에서는 차이가 역전되었습니다."

  양 석민 중장이 화면의 내용을 바꿔가며 자신있게 보고하자 참모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모든 참모들이 평양 근해의 상륙전에 대비하여 무인 어뢰 시스템을 장비한 인민군해군의 박 정석 상장의 주도면밀함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피스에서 파견된 짜르도 박 상장의 기가 막힌 무기운용과 공격 타이밍 선정에 혀를 내둘렀다.그러나 북해함대의 사령인 린 제독과 개인적으로 친했던 박 상장은  오랜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친구를 이긴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박 상장은 자신이 서해함대 사령관일 때 상부에 건의하여,  비싸지만 확실한 무기인 스퀄어뢰를 러시아에서 대량으로 수입했다. 서해 각지의 수중에 이들을 배치하고, 남포 북쪽인 용강군에 있는 산의 동굴에서 이들을 무인조종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997년의 통일원년에 남북은 통일이냐 전쟁이냐의 갈림길에서 협상과 동시에 군비증강에 열을 올려 각자 세계 여러나라에서 각종 무기를 수입했었다. 이 시스템도 97년에 개발된 것이었다.

  "이 기회에 우리가 중국의 해안을 완전히 봉쇄해야 합니다."

  피스의 짜르가 강력히 주장하며  중앙화면을 자신의 모니터와 연계시킨 후 보고를 했다. 반전전사 집단인 피스의 연락관으로 파견된 짜르는 통일한국군 해군 중장의 계급과 동시에 통일참모본부 국제연락 담당 참모의 직함을 받았다. 평양 방어선에 투입된 피스의 지상군은 대장인 싱이 통일한국군 육군 중장의 계급을 수여받았고 남지나해에 파견된 피스의 의용군과 용병들도 계급과 군번을 받았다.  이들이 교전당사국의 군인이 되어야 국제관계에서 하자가 없고, 포로가 되었을 경우 정당한 포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젊은 인 한수 예비역 중위가 짜르의 통역을 하고 있었다. 인 대위는 대학생 때부터 그린 피스와 국제사면위원회의 회원이었는데, 전쟁이 나자 피스의 요청으로 통일참모본부에 배속이 되었다.  젊은 사람 치고는 뚱뚱하고 배가 많이 나와 풍채가 있어보였으나, 군복이 너무 꽉끼어 허릿살이 삐져나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면 웃기부터 했다.

  "현재 남지나해의 상황입니다.  우리 함대는 중국의 2개 분함대와 전투를 수행중입니다.  화력은 우리가 앞서지만 하이난섬(해남도)에서 출격하는 전투기들 때문에 완전한 해상봉쇄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피스함대의 놀라운 화력과 기동력에 한편으로 놀라며  참모들이 아쉬워하자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나섰다.

  "중국은 800대의 해군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항속 거리가 짧고 구형이지만 해상봉쇄 함대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함대가  직접 중국 산둥반도나 북경의 입구인 천진을 공격하고 싶어도 이들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대공미사일을 갖춘 몇 척의 구축함을 피스 함대에 배속시켜서 남지나해의 해상 봉쇄를 강화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참모들이 찬성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국해군의 심 현식 중장을 보았다. 심 중장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일본 때문에…  함경도쪽 인민군, 아니, 병력은 철수가 취소되어서 이제 그쪽으로 함대를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만,  러시아에서 무기를 수입하는 항로를 지켜야 하고, 더 큰 문제는… 최근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아니, 일본 아새끼들이 또 어드레케 하디요?"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흥분해서 평안도 사투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독도는 일단 한일간의 정치문제화하고 있습니다만, 독도를 점령하고 나서도 일본함대에 의한 영공과 영해침범의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오늘만 해도 동해함대와 일본 자위대함대가 조우전을 벌일 뻔 했습니다. 걱정하실까봐 말씀은 안드렸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동해함대의 구축함을 뺄 수도 없기에 말씀드립니다."

  참모들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쟁 전 정보사단의 보고에서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할 경우,  일본도 같이 한반도를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했었다. 그리고 일본에 관한 각종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의 자위대가 한중전쟁 발발 이후, 일부의 호전적 여론을 입고 정치권의 명령을 공공연히 무시한다고 했다.일본 정가에서는 쿠데타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만약 일본이 우리를 친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가장 좋겠소?"

  이 차수가 참모들을 진정시키고 간단한 질문을 했다. 양 중장이 즉답을 했다. 너무나 많이 토의한 문제였다.

  "중국의 한반도 침략 초기나, 한중 양국의 전력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소모된 때 입니다."

  "그렇소. 지금은 아직 아니오. 독도는 일단 내버려 두시오.하지만 독도를 잊지는 맙시다."

  이 차수가 분노하는 참모들을 진정시켰다.

  1999. 11. 22  19:40  평안북도 영변

  영변은 인민군 2군단이 공격을 맡고 있었다. 평안남도 개천에서 청천강을 건너다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들은 하루 밤낮을 싸워 겨우 도강에 성공하고 영변을 향해 신속 전진중이었다. 인민군 7사단은 영변과 희천 사이의 방어선을 뚫어  영변을 고립시키기 위해 영변 동쪽에 집중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영변 남쪽을 방어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 231사단의 연락군관인 쿠젠모우 중위가 사륜구동차를 타고 급히  전선의 연대로 가는 도중에 길 뒤쪽에서 들리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놀라 차를 세우게 했다. 여자의 비명은 계속 들려왔다. 쿠 중위는 차에서 내려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쿠 중위와 동년배인 운전병이  뛰어가는 쿠 중위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차안에서 담배를 피워물며 쿠 중위의 결벽성을 걱정했다.

  길 뒤의 작은 계곡에서는  5명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젊은 여인 한 명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다리 하나씩을 잡고,  그 중 한명이 막 못된 짓을 시작하고 있었다. 쿠 중위가 권총을 빼들고 서서히 이들에게 접근했다.  이들은 옆에 누가 오는지 신경도 안쓰고 킬킬대며 하던 일에 몰두했다.

  "너희들 뭐하는거야?"

  병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봤으나 아군인 것을 확인하자 킬킬대며 웃었다. 허리 운동을 하던 상사는 젊은 중위를 힐끗 보고 그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고는 하던 짓을 계속했다.  여인은 이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는지 얼굴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수치와 고통으로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보면 모르십니까? 히히~ 군관동지, 잠깐만 기다리십시요. 두번째 순서를 드리겠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잡고 있던 중사가 말하자 병사들이 쿠 중위를 보고 킬킬댔다. 분노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쿠 중위가 허리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이를 본 병사들의 얼굴이 갑자기 노래졌다.  그가 여인의 몸위에 있던 상사를 쏘았다.계곡에 총성이 울리고 상사의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튀었다. 상사는 여인의 몸위에 힘없이 쓰러지고 병사들이 놀라 튀듯이 일어났다. 열병이 중위에게 총을 쏠까 말까 망설였으나 그는 지금 어깨에 총을 메고 있는 상태여서 망설였다. 고참인 상등병이 그 열병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중위가 다시 총을 쏜다면 이들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을 기색이었다. 쿠 중위가 이들에게 권총을 들이댔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인민해방군 전사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한 명의 군관과 네 명의 병(兵)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하지만 총을 겨누고 있는 쪽은 군관이었다.

  "모두들 구덩이를 파서 상사를 묻어!"

  병사들이 살게됐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둘러 야전삽으로 땅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쿠 중위가 여인을 보았다.찢어진 인민복으로 몸을 가리고 삽질을 하는 병사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쿠 중위는 그녀가 인민복을 입었다는 것은 게릴라전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여자들까지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서는 이 나라가 무서워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쿠 중위가 얼른 외면했다. 쿠 중위가 어떡할까 고민했다.  이 여인을 놓아줄 경우 인민해방군의 치부가 알려질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이 여인을 살려줄 경우 지금 땅을 파고 있는 병사들이 자신의 등뒤로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권총을 그 여인에게 겨눴다.  여인이 쿠 중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계곡에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1999. 11. 22  20:30  평안북도, 박천

  한국군 제 9 기갑사단이 팬텀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박천에 형성된 인민해방군의 남쪽 방어선 일부를 돌파하자 해병 1사단이 이 뚫린 구멍으로 쇄도해 들어갔다.대공미사일의 보급을 받지 못한 중국군은 공중지원도 받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쓰러져갔다.  박천은 한밤중인데도 각종 포화와 조명탄, 그리고 곳곳에 일어난 화재 때문에 대낮처럼 환했다.

  "1시 방향에 저격병!"

  차장이 외치자 포수가 주포를 2층건물의 창문을 향해 조준했다. 조준기로 보니 창문 안에서 중국군 저격병이 단발 사격을 하고 있었다.  레이저가 발사되어 그 저격병의 이마가 조준기 중심선에 들어왔다.  거리는 340미터라고 계기판에 디지틀로 표시되어 나왔다.  포수가 방아쇠를 당기자 K-1 전차의 육중한 120밀리 포가 발사되고 차체가 울렁거렸다.

  "명중! 대구리에 정학~히 맞았습니다, 마."

  포탄은 창문에 서있던 저격병의 두개골을 관통하여 이층의 벽을 뚫고 건물 바깥에서 폭발했다. 섬광이 번쩍이고 충격에 건물이 무너졌다. 차장용 조준기로 보고있던 전차장이  잘했다며 포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해병 1사단의 전차대대는  다른 해병대원들과 함께 건물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제 9기갑사단의 전차들은 박천 남쪽에서 대기하며 해병대의 연락을 받아 포격지원만 하고 있었다. 9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아직도 1200 마력 엔진에 105밀리 포를 갖춘 개조되기 전의 K-1 전차들과 방호력이 떨어지는 구식 M-48 전차로 구성되어, 통일참모본부로서는 전선에의 투입을 꺼려왔다. 그러나 이 부대는 K-1 전차들의 잦은 고장에도 불구하고 중국군 보병부대를 상대로 그런대로 잘싸워왔다. 대신에 정비병들은 죽을 맛이었다.  구난차들이 고장난 K-1 전차를 끌고 후방의 정비소를 바삐 오갔다.

  1999. 11. 22  20:45  평안북도 박천 상공

  F-16 조종사 김 종구 중위는 연일 계속되는 출격으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한국 공군은, 특히 F-16 전투기들은 개전 초부터 너무 혹사 당해왔다.  공군에 있다가 예편한 민간 여객기 조종사들이 급히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이들은 대부분이 팬텀이나  F-5를 몰던 조종사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같은 전투기를  조종사들이 교대로 탑승하여 효율적인 전투기 운용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 공군에게 F-16은 비교적 신예기라 숙달된 조종사들이 너무 부족했다. 일부 F-5 전투기 조종사들을 F-16의 교대병력으로 하려는 안(案)은  F-5도 바쁘기 때문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사고도 잦았다.길고 긴 초계비행과 공중전 후에 강릉 기지로 귀환하던 F-16 한 대가  기지 근처 논에 그대로 쳐박히고 말았다. 편대장이 무선으로 조종사를 계속 호출했으나  대답이 없었다는 보고가 있어, 그 조종사는 졸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것과 같은 기록으로 2건이 더 있었다.

  성남에서 이륙한 F-16 한 대는 이륙 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성남시내로 추락해 큰 인명피해가 났다.  조종사는 탈출했지만 전투기가 주택가로 떨어져 20여명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이 사고는 잦은 출격으로 인해 기체의 피로도가  한계에 달해 발생한 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사람보다 기계가 이 극한상황을 못버틴 것이다.

  그리고 부품의 조달이 원활치 못해  완벽한 정비를 바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군본부에서는 조종사의 안전을 위해 전투기에 이상이 있을 때는 기체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가능한한 빨리 탈출하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전쟁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지침이었다.

  박천 2만 피트 상공에서의 공중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공격기를 엄호하던 전투기들끼리 맞붙었다.  처음에는 전투기들끼리 서로 공중전을 피하며 아군 공격기의 엄호에만 치중했다.  그래서 박천전선에서는 양측 전투기들은 공중에서 구경만 하고 지상은 서로의 공격기가 폭격을 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간간히 한국군측 진지로부터 스타 버스트 지대공미사일이 하늘을 향해 발사되었고,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그러다가 중국 전투기들이 싸움을 걸어왔는데, 이는 중국 지상군의 종용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공군이 폭격을 함에도 상공의 중국 전투기들이 움직이지 않자 화가난 중국군 사단장이 병단 지휘부에 연락을 하고, 상공의 우군기를 향해 얼마 남지 않은 용감 812형 지대공미사일 하나를 날렸다. 중국 전투기 편대의 지휘관은 한국공군의 F-16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중국군의 편제상 공군과 해군은 전시에는 각 1급군구에 소속되어 있어 지상군의 명령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전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 있었어도 전시인 지금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 공군은 가능한한 공중전을 피하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에 지상의 아군이 폭격을 당하고 있어도 중국 공격기들을 요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의 공격기 편대는 적 지상진지와 엄호 전투기 편대 사이의 낮은 상공에서 불안하게 폭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사 협정은 무너졌다.

  서로 20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던 한국군의 F-16과 중국군의 미그-23들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레이더 유도형의 공대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미사일 사격 후에 계속 미사일의 유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파이어 앤 포겟(fire and forget)능력이 있는 AMRAAM과 그 능력이 없는 PL-10의 효과는 극명한 차이를 가져왔다.

  계속 목표에 레이더를 비춰줘야 하는 PL-10은 이 미사일을 발사한 중국 전투기가 AMRAAM미사일의 목표가 되자 유도를 중지하고 긴급히 선회하는 바람에 유도를 잃고 제멋대로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사정거리에서의 차이가 너무 컸다.  SAR(반능동 레이더 유도)방식의 PL-10은 사정거리가 15km 밖에 되지 않았다. PL-10은 중국 영토 내에서 자체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단순한 숫적 우위로써 성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고공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미그-23 전투기들은  마하 4의 AMRAAM을 피하기 위해 채프를 뿌리며 급선회를 반복했다. 하지만 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 한 기체를 노리는 6기의 암람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상공에서 피어나는 불꽃이 늘어났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진 중국 엄호기들의 편대장은 후퇴를 명령했다. 살아남은 중국 전투기들이 도망가자 중국 공격기들도 연락을 받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F-16 전투기들은 팬텀과 F-5로 이루어진 아군 공격기들의  폭격이 끝나자 기지를 향해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근접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한국공군의 최근 공중전은 계속 이런 양상이 지속되었다.

  김 중위는 전투가 너무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적기 1대를 격추시켜서 이제 그의 전투기에 그려질 킬마크는 8대가 되었다.그리고 자신보다 많은 격추수를 기록했던 다른 두 명의 조종사는 이미 전투기를 몰 수 없었다.  한 사람은 지대공미사일에, 한 사람은 6기의 미그기에 포위되어 격추되었다.  미사일을 맞은 전투기는 공중폭발했고, 추락하는 기체에서 탈출한 조종사는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김 중위는 올봄의 멋있었던 드라이브를 생각했다.

  단 한 대의 피해도 입지 않고 상공 엄호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편대장은 기지에 남은 AMRAAM과 스패로 미사일의 수를 계산해 보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조종사들은 무선을 개방한채 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졸음을 쫑기 위한 필사적인 노래였다.  몇 곡을 부른 후 점호가 시작되었으나 김 중위가 응답하지 않았다. 편대장이 즉시 김 종구 중위를 호출했다.

  "강남제비! 강남제비, 들리나?"

  중국과의 전쟁이후 한국과 북한 공군의 콜사인은 모두 한국어로 바뀌었다. 영어와 러시아어로 되어있던 남북의 콜사인을 중국군이 도청할까봐 아예 한국어로 바꾼 것인데, 한국 공군은 출격임무 때마다 콜사인을 바꾸던 방식에서 이제는 아예 개인이 정하도록 바꾸었다. 김 중위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 제비를 택했다.

  "강남제비!!"

  편대장이 김 중위를 계속 부르다가 그의 전투기 바로 위를 비행했다. 야간에 전투기끼리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지만 그의 기체에 충격을 주어 깨우려는 노력이었다.

  김 중위는 자신의 차를 몰고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청평을 지나 가평군에 접어들었다. 주로 강을 따라서 난 낭만적인 46번 국도 양옆에는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시속 170 km로 달리는데도 스치는 바람은 너무 부드러웠다. 옆에 앉은 여자가 너무 좋다고 비명을 질렀다. 김 종구는 괜히 여자를 데려왔다 싶어서 짜증이 났다.  지난 주에 같이 왔던 경희는 한시간여의 드라이브에도 경치에 정신이 팔려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었다.  경희와 같이 올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혜영이와 노는 이유는 계속 이 정도의 관계는 유지해야 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혜영이는 아직 건드려보지 못한 여자애였다. 미개척지에 대한 탐험은 모험가로서의 당연한 본능이다.

  김 종구는 계속 재잘대는 혜영이의 짧은 치마 사이로 손을 넣었다.혜영이는 잠시 움찔했으나 가만히 있었다.  손이 허벅지를 더듬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스타킹을 하지 않은 허벅지는 부드러웠다.  김 종구는 왼손으로 운전하면서 혜영이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12톤짜리 덤프트럭이 엇갈려 지나가느라 바람이 세차게 그녀의 머리를 날렸다.

  "강남제비!! 제발… 김 중위!"

  편대장이 계속 그를 호출했으나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김 중위의 기체는 수평비행을 계속했지만,  1분 후면 서울 상공의 전시대공방어망에 들어갈 거리에 있었다. 체크포인트인 북한산이 바로 아래에 있었다. 서울 상공을 우회하여 수원비행장에 착륙해야 하는데 여기서 선회하지 못하면 아군의 지대공미사일에 김 중위의 기체는 추락하게 되어 있었다.

  편대장은 이미 지상의 미사일기지에 연락을 했지만, 서울상공의 엄호가 제 1의 임무인  수도방위사령부의 대공지휘관은 예외를 용납하지 않았다. 서울상공에 침입하는 비행기는 아군기든 적기든 가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아군으로 위장하고 서울을 폭격할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대공지휘관으로서는 당연한 의무였다. 멀리 야간등화관제를 실시하지 않고있는 서울의 불빛이 보였다.

  편대장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편대기 전원의 선회를 명한 다음에 편대장이 애프터 버너를 키고 속도를 내어 편대 앞쪽으로 나갔다.짧게 선회를 한 다음에 김 중위의 기체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것이 마지막 시도였다.

  김 종구는 혜영이의 치마 속에 넣은 손을 더 위쪽으로 옮겼다.  매끈한 피부가 느껴졌다. 팬티의 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 위치에는 맨살이 느껴졌다. 가운데쪽으로 더듬어갔다.

  "노…? "

  김 종구가 웃으며 치마를 들어 속을 보았다.  혜영은 못본체 하며 아래를 가리지도 않았다.  김 종구는 근처에 러브호텔이 있나 둘러보다가 다시 치마 속을 자세히 보았다. 혜영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어느새 바로 앞에 커다란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혜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연신 비명을 질렀고 김 종구는 핸들을 우측으로 잽싸게 꺾었지만 이미 늦었다.강한 충격이 전신을 때렸다.

  "김 종구 중위!"

  편대장이 콜사인을 생략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편대장이 들은 것은 잔뜩 졸린듯한 목소리의 비명이었다.

  [으으....... 혜영이 괜찮아? ]

  편대장이 한심하다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장난끼가 발동했다.

  "자기, 난 괜찮아. 자기는?"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김 중위의 당황한 듯한 응답이 들려왔다. 편대원들이 계속 개방하고 있는 편대무선망  여기저기에서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편대장님... 아니, 푸른 산, 여기는 강남제비! 죄송합니다.]

  "즉시 3시 방향으로 선회해! 위험지역이야!"

  1999. 11. 22  20:55  평안북도, 영변 동쪽 15km 지점

  인민군 제 7사단의 최 정수 소장이 중국군의 122 밀리 곡사포탄이 작렬하는 능선에서 망원경으로 앞을 살폈다. 영변에서 희천까지 펼쳐져있는 중국군의 방어선은 약 1.5km 앞에 있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인민군 전투기들은 중국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느라 지상전은 신경쓸 수 없었다. 최 소장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 진지에 대한 공중지원보다는 차라리 적의 공습을 안받는 것이 나았다.

  중국군 방어선 상공에 중국에서는 대황봉(大黃鋒)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제 슈페르훼르롱 헬기가 떴으나 인민군측 참호에서 포탑만 내밀고 있던 50년대식의 BTR-152A 대공포차가 즉시 14.5 밀리 중기총을 발사해서 단번에 이 헬기를 떨어뜨렸다. 헬기가 격추되자 위치가 드러난 이 대공포차는 즉시 후퇴해서 중국군의 포화를 피했다.

  공격개시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후방에 전개한 7 사단의 포병연대에 소속된 36대의 곡산형자주포로부터 170밀리 포탄이 연속 발사되어 중국군 방어선 곳곳을 때렸다. 각종 구경의 방사포(다연장로켓)탄이 연달아 방어선 앞의 눈밭에 작렬하자 최 소장은 축제 때의  불꽃놀이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중국 명절의 폭죽놀이다.’

  그는 중국군들도 로켓탄의 연속폭발을 폭죽놀이같다는 생각을 하든말든 그가 할 일로 돌아갔다.  부대투입의 타이밍을 잡는 일이었다. 준비는 참모들이 진행하고 있었고 작전은 이미 정해졌다.

  "전차대대 투입 준비."

  사단장의 명령을 받아 작전참모가 통신군관에게 명령했다.

  "로켓 발사!"

  통신군관이 즉시 후방에 연락하자 곧 20여기의 로켓이 날아왔다.로켓은 중국군의 방어선 바로 앞 상공에서 힘없이 폭발하여  조각이 되더니 수많은 자폭탄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로켓이 폭발한 아래에 길이 130미터, 넓이 12미터에서 22미터 정도 간격으로 연속 폭발이 일어나며 뿌옇게 먼지가 치솟았다. 이 중국제 762식 425밀리 지뢰제거용 로켓은 북한이 1997년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이었다.  중국제 무기에 의해 중국방어선 앞의 지뢰밭은 완전 소멸되었다.

  "투입!"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작전참모의 연호가 이어지며 엄폐호 뒤에 숨어있던 인민군의 T-72M1 전차들이 한꺼번에 엄폐호를 넘어 평야를 달렸다. T-72M1은, T-72의 여러 변종 중 하나인 T-72A의 수출형인 T-72M을 현대화하고, 경사장갑판에 16밀리의 부가장갑층을 덧댔으며, 포탑에 충전물을 채운 복합장갑을 채용한 개량형이다. 이 전차들은 원래 구 소련제인데 북한에서 200대를 수입했고, 나중에는 라이센스 생산하기도 했다.

  각 전차의 포탑 뒤에는 두 명의 보병이 기관총과 저격총을 들고 사격 준비를 했다. 사단장은 전차의 대미사일 능력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보병보다는 전차병을 중요시한다는 뜻이었다.물론 이 덕택에 전차장은 전투지휘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중국군 방어선에서 대전차미사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미국에서 개발하여 80년대에 도입한 TOW의 중국제였다. 목표가 된 전차에 탄 저격병이 날아오는 불빛을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하고 기관총 사수는 TOW가 발사된 지점에 대해 소사를 가했다. 대부분의 TOW가 중간에 파괴되거나 유선유도를 상실하여 땅에 쳐박혔다.  몇 발은 인민군의 전차에 명중했으나 두터운 T-72의 전면장갑을 뚫기는 어려웠다. 중국군 사단 방어선 전면에 발사된 총 27발의 TOW 중에서 겨우 2발만이 목표를 파괴시켰다. 인민군 전차는 아직도 56대나 남았다. 겁에 질린 중국사단장이 토우를 철수시키고 속도가 빠른 76밀리 대전차포로 상대했으나 대전차포의 성능은 토우보다 더 떨어졌다.  명중된 인민군 전차는 충격을 받지도 않고 계속 전진했다.

  "2시방향에 급조된 토치카! 성형작약탄 한방 먹여!"

  T-72의 포탑 안에서 전차장인 황 중위가  포탑을 돌리며 왼쪽에 앉아 있는 포수에게 명령했다.  주포 오른쪽에 있는 적외선 서치라이트는 중국군의 토우 미사일에 부서졌지만 포수의 야간스코프는 남아있었다. 포수가 조준경의 중심에 목표를 놓자, 레이저거리측정기가 자동으로 거리를 산출하고 컴퓨터가 풍향, 풍속, 기온 등을  감안하여 각도를 조정했다. 자동장전장치는 포탄을 자동으로 장전했다.

  전차가 전진을 계속하는 중에 포수가 발사했다. 포구를 떠난 HEAT-FS 포탄은 발사 직후 날개가 펴져서(FS:Fin-Stabilized) 목표를 향해 비행했다. 포탄에 명중한 대전차참호는 안쪽으로부터 섬광이 번쩍이더니 와르르 무너졌다.

  전차의 뒤를 따라 보병전투차가 나서고,  이들 뒤로는 보병들이 헉헉대며 뛰어갔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273밀리 다연장로켓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병이 중국군 방어선에 접근하면서 로켓탄의 위협은 점점 줄었으나 방어선에서 발사된 각종 화기에 의한 피해는 커졌다.보병 대 보병의 사격전이 시작되었다.

  첫번째로 방어선을 넘은 황 중위의 T-72가 진지를 유린했다.  인민해방군 보병들은 전차를 피해 제 2진지로 후퇴했으나 결코 전차의 속도보다 빠르지 못했다. 황 중위가 동축의 7.62밀리 기관총을 쏘아댔다.  원래 후속부대로서 대전차 방어수단을 별로 갖추지 못한 인민해방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전차와 중국군 보병이 섞여 600미터 후방에 있는 제 2진지의 중국군은 사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군 전차들이 한편으로는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사살하며  단숨에 제 2진지를 점령하려고 계속 전진하는데, 갑자기 오른쪽에서 1개 대대의 중국 전차들이 나타났다.

  중국제 80식 전차들은 포격을 하면서 급속도로 인민군 전차대에 접근하여 이들을 공격했다. 80식 전차의 105밀리 강선포에서 발사된 APFSDS(철갑탄의 일종)가 초속 1,455미터의 속도로  인민군 T-72의 얇은 측면장갑을 꿰뚫었다. 인민군 전차들이 하나씩 파괴되었다.  뒤따라온 인민군들도 중국전차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이미 예상된 상황이었다.

  인민군 보병들이 전차보다 먼저 사격위치를 잡고 반격을 시작했다.보병들이 한국군에게서 인도받은 판저파우스트를 중국전차에 날렸다.장갑 관통력 700밀리의 이 대전차로켓은 T-80의 전면장갑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무기였다.  중국전차들이 인민군 보병의 공격에 당황하는 순간 인민군 전차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치열한 전차전이 시작되었다.

  "계속 이동하면서 쏴라! 1시방향에 돌출된 땅크!"

  황 중위는 운전병과 포수에게 명령하며 자신은 포구를 왼쪽으로 돌렸다. 포수가 장전을 하며 목표를 조준간에 잡았다. 황 중위의 전차가 신나게 좌우로 달렸다.  전차 바로 앞의 땅에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주포가 발사되었고 바로 그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선두의 중국제 전차가 포탑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폭발했다. 장관이었다.또 다른 목표를 찾아 황 중위가 전방을 살피는 중에 전차에 극심한 충격이 가해졌다.  포탑 오른쪽이 뚫리더니 뭔가가 튀어들어왔다.  황 중위가 아차하는 순간 그와 부하들의 몸은 갈갈이 찢어졌다.

  그는 신혼이었다.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관사에서 그의 아내가 불러오는 배를 만지며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그의 아내 곁에 앉아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남북통일이 되어서 이제 동족상잔의 비극은 없어질테니 군인의 아내로서는 한시름 놓았다는 그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3년 전만 해도 반동으로서 자아비판을 받을만한 언사였으나 지금은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다른 적과 맞설 줄을 상상을 하지 못했고, 그녀는 앞으로는 최소한 같은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한대가 당했습니다만… 곧 적 전차대를 제압할 것 같습니다."

  참모가 망원경으로 전차전을 유심히 살폈다. 전차전이 벌어진 벌판에 조명탄이 연이어 낙하하고 있었다.  이제 움직이는 전차보다 서있는 전차가 더 많게 되었다.  최 소장은 예비대의 투입을 지휘하다가 잠시 잠망경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인민군과 인민해방군의 전차들은 급기야 서로 얽혀서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의 주포를 맞고도 파괴되지 않는 전차는 없었다.  그러나 보병의 측면지원을 받은 인민군 전차들이 점점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잘 하고 있구만, 기래야지."

  1999. 11. 23  10:30  평안북도 운산

  개전 첫날 새벽에 점령된 운산 읍내 군당위원회 회당 앞 광장에 생기를 잃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이들 200 여명의 민간인 주위에는 총을 겨누며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인민해방군들이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억류되어 있는 민간인이나 이들을 감시하는 인민해방군이나 모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선의 인민해방군은 어제 저녁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중이었다. 박천과 영변 두 곳의 전선이 뚫리고 그 사이로 통일한국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영변에서 패배한 인민해방군 231사단은 뚫린 방어선을 같은 집단군의 제 232사단에 인계하고 물러났지만,  232사단도 오래 버틸 것같지 않았다.

  231사단 정치부 소속 군관인 지앙 소좌는 보병전투차 옆에서 자꾸 시계를 들여다 보며 초조하게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옆에 있는 무전병은 무선을 개방한 채 연신 포성이 들려오는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언제 국군이나 인민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에 명령은 아직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상부의 명령 한마디에 이들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지앙 소좌가 민간인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겁먹은 표정이었다.지앙 소좌는 알고 있었다. 대부분 중년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로 구성된 이들 민간인들은 언제라도 정규군에 편입될 수 있을 정도의 군사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몇몇 고등중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도 웬만한 나라의 예비군보다 훨씬 많은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북한의 모든 인민들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중국군의 예비대인 민병보다 더 강한 군사조직인 교도대나 노농적위대에  소속되어 있어서,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제복을 입고 총을 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중국군은 이들을 그냥 놔두고 후퇴했다가는 언제 이들에 의해 뒤통수를 얻어맞을지 모르는 위험분자들로 간주했다.

  민간인들 가운데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한 청년이 조선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민간인들에게 노래가 퍼져갔다. 무슨 노래인지 몰라도 행진곡풍의 리듬에 점점 음정이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군가나 조선에 대한 충성심이 담긴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앙 소좌가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주동자를 끌어냈다.  경비병들에게 끌려나오는 동안 민간인과의 사이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그 청년은 총검을 휘두르는 경비병들에게 끌려나왔다.

  지앙 소좌가 천천히 권총을 그에게 들이댔다.  청년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두려운 빛이 나타났다가 즉시 사라졌다.  청년이 눈을 부릅뜨며 소좌를 노려보더니 다시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땅!"

  총소리와 함께 청년의 이마에 붉은 구멍이 생기고 머리 뒤로 피가 터져 나왔다. 지앙 소좌가 총을 권총집에 넣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몸이 서서히 뒤로 무너졌다.  민간인들 사이에서 경악과 흐느낌이 흘러 나왔다. 지앙 소좌가 적은 이렇게 다뤄야한다는 듯 빙긋 웃었다.  자신은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점령군인 것이다.  부하들이 즉시 시체를 끌고 광장 구석에 파둔 구덩이에 쳐 넣었다.

  "반항하는 놈들은 사살해버려!"

  부하들 사이에 당혹감이 번졌으나 금방 원상태로 돌아갔다. 부하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민간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뒤쪽에 있던 노인이 천천히 아까의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민간인들이 또 따라불렀다. 부하들이 그 노인을 끌어냈다. 지앙 소좌가 권총을 꺼내 겨눴다.

  "땅!"

  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지앙 소좌는 권총을 민간인들에게 휘둘러 보였다. 언제든지 반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뜻이었다. 부하들이 노인의 시체를 발을 잡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민간인들의 눈에는 분노와 함께 공포가 서렸다. 아직도 상부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앙 소좌는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천여년간 중국의 피보호국, 19세기말부터의 일본의 침입과 식민지배, 동족상잔의 전쟁, 동족끼리의 학살 등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특히 미 제국주의의 노예이며 노동자, 농민의 적인 남조선 정부와 개인우상화로 점철된 북조선정부를 남북 조선의 인민들이 내버려둔 것은 모두 인민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조선의 인민들은 외세와 불의에 저항할줄 아는 중국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지금도 이 민간인들은 총이 무서워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앙 소좌는 왜 아직도 당 지도부는 핵 사용을 결정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핵미사일 몇발이면 조선은 금새 항복할텐데, 외국의 눈치를 보는지 지도부의 대응은 미적미적했다.  당 지도부의 우유부단함이 이렇게 전쟁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하지만 핵전쟁에서 보병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핵전쟁에서 자신들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조선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아까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소좌가 명령하지 않아도 병사들이 그를 끌어냈다.  소좌가 고개짓을 하자 부하들이 그녀를 구덩이로 끌고 가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잘 보라는듯 수십번을 찌르고 또 찔렀다.시체에서 피가 터져나와 눈밭 위를 붉게 물들였다. 지앙 소좌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표정이 밝아진 무전병이 그에게 무전기를 건냈다.

  "231사의 정치부 지앙 소좌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역시 병단사령부는 옳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지앙 소좌는 생각했다.그는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북조선인들을 회당으로 몰아넣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즉각 사살되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문을 잠그고 창문도 못질을 해서 봉했다. 부하들이 회당건물 밖의 곳곳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회당을 중심으로 총을 겨눈 부하들이 반원형으로 둘러섰다. 기관총 2정의 사격준비가 끝나자 소좌가 다시 권총을 꺼내들어 하늘을 향했다.

  "사격!"

  장 소좌의 총소리를 신호로  정치부 소속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수류탄이 계속해서 투척되었다. 회당 안쪽에서 비명이 이어졌다. 회당은 점점 불이 번지고 있었다. 2층 목조건물인 이 회당은 계속된 폭발과 화염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잠시 귀를 찢는듯한 비명의 합창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에는 잠잠해졌다. 257명의 주민들은 이제 중국군에게 저항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이런 일이 후퇴하는 중국군 부대의 점령지마다 벌어지고 있었다.  무너진 회당은 아직도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999. 11. 23  10:50  평안북도, 선천

  차 영진 중령은 북한제 소형 사륜구동차를 몰고  대목산 요새를 내려왔다.  선천 시가지 곳곳에는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제 11기갑사단이 중국군을 막는 동안  모두 피난을 했기 때문에 사람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쌓인 숲과 도로 곳곳에는 인민군 초소들이 설치되어 그를 보고 있겠지만, 그들은 명령 없이는 몸을 드러낼 수 없기때문에 차 중령은 쓸쓸한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차 중령이 집으로 향하는 작은 도로에 들어섰다. 멀리 자신의 관사가 보였다.  북한에 주둔하는 제 11기갑사단의 기혼자를 위해 지은 소규모 3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차 중령은 관사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정문의 경비실은 유리창이 모두 깨어져 있었다.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아무도 없을 이곳에 혼자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내는 자신이 죽은 줄 알 것이다. 그는 개전 첫날 저녁에 대목산 요새에서 위성수신되는 텔리비전으로 뉴스를 보았는데, 자신의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본대의 후퇴를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차 중령과 그의 제 3 전차대대라는 말을 아나운서를 통해 들었을 때 그는 씁쓸하게 웃어야 했다. 자신은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어제밤에 본 뉴스는 선천과 그 주변의 평안북도 지역에서 제 2전선을 형성해서 용감하게 싸우는 부대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는 그 부대의 지휘관을 60대의 예비역 인민군 대장이라고 했고,  그의 부하들은 20만에 육박한다고 했다. 차 중령은 웬 언론의 과장보도인가 했지만 이것을 군 지휘부의 선전으로 이해했다.  같이 뉴스를 본 홍 대좌는 그를 자꾸 장군님이라고 불렀다.  차 중령이 놀리지 말라고 하니까 홍 대좌는 차 중령이 곧 장군이 될 것이라면서 미리 장군으로 부르는게 어떻냐며 웃었다.

  차 중령이 2층의 자기집을 보았으나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그는 군용 스키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군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있는 집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차를 몰고 다시 간선도로에 들어섰다. 하늘에 전투기들이 고공을 지나며 비행운 네 개가 그려졌다.  차 중령이 실눈을 뜨고 비행기를 보더니 F-16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몰아 대목산을 향했다.

  1999. 11. 23  11:00  경기도, 강화

  신 승주는 강화도에 있는 국가안전기획부  교육원에서 여러가지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해군 UDT출신도 있었지만 안기부 요원들과 북한의 특수부대인 정찰연대 소속의 군인들도 많았다.  훈련은 해상침투가 주였고 교육 내용은 중국어와 컴퓨터가 전부였다.  중국어는 정찰연대원들이 잘했고 컴퓨터는 안기부원들이 발군의 실력을 발했다. 자신처럼 UDT 대원들은 수업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찼다.

  그런데 신 승주, 예비역 해군 중위인  그는 도대체 무슨 임무를 맡기려고 이런 교육을 시킬까 궁금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들의 목적지는 일단 중국이 확실했다. 그러나 전시에 컴퓨터는 왜 배운단 말인가?  어제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봐서 이들이 맡을 임무는 극히 위험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그러나 교관이나 교수들도 이들의 임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내일 저녁에 작전에 투입된다고만 말해줄 뿐이었다.

  1999. 11. 23  11:20  동경 124도, 북위 39도 3분, 서해함대 충북함

  서해함대 사령관인 김 종순 중장은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오는 통일참모본부의 명령과 각군의 요구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중국인민 해방군 해군의 3개 함대가 모조리 도륙된 지금,  서해함대의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 기회에 중국에 대한 서해의 봉쇄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의외로 통일참모본부는 서해 봉쇄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 중장이 차선책으로 제안한 요동반도 다이렌항의 공격도 중국해군 소속의 지상발진 공격기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개전 첫날에 침몰된 인천함이 보내온 전투보고에 따르면 적 공격기에 대한 시 스패로의 명중율은 상당히 높았다.공중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중국해안에 대한 봉쇄는 상당한 수준까지 수행할 수 있는데, 통일참모본부는 해군을 너무 아낀다는 불만이 들었다. 현재 육해공군중에서 유일하게 중국에 대해 확실하게 우세한 전력은 해군밖에 없는데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참모본부가 원망스러웠다.

  지상군에 대한 포격지원과 가끔씩 영해를 넘어오는 중국 잠수함과 미사일정의 격퇴가 서해함대가 수행하는 중요한 임무의 거의 전부였으나, 의외로 통합참모본부는 함대를 혹사시켰다. 쓸데없이 통참이 지정한 해역을 함대가 초계만 하다가 돌아오는 일이 잦았는데, 이 초계해역의 결정은 외부적으로는 김 중장이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김 중장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으나, 통일참모본부가 무슨 비밀스런 일을 벌이려나 보다 하고 묵묵히 명령에 따랐다.

  중국 북해함대의 전멸은 중국에게 치명적이었다. 상륙전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놓고 여객선의 연안항해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어부들은 서해, 중국인들에게는 황해로 불리는 이 바다로 조업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다. 중국 북해함대는 남해함대에게서 잠수함 전대 하나를 빌려 한반도 근해로 내보냈으나, 재래식잠수함으로는 접근하는 도중에  한국해군의 초계기와 구축함으로 이뤄진 방어선을 뚫기가 힘들었다.  겨우 방어선을 뚫고 들어간 잠수함들은 반격이 무서워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서해함대에 떨어진 오늘의 임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중국영해 아슬아슬한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전북함을 잃고 다시 원래의 기함인 충북함에 승함한 김 중장은 한국해군의 장교들이 얼마나 우수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대규모의 대형함정들을 지휘하기 벅차서 충북함의 함장인 고 재일 대령에게 임시로 함대지휘를 맡겼는데,고 대령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천방지축 엉망으로 움직이던 연안경비정과 소형 어뢰정, 그리고 미사일정들이  고 대령이 지휘를 시작하자 어느새 일사분란하게 함대 후미를 따라오게 되었다.

  "오늘은 마중나온 분들이 계십니다."

  60km 전방에 나가있는 초계기로부터  받은 대잠정보를 하사관이 함교의 중앙 스크린에 표시하는 것을 보며  함장이 함대사령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최소한 두 척의 잠수함입니다. 대함미사일 탑재잠수함이라면 차라리 쉬울텐데 아닐겁니다.  그리고 서해의 경우, 원잠보다는 재래식 잠수함을 잡기가 더 힘듭니다."

  대잠수함전에 대한 경력이라면 첫날의 전투 밖에 없는 인민군 출신의 김 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일 전에는 한국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의 잠수함을 보유했던 북한 해군은 대잠수함전 훈련은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해군이 보유한 대잠무기라고는 나진급 등의 비교적 대형함에 장비된 대잠로켓인 RBU-1200 밖에 없었고  대잠전을 중요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국해군과의 해전에서 항공전뿐 아니라 잠수함전이 중요한 전투방식으로 떠오르자,  대잠전을 잘 모르는 김 중장은 고민에 쌓였다.

  김 중장은 개전 첫날 전사한 전북함의 함장 장 태석 중령이 생각났다. 그는 미사일전 뿐만 아니라  대잠수함전에서도 기량을 발휘했으나 죽었다. 김 중장은 자신이 무능한 탓이라며 아직도 그의 죽음을 원통해했다. 김 중장은 잠수부들을 동원하여  전북함이 침몰한 지점 부근에서 장 중령의 시신을 인양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장 중령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시신을 차디찬 바다에서 찾고,  대령으로 추서하는 것 밖에 없었다. 김 중장이 묵묵히 고 대령을 쳐다 보았다. 한국해군답게 대잠수함전의 경력은 많아 보였다. 신중한 그의 용기를 북돋우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재래식 잠수함은 잡기가 쉬운 편이지."

  미국이나 러시아의 경우,  원자력이든 통상형이든 간에 공격잠수함은 잠수한 상태에서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함 중앙의 수직발사관 뿐만 아니라  어뢰발사관을 통해서도 하픈이나 SS-N-16 따위를 날릴 수 있기 때문에 공격 직전에 징후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특히 러시아 잠수함의 경우 사정거리 500km가 넘는 잠수함 발사 대함미사일이 여러 종이 있기 때문에, 인공위성이나 조기경보기에 의한 목표의 확실한 데이터만 있으면 동해에서 서해의 목표를 공격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다.이 특성은 잠수함의 은밀성과 합해져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중국해군의 경우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은 원자력인 한급 잠수함 5척과 재래식인 로미오급의 개량형인 우한급 1척에만 해당된다.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사정거리 40km의 잉지-1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수면 위로 부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목표로 하는 함대의 상공에 초계기가 떠있으면 이들은 공격기회를 갖기 힘들다.

  "초계기로부터 적 잠수함 탐지보고와 함께 공격권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잠전지휘관이 함대사령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겪은 함대사령관들은 상황과 능률을 떠나서 대체로 함과 초계기의 합동작전을 원했었다. 그가 아는 한 수상함에 탄 진짜 해군이 해군 소속의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공을 독점시키는 법은 없었다.  설사 그 잠수함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배를 탄 함장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는 집요했다.

  "즉시 공격하라."

  함대의 대잠지휘관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초계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지상발진형 초계기인 P-3C 오라이언 4기가 함대탑재 헬기들인 슈퍼 링스와, 역시 지상발진형인 UH-60 시 호크의 지원을 받으며 적 잠수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9. 11. 23  11:35  서해함대 서쪽 20km, 초계기 오라이언

  "DIFAR(수동형 소노부이), 1,000 미터 간격. 준비… 투하!  준비… 투하! "

  P-3C 오라이언의 지휘관이며 전술통제사인 단 종상 소령은 자신이 지금 중형승용차의 투하를 명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회용의 조그마한 소노부이(음파탐지 부표) 값이 왜 그리 비싼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개의 프로펠러를 단 이 초계기는  해상 50미터 상공을 낮게 날면서 소노부이의 세번째 선을 만들고 있었다. 단 소령은 중국의 잠수함이 틀림없이 소노부이를 투하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능동형 소노부이와 섞어서 투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놈… 꽤 질긴데요?  밍급으로 이정도의 조함능력이라…"

  각종 전자기기로 꽉찬 기체 중앙에서 여러 소노부이에서 전해오는 시그널을 분석하며 이 영승 중위가 투덜거렸다.  전쟁이 터지자 군용비행장으로 변해버린 영종도 국제공항에서 아침 9시에 출격하여 벌써 2시간 반이 되가고 있었다. 이 해역에서 잠수함의 활동을 발견하고 추적한 지도 벌써 30분이 넘었다.잠수함이 내는 소리를 분석하여 이 잠수함을 밍급, 중국해군의 제식명으로는 035급으로 분류했으나  공격기회를 줄 정도로 확실한 신호음을 내지 않았다.  대충 위치를 감잡을 정도 되면 어느새 소리가 사라지곤 해서 아직도 짜증나는 술래잡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단 소령은 대잠초계기 승무원들은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안전한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잠초계기의 적인 잠수함에서 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 러시아의 타이푼이 대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미사일 발사를 위해 비싼 원자력 잠수함을 해표면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함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함공격을 할 때도 전투기의 엄호가 있거나  사정거리가 긴 미사일을 발사하기 때문에 직접 공격을 받을 위험은 없었다.  그리고 어떤 해군지휘관이라도 대공무장이 빈약한 초계기를 적 전투기들이 활동하는 상공에 파견할 리도 없었다.  개전이래 통일한국군은 아직 단 한 대의 초계기도 잃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초계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륙붕의 경사면이라서 힘들군…"

  이 해역은 완만한 경사로 이뤄진 서해안의 대륙붕이 갑자기 급경사로 바뀌면서 심도가 깊어지는 곳이다. 잠수함이 이 경사면에 숨어있으면, 발견도 어렵지만 공격할 때 어뢰의 심도조정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목표인 중국잠수함은 계속 심도를 낮춰가며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하지만 시속 760km의 초계기를 속도만으로 따돌리려는 멍청한 잠수함장은 있을 수 없었다.

  "12번 소노부이에 미약한 신호음 감지!"

  이 중위가 눈을 계속 껌뻑거리며 손으로 콘솔을 조작하고 있었다. 단 소령이 즉시 조종사에게 연락하자 초계기가 선회를 하여 방금 소노부이를 떨어뜨린 곳으로 갔다. 초계기에서 머린 마커를 투하하자 해면에 노란색의 연기가 피어 올랐다.  자기탐지기에는 목표가 탐지되지 않았다.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탐지하는 자기탐지기(MAD)는 확실한 탐지를 보장하기는 하지만 유효거리가 500미터 이하로 짧기 때문에 잠수함 바로 위의 상공을 날아야 한다. 초계기가 다시 한번 선회했다.

  전방감시 적외선장치(FLIR)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잠수함은 슈노켈을 함내에 수납한 상태로, 축전지에 의한 무음잠항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경우 통상형잠수함이 원자력함에 비해 훨씬 소음이 적다.  소노부이에 잡히던 저주파 신호음이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초계기의 보고를 받은 충북함의 대잠지휘관이 근처의 시 호크에 연락하여 12번 소노부이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헬기가 하버링하며 디핑소나(양강식 음파탐지기)를 내리고 청음을 시작했다. 헬기의 강한 바람에 의해 수면에 동심원이 퍼지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노란색의 연막이 흩날렸다.

  [심도 150까지 계속 내려. 좋아.... 정지! ]

  초계기의 승무원들은  충북함과 연결된 무선망을 통해 대잠헬기의 기장이 내는 소리를 초조하게 듣고 있었다. 초계기는 적 잠수함이 도망갈 것에 대비해 남쪽에 또다른 소노부이의 선을 만들었다. 단 소령은 이번에도 고집스럽게 수동형 소노부이만을 투하했다. 수동형이 싸기도 하지만,  탐지거리가 크기 때문에 잠수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수동형이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탐신모드 전환! 탐신! ]

  초계기의 승무원들은  헬기의 디핑소나가 내는 고주파 탐신음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즉시 화면에 잠수함의 밝은 빛이 표시되었다가 점점 희미해졌다. 이 중위가 목표의 위치를 파악하며 외쳤다.

  "심도 250! 아, 움직입니다. 침로 3-5-3, 5노트, 증속중!"

  단 소령 콘솔의 중앙화면에  밝은 점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헬기가 즉시 수중에 어뢰를 발사하여 그 점을 좇았다. 두개의 점이 점점 접근하고 있었다. 초계기에서 투하한 20개의 소노부이에서는 헬기가 투하한 어뢰가 발신하는 탐신음이 계속 수신되었다.

  "17, 18번… 4번 라인의 17번과 18번 사이에 소리가 들리니다! 침로를 계속 바꾸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다른 목표이거나…"

  이 중위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단 소령을 쳐다 보았다.  단 소령이 시그널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시 호크는 유선유도어뢰를 공격하고 있어.  음문을 녹음시켜 발사한 거야. 이것이 진짜다. 목표는 새로운 소노부이 라인을 모르고 있군. 어뢰 투하 준비!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매드(MAD:자기감지장치)로 최종 확인한다."

  이 중위의 화면에는 아까의 두 점이 계속 교차하고 있었다. 10노트도 안되는 잠수함을 어뢰가 계속 스치며 명중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계기가 좌측으로 선회하여 다시 북동쪽으로 날았다.

  "목표의 추정침로는 2-5-0이다.  최 하사는 탐지되는 대로 마커를 투하하도록!"

  "투하! 투하했습니다. 확실합니다! "

  단 소령이 명령을 하자마자  MAD를 맡은 최 하사가 머린 마커를 투하했다. 단 소령이 즉시 초계기를 선회하도록 했다.  초계기가 바다 위의 붉은색 연막을 향해 선회했다.

  "좋아, 어뢰, 패시브. 초기수색심도 300. 준비… 투하! "

  단 소령의 명령에 따라 어뢰가 투하되었다. 낙하산을 달고 수면에 내려앉은 Mk-46 어뢰는 점점 깊이 내려가 잠수함의 스크루를 탐지하고 조용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네 개의 꼬리날개를 가지며 앞부분이 납작한 이 어뢰는 45노트의 속도로 가속했다.

  "목표, 침로 유지. 어뢰가 추적하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거리 200! 계속 접근 중입니다."

  이 중위가 흥분되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 밍급 잠수함 소나의 사각지대로부터 추적하고 있는 어뢰를 잠수함은 감지할 수 없었다.

  "목표, 급격히 증속하고 있습니다. 침로 변경, 어뢰와의 거리는 100! 곧 명중합니다!"

  단 소령은 두 개의 밝은 점이 합해져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 중위가 환성을 질렀다. 스크린에는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격침 확인하라."

  단 소령의 명령에 초계기가  격침이 예상되는 곳의 상공을 선회했다. 잠시 후 기름띠와 잡다한 물건들이 떠올랐다.  기장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보고했다.

  "좋아, 격침 확인!"

  기내에 환성이 터졌다.  통신사가 남포에 있는 지상 대잠지휘소와 충북함에 연락했다.초계기의 모든 정보는 대잠지휘소와 데이터 링크가 되어있기 때문에 부유물 확인만을 보고해도 되었다. 충북함의 대잠지휘관이 또다른 두척의 잠수함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기수를 북쪽으로, 대륙붕 경사면을 따라 디카스의 선을 깐다."

  초계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비행하며  DICASS(방향지시 능동형 소노부이)를 투하하기 시작했다. 이 소노부이는 수동과 능동의 겸용이며 음파의 발신간격을 초계기에서 조정할 수 있다.  단 소령이 앉은 콘솔 좌측의 레이더에는 동료 초계기와 헬기들이 열심히 잠수함을 사냥하고 있는 모습이 표시되고 있었다.

  "간격 2km, 준비… 투하 시작!"

  또다른 대잠요원인 박 소위가 소노부이를 투하할 때, 이 중위는 소노부이들이 청음한 시그널을 살피고 있었다. 일단 청음모드부터 시작했는데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포항의 대잠지휘소에서는 잠수함 한 척이 그 라인으로 갔다고 전해왔다. 아직 잠수함이 소노부이의 선에 접근하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초계기는 소노부이의 초단파를 보다 잘 수신하기 위해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디카스 1, 3, 5, 탐신모드로 전환준비."

  단 소령이 결심했다.이 중위가 소노부이들의 발신간격을 조정하고 단 소령에게 준비완료의 신호를 보냈다.

  "탐신!"

  이 중위가 각 소노부이들이 보낸 시그널을 계속 살폈지만  의심이 가는 물체를 잡을 수 없었다.

  "기다려. 특히 2, 4번을 주시하도록."

  1999. 11. 23  11:50  초계기 S-2A/F

  대잠초계기의 임무를 비교적 신형인 P-3C에게 물려주고 해상수색만을 전문으로 하는 S-2A/F 트래커(Tracker)  한 대가 연료보급을 마치고 다시 이 해상에 도착했다. 3,000 미터의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해상에는 지금 한창 잠수함 사냥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장은 이들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P-3C가 두 척, 슈퍼 링스가 한 척의 잠수함을 잡았고 함대는 위협이 사라진 해상을 천천히 서진하고 있었다. 기장이 조종간을 잡고 기수를 내리려는데 부기장이 갑자기 긴장했다.

  "레이더에 뭐가 잡히는데요? 수상함 같은데… 좀 작습니다."

  기장이 레이더를 보니  서쪽 해상에 뭔가 자꾸 레이더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 60km 정도… 중국의 잉지나 스틱스라면 아직 사정거리는 아닌데… 미사일정일지도… 그런데 함대에서는 모르고 있나보군."

  근처에 중국군의 항공기가 없는 것을 확인한 초계기가 서쪽을 향했다. 아마도 작은 선박이 파도에 휩쓸리며 가만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만약 이것이 매복하고 있는 중국의 미사일정이라면 서해함대에 큰 피해를 줄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기장은 목표의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동합니다.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20노트….. 30노트! "

  "함대에 연락해!"

  기장이 속도를 내어 서쪽으로 급히 향했다.  부기장이 충북함과 무선 교신을 시작했는데, 충북함에서는 아직 적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기장이 직접 충북함과 교신을 했다.

  "고속미사일정으로 보인다. 속도 40노트, 아니, 50노트."

  [지금 장난하나? 무슨 속도가 50노트야?]

  기장이 충북함 함장의 지적에 놀라 디지틀 속도표시기를 다시 확인했다. 기장의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금 70노트로 가속! 속도 증가중, 비행정인지도 모른다."

  [비행정? 중국 해군에서 Be-6 매지(Madge)는 퇴역했을텐데... 4대 밖에 없고... 속도와 고도는? ]

  "100노트, 고도는 아직도 낮다. 1미터. 매지보다 훨씬 크다! "

  [알겠다. 전투기를 보내겠다. 계속 대기하라.]

  기장은 저 비행정이 혹시 러시아제의 지표효과익(WIG:Wing-In-Ground effect) 항공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 위에 떠있기도 하고 1에서 4미터의 고도로 해면을 스치며 낮게 날기도 하지만, 고공을 비행하는 능력도 있었다.  만약 이 항공기가 함대에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고 수면 위로 내려가는 경우, 함대의 중거리 대공미사일에 의한 요격은 불가능해진다.

  "고도는 1미터, 속도 300노트!  매지보다 훨씬 빠르다. 위험하다! 공격하겠다!"

  기장이 결단을 내렸다.  함대 상공을 방어할 요격기가 없는 지금, 그 항공기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F-16은 서해 상공에 중국 전투기들의 움직임이 없자 이륙하지 않고 영종도 공군기지에 출격대기만 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륙하여 그 항공기를 공격하려면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하픈, 목표입력. 발사!"

  부기장의 기장의 명령을 듣고 잠시 황당해졌으나 그대로 명령을 따랐다. 한국해군은 오라이언을 배치한 다음 트랙커를 퇴역시키려 하였으나 오라이언의 숫자가 너무 적어  수명연장을 위한 개조 후에 계속 현역에서 활동하게 했다. 주로 해안선 감시임무 위주였으나 대함공격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부기장이 하픈을 발사했다.기체에서 분리된 하픈의 꼬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며 이 미사일은 점점 고도를 내리고 속도를 높였다. 초계기와 그 항공기의 거리는 어느새 30km로 접근하고,  미사일과의 거리는 10km로 좁혀졌다. 그 항공기는 일체의 전파를 발하지 않고 있었다.

  "적 항공기 미사일 발사! 총 6기가 함대를 향합니다!"

  부기장이 비명을 질렀다.  기장은 즉시 충북함을 호출하여 상황을 전했다.

  "지표효과익기 룬이다! 지금 룬에서 미사일 6기를 발사했다.  속도는 마하 0.9. 시 스키밍 방식이다."

  룬(Lun)은 러시아가 해군용, 또는 민간수송용으로 개발한 지면효과익 항공기이다. 중량이 무거운 화물을 수송할 수 있으며, 유도탄발사 튜브가 있어서 대함공격도 가능하다. 민간용일 경우 최대 400명의 인원수송이 가능하다.

  기장이 레이더를 보니 6기의 미사일이 함대쪽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초계기에서 발사한 하픈도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 항공기를 향했다. 속도가 느린 대함미사일,  특히 순항고도가 낮은 하픈으로 항공기를 공격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했지만,  룬이 저공을 비행하는 한 이 항공기는 단지 속도가 빠른 배에 불과했다. 룬에서 또다른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맞아라."

  부기장이 레이더를 뚫어져라고 보며 외쳤다.  그는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룬과 하픈이 거의 한 점이 되었다.

  중국이 러시아에서 1999년에 수입한 룬은 300노트의 최고속도로 동쪽을 향하며 계속 미사일을 발사했다.  통일한국군의 서해함대에 대한 위치자료는 위성을 통해 받고 있었고 , 목표상공에는 초계기와 헬기만 있었기 때문에 중국제 잉지 미사일은 중간에 요격을 받지 않고 함대를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웅장한 터보팬 8기를 단 이 항공기는 수면과의 반발력을 이용해 수면 바로 위를 날 수 있다.  이 항공기는 주로 수면 위를 비행하지만, 초계 임무에 동원될 때는 최대 3,000 미터의 고도를 나는 진짜 항공기이기도 하다.

  꼬리날개 중간 앞쪽에 있는 관측실에서 시스템 조작사들이 계속 미사일을 발사했다.  수면 위 16미터에 위치한 이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푸른 바다와 짙푸른 하늘 밖에 없었다.  또 한 발의 미사일이 발사되고 연기가 걷히는 순간, 바다 위 멀리 하얀 점이 수면 위를 스치며 날아왔다.

  "명중!"

  "명중했다. 방금 룬에서 미사일 3기가 추가로 발사되었다. 먼저 발사한 6기와 그쪽의 거리는 10마일."

  기장은 대함미사일로 격추한 이 항공기를 함정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그는 미사일들의 목표가 되고 있는 서해함대가 걱정되었다.

  1999. 11. 23  11:55  충북함

  "잉지(鷹擊)입니다. 잉지는 레이더 추적방식입니다."

  함장인 고 재일 대령이 보고하자  함대사령관인 김 중장이 모든 함대를 북쪽으로 돌리며 한 줄로 서라고 명령했다.함대가 넓게 퍼지며 직선대형이 되었다.  함 간의 거리는 점점 벌리고 있었다. 미사일의 진행방향 정면에 충북함이 있다는 사실을 안  고 대령이 김 중장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놀랐다.근처 상공에 있던 초계기와 헬기들은 고도를 높여 미사일을 피했다.

  "함대 기관 정지, 스패로 준비. 채프 발사! 대전자전 실시! "

  김 중장의 명령에 함장은 서둘러 작전을 실시했다.  잉지 대함미사일에서 나오는 레이더 전파가 잡히자 즉시 ULQ-6 전자전용 재머가 방해전파를 발사하고 2기의 Mel사(社)제 채프로켓이 발사되었다. 1997년의 개조공사 때 새로 장비된 시 스패로가 미사일을 향해 날았다. 함대의 다른 대형함들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3기 명중, 3기 접근중. 2km 입니다."

  함장이 초조한지 망원경을 들어 서쪽 하늘을 보며 명령했다.

  "다시 채프 2기 발사! 최종 요격하라!"

  함이 울리며 채프 로켓 2기가 다시 발사되어 흩날리는 작은 알루미늄 조각이 충북함을 덮었다.  함에 있는 2기의 20밀리 벌컨 개틀링포가 연사되었다. 함대의 모든 소구경포가 미사일 요격에 나섰다. 포화를 뚫고 들어온 잉지 미사일 중 2기는 충북함을, 1기는 나진함을 노렸다.

  잉지 1기는 1km 전방에서 폭발하고 다른 1기가 접근해왔다.이 미사일은 충북함 바로 위에서 폭발했다. 섬광이 번쩍이며 함교에 파편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독님!"

  고 대령이 쓰러진 김 중장을 부축했다. 김 중장이 눈을 떠서 보니 고 대령도 머리에 큰 상처가 나있고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 나왔다.  또다른 폭음이 들려왔다.  고 대령이 함교 밖을 보더니 침통한 표정을 짓고 다시 김 중장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의외로 부상이 적은 김 중장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깨어진 유리창을 통해 겨울 서해바다의 찬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방금 나진함이 당했습니다, 사령관님. 어이~ 위생병! "

  함장이 위생병을 찾는 사이에 김 중장이 침몰하는 나진함을 바라보았다. 만재배수량 1,500톤에 북한해군에서 가장 큰 함정인 나진함은 미사일 한 방을 막지 못하고 침몰하고 있었다.  그 배는 미사일에 대항하는 수단이 기총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진함은 함수부터 침몰해서 지금은 함미의 100밀리 포좌만 보였다. 자존심이 상한 김 중장이 이를 갈았다.

  상공에 소음이 들리고 김 중장이 함교 밖을 보니 F-16 전투기들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 중장은 또다른 미사일이 오지 않나 걱정했지만 이 미사일들은 F-16 전투기들이 요격했다.

  1999. 11. 23  11:58  초계기 오라이언

  서해함대의 불행을 전해들은 단 종상 소령은 혀를 찼다. 중국이 지면 효과익 항공기를 동원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서해함대에 한국형 구축함이 한 척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왔다. 구식 기어링급의 충북함에 있는 2연장 발사기가 아닌 수직발사기였다면  중국제 미사일을 모두 요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형구축함 중에서도 신형함에 탑재된 SM-2라면 속도가 느린 잉지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디카스 4번에 기계음이 들립니다. 접근 중… 거리 200미터."

  이 영승 중위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단 소령의 예상대로였다.그는 2km 간격으로 능동/수동 겸용 소노부이를 투하하고, 1, 3, 5번만 능동 탐신상태로 두었다. 그 사실을 모른 중국 잠수함은 탐신음파를 발하는 3번과 5번의 디카스 사이인 5번 디카스 바로 아래를 지나갔다.

  "4번으로! 어뢰 투하 준비, 패시브."

  중국 잠수함은 초계기와 헬기의 추적을 모두 피하고, 이제 마지막 소노부이라고 생각하여 속도를 약간 높인 것이 문제였다. 4번의 소노부이는 계속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단 소령이 보기에도 잠수함의 침로와 속도는 너무나 분명했다. 초계기가 동쪽으로 날았다가 서쪽으로 선회해서 잠수함의 침로와 일치시켰다.  초계기는 4번 소노부이가 신호를 보내는 곳으로 저공비행했다.

  "투하!"

  또다시 어뢰가 수면 위로 떨어지고 추적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수면위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초계기가 그 지점 상공을 계속 선회했다.

  "확실하게 격침!"

  기장이 육안보고를 하자 단 소령이 빙긋 웃었다.  이 중위와 다른 승무원들이 모두 미소를 지었다. 아까처럼 환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제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서해함대는 나진함의 생존한 승무원들을 모두 구조하고 나서  남포항을 향해 동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기함인 충북함의 피해는 레이더와 통신장치 등이 소실됐을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충북함은 당분간 전투불능에 빠지게 되었다.  레이더와 통신기가 없는 함정은 현대 해전에서 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초계기와 헬기들이 함대의 뒤를 따랐다.

  1999. 11. 23  11:20  중국 북경, 北京飯店

  중국의 국가주석 리루이환은 천안문광장 동쪽에 있는, 성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베이징판띠엔(北京飯店)에서  주중 미국 대사와 만나 기나긴 오찬을 시작하고 있었다.이 호텔은 내전 이후 계속 중국공산당의 전용 고급 접견실로 사용되어 일반인과 외국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며 주석은 미국 대사에게 무기의 빠른 인도를 독촉했지만 대사는 일단 해상수송로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못하다며 중국에 의한 동지나해의 완전장악을 먼저 요구했다.

  "그 빌어먹을 피스라는 불법단체 때문에… 그럼 미 7함대를 보내 수송함대를 보호하면 될 것 아니오? "

  주석이 베이징카오야(북경식 구운 오리 요리)의  껍질만 뜯어 먹으며 대사에게 은근히 중국의 불쾌한 감정을 전달했다.대사는 상해요리인 티에빤위(鐵板魚–생선철판구이)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임무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무기판매를 위해 한국과 전쟁을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의 의중이십니다."

  대사의 대답을 들은 주석은 미국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지금도 미국은 중국과 한국 양쪽에 무기를 팔고 있었다. 만약 전선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19세기 말의 경우처럼,  세계의 열강들이 중국을 나눠먹기 위해 떼지어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했다.

  ‘그렇다면 핵이 용서치 않을거야.’

  주석은 중국 각지에 배치된 핵미사일을 믿고 있었다.  공격에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영토가 침입당하는 경우 세계 어느나라든 공격할 수 있는 장사정의 대륙간탄도탄의 위력을 그는 굳게 믿었다.

  "피스함대는 강력합니다. 최신 무기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핵을 탑재했을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에서는 핵무기를 해제하고 항모와 순양함을 판매했지만, 소형 전술 핵탄두의 경우 국제 무기거래 암시장에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에 수십개의 핵무기를 만들만한 양의 플루토늄이 러시아에서 분실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주석은 대사의 말을 듣고 무척 당혹스러워 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보통의 작은 나라들은 보유할 꿈도 못꾸는  핵까지 가지고 있다면 조선 점령을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처음에 조선 점령은 단지 시간문제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벌집을 건드린 꼴이었다.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지도 모르는 원정일 뿐이라고 인민들을 안심시켰으나, 상하이와 항조우가 20일밤에 폭격을 당하자 중국대륙 전체가 뒤흔들렸다. 해안의 여러 도시에 살고있는 주민들이 일제히 내륙쪽으로 피난가서,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몰려있는 해안공단은 심각한 일손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군수산업은 내륙에 있고 노동자들은 공무원 신분이기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생산되는 무기의 질이 너무 낙후되어 전선에서는 최신무기의 보급을 독촉하고 있었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3개 함대 전멸은  조선반도 점령작전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었다. 남아도는 해병대와 지상군 병력을 좁은 전선에 투입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병참선은 점령지 각지에서 출몰하는 빨치산과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끊긴지 오래였다.  주석은 차라리 조선반도에서 부대를 후퇴시킬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후퇴명령을 내리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고, 언제 주석자리를 내놓아야 할 지도 몰랐다. 전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도 걱정스러웠다.

  미국 대사는 중국 국가주석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중국은 핵을 사용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대사는 대통령에게 보낼 암호전문의 내용을 머리속에 담아두었다.

  1999. 11. 23  11:30 (북경 시간)  베이징(北京), 중남해(中南海)

  초겨울의 베이징 거리는 매우 한적했다. 가끔 군인들을 가득 태운 군용트럭 몇 대가 거리를 오가는 것을 뺀다면 북경의 중남해는 유령의 거리처럼 보였다.평소에도 정부고관 외에는 행인들이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 군인들에 의한 통행인의 검문검색이 강화된 지금,이 넓은 거리에서 민간인은 전혀 볼 수없었다. 이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호화주택의 2층 창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3년전까지 유고 내전에서 활약하던  베트남 출신의 용병인 암호명 구스타프가 자신의 총을 점검했다.  구스타프는 저격수로서는 특이하게도 미니미 경기관총을 쓰고 있었다.이 총은 미국 육군과 해병대가 M-60 분대지원 기관총의 후속 병기로 제식화한 벨기에 FN사의 제품이다.  총이 가볍고 M-16과 같은 5.56 밀리 탄약을 사용하며, 또한 발사속도가 M-60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 때문에  미군은 이 총을 M-249 SAW(분대기관총)라는 제식명으로 채용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저격수들은 M-24나  M-40 계열의 스나이퍼 라이플을 선호한다. 가볍고 명중율이 높기 때문인데 거의 대부분의 이들 저격총은 파괴력이 높은 7.62밀리 탄을 사용한다. 미국의 해병대가 제식 채용한 맥 밀런 M-87ELR같은 경우는 사정거리가 2,000미터나 되며 구경은 12.7 밀리나 되는 원거리 저격총이다.

  구스타프가 리어사이트(가늠자)에  스코프를 장착하고 200발 들이 탄약상자를 장전했다. 방에 쓰러져있는 정치경위국원의 시체에서 꺼내 창문틀에 놓은 무전기에서 작은 전자음이 흘렀다.구스타프가 무전기에 달린 응답신호용 단추를 누르고 창밖을 보았다. 예상대로 앞쪽 멀리 보이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요인이 나오니 경계를 강화하라는 경호대의 무전신호가 그에게는 암살준비의 신호가 된 것이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직속의 정치경위국에 소속된 경호원들이  중국 공산당의 최고권력기관인 정치국의 구성원들을 호위하며 이들을 승용차로 안내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스타프가 조준경 안에 포착된 정치국원들의 얼굴을 보더니 실망을 하며 총구를 내렸다. 그들은 일반 정치국원 12명 중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구스타프의 목표는 최소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으며, 그는 7명의 상무위원들 용모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 정치국원들은 먼저 승용차를 타고 현관을 빠져나갔다. 경호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그의 망원렌즈에 잡혔다.

  정치경위국은 기존의 경위국이 요인경호업무에서 한계를 드러내자 새로이 설치한 경호부서이다. 지금 현관에는 요인들을 기다리며 9명의 경호원이 대기 중이다. 구스타프가 있는 방향을 감시하는 경호원은 2명이었으나 원거리 감시는 한명 뿐이었다. 그는 구스타프가 있는 창문이 열려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은 정치경위국에서 미리 예상 저격포인트로 설정하여 2명의 경위국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구스타프의 손에 죽었지만 경호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경호원들에 에워 쌓인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스타프가 조금 열린 창문 안쪽의 그림자 속에서 스코프로 보니 상무위원 세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함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기관총을 창문틀에 거치하고 다시 스코프로 조준을 했다.

  당 주석은 없었지만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회의장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상무위원회  위원장의 얼굴이 나타났다.옆에는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원 총리의 얼굴과, 옆모습으로만 보이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얼굴도 있었다.  군사위 부주석은 군사위 위원과 정치국원을 겸임하지 못하는 지금까지의 관례와는 달리 실세답게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한 거물이었다.  주름살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무슨 근심을 하는지 사진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어쨋든 그들은 당 권력서열 5위 안에 드는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이 세 명은 중국의 당, 정, 군의 핵심인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국회의장, 국무총리, 그리고 군부의 실력자이지만,권력을 분점하는 중국 공산당의 특성상 이들의 권력은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강했다.

  구스타프는 공산당 총서기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겸, 국가주석인 리 루이환이 없는 것이 안타까왔다.  20분 전에 협력자로 부터 받은 정보에 따르면, 주석은 황급히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는 것이다.그는 일단 이 세 사람을 제거하고 당 주석 등은 다음에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거리는 600미터, 웬만한 저격수라면 충분히 맞힐 수 있는 거리였지만, 목표는 세 개였다. 세 개의 목표를 한 번에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구스타프가 총구 아래의 발사속도 조절레버를 고속으로 조정했다. 이제 이 기관총은 분당 1,100발의 속도로 발사될 것이다.구스타프가 왼쪽의 목표부터 연사를 했다.  6조 우선의 총구에서 나온 강력한 탄알들이 공중을 날았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실로 쓰는  고풍의 전통 중국식 기와집 현관 앞에서 세 사람의 노인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정치경위국 소속의 호위병들이 총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상무위원들의 몸을 가렸으나, 이미 늦어 상무위원들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땅에 쓰러져 있었다. 군사위 부주석은 머리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고, 국무원 총리는 머리의 반 정도가 보이지 않았다.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머리에서 피와 뇌수를 흘리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원들 뒤에 있던 한 경호원은 배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호원들 중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구스타프가 있는 건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외쳐댔다.  구스타프는 그 자를 향해 단 한 발을 발사했다.  지휘관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는 모습이 조준경 안에 잡혔다. 즉시 다른 호위병들의 자세가 낮아졌다.

  구스타프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 순간, 1층 계단쪽에서 폭발음이 울려왔다. 구스타프가 장치해 둔 부비트랩이 폭발한 것이다. 경호원들의 움직임이 의외로 빠르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과 반대쪽으로 서둘러 걸었다.총신과 45도 방향으로 기울어진 미니미 기관총의 운반손잡이 때문에 기관총의 무게중심이 이상했으나 발에 걸리지 않아 좋았다. 맨 구석 방의 문을 열고 미리 열려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옆집의 지붕 위였다. 그는 지붕 몇 개를 타고 넘었다.  이 지붕을 감시하던 자들은 그가 저격을 시작하는 순간에 파트너에게 제거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6구의 시체가 부근 건물 옥상 위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지붕을 기어가면서 코트 주머니에 있는 원격조종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가 숨어서 저격하던 건물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담을 넘어 흰색 건물 뒤로 숨어들어갔다. 이 건물의 2층 창문들이 열리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가시지 않은 쓰레기장에서 총을 분해했다.  운반손잡이를 잡고 레버를 누르며 앞으로 당기자 간단히 총열이 분리되었다.  양각대를 분리한 뒤, 코트를 벗어 기관총을 덮고 둘둘 말았다.  그리고 쓰레기장에 미리 준비된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 비닐봉지는 병원청소부로 변장한 다른 협력자가 처리해 줄 것이다.

  코트를 벗은 그는 안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유유히 병원 뒷문을 통해 2층 자신의 병실로 향했다.  환자와 간호사들은 창밖의 상황을 보느라 정신없어서 그가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병원 밖의 대로에서 앰뷸런스와 군부대 차량들의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침대에 누운 그는 잠시 잡지를 펼쳐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는 70년대에 베트남이 패망하자 미국으로 불법이민한 아버지와, 역시 불법 이민인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스 앤젤레스의 뒷골목 부랑자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화려한 미국땅의 어디든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를 바탕으로 15세 때부터 차이나 마피아의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다.

  17세에 저격수 훈련을 받은 그는 차차 경력을 쌓아 잠입과 저격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1994년 여름에 차이나 마피아와 야쿠자USA와의 한판이 벌어지자 그는 단독으로 야쿠자들의 지부 세 개를 박살내 버렸다. 둘은 순수 저격총만으로 천천히 해치웠으나, 마지막 하나의 지부는 미니미 경기관총을 들고 혼자서 쳐들어갔다.  시카고의 야쿠자 지부장은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자 그를 향해 일본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는 그 일본인에게 남은 탄알 80발 모두를 쏟아 부었다.

  차이나 마피아의 영웅이 된 그는 중간간부로 선발되는 기회를 맞았으나, 그의 가계를 조사한 차이나 마피아의 두목급들은 그가 순수 중국인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그를 처단하려고 했다. 또 한 번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는 자신의 가족이었던 차이나 마피아 30여명을 사살한 후에야 미국을 탈출할 수 있었다. 멕시코 국경을 돌파할 때에는 텍사스 레인저 2명을 살해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을 추적하는 미국 수사요원과  차이나 마피아의 암살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멕시코 농민반란군에 가담했다.  그곳에서 농민들의 운동을 지도하던 카를을 만난 그는  카를의 추천을 받아 피스의 대원이 되었다.  그는 성형수술을 받고  피스가 관여하는 국제분쟁지역 곳곳에서 활동했으나 단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았다.  23세인 그는 두 달 전에 중국에 입국해서 카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전날 실행을 명령받았다.  히트 대상은 역시 그가 미리 얼굴을 익혀둔 당 중앙 상무위원들이었고,  그는 오늘 일곱 명 중에서 세 명을 해치운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자신이 하든지, 아니면 다른 팀이 하게될 것이다. 어쨋든 이제 중국 공산당의 고위간부들은  대낮에도 몸을 노출시킬 수 없게 되었다.

  "이 병실에는 결핵환자가 있습니다. 그래도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 신원은 확실하오?"

  "예, 물론입니다. 10년간 저희 병원에 오셨죠. 시내에 있는 지엔꾸어 판띠엔(建國飯店-호텔)의 지배인입니다.  말기라서 열흘 전에 입원하셨고, 지금은 움직이기도 힘든 위험한 상태입니다."

  구스타프는 병실밖에서 들려오는, 병원장과 처음 듣는 목소리의 젊은 남자가 대화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잠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더니 몇 개의 군화발자국 소리가 구두발자국 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구스타프는 한번 킥킥대며 웃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이마에는 나이답지 않게 깊은 주름살이 패여있었다.

  1999. 11. 23  01:00(워싱턴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전혀 뜻밖이군요. 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버티다니. 지금은 오히려 중국군을 몰아내고 있지 않소?"

  NSA(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 대통령이 장관들을 힐난했다.  대통령인 제임스는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의외로 한국전선에서 중국이 고전하자 내심 고소하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황예측을 잘못한 장관들과 군 장성들을 질책할 필요는 있었다. 특히 정보부서의 군인과 관리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전력이라면 일주일 안으로 한반도 남단인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었다.

  "한국이 이렇게 계속 버틴다면 중국이 핵을 쓸지도 모릅니다."

  국무부의 제프리 차관보가 두려운 듯이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핵이라… 2차대전 후 최초로 실전사용될 수 있는 기회로군. 파머슨 국장,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중국이 과연 한국에 핵을 쓸거라고 보는거요? "

  대통령이 CIA 국장을 지명하자 국장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이미 정보부의 결론은 나 있을 것이므로 그는 결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떻게 첫마디를 멋있게 꺼낼까 하는 것으로 대통령에게 비쳐졌다.

  ‘저 빌어먹을 놈부터 잘라야 되겠군.’

  대통령은 국장을 정치적 야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중책에 앉혔는데 멍청한 사람이 욕심이 많다고, 파머슨은 본업인 정보분야보다는 의회관계자들과의 친선유지에  시간과 공을 더 많이 들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물론 이 보고는 CIA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정보기관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아직은 중국이 핵을 쓸 단계는 아닙니다.  동양의 작은 나라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러시아나 인도와의 분쟁을 생각한다면,  중국은 다음 전쟁을 생각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제 핵공격은 어느 나라에게나 악몽이니까요."

  뜸을 들이던 국장이 계속 보고했다.  대통령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의 목을 자를 커다란 망나니칼을 갈고 있었다.그것도 모르고 있는 국장이 계속 떠들었다.

  "중국이 계속 지하핵실험을 해와서 그들의 핵제조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운반체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은 공격전에 핵무기를 쓰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좋소,"

  미 대통령은 비서실로부터 받은 보고와 별다를게 없는  회의참석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늦은 밤까지 이따위 회의를 계속 진행해야 되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당연히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이나 주변에서 위협을 느끼는 국가들에게 최대한 미제 무기를 팔아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무기수입이 급증하고 있습니다.무기수출액은 미 합중국 역사상 올해가 최고를 기록할 것입니다."

  국무장관의 보고를 들으며 대통령은 분을 삭이고 있었다.자신은 아마도 무기를 가장 많이 팔아먹은 죽음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도 무기판매를 중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의 의회는 대통령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트집잡고 있었다.  하원의원들은 자기네 주에서 생산되는 무기의 판매를 위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일부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날아가 열심히 세일즈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주로 러시아제 군함으로 구성된 피스함대에 의해 중국의 근해에서 제주도로 나포된 미국의 수송함대 중에서  2척의 신형 이지스함이 침몰하고 다른 배들이 대파되는 수모를 당했다. 미국의 조야는 잠시 한국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지만,  한국정부가 충분한 피해보상을 하면서 수송선의 무기는 중국에서 제시한 금액의 두배로 사들였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에 추가적인 무기판매를 애원했다.

  미국은 중국의 해상이 거의 봉쇄되자 미얀마와 파키스탄을 통해 항공기와 지상전용 무기를 중국에 판매하고 있었다.  중국은 신형 수상함의 판매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피스의 함대가 버티고 있는 지금, 이 해상에 파견된 미 제 7함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국에 함정을 판매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무기판매량이 줄어들고, 이는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압력으로 결과가 나타났다.

  결국 미국은 한국과 중국 양쪽에 모두 무기를 판매하기로 하고 양 교전국 모두로부터 중립을 보장받았다. 미국 정부는 두 나라의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무기판매를 통하여 분쟁을 부추긴다며 미국과 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의 유권자 대부분은 중산층과 노동자인 것이다.  중국의 확실한 한국 점령이 보장되지 않는 지금, 미 정부는 실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미국이 보는 일본의 행동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산업을 완전히 군수산업체제로 전환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를 주문했다.일본에 파견된 스파이들에 의하면 완전한 전시체제에 접어들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미국으로서는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 해외진출 욕구는 항상 미국의 걱정거리가 되어 왔지만,  어쨋든 지금은 무기판매량이 많아져서 좋았다.

  "한때 유일한 초강국이었던 미합중국이 양쪽에 무기나 팔아먹고 있다니, 이게 무슨 창피한 일이오?"

  대통령의 한마디에  참석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으나 무기수출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차기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대통령 자신이라는 생각이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99. 11. 23  19:30  중국 홍콩, 홍콩섬 서쪽 해저

  한국 해군 209급 잠수함의 7번함인 성진함이 홍콩섬을 오른쪽에 두고 선회하고 있었다. 성진함은 고전소설 구운몽의 주인공인 성진을 이름으로 딴 잠수함이었다.  이 잠수함은 재래식 잠수함이지만 폐쇄싸이클 디젤 방식의 엔진을 장비하여  슈노켈 없이 2주 정도 계속 수중항주할 수 있는 최신식의 함이었다. 액화산소를 적재할 공간때문에 다른 209급 잠수함들보다 배수량이 약간 컸다.

  이 잠수함은 개전 나흘째부터  일본 선적의 상선 아래에 숨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중국 해군의 해안경비정과 초계기들은 일본과의 갈등을 우려해서인지 이 상선에 접근하지 않아  성진함이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함장인 이 승렬 소령은 상선을 따라가면서도, 중국과의 전쟁수역으로 선포한 이 해역을 거리낌없이 드나드는 일본인들이 얄미워서 속으로 몇번이나 어뢰발사를 외쳤는지 모른다.

  이 소령이 수면 위로 전파수신기를 올릴 것을 지시했다. 세 방향으로부터 가지가지의 수많은 전파가 잡혔으나, 지상기지의 해상수색 레이더와 항공기에서 발하는 해상수색레이더의 주파수는 없었다.다만 신제(新界)에 있는 홍콩의 최고봉 다모산(957m)에서 선박 운항지시용 전파만이 잠수함의 신경을 건드렸다.  잠수함을 위협할 어떤 전자적 징후는 없어 보였다.그러나 경비정이나 초계기가 전파관제를 한 상태로 해상에서 잠수함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소령이 신중하게 잠망경을 올리며 주변 해역을 살폈다. 어느새 수면 위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상공의 위험이 없는지 확인한 이 소령이 홍콩섬의 중심부인 빅토리아항을 자세히 살펴봤다. 홍콩의 야경은 정말 멋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전쟁중인데도 센트럴(中環) 지구의 밤은 화려했다. 홍콩사람들은 홍콩을 중립지대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망경을 왼쪽으로 돌리니 주룽(九龍)반도 의 밤이 잠망경 가득 비쳐졌다.

  함장이 잠망경을 계속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북쪽에 칭이 섬이 보이고, 서쪽에는 홍콩에서 가장 큰 섬인 란타우 섬이 보였다. 남쪽에 수평선이 이어지더니 남마섬에 의해 수평선이 끝났다.  계속 잠망경을 돌려 남동쪽을 보니  애버딘만에 떠있는 수상(水上) 레스토랑들의 화려한 불빛이 보였다.  레스토랑 사이사이에는 수생생활자들의 생활공간인 수 많은 삼판(거룻배)과 정크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1997년의 홍콩반환 이전부터  홍콩의 공업생산은 주로 홍콩섬 건너편 지역인 주룽반도와 광둥성에 접한 신제(新界)에서 이뤄졌으며 홍콩섬은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되어있었다. 산업이 노동력을 지배하고 자본은 산업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이 조그마한 홍콩섬은 홍콩 전체 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제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순진한 정치가들은 홍콩이  중국 전체를 자본주의화하기 바랬으나,  돈에 관한한 유태인이 무색할 정도로 집요한 중국인들을 그들은 너무 몰랐었다. 중국은 홍콩 이양 전부터 1국 2체제를 주장해왔으나 정치와 경제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깊은 영향을 미친다.  1997년 이양 후의 홍콩의 자본은 급속히 사회주의화하면서도 중국인의 돈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합해져 활발한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콩을 떠받치는 3종류의 자본인 영국과 유태인의 자본도 고스란히 홍콩에 남아 홍콩경제의 활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국과의 전쟁 첫날, 중국 군부에 의해 모든 국제통신이 차단되었다. 정보와 통신이 중요한 신경망이 되는 금융가에서 국제통신의 마비는 최악의 결과를 예상되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정보수집력이 대단한 금융가에서는 이미 위성 전파송수신기를  준비했기 때문에 완전마비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홍콩의 금융가는 신속한 국제통화를 할 수 없어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3번부터 8번까지 지상공격용 하픈 장전."

  "3번부터 8번 어뢰발사관, 지상공격용 하픈 장전."

  함장의 명령을 부함장이 복창하자 어뢰실에서 준비를 했다. 어뢰실에서는 바닥에 일렬로 있는 네 개의 발사관과 천장을 따라 반원형으로 배치되어있는 네 개의 발사관 중에서 6개의 어뢰를 빼고 하픈을 장착했다. 어뢰실의 수병이 마지막 발사관의 하얀 뚜껑을 닫았다.

  하픈은 기본적으로 대함미사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목표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인천에서 출항하기 전에 이미 하픈에 약간의 조작을 해서 문제는 없었다.  토마호크같은 잠수함용 지상공격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들은 이 무기를 다른 나라에 절대 팔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경제파탄의 상황에 이른 러시아도 비슷한 무기를 한국군에게 인도하기를 거부했다.  덕택에 국립과학연구소만 죽어났다. 연구원들이 사흘 밤낮을 고생하여 하픈의 시커를 고쳤다.  근거리의 지상목표를 향해 최초로 하픈이 발사되는 순간이었다.

  "발사."

  함장의 한마디에 하픈 미사일이 533밀리 발사관을 통해 수중발사되었다.  미사일은 흰 연기를 뿜으며 급상승하다가 제트기관이 작동하여 수면비행을 시작했다. 제 2, 제 3의 하픈이 계속 수면을 뚫고 나왔다. 미사일은 센트럴 지구의 거대한 빌딩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곳에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금융기관 종사자들이 야근을 하고 있었다.  최초의 하픈이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입주해 있는 33층 건물을 뚫고 들어갔다. 15층의 창문을 뚫고 들어간 미사일은 지연신관에 의해 안쪽 벽 하나를 더 관통하여 건물 중심에서 폭발했다. 불과 10 km를 비행한 하픈은 아직 제트연료가 많이 남아 있어서  폭발의 중심으로부터 건물 사방에 불길을 뿜어냈다. 빌딩은 3개층에 걸쳐 화재에 휩싸였다. 16층의 빌딩관리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소화작업을 지시했으나  이미 배선이 폭발에 의해 두절되었다.  잠시 후 이 관리실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이 건물 외에도 5개의 대형건물에 화재가 시작되었다.시내 중심가를 소방차들이 내달았다.

  "홍콩의 야경은 역시 멋있군."

  함장이 잠망경으로 보며 감탄했다. 전투지휘소에 있는 사관들도 비디오로 그 광경을 보며 얼이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어느 젊은 하사는 ‘뿅간다, 홍콩간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목표 0-8-5, 어뢰발사 준비."

  부함장이 함장의 명령을 어뢰발사실에 명하고, 잠망경과 연결되어 있는 비디오를 통해 목표물을 확인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잠망경에 비친 바다 위에는 성진함이 홍콩으로 숨어들어올 때 이용했던 상선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함장님… 이건 민간선입니다… 일본의 참전을 부를지도… "

  이 소령이 힐끗 부함장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함장이 부함장을 한심하다는듯 쳐다보았다.

  "저 빌딩에 있는 사람들도 민간인이야. 이곳은 한국정부에 의해 교전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저 배는 교전당사국 중 일방을 지원했다. 이미 그들은 중립이 아냐.일본이 쳐들어오든 말든, 우리는 일단 홍콩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거야."

  "1번 어뢰 발사!"

  수중을 어뢰가 달렸다.  어뢰는 홍콩섬과 주룽반도 사이의 해협을 순항하는 상선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접근해갔다. 어뢰는 빅토리아항에 접안하기 위해 방향을 틀던 상선의 중앙에 명중했다.  밤바다에 물기둥이 솟구치고 상선이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밤바다로 뛰어들었다.

  "됐어, 당분간 홍콩은 완전 봉쇄다. 잠수! 좌현 180도."

  함장이 잠망경을 내리고 서둘렀다. 승무원들이 깜짝 놀랐다.  성진함의 임무는  아직도 홍콩에 있는 외국자본들을 중국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 홍콩을 공격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함장은 홍콩뿐만 아니라 마카오나 광저우도 노리는 것같았다.그러면 이들이 생존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승무원들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대량으로 분비되기 시작했다.  이제 제한적인 홍콩폭격이 아니라 본격적인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선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소나 담당 하사가 보고했다. 그를 향해 함장의 눈이 반짝였다.

  "침몰한 해역의 수심은?"

  "35미터, 흘수에 닿지는 않겠지만  대형선박들은 충분히 위협을 느낄 것입니다."

  함장인 이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통행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가급적 홍콩 사람들이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상선이 천천히 침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 11. 24  20:55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요새

  "남시쪽에서 2개 집단군 병력이 남진중입니다. 철산의 연대가 막고는 있지만 오래 못버틸 것같다고 합니다. 정주에서는 3개 사단이 북진중입니다. 구성에서는 산악부대 2개 여단병력이 산을 넘어 이쪽으로 향했다는 보고입니다. 후속부대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홍 종규 대좌가 설명하자 차 영진 중령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시가 어디인지 지도를 통해 확인해보니 이곳은 신의주와 선천의 딱 중간부분이었다. 그는 중국이 너무 늦게 선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참모들의 얼굴을 보니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로서는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니 그럴만 했다. 유격부대를 정규전에 쓰는 것은 비경제적이긴 하지만,  선천을 중국군에게 내줄경우 평안북도 대부분이 중국군 차지가 되어 앞으로의 전쟁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부군이래 20만이라 뻥을 깠더니 뎡말 믿나 보구만."

  저격여단의 최 대좌가 농을 꺼냈으나 아무도 웃어주지 않았다.

  "적 부대의 위치를 표시해 보시오.  아무래도 남쪽의 적은 포위된 것 같습니다."

  차 중령이 참모부 소속의 여군들을 독촉하자  소좌의 계급을 단 중년의 여성장교가 젊은 소위들을 다구쳤다. 12,500분의 1로 축소되어 펼쳐진 지도에 중국군의 부대위치와 방향이 표시되었다.통신실의 연락을 받은 소위 한명이 기갑부대의 위치를 새로 북쪽에 기입했다.

  "전차여단? 심각하군요…"

  차 중령이 기억하는 중국군의 보병사단 편제에서 전차연대는 겨우 32대의 전차와 몇 대의 장갑차로 이뤄진 지원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독립 장갑여단이라면 전차의 수가 100여대에 이른다. 보병전투차는 몇 대나 있을지 몰랐다.

  "요새에 전차는 몇 대가 있습네까?"

  황보 일 야간전대대장이 그에게 물어보았다.  야간전대대로서는 전차가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

  "K-1 전차 4대와 T-62가 15대 있습니다. 그보다는 적에게 헬기부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러분들 오셔서 보십시요."

  차 중령이 전쟁 첫날 겪은  중국 헬기부대의 공포를 떨쳐버리며 지도 남쪽 부분을 지휘봉으로 짚어나갔다.

  "오늘 낮의 텔리비젼 뉴스에서는 아군이 정주를 공격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태천과 운산, 희천까지 이미 점령했으니 구성의 적은 동쪽과 남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텔리비젼 뉴스가 정확하다면 말입니다."

  차 중령은 전쟁기간 중 언론이 얼마나 정확할까 걱정되었다. 그는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군사비밀 보호조항이 위력을 떨치는 전쟁상황에서,  언론은 국민에게 사실을 전하기 보다는 거짓을 전하거나 단순한 정부의 선전기관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남쪽의 정주에 있는 인민해방군이오. 우리는 그들의 실제 병력을 모르고 있소. 최악의 경우에는 우린 포위당한 채로…"

  "정주를 중심으로 피해를 입은 11개 사단이 몰려 있습네다."

  참모들이 갑작스런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통신부의 한쪽 구석에서 TV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김 수경 소위가 참모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김 소위는 TV뉴스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장갑사단은 없고, 모두 보병사단 뿐이라고 합네다. 물론 갑종(甲種) 사단입네다. 보도를 보시디요."

  차 중령이 통신중대의 텔리비젼 수상기 앞으로 뛰어가자 참모들이 그를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전시법에 의해 방송을 통한 국민동원을 책임지고 있는 KBS의 9시 뉴스였다.

  북한의 TV전파 송출 방식은 러시아나 서유럽과 같은 PAL방식이다. 미국이나 일본, 기타 대다수 국가들의 NTSC 방식과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998년 초부터 남북합의에 의해 남북한의 모든 방송국이 두가지 방식 모두에 의한 동시 전파송출을 하고 있어서, 북한의 수상기를 통해서도 KBS를 볼 수 있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보병사단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갑종사단은 현 대화된 중장비로 편성되어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하며, 분쟁위협이 있는 일선에 배치된 1급부대이다. 을종(乙種)사단은 경장비로 편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예비병력이 여기에 포함된다. 병종(丙種)사단은 소형경장비로 편성되어 있으며,  주로 유격전이나 산악전을 수행하는 부대이다. 물론 세 종류의 사단 모두 현역부대이다.

  화면에는 중국의 전파방해 때문에 약간 흐릿했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평안남북도의 지도가 표시되었고,  놀랍게도 중국군의 부대배치 현황이 나와 있었다.  차 중령이 경악했다. 아군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정보도 당연히 군사기밀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평시에는 가상적국과의 관계악화를 막기 위해서이며,  전시에는 아군의 정보수집능력을 은폐하여 작전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함이다.차 중령은 이런 상황은 교육받지 못했다. 이 뉴스를 믿어야 할지, 아니면 작전지휘부의 역선전으이나 국민의 사기부양 정도로 치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통일한국군은 안주를 점령하고 청천강을 건너 22일 밤 박천과 영변을 수복했습니다. 계속 북진중이나 평안북도 산간지역에 며칠째 내린 폭설로 진격이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통일참모본부에서 제공한 자료에는 평안북도 정주지방에 있는 중국군은 약 10만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남쪽에서는 아군의 15개 사단이 북진 중이고 선천에는 호국의 영웅인 이 종식 차수의 20만 대군이 남진 중입니다...]

  화면에는 선천에서 출발한 푸른색 화살표가 국도를 따라 남쪽 정주를 향해 꾸불꾸불 움직이고 있었다.  참모들 사이에 잠시 술렁거림이 있었다.

  "무시기 소리야? 이곳 평북해방구 대장님이래 영명하신 차 영진 장군님이신데… 길고 우린 방어전 수행에만 전념하는데 무신 기따위… "

  홍 대좌가 흥분하며 화를 냈다.  차 중령이 그를 제지하며 계속 화면을 주시했다.  화면에는 리번형 부교를 이용하여 청천강을 도강하는 각종 군용차량의 행렬이 비쳐졌다. 더 이상 자료는 이어지지 않았다.  TV에서는 행진곡풍의 군가가 흘러나왔다. 차 중령이 신음성을 울렸다.

  "녹화는 하셨소?"

  "물론이디요."

  앳띤 얼굴의 김 소위가 녹화테입을 TV 옆의 비디오 겸용 수상기에 넣고 돌렸다. 시간을 21:05에 맞추니 그 뉴스부분이 재생되었다.

  "저 화살표가 왜 직선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저 화면을 5만분의 1 지도와 합성할 수 있습니까?"

  "기다리시라우요, 대장님."

  김 소위가 어떤 참모로부터 지도를 받아들고  이를 스캐너에 넣었다. 그녀가 잠시 자판을 두들기더니 화면에 평안북도의 지도가 뜨고,  뉴스에 나왔던 화면과 지도의 비율을 조절하여 두 가지를 일치시켰다.

  "도로와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통일참모본부가 우리의 진격방향을 지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차 중령이 지적하며 참모들을 돌아보니 그들은 감격하고 있는지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대장 동지! 상부에서는 우리에게 진격명령을 하고 있습네다. 우리는 고립되지 않았습네다."

  홍 대좌는 무척 흥분하고 있었으나, 차 중령은 이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통일참모본부가 TV 뉴스를 통한 우회적인 공격 명령을 내릴지라도 중국의 정보기관도 당연히 한국의 모든 뉴스를 모니터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희생양으로 하고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저격여단의 최 대좌는 홍 대좌와 반대로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승리를 얻으려는 지휘부에 적개심을 나타냈다.  다른 참모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지 묵묵부답이었다.

  "무시기 소리오? 최 대좌. 조선의 모든 인민은 새로운 전황에 들어선 조국수호전쟁의 요구에 맞게 그 전투적 기능과 역할을 벌임으로써,  온 조선을 해방하는 역사적 위업에 이바지 해야하오. 동무는 현역군관이면서 자신의 투쟁임무를 잊었단 말이오?"

  "길타고 해도 병력이 얼마 안되는  우리를 총알받이로 만들려는 것이 앙이갔소?"

  홍 대좌의 원칙론에 최 대좌는 인간적인 항변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최고 엘리트를 자부하는 저격여단을 지휘하는 그는,  소모전에 자기 병력을 투입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홍 대좌가 다시 그 말을 반박했다.

  "인민이 조국의 위기에서 자신의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당에 대한 충성심,철저한 주체성, 높은 공산주의의 당성과 인민성, 심오한 과학이론적으로 무장하여 원쑤들을.."

  "김 소위는 언론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차 중령은 인민군 군관들의 공산주의 이론 설명처럼  따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홍 대좌의 말을 잘랐다.

  "방송과 신문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혁명적 민주주의를 창설하는데 공헌하며, 전쟁기간 중에는 전당(全黨)과 전체 인민과 인민군들을 사상의지로 무장시키고, 영웅적 투쟁에로 다그쳐 승리에 적극 기여하는 것입네다."

  차 중령은 역시 공산주의 언론이란 평시에나 전시에나 마찬가지로 철저한 선전선동물이며,  정치적이고도 이념적인 무기이며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얼굴의 김 소위에게서 나온 말이 너무 섬득하게 들렸다.

  "좋소. 그럼… 상부에서는 이 뉴스에… 아니, 이 보도에 나온 지도 그대로 공격하길 명한 것으로 보이오? 혹시 어떤 복선이 깔려있지 않을까요?"

  김 소위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잠시 화면을 보더니 뭔가 찾는듯 열심히 자판을 두둘겼다.  화면을 빨리 돌리다가 한 부분에서는 1 프레임 씩 천천히 돌렸다.김 소위가 갑자기 화면을 정지시키고 다시 앞으로 돌리더니 화면의 화살표를 최대한 확대했다. 김 소위가 다시 색상을 여러가지로 바꾸었다. 흐릿한 농도 차이가 나는 화살표 안쪽의 색깔이 여러 다른 색으로 확실히 세분되자,  화살표에 일련의 숫자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차 중령은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김 소위가 소리치는 것을 보고 뭔가 의미있는 숫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749112813244…  7491-1281-3244!  7491은 우리 연대의 호출번호입네다!  길고 1281은 전시 지정 주파수의 하나로써 128.1 메가헬씁네다, 동지! 그리고 옆에 있는 것은 암호책 번호가 틀림없습네다."

  "천 소좌! "

  홍 대좌가 황급히 통신군관을 불렀다. 통신을 담당하는 이 군관은 즉시 암호책을 준비하며 그 주파수에 통신기의 다이얼을 맞췄다.  그러나 아무 것도 수신할 수 없고 지독한 잠음만 흘러나왔다. 참모들이 긴장하며 통신군관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심있게 지켜보다가 그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송신을 명령한 것이 아닐까요? 요즘도 텔리비전 전파는 계속 수신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 주파수로 송신을 하면…"

  차 중령이 불안한 감정을 감추며 통신군관에게 물어보았다. 통신군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시지정 주파수는 적에게 고립된 부대의 명령수신을 위한 것입네다. 길고 광대역전파방해로 인해 상부와의 통신이 불가능하디요.  텔레비죤 전파래 첨부터 막디 않은 건 아냐요. 하디만 이 전파래 위성서 오고 있습네다. 같은 텔레비죤이라도 공화국의 조선중앙방송이나  만수대 방송이 수신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네다. 이 주파수대는 계속 전파 방해레 받고 있다는 말씀입네다. 안타깝게도 요새엔 위성송신장비가 없습네다."

  차 중령은 중국의 침략 첫날 전투에서 위성통신 장비를 갖춘 대대 통신차가 중국헬기의 공습에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통신차는 외형이 대공미사일 지휘차와 유사하기 때문에 제 1의 공격목표가 되어 부서졌다.  차 중령은 통참과 통화할 때 그가 화가 나서 송신기를 부술까봐 안절부절하던 젊은 통신병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통신의 벽에 부딪힌 차 중령은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통신병은 엄청난 전파방해 속에서도 훌륭히 통일참모본부와 연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파방해 환경이 바뀌어서  다시 그 주파수로 아군과 교신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고 혹시 통신이 적에게 누설될 가능성은?  그리고 혹시 전파를 발신하면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겠소? "

  참모들은 아직도 아군과의 교신 가능성에 들떴으나,  지휘관으로서의 차 중령은 이 문제를 통신군관에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들어 방해전파래 많이 약해졌디요. 전선이 우리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입네다. 길티요, 적은 지상방해전파만 수행하고 있디요.기 차이래 결정적입네다. 다시 해보갔습네다. 김 전사 동무!"

  전파수신기로 남진하는 중국군의 위치를 탐색중이던  통신병 김 전사가 뛰어왔다.

  "네, 중대장 동지!"

  "검산의 중계탑이래 가동 대기상태디?"

  검산은 요새가 있는 대목산에서 서쪽 6km에 위치해 있으며 서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이다.인민군은 대목산보다 해안방어에 훨씬 유리한 검산에 해안방어진지를 두었으나, 집중적인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진지는 대목산에 두었다. 검산의 주봉인 산성봉은 441고지이며 북쪽에 치우쳐 있고, 남서쪽에 검산의 최고봉인 459고지 정상에 송신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신탑은 대목산까지 지하매설관을 통해 원격조정할 수 있었다.

  "물론입네다, 동지."

  "현재의 전파방해상황에서 주파수 128.1 메가헤르츠의 교신가능 거리는?"

  "잡음이 많갔디만 70 키로메타는 충분합네다!"

  "음….."

  통신군관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가 알고 있는 선천과 박천의 거리는 딱 75 킬로미터였던 것이다.

  "가능은 하겠디만… 잡음이래 섞여 정확한 전달은 되디 못합네다.시도 해 보갔습네다만…"

  차 중령이 고민했다.  이동송신기를 쓰면 전력이 약해 전파의 도달거리는 훨씬 짧아지므로 검산의 송신기를 쓸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상급부대와의 통신도 못하고 중국 전자부대의 감시망에 걸리면 검산의 송신기는 헛되이 날려버리는 수가 있었다.  그리고 대목산까지 중국군의 의심을 받아 대규모 공격의 목표가 될 수 있었다. 차 중령은 대목산 요새는 꼭 지키고 싶었고, 동시에 상부와 교신을 하고 싶었다. 그는 요새의 안전을 희생하는 대신, 급박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상부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송신하시오."

  "알갔습네다, 동지!"

  통신반은 상급부대와의 교신을 위해 급박하게 움직였다. 검산의 통신병이 수신기를 지상에 올리고 통신용 고무풍선을 하늘로 띄웠다.  케이블에 연결된 풍선은 북서풍을 타고  흔들리면서도 계속 하늘 높이 올라갔다. 통신군관이 시계를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준비를 시켰다.차 중령은 천 소좌에게 대전차무기와 대공미사일의 부족을 통신에 꼭 넣어달라고 했다. 한국군이 이를 요새에 공수해주지 않더라도 이를 알리는 것이 작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통신중대장인 천 소좌가 지도를 보며 쪽지에 글을 쓰더니, 이를 다시 김 소위에게 넘겼다. 시간이 되자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 김 소위가 책상 위의 마이크 앞에 앉았다.  차 중령은 이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작하기요."

  김 소위가 천 소좌의 명령에 따라 준비된 원고를 읽어나갔다.  128.1 메가헤르츠의 FM방송전파가 선천에서 사방으로 퍼졌다.  박천을 점령하고 제 9기갑사단과 교대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해병 1사단의 통신대대가 이 전파를 잡았다.선천 남쪽의 서해 탄도(炭島) 인근 해상에는 중국공격기를 피해 야음을 틈타 잠입해 있는 전파정찰선 월출호가 전파를 수신했고,동시에 신의주에 있는 인민해방군 제 19병단의 통신부대도 이 주파수를 수신하여 발신위치 추적을 실시했다.

  "안녕하십니까? 평양방송의 [구시반 예술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김 소위가 북한방송 특유의 간드러지는 전달식 입말투로 방송을 시작했다. 입말투란 북한에서의 구어체이며 전달투는 입말투 중에서도 새로운 사건과 사실을 전달하거나 알려 줄 때에 쓰는 말투이다.이야기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인만큼 뜻을 똑바로 전달해 주게 된다.

  "처음 보내드릴 노래는 조선예술영화 <목란꽃은 다시 피였다> 가운데서 주인공 분옥이가 역경에 처했을 때 자기를 한품에 안아 키워준 당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충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김 소위가  비교적 속도가 느리고 어조가 부드러운  설명투로 노래를 소개하며 CD를 작동시켰다.  차 중령은 그녀의 말투가 너무 간사스럽게 들려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김 소위는 북한의 표준말인 문화어를 잘 구사했지만, 평양 출신의 최 대좌에게 그녀의 말투는 약간 어색하게 들렸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파수신기에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애처러우면서도 바탕에 힘이 깔린 노래가 이어졌다.  차 중령이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통신군관에게 물으려 했으나, 통신군관은 그가 말을 하지 못하게 제지했다.차 중령이 말을 하려다 김 소위의 눈과 마주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은하수 비껴간 저기 저 멀리 정다운 별들이 반짝이는 곳 그리운 북녘하늘 우러러보면 충성의 한마음 불타옵니다."

  김 소위가 간들어지는 느낌투로  시인지 뭔지 모를 내용을 낭송하자, 차 중령은 끔찍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대중을 감동시키는 말투인 느낌투는 속도가 느리고 휴식이 많으며 음의 고저가 큰 곡선을 그리며 오르내리기도 한다. 천 소좌가 저 시의 뜻은 선천 북쪽에 대규모 적 부대가 남진 중이라는 뜻이라고 차 중령에게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7491 노동자 여러분들이 즐겨 부르시는 노래 한 곡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 곡은 평양의 홍 종규씨가 원산의 차 영진 동지께 띄워달라는 신청곡입니다. 곡명은 <하늘 아래 천리마처럼 달린다>입니다."

  차 중령은 천리마가 전차이며 하늘은 대공미사일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나 왜 자신의 이름이 이 여자 아나운서의 입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암호문인가 생각되었다.

  노래가 시작되자  통신군관이 검산에 파견된 통신반에게 송신기로 쓰이는 풍선의 절단을 명했다. 검산의 검은 하늘 위로 대형고무풍선이 라디오 전파를 발하며 남동쪽으로 흘러갔다. 이 풍선의 전파는 검산과 케이블로 연결되었을 때의 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전선에 퍼져있는 수십 곳의 한국군과 중국군 통신부대들이 계속 수신하고 있었다.

  신의주의 중국군은 이 전파의 발신원이  항공기라고 추정하여 내용과 함께 상부에 보고했다. 내용분석은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조선족 청년이 한 것이었다.

  송신이 끝나자 통신군관이 천 소좌가 차 중령과 지휘관들에게 암호문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선천 연대와 주변지역 부대의 지휘관은 대장님이라는 뜻입네다.길고 피양서껀 원산까지는 거리가 230키로메타인데 아군의 병력이 2만 3천이라는 뜻입네다.  즐겨 부른다는 것은 명령을 내리면 충실히 수행하갔단 뜻이디요."

  설명을 듣고서야 차 중령과 지휘관들이 이해가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김 전사가 긴장을 하더니 천 소좌에게 손짓을 했다.김 전사는 녹음을 하며 계속 필기하고 있었다.천 소좌가 통신용 헤드폰을 쓰고 내용을 듣다가 김 전사가 전해준 쪽지를 읽었다.

  "난수표(亂數表)에 의한 암호명령이 전달되었습네다!  암호책의 3244 난수표로 풀어보면,새날이 밝았으니끼니 당과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내용입네다. 즉, 자정에 정주를 공격하라는 뜻입네다! "

  차 중령은 상부의 명령을 알겠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홍 대좌에게 물었다.

  "북쪽에서 남진하는 적은 무시하고 전군을 동원해  정주를 치라는 뜻일까요? "

  "아이디요. 노농적위대는 절대로 기반을 적에게 내주지 않습네다. 선천을 방위하면서 정주를 공격하라는 뜻입네다."

  "음… 어려운 주문이군요. 알겠소. 근데 천 소좌."

  "예, 대장 동지!"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지 않았소? 어떻게 이리 정확하게…"

  "전파는 서쪽 바다 상에서 왔습네다."

  차 중령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TV뉴스에서 통일한국 해군의 연승보도를 보기는 했지만, 중국 해군의 물량작전을 극복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는 제발 제해권을 한국해군이 가지길 희망했다.

  "자,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작전의 실행입니다.  우리는 삼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으나 상부에서는 남진을 명령했고,  또한 선천을 내줄수도 없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병력을 쪼개 써야할 입장입니다. 전술의 기본원칙인 집중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이지요.  하지만 내선의 유리함으로 이 난제를 극복해야합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상당히 바빠질 것입니다. 이제 유격전은 종말이 왔군요."

  차 중령은 중국군에 의한 포위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휘관들과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대목산 요새 수비와 전선에의 병참지원은 홍 대좌가 맡고, 북쪽의 중국군 대군 방어는 최 대좌가 지휘하기로 했다. 동쪽은 산악전대대를 투입시켜 최대한 지연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병력차이가 10대 1이 넘는 불리한 상황에서, 이들은 통일참모본부의 공격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졌다.

  1999. 11. 24  21:40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허허… 개전 첫날에 실종되었던 제 11기갑사단의 3대대장이란 말이오?  공중지원을 요청하던 그…"

  정 지수 대장이 믿기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양 석민 중장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길티요. 11기갑이래 선천에서 전투를 수행했으니끼, 서쪽 대목산 요새로 간 모양이디요. 어쩐지 노농적위대치곤 잘 싸운다 했디요."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은 인민군 군관이 그 요새의 지휘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으나,  그래도 차 영진 중령이 그동안 잘 싸워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2만 3천… 그것도 예비역인 노농적위대입니다. 결코 막강한 전력이 되지 못하는 그들이 이번 전쟁의 수훈갑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들을 활용하는 것인데… 그들이 행여나 욕심 부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양공이 아니라 조공만 해주면 되는데…  잘못하면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양 중장이 노농적위대의 전력을 제대로 몰라서 길티요. 훈련의 양과 질에서…  그보다 대공무기와 대전차무기를 지원해 주는 것이 좋디 않겠습네까? 실탄이나 식량은 아직 비축분이 많을 것입네다."

  김 대장은 양 중장이 노농적위대를 과소평가하자  불쾌해져서 한국의 향토예비군과 비교하려다가 그만 두고, 차 중령의 부대에 무기지원하는 것을 제안했다. 제안은 즉시 가결되고 그 방법은 서해상으로 우회한 항공기에 의한 공수로 낙착을 보았다.

  1999. 11. 24  22:30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보도가 또 나옵네다."

  공격준비에 바쁜 차 중령이 김 소위의 외침에 TV화면을 보니 김해공항에서 출격준비를 하는 수송기 대열이 비쳐졌다. 아나운서의 설명으로는 그 무기들은 중국으로 가던 미국 수송함에서 노획한 것이며, 선천의 북부군에게 간다고 했으나,차 중령은 군사비밀을 이렇게 공개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잠시 후 화면을 정밀조사한 김 소위는 저 비행기들의 도착시간은 22시 40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제주에서 선천까지 수송기로 10분? 설마… 홍 대좌!"

  "네! 대장동지."

  "지금 당장 낙하산으로 공수되는 보급품을 받을 준비를 하시오. 지금 당장이오.  그리고 아군 공수부대가 올지도 모르니 오인사격은 하지 말도록 주의시키시오."

  "알갔습네다."

  홍 대좌는 요새 근처에 배치된 하급부대를  동원하여 넓은 지역에 투하될 보급품을 챙길 준비를 했다.차 중령은 즉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요새 꼭대기의 관측소로 향했다.  관측소에서는 인민군 장교와 하사관 두 명이 망원경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밤에 일반 망원경으로 하늘을…’

  차 중령이 장교에게서 망원경을 건네받고 하늘을 보았다.  온통 하얀 물체가 검은 하늘을 덮었다.  착지한 보급품은 주변 초소에 잠복중이던 대원들이 차량을 동원하여 요새로 이송했다. 차 중령은 이 보급품을 요새와 하급부대에 적절히 분배했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참이었다.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9. 11. 24  11:30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차 중령과 지휘관들은 부대의 재배치에 매달렸다. 철산의 노농적위대 연대와 미처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들로 증강된 독립부대들은, 저격여단장인 최 대좌의 지휘를 받으며 방어선 강화에 나섰다. 그동안 소규모의 유격작전에만 익숙했던 노농적위대는 한곳에 집중하여 모처럼의 대규모 부대가 되었다. 요새에 있던 T-62와 차 중령이 후퇴할 때 같이 왔던 제 11기갑사단 최후의 전차 4대는 모두 북쪽에 투입되었다.  최 대좌와 대원들은 급하게 대전차 참호를 파고 위장하느라 바빴다. 정찰대가 중국군의 접근상황을 바쁘게 전해왔다.

  황보 중좌는 야간전대대원 및 약간의 지원부대를 지휘하여 도로를 따라 차량을 타고 구성으로 향했다.  대신 구성쪽에 있던 부대는 모두 선천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이 통신기로 외치는 ‘날래 날래’는 거의 노래가 되다시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황보 중좌는 구성시의 인민해방군이 남쪽의 정주군과 연결되지 않도록 견제하는 임무를 띠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중국군과 교전하게 된다.

  차 중령은 나머지 병력을 긁어모아 지금도 산발적인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쪽 전선으로 향했다.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에 근처 고지에 있던 하급부대들이 그의 행렬을 뒤따랐다. 전 부대가 급속이동하기에 차량이 너무 모자랐다. 차 중령의 본대가 먼저 전선에 도착한 후 하차하고, 차량부대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 구보로 헉헉대며 눈길을 이동중이던 후속부대를 실어 날랐다.

  1999. 11. 24  11:45  평안북도 차련관

  차련관은 평안북도의 서쪽 해안지방인 철산군 철산읍의 북쪽 20 km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다. 북서쪽에는 압록강과 용암포가 있는 용천군과 맞닿고, 동쪽에는 선천군이 있다. 경의선과 평양-신의주 고속도로가 만나서 함께 남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최 대좌는 주방어진지의 구축과 함께 전방에 전초선을 형성하여 중국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그는 주 진지가 돌파될 것에 대비하여 충분한 예비대를 준비하고 후방 깊숙히 포병을 배치했다. 지뢰지대나 대전차호를 건설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으나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쌓인 고개라서 전차의 기동은 불편하리라 예상했다.

  전초선에서 적 대규모부대의 이동이 관측되어 최 대좌에게 보고했다. 그는 시계를 보다가 차 중령의 공격예정시간이 아직 안되었음을 깨닫고 차 중령의 부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1999. 11. 24  23:50  평안북도 선천군, 노하

  선천군 선천읍에서 남동쪽으로 15km에 노하역이 있다. 이곳은 정주군과의 경계지대이며 정주읍 서쪽의 곽산과는 가까운 거리이다. 현재 곽산은 중국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차 중령의 부대는 야간에 계속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이들을 남쪽으로 몰아내려 했으나, 정주에 몰려있는 11개 사단의 인민해방군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 3개 사단이 천천히 북진 중입네다. 방어선을 펼치겠습네까?"

  "아니오."

  차 중령은 교도대의 예비역 소좌라는  이 인민군 군관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군복 위에 두툼한 털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흰색의 스키복을 입고 있는 그는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서인지 펭귄처럼 보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소좌의 모양새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소좌… 적은 전차가 없다는 정보가 확실하오?"

  "기렇습네다. 전차뿐 아니라 차량도 거의 파괴되었습네다. 항공대 동지들이 고생 많이 했디요."

  그동안 선천 남쪽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김 소좌는 한국군과 인민군 전투기들에 의한 공습을 자주 보았다.  전투기들은 중국군 보병은 완전히 무시하고 전차와 포만 철저히 파괴하였다. 보급이 떨어져 제대로 저항도 못하는 중국군은 어차피 예비부대라서 전차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보유했던 전차와 보병전투차를 모두 잃고 거의 보병만으로 방어선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이제 한계에 도달하자 병참선 회복을 위해 선천으로 진공하고 있는 것이다.

  차 중령이 김 소좌가 준비한 지도에서  중국군의 행군대열을 살펴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종대로 전진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폭설은 그쳤지만 산과 들은 모두 눈에 덮여 있었고,  일부의 도로만 개통되어 중국군의 진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각 중대마다 통신기는 있지요?"

  "물론입네다. 대장 동지!"

  "스키 보유량은?"

  "3개 중대가 준비되어 있습네다."

  차 중령은 확인을 거듭했다.

  "좋소. 1개 연대는 북으로, 1개 연대는 남쪽에 배치시키시오. 스키부대는  1개 중대씩 분산시켜 적 부대 행렬에 대한 이동간 사격을 실시케 하시오. 자, 이동시키시오."

  차 중령이 지도 위의 세 점을 가리켰다.  차 중령의 예하부대 중 1개 연대는 산으로, 1개 연대는 평야로 눈길을 헤치며 달렸다. 캄캄한 밤에 하얀 눈밭을 뛰어가는  이들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숫자는 별로 많아보이지 않았다.

  "2차대전 때 핀란드전역을 아시오?"

  "물론입네다. 쏘련이 초기에 핀란드군에게 패배했디요."

  독일의 폴란드 침공양상을 본 스탈린은 독일군의 막강한 전력에 겁을 먹고 독,소 불가침 조약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되기 직전 소련군을 폴란드에 투입하여 분할점령하고, 보다 더 완벽한 완충지대를 원하게 되어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을 합병했으며 핀란드에게 핀란드만에 있는 4개의 섬을 할양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가 이를 거부하자 소련은 선전포고도 없이 핀란드를 공격했다.  소련은 100만의 대군과 막대한 수의 전차와 항공기를 투입했으나 악천후와 핀란드 국민의 저항으로 초기에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그후 소련은 사령관을 해임하고 카렐리아 지협에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겨우 핀란드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티 전술도 아시겠군요."

  "모티전술을 쓰시갔습네까?"

  김 소좌가 빙긋이 웃었다. 모티(motti)란 장작용 나무토막을 패기 위해 쌓아둔 것을 의미하는데,  핀란드군이 천연의 삼림지대에서 주로 임업에 종사하는 그들 특유의 환경에 부합되게 발전시킨 전술이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 1개 사단을 약 10개의 토막으로 조각낸 뒤 각개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1개 사단이 안되는 핀란드군은 병력수 3배의 소련군 2개 사단을 전멸시켰다.

  "바빠지갔구만요."

  "물론이오. 날도 추운데 운동 좀 하죠."

  김 소좌는 이동중인 각 부대에 전술개요를 설명했고, 이 전술을 이해하고 있는 예비역 군관들은  부하들을 잘 통솔하여 적당한 위치에 매복시켰다.

  1999. 11. 25  00:10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일대

  거리 2,000미터까지 중국군이 접근하자 네 대의 K-1 전차들이 엄폐호에 차체를 숨긴 채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잠시 후 선두의 중국제 90-2형 전차들이 노란 불꽃에 쌓여 폭발했다.  그동안 잦은 고장으로 말도 많았던 K-1 전차는, 그러나 명중율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4백미터 거리에서 동전만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전차는 한국군 전차병이 탑승한 K-1 전차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T-62 전차들은 차량부대에 대한 포격을 했다.  여기에 후방에 있던 포병과 보병의 박격포도 가세해서 중국군의 차량대열은 지리멸렬했고,  이들은 파괴된 차량과 부상병들을 버리고 황급히 북쪽으로 퇴각했다.

  이들을 선도했던 중국군의 기갑정찰대는  깜짝 놀라 고개의 인민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으나, 근처에 미리 매복해 있던 보병들의 공격에 놀라 본대를 따라 후퇴했다.  중국군 본대의 후퇴를 확인한 K-1 전차들이 기갑정찰대의 경전차와 보병전투차를 하나씩 명중시켰다.  정찰대는 한국군 전차의 주포 사정거리에 자신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차량을 버리고 서둘러 눈 속에 몸을 숨겼다.  원래 차 중령의 전차였던 K-1 전차의 포수 겸 전차장을 겸하고 있는 박 중사는 남아있는 포탄의 수를 세어보았다. 이제 철갑탄과 성형작약탄 합해 겨우 12발의 포탄만 남게 되었다.

  "최소한 한 시간은 벌겠군."

  최 대좌가 자신의 희망을 중얼거렸으나 중국군 헬기의 출현으로 그의 희망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고개에 있던 대공포 부대들이 스타버스트 지대공미사일을 날렸다. 레이저 유도방식의 이 미사일은 황급히 채프와 플레어를 뿌리며 급선회하는 러시아제 해벅 공격헬기들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헬기들이 놀라 북쪽으로 달아났다.  미사일 케이스에 있는 한글로 된 작동설명서를 보고 처음으로 스타버스트를 발사해 본 인민군은 이 미사일이 중국헬기를 여지없이 명중시키자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그동안 적기가 무서워 낮에는 꼭꼭 숨어있었는데 이제 하늘의 걱정은 사라지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중국 집단군 지휘관은 남쪽의 고개에 도대체 얼마만한 병력이 있는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 군사위에서 내려보낸 정보가 맞다면 적 병력 20만이 이 지역에 퍼져 있으며,  자신의 부대는 포위 섬멸될지도 모른다며 우려했다. 그는 신중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차련관 고개를 마주보는 산의 능선에 부대를 전개하고 적병력 규모를 살폈으나,  인민군의 은폐가 완벽했는지 잘 파악되지 않았다. 그는 병단 사령부에 차련관 일대에는 인민군 1개 군단이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공중지원을 요청했다.

  1999. 11. 25  00:20  평안북도 선천군, 노하 일대

  인민해방군 제 135 사단의 사령인 가오 대좌는 전방에 있는 연대로부터 강력한 적의 저항선을 만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병력을 계속 증강시켜 이 저항선을 돌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는 부대의 신속전진을 명령했다. 트럭과 보병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갑자기 북쪽 숲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진격하던 중국군 부대가 산개하여 응사를 시작했다.눈밭에 엎드린 인민해방군은 그동안 기아와 추위에 떨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기습을 받자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총이 발사되는 화염은 숲 곳곳에 많이 보였으나  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고, 추위는 총을 쏘는 손가락을 얼어붙게 했다.  정차해 있는 트럭들이 숲에서 날아오는 RPG에 의해 하나씩 파괴되었는데, 이미 중국군은 차량에서 하차한 후였으므로 인명피해는 적었다. 다시 남쪽의 들에서도 기관총이 발사되었고 본격적인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인민해방군은 포위되었다는 두려움에 빠졌으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저항을 계속했다. 가오 대좌가 무선으로 하급 부대를 불렀으나 무전기에서는 총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와 통신이 연결된 단(團:연대)의 지휘관은 오히려 사단장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 사(師:사단)가 병력미상의 적에게 공격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함성소리에 놀란 가오 대좌가 동쪽을 보니 인민해방군이 전진 중이던 도로 위로 인민군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하얀 스키복을 입은 인민군은 아직도 동복을 입지 못한 푸른색 군복의 인민해방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약 1개 대대병력의 인민군이 인민해방군 1개 연(連:중대) 병력을 전멸시키고,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했다.

  가오 대좌는 도로 곳곳에 인민군의 차단작전이 시작된 것을 알았으나 이에 대처할 경황이 없었다.  남쪽 들에서는 인민군의 장갑차들이 기관포를 연사하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장갑차 뒤로 수많은 인민군들이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어디선가 대전차미사일이 날아와 가오 대좌가 조금 전까지 탑승했던 장갑지휘차를 날려버렸다.

  "대열에 뛰어들어온 적을 먼저 포위공격하라! 우리 부대는 서로 연결되어야 해!"

  가오 대좌는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도로 옆의 배수구에 몸을 숨기고 하급부대에 연락하기 바빴다. 야간에, 그것도 폭설로 인해 기동이 어려운 곳에서 자신의 명령이 하급부대에 의해 쉽사리 수행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이 방법만이 부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관총사수들이 어디선가 모를 곳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연이어 쓰러졌다. 부사수들이 기관총을 잡으면 그들도 쓰러졌다.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저격이 무서워 땅에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남쪽의 인민군이 점점 접근해오고 있었다.이곳에 포위된 자신의 부하들은 채 1개 대대가 되지 못했는데,적은 어림잡아도 5배의 병력이나 되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내전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고참병들이 쓰러져갔다. 가오 대좌는 통신으로 하급부대에 후퇴를 명하고 자신은 백기를 준비했다. 인민군의 사격이 잠시 멈추자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서둘러 총을 버리고 양손을 높이 들었다.

  "다음 장작으로 이동하시오."

  선천의 37연대가 주력인 이 연대병력은 포로 노획부대 약간을 남겨놓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논길을 달렸다.  차 중령은 포로들의 숫자를 대충 파악하고 본대를 따라 다음 공격지점으로 향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이런 전투를 아홉번은 더 치러야했다.  차 중령과 함께 장갑지휘차에 탑승한 김 소좌가 바깥 상황을 살피며 하품을 했다.

  "이겨서 좋티만 앞으로는 지겹겠다는 생각이 듭네다."

  "나도 마찬가지요. 근데… 동쪽에 1개 사단이 더 있다면서요?"

  김 소좌는 차 중령의 말에 질려버렸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따분한 사격훈련에 불과했다. 지금은 중국군 2개 사단을 20여개의 조각으로 분리시켜 산발적인 총격전을 하고 있으며, 토벌대격인 1개 연대를 통해서 아직까지 겨우 한 개의 조각만을 전멸시켰다. 적 부대간의 연동이 어려운 도로사정을 이용해서 실시하는 이 모티작전은 당하는 적에게는 지옥이지만, 공격하는 측에서도 별로 재미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의 중국군에게서도 쉽게 항복을 받아냈다.

  "자, 다음으로 이동하시오."

  승리의 환성을 지를새도 없이 37연대는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도로의 인민해방군을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이곳을 제 37연대에게 물려주고 자신들은 먼저 동쪽으로 향했다.잠시 총격전이 이어지고, 또다시 200여명의 포로를 잡은 37연대는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눈밭에서 기동력이 발휘되는 인민군 스키부대에게  세번에 이은 공격을 받고, 다시 압도적인 병력에 포위된 이들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인민군들이 이들을 무장해제하고 한쪽 구석으로 몰았다. 이들은 트럭에 태워져 즉시 선천의 대목산 요새로 향했다.

  다음 차례가 된 것을 알아차린 동쪽의 인민해방군은 서둘러 동쪽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인민군의 포위망은 완강했다.이들은 37연대가 오기 직전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1개 대대 병력이 넘었으나 겨우 1개 중대의 포위한 적에게 항복한 것이다.이 소식을 들은 37연대의 차량화부대는 즉각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다음 장작을 팰 준비를 했다.

  인민해방군은 도저히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소단위로 나눠진 중국군 대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바빠 협동작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계속해서 각개격파의 제물이 되었다.세계 어느나라의 군대라도 장교 정도면 누구나 이런 작전과 그 대응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그 희생물이 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중국군 부대는 모티 전술의 희생양이 될만한 모든 악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지금이 몇번째 장작이죠?"

  "글씨요… 네. 일곱번째입네다."

  김 소좌는 연신 하품을 하며 상황판을 보고 차 중령에게 보고했다.장갑지휘차에 같이 탑승한 여군인  김 소위가 무전기를 차 중령에게 넘겼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차 중령은 무슨 좋은 소식인가 하고 무전기를 받고 통화를 했으나,  그로서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는 안좋은 소식이었다.

  "뭐요? 1개 자동차화사단? 그게 정말이오?"

  [기렇습네다. 급거 서쪽을 향하고 있습네다. 지연작전을 펼칠까요?]

  차 중령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장이 빈약한 정찰대를 소모하기는 부담이 갔다. 그렇다고 아직 모티전술이 끝나지 않은 마당에 중국군 기계화사단이 구원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공격하시오.  RPG와 기관총으로만 공격하고, 적이 역공하는 경우 즉시 후퇴하시오. 알겠소?  절대 무리하지는 마시오."

  차 중령이 무전기를 김 소위에게 넘기는데, 그녀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마 차 중령에 대한 신뢰의 표시이겠지만,  부대원 전체가 지휘관에게만 너무 의존하면 그 부대의 전력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나폴레옹이기 보다는  차라리 무능력해 보이는 힌덴부르크이길 바랐다. 지휘관은 참모와 전선의 하급지휘관의 창의력을 보장해주는 역할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너무 대대장적의 지휘습관에 물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자신도 이 정도의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하급부대에 자질구레한 것까지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했다.이런 지휘방법은 지휘관의 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위기상황에서는 최악의 지휘방법이 될 수 있었다.

  "도로 근처에 있는 정찰대들에게 즉시 연락하시오.그리고 37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도로를 차단하도록!"

  김 소위가 차 중령의 명령을 받아 도로 근처에 매복해 있는 정찰대를 하나씩 호출하여 그의 명령을 전했다. 25km에 이르는 도로 곳곳에서 정찰부대들이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이 공격하기까지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김 소좌는 지도에서 적당한 교량이 없는지 찾아보았다.갈수기인 겨울에 교량을 파괴하더라도 적 전차들이 작은 개울 정도는 쉽게 건널 것이 틀림없으나 그래도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소좌는 차 중령에게 묻지도 않고 정찰대로 하여금 3개의 다리를 폭파하도록 김 소위에게 명령했다. 김 소위가 차 중령의 눈치를 살폈으나, 차 중령은 김 소위를 모른체하며 전투상황만 살펴보았다.  김 소위가 정찰대를 호출하여 김 소좌의 명령을 전했다.

  1999. 11. 25  00:30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

  "옵네다. 자동차화보병사단입네다."

  눈 덮인 언덕에 숨어있던 정찰대의 강 중사가  망원경으로 도로를 살폈다. 밤이었지만 하얀 눈에 반사된 달빛이 도로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선두 전차래 통과시키고 중간을 티디. 준비하라우!"

  중국군의 제 29 오토바이사단은 전차대대를 앞세우고 급거 서쪽을 향해 달렸다. 약 30여대의 전차들이 통과하고 장갑차와 보병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기관총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사격!"

  기관총이 불을 뿜고 RPG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연기를 뿜고 날았다. 중국군 차량대열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분대에 있는 2명의 RPG 사수가 5발씩의 RPG를 모두 소모하자  강 중사는 미련없이 후퇴를 명령했다.도로에는 부서진 트럭과 장갑차 4대가 불에 타고 있었고, 트럭의 보병들은 모두 하차하여 언덕을 향해 사격하고 있었다.

  강 중사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후퇴하면서도 자꾸 도로를 살펴보았다. 보병은 다시 트럭에 탑승하고 차량대열이 서쪽으로 향했다. 그는 아예 도망가려던 생각을 바꾸어 100미터쯤 이동한 후에 다시 기관총 사격을 명했다. 차량대열이 또다시 멈추고 응사를 했다. 정찰대원들은 모두 킥킥대며 웃었다.급기야 화가 난 중국군 지휘관이 언덕의 점령을 명하자 인민군들은 적당히 위협사격을 가한 후에 본격적으로 후퇴했다.

  중국군 제 29 오토바이사단의 지휘관은 똑같은 상황을 열 번 넘게 겪어야만 했다.겨우 이들을 물리치고 나서 개울에 도달했지만, 다리는 이미 폭파된 뒤였다. 사단장은 또다른 함정이 있을까 두려워 도강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는 2개 사단의 구원 포기를 의미했으며 정주의 병단사령부로 하여금 이 지역에의 병력증강을 강요했다.  병단 사령은 3개 사단을 남쪽의 한국군 방어에 전념시키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이끌고 서쪽을 향하기로 결정했다.

  1999. 11. 25  01:30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선천의 부대가 조공을 성공시켰습니다. 2개 사단을 섬멸하고 6개 사단을 정주 북쪽에 붙들어 맸습니다."

  김 병수 대장이 정주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이동을 확인하며 이 종식 차수에게 보고했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던 이 차수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 지수 대장은 즉시 전선의 부대화 연결된 통신기를 잡고 이 차수의 명령을 기다렸다.

  "공격하시오."

  1999. 11. 25  01:30  평안북도 운전읍

  통일한국군 제 1기갑사단의 전차들이 일제히 엔진을 가동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95년과 96년에 러시아에서 차관 대신에 수입한 T-80 전차들이 주축이 된 이 기갑사단은 미국이 한국정부에 떠넘긴 M-1A1 전차 1개여단이 주축이 된 제 2기갑사단과 함께 11월 19일에 창설된 부대였다.

  혹한지인 시베리아에서도 운행할 수 있도록 제작된 이 전차는 한국의 폭설은 기동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선두에 기갑정찰부대가 서고 나머지 전차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전진했다.  이들을 따라 보병 2개 사단이 진군했다. 포격이 시작되자 밤하늘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각종 구경의 곡사포탄과 로켓탄이 날았다.

  북쪽인 구성쪽으로는 보병 3개 사단이 진격을 시작하고, 예비 4개 사단이 투입 대기 중이었다. 눈이 멈춘 평안북도 일대의 평야와 야산에는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1999. 11. 25  01:45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조인트 스타즈(J-STARS)기에서 보고입니다.  적의 배치는 동쪽에 일렬로 5개 사단, 서쪽에 2개, 북쪽에 2개 사단입니다.  선천쪽의 아군은 아직 소탕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거의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정 지수 대장이 이 차수에게 보고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 종식 차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일선 지휘관의 력량이 전황을 좌우하갔디요.  제 1기갑은 전선을 돌파한 후 그대로 선천쪽으로 밀고 가시오. 그들에게 우리의 전진을 알려 주시구레… 남시쪽 인민해방군의 움직임에 유의하시오. 아무래도 걱정이 되오. 요격기는 준비됐소?"

  "물론입니다. 3개 비행단이 언제든 출격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호석 중장이 대답하자 이 차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서서히 일어났다. 그는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정 대장이 중앙화면의 병력배치도를 보았다. 중국군 5개 사단 정면에 통일 한국군 2개 사단이 산발적인 진지전을 수행중이었고, 중국군의 전선 중앙부를 제 1기갑사단과 보병 2개 사단이 집중공격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승패는 이 작은 지점에서 결판날 순간이었다.

  북쪽 구성방향으로는 또다른 보병 3개 사단이 급속히 진격 중이었다. 2개 방향으로 2개 사단이 진격하고, 그 뒤를 1개 사단이 후방을 엄호하는 방식이었다. 선천의 유격부대로부터 그쪽에 중국군 2개 여단 병력이 서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는 선천의 부대가 빠진 그곳을 한국군이 얼마나 빨리 접수하느냐에 따라  이번 포위작전의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았다.

  정 대장은 북부군이라는 명칭을 쓰는 선천의 유격부대가 중국군을 제대로 묶어주기만을 바랬다.  북부군이 2개 사단과 교전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그들의 무모함에 깜짝 놀랐지만 의외로 중국군을 섬멸하고 또다른 사단과 대치 중이라는 보고를 다시 받고 안심이 되었다. 그들이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길 바라면서 비상유선통신망을 이용해 전선의 사령관을 호출했다. 2군 사령관인 이 도형 대장이 통신에 나왔다.잠시 서로 상대방이 경례하기를 기다리는 어색한 순간이 흐르고, 이 대장이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으나 이는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통신보안!]

  ROTC출신인 정 지수 대장은 육사출신 장성들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소위 임관일은 정 대장이 몇 달 빨랐으나 장성진급은 이 대장이 1년 빨랐다. 그는 ROTC 중에서는 진급 선두그룹이었으나 보직에 있어서는 항상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에 비해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장진급 후에 통일참모본부에 배속된 그는 이것이 군문의 마지막 보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임지에 임했었다.2년 전만해도 적지인 이곳 개성에 부임을 희망하는 장군은 한국군에 몇 없었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서가 아닌 통일참모본부의 수석 참모로서, 그리고 남북 통일한국군 전체의 군령권을 가진 의장 이 종식 차수의 대리인 자격으로 다른 육군 대장에게 명령했다.

  "통신보안. 통참의 정 대장이오. 현재시각 0150, 작전을 실시하시오."

  1999. 11. 25  01:50  평안북도 정주 남동쪽 15km

  굉음을 울리며 러시아제 T-80 전차들이 떼지어 중국군 방어선으로 돌진했다.  집중포화를 받고 불바다가 된 야산 바로 남쪽에 있는, 중국군 1개 중대가 방어하는 약 500 미터의 짧은 전선에 전차 1개 대대가 몰아닥친 것이다. 제 1기갑사단 제 2 전차대대 뒤로 2개 대대의 K-200 보병전투차들이 기관총을 쏘아대며 따라오고 있었다.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은 연막탄도 발사하지 않은 채  대전차방어 수단이 빈약한 중국군 방어선으로 돌입했다.

  "1시 방향, 기관총좌!"

  전차장의 명령에 따라  변 승재 하사가 포탑을 돌려 중국군의 기관총좌를 찾았다.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온 기관총 참호에 사격통제장치의 조준간을 맞추니 레이저 거리측정기에 거리가 150미터라고 표시되고 탄도 컴퓨터가 자동으로 포의 각도를 수정했다.  전차가 전진함에 따라 포는 서서히 목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수평장탄기가 포탄을 자동장전하자 변 하사가 방아쇠를 당겼다. 125 밀리의 2A46M-1 주포가 발사되고 진동이 차체를 흔들었다. 곧이어 목표에 섬광이 번쩍였다.

  "명중!"

  전차장 겸 중대장인  한 보겸 대위는 주포 오른쪽의 7.62밀리 기축기관총을 발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차 주포의 목표가 별로 없는 중국군 보병의 방어선에는 오히려 기관총이 더 효과적인 공격무기였다.  전차가 철조망을 찢고 급기야 참호선을 넘었다. 중국 보병들이 놀라 참호에서 뛰쳐나와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대위가 후퇴하는 중국군 등뒤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하얀 눈밭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변 하사는 후퇴하는 적에게 총질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전쟁상황이었다.

  전차에 이어 방어선에 도착한  보병전투차에서 보병들이 하차하기 시작했다.이들은 아직도 남아서 저항하는 중국군을 사살하며 돌파구를 점차 확대했다. 짧은 시간에 중국군 방어선에 약 2km의 구멍이 생겼다.

  한 대위는 돌파구의 점령은 후속하는 기계화부대에게 맡기고  자신의 전차는 계속 전진을 명령했다.중대 소속의 전차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고 중대장의 전차를 따랐다. 이들이 뚫어놓은 작은 틈새로 보병 2개 사단이 물밀듯이 쇄도했다.

  전진하는 T-80 전차들, 50cm나 쌓인 눈도 이들의 무한궤도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다이어먼드 진형을 갖추고 진격하는 선두의 전차 중대는 후방진지를 부수고  다시 전진하여 인민해방군 제 105사의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이들이 다시 고개 하나를 넘자 평원에 대규모의 포병부대가 보였다.  일렬횡대로 전개한 전차들이 포를 쏘기 시작했다. 중국 105사의 포병연대는 통일한국군 전차들의 직사 사격에 순식간에 궤멸당했다. 50여대의 전차들은 견인식야포와 자주포들의 잔해를 뒤로 하며 계속 서쪽으로 전진했다.

  1999. 11. 25  02:10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중앙돌파 성공! 3개 사단이 돌파했습니다. 포위망 형성 중! 계속 예비대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정 지수 대장은 전선의 사령관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했던 공격이 성공하자 다른 참모들과 함께 뛸듯이 기뻐했다. 중앙의 화면에는 각 부개가 전개하여 시시각각 중국군을 포위하는 진형을 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남쪽의 인민해방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점점 서해바다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적 105사단은 궤멸됐습니다.  2개 사단은 해안쪽으로 밀리고 있는데 현재 7개 사단이 포위망을 완성하여 공격 중입니다.  적은 얼마 못버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 상장님."

  정 지수 대장이 인민군인 박 정석 해군 상장을 쳐다 보며 물었다. 박 상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선 더 몰아 붙여야지요."

  이번 작전의 하일라이트를 장식할 박 상장은 아직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상장은 지상전 지휘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났다. 그는 지금 너무 피곤해서 딱딱한 야전침대라도 마다 않을 지경이었다. 아니, 상황실 바닥에서라도 누워서 잤으면 싶었다.

  1999. 11. 25  02:30  평안북도 선천군, 노하

  "드디어 장작을 다 팼습네다."

  김 소좌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 중령도 하품이 절로 나왔다. 휘하부대의 인원점검을 실시하고 모든 부대를 동진시켰다.  잠시 후 각 부대별로 피해상황 및 전과보고가 들어왔다. 선천 연대인 35연대가 전사 856명, 부상 1240명인 반면에, 구성의 예비연대인 37연대가 전사 571명, 부상 970명이었다. 차단전에 참가하지 않고 견제공격만 했던 스키대대는 큰 피해가 없었다. 적 사살은 8,500명 정도에 포로가 1만 2천명이나 되었다. 빠져나간 적은 별로 되지 않았다.  겨우 도망친 중국 패잔병들은 눈밭을 헤매게 될 운명이었다.

  "전사 1,427명에 부상 2,500명 정도입네다. 의외로 피해가 큽네다."

  작전참모인 김 소좌가 투덜거리며  핀란드 전역에서 모티전술이 사용된 대표적인 전투인 수오무살미 전투의 결과를 기억했다. 핀란드의 9사단은 소련의 163사단과 44사단을 상대로 사살 27,500명, 포로 1,500명, 전차파괴 50대의 전과를 올린 반면에,  피해는 전사 900명, 부상 1,770명의 경미한 손실만 입었다. 거의 3배의 적을 상대로 싸워 이긴 핀란드군에게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이동이 신속치 못했다는 뜻입니다. 안타깝군요."

  차 중령은 북부군 최초의 정규전도 유격전식으로 수행했다.  이는 민간인이 대부분인 북부군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역시 훈련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닙네다. 대장님."

  김 소좌가 도끼눈을 하며 자신을 째려보는 김 소위의 눈치를 보며 차 중령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핀란드의 쏘련군은 얼어죽은 놈들이래 많았지요."

  김 소위가 방긋 웃으며 차 중령을 보았다.  차 중령은 뜨거운 눈길을 느끼며 계속 지도를 검토했다.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적의 오토바이 사단은 또다른 장작패기의 희생물로 적한한 배치상태였다. 그러나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북부군으로 화력이 강한 중국군 자동차화사단을 공격하려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할 상황이었다.

  "대장동지는 존경스럽습네다. 소수병력으로 적의 대규모 부대를 전멸시켰잖습네까."

  김 소위의 칭찬에 차 중령은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 그는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니오. 우리는 전투마다 항상 다수로 소수를 친 것 뿐이오. 용감한 소수가 다수에게 이기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하죠."

  차 중령이 장갑지휘차의 해치를 열고  전투가 끝난 도로 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때리며 스쳤다. 도로 위에서는 불타고 있는 중국군 트럭들 사이로  대원들이 동료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포로는 한쪽으로 몰아 무장해제한 다음에 줄을 지어 서쪽의 선천의 대목산요새로 향하게 했다.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은 꼬리를 물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곽산쪽에 자동차화 보병사단이 있다면서요?"

  차 중령이 몸을 떨며 해치를 닫고 지휘차 안으로 들어왔다. 작전참모답게 김 소좌는 이미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전차 1개 대대가 선두에 있습네다.길고 적의 전진은 이 다리에서 멈춰 있습네다. 정찰대레 계속 파상공격을 가하고 있습네다."

  차 중령은 중국군이 아마 상당히 피곤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야산을 타며 계속 공격을 가하는 정찰대들은 화력은 약하지만, 주로 트럭과 장갑차로 구성된 중국군 오토바이사단은  그들의 공격을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선두와 각 연대 사이사이에 배치된 전차들은 파괴된 다리와 자동차들 때문에 다들 꼼짝 못하고 있었다.

  차 중령은 곽산의 중국군을 공격할까 말까 망서리고 있었다.  경장비만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북부군으로서는  비교적 중무장인 그들을 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대가 활약할수록 남쪽의 전선은 약해져 통일한국군이 더 빨리 진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조바심에 그는 더욱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여군 통신군관인 김 소위가 무선연락을 받더니 갑자기 흐느끼며 울었다. 김 소좌가 물으니 그의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주물직장 고문이며 인민참심원(형사 및 민사재판에서 제 1심 배심원 역할을 하는 인민대표)이기도 한 그녀의 아버지는 나이 50줄에 하급 전사로서 이번 전쟁에 출전했는데, 그만 몇 안되는 북부군의 전사자 명단에 낀 것이다.이 소식은 김 소위의 아빠트 이웃에 사는 [구역 식료독채 지배인]인 예비역 상위가 전해준 것이다.

  "침략자를 몰아내야 한다며  이악쟁이(끝장을 볼 때까지 달라붙는 끈덕진 사람)처럼 달려드시다가 그만…"

  차 중령은 침묵했고 김 소좌가 그녀를 달랬다.

  "동무… 안됐수다만… "

  김 소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소위가 통신기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그녀 딴에는 무척 노력하고 있었다. 차 중령은 운전병에게 곽산쪽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그는 곽산의 적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고 견제만 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민간인에 불과한 노농적위대원들의 희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현대전이 총력전, 모든 국민의 전쟁이라고 해도 전쟁은 결국 군인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생도 군인이 먼저다.’

  1999. 11. 25  02:50  평안북도 정주

  제 1 기갑사단 제 2 전차대대는 중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계속 서진했다. 제 2 전차대대를 따라오던 병력은 중간에 모두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이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무찌르며 끝없이 전진했다. 시속 48km의 속도로 쾌속 진군하는 도중에 저항하는 적은 없었다. 정주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정주에서는 중국군들이  서쪽의 위협에 맞서서 병력을 급히 출동시키고 있었는데 뜻밖에 동쪽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제 1전차중대장인 한 대위의 전차가 선두를 서고 나머지 50여대의 전차가 역V자로 전개해 정주읍에 포격을 실시했다. 얼마 안되는 숫자의 큰 건물들은 모조리 포격을 받고 무너졌다.  중국군들이 쏟아지는 포화와 무너지는 건물 사이에서 도망다니기 바빴다.

  한 대위가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선두에 서서 정주 시내로 돌입했다.  50여 대의 전차가 일렬로 돌진하는 모습은 중국군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방어벽으로 삼아 반격을 준비하던 중 국군은 들소떼처럼 공격해오는 전차들에 놀라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전차 윗부분의 차장 큐폴라가 일제히 열리며 차장들이 12.7밀리 기총을 잡고 사방에 난사했다.

  길 옆에 서쪽으로 이동준비 중이던 트럭대열이 세워져 있었는데 전차들이 지나가면서 기총탄을 퍼부었다.  보병은 이미 하차하여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으나 트럭은 모두 고철이 되었다.엔진과 차체가 철저히 파괴된 이 트럭들은 다시는 사용되지 못할 지경이었다.이런식으로 제 2전차대대는 정주읍을 관통하여 계속 서쪽으로 갈 수 있었다.

  "화끈하군요."

  "길티… 이맛에 전차 타는거이 아니겠슴메?"

  변 승재 하사가 한 대위와 함께 웃고 있는데, 운전병인 강 병장이 전방에 적 차량부대가 있다고 알려왔다. 한 대위가 대대장 전차에 보고하고 전차들은 다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변 하사의 포수용 페리스코프로 보이는 중국군들은 정주읍쪽의 갑작스런 총성과 연이은 전차의 등장에 놀라 동쪽을 보고 있었는데 T-80 전차들이 나타나자 내심 안심이 되는 모양으로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떤 중국군은 길옆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른쪽은 산, 왼쪽은 개울입니다. 차들로 꽉 막혔습니다."

  "들판으로 내려가라우."

  운전병인 강 병장이 전차를 좌회전시켜 길 아래로 내려갔다.  차체가 덜컹거렸으나 토션바식의 서스펜션이 충격을 흡수했다. 아직까지 단 한 대의 피해도 입지 않은 2대대의 전차들이 평야로 내려서서 눈으로 쌓인 들판을 질주했다.중국군들은 이들이 지원하러 온 중국전차인줄 믿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50여대의 전차가 일렬로 계속 달리며 중국군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정지. 사격준비!"

  한 대위가 대대장의 명령을 수신하고 승무원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서고 포탑이 오른쪽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도로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 중국전차 30여대가 보이고,  트럭행렬에는 곳곳에 인민 해방군들이 기습에 대비해 산쪽으로 기관총좌를 설치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1,200미터였는데  날이 어두워서 중국군들은 전차의 주포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차장인 한 대위가 기관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대장의 명령이 50여대의 전차에 동시에 수신되었다.

  "발사!"

  한 대위가 명령과 동시에 기관총을 발사하자  변 하사도 주포를 중국전차를 향해 발사했다. 거의 동시에 발사된 50여발의 철갑탄이 측면 방호력이 약한 80식 전차의 포탑부분을 관통했다. 기관총탄이 길 위의 모든 물체를 날려버릴 듯이 사방에 작렬했다. 변 하사는 발사 후 즉시 자동장전장치를 통해 제 2탄을 날릴 준비를 했으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중국 전차에 명중되고 2발 이상의 포탄에 맞은 전차들도 많았다.  전차대는 다시 서쪽을 향해 전진하며 계속 길 위로 기관총 사격을 했다.  한 대위는 39발의 포탄보다 1250발인 기관총탄이 먼저 떨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1999. 11. 25  03:00  평안북도 정주 상공

  수원비행장에서 이륙한 4대의 F-16은 첫번째 웨이포인트를 향해 북서쪽으로 450노트의 속도로 날았다. 이들은 CAP(전투초계)임무를 맡은 F-16편대로 제 12 전투비행단에 배속된 기체들이었다.  선천 북쪽에 중국군의 공수부대가 투입될까 우려한  통일참모본부는 계속 전투기들로 전투초계를 하도록 명령했고,  12전투비행단에서 이 임무를 맡아 벌써 다섯번이나 출격했다. 평양 북쪽의 순안비행장에서는 새벽에 있을 대대적인 지상공격을 위해 전투기 정비에 한참이어서 12전투비행단이 이 임무를 대신 떠맡았다.

  편대장인 조 장호 소령은 편대기 전원에 전파관제를 명하고 서해안을 따라 저공으로 천천히 북상하다가 해주 상공의 E-2C로 부터 보기(bogye :피아식별 미확인 기체) 발견의 경보를 받았다.조기경보기와 데이터 링크된 그의 레이더에 적기 4대가 확인되었다.

  "적 편대 발견, 고도 12,000피트."

  조 소령은 곧장 직진했다. 적기도 조 소령의 편대를 눈치챘는지 남쪽을 향하여 날아왔다. 적기가 조 소령의 편대를 확인했는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에 조 소령은 계속 저공비행을 했다.갑자기 레이더 수신 경보가 울리고 조 소령의 윙맨인 김 종구 중위가 소리쳤다.

  "적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MUSIC ON!"

  적기에서 2발씩의 R-27R(나토명 AA-10 Alamo-A)이 날아들었다.  반능동 레이더유도미사일(SAR)인 R-27R은 그러나 저공비행하는 물체에는 소용이 없었다. 미사일의 유형을 파악한 조 소령은 계속 저공비행을 명하며 북쪽으로 비행했다.  유도를 잃은 중국의 미사일은 산꼭대기에서 제멋대로 폭발했다. 이제 적기와의 거리는 20마일.  해주의 조기경보기는 적기의 유형이 MiG-29라고 알려주었다. 나쁜 소식이었다.

  "괭이갈매기가 편대원들에게. 전원 교전준비하라!  고도를 올려 사정거리안에 들어오는대로 공격하라."

  조 소령은 KBS-TV에 몇 십년째 방영중인 프로그램 ‘동물의왕국’의 팬이었다. 콜사인을 조종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되자 그는 해변의 난폭자인 괭이갈매기를 자신의 콜사인으로 정했다. 괭이갈매기는 모든 종류의 물새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포식자이다. 알과 새끼 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으면 어미새까지 공격하는 포악함이 전투기 조종사인 그의 마음에 들었다. 물수리의 다 큰 새끼를 공격하는 괭이갈매기의 모습은 결코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편대기들이 애프터 버너를 가동하여 속도와 고도를 높였다. 8000피트 상공에 이르자 조 소령은 김 중위에게 AMRAAM의 발사를 명했다. 적과의 거리는 어느새 15마일까지 접근되었다.

  "FOX ONE!"

  윙맨인 김 중위가 AIM-120 AMRAAM 2발을 발사했다. 편대의 또다른 윙맨인 최 대위도 2발을 발사했다. 4기의 미사일이 마하 4의 속력으로 밤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북쪽 상공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최 대위가 편대간 무선기를 통해 환성을 질렀다.

  "하나 잡았다!"

  조 소령이 레이더를 키고 적기가 3기 남았다는것을 확인했다. 적기는 두려움 없이 접근해 왔다.  신형 공대공미사일의 공급이 어렵게된 중국 공군 입장에서는 미사일전 보다는 근접전을 택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조 소령이 적기로 부터 이탈할까 망설일 때는  이미 근접공중전을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렇다고 도주하자니 속도에서 밀렸다.  거리 10km 정도에서 편대기 전원이 적외선 추적방식의 공대공미사일인 사이드와인더 AIM-9L을 발사했다.  8발의 미사일이 음속 2.5배의 속도로 미그기를 향했다.

  "기똥차구만. 저걸 다 피해!"

  200미터 전방에서 급기동으로 미사일을 회피하는 미그 조종사들의 기량에 반해 편대원들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순간의 빈틈이 한국 공군의 F-16에게는 기회를 주었다.

  조 소령은 앞의 미그-29 하나가 선회하는 것을 보고  그 미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중국 조종사들의 기량은 최고수준이었다. 어느새 미그는 조 소령의 4시 방향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두 기체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와 조 소령의 윙맨인 김 중위는 비명만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서 김 중위는 그를 엄호하지 못한 것이다.

  선회율에서라면 결코 미그-29에 뒤지지 않는 F-16이라고 믿었기에 자신했지만 10.5 G로 급기동하는 미그 조종사에게 조 소령은 질리고 말았다. 조 소령은 제너럴 다이내믹스사의 과대광고를 저주했다. 데모 테입에서는 선회율에서 F-16이 약간 앞선 것으로 나왔으나, 광고를 믿은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별수없다."

  조 소령은 기체를 상승시키며 조종간을 옆으로 틀었다.하이 요요. 기동성이 좋은 적을 상대로 벌이는 전법. 기동성이 좋은 기체는 선회전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나쁜 기체는 속도를 줄여서 기동성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공중전에서는 속도는 곧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도  기동성을 높일수 있는 전법이 강구되었고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하이 요요였다.

  조 소령의 F-16이 속도가 350노트까지  줄어들며 미그의 뒤쪽으로 선회하여 들어갔다. 수호이의 배기노즐이 보였다. 거리는 약 300미터정도.

  ‘됐다…’

  "Guns! Guns!"

  M61A1  20밀리 기관포에서 총탄이 물줄기처럼  휘어져 날아가 미그기의 엔진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미그의 동체가 엔진을 중심으로 반으로 쪼개지며 폭발했다. 그러나 환호할 겨를이 없었다.

  "May day! May day! 조종불능! 젠장, Ejecting! "

  최 대위가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조 소령 기체의 10시 방향에서 추락하는 기체로부터 비상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 전투기로부터 발사된 미사일은 최 대위의 기체를 관통했다.  불발탄이라 폭발하지는 않고 완전히 관통하여 나갔지만, 그의 기체는 순식간에 운행불능이 된 것이다.

  눈에 하얗게 덮인 산맥을 배경으로 노란색 낙하산이 펼쳐졌다. 조 소령은 최 대위가 아군지역으로 낙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전 이래 한국공군은 극심한 조종사난에 시달려야 했다. 김 중위만 해도 귀환 도중 졸다가 사고를 일으킬뻔 하지 않았는가.

  "내 꼬리 좀 치워줘!"

  조 소령이 3시방향을 봤다. 김 중위의 F-16이 쫓기고 있었고 그 뒤를 미그기가 집요하게 뒤쫓고 있었다. 그는 김 중위가 결코 양반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며 소리쳤다.

  "김 중위! 잠깐만 참아!"

  조 소령의 F-16이 급선회하여 미그의 뒤쪽으로 달라 붙었지만 미그기 조종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1.2마일정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미그는 김 중위의 기체를 향해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인터폰을 통해 김 중위의 비명이 들려왔다.  조 소령은 무기셋팅을 AIM-9R 사이드 와인더로 바꾸었다. 광학추적방식의 AIM-9R이 적기를 포착했다. 소리가 커졌다.

  "FOX TWO!"

  두 발의 사이드 와인더가 조 소령의 F-16에서 점화되어  약간의 충격을 남기고 미그기로 돌진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미그기는 이제야 알아 차렸는지 회피기동으로 들어갔다. 플레어와 채프를 마구 투하했으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AIM-9R은 그런 방식에는 교란되지 않는 광학추적식 시커를 가진 미사일이다.  한 발이 엔진노즐에 빨려 들어가고 한 발은 미그기의 꼬리날개 바로 밑에서 폭발했다. 미그의 동체 후부가 완전히 날아갔다.

  캐노피가 날아가고 조종사를 태운 시트가 차가운 한국의 겨울 하늘로 침몰하듯 가라 앉았다. 낙하산이 활짝 펴지고 주변에 적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조 소령은 탈출한 조종사에게 날개를 흔들어 주었다. 탈출한 중국 조종사가 주먹쥔 손을 치켜들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 소령은 헤드기어 안으로 미소를 지었다.

  편대를 모아 상황보고를 들어 보니 적기 3대를 격추시키고 아군은 최 대위의 한 대만 격추되었다.  3대 남은 F-16이 편대를 짜서 수원비행장을 향했다. 연료는 어느새 빙고상태가 되었다. 조 소령이 서둘러 최 대위의 낙하지점을 E-2C에 보고하고 남쪽으로 기수를 잡았다.  남쪽 하늘에서 또다른 편대가 북쪽을 향했다.

  1999. 11. 25  03:15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이중포위망 완성! 섬멸작전 진행 중입니다."

  정 지수 대장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김 병수 대장도 중앙의 화면을 보며 들떠 있었으나 다른 참모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한 명씩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1개 사단의 증원보다는 한 시간의 수면이었다.

  "제 1기갑의 전차대대와 북부군이 드디어 연결됐습네다.  전차대대는 즉시 선천쪽으로 향해했다는 보곱네다…… 동지들이 다 어데로? "

  정 대장과 김 대장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상황실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 정석 상장만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묻고 졸고 있었다.

  1999. 11. 25  03:20  평안북도 정주 남쪽 9 km 해안

  서해안을 따라 중국군 2개 사단이 몰려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통일한국군은 후퇴할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이들을 몰아붙였다. 이들이 공격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구축하려는 순간 서해바다 쪽에서 불기둥이 몰려왔다.외장도 인근 해상에 포진한 서해함대에서 함포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인민해방군은 해안에 집중되는 포화를 피해 내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에게는 차라리 한국군의 전차가 대적하기 쉬운 상대였다.

  어두운 밤바다 위에 작은 물체들이 새까맣게 해안을 향해 몰려들었다. 100여척의 남포급 LCP들이 해안으로 쇄도했다.  이 상륙정들은 80톤 밖에 되지 않는 소형함이지만, 속도는 40노트나 되며 30명의 보병이 탑승할 수 있다. 각 2기의 2연장 14.5밀리 기관포가 해안 일대를 휩쓸었다.

  이들 뒤로 100여척의 또다른 상륙정들인 소종급 하버크래프트(hover-craft)가 몰려왔다. 영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1987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이 상륙정들은 다행히 동족상잔이 아닌, 외국의 침입에 대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하버크래프트에는 각 60명씩의 상륙경보병여단 대원들이 탑승하고 해안선을 노려 보았다.

  통일한국군 서해함대의 사령관인 인민군 출신의 김 종순 중장은 동해 함대로부터 긴급 지원받은 한국형 구축함, 남이함의 함교에서 상륙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김 중장은 오랜만에 자신있는 임무인 상륙전 지휘를 맡아 신명이 났다.  정주쪽 해안선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그의 함포사격 지휘는 정확했고, 상륙지점 선정 역시 나무랄데가 없었다.  그의 지휘로 중국군으로부터 별 저항을 받지 않고 2개 여단의 상륙경보병 부대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함수의 127밀리 단장포는 해안을 향해 계속 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분당 20 발씩 발사하는  이 오토 멜라라사의 자동포는 흡사 기관총처럼 화염을 연속 뿜어냈다. 구식 기어링급 구축함인 경기함은 같은 127밀리 구경인 Mk-38 함포가 2연장 2기가 있는데, 분당 15발의 속도로 25 kg의 포탄을 퍼부었다. 구식함이 오랜만에 대활약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상륙전 지휘 도중에도 북쪽 하늘을 감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다시는 기함을 잃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기함이었던 전북함은 침몰하고 충북함은 조선소에서 수리중이었다.  한국형 구축함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이제 자신감이 생겨서 자꾸 통일참모본부에 서해 함대에 의한 중국 해안선 공격을 건의했다.

  1999. 11. 25  04:00  동지나해 (동경 122도 10분,북위 26도 23분)

  대만 북단 펭치아(彭佳嶼)에서 동북 20 km인 이곳 동지나해상에 반전 전사 집단인 피스의 함대가 서쪽으로 항진 중이었다.  상공에는 20여기의 미그-29 전투기들이 전투초계 중이었고, F/A-18 전폭기들은 착함 중이었다. 상공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대잠초계기와 헬기들은 바삐 해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간단했다. 동지나해 해상의 남북으로 오르내리며 중국의 해상수송로를 차단하고 중국의 해안방어부대들과 계속 교전하여,  이 전력을 중국군 지도부가 한반도쪽으로 빼돌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함장 겸 함대사령관이며 러시아 해군 출신의 퇴역 제독인 루시쵸프는 전황판을 보며 두 시간 동안 격추시킨 중국 항공기의 숫자를 확인했다. 피스 함대의 함재기인 MiG-29 편대는 미그-21 Fishbed와 같은 스타일인 시안 J-7(섬-7) 함대방공전투기 34기를 격추시켰고,  함대 소속의 대공 미사일 순양함과 F/A-18 편대는 합작으로 미그-19 Farmer 유형인  센양 J-6 해상공격기를 73기나 격추시켰다.

  처음 이 중국 전투기들이  레이더를 온통 덮으며 떼지어 공격해올 때 루시쵸프는 함대의 최후를 생각했으나, 이들의 공격력은 의외로 약했다. 대신에 피스의 함재기용 미사일이 거의 바닥나서 한번 더 공격받았다면 진짜로 최후를 맞을뻔했다며 그는 놀란 가슴을 쓸었다.

  J-7 전투기들은 미그-21이 항공역학적으로 우수한 설계의 명작전투기임에도 불구하고, 지상레이더 기지의 관제를 받지 못한데다 공대공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짧은 적외선 유도방식이며 구식인 AA-2 Atol 뿐이라서 피스의 함재기들에게 처절할 정도로 당했다. 격추된 J-7 중에서 25기는 미그-29 편대로부터 레이더에도  안잡히는 장거리에서 미사일공격을 받고 추락했고, 나머지는 중국 해안쪽으로 도주하는 중에 격추되었다. 34기라는 이 숫자는 중국 해군에 소속된  시안 J-7 전투기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삼각익인 미그-21은 다양한 종류의 파생형이 있으며,  원래는 요격기로 개발되었으나 MiG-21 PFMA 같은 경우는 전투폭격기로 개량된 경우이다. 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바스람 기지에 주둔했던 소련공군의 MiG-21 MF(피시벳 J)는  Gsh-23L  기관포를 동체 아래 기축선에 장착한 유형이다.

  J-6의 대규모 편대는 엄호기인 J-7이 피스의 미그-29 편대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항공모함으로 돌진했다.함대 상공에 대기하고 있던 24기의 F/A-18 편대는 이들을 향해 모두 144발의 AMRAAM을 날렸다.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는 이 전투기들은 추풍낙엽처럼 바다로 떨어졌다.  F/A-18 편대는 미사일을 모두 발사한 후 이들과의 접근전을 피하며 거리를 두고 함대 상공을 선회했다. 중국 공격기들이 함대에 접근했다.

  러시아제 슬라바급(제식명 1164급) 유도구축함  빌나 우크라이나에서 SA-N-6 대공미사일을 발사하고, 저공으로 접근하는 적기는 SS-N-4 단거리 대공미사일로 요격했다. 막대한 피해를 보며 함대에서 3km까지 접근한 중국 공격기들은 겨우 대공미사일인 PL-2  2기씩을 발사하고 도망갔다. 중국제 적외선 유도방식의 공대공미사일인 PL-2는 아직까지도 제한적인 대함공격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거리 3 km의 이 미사일은 항모에 탑재된 30밀리 AK-630에 의해 대부분 격추되었다. AK-630은 레이더로 자동 유도되는 6총신의 근접방어화기이다. 러시아 해군은 이 병기를 미사일 요격시에 상호보완하도록 쿠츠네초프급 항모의 네 곳 같은 위치에 2기씩 배치했다.

  피스함대 승무원들은 중국 해군기들의  집단자살과도 같은 이 공격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루시쵸프는 항공기에 의한 제 2파의 공격이나 이들이 양동부대인 경우 다른 유형의 공격을 예상했으나, 아직 함대는 이렇다할 어떠한 유형의 공격도 받지 않고 있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루시쵸프가 함대 주위에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전투함교의 의자에 앉아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함장인 루시쵸프는 타이완쪽에서 치열한 공격이 있을 줄 예상했으나 의외로 그쪽에서는 전투기들이 날아오지 않았다.  중국에 의해 점령된 타이완의 조종사들이 피스에 투항할까 두려운 중국군 지도부가 이들의 출격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타이완 조종사들은 망명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타이완이 패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조국은 중국인 것이다.

  루시쵸프는 함대가 이 해역에 진입한 이유는 타이완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라 본토의 푸젠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도 타이완에서 출격하는 전투기는 달갑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그는 중국의 신형 전투기들이 거의 소모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존심 강한 중국군의 지도부가 중국해상을 봉쇄한 피스함대가 이렇듯 날뛰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판에는 공격을 마친 전투기들의 착함이 계속되었다. F/A-18 전투기들의 착륙은 매우 우아해 보였다.  레이더를 사용한 완전자동 착함유도장치에 의한 이들의 착륙은  광학식 착륙유도등에 의한 백업을 받아 모두 안전하게 착륙했다. 이들은 착함 즉시 승강기에 의해 아래쪽 격납고에 수용되어 연료와 무기 보급을 마쳤다.이들에 이어서 미그-29들의 착함이 시작되었다.

  함교 맨 꼭대기층인 주항공관제소 아래층의 항해 및 전투함교에서 루시쵸프는 오늘 새벽의 공격목표인 저장(浙江)성의 항저우(杭州)와 푸젠(福建)성의 푸저우(福州) 및 시아먼(厦門)에  대해 다시 검토했다.

  시아먼은 루시쵸프가 현역 시절에  러시아 극동함대를 이끌고 친선방문했던 곳이었다.  廈門은 타이완하이시아(臺灣海峽)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과 마주 보고 있는 항구도시로 중국이 1979년에 경제특구로 지정한 이후 크게 경제발전이 된 도시이다. 해상으로 동쪽 7km지점에 티이완령인 진먼따오(금문도)가 있어서  예전에 타이완과 긴장관계일 때는 군사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륙쪽의 지메이(集美)와 시아먼따오(廈門島), 그리고 꾸랑위따오(鼓浪嶼島)의 3개 지역으로 이뤄졌다.

  루시쵸프의 기억에 푸저우와 시아먼에는 대공미사일 발사기지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커다란 몸체에 사정거리 40km에 불과한 중 국제 지대공미사일은 최신의 초음속전투기에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아먼에는 MRBM이!! "

  루시쵸프는 콘솔을 조작하여 중국군의 핵전력에 관한 정보를 찾았다. 중국의 전략군인 제 2포병(전략로켓부대)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직접통제를 받으며 모든 전략미사일을 관장하고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원자력잠수함도 지휘한다.  제 2포병은 군구별로 배속되어 있긴 하지만 중앙군사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자료에 나와 있었다.

  루시쵸프는 시아먼에 있는 미사일의 유형을 확인했다. 탄두위력 20KT 에 사정거리 1,200km의 MRBM(중거리 탄도탄)이었다. 중국에서는 DF-2로 분류하고 서방세계에서는 CSS-1로 부르는 구식 미사일이었다.이러한 유형의 미사일은 중국에 50기가 있으며, 최근 ICBM(대륙간탄도탄)의 사거리 연장에 중국이 온 힘을 기울였고  중거리탄도탄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미사일 수의 차이는 없었다.  중국에는 7곳의 MRBM 기지가 있으므로 이곳 기지에는 약 7기의 중거리탄도탄이 배치된 셈이다.

  루시쵸프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핵미사일은 중앙군사위원회의 강력한 통제에 놓여있지만,  일선부대에서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핵미사일 발사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는 통신체계가 비교적 확실한 미국이나 러시아와도 다른 점이었다.  중국은 통신위성에 의한 전시 전략핵방어명령체계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적국에 의한 통신위성의 요격을 염려하여 중앙에 의한 미사일 발사권한의 완전한 독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루시쵸프가 공포를 느꼈다. 그는 피스의 함대가 상하이나 하이난따오(海南島)를 공격할 때는 중국해군이 그래도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해군함정이 전멸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소형의 미사일고속정과 어뢰정까지 동원하여 피스의 공격을 저지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 해역에서는 아직 중국의 어떠한 해군함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잠수함의 흔적도 없었고, 다만 구식 공격기들의 단말마적인 저항만 있을 뿐이었다. 루시쵸프는 중국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군인으로서의 그의 육감은 중국이 자국 영해로 발표한 이 해역에서 그와 부하들을 탈출시키도록 했다.

  "침로 0-9-5!  이 해역을 긴급 이탈하라. 함대, 최대한 분산하라! "

  함장의 갑작스런 명령변경에 함교의 모두가 놀랐으나 일단 그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함교요원들이 다시 바빠졌다. 항모에 착륙중이던 전투기 중에서 장거리요격 능력이 있는 개조된 미그-29전투기 4대가 즉각 연료 보급과 무기 탑재를 마치고 이륙하기 시작했다.E-2C 조기경보기뿐만 아니라  함대의 모든 함정들이 레이더를 키고 하늘의 위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오랜 동료인 순양함의 함장이 루시쵸프의 걱정을 눈치채고 걱정말라고 전문을 보냈지만 그의 걱정은 사그러들지 않고 조급해지기만 했다.  일본의 88함대가 함대의 동쪽인 센카쿠열도에서 접근해 온다는 경보가 울렸으나 지금은 잡다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피스의 함대는 최대한의 속력을 내어 동쪽으로 항진했다. 거의 도주한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속도가 빨랐다.  잠수함으로부터의 위협을 막는 역할을 하는 대잠초계기들은 너무 빠른 함대의 이동속도에 놀라 황급히 함대의 진행방향에 소노부이를 투하했다.

  1999. 11. 25  04:35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겨울로 접어든 북경의 밤은 어두웠으나 천안문광장 동쪽에 있는 베이징판띠엔(北京飯店–일급호텔)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에 대한 저격 이후 밤을 낮처럼 밝히며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 호텔은 내전 당시 중국의 구 지도부가 사용해왔는데, 내전에서 승리한 남부중국의 실력자들이 중앙을 접수한 후에도 이곳은 비공식적인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다.

  내란 이후 중국 중앙정치의 최고 권력가이며, 광둥-푸젠 지역의 실질적인 총수인 중국 공산당 총서기 리루이환은  이 호텔의 신축건물인 꾸이삔러우(貴賓樓) 3층의 집무실에서 군 장성들에 의해 둘러 쌓인 채 심리적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다. 이들은 당 중앙군사위 위원들뿐만 아니라, 3대총부(3大總部 — 총참모부,총정치부,총후근부)의 장들과 해, 공군 및 전략미사일군의 사령관, 그리고 7대군구중 조선침공에 나서지 않은 군구사령 등, 모두 20명에 가까운 고위장성들이 총서기의 결단을 강요했다.

  "국제적인 압력이 두려워서 조선반도에 대한 핵 사용이 안된다면, 차라리 중국의 영토나 영해에 핵을 써서라도 적의 기세를 꺾고, 우리에게 유리한 휴전협정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인민해방군 해군 사령인 창 리엔충 상장(上將)이 총서기의 책상에 두 팔을 짚고 총서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창 해군상장은 일반적으로 중장이 맡던 해군사령에 다시 임명된 퇴역 장군이었다. 그는 내전 당시 군부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높이산 총서기의 요청으로 현역에 다시 복귀하여, 해군과 공군,그리고 일부 중립을 선언한 대군구를 남부중국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공로로 정치국 후보위원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군사위원이 되지 않고 현역에 남음으로써 총서기의 후견인을 자임했다. 70대 초반의 창 상장이 손자를 달래듯 50대 후반의 젊은 총서기를 설득했다.

  "조금 전에 피스 함대를 치던 우리 해군 항공대가 거의 전멸했습니다. 신형함과 신형 전투기가 거의 없는 지금, 적들은 우리의 영해에서 마음껏 학살을 즐기고 있단 말입니다.  곧 시아먼(廈門)과  푸저우(福州)가 이들의 폭격을 받아 잿더미로 변할 것입니다. 이곳은 총서기 동지와 정치국 주요 상무위원들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홍콩과 상하이, 난징(南京)의 예에서 보듯이 이들은 군사목표와 민간 목표를 구분하지 않는 잔인한 용병들입니다. 인민해방군 해군이 안타깝게도 전멸한 이상, 이들을 막을 전력은 이제 전혀 없습니다."

  창 상장은 의도적으로 해군 소속의 1개 항공사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었다. 제한된 해역에 몰려있는 함대를 향해 사방에서 대함미사일을 발사했으면 항공기의 피해도 줄이고 피스 함대를 격퇴시킬 수도 있었지만,  창 상장은 잔인하게도 해군 항공대를 자살공격으로 내몰았다.  그는 항공기들의 무모한 돌격으로 인한 피해가 클수록 총서기의 결단이 빠를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와 다른 장성들의 요구는 핵 위협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군사위 소속 위원들과 각군의 최고지도부인  이들은 한국과의 전쟁에서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치욕을 맛보았다.  보름 안에 한반도를 완전 점령한다는 그들의 계획은 처참하게 깨어지고,  이제 그들은 한국의 역공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조금 전에는 한반도 북서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제 17병단 전병력이 통일한국군에게 삼면에서 포위당하여 항복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가 비암호 무선통신을 통해 들어왔다.  내전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쓰취앤(十全)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17병단 사령, 위앤팡 중장은 휘하의 서부전선 3개 집단군이 완전 포위당하여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부하들에게 항복을 명령하고 자신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비보도 들어왔다.

  17병단은 16병단의 후속부대였다.  개전초기에 평양까지 밀고 내려갈 기세였던 제 16병단은, 이미 예하의 3개 장갑집단군이 전멸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보병사단만으로 만주에서 재편성을 하고 있었다. 17병단은 이들이 빠진 전선을 간신히 방어했는데,  안주에서 크게 패배하고 이후의 전투에서도 계속 한국군에게 밀렸다. 정주에서 포위될 때는 처음 편성되었을 때의 겨우 절반의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결국 인민해방군 제 17병단의 20여개 사단 중에서, 마지막 11개 사단이 정주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동부전선인 함경북도의 인민해방군 제 5병단도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흥남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던  인민군 3군단과 5군단은 이제 입장이 바뀌어 공격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들은 진격속도가 하도 빨라서 어느 부대가 먼저 두만강에 도달하는가 내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제 9 기계화군단과 3개 상륙경보병여단이 가세했고, 한국군의 2개 공수여단도 내기에서 빠지지 않을 작정인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통일한국군은 청진까지 수복했으며, 이같은 진격속도로는 이틀이면 두만강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이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 한나절에 1개 사단의 인민해방군이 전멸, 또는 포로로 잡히고 있었다.

  반면에 침공군의 입장인 중국 인민해방군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때 이른 폭설로 전선으로의 보급활동이 완전 마비되었다.  현재는 일부 도로가 개통되어 급한 군수품과 병력을 이동시킬 정도는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이들의 이동도 각처에서 활약하는 유격대 때문에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중국의 중앙군사위원회는 점령지대의 유격부대를 폭설 전에 미리 제거하지 못한 과오를 반성하고 있었다.  어쨋든, 중국군은 오늘 새벽 평안북도 서부의 포위섬멸전과 함께 전 전선붕괴와 후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 주시오, 총서기 동지!  전쟁에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일단 이기고 보는 법이오.  패전의 모든 책임을 총서기가 지기 싫으면 핵을 사용하란 말이오."

  창 리엔충 해군상장에 이어 첸 쯔밍 총후근부장이 총서기를 윽박질렀다. 여기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출세한 난징군구 사령 리양시(梁溪) 중장이 가세했다.

  "총서기 동지, 당과 인민, 그리고 인민의 군대를 생각하시오. 동지께서 우리 인민과 군을 무시하신다면…"

  리양 중장의 말은 총서기에게 협박으로 들렸다.  군부가 합심하여 총서기를 몰아내거나,  최악의 경우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화가 난 총서기는 앞장서서 핵 사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면면을 살펴 보았다. 뭔가 공통점을 발견하자 그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모두 이번 전쟁에서 가장 졸전을 보여준 인물들이었다.

  해군은 참패가 아니라 아예 전멸했으며, 총후근부는 날씨예측을 잘못해 인민해방군에게 가을옷을 입힌 채 이들을 전선에 내보냈다.  그리고 현재의 전황이 이렇게 된 것은 기상악화 탓도 있지만, 후방의 게릴라를 소탕하지 못한 그의 잘못이 컸다. 마지막으로 난징 군구 사령은 작전실패로 인해 중앙으로 소환된 인물이었다. 한반도 동부전선에서 인민군의 전선을 돌파한 제 39 집단군과 제 5 병단 주력을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해 동부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고, 이 여파가 서부전선까지 이어진 것이다.

  ‘자기들이 패전 책임을 지기 싫으니까  핵을 사용하자고 꼬드기는 모양이지…’

  총서기는 핵을 사용했을 때의 파급효과를 생각했다. 겁먹은 한국군은 아마도 더 이상 공세를 강화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전선이 고착되고 잘하면 정전협상 테이블에서 의외의 양보를 얻어낼 지도 몰랐다.  중국이 바라는 가장 큰 욕심은 두만강 유역 일부의 조차였다.  북한과 러시아에 의해 동해로 빠져나가는 길이 막힌 중국은 두만강에서의 자유항해권은 계속 유지했으나,  유사시에 통행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이 수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 그는 한반도를 장악하지 못하더라도 동해–아니, 일본해라고 그는 정정했다–에 진출할 수 있다면  한반도쯤이야 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승전하더라도 막강한 중국의 위협에 놀라 계속 방위비 증강에 쪼들리게 되고, 일본은 중국과 접하게 되어 크게 놀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전쟁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국을 점령할 줄 알고 남동임해공업단지를 초토화시키지 않은 것은 실책이었다. 이제 이곳은 공습을 하고 싶어도 장거리 폭격 능력이 떨어져 못하게 되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세부계획을 세우고 시나리오를 작성한 총참모부에 대해 분노가 일었다.  총참모부장은 살기등등한 장군들 뒤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국제관계였다.일단 미국과 러시아가 핵의 사용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아직까지 한번도 전쟁에서 핵이 사용되지 않았다. 핵이 사용될 경우의 상호 보복이 두려워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길 경우, 핵 사용 경험국은 핵의 선제공격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것이 더 큰 문제였다.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가장 큰 가상적이므로, 이들 핵강대국을 상대로 선제 핵공격을 받았을 경우 과연 중국이 남아날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자국 영해 내에까지 침공한 적에 대한 핵 사용이라면…’

  총서기인 리루이환은 이들의 유혹에 넘어갈까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그 해역은 타이완 점령 뒤부터는 국제해양법의 기선주의에 따라 자국영해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해역이었다.  그는 핵을 쓰기 전에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들에게 핫라인(비상전화)으로 통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쟈우가, 광쟈우가!"

  통신군관의 얼굴이 하얗게 되어 총서기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 장교가 발음한 광주(廣州)는 분명 광둥어(廣東語)식 발음이었다.  아무리 남부중국이 천하통일을 했고, 정치와 경제지도자의 대부분이 남중국 계통이라지만 군대에서의 표준어는 역시 아직도 북경어였다.  통신군관은 고향에 뭔가 안좋은 일이 생겨서 무척 당황한 것이다. 중국인에게 고향은 조국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야? 광저우가 어떻게 됐어? "

  총서기가 베이징(北京)어식으로 물었다. 약간의 경음화가 된 꽝저우, 또는 쾅초우가 베이징어 발음에 가깝다.  광둥어와 베이징어의 발음 차이는 불어와 독일어의 차이보다도 심해서, 상대의 말을 모르면 아예 통역을 대동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 군사위원 등 군 고위장성들도 광둥의 성도인 광저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걱정되었다.  해군 초계기의 보고로는 피스 함대는 아직 공격하지 않고 있다고 했었다.  시아먼(廈門)이나 푸젠성의 푸저우(福州)가 먼저 당하지 않고 광저우가 당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광저우가 불타고 있습니다. 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미사일이 아직도 하늘을 날고 있답니다."

  통신군관의 말에 장성들이 놀랐다.  이 정도 거리까지 도달하는 미사일이라면 해상발사 토마호크나 인민군의 대포동 2호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피스 함대는 인공위성과 초계기들의 주요 감시 대상이므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낱낱이 이곳에 보고되고 있었다. 결국, 피스 함대의 토마호크식 함대지 미사일은 아니고, 한반도에서 발사된 사정 3,500 km의 대포동 2호라는 뜻이었다.

  리루이환 총서기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통신군관이 총서기 집무실에 있는 대형 TV를 켜니, 그곳에 불타는 새벽의 광저우가 군사위원회 직속 통신부대의 폐쇄회로를 통해 생방송되고 있었다.  광저우후어처잔(廣州火車站–기차 역)의 호텔 겸용인 거대한 역사(驛舍)와, 바로 맞은편의 리우화삔꽉(流花賓館)이 통째로 무너졌고, 남쪽의 런민루(人民路)에 있는 큰 건물인 전보전화국이 반쯤 무너진 채 불에 타고 있었다.

  촬영을 하는 헬기가 좀 더 상승하며 남쪽으로 선회했다. 홍콩으로 흐르는 주지앙(珠江)에 놓인 다리 두 개가 반토막이 나 있었다. 남서쪽에 불타고 있는 곳은, 이곳이 고향인 총서기의 눈에 보기에 홍콩과 마카오로 가는 페리의 선착장이 틀림없었다.

  스짜이광저우(食在廣州), 먹을 것은 광저우에 있으며 하늘을 나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으며 네발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다 먹는다는 식도락의 도시, 한나라 이후 번성한 해상무역 도시, 아편전쟁과 신해혁명의 도시,  그리고 수백만 중국 화교들의 고향인  이곳 광저우의 밤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거리를 누비며 소방차들이 달렸다. 성질 급한 인민들이 짐을 지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새벽의 광저우 거리는 때아닌 인파로 가득 찼다.

  피난행렬을 본 총서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상하이가 공격받자 연안도시의 인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내륙 깊숙히 도망가 버렸다.  홍콩이 공격을 받은 이틀 전에는 외국인과 이중국적의 홍콩인들이 모두 해외로 빠져 나갔다.  이제 남부의 내륙도시인 광저우가 당한 지금, 도시의 노동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임에 뻔했다.  이는 군수품생산에 차질을 빚어 가뜩이나 불리한 전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 되었다.

  "뭐하는 거요? 빨리 발사하지 않고!"

  총서기가 전략미사일군 사령에게 역정을 내었다. 공포와 분노가 범벅이 된 표정의 장성들이 갑자기 표정이 환해졌다.  전략미사일군 사령인 쏭윈펑 중장이 직통전화를 잡고 난징군구의 제 2포병 사령을 호출했다. 쏭 중장이 핵공격의 암호를 대자  제 2포병 사령은 당장 시아먼의 전략 미사일대대를 불렀고, 그는 즉시 피스함대에 대한 핵공격을 지시했다.

  1999. 11. 25  04:50  중국 광저우, 주지앙(珠江) 하저

  한국해군의 209급 잠수함 7번함인 성진함의 발령실에서 함장인 이 승렬 소령이 잠망경으로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그의 표정은 중국 본토 깊숙한 이곳 내륙의 광저우를 공격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민간인들을 공격했다는 자책감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성진함은 23일 밤에 홍콩에 미사일공격을 가한 잠수함이다.  홍콩 공격 후 하루 약간 더 걸려서 이곳 광저우에 도착하여, 수중에서 레이더로 포착된 시내의 대형건물에 지상공격용 하픈을 날린 것이다.  강에 걸린 두 개의 다리는 어뢰로 공격했음은 당연했다.

  함장이 잠망경을 올리고 잠망경대에서 내려왔다. 온통 황금빛으로 환한 함내는 침묵으로 무거웠다.  수병들은 TV화면에 비친 불타는 광저우는 보지도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신경썼다.수병들은 잠수함에 의한 광저우공격은 함장의 무리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돌아갈 길은 거의 막힐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살아돌아갈 희망을 갖지 않았다. 홍콩으로 가는 강 하구 곳곳에 중국해군의 전력을 동원한 잠수함 찾기가 시작될 것이며, 운이 좋아 포로가 되더라도 비무장의 중국인을 학살한 자신들이 살아남게 되리라는 헛된 상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에이, 쓰펄! 기분 풀어. 살아 돌아가면 되잖아? "

  이 소령이 부하들의 감정을 눈치채고 이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했으나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는 광저우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할까 하다가 부하들의 표정을 보고는 단념하고 말았다. 폐쇄사이클 엔진의 신형 209급 잠수함은 수병들의 침묵처럼 조용히 주지앙의 강바닥을 기듯이 낮은 심도로 계속 동쪽으로 향했다.  저심도 항해용의 저주파 소나만이 가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1999. 11. 25  06:00  평안북도 선천군, 노하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기나긴 전투를 치르느라 녹초가 된 병사들이 동쪽을 마주보고 길게 파인 참호선 안에서  평야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민간인인 이들 인민군들은 며칠간의 야간전투에 익숙해졌는지 아직 잠이 필요할 것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간 밤낮으로 한시도 편히 수면을 취하지 못한 차 영진 중령은 머리가 빠개지진 기분이었다.

  그의 이상증상은 말에서 나타났다. 한번 지시한 명령을 자꾸 다시 내리는 것이다. 그도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통신군관인 김 소위가 불안한듯 자꾸 차 중령을 쳐다 보았다.

  차 중령은 피곤한지 자꾸 인상을 쓰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갑지휘차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 새벽의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갑자기 요의를 느낀 그는 장갑차에서 내려 참호 뒤쪽 구석으로 갔다.

  멜빵이 달린 흰색 스키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속에 입은 인민군식 누비바지를 벗었다. 다시 속의 군복바지 단추를 풀고 간신히 팬티에서 물건을 꺼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오줌이 떨어지는 자리에는 눈이 녹아 흙이 보였고, 주변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 아래쪽을 보았다.

  귀두 뒷쪽에 때가 잔뜩 끼어있었다. 사타구니도 끈적끈적하여 기분이 나빴다. 그는 전쟁 시작일부터 목욕은 커녕 머리도 감지 못했다.대목산 요새에 세면장이 갖춰져 있었지만, 지휘에 바쁜 그는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아까와 반대순서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녹았다가 다시 언 참호 위의 눈을 한줌 쥐어 얼굴에 대었다. 별로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는 문득 평야 건너 동쪽 산 아래에 시커먼 물체들이 줄지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망원경을 들고 보니 그것이 전차대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잽싸게 장갑지휘차로 내달렸다. 장갑차 안에 있던 김 소좌가 정찰대의 보고를 받았는지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고, 참호선에 있던 병력은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비상신호가 오갔다.

  김 소좌가 하얀 김을 뿜으며 망원경으로 동쪽을 살폈다. 대규모 전차부대의 출현에 김 소좌는 아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차 중령은 장갑지 휘차의 뒷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쪽으로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전차대열을 살폈다.

  "차종은 모르겠답네다만… 려단규모로 추정된답네다."

  "그렇다면 정찰대는 공격하지 말라고 하시오.  혹시 우리편일지도 모르오."

  김 소좌의 보고에 차 중령이 명령했으나,김 소좌는 이미 정찰대와 전체부대에 그런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과연 전차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차들이 접근해 올수록 차 중령의 긴장이 더해졌다.  그가 평소에 보던 전차는 결코 아니었다.  K-1이나 T-62 등의 남북한이 보유한 전차는 결코 아니었고, 미국제나 중국제 등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육중한 무게의 전차들은 멀리 실루엣만으로 보면 포탑이 사마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탑은 납작하고 앞부분으로 갈수록 날카로왔다. 그리고 포탑은 차체와의 비율이 안맞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아니, 포탑에 차체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차 중령은 예외없이 달걀형 포탑인 러시아 및 중국제 전차, 그리고 네모나게 각이 진 독일제 레오파르트나 차체에 비해 포탑이 큰 편인 M-1 에이브럼즈 전차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종류는 절대 아니었다.  전체 포탑이 경사면으로 이뤄진 챌린저도 결코 아니었다. 전차들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저놈의 땅크는 어느쪽 겁니까?"

  "글쎄요… 120밀리 포에 방열피복이 있군요. 포신의 뿌리가 포탑 위까지 올라온 걸 보면 아무래도 메르카바가 아닐까 하는데요…"

  전차부대 지휘관이었던 차 중령도 이들 전차의 차종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차종을 알아야 피아를 구분할텐데 도대체 처음 보는 차종이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새벽 내내 동쪽 산등성이 마다 포화가 피어났었다.  이제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포성이 그치고 새벽의 정적이 찾아왔는데, 다시 너른 들이 전차의 굉음에 묻힌 것이다.

  "이스라엘제 멜카바요? 에이, 설마요."

  "기축기관총과 좌우 양쪽 큐폴라의 기관총,  포탑의 생김새로 봐서는 아무래도… 전투준비 시키시오. 그리고 차련관쪽 상황도 체크… 아니 점검하시오."

  "알갔습네다!"

  김 소좌가 해치를 닫고 아래로 내려갔다. 차 중령이 망원경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부대원들은 벌써 전투위치에 배치되었다. 분대마다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인 밀란의 발사준비로 바빴다. 전차들이 참호선 2km 전방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다리 건너에 있는 참호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전진해왔다. 전차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전선에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최 대좌 동지는 부상중이랍네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답니다."

  차 중령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딱 일주일을 버티고 이젠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이었다.  최 대좌에게는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할 것이다.  그는 차 중령 자신보다 군대경력이 훨씬 많으니 스스로 판단하길 바랐다. 그는 앞에 있는 전차를 막기도 벅찬 것이다.

  "그리고…"

  김 소좌가 차 중령의 눈치를 보며 계속 보고했다.

  "산악전 1대대와 야간전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중입니다. 후퇴하면서도 지연공작을 펼치고 있습네다만, 날이 밝아질수록 불리해지고 있답네다."

  차 중령이 신음성을 냈다.  그는 김 소위가 쭈뼜거리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물었다.

  "한시간 넘게 이곳에서 통신을 했는데도 아직 적의 포격을 받지 않았습네다. 적의 통신추적부대는 없다고 보시는 것이…  지금 공용주파수로 통신을 해보는 것이 어떻갔습네까?"

  "하시오."

  차 중령은 약간 화가 난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진작 알고 있었다면 스스로 해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모든 결정을 지휘관에게만 미룬다면 참모들이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답답했다.

  풀이 죽은 김 소위가 통일한국군 공용주파수로 비암호 음성통신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곳의 위치를 말하며  전방의 전차부대가 어떤 것인지 물었다. 김 소위는 당당하게 북부군 지휘부라고 밝혔다.의외로 바로 응답이 왔다. 감도는 바로 앞에서 말하는듯 분명했다.

  [통일한국군 소속의 피스부대 통역관 채 세찬 중위입니다. 현재 선천으로 진입중! 전방의 소속미상의 부대가 북부군인지 확인바란다. 오버~ ]

  차 중령뿐만 아니라 김 소좌와 김 소위 모두 의아해했다.  처음 듣는 부대명이었으며, 자신들이 알기로는 남북 연합의 독립부대는 아직 없었다. 게다가 외국어 이름의 부대라니. 갑자기 통신망은 여기저기서 오는

통신으로 혼잡스러웠다.

  [여기는 국군 해병 1사단이다. 피스 부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 오버~]

  [통일한국군 제 1 기갑사단이다. TV 뉴스에서 귀가 따갑게 귀 부대의 무훈을 들었다. 귀 부대의 전승을 축하드린다. 오버~ ]

  [인민군 93상륙경보병여단입네다! 동지들, 욕 봤슴메~ 날래 가갔시요.]

  김 소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김 소위로부터 통신기를 넘겨받았다.

  "동지들~  날래 오시구레. 고맙수다. 선천을 지나 철산군 차련관으로 바로 가시오! 동지들, 정말 고맙소! "

  김 소위가 예하부대와의 통신을 열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차 중령이 장갑차의 해치를 열고 나와보니 참호 위에는 인민군들이 올라와 인공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참호 바로 앞에까지 온 선두의 전차 안테나에는  녹색으로 그린 한반도 지도 모양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었다. 2번 전차는 태극기, 3번 전차는 인공기였다. 전차 승무원들이 큐폴라를 열고 나와 환영하는 인민군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999. 11. 25  05:10(북경 표준시)  동지나해의 피스함대

  "빨리, 더 빨리… "

  피스함대의 임시 함대사령관 겸 항모 함장인 루시쵸프는 거의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전황이 중국에 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데 왜 진작 그들이 핵을 쓸 가능성을 생각지 않았을까, 중국 해군기들의 자살공격을 보고서야 눈치를 챈 자신의 정세판단력 부족을 한탄했다.

  거대한 몸체의 항모는 이미 35노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공순양함과 다른 대형 함선들도 최고 속력을 냈으나 항모를 따라잡기는 벅찼다. 항모는 이들과의 격차를 계속 벌리며 동진했다.

  "함대, 핵공격에 대비하라. 레드 원 실시!"

  루시쵸프는 함대에 핵폭발의 영향에 대비하여  비사용 전자장비에 대한 방호막 등을 준비시켰다. 레드 원(red 1)은 핵공격에 대비하여 함의 전자장비를 보호하기 위한 예비단계였다. 만약 부근에서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인근 해역에 있는 모든 전자장비는 기능을 상실한다. 전파를 쓰는 레이더나 통신장비 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전기장치 등이 모두 고장이 나므로,  레드원은 이에 대비하여 함대의 전자장비를 보호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함대의 IFF(피아식별장치)의 전원이 꺼지자  갑자기 비상이 울렸으나 아군함대를 인식하지 못한 자동경보장치의 비명일 뿐이었다.  항법레이더와 해상수색 레이더도 전원이 끊기고 두툼한 플라스틱제 방사능 방호망이 쳐졌다. 항공모함의 경우는 항공기 통제용인 Fly Trap B 레이더까지 꺼버렸다. 당분간 전투기의 항모 이착함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모와 순양함 우크라이나는 레이더를 풀가동하며 하늘로부터의 위험을 찾고 있었다. 아직은 이렇다할 하늘로부터의 위협은 없었다. 그러나 핵미사일이 올지 핵폭탄을 탑재한 전략포격기가 올지 아무도 몰랐다.

  "조금만 더…  곧 센카쿠열도다.  이제 중국은 핵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본 영해로 바로 들어가 버려."

  루시쵸프가 계속 속도를 높일 것을 함대에 종용했다.  센카쿠 열도는 타이완과 일본열도 사이의 군도(群島)이다. 타이완과 일본 사이에는 류구제도(諸島)가 있는데, 가운데에는 오끼나와 군도가 있고 가장 서쪽의 것이 센카쿠열도이다.

  "초계기로부터 보고,  본함으로부터 1-2-0, 거리 20마일에 잠수함 급부상 중!"

  "함대의 침로 남쪽에… 즉시 공격하라!"

  함장은 피아구분도 하지 않은 채 초계기에 공격을 명령했다. 그 잠수함이 중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상관 않기로 했다. 이들이 살기 바쁜 판에 한가하게 피아구분할 여유가 없었다. 모든 가능한 위협에 대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초계기가 바로 그 해역으로 날아갔다. 그 해역은 센카쿠열도 바로 서쪽의 공해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핵공격을 우려해 도주중인 피스함대의 목적지와 같았다.

  "잠수함, 미사일 발사! 단 한 발입니다!"

  함대 전체에 미사일 경보가 울렸다.  함대는 더욱 분산하며 대공요격체제로 들어갔다.  피스 함대의 기함인 항모 [피스]의 비행갑판 앞부분의 좌우에 각각 6기씩 배치되어 있는 8연장 수직발사기인  SA-N-9가 요격을 위해 발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이 미사일발사기는 후부 비행갑판의 좌우에도 설치되어 있으므로 재장전 없이 사정거리 45km의 대공미사일을 합계 192발이나 발사할 수 있다. 이 미사일은 9.1미터의 저고도를 마하 2로 비행하므로, 대함미사일이나 저고도로 침입하는 적기에 충분한 요격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미사일이다.

  슬라바급 순양함 우크라이나의 중거리 대공미사일인 SA-N-6도 발사준비를 완료했다. 이 미사일은 사정거리 100km, 상승한계가 27,432미터인 고고도용 장거리 대공미사일이며, 슬라바급 함정의 함미에 8기의 8연장 수직발사기가 갖춰져 있다. 무선지령에 반능동레이더 유도방식의 이 미사일은 탄두중량이 90kg이나 되며,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미사일의 궤도가 안정되기만 하면 항모보다 먼저 발사될 예정이었다.

  함대를 향하는 모든 미사일은 핵미사일로 간주되었다. 상대적으로 서쪽에 있던 함재기들은 갑작스런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놀랐으나, 루시쵸프는 함재기들을  그 공역에 그대로 대기시키고 대공미사일로만 승부하려고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장이 겁장이라고 놀리던 승무원들이 경악했지만, 아직까지는 설마 하고 있었다.

  "미사일, 계속 상승중! 반복합니다. 미사일 상승 지속!!"

  잠수함으로부터 발사된 미사일이 계속 고고도로 상승한다면, 이는 최소한 순항미사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즉. 확실히 핵미사일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함장 루시쵸프가  3차원 레이더에 표시된 목표의 고도를 보았다. 미사일의 고도는 이미 10만 피트를 넘고 있었다.

  "설마, SLBM(잠수함 발사 탄도탄)?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말인가? "

  함장이 서둘러 방사능 방호복을 입으며 레이더 관제사관에게 물었다. 관제사관은 파랗게 질리며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함대 전체에 핵미사일의 경보를 발했다.  함장은 콘솔을 조작하여 중국제 핵미사일 발사 가능 잠수함의 현황을 찾았다.

  ‘골프급 1척. 디젤-일렉트릭. 사정거리 2,700km의 2메가톤급 CSS-N-3 핵미사일 2기 탑재. 그리고 092(시아)급 1척. 원자력잠수함. 동급 12기의 CSS-N-3이나 사거리가 약간 연장된 CSS-NX-4 탑재.  NX-4는 MIRV(다탄두탄)이며 2메가톤. 잠항한계는 약 300미터. 094(大慶油)급 4척은 건조완료 및 취역 중… 자료 불상, 총 12척 건조계획.  음… 겨우 여섯척 뿐이지만… 그래도 SSB이나 SSBN이로군. 보유척수가 적어 상징적인 함일 것으로 판단했었는데…’

  핵 발사 잠수함 한 척이 계속해서  작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급 3척이 필요하다.그러나 중국은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의 발사체를 연구하기 위한 것인지 구식은 각 1척씩만 운용중이었다. 시아급은 1982년까지 두 척이 건조되었으나 한 척은 1985년에 사고로 침몰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전략에 활용할 수 있는 함종은 094(대경유급) 밖에 없었다.

  잠수함이 발사한 이 미사일은 계속 상승하다가  약 12만 피트 상공에서 로켓과 탄두가 분리되었다. 2단계 고체연료 추진방식인 이 미사일은 상승을 멈추고 관성유도로 목표를 향해 서쪽을 향해 날았다.  부분궤도를 이용한 이 구식의 SS-N-3 미사일을 레이더 위성을 갖춘 모든 국가에서 추적을 시작했다.

  1999. 11. 24  15:20 (워싱턴시간)  미국 워싱턴

  미국 콜로라도주 사이언 마운틴의 지하에 있는 북미방공사령부(NORAD)의 미사일 경보팀은 탄도미사일의 발사를 감지하고 즉시 대통령을 호출했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는 황급히 워싱턴 공군기지로 달려가 공군 1호기에 탑승했다. 그는 공군기지로 가는 차 안에서도 제발 그 미사일이 핵미사일이 아니길 빌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도시에 투하된 핵폭탄의 파멸적 위력에 놀란 세계 열강은 핵폭탄의 제조에 열을 올렸지만,  동시에 이의 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도 성공을 거두어 아직까지 한번도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전술적인 목적으로 핵미사일이 발사되었으니,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가 미국이 핵공격을 받았을 경우 핵보복을 할 수 있는 암호통신기가 있는 검은 색 수트케이스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핵전쟁에서 누가 과연 승자일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이 같은 차에 탄 인물들의 면면을 훑어 보았다. 베이커 비서실장은 남의 나라 일이라고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제이슨 합참의장은 심각했다. 중국과의 무기판매 협상을 담당한 제프리 국무차관보는 얼굴이 거의 흑색이 되었다.  합참의장이 전화를 받더니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핵미사일이 확실하답니다.  중국제 CSS-N-3 유형이며 목표는 피스의 함대입니다."

  "중국이 미쳤군…"

  대통령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중국과 한국의 전쟁을 부추기며 양쪽에 무기를 팔아먹은 자신을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제 핵전쟁이 발발했으므로 자신의 재선은 물건너 간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어 재임중 사퇴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는 당장 대통령을 때려 치워도 좋으니 핵미사일은 아니길 바랐다. 그는 중국 주석과의 핫라인이 아직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핫라인을 응시했다.

  1999. 11. 25  06:15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피스함대로부터의 급전입니다! 중국군으로부터 핵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함대는 요격에 나섰지만 자신없다는 투의 보고입니다. 곧 모든 통신이 단절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살았든 죽었든 간에…"

  양 중장의 보고에 참모 모두가 얼이 빠진 모습이 되었다. 정 지수 대장은 회의탁자 위로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고,  인민군의 박 정석 상장은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인민군의  최고 어른인이 종식 차수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참모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압박한 것이오? 몰아붙이기가 약간 심했다는 생각이 드오."

  이 차수가 침묵을 깨고 양 중장에게 물었다.  양 중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어측으로서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더이상의 교전은 무리입니다. 휴전을 제의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하지만…"

  반전전사 그룹 피스의 파견관인 짜르가  한국인들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참모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 한수 중위가 통역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의 정치적인 휴전협상이라면 거의 항복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요구는 한국이 받아 들이기에 무리할 정도일 지도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인 중위는 코리어를 한국이라고 통역했으나,  인민군 장성들의 표정을 보고 즉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수정했다. 그는 다음부터 코리아라고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 한반도를 완전 수복하지 못했습니다. 현 상태에서 전선이 교착된다면, 휴전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평안북도의 일부와 함경북도의 상당부분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박 정석 상장은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며  짜르를 멍청한 눈으로 쳐다봤다.한반도가 핵공격을 받아도 중국에 저항해야 할 것이냐며 짜르에게 무언의 항변을 한 것이다.

  "기래서… 우리 공화국에서 핵을 개발하려 했디요."

  김 병수 대장이 한탄을 했다.  핵이 있었다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1999. 11. 25  05:16  항모 피스

  "미사일 접근 중!  강하 시작, 고도 3만 5천 미터."

  레이더 관제사관이 목숨을 포기한 듯 힘겹게 보고했다.  함장인 루시쵸프는 끝까지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전원 대피! 순양함에는 대공미사일 발사를 지시하라."

  "벌써 발사했습니다."

  루시쵸프가 함교 창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서쪽 수평선에서 붉은 빛줄기들이 천천히 하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고, 한참을 올라갔다. 그는 삼차원 레이더에 표시된 몇 개의 점들을 보았다.선두의 빛이 목표에 천천히 접근했다.

  함대에서는 승무원들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핵폭발의 여파에 대비하느라 바빴다. 항모의 삼차원레이더와 순양함의 목표추적레이더를 제외하고 모든 통신, 전자장비가 멈췄다.

  "고도 2만에서 명중 직전!"

  레이더사관의 보고와 동시에 상공이 태양빛의 몇 배의 밝기로 빛났다. 섬광이 함대를 휩쓸었다.  레이더는 즉시 하얀 빛으로 뒤덮여 작동불능 상태가 되고 함대간의 통신은 마비되었다.  폭발이 일어난 상공 아래에 있던 초계기 한 대와 대잠헬기 한 대가 폭풍에 휘말려 들었다.  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던 전투기들 상당수는 기체의 조종이 상실되어 제멋대로 비행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공중폭발하도록 신관을 조작했습니다. 미사일에 명중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이라 말인가? 어쨋든 함대의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위력이 예상 외로 크다!"

  핵미사일은 웬만한 충격에는 핵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특히 메가톤급의 수폭은 세밀한 안전장치가 달려있어서 공중에서 요격받은 경우 미사일은 부서진 채로 추락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군은 요격받기 전에 폭발하도록 특정 고도에 이르면 신관이 작동하도록 했거나,  무선 지령을 내렸음에 틀림없다고 루시쵸프는 생각했다. 미사일을 발사한 중국 잠수함은 초계기에 의해 침몰됐으니, 그 잠수함에서 무선 지령을 내릴 수는 없었고,  대신에 중국 본토에서 위성을 통해 전파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핵폭발의 충격은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는 위성을 통해 즉각 핵폭발을 감지했다. 폭발의 섬광은 타이완 뿐만 아니라 오끼나와 군도에까지 비쳤다. 류큐(硫毬)열도의 모든 주민들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 고공에서의 핵폭발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모든 위성통신과 공중파 통신이 강력한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불통이 되었다.

  중국의 수폭은 1초 정도 빛을 계속 내더니 주변에 원자구름이 형성되었다.  버섯모양의 이 구름은 머리 부분은 정지한 채 뿌리 부분이 계속 바다 표면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피스 함대의 승무원들은 실명하게 될까 두려워 어느 누구도 이 광경을 보지 않았다.

  "전 함대는 해일에 대비하라!"

  함장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승무원들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준비를 마쳤다.폭발한 곳 바로 아래의 해역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높이 60미터의 거대한 해일은 마침 해일의 진행방향과 직각으로 위치해 있던  피스 소속의 보급선 한 척을 삼켰다.  프리깃함 한 척은 최고 속도로 해일을 향하여 돌진했으나, 해일을 넘지 못하고 뒤집혀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아직까지 통신 불가! 피해상황 보고입니다. 육안확인과 점멸등 신호통신 결과 보급선 1척과 프리깃함 2척,  전투기와 초계기 등 항공기 20여대를 상실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무사합니다."

  통신사관이 아닌 항해사관이 함장에게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핵폭발시에 발생한 강력한 전자기파는 전자장비의 대부분을 고철로 만들고 전자장치가 핵심인 기계를 멈추게 했다. 함대 서쪽 상공에 있던 전투기의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조종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대부분이 낙하산으로 탈출하고 말았다.  그나마 탈출할 수 있는 조종사는 다행이었고 상당수는 탈출장치마저 고장이 나서 비행기째 바다로 추락했다.피스 함대 최악의 날이었다.

  "이런 젠장…"

  오스트렐리아 공군 출신의 맥스는 간신히 고도를 유지했다.  그는 동쪽 상공에서 몰아쳐 오는 강력한 전자장의 폭풍을 피해  서쪽으로 계속 비행했다.  동료들이 비상탈출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동쪽에서 다가오는 해일 때문에 그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레이더가 고장이 나서 육안수색을 했으나, 근처 상공에 중국군 항공기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지옥에 접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기도 고장이 나서 동료 전투기나 항모에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핵폭발의 여파가 자신과 기체에 미칠까  두려워 정신없이 서쪽으로 향한 것 뿐이었다.

  그의 전투기인 F/A-18 전폭기는 보조 연료탱크도 없이 암람 공대공미사일 8기를 장착하고 있었다.기체를 점검해 보니 항공기 운항장치와 미사일 가운데 5기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폭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이기도 했지만, 폭발 순간에 전자장비가 몰려있는 기수를 폭발과 반대방향으로 돌린 순발력 덕택이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서쪽 하늘을 응시했다.  뭔가가 고속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몸체와 마하 1.6 정도의 속력.  그의 뇌리에 얼핏 스친 느낌은 그것이 핵미사일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제기랄!"

  Whiz를 몇 번 외친 그는 다가오는 미사일을 향해 암람을 날렸다.  거리는 약 15km.  만약 미사일이 그의 전투기와 지금의 미사일 중간 위치에서 폭발한다면 그의 비행기는 폭발의 중심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8발 중 발사 가능한 5기의 미사일을 모두 발사했다. 그러나 그 중 2기는 또다른 고장이 발생해 발사가 되지 않았다.  3기의 미사일이 핵미사일에 접근하고 그는 선회를 하여 8시방향으로 날았다.

  잠시 후 대폭발이 일어났다. 빛과 열의 덩어리가 주변의 하늘을 잡아먹으며 급속히 팽창했다.맥스의 기체는 섬광의 중심에서 벗어났으나 운행불능이 되었다. 전투기는 제멋대로 추락하고 있었다.  맥스는 비상탈출 레버를 당겼으나 사출이 되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그는 헬멧을 벗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조금이라도 공포를 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머리에 대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맥스는 호주 공군의 전투비행단 소속 조종사였다.  호주 공군은 90년 이래 몇년째 예산이 계속 삭감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부품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비와 보급이 불량한 최첨단 항공기의 운명은 뻔했다. 전투기들 대부분은 단지 활주로 옆에 세워진 장식품에 불과했고 운항이 가능한 항공기는 극소수였다. 조금이라도 고장이 있는 항공기는 비교적 멀쩡한 항공기의 정비를 위해 부품이 떼어졌다.  전투비행단의 4분의 3이 이런식으로 완전한 폐물이 되었다.

  그는 비행대에서 몇대 안되는 F/A-18을 끌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고장이 생겨 비상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도 결국 부품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투기는 하필이면 민간인 거주지역에 떨어져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간인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그는, 결국 불명예 퇴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행은 그의 운명이었다.  공군에 있을 때도 하루라도 비행하지 못하면 좀이 쑤셔서 못견뎠는데,  비행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제대 후에 그가 처음 얻은 직업은 농장에 농약을 뿌리는 경비행기 조종사였으나 프로펠러기는 속도가 너무 느려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다음에 얻은 직장은 어느 부호의 자가용 제트기 조종사였으나 VIP를 안전하게 모셔야 하는 이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심해진 그는 그 부호의 젊은 부인이 유혹하자 장난삼아 불장난을 즐겼다. 그러나 꼬리가 밟힐 것을 두려워한  그 부인은 매몰차게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서, 그는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하늘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느낀 그는 처음에 아프리카 분쟁국의 용병 전투기 조종사로 전전하다가 브루나이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피스라는 조직의 목적을 알게 되어 가담했고, 피스가 한중간의 전쟁에 개입하자  피스와의 계약에 의해 그는 만사를 제끼고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맥스의 F/A-18 전투기는 종이비행기 떨어지듯 빙빙 돌며 바다로 추락했다.

  "핵이 또…"

  서쪽 하늘에서 번쩍이는 섬광을 보며 함장인 루시쵸프가 중얼거렸다. 중국이 왜 또 하늘에서 핵을 폭발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핵미사일 한 발로 전자기장애를 일으켜서 대공방어망을 붕괴시키고 다음 미사일로 목표에 명중시키면 되는데 왜 아까운 핵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두번째로 발사한 미사일의 유형은 잘 모르지만, 구식 핵미사일이라면 틀림없이 진공관을 쓰고, 이것은 명중율은 낮지만 전파방해나 핵폭발 후에 생기는 전자기장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것이 루시쵸프의 생각이었다.

  루시쵸프는 중국이 또다시 핵미사일을 발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 해역에서 탈출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센카쿠 열도는 아직 40km나 남았다. 개전 첫날에 중국이 선포한 전쟁수역을 벗어나려면 아직 15km가 남은 셈이다.  중국은 자신들을 소멸시키기로 작정한 것같다고 항해사관이 투덜거렸다.

  함대에 작동하고 있는 통신기는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다. 피스와 우크라이나는 점멸등 신호를 주고 받으며  그래도 계속 동쪽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구축함 한 척이 항모를 따랐다. 승무원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계속된 핵폭발과 거대한 해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승무원들은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다.

  1999. 11. 25  05:25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타이페이의 관측소에 따르면, 목표 상공에서 두 번의 섬광이 목격되었으며, 위성에서도 이를 포착했다고 합니다."

  전략미사일군의 사령인 쏭윈펑 중장이 보고했다.당 총서기와 다른 고위 장성들은 이것이 확실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적이 전멸했다는거요?"

  창 리엔츙 해군상장이 묻자 쏭 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까지 그 해역에는 모든 통신이 불통되고 레이더는 기능이 저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적은 소멸한 것으로 보셔도…"

  "무슨 소리야? 그놈들은 우리에게 미사일을 날린 놈들이오.당연히 확인해야 되지 않겠소?"

  총후근부장인 첸쯔밍 상장이 호통을 쳤다. 그러나 전략미사일 사령으로서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그 공역(空域)에는 정찰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전자기파에 의한 전자장애가 극심해 추락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믿어 주십시요.첫번째 핵은 전자기장애를 유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목표를 노렸으나 적은 어떠한 방어수단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표는 소멸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놈들이 살아서 핵을 날린다면? 미사일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총서기가 그동안 묻어온 공포의 일단을 밝혔다.그에게는 러시아 해군의 항공모함이었다는 피스의 항모가  혹시 핵미사일을 탑재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걱정 마십시요. 제가 러시아에 이미 조회를 했습니다.  공작비가 조금 많이 들긴 했지만 확실한 정보입니다. 피스에는 핵이 없습니다!"

  쏭 중장은 군사위원들과 고위 장성들을 안심시키며  오랜만에 자신의 역할을 과시했다며 기뻐했다.

  1999. 11. 25  06:30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피스함대와 연락두절! 제주 상공에 급파됐던 E-2C의 레이더는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그쪽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짜르의 외침이 있고나서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러시아제인 핵항모와 순양함, 기타 수상함정들로 구성된 막강한 피스 함대가 전멸한 것이 틀림없었다. 중국이 결국 핵을 사용했다는데 대해 모두들 경악했다. 중국이 핵을 사용한 지점은 중국이  영해로 발표한 곳이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핵공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들의 고민은 중국이 피스의 희생으로 핵탄 사용을 끝낼 것인가, 과연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핵위협은 없을까, 이런 핵강대국과 전쟁을 해서 조국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었다.특히 몇년전에 핵개발을 추진했던 인민군의 장성들은 불만이 가득 쌓인 표정들이었다.

  "기저 우리한테도 핵이 있었어야… 내레 좀 물어봅세. 남반부에서는 왜 그리 핵무장을 반대했디요?"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국군 참모들에게 물었다. 핵주권을 갖지 못했을뿐 아니라 동족의 반쪽이 핵을 가지지 못하게 방해한 남쪽에 대한 통렬한 질책이었다.

  "그때는 남북이 대치상황이어서 우린 불안할 수 밖에 없었소. 군사적으로 긴장상황이 계속되는 판에 상대편이 핵무기를 쥐고 있다면 없는쪽 마음은 어떻겠소? "

  한국군의 정 지수 대장이 반박했으나  김 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반박했다.

  "기럼 우리가 동족한티 핵을 쓰리라 생각했단 말이디오?  앙이, 기게될 법이나 한 소리야요? 우린 기저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침략은 누가 한다고… 왜 북에서는 병력을 전진배치 시키고 걸핏하면 비상령을 발동했소? 그동안 한반도에 위기조성한 쪽이 누구인데…"

  "무신 소리오? 팀 스피리트 훈련은 상륙작전이 포함된 공격훈련 아이오?  핵전쟁을 전제로한 공격훈련… "

  "어차피 전쟁이 나면 당신네들이 한반도에 핵을 쓸게 아니었소? 그리고,  미국의 적성국이 핵무장하도록 미국이 가만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오? 우리가 막지 않았으면 미국이 영변을 폭격할 수도 있었단 말이오. 그럼 당연히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 것 아니오?  죽어나는 것은 결국 우리 민족 뿐이란 말이오."

  "기럼 와 러시아서껀 중국서껀 다 핵이 있는기요? 길고 파키스탄이나 인도는? 다들 미국에 대해 잠재적 적국 아이갔소?"

  "동지들, 그만들 하기요!"

  듣고만 있던 이 종식 차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할 시간에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참모들이 대책을 논의했으나  농축우라늄 보유량이 별로 없는 한국에서는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1999년의 한국에 핵미사일 개발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망을 피해 핵물질을 비축할만한  제 3세계 국가는 없었다.  한국은 핵융합로에 대한 기술개발을 계속 추진했지만 아직 변변찮은 실험용 고속증식로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동중인 원자력발전소, 엄밀한 의미의 핵발전소에서 연료를 전용할 수는 있지만, 이럴 경우 발전소에 장치되어 있는 폐쇄회로 TV를 통해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망이 이를 즉각 포착하고,  이 정보가 중국에 흘러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럴 경우 국제적인 압력은 둘째 문제고, 당장에 중국의 핵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사실 핵보유국과 분쟁이 있는 나라는 상대방이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군사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적이 핵을 사용할 줄 뻔히 알면서 싸우는 나라는 있을 수 없었다.이 경우는 적국의 아량에 의존하는 희안한 전쟁인 것이다.  물론 선제 핵공격이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를 어긴다고 꼭 다른 나라들로부터 보복 핵공격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없었다.

  ‘미국!’

  양 석민 중장은 참모들의 언쟁을 보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25 때 미국이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가 두조각난 것이 미국의 책임이든 아니든,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는 말든 어쨋든 남침을 막은 것은 미국의 힘이 컸었다.이후 계속된 냉전시대에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적 원조,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미군의 범죄와 기지촌, 불평등했던 한미행정협정 문제…

  1998년, 한반도에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가자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인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미국과 러시아,일본과 중국 등의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통일을 저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이간질을 시키려 했으나, 남북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의 정보기관에서는 서울과 평양에 몇 건의 테러와 함께 대사관을 통해 계속 역정보를 흘렸으나 통일은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나라이며 실전에 사용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은 핵기술이 다른나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5대 강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핵을 개발하려고 하면 총력을 기울여 이를 방해했다. 이라크나 북한과는 일전을 각오하여 막으려 했으며, 실제로 이라크의 경우는 2번이나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만이 핵을 가지겠다는 것은  국가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양중장은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핵확산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자신들은 실제로 비밀리에 계속 핵실험을 해왔고, 심지어 인체실험까지 강행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처럼 핵보유국의 도덕성도 지탄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각하이십니다."

  양 중장이 통신장교의 비상연락을 받고 이를 참모들에게 전했다.  이 차수 이하 참모들이 기립하자  회의실 왼쪽의 멀티비전식 화상통신장치에 대통령의 얼굴이 나타났다. 노인은 청년의 흉내를 내고 청년은 노인의 흉내를 낸다던가. 홍 대통령은 전혀 염색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통령의 뒤로 국무위원들과 합참의장, 그리고 삼군 참모총장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 회의는 개전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은  일일 확대 비상국무회의였다. 대통령이 통일참모본부로부터 간밤의 전황을 보고받고, 후방에서의 예비부대 편성과 보급문제 등 군정에 관한 제반사항을 토의하는 자리였다. 대통령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문을 꺼냈다.

  [방금 중국으로부터의 통첩을 받았소. 현전선 교착상태에서의 휴전이오. 그리고 안기부와 다른 정보부서로부터 남지나해에서 중국이 핵미사일 2기를 발사했다는 보고를 받았소.  폭발은 중국 현지 시각으로 각각 05시 20분과 23분이오.  피스함대가 그쪽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 차수!  그리고 참모 여러분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대통령은 국무위원과 안기부장 등  정부위원들의 보고를 이미 받았으나 실제로 전쟁을 이끌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묻고 싶었다. 이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이번 한중전쟁의 지도부였다. 북한 주석의 피살 이후 북한 권력의 새로운 실세로 부상한 인민군 총참모장 최 광 차수의 양보가 먼저 있기는 했지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방부장관도 통일참모본부에 대해서는 지휘권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한국과 중국의 시차는 한 시간이다. 물론 북경표준시와 비교했을 때이다.

  "중국이 통첩을… 휴전?"

  참모들이 웅성거렸다. 국군 출신 참모들은 전쟁이 끝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으나, 인민군 출신 참모들은 아직 실지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휴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차수는 노여움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인민군 참모들이 들고 일어나 대통령에게 항변하려는 순간 국군 출신인 양 중장이 먼저 나섰다.

  "피스함대로부터의 연락은 없습니다. 각하! 그러나 이 상태에서 휴전을 실시하면 실지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일부가 아직 수복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땅입니다. 우리나라, 통일조국의 신성한 영토입니다. 재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양 중장은 아직 조국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의상 [우리나라]라고만 부르고 있었는데,  99년 이후에는 거의 이 이름으로 굳어진 느낌이었다. 영문표기인 KOREA는 남북이 그전부터 쓰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대한]을, 북한은 [조선]이나 [고려]를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견 합치를 보기 힘들었다. 서로의 감정이 다른 이름을 용납할 수 없었다.

  화면의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국무회의에 배석한 고위장성들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합참의장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은 동의한다는 표정을,  그리고 공군참모총장은 당황하고 있었다. 민간인 출신인 일반 국무위원들은 통일참모본부의 휴전반대 입장에 놀라, 다시 핵 공포에 사로잡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솔직히 중국의 핵이 두렵소. 우리는 그들의 핵을 막을 방도가 없소. 그리고 중국은 현재 자기네들이 점령하고 있는 조그만 땅덩어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오.  북경에 있는 중국대사가 총서기로부터 언질을 받았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따로 있는 모양인데, 휴전협상에서 밝히겠다고 하오. 그게 뭔지 대충은 알겠는데...]

  "중국은 선봉과 웅기만(雄基灣)을 요구할 것입네다. 절대로 안됩네다, 각하!"

  인민군 해군의  박 정석 상장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차수와 김 대장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통령이나 국군장성들이 의외로 강한 그들의 거부감이 이해되지 않았다.  중국의 핵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웅기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양 중장이 조용히 일어나 회의실 뒤쪽의  대한민국전도 맨 위쪽에 있는 웅기만을 보았다.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최초로 구석기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90년대 이후 북한이 나진선봉지구라고 하여 나진과 함께 무역항으로 개발한 선봉이 바로 웅기였다.  선봉의 바로 앞바다는 아직도 웅기만이라고 불린다.중국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중국이 왜 한만국경쪽인 혜산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웅기쪽을 집중방어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진정을 한 박 상장이 말을 이었다.

  "중국에게 선봉을 주는 것은 동해를 송두리째 주는 것이며,  또한 태평양을 주는 것입네다. 러시아와의 연결이 끊어지면 조선반도는 완전히 중국에 둘러쌓인 섬으로 전락하고 맙네다.  양강도와 자강도를 다 주는 한이 있더래도 선봉은 절대 안됩네다. 조국에 미래를 생각하십시요, 각하!"

  양강도와 자강도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신설된 도이다.  한국정부가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를 남북으로 구분하자,  북한도 따라서 황해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일부를 분리시켜 자강도와 양강도를 신설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의 도는 경기를 포함하여 10개가 될 수 있었다. 행정구역 신설에도 남북간의 자존심이 묘하게 작용한 것이다.

  중국이 이번 전쟁을 통해 웅기,  즉 선봉을 얻는다면 동해로 직접 진출할 수 있는 출구를 얻게되는 셈이다. 남쪽으로 우회해야 하는 지금의 중-미 항로는 선봉을 얻음으로써 엄청나게 짧아지게 된다. 그리고 선봉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선봉이 중국에 넘어가면 국가경쟁력에서 중국은 획기적인 변신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이 경제면에서도 한국을 제친다면 한국은 이제 중국 변방의 조그마한 나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박 상장은 진심으로 통일한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다시 지도를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이들은 웅기, 즉 선봉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나  중국의 핵위협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게다가 민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 아닌가. 미래냐, 생존이냐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핵공격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도 그 지역을 내주는데 반대하겠소만...]

  대통령의 고뇌하는 표정을 읽은  이 차수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각하, 인민군 총참모장인 최 광 차수로부터 장마작전에 대한 말씀을 들으셨을겝니다."

  대통령이 놀라서 눈이 둥그렇게 커졌고 다른 국무위원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했다.  이 차수는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그리고 삼군 참모총장들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이 그 작전에 대해 모른다는 표정이기 때문에 이 차수는 그 작전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그 작전을...]

  대통령이 아연 긴장했다. 개전 초부터 그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잘못되면 한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작전이라 최대한 작전시기를 늦추려고 했었다.  가능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시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 작전이었다.  그는 설령 한국이 중국에 패배하더라도 실시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씀을 안하셨군요. 잘 하셨습네다. 감사합네다."

  이 종식 차수가 어린애 달래듯 말하자 약간 불쾌했으나, 대통령은 그에게 이 작전의 당위성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어봅시다. 과연 민족의 생존을 걸고 도박할 정도로 선봉의 가치가 크단 말이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이 차수는 대통령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을 잔잔한 미소로 대신했다. 대통령은 이 차수를 보다가 옆의 양 중장과 정 대장을 보았다.  양 중장은 이 작전의 입안자이며 책임자이고,  정 대장은 국제정치학 박사라고 알고 있었다. 계속 지켜보기만 하던 정 대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이상,  어차피 중국은 뭔가를 손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은 그정도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웅기를 내줄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휴전협상이 시작되어도 서로간의 이해가 상충되어 조만간 결렬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중국에게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되고 맙니다. 주도권을 중국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국은 자국 영토 밖에서 결코 핵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핵 선제공격은 다른 가상적국으로부터의 핵공격을 유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핵미사일에 대한 방위체계가 빈약한 중국은 선택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때문에라도 그들은 한반도에 핵을 쓰지 못합니다.  일본의 원자력기술은 세계 최고수준이며, 플루토늄 비축량도 많습니다.일본은 6개월 이내에 핵무기와 그 운반체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은 결코 스스로 악마의 봉인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무력점령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 덕택에 한반도가 핵공격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작전 장마, 발동하시오.]

  1999. 11. 25  06:50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방어선

  인민군 저격여단장인 최 대좌와 그의 지휘하에 있는 노농적위대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막강한 중국의 대규모 전차부대가 결국 방어선을 돌파하여 물밀듯이 남쪽으로 쳐내려갔다.  최 대좌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며 후속하는 중국군 보병에 대해  눈물겨운 항전을 계속했으나, 중국군의 병력은 무한대로 보였다. 그들은 보병전투차와 장갑차로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동쪽의 방어진지에서는 지금도 육박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중국군의 전차에 의해 방어선이 뚫린 이후로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전차부대에 의해 유린된 중앙의 방어선이 너무 아쉬웠다.

  "이거, 안되갔구만… 온다는 놈들은 왜 오디 않고…"

  최 대좌는 붕대를 맨 머리를 만지며 무전기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의 옆에는 무전기를 등에 맨 통신병이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최 대좌는 무전기가 고장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오라우! 다 듀갔구만… 이기."

  이 급박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전에서는 계속 가고 있다는 연락만 이어졌다.  최 대좌가 흐려오는 정신을 추스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력은 처음의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전차라고는 차 중령이 탔던 대대장차인 박 중사의 전차밖에 없었다.그나마도 캐터필러는 끊기고 여러발의 포탄을 맞았는지 포탑이 처참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포탄도 바닥났는지  박 중사가 큐폴라를 열고 나와 중국군을 향해 대공기총을 연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폭음과 함께 최 대좌가 있는 참호의 바로 옆에 수류탄이 폭발했다.최 대좌가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권총을 빼들었다.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참호로 뛰어들며 최 대좌를 향해 총을 쏘았다.  최 대좌가 조준도 하지 않고 권총을 연사했다. 그림자들이 쓰러졌으나 그는 한발씩 더 쏘았다.

중국군 보병이었다. 어느새 그들이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다. 최 대좌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없어서 몰랐는데 왼쪽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나왔다.

  이곳은 산등성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투입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참호선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언 땅을 판다는 것도 애초에 무리였다. 최 대좌는 과다한 출혈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졌다.주변에 부하들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방어선 앞에는 중국군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고 있었고,  이미 최 대좌가 있는 서쪽 방어선의 일부도 뚫렸는지 참호 안에서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으아아~~~ "

  왼쪽에서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한 예비역 하급전사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참호선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반대쪽에는 중국군 10여명이 참호선을 따라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군들이 사격을 하는 순간 그 전사의 머리 위에 있던 물체가 폭발했다.  후폭풍이 참호를 쓸고 나서 최 대좌가 고개를 다시 들어 그쪽을 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전사는 크레모어를 들고 자살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총알이 떨어졌나…"

  최 대좌는 졸음이 쏟아져 버틸 수가 없었다. 중국군 전차대들이 향한 남쪽에서 포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제 일주일간 버틴 북부군은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봉급값 만큼은 충분히 싸웠다고 자부했다. 참호벽에 등을 기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999. 11. 25  07:00  일본 도쿄, 통막회의

  "드디어 핵을 썼군요.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야마다 공장(空將)이  통합막료회의 지하 5층, 전투지휘실의 전면 멀티비전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면에는 핵폭발이 일어난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고,  일본 해상자위대의 88함대인 제 5함대는 센카쿠열도쪽으로 신속히 이탈하고 있었다.

  88함대는 지상발진 항공기의 지원없이 독자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함대를 말한다.  이 88함대는 3척의 미사일구축함과 5척의 대잠 프리깃함, 그리고 탑재헬기 8기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의 함대이다. 선단호위, 적의 상륙전에 대한 방어전 수행능력 및  일정 수준의 지상타격력을 갖춘 이 함대는 첨단의 이지스함이 대공방어를 전담하고 프리깃함은 대잠작전을 수행하며, 탑재헬기는 대잠,대함 공격을 병행할 수 있으므로 이들이 합해져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이른바 진정한 의미의 대양해군이다.

  "우리 일본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즉각 징병제를 실시하고 우리도 핵무기 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토야마 해장(海將)이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통막 구성원들을 보았다. 육막장(陸幕長)인 고마쓰 육장이 쌍수를 들고 찬성했으나 통막의장인 오부치 육장은 막장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통막은 합의체이고 그 장(長)인 의장은 단순한 중재자에 불과했다. 실권은 각 자위대의 막장에게 있는 것이다.  신중하지만 기회주의자인 야마다 공장이 세 불리를 느껴 기권하자,  통막의 건의사항은 이제 내각의 심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오부치 육장은 내각에 제출할 보고서를 들고  통합막료회의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이제 일본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사람들은 정치인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중전쟁 이후 긴급 구성된 비상 연립내각은 극우로 기울어져 있었다.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로 이뤄진 일본의 온건한 리버럴당은 이미 정권을 잃고 야당으로 전락했는데,  이 당에서 연립내각에 입각한 각료들마저 극우파 일색이 되었다.  일본의 정치권은 한중전쟁을 재무장 및 핵무장의 좋은 기회로 삼아,  군사와 정치분야에서도 세계를 이끌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부치 의장은 승용차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1999. 11. 25  07:10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남쪽 3km

  "이거 너무 단순작업이군요."

  변 승재 하사는 연신 목표물을 잡아 포를 쏘며 중얼거렸다. 차장이며 중대장인 대위가 자신의 스코프로 목표를 지정하면, 변 하사는 그 목표에 조준을 하고 나머지는 컴퓨터가 포탄을 수평으로 자동장전하고 발사까지 하는 쉬운 일이었다. 변 하사가 페리스코프로 밖을 살펴보니 지상 공격기 A-10과 F-4E 팬텀이 하늘에서 공격하고,  멀리 동쪽에서는 피스부대의 전차대와 보병들이 중국 전차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중국 전차들이 달려들면 한국군은 접근전을 회피하는 식으로  계속 약 2km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변 하사가 소속된 통일한국군  제 1전차사단은 서쪽에서 중국군 전차부대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약 1개 사단의 중국 전차부대는 보병부대의 지원없이 싸우느라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중국제 80식 주전투전차들은 사격통제장치가 개선되고 이전의 전차와 비교해 여러 면에서 개량이 되었으나 방호력에 있어서는 신통치 않았다. 이들은 변 하사가 발사한 T-80 전차의 125밀리 활강포에 맞았다 하면 파괴되었다.  반면에 변 하사의 전차는 벌써 3발의 포탄을 맞았으나  그정도 거리에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80식 전차의 더 큰 문제는  90년대 말의 현용전차이면서도 아직도 주포가 105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겉모양이 서방의 L7/M68 105밀리 포와 흡사한 이 주포는  중국제 및 서방세계의 다양한 전차포탄을 사용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구경에 의한 한계가 있었다. 2,000미터라는 비교적 장거리에서 이 105밀리 강선포는  피스의 아리아떼나 메르카바는 물론 통일한국군 제 1 기갑사단의 주력전차인 러시아제 T-80의 장갑도 뚫지 못했다.

  결국 차련관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던 중국군의 전차 1개 사단 약 270대의 전차는 통일한국군의 입체적인 공격을 받고 30분만에 전멸하고 말았다. 통일한국군은 중국 전차부대의 마무리를 지은 다음, 서둘러 차련관 방어선으로 향했다.  피스의 통신장교인 한국인 장교는 차련관 방어선이 아무래도 전멸한 것같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해왔다.

  1999. 11. 25  06:20(현지시각) 동지나해, 센카쿠제도 15km 남쪽 해상

  루시쵸프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최강의 함대라고 자처했던 함대가 구식 핵미사일 단 두 발에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직격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2메가톤급 핵미사일의 위력은 정말 엄청났다. 전자기폭풍과 해일만으로도  피스의 함대와 항공기에 파멸적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구축함과 프리깃함들은 모두 침몰하고 함재기는 절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이제 두번 다시 이따위 전쟁에 끼어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살아서 돌아가면…

  "침로를 1-2-0 으로…,  오끼나와제도에 바짝 붙어서 일본쪽으로 항진한다."

  루시쵸프는 중국이 추가적인 핵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일본 영해에 거의 붙어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만약 그래도 중국이 또다시 핵공격을 한다면, 일본도 큰 피해를 입게되어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전투함교 겸 항해함교인 이곳에 퍼져 있었다. 항해장교는 함장이 명령한 침로대로 남동쪽의 다라마섬을 향했다. 비상 가동한 예비레이더는 예상대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함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비행갑판에서는 방사능 세척작업이 한창이었다. 방사능복을 입고 작업하는 갑판원들은 흡사 우주인같아 보였다.

  계기가 작동하지 않아 육안에 의지해서 간신히 비상착륙한 함재기 조종사들은 조종사 휴게실에 널부러진채 악몽의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허공에서 태양빛의 몇 배나 더 밝은 섬광과 함께 기체를 덮쳐오는 열폭풍, 곧이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기폭풍에 의해 고장난 계기판과 조종불능 상태에 빠진 기체, 추락하는 동료기들, 본능적으로 기수를 내리자마자 동쪽 해상에 보이는 산만한 너울… 2만톤급의 보급선이 한낱 종이배처럼 해일에 침몰하는 모습.

  이 조종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들은 간신히 기체의 조종을 회복하여 항공모함에 착함할 수 있었지만 착함하는 중에 또다른 4기의 전투기는 바다에 쳐박히고 말았다.  물에 빠진 조종사들이 구조를 요청했지만 항모의 구조헬기도 고장이 나서 이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40노트의 고속으로 항진하는 항공모함에서  승무원들은 물에 빠진 조종사들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었다.  한 조종사는 필사적으로 수영을 해서 항모쪽으로 다가왔지만, 또다른 핵공격을 우려한 항공모함은 도망치듯이 동쪽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갑판원들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조종사가 물에 빠지면서도 계속 흔드는 손이었다.

  멀리 남동쪽으로 민나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민나섬은 미야코열도의 서쪽에 치우친 다라마섬의 북쪽 10km에 있는 섬이다.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에서 타이완까지, 북동에서 남서로 이어지는 난세이(南西)제도는 큐슈쪽의 사쓰난(薩南)제도와 그 남서쪽의 류큐(琉球)제도로 나눠져 있으며, 류큐제도는 다시 일본과 타이완의 중간부분인 오끼나와제도와 남서쪽의 사키시마제도로 나뉜다. 타이완의 바로 동쪽에 있는 사키시마제도는 또다시 미야코(宮古)열도와  아에야마(八重山)열도로 이루어져 있다.

  미야코열도에 포함되는 민나섬은 따뜻한 구로시오(黑潮) 해류가 흐르는 오끼나와제도의 섬답게 거초(치맛자락처럼 섬을 둘러싸고 있는 산호초. 산호초와 섬 사이의 바다인 초호<礁湖 : lagoon>가 있으면 보초<堡礁>,중간에 섬이 없고 도넛 모양의 산호초만 있으면 환초<環礁>라고 함)에 둘러싸인 평탄한 섬이다. 바로 직전의 핵폭발과는 무관하게 이 해역의 바다는 눈부시는 쪽빛이었다.

  [섬 뒤쪽에 일본의 함대입니다!  경고신호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함교 마스트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수평선을 살피던 승무원이 함장에게 인터컴으로 보고했다.  20세기가 며칠 남지 않은 시대에 100년 전의 구식 범선과 같은 방법을 쓰는 함대의 상황이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루시쵸프는 어쨋든 서둘러 망원경을 들고 밖으로 나가 남동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점점 밝아오는 남동쪽 수평선상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군함의 점멸등 신호였으나 그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야?"

  루시쵸프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함장을 따라나선 항해사관에게 물었다. 캐나다 출신인 항해사관은 점점 어두워지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 영해에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더 이상 접근할 경우 공격하겠답니다."

  "…미친놈들!"

  루시쵸프는 짜르로부터 일본이 한국을 공격할 우려가 있다는 정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럴 경우 지상군이 취약한 일본으로서는 한국군의 공군과 해군을 먼저 공격하고, 이것이 성공할 경우 해상봉쇄를 실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러시아나 중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국은 한 달 이내에 일본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으나, 피스의 함대가 있다면 전개과정은 전혀 달라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중국처럼 거꾸로 일본이 해상봉쇄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스의 함대는 한중전쟁 개전 이래 계속 일본함대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저놈들 설마 우리를 공격…"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함대는 한국군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대양함대이니까요."

  연안해군과 대양함대는 단독작전 수행능력이 있는가의 여부로 구분된다.  피스함대의 존재는 중국이나 일본 모두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중국은 통일한국과의 전투에서 항모를 모두 잃었으며, 일본은 주변국, 특히 미국의 견제로 아직까지 항모가 없었다. 계속되는 불황으로 미국이 세계경찰로서의 임무를 포기한 1998년 말부터 항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일본의 야당은 항공모함같은 공격무기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섬으로 이뤄진 일본열도와 해상수송로의 방어에는 항모가 필요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일본 방위청은 반공개리에 이미 항모의 기본설계와 탑재기의 선정을 마친 상태였다. 핵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요즘, 항모의 추진기관은 당연히 원자력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피스함대가 거의 전투력을 상실한  지금이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피스의 함대에서는 지금도 대공, 대함미사일에 대한 점검을 실시중이었다. 미사일 중 상당수가 당장 발사해도 이상없을 정도였지만, 이를 유도하는 레이더시스템이 완전 파괴되어 발사할 수가 없었다.  대공방어망의 중핵인 단거리대공미사일과 미사일 요격용 대공포도 관제레이더의 상실로 아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사실상 함대는 위협으로부터 벌거벗은 상태였다.

  "알겠어. 북쪽으로 돌리라구.  오끼나와제도의 구메섬 서쪽으로 항진한다."

  루시쵸프는 사냥개에게 쫓기는 맹수의 심정이 되어 함교로 돌아갔다.

  1999. 11. 25  06:30  일본 제 5함대 기함, 토라

  "피스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안타깝습니다."

  "시끄러!  아직 저 항모에는 전투기 수십대가 있을거야.  그리고 우리는 아직 교전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냐. 게다가 우리도 전자장비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니까.  서서히 저들 함대를 따라가다가 오끼나와 본도로 기항하도록."

  "알겠습니다. 제독!"

  제독이 함대사령실로 돌아가자 미야기 일등해좌는 콩고급 이지스함의 7번함인 토라의 함교에서 일본이 한국을 공격했을 때, 피스의 항공모함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항모를 필두로 항공모함전투단이 다시 형성된다면, 강력한 전투함들로 구성된 일본의 자위함대로서도 이들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제 위성으로부터 수신된 해상자위대 정보보고에는  한국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이 조만간 진수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아직 진수도 하지 않았지만  이순신함, 또는 충무함으로 명명될 예정인 이 항공모함은 배수량 4만 5천톤급의 중소형 항공모함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본의 영웅 중의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패하게 한 조선의 장수 이름을 항모로 삼은 것 자체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4만톤급의 소형항모는 2만톤급의 최소형 항모에 비해 비용 대 효과면에서 우수한 면이 있다.공간의 제약으로 F-14나 F-18 같은 전투기는 운용할 수 없으나, S-3같은 대잠기와 필요한 만큼의 대잠헬기, 그리고 F-4 팬텀이나 수직이착륙기를 운용할 수 있는 크기이다.  또한 현측에 장갑을 붙임으로써 생존성이 높기도 하다.

  미야기 일등해좌는 한국형 항모의 제원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추진은 원자력이지만 소형항모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탑재기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F-4 팬텀으로 결정이 났고, 위성정보에 의하면 함수부분에 고유무장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제 중무장 항모의 건조사상에 따른 것이겠지만, 공간이 적은 소형항모에 무장이 필요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일본에서 건조준비중인 항모는 정말 멋지다는 느낌이었다.

  일본의 해상자위대 전력증강 사업계획에 포함된 이 신형 항모는 배수량이 약 7만 5천톤.  대형항모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일본의 발전된 전자 및 조선기술에 의해 미국의 9만톤급 최대항모인  니미츠급 항모 이상의 능력을 발휘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미야기 해좌는 이로써 대일본국 해군이 드디어 세계를 웅비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나라에 두 척의 항모라…  피스함대는 중조(中朝)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지 않을까… ‘

  속도가 느린 통상형 잠수함으로  구축함과 프리깃함에 둘러싸인 항모를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재래식 잠수함들이 상륙작전을 위해 접근하는 중국함대를 공격해 잠수함 발사 하픈으로 항공모함 한 척을 격침시키기는 했지만, 이는 미리 기다렸다가 공격한 것이라 다르다는 평가였다.  한국의 항모가 진수되고 일본과의 한판이 벌어진다면, 그는 일단 항모의 함재기를 모두 없앤 다음 항모전투단을 공격해야 된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한국항모를 격침할 수 있는 작전구상에 들어갔다.  아직 취역하지도 않은 한국의 항모는 이미 일본 해상자위대 토라의 함장, 미야기 일등해좌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침몰하고 있었다.

  1999. 11. 25  07:40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최 대좌 동무! 정신 차리기오."

  저격여단의 여단장인 최 대좌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 몸이 계속 흔들리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격전 중에 총에 맞은 것 같았으나 고통은 없었다. 단지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미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모든 동물은 회복 불가능한 중상을 입는 경우, 뇌분비 물질의 하나가 작용하여 고통을 차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즉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동물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은  고통에 못이겨서가 아니라 쾌감에 관계되는 행동이라고 들었다.  자신이 그런 상태가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간신히 눈을 뜨자, 바로 위에 36연대장의 얼굴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36연대장의 주름진 얼굴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꿈결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흑과 백에 약간의 회색이 가미된 세상은  천천히 돌아가는 활동사진 마냥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인민군 하급전사의 넓은 등판과, 머리 위의 젊은 전사의 상체도 보였다. 또한 오른쪽에는 중년부인인 간호장교가 수혈병을 들고 그가 누운 들것을 따라오고 있었다.최 대좌는 부대 전체가 방어선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36연대장에게 화를 벌컥 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나 그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무… 전선이래… 사수해야디… 어드렇게… 후퇴하는기요."

  최 대좌가 말이 잘 안되어 답답한듯  한숨을 토해내자 36연대장이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말기요. 우리 군이 구원을 와서 중국놈들 다 몰아냈으니끼니."

  최 대좌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처음 보는 종류의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줄지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보병전투차와 각종 장갑차들도 도로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또한 하늘에는 공격헬기들이 떼지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최 대좌는 착륙한 헬기가 내는 굉음과 프로펠러의 강한 바람을 느끼며 다시 잠이 들었다.

  1999. 11. 25  07:55  경기도 개성, 통일참모본부

  "이것이 통참이 이사가기 전의 마지막 작전입니다. 목표까지 1분입니다."

  중국이 제안한 휴전협상에는 일단 응하되  큰 기대를 갖지 않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 통일참모본부는 그동안 아껴왔던 북한의 지대지미사일로 만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목표는 만주지방의 각 비행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반도로 침입하는 중국의 전투기들이 발진기지로 삼는 비행장들이었다. 그중에는 군용 비행장도 있었지만, 다리엔(大連)과 선양(瀋陽), 그리고 창춘(長春)은 국내선용 공항이기도 하다.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는 7개의 목표가 표시되어 있고 7개의 미사일의 현재 위치와 진로가 표시되었다. 스커드 지대지미사일의 개량형인 로동 3호는 군용과 민간용을 구분하지 않고 비행장으로 점점 접근했다.

  스커드형 미사일의 가장 큰 단점은 명중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유도장치가 정밀하지 못한 까닭인데, 이러한 결점때문에 스커드미사일은 군사목표보다는 대도시공격에 자주 이용되었다.  그러나 GPS(위성 수신 지구위치파악 시스팀)항법수신장치가 선박과 자동차에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시대에,  미사일이라고 이를 이용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었다. 약 5천달러에 불과한 지구위치파악 시스팀 덕택에 북한의 로동 3호 미사일은 졸지에 최고의 정밀도를 획득하게 되었다.

  "명중했습니다. 자, 로동 3호의 탄두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이제 저 비행장들은 당분간 사용하지 못합니다. 휴~~ 그동안 저 혼자만 알고 있느라 힘들었는데 오늘에야 말하게 되는군요."

  한국 공군의 심 현식 중장이 유쾌하게 웃으며  참모들의 표정을 살폈다. 참모들은 다소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동미사일이 만주의 각 비행장에 접근하는 것을 보고 참모들은 일반적인 폭격인줄 알았으나 단 한 발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는데,  심 중장은 비행장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뭔가 있는듯이 보였다.

  "설마… 화학무기 공격이오?"

  "땡!  틀렸습니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그리고 독가스공격은 국제협약에 의해 금지되었습니다."

  정 지수 대장의 틀린 대답에  심 중장은 더욱 신이 난듯 참모들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화학무기,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면 독가스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는 별명답게 대량살상무기의 하나이다. 제조와 보관이 비교적 간단하며 비용도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사용한 측은 동일한 독가스의 보복공격을 각오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박 정석 상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혹시… 핵 아입네까?"

  박 상장의 대답에 참모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스함대가 중국의 핵공격을 받아 충격을 받고 있었는데, 박 상장의 말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되어 있었다. 놀란 참모들이 박 상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쑥스러운지 농담이라고 말했다.정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심 중장이 해답을 말했다.

  "반(反)마찰 폭탄입니다. 윤활제인 테플론(Teflon)의 일종이죠. 하지만 테플론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이제 저 비행장들에서는 비행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함은 물론 자동차의 주행도 불가능합니다. 모조리 미끄러져 버리니까요."

  테플론 계열의 윤활제는 표면을 미끄럽게 만듦으로써 철도나 활주로, 경사로, 계단 또는 중장비까지 상당 기간동안  사용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바퀴가 달린 모든 탈것은 이 윤활제 성분이 없어질 때까지 그자리에 고정시키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퀴가 헛도는데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도 없고,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도 못한다. 윤활성분을 희석시키든지, 아니면 강력한 캐터필러를 가진 차량이 이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테플론은 환경에 무해한 성분이라서 사용자측이 망설일 까닭도 없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테플론이 비싸고 효과도 적었으나,  과기연(국립과학기술연구원의 약칭)이 개발한 이 윤활제는  낮은 농도에서도 활주로에 흡착되어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과기연은 항공기와 각종 무기류를 시험, 개발하는 정부기관이다. 전부터 연구해 오던 무기들이었으나, 전쟁이 시작되자 개발에 가속이 붙어 이틀전에 완성이 되었다.

  "아마 지금쯤 목표가 된 비행장에서는 난리가 났을겁니다. 만약 전투기가 착륙중이었다면 틀림없이 활주로 끝에 쳐박혀 있을겁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착륙하는 여객기가 없으니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참모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심 중장을 보고 있는데, 그는 신이 나서 다른 개발중인 무기까지 설명했다. 그렇다. 이것들은 사용하기 따라서는 당당히 무기의 반열에 드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접착제도 있습니다.  폴리머(polymer) 접착제를 공중에서 살포하면 장비를 그 자리에 접착시켜 꼼짝달싹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위력이 낮아서 개발중이지요.  사륜구동차까지는 됩니다만, 아직 무한궤도차는 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액화금속연화제, liquid metal embrittlement라는 것도 있죠. 아, 작은 사전에는 안나옵니다. 어쨋든, 이것은 다리나 공항시설, 엘리베이터나 각종 무기등의 금속제 구조물에 스프레이로 뿌리기만 하면 부스러지고 깨져버립니다. 다만, 폭탄을 사용하는거나 마찬가지이니 사용이 제한되겠지만요. 그리고 다른 것도 있는데 아직은 비밀입니다.

  이런 것들을 [시설사용배제]라고 합니다. 비살상이론의 핵심개념에서 나온 무기류이죠. 그리고…  만약 특정 도로나 일정 지역의 눈을 녹여서 진창으로 만들고 싶으시면 그 지역을 제게 말씀 하십시요. 과기연이 개발한 해빙세균을 이용하여 눈을 녹여 드리겠습니다."

  해빙세균은 빙핵(氷核)세균과 정반대의 관계에 있는 세균이다.  빙핵세균은 구조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백질을 생성함으로써  수분의 입자가 이 단백질과 접촉할 경우,  얼음의 결정구조처럼 곧바로 정렬되는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에 물이 높은 온도에서도 빨리 얼게 하는 특성을 지닌다. 물의 어는 점을 높이는 이 빙핵세균은 스키장이나 스케이트장, 또는 아이스크림이나 제빙공장에서 사용되어 왔는데, 과기연은 이와 반대되는 개념의 해빙세균,  즉, 물의 어는 점을 낮추는 세균을 유전자공학을 이용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연구에는 남극의 바위 박편 사이라는 극한공간에서 생존하고 있는 규조류가 이용되었다.

  참모들은 심 중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상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혹시 심 중장이 핵의 공포로 인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진지했고, 미사일 폭발 얼마 후에 전선의 항공관제관으로부터  관심을 끌만한 내용의 보고가 접수되었다. 만주상공에 중국전투기가 전혀 이륙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99. 11. 25.  08:15  경기도 강화도, 안전기획부 교육원

  "제군들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은 강당에 모인 300여명의 요원들이 웅성거렸다.  고된 아침훈련이 시작되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이들을 강당에 소집한 이 사람은 첫마디를 내뱉고 잠시 조용히 요원들을 살펴 보고 있었다. 안기부 해외담당 조직원, 해군 UDT, 그리고 인민군의 정찰연대 소속으로 구성된 이들 특수요원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연단의 장군을 바라 보았다.  위험한 작전에 병사들을 투입하는 지휘관은  항상 저런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는 표정이었다.

  통일참모본부의 상황실장인 양 석민 중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장성은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실제 나이도 별로 되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장군은 장군이었다.

  "제군들이 갈 곳은 출발 전에 조별로 알려주겠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받은 교육과 훈련 내용은 일체 비밀이다. 어떠한 비밀도 외부에 발설치 말것이며,여기에서 알게된 모든 것, 그리고 임무수행 중에 알게된 모든 것도 비밀이다."

  그의 엄포에 요원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약간 교육내용이 다른 것만 뺀다면 그들이 갈 곳은 뻔했다. 중국에 침투해서 요인 암살이나 폭파공작을 하면 되는 뻔한 임무에 갑자기 웬 엄살인가 싶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는 모두 유서를 제출하도록. 유품도 남겨 놓길 바란다. 여러분들을 사지에 몰아넣어서 작전책임자인 본관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작전이 모두 끝나면 나는 여러분을 희생시킨 책임을 지고 자진하겠다."

  양 중장의 말을 들은 요원들이 이제서야 긴장하기 시작했다.  유서야 위험한 적진 침투작전 전에 항상 써왔지만  최근들어 유품 이야기는 처음이었다.그리고 아무리 생환가능성이 낮은 작전이라도 작전책임자, 그것도 고위 장성이  자결하겠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태평양전쟁때의 구 일본군 장교도 아닌 20세기 말에  통일한국군 장군의 자결이라니…

  그리고 군인과 정보요원은  항상 국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리 소모품이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임무였다.양 중장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요원들은 자신들이 맡을 임무가 보통의 침투임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작전내용을 들으면 이해하겠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이다. 작전이 성공해도 여러분의 생환가능성은 없다. 제군의 가족들은 국가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이 작전명은 장마라고 붙여졌다. 이미 개전 첫날에 정해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양 석민 중장은 말을 마치자 특수요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침울한 표정이 되어 임시 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육군소장과 함께 강당 밖으로 나갔다. 그는 비상국무회의와 통일참모본부간의 아침 정례 화상회의 직후 청와대를 방문하고, 바로 강화도로 날아온 것이다.

  요원들이 웅성거렸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생환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핵기지 침투야… 폭파가 아닌 사용가능한 점령이군.’

  ROTC출신 예비역 해군 중위인 신 승주는 지금까지 한중전쟁의 전황과 그동안 받았던 교육내용을 종합하여 자신들의 임무를 유추해 냈다.만약에 자신들이 일반적인 침투를 목적으로 교육을 받는다면 컴퓨터나 중국어 등의 교육은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아침에 본 TV 뉴스에는  분명히 동지나해 상공에 핵폭발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자신의 임무가 이것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과연 양 중장의 말대로 생환가능성은 전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요원들이 중국의 핵기지를 점령해도,  그 핵으로 중국을 과연 위협할 수 있을까 하는데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너무 넓고 인구도 엄청나게 많았다. 일반적으로 핵보복은 공멸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지만,  중국은 핵공격에 공멸(共滅)하지 않을만한 유일한 나라였다.

  1999. 11. 25  07:20 (북경 표준시)  광저우 동쪽 15km 주지앙(珠江)

  "일출이다!  다운트림, 심도 15. 반속전진!"

  함장인 이 승렬 소령이 잠망경의 손잡이를 접어 내리며 명령했다. 밸러스트 탱크에 물이 들어오자  한국해군의 209급 잠수함 성진함은 약간 심도가 더 내려갔다. 이 소령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디지털 심도계의 숫자를 확인했다. 잠수함의 기축을 중심으로 표시되는 심도계인만큼 함교는 이보다 훨씬 높게 된다.  지금도 마스트가 물에 잠길락 말락하는 정도의 심도밖에 되지 않았다.

  강의 하류로 내려올수록 수심이 낮아지긴 했지만 아직 잠수함에게 충분한 정도의 수심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 잠수함은 세 번에 걸쳐 강바닥의 암초에 충돌했었다. 초고장력강으로 제작된 복각식 내압선각(耐壓船殼)이 아니었으면 함체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잠수함의 잠항은  혹시나 상공에 있을지도 모를 비행기의 육안수색으로부터 잠수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이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광저우 공격 전이었다면 낮에는 당연히 엔진을 멈추고 강바닥에 올라탄채 밤이 오도록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본거지를 공격당해 화가 난 중국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대잠수상함과 초계기로부터의 추적을 최대한 피해야 되는 것이다. 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모르는 성진함의 승무원들은  이런 식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잠수함은 주지앙을 거슬러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심해항주용 저주파를 불규칙적으로 발산하며 강바닥을 포복하듯이 기며 서서히 강을 따라 내려갔다. 광저우로 올라갈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밤이 아니고 낮이라는 점, 그리고 중국의 추적을 받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중국은 우리가 공격한 줄 알고 있겠지?"

  함장이 불안한듯 한마디 내뱉고는 아차 하고 말았다.  역시 사려깊지 못한 부함장이 예상되는 대꾸를 했다.

  "당연하죠. 한국에 탄도탄이나 토마호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벌써 잠수함은 공격받아야 했으나 아직 잠수함에 대한 중국의 공격은 없었다. 이 점 승무원 모두들 궁금해했으나 아마도 해안에서 초계기를 빼지 못하는 사정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아니면 수심이 충분히 깊은 주지앙의 강 어귀에 대잠함정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소나를 담당한 하사관인 최 중사가 외쳤다.

  "소나에서 지휘소로!  우현 전방 1500에 수상함정입니다. 접근중!"

  "미속전진, 잠망경 올려!"

  이 소령이 역시나 하면서 서둘러 잠망경을 잡고 우측으로 회전시켰다. 멀리 일출을 배경으로 소형 경비정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배가 이 잠수함의 존재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이 소령은 모르는 쪽에 걸었다. 그와 그의 잠수함, 그의 부하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조금 더 잠수할 수 있나?"

  이 소령이 잠망경을 내리며 불안한듯 항해장에게 묻자 항해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저(河抵)에 좌초되는 수가 있습니다. 너무 낮아서…"

  "좋아, 이대로 정지한다. 조금만 더 가면 하구가 넓어지는데…"

  스노클이 사령탑 안으로 수납이 되면서 성진함의 4,600마력짜리 디젤 일렉트릭 순항엔진이 멈췄다. 성진함은 공기가 필요없는 추진방식인 아르고(Cosworth Argo) 디젤엔진을 갖췄으므로  이 엔진을 쓰면 스노클을 쓸 필요가 없었으나, 함장은 액체산소가 부족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 이 엔진의 가동에는 항상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어차피 디젤엔진의 소음은 마찬가지라서 전투상황에서는 축전지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신형엔진의 가동은 심해에서 장기간 기동할 때 사용하는 극히 제한적인 효용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음이 적고 2개월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서 이 엔진의 개발은 재래식잠수함이 원자력잠수함에 뒤지지 않을만한 성능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속도와 탑재량을 뺀다면…

  주지앙(珠江)은 윈난(雲南)성의 동쪽 끝에서 발원하여  광시주앙쭈쯔즈취(廣西壯族 自治區)를 거치기까지 계속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광저우 남동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급선회하여 홍콩과 마카오 사이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류의 이름은 주지앙, 본류는 시지앙(西江)으로 이름이 다른데, 양자강이 중국인들에게는 하류에서만 불리는 이름이고 상류와 중류는 장강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이 강도 위치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이 승렬 소령의 잠수함은 23일 밤에 홍콩 공격을 마치고 야음을 틈타 주지앙의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마카오보다는 광저우공격을 택한 그의 결정은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귀항까지는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얕은 강바닥에서 움직이는 잠수함에게는 조그만 경비정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커다란 잠수함으로서는 숨을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주지앙의 붉은 흙탕물이 그의 잠수함을 지켜주는 유일한 자연조건이었다.

  "접근! 목표 가속 중, 현재 20노트!"

  한국해군의 209급 잠수함 성진함이 정지한 위로  중국 경비정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모든 승무원이 소리가 들려오는 천장을 바라 보았다.어차피 경비정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소나병인 최 중사가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 배의 엔진음을 분석한 결과, 그 배는 상하이급 고속공격정으로 분류되었다. 함장의 기억으로 그 배는 연안초계정으로 알고 있었다.  발사관제관이 어뢰에 경비정의 음문을 기록하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보며, 함장이 서둘러 중국 해군 함정의 제원을 기록한 책을 펴고 상하이급에 대한 기록을 살폈다.

  ‘만재배수량 134톤, 최고속도 30노트, 승무원 38.  무장은 중국제 37밀리 2연장 2기와 구 소련제 25밀리 2연장 대공기총 2기… 몇몇은 2연장 57밀리나 2연장 75밀리로 무장.  대잠무기는 없으나 일부는 함체 내에 소나를 수납하거나 가변심도 소나(VDS)가 있음… 최근 극소수의 동급 경비정은 대잠함정으로 개조되었을 가능성… 젠장, 짜증나는군. 도대체 이 배는 어떻게 분류되는거야?’

  "일단 적함에 소나가 있다는 가정을 해야되겠죠. 광저우 공격은 우리 짓인줄 알테니까요."

  적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함장이 일그러진 표정을 짓자, 이를 본 부함장이 함장에게 조언했다. 함장인 이 소령은 나도 안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TV를 보십시요. 핵공격입니다! 그리고 적은 우리가 공격한줄 모르는데요?"

  통신장교의 말에 깜짝 놀란  함장과 부함장 등의 지휘소 요원들이 서둘러 통신실로 뛰어갔다. ‘핵이라니…’  우려하던 일이 결국 발생하고 만 것이다. 놀란 눈으로 함장이 본 것은 통신실에 있는 몇 개의 TV화면이였는데 통신장교가 손으로 가리킨 화면에서  미국의 ABC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잠수함에서는 지금도 통신용케이블을 방출하여 이를 통해 잠수함 안에서도 세계각국의 주요 TV뉴스를 위성수신을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적도상공의 정지궤도에 있는 무궁화 3호의 전파는 이곳까지 도달하지 않았지만,  전쟁당사국이 아닌 비교전국의 뉴스가 항상 더 정확한 법이었다.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 군의 정보망을 통하지 않고 민간상업방송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최근에 당연시 되고 있었다.

  TV뉴스에서는 타이완 북쪽해상에 핵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핵폭발이 있던 해역을 표시한 지도가 사라지고 잠시 후 양복을 입은 중국인이 화면에 나와 뭐라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 아래에 영어자막이 처리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통신장교인 최 중위가 이를 더듬거리며 해설까지 붙여 번역했다.

  "한국이 통상형 탄도미사일로 광저우를 공격해서 그 보복으로 동지나해에서 중국해안을 봉쇄중이던 피스함대에 핵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멍청한 놈들이 잠수함 발사 하픈과 탄도미사일도 구분을 못합니다.  게다가 탄도미사일은 지들이 먼저 사용하고선… 혹시 중국은 탄도미사일에 대한 경보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것일까요?

  추가적인 탄도미사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중국은 한반도에도 핵을 쓰겠다는 위협도 하고 있습니다… 얼라리오?  휴전도 제안하는데요?"

  핵과 휴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었다.  일단 한반도에 대한 핵공격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성진함의 광저우 공격으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군 지도부가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피스함대에 핵공격을 한 것이라면, 그리고 한국군 지도부도 성진함이 광저우를 공격한 것을 모르고 있다면, 성진함 승무원들만이 이 사태의 전말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된다. 성진함의 함장 이 소령은 자신의 함은 꼭 살아 돌아가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접근중! 거리 200!"

  소나병인 최 중사의 외침에 정신이 퍼뜩 든 함장이 다시 소나실로 뛰어갔다. 한국에 돌아가 진상을 밝히는 것은 둘째 문제고, 먼저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100!"

  최 중사가 신경질적으로  잠수함과 경비정까지의 거리를 계속 보고했다. 항해장이 작도판에서 경비정의 진로를 추정했다.이 작은 배는 거의 정확히 성진함 바로 위를 통과하는 코스를 잡고 있었다.

  [빙~]

  "고주파 발신음입니다! "

  중국 경비정의 탐신음 발신과 승무원들의 머리칼이 쭈뼛 선 것, 그리고 최 중사의 외침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이 경비정은 하필이면 가변심도 소나를 갖춘 함이었다.  310여척의 상하이급 고속공격정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갖췄다는  가변심도 소나를 이 경비정이 갖추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발신음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최 중사는 고주파 탐신음의 반향음을 잡으며 하저의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고, 나머지 승무원들이 일제히 함장을 주목했다. 그의 공격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대기! 아직 기다려!"

  이 소령은 적 경비정이 아직 잠수함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경비정과 교전한다면 중국의 대잠기와 대잠함정들이 주지앙의 하구를 봉쇄할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경비정이 잠수함의 존재를 모른다는 자그마한 가능성에 잠수함의 운명을 걸었다.

  "제길, 왜 탐신음을 쏜거야?"

  함장이 의자에 앉은채 손으로 볼펜을 돌렸다. 그가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지만, 승무원들은 그의 행동에서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중국의 경비정이 탐신음을 발한 것은 몇가지 가정이 가능했다.

  첫째는 최악의 경우이지만  경비정이 잠수함의 존재를 파악한 경우이다.잠수함의 마스트를 육안수색에 의해 발견했거나 엔진음을 파악한 경우인데, 성진함이 정지한 지금 현재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만약에 이 경우라면 이는 공격직전의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는 강의 흐름에 이상을 느낀 경비정이 물속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탐신을 한 경우이다.  이 경우 해도에 표시되지 않은 암초가 물속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인데, 잘못하면 잠수함이 발견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세번째는 광저우를 공격한 잠수함을 발견하기 위해 막연히 하저에 탐신음을 발한 경우였으나, 방금 방영된 TV뉴스는 이 경우를 배제하고 있었다. 중국은 성진함의 광저우 공격을 모르는 것이다.  이 세가지 모두 성진함에는 위험했으나 함장은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경비정이 우측으로 급선회했습니다! 우리를 암초로 생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강은 깊은바다와 달리 다양한 소음을 내며 흐른다.  유속이 빠를수록 소음도 심해지며, 물속을 떠내려가는 돌멩이와 잡동사니들이 다양한 소리를 내기때문에 의외로 잠수함이 숨어 있기는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편이다. 경비정은 아마도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돌려져, 승무원들이 이 수역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고주파 소나를 발신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빙~... 빙~]

  경비정에서 3초 간격으로 탐신음을 2회 연속 발신했다. 최 중사가 깜짝 놀라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함장에게 보고했다.

  "아닌데요… 적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파악…"

  "어뢰 발사 준비!  안전거리 100미터, 1번관 발사! 잠망경 심도로!"

  참을 수 없어진 이 소령이 연이어 명령했다. 209급 잠수함 앞면의 어뢰실에서 이층 맨왼쪽의 발사관이 열리고, STN(System Technik Nord)사제의 533밀리 SUT Mod 2 어뢰가 장전되었다. 초기에 한국해군에 인도된 209급, 즉, 장보고급 잠수함들은 모두 14기의 어뢰만을 탑재할 수 있었으나,  후기형은 어뢰발사관실이 확장되어 총 24기의 어뢰나 하픈을 탑재할 수 있었다. 성진함의 하픈은 지상공격용으로 개조되었는데,  이미 이를 두번의 공격에 모두 사용했으므로 이제 어뢰 9발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 남은 어뢰 수는 8발로 줄어들게 되었다.

  잠수함은 급속히 엔진을 가동하고 전동펌프가 가동하여 밸러스트탱크 안의 물을 함체 밖으로 밀어냈다. 성진함은 서서히 부상했다.  이미 서로의 위치는 완벽히 파악했으니 먼저 공격한 쪽이 이길 것으로 이 소령은 생각했다. 이 소령이 이를 악물었다.

  어뢰가 발사관을 떠나 흙탕물 속을 질주했다. 앞쪽으로 발사된 이 어뢰는 잠수함에서 지령하는 유선유도에 따라 급속히 가속하며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경비정은 어뢰의 추적을 확인하며 황급히 속력을 올렸으나 이미 최종유도 속도인 35노트에 도달한 어뢰를 따돌릴 수 었었다. 잠수함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으로부터 커다란 폭발음이 수중으로 퍼져 나갔다.

  홍콩과 광저우간 민간선의 항로안전유지를 담당했다가 암초를 확인하기 위해 탐신음을 발사한 이 불행한 고속공격정은 260kg이나 되는 어뢰의 탄두가 폭발하자 당장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성진함은 잠망경 심도로 부상해서 이 소령이 잠망경을 통해 밖의 상황을 살폈다.목표가 있던 하상(河上)에 경비정은 형체도 보이지 않았고 생존자도 없었다.  찢겨진 종이조각과 기름덩어리 등의  부유물만 강물 위에 둥둥 떠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명중!"

  어뢰가 고속정에 충돌하기 직전에 헤드폰을 벗은 최 중사가 함장에게 뒤늦게 보고했다.

  "급가속, 최대한 속도를 내어 이 강을 빠져나간다. 자, 가자!"

  성진함은 수중 최고속도인 25노트의 속력으로 가속하여  하구쪽을 향했다. 이미 성진함의 존재는 중국군에 알려졌을 터이니 중국 해군이 강 하구를 봉쇄하기 전에 최대한 바다에 접근할 속셈이었다.

  1999. 11. 25  08:30  중국 선양(瀋陽), 선양비행장

  며칠째 계속된 폭설이 멈추자 인민해방군 공군의 제 24 전투사에서는 출격준비에 바빴다. 북한 정주와 철산군 지방에서 인민해방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은 오히려 인민해방군 조종사들의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미그-21 전투기의 중국제인  제 24 전투사(戰鬪師–사단급의 전투비행단) 소속의 섬(殲)-7(J-7) 전투기 100여기는  인근 푸순(撫順) 비행장의 강격(强擊)-5 공격기들과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에 나설 예정이었다. 강격-5 공격기는 미그-19의 중국식 개량형인 지상공격기이며, 일반적으로 J-5라고 불리운다.

  조금 전에는 북한지방에서 지대지미사일이 날아왔으나 활주로 상공에서 공중폭발하여 비행장에는 외관상 전혀 피해가 없었다.  북한제인 스커드형 지대지미사일의 신관이 불량한 것으로 판단한 제 24전투사의 사령은 이를 상부에 보고했는데, 다른 비행장도 같은 공격을 받았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별 피해가 파악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공격받은 것은 단 한발씩의 미사일 뿐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지나갔다. 사령은 이것이 혹시 핵공격 위협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첫번째 전투기가 서서히 활주로에 진입했다.  공대공미사일과 폭탄을 잔뜩 탑재한 이 전투기는 관제탑의 지령에 따라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나, 활주 도중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활주로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1번기부터 사고가 생긴 것이다.

  [으악! 조종이...]

  관제탑의 스피커에서 사고기 조종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관제원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성에가 잔뜩 낀 관제탑의 유리창 밖으로 사고기를 보았다. 그 전투기는 계속 미끄러지다가 대공참호에 처박혀 있었다. 대공포 요원들이 놀라 참호를 뛰쳐 나왔다. 큰 사고는 아니었으나 기체의 화재를 염려하여  항공대 소속의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사고기를 향해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활주로면의 상태는 이미 확인했으므로 노면이 얼어서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조종사의 실수로 판단한 관제탑에서는 후속기의 이륙을 종용했다.

  그러나  2번기도 마찬가지로  얼마 속도도 내지 못하고 음주운전자가 운전하는 승용차처럼 활주로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전투기는 결국 1번기처럼 활주등을 부수며 활주로에서 벗어나 주기장에 세워져있는 Il-14 수송기에 부딪히고 말았다.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전투기와 수송기 모두 크게 파손되었다. 이를 보고 이륙 대기중인 조종사뿐만 아니라 관제탑에서도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관제원들이 아까 이륙하다 사고를 낸 1번기 쪽을 바라 보았다.  앰뷸런스는 사고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장에서 비틀거리고 있었고 소방차가 사고를 낸 전투기에 정면충돌했다.그렇지 않아도 충돌한 전투기는 주변에 항공유를 잔뜩 흘리고 있었는데 소방차가 충돌하자 스파크가 일어 전투기와 수송기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폭발하고 말았다. 연속된 사고로 이 군용비행장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1번기의 폭발을 보고  인민해방군 공군 제 24전투사의 사령이 비행장 내 스피커와 모든 무선회선을 연결한 비상방송망의 전원을 넣었다.

  "전원 대기하라! 전투사 소속 전원 제자리에 대기하라!  차량도 움직이지 마! 노면 상태를 다시 점검한다. 시설단 출동하라. 단, 차량은 사용하지 말것."

  비행장 시설단장인 중좌를 포함한  일단의 조사원들이 활주로로 뛰어갔다. 달리던 이들이 넘어지고 미끄러졌다.망원경으로 이 모습을 본 사령은 확실히 활주로에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이들이 가져온 것은 진득한 하얀 물체였다.

  사령은 긴급지령을 내린 즉시 이 사태를 상부에 보고했다. 이 비행단의 전시 작전지휘권을 가진 상급부대이며,  동북 3성의 관할 군구인 선양(瀋陽) 대군구의 전시조직인  제 11병단의 항공사령부가 보낸 회답은 다소 의외였다.  비암호 무선으로 온 11병단 항공사령부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 동북 3성 각 비행장 상공에서  폭발한 조선제 미사일에서 특별한 종류의 윤활유가 살포되었다. 활주로 뿐만 아니라 주기장(駐機場)과 주변 도로 일대의 지표면이 마찰계수 0에 가깝게 되어, 항공기의 이착륙과 일반 차량의 운행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쇄도하고 있다. 귀 비행장에서는 즉각 윤활유 제거작업에 착수하라. 당분간 출격은 금지하며 귀 전투사의 관할 공역(空域)은 북경군구 공군이 대신 담당한다.]

  제 24 전투사의 사령은 기가 막혔다.  동북 3성의 모든 군용비행장이 마비되었다면, 이 전쟁은 극히 불리해지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상전의 공중지원은 멀리 북경군구에 있는 비행장에서 이륙해야 하므로 항속거리면에서 너무 불리하고,  만약 조선이 만주를 폭격한다면 중국군은 폭격에 대항할 요격수단이 거의 없었다.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커다란  저속의 지대공미사일에 맞아줄 전투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령은 조선반도에 대한 핵위협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적 영토에 대한 핵공격은 누구나 꺼리는 선택이었다. 그는 조선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 무기시장에서 이미 핵을 구입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게다가 북조선은 계속하여 비밀리에 핵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20세기 말이 다되어 핵을 보유하려는 국가에서는 어느 나라든지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핵에 대한 정보는 일반화되었다. 핵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기구라는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의외로 국제핵정보시스팀(International Nuclear Information System)이라는 공개정보를 운영 중이며, 전문도서관에서도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Basement Nukes(지하실핵무기)라는 핵무기 만드는 방법이 적힌 책자는 공공연히 판매되고 있어서, 일부 테러집단 마저도 핵에 대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비밀로 유지되고 있는 정보는, 어떻게 핵폭탄을 제조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고급스러운 핵을 만드는가 였다.

  그리고 핵물질에 대한 국제적인 통제도 허술해서 전세계에서 유통 중인 고농축우라늄(HEU) 3,000톤 중에서 실제 IAEA 등 국제기구의 사찰대상이 되는 것은 겨우 1%에 불과한 실정이다. 플루토늄도 마찬가지로 현재 존재하는 1,000여톤의 이 핵물질 중에서 국제 감시하에 놓인 것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신고된 핵에너지 시설에 있는 양만 따진 숫자라는 것이다.  핵폭탄의 재료가 되는 이 위험한 물질들이 조선에 얼마만큼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도대체 조선에 핵폭탄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사단 사령의 두려움이었다. 어차피 핵전쟁이 일어나면 공멸(共滅)하는 것이 아닌가?

  동북 3성(東北三省)은 만주일대에 있는  중국의 3개 지방인 헤이롱지앙(黑龍江)성, 지린(吉林)성과 리아오닝(遼寧)성을 지칭한다. 산하이꽉(山海關)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이들 지방은  關外, 또는 關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역은 석유, 석탄 등 지하자원의 보고이며 쌀의 산지이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와 접경을 이루기 때문에 이 지역은 북경 주변과 함께 핵미사일 기지와 군사력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이 넓은 지역은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벌거벗은 셈이었다. 제 24전 투사의 사령은 서둘러 지대공미사일기지를 점검하고 헬기에 공대공미사일을 무장시켰다. 그로서는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었다.

  1999. 11. 25  08:50  경상남도 진해, 잠수함대사령부

  "성진함에서는 아직 연락 없지?"

  "예. 계속 호출했지만 23일 밤 이후 계속해서 응답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한국해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인 윤 재완 소장은 성진함에 너무 무리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홍콩 공격만 해도 재래식 잠수함으로서는 어려운 임무였다.  만약 작전이 성공할 경우 추가 공격은 함장이 재량껏 해도 좋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 말 때문에 부담을 느낀 함장은 안전귀항을 도외시한채 최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그래도 홍콩 작전은 대성공이어서 한중전쟁 시작 후에도 홍콩에 남아있던 영국과 미국계 자본, 그리고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온 일본계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24일 단 하룻동안 홍콩을 빠져나간 자본은 미화로 환산해서 500억 달러가 넘었다.  자본 뿐만 아니라 외국인 고급기술자들도 홍콩을 탈출하기 바빴다. 중국경제의 기초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본과 기술자가 빠져나가고 원자재의 공급이 원활치 못한 합작공장은 가동율이 급속히 떨어졌다.

  한국 잠수함이 민간 상선을 공격한 것으로 확인되자 외국선적의 화물선들이 일제히 홍콩에의 기항을 거부했다.  해상보험료는 다시 세 배나 더 뛰었고, 외국인과 이중국적자들은 치떠(啓德)국제공항으로 몰려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중국 각지를 연결하던 해상교통은 완전 마비되었고, 해안도시에 살던 노동자들은 내륙으로 피난가기 바빴다.  남부의 연안공업지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형식만 의무병역제이지 실상은 모병제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에 입대하는 것은 공산당원이 되기보다 어려웠다. 평시의 중국군이 230만 병력을 유지하여 외견상 엄청난 숫자같지만,  이는 전 인구의 0.25%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비율이다. 자위대만 있고 군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국민대 자위대원 숫자의 비율보다 더 낮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민들은 전쟁이 있을 경우  자신은 전쟁과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기 쉬웠다. 전쟁은 군인의 일이었고, 만약 징병제가 실시되어 자신이 군에 징집된다면 이는 신분상승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인민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피난을 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한번 더 호출해봐. 홍콩 공격 전에도 성진함은 무선봉쇄 상황이었으니까 혹시 모르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저궤도위성(LEO)통신망인 이리듐의 채널을 개방했다.  이리듐은 미국 모토롤라사를 중심으로한 국제 통신서비스 컨소시엄인데, 고도 800km에 떠있는 66개의 위성을 이용한 이동통신망이며,  한국에서는 한국이동통신이 참가했다. 비슷한 서비스로는 고도 1천 400km에 떠있는 48개의 위성을 이용한 글로벌스타와, 1만km의 위성 12개를 보유한 프로젝트21 등이 있었다.  이들 서비스는 모두 한국기업이 참가하고 있었지만,  한국해군은 공영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이동통신과 잠수함 통신망 개설을 계약하여 1998년부터 작전에 사용하고 있었다.

  "홍길동이 구운몽에게, 홍길동이 구운몽에게.  율도국으로 돌아오라. 아니면 현재 위치와 현황을 보고하라. 이상!"

  윤 소장과 통신병은 통신망을 개방한채 몇초동안 멀거니 스피커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성진함은 중국군에게 침몰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번졌다.

  1999. 11. 25  07:51  중국 주지앙, 한국해군 성진함

  "또 시에미가 찾는데요?"

  통신장교가 함장인 이 소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현재 적지에서 작전중인 상황에서  상부에 무선으로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잠수함이 전파를 발신하면  당연히 상대방이 이를 역추적하여 잠수함의 위치는 순식간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상부의 위치보고 요구를 묵살할 것으로 생각한  통신장교가 별 생각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데 갑자기 함장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의 상황을 압축해서 전송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통신장교가 함장을 보며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지금은 귀항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인가? 그가 잠시 예상되는 글자 수를 세어보더니 함장에게 0.3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중국의 눈과 귀인 통신위성들도 이리듐 위성들과 동시에 성진함의 짧은 전파를 잡아서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할 것이므로 적지에서의 전파통신은 위험했다. 다만 함장은 중국에도  저궤도 위성통신망을 이용하는 이동전화 가입자가 충분히 많기 때문에 이에 한가닥 희망을 걸기로 했다.

  "자네가 전통문을 작성해서 전송 전에 내게 보여주게. 알아서 상황설명을 충분히 해서 말야. 유서를 작성하는 기분이겠지만…"

  잠시 후 통신장교가 써서 함장에게 보고한  위성 통신문은 다음과 같았다.

  [성진이가 시에미에게. 본함은 홍콩 공격 후 광저우를 공격했음.  23일 밤 홍콩에 5기의 하픈 발사, 모두 명중.일본국적의 민간수송선에 어뢰 발사하여 침몰시킴. 항로를 봉쇄하기 위한 부득이한 작전이었임. 25일 새벽 광저우 시내 주요 건물에 하픈 발사, 광저우의 교량에 어뢰 발사하여 붕괴시킴. 현재 위치는 주강(珠江) 하류. 상하이 II급 고속공격정 한척 격침, 현재 예상되는 적의 추격을 피해 급속 남진 중.  명복을 빌어주기 바람.]

  이 소령이 통지문을 읽더니 피식 웃었다.  통신장교는 상부의 지원을 바랄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정도의 개그는 용납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따라 웃었다.

  "전송하도록! 곧 하구에 도달한다. 적함이 몰려오기 전에…"

  "알겠습니다."

  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통신장교가 통신용부표의 사출버튼을 눌렀다.  미리 작성되어 부표에 저장된 데이터는 잠수함에서 떨어져 나온 후 물밖으로 올라갔다. 안테나가 세워진 이 부표는 정확히 5분 뒤에 전파를 발신하고 침수하기 시작해 바로 물속으로 잠겼다.

  이 전파는 하늘높이 퍼져 나갔다.  중국 남부의 800km 상공에 위치해 있던 이리듐통신망 소속의 위성 3개가 전파를 잡아 즉시 이를 증폭하여 60도 각도로 지구를 향해 되쏘았다.그러자 한반도 상공을 날고 있던 이리듐 소속의 위성이 이 전파를 잡아 다시 이를 한반도에 중계했다.  진해에 있는 잠수함대 사령부의 통신기에는 화일 형태의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힉! 초계기의 해상수색 레이더 전파입니다. APSO-504(V)3형 레이더 전파! Y-8MPA 초계기입니다."

  전파관제관이 잠수함에 위협이 될만한 전파를 분석하다가 전파분석기의 경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1-5-4, 거리 9,000에 고도 6,000입니다. 대잠초계기가 이 고도에 있다는 것은…"

  "그래, 이미 하구에 소노부이를 뿌렸단 거지. 의외로 빠르군."

  함장이 전파관제관에게 매우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초계기는 다수의 소노부이가 발산하는 초단파를 수신하기 위해 최대한 고도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전파관제관이 모니터를 보고 새로운 전파의 특성을 분리해 냈다. 처음과는 달리 그는 안정되어 있었다.다른 초계기의 출현은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못했다. 이왕 버린 몸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또 있습니다. 이번엔 3기의 하얼빈 H-5 초계기입니다. 위치는 1-3-0에서 2-1-5 사이, 거리 12,000에 고도 4,000 정도입니다."

  함장이 항해지도가 있는 곳으로 가서  주지앙 하구의 해도를 살폈다. 수심은 35미터로 이곳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다만, 훨씬 넓다는 것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주강 하구의 넓이는 바다처럼 넓었다. 하구 왼쪽에 홍콩이, 오른쪽에는 마카오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약 64km나 된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중국의 대잠함정들이 포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뚫고 나가야지. 저곳만 뚫으면 되잖아?"

  부함장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함장은 항해장교와 함께 예상되는 중국의 소노부이선을 해도에 표시했다.초계기의 위치와 이곳 지리를 보면 아무래도 홍콩 서쪽의 후하이 반도와 주강 하구에 있는 두개의 섬 사이에 소노부이선이 설치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대잠 수상 함정들의 위치는 홍콩 서쪽의 란타우섬과 마카오 사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섬들에 의해 소나의 탐지범위가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란타우섬 왼쪽으로 해서 홍콩으로 들어간다. 짜식들은 설마 하겠지. 그리고 중국의 대잠초계기는 별거 아냐. 하얼빈 H-5 대잠초계기나 하얼빈 Z-5 대잠헬기는 이미 구식이고 센서도 별로…"

  함장이 승무원들 들으라는듯 자신만만하게 떠벌이며 탈출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눈치없는 부함장이 또 끼어들었다.

  "그래도 디카스(DICASS:방향지시 액티브 소노부이), 매드(MAD:자기탐지장치), FLIR(전방감시 적외선장치) 등 갖출건 모두 갖췄는데요?"

  함장이 물끄러미 부함장을 쳐다 보았다.  조만간 잠수함의 함장이 될 20대 후반의 이 젊은 대위는 항상 별명처럼 썰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9. 11. 25  07:58  중국 주지앙 상공, 우주

  중국 상공을 지나던 저궤도 과학위성인  우리별 3호가 주지앙을 중심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강의 하구에서 잠수함을 찾고 있는 녹스급 대잠 프리깃함 세 척과 지앙후이급 프리깃함 두 척,그리고 잡다한 종류의 초계정들의 화상이 위성촬영 즉시 데이터 링크를 통해 용인관제소에 전해졌다. 물론 상공에 있던 초계기도 인공위성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그리고 위성은 초계기들이 강 하구에 투하한 소노부이들이 내는 초단파를 잡아 이를 분석하여 같이 보냈다.

  이 정보는 즉시 유성의 정보사단과  진해의 해군사령부에 전달되었는데, 이는 잠수함대 사령부가 긴급요청한 정보이기도 했다.  우리별 3호는 갑작스런 궤도변경으로 인해 수명이 절반으로 단축될 운명이었으나, 해군은 핵폭발의 원인을 제공한 된 성진함의 상황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지위성인 무궁화 계열의 통신용위성과 달리 저궤도 과학실험위성인 우리별 3호는 위성체를 한국에서 자체 제작하여 1998년 초에 중국제 위성발사체인 장정(長征)-5호 추진 로켓에 의해 발사되었다. 영국의 서리대학에서 제작한 우리별 1호와,  이를 모방한 국산위성인 2호의 해상도(解像渡)가 200미터에 불과한 반면에, 우리별 3호의 해상도는 15미터나 되어 홍콩 주변 해상의 움직임은 낱낱이 한국군에 전해졌다.  관측위성으로 개발된 우리별 3호는 전시인 지금 아주 유용한 정찰위성으로 전용된 것이다.

  이 위성은 다시 타이완 북쪽 상공을 지나며  핵공격을 받은 피스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수색에 들어갔다. 잠수함대 사령관인 윤 재완 소장은 중국 해군함정들의 제원과 위치를 파악해 이를 즉시 위성통신을 통해 성진함에 통보했다.

  1999. 11. 25  08:10  중국, 주지앙 하구

  "함대사령부로부터의 입전입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중국 함정들의 위치가 나왔습니다!"

  함장과 항해장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모니터를 통해 통신장교의 콘솔로부터 전송된 정보를 받았다.  한국이 언제부터 우주전을 수행할 능력이 생겼나 신기해 했다.

  먼저 대기권 밖 1,400km의 우주에서  광각카메라로 촬영된 강 하구의 상황이 나왔다. 3초간 찍은 화상으로 현재 중국 함정들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속도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감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중국 해군에서 어떤 종류의 함정들을 동원했나 알려주었고, 전파수신기를 통해 입수한 정보로 소노부이의 선이 표시되었다. 소노부이는 예상대로 섬들 사이를 연결한 선에 깔려 있었다.

  "정확한 위치로군요. 지금 바로 하픈을 발사해도 되겠는데요?"

  잠수함대 사령부가 성진함을 버리지 않았다며 부함장이 신이 나서 떠들자 함장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자네같으면 지금 발사하겠나?"

  "…아뇨…"

  함장은 어떻게 대만해군에 있던 미국제 녹스(Nox)급 프리깃함이 이곳에 있나 궁금했다. 이 프리깃함은 대만의 해군증강계획에 따라 미국 해군으로부터 임대한 함정들이었다.  물론 미 해군으로부터의 임대기간이 끝나자 대만해군에 판매된 것은 당연했다.  함장은 중국에 항복한 대만 해군 함정들을 중국군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분산시킨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중국 지도부는 전직 대만해군의 반란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녹스급은 대잠미사일이 있습니다.  대잠병기라고는 RBU-1200만 탑재한 지앙후이급과는 차원이 다르죠."

  항해장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대잠로켓인 RBU-1200은 사정거리가 1,800미터에 불과하고 잠수함 추적 등의 유도능력이 없다.  2차대전 때의 대잠폭뢰와 비슷한 무기인 것이다.  그러나 녹스급은 구식함정이라고는 하지만  당당히 ASROC(대잠로켓)을 갖추고 있었다.  함장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는 사정거리 1.6km에서 10km에 탄두는 Mk 46 어뢰라고 나와 있었다.

  1999. 11. 25  09:25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요새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평안북도 수복의 영웅들인 북부군의 본부, 대목산 요새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북부군을 이끈 군 지휘관들이 승전을 발표하기 위해 나와 있습니다.  곧 기자회견이 시작되겠습니다."

  KBS의 아나운서가 카메라 앞에 서서  다소 흥분된 어조로 중계방송을 시작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 조명 때문에 지하인 이곳 실내는 대낮같이 밝았고 겨울인데도 땀이 흘러 나왔다.

  차 영진 중령은 7개 방송사와 16개의 국내 신문사, 그리고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북적대는 사령실 앞쪽에 도열한 인민군 예비역 장성들의 틈바구니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앞줄은 이 종식 차수와 노령의 인민군 예비역 장성들,  뒷줄은 차 중령과 이번 전투에 참전한 주변 지역 노농적위대 연대장들이 앉아 있었다. 한국군은 북부군의 군세를 과장하기 위해 현역 인민군 차수인 이 차수가 20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다고 선전했기 때문에 이 차수와 다른 고위 인민군 장성들이 이 기자회견에 나온 것이다.

  차 중령의 정모와 어깨 견장에는  대한민국 육군 준장의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고급장교의 2계급 특진이란 5.16이나 5.17같은 군부쿠데타의 주역인 장성들이 정치에 나서기 위해 예편할 때  소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한 예 외에는 없었지만 차 중령의 경우에는 이미 전사한 것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이미 11월 17일에 대령으로 추서되어서 그는 일계급승진한 것에 불과했다.

  추서 사유는 제 11기갑사단의 패전시 그의 대대가 보여준 분전과, 후퇴하는 본대를 위해 과감히 희생정신을 발한 것이었다. 그의 생존이 확인된 이후에는 그동안 북부군을 이끈 공과  이번 전투에서 올린 전과를 감안하여 차 중령은 졸지에 장군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래의 소속인 제 11기갑사단이 패배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선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통일참모본부가 설득해도 승진을 거부했으나,  육군사관학교 1기 선배인 한 중령,  지금은 부상때문에 예편하여 예비역 대령이 된 한 대령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마디에  결국 승진을 수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가 중국에게 깨지면 전범이 될까 무서운거야?  그래서 장군이 되기 싫은거지?’

  그의 소속인 제 11기갑사단은 패배 후에 후방에서 재편성 중이었으므로, 일단 그의 보직은 대부분이 허상인 북부군 작전참모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자칭 북부군의 최고 지휘관 자격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차 영진 준장은 1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통솔해야 된다는 부담감은 싫었지만, 전쟁기간 내내 같이 싸워온 북부군 장병들과 같이 있게 되어서 좋기도 했다.

  "이 차수님, 연설 준비는 되셨습니까?"

  기자회견을 취재하기 위해 온 합동 방송기자단 중에서 연출을 담당한 PD가 이 차수에게 묻자 그는 약간 쑥쓰러워하며 대답했다.

  "물론이디요."

  방송 코디네이터인 젊은 여성이 이 차수의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PD가 스탠바이를 외치자  이 차수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연단으로 올라간 이 차수는 통일참모본부 의장이 아닌 북부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저희 북부군 소속 장병과 이 지역 인민들은 조국이 중국군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자,  부대가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일동안의 처절한 전투 끝에 결국 침략군을 몰아 내는데 일조를 했음에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차수는 평안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고 평양식 문화어로, 준비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그는 북부군의 과장된 편제와 전과를 자랑하고, 내일 중으로 신의주를 수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동안 선천 인근의 해방구 방어와 남쪽에서 포위하고 있던 중국군을 공격하느라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북부군 단독으로 신의주를 공격하겠다는 엄포를 하는 것이다.

  이어서 기자들의 질문과 이 차수의 답변이 이어졌다. 미리 질문 내용에 대한 검열을 받은 국내 기자들과는 달리, 외신 종군기자들의 질문은 의표를 찌르는 내용이 많았지만 이 차수가 훌륭히 받아 넘겼다.

  그가 박수를 받으며 연단을 내려오자, 미리 연출된 각본대로 홍 대통령을 대신하여 등장한 국방장관이 이 차수와 악수를 한 후 그에게 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나서 국방장관은 연단의 마이크를 잡고 북부군의 그동안 공적을 치하하고 이번 신의주 수복작전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견은 전파를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반도 침공작전이 인민해방군 해군의 조기 참패와 평안북도의 북부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하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도 이 회견을 TV로 시청하고 있었다.회견을 지켜본 차 준장은 아무래도 주공은 다른 곳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젠장, 나는 미끼가 되는거로군.’

  1999. 11. 25  08:40  중국 주지앙 하구, 한국해군 성진함

  "소노부이의 선까지 앞으로 2,000미터입니다."

  "아직 괜찮아. 일단 1,200미터까지 접근한다."

  항해장이 해도를 보며 걱정했으나 함장은 계속 접근을 명령했다.  주지앙 하구의 물살이 의외로 세서  바다의 파도보다 훨씬 소음이 심했기 때문에 그는 통과를 자신했다. 일반적인 수동형 소노부이의 탐지거리는 약 30마일이나 되지만, 이 부이는 10헤르츠 이하의 저주파만 포착한다. 수중에서 주파수가 높은 음은 감퇴하기 때문에  소리를 듣기만 하는 수동형 소노부이의 하이드로폰(음파 탐지기)은 낮은 주파수대만 탐지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주지앙의 물살이 강 바닥을 긁고있기 때문에 아직 걱정은 없다는 것이 함장의 생각이었다.

  성진함은 초계기로부터의 레이더와 육안수색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스노클을 함교에 수납했으므로,  외부공기가 필요없는 디젤엔진인 아르고 엔진을 가동하여 저속항주 중이었다. 재래식 잠수함이 원자력 잠수함에 비해 소음이 적다지만, 그래도 동력전달장치인 샤프트나 스크루 등에서 상당한 소음을 발하고 있었다.

  "음문 입력 다 되었나?"

  "예! 2기가 완료 됐습니다. 속도에 따라 세 가지 음을 발합니다."

  발사관제관이 함장의 물음에 답했다. 성진함이 돌파할 곳의 반대쪽으로 이 잠수함의 소리를 녹음한 어뢰를 발사하여  중국 함정과 초계기를 속일 계획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할지의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중국 초계기들이 투하한 소노부이의 성능과 강 하구의 물살에 달린 것이겠지만, 승무원들은 운이 따라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함장이 해도를 확인했다. 위성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나온 소노부이의 선에서 약 1,5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중국 프리깃함들의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음문어뢰 발사 준비! 초속(初速)은 5노트, 침로 1-0-5로 설정."

  발사관제관이 인터폰으로 어뢰실과 통화하며  함장의 명령을 전했다. 잠수함 내에 긴장이 가득 찼다. 음향어뢰에 초속과 방향에 대한 입력이 끝나자 발사관제관이 함장에게 보고했다.

  "2기 연속 발사! 좌현 90도, 디젤 정지, 전동모터 가동, 20 노트로!"

  성진함이 1,800톤의 함체를 움직이며 어뢰를 발사했다.  초기형 장보고(209)급의 만재배수량이 1,300톤이 안되는데 비하면 비교적 거구였으나 다른 나라 잠수함에 비하면 극히 소형의 잠수함이다.  어뢰 2기는 2분 간격으로 차례로 발사되어 일단 서쪽으로 궤적을 그려나갔다.

  "15노트, 계속 가속중! 소노부이선까지 1,300미터!"

  항해장이 속도계를 보며 함장에게 보고했다. 아무리 축전지로 무음잠항 중이라지만 이 정도의 속도에서는  아무래도 소리가 많이 발생한다. 함장이 초조한듯 속도계와 해도를 번갈아 보았다.

  "20노트, 거리 1,200!"

  "좋아, 우현 90도! 모터 정지, 어뢰는?"

  항해장의 보고에 이어 즉시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함체가 서서히 남쪽을 향하며 관성과 강의 물살에 의해 계속 남쪽으로 흘러갔다. 어뢰는 아직도 서쪽으로 계속 항주중이었다. 속도는 7노트.

  "1번 어뢰, 음문 발신! 침로는 2-5-0으로. 속도 15 노트로 가속! 2번 어뢰는 현 상태 유지."

  잠수함으로부터의 유선지령에 의해 어뢰가 성진함의 소리를 내며 남쪽으로 향했다. 1번 어뢰와 소노부이 선의 거리는 900미터로 접근했다. 반면에 2번 어뢰는 계속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함의 속도 16노트로 감속, 계속 속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항해장이 다소 겁먹은듯 보고했다.  소노부이의 선 바로 아래를 지나는 잠수함의 승무원들이 용감하길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어차피 물살의 속도와 같아지겠지."

  함장은 남의 말하듯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어뢰의 궤적을 계속 살폈다. CSU-83 소나가 계속 2기의 어뢰를 추적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서인지 자주 놓치고 있었다. 함장은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좋아했다.

  "1번 어뢰쪽에 일제히 탐신음! 청음소너 말고도 능동형이 있습니다! 어뢰는 탐지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최 중사가 함장에게 보고하자 함장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그는 이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2번 어뢰 급가속! 음문 발신! 어뢰의 침로 2-1-0으로.1번 어뢰 와이어 절단, 액티브! 최종속도로!"

  함장이 명령을 연이어 발하자 발사관제관이 바빠졌다.이미 위치와 정체가 노출된 어뢰는 계속 남진시켜 탐신음을 발하며 중국의 프리깃함을 향하게 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뢰는 잠수함인척 가장하는 것이었다.

  "적 목표에 대한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확인작업 중. 2-4-5는 녹스급, 1번 목표로 설정합니다.  2-4-9는 지앙후이급, 목표 2로 설정. 2-5-3은 녹스급, 목표 3으로 설정. 다른 두 함정은 속도가 낮아서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각기 목표 4와 5로 설정함."

  소나 담당자인 최 중사에 이어 항해장이 보고했다.

  "본함… 소노부이선 통과중입니다… 본함의 속도 유속과 같은 12노트입니다."

  승무원들이 힐끗 잠수함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지만 이것은 본능적인 버릇이라 어쩔 수 없었다.함장은 물살의 속도가 뜻밖에 빠르다고 생각했다. 최 중사로부터 어뢰가 있는 쪽에서는 중국 프리깃함들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왔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성진함은 소노부이의 선을 통과하므로 다소 긴장이 풀렸다.

  "1번 어뢰와 3번 목표의 거리 1,400.  3번 목표 400미터 후방에 발신음, 미끼어뢰로 추정됩니다. 1번 어뢰는 35노트로 접근중…"

  미끼 어뢰는 수상함정이 어뢰를 피하기 위해 함미에서 예인하는 소리 발생장치이다.  어뢰의 목표가 되는 함정의 스크루음과 같은 소리를 내어 어뢰를 유인한다.

  "초계기들 레이더 전파를 발하며 모두 서쪽으로 이동중입니다."

  "2번 목표에서 로켓발사음, RBU-1200으로 추정됩니다."

  발사관제관과 전파관제관, 그리고 소나담당인 최 중사가 거의 동시에 보고했다.함장은 3개의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를 동시에 듣는 기분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전장에서 4명의 참모로부터 동시에 보고를 받으며 명령을 내렸다던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전방에 적함이 있나?"

  함장이 최 중사에게 묻자 최 중사는 고개를 저었다.  강의 유속이 12노트라면 강물 위에 떠있는 배가 현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같은 속도로 상류방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하는데 전투상황에서 이런 짓을 할 멍청한 해군은 없었다.

  "2번 어뢰 해상에 연속된 돌발음! 대잠로켓인 RBU-1200의 폭발음입니다!"

  "수상함정들이 모두 어뢰를 좇는단 말이지? 기가 막히군."

  폭발음의 반향이 함체를 때리자 이 소령이 중국해군을 비웃듯 중얼거렸다.

  "2번 어뢰 와이어 절단! 유도를 상실했습니다. 1번 어뢰, 미끼어뢰와 충돌 직전!"

  최 중사가 보고하자 이 소령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2번 어뢰를 와이어가 끊기기 전에 패시브(음파 수동형 탐지) 상태로 전환해야 된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발사관제관은 아직 200미터의 여유가 있었다고 변명했지만, 전투시에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 법이었다. 아마도 대잠로켓의 폭발에 와이어가 끊겼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어쨋든 중국의 수상함정들은 어뢰와 놀고 있었다. 1번 어뢰는 미끼어뢰를 지나쳐 3번 목표인 녹스급 대잠프리깃함에 접근했다. 목표는 어뢰를 피하기 위해 전속항주중이었으나 어뢰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최 중사의 소나 모니터에 환한 빛이 피어났다.  최 중사가 명중을 외치자 함내에 작은 환성이 일었다.

  함장이 이젠 비교적 여유를 가지며 승무원들을 돌아보았다.수신용 케이블까지 수납되어 할일이 없게된 통신장교는 비디오를 보고 있었고 항해장은 계속 해도를 살피고 있었다.  부함장은 항해일지에 녹스급 프리깃함을 격침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승무원들도 한결 여유를 가지며 업무에 임했다. 전투상황이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소나를 담당한 최 중사만이  계속 잠수함의 침로상에 방해물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한국해군 장보고급 잠수함의 후기형인 성진함은 소노부이의 선과  대잠초계기, 잠수함전용 수상함정 등의 위협을 뿌리치고 후하이만을 지나 다시 아르고 엔진을 가동시키며 홍콩의 신제에 접근했다.  함장은 란타우섬을 왼쪽으로 돌아 홍콩섬으로 방향을 잡을지,  아니면 서쪽으로 돌아 바로 동지나해로 빠질지 고민하고 있었다.

  홍콩섬쪽은 해역이 너무 좁아 회피운동이 필요할 때는 곤란했고 해상을 항해하는 선박이 전혀 보이지 않아 뭔가 불안했다. 동지나해쪽은 당연히 중국의 초계활동이 활발할 것으로 보았다. 부함장 및 항해장과 협의하여 동지나해쪽으로 가려고 결정한 순간에, 운명의 순간이 잠수함을 덮쳤다.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함의 내압선각(耐壓船殼)이  깨지는 소리가 나며 전등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 속에서 쓰러졌다가 다시 비상용 전원이 들어오자 함내 상황을 살피며 바닥에서 일어난 함장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금이간 배관을 통해 사령실로 바닷물이 뿜어지고 있었다. 최 중사는 귀를 감싸쥐며 바닥을 뒹굴었고,  승무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이 쏟아지는 곳을 막으려 했다. 비상용 알루미늄 반창고로 물이 새는 곳을 막고 있는 승무원들을 보며 이들이 함장인 자신보다 위기상황에 대처를 훨씬 더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장은 자신의 할일을 깨달았다.

  "젠장, 기뢰야! 피해상황은?"

  "기관실이 당했습니다. 좌현 밸러스트탱크 파손, 스크루 작동정지!"

  부함장은 의외로 꼿꼿한 자세로 각 부서의 피해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부함장이 기관실의 구역폐쇄를 건의했다.그러나 구역폐쇄는 잠수함의 끝장을 의미한다. 함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동모터 가동, 배수하라! 업트림 최대."

  "기관실의 침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철수명령을 내리고 부상하시는게…"

  함장은 이제서야 이 해역에 민간선박이 전혀 없다는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옴을 깨달았다.  그가 홍콩을 공격하고 광저우로 올라갈 때와 다른 코스를 취한 것이 잘못이었다. 광저우로 올라갈 때처럼 여객선 뒤를 졸졸 따라갔으면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올라갈 때와 같은 코스를 취해야 했다. 그는 패배를 시인했다.

  "기관실 인원 철수하라. 부상한다!"

  성진함은 엔진을 정지시키고 함의 모든 힘을 부상하는데 쏟았다.  마침 잠수함의 심도가 별로 깊지 않았기 때문에  5분만에 심도 60에서 해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함교 위로 올라온 함장이 눈부신 아침 햇살 아래에서 처음 본 것은 잠수함 바로 위를 날고 있는 하얼빈 H-5 대잠초계기와 Z-5 대잠헬기의 무리였다.  멀리 서쪽 해상에서 초계정 세 척과 프리깃함 한 척이 헐떡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꾸역꾸역 함교 밖으로 나갔다. 몇 명은 헬기를 향해 저항하지 않겠다는듯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고, 일부는 구명보트를 물 위에 띄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이 소령은 함과 운명을 함께 할까 생각했으나, 대규모 물량전인 현대전에서는 인명이 훨씬 중요했으므로 한국 해군은 이런 생각을 일축하며,  이런 상황에서는 포로가 되더라도 함을 이탈하도록 교육받았다.  최 중사가 다른 승무원의 부축을 받으며 함교를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귀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최 중사, 수고했어. 미안하군."

  "함장님, 뭐라고요?"

  "수고했다고."

  "죄송하지만 다시 말씀해 주십시요."

  함장이 고막이 터진 최 중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상의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어 뭔가 적었다. 최 중사가 이를 읽으며 화를 냈다.

  "그냥 입만 벙긋거렸다고요? 에이~ "

  스피커를 통해 큰 소리로 중국어가 들려왔다.  함장이 고개를 돌려보니 녹스급 프리깃함에서 잠수함을 향해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자, 전원 퇴함하라!"

  인원점검을 마친 함장도  서둘러 함교를 내려와 구명정에 옮겨 탔다. 중상자만 6명이었지만 한명의 전사자도 없어 불행중 다행이었다. 6명의 장교와 27명의 수병은 4척의 구명정으로 중국군 프리깃함을 향했다. 녹스급의 이 구식 프리깃함에서 브리지가 내려왔다.  이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들이민 중국 해군들이 묵묵히 서서 이들을 맞았다.  선두에 선 함장이 이 프리깃함에 올라와보니 나이가 많아보이는 중국군 군관이 갑판위에 버티고 서 있었다. 중좌 계급장을 단 이 군관의 표정은 어딘가 착잡해 보였다. 그는 이 군관이 대만해군 출신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소령이 거수경례를 했다.

  "단결! 대한민국 해군 소령 이 승렬 외 32명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에 항복합니다.  전시 포로에 관한 협정에 따라 대우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1999. 11. 25  09:30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北京飯店)

  "어서 오시오, 허 동지! 하하하~ "

  "여전히 건강하시니 보기가 좋습니다, 주석님."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리 루이환이 현재 교전당사국인 대한민국 대사 자신을 이렇게 호텔 로비에서부터 맞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주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사를 안내했다. 그러나 주석 뒤에 도열해있는 수행원들은 은연중에 무거운 분위기로 대사일행을 압도하고 있었다.

  대사는 외무부 본청에 근무할 때 서울 성북동자택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했는데,출근길에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때마다 우측에 보이던 허름한 중국집인 북경반점과  이 호텔의 이름이 같은 것을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 호텔은 홀리데이인이나 호텔 샹그릴라 등, 외국계 자본에 의한 호텔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북경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호텔이었다. 신축건물인 꾸이삔러우(貴賓樓)에서는 자금성(紫禁城) 내부가 잘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오늘은 꼭 이 멋진 성을 살펴봐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대사는 주석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주석의 집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허 대사는 수행원으로 대사관에서 문관과 무관 각 한명씩만 데려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 무관과 주석 경호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기싸움이라고 한다던가, 허 대사는 뒷머리가 근질거려 자꾸 이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내 소개하지요. 이분은 해군 사령 창 리엔츙 상장이시고, 이 사람은 제 2포병 사령 쏭 윈펑 중장이오."

  리 주석이 수행원 중에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장성 두 사람을 대사에게 소개했다.  대사는 두 사람과 인사하며 하필이면 핵미사일을 관장하는 전략미사일군 사령관 격인 제 2포병 사령을 데리고 나왔을까 하며 기가 죽었다.

  "자, 앉으시오. 대사."

  "감사합니다, 주석님."

  주석집무실 옆에 있는 접견실의 의자에 주석을 마주보고 단정하게 앉은 그는 중국의 최고실력자인 이 사람을 세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원래는 광동, 광서, 호남, 호북 4개성을 관할하는 광저우 대군구(大軍區)의 사령이었다가 개방과 함께 자본가로 변신한 그는, 내전 이후에 다시 정치가로 변신해 있었다. 격동기의 중국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수완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초강대국의 하나가 되었지만 제 3세계의 관료적 권위주의체제를 답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체제의 정치적 특성은 민중부문이 탈정치화되고  사회갈등 그 자체를 국가발전의 적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며,  관료 위주의 권위주의적 문제해결 방식이 크게 강화된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자본축적 위주의 발전전략이 강화되어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실시된다.  내수시장보다 국제경쟁력이 우선시되어 국민경제의 해외의존도가 심화되며,산업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대중소비재산업을 중심으로 균형있게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전자제품 같은 특수내구재소비재산업과 건설부문을 중심으로 하여 특수계층과 관련되어 부분적으로 확대된다, 라는 것이 관료적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한상진 교수의 논문내용이었다.

  "잠깐만… 주석님, 죄송하지만 커튼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고궁(故宮)을 내려다 보고 싶은데요…"

  주석의 수행원들이 움찔했다. 이틀전, 정치국원 3명이 대낮에 암살된 상황에서 최고실력자인 주석이 암살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철통같은 경비를 믿은 주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커튼을 열라고 명령했다. 수행원들이 서쪽 창문의 커튼을 열자, 대학원에서 중국문화를 전공했던 허 대사는 뛸듯이 창가로 가서 티엔안먼(天安門)과 그 뒤의 고궁박물관으로 쓰이는 쯔진청(紫禁城)의 전경을 보았다.

  초겨울의 흐린 하늘 아래 勞動人民文化宮과 中山公園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인 外朝의 태화전, 중화전과 보화전, 그리고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던 內廷의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다. 허 대사가 감탄사를 연발하자 리 주석이 씨익 웃었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이고 국력의 차이다.’

  같은 시간, 티엔안먼(천안문), 2층 전각 동쪽

  중국 현대사의 상징물인 천안문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는 천안문의 2층, 전각의 처마에 의해 그늘이 진 창문에서 남방계 중국인이 서서히 총을 들어 올렸다.  총은 일반적인 저격용 소총보다 훨씬 컸으나 외관은 조잡해 보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회교전사들이 대공포로 쓰이는 20밀리 벌컨 개틀링건을 분해하여 만든 수제총(手制銃)이었다.

  제작자의 이름을 딴 이 총의 이름은 아브 알 하산,  유효 사정거리가 3,500미나 되며,  장갑 관통능력이 150밀리라고 알려져 있는 엄청난 놈이었다.  아프간의 회교전사들은 이 총으로 높은 산위에서 아래의 러시아 전차를 향해 쏘아 상부장갑을 뚫고  전차를 파괴시켰다고 전해졌다. 볼트액션식의 단발이지만 냉각장치에 문제가 있어서 연속사용이 곤란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23일 낮에 3명의 정치국원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킬러, 암호명 구스타프는 천천히 스코프를 통해  중국 국가주석의 집무실 바로 옆방인 접견실을 훔쳐보았다.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허 대사가 창가에 서 있었고 주석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리창까지의 거리는 레이저측정기를 통해 652미터로 파악했으나 그는 여기에 7미터를 가산했다.그는 창유리의 재질을 이미 알고 있었다. 40밀리 강화방탄유리, 어지간한 기관총에도 뚫리지 않는 놈이었다.

  이 유리의 특징은, 빛이 똑바로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사각에 대해 약 5도 정도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성질이 있으며, 동시에 아래로 3도 정도 기울어져 보인다.  창 밖으로부터의 원거리 저격에서 요인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유리였다. 구스타프는 이미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탄도수정을 했으므로 이제 쏘기만 하면 잡을 수는 있었다. 다만, 그의 퇴로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결점과 함께,  스스로 사격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불안했다. 이것은 스나이퍼에게는 둘 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라고 구스타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베이징판띠엔

  "이번 전쟁은 중조(中朝) 간의 수천년 역사상 매우 불행했던 일이 틀림없소."

  "그렇습니다, 주석님."

  하지만 이 불행을 누가 먼저 자초했느냐가 중요했다. 허 대사는 주석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입을 연 주석의 말은 대사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번에 조선이 먼저 침공하지 않았다면 계속 우호증진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오."

  "….."

  침략국이 구사하는 상투적인 잡아떼기였지만 반박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대사는 생각했다. 그는 주석에게 괜히 꼬투리를 잡혀 회담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주석은 대사의 강한 반발을 우려해 더 이상 이 문제는 캐묻지 않았다.  대사의 등 뒤에 배석한 무관이 순간 움찔했으나,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사가 이곳에 오기 전에 무관에게 몇번이나 다짐을 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제안한 휴전협상에 대해 귀국(貴國)의 총통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중국계 국가에서는 대통령제하의 국가원수를 총통이라고 부른다.  물론 히틀러같은 체제는 아니고, 미국식이나 제 3세계 국가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을 모두 총통이라고 불렀다. 한자로 대통령이라고 써줘도 소용이 없었는데 이는 중국인의 자존심 때문일까? 어쨋든 허 대사는 한국 국가 원수에 대한 호칭을 정정해 주어야만 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휴전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국경선의 원상회복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중국의 요구는 적극 검토하겠지만, 영토할양같은 무리한 요구조건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음… 그럼 배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오?"

  "저희가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배상문제는 결국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문제는 결국 피할 수가 없었다. 대사는 회담의 결렬을 각오했다.

  "허허… 견해차가 너무 크군요."

  "네… 안타깝습니다. 주석님."

  허 대사는 이 만남이 끝나고 가질 기자회견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의미있는 대화가 진행] 되었다는 외교적 수사를 쓰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외교협상이 어떤 진전도 없이 결렬되었음을 뜻한다.  대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런 결과밖에 나올 수 없었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소.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의 복리를 위해 그동안 사문화되었던 두만강 항행권을 보장받고자 하오.영토적 야심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오."

  "인민공화국의 두만강 자유항행권은 이미 보장이 되고 있는줄 압니다만…"

  "두만강은 수심이 너무 낮아요.  대형화물선이 중국영토에 들어올 수 없단 말이오. 조선이 약간만 양보해 준다면 양국의 이익증진에 크게 도움이 될텐데 말이오."

  "중국의 수출입에 선봉지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허 대사가 이중의 암호문을 통해 본국으로부터 받은 전문에는 선봉에 대한 양보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되어있었다.그러나 주석은 지금 집요하게 선봉을 요구하지 않는가? 협상은 이렇게 평행선만 긋고 있었다.

  "귀국의 잠수함 한 척이 오늘 새벽에 광저우를 공격했더군요.  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에 의한 공격인줄 알았소. 그 잠수함은 인민해방군의 해군에게 결국 격침되었지요. 피스라는 용병들만 핵을 맞은 셈이오."

  "….."

  주석은 말을 돌려 은근히 대사를 협박하고 있었다. 잘못 알기는 했지만, 중국이 핵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선택권을 극히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또한, 만약 한국이 중국 영토를 공격하면 언제든지 핵을 쓸 수 있다는 엄포이기도 했다.

  주석의 비서가 다가와서 주석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전했다.  주석이 작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비서는 리모콘으로 벽면의 대형 TV화면을 켰다. 화면을 본 대사가 의아한 눈으로 화면 속의 인물들을 응시했다.

  ‘이 시간에 유엔총회라니… 저 사람은 중국의 주(駐) 유엔대사!’

  뉴욕은 북경보다 14시간이 늦다.  이곳이 아직 아침 10시가 안되었으니 뉴욕은 밤 8시 정도였다. 원래 뉴욕시간으로 내일 아침에 열릴 예정인 총회는 중국의 핵사용에 대한 우려와, 한중전쟁이 3차대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조정하려는 의도로 개회가 추진되었는데  중국의 주장으로 더 일찍 열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중국의 선전전이 한창이었다.  화면 속의 연단에서는 중국의 주 유엔대사인 첸 밍산 대사가 한창 연설 중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적대행위의 중지를 조선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아직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본국에서는 이를 침략행위의 지속 의사로 받아 들이며, 전선에 병력을 대폭 증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요구조건은 간단합니다. 중국 영토에 대한 침략적 적대행위의 중지와 두만강 자유항행권의 실질적 보장입니다.]

  ‘중국영토에 대한 침략행위 중지라고?  겨우 1개 함대도 방어하지 못하여 핵을 쓴 주제에 어찌 대국이랄수가…  자유항행권의 실질적 보장이라. 결국 선봉항을 조차(粗借)해주든지 할양(割讓)하라는 얘긴데, 이건 한반도의 홍콩인가?’

  중국이 태평양으로 바로 나오는 것은 중국을 경계하는 나라들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였다.특히 미국이나 일본은 이를 극력 저지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점령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반도를 아예 포기하고 중국의 세력신장을 수용하겠지만, 이미 중국의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지금 선봉항 조차나 할양은 중국에게 실질적인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므로 이들 나라들이 거부할 것이 분명하다고 대사는 생각했다. 아직은 수세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 국제역학관계가 유리하게 돌아갈 것으로 본 대사는 자신감을 얻었다.

  중국의 위세에 숨죽이며 지내온 동남아시아 각국은 한국이 중국을 막아내자 자신감을 얻어 자국의 군비증강에 한창이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중국의 남사군도 점령 이후 해체되었던  긴급대응군을 재편성하며 해군과 공군 증강에도 열을 올렸다. 남사군도에 대한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해상초계가 공공연히 강화되기도 했으나, 중국은 아직 이에 대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9. 11. 25  10:55  평안북도 선천군 대목산요새

  "기래, 동무들 뎡말 수고들 많아서."

  기자회견이 끝난 요새의 지하 지휘소에는 한국의 국방장관과 북한 인민무력부장 서리 겸 총참모장 최 광 차수,그리고 통일참모본부의 이 종식 차수가 북부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선천군과 철산군, 그리고 구성군의 노농적위대 연대장들은 조국해방전쟁의 전설적 영웅인 이들 앞에서 꼼짝않고 부동자세를 취했다.나이로 봐도 한 세대 앞의 사람들이었고 계급은 까마득하게 높았으니,예비역 중좌와 대좌에 불과한 자신들이 이렇게 마주 앉는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승진과 함께 노농적위대원 모두 현역으로 복귀했다.  중국에게 이들이 훈련이 부족한 예비역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부상당한 저격여단장 최 소장 대신 야간전대대장인 선우 대좌가 저격여단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그는 살아남은 야간전대대와 산악전대대원들 외에, 추가로 시가전대대와 다른 부대 소속이었던 몇 개의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배 윤성 대좌가 지휘하는 대전차대대는 중국 장갑집단군에 대한 효용을 인정받아 부대를 확대개편하여 독자적인 여단이 되었다.

  "동무들을 이렇게 부른 것이래… 부탁을 하기 위함이야."

  "어떤 명령이든 당과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쳐 수행하갔습네다!"

  최 광 차수의 말에 철산군의 연대장으로서 이번에 차 준장과 함께 승진한 대좌가 절도있게 대답했다.  이들과 함께 있는 차 영진 준장은 심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불안함을 느껴 졸음이 확 깨는 기분이었는데, 역시 분위기는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군인이래 당엔히 조국수호를 위해 몸바텨야 합네다! 당과 조국이 부르신다면 저희는 언제라도  원쑤를 향해 비수를 꽂을 각오가 되어 있습네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요!"

  차 준장이 믿고 있던 홍 대좌, 아니, 이번에 소장으로서 인민군 장성의 반열에 오른 홍 종규소장이 나이답지 않게 씩씩하게 대답했다.차 준장은 왜 북한사람들은  항상 조국보다 당을 우선하나 하는 것이 한가지 의문이었다. 사회주의자라서 당을 국가보다 중요시하는 것인가? 조국과 당, 또는 인민, 조국, 당의 순서로 말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했다. 아니, 인류와 세계평화를 위해…  또는 지구환경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위해라고 한다면? 그는 군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라 역시 믿음직 하구만. 기래, 이번 북부군에 최고 영웅 차 동지는 어드렇게 생각하디?"

  차 준장은 최 차수같은 70대 노인의 눈에는  50대 중년도 어린아이처럼 보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겨우 30대 초반인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차 준장은 깜짝 놀라며 대답을 했다.

  "국가 위급시에 전투를 수행함은 군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요. …, 설마 신의주를 북부군 단독으로 점령하라는…?"

  "기래, 역시 이번 조국수호전쟁의 영웅이구만! 동무래 전략가적 소질도 다분히 있구만 기래."

  역시 북부군은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노농적위대로만 전과를 쌓지 않았다. 차 준장 같은 현역 영관급이 지휘를 한 것은 북부군이나, 통일한국 전체로 봐서도 행운이었다.  최 차수는 깜짝 놀라고 있는 차 준장을 응시하며, 이런 훌륭한 인재가 인민군이 아닌 국군에 있는 것이 아깝다며 한탄했다.

  차 준장은 속으로 맙소사를 연발했다. 채 2개 사단이 되지 못하는 얼빠진 예비역들로 어떻게 3개 집단군 병력이 몰려있는 신의주를 친단 말인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집단군은 한국군의 군단에 해당되는 단위이지만 병력구성의 차원이 달랐다. 리아오닝(遼寧)성의 제 39 합성집단군은 평시에도 2개 기계화사단과 1개 오토바이사단, 1개 기갑사단, 각 1개씩의 고사포여단과 포병여단이 있었고, 중국내전 중에는 이것이 거의 2배로 확대개편되었다.  90년대 중반까지 집단군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가 2개 기계화사단과  각 1개씩의 포병, 고사포, 기갑 여단으로 구성된 허뻬이(河北)성의 38집단군이었고,  가장 큰 규모는 각 3개씩의 보병사단과 수비사단, 그리고 각 1개씩의 보병, 고사포 및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에 본부를 둔  선양군구 소속의 제 23집단군이었다.

  1개 집단군의 총병력은  한국군 군단병력의 두배 정도라고 보면 적당했다.미국의 보병사단처럼 전차 200여대로 구성된 전차여단과 헬기 150대로 구성된 항공대대를 예하에 두는 엄청난 부대는 아닐지라도 인민해방군의 현대화계획에 따라 발전된 중국군 보병의 전력은 급속히 신장되어 있었다.

  "1급 군사비밀이디만, 동무들을 믿고 갈차 주갔서.  이 차수, 설명해 주라우!"

  최 차수가 한국 국방장관의 눈치를 보더니  이 차수에게 설명을 미뤘다. 군 지휘권을 모두 통일참모본부에 넘겨준 상황에서 최 차수가 표면에 지나치게 나서는 것은 한국정부 입장에서 보면 우려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최 차수는 한국정부의 눈길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종식 차수는 자신보다 한참 선배이며 권력서열도 어마어마하게 차이나는 최 차수의 명령을 받들어 설명을 시작했다.

  중국은 한반도 점령에 실패하자 선봉지역의 방어에 역점을 두고 이를 핵위협과 협상을 통해 영구점령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  선봉이 중국에 넘어가면 결국 중국의 의도가 성공되고, 앞으로 한국이 중국과의 경제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통일한국군이 선봉지역을 수복하려 했으나 병력의 집중이 안되어 불가하다는 배경설명을 했다.

  "기래서…  어렵겠디만 동무들만으로 신의주를 공격해 줘야 되가서. 우리가 테레비죤 방송을 통해서 북부군의 위용을 과장한거래이 잘 알고 있디? 길고 아까 기자회견도 말야. 선봉에 추가적인 병력증원이 있으면 우린 못이겨. 지금 만주에 있는 중국군 병력의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야 해. 여기 있는 군은 강계쪽으로 빼돌리고 말야. 무슨 뜻인지 알간?"

  "네! 알갔습네다!"

  밀어내기 방식으로 서부전선의 병력을 동부쪽으로 이동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연대장들이 일제히 복명했지만 차 준장은 기가 막혔다.

  "의장님, 만약에 우리가 패해서…"

  차 준장은 당연히 패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군대문화에서 당연한 패전이란 용납되지 않는 용어였다.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야만 했다.

  "신의주에 있는 중국군이 밀고 내려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비부대도 없는 상황이라면 평양까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기건… 그니까 동무들 부대는 양동작전만 수행하라우. 동무들의 임무는 신의주 수복도 아니고 의도적인 패배도 아냐. 기저 공격하는 척만 하라우. 알가서? 길고 급하면 개마고원쪽 병력을 빼내 줄테니끼 최악의 경우에는 방어만 하라우. 불패의 신화를 지닌 상승(常勝) 북부군이니끼 잘 하리라 믿가서."

  최 차수가 끼어들어 이 차수를 도왔다. 결국 이렇게 해서 북부군이라는 허울만 좋은 차 영진 준장의 부대는  대규모 적을 향해 공격해야 되는 어려운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1999. 11. 25  10:15  중국 북경, 베이징판띠엔

  "전쟁에 관련된 거라면 아무래도 총회보다는 안보리가… 허허… 미안하오."

  각국 유엔대사가 한중간의 전쟁에서 중국이 핵을 사용한데 대한 비난 여론이 흐르고 있었으나, 총회의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며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들이 총회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  흐지부지되고 만다. 국가주석이며 총서기인 리 루이환의 속셈은 그것이었다. 한국이 아무리 방어전을 성공리에 수행해 내더라도 이것은 제한전일 경우이다. 핵이 전면에 등장하고 나면 재래식 전쟁은 의미가 없었다. 허 대사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수행원을 보며 말했다.

  "그 리모컨 잠깐 주시겠소?"

  주석의 수행원이 주석의 눈치를 보자 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대사가 리모컨을 받아 벽면 대형TV의 채널을 영국의 BBC방송으로 돌렸다. 한중전쟁에 대한 보도가 한참 이어지고 있었다. 화면에 핵이 폭발한 동지나해 지역의 지도가 나오자 주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다음에는 한반도 지도가 표시되며 이 위로 붉은 화살표와 푸른 화살표가 난무했다. 전투장면이 이어지고 다음에는 대목산요새의 기자회견이 잠깐 나왔다.

  이 보도가 끝나자 앵커가 서울에 있는 특파원을 호출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중년백인인 BBC의 서울 특파원은 고상한 발음의 영국식 영어로 자신은 서울의 국방부 공보실에 있으며,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며 흥분하고 있었다.카메라가 기자회견실 중앙 벽면의 멀티비전 화상을 비쳤다. 몇 개의 스틸 사진이 계속 흘렀다.

  장보고급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209급 잠수함이 어느 섬의 선착장에서 부상한 채로 병참보급선인 천지함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있는 모습이 먼저 나왔다.  중국해군 동해함대를 박살내고 홍콩과 광저우를 공격한 놈들이라며 분노한 주석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조그마한 재래식잠수함들이 이렇듯 활약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다음 사진은 한글이 새겨져 있는 크레인으로 어뢰를 잠수함에 수납하는 것이었다.  흰색인 이 길쭉한 어뢰의 탄두부분에 태극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인민해방군 중장 출신인 주석은 해군이 아니었지만  어뢰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사와의 회견에 배석한 창 리옌충 상장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시오? 상장."

  "주석님, 저건 SLCM… 혹시 핵일지도…"

  창 상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석이 확인을 위해 제 2포병 사령인 쏭 윈펑 중장을 보니 그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주석에게 보고했다.

  "러시아제 신형 아쿨라급 잠수함에 탑재하는  SS-N-21, 나토 코드 샘슨(Sampson)이 틀림없습니다. 533밀리 어뢰발사관에서 발사하는 중거리 순항 핵미사일입니다."

  SS-N-21은 잠수함 발사 순항미사일인 SLCM이며 항속거리는 3,000km이고 탄두는 300kt(킬로톤)급이다. 마하 0.7의 속도로 고도 200미터를 관성유도, 또는 terrain following방식(사전에 미사일의 컴퓨터에 목표까지의 지형을 입력하고 이를 비교하며 비행하는 방식)으로 날아간다.CEP(발사된 숫자의 평균 절반이 형성하는 탄착점)는 150미터로서 정확도가 비교적 높은 미사일이다.

  허 대사는 다소 의외였다.  본국으로부터 이 시간에 영국의 BBC나 미국의 ABC, NBC 등을 키라는 명령을 받긴 했지만, 한국에 핵미사일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게다가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중거리 순항핵 미사일이라니…

  TV화면 안에서도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술렁거렸다. 다음 사진은 더욱 경악할만 했다. 어느 지하기지 사일로에 있는 거대한 SS-18 SATAN의 모습이었다. 역시 태극마크와 한국인 기술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석과 고위장성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SS-18은 전략 탄도미사일로 탄두가 10개나 되는 MIRV(다탄두미사일)이다.

  "빌어먹을 러시아!"

  창 상장이 욕을 퍼부었다. 틀림없이 중국의 한국 점령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가 한국에 핵미사일을 팔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닙니다.  구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공화국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SS-18은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카자흐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게…"

  쏭 중장이 러시아의 핵미사일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와 각 공화국 사이에서는  핵미사일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이 러시아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상당수는 관리미숙으로 이전 대상에서 빠지거나 은닉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핵미사일이 철저한 계수에서 어떻게 빠지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미국의 예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유럽주둔 미군은 중거리핵 전력조약에 따라 유럽 내에 있던 퍼싱미사일의 발사장치를 모두 파괴했다, 라고 국방성에 보고한 후에 또하나의 발사장치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이란의 반정부세력인 인민전사기구에서는 이란이 카자흐스탄으로부터 4개의 핵탄두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92년 12월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은 이를 단순한 루머일 뿐이라고 부인했다.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카자흐의 대통령도 모를 수가 있었다.

  "155밀리 곡사포와 저 유형의 포탄, 저건 전술핵입니다, 주석님.  저것도 러시아제이군요. 저런 종류는 국제 암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쏭 중장이 화면을 보며 설명했다. 주석이 기가 팍 꺾인 모습으로 얼이 빠져 TV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순히 어느나라가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핵의 운송수단, 즉, 핵미사일같은 발사체나 폭격기 등의 운송수단을 가질 때 진정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대사, 당신네 나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어겼소. 조선반도 비핵화선언 말이오."

  주석이 분노에 찬 신음성을 발하며 대사를 노려 보았다. 대사는 담담했다. 허 대사는 어깨가 쑤신듯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천천히 두드렸다.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실은 밖의 저격자에 대한 신호였다. 대사는 주석을 살려 둬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실력자가 등장하여 그가 권력을 확립하기 전에 생길 수 있는 권력공백기에 집단지도체제가 강경화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국정부로서는 참기가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약속보다는 아무래도 생존이 우선…"

  "집어 치우시오!  조선이 핵으로 위협을 하고 있는데, 핵탄두의 보유 숫자로는 중국과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대사는 이 점을 귀국 정부에 분명히 밝히시오. 중국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리 루이환은 벌떡 일어나 허 대사에게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대사가 허탈하게 웃고는 천천히 일어나 수행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같은 시간,  천안문루에서 이 방을 노려보고 있던 암살자 구스타프는 총을 분해하여 가방에 담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거의 눈이 오지 않는 북경의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1999. 11. 25  11:20  일본 도쿄, 비상연립내각 주회의실

  "오부치 의장의 의견이 그렇더라도, 통막은 합의체가 아니겠소? 막장들의 의견이 우선이지요."

  방위청장인 요시다 겐스케가 오부치 통막의장을 공박했다. 어차피 반전론자로 낙인찍힌 늙은 육막장은 필요가 없어서  통막의장으로 승진시킨 사람이 요시다 방위청장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가 핵무장을 하고 군비도 증강한다면 중국과 한국이 우리를 적대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과 러시아도 경계를 할 것이며 당연히 유럽도 경계를 하게 됩니다. 이 경우, 가장 크게 타격을 입는 것은 경제분야입니다.무역량이 감소하고 원자재 수입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의장은 통막의장이지 통산상이 아니잖소?"

  "그렇더라도 핵만은 안됩니다. 국민 여론도 아직은 그렇지만 선제 핵공격을 받는 날에는…"

  "조선을 보시오.  한참 이기고 있다가 핵 한 발에 벌벌 떨고 있지 않소? 만약 조선에 핵이 있었다면 이런 낭패를 겪지는 않을 것이오. 조선은 결국 중국의 핵압력에 굴복하고 말것이란 말이오. 우리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핵을 보유해야 합니다.  일개 테러단체도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데 강대국인 우리 대일본이 핵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아요."

  "핵이 있으면 선제 핵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내 의견이오.  어느 나라든 보복이 두려울테니까. "

  관방장관은  한중간의 전쟁에서 신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핵을 사용한 지금 일본도 핵을 보유해야 하는 당위론을 펴고 있었다.

  어느나라에 핵이 있다면 적국은 핵보복이 두려워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핵이 두려워 선제핵공격에 주력할 수도 있다고 오부치 의장은 생각했다. 이것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단추전쟁이 끝났을 때는 이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방위청장이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허둥대며 TV를 켰다.  급히 자신의 책상에 있는 단말기를 조작하여 채널을 바꿔가며 뭔가를 찾았다.  총리와 대신들이 방위청장을 지켜보자  급하게 한마디 던지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조선에 핵이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가지로.. 녹화한 테입을 보여 드리죠."

  "뭐요?"

  총리와 대신들의 얼굴이 노래졌다.

  "자, 이제 나왔습니다. 보시죠."

  화면에는 중국 총서기가 본 것과 같은 SLCM, SS-18, 곡사포 전술핵탄두 등이 차례로 나왔다. 모든 각료들이 이 화면을 보며 경악했다.

  "이제 물건너 갔습니다. 대륙간탄도탄인 SS-18이 있다면 미국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은 중국보다 핵우위에 섰습니다.  저 화면이 진짜인지는 검토해 봐야겠습니다만…"

  문부상에 이어 대장상이 한탄했다.

  "중조(中朝) 전쟁이 끝나기 전에 다케시마(竹島)는 반환해 줘야 되겠습니다.한국은 핵물질에 대한 IAEA의 감시가 심하자 자체개발보다는 해외수입을 감행한 모양입니다. 틀림없이 러시아의 도움이 있었을겁니다."

  미국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지형을 관측하여 세부지도를 만든 것이 1948년에서 1953년 까지이다. 이 지도에 보면 울릉도 도동항의 북동쪽에 있는 납작한 섬인 죽도가 독도로, 독도는 죽도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백두산의 국경조약에서 쏭화지앙(송화강)을 염두에 두고 동쪽경계로 삼은 토문강(土門江)을  중국이 두만강으로 자의적 해석을 함으로써 조선이 만주 동부인 간도를 잃었듯이,국제관계에서 지역 명칭의 확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이 독도를 죽도라고 하는 한은 언제든지  독도문제는 한일 양국간에 불거질 수 있는 문제였다.

  "안됩니다. 기껏 얻은 다케시마를…  우리도 빨리 핵을 개발해야 합니다. 6개월이면 핵뿐 아니라 실전발사체까지 배치할 수 있다고 했죠?"

  "그렇긴 합니다만 실기(失機)한 것이 아닐지…  미국의 견제도 받을테고요."

  관방장관의 질문에 방위청장이 신중해 졌다.일본의 미래를 가늠할 이 순간에 신중해지지 않을 각료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조선처럼 핵을 수입한다면?

  관방장관이 의견을 제시하자 놀란 각료들이 침묵했다. 일본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핵을 개발할 수도, 수입할 수도 있었다. 핵을 보유한다는 결과는 마찬가지다.조용한 침묵이 흐르더니 그동안 말없이 각료들의 말을 듣기만 하던 총리가 미소를 지으며 운을 떼었다.

  "비상각료회의에 제안된 안건은 국민총동원령과 징병제입니다.  물론 핵개발 문제와 맞물려 있기는 하지만 이것들부터 결정합시다.  어떻소, 열도에 대한 대륙의 위협을 이유로 반도에 자위대를 진군시켜도 되겠소? 조선에서 반대가 심하더라도 말이오."

  "약간 늦긴 했습니다만, 중국군이 완전히 패퇴하기 전에 반도에 진주시켜야죠. 이 경우 조선군과의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진짜로 조선에 핵이 있다면 조선은 핵을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방위청장의 대답에 수상과 각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단 조선반도 진주는 연기되고 자위대 확대개편과 징병제 실시, 핵개발 등의 안건들이 일사천리로 통과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 침공을 전제로 한 작전이었지만 외부에는 중국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일본의 움직임이 있자 일본내 미국과 러시아의 정보기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시체제로 돌입한 자위대의 총지휘는 중앙지휘소로 인계되었다.  도쿄도 미나도쿠 롯폰기에 있는 이 자위대의 작전중추는 최고지휘관이 방위청 장관, 관리책임자는 통합막료감부 사무국장이다. 지하 2층의 종합정보실에는 대형 데이터화면이 있는데, 이것은 육상자위대의 야외통신시스팀, 항공자위대의 뱃지시스팀(Base Air Defence Ground Environment : 자동경계관제 시스팀), 그리고 해상자위대의 자위함대 지휘 지원(SF) 시스팀까지 연결되어 유사시에는 이곳이 일본의 최고급 전쟁 지휘소로서 기능하게 되어 있었다.

  1999. 11. 25  10:20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로비

  한국과 중국의 휴전협상결과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이 호텔의 라운지에는 각국의 외신기자들로 만원이 되었다.  원래 대사의 주석 접견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핵위협을 한 뒤라 협상의 결과를 자신한 중국은 이 정보를 특파원들에게 흘려 협상이 끝날 때는 이미 중국의 모든 외신기자들이 이 정보를 본국에 타전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되었지만  기자를 부른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허 대사가 앞으로의 전쟁을 우려하며  잔뜩 풀이 죽어 나오다가 운집한 기자들을 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통일한국은 중국과 맞먹는 핵강국이었으므로 자신감을 표현해야 했다.  기자들이 주석과 수행원들을 에워싸며 질문공세를 벌였다.

  "협상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휴전은 성립되었습니까? 중국의 요구사항은 무엇이죠?"

  "지금 유엔총회에서는  중국의 핵사용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한 말씀…"

  "한국이 핵을 어떻게 구했습니까?  서울에서는 구입경로에 대한 설명이 없던데요. 핵확산금지조약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까?"

  대사는 과연 이들이 자신에게서 나올만한 정보를 묻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냥 한번 넘겨짚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대사는 영어와 중국어로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숨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겠죠. 다음 협상이 약속된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만나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 평화적으로 이번 사태가 수습되길 바라는 것이 한국민 전체의 소망입니다."

  영어 질문에 대해 영어로 대답한 대사는 다음 질문에 대해 중국어로 대답했다.

  "중국측이 요구한 것은 총서기나 다른 분들께 여쭤보십시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핵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마음일 것입니다.  한국이 핵을 어떻게 구입했는지는 저로서도 알지 못합니다.  핵확산금지조약이라도 국가의 중대위기시에는 보유가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핵 보유에 대한 평등권의 문제도 있고… 상임이사국 5개국만 핵을 보유하란 법은 없잖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핵확산금지조약이 실효상태인 지금…"

  "전문가의 견해로는 한국정부가 발표한 사진이 조작됐다고 하는데 대사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대사는 그 질문을 한 미국계 기자를 쳐다보며 다시 영어로 대답했다. 자신도 방금 알게된 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글쎄요.  저도 실물을 본 것은 아니라서 확실한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아직 한국정부는 이번 전쟁에 관해서 특별히 과장을 하거나 거짓말을 발표한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말입니다."

  대사관에서부터 안내를 맡았던 인민무장경찰의 책임자가 대사에게 신호를 하자 허 대사는 수행원들과 함께  승용차가 준비되어 있는 정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따라붙으며 집요하게 질문했다.

  "대사는 대사관에 연금된 것으로 아는데 적국에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가족들과 함께 기거한다면서요? 구금상태나 다름없잖습니까?"

  "한국대사관은 건물 임대계약기간동안 한국의 영토입니다. 아직은 중국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식료품 구입에 애로를 겪는 점이 불편하지만 중국에 거주하던 일반 한국인들보다는 생명의 위협을 훨씬 덜 받고 있습니다. 다만 본국과 통화할 때 잡음이 심한 것이 문제입니다."

  대사는 중국당국의 감시에 대해 노골적인 반응을 드러냈지만, 그보다는 중국에 있던 한국인 기업가들과 근로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이들이 백주에 중국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했다는 보고는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간첩혐의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집단구타나 폭행에 의해 죽거나 다친 사람이 55명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전황이 한국에 유리하다는 사실이 일반중국인들에게 알려질수록 그 숫자는 늘어나게 될 전망이었다.

  대사는 중국 인민무장경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한국에 과연 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문관과 무관은 도청을 염려하여 대사관에 돌아갈 때까지 한마디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1999. 11. 25  11:40  남양주군 금남리 통일참모본부

  [주중대사로부터 보고를 받았소. 휴전협상은 고사하고 예비협상도 포기해야 할 판이오. 중국의 요구가 집요하단 말이오. 선봉... 그곳을 절대로 주지 않기로 했소.]

  선천에서 지금 막 돌아온 이 차수는  뜻밖에 음울한 얼굴의 대통령을 보아야 했다.  헬기로 오는 길에 참모본부로부터 한국의 핵보유 보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으나  지금은 대통령에게 직접 묻기가 곤란했다.

  [빠른 시일 내에 실지를 모두 회복하고 만주지역에 압박을 가하시오. 확실한 승리 외에 우리가 살 길은 없소.]

  "알갔습네다. 각하!  오늘 중에 신의주와 선봉지역에 대한 공격이 있고 만주에 대한 공격도 몇가지 준비되어 있습네다. 길티만 한가디 확실히 해주셔야 되갔습니다. 핵은 어케된 일입네까?  진짜로 있습네까?"

  대통령이 대형 멀티비전 안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멤버들인 국방장관, 안기부장, 3군 참모총장 등은 화면 이쪽보다는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國家安全保障會議는 헌번 제 91조에 의해 설치되는  필수적인 대통령 자문기구이다.한국헌법상의 통치구조에서 대통령자문기구는 별로 그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하나의 장식적인 기구에 불과하나, 이 기구는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한 전문적인 자문기구이므로 이번 전쟁을 계기로 위상이 급속히 올라갔다.  이 기구의 구성원은 대통령, 국무총리, 통일원장관, 재경원장관, 외무, 내무, 국방장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및  대통령이 위촉하는 약간의 위원으로 이뤄진다.(국가안전보장회의법 2조 1항) 국가 비상시에 위촉되는 정부위원은 3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오. 아니, 최소한 기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우리나라에 없소.]

  "SS-18, SLCM, 길고 곡사포용 핵탄두래 있다고 들었습네다. 이것들은 아이고 다른 거이 있단 말씀입네까?"

  [지금은 말할 수 없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단 말이오.]

  대통령이 당황했는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나라에 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작전을 짜도 좋소. 아니, 그래야만 하오.]

  이게 무슨 귀신 놀음이란 말인가? 하는 것이 참모본부 요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대통령은 아직도 통일참모본부에 감추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양 석민 중장은 섭섭치 않을 수 없었다.양 중장이 안기부장과 국방부 장관의 표정을 살폈다.

  ‘안기부장! 도대체 무슨 짓을…’

  [그렇게 아시고...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소.]

  "….."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군 통수권자인 한국 대통령과 군령권을 쥔 통일참모본부간의 신의가 깨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황급히 통신용 폐쇄회로 멀티비전을 끄자 참모들의 한숨이 이어졌다.

  "이기 안되갔구만, 이거 믿을 수 있가서?"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투덜거리며 창문으로 다가 갔다. 북한강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강 위로 아침안개가 자욱히 퍼졌다.

  ‘남쪽이 역시 따뜻하구만.’

  앞에 보이는 새터 유원지에서는 고교생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였다. 해맑게 웃고있는 청소년들을 보며, 그는 지금 한국이 전쟁 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청소년들의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가 너무 좋았다. 김 대장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1999. 11. 25  10:50  중국 톈진신깡(天津新港) 해수면 아래

  "전진미속, 우현 90도."

  "전진미속, 우현 90도!"

  함장의 명령을 부함장이 복창했다. 한국해군 209급 잠수함의 1번함인 장보고함은 이틀간에 걸쳐 중국측의 SOSUS라인을 뚫고 베이징의 관문인 이곳 톈진항에 도착한 것이다.

  톈진은 명나라 이후에 강남의 곡물을 베이징으로 수송하는 기지로 번창했다. 1860년 베이징조약에 의해 대외무역항으로서 개항되고, 의화단의 난 이후 체결된 1901년의  베이징의정서에 의해 8개국 조계(租界)가 설치되었다.  이후, 이 도시는 베이징과 상하이에 이어 중국 제 3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신깡(新港)은 10만톤급 화물선 4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거대한 부두로 이뤄져 있었다.  다른 중소형 화물선도 다수 접안할 수 있는데, 지금은 대형화물선들의 하역작업이 한참이었다.

  장보고함이 톈진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대잠함정들과 초계기들의 대잠수색망을 뚫었으나 청음소노부이들로 이루어진 소서스라인 돌파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잠수함으로서는 당연히 낮에 공격하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재래식 디젤-일렉트릭 동력장치를 가진 장보고로서는 시간을 아껴야 했다. 이미 항구와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들의 위치는 파악되었다.공격의 결단만이 남은 것이다.

  함장인 서 승원 소령이 잠망경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전투대기는 시키지 않고 반수의 부하들은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어떤 일도 용납되었다.그러나 말이 쉬는 것이지 적지에 들어온 병사로서 누구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상벨이 짧게 두 번 울리자 승무원들이 즉각 선실을 나서며 좁은 통로를 뛰어 전투배치에 임했다.전투배치가 완료되기까지 시계를 보고 있던 함장은 부하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채 20초가 걸리지 않은 것이다.

  부함장인 김 철진 대위는 항해장교와 함께 해도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 해도는 안타깝게도 20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항해장교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데 함장은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괜찮아, 20년 사이에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으니까. 기뢰 방출 준비."

  "기뢰 방출 준비!"

  부함장이 복창했다.  김 대위는 눈이 없는 기뢰가 여객선을 침몰시킬지, 원래의 목표인 화물선을 침몰시킬지 알 수 없었다.  서해에서 중국의 상륙부대를 공격한 것과 이번 임무는 달랐다. 그들은 비무장의 여객선을 침몰시켜 대형참사를 유발할지도 모를 기뢰를 항구에 부설하는 데에 약간 양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나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뢰 1번 부터 12번까지, 300미터 간격, 방출 시작!"

  함장의 명령에 따라 잠수함의 위쪽이 열리고 부력을 얻은 기뢰가 수중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물살을 따라 움직이던 기뢰들 아래쪽에 와이어가 나와 물속 바닥에 부착되었다. 이제 이곳을 지나는 어떠한 종류의 선박도 단박에 부서지게 되었다. 잠수함은 천천히 항구 밖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2번까지 방출 완료!"

  "잠망경 올려!"

  발사관제관의 보고에 따라 함장이 명령을 다시 내리고 잠망경으로 수면 위의 상황을 살폈다. 대낮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잠수함으로서는 금물이었지만 이곳의 바다는 충분히 탁했다. 상공에 초계기가 지나가더라도 육안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소나에서 보고된 대로 부두에는 거대한 화물선이 세 척, 부두와 약간 떨어진 곳에 다른 두척이 하역 대기중이었다.

  "1, 2, 3번 목표에 어뢰 한 발씩 발사 준비!"

  명령 복창과 수령, 준비완료 보고가 이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20여척의 화물선 중에서 사전에 선정된 세 척의 대형화물선이 목표였다.

  "발사…"

  서 소령이 조용히 명령했다. 어뢰관에 물이 들어오고 시동을 건 어뢰가 추진력을 얻어 바다속을 항주했다. 거리가 짧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 척은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하역작업중이던 거대한 크레인이 충격을 받아서인지 서서히 바다쪽으로 무너졌다.  너무 큰 화물선이라서 이들은 즉시 침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망경을 보고 있던 함장은 최소한 두 척은 침몰하리라 예상했다.  김 대위가 모니터를 통해 화물선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현 180도, 기관 전속."

  "우현 180도, 기관 전속!"

  함장의 명령에 부함장이 즉각 복창했다.잠수함이 급하게 외해를 향하고 잠망경에는 두 척의 화물선이 잡혔다.

  "4, 5번 목표에 준비되는 대로 발사. 6,7,8번은 하픈으로."

  "4, 5번 어뢰 발사!  함장님, 한발은 남겨 두시는게… 6,7,8번 발사관 하픈 장전!"

  김 대위가 함장의 명령을 복창하며 조언을 했으나 서 소령은 듣지 않았다. 장보고함은 항만 공격만 명령 받았다.그러나 40km 북쪽에 무엇이 있는가 함장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깡여우티엔(大港油田), 중원지방에서 유일한 유전이었다.

  "하픈의 목표는 바로 이곳!"

  함장이 북경과 톈진지방의 여행팜플렛을 꺼내 발사관제장교에게 주었다.  관제장교가 컴퓨터에 그곳의 위치를 입력하자 목표에 대한 방위와 거리가 나왔다.  관제장교는 이를 하픈에 입력하며, 동시에 비행고도를 충분히 높이 잡았다.대함미사일인 하픈은 산이나 가로수를 무시하기 때문에 명중이 의심스러웠으나 적의 유전에 대한 공격기회를 놓친다면 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관제장교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함장이 즉각 명령을 발했다.

  "하픈 발사. 자, 집에 가자! 전투배치 해제."

  발사절차가 완료되자 함장은 침로를 동쪽으로 잡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함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부함장이 서둘러 함내에 남아있는 무기를 점검했다.

  "어뢰도 없고 하픈도 없고… 걱정되는군."

  부함장인 김 대위가 투덜거렸다. 모항인 진해로 돌아가려면 직선거리로 아직 1,000km는 가야했는데 무기가 없었다. 이때 대규모 대잠수함전 부대를 만나면 저항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함장은 왜 잠수함의 무장을 모두 사용해 버린 것일까?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어뢰 한두발 정도는 남겨 두는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함장은 뻔히 알면서도 무기를 모두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9급 잠수함의 어뢰 장비수는 겨우 14발에 불과하다. 어뢰 1기의 탑재 공간에 하픈 1발, 또는 기뢰 두발 탑재가 가능하므로 사실상 탑재능력은 극히 빈약하다. 장보고함은 기뢰 12발과 하픈 3발, 어뢰 5발을 모두 소비하여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K-2 소총을 점검하도록!"

  김 철진 대위는 장보고함이 완전한 비무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미소지었다. 아직 소총과 권총 몇 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최고 심도로 동쪽을 향해 질주했고, 톈진항의 비극을 연락받은 대잠수함전 부대가 최고속도로 잠수함의 예상탈출로를 더듬었다.

  서 소령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2년 전의 가을밤을 회상하고 있었다.  지금 아내가 된 서클후배 소현이의 차로 서울대 뒷산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학군단 아래의 넓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위산 위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밤하늘은 달빛을 받아 푸른색으로 빛나는듯 했다. 소현은 이야기를 하자고 했으나 그는 그렇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의 존재보다는 그 장소가 훨씬 중요하게 느껴졌다. 차에 있는 오디오를 키자 careless whisper가 흘러 나왔다.  그는 말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 승원 소령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춘천농산물검사소에서 서무과장을 하던 그는 병역을 마치기 위해 사병으로 입대하기 전에 학사장교가 되어 해군에서 복무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학사장교는 함정에 타기 어려웠으나, 그는 해군에 매료되어 진정한 해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결국 최초로 구축함장의 부관이 되었다가 초계정 정장이 되었다. 그는 퇴역하지 않고 해군에 계속 남았다.

  그는 대위로 승진한 후에 잠수함의 부함장이 되었다. 그는 아직 역사가 깊지 않은 한국해군의 잠수함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잠수함의 함장이 될 수 있었다.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전쟁영웅이 되는 것도 결코 바라지 않았다.  다만 잠수함을 몰고 바다를 떠돌고 다니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전쟁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

  그는 아무리 전략적인 필요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민간인 항구를 공격하는 임무는 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잠수함은 몇척 남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잠수함들은 더 위험한 임무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는 뱃놈 친구들 모두가 살아남길 바랐다.

  [지휘소입니다. 현재 중국 구축함 한 척이 접근 중!]

  실내의 스피커를 통해 김 대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소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공격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지나가. 우린 어뢰가 없잖아."

  서 소령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김 철진 대위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마이크를 내렸다.

  ‘누가 누굴 공격해요?’

  1999. 11. 25  11:00  중국 리아오님(遼寧)성 다이렌(따리엔:大連)

  인민군 인민무력부 직속 정찰연대 2대대 소속의 백 지완 대위는 다이렌 시가의 중심인 종산꽝창(中山廣場)의  한 러시아식 건물 2층 창가에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쓰따린루(斯大林路 : 스탈린로)에서는 산동(山東)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한만국경으로 몰려가는 대규모 기갑부대의 시가행진이 한창이었다. 철로가 있었지만 이미 인민해방군의 병력과 장비로 포화상태가 되자,  일부는 이렇게 도로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다. 6방향으로 길이 나있는 방사상의 도로접합점인 이 광장에는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민들이 이들을 환송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이런 공짜 구경을 안놓치지.  기가 막힌 구경을 하겠군. 우리 작전에 약간 방해가 되겠지만…"

  두툼한 중국옷에 털모자를 쓰고, 이 고장의 특산물인 사과를 먹고 있던 백 대위가 손목시계를 본 순간,  역과 항구로부터 동시에 폭음이 울려왔다.

  "1100시 03초…, 현재 기온에서의 음속은 초속 315미터. 거리는 900미터. 역시 정확하구만. 수고해서. 자, 우리도 공격하자우!"

  백 대위가 대원들과 무선으로 연결되는 헤드셋으로  부대원들을 격려하며 동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광장 주변의 건물 옥상에서 각종 화기들이 불을 뿜었다.

  밀란 대전차미사일이 큰 폭음에 놀라 도로 위에 정차해 있던 중국 전차들을 향해 퍼부어지자,  중국군과 구경꾼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뛰어 도망다녔다. 기관총들이 중국군을 구별하여 쓸기 시작했다. 7개의 광장 주위 건물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장 옆의 건물 벽 앞에서 파랗게 질려있던  인민해방군들이 주변 건물 옥상을 향해 무작정 자동소총을 갈기고 있었는데, 이들은 기관총 연사를 받고 왼쪽의 인민해방군부터 한명씩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하얀 벽에 붉은 피가 가득 튀었다. 어떤 인민해방군들은 간신히 건물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고 생각한 순간, 안쪽으로부터의 갑작스런 사격에 옴몸이 갈갈이 찢겼다.

  백 지완 대위는 사격을 하면서도  인민군 최정예인 정찰연대에 왜 이따위 임무를 부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찰연대는 특수부대이긴 하지만 정규전을 수행하는 부대가 아니다. 요인암살이나 납치, 폭파 및 사보타지 등의 특수전이 이 부대의 전공이었다. 역과 항구의 폭파는 이 부대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으나 적지에서 적의 대열을 직접 공격한다는 것은 백 대위의 10여년 군생활 동안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서쪽에 적 응원군!"

  상황이 대충 끝나가는데 부관인 채 중사가 외쳤다.백 대위는 서쪽 도로를 살폈다. 박살난 중국군 전차들 사이로 보병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웃기게도 경찰의 정모와 같은 모자를 쓴 얼치기들이 아닌가? 백 대위는 이들이 전투력이 별로 없는 경찰에 불과하다며  안심을 하고 있는데 다른 대원들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큰일입네다! 인민무장경찰입네다. 이 지역 준군사조직… 병력은 독립대대로 보입네다."

  "젠장, 이들을 다 죽이기 전엔 도망가기 힘들겠군요."

  채 중사에 이어 중국인 차림을 한 안전기획부 요원이 투덜거렸다. 그는 오래 전에 이곳에 침투하여 현지인으로 위장하며 첩보활동에 종사하던 자였다. 그제서야 백 대위도 그의 말에 수긍했다. 다른 지방에서 온 정규군이 아니고 이 지역 출신의 인민무장경찰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게릴라전이란  그 지역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가로 승패가 갈린다. 백 대위가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인민무장경찰은 민간인 경찰과는 달리 거의 정규군 수준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민군 최강인 정찰연대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후퇴하시죠."

  "그럽시다. 동무들, 후퇴하기요! 제 1 지점에서 모인다. 가자!"

  백 대위가 다시 헤드셋을 통해 외치자  두툼한 중국식 누비옷을 입은 대원들이 서둘러 장비를 챙기며 1층 뒷문 쪽으로 뛰었다.  골목길을 뛰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하얗게 솟아 나왔다.  백 대위는 광장쪽에 배치된 40명과 항구 및 기차역 폭파조 10명 중 몇명이나 접선지점에 모일지 걱정되었다.

  "트르륵!"

  "큭!"

  "왁~ 매복이다!"

  뛰어가던 골목 앞쪽에서 총성이 연이어 울리자  선두의 임 하사가 피를 뿌리며 넘어졌다. 백 대위의 일행은 즉시 산개하여 응사하기 시작했다.

  "수류탄 쓰지 마!"

  남한의 안기부 소속이라는 현지협력자는  외침과 동시에 앞으로 뛰어가며 연사를 했다. 채 중사가 수류탄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이미 상황은 끝났다.  안기부원은 중국제 69식 자동소총으로 골목 오른쪽 소화전 뒤에 숨어서 사격하던 인민무장경찰을 사살하고 바닥을 구르며 연이어 왼쪽의 벽에 붙어 있던 두 명을 사살한 것이다. 백 대위가 신호를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정보부원의 전투능력이 이정도인가 하며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채 중사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다시 꽂았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옆골목의 상황을 살피던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의 손가락 신호로 적은 20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아군은 5명에 불과했다.안기부원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가 둘로 줄였다. 다시 하나만 폈을 때 모두에게 긴장감이 돌며 골목을 뛰쳐 나갈 준비를 했다. 그가 새끼손가락을 오무림과 동시에 뛰쳐나가며 사격을 시작했다.백 대위와 그의 3명의 부하들도 같이 뛰어 나갔다.

  가만히 선채 자동으로 사격하는 안기부원과 달리 백 대위는 인민해방군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한 명당 한 발씩 쏘았다. 뒤에 있는 중국군은 같은편이 맞을까봐 이쪽을 향해 사격하지 못했다.그 틈을 파고 들어가 지근거리에서 쏘는 것이다. 백 대위는 총구를 이쪽으로 향한 적에 대해 쏘고 그가 쓰러지는 동안 다른 적을 쏘다가, 앞의 적이 완전히 넘어지고 나서 뒤의 적이 보이면 다시 그들을 향해 쏘았다.  이것은 사격의 정확성 보다는 대단한 배짱과 냉철함이 필요하다. 아군의 숫자가 많은 것은 단순히 방해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백 대위가 알고 있는 백병전의 교리였다.  총성이 멈췄을 때에는 골목에 20구의 중국군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백 대위의 무모한 행동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안기부원이 정신을 차리더니 반대방향의 골목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찰연대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1999. 11. 25  11:55 중국 지린(吉林)성 상공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A-10 공격기의 기장인 부 영철 소령은 아직까지 한번도 그의 비행기의 레이더경보기가 작동하지 않고 만주를 횡단한 것이다. 지상 레이더뿐만 아니라 중국 전투기에 의한 전투초계 레이더 전파도 없었다.  만주지역 공군기지들의 기능이 마비되자 이들을 대신하여 베이징 부근에서 발진하는  중국기들의 짧은 교대시간을 이용하여 저공으로 공중초계라인을 돌파하기는 했지만  미약한 전파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그의 비행기와 동료들은 어느새 장춘에 근접하고 있었다. 아무리 저공비행을 했다지만  지상레이더와 고공의 전투기로 구성된 중국의 대공경계망은 너무 허술해 보였다.

  저공으로 비행하며 보이는 만주의 평원은 온통 눈에 덮여  천지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만주의 눈은 푸석푸석한 가루눈으로 수분이 적어 손으로 쥐어도 뭉쳐지지 않는다. 눈사람도 못만들 눈인 것이다. 바람이 불어 눈가루들이 날아다니며  고운 얼음입자가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왔다.

  부 소령은 잠시도 고도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만주의 평원은 넓게 펼쳐져 있지만 완전한 수평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각도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세심하게 조종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너무 높게 날아 적의 레이더에 걸리거나,  아니면 너무 낮게 날아 지면에 쳐박힐 위험이 있었다.

  길림성의 창춘(長春)과 지린(吉林)시 중간의 체크포인트인 어느 산에 이르자 폭격대와 호위기들은 일제히 세 집단으로 나뉘어 목표를 향했다. 폭탄을 만재한 부 소령의 A-10폭격대는 뒤뚱거리며 천천히 서쪽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강남제비! 살아 있나?"

  "물론입니다. 괭이갈매기."

  "또 여자 꿈꾸는 건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마이크로폰을 가득 채웠다. A-10 썬더볼트 8기와 F-4 팬텀 12기로 구성된 폭격부대를 호위하는 F-16 팰콘 편대의 편대장은 조 장호 소령이 맡았다.  그는 선도기인 김 종구 중위의 기체를 보았다. 비행상태로 보아 최상이었다.  전쟁은 며칠간에 불과했지만 조종사들은 어느새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예비역들이 완전히 현역에 복귀하여 작전에 투입되었고, 공군출신 민항기 조종사들 중에서 F-5E를 몰던 조종사들 상당수가 교육을 받고 F-16 전투기를 조종하게 되었다. 아직 이들의 조종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문제는 있지만,이제 정비만 제대로 된다면 조종사의 피로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목표 15km, 선도편대 앞으로!"

  "아직 적 레이더 활동 없음!"

  4대의 F-16이 폭격부대의 선두에 나섰다.  계곡에 나 있는 창춘과 지린 사이의 도로 위에는  민간 승용차와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그들은 이번 전쟁과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이들을 중국 전투기로 생각을 했는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동서방향으로 난 길을 질주했다.

  "목표 10km!"

  "좋아! 보조 연료탱크 투하, 각자 목표를 향해 분산 돌격!"

  F-16 조종사들이 애프터버너를 가동하며 고도를 높였다. 선도기의 김 종구 중위가 아래를 보니  바둑판처럼 정리된 창춘 시가가 펼쳐져 있었다. 지린성의 성도(省都)이며 구 만주국의 수도였던 창춘은 중국에서도 명문인 지린따슈에(吉林大學), 거대한 자동차공장, 중국 최초의 영화제작소 등으로 유명하다. 김 중위와 F-16편대는 계속 서쪽으로 비행해 창춘공항으로 쇄도했다.

  가장 먼저 목표를 잡은 것은 팬텀기였다. 팬텀은 시가지의 가장 북쪽 로터리인 신파꽝창(新發廣場)의 북서쪽에 있는 중국 공산당 길림성위원회 건물에 고도 5백미터에서 2발의 Mk-82 500 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지연신관을 갖춘 폭탄들은 구 일본의 관동군사령부로 쓰이던 이 건물의 옥상으로 빨려들듯 사라지더니 잠시후 굉음이 울리며 건물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바로 오른쪽을 날던 팬텀은 창춘짠(長春站:기차역)에 펼쳐져 있는 수십 가닥의 철로 위로 Mk-20 클러스터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탄에서 작은 낙하산이 펼쳐지더니  작은 폭발이 일며 수십개의 자폭탄이 되어 땅으로 향했다. 이들이 땅에 부딪히자 역 주변 사방에 불꽃이 연이어 일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부 영철 소령의 A-10은 거대한 목표물을 할당받았다. 창춘 시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쓰따린따지에(斯大林大街) 남쪽 끝의 자동차공장인 長春第一汽車制造廠이었다.  중국에서는 기차를 후어처(火車), 버스를 꽁꽁지처(公共汽車)라고 부른다. 버스와 승용차, 트럭의 집합명사가 지처(汽車)인 것이 한국과 다르다.  이곳에서는 중국 최초의 대형트럭 지에팡(解放)을 제작했으며 요즘도 이를 제작하고 있다. 발전소에서 보육원까지 갖춘 이 공장안에는 버스가 달리며 학교도 10개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큰 공장이다. 이곳이 목표가 된 이유는, 이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 소령은 공장 건물 지붕마다 하나씩의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건물의 수는 많고 폭탄은 너무 적었다. 탑재한 12개의 폭탄은 금방 바닥이 났고, 부 소령은 강력한 GAU-8/A 개틀링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멀쩡한 건물들을 향해 3초씩 발사했다. 탄알 수로는 약 100발씩이었다.  비교적 오래된 건물은 무너지기도 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그는 건물보다는 건물 내부에 있는 생산라인이 파괴되길 바라며 사격한 것이다.  그러나 건물 10여곳을 공격하자 탄창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선도기인 김 종구 중위의 F-16은 창춘비행장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대공포화의 환영을 받았다. 지상으로부터 몇줄기의 25밀리 기관포탄이 하늘로 향했다.  이들이 공항 경비용인 WZ-551 장갑차에서 육안조준에 의해 발사된 것을 확인한 김 중위는 그대로 공격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지상에서 불꽃이 솟아 올랐다.

  "젠장!"

  김 중위는 즉각 레이더 유도 미사일의 경보를 발하고 스플릿S를 취했다.  하프롤을 취한 뒤에 기수를 들어 올려 방위를 180도 바꾸는 이 스플릿 S는 이차대전 때의 프로펠러 시대부터 쓰던 기동법이었다.  이후, 그는 즉시 기수를 내려 땅으로 내려 꽂았다.  미사일이 방향을 바꿔 지상을 향했다.김 중위는 이 미사일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확인하고 틀림없이 고공 요격용 미사일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저공에서 피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 미사일은 속도는 빠르지만 선회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김 중위의 기체가 스치듯 미사일 옆을 지나갔다.  예상대로 저공에서는 근접신관이 작동하지 않았다.미사일은 활주로 옆의 산꼭대기에 쳐박혔다.

  "놀랬지? HQ-2J SAM이야. 러시아제 SA-2 가이드라인과 흡사하지."

  편대장이 설명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편대장을 비롯한 공격대는 어느새 공항 주위에 배치된  미사일과 대공포 참호를 공격하고 있었다. 사방에 불꽃과 연기가 피어 올랐다. 김 중위도 이 파티에 참가했다.

  "이야~ 김 중위의 격추댓수를 넘기겠는데?  지상에 있는 놈들이긴 하지만 말야."

  조 소령은 어느새 중국 전투기를 다섯대나 파괴했다. 김 중위는 기관포로 지상에 그대로 있는 섬-7(MiG-21) 전투기를 파괴하고 고도를 약간 높였다. 중국 전투기들은 이륙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대공포가 간헐적으로 불을 뿜었고,  지상에서는 기지요원들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분주히, 그러나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여기는 강남제비, 비행장의 중국군이 이상하다. 왜 이륙 안하지?"

  "여기는 샛바람. 모르겠지만 적기는 분명히 장난감이 아니다. 연료가 가득 채워져 있고 무장도 되어 있다. 만주에서는 앞으로 며칠간 중국기들이 이착륙을 못한다고 들었다. 냠, 난 7대 파괴."

  김 중위의 윙맨인 김 광열 중위가 대답했다.  적기의 위협이 없자 윙맨까지 폭격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 중위는 기관포로 비행장 외곽에 있는 지상 연료탱크에 사격을 가했다. 몇 발이 연료탱크를 관통하자 엄청난 불길이 김 중위의 기체 뒤로 치솟아 올랐다.

  "비행기들이 집단으로 생리중인가?"

  "푸하~ 그럴지도 모르지."

  대공포가 전멸하자 여유를 갖게 된 조종사들이 농담을 하는데 편대장이 이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공격을 마친 기체는 동쪽으로 향하라! 폭격부대를 지원한다!"

  비행장을 불바다로 만든 F-16편대가 창춘시 상공에 다시 진입했을 때에는 이미 시가는 화재연기로 자욱했다.  폭격을 마친 한국공군 소속의 항공기들은 기수를 남쪽으로 향했다.  구식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기지들은 완전히 무시하며 고공으로 비행했다.  팬텀이 보기와는 달리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그 뒤를 썬더볼트가 헉헉대며 뒤따랐다.최고속도가 마하 2나 되는 팬텀은 한세대 전만해도 최고의 전투기였던 것이다.

  1999. 11. 25  12:1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공격이래 착착 진행되고 있습네다."

  인민군의 김 병수 대장이 의기양양하게 참모들에게 보고했다.그가 담당한 동부전선은 어느새 압록강변의 혜산과 동해안의 청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함경북도의 관모봉(2,541미터)과 청진 남쪽에 있는 경성에서는 지금도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지만 만주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중국군은 계속 북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평안북도 선천 등 서해안 공격을 마친 3개 군단을 빼낸 통일한국군은 병력에서 다소 숨통이 틔여 공세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

  중앙화면에 나온 한반도 지도는 이제 대부분이 통일한국군에 의해 수복되었다는 표시인 푸른색으로 표시되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북한지역의 거의 절반이 중국 점령지역인 노란색으로 표시되었던데 비하면 참모들의 감회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작전 성공입니다. 만주에는 더 이상 인민해방군 마크를 단 비행기가 없습니다."

  "오, 정말 수고했소. 귀환하는 폭격부대는 무사한가요?"

  이 호석 공군중장의 보고를 듣고 가장 기뻐한 참모는 정 지수 육군대장이었다. 진격속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적의 저항이 아니라 대공화망의 구성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가 묻자 이 중장은 중앙화면을 자신의 단말기와 연계시켰다. 3개의 주요 폭격부대가 남진하고 있는 모습이 화살표로 표시되었다. 모두 푸른색, 손해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입니다. E-2C가 이들의 숫자를 세었습니다."

  "오~ 다행이구만. 기런데 왼쪽에 붉은 점들은 머디요?"

  박 정석 해군상장의 질문에 화면을 확인하고 놀란  이 중장이 조기경보경계기를 호출했다. E-2C에서는 그것들이 베이징 근처의 기지에서 긴급발진한 요격기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전투기들의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귀환하는 폭격부대는 이들의 요격을 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붉은 점들은 급속히 푸른 점에 근접하고 있었다. 참모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섬-7, 즉 미그-21의 행동반경은  우리 전투기들보다 더 길지만 아직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안심해도 됩니다. 저 정도 속도로 이만큼 날아왔다면 지금쯤은 연료가 거의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 중장이 참모들을 안심시켰으나 이 차수의 생각은 달랐다. 겨우 확보한 제공권을 잃고 싶지 않았고, 중국전투기들이 경무장에 연료탱크를 달고 항속거리를 연장시켰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기렇다고 해도… 저들이 국경을 넘어 폭격할 수도 있지 않소? 요격부대 출동시키시오!"

  "차수님… 저들이 압록강을 넘는다고 해도 다시 발진했던 기지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만주 평원에 불시착을 하게될 것입니다. 그냥 놔둬도 저들은 이미 끝장입니다. 비교적 신형전투기 100여대가 말입니다. 상당기간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맞붙어서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이 중장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차수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늙고 작달막한 이 사나이는 피로에 지쳐 있었고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야 말로 한민족의 미래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총지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을 위해서 요격기들을 출격시키겠습니다. 차수님."

  이 중장이 참모직권으로 순안비행장에 대기중인 전투기들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두 번의 미사일 공격과 한번의 폭격을 받은 평양 북쪽의 순안비행장에서는 미그-23 전투기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가변후퇴익에 투만스키 R-29B 단발엔진을 장착한 이 방공전투기들은 이륙후 3만 피트까지 상승하여 마하 2 이상의 고속으로 만포 상공을 향했다.

  1999. 11. 25  12:15  서울, 청와대

  "좋아요. 최 차수는 믿지 못한다 칩시다. 그렇다 해도 통참의장인 이 차수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소?"

  "사람 마음은 믿지 못하는 법입니다. 각하!  그리고 이 차수는 최 차수의 명령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지휘체계입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우리의 협력이 깨지면… 비극이오."

  홍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정원에는 잔디가 누렇게 말라 있었다. 안전기획부장은 회의탁자에 놓인 몇 장의 사진을 다시 검토했다. 틀림없이 주조(駐朝)중국대사와 최 광 차수의 비밀회동이었다. 그는 적이 내부에도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고,  그 적을 색출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대통령과의 독대(獨對)는 예정보다 길어졌다.

  "최선을 다해 막아 보겠습니다."

  "….. 최 차수 그는 보통 군인이 아니오. 현재 북한 권력서열 1위에 있는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란 말이오.  내가 최 차수와 직접 전화연락을 해 보겠소."

  "안됩니다!"

  지 효섭 안기부장은 기겁을 하며 대통령을 말렸다. 확실한 증거를 포착할 때까지는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하며,  최 차수 주변에 도청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허허! 만약 도청한 것이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적전분열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 아니오? 지금 제정신이오?"

  "국가원수급의 정치가가 외국의 스파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동독의 예를 보십시요.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라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겠습니까? 통일한국 초대 대통령입니다."

  "어찌 이민족과의 전쟁 상황에서 동족에게  총뿌리를 돌린단 말이오? 그들은 지금까지 훌륭하게 전쟁을 수행해왔소.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의 반역자는 있을 수 없소."

  "중국이 최 차수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토보장을 해주는 대신 중국이 최 차수의 인민군을 지원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실효된 지금 외국군의 개입은 불가능합니다.어쩌면 제 2차 한국전쟁, 그것도 불리한 전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만 두시오! 너무 지나친 말씀이오. 노인의 권력욕이 이 강토를 또 한번 골육상쟁의 지옥으로 만드리라 생각지 않소.  이름 뿐일지도 모를 국가원수의 지위 때문에 영토를 팔아먹… 음….."

  권력욕.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아니, 동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식욕, 성욕과 함께 생명체의 자기보존본능에 속하는 하부본능이었다.  생명의 유한함을 인식하고부터 갖게 되는 본능이라던가?  동물은 자신의 분신인 유전자를 후세까지 전달시키기 위해서 생존경쟁 뿐만 아니라 치열한 유전자 전달경쟁도 하게 되는데, 동족간의 배우자 쟁탈경쟁, 이른바 새끼낳기 투쟁이 그것이다.

  유전자의 전달, 또는 배우자의 독점에서 중요한 것이 권력이다. 권력을 획득한 개체는 그 집단내부의 이성에게 매혹적인 유전자 보유개체로 인식되어 숫컷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극히 유리하다. 인간에게도 권력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 강해서 한국역사상, 아니, 인류역사상 온갖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그렇지요. 늙을수록 성욕이 감퇴되는 만큼 권력욕은 커진다던가. 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욕심이요. 나는 아직 젊으니 차라리 그에게 통일한국 대통령 자리를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소. 그리고 통일이 되면 나는 계속 정치를 하지 않아도 될테고…"

  "안됩니다, 각하! 그건 국가반역죄입니다!"

  안기부장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통이 크다는 평판을 듣는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의 그런 생각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 효섭 안기부장은 목소리를 낮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통일한국의 대통령은 꼭 각하가 되셔야 합니다.  아니, 최소한 우리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장악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힘을 줘선 절대 안됩니다."

  "무슨 소리오?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오. 북한주민들 중에서 통일한국을 이끌 지도자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잖소? 특정지역 주민들을 소외시켜서 그 나라가 제대로 될 것같소? 추악한 지역주의가 지금까지 전체 국민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왔는지 부장도 알고 있지 않소?"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나 외국의 각종 내전 등을 말씀하시는줄 잘 압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입니다. 뼛속부터 빨갱이란 뜻입니다.그들은 통일을 일종의 통일전선전술로 활용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만, 기회가 닿으면 언제라도 흑심을 드러낼 겁니다. 결코 그들에게 권력을 맡겨선 안됩니다. 각하!"

  "허허!  그럼 그들을 영원히 우리 민족으로 받아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오? 너무 하시는구료."

  "동포애와 사상은 별개 문제입니다. 각하나 저나 저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자들일 뿐입니다. 타도대상에 불과하다는 뜻이죠."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들도 많은 양보를 해왔소. 그런 식이면 통일이 안되요."

  "위험한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을 택하겠습니다. 각하!"

  부장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대통령은 이 어려운 시기에 그가 안기부장을 맡은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 부장은 우익을 표방한 관료중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로 알고 있었다. 부총리보다 더 막강한 자리라는 안기부장을 이런 인물에게 준 것이 잘못이었다.  그딴에는 당연한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결심을 밀어 붙인다면 부장은 나를 몰아내는 쪽에 서겠군요."

  "죄송하지만 그럴지도 모릅니다, 각하."

  "부장을 해임할 수도 있는데…"

  "각하의 뜻을 돌릴 수 있다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

  "….."

  "일단 최 차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감시하시오. 하지만 만약 그가 알더라도 섭섭치 않을 수준까지만 하시오.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소. 잘못하면 국가, 아니, 민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요."

  "진의파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안기부장은 만약 최 차수의 반역행위 증거가 드러나면  즉결처분하겠다는 말은 결국 하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섰다. 전시에 정보부서의 위상은 급속히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고, 그는 이를 신경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론 국가반역자에게는 당연히 죽음만이 있었다. 정문을 나설 때,  개전 첫날의 피습 이후 대폭 강화된 청와대의 경비병들이 그의 승용차를 향해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1999. 11. 25  12:20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요새

  대목산 남쪽 양지바른 비탈에서는 오늘 새벽에 죽은 전우들의 장례식이 한창이었다.  북부군 전체가 신의주쪽으로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장례는 서둘러 치뤄졌다. 전사자들은 간단히 염을 하고 정복이 입혀진 채 흰천으로 말린 다음 관도 없이 매장되었다.  고성능 스피커에서 장송곡이 흘러나오다가 멈췄다.  홍 종규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 행사는 지휘관급 군관 전사자 몇 명의 추서와 묵념에 이어  사령관인 차 영진 준장이 연단에 나섰다. 차 준장이 천천히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나갔다.

  "오늘 우리를 떠나가신 영령들은 혼은 비록 육신을 떠났지만 같이 싸웠던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실겁니다. 그분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인답게, 아니, 이 땅의 주인들답게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전투의 지휘관으로서 그분들 대신 살아남았다는 데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제가 지휘관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하여 그분들의 생명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평생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과,  이 전쟁을 막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어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길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원합니다.  저는 지휘관으로서 다시는 이런 큰 피해를,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생명의 손실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가고 있으니 여러분은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리한 행동은 금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참가자들이 약간 웅성거렸다. 지휘관이 하는 추모사라는 것은 청중에게 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산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명령복종이나 영웅적인 행위보다는 생명의 존엄을 강조함으로써  피해자이며 유족들인 청중을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전쟁의 목적과 상관없이 개개인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차 준장의 부관으로서 이번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김 소위는 정복을 입고 유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입술을 물고 있는 모습이 처연해 보였다.  차 준장은 추모사 도중 그녀를 힐끗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외면했다. 장례식 때의 미망인이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와 보인다던가… 원고를 읽으면서도 그는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묘한 부조화를 생각했다. 차 준장이 추도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자 의장병들이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예포가 울리고 희생자들이 매장되었다.

  스피커에서 갑자기 전자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다.장엄한 전주가 길게 이어지는 이 음악은 차 준장이 익히 들어오던 것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데모할 때 부르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아닌가?  북한땅에서 이런 노래를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노래없이 연주만으로 북한 땅에서 울려퍼지는 처연하고 장엄한 이 음악은 차 준장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차 준장은 연단에서 내려와 고급군관들과 함께 유족이며 동시에 인민군 전사이기도 한 장병들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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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우 포병 1개 련대란 말씀입네까?"

  북부군에 새로 배속되어 지금 막 선천시에 도착한  국군 제 6사단 포병연대를 살펴보기 위해 차를 타고 산길을 내려가는 도중 홍 소장이 차 준장에게 항의하듯 되물었지만 차 준장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홍 소장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 준장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지휘관이었다.

  "…,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소만… 우리는 공격하지 않고 견제만 하면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부대는 양공도 아니고 조공도 아니며, 단지 양동부대일 뿐입니다."

  차 준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남북의 군사용어가 달라서 의미가 잘못 전달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같은 단어를 희안하게 의미부여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버릇이 아닌가? 하지만 홍 소장의 표정을 보고 걱정을 덜게 되었다.

  "기래도…  신의주에 인민해방군 2개 병단이 몰려있답네다. 자칫 큰 일이…"

  전면공격도 아니고, 적을 묶어두기 위해 공격하는 척 한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적에게 전력을 들킬 경우에는 혹독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 양동부대의 운명이었다. 차 준장의 어깨가 무겁게 짓눌러졌다.

  국군 제 6사단의 포병 연대장은 말로만 듣던 북부군 사령관이 새까맣게 젊은 사람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차 준장의 소위 임관일이 자신보다 6년이나 늦다는 사실도 알았으나 연대장의 상관은 차 준장이었다. 그는 직접 부대현황을 브리핑하고 차 준장의 명령을 받았다.

  1999. 11. 25  12:23  서울, 청와대

  홍 대통령은 안기부장을 보내고 나서  엄청나게 큰 체구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과학기술부 장관과 함께 들어온 그 과학자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울의 모 사립대학의 생물학과 교수라고 밝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번에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것이 극히 비인도적인 무기라는 것입니다. 물론 핵이나 화학무기, 또는 생물학무기가 다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이것으로 중국을 위협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생물학과 교수이니 당연히 생물학 무기라고 생각한  대통령은 그에게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종의 인종특화(人種特化)무기입니다. 중국인에게만 작용하는 무기죠. 세균전 또는 화학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대통령을 측은하다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이런식의 눈길에 익숙치 않은 대통령은 일순 당황했으나,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자 과기부 장관이 나섰다.

   이 분은 게놈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아서 연구한 과학자십니다. 인체의 유전자 분자구조를 연구하는 이 프로젝트는 세계각국이 경쟁적으로, 또는 협력하에 진행되고 있는데, 이번에 이 박사께서 세계 각 인종별로 독특한 유전자 차이를 밝혀 냈습니다. 성 염색체인 47번 염색체의 위에서 10분의 3 정도에 위치한 이 게놈은, 각 인종의 신체구조를 결정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중국인은 특수한 분자구조물에 대해 극히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이것은 유전공학적으로 인체에 해가 없는 세균을 통해 합성할 수 있으며, 세균 자체의 살포나 그 화학약품의 살포에 의해 중국인을 말살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극히 비인도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국인도 그 보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핵폭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와 이 박사님은 이것을 중국을 위협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경우 이것을 일부 사용할 수도…"

  "무슨 말씀이오? 그런 끔직한 일이… 도대체 상상도 못한 일이 생기다니… 안되오. 절대 사용을 허락할 수 없소. 이것은… 도대체 그 상상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오."

  대통령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한국의 과학자가 중국인의 신체적 약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중국 과학자도 언젠가는 한국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서로에게 사용한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인간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개 테러단체에 의해 인류가 절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난 게놈(Genom) 프로젝트가 유전병의 예방이나 치료같은 의료목적이나 농업생산물의 종자개량처럼  생산적인 곳에만 쓰이는 줄 알고 있소. 이 박사께서는 좀더 그쪽으로 노력을 하고 전쟁은 군인들과 정치가들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면담이 끝나자 과기부 장관과 이 박사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접견실을 떠났다. 이들이 떠나자 홍 대통령은 전화로 과기부 장관을 불러서 그에게 연구비 지원을 하도록 명했다. 과기부 장관의 말투가 밝아졌다. 대통령은 전화를 끊고 자신의 명령을 과기부 장관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되었다.

  과기부 장관은 자신의 진의를 그 프로젝트를 추진하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자신은 진정 인종특화무기의 사용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 속으로는 그런 무기의 확보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 의심했다.

  ‘중국에 핵만 없다면…’

  1999. 11. 25  12:25  자강도 만포 상공

  "이야~ 새까맣게 몰려오는데?"

  김 종구 중위는 E-2C로부터 링크된 레이더 데이터를 확인하며 탄성을 질렀다. 북서쪽에서 IFF(피아식별장치)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항공기들이 떼지어 한국공군 편대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한번 붙어 보려고? 기수 돌려서 같이 갈까? 강남제비."

  "히~ 그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겠다. 근데… 원폭 하나만 있으면 저것들을 한꺼번에 사그리…키키!"

  "켁~~ 웬 원폭? 끔직한 소리다! 피스함대가 핵 때문에 대만 근처에서 아작났다는 말도 못들었어?"

  "이봐! 그만 조용히 못하겠나? 아직 적지 상공이라고."

  "죄송합니다."

  "….."

  한국공군의 조 장호 소령은 살아돌아왔다는 기쁨에 들뜬 부하들을 너무 나무라지 않기로 했다.  중국은 의외로 한만국경쪽의 대공방어가 허술했다.전통적으로 긴장관계인 러시아와의 긴 국경선에는 샘 기지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지만 한반도쪽은 중국도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었다.물론 대공미사일기지의 밀도가 인구가 별로 없는 중국 남서쪽보다 높았으나, 그동안 전통적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던 중러국경과 대만을 마주보고 있는 푸젠성보다는 훨씬 덜한 것이다.  만포상공에 떠있던 E-2C 조기경보기의 전자정보분석을 통해  전투기들의 침입루트를 결정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탈출루트로의 유도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전투기들은 만주를 폭격한 통일한국군을 요격하기 위해 북경 주변의 비행기지에서 긴급출동했으나, 이미 한국공군은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전투기들은 만주가 폭격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돌아가는 한국 전투기들을 공격하기 위해 급속 접근하고 있었다. 주력인 미그-21 계열의 전투기도 마하 2 이상의 속력을 내므로 이들과 폭격대와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만포 상공까지 전진배치되었던  E-2C 조기경보기와 J-STARS 지상전투관제기도 서서히 남쪽으로 물러섰다. 만주폭격이 성공한 지금 필요없는 공중전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자전기들과 폭격대는 만주접경 지역인 만포 상공으로부터 남하하는 것을 확인한 중국전투기들이 급속히 압록강을 넘어 추격했다.

  만포지역은 아직 중국군의 점령하에 있었으나  아침부터 시작된 폭격에 의해 대공미사일 등의 위협적인 요소는 이미 말살된 상태였다. 통일한국군 공군기들과 그 뒤를 추격하는 중국전투기들의 거리가 계속 줄어들었다.

  1999. 11. 25  12:27  자강도 상공 E-2C

  "거리는 100km, 암람의 사정거리 안에 들긴 하지만…  조금 더 접근시키는게 좋겠군."

  장우성 대령이 레이더를 지켜보면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태백산 레이더기지에서 찬밥을 먹던 흔해빠진 그라운드맨(지상근무 공군)에 불과했으나, 이제 한반도 북부 상공에 떠있는 모든 공군기들을 지휘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공군 준장이나 소장인 전투비행단장들은 전투기들이 이륙한 후에는 작전지휘권을 갖지 못한다. 전문관제관의 역량으로 공중전을 지휘하는 것이 한국공군의 정식 지휘체계이기 때문이다.

  중국전투기들은 필사적으로 후퇴하는 한국공군 폭격대를 추적해 만포와 서쪽의 초산, 동쪽의 김형직시(후창)의  세 방향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장 대령은 이 모습을 레이더로 보면서 혀를 찼다.

  "중국은 정말 자존심이 강하군. 100여대의 전투기를 자존심때문에 버리다니. 정말 무모하군. 이봐, 박 대위. 자네 미그-21의 행동반경을 알고 있겠지?"

  E-2C의 부지휘관이자 레이더 관제관인 박 흥수 소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630km입니다. 순항속도로 말입니다.물론 항속거리와 많은 차이가 나죠. 제 계산으로는 앞으로 10분이면 연료가 완전 바닥날 겁니다.압록강을 넘기 전에 벌써 빙고상태가 되었을텐데 돌아가지 않는군요."

  "그래, 앞으로는 중국의 공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이로써 만주의 하늘까지 우리가 장악하겠군. 이놈들은… 시간만 좀 더 끌어주자고. 강 대위, 공격대의 속도를 줄이라고 전하게. 요격대의 속도도 말야, 그 사람들은 초조하겠지만."

  "후후~ 알겠습니다. 공격대 조종사들이 자꾸 뒤를 돌아보겠는데요?"

  통신장교인 강 대위가 귀환하는 폭격대는  속도를 줄이라고 명령하고 요격부대에도 북진을 멈추고 현재의 희천상공에서 선회하도록 명령했다. 장 우성 대령은 이들 무리들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백암산에서 40km! 현재 아군 지대공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입니다. 적 편대와 아군 공격대의 거리 30km!"

  박 소령이 보고하자 장 대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백암산은 희천 북쪽 약 35km에 위치한 적유령산맥의 주봉이다. 해발 1823미터. 원래 인민군의 지대공미사일 발사기지가 있던 곳으로 인민군은 희천을 수복하자 마자 경보병여단을 투입하여 즉시 이곳을 점령했다. 기지시설과 미사일의 보관상태는 의외로 완벽했는데,  포로가 된 중국군 군관의 진술로는 한국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파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곳에는 지금 모두 5기의 지대공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지대공미사일 발사시켜! 공격대 반전, 요격대 좌로 급속 선회시켜!  공격대, 미사일 발사 즉시 이탈하라!"

  강 대위의 통신반이 바빠졌다. 만주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던 전투기들 중에서 암람이나 스패로 등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갖춘 전투기들이 일거에 급반전하여 미사일을 발사했다. 만주폭격에서 주로 호위전투기 역할을 한 F-16전투기들로부터 발사된 100여기의 미사일이 중국 전투기들을 향했다.

  백암산의 미사일 기지도 구식이지만 위력이 큰 SA-2 가이드라인을 발사했다. 기지의 지하에 있는 주 발사기는 미사일 5기를 동시에 발사 및 추적을 했고, 기지 주변에 배치된 3대의 이동식 발사차량에서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미사일들은 수직상승을 하여 한국공군의 공대공미사일 발사를 지금 막 파악하고 회피행동에 들어가려던 선두의 미그기를 산산조각냈다.  탐지거리가 25km에 불과한 미그-21형 전투기들은 15km 전방에서야 스패로 등 공대공미사일을 파악했는데,  회피 타이밍을 잡기 전에 지대공미사일의 습격을 먼저 당한 것이다.

  가이드라인 지대공미사일에는 전시용 예비모드의  레이더 유도신호가 달려 있어서 중국 전투기에 장착된 레이더 경보장치의 비상경보는 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그-21은 룩다운 능력도 없는 전투기였으니 바로 밑에서 올라오는 지상발사 미사일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당했다.

  중거리 미사일 발사능력이 없는 중국 전투기들은 일단 사방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회피하기 바빴다. 초반에 미사일이 미익 바로 뒤에서 폭발하여 플라이트 스핀에 돌입한 편대장 창 대교는 고도 2,000미터에 이르기까지 플라이트 스핀 회복 조작을 계속했으나 실패하자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자신의 기체인 삼각날개의 미그-21 전투기는 한참을 더 추락하여 어느 산 계속에 쳐박혀 불꽃이 피어났다.

  상공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낙하산이 강하하는 주변으로 추락하는 아군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미사일 한 발 발사해 보지도 못한 중국 전투기들은 북서쪽을 향해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창 대교는 지금 자신이 강하하는 지역이 아직은 중국 지상군의  수중에 있기를 바랐으나 회의적이었다. 아침에 받은 전황 브리핑에서도 이 지역은 아군 점령지대였으나 엉뚱하게도 적의 지대공미사일이 날아오지 않았는가?  창 대교는 지상에 접근하자 한바퀴 땅에 구르며 안전하게 착지했다.  눈이 쌓인 산간의 밭에 착지한 그가 낙하산을 벗고 있는데 저 멀리서 트럭이 한 대 접근해왔다. 자신을 발견했는지 트럭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고 약 30미터 전방에서 트럭이 정지했다.

  창 대교는 즉시 권총을 뽑아 들었다.  트럭 뒤쪽에서 몇 명의 보병이 뛰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위장복을 입어서 아군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으나  총을 겨누며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분명 중국어는 아니었다. 창 대교는 권총을 버리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하늘을 보니 상공에는 어떠한 비행기의 궤적도 보이지 않았고,  회색빛 겨울하늘이 그의 처지를 예고하고 있었다.

  1999. 11. 25  12:40  서해, 한국해군 장보고함

  "아웅~ 잘잤다. 그 구축함은 어떻게 됐나?"

  김 철진 대위는 항해장교와 함께 해도를 놓고  한참 씨름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 보았다.  함장인 서 승원 소령이 커다란 머그잔을 들고 발령소 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틀림없이 함장실에서  천천히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탔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함장은 그의 여유에 어이가 없었으나,  현재의 급박한 상황을 함장에게 즉시 보고했다.

  "구축함과의 거리는 계속 5km에서 20km정도입니다. 아마도 적은 우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확신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전속항진과 정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군. 확신했다면 당장 어뢰나 RBU를 발사했겠지."

  함장은 남의 얘기하듯 하며 해도를 살펴보았다.  아직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를 연결한 소서스라인까지 가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고주파탐신음은 없었겠고… 김 대위는 적을 뭘로 알고 있나?"

  "지앙웨이급 프리깃함으로 파악됐습니다.  화베이나 통링 둘 중 하납니다."

  서 소령의 기억에  그 프리깃함들은 대잠전보다는 대수상타격력에 중점을 둔 함정들이었다.  대잠무기는 RBU 1200이던가… 함장이 옆의 단말기를 조작해서 지앙웨이급 프리깃함들의 제원을 확인했다. 90년대 초중반 취역, 배수량 2,200톤급,  최고속도 25노트, 하르빈 대잠헬기, 소나는 에코 5형… 역시 잠수함으로서는 대잠헬기가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 전투함은 엔진소리로 위치가 파악되지만 헬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잠수함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RBU-1200은 러시아에서 개발한 대잠로켓발사기이다. 사정거리 1200에서 1800미터, 탄두중량 34kg의 폭뢰를 5발 연속 발사하는 방식인데, 지앙웨이급에는 5연장 발사기 2기가 있다.  미국이나 서방 각국이 대잠무기로 324밀리 어뢰발사관, 또는 아스록(ASROC : Anti Submarine Rocket Launcher)을 탑재함에 반해,  공산계는 대잠로켓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서 소령이 심도계를 보니 약 8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수함은 수중 항진속도 약 10노트의 무음잠항 중.  이대로 간다면 중국 영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축전지가 떨어져서 잠수함은 부상해야만 할 지경이었다. 부상 항주, 또는 스노클 항주를 위해서라도 일단 이 구축함을 떼어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 소령이 시계를 보더니 급히 엔진정지를 명했다.  잠수함의 속도가 천천히 떨어졌으나 속도는 아직 5노트 이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축전지가 전기공급을 멈추고 기관이 정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은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썰물!"

  부함장이 짧게 외쳤다.  이제서야 승무원들은 그가 왜 여유를 부렸는지 이해가 갔다.  발해만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썰물의 흐름이 잠수함을 한반도쪽으로 천천히 몰고갔다. 잠수함은 완전 무음상태에서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썰물을 세번쯤 이용해야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을거야.  자, 그동안 다들 쉬라구. 하루 반동안 휴가다. 하하!"

  1999. 11. 25  12:55  평안남도 순안비행장

  "자네가 강남제비 김 종구 중위인가?"

  김 중위는 착륙 후에 연료보급을 마치고  기체 옆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번 폭격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중년의 조종사가 다가왔다.  헬멧을 옆에 끼고 서 있는 그의 계급장에는 무궁화 두개가 붙어있었다.  김 중위는 즉시 차렷자세를 취하고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반갑네.  나는 자네와 교대로 이 전투기를 몰게될 복숭아 황 중령이네. 음… 기체 손질상태는 제대로 됐구먼. 자넬 닮아 좀 뺀질뺀질하게 생겼군."

  주변 조종사들이 킥킥댔다. 중령의 콜사인 때문인지, 김 종구 중위가 뺀질뺀질하게 생겼다는 말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김 중위는 한눈에 보기에도 황 중령이 민항기 조종사임을 알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예비역 조종사들이 대거 현역에 복귀했는데,  F-16C/D의 경우 조종사가 부족하여 약 일주일간의 기종변경 훈련을 받은 전 F-5E 조종사들이 김 중위의 편대에 오늘부터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 중령님 콜사인이 좀 독특하시군요."

  전투기의 엔진을 돌아보고 나서 캐노피 밑에 표시된 격추대수를 세고 있던 황 중령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김 중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자넨 복숭아를 본 적 있나?"

  틀림없이 과일을 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김 중위는 황 중령이 자신과 비슷한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황 중령의 외모는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키만 크고 평범한, 또는 약간 멍청하게 보이는 타입이었다.  선글래스 너머로 가끔 번득이는 눈빛은 그가 베테랑 조종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무스탕부터 팬텀과 F-5A 프리덤 파이터, 제공호,  F-5E 타이거까지 몰아본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겨서 뒤집어 놓으면 복숭아가 보입니다."

  옆에 있던 현역 조종사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유유상종이라고, 같은 전투기를 비슷한 사람들이 몰게된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누가 더 잘나가는 제비인지는 두고 볼 일이라며 조종사들이 의미있는 미소를 교환했다.

  "후후… 틀렸네. 바로 뉘여서 다리를 구부려야지 복숭아가 보인다네. 이따가 거울 앞에서 한번 해보게. 그런데 이 기지배 이름이 뭔가? 성감대는 어디지?"

  주변 조종사들이 낄낄대고 김 중위는 한방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개졌다.

  "선영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전체적으로 민감한 편입니다."

  "그래, 길을 잘 들여놨겠지. 내가 즐기기 편하게 말야.  자, 그럼 한번 운우지정을 나눠볼까?"

  동료 조종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황 중령은 사다리를 올라 조종석에 앉았다.  미리 연락이 되었는지 하사관들이 몰려와 스타터를 가동시켰다.  김 중위의 기체가 굉음을 내며 천천히 주기장을 빠져 나갔다. 김 중위는 애인을 남에게 뺏긴 기분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는 기체에 대한 독점권을 잃은 대신  수면과 휴식을 얻게 된 것이다. 김 중위의 F-16,  이제는 김 중위와 황 중령이 공동으로 몰게될 전투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비상했다.  그는 차라리 황 중령 같은 베테랑 조종사에게 전투기를 맡기는 것에 위안을 삼고 조종사휴게실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기지 상공에는 김 중위의 전투기가 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며 조종사들과 지상근무요원들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공중 3회전과 스플릿S 등의 곡예비행이었는데 황 중령의 조종은 아주 부드러웠다.  여자 다루던 솜씨라고 김 중위가 투덜거렸다.

  1999. 11. 25  13:05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식사 잘 하셨습니까? 방금 집계가 끝났습니다."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을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들은  이 호석 공군 중장이 전과보고를 하자 10년 묶은 체증이 씻기는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승리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북경군구에서 발진한 100여기의 중국 전투기 중에서 안전하게 압록강을 넘어 도주한 전투기는 30여기에 불과했다. 지상발사 미사일에 17기, 공격대의 공대공 미사일 일제발사에 24기,  요격부대의 공격에 31기 등 모두 72기의 중국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나머지 도주한 중국 전투기들도 애프터 버너를 썼기 때문에  연료가 떨어져 만주 곳곳에 비상착륙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아군의 피해는 미그-23 전투기 6기.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1982년 레바논 공중전에서 기록된 56 대 1이나  포클랜드에서의 26 대 0에는 못미치지만 어쨋든 큰 승리였다.

  "이 정도 비율만 되면 중국의 전투기 4,000여대도 별게 아니겠습니다. 중국이 신형기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러시아가 최신형 전투기를 중국에 인도하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수고 많았소. 이제 걱정은 없겠소. 단 한가지를 빼면…"

  이 차수의 말에 갑자기 참모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핵무기로 두둘겨 맞을 가능성이 계속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 국지전에서의 승리는 전략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지나해의 피스함대는 아직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여서 통일참모본부는 사실상 함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해상초계기가 최대한 남진하여 해상수색을 계속했으나 아직은 방사능에 의한 델린저 효과가 강하여 전파수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1999. 11. 25  14:10  평안북도 선천 대목산

  ‘젠장, 부가티 EB110 슈퍼 스포츠!’

  차 영진은 자신의 차를 스쳐 지나가는  검은 광택의 스포츠카를 좇아 속도를 올렸다. 다른 차에 추월당하는 것은 아직까지 젊은 그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수치로 간주되었다. 본능적으로 페달에 힘이 가해졌다. 그의 구형 프라이드는 이미 시속 240km를 넘고 있었다.  반대편 차선을 운행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의 눈을 자극했다.

  유선형의 스포츠카는 벌써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고 차 영진은 죽어라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나 610마력의 고출력을 자랑하는 이 슈퍼 스포츠와의 거리는 좀체로 줄어들지 않았다. 좇아오는 프라이드를 발견했는지 스포츠카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좋아, 조금만 더 가면 회전코스다.중부고속도로에서 잔뼈가 굵은 내 솜씨를 보여주지.’

  앞서가는 스포츠카가 급커브를 발견했는지 뒷쪽의 브레이크등이 켜졌다. 차 영진도 엑셀에서 발을 떼었다. 그의 차는 스포츠카와 거의 동시에 회전코스에 진입했다.  스포츠카는 1차선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차 영진은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와 스포츠카 사이의 작은 공간을 파고 들었다.

  차 영진은 커브에서 엑셀과 브레이크를 한발로 동시에 밟았다.  그는 커브길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스포츠카와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스포츠카는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커브 중에 2차선으로 밀리는 것이 더 두려웠는지 차선을 비켜 주지 않았다.

  ‘추월!’

  드디어 차 영진은 10여 미터를 앞서 나갔다.그가 득의만면해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광폭한 엔진음 소리가 들리더니 스포츠카가 맹렬한 속도로 추격해 왔다. 백미러로 보니 거리가 거의 좁혀지고 있었다.

  ‘이런, 한계다…’

  그는 1,300cc 엔진 자체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했다. 현재 직선코스에서도 가속도 0, 더 이상의 속도가 붙지 않았다.  엔진을 튠업하고 강제공기와류장치를 다는 등, 별의별 장치를 다 갖추었으나 시속 250km를 약간 상회하는 것이 한계였다. RPM 미터는 6,000에서 멈춰 있었다.

  스포츠카는 그의 차 범퍼 뒤 20cm까지 바짝 접근했다. 앞차의 이동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차의 뒤쪽은 기압이 낮아지는데, 이를 이용하여 뒷차는 엔진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앞차와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 경주차들의 경기에서는 추월 직전에 많이 쓰는 기술이었다.

  반대편 차선에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보이자, 백미러를 통해 뒷차의 운전자를 보았다. 뒷차 운전자의 선글래스 뒤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의외로 젊은 여성이 아닌가?

  스포츠카와의 거리가 약간 멀어진다 싶더니 뒷차가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그러더니 금새 자신의 차를 추월하고 말았다.  차 영진이 한숨을 쉬는데 앞차가 비상등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우측 깜빡이를 켜고 2차선으로 위치를 옮겼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차 영진은 속도를 줄이고 2차선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가니 고속도로 휴게소가 보였다.

  "새파란 애송인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저씨로군요. 반가와요. 저는 김 혜선이라고 해요."

  늘씬한 키의 아가씨가 먼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선글래스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싱싱하고 젊어 보였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전 아직 20대 총각입니다. 만 29세 11개월이죠."

  그는 악수를 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그러세요? 저는 스물 넷이여요.  근데 아저씨 머리가 짧은 걸 보니 운동선수세요?  아니면 군인?  설마 폭력조직에 계신 분은 아니시겠죠? 호호~ "

  "크… 군인입니다.부대에서는 무지막지하게 탱크를 몰고 다녔죠. 가끔 배고플 땐 감자밭을 짓뭉개는 수도 있지만…"

  "어머, 그래요?  군인들은 요즘도 배가 고픈가요? "

  그녀는 군인들이 전차를 몰고 감자밭을 뒤집어 엎고 나서,  옹기종기 모여 쪼그리고 앉아 감자를 구워 먹는 것을 상상하며 꺄르르 웃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꽤 오래 이루어졌다.  부산이 고향이고 지금은 한국 과학기술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직장이 있는 유성의 어느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대전의 육군본부에서 파견근무 중이던 그는 자주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았고, 주말에는 함께 멀리 여행을 가기도 했다.

  속초가 가장 좋았다. 겨울의 동해바다는 모든 것을 잊게 하고 그들에게 평안과 휴식을 주었다.그러나 차 영진이 근무지를 옮기자 자연히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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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군의 실제 지휘관인 차 영진 준장의 자는 모습을 보며, 통신군관이며 그의 부관인 김 중위는 그를 깨우기가 꺼려졌다.차 준장에게는 실로 오랜만의 수면이었고,  이 사실은 김 중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 준장의 자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이 미소를 짓다가 계속해서 안타까움과 공포가 서렸다.악몽을 꾸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김 중위는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사령관 동지!  기만 일어 나시기요."

  김 중위가 흔들어 깨우자 차 준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 잠이 덜깼는지 흐리멍텅한 표정이었다.

  "날래 신의주 방면으로 출동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

  차 준장이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실로 오래간만에 꿀맛같은 잠이었는데,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의 교육과 훈련, 대부분의 근무시간은 다 이런 전쟁상황에 대비해  국가에서 투자한 자본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의 밥값을 해야만 했다.

  "출동준비는 다 되었소?"

  "기러습네다. 전원 승차 완료됐습네다."

  차 준장은 또 이를 닦을 시간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지쳐 있을 병사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1999. 11. 25  14:25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P-3C 초계기로부터 급전! 피스와 우크라이나가 무사하답니다!"

  한국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이 급전을 받아  이를 참모들에게 보고하자 참모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그들은 함대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러시아제 쿠츠네초프급 전투항모와 슬라바급 중순양함의 생존은 핵전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생존은 항모와 순양함의 전력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의 위치는 어떻게 됩니까?"

  반전전사집단 피스에서 파견된 연락관인 짜르는 그동안의 초조함에서 벗어나 활기를 띠고 있었다.  영어에는 능숙하지만 러시아어는 아직 숙달되지 않은 인 한수 중위가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쓰는 짜르의 말을 통역하기 바빴다.

  인 중위는 짜르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며,  혹시 러시아가 한중전쟁에 깊숙히 관련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전전사집단 피스라는 것이 생긴지 수십년이 되었다지만,  웬만한 국가의 무력수준을 넘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핵항모와 순양함이라니… 그리고 이 전투함들의 승무원들 대다수가 러시아 출신이 아닌가? 인 중위는 한중전쟁 뒤에 숨어서 바삐 움직이고 있을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역할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체 하는지, 피스에 대한 병참 및 정보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현재 오키나와 북방 40km, 이헤야섬 서쪽에서 제주도 방면으로 급속항진 중입니다. 이것은 일본 해상자위대의 비암호 통신문을 초계기에서 청취한 것입니다. 아직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함대의 통신능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본 자위대 소속 함대와 항공기들이 계속 추적 중입니다만, 조우전은 있을 것같지 않다고 합니다."

  "이 나쁜 쪽발이들!"

  심 중장이 보고하자 한국 육군 정 지수 대장의 입에서 급기야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한국이 중국에 점령되면 일본의 방위에도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한국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주지 않고 은근히 방해만 하는 일본이 정말 싫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향하는 화물선들은 걸핏하면 일본 해상자위대의 임검에 걸려 해상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군수품과 생필품, 원자재들이 일본 자위대 때문에 해상에서 발이 묶이는 일이 허다해서,  요즘 한일간에는 외교전이 한창이었다.

  "독도만 해도 그러더니… 중국을 몰아내고 나면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거 너무 흥분하디 말기요. 일본을 칠 힘은 없으니끼."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정 대장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전쟁은 감정만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번 한중전쟁을 총지휘하는 통일참모본부의 참모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했다.

  "신의주 폭격에 동원된 항공력은 얼마나 되오?"

  이 종식 차수가 한국 공군의 이 호석 중장에게 묻자,  참모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 중장이 단말기를 조작했다. 현재 폭격부대의 위치가 중앙화면에 표시되었다.  이 차수는 회의진행 대부분을 맡아 해주었던 양 석민 중장의 존재가 아쉬웠다.

  양 중장은 ‘작전 장마’의 작전 책임자로서, 상황에 따라 작전에 직접 투입될지도 모른다고 연락해왔다.  이 차수는 그의 행동력은 높이 샀으나 지휘관이 할 일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모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자신이었고, 다음은 사실상 인민군 장성들의 군문 종사기간이 국군 참모들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나 실세는 한국군의 정 지수 육군대장이었다.  정 대장은 대통령과 국방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다른 국군참모들을 사실상 감독하며,  또한 그의 주요업무 중에 하나는 참모본부의 상황을 국방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예비역 조종사들의 투입으로 저위협 상황에 대한  대처가 수월해 졌습니다. 호위는 현역이, 그리고 폭격과 수송은 주로 예비역 조종사들이 맡고 있습니다. 물론 기체의 피로도는 극에 달해서 수명이 훨씬 짧아지고 있습니다만.

  현재 상황입니다. 공격대는 현재 신의주 폭격위치에 있습니다. 첫 공격은 스탠드 오프(stand-off : 원격 공격)이지만 호위기들이 적의 대공진지들을 제압하고 나면 정밀 근접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호석 중장이 단말기를 다시 조작했다. 화면에는 신의주 시가가 실시간으로 영상전송이 되고 있었다.  신의주는 이미 인민군의 스커드 미사일에 피해를 입어 시가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카메라 포드를 장착한 드래곤 플라이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현재 청와대와 국방부, 인민무력부 등에서도  시청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폭격 시작시간입니다."

  화면에는 팬텀기에서 발사된 로켓탄들이 연기를 길게 끌며 신의주 시가지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이들의 임무는 중국측의 대공진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공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면 대기하던 호위기들이 즉시 근접공격, 또는 대레이더 미사일 공격을  가하는 작전이었는데, 다만, 아군기의 손실은 필연적인 작전이었다.

  "신의주에는 아직 인민들이 남아……."

  박 정석 상장이 신음성을 흘렸다. 아군에 의해 시민들이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선천 이남 지방에서는 인민들이 피난, 또는 현지 입대했지만 압록강 부근 지역 주민들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이들이 입을 피해를 걱정했지만 주공을 신의주쪽인 것으로 중국을 호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참모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못난 군대… 신의주에는 약 25만의 시민과 함께 20여만의 중국군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군사시설, 또는 중국군 집결지에만 정밀한 공격을 하더라도  시민의 피해 발생은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지금의 무차별 폭격에 얼마나 많은 시민의 피해가 생길까…

  1999. 11. 25  14:55  평안남도 순안 비행장

  "우리 선영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황 중령님."

  김 종구 중위는 그동안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귀환한 기체의 상태가 깨끗해서 너무 기뻤다. 주변에 사람들만 없다면 당장 전투기에 입을 맞추고 껴안을 기색이었다.  연료보급을 마치고 주기장에 도착한 황 중령이 사다리를 내려오며 말했다.

  "뭐, 내 애인도 되는데…"

  "윽….."

  "뭐해? 빨리 이륙준비 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김 중위는 투덜거리며 전투기에 탑승했다. 하사관들이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중에 관제탑으로부터 임무부여를 받았는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중국 전투기들의 내습을 요격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전투기가 부여받는 전형적인 임무인 전투공중초계(CAP)였다.  잿빛 하늘 아래에는 또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9기의 F-16이 이륙 즉시 편대진형을 갖추고 북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그중 한 대에는 한국군의 공군참모총장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있었는데, 그가 순안비행장에 나타날 때부터  이미 뉴스의 촛점이 되어, 기자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방송국과 신문사에 전송하고 있었다.

  ‘상징적 의미인가? 아니면 또다른 작전인가?’

  김 중위는 특이한 편대원의 존재에 껄끄러웠지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전투기에 탑승한 이상 공군참모총장도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윙맨이 딸린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전투가 발생되면 즉시 이탈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투기들은 3만 피트 상공에 도달하자 E-2C의 명령을 수신했다. 산둥 반도의 칭따오(靑島)쪽에서 50여기의 전투기가  신의주쪽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요격하라는 명령이었다.기종은 미그-29가 24대였고 나머지는 미그-23의 중국제인 F-9이었다.

  "헉… 풀크럼이 24대!  우린 쨉이 안되잖아? 이거."

  "최소한 F-14나 F-15는 주고 싸우라고 해야지.  지원도 없다니, 미쳤나? 여긴 공참총장도 계시다고!"

  편대원들의 항의가 대단했으나 편대장인 조 장호 소령이 기수를 미그쪽으로 돌릴 것을 명령했다. 전투기들이 일사분란하게 남서쪽으로 선회했으나 조종사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그-29는 미국의 잘나간다는 전투기인 F-14,15,18을 모조리 아작낸 전투기입니다. 지금 숫적으로도 상대가 안되고요. 편대장님! 재고해 주십시요. 이런 승산없는 전투에 우릴 내몰겠다는 겁니까?"

  "이봐!  그건 독일 조종사가 몰았을 때의 야그야. 실전에서는 정반대였잖아? 글고 저치들은 중국인들이라고. 겁낼 것 없어. 그리고… 가속력은 딸리지만 선회성능은 F-16이 더 낫고…"

  "저건 레이더 능력이 딸리는 보통의 미그가 아니라고요. 미국제 전투기들도 ECM에서는 저들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저들이 알라모라도 갖추고 있으면 우린 접근해 보기도 전에 전멸입니다. 총장님, 아니, 해동청 46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 기선 대위가 공군참모총장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총장은 묵묵부답이었고 한참만에 들려온 대답은 조종사들의 기대를 꺾었다.

  "자네들은 편대장의 명령을 무시할건가?"

  F-16과 미그-29의 거리는 약 130km,  사정거리 75km의 암람이나 45km인 스패로 공대공미사일의 사정거리 훨씬 밖이었으나, 러시아제 알라모의 사정거리가 170km이므로 이들을 발사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다만,  중국전투기의 레이더가 미사일의 성능을 따라 줄지는 미지수였다. 러시아는 종종 수출하는  전투기의 성능을 떨어뜨린채 판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 전투기들은 한국공군기들을 발견했는지  이쪽으로 기수를 틀고 있었다.

  "높은산, 썰렁펭귄 선두로!  유효 사정거리를 비슷하게라도 해야지."

  편대장의 명령에 따라 강력한 ECM포드를 장착한 2기의 F-16이 좌우로 전개하여 선두로 나섰다.  적기의 레이더 유효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하는 ECM은 그러나 아군기들의 위치를 드러내는 역할도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만약 적기의 ECCM(대전자전)능력이 아군기의 ECM보다 우월하다면 이들은 정말 바보같은 짓을 하게된 셈이다.

  전자전 포드를 갖춘 전투기들은 계속 진행하고 나머지 전투기들은 선회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도는 2만 5천. 속도도 약간 줄였으므로 전자전을 수행하고 있는 전투기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다.선두와 미그기의 거리는 약 60km로 근접했다.

  "적, 대공미사일 발사! 약 40기, 맙소사! 마하 4.5!"

  강력한 전파방해전을 수행하던 백 대위가 비명을 지르자 편대장이 즉시 명령을 내렸다.  미사일은 모두 ECM포드 장착기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전자전기들이 중국 전투기들의 레이더를 속였다는 뜻이 된다.

  "아크리드야!! 암람 발사! SAR이니 걱정 없어, 먼저 치라구!"

  편대장인 조 장호 소령은 부하들이 명령을 수신하기도 전에  이미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 6기의 전투기들이 4발씩 합 28기의 암람 중거리미사일을 날렸다.  암람은 아크리드에 비해 속도가 약간 느리지만,  러시아제 아크리드의 약점은 Semi-Active Radar, 미사일이 목표에 명중할 때까지  계속 전투기가 목표를 향해 레이더를 비춰주고 있어야 했다. 미사일 자체에 레이더가 내장된 암람에 비해 불리한 점이다.

  최근에 와서 공중전에 대비한 각국의 공중무기 개발 경향은 전투기의 탐지능력 강화와 공대공 미사일의 fire-and-forget 능력 개발로 집중되었다. 미사일의 명중율이 높아지면서 근접전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이다. 공대공미사일의 명중율이 형편없었던 개발초기나 베트남전 때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부분이다.

  미사일을 발사한 중국 전투기들은 접근해 오는 미사일을 회피하여 자신이 발사한 미사일의 레이더 유도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계속 미사일을 유도하여 한국군의 미사일에 명중될 위험을 안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역시 예상대로 중국전투기들은 미사일의 유도를 포기하고 급선회했다. 한국에 F-16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으나 중국에는 신예기인 미그-29와 수호이-27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 중위의 레이더에는 회피행동을 하는 중국전투기들과 이들을 추적하는 미사일의 궤적이 교차되고 있었다.

  "오, 예~~~ 6기 격추!"

  중국 전투기들이 발사한 미사일은 유도를 상실하자 모두 빗나갔으나, 한국 전투기들이 발사한 미사일에 의해  8대의 중국 전투기들이 격추되었다. 양측 전투기들의 거리는 어느새 40 km로 접근했다. 또 한대의 중국 전투기가 격추되었으나 미그-29인지, 아니면 F-9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스패로 락온! 자, 발사 후 돌입이겠죠?"

  중국전투기들은 아직도 미사일을 피하기 바빴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편대장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김 중위는 남은 스패로 미사일 발사준비를 이미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미사일을 모두 소비하고 나면 이제 근접공중전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대장의 명령은 뜻밖이었다.

   "긴급 선회, 기지로 돌아간다."

  편대장은 부하들의 명령수령 확인도 생략한 채 바로 선회했다. 그 뒤를 참모총장과 2대의 전투기가 따르자  김 중위와 다른 두 대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그들을 따랐다. 중국 전투기들이 반격을 시작했으나 ECM포드 장착기들이 암람을 발사하자 다시 중국 전투기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회피하기 바빴다.  또다시 상공에 불꽃이 피었다.

  "괭이갈매기, 왜 그러시죠?"

  김 중위는 편대장이 전투를 피한 것에 대해 궁금해졌다. 약간 무모할 정도로 공중전을 즐기던 조 소령이 아니었던가? 그가 싸움을 피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모하게도 50여기의 적기를 향해 공격명령을 내리더니, 갑자기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조 소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고… 중국 전투기들의 미사일 무장에 대해 재검토 해야겠어. 아크리드라니… 해동청 46은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편대장이 귀한 손님인 공군참모총장을 호출했다. 그가 받은 정보브리핑에서 중국의 구식 전투기들이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편대장이 한 질문은 약간의 항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네.  벨로루시에서 중국에 무기를 판매했다더니 저것들이구먼. 앞으로는 전쟁이 더 힘들어질거야. 자네들도 조심하게."

  그동안 한국 전투기들은 상대적으로 미사일 무장이 빈약한 중국 전투기들만을 상대해 왔다.수호이-27의 절반은 남해해전에서 한국공군의 덫에 걸려 전멸했고, 미그-29는 피스함대 함재기들과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나머지 미그나 섬형 전투기들은 숫자는 많았지만 레이더 유도형의 미사일을 탑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전황은 불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분명히 확인했지만 미그-23 유형인 F-9에서도 반능동형이기는 하지만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른 전투기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체 레이더로 조준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중국이 보유한 수천대의 전투기들은 어제까지의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구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소련무기의 분배문제는 구 연방 참가국 사이에서 항상 분쟁의 불씨가 되어 왔다. 러시아는 흑해함대나 다른 전투기 등 뿐만 아니라  핵무기에 있어서도 확실한 통제권을 확립하지 못했다. 이들 무기류가 이번 한중전쟁을 맞아 한국과 중국에 흘러들고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일본과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도 구 소련의 무기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중국의 한국점령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은근히 한국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벨로루시(백러시아) 등의 다른 CIS 국가들은 남의 일일 뿐이었다.중국이 보유한 구 소련제 무기들에 대한 부품과 소모성 무기들의 공급은  이런 경로로 이뤄지고 있었다.

  공군참모총장과 조 소령, 김 중위 등은 무거운 날개짓으로 기지로 귀환했다. 기자들이 공군참모총장의 무사귀환과 적기 격추를 축하하며 취재경쟁에 열을 올렸다. 조 소령은 참모총장이 3기의 적기를 격추시켰다며 기자들 앞에서 과장했는데,참모총장은 쑥쓰러운듯 미소만 짓고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김 중위는 자신의 격추댓수가 한 대 줄어들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1999. 11. 25  15:30  평안북도 신의주, 화평동 아파트 단지

  신의주 시가에 대한 통일한국군의 대대적 공습에 이어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신의주를 기습점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신의주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신의주를 수복하려는 통일한국군에 의해서 신의주 시내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었다.미처 신의주를 빠져나가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들과 인민군 포로들,  그리고 중국군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바이, 우리는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오.  아빠뜨 방공호에 꼼짝없이 갇혀서 말이오."

  신의주 제1사범대학 교수인 리 태윤은 포성이 울릴 때마다 휴대용 TV 수상기만 희미하게 켜진 지하방공호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TV뉴스에서도 신의주 폭격과 포격에 관한 보도가 한창이었다.  한국공군의 촬영뿐만 아니라, 어떻게 신의주에 들어 왔는지 미국 CNN과 BBC의 종군기자들이 촬영한 화면도 함께 보도되었다.  북한제 방사포에서 발사된 로켓탄들이 시가 곳곳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여기에 한국 육군의 155밀리 자주포도 가세하여  신의주에는 온전한 건물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주변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간단한 가재도구만 챙겨와 역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과 나이든 여자들, 인민학교에 다니는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젊은이들은 지하조직을 결성해 점령군들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거나,  아니면 중국군의 검거를 피해 숨어 있었다.

  "교수 선생, 저 소리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우리 인민의 군대가 공격하는 소리오.나는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데 동무는 어찌 그리 겁이 많소?"

  "아바이, 길티만… "

  리 교수는 전쟁참가자이며 전후복구건설과 천리마운동을 거쳐 사회주의 대건설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매 단계를 꿋꿋이 살아온 오랜 로동계급의 이 아바이가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흔한 노동계급의 사람이고 자신은 공산당원이며 지식계층의 사람이었다. 평등한 사회인 조국에서도 사람의 가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나 생명은 유한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닌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쿠앙~"

  "꺄~~악!

  지근거리에서 폭발한 굉음에 놀라 지하 방공호에 갇힌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리 태윤도 고개를 숙이고 떨다가 고개를 들어 아바이의 표정을 살폈다.  주물공인 그 아바이는 묵묵히 테레비죤만 시청하고 있었다.

  "내레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포탄이레 피해가는 거이 아이고,  방공호에 포탄이 명중하드래도 방공호는 끄떡 없을수도 있고 한발에 무너질 수도 있는거 아니겠슴메?  내레 무섭기도 하디요. 하디만 어쩌갔소? 눈먼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리 교수도 묵묵히 좌정하고 앉았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과연 그가 괜히 아바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었다.  노인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이 아바이였지만,  존경을 받지 못하는 노인은 아바이로 불려지지 않는 법이다.

  또다시 폭음이 이어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 교수는 늦게 결혼하여 이제 인민학교 4학년인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TV뉴스를 시청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세계 뉴스의 촛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폭격을 당하고 있는 신의주에서, 그 광경을 TV로 보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아파트 건물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아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리 교수가 아들을 다독였다.

  "지하 방공호래 워낙에 튼튼히 지어졌으니끼니 안심하라우.기래서 방공호 아니가서?"

  1999. 11. 25  15:30  평안북도 신의주 남방 15km

  드디어 신의주가 보였다.  차 영진 준장은 부대를 재정비하여 북쪽으로 급속이동시켰다. 신의주는 중국군이 도시 자체를 요새화하여 공격이 매우 힘들것으로 수색중대가 보고해왔다. 신의주의 중국군은 자체의 방어 뿐만 아니라 국경인 단둥(丹東)에서의 포격지원과 압도적 다수인 공중지원,  게다가 바다쪽에서도 아직까지는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해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이곳에 운집한 적의 대병력을 견제한다는 것이 차 영진 준장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다만 좋은 소식은 중국 공군의 출격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는 통일참모본부의 귀띔뿐이었다.

  언덕 뒤에 지휘차를 세우고 병력배체를 지휘하는 중에 새로 저격여단장이 된 선우 대좌가 키가 왜소한 장교 한 명을 대동하고 방문했다. 낮에 활동하게 되면서부터 선우 대좌는 항상 선글래스를 착용했는데,  의외로 보기가 좋아 인민군들 사이에서는 선글래스가 유행하였다.

  "사령관 동지, 우리 여단의 시가전 대대가 맡아 봄이 어떻갔소."

  인민군 저격여단은 신의주 공격전의 우익을 맡기로 했었다. 저격여단은 유명한 특수부대였고 그 부대의 명성은 이번 전쟁을 통해 확고히 다져졌다.

  "시가전 대대라뇨?"

  차 준장은 시가전대대라는 이름은 처음 알았다. 인민군의 정찰연대가 적진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는 특수공작 부대라면 저격여단은 특정의 전투에 있어서의 전문가들이 모인 부대다. 산악전대대와 시가전대대,  그리고 대전차대대가 이번 전쟁을 통해 유명해졌다. 러시아의 저격사단이 일반 보병사단인 것과는 질적으로 크게 달랐다.

  "그러니까 포위공격을 하면서 시가전 대대를 투입하여 적진을 교란시키자는 말씀이시죠? 하지만 우리 군의 공격이 무뎌질 수도 있고…"

  차 준장은 신의주 시내에 있는 아군 때문에 작전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했다.  지금도 병력면에 있어서는 아군이 결코 우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해공군의 각종 지원을 받는 중국군을 상대하기란 실로 위험했다.저격여단장인 선우 대좌가 씨익 웃었다. 그만큼 자신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왜 시가전대대겠소?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10여년 동안 훈련한 부대가 시가전 대대 아이갔소? 우리 시가전 대대를 믿어 보시라요. 다른 군종은 지원만 하면 충분하디요. 하루낮 하루밤만 시간을 주시디요. 그리고 이거 받으시고…"

  "뭡니까? 이건…  신의주 시내 중국군 배치도? 11월 25일 15시 현재라면 30분전… 벌써 정찰했나요?"

  선우 대좌가 다시 씨익 웃었다.  차 준장이 받은 지도에는 신의주 시내 중국군의 병력배치가 기입되어 있었다. 전차부대, 포병부대,기타 병참기지 등의 위치뿐만 아니라,  부대 규모와 장비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차 준장은 이를 즉시 부관에게  넘겨 포병대에서 포격을 개시할 것을 지시했다. 김 중위가 통신병을 불렀다. 김 중위는 포격명령만 받았으나 지도를 팩스로 통일참모본부에 보내 공군지원도 요청했다. 이것이 부관의 역할인가 하는 생각이 차 준장에게 들었다.  자신은 정말 깜빡 했었다.

  선우 대좌는 다시 한번 이번 신의주 공략전을 시가전대대에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지원만 적절히 해주면 신의주를 점령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차 준장으로서는 대전차 대대와 산악전 대대의 위력을 익히 아는지라 믿음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도대체 1개 대대로 적 2개 병단을 상대로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었다. 차 준장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부대의 임무는 점령이 아니고  양동부대의 역할이 아닌가? 견제만 하면 충분했다. 그는 다시 한번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정밀정찰만 한번 더 하겠다는 선우 대좌의 요청을 받아 들여 시가전대대의 투입을 승인했다.  약간의 전투정찰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선우 대좌 옆의 왜소한 장교가 경례를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시가전 대대의 책임장교라는 생각이 들었다.키는 작지만 눈빛이 매서운 전형적인 인민군 군관이었다. 세 사람은 즉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먼저, 시가전대대의 임무는 적정탐지와 후방교란, 그리고 압록강철교에 대한 포격유도로 국한한다.  아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든 세부작전을 대대장에게 맡겼다.

  포병대에서 포격을 재개했다. 시가전대대는 이미 신의주 동쪽인 압록강 가운데의 위화도 쪽으로 해서 신의주로 진공 중이었다. 포격전을 계속하며 다시 내일 오전의 공격을 위해 차 준장과 다른 장교들이 부대를 점검했다.  시가전대대의 적정정찰이 어느 정도 되면 다시 수정할 생각으로 일단 보급에 만전을 기했다.  차 준장으로서는 아무리 전문가집단이라도 1개 대대만 내보낸 것이 걱정되었다.

  1999. 11. 25  15:50  평안북도 신의주, 마전동

  쓰러진 건물의 잔해가 곳곳에 쌓여있었다.  대대의 각 소단위 부대들은 작은 건물 하나 하나를 수색해 들어갔다.  최초로 패배를 경험한 중국군은 포격에 몸을 움츠렸는지  도로에는 보병들은 없고 장갑차 몇 대만 보였다.  시청이 보이는 중앙거리의 한 건물 옆에 도착했다. 장갑차 3대가 그 건물을 경비하고 있었다.

  강 만형 하사가 분대원을 이끌고 장갑차 옆으로 접근했다.  일반적인 중국장갑차의 무한궤도가 아닌 6륜구동의 큰 바퀴를 가진 이 WZ-523 장갑차에는 옆부분에 탑승보병용의 총안이 있어 들키지 않게 자세를 바짝 낮췄다. 장갑차 윗부분의 기총사수용 해치가 열려있었다.  장갑차에 중국군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강 하사가 손가락으로 세 사람의 전사를 지목하고는 다른 전사들에게는 주위 건물을 경계하게 했다.소음권총과 손도끼를 든 세 사람이 해치안으로 들어갈 때 강 하사는 망원경으로 시청을 살폈다.

  그는 신의주 출신이라서 이 지역의 지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의 분대는 큰길은 피하고 작은 골목길을 몇개나 돌고 돌아 시청 옆에 다다른 것이다. 시청 앞에는 포격에도 아랑곳 않고 중국군 전차 몇 대가 서 있었고, 시청과 주변 건물의 옥상에는 대공포 진지들이 보였다.

  강 하사의 분대는 신의주 시청 주변을 정찰하고, 필요시에는 포격 유도를 하는 것이 맡은 임무였다.  그는 시 청사의 포격을 대대장에게 무선으로 요청했다. 전차들이 경비를 서는 것을 보면 시청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청사 말고도 이런 작은 건물에 포격에도 아랑곳 않고 장갑차가 경비를 서는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좋다. 수색해 보자!’

  일분도 지나지 않아 장갑차에서 세 사람이 다시 나왔다.민 전사의 손도끼는 붉게 물들었는데 사람 머리카락 한 웅큼이 도끼에 묻어 있었다. 강 하사를 따라 분대원들이 그 건물의 무너진 틈 사이로 들어갔다.드디어 시청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강 하사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보니 시청사가 화염에 휩싸여 붕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3층짜리 콘크리트건물인 이 곳은 뭔가 사람이 많이 있는 것같은 냄새가 났다. 역시 사람이 보였다. 포성에 놀라 벽뒤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경비병 네 명과 마주쳤다. 최 전사의 소음권총이 즉시 불을 뿜었고, 한 명은 민 전사가 도끼로, 한 명은 박 전사가 목을 꺾어 죽였다.  시체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경비병들을 해치운 이들은 조용히 복도를 뛰어갔다.계단을 만나자 부하 세 명은 옥상까지 수색을 시키고,  강 하사는 나머지 인원을 이끌고 지하실로 내려섰다.오로지 군인으로서의 감각이 그를 지하실로 이끈 것이다. 지하실은 낮인데도 컴컴했다. 암적응이 될 때까지 잠깐 기다리니 어두운 지하실의 복도가 차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움직였다.

  선두의 민 전사가 복도를 돌다가 갑자기 가지고 있던 손도끼 두 개를 연속 던졌다. 뭔가 적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강 하사가 고개를 내밀고 보니 복도 끝의 철문 앞에 중국군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가슴이나 머리에 도끼가 박혀 있었다. 철문에서는 빛이 스며나오고 있었다.전방을 경계하며 서서히 복도를 걸어서 철문에 도착했다. 문은 잠기지 않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전기불이라니! 발전시설까지 갖춘걸 보니 이곳이 통신시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 하사의 뇌리를 스쳤다. 대개 특수전부대의 임무는 적과 교전하는 것 보다는 정규군의 공격에 앞서 적의 중요한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급, 통신이나 지휘 계통은 가장 중요한 공격목표였다.

  안에서는 중국어가 흘러 나오고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강 하사가 문을 빼꼼히 열고 보니 약 30명의 중국군들이 보였다. 역시 통신시설인지 헤드폰을 쓰고 있는 기술병들이 많이 보였다.한쪽에서는 중국군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적은 침입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라며 강 하사가 좋아했다. 강 하사가 손을 들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전원사살의 명령이었다.그가 손을 내리자 모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어차피 밖은 포격으로 소란스러웠으므로 이 상황에서는 총소리가 나도 상관없었다.  앞장을 서며 들어간 허 전사가 스콜피온 Vz-61 기관단총을 좌우로 긁었다. 김 전사의 북한제 68식 소총이 불을 뿜자 연기가 피어 오르고 탄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중국군들이 맥없이 쓰러져갔다. 중국군들은 겨우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는데, 간간히 여군들도 끼어 있었다. 응사할 생각도 없이 모두들 머리만 숙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사격 중지!"

  강 하사가 짧게 명령을 발했다. 분대원들이 얼이 빠져 있는 중국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구석진 곳으로 몰았다.12명을 사살하고 15명을 생포했다.중상을 입은 중국군 두 명은 따로 모았으나 모두가 죽어가는 얼굴이었다. 강 하사가 중국군 포로들의 면면을 살펴봤다.계급을 보니 중국 인민해방군 중장이 한 명, 소장이 한 명 있었고,  공군대교(大校)가 한 명, 해군중교(中校)가 한 명,  기타 교관(校官)과 위관(尉官)급 군관들, 그리고 여군이었다. 중국군 소장은 집단군 사령에 해당된다. 통일 전의 남북한에서는 군단장급이다. 그리고 대교는 사단장급이었다.  그렇다면 중장은?

  ‘거물이다!’

  강 하사가 즉시 대대장을 무선으로 불렀다. 긴급한 상황 외에는 발신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강 하사는 벌써 두번이나 무선송신을 한 셈이다. 지하실인데도 의외로 통신이 쉽게 연결되었다.

  "대대장 동지! 중국 인민해방군 중장과 소장, 기타 군관급 12명을 생포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공군 대교, 한 명은 해군 중교입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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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건물의 위층을 수색하던 3명의 전사는 수많은 적군에 직면했다. 층마다 경비병들이 있고 방마다 적군이 가득했다.  최 전사의 소음총이 연이어 불을 뿜고, 나머지 두명의 병사는 총검만으로 싸워야 했다.  도대체 이 건물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소음을 줄여야 했다.  소음권총을 가진 최 전사가 총을 든 적병을 쏘아 죽이며 견제하는 동안 박 전사와 노 전사는 비무장이거나 미처 총을 겨누지 못하고 있는 중국군을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죽였다.

  세 명의 병사가 마지막으로 건물 옥상에 있는 대공포진지를 점령했을 때, 박 전사와 노 전사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듯 AK-47의 북한제 라이센스인 68식 소총을 난사했다.

  그들의 군복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음권총을 주로 이용한 최 전사는 그런대로 견딜만 했지만, 다른 두 명의 전사는 피향기에 취했는지 몸이 피곤해서인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최 전사가 분대장에게 상황보고를 하겠다며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갔다. 사실은 전신이 피로 물든 이들과 함께 있기가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건물 곳곳에 번진 피냄새가 역겨웠다.

  1999. 11. 25  15:55  북부군 본부 지휘차량

  시가전대대장과 같은 회선으로 듣고 있던 차 준장은 기가 막혔다. 포격이 시작된지 10여분만에 신의주시 중심인 시청에 도착하고 게다가 한국군으로서는  대장급에 해당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중장을 포로로 잡다니!

  [직책이 메이야?  병단 사령이가?]

  대대장이 강 하사에게 묻는 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리고 직직거리는 잡음 속에 위협적인 중국어가 흘러나오더니,  다시 억센 평안도 사투리가 흘러 나왔다.

  [기렇습네다!  중장을 심문해보니 해군과 공군의 작전장교와 함께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네다.  지금 제 손에 작전지도가 있습네다. 후퇴계획입네다! 반복합네다. 이들은 후퇴계획을 세우고 있습네다!]

  강 하사의 침착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차 준장이 있는 본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차 준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퇴? 기거 이상하군. 일단 4명을 제외한 전원을 사살하고 제 5구역에 있는 2중대본부로 이동하라! 거기서 작전지도를 사령부에 팩스로 보내도록!]

  대대장은 여단장과 차 준장이 듣고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시청에 대한 포격 중지를 요청하며 동시에 강 하사에게는 참혹한 명령을 내렸다. 차 준장의 안색이 변했다.

  ‘포로를 사살하다니!’

  차 준장은 얼굴이 벌개졌다. 분노한 표정으로 여단장을 노려봤다. 그렇다고 무선으로  대대장이나 강 하사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차 준장은 전파관제 때문에 무전을 수신만 하고 있었다.

  "저격여단은 제네바 협정을 알고 있습니까?"

  차 준장이 저격 여단장인 선우 대좌에게 항의했다.

  "물론 잘 알고 있디요.  하디만 적 진지의 가운데에서 어떻게 포로를 데리고 올 수 있갔시요? 겨우 9명의 인원으로 15명은 무리디오!"

  선우 대좌는 당연하다는 투로 차 준장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말을 하고는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계속 신경을 썼다. 무선은 바로 끊겼다.

  "후퇴라니오? 뎡말 중국군이 신의주에서 후퇴한단 말씀입네까?"

  부관인 김 중위가 이 중요한 정보를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려고 했으나 차 준장은 확인을 한 후에 보고하자며 김 중위를 제지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차 안에 비치된 팩시밀리를 응시했다.

  1999. 11. 25  16:00  평안북도 신의주, 시청사 주변 건물안

  강 하사는 포로 모두의 눈과 입을 가린 다음, 그들 중 4명만 철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나머지 중국군 포로들은 부하들이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모두 죽였다.민 전사는 도끼로 통신시설을 부수고 난로 옆에 있는 등유통을 엎었다.  오 전사는 눈에 잘 안띄는 세 군데에 시한폭탄을 부착했다. 강 하사는 나오면서 작전명령서와 작전지도, 그리고 각종 암호문 등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층으로 올라오니 현관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강 하사가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미소지었다.

  ‘아군이다!’

  연락을 받고 제 2중대의 일개 분대가 지원을 위해 온 것이다.  그 분대가 통로를 개척하며 선도하고 강 하사의 분대는 포로를 끌고 갔다.최 전사와 다른 두명의 전사가 현관에서 합류했다. 이들의 군복이 피로 온통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분대원들이 모두 놀랐다.  아직도 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1999. 11. 25  16:05  신의주, 압록강 제 1 철교 남쪽

  이 재철 상위는 인민군 중에서도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고급군관학교를 나온 그는  일찍 제대하고 나서 관료로서 공산당에 입당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군 중에서도 가장 훈련이 심하기로 유명한 저격여단에 자원을 했다.  항상 긴장상태인 한반도에서는 군인 이상의 출세길이 없다는 것이 이 상위의 생각이었다.

  그는 저격여단 일개 소대를 이끌고 위화도를 우회하여 압록강철교 동쪽 언덕에 매복을 했다.  앞엔 얼음에 덮인 압록강이 있고 건너편에 안둥 시가지가 보였다. 서쪽으로는 압록강 제 1 철교가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주변에는 각종 대공화기와 미사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압록강 제 1철교 위에는 중국군의 수송트럭들이 가득했다. 뜻밖에 모두 북쪽, 즉, 만주방향으로 향하는 수송대였다.  망원경으로 보니 대부분이 병력수송용 트럭들이었다. 최 하사가 레이저조준기를 철교에 맞췄다는 신호를 보내자 이 재철 상위가 포병대로 직접 연락했다. 철교부근에는 아직 포격이 시작되지 않아서인지  밖에 나와 있는 중국군들이 많았다.

  "포격 개시"

  이 상위가 무전기에 대고 짧게 외쳤다.

  신의주 남동쪽 25km,  철산군 남시에 위치한 국군 제 6사단 포병연대에서 포를 쏘기 시작했다.  최 하사의 조준에 맞춰 포탄들은 정확히 철교위의 수송대에 직격을 가했다.

  "수송대가 목표가 아냐. 그 다리다!"

  3발의 155밀리 포탄을 맞고 철교 남단이 무너졌다. 이어 조준기의 목표를 북쪽으로 돌렸다. 수십 발의 포탄이 집중되자 곧이어 북단쪽도 무너졌다.

  "자! 이동!"

  이 상위가 명령하자  경계를 맡은 대원들이 먼저 탈출루트로 향했다. 저격여단은 워낙 힘들게 양성되어  임무완수 못지않게 탈출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부대였다. 다음 임무에도 투입되어야하므로!  포격의 정밀함으로 적은 이미 침투조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으로 이 상위는 생각했다. 이 상위와 그의 부하들은  제 2의 임무를 위해 남쪽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같은 시간  신의주 시가 남쪽 3km, 화평동 인민학교 부근 언덕

  "정찰지도에는 안나와 있는 병력입네다. 직승기사단입네다."

  망원경으로 학교운동장을 보면서 박 기철 중위가 보고했다. 중대장인 최 명수 대위는 당황했다.신의주 남쪽시내에 침투해 들어가야할 병력을 이 곳에서 쓸 수도 없고,그렇다고 지나치기에는 적의 덩지가 너무 컸다. 척후 몇 명만 남겨 무전연락으로 포격이나 공중공습을 요청할까 생각했으나 포병대는 사전에 선정된 중요목표에 대한 포격만으로도 벅찰 것이며,  통일공군은 적 전투기 요격 외에는 빼돌릴 자원이 없다고 미리 통일참모본부에서 못을 박아 놓았다.만주의 중국군 전투기들은 당분간 못 쓰게 되었지만, 산둥반도에서 날아오는 전투기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다는 전갈이었다. 게다가 적의 대공 미사일망을 뚫고 공습을 하는것은 위험이 너무 크다고 최 대위는 생각했다.

  학교 운동장과  주변 공터, 그리고 야산의 밭에까지 중국군의 헬기가 가득했다. 최 대위가 보기에 적의 헬기 수는 200여대 정도 되어 보였다. 러시아제 해벅, 하인드 등의 비교적 신형헬기들이 절반, 프랑스에서 도입한 슈페르 훼르롱(중국 명칭 大黃鋒) 헬기들이 몇 대 보이고, 나머지는 선풍 25호 같은 구식 헬기들이었다.

  중대원의 숫자보다 더 많은 헬기들을 보고 최 대위는 고민했다. 그러나 헬기사단의 위력을 익히 아는지라, 그는 공격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중국군은 통일한국군의 신의주공격에 대비하여 막강한 헬기사단을 바로 전선 코앞에 배치한 것이다.저공비행으로 신의주시를 서쪽으로 우회하고 두 시간 전에야 도착해서 아직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니 북쪽 길에서 유조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 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최 대위는 유조차들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공격한다! 유조차들이 정지한 직후 사격한다. 소대별 분담, 1소대는 학교 운동장, 2소대는 야산쪽을, 3소대는 주택가와 길쪽을 맡아라.  박격포는 직승기, 기관총은 승무원들을 향하도록. 가자!"

  일단 공격하기로 결정하자 중대는 신속히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전사들이 프랑스제 휴대형 대공미사일 미스트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헬기사단은 공격헬기와 병력수송헬기부대로 이뤄졌다.보병은 1개 여단 규모였으나 기동력에서 어떤 사단보다 나았으며 화력은 거의 군단급이었다. 헬기사단은 중국군 통틀어 3개 사단밖에 없는, 중국군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연료차들이 정지하여 헬기에 급유를 시작하는 모습이 최 대위의 망원경에 잡혔다.

  "사격 개시!"

  최 대위의 신호로 인민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기관총과 소총이 불을 뿜고 RPG와 박격포탄이 하늘을 갈랐다. 인민군은 저격여단답게 정확한 사격을 가했다.  넓다란 인민학교 운동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고 있던 헬기조종사들이 쓰러지고 이어 헬기의 취약점인 엔진과 비행중 헬기의 중심을 잡는 뒤쪽 프로펠러에 불똥이 튀었다.

  유조차는 소총의 소이탄에 한발씩 맞을 때마다 폭발했다.제트유가 길에 흐르며 불에 타자 다른 유조차도 연이어 폭발했다.  헬기탑승보병과 수송대원들에게는 사격할 필요도 없었다.헬기와 유조차들의 폭발불길에 휩싸여 중국군의 막강한 헬기사단 대원들은  제대로된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져갔다.  간간이 이륙하는 헬기들이 있었으나 엔진이나 프로펠러의 고장으로 추락하여 이미 지옥이 된 지상 위에 불길을 덮는 식이었다.

  인민군으로서도 공격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공격헬기가 한대라도 뜨면 대공무기가 취약한 인민군으로서는 당할 수 밖에 없기때문이었다. 중국군은 헬기를 띄우기 위해, 인민군은 그것을 막기 위해 인민군과 중국군 모두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중국군의 헬기 수가 너무 많았다. 갑자기 언덕 너머에서 헬기들이 날아올랐다.

  [중대장 동지! 적 직승기래 또 있습네다!  20여대가 날아오고 있습네다!]

  야산쪽을 맡은 2소대장이 무선을 통해 연락해오자  최 대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적의 확실한 전력도 모른채 공격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 계속 싸울 수 밖에 없었다.  헬기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병이 도망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는 이곳에 뼈를 묻기로 작정했다.

  "대공유도탄 발사! 있는대로 퍼부라우!"

  최 대위는 극한상황에서 판단을 했다. 이미 중대원 전원의 전멸을 각오했다. 그러나 일개 군단에 필적하는 적을 상당수 파괴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중국군의 헬기는 인민군이 숨어있는 야산에 기관포와 로켓탄 세례를 퍼부었다. 20대라도 막강한 화력의 집중이었다. 사전에 충분히 엄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화력이 너무 강해서 대원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시가전대대가 이런 야산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능률이었다.

  인민군쪽에서 대공미사일이 날았다.  저공침투 항공기용 적외선 유도방식의 프랑스제 소형 미스트랄이  마하 2.5의 속도로 날아가 중국군의 헬기들을 하나씩 격추시켰다.  3대의 발사기에서 10초에 한발씩 발사되니 3초에 한발의 미사일이 발사되는 꼴이었다. 갑자기 중국군 헬기들의 공격이 눈에 띄게 신중해졌다. 모두 처음 나왔던 언덕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리 적이 보병뿐이더라도 대공미사일을 갖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물며 헬기사단을 향해 공격해오는 적이라면  최소한의 대공무기는 갖췄을 것이라며 중국인민해방군 헬기사단의 제 2 연대장인 톈 구이쿤(田貴軍) 중교는 겁을 집어먹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라서  배기열 냉각장치는 미사일을 피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헬기 조종사라면 당연히 미사일에 노출되어 성능이 불확실한 플래어를 쓰느니 차라리 언덕 뒤에 숨는 것을 선호했다.  톈 중교는 언덕 뒤에 숨어서 가끔 기회를 보아 인민군쪽을 향해 로켓탄을 날리며 인민학교 운동장의 상황을 살폈다.

  사단 본부는 이미 전멸을 했고, 남아있는 헬기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공격헬기 10여대 뿐이었다.지상에는 이미 헬기의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파괴된 고철들 뿐이었다.우왕좌왕하며 뛰어다니는 중국군들이 보였으나 적을 향해 사격하는 아군은 없었다. 이미 조직적인 전투는 패한 것이다.  언덕뒤에 숨어서 미사일을 발사함에도 불구하고 또 한대의 헬기가 인민군이 쏜 미사일에 맞고 추락했다.

  "후퇴! 모두 안둥으로 돌아간다!"

  톈 중교는 몇 대 안남은 헬기나마 보존하고 싶었다. 1개 사단의 헬기가 완전 전멸하는 것을 피하고, 자신이 즐겨온 섬멸전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지상에 남은 아군은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남은 연료로 안둥의 비행장까지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뿐이었다.너무 최전선에 귀중한 헬기사단을 배치하게 한 군사위원회의 명령이 저주스러웠다. 중국군의 해벅 헬기들은 편대를 지어 북쪽 하늘로 사라져 갔다.

  1999. 11. 25  16:10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 신의주 형무소

  권 중위는 신의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형무소의 망루에서 망원경으로 중국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아무리 아군의 포격이 치열하다지만 인민군들이 형무소를 공격하며 총격전을 하는 동안 당연히 예상되었던 중국군의 지원병력은 점령할 때까지 끝내 오지 않았다.  지금도 멀리 보이는 시내의 도로상에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보병전투차들만 가끔 보였으나 부대 형태를 갖춘 중국군의 차량행렬은 없었다.

  "이기 어드레케 된기야?"

  옆에서 같이 망원경으로 시내를 살피던 노 중사는 묵묵부답이었다.노 중사는 포로가 되었던 인민군들을 석방하고 노획한 중국군 무기로 무장시킨 후 방금 망루로 올라왔다. 노 중사가 보기에도 중국군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혹시 후퇴하는 기 아니겠음메?"

  "길티요…"

  중국군 응원병력과의 치열한 한판을 기대하던 권 중위는 허탈해졌다. 적지 한가운데서 이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형무소를 점령할 때도 중국군의 저항은 의외로 미미했다. 덕택에 간단히 형무소를 접수하고 1천 5백여명의 인민군과 사회안전원들을 석방할 수 있었지만, 이 임무에 1개 소대나 투입한 것은 전력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예정대로 포로들을 데리고 귀환하기 위하여 망루를 천천히 내려 왔다.  형무소 운동장에는 포로롭 붙잡혔다가 석방된 인민군들이 저격여단 소속의 병사들을 붙잡고 전쟁 진행상황을 물어보고 있었다.

  1999. 11. 25  16:2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신의주의 중국군들 사이에 후퇴 기미가 보인답네다.  북부군이 신의 주 시내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습네다."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다소 당혹스런 표정으로 보고하자,  통일참모본부 소속 참모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력수 10대 1인데 그럴리가? 그리고 지금은 1개 대대만 투입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군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은 뭔가 중국군의 함정인지도 모른다며 신중한 의견을 냈다.

  "신의주 철교 위의  중국군 수송대들이 모두 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답네다. 인민해방군 중장과 소장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들의 작전계획에도 기렇게 되어 있고… 지상전 관제기인 J-STARS의 보고도 일치합네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는  신의주에 중국군 병력이 얼마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습네다."

  김 대장이 북부군 사령부로부터 받은  중국군 작전지도를 중앙화면에 비췄다. 화살표의 방향은 전면후퇴의 양상이었다. 이 종식 차수의 의견은 뜻밖이었다.

  "어차피 중국군에게도 신의주는 별로 의미가 없으니끼니… 중국군이 후퇴하는기 확실하믄 신의주를 점령하라고 하시오."

  "알갔습네다."

  김 대장이 북부군에 명령을 내리는 동안 이 차수가 참모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북부군이 양동부대인 것처럼,  신의주에 주둔해 있던 중국군 병력도 그런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르오. 신의주 철교를 파괴한 부대의 보고에서도 수송대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선봉지역에서 예상보다 훨씬 큰판이 벌어질 듯 하오."

  한국군의 정 지수 육군대장이 함경북도 선봉 주변의 양군 병력배치도를 중앙화면에 올렸다. 한국군 20개 사단, 인민군 약 30개 사단이 진공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여기에 한국군의 3개 공수여단과 인민군 5개 경보병여단이 공중침투 및 상륙전을 할 예정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군은 후퇴한 30개 사단 외에 다른 30개 사단이 추가로 두만강을 넘어와 증강되었다.  청진 북쪽의 제주도만한 작은 지역에 양군 모두 100여만 이상의 대군이 집결 중이었다. 정 대장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 졌다.

  1999. 11. 25  16:40  평안북도 신의주 토교동

  차 준장의 부대는 신의주 시가 바로 남쪽의  석수산(해발 115미터)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했다. 신의주시는 군데군데 검은 연기가 치솟을 뿐, 시가 전체가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전쟁 중의 고요함은 병사들, 특히 부대를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피를 말리는 상황이었다. 틀림없이 있어야 할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차 준장은 장갑지휘차인 구소련제 구식 BRDM-2U의 차장용 큐폴라를 열어, 상체를 내놓고 망원경으로 신의주 시가를 살펴 보고 있었다. 없었다.  3개 병단이나 된다던 중 국군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황량한 바람이 야산을 휘돌며 차 준장의 뺨을 때렸다.

  서쪽 해안지역인 토성동으로 간 36사단-구 인민군 노농적위대 36연대의 후신-과 신의주 동쪽인 선하동으로 진군한 37사단 모두 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시가전대대가 진입할 때만 해도 우글거리던 중국군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신의주에 잠입한 저격여단 시가전대대의 각 소단위 부대 보고에 의하면,  갑자기 중국군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 준장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진격을 멈추고 예하부대를 야산에 포진시켰다.  함정이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차 준장의 가슴을 압박했다.

  "통일참모본부에서 명령입니다.  신의주에서 중국군이 대부분 후퇴했으니, 잔적을 소탕하고 오늘 밤까지 신의주를 점령하라는 명령입니다."

  김 중위가 보고하자, 차 준장이 장갑차의 지휘관 큐폴라에서 내려 서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중국군 중장이 있던 곳에 어떻게 중국군이 별로 없다는 건가? 우리 부대에 저격당한 헬기사단은 왜 이 지역에 있었는지, 아무리 중국군이 후퇴 중이라고 하지만,  저 정도의 병력이 노출됐다면 최소한 1개 집단군은 있을게 아니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차 준장이 답답한 마음에 같이 지휘차에 탑승한 고급장교들에게 물었다.  참모장 겸 35사단장인 홍 종규 소장, 저격여단장 선우 대좌, 부관 김 소좌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만약 중국군의 병력이 차 준장의 말대로 1개 집단군 이상이라면, 북부군으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유격전이나 양동작전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점령작전은 전혀 다른 상황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까 선우 대좌가 제출한 정찰보고서에는 틀림없이 중국군들이 대부분 그대로 있었소. 이들이 그 사이에 신의주를 다 빠져나갔다는 뜻이오? 첫번째 정찰이 1500에 있었고 신의주 철교는 1610에 파괴됐으니,  정찰 보고가 확실하다면, 약 한 시간 사이에 20만 병력이 빠져 나간 셈이 됩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차 준장이 지적하자 시가전대대의 상급 지휘관인 저격여단의 선우 대좌가 변명하듯 말했다.

  "신의주 철교를 파괴한 부대에 의하면, 중국군은 한창 후퇴하고 있었다고 합네다.  길고 압록강은 지금 얼어붙었으니끼니 충분히 도보로 도강이레 가능하디요. 금년엔 추위레 날래 찾아 왔습네다."

  "중국군이 철교와 유조선 가교를 통해 후퇴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 재철 상위의 보고로 알고 있소. 하지만 그 사이에 20만이 빠져 나가다니, 아무리 중국군이 자동화되어 있다고 해도, 아무리 압록강이 얼어붙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중국군이 압록강 얼음 위를 도보로 건너고 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소.  아무리 추운 지역이라고 해도 내가 보기엔 아직 강을 건널 정도로 동결되지는 않았을 것이오.게다가 신의주에서 멀지 않은 용암포에서 압록강이 서해와 만나므로 짠물의 영향도 있고…  김 중위, 신의주 부근 압록강의 최초 동결일과 빙질에 대해 기상청에 문의하시오. 아니면 신의주 출신 전사들에게 확인하시오.

  1500에 정찰지도를 작성한 정찰대가 아직 신의주에서 활동 중이오.이 상위나 다른 침투조도 계속 압록강 주변에서 정찰 중이지 않소? 아무래도 이는 중국군의 공성지계(空城之計)가 아닌가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상당수의 병력이 땅굴이나 건물 안쪽에 숨어 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전 병력을 동원해 신의주를 점령할 때, 은폐했던 중국군이 우릴 포위한다면, 우린 아마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차 준장은 중국군의 작전계획서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전면후퇴 계획이 분명했지만, 시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후퇴는 공격보다 더 세밀한 작전계획이 필요한 법이다.  시간에 따라 부대이동을 시켜야 하는 후퇴작전은 동시에 갖가지 돌발사태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의 여러 작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전으로 간주된다. 만약 후퇴작전에서 실패하면 부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후퇴 작전계획에 앞선 후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인민해방군 중장의 생포도 꺼림찍합니다. 아무리 저격여단이 용맹하다지만 이렇게 쉽게…"

  차 준장은 오늘 오후에 있었던 모든 일이 찜찜했다.남시와 신의주 남쪽 산악지역까지에 대한 무혈점령, 중국군의 너무도 빠른 후퇴와 증발, 그리고 아무리 전문적인 부대라고 하지만 시가전대대의 중국군 중장 생포 등, 의심가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전쟁이 곧 끝난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 있던 것이 아닌가 차분히 반성해 보았다.  만약 북부군이 신의주를 섣불리 점령하려다가 중국군에게 포위, 섬멸된다면 서부 전선의 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전전선의 붕괴가 눈에 보듯 뻔했다. 선우 대좌는 그렇게까지 회의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참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티만 신의주를 정찰 중인 아군 시가전대대나  항공정찰에 의한 보고 모조리 일티하고 있습네다. 중국군의 분명한 전면후툇네다. 이 됴은 기회레 잃디 않는 거이… 기리고 통참본부의 지엄한 군명입네다."

  차 준장은 고개를 들어 선우 대좌를 노려 보았다. 1개 대대로 신의주를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선우 대좌도 지금은 자신이 별로 없어 보였다.

  "중국군은 후퇴시에 이점제면(以點制面), 병력의 전경후중(前輕後重), 화력의 전중후경(前重後輕) 원칙을 준수하고 있소. 이번에 중국군이 진짜로 후퇴했다면 이 원칙을 지켰을 것이오. 적의 다양한 매복과 기습과 잦은 반격에 직면했을 것이란 말이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의 어떻한 기동방어에도 접하지 못했소.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아주 쉽게 이곳 신의주 외곽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더 불안하단 겁니다."

  중국군은 후퇴시에 중요거점을 지속 방어하며, 병력은 후방에 집중시키고, 화력은 전방에 집중시키는 작전을 쓴다. 추격하는 적에게 상당한 정도의 손실을 강요하고 시간을 끌어, 아군이 재편성할 여유를 버는 것이다.

  "선우 대좌는 부대를 지휘하여 신의주를 점령하시오. 이미 절반 정도는 우리 수중에 있지만 틀림없이 상당수의 중국군들이 있을 것이오. 신의주에서 획득한 아군 포로들이 무장했다니까 이들도 같이 지휘하시오.

  그리고 꼭 정찰대를 활용하도록 하시오.  경계에 실패하지 말란 말이오.선우 대좌는 정주쪽에서 혼이 난 경험이 있으므로 제대로 하리라 믿습니다."

  차 준장이 말을 하며 선우 대좌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경력 중에 유일한 패배이며 야간전대대 최대의 위기상황을 차 준장이 구해주지 않았던가? 역시 선우 대좌는 상당히 불쾌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부하장교의 자존심보다는 작전의 성패, 더 나아가 일반 전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중국군도 대부대의 은폐에는 이골이 난 군대요. 국공내전이나 6.25, 중국인들이 말하는  인민해방전쟁이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서도 보듯이 중국군은 전통적으로 유격전엔 강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오. 꼭 역습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나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시가 바로 남쪽에 대기하겠소. 만약 중국군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면 교전을 피하고 즉시 후퇴하시오.  제 말 뜻을 아시겠죠?  절대 무리하지 마시오.  우리의 원래 임무는 양동작전일 뿐이오."

  "알갔습네다. 사령관 동지!"

  선우 대좌가 거수경례를 하고 지휘차를 나섰다.  지휘차를 따르던 선우 대좌의 사륜구동차가 그를 태우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그는 오늘 새벽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산악전 1대대 잔여병력과, 새로 편입된 주변 지역의 교도대원으로 구성된 2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는 부대를 이끌고 신의주를 향했다.

  그의 직속부대인 야간전대대는 새벽의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아직 취침 중이었고, 시가전대대는 신의주 시내에서 작전 중, 그리고 대전차대대는 다른 부대에 배속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름만 최강의 저격여 단장이지, 사실 일반 예비부대 연대장과 별 차이 없는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물론 밤이 되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선우 대좌는 스판드럴 대전차미사일 발사기가 탑재된  사륜구동식 장갑차인 BRDM-2를 선두로 부대를 전진시켰다. 12대의 T-62s(러시아제 T-62 주전투전차의 북한 라이센스 생산품)가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5단 기어를 넣고 시속 50km의 최고속도로 달렸다. 그 뒤를 장갑차와 병력수송용 트럭들이 뒤따랐다.  하얀 눈길이 전차의 무한궤도에 벗겨지며 검은선을 북쪽으로 그리고 있었다.  무개트럭에 탄 인민군 전사들은 두툼한 흰색 위장복을 입고 피로와 추위, 불안감에 쌓인 채 신의주를 응시했다.

  신의주 남쪽인 남시에는 국군 6사단 포병연대가 대기 중이었다. 36연장 130밀리 다연장포를 갖춘 국군 포병대는 북부군의 122밀리 방사포부대와 함께 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직 명령은 없고 따분한 대기상태가 계속되었다. 155 밀리 자주포는 정찰대의 지령에 따라 간헐적으로 계속 유도장치가 달리 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1999. 11. 25  16:55  평안북도 신의주 위화도 서하리

  이 재철 상위는 서하리의 주택가에 숨어  동하리에 있는 비행장을 정찰하고 있었다. 신의주에는 이곳과 민포동 두 곳에 비행장이 있다.모두 1950년대에 건설된 비행장이다.

  이 상위의 망원경에는 어떠한 적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 공군의 폭격을 받은 활주로 곳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으나, 파괴된 비행기의 잔해도, 연료저장탱크같은 지상시설물도 없었다. 1500부로 작성된 정찰 지도에는 위화도에만 중국군 1개 집단군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도로나 눈쌓인 논길 위로 가끔 중국군의 사륜구동차가 한국공군의 폭격에 겁을 먹었는지 속도를 내며 북쪽으로 질주할 뿐이었다.

  이 상위는 약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전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의 징크스였다. 뒷머리가 쭈뼛 서면서 망원경을 압록강 쪽으로 돌렸다. 이 상위의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보라우, 동무! 압록강 너머 만주땅에 중국군 진지…"

  이 상위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옆에 있는 무전병을 손짓으로 불렀다. 무전병이 실눈을 뜨고 바로 앞의 추상도 너머,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군 방어진지를 살폈다. 얼핏 보아도 대전차 및 대공포 진지가 수 십 개씩 보였다. 부지휘관인 안 소위도 이 모습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새끼들, 모조리 토깠구만 기래요.  1개 군단 병력이레 튱분하갔습네다."

  "길티, 길티. 무전병, 본부에 보고하라우. 평가레 1개 군단, 아늬야, 1개 집단군으로 하라우. 알간? 날래 보고하라우."

  이 상위는 중국군이 압록강변에 구축한 방어진지를 것을 계속 관찰하며, 이제 서부전선의 전투는 종료된 것으로 확신했다.

  1999. 11. 25  17:00  평안북도 신의주시 연상동

  저격여단은, 엄밀히 말해 저격여단 일부 병력과 교도대의 혼성부대는 신의주 시가 바로 남쪽인 연상동에 접어들고 있었다. 개전일인 11월 17일 꼭두새벽에 인민군 9사단이 전멸한 곳이다.아직도 도로 주변에는 인민군의 전차와 장갑차, 트럭 등의 파괴된 잔해가  눈에 덮힌 채 곳곳에 널려 있었다.  노획한 무기를 후방으로 옮겨 재활용한다는 중국군의 전장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중국군도 현대화된 것이다.

  저격여단은 선우 대좌의 지휘를 받아  의심이 가는 모든 곳에 수색대를 파견하며 차근차근 신의주를 외곽부터 점령하고 있었다.  선우 대좌도 신의주에 접근할수록 신중해 졌다.  이 상위의 정찰대가 중국군들이 압록강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고 본부에 보고했고 이를 즉시 선우 대좌도 접수했지만,  중국군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차 준장의 의견에 공감이 갔다.

  차 준장은 나이는 어리긴 해도 의외로 모든 일에 신중했다.  그의 신중함이 북부군을 아직도 생존케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선우 대좌도 인정했다.

  부대의 진격을 선도하던 수색대가  포로 두 명을 선우 대좌에게 끌고 왔다. 얼핏 보아도 상당한 고위급 군관이었다. 수색대 지휘관의 보고로는 이들은 연락군관인데 신의주의 병단사령부에서 단둥의 야전사사령부로 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수색대 지휘관이 압수한 지도와 명령서를 선우 대좌에게 건네자,  한자를 잘 모르는 선우 대좌는 이를 부관에게 넘겨 내용을 파악토록 했다.

  "기럼 병단사령부레 아직 신의주에 있단 말가?"

  "기런거 같습네다."

  전사부터 시작해 군관이 되었음직한 늙은 소위가 부동자세로 선우 대좌에게 대답했다.

  "이기 메이 참말이고 메이 거짓뿌렁인디…내레 당최… 일단 사령부에 보고하라우. 포로도 바로 넘기고, 날레! 자, 계속 진격하라우."

  1999. 11. 25  17:10  평안북도 철산군 대화도 해상

  "조기경보기로부터 보고입니다. 미확인 대규모 함대 접근 중, 3-4-0, 거리 65,000. 숫자는 약 60척.  소형함 위주의 편성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통신장교가 전투지휘함교로 보고하자,  즉시 비상사이렌이 울리고 장병들이 전투배치에 들어갔다. 함교가 갑자기 부산하게 돌아가며 함대사령관인 김 종순 인민군 해군 중장이 철모를 쓰고 전투함교에 나타났다. 그는 함대지휘권을 함장으로부터 인수하며, 그로부터 현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통일해군 서해함대의 기함인 충북함이  23일에 중국군에 의해 전자장비에 피해를 입자,  새로운 기함으로 한국형 구축함 백범함이 파견되었다. 이 구축함은 태평양에서 시험항해를 하는 중 개전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바로 서해함대에 배속된 것이다.  함장은 충북함의 함장이었던 고 재일 대령이 맡고, 부함장은 시험항해 때의 함장이었던 이 현철 중령이 맡게 되었다.

  "주로 미사일정과 어뢰정입니다. 그래도 숫자가 상당하고 대함미사일의 경우 사정거리가 40km에 달하기 때문에, 함대에 충분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단독작전이레 앙이고 항공이나 위성지원이레 있갔디. 기런데 뎌것들 와 나왔지비?  혹 우리 작전을 눈치챈 거이 아늬야?"

  "통일참모본부의 훈령에는 현재 신의주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전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아마 우리 해군에 의한 신의주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같습니다. 아니면 우리 함대가 며칠째 이 해역에 대기하고 있어서 뭔가 걱정되는 모양입니다."

  "기래?  기럼 일단은 안심이레 되는구만."

  김 중장은 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사령관 전용 콘솔을 조작하여 중국 해군의 미사일정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그는 현대화된 한국형 구축함에 탑승하면서 자신도 철저히 현대화되기로 다짐했다. 그는 하사관에게 부탁하여 단말기 조작법을 익혔다. 부하에게 묻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 기함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국의 고속 미사일정은 후앙급, 호우신급, 후앙펜급, 헤구 및 호쿠급이 있습니다. 배수량은 70톤에서 500톤까지 다양합니다. 무장은 대개 YJ-1(잉지-1 : 鷹擊)이지만, 구식인 헤구 및 호쿠급은 SY-1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함대사령관이 단말기로 중국 함정들의 제원을 확인하는 동안, 함장이 대체적인 제원과 무장을 설명했다.

  "내레 이것들을 일일이 하픈으로 격침시킬 수도 없고… 기렇다고 설라무네 포격전을 하다가는 놈들이 미사일을 쏴 댈티고.. 숫자레 많으니 상당히 골티 아프구만. 함장 동무의 생각은 어드레?"

  고 재일 대령은 함대사령관의 동무라는 호칭에 아직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반공영화에서 익숙해진 ‘동무는 반동이야!’, 또는 ‘이 종간나이 새끼 동무’ 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실제로 동무라는 호칭은 상당한 존경심을 담고 있는데도, 이 말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호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중국과 접경지대라서 함대를 더 이상 북진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기래… 됴은 생각이야. 가까운 곳에 순안비행장이 있으니끼니 미그로 미사일정을 잡자우."

  "미그보다는 A-10이 적절할 것으로 보입니다.비행기치고는 장갑이 상당히 튼튼하니까요."

  "길티만 몇 대 안되는 거로 아는데…"

  "원래 소형함선은 팬텀이 맡아 왔습니다만, A-10이 이 임무를 인수했습니다. 대해상훈련도 상당히 받았고요. 이 상황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요."

  고 대령은 이 훈련이 원래  북한 간첩선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해함대 사령관인 김 중장은 이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하며 명령을 내렸다.

  "알가서. 동무가 연락해서므네 잘 해 보라우."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메이요?"

  "신의주에 대한 지원포격도 하지 않으면서, 왜 서해함대가 며칠째 이 해역에 머물며 자꾸 중국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겁니까? 혹시 무슨 비밀작전이라도 있습니까?"

  "길쎄… 나도 몰갔서."

  김 중장이 허둥대며 대답했다. 뭔가 아는 체를 하는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지 고 대령이 보기에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1999. 11. 25  17:15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

  날이 어둑어둑해 지는 시간에 저격여단은 드디어 신의주에 입성했다. 미리 이 지역에 침투해 들어온 시가전대대원들과  석방된 사회안전원들이 엄중한 경계를 하는 가운데, 선우 대좌의 부대는 해방군으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인민들이 공화국기를 들고 그의 부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일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이지만, 신의주 시민들은 온갖 공포와 고통을 참아 왔다. 빨치산운동이나 파업 등, 시민들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해왔고, 이제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강 건너편에 중국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못했다.  신의주는 언제든지 전화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 동지! 인민들과 공화국기의 물결입네다.  신의주에는 중국군을 찾을 수 없습네다. 신의주 수복공작이레 대성공입네다. 걱정 끊으시라우요."

  선우 대좌가 무전기를 통해 차 준장과  연락하는 중에도 연신 껄껄대고 있었다. 이제 서부전선은 전쟁이 끝난 것이다.  아울러 이번 한중전쟁도 빨리 끝나길 희망했다.

  [그래도 조심하시요. 수색을 계속하도록 해요. 그리고 압록강변에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시오.]

  "명령대로 하갔습네다. 사령관 동지. 긴데 동지는 언제 입성하시갔습네까? 최고지휘관이시니 입성의 영광도 먼저 누리셨어야…"

  인민학교의 2층 교장실에 설치된 저격여단 사령부에 도착한  선우 대좌는 회전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차 준장과 통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무전병이 통신을 계속하는 여단장을 졸졸 따라 오다가  이제야 겨우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본대는 신의주에 입성하지 않겠소. 알겠습니까? 여기 계속 주둔하겠단 말입니다.  선우 대좌는 신의주 치안과 복구, 방어선 구축에 총력을 경주하시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하하. 알갔습네다. 동지. 길고 신의주 점령을 축하드립니다, 사령관 동지!"

  [...]

  "참! 포로는 인수하셨습네까?"

  [무슨 포로요?]

  "허~ 그 틴구들 무지 느리구만. 인민해방군 연락군관이레 한 놈 생포했습네다. 계급이래 상교(上校)던가… 하튼 곧 도착할 것입네다. 작전 지도레 방금 팩시 전송했으니끼니 받아 보시기요."

  [그래요? ... 네. 알겠습니다. 계속 샅샅이 수색해 보시오.]

  "알갔습네다."

  [수고하기 바람. 이상, 교신 끝.]

  선우 대좌는 차 준장의 소심함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필요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했다.그러나 명령은 지엄한 것, 부관에게 신의주 인민들을 동원해서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령했다.

  1999. 11. 25  17:20  평안북도 신의주 토교동

  "신의주에 중국군이 없다니 이상하군…  이 상위의 보고로는 압록강 남안에 중국군 방어선이 구축되었다고 하고…"

  차 영진 준장은 아직도 걱정이 되었다.참모인 김 소좌가 사령관의 걱정을 읽었는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일참모본부의 평가대로 이쪽에 있던 중국군도 양동부대레 맞는 거이 같습네다. 일단 신의주레 점령했으니끼니 우리 임무레 다 한거이 앙이갔습네까?"

  "글쎄요. 선봉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집착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전쟁은 의외로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차 준장은 전쟁이 빨리 끝나겠다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아무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군은 정말로 모두 후퇴한 것으로 보였다. 쓸데없는 기우를 한 자신이 우습게 보였다. 부하들에게 자신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그래도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군사작전이라는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는 가장 먼저 아내를 찾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서울에 있는 친정에 갔으리라.  그는 항상 활달한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사령관 동지! 팩스레 들어왔습네다!  인민해방군의 신의주 후퇴명령서인데 먼가 수상합네다."

  여군 통신군관인 김 소위가 허겁지겁 팩스를 차 준장에게 건넸다. 팩스용지 두 장에는 중국식 한자가 가득했는데,  차 준장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해서 이를 김 소좌에게 넘겼다.  명령서를 읽는 김 소좌의 안경 너머로 눈빛이 번득였다.

  "일반적인 후퇴명령서인데 어드레 수상하오?"

  김 소좌가 김 소위를 힐책했다. 통신군관으로서의 김 소위가 너무 월권행위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시간을 보시기요, 김 소좌 동지."

  "1999년 11월 25일 1900부로 후퇴! 이거이… 중국시간과 한 시간 차이가 납네다만,  사령관 동지!  이 명령서레 사실이라면 중국군은 아직 후퇴하지 않았습네다!  하디만 그럴리가… 도대체 어디에…"

  "그럼 그들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저격여단 시가전대대는 인민해방군 중장의 생포와 함께 후퇴공작계획서를 입수했었다. 그러나 지금 후퇴명령서를 가진 연락군관이 생포되다니, 후퇴명령을 다른 지휘체계를 통해 내렸단 말인가?  차 준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 소좌를 바라 보았다.

  "저들의 명령체계레 의외로 느릴지도 모릅네다. 앙이면 둘 중 하나레 가짜디요."

  김 소좌는 중국군의 명령체계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흑막이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안합네다. 즉시 저격려단에 통고를…"

  김 소위가 차 준장에게 건의하자, 차 준장도 불안해져서 선우 대좌를 호출하려고 김 소위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북쪽에서 연이은 폭음이 들려왔다.  폭발음과 함께 기관총 발사음이 북부군이 주둔하고 있는 석수산에 메아리쳤다.

  "쿠앙~ 쿠쿠쿠~~~"

  "신의주쪽입네다!"

  김 소좌가 지른 비명과 동시에 냉정한 김 소위가 즉시 평가를 했다.

  "중국군의 공격입니다!"

  김 소좌와 김 소위의 외침이 저 멀리 아련히 들리는 것 같았다.차 준장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제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공격을 받고 있다이! 사방이 완전 포위됐다. 최소 3개 집단군 병력! 빠져나갈 길이레 엄서!]

  선우 대좌로 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그는 특수전 부대장답게 통신체계를 완전 장악하여 신속하게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응사를 명하고 상황을 판단했는데, 절망적인 정도를 지나 부대 전멸의 위기로 받아 들였다.

  "우리가 간다. 기다려! 김 소좌, 출동준비하시오! 선우 대좌! 어떻게 된거요?"

  차 준장이 부대 출동을 명령하고 선우 대좌를 계속 호출했다. 그러나 무전기에서는 폭음만 이어질 뿐 응답이 없었다.

  [사령관 동지...]

  한참 있다가 선우 대좌가 다시 통신망에 나왔다. 아직 저격여단 사령부는 무사한 것 같았다. 차 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디 말기요. 구원해도 소용없시요. 적이레 너무 많습네다. 내레 가티 죽갔습네다.]

  "무슨 소리요? 잔말 말고 기다리시오. 곧 부대를 출동시키겠소."

  [수풍댐에 폭탄이레 설치했습네다.  한참 되었디요. 산악전 2대대... 뎡말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었습네다.]

  "뭐요? 수풍댐을 폭파시키겠다는 것이오?"

  [길티요. 비록 갈수기디만 겨울이라 강이 얼었으니끼니 효과레 더 됴갔디요. 신의주서껀 단둥까라 모조리 물에 잠깁네다.]

  "안됩니다! 일반 시민까지 몰살시킬 셈이오?"

  [일없시요. 도로에 나와있던 인민들 모조리 죽었습네다. 중국군이 쏴 죽였습네다. 제 품에는 인민학교 다니는 아동들이레 죽어가고 있습네다. 꽃다발 들고 사령부로 찾아 오던 어린 동무들... 흑~  중국군이레 이들을 듀였습네다. 이놈들... 큭큭~]

  차 준장은 선우 대좌가 이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 준장은 대학살을 막아야 했다. 한겨울의 수공은 익사자보다 동사자를 더 많이 만들고,  당연히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자를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다.

  "명령이오. 기다리시오. 수풍댐 폭파는 안돼!"

  [이미 늦었습네다. 명령이레 내렸습네다. 동지, 고맙습네다. 전에 살려 주셔서... 이뎨야 감사말씀 드립네다. 야간전 대대원들에게 저의 죽음을 알려 주시기요. 물이 오기까지 30분 정도 남았습네다.  그동안 이들을 붙잡아 놓갔습네다. 길고 시가전대대레 탈출시키갔습네다. 이들을 잘 부탁합네다.]

  자존심 강한 선우 대좌가 진심으로 차 준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차 준장은 선우 대좌가 정말로 죽을 결심을 한 것으로 느꼈다. 차 준장이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다만, 물이 밀려오는 속도가 갈수기와 비교해서 어떻게 될 지 자신이 없었다. 방해물이 없다면 유속은 상당히 빨라질 것이다.

  "이봐요! 제발 탈출하시요. 죽으면 안돼!"

  [길동무레 많아서 됴습네다.]

  기관총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유리창 깨지는 소리도 무전기를 통해 울렸다. 선우 대좌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차분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필요없는 학살일 뿐이오. 여기는 주전장이 아니란 말요!  당장 명령을 취소하시오!"

  [그들은 무장하디 않은 인민들을 학살했습네다.  길고 댐이레 폭파시키면 선봉지구에 대한 중국군의 지원이 무척 약해질 겁네다.]

  차 준장이 선우 대좌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우 대좌는 의외로 고집불통이었다.그러나 이것이 원래 그의 성격이라는 것을 차 영진 준장이 몰랐을 뿐이다.

  "우린 공격하겠소. 최대한 신속히 이탈하시요!"

  [동지! 제발 오지 말기요!]

  "김 소좌, 준비됐죠? 출동합시다. 바로 공격합시다!"

  [오디 말라니깐요?]

  "그럼 동무가 먼저 탈출하시요! 같이 죽고 같이 살잔 말이요. 전쟁은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왜 죽으려고 한단 말이오?"

  [탈출은 불가합네다.인민해방군이레 땅굴을 파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네다. 함정에 빠진겁네다. 길고 동지레 오시면 돌아갈 시간이...]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고 통신이 잠시 끊겼다. 저격여단은 지금도 치열하게 총격전 중이었다. 중화기는 별로 동원되지 않았지만 중국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들은 6.25때 처럼 땅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 저격여단이 신의주에 진입하자 꾸역꾸역 몰려 나왔던 것이다.

  [여긴 2층인데 1층까지 점령당했습네다.  부하들 숫자레 많이 줄었습네다. 고맙디만 늦었습네다. 사령관 동지. 안녕히 계시기요.]

  선우 대좌는 통신망을 계속 열어 두었으나, 다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무전기에서는 총소리와 폭음만 요란하게 흘러 나오고, 간간이 비명소리가 섞여 들렸다. 차 준장이 안타까와 견딜 수 없었다.

  "김 소좌! 공중지원을!"

  "길티만 아군과 섞여 있는 판에 항공지원이레 무리디요."

  김 소좌가 허둥대는 차 준장을 진정시켰다.  이 급한 상황에 그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어쩌란 말인가. 신의주를 공격하시오. 진격! 포격 개시!"

  1999. 11. 25  17:25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

  "뎡말 오래 기다려서. 폭파 안해도 되는 줄 알았지비."

  산악전 2대대 1중대 소속의  김 동현 중사가 분대원들과 함께 야산의 계곡에 숨어 거대한 수풍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19일에 중국군 수송열차를 폭파시키고, 송평에서의 교량파괴공작도 끝나고, 이제 마지막 임무인 수풍댐 폭파공작을 실행할 순간이었다.  이들은 21일에 댐 중요부위에 폭탄을 장착하여 이제껏 폭파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건전지레 남은거이 엄서…"

  최 전사가 CD 플레이어를 끄며 배낭에 집어 넣었다. 그는 8일동안 모두 32개의 건전지를 사용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뇌관용 건전지까지 빼 전압을 조정해서 썼음을 김 중사도 알고는 있었지만,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최 전사는 분대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중폭파 전문요원이었고, 이번 수풍댐 폭파가 분대의 마지막 임무였기 때문이다.

  "최 전사. 폭파하라우."

  "…, 분대장 동지. 꼭 구경하셔야 되갔습네까?"

  최 전사가 당돌하게 분대장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시선만으로 분대장도 이 상황을 뻔히 알고 있지 않냐는 뜻을 전했다. 김 중사가 약간 당황했다.

  "기런건 아이디만 확인이레… 알가서. 전원 이동하자우."

  김 중사는 수풍댐이 붕괴되는 광경을 보고 싶었지만 여기에 있다가는 분대원 모두에게 위험했다. 댐이 파괴되면 중국군들이 파괴조를 추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김 중사의 분대가 댐 근처에 숨어 있던 것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수풍댐에 대한 중국군의 경계는 엄중했다.

  분대원들이 야산을 막 넘어가는 순간, 최 전사가 TV 리모컨처럼 생긴 원격조정기를 꺼내 눌렀다. 폭음은 의외로 작았다.  쿵 하는 소리가 계곡에 은은하게 메아리쳤다. 최 전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리모컨의 건전지를 빼서 이를 자신의 CD 플레이어에 갈아 끼웠다.

  "이기 메이야? 이기… 실패 앙이야?"

  박 하사가 놀라 김 중사와 최 전사를 연이어 둘러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다만 발걸음만 빨라졌다.  최 전사는 다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이어폰이 그의 두 귀에 꽂혀 있었다.

  "기럼 3키로짜리 폭탄 두 개에 댐이레 당장 날라갈 줄 알았슴메?"

  분대원들에게는 폭파전의 스승격인 김 중사가  약간의 비웃음을 흘리며 박 하사에게 대답했다. 박 하사가 다시 확인했다.

  "폭파레 되기는 되는 겁네까?"

  박 하사는 폭탄을 터뜨리면  당연히 즉시 댐이 붕괴하며 물이 대량으로 쏟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의아한 표정이었다. 멀리 보이는 수풍댐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이디. 기다려 보라우. 길고 서둘러. 우린 구경할 틈이레 엄서."

  분대원들은 미리 개척된 통로를 따라 신속하게 이동했다.  댐이 진동하며 메아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1999. 11. 25  17:30  평안북도 신의주 풍하동

  [2시 방향 적 전차대! 공격받고 있다이~]

  선두의 정찰대가 무선으로 알려 온 것은, 비명과 함께 이어진 잡음이었다. 통신군관인 여군 김 소위가 정찰대를 호출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차 준장이 적의에 찬 표정으로 무전기를 응시했다. 김 소위는 무서워서 감히 차 준장을 바라보지 못했다.

  "즉각 반격하라우!  부대 전개, 포격 개시!  37사단이레 머하는기요? 미리 발견도 못하다니."

  김 소좌가 즉석에서 명령을 내리고, 분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차 준장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김 소위가 지도를 보며 중국 전차부대의 좌표를 포병대에 연락했다.

  "인민해방군 중장이니, 후퇴공작계획, 후퇴명령서니 다 가짭니다. 역시 중국군의 공성지계(空城之計)였소. 속았소."

  "….."

  김 소좌는 장갑지휘차의 총안(銃眼)을  통해 전방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차 준장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중국군의 포탄은 장갑지휘차 부근에까지 낙하하여 작렬하고 있었다. 전방은 일시에 발사된 연막탄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죽인거요. 저격여단, 신의주 시민들… 그 많은 중국군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다니… "

  "아입네다. 동지! 저격려단의 수색이레 미진한 거디요."

  김 소좌가 적외선 잠망경을 차 밖으로 올리고 전황을 살폈다. 중장비가 부족한 인민군들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국군은 T-80 II 전차가 주력이었고, 병력비율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국군 6사단 포병대의 다연장로켓이 전장에 도달했다.  로켓탄이 낙하하면서 연달아 폭발하여 눈덮힌 평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전차대와 보병이 분리되자 중국군 전차들의 급속진격이 멈칫했다.  전차대는 적 포병대에 의한 보전분리(步戰分籬)를 두려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보병이 수반되지 않은 전차대는 의외로 상대의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들만 보내고 나는 숨어 있었소. 무서워서 말이오.  아… 이 죄를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적은 2개 집단군이레 넘는 병력입네다. 장갑사단들로 평가됩네다.동지! 명령을 내려 주시기요. 더 이상 신의주에 연연할 수는 없습네다.신의주 시내에도 1개 집단군 이상의 병력이 있습네다.길고 수풍댐이레 폭파됐으니끼니 이곳은 곧 물바다레 될 것입네다."

  "….. 내 결정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겠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명령을 내려 주시기요."

  김 소좌가 차 준장의 냉철한 판단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시요. 후퇴…"

  "후퇴! 전면 후퇴하라."

  김 소위가 바로 후퇴명령을 예하부대에 전하자, 김 소좌가 후퇴할 장소를 지정했다. 김 소좌는 김 소위로부터 마이크를 뺏아 예하부대에 신의주평야가 남쪽 산악지대와 연결되는 백토동까지 전원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1999. 11. 25  17:35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

  강 만형 상사는 이미 온몸에 세 발의 총상을 입고, 폭격에 무너진 돌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분대원들 대부분이 전사하고 민 하사와 노 전사만이 남았다.  소음권총의 최 중사, 폭발문전문가인 오 전사, 저격병고 전사, RPG 사수 박 상등병 등은 중국군과의 치열한 육박전에서 모두 죽은 것이다.  지금도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30여 미터 떨어진 골목에 중국군들이 증오에 가득찬 눈으로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두워지는구만."

  강 상사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녁놀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이미 고통은 잊은지 오래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며 부하들의 상태를 살폈다. 두 사람은 별로 걱정도 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중장 등을 생포하여 본부에 인계한 즉시 이곳 신의주로 다시 들어왔다. 이들은 시가전대대 본대를 찾다가 중국군과 치열한 조우전을 벌이고 있었다.

  민 하사의 손도끼는 이미 검붉게 물들어, 지금도 도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노 전사는 아끼던 조선검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치열한 총격전과 육박전 끝에 이들도, 대치하던 중국군도 이미 실탄이 바닥난지 오래였다. 오직 각자의 육박전 기술과 힘만이 의미있는 전투가 되었다.  중국군은 처음에 이들을 포위할 때 1개 중대병력이었으나, 이때는 40명 정도만이 살아남아 이들을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분대장 동지! 또 몰려옵네다."

  "기래? 기럼 시작하자우."

  강 상사가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자동소총을 들었다.  소총에는 실탄이 딱 세 발 남아 있었다. 중국군들은 약 30미터 거리를 남겨두고 함성을 지르며 몰려왔다. 이들은 세 명의 인민군을 중심으로 동심원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모두들 총검을 바짝 세운 채였다.  강 상사는 수류탄이 하나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우리도 돌격 준비."

  강 상사가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부하들에게 준비를 시켰다.  중국군과의 거리가 10미터로 단축되었다. 8미터, 7미터, 6미터, 5미터…

  "돌격~~~ "

  강 상사는 중국군들이 3미터까지 접근하자  함성을 지르며 가장 숫자가 적은 북쪽으로 먼저 달려 나갔다. 그의 뒤를 부하들이 따랐다.

  강 상사는 첫번째 적의 가슴에 총검을 찌르고, 총검을 뽑자마자 다음 적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휘둘러 쓰러뜨렸다.  다음, 앞으로 나아가서 달려오는 적의 총검을 피하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찍었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반적인 AK 소총과 달리 그의 총 개머리판에는 두꺼운 강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옆에서는 민 하사가 쌍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왼손의 도끼로 적의 목 뒤를 찍으며 오른쪽 도끼로 달려드는 중국군의 총검을 쳐냈다. 다시 도끼자루 윗부분의 창으로 중심을 잃은 중국군의 옆구리를 쑤셨다.  쓰러지는 중국군 병사의 배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노 전사는 좌충우돌하며 칼춤을 추었다.  본국검법을 쓰는 노 전사는 이런 난전에서 단연 돋보였다.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식 검도나 해동검법을 하는 사람들과의 일대일 대결에서는 형편없이 밀리지만,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본국검법은 실전을 위한 검법인 것이다. 사람의 머리가, 팔과 다리가 바닥에 구르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그는 연이어 달라들던 중국군 세 명을 눈깜짝할 새에 베어 쓰러뜨리고, 북쪽으로 탈출구를 열었다.

  지칠 줄 모르고 도끼를 휘두르던 민 하사가 뒤에서 찌른 총검에 배를 꿰었다.날카로운 총검, AK 계열의 소총에 꽂는 창 비슷한 총검이 민 하사의 등에서부터 배를 뚫고 나왔다. 민 하사가 서서히 무너졌다.  그의 위험을 발견한 노 전사가 민 하사를 찌른 중국군을 베어 쓰러뜨렸으나, 그 중국군이 쓰러지자 민 하사도 앞으로 넘어졌다. 얼어붙은 땅에 얼굴을 묻은 민 하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강 상사도 최후를 맞았다.세 명의 중국군에게 동시에 찔린 것이다. 강 상사는 자신을 찌른 중국군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찬찬히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총검에 꽂힌 채 총을 그들의 가슴에 대고 한방씩 쏘았다. 중국군들의 얼굴에서 공포와 경악을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자살용으로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실탄은 이렇게 사용되었다.

  "분대장 동지!"

  강 상사는 노 전사의 외침을 들은 것 같았다. 고통은 없었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것이라고 그는 배웠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1999. 11. 25  17:40  평안북도 철산군 다계도 상공

  한국공군의 A-10 썬더볼트 공격기들이 수면 30미터 상공을 스치듯 일렬로 비행하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바로 물 속에 곤두박질 치는 이 곡예비행을 3분째 계속하느라  9명의 조종사들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목표로부터 발사되는 레이더 전파는 공격기에 점점 더 강하게 수신되었다. I 밴드의 주파수인 중국 함정들의 해상수색 레이더는 아직 공격기들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부 영철 소령은 목표가 대공미사일을 갖추지 않은 미사일정과 어뢰정이라고 브리핑 받고 출격했다. 그러나 이들 함정들이 갖춘 37밀리 대공포나 25밀리 2연장 대공기관포는 대공미사일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목표 확인! 미사일함을 식별하라. 1번기부터 공격한다. 자, 가자!"

  선두의 부 소령이 가장 먼저 중국 함정들의 불빛을 발견하고  후속기들에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계속 저공비행으로 중국 함정들에 2km까지 접근했다. 중국 함정들은 이제서야 공격기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진형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아직 대공포는 발사되지 않았다.

  [바바바바바~~]

  부 소령의 30밀리 어벤저가 3초간 불을 뿜었다. 유압회전모터가 작동하며 매분 2,100발의 속도로 HEI(고성능 작약소이탄)가 발사되었다. 수면에 작은 물기둥들이 치솟고  이것이 중국의 후앙펜급 고속미사일정에 접근하자, 잠시후 고속정은 벌집이 된 채 불꽃이 피어 올랐다.

  부 소령은 그대로 희생물의 상공을 지나 다른 목표를 잡았다. 1km 전방에 비교적 대형함인 호우신급 고속미사일정이었다. 부 소령은 AGM-65 매브릭 미사일을 발사한 즉시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대공포탄의 빛줄기를 피해 오른쪽으로 급선회했다. 사출된 미사일은 차가운 겨울바다와 뚜렷이 대비되는 중국함의 열원을 감지하여 명중코스로 진입했다. 고속 미사일정이 이 미사일에 대처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원래 대전차미사일인 이 매브릭 미사일은 480톤급인 호우신급 고속미사일공격정의 상부구조물에 명중하여 그대로 5미터 정도를 관통한 후 폭발했다. 상부갑판이 엿가락처럼 녹고 레이더 철탑이 무너졌다.

  부 소령이 후추안급 쾌속어뢰정을 기관포로 파괴한 후 해상을 둘러보니 곳곳에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직 아군기의 피해는 없었다.

  "이탈한다!"

  부 소령이 짧게 한마디 하며 먼저 동쪽으로 비행했다. 대공포탄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미사일정이 그의 비행코스에 보였다. 러시아의 OSA급과 같은 후앙펜급 미사일정이 함미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이제 이 함정은 미사일 발사가 불가능하지만 비교적 수리가 간단한 피해정도였다.  부 소령이 미사일정의 상부구조물에 20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의 공격기가 미사일정을 지나자마자 이 배가 폭발하며 저녁노을을 더 밝게 물들였다.

  "상승!"

  부 소령이 또다시 편대기에 짧은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미리 계획된 작전이었다.  일격이탈 후에 중국 함정들의 대공포 사정거리 밖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다.  매브릭의 사정은 32km, 중국제 37밀리 2연장 대공포의 사정거리는 8.5km이다. 결과는 뻔했다. 중국 대공포의 사정거리 아슬아슬한 곳에서 각 공격기가 탑재한 8기의 미사일을 모두 발사하기도 전에 해상에 목표가 될만한 중국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부 소령은 기지와 엄호기인 F-16 편대에 연락을 한 다음에 기수를 남동쪽으로 돌렸다. 신의주쪽에서 섬광이 비치는 것이 얼핏 보였다.

  부 소령은 기지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중국해군 전투기들이 목표상공에 도달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해역 상공에서 멍청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 소령이 유쾌하게 웃었다.

   굼벵이들. 후후~

  아직도 목표 해역 상공에 남아있는 F-16 전투기들이 중국 전투기들과 대치하다가, 연료가 떨어진 중국 전투기들이 귀환할 때, 새로이 출격한 북한 미그기들이 이들을 천천히 추적하며 격추시키는 것이 공군의 작전이었다. 브리핑실에 도착한 부 소령과 다른 조종사들은 이번 작전이 대성공이라고 들었다.미그끼리의 결전에서 연료가 충분한 북한 공군이 모두 11기의 중국 전투기들을 격추시켰다.

  1999. 11. 25  17:45  평안북도 신의주 미륵동

  "노 중사! 날래 남쪽을 지원하라우!"

  미륵동 형무소에서 권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아직껏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몰려드는 중국군들로 인해 지금은 거의 괴멸상태에 있었다. 주로 신의주의 사회안전원과 인민군 석방포로들로 구성된 약 1천여명의 혼성부대는 악착같이 이 마지막 거점을 지키고 있었다.  후퇴하려 해도 이미 완전히 퇴로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중화기를 앞세운 중국 정규군 앞에서 이들의 운명은 결코 희망적이지 못했다.

  "머하는기야? 이보라우! …!!"

  고개를 돌린 권 중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 중사는 뒤로 넘어져 있었고, 그의 이마에서는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분명했다. 권 중위가 다가가서 그의 시신을 살폈다.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 그리고 억울하다는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뒤집혀진 그의 철모에는 피가 흥건했다.권 중위는 차디찬 벌판에 누운 노 중사의 눈을 감겨 주었다.

  "각 분대 보고하라!"

  권 중위는 무전병을 불러 마이크를 잡고  예하 분대장들을 호출했다. 다중통화 무전기를 통해 분대장들의 인원 보고가 이어졌다.

  [1분대 165명 전사, 37명 중상. 현 인원 94명.]

  [2분대 112명 전사, 28명 중상, 현 인원 129명입네다.]

  [3분대 211명 전사. 54명 중상. 현 인원은 46명...]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3분대장인 최 중사가 무전기를 통해 다시 인원을 정정했다.

  [3분대 213명 전사. 55명 중상. 현 인원은 43명입네다.  지원은 어케된 겁네까?]

  3분대장인 최 중사가 짜증을 버럭내며 소대장에게 물었다.  평소같으면 이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분대장으로서 300여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을 지휘하기에도 벅찬 일이고,  게다가 지금은 온갖 돌발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전투상황, 그것도 패전 중인 것이다.

  "….. 본부소대는 65명 전사, 33명 중상, 현 인원 71명이다. 지원하갔다. 기다리라우."

  권 중위는 현역도 아닌 사람들을 전투에 투입시켜 피해를 크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형무소와 주변 무기고를 털어 이들을 무장시켰으나, 이들은 원래 전투에는 적합치 않은 인민들이었다. 특히 남쪽을 맡은 제 3분대의 희생이 컸다. 엄폐물도 별로 없는 지대인데다가 중국 전차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대전차무기인 RPG-7은 많이 남아 있었다. 중국 전차들은 접근전을 피한 채 집중포격만 하고 있었다.

  "어이, 거기 20명. 남쪽으로 이동하라우."

  권 중위가 빗발치는 총탄을 겁내지도 않고 똑바로 일어나, 급히 건설된 참호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어차피 중국군은 저격여단 대원들의 정확한 저격이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조준도 않고 총을 쏘아대는 병사들을 나무라며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제대로 사격하도록  자신이 행동으로 다구쳐야 했다.

  이들과 500여 미터 떨어져서 대치하고 있던 중국군들이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동시에 세 곳의 건물에서 저격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은 저격여단 시가전대대 소속의 병사들이 역저격했으나, 하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권 중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창 안에서 반짝인 섬광이었다.

  권 희철 중위는 여행가가 꿈이었다.  여행이 자유스럽지 못한 북한에서도 그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북동쪽 온성에서부터 남서쪽 옹진까지 안가본 곳이 없었다. 통일이 진행되면서 남북간의 여행이 자유로워지자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한 곳곳을 여행했다. 북한지방과는 또다른 여행의 묘미가 있었다. 단풍이 진 설악산은 금강산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경치가 좋았다. 강원도 어느 곳에서는 주민들이 그를 군부대에 간첩으로 신고를 하여 조사받은 적도 있었으나,  이 또한 여행의 재미있는 추억 중 하나였다.

  제대 후에 그는 세계를 여행하는 계획을 세웠다. 카자흐와 우즈베크,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등 회교권 국가들이 그의 첫번째 해외여행 계획지였다.  중국과 유럽문화 뿐만 아니라 이들도 세계에서 중요한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후세계만이 그가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여행지였다.

  1999. 11. 25  17:50  평안북도 신의주 민포동

  "적 보병들은 도주했습네다.  전과보고입니다. 직승기 완전 파괴 213대, 반파 137대, 노획 35대. 적 사살 1,500여명, 포로 370여명.아군 피해 전사 31명, 부상 27명, 이상입니다."

  전투의 뒷처리를 맡은 선임소대장 박 기철 상위가 무전으로 보고하자, 중대장 최 명수 대위의 입이 좋아서 다물어질 줄 몰랐다.  중국군 헬기 사단의 헬기 중에서 빠져나간 헬기는 10여대에 불과했다. 헬기강습보병들은 갑작스런 기습에 지휘체계가 붕괴되어 대부분 북쪽으로 도주했다. 최 대위의 중대는 이들을 추적, 섬멸하다가 동쪽에서 보이는 섬광에 놀라 전진을 멈추고 상황파악과 함께 부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의주의 본대가 적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시가전대대 전체에는 후퇴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메이 어드레? 려단이 위험한데 우리만 도망가라고?  앙이야. 공격하가서."

  "려단장 동지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만,  그리고 구원에 나섰던 북부군 주력도 중국군 대부대에 밀려 패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럼 방금 동쪽에 있던 전투레… 알가서. 길고 명령은 상황에 따라 가끔 늦을 수도 있는거디. 자, 우린 진격한다."

  최 명수 대위는 신임 저격여단장인 선우 대좌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무능력한 박쥐같은 늙은이’ 이것이 선우 대좌에 대한 최 대위의 평가였다.  운이 좋아 초기에 북부군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여단장인 최 대좌의 부상으로 임시 여단장이 되었지만, 원래는 결코 여단장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교육도 등한시하고 현대전에 적합치 않은 인물로 낙인찍혀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 자가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혼쭐이 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고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전국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격여단 본대를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포로와 아군중상자를 노획한 중국군 헬기로 후방으로 호송하고, 나머지 1백여명의 병력이 신의주 시가로 진입해 들어갔다. 중대원들은 방금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동쪽  풍하동 평야를 힐끗힐끗 쳐다 보면서 북쪽으로 전진했다.  노련하게 건물 그늘로 숨어 접근하는 그들을 시가지를 포위한 중국군은 발견하지 못했다.

  "시내도 상황은 거의 끝난 것 같습니다. 전투가 없는데요?"

  박 기철 상위는 도로 곳곳을 둘러 보았다. 사방에 인민군과 인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지만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숫자로 추정되는 중국군은 시가 안쪽 곳곳에 몰려 있었다.가끔 북부군 본대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남쪽에서 쏘아대는 포성이 이곳까지 울려 퍼졌다.

  "대대장 동지를 부르라우!"

  "대대본부와는 30분째 통신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까 명령은 려단 본부에서 온 것입니다."

  "무시기? 기럴리가… 기럴리 엄서. 메이 잘못된기야."

  최 명수 대위는 처음으로 공포를 맛보았다. 항상 가장 은밀한 곳에서 대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대대장이 연락두절이라니,  전투에는 절대 직접 개입하지 않고 지휘만 하는 대대본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전투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자우! 내레 이것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라우~ "

  중대장이 은폐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신의주 시가에서 새로운 전투가 일어나면, 북부군 본대의 후퇴도 용이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최 대위는 새로이 북부군에 배속되면서 북부군이 의외로 소규모라는 점에 깜짝 놀랐다. 2개 사단에 못미치는 병력으로 서부전선에서의 승패를 갈랐다고 생각하니 지휘관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고 지휘관이 약관의 한국군 중령이라는 사실에  그는 다시 한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한국군 장교에게도 이정도로 훌륭한 유격전 지휘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전투에서와 같은 상황에서는 차 준장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의 병력을 최대한 분산시켜 저격여단의 후퇴를 돕기로 그는 결정했다.

  주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병사들이 중국군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한 발에 한 명씩. 중국군들이 응사를 시작했으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저격여단 대원들은 사격할 때만 잠깐 고개를 내밀고  금새 모습을 감췄다.  소총 뿐만 아니라 병력 집결지에는 RPG와 기관총이 발사되어 중국군들이 당황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발사되는 총탄에 중국군들이 쓰러져 갔다.  숫자도 만만치 않아서, 중국군들은 겁에 질려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래, 우리 부대레 일케 싸우는 기야. 아무리 적이 대부대래두 소용 없디. 자, 몰아붙이라우! 진격!"

  최 대위가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하고 남동쪽을 망원경으로 살폈다.후퇴하던 본대가 산악지형에 접어들자 방어선을 형성하고 반격에 나선 모습이었다.

  [신의주에 계신 인민들은 지금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십시요. 수풍댐이 붕괴됐습니다! 곧 물살이 덮치게 되니 지금 즉시...]

  "뎌게 메이야? 무시기 소리디?"

  최 대위가 하늘을 바라보니 경비행기가 신의주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쌍발엔진에 두 개의 꼬리날개가 달린 이 비행기는 최 대위가 기억하기로 한국 공군의 O-2A기였다. 강력한 스피커를 단 이 정찰기는 시가 곳곳에서 발사되는 중국군의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공비행으로 신의주 상공을 누비고 있었다.

  1999. 11. 25  17:55  평안북도 신의주 상공

  "김 대위, 더 북쪽으로 코스를 잡아. 인민 여러분! 그리고 인민군 전사 여러분, 즉시 높은 곳으로 대피하십시요. 이제 5분이면 물살이 몰아 닥칩니다! 신의주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됩니다!"

  한국 공군 3276부대 237 비행대대의 한 우형 소령은 대공포화가 무서워서 자꾸 남쪽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려는 김 대위를 질타하며 긴급방송을 계속했다.  원래 그의 대대는 한국군 유일의 전술통제비행단이었다. 정찰과 폭격유도가 주 임무였는데, 이번에는 신의주에 있는 시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알리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한 소령은 시가지가 처참하게 파괴된 모습을 보며, 과연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전에 신의주에는 30만에 가까운 인구가 있었다고 들었다.  일부가 점령군인 중국군의 감시를 피해 피난을 하거나, 양측의 폭격, 포격에 사망했더라도 아직 절반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가지에는 온통 중국군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쪽하늘에는 저녁노을이 거의 지고 있었고, 지상에서는 대공포화가 이 비행기를 노리고 있었다.  벌써 3회 이상 피격을 당했으나 아직 비행기는 버텨 주고 있었다.

  "맞았습니다! 한 소령님, 조종불능입니다!"

  갑자기 오른쪽 엔진이 멈추고 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김 대위가 필사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려 했으나 비행기는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비행기 바로 아래로 건물 옥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상착륙해! 오른쪽에 활주로가 있다.  여기는 까마귀, 긴급상황 발생! 신의주 비행장에 비상착륙하겠다."

  한 소령이 기지와 통신하는 동안 김 대위는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잡았다.  남북으로 뻗은 비행장에는 군데군데 포탄 구덩이가 보였으나 착륙에 방해가 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김 대위는 활주로 한 가운데에서부터 착륙을 시작했다. 바퀴가 땅에 닿으며 파열음이 귀청을 찢는 듯했다.  결국 오른쪽 앞바퀴가 부서지며 비행기는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며 결국 기수가 땅에 쳐박히며 정지했다.

  "으… 이봐, 김 대위. 착륙 좀 제대로 할 수 없나? 멀미 나잖아?"

  한 소령이 벨트를 풀고 비행헬멧을 벗었다. 헬멧을 벗자 뜨뜻하고 미끈미끈한 액체가 그의 얼굴에 흘렀다.

  "이런 젠장. 피잖아? 김 대위, 빨리 내리자고. 연료가 새고 있어!"

  한 소령이 부서진 왼쪽문을 발로 차서 열고 조종석에서 빠져나오려다가 김 대위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의 몸을 손으로 흔들자 김 대위는 스르르 좌석으로 밀리듯 쓰러졌다.  한 소령이 놀라 김 대위를 다시 흔들었다. 절명한 것을 확인한 한 소령이 착잡한 심경으로 조종석을 빠져 나왔다. 그가 비행기에서 25미터쯤 뛰자 정찰기는 화염에 휩쌓인 채 폭발했다. 잠시 엎드려 있던 그는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1999. 11. 25  18:00  평안북도 신의주 백토동

  "엄청나군요."

  차 준장이 잠망경과 연결된 모니터 화면을 통해 밖의 상황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신의주점령도 실패하고, 아까운 1개 여단, 특히 귀중한 특수부대인 저격여단을 잃고 신의주 시민들도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다.

  중국군들은 연상동까지 몰려와  교두보를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번 목표로 한 적은 꼭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것이 중국군 전술의 기본이었다.  적을 패퇴시킨 후에도 집요하게 추적하여 최대의 타격을 가하는 것도 그들의 기본전술이었다.  이 기본전술을 실행하기 위해 중국군 지휘관은 철저하게 공격위주의 전법을 구사했으나 안전한 산악지대에 도착해서 반격하는 인민군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전선은 고착되었다.

  "공중지원을 요청하는게 어떻겠소?"

  "아냐요. 곧 물이 밀어 닥칩네다. 소용없습네다."

  "물이 어디까지 차오르게 되죠?"

  차 준장이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김 소좌에게 물었다.  김 소좌가 지휘차에 갖춰진 컴퓨터를 조작하여  신의주 부근 지도를 화면에 올렸다. 지도에는 각 지역의 해발고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1729에 폭파확인 신호레 들어왔습네다. 압록강이 얼어붙은 경우, 물살의 도달시간은 35분이 소요됩네다. 기럼 1804, 1분 남았습네다. 산악전대대의 보고에 따르면 댐의 수위는 174 메다."

  김 소좌가 데이터를 입력시키자  시간별, 지역별로 물에 잠기는 정도와 시간이 표시되었다.

  "신의주 북동쪽 위화도레 완전히 잠기고,  안둥과 신의주는 4층 이하는 모조리 잠깁네다. 기러니끼니… 바로 아래 연상동까지 잠기게 됩네다."

  "그럼 신의주 시민들은 모두…"

  "안타깝디만 기렇습네다. 5층짜리 건물이야 아빠뜨 뿐인데, 인민들이레 모조리 지하 방공호에 들어가 있을 겝네다. 아까 항공방송에서 신호를 했디만, 아마 절반 이상은 익사하게 될겁네다."

  "이럴수가… 우리는 이제 살인마 소리를 듣게 되었소.  군인이 민간인들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죽이다니…  김 소좌! 우리 전사들도 더 위쪽으로 후퇴시키시요. 혹시 모르니 말이요."

  차 준장은 시민을 학살한다는 자괴감과 부하들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네다.우리 과학자들이 철저한 시뮬레이션을 거쳐서 보고서를 냈으니끼요."

  갑자기 포성이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치열하게 포격을 실시하던 중국군 전차들도 갑자기 침묵을 지켰다. 이에 놀란 인민군들도 사격을 멈추자 신의주 일대에는 갑자기 적막이 엄습했다.  멀리서 은은한 메아리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우당탕 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옵네다!"

  김 소좌가 바짝 긴장하며 잠망경을 잡았다가  위쪽 큐폴라를 열어 젖히고 상체를 장갑지휘차 밖으로 내밀었다.  차 준장은 잠망경과 연결된 화면을 보았다.  북쪽 신의주평야와 북동쪽 위화도는 땅거미가 져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땅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왔습네다!"

  차 준장도 큐폴라를 열고 서둘러 상체를 차 밖으로 내밀었다. 망원경으로 북쪽을 살피니, 보다 분명하게 거대한 물살이 대지를 덮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눈 덮인 평야를, 파괴된 집들을, 각종 차량들을 덮치고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중국군들이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뛰고 있었다. 그러나 해일같은 물살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수많은 중국군과 전차들은 물살에 떠밀리거나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 준장이 이 광경을 보며 전율했다.

  중국군은 수풍댐이 파괴되어  물살이 신의주를 휩쓸게 된다는 사실을 바로 직전에야 알았다. 그러나 신의주 시내에는 높은 건물이 없고 산악지대는 북부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이들이 피할 곳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인민군들의 방어선인 석수산쪽으로 달려오던 중국군들은 인민군들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무수히 쓰러져 갔다. 그래도 중국군들은 총을 버리며 계속 산쪽으로 몰려들었다. 포로가 된 중국군들은 자꾸 힐끗힐끗 북쪽을 돌아 보았다. 적인 인민군보다는 수마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산 아래 보이는 것은 물밖에 없었다. 온 천지가 물에 잠겼다. 물살은 계속 불아나고 있었다. 일제가 건설하고 패망한 후, 생산전력을 절반씩 나눠 쓰던 북한과 중국이 공동관리하던 수풍댐, 이 거대한 댐이 붕괴되자 한꺼번에 수조톤의 물이 방류되어 하류지역을 무참하게 휩쓸었다.댐 바로 남쪽의 수풍, 신의주와 안둥, 의주 뿐만 아니라 압록강 하류인 용암포와 마안도까지 휩쓸었다.

  북부군 장병들은 이 엄청난 재난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  신의주에는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4층건물은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차 준장이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와 분노 때문이었다.  김 소좌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라고 있었다.

  "전혀… 압록강이 얼 경우에는 더 심한 결과가 올 줄을 알았지만 일케 까디는…"

  1999. 11. 25  18:10  경기도 남양주군 통일참모본부

  "대재앙입네다. 신의주, 압록강 건너 안둥이 모조리 물에 잠겼습네다. 아니, 휩쓸려 없어졌다는 표현이 맞갔디요."

  김 병수 대장이 씁쓸하게 보고하자 참모들 사이에서 침묵이 교차되었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도시를 수몰시키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인 전술이라고 생각했다.일반인들의 희생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엄청난 숫자가 틀림없었다.

  "중국군 3개 집단군이레 신의주에 감쪽가티 숨어 있었습네다. 중국군 공병대의 능력에 대해 재평가할 수 밖에 없습네다. 길고 안둥에 주둔하던 중국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낍네다. 총 병력 2개 병단에 7개 집단군, 20여개 사단이레 전멸, 또는 회복불능인 것으로 판단됩네다."

  김 병수 대장의 평가가 사실이라면 중국군은 서부전선에서는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한국군이 만주지역을 공격한다해 도 이들을 막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선양(瀋陽)쪽에 5개 사단이 있었지만 이들은 총후근부 소속의 병참, 또는 경비부대였다.

  "북부군의 피해가 심각한 모양인데요."

  정 지수 대장의 질문은 자못 심각했다. 서부전선은 지금 이들을 뺀다면 거의 무인지경이나 다름 없었다. 몇 개의 예비사단이 북부군 후방에 대기하고 있지만,  통일참모본부에서는 이들을 전선에 투입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병력과 장비가 도저히 수준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양 인근에는 평양지역사령부 예하 2개 사단이 있지만, 이들이 평양을 떠날리는 만무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군의 테러 등에 대비한다지만 사실은 전쟁 중에도 아직 남북간의 신뢰가 완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인민해방군이레 서부전선에 쏟을 힘은 더 이상 없으니끼니…  걱정 말기요, 정 대장 동지. 길고 동부전선이레 어케 됐슴메?"

  이 종식 차수가 선봉지역 전역의 전황을 묻자,  정 지수 대장이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했다.

  "상대는 종심방어진을 형성하고 기동방어를 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전진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자꾸 함정에 말려드는 기분입니다. 상륙전이나 공수부대의 투입 모두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격받을

낌새를 채면 즉시 후퇴해 버립니다."

  정 대장이 중앙화면을 작동시켜 함경북도 북부지역의 지도를 올렸다. 청진은 순식간에 수복했으나, 이는 중국군이 미리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나진, 선봉에 다가갈수록 중국군의 저항과 병력밀집 상태는 강화되었다. 중국군은 회령과 나진을 연결한 선에서 저항을 하고 있었는데,  특수부대의 매복과 기습 때문에 한국군과 인민군으로 구성된 통일한국군은 이들의 저항선에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은, 무산, 혜산, 만포 등은 모두 점령했습니다. 백두산 지역에도 중국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신의주가 회복된 셈이니 이제 이 지역만 수복하면 됩니다만…"

  참모들이 한반도 지도의 북동쪽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만 점령하면 한반도 전체를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중국군의 대병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었다.

  "북부군의 차 영진 준장으로부터 화상통신 요청입니다.  연결해도 되겠습니까?"

  참모본부 소속의 영관급 장교가 참모들에게 보고하자 이 종식 차수가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중앙화면에 차 준장의 초췌한 모습이 나왔다.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마친 차 준장은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했다.

  [이번 신의주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저는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저를 해임 및 예편시키고 북부군 장병들에게는 책임을 면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는 군사법원에의 소추도 각오하고 있습니다만.]

  참모들은 그의 말을 듣고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신의주 수몰에 대한 보고는 통일참모본부에서 이미 받았다. 압도적인 수의 중국군에게 포위된 저격여단장이 단독적 판단에 의한 수풍댐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댐의 폭파는 인민군이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 준비한 작전이었다.  일반인의 희생이 컸더라도 북부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차 준장은 원래 소속이었던 제 11 기갑사단이 해체되고 북부군 사령관이 되면서, 형식상 통일참모본부 직속의 독립부대장이 되어  중요한 일은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차 준장은 신의주와 주변 지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지자  양심상 가책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기건 인민군 전략이어서. 동무는 계속 직책을 수행하라우."

  김 병수 대장이 이 차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차 준장에게 변명을 했다. 김 대장은 군무경력에서 자신과 30여년이나 차이가 나는  차 준장이 건방지게도 통일참모본부에 예편을 요청하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도 전쟁 중이 아닌가? 유능한 지휘관을 전시에 예편시킬 지휘부는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제가 지휘하던 부대의 행동으로 10여만이 넘는 시민이 희생됐습니다. 저의 손은 지금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구조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자료화면입니다.]

  차 준장의 얼굴이 왼쪽 윗부분으로 축소되고, 화면 대부분이 물에 잠기기 직전의 신의주 시가를 비쳤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신의주에 거대한 해일이 덮치듯 물살이 몰려왔다.중국군 병사들이 높은 곳을 찾아 질주하는 모습도 보였다.전차와 보병전투차 등의 차량들이 장난감처럼 물에 휩쓸리며 파괴되었다.  압록강 건너의 단둥도 물에 잠기고, 둑을 따라 형성된 중국군의 방어진지도 물살에 휩쓸려 붕괴되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어 북부군에 의한 시민구조작업이 나왔다.  아직도 물에 반쯤 잠겨있는 신의주에는  시체들만이 물위에 둥둥 떠내려 가고 있었다. 몇 대의 헬기가 신의주 하늘을 날고, 어디서 구했는지 고무보트 몇 대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는지, 구조대원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제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인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군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군인이라는 데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제 전쟁도 거의 끝나가니 저를 예편시켜 주십시요.  예편원은 이미 국군 육군본부에 팩스로 전송했습니다.]

  차 준장은 진심으로 예편을 바라는 것 같았다. 참모들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전쟁 이후 계속된 피로가 쌓여 그의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양심의 무게에 짓눌려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참모들은 동정심이 일었으나, 그의 예편을 허가할 수는 없었다.

  "차 동지!"

  이 차수가 차 준장을 불렀다.  아버지뻘 이상의 연령차가 나는 이 차수는 차 준장을 성장기의 고민하는 손자 보듯 하고 있었다.

  "차 동지에 고민을 이해하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거이 웃기는 소리디. 생명이레 바꿀 수 없는기야. 동무의 고뇌를 이해하오. 동무레 오늘부로 사령관에서 해임하가서. 대신, 예편이레 아니돼. 당분간은 이곳 참모본부에서 일하도록 하기요."

  차 준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고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전시라서 자원에 의한 예편은 불가능했다. 10여년 동안 군문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 중, 또는 이후에는 그의 경력으로 마땅한 직장을 갖기는 어려웠다. 차 준장은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막중한 책임감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어차피 서부전선의 상황은 이미 끝났으니  누가 북부군 사령관이 되든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상황이 종료되면 지휘권을 홍 종규 소장에게 넘기고 귀관은 이곳 참모본부로 오기요. 장소는 육군본부에 문의하고…"

  차 준장 뒤에 배석한 홍 소장이 계속 놀라고 있었다. 차 준장이 예편을 원한다는 사실에도 놀랐고,  자신이 북부군 사령관이 된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차 준장이 사령관에서 해임되면 당연히 현역 인민군 장성이 사령관에 부임하게 될 줄 알았는데,  사령관직을 자신에게 맡긴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홍 소장의 뒤에 서 있는 젊은 여군 소위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계속 화면 이쪽과 차 준장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 정석 상장은 북부군 지휘부를 보며 차 준장이 이들에게 미리 언질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의장님.]

  차 준장이 경례를 하고 화면이 꺼졌다.참모들이 이 차수의 결정에 반대는 못했지만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섣불리 사령관을 교체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호석 중장이 묻자 이 차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의 책임만으로도 진이 빠졌을기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더 이상은 무리디. 차 준장이레 참모본부에 오면 며틸 휴가나 주라우."

  이 차수는 명령을 내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휴가를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이나 국군 수뇌부, 인민군 수뇌부 모두 자신에게만 기대고 있었다. 그도 차 준장 만큼이나 지치고 피곤했다.

  1999. 11. 25  17:20(중국시간) 북위 38도 45분 동경 122도 51분, 서해

  [빙!]

  장보고함의 승무원들이 갑자기 함체를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긴장했다. 아직 중국 함정들과의 술래잡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이 깔아놓은 소서스라인은 돌파했지만, 아직 프리깃함 두 척, 숫자를 알 수 없는 초계기 몇 대와 대잠헬기들이 장보고함을 추적하고 있었다.

  "중주파수 탐신음! 3-0-5! 목표 증속!"

  함장이 깜짝 놀랐다. 장보고함은 남쪽에 있는 프리깃함의 엔진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해류를 타고 무음잠항 중이었는데 탐신음은 뜻밖에도 서쪽에서 온 것이다.

  소나 담당자인 이 중사가 중국 함정이 낸 소리를 역으로 분석하여 적함의 정확한 위치와 거리 및 함종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예인소나가 해류에 휩쓸리며 잠수함의 진행 방향과 약간 달리 위치를 잡고 있었는데, 중국 프리깃함이 운동을 시작하자,  이것이 다양한 소리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걸렸나?"

  아직 잠이 덜깬 서 승원 소령이 남의 얘기하듯 묻자, 이 중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방향은 우리 바로 뒤쪽입니다.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어중간합니다.  목표와의 거리는 2,700에서 3,200 사이, 녹스(KNOX)급으로 생각됩니다."

  이 중사가 소나와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해수의 수온분포도를 번갈아 보았다.  함장은 어뢰도 없는데 무슨 목표냐며 이 중사에게 반문하려다 그만 두었다.

  "함이 해저에 있거나, 더 가까이나 멀리 있었다면 확실히 탐지됐을테지만 이 거리와 심도에서는 탐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수온을 체크해 본 결과 이곳은 소나의 사각지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서 소령은 자신감있게 말하는 소나병을 믿기로 했다.  잠수함의 귀인 그를 믿지 못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소나는 전방향,모든 심도에서 잠수함을 발견할 수 있는 장치는 아니었다.

  "아! 목표는 방향을 선회하고 있습니다!"

  이 중사가 환성을 질렀다. 승무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엔진정지 중이었나 봅니다. 적함은 우리에게 탐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가까왔더라면 들킬뻔했습니다."

  부함장이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녹스급이라… 그거 미국에서 임대받은 건데 아직도 안돌려줬나? 중국이 전리품이라고 주장하진 않을텐데…,  미국이 중국에 다시 임대해 줬을까?"

  녹스급은 중국의 일반적인 프리깃함과 달리  대잠공격에 상당한 위력을 가진 함정이었다.  비록 70년대 초반에 건조되기는 했지만 대잠병장은 8연장 아스록과 함께  324밀리 어뢰발사관 4문을 갖춘 제대로 된 프리깃함이었다.  함체에 수납된 액티브 소나와 함께 예인식 패시브 소나도 갖추었고,  대잠헬기를 탑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픈까지 무장하고 있었다. 단지 대공무장이 20밀리 벌컨 뿐이라는 것이 한가지 흠이었지만, 이는 자체무장일 뿐이고 대공방어는 함대의 다른 함이 맡게 되어 있었다.  함장인 서 소령도 3척 단위로 작전을 하는 이 프리깃함들에게는 약간 겁을 먹고 있었다. 배수량도 미국에서 건조한 프리깃함답게 자그마치 4,300톤이나 되었다.

  "항공기 엔진음입니다. 접근! 아…  방금 우리 남쪽 600미터를 지나 2-3-7로 향했습니다."

  소나원의 외침에 함장과 부함장이 놀라다가 MAD 탐지거리 밖인 600미터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하지만 이 비행기가 소노부이를 투하하고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비행기가 지나간 선을 통과할 땐 극히 조심해야 했다. 항해장교가 단말기를 두들겨 상황모니터에 선을 그었다. 모든 승무원들이 잠수함이 그 선을 통과할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드디어 비행기가 지나간 선을 통과하자 부함장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올초까지 대만엔 모두 6척의 녹스급이 있었습니다.  주로 대만해협의 대잠방어에 활용됐습니다."

  부함장인 김 철진 대위가 항해컴퓨터와 연결된 단말기로 확인했다.그러나 대만이 중국에 복속된 이후  녹스급 프리깃함의 운명에 대한 언급은 나와 있지 않았다.

  "녹스급을 대만의 남해함대에 배속시켰다면 대만이 그리 쉽게 깨지진 않았을거야."

  함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느 나라의 해전이든 이는 즉시 세계 모든 해군의 교과서가 되어 이들이 실행한 작전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함장이 생각하기로는 대만의 2함대가 1함대를 구원하기 위해 급속 항진했을 때, 녹스급을 충분히 활용했다면 2함대가 그리 허망하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만해군의 녹스급은 대만해협에는 몇척 있지도 않은 중국 잠수함을 찾는데만 동원되었다.

  함장은 부함장과 함께 탈출계획을 다시 짰다.  아무래도 녹스급 프리깃함에 탑재된 대잠헬기가 문제였다. 함장은 이놈의 시스프라이트는 Mk-46 대잠어뢰를 두 발씩이나 달고 다닌다며 투덜댔다.

  "어뢰 하나만 빌려달라고 해 보시죠. 구경은 다르지만 급한대로…"

  "좋은 생각이야. 잠수함을 부상시킬까?"

  "….. 아뇨."

  액티브 소나로 탐신음을 발한 프리깃함이  다른 방향을 향해 다시 탐신을 시작했다. 승무원들의 표정이 밝아졌으나 아직은 중국 프리깃함들의 숫자와 위치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대잠헬기들이 언제 갑자기 장보고함 바로 위에 나타나 어뢰를 쏘아댈지,  아니면 소노부이를 투하하고 조용히 청음하고 있을지 몰라 도대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플로팅 안테나 올려!"

  함장의 명령에 따라 광대역 전파수신기가 달린 부표가 와이어를 끌고 해표면을 향했다.  이어서 전파담당장교가 전파발신원의 위치와 방향을 분석해 전술상황판에 입력했다.발사관제장교가 이들에게 습관적으로 번호를 부여했다. 공격무기가 있다면 좋은 목표가 되겠지만, 지금은 회피와 은폐만이 이들이 살 길이었다.

  [전파원은 초계기 두 대에 헬기 3대입니다. 모두 해상수색 레이더 발신 중이며 활발한 무선교신 중입니다. 수상함은 프리깃함이 두 척인데, 레이더반사파를 내지만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몇 개 더 있습니다. 지금 상황판에 올립니다.]

  전파담당장교의 말이 함내 스피커로 들렸다.  그의 말은 위치가 알려진 녹스급 프리깃함의 레이더전파를 반사하는 그 물체들이 레이더가 없는 소형의 초계정인지, 아니면 프리깃함이 전파관제 중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대형 평면스크린에 투사된 전술상황판에는 각 주파수대역의 레이더 전파를 내는 목표와, 이들 레이더에 반사되고 있는 물체들의 위치와 방향이 표시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물체가 아무래도 의심이 갔다.

  "대잠헬기가 3대이니 아무래도 이 목표는 프리깃함 같습니다. 지상발진 헬기가 이 해역에는 도달하기 힘듭니다.  엔진도 정지하고 레이더도 끄다니… 대단한 놈입니다."

  부함장의 의견에 함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전파담당장교의 말이 스피커에서 울렸다. 다소 기가 차다는 음성이었다.

  [G 밴드! 역시 녹스급 프리깃함의 해상수색 레이더 전파입니다. 사격통제장치까지 끄고 있었다니, 역시 대단한 놈입니다.]

  전파분석을 마친 담당장교가 이를 상황판에 올리자 이 중사의 소나도 그 프리깃함이 내는 소리를 잡았다.그의 엔진음 분석도 역시 목표를 녹스급으로 분류했으며,  침로를 북쪽으로 잡고 이동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함의 함장은 지독하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며 다들 혀를 찼다.

  프리깃함이 내는 전파의 종류는 다양하다. 대공, 해상 수색레이더 뿐만 아니라, 항해용 레이더와 기상레이더, 무선용 전파, 각종 화기를 조작할 때 쓰이는 전파 등 갖가지 전파원이 있다.  이 녹스급 프리깃함은 엔진을 정지하고 완벽하게 전파관제를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장보고함은 하마터면 그 프리깃함 바로 아래로 지나갈뻔 했다.  아무리 장보고함이 무음잠항 중이라고는 하지만,  해류와 잠수함의 속도차이로 잠수함이 발견될 가능성이 컸다.

  함장은 썰물이 끝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한반도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위험한 명령을 내렸다.

  "안테나 수납! 전진반속, 침로 유지."

  잠수함은 중국 함정들의 소나 탐지범위를 피하며 서서히 전진했다.안테나를 수면에 내놓고 항진하면 각종 전파 정보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상공에서 발견할만한 궤적을 만들게 되므로 전파정보를 얻지 못하더라도 플로팅 안테나를 수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배나 잠수함의 잠망경 등이 만드는 항적은 밤에 발견되기가 더 쉬운 것이다.

  장보고함은 가끔 목표를 크게 돌아 우회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중국해군의 눈에 띄이지 않았다. 대잠헬기들의 위치로 보건대 지금은 중국 초계함대의 수색권을 약간 벗어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고공에 있는 초계기들은 아직도 주요 감시대상이었다.이들의 탐지범위는 의외로 넓었다.장보고함 승무원들은 초계기의 소노부이에 걸리지 않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공격수단이 하나도 없게된 잠수함 장보고는 축전지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럴 때 공격을 받는다면 격침되거나 부상하여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역을 벗어나려면 아직 200여 km가 남았다.

  서 승원 소령은 잠수함대 사령부에서 보낸 전문에서 작전은 대성공이라고 들었다. 톈진항을 공격한 것이 성공이란 뜻인지… 함장은 전문이 중국연해에서 탈출하는 중에 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했다.아무래도 자신이 미끼가 된 기분이었다.

  세 척의 한국해군 잠수함과 다섯척의 북한 고속미사일정이 중국의 내해인 발해만 안쪽으로 침투해서 중국의 방어선을 교란시켰다. 고속미사일정들은 북한공군의 공중엄호에도 불구하고 중국해군의 미그-23들에게 모두 격침되었지만 중국 초계정과 상선 몇 척을 공격하여 침몰시키거나 대파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F-16과 인민군의 미그-23 및 미그-29 전투기들이 이 해역 상공에 종종 출몰하여 중국군은 요격하기에도 바빴다.

  중국 해군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고 상당수의 프리깃함과 초계기를 서해 안쪽으로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고, 남부해안을 경비하던 함정들도 북쪽으로 돌려야 했다. 그만큼 한국해군의 작전영역은 넓어졌고, 이는 한국군의 또다른 작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서 승원 소령은 도대체 어떤 작전 때문에 한국 해군이 몇 대 밖에 보유하지 못한 209급 잠수함을 미끼로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그리고 걱정은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다.

  1999. 11. 25  18:30  평안북도 신의주 토교동

  차 영진 준장은 완전히 어둠이 깔린 신의주,  아니, 신의주였던 벌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물은 상당히 빠져 나갔지만 신의주시는 토사에 거의 매몰되었다.  시내에 5층짜리 건물들은 몇개 삐죽히 옥상부분을 물 위에 내놓고 있었지만  상당수는 아직도 물에 잠겼거나 붕괴되었다. 시 외곽의 아파트촌도 상황은 비슷했다. 낮은 지역은 수몰되고 높은 지역의 아파트는 무너졌다.

  다행히 민간인 생존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대부분이 고지대의 5층짜리 아파트 윗층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치열한 폭격과 포격의 와중에서도 자기 집을 지키고 있었다.  중국군들이 밀집한 시내 중심 외에는 무차별 포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트촌은 의외로 포격에 의한 피해가 적었고,  시민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시규정대로 폭격과 포격을 피해 지하방공호에 들어간 사람들만 목숨을 잃었다.

  차 준장은 신의주 시민들이 물에 빠져 죽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이 막히고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게다가 한겨울의 차가운 압록강물… 차 준장은 가슴이 아팠다. 이 사태를 막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수풍댐에 폭탄이 설치된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절대로 댐 폭파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 대좌가 그 명령을 자신의 곁에서 내리려 했다면, 차 준장은 그를 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 준장이 지휘차 안으로 들어와 보니  참모들이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화면에는 수몰된 신의주시가 보였고, 기자가 신의주시의 비극에 대해 울분을 감추지 않았다.  기자는 침략군인 중국군은 물론이고, 수풍댐을 폭파하거나 명령한 자들이 만약 한국군이라면 당장 체포해서  비인도적 범죄자로 기소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차 준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기 다 작전 아니겠슴메? 기자동무들이 전쟁상황을 모르는구만."

  홍 소장이 차 준장의 눈치를 보며 투덜거렸다. 저격여단이 편제상 북부군에 소속되어 있고,  신의주사태가 날 당시 차 준장이 지휘관이므로 기자는 지휘책임자로 차 준장을 지적한 것이 되었다.

  "맞는 말입니다. 저는 그 책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이런 범죄행위는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군인으로서는 절대 막아야 할 민간인 학살이라는 범죄를 오히려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동포들을 이렇게 학살하다니…"

  차 준장이 한탄하듯 말하자,  김 소위가 안스럽다는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김 기자 수고했습니다.]

  기자가 사라진 TV화면에 뉴스 앵커가 나타나고 그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차 준장은 관심있게 지켜 보았는데,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신의주와 의주, 용암포에서 익사한 우리 동포들,  그리고 중국 단둥에서 피해를 입은 중국 인민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앞서 기자가 말씀드린 대로,  신의주에서 13만, 의주에서 2만 3천, 용암포에서 1만 4천명 등 16만 7천명의 시민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단 둥의 인구가 20만을 상회하고, 그 지역도 대부분 수몰됐으므로 이번 사태로 인한 한국과 중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40 만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있던 중국군 병력이 2개 병단 30만이라고 하니까, 정말 대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미국 ABC에서 잡은 자료화면입니다.]

  "민간인이 40만이나…"

  차 준장이 신음성을 발했다. 그는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김 소좌가 얼른 그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으나, 그의 얼굴은 눈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정하시기요. 어쩔 수 없었습네다.  선우 대좌레 단독으로 댐 폭파를 명령한 겝니다."

  TV화면에서는 여자 뉴스앵커가 신의주 참사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수공은 훌륭한 작전이었지만, 주민소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풍댐을 폭파하여 무고한 시민들의 피해가 컸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전쟁상황에서도  신의주와 단둥 상공에서 항공촬영한 듯한 자료화면이 나왔다. 그것은 차 준장이 본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단한 기자동무들이라며 홍 소장이 혀를 찼다.

  차 준장은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보였다.  술에 잔뜩 취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참모들의 움직임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것같았다. 차 준장의 상태를 살핀 김 소위가 놀라 TV를 꺼버렸다.

  "아니오. 켜시오. 나는 저것을 봐야 되요."

  다시 켜진 TV에는 신의주와 단둥에서 양쪽 군인들이 구조작업을 하는 광경이 나왔다. 그러나 시내에서의 생존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시 외곽 아파트촌 옥상에서 주민들이 헬기로 대피하는 광경이 조금 나왔다. 그나마 건물의 층수가 낮은 단둥에서는 거의 생존자가 없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금강산(錦江山)공원과,  야뤼지앙따시아(鴨綠江大廈)라는 호텔의 고층에서만 중국인 생존자가 구조되었다.

  다시 화면이 바뀌어 이 종식 차수의 인터뷰가 나왔다.그는 어느새 평양에서 내외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수풍댐 폭파가 신의주에서 중국군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빠진 저격여단장의 단독판단에 의한 명령에 의한 것이며, 원래 댐 폭파는 중국군의 한국침공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차 준장이 왜 그가 나왔을까 생각해 보니, 북부군의 사령관을 표면적으로 이 종식 차수가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차수는 댐이 폭파된 사실을 알고 항공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경고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수기인데도 댐의 저수량이 예상외로 많았고, 적정수준을 넘는 참사가 발생했음을 시인했다. 그는 이에 책임을 지고 북부군 사령관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선우대좌는 전사했고, 자신은 사퇴했으니,  부하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는 말까지 했다. 다분히 북부군의 현 지휘부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차 준장은 가슴이 무거웠다. 민간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고 생각한 그는, 이때부터 불을 끄고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1999. 11. 25  18:40  서울, 정부종합청사 국무회의실

  "국민총동원령이라니, 지금이 일제시댄줄 아십니까?  중년과 어린 대학생들을 동원하여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것이오?  지금 전쟁은 거의 끝나지 않았습니까? 신의주도 수복했고, 이젠 함경북도 나진과 선봉을 포함해 조금만 더 수복하면 되는데, 이제 그들을 동원하여 어쩌겠다는 겁니까? 중국을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야당 출신인 통상산업부 장관이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공동제안한 국민총동원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오늘 새벽, 중국군의 피스함대에 대한 핵사용과 북부군의 신의주 수복을 기점으로 여론은 급속히 종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두가지 사건은 국민들에게 충격이었다. 중국이 핵을 썼다는 사실과, 대량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실 때문에 나진과 선봉 등 약간의 땅덩어리를 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과의 위험한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급속히 기울었다.

  "북한땅이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요. 이제는 통일한국의 영토가 아닙니까? 결코 우리 영토를 침략자에게 할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중국군은 거의 백만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만주에도 속속 중국군 증원병력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결코 수복하지 못합니다."

  국방장관이 섭섭하다는 듯 통산장관에게 말하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얼굴을 붉히며 국방장관에게 삿대질했다.

  "당신네 군부는 그동안 엄청난 예산을 써오면서 뭘했단 말이오? 지금 상당한 승리를 올렸다고 콧대가 높아진 모양인데, 개전 초기에 당한 패배를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그리고 승리라는 것도 외국의 용병이나 북한 노농적위대같은 예비군들이 얻은 게 아니오? 이번 전쟁을 보면서 나는 꼭 옛날의 임진왜란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어요. 그때도 관군들은 무참히 패배하거나 도망가기 바빴고,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켰지요. 도대체 정규군이 한 일이 뭐요? 기껏 과부들이나 양산하지 않았냐 말이요.

  지금 통일한국군의 병력은 한국군 60만에 인민군 110만, 그리고 양측에서 동원한 예비군 300만 등, 거의 5백만에 달하고 있습니다.그런데도 현재의 전력으로는 나진과 선봉을 수복할 수 없다고요?  그곳에서도 민간인 유격대가 피를 흘려야 되나요?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국방장관이 수모를 참느라고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할 일을 잊은 것은 아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국군이나 인민군이  초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많은 희생을 치루며 이만큼이라도 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지금 중국군이 강점하고 있는 함경북도 일부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고, 현역과 동원예비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병력을 한곳에만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전선이나 후방도 지켜야 하니까요. 최대한 긁어모아 봤자 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가용병력은 겨우 100만에 불과합니다. 통일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총동원령을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징집된 국민들이 모두 전선에 투입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대부분 후방에서 병참이나 경비 등의 업무를 맡게 됩니다."

  겨우 100만이라는 국방장관의 말에 국무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국과의 전쟁에서는 병력 수의 차원이 달랐다. 그 어느 나라도 중국과의 장기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편전쟁이나 중일전쟁처럼 앞선 무기체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중국군을 몰살시키기 전에는 그 어느 나라도 대등한 무기로 중국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동부전선의 나진과 선봉쪽에는 우리측 병력 100여 만이 있다고 들었소. 아시겠지만 서부전선은 사실상 거의 비워 둔 상태입니다. 북부군이 소문과는 달리 과장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저녁에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0만 병력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후방에는 아무리 많아야 백만 남짓일테고, 나머지 300만 병력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

  농림수산부 장관이 의문이라는듯 국방장관에게 질문했다. 국방장관은 순간 당황했으나 금방 다시 원래 표정을 찾았다.

  "100만은 동부전선의 최전선에 배치됐습니다. 일부는 후방에, 일부는 중부전선에서 중국군 병력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동부전선 배후에서 예비병력으로 활용 중입니다.예비병력의 중요성은 잘 아시겠죠."

  국방장관은 ROTC 예비역 중위 출신인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답변했다. 그러나 농림수산부 장관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넉넉하게 계산해 보아도 200만이라는 숫자가 모자랐다.  농수산부장관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국방장관과 대통령은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도대체 중국의 핵에 대한 대책은 도대체 세워져 있는 겁니까?  낮에 TV에 나온 그 핵미사일은 어떻게 된거죠?  정말 우리 것입니까? 만약에 중국이 우리 영토 내에서 핵을 쓴다면 우리도 보복할 수 있어요?"

  국방장관을 질타하던 통산장관이 이번에는 핵미사일건의 장본인인 안기부장을 보며 질문을 퍼부었다.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정부위원으로서 이번 비상국무회의에 출두한 안기부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답변을 시작했다. 예상질문인 만큼, 준비는 되어 있었다.

  "예, 정확한 숫자를 밝히기는 힘들지만  상당한 수의 지상발사 핵과, 잠수함 발사 순항핵미사일, 그리고 약간의 핵배낭 종류가 있습니다. 만약 중국이 우리 영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면, 우리도 당연히 핵공격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우리에게 핵이 있다는 것은 중국의 핵위협에 대한 견제가 되는,  즉, 핵억지력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더 낫겠죠."

  안기부장이 약간은 뻐기는 듯한 투로 이야기했다. 국무위원들은 안기부에서 외국으로부터 핵무기를 입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급비밀에 관련된 사항같아서 국무위원들은 더 이상 질문하기가 곤란했다.

  "만약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대통령이 침묵을 깨고 발언을 시작했다. 지금의 국무회의는 옛날처럼 거수기들이 모인 통과의례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연립정권을 세울 수 밖에 없었고,아직도 4개의 지역당이 한국의 정치를 왜곡하고 있었다. 홍 대통령은 2개의 정당과 연립하여 다수당정권을 수립했다. 대통령제하에서도 국회의 의석수는 정책집행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몇 개의 장관자리를 야당에게 주기도 했는데, 국정에 야당의 협조를 기대하는 동시에 원할한 정권교체에 대비한 포석이기도 했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이를 대통령의 연립여당에 대한 견제로 풀이했다.

  "우리는 중국과 있을지도 모를 핵전쟁을 막고, 한편으로는 잃은 영토를 회복해야 합니다.  나진과 선봉이 함경북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조그만 땅덩어리라도 우리 통일한국의 영토입니다. 북한이 10여년에 걸쳐 이 지역에 투자를 하고, 우리 기업인들도 많은 투자를 했지만, 경제적인 것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지적한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모순되어 있었다. 한국이 총력을 기울여 나진과 선봉을 수복하려 한다면,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려 하면 중국이 언제든 핵을 쓰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국무위원들 이 우려하는 것은 이 부분이었다.지금도 중국측에서는 조선초기까지 이 지역이 만주족의 영토였다고 선전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어떤 나라가 외국영토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하면 다른 나라로부터의 핵보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국제협정이었지만,  이것이 지켜질 것이라곤 아무도 믿지 않았다.  특히 유엔 안보리 5개국 중의 한 나라가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했다. 막강한 중국의 핵전력을 알고 있는 다른 핵강국들이 과연 중요하지도 않은 나라 한국을 위해서, 또는 단순히 국제협약을 준수하기 위해서 핵보복에 나서길 바란다는 것은 꿈에 불과할 것이다.

  "제정러시아가 왜 그토록 부동항을 원했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근대사를 돌이켜 보면,러시아가 개입한 모든 전쟁에는 이 부동항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20세기가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지금, 부동항 보유 여부는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역시대입니다. 해양의 시대입니다."

  청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평생을 역사학을 연구해 온 홍 대통령이 러시아의 예를 들어 바다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부동항을 갖기 위한 러시아의 몸부림은  18세기에는 스웨덴이, 19세이엔 영국이, 다시 20세기에는 미국이 방해함으로써  잠재적 초강국 러시아를 포위하는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발트해나 바렌츠해 및 흑해의 해상출구는 언제든 주변국들에 의해 봉쇄될 수 있으며,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은 겨울에 외해가 얼어붙으므로 아직도 러시아는 제대로 된 부동항을 갖지 못했다는 설명도 했다.

  일본의 오끼나와 군도와 필리핀 군도가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언제든 막을 수 있으므로 중국은 그만큼 나진과 선봉을 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도 일본열도에 의해 태평양으로의 진출이 방해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군력이 분산될 것이 뻔한 일본이 모든 해상을 봉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조그만 점으로 인해 중국은 일본이라는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나진과 선봉을 점령하면 중국해군과 일본해군이 조우하는 기회가 많아져, 당연히 일본은 군사력에 상당한 국력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도 중국이 노리는 점일 수 있었다. 일본의 재무장을 그 어느 나라보다 우려하는 중국이,  반대로 비경제적인 투자인 군비에 일본의 국력을 낭비케 하려는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국가간의 경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미국이 구 소련을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밀어붙여 결국 소련을 해체시킨 것과 유사하다.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통일참모본부나 정보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여러분도 여기 오시면서 다 읽어 보셨겠지만,  우리가 나진과 선봉을 끝내 수복하지 못할 경우 국익에 치명적인 손실이 예상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전쟁처럼 중국이 언제든 다시 한반도를 무력침공할 경우,  우리는 사면에서 포위되는 상황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충분히 과시했지만, 다음 전쟁에서는 그리 쉽게 국토를 방어하지는 못할 거란 겁니다.

  나진과 선봉을 통해 중국 해병대가 동해안 곳곳에 상륙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우리는 대만과 같은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대만과의 차이는, 우리는 한족(漢族)이 아니란 겁니다. 우리 민족은 기나긴 세월동안, 어쩌면 영원히 식민지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나타났던 수많은 중국 인근의 소수민족들처럼, 우리도 말과 문화를 잃고 중국에 동화되어 역사에서 퇴장할 수도 있겠죠."

  통산장관과 보건복지부장관은 아직도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다.  농림수산부장관이나 정보통신장관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장관들이 총동원령에 반기를 들었다.무소속 대통령의 한계였다.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무소속들이었지만, 다른 당소속의 국무위원들은 이미 당 차원에서 반대입장을 확고히 한 모양이었다.

  헌법상 국무회의 심의에서 부결로 처리된다고 해도 대통령이 이를 집행하면 위헌은 아니다. 심의에 부치는 것만으로 헌법상의 의무는 다 한셈이다. 심의 자체가 기관내 통제수단이며 통치권행사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통치구조상의 매커니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의에 부쳐진 정책결정사항에 대통령이 기속(羈束)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정치적 위험부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국민들이 얼마나 따라줄 지가 더 문제였다. 대통령이 결국 새로운 사실 한가지를 국무위원들에게 공표했다.

  "조금 전에 일본 총리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자는 안이 부결처리됐으므로,  일본 단독으로 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겠다는 겁니다."

  국무위원들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중국과의 전쟁에 경황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독도를 강점한 자들이 우호의 손길을 내밀다니,  일본은 또다른 속셈이 있다며 위원들이 흥분했다.

  "거의 수복하고 나니까 승리를 나눠먹자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지도 모릅니다. 절대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총동원령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통산장관이 대통령에게 일본의 제의를 거부할 것을 종용했다. 정보통신부 장관은 전혀 다른 우려를 표명했다.

  "일본이 개입할 경우, 일본과 중국의 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될 우려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세계대전입니다. 아니, 핵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일본에 다량의 농축 플루토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요. 그들은 언제든지 핵탄두를 제조할 기술과 능력이 있습니다. 운반체계도 중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위성과학의 발달이 앞섰습니다."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역시 일본이라는 카드는 한국민을 단결시키는 좋은 재료였다.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국내의 정치위기 때마다 써먹던 일본카드를 자신도 썼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국민을 단결시켜야 할 때였다.

  "물론 저는 한마디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자위대의 한반도 접근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도 했지요."

  국무위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본의 잠재적 위험은 이번 한중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커졌으며, 누구보다도 국무위원들이 실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의 독도점령사건과 해상봉쇄 비슷한 항로방해로 국민들의 대일감정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요구는 또다른  정명가도(征明假道)가 될지도 모릅니다. 중국을 친다면서 사실은 한반도에 욕심을 내는 것 말입니다."

  대통령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며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것을 당부했다.  대통령은 일본이 중국과 함께 한국으로 진공하지 못한 것은 전쟁준비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해결해야 될 것은 중국에 점령당한 지역의 수복과 핵전쟁 방지였다. 일본과 독도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중국의 핵사용은 군에서 막기로 했소. 만약에 중국이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국민총동원령에 찬성하시겠습니까?"

  "확실한 보장이라뇨? 중국과 협상을 했단 말씀입니까?"

  대통령의 제안에 보건복지부장관이 질문을 했다.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서 여성단체장이 된 것같은 보복부장관을 대통령은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런 류의 사람치고는 보복부장관은 그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다. 옛날의 여성장관들처럼 몰상식한 언행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지금 작전이 실시 중입니다. 위험한 작전이고… 사실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요. 하지만 일부라도 성공한다면, 중국의 선택권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대통령은 경호원과 비서관들을 국무회의실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장관들은 12시간 동안 국무회의실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총동원령이 가결되고 티 타임 때 안기부장이 대통령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물었다.  정말로 일본 총리가 자위대를 파병하겠다고 전화를 했냐는 질문이었다. 대통령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부장은 내가 거짓말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안기부장이 당황했다.  자신이 가진 정보 루트로는 그런 정보를 얻은 바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금까지 거짓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위정자로서 너무 고지식하다고 생각해온 터였다.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항상 진실만을 말씀하셨죠."

  "그렇소. 나는 일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아 왔소."

  대통령은 약간은 어색하게, 약간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실로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은 그의 정적(政敵)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일본을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일본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강화하겠습니다."

  "뭐…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아까 내 말은 거짓말이오."

  "네? 그럼 일본수상이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없다는 겁니까?"

  안기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항상 진실만을 말하던 고지식한 교수 출신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다니,  그것도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를 크게 손상시킬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렇소. 근데 목소리가 너무 크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안기부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장관들은 각 정당별로 삼삼오오 모여, 이번 총동원령 통과에 대해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일 아침에 당사로 출근하면 당 총재들에게 쪼인트를 한 방씩 까일 것이라며 대통령이 속으로 웃었다.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대통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 총리의 전화를 받은 적이 없소. 일본대사가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는 있지 않소?  만약 이것이 언론에 공개되고 일본이 사실이 아니라며 펄쩍 뛰더라도  누가 일본의 말을 믿겠소?"

  "….."

  안기부장은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작은 일에는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항상 진실만을 말하다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완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었다.  덕택에 국민총동원령은 국무회의의 심의에서 의결되고 해당 국무위원들의 부서(副署)만 남았다.

  1999. 11. 25  17:50(중국시간)  중국 상하이 총밍따오(崇明島)

  "후후~ 시작은 아주 좋군요."

  신 승주 대위는 침투할 때 입었던 잠수복을 벗고 두툼한 겨울양복 위에 하늘색 오리털 파카를 걸치며 속삭이듯 동료들에게 말했다.  동료들이 그에게 미소로 답했다. 잠수함이 중국 영해에 잠입할 때에도 특별한 위험이 없었고,상륙할 때 걱정되었던 중국군 해안방어부대의 순찰도 보이지 않았다. 해안부대의 해안초소 투입이 겨울철에는 1800에 시작되므로 아직은 해안부대의 투입이 이뤄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한국과 중국의 시차는 표준시로 한시간 차이지만,  한국이 일본 고베 인근을 통과하는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리고 상하이는 중국의 동쪽 해안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시차는  사실상 20분 정도에 불과하다.

  주변은 이미 캄캄했고, 양쯔강 하구 건너 멀리 보이는 상해 시가지의 불빛이 환하게 물위에 반사되었다.전쟁 중이고 전에 피스함대로부터 폭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하이는 전쟁과 무관한 평화로운 도시처럼 보였다. 제주도에서 출항할 때 보았던 모슬포처럼, 치열한 전쟁 중에도 민간인들의 삶은 활기찼다. 전쟁이든 평화든, 어느 누구의 지배하에 있든 세상은 민간인, 보통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 대위는 수중침투할 때 사용하던 장비는  해변에 깔린 자갈을 파서 모두 묻어 버리고 동료들을 따라서 길 위로 올라섰다.차가운 바람이 절벽길을 따라 불어 왔다.

  "옵니다."

  미니버스 한 대가 전조등을 킨 채 천천히 해안로를 거슬러 올라왔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지점이었다. 신 대위는 이를 보며 역시 안기부답다고 생각했다.

  "탑승!"

  지휘자인 이 우철 과장이 차 번호를 확인한 후 12명의 요원들을 지휘하여 선두로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운전사는 과장이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중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

  두툼한 솜옷을 입은 운전사가 요원들을 반기며 차를 유턴시키자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희는 안기부 제 3국 소속 요원들입니다. 여러분들과 이번 일을 같이 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과장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자, 이동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행허가증을 받으십시요."

  요원들이 자리에 앉으면서 여행허가증을 받았다. 주소는 중국 제 3의 섬인 이곳 총밍따오(崇明島),  여행지는 상하이였고 여행목적은 물품구입이었다. 총밍따오가 상하이시에 포함되어 있고, 평소 이 정도 거리라면 여행허가증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라서 중국인민들의 여행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들은 지금 상하이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총밍따오에서 되파는 보따리장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신 승주 대위가 자신에게 할당된 가방 안을 살폈다.모두가 두툼한 옷가지였고 그 중에 상당수가 최신 유행중인 모델의 오리털 파카였다. 색깔도 다양하고 사이즈도 종류별로 있었다.  역시 현지에 있는 요원들답게 이곳 상하이 시민들의  취향에 뒤떨어지지 않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인들도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중충한 색깔의 겨울옷을 입던 때와 시대가 달랐다.  중국인들은 패션부터 세계화된 모양이라며 요원들이 농담을 했다.

  1999. 11. 25  19:00  평안북도 신의주 토교동

  신의주 수몰사태의 수습과 북부군 사령관직 인수인계를 하고 있던 차 영진 준장은 야간고글을 쓴 인민군 군관의 방문을 받았다. 이미 사정을 모두 파악했는지 그 군관의 표정은 침울해 보였다.

  "죄송합네다. 이 지경 되도록 도움이 앙이 되어드려서…"

  "아니요. 제가 미안하죠. 다 무능력한 제탓입니다."

  차 준장이 씁쓰레하게 미소지었다. 저격여단은 단 하루 사이에 두 명의 여단장을 잃은 것이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전투와 사건이 단 하루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

  "이제 저격여단은 야간전대대만 남았소.  아니, 대전차대대는 동부전선에 있으니… 산악전 2대대도 상당수 남아 있을테고.  그동안 수고들 하셨습니다. 먼저 떠나게 돼서 미안해요."

  차 영진 준장은 새로이 북부군 사령관이 된  홍 소장과 다른 두 명의 사단장급 예비역 대좌, 국군 6사단의 포병연대장,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통일참모본부가 후방에서 급히 빼돌려 배치한 인민군 제 23사단장, 그리고 야간전대대장과 악수를 나누고 지휘차에서 나왔다.  23사단장의 계급이 중장이니 북부군은 또 하급자를 사령관으로 모시게 된 셈이다.

  김 소좌와 김소위가 매우 섭섭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지휘장갑차 옆에 포탄이 바닥난 K-1 전차 4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준장이 작별을 고하고 1호차에 올라탔다. 실로 며칠만에 타보는 자신의 전차였다.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준장님!"

  포수인 박 중사가 차 영진을 반갑게 맞았다. 차 준장은 박 중사와 악수를 하고 전차를 둘러 보았다. 코끝이 찡했다. 이놈은 9일간의 격전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차 준장 자신처럼…

  그러나 17일의 첫 전투에서 살아남은 여섯 대의  전차 중 두 대는 전쟁기간 중에 파괴되었다. 한 대는 23일의 공습에, 한 대는 오늘 새벽의 전투에서 파괴된 것이다. 제 11기갑사단이 며칠만에 전차소대로 전락한 셈이었다. 네 대의 전차는 눈이 녹아 진창이 된 길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차 준장은 물에 빠져 죽은 60만명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전율하기 시작했다.

  1999. 11. 25  18:10  중국 지린성 뚠화(敦化)

  인민군 소속 AN-24기는  눈보라가 쏟아지는 만주의 악천후 속을 뚫고 저공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이 작은 경비행기에는 국가안전기획부와 북한 정찰연대 소속의 요원 13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비행기의 요동이 너무 심해서 약간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곧 착륙합니다.]

  기장이 짤막하게 방송을 하자 착륙등이 켜지고 기내에 경보가 울렸다. 요원들이 안전벨트와 장비를 확인하고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기체가 하강하는 느낌이 들고, 잠시후 충격이 온몸에 퍼졌다. 비포장길을 펑크난 승용차로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충격은 곧 멈췄다.

  요원 한 명이 문을 열자 눈보라가 기내로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들 고글을 쓰고 즉시 비행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 뒤로 인사말이 전해졌다.

  [건투를 빕니다.]

  이들을 싣고 온 AN-24기는 즉시 이륙했다. 예비역 중위이며 컴퓨터기사인 백 창흠은 자신들을 싣고온 비행기가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경비행기였다.  비행기는 짙은 어둠 속을 비행등도 키지 않고 이륙해서 남쪽 하늘로 돌아갔다.  백 중위는 자신이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자, 출발하자우!"

  정찰연대 소속인 인민군  가 경식 소좌의 선도로 이들은 즉시 장비를 챙겨 동쪽으로 향했다.  만주벌판의 거치른 눈보라가 이들에게 몰아 닥쳤다.

  1999. 11. 25  19:2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함경북도에 백사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청진 남서쪽에 있는 해발 1,479미터인 백사봉이고,  다른 하나는 청진 북쪽, 또는 나진 서쪽에 있는 해발 1,139미터의 백사봉이 그것이다. 모두 함경산맥에 속한 봉우리인데, 1139 고지인 백사봉은 동쪽 30km에 나진, 북서쪽 약 20km에 두만강을 낀 회령이 있어서, 나진과 선봉을 강제점유하려는 중국 인민해방군과, 이를 수복하려는 통일한국군 사이에서 이번 전쟁 최대의 접전지가 되고 있었다.

  산은 별로 높지 않았지만 험악한 함경산맥의 봉우리답게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듯 경사가 심했고, 곳곳에 눈발을 날려 산길을 지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민군 제 19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중국군의 강한 저항을 받아 패퇴하자, 다음에 투입된 부대는 피스의 용병, 구르카여단이었다. 대부분 국제 지원병으로 구성된 피스의 다른 부대와는 달리, 이들은 돈을 받고 전쟁을 하는 프로들이었다.  히말라야 산자락의 소왕국인 네팔 출신 병사들답게 이들은 혹한에도 아랑곳 않고 차근차근 주변 봉우리들을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앞서 투입되었던 인민군 19사단처럼 피스의 구르카 여단도 그동안 이들과의 술래잡기를 지겹도록 하고 있었다. 한 부대가 습격당하면 한 부대는 습격을 하는 식으로, 이들의 전투는 점점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목표인 선봉에 다가갈수록 강력한 중국군 부대의 매복과 야습에 전체 통일한국군의 진군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산악전 부대인 다수의 병종(丙種)사단은 동부전선 전 전선에 걸쳐 출현했고, 이들의 지연작전은 상당히 성공하고 있었다. 통일참모본부는 나진, 선봉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이들을 소탕해야 했다.

  피스의 용병인 구르카 여단 제 5대대장 빠뜨랭 중령은 산중설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눈덮힌 산, 싸늘한 바람, 눈꽃이 만발한 나뭇가지들… 그의 입에선 절로 샹숑이 흘러 나왔다.

  [중국군 척후병들입니다! 1개 분대 병력.]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고를 담은 속삭임이 헤드셋을 통해 전해졌다. 빠뜨랭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자전송기를 보았다. 지도와 대조한 중국군의 출몰지점은 신현이라고 하는 고개였다.  그는 초조하게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대대원 전원은 현재 매복상태이므로 아군 척후대가 부대의 눈과 귀를 담당했다.  점점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 1분마다 전해졌다.

  드디어 중국군 척후병들이 매복지점에 나타났다.부대 전원이 숨을 죽였다. 이들은 목표가 아니었다. 중국 척후병들은 한참 주위를 살피다가 무선연락을 하더니 다시 서쪽으로 내려갔다. 지금 구르카 여단 5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곳은 백사봉 남쪽 2km, 어명산(1031 고지) 북쪽 1.5km이며,  중국군들이 처음 발견된 신현은 북동쪽으로 1.2km 정도에 있었다. 이들 세곳 모두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으니,이들은 적진 깊이 들어와 매복하고 있는 셈이었다.

  "중국군 수색대! 중대 규모!"

  척후대의 보고를 받은 빠뜨랭 중령은 대대통신망에 연결된 헤드셋 마이크로 속삭이듯 부대원들에게 경고했다. 잠시 후 100여명의 흰색 그림자가 스멀스멀 접근해 왔다. 대대원들이 조용히 숨어 이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어스름 속에서 하얀 위장복을 입은 중국군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경쾌했다. 최강의 보병이라는 히말라야 산지 출신의 구르카용병들도 헐떡대며 이곳에 도착했는데, 그들은 호흡 한번 흐뜨리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으니 이들은 어둠에 익숙한 부대라고 판단되었다.

  이들이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이며 뭔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산길에 지뢰나 크레모어를 매설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양쪽 계곡 아래에서 참호를 파고 있었다.  빠뜨랭이 있는 언덕 바로 밑에도 중국군들이 작업을 했다. 삽으로 얼어붙은 땅을 파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매복부대인가?"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용병 지휘관 빠뜨랭은 이들이 평범한 수색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전통적으로 유격전이나 매복, 야습 등 인민전쟁에 익숙한 중국군이라지만, 각개 병사들의 움직임과 복장으로 보아 이들은 중국의 산악전부대라는 병종사단이 틀림없었다.  오늘 새벽에 동부전선에 투입된 5대대는 처음으로 중국 병종사단과 교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보병사단은 3종류로 구분되는데, 현대식 중장비로 편성되어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한 갑종(甲種)사단, 경장비 편성의 을종(乙種)사단,  그리고 산악작전과 유격작전 수행에 적합하도록 소형경장비로 편성된 병종사단이 있다. 병종이라고 우수하지 못한 병사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최정예 신속공수 대응부대인 권단에 못지않는 병력이었다.

  빠뜨랭 중령은 헬멧에 장착된 헤드셋을 통해 중대장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렸다.  중국군들이 완전한 매복에 들어가면 공격이 수월치 않으리라는 판단이 서자 빠뜨랭은 공격을 서둘렀다.

  "공격준비!"

  각 중대가 공격위치에 배치된 것을 확인한  빠뜨랭 중령이 명령을 내리자 그의 이어폰에서는 중대장들이 각 예하 소대장들에게 내리는 명령이 들려왔다. 대대 통신망은 완전 개방된 상태였다.  빠뜨랭이 옆에 대기하고 있던 네팔인 저격병에게 신호를 보내자 저격병이 목표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정확히 중국군 지휘관을 찾아 머리에 조준선을 맞췄다.

  "땅!"

  최초의 총성에 중국군을 지휘하던 자가 쓰러지고 연이어 총성이 계곡 전체에 메아리쳤다. 양철판 튀는 듯한 카빈 소리와 빵빵대는 M-16 총성, 망치 두둘기는 소리같은 M-1의 총성, 기타 1차대전부터 유고내전까지의 기간동안 동서 양진영에서 개발된 모든 종류의 총성이 계곡에 메아리쳤다. 구르카 여단이 보유한 소총의 종류는 개개 병사의 나이만큼 다양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훌륭한 저격수였고, 총기 종류가 다양한 것은 그들에게 익숙한 개인화기를 사용케 하려는 배려가 담겨 있기도 하다.

  중국군은 참호를 파던 중에 불시의 기습을 받고  즉시 산개하려 했으나 엄폐할 시간여유가 없었다. 이들을 노리는 총구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얀 눈밭 곳곳에 소나기가 내리듯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빠뜨랭은 이를 보며 팥빙수를 연상했지만, 다음부턴 팥빙수를 먹을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것 같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갑작스런 적막이 찾아왔다. 중국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당했고, 여기저기서 목표를 찾을 수 없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좋게 저격을 모면한 중국군 한 명이 겁에 질려 북동쪽으로 뛰는 것이 발견되었다. 병사들이 사격을 하려다가 관두었다.그가 가는 곳은 지옥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버리고 산쪽으로 뛰던 중국군은 바로 앞에 쌓인 눈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 속에서 번득이는 하얀 물체였다.  그의 머리가 하얀 눈밭 위를 굴렀다. 이것을 본 구르카 병사들이 환성을 질렀다.  빠뜨랭이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쿠크리검을 든 구르카병사가 서 있었다.  눈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단칼에 중국군 병사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빠뜨랭은 중국군이 있던 곳들을 야시경으로 살폈다. 신음소리가 들려 왔으나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빠뜨랭 옆의 네팔인이 자기 키만한 M-1 소총에서 솔솔 새어 나오는 화약연기를 훅 불었다. 진한 화약연기가 빠뜨랭의 코를 자극했다.

  ‘이 냄새가 좋아.’

  그는 화약냄새는 정말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냄새를 잊지 못해 아직도 이 냄새를 찾아 세계 각지의 전장을 헤매는 용병 신세였다. 짜릿한 화약연기, 전장의 긴장감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졸음이라는 이 이율배반감, 이 모든 것들을 그는 좋아했다.

  그는 80년대까지 전통적인 향수의 고장인 프랑스 그라스 마을의 향수 공장에서 조향사(造香師)로 활약했다.  가장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는 향기의 마술사, 조향사.  그는 대학교를 마친 후에 향기에 끌려 조향사 전문학교를 나와 몇 년 간 이 회사에서 일했다. 마을 뒷산에 가득한 은은한 자스민 향기는  마약처럼 그를 이 마을에 붙들어 맸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선임조향사의 자살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예민한 후각을 잃고,  창의성에서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졌다고 생각한 그의 늙은 선배는 권총자살을 택했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그는 절명해 있었다.  회색 타일을 깐 바닥에 선홍색 액체가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권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와 매캐한 화약내음이 그를 매혹시켰다.  그의 후각에 강렬하게 각인된 그 화약냄새를 그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었다.

  빠뜨랭은 향수 만드는 일에 시들해 졌다.  그 어떤 향기도 그의 후각을 자극하지 못했다.  선배 조향사의 자살은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도 했다. 조향사로서 부적합하다는 주변 시선을 의식한 그는 어느날 밤,  공장에 들어가 자스민꽃 1톤을 농축시킨 1리터의 향수원액을 훔쳤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싸다는 향수원액이었다.

  30km를 뛰어 새벽녘에 니스에 도착한 그는  배를 타고 스페인을 거쳐 모로코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향수원액을 헐값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그러나 화약냄새는 결코 그를 자유롭게 놓아 두지 않았다.모로코 해방전선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던 그는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했다.프랑스인은 장교로만 지원할 수 있는데, 그의 경력이 입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따분한 외인부대 생활이 싫어져 제대한 후 세계 각지의 전장을 떠돌게 되었다. 유고내전에서 크로아티아 편에 서서 싸우던 그는, 피스의 공작원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피스라는 무장단체의 용병 장교가 되었다.

  그는 이 조직의 방대함에 놀라고 말았는데,  방대한 정보조직과 자체 보유한 군대 말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 개의 환경 및 반전단체가 이 조직의 하부구조라는 것을 알고는 열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색대 전방으로! 3중대, 전과확인하고 전리품을 노획하라!"

  빠뜨랭 중령은 1개 소대를 중국군이 오던 방향으로 내보내고, 주력은 현 위치에 대기시켰다. 3중대원들이 구르카 용병의 상징인 쿠크리 검을 쥐고 뛰쳐 나갔다. 포로획득이 아니고 육박전상황이라면 당장에 사람들의 머리가 바닥에 뒹굴었을 것이다. 이들이 부상자와 포로를 잡아 후방으로 이송시켰다.

  포로가 된 중국군은 중상자가 대부분인 20여명이라고 3중대장이 보고했는데, 일발에 적을 죽이지 못하고 부상자로 만들어 고통을 준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 빠뜨랭을 전율시켰다.  내세를 믿는 것인가?  빠뜨랭은 자문했으나 그들의 생활과 종교를 잘 모르는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국군 1개 대대병력, 2km 전방, 급속 남하 중!  선두에 1개 분대의 정찰병력!]

  수색소대장의 보고가 유창한 영어로 또렷이 들려왔다.  쪼글쪼글하게 생긴 늙은 네팔인 소대장이, 영국인은 아니지만 정통 교육을 받은 유럽인인 빠뜨랭 중령 자신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전에 인도군 소속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군에 소속된 구르카여단의 지휘관은 구르카어를 말해야 했다. 만약 그가 구르카어를 구사하지 못하거나 용맹과 지구력에서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면, 병사들은 가차없이 지휘관을 몰아냈다. 그들이 전쟁에서 이룩한 신화만큼 구르카용병의 자존심은 강했다. 그러나 피스에 소속된 구릉족들은  네팔인들이 가장 명예로 생각하는 영국군이 아니었다. 이들은 세계각지에서 경호원이나 경찰 등으로 활동하다가 피스의 용병이 된 사람들이다.

  빠뜨랭은 그들이 전쟁에서 프로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프로정신으로 구르카용병은 그 어느 군대보다도 전투력이 강했고, 특히 육박전과 유격전에서 그랬다.  그러나 이들은 교육수준이 낮기 때문에 대규모 부대의 지휘관은 맡기 어려웠고, 이 기회에 빠뜨랭이 지휘관을 할 수 있었다. 계급은 곧 봉급이었고, 이는 방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각 부대 즉각 북진!"

  이들은 약 700여 미터를 전진하여 새로운 매복선을 준비했다. 앞서서 전멸당한 중국군들이 침투한 산길에 크레모어를 매설했다. 중국군의 군화자국이 많고 날이 어두워 의심을 받지 않을 좋은 기회였다. 크레모어를 설치하자마자 중국군 정찰대가 눈덮인 산길을 헤엄치듯 서둘러 헤치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곧이어 적의 주력이 도착했는데, 이들은 양쪽으로부터 포위된 상황이었다.  총소리가 멈추자 당황했는지, 이들의 발걸음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빠뜨랭이 아드레날린을 잔뜩 분비하며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정찰대의 보고가 그의 이어폰에서 울렸다.

  [대규모 병력 출현! 1개 연대 이상으로 추정됨! 급속 남진 중입니다.]

  "뭐야? 이 좁은 산중에 1개 연대라니?"

  빠뜨랭은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했다.  다행히 매서운 눈보라가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아래쪽으로부터 불어와 그의 말소리가 묻힐 수 있었다.

  [정정합니다. 2개 연대 병력으로 추정!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젠장, 여봐! 무전병. 본부에 연락해서 포격지원을! 공중지원도 부탁해!"

  빠뜨랭이 속삭이며 신호를 하자 무전병이 좌표를 받아 여단본부와 함께 풍산동에 배치된 포병대에 이를 문자로 송신했다.김책(성진)시와 함흥비행장에 있는 통일한국군의 공군기 중에서  야간공격능력이 있는 공격기는 모조리 출격을 시작했다.

  1999. 11. 25  19:30  함경북도 나진 남쪽 대초도

  제 6상륙경보병 여단에 소속된 인민군들이  고무보트를 저어 나진 앞바다에 있는 대초도(大草島) 해안으로 접근했다. 나진과 선봉에 엄청난 숫자의 중국군이 바글댄다는데,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섬의 남쪽 암초인 오지암 뒤에서 적외선감지기로 해변을 비쳤으나 배경과 구별되는 물체는 없었다. 다시 서서히 섬의 남쪽 암벽쪽으로 보트를 저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대초도등대가 있는 곳 바로 남쪽 절벽이다. 등대는 폭격에 의해 이미 파괴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나진의 중국군 병력배치를 살피고 해안방어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다. 통일한국군은 이곳에 상륙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7명의 인민군 병사들이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주변은 캄캄했고 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도조 두 명이 서서히 기어서 숲쪽으로 접근했다.  아무리 적이 없다지만,  이들이 포복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분대장인 하 철룡 상사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펑!]

  갑작스런 섬광과 폭음이 이들을 휩쓸었다. 크레모어가 터지자 내장된 수백개의 쇠구슬이 선도조의 몸을 갈갈이 찢었고 폭발과 동시에 조명탄이 하늘을 향해 발사되었다.  하 상사는 이 와중에도 한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선도조 두명은 이미 절명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고, 앞쪽 숲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해안초소야! 후퇴하라우~"

  하 상사는 부하들에게 속삭인 후 먼저 기어서 바위를 내려갔다. 숲쪽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하 상사는 본능적으로 2정의 기관총과 6정의 소구경 자동화기가 발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두 곳이야. 우회해서 공격하라우. 내레 서쪽을 맡갔서. 자~"

  하 상사가 움직이자 부하들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 이들이 떠난 자리로 방망이 수류탄 여러 발이 날아 들었다. 섬광과 폭음이 이어졌다.

  하 상사는 젖먹던 힘까지 내어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랐다.  이런 경우 즉각 우회하여 공격한 자들에게 역습을 가해야 했다. 아니면 퇴로가 차단되어 고무보트로 후퇴하기가 불가능해진다.

  하 상사보다 먼저 꼭대기에 오른 김 하사가 안전을 확인하고 하 상사와 최 전사가 올라왔다. 최 전사는 즉시 배낭에서 RPG-7을 꺼내 불꽃이 번쩍이는 숲을 향해 조준했다.

  하 상사는 반대쪽으로 돌아간 조가 공격대기 상태에 들어갔을까 계산해 보았다. 약간 일렀다. 그러나 공격을 늦출 수는 없었다.

  "두 발 연속 사격하라우."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 전사가 RPG를 발사하고  서부의 총잡이처럼 배낭에서 탄두를 꺼내 신속하게 재장전했다. 최 전사가 다시 조준하여 발사하기까지 채 2초가 걸리지 않았다. 첫 발이 목표를 잡았을 때는 이미 제 2탄이 흰 연기를 뒤로 뿜으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내려가!"

  이들은 올라온 길을 따라 다시 암벽을 타고 내려갔다.이들이 있던 곳에는 사방에서 날아온 기관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1999. 11. 25  19:4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부정확해… 이거 정확히 유도할 수는 없나?"

  빠뜨랭 중령은 포병대의 사격이 정확치 못하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사실은 산자락에 가려 사각(死角)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중국군은 갑작스럽게 십자포화의 중심선에 갇히자, 순식간에 병력을 분산시켜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원래 좁은 계곡에 중국군은 더욱 밀집되었다. 적의 덩지가 너무 커서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하던 빠뜨랭은 속이 바짝바짝 탔다.

  어느새 포격이 잦아들자 숨죽이고 있던 중국군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빠뜨랭이 추산해 보았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하들에게 공격명령을 막 내리려던 차에 상공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쌔~~~~액]

  "왔다!"

  빠뜨랭이 하늘을 보니 고공에 엄호 전투기들이 편대비행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저공으로 수십대의 전투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위성 위치 파악 시스팀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 아군기에 의한 오폭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전투기들은 정확한 위치에 폭격을 시작했다.

  첫번째 팬텀 편대가 일렬로 접근하더니 기화폭탄을 투하했다. 순식간에 하얀 산이 붉게 물들 정도로 화염이 솟구쳤다.  계곡에는 벌건 불길이 낼름거리는 독사의 혓바닥처럼 하늘로 뻗었다.

  두번째 편대가 숨쉴틈도 없이 클러스터 폭탄을 투하하자 콩볶는 듯한 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쳤다.수많은 자폭탄들이 분산하여 중국군이 밀집한 곳 5미터 위에서 연달아 폭발한 것이다. 뿌연 연기가 사라진 곳에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빠뜨랭은 이 광경을 보며  자신이 폭격의 중심선에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좁고 기다란 계곡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회령 남쪽인 풍산동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구르카여단을 치기 위해 야습에 나섰던 인민해방군의  1개 사단 병력은 백사봉 남동쪽인 신현에서 이렇게 괴멸당했다.

  몇 개의 빛줄기가 상공으로 쏘아졌다.  폭격을 마친 30여대의 팬텀기와 비슷한 수의 드래곤 플라이는 저공으로 남쪽을 향해 비행했고, 미사일은 F-16 편대가 몸으로 받았다. 이들은 지대공 미사일을 회피하며 저공비행으로 중국군 미사일부대를 찾았다. 그러나 미사일을 피하지 못한 전투기들이 공중에 갖가지 색의 수를 놓았다.

  전투기들이 저공비행으로 산그늘 뒤로 숨자 대레이더미사일을 우려한 중국군 고사포부대는 즉시 레이더의 전원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의 위치는 이미 전투기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었다.  날렵한 F-16이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늘은 완전히 F-16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중국군은 만주의 각 비행장에 뿌려진 윤활제를 제거하여 내일의 출격에 대비하고 있었다.이 상황변화는 통일한국군의 제공권에  중국군이 도전하는 형식이 되지만, 숫적으로 열세인 통일한국군이 과연 제공권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통일한국군이 걱정하는 것은 사실 이것이었다.

  1999. 11. 25  18:50  중국 상하이 북쪽 총밍따오

  "검문소! 올 때는 없었던 것입니다."

  운전을 하던 요원이 바짝 긴장했다.30분 동안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작전회의와 현지상황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갖다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 미사일기지쪽으로 출발했는데, 길 모퉁이를 꺽자마자 전방 50미터 정도에 검문소가 보였다.  미리 알았다면 우회하거나 도보로 갔겠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미니버스는 태연하게 검문소 차단기 앞에 정차했다. 병사가 위병소에서 나와 차창이 열리길 기다렸다.  신 승주 대위가 차창 밖을 보니 그 병사는 일반 인민해방군 의무병 중에서도 가장 졸병인 열병(列兵) 계급장을 제복 깃에 붙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문소의 위병소는 간단한 이동식이었다. 안에는 나이가 약간 들어보이는 고참 병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되자 도로에는 통행하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간세(間世)라도 침투했나요?"

  운전사가 통행증을 꺼내 검문소 병사에게 건네주며 상하이 억양이 강하게 섞인 북경어로 물었다.다행히 병사는 차 안의 실내등을 키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병사가 승객들에 대해 약간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들이 중국인과는 약간 다른 외모를 가졌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병사는 승객들에게 질문을 할 것이고,  중국말이라고는 조금밖에 할 줄 모르고 중국어 억양에도 문제가 있는 요원들은 당장에 중국인이 아닌 것이 들통날 것이 뻔했다.

  "유도탄기지에 대한 경비가 강화됐어요.앞으로 밤에는 통행제한이 있게 될지도 몰라요."

  병사가 추운지 발을 구르며  차 번호와 통행증에 있는 내용을 검문소 일지에 적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몇시부터 통금이 될 것 같습니까? 언제부터요?"

  운전사는 짐짓 장사에 관계되는 것부터 물어 보았다.  졸병이라서 그런지 역시 그 병사는 술술 이야기 해 주었다. 나머지 요원들은 조는 척하며 병사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중간중간에 모르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글쎄요. 아직은 상부에서 명령이 안내려 왔지만, 통금에 대비하라고 하는군요. 우린 이 검문소에서 당분간 계속 근무할 겁니다."

  운전을 하는 요원은 젊은 병사를 보고 약간 만만하게 느꼈다.뭔가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여기 유도탄 기지가 있었나요? 굉장하군요."

  "모르셨어요? 원자탄 기지인데요. 엄청나죠?"

  인민해방군 병사는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동원해서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댔다. 자신은 기지 수비대 소속인데, 최근 병력이 증강배치되었다는 둥, 미사일기지 주변에 지뢰를 깔았다는 둥, 군사비밀에 해당될만한 것도 떠들어 댔다. 팀장인 이 우철 과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위병소에 있던 군사(軍士–하사관급)가 기다리다 못해  열병을 부르자 열병이 통행증을 다시 건네주고 차단기를 올렸다.  운전사는 전조등을 키고 천천히 어두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뢰라… 우린 지뢰에 대한 준비가 안되었는데…"

  장비를 최소한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지뢰탐지기 같은 야전용 장비는 전혀 준비를 하지 못했다.  여름 해변에서 종종 금속탐지기를 이용하여 동전을 줍는 모양을 볼 수 있는데,  지금 이곳은 휴양지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었다.지뢰탐지기를 대용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 과장의 고민이었다.

  "쩝… 기본 실력으로 헤쳐 나가야죠. 루트에 지뢰를 매설할 만한 곳은 얼마 없습니다, 과장님."

  미사일기지에 잠입할 루트는 주로 산길로 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일반적인 대인지뢰라면 염려할 것이 없지만,  내전 당시에 미국에서 대량수입한 크레모어가 문제였다.  미니버스는 어느새 베이스캠프인 산속의 외딴집에 도착했다.

  1999. 11. 25  19:00  중국 지린성 뚠화(敦和)

  백 대위가 있는 가 소좌의 팀은 미사일기지가 보이는 산 중턱에 도착했다.  야영지는 산에 있는 작은 동굴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통역 겸 안내역인 요원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동굴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접선예정시간이 조금 지나자 세 사람이 나타났고,  이들은 즉시 산개하여 총구를 들이대며 암구어를 물었다.

  "우산!"

  "장마!"

  이들 사이에 팽팽하게 번져있던 긴장감이 녹아 들고 현지요원들이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오시느라 수고 많았수다."

  "반갑수다레~ 동지들!"

  날은 이미 어두웠지만 눈빛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엉망이어서 마적단을 방불케 했다. 가 소좌가 묻자 현지요원들은 그동안의 고생이 끔찍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공안부 아새끼레 뎡말 지독하디요. 닷새 동안이나 추적을 받다가 기아새끼들 다 듀이고 왔습네다. 한참을 돌아 왔디요. 자, 가시면서 설명해 드리디요."

  이들의 책임자인 듯한 요원이 간단히 설명했다.  중국 공안원들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현지요원들에 대한 검색에 들어갔다.  원래 이들은 영사관 구실을 하는 조선주중연길리익대표부(駐中延吉利益代表部) 소속이지만, 하는 일은 첩보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군의 이동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익대표부가 북한에 이를 보고하기도 전에 이익대표부는 중국 공안원들의 습격을 받았다.  간신히 검거를 피한 요원들은 중국 공안부 소속의 비밀경찰들에게 추적당하는 중 뿔뿔히 흩어졌고, 이들 세명만 간신히 활동을 유지하고 정보를 북한에 보내기 시작했다.

  뚠화(敦和)의 중국군 핵미사일 기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들은 이번 임무에 차출되어 장장 120여km의 눈길을 도보로 헤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멀리 위회하기도 해서, 실제 이들이 주파한 거리는 훨씬 더 되었을 것이다.

  "뎡말 수고 많았수다레, 동지들."

  가 소좌가 이들의 영웅적인 행위에 감동이 되어 칭찬하자 현지요원들은 담담하게 칭찬을 사양했다.

  "일없시요. 당과 린민을 위한 것이디요. 전선에서 싸우는 동지들이레 더 노고가 많갔디요. 다 왔습네다."

  현지요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달빛만 고요할 뿐 산중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기렇소.  우린 기필코 이번 조국수호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여야 할 것입네다. 기런데 비트레 어딨시요? 당최 보이디 않는구만."

  백 중위가 세제 이름같은 비트라는 말을 듣고 킥킥댔으나, 이는 비밀 아지트의 준말이고, 항일빨치산 시절부터 써오던 유서깊은 용어였다.

  "동지 눈앞에 있디 않습네까?"

  현지요원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자 가 소좌가 유심히 그곳을 살펴보았다. 거의 완벽한 위장상태였다.  가 소좌는 현지 요원의 안내로 중국 미사일기지를 정찰하러 나가고 나머지는 짐을 풀었다. 피로보다는 그동안 참았던 추위가 더 견딜 수 없었다.  땀이 식은 곳에 남은 물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백 중위가 방탄조끼 안쪽에 장착된 방한조끼의 발열스위치를 넣자, 화학에너지를 이용한 발열제가 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졸음이 스르르 몰려왔다.

  1999. 11. 25  20:00  대전, 유성 정보사단

  "대부분 베이스켐프에 도착할 시간입니다. 아직은 어떠한 무선보고도 없습니다. 무사하다는 증거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임시로 통신대대에 지원나온 이 현우 소령은  통일참모본부 소속이라는 중장과 함께 중국에 침투한 요원들의 예상 진로를 보고 있었다.  이 젊은 중장은 너무나 긴장해 있었다.  이 소령이 보기에도 이 작전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니, 차라리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작전의 제안자이며 지휘자인 양 석민 중장은 입술이 바짝 타 있는 모습이었다.

  "장춘 부근에 눈폭풍이레 불고 있습네다. 기상이 워낙 됴티 않티만서두, 우리 조종사 동무들을 믿어도 됴습네다."

  이번 작전의 부책임자로서 인민군에서 파견된 박 형순 상장은 15개의 화살표가 중앙의 대형화면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지금 시간에는 대부분 도보로 목표에 접근할 예정이라서 전진속도가 너무 느렸다.  옆의 의자에 눕다시피 한 정보사단장 이 재영 중장은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밤을 새야 한다니 너무 끔찍했다.

  "절반만 성공해도…"

  "대성공이갔디요."

  김 중장의 말을 박 상장이 받았다.이들이 세운 목표는 공격대상인 중국 미사일기지 절반 이상의 점령이었다.  그러나 성공여부는 극히 불투명했다. 기지수비대의 방어를 뚫고 통제실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은 요원을 투입할 수도 었었다.

  "문제는 중국이 오늘부터 기지수비를 대폭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주로 대공방어 위주로 했지만 지상병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비전담 병력만 1개 중대가 넘었습니다."

  해커인 김 준태 소령이 다시 한번 모니터로  변화된 상황을 확인하며 걱정을 했다. 김 소령은 친구인 구 성회 소령과 함께 교대로 거의 열흘간 밤샘작업을 했다.  이들이 끌어들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중국 핵미사일 발사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는데, 두시간마다 암호가 계속 바뀌어 요원들이 기지를 장악할 때까지  중국군 중앙컴퓨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되겠지요. 아니, 잘 되어야죠."

  양 중장은 구 성회 소령이 자고 있는 소파 한쪽에 앉았다. 구 소령의 오른쪽 허리춤에 달린 권총이 대롱거렸다. 구 소령과 김 소령은 입대후 아직 권총사격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양 중장도 알고 있었다. 계속 밤을 새며 중국군 핵미사일의 발사암호를 찾기 위한 노력은  그만큼 눈물겨운 것이었다.

  양 중장도 눈을 붙이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인 아지트에 도착한 요원들도 지금쯤은 취침을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새벽의 일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체력을 비축할 때였다.  양 중장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1999. 11. 25  20:1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문제는,  만주에 있는 중국 공군기지들에 대한 대공방어가 대폭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핵미사일기지나 대도시같은 곳도 물론입니다만, 우리 목표가 아니니 상관은 없지요.  아마도 중국은 우리가 뿌려놓은 반마찰제를 거의 제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일부터는 중국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예상되며, 우리 공군기가 요격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호석 중장은 내일의 격전이 걱정되었다. 오늘은 한반도와 만주의 제공권을 통일공군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지만, 내일의 상황은 달라질 것이 뻔했다. 오늘처럼 마음놓고 나진,선봉에 집결한 중국군을 두들길 수는 없을 것이다.

  참모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통일한국공군이 신나게 중국군을 두들겨댔지만,  만주의 공군기지가 재가동된다면 상황이 달라질건 뻔했다. 해군도 한반도쪽으로 상당히 후퇴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오늘 새벽에 썼던 반마찰제 말고도 또다른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미사일 요격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처럼 순순히 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걱정이죠."

  이 중장은 한국군이 지금까지 미국의 무기체계에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걱정되었다. 전쟁시작 전부터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지 못했다. 국내 자체생산은 극대화시켰지만, 기술격차로 인해 중거리공대공미사일과 첨단무기의 재고는 격감했다. 해외에 나가있던 선장이나 조종사들이 자발적으로 무기수입에 나섰지만, 이들의 노력도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걱정되었다.

  "피스함대가 제주도 남방 240km까지 왔다는 소식입니다. 해군 소속의 슈퍼 링스가 함대와 통참을 무선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긴급 출동했습니다. 초계기와 전투기들이 호위를 위해 함대 상공에 대기중입니다."

  심 현식 해군중장이 피스함대의 제주도 근해 도착을 알렸다.  짜르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펴지고 참모들이 그에게 축하를 해 주었다.

  "다행이오. 잘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러시아인이며 반전전사집단 피스의 한국연락관,  암호명 짜르는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피스함대가 두 척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나마 중국군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일본함대의 위협으로부터도 벗어난 것이다. 그는 상황실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다들 어디 계신거죠?"

  통일참모본부 상황실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의장인 이 종식 차수는 신의주 수몰건에 대한 해명을 위해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마쳤으나 아직 돌아올 시간은 멀었고,양 석민 중장은 유성의 정보사단에서 뭔지는 모르지만 비밀작전을 지휘한다고 들었다.

  이 차수를 대신하여 의장대리직을 수행중인 한국육군의 정 지수 대장은 김 병수 인민군 대장을 힐끗 훔쳐 보았다. 김 대장이 시선을 의식해 정 대장을 보자 정 대장은 즉시 그를 외면했다. 김 대장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받았으나 국군 참모들이 불쾌해 할까봐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 대장은 자신의 의견이나 지휘관련정보를 거의 말하지 않고 있었다.

  1999. 11. 25  20:20  평양 조선로동당 3호 청사

  "아니 됩네다, 동지! 기럴 수 없습네다!  갑자기 그라시는 이유가 멉네까?"

  이 종식 차수는 인민군 및 당 서열상 한참 상급자인 최 광 차수의 뜻에 최초로 거스르게 되었다. 최 광 차수의 표정이 심각해 지고 있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두 명의 인민군 차수와 함께,  인민군의 핵심실세들인 이 원봉 호위총국장 대리와 이 하일 당군사부장 겸 평양지역 사령관 등 2명이 배석했다.

  이 두사람은 혁명 2세대로서 나이 60대 후반의 고참 대장급이었는데,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었다.  개전 첫날 주석을 비롯한 인민군 수뇌부가 전멸하자 즉시 최 광 차수와 함께 군부내 실권을 장악해서 지금까지 전쟁을 수행해 오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원봉 호위총국장 대리는 전쟁 전에는  당 총정치국 부국장을 하다가 차수 이상의 군수뇌가 전멸하자 호위총국장을 맡았다. 이들은 당 권력서열에서 이 차수 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이라서 이 차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무언의 압력을 가해 왔다.

  "작전장마레… 이미 중국에 노출되었소. 실패요.  주조(駐朝)중국대사레 다시 한번 내게 종용했수다."

  이 차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중요한 작전이 사전에 적에게 노출되다니, 엄청난 사실이었다.

  "그걸 어떻게… 대사가 참모장 동지를 협박했단 말씀입네까?"

  "… 그런 셈이오. 그들은 이미 모든걸 알고 있단 말이오. 작전 장마에 모든 계획이레 모조리 탄로났소.  우리가 핵유도탄에 비밀코드를 알고 있단 사실서껀 모조리… 대사는 투입된 요원들에 현위치를 알려 달란 게요. 앙이면 오늘 자정, 조선반도에 핵을 쓰갔다는…"

  이 차수는 전쟁이 일어난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 차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기럴수가! 당장 작전을 취소하갔습네다!"

  "앙이 되오. 기럴 순 없소."

  최 차수는 단호했다. 이 차수는 장마작전을 취소하고 이를 중국에 통보하면 핵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그러나 최 차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기럼 꼭 요원들을 중국에 팔아 넘기갔다는 겁네까?"

  이 차수가 다소 도발적인 언사를 구사했다. 최 차수의 고민이 무엇인가? 이 차수는 알 수 없었다.

  "내레… 어쩔 도리 없소…"

  "이들을 중국에 넘기더라도 또다른 협박을 할것입네다. 결국엔 조선 강토 전부 중국에 넘어갈 것입네다!"

  "우린 중국군 중앙컴퓨터에 침입했다고 됴아했디만 실은 그들에 함정에 빠진게요. 우리의 대실패요."

  "그들이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겝네다.  기렇게 당하딘 아니 했을텐데 와… "

  그동안 중국군은 자신의 중앙컴퓨터가 해킹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뒀다는 뜻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보고에 따르면 중국측이 어떠한 보안강화도 하지 않고 컴퓨터를 운용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얻은 정보는 실제 전투에서 통일한국군에 엄청나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중국 장갑집단군의 섬멸이나 중국군의 배치상태 파악,  만주비행장의 폭격까지 통일한국군은 해킹된 정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중국은 그정도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쨋든… 그들의 위치를 넘겨 주기요.  내레 조국에 핵폭탄이 떨어디는 걸 볼 수 만은 없소."

  "결국 조선반도 전체가 그들의 수중에… 우린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입네다."

  "기건 앙이오."

  단호하게 대답한 최 차수가 배석한 두 명의 대장을 힐끗 보다가 말을 이었다. 두명의 대장이 눈치채고 약간 우려하는 눈빛을 띠었으나 최 차수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약조가 되어 있소. 중국이 우릴 지원하기로…"

  "기기 무시기 말씀입네까? 설마…"

  이 차수가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상상이었다.그러나 곧이어 최 차수의 입에서 터져나온 선언은 그의 최악의 상상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에서 사회주의가 결국 승리하는거요."

  최 차수의 말을 들은 이 차수가 벌떡 일어났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럼 중국의 힘을 빌어 남반부를… 안됩네다!  다시는 동포를 적으로 돌려선 안됩네다! 다시는… 우린 다시는 겨레를 미소로 대할 수 없게 됩네다. 기건 비극입네다."

  불쌍한 남반부 인민들…  그들은 맹방이었던 미국, 일본과의 사이가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을 추진했다.중국이 이들의 명확한 적인 이상, 그들을 도와줄 나라는 전혀 없었다.  러시아가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힘을 잃은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이미 화석이 되어 있었다. 전쟁 중에 미사일 등의 무기를 한국측에 넘기기도 했지만, 남북한이 서로 싸운다면 어느 편에 설지는 뻔했다.

  "우리 임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선 기렇게 결정을 보았소. 동무도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의 인민이라면 당과 조국의 명령을 받드시오."

  "아아… 길타고 적전 분열을…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입네다.  36계 중에 제 3계인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이며 구미 제국주의자들의 divide and rule입네다. 뻔한 것 아입네까?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갔다는 중국의 속셈…"

  "중국이 이민족이라고 해도 사회주의 동포요. 우리 조국에 대한 침략을 절대 하지 않갔다고 맹서했소. 그들에겐 단지 나진과 선봉만 떼어주면 되오.  대신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길을 공화국에 넘기기로 했소.  이 정도면 퉁분하디 않갔소?  전쟁도 끝내고 만주의 땅도 얻게 되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선택이었고, 강요였다. 이 차수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  연길이 있는 연해주, 즉 우수리강 동쪽지방이 원래 한민족의 땅이었는데 잘못된 국경조약에 의해 잃게 되고,  이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확인했다는 따위의 말은 할 필요조차 없었다.

  "총참모장 동지!"

  이 차수가 두터운 뿔테안경을 쓴 최 차수를 노려 보았다.  81세의 이 노인은 아주 고지식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1969년, 반혁명죄를 묵인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어 탄광노동자가 된 그는, 김 일성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발휘하여 김 일성까지 감동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김 일성에 의해 1988년, 다시 총참모장이 되었다.

  "저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이지만,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는 않갔습네다. 조국을 침공한 그들의 말을 믿딘 않갔십네다. 최근 2년간 남반부 사람들과 많이 만났디요. 그동안 원한과 증오가 깊었습네다만, 기래도 분명히 따뜻한 피가 흐르는 우리의 동포였습네다."

  최 차수와 두 명의 인민군 대장은  이 차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대장 두 명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다는 시선의 교환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는 위험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재 직책이 너무 무거웠다.  남북 모든 병력의 지휘권은 그가 의장으로 있는 통일참모본부에 귀속되어 있었다.결코 남북의 위정자들이 원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는 전쟁을 잘 이끌어 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 순간이 지나면 이 노장군은 숙청당하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남북이 서로 싸울지도 모르는 판에 통일참모본부는 무용지물이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습네다. 서로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네다. 수년간 계속된 홍수와 가뭄으로 굶주린 인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습네다.  사회주의도 결국 해결해 주지 못한 문제였습네다. 영명하신 지도자 동지도 해결하디 못했습네다."

  "동무!"

  이 하일 당군사부장이  이 차수의 말이 듣기 거북해 제지하려 했으나 최 차수가 그를 막았다. 이 차수의 말이 이어졌다.목숨을 건 위험한 설득이었다.

  "사상과 주의는 인민을 위한 것입네다. 당도 인민을 위한 조직입네다. 우리 어버이들께서 항일투쟁을 하실 때나 조국수호전쟁에 나가 싸울 때도 인민을 위한 것이었습네다.  인민은… 우리의 신앙이며, 또한 우리 자신입네다. 진정 어칸 것이 인민을 위한 것인디 생각하셔야 합네다.

  길티요… 우린 전쟁을 하고 있습네다. 중국의 핵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네다. 기것 때문에 우린 장마작전이란 것을 계획했디요. 사실 실패한다면 더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습네다.  기러나 우리의 선택은 하나뿐이었습네다. 중국이 작전 장마의 개요를 알고 있다디만, 분명 자세히는 모를갑네다. 요원들의 비트도 모르디 않습네까?  중국이 자정에 우릴 공격한다면, 우린 작전예정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습네다.  어차피 중국의 핵위협에 대한 대처작전이 앙이갔습네까?"

  이 차수는 의문을 제기하며 잔뜩 겁을 먹은 군부 수뇌들을 설득했다. 최 차수가 다시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지들의 사회주의와 인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깊이 잘 알고 있습네다. 통일조국이 사회주의조국이라면 더 됴캉디요. 통일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강령을 따른 것이 많다고 들었습네다. 기래도 시장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할깁네다. 사회주의의 명확한 패배디요.

  하디만 중국은 이민족의 적이며, 남반부는 동포요, 동지입네다. 이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는 것이 됴캉습네다."

  이 차수는 억지로 설득하려고만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는 결정권을 최 차수에게 다시 넘겼다.

  "이 동지는 내더러 남반부 대통령을 만나보라는 것이오?"

  "기렇디요."

  최 차수의 마음이 흔들렸으나 대통령을 만나라는 말에는 기분이 상했다. 홍 대통령은 국민의 직선에 의해 선출되었고, 자신은 당에 의해 임명된 총참모장에 불과했다.  현재 실질적인 북한내 권력순위 1위라고는 하지만, 남한에서는 그를 군부실세 정도로만 치부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군령권을  이 차수가 의장으로 있는 통일참모본부에서 집행하고 있지 않은가? 남반부에서 보면, 자신은 허수아비 총참모장에 불과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고 있었다.

  "김 일성 수령 동지께서 말년에 와 남반부 대통령을 만나려 하셨갔습네까? 통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네다.  서로 대치하다간 공멸하고 말갔다는, 길고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인식이었습네다.  사회주의조국에 의한 남반부의 무력해방보다는,  북남 인민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용명하신 판단이었습네다."

  "동무가 수령동지에 대해 알면 멀 아네?"

  최 차수가 화를 버럭 내며 이 차수를 노려 보았다.  부하들에게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최 차수였지만,  그는 김 일성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에 의해 평가받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김 일성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까 생각했다.

  그래도 당장에 중국의 핵공격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었다. 만약 남반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그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어차피 중국의 핵에 의해 통일한국이 패배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차라리 이 기회에 남조선을 무력통일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다. 조선강토와 인민도 지키고, 남조선도 해방할 기회였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이미 결정한 바 대로,  그는 중국의 제의를 받아 들이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제가 지휘권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통일참모본부레 결국 합의체입네다. 길고 지금은 남반부에 남양주로 이전했습네다.  알고 계시겠디만. 중요한 것은, 남반부 국방군이 통신정보망을 모조리 장악했다는 겝네다. 이 상황에서 결코 참모장 동지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겝네다."

  이 차수는 참모장인 최 차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후회했다. 그도 이미 이런 건 고려했을 것이다.

  [똑똑!]

  "메이야? 아무도 들어오디 말라고 하디 않아서?"

  문을 열고 들어온 호위총국 소속의 젊은 대위에게 최 차수는 다시 한번 화를 벌컥 내고 말았다.  잔뜩 겁에 질린 대위는 그래도 두 명의 차수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보고했다.

  "죄송합네다.  통일참모본부에서 이 차수 동지께 아주 중요한 연락이 있다고 합네다."

  이 차수가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최 차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화상통신을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화면에는 이 차수의 기억에 없는 인물이 나왔다.

  [방금 전에 통참의 전산정보실에서 오 성윤 대위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통참의 컴퓨터가 해킹당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한 분량의 비밀정보가 유출됐습니다.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산정보실장인 강 승철 대령이 보고했다.  김 준태와 구 성회 등 대학생 해커들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 준 곳이 이 전산정보실이고,두 사람은 해킹계의 실력자들을 뽑아 같이 활동했다.오 성윤은 구 성회의 동호회 선배였다.

  "빠져나간 정보레 어느기야?"

  [중국군에 관련된 자료 전부와 통일한국군 편성현황, 작전성과보고와 작전계획, 그리고 나진선봉 탈환작전계획 등입니다.]

  "메이야?  이럴 수가… 동무! 혹시 작전 102에 관한 것도 있간?"

  강 대령이 목록을 확인하더니 유출되었다고 보고했다. 맙소사!  정말로 다 빠져나간 것이다.  이 차수의 표정이 창백해 졌다. 강 대령은 단지 관리자라서 작전 102의 실체, 정확한 명칭인 작전 장마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작전실행 몇시간 전에야 모든 정보가 중국측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니, 이미 작전은 완전실패였다.  작전내용 유출은 이 차수의 애초 예상처럼 최 차수가 중국에 빼돌리거나 첩보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통일참모본부 컴퓨터에서 해킹된 것이라면, 중국은 통일한국군의 작전을 손바닥 들여보듯 알고 있는 셈이다.

  "거 보라우… 내말이 맞디…"

  최 차수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이 차수를 나무라는 순간 화면에 다른 얼굴이 나왔다.  새파랗게 젊은 국군 대위였다. 상당히 어색하게 경례를 하더니 실장의 보고를 보충했다.

  [의장님! 이들 정보는 중국이 아니고 일본이 빼갔습니다. 통화내역을 조사해 보니,  일본 도쿄도 미나도쿠 롯폰기에 있는 자위대의 중앙지휘소로 정보가 유출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의 유입을 다른 컴퓨터로 이전시켰습니다. 대신, 다른 가짜 정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해킹방법은 교묘해서 자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만,  남양주전화국에 있는 통화내역을 조사해 보고 찾아낸 겁니다.

  지금까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해커는 우리가 중국군 컴퓨터를 해킹한 경로로 침입해서 데이터를 일본쪽으로 유출케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을 거쳤기때문에 우리가 중국을 해킹한 사실이 그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현재 그들의 해킹 프로그램을 찾고 있으며, 차후의 보안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중국이 아니고 분명히 일본이 우리 컴퓨터를 해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이!"

  "일본이 넘겨줬구만!"

  이 차수와 동시에 최 차수가 신음성을 발했다. 일본이 중국에게 모든 정보를 다 내주었을까? 그것은 의문이었다. 잠시 손익계산을 해 보았다.

  "기럼 방법이 있습네다."

  이 차수의 눈빛이 반짝이며 최 차수를 바라 보았다.  최 차수가 결심을 굳혔다.  중국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일본이 모든 정보를 중국에게 줄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 차수는 일본이 중국의 배후에 숨어서  이번 한중전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항일전쟁 때 일본제국주의에 치열하게 투쟁했던 선배들이 자신의 꼴을 보고 뭐라고 비난하실까?  최 차수는 부끄럽기도 했다.

  "동무! 남조선 대통령과 화상통신 준비하라야."

  "알갔습네다, 총참모장 동지!"

  아직까지 벌벌 떨고 있는 호위총국 소속의 대위에게 명령하자,  그가 익숙한 동작으로 통신기를 조작했다. 두 명의 대장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상관은 최 광 참모장이었다.  이들의 상관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무한이었다.

  1999. 11. 25  20:3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빠뜨랭이 지휘하는 구르카여단 5대대는  중국군 1개 사단이 괴멸당하다시피 한 계곡 아래쪽에 아직도 숨을 죽이고 매복하고 있었다. 중국군들이 몰려와 부상자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적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것같았다. 행동은 신중했고, 절대로 밀집대형을 취하지 않았다.

  [칠까요?]

  "놔둬."

  계곡 건너편에 있는 대대 작전참모가 공격을 건의했으나 빠뜨랭은 신사였다. 쉽게 전과를 올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럴 때 치면 신사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는, 그는 더 큰 적을 노리기로 했다. 과연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국군 병력은 정말 무한한 것같았다.

  [1개 여단에서 사단병력! 또 몰려 옵니다.]

  정찰대 지휘관이 혀를 내둘렀다.  인구가 얼마 안되는 네팔 사람들은 중국군에 기겁을 할만 했다.  1개 사단이 전멸한 곳에 또다른 대규모병력이 몰려오는 것이다. 이들은 매우 신속하게 움직였다. 정찰대에서 보고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주매복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공격준비! 포격 및 공중공격 지원 요청하라."

  대대장이 헤드셋을 통해 짤막하게 명령했다. 구르카 병사들의 눈빛이 번쩍였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구릉족이었지만, 이 프랑스인 대대장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외인부대가 허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용기에 있어서, 이들은 결코 대대장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개척된 통로를 따라 구르카대대가 매복해 있는 계곡을 반정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은 너무 신속했다.  1개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이 짧은 시간에 반이나 빠져나가다니, 빠뜨랭은 시계를 보았다. 예정된 공중지원은 이미 때를 놓쳤다. 중국군 부대의 후미가 매복선 중앙에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빠뜨랭이 명령했다.

  "공격!"

  [...............]

  엄청난 폭음이 계곡에서 메아리쳤다.  신속행군하는 중국군의 또다른 병종사단 병사들의 발자국과 숨소리만 들리던 산에 총성이 난무했다.병종사단의 후미에 있던 중국군은  갑작스런 사격에 쓰러지거나 서쪽으로 도주했다.  가장 서쪽에 있던 중국군 선두연대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화에 직면하여 전진을 멈추고 분산했다. 포위공격에 당황했는지 응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군이 도주함으로써 일단 이곳의 전투는 끝났으나, 중국군은 서쪽에서 재편성하여 몰려올 기미가 보였다. 전방은 포격, 후방은 매복부대라는 상황에서 속이 편할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쪽은 위치가 노출되고 숫적으로 열세이니 불리할 것이 뻔했다.

  "후퇴할까?"

  빠뜨랭이 구르카 병사들의 마음을 떠 보았다. 여기저기서 중대장들이 말도 안된다면 전투속개를 주장했다. 빠뜨랭이 씨익 웃었다.

  "전투가 다시 시작되면 담배 있는 병사들은 나뭇가지에 불붙인 담배를 끼워 놓으라고 명령하게."

  [..., 알겠습니다.]

  중대장들은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간 모양이었다.야간전에서는 적의 병력규모를 알기 어렵다.  멀리서 보면 총구에서 솟는 화기(火氣)와 담뱃불을 구분하지 못한다. 전투같은 경황없는 때에는 더 심해진다. 이는 인민군이 6.25 때 미군에게 써먹던 수법이었다.  양구지구에서 숙영하던 미군 1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연대가 인민군 1개 대대의 야습을 당했는데, 양쪽 산을 온통 수놓은 담배불을 총구에서 나오는 불로 오해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 적이 있었다.

  5대대는 더욱 분산된 진형을 취하며  후방에서 올지도 모를 중국군에도 대비했다. 그때의 인민군에 비하면 지금의 구르카 대대가 더 불리했지만, 결과는 모를 일이었다. 빠뜨랭은 참호선을 약간 전진 시켰다.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0미터 정도 전진했는데, 이는 또다른 함정이 되었다.

  1999. 11. 25  20:35  평양 조선로동당 3호청사

  "준비됐습네다.  광화문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라고 합네다. 지금 국무회의 중입네다."

  최 광 차수는 대형화면 중앙에 나온 대통령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정부고관으로 보이는 민간인들과 고위장성들이었는데,  이들은 편안한 자세로 회전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졸고 있거나 끼리끼리 잡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남반부 대통령이 무소속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국가원수 앞에서의 자세로는 너무 불경스럽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 지금 장관들은 인질이지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요. 하하하~ 휴대전화기도 모두 압수된 상태고... 최 차수님, 무슨 일입니까?]

  최 차수가 놀란 표정을 짓자,  대통령이 뒤를 돌아보더니 농담식으로 이야기했다. 대통령 뒤로 안기부장이 바싹 다가 앉았다.  최 차수도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그자의 지령으로 자신이 최근 남한의 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 각하!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에고... 비밀스런 이야깁니까?]

  대통령이 다시 뒤를 돌아 보았다. 몇몇 장관들이 화면에 비친 인민군 장성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 보고 있었다.최 차수는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저들을 다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네까? 작전 장마에 관한 중요한 말씀입네다."

  [아... 이들에겐 다 설명했습니다.그래서 작전이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방금 양 중장에게서 중국측이 우리 작전을 눈치챘을 거라는 보고도 들었습니다. 일본이 정보를 넘겨줬다죠.]

  "네… 기럼 어카실 생각입네까?"

  대통령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는 사실이 최 차수에게는 더 이상했다.

  [할 수 없죠. 작전시간을 약간 당기는 수밖에... 중국이 그렇게 함부로 핵을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군요격부대가 출동준비 중이니 그거나 믿어야죠.]

  "중거리지만 탄도탄입네다. 요격이레 매우 힘들 것입네다. 길고 서울이 가장 큰 목표라는 사실도 아시갔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잃은 땅은 회복해야 되고, 핵은 맞으면 안되고... 어쩔 수 없죠.  절대로 나진과 선봉을 중국에게 넘겨주어선 안됩니다. 우리 민족에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 올 것입니다.]

  최 차수는 대통령이 북한의 땅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그리고 자신보다 그 땅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새로왔다. 최 차수가 결심했다.

  "주조중국대사가 장마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의 아지트를 넘겨 두디 않으면 자정무렵에 핵공격을 실시하갔다고 포고했습네다.넘겨줄 경우, 인민공화국이 북남통일의 주체가 되도록 도와주갔다는 약속도 했습네다."

  옆에 앉은 안기부장이 의외라는듯 최 차수를 응시했다.  자신이 얻은 정보와 같은 내용을 최 차수가 실토하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저 간나이… 날 둑이려 했디…’

  최 광 차수는 안기부장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안기부의 미행은 거의 드러내놓고 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암살위협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남반부 대통령이 그 계획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대통령은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허허~ 그래요? 엄청난 협박이군요. 조건도 그렇고... 그럼 어떡하시겠습니까? 말씀 하시는 걸 보니 그렇게는 안하시겠군요. 감사합니다.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군요.]

  최 차수는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젊은 대통령치고는 과연 대단한 배짱이었다. 최 차수가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지난 중국내전 때였다. 중국이 내전으로 정신이 없을 때 한국이 북조선을 봉쇄했다면,전쟁물자의 비축이 바닥났던 인민군은 일패도지할 것이 분명했다.일부 남조선의 우익언론은 남조선정부를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나 홍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최 차수는 그 이후로 남조선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작전시간이레 대폭 당겨야 합네다. 기리고 일본은 차후에 꼭 응징할 것을 약속해 주십시요."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뜻으로 최 차수는 받아 들였다.

  화상통신을 끝낸 최 차수는 다시 당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할 것을 명령했다.  이 기회에 한중전쟁을 반대해 오던 친중인사들도 숙청할 것을 결심했다.

  1999. 11. 25  20:4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적, 1개 연대병력!]

  우측에 전개하고 있던 3중대장이 가장 먼저 중국군의 전진을 보고했다. 빠뜨랭은 느긋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깊숙히 끌어들이려는 생각이었다.

  [적, 현위치에서 대기 중!]

  빠뜨랭은 의아했으나 아직은 중국군의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아군의 포격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포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풍산동에 있는 구르카 여단의 포병대에서는 155밀리 포사격을 실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병대에서는 지뢰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제 피아트90 트럭에 탑재된 이스뜨리체 지뢰살포시스팀이 일분당 4,200개의 비율로 대인지뢰를 주요 적진입예상로를 향해 대량으로 살포했다. 사거리는 예전의 250미터에서 1500미터로, 6배나 늘어난 상태다.

  흰색으로 위장된 직경 9센티미터의 플라스틱 대인지뢰인 Vs-Mk2-El은 트럭 위의 발사대에서 사출되어 땅에 떨어질 때는  뇌관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 지뢰는 헬기에서 살포할 수도 있으며 폭파시간을 조절할 수도 있다.  피아를 가리지 않으며 수십년간 무수한 민간인 피해자를 발생시킨 악마같은 무기 지뢰는 비인간적인 전쟁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무기로 지탄을 받는다.  2만여개의 지뢰는 백사봉에 쌓인 눈속에 파묻혀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가닥의 빛줄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았다. 캄캄한 하늘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고 잠시 후 여단장에게서 온 무전내용은 빠뜨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포병대 전멸! 현재 여단은 대규모 적으로부터 완전포위 당했다.  더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며, 자체 판단에 따라 후퇴하라.]

  중국군은 구르카여단 포병대대의 위치를 파악하자, 그동안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던 집단군 포병연대를 동원하여 일거에 괴멸시켰다. 프로토타입만 있는 줄 알았던 북방공사제작 203 밀리 곡사포가 대거 동원되어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한 것이다. 구르카여단의 포병대대는 참호를 깊숙히 파고 포를 엄폐시켜서 직격탄에 맞아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근접신관에 의해 공중폭발하는 포탄에 포병들이 떼죽음 당한 것이다.

  그것보다 문제는 중국군이 어떻게 여단본부를 포위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아마도 북쪽에 있던 3대대가 전멸하여 방어선이 뚫린 모양이었다.  빠뜨랭은 친구인 멕시코 출신 의용병 페르난도가 걱정되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용병이 아닌 의용병이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땐 놀랐으나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큰 나라였다.  상류층은 대학교육을 받고 민중의 존경을 받는다.  이들의 의식수준이 선진국 지식층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페르난도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때였다.

  "후방을 주시하라!"

  [후방에 적 1개 연대병력!]

  빠뜨랭의 지시와 두번째 매복지에 남아있는 제  2중대장의 보고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중국군은 5대대도 포위공격을 하려고 대기중인 것이다. 현재 구르카여단 병력의 대부분이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포위망은 여러개다. 빠뜨랭은 이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중대장이 자체판단하여 공격하라!"

  두번째 매복지에는 구르카대대가 매설한 지뢰와 크레모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것을 활용할 좋은 기회였다. 요청한 공중지원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쿠쿠쿠~]

  빠뜨랭이 뒤를 돌아보니 계곡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지뢰와 크레모어를 동시에 격발시킨 것이다. 총성이 이어졌다.어찌나 시끄러운지 중대장과의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쪽도 몰려 옵니다!]

  빠뜨랭이 야시경으로 전방을 살펴 보니 약 1개 대대의 중국군이 총을 난사하며 몰려오고 있었다. 틀림없이 희생부대였다.  6.25 때 중국군은 방어진지의 전방에 매설된 지뢰밭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았는데,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아직 이런 작전을 사용하는 중국군이 무모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작전인지 빠뜨랭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더!"

  빠뜨랭은 틀림없이 보았다. 중국군은 지뢰매설 예상지점에 지뢰가 없자 일순 당황한 것이다.  그들은 내친 김에 계속 몰려와서 최초의 참호선을 향해 자동소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새로운 참호선은 방어에 적절하지 못한 위치였지만 그보다 전방이었다. 최초의 참호선 약 60미터 전방을 돌격선으로 선정했는지 중국군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왔다.  현재의 참호선 40여 미터 전방이었다.

  "한번에 끝내도록. 사격!"

  눈으로 참호를 위장하고 있던 구르카 병사들이 몰려오는 중국군을 향해 일제히 총을 겨눴다.  갑자기 하얀 터번을 두른 구르카 용병들이 유령처럼 눈속에서 나타나자 중국군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버렸다.  대부분의 중국군병사가 총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엔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수류탄 일제 투척 후에 돌격하려는 순간이었다. 중국제 방망이수류탄은 손가락에 안전끈을 매고 던진다.  이들은 총을 쏠 여유가 없었다.

  일제사격이 시작되자 이 가까운 거리에서 목표를 놓칠 구르카 용병이 결코 아니었다.  중국군 병사들이 춤추듯 팔을 휘젓더니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가슴이 아닌 머리에 총을 맞았다.  중국군 병사들이 방탄복을 입었을 것으로 우려한 용병들은 확실한 목표인 심장보다는 머리를 노렸다. 사격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백개의 구멍뚫린 철모가 눈위를 굴렀다.  구르카 병사들은 네 발 이상 쏘지 못했다. 목표가 없어진 것이다.

  "제 2진지로 후퇴…"

  빠뜨랭이 차분하게 명령했다. 구르카 전사들은 포복으로 언덕을 올라와서 참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손실은 거의 없었다. 이들이 숨자 서쪽에서 중국군의 산악포가 발사되어  포탄이 참호 여기저기에서 작렬했다. 빠뜨랭은 이 산악포를 잘 알고 있었다.  구 소련제 76밀리 산악포, M-1966. 총 780kg의 무게인데 분리하여 운반할 수 있었고,  가장 큰 특징은 속사성이었다. 분당 15발을 발사하는 무서운 놈이었다. 여기에 박격포까지 가세했다.

  담배작전은 의외로 후방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계곡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잠시 후 중국군은 5백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북쪽으로 도주했다는 2중대장의 보고를 받았다. 아직 빠뜨랭의 5대대는 건재했다.

  1999. 11. 25  20:50  서울 은평구 응암동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인 이 진은 회사 동료이자 애인인 변 승찬이 아직 살아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회사는 이미 문을 닫았다.  경영주와 광고주가 없어진 회사는 다닐 필요도 없었지만, 노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그는 아파트 창가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었다.

  "춥겠다…"

  그녀는 휴대용컴퓨터를 키고 통신환경으로 맞추었다. 익숙한 번호… 변 승찬의 삐삐번호를 입력하고 내용을 적었다. 그녀는 입대할 때 휴대형전화기는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화할 수 없어서 안타까왔다.

  [춥죠? 이제 전쟁이 거의 끝나가서 다행이어요.]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사랑한다는 글을 입력하지 못하고 전송했다. 삐삐호출과 문자전송이 이루어졌다는 신호가 보였다. 다행이었다. 전송이 실패하면 어떡할까 했는데, 위성통신을 이용한 삐삐호출은 확실하게 연인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그가 지금 어느 곳에 있을까 궁금했다.TV뉴스나 전자신문 어디를 찾아봐도 그가 속한 부대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1999. 11. 25  21:0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또 옵니다.]

  2중대장의 보고에 이어 전방 척후조의 보고도 왔다. 빠뜨랭이 불안한 듯 자꾸 백사봉쪽을 올려다 보았다.  백사봉 정상으로 올려보낸 정찰대의 보고는 끊어졌다. 1개 소대를 위쪽에 배치했지만 불안했다.  빠뜨랭은 경사면을 따라 밀고 내려올 중국군이 가장 우려되었다.

  "포위됐겠죠?"

  "…, 물론."

  묻는 네팔인 저격병이나 대답한 빠뜨랭이나 별로 긴장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늙은 저격병이 M-1 소총을 참호 위에 거치했다. 적과의 거리는 1,000미터, M-1의 유효사정은 600미터… 빠뜨랭은 그가 단순하게 적정을 살피는줄 알았다. 잠망경으로된 야시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 그들은 서서히 전진해 오고 있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탄피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빠뜨랭의 야시경에는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앞서 지휘하던 군관이 쓰러지는 모습이 잡혔다.  빠뜨랭이 놀란 얼굴로 저격수를 보았다.  저격수는 망원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젠장, 2센티 정도 벗어났어요. 지금 기온이 영하 16도 정도 되는 모양이죠?  아까 영하 12도로 조정했었는데…"

  빠뜨랭이 야전용 손목시계에 달린 온도계를 달빛에 확인했다.섭씨 영하 16도 2분이었다. 그는 기가 막혔다.  저격수가 가늠쇠를 조정하더니 다시 사격자세를 취했다. 방향은 약간 오른쪽이었다.  빠뜨랭이 야시경을 약간 돌렸다. 스코프에는 인민해방군의 대대장급으로 보이는 군관이 고개를 숙인채 잰걸음으로 눈위를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다시 총소리가 나자 그는 쓰러졌다. 중국군 병사들이 눈 위에 엎드렸다.

  1999. 11. 25  21:05  경상북도 대구 대명동

  공사판 막노동자인 김 광렬은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와서 가족과 저녁을 먹다가 청천벽력같은 뉴스를 접했다. 국민총동원령이 공포되어 만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모든 남성들은 군에 입대하라는 것이다.

  "지랄! 돈있고 빽있는 놈들은 와 안가고 없는 놈만 끌고 가노?"

  김 광렬이 수저를 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딸애가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가 애를 끌어안고 불안한듯 김 광렬의 눈치를 살폈다.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줄로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남편이 왜 이리 흥분을 하는지 그의 아내는 잘 알고 있었다.

  "누~는 방산에 근무한다꼬 안가고, 누는 이공계대학 다닌다꼬 안가더만, 인자 인적자원이 부족한 모양이재.  처자식은 머 묵고 살라꼬 내를 끌고 갈라카나?  치아라! 내는 안간다."

  한중전쟁이 터지자 상당수의 공장들이 방산업체로 신규지정이 되었다. 연령상 동원예비군 징집연령이지만 대구 인근의 삼성중공업이나 금속공단에 취업한 동네청년들은 군입영이 유예되었다. 대학 중에서도 이공계는 군입대가 유예되었다.  이런 직장에 다니지 않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김 광렬은 억울했다.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안한 일자리인 공사판을 전전했는데,  이제 또다른 불평등을 당할 판이었다.

  "그라믄… 경찰이 잡아가면 우짜노…"

  "시끄랍다! 니는 냄편이 총맞고 디지면 씨원하겄나?"

  "아입니더. 설마예…"

  그에게 전쟁은 현실로 닥쳐왔다. 건축경기가 죽어서 일자리가 줄어들었다는 느낌만 왔으나, 이제 징집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이 전장에 나가는 것이다.

  "내사, 대통령부텀 맘에 안든기라.  중국보고 엇다, 묵고 떨어지그라 하믄서 함경도 땅쪼가리 쪼금 띠주면 될끼 아니가.  길고 말 나와서 말이재…  부잣집 유식헌 아그들은 다 외국으로 튕다 아이가.  갸들부터 잡아 와야재 내같은 놈 잡으다가 머에 쓸라꼬. 총알받이밖에 더 되겄나."

  동원예비군이 징집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동원예비군들은 그래도 젊고, 중국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수호한다는 명분이 있었다.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핵공포에 휩쌓여 있었다.  전쟁 초반에 대부분의 부유층들이 빠져 나간 것을 막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발도 컸다. 그리고 징집대상인데도 갖가지 이유로 입영을 피한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은 징집대상자들의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었다.

  1999. 11. 25  21:10  평안북도 부령 백사봉

  "왜 공격해 오지 않는 거지?"

  빠뜨랭이 야시경을 사방으로 돌렸다.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서쪽에서 포성과 총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대대원들이 불안한지 자꾸 고개를 들며 서쪽을 힐끗거렸다. 중국군은 구르카여단 제 5대대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계속 대치만 하고 있었다.

  저격병은 계속 한 발씩 쏘고 있었다.  현재 최소한 수천 명이 대치하고 있는 이 백사봉 기슭에서  늙은 네팔인 혼자만 전쟁을 하는 것 같았다. 참호 바닥에는 어느새 황금빛 탄피가 가득 쌓였다.

  "땅!"

  다시 한방을 쏘고 나서 이 네팔인 병사는 실탄의 탄두부분 끝을 이용해서 가늠자 수정을 했다.  M-1 소총이 계속 열을 받아서 탄도가 약간씩 빗나가는 모양이었다.  망원렌즈는 이미 제거한지 오래 되었다.  고양이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저격병은 야간사격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빠뜨랭이 신기한듯 저격병을 쳐다 보았다.

  "달빛이 눈에 반사하니까 야간조준경은 필요없죠."

  저격병은 대대장의 시선을 느끼고 대답했지만, 이곳이 네팔과 흡사한 지형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티벳과 네팔, 북부인도는 거의 흡사한 산악지형인데, 눈 쌓인 백사봉은 그의 고향과 너무나 닮았다. 자신은 용병이 아니라 고향을 지키는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솟아 올랐다.

  "기관총 전방으로, 북쪽 경계!"

  불안해진 빠뜨랭은 참호선에 같이 있던 기관총들을 빼내 앞으로 전개시켰다.  사수들이 참호선 20미터 앞에 있는 예비용 기관총좌에 기관총을 거치하며 방경계에 들어갔다.  언뜻보면 대대의 중화기와 나머지 병력이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근접전일 때 일반적으로  소단위 부대장은 중화기 보호와 시계확보를 위해 기관총좌는 참호선 후방에 배치한다.  그러나 빠뜨랭은 자꾸 뒤가 근질거려 최악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백사봉 계곡은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소리에 저격수가 쏘는 총성이 간헐적으로 섞여 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냈다.그 소리를 뺀다면 양측 모두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

  1999. 11. 25 21:15  평안북도 부령, 풍산동

  서쪽에서는 아직도 포위된 구르카여단의 주력부대가 중국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성과 포성, 간간이 지뢰 터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구르카여단의 지휘관인 티벳인 돈나카 탄진은 피스부대 총사령부에 지원요청하기 바빴다.

  피스의 지상군 파견부대는 구르카용병 1개 여단과 국제지원병 1개 여단,  그리고 용병과 지원병으로 혼성편성된 각 1개의 기계화여단 및 기갑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지라서 다른 피스부대의 응원이란 기대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들 부대는 모두 돈나카도 모르는 곳에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피스 지상군 부대의 사령관인 인도인 싱에게서 받은 명령은, 가끔 중국군에게 도발하여 소규모 전투를 실시하며 방어에 주력하라는 것이었다. 항상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던 싱의 터번을 두른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만약 이번 전쟁이 의외의 결과로 끝나면 티벳의 독립을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했었다.피스의 국제지원병으로 대거 자원입대하여 전선에 투입된 망명 티벳인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한 빈말인지는 몰라도, 그는 싱의 말을 믿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창탕고원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성스러운 흰산과 더욱 성스러운 마나슬루 호수를 실컷 보게될 날을 그리며  그는 지금까지 고된 망명생활을 해왔다.

  그가 믿을 것이라고는 공중지원 뿐이었는데, 사방이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에 포위됐는데도 아직 공중지원은 오지 않고 있었다.  여단이 임시로배속된 3군단사령부에서 연락이 오기로는 전 동부전선에 걸쳐 중국군이 공세가 시작됐으며, 항공기들은 다른 부대의 더 급한 지원에도 바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돈나카는 용병이라고 무시하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따졌지만 그도 상황은 대충 알고 있었다.  중국 주변국 중에서 러시아를 뺀 중소국가가  중국을 상대로 이만큼이라도 공군전력을 보존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한국공군이 이스라엘군 이상으로 출격횟수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죽으라는 뜻인가?"

  돈나카 준장은 5대대를 위해 포격을 한 것은 자신의 실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주포가 아닌 이상 이동 후 방열(포의 전개 후 사격 준비완료)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엄폐만 엄중히 하고 말았었다. 중국군 포병대는 그동안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구르카여단의 포병대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중국군은 구르카여단의 포병대가 전멸하자 화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병종사단만으로 4개 사단병력이었다. 그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최강의 보병이라는 구르카 용사들도 이때만은 공포를 맛봐야만 했다.

  "후퇴 코스는 없나?"

  "완전포위되었고 후방엔 중국군이 지뢰를 매설했습니다. 제 3대대가 응원오다가 지뢰에 호되게 당했답니다. 69식 지뢰, 러시아의 OZM과 같은 도약식 지뢰입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작전참모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돈나카는 땅에서 튀어 올라 1.5미터 높이에서 폭발하는 그 대인지뢰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살상위력은 약하지만 부상자를 대량으로 양산한다. 부상자 호송을 위해 최소한 두 명의 병사가 동원되므로 실제 전력손실은 더 크다. 게다가 부상자의 처참한 부상부위를 봤을 때 병사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효과는… 무전병이 전선의 급보를 전했다.

  "2대대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방어선이 뚫리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젠장… 이제 예비병력도 없어."

  돈나카는 이 좁은 산악지역에 대병력을 투입한 중국군의 전술에 기가 막혔다.  좌측에 있던 인민군 101사단과 우측의 국군 62사단이 모두 대규모 중국군에 포위 당해 피스부대는 운신의 폭이 전혀 없었다.그가 알기에는 이들 부대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해안쪽 상황은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이동배치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동부전선에서는 일대 혼란이 몰아닥쳤다. 동부전선 사령부에서는 전선유지를 위해 후퇴를 종용했으나,  이제 후퇴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인근에 파견되어 있는 국군 육군 항공부대에서 공격헬기를 보냈답니다!  2대대 전면으로 유도할까요?"

  무전병의 보고와 동시에 벙커 밖에서 폭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원소식을 듣고도 돈나카는 명령을 내릴 겨를이 없었다.

  "뭐야? 저 소리는…"

  "지원오던 아군 공격헬기들이 모조리 당했습니다. 남은 놈들은 도망갔습니다!"

  밖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네팔인 부관이 벙커로 뛰어들어오며 보고했다. 전투 중에 도망가는 것을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아군 헬기의 도주는 충격이었다. 돈나카가 벙커를 나섰다. 사방에 포탄이 작렬하고 있었다. 남동쪽 산기슭에 코브라인지 뭔지 모를 헬기 잔해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파괴된 헬기의 숫자는 의외로 많았다. 그가 본 것만 10여기가 넘었다.  이 정도라면 버텨날 항공대대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군과 적군의 위치마저 불분명하고 시계가 제한되는 야간에 그들의 활약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산악부대라면서 휴대형 대공미사일을 대량 보유하다니?"

  그는 저녁 무렵의 폭격 때 중국군이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기억했다. 이 산중에 대형 지대공미사일을 끌고 온 놈들이었다. 이상하게 그 때는 휴대형 대공미사일이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뭔가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1999. 11. 25  21:20  평안남도 순안비행장

  김 종구 중위는 셸터 안에서  자신의 애기를 정비사들이 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의사에게 맡긴 기분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나 할 수 없었다.황 중령이 김 중위의 기분을 아는지 옆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의사는 다 도둑놈들… 필요없는 부분까지 건드리고…’

  김 중위는 왜 F-16의 레이더를 제거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조기경보기의 관제를 받는다지만 전투기에 레이더는 필수가 아닌가? 구 소련제 전투기들이 실전에 약한 것은 레이더성능의 결함 때문이라고 배운 김 중위는 지금 하는 이 작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주익을 통째로 떼어내고,  동체연결부가 약간 더 넓은 주익을 조립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고도에서의 방향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다. 김 중위가 알기로는 이 작업은 단지 선정된 12기의 전투기에만 행해지고 있었다. 모두 이번 특별임무에 투입된 전투기들이었데, 개조가 끝난 전투기들은 시험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 전투기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FSX를 닮게 되었다.

  고도로 숙련된 정비병들과 국립과학연구소 직원들,  삼성항공의 직원들이 레이더가 있던 빈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었다.  미리 준비된듯 개조는 짧은 시간에도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미그-31M을 흉내내고는 있지만 글쎄, 우린 대위성미사일도 없잖아? 하다 못해 피닉스라도 있다면 몰라도…"

  김 중위의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황 중령이 거들었다. 미그-31M이라면 대위성요격용 전투기인데 임시방편으로 그 전투기 흉내를 낸다고 상승속도나 상승한계 등 성능도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대위성미사일(ASAT)이 한 기도 없지 않은가?  김 중위는 그 무기도 러시아에서 수입해 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브리핑에서는 틀림없이 암람과 스패로를 장착한다고 들었다.

  [쌔~~~~~~~~]

  그는 때늦은 이륙음을 듣고 셸터 밖으로 나왔다. 활주로마다 두 대씩의 F-5E 전투기들이 이륙하고 있었다. 유성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것처럼 멋진 광경이었다.  전투기들은 연이어 이륙하고 있었다.

  순안비행장에 파견된 F-5E 전투기들이  이처럼 출격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1996년부터 실시된 전투기 개량사업에 따라 기골을 보강하고, 개량된 APG-66 멀티모드 공격레이더를 장착하게 된 F-5E 전투기들은 스패로 공대공미사일을 무장했다. 조기경보기인 E-2C나 J-STARS기들 덕택에 이 전투기들은 의외로 좋은 성과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F-5의 장기인 근접전의 기회는 감소했다. 단일기종으로 F-5를 300여기나 보유한 한국공군은 극도로 중국과의 근접전을 회피했고, 주로 중거리 공대공미사일로만 대응했다. 이 작전은 숫자만 앞세운 중국 공군의 구식 전투기들에 그런대로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개전 초반에 입은 피해를 제외한다면, 요즘의 피격 댓수는 상당히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거의 적 지상포화나 미사일에 의한 피격이었다. 중국 전투기들은 초반에 신예전투기를 모두 소모한 것이 패착이었다.

  "음냐…… 전 갑자기 러시아의 전략방공군이 된 기분이군요."

  "그렇게 말야. 쩝… 미사일이 안 맞으면 몸으로 때워야 되나? 미사일 요격훈련은 한국공군에서 전혀 없었잖아?"

  김 종구 중위가 비번일 때 대신 조종을 해야할  황 중령도 걱정이 많았다. 자신이 비행중일 때 그 임무를 해야 한다면?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말입니다. 전투기처럼 조기경보기에서 지시하는 대로 해야죠 머…"

  김 종구 중위와 황 중령은 자신들에게 떨어진 임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탄도미사일 CAP이라니!  암람이나 스패로 따위로 중국의 핵미사일인 동풍-31호를 잡으라니, 이런 황당한 명령을 받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목표발견이야 조기경보기들이 알아서 해 준다지만 초고속인 중거리탄도탄이 전투기에서 발사한 공대공미사일에 명중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급한 마음에 전투기까지 탄도탄 요격에 내몬 지휘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전역방공망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방공망도 없지 않은가. 겨우 2개 대대밖에 없는 패트리어트 2 미사일 포대는 전국 주요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중국이 어느 기지에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미사일을 발사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배치는 어쩔 수 없었다.

  "에고, 썰렁하군. 내가 더 썰렁한 야글 하나 하지. 자네, 밥 혼달 이야기 알아?"

  황 중령이 특유의 썰을 풀었다. 김 중위는 황 중령의 입을 보며, 다리가 무너지거나 배가 가라앉더라도 그는 절대 물에 빠져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킥킥 웃었다.

  "밥 혼달요? 글쎄요."

  "밥 혼달은 중세 유럽의 유명한 맹수사냥꾼이라네. 중세 기사나 왕가의 문장을 보면 호랑이하고 사자가 자주 나오지? 사자왕 리차드라는 영국 국왕도 있고… 그런데 지금 유럽에는 그것들이 없잖아. 그 사람이 다 잡았기 때문이라고 대영백과사전에 나오더군."

  김 중위는 아무래도 맞는 이야기 반에 거짓말 반이 섞였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대영백과사전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이니 참고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럼 옛날엔 유럽에도 그런 맹수들이 살았나 보죠?"

  "그럼~ 그런데 그 사람이 다 잡았지.  대단한 맹수사냥꾼이야.  어렸을 때는 바보라고 소문이 났었대. 그래서 여자아이들이 울면 밥혼달에게 시집 보낸다고 해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군."

  "크… 얼마나 바보로 소문났으면 그래요."

  김 종구는 혹시 황 중령이 야한 이야기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맞장구 쳤다. 노련한 사냥꾼의 사냥 이야기는 앞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물론 사냥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아까 저녁 무렵에는 정문 위병소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마침 위병소 앞을 지나던 같은 편대의 이 대위가 봤는데, 열 몇 명의 아가씨들이 황 중령을 퇴근시켜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작전중이라 안된다고 근무자들이 제지했으나 이들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영내로 들어올 기색이었다고 했다. 그말을 들은 김 중위는 기가 막혔으나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황 중령과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에게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문제는… 코크리아라는 나라의 공주가 그 바보에게 시집간다고 우겨서 전 유럽이 발칵 뒤집혔었다는군. 대단한 스캔들이 된 거지."

  "공주가 왜 바보에게 시집가요? 혹시 선화공주처럼 유언비어로…?"

  "윽… 백제 무왕 이야긴줄 아나벼? 어렸을 때 그 공주는 대단한 울보였는데, 왕과 왕비가 자꾸 밥 혼달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얼러서 공주는 그런줄 알았다나… 공주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사정했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말야."

  "….."

  "그 공주의 이름은 팽기니아라고 한다네. 결국 공주의 고집대로 둘은 결혼해서 살게 되었지.  공주의 내조 덕택에 밥 혼달은 유럽 최고의 맹수 사냥꾼이 되고 말야."

  여자 이름이 펭귄하고 비슷한 걸 보니  역시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결말이 어떻게 날까 궁금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요…"

  "계속 들어봐! 근데 이웃나라와 전쟁이 일어났대. 실리아라고 하는 나라지."

  "이름들이 무슨 환타지소설 같기두 하구… 정말입니까?"

  "어허~ 이 사람이."

  "죄송합니다. 계속 하시죠."

  황 중령이 김 종구의 입을 막고는 잔뜩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가 장군이 되어 출전해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어느 날… 안타깝게도 그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네.. 어때? 슬픈 이야기지?"

  "으윽… 그렇게 썰렁할 수가… 근데 혹시 그 이야기 바보온달 아녀요? 내용하구 이름이 비슷한데요."

  "크… 인제 알았나?  바보온달을 내려쓰기로 해보게. 뭘로 보이나."

  "꽥~ 글쿤요. 그럼 코크리아가 고구려, 팽기니아가 평강공주, 실리아가 신라란 말씀이죠? 이름만 약간 바꾸면…"

  "이 야그는 내가 이대앞에 있던 바보온달이라는 카페를 지나다가 근처에 있던 여대생을 꼬실 때 써먹은거지. 간판이 내려쓰기로 되어 있더군. 그래서 한글은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네. 오늘의 교훈이지. 알겠나?"

  "윽… 예…"

  이륙한 F-5 전투기들은 편대를 지어 북동쪽 상공으로 날아갔다.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들의 대량 출격이라니… 김 중위는 그들이 걱정되었으나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니 너무 막막했다.

  1999. 11. 25  경의선 고속도로, 개성구간

  서울-평양간 고속도로에는 요즘 민간용 사륜구동차들의 행렬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 차들은 적게는 서너대, 많게는 20대 정도씩 떼를 지어 북쪽으로 이동했다.  주로 밤시간을 이용했고 가로등을 껐기 때문에 이 행렬을 본 민간인들은 군용 지프로 알았다.  승용차보다 높은 전조등을 키고 그 바깥쪽의 깜박이나 보조등은 껐기 때문에 밤에 볼 때는 군용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륜구동차들은 차체에 약간의 개조하고 군용도색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원형은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코란도와 록스타, 스포티지, 일제 파제로의 파생형인 갤로퍼 등 각종 지프형 사륜구동차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유행중인 현대 아반떼 투어링이나 아시아자동차의 레토나 같은 RV(레크레이션 비클)도 많았다. 이들은 개전 다음날부터 민간인에게서 징발되어 전선으로 가는 차량들이었다.

  차량행렬은 행선지를 숨기기 위해 신계 쪽으로 빠졌다가 곡산에서 다시 평양-원산 고속도로를 따라 동진했다. 그리고 나서 함흥을 거쳐 혜산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차량 행렬은 끝없이 북으로 이어졌다.

  1999. 11. 25  21:30(한국시간)  주미한국대사관

  "이런 망할 놈들!"

  "왜 그러십니까?"

  이 현종 참사관이 전화기를 놓더니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무관인 한 영순 대령이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 생각하며 참사관에게 물었다. 뜻밖에 이 현종이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미국놈들이 물건을 팔겠다는군요.  팔아 달라고 사정사정할 때는 못들은척 하더니 우리가 중국을 거의 몰아내고 나니까 이제야…"

  "그래요?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휴~ 그동안 암시장에서 구입하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떤 무깁니까?"

  한 대령은 미국도 결국은  중국의 팽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한중전쟁을 예의주시해 온 것이다. 늦긴 했지만, 그래도 무기란 없는 것 보다는 남아 돌더라도 있는 게 훨씬 나은 법이다.

  "지대공, 공대공 미사일 종류와 어셋? 뭐, 그런 거요. 어셋이란 무기는 일본에서 바로 공수해 준다고 합니다. 국방부에는 이미 통보했다는군요. 공대공미사일 재고가 바닥났다고 난리던데 이제 한숨 돌리게 되겠죠."

  "어셋? ASAT, 대위성궤도미사일 말입니까?"

  "어셋이 그런 무기요? 근데 그걸 왜 우리에게…"

  참사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의 정찰위성을 요격하란 뜻인가? 그는 목표가 될만한 중국 위성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통신위성이 없더라도 다른 나라의 상업용위성을 쓰면 그만이므로 구태여 어렵게 서로의 위성을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레이더 정찰위성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피차 없는 판에 위성무기라니,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탄도탄 요격무기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맙소사! 핵위기인가 보군요."

  주미 대사관은 본국에서 어떠한 훈령도 받지 않았다.  이곳 현지의 언론보도 대로,  중국은 영해 내에서만 핵무기를 쓰고  한반도에는 사용치 않을 줄 알았던 것이다.  미국이 어떠한 정보를 갖고 있든, 어떻게 이 정보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참사관은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해야 했다.

  "이런! 당장 본국에 연락을… 필요한 무기 목록을 더 달라고 하시오!"

  한 대령이 국방부 조달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통보가 된 모양인지 주일미군의 허큘리스 수송기 한 대가  일본에서 출발했다는 말을 담당관으로부터 들었다.  10분 후에 영종도 공항에 도착한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한 대령은 위성요격에 필요한 무기 목록을 암호전문으로 대사관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1999. 11. 25  21:35  대전 유성 정보사단

  "일본에서는 딱 한 명… 후지야마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해커들에게는 좋은 상대였다고 합니다. 그가 일본군인 줄은 몰랐습니다. 유니콘2가 나온 것은 그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자가 유니콘을 깼죠. 그러나 2는 워낙 랜덤하게 움직여서 잡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성회야 너는… 아니, 구 소령! 어떻게 생각해?"

  양 석민 중장은 소파에 앉아  해커인 구 성회 소령과 김 준태 소령이 설명하는 앞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두 젊은 소령이 자신을 자꾸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후루룩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양 중장님, 그들은 아마 제대로 깨지는 못했을 겁니다. 성윤이형, 아니, 오 성윤 대위의 말처럼 일본은 우리 전화회선을 도청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일본으로 우회해서 중국군 컴퓨터를 해킹할 때 공짜로 중국군에 관한 정보를 얻고,  동시에 그 회선을 통해 해킹 프로그램을 침투시키는 식 말입니다. 완전히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모뎀까지 움직이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대상 컴퓨터에 새로운 파일이 저장되면 자동으로 해커의 컴퓨터에 자료를 전송하는 식입니다. 이동하면서 무선전화를 쓰거나 몇 단계 다른 호스트를 거치면 전혀 해커의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해킹계의 거장이라는 오 대위님이 아직도 바이러스를 못 찾고 헤매는 것을 보면 김 소령 말대로 정말 후지야마같습니다. 그놈이 슈퍼 유저권한을 가졌으면 진작에 드러났을텐데 그런 실수는 안하는군요. 전화비가 안나오게 레드 박스라도 쓸 것이지… 나쁜 놈!  그놈은 미 국방성이 가장 경계하는 해컵니다. 혼자서 미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큰소리 친 사람이죠."

  양 중장은 구 소령이 말하는 것을 흘려 들으면서 라면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할 얘기 들어봤자 어차피 이해도 되지 않았다. 곤하게 자다가 대통령의 화상통신을 받고 잠을 깬 그는 당번병을 시켜 라면을 끓이게 해서,  전시식으로 지급된 참치와 김치 통조림을 반찬삼아 먹었다. 다른 장군들은 체면상, 두 젊은 소령은 군번이 딸려서 같은 자리에서 못먹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무 컴퓨터나 마구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겠군. 어때, 자네들도 세계정복 한번 해보지 않겠나?"

  양 중장이 트림을 길게 하며 농담을 했다. 인민군 박 형순 상장과 정보사단장인 이 재영 중장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양 중장의 농담이 완전한 헛소리는 아니었다. 목표가 된 나라의 국방, 행정, 산업을 마비시킬 수 있다면 이는 그 나라의 멸망과 직결된다.  만약 핵발사를 명령할 수 있다면 더 확실하다.  이들도 이번 전쟁 중에 해커의 활약상을 충분히 구경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대통령의 작전개시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정 이전이 되리라는 예상만 하고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요원들도 이미 제 1 캠프에 도착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1999. 11. 25  21:40  함경남도 혜산

  "후아~ 비상이라니! 우리 부대도 써먹긴 써먹는군요. 전쟁 끝날 때까지 묵혀 둘 줄 알았습니다."

  변 승재 하사는 중대장 겸 전차장인 한 대위가 큐폴라를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며 연신 하품을 했다.  그는 러시아제 T-80U 전차의 레이저 레인지 파인더를 다시 조정했다. 밖이 너무 추워서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차 안에만 있었다.  중대장은 추위도 안타는 모양이었다.

  야시장치로 바깥을 보니 수많은 한차와 보병전투차들이 출동대기 중이었다. 아직 위장망은 걷지 않았다.

  "기럼 동무는 땅크를 엿바꿔 먹으라고 나둔 줄 알았슴메?  크게 한바탕 해야 대디 않간?"

  한 보겸 대위가 오랜만의 출동명령에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을 다독였다. 남들은 신나게 중국군들과 싸우고 있는데 이곳 혜산땅에 도착한 이후로 무료하게 시간만 죽이고 있어서 인민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라고 자주 얘기했었다.

  "대기하라우. 공격명령이레 아딕 떨어디디 않아서. 길고 일단은 이동할기야. 운전 잘 하라우, 동무!"

  중대장이 운전병에게 다짐을 받았다.  변 하사는 동무라는 소리에 다시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변 하사가 전차병용 재킷의 왼쪽상의에 있는 무선호출기를 연신 꺼내서 내용을 확인했다.  뿌듯했다. 비록 사랑한다는 고백은 없었지만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동무! 자꾸 멀 보남?"

  한 대위가 변 하사의 삐삐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무선호출기를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문자전송까지 되는 줄은 이번에 알았다. 공화국은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반부에 흡수되다시피 통일한 것이 치욕이라고 여겼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ㄴ네다! 기기 별기 아닙네다!"

  변 하사가 얼떨결에 평안도 사투리로 대답하자 운전병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출동대기 완료했겠지?  자, 이제 시작이다. 공병대와 기갑정찰대대가 선두로 나섰다.]

  대대 통신망을 통해서 대대장의 훈시가 시작되었다.  변 승재는 처음 동부전선으로 이동할 때는 자신의 부대가 선봉지구를 수복하기 위한 지원병력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부대가 혜산에서 멈추자 압록강 방어선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부대 규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는 변 승재가 소속된 통일한국군  제 1기갑사단 말고도 한국군 제 7, 9 기갑사단, 인민군 815기계화군단, 그리고 주로 에이브럼즈 전차로 구성된 통일한국군 제 2기갑사단도 같이 있었다.  도로 근처 숲속에 은폐하고 있는 보병사단은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변 승재는 직감적으로 부대가 압록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불행히도 적중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이 급해지면 핵을 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압록강을 건너, 백두산을 우회하여 다시 두만강을 도강한다. 제군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여행을 하게 되는 셈이지.  선봉 지구 수복이라는 전략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쪽은 전선이 너무 좁고 지금도 양측 200만 병력이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우리는 함경북도의 산지보다는 만주 대평원을 횡단하여 적의 배후를 치게된다.]

  통신망에서 대대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은 전의에 불타서 지르는 함성소리가, 혹은 우려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그대로 들려왔다.

  [우리가 가는 길에 승리 뿐이다. 여기 예비군 출신들이 많지 않은가?]

  대대장은 인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예비군들을 의식하여 예비군가를 인용했다. 부대가 급히 편성되고 현역이 적어 훈련이 부족할까 걱정했지만 대대원들은 의외로 훌륭했다. 아니, 전차의 성능, 또는 그 정비상태가 훌륭했는지도 몰랐다.  러시아에서 차관 대신 현물로 받은 이후 거의 4년간 창고에서 썩고 있었는데도 잔고장 하나 없었다. 오늘 새벽 평안북도 정주지구 전투에서도 대대가 선봉에 투입되어 화끈하게 싸운 기억이 떠올랐다. 적진 중앙돌파와 그 이후의 전격 돌격전. 전차부대 지휘관은 이런 맛에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처럼만 하면 선봉에 있는 중국군 백만은 좆도 아니다. 만주에 있는 중국군도 겨우 30만 밖에 안되니 걱정없다. 우린 2백만이다!  선봉에서 싸우고 있는 부대 백만까지 합하면 우린 자그마치 세 배의 병력이다. 침략자를 전차로 깔아 뭉개자!  중국놈들을 동해바다로 밀어 붙이자!]

  대대통신망 가득 대대장이 살벌한 구호를 선창하자 대대원들이 다 함께 외쳤다. 한 대위와 운전병도 웃으며 구호를 외쳤다. 변 하사는 아무래도 걱정되었다.

  1999. 11. 25  21:45  서해, 한국해군 잠수함 장보고

  "으… 지겨운 놈들!"

  "정말 집요하군요. 이제야 겨우 벗어났습니다."

  "그래, 이제 거의 다왔으니까… "

  함장인 서 소령은 함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출발 때 아군함정이 호위해 주던 안전해역에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승무원들의 긴장이 풀어지며 여기저기서 잡담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소나에서 지휘소로!  중주파수 탐신음! 상대의 소나는 GE사의 SQS-53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녹스급이 확실함! 방위 2-8-0에 거리 1,500에서 1,650! 발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끙… 또 숨어 있었나 보군."

  소나병인 이 중사의 보고를 들은 함장이 신음성을 흘렸다. 전투다! 다만, 이쪽이 비무장인 상태에서 전투상황에 들어간 것이다. 피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함장이 일단 전투배치를 지시했다.  좁은 복도를 통해 젊은 수병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AN/SQS-53/26이 정식명칭인 이 소나는 SQS-26CX의 발전형이다. 탐지, 추적, 함형확인, 수중통신, 음향어뢰에 대한 기만 등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소나다.  이 소나는 화기관제장치와 연계되어서 목표의 거리와 방위, 심도 등이 파악되면,  이 데이터가 어뢰나 아스록에 바로 입력되어 발사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그만큼 대응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녹스급 프리깃함들은 이 새로운 소나를 장.

  "우현 90도, 증속!  15노트에서 노이즈메이커 발사!"

  수중배수량 1280여톤의 소형 잠수함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전지로 항진한다지만  물살과의 마찰 때문에 프리깃함은 잠수함의 소리를 확실히 들었을 것이다. 이미 상공에는 아스록이 날아와서 어뢰가 물속을 항주하며 탐신 중일지도 몰랐다.  또한 조용히 상공을 선회하며 잠수함을 탐지하고 있을 대잠헬기는 승무원들에게 더 무서운 존재였다.

  "노이즈 메이커 발사완료!"

  "적함 급속 증속 중! 방위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함장이 두 명의 보고를 동시에 들으며 명령했다.

  "좋아, 조금 더 가서 기관정지하고 통신용 부이 띄울 준비. 내용은…"

  "장고가 시에미에게. 집에 왔는데 환영도 안해주냐? 이거죠?"

  통신장교가 말하자 서 소령이 싱긋 웃었다.

  "옵 코오스! 지금 입력 즉시 발사."

  서 소령은 ‘낫’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가 자주 써먹는 말이었다.

  "반전할까요?"

  부함장인 김 철진 대위가 걱정스런 얼굴로 함장에게 물었다.  위장용인 노이즈 메이커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자살행위 아닌가?  노이즈메이커는 장보고함의 엔진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프리깃함의 소나를 혼란시키고 있었고, 이 소리가 프리깃함과 헬기의 관심을 끌 것은 당연했다.

  "천만에! 우린 이 자리에 숨어 있는다. 고! 고! 못먹어도 고!"

  "삼고초려라는 말도 있는데요… 쓰리고할 때는 초를 조심하라는…"

  "이런~ 젠장! 초치지 말고!"

  부이가 수표면까지 일직선으로 상승했다. 부상한 즉시 부이는 상공을 향해 전파를 발신하기 시작했다. 적도상공 35,800km에 있는 정지궤도위성 인텔셋이 전파를 잡아 분류하고 이를 C밴드의 주파수인 5.3기가 헤르츠의 초고주파에 실어 한반도쪽으로 전송했다.  진해의 잠수함대사령부는 이를 해군사령부에 보고하고 다시 해주의 조기경보기를 호출했다.사령부는 기밀통신망을 열고  인근 해역에 있는 아군 함정을 수배하니 몇 척의 고속공격정이 리스트에 있었다.  미사일정이 세 척 있고 어뢰정도 두 척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미사일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또한 황해도 옹진에 있는 미그-23도 긴급발진했다.

  중국 북해함대에 새로이 배속된 녹스급 프리깃함은 목표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다른 자매함 두척은 각각 남북으로 흩어져 이 해역에는 친양함 한척만 남아 있었다. 중국 군부는 중국해군에 편입된 전직 대만 해군들이 조선으로 망명할 것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제정신이 있는 군인이라면 망해가는 나라에 망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노이즈메이커가 발사되고 나서 목표의 위치가 모호해졌다.  친양함의 함장은 탑재 대잠헬기인  시 스프라이트를 목표가 진행하던 반대방향으로 보냈다. 통상적으로 잠수함은 노이즈 메이커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최소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그는 배웠다. 그리고 목표 해역에서 발사된 통신용 전파의 존재는 함장에게 잠수함이 기만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헬기나 친양함의 소나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함장은 이 해역의 세력판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원래 대만 해군인 그는 함대사령부에서 내리는 명령과 정보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중국인은 과장이 심하다던가?  프리깃 함장은 안전해역을 100km나 벗어나 한반도쪽에 접근하고 있었다. 해주 상공에 떠있는 조기경보기가 그 해역에 있는 고속공격정들에게 이미 목표의 위치를 알린 후였다. 프리깃함은 함대사령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정보, 즉, 위험해역에의 접근과 한국해군의 공격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

  "대공경계 발령! 0-9-0에서 미사일 3기, 급속 접근중!"

  레이더 담당군관이 저공으로 접근해 오는 미사일을 발견하고 대공경계를 발령했으나 이미 늦었다.  인민군 해군의 서흥급과 코마급 고속공격정들이 수평선 밖에서 SS-N-2A 스틱스 미사일을 날린 것이다. 미사일 요격용인 20밀리 벌컨포가 함미에 있기 때문에 목표를 잡지 못했다. 함장이 선회를 명령하는 동안에 미사일은 이미 2km 이내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벌컨 팰렁스가 탄피를 쏟아내며 선두의 미사일을 향해 탄환을 대량으로 발사했다. 첫번째 미사일이 명중했다. 섬광이 밤하늘을 밝게 수놓았다. 함교에서 환성이 울렸으나 약간 시간차를 두고 날아오는 두번째 미사일이 보이자 함교요원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녹스급 프리깃함에서 섬광이 일고 물기둥이 치솟았다. 하픈의 두배나 되는 탄두가 우현을 뚫고 들어와 함 내부에서 폭발한 것이다. 2초 후에 다시 섬광이 일며 함교가 통째로 날아갔다.  프리깃함 전체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연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함은,  함미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함교 앞 함수 중간부분은 파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치고 있었다. 함수는 용골부분만 남은 것이다.  함은 즉각 침몰하지는 않았으나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잠시 후에 몇 명의 수병이 차가운 서해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그들도 원래는 대만해군이었으나 새로이 북해함대에 배속되어 대잠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상으로 어뢰정 두 척이 나타났다.  친양함에 탑재되는 대잠헬기는 아직 잠수함을 찾고 있다가 발견했다.  대응할 무장이라고는 7.62밀리 기총밖에 없는 이 헬기는 잽싸게 서쪽으로 도주했다. 헬기와 다른 두 척의 프리깃함이 발산하는 전파는 해주 상공의 E-2C가 계속 수신하고 있었다.

  "수상에 돌발음! 다시 돌발음!  프리깃함이 있던 위치입니다!"

  이 중사가 함체를 울리는 굉음에 지지 않을 정도의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오~ 예!!!"

  서 소령이 주먹을 들고 불끈 쥐었다.

  "으그그 이쁜 것들~ 누군지 몰라도 오늘 저녁 술독에 빠지게 해주지. 이 중사! 어떤 공격이었나?"

  "모르겠습니다. 어뢰는 아니고 미사일인데 폭발의 규모로 봐서는 하픈보다 훨씬 큰 놈입니다. 아무래도 인민군의 스틱스같은데요?"

  "호~ 그럼 같은 해군이구만. 좋~았어. 우리나라의 통일과 장보고함의 무사귀환을 축하하며 그 친구들과 한잔 하자고.  술값은 잠수함대 사령관이 내 주시겠지."

  서 소령은 한국 공군보다는 차라리 인민군 해군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이제는 같은 식구 아닌가?

  "와~~~"

  승무원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주먹을 머리 위에서 마구 돌리면서 혀를 굴려 사하라의 베두윈족이 내는 휘파람소리를 냈다.  그동안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고, 술까지 마실 수 있다니, 오랜만에 기분들이 너무 좋아졌다.

  "업트림 최대!  잠망경 심도로! 얼마나 이쁜 놈들인지 확인해야지."

  장보고함이 수면 위 상황을 확인한 후 부상했다. 어뢰정이 중국 수병들을 구조하는 모습 뒤로 침몰하는 프리깃함이 보였다.  마스트에 수병들이 잔뜩 올라와 어뢰정을 행해 함성을 질렀다. 곧이어 미사일을 발사한 고속미사일정이 오고, 잠시 후에는 잠수함 위로 미그-23 전투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1999. 11. 25  20:50(중국시간)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미친 놈들입니다. 감히 핵유도탄 기지를 공격하려 하다니, 한두 군데도 아니고 30여곳에 흩어져 엄중한 경계하에 있는데 무슨 수로…"

  제 2포병 사령 쏭윈펑 중장이 중국전도가 펼쳐진 중앙화면을 보며 한국의 전쟁지도부를 비웃었다. 화면에는 각 미사일기지의 위치가 표시되었는데, 이상없다는 신호인 푸른 색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인 정치국원이나 고위 장관(將官)들은 약간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그따위 일본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우린 충분히 조선의 책략을 막아낼수 있습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서울과 평양은 불바다가 되겠군요. 미국이나 일본도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하하하~"

  쏭 중장은 조선공작회의가 시작된 이래 계속 싱글거리고 있었다.  콧대 높던 인민해방군 장성들이, 내전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운 그들이 조그만 나라 조선에게 참패를 거듭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이 나서서 평정한다고 생각하니 유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오."

  리루이환 총서기가 말을 꺼내자 회의실에 있던 전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어서 총서기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핵기지 중에 하나라도 조선군에게 점령되거나 유도탄에 손해를 입으면 동지는 숙청이오. 그만큼 자신했으면 책임을 져야겠지. 동지! 알겠소? 그만큼 중요한 일이오."

  숙청… 직위해제부터 강등, 파면, 형사소추, 심지어 총살형까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던가! 그 살벌한 문화혁명과 정치위기 때마다 있었던 숙청, 그리고 내전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었으나 숙청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살이 떨렸다.

  "일본이 왜 그 정보를 우리에게 흘렸을까요? 우리가 조선반도를 획득하면 일본에 상당히 불리해 질텐데요."

  분위기를 바꾸려고 총후근부장인 첸쯔밍 상장이 물었다. 그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놈들 하는 짓은 항상… 우리가 좀 더 조선과 소모전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된 왕민강이 나름대로 분석했다. 왕은 전인대(全人大 : 전국인민대표대회) 홍콩대표를 지냈던 자였다. 내전 당시, 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광둥-푸젠 세력을 지원하여 지금의 지위를 획득했다. 물론 전임 상무위원들이 저격병에게 떼죽음 당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어쨋든 지금은 당의 정보부서인 외사국(外事局)까지 장악하고 있는, 일곱 명밖에 안되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의 한 명이었다.

  "우리가 핵을 쓴다는 걸 일본이 모르지는 않을텐데…  그건 그렇고, 왕 동지! 최 광 원수에 대한 회유공작은 어떻게 된거요?  진행이 좀 됐소?"

  왕 민강은 약간 당황했다. 상무위원이 되고 나서 첫번째 공작인데 잘 되고 있는지 조차 불분명했다.

  "주조대사의 보고를 받기로는 최 원수가 상당히 흔들렸다고 합니다. 어차피 조선이 핵을 피하지는 못할테니까 북조선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밤 10시40분, 조선시간으로 자정 20분 전에 최 원수가 연락해 주기로 했습니다."

  장군들이 원수라는 호칭을 듣고 피식피식 웃었다. 원수 3명에 대장보다 높은 차수가 8명이라니,북조선의 직책은 너무 인플레가 심하다는 평가였다. 하긴 원조전쟁(援朝戰爭 : 6.25) 이후 물갈이가 거의 안된 조선군이니 그럴만 했다. 중국군 총참모부장(총참모장)은 대부분의 경우 상장이 맡았고, 드물게 중장이 맡은 경우도 몇번 있었다. 같은 계급으로 비교한다면, 조선 인민군 상장은 중국군 소장이 맡는 군단장급 정도에 불과하다.

  "아직 확실한건 없군 그래요."

  리 총서기가 왕을 나무라기는 했지만  그리 신경쓰지 않고 있는 문제였다. 어차피 핵으로 조선을 두둘기기만 하면 끝나는 쉬운 문제였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해군 사령 창리엔충 상장이 손으로 백발을 쓸어 올리며  말을 시작했다. 나이만큼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렸다.

  "조선이 현재까지 동원한 병력은 500만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인구의 10분지 1을 동원하다니 대단한 나라이긴 틀림없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그 많은 병력이 지금 다들 어딨냐는 겁니다. 신의 주쪽과 후방에 많이 잡아 각각 백만, 동부 선봉지역에 2백만 정도가 있다고 쳐도 약 백만의 병력이 사라졌습니다."

  조선공작회의에 배석한 교관급 군관이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 부근을 화면에 잡았다. 현재 인민해방군의 위치와 조선군의 추정위치가 표시되었다.  사라진 병력은 군정보기관이 심혈을 기울여 찾고 있지만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빠이터우산(백두산) 근처는 현재 전투가 없는 곳입니다.  만약 그쪽에 대규모 부대가 잠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조선이 만주에 대한 침공의사를 갖고 있다고 간주해도 됩니다."

  "에이~ 설마!"

  곳곳에서 창 상장의 의견을 비웃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창 상장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계속 설명했다.

  "조선군이 혜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다시 두만강을 건너 선봉을 칠 수도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이 정도 기동을 한다면… 우리 군은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빠지며 동시에 만주도… 만주는 지금 어느 정도 부대가 배치되어 있나요? 리 동지."

  난징군구 사령 리양시 중장이 화면을 직접 조작했다.  병력배치는 군사비밀인 까닭에 교관급이 다룰 것이 못된다. 화면에 그림과 숫자로 현재 중국군의 병력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9병단과 22병단에… 아니, 16병단은 이미 전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편제는 되어 있군요. 수비사단 세 개와 인민무장경찰 독립대대 20여개는 있으나 마나고, 겨우 2개 병단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병력을 증강배치해야 합니다. 그 2개 병단은 전력이 약하고 현재 분산배치되어 있군요. 이러다간 큰일납니다. 빠이터우산에서 베이징까진 기차로 6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들이 맘만 먹으면 베이징까지 바로 올 수도 있습니다.  조선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닙니까?"

  늙은이는 항상 보수적이다! 라고 쏭 중장이 창 상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중국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노인들이 정권을 움켜잡고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쏭 중장은 내전에 적극 가담하고 결국은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지금 늙은이가 나서지 않는가? 불쾌했지만 꾹 참고 발언했다.

  "허허~ 창 상장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오늘 밤에는 다 끝날 전쟁 아닙니까?  혹시나 만주로 쳐들어 온다면 핵을 몇 발 더 쓰면 되겠지요."

  쏭 중장이 대답하고 나서 껄껄거리며 웃자  다른 장군들도 따라 웃었다. 핵이 있는데 감히 조선군이 어찌 만주를 침공해 오겠냐는 자신감이었다.

  "에… 오늘 저녁 선봉 주변 해안에서 조선군 정찰대의 침투가 몇 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륙작전의 징후로 보입니다. 피스라는 용병단체의 양륙함은 지금 동해안에 있습니다.조선의 남해함대도 함경북도 해안으로 이동 전개 중입니다. 틀림없이 상륙작전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백만의 병력은 상륙예비병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전선에서 약간 떨어진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죠.  조선반도 동쪽 해안에서 말입니다."

  리양시 중장이 단말기를 조작하여 화면에 있는 화살표로 한반도 동해 안 쪽을 긁었다.  산맥에 가려 중국의 정보망이 커버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정치국원과 고위 장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륙작전을 실시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게다가 대규모로 하기에 그들의 상륙작전능력은 떨어지고…  더우기 핵유도탄을 발사하겠다고 보낸 최후통첩에서 발사시간을 오늘밤 자정으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늦었습니다. 자정 이전에 항복하든지 아니면 서울과 평양이 잿더미가 된 다음에 항복하든지, 또는 남북 조선이 피터지게 싸우든 간에 그들의 항복은 기정사실입니다. 상륙작전은 전혀 걱정할 게 못됩니다."

  총서기를 포함한 참석자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역시 핵폭탄은 직접 사용하지 않아도 전략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오 주석이 왜 그토록 핵에 집착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중한 창 상장이 이견을 제시했다.

  "조선정부는 자국에 핵이 있다고 주장했소.  그 화면을 동지들도 모두들 보았을 것이오. 그게 만약 진짜라면? 러시아나 미국, 카자흐, 벨로루시 등 모두들 자국에서 수출하지 않았다고 발뺌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핵보복에 나선다면?  그리고 만약에 조선 침투부대가 핵유도탄 기지를 하나라도 점령하거나 유도탄을 탈취한다면?"

  "하하! 기우입니다. 걱정은 제발 마십시오."

  쏭 중장이 다시 나섰다. 핵기지가 조선군에 침탈당하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국적이 아닌 조선인은 모두 수용소에 갇혔다. 톈진 등 몇몇 도시에 조선 게릴라들이 난동을 부렸다지만 이미 진압했고 더 이상의 난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당과 국무원의 정보부서들이 조선게릴라의 소멸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쏭 중장도 TV뉴스에서 게릴라들의 시체를 구경했었다.  아직까지 게릴라가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가 총사령관이라도 게릴라는 진작 다 소모했겠지.’

  1999. 11. 25  21:55  함경북도 부령, 풍산동

  북쪽을 방어하던 구르카 2대대는 붕괴되었다. 중국군은 1파 공격으로 지뢰밭에 침공로를 개척하고,  다시 2차 공격대가 2대대의 실탄을 소모시켰다. 3파는 단숨에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했다. 방어선이 뚫리자 2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들은 후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서 싸웠다. 여단장인 돈나카가 후퇴를 명령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전사들답게 최후를 맞았다. 인민해방군 2개 병종사단 병력이 무너진 방어선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야간이라 어쩔 수 없이 곳곳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었는데, 구르카 용병의 특기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육박전이 시작되자, 구르카 용병들은 애용하는 쿠크리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전쟁을 즐기는듯 했다. 그들의 눈빛이 번쩍이며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사방에 폭음과 총성, 비명이 터져나왔다. 본부 요원들과 지하벙커를 나설 준비를 하는 돈나카는 자신의 최후가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남지나해에 있던 중 티벳 임시정부 총리의 전화를 받았었다. 총리의 명령은, 한반도에 파견되는 피스의 지상군부대에 지원하여 중국을 공동의 적으로 둔 통일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정부관료들과 연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티벳독립에 한국의 힘이라도 빌릴 셈이었던가? 돈나카는 어쨋든 총리의 명령을 수행키로 했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노선에 총리가 반기를 들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를 믿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한반도로 항진하는 양륙함에 탑승해 있었다.

  그는 한국,  특히 북한지방이 고향인 티벳과 닮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다음으로 한국인이 티벳인들과 너무 닮았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유럽에서 만난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이어서 한국인을 만날 기회는 없었는데, 한국에 와서 본 이곳 사람들은 고향사람들과 왜 그리 닮았는지…

  그는 이 인민군을 몇 명 보았는데 무척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티벳 사람만큼 강인하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티벳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서서 낳는다.  그리고 아기가 스스로 울 때까지는 죽든지 말든지 아기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약한 아기는 필요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낳은지 1년쯤 되면 한겨울에 아기를 찬물 속에 쳐 넣는다.이런 시련을 겪고도 살아남아야 그 아기는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  한국의 풍습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군은 베트콩들처럼 무모한 자살공격은 하지 않았다. 돈나카는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반쯤 무너진 지하벙커를 나섰다.  청진 앞바다에 있는 양륙함에서 전투기가 출격했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참모장과 본부요원들이 그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사방에 포탄이 작렬하고 있었지만 피하거나 숨지도 않았다.  일순간에 포화가 딱 멈췄다. 하지만 총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많이 들렸다. 아군의 것이 아닌 중국제 AK 종류였다.

  "투카카카~~~"

  무전병이 적을 발견하고 자동으로 소총을 긁었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다가 오던 중국군 네 명이 그자리에서 거꾸러졌다. 동료들이 죽은 것을 보고 놀라 한 명이 도망쳤으나 같이 있던 부관이 도망가는 병사를 좇았다.  부관은 뛰어 가면서 그 병사의 목을 쳤다. 쿠크리 단검은 가운데가 칼등 쪽으로 휘어 있다. 낫모양의 이 단검은 던지기나 찌르기에는 부적합하지만 단 한가지 용도에는 아주 훌륭하다. 목이나 다리, 팔 등을 단칼에 자를 수 있는 검이다. 철모를 쓴 머리가 바닥에 구르며 피가 눈위에 확 뿌려졌다.

  "온다던 전투기는 어떻게 된거야?"

  무전병이 다시 양륙함을 호출했으나 응답은 없고 잡음만 잔ㅉ 울렸다. 돈나카가 허탈하게 웃었다. 구르카병사들이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바라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돈나카 옆에 서 있던 작전참모가 베레타 권총을 들고 어둠 속을 향해 두 발을 연사했다. 정확한 사격이었다. 30미터 정도 걸어가니 흰색 방한복을 잔뜩 껴입은 중국군 병사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앞쪽에서 수십명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군이었다.

  "어차피 도망도 못가고…"

  돈나카는 미니미 기관총을 들어 몰려오는 중국군을 향해 연사했다.물이 튀듯 눈이 튀었다. 부관이 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 계속 던졌다. 폭음과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중국군은 일단 물러났으나, 병력이 증원되자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1개 중대의 중국군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 왔다.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대규모 공세를 취하는 중국군, 그리고 이 지경이 되도록 지원하지 않는 한국군 사이의 상황에 뭔가 변화가 있다고 느꼈다. 동부 전선에는 한국군 병력이 중국군보다 훨씬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쟁은의외로 오래 끌 것 같았다.

  갑자기 상공에 폭음이 울렸다.  상공에는 아직 비행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공격해 오던 중국군들이 멈칫거렸다.  잠시 후 남쪽에서 전투기들이 나타나자 중국군들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렸다. 청진의 양륙함에서 이륙한 해리어 II 전투기 네 대가 나타나더니 2대대 전면에 50밀리 로켓탄을 발사하고 산을 넘어 그대로 북쪽으로 날아갔다.  로켓탄이 연속 폭발하고 그 화염 위로 미사일이 날았다.

  "이 멍청이들아! 목표 위치는 바꼈어. 아예 우리 진지에다가 퍼부으라고!"

  무전병이 무전기에 대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으나 이 말이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음에 온 편대도 같은 위치에 폭격한 것이다. 폭격이 끝난 것을 확인한 중국군들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잠시 폭격을 구경하던 양측이 다시 전투를 재개했다.

  여단장인 돈나카 탄진은 이미 부하들에게 자유행동을 지시했다. 개별적으로 후퇴하거나 항복해도 좋다는 것이었지만 구르카 용병들이 이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후배들의 용병 일자리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거의 유일한 외화수입원인 용병 일은 네팔에서는 주요한 수출산업이었다. 그들은 결코 후퇴하거나 도망갈 수 없었다.

  1999. 11. 25  22:00 함경북도 부령 백사봉

  [본대가 심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2중대장이 보고할 때  빠뜨랭은 서쪽 하늘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중국군이 발사하던 포성은 이미 멈췄다. 총소리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지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중국군 1개 사단을 뚫고 말인가? 그리고 그 방향에는 아군이 살포한 지뢰도 있고… 아무래도 우리 자신이나 신경써야겠어. 곧 몰려올테니."

  [옵니다! 스키부대입니다!]

  1중대장이 보고했다. 빠뜨랭이 북쪽 산기슭을 올려보니 어둠 속 하얀 눈밭 위로 허연 물체들이 수없이 몰려왔다.  산악포와 박격포탄이 참호선 곳곳에 다시 낙하하기 시작했다.

  "사격!"

  북동쪽 산사면을 따라 내려오는 중국군 스키부대의 숫자는 엄청났다. 중화기가 총동원되어 치열하게 사격을 했으나 그 숫자는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산비탈에 쌓인 눈 곳곳에 총탄에 튀어 눈보라가 일었다. 중국군은 순식간에 방어선에 접근하여 스키를 탄 채 점프를 하며 참호로 뛰어 들었다. 이들을 뒤따라 피해를 입지 않고 접근한 보병들이 돌입했다.

  참호선 곳곳에서 기관단총 소리와 수류탄 폭발음이 들려오자, 빠뜨랭 되고 있는 기관총 사수들을 그가 있는 곳으로 집결시켰다.작은 원을 중심으로 이들을 배치한 다음, 대부분 서쪽으로 총구를 향하게 했다.  곧이어 반대편 넓은 평원쪽에서도 중국군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키부대가 5대대의 배후에 나타가길 기다리고 있다가 포위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거리 300에서 일제사격 실시!"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린 빠뜨랭은 이제 전투는 자신과 상관없다는듯이 참호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밤하늘은 맑았고 별이 총총했다. 그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공기중에 퍼져 나갔다.  그를 따라다니던 저격병과 무전병이 시선을 교차했다.  늙은 저격병은 다시 육박전이 진행되고 있는 아군 참호쪽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구르카 병사를 쓰러뜨리고, 창같이 뾰족한 총검으로 막 그를 찌르려던 중국군이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에 쓰러졌다.

  잠시 후 기관총이 서쪽을 향해 일제히 발사되었다.  기다란 참호선에서는 아직도 백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참호선 앞쪽은 기관총의 일제사격으로 무수한 숫자의 중국군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었는데, 10여년간 용병생활을 했음에도 빠뜨랭은 아직도 죽는 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이따위 전쟁이 벌어지고 젊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죽어야 되나?"

  화가 잔뜩 치민 빠뜨랭이 불어로 외쳤다. 구르카 병사들은 그를 힐끗 보더니 사격을 계속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중국, 빌어먹을 한국!"

  빠뜨랭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 자신은 이미 삶에 대한 의욕은 없었다. 향수공장 연구실에서 맡았던 그 매캐한 화약냄새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았다.  십년간 전쟁터를 돌아다녔지만,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강렬한 냄새는 아직 찾지 못했다. 분명히 화약냄새만은 아니었다.  이곳저곳 전쟁터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기도 했지만, 그 냄새는 분명 아니었다.

  빠뜨랭은 갑자기 몸에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등쪽에서 강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졌다.  피가 튀고 공기중에 피냄새가 확 퍼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참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피우던 담배가 턱을 지졌다.  옆에 있던 무전병과 저격병이 네팔 말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바로 이 냄새였구나. 화약과 신선한 피냄새가 섞인 죽음의 냄새… 역시 강렬하군…’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숨졌다.

  1999. 11. 25  22:10  중국 지린성 뚠화

  "항공정찰 사진에 비해 경비가 훨씬 강화되어 있습니다."

  백 창흠 대위가 야시경으로 중국 핵미사일기지 주변을 살피다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내말이 그말이외다. 백 동지."

  가 경식 소좌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입구 쪽에 전차 2대와 보병전투차 4대가 배치되어 있고 초소와 참호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침투는 예상보다 상당히 어려워지겠다며 다들 걱정했다.

  "지도에 없는 초소, 지뢰, 지뢰, 초소… 강 동지, 기입했간?"

  "했습네다. 책임자 동지!"

  인민군 정찰연대 출신인 가 소좌와 강 중위는  캄캄한 밤중에도 지뢰밭을 정확히 짚어내어 이를 지도에 표시했다.  그들은 지뢰지대의 정확한 위치를 서로 확인하지도 않고 말만으로 통하는 것같았는데, 백 대위가 보기에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점령할 곳은 통제실과 사일로입니다. 문제는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겠죠."

  백 대위가 가 소좌를 넌지시 쳐다보자, 가 소좌는 백 대위를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도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땅크를 때려 잡을 중화기가 부족하외다. 천상 우회하는 도리밖엔… 긴데 지뢰천지라서… 안에 있는 아새끼들서껀 죄 합쳐 1개 대대레 되갔구만!"

  기술분야의 백 대위는 미사일기지의 경비상황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같이 훈련받으면서 이들의 능력을 충분히 신뢰하게 되었다.  침투와 파괴공작에서 이들을 따라갈만한 자들은 없었다.  해군 UDT나 공수특전단도 이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도대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가 알고 있는 세계 어느 나라의 특수부대보다 강했다.

  "그럼 힘들다는 말씀입니까? 본부에 그렇게 보고할까요?"

  "앙이오! 기기 무시기 말씀이오? 내레 단지 총알이 부족할까 걱정한 거디오."

  백 대위가 넌지시 떠보자 가 소좌는 황망히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가 소좌는 이 팀의 책임자였지만  소위 남반부 국방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력이 약한 쪽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핵기지 공격팀은 침투 및 지원조에서 팀장이 선임되고 기술조에서 부팀장이 임명되는 식으로 팀이 구성되었다.  핵기지를 점령할 경우 모든 지휘권은 기술조 조장, 즉, 부팀장이 장악하게 된다. 초반에 이런 구성을 인민군측에서 반대했었지만, 컴퓨터와 로켓 기술에서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쪽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조직구성에 동의했다. 문제는 과연 이런 소수의 팀으로 삼엄하게 경비중인 핵기지를 점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작전을 구상한 통일참모본부측에서도 회의적이었지만, 기적이라도 일어나 다만 한두개의 기지라도 점령하길 바라고 있었다. 중국의 핵위협에 시달리는 통일한국군 최고지휘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99. 11. 25  22:15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우루무치시 동쪽 15km

  중국의 서쪽 끝, 신장웨이우얼(新彊 維吾爾) 자치구 우루무치시 외곽의 사막에서는 20여 마리의 말이 어둠과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뚫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말에 탄 10여명의 유목민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계속 달리기만 했다. 터번을 두르고 사막 옷을 입은 그들은 얼핏 보기엔 이 근처에 사는 위구르족이나 하싸커(哈薩克)족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햇빛에 그을은 듯한 구리빛 피부가 이들의 강인함을 말해 주는 듯했다. 광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리는 그들 북쪽으로는 톈진(天山) 산맥이 달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이 가던 방향으로 헤드라이트를 밝게 켠 사륜구동차가 멀리 나타났다. 선두의 말이 갑작스런 불빛에 놀라 앞다리를 들고 울음소리를 냈다.

  "순찰차입네다!"

  "모두 침착하시오! 자연스럽게 행동하시오."

  이들은 분명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사륜구동차가 이들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20여 마리의 말을 바꿔가며 타는 10여명의 사람들은 자동차가 다가오자 멈춰 섰고, 차는 이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정지했다. 차에서 중국군인이 한명 내리는게 보였는데, 눈부신 헤드라이트 너머로 나머지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가운데 한 명이 차에서 서 있는것으로 보아 기관총 사격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야히미시즈(안녕하십니까)?"

  "야히미시즈?"

  일행 중의 한명이 먼저 위그르어로 인사하자 중국군인도 위그르어로 인사를 받았다.

  "웨이우얼(위구르의 중국명)족이시구만. 이 밤중에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거요?"

  두툼한 야전복을 입은 중국 병사는 중사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 상당히 오래 근무한 것처럼 보였다. 중국군이 북경어로 묻자 선두의 유목민이 더듬거리는 중국어로 답했다.

  "메르 헤메티(죄송합니다). 투루판(吐魯蕃)에 계시는 저희 일족의 큰 형님께서 말년에 아들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중까지 도착해서 이 경사를 축복해 드리려고 가고 있습니다.  차는 믿을만한게 못되거든요. 우리 식구들도 많고…"

  선두에 선 유목민이 뒤에 서 있는 식구들을 가리켰다. 여러가지 연령층에 여자도 한 명 섞여 있었다.  중사가 여자를 힐끗 보고는 유목민에게 경고했다.

  "오늘밤에 이 지역은 통행금지요. 더 이상 동쪽으로 가지 마시오. 비상이 내렸거든. 혹시 수상한 사람은 못봤소?"

  중사는 이들을 보며 참으로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하긴 이번 전쟁은 이들 위구르족과는 거의 상관없을 것이다. 2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무슨 상관일까?  자신도 거의 전쟁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다만, 중국측이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이 불안했지만…

  "츄시엔미딤.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급하게 와서. 아까 한참 전에 차 몇 대가 반대쪽으로 지나갔는데요."

  유목민 일행은 중국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일행이 빨리 말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이 지역사람이 아닌 그들은 오래 이야기할수록 불리하기 마련이라.

  "어쨋든, 이 지역은 핵기지가 있으니 동쪽으로 갈 수 없소. 남쪽으로 빙 돌아서 가든지 내일 가든지 하시오."

  "어이구~ 나리! 오늘 밤중에 꼭 도착해야 하는데요.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임시통행증이라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유목민이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폐뭉치를 꺼내 그 병사에게 주자 병사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허, 이거. 할 수 없구만. 이 통행증을 줄테니까 다른 순찰조에게 보이도록 하시오. 그들에게도 성의를 보이는걸 잊지 말고. 참, 핵기지에서 4km 이내에는 절대 접근하지 말고 우회하도록 해요. 오늘은 경비가 삼엄하고 접근하면 위험해지니까."

  "라히미티, 라히미티!(감사합니다)"

  유목민은 병사가 차로 돌아갈 때까지 허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잠시 후 순찰차가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휴~ 내레 십년감수했수다!"

  "수고했습니다."

  이들은 우루무치 미사일기지를 담당한 요원들이었다.  원래는 파키스탄 접경의 대륙간탄도탄 기지인 아커쑤(阿克蘇)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기지는 사막 한가운데에 있어 접근이 어렵고,  게다가 경비가 대폭 강화되어 출발 직전에야  러시아국경과 가까운 우루무치로 변경되었다. 이들은 말로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오늘 저녁에야 도착, 현지 요원과 접선하여 핵기지로 접근 중이었다.

  원래는 작전개시 시간을 새벽으로 잡았지만  중국이 자정에 핵공격을 가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지금 전속력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자정 전에 도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쨋든 이들은 다시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1999. 11. 25  22:20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차 영진 준장은 전차대를 이끌고 이동 중에 통참으로부터 긴급연락을 받고, 통참에서 보낸 연락용 헬기에 탑승해 구리시의 어느 부대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승용차를 타고 통참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부대에는 통일참모본부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던 그 부대의 대대장도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선으로 다른 곳에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육군본부나 국방부에서는 일급보안사항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차 준장이 황당해 하고 있는데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이 그를 만나러 왔다. 통참에서 보낸 사람이란 것을 직감한 그는 민간인을 따라 나섰다. 통참의 연락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빨간색의 95년형 아반떼 승용차 열쇠를 차 영진에게 주며 통참의 위치를 구두로 설명했다.  갈 때 계급은 숨기라며 지령처럼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설명을 마친 그 연락관은 버스시간에 늦는다며 서둘러 부대를 나섰다. 혹시나 못찾을까봐 걱정한 차 준장은 같이 타고 가면 되지 않느냐며 청했으나 그는 거부한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승용차에 올라탔다. 원래는 민간인 차인데 이번 전쟁통에 징발당한 모양이었다.  차주인의 성품을 말해주듯 차 내부는 지저분했고 담배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주인이 잊었는지, 아니면 전쟁중인 군인에게 주는 위문품인지 음악 테이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동을 킨 그는 캄캄한 부대 앞길로 나섰다.

  연락관이 말해 준 그 위치라면 차 영진도 잘 알고는 있었다. 그는 장군체면에 운전병도 없는 소형 승용차를 타고 국도를 달렸다.  경춘국도는 의외로 평화로워 보였다. 승용차와 트럭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몇년 전에 확장공사를 했음에도,  그리고 더우기 전시중에도 이 도로의 체증은 대단했다.  미금시를 빠져 나온 그는 30분만에 겨우겨우 새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호등이 꺼지고 군인이 경비를 서고 있는 철로 건널목을 지나, 2차선 도로를 1분쯤 달리니 조그만 건물로 향하는 비포장도로가 보였다.

  그 도로를 지나자 벽돌로 대충 쌓은듯한 입구가 보이고 문 옆에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정문에 붙은 초라한 나무현판에는 7291부대  제 1대대 제 3중대라는 부대명이 검은 페인트로 초라하게 칠해져 있었다.  차 영진은 여기가 과연 5백만 통일한국군을 지휘하는 통일참모본부인가 의심스러웠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병사들이 나와 그의 차를 정지시켰다.

  "여기가 통일참모본부인가?"

  차 영진이 차 유리창을 내리면서 물었다.  살을 에이는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아닙니다. 이 근처에 그런데가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보여 주십시오. 여긴 군부대라서 민간인 통제구역인데요."

  "이봐! 여기 계급장 안보이나?"

  차 영진이 화가 나서 조수석 아래에 감춰둔  야전상의의 계급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병사는 별로 놀란 눈치도 아니었고 막무가내였다.

  "죄송합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차 영진이 분을 삭이며 육군수첩을 건네주자 경비병이 이를 통제소로 가져갔다.  다른 병사는 총구를 그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성에게 저런 행동을 취하다니! 후방의 병력은 너무 군기가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일참모본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가 더 난감했다. 신분증을 가져갔던 병사가 다가오자 차 영진이 연대사령부의 위치를 물으려는데 그 병사가 먼저 말했다.

  "정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십시오. 2층 황실입니다. 통일참모본부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장군님!"

  이제야 병사들이 앞에 총을 하며 경례를 붙였다. 차 준장은 약간 황당했으나, 병사가 신분증과 출입증을 주자 정신을 차려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50미터쯤 가니 조그마한 2층 벽돌건물이 있어 그는 운동장에 주차시키고 계단을 올라갔다. 안쪽으로 갈수록 경비는 점점 삼엄했다.

  1999. 11. 25  22:25  서울 국방부 지하벙커

  옛날엔 비상시 육군본부의 지휘소로 쓰였던 국방부 지하벙커에서 비상국무회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우습게도 굴비 엮듯 이 줄줄이 삼엄한 경비속에 버스에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버스에 탑승했기 때문에 이들은 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어쨋든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이 긴긴 밤이 새야 이들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살아남더라도…

  "서울이 제 1의 목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핵폭탄의 위력은 전선에서도 사실상 크지 않습니다. 밀집한 대규모 기갑부대에게나 유효한거죠. 어쨋든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총리의 말에 대통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눈치만 살폈다. 전쟁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 국무위원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대통령을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일쑤였던 것이다.

  "글쎄요. 과연 중국이 핵공격을 감행할지요… 잘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합니다. 두시간 정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대피할 수 있을까요?"

  최 창식 총리가 비상소개령이 내려진 한밤중의 서울 거리를 상상해 보았다. 도로에 넘쳐나는 차들, 피난민들… 오늘 밤이 새더라도 서울시민의 10분의 1도 서울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도로가 집중된 서울 인근의 차량통행이 마비된다면 전방으로 수송중인 군수품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게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할 수 없습니다."

  총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놈의 도시는 너무 거대해졌다. 전쟁같은 극한상황에서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것이 대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최 총리!"

  "네! 각하."

  최 총리는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까 겁이 났다.  단군이래 가장 만만한 국가지도자라는 평을 듣던 무소속출신의 대통령이 전쟁이 발발하자 몰라보게 달라졌다.  대통령은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확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인간의 욕심이란 모르는 것이다.

  "총리께서는 대전으로 가 주시오. 유성에 있는 정보사단의 위치를 헬기 조종사가 잘 알고 있소. 그곳으로 가서 지휘관들을 격려해 주시오."

  총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하! 혹시…"

  "그렇습니다. 대통령 유고시에는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아 주시오."

  "각하!"

  총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대통령의 가장 큰 반대세력은 사실 총리가 소속된 당이었다.  대통령은 연립내각을 구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총리직을 그 당에 배분했으며 당총재는 대통령을 우습게 봤는지 정치경력도 길지 않은 재선의원을 총리로 천거했다. 대통령은 이 굴욕을 감수하고서야 간신히 안정의석을 가진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 총리는 절대로 대통령이 그에게 권한대행을 맡기지 않을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총리가 최초로 대통령에게 감복했다. 다른 국무위원들도 신기한 일이라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서관!"

  미리 준비된듯 40대 초반의 비서관이 검은색 가방을 가져와서 대통령에게 주자 그가 이를 총리에게 넘겼다. 총리가 물끄러미 가방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총리께서는 의외로 배짱이 있으시더군요.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오."

  대통령이 총리에게 신뢰의 눈길을 보냈다. 그가 당총재의 명령만 수행하는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총리의 의견을 그동안 대폭 수용해 온 것은 제 1연립여당의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고 총리를 믿어서였다는 것을 국무위원들이 깨닫게 되었다. 국무위원들은 무서운 대통령에 무서운 총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명령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통령의 명령은 확고했다. 아니, 그가 총리에게 명령이라는 말을 쓴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 네. 각하! 부디 보중하십시오."

  뚱뚱한 체구의 사람 좋게 생긴 총리가 어깨가 축 늘어진채 밖으로 나갔다. 양심적인 그는 상당히 부끄러워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국무위원들 사이에 번졌다.  총리가 나간 것을 확인한 대통령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회의도 끝났고 우린 이제 할 일도 없습니다. 장군들이 알아서 다 하겠죠. 통일참모본부나 정보사단… 우린 그들을 밀어주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잖습니까? 우리 고도리나 칠까요? 아니면 포카 어때요?"

  점잖은 국무위원들이 경악을 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줄 몰랐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놀이라니. 이때 용감한 내무장관이 외쳤다.

  "각하! 고도리는 일본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고스톱이라고 말씀하십시오! 저는 포카를 치겠습니다. 하실 분 이쪽으로 오세요~"

  1999. 11. 25  22:30  베이징판띠엔

  "거 참 심심하군요. 무작정 자정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합니까?"

  리양시 중장이 하품을 하며 정치국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총서기와 창 리엔충 상장은 묵묵히 모니터만 주시하고 있고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끼리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장관(將官)들은 몇명은 서 있고, 몇 명은 앉아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 중장은 마작 생각이 간절했다.

  "기다릴 것도 없이 그냥 발사해 버리죠. 어차피 기다릴 필요는 없잖습니까?"

  강경파인 제 2포병 사령 쏭윈펑 중장이 말하자 정치국원들이 깜짝 놀랐다. 총서기와 창 상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좀 더 기다려 봅시다. 평양에서의 움직임은 없소?"

  총서기가 묻자 외사부 담당인 정치국 상무위원 왕민강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평양주재 대사의 보고로는 평양 인근에서 군부대의 이동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소규모의 차량행렬이 수차례나 도심쪽으로 향하는 것이 정보원들에게 목격되었습니다. 하지만 쿠데타로 보기에는 병력이 너무 소규모…"

  "어차피 평양은 최 광 원수의 장악하에 있으니 상관없소."

  묵묵히 듣고 있던 첸쯔밍 총후근부장이 단언했다.  평양은 어차피 관심사 밖이었다.  인민군이 어떻게 움직여 줄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전선은 의외로 조용했다. 다만 선봉을 중심으로한 동부전선만이 중국군의 공세로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이것도 본격적인 공세가 아닌 양동작전이므로 전황은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중국 지도부가 바라는 것은 한국의 항복, 또는 이에 준하는 선봉지역의 할양이었다.  만약 인민군과 한국군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어설픈 공작이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유도탄 숫자를 늘립시다. 세 발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소?"

  창리엔충 상장의 제안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아닌 리루이환 총서기였다.  창 상장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한반도에 발사되는 핵미사일의 숫자를 늘리자는 것이 아닌가? 창 상장이 부언했다.

  "어차피 핵을 발사하는만큼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소. 한 발일 경우 한국군이 요격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단 말이오. 확실하게 끝장을 봅시다."

  "하하하! 절대 요격할 수는 없습니다.  유도탄이 대기권에 재돌입할 때는 음속의 20배 이상의 빠르기입니다. 패트리엇, 나이키, 호크 등 한국이 보유한 어떠한 지대공 미사일로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3기로 확대하자는 창 상장님 제안에는 동의합니다.  이 기회에 한국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조국의 백년대계에도 유리할 것입니다."

  쏭 중장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도 내심으로는 단 1기만 발사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의 말은 정치국원들에게는 염라대왕의 선고처럼 들렸다. 수백만의 인명이 살상될 것을 상상한 정치국원들이 전율했다. 상상만 해오던 핵전쟁이 드디어 실체화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모두들 핵위협으로 끝낼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이 끝까지 버틸 경우 중국이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핵을 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되었다. 정치국의 분위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서울 말고도 사이좋게 평양하고… 음… 선봉 부근에도 한 발 날릴까요?"

  쏭 중장이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정치국원과 고위 군지휘관들을 바라 보았다. 군부에 영향력 있는 노장이며 총서기의 후원자인 창 상장이 발사기수 확대를 주장한 만큼 이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선봉 부근이 잔류방사능에 오염되면 애쓰고 점령할 필요있겠소? 이번 전쟁의 목적이 뭡니까? 한국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의미가 있지 않겠소?  차라리 그동안 우릴 속ㅆ인 선천부근의 게릴라들에게 불벼락을 내려 줍시다."

  첸츠밍 상장은 아직도 신의주와 단둥의 수몰로 인민해방군이 큰 피해를 입은데 대해 치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가장 골치아픈 존재이며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원인이 북부군이라는 게릴라조직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확대당군사위원들이 더 많았다.

  "그것보다는 지휘부인 통일참모본부라는 것을 때려 잡읍시다. 머리를 잘라야 힘을 못쓰겠죠. 개성 부근에 있다면서요? 서너차례 공습하려고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리양시 중장이 제안하자 고위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군사위원들이 주축이 된 확대군사공작회의 멤버들의 대부분이 찬성했다.

  "좋습니다. 개성으로 합시다. 그러나 외국의 눈도 있고 하니…"

  듣고만 있던 총서기가 입을 떼었다. 정치국원과 군부인사들이 침묵했다. 외국이란 핵강국을 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모종의 행동에 나설 수도 있고,  핵을 사용했다는 빌미를 잡아,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엔이 나설 수도 있었다.  전쟁에서 핵을 사용하는 것은 전 인류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대륙간탄도탄을 보유한 중국을 공격할 배짱을 가진 나라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불안했다.

  "세계여론의 비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민간인 피해를 줄여야만 합니다. 미국이 아세아전쟁에서 사용한 핵 때문에 도 비난을 받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 봅시다."

  "탄두의 위력이 적은 것을 발사하고 지중폭발을 시키면 됩니다. 하지만, 낙진이 더 많이 발생하여 방사능오염지역이 확대되니 마찬가집니다만… 발사계획을 많이 바꿔야겠군요. 산시성의 발사는 취소하겠습니다."

  쏭 중장은 발사계획의 상당부분을 수정해야 했다. 원래 산시(山西)성에 밀집한 여러 핵미사일 기지 중에서 서울을 향해 3메가톤급 미사일을 한 발 발사할 계획이었지만 세 발이라면 여러 곳에서 발사할 수 있게되어 좋았다. 그는 인민해방군 제 2포병의 위력을 다른 장관이나 다른 핵강국에 과시할 수 있다는 영웅심에 불타 올랐다.  그는 이 기회에 인민해방군 주력이 하지 못한 조선의 항복을 멋지게 받아낼 참이었다.

  "그래도 그게 좋겠소. 여론이라는 것은 처음 발생한 사상자에게만 관심이 있을테니. 히로시마에 떨어진게 어느 정도요?  그 정도 위력의 핵이 좋겠소."

  "그럼 동풍2호(DF-2)가 좋겠습니다. 비슷한 20킬로톤입니다. 사정거리가 짧으니 뚠화와 상하이에서 발사해야 합니다. 지중폭발로 하고… 하나 정도는 메가톤급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위력과시용으로 하나쯤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 인명을 살상할지 결정하고 있었다. 자기딴에는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듯 상대방이 불쌍해서 봐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동풍2호는 중국이 1970년에 MRBM으로 실전배치한 핵미사일이다.  사정거리는 개발시에 1,200킬로미터. 탄두위력은 20킬로톤급이다. 서방측 분류번호는 CSS-1.

  "개성이라는 곳의 적 지휘부가 좋겠소. 그곳을 아주 초토화시켜 버립시다."

  리양시 중장이 개성의 통일참모본부를 메가톤급 핵미사일의 희생물로 삼자고 제시한 것은 합리적이었다.  민간인 피해도 줄이고 공격의 명분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럼 그곳에는 아커쑤에서 대륙간탄도탄을 날리지요.  3메가톤으로 하겠습니다. 세계 최초로 탄도탄이 실전 사용됩니다.  미제국주의자나 망해버린 러시아놈들 모두 깜짝 놀라겠습니다. 하하~"

  창 상장은 모두들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대국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지금 선택권은 없었다.  세계여론이 비등하고 다른 강대국에게 핵보복을 받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창 상장은 총서기와 확대군사공작회의 참석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1999. 11. 25  22:40  성남, 서울공항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은 확장공사 이후 가장 큰 손님들을 맞았다. 거대한 C-130 허큘리즈 수송기 12대가 착륙한 것이다. 테러, 또는 사고를 우려한 군지휘부는 김포공항이나 영종도공항이 아닌, 서울공항에 이 수송기들의 착륙을 유도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화물의 하역을 마치고 있었다.

  "화물은 ASAT 6기, 패트리엇 1개 대대분, ABM 3개 포대입니다. 수령증에 확인을 해주시오."

  미공군 대령의 계급장을 단 수송기 편대장이 한국군 통역관의 안내를 받아 하역을 지휘하고 있던 국방부 조달본부 소속의 조달관에게 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서류를 내밀었다.  공군 중령인 이 나이든 조달관은 ABM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조달관은 단지 이번 일이 위성공격을 위한 미제무기의 인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ABM이라니… 전혀 예상 밖이었다.

  조달관이 서류를 자세히 보았다.  ABM은 HOE-3 미사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HOE라면 대륙간탄도탄인 미니트맨의 로켓에 팝업용 추진체를 결합시킨 비핵요격미사일 개발실험의 명칭이었다. 이것이 현실화되다니…

  "ABM은 수령항목엔 없습니다만, 이건 혹시 아직 실험중인 미사일이 아니오?"

  "귀국의 통신보안을 신뢰할 수 없어서 미리 연락하지 못했소. 실험중? 그건 외부적으로는 아직 그렇소."

  미 공군 조종사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말했다. 자신감의 표현인지, 아니면 이 장교는 그 성능을 모르는 것인지 조달관은 궁금했다.

  "우린 사용법을 모릅니다만… 고문단도 같이 왔습니까?"

  "난 전달하라는 임무만 받았소. 궁금하면 매뉴얼을 보시오."

  "…, 알겠소. 근데 ASAT 6기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우리 미국제 무기는 매우 정밀합니다. 그리고 만약 중국이 10기 이상의 핵을 발사한다면 모두 요격하더라도 어차피 한국은 끝장이오. 자, 빨리 서명해 주시오."

  편대장은 최근 한국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량 수입한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중국이 만약 다수의 핵을 사용하면 방사능 낙진 때문에 한국은 완전 폐허화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그런 뜻이었다.

  조달관은 이곳에 올 때 느꼈던  서울과 성남의 시내 분위기를 생각했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폭격의 위험이 사라지자 비교적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다. 오늘 새벽의 핵폭발로 상당한 위기감이 있었지만 다들 설마 하는 분위기였는데 미국은 중국의 핵공격을 예상하고 있다는 뜻인가?

  조달관이 수령을 확인하는 사인을 하자 미공군 조종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기체로 돌아갔고,  잠시 후 12대의 수송기는 이륙을 시작했다. 누구도 전쟁지역에 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핵공격의 위협을 받는 도시 근처라면… 그런 생각을 한 조달관 중령은 국방부에 무기수령을 보고하고 미사일 운용병력의 추가지원을 요청했다.  국방부 차관인 하 일석 대장은 즉각 지대지미사일 운영병력을 차출해 서울공항으로 급파시키고 무기의 분배 및 배치작업에 착수했다.

  1999. 11. 25  22:45  경기도 남양주 새터

  차 영진은 통일참모본부 상황실에 들러 위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들 경황이 없어 보였으나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삼면의 벽에는 각각 다른 곳들과 화상통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 벽은 좁디좁은 국방부 지하벙커에서 우글거리는 대통령과 국무위원, 고위장성들, 그리고 북한쪽인지 인민군 고급군관들이 들락거리고 있는 곳이 있었고, 정면에는 전선상황이 표시된 지도가 대형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정보사단과, 뜻밖에도 전북 무주의 위성관제소가 연결된 통신화면이 걸려 있었다.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의장인 이 종식 차수에게 전입신고를 했다. 이 차수는 평양에서 헬기로 돌아와 잠시 그의 사무실 의자에 앉고 쉬고 있었는데,  뭔가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가 차수에게 받은 최초의 명령은 뜻밖에도 이틀간의 휴가였다.

  "동지는 기간 잠을 제대로 자디 앙이한 모양이니 싫토록 잠이나 자시구레."

  "…"

  "여기 일이레 걱뎡 말라우. 어케 되디 않가서?"

  어차피 여기에 있어봐야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차 영진은 차수의 말대로 실컷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 차수의 묘한 표정이 그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핵이야. 중국이 핵을 쏘갔다는 게디."

  "네? 설마… 그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차 영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남북대치상황에 맞춰 남북의 군편제는 핵전에 전혀 대비가 되지 않았다.  남북 모두 지상군만 세계 10위권에 드는 육군왕국이 아닌가? 차 영진은 통일한국의 항복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 차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어카긴 어케? 기기야 요격하믄 되디 않갔어?"

  "네? 그치만 우리나라엔 요격용 무기가 없잖습니까?"

  "미 제국주의놈들이 웬일인디 요격무기를 됴금 넘겨 듀더구만. 하디만 동무도 알갔디만 도움이 되딜 않아."

  이 차수의 표정은 절망에 빠진 중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듯이 보였다. 뭔가 있긴 있었다. 차 영진은 이 고령의 장군이 신참인 자신에게 가르쳐 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으나 은근히 떠 보기로 했다.

  "다른 작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길티… 웃디 말라우. 핵기지를 공격하기로 해서."

  "윽… 네…, 절대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모두 제압하실 작정입니까?"

  차 영진은 비참하다는 생각을 했다. 핵강국끼리의 핵전상황이라면 당연히 선제핵공격으로 적의 핵기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적이 이미 미사일을 발사했다면 이쪽도 핵미사일로 보복을 하거나 요격용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직접적인 피해를 최소화 하면 된다.  그러나 비핵국이라면 핵보유국에 대항하는 방법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그는 너무 창피했다. 약소국의 지상군, 핵을 보유하지 못한 나라의 육군이 핵전쟁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핵강국인 구 소련의 스페츠나츠는 전시에는 후방교란 임무 외에도 적의 핵미사일기지 공격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공격수단이 특수부대원에 의한 핵기지습격 밖에 없는 통일한국군은 별 도리가 없었다.

  "다는 앙이야.  일부 점령하면 기걸 가디고 협박하자는 게지. 곧 작전이레 시작돼. 참관하가서?"

  "글쎄요. 저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같습니다만…"

  "기럼 알아서 하라우."

  "알겠습니다. 통일!"

  차 영진은 사병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작지만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컴퓨터와 화상통신용 스크린, 책상과 간단한 침구, 커피세트 등 필요한 것이 적당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차 영진은 커피를 마시며 창가를 보았다. 어둠 속 멀리 강건너에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다.

  강건너집이었다. 새터 유원지 북한강 건너에는 엠티 온 학생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파는 집이 아직도 있었다. 차 영진은 작은 배를 저어 뿌옇게 안개가 피어나는 강을 건너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크림과 설탕이 듬뿍 들어가 느끼한 맛이 나는 커피였지만, 늦가을의 정취가 너무 좋아 커피맛은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하고 같이 갔더라…’

  그는 아내를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그가 겪은 것들은 보통 때의 몇년치를 넘는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간이침대에 누워 리모컨으로 12CD Changer인 오디오를 틀었다. 아카펠라식으로 편곡한 ‘창가의 명상’ 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커피 한 잔,

  그리고 그대

  그대 날버린 꿈을 꿨소. 꿈을 꿨어요.

  그는 노랫가사와는 달리 바람의 꿈을 꾸었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바람, 생명력 넘치는 겨울 남해바다 거친 파도를 스치듯 부는 바람…

  1999. 11. 25 22:50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우루무치 동쪽 35km

  공격조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이 팀은 모두 14명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팀과 마찬가지로 공격조, 지원조, 및 기술조로 이루어졌는데, 팀장은 주파키스탄 대사관의 무관이며 정보사단 소속이기도 한, 대한민국 육군 중령 김 승종이 맡았다. 그는 이전에도 이 지역을 자주 방문한 적이 있어서 이 임무의 책임자로서 적격이었다. 조금 전에 위구르어를 했던 자도 이 사람이었다.

  김 중령이 모래언덕 위에서 망원경으로 3km 전방의 핵기지를 살폈다. 평지에 설치된 이 핵기지는 지상에 발사구와 차량출입구만 노출되어 있는 식으로 건설되었다.  주변에 별다른 경비시설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많은 경계의 눈빛과 전자감시망이 가득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거리는 약 3km나 되는데 가는 길에 몸을 숨길만한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잘못해서 지뢰밭에 갇힌 채 경비초소와 무장헬기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는다면?  핵기지에는 접근도 못해보고 전멸할 것이 뻔했다. 그는 다른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기어 내려갔다.

  "도보로… 위장복으로 갈아 입읍시다."

  대원들이 장비를 말에서 내리고 출발준비를 시작했다.  사막유목민의 복장을 벗고 적외선위장복으로 갈아 입었다.  레이더전파까지 흡수하는 검은색 재질에, 적외선이나 전파의 반사가 많은 직선을 피한 둥그런 디자인이었다.

  "보긴 뭘 보나~"

  유일한 여자대원인 이 은경 대원이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자 다들 잠시 긴장을 잊고 낄낄거렸다.

  "엉덩이…"

  인민군 정찰연대의 정 호근 대원이 이 대원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다.모두들 배를 잡고 웃으려는 순간 언덕에 대기하고 있던 경계조에서 쉿 하며 경고음을 발했다. 대원들이 전투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모래언덕 너머에 불빛이 보였다.

  "통상순찰입니다."

  "그렇소."

  망원경으로 순찰차를 감시하는 김 중령의 얼굴을 헤들라이트가 훑고 지나갔다. 그는 지도에 이 순찰차의 궤적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어느새 500미터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이쪽으로 온다는 거요. 말을 숨길 수가 없겠소."

  김 중령이 고개를 돌려 대원들을 살펴보니 인민군들은 이미 공격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모두 무성무기였다. 유목민에게서 산 말 20여필은 훈련이 잘 되었는지 재갈을 물리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서 있었다. 대원 한명이 말들을 모래바닥에 주저 앉혔다.

  "말 때문에 어차피 숨는다고 해도 들키게 됩니다. 칩시다! 최대한 거리를 단축하고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김 중령의 명령에 따라 각자 좋은 위치로 달려갔다.  거리는 200미터로 단축되었다.  정 호근 대원의 러시아제 VSS 9밀리 소음저격총이 목표를 따라 서서히 총구를 움직였다.  검은색의 두툼한 원통형의 총구와 개머리판에 뚫린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은 이 총이 멋보다는 기능을 중시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은경 대원의 석궁에는 예비화살 3개가 장전되어 있었다.  거리는 이미 60미터, 순찰차에 탄 중국군은 3명이었다.

  "쉿!"

  석궁이 먼저 발사되었다.  사륜구동차의 뒷좌석에 서 있던 기관총 사수의 목에 화살이 박히자,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그러나 다른 대원들의 총구는 아직 침묵을 지켰다. 순찰차는 계속 천천히 접근해 왔다.

  "쉭!"

  바람을 가르고 다시 석궁이 발사되었다.  첫발을 쏘고 나서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순찰대 지휘자는 관자놀이에 화살이 꽂힌 채 앞으로 쓰러졌다. 이제서야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운전병이 핸들을 급히 꺾었지만 즉시 정 호근 대원의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차는 모래밭 위에 서서히 멎었다. 대원 하나가 차로 뛰어갔다.

  잠시 긴장된 순간이 흐르고 순찰차에 접근한 대원이 소음권총으로 확인사살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몸에 바짝 대고 권총을 쏘자 어둠 속에서 시체가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대원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랑거리는 것으로 보아 시동 걸기도 만만치 않은 고물차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가 차를 몰고 왔다. 미국 크라이슬러사와의 합작회사인 베이징지프제작공사에서 제작한 XJ 체로키였다.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고 기관총을 거치하기 위해서인지 지프의 지붕은 제거되어 있었다.

  "오호~라. 미제차로구만. 젠장! 제국주의자들끼리 서로 돕자는겐가?"

  다른 대원들이 시체를 치우는 동안 이 은경 대원이 군화발로 뒷문을 냅다 차 지르자 두꺼운 철판이 쑥 들어갔다. 인민군 병사들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지프(Jeep)는 고유명사이며 상표명이다. 크라이슬러사의 지프사업본부, 또는 이와 합작한 공장에서 만든 사륜구동차만을 지프라고 한다.  체로키는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길쭉한 왜건형의 사륜구동차이다. 중국군은 이 차의 성능에 만족했는지 90년대 초반까지 이미 1만대 이상을 생산하여 일선에 배치했다.

  "이 차를 타고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까무잡잡한 피부라서 야간위장이 필요없을 것같은 이 은경 대원이 김 중령에게 묻자 김 중령이 주변을 살피며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오.  자, 타 봅시다~"

  14명의 대원들이 꾸역꾸역 XJ 체로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차는 의외로 튼튼했고 힘은 넘쳤다.  14명이나 태운 순찰차는 삐걱거리며 서서히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9. 11. 25  22:55  서울 안국동, 종로경찰서

  "야이 떼놈 새끼야~ 빨리 불어!"

  "난 정말 모른단 말입니다! 윽~~~"

  정보 2과의 김 중원 형사가 꿇어앉아 있던 피의자의 허벅지를 구둣발로 짓밟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너무 아픈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는 이미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으흐흑… 난 아직도 국적이 자유중국이오. 내가 왜 중공 편을 들겠습니, 으윽!"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차렸네? 대만이 중국에 점령됐으니까 이제 같은 나라잖아?"

  남자의 항변은 형사의 뭇매 때문에 이어지지 못했다.  쓰러진 남자를 구둣발로 자근자근 밟던 형사가 책상 뒤쪽에 있던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실과 헝겊으로 된 걸레부분을 제거하자 대걸레의 막대부분이 기다란 몽둥이가 되었다.  형사의 눈에 살기가 이는 것을 본 피투성이 남자가 공포에 질려 구석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사… 살려줘요…악!"

  "김 형사, 무슨 일이야?"

  배가 불룩한 계장이 조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비명소리가 아무래도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사람 하나 잡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 계장님."

  "이놈은 뭐야?"

  "이 자식 떼놈입니다."

  "그래?"

  경찰 입문 25년만에야 경위가 된  중년의 계장이 화교의 몰골을 보았다. 얼굴 곳곳에 피멍이 들어 말이 아니었으나, 차려입은 품새는 말쑥하니 잘 사는 모양이었다.화교가 계장에게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길을 보냈으나 냉정하게 외면했다.경위는 오늘만 벌써 3명의 화교를 족치고 있는 김 형사가 부럽다는 표정이었다.

  "수고해~"

  "예, 계장님. 이따가 뵙겠습니다."

  계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자 형사는 의자에 거꾸로 앉았다. 그는 몽둥이를 길게 잡고 바닥에 탁탁 두들기며 화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형사는 약간 조급해 졌다. 정보에 따르면 중국이 핵을 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밀항시킨 가족은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이제 한탕만 하고 뜨면 영원히 이 나라에는 볼 일이 없었다. 이 화교가 마지막 희생물이자 봉인 셈이다.

  "야 자식아~ 간첩혐의로 즉결총살 시키려다가 한국에 봉사하는 길을 열어주려고 너를 계도하고 있는 중이다, 임마.  나한테 감사할 줄 알아야지."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 자식이~ 내가 돈에 혹할 사람같아? 그래도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것같군. 그래, 좋다. 인간이 불쌍해 봐 주지."

  화교가 형사에게 몇번씩이나 굽신거렸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결과를 바라기에는 무리였다.

  "여기 전화있다. 마누라 불러서 가져 오라고 해. 아니, 밖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군. 네놈 재산목록은 내가 다 가지고 있어. 조금이라도 숨기려 했다간 넌 죽어. 알겠어?"

  화교의 얼굴에 몽둥이를 바싹 들이대며 위협하자 화교가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국공내전 당시 할아버지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 3대에 걸쳐 살아왔지만 어차피 이 나라는 남의 나라였다.  어릴 때부터 떼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서럽게, 서럽게 살아왔다.  한국인은 외국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폐쇄적인 나라였다. 다른 민족과 화합하며 살아본 역사가 없다는 것은 한국에 정착하려는 타민족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특히 피부색이 다른 인종은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혼이나 취직 등에서 자신이 수십년간 차별을 받아온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혼혈아들을 극도로 혐오했는데, 이는 혼혈아들의 잘못이 아닌, 동족끼리 피흘리며 싸우고 외국군까지 끌어들인 그들의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민족에 대한 포용력이 없는 한국인,  도저히 한국에서 살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지역이나 출신별로 차별하지 않는가? 게다가 외국 국적의 한국인에 대해 아첨과 동시에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 일본인들과 닮았을까?

  그는 모든 걸 훌훌 털고 다른 나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륙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자신은 젊으니 군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 군인으로서 한국에 돌아와서 근무한다면 이따위 형사들을 모조리 도륙낼 수 있다는 환상이 들었으나 애써 물리쳤다.  자신은 결코 이런 비인간적인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형사가 휴대형전화기를 코앞에 내밀었다.

  1999. 11. 25  23:0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대규모 함대가 한반도에 접근 중입니다! 북위32도 22분 동경 127도 50분! 제주도 동남방 150km 정도입니다."

  놀란 표정으로 단말기를 보고 있던 해군의 심 현식 중장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내일 아침에 긴급편성될 사단들의 전선배치에 대해 협의하던 참모들이 놀란 얼굴로 심 중장을 보았다.

  "중국에 아직도 대규모 함대가? 그쪽은 우리 함대가 없지 않소? 규모는 어느 정도요?"

  전선의 상황을 체크중이던 정 지수 대장이 묻자 심 중장이 계속 보고했다.  인민군 제복을 어색하게 걸쳐입은 짜르가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심 중장의 표정을 살폈다.

  "완벽한 전파관제를 하며 접근했습니다. 심지어 초계기도 없이 움직여서 발견이 늦었다고 합니다. 대형함만 16척 이상입니다. 항모전투단이 틀림없습니다!"

  "초계기에 선도레 없다믄 위성지원을 받는 미제 신속억제군일 겁네다. 항모 2척에 해병대 1개 려단일 가능성이레 크디요."

  박 정석 상장이 의견을 제시하자 참모들의 의구심이 풀렸다. 이런 대규모함대를 운영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미국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참모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미군이? 미군이 왜 우리나라로 옵니까?"

  "설마 상륙작전을 감행하지는 않을겁니다. 신경은 쓰이는군요."

  아무래도 미국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민군 박 정석 해군상장이 투덜거린 반면, 국군출신 참모들은 혹시나 미군이 한국을 돕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박 상장이 한마디 더 추가하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꿈 깨시라요. 핵 터디는거 구경하러 온기야요."

  "으… 핵."

  정 지수 대장이 치를 떨었다. 핵이라는 말 앞에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꼭 중국이나 미국함대라는 보장은 엄소. 더 자세히 확인해 보기요. 일본함대 위치도 파악해 보구… 아무래도 요즘 일본 국내동향이 수상하니끼니."

  이 차수가 투덜거리듯 명령하자 심 현식 중장이 마지못해 제 3함대를 호출하여 제주도 동남방에 위치한 소속미상함대의 확인을 지시했다. 그동안 이 종식차수는 약간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참모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기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일일이 전선상황을 확인하기 보다는 대충 추론하고 마는 식이었다.이 차수는 중국의 핵보다는 그런 것들이 더 걱정스러웠다.

  "현재 만주의 중국군 공군기지에 새로 배치된 전투기의 숫자입니다."

  이 호석 중장이 패널을 조작해 중앙스크린을 켰다. 중국 공군은 아직 숫적으로 통일한국 공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반도 북부를 작전반경에 둘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기지에 배치된 전투기의 숫자가  무려 600대 이상에 달했다. 오늘 밤의 작전에 심각한 차질을 빚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게다가 각 공군기지 부근에 대공방어망이 극도로 강화되어 공습하기도 어려워 보였다.이 중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기기를 조작하여 각 공군기지에 배치된 전투기의 유형과 제원을 잠깐 설명했다.  전혀 걱정스런 표정이 아니었다.

  "오늘은 상공이 조용했습니다. 내일도 침묵시키겠습니다."

  이 중장이 자신있게 공언하자 박 정석 상장이 의아한듯 이 중장을 보았다.

  "또 반마찰제라는 그런거 쓰갔다는 거디요? 어렵디 않갔소? 요격하래고 눈에 불을 혔을텐데…"

  "아, 이번엔 다른 겁니다. 오늘은 비행장만 못쓰게 만들었지만 내일은 전투기 자체를 고장낼 겁니다. 그 600여대의 전투기는 며칠간 고물되는 거죠."

  "며틸간? 파괴하는 거이 아이오?"

  "네, 우리 공군의 피해는 없을 겁니다. 직접 공습하지는 않으니까요. 전투기라는 복잡한 기계장치에 모래를 뿌리는… 뭐, 그런 겁니다."

  "신무기라도 되오?"

  "에그… 한참 전에 개발된 무깁니다. 만들기도 쉽죠. 인민군의 대포동 유도탄을 좀 빌렸습니다. 거기다 달아서 쏘는 거죠."

  1999. 11. 25  23:05  함경북도 혜산 제2고등중학교 제 2군 전선사령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도하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통일육군 제 2군 사령관 김 재호 대장은 진정한 군인이었다. 그는 전쟁이 격화되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남북한의 정규군과 예비군 혼성으로 통일육군 5개 군의 편성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북한정권과의 합의하에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남북한의 기존 군 편제를 해체하여  5개의 군을 편성했거나 편성할 예정이었다.  해군과 공군에 이어 이제 지상군도 거의 통합이 된 것이다. 아직은 말단 보병소대까지 국군과 인민군이 편성되어 같이 싸우게 된 것은 아니지만 대대단위에서의 혼합편성은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혼합편성된 부대가 많아져 통일육군이라는 명칭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고,통일육군 제 1기갑사단같은 경우는 바로 제 1기갑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 1군은 지금도 함경북도 나진-선봉 남서쪽 전선에서 중국군과 치열하게 교전 중인 동부전선사령부 예하의 부대를 중심으로, 여기에 추가투입된 부대와 피스의 국제의용병이 편성되었다.1군은 통일참모본부의 직할부대격이어서 이 종식 차수가 사령관을 겸임했지만 실제 지휘는 인민군출신의 장성이 하고 있었다.

  김 대장의 제 2군은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으로 긴급배치되었다.  김 대장이 관할할 예정인 또다른 부대인 5군은 현재 재편성 중이고, 3군은 서부전선과 후방일대의 경비임무에 투입되었다.6군은 내일부터 주로 일반예비군과 향토사단으로 편성될 예정이다.

  통일한국군이 계획하는 역습의 주체는 김 대장의 2군이 맡았다. 원래는 백두산을 우회하여 만주를 횡단,  두만강쪽에서 다시 한반도로 진입해 나진과 선봉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군의 배후를 기습, 제 1군과 함께 포위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만주를 점령하거나 북경을 공략할 준비도 갖추고 있었다. 현재 통일한국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전력이 이 2군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현재 통일한국군 제 2군은 백두산 서쪽인 혜산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인 그가 직접 맡았다. 전선의 총지휘를 계속 맡아달라는 합참의장 황보 대장의 명령은,  명령을 내린 황보 대장 자신이 생각해도 의미가 없었다. 각 전선에 대한 명령권은 현재 통일참모본부가 장악하고 있어서, 남북한의 군수뇌부는 사실상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  그래서 김 대장은 직접 전선사령관을 자원했고,  이곳에 나와 역사적일지도 모를 공격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기다란 탁자에는 참모들과 직속부대장, 지원부대장들이 공격준비에 대한 최종 점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입네다. 00시 정각에 5개 지점에서 3개 사단이 한 시간 내에 도하할 수 있습네다. 총 16개의 부교 및 가교레 가설될 예정입네다. 단, 어케된 일인디 오늘밤 아군 항공지원이레 뎐혀 없습…"

  "제 말씀은, 지금 당장이라도 도하가 가능하냐는 뜻입니다.  공군은 아마 오늘밤에 바쁠 것이오."

  김 대장이 허 대장의 말을 자르고 다시 물었다.

  "언제든 가능합네다."

  참모장인 인민군 출신의 허 석우 대장이 지도를 보며 보고했다. 겨울 갈수기에 압록강 상류의 강폭은 좁고 수심도 얕았다. 도강은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부교를 설치할 필요도 없이 단 한 대의 가교전차만으로도 병력과 장비를 도하시킬 수 있었다. 다만 압록강 건너에서 직면하게될 적의 저항이 어느 정도인가가 문제였다.  정보사단의 보고에 의하면 약 20km의 전선에 걸쳐  중국 인민해방군 1개 사단이 방어선을 전개하고 있다는데, 화력이 약한 수비사단이라 문제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쪽에 100여개 사단이 있는 판에 중국이라고 대규모 병력이 숨어있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인민해방군의 보조무력인 인민무장경찰의 존재는 더 부담이 갔다. 이들이 독립대대단위로 흩어져 만주 곳곳에서 2군의 전진을 방해할 지도 모를 판이었다.

  "교두보가 확보되믄 34개의 부교 혹은 가교레 더 설치됩네다. 1시간에 10개 사단이 도하할 수 있습네다. 강이 얕아설라무네 기갑병력은 바로 도강이 가능하니끼니 전혀 문제 없습네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이 발사할지도 모를 핵미사일이었다. 100여만이라는 엄청난 숫자는 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 뻔했다. 한국의 중국침략을 빌미로 중국이 핵을 사용치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또한, 듣기로는 정부가 중국으로부터 핵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정부가 먼저 항복을 선언할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이 작전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핵만 없으면…"

김 재호 대장은 뭔가 진한 아쉬움이 가슴에 남았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앞에 두고 보니 무인의 기개같은 것이 울컥 솟으며 목이 메었다. 광개토대제와 을지문덕, 대조영같은 인물들의 신화를 떠올렸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핵이라니…’

  "중국에 핵이 앙이 있다믄 만주레 우리 땅이디오."

  "우리는 침략을 하는 것이 아니오, 허 대장."

  "알고 있습네다, 사령관 동지!"

  허 대장은 김 대장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는 동원가능한 병력으로만 본다면 중국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북의 인민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남북간의 동란과 대치상태로 인해 대부분이 의무병역을 복무하여 별다른 훈련 없이도 바로 전선 투입이 가능하다. 남북한 공히 5백만씩,  단기간에 일천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도 조선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의 병력이 내전기간동안 증가해서 인민무장경찰까지 합하면 약 5백만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상 동원하기는 무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먼저, 병참이 따라주지 않는다. 개인화기에서부터 차량 등 이동수단, 동절기를 맞아 중요해진 군복 등을 단기간에 충당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지만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소집과 훈련, 이동 등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훈련이 되지 않은 민간인을 전선에 투입하는 멍청이는 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허 대장은 이 기회에 중국을 넘보는 것이 어떻냐는 생각이었고, 전쟁이 유리해지면서 상당수의 군장성들이 갖게 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 대장은 그런 장성들에게 관동군을 꿈꾸느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하지만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핵문제에 부닥치면 말이 달라진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동원가능병력은 이 순간에 있어서는 단지 골육상쟁을 위한 숫자놀음밖에 되지 않았다.  또다른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의미있는 숫자인 것이다.  이것이 남북한의 모든 직업군인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자동차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주로 후발대인 동원사단들에 배분했습니다. 약 절반의 병사가 면허증이 있으며, 또 그중 절반이 실제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우려했던 운전병 수급에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자동차는 개조가 다 끝난 상태이고 무기탑재도 끝났습니다."

  군수참모가 부동자세로 보고하자 김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발된 자동차를 배치한 부대가  대부분 예비군으로 구성된 동원사단이니 운전병이 모자랄 리는 없었다.  다만 5만대의 차량을 운행할 연료와 소모성 무기의 보급이 문제였다. 과연 전투는 사기, 전쟁은 병참이 문제였다.

  "경유는 보급에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전국적으로 휘발유 부족사태가 심각해서 이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징발된 사륜구동차의 연료는 두 가지이며, 휘발유차가 약 3분의 1을 점하고 있습니다. 원유가 더 들어와야 할텐데 아직 남지나해의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여 유조선들이 필리핀 동쪽해상으로 우회하고 있어, 상당한 시간이 더 소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 저녁에 유조선 한 척이 또 당했답니다."

  김 대장은 피스함대의 힘이 컸다는 생각을 했다.  피스함대가 붕괴되자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제 한반도가 봉쇄될 수도 있는 판이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중국의 항모전투단이 괴멸된 지금 대만에서 출격하는 중국전투기의 작전반경 밖으로 돌면 되는 것이다. 지금 중국해군에 대양에서 작전을 수행할만한 대형함정들은 모두 서해상에 몰려 있었다. 당분간은 중국에 의해 해상봉쇄를 당할 걱정이 없었다.

  "원유 비축분은 30일, 민수용 포함 45일입니다. 정권 바뀔 때마다 비축분을 60일로 늘린다고 말만하고는 아직도 이 모양입니다. 비축기지를 늘린만큼 석유소비량도 늘어났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45일분이라는 것도 평상시 기준이지 실제 전시상황이 발발하면 순식간에 거덜나 버립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유류를 앞으로 소비하면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김 대장이 정보사단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단말기를 통해 읽다가 옆에서 부관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부관은 학사장교 출신이지만 그의 말로는 말뚝 박았다고 했다.  겨울철의 만주벌판에 보병의 투입은 의미없다면서 사륜구동차의 대량투입을 제안한 젊은이였다. 기동성도 살리고 전투력을 올릴 뿐만 아니라 동상 등으로 인한 전투력소모를 막기 위한 좋은 방안이라 생각하여 김 대장은 부관의 조언에 따라 전국에 있는 지프형 차량의 징발을 건의했고,지금 이 시간에는 배분과 무기 탑재까지 거의 끝난 상태였다.그러나 이 차량들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해 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김 대장은 부관이 중위 때부터 휘하에 두었다.  군인으로서의 패기도 없고 게으르기까지 했으나 상식의 틀을 깨는 머리는 사줄만 했다. 군에 말뚝 박고 장군까지 되겠다는 놈이  겁도 없이 사사건건 자신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기 일쑤고,  사령관이 밤에 공식 일정이 있는데도 외박을 나가기까지 했다.  그래서 윤 대위 대신 당번병이 부관 역할을 할 때가 종종 있었고 김 대장은 그것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많았다.하지만 윤 대위는 일견 수긍이 가는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참모들은 감히 자신에게 대꾸도 못하기 때문에 이 젊은이의 용기와 두뇌를 사기로 한 것이다.

  "정유공장이 남아 있다는 거에 대해 니는 우째 생각하노?  우리 똑똑한 윤 민혁 대위님."

  한참 무게를 잡던 김 대장이  갑자기 투박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묻자 윤 대위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역시 중국은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산업시설을 이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령관님!  일본과 미국을 위협하고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려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이 젊은 육군대위는 별로 긴장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의 생각과 같았다. 하지만 중국이 이제 한반도 점령을 포기한만큼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즉, 미사일 공격이나 공습을 당할 우려도 있고,그렇게 되면 연료가 부족해 작전은 완전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김 대장의 걱정을 읽은 윤 대위가 추가 보고했다.

  "중국은 결코 정유공장을 폭격하지 못합니다. 항공모함이 모조리 박살난 지금, 항속거리가 따라주는 전투기를 보유치 못한 그들은 결코 정유공장을 폭격할 수 없습니다. 충남 대산지역은 공습할 수 있다지만 우리 대공망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지대지미사일은 사정이 짧고, 여러 수단에 의한 이의 요격이 가능합니다."

  윤 대위가 자신있게 대답하자 김 대장이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자신의 위치도 모르는 놈이다!

  "닐마는 정치뿐 아니라 공군에도 전문가가? 네 군대 와서 배왔나?"

  김 대장과 윤 대위는 참모총장과 부관으로 만난 작년부터 이미 앙숙 관계였다. 남에게 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은 사사건건 다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다툼을 두 사람이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입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잘났어~"

  김 대장이 윤 민혁 대위를 곁눈질로 보니, 그는 입을 오무린채 ‘그래요. 저 잘났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런 놈이 장군이 된다면… 으… 육군의 비극이며 휘하 장병들의 고통이고 동시에 성실한 납세자들의 불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척 말그래이~ 글고 이젠 전쟁이니 똑바로 해라카이.  니캉내캉 친구가?"

  윤 대위가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아저씨같은 친구 둔 적 없소’ 라고 투덜거리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김 대장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1999. 11. 25  22:10(북경표준시) 중국 북경 베이징판띠엔

  "시간이 거의 됐습니다. 공작은 어떻게 됐습니까?"

  총서기 리루이환이 연신 벽시계를 올려 보다가 정치국 상무위원 왕민강에게 물었다. 어물거리던 왕이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외사국(外事局)의 공작은 완전 실패였다.

  "연락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것들이…"

  왕민강은 한국의 시간끌기 작전에 당한 것같다는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자신의 공작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를 구해준 것은 제 2포병 사령 쏭윈펑 중장이었다. 왕민강이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끌지 말고 지금 발사합시다!"

  그러나 대국의 체면 때문인지 총서기는 주저하고 있었다.  이왕 깨어진 협상, 핵미사일 발사는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자정 전에는 발사하고 싶지 않았는데,  체면 문제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핵발사라는 두려운 결정을 늦추고 싶어서였다.

  "지금 결정해야 합니다. 미사일발사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먼저 카운트다운에 들어 가겠습니다."

  "벌써요? 아직 시간이 남았잖소?"

  "정확히 자정에 조선에 명중시켜야죠. 자정에 공격한다고 했지, 자정에 발사한다고 하진 않았잖습니까?"

  총서기는 쏭 중장을 보며, 어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뜻밖에도 확대군사위원회에 참가한 다수의 정치국원들이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미 결정난 마당에 빨리 끝장을 보자는 심산인 것이다.

  "카운트다운 도중에 취소할 수도 있겠죠?"

  "물론입니다. 동지!"

  총서기가 다짐을 받자 쏭 중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주장대로 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조선은 100년 전처럼 다시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하시오."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총서기 동지!"

  제 2포병 사령원 쏭윈펑 중장이 경례를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3개 기지에 동시 연결해!"

  쏭 중장이 자신의 탁자 앞에 있는 단말기를 세우고 자판을 몇번 두들기며 암호명령문을 찾았다. 매일, 그리고 시간별로 달라지는 암호체계에서 암호를 외운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쏭 중장이다. 목표좌표는 이미 입력했겠지? 2300시에 목표에 명중할 수 있게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다. 발사가 아니라 명중이야! 계산 잘 하도록. 특별한 명령 없으면 발사해! 그래, 지금 말 하잖아. 첫번째 암호는 홍치(紅旗), 두번째 암호는 윈깡스쿠(雲崗石窟)다. 각 기지에서는 아까 지령한 대로 지정된 목표에 지정된 유도탄을 발사할 것. 이상!"

  드디어 위험한 장난감으로 논다는 기분이 들자 상무위원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총서기가 아무래도 불편한듯 자꾸 몸을 뒤척이다가 수행원을 불렀다.

  "남조선 총통과 연결하시오."

  1999. 11. 25  22:15(북경표준시)  중국 상하이, 총밍따오

  총밍따오의 외진 산속 기지에 온통 비상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이 기지의 지하 사일로에서 20킬로톤급 핵미사일 둥휑(DF, 東風)-2호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이다. 기지는 그동안의 등화관제에서 벗어나 모든 전등을 대낮같이 밝히며 엄중한 경계태세에 돌입했다.그동안 숨어 있던 경비병력과, 기지 내부에 있던 병력이 밖으로 나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외부의 공격에 대비했다.

  "동지들! 들켰나 봅네다."

  "아니오. 저건 발사 직전이란 뜻이오. 큰일이외다."

  "진정하시오. 아직은 시간이 있어요!"

  리더인 이 우철 과장이 대원들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신 승주 대위는 속으로 ‘좆됐다’라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조국이 핵미사일에 얻어맞게 생긴 것이다. 서울에 있는 내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작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할 조국은? 민족은? 답은 ‘젠장!’ 이었다.

  "발사 전에 우리가 먼저 칩시다!"

  "아니되오. 다른 기지에서도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아니되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중앙의 지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했다.  남북한 정부가 중국에 항복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공격을 늦춘 이유였다.

  신 승주가 인민군 동료인 이 상사를 보니 그는 이런 소란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정좌한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솟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이건 착각이었을까?  눈은 오지 않았지만 이곳은 현재 영하의 기온이었다.  차가운 북서대륙풍이 얕은 바다를 넘고도 조금도 위력이 약해지지 않았다.  신 승주는 추위 때문인지, 조국의 운명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투 전에 느끼는 공포 때문인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

  1999. 11. 25 22:20(북경표준시) 중국 신장웨이우얼, 우루무치 동쪽 35km

  김 중령은 사륜구동차의 헤들라이트를 끈 채 서서히 핵기지로 접근했다. 기지 주변에 가득 깔린 지뢰밭을 걱정했는데 순찰차가 나오는 코스를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이제 지뢰 걱정은 한시름 놓아도 되었다. 아무래도 순찰시간이 정해져 있을 것이므로 순찰차를 몰고 기지로 직접 접근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지 1km 정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의 초소를 점령하여 다시 도보로 기지에 접근할 작정이었다. XJ 체로키는 14명이나 되는 승객을 가득 태우고 사막 위를 천천히 굴러갔다.

  "이상합네다. 초소레 없습네다."

  정 호근 대원이 적외선야시경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서쪽 하늘에 걸린 반달이 사막의 어둠을 어슴프레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어디서건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요한 핵기지의 경비가 이정도일 수는 없는데… 대원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피식~"

  돌발음에 놀란 대원들이 오른쪽을 보니 어둠 속에서 시뻘건 것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RPG다! 피해욧!"

  이 은경 대원이 비명을 지르자 놀란 김 중령이 잽싸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사륜구동차 바로 앞에 섬광이 번쩍이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음이 갑작스럽게 고요한 사막의 밤을 울렸다.

  "그쪽에 적이레 없시요!"

  야시경으로 살피던 정 대원이 외쳤으나, 화끈한 이 은경 대원은 포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K-2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대원들의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또 옵니다! 이번엔 11시 방향!"

  "박 소좌님이레 당했시요. 7시 방향에서도 날아옵네다!"

  김 중령이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적은 보이지 않는데 포탄만 날아오는 것이다. 그의 머리에는 의심이 가는 무기의 이름이 떠올랐다. 가장 왼쪽에 탑승했던 공격조의 조장 박 소좌는 머리와 등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차가 돌뿌리에 걸려 크게 튀다가 왼쪽으로 급선회했다.

  "퍼펑!"

  사륜구동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동시에 포탄이 작렬했다. 대원 3명이 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체로키가 급정차했다.

  "이건 지뢰야! 하차하시오!"

  대원들이 서둘러 하차하며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정 호근 대원이 박 소좌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려다 포기했다. 조금 전에 절명한 것이다. 이 은경 대원이 다른 대원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 시뻘건 불빛이 날아와 사륜구동차를 산산조각냈다.

  "조장 동지! 날아다니는데 뎌게 어케 지룁네까? 길고 되놈들이레 여길 디나올 때는 와 작동하디 않았습네까?"

  정 호근 대원이 묻자 김 중령이 K-1 기관단총을 점검하며 투덜거렸다.

  "XM-93이라고 광역지뢰의 일종입니다.  미국에서 최근 개발한 날아다니는 지뢰요.적외선 감지장치와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어서 목표를 탐지, 분류, 추적하지요. 그건 그렇고 여길 어떻게 뚫고 나간담?"

  XM시리즈같은 광역지뢰(WAM : Wide Area Mine)는 원격조정이 가능한 지뢰이다.  중국 순찰대가 사륜구동차를 타고 나왔을 때는 작동하지 않다가,  돌아올 시간 전에 침투조가 지프를 타고 왔기 때문에 공격당한 것이다. 이 기지의 경비상태를 보고한 현지요원은 이 지역에서 중국군이 순찰하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이곳이 지뢰지대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XM-93은 미국 텍스트론사가 개발했고, 탐지 및 사정거리는 약 100미터이다. 보통은 전차, 장륜차 및 대형트럭을 목표로 하지만 센서를 예민하게 조정할 경우 사륜구동차같은 작은 목표도 공격할 수 있다. 텍스트론사는 대(對)헬기지뢰인 AHM까지 개발한, 상상력이 풍부한 무기제조 회사이다.

  "드드드드~~"

  "웃!"

  김 중령이 고개를 들어 적 기관총의 위치를 파악했다. 좌우에 한개씩, 거리는 약 600미터.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움직이기에는 위험했다. 사방에 돌 파편이 튀었다. 대원 한사람이 유탄에 맞았는지 엎드려 있는 자세가 이상했다. 김 중령이 그 대원을 흔들어 보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기관총을 제압하시오!"

  "알갔습네다!"

  이미 사격준비를 끝낸 정 호근 대원의 대답과 동시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다시 한발. 오른쪽의 기관총좌가 침묵했다. 다시 몇발을 쏘자 왼쪽 기관총도 사격을 멈췄다.

  "적 헬기 3대, 전차와 장갑차량 접근 중… 보병 다수!"

  야시경을 든 김 중령의 손이 떨렸다. 지하핵기지의 차량출입구에서는 각종 전투차량과 보병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김 중령은 적의 공격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후퇴하시오."

  대원 한 명이 SA-7 그레일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헬기에서 불꽃이 연달아 피어났다. 헬기가 상공에서 공중폭발하고, 잠시 후 헬기에서 발사한 로켓탄이 주변 여기저기서 폭발했다. 폭음이 울리며 섬광이 대원들의 엎드린 모습을 환하게 비췄다. 대원 두 명이 하늘을 향해 눕고 한명은 신음을 하며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앙이되오! 조국이 위험합네다. 공격해야 합네다!"

  정 호근 대원과 이 은경 대원이 어둠 속에서 김 중령을 노려 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김 중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벽에 2차 공격을 시도하겠소. 자, 서두르시오."

  그레일미사일이 다시 발사되자 선풍 25호 헬기들이 플래어를 터뜨리며 꼬리를 보이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미사일이 접근하자 플래어의 숫자가 급증했다.  김 중령은 후퇴준비를 하면서 미사일이 빗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구식 미사일은 목표를 정확히 잡아 선풍-25 헬기 한 대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불붙은 파편이 지상으로 낙하하며 유성의 비를 뿌렸다.  놀란 중국군이 어물거리는 사이에 침투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에는 14명의 인원이었는데 지금은 중상자 1명 포함 6명만이 남았다. 인민군 정찰연대 소속의 중상자는 몰핀을 주사했지만 고통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정 대원이 그를 들쳐 업고 뛰는 도중에 비명이 계속되었다.

  "동무! 제발 날 내버려 두기요. 버리고 가라우야!"

  부상당한 대원이 울부짖자 정 대원이 달리다 말고 우뚝 섰다.

  "안돼요!"

  무서운 것을 상상한 이 대원이 제지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정 대원이 부상자를 바닥에 내려 놓고 대검을 뽑아 동료의 목에 대었다. 부상당한 대원이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동무. 고맙수다레."

  "난중에 만납세다."

  고기 써는 듯한 소리가 섬뜩하게 들리고 나서,  그 부상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 대원이 고개를 돌렸다. 정 대원이 죽은 동료의 시신에서 장비와 영국제 XL-70E3 소총을 챙기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난 곳을 62식 경전차의 85밀리 포와 W-523식 장갑차의 12.7밀리 기총이 휩쓸었다.

  신중하게 접근한 중국 장갑차들이 모래언덕 뒤에 도착해서 발견한 것은 3구의 중국군 시체 뿐이었다.

  1999. 11. 25  23:25  서울 국방부 지하벙커

  [시간이 되었습니다. 작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지하벙커 왼쪽의 화면에는 화상통신을 통해서 대전 정보사단에 있는 양 석민 중장이 음울한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재촉을 했다. 대통령은 이쪽을 쳐다 보지도 않고 안기부장과 귓속말로 뭐라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이 화급한 상황에 무슨 일인가? 안기부장이 또 꽁수를 부리는게 틀림없다는 생각인지, 양 중장은 상당히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양 석민은 지 효섭 안기부장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원래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던 3군 사령부의 헌병장교였던 그는,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키자 신군부에 가담하여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했다. 그가 안기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내정치 및 보안업무를 맡은 것으로 보아 결코 떳떳치는 못하리라는 판단이었다.

  "아, 양 장군! 잠깐 기다리시오. 중국 총서기와 화상통신이 연결되었소."

  양 석민이 국방부 지하벙커의 정면, 그의 시선에서는 왼쪽 끝에 중국인들이 나온 모습이 보였으나 비스듬하기 때문에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양 중장이 지시하자 시설담당 장교가 국방부와 중국과의 통신회선을 릴레이 전송받아 양 중장도 그들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

  "주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루이환 총서기는 거만한 태도로 대통령이 먼저 인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했다. 탁자 주변에 앉은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고위급 장성들도 이쪽을 비웃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 안녕하셨습니까?]

  비서실 소속인 젊은 통역관은 총통을 대통령으로 통역했다. 중국측에 한국어 통역이 없기 때문에, 통역관은 혼자서 두 사람의 말을 한국어와 중국어로 각각 통역해야 하는 고역을 치렀다.

  "국지전에서 선제 핵공격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통령은 넌지시 다른 핵강국의 존재를 환기시켰다. 대륙간탄도탄의 보유 숫자가 적은 중국은 결코 미국이나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감히 끼어들지 못할거라는 판단을 내렸소. 저번에 귀국이 고용한 용병부대를 일부러 핵공격한 것은, 이 상황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었소. 그 누구도 우리의 의지를 막지 못할 것이오. 제 살길 찾기 바쁠테니까. 그리고 한국을 시기하는 국가들이 많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단 말이오.]

  "…"

  [한가지 가르쳐 드리지요. 서울에도 핵미사일 1기가 조준중이오. 서울은 이제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래도 버티시겠소? 시간이 없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지 오래란 말이오. 그쪽 시간으로 자정 정각에 서울은 잿더미가 될 것이오. 이래도 항복하지 않겠소?]

  대통령과 양 중장이 깜짝 놀랐다. 발사예상시간이 빗나난 것이다! 그렇면 작전은? 대통령이 양 중장이 나와 있는 화면을 보며 눈짓으로 신호했다.

  "민간인을 몰살시키려 하다니! 그러고도 당신이 일국의 지도자라 할 수 있소?"

  [현대전은 총력전이오. 그리고... 후후~ 핵은 강대국의 정치적 무기라고들 하지요. 사용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내가 그것을 사용해 보이겠소.  자, 어떻소? 겨우 몇십 평방킬로미터의 땅덩어리 때문에 국민을 희생시키겠소?]

  "적국의 침략을 받고 항복하거나 양보한다는 것은 독립국가의 수치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겠소."

  1999. 11. 25  23:30  대전, 정보사단

  "구 소령, 김 소령! 빨리 공격명령 전송하고 다운시켜!"

  양 중장이 대통령에게서 신호를 받자마자 며칠을 준비한 작전을 한마디로 응축하여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의 묵시적인 명령은 통일참모본부에도 전달되어, 대기하고 있던  참모들이 양 중장의 신호에 맞춰 여기저기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해커 구 성회 소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앉아 있는 컨솔 위의 자판 엔터 키를 눌렀다. 김 준태 소령은 미리 준비된 명령문을 위성통신으로 20여개의 침투조에 동시 전송했다.  이 두 사람을 포함한 젊은 컴퓨터 도사들이 며칠 밤을 새며 완성한 결과가 드디어 실행에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1999. 11. 25  23:32  서울, 국방부 지하벙커

  "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위협에 굴복해 영토를 뺏길 수는 없습니다."

  [위협이라고요?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더니... 쯧쯧. 그리고 우리는 강탈하는 것이 아니고 교환하자는 것이오. 오해는 마시오. 게다가 그쪽 나진, 선봉 지방은 조선초까지는 관외(關外)의 부속영토였소. 즉, 지금은 한족으로 동화된 만주족의 영토란 말이오.]

  리루이환 총서기는 강하게 협박하려다가, 한국이 이 영상을 녹화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등 정치선전에 이용할까봐 한 발 물러섰다.  ㄲ와이, 즉 관외라면 리아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롱지앙(黑龍江)의 동북 3성(東北三省)을 뜻한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귀국은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보유했던 영토를 돌려줄 겁니까? 당장 미사일 발사준비를 중지시키시오. 그리고 귀국이 우리 영토를 침공하여  우리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배상해 주십시요."

  [쯧쯧... 젊은 분이 고집은... 그 고집 때문에 각하와 국민들이 피를 보게 될 것이오.]

  "한국이 최근 게놈 프로젝트(Genom  Project)에 참여하여 인종별 유전자 차이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진행시켰다는 사실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중국인만을 말살시키는 인종특화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이를 개발하지 않았소.  핵도 비인도적인 무기이니 사용을 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핵공격을 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그 연구에 관계된 자들을 모조리 중국으로 압송하겠소.]

  총서기는 결국 영토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한국이 그동안 연구했던 실적까지…

  "지금도 총서기나 중국 인민들도 결코 안전하지는 않을겁니다. 재고해 주시죠."

   [서울에서 북경에 있는 저를 위협하시는 겝니까?]

  총서기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주변 인물들은 가소롭다는듯 껄껄대고 있었다.

  "총서기께서는 북경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후훗~ 보복이라도 하겠다는게요? 난 여기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소.  치졸한 저격에 숨져간 동지들이 지하에서 각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저야 그분들과 친하지도 않은데요. 총서기께서 먼저 가십시오. 친구분들께서 총서기를 반기실 겁니다."

  [푸하하~]

  대통령은 고개를 돌려 오른쪽 화면에 비친 북한의 지도부를 살펴 보았다. 최 광 원수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통령은 김 일성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젖먹이였을 때 아버지가 국민방위군에 입대했는데, 부패한 국군장교들 때문에 아버지는 굶어 죽고 말았다. 나이가 들어 이 사실을 알게된 대통령은 김 일성과 이 승만 모두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94년에 김 일성이 죽자 그는 뛸듯이 기뻐했다.  더 빨리 죽지 않은 것이, 아니면 국민들에게 맞아 죽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같이 합심해서 중국의 침략에 맞서고 있는 요즘도  TV뉴스에 나오는 북한 인민군 군관들을 볼 때마다 공연히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최원수가 평생 흠모하던 김 일성에 이어 그의 아들인 김 정일까지 잃은 최 광 원수의 분노는 어떤 것일까?  그가 보는 앞에서 중국의 주석이 죽는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홍 대통령은 궁금했다. 화면 저쪽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국가주석 겸 총서기와 정치국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홍 대통령을 실컷 비웃던 총서기가 갑자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며 몸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내려갔다. 정치국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총서기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멍청히 보고 있었다.  총서기가 완전히 쓰러지고 나서야 화면 저쪽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총서기 좌우에 도열해 있던 고급장교들이 총서기를 부축하려다가 그를 바닥에 다시 눕혔다. 중국 군인들의 군화발 사이로 보이는 바닥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군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총알이 날아 들어온 창문을 보았으나,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 한 사람이 화면 쪽으로 다가왔다.

  [조선이 또 치사하게 암살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소!]

  당당한 체구의 중국 장군이 화면 이쪽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분노에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흉칙해 보였다. 대통령의 기억으로 그 장군이 단 계급장은 그가 분명 인민해방군의 중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대통령은 중국 지도부가 북한 주석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이 놀라운 상황에서 통역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통역했다.  그 전에 이미 안기부장이 귓속말로 그가 전략미사일군 사령관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제 2포병 사령 쏭윈펑 중장이다.  핵미사일 3발이 이미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곧 발사된다! 이제 결코 발사가 중단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서울과 평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조그만 땅덩어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건 당신들 책임이다.]

  대통령은 통역을 들으며, 중국말은 의미전달에 유용한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길었다. 그리고 중국말에 사성이 있어 듣기에 아름답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과장같았다.  전화 수화기를 들던 정치국원 한명이 저격당하고, 동시에 회의실로 뛰어 들어오던 무장경비병 2명도 사살당했다. 정치국원과 장군들이 발이 얼어 붙은채 서 있었다.

  "귀하께서는 조만간 있을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로군요. 미리 심판을 내리겠소. 조금 이따가 만납시다."

  대통령이 안기부장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쏭윈펑 중장이 놀라며 피하려다가 다시 눈을 부릅뜨며 똑바로 이쪽을 보며 섰다.적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죽겠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의 머리가 터지며 피와 뇌수가 튀었다.  머리 윗부분을 잃은 쏭 중장이 맥없이 쓰러졌다.

  학살은 북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안기부장의 목표지시에 맞춰 중국 공산당과 군부의 최고 지도자들이 하나씩 저격당했다. 방탄유리와 두꺼운 커튼을 뚫고 날아든 탄환이 고위장성들과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연거푸 쓰러뜨렸다. 탁자에 정좌하고 앉아 있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숨을 곳을 찾아 도망다니다가 총에 맞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단발에 절명했다.  안기부장이 바삐 목표의 위치를 계속 불러대고 화면 저쪽에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중앙화면 건너편에서는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통령이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최 광 원수와 인민군 고위 장성들은 굳어진 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최 원수가 대통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방위본부장은 대기하고 있소?"

  국무위원들이 말만으로 중국의 고위지도자들을 사살한 안기부장의 마법을 넋을 잃고 구경만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습니다, 각하!"

  내무장관이 보고하자  대통령이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경보를 내리시오… 핵미사일 경보겠죠."

  "…예… 각하…"

  "양 중장은 이 상황을 다 보았겠죠?"

  대전의 정보사단에서 화상통신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양 석민 중장은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듯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예! 각하!]

  "작전 장마, 실행명령은 내렸소?"

  [전달했습니다, 각하.]

  "이제 우리는 기다릴 뿐이오. 다만, 투입이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되오."

  [..., 그렇습니다. 각하.]

  "미사일 3기가 한반도를 향해 발사준비가 된 모양이요. 그것들을 요격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소?"

  [..., 죄송하지만... 20퍼센트 미만입니다.]

  "허허…"

  국무위원들의 얼굴이 파래졌다.  이제 서울은 불벼락 세례를 거의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준비된 상황에서 그정도라. 그 20퍼센트에 일천만 서울시민의 생명이 달렸다니, 기가 막히군요. 하긴 10퍼센트에서 두배나 요격확률이 올라갔으니 기뻐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각하.]

  "총리는 도착하셨소?"

  홍 지영 대통령이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제대로 되는 것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벌써 한참 전에 떠난 총리가 아직도 대전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락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도착하시지 못했습니다.]

  "네… 통신은 계속 연결하고, 일 보도록 하시오."

  [예... 통일!]

  양 중장이 엄숙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홍 대통령은 몇년 전 국립묘지에서 월남전 참전용사가 동료의 묘비에 경례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양 중장의 거수경례는 그 참전용사의 눈빛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끈끈한 동지애, 죽은 동료에 대한 회한 등이 함축된 경례였다. 대통령이 목례로 받자 양 중장이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돌아서는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잠시 후 서울과 평양에는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시민들이 지하방공호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촌 주민들은 아파트건물이 붕괴할까봐 지하로 대피하는 것을 꺼리고 대부분이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지하방공호로 몰려갔다.  방공호가 만원이 되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밖에서 철문을 두들기며 절규했다.

  도로에는 승용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며 클랙슨을 울려 댔다. 곳곳에 접촉사고가 일어났으나 운전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신호등도 무시하고 마구 달렸다. 도로에 차량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승용차들은 마치 카레이스라도 하듯 질주했다. 일부는 집으로, 일부는 시외로 나가는 외곽도로를 향하는 승용차들이었다. 서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1999. 11. 25  22:35(북경표준시)  베이징, 티엔안먼(天安門)

  "젠장! 여기서 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미친놈은 없겠지."

  영어로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 중국인 2세는 창문을 통해 광장을 내려다 보았다.  국경절마다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동양 최대의 광장에는 지금 비상등을 켠 군용트럭들이 사방에서 몰려들며 천안문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가 선두의 트럭 운전석을 향해 한발을 쏘았다.  트럭이 급회전하더니 돌난간에 충돌하며 정지했다. 다른 트럭들이 급정지를 하자 보병들이 트럭 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 광장 중앙의 인민영웅 기념탑 쪽에는 벌써 전차와 장갑차들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스타프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이 저격수가 미니미 경기관총을 몰려드는 중국군을 향해 연사하기 시작했다.  유서깊은 천안문 광장에 기관총 소리가 메아리쳤다.  선두의 중국군 4~5명이 쓰러지자 중국군들은 극도로 조심하며 접근했다.  장애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유리했으나 그를 잡으러 오는 병사들은 너무 많았다.

  "그냥 밀어 붙여! 돌격하란 말야!"

  호위국 소속의 군관 한명이 허공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미 정치국원들은 몰살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범인을 잡아봐야 그의 정치생명, 더 중요한 군인생명은 끝장났다. 어쩌면 숙청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군인정신이었다.

  병사들은 광장 곳곳에 엎드려서 천안문을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천안문 뒤쪽에서도 다른 병력이 접근하고 있으니 잡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생포해서 정치적 선전을 노릴 수도 있었다.

  "나를 따르라! 돌격!"

  앞장서서 뛰던 군관이 갑자기 픽 쓰러졌다. 병사들이 다시 엎드렸다.

  구스타프는 2층에서 황급히 뛰어 내려왔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각종 국경절에 천안문광장에서 펼쳐지는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는 1층 스탠드를 지나 어두컴컴한 뒤쪽으로 뛰었다. 총소리가 그를 따랐다.

  천안문 뒤쪽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공인문화궁(工人文化宮)과 중산공원(中山公園)의 사잇길로 경비병들이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스타프는  그들이 고궁박물관의 경비병이라 직감했다.  중국병사들이 구스타프를 발견하자 그가 먼저 쏘기 시작했다. 두세명이 쓰러졌다. 그는 중국군들이 응사하기 전에 계단 오른쪽으로 뛰어 내렸다.  거의 3층 건물 높이였지만 다행히 다리가 부러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공인문화궁의 담에 미리 준비된 밧줄을 타고 벽을 올랐다. 그가 밧줄을 올리고 나자마자 경비병들이 밑으로 우르르 뛰어가고 있었다.

  1999. 11. 25  23:37  함경북도 혜산

  "작전개시! 공격이다!"

  김 재호 대장이 각 예하군단과 연결되는 통신망의 스위치를 넣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먼저, 은폐해 있던 가교전차들이 말라붙은 강을 향하고 K-200 보병전투차들이 강을 건넜다. 도하지점에는 이미 제 3특공여단 소속 부대원들이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반쯤 덮고있던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가 각종 차량의 엔진소리와 함께  묘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구름에 달이 가린 캄캄한 압록강변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인간과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황판을 보고 있는 김 대장의 뒤에는 참모들이 도열해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통신병들과 작전과 소속 위관급 장교들 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김 대장이 부하들을 격려했다.

  "최대의 적은 시간이다. 24시간 내에 두만강에 도달한다. 돌격!"

  제 1기갑사단과 815기계화군단, 제 1해병사단이 선두를 이루었다. 그들 뒤로는 아직도 100여개의 사단병력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9. 11. 25  23:40  평안남도 순안비행장

  "드디어 출동입니다!"

  김 종구 중위가 활주로 옆 주기장에 대기중인  기체에 올라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다시는 살아서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비장함이 표정에 떠올랐다.  황 중령이 다른 전투기들이 발진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이른바 황 중령식 커피라는, 초이스 커피 한 스푼에 설탕 네 스푼, 그 위에 제주밀감 한조각을 띄운 국적없는 커피블렌딩이었다.

  "김 중위, 박치기는 하지 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줘."

  "하하~ 당연하죠. 제가 죽으면 배아파서 어떡해요. 제가 귀신이 되서라도 황 중령님 취미생활을 방해라도 할까봐서 그러세요?"

  "크… 아냐. 살아 돌아오면 내 기술을 모두 전수해 주지."

  "황 중령님의 기술요? 와~ 꼭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

  "제 걱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륙준비를 마친 김 종구 중위가 정색을 하며 황 중령에게 말했다. 뜻밖에 김 중위가 진지한 것을 본 황 중령이 당황했다.

  "순진하기는~ 난 선영이가 걱정되서 하는 소리야. 잘 데려와야 하네. 내 애인이기도 하니까."

  "윽…….. 네."

  김 중위가 전투기의 캐노피를 닫으며 황 중령과 정비사들에게 경례했다. 황 중령이 씁쓸한듯 답례했다.  전투기의 브레이크가 해제되고 천천히 활주로쪽으로 이동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김 중위의 F-16이 약간 노면이 고르지 못한 활주로에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이번 임무를 맡은 전투기들이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이륙하여 별이 되었다. 김 중위의 차례가 되자 160노트의 속도로 가속하며 상승각 15도 정도로 하늘로 떠올랐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전투기들이 고도 6000피트에서 편대를 이루자 남쪽으로 기수를 향하며 가속했다.  5분이 안되어 여섯대로 편성된 요격편대는 평양상공에서 선회중이던 미그-29 편대와 교대하며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과 똑같은 무기를 탑재한 전투기들이 수원비행장에서도 이륙했다.

  1999. 11. 25  22:42(북경표준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아커쑤

  광활한 중국대륙의 서쪽 끝,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커쑤(阿克蘇), 克蘇라는 이름답게 70년대의 숙적인 구 소련에 대응할 군사도시로서 성장한 이 위구르족의 도시 근교에 건설된 지하핵기지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습 외에 이렇게 실제상황에 돌입한 것은 기지건설 이래 처음이었다.경비병력이 탑승한 전차와 장갑차들이 사방으로 전개하여 철통같은 경계망을 펼쳤다.

  지하에는 발사관제실이 있었고 지금 기지사령원이 초조하게 북경과의 통신재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신병이 고개를 저었다.

  "본부와 도저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직통전화뿐만 아니라 모든 유선통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기지사령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에도 우루무치 기지에서 침투한 적을 격퇴했다는 통보를 받지 않았던가? 왜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최종 발사명령을 받을 수 없어!"

  "사령원 동지! 무선으로 명령수신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잠자코 서 있던 부사령이 조언했으나 사령관의 화만 돋궜다.

  "미쳤어? 기지 위치가 노출될 우려가 있으니 무선은 절대 안돼! 우리 기지의 임무는 소비에트를 경계하는거야!"

  "지금 기지는 고립되었습니다. 근처의 다른 군부대에도 연락이 안됩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령원 동지!"

  통신군관의 보고에 이어 미사일관제사가 사령관의 결단을 재촉했다. 시간은 이미 마이너스 3초를 넘고 있었다. 사령원은 이제 발사를 해도, 안해도 명령을 위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명령은 수행하고 볼 일이었다.  기지가 생긴 이래 최초로 실제 핵미사일 발사를 하게 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는 스스로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젠장, 발사해! 나도 모르겠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유도탄기지의 지상으로 노출된  사일로가 자동으로 열리며 기계장치에 의해 주변에 있던 위장막이 제거되자,  거대한 미사일이 하늘로 솟구쳤다. 중국이 개발한 최초의 대륙간탄도탄인 동풍 4호(CSS-3)가 발사된 것이다. 액체 2단 추진방식인 이 미사일은 3메가톤급의 위력뿐 아니라 크기에서도 엄청났다. 물론 35미터짜리 러시아제 SS-18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25미터가 넘는 괴물이었다. SS-18 같은 MIRV가 아닌 탄두 하나짜리이면서도 이렇게 큰 것은 중국의 과학력이 뒤떨어진다는 증거였지만,  그래도 당당히 대륙간탄도탄의 반열에 드는 놈이었다.

  핵미사일은 꼬리에서 시뻘건 불을 뿜으며 발사한지 1분 30초만에 기지의 시계를 벗어나 대기권을 탈출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바위언덕에서 김 중령과 다른 요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1999. 11. 25  13:45(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우라질! 드디어 발사되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합참의장이 보고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은 전면의 대형화면에서 움직이는 화살표를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NSA(국가안전보장회의) 구성원들은 경악을 넘어 분노하고 있었다. DIA(국방정보국)가 한국과 중국의 움직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한 즉시 긴급소집된 NSA에서는 핵전쟁에 대비하여 최고비상령을 발동할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때 대륙간탄도탄의 발사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한 발 뿐이오?"

  대통령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묻자 합참의장이 약간은 미심쩍은 눈치로 보고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더 발사될 가능성이 큽니다."

  "목표는 어디요? 어떤 종류고?"

  "아직 미사일이 최고점에 도달하지 않아서 확실치 않습니다만, 방위로 보건대 한반도 중심부입니다.  서울 약간 북쪽인 것같습니다.  탄도탄이라면 메가톤급이 틀림없습니다."

  "서울은 아니다? 평양도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있죠?"

  "판문점 북쪽, 개성이라는 곳에 이번 전쟁에서 지휘권을 확보한 통일 한국군측 최고 사령부가 있습니다. 중국도 위치를 파악한 모양입니다."

  CIA의 매퀄리스 국장이 나서서 한국의 통일참모본부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두툼한 안경을 쓴 영국신사같은 모습의 매퀄리스가 이 기구의 구성, 지금까지의 작전 등에 대해 보고하자 대통령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국이 역공을 시작한다고요? 한국에 핵이 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오? 없다면 이렇게 무모할 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국정부가 보여준 핵미사일 등은 가짜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블러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매퀄리스는 허세를 부린다는 뜻의 단어 bluff를 사용했는데, 포카게임에서 낮은 끗발의 카드로 높은 끗발인 체한다는 뜻도 bluff이다. 허세는 정치외교의 기본이 아닌가?  매퀄리스는 이 회의가 끝나면 동료들과 포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중국 국가주석에게서 전화가 안오는거지?"

  대통령은 약간 초조했다.  핵미사일을 발사했으면 당연히 핫라인으로 통고해야 원칙인데 아직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한국에 핵이 없다는 사실에  대통령이 안도와 동시에 한국인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지켜본 국장이 계속 보고했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왜 그리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핵기지에 소수의 침투팀을 투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팀도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정부가 그들만 믿고 있다면 대량학살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국에 항복하거나 점령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중국을 내버려 둘 경우에는 핵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제 3세계의 빈국뿐만 아니라 테러단체마저도 핵을 구하느라 눈이 뒤집힐 겁니다. 강력히 재제해야 합니다."

  매퀄리스 국장에 이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며 선거참모였던 호블랜드 국무장관이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극우강경파이며 공산국가에 대해 철저한 매파로 알려진 국무장관의 조언은 대통령을 섬뜩하게 했다. 그는 중국과의 핵전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힘을 못쓰는 지금, 중국만 제거하면 미국에 위협이 될만한 나라는 없었다. PAX Americana, 즉, 미국지배하의 세계평화에 대한 꿈이 실현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핵이라니…

  "중국에 탄도탄 숫자는 얼마나 있소?"

  "지상발사 대륙간탄도탄 8기에 잠수함발사 탄도탄 24기입니다. 대만해상에서 사용한 것은 중거리탄도탄이고, 이것들이 100여기 가량 있습니다. 중국과의 핵전상황을 상정한다면, 우리측의 피해가 전혀 없이도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단, 선제공격을 한다면 말씀입니다."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호블랜드가 미소를 지었다.  합참의장을 대통령에게 천거한 사람이 국무장관이었다.

  "보복능력이 없다? 글쎄요… 잠수함발사탄도탄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1차공격에 절반은 살아남고, 이들이 발사한 미사일의 절반은 우리 합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거요.  난 국민의 목숨을 걸고 그따위 모험을 하고 싶지 않소."

  "중국이 급성장할 수 있습니다. 일본도 중국에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은 세계강국이 됩니다! 인구와 경제력을 보십시오."

  "차라리 한반도를 중국에 넘겨 주시오. 일본의 군비증강을 어느 정도 눈감아 주고 무기나 팔아 먹읍시다. 중국은 해군력이 약해 일본을 절대 칠 수 없어요.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중국해군은 거의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소. 당분간은 다른 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이오."

  "그럼 비난만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으로…"

  국무장관이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난은 하되 무기수출은 계속 추진하시오. 한국으로 간 무기대금도 중국에게 받으면 되니까…"

  "자유세계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각하!"

  호블랜드가 강력히 권고했으나 이미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날더러 핵전쟁을 하라는 거요? 당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하든지 하시오. 난 도저히 자신 없소."

  1999. 11. 25  23:50  중국 상하이 총밍따오

  "젠장! 발사했습니다!"

  "이런 종간나이!"

  "아~~~"

  시뻘건 빛줄기가 캄캄한 밤하늘을 뚫고 천천히 하늘로 치솟았다.  길이 21미터, 직경 1.65미터, 발사중량 26톤인 이 거대한 동풍2호 핵미사일은 점차 가속하여 정신이 나간 채 이 모습을 보고있는 요원들의 시야를 벗어나 하늘로, 하늘로 계속 상승했다.  시뻘건 불이 하늘로 치솟는 장면은 과연 장관이었다.

  "대장 동지! 서두릅세!"

  "신중하시오!"

  "무시기 신중이오? 동포들이 떼죽음하게… 진작 공격했으면…"

  방금 중국군 초소를 점령한 인민군 정찰연대 소속 요원이 씩씩거리며 이 우철 과장에게 분노에 찬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에 중국군을 찔러 죽였던 대검을 당장에라도 이 과장의 목줄에 들이댈 것 같았다. 다른 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원들은 아직껏 미적거리며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던 양 석민 중장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공격명령이 늦어 핵기지에 접근하는 중에 이미 미사일은 발사된 것이다.

  "과장님! 더 발사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해야 하오. 한번의 공격에 꼭 점령하도록 합시다. 계속 시간표 그대로 전진하시오."

  대원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중국의 핵기지를 향해 접근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1999. 11. 25  23:51  대전, 정보사단

  "옵니다!"

  관제관의 외침에 양 석민 중장이 눈을 부릅뜨고 상황판을 노려 보았다. 온다, 악마의 화신이 날아온다. 군인의 신앙인 국민의 생명을 노리고 3기의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목표는?"

  "신강에서 발사한 것은 개성을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돈화와 상해에서 발사된 2기는 아직 최고점 도달 전입니다만 방위는 서울과 평양같습니다!  목표도달시간은 대략 19분 정도, 2400 플러스 마이너스 1분에 도달 예정입니다."

  "개성을 왜…"

  양 중장이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화상통신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국방부 지하벙커, 평양의 로동당 청사, 통일참모본부 모두 차분한 분위기였다.  다만 예상보다 약간 빠르다는 웅성거림만 있었다. 관제사가 양 중장에게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적은 통참이 이전한 것을 모르고 있나 봅니다."

  불행 중 유일한 다행이랄까?  그러나 어느 군인이 장성 몇 명의 목숨과 수십만 시민의 목숨을 비교할 수 있을까?  개성시민들은 통일참모본부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멸할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통일참모본부는 개성시에 핵미사일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있었다.

  양 중장은 중국측의 특수부대를 우려하여 통일참모본부를 비밀리에 이전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당당하게 이전사실을 공표했어야 했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개성의 구 본부 건물에 남아있던 경비병력을 철수시켜서 최소한 통일참모본부가 이전했다는 정보를 중국이 갖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설마 중국이 핵미사일을 개성에 겨누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양 중장이 이를 악물었다.

  "요격용 전투기나 관제기, 미사일이 부족합니다.  서울과 평양의 확실한 수호를 위해 개성은 포기하겠습니다."

  양 중장이 30만 개성시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통참의 김 병수 대장이 벌떡 일어나 뭐라고 외치려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으로 책상 모서리를 마구 치기 시작했다.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대통령과 최 광 원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국무위원 한 사람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흐느끼는 모습이 보였다.

  양 중장에게는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잘만 하면 핵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지도 몰랐다. 양 중장이 벌떡 일어서며 명령을 내렸다. 자신은 감정에 휩싸일 틈이 없었다.

  "요격부대 상황은?"

  1999. 11. 25  23:53  중국 지린성, 뚠화

  가 경식 소좌가 공격신호를 내리자 선도조의 강 중위와 정찰연대 소속의 병사 한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 창흠 중위는 기술분야이긴 하지만 숫적으로 몇배 많은 중국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총기를 점검했다. 본부에서 추천한 K-1기관단총보다는 K-2자동소총이 믿음직해서 그는 K-2를 택했다. 자신이 현역 때 문제가 많았던 K-2의 먼지덮개 같은 사소한 결함은 이미 개량되었으니 총은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유탄발사기를 장착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다만, 에스키모처럼 두툼하게 차려입은 지금의 복장이 더 문제였다.

  가 소좌가 신호를 하며 대원들을 이끌었다. 눈꽃이 핀 나뭇가지들 사이를 지나 숲속 짐승들이 만든듯한 조그만 길로 접어 들었다. 핵기지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1999. 11. 25  23:55  평양 상공

  [편대 정위치, 조기경보기와 연계!]

  편대장인 조 장호 소령의 명령에 따라 6기의 F-16이 일렬종대로 편대를 재편성하며 각각의 거리를 4km 정도로 유지했다. 기수는 다시 북쪽을 향하고 고도는 천천히 올렸다.  핵미사일의 예정낙하코스에 맞춰 전투기를 배치한 것이다. 공중조기경보기가 전투기들의 시간별 위치를 세밀하게 지시했다.  핵미사일의 코스는 이 전투기의 코스와 반경 50미터 이내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시뻘건 불빛이 연이어 지상에서 올라와 하늘을 향했다.

  "연계 개시!"

  김 중위가 조종석에 특별히 추가된 스위치를 누르자 전투기는 조기경보기와 연계되어 자동조종되기 시작했다.  전투기는 핵미사일의 낙하코스를 따라 천천히 상승했다. 김 중위가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계기판을 살폈다. HUD와 REO에 평양 상공에 있는 E-2C에서 보내오는 전자신호가 영상이 되어 잡혔다. 목표는 마하 25의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상승하는 작은 점들이 하강하는 더 밝은 점에 접근했으나 빗나갔다. 두번째도, 세번째도 마찬가지였다. 1번기와 미사일의 거리는 150km가 되었다. 20초이내에 도달한다!

  [젠장, 마하 6짜리 패트리어트-3가 4발 연속 빗나가다니!]

  [이 따위 미사일에 맞기나 하려나...]

  [20세기 말에 논개 흉내내야 되는 이런 개같은 경우가!]

  "몸으로 때우고 싶어도 어려울겁니다. 너무 빨라요!"

  통신망이 순식간에 편대원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1번기가 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다. 아니, 지금은 레이더가 아니라 다만 E-2C에서 보내는 영상신호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에 불과했다. 대신 탐지범위는 250km나 되었고 최대 축척비로 구성된 REO(레이더/전자광학표시기)에 목표의 데이터가 나왔다. 방위는 전투기의 진로와 정면이고 목표의 속도는 자그마치 7000노트 정도 되었는데 계속 가속되고 있었다. 김 중위가 다시 확인해 보니 앞에 1만이 빠진 숫자였다. 계기판에 표시되는 속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지금 전투기들은 이미 조종사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자세와 방향 등의 모든 것은 공중조기경보기인 E-2C에서 관제하고 있었다.  원격조정이나 거의 다름없었고 조종사는 다만 요격미사일의 단추를 누를 수 있을 뿐이었다.

  위성요격용 미사일이 목표를 향하여 급가속했다.  1번기가 발사한 미사일이 핵미사일에 거의 명중할뻔 하다가 빗나가며, 곧이어 2번기가 발사 발사한 미사일도 빗나갔다. 1번기가 핵미사일과 교차하며 발생한 기류탓인지 기체가 조종불능에 빠지며 추락했다.  마지막으로 3번기가 발사한 위성요격용미사일마저 빗나가자,  놀란 나머지 전투기들이 일제히 암람 공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목표식별장치가 완벽해서 아군기가 맞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사실 아군기가 맞더라도 이들은 주저없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것이다. 미사일은 하나도 명중하지 못하고 핵미사일이 계속 낙하했다.  2번기가 사이드와인더 2기를 발사했으나 너무 느렸다. 핵미사일은 이미 전투기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제발 맞아라!]

  [시뮬레이션과 달라!]

  [야이 개새끼들아! 코스산정 제대로 못하겠냐?]

  E-2C의 레이더전파가 목표에 닿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 컴퓨터의 코스계산처리에 소요되는 시간, 그리고 이를 전자신호로 전투기에 보내는 시간 등은 다 합해도 극히 짧지만,  마하 25나 되는 핵미사일을 명중시키기에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고 있었다. 이미 핵미사일은 그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도 어쩔 수 없는 편차라는 것도 있었다. 지금도 전투기들이 줄지어 핵미사일의 진로 앞을 막아 섰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일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못한 것이다.

  [떡을 할! 니네들이 못하면 우리가 몸으로 막겠다!  ECCM이나 채프도 없는데 그 큰 걸 못맞히냐?]

  [웃기지 마! 니가 해봐. 자존심 상해!]

  처음 것은 조기경보기의 기장이 내뱉은 소리고, 두번째는 조 장호 소령의 외침이었다. 4번기 조종사인 김 종구 중위가 피식 웃으며 암람 공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맞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헤드업디스플레이의 조준원에는 이미 핵미사일이 잡히고 있었다.  목표거리 지시기에 나타난 미사일과의 거리는 현재 12km. 미사일은 REO 측면각 지시기의 맨위에 고정되어 미사일과 전투기가 서로 정면을 향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김 중위가 발사한 위성요격미사일도 빗나갔다.

  그는 미사일과의 거리 4km에서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투기와의 근접전이었다면 사정거리도 안될 먼 거리였지만 그는 지금 발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발의 20밀리 탄환이 탄막을 형성하고 미사일이 탄막 안으로 들어왔다.  김 중위는 기관포탄이 핵미사일을 파괴시킬 것이라는 기대따위는 하지도 않았다.다만 방향이라도 약간 틀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혹시나 핵미사일이 공중폭발한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왜 북한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되지?  아니,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해? 내가 군인이라서? 젠장~ 전쟁날줄 알았나.’

  미사일에 2~3발의 기관포탄이 명중했는지 땅으로 내려 꽂히는 거대한 불꽃에 작은 불꽃을 더했다.  방향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김 중위의 눈에 거대한 미사일 본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사일은 급속히 점점 커졌다. 지금은 탄두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지만 F-16보다 세 배는 커보였다. 김 중위의 항상 졸린듯한 눈도 이때만은 크게 떠졌다.

  "제기랄! 강남제비!"

  수우족 인디언의 이름같은 높은산을 콜사인으로 쓰는 백 기선 대위는 김 종구 중위의 기체가 불화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튕겨 나오는 것을 보며 외쳤다. 편대 통신망에 김 중위의 응답은 없었고, 그의 기체는 왼쪽 날개가 부러진채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고 있었다. 불화살은 5번기를 따돌리며 일직선으로 자신의 기체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 가까와져서 사이드와인더와 암람, 기관포까지, 발사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발사했다. 유효거리를 따질 여유나 이유는 없었다. 그는 돌이라도 들고 있으면 그것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남제비, 정신차려 임마!"

  백 대위가 조기경보기의 관제를 해제하고 직접 조종을 하기 시작했다. 자동조종을 상실한 조기경보기의 관제사가 놀라 백 대위를 호출하는 소리가 무선기를 가득 채웠다. 그는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미사일에 기관포를 쏘며 정면 충돌을 노렸다.  그는 설마 여러 종류의 미사일이 빗나가고 4대의 전투기를 피한 이 핵미사일이  자신의 기체에 충돌하리라는 환상은 별로 품지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헤드업디스플레이보다는 감각을 믿기로 했다. 고속으로 낙하하고 있는 핵탄두가 시야에 보이자 약간 상향조준하여 기관포를 발사했다.  붉은 섬광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백 대위의 전투기와 핵탄두는 정면충돌했다. F-16 전투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미사일이 전투기의 잔해를 뚫고 아래쪽으로 나왔다.  미사일은 방향이 거의 바뀌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 꽂혔고, 백 대위가 탈출하는 모습은 결국 보이지 않았다. 통신망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결국 마지막 6번기마저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했다.

  김 종구 중위의 전투기는 아직  공중조기경보기의 원격조종하에 있었다.  김 중위의 전투기를 사실상 조종하던 관제사가 비상명령어를 입력하자 플라이트스핀 중인 김 중위의 전투기로부터 사출좌석이 퉁겨져 나왔다. 낙하산이 펴지고 김 중위는 기절한 채 길고 긴 강하를 시작했다.

  핵미사일의 탄두는 코스가 약간 바뀌며 대동강의 북쪽 지류인 보통강 중류변의 백사장에 깊숙이 박혔다. 그러나 미사일은 웬일인지 폭발하지 않았다.  백 대위의 기체와 충돌했을 때 핵미사일의 자동안전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1999. 11. 25  23:59  경기도 개성

  개성 상공에서 1,500미터에서 3메가톤의 핵미사일이 폭발했다. 긴급발진한 미그-23 1개 대대의 화망을 뚫고 들어온 이 미사일에 개성에 주둔하는 고사포대대에서 SA-6을 날렸지만 모두 빗나갔다. 통일참모본부가 있던 건물 상공에서 이 가공할 수소폭탄이 폭발했다.

  수억도에 달하는 초고온이 대기를 노랗게 달궜다. 중성자와 중간자에 의해 원자핵 내에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던 양전하들이 클롱반발력을 이기고 서로 충돌했다. 질량결손이 막대한 에너지를 낳고 이 에너지가 다른 원자핵의 결합을 가속시키자, 핵융합반응이 촉발되면서 열선이 대지를 불태웠다. 곧이어 거대한 불의 버섯구름이 형성되며 다시 폭풍이 불타는 땅과 건물을 휩쓸었다. 화구가 계속 커지면서 개성시 전체가 화염에 빨려들어 갔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은 1분도 안되어 소멸되었다.

  1999. 11. 26 00:00  서울, 국방부

  [평양은 살아남았습니다!  전투기들의 가미가제식 요격이 성공했습니다. 대신 개성이 당했습니다. 현재 통신두절!]

  국무회의에는 일순 함성이 터졌다가 싸늘하게 분위기가 식었다. 그러나 잠시 후 평양과 서울의 요격체계가 같다는 것을 확인한 국무위원들은 서울이 살아남을 확률이 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대통령이 최 광 원수를 불렀으나 최 원수는 장승처럼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눈밑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최 원수를 부르기를 포기했다. 이제는 서울 차례인 것이다.  홍 대통령이 미사일 접근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가 화상통신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각하께서는 왜 서울에서 피하지 않습네까?]

  "…"

  [...]

  최 광 원수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다. 홍 대통령도 미소로 답했다.

  ‘최 원수와 같은 이유지요.’

  라고 말하지 않고도 뜻이 통했다. 비로소 홍 대통령은 인민군 복장을 입은 사람에게도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약간 늦은 감은 있었지만…

  수도방위사령부는 서울 상공의 방어까지 책임지고 있었고, 이는 서울에만 한정된 집중화된 방어체계였다. 수방사의 모든 정보는 데이터링크를 통해 국방부과 평양,  그리고 남양주의 통일참모본부와 대전의 정보사단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지금 시시각각 탄도미사일의 위치가 보고되며 아군의 대응도 역시 즉각 보고되었다. 미국에서 긴급공수된 ABM이 지금 막 발사되었다.  이 미사일요격미사일은 마하 10 이상의 속력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미사일끼리 점점 접근했다.

  "미사일은 남서쪽에서 날아왔습니다. 상해 앞바다의 섬인 숭명도에서 발사된 놈이 틀림없습니다. 탄두의 위력은 20킬로톤 정도 될 것입니다."

  국방장관이 프로야구중계방송의 해설자와 같은 톤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홍 지영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얼핏 보고, 다시 중앙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

  [ABM 1, 2, 3호 모두 목표상실! 패트리엇이 백업하고 있습니다!]

  "음…"

  대통령이 신음성을 발했다. 미국이 한국에 비싸게 팔아먹은 HOE-3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탄도탄 요격처럼 빠른 물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레이더와 컴퓨터, 전파를 이용한 위치파악보다는 다른 방법이 있어야 했다.전파 종류를 이용한 목표추적은 음속의 25배 정도를 비행하는 물체에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가령 목표가 마하 25의 속도로 지상 100km에 있다면, 레이더가 목표를 잡은 순간 목표의 위치는 이미 5미터 이상을 벗어나 있게 된다. 이 데이터를 요격부대에 전송하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실제 요격대상의 위치도 바뀌는 것이다.요격부대가 자체의 미사일을 활용하면 시간은 단축되지만 그정도의 거리를 소형전투기가 탐지할 레이더를 장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명중이 확실한 후면발사가 불가능한만큼, 정면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대기권 진입 미사일의 속도 ; 마하 25 (중거리탄도탄의 경우)

음속 ; 340미터/초 (고고도는 영하이지만 상온으로 가정)

전파의 속도=광속 ; 약 300,000km/초

위치(고도) ; 100km

레이더 전파왕복시간 ; 1500분의 1초

이동거리 = (25*340미터/초) / (1초/1500) = 5.67미터

  미사일 요격시스팀은 이 오차를 수정해 주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전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대기와의 마찰에 의한 미사일의 감속, 지구의 중력에 의한 가속, 미약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코리올리효과 등,  미사일의 속도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고에너지 레이저에 의한 적 위성이나 대륙간탄도탄의 요격이 주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SDI가 아직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구 소련이 고에너지 레이저기술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공위성이나 대륙간탄도탄의 요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체 레이더가 탑재된 요격용미사일도 마하 25를 넘는 목표에 대해서는 정밀도가 떨어진다. 음속 이하로 비행하는 전투기도 확실하게 명중시키지 못하는 미사일이  초고속의 대륙간탄도탄을 요격하는 것은 난센스다.  게다가 대공미사일은 명중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폭발파편에 의해 목표를 파괴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폭발하는 순간 핵미사일은 이미 그 상공을 통과한 후의 일이다. 미사일은 전혀 손상을 받지 않는다.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미사일이 핵미사일이 아니면 아직까지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 방법이 평양을 구한 것처럼 서울도 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천만의 시민이 사는 곳이었다. 전략적으로도 결코 잃으면 안되는 곳이었다.

  [패트리엇 12기 모조리 빗나감!]

  [위성요격미사일 및 공대공미사일 목표 요격 실패!]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의 관제사들이 연이어 비명을 질렀다. 전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들의 머리 위로 핵미사일이 낙하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안기부장은 대통령이 공포보다는 격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신기했다. 대통령은 과연 죽음을 초월한 사람인가? 대단한 배짱이라고 생각했다.

  [미사일, 요격기 편대 통과! 목표, 청와대로 최종 파악!]

  "빌어먹을 미제 무기들! 비싸기만 하고 엉터리야!"

  여기저기서 국무위원들의 비명과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국무회의가 청와대에서 가까운 정부종합청사로부터 국방부 지하벙커로 이동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가톤급의 핵이라면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다.국방장관의 말대로 20킬로톤급의 위력이라면 폭심에서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용산일대도 직접적인 핵폭발의 영향권에 들 것이 틀림없었다.

  "영부인께서는…"

  통일부총리가 묻자 대통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주인은 아직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물론 민방위본부의 지시대로 지하방공호에 있겠지만 폭심 주변에서 별로 깊지도 않은 지하 방공호는 의미가 없었다. 홍 대통령은 중국이 청와대를 목표로 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전략적으로 의미가 있는 국방부나 서울 시가의 한복판이 목표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몇몇 국무위원들은 생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국방부 지하벙커의 견고성을 믿는지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국무위원들은 이 엄청난 공포 앞에서 사고력을 잃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총리! 총리는 도착했소?"

  [여기 있습니다, 각하!]

  옥상의 헬기탑승장에서 뛰어왔는지 아직도 헐떡이고 있는 총리의 모습이 보였다.하늘에도 러시아워가 있는지 서울에서 대전까지 헬기로 오는데 무려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각종 요격용 미사일의 배치와 병력수송 때문에 도로뿐만 아니라 상공도 교통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공습경보가 발령된 마당에 각 도시 상공마다 요격부대에 의한 기종 및 탑승자 신원확인이 시간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만큼 나라가 어수선했다.

  "서울이 핵공격을 받고 있소.  서울과의 연락두절시 통수권을 총리께 맡깁니다. 끝까지 잘 싸워주길 바랍니다."

  [각하...]

  [목표도달 3초전! 공중폭발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방에는 암호표가 있소. 양 중장과 상의해서 핵공격 여부를 결정하시오. 무거운 짐을 맡겨 드려서 죄송합니다. 대통령 서리 각하."

  홍 대통령이 최 창식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통령 서리로 부르자 국무위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최 광 원수와 통일참모본부의 이 차수가 최 총리를 유심히 보았다. 최 원수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천장과 바닥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화상통신은 모두 두절되고, 동시에 전기도 나갔다. 암흑이 밀려왔다.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울 북부시가에 작은 섬광이 번쩍였다.복원된 경복궁을 배경으로 강렬한 빛이 잠시 서울의 밤하늘과 북악산을 하얗게 비췄다. 곧이어 거대한 태양이 땅에 내려온듯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초고압, 고온의 가스가 만들어낸 불기둥이 주변 건물을 빨아들이면서 급속하게 커졌다.방사선과 열선이 발산되며 삼청동의 한옥들을 녹이고 강력한 압력파가 지상과 대기를 통해 시내 전역에 파급되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 안국동에 있는 한국일보빌딩이 모래성처럼 부스러졌다.

  폭발의 중심지역에 기압이 낮아지면서 폭심을 향해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과 자동차, 가로수들이 빨려 들어갔다. 폭심을 중심으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나며 방사능재와 각종 잔해가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 사이에도 폭발로 인한 피해지역은 끝없이 확장했다. 청와대 주변지역인 삼청동과 사직동, 효자동, 청운동, 안국동 등 곳곳에 있는 건물 수백채가 열선에 의해 불에 타기 시작했다. 핵폭발로 인해 발생한 첫번째 충격파와 지진파가 종로구 일대의 건물과 주택을 무너뜨렸다. 광화문 인근 도로변에 비상주차된 차들이 폭풍에 날아가고 가로수가 뿌리째 뽑혔다. 잠시 후 시청과 플라자호텔이 무너지고, 폭풍의 위력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은채 국보 1호인 남대문을 휩쓸고 서울역사를 무너뜨렸다. 초겨울, 바싹 마른 남산의 아카시아숲에 산불이 일어나고 거대한 남산타워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핵폭발로 발생한 진동파가 광화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수많은 구조물들을 붕괴시켰다. 청계고가와 아현고가, 서울시 외곽고가 도로가 무너지고 지하철 1호선 종각역 부근이 통째로 붕괴되어 종로 일대의 도로가 지하로 꺼져 내렸다.  마포대교가 파도처럼 일렁이더니 결국 한강으로 주저앉고 독립문 뒤쪽의 금화터널이 통째로 붕괴되었다.

  핵폭발로 인한 지진파는 멀리 분당과 과천, 구리시 등의 아파트 몇 동을 붕괴시켰으며 일산의 신도시 아파트촌 절반이 주저앉았다.

  1999. 11. 26  00:02 서울 응암 1동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였던  이 진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방공호나 지하실로 대피하지 않았다.  부모와 동생은 이미 며칠전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간섭할 사람은 없었다. 10분에 한번씩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귀찮을 뿐이었다. 핵미사일이 서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사람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시내에는 아직도 공습사이렌이 길게 울리고 있었다. 녹번시장 근처에 있는 집에서 보이는 시내는 오랜 야간등화관제훈련에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이미 대피해서 사람이 없는지 주변 집들이 전등을 밝히지 않아 깜깜했다.  민방위본부의 대피명령을 무시하고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차량들이 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산뜻하게 꾸며진 방에서 흔들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TV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핵미사일의 서울접근을 급박하게 알렸다.  화면 아래에 자막이 흐르며 개성시가 핵미사일의 일격에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갑자기 동쪽 창문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설마를 몇번 외치며 일어나 창문으로 뛰어갔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하늘로 치솟고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서울이 온통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TV방송이 갑자기 끊기고 전기가 나갔다. 그때부터 그녀가 창문에서 본 것은 아수라지옥이었다.

  시내 곳곳에 수도관이 터지면서 도로는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가스회사의 직원들이 모두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는 바람에 가스관 차단을 실시하지 못했다. 붕괴된 도로 주변에 허술하게 묻혀있던 가스관에 균열이 생기면서 강력한 압력에서 해방된 도시가스가 분출했다.  물바다가 된 지하철 3호선 녹번역 부근 도로 위로 가스가 두텁게 쌓이며 흘러 내렸다.  도로에 누적된 도시가스는 녹번사 거리 근처 서부소방서에서  긴급출동 중이던 소방차의 배기가스에 닿자마자 폭발했다.  도로를 따라 폭발이 연속되며 시외로 빠져나가려던 자동차들이 갈기갈기 찢긴채 장난감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정전으로 인한 암흑 속에서 그 장면은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지하에 얼기설기 매설되어 있던 도시가스 배관망은 한국 특유의 부실공사와 관리자의 도주, 결정적으로 핵폭발로 말미암아 서울을 지옥으로 바꿔 놓았다.  시내 곳곳이 핵폭발에 의한 화재보다는 도시가스에 의한 피해가 더 컸다.  일차폭발 이후에 발생한 도시가스의 연속폭발과 화재로 인해 발생한 유독가스가 지하방공호나 전철역에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을 질식시켰다.  동시에 수백군데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차와 앰뷸런스들이 출동했지만, 도로 곳곳이 붕괴하고 부서진 차량잔해에 막혀 움직이지도 못했다. 부상자들이 울부짖었으나 그들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은 청바지와 간단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집을 뛰쳐 나갔다.  아직도 균열된 배관에서 치솟는 도시가스가 밤하늘을 향해 화염을 뿜어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방사능 낙진은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집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미친듯이 질주하던 차량이 핵폭발과 화재에 놀라 뛰쳐 나온 동네 아주머니를 깔아 뭉개고 도망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주머니를 살펴 보았으나 이미 즉사했다.  차에 받히고 바퀴에 깔린 그 여자의 배에서는 창자가 꿈틀거리며 나오고 있었고,거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진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잠시 후 시체를 차가 다니지 않는 길옆으로 옮기고 다시 넓은 도로로 나섰다.

  1999. 11. 26  00:03 대전, 정보사단

  "서울이 당했습니다."

  관제사가 얼이 빠진 듯이 의자에 뒤로 푹 퍼진 채 천천히 보고했다. 국방부 지하벙커와 연결되어 있던 통신화상이 지직거리더니 결국 채널을 잘못 맞춘 TV수상기처럼 화면이 나갔다.  6개 TV방송은 전면 중단되었고, 위성TV와 지역 CATV마저 연결이 제대로 안되었다. 통일참모본부와 연결된 화면은 음성은 들리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피해는?"

  묻고 있는 양 중장의 안면근육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최 총리는 장승처럼 우뚝 선채 눈을 감았고,  이 재영 중장이나 다른 사람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완전 두절됐습니다."

  "수경사, 아니, 수방사는?  서울 인근 부대에 연락해서 정찰기를 날려! 유무선통신이 안되면 연락헬기라도 날리란 말야!"

  양 중장이 통신장교에게 고함을 치고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 준태와 구 성회가 그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서울과 개성에 명중한 핵미사일은 핵폭발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전자기펄스를 발생시켜 한반도 중부의 유,무선 통신을 모조리 두절시켰다. 서울 상공에서 미사일 요격에 투입된 전투기들은 살아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재로서는 서울과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다.

  "총리님! 아니, 대통령 각하!"

  "양 중장."

  최 총리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50대 중반의 총리는 고혈압 기운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발사명령을 내려 주십시요."

  "…, 진정하시오. 피해를 파악해 봅시다. 통참이나 최 원수와도 협의하고…"

  "이럴 수가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양 중장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 넣었다.  권총집의 단추는 채우지 않았다. 일어섰다 앉기를 몇번 반복하고 있는 양 중장을 이 재영 중장이 진정시켰다.

  "양 중장은 이번 작전의 책임자요. 부디 냉철하시오."

  "…., 죄송합니다. 선배님."

  양 중장이 고개를 푹 숙이며 천천히 상황실을 떠났다.  이 재영 정보 사단장은 동해안쪽으로 멀리 우회하는 유선망을 통해 서울 인근의 연락이 되는 군부대를 호출하여 서울 구조작업에 동원하고 남양주의 통일참모본부와 화상통신을 연결했다. 화면에 얼굴이 벌개져 있는 이 종식 차수의 얼굴이 보였다.

  "통일참모본붑니다!"

  중앙화면에 나온 침통한 얼굴의 이 종식 차수는 정보사단 상황실에서 얼이 빠진 채 서 있는 최 총리를 보고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면이 자꾸 일그러졌다. 이 차수가 경례를 하자마자 총리가 울부짖었다.

  "서울이 핵에 당했소! 연락도 완전 두절이오."

  [완전히 당한 것은 아닙니다. 의외로 위력이 약한 탄두였습니다. 개성은 전멸했지만 서울은 아닙니다.]

  "…?"

  [20킬로톤 이하의 위력이었습니다.게다가 지중폭발이었기 때문에 위력이 더욱 격감했습니다.대신 인근지역도 상당한 지진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 지수 대장이 이 차수 대신 총리에게 차분하게 보고하자 총리는 정 대장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피해가 적다는 말을 듣고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양 중장은 핵보복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소. 이 차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핵이레 있습네까? 거짓뿌렁 앙이었습네까?]

  이 차수는 금시초문이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총리와 양 중장을 살펴 보았다. 어느새 들어와 있는 양 중장의 두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쿨럭! 2400시로 비밀이 해제된 파일에 담겨 있었습니다. 자료를 전송하겠습니다."

  양 중장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앞에 놓인 패널을 조작하더니 잠시 후 다시 이 차수와 다른 참모들에게 보고했다.

  "안기부장이 공작을 벌인 모양입니다. 극비리에 국제 무기암거래시장에 나온 240밀리 박격포용 핵탄두 3발과 152밀리 곡사포용 핵탄두 2발을 입수했습니다. 각기 위력은 다르지만 모두 5킬로톤 이하급입니다. 안전기획부는 이것을 우리별로켓이나  인민공화국의 대포동 3호에 탑재하는 계획을 전쟁발발 직후에 세웠고,  실전사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양 중장이 잠시 자판을 두들겼다.

  "우측 화면에 나온 바와 같이, 전라북도 정읍 부근 기지에 이것을 배치했습니다."

  화면에는 정읍 남쪽 산악지대, 내장산 위쪽의 특정위치가 검은 화살표로 지정되어 있었다.

  [기래서 대포동을 몇개 달라고 했구만. 알갔소. 긴데 양 중장이 보복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시기요?]

  "당한만큼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양 중장의 목에 핏발이 바짝 섰다.

  [아이오. 기건 위력이 약해 중국이 다시 보복에 나설 수 있소. 디금 중국 지도부레 괴멸됐수다. 동지도 알갔디만... 기럼 집단지도체제레 들어서고, 집단지도방식이레 강경화되는 수가 많디오.투입된 요원들을 일단 믿도록 합세.]

  "…"

  [총리께서는 어케 생각하십네까? 작전 장마에 대한 거이 아시리라 생각합네다만.]

  "…,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겠지요.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일단 서울시민과 대통령 각하를 구조해야겠소."

  1999. 11. 25  00:05  중국 지린성 뚠화

  기지사령관인 우허숭 상교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유도탄을 발사하기 직전에 당중앙 확대군사위원회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부하들을 마을에 내보내 일반전화로 연락하려고 했지만 트럭을 타고 나간 부하들이 돌아올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다.

  "이거 원… 정말 특수부대가 공격해 오는 거야?"

  유도탄을 처음으로 발사해 본 관제사들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사령관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현재의 경비상태에서는 소수의 적이 침입해 온다한들 절대로 기지를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불안한 생각이 드는지 자꾸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놈들 왜 안돌아 오는 거지?"

  "사령원 동지, 무전으로 하면 안됩니까?  이미 유도탄을 발사했으니 이제 무선관제를 풀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규정이… 에이! 통신군관. 베이징과 연결해!"

  "네! 사령원 동지!"

  통신군관이 통신전업군사(專業軍士)와 함께 베이징을 호출했지만 당 중앙 군사위는 물론이고 제 2포병 사령부와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군구사령부나 인근의 집단군 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무선도 두절되었습니다!  전파방해는 없습니다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을로 간 병사들과 연락되나?"

  통신전업군사가 주파수 다이얼을 맞추더니 잠시 후 고개를 흔들며 보고했다.

  "신호는 틀림없이 가고 있는데… 그쪽에서 호출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틀림없이 어디 가게에서 술처먹고 있을거야. 아무데나 불러봐!"

  "해방군 공용주파수대역을 사용하겠습니다. 나옵니다!"

  [여기는 철군(鐵軍) 2, 그쪽은 어딘가?]

  스피커에서 아군의 소리가 들려오자 화색이 만면한 사령원이 마이크를 직접 잡고 물었다.

  "뚠화 유도탄기지 사령 우 상교다. 그쪽은 어디야?"

  [132사(사단) 전차중대장 마 대위입니다. 사령 동지! 무슨 일이십니까?]

  "베이징이나 군구사령부에 통신이 안된다. 귀관은 상급부대와 통신이 되나?"

  [저희도 상급부대와의 무선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제 2포병에서는 유선만 쓰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우 상교는 울화가 벌컥 치밀었다. 우 상교는 평소에 일반 인민해방군 부대원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도 이런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군에게 신나게 깨지기만 하는 주제에!

  "이쪽은 조금 전에 조선에 핵유도탄을 쏘았다.  보고를 해야 하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쪽은 어때?"

  [명령을 받고 이동중입니다. 장백산(백두산) 서쪽 지방에 소규모 조선군 게릴라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하급부대간 무선통신은 유지되고 있는데 이상하게 상급부대만 안되고 있습니다.  련(연대)사령부뿐만 아니라 집단군 사령부도 연결이 안됩니다.]

  "알았어. 상급부대와 연락이 되면 이쪽으로 무선연락을 해달라고 전해주게. 수고하게."

  우 상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투덜거렸다.

  "끙… 봉화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야."

  유도탄기지의 차량출입구로 트럭이 상향등을 킨채 달려오고 있었다. 문을 경비하던 위병들이 서둘러 바리케이드를 올렸다.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지에팡(해방) CA-10  유개트럭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주차장을 지나 지하 관제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트럭이 서자 트럭 뒤에서 하얀 설상복을 입은 군인들이 뛰어 내렸다.

  먼저 그들을 발견한 것은 이번 전쟁 직전에 징집된 신병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복장이 신기한듯 한국군들을 보고 있다가 침투요원 중의 한사람이 던진 대검에 맞아 죽었다.  설마 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한 것이다. 팀장인 가 경식 소좌가 엘리베이터 위에 있는 감시카메라를 향해 소음총을 쏘았다.  대원 한 명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4명 전원이 탑승하자 즉시 지하 12층으로 내려갔다. 돌산의 암벽을 파서 만든 이 미사일기지의 중추부인 관제실은 핵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여기서껀 문제야~ 백 중위. 준비하라우!"

  백 창흠 중위가 랩탑 컴퓨터의 케이스를 벗겼다. 이곳에서 사용할 그의 무기는 휴대용컴퓨터였다. 다른 대원들이 총기를 점검했다.  드디어 문이 열리자 대원들이 쏟아져 나오며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던 경비병들이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졌다.  파편과 피와 살점이 튀었다.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감시카메라에 한국군의 침입이 발견된 것이다.대원 한명이 엘리베이터를 고정시켰다. 이제 지하는 위층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미사일 격납고도 지하에 있지만 그곳은 이곳과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사격을 끝낸 대원 중 한명이 회전식 출입기를 밀고  관제실로 들어가려했지만 출입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두터운 합금강으로 된 벽은 핵폭발에도 견딜 것 같았다.  이 문은 안쪽에서만 자동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출입자가 신분증을 전자감식기에 비쳐 신원파악을 다시 실시한 다음, 경비원이 출입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는 방식이다.백 창흠 중위가 출입기 배선반을 열고 컴퓨터를 연결시켰다. 백 중위가 익숙한 솜씨로 자판을 두둘겨 미리 준비된 출입암호와 비상개방신호를 입력했다.

  "날래 날래 하라우~"

  가 소좌가 재촉했다. 뚜우뚜우~ 울리는 비상벨 소리가 대원들의 귀청을 자극했다.  백 중위가 왼손을 들어 전진신호를 보내자 인민군 강 중위를 선두로 회전식출입기를 밀고 들어갔다.  그는 출입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격을 시작했다. 마침 출입문쪽으로 몰려오던 경비병들이 총에 맞고 쓰러졌다. 강 중위의 짧다란 AKR이 계속 불을 뿜었다.  가 소좌가 기술조에게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1999. 11. 26  00:07  중국 상하이 총밍따오

  이 우철 과장의 팀은 정문 입구에서부터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검은 옷의 한국군이 군청색의 중국군에게 숫적으로 압도당해 몰리고 있었다. 중국군의 90식 APC가 노란 화염을 뿜으며 폭발하는 동시에 이쪽 요원 한명이 쓰러졌다. 침투조는 유도탄기지 안쪽으로 들어가며 점점 숫자가 줄어 들었다.

  이 과장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으나, 엘리베이터는 지하에 정지한 채 올라오지 않았다.  신 승주 대위가 다른 대원들을 물러나게 하고 승강기 입구에 폭탄을 장치했다.  요원들이 엎드리자 폭음과 함께 승강기 문이 폭파되었다. 신 대위가 기다란 밧줄을 풀어 승강기문 위쪽에 매단 다음 몸을 묶고 밑으로 강하했다.  다른 대원들이 중국군에게 응사하며 그를 엄호했다.

  "쓰벌! 졸라게 많구만."

  승강기 입구 소화전 뒤에 숨어있던 이 우철 과장이 뉴 우지 기관단총을 양손에 잡고 교차하듯 연사했다.  한꺼번에 몰려오던 중국군 대여섯명이 쓰러졌다.  중국군이 엄폐물 뒤로 물러나더니 집중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총알이 빗발치듯 이쪽으로 쏟아졌다. 요원 한 명이 목에 총상을 입고 뒤로 넘어졌다.

  "박 중사!"

  이 과장이 부상자를 부축해서 일으키려다가 다시 바로 눕혔다.  입안이 피로 가득한 채 정신을 잃은 박 중사의 부상부위를 확인하고 대검을 꺼낸 그는 대검으로 누워있는 박 중사의 목 아래쪽을 잘라 기도를 통하게 해주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잠시 후 박 중사가 약간 정신을 차렸다.

  "쿨럭!"

  박 중사가 누운채 검붉은 피를 한됫박이나 울컥 토했다.

  "과장 동지… 실패했습네다."

  "아냐! 우린 성공할 수 있어.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국이… 조국이 위험합…네다… 이미 항복했을 수도…"

  박 중사의 눈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박 중사!"

  "쿠앙~"

  승강기쪽에서 폭음이 울리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매캐한 연기가 주변에서 가라앉자 신 승주 대위가 신호를 했다.차례대로 밧줄을 몸에 묶어 승강기 통로를 통해 아래로 강하했다.선두는 이 과장과 신 대위였다. 이들은 3번 정도 통로 벽에 발을 굴리며 40미터를 수직강하했다.  캄캄한 엘리베이터 통로 저 밑쪽에 추락한 승강기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폭발에 승강기 문이 뚫려  밝은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동시에 뛰어 들어가며 움직이는 것에는 무조건 발사했다.  폭발에 놀라 아직 제정신을 못차린 경비병 4명이 쓰러졌다.

  "기술조!"

  이 과장이 뒤를 돌아보며 외친 순간에는  이미 6명의 요원이 더 들어와 있었고,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김 태현 소위가 육중한 철문 옆에 달린 패널을 뜯고 휴대용컴퓨터와 연결시켰다. 그가 암호와 개방명령어를 입력했으나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빨리! 적이 대비태세를 갖추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 해!"

  승강기 위쪽에서 중국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상사가 통로 위쪽을 AK-47을 난사했다.  대구경 소총답게 엄청나게 큰 소리가 엘리베이터의 빈 공간을 울렸다.김 소위가 바삐 명령어를 몇 번이나 입력했지만 철문은 요지부동,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안열립니다!"

  김 소위의 비명을 들은 요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쩌란 말인가? 그 철문은 핵폭발에도 견디도록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기다려 보십시요. 암호가 바꼈을지도 모릅니다. 암호검색프로그램을 가동하겠습니다."

  "콰앙!"

  폭음에 놀란 이 과장이 승강기쪽을 보니, 통로 위쪽의 중국군에게 응사하던 요원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이 상사가 벽 뒤에 바짝 붙었다가 다시 위쪽으로 응사했다.  비명이 엘리베이터의 통로 위에서 아래까지 길게 이어졌다.  잠시 후 쿵 하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암호가 나왔습니다!  저쪽은 입구개폐장치의 전원을 내려야 했습니다. 자, 열립니다!"

  김 소위가 외치는 동시에 육중한 철문이 위로 열리고 이 과장이 바닥으로 몸을 날리며 반대쪽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앉아 쏴 자세를 취하며 침투조를 기다리고 있던 중국군 3명이 쓰러지고,  이들 뒤로 신 대위가 수류탄을 날렸다. 수류탄의 폭음이 울리는 동시에 엘리베이터쪽에서 엄호사격을 하던 이 상사가 어느새 뛰어나가며 연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신 대위나 중국군들이 본 것은 일종의 마술이었다.

  이 상사는 적병마다 정확히 세 발씩 명중시켰다. 점사기능이 없는 AK 소총으로, 게다가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연사를 하는 중에 일반 병사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상사가 왼손으로 권총을 꺼내 쏘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소총 방아쇠 앞에 있는 탄창멈치를 눌러 삽입된 탄창을 꺼내 돌리면서 소총을 약간 위로 던져 올렸다. 미리 테이프로 두개를 붙인 탄창이 공중에서 짧게 반바퀴 돌자 이 상사가 탄창 아랫부분을 손으로 툭 쳤고, 탄창은 요술처럼 소총의 탄창삽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공중에서 낙하하고 있는 소총의 개머리판을 탄띠에 대며 장전손잡이를 잡아 당기자, 다시 소총은 사격준비가 완료되었다.

  중국 경비병들이 이 상사의 마술에 잠시 눈이 팔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새로운 탄창에 삽입되어 있던 30발의 실탄이 10명의 목숨을 앗았다. 엄폐물이 없는 상태하에  가까운 적과의 대치에서는 배짱이 센 쪽이 이기는 법이었다. 공포를 느끼는 순간에는 시간이 빨리 가는 법, 이 장면을 보고서야 신 대위는 94년에 보았던 서부극의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숫자가 많은 중국군이나, 같이 뛰어들어온 한국군이나, 이 상사를 제외하고는 한발도 쏘아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 관문은 간단히 폭파만 하면 됩니다."

  김 태현 소위가 재촉하자 정신을 차린 이 과장이 정면의 철문을 향해 RPG를 발사했다. 폭음이 통로를 울리자마자 신 대위가 뛰어가 폭파 부위에 익숙한 솜씨로 미리 준비된 폭약을 장착하고 물러섰다. 다시 거대한 폭음이 이어졌다.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았을 때는 이미 요원들이 관제실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관제원들과 기지사령이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고, 문 주위에는 경비병의 시체 3구가 널려 있었다. 이 상사와 다른 요원이 중국군인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 무장해제시켰다. 김 태현 소위가 컴퓨터를 점검하는 동안 신 대위는 다시 밖으로 나가 통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이 상사가 거의 얼이 빠진 중국군 6명을 포박하는 동안 이 과장이 무전기의 전원을 올리고 주파수를 맞춘 뒤, 마이크를 잡고 짧게 말했다.

  "우산."

  1999. 11. 26  00:10(한국시간)  중국 지린성 뚠화

  "백 동지!"

  "네! 하고 있습니다."

  가 소좌가 재촉하는 중에도 백 창흠 중위가 익숙한 솜씨로 통제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그가 준비된 디스켓을 주컴퓨터에 연결된 단말기 드라이브에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포로가 있는 쪽을 힐끗 보더니 다시 일에 열중했다.

  가 경식 소좌는 한쪽에 엎드려 있는 포로들을 노려 보았다.모두들 얼이 빠진 채 무장해제되어 있었다. 시체 3구가 하늘없는 천장을 향해 누워 있었다. 포로 중에 교관급 고위장교가 눈에 띄자, 가 소좌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기지사령 우허숭 상교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당했다. 기지방어시설이 이렇게 쉽게 뚫릴지는 몰랐다.

  "상교? 당신 연대장급이구만."

  가 소좌가 중국어로 기지 사령에게 묻자,  사령은 뜻밖에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너희들은 조선군?"

  "당연하지."

  가 소좌가 잠시 백 중위쪽을 보았다. 예정대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모양인지 백 중위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북경에 핵을 날릴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 조선에 한 것처럼. 이의 있나?"

  우 상교가 파랗게 질렸다.  그는 핵기지를 점령한 한국군들이 핵미사일을 빌미로  중국정부를 협박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한국군 기술병은 미사일 발사 전단계 중에서 제 3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어떻게 암호체계를 풀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13억  중국인민은 핵위협에 완전 노출이 된 셈이다.

  "안, 안된다. 그곳에는 천 오백만의 인민이 있다."

  가 소좌의 눈빛이 잠시 빛나며 주먹으로 우 상교의 면상을 쳤다.  우 상교가 코에서 피를 흘리며 다시 벌떡 일어났다.

  "서울에 천만, 평양에 6백만이나 있었다. 그곳에 너희들은 핵미사일을 쏘았다. 너희들은 같은 꼴을 당할 것이다."

  우 상교는 이 중년의 인민군 소좌가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도외시한  듯 했다.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기지 사령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해야 했다.

  "우리가 발사한 미사일에는  20킬로톤밖에 안되는 소형탄두를 탑재했다. 그리고 사전에지중폭발로 세팅했다. 핵폭발로 인한 피해는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다. 제발 아량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우 상교가 애원했다. 발사를 멈출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없어 보였다. 가 소좌가 차갑게 대꾸했다.

  "너희들은 핵을 먼저 발사했다. 당한 것 이상으로 보복을 하겠다."

  "가 소좌님! 입력이 끝났습니다. 대륙간탄도탄 1기, 중거리탄도탄 8기 입니다."

  백 중위가 핵미사일의 목표에 대한 데이터 입력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사전에 준비된  암호문을 입력했기 때문에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미사일의 목표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사로잡히는 경우를 가정했을 때, 알고 있는  정보가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중국의 대도시나 군사적 요충지들이 목표가  되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우 상교도 같은 생각이었다.

  "안돼! 중국인들을 몰살시킬 셈이냐?"

  우허숭 상교가 악을 썼으나 가 소좌가 냉담하게 명령을 내렸다.

  "기럼 발사하기요."

  "예!"

  백 중위도 가 소좌만큼 한올의 망설임도 없었다. 틀림없이 이 기지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보았다.  한국의 어느 대도시, 어쩌면 서울일지도 몰랐다. 서울이  당한만큼 북경이나 다른 대도시도  사라져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눈에는 눈,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었다.

  우허숭 상교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가 소좌의 권총이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중국군들은 계속 엎드려 있었으나  이들도 총알세례를 받았다. 중국군들의 등에 총알이 박히며 피와 살점이 튀었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핵미사일 9기는 단축된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며 자동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기지 전체에 발사경보가 울려 퍼졌다. 발사까지 30초가 남았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정상이다.

  "콰쾅!"

  "이기 메이야?"

  팀원들이 몇 명은 엎드리고, 몇 명은 총구를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은 그대로 있었다. 중국군 경비병력이 통제실 정면 벽을 폭발시키려 했으나 시도는 무위로 끝난 것이다.  이들은 아무래도 살아돌아가긴 틀린 모양이라고 투덜거렸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미사일 사일로가 열리고, 곧이어 로켓이 점화되었다. 거대한 핵미사일 동풍 시리즈 핵미사일 9기가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백 중위는 한국과 중국이 공멸하리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두 나라가 힘을 합하면 서로에게 좋을텐데… 하긴 대국인 중국이 조그만 나라인 한국의 힘을 빌릴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핵을 발사한 것은 너무했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중국도 핵세례를 받아야 했다. 백 중위가 허탈하게 웃었다. 출입문 쪽에 다시 폭발음이 이어졌다.

   1999. 11. 26  00:15  서울 응암동

  이 진은 주변 건물들이 활활 타고 있는 대로로 나섰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아스팔트까지 녹아내리며 불타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길거리에는 핵폭발과 화재에 놀란 사람들이 뛰쳐 나와 허둥대고 있었다. 이 진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서울시민들은 죽어가고 있거나 정신이 없는 사람, 두가지 뿐이었다. 갑자기 무력감이 몰려 들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차도를 가로질러 갔다.  이 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차도로 뛰어들어 앰뷸런스를 세웠다. 차가 급정거를 하고, 앞좌석에 탄 119 구급요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응급환자가 있다는 말을 기다리던 구급요원은 바빠 죽겠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말을 들은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뒷좌석에 빨리 타라고 종용했다. 이 진은 서둘러 뒷문을 열고 앰뷸런스에 올라탔다. 문을 닫기도 전에 차는 출발했고,  도로에 쌓인 잔해를 그대로 타고 넘어가는 듯 차는 요동이 심했다.

  그녀가 차 안에서 본 것은, 3도 화상을 입어 피부가 녹아버린 환자들이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수액을 주사받고 있는 환자 두 명은 산소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구급요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심전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앰뷸런스가 서고, 구급요원들이  환자들을 차에서 내렸다. 병원 간판을 보니,  역촌동에 있는 서부병원이었다. 병원 내부로 들어가면서 그녀가 본 것은 또다른 지옥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그들의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의사나 간호원이  급히 통로를 지나갈 때 마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환자는 많고 일손은 딸렸다. 이 진은 간호사에게 자신이 할만한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1999. 11. 25  23:20(중국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해방군 해군사령 창 리엔충 상장이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3층에 내려와서 본 것은 비극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깨어서인지 멍청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던 동료들이, 핵을 쓴다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던 동료들이, 어려웠던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동료들이, 중국의 자존심을 외치며 중화민국 통일을 이뤄내고 잠재적 경쟁국의 제거를 소리높여 외치던 동료들이  차디찬 피투성이시신이 되어  들것에 실려나가는 것이다.

  유리창은 박살이 나있고 커튼 곳곳에 총구멍이 나 있었다. 정면 벽의 중앙화면은 방영시간이 지난 TV화면처럼 칙칙대고 있었다. 암살이다. 집단학살이다. 창 상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정치국원에 대한 암살을 두 번이나 막지 못하다니!

  "동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온 정치국 후보위원이 잔뜩 겁에 질린채 창 상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당장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시오.  정치국 후보위원 전원과 북경군구 사령을 호출하시오.  새로운 인원으로 조선공작회의를 계속해야하겠소."

  창 상장이 잠시 창문을 바로보고 말을 이었다.

  "회의실은 지하실이 좋겠소."

  후보위원에게 지시한 창 상장은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정치 경위국 교관(장교)들에게도 몇 가지 지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창 상장이 배석한 부관을 불렀다.

  "이봐.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지?"

  부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상관을 주시하더니 메모한 내용을 전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변에 그의 부관이 없었다면 낭패를 당할뻔했다. 그래도 아직 실수는 하지 않았다. 이제 정식  정치국원은 자신 한사람  뿐이다. 모든 것은 그가  결정하는 것이다.

  "창 상장 동지! 전화가 불통입니다!"

  "아까는 되지 않았소? 나도 전화받고 온건데…"

  "판띠엔(飯店 : 호텔) 내에서만 되고 외부통화는 완전 두절됐습니다."

  "이런! 무전기로 하시오."

  창 상장은 발사한 핵미사일이 제대로 조선에 명중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정치경위국 군관 한명이 헛되이 전화통만 붙들고 있었다.

  "인공위성관제소와의연락이 되나?"

  "안됩니다! 유선전화망이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이동전화도 마찬가집니다."

  "당장 밖으로 나가 전화해봐."

  회의탁자 총서기 자리에 있는 전화벨이 길게 울렸다.  부관이 전화를 받다가 잠시 당황하더니 영어로 대화를 했다. 총서기 자리에 영어로 전화를 하는 자라니!

  "도대체 뭐야?"

  "미국 대통령의 전화입니다. 수십기의 핵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노발대발하고 있습니다. 미국 전역과 태평양사령부, 주일미군이 지금 1급비상사태에 돌입했답니다."

  "뭐? 수십 기? 설마… 3기만 발사하기로 했는데… 우린 3발만 발사했다고 해! 그리고 총서기는 암살 당해 죽었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애드므를 창 디클레어스 듯 피플스 리퍼블리컵 차이너즈 샷 저슷 쓰리 미슬즈. 세크르트리 제느를스 머드. 미스터 프레지든."

  창 상장이 부관이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자기딴에는 미국 군사고문단과도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며 자랑했지만,  미국인은 비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천천히, 그리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찬찬히 듣고  있던 부관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창 상장을 힐끗 보았다.

  "…, 오 너~ 키딩! 창 상장 동지. 틀림없이 50기랍니다. 상하이, 뚠화, 푸젠 등에서 틀림없이 탄도미사일을 조선을 향해 발사했답니다."

  "맙소사! 내가 밖에 잠깐 나갔다 와 보니 다들 죽어서 모르겠다고 전해! 젠장~"

  부관이 자세한 것은 좀 더 조사한 후 통보하겠다고 미국 대통령을 달랬다. 잠시 후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이번엔 정치경위국 군관이 러시아어로 통화했다.

  "위성전화는 되는군. 좋아! 레이더 기지를 불러 봐!"

  부관이 총서기 자리에  있는 핫라인의 옆, 위성전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부관이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부관의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상장 동지! 레이더 기지의 보고입니다. 4곳의 유도탄 기지에서 50여기의 핵유도탄이 조선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실인가 봅니다."

  "그런 미친 짓을! 어서 전화를 줘! 나, 해군사령 창 상장이야! 뭐야?"

  내용을 거듭 확인한 창 상장이 힘없이 수화기를 떨궜다. 50여기의 핵미사일이 틀림없이 조선을 향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50기라면…, 우리가 보유한 핵  탄도탄의 3분의 1이야. 조선이야 당연히 박살나겠지만, 우린 핵 보복 능력을 잃었어. 당분간 미국이나 러시아에 배짱을 부릴 수 없겠군."

  "어떻게 된겁니까?  50여기를 발사하도록  미리 명령이  내려진 겁니까?"

  부관이 물었으나 창 상장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상장 동지!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요?"

  창 상장이 돌아보니 문가에 전업기술군관이 한  명 서 있었다. 계급은 사단장에 해당하는 대교였지만 나이는 상당히  들어 보였다. 중국군에서 기술군관은 진급이 상당히  까다롭다. 최고 승진 가능한  계급은 중장이었지만, 이 계급까지  오른 고급전업 기술군관은 없었다. 대교가 경례를 하며 보고했다.

  "저는 통신전업군관입니다. 이곳의 통신부대장일  뿐만 아니라 북경군구의 통신대장이기도 합니다. 현재 전국의 유선망이 붕괴되었습니다."

  "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이 중차대한 시기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동 중이던 전화교환기  전부가 과부하로 인해 고장이 났습니다. 군부대 전용으로 쓰던 전화교환기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군용무선망이 붕괴되었습니다. 단(團-聯隊)급 이상의 상급부대에서  쓰는 무전기가 모조리 폐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럴 수가… 혹시 적이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누군가가  시험용 회선을 통해 전화국에 설치된 전전자교환기(全電子交煥機)를 원격조작했습니다. 그리고 군용  무선망은 무전기의 암호장치가  파괴되었습니다. 소단위부대간의 무전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어쨌든  이제 전쟁은 끝났으니 다행이군. 동지는 유선망의 복구에 최선을 다하시오. 지금 조국은  외국의 침략에 대해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소."

  "예! 알겠습니다. 동지!"

  창 상장이 계단을  통해 천천히 1층 로비로 내려왔다.  한국이 마지막 힘을 다해 중국의  통신망을 마비시킨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은 끝났다!

  1999. 11. 26  00:25 일본 도쿄도 미나도쿠 롯폰기

  통합막료회의 참가자들은 조용히 정면의 상황판을 응시했다.  모두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중국이  한반도에 최소한 3발의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이 중 최소한 두 발이 핵폭발을  일으켰다. 핵미사일 1기는 고장으로 판단되었다. 전역방어망도 없는 한국이  설마 요격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예상된  상황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상황 때문에 이들은 모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여러 곳에 배치된 미사일 기지들 중에 몇 곳에서 또다시 50여기의 미사일을 발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저정도면 반도 전체가 산산조각이 난다. 조선이 항복하더라도 중국이 얻을 것은 없을 것이라며 방위청장이 고개를 저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땅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제 일본도 방사능 오염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자위대 중앙지휘소는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 지하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듯 참가자들이 천장을 올려봤다. 사토 가쓰미 조사 2과장이 분위기를 깨려는듯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반도 중부지방의 유무선 통신이 완전 두절상태입니다. 조선군 통일참모본부에서는 더 이상 자료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젠 필요도 없겠지만… 이상한건 대륙의 모든 유선통신도 두절됐다는 겁니다. 간간이 무선통신 전파는 잡히고 있지만… 원인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조선이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중국의 전신국을 모두 파괴한게 아닌지…"

  자위대 각 군의 최고지휘관인 막료장들이 모인 이곳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중국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중국과 조선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익을  챙길까 생각하던 그들은 이제  중국의 열도침략을 막는데 부심하고 있었다. 추가 핵발사 전까지는… 이제 일본의 핵보유를 주저할 이유는 전혀  없어지게 되었다. 자체개발이든  밀수입이든,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핵을 보유하기로 결정했다. 방위청장인  요시다 겐스케 중의원(衆議員)이 내각총리를 기다리는지 자꾸 문쪽을 힐끗거렸다.

  "결단의 순간입니다."

  해막장(海上自慰隊 幕僚長) 하토야마  유키오 해장(海將)이 침묵을 깼다. 그는 뜻밖에도 전혀 예상밖의 발언을 했다.

  "우리도 육상자위대를 조선반도에 상륙시킵시다."

  "정신이 있소? 중국이 핵을 썼단 말이오. 그것도 수십발이오."

  항공자위대 야마다  마사오 공장(空將)이  유키오 해장을  힐난했으나 유키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중국은 결코 자위대에게 핵을 쏘지 못합니다. 국제여론으로 압력을 넣으면 됩니다. 중국은 대동아전쟁 이후 최초로 핵을 실전투입했습니다. 그것도 대량으로 말입니다. 조선의 비참상은 곧 세계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겁니다. 유엔을 이용합시다.  미국이나 러시아도 동참할 것이 분명합니다."

  "국제여론으로 핵불사용  압력을 넣고 우리가  반도로 진공한다는 거요?"

  오부치 게이조 통막(통합막료회의)의장이 유키오의 발상이 신기한 듯 되물었다. 듣고만 있던 고마쓰 미도리 육장(陸將)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었다. 중국에 의한 핵미사일 추가발사라는 변수는 있었지만…

  "그렇죠. 핵을 쓸 수  없다면 중국은 우리에게 도전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전력은 바닥났습니다.  대동아전쟁 때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조선에 진주했듯이, 우리도 조선이 항복하자마자  진주하여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는 겁니다. 최소한  반도의 절반은 얻을 수 있습니다. 피한방울 안흘리고 말입니다."

  "무슨 소리요?  중국군이나 한국군과 국운을  걸고 피흘려 싸워 기껏 방사능에 오염된 땅이나 얻자는 거요? 이건  무의미한 침략이오. 쓸데없는 도박이란 말이오."

  듣고만 있던 야마다 마사오 공장(空將)이 나섰으나 이미 대세는 참전 쪽이었다. 오부치 의장이 안타까운지 혀를 찼다.

  "중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일본에 안전지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고마쓰 육장이 나서서 반대를 무마하려는 순간 손님,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중앙지휘소의 주인이 나타났다.

  "총리 각하!"

  통막 참가자들이 전원 기립하여 수상을 맞았다. 자위대 중앙지휘소가 생긴 이후 최초로 일본 수상이 자위대를 지휘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히데키 요시오. 자민당의 중간보스였던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입문한지 20년만에 그는 수상이 되었다. 일본에 우익의 물결이 넘치는 기회를 이용하여 3개 당과 연합, 2년째 집권하고 있으며, 아직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가 기용한 대신들은 모두 우파의 거두들이었다.

  "어떻게 되었소? 오는 중에 내각조사실로부터 대충 보고는 받았소만. 방금 중국이 추가로 핵을 발사한 것까지…"

  코트를 당번병에게 맡기고 미리 준비된 가운데 자리에 앉으며 총리가 물었다.

  "조선에 파병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각하."

  고마쓰 육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오부치 의장이나 야마다  공장이 나서려다가 요시다 방위청장이 눈빛으로 만류하자 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들이 나서더라도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훌륭하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조사 2과의 훌륭한 활약에 대해 치하하는 바이오. 세부작전계획은 있소?"

  수상의 칭찬은 방위청 조사 2과가 내각조사실과 합동작전으로 국제무기상을 통해 핵탄두를 반입한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눈치를 챈 오부치 의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평가는 한마디로 집약되었다.

  ‘미쳤다!’

  "아직 없습니다. 총리각하. 중국의 핵공격은 워낙 돌발적인 일이라서… 하지만 전부터 작성한 것이 있습니다."

  하토야마 해장이 자신의좌석 앞에 있는 화면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누르자 중앙화면에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도가 나타났다.

  "부산과 진해를 일단 접수하기로 하였습니다. 부산은 조선 제 2의 대도시이고, 진해는 해군사령부와 기지가 있는 곳입니다. 해상이나 지상의 저항은 미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만 공군은 숫적으로  불리하지만 성능은 우리가 훨씬 우세합니다."

  "좋소. 공격개시일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미 출동태세가 갖춰졌습니다. 예비역동원은 이미 끝났으며, 지원병 증원과 기술병 징병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일반 동원병력은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이 더 이상 핵을 쓰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즉시 개전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작전명령 1호를  재가해 주십시오."

  고마쓰 육장이 단말기 화면을 손가락으로 눌러 준비상태를 계속 보고했다. 육상자위대 병력배치  40만, 훈련 중인 병력  100만, 동원소집통지 5백만! 2차  대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벌써 600만 병력을  전투준비에 투입했다.

  "명령 1호라… 벌써 그렇게 됐소?"

  "예. 투입은  이미 된 상태입니다만,  아직 작전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소. 실행하시오."

  오부치 의장은 자신을 빼돌리고 이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불안했다. 그는 제발 일본국민이 또다시 고통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마쓰 육장이  전화로 예하부대에 뭔가 지시하고  나자 다른 전화벨이 울리고, 중앙지휘소 소속의 이등육좌가 저놔를  하토야마 해장에게 넘겼다.

  "음… 그래. 알았어."

  하토야마 해장이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오?"

  수상이 묻자 해장이 약간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주일미군 사령관  제임스 중장이 이치가야(市谷)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답니다."

  이치가야는 1997년에 방위청이 신청사를 지어 이전한 곳이다. 그곳은 2차대전 때의 대본영, 참모본부, 육군성, 육군사관학교가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일본은 그곳에 중앙지휘소와 정보본부를 설치했는데, 사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후후. 여우같은 제임스가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변장이 훌륭했군. 내 역할을 맡은 사람은 누구요?"

  "내각조사실 소속인 일등해좌  사사끼입니다, 각하! 각하를 닮아 미남입니다."

  상황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군은 이미 허수아비였다. 이제 중국의 핵미사일에 의해  한국이 제거되고, 일본이 한국의  일부를 점령하면 중국과의 대결에서 결코  불리하지 않겠다는 낙관론이 퍼졌다.  역시 남의 전쟁에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익만 챙기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총리 각하! 화면을 보십시오!"

  중앙화면을 보던 야마다  공장(空將)이 손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그는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섰다. 수상과 다른 참석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응? 저건?"

  "이럴 수가!"

  중앙화면에 나타난 탄도탄의 진로와 예상목표점은 한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중국 곳곳에서 출발한 붉은  선이 한반도 중부지방을 향하여 이동하고, 에상폭표지점으로 표시된 보라색 X자 50개가 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목표지점은 어딘가?"

  하토야마 해장이  관제원들에게 소리쳤다. 중앙화면  오른쪽에 목표지점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충주호? 호수란 말인가?  주변에 대도시나 군사목표는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요시다 방위청장이 막료장들의 얼굴을 살폈다.  의혹이 가득한 얼굴들에 은근하게 공포가 번졌다.

  "혹시 조선의 책략…?"

  "조선군이 중국의 핵기지를 점령해 미사일을 조선으로 발사했다는 거요?"

  "가능합니다… 핵물질을 빼돌리기 위해서라면…"

  야마다 공막장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요?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핵재처리 기술, 기폭장치, 운반장치가 필요하오. 미사일에서 순도 높은  핵물질을 꺼내더라도 기폭장치와 운반체는 어렵소."

  요시다 방위청장이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한국의 핵보유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해야 했다.

  "기폭장치는 국제무기거래시장에  나와 있고,  운반체는 로동미사일을 쓰면 됩니다. IAEA나  미국에서 가장 감시를 심하게 하는 것이  핵물질입니다. 다른 것은  웬만한 나라에서는 충분히 만들만한  기술이 있습니다."

  공막장의 설명을  다른 참가자들은 믿고  싶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99. 11. 26  00:30  함경북도 혜산, 압록강변

  "빨리! 신속하게 이동해!"

  김 재호 대장이  강변 백사장 위에 직접 나서서 호각을  불며 재촉했다.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도강했다. 부교가  건설되며 보병도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북쪽 산등성이 너머 섬광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김 대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 중국군과의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은은하게 폭음이 울려 퍼졌다.

  "멍청이들!"

  차가운 강바람에도  꼿꼿이 서있는 김  대장과 달리 윤 민혁  대위는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도 덜덜 떨고 있었다. 각종 변종(variation)의 K-200 보병전투차들이 BV-206 다목적전술차량을 이끌며 천천히 강을 건넜다. 김 대장이 옆을  지나가던 박격포차를 세운 후,  뒤에 딸린 다목적차량 위에 올라타며 외쳤다.

  "참모장! 사령부도 빨리 전진이동하시오."

  허 석우 대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경례를 하고 본부로 돌아갔다. 보병전투차가 이동을  시작하자 윤 대위가 차량을  따라 뛰며 물었다.

  "사령관님. 본부 지휘차에 타지 그러십니까?"

  "싫다미~ 내는 전진하는 병사들이랑 같이 가고 싶은기라. 내 엄다꼬 될 일이 안되나. 그카고… 니는 와 안타노?"

  윤 대위가 바로 앞에 보이는 압록강을 보며 투덜거리더니 상관이 탄 다목적차량이 아니라 박격포차에 올라탔다.

  "윤 대위! 이쪽으로 안 오나? 니는 겁쟁이가?"

  "사령관님! 거긴 병력이 타는 곳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절마가…"

  김 대장은 강이 가까워 오자 할 수 없이 보병전투차로 옮겨탔다. 다목적차량은 위가 평평해서 불안했던 것이다. 졸지에 육군참모총장과 동승하게된 현역 사병들이 바짝 쫄고,  윤 대위가 이들을보며 씨익 웃었다. 사령관이 헬멧에  달린 헤드셋을 통해 뭔가  보고를 받는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김  대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보병전투차가  천천히 강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탄  차량 외에도 수많은 전차와 보병전투차들이 강을 건너고, 가교전차에 의해 설치된 가교와 긴급가설된 부교를 통해 보병들이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넜다.  한민족의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나선정벌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윤 대위가 불안한 듯 자꾸 강물쪽을 흘끗거렸다.

  "결국 당하고 말았군."

  "뭘 말입니까?"

  오랜만에 진지해진 김 대장의 얼굴을 본 윤 대위는 불안해졌다. 항상 낙천적이던 김 대장은 전쟁이 터진 후에도 곧잘 농담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어느 때와 달리 진지해 보였다.

  "핵폭탄에 당했다고! 몽땅 날라간거야! 서울과 평양, 통참까지 몽땅! 육본과 국방부, 통일참모본부까지 연락이 안된다는 내용이야"

  김 대장이 신경질이 났는지 헬멧을 벗어 보병전투차의 벽을 마구 두들겼다. 윤 대위와 사병들은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진겁니까? 공격을  연기해야 하는거아닐까요. 정부에서 항복할지도 모르는데…"

  윤 대위는 전쟁에 졌다고만 생각했지만, 서울에 집이 있는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 가족의 생사가 걱정되는 것이다.

  "웃기지마! 내는  공격중지 명령을  받은게 아냐. 진격명령은  유효하다."

  "그러다가… 예하부대에  피폭사실을 알릴까요?  아니면 당분간 비밀로…"

  윤 대위는 공격부대가 서울처럼 핵공격을 받을까 불안해졌다. 중국에도 상당한 숫자의 전역핵, 전술핵이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피폭당한 피스함대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도 큰 문제였다. 김 대장이 악이 받쳤는지 윤 대위에게 고함치듯 말했다.

  "알려! 서울과 평양에 있던 가족들이 몽땅 죽었다고 장병들에게 알리라구!"

  1999. 11. 26  00:35  대전, 정보사단

  정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핵미사일의 궤적  앞에 정보사단장인 이 재영  중장은 얼어붙었지만 이번 작전을 책임진 양  석민 중장과 다른 팀원들은 모두 환성을 질렀다. 내용을 잘 모르는 최 창식 국무총리, 지금은 대통령 권한대행인 그는 처음에 깜짝 놀라다가 다른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서,  그리고 양 중장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기뻐했다. 거의  불가능할 줄 알았던 한국군의 승부수인 이 작전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상황실장 나 영찬 대령이 이제야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개전초기에  즉응태세를 갖추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여 죄책감에 쌓여 있었는데, 이제야 그 짐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된 것이다.

  "됐어. 이젠 됐어. 제천을 연결해서 양 중장님께 드려!"

  "예! 대기중이었습니다."

  나 대령의 지시로 통신장교가  헤드셋을 양 중장에게 넘겼다. 통신장교는 통화내용을 다른 팀원들도 들을 수 있게  개방시키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강 대령이오?  큰일났소. 보고 있었겠지만  지금 그쪽으로 핵미사일 수십발이 날아가고 있소."

  [으악!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제발 살려 주십시요!]

  "윽… 강 대령, 즉각 회수해서  그곳에 넘기시오. 숫자는 아직 모르오. 우린 레이더 위성이 없으니까… 숫자가 확인되면 다시 연락 드리겠소."

  양 중장은 강  대령이 한술 더뜬다고 투덜거렸다.  양 중장의 내심은 사실 편치 않았다. 확인된  바로는 중국 곳곳에 있는5곳의 핵기지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했다. 20여팀 중에서 나머지는 모두  실패한 것이다. 하긴, 작전을 성공시킨  팀도 당연히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만주의 핵기지를 공격한 팀원들만이라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버텨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들을 구하지 못하면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맡기로 한 약속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소? 운반체야 북한 미사일을 쓴다지만, 기폭장치는 개발이 상당히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오?"

  최 권한대행이 묻자 양 중장이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심각하던 최 권한대행의 표정이 확 피었다.

  "과연…  기폭장치는 계수기에  걸리지도 않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중에 정치적으로 보답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압력도 줄일 수 있고… 각하!"

  양 중장은 최 총리를 대통령으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건 신경 쓰지도 않던 최 총리는 대답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1999. 11. 26  00:40  충청북도 제천시 신리

  "옵니다! 30초 전!"

  "그래, 대단한 손님들을 맞으러 나가야겠군."

  레이더 담당 하사관이 외치자 강 만일 대령은  헬멧을 쓰고 강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밖으로 나갔다. 예정시간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틀림없이 탄도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대전 정보사단과 연계된 상황판에는 약 50기의 핵미사일 진로가 표시되고 있었다.

  강 대령이 망원경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노란 빛줄기가 쏘아오고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의김  박사가 지휘소로 쓰는 임시 가건물 밖으로 따라  나왔다. 특별훈련을 받은  해군 UDT 대원들은  강변에서 이미 승선대기 중이었고, 충주호에  있던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예정낙하지점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력에서 동원된 조명차들이 호수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긴급상황에 대비하여 구조용 헬기들이 이륙준비를 마친채 대기하고 있었다.

  "멋지군요."

  김 박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강 대령이 망원경을  내리며 동감을 표했다. 박사라면 백발이  성성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노인들로만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김 박사는 흐리멍텅하게 생긴 30대 초반의 젊은이었다. 이런 사람이 한국  핵물리학계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째 잠을 못잤는지 부시시한 얼굴에 머리카락은 거의 까치둥지 같았다.

  "그렇죠? 김 박사님. 근데 정말 방사능이 유출되지 않겠습니까? 여긴 아시다시피 상수도 보호구역이라서요…하하."

  강 대령은 이 상황에서 수원지의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리에 끝나면 상수도 보호구역의 방사능 오염 여부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시민들이 생수를 사서 마시지만,  아직도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부는,  그리고 정부에 소속된  국군은 상수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 충격으론 핵물질을  담은 용기가 파손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심  40미터이니… 빠른 시간 내에  탄두에서 핵물질을 분리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쪽은 이미 준비됐습니다. 중앙고속도로는 통제됐겠죠?"

  "물론입니다. 수송로의 경계태세도 완벽합니다. 아! 왔습니다."

  밤하늘을 가르며 시뻘건 불덩이가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유성이 점점 커지더니,  형체가 형성되었다. 탄두는  신리와 충주호의 섬인  양평 사이의 물속으로 낙하했다.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호수에 떠 있던 배들이 심하게 요동했다. UDT 대원들이 고무보트를  가동시켜 낙하지점으로 향하고, 크레인같은 중장비를 실은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대기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직 대기,  대기. 손님들이 좀 더  올거란 말야! 진정하고 계획대로 해!"

  강 대령이 헤드셋에  연결된 무전기와 지휘소 스피커로  대원들을 제지시켰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미사일이  이곳에 올지는 몰랐다.  그가 알기론 중국의 핵기지마다 약  10기의 핵미사일이 있다고 들었다. 방금 정보사단으로부터 받은  연락으로는 이곳을 향하는 핵미사일의  숫자는 약 50기가 확인되었다고 했다.  20개의 핵기지 공격팀 중에 5~6개 팀이 성공한 것이다. 의외로 높은 성공율이었다.

  다시 빛줄기가 이쪽으로  날아왔다가 역시 물 속으로  낙하해 들어갔다. 다시 보아도 그 장면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또 다시 미사일이 날아왔다. 강 대령은  혹시나 핵미사일 중의 하나가  폭발하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졌다. 절대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하나라도  폭발하면 이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다. 충주와 제천 인근에 거주하는 수십만의 인구와 상수원이 소실되고,  기껏 얻은 핵탄두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은 핵미사일이  과연 폭발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다.

  "어휴~ 엄청 많군요."

  "음…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핵강국이 될 것 같습니다."

  김 박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핵보유국이 되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압력을 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탄두에서 핵물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감독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를 처리하여 다른 미사일 탄두에 넣는 것은 다른 기술자의 일이었다. 방사능물질 처리용 차량들이 비상등을 깜밖이며 구석에 몰려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1999. 11. 26  00:5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작전 장마. 성공리에 종료되었습니다. 탄두는 모두 회수,  플루토늄을 분리하여 그곳에 보냈습니다.]

  대전 정보사단에서  화상통신으로 보고하는  양 중장은 특유의  멋진 머리결이 기름기에 번들거려 보였다. 하룻사이에 나이도 상당히 들어보이고, 무엇보다도 피로에  지쳐 있었다. 이 종식 차수가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고 보고를 계속 들었다.

  "수고 했수다. 서울 상황이레 어떻소? 참, 권한대행 각하는 계시오?"

  [권한대행 각하는 반강제적으로  숙소로 보내드렸습니다. 서울은... 저희쪽도 자세히 모르고 있습니다.  수도권 인근부대와 간간히 통신이 되고 있긴 합니다만,  전 병력이 피해자 구조와  긴급복구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주진공작전의 순조로운  진행과 작전장마의 성공에 고무되었던  참모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서울의 피해상황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평양 쪽에서 개성으로 출동한 부대의  보고로는, 개성시 자체가 완전 소멸했다고 했다.

  "행복해야 해. 넌 반드시 좋은 사람 만나….

  다시는 나같은 남자 만나지 마. 제발 행복해야 해…"

  갑자기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이 차수와 참모들이  문쪽을 바라 보았다. 축 늘어진 차 영진 준장이 이 소라의  ‘난 행복해’라는 노래를 처량하게 부르고 있었다.

  "차 준장!"

  정 지수 대장이 차 준장을 나무라다가 차 준장의  눈이 풀린 것을 보고 놀랐다. 술에 취한 듯한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방금 평양 방송  긴급보도를 보았습니다. 서울하고 개성이 날아갔다면서요? 서울엔…"

  "이봐, 차  준장! 서울엔 내 가족도  있었소. 노모, 아내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년이 있단 말이오!  차 준장만 가족을 잃은 게 아냐! 빌어먹을~"

  정 대장이  벌떡 일어나 차  준장에게 흥분한 듯 외치더니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정  대장의 어깨가 들먹거리고 있었다. 차  준장이 문을 기대며 주르륵 흘러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차 준장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축 쳐지며 중얼거렸다.

  "네, 죄송합니다. 근데  이 전쟁이 서울시민을 몽땅  죽이더라도 계속 수행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국민을 죽이는 정부와 군대라… 언젠가 꼭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999. 11. 26  01:00  함경북도 혜산 상공

  "나-8 지점에  대대규모의 전차대로  추정되는 병력이 이동중입니다. 진로 2-1-5."

  "파-36 지점에서 잦은 무선 교신. 적 포병대로 추정됨."

  2군소속의 항공 관제관인 육군 대령 한사람이 아퍼레이터들이 분석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격의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공지공용 전자전기인 J-STARS기로부터 얻은 정보는 어차피 2군 사령부에 동시에 전송되고 참모부에서 다시 공격순위를 설정하겠지만, 자신의 임무는 가장 위협이 되는 적 병력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것이다.  사령부의 참모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가 되겠지만…

  J-STARS기는 한국에  2대가 있었다. 한 전선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모두 4기의  전자전기가 필요했지만 미국은  더 이상의  J-STARS기를 한국에 판매하지 않았다. 4개팀이  교대로 2기의 전자전기를 24시간 전선상공에 띄웠다. 정비팀만  죽어났다. 부속품이 부족해 멀쩡한  수송기에서 부품을 빼내기도 했다. 구멍만 맞으면 뭐든지  좋았다. 이 비싼 전자전기는 정비불량으로 언제 추락할지 모를 상황까지 되었다.

  1999. 11. 26  01:10  함경북도 혜산

  주로 동원예비군으로 구성된 57사단  소속 병사들이 카 라디오, 동원된 민수용 사륜구동차에 장착하기 위해  암호해독장치가 내장된 라디오를 통해 2군사령부의 방송을 들었다. 비장한 곡조의 장송곡이 1분 정도 흐르더니 북한 출신  여성방송원이 다소 과장된 억양으로  평양과 서울의 소멸을 알렸다.  일순 끝없이 이어지던 차량대열이 딱  멈춰서고, 병사들이 이 방송에 귀를 귀울였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 욕지꺼리가 섞인 고함이 외쳐졌다.

  라디오에 행진곡풍의  음악이 나오더니 여성방송원이 원쑤를  무찌르자며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울에 집이 있는 이 동원예비군들은 평안도 억양이 거북하기는 했지만  방송에 나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처음에 겁에 질리며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이제 더 이상  잃을게 없다는 생각인지 모두들 이를  악물었다. 앞차를 재촉하는 클랙슨 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행군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같은 동원사단인 61사단은 허겁지겁 57사단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로 전라남도에 거주하는 동원예비군들이 주력인 61사단 병사들은 어제만 해도 남쪽 끝에서 북서쪽 끝, 다시 북쪽 끝까지 왔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이제 상황은 또 달라졌다.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공하는 것이다. 이들도  서울이 피폭당했다는 방송을 들었지만,  그래도 고향에 핵이 떨어지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통일한국군 최고지휘부는 서울피폭에도 불구하고 항전을 계속한다며 병사들간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1999. 11. 26  01:30  서울 용산, 국방부

  캄캄한 지하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홍 대통령은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유사시 강력한 적의 폭격에도  버틸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국방부 지하벙커가 핵미사일에 직격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공무원은 뇌물 먹고, 기업주는  부실공사하고, 현장감독은 자재 빼돌리고 하는 등, 군부독재 시절의  총체적 부실이 국방부 청사라고 해도 예외일리는 없었다.

  국무위원과 합참의장 등  비상국무회의 참석자 중에서 절반이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국방부 소속으로서  이 상황실에 배치된 현역 군인도 4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약간 배가 불룩해 보여서, 임신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던 통신장교인 여군 소령도  점호에 응답하지 않았다.

  ‘잔인하다! 우리는 세상의 빛 한 번 보지 못한, 성장하여 어떤 사람이 될 지도 모를 태아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분노하던 홍 대통령은 전쟁을 막을 수  없었을까, 최소한 서울에 대한 핵공격을 막을 수 없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모든 걸 양보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으로서 영토를 침략국에  할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영토보다는 국민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무너진 지하에  갇힌 사람들은 이제 조용히  구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무너진 건물잔해 밑에  깔린 희생자들의 상황이 이랬을까? 핵폭발의  충격파에 의해 순간적으로 붕괴된 이곳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너무  무기력했다. 누군가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위쪽에서는 구조작업이 시작된 듯한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전황이 더 걱정되었다.

  "항복하지 말아야 하는데…"

  "총리는 절대 항복하실 분이 아닙니다. 각하!"

  "무리하지 마시오."

  대통령은 크게 부상을 당하고 바로 옆자리에 누운 내무장관이 걱정되었으나 자신이 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아직도 오른쪽 다리가 무너진  천장 잔해에 깔린 내무장관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이제 고통도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대통령은 장관의 희미한 미소를  보는 듯했다. 홍 대통령은 장관에게 자꾸  말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상황에서 할 말도 없었다.

  "지 부장은 계시오?"

  홍 대통령이 어둠 속으로  외쳤지만 지 효섭 안기부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1993년, 김 영삼 전  대통령이 그동안 관례적으로 참가하던 안기부장의 국무회의  참석을 금지했는데, 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이 안기부장을 장관 이하인 부장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농담이 돌았다. 홍 대통령은 지 효섭 안기부장을 지부장이라며 놀렸는데, 지금은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공안 출신이고 약간 극우성향이긴  했지만, 안기부가 국내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지 부장의  공이 컸다. 대통령은 안기부가 전쟁전까지 경제정보를 집중적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중국에 파견된 요원들도 대부분  경제정보 수집이 주목적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도 안기부는 국제무기밀무역상으로부터 핵탄두 몇 개와 기폭장치 다수를 입수하는  공을 세웠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몇 개 국가에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얻어낸 성과이긴 하지만…

  작전 장마의 결과는  아직 모르겠지만, 상당수의 안기부원들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작전  결과나,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이들 대부분이 희생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홍 대통령의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지 부장의  죽음은 대통령의 마음을 허전하게  했다. 대통령과 반대편에 설 수  있다고 당당하게 자신을 협박하던 지 부장,  홍 대통령은 그  자리를 메꿀 사람이 드물다며  아쉬워했다. 사실, 아쉬움을 떠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대통령은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까가  걱정되었다. 그의 머리 위를 육중한  건물잔해가 누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환청인지 멀리서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병대가 왔나봅니다!"

  대통령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국방장관이 외치자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환성을  질렀다. 국방장관은, 독산동에  있는 공병단에 미리 출동준비를 지시한  것이 불행히도  적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모르게 내린 명령이었다.  대통령은 틀림없이 시민을 먼저  구하라고 할 것이므로.

  "하하~ 이제 각하는 사셨습니다. 다행입니다."

  내무장관이 고통을 이기며 억지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소리요? 장관도 사셔야지요."

  "저는 틀렸습니다. 최소 몇시간은 더 버텨야 하는데…. 참.  영부인께서는…"

  내무장관은 이제야 청와대가 핵폭발에 말려들고,  영부인은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을  기억했다. 아무리 방공호로 피난해도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음… 아무래도 새장가 가야될  것 같소. 이 나이에 누가 나에게  시집올지…쩝."

  대통령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했다.  내무장관의 말에 뭔가 대답을 해야 된다는 의무감에서였다.  대통령과 영부인은 잉꼬부부로 소문이 났다. 정도가 지나쳐 대통령이 공처가라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영부인인 하 선영 여사는 정치나 이권에는 결코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영부인이 당연히 참가하는 것으로  관례가 되어 있는 여성연합회 모임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이  국민들이 대통령을 신뢰하는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 국방장관이 어색한 농담에 장단을 맞췄다.

  "지난번 파주에 그 과부집 있잖습니까. 전에  모내기 하고 간 곳 말입니다, 각하. 하하하~"

  대통령은 국방장관이 아무래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지난 여름에 국무위원들과 함께 모내기 일손돕기를 마치고 흙묻은 작업복 차림 그대로 근처 선술집에 간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단체손님을 맞아 신이 나서  시중을 들던 과부가 대통령을 몰라보고, 그  나이에도 귀엽게 생겼다며 연애하자고  찝적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과부는 자신이 우아한 이혼녀라고 박박 우겨댔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던데요. 에고~  지금까지도 붙잡혀  살았는데, 또요?"

  위에서 중장비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  소리가 지하까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구조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위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생존자들이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삼풍백화점 매몰자 중에서 섣부른 구조작업 때문에 희생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1999. 11. 26  01:50  중국 지린성 창빠이(長白) 북방 3km

  "흠… 전방에 적 보병 1개 중대라… 시험용으로 적격이겠군."

  김 재호 대장이  망원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제  2군의 선두부대인 30사단은 백두산이 주봉인 장백산맥 기슭에  있는 안투(安圖)현을 향하고 있었다. 안투현은  지린성 연변조선족 자치구에 포함되어  있는 산악지대이다. 가는 길이 아직은 평원이라 전진은 수월하고, 아직 적의 저항도 크지 않았다.

  선두부대는 도시나 적 병력 등 전술적 목표를 무시하고 시속 60km의 빠른 진군속도를 유지했다.  선두부대가 적을 만나 전투에 돌입하면, 다른 후속부대가 교대로 전진하는 방식으로 부대 평균 시속 40km 이상을 유지하여 백두산을 우회한다는 것이 작전의  요체였다. 30사단은 기계화사단답게 기동성이 높아 이 임무에 적합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탄했다.

  압록강변의 국경도시인 창빠이 북쪽의 이 넓은 개활지에는 낙오된 중국 인민무장경찰 1개 중대가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2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선두  공격부대가 남기고 간 중국군의  잔존부대였다. 공격헬기인 코브라의 공격을 받았는지  병력수송용 해방트럭 7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이들은 무장이  비교적 빈약한 편이지만 일반  보병부대로 공격할 경우  이쪽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윤 민혁 대위가 나섰다.

  "그렇습니다. 적은  완전 포위되었지만 아직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있습니다. 아군병력은 대치만 시키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교체투입할까요?"

  김 대장이 망원경을 넘기고 말했다.

  "그래."

  윤 대위가 무전기로  지휘관들을 불렀다. 잠시 후  전방에서 대치하고 있던 전차중대가 뒤로 물러나고 이 자리를 새로 편성된 자동차화보병소대가 메꿨다. 주로 보병전투차와 장륜형  보병수송장갑차들이 아니라 약간 개조한 차량 위에  무기를 탑재한 민수용 사륜구동차들이 몇대 나섰다. 이 빈약한 모습을 보고 김 대장이 혀를 끌끌 찼다. 중국군과의 거리는 약 1.5km, 중국군이 발사한 박격포탄이 이들 부근의 눈밭 곳곳에 작렬했다.

  "콰콰콰콰콰!!!"

  투입된 보병소대에서  일제사격을 실시했다. 박격포탄이  중국군 머리위로 떨어지고 벌컨과  고속유탄이 방어선 곳곳에 작렬했다.  강력한 중기관총과 분대지원 기관총탄이  중국군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접근할수록 한국군의 화력이 강해졌다. 전투시작 3분, 박격포탄 60발이 소요되었을 때 중국군  참호에서 백기가 올랐다. 곧이어  한국군의 사격이 멈췄다. 겁에 질린 중국군들이 부상자들을 들쳐  메고 참호를 기어 나왔다.

  "대단하대이…. 억수로 대단하대이!"

  눈을 둥그렇게 뜬 김 대장이 서류를 들고 조금전 공격에 참여한 자동차보병소대의 장비를 다시 훑어 보았다.  군용장비치고는 싸구려로 구성된 부대가 의외로 화력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임 무 차 종 탑승병력 탑재무기
지휘,통신 KM-410 3 5.56밀리 K-3 분대지원기관총
정찰 사륜구동 3 12.7밀리 K-6 중기관총, RPG
보병전투차 K-200 3+7 12.7밀리 M2 HB 기총, M-60
보병수송 사륜구동 7 K-3
화기 사륜구동 3 K-6, K-4 고속유탄발사기

대공

사륜구동

3

SA-9 Gaskin 지대공미사일,
또는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 K-3

대전차 사륜구동 3 ATGW Sagger(단발형), K-3
공지양용 KM-45 트럭 3 20밀리 벌컨 대공포
박격포 사륜구동 3 60밀리 박격포, K-3
탄약차 사륜구동 2 K-3
보급 및 정비 KM-25 트럭 3 K-3
연락 250cc 오토바이 1  

차량 12량 : 보병전투차 1량, 군용 지프 1량, 트럭 2량, 민수용 사륜구동차 7량, 모터 사이클 1대

병력 계 : 1/43

보병 장비 세부내역 별첨

참고  KM410 경차 — 지프형 군용 사륜구동차 (아시아자동차 제작)

      KM45  트럭 — 1과 1/4톤 트럭 (아시아자동차 제작)

      KM25  트럭 — 2.5톤 트럭 (아시아자동차 제작)

      사륜구동차  — 민수용, 2~9인승. 일부 컨버터블, 일부 무개 개조

  "어떻습니까? 역시 화력과 기동성 위주의 편제입니다."

  윤 대위가 은근히 자랑했다. 김 대장은 애초에 기동성만을 추구했다. 보병소대는 최일선 소총부대에 맞게, 하차하여 전투를 수행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개조나 무기탑재에  쓸 시간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즉각 투입을 생각했으나, 윤  대위가 무기탑재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병사들은  새로운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나 아직은 조작이 서툴렀다.

  이런 부대에 필요한 장비와  인원의 관리가 너무 복잡하여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다양한 장비와 무기, 보급품은  바코드로 관리하였다. 군수참모가 마치  백화점 차린  것같다며 투덜대긴 했지만,  병참업무가 상당히 간략화되고  표준화되었다. 그래서 예비부품을  상대적으로 상당한 수준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라. 니 잘났대이~ 니가 육참총장하믄 딸딸이까정 군용으로 쓴다카겠대이."

  "딸딸이는 일본 자위대가 하는 거고,  그걸 표준어로 경운기라고 합니다. 총장님, 아니, 사령관님. 경운기라… 쓸 데가 있겠는데요?"

  경차량 몇 대로 구성되어 독립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도록 편성된 예는 러시아나 프랑스의  공수부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공수가능한 경장갑차량 몇  대가 대공, 화력, 대전차 등의  임무를 분담한다. 그러나 보병이나 보급까지 차량에 의존하고,  1개 소대가 완전히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편성된 부대의 예는 없었다.

  윤 대위는 여러  가지로 무기체계를 조합하느라 골머리를  싸맸다. 너무 다양한 무기체계가 소단위 부대 내에 있으면 화력집중이나 작전수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게다가 대전차 및 대공미사일은  한국군에 그렇게 많지 않아  충당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러시아로부터 소형 대전차무기와  소형 대공미사일을 대량으로 밀수입하자 이런 조합이 가능해졌다. 화력도  기존의 보병소대보다 당연히 몇  배 강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기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 단지 새로운 무기체계에 적응해야 되는 보병들이 당황했지만, 러시아제  무기는 의외로 사용하기 간편했다.

  "팡! 파바바~"

  "뭐야?"

  조용하던 밤하늘에 총성이 울리자 김 대장이 움찔하더니 똑바로 서서 총소리 나는  곳을 보고, 윤  대위는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땅바닥에 엎드렸다. 윤 대위가 허겁지겁 헤드셋을  통해 자동차화소대의 소대장을 불렀다.

  "이 중위! 무슨 소리요!"

  [사병들이 포로들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이런! 포로학살은 국제협약에서 금지된 것을  모르오? 즉각 제지하시오!"

  [지금 다들 흥분한 상태라서...  동원예비군들이 총검으로 포로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맙소사! 어떻게든 제지하시오!"

  "내버려 둬."

  "네?"

  윤 대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김 재호 대장은 묵묵히  학살현장을 멀리 지켜보고만 있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죽음과 피, 광기가 드넓은 벌판을 메웠다.

  "저들을 당장  체포해서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합니다.  전시규정을 위반한…"

  "내버려 두라고! 저들은 복수할 권리가 있어."

  "무슨 말씀입니까? 중국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저들은 무장해제된 포로들입니다. 양민학살과 다름없습니다!"

  "시끄러! 자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만 해!"

  뜻밖에도 김 대장이  흥분을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윤  대위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김 대장이 휙  돌아서서 지휘차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윤 대위가 학살현장을 돌아보니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100여명의 포로가 있던 자리에는 널부러진 시체만 있었다. 병사들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윤 대위가 김 대장을 보니, 김 대장은 지휘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윤 대위가 천천히 지휘차쪽으로 걸어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합리적이던 김 대장이 저렇게 변하다니…

  "장군님…"

  1999. 11. 25  11:00(워싱턴 표준시)  미국 워싱턴, 백악관

  미국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놀라운 정보가 회의참석자들을 쉴 새 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대통령 제임스는 계속되는 상황변화에  놀라고 말았다. 서울과 개성에  핵폭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던 그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것은, 제 3세계에까지 핵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인류의 미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핵미사일 재료가 세계 무기시장에서 암거래된다면,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던 미국의 평화가, 미국의  국가정책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미국  시민들의 생명이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워싱턴 정도의  작은 도시는 20킬로톤급 핵폭탄 한 발에 날아갈 것이다. 제임스가 전율했다.

  "맙소사! 한국이 핵강국이  되었소! CIA나 DIA는 상황이 다  끝난 이제야 한국이 기폭장치를 밀수한 사실을 알았단 말이오?"

  "할 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CIA의 매퀄리스 국장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벨로루시(백러시아)와 카자흐공화국의  핵미사일에 대한 감시는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설마  완제품 상태가 아니라 기폭장치만  분리해서 한국에 넘겨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빌어먹을 벨로루시! 빌어먹을 카자흐스탄!"

  "한국에는 90년대 초에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들어온 과학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이번에 기폭장치의 조립에  동원된 모양입니다. 한국이 핵보유국이 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 군사적압력을 가해 기폭장치의 회수를 노린다면? 동해에 투입된 미국 항모전투단이 핵미사일 한발에 전멸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는 그런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친 짓! 제기랄, 창 장군을 연결하시오."

  제임스는 매퀄리스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핵확산방지라고들 하는데, 자신의 임기중에 중소국가의 핵보유를  막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핵을 보유한 국가는 5개 안보리 기존 상임이사국과 인도와 파키스탄을 외에도, 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15개국으로 늘어났다. 이런 국제 정치상황과 핵기술의 일반화에 따라 그만큼 핵확산을 방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  교전국인 한국이 핵을 보유하게 된다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전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화상통신은 안됩니다. 핫라인으로 연결했습니다. 각하."

  NSA 소속의 젊은  해군 중위가 한참 지난 후에 작은  마이크를 대통령에게 건넸다.

  "통신연결이 안되다니, 중국은 망했군!"

  옷깃에 마이크를  꽂으며 투덜거리던 대통령이 호흡을  한 번 다듬고 나서 전화회담을 시작했다.

  "창 장군? 나, 미합중국 대통령 제임스요."

  회의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노인의 목이 쉰듯한  중국 말소리가 나고, 이어서 젊은 여자의  영어가 이어졌다. 전에 주중 대사를 지냈던 제임스는, 채널을 바꾼  동시통역보다는 짧은 중국어나마 직접  듣고 통역과 비교하는 것을 선호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각하.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 창 장군께서는 동지들을 잃은  슬픔이 크시겠소. 하지만 지금 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 있으니 이해하고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남 걱정부터 하다니, 창 장군은 웃기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중국의 자존심이라는 말인가? 하긴, 제임스는 외교관 시절,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핵미사일건으로 하시는 말씀이군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이 핵미사일 3발을 한국에 발사했고,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지 50기가 추가로 발사되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것들은 폭발하지 않았습니다. 발사한 이유는 제가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현재 유무선통신이 마비된 관계로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정치국에서 그런  결정을 할 리가 없으니 아마도 한국에서 핵미사일을 강탈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임스는 오랜동안의 주중대사 기간 중에 중국인이 이렇게 먼저 내심을 드러낸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그런 점에서 창  장군은 특이한 중국인이었다. 창 장군은  정치국과 군부의 확대회의 참석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현재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다. 제임스가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기폭장치 수십기를 외국에서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미사일 50기가 동시에 한  목표를 향해 발사된 점, 핵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점  등의 정황으로 미뤄볼 때 핵탄두에 탑재된 플루토늄을 획득하기 위한 한국의 작전으로 보입니다."

  "그럼 현재 한국에 50기의 핵미사일이 있는 것으로 보면 되겠군요."

  창 상장이  남의 말 하듯  편하게 얘기했다. 제임스는 혹시나  한국이 핵미사일을 완전조립하기 전에 중국이 추가로 핵공격을 할까봐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며칠 전부터 핵미사일 몇 기가 있었습니다."

  "네… 그렇습니까?  정치국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한국에 핵미사일이 있었다는 말씀은 금시초문이군요."

  창 상장의  말은 제임스에게는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사전에 중국에 귀띔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책으로 다가왔다.

  "저도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창 장군의 솔직한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요점은,  더 이상 핵전쟁을 확대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핵을 남용하는 국가는 미국의  국운을 걸고 응징하겠다는 것이 대통령인 저와  국가안전보장회의 참가자 전원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핵보유국들 사이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UN에는 선제핵공격 보복안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이 안건에 적극 지지할 예정입니다.

  제 말씀은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서울에 핵폭발이 있은 후 아직까지 한국  대통령과의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군 지휘부도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만,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한국군에도 이 메시지를 전달하겠습니다."

  "…..,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각하의 견해에 당과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바입니다. 이후 한국에  의한 선제 핵공격이 없다면  본인과 임시정치국은 결코 핵공격을 명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정부와 군지휘부에도 꼭 각하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퀄리스 국장의 눈에 경멸의 빛이 잠시 스쳤다. 중국은 패배했다. 중국은 미국이 한중간의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길 원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중국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고선 한국의 핵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할  수 있는 결정은? 그러나 매퀄리스가 원하던 답이 바로 창 상장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에…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중국의 해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함정을  자체 건조하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러시아는  현재 음양으로 한국을 지원하고 있어서 러시아로부터의  무기도입도 어렵습니다. 미국이  인민해방군 해군의 재건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전쟁을 지켜 보면서 무기체계보다는 그 운영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강력한 무기도  그 운영이 미숙하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군사고문단의 파견도  공식적으로 제안합니다."

  ‘인질이다! 한국의 중국 공격을 막으려는 수작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참가자들이 일제히 대통령을 응시하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대통령이 주저하고 있을 때 눈치를 챈 창 상장이 말을 이었다.

  "한국이 역공으로 나오면 전쟁은 상당히 길어질 것이며 군부강경파나 핵기지 사령관이 절망적인 결정을 할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이 우려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귀국에 상당량의  무기를 주문했지만 인도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희는 대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이외에도 저희는 추가적인  무기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 상장이 위협 반 애원 반으로 나왔다.  위기에 몰린 중국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는  또다시 핵미사일이 발사될 수도  있다는 창 상장의 협박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정부가 붕괴되는 판에 당연히  핵미사일을 쓰고 싶은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무기판매도 계획보다는 많이 성사될  것이라는 희망도 그의 결정에 참고가 되었다. 제임스가 결단을 내렸다.

  "제의를 수락합니다.  중국이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 주시면 의회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참, 한국은 지금  이 시간에도 국경선을 넘고 있습니다. 귀국의  북동지방을 약 백만의  한국군이 침공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통신이 마비되어서 모르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약간의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창 상장의 대답이 나왔다.

  "…! 각하의 호의 정말 감사합니다.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흠….. 우린 무기장사를 두배로 했군요. 의회관계자들이 좋아하겠소."

  전화를 끊은 제임스가  미국을, 자신의 현재 처지를 비꼬았다. 피스의 함대가 제주도 남쪽해상에서 중국으로 가던 미국 수송선단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상당수의  전투함을 상실하고 중국에 보내질  무기 대다수가 한국에 강탈되었다. 한국은  이 무기들에 대한 대금과  손해배상을 약속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중국이 대금지급을 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추가적인 무기공급을 수용하실 생각입니까?"

  호블랜드 국무장관이 묻자 제임스가 책상을 치며 흥분했다.

  "당연하지 않겠소? 우리가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요? 전쟁을 막기라도 했소, 아니면 확전을  방지했소? 도대체 미국이 이렇게 제  3자적 위치에 있던 전쟁이  어디 있었소.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기 팔아먹는 일밖에 없단 말이오."

  이번 전쟁 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한국이었다.  그러나 핵미사일을 빼앗기고 통신마저  두절된 중국은 현재 위기에  처해있고, 미국은 상당한 자존심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제임스는 그것이 싫었다.

  "장관! 각국 대사들에게 연락해서 미제  무기가 필요한 나라에게 원하는 대로 팔겠다고  전하시오. 미국대사들에게는 주재국 정부에  무기 팜플렛을 돌리게  하시오. 원한다면 핵도  팔겠다고 말이오! 한국정부에도 미제 무기를 파시오."

  "예, 예."

  그동안 기고만장하던 호블랜드가 기가 팍 죽어서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핵이라니…  어쨌든 미국대사들은 졸지에 무기판매상이 되어 각국 정부를  방문해야 했다. 물론 그동안 대사들이 하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무기판매였지만, 이제는 자존심도 내버려야 했다.

  1999. 11. 26  02:20  만주 지린성

  "30사단 제 69연대  현재 안투현 강습 중! 목표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보고입니다!"

  "좋~았어! 어쿠!"

  기다리던 보고가 오자 김 재호 대장이 좁은 지휘차 안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를 찧고 주저앉았다. 윤  민혁 대위가 낄낄거리자 김 대장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내 다친기 니는 그리  좋나? 그런 심뽀로 니 얼마나 잘되나 내 두고 볼끼다. 최 중위! 현지 지휘관을 대!"

  "사령관님 헤드셋에 연결하겠습니다. 69연대 1대대장입니다."

  통신장교가 군단과 사단 등  지휘계통을 건너 뛰어 직접 현지 지휘관과 통신을 연결했다. 최 중위가 통신기를 조작하여 무선을 개방하자, 격렬한 총성과 함께 바람소리 등 약간의 잡음이 섞인 가운데 현지 지휘관의 격양된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충성! 69연대 제  1대대장 이 대섭 중령입니다. 현재  교두보 확보중! 적은 산발적인  저항에 그치고 있습니다.  시내에서 잔적 소탕중입니다. 대대 병력이 현청사와 전신국 등 주요 거점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제 9 공수여단은 안투현 동쪽지역에 강하중입니다.   남쪽에서도 본대가 진공해 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만사 작전계획대로입니다. 현재 병력손실 전무!]

  김 대장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헬리콥터에서 강하하는  보병들과 공수부대, 시내로  진입하는 기계화부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좋아! 전화설비는 파괴했겠지?"

  [물론입니다.]

  "아주 수고했어. 귀관을  안투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지금 이시간부로 귀관은 대령이다. 대한민국  국군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자네의 승진을 명령한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령부로 연락하도록. 본대는 안투현을 우회해서  장백산맥을 넘어가겠다. 병참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작전계획대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충성!]

  김 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헤드셋을 끄자마자 최 중위에게 명령했다.

  "나머지 65연대 병력과 9공수는 회수하도록. 계속 전진이다."

  김 대장의 명령을  들은 윤 대위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전쟁중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윤  대위가 물끄러미 작전상황판을 다시 살폈다. 예상을 넘은  진격속도였다. 축차투입된부대들이 전술목표들을 점령해 나가는 가운데 본대는  거칠 것 없이 만주벌판을 달려가고 있었다.

  1999. 11. 26  02:40  서울 용산구 남영동

  "지금 바로 북쪽에는 불에 타고 무너진 건물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열선에 타고 방사능에  오염되어 생명이 위독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을 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관악구 관악소방서 소속 성 기혁 소방대장이 소방차끼리 연결하는 무선기를 들고 다소 비장한 목소리로 훈시를  했다. 25대의 소방차가 대일학원 옆, 서울역으로 통하는  길에 대기하고 있었다. 성 기혁이 보는 이 길, 한강대교로  빠지는 이 너른  길은 지금도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승용차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관악구 관내에서 일어난  화재는 모두 진압했고,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은 민방위대원들이  구조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할 일이란  당연히 최대 피해지역인 종로구 일대의 구조였다.

  남한쪽 전쟁수행 총지휘부인 국방부 지하벙커나 서울  외곽의 B-2 벙커, 민방위본부 등의  비상지휘체계는 모두 붕괴되었다. 서울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있는 가운데, 성  기혁은 자체판단으로 폭심지역 구조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구조작업이 시작되어 소방차들이 흩어지면 소방차들끼리의 무선연락은  불가능할 것이다. 서울시  전체적으로 지금도 극심한 전자장해를 겪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방사능 방호복이  없다. 지금 저 선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살아남더라도 평생을 방사성 질병에 시달릴 것이다. 살아남더라도…"

  성 기혁이  길 반쪽을 메운 바리케이드와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머리가  듬성듬성 빠지고 뼈가 부어오른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진탕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가?

  "아직 늦지  않았다. 귀관들이 죽거나 방사능에  오염되더라도 국가가 귀관이나 가족을 책임지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전쟁이 불리한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오염지역 구조임무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안전한 곳에서의 구조임무를 수행하기 바란다."

  무선기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성 기혁 소방대장 말고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김 진열 소방관은 신혼이니까  빠져라. 방사능에 피폭되면 2세에게도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  나머지 사람들도 희망대로 선택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선택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님!  저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소방관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소방관 말입니다. 저는 지난 7년간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절대 빠지지 않겠습니다. 혼자서라도 뛰어 들어 가겠습니다.]

  소방관 중 비교적 젊은 김 진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성 기혁의 귓전을 때렸다. 성 기혁은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관악소방서 대원 중에서 훗날을 위해  몇 명을 남겨 놓으려는  자신의 의도를 왜 몰라준단 말인가.

  "빠지라면 빠져, 임마! 왜 말을 안들어? 명령이다!"

  [부당한 명령, 불복하겠습니다. 제가 신혼이라서  이번일에서 제외된다면 저는 몇 달 후에 태어날 제  자식과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게 됩니다. 대장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구조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겁니다. 빨리요!]

  [그렇습니다. 빨리 구조작업을 시작합시다!]

  여기저기서 차 기혁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어쨌든 빠질 사람은 어서 빠져.  10초 내로 출발한다. 선도차부터 출발준비!

  방사능 잔류량이  엄청난 곳에서 방독면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살아남은 사람들,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소방관 중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평생 시달릴 방사능 후유증은? 가족은?

  소방관들의 머리로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난동했다.  심장이 6000 RPM의  자동차엔진처럼 박동치며 아드레날린이 최고조로  분비되었다. 소방대장의  한마디에 소방관들이  갖고 있던 긴장감이  일순간에 폭발하며 소멸했다. 이제는 일이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직업, 평생을 천직으로 여겼던 자부심 많은 소방관들의 직무를 시작할 때였다.

  "출발!"

  1999. 11. 25  11:30(위싱턴 표준시)  미국, 뉴욕

  "우리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선언합니다. 다른 안보리 상임이사국 회원국에서도  이번 전쟁에서의 중립선언과 전쟁의 조속한 종결 촉구 결정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티븐스 주유엔대사가 발언하자, 일본의 사사키  대사가 발언권을 얻어 발언을  시작했다. 발언을 준비  중인 중국대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러시아와 함께 일본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에서도 한중전쟁의 주변국으로서 당연히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였으며,  이번 한중전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아직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에서는 독일과 영국 외에는 중립을 선언하고 전쟁종결을 촉구한 나라가 없었다.

  "미국 대사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중국군이 한반도 일부를 점령하고 있으며,  핵미사일에 수도 서울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종전을 한다면  한국에게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일본은 유엔이  한국을 지원하든지, 최소한 핵전쟁  확대에 대해서만 억지력을 발휘하고  한국에게 유리해진 전쟁국면에서는 실지를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일본 자위대는 유엔의  깃발 아래에서 한반도로 파병되어  침략자에 맞서 싸울 준비를 마쳤습니다."

  첸 밍산 중국대사가 얼굴이 벌개졌다.  세계평화를 수호한다는 유엔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침략국인 중국입장에서는 전쟁에 불리해진 마당에 할 말도 없었다. 중국이  유리한 국면에서는 당연히 이 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날 줄 알고 다른 상임이사국의 중국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은근히 중국을 비난하는 것이다.

  유엔군을 한반도에 파병하자는  일본 대사의 제의는 중국이 거부권을 가진 이 마당에 당연히 부결될 것이  뻔했지만, 중국측에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었다.

  "저도 일본대사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러시아대사까지 나서자  중국대사가 분노했다. 러시아는  한국에 많은 무기를 팔아먹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중국이 주로 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자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서 한몫 잡고자  한국과 손잡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었다. 러시아대사의 발언이 이어졌다. 중국대사 입장에서는 구구절절이 얄미운 말이었다.

  "중국은 침략과 핵공격에 대해 한국에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1개 성(省) 정도는 한국에 할양해야 균형이 맞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은  더 이상의 핵전쟁을 바라지  않으나, 중국이 침략한 후에  즉시 종전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은  유엔에서, 이제서야 일방적인 전쟁종결을 종용하는  것은 정의와 균형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생각입니다."

  ‘종전 유도는 실패다.  상임이사국들은 중국의 몰락을 바라거나,  최소한 철저히 중국의 자존심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

  중국대사가 위기감을 느끼고 나섰다. 중국은  아마도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할  것은 각오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국, 중국의 존립을 위해서는  무슨 짓인지 할 수도 있었다. 창 장군이 임시 조선공작회의 주석의  자격으로 보낸 훈령이 그를  압박했다. 훈령 외에도 창  상장은 대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대사는 전황이 그렇게 악화될 줄은  예상 못했다. 아니, 지금은 아직  아니다. 앞으로의 일이었다. 중국은 공군력 빼고는 거의  모든 군사력을 소모했다. 더  이상 투입할 병력도, 보급품도 없었다.

  [동지는 모든 외교역량을 동원해서  이 전쟁의 종결을 유도하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업무를 수행해야  하오. 본인과 조선공작회의는 어떻한 희생도  각오하고 있소. 그리고... 불행하게도  아직 조선 대통령이나 조선군 수뇌부와는 통신이  연결되고 있지 않소. 이것은, 베이징이 핵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오. 혹시나 조선공작회의나  정치국원과 통신이 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이 임무를  수행하시오. 조국의 전 인민과 당이 대사의 분발을 기대하고 있소.]

  "그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정치국원들은 모두  암살되었소. 중국정부의 잘못된 판단이긴 하지만,  당사자들 대부분이 이미 사망한 지금, 책임소재를 따지는 것은 어렵소. 하지만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국은 결코 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중국대사가 다소 비장한  음색으로 평화를 주장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 뿐이었다.

  "일주일 전과 말씀이  많이 다르시군요. 중국이 불리한  모양이죠? 왜 그러실까. 핵 몇발만 쏘면 될텐데 말이죠."

  프랑스대사까지 중국대사를  조롱했다. 중국이 핵미사일  다수를 한국에게 강탈당했다는 것은 이미 전세계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중국은 한국에 대해 유일하게 우월했던 핵전력에서마저  우위를 상실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불리해진 지금 중국은 국제외교계에서도 사면초가였다.

  "한국대표께서도 한 말씀 하시겠소?"

  안보리 의장인 독일 대사가 업저버로 참석한 한국대사를 지명하자 박 윤흔 대사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중국이 침략전쟁에서도 핵을 사용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인구집중지역인 서울  등 대도시에 대해 발사하다뇨.  중국은 너무 비인도적인 행위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서울이 핵공격을 받아  지금 정부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으며, 정부로부터 아무런 훈령을 받지 못해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일단 한반도로부터 중국군의  즉각적인 철수, 한국 국민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한 충분한 배상, 한중국경 300km 북쪽 이내 지역의 비무장화와  중립국 감시,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한국 할양, 이 네 가지 조건을 중국이 모두 수락한다면 종전협상이 진행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대사는 영문학박사답게 그 긴 말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했다. 조건이 길어질수록 첸 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번째 조건은 너무 하지 않소? 그건 침략이오!"

  첸 대사가 거세게 항의했으나  역시 돌아오는 것은 각국 대사들의 차가운 눈빛 뿐이었다. 현재 중국은 항의할만한 입장이 되지 못했다. 곧이어 계속된 표결에서 결국  안보리 상임이사국 회원국 대사들은 실컷 중국을 조롱하고 나서 종전결의안을 부결시켰다.

  거부권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표결도 안된 것이다.  미국이 동의했으나 다른 5개국  전원이 반대했다. 지금은 미국의 압력도  소용이 없어서 전통적으로 미국을 지지해 온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일본까지 반대했다. 개전초기가 아닌  현 상태에서의 종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들이었다. 러시아는  한중전쟁에 개입해 온  것을 의식했는지, 아니면 표결에서 이길 것을 확신했는지 기권하고  말았다. 결국 핵전쟁확산방지건만 본회의에 상정하고 종전결의안은 상정하지  않았다. 중국대사가 힘 없이 발걸음을 옮겨 대사실로 향했다.

  박 대사는 약간은 걱정스러웠으나 그래도 몇시간 전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대통령은 궐위  중이고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는 상황이었다. 총리로부터  훈령은 받았지만, 아직은 어떠한 종전 시도도  저지하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사는  총리로부터 통일한국 정부 전체가 소멸한 것으로 위장해도 좋으니 몇 시간 더 기다려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미국이 한국대사관과  총리와의 전화를 도청했다면? 박 대사는 미국이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1999. 11. 26  03:20  서울 역촌동, 서부병원

  응급환자들이 끊임없이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병실은  이미 만원이 된 지 오래이고  영안실도 시체로  넘쳐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지금,  이 진도 평상시에는 웬만한  인턴이나 고참간호사들이 할만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수술실에  세 번이나 들어가 수술보조를 했고 끔찍하게 타버린  화상환자들을 소독했다. 신에 대해  간절하게 구원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조금  전에는 수술 도중에 여섯 살박이 어린이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환자가족들까지 구호에 동참했다.

  "또 열폭풍 피해자들이야. 응급실로!"

  핵폭발이 일어났을  때 가장 가혹한 것은  방사능 피폭환자가 아니었다. 살아나도 평생 고통을 겪긴 하지만  피폭량이 적을 경우에는 그나마 생명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열폭풍 피해자들은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전신이 끔찍하게 탄데다가  방사능 피폭량도 많아 죽어가는 환자들은  병원에서 포기하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 다른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맑은 공기가 마시고 싶어서  병원 정문쪽으로 나온 이 진은 실려오는 환자들 중에서 한 위급환자가 어쩐지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그을러서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어 응급침대에  실려가는 환자를따라갔다. 불안감은  점점 확신 비슷한 느낌으로 변했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환자는 약간의 의식이 있는지 조그만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 진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혹시 미영이?"

  "…, 아, 진이구나? 우리 소연이 어떻게  됐니? 내 딸 알지? 같이 구조됐는데 난 눈이 안보여."

  이 상황에서도 자식 걱정이 앞서다니, 이 진은 울컥 울음이 치밀었다. 뒤를 보니 조그만 체구의 환자가 응급침대에 실려 뒤따르고 있었다.

  "소연이 있어. 정신을 잃었지만 살아 있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자고 있나봐. 이제 걱정 마!"

  "그래? 정말 다행이야. 내 새끼… 고마워."

  "…, 바보. 너가 더 위험해."

  "정말 무서웠어. 엄청난 빛에 눈이 멀고  나서 난 무조건 소연이를 안고 엎드렸거든.  정신이 들고 보니 누군가  날 옮기더라. 소연이도 같이 왔어. 느낌으로 알 수 있어."

  응급침대가 병원 복도 한 구석에 도착하자 간호조무사들이 미영을 바닥에 눕혔다.  지금은 수술실도, 입원실도  만원이었다. 이  진이 미영의 옷을 벗기고  약간은 익숙해진 솜씨로 미영의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아프더라도 좀 참아."

  화상은 주로 머리 부위와 등에 집중되었다.  정말로 바보같이 딸을 안고 엎드린 모양이었다.

  "이 바보야…"

  "다행이야. 근데 아프지 않아."

  "…..!"

  미영은 중증환자였다.  등의 피부가  완전히 벗겨지고 신경마저  끊긴 모양이었다. 진은  이런 환자가 한 시간  이상을 버티는 것을 못보았다. 딸을 살려야 한다는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미영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수술실에서 나오던 의사가 잠시  미영의 맥을 짚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다른 수술실로 뛰어갔다.  진은 그 의사에게 매달리고 싶었으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사는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었다.

  "고마워, 진아. 소연이 손 좀 잡게 해 줄 수 있겠니? 옆에 있지?"

  엎드려 있던 미영이  왼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소연은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이  소연을 안아 미영 옆으로 옮겼다. 미영이 소연의 작은 손을 움켜 쥐었다. 어머니만의 감각인지 더듬거리지도 않고 단번에 손을 잡는 게 진은 이 상황에서도 신기했다. "불쌍한 우리 아가…"

  진에게 보이진 않지만 엎드려  있는 미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앞날을 걱정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물이었다.

  "애 아빠는 징집당해서 지금은 함경북도에 있다고 들었어. 진아. 미안하지만 내 부탁 좀 들어줄래?"

  "…, 응. 그래, 말해 봐. 이 바보야…"

  "소연이를 잘 부탁해. 꼭 아빠를 찾아 줘. 혹시 애 아빠가 죽으면…"

  진은 미영과는 고교  때부터의 친구였다. 미영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찍 부모를  여읜 가난한 청년과 결혼했다. 그때 미영의  나이 19세, 이들은  결혼하자마자 얼마 안되서 딸을  낳았다. 미영이 진에게 한 말은 고생스럽지만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진은  미영이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었다.

  진은 미영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만했다. 그 누구도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의 고아원이란… 미영은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 알았어. 걱정 마. 이 바보야. 제발…"

  "고마워…"

  미영은 행복한듯한 미소를 지었고  아이를 잡은 손에서 힘이점점 빠져 나갔다. 진은  친구의 미소를 한참 쳐다보다가 아직도 자고  있는 소연을 안고 미영의  팔을 몸에 가지런히 붙였다. 진이 미영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안녕."

  진은 환자 진료패에 환자이름을 쓰고 나서 보호자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밤새 한사람이라도  구하려고 방사능 오염지대를  뛰어다니며 피로에 지친 남자 간호조무사들이 미영의 시체를 들쳐메고 영안실로 옮겼다. 그것이 진이 미영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1999. 11. 26  02:45(베이징 표준시)  중국 랴오닝성, 센양 공군기지

  "이제 날만 밝으면 조선반도 전체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실시한다. 임시중앙군사위 및 조선공작회의가  설정하여 우리 기지에 할당한 목표는 다음과 같다."

  작전참모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100여명의 조종사들이 브리핑실을 가득 메우고  설명을 들었다. 미그-21의  개량형 섬-7형 전투기가 주력인 인민해방군 공군 제 15  전투사단 소속 조종사들에게 할당된 임무는 공격사단과 폭격사단의 J-5 공격기를 공중엄호하는 것이다.

  브리핑이 끝나자 앞쪽 의자에 앉은 사단장이 일어나 이 작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인민해방군 공군 대교인 사단장, 린 치앙은 그동안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힘이 넘쳤다.

  "이 작전은 인민해방군 공군 창설 이래 최대의 작전이다. 이미 설명 받았듯이 2500여대의 전투기와 500여기의 공격기, 그리고 500여기의 폭격기가 이번 임무를 위해 출동한다. 전략목표에 대한 폭격과 동시에 우리는 조선 공군을 격멸하는 임무를 맡는다."

  린 대교는  중국이 한반도에  핵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정치국원들이 집단으로 암살당했다는 것을 조종사들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핵공격 직후에 만주지역의 거의 모든 유무선통신이 끊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갑자기 브리핑실에  비상벨이 울리고 당직군관이 사단 사령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밖에는  공습경보가 발령중이라 조종사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공습인가?"

  [탄도유도탄 2기가 접근 중입니다. 북조선의 로동-2호 유도탄입니다. 요격하겠습니다.]

  "….."

  사단장 린치앙  대교는 당직군관의 자신없는 말에  즉각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국의 군사력  수준으로는 절대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없었다. 접근하는 핵미사일에  대해 핵미사일로 요격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득보다  실이 큰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수도인  베이징도 핵미사일로부터 지키지 못하는데 일선 비행기지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단장이 미사일 요격을  명했다. 전투기들은 대부분 쉘터  안에 있으므로 피해는 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조선이  어제처럼 반마찰제를 쓰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반마찰제에 효과있는 중화제를  활주로 부근에 대량으로 준비해 두었다. 살수차 두 대는 중화제를 활주로에 뿌릴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공병대 소속의 방재반도 언제든지 투입될 수 있도록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이 반마찰제 공격 후에 공습을 시도하더라도 그 사이에 이륙하여 요격할 수 있었다.  어제 오후부터 상공에는 전자전기와 정찰기가 상시 대기 중이었다. 다시는 같은 작전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접근 중... 7km, 우리측 대공미사일 4기 발사했습니다. 4초 후 접근. 빗나갔습니다. 2차로 4기 추가 발사. 접근 중... 모두 빗나갔습니다!]

  "젠장, 마하 6짜리도 격추 못시켜? 이래  갖고는 만약 조선이 핵을 쏘면 우리 기지는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건가?"

  린 사령이 투덜거리는 동안 조종사들이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충격에 대비했다. 잠시 후 폭음이  두 번 연속 울렸다. 건물과 유리창이 크게 진동했지만  이상하게 유리창 한 장 깨지지 않았다.

  "피해상황은?"

  린치앙 대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통신군관과  레이더 담당 전업군사는 미사일접근에도 아랑곳 않고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아직 확인 중입니다.  미사일은 모두 활주로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그래? 또 반마찰제인가 하는 놈이군. 방재반 출동시켜!"

  린 대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같은  공격을 두 번이나 실시하다니, 조선군  지도부는 멍청이라며 비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할 때였다.

  [예! 알겠습니다.]

  살수차들이 활주로에 액화중화제를  살포하고 다른 공병대 병력이 손으로 직접 활주로에 중화제를 뿌렸다. 작업을  하는 중국군들은 몸이 약간 간지러움을 느꼈으나 그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은 인민해방군 공군의 창설 이래 가장 참담한 패배를 한 날로 기록된다.

  1999. 11. 26  04:00  경기도 남양주 새터

  "서울과의 통신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현재 인명구조  및 복구작업 중! 통일한국군 제  2군과의 통신은 아직 불통, 비상작업 중이니 조만간 다시 개통될 것으로 보입니다."

  "위성통신은 왜 안되는건가?"

  "2군 사령부측에서 수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측 호출신호는 분명히 가고 있습니다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 각하는?"

  정 지수 대장과 통신장교의 대화를 듣던 이 종식 차수가 오른쪽 화면에 나온 최  총리와 양 중장을 힐끗 보았다. 아직도  착잡한 모습들이었다.

  "아직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통일 2군 사령부의 현재 위치는 모르겠나?"

  정 지수 대장이 작전지도를 중앙화면에 올렸다.  지금 이 시간에는 백두산 북쪽 안투현을 지나 엔지(연길)를 향하고 있어야 했다. 작전대로라면 5시간만에 약 3백km의 중국 영토를 종주하는 셈이다.

  "김 장군의 계획은… 너무 성급한거 아닙니까?"

  짜르는 전사에 없을만한 속도의 전격전을 회의적인 눈길로 바라 보았다. 다른 참모들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그다지  기대하기 힘들었다. 다만, 약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엔지를 점령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함경북도 나진  선봉 지구에 몰려있는 중국군을  과연 완벽하게 포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핵심이었다.

  "1군이레… 예정된 공격을 계속하고 있습네다."

  김 병수  대장이 중앙화면에서  동부전선 부분을 확대하며  설명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중국군을 북동쪽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반격이레 만만티 않습네다만, 계획선인 청진서껀 무산까라 비교적 쉽게 점령할 것으로  보입네다. 적을 까부수고 있다는  예하부대에 보고레 이어지고 있습네다."

  "잘 알갔소. 아, 차 동지! 이제 진정되었소?"

  이 차수를 따라 참모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 쪽으로 돌아갔다. 언제 왔는지 출입문 기둥에 기대 서있던 차 영진이 흐릿한 눈길로 중앙화면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북경을 공격할 생각이시군요."

  "무슨 소리요? 차 장군."

  정 지수 대장이 뜻밖의 말에 놀라다가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중앙화면의 지도에는 백여만의 통일한국군 병력이 백두산을 크게 우회하여 두만강 하구 쪽을 향하고 있었고, 또다른  백여만의 병력이 혜산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국군 육군 참모총장이기도 한  김 재호 대장은 틀림없이 5군은 예비병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예비병력치고는 정규군 병력이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짜르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속 60km의 쾌속  진군이라면, 그것도 대부대의 이동이라면 남북한 지상군의 장비로는  불가능할텐데요… 수송기도 없고.  알겠습니다. 민간인 차량을 징발한 거로군요. 겨울철이니 사륜구동차를…"

  "동무!"

  참모들이 갑작스런  외침소리에 깜짝  놀랐다. 지도에만 붙박혀  있던 눈길들이 이 차수를 향했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이 차수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차 동지레 기기 가능하리라 믿소? 중국 북경을 공격?"

  차 준장이 한 번 씩 웃더니 평소에  양 중장이 앉던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판을 두드리더니 병력배치와 진격소요시간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훈련용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다뤄 본 경험이 많고 이런 용도에 쓰이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수정은 문제가 아니었다.

  "총장이신 김 재호 대장은 아니겠지만 참모 중에 어떤 사람이 북경공략을 상정하고 작전계획을 짠 모양입니다."

  참모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수정작업에 열중하던 차 영진이 고개를 들고 마지막 엔터키를  눌렀다. 참모들이 중앙화면을 보니, 두만강을 향하던 푸른색 화살표가  천천히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화살표는 다시 북쪽으로  급선회하고, 혜산에서  출발한 다른 화살표가  서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문제는,"

  차 영진이 중앙화면의 동작을  잠시 멈추게 하고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이 주공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진-선봉에  있는 중국군을 섬멸하고  나서 공략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포위망을 풀고  공격을 개시할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김 대장과 그의  참모의 작전계획대로라면 아마도 상당한  지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계획을 높은 분들이 알고 계실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은 가운데 침묵이 이어졌다.  이 차수가 이 침묵을 깨뜨리고 발언을 시작했다.

  "음… 솔직히 기 작전계획을 승인할  때 본관도 기런 의구심이레 가졌더랬소. 실지회복이라문 우리 병력으로 퉁분한데 와 우회를 하는디…"

  "우리가 중국에게서 약간의  핵을 뺏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중국은 핵강국입니다. 그들에겐 다양한 종류의 전술핵이 있습니다. 아까 2군의 병력편성과 장비를 보았는데 대대단위로  완전 독립적 편성이더군요. 하지만 중국은  자국 영토에 대한  침략을 용납치 않을 것입니다.  우린 중국의 전술핵에 맞설만한 무기가 없습니다."

  "기렇티. 중국이레  기존에 종심방어전략에서  탈피한디 오래디. 디금은 적극방어전략이야요."

  "2군의 작전계획을 승인하고 계속 지원하실겁니까?"

  차 준장의  질문에 이 차수와  참모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차  영진이 단말기로 1급보안문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2군  사령부 핵심참모들의 인사파일이 열렸다.

  "김 재호 대장, 1980년 5월… 음… 이건 일단 넘어가죠."

  김 대장의 인사기록을 보던 차 준장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지었으나 꾹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핵심참모들의  인사기록을 훑던 차 준장의 눈빛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윤 민혁 대위, 학사장교 출신, 학부때 대학생다물회 회장 역임!"

  다물, 다솜, 단군의  땅, 한단고기 등등의 낱말들이 차  준장의 뇌리를 스쳤다. 다물은 잃어버린  단군의 땅을 찾자고 광개토대제가  외친 구호이며, 다솜은 사랑이라는  뜻의 옛말로서 일종의 인사말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과 극우적인 청년학생들의 주장은, 광할한  만주평원과 황하 이북의 중원땅,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까지 모두가 단군조선(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이 아니라  쥬신이라고 한다)의 땅이며, 단군의 후손인 우리가 그 땅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물회는 1996년 까지는  여러 이름으로 존재했지만 1997년부터 집결되기 시작하여, 남북  지도층 서로가 망설이던 남북통일에  강력한 압력단체로 작용했다.  통일 이후에  이들은 끊임없이 대륙경영을  주장하여 한국정부는 중국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대학교 운동권  조직을 이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각종  강연회와 가두시위를 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하는 인사들은 남북통일을 반대하던 인사 이상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백주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일본과 중국도 점점 극우화되었고, 격앙된 민족감정의 대립이  이번 전쟁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본인은"

  참모들이 경악하고 있는 가운데 정 지수 대장이 운을 떼었다.

  "2군 사령부의 개편,  또는 최소한 참모진의 개편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부관은 절대적으로 해임해야 합니다."

  "….."

  "설마 부관 한 명이…"

  이 호석 공군중장이 중얼거리다 말고 나머지 참모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실질적인 군령권은  분명히 통일참모본부가 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권을 포함한  군정권은 아직도 남북한 군의 최고통수권자, 즉, 한국은 대통령이, 북한은 최 광 원수가 쥐고 있었다. 통일한국군 제 2군 사령관의 경우에는 남북한 군의 최고지도자인 두 사람의 합의하에 이뤄져야 하지만 대통령은  유고상태였다.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한다지만, 현직 육군참모총장인 김  재호 대장을 직위해제할만큼의 힘이 권한대행에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참모들에게 들었다.

  "아직은… 2군의 공격계획이레 북경공략을 념두에 두었다는 확실한 증거이 없소."

  이 종식 차수가 중앙화면에  나온 국무총리의 표정을 힐끗 살피며 말을 이었다.

  "통신이 재개되는 대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요. 길고,  북경공략이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디오. 그기 옳티 않갔습네까?"

  이 차수는 분명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북한에는 2명의 대원수, 7명의 원수, 8명의 차수가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인 김 재호 대장과 이 차수와는 분명 격에 있어서 김 대장이 훨씬  높았다. 그런 직위에 있는 사람을 이 차수가 책임자로  있는 통일참모본부에서 진퇴를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 회의를 최  창식 대통령 권한대행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제 2군 사령부에  대한 경계심을 유발시킨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통일참모본부와  김 재호 대장간의  견제와 신경전이 시작될 참이었다. 이 차수는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권한대행 각하!"

  최 권한대행과 이 차수가 잠시 눈길을 주고 받더니 최 권한대행이 한숨을 내쉬고 말문을 열었다.

  [이 차수..., 차수의 뜻대로 하십시오.]

  "….."

  [2군의 김  대장에게 포위공격 외에  다른 전략적 목표를  공격하거나 점령하지 말라고 이르시오.]

  최 권한대행으로서는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말이 문민우위지, 5.16이나 12.12같은 역사의 굴절을 겪은  한국에서 아무리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하지만  국무총리 주제에 육군 참모총장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이 차수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권한대행  옆에 앉아있던 양 중장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안됩니다! 적의 핵기지를 다만 몇군데라도 점령해야 합니다. 저는 그들을 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핵기지를 공격했던 요원들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저  먼저 죽이고 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십시오.]

  ‘일이 꼬였다’ 라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쳤다. 통일참모본부와 며칠간 떨어져 있던 양 중장은 제 2군의 우회기동을 만주공격으로 오해를 해서 요원들에게  그런 약속을 했고,  현지 사령관인 김 대장도  은근히 중국 침공을 기정사실화하려고  중국에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확전을 막으려는  최 권한대행의 입장은 단호했다. 화면 건너로 섬뜩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귀관의 전역을 명하오. 이제 귀관은 군대의 작전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소.]

  강렬한 긴장감이  화상통신용 화면  이쪽 저쪽에서 감돌았다.  실의에 찬 양 중장이  권총을 빼자 총리 경호실  요원들이 황급히 권총을 꺼내 들었다. 탁자 위에  권총을 올려 놓은 양 중장이 천천히  걸어서 출입문 쪽으로 걸었다. 화면 양쪽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등 뒤로 권한대행이 말을 이었다.

  [귀관은, 아니, 귀하는 아직  예비역 공군대장으로서 할 일이 많소. 국방부장관으로서 그 책임을 다 해야 하오. 일단  두 가지 현안에 대해 상의합시다.]

  통신화면을 힐끗 본 양 중장은 짜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1999. 11. 25  18:15(워싱턴표준시) 미국 워싱턴

  "한국군의 대병력이  한반도 북동부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이쪽 청진이라는 곳 부근 일대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 징후가 보이며, 심지어 중국영토인 만주 남부 내륙  곳곳에서도 소규모 전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국의 중국 침공인가?"

  대통령 제임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매퀄리스 CIA 국장에게 물었다.

  "아직 정보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대규모  역습으로 봐도 될만 합니다. 한반도 북동부를  점령한 중국군이 궁지에 몰릴 것으로 보입니다만, 상황이 나빠지면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한중 국경선은 넓으니까요, 각하."

  "내 말은 말이오, 만주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혹시 한국군이 만주를 공격하고 있는 것 아니오?"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만, 저도 혹시나 해서 위성 블랙 레이븐 2호를 만주쪽으로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소규모  특수전 수행부대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궤도수정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 더 기다리시면 정확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중국을 침공한다면?"

  대통령이 집요하게 한국의 침공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자 매퀄리스 국장도 심각해졌다. 국장 자신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만약 한국이 그런 미친 짓을  한다면… 본격적인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은 자국 영토를  침범한 적군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할 게 분명합니다."

  국가안정보장회의 참가자들이  신음성을 발했다. 도대체  신기한 일이었다. 핵무기가 그렇게  많이 동원되고도 아직 이놈의  한중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쟁이 이어지는 것이다.

  "중국은 함부로 핵을 쓰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도 50여기의 핵미사일이 있고,  소규모지만 전술핵도 보유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국무장관 호블랜드는 매퀄리스 국장과는 다른  견해를 표했다. 합참의장과 각군 고위장성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여기, 혜산이라고 하는 지역에 집중된 병력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전투도 없고 전략적으로  중요치 않은 이곳에 30만이라니. 4시간  전의 배치현황이라면 지금쯤은 아마도…"

  "만주 남부를 횡단, 장백산을 우회하여  다시 한반도로 들어오는 우회전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합참의장이 주방위군 경력밖에  없는 호블랜드 국무장관의 전략적 식견에 대해 감탄했다는 듯, 약간은 경멸적인 어조로 물었다. 호블랜드 국장이 단말기를 조작하여 표시기로 백두산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약 150km이니 시속  30km로 전진한다 치면 지금쯤 이미 중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렇다면  한반도 북동부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군은 포위되는 것입니다."

  "저런, 그건  2차대전 당시  나찌 독일군에게도  불가능한 전격전입니다."

  "이스라엘군은 해냈지요. 심지어 이집트군도. 아니, 징기스칸이나 다른 고대 유목민족들도 그런 일은 해냈지요."

  "현지는 지금  겨울이란 것을 아셔야죠.  그리고 한국군은  보병 위주고."

  국무장관과 합참의장의 말싸움이 계속되자 제임스 대통령이 나섰다.

  "신사 여러분! 우리는 지난 겨울에 미시간주에서 사냥을 했지요."

  참가자들이 지난 겨울의 사슴사냥을 떠올렸다.  네 대의 사륜구동차에 분승한 그들은 폭설 속에서도 시속 50km 이상은 유지했다. 전차나 장갑차는  불가능하더라도 사륜구동차라면  가능하다! 게다가  한국은  연산 500만대를 생산하는 자동차왕국이다! 장군들이 한국군의  공격속도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제임스가 말을 계속했다.

  "문제는 압력을 넣어 한국의 중국공격을 막고 싶어도 그 창구가 연결이 안된다는 것이오.  모두들 한국군의 지휘계통을 찾아  연결할 방도를 찾아 내시오!"

  1999. 11. 26  04:30(한국시간) 랴오닝성 단둥

  신의주 건너편 국경도시인 단둥은 어제 저녁의 물바다에 이어 지금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중국군  집결지와 병참집결지에 대한  인민군의 무차별 포격과 치열한  공중폭격, 그리고 미리 단둥에  잠입한 경보병여단 대원들에 의해 도시는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횃불로 타올랐다.

  수몰된 군인과 민간인  구조작업을 계속하느라 정신이 없던 인민해방군은 부랴부랴 부상자들을 호송하여 단둥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하늘에는 주로 요격기로 활용되는 미그-21 전투기들이 날았다.

  북부군 사령 홍 종규  소장은 압록강 철교 옆의 고지대인 압록강공원 위에서 단둥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비역인 자신이 일개 독립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비록 양동부대이긴 하지만  중국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현재 진강산(鎭江山),  모회산(帽 山) 등의  고지 점령,  칠도가(七道街), 영가(永街) 등의 시가지에서 산발적  전투 진행 중입네다. 3개 사단 도강 완료!"

  김 소좌가 보고하자 홍 소장이 끄덕거렸다.  뜻밖에 저항은 거의 없었다. 홍 소장은 은근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작전명령에는 단둥 지역을 확보하고 양동전만  수행하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만주지역에 중국군은 별로 없어서, 북부군 휘하의 2개 군단이면 심양(瀋陽) 정도는 충분히 점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나왔다.

  "더 이상의 진격을 명령하디  아니한 것은 다른 계획이레 있는 듯 합네다."

  김 소좌가 망원경으로 단둥 시가를 살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길티, 기러티."

  홍 소장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김  소좌가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대 지휘관이라면, 명색이 장군이라면  이 좋은 기회를 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3군 사령부에 보고는 했간?"

  "보고레 마티고 나오는 길입네다."

  후퇴하던 중국군 대열이 미그-21기  편대의 공습을 받아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미그기의 동체  아래 기축선에  장착된 Gsh-23L  기관포가 BMP를 향해 불을 뿜자 곧이어  노란 섬광이 대지를 적셨다. 김 소좌가 폭격현장 주변을 보니  상당한 숫자의 민간인 피난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길가에 널려진 민간인 시체들도…

  1999. 11. 26  04:40(한국시간)  중국 랴오닝성 안산(鞍山)

  [편대장 동지, 고도를 좀 올립시다. 뭐가 보여야 비행을 하지요.]

  "안돼! 여긴 위험 공역이야."

  인민해방군 공군, 제  37 독립정찰단(團–연대) 소속의 차오(喬) 소교는 겨울 폭풍우 속을 고도  4000피트, 속도 180노트, 0-4-8을 향해 계속 비행하고 있었다. 눈이 오고 구름이 짙게 끼어  시계는 0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지령을 받고 출발한 연락기들은 어찌 된 셈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동북지역은 유무선연락이  완전 두절되어 베이징 군구 소속 공군인  자신들이 연락 임무를 띄고 센양(瀋陽)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그-21의 중국  개량형인 섬-7형 전투기 두 대는 혹시나  있을 위험에 대비해  간격이 좁은 전투전개(Combat  Spread) 대형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오 소교보다 우하방(右下方)에서  비행하고 있는 요기, 지앙 중위는 죽을 맛이었다.

  "이 정도는 저공도 아니잖아? 겁나면 고도계를 계속 주시하라고… "

  아군 공역에서 상대적으로 저공비행을 하는 것은 차오 소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아군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는 산을 몇 개 넘고 나서, 지금은 군데군데 농가의 불빛이  보이는 개활지를 비행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지앙 중위가 비명을 질렀다.

  [후방 레이더 경보! 락온됐습니다!]

  "크로스 턴(Cross Turn) 실시! 겁 내지 마. 목표를 확인한다!"

  차오 소교가 고도를 낮추며 브레이크하여  오른쪽으로 급선회했다. 지앙 중위는 아마도 고도를  높이며 왼쪽으로 선회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지앙  중위의 비명이 차오 소교의 조종석 안을  가득 메웠다.

  [미사일! 적외선 유도 미사일!]

  "젠장, 디펜시브 스플릿(Defensive Split)!"

  미사일의 추적을 받고 있는  지앙 중위가 함부로 고도를 올리지 못하리라 생각한 차오  소교가 급히 고도를 올리며 선회했다. 만약  지앙 중위가 왼쪽으로 선회했다면,  이제 다시 오른쪽으로 선회해야 한다. 지앙 중위에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기동이었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후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어둠 속에 노란 섬광 2개가 자신을 향해 급상승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아래  쪽에서는 불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다른 섬광 두 개가 추락하는 불꽃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더를 키자 상황은 분명히 드러났다. 차오  소교와 같은 기종인 미그-21 전투기 4기가 배후에서  접근해 지앙 중위의 전투기를 날린 것이다. 차오  소교는 추적하는 전투기들을 기수  아래로 흘려 보내며, 지앙 중위를 죽인 적기를 향해 PL-2 적외선 유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적기는 플래어를 발사하며  좌우로 흩어졌다.  배후가 무방비인 상태에서  차오 소교는 오른쪽 전투기를 추격했다.  적기는 4기, 적은 피아 확인을 하고 나서 발사해야 한다는  것이 차오 소교에게 유리한  점이었다. 미사일은 예상대로 공중에서 헛되이  폭발했지만, 차오 소교는 적의  꽁무니를 붙잡을 수 있었다.

  차오 소교가 락온하려고  방향을 수정하는 사이에 적기가 브레이크를 걸어 속도를 뚝  떨어뜨리며 급상승했다. 적기가 반전하는  사이에 차오 소교의 전투기도 잽싸게  속도를 떨어뜨리며 반전했다. 두  전투기가 시저스(Scissors) 기동으로 꽈배기 모양을 그리며 서로의 배후를 잡으려고 다투는 사이에 다른  전투기들이 차오 소교의 전투기  배후로 접근했다. 차오 소교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자신의 전투기 좌우로 스치는 불빛과, 역반전하여 급상승하는 적기였다.

  1999. 11. 26  03:50(베이징 표준시)  중국 베이징

  "위성통신과 연락헬기로  간신히 주요 사령부  및 핵기지와의 통신이 연결됐습니다만…"

  고급전업 기술군관인 왕 대교가 창 상장에게 보고하면서 약간 머뭇거렸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인적 구성이  대부분 겹치는 조선공작회의에 참석한 예비 정치국원과 장관급 장성들의 시선이 왕 대교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뭐요? 혹시 핵기지 몇 곳이 연결 안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역시 그곳들은 불순분자들에게  점령되었다고 보시는 것이… 모두 다섯 곳입니다. 허가 없이 발사된 그 핵미사일들을 추적한 텐진 레이더기지의 보고와도 일치합니다."

  ‘역시 뺐겼다…’  참석자들이 심각해졌다. 다시는 핵으로  한국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으로부터 핵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알겠오. 각  군구사령부에 그곳으로  병력지원을 하도록 연락하시오. 그런데 아직 동북지역에서 들어온 소식은 없소?"

  동뻬이(東北), 만주지역은 뭔가  이상한 조짐이 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다.  자정 이후에 동북지역과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 한반도 북동부,  함경북도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파견군을 지원하는 지역이며 한중국경과  접한 지역이므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지만, 정보가 없는 판에 임시조선공작회의에서  함부로 군사적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쪽은 전파방해도  심해 아직 연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연락용 정찰기를 연속 띄웠지만  폭풍우 때문인지 통신상태 불량인지 실종상태입니다."

  "이거 원… 장님이 따로 없구만. 어쨌든, 예비역 병력동원에 만전을 다 하시오.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긴 해야  하는데 조선이 쉽게 받아들여 줄 지 모르겠소."

  "그럼 창 상장 동지께서는 정전(停戰)을 고려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새로이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에 임명된 위앤(元) 중장이 묻자, 창 상장은 기가 막히지도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쏘았다.

  "동지는 그럼  이 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하란 말이오? 엄청난 능력을 가진 총후근부장이시군!"

  "…, 죄송합니다. 상장 동지. 하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 중장, 아니, 고 상장 동지는 어디 계신 겁니까?"

  창 상장이 고개를 홱  돌려 위앤 중장을 노려보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노에 찬 시선이라 위앤 중장이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나도 모르겠소."

  1999. 11. 26  05:00  평양

  "김 중위, 이제 정신 드나?"

  김 종구 중위는  암흑 속에서 저 멀리  한쪽이 환하게 밝아옴을 느꼈다. 어둠 속의  광명, 그리고 그 밝음을 약간 가리고  있는 하얀 물체들. 몸에 감각이 전혀  없었다. 사후세계가 이렇다고 가사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희미하게 기억되었다. 아니, 그건  출산 때 처음 세상을 본 충격적인 기억이 남은 거야… 라고 생각하며  안간힘을 쓰며 눈을 떴다.

  "나야, 황 중령. 김 중위 수고했네."

  하얀 물체가 점점 형상을 형성하여 희미하게나마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김 중위는 그  대상을 느끼면서 뭔가 구역질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거부감인가?

  "황 중령님? 살았군요. 높은산, 백 기선 대위님은요?"

  김 종구는 백 대위가 낙하하는 핵탄두를 향해 기체를 던진 사실이 기억났다. 아마도…  묻지 않는게 나았다.  공군사관학교 2기  선배로서 김 중위 자신이 요기(초보 조종사)일 때 백 대위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백 대위가 막았네. 평양은 구했지."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면서  황 중령과 그 옆에  서 있는 인민군 군의(군의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 중령은 웬일인지 하룻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이런  말을 직접 했다가는 맞아죽겠지만… 김 중위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평소에는 별로 느껴보지 못한 사랑과  회한의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김 중위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럼 서울은요? 으윽!"

  김 중위는 다리와  허리에 강한 고통이 느껴져  다시 풀썩 눕고 말았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김 중위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진정하게. 자넨 정신을 잃고 강하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어. 서울은 반쪽이 날아간 모양이야."

  "예? 서울 어느쪽입니까?"

  "서울 북쪽이라고 하네.  최종목표가 청와대라고 하더군. 지금 서울은 통신이 완전 불통됐어. 정찰기가 뜨긴 했지만 피해상황을 알 수 없다네. 들리는 말로는 서울 전역이 거의 불바다가 되고 있다더군."

  부모님이, 친구들이… 김  종구는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은 것이 다행인가 생각해 보았다.

  1999. 11. 26  05:10(한국시간)  중국 지린성 옌지 남서방 14km

  [여기는 철군 7, 철군 2 나오라.]

  "여기는 철군 2. 보고하라, 김 중위."

  만주벌판의 차가운 눈보라가  132사(師-사단) 전차중대(連)장인 마 상위의 뺨을  후려갈기며 스쳐 지나갔다. 마  상위는 휘하의 전차 16대와, 긴급 소집된 인민무장경찰 1개 독립영(營-대대)을  지휘하여 남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전조등을  끈 수십대의 지에팡(解方)트럭이 선두의 전차중대를 뒤따랐다.

  [전방에 이상한 조짐은 없습니다.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좋아. 이 속도를 유지하라."

  마 상위는  서쪽으로 쾌속진군하는  59식 전차대열의  선두에서 54식 12.7밀리 대공기총을 움켜쥔채  명령했다. 이런 날씨에서 주포에 장착된 적외선 써치라이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눈밭 위를 나침반만 믿고 감각에 따라 방향을  잡을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런 이상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무선통신이 두절되어 사(師) 사령부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적의 공격이 심각히 우려되는 시점이었다.

  마 상위는 김  중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연변조선족이면서도 당성을 인정받아 소수민족으로서는 입학도 힘들다는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당당히 인민해방군 군관이  되었다. 항일전쟁 때도 아닌 지금, 공산당원이 되기보다 힘들다는 인민해방군에, 그것도  군관으로서 복무한다면 대단한 명예였다.

  마 상위가 보기에도 연변조선족은 이미  완전한 중국인민이었다. 결코 조국을 배반하여 조선을  편들 사람들이 아닌데도 각급 인민정부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기는 철군 7, 철군 2 나와라!]

  아까와는 다르게 김 중위가 무선을 통해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일인가? 철군 7."

  [정찰대가 적에게 완전  포위되었다! 갑자기 배후를 차단당했다. 적의 기갑부대다. 규모는 1개 려(旅-여단), 스피커로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있다!]

  "….."

  역시 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이 정도 대규모의 적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다. 마 상위는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당연히 항복할 수 없다. 적정을  더 자세히 살핀 후에 공격하고 탈출하겠다.]

  "!"

  김 중위는 역시  훌륭한 인민해방군 전사이며 군관이었다.  마 상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적 전차는 T-80U  쏘련제 땅크다. 쏘련제 전차가 조선군에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보병전투차는 남조선제 K-200. 공격용  헬기가 상공에 떠 있다! 자, 이제 우리는 공격하겠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김 중위! 잠깐!"

  [중지! 잠시 대기하라. 무슨 일인가? 철군 2.]

  "그냥 항복하라.  귀관은 인민해방군의  군관으로서 명예로운  책무를 다했다."

  마 상위는 구식 정찰용 장갑차인 YW-531 APC 한 대와 해방트럭 한 대에 분승한 20여명의 인민해방군 전사들이 압도적인 적에 포위되어 덜덜 떨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측은했다.  대전차무기도 없는 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저항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 내가  조선족이라서 그런 것인가? 나와 조선족의 명예에 대한 훼손이다. 우리의 조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당연하다. 귀관의  충성심은 잘 알고  있다. 귀관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적에게 포로로  잡혀 역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이것은 명령이다! 전투는 우리가 한다."

  마 상위가 차분하게 명령하자  김 중위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김 중위가 힘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복창했다.

  [정찰소대장 인민해방군 중위  김 성묵과 인민해방군 전사 23명은  침략자 조선군에게 항복하여 거짓정보를 흘리는 임무에 복무하겠다.]

  "고맙다, 김 중위. 그대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하겠다."

  [적의 독촉이 심해서 이만  하차하겠다. 꼭 침략군을 격퇴시켜주기 바란다. 이만...]

  무전기가 꺼졌다.  마 상위가  헤드셋의 통신선을 바꾸어  예하부대에 명령했다. 한국군의 위치와 규모는 너무나  분명했다. 다만, 아군의 머리위로 포탄을 쏘려니 약간은 착잡했다.

  "전원 횡대로 전개하라. 적의 집결지에  포격을 실시한다! 좌표는 361, 547."

  16대의 전차가  눈밭에서 횡으로  전개하고 인민무장경찰의 박격포도 발사준비를 갖췄다.  다른 보병들은  얼어붙은 눈밭에서 참호를  파느라 분주했다.

  [퍼펑!]

  "뭐야!"

  갑작스런 섬광에 놀란 대부분의 병사들이 몸을  숙이고, 마 상위는 눈을 손으로 가렸다. 서서히 낙하하는 10여발의  조명탄 뒤로 엄청난 폭음들이 연이어졌다.

  "적이다! 공격헬기다. 응전하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온  헬기들이 중국군을 향해 토우 대전차미사일을 쏘아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절반의 전차를 잃은  중국군은 서둘러 대공방어에 들어갔으나 헬기에  의한 포위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없었다. 한국군은  J-STARS기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중국군의 존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 상위는 김  중위와의 무선교신을 너무 오래 끈데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기관포탄이 눈밭 위에 작렬하자 아직 참호를 갖추지 못한 병사들이 거꾸러졌다.

  "젠장! 방어력도 약한 500MD야. 대공사격을 하라구!"

  500MD인가, MD500인가? 두가지 이름이 마 상위의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 남조선군에 있는 68대의 공격형 500MD! 아니, 북조선에서 민간용 MD 500 수십기를 독일을 통해 구매했으므로 MD500일지도…

  ‘빌어먹을!  500MD든 MD500이든 무슨 상관이야?’

  내수용과 수출형, 또는  민간기와 군용기에 따라 몇가지  모델명이 있는 휴즈사의 전형적인 잠자리형 항공기들은 벌판을 스치듯 날렵하게 날아와 대전차미사일과 기관포를  쏘아댔다. 바로 오른쪽에 있던  12호 전차가 폭발하고,  다른 한 대의  해방트럭이 기관포의 제물이 되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화염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지며, 차량 주변에 엎드려 있던 전사들 위로 파편이 덮쳤다.

  후방에서 시뻘건 화염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한 마 상위는 대공기총을 연사하면서 전차를 급선회하게  했다. 바로 왼쪽으로 다른  헬기가 스쳐 지나가며 3호 전차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사일에 비해 전차는 너무 느렸다.

  "저것이 연길의 불빛이다!"

  김 재호 대장이  장갑지휘차의 큐폴라를 열고 동쪽을  응시했다. 공격헬기의 기습을 받고 불타는  중국군 해방트럭들 너머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압록강을  넘은 뒤부터 방송차에서 반복해서  틀어주는 음악인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브라나’가 만주벌판에 울려  퍼지자 김 대장의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네…"

  김 대장을 따라 차체 밖으로 고개를 내민 윤 민혁 대위가 스키점퍼의 깃을 세우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벌판에는 자동차화 보병들이  특유의 사륜구동차를 타고  움직이며 소탕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총성은  거의 울리지 않았다.

  백두산을 크게 우회하고  짧은 시간에 만주를 횡단하여  나진,선봉 지역의 중국군을 포위하는 이 작전은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무인 지경의 만주를 횡단한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지금부터여서, 윤 대위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자칫하면 남북으로 협공당하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윤 대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직도 군사대국이었다.

  "인민군 4군단을 북진시켜! 모란강(牡丹江:무딴지앙)을 점령한다!"

  큐폴라를 닫고 차내로 날렵하게 내려 선 김 대장이 의외의 명령을 발했다. 따라  들어온 윤 대위와 다른  참모들이 깜짝 놀랐다. 작전참모인 송 병준 소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나 감히 사령관을 제지하지 못했다.

  "네? 총장님?"

  윤 대위가 반문하자  김 대장이 씩 웃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통신장교 고 영섭 중위가 인민군 4군단에 명령을  전했다. 윤 대위는 마음먹은 대로 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포위망을 완성하면서  사령관은 당연히 포위망 바깥쪽의 위협에 대해 민감해지기  마련이었다. 일개 군단 정도를 엄호 내지는 견제부대로 운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원래 작전 계획에는 들어있지  않은 운용이었다. 통일한국군은  어디까지만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한중국경 부근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당연히 금기시되고 있었다.

  윤 대위는 김 대장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서둘러 인민군 4군단의 편제를 보았다. 보병사단  3, 기계화사단 1, 보병여단 1,  경보병여단 1, 저격여단 1, 교도대로 구성된  사단급 부대 1, 기타 포병, 공병 등 지원부대. 전형적인 전시의  인민군 군단 편제였다.  그러나 인민군 4군단은  통일 전까지는 휴전선 서부전선에  전진배치되어 있던 최정예부대이다. 사실, 이 부대는 본대의  좌측을 엄호하는데 투입하기로 예정은  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km나 북진하여 모란강시를 점령한다는 계획은 있을 수가 없었다.

  윤 대위가 중국군 배치현황을 열람해 보니 다행히 인민군 제 4군단의 진로 부근에는 중국 인민무장경찰 소속의  5개 독립대대밖에 없었다. 모란강,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도시 중  하나인 모란강은 베이징과  텐진, 하얼빈 등으로 연결되는 철도 접합점으로서,  이곳을 점령하면 헤이룽장성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이다. 지금처럼  진격한다면 중국군이  병력을 집결하기 전에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헤이룽장성에 배치된 중국  인민해방군은 뜻밖에도 남쪽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령관님, J-STARS기에서  무선연락입니다. 통일참모본부와의 무선 회선을 연결해 드리겠답니다."

  고 중위가 헤드셋을  김 대장에게 건넸다. 윤 대위가 고  중위를 향해 질책의 눈길을 보낸 것을 김 대장은 눈치 채지 못했다.

  "김 재호 대장이오."

  [수고하시오. 내레 통참에 이 차수외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잠시 긴장 섞인  침묵이 흘렀다. 몇 시간동안  통일참모본부와 무선통신이 두절되었던 2군사령부 수뇌의 대답이  이렇다니, 윤 대위가 진땀을 흘리며 이들의 통화를 들었다.

  [위치레 보아하니, 연길에 도착했구만요. 작전성공을 경하드립네다.]

  "덕택에… 감사합니다."

  김 대장이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신망  저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침묵이 더 흘렀다.

  [대통령 권한대행 각하에 명령을  전하갔습네다. 중국 영토 깊숙히 진공하지 말라는 특별지시입네다.]

  "권한대행? 대통령이 유고이신 모양이군요. 음…"

  결국 서울이 핵폭탄에 뽀작났군. 대통령도 골로 가고… 서울이 핵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까지 유고상태가 된 것은 몰랐다.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당연히 안전한 곳에서  지휘를 해야하지 않는가? 윤 대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 사태가 전쟁과 자신의 목적에 미칠 영향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김 대장이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무슨 말씀입니까?  원래 작전계획에는 우리가 역공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 작전의 요체 아닙니까?"

  이 차수가 말을 머뭇거리는 것인지, 몇  군데를 거쳐 연결된 통신상의 문제인지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다.

  [아니야요. 나진, 선봉에 있는  적을 포위, 섬멸하는 거이 작전에 요체디요. 포위망에 갇힌 적의 섬멸에 주력하시라요.]

  이 때,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생각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김 재호 대장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모습이 윤 대위에게 포착되었다.

  "알겠습니다. 적 섬멸에 주력하겠습니다."

  통신기를 고 중위에게 건네준 김 대장이  잠시 투덜거렸다. 윤 대위는 일이 어긋나고 있음을 알았다. 역시 한국의  지도부는 배짱이 없는 반도인에 불과했다.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가진 지도자는 없단  말인가? 윤 대위가 퍼뜩 생각난 듯 김 대장에게 물었다.

  "4군단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까요?"

  윤 민혁 대위가 묻자 김 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작전참모 송 소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소리야? 모란강은 포위망 완성을  위해서도 꼭 필요해. 계속 전진시켜!"

  윤 대위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 고 중위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중국 기갑정찰대 20여명을 생포하여  취조한 정보참모가 위관급 군관 한 명을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그 중국군 중위는 조선족이랍니다."

  "그래? 데려오라고 해."

  김 대장과 윤 대위가 동시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지었다. 잠시 후 정보참모인 곽  준장이 포승에 묶인 중국군을  데리고 장갑지휘차 안으로 들어왔다. 녹색 방한모를 쓰고 있는 중국군  군관에게 김 대장이 다짜고짜 먼저 물었다.

  "자네, 우리말 할 줄 알겠지?"

  상당히 불만에 쌓인 듯한  그 중국군은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아까처럼 한국말로 해, 임마!"

  곽 준장이 다그치자 중국군이 겁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왜 조선은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는 겁니까? 당장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썅~ 니들이 먼저 침략했잖아?"

  곽 준장이 나서기도 전에 김 대장이 쏘아붙였다. 1997년 경, 국방부로 받은 지침에  이런게 있었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들,  연해주나 사할린,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한국인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은 몇 세대에  걸쳐 남의 나라에 살면서도  문화나 언어면에서는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상면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향은 한반도라도 조국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 자는 132사단 전차중대 정찰소대장 김 성묵 중위입니다."

  이제야 곽  준장이 포로의 신원을  보고했다. 김 대장이 묘한  웃음을 짓더니 찬찬히 김 중위를 살펴보았다.

  "흠, 그래? 김 중위, 우리 통일한국군에 현지입대할 생각은 없나?"

  "난 중국인이오."

  "피는 못속여. 자넨 한국인이야.  난 김해 김씨인데 자네 본관은 어딘가? 한국사람이 중국편을 들면 쓰나?"

  의외로 단호한 대답을 들고도 김 대장은 포로를 살살 구슬렀다.

  "당신들은… 결코 중국에 이길 수 없소. 당신들은 패해 반도로  도망가게 될거요. 그런데 우리가 당신네들을 도우면 우린 설 땅이 없게 되오."

  "우리가 만주, 최소한 연변지역을 영구점령한다면?"

  김 대장의 말을  들은 윤 대위가 흐뭇한 미소를, 송  소장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셨군요."

  "야, 짜식아~ 만주는 원래 한민족 땅이란 걸 모르나?"

  김 중위가 비웃음을 흘리자 옆에서 가만 듣고만 있던 윤 대위가 나섰다.

  "어쨌든 나는, 연변 조선족 동포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당신들을  도울 수 없소.  곧 고 상장 동지가 해방군을 이끌고  당신네들을 참살할거요."

  한국군이 연변쪽을 점령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한, 연변조선족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해졌다. 김 대장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고 상장에 대한 생각에 미쳤다.

  "고 상장? 아…  내전때 정면돌파로 유명한 그  고 중장 말이로군. 그 친구는 지금 어딨나?"

  "나도 모르겠소."

  1999. 11. 26  04:30(북경표준시)  중국 신지앙웨이우얼 자치구

  "이봐, 정 대원! 정신 차려!"

  "…, 차렸디."

  차가운 바위 위에  누운 정 호근 대원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이 은경 대원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이  대원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총소리가 울리며 사방에 파편이 튀었다. 팀장인  김 중령은 신호가 끊긴지 이미 오래였다.

  역시 핵기지를 다시  공격한 것은 무리였다. 결국은  아까운 동지들만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동무, 내레 아까 박 동무 따라 가가서. 도와 두기오."

  정 대원이 대검을  뽑아 힘없이 이 은경에게 내밀었다. 이  대원이 대검을 물끄러미 보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둠 속에서 희끗한 물체가 이  대원의 뒤로 달라들고,  반사적으로 이 대원의 석궁이  그림자를 향하여 발사되었다. 비명과 연이어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나고 다시 이 대원이 정 대원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했다. 정  대원이 반쯤 일어나며  74식 소총을 연사했다.  다시 이 대원의 뒤쪽에서  비명이 이어졌다.

  "항상 뒤를 조심하기요. 가는 데까지 가 봅세. 길티만 언제든 혼자 가도 되오."

  이 대원이 정 대원을 들쳐 업었다. 정  대원이 비명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이 대원은 정 대원이 고통을  참느라 근육을 빳빳이 긴장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  대원의 옆구리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이 대원의 왼쪽 어깨를 적셨다.

  이 대원은 바위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주변에 온통 시체였고, 위쪽은 공격헬기의 라이트와 중국군 수색대의  플래시가 번쩍이고 있었다. 조금전까지 두 대원이 있던  곳이 각종 중화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였다. 이 대원이 바위 밑으로 급히 숨었다.

  "이대론 안되갔소. 잠적술 씁세다."

  정 대원이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고통은 참을만 했다. 그러나 몇시간째 계속 추격을  당하자 몸과 마음이 솜처럼 늘어져 버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게  지친 것이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느낌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느낌은, 이를테면,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모래 속으로 숨자고요?"

  "날래 낼 내려 놓기요. 날래~"

  정 대원은 바닥에 뉘이자  마자 무슨 힘이 남았는지 급히 야전삽으로 모래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 키만한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들어 오기요."

  좁디 좁은  곳에 두 사람이  쭈구리고 앉았다. 위쪽을 위장포로  덮은 다음, 정 대원이 다시 옆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 대원의 귀에는 어둠 속에서  사각사각하는 모래 파는  소리만 들렸다. 앞에 쌓인  모래를 뒤로 옮기던 이 대원이 킥~ 하고 웃었다.

  "웃디 말고 날래 따라 오기오. 5메다는 더 파야 하오."

  "아, 미안요. 하지만 정말 땅굴파는 솜씨는 알아줘야 해요."

  정 대원이 삽질을 딱 멈췄다. 이  대원의 말에 약간은 당혹스러웠지만 그가 처해야 할, 아니, 그가 처하고 싶은 상황은 더 당혹스러울 것이다.

  "…, 생존술에 기본이야요.  자, 기쪽을 메우고 날래 이쪽으로 들어  오기요."

  이 대원이 군화발로 자신이  있던 모래굴을 무너뜨리며 정 대원이 누워 있는 곳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 대원의  가쁜 호흡이 정 대원 바로 코앞에서 느껴졌다. 정  대원이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조립식 쇠막대를 늘여 위쪽을  뚫기 시작했다. 이것은 조립식 원형텐트의 속이  빈 가느다란 파이프같은 것이다.  훈련에 의해 익힌 감각으로  막대가 지표면에 닿았음을 알자, 정 대원이 줄을 당겨 막대의 위쪽 끝을 열었다.

  "휴~ 완성됐소. 이제 우릴 찾지 못할 것이오."

  정 대원 옆 어둠 속에  팔베게를 하고 누운 것이 틀림없는 이 대원이 약간은 불만스런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이렇게 껴안고 있어야 되나요?"

  1999. 11. 26  05:50  경상북도 경산시

  "어따메, 이 잡것들이 이 행님  말을 우습게 알아 드러부네, 이~. 퍼뜩 대가리 박으랑께. 대가리란 표준말로 마빡이란 것이여. 알아 듣겄냐?"

  완전무장한 한국군 3명이 대구 동쪽,  경산시에 있는 저수지인 중산제의 옆길에서, 중산동에 위치한 제일합섬으로  출근하던 근로자 5명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총구를  들이 미는 군인들의 서슬에  놀란 근로자들은 시키는 대로 원산폭격을  했으나 한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를  땅에 쳐박고 양팔을 허리  뒤로 잡은 중년 남자  둘과 젊은 여자 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을 참았다. 이들이 타고  온 봉고차는 아직도 시동이  켜진 채 엔진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년이 뻣뻣이 서서 항의했다.

  "와 그라능교? 와 못잡아 묵어서 난링교?"

  "이 쌍렬의  새키들아. 니들은 강주사태때  전라도 놈들  빨갱잉께 다 죽여뿌러라 해싸코 지랄  안했냐. 우리 아부지가 그때  공수부대 총맞고 디저부렀다. 갱상도 군바리 그 개시끼들 땜시로."

  군인 한명이 그 청년의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치자 청년이 어깨를 쥐며 쓰러졌다. 다른 군인들이 청년을 군화발로 계속 짓밟았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른 근로자들은 무서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욕을 하던 군인이 대검을 꺼내 청년의  가슴을 찔렀다. 청년의 눈에 공포와 고통,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마른 풀 위로  붉은 피가 흘렀다. 땅이 피를 거부한듯 피는 땅으로 스며들지 않고 길쪽으로 흘러갔다.

  "난리통에는 누가 디져도  암 말 모든다. 육이오  때도 그랬고 강주에서도 그랬다. 이 새끼는 간첩질 하다가 디진거여. 느그들 알겄냐?"

  "…예."

  "아니~ 이 쌍렬에 자슥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군인이 군화발로 중년근로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사람들이 연달아 옆으로 쓰러지며 비명과 신음이 계속 이어졌다.

  "이것들이 디질라고 환장해 뿌렀냐? 복창소리 보지. 알겄냐?"

  "예!"

  중년 남자 둘은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땅에 처박은 채 이를 악물었다. 여공들은 난생 처음 대하는 공포에  질려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래. 오른짝 기집애 일나라. 빨간색 파카 입은 년, 그래, 니."

  생머리의 여공이 덜덜 떨며 일어났다. 시체를  보고 나서는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80년에 강주에서  갱상도 공수부대 새끼들이  대검으로 여자 젖가슴 짜른 거, 니 아냐? 길가는  사람 아무한테나 칼질 한거지. 그때 애기 밴 여자 배때지도  갈라부렀다. 임산부가  데모하다 죽었겄냐? 그건  아냐? 아냐고?"

  여공이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이 시간에는 길에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여공이 간절하게 애원하는 눈빛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군인이 대검을 꺼내들었다.

  "느그들 다 일나 앉어라. 어쩌케 짤랐는지 느그들한테 보여줄랑께."

  주춤주춤 일어난 근로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여공이 뒷걸음질치려 했으나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얼어 붙었다. 군인  한명이 여공의 머리채를 잡아 채 무릎을 꿇렸다.

  "살려줘요."

  여공이 머리채를 잡은 군인의  바지를 잡고 매달리자 그 군인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여공의 어깨를  내리쳤다. 우지직 하며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 그 여공이 고통에  겨워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며 울었다.

  "누가 니를 죽인다냐? 그때 가슴을  어~쩌케 짤랐는지 보여줄랑 거지. 벗어. 벗어, 이 쌍년아!"

  "꺄악~~"

  군인 한명이 여공이 반항 못하게 잡고, 다른 군인이 대검으로 여공의 옷을 북북 찢었다.  잠시 후에 대검에 긁힌 상처 투성이의  알몸이 드러났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수치심 때문인지 여공이 덜덜 떨었다. 군인이 칼을 여공의 턱밑에 댔다.

  "하갼, 느그 갱상도 새끼들은 씨를 말리 뿌러야 대. 전두한이 노태우 그 개새끼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얼매나 많이 죽이 뿌렀냐? 그런 새끼들이 좋다고 느그들은 민정당 새끼들한테 표  몰아주고 말이여. 글고 죄없는 우리  절라도 사람  빨갱이라고 욕하고. 느그들은  사람도 아니랑께. 자, 느그들 똑바로 쳐다 바라. 고개 돌리는 새끼는 디질 줄 알어."

  말을 마치자마자 그 군인이 한손으로 여공의 젖가슴을 잡고 시퍼렇게 날이 선  대검으로 그 젖가슴을  도려냈다. 피와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너무 놀란 그  여공은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여공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으나 옆에 있던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그 여공의  머리를 쳤다. 쓰러진 여공의 머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거~시, 유방이라는 거시여. 느그들은 오월의 노래라고 아냐?"

  그 군인이 방금 도려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젖가슴을 한손에 쥐고 근로자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가로등 불빛을 배경으로 서있는  이 군인은 흡사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 노동자들은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패전 직전의 전쟁  분위기에서 병사들이 미친 짓을 하는 수가 있다지만,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이런 짓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리 전라도 군인이라지만,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로 그들의  원한이 컸단 말인가?  약간 마른 체구의 중년근로자 한 사람이 부들부들 떨었다.

  "….."

  "이런 시러배 잡것들이! 아냐, 모르냐?"

  "아, 압니다."

  그 중년 근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른다고  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몰랐다. 전라도 사투리의  군인이 음흉하게 미소를 짓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 그러믄 니 한 번 불러 바라. 잘 못부르믄 니도 디질 줄 알어. 알겄냐?"

  "예, 예."

  젊었을 때 노동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어 웬만한 운동가요는 다 알고 있는 그  중년 근로자는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질줄은 상상도  못했다. 말로만 들었고, 별로 믿지도 않았던 80년  광주에서의 일이 이곳에서 벌어질 줄이야. 중년 노동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다시는 살아서 가족을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그만, 그만! 잘해 부렀어. 다음, 니 한 번 해 바!"

  군인이 다른 중년  근로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검은  가죽잠바를 입은 그 근로자는 덜덜  떨더니 그 노래를 모른다고 했다. 다른  군인들이 달려들어 그 근로자를 개머리판으로 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어메~ 이런 쌍놈에 새끼, 그 노래도 몰르다니. 우리 절라도  사람들에 한이 맺힌 노래여~, 이 잡것아."

  "죄송, 죄송합니다."

  폭력이 멈추자 그 근로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눈두덩이 퍼렇게 멍들고 입안이 터졌는지 입에서 피가 계속 흘러 나왔다.

  "시방 나가 기분이 좋아서 이만 하고 느그들은 돌려 보내주겄다. 담부터 검문하는디 건방 떨면 저 새끼같이 죽이뿐다. 알겄냐?"

  노동자들의 눈에  처참하게 널부러진  청년의 시체가 보였다.  아직도 뜨거운 피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가슴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예, 예!"

  "그럼 저 잡것들 데꼬 가부러. 느그들 꼴만 바도 배알이 꼴린께."

  "예, 알겠습니다. 수고 하이소."

  근로자들이 청년의 시체와 사경을 헤매며 쓰러져 있는 여공을 들쳐 업고 봉고차에 실었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쏘지나 않을까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도망치듯 시내쪽으로 차를 몰았다. 백미러에 비친 무장군인들,  아니, 인간의 탈을 쓴 악귀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1999. 11. 26  05:20(베이징표준시)  중국 랴오닝성 센양

  린 치앙 대교는 관제탑에서 출격지휘를  하다가, 활주로에서 출격준비중인 조종사들의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조종사들과의 무선교신 내용은 한결같았다.

  [엔진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른 계기들도 이상합니다!]

  린 대교가 유리창을  통해 활주로에 늘어선 전투기들을  보았다. 전투기들은 고장난 장난감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뛰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기 조종석에서 기어 나오는 조종사도 있었다. 출격준비 중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린 대교가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레이더 담당 전업군사가 비명을 질렀다.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선기가 고장입니다!"

  통신병까지 비명을 지르자, 린 대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소리야? 어떻게 된거야?"

  1999. 11. 26  07:00  서울 용산, 국방부

  "빨리! 조심하고!"

  희뿌옇게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수경사 소속 공병감인 조 대령이 구조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잔해  밑에는 대통령과 한국군 최고 지휘관들이  갇혀 있었다. 몇시간째 이 작업을 해  오고 있지만 쉴 틈이 없었다. 크레인과 포클레인 등의  중장비가 총동원되어 이 작업에 나섰다.

  [선발대가 지하 1층에 도달했습니다.  구멍을 뚫고 지하 2층으로 계속 진입시키겠습니다.]

  드릴이 벽을 뚫는 듯한 엄청난 소음 사이로 선발대장 김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대령이 통신기를 잡고  주변의 포크레인 굉음에 못지 않은 소리로 외쳤다.

  "김 소령? 조심해서 접근하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 대령이 부들부들  떨었다.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대통령이 죽었다면… 핵공격까지  당한 마당에 정부가 중국에  항복하거나 화전양론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중국의 공격에 쉽사리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시쳅니다! 시체 3구를 발굴했습니다.]

  "뭐야? 누구야? 신원파악은 되나?"

  [사병들입니다. 한 명은 하사관이고... 경비병력 중 일부로 보입니다.]

  조 대령이 가슴을 쓸었다. 아직은 어둡기도  했지만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정신이 아득해져서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방사능 낙진경보가 길게 울려 퍼졌다.

  [생존잡니다! 건물 잔해를 뭔가로 두들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뭐야? 작업 중지!"

  조 대령의 한마디에  중장비들이 일시에 엔진을 멈췄다.  갑자기 적막이 찾아오고 조 대령이 무전기에 귀를  귀울였다. 무전기에서 강력한 소음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벽을 뚫고 파이프를 넣었습니다.]

  잠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쪽에는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조 대령 생각에는 구조대원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듯 했다.

  [중령님. 구조댑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꺼내 드리겠습니다.]

  "…..!"

  ‘생존자다!’ 조 대령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빨리, 빨리’라는  말이 조 대령의 입안에 감돌았다.

  [.....]

  "그쪽에서는 무슨 말 없나?"

  답답해진 조 대령이 김 소령에게 묻자, 뜻밖에도 희소식이 왔다.

  [대통령 각하는 무사하시답니다!]

  "만세! 김 소령. 빨리 구출해 드려! 병력지원을 해줄까?"

  [어차피 이곳엔  공간이 없습니다. 30분 후에  교대병력을 보내주십시오.]

  "알았어. 조심하게. 일단 지상작업은 중지시켰네. 인명구조가 최우선이야! 어이! 이쪽으로 구급반 대기시켜!"

  "이제 우린 살았습니다!"

  구조대의 굴착드릴이 벽을  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가운데, 이 소리에 지지 않을만큼  큰 소리로 국방장관이 외쳤다.  여기저기 살아남은 자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작은 구멍을  통해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으로 홍 대통령은  내무장관이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대통령이 허탈했는지 벽에 기대 앉았다.

  굉음과 함께 드디어  벽이 뚫리며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구조대원들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이 쓰러진 기둥 너머로  보였다. 홍 대통령이 탈진한채 앉아 있는데, 갑자기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이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홍  대통령은 아득한 암흑의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1999. 11. 26  06:20(북경 표준시)  티벳(서지앙 자치구), 라싸

  "자유 티벳 만세!"

  "달라이 라마 만세!"

  "우리의 판첸 라마를 찾자!"

  티벳의 수도  라싸(拉薩)의 번화가인  빠지아오지에(八角街)의 아침에 때아닌 함성소리가 요란했다. 붉은 승복을 걸쳐  입은 백여명의 티벳 승려들과 수천명의 민간인들이 노천 시장의 거리를 행진했다.

  이들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티벳 여성 빠르 바티와 청년들은 빠지 아오지에의 중심인 죠칸사(大昭寺  ; 중국식으로 따자오쓰)를 한바퀴 돌고 나서 北京東路를 따라 포탈라궁을 향했다.  노란색 라마 깃발을 흔드는 티벳 청년 나사날  바타파를 중심으로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불어나고 행진속도도 빨라졌다.  빠르 바티가 휴대용 확성기로  외치며 시민들을 계속 선동했다.

  [티벳은 우리의 땅입니다. 중국인들과는  문화도, 언어도, 뿌리도 다른 우리들의 땅입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곳에 중국인들을 이주시켰지만, 보십시오. 중국  여성은 이곳에서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땅이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로와 접해 있는 집들의  창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시위도 많은 민간인 희생자만  남기고 실패로 돌아갈 것인가? 시위대의 눈앞에  포탈라궁 바로 동쪽, 남북으로 뻗은 해방로 진입로에  공안요원들이 일렬로 도열한 것이  보였다. 행진하던 시위대의 선두 대열이 딱 멈췄다.  공안요원들의 머리 위에 나부끼는 플래카드가  이들의 동공에  확산되었다. ‘축 서장자치구  해방 34주년!’, 티벳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 글이 쓰여진 플래카드도 총을 든 공안요원들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총이다!"

  어느 노인이 지른  외마디에 시위대들 사이에 공포가  엄습했다. 앞에 늘어선 공안요원들의  대열은 그들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보였다. 성스러운 흰산보다 더 높아보였다.  이제 우리는 죽고, 평화적인 독립시위는 또 실패하고 마는가? 겁먹은 시위대 일부가 주변 상가와 주택가 골목으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빠르 바티가 나섰다.

  [겁내지 마십시오! 적이 총을  쏘면 우리도 쏠 것입니다! 이번엔 기필코 독립을 쟁취합시다. 세계 열강과 한국, 러시아가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총도 러시아제입니다. 사격준비!]

  빠르 바티가 검은 색의  짤막한 자동소총을 흔들며 명령을 내리자 선두의 청년들이 일제히 옷 안에 감춰둔 AKR을  꺼내 공안요원들을 겨눴다. 일순 공안요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비무장한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면 되었다. 티벳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무저항주의를 따라 이따금  평화시위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공안요원들이 잔뜩 겁을  먹으며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수많은 티벳인들이 이 사건의 경과를 주시하고 있을  때, 요란하게 스피커가 울렸다.

  [쏴요! 침략자들을 몰아냅시다!]

  일렬로 앉아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티벳인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그동안 비무장  민간인들만을 상대해 온 공안요원들은  분노에 찬 청년 티벳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대여섯명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자 공포에 질린  중국인 공안요원들은  일순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주변에 숨어 구경하던 티벳인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달라이 라마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방법이긴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보는 통쾌한 광경이었다.

  [자, 포탈라궁에서 침략자들을 몰아냅시다! 앞으로~~~ ]

  빠르 바티가 외치자 일시에 도로를 메운 수천명의 시위대가 노도처럼 해방로를 메꾸며 포탈라궁을 향했다. 소년들이  전봇대로 올라가 플래카드를 걷어 냈다. 땅에 떨어진 플래카드는 즉시 찢기고 불태워졌다. 무장 시위대의 일부가 서장자치구 인민정부 청사와  공안청 청사를 점령하고, 노동인민문화궁, 시인민정부 청사, 공안국 등은 성난 시위대가 난입하여 불태워 버렸다. 겁에  질린 중국인 공안요원들은 대처도  못하고 사로잡히거나 시외로 탈출했다.  티벳인들은 중국의 강제병탄 이래  최초로 승리를 맛봤다.

  "미스터 타시. 무기를 더 구해 줘요. 저 많은 사람들을 모두 무장시키려면 무기가 더  필요해요. 공안청 무기고를 털었지만  충분히 나오지는 않았어요."

  죠칸사를 남쪽으로 바라보는 빠지아오지에의  시장, 허름한 2층건물에서 이번 무장폭동의 지도자 빠르 바티가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남자를 졸랐다. 옆에는  최초의 승리로 잔뜩 격앙된  얼굴의 티벳인들이 총을 어깨에 맨채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스 팔바티, 군사훈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는 인민해방군 정규군에 맞서 싸울 수 없소. 티벳해방전선의 진입을 기다리시오."

  타시 구르메라고 불리는 이  청년은 다른 티벳인들과 함께 짬빠(보리, 보리밥)를 먹고 있었으나, 그의  외모는 아무리 보아도 티벳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티벳인이라면  강렬한 자외선 때문에 검붉게  그을리고 씻지 않아 때에 절은 피부로 확연히 구분될 수  있지만, 이 청년은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목욕울  했음이 분명했다. 춥고 건조한  티벳에서 목욕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티벳인들은  심지어 대변을 보고도 뒤를  닦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티벳의 가혹한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  티벳에는 중국 정규군이 거의  없어요. 작년에만 해도  50만명의 인민해방군이 있었지만 한국과  전쟁을 치르는 통에 지금 중국은 티벳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그리고 제 이름은 빠르 바티라고요."

  망명 티벳  여성답게 깔끔한 모양새의 빠르  바티가 계속 다구쳤지만 타시 구르메의 입장은 단호했다.

  "미안하오, 빠르 바티. 어쨌든 나는 학살을 방치할 수 없소. 르카쩌(日喀則) 인근에 인민해방군 1개 사단이 있어요. 단 하루면 이곳 라싸로 달려올 수 있소. 해방전선에서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느냐가 독립의 관건이 될 것이오. 그들의 승전보를 기다리시오. 이것은 해방전선과의 약속이기도 하오."

  타시 구르메는 학생  때 일본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을  후회했다. 삼지안 파르 바티와 우(无) 고안야던가?

  "그럼 왜 우리가 봉기하도록 재촉했죠?"

  "….., 라싸의 봉기소식을 듣고 틀림없이 인민해방군이 이쪽으로 올  것이오. 해방전선이 그들을 몰아낼 거요. 그렇게 된다면 티벳은 독립할 수 있소."

  "한국 수도에 중국이 핵을 발사했다는 게 사실이죠?"

  아직도 라마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나사날 바타파가 묻자 타시 구르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사실이오."

  "흥! 결국 한국이 다급해지니까 이제야 봉기를 허락한 것이군요. 그렇다면 계속적인 지원을 해 줘야 할 거 아녀요?"

  타시 구르메는 재촉하는 빠르  바티를 쳐다 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타시 구르메, 그대와 같은 티벳사람이요. 무기는 해방전선에  지원되오."

  1999. 11. 26  07:40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이 PD! 가수,  아나운서들 제때 도착하겠나? 현재 어느 정도  준비됐어? 8시에는 출발해야 해!"

  "준비상황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자재준비 완료. 방송요원 소집 완료, 아나운서와  진행요원들, 관현악단, 합창단 집합 완료됐습니다. 어제 밤에 미리 연락했으니까요. 가수는 아직  몇 명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빌어먹을! 전화도 안되고… 제때 안나오고 건방 떠는 것들 있으면 모조리 잘라버려!"

  한국방송공사 TV본부 2국 직원들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부터 여의도에 있는 방송국에서 밤샘작업을 했기 때문에 지옥같은 핵폭탄의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직원 몇 사람이  가족들을 찾으러 새벽에 시내로 들어가려 했지만 원효대교  등, 시내로 통하는 길은 모두 봉쇄되었다.

  서울 시내는 핵폭발로 인해 아직도 아비규환이었지만 불길은 대충 잡히고 지금은 인명구조와 복구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2국장인 김 승종 국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긴급보도를 함께 보며 이 PD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통행제한된 교량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지방으로 피난간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또다시 핵폭탄이 날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걔네들이나  우리나 모두 종군하고 있는  거야. 전쟁터에 나가 직접 싸우는 군인만 군인이  아냐, 우리도 군인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도망가?"

  "아! 저기 트리플 엑스가 오고 있습니다!"

  신세대의 우상, 댄스  락그룹 트리플 엑스가 보라색으로  물들인 머리결을 일렁이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세 사람에  이어 이들의 매니저와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오자마자 김 국장은  따귀를 올려붙였다. 최고 인기 그룹인 이들을 이렇게 다루다니, 평시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 자식들아! 7시 반까지  오라고 했잖아? 이젠 컸다고 시건방 떠는거야?"

  김 국장이 이들에게 발길질까지  해댔지만 매니저도 서슬 퍼런 김 국장에게 감히 나서질 못했다.

  "악기는 너희들이 운반해. 인원을  최소한도로 줄여야 하니까. 매니저, 운전사,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다 못가니까  알아서들 해! 잠시  후에 출발한다. 개인행동은 용납 못해. 이건 군 작전이야! 알겠나?"

  1999. 11. 26  06:50(베이징 표준시)  중국 베이징 쯔진청(紫禁城)

  ‘나는 아직 살아있다.’

  피스 소속의 킬러인  구스타프는 꾸꽁(故宮) 깊숙한 곳인  타이허디엔(太和殿) 다락에 숨어있었다. 아침인지 대전 다락에 희미하게 볕이 들고 있었다. 대전(大殿) 부근에서는 아직도 중앙당 직속인 경위국 소속 군인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가들려왔다. 그들은 몇시간째  정치국원들을 살해한 범인을 샅샅이 수색하는 중이었다.

  구스타프는 배낭을  열고 소지품을 점검했다. 미니미  기관총과 200발 들이 탄창 하나, 여분의 탄알, 권총,  그리고 마지막 임무에 사용할 체코제 플라스틱 폭탄  셈텍스가 그가 쓸 수 있는 무기의  전부였다. 근접전에서 유효한 수류탄이나  최후의 무기라는 대검(帶劍)도 없었다. 얼굴없는 협력자는 왜 수류탄과 대검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자살할 무기는 준비해 줘야지, 젠장!’

  투덜거리던 구스타프는 갑자기 자신의 원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스페인 의사  카를이 지어준  구스따브라는 이름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스페인 사람 카를이, 베트남인과 중국인의 혼혈이며 미국인인 자신에게, 치열한 멕시코 내전의 와중에서  왜 독일식 이름을 지어줬을까? 수년째 풀지 못한 의문이었다.

  ‘왜 그는 내  어머니의 조국에 나를 보냈을까? 내가 차이나  마피아와 싸웠기 때문에 안심했을까?’

  보트 피플인 남부 베트남인 아버지와 밀입국자인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구스타프는 어렸을  때부터 자아정체성(自我正體性)의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난 최악의 부모에게서 난 자식이며 미국이라는 절대적 인종차별국가에서 그는  성장했다. 그가 성장하고 나서도 최근까지  정체성의 혼란은 더 심해졌다.  공산 베트남은 중국에 점령당했고, 어머니의  출신지역인 산둥성은 남부 광둥-푸젠  연합에 의해 식민지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는 모두가  싫었다. 동족상잔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떠돌이로  만든 베트남, 어머니를 죽도록 고생시키고 결국은 추방해버린 중국, 철저하게 자신을 차별하여  뒷골목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 한 미국 모두  싫었다. 더욱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최하층민  부모가 더 싫었다. 그는  복수를 하고 싶었다. 뚜렷한  대상은 없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아무에게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제 그 대상은 중국이었다.

  ‘한국은?’ 그는 한국을  생각하자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들었다. 거대한 나라 중국에 당당히 맞서는 한국이라서?  아니었다. 뭔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유전자 깊숙히 새겨진 공포, 그것은 뭔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벽처럼,  특정 인종에 대한 공포였다. 원시시대 인간이 불과 용을 무서워하고 경외하듯,  중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면  당연히 가지는 심연(心淵)의 두려움이었다. 뿔달린 구리투구를 쓴 용맹한 어느 무신(武神)에 대한  경외감, 북쪽 하늘  너머로 엄습해 오는 공포,  이것이 중국인에게 수천년간 이어져 온 본능적 두려움이었다.

  ‘까를, 구스따브…’

  구스타프는 카를과 그가  지어준 이름, 구스타프를 되뇌이다가  한 이름이 떠올랐다. 정신과의사 칼 구스타프 융(Karl Gustav Jung)…

  1999. 11. 26  08:05  경상북도 경산시, 경산경찰서

  "1명 사망, 2명  중상… 피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전라도 출신  군인들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기가 막히는구만. 우 과장, 군인들이 그런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 이런 난리통에 말이지."

  경찰서장에게는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서울  반쪽이 날아가고 개성시가 완전  소멸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한국은 전쟁에서 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경북지방경찰청이나  검찰청, 주변 군부대에서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새벽에 관할구역에서 벌어진 일이 더 급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80년  광주에서도 실제 일어난 일이잖습니까?  익명에 묻혔을 때의 무책임한  상황인식과, 폭력을 행사하고픈 잠재적 본능…  전쟁같이 어수선할 때에는 그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형사과나 수사과보다는 보안과에 맡긴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연락해봐도 사고지역에 경비병력을 파견했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보안과장인 우 과장은 피해자  중 한 사람이 사건현장에서  녹음했다는 테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간부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혹시 중국이 특수부대를  파견한 것이 아닐까요? 후방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말입니다. 이상한 것은… 가해자 군인이 3명이라는데 녹음된 테이프에는 피해자들 외에는 가해자 한 사람의 목소리만 녹음됐습니다."

  서장은 대공과장의 말도 듣고보니 그럴듯했다.  여기만 해도 정보과장과 조사과장은 그런 군인들을 찾아내서 공개총살형을 시켜야 한다고 흥분하고 있었다.  서장으로서는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 실지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민과  경상도민의 충돌, 만약 만행을 벌인 전라도군인들을 찾아내 처벌한다 해도 전라도 사람들은 틀림없이 조작이라고 믿을 것이다… 라는 걱정이 앞섰다.

  "이 사건은 당분간 비밀에 붙이시오.  정보과에서는 시중에 나도는 유언비어를 수집하고, 보안과는 군부대와 더 접촉해 보시오. 보도매체에는 협조를 요청하고…"

  "예."

  서장의 명령에 과장들이 대답은  했지만 이미 이 사건의 전말은 경산이나 인근 대구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직은 특별한 일은 없었으나 전라도 출신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이웃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는 정보나 거실 유리창이 깨졌다는  신고가 많이 들어왔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우 과장이 잠시 통화하더니 놀란 얼굴을 하며 서장에게 말했다.

  "정오에 대구에서  궐기대회가 열린답니다. 전라도 군인  체포와 총살을 요구하며 군부대 정문까지 시위행진을 한다는 첩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사투리를 쓰지 않고 있던  서장이 급기야 분통을 터뜨렸다.

  "그기 머꼬? 글마들 미쳤다 아이가! 이런 난리통에 와 지랄을…"

  1999. 11. 26  07:15(중국 표준시)  중국 신지앙웨이우얼 자치구

  "아직도… 윽, 불안하오?"

  "…, 벌건 대낮에 이동하다뇨. 적이 쫙 깔렸을텐데."

  이 은경 대원은 부상당한 정 호근 대원의 상태를 잠시 확인하고 나서 계속 부축하면서 걸었다.  이 대원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 한뼘쯤 떠올라 있었다. 태양  아래 멀리 중국제 장갑차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찾는듯한 모습이었다.

  "앙이오. 그들은  차량으로 이동하니끼니 우리가  먼저 알 수 있디요. 밤에는 적외선탐지기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디요."

  "그렇긴 하지만…"

  이 대원은 겁이 나기는  했지만 어제의 격전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고 싶었다. 새벽에  잠시 수색이 뜸해진 틈을  타서 모래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가능한 더 멀리 서쪽으로 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혈은 했지만 아직  정 대원의 상처는 깊었다.  여분의 사막용위장복이 없었다면 그는 모래 위를 기어가는 장난감소방차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막에도 길이  있디요. 장갑차량이레 함부로 길을  벗어나디 못하는 법이야요."

  어디선가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자동적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직승기레 빼구…"

  위장복을 머리  위까지 덮은 정 대원이  무반사처리된 망원경을 꺼내 헬기와 주변 지평선을 감시했다. 아직 위험은 없었다.

  "유르트!"

  "그게 뭐죠?"

  아지랑이 너머 멀리  수평선 가장자리에 작은 구조물들이  보였다. 꼬물꼬물한 것은 사람이 틀림없는데, 주변에 차량 두 대가 보였다.

  "위구르족이나 주변 유목민족들이 사용하는  천막이요. 중국 병사들에 검문이 끝났나보오."

  "혹시… 저들에게 도움을 받자는 것은 아니겠죠?"

  "도움이레 받아야겠수다. 빨치산이레 보급투쟁이 기본 앙이갔소?"

  1999. 11. 26  08:25  중국 만주 무딴지앙(牡丹江)시 남방 17km

  인민군 4군단은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확대전진대형으로 전개하여 급속 북진하고 있었다.  선두는 제 15 기계화사단, 남북대치상황에서는 경기도 북부의 서부전선에 전진배치되었던 정예답게 기계화되어 전진속도는 시속 40km에 육박했다.

  이 뒤를 보병사단,  경보병여단 및 각종 지원부대가 따랐다. 폭  20km의 작은 구멍으로 약 6만명의  병력이 무딴지앙으로 몰려갔다. 어디에도 적은 보이지 않았다. 5개 독립대대  정도라는 인민무장경찰도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전방에서 쾌속전진하는  기갑정찰대대가 국군 전자전기에서 제공해준  중국 인민무장경찰의 주둔지를  급습했지만, 막사마다 텅 비어 있다는 보고였다.

  "어드레 간기야?"

  군단장인 최 성만  대장이 투덜거렸다. 작지만 손쉬운  사냥감을 놓쳐 안타깝다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만주는  적지라기보다는 무주공산이었으며, 어떻게든 공을 세워보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1999. 11. 26  08:30  서울 용산,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연길을 점령했단 말이죠…"

  홍 지영 대통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침대머리에 붙은  환자상태표에는 두개골복합함몰 골절, 좌우대퇴부 연부조직손상, 우측경골골절,  우복막출혈 등의 글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응급처치를  끝낸 중대부속병원 의사들은  다른 민간인 환자들이 더 급하다며 돌아가버렸고,  경상에 그친 국무위원들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예… 통참의 2군사령부에 대한 지휘권 장악에 문제발생? 그럴  리가… 예… 아니오. 아무래도 총리가 당분간  권한대행을 계속해야겠소. 예? 양 중장은 현역인데… 알겠소. 국방장관은 순직했으니 그 인사는 내가 추인하겠소."

  홍 대통령은 허탈했다.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국무위원과 정부위원들을 모두 잃은 것이다. 국방장관, 안기부장, 내무장관, 합참의장이 지금은 차디찬 시신이 되어  영안실에 누워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었다. 부인과 비서실, 경호실 직원 등 청와대 식구들, 개전 첫날 테러범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었던 93경비대대의 박 철민 중령과  병사들,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시민들…  자신이 지켜야할  시민들이 100만명 가까이  사망했다는 TV보도는 대통령을 전율케했다.

  "아니오. 총리께서  계속 대전에서  지휘하시오. 난  서울을 지키겠소. 예. 수고하시오."

  수화기를 간호장교에게 건넨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에게 내린 첫 명령은, 군의관들을 민간인 구호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40대 간호장교 한 사람만 빼고 대통령 주변에서  서성이던 군의관들이 모두 방 밖으로 밀려 나갔다.

  "각하! 이 원고를 읽어 보십시오. 각하께서 건재하시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려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도진들이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병실  밖에서는 각하의 생존을 알리는  생방송이 한창입니다."

  공보처장관 오  석천이 대통령에게 서류철을 넘기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염치로 국민을 뵐 수  있겠소. 국민을 지키지  못한 내가 먼저 죽었어야지…"

  "아닙니다. 국민들에게는 각하께서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서울에 계속 계셨다는 것, 국민들과  함께 하다가 역시 국민들처럼  중상을 입었다는 것, 그리고 계속  서울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면 국민사기양양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역시 나치 선전상(宣傳相) 괴펠스(Goebels)인가…’

  대통령은 5공 초반기의 언론학살에 관련이 있다는 공보처장관을 붕대 사이로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은 얼굴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보처장관은 내각, 또는 정부의 대변인이다. 대변인이 대통령에게 바턴을 넘겼다는 것은 꿍꿍이속이 있다는 얘기였다.  홍 대통령은 오 장관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1999. 11. 26  07:40(중국 표준시)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지하에 임시로  마련된 상황실에서는  조선공작회의가 속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한 이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증폭된 위성수신방송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실에  설치된 대부분의  TV모니터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전쟁  진행상황과, 서울에서 발생한 핵폭발을  집중 보도하고 있었다.  한 화면에서는, 방사능방호복으로 완전무장한  CNN 기자가 폐허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창  상장과 정치 국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리라 생각했던 핵공격은 오히려  중국지도부를 핵보복의 공포에 시달리게 했다. 지금도 지도부는 각 중요 레이더기지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주석 동지! 관외(關外  : 만주)와의 무선통신이 부분적으로  재개됐습니다!"

  왕 대교가 서둘러 회의실로  들어서며 외치자 창 상장이 지체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제 1 야전사(野戰司) 사령원 동지를 대주게."

  한반도 북동부를 점령하고 있는 제 1 야전군사령부는 어떤 상황일까? 모든 정치국원들이 갖고 있는 최대  의문점이었다. 8시간 가까이 전선상황을 모른다는 것은  최고사령부격인 조선공작회의를 눈뜬 장님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단둥의  제 2 야전사는 인민해방군이 신의주를  잃자 미리 센양으로 옮겼다. 조선군이 한반도 북동부에  대해 어떤 압박을 가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전략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뇌전(雷電 : 유선통신)은 어떻소?"

  총후근부장 위앤 중장이 소근거리며  묻자 왕 대교 역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신임  총참모부장 우이 롄찬  중장이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우전부(郵電部) 전신총국에서 예비용  전전자교환기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재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에잉~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될 것이오. 통신망의 헛점을 적에게 노출시키다니…"

  우이 중장의 투덜거림은 창  상장이 통화를 시작하자 바로 끝나고 말았다.

  "차오 동지? 나 창 상장이오. 그렇소.  방금 통신이 재개됐다 하오. 그곳 상황은 어떻소? 음…"

  창 상장이 안면근육을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가 수화기를  천천히 내리며 긴장하고 있는 회의 참가자들에게 선언했다.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안투(安 )와 엔지(延吉)를  함락했소. 이는 명백한 조선의 만주침공이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 1야전사 병력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고 있소. 1야(野)는 포위됐소! 우리는  대장정 이래 최악의 상황에 처했소."

  1999. 11. 26  08:45  경기도 남양주

  "대통령 각하레 과연 용명하시구만."

  이 종식 차수가 와이드TV화면에 비친 장면을  보며 감탄했다. 미이라처럼 온몸이 붕대에 감긴  몸을 반쯤 일으킨 사람이 특유의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담화를 발표하고 있었다. 발표에서  대통령은 이번 핵공격에서 피해를 입은 국민과 유족들에  대한 조의표명과 함께 자신이 끝까지 서울에 남아 있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대통령 맞슴메? 배우 동원한기 아님메?"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국 입장에서 대통령의  유고를 감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 통일참모본부 참모들의 중평이었다.

  [우리 통일한국군은 남북한 정보기관과 함께 작전을 성공시켜  중국의 핵미사일 절반을 빼돌렸습니다.  중국은 이제 핵공격력을 상실했습니다. 더 이상 중국의 핵공격이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자료화면에는 충청북도의  어느 지하비밀기지에서 핵탄두가 미사일에 탑재되는 광경이 비쳤다. 이 차수는 뿌듯하다는 미소를, 차 준장은 일본과 미국에 대한  걱정으로 우려의 표정을, 인민군 장군 복장을  한 짜르는 알듯모를듯 애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의 도발이 없으면  결코 핵보복을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중국군은  즉각 우리 영토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합니다.]

  짤막한 긴장의 순간이 지나며 홍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이번 전쟁에서 소중한 생명을 잃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다른 나라 국민 등 모든 분들께 삼가 조의를표하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인가요?"

  차 영진 준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끝일까? 통일참모본부에서 전군을 지휘하고 있는 모든 참모들의 의문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방송사의 보도본부가 나왔다.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대통령의 담화에  대해 요약하고 해설하고  있을 때, 다시 화면이  바뀌며 책상에 앉은 젊은  기자가 나왔다. 그 기자의 오른쪽 위에는  중국 인민 해방군의 대부대가 전선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담긴 화면이 있었다.

  [지금 곧 중국 CCTV에서 중국공산당 중앙당  상무위원회의 중대발표를 중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제 전쟁은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각국의 언론들이 중국 지도부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면은 보도본부에 있는  각국 주요 TV화면으로 확대되고, 모든  TV 방송이 CCTV의 화면을  생중계하는 모습이 보였다. 85식  전차에 탑승한 전차병의 당당한  얼굴, 해방트럭에 탑승한 보병들의  날카로운 총검들이 우렁찬 해방군가의  소음 속에 번쩍이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마치 정치평론가처럼 중국이 정전회담을  제의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말을 하고 있었다.

  차 영진 준장을 제외한 참모들은 중국측의 일방적인 선전일지도 모를 발표를 여과없이 바로  방영하는 것에 대해 당황했지만,  통신과 방송이 극도로 발전한 현재 이를 막을 방법과, 무엇보다도 의미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임시 주석 겸 인민해방군 해군사령 창 리엔충 상장입니다.]

  중국어와 함께 동시통역이  이어졌다. 창 상장 주위에는  신임 총후근 부장 위앤 중장과 총참모부장 우이 롄찬 중장, 그리고 몇 명의 장성, 고관들이 배석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무위원이시군."

  "당중앙군사위원회와 임시조선공작회의 주석이기도  할겁니다. 총서기자리는 아마도 틀림없이 저 친구가… 임시 국방부장일지도 모르고…"

  이 차수에 이어 이 호석 중장이  끼어들었다. 장군들이 오랜만에 재미있는 화제거리를 찾은듯했다.

  "국가주석이나 국무원  총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희안한 나라죠. 한 사람이 도대체 몇 개의 직책을… 쯧쯧."

  정 대장이 약간 비꼬듯 말했으나, 그의  말은 인민군 장성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당  우위의 일당독재 공산주의 국가에서  국기위기시 권력의 집중은 당연했다.  박 정석 상장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을 때 창 상장의 발표가 계속되었다.

  [한국은 현재 중국의 영토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민간인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하고 있으며, 한국군은 그들의  만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불에 탄  농촌마을의 모습이 비쳐졌다. 군데군데  포탄 자욱이 있고 시체와 가재도구가 적당한 배치로 흩어져 있었다.

  "악랄한 선전이로군요. 저곳은 눈도 안왔나 보죠."

  이 호석 중장이 지적하자 다른 참모들이  고개를끄덕였다. 화면에 비친 모습은  틀림없이 늦가을이었다. 아마도  한국침공 전쟁 직전에  2차 중국 내전을 가장하면서 찍은 화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민해방군은 그들의 침략을 저지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기로 했습니다.]

  "역시…"

  심 현식 중장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중국은 종전(終戰)을 원치 않는 것이다.

  [핵폭탄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전임 정치국은 불행히도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일념에서 핵미사일을 한국에 발사하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만, 새로이 구성된  정치국에서는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을  반대할 것입니다.]

  참모들이 비웃음  반, 안도감 반의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화면 속의 창 상장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를  침략한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진군가가  해방군합창단에 의해 울려 퍼지며 화면은 잠시 중국군의  행진장면, 다시 한국방송공사의 메인  스튜디오로 옮겨졌다. 김 병수 대장이 짤막하게 논평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고놈들 전력이레 바닥났을틴데 무시기 능력으로? 창 상장이 직접 총들고 전선에 나올 모양이디요?"

  1999. 11. 26  08:55  대구

  "일마 쥑이라~"

  "쥑이, 쥑이!"

  "난 경기도 사람이오! 으악~ 회사차 넘버가 전남번호인걸 어떡해요~"

  시장에서 10여명의 사나이들이 키가 작은 트럭 운전사를 짓밟고 있었다. 어떤 중년 남자는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기고, 어떤 청년은 칼까지 빼들고 찌를 기세였다.

  "거짓말 말거래이. 니가 전라도 사투리 쓰는 거 다 봤다 아이가!"

  운전사가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집단구타는 그치지 않았다. 분노가 폭력이 되고, 폭력은 다시 분노를 재 생산했다. 그때, 호각 소리가 길게 울리며 경찰이 뛰어왔다.

  "머하능교? 사람 잡겠심더!"

  순경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와 피해자의 상태를 살폈다.  혼절한 트럭 기사는 언뜻  보기에도 생명이 위독해 보였다. 순경과 같이  온 방범대원이 피해자를 업으려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제지했다.

  "일마, 전라도놈이라 안캅니꺼. 유선방송 안봤능교?"

  "전라도 놈들 다 쥑이삐리야 된다 안카노!"

  순경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경찰학교에서는 이럴  때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어떻게?

  "내도 봤지만,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심니꺼? 진정들 하이소!"

  "치아라~ 안비키문 니도 마, 칵 쌔리 쥑이삘끼라!"

  방범대원의 머리를 내려치는  몽둥이를 보고 순경이 멈칫멈칫 손가락으로 방범대원의 뒤를 가리켰다. 방범대원은 자신의  뒤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순경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 뿐이었다. 잠시 머리에 충격이 오고 욕지꺼리같은 소리가 머릿속에 웅웅거렸다.

  1999. 11. 26  09:00  광주

  "긍께 이것이 그지께 우리 집에 와서 강도질을 해부렀어야~"

  "오매~ 마빡에 피도 안마른 새끼가.  인자 본께 이놈 날강도같이 생겨부렀구만 이~"

  "범죄형이여~ 갱상도  사투리 쓴 거  본께 80년 오월이 생각나는구만 이~ 이런 난리통에 갱상도 놈들이 왜 광주에서 설친당가?"

  "내는 아입니더! 믿어 주이소~ 학교 가는  길에 이 아저씨가 다짜고짜 내를 팬다 아입니꺼!"

  "야 자슥아. 이 아저씨가 니를 봤응께 니를 잡지, 글않으문 니를 괜히 잡겄냐?"

  허름한 반코트를 입은 중년  남자가 청년의 멱살을 쥐고 흔들다가 땅에 패대기 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넋두리를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시상에… 나 말 좀 들어 보소. 글씨 이것이 그지께 밤에 곤허게  자는디 칼 들고  들어와서는 온 식구를 꽁꽁 묶어불고 하는  짓이 글씨… 우리 보는 앞에서  중핵교 댕기는 내 딸래미를  강간해부렀지 않겄습니까. 전라도 씨는  더러웅께 갱상도 씨앗을 퍼뜨려야  된담서… 흑흑. 불쌍헌 내 딸래미. 신세 조져뿌렀네 이거~"

  "이~~~런! 흉악한 놈 같으니라고~ 전두환이보다 더 해부러야. 이런 개 잡것을 보드라고! 갱상도  놈들이 우리 전라도 사람을 아직꺼정  우습게 봐부러?"

  "아~따 시방 머든다요. 이런 잡것은 쌔리 직이ㅃ시다."

  1999. 11. 26  09:10  함경북도 회령(會寧) 개선산

  "또 온다! 아~ 정말 끝없이 몰려온다."

  "이젠 지겹다, 지겨워."

  "뭐 해요? 빨리 쏘세요."

  회령 동쪽 개선산,  해발 790미터의 험준한 산세를 갖춘  이 산에서는 2시간째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헬기를 이용해  이 산 정상을 급습한 한국군 2개 중대는 중국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이제 병력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이번에 오는  적은 6번째로 맞는 상대였다. 중국군은 실패할 때마다 꾸준히 새로운 대대병력을 축차 투입했다.

  개선산은 사면이 급경사이고, 지금같은 겨울철에는  눈이 쌓여 도저히 오르지 못할 곳이다.  그러나 산정의 정동쪽과 남동쪽인  사아동 방향만이 비교적 경사가  완만했다. 해발 700미터의 등고선을 따라  구축된 방어진지도 두  방향에 화력을 집중했고,  역시 중국군도 그 두  방향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포탄이 참호선 곳곳에 작렬하는 가운데 하 인철 중위는 참호위에 쭈그리고 앉아  주로 예비군들로  이뤄진 소대원들에게 사격을  재촉했다. 중국군의 공격준비 포격은 중국군들이 정상에 거의 접근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군의  사격이 시작되자 눈밭을 새까맣게  덮으며 몰려오던 중국군들이 몸을 숙였다. 산 뒤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리더니 코브라 헬기 3기가 나타나 중국군 머리 위로 로켓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군들이 환성을 지르며 잠시 숨을 돌리나 했더니 그것은 희망으로 끝났다. 사아동쪽 574고지에서 날아온 미사일에  1기가 격추되자 나머지 헬기는 주저없이 산 뒤로 도망가고 말았다.  다시 중국군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어선에서 사격이 재개되었다.

  ‘딱!’ 소리가  나더니 신호탄이 빨간 연기를  뿜으며 하늘에서 천천히 낙하했다. 하 중위가  외치자 이미 익숙해진 듯 사병 한  사람이 사무적으로 같은 단어를 크게 외쳤다.

  "크레모어!"

  한국군들이 고개를 숙이고, 경사면 아래쪽에서 연속 폭발음이 울렸다. 후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하 중위가  고개를 내밀었다. 중국군들은 얼이 빠졌는지 전진을 멈추고 있었다.

  "준비하시고…쏘세요!"

  하 중위가 명령하자 하  중위보다 나이 많은 부하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투에 투입된 두 시간이 며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반 이상의 전우들이 이미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권태와 지겨움, 이  두 가지 뿐이었다. 어제밤 잠을 제대로 못잔 병사들은 사격하면서도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반응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들은 중국군 밀집지역에  강습한 셈이었다. 추가적인 병력지원이나, 병력교대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나진, 선봉 지역 주위에 있다는 중국군이 여기에 다 몰려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글거렸으며, 하 중위가 우려하는 것은 병사들이  공포보다는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 중위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본대와 연락을 계속하고 있는 포병관측장교와 공군 전선관제장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고지를 떠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듯 연신  망원경으로 멀리 나진 지역쪽을 살피며 무전연락을 계속했다.

  1999. 11. 26  09:22  중국 랴오닝성 안산(鞍山) 서쪽 40km 상공

  [목표 1의 위치와 선회코스 변동 없음.]

  섬-7(미그-21의 중국 개량형)  전투기를 조종하고 있는 자오 즈윈 상위는 헤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를 무표정하게 들으며 계기판에 신경을 집중했다. 통신망을 통해  계속 조선공군의 움직임이 알려졌지만  아직 작전이 제대로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오 상위가 소속한 인민해방군 공군 제 10 전투사단 전투기 100여기는 권계면인 고도  11,000미터를 500노트로 비행하고 있었다. 만주에 기지를 둔 전투사단 전투기들이 모조리 고장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군사령부는 즉시 베이징 군구 소속의 공군을  이 임무에 투입했고, 10사단은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10사단이 받은  명령은 지상공격전 적기요격임무였다.  무인지경이 된 만주 동북지방을 휩쓸며 제 1 야전사를 포위한 조선군에 대해 지상공격을 하는 척 위장하여, 한반도 북서부에서  출동하는 조선 공군을 격멸하는 것이다.  10사단 전투기들을  기동성이 떨어지는 공격기로  오인하여 조선공군이 안심하며 요격해 올 때,  공대공미사일로만 무장한 10사단을 필두로한 전투기들이 일거에  조선공군을 괴멸시킨다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포위된 1야(제 1야전사)를 구원하기 위한 지상공격 전에 꼭 필요한 사전 정지작업이기도 했다.

  목표 1로  지정된 조선군 전자전기  E-2C는 강력한 전파를 발산하며 계속 권계면에서 선회하고 있었다. 이  전자전기는 반경 100km의 큰 원을 그리며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는데, 위치가  처음 파악된 이후로 내내 같은 코스를 유지하여 지금까지 예상위치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남쪽으로 치우쳐 비행할 때는 아군측 전자전기의 레이더에서 사라진 적도 있지만 곧  다시 나타나곤 했다. 지금은 조선 전자전기가  아군 전투기 편대에 접근하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잠시  후에는 상당한 숫자의 조선공군기가 저공으로 접근해올 것으로 자오 상위는 생각했다.

  자오 상위는 단 한  대의 여객기에 전투기들이 바짝 붙어 기습공격을 성공시킨 이스라엘 공군이  생각났다. 혹시 저 전자전기는  전투기로 둘러 쌓인 게 아닐까? 자오 상위는 고개를  저었다. 밀집대형으로 한 대인 것처럼 레이더를 속일 수는 있더라도,  실속속도에 가깝게하여 전자전기로 오인시킬 수  있더라도, 전투기는 저속쌍발기처럼 그렇게  장시간 체공할 수 없었다.

  [1-3-5, 거리 147km, 고도  2,000미터에 100여기의 적기 발견! 목표 2로 지정함!]

  ‘온다!’

  전자전기의 관제관 목소리는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오 상위도 속으로 떨었다. 중국내전과  대만공격전에서 몇번의 공중전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오 상위도 전투 시작전에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 전투인 것이다.

  [적기는 전원 F-4E다. 현재 전파관제중. 속도와 침로를 유지하라! 5분 이내에 적색선 접근.]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 것 같았다. 누가  보더라도 중국 공군기 중에서 60여기가 공격기, 40여기가  전투기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조선군이 100여기의 팬텀을 보낸 것은 일견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들 조선 공군기 대부분은  기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자오 상위는 자신했다. 편대기 모두가 4개의 파일런에  공대공미사일을 가득 탑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비 전투사단 2개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이미 중국 공군은 3대 1의 숫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접근전을 유도하면 팬텀은 민첩한 미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99. 11. 26  09:27  대전 유성, 정보사단

  "중국 내전의 영웅인  고 휘 상장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왜 대구와 부산, 광주에서 동시에 지역감정  문제로 소요사태가 벌어졌는지 분석하는 것, 그리고  최근 일본의 동향에 대한 검토가 이번  회의의 주제입니다. 먼저 고 상장의 현황파악에 대한 정보는 수집됐습니까?"

  이 재영 중장이 해외정보를  관할하는 권 순철 준장과 안기부에서 파견근무 중인 강  성식 이사관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항상  자신이 앉던 상석에는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 중인 최 총리와 신임 국방장관이 된 양 석민  중장이 자꾸 TV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 중장은 후배가 졸지에 상관이  된 이런 상황이 무척 거북했으나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만 했다.

  "고 상장은 상장 취임 이후 이번 한중전쟁기간 내내 행방이 묘연합니다. 일설에는 위암  치료차 윈난(雲南)성의 고향에서 요양중이라고 합니다만, 한 번도  전선에서 이탈하지 않은 고 상장이 유독  이번 전쟁기간 동안에 요양을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다."

  권 준장이 알맹이 없는  답변으로 일관하자 실망한 이 중장이 손가락으로 원탁을 툭툭 두둘겼다.

  "윈난성, 그의 고향에는  없습니다. 우리 회사원들이 파악한  사항입니다."

  국가안전기획부에서 파견된  강 성식  이사관이 대답했다. 강  성식이 단말기를 조작하여 만주지방 지도를 중앙화면에 투사하여 고 상장의 자취를 추적했다. 그를  나타내는 선은 전쟁발발 첫날,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완전히 멈췄다.

  "그가 군인으로서 입지를  다진 만주에서도 현재 그의 자취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회사원들을  독려하고 있습니다만, 전시상황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습니다."

  "쯧쯧…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요주의인물을  놓쳤군요. 우리는  지금 전쟁수행 중이오. 빨리 찾아 내시오."

  이 재영 중장은  답답했다. 중국 내전에서의 최고  영웅이며 인민해방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던 고 상장이 이번 내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수상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하얼빈 부근에 적의 대규모 병력이 있다는 정보는 없기 때문에 아직은 안심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존재보다 더 급한 것이 국내상황이었다.

  "다음은 왜 전시상황에서 한낱 지역감정에 의해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소요사태가 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치안유지 차원이 아니라 전쟁수행 과정에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재영 중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 성식 이사관이 다소 흥분된 어조로 답했다. 이 문제는  사실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뻔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곳곳에서  지역감정으로 인한  소요사태가 발생한  것은 누군가 의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집권유지를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은 한국정치인들 치졸한 작품이었다… 라고 최 총리는  생각했다. 이것은 국가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지금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부산, 광주,  대구 등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파업이 지역별로  확산되고 교통이 마비된 곳도 많았다. 아직은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 문제는 감추지 말고 과감히  공개합시다. 소요사태에 가담한 대다수 국민은 자신들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모릅니다. 여러 지역에 동시에 그런 일이 있다고 발표되면 폭동가담자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 재영 중장이 제안하자 신임 국방장관 서리 양 석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배후는 중국이겠죠?"

  "글쎄요. 중국이 소요사태의 배후에 있길 바래야겠죠."

  일본이 배후라면? 한국에게는 불행한 일이 된다고 참석자들은 생각했다. 참석자 모두들 일본이라는 단어 자체를 자제하고 있을 때, 종합상황실장 최 성묵 소장이 눈치없이 나섰다.

  "일본은 예비역소집을  완료하고 국민총동원령을  발포한 상태입니다. 현재 자위대 병력 60만, 조만간 300만으로 증강될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이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나라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정보분석실장 나 영찬  대령이 오래된 의문을 제기했다.  갑작스런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나서 양 석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아니면 앞으로는 영원히 기회가 없습니다."

  메이지유신 당시의 일본에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비수(匕首)’라고 가르친 것은 1880년대 일본 육군에 고문으로 와있던 독일군인 메켈 소령이었다.

  "음… 아직은 중국에 집중해야겠소.  일본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어요. 바로 오늘 작전을 진행해야 하니 동해함대도 움직일 수 없고…"

  최 총리는 이런 소득이 없는 회의는 빨리 끝내고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싶었다. 각 부서간 전시동원체제 협조문제와  민간인 구조작업 등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피스의 지원병이나  용병 구성원  중에서 구 소련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전투기조종사의 대부분이 구 소련방공군 출신입니다."

  나 영찬 대령이  의문을 제기했다. 최 총리가  순간적으로 실룩거리고 양 석민의  눈이 빛났다. 이  현우 소령이 단말기에서 용병  조종사들의 이름을 죽  훑었다. 그가 자판을 몇번  두들겨 성이 -v나 -ki로  끝나는 이름을 분류했다. 조종사 중에서만 모두 38명이 검색되었다.

  "그거야…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가 병력을 크게  감축했지 않소? 악화된 경제상태가 작용했고 말이요."

  "그렇다면 그들은 민간조종사로 전업할 수 있었는데 왜… 만약 러시아 군부가 간접적으로 개입했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지난  61년 우리 공화국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호상 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는데, 러시아가 그 조약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닌지…"

  북한의 국가보위부에서 파견근무중인  지 창준이 다소 순진한 의견을 피력했지만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 조약은 당사자 일방이 폐기를 통고하지 않으면 계속 연장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독립국가연합이니 그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나라에는 세계 열강 4개국이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되고 있습니다."

  나 영찬 대령이 매우  걱정스럽다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최 총리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나 대령은  더 이상 이 논의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각하께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은 없지만 혹시나 그렇더라도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지원하는 것이니 개의치 마시오."

  1999. 11. 26  09:31(한국시간)  중국 랴오닝성 안산(鞍山) 상공

  [목표 2 접근, 적색선 근접!  전기, 1-8-0으로 침로 변경, 가속 하강하라!]

  아군측 전자전기인 메인스티에서 보내온 목표와의 거리는 이미 40km도 되지 않았다.  미사일을 발사해도 충분한 사정거리였지만  아직 확실한 명중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팬텀 편대도 아직 스패로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고 있었다. 자오  상위와 동료 전투기들은 심한 마이너스 G를 느끼며 하강했다. 그는 전자전기에서 배당한 목표에 미사일을 조준했다. 섬-7 전투기의 낙후된 레이더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자전기가 명중 여부를 판단해 줄 것이다.

  [적 편대 급선회! 꽁무니를  빼고 있다. 전기, 1-7-0으로. 급속 추적하라!]

  잔뜩 흥분된 관제사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가득 채웠다.  우군 전투기들의 통신이 개방되면서  시끄러운 환호성이 이어졌다. 자오  상위는 스로틀을 잔뜩 열고 애프터 버너를 가동시켰다.  새털구름이 칵핏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자오 상위는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짜식들. 너무 늦었어!’

  자오 상위는 전자전기와  연동된 레이더에 비치는 조선공군의 궤적을 살폈다. 틀림없이 편대를 풀며 황급히 도주하는 모양이었다. 조선공군은 이제야 이쪽이 공격기가  아니고 전투기인 것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10사단을  따라오고 있는 우군기들이 적  전자전기에 잡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잘하면 전자전기의 목표지령 없이 자체 레이더로 유도하여 보다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곧 Jay  Bird 레이더의 식별한계인 20km에  접근하면 적외선유도미사일로도  충분히 격추시킬 수 있는 거리였다.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후퇴하는 적은 이제  반격할 기회도 없었다. 출격전  브리핑에서 조선 공군의 능동형 대공미사일인  암람은 재고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했다. 세계 무기밀매시장에서  중국과 조선이 서로 상대방이  쓰는 무기까지 쟁탈전을 벌였다.  밀매가격이 열배로 뛰었어도 시장에  나온 무기는 거의 없었다. 특히  능동형 공대공미사일은 품귀가 심해, 인민해방군 공군 정보부서에서는  조선공군의 재고량을 이틀분으로  추정했다. 팬텀이 암람을 발사할  수도 없거니와, 270도 발사가  가능하도록 사격통제장치를 개조했다는 보고도  없었다. 이제 안심하고 목표에  미사일을 발사하면 캐노피 아래에 한두개의 킬마크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적기 미사일 발사! 반능동!]

  갑자기 관제관의 비명이 헤드폰을 때렸다. 자오  상위의 숨이 탁 막혔다. 자오 상위의 레이더 경보기에도 분명  전방의 팬텀에서 나오는 연속 파조사레이더의 전파가 잡혔다.

  ‘반능동? SAR? 미 제국주의자 부호로 Fox 2! 그렇다면 스패로?’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자오 상위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능동미사일은 발사한 후에도 전투기의  레이더가 계속 목표를 비춰야 한다. 미사일의  유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표에 계속 접근해야 하는 방식인  것이다. 피닉스나 암람같은 능동형미사일이라면 미사일 자체에 레이더가 있고 적외선유도방식은 레이더가 필요없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중거리용 미사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능동형미사일을  발사한 전투기가 계속 도주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적기는 이탈하고 있잖아?  어떻게 된거야? 다른 미사일 발사체가  있는거야?]

  [.....]

  익숙한 사단장의 목소리가 헤드폰에서 울렸지만 관제관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마도 필사적으로  주파수를 변경하며 보이지 않는  적을 찾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자오  상위의 레이더에 잡힌 팬텀편대는  분명 남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선회하여 발사하고 다시 도주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적기나  지대공미사일이 아군기를 노리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 자오 상위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영국에서 발간된 현대항공전에 관한 책자였다.  자오 상위는 깜짝 놀랐다. 즉시 후퇴해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후부발사다! 당장 회피행동에 들어갑시다!"

  자오 상위가  외치며 기수를 돌리려 했지만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조종간을 잡은 손을 고정시켰다. 스패로  미사일은 벌써 급속히 거리를 줄이며 접근하고 있었다.

  [미사일 발사 후에 이탈하라!]

  오랜만에 같이 출격한 사단장이 침착하게 명령하자 100여기의 섬-7형 전투기들이 2발씩의 R-27R, 나토코드 AA-10 Alamo-A를 발사했다. 스패로처럼 반능동형 미사일이므로 발사기가 선회하면 곧 유도를 잃고 제멋대로 비행할 것이다.  그러나 적기의 미사일유도를 방해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발사한 것이다.

  우군 전투기들이 미사일 발사를 완료하기도 전에 100여기의 미사일이 날아왔다. 선회중인 자오  상위는 선두의 전투기 몇기가  공중에서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푸른 만주의 하늘  곳곳에 죽음의 불꽃이 피어났다. 자오 상위는  레이더 경보장치가  삑삑거리자 즉시  RBC(Rapid Bloom Chaff : 급속전개형  채프)를 방출하며 왼쪽 아래로 기수를 꺾었다.  1초만에 채프의 구름은  섬-7 전투기의 레이더 반사면적보다 1.5배정도  크기로 확산되었다. 섬광에 뒤이은 파편들이 조종석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젠장! 맞았다!"

  유압경보장치가 울리고 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하얀 구름이 기수 앞을  통과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미사일이 대대장의 전투기에 락온하고 있었다. 회피운동을 하던  대대장기는 한순간에 공중 폭발했다.

  "적기는 연속파조사(連續波照射)기능이  있는 후미레이더를  장비했거나 포드형 레이더를 장비했습니다!"

  [.....]

  모두들 바쁜지 통신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오  상위가 돌아보니 아군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사일을 회피하기 바빴다.  자오 상위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았다. 적기가  뒤로 미사일을 발사하면 어떻게 공격한단 말인가? 적기보다  먼저 발사한다고 해도 적기는 미사일에서 멀어지고, 반대로  아군기는 미사일에 접근하는 식이므로  적기 격추 전에 아군기가 먼저 당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적기의 꼬리를 잡았다는 것은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2차 경보가 울렸다. 도주하는  팬텀들이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피할 곳도 없는  고공에서 믿을 것은 순발력 뿐이었다. 9톤밖에 되지 않는 섬-7 전투기들은 급속도로 상하운동을 하며 가능한 북서쪽으로 도주했다.

  ‘팬텀들은 도주하는 것이 아냐. 단지 발사위치를 잡고 있을 뿐이야.’

  자오 상위의 전투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기체 여러 곳에 문제가 생겼지만 컨트롤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처입은 전투기이지만 센양비행장에 도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국 공군전술가들의 단순한 아이디어를 실전에 적용시킨 조선공군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전쟁 중에 후미형레이더로 교체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구식 전투기인 팬텀에  어쩌다 한 번 쓰는  후미형레이더를 장착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포드형 레이더인데, 자오 상위는 러시아제가  아닌가 의심이  갔다. 러시아의 레이더포드에  조선의 전자기술이 가세했다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사일 제 3파 접근 중....! 목표 1 급속  가속, 접근 중! 한 대가 아니다. 이 속도는? 속았다! 전투기의 대편대다!]

  관제관의 비명이 칵핏을 가득 채웠다.  조선공군의 전자전기가 있다던 남서쪽 하늘이 새까만  물체들로 뒤덮였다. 산산조각이 난  아군 편대에 화살처럼 내려꽂히는 적기의 대편대가 자오 상위를 전율케했다.

  1999. 11. 26  09:34  경기도 남양주

  차 영진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를 몰고 통일참모본부를 빠져나왔다. 자갈길로 된 입구  바로 밑을 지나자, 어젯밤 들어올 때 짖던 개들을 키우는 집이 보였다.

  ‘개떼군.’

  차창 오른쪽으로 보이는 수십마리의 개들이 오늘은 짖지 않고 그에게 꼬리치고 있었다. 복스럽게  살이 토실토실 오른 토종개들이었다. 차 영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음흉한 미소를 띄우자 개들이 기겁을 하며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밤에는 몰랐지만 낮에 본 새터의 표정은  밝았다. 옛날부터 있던 민박집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선 러브호텔들이 새터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차 영진은 2차선 포장도로로  나오자 곰바위골을 지나 양수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어를  4단으로 바꾸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MT  왔다가 중국의 핵공격 소식에 놀라  서울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길가를 메우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학생들도 표정 한편에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젓하게 서 있는 ‘하이  마트’라는 호텔에 차를 댔다. 여자친구와 함께 몇번  찾아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그 여자들은 항상 바뀌었지만…

  1층 커피샵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쪽으로 넓게 난 창,  창 바로 바깥의 너른 잔디밭, 그  너머의 북한강… 그는 정 태춘의  ‘북한강’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독특한  그 가수의 음색과 멜러디는 기억났지만 노래가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흐르는 강물을 보며 커피 한잔을 마시면 그 뿐이지 않은가.

  30대 중반의 웨이터가 주문을 받았다. 차  영진은 엉겹결에 오른 손을 반쯤 올리다가 다시 내렸다. 갑자기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자신이 왜 그랬을까 생각했다.

  ‘그래! 저 웨이터는 군인이지.’

  군인은 군인을 알아본다.  군인은 뭔가 군인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가 있었다. 만약 직업군인이라면,  대중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만나도 서로가 상대의 계급과 병과 정도는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차 영진은 자신이 탈영병이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그 웨이터가 왔음을 알자 기분이 나빠졌다.

  탈영병, 특히 전시  탈영병에게는 총살이 군법이다. 전시에는 적에 대한 공포보다는 아군에  대한 공포가 더 큰 것이 보통이고,  어떤 국가든 이런 분위기를  획책한다. 그리고, 탈주병  색출과 즉결처분에 관련되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그 어느 나라,  어떤 전쟁에서도 비겁하고 잔인했다.

  ‘폭력이다! 그것은  전쟁과 다름없이 힘없는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몰상식한 폭력이다.  아니, 국가라는 폭력기관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테러다.’

  차 영진은 죽어간 부하들을 생각했다. 처참하게  죽어간 제 11 기갑사단 병사들, 정규군도  아니면서 막강한 중국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다 죽어간 북부군  소속 인민군들… 그 누군들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우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싸웠고,  죽어갔고, 국가는 그들이 도망치면 언제든 총살을 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 영진은 불쾌한 기분이 들어 커피샵을  나왔다. 그 웨이터는 아직도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차 영진이  계급장을 붙이지 않은 야전상의를 입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일반 병과에 대한 보안부대의 우월감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 차  영진이 걸음을 딱 멈췄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개를 홱 돌리고 그 웨이터를 손짓으로 부르며 외쳤다.

  "이봐, 상사! 장군을 보고 경례도 안하나? 자네 소속이 어디야?"

  1999. 11. 26  09:37(한국시간)  중국 랴오닝성 센양 상공

  "다들 알다시피 이곳은  1대대가 전쟁 첫날에 전멸한  곳이다. 우리는 1대대의 원쑤를 갚는다! 지금이 그 기회다. 발사준비!"

  이 한봉 중좌는 그동안의 울분을 씻으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외화부족에 시달리던 북한 정부가 구입한 이 비싼 미그-29 전투기들은 이번 전쟁 중에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초전에 미그-29 1개  대대가 전멸하자 놀란  지휘부에서는 2대대를 평양영공 수호에만  돌렸다. 게다가 핵미사일 요격 때는 추가적인 전자장치의 부착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게도 한국공군에게 평양수호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적 대편대의 요격에  미그-29 편대가 선봉을 맡아  싸울 수 있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목표들은 지금  미사일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딘가 산 뒤에 적기가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적기보다는 지상의 미사일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적기, 이것이  그들이 맞부딪혀야 할 강적이었다.

  선두의 러시아제  미그-29 전투기와 뒤따라오는  미그-21 전투기들이 일제히 미제 사이드와인더를 발사했다. 이미  중국공군은 숫적우세를 상실하고 있었다. 4차에 걸친 팬텀 편대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중국 공군기는 숫자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고,  미그의 급습으로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했다. 방어측에게 9시 방향이란 상당히 거북한 방향이었다. 미그에 맞서  선회를 하면 도주를  못하고 팬텀에 옆구리를 보이게  된다. 섬-7 전투기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200여기의 사이드와인더가 중국 편대를 덮쳤다. 플래어가 만주 상공을 가득 메우고, 군데군데 섬광이 피어났다.

  이 상황에 다시 팬텀 편대가 가세했다.  견디다 못한 중국 공군기들은 차례로 전장을 이탈했고,  급기야 20여만이 남은 중국  전투기들이 일제히 북쪽으로 급가속했다. 이들 뒤로 3종류의 공대공 미사일이 뒤따랐다.

  "미사일 발사 중지! 2대대 추적하라!"

  이 한봉 중좌는 적을 한 대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최고속도에서는 비슷하지만  가속력에서 앞서는 미그-29  전투기들이 얼마 안가 중국제  섬-7형 전투기들의  꼬리를 잡았다.  미그-21 전투기는  시계가 270도로 제한된다.  후미 레이더경보장치가 없으면 뒤에서  점증하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셈이다.

  20여기의 중국 전투기들  중에서 4기가 추락하자 미그-29를 오버슈트시키기 위해 급히 브레이크를 하고 반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은 불행히도 미그-29였다. 헬멧과  연동된 사격관제장치의 지령을 받는  다중총신의 기관포가 섬-7 전투기의 동체를 꿰뚫었다. 섬-7 전투기들은 이  불리한 공중전에서 이탈할 수도 없었다. 공중전  공역 주위에 머물러 있던 인민군 공군소속의 미그-21 전투기들이 나토 코드  AA-2-2 Atol-D, 러시아 제식명 K-13M/R-13R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미사일을 발사했다. 인민해방군 공군 제 10사단 소속  전투기들은 단 한 대도 남지 않고 전멸했다.

  자오 상위는 상공의 공중전과는 상관없다는 듯 상처입은 전투기를 이끌고 센양비행장으로  접근했다. 비행장으로  가는 길에 수십대의  섬-7 전투기들이 황급히 남쪽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너무 늦었어!’

  그들도 각개격파되지 않을까  우려하던 자오 상위의 시선에 센양비행장의 모습이 잡혔다.  비행기들은 모두 셸터 안에 들어가 있어서  긴 활주로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착륙신호를 하고  착륙하던 자오 상위는 관제탑 옆에 뭔가  이상한 것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었다.  미사일 발사대에 놓여있는 것은 틀림없이 전술핵이었다!

  1999. 11. 26  09:45  함경북도 회령 개선산

  "아군 교대병력이 온다~~"

  산 정상에서 서쪽지역 중국군의 동태를 살피던 경계조가 환성을 지르자 전 대원의  시선이 산 정상으로 집중됐다. 아군 미그-19  전투기들이 산그림자 속으로  들락날락하며 폭격을  한다 싶더니, 역시  지원병력을 실은 헬기들이 개선산 정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시 2중대장을 맡고 있던 하 인철 중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40대의 UH-1이다. 최소한 1개 대대는 온다!"

  경계조가 다시  외치자 참호선  곳곳에서 환성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이제야 교대병력이 온  것이다. 운이 나빠 교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병력보충은 할 수  있으니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진 셈이다.

  "적 대공미사일이다! 에고, 두 대 추락."

  "또 한 대… 으윽, 또, 또….. 자꾸…"

  하 인철 중위는  참지 못하고 참호를 뛰쳐나가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헉헉거리며 겨우  정상에 도착해보니  경계조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선산의  서쪽사면 눈밭 군데군데에 추락한  헬기가 화염을 뿜고 있었다.  지금도 한 대의 헬기가 추적하는 미사일을  피해 플레어를 투하하며 악착같이  도망가다가 결국 엔진부분에 미사일이 명중하여 공중폭발을 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헬기들은 산 정상의 7부능선에 도달하고 있었지만 해발 790미터가 이렇게 높을까 의아스러웠다. 통통한 모양의 UH-1  헬기는 개량 프로그램에 의해 속도가  강화됐음에도 급상승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지원나온 미그-19  전투기들이 지상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었지만, 어디서 날아오는지 적외선 유도방식인  휴대형 지대공미사일은 헬기만 노렸다. 호위차 동행한 10여기의 건쉽이  지상을 향해 정신없이 공격했지만 이들도 하릴없이 추락해갔다.

  "그냥 그곳에 착륙해, 이 바보들아! 다 죽을 셈이야?"

  또 한 대의 헬기가  꼬리날개 부근에서 미사일이 폭발한 충격에 조종을 상실하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후 이 헬기는 12.7밀리 대공기총의 십자포화에 걸려들어  갈갈이 찢겨나갔다. 하 중위가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들을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민첩성이 떨어지는 병력수송용 헬기로는 중국군의 화망이 밀집한 지대를 뚫기는 애초에 무리였다.

  아군 헬기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기내에 장착된  기관총으로 지상을 훑다시피 사격을 가했고, 보이는 적에  대해서는 로켓포를 쏘며 지나갔다. 그러나 사방에 숨어있는 중국군의 대공망은 의외로 치밀했다.

  "왔다!"

  드디어 첫번째 헬기가  정상에 도달했다. 사색이 된  조종사와 기관총 사수의 얼굴이 보였다. 흰색 위장복을 입은  병사가 줄을 타고 헬기에서 강하하기 직전, 갑자기 동쪽에서 날아온 붉은  화살같은 것이 헬기를 꿰뚫었다. 헬기는 하  중위가 올려다보는 가운데 화염을  뿜으며 공중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멍청히 서서 보던 하 중위 앞에  뭔가 붉은 것이 툭  떨어졌다. 불에 타고 피투성이가  된 팔 한짝이었다.

  헬기들이 서쪽사면을 뚫고 산을 넘어와 착륙하려던 순간을 잡아 남쪽과 동쪽에 있는  중국군 보병들이 휴대형미사일을 날리고  있었다. 보병의 강하를  위해 하버링하고 있는 헬기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추락했다. 개선산 주둔  한국군이 필사적으로 적의 대공거점을  향해 사격했으나 중국군도 필사적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헬기에서 꾸준히 병력이 강하하고 있었다.

  중국군이 산정상에 대한 집중포격을 개시했다.  엄폐물이 없는 산정상의 헬기강하병들이 속절없이  집중포화의 제물이 되었다. 하  중위가 이들을 이끌고 참호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를  따라오던 병사 중 두명은 참호에 들어오기 직전에 자욱한 포연과 함께 사라졌다.

  "총인원 471명, 사고 419명, 현인원 52명. 그중 중상이 19명입니다."

  이번에 증강된 병력인 3대대 1중대의 인사계라고 자신을 소개한 상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1중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3대대에서  생존한 최고 상급자였던  것이다. 살아남은 헬기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중대장과 하 중위는 기가 막혔다. 헬기강하병들은 대부분 얼이 빠져 있었고, 미리 개선산에 도착해  치열한 전투를 치른 부대원들은  모두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도저히 이곳에서 살아남을 것같지 않았다.

  하 중위가 갑자기  텅빈 개선산 하늘을 올려 보았다. 이곳  개선산 상공에는 한국이나 중국 어느 쪽도 항공기를  함부로 보내지 못했다. 오는 족족 상대방의  지대공미사일에 추락했고, 어쩌다  대량으로 몰려오더라도 밀집한  대공방어망에 반 이상을  잃고 도주했다. 하 중위의  부대가 처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랐다. 이제 중국군은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고, 이곳은 한반도 모든 곳  중에서 양측의 지대공 화망이 상대방의 공군전력을 압도하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곳이 전략적으로 그렇게 가치있는 곳입니까?"

  하 중위가 1중대장에게 물으며 공군관제관과 포병 관측장교들이 있는 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 바빴다. 다시  적 보병부대가 몰려온다는 외침이 울리고, 하 중위는 자신의 위치로 뛰어갔다.

  1999. 11. 26  08:55(중국 표준시)  중국 신지앙웨이우얼 자치구

  "야히미시즈(안녕하세요)."

  이 은경 대원이  주워들은 위구르어로 인사했다. 천막  밖으로 나오던 처녀가 온통 피에 물들어 악귀같은  모습을 한 정 호근 대원을 보고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정 대원을 들쳐멘  이 대원이 실망과 동시에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이곳은 적지였다. 천막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유목민 남자 둘이 구식 총을 들고 나왔다.

  "야히미시즈."

  이 대원이  그들에게 K-1 기관단총을 겨누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놀란 유목민 중 노인 쪽이 정신을 차리고  정 대원의 상태를 살폈다. 노인이 총구를 내리고 이 대원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젊은 유목민은 아직도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대들은 이곳 사람들이 아니군. 중국 게다가 우린 위구르족이 아니라 타지크인이란 말이야."

  정 대원을 자리에 눕히며 노인이 중국어로  투덜거렸다. 정 대원이 노인의 말을 통역해 주자, 이 대원이 이제야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타지크와 키르기스,  카자흐뿐만 아니라 이곳은  타지크인들의 유목지였다. 원래 겨울에는 따뜻한 타지크로 돌아가야될  이 사람들은 웬 일인지 이곳에 남아있었다.

  칼을 빼든 노인이  익숙한 솜씨로 정 대원의 피묻은 옷을  찢었다. 탈골된 어깨가 드러나고  허벅지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비릿한 피냄새가 천막 안을 가득 메우자 처음 보았던 유목민 처녀가 헛구역질을 하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노인이 뭐라고 외치자 처녀가 다시  들어와 화덕에 냄비를 올려 놓고 불을 지폈다. 검은  바지 위에 덧입은 색이 바랜 치마, 검은 윗도리,  하얀 머리천 사이로 보이는 매부리코와  검은 눈썹. 가꾸면 상당한 미인일 것이라고 이 대원이 생각했다.

  "당신은 운이 좋소. 내가 옛날에는 의사였으니…"

  노인이 2되짜리 술병을  들어 한입 가득 마시고 정  대원에게 넘겼다. 정 대원이 입맛을 다시더니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이런 몸으로 아직 살아있다니, 게다가 정신마저 멀쩡하다니, 당신  정말 대단해. 하지만  이제 그만 기절하는게 좋을걸세. 옆구리부터 총알제거 수술을 시작할테니."

  노인이 날카로운 칼을  화덕 불에 지졌다. 잠시 후 정  대원이 비명을 지르자 이 대원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1999. 11. 26  10:10  함경북도 나진 남동쪽 142km 해저

  "목표 침로 2-9-9, 거리 2300, 속도 20노트."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소나병이 그래픽 처리된 화면을 보며 함장에게 보고하자 함장은 잠망경에서 눈을 떼지도 않으며 명령했다.

  "좋아. 그대로… 2, 3번관 89식 유선어뢰 장전."

  "함장! 공격은 불가합니다! 아직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병들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함장을 돌아보았다.  함장 옆에 있던 부함장이 놀라 함장을 만류했지만 함장은 뜻밖에 단호했다.

  "이마무라군. 자넨 함장의 명령에 불복할텐가? 이게 명예로운 해자(海自) 장교로서 할 짓이야?"

  "상부의 명령은 조선 해군에 도발하지 말라는…"

  부함장 이마무라  이등해좌(二等海佐)가 우물쭈물하자 함장이  호통을 쳤다.

  "상부의 희망은 조선 해군력을 감축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장전햇!"

  함장 하치로 나카이 일등해좌(海佐)는 단호했다. 부함장이 어쩔 수 없이 함장의 명령을  전하고 인터폰에서는 어뢰실의 복창이  이어졌다. 함내에 갑작스런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함장은 다시 잠망경으로 한국해군의 FF951, 울산급 프리깃함의 1번함인 울산함을 찬찬히 살폈다. 1979년에 제작된  함 치고는 너무 구식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산함은 본대 합류에  늦었는지 급히 가느라 쿵쿵거리는 엔진음이 잠수함의 함체를 울렸다.

  이런 류의 한국 해군함은 예민한 예인소나를 장비하지 않는다. 즉, 함이 전진하면서 좌우로 선회하며 함수의 소나로 확인하기 전에는 후미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라는 뜻이다.  주변에는 조선의 다른  해군함정도 없었고 대잠헬기도 물론 없었다. 이것은 잠수함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주변에 조선해군의 초계기가 없다는  것은 이미 해상자위대 본부에서 3시간 전부터  확인해 주고 있었다.  중국 잠수함이 동해 북단까지  오지 못하리라는 섯부른 판단은 지금 한국측에 귀중한 전투함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초기 심도 200, 속도 10노트, 3-5-0으로 발사 준비.  발사 후 좌현 전타, 이 해역을 빠져나간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세부사항을 전하는  부함장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공격받은 조선해군은 틀림없이 일본 잠수함의 짓인  줄 알 것이다. 물론 일본정부는 잡아떼겠지만, 이런 짓을 중국이나  러시아가 할리는 만무하니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과의 전쟁?  이마무라 이등해좌는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잘못하면 조선과의 핵전쟁이었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막바지에 몰려 있는 조선이 혹시나 일본 본토에 핵을 쏜다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발사관 주수."

  "발사관 주수!"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함체를 울리고,  잠시 후 어뢰실에서 주수완료의 보고가  들어왔다. 부함장이  함장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함장이 인터폰을 들고 직접 명령했다.

  "준비 되는대로 발사!"

  어뢰발사관이 열리고 두 발의 어뢰가 푸른 동해바다 물속 러져 들어갔다. 어뢰는 일단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다시 서쪽을 향해 조용히 달렸다.

  "좌현 전타, 심도 300까지 잠수!"

  "좌현 175도, 잠항각 9도, 심도 300까지 잠수!"

  잠수함은 물속 깊숙히 들어갈수록 승무원들이 다시 햇빛을 볼 가능성이 적어진다. 그러나  적함으로부터의 공격을 받는 것보다는  물속에 있는 것이 승무원들의  심리를 안정시키기도 한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최신형 잠수함, 하루시오급의 5번함 와카시오는  동해의 해저 깊숙히 가라앉고, 잠시 후,  어뢰는 유선유도를 상실하고 최종속도인 55노트로 목표에 접근했다. 갑자기 목표의 침로가 바뀌며 속도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소나에서는  급선회하는 밝은 빛을 두 개의 작은  빛이 추적하고 있었다. 두 번의 엄청난 폭발음이 튼튼한 잠수함의 함체를 때렸다.

  "명중입니다."

  소나병이 뒤늦게 담담히  보고했고, 함내에 환성과 박수는 없었다. 나카이 함장은  최초의 전과를 올린데 대해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수병들은 침묵으로써 항변했다. 함장은  승무원들의 조용한 저항을 무시하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좀 더 깊이 들어간다. 침로 2-6-4, 반속전진."

  "목표는 계속 해저로 침강하고 있습니다."

  부함장의 복창과  소나병의 보고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불행한 조선해군 승무원들은 퇴함할  여유도 없이 당했다. 모조리 일본해, 조선인들이 동해바다라고 부르는 일본해에 수장된 것이다.

  1999. 11. 26  10:20  함경북도 나진 작소동

  차오 상장은 아직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선군은 장백산(백두산)을 우회하여 제 1 야전사를 포위하더니 다시  주변에서 가장 높은 개선산을 기습점령한  것이다.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사단 사령에게 호통을 쳐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고 꼭 점령하라고 했지만 아직 기쁜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조선군이 개선산의 병력증강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역시 상륙전을 감행할 모양입니다."

  어둠침침한 전등이 빛나는 지하토굴에서 제 1 야전사 부직(副職-부사령관) 친 차이엔 중장이 조언했다.  중년의 친 중장은 낮에 차오 상장을 보좌함은 물론 야간상황실에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눈은  이미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약간의 빈혈기마저 감돌았다.

  "설마 그런 미친 짓을… 조선에는 상륙주정이 별로 없잖소?"

  "조선에서 또 어떤  작전을 쓸지 모릅니다. 우리도  별다른 상륙용 장비 없이도  대만을 점령했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우리의  해안포대를 침묵시킨 다음에는  어선으로 상륙전을  펼쳐도 됩니다. 이곳은  수심이 깊은 조선 동해안이기 때문입니다."

  신중한 친 중장이 차오 사령의 주의를  촉구했다. 조선의 다른 전선과 달리 이곳 전선에서만 조선군에  밀리지 않은 것은 친 중장의 신중함과 예리한 판단력 덕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차오 상장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음… 사실 중장비를  하역시킬 필요가 없다면 그딴  12노트짜리 LST나 LSM보다는 날랜 소형어선이 훨씬 상륙전에 적합하지. 대만상륙전에 대한 토론에서 우리 장관(將官)들이 모여 내린 결론이라오. 우리는 그에 대해 대비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소."

  "대함유도탄이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단기전을 예상했기 때문에…"

  "알고 있소. 항공수송을  요청하시오. 그렇더라도 그들이 상륙하고 나면 격퇴하는 것이  좋겠소. 그건 그렇고 개선산 공격은 어떻게  되고 있소?"

  친 중장이 작전상황실 중앙화면 아래 기기를 조작하자 개선산 정면이 보였다. 폐허가  된 산 정상 부근  군데군데에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의 공격준비 포격이었다. 아군 보병들은  엄폐물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새로운 대대였다. 차오 상장은 이것이  8번째라며 투덜거렸다. 적은 소규모였지만  막강한 대공화력을 바탕으로 인민해방군 헬기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보병만으로 해치워야 했다.

  "네! 적 헬기 50여대를 격추시켜 병력지원을 차단했습니다. 전 전선에 걸쳐 치열하게 교전중이지만  산악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우리가 유리합니다."

  "그래도 도강을  허용한게 마음에 안들어.  개선산은 그리  높은 곳은 아니지만 이 지역 상당부분이 시계에 들고… 그리고 말야…"

  [쉭! 쉬쉭! 쿠쿵~]

  "또 시작이구만."

  폭발진동서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차오  상장이 즉시 해안방어부대를 호출했다.

  "그래, 나야. 지금 이 포격 혹시 적 함대의 공격 아냐?"

  [이 포격은 조선군 지상부대에 의한 것입니다. 아직 적 해군은 해안선에 접근치  않고 있습니다. 참고로, 적  함포의 사정거리는 매우 짧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야?"

  차오 상장의 눈이 빛났다. 적 해군  함포의 사정거리가 짧다니 다행이었다. 만약 해안방어부대의 야포 사정거리보다  길다면 아군은 대책없이 당하게 된다. 그래도 차오 상장은 사정거리  차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적 함포의 최대  사거리가 17km인 반면, 아시다시피  아군 WA-021, 155밀리 곡사포는  사정거리가 39km에 달합니다.  게다가 대함유도탄의 사거리는 하이잉(海鷹)-3의 경우 130km나 됩니다. 적 해군은 걱정 없습니다. 해안선에 접근하기도 힘들겁니다.]

  "좋았어. 조선해군은 자네에게 맡기네. 계속 수고하도록!"

  전화를 끊은  차오 상장은 왜 조선해군이  동해에서 계속 얼쩡대는지 불쾌했다. 장백산을 돌아온 지상군이 주공이고  해군은 단순한 양동부대일까?

  "소형어선은 유도탄이나 야포에 맞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중한 친 상장이  다시 사령관의 주의를 촉구했다. 머리를 한  번 긁적인 차오 상장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병력을 해안쪽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적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차오 상장이 보고 있는 작전상황실 중앙화면에는 개선산 정상을 오르고 있는 인민해방군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겨울산을 헉헉대며 오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게다가  그곳은 완전 노출된 곳이  아닌가? 이 새로운 대대원들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지 의심스러웠다. 조선군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쌍방의 포화는 더욱 치열해졌다.

  1999. 11. 26  10:35  중국 헤이룽장성 무딴지앙(牡丹江)시 남방 3km

  "대단한 반격이구만. 됴아 됴아."

  인민군 제 4군단장 최 성만 상장은 부하들에게 여유를 보였지만 내심 떨리고 있었다. 적은  30분째 치열하게 아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도저히 예비병력인  인민무장경찰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그들은 잘 싸웠다. 막강한  인민군 기계화사단이  전진하기는커녕 약간씩 밀리고  있을 정도였다. 10여km에  이르는 전선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사령부는 그 구멍을 얼마 안되는 예비병력으로 메우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적 병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까?"

  참모장 손 성필 소장이 작전지도를 살피며  의견을 피력했다. 이 상태에서는 패배가 분명했다. 예하 4개사단 모두가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고, 군단직할의 경보병여단마저 치열하게  교전중이었다. 조만간 예비병력은 완전히 바닥날 것이다.

  "기게 무신 소리야? 동무레 적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이 앙이야?"

  [쉬유유우~~~~~~ 쿠! 쿠! 쿠!]

  "이기 메이야!"

  최 상장이 지휘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광활한 만주평원 멀리 지평선 부근에 일렬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포탄의  낙하지점이 점점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포탄은 거의 동시에 착지하여  한순간에 폭발했고, 그럴때마다 장갑이  약한 장갑차와 보병 수송용  트럭들이 형편없이 당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흰색 위장복을 입은  병사들이 엄폐물을 찾느라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적 포병대의 십자포화입니다. 보십시오.  적은 정규군, 그것도 대규모 부대입니다!"

  "이기… 적 포병대 위치 계산했나? 즉각 반격하라우!"

  뭔가 이상했다.  통일 1군 사령부에서는  분명 모란강시 부근에  적은 인민무장경찰 3개 대대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 20배의 병력으로도 밀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적에게 분명 지원병력이 있습니다. 그것도 대규모… 최소한 1개  군단은 되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함정?"

  "적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너무  성급히 진격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작전상 후퇴하시는 것이…"

  "기건 아니 돼."

  최 성만 상장은 국군 사령관에게 지휘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그는 인민군 전사의 감투정신을 국군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적의 규모와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앙이야. 분명 여기까지에 한계야. 밀어붙이라우."

  1999. 11. 26  10:50  함경북도 회령 서원동

  "개선산에 대한 적 지상부대의 열번째  공격입니다. 이번 도끼에 넘어갈지도…"

  "우리 부대가 나무가? 와 넘어지노?"

  김 재호 대장은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O-37B 드래곤플라이에서 보내오는 영상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전투가 없는 개선산 서쪽 지역만 보였지만,  유탄이 산 정상 주위에서 계속 터지는  걸로 보아 고지에 대한 포격이  아주 치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였다. 너무 욕심을 부린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고있던 참이었다.

  서원동에서 개선산까지는  동으로 8km,  남으로 6km의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는  산들이 천연의 요새가 되어 통일 1군의 진격을 가로막고 있었다. 도대체가 중국군 병력이 너무 밀집해 있는 것이다. 졸지에 최전선으로 바뀐 두만강 부근의 중국군 예비부대들은 그렇게 호되게 당했어도 후퇴할래야  할 공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저항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시 개선산에서 보내오는  영상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포격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전투가  개시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적은  동쪽과 남쪽에서 각각 몰려오는 1개 대대씩의 병력. 현재  아군 병력은 약 6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실, 적  보병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보병이 고지를 향해 죽기를 각오하고  올라오더라도 거의 탈진한 상태가  된다. 엄폐물이 없는 그곳에서 중국군  보병들은 참호에서 숨어 쏘는 총탄에 죽어갈 뿐이었다.

  한국군 야전교범에도 각개전투라는 항목으로 나와있는 그같은 저돌적인 공격은, 전혀  전술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1차대전 이후의 세계 야전지휘관들이 그렇게  많이 깨닫고도 요즘도 쓰이고 있는 야만적인 작전이었다.  이러한 고지공격의 유일한  전술적인 잇점은, 적의 탄알을 소비시키는 것,  그것도 경제적으로 소비시키는 것 뿐이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아군 병력의  숫자가 너무 많아 보급품을  절약할 필요가 있을 때 감행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가 봐도 무모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군사교육을  하는 자들은 전통 때문인지, 군인으로서 가장 용감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세계 곳곳의  육군에서 정식 교범 중의 하나로 남아있는 작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었다. 한국군이 유개호(有蓋壕)  총안(銃眼)에서 머리를 내밀고 총을 겨눌 때를 노려 중국군 포병의 직사화기가 불을 뿜는다. 이것이 지금  개선산을 위기로 몰아넣는 주범이었다. 그리고 아군 본대의 후방에 있는 포병이 지원포격을 할라치면 중국군 포병들은 귀신같이 엄폐호에 숨어버렸다. 흩어져있는 중국군 무반동포 탑재차량들, 그리고 엄폐호에 숨어서 쏘아대는 직사화기들…  이것들을 공격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지휘부의 고민이었다.

  이때 윤 민혁 대위가 나섰다. 어찌 보면  현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의견이었지만, 다른 참모들은 지금은 불가능한  공중공격이나 포격만 생각하고 있어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즉시 채택되었다.

  "전차대에 연락해서 벌집탄이나  산탄을 쏘게 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포격 정밀도는 필요없으니 장거리에서 발사해도 될겁니다."

  전차가 쏠 수 있는 포탄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활강포나 강선포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탄은  날탄(APFSDS:날개안정분리철갑탄)과 대탄(HEAT:대전차고폭탄)이 있다.  이 두종류의 포탄은 회전하면  안되므로 강선포의  경우 탄에 헛도는  링을 달아 회전을 막는다.  강선포로만 쏠 수 있는  탄으로 일반 고폭탄, 벌집탄,  산탄, 백린연막탄 등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일반 야포로도 쏠 수 있지만 같은 구경의 포라도 포탄은 전차와 공용이 아니다.  벌집탄은 크레모어처럼 탄 내부에  쇠구슬이 들어 있고  거리조정신관이 부착되어  있다. 산탄은 벌집탄과  비슷하지만 쇠구슬 대신  작은 화살이 많이  들어있다. 백린연막탄은 흰 인이  들어 있어서 인이 공기와 접촉하면 연소하면서 병력을 살상한다.

  먼저, 두만강을  도하하고 대기중인 M-48 전차부대에  연락해서 전차에서 다른 탄종을  빼고 대신 벌집탄과 산탄이  대량공급되었다. 이윽고 포격이 시작되자  포탄이 날아가는  것이 지상레이더에 잡혔다.  개선산 정상의 포병관제관이  보내온 화상에는  목표에 명중했는지 어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띄게 중국군의 포화가 사그러들었다. 일반 포탄과 달리 이들 포탄은 목표가 공격을 받으면서도 직접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모르는 수가 많은 것이다.

  어떤 벌집탄은 개선산  정상에서 터졌다. 쇠구슬이 부채꼴로  퍼져 고지 정상으로 접근하던 중국군 보병들이  스러져갔다. 보병들은 한국군의 일제사격에 의한 것인줄  알고 그대로 몰려왔다. 또다시 산탄이 터지고, 작은 쇠화살들이 중국군  보병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포격지원을 해달라고 외치던 중국군 대대장은 병력손실이 심각해지자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번 찍혀도 안넘어갔네요."

  "나무가 아니니까."

  "어쨌든 빨리 교착국면을 돌파해야 될텐데요….. 쩝."

  장갑지휘차 안에서 전투장면을 지켜보던  김 재호 대장과 윤 민혁 대위의 잡담이었다.

  1999. 11. 26  11:00  경기도 남양주 통일참모본부

  "울산함에서 연락이  끊긴지 30분이 넘었습니다. 인민군  어뢰정의 부고에 따르면, 주변해역에서 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곤혹스러웠다. 보고하는 심 현식 중장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장은 분명 어뢰라 했디요?"

  이 종식 차수는 일면 당황했고, 한편으로는 낙담까지 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정체모를 적 잠수함에 의한 아군 수상함의 격침이라니.

  "그렇습니다. 기뢰나 지상, 혹은 항공기에서 발사한 어뢰, 또는 미사일은 아니었습니다."

  심 중장이 울산함이 보내온  긴급통신을 녹취한 테입을 다시 틀까 하다가 그만  두고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했다. 중앙화면에는  울산함이 침몰한 해역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육지쪽에서는 통일한국군과 중국군 지상군의 위치가  표시되었고, 각국 공군기들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1995년  러시아에서 수입된 킬로급 잠수함이 중국 해군에 있긴 하지만, 만약  중국 잠수함이 동해에 들어왔으면 일본의 소서스라인에 당연히 걸리고,  일본 해상자위대의 초계기들이 하루종일 그  잠수함 상공에 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물론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참모들이 도저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본의 짓이라고 암묵적으로 결론이 났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참모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울산함이레 중국  해군 잠수함에 의해  침몰한 것이오.  동지들은 이 사실을 받아 들여주기 바라오. 대신,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오."

  결국 예상했던 대로 이 차수가 입을  열었다. 뉴스에는 짤막하게 울산함이 피침당했다는  사실이 보도될 것이다.  유족이나 컴퓨터통신망에서는 울산함의  침몰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과 맞설 전력이 없었다. 절반 이상의 지상군 병력이, 그것도 통일한국군 전력의 대부분이라고 할 병력은 모두  두만강 주변에 몰려 있었다. 공군이나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도리가 없었다. 한중전쟁에서 부산이 최후방이 되어야 했다.

  "알갔습네다, 위원장 동지. 울산함에 비극은 중국 짓입네다. 대잠 경계를 더욱 강화하갔습네다."

  박 정석 상장이 대답하며  초계기의 전용 후 서해와 남해의 대잠능력을 평가했다. 그동안  겨우 8기의 초계기를 서해와 남해에 각  4기씩 배치했었으나, 이제 최소 3기를 동해로  빼내면 그만큼 중국과의 접적해역에 구멍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인민해방군  해군 소속 킬로급 잠수함은 전쟁이래 한 번도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1999. 11. 26  11:15  평안북도 영변

  김 종구 중위는  기가 막혔다. 아니, 골때렸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자신이 해군으로 전속된  것이다. 처음 병원에서 황 중령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농담인줄 알았다. 진담인 것을  확인하자 자신이 다리를 다쳐 임시로  배속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전 비행대대가  해군에 배속된 것을 알고 나서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해군항공대가 있는 진해나 제주도도 아니고 내륙지역, 그것도  중국과 맞닿고 있는 평안북도 영변으로 전출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뭉툭한 Mi-8 헬기가 비행장에 착륙했다. 다리에 기브스를 한 김 중위가 목발로 땅을 딛고 보니, 여기는 정말로 영변이었다. 험준한 산자락을 끼고 계곡쪽에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넓게 펼쳐진  이곳에는 고정익기를 위한 활주로가 3개나 있고, 헬기를 위한 착륙장도 곳곳에 있었다. 그물로 위장된  것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  대공포나 대공미사일 발사대였다. 정식 공군기지도  아닌 영변에 이런 시설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왜 이런 곳이  이번 전쟁기간 중에 한 번도 이용되지  않은 것일까? 황 중령이 김 중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저게 500호 건물이야. 북한이  핵시설이 아니라고 잡아뗀 방사화학실험실 알지?"

  "윽… 그럼 그 유명한 핵물질추출시설입니까?"

  "응, 근데 저  동굴 안에 있는 것들은 뭘까?  다른 전투기들은 주기장에 있는데  전시상황에 동굴 쉘터에  처박혀 있는 전투기라…  한두대도 아닌데?"

  인솔장교를 따라가며  황 중령은  자꾸 컴컴한 동굴쪽을  쳐다보았다. 김 중위는 아무리 보아도 전투기인지 공군기지 일반 시설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뭔가 끈끈한 인연의  끈이 황 중령과 전투기를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지들! 모두들 잘 오셨습네다. 동무! 거기 앉으시라요. 본관은…"

  브리핑실에 모여 웅성거리던  조종사들은 강단에 서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교관이라고  느꼈다. 전시에 조종사  교육이라니. 게다가 이곳에는 인민군 조종사들의 모습도 꽤 보였다.

  김 종구 중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인민군 제  3 전투비행단 소속의 백 범수 대좌라고  밝힌 짤달막한 이 사내 옆에는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김 중위는 이 러시아인에게 더  관심이 갔다. 조종사들은 아무래도  한국정부가 러시아에서 미그-29 전투기를  대량으로 수입한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이제부터 동지들은 수호이를 몰게됩니다."

  ‘수호이? 수호이-27 플랭커 말인가? 아니면 지상공격용 수호이-34?’

  러시아는 1994년, 중국에 수호이-27을 다수  인도하고 현지생산계약까지 맺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을 공격하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중국을 견제할 겸, 달러도 벌 겸 한국에 수호이를 판 모양이었다. 그러나 백 대좌의 한마디가 조종사들의 의표를 찔렀다.  조종사들은 의미를 깨닫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지들은 수호이-33을 몰게됩네다."

  수호이-33, 해군용 수호이-27K의 다른 이름인 함상용 전투기였다. 옥포 조선소에서 소형항모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김 중위가 알기에도 소형항모에서 이런 대형전투기가 이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증기사출기의 도움을  받으면 이륙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비좁은 갑판에 무슨  수로 착륙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벌써 항공모함의 건조가  완료될 시점이란 말인가?  조종사들의 궁금증이 더해갔다.

  "여기 우리 조선의  최고 기량급 조종사 동지들이  다 모였습네다. 저와 이쪽 피레니코프 대좌가  여러분들을 위해 수호이-33의 조종술 교관을 맡게 되었습네다. 에…  피레니코프 대좌는 전직 러시아 해군 조종사 출신으로서 현재는 피스 의용병입네다. 사아샤?"

  사아샤라는 애칭으로 불린 러시아인이 벌떡  일어났다. 사아샤가 의례적인 연설을 하고  백 대좌가 통역을 맡았다. 김 중위는  러시아어를 처음 들어본다. 시베리아처럼 거칠고 퉁명스러울줄  알았던 러시아어가 의외로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게다가 이 러시아 군인이 러시아 공군이나  방공군이 아니고 해군 비행대  출신이라니, 항공모함이 만들어지긴 정말  만들어지나 보다 하고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북 정부, 그리고  러시아 정부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1999. 11. 26  11:30  중국 헤이룽지앙 무딴지앙시 남쪽 7km

  "완벽한 패배입니다, 동지!"

  손 성필 참모장의 말을 흘려 들으며 최 성만 상장은 다시 한 번 작전 지도를 확인했다. 분명한  것은, 적은 인민무장경찰이 아니고 대규모 정규군 부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적은 아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구멍난 방어선을  통해 중국군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면 4군단은 최소한 100km는 후퇴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4군단의 피해가 막심했을텐데, 중국군은 공격을 멈췄다. 이것이 최 상장의 흥미를 끌었다.

  "항공지원을… 적의 병력규모를 확인해야 합니다."

  "적에겐 어떤… 문제레 있어. 기래. 전차가 몇 대 없었어. 기동성에 문제레 있는거이 확실하디."

  "하지만 적의 화력은 막강했습니다. 적  포병부대가 분산되어 있어 반격의 실효성도 적습니다."

  "기래. 우리에게 제  2미사일여단만 있었어도… 한때 서부전선  최강의 4군단이레 이리 심히 당하다니, 말이 되갓서?"

  최 성만 상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후퇴와  부대 재정비를 위한 명령이라는 것으로 직감한 손 성필 참모장은 상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패배를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군단장이 내린 명령은 전혀 뜻밖이었다.

  "역습하라우! 지뢰 동시 폭파,  15 기계화 쾌속 전진. 32사단 좌측, 35사단 우측  공격! 34사단과 교도대,  15 기계화를 따르라.  경보병여단은 우회하여 배후 공격! 저격여단 예비. 기동작전이다. 멈추면 진다! 공격~"

  공병대가 후퇴하는 와중에 묻어 둔 대인지뢰 수천개가 동시에 폭발했다. 북쪽 지평선쪽이  삽시간에 화염에 쌓이자 상처입은  15 기계화사단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패배에서  살아남은 150대의 전차와  200여대의 장갑차가 쐐기모양으로 화염의 중심선을 향해  진군했다. 이들을 뒤따라 교도대가 트럭에 탑승한  채 기관총을 쏘아댔고, 이들 머리  위로는 122밀리 30연장 방사포 북쪽으로 날아갔다.

  인민군의 기계화사단은 1개 전차여단과 2개 기계화여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차여단은 4개  대대, 200대의 전차로 구성된다.  4군단같은 인민군 최정예부대에는 구  소련에서 수입하거나 북한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T-72M1과 개량형 T-62 전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최 성만 상장은  조금 전의 패배가 기동성과 화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방어전이었기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하여 예하부대를 급속 전개하여 역습에 나선 것이다.

  후미의 포병연대에서는 Su-100 자주포가 계속 불을 뿜었다. 방사포는 만주를 모두 불태워버리기라도  하듯 연속 로켓을 발사했다.  공격은 먹혀들어갔다. 방어선을  구축하던 중국군은 갑작스런  지뢰폭발과 역습에 놀라 뿔뿔히 흩어졌다.

  특히 일반 보병사단에  배속된 기계화대대 소속 BMP-3의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100밀리 주포탑에 연동된  동축 30밀리 기관포는 25대가 동시에 발사하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기관포 반대편 동축의 7.62밀리 기총과 차체  정면 좌우에 설치된 같은  구경의 기총도 동시에 불을 뿜었다. BMP-3은 과연 한 대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각 보병전투차(BMP-3은  ICV)마다 7명의 보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력까지 가세하자 전방의 인민해방군 자동차화보병사단은 형편없이 당했다.

  중국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바닥에  처박혀 벌벌 떨었다. 이들에 맞서  중국군 69식 전차 1개  중대가 나섰지만 장갑차들이 동시에 발사한 9M117(나토코드  AT-10 Bastion) 미사일에 한순간에  전차중대가 격멸당했다. 전차는  엄폐물이 없는 평지에서 반자동  레이저유도 미사일을 피할  길이 없었다. 두  대의 전차가 살아남아 반격에  나섰지만 BMP-3의 100밀리 주포는 1000미터 이내의 목표에 대한  발견에서 발사까지 겨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역습이 성공하고 있습니다! 적은 저항도  못하고 각개격파 당하고 있습니다."

  "기래, 기렇디."

  최 상장이 지휘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씻었다. 기계화사단은 계속 전진하고, 최 상장에게 보이는 지평선 안쪽에서는 소탕전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멋진 승리였다.

  1999. 11. 26  11:35  중국 헤이룽지앙 무딴지앙시 남쪽 2km

  "적 전차부대가 선두입니다."

  작전참모가 공손히 보고하자 젊은  장군이 의자에 깊숙히 누운 채 모자를 약간 들어  올렸다. 좁은 지휘차량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초호화판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지휘차 내부에  샹들리에가 밝게 빛나는가 하면 바닥에는 붉은 카핏이  깔려있었고, 장군이 앉은 의자는 촌스럽게도 호랑이가죽으로  덮혀 있었다. 멋진 야전용  외투를 입은 그는 잠시 바로 앞의 작전지도를 보며 현황을 파악했다.

  "후퇴해!"

  장군이 짧게 지시하고나서 다시  모자를 얼굴에 덮어 쓰고 잠에 빠졌다. 잠자는 그의 모습은 마치 전투는 이미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지휘차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굉음과 함께  진동이 차체를 울렸다. 장군이 단잠을 깨서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관이 마호타이주를 포도주잔에 반쯤 따라 그에게 바쳤다.

  1999. 11. 26  10:45(중국표준시) 티벳(서지앙 자치구) 라싸 남쪽 5km

  타시 구르메는 바람에 나부끼는  타루초(깃발에 경전을 새긴 것. 성황당처럼 줄로 엮어 나무에 매달려 있다) 아래에서 버터차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엔 역겨웠던 버터차를 지금은 구수하게  느끼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야크  두 마리와 다섯명의 동료가  그와 함께 했지만, 동료들의 잡담에 자신은 항상 빠져야만 했다. 그들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이질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이 갑자기  잡담을 딱 멈추더니 멀리  수많은 중국군의 행렬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타시  구르메가 망원경을 꺼내 보았으나, 그들이 가리킨 동쪽  산등성이 아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계곡에  소음이 울리고 조금  더 있다가 기다란 트럭행렬이  보였다. 티벳인들은 육감이 너무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타시 구르메가 라싸를 해방한 빠르 바티 등의 독립무장세력에게 총을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물론 여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라싸에는 아직도 수많은 중국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라싸에서 한족(漢族)의 숫자가 티벳인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들 중에서 다수가 중국군과 내통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를테면, 라싸점령군의 무장이 향하는 중국군 정규부대의 경계가 느슨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티벳인들은 인도 북서부의 다람살라(Dharmsala)에서 육로로 침투한 티벳해방전선의 전사들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대장정이었다. 전사들은 추위와  굶주림, 히말라야 산맥의 눈사태에 생명을 잃었고, 친중국적인 파키스탄 군인들의 추격을 뿌리쳐야 했다. 이들은 5일간의 강행군 끝에 간신히  이곳 라싸 진입로에 도착하여 오늘 아침에야 매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기는 이미  어제 트럭편으로 이곳에 도착하여 동굴 속에 감추어 놓았다. 이제 중국군과의 전투만 남았다.

  "준비하시오."

  타시 구르메가 소형 무전기를  꺼내 짤막하게 명령하고 나서 다시 버터차를 마셨다. 설산들  사이로 보이는 티벳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름으로 찬란했다.

  1999. 11. 26  11:50  중국 헤이룽지앙 무딴지앙시 남쪽 3km

  "전차장 동지! 이기 함정 아님메?"

  "무시기 소리야? 날래 쏘기나 하라우."

  전차장인 특무상사 조 두형은 왼쪽에 앉아있는 포수의 불안감이 자신에게 전염된 것을  느끼며 화를 버럭 냈다. 사실 조  특무상사도 약간은 불안했다. 150여대의 전차는 계속 진군했지만  적 병력은 갈수록 엷어졌다. 밀집된 적 병력  사이로 돌진하면 좋은데, 이제 적은 띄엄띄엄 배치되어 가끔 대전차미사일을 날리고 있었다.

  조 특무상사는 평소에도  함경도 출신을 싫어했다. 그런데  이번 전쟁중에 불쾌하게도 함경도 출신인 김 중사가  포수로 배정되었다. 조 특무 상사가 보기에  김 중사는 하는  일마다 불안했다. 역시 함경도  출신은 믿을 사람들이 못됐다.  북한 사회에서 함경도 사람들이  거칠고 생활력 있는 것은 인정받았지만 항상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서 다른 출신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았다. 조 특무상사는 그런  평가가 맞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요즘 그는  잘못하면 이따위 포수 때문에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고폭탄이레 세 발밖에 남지 않았음메."

  "이런… 동무레 와 이제야 말하는기야?"

  역시 함경도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강도(평안북도 북동부) 출신의 자신이나  황해남도(황해도 서남부) 출신의  운전병 박 동무에  비해 자신의 일에 얼마나 무책임한가?  이런 사람이 자신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니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폭탄 21발 중에 3발이라… 급할 때는 철갑탄을 써야갔구만…’

  "적 땅크 발견! 12시, 거리 1500!"

  남은 포탄수를 계산하고 있던  특무상사 조 두형은 김 중사의 외침에 놀라 입체거리측정조준기(stereoscopic  rangefinder sight)를 살폈다. 수직안정기에 의해 진동 없이 선명하게 보이는 조준기에는 틀림없는 중국제 80식  전차가 잡혀있었고, 잠망경으로  보니 같은 80식 전차들이  땅속에서 수도 없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인민군 15  기계화사단의 전차여단은 이미 삼면으로 완전 포위된 상태였다.  수평선 너머까지 가득 차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적 전차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중대  내 통신망인 무선용 스피커가 시끄럽게  울렸다. 중대장은 거의 실성한  듯 무선망에 대고 악을 쓰고 있었다. 조 특무상사는  놀라고 혼란스러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때 그를 정신차리게 한 것은 김 중사의 외침이었다.

  "철갑탄 장전, 조준완료."

  "발사!"

  언제 장전을 했는지, 조준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이 전차전에서 가장 먼저 조 특무상사의 전차가  발포를 하고, 저 멀리에서 노란 섬광이 튀었다. 이를 신호로 인민군과  중국군 전차들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명중! 철갑탄 장전."

  박 하사가  전차를 급히 왼쪽으로 급선회하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렸다. 조  특무상사의 입체거리측정조준기에 적  전차가 다시 조준되었다. 발사, 또 명중. 세 번째 조준을 할  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조 특무상사를 덮치고, 그는  즉시 정신을 잃었다. 중국군 전차의 대전차철갑탄(APFSDS-T)이 달걀  반쪽을 엎어놓은 모양의  포탑을 때린 것이다. 아득하게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며 유독가스 냄새가 차체에 가득 찼다. 코와 귀에서 걸쭉한 것이 흘러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졸렸다. 역시 함경도놈은 재수가 없었다.

  1999. 11. 26  11:05(중국표준시) 티벳(서지앙 자치구) 라싸 남쪽 5km

  이곳은 지옥이었다. 이곳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유명한 전사에서 자주 나오기도 하고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도 한 협곡 사이의  적군 섬멸하기가 현재 벌어지고 있었고, 그  양상은 옛날과 달라진게 거의 없었다.

  화살과 돌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변했지만 이것들은 멀리 청산리 대첩에서도 나온 케케묵은 무기였고, 자동소총과  수류탄도 고대와 비교해서 크게 발전한 것도  없는 무기였다. 다만, 춘추전국시대처럼 계곡 위에서 바위를 굴리거나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현대전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은  헬기의 등장, 그것도 지뢰살포 헬기의 등장이었다.

  중국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총알 피할 곳을 찾아 정신없이 뛰었다. 이들이 하늘의  위협에 미처 대처할 겨를이 없는 것이  실로 치명적이었다. 아니, 미개한 티벳에서 상공에 있는 비행체는 모두 중국군 무기라고 착각한 것이  패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파키스탄의 어느  농장에서 농약을 뿌리는데  쓰이던 라마(Lama) 헬리콥터가, 이탈리아제 BPD SY-AT 지뢰살포기를 매달자 무서운 하늘의 학살자로 표변했다. 3,744개나 되는 BPD SB-33 대인지뢰는 헬기 아래 매달린 운반용 탄창에서 나오자마자 충격신관이 작동하여 지상에 닿은 즉시 폭발했다. 직경 88밀리미터, 무게 140그램밖에 안되는 울퉁불퉁한 모양의 이 작은 플래스틱 지뢰는 파괴력이 의외로 강했다.  해방트럭 밑에 숨은 중국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2km에 이르는 좁은 계곡은  잠시 후 불타오르는 해방트럭 잔해와 중국군의 시체로 가득  찼다. 이들은 단 한명도 계곡을 빠져  나가지 못했다. 확인사살조가  계곡을 타고 내려가  울부짖는 부상병들을 사살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타시  구르메가 며칠동안 감지 않아 기름기가 끈적거리는 머리결을 뒤로 쓸어 넘겼다.

  "1개 대대 병력으로 적  1개 연대 완전 소탕이라… 제기랄,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길이 남겠군."

  1999. 11. 26  12:20  중국 헤이룽지앙 무딴지앙시 남쪽 3km

  "이보라우, 김 중사!"

  조 두형 특무상사는 살아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놀랐다. 옆에는 김 중사가 쓰러져 있는데  온통 피투성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시체를 보기는 처음이라 무서웠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아무도 없고 군데군데 아군 전차들이 불타고 있었다.

  조 특무상사가 김 중사를 흔들어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전차 밖으로 나온  걸까? 그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 특무상사가 김 중사를 옆으로 뉘었다. 눈 위로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가슴과 배를 관통한 세 발의 큼직한 총상,  이것들이 김 중사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조 특무상사가 상황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았다. 적의  철갑탄은 포탑의 복합장갑과 부가장갑  덕택에 전차를 관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충격은 내부에  거의 그대로 전해져 운전병은  아마도 내장파열로 죽고 김 중사와 자신은 일단 살아 남은 모양이었다.

  ‘혹시 김 중사가 나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함경도놈은 제 자신밖에 모른다. 전차가 폭발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전차에서 30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역시… 김 중사가 자신을 들쳐메고 뛰다가 적의 기관총에 당한 것이다.  조 특무상사는 무수한 숫자의 전차 무한궤도가 뒤엎고 지나간 눈밭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1999. 11. 26  12:40  서울 한강, 가양대교 아래

  "잘가, 미영아."

  이 진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미영의  뼛가루와 함께 강물에 흘려 보냈다. 25살, 아직 꽃다운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잔인한 국가간 폭력인 전쟁, 그것도 가장 비인간적인 핵폭발에 의해  아기만 남기고 온몸이 타서 죽다니, 울음이 복받쳤으나 진은 악착같이 참고 있었다. 어찌 자신의 슬픔이 그의 남편이나 딸의 그것에 비할까.  뱃사공이 천천히 난지도 시민공원쪽으로 노를 저었지만 진은  옆에 사람이 있다고 느낄 경황이 없었다. 배는 강줄기를 따라 점점 거슬러 올라갔다.

  미영이는 고아였다.  아니, 진은 미영이가  고아인 줄로  알고 있었다. 고교때 항상 활달했던 미영이도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고교 때는 동성연애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미영이가 죽고 나서야 서로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미영이는 좋은  친구였고, 아무 것도 없었지만  꿋꿋하게 생활해왔다. 항상 웃는  그 얼굴 뒤로 얼마만한 고통이 가려져  있는지 몰랐다. 딸을  두고 먼저 가서 안타까워하는  미영의 말들이 기억났다. 진은 너무 슬펐다.

  미영이는 병원 화장터에서  몇 개의 뼈조각과 부드러운  재로 남았다. 아니, 5분의 1이  미영의 유골이었다. 병원 화장터에서는 몰려드는 시체를 감당하지 못해 한 번에 다섯 사람씩  태우고 유골을 대충 나눴다. 미영의 시체를  화장할 때에는 칠순 노인,  중년 여인, 어린  아이, 그리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 하나와 함께였다. 정식 절차보다는  능률이 우선되었다. 휘발유가 모자라자  나무토막을 썼고, 빨리 타라고 시체를 토막내기까지 했다.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처사라며  유족들이 항의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연이는 내가 맡을께, 너무 걱정 마…"

  작은 나무상자에 담긴 재를 한줌 쥐고 싸늘한 겨울 바람에 날려 보냈다. 재가 바람에 흩날리다  강물 위로 흩어졌다. 4년간의 대학시절에 진은 미영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진의 허영이나  변심이라기보다는 미영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진이 대학 2년  때 미영이 결혼한다는 연락이 와서 몇 년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이미 배가 불러 있었다.

  졸업 후 공장에서 매일밤  잔업에 시달리며 모은 돈을 미영이는 악착같이 저축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영은  고교 재학 때도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다. 방학 때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하고 학기 중에도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주변에서 쉽게 돈  벌 수 있다는 유혹이 자주 있었지만 미영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다.

  남편은  소규모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강원도에서  태어났다는 그 남자는 인상이 후덕스럽게  생겼고 미영 말로는 자신에게 아주 잘해 준다고 했다. 지금  그 남자는 동원예비군으로 징집되었고  만주로 파병되었는지 연락도 되지 않는다. 불쌍한 딸 소연만 남은 것이다.

  진은 미영이의 마지막 남은 뼛가루를 상자째  강물 위에 띄어 보냈다. 이제 미영이는 세상에  없었다. 고통과 서글픔의 세상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진은 작은 배에서 내려 강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향해 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꾹  참고 걸어 올라갔다.

  진이 계단을 중간쯤  올랐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가 확  잡아 당겼다. 진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깜짝 놀라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것은 친구의  느낌이었다. 미영이가 마음 속으로 말을 전해오는 느낌이 왔다.

  [같이 가... 무서워... 외롭고.]

  "미영아…"

  친구는 죽었지만 분명히 진을 부른 것이다.  반가운 동시에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돼…"

  [너... 나 싫어?]

  "아니,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지만 안돼."

  진은 너무 단호하게 거부해서 미영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진은 다시 뒤에서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다가 미영이와 같이 있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신이 죽어야 했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 아래는 가파르게 경사져 있었다. 죽는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진은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영아, 난 널 정말 좋아해. 하지만 그러면 안돼."

  [.....]

  "그냥 혼자 가. 소연이가 남아 있잖니. 우린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거야. 제발… 흑흑흑!"

  진은 그동안 복받쳤던  설움이 몰아닥쳤다. 계단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울고 말았다.  세상은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하지만 진이 없으면 홀로 남은 소연은 어떡하란 말인가. 진 자신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어린 소연이 더  불쌍했다. 진은 자신을 달래는 듯한 미영의  손길을 느꼈다. 엄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미안해…"

  [아냐...]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은 섭섭한 모양이었다.

  "이제 울지마…"

  [응...]

  하늘은 눈부시게 밝았다. 미영이의 미소를 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진은 미영의 따뜻한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느낌이 점점 약해졌다. 그렇게 미영이는 떠나갔다. 진은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계단을 다  올라간 진은 고개를  돌려 선착장을 보았다. 그곳에  진이 탔던 작은 배가  메어져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뱃사공의 잔잔한 미소가 문득 느껴졌다. 진은 더 이상 무섭지도, 슬퍼하지도 않게 되었다.

  1999. 11. 26  12:50  평안북도 영변

  삽입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여자와의 섹스  생각이 난다. 이런 단조로운 운동은  질색이다. 여자의 굵은  허벅지를 어깨 위로 올렸다가  다시 허리를 감게 했다가 해보지만, 단조롭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자에 대한 의무감뿐이다. 아니, 이 여자도 의무감에서 신음성을  내는 지도 모른다.  역시 섹스로 얻는 쾌감보다는  섹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섹스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얻는 쾌감이 더 크다고 느꼈다.

  황 인호는 침대 위의 프랑스여자를 다시  엎는다. 커다란 둔부가 눈에 가득 들어오고, 그 아래에 이미 축축한 음부가 보인다.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당기고 질  입구를 찾는데 여자가 당황한  듯 불어로 뭐라 씨부린다. 항문에 삽입하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다. 아까와는 달리 힙의 푹신한 느낌이 좋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다.

  여자 다리를 뻗어 완전히 엎드리게 하고 목덜미를 입술로 애무하다가 황은 여자의 머리결을  바라본다. 갈색 머리결이 참 아름답다. 부드럽기도 해서 입에 물고 싶지만  그러면 틀림없이 머리카락 한 올 정도가 이빨 사이에 씹힐 것이다.  그런 느낌은 싫다. 혀를 내밀어 귓볼을 간지럽힌다. 여자의 숨결이 가빠진다. 혀가 여자의 귓속 깊숙히 들어가자 숨이 가쁘다 못해 컥컥거리기까지 한다. 이제 더  이상 지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여자를 다시 바로  ㄴ히고 화장대에서 로션을 가져온다.  여자의 가슴 가득히 로션을  발라 손바닥으로  마사지하듯 문지른다. 여자가  눈치를 채고 손으로 가슴을 모은다. 황은 여자의 배 위에 올라탄다.

  내일은 다시  앵커리지로 간다. 뉴욕에서  1박하고 다시 서울로  가는 것이 스케줄이었다.  이 여자의 내일 상대는  누굴까? 맞아,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털복숭이 기장 놈이겠지. 이름이 좆털이 뭐야? 휴게실에서 ‘헤르 좆털!’이라고 아는 척했더니 우리  항공사 스튜어디스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지만  이름이 그런 걸 어떡하란 말야. Herr  Sottel. schwa(액센트가  없는 모음이  약화되어 모호하게  발음되는 현상.  영어에서 september가 섭템버로,  Korea가 커리어로 발음되는 것  등이 그 예)는 영어보다는 독일어에서 특히 철저히 적용된다.  부기장놈은 끝까지 조텔이라고 불렀지만 독일어 명사에서 2음절  엑센트라니. 실제 발음이 좆털인걸 왜 바꿔?  자, 집중해야지. 빨리 끝내고 자고 싶다.  여자의 똑바로 누워있는 얼굴은 역시 보기 싫다.

  황은 첫경험을 장난스럽게 치뤘다. 장난하다가  애뱄다는 경상도 말처럼,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여동생과 장난처럼 경험한 것이다. 볼링을 치고  나오면서 킬킬대며 떠들다가 지나가는  길에 여관이 보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벌건 대낮에  손목을 잡아 끌고 들어갔다. 처음엔 앙탈도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  시선이 창피했는지 얼른 따라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층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나, 자,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관방에는 단 둘밖에 없었다. 서로 얼굴만 붉어졌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희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황은 멀뚝허니  서 있었다. 황은 이 난국을 타개해야 했다. 무심코 한 발을 떼다보니 서로 가까워졌다.  다시 반대쪽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침대에 앉고, 팔을 뻗어 성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럽게 안겨오는 성희의 몸냄새는 황을 아찔하게 했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지고, 혀가 그녀의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티셔츠와 스커트를 벗기자 알몸이 드러났다.  아기처럼 매끄럽고 토실토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둘러 자신의 옷을  벗고 다시 격렬하게 안았다. 겨드랑이에 듬성듬성 난  털이 귀여웠다.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고 가슴에 입맞췄다. 부드러운  감촉과 향기로운 살내음이 좋았다. 매끈한 허벅지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팬티를 벗기려하자  성희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고? 웃기지  마라. 숫처녀 깨는데  얼마나 힘드는지 알기나 해?  게다가 숫총각이…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되는거야? 으… 부러지겠다. 얘가 정상인가? 여자 거기는 원래 이런 거야? 10분 넘게 낑낑대고 있다. 소설같은데 보면 단박에 되던데, 이건 뭐 콜라병에  당구공 넣기보다 더 어려웠다. 간신히 되나  했더니 성희 말로는 거기가  아니란다. 이젠 지쳤다. 포기하려는데 성희가 울락말락한다. 이게 무슨 창핀가.  실패하면 성희가 더 창피해 할까 겁나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성희가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황은 엉덩이를  움직여 피하려는 성희를 못움직이게  잡고 힘으로 꽉 눌렀다. 성희는 옆방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참아, 조금만 참아."

  이게 제대로 되는 건지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삼류소설이나 이상한 잡지 보니까 이런  대화 내용이 있더라는 것 뿐이었다. 사실은  황도 아파 죽을뻔했다. 여자만 아픈게 아니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엉터리 삼류 연애소설 쓰는  자들을 저주하면서 황이 기를 쓰는 가운데,  채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사정이 되고 말았다. 황이 성희의 몸  위에 무너지고, 둘은 가만 그렇게 있었다.

  사랑스런 여인, 그리움이 깊어가는 곳. 그녀 생각에 얼마나 많은 밤을 고뇌하며 지새웠던가? 황 인호는 깊은 밤에 그녀의 집앞에 들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불켜진  2층 창문 안에서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할까?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와 나는 혹시 30억년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닐까? 전생에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아쉬워하여 지금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인호는 자신이 미웠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괴로움. 그녀는 나의 마음을 알까? 그에게 화사한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는 그녀가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왜 자꾸 우리 집앞에서 기웃거리니?"

  황 인호는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단발머리에 체크무늬  원피스 교복. 틀림없이 영선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집밖에 있다니… 인호는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자위하다 들킨 것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너 일루 따라와."

  인호는 영선이 이끄는 대로 집 바로  옆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인호는 가슴이 떨리고, 그것보다는 너무 무서웠다.  영선이 홱 돌아섰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표정은 무서웠다.

  "너, 나 좋아하니?"

  "…, 아, 아냐."

  왜 이따위 대답을 했을까? 돌이키기에는 너무  큰 실수였다. 상상속으로나마 그녀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고백했던가? 지금은 그 단어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거짓말만 한 셈이었다.

  "그럼 왜 자꾸 우리 집 근처에 얼씬거려?"

  "그게 아니고…"

  "솔직히 이야기해 봐. 너, 날 좋아하지?"

  "으응. 그래. 그런데…"

  됐다!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 인호는  그녀의 다음 말이 기대되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를 좋아하지?"

  인호는 놀랐다. 애는  부끄럽지도 않나? 이런 모습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주면 부끄러워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도망갈 줄 알았던 그녀는 지금 당당히 인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

  "넌 네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해.  그러면 상대에게  상처만 안겨줄 뿐이야. 너는 더 성장해야 돼."

  "….."

  "너는 남을 사랑할 자격이 없단 말야! 나는 그런 네가 싫어. 유치해!"

  영선이 홱 돌아서 집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다시는, 다시는 그녀를 못보게 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얼른 뛰어가서  그녀 앞을 가로 막았다.

  "난 널 사랑해. 진심이야!"

  영선이 이해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경멸의 눈초리, 또는 가증스럽다는 뜻의 눈초리였다.

  "아니… 더 솔직해져 봐. 넌  자신을 위한 감정만 있을 뿐이야. 누군가를 사랑하고픈 욕망,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뿐이야. 너는 남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순수한 사랑도, 순진한 남자의 가슴 시린 용기 없음도 아냐. 비겁한 이기주의자의 치졸한 자기위안일 뿐이야."

  영선이 그를  제치고 다시 집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그녀를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여자 생각하시나 보죠?"

  어느새 김 종구 중위가 목발을 짚고 옆에  서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라 나른해서 잠시 낮잠을 잔 모양이었다.  김 중위가 느물느물한 웃음을 짓자 황 중령은 반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음… 나, 서 헌팅턴(Sir Huntington)의 일대기를 구상중이라네."

  "크… 헌팅으로 작위까지…  게다가 천명이나! 황 중령님,  아니, 황 인호 경(卿)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군요."

  " 삶이었지. 자넨  그 고통을 모를거야. 나의 성장기에 점철된 그 여자들과의 가열찬 투쟁을…"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말과는 달리 김  중위의 눈엔 조소의 표정이  역력했다. 속으론 ‘잘났어, 정말~  아직도 에이즈 안걸렸나요?’  라고 했을테지. 뭔가  하나라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생각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래.

  "자넨 여자를 울리지 말게나."

  "으아~ 황  중령님이나 여자들  울리지 마세요.  천명이나 꼬셨다면서요?"

  "꼬신다고 다 울리는 게 아니지.  진정한 헌터는 헤어지더라도 여자를 울리면 안돼. 신신을 바쳐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헌터의 숙명일세. 심신(心身)이 아니라 신신… 몸과… 해구신의 그 신(腎)이지. "

  "크… 예, 써!"

  "자넨 내가 대영제국 기사작위를 받은 줄 몰랐지?"

  "잉? 농담 아녀요? 외국인에게는 작위를 거의 안주는 걸로 아는데요."

  "영국 왕실에 대한 IRA의 공격이 심하던  재작년에 내가 바람둥이 공주 하나를 구해준  적이 있거든. 나야 IRA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내 비행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지. 작년에 하급기사 작위를 받았다네. 이름을 헌팅턴으로 해달라고 했지. 쿠쿠~"

  "으… 국제적인 망신입니다."

  "그게 망신이라니. 우리 헌터들도 세계화되어야 하지 않겠나? 후후~"

  "백마, 흑마… 부럽심다. 홍알홍알~"

  1999. 11. 26  13:00  경기도 남양주시

  차 영진이 부대 밖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상황실로 들어와 보니 참모들 대부분이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잠깐씩 잠을 자긴 했지만 일주일째 쌓인 피로를 극복할 수  없었다. 중앙화면인 200인치 멀티비전에서는 TV방송이 한창이었다. 역시 서울 피폭 이야기가 머리 뉴스였다.

  우주인같은 방사능방호복을 입은  기자가 서있는 곳은 광화문 네거리였다. 아니, 광화문 네거리가 있던  자리라고 기자가 보도했다. 주변에는 무너져내린 교보빌딩과 세종문화회관이 보이고, 멀리  불에 그을린 북악산이 보였다.  SNG가 안되어 유선으로  방송을 하는지 방사능오염지역 치고는 의외로 화질이  깨끗했다. 낙진이 두차례나 떨어진  서울 도심에는 극소수의 구호반이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를 헤치고 있었다.

  ‘전자기펄스는 동축케이블에도 영향을 미칠텐데… 벌써?’

  하는 생각을 하며 차 영진이 보는데 화면이 기자에서 그 뒤의 충무공 동상으로 옮아갔다. 불에 형편없이 그을렸지만 동상의 윤곽은 뚜렸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탔습니다.  하지만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이순신 장군 동상과 이 작은 거북선은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핵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거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성웅 이순신장군께서는 하늘에서도 우리  민족을 보위하시나 봅니다. 우리는  충무공의 호국 정신을 이어받아 기필코 이번 전쟁에서 중국을 몰아내고...]

  "저런 사기를…"

  뜻밖의 소리에 참모들이 문쪽을 돌아보았다. 차  영진 준장이 TV뉴스를 보며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이 종식  차수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흠… 이유가 뭐기요, 차 동지?"

  "폭심(爆心)이 청와대라면…  충무공동상은 청와대에서  1마일 이내에 있습니다. 10킬로톤급의 핵이  폭발했을 경우 폭심에서 반경 0.5마일 이내의 모든 물질이 기화하고  1마일 이내의 모든 지상구조물이 파괴됩니다."

  차 영진이 원탁의 빈자리에 앉아 단말기를  조작했다. 원탁에 있는 화면을 켜고 광화문  주변 지도를 찾아 그 화면에 띄웠다.  그가 손가락으로 청와대와 충무공 동상이 있는  곳의 두 점을 찍어 직선을 긋고 자동 거리계산모드를 선택하니 디지탈 거리계에 약 1550미터라고 나왔다.

  "폭심에서 1마일 이내에  있는 것은 모두 파괴됩니다. 압력  17psi, 풍속 290mph… 사람처럼 부드러운 물체는 생존가능성이라도 있습니다. 참고로 폭심 반경 1마일 이내의 사망율은 90%에 달합니다. 물론 즉사하지 않더라도 방사능에 의해  고통받다 대부분 곧 죽습니다만.  그러나 동상처럼 단단한 물체는  여지없이 부서집니다. 어느 기관인지는  몰라도 충무공의 신화를 정치선전에 이용하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차 영진은 혐의가  가는 기관의 리스트를 뽑았다. 국가안전기획부, 국군기무사령부, 정보사령부의 후신인  정보사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보처였다. 그는 퍼뜩 공보처장관 오 석천의 성향이 기억났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오죽하면 과거  정치에 개입하던 안기부 대신 공보처가 국내정치를 도맡았다는 말이 나돌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정 지수 대장이었다.  정 대장이 핵폭발시 거리별  피해정도를 나타내는 표를 원탁 왼쪽의 보조화면에 띄웠다.  10킬로톤급 핵이 폭발했을 경우 차 영진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 대장이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미국의 핵폭발실험자료입니다만,  이 핵실험에서 폭발은 분명 1980피트 상공이었습니다.  이번과 같은  지상폭발은 다릅니다.  그리고, 이번에 폭발한  것은 아마도 20킬로톤급일겁니다. 동풍2호에  장착된 탄두는 대개 20킬로톤이거든요."

  정 대장이 반박했지만 핵의 파괴력이 적다는  것은 아니었다. 차 영진이 보충설명했다.

  "물론 지상폭발일  경우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범위는  줄어듭니다. 그러나 지상폭발의 경우 그 충격이 훨씬  강하게 지상에 미칩니다. 지진효과를 감안할 경우 무너지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아직까지도 희생자의 공식집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핵에 의한 직접적인 살상과 건물붕괴 및  가스관 폭발 등으로 인한 간접적인 사망까지 합하면 서울시에서 약 20만명의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재앙입니다! 핵발사를 명령한 중국 지도부는  전쟁범죄자로 처단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부상자는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습니다. 서울시내 모든 병원에  아직도 환자가 몰리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평생 고통받다가 끝내는...]

  잠시 뉴스를 본 이 차수가 힘없이 웃었다.

  "기럴듯한 신화야. 이순신 장군이레 살아있는 거디요. 우린 기저 모르는 척하고 있습세다. 무시기… 생각이레 있갔디요."

  1999. 11. 26  13:15  중국 지린성 뚠화

  "가 소좌님!"

  "백 동지…"

  백 창흠  중위가 손을 뻗어 가  경식 소좌를 끌어 당겼다.  가 소좌의 몸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엎드린 가  소좌를 대충 덮어  주고 가  소좌의 68식 자동소총을  대신 잡았다. 그가  쓰던 K-2 자동소총 탄알은 조금 전에  모두 떨어졌다. 기지에 들어올 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던  총을 기본휴대량인 216발 외에 쓰러진 동료들의 탄알까지 모두 써버린 것이다.

  동료들은 모두 죽었다.  여기저기 중국군과 요원들의 시체가  가득 쌓였다. 흘러나온  피가 통로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가 경식 소좌와 백 창흠 중위 두 사람만이 남아 최후의 저 構 있었지만 이미 의미없는 일이었다. 핵폭발의 충격에도 견딘다는  특수강판 차단벽은 중국군이 강산성의  용제를 썼는지 이미 두군데나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 사이로  총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 소좌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으니 실제  전투력은백 중위 한 사람만 남은 것이다.

  백 중위가 전투중에 알고보니, 그가 있는 위치는 기가 막힌 곳이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기에 딱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지상 4미터, 천장에서부터 7미터.  이곳은 사령관이 각종 모니터와  관제관들을 내려다보며 지휘하던 곳이었다. 출입구를  향해 비스듬하게 위치한 기지  사령의 콘솔(console)이 방벽 역할을 해주었고, 수류탄이 정확히  날아오기에는 약간 멀었다.  또한, 중국군이 구멍 사이에서  유탄을 발사해도 한참 뒤에 있는 벽이나 천장에서 폭발했다. 그래도 그  유탄에 가 소좌가 치명상을 입었다. 가 소좌는 백 중위와 달리 콘솔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수류탄이 굴러와  지휘석 아래  공간에서 폭발했다. 오른쪽  구멍에서 중국군 세 명이 뛰어  들어오자 백 중위가 한 발에 한  명씩 보냈다. 68식 자동소총의 반동이 의외로 강하게 느껴졌다.

  "조국은 우릴 버렸습니다.  잊어 버렸을 수도…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그 거짓말쟁이 양  중장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군요.  꼭 구원팀을 보내주겠다고 큰소리 치더니만 소식도 없네요."

  또다시 중국군 병사들이  세 명씩 두개의 구멍으로 진입했고,  백 중위가 분노를 탄알에  실어 날렸다. 비명이 들리고  중국군들은 동료들의 시체 위에 쓰러졌다. 중국군  한 명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었다. 백 중위가 정조준하여 그  병사의 가슴을 맞췄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총격이 잦아들었다. 중국군들은 다시  재정비하여 쳐들어올 것이다.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실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럼 동무는 참말 아군이 구출하러 올 줄 알았나?"

  "그런건 아니지만요… 하하! 허탈해서 그렇습니다."

  "기래도 작전이레 성공해서리 다행이디. 암, 다행이디. 이제 전쟁은 곧 끝날기야. 조국을 구한거디."

  가 소좌가 무거워진  눈꺼풀을 꿈벅거렸다.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백 중위는 그가 오래지 않아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야죠. 우린 죽고…  항복하더라도 중국군들이 내버려두질 않을겁니다. 결국, 우린 소모품이었어요."

  "소모품? 길티… 길티만 우리 특수요원들에 숙명이디 않갔서?"

  백 중위는  자신이 예비역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었다. 허울좋은 국가안전기획부 국제국 요원. 사실 전쟁 전까지 자신이  하던 일은 국가에서 외국에 파견한 산업스파이에 불과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보안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외국 경쟁회사의  기밀을 빼내  한국기업과 국가안전기획부에 보고하는 일이 그의 전문이었다.  유령회사를 차린 다음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 경쟁사 관리자의 아이디를 유인한 후, 그  아이디를 다운시킨 사이에 경쟁사 컴퓨터 자료를 해킹하는 것이 특기였다.

  그때 통로 저쪽에서  기관단총 연사음이 길게 울렸다.  비명과 총성이 시끄럽게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폭발음이 두 번 짧게 울렸다.

  "구원팀? 가 소좌님! 구원부대가 왔습니다!"

  "….."

  "틀림없다니까요!"

  백 중위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온다던 구원팀이 온 것이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가 소좌의 상태를 보니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빨리 치료만 받는다면 살아서 전쟁영웅 칭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가 소좌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졌다.

  "동무! 속디 말라우. 뎌건 술수야!"

  백 중위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으며  총구를 다시 돌렸다. 가  소좌의 우려는 충분히 있을만했다. 도대체 여기에 구원팀이 올 리가 없었다.

  "동무들~ 거기 누구 있슴메? 구원팀이레 왔슴메!"

  함경도 사투리가 들리자  가 소좌와 백 중위의 눈이 마주쳤다.  가 소좌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동무, 속디 말라우. 연변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많은 거 알지비?"

  "….."

  "구원팀이레 왔다니끼니… 와 대답이 엄서?"

  백 중위는 심하게 떨렸다. 살고 싶었다. 혹시 저들이 아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중위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암구어!"

  "무지개!"

  "맞잖아요!"

  백 중위가 가 소좌를  바라보았다. 가 소 構 웃었다. 백 중위는 자신이 너무 순진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구원팀이레 당한기야."

  가 소좌의  말이 맞았다. 구원팀이  왔더라도 그 많은 중국군을  모두 처치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부상당한 동지가 고문에  못이겨 자백했으리라. 강인한 요원들이 암호를 말하지 않더라도  자백제를 쓰는 경우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기 가 경식 소좌 있나? 우리가 간다. 쏘지 마라!"

  가 소좌와 백 중위의 눈이 마주쳤다.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기다려! 확인해야겠다. 거기 책임자 누군가?"

  백 중위가 바깥을 향해 외치자 아까와는 달리 서울 말씨가 들렸다.

  "…..,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인 양 석민 중장이다. 난 안기부 강 과장이야. 거기 백 중위지? 자네, 내 목소리 알잖아?"

  "정말이요? …..,  강 과장님, 거기  구멍으로 얼굴 내밀어  봐요! 젠장, 빌어먹을! 왜 이제야 온거요?"

  백 중위는 양  중장이 이곳에 직접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화는 풀리지 않았다.

  "알겠다. 잠시 기다려라. 내가 들어가겠다."

  강 과장과는 다른 목소리가 나고, 강 과장이 당황해 외쳤다.

  "쏘지 마라! 그분은 국방부장관이시다!"

  "쓰펄! 국방부장관이든 대통령이든 무슨 상관이야."

  양 중장, 이제는  국방부장관이 된 양 석민이 구멍을 통해  기어 들어왔다. 흰색 설상복에 흰색 헬멧를 쓴 양 석민이 두손을 번쩍 들었다. 분노한 백 중위가 총을 양 석민에게 겨누고 벌벌 떨며 일어섰다.

  "왜 이제야 온거요. 왜… 조금만 빨리 왔으면 다들 살았을텐데…"

  "백 동무… 그만 하기요."

  가 소좌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백 중위의 다리를 움켜 잡았다.

  "미안하다. 첫 번째  구원팀이 적기에게 격추되고 두  번째 팀은 적의 대공포화에 맞았다. 그보다 먼저 가 소좌를 치료해야겠네."

  "제기랄… 빌어먹을… 근데 당신 정말 양 중장 맞소? 그리고… 내가 열받아서 당신을 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해봤소?"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귀관 맘대로 해라. 늦었지만  난 약속을 지켰다. 귀관이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후회 안한다. 안타깝게도 그대들은  이번 작전 장마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생존자들이다.  첫번째질문에 대한 답은… 백 중위 스스로 판단하라."

  양 석민이 헬멧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속알머리가 없었다. 양 석민이 틀림없었다. 출발 전 브리핑 때 그의  대머리를 보고 요원들이 키들거린 적이 있었다. 겉모습은 아주 젊어 보이는데  머리카락은 많이 빠져 있었다. 백 중위가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무 무서웠다. 죽어간 요원들이 너무 불쌍하기도 했다. 다른  요원들이 서둘러 들어와 가 소좌를 응급조치했다. 양 석민이 백 중위의 어깨를 두둘겼다.

  1999. 11. 26  13:25  함경북도 회령 개선산

  "소대장님! 퍼뜩 좀 와 보이소!"

  젠장, 예비군의 호출이다. 무슨  말을 들을지 뻔한거 아닌가? 하 중위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소대원 몇 명이 몰려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에는 참호가 군데군데 무너져 흉한  꼴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개호는 모두 무너졌다.  이제 한국군 병사들은 근접신관으로  세트된 포탄에는 무방비가 되었다.

  "와 그라능교?"

  4명의 예비군들이  상처투성이의 몸을 참호에  눕히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강 병장이 부산  사람인데… 하 중위가 잠시 참호  너머를 살펴보았다. 중국군은 질렸는지  아예 공격해 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점심때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퍼뜩 말 해 보이소."

  여유를 부리는 듯 하 중위가 계속 경상도 사투리로 강 병장을 재촉했지만 강  병장은 하 중위를  본체만체하며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참호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음울한 소리로 물었다.

  "우린 여기서 다 죽는겁니까?"

  위생병이 전사하여 임시 위생병을 맡고 있는  임 종석 병장이었다. 순전히 제약회사 다닌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 그는 혼자서 전사자 시체 100여구를 수습했다. 그런데 그 질문… 당연한 거 아닌가?

  "아까 교대병력들 어떻게 됐는지 보셨잖습니까… 아마 다시 헬기로 교대병력이 오기는 힘들겁니다.  위에서이 있겠죠. 아군이 계속 전진해 와서 우릴 구해주든지… 저도 죽기 싫은건 마찬가집니다."

  "서울이 핵을 맞았다는데요… 새벽에도 전화가 연결이 안됐습니다.  서울 인근은 모두 불통이더군요."

  사단에 있는 통신차들 말고도 통신차와 무선이 연결되는 차량이란 차량에는 병사들이 수백명씩 몰려들었다. 핵폭발이  알려진 자정 직후에는 전화가 전혀 안됐지만 새벽부터는 대부분 개통되어 서울 일부를 제외한 곳의 통신은 모두 재개되었다.  임 병장이 전화하려 한 곳은 그곳 일부, 하필 바로  그 불통지역이었다. 하 중위가  임 병장의 걱정을 이해했다.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가족걱정을 하다니. 하  중위는 결혼이라는 것이 굉장한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핵폭탄 몇십발을 뺏아온 모양입니다.  이제 전쟁은 곧 끝날테니 걱정 마세요. 부인도 살아 계실겁니다."

  "전쟁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가족이 서울에 있습니다. 아내는  고아입니다. 저 말고는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도 31세 정도? 소대  인사기록표를 읽은 하 중위는 임 병장이 아내와 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삼류 제약회사의 영업사원. 월급도 적고 힘든 직업이란 것을 하 중위는 알고 있었다.

  "…, 전쟁은 곧  끝납니다. 오늘 안으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이번 작전이 끝나면 소대가 재편성되고 시간이  좀 나겠죠. 아마 며칠이라도 소대원 전원에게  휴가가 있을겁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임 병장님은 제가 반드시  휴가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좀  참으세요. 그리고 꼭 살아 남으십시오. 부인과 따님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불쌍한 소연이… 미영이."

  임 병장이 하늘을 보며 넋두리를 하듯 한숨지었다.

  "설마 부인이 두 분?"

  "소연이는 내 딸이오."

  장난기가 발동한 하 중위를 임 병장이 힐난하며 노려 보았다.

  "아… 죄송.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돌아가는 하 중위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임 병장은 자신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꼭 살아 돌아가야 했다. 누가 내 아내와 딸을  돌볼 것인가. 혹시 둘 다 죽은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 혼자 살아 남은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시 포성이 울리고, 지겨운 오후 전투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임 병장이 총을 메고  전투위치로 돌아갔다. 포탄 파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설상복 안쪽에 입은  야전상의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전사한 중대원들의 인식표가 가득 느껴졌다.  임 병장은 자신의 인식표가  남의 호주머니에 있게 될까 겁이 났다.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위로 고개를 내밀 수가 없었다.

  1999. 11. 26  13:40  함경북도 회령 서원동

  "총장님! 인민군 4군단이 패퇴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적과 조우했다고 합니다."

  윤 민혁 대위가 통신기의  단말기에 나타난 내용을 읽으며 놀라 외치자 참모들의 안색이  변했다. 흑룡강성에 중국군의 대군이  숨어있을 줄이야. 그러나 김 재호 대장은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모습이었다.

  "제 15기계화사단의  전차여단이 거의 전멸했답니다.  4군단의 손실은 63%, 지금 전선이 붕괴되어 걷잡을수 없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군단사령부에서는 대규모 항공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쯧쯧… 최 상장 그 사람, 일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보고 한 번  안하다니. 자존심은 원…"

  김 대장이 혀를  차며 단말기에 나온 전황을 대충 훑어  보았다. 역시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드러났다.

  "통참에 고 휘 상장의 대군이 거기  있다고 알리게. 고 상장이라면 통참에서도 무시하지 못할거야. 병력은 100만,  아니, 150만 정도라고 말하고. 참, 5군 지휘권을 달라고 해.  그리고 4군단에는 항공지원 불가를 통보하게. 후퇴하고 싶은데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재정비하라고 전해. 대신 지대지미사일 지원은 해주겠다고 하게."

  윤 민혁  대위가 통신장교인 최 영섭  중위에게 세부사항을 지시하자 최 중위가 그 내용을 통일참모본부에 송신을  했다. 윤 대위가 교신내용을 프린트한 용지를 김 대장에게 주자 김 대장이 읽고 씨익 웃었다.

문서번호 : 99통육2-031

수신 : 통일참모본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이 종식 차수

참조 : 국방부 장관, 인민무력부장, 정보사단당

발신 :통일육군 제 2군 사령관  김 재호 대장

제목 : 고휘 상장이 지휘하는 적 지상군 주력발견에 대책

  1. 통일육군 제 2군 예하의 인민군 4군단은  본대 주력의 배후를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중인 바, 1130 현재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규모 적과 조우, 패퇴함. 지휘관은  중국내전시 기갑전으로 공을 세운 고휘 상장으로 추정됨.

  2. 제 2군 예하 정찰부대 및 정보부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적 주력은 4개 장갑집단군, 30개 갑종사단 및 65개 을종사단, 기타 다수의 인민 무장경찰로 구성된 것으로 추산됨. 총 병력 150만 이상으로 추정됨.

  3. 강력한 적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위해서는 지휘권의  통일이 요망됨. 제 5군 지휘권의 2군 사령관에의 이양을 요청함. 끝.

                         통일한국군 제 2군 사령관  대장 김재호

  고 상장은 역시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튀어나오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대장은 이제야  마음놓고 작전을 이끌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인민군 4군단이라… 인민군 보병부대 최강의 병력이었다. 자신이 서부 전선에서 제 1군단장을 할  때 인민군 4군단을 방어하는 대책을 세우느라 골머리를 싸맨 적이  있었다. 1군단 예하의 보병 4개 사단에  1개 기계화사단 갖고는 어림도  없었고, 6군단의 1개 기계화보병사단  전력 전부와 김포의 해병 2사단에서 전차 2개 대대를 빌려와야 겨우 그들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들고 안전부절했었다. 그런 인민군 4군단이 형편없이  패하고 전차여단이 거의 전멸했다면 적은 최소 몇 개의 장갑집단군을 동원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윤 대위가 다소 과장된 전문을 발송케  했지만 그럴듯했다.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통일참모본부를 어떻게 설득해 5군 지휘권을 쥐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권이 너무 자신에게 집중되면 인민군 장교들의 반발이 거세질건 뻔했다.  그러나 김 대장은 작전을 위해서는 제 5군이 꼭 필요했다.

  "자, 이제 우리는 중앙돌파를 실시한다."

  "…! 남쪽으로 말입니까?"

  "물론이지. 만주의 적은  아직 규모확인이 안됐어. 정 급하면 5군에게 우리 배후를 맡기고 우린 전진해야돼. 아직 시간은 있어. 포위된건 우리지만 내선의 잇점을 십분 활용하자고."

  윤 민혁 대위의  눈이 빛났다. 제 5군 사령관  천 호철 대장, 김 재호 대장의 육사 2기 후배이자 명령에 죽고 사는 진짜 군인이었다.

  "사령관님! 제 5군에서 긴급전문입니다!"

  최 영섭 중위가 전신용지를 김 대장에게 건네기 직전에 윤 대위와 눈이 마주쳤다. 윤  대위는 긴급전문을 읽고 있는 김 대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사령관님."

  윤 대위가 궁금하다는 듯 김 대장에게 묻자,  김 대장이 종이를 윤 대위에게 건넸다.

  "천 대장이 사고로 죽었다는군. 제기랄, 일이 잘 풀리는 건가?"

  전문에는 천 호철 대장이 전선시찰 중에 헬기사고로 즉사했다고 적혀 있었다. 부사령관은 인민군의 이 성춘 대장이었다. 통일참모본부에서 한국군을 대표하는 정 지수 대장이 불안하지만 김 재호 대장의 주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윤 대위는 확신했다. 국군이 주력인  제 5군의 사령관 자리에 인민군 장성을 앉힐 수는 없었다.

  "허 장군."

  "네! 사령관 동지!"

  2군 참모장인 인민군 허 석우 대장이 의자에 앉은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특수 8군단은 준비됐소?"

  "기렇습네다! 3개 여단이레 대기중입네다."

  특수 8군단, 북한의 대표적 비정규전부대이다. 특수부대왕국인 북한의 다양한 비정규전부대  중에서도 가장  숫자가 많고 전투력이  뛰어나다. 원래 남한 침공 전에 침투하여 활주로 파괴, 도로 봉쇄,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맡는 특수 8군단은  이번 전쟁기간 중 한번도 동원된 적이 없어 그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특수 8군단은 군단병력이 아니다.

  "즉각 투입하시오."

  1999. 11. 26  13:55  나진 남동쪽 97km 해저

  "목표 1, 방위  0-4-5, 침로 1-9-0, 15노트. 거리 15000미터입니다.  목표는 탐신음을 발하고 있습니다."

  소나를 담당한 장교가 4개의  디스플레이에 나온 정보를 종합해 보고했다.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는지 소나장교는 느긋했다. 함장 하치로 나카이 일등해좌(해상자위대 일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중국 해안포대에서  관할하는 하이잉(海鷹)이나 잉지(鷹擊)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텐데. 침로 0-9-0, 미속전진."

  일본 해상자위대 하루시오급  잠수함 와카시오는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했다. 함장이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자신의 콘솔에서  중국 지대함 미사일의 자료를 찾았다. 구 소련제 P-5(나토식 Styx)의 중국제  개량형인 하이잉-2 해안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00km, 하이잉-3이나 4의  사정 약 130km. 잉지-2(나토코드 CSS-NX-8 Saccade)의  경우 최대사정거리가 120km에 달한다고 되어 있었다.

  "해안레이더에 잡히지 않을겁니다."

  이마무라 부함장이 말하자  함장이 끄덕였다. 그렇지, 지구 표면이 둥그니까  멀리  있으면  레이더에  잡히지  않지. 초계기와  조기경보기, OTH-B 레이더(超水平線 레이더 후방산란형)와 미국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위성경보체계가  물샐틈 없이  경계하는 일본열도의 경계상태와는 다를 것이다. 게다가  해안에 있는 중국 레이더시설은  한국해군과 특수부대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콘솔에서 일어나며 함장이 말했다.

  "그렇군. 그럼 우리가 중국을 도와 줘야지. 목표의 정체는 파악됐나?"

  소나병이 음울한  얼굴로 함장을  돌아보더니 보고했다. 함장은  그의 우는듯한 표정을 끝까지 못본척했다.

  "포항급 코르벳함입니다.  음문(音紋)해독중.. 경주함같습니다만,  아직 확인 중입니다. 진주함일지도 모릅니다."

  "겨우 코르벳함이야? 알았네, 그거라도 공격하지."

  부함장이 전투정보 주컴퓨터에  연결된 단말기를 두들기자 포항급 코르벳함에 대한 자료가  나왔다. 기본적인 함체구조와 무장  등이 컬러로 나오고, 무장에 대한  세부설명이 붙어있었다. 이에 따르면 경주함은 대 수상전 전문 코르벳함이었다. 대잠병기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대형전투함이 별로 없는  한국해군은 소형 코르벳함을 대수상전, 대잠전, 대공전 세가지로 나눠 전문화시키고  있었다. 하픈을 장비하는 다른  한국 해군 함정과는 달리 포항급 코르벳함은 특이하게도 엑조세를 장비하고 있다.

  "하픈과 어뢰 모두  사정거리에 드는데… 좋아. 이번엔 하픈을 써보자고. 어때? 소나 데이터만으로 되겠지?"

  아직은 일본잠수함이라는 비밀을 지켜야 했다.  하픈을 발사하기 전에 목표에 대한 정확한 위치 파악은 일반적으로 레이더나 공격용 능동소나로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이쪽의 정체와 위치가 쉽게  폭로되어 손쉬운 공격목표가 될  수 있었다. 함장은 아직 이쪽의 정체를  감추고 싶었다.

  "충분합니다."

  소나담당장교가 말하며 병기관제장교를  쳐다 보았다. 병기관제장교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가 탐신음을  계속 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정위치를 파악하기는 쉬웠다.

  "하픈, 목표 데이터 입력."

  함장이 명령을 내리자 이마무라 이등해좌는 위험한 장난감을 가진 어린애 생각이 났다.  함장은 실제로 무기를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어뢰발사관에 하픈이 장전되고  쉬익~ 하는 주수음이 함체를 울렸다.

  이마무라는 명분없는 전투가 싫었다. 만약  함이 격침된다면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인가? 정부에서는  분명 유족에게 와카시오함은 일본해역 부근에서 사고로 침몰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다.

  [때앵~]

  "적이다! 어디야?"

  갑작스런 고주파 액티브 소나음에 놀란 소나병과 일부 승무원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함장은 직감으로  발신지가 매우 가까운  거리임을 알고 소나담당장교를 재촉했다.

  "2-7-5, 거리 2700! 심도…..!"

  당황한 소나병이 데이터를 읽었다.

  "뭐야? 수상함(水上艦)이 아냐?"

  나카이가 놀라 소나쪽으로 뛰어갔다. ZQR-1 예인소나에 기록된  음원(音源)은 분명 수중에서, 그것도 하루시오급 잠수함은 엄두도 못내는 깊은 물속에서 나온 음이었다.

  "심도 700미터! 잠수함입니다!"

  "빌어먹을! 러시아 핵잠이군. 우리에게 경고하는거야?"

  러시아 원자력잠수함이 왜  이 해역에 나타난건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나카이는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해상자위대 고위장성들의 생각은 일치하고  있었다. 조선정벌이었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조선해군의 함정을  최대한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일본군부의 기대를 별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경제파탄으로 엉망이 된 러시아가  뭐 먹을게 없을까 하고 나선 것이다. 나카이는 분노했다.

  "액티브 소나음의  주파수 대역으로 보아 분명  러시아제입니다. 테이션음 발생. 돌발음  연속 발생 중! 목표 2는 급속잠항  중입니다. 기관 회전수 확인…"

  소나병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데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고 서있던 소나담당장교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목표 2는 러시아제 아쿨라(Acula)급입니다. 윽! 어뢰관 주수음!"

  "침로변경 1-5-5로. 이 해역에서 이탈한다."

  나카이 함장이 다급해졌다. 러시아 잠수함이  본함에 적대적인 행동을 취한 이상, 통상형  잠수함으로서 이쪽의 위치를 알고  있는 원자력잠수함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함선과 교전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보다는 못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핵강국인 러시아에 시비를 걸 자위대 잠수함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해역이  러시아 EEZ와 가깝다는 사실이다. 일본잠수함이 이 해역에서 나포되기라도 하면 일본은 국제적 비난과 망신을 피할 수 없었다. 해상자위대 고위층도  운신의 폭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나카이 함장은 분노를 삭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침로 1-5-5, 전진  반속. 함장님! 저 러시아 잠수함이 액티브  소나를 발하면 우리까지 조선 코르벳함에게 포착됩니다.  하지만 잠항심도가 낮은 우리만 공격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액티브 소나음은 빔 형태로 지향성이 있다.  방향의 범위를 정해 발신하기 때문에 코르벳함은  직접적으로 소나음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해저에 반사된 소나음을  수신했을 것이고, 러시아 잠수함과  일본 잠수함의 위치를 거의 정확히 파악했을 것이다.

  "그래. 그놈은 수상함정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할 자신이 있는게야. 하긴 잠항한도가 엄청난 놈이니까… 우리가  조선함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거야. 젠장… 먹이를 바로 앞에 두고 물러서야 하다니."

  하루시오급 잠수함 와카시오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나카이는 이번 전쟁기간 중 한국  측이 선포한 전쟁수역을 빠져나갈 마음은 없었다. 그는 만만한 조선해군에게는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언제고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우전방에 어뢰! 1-8-0!  거리 1400. 러시아제 40형  어뢰입니다! 러시아 잠수함이 또 탐신음을 발했습니다."

  소나병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외쳤다. 나카이가 사색이  되어 명령을 연속 발했다. 하루시오급의 수중최대속도는  20노트급이지만 40형 어뢰의 최종속도는 45노트  이상이다. 왜 러시아 잠수함이  공격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함장은 상당히 급하게 되었다.

  "급속반전, 좌현 180도, 상향타 15도!"

  "어뢰에서 탐신음! 어뢰에 포착됐습니다!"

  왜 어뢰가 앞쪽에 있을까?  나카이 함장은 경황중에도 어뢰의 코스를 분석했다. 시간상 목표  2의 주수음이 들리기 전에 발사된  것이 분명했다. 다른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했거나 목표 2가  주수음을 내기 전에 숨어서 미리 발사한  어뢰일 가능성도 있었다. 함장은  합동작전을 원칙으로 하는 러시아 잠수함대니 다른 잠수함의 존재도 신경쓰였다.

  그런데 와카시오함의 속도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어뢰의  방향도 와카시오를 한국해군 코르벳함 바로 앞쪽으로  몰았다. 나카이는 코르벳함을 완전 무시하기로 했다. 일단 어뢰부터 피하고 봐야했고, 수상전 전문의 경주함이 동료함이나 초계기를 부르는 사이에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  잠수함이었다. 이것이 자꾸 액티브 소나로 탐신음을 발했다. 나카이가 초조해졌다.

  "어뢰 접근! 본함을 향합니다. 거리 600, 가속 중!"

  "좌현 180도, 상향타 30도!"

  와카시오가 급선회하면서 수중에 물거품의 막을  형성했다. 어뢰가 잠수함을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소나병의 비명이  이어졌으나 함장은 의외로 침착했다.

  "거리 300!"

  "다시 급속반전, 좌현 180도. 노이즈 메이커 발사!"

  수중에 거대한  물살이 일어나고,  원통형의 노이즈 메이커가  잠수함 위로 솟았다. 와카시오는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러시아 잠수함이 또 탐신음을 발했다. 러시아 잠수함의 위치와 함께  어뢰의 항적이 소나 디스플레이에 환히 비쳤다.  노이즈 메이커에 접근하던 어뢰가  방향을 틀었다.

  "다시 접근, 거리 70! 명중합니다!"

  뚜! 뚜! 하는  어뢰 탐신음이 커지며 간격도 점점 짧아졌다.  승무원들이 명중에 대비하며 기둥같은 것을 붙잡았다.  도저히 어뢰를 피할 수가 없었다. 함체에 뭔가 쾅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함장이 눈을 질끈 그것 뿐이었다.

  "불발입니다!"

  거의 혼이  나간 소나병이 보고하자 승무원들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러시아 잠수함은 아마 탄두가  없는 어뢰로 본함에 경고를 한 것이리라.

  "그럼 그렇지. 로스케놈이 감히 우릴 공격하지는 못할거야."

  나카이 함장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놀라본 적이 없었다. 나카이 함장은 돌아가면  이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정부는  틀림없이 차관제공 연기 등,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가할 것이다.

  "새로운 어뢰입니다! 0-1-0! 목표 1이 확인됐습니다. 경주함이 아니라 진주함입니다!"

  소나병이 다시 경고를  발했다. 함장이 진주함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한국형 코르벳함 경주함과 진주함은  같은 현대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상부구조물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엔진이나 디자인 등 두  함은 거의 모든 것이  똑같았다. 소나병이 진주함을 경주함으로  착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진주함은  대잠수함 전용이었다. 거리가 멀다면 사정거리가  긴 하픈으로 공격하고 피하면  되지만, 지금은 진주함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와카시오가  정신없이 어뢰를 피하는 사이에 진주함이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한 것이다.  게다가 진주함은 러시아 핵잠수함의 액티브 소나에 의해 와카시오의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침로 1-8-0, 전진전속!  제기랄! 로스케놈은 조선해군이 우릴 공격하도록 유도한거야!"

  두 발의 Mk46  324밀리 어뢰가 40노트의 속도로  다가왔다. 잠수함이 급선회를 하며 물  속에 소용돌이를 만들고 노이즈  메이커를 발사했다. 진주함이 발사한 어뢰는 두 발이었다. 탐신음을  발하는 액티브 어뢰 뒤에 패시브 어뢰가 숨어 있었다. 어뢰 두  발이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헤매더니, 패시브 어뢰가 노이즈 메이커를 좇아  빙빙 돌며 해저로 내려갔다. 액티브 어뢰는 계속 탐신음을 발하며 잠수함의 옆구리를 잡았다. 물 속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폭발음이 바닷물을 뒤흔들었다.

  [뚜우~ 뚜우~]

  폭발음과 동시에 전기가  나가고 비상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예비전원이 가동되고 불이 들어오자 발령실 요원들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함장은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배관 몇 군데에서 물이 새자  승무원들이 파이프에 긴급복구용 테이프를  붙였다. 소나원 한 명은 명중될 때까지 어뢰를 추적했는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전자전  담당장교는 공포에 의한 쇼크상태에  빠져 의무실로 후송되었다.

  "어뢰보관실이 침수되고 배터리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부상해야 합니다."

  부함장이 보고하자 함장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교전국이 아니면서도 울산함을  격침시킨 함장으로서는 도저히 함을  부상시킬 수는 없었다.

  "우린 이승만 라인을 빠져나가야 한다. 피해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라."

  어뢰실과 전원실이 침수되고 승무원 5명이 죽었지만 기관실은 무사하고 예비전원도 충분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만, 함수의 소나가 사용불능이 되었고, 측면 청음소나도 작동을 멈추었다.

  "예인소나는 괜찮으니 상관없어. 목표 1의 위치는?"

  "3-4-7에 6,700입니다. 현재는 약 30노트로 급속 접근 중입니다."

  "그렇게 접근했나? 우라질! 1-3-5, 급속 전진. 적이 고속일 때  우리도 이동한다."

  진주함은 급속전진하다가  멈추기를 반복할 것이다.  진주함이 멈추기 직전에 우리도  멈추면 된다고  함장은 생각했다. 와카시오는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남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앵~]

  "으… 또 뭐야!"

  함장이 진저리를  쳤다. 음원이 러시아  잠수함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와카시오의 위치가 진주함에 분명히 전해질 것이다.

  "목표 2가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심도 950!"

  "저놈은 조선해군의 손을 빌려 우릴 죽일 셈이야!"

  진주함에 장비한 Mk46  어뢰가 초기형이라면 최대 항해심도는 450미터에 불과하다. 비교적  신형인 Mk46 Mod 5의 경우에도  겨우 750미터다. 그리고 와카시오함도 그 러시아 잠수함을 공격할 수 없었다. 와카시오가 장비한 89식 어뢰의 최대 잠항심도는 약  900미터다. 더더욱 큰 문제는, 와카시오는 더  이상의 공격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진주함이 점점 접근해 왔다. 나카이 함장은 첫번째에 받은 피해 때문에 더 이상 잠수할 수 없었다. 무조건 동쪽으로 급속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1999. 11. 26  14:05  경기도 남양주시

  "1함대에서 보고입니다.  진주함이 나진 남동쪽  해상에서 국적불명의 잠수함을 격침시켰답니다. 현재 부유물 수거 중입니다."

  심 현식 해군 중장이 어두운 음색으로 보고하며 자신의 화면에 뜬 데이터를 중앙화면에 올렸다.  제 5군의 지휘권 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이던 참모들 사이에서는  순간 당황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울산함을 공격한 일본 잠수함이 분명한데, 현재의 전황에서는  이 전과를 언론에 통보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일본을  공격하라는 여론이 들끓어  전쟁수행에 지장을 줄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비밀로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핵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이 이번 국적불명 잠수함의 격침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 잠수함은 심해 깊숙히 사라졌다는 진주함 함장의 보고입니다."

  심 현식 중장이 보고하는 도중에 짜르라는 암호명을 가진 러시아인을 힐끗 보았다. 전혀 표정변화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 러시아 해군이 아니라 피스의 의용병이라는 무언의 주장이었다.

  "길케 하기요.  부유물이레 발견되면 어느  나라 잠수함인지  알게 될 것이오. 진주함 함장에게는 비밀유지를 당부하시오."

  역시 이  종식 차수의 결정은  참모들이 예상한 대로였다. 심  중장이 진주함장에게 부유물을 상자에 담아 밀봉시킬  것을 명령했다. 암호화된 명령문이 전파를  타고 1함대 사령부와  진주함에 즉각 수령되었다.  심 중장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 차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 2군  사령원 동지에 말에도 일리가  있소. 현재 2군이  대규모에 적군에 포위되고 5군  사령원 동지가 순직한 지금, 지휘권에  통일을 기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김 대장 동지야 원래  남반부 참모총장이었으니끼니 어차피 5군도 그에 에하나  다름없시요. 하디만 중국영토에 대한 공격은 제발 자제해달라고 당부하기요."

  인민군 장성들은  불만을 삭이는  표정이었고, 국군 참모들은  당연한 결정이라며 결과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가중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 통일한국군 제 5군의 지휘권은  김 재호 대장에게 넘어갔다.

  1999. 11. 26  14:15  함경북도 회령 배덕동 고개

  벌써 30분째 포격이  이어졌다. 주로 근접신관에 의한  폭발이라 회령을 마주보고 있는 기다란 참호선에 숨은  보병들은 수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폭격은 없었다. 어떠한  비행기도 회령 상공을 날 수 없었다. 마오 쳉 중사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고있는 계곡의 대공엄폐호 안에서 중대장이 집단군 직속인 방공연대장과 교신하는 내용을 들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예! 적의 포격은 대단하지만 아직 견딜만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적기는 얼씬도  못합니다. 조금 전에도  조선군 비행기 수십 대가  왔지만 접근도 못해 보고 도망갔습니다."

  중대장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하긴,  이곳에 전투기를 보낸다는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오  중사가 한껏 기지개를 켜는데  하늘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마오 중사가  망원경으로 그 물체들을 확인했다. 맙소사!

  "중대장님! 상공에 적입니다!"

  마오 중사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중대장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망원경으로  북서쪽 하늘을 살폈다. 레이더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럴수가! 패러글라이딩이라니!"

  하늘에는 무수한  숫자의 잿빛  패러글라이더가 떠 있었다.  이것들은 북서풍을 타고 점점  이쪽으로 날아왔다. 마오 중사와  부하들이 대공기총에 달라붙었다.

  "어떡하지? 미사일은 쏘아도 소용없고."

  허둥대던 중대장이 무전기를 잡고 외쳤다.

  "적이다! 대공기총은 대공사격 준비. 상부에도 빨리 보고해!"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대공사격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방 곳곳에 연막탄이 작렬했다. 대공기지 주변은 연기로 가득했다.

  "상관없어. 사격준비! 2000미터 거리 내로 들어면 일제사격한다."

  중대장이 명령을 내리고  다시 망원경으로 하늘을 살폈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낙하산 집단과의 거리는 약  2500미터였다. 방아쇠를 잡은 마오 중사의  손가락이 떨렸다. 전화벨이 울리고  중대장이 무전기의 수화기를 잡았다.

  "뭐야. 뭐? 적기다!"

  전방의 대공초소의 보고에 따르면 대규모의 An-2 편대가 하늘을 덮고 있다는  것이다. 대공포와 대공기총들이 총구를 내렸다. 과연 수십기의 소형 An-2 수송기들이 능선을 넘어 마오 중사가 있는 계곡으로 떼지어 몰려왔다. 곳곳에 숨어있던 대공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저공비행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느린 프로펠러기들은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숫자가 워낙 많아서 눈이  쌓인 산사면에 착륙하는 비행기도 많았다. 그곳에서  보병들이 쏟아져 나오자 중국군  보병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마오 중사는  몰려오는 비행기를 향해  죽어라고 쏴댔다. 또 한  대의 경비행기가 화염을 뿜으며  추락했다. 쉬익 하는 소리가  나서 아래쪽을 보니 침투한 인민군들이 RPG로켓을 발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콰!]

  마오 중사가 놀라 바로 옆 대공초소를  보았다. 초소는 시커먼 연기에 쌓이며 마대자루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적 헬기입니다!"

  누군가가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An-2의  뒤에 숨어 저공으로 침투한 헬기들이 마오 중사가  있는 대공진지를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다. 포탄이 모래를 담은 포대를 뚫고 들어와  중대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주위에 서 있던 부하들도  춤추듯 쓰러졌다. 마오 중사가  대공기총을 왼쪽으로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포를 발사하고 있는 MD500 헬기가 의외로 커보였다.

  "빌어먹을!"

  대공기총에서 총알이 딱  한 발만 나가고 멈췄다.  기관포탄이 기총의 기관부를 뚫은 것이다. 마오 중사는 즉시 엎드렸다. 기관포 소리가 이어지고 간간히 폭음이  울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늘을  보니 상공에는 회색빛 패러글라이더가 강하하고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인민군이 틀림없었다. 마오  중사는 다시 죽은척 엎드렸다. 대공진지 부근에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1999. 11. 26  14:30  중국 지린성 연변

  연변시 동쪽 너른 눈밭에  한국 방송사상 최대의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열린음악회 만주공연’, KBS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송출했다. 지금은 대부분이  군인들인 관객과 합창단이 함께 노래,  ‘터’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열렸던 열린음악회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군악대가 참가했다는  것이다. 지금 합동악단 지휘는 국군 군악대장 이 영섭 중령이 맡고 있었다.

  열린음악회의 만주공연은  선언적 의미가 있었다.  지금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정보관계자들은 TV화면에 붙어서  이 음악회의 전략적 의미를 분석하느라 바쁠 것이 분명했다. 관중은  1개 연대 정도였지만 1개 사단  병력이 외곽 경계를  맡았다. 객석에 수류탄 하나라도  터지는 날이면 아수라장이 될뿐만 아니라 만주공연의 의미는 완전 퇴색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객석에  앉은 민간인 복장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군무원이거나 현역 군인들이었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금강산(원래는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나라.

  동해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며는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터     한돌 글,곡

  사회를 맡은 예쁜  여자 MC가 뭐라뭐라고 잔뜩  선동하는 투의 말을 했다. 이런 것도  이북 출신의 여성 방송원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는 투였다. 합창단에 의한 합창이 시작되었다.

  오 우리의 땅 더 이상 뺏길 수 없다.

  누가 우리에게 싸움을 강요하는가.

  우린 한 형제, 우린 한 핏줄, 단 한 분의 어머니

  우린 한 형제, 우린 한 핏줄, 단 하나의 나라.

  돌아가라 너희는, 여기는 우리의 땅

  우리는 하나되어 외친다, 조국은 하나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통일조국이여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통일조국이여, 통일조국이여

  봄이면 진달래 피고 가을이면 벼이삭 익는

  남녘에서 북녘으로 허리를 이은 한라에서 백두까지

  다 한줄기 늘푸른 저 들판 트인 저 평야

  동해에서 서해까지 한바다 물결 우리는 우리는 하나였소

                              하나되는 땅    민족음악연구회 글, 곡

  방송되는 노래들이 당장 급한 중국 침략으로부터의 조국 수호를 주제로 하는지, 아니면  민족통일을 외치는지 모를 노래들이었다.  ‘하나되는 땅’에서의 ‘너희’는 원래  미국을 뜻한다. 선곡한 사람이 운동권 가요의 내용을 혼동한 것이 분명했다. 하긴, 어떤 대중가요나 군가가 운동권 가요만큼 애국심을 자극하는 노래가 있을까마는…

  MC가 거창하게 소개하자  무대에 가수 송창식이 나타났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로 시작하는 ‘내나라  내겨레’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이기도 해서 송창식이 나온 것이다. 그는 노래의 절정부,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땅에 순결하게…’를 특유의 멍청한듯한 미소를 지으며 불렀다.

  "이럴 때 태지들이 있으면 죽여주는데요…"

  임시 스튜디오에서 이 PD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김 승종 국장도 동감했다.

  "’발해를 꿈꾸며’ 말인가?  하긴… 가수나 나갈 노래들이 너무 구닥다리들이라서… 그래도 노찾사하고  트리플 엑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젊은 것들이니 좀 낫겠지. 성악부문을 뺀건 잘한 결정이었어."

  "근데 ‘광야에서’ 그 노래는 중국을  너무 자극하는게 아닐까요? 독도도 만주도 원래 다 우리땅이긴 하지만 어느 나라가 좋아하겠어요?"

  "이봐, 이 PD, 우리땅이니까  우리땅이라고 하지. 원래 다 우리땅이었어. 주인이란 말야. 지금은  이 땅을 찾는 과정에 들어섰고… 자, 시간됐으니 이제 내보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청년합창단이  무대에 나왔다. 처절한 전주곡이  흐르고 나서 노래는 낮은  음계에서부터 천천히 올라갔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 있다.

  부등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옷의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할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광야에서   문대현 글, 곡

  카메라가 잠시 아기를  안고있는 20대 중반의 여성을  비췄다. 아나운서가 질문하자 연변에 살고 있다는 키가 작은 그 여자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만주는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어요. 특히 간도지방은  한말까지 우리땅이었는데 일본이 청나라에  넘겼죠. 이제 우리땅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간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 모두의  바램입니다!"

  김 국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는 아마도 수면제가 든  우유를 마셨을 것이다. 김 국장은 공연  전에 이 PD가 여자 공수부대원에게  종이쪽지를 건네며  뭔가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저 정도의 조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용납될만 했다.

  다시 카메라가 무대를  향하고, 전속무용단과 함께 트리플  엑스가 무대에 나타났다. 객석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군인들이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아니었다. 전주곡이 나오자 무용단의  퇴폐적인 율동이 시작되었다.

  화려한 조명발, 젊음이 뜨거움을 토하는 곳

  클럽 에로티카에서 난 널 보았어.

  섹시한 몸매, 현란한 춤솜씨

  날 기다려. 썬글래스에 반바지 입고 내가 나간다~

  붉은 팬티로 예쁘게 접은 장미꽃을 주었지.

  장미 팬티를 펼치며 꺄르르 웃는 너.

  너의 눈빛은 너무 뜨거워. 내 몸을 훑지 마.

  네 눈빛은 꽃뱀의 혓바닥같아.

  나보다 나이가 많아? 상관없어. 여자들은 젊은 남자 좋아해.

  오늘밤 널 리드할게. 그것 봐, 넌 여자잖아.

  날 너무 보채지마. 남자는 시간이 필요해.

  사랑을 계속 할 순 없어. 난 토끼가 아냐. 우헤헤~

  날이 새면 넌 날 못본 척 하겠지. 물론 나도 그럴거야.

  클럽 에로티카에서 널 다시 만나도, 넌 날 모르는 체 하겠지.

  그곳에서 여러 남자와 어울리면서도

  약혼자 앞에서는 내숭을 떨겠지. 순진한 척~

                                     클럽 에로티카   김종구 글, 곡

  "저놈들은 결코 서태지에 비할 바가 못돼. 사이비같으니라구."

  "당연하죠. 독창성이나  가창력이라곤 도대체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으니… 그래도 요즘 젊은애들 중에서는 인기가  젤 좋자나요? 20대 후반까지는 쟤들을 꽤 좋아하던데요."

  "다른 놈들처럼 억지로 만들어진 인기야… 근데 저런 자식들이 어떻게 우리 다물회에 들어왔는지 모르겠군. 골이 텅  빈 자식들이 무슨 광개토대왕 노래를 부르는지 기가 막혀서 원…"

  말을 하던 김 국장이 잠시 스튜디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음향기사와 조명기사,  스크립터와 이 PD 밑에  있는 AD들, 모두 다물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요즘 연예가에서는  다물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뜰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 누구도 다물회의 힘을 무시하지 못했고, 어떻게든 가입하려고 발버둥쳤다. 신인가수나 텔런트들은 거의  발광을 했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름을  쓰고 있지만, 모두 다물회의 하부조직이나 방계조직이었다.

  "우리 다물회 윗사람들이  저놈들에게 곡을 줬다니깐 할  수 없죠. 그래도 노래는 그럴듯해 보이잖아요? 갱스터랩과 프로그레시브 락의 절묘한 조화…"

  ‘멍청한 이 PD…’

  김 국장이 속으로  웃었다. 다물회는 연예계 등  문화계와 청년학생계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계와 재계,  언론계, 그리고 군부에도 확고한 지지기반이 있었다. 이것이  열린음악회 만주공연 생방송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이 공연의  목적은 머뭇거리고 있는 정치계와 군부에 여론의 압력을  가해 만주를 한국영토로 만들자는,  그들의 구호로 만주수복을 하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조용한 전주족이 흘렀다. 김  국장은 이 노래 때문에 트리플 엑스를  부른 것이다.

  단군성조께서 지난밤 꿈속에 나타났네.

  잃은 땅을 찾으라. 그대 겨레의 터전을 지키라.

  피눈물 흘리는 단군성조시여.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칼, 나의 칼이여. 열성조께서 지켜오신 단군의 검이여.

  저 평원에서 말 달리자, 활을 쏘자.

  오랑캐를 쳐부쉈다. 치우천왕 만만세!

  거룩한 요하, 끝없는 지평선. 우리의 요동땅이여.

  중원은 못찾았어도 만주는 다시 우리의 말발굽 아래.

  한겨레 8천년 피땀으로 지킨 벌판

  광개토대제가 지난밤 꿈속에 나타났지.

  잃은 땅을 찾으라. 그대 겨레의 터전을 지키라.

  대제의 안타까운 표정, 저도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잃은 땅, 만주를 찾아서

  연변으로 여행갔지, 연해주도 돌아봤지.

  아! 그곳은 아직 우리의 땅,

  하얀옷 입은 우리 피붙이들이 살고 있어.

  지금 찾지 못하면 영원히 찾지 못해.

  만주를 찾을 때 광개토대제는 편히 쉬리라.

  을지문덕, 양만춘, 김종서 장군, 효종대왕이 꾸짖네

  잃은 땅을 찾자. 우리 겨레의 터

지키자.

  우리가 할 일, 우리땅을 우리의 손으로!

                                        광개토대제   김경진 글, 곡

  세 사람이 하늘을 향해 찌른 손을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내리 꽂자 노래가 끝났다.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앵콜을 연호했다.

  1999. 11. 26  03:00  경기도 남양주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차 영진 준장은  서둘러 차를 서울로 몰았다. 주변에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위성도시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울은 정말 참혹했다. 시내 중심부는 움푹 파인 거대한 웅덩이로 변했고, 외곽은 무너진 빌딩의  잔해들만이 을씨년스럽게  그를 맞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곳은 군인들에 의한 통제도 없었다.

  종로구 와룡동에  도착하여 서둘러 자신의 처가집인  비원 앞 한옥을 찾았다. 주변 한옥촌은  모두 무너졌지만 처가집만 고스란히 남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처가집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정말 다행이오. 장인어른, 장모님도 무사하시오?"

  차 영진이 환하게 웃자 아내는 이상하게 슬픈 얼굴을 했다.

  "아뇨.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돌아가셨어요."

  "뭐요? 그럴수가…"

  차 영진이 아내를 위로하려던 순간 아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 영진이 흠칫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저도 죽었어요. 당신이 오길 기다렸어요."

  "뭐라고요?"

  놀란 차 영진이 아내를  보자 아내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방사능 피폭과 열폭풍에 이중으로 당했는지  얼굴과 몸 피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살이  녹아내림에 따라 얼굴이 참혹하게  변하자 아내가 끔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영진이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같은 군인들이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어요. 당신을 저주해요. 나는 억울해요. 당신 탓이예요!"

  끔찍한 모습을 한 아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뒤로 넘어진 차 영진이 일어나려고 바둥거렸다. 뼈만 남은 아내가 그의 목을 졸랐다.

  차 영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군복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잠시 헉헉대다가 주변 사물이 눈에 들어옴을 느꼈다. 세  개의 TV화면 중 하나에는 통일참모본부 회의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다들 늘어져  자고 있었다. 지쳤을 것이다.  왼쪽 화면에는 전쟁중에 웬일인지 노래공연이 한참이었다. 카메라가 관중을  쭉 비췄다. 군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합창을 하고 있었다. 차  영진이 회의실과 연결된 모니터의 소리를  죽이고 TV 공연쪽 모니터의 음량을 높였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2절) 문승현 글,곡

  [중국은 서울과 개성에  핵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무수히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에게 만주땅을 돌려줘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만주는 우리땅입니다.  우리 만주를 지키기 위해 싸워 나갑시다.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우리 겨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맙시다.  다음 노래는...]

  여자 아나운서가 멘트를 하고 다음 노래를  소개했다. 밑에 자막이 흐르는데, ‘열린음악회 만주공연 생방송’이라는 글자가  크게 들어왔다. 아직 흐리멍텅했던 차 영진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올리고 서둘러 회의실로 뛰어갔다.

  "잠깐 일어나 보십시오. 지금 TV에  나오는거 보셨습니까? 도대체 어디서 저따위 공연을 방송으로  내보냅니까? 우리가 침략자라는 것을 자인하자는 수작입니까?"

  차 영진이 큰 소리로 떠들자 참모들이 부시시한 눈을 뜨며 TV화면을 보았다. 이 종식 차수나 다른 참모들은 별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참모들이 방송을 못본 모양이라고 생각한 차 영진이 설명했다.

  "이 상태에서 만주를  우리땅이라고 하면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중국이 죽자사자  싸울건 눈에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또 핵미사일이 날아올텐데요?"

  참모들은 어쩌면  이 공연은 통일참모본부에서 사전에 승인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차 영진이 다시 주장했다.

  "이번 공연을 주도한 공보처장관에게 항의를 전달하고 공연에 협조한 지휘관들을 문책해야 합니다. 국민을 호도하여  전쟁을 지속하려는 불순 세력의…"

  "이봐요, 차 준장!"

  차 영진이 돌아보니 정 지수 대장이었다.  잔뜩 신경질이 나있는 표정이었다.

  "만주가 우리땅이라는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뇨?  그리고, 중국이 나진,선봉을 점령하고 내놓지 않는 마당에  우리가 만주를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면 어떻소? 나는 차라리 지금 상태에서 휴전이 되어 국경이 고착되면 좋겠소."

  놀란 차 영진이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다물회라는  이름이 그에게는 아주 크게, 그리고 무섭게 다가왔다.

  1999. 11. 26  03:10  함경북도 회령 제봉(542고지)

  완만한 제봉의 산기슭에서 김 재호 대장이 장갑지휘차 큐폴라를 열고 나와 망원경으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포격이 끝나자  폭격이 시작되었다.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F-16 전투기들이 얼마 남지 않은 중국군 대공진지를  집중공격했다.  중국군  대공기지가  격멸당하자  병력수송용 UH-1 헬기들이 배덕동  뒤쪽 763고지에 집중 투입되었다. 추락하는  헬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는 순간, 한  대의 헬기가 공중폭발했다.

  지상에서는 날렵한 보병전투차들이 산사면까지 도착하자 보병들이 하차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다행히 이들에 대한 공격은 별로 없었다. 방어선의 중국군은 침투한 특수 8군단 병력을 막기도 바빠서 아마도 보병쪽에는 신경을 쓰기 어려울 것이다.

  개선산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개선산의  주봉은 국군 일부 병력이 점령하고 포병  및 공군 관측팀이 활동하고 있는  790고지이고, 회령 평야와 접하고 있는  쪽에 763고지가 있다. 하나는 763고지  남쪽의 711 고지이다. 이 두 개의  고지와 790고지 사이에는 녹야천이 흐르며, 주변에 논과 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전투는  2군 사령부와 790 고지의 국군 사이에 있는 중국군의  주방어선, 763고지에서 한창이었다. 지금 그곳에는 낙하산으로 강하하거나 An-2로  착륙한 인민군 특수 8군단 일부 병력, 헬기강하병, 산기슭에서 올라오는 보병들이 포격과 폭격으로 엉망이 된 방어선을 뚫는 중이었다.

  "사령관님~ 763고지를 헬기강하병들이 점령했답니다~"

  지휘차 안에서 윤  민혁 대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  대장이 씩 웃었다.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고, 건방진 윤  대위가 밖에 나오기 싫어 안에서 외쳤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짜~식. 이번 전투 끝나면  눈밭에 한 번 굴려야겠군. 얼음물이 더  나을까? 사내자식이 이깟 추위가 무서워서야…’

  김 대장이 다시 망원경으로 고지쪽을 살폈다.  정상에 녹색 한반도 그림의 통일한국기가 펄럭였다. 샌드위치가 된  중국군은 남쪽 산사면으로 밀리고 있는 중이었다. 후퇴하는 중국군 머리 위로 포격이 가해지고, 일대 추격적인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전투는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 대장이 큐폴라 아래쪽에 대고 말했다.

  "어이~ 윤 대위. 나랑 목욕 한 번  같이 할까? 압록강에서 어떤가?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할래?"

  "…! 사령관님 취미가 그쪽이었습니까?  저는 싫은데요? 딴 남자를 찾아 보십시오."

  "으…, 빌어먹을! 날 호모로 몰아?"

Sir Huntington’s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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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ist’s Discipline  : 숫처녀는 공략  말라. 맛도 못보고 가중처벌된다. (强姦未遂+상해치상=强姦致傷)

note : 한국형법에서 통설인 삽입설에 따르면 미수에 그치는 수가 많다. 旣遂보다 형사책임이 더 무겁다. 민사책임은 훨씬 더 무겁다…–;

                               ‘Sir Huntington 一代記’ 中에서

  1999. 11. 26  14:40  (베이징표준시) 티벳 라싸 남쪽 5km

  "눈이 옵니다, 타시 구르메."

  티벳해방전선의 지도자,  소남 툰두프가 스스로를  티벳인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아시아인에게  공손히 보고했다. 타시 구르메는  라싸 주변의 전술지도를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회색빛 조각구름이 점점이 흐르고 있었다.

  "중국군 본대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오는 모양입니다. 멍청이들은 아닐테니까요."

  "라싸로 향하는 제대로  된 길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타시 구르메.  강쪽은 진창이라 오기 힘듭니다만, 걱정되신다면  정찰병을 더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이라….. 그쪽은 진흙탕이지만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보병 대부대가 이동하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우리가 매복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중국군에게는 라싸가 먼저일 것이오."

  게릴라전에서는 본거지가  있어야 한다. 티벳같은  고원지대에서 대병력이 숨을 곳이 도시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 국공내전의 모택동처럼 광대한 영토를 이용하여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없었다. 현재 인구밀집지역인 라싸가 해방구가 된 지금, 그들은 라싸를 지켜야 했다.

  "알겠습니다, 동지. 얀가! 옹갸르!"

  툰두프의 두 동생, 소남 얀가와 소남  옹갸르가 계곡쪽에서 총을 들고 뛰어 왔다. 툰두프가 두 사람에게 뭔가를  지시하자 두 사람이 30여명의 전사와 노새  다섯 마리, 야크 두  마리를 이끌고 도로쪽으로 뛰어갔다. 타시 구르메는  푸른 하늘에 점점이  퍼진 잿빛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한바탕 진눈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싸쪽에서 구식  자가용승용차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경계병들이 신분을 확인하고 소남  툰두프를 부르자, 그가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여인과 잠시 이야기하더니 타시 구르메에게 안내했다.

  "이 분은 찬  초크 달마이십니다. 자유티벳동맹의 지도위원입니다. 이 쪽 분이 성스러운 흰산의 영웅, 타시 구르메님이십니다."

  툰두프는 타시 구르메를 소개하며 목이  메었다. 툰두프에게 구르메는 티벳을 구원할 전설의 영웅이었다. 타시 구르메를  찬찬히 살피던 찬 초크 달마가  갑자기 차가운 땅에  오체투지를 하며 절을 했다.  구르메가 당황했다. 자존심 강한 티벳인이 외국인에게  이렇게 파격적으로 존경심을 표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영웅이시여! 티벳을 구원해 주소서! 지금 라싸의 모든 백성들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나이다. 타루초를  돌며 당신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라싸에서 듣기로  당신께서는 진짜 판첸 라마라고  하던데 불경스럽게도 저는 조금 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찬 초크 달마가  잠깐 고개를 들어 타시  구르메를 우러러 보고 다시 머리를 땅에 부딪혔다.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벳인들의 정치,신앙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숭배대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판첸 라마의 옹립에 개입하여  중국 어린이를 판첸 라마에 등극시켰으나 대부분의 티벳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타시 구르메는 한국을 방문한 달라이 라마를 한국정부가  홀대한 것을 기억했다. 대만과의 교류에서처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 일어  나시오. 나는 당신들의  종교와 관계없는 사람이오. 그건 그렇고, 라싸의  상황은 어떻소? 빠르  바티께서는 총을 주지  않는다고 화가 난 모양이던데…"

  찬 초크 달마가 갑자기  머리를 땅에 몇번 부딪히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그  어린 것은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벽에 머리를 찧고 있습니다.  당신을 알아 모시지 못한 죄, 저희들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중국을 몰아낸 뒤에 죄의 대가를  받게 허락해 주십시오."

  "어허~ 저런… 당장  그런 짓 그만 두고 이제 사람들을  무장시키시오. 무기가 있는 곳은 조칸사  관리인으로 일하는 나완 타히가 안내할 것이오."

  "오오~ 성스러운  호소(湖沼) 마나슬루처럼  넓으신 자비,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티벳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부디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주시옵소서."

  찬 초크 달마가 9번  절을 하고 물러나자 타시 구르메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칼 첸 총리의 심리팀이  라싸에서 공작을 벌인 모양이었다.  이제 자신은 싫더라도 졸지에  관세음보살 대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며 타시 구르메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장갑차입니다!"

  툰두프가 외친  후에 무전기가 울렸다.  장갑차 10여대를 앞세운  1개 연대 병력의  중국군이 계곡쪽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었다. 놀란  타시 구르메는 짤막한 명령 몇가지를  내리고 서둘러 병력의 절반을 빼내 강쪽으로 뛰었다. 기관총 소리가 계곡에서 길게 울려 퍼졌다.

  1999. 11. 26  16:05  함경북도 회령 제봉(542고지)

  김 재호 대장이 장갑지휘차 내부에 깔린 전자상황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흑룡강성에 있던  중국군의 진격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잘못하면 나진,선봉의 중국군을 양분하기도  전에 먼저 배후를 공격당할 수 있었다. 5군의 진행방향을 살피던 윤 민혁 대위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쪽으로 움직이던 푸른 화살표가 그 순간 갑자기 서쪽으로 꺾였다.

  "5군으로 막는게 아니었습니까?"

  "…, 응!"

  "……!"

  김 대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윤 대위가 얼핏 고개를 돌려 최 영섭 중위와  눈이 마주쳤다. 최 중위가 윤 대위의 자리쪽으로 눈짓을 했다. 아까 사령관이  쪽지를 최 중위에게 넘겼는데 그것이  5군에 내린 명령서였던  모양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최 중위가 자꾸 눈치를 주는게 이상했었다.

  "부관을 그렇게 무시하시다니…흑흑. 저는 게임이나 하렵니다."

  윤 대위가 장갑지휘차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잠시 훌쩍대더니 전술컴퓨터에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연결시켰다. 그러나 통신내역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으며,  통신내용은 암호체계가 거의 완벽해서 그의 능력으로는  해킹할 수도 없었다. 이럴  겨우에 대비하여 최 영섭 중위와 약속을 한 것이 게임 네트웍에서의 정보교환이었다.

  "께임? 하래미~"

  "삐쳤습니까?"

  "아니. 니는?"

  "아뇨….."

  윈도스가 뜨고 윤  대위가 범용 통신프로그램 ‘하눌타리’를  선택하자 잠시 후  인터넷이 자동접속되었다. 김  대장은 윤 대위가 자주  게임을 하는 것을 보아 왔으므로 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윤 대위의 통신 캐릭터인 치치올리나의 누드를 보기 위해 잠시  기웃거렸다. 윤 민혁이 김 대장을 향해 인상을  험악하게 쓰자 김 대장이 못본 척  고개를 돌렸다. 윤 민혁이 투덜거리더니  캐릭터에 수영복을 입혔다. 그가  랩탑에서 단축키를 누르자 다음과 같이 입력되었다.

telnet 209.248.36.10 2026

  윤 대위가  화면을 다운시키고 가상현실 게임용  고글과 헤드셋을 썼다. 드넓은 만주벌판에 점점이 고인돌이 퍼져있는 입체화면에 나타났다. 저 멀리 피라밋 모양을 한 거대한 석제  고분 옆에, 고구려군 막사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치우천왕님, 어서 오십시오. 23장의 서간이 도착했사옵니다.]

  윤 민혁이 직접  CG작업을 해서 만든 여덟명의  시녀, 팔선녀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익숙한  솜씨로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무선게임기를 조작하자 반바지를 입은  우편배달부가 달려와 종을 두 번 울리더니 그에게 편지뭉치를  주었다. 게임 내  메일이 하룻사이에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제목을 대충  훑어보니 서울 피폭이 게임메니어들을  상당히 놀래킨 모양이었다.

  편지 종류 (보낸이)            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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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성 (黃帝) : 치우천왕님! 간만에 탁록벌판에서 한 판 붙읍시다~

2. 동화상(영화처럼-그룹) : R’uss族 기사 ‘이반’과의 멋진 한판 갈무리

3. 텍스트 (도와줘요) : 레벨 좀 올려줘요. 잉잉~ 아이템도…^^;

4. 텍스트 (흑호냉혈-복수) : 저랑 1:1로 붙을 분? 메일을… 흐흐…

5. 동화상 (사울아비) : 관운장 경험치 짜네요. 두 번 죽고 잡음…T.T

6. 음성 (雉姬) : JE T’AIME. MOL. NON. PLUS

7. 정지화상 (AirHead) : 雨師 에어헤드의 멋진 기마 장면

8. 음성 (바람의혼-전체) : 서울에 웬 공습경보? 그래도 난 게임한닷!

9. 음성 (error) : blank message

10. 음성 (error) : blank message

11. 텍스트 (error) : blank message

12. 음성 (고자의꿈-전체) : 현재 서울 상황 중계. 반쪽이 났음.

13. 음성 (환경미화원) : 형, 살아 있어? 서울에 핵 떨어졌다면서요?

14. 음성 (천재온달-그룹) : 현재 클럽 생존자 확인중

15. 텍스트 (예쁜도야지-그룹) : 흑흑.. 그 착한 픽셀님이…

16. 텍스트 (제갈공갈-전체) : 아직도 서울 전화, 삐삐 다 안되요…

17. 텍스트 (평강공주-그룹) : 서울분들 괜차나요? 확인 좀 해요!

18. 동화상 (Molester-전체) : 긴급! 핵폭발 후 서울의 참상

19. 음성 (픽셀-그룹) : 저는 살아 있어요. 핵 정말 무섭네요. 핵핵~

20. 텍스트 (Flora-그룹) : 현재 무리원 생사현황. 빠진 분 메일 바람.

21. 음성 (요헨파이퍼-전체) : 채널 69 보세요! 생존자 구조장면 나옴

22. 음성 (검법달인-전체) : 구조 자원봉사에 참가합시다~ 게시판 참조

23. 텍스트 (고주몽) : (북부욕살께 보고) 명림답부의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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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대위가 최 중위의 게임용 아이디인 고주몽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마지막 편지를 선택했다. 명림답부(明臨答夫)는 기원 172년 고구려 신대왕 때 고구려를 침입한 한의 대군을 섬멸시킨 국상(國相)으로, 여기서는 김 재호 대장을 가리키는 암호였다. 메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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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온 시간 : 1999. 11. 26  15:48

받는이 : 치우천왕

보낸이 : 고주몽

제목 : (북부욕살께 보고) 명림답부의 서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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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번호 : 99통육2-033

수신 : 제 5군 부사령관

참조 : 참모장, 작전참모

발신 : 제 2군 사령관 겸 제 5군 사령관

  계속 북진하다가 1600시를  기하여 서진하라. 전방경계 및  각급 부대의 보급에 만전을 기할 것. 이상.

                     제 2군 사령관 겸 제 5군 사령관 김 재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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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大使者로부터의 전언 : 영락대제는 西征 일정을 알고싶어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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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대위가  편지를 지우고 게임접속을  끝냈다. 김 재호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5군을 서진시킨 것은 흑룡강성의 강적을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느껴졌다. 그는 결코 북경을  공략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다물회  수뇌부에서는 북경공략일정을 보고하길 재촉하고 있었는데, 통일참모본부나 김 재호 대장은  그쪽은 전혀 생각도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군부에서 활동하는 다물회원들은 대부분 작전지휘부가 아니라 일선지휘관들이라 다물회의  이상인 고토회복에  상당한 곤란함을 느꼈다.  김 대장을 다물회에 서둘러  포섭치 못한 것은 이들의  실책이었으나, 사실 김 재호는 육군참모총장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은 다음 서열의 장군들에게만 신경을  썼다. 그래서 윤  민혁은 김 재호를 조정하기  위한 특별임무 수행에 골몰했다.

  "병력 투입은 잘돼가나?"

  김 대장의 말에  놀란 윤 대위가 변화된 상황을 살폈다.  모니터의 작전계획과 상황판의 부대별 위치는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예, 초단위로 맞춰 투입하고 있습니다. 적의 저항은 거의 없습니다."

  "뻥은… 윤 대위. 개선산 한 번 올라가 보자고."

  "어이구~ 최전방 시찰이십니까?  네… 완전히 클리어 되었으니…  알겠습니다. 준비하죠."

  "무슨 께임이가? 클리어 하게."

  "적을 소탕하여 위험이 없다는 뜻입니다. 미국식 군사 전문용어죠."

  "치아라, 마."

  1999. 11. 26  16:25  시모시마(대마도 下島) 남서쪽 46km 해저

  "해협에 깔린  일본의 소서스라인을 뚫고 간다는건  자살행위야. 일본 자위대 수상함정이 도대체  몇척이나 있냔 말야. 게다가 미  7함대 함정과 초계기도 도처에 깔려 있고."

  인민해방군 해군  제 2함대  소속의 킬로급(636식) 잠수함  382번함은 해저에 주저앉아  있었다. 쿠로시오  해류가 잠수함을 감싸돌며  함체를 울렸다.

  "해협을 뚫고 나가라니. 이 작전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어. 우리가 발견되면 그들이 공격하지는  않더라도 개떼같이 몰려들어 조선해군이 낌새를 챌게 뻔해."

  불안감이 빠오진산(包金山) 상교를 자꾸 떠벌이게 만들었다. 부함장이 함내 기기체크를 하다가 조언했다.

  "일본의 의향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몇  년전까지는 조선이 북조선에게 공격받는 경우 어떻게든 개입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만, 평화 헌법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이 조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함장 표정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뭔가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일본이 조선을 노리고 있다?  좋아,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지.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목표는 뭔가?"

  관제담당 군관이 이미 주변의 수상함정들에 대한 해석치를 내놓고 있었다.

  "일본 자위대의 소해정입니다. 함장 동지."

  "공격한다. 어뢰 준비."

  방향과 거리가 판독되자  명령복창이 이어지고 함장이 어뢰관 주수를 막 명하려던 참에 소나담당 군관이 함장을 제지시켰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노부이가 투하된 모양입니다."

  "제기랄… 도대체 어느 놈이야?"

  빠오 상교가 소나로  다가왔다. 소나 모니터에는 자그마한  점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 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작은 점이 생겼다.  이 점은 생기자마자 강한  빛을 발하다가 희미해지고, 다시 10여초 후에 밝아졌다.

  "이건 능동형이라  멀어서 우리가 탐지되지 않습니다만,  아까 투하된 수동형이 불안합니다.  능동과 수동 겸용도 있습니다만…  또! P-3C에서 소노부이의 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면 탐지됩니다!"

  소나담당군관이 소나를  가리켰다. 함장은  아무래도 이 해역에  잘못 들어왔다며 투덜거렸다.

  1999. 11. 26  15:40  (베이징표준시) 티벳 라싸 남동쪽 6km

  난청치(南承基) 중위는 떨려오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개같은 상황이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곧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티벳 반란군은 위대한 마오 주석의 교리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공간을 주고 시간을  얻는다는 인민전쟁의 기본원칙은 무시한  듯했다. 그들은 10여  km를 후퇴했고, 아군은  그만큼 전진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오늘밤 안으로 라싸를 점령할 수 있었다.  라싸를 점령하면 티벳 반란군들은 기반이 없어져 소멸될 운명이다. 게다가  아군의 피해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사상자는 3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두에 선  자들은 모두 죽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커서, 누구도 선봉에 서지 않았다. 결국 소대장이 선봉에 나서야 했다. 난  중위는 소대장이다. 결국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연대장이 다음 소대를  불렀다. 잠시 웅성거림이 있고  친구이기도 한 윈꾸취엔(溫谷泉) 중위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부하 소대원들이 그를  따라 뛰었다. 윈 중위는 채 20미터도  못뛰고 가슴을 쥐며 쓰러졌다. 총소리를 따라가보니 강  진흙탕 밑에서 솟아난 티벳인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총이 불을 뿜고, 놀라 멈춰선 병사 둘이 더 죽고 나자 총성은  멎었다. 티벳인 저격병은 아군 저격병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또 200미터를 벌었다.

  연대 전체가  또다시 조용히  전진했다. 중화기중대가 진공로  곳곳에 박격포와 유탄을 마구  발사했다. 뿌옇게 포연이 피어났다. 그러나 적이 어디 숨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위절벽 위에서는  언제나처럼 치열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절벽 위의 전투는, 절벽 아래 강 옆에 난 길을 따라 전진하는 중국군 부대의 행군에 맞춰 이어지고 있었다.

  연대장이 신호를 하자 다음에는  난청치 중위가 속한 2중대가 전면에 나섰다. 1소대장 위(玉)  중위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엘리트 공산당원답게 당당히  부하들을 독려하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부하들은 위 중위와 가능한 거리를 두려는 듯 쭈볏거렸다.

  갑자기 자동화기의 연사음이 울리고, 1소대원들이 쓰러졌다. 강 옆 작은 길에 땅을 파고 숨어있던 티벳인 둘이 기관총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1소대  뒤에서 따라오던 트럭에서  무반동포가 발사되자 곧  적은 제압되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바위절벽 쪽에서 날아온 RPG가  트럭을 날려버렸다. 난청치 중위가 시체 무더기 속에서 위 중위를 찾았다. 위생병이 위 중위의 다리를 압박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선두에 서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이제 2소대 차례였다.  멀리 뒤에서 연대장이 수신호를 하는  것이 보였다. 난 중위의 눈에는 연대장이 사형집행인처럼 보였다. 2소대가 있던 곳에 한차례 소란이 나섰다. 중대장이  뭐라고 소리치자 병사들이 2소대장 쉬엔(宣)  소위를 꿇어 앉혔다. 중대장이 권총을 꺼낸 것과 동시에 그를 향해 발사했다. 쉬엔 소위가 앞으로 거꾸러졌다.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중대장이 권총을 흔들며 뭐라고  하자 선임분대장인 군사장(軍士長)이 나섰다. 군사장의 덜덜 떨고 있었다. 조만간 자신의 모습이 될 것이라며 난 중위가 한숨을  쉬었다. 포복은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단장의 재촉이 심해서 가능하면  빨리 라싸에 진입해야 했다.  중대장이 재촉하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그  군사장이 소대를 인솔하고 나섰다.

  ‘체 게바라의 전술이다!’

  난청치 중위가 치를 떨었다. 병력이 열세인  게릴라들이 쓰는 전법 중에서, 선두에 서면  무조건 죽는다는 사실을 적에게  각인시키는 심리전술이었다. 쿠바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쓴 전술인데, 공격측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라싸를  점령할 때까지 선두에 선 아군은 죽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운이 좋으면  위 중위처럼 중상을 입고 살 수도 있었지만, 정말로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리고, 라싸까지의 길  십 몇 km가 이렇게  멀 줄은 생각도 못했다. 좁디 좁은 강변길 매 200미터 정도마다 중국군의 피로 씻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4km 정도 전진했다.  약 20명의 소총소대  소대장이 전사했다는 계산이었다.  처음에는 분대병력을 내보내봤지만  200미터를 전진하는 사이에 모두  저격을 당했다. 적 매복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하려면 공격측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데, 길의  넓이를 감안하면 숫자는 최대한 소대병력을 넘지 못하는 제약까지 있었다.  부대장이야 어쩔 수 없이 이런 작전을  선택하겠지만, 선봉에 나서야 하는  소대장은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았다. 함성이 울리고 2소대가 뛰어나갔다. 역시  그 분대장은 몇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바위 뒤에  숨어있던 티벳인이 선두에 선  아군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소대가  일제사격을 하자 그 티벳인이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서 병사들이 힘을  내어 연사를 하며 접근했다. 티벳인이 숨은 바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총탄이 튀고  있었다. 병사들이 50미터  정도까지 접근할 때 갑자기  섬광이 번쩍였다.

  "크레모어!"

  놀란 난청치 중위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또 당한 것이다. 화기중대는 최전방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사전포격을 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크레모어 단  두발에 1개 소대병력이 날아가 버렸다. 이제 난 중위 자신의 차례였다. 연대장의 신호를 기다리는데 아직 신호가 없었다. 연대장은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길이 좁아 사단장에게 선봉연대를  교체해달라고 요구하기도 무리였다.

  난 중위  직속 대대장이 그를  연대장이 있는 곳으로 불렀다.  어느새 바위절벽 위쪽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1대대장과 소대장을 모두 잃은 2대 대장이 수하 중대장들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연대장이  사단 사령에게 무전기에 대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연대에 소대장은 딱 두  명 남았습니다. 제발 교대시켜 주십시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부하들이  공격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옆사람에게 들릴까? 여자 옆에서 무의식 중에 침을 삼켰는데, 그 소리를 여자가 들으면 얼마나 창피할까? 궁금한 것은…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쿠쿠… 근데 들리긴 들리나?

  "꿀꺽~"

  차의 시동을 키고 워밍업을 하는  동안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내차로 가끔  집에 바래다 주는… 그냥 아는 사이다.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는데, 시끄러운 차 엔진소리 때문에 설마  이 소리가 들릴까 하던  나는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그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내게 들렸다… –;

                               ‘Sir Huntington 一代記’ 中에서

  1999. 11. 26  17:05  함경북도 회령 개선산 790고지

  고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서쪽  평지 한 곳에 일시에 포연이 치솟더니 그곳은 삽시간에  허허벌판이 되었다. 십자포화는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며 지상을 불꽃으로  휘감았다. 평지에 펼쳐진 중국군  방어선은 포격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치밀하게 밀집된 포화는 살아있는 생명체 하나 남기지  않았다. 하 인철 중위는  끔찍하다며 진저리를 쳤다. 회령 시가로 빠져 나가는 계곡 쪽에서 헬기가 보이더니 지상으로는 보병전투차들이 물밀 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군이었다.

  "아군이 옵니다."

  왼쪽 팔을  붕대로 고정시킨 하 중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래 참호쪽 병사들에게 내뱉듯이 외쳤다. 옆에 있던  강 병장이 신이나서 떠들었다.

  "헬리콥터에, 탱크, 장갑차가 빠글빠글하대이~ 우린 살았다~~"

  몇 남지 않은 병사들은 참호 속에 아무렇게나 몸을 눕히고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망원경을 남쪽으로 돌려  보니 중국군들이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다. 790고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곳은 방어하기 곤란해서인지  서둘러 제  2방어선으로 퇴각하는  모양이었다. 무전기가 울리고 하 중위가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보안, 3중대… 사령관님이십니까? 통일! 중위 하 인철."

  잔뜩 지친 하 중위가 피곤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모습을 강 병장이 무심하게 지켜 보았다. 하 중위는 알 수 없는 짜증이 일어났다.

  "네? 여긴 뭐하러 오십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전기에서는 뭐라고 시끄러운 소리가 잔뜩 들렸으나 강 병장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수화기를 내리며 하 중위가 투덜거렸다.

  "씨발놈이 오든지 말든지."

  "그래, 2개 중대에 추가로 1개  대대를 처박았는데 겨우 이거 남았나? 중위인 자네가 선임이고?"

  "….."

  하 인철 중위가 부동자세로 묵묵히 서있는 가운데 김 재호 대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여차하면 싸대기 날리고 워커발로 걷어 찰 기세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여기 저기 주저앉아 교대병력이 참호를 보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상병들을 실은 헬기가  서둘러 이륙하느라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겨우 31명이 뭐야?  그나마 절반 이상이 중상자고.  관측팀도 살아난 놈이 없고. 이게 도대체 뭔가?"

  "그 상황에서도 자그마치 31명 씩! 이나 남았습니다. 사령관님!"

  참다못한 하  중위가 얼굴을 붉히면서  항의했다. 김 대장이 이  말을 듣고 격노했다.  오른손이 자꾸  권총집을 건드렸지만 간신히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를 수행하는 헌병들이 잡은 K-1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 새끼가 부하들 다 죽인 주제에 무슨 말이 많아?"

  "선임은 대대장님이었습니다. 전사하신 분들께  욕할 수 있는 겁니까?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중에는 실탄까지  떨어져 중국제 아카보로 싸웠습니다. 우릴 사지에 몰아넣고 해준  게 뭐가 있다고 큰소리십니까?"

  새로 고지에 배치받은 병사들은 중위와 육군 대장의 말다툼을 신기한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김 재호 대장이 창피했는지 말을 멈추고  하 중위를 노려보았다. 김 대장이 손가락으로 하 중위의 명찰을 쿡쿡 찔렀다.

  "자네, 내 헬기에 탑승해. 그리고  이쪽 병력은 모두 교대한다. 후방에서 재편성하도록. 상사!자네가 인솔해!"

  상사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돌아가려는 김 대장 일행을  보며 병사들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대부분 예비군들이고 약간은 현역병인 병사들이 주섬주섬 일어나기만 했다.

  "알겠습니다. 전체 차렷! 사령관님께 경례!"

  "통일! 통일… "

  회령 제봉 542고지로 돌아가는 헬기에서 김 대장과  윤 대위, 하 중위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하 중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을 예감하고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김 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네들 수고 많았어. 나도 그 정도인줄 몰랐다고."

  "죄송합니다만, 제가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나도 알어.  자네들은 전쟁 끝날 때까지 휴가나  가게. 남들 몇 달간 싸운 이상으로 고생했으니…"

  "네…"

  "그 예비군들은 소집해제 해도 좋겠군. 원하는 대로 해주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김 대장이 대답을 안하고 창밖을 보며 한참을 끌었다.

  "뭔가? 왜 예비군이 투입되었나 하는 거 말인가?"

  "예. 물론 경무장이라  고지방어전에 적합한 편성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현역이 아닙니다. 전투력도 떨어지고… 그들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고…"

  하 중위는 어떤 월남전 영화에서 본 마지막 장면 중의 하나가 떠올랐다. 부대장이 대부분  귀국을 일이주 앞둔 소대병력을  월맹군에게 미끼로 내던졌다.  소대원들은 몰려오는  월맹군에 맞서 밤새도록  처절하게 싸웠고, 아군 포병대가  포위된 소대 주둔지에 맹포격을 가했다. 전투가 끝난 아침, 헬기를 타고 온 부대장이  시체로 뒤덮인 참호를 둘러보면서 하는 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뒀다… 전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도 몰랐다네. 그런  중요한 전투에 예비군병력이 투입된줄 몰랐어. 알았다면 진작 바꿨겠지."

  윤 민혁 대위가 김 대장이 말하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눈발이 점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하 인철 중위는  임 병석 병장이 생각났다. 한 시간만  버텼으면 살아서 가족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안타까움이 일었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방어선 두  군데가 뚫리고 중국군 1개 소대병력과 백병전이 붙었다. 중국군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곳곳에 수류탄이 작렬하고 총탄이 사방으로  튀었다. 모두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신없이 싸웠다. 그 누구도 전우를 위해서, 또는 조국을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남의 목숨을 걱정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왼쪽 어깨  관통상을 입고 참호에 누워있던 하  중위는 흐릿한 시선으로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총성이 점점 잦아드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중국군들이 뛰어 넘어갔다. 놀란 하 중위가 죽은  척하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보니, 중국군  5~6명이 반쯤 찢긴 태극기가 휘날리는  지휘벙커를 향해 건너편 참호선을 내달리는 모습이 잡혔다.

  지휘부는 이미 중국군의 포격에  전멸한 상태라 하 중위는 처음에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지휘벙커가 임시 야전병원으로 바뀐 것을 깨닫고  놀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그들을  추적했다. 벙커 안에서  그가 직접 본  부상병만도 20명이 넘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부상자가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대부분이 중상자들이라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 중위가  서둘러 뛰며 K-5 9밀리 권총의 탄창을 교환했다.

  벙커쪽에서 K-2  자동소총의 연사음이 길게  울리고 그 직후  폭음이 이어졌다. 서둘러 뛰어간 하 중위는 벙커  안으로 막 돌입하려던 중국군 셋의 등짝을 향해  권총으로 한 발씩 쏘았다. 중국군들이 첫  발을 맞고 쓰러지자, 그 다음에는 완전히 숨을 멈출 때까지 돌아가며 쏘았다. 약간은 어려 보이는 중국군  병사의 피로 범벅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  중위가 나머지 탄알을 쏟아  부었다. 권총이 찰칵거리자 정신을 차린 그는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돌과 흙을 파내고 마대자루로 대충 쌓은 그곳은 화약냄새와 피내음이 코를 찔렀다.  쓰러진 임 종석 병장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어두워서 그런가 생각했지만 임 병장은 하체가  분명 없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벙커 안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있던 그가 수류탄을 몸으로 덮친 것이 분명했다. 그 옆에는 붕대로  머리를 감은 부상병 한 명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누운채 이를 딱딱 부딪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지은 임 병장의 처절한 미소를,  처량한 눈빛을 하 중위는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전우들을 지킨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을 안고 죽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하 중위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임 병장이 부러웠다.

  ‘전쟁이 끝나면…’

  그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으로 보아 전쟁은 곧 끝날  모양이었다. 이제 전후복구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토목공학과를 졸업했기에 취직걱정은 없었다. 아마도 상당히 바빠질 것이다.

  남자고등학교, 남자들만  득실대는 공과대학, 군대…  앞으로 건설현장에서 맞부딪힐 인부들…  지겨웠다. 창밖으로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1999. 11. 26  17:35  함경북도 회령 도장동

  "으이그~ 젠장! 기껏 도하하더니 다시 돌아가?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운전병 장 병장이 심하게 투덜거렸다. 압록강을  건너고 밤을 새서 만주를 횡단하더니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려나 하고 투입순서를 기다리는데 사단 전체가 다시 두만강을 건넌다는 소리에 질려버렸다.  장 병장은 명령에 따라 전차를 계속  북으로 향했다. 눈덮인 2차선  도로가 명절 고속도로처럼 붐비고  속도는 20km에 미치지 못했다.

  장 병장은 지쳤다. 압록강을  처음 건넌 이후 한 번도 전투가 없었다.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상황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이런  시간에 다른 승무원들이야 그 시간에 잠을  잘 수 있지만 운전병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장 병장이 운전병용  큐폴라를 닫고 들어와 뒤쪽을  보니 전차중대장 한 보겸 대위는 통신 중이고 포수 변 하사는 멍한 표정으로 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이~ 변 하사, 왜그래?"

  동갑이라 말을 놓기로 한  변 승재 하사는 포수석에서 마약 중독자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는 거의 10시간째 말이 없었다. 틈만 나면 대대 통신차량으로 달려가곤 하던 변  하사가 이젠 포기했는지 전차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장 동무! 하사 동지에게 반말하면 쓰갔나?"

  통신을 마친 한 대위가 힐난했다.

  "에이~ 중대장님. 동갑인데 어때요."

  "기래도 상급자 아니갔어?  우리 인민군대에서는 이런 경우 영낙없이 자아비판감이디. 기건 기렇고… 우리는 고 휘 상장이 지휘하는 장갑집단군을 상대해야 되는 모양이야."

  한 대위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 휘 상장? 인민군 아닙니까?"

  "앙이야. 조선족 동포디. 중국 이름이레 가오후이디만 뙤놈들도 고 휘라고 부르디.  중국내전에서 아주 유명해져서리,  이젠 모르는 군인이레 없디. 북경군이 형성한  강력한 종심방어진에 전차 12개  사단을 집중투입, 중앙돌파를 성공시켜설랑 결국 북경을 점령한 인물이야."

  "윽… 그럼 지금 만주에 그의 부대가  있다는 겁니까? 우린 병력만 많지 전차는  몇 개  사단이 안되잖아요.  그럼 공중지원에  의존해야겠네요?"

  "긔기 문제야. 고 상장에게는  직속 항공사단이레 두 개나 있거든. 방공사단도 있어설라무네 우리 군도 항공지원을 하기 힘들기야."

  "그런 강력한 적에게 우리만 투입하다니.  그럼 패전은 기정사실 아닙니까?"

  장 병장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인 다음, 기어를 변속시켰다. 또 밀리는 모양이었다. 한 대위의 한숨이 뒤로 들려왔다.

  "상부에서 무신 생각이레 있갔디."

  1999. 11. 26  17:45  서울 역촌동 서부병원

  진이 병원 복도를 지나다가 눈을 붕대로 가린 환자가 허공중에 손을 젓는 것을 보았다. 복도에 있는 환자는 살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사인지 또 하나의 생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모양이라고 생각한 박 진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이 호룡은주변에 사람이 서있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아니고 아마도 간호사일 것이다. 어떻게든 매달려 보아야 했다. 전신에 고통이 엄습해 오고 지금은 숨을 쉬기도 벅찼다.

  "물… 제발 물 좀 줘요. 살려줘~"    

갈증에 지치고, 그보다는 혼자있다는 공포에 질린 환자였다. 박 진이 머리카락과 얼굴 피부가 홀랑 타버린 환자의 손을 잡았다.

왜 물을 달라고 말했을까? 이 상황에서도 먼저 치료해 달라는 말을 하기 쑥스러웠다. 갑자기 따스한 손길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물을 마시면 안되요. 참으세요. 제가 옆에 있을 게요.

  "간호사 아가씬가 보군요. 고마워요. 제 상태가 어떻습니까?"

  박 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환자를 위해서 자신이 간호사 행세를 하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라고 하면 환자가 실망하고, 이것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내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탈수증에 걸린 자신이 무턱대고 물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옆에 있어주겠다니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얼굴과 상반신에 2도 화상이에요. 소독은 했으니 괜찮을거고요.  그런데…"

  박 진이 환자상세표를  보았다. 구조한 위치와 시간, 상황,  그리고 방사능 피폭량과 의사의 소견이 적혀 있었다.  간호사가 이 소견서를 본다면 몰핀 한방이라도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이 병원에서 일하며 배운 경험에 따르면  이 환자가 살 가능성은 30%도 채 되지 않았다.

  "방사능에 노출되셨어요.  지금은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현대 의학기술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정도의 양이예요. 화상도 위험할  정도는 아니구요. 절대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세요."

  "아…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래도 의사는 오지도 않던데요."

  "아저씨보다 더  위험한 분들이 많아요.  의사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저씨는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거짓말을 하는 박 진은 슬퍼졌다. 이렇게라도  해서 이 환자가 버텨주길 바랬다. 환자의 일그러진 얼굴에 언뜻 미소가 번졌다.

  "비켜 주세요! 갑시다~"

  고개를 든 박 진이 물끄러미 시신이  실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시트가 덮이지 않아 비교적 온전한 시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비만증이 있어 보이는 중년남자였다.  외상은 없는데 왜 죽었을까 궁금했다. 어쨌든 또 한 사람의 생명이 꺼지고 육신은 재만 남을 것이다. 아니,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병원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로 시체를 매장하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 희생자의 유족이 살아 있더라도 가족의 시신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방금 지나간건 뭐죠? 또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나요?"

  "…, 예. 아저씨보다 훨씬 중상이었어요…"

  "네… 중환자가 많은 모양이죠.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예… 아저씨. 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환자 돌보러 가야겠어요. 힘 내세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제가 또 들를게요."

  "그래요. 너무  고마워요. 참! 제 이름은  이 호룡이요. 아가씨 이름은 뭐죠?"

  "박 진이예요. 이따가 항생제 주사 놓아드릴께요."

  박 진이 돌아서며  울먹였다. 저 환자는 기껏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귀한 생명들이 너무 쉽게 죽어 안타까웠다.

  1999. 11. 26  18:04  중국 헤이룽지앙성 무딴지앙시 남쪽 37km

  중국 인민해방군 제 54  장갑사는 인민군 4군단을 사정없이 몰아가며 전진하고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인민군들은 후퇴하면서 단도저격조를 운용했지만 상대가 워낙 대규모여서 중국군의 전진을 지체시킬 수도  없었다. 중국군의 전진속도가 점점  빨라져 인민군 후미부대인 교도대를  중국 전차들이 따라잡고 있었다.  선두의 중국 전차들이 주포를 발사하며 인민군 교도대를 막 짓밟기 직전이었다.

  수평선 가까이에 점점이 흩어져 눈이 잔뜩  쌓인 것들이 있었다. 이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있는 것처럼  꼼짝않고 있었다. 하얗게 눈이  쌓여 멀리서 보면 나락더미처럼  보였다. 중국 전차들이 주포를  쏘며 무장이 빈약한 인민군  교도대를 덮치기 시작하자  이 나락더미들이 400여대의 사륜구동차가 되어 움직였다.

  중국 전차병들의 눈에는 수평선에 눈의 해일이  인 듯 보였다. 전차대 통신망이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한순간에 100여기의 sagger  대전차미사일, 100여기의 RPG-7이 하늘을  가르고, 100여기의 벌컨이 불을 뿜었다. 하늘에는 3초에  100발 비율로 HEAT 박격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시뻘건 포탄과 꼬리에 붙은 연기뿐이었다.

  20밀리 대공벌컨이 장갑차를 꿰뚫었다. 뚫린  구멍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오더니 장갑차는 곧 폭발했다. 기갑보병들이  장갑차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기관총의 십자포화였다.  하얀 눈 위에 피와 불길이 퍼졌다.

  1999. 11. 26  18:07  중국 헤이룽지앙성 무딴지앙시 남쪽 21km

  지휘차에 있던 통신군관이  비상전문을 받고 놀라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전방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추정규모 1개 여단. 좌우에서  54장갑사를 공격중입니다."

  고 휘 상장이  신기하다는 듯 중앙 전황판을 바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인민군 4군단에는 그만한 전력이  없었다. 후방에서 동원했다고 가정하더라도 1개 여단이라는 병력을  그 짧은 시간에 동원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또한, 방공연대의  보고에 의하면 만주의 하늘은 깨끗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정부대도 아닐 것이다.

  "기계화부대인가? 북조선 인민군 소속이  아닐지도… 하지만 겨우 1개 여단인데 뭘 꾸물거리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입니다. 자동차부댑랍니다. 사륜구동차에 대전차무기가…"

  헤드셋으로 계속 54장갑사의 보고를 들으며 통신군관이 상황을 고 상장에게 전했다.  고 상장이 피식 웃었다.  한국군 지프에 탑재한 토우와 106밀리 무반동총이 생각났다. 포탄 적재량이  적어 각 지프마다 포탄차가 따라다닌다. 집중운용하면 전차부대에 대해  일시적인 타격은 주겠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적은 결코 주도권을잡지 못한다고 자신했다.

  "방호력이 떨어질테니 그냥 밀고 나가."

  "화력이 너무 강합니다. 화력이 밀집되어  전차부대도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하고 있습니다!"

  놀란 통신군관이 헤드셋을  사령관에게 넘기는 동안 통신병이 통신군관에게 메모를 전했다. 통신군관이 깜짝 놀랐다.

  "54장갑사가 전멸직전입니다.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거 왜 이래? 사단 사령을 불러!"

  고 상장이  헤드셋을 통신군관에게  넘기며 다급해졌다. 뭔가  큰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 통신이 끊겼습니다."

  고 상장의 가슴에 분노가 일었다. 그깟  자동차부대에 당한 54사 사령에 대한 증오였다.

  "그 지역에 포격 집중, 정찰기 날려!"

  통신군관이 포병사령을 불러  명령을 전했다. 곧이어 전군의  포가 지도상의 한 지점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10여분 후, 정찰기의  보고에 따르면 54장갑사는 전멸하고, 그 근방에 포격에 당한듯한 50여대의  사륜구동차 잔해가 보인다고 전했다.  고 휘 상장이 당장 적을 찾아내라고 다구쳤다. 잠시 후, 통신군관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고 상장에게 보고했다. 고  상장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대공미사일 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정찰기에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추신) 병원장면은 이중화법입니다… 주체가 둘이니 따로, 또같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탈자가 아녀요…^^;

1999. 11. 26  18:15  중국 지린성

  이미 결과가 뻔한  전쟁, 이 따위 전쟁을 왜 계속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젊은  병사들만 무수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원예비군 김 효찬  병장은 자신이 왜 머나먼  땅에까지 와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지 답답했다.  추악하게 늙은 양국의 정치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 전쟁을 계속하는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조국 수호? 겨레의 영광? 웃기고 자빠졌네.’

  언덕을 넘으며 사륜구동차  구식 록스타 R2가 크게 튀었다. 잿빛구름 사이로 만주의 푸른 하늘이 시리게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면서 중국군의 진청색 털모자 20여개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총구를 돌리며 방아쇠를 누르자 기관총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붉은 피가 허공중에 흩뿌려지는 것이 보이는 순간 차가  땅에 닿은 충격이 전해졌다. 조수석에서 K-3을 쏘는 동료는 차가 튀느라 조준이  형편없이 빗나갔는지 건너편 이층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빌어먹을 중국인 마을에서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이 중국군이었다. 바로  몇시간 전에 지나올 때는  민간인밖에 없었는데… 이미 그가 배속된 중대는 적에게 포위된 모양이었다. 통일한국군 5군 중에서도  예비대로 중간에 배치된  61사단이 이 정도  상황이라면… 김 병장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너른 만주벌판에서 적과 아군이 섞여버렸는지도 몰랐다.

  덮개를 걷어버린  차에 북풍이 세차게 몰아쳤지만  김 병장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제 부근에서 움직이는 적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소대 차량에 거치된 K-6에서 연기가 하늘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와서 지원해준 모양이었다.

  [5호차! 5호차 나오라!]

  소대장의 호출이 오자 김 병장이 헤드셋 마이크를 열고 대답했다.

  "5호차다. 방금 전투를 마쳤다."

  [잘했다. 그런데 우린 아마도 포위된 것같다.]

  "…, 알고 있다. 보급이 필요하다. 여기 있는 7호차와 교대하겠다."

  [교대를 허가한다. 즉시 8호차 위치로 오도록. 참고로 1호차는 당했다. 그쪽도 조심하라.]

  "알겠다. 나는 살고 싶다…"

  1999. 11. 26  18:30  경북 경산시 영남대학교

  또다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김 학수 중사는  이미 어둠이 깔린 축구장 입구쪽에서  번쩍이는 섬광을  보며 무전교신을 계속했다.  시뻘겋게 유탄이 날아오고, 바로 뒤의 바위에서 폭풍과 함께 파편이 튀었다. 헤드셋 저쪽에서도 교전중인지 총소리가 계속 울렸다. 김 중사가 악을 썼다.

  "중대장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지원이 여의치 못하다면 저흰 후퇴하겠습니다."

  [젠장... 이쪽도 힘들어. 알겠다. 김 중사가 소방서를 확보하도록!  우리도 곧 그쪽으로 가겠다.]

  "예. 소방서쪽으로 퇴각하겠습니다. 충성!"

  김 중사가 헤드셋을 끄고 축구장 뒷편  담쪽을 살폈다. 야트막한 철책에 담쟁이 덩굴같은  말라죽은 식물이 잔뜩 붙어있어  있었다. 넘어가다가 몇은 적에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바로 옆의 박 하사에게 철책 제거를 명했다.

  박 하사가 수류탄  두 개를 까던지자 철책이  10여 미터 정도 무너졌다. 김 중사가 퇴각신호를  보내자 2명씩 철책 뒤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뛰어온 K-3 사수 장 병장이 기관총을 거치하고 발사를 시작했다. 김 중사가 적의 동태를 살폈다. 상대편의 총성이 뜸해지고 있었다. 너른 축구장에서 돌격을 감행할 멍청이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자, 가자!"

  선도조 두 명이  앞으로 나서고 10미터 간격으로 두 명씩  뛰었다. 영남대 실내체육관 옥상에 있는  적 기관총이 불을 뿜었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멀리  소방서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적은 보이지 않았다. 17명의 군인이 숲길을 뛰었다.

  소방차들이 모두 대구시내로  출동했는지 소방서 건물 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선도조가 신호를 하자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몰려나갔다. 과연  차고에는 소방차가 한 대도 없었다. 소방관들도 모두 출동했는지 소방서는 2층까지 텅 비어 있었다.

  경산공업단지쪽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불타는 대구의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김 중사가 대원들에게 수비위치를 지정하고 있는데 소방서 앞 도로 서쪽에서 무장병력 몇 십명이 이열종대로 행군하는 것이 보였다.

  "선임하사님! 중대 본대병력인가 봅니다."

  박 하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행렬을 주시했다. 행군대열의 척후조가 멈춰서더니 이쪽을  향해 뭐라고 떠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철모의 흰색 표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대열의 지휘관이 다가왔다.

  "김 중사!"

  "중대장님!"

  김 중사가 중대장에게 뛰어갔다. 격렬한  전투를 치렀는지 중대병력이 절반 줄어있었다. 이들이 소대장들 현재 적의 위치와 병력, 공격계획 등을 논의하는 동 병력이 산개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영남대학교에 적 1개 중대 병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 중사가 보고하자  중대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중대장이 지시를 내리다가 얼핏 소방서 옥상에 뭔가 있는 것을 느꼈다.

  "옥상에도 병력을 배치했나?"

  김 중사가 휘하  병력 배치를 생각하며 옥상쪽을  올려봤다. 소방서건물이 텅 빈  것을 확인한 김 중사는  옥상에 병력배치를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외쳤다.

  "적이다!"

  응사할 시간도 없었다.  중대병력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소방서 앞마당에 수류탄  30여개가 굴렀다.  여기저기 폭발이 일어나며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옥상에서 M-16 특유의 빵빵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도로 건너편에서도  자동소총 연사음이 길게 울렸다. 놀라서 건물 안쪽으로 도망가던 병사 너덧 명이 피를 뿌리며 엎어지는 것이 보였다.

  밤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적은 최소  아군의 3배로 추정되었다. 게다가 기습을 당하여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이다. 이럴 때는  무조건 도망가야 했다. 김 중사가 소방서  안으로 뛰다가 몸에 충격을 받고 넘어졌다. 대퇴부쪽에 통증이 일며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총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움직이는  아군은 별로 없는 것같았다.  갑자기 두려워진 김 중사가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위생병! 으으… 임 상병!"

  "아군복장이라서 적인지 아군인지 원…  아까 이놈들이 분명히 한국말을 했거든요? 아! 저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김 중사가 기를 쓰며  기어가고 있는데 훈련모를 쓴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허름한 복장으로  보아 직장예비군 같았다. 그들이 김 중사를 향해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김 중사는 탄띠에 있던 수류탄을  아까 전투에서 써버린 것을 깨달았다. 이제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1800시부터 흰색띠는 적이라고  했으니까… 최 소방사, 거기 다리  잡아. 일단 살리고 보자고."

  ‘젠장… 저치들은 노란띠다. 언제 바뀐거야?’

  김 중사는 피를 너무 흘려 쇼크상태가 되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그를 들쳐멘 사람들이 응급구조사 어쩌고 외치는 말을 들은 것같았다. 장갑차의 우르렁거리는 소리가 길을 울렸다.

  1999. 11. 26  18:45  함경북도 회령 제봉(542고지)

  "국방군 제 55사단이  집중포격을 받아 피해가 큽니다.  그 지역을 이탈했지만 피해가 19%에 달한다고 합니다."

  참모장 허석우 대장이  또박또박 말을 끊어 보고했다.  평안도 사투리 대신 방송에서나 쓰는  문화어로 말하려니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의 신경을 거스리지 않으려면 말투도 최대한 조심스러워야 했다. 그는 인민과 조국의 운명을 쥔 사나이였다.

  "그리고 61사단 일부  병력이 현재 전투중이라는 보고입니다.  5군 중간에 있던 부대가 공격받은 것입니다. 적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음… 61사단과 조우한 적은 우리가 흘린 인민무장경찰 독립대대일 것이오. 그보다는 55사단이 문젠데…"

  김재호 대장은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보고를 들으며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중국군 제  54 장갑사를 공격한 한국군 제 55사단은  즉시 후퇴하여 남쪽으로  급속전개했다. 그러나  조만간 중국군 정찰기에  걸리고 다시 포격을 받을  것이다. 허 대장은 이 넓디 넓은  만주평원에서 그들이 숨을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아까운 동원사단이 또하나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한국군은  정규사단보다 동원사단이 화력은 뒤지지만 어찌된 셈인지 전투력은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공중지원은 아니 되겠습니까?"

  "안되오! 너무 바빠. 우리가 폭격당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지경이오."

  허 대장이 장갑지휘차의 왼쪽벽에 걸린  화면을 보았다. 조기경보기에서 처리한 정보가  시시각각 들어오고 있었다. 통일공군은  이번에도 중국군의 대규모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갑자기  북서쪽에서 인민해방군 전투기 제 3파가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 대장이 혀를 찼다.

  "그리고 공격기는 조금 이따가 써야 되고…"

  전쟁은 묘한  양상으로 지속됐다.  한국군은 신의주에서 치고  올라간 북부군을 주력인 척하고,  중국군도 가능한한 고휘 상장의  대규모 기갑부대를 숨기기 위해  신의주 주변지역에 대한 양동공격에  바빴다. 지상군 병력이 희박한 그서는 서로 상대를 속이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전투기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나진,선봉 지역에 있는 중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는 중국 공격기들을 한국공군이 악착같이 막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숫자에 밀린 통일한국 공군이  점차 밀리는 양상이었다. 평북  구성에서 일단의 푸른 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대장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짚으니 미그-19의  식별부호가 떴다. 김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구식인 미그-19까지 동원하다니,  이제 공군전력도 바닥난 모양이라며 김 대장이 투덜거렸다.

  "백사봉쪽은?"

  "아직 점령  못했습니다. 좁은 지역에  적이 너무 밀집되어 있습니다. 약 15개 사단으로 평가됩니다. 원래 1군의 주공이 그쪽이었습니다만…"

  허석우 대장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제 1군은  인민군 이종식 차수의 직할부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허  대장의 친구이기도 한  1군 사령관은 전쟁이 끝나면 아마도 숙청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요? 이봐, 윤 대위."

  "예?"

  "병력이 많다고 좋은게 아냐. 그치?"

  "네. 병력의 우세가 항상 전황에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단위부대들에 운신의 폭이 적어지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곳을 피하면 간단하지. 실제  전투에 투입되고 있는 병력의 차이가 중요해. 우리쪽 병력투입 현황은?"

  "역시 계산대로입니다."

  "잘 되고 있다고?"

  놀란 김 대장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윤 대위가 피식 웃었다.

  "아뇨. 전진이 멈추었습니다. 강력한 적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문딩이~ 그라믄 제대로 되고 있는 거 아이가.."

  김 대장이 전술지도를 다시 살펴 보았다. 개선산 동쪽이 선봉, 남서쪽이 백사봉이 있는  풍산이다. 항공정찰에 따르면 선봉지역에는  약 30개 사단이 밀집되어 있다고 했다.

  "개병대 투입. 예정대로 1개 여단만!"

  "연락하겠습니다."

  해병 2사단은  현재 2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허 대장의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

  1999. 11. 26  19:25  경기도 남양주시

  "전선상황이 아슬아슬합니다."

  정지수 대장이 자못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김재호  대장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으니 이제 그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원탁에 나타난 전략지도에는  시시각각 각  부대의 위치가 수정되어  표시되었다. 통일한국군 2군의 남진속도보다 만주에 있는 중국군의 이동속도가 훨씬 빨라 참모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1군에게 전진을 명령하시오."

  이종식 차수가 김병수 대장에게 말하자 김 대장이 1군 사령부를 호출하여 명령을 전했다.  정 대장 탁자의 인터폰에 불이 들어오자  그가 단말기를 조작하여 내용을  확인했다. 그가 잠시 갸웃거리더니  내용을 다른 참모들의 단말기에 전송하며 보고했다.

  "대구와 광주의 무장폭동은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그놈들 미친 놈들 아닙니까. 지금이 어느 땐데…"

  박 정석  상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소수의 적  게릴라부대가 선동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폭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대구에서 3만, 광주에서 5만의  민간인들이 폭동에 가담했다. 특히 광주의 시위가 격렬했는데, 규모에 비해 피해는 적었다. 오히려 대구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공보처에서는 지역감정을  유발할까봐 사상자 발표를 늦추고  있었지만 인터넷과 각 컴퓨터통신망에서는 각종 유언비어가 범람했다. 특히 대구에서는 민간인  시위진압에 총기를 대량 사용했다며, 정부가 광주보다 대구사람을 무시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경북 경산시에서  소속불명의 무장군인 60여명을 사살했습니다. 포로를 한 명 잡았다고 합니다만, 현재 중태입니다."

  정 대장은 이것이 혹시  아군끼리 오인사살한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되는 눈치였다.

  "흠… 생포된 첫 번째 포로겠구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 투입된 우리측  병력은 소방관들이었다고 합니다."

  "기렇소? 하하~ 소방사 동무들 바빴겠구만."

  박정석 상장이  오랜만에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인은 소방사와 119 응급구조사, 그리고 독도수비대원이다, 라고 차영진은 생각했다. 일본의 공격을  받은 독도수비대원들이 전멸하고 나서 이제  후방의 소방사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피폭당한 후,  구조작업에 참가한 수많은 소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다.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  이제 총을 들고 적과 총격전까지 하고 있었다. 차영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1999. 11. 26  19:40  함경북도 나진

  먼저 중국군의 해안방어선에 비상이 걸리고,  이동식 발사대에서 하이잉(海鷹) 대함미사일 몇발이  날았다. 잠시 후, 목표는  북한 쾌속어뢰정으로 파악되어 중국군이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는 대신 해안방어선에 병력을 증강투입했다. 미사일과 크기에서 차이가  별로 안나는 어뢰정들은 하나도 손실을 입지 않고 물러나며 해안선을 향해 예광탄을 쏘아댔다.

  이번에는 남동쪽 바다에서 F-5  전투기 몇 대가 날아왔다. 즉각 대공 미사일이 발사되고, 전투기는  금방 퇴각했다. 청진쪽에서는 통일한국군 제 1군이 대공세를 시작했다. 함경북도 북동부는 하늘과 바다, 지상에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통일한국군 제 1군의 작전개념은 공지전과 작전기동군을 합한 강력한 공격작전이었다. 나진으로  가는 길인 개선산  남쪽 이진동을 향해  3개 제파가 집중적인  파상공격을 시작하고, 후방에는  기계화부대들이 이동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그동안 위치노출을 꺼렸던  포병대가 자주포와 곡사포, 다연장포를 총동원하여  목표물을 강타했다. 저공비행으로 침투한 미그-19 전투기들이  대공포화를 뚫고 중국군  병력집결지를 향해 내려 꽂혔다. 포병과 공군은  사정거리별로 철저히 분담해 목표를  잡고 있었다.

  중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대포병레이더가 통일한국군  포병대의 위치를 찾자 반격이 시작되었다. 8인치 곡사포와  83식 152밀리 자주포가 연이어 불을 뿜고  82식 다연장로켓포가 연속발사되며 저녁하늘을 섬광으로 찢었다.

  나진 상공의 좁은 하늘에 80여대의 미그-21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이 숫자는 그동안 북한이 보유한 전체 미그-21기의  절반에 해당하며, 한중전쟁 기간동안 잃거나 수리중인 기체를 제외한 모든 미그-21이 나진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이 많은 숫자의 전투기가 나진 상공에  동시에 도달하기 위해 미그기들은 상당시간을 후방 상공에서 편대를 짜는데 보내야 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중국군  제 1야전사 휘하의 2개 방공사단과 5개 독립연대에서 일제히  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구식이지만  기동성이 우수한 삼각날개의  미그-21 전투기들이 날렵하게  미사일을 피하며 곳곳에 숨어있는 대공기지를  폭격했다. 북한공군 조종사들의  뛰어난 조종술은 그동안의 연료난으로 북한  조종사들은 훈련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무색케했다. 그래도 시간이 감에 따라 격추당하는  기체 댓수가 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대공미사일의 숫자도 줄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제 H-5 폭격기  50여대가 북쪽하늘로부터 나타났다. 개전이래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폭격기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서방측에 일류신-28로 불리는  이 경폭격기는 중국  미사일부대가 피아식별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발사를 망설이는 동안  중요 목표마다 정확히 1톤짜리 폭탄을 떨궜다. 연료저장고와 병력집결지, 포병과 전차  집결지가 1차 목표였다. 이들이 목표에 대한 폭격을 마친 이후에 대공미사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발사되는  미사일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4기의 H-5가 추락하고 2대가 공중폭발했다.

  1999. 11. 26  18:50  중국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조선군 배치현황이 또 입전되었습니다."

  왕 대교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  리엔충 상장에게 보고하며 창 상장 책상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화면에  한국군의 각 부대별 위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고휘 상장의 부대 앞에는  의외로 한국군 병력이 적었지만 고 상장의 전진이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그래? 음…"

  창 상장은 모니터를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중국군이 가진 정보와 너무 많이  틀려서 처음에는 한국군의 기만술책으로  알았다. 그러나 확인결과 이름없는 자로부터 보내진 정보는 모두 사실이었다.

  "이 자료를 즉시 고 상장에게 넘기도록."

  "알겠습니다. 주석 동지."

  누굴까? 창 상장은 도대체 어떤 세력인가  궁금했다. 한국인? 아마 한국인은 아닐  것이다. 한국군 정보에  정통한 미국인? 아니면  저번처럼 일본군? 무슨 일이든 대가없는 선물은 없다는 것이 창 상장의 소신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대가를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은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미국쪽 종전압력이 대단합니다."

  총참모부장 우이 렌찬 중장은 혹시나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 상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자신은 고 상장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미국의 압력을 막는 것도 자신의 일이다.

  "이제 핵만 쓰지  않으면 되오. 어떤 나라도  중립을 지키기로 했으니까. 유엔총회에서 전쟁  전의 영토상태로 회복하라고 자꾸  결의안을 내는 모양인데, 모두 무시하겠소. 일단 고 상장을 믿읍시다."

  군사위원회 위원들이 공감을 표했다. 창 상장은  이들을 보면 힘이 빠졌다. 대충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눈치들이었다. 자존심도 문제지만 이제 중국이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기도 곤란하다는 것이 창 상장의 생각이었다.

  "1야전사의 차오  중장이 자꾸 공중지원을 요청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

  1999. 11. 26  20:15 경기도 남양주시

  통일참모본부 지하실에 있는 전산정보실 한쪽 구석에서 오 성윤 대위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범용통신 프로그램인 엑스-네티즌(X-Netizen)의 도우미 캐릭터가 약간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리던 도우미가  지루한지 귀엽게 하품을 했다. 아니, 일종의 스크린 세이버 역할이라고 오 대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추적한 자료를 따로 저장할까요?]

  자막이 뜨자 오 대위는  도우미가 아직도 엷은 자주색 스웨터에 가죽 미니스커트의 가을옷  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패션감각이 뛰어난 오 성윤 대위로서는 안타까웠다.

  ‘멋진 겨울옷을 디자인해서 입혀야 할텐데… 밍크코트로 할까?  글쎄… 그런 차림으로 내  캐릭터와 함께 인터넷에 들어가면 동물보호론자들의 비난이 빗발치겠지.’

  오 성윤 대위의 통신용 그래픽  캐릭터는 러시아인 모피사냥꾼이었다. 호랑이 가죽옷에 담비털모자를 쓰고 화승총을 든 그의 캐릭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사용자들이 늑대와 여우 등 동물  캐릭터를 많이 쓰기 때문에 그들을 놀려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캐릭터를  선택한 것은 그가 즐겨 읽는 컴퓨터 통신망 연재소설의 영향이 컸다.

  어차피 갑자기 정전이 되더라도 자료는 저장이  될 것이다. 오 대위가 손잡이형 마우스를 클릭하자 내용이 간략히 요약된 제목으로 파일이 하드디스크와 백업용 DVD(디지틀 비디오 디스크)에  동시 저장되었다. 오 대위가 비디오 드라이브에서 DVD를 꺼내 볼펜에 걸고 빙빙 돌렸다. 왼쪽 아래 창에서는 영화  ‘엑스칼리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아더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벚꽃이 피어나는 길을  말타고 달리는,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이며 멋진 클라이막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 대위는 광섬유가 전국에 깔리면서  VOD(video on demand)가 훨씬 볼만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오 대위가 다시 찬찬히 지금까지 추적한 기록을 살펴 보며 목표의 이동루트를 작성했다. 분명 통일참모본부에 있는  사용자가 인터넷을 통해 몇 개국을 거쳐  미국과 중국에 자료를 보냈다. 오 대위는  어떤 자료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먼저 X-Netizen에  자신의 강력한 해킹툴인 일지매를  불러들여 작업을 시작했다. 화면 오른쪽 창에 일지매가  부팅되자 가느다란 단검 그림이 떴다. 도둑의 단검은 열쇠역할도 겸한  것이므로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랜(LAN)을 쓰는 주제에  적국에 자료를 전송하다니… 오 대위는 상대가 초보이거나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문제의 로그 파일이 뜨자 그와 관련된  파일을 찾았다. 역시 호스트에는 그 파일이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지운 파일도 복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오 성윤이 복구한 파일을 열려  하자 암호를 물어왔다. 일지매가 파악한 그 파일의 암호체계는 혼돈(chaos)이론을 응용한 방식으로, 그가  상당히 짜증내는 종류의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 해독시간이 에러로 처리되어 나왔다.

  그 암호체계를 판매한  회사의 광고에 따르면, 암호파일이  스스로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작성자  본인과 파일을 전송받은 사람 외에는 도저히 파일에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송받은 쪽을 노려봤자 전송을 받은 후 파일이 철저히 뒤죽박죽으로 변형된다.  전에 그 암호체계로 전송실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고양이 그림을  보냈는데도 전송받은 쪽 암호를 풀고 파일을 확인하니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 그림이 나왔다. 아마 그래픽으로  자료가 자체 변형되는 모양이었다. 운이  좋아 수신자가 열람하기 전에  파일을 가로채기 전에는, 결국 오 대위같은 유능한 해커도 작성자쪽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끙… 근데 존심 상하게 겨우 성공률이 20% 미만…’

  1999. 11. 26  19:30(베이징 표준시)  중국 신지앙웨이우얼 자치구

  "……, 저녁놀이 곱지 않소?"

  "네…"

  서쪽 평원이 붉게 물들며 해가 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정 호근 대원과 땔감을 나르던 이 은경  대원이 넋을 잃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지크인 의사가 유르트에서 나오며 외쳤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신은 최고의 예술가이시지. "

  정 대원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타지크인을 노려 보았다. 이  대원이 정 대원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자네 다리는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다네.  어쩔 수 없었지. 인샬라(신의 뜻대로)."

  "전사는 죽을지언정 스스로의 다리로 땅을  디뎌야 합니다. 이런 상태로 내가 어찌 인민을 지키는 전사라고 할 수 있겠소?"

  정 대원은 자신의  다리를 볼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무릎  바로 위에서부터 뭉텅 잘려진 그의 다리는 지금 차가운 모랫속에 파묻혀 있었다.

  "인샬라…"

  "빌어먹을 인샬라!"

  정 대원이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자 타지크인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유르트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반부 괴뢰도당은… 아니,  실수요. 미안하오. 남한 정부는  신체장애자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이런 상태로  남반부 주도하에 통일이 되면 나는 하층민을 면치 못하겠소."

  정 대원은 경제적  풍요함은 자본주의가 낫더라도 능력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래도 사회주의가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목발에 짚고 힘들게 혼자 길을 걷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아녀요. 국가유공자는 보훈처에서 연금도 주고 직장도 알선해 줘요."

  "후후… 남반부에서는  상이군인에게 최저임금도 안되는  푼돈을 주는 걸 내레 아오. 직장도 천대받는 경비직이나 주고설라무네… 하옇든 국가를 위해 싸우다 다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 사회주의에 비해 무척 처지는 거이 확실하오."

  "그건 사실일거여요."

  이 대원이 정  대원의 분노를 느꼈는지 동감을 표했다. 정  대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레 장가나 갈 수 있을지… 차라리 통일이 아니 되었으면 좋겠소."

  "정호근 동지…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실 거여요."

  이은경 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  대원이 이 대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앙칼진 눈매지만 뜻밖에 예쁜  구석이 있었다.

  "…, 동무는 말투가 많이 바뀌었소?"

  "…, 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이 대원에게서 정 대원은 뭔가 아주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정 대원이 괜히 74식 소총에서  탄창을 꺼내 실탄 수를 세어 보았다. 서서히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일단 키르기스나 카자흐로 탈출해야겠소."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을 얻기 어렵다. 비극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Sir Huntington 一代記’ 中에서

  1999. 11. 26  20:45  함경북도 은덕(아오지) 남동쪽 6km

  "전원 배치완료했습니다!"

  해병 제 2사단 부사단장이며  임시 여단장을 맡고 있는 최 준호 준장이 보고를 받으며 시계를 보았다. 공격명령을 받고 나서 2시간, 모든 것이 예정대로였다. 부대는  온성과 경원쪽에서 방어선을 펼친  강력한 중국군을 회피하여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한국정부와  협의가 되었는지 창문이 가려진 특별수송열차를 배정해 주었다.  무개열차에 실린 전차와 곡사포는  위장포로 가리고 간간이 민간용 중장비를 끼워 건설현장으로 향하는 행렬로 꾸몄다.

  두만강은 차가왔다. 살얼음이 언 강 가운데는  푸른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찰대의 안전신호에 따라 짧은 시간에  도강을 마친 부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적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조용했다. 장갑지휘차 바깥은 캄캄했지만, 바로  앞 선봉과 멀리 관곡령 너머 나진항이  불길에 쌓여 있고 아직도 아군에 의한 포격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해병대가 한러국경을 넘자  이 지역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는 주민들이 그들을 반겼다.  그들 말로는 스스로  노농적위대라고 하지만, 무장이나 조직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대규모 중국군의 위세에 눌려  이들은 실제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았다. 이들에게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 지역에 주둔하던 중국군 2개  사단은 이미 해질녘에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인 이곳에  한국군이 올리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았다.  하긴, 온성과 경원쪽의 두만강 유역은 전쟁터라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산너머  남쪽이 바로 웅기, 현재 북한식 지명으로 선봉이다. 정찰부대에 의해  적 주요목표에 대한 확인자료가  계속 포병연대에 송신되고 있었다.  목표에 대한 위성관측자료는 확실했지만  그 사이에 약간의  위치변동이 있는 목표도  있었다. 최 준장이 시계를  보며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포격 개시!"

  잠시 후 포탄이 나진  시가지 남쪽에 있는 나진역에 집중적으로 낙하했다. 통일 1군 포병대가 사격하기에 그곳은 사각이었다. 병력과 물자의 집결지인 이곳의 중국군은 갑작스런 포격에 놀라 모두들 대피하느라 바빴다. 능선에 포진하고 있던 해병 2사단  예하 2개 전차대대에서도 선봉시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관곡동 너른  들에 숨겨진 유류저장고가 폭발하며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고, 선봉의  외항격인 비파항에서도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여기에 남서쪽 청진방면에서  대기중이던 통일한국군 제 1군의 포병대가 가세했다.  한반도 북동쪽 끝의 두 항구는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1999. 11. 26  21:05  함경북도 회령 제봉(542고지)

  윤민혁 대위의 목걸이 삐삐가 진동했다. 윤  대위가 확인해 보니 호출 번호는 게임에 접속할 것을 명령하는 다물회의  암호였다. 김 대장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슬며시  그래픽통신게임, ‘대고려’에 접속했다.  게임 내 편지가 와서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발신인이 대막리지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그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린 자의 지위는 대대로(大對盧)였는데, 고구려의 국가비상시 최고권한직인 대막리지(大莫離支)로 바꾼 것으로 보아 다물회가 뭔가 군사적인 행동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편지를 보는 윤 대위의 눈이 치켜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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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온 시간 : 1999. 11. 26  21:01

받는이 : 치우천왕

보낸이 : 대막리지

제목 :

내용 :

  명림답부의 아이디를 삭제하고 그의 권한을  접수하라. 명림답부는 서정(西征)에 방해가  된다. 태대형(太大兄)  을지문덕이 새로이  북부여의 국상(國相)으로 임명될 때까지  울절(鬱折) 고선지가 권한대행을 맡도록 한다. 만약 치우천왕이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경우, 오버로드가 나설 것이다. 서부여의 국상 을파소(乙巴素)의 아이디가 삭제된 것을 명심하라.

                다물 단군의 땅

                                        대막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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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호 대장을 죽이라니, 역시 이것밖에 방법이 없단 말인가?’

  게임접속을 끝내는 윤  대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울과 평양에서는 또 무엇이 준비중인가 불안했다. 김  대장의 권한을 접수하라는 말은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기 전에 김 대장 몰래 5군에 작전명령을 내리라는 뜻이라 판단되었다. 편지내용에 따르면  새로이 2군 사령관이 임명될 때까지  암호명 고선지가 모든  결정권을 쥐게 될 것이다.  고선지는 사실 윤 대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신이나  최영섭 중위처럼 중요한 때에  대비해 다물회에서 안배한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윤 대위가  나서지 않아도 2군 사령관을 대리할만한 고위장교일 것이다.

  윤 대위가  힐끗 김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5군 사령관의 죽음에 역시 오버로드가 개입을…’

  오버로드(overlord)는 수퍼유저(superuser), 즉, 게임이나 통신망의 운영자보다도 높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다물회원들 사이에서는  이 암살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쟁 전에 국가안전기획부와  마찰을 빚던 대검찰청  중수부장(중앙수사부장)이 당한 의문의  사고사에 그가  개입됐을거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윤 대위는 다물회원이  아닌게 분명한 5군 사령관이 헬기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이제 자신의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오버로드는 잔혹하다. 그리고 어떤 사소한 증거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냉철하기도 하다.

  윤 대위는 자신을 이만큼  키운 다물회가 이제는 자신을 써먹을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 대장의 죽음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통일참모본부가  북경공략을 결정할리  만무하고, 직업군인정신이 투철한 김 대장이  단독으로 북경공격을 명령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조직에 자신이 쓸모있음을  증명할 때였다. 이미 그  실행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윤 대위가  최영섭 중위를 눈짓으로 불러 남들 몰래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갑자기 최 중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1999. 11. 26  21:25  함경북도 풍산

  통일한국군 제 1군은 개선산쪽에서 남진하는 2군과 함께 백사봉을 중심으로 세곳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치열한  사전포격과 공중폭격으로 중국군의 공세를  무디게 하고 병력지원을  차단하는 사이, 2군이  백사봉 북쪽의 장라동을 점령하고 1군은 백사봉  서쪽의 원평, 남동쪽의 신현을 점령했다.

  제 1군 부사령관인 인민군 배중혁 대장은 백사봉과 가장 가까운 신현을 점령하기 위한 작은 전투에서 2개 사단병력을 소모하고는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도 적지 깊숙히 파고든  인민군 19사단장 박팔양 중장은 사령부에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주체전술에  따라 청진에 설치된 육해공  합동상황실에서 나와  풍산에서 지상군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그에게 백사봉은 악마의 산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인민군과 중국군, 외국용병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피스의  부대까지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게될지 걱정되었다.

  그는 피해가  얼마가 나든 이종식  차수의 전술을 따라야 했다.  사실 동부전선 최고의 천연요새인 백사봉은 목표가  아니었다. 지형이 험하고 중국군이 밀집한  백사봉은 단지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불과했다. 그동안의 공격은  적의 주력을  이곳에 묶어두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통일한국군 1군에게  있어서 남쪽의 어명산(1031고지)이 전략적  목표였고, 적시에 점령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명산을 점령하면 바로 밑의 어석산(866고지) 점령은 식은 죽 먹기고, 그렇게 되면 나진의 이진동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며 바다가 보이게  된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한국군은 청진쪽으로 펼쳐진  중국군의 방어선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인민해방군 100만 병력을 좁은 나진과  선봉에 모두 가둘 수 있게 된다.  지금도 백사봉 주변의  중국군 14개 사단은 2군에  의해 배후를 차단당한채 묶여 있었다.

  배중혁 중장이 참모장과 함께 망원경으로  어명산의 비탈길을 살폈다. 예광탄과 포탄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불타는 차량들이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멀리 보였다.

  세 방향이  깎아지른듯한 계곡인 신현은 묘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사봉에서  보면 화력을 집중하기  좋은 산골짜기에 불과하지만, 어명산으로 가는 길이 훤하게 트인 곳이다. 동쪽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 서쪽은 완만한 경사가 지고 어명산  가는 길은 표고 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인민군 19사단은  배후인 백사봉에서 쏟아지는 탄막을  그대로 맞으며 방어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어명산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비포장 이차선 도로를 수많은  차량이 속도를 내며 몰려갔다.  행렬 사이사이로 포탄이 계속 퍼부어지고 있었다. 부서진 차량이  행렬을 막으면 즉시 뒤따르는 차량이 그것을  좌우의 골짜기로 밀어냈다. 작전의  성패와 그들의 목숨은 시간에 달려 있었다.

  박팔양 중장이  탄 장갑차가 산악포에 명중되어  주저앉자 박 중장과 참모들이 얼른 내려 주변을 지나는 장갑차에  올라탔다. 벌써 세번째 갈아타기여서 지나가는  차량 잡기는 이골이  난 터였다. 그의 머리  위로 기관총탄이 스쳐 지나가고 작전참모가 장갑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뒷 차량의 전조등에 비친 작전참모는 뻥 뚫린 가슴에서 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따르던 PT-76이 작전참모의 시체를  깔아뭉갰다. 사단장은 참모가 한  방에 절명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사단 참모진은 이제 정보참모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부사단장,  참모장, 정치보위국 군관, 통신군관들까지 모두 죽거나 흩어졌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연막탄 연기 사이로 불타는 어명산을 바라보았다.

  어명산 위에서는 아군 헬기들이 로켓탄을 쏘아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Mi-24 헬기 한  대가 공중폭발하며 불붙은 파편이 산아래로 비산했다. 선두부대가 어명산의  중국군과 접전을 시작했다. 좁은 길을 올라가는 인민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제 선두부대가 300미터만 더 전진하면  어명산 정상이었다. 공격이 워낙 치열했는지 이들의  공격이 먹혀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어명산의 중국군들은 통일된 움직임 없이 산발적인 저항에 그치고 있었다.

  박 중장이 탄 장갑차가 앞서가던 트럭  뒷부분을 들이받았다. 아차 하는 사이, 병력을 가득 실은 그 트럭은  바로 왼쪽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장갑차가 멈추자 박 중장이 큐폴라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날래, 계속 전진하라우!"

  장갑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장갑차 뒷부분에  큰 충격이 오며 차량이  화염에 휩싸였다. 박 중장이 발판을 딛고  일어나려 했지만 발을  헛디뎠다. 불길은 치솟고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무릎 아래로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1999. 11. 26  21:40  함경북도 회령 제봉(542고지)

  "1군에서 전문입니다. 인민군 19사단이  어명산을 점령하고 다시 어석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병력피해는 4분의 3이나 났고, 사단장은 전사했습니다."

  통신장교 최영섭 중위가 김재호 대장에게 보고했다.  잠깐 졸다 깬 김 대장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참모장 허석우 대장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전략거점을 인민군이 점령해서  이제 체면은 세운 셈이었다. 이제 나진,선봉에 갇힌 중국군 병력은 좁은 지역에서 완전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승리는 눈앞에 있었다. 통일한국군 5군의 서진과 2군의 소수병력에 의한 지연전에 고휘 상장의 대군이 멈칫거리며 남진속도를 늦추고 있기  때문에 이제 한시름 놓게 되었다. 최  중위가 자꾸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침략군을 포위,섬멸하면 이 전쟁은…"

  "5군이 갑자기 왜 이래?"

  김재호 대장이 전술지도를 보다가  5군의 현재위치에 놀라 직접 전술 지도화면을 조작했다.  타임스케일을 1분  단위로 맞춰보니 5군은  이미 30분 전에 급속서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5군이 부대를 산개시키며 선양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부대배치가  지금까지의 위협이 아니라 선양을 점령목표로 한 것이 분명했다.

  "명령도 없이 왜… 메이야?"

  김 대장에게 말하던 허석우  대장이 놀라 권총집을 움켜쥐며 뒤로 돌았다. 그가 본  것은, 그의 뒤에 있던 윤민혁  대위가 허 대장의 권총을 쥐고 그의 뒤쪽을 향해 쏘는 것이었다.  발사하는 윤 대위의 얼굴표정에는 안타까운  감정의 빛이 역력했다.  또 한발이 발사되며 화염과  함께 총에서 뿌옇게 연기가 솟아 올랐다. 허  대장이 권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 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허 대장이 김 대장에게 달려가  윤 대위로부터 그의 몸을 가리려는 순간, 통신기에  앉아있던 최 중위가 일어나며 허 대장의  가슴과 배를 쏘았다.  허 대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최 중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윤  대위가 쓰러진 김재호 대장에게 다가갔다.  김 대장은 이미 절명했고, 아직도 가슴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뜻밖에도 고향생각을  하는지 온화해 보였다. 윤 대위가  그의 머리를 쏘아 확인사살을 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산병 백관수 하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기 패널에 손을 올린채 벌벌 떨고 있었다.

  1980년 오월, 광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 김재호 대장, 당시 젊은 김 대위가 있었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길목인 광주교도소  앞길에서 그는 부하들이  길가에 널린 무장폭도들의 시체를  옮기는 모습을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40대가 넘은  장년과 20대 청년들뿐 아니라 갓 고교생이  된듯한 앳된 소년들의 시체도 섞여 있였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카빈소총 따위의 빈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은 그들에게서 분명 공포보다 더 강한, 그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분를 느꼈다.

  주둔지로 복귀한 뒤,  중대원들의 의가사제대가 줄을 이었다. 막사 주변에 굴러 다니는 술병 숫자가 전보다 눈에  띄게 늘었고, 그 자신도 술을 찾는 밤이 많아졌다. 중대원 중에서  정신병으로 후송된 부하가 둘이나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총에 맞아죽었을지도  모를 어린 소년의 처참한 모습이 꿈에  자꾸 떠오른다며 횡성수설했다. 광주투입  이후의 여러가지 변화 중 특히 하사관들의 술렁임이  심했고, 결국 셋이 장기복무를 포기하고 제대했다. 그는  중대원들에게 훈시를 하며, 그때 결코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따라 교도소를 지키기 위해 무장폭도와 교전한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그때  광주시민들은 교도소는 안중에 없었다.  당시 고립되었던 광주시민들은 담양  등 외지로 빠져나갈 길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서울로 외출 나갈 때는 자신을 보는 시민들의 눈초리가 전과 달리 차가움을 느꼈다. 몇  년 후 광주청문회가 열리자 그는 심한  자괴감을 맛보았다. 자신의  사단이 광주투입부대로서 시민학살에  관여했다는 신문 기사를 자주 보게  되었고,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도들이 민주화 운동의 순교자로 바뀌는 기가 막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이 부하들에게 내렸던 명령이 정당했던가 자주 돌아보게 되었다. 좀 더 정중하게  항복을 권했더라면, 그들이 도망갈 때 즉각 사격을 중지시켰더라면 희생자가 조금 더 적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당시 5공청문회를 보면서 그는 군부출신 대통령들의 부도덕성에 치를 떨었는데, 다시 몇  년 후에 터진 전직 대통령 수뢰사건  폭로와 재판에서 드러난 천문학적인  비자금… 그런 대통령들 밑에서 충성을  다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국 군부를 업고 집권한  세력은 부패한 독재자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진정한 정부의 힘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했다.

  광주진압작전의 공로로 받은 훈장이 이제는 그의 진급에 장애물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경력을 알게된 부하  장교들이 그에게 은근히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자신이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자위권을 발동하여 교전했을 뿐임을, 비무장의  시민을 학살하지 않았음을 강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을 결코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는 하나회가 아니라는 점과 부산출신이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해 90년대 초반부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진할 때마다 자신의 과거 경력이 언론에 발표될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전역을 얼마 안남기고 중국의 침략이 시작되자 그는 마지막 보직으로 생각한  육군참모총장직을 반납하고  전선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계획대로 잘되어 이제 중국군을  거의 포위하고 실지를 회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만주에서  남진중인 고휘 상장의 대군은 지연전 때문에 속도가 느려졌고,  게다가 이왕 5군이 심양(瀋陽-선양)쪽으로 향했으니 이제 2군에 미치는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한국군이 북경점령과 완전승리라는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전쟁은  이대로 끝날 듯 싶어 다행이었다. 이제 그가 없더라도 전쟁은  곧 끝나리라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왜 윤 대위가 자신을 쏘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도 5월 광주의 한이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말았다. 5군의 서진은 아마도 윤 대위가 자신을 쏜 것과 관련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설마 북경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리라. 김재호 대장은 이제 편안했다. 이제 그를 평생 괴롭혀오던 악몽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장갑지휘차 주변에서 경비하던  헌병들이 뒷문을 마구 두들기는 순간 운전석쪽에 있던 김영석 중위가 K-1 기관단총을 거머쥐고 들이닥쳤다.

  "무슨 일입니까?"

  김영석 중위가 본  것은 쓰러진 두 명의 대장이었다. 한  명은 육군참모총장이며, 현재는  통일한국군 2군과  5군의 사령관을 겸임한  김재호 대장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통일한국의 운명을 쥐고  전군을 호령하던 사나이가 붉은 피에 흥건히 젖은 한낱  시체가 되어 있었다. 김 중위가 경악을 하고  있는 중에 윤 대위가 뒷문을 열었다.  헌병들이 그들을 노려보며 총구를 겨누었다.

  "허 대장이 갑자기 사령관님을  쏘았소. 허 대장은 우리 최 중위가 사살했소. 서관희 대위! 아무래도 국군의 지휘에 인민군들의 반발이  심한 모양이오. 즉시  주변을 통제하시오. 김  중위! 어서 군의관을 부르시오.  그리고 사령관님이 유고된 사실을  비밀로 하시오. 빨리 움직여요!"

  장갑지휘차 주변을 경비하는  헌병들을 이끄는 서관희 대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즉시 부하들에게  비상경계태세를 명령했다. 서 대위가 장갑을 쥔 손으로 쓰러진  허 대장 옆에 놓인 권총을 집어 들었다. 총구에서는 아직 뜨거운 열이 느껴지고 있었다.

  1999. 11. 26  21:45  경기도 남양주시 통일참모본부

"이게 어찌된 일이오? 왜 5군이 선양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피스 연락관 짜르가 탁자에 투사된 지도를  가리키며 펄펄 뛰었다. 참모들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를 기다리는 듯  초초한 표정이던 정지수 대장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고휘 상장이 이끄는  중국군은 너무 강력합니다. 잘못하면  2군이 포위될 것이오. 5군의 이동은 사전에  보고가 올라왔듯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기만작전이니 염려 마시오."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지  않았소? 정말로 한국이 베이징을 공격하는 것 아니오? 당신들은  이제 침략자가 되었소. 그렇다면 우리  피스 부대를 당장 한국에서 빼내야겠소! 우린 전쟁을 막고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을 상대로 싸울 수도 있단 말이오!"

  짜르의 언성과 달리 통역관 인한수 중위는  느긋하게 통역을 했다. 그래도 참모들은  짜르가 매우 분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지수  대장이 나서서 그를 다독거렸지만 짜르의 화를 돋구기만 하고 있었다.

  "어허~ 서두르지 마시라니깐… 쯧쯧.  저렇게 성미가 급해서야. 전쟁에서 기만행동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진과 선봉의 중국군 제 1야전사가 섬멸되면 중국이 강화를  요청하고 전쟁은 완전 끝날텐데 뭐하러 북경을 공격하겠소?"

  "나를 무시하는거요?  나는 소비에트연방의 군인이었소.  화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5군이 지연전을 펼치면 1군과  2군이 충분히 1야전사를 섬멸할 수 있었소. 나는 전부터 5군이 고휘군을  막지 않고 서쪽에 치우쳐 있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소. 5군을  지휘하고 있는 2군 사령관이 미친 것 아니오?"

  이종식 차수의  책상 위에서 벨이  울렸다. 전쟁 이래 자신에게  직접 전달된 정보는 없었기 때문에 약간 놀란 이 차수가 자신의 단말기를 보았다. 개전 이래  처음보는 1급비밀 표지가 떠  있었다. 이 차수가 즉시 암호를 입력하고  파일을 열었다. 이 차수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모들의 시선이 집중되며 회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통일군 2군 사령관 겸 5군 사령관,  국군 김재호 대장이 인민군 허석우 대장에게 암살되었다는 보고요."

  "메이요? 기럴 리가!"

  "허석우 대장은 지휘차에 탑승한 통신장교 최영섭 중위가 사살했다고 합네다. 현재 2군 헌병대에서  조사중이라고 김 대장의 부관, 윤민혁 대위가 보고했수다."

  "그럴 수가… 믿을 수 없습니다."

  참모들의 놀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5군  사령관에 이어 2군 사령관마저 잃게된  것이다. 전쟁 중에 전사하지  않고 사고나 암살로 죽다니, 명예를 소중히  하는 직업군인인 그들로서는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노한 이 차수가 통신장교를 불렀다.

  "당장 제 2군 사령부를 연결하기요."

  중앙화면에 2군  인사부장 심보선 중장, 윤민혁  대위와 최영섭 중위, 그리고 헌병대의 서관희  대위가 나왔다. 거수경례를 하는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을 본 이  차수는 말도 않고 머리에 손을 짚고 있었다. 정지수 대장이 물었다.

  "심 장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거요?"

  [죄송합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는 그때 다른 차량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이 그때의 증인입니다.]

  심 중장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인민군 김병수 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기래요? 윤 대위. 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난겐가?"

  심 중장이 화면  밖으로 나가자 윤 대위가 앞으로 나섰다.  윤 대위는 그 상황에서도 상당히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김재호 사령관님이  5군에 선양으로의 진공을 명하자  허 대장님이 심하게 반발하셨습니다. 명령을 전한 다음에도  두 분은 계속 다투셨는데 허 대장님이 화를 참지 못하셨습니다.  허 대장님이 쓰러진 사령관을  향해 계속 총을 쏘시길래 최 중위가 나서서 허 대장님을 사살했습니다.]

  "음… 서 대위."

  다시 정지수 대장이 취조하는 어투로 헌병장교를 불렀다.

  [예! 대위, 서-관-희!]

  "자네는 그때 어디 있었나?"

  [사령관님이 계신 장갑지휘차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럼 일이 벌어진 다음 왔겠군. 자네는 무얼 봤나?"

  [예! 사령관님과 허 대장님은  이미 절명해 계셨습니다. 허 대장님 곁에 있는 권총 총구가 따뜻했고, 탄창을 빼서  세 발이 발사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별다른 상황은 없었나?"

  [예! 본  상황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현재 장갑지휘차에 있던 다섯명을 조사중입니다!]

  "다섯? 기럼 또 누가 있었소?"

  인민군 김병수 대장이 다시 나서자 서 대위가 보고했다.

  [부관 윤민혁 대위와 통신장교  최영섭 중위, 장갑지휘차 차장인 김영석 중위, 운전병, 그리고 사령실 내에 전산병이 있었습니다!]

  "기래요? 날래 전산병을 부르기요."

  [백 하사!]

  꽤나 어려 보이는 백관수 하사는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안스러웠다. 정 지수 대장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자네가 그때 본 상황을 이야기하도록."

  [두 분이  한참 말다툼을 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나서... 뒤돌아 보았습니다. 허 대장님이... 쓰러져 계신 사령관님에게 권총을 쏘는 것이 보였습니다. 흑흑~]

  "울지 말고, 임마! 계속해!"

  정지수 대장이 갑자기  신경질을 내며 백 하사에게  쏘아붙였다. 군인이 사나이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 정 대장은 이유모를 분노가 폭발하곤 했다.

  [예! 죄송합니다! 흑. 놀란 최 중위님이  허 대장님을 쏘고 사령관님의 상태를 살폈습니다만, 이미 절명하신 후였습니다. 사령관님은... 흑흑. 허 대장님이 쐈습니다. 왜 그리 화가 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그래?"

  질문을 마친  정 대장이 참모들의  얼굴을 살폈다. 김 대장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참모장 인민군 허 대장이 하극상을 범한 것이 분명한 결론이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앉아있던 차 영진 준장이 나섰다.

  "윤민혁 대위! 자네는 대학 다닐 때 대학생 다물회장이었지?"

  [...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군인이기 때문에 사조직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다물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애국적이긴 하지만 극우민족주의에  치우쳐 있습니다. 만주를 찾겠다는 그들의 목표는 국제평화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윤 대위가  정훈감실에서 내려온  사회정세보고서를 외우듯 특징없이 대답했다.

  "음… 내 생각도 그렇다네. 그런데 말야…"

  [.....]

  "아까는 5군  사령관이 사고로 순직하셨네. 조금전에는  2군 사령관께서 암살당하셨지. 암살  직전에 5군이 선양쪽으로 급속이동을 시작했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명령은 분명  김 대장님이 내리셨습니다. 나중에  확인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고는 한참 후에 일어났습니다. 명령문을 전송해 드릴까요? 전송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음… 이쪽으로  보내주게. 그런데 지금  2군 지휘권을 인수한 사람은 누군가? 아까 그 심 중장님이신가?"

  차영진 준장이 단말기를 통해 심 중장의  이력을 훑어 보았다. 계급에 비해 별로 화려하지  않은 경력이었다. 육군 소장때  부군단장을 마지막 보직으로 전역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통일이 진전되는 바람에  아직 현역에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한국 육군에서  부군단장을 하다가 승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예! 2군 인사부장이신 심보선 중장이십니다.]

  윤 대위가 대답하자  심보선 중장이 다시 중앙화면에  나왔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을 취조하는듯해서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인민군 김 병수 대장이 차 준장을 대신해 질문했다.  군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남북한을 떠나서 김 대장이 훨씬 선배인 셈이다.

  "아직 후임 2군  사령관은 정해지지 않았소. 심  중장은 2군의 선임장교로서, 또한 사령관 서리로서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시오?"

  [순직하신 사령관님의 뜻을 이어받아 기필코 나진,선봉의 적을 섬멸하고 침략을 막아내겠습니다!]

  "아니… 지금 이동하고 있는 5군 말이오. 5군은 어떡하시겠소?"

  [당연히 사령관님의 명령대로 선양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는 고휘 상장의 대군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입니다. 정식으로  새로운 사령관께서 부임하기 전까지는 김재호 대장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음…"

  현재 2군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있는 인민군 대장이다. 인민군 대장이 국군 중장의 명령을 받게되는 셈이다. 김병수 대장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김재호  대장이 죽었다고 해서  2군 사령관 서리의 5군에  대한 지휘권을 박탈할 수도 없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던 정지수 대장이 나섰다.

  "2군 사령관은 곧 임명해서 보내겠소.  그때까지 작전을 잘 수행해 주기 바라오."

  "저를 2군 사령관에 임명해 주십시오."

  정지수 대장이 이종식 차수에게 간청했다. 이  차수가 정 대장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이 차수가 보기에  정 대장은 약간 과격했다. 자칫하면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할 수 있는 위험인물로 판단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적임자가 없었고, 정 대장의 청을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공화국 임시주석과 남반부 대통령에 재가를 얻어야 하오."

  "통참에서 천거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군 지상군에서는  제가 최고 서열입니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합참의장을 빼면 정지수 대장이 최고서열이었다.  그는 공석인 육군참모총장으로 거의  내정되어 있었는데,  정 대장도 이름뿐인  육참총장은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차수 자신도 직접 병력을 이끌고 작전을 지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1999. 11. 26  20:55  (현지시각) 베이징, 베이징판띠엔

  "2야(野)를 대주게."

  창 상장은 기가 막혔다. 약 100여만으로  추산되는 한국군의 진공은 4개 지대(支隊)로 나누어 행해졌지만 분명 베이징을 향하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가 최악으로 여기는 악몽이 지금  현실에서 진행중이었다. 전술핵이라는 막강한 중국군의 방어수단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한국군이 베이징을 공격하는 것이다.

  2야전사가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  해도 통일한국군 제 5군 본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간에 선양수비군이 있긴 해도, 예비로 돌린 2개의 수비사단과 인민무장경찰 몇  개 독립대대, 그리고 사단병력의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사기가 땅에 처박힌 몇 개의 사단 찌꺼기에 불과했다. 한국군의  선양 점령은 시간문제이고,  이제는 베이징까지 위험했다. 야간작전능력이 있는  공격기마저 이제 바닥이 드러났다. 각 군구에 남아있는 예비병력과 해안방어연대들,  인민무장경찰, 그리고 공안국 소속 무장요원들까지 모두 긁어 동원해봐야 채  50만이 되지 않았고, 무장 수준도 극히 미비했다. 도저히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비상회의에서 총참모부장인 우이 롄찬 중장이 인민총동원령을 발령할 것을 주장했다. 항일전쟁의  전통을 살려 인민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인민전쟁을 전개하게 되면 최소 절반의  영토, 절반의 인민이 적의 군화발 아래 짓밟힐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은 1930년대와 달리 지킬 것이  너무 많았다. 인민의 생활수준을  몇십년 후퇴시켜가면서 조선과 대적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 군사위원회의 광범위한 동의를 받았다.

  이윽고 만주에 있는 제 2야전사 사령, 고휘  상장이 호출되자 왕 대교가 창 상장의  회선과 연결했다. 창 상장이 즉시 이를  중앙화면과 연결했다. 검은색 가죽제복에 선글래스를 낀 고휘  상장이 화면에 나오자 군사위원들이 침묵을 지켰다.

  "조선군이 베이징을 향하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막아  주십시오. 저는 1야(野)를 먼저 구출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1야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의 기만술책에 넘어가시면 절대 안됩니다.]

  자신을 호출한 이유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고휘 상장이 미리 쐐기를 박았다. 창 상장이 무슨 말을 할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베이징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군 5군에 대한 추격전이 성공하여 무사히 베이징을 방어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2야만으로 조선군 3개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창 상장 자신이 이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을 막을 병력이 없소."

  이것은 전략상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선택의 문제였다. 창 상장과 고 휘 상장은 결론은 미뤄둔 채 상대를 떠보고 있었다.

  [전술핵을 쓰셔야겠습니다.]

  "그건… 조선에 의한 핵보복은 문제가 아니오. 방금 미국과 몇몇  나라 정부로부터 전문이 도착했소. 어떠한 핵공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엄포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서도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고, 어찌된지 인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도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소."

  창 상장의 말을  듣던 고휘 상장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 핵 강국의 정보부에서는 이미  중국의 패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중국이 이기고 있었다면  그 나라들은 결코 그런 엄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각국 정부와 그 주재국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핵시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략무기인 핵폭탄을 쓸데없이 전술목표에 소모했다는 것이 고휘 상장의 생각이었다. 피스함대와 서울에  대한 핵공격은 전략적 성과도  없이 세계열강들로 하여금 중국으로부터 등돌리게 하기 충분했다.

  [동지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병력을 서진시키면 승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1야를 구출해서 그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병력면에서는 그리 불리하지 않으니 우리가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1야를 구하지 않으면 1야뿐만 아니라 저희 2야도 각개격파될게 뻔합니다.]

  "그럼 날더러 어떡하란 말이오? 우리 군사위원들까지 총들고 나가 싸우다 죽을까요?"

  ‘동지는 무엇을 바라는거요?’

  고휘 상장의 표정은  창 상장에게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  고휘 상장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고 상장의 결론은 단호했다.

  [베이징을 포기하십시오.]

  창 상장을 제외한  군사위원들이 흠칫 놀랐다. 아무리  상황이 안좋더라도 적군에게 수도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다른  군사위원들이 나서려 하자 창 상장이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 그럴 수는, 절대 그럴 수 없소!"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조선국경과 베이징은 너무 가깝습니다. 중화역사상 수도가  북쪽에 있다가 북방 기마민족에게  멸망한 예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충분히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베이징은 나중에 수복하면 되겠죠. 공간을 이용해 적 병력을 흡수하는 것이 인민전쟁의 요체 아닙니까?]

  고 상장의 심각하지만 특유의 이죽거리는 듯한 모습을 본 군사위원들이 약간은 분개했다.  역시 소수민족은 믿을게 못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고  상장은 자기 할아버지의 조국이  조선이라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알겠소.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낼까 하오. 처음부터 잘못된 전쟁이었소."

  드디어 고 상장이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다. 한국군이  베이징으로 향하면 자신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통일한국군  5군이 지연전으로만 응수한다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었다. 아마도  1야가 전멸당하거나 항복하는 동안 자신의 2야가  한국군 5군과 현재 지연전에 나서고 있는 2군의 일부 병력을  패퇴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2야와 2군의  일대일 결전이 남게되고, 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  지도부의 어떤 미친놈이, 수십발의 전술핵을 뒤집어 쓸 위험에도 불구하고 5군에게 서진을  명령했다. 중국이 핵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패배뿐이었다.

  고 상장이 선글래스를  벗고 고개를 들어 바른 자세를 취했다.  고 상장의 눈빛이 군사위원들에게 강하게 쏘아졌다.  최대한 예의를 갖췄지만 그 특유의 비꼬는 듯한 말투는 숨길 수 없었다.

  [아주 불리한 협상이 되겠습니다.  아마도 조선은 조선반도를 점령 중인 1야를  내버려 두고 협상에  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00만명  넘는 포로를 안고 종전협상이라... 외교부장께서 꽤나 곤혹스러우시겠습니다.]

  "내가 직접 조선에 가겠소."

  고 상장과 동시에 군사위원들도 놀랐다. 창  상장의 굳게 다문 입술은 전투에 임한 어떤  지휘관의 표정보다 결연했다. 조국을  전화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이 겪을 치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1야 병력 전체가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화면이 꺼지길 기다리던 고 상장이 깜빡  잊었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통신을 끄려던 왕대교가 놀라며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럼 상호 적대행위는 종식해야겠습니다.]

  "…., 아니오."

  창 상장이 오른쪽  벽의 전략지도를 보았다. 1야가 점령하고  있던 조선땅이 한참 줄어들어  있었고, 반대로 조선군이 점령한  만주땅은 갈수록 서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2야는 거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땅따먹기 게임은  이미 역전된지 오래였다. 창 상이 중앙화면을 보니 고 상장도 지도를 보는지 눈길 아래로 뭔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아니오! 회복할 수 있는  한 한치라도 회복하시오. 동지가 빠른 시간내에 가능하다고 판단한 적정선까지 점령한 다음 내게 연락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동지. 그럼 일단 작전은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별 의미없겠지만...]

  고 상장이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군사위원들을 훑어보며 경례를 붙였다. 군사위원들이 잔뜩 풀이 죽었는지 엉거주춤 경례를 받았다.

1999. 11. 26  07:10(현지시각)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외곽

  아틀라카틀(Atlacatl) 부대  소속 병사 로베르토 마르티네즈는  분대원들과 함께  도로 주변에 매복  중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도로를 지나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심심했다. 그에게는 인디오나 농민들을 마음대로 학살할  수 있는 농촌이 훨씬 좋았다. 여기는  아무래도 미군이나 경찰 등의 눈치가 보이고, 공무원도  죽이면 안되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는 끔찍했던 훈련과정이  생각나 진저리를 쳤다. 온두라스  국경 부근에 있던 피난민 캠프에  갑작스레 나타난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자기  또래의 청소년들을 트럭에 태웠다.  그리고나서 자행한 그들의 행동은 악귀를 연상시켰다.

  사람들에게 옷을 모두 벗으라고 시킨 다음 머체티(machete:중남미  원주민들이 가지치기용으로 쓰는  날이 넓은 칼)를 든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노인, 부녀자들이  대부분인 그들은 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끔직한 것은 그들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손목과 팔꿈치, 어깨,  발목 등 마디마디를 자르고 마지막으로  목을 잘랐다. 젊은 여자들은 따로 모아 윤간한 다음 하체부터 찢어 죽였다.

  어린 로베르토는 군부대에 끌려와 혹독한 기합과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들개와 콘돌을 맨입으로 물어뜯어 죽여야 했고, 교관의 기분에 따라서는 자기들끼리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을  벌여야 했다.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주변 마을에서  끌려온듯한 어린 소녀를 강간해야  했고, 결국은 그 소녀를 돌로  쳐 죽여야 했다. 군인들이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고문하며 손톱을 뽑거나 목을 자르는  모습은 거의 매일 보았고, 연병장에는 사람 시체에서  잘려나온 여러 가지 장기가  굴러다녔다. 이런 살벌한  캠프에서 2년을 보냈다. 차차  적응 되어가는 자신이 무서웠다.

  이렇게 나치 친위대에서  따온 교육과정을 따라 훈련받은 로베르토는 미국 군사고문단 앞에서  심사를 받았다. 몇가지 의례적인  사상적 심사와 함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변 마을을 급습하여 주민들의  목을 잘라왔다. 그 후에야  그는 자신이 아틀라카틀이라는 끔찍한  부대에 정식으로 가입된 것을 알았다.

  "버스가 옵니다!"

  멀리 고물 버스가  굴러오고 있었다. 버스 지붕에 짐이 잔뜩  있는 걸로 보아,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장보러 오는 모양이었다.

  "음…"

  매복하느라 따분했던 분대장이 머리를 굴렸다.  다른 분대원들이 소총이나 머체티를  매만지면서 은근히  습격하길 바랐다. 드디어  분대장의 결단이 난 모양이었다. 분대장이 병사 둘을 내보내 버스를 멈추게 했다. 주로 부녀자와 노인들로 이뤄진 버스 승객들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두손 들고 내려! 운전사 먼저, 빨리!"

  "말 안들려?"

  버스 문이 강제로 뜯겨 나가고 운전사가  땅에 내동댕이쳐 졌다. 성질 급한 병사 하나가 머체티로  운전사의 목을 치자 끌려나온 사람들이 도로에 꿇어 앉은채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그들의 운명은 뻔했다. 죽음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병사들에게 자비를 구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미소와 칼 뿐이었다.  요즘은 언제나 그렇듯 지루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젊은 여인들은 게릴라에  가입하거나 길거리에 나돌아다니지 않는다. 또한 병사들이 젊은 여자들의  씨를 말리기도 한 탓이다.

  [타!]

  "뭐야? 총은 쏘지 말라고 했잖아? 물건에 피가 묻으면 값이…"

  화가 나서 펄펄 뛰던 분대장이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민간인이 아니라 부하 병사가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민간인들의 비명이 귀청을 찢는 듯했다.

  [타!]

  포물선 궤도를 그리던  총알 하나가 분대장의 골통을  꿰뚫었다. 분대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쓰러졌다. 로베르토가 중년여자들 뒤로  숨으며 응전태세를 갖췄다. 살인자는  보이지 않았다.

  ‘살인자? 그렇지. 내가 살인자야. 그리고 군인은 원래 살인자라고.’

  민중이 민중을 죽이고, 다른 민중이 민중을 죽인 민중을 죽인다. 그것은 민중의 탓이  결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죽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멀리 숲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옆에 있던 병사가  또 쓰러졌다. 극히 짧은 시간 후에 총소리가 울렸다.

  "저쪽이야! 사격!"

  부분대장이 외치며 숲쪽을  향해 M-16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분대원들이 응사를 시작했으나 먼저  공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 분대원들 사이에 공포가 엄습했다.  로베르토는 친구인 호세가 뒤로  슬금슬금 빠지는 것을 보았다. 겁에 질린 로베르토가 그를 따라갔다. 호세와 로베르토는 총소리를 뒤로 하고 죽어라고 벌판을 뛰어갔다.

  1999. 11. 26  22:25  엔지(연길) 북쪽 14km

  헤들라이트를 킨 60여대의  트레일러가 북쪽을 향해 비포장도로를 질주했다. 각 차량마다  T-80 전차나 KH-179 155밀리 자주포  한 대씩을 태우고 달리는 그 행렬은  통행에 최우선권이 부여된 듯 맨앞에 헌병차가 선도했다. 트레일러 행렬  뒤로는 K-200 보병전투차와 KM50  트럭들이 따랐고, Bv-202 장륜식 설상차 몇 대도 이 행렬에 끼었다.

  한참을 북으로 달리던  행렬이 순간 정지했다. 거대한  트레일러의 뒷부분에 있는 두 개의 발판이 땅으로  내려오고, 전차병들이 전차를 고정시켰던 쇠줄을 풀었다. 곧이어 전차가 우르렁거리며 내려서기 시작했다. 보병전투차들은 이미 자기 위치로 전개하고 있었다.

  트레일러들이 남쪽으로 돌아가자 공병차들이 전차엄폐호를 파기 시작했다. 민간에서 징발된  포크레인과 불도저 덕택에 작업은  예정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전차가 엄폐호에 들어간 후  위장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전방에 수많은  불빛이 보였다. 잠시 후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백대의 자동차 전조등이었다.  앰뷸런스와 트럭행렬이 먼저 오고, 그 뒤로 사륜구동차들이 보였다.  후퇴하는 그들을 따라 포화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건 55사단이야."

  전차장 한보겸 대위가  차장용잠망경을 통해 바깥을 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변승재 하사가 포수망원경으로 보니  후퇴행렬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륜구동차에 탑승하고 있는 군인들 태반이 부상병들이었다. 듣기보다는 병력도 많이 줄어 있었다.

  "작살났구만…쯧쯧."

  운전병 장 병장이 남의 말 하듯 제 1사단은 두만강을 넘어 어느새  이곳까지 와서 고휘 상장의 2야전사에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이동행렬이 길고  편성에 시간이 걸려 한보겸 대위가 소속한 일부 병력이 선발대로  이곳에서 적의 전진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고 투입되었다. 한 대위가 실토했듯이 시간끌기용 총알받이였다.

  "이제 우리 차례디…"

  포수 변승재  하사에게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영변  근처에서 벌어졌던 첫전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흉폭한 맹수에게 맞서는 어린아이같은  심정이 되었다. 아련하게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 솟았다.

  ‘우아하고, 지적이며,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생기발랄한… 한마디로 품위있는…’

  회사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결코 그가 원하던 여자가 아니었다. 내숭이나  떨고 화려한 옷입기를  좋아하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갑자기  변신을 시작했다. 깔깔거림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고  사물을 보는 안목이  넓어졌다. 처음 그녀와 같이  일할 때 거칠게 대하던  그가 당황하며 그녀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몇 단계나 성숙해진 그녀에 대해  갑작스럽게 범접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괴로워할 때 그녀가  다가왔다. 그녀의 행복한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중국군의 십자포화가  점점 가까워졌다. 심장이  박동치며 아드레날린이 대량으로 분비됨을 느꼈다.

  1999. 11. 26  22:42  서울 용산, 중앙대부속병원

  오석천 공보처장관이  환하게 웃으며  입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간호장교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던 홍지영 대통령이 화들짝 놀라며 담배를 시트 안에 감췄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각하!"

  대통령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장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말이요? 오 장관. 중국이 항복하기라도 했소? 설마…"

  "중국 군사위  주석 창 리엔충  상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각하를 뵙기 위해 직접 서울로 오겠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왜…?"

  "5군이 심양을 공격하자 북경을 점령하는 줄 알고 놀란 모양입니다."

  "핵공격은 안한답니까? 앗~ 뜨거!"

  대통령이 시트를 걷고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렸다. 허벅지부분을 감싼 붕대에 구멍이 나고 그 주변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오 장관이 낄낄대며 웃었다.

  "조심하셔야죠. 이  기회에 아예 끊으시지… 핵은  걱정없습니다.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  지도부에 압력이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호오… 그럼 전쟁은 곧 끝나겠군요."

  "제가 다시 중국 외교부장과 통화해야 합니다만… 중국 주석과의 회담 시간은 어떻게 잡을까요? 그쪽에서는  종전 이후 복구사업을 논의할 대규모 협상단까지 파견한답니다."

  중국이 한국에 배상을 하겠다는 뜻일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대통령이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각나 다시 장관에게 물었다.

  "빠를수록 좋겠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주석이 도착하시는  대로 바로 시작합시다.  그런데 종전은 언제부터요?  지금 당장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춰야 희생이…"

  "중국군은 현재 전 전선에 걸쳐  모든 적대행위를 종식했습니다. 공격 중지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알겠소. 최 총리와 상의해 보겠소.  그런데… 왜 갑자기 5군이 베이징으로 향했지요? 공격계획에 없던 일인데요."

  오 장관의 눈이 잠시 빛났다. 그에게서 자랑스런듯한, 또는 뿌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김재호 대장이 암살당하기  직전에 5군에 서진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각하. 그런데 그들과의 종전회담에 임할 때 간도의 한국반환을 강력하게 주장하십시오. 원래 우리땅인건 각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그래도 지금은 남의 영토인데 어찌…"

  "중국은 티벳을  점령할 때나 다른 영유권  분쟁에 접할 때도 수백년 전의 점유사실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땅임을 내세워 만주를 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간도는 겨우 100년도  안된 20세기, 금세기 들어서 잃은 땅입니다."

  오석천 장관이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통령의 대답에  따라 어떤 행동이 이어질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흠… 검토해 보겠소. 장관은 일단 재경원장관, 외무장관,  국방장관 등에게 연락하여 종전위원회를 구성하시오."

  1999. 11. 26  22:55

  변승재는 얼이 빠진채  T-80 전차 밖으로 나와 부상병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교전으로  인한 인명손실이 화된 대대의  절반에 육박했다. 엄폐호는  온전한 것이 없었고  움직일 수 있는 전차  댓수는 겨우 7대에 불과했다. 변 하사는 휴전이 조금  일찍 되었더라면 이런 피해는 없었을거라며  투덜거렸지만, 대대의 방어가  그나마 성공함으로써 중국의 한국에 대한 종전통보시간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정지수 대장은 통일한국군 제  2군 사령부로 가는 헬기에서 휴전소식을 들었다.  차영진은 선천에 있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는 그의 아내가 가방을 꾸리고 있었는데, 붙잡으려는  차영진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녀의 차로  떠나고 말았다. 차영진은 아내가 설마 계속  선천의 관사에 남아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 보냈다.

  정보사단의 이현우는 이번  전쟁에 관한 세계각국의 입장을 드러내는 정보를 취합하느라 바빴다. 김준태와 구성회는  비밀자료를 분류하고 있었고, 오성윤은 아직도  암호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어 전쟁이  끝난 줄도 몰랐다. 서승원의 잠수함은  보급을 마치고 출항 직후에  종전소식을 듣고 다시 남포항으로 돌아갔으며, 전투기조종사  김종구와 황인호는 영변의 지하격납고에서 동료들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렸다.

  홍지영 대통령과 몇몇 국무위원들은  중국 주석 일행을 맞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 있었다. 북부강변도로를 지나며  보이는 무너진 도시외곽고속도로의  잔해가 흉물스럽다고  느꼈다. 가는 길에  그는 대구에서 잡힌 반란군이  아무래도 일본인같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홍지영은  중국 주석과의 만남에서 불법침략에  대한 배상으로 금전적 배상 외에 무엇을 원할까  고민했다. 오석천 공보처장관 주장대로 연변 일대의 만주땅  일부를 돌려달라고 하면 그쪽의 반응은 어떨까? 분명 부정적이겠지만 이쪽이 강하게 나가면 혹시 잃은 땅은 조금이라도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동지나해와 황해로 표기된 바다 이름을  남해와 서해로 바꿔달라고  해야지…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어린애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박진은 아직도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빴다.  이호룡이라는 환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윤민혁과 최영섭은  2군 헌병감 김용진 소장에게서 호출을 받고  혜산에 있는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윤민혁은 컴컴한 만주의 하늘을 자꾸 뒤돌아 보았다.  전쟁을 끝내고 만주를 돌려받기 위해서는 김재호 대장을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 의사처럼,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확신범이라며 하늘을  우러렀다. 그의 생각처럼 5군이 서진을 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더 길게 끌었을지도  모르며,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비군 김광열은 선양으로  향하는 트럭에서 살았다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며, 이은경과 정호근  대원은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대원의 허리를 잡은  정 대원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저격수 구스타프는 아직도 자금성의 천정에 갇혀 있다.

  그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통일참모본부의 참모(군사위원)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자고 있었고, 서열이 가장  낮은 이호석 중장만이 남아 투덜거리며 당직을 서고 있었다.

  중국 군사위원회  주석단 일행은 서울로 가는  민항기를 타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봐 호위기는 붙이지 않았다. 창 상장은 앞으로의 일이 더  큰일이라며 걱정이 태산같았다. 1야전사의 차오  중장은 병력손실이 너무  크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2야전사의 고휘  상장은 장갑지휘차 안에서 느긋하게 마오타이주를 즐겼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는 국무장관 호블랜드로부터 이번 전쟁기간 중 판매된 무기액수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웃고  있었다. 앞으로 일본에 판매할 무기량은 훨씬 많았다. 제임스는 곧  다가올 자신의 재선이 확실하다며 즐거워했다.

  일본 통막의 고마쓰 미도리 육장은 병력을 좀 더 빨리 동원하지 못한데 대해 땅을 치고 있었다. 라싸의  티벳사람들은 독립을 축하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고,  타시 구르메는 울고 있는 빠르 바티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1999년 11월 중순에 시작된 통일한국과 중국의  전쟁은 양국간에 큰 피해를 남기고 이렇게  끝났다. 핵무기를 사용한데 대해  국제적인 비난이 있었지만, 세계인들은  더 이상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데에 안도했다. 그동안의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통일한국을 질시하는 주변국들이나 다른 나라의 불행에서 이익을 구하려는 국가들이 아직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시아2000 3부, 만주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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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해커

동 급 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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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유저 저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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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Hacker) 컴퓨터내의 기록을 패스워드를 풀어 훔치거나 망치는 사람

…………………………………… <현대시사용어사전.동아일보사.90년.>

대부분 구 자유학원 부근에서 산책을 하는 편이지만, 간혹 도큐핸즈에서 DIY 제품들을 구경하며 고객을 만나곤 한다. 개인적인 아르바이트가 없을때는 산타마(山多摩) 지구의 싸이클링 센터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기도 하는데, 한참동안 자전거를 타노라면 그가 입는 버튼다운 셔츠는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럴 경우 땀을 식히는 데는 역시 술이 최고다. 리무진 택시로 긴좌부근의 서민 주점에 도착,한잔의 차가운 정종을 마시면 그날의 피곤이나 노곤함은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변함없는 그였다.

그가 하는 작업은 주로 자정 무렵에 시작했다가 끝났다. 작업 중에 그는 간혹 Gif 파일이나 케이크워크로 자신이 편곡한 음악을 들었는데 그것도 이젠 그만 두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DAT(디지털 오디오 테입)으로 레코딩 된 로저 워터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준은 지금 음악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준이 하는 작업에는 매뉴얼이나 교과서가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준의 경우처럼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는데,그것도 나쁜 경험이 아니다. 해커가 되면,어느새,머릿속에 컴퓨터 잡지 하나는 미끈하게 뽑을 정도의 지식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교도소에 들어가면, 시간이 언제가나 하며 복역하는것이 아니라,자신이 습득한 방대한 지식을 복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눈치 없는 친구들은 바보가 되어 나오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밥벌이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에는 항상 최소한의 정당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은행 휴면구좌를 농락할 때는 그 돈을 가난한 서민들에게 나누어준다는,그런 멜랑꼴리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고비쪼로 자신의 구좌에 1% 정도 쑤셔 넣는 경제적 안목도 필요하다.
준은 방금전 교세라 인터내셔날 인스티츄드(KII)에 침투해 들어갔다. 본사정보팀이 교세라가 개발중인 3IC용 세라믹의 패키지도면을 원했을 때 그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핸드폰 암호를 하나 물색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우 대개 아마추어들은 일반 전화선을 전송루트로 사용하거나,혹은 전화국에 침입한 뒤 전화 코드를 일일이 바꿔가며 당국의 추적을 피한다. 그건 그가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원시적이고 비능률 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한때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가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의 핸드폰암호를 풀어 그 핸드폰의 전파를 무선모뎀에 연결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같이 일본에 앉아 미국까지 침투할 때는 (KII는 미국 실리콘 벨리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계 연구소다.)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준은 잠시동안 이미 파악해 놓은 몇개의 핸드폰 암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백악관에 출근하는 어느 얼빠진 미국인의 핸드폰을 자신의 전송루트로 이용하기로 했다.

실리콘벨리에 있는 교세라 인터내셔날 인스티튜트의 대형 JT 컴퓨터는 침입자에 대해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흐느적거리고 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JT-9900형 대형 컴퓨터는 일본 NEC가 자랑하는 비 IBM형 컴퓨터로 220기가의 대형 용량을 자랑하고 있는 초괴물이었다. 하지만 JT는 몇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약점은 다른 대다수의 컴퓨터처럼 유닉스 최신버전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유닉스 광인 해커들에겐 여지없는 사냥감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JT 시리즈에는 미국제 대신에 일본 방역회사가 제작한 자체 방역시스템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었는데 그 점 역시 약점중의 하나였다. 방역시스템은 준이 침투하는 시간에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준은 이미 JT 플랫폼 문 앞까지 들어가 있었다. 준이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의 중앙 한가운데에는 분홍빛의 박스가 나타나 준에게 암호를 묻고 있었다. 준은 이와 같은 직접적인 교섭에 접촉할 경우에는 왠지 식은 땀이 났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수많은 훈련을 했던 남자였다. 어쩌면 지난 1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교세라를 비롯해서 모두 7개의 대기업 방역시스템을 해체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준은 동호(무슨 이름인지 몰라 제 이름을 살짝)가 제작한 (자동 패스워드 축출 프로그램)을 걸어 보았다. 그러자 채 몇분이 되기전에 암호문을 물어오던 분홍색의 박스는 수많은 난수표를 째각 이며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준의 프로그램에 여지없이 걸려든 것이다.
이윽고 준의 눈 앞에서 12자리의 문자가 완성되어 갔다. 그런 뒤 암호문을물어왔던 분홍색의 박스는 화면 한가운데에서 흔적없이 사라졌다. 준은 그때 카푸치노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감기 기운도 있었지만 화면이 열리는 것이 보이자 준은 제정신을 차렸다.

준은 담배를 손끝으로 튕긴뒤 거칠게 입에 물었다. 그런 뒤 삽시간에 플랫폼 내부로 치고 들어갔다. 화면 우측에선 한꺼번에 수백종류의 아이콘이 별처럼 무수히 지나가고 있었지만 준은 색깔만으로도 아이콘의 용도가 무엇인지 판별해내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은 그따위 아이콘에 신경을 쓸 입장이 아니었다. 이미 키보드의 위에 올려져 있는 준의 손가락은 한치의 오차도없이 타이핑을 해대고 있었고,그때마다 모니터 화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방들이 접혀졌다가는 다시 다른 방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준이 패키지 도면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불과 50초 뒤였다.

준은 패기지 도면을 초고속으로 압축했다. 준의 컴퓨터에 램상주로 떠있는 디지털 시계는 JT 시스템에 적용되는 (암호자동 교환시간)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디지털 시계가 정확하게 판별했다면 JT에 걸려있는 방역시스템은 3분마다 새로운 암호를 갱신하려고 대들 것이다. 만약 그 시간안에 모든 걸 해결하지 않는다면 준의 위치는 순시간에 포착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아직 1분 20여초 남았을까. 준은 이미 모든 작업을 끝낸 뒤였다. 준은 다시 담뱃불
밗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담배를 뒤로 물고 필터 부분에 라이터 불을 당겼던 것이다. 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간혹 자신이 멍청하다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럴 정도로 심할까…<br>
준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300개의 바이러스를 압축한 (Computer Terminator/해커버전)을 선물로 던져 놓고 나왔다. 그런 뒤 마지막 작업으로 준은 자신의 아이디명을 JT 시스템안에 던져 놓고 나왔다.

아마 교세라는 누가 침입했는지 조차 모를 것이고,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게 바이러스 탓이라고만 여길 것이다.
300개의 바이러스는 이미 수년 전부터 준이 맥아피연합에서 리콜해 온 각종 바이러스 소스였는데,이런 경우에 제법 쓸모가 많았다.

도면을 확인하는 작업까지 끝나자 준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젠 필터에다 대고 불을 붙이거나 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준은 컴퓨터를 멍하니 응시하며 이제부턴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시간이면 도쿄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야구장처럼 떠들썩한 분위기일 게다.
순간적으로 나쓰에가 웃는 모습이 준의 뇌리에 떠올랐다. 나쓰에와 준이 만난 건 게이오 대학에서 열린 일렉트로녹스 포럼에서 였다. 나쓰에는 27세의 훤칠한 키를 가진 여자였는데 표정이나 행동거지가 제법 수수한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그날 검정색의 수트를 걸치고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쓰에는 포럼이 끝난 뒤 자신을 소개할때 클리퍼광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 준은 흥미를 느꼈고,그 날밤 준은 나쓰에와 함께 파노라마 파크까지 걸어갔었다. 둘이 헤어진 건 다음날 새벽 공원 다리 위에서였다.

나쓰에의 모습이 떠오르자 준의 손은 자동으로 오거나이저를 열기 위해 마우스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준은 손쉽게 나쓰에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런 뒤 준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머리 속에 외웠다. 하지만 오늘은 한가지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준이 오거나이저를 크로즈한 뒤에,다시 사방팔방으로 어지럽게 열려져 있는 유닉스를 닫고 DOS 화면으로 막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모니터 화면에서 스크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뒤 모니터 화면 중앙에서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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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없이 미 합중국 컴퓨터를 파괴하는 자는 5만불 이하의 벌금,또는 5년 이하의 구금,혹은 이를 병과 한다.

……………………… -연방 컴퓨터 시스템 보호법안 중에서. 미국.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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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거주하는 하숙집 가나기원金木園은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아베구장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나기원은 문자 그대로,금빛처럼 울창한 정원수로 둘러 쌓여있는 신주쿠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하숙집이었다. 8조 다다미방 24실의 가나기원의 여주인인 모리타 가나에는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미망인 였는데,그녀는 다도(茶道)를 24명의 하숙생에게 일일이 챙겨줄 정도로 정성스럽다. 한편으로 그녀는 풍부한 머리카락과,혼혈아 흔적으로 보이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에는 오늘 밤에도 딸 준꼬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초봄이라 그런지 지금도 정원에는 아스라이 찬기운이 남아 있다. 아마 곧 있으면 벚꽃이 필 터이다. 가나에는 문득 한국에서 건너온 사내가 1년동안 투숙하고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방에서는 저녁 내내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나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휠체어에 앉아있는 준꼬를 내려다보았다. 준꼬는 한참 재롱을 떨 8살 난 여자애였지만 선천적으로 하반신 마비 환자였다. 준은 가나에 모녀가 정원에서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지만 아직도 물끄러미 자신의 데스크탑 컴퓨터에 떠있는 경고문을 응시하고 있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별안간 준의 머리에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가 떠올랐다. 아는 게 없었던 시절…그저 불안하게 컴퓨터에만 매달렸던 시절이었다.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94년 그 해 3.1절 특사로 출감했을 때 준의 나이는 27살이었다. 그날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할 매형과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돈줄이었던 누나는 이미 준이 교도소에 수감된 사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그 당시의 그는 기숙할 곳조차 변변치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하지만 취직자리를 구한답시고 이력서에 (신용카드 복제 대행으로 대전 교도소 3년 복역)이라고 기입하는 일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해 3월경의 준은 (그의 말처럼 아까운 청춘조차 멍이 든 채) 탱자탱자 서울거리를 거닐며 소비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준은 제일그룹 정보팀에 근무하는 친구 고종수를 만날 수 있었다. 말이 고교동창이었지,그와 고종수는 친하지도 않았고 당구를 같이 친 적도 없었다.
"자네 소식은 3년전에 한번 들었던 것 같군…"
"대기업에 근무한다더니…신문기사까지 스크랩하나?"
"내가 출세하는 데에 자네 실력이 도움되면 좋겠어."

그들은 고려빌딩 지하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야릇한 밀담을 나누기엔 너무 개방적인 장소였다.
"원하는 도면이 뭔데 그래….?"
종수는 웨이터에게 히쭉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을 시작했다.
"마쓰시다 전기의 가전제품이네. 코끼리 밥통의 일종인데 그게 밥도 하고 캔터키 치킨까지 튀길 수 있는 모양이더군…"
준은 안주를 기다리다 말고 레몬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사실 나도 내 기술이 녹스는 걸 원치 않아. 요즘은 당구비조차 없어서 빌빌대니까 말야. 어쨌든 좋아. 한가지 약속만 확실하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구해보겠네."
"무슨 약속인데…?"
"도면을 구해오면 아파트 한 채를 나에게 준다고 약속하게…"
종수는 벙찐 얼굴로 준을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이 나왔다.
"후… 착각이 심한 편이군."
종수는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보수는 당연히 없다는 걸 명심하게. 난 단지 신문지상에서 읽었던 자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게야. 자네가 용산 해커계의 최고였다면 말이지."
용산 해커…
순간 준의 눈에서 적의의 빛이 번쩍였다.
준의 입장에서 본다면 용산상가는 대덕단지 못지 않은 두뇌들이 모여있는 장소였다. 비록 장사치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거대한 비전을 꿈꾸고 있었다. 그 비전 아래서 꿈틀거리는 용산의 해커들…그 말에는 어쩐지 범죄자라는 뉘앙스가 풍겨오고 있다. 따지고 보자면 준은 말 그대로 용산해커였다.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처절하게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한. 모든 건 돈 때문이었다. 각자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준도 남들처럼 고만고만한 꿈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하루종일 컴퓨터에만 빌붙어 있는 남자가 학비를 벌기 위해 뛰어 다닐 생각을 할까. 아니 그보다는 준 스스로가 컴퓨터에 너무 미쳐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남들보다 1퍼센트 정도…그저 1퍼센트만 더 미쳐 있었다는 것이 준의 인생을 지금과도 같이 만들어 놓았다.
우울한 마음이 진정된 것은 안주가 나온 뒤부터였다. 웨이터 두사람이 가지고 온 안주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주 푸짐했다. 그 때문에 준은 갑자기 긴장감이 풀렸다. 사실 배가 고팠다. 그런 준의 변화가 재미있었는지 종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여긴 우리 정보팀이 자주 오는 단골집이네. 그래서 내가 오면 대개 이 정도의 안주는 미리 준비가 된다네. 어떤가? 여잘 불러서 같이 먹자고 할만큼 많은 양은 아니겠지?"

준이 해커계로 복귀한 건 그로부터 3일 뒤인 수요일 밤이었다. 준은 고종수가 원하는 도면을 구하기 위해 우선 북경대학 단말기에 접속했다. 거기서 잠시 하는일없이 놀다가 10분뒤에 준은 곧바로 홍콩에 있는 사설 비비에 접속을 시도했다. 이미 준에게는 여러 종류의 아이디가 크랙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홍콩 사설비비 단말기안에서 다시 적당한 아이디를 크랙한 준은 곧장 그 아이디를 사용해서 인터넷에 들어갔고,그곳에서 일본 온라인망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 뒤 곧바로 마쓰시다 연구소까지 치고 들어갔다. 물론 도면을 다운 받는 일은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쉬운일이었다. 준이 그날 작업을 하면서 걱정한 것은 단지 전화비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준은 다운 받은 도면을 디스켓에 카피한 뒤 고종수를 찾았다. 고종수는 전혀 의외라는 듯 준을 맞이했다. 고종수가 준이 입수한 도면을 자신의 20인치 멀티싱크로 읽어 들인 것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이때 종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이걸 무슨 방법으로 카피해 온 것일까…
그건 분명 마쓰시다의 초인기 품목인 Violet 전기밥솥의 설계도면이었다.

준이 정보팀 팀장을 만난 건 다음날 밤이었다. 물론 고종수가 만든 술자리에서 였다.
정보팀 팀장인 이혁수는 다소 꾸부정한 인상을 가진 중년남자였지만 하버드 유학파중 하나였다. 그는 한달전부터 비서실장 물망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로 상당히 지쳐있었다. 그는 준의 능력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이혁수는 간단하게 말했다.
"우선은 본사 전산실에서 근무해 보도록 하게. 그 후에 내 시간이 있으면 자네에게 적당한 자리가 있는가 찾아보겠네."
그날 밤 처음으로 종수와 준은 당구를 함께 쳤다. 그런 뒤 기계를 구입해 여관으로 들어갔다. 둘 사이의 고스톱판이 끝난 건 다음날 아침 7시였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 뒤 준이 일본에 날아온 것은 작년 3월이었다. 이때 김준은 제일 신문사 도쿄 특파원이란 헤드(Head:위장직업)를 가지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그의 임무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일본의 축적된 기술을 암암리에 훔치는 것은 준의 임무중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으로 날아오기 전에 준은 그룹 본사에서 개설한 8개국어 습득반에 등록해 일본어를 정책적으로 익혀왔기 때문에 적응하는 문제도 별무리가 없었다. 일본에서 지난 1년간 김 준이 훔친 정보는 모두 27종류에 달했다.

즉,준은 자기 자신을 (확고한 직업정신)을 가진 (전형적인 해커)라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뒤 보수를 획득했는데,그러한 그를 매장하겠다는 경고 메시지가 30분전에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것이다.
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신을 매장하겠다는 따위의 말장난이라니.
버러지 같은 놈. 내가 극동 최고의 해커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준은 자꾸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비록 구형이긴 했지만 펜티엄 프로세서를 채용한 준의 데스크탑 컴퓨터는 고종수가 준의 입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카드로 긁은 것이었다. 하드용량도 겨우 1.2기가 밖에 안되었지만 그곳에는 준이 아끼는 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 때문에 요즘 유행한다는 불루칩으로 업그레이드할 생각도 일부러 떨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어느 미친 놈이 하드디스크 안에다가 웃기지도 않은 메시지를 남기고 간 것이다.

준은 오염된 데스크 탑의 하드를 정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걸어 놓은 뒤 문제가 있는 있는 파일을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도중에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소리가 들려 왔다.
후루겔스 게이꼬였다. 메리노종의 니트를 즐겨 입는 여자.
"뜻밖이군. 이 밤중에 왠 일인가. 게이꼬양?"
가나기원의 하숙생중 홍일점이었던 게이꼬는 TV 도쿄의 취재부 기자였다.
수준급의 미모와 일본사회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는 안목. 게다가 이 미모의 아가씨는 좌절할 줄도 알았다. 뭐니뭐니해도 게이꼬의 매력은,남성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각선미에 있었다. 어쨌든,게이꼬는 한밤중에 준을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그저 가끔가다 하숙집 연못가에서 마주보고 앉아서 한일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죄송한데…이 디스켓을 해체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녀는 3.5인치 디스켓을 미소 지으며 흔들었다.
"해체? 패스워드를 찾아 달라는 뜻인가?"
"하이. 마끼 준사히라는 여자의 유서입니다만."
"글쎄….난 보시다시피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데?"

준이 싸늘하게 거절하자 게이꼬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분명 게이꼬가 느끼기에 이 한국인 사내는 지금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럴까…
불현듯 게이꼬의 뇌리에 며칠전 읽었던 도큐멘트성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 1996년 벽두를 시작으로 쓰쿠바 지역은 이웃 한국에서 날아온 산업스파이 문제가 떠들썩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른바 (파워유저 코리아)라고 불리는 이 집단은 마구잡이로 쓰쿠바 전지역을 휩쓸고 다녔고 급기야는 노무라 연구소와 외무성 온라인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현실적으로 이웃 한국 재벌들의 입장은 매우 다급한 상황이다. 앞쪽에는 일본과 독일이 골대를 막고 슈팅을 허용하지 않았는데,등뒤에서는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진공업국들이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는 게 현 한국상황이다. 이때문의 대다수의 한국 기업은 아예 정보팀을 일본에다 상근시키는 경우도 있다.
훔치던지. 아니면 박살내라.
이것은 파워유저 코리아의 숨은 임무중 하나다. ————

히풋 자신도 모르게 게이꼬는 미소를 흘렸다. 이 남자…설마 산업스파이는 아니겠지…
게이꼬는 일부로 아양을 떨었다.
"좀 봐주세요,네? 저 실은 내일 아침에 당장 필요한 내용이거든요."
게이꼬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구부리며 절을 한 뒤,이번에는 책장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노트북에 이상이 없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이 디스켓의 내용은 내일 아침 뉴스의 빅 스쿠프(Scoop;특종)가 될 겁니다."
게이꼬의 유래없이 정중한 말투를 듣자 준은 미처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준은 게이꼬가 건네주는 디스켓을 받았다. 게이꼬는 이미 방문을 닫고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이꼬가 건네준 디스켓에는 바이러스가 없었다. 유서 파일의 이름은 MK였고,백업 파일은 없다. 의아한 점은 MK파일이 6개의 디렉토리중 맨 마지막 디렉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5개의 디렉토리 안에는 파일이나 기타 비슷한 것조차 없다.
병적이군… 2HD 디스켓 안에 6개의 디렉토리를 만들어 놓다니…
준은 뷰(파일보기) 프로그램을 크로즈한 뒤 화면 상단부에 있는 디렉토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패스워드를 물어오는 박스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차 하는 심정으로 준은 다시 각각의 디렉토리에 진입을 시도해 보았다.
놀랍게도 디렉토리마다 패스워드가 걸려 있다. 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Mdir로 디렉토리를 카피해서 노트북으로 옮겨 담았다. 그렇지만 노트북에 옮겨진 디렉토리에도 패스워드가 여전히 걸려 있다. 이번에는 (암호축출 프로그램)을 구동시켰지만 이마저 디렉토리에 걸려 있는 암호가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한다. 준이 가지고 있는 축출프로그램은 이미 구형이 된 것일까. 아니면 암호 자체가 더 지능화된 것일까.
준은 생각을 바꾸고 마우스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전체 디렉토리의 크기가 노트북화면에 떠올라왔다. 4만 바이트 수준이었다. 고작 원고지 몇매의 내용이 들어 있을 성싶은데 왜 암호를 걸어 놓았을까… 더구나 이건 자살한 여자의 유서라고 하지 않았나…

준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노턴 데스크탑을 가동시켜 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매크로 현상이 복잡하게 발생했다. 그런 후에 노트북은 자동으로 다운이 되었다. 준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액정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매크로…?
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전 자신이 봤던 광경이 무엇인지 판별하려고 했다.
노트북을 다시 부팅시키자 이번에는 상위 5개의 디렉토리안에 X1부터 X5까지의 파일이 각각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흥미있는 일이었다. 뷰 프로그램으로는 새로 파생된 파일의 내용이 무언지 식별할 수가 없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야,준은 X1부터 X5까지의 새로 생성된 파일들이 유틸리티에 대한 방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니까 그가 노턴데스크탑을 구동시키는 순간 매크로로 생성된 5개의 파일은 (상용 유틸리티)의 작동을 방해하는 일종의 보안장치였다.
어느새 로저 워터스의 노래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추측하기에 노트북의 하드디스크안에도 새로 생성된 파일이 있을 것 같다.
역시 준의 생각대로 새로 생성된 파일이 하드디스크 안에서도 발견이 된다.
아마 이 유서를 남긴 여자는 노턴이 가동되면 매크로가 발생하는 프로그램을 디스켓안에 짜 놓았을 것이다. 峠 착상이자 능력임 셈이다.
준은 코볼을 펼쳐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암호를 크랙하는 파일을 만드는 것이다.

디렉토리가 열린 건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처음에 뷰 파일로 보았듯 맨 마지막 방에 MK라고 쓰인 문서 파일이 얌전히 잠을 자고 있다. 아마 문제의 유서일 것이다. 준은 유서를 읽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를 구동시켰다.
하지만 이 역시 다시 암호가 걸려 있다.
준은 다시 암호크랙용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메인 시스템을 엑세스하는 것이 아닌 이상 소규모의 암호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MK 파일에 걸려있는 암호는 러브love라는 단어였다. 준은 파카 만년필을 꺼내 벽에다가 러브를 써놓았다. 그건 준이 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게이꼬는 막 자신의 방을 나왔다. 어느새 두시간 가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 한국인 사내가 암호를 찾아냈는지 모른다.
간혹 게이꼬는 사내에게서 이상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곤 했다. 한번쯤이면 러브캡슐로 가자고 말을 걸어올 텐데…
사내가 그런 말을 해도 게이꼬는 싫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게이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카푸치노 커피를 좋아할까…
준은 게이꼬가 나타나자 곧바로 해킹한 디스켓을 내밀었다. 게이꼬는 붉게 물든 얼굴로,이 카푸치노와 쓰시(초밥)는 자신이 직접 만든거라고 강조한 뒤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고꼬니 가이데…라고 말했다.
메모지에다가 암호를 적어 달라는 뜻이다.
준이 암호를 적어주자 게이꼬는 그것을 잠시동안 들여다보았다.
LOVE…
순간 게이꼬는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에서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게이꼬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상 준은 암호에 대해 할말이 없었다. 암호는 말 그대로 암호인 것이다. 준이 자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않자 저절로 게이꼬의 이마는 찡그러진다. 게이꼬는 쌀쌀하게 준의 방을 나섰다. 이지워크 향수 냄새를 방안 가득 남겨 놓고.

같은 시각 짙은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서울 밤거리를 질주하는 중형택시가 있었다. 고종수. 제일그룹 정보팀 팀장인 고종수는 지금 밤늦게 퇴근을 하다가 긴급히 본사로 뒤돌아가고 있었다.
고종수가 본사 현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수위가 인사를 했지만 종수는 아는 채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뛰어 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종수가 본사 33층 꼭대기에 있는 정보팀에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한일수 대리는 담배를 뻑뻑 피며 종수를 맞이했다. 종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딘지 알아냈나?"
"글쎄요 저 그게 말입니다만…"
"빌어먹을. 한대리는 빨리 정보팀을 비상소집하게. 난 미스 탁에게 가 있을테니까."
종수는 자신의 발마칸 코트를 사각이며 섹션 V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간 근무자 중 한 명인 탁선미 양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서 종수에게 인사를 했다. 이미 탁선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된 겁니까? 선미씨."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탁선미는 종수의 굳은 표정에 겁을 먹고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해킹된 암호코드가 모니터 중앙에 올라왔다.

== LOVE ==

종수는 눈앞이 아득해 질 정도로 긴 충격을 받았다. LOVE는 제일중공업과 국방부 사이를 연결하는 사라사테 시스템의 메인암호였다. 어느 미친 놈이 그 암호를 해킹하고 제일중공업에 침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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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나쓰에와 심각한 데이트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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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에 준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에 들렸다. 임무가 완수되면,자료의 내용이나 질에 관계없이 고종수가 220만원의 보너스를 송금해주기 때문이다.
준은 습관적으로 수금된 돈을 스미모토 신탁은행 구좌로 옮겨 놓기 위해 현금인출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돈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세번씩이나 재확인했지만,준의 구좌로 떨어져야 할 220만원의 송금은 지연 되고 있었다. 창구의 아가씨는 싸늘하게 굳어 가는 준의 표정에 겁이 났는지 스미마셍 스미마셍 고개를 숙인다.

오후 5시. 준은 도쿄 돔에서 야구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곧 소나기라도 내릴 것 같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야구는 오리온즈팀이 7점차로 지고 있었다. 본사와 핫라인이 연결이 된 것은 오리온즈팀이 4점짜리 만루홈런을
다시 두들겨 맞을 때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잖아?"
한쪽으론 핸드폰을,다른 손으론 네스카페를 마시며 준은 다그쳤다.
"전화를 회피한 점은 사과하겠네…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어."
고종수의 음성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무슨 일인데 그래? 롯데 오리온즈가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큰 문젠가?"
반은 농담이었을 것이다. 준의 말이 끝나자 종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본사 중공업 터미널이 뚫렸네."

준은 네스카페를 들이키다 말고 그것을 떨구었다. 차가운 커피가 준의 바지를 타고 흘러 내렸다.
"뭐라고 했나. 방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네. 어제 밤에 중공업 터미널이 뚫리면서 국방부 병참사령부까지 개방된 모양이야."
"그럴 리가?!"
갑자기 커피 맛이 확 달아났다. 준은 불현듯 머리가 아파왔다.

이때 나쓰에는 검정색 나염을 하늘거리며 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남자야… 야구장에서 만나자면서 좌석표만 달랑 보내오다니… 나쓰에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외국인과의 데이트는 난생 처음이었다. 특히 한국인 남자와는…

한국인 남자는 일본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골격상의 문제나 피부색도 일본 남자와 구별이 안된다. 일본 남자처럼 보이는 외국인과의 데이트.
아마 다른 여자들은 이 기분을 모를 거다. 이걸 몰래 데이트라고나 할까.

나쓰에는 길게 호흡을 한번 쉬더니 준의 어깨를 툭 쳤다.
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쓰에를 돌아다 봤다.
"아 나쓰에양…"
"어머,무슨 일…왜 그러세요?"
"아.아닙니다. 늦으셨군요…"

나쓰에는 히풋 미소를 흘리며 준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가끔 보는 상표였다. 핀란드제일 것이다. 에릭슨이라 했던가. 그녀의 입에서는 잔잔하게 구강향수냄새가 흘러 나왔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 가요?"
"아닙니다.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지 않겠읍니까?"
나쓰에는 왠지 이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조명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몰라. 나이트게임으로 열리는 프로야구 경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종수는 준과 나쓰에의 대화를 전화를 통해 듣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이 녀석은 지금 데이트중이란 말인가?
종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정보팀 팀장이 된 이후로 종수는 하루에 3갑을 빨아대는 해비스모커가 되었다. 다시 준과 여자사이에서 일본어가 오고 갔다. 그런 뒤 잠시 잠잠해 진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난 것으로 판단한
고종수는 입을 열었다.

"러브라는 암호를 알고 있나?"
"러…브…?"
"러브는 사라사테 시스템의 패스워드네."

준은 힐끔 곁눈으로 나쓰에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러브)라면 게이꼬가 건네 준 디스켓에 걸려 있던 암호다.

우연일까. 왜 하필 게이꼬의 암호가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와 동일한가…<
준은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 송금이 불발된 이유나 설명해주게."

이때 라이온즈의 강타자 데스트라데가 만루 홈런을 친 모양이다. 갑자기 나쓰에가 간지러지게 환호성을 질렀다. 준의 등을 때리면서.

종수는 울컥 화가 났다. 함성소리 때문에 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저쪽에서는 한대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구경기가 끝나면 이야기하세. 이러다간 아무 일도 안되겠군…"
그런 뒤 종수는 와락 전화수화기를 놓았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한대리는 종수의 책상 옆에 멈추어 서 있다. 한대리는 말했다.
"분명합니다. 교수님의 전화번호가 침투루트로 이용되었습니다."
종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발마칸코트를 걸쳤다.
"확실한가?"
교수님은 바로 김준의 암호명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침투 전화라인을 역추적해 보니까,사용된 건 김준의 핸드폰이었습니다. 방금 부장님이 통화했던 그 핫라인을 통해 제일중공업 단말기가 뚫린 겁니다."

믿을 수가 없다. 종수는 머리가 어질해졌다. 준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친구가 제일중공업을 뚫고 들어올리는 없었다.
누가 김 준의 핸드폰 암호를 풀어 해치고 이용했을까…

"알겠네. 한시간 후 다시 통화하기로 했으니까 이 문제는 당분간 자네만 알고 있도록 하게…"
"알.알겠습니다 부장님."
종수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정보팀 직원들이 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말 없이 종수를 따라 섹션 V로 걸어갔다.

야구는 롯데 오리온즈가 데스트라데에게 만루홈런을 두방이나 내 주더니 결국 96년 시즌 개막전을 17점차로 대패했다. 절규하는 롯데 팬 사이에서는 준이나 나쓰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쓰에는 스타킹을 벗으며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막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나쓰에가 욕실에 들어갈 차례였지만 왠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럴까. 저 남자는…

아까 나쓰에가 들은 건 분명 한국말이었다. 나쓰에는 오래전부터 조총련계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몇 마디의 한국어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때 나쓰에는 한국어를 교양과목으로 선택하기도 했으니까.

나쓰에는 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준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쓰에는 그런 사내의 모습에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만나자구 해 놓고선 잠을 잔다 이 사내는.

준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로부터 2시간 뒤인 밤 10시 무렵이었다. 나쓰에는 가만히 벽에 기대선 채로 핸드폰이 울리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다시 요란하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자 침대에 누워있던 준은 잠이 깨었다. 준은 약간 아픈 머리로 핸드폰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종수였다.

준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놀랍게도 고종수는 김준을 의심하고 있었다.

준은 핸드폰 스위치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쓰에가 보이지 않았다.
준은 나쓰에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나쓰에는 TV 옆에 서 있었다. 히풋 미소를 흘리며 나쓰에는 준이 더듬거리는 행동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도 참 이상해…별일이지. 한편으론 화가 나면서도 저 남자가 잠자는 걸 2시간동안 지켜보고 있다니…

준은 슬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나쓰에는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줄 알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 남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러더니 옷을 주절주절 찾아 입는다. 나쓰에는 황당했다.
"어머, 왜 그러세요? 갑자기?"

"지금 가야겠소. 미안합니다 나쓰에양."
준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면서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0시를 막 지나고 있다. 이 시간에 호텔에 들어와 잠을 퍼자다니.
나도 미쳤군…
준은 재빠르게 옷을 입은 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헌데 가만히 보니까 여긴 호텔이 아니다.

나쓰에는 분통이 터져 준을 따라 붙었다.
"이럴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구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 방에 온 게 아닌 가요? 헌데 지금 이 행동은 뭐죠…?"

그러고 보니 여긴 호텔이 아니라 나쓰에의 방인 것 같았다. L자 구조의 맨션. 준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곰인형이 방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방구경은 대충 한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나쓰에양…"
준은 대충 인사를 한 뒤 맨션 밖으로 뛰어 나왔다.

나쓰에는 황당했다. 이런 멋없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쓰에는 자신의 방을 남자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다. 준이 그 유일한 남자였는데.
나쓰에는 울화통이 터져 곰인형을 사정없이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준은 다시 한번 백미러를 응시했다. 도쿄 외각에 있는 아담한 맨션…
준은 맨션 주소를 머릿속에 외운 뒤 자가용의 시동을 걸었다.
게이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준의 차가 스타터하자 회색 싱글재킷을 입은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 뒤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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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바로 눈 앞에서 후루겔스 게이꼬를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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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겔스 게이꼬는 동료들과 함께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벌써 밤 11시었다. 비까지 내리니 오늘 같은 날은 술마시기에도 좋았다.
"어쩜…오늘 아침에 그 뉴스는 특종이었다 애."
미도리가 다시 그렇게 말하자 게이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니까. 흥!"
그런 뒤 무스탕 재킷 안에서 게이꼬는 히쭉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분홍색 입술은 그때 V자 형으로 요염하게 오므라들었다.

게이꼬의 야심은 TV도쿄의 메인 앵커 자리였다. 아니 게이꼬는 사실 재능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겐 여러가지 약점이 있었다. 가장 큰 약점은 PD와 함부로 잠을 자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PD들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게이꼬의 미모를 흠모했지만 그녀에게 잠을 자자고 말을 붙이는 용기 있는 PD는 없었다.

게이꼬는 그게 싫었다. 요즘 들어선 못생긴 걸로 유명한 곤바야와 함께 잠을 자고 싶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메인 앵커 타이틀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못생긴 걸로 유명한 곤바야 제작1부장은 지금 막 TV도쿄 데스크에 앉아서 교양 프로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 한통화 없는 것을 보니 이 교양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또 시청률 경쟁에서 깨진 모양이다. 이런 프로는 1년뒤에야 전화가 걸려 올 것이다. 아저씨,1년전에 그거 재방송 안해요? 라고…하면서 어느 정신나간 놈들이나 전화통을 두들겨댄다.

"살맛 안 나는 군…"
곤바야는 히쭉 뇌까리며 데스크 실을 빠져 나왔다. 하시모토 일행은 이미 TV도쿄의 최대 인기프로인 (사랑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청자도 참 가지각색이다. 정신병자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포르노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고 웃고 하다니 말야. 음 역시 포르노인가…

곤바야가 제작 1실로 들어왔을 때는 낯모르는 남자가 성큼성큼 복도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싸늘하게 생긴 게 이 근처에선 본적이 없는 남자다.
신참 탤런트일까…곤바야는 무의식중 발길을 돌렸다. 그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가 보도 제작1국입니까?"
"예 그렇소만…"
"제 이름은 김준입니다. 한국 제일신문사 도쿄특파원이죠."
준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이상하게 못생긴 그 뚱보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단추 만한 눈알로 명함을 쳐다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지요? 귀사와 저희는 기사제휴관계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실은 후루겔스 게이꼬 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숙집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 게이꼬 리포터를 찾으시는 군요?"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게이꼬양이 오늘 아침에 보도한 뉴스를 볼 수 있을까 합니다. 제가 운이 나쁘게 그 보도를 놓쳤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니까 잘 안된다. 준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곤바야는 그런 준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한국에도 마끼 준사히의 팬이 있군요? 뉴스에 나온 그 죽은 여자 말이죠."
곤바야가 그렇게 말하자 준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팬이라니…
망나니 여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 하이. 안녕하세요. TV 도쿄의 후루겔스 게이꼬입니다. 오늘 전 구보 부동산의 외동딸이 자살한 이즈해에 와 있습니다. 예 아시는 군요. 마끼 준사히양의 자살 사건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서 마끼 준사히의 알려지지 않은 유서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자살하기 하루 전에 이 디스켓 안에 자신의 유서를 작성해 놓았습니다….
아 제 뒤에 보이는 화면은 녹화화면입니다. 전 이 유서 내용을 어젯밤에야 입수를 했고,미처 문제의 장소로 찾아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등뒤에 보이는 화면은 일주일전에 방영된 문제의 요트폭발 사고장소입니다. 음 사실 감이 안 난다고요? 후후 저 후루겔스 게이꼬는 사건을 쫓아갑니다… 장소가 아니죠. 네… —–

준은 녹화된 화면을 보았다. 별 이상한 점은 없다. 게이꼬의 말대로 디스켓 안에는 마끼 준사히의 유서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준은 어젯밤에 유서 내용을 읽지 않았었다. 유서 내용도 별 이상한 게 없었다. 그저 마끼 자신이 사귄 남자친구들의 주소록이라고 할까.

마끼의 난교파티에 참석한 남자 중에는 몇몇 알만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저 그 정도 수준이었다. 죽기 전에 물귀신처럼 자신과 사귀었던 남자들을 끌고 가려고 했는지 모른다. 마끼는 미인이 아니었다.

준이 녹화된 화면을 모두 시청하자 곤바야가 준의 등을 슬쩍 건들었다.
"게이꼬양은 미나미 주점에 있을 겁니다. 아까 보니까 오늘 거기서 고교 동창생 모임이 있다고 하더군요."
준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실례지만 게이꼬의 디스켓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거는…"

곤바야는 난감했다. 곤바야 역시 그 디스켓에 유서만 작성되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게이꼬는 유서밖에 들어있지 않다고 했지만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 곤바야는 뉴스 취재원이 어딘지 궁금했다.

"디스켓은 게이꼬가 가지고 있을 겁니다만…사실 저도 그 디스켓을 살펴보고 싶었는데 게이꼬가 싫어하더군요. 워낙 독특한 여자라서리…"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준의 자가용이 미나미 주점 앞에 멈춘 것은 밤 11시 47분이었다. 준은 신문지로 비를 피하며 미나미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꼬는 아직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문득 준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게이꼬는 긴장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봤을까…
게이꼬는 손을 번쩍 들어서 흔들었다.
"하이. 안녕하세요?"

준은 성큼성큼 게이꼬에게 걸어갔다. 게이꼬의 동료들은 무슨 일일까 하고 의자에서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개중에 몇명은 준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대부분은 노처녀들이었으니까,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긴게다.

준은 비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어설프게 인사를 했다. 그런 뒤 게이꼬에게 눈짓을 보냈다. 게이꼬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준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왔다.

주점 밖은 천둥번개까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둘은 주점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게이꼬가 물었다.
"다급한 표정이네요? 무슨 일이죠?"
게이꼬는 걸치고 있는 무스탕에 빗물이 묻을까 재빠르게 털기 시작했다.
"미안한데,그 디스켓을 다시 볼 수 있겠나?"

소나기가 처마 밑에까지 사정없이 튀어오자 게이꼬는 무스탕을 포기했다.
"마끼의 유서가 기록된 디스켓 말입니까?"
게이꼬는 의외라는 듯 준의 눈을 응시했다. 거리가 가까웠는지 이지워크 향수 냄새가 준에게 느껴졌다. 둘은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게이꼬는 호흡이 가파졌다.

"난처한 일이 발생했나 보군요…"
게이꼬는 불쑥 폭우속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더니 씩씩하게 팔운동을 한다.
"궁금한데요? 그런데 어쩐다죠? 지금 그거 저에게 없어요. 뉴스 끝내고 난 뒤 방송국 자료실에 두고 나왔거든요. 급하시다면 자료실에 전화를 넣을 수도 있는데."

준은 특제 와코루 수건을 게이꼬에게 내밀었다.
"그래주시겠소?"
그녀는 와코루로 비에 젖은 머리를 닦는다. 사실 비를 맞으며 빗방울을 닦다니 피차 일반이다.

"그렇게 하죠 뭐. 친구들만 없다면 제가 갈 수도 있겠는데…"
"그럼…기다리겠소."
갑자기 준이 그렇게 말하자 게이꼬는 기분이 묘했다. 기다리겠다니. 무슨 뜻일까…오늘은 어쩐지 이상하다. 갑자기 장난스럽게 내리는 이 폭우도 심상치 않고.

게이꼬가 나온 건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둘은 준의 자가용에 올라탔다.
하지만 자가용은 시동이 걸리지 않고 있었다. 준은 별안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회색 싱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준의 자가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준의 자가용 옆에 멈추더니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쳐 보였다.
그러더니 남자는 말했다.
"국가 안전기획부 도쿄 주재원입니다. 저와 함께 잠깐 대사관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준의 이마는 바짝 오므라들었다. 준은 사내를 올려다보다가 게이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도로 너머에 지하철입구가 보였다. 준은 슬쩍 게이꼬에게 턱짓을 했다. 게이꼬 역시 운전석 창너머에 서있는 회색 신사복의 남자를 쳐다 보다가 준이 주는 턱짓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이제 막 운전석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게이꼬는 조수석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곧이어 준이 뛰어 나갔다.

임춘해. 임춘해는 여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안기부의 최고 베테랑이었다. 이제 나이가 40대에 접어든.
임춘해는 두 남녀가 반대편 도로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회색 싱글 정장의 안쪽 포켓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춘해는 권총을 꺼내지 않았다.

새벽 0시 32분. 지하철 역구내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이꼬는 플랫폼쪽으로 뛰어가다가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 듬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다 보았다. 준이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정말?"
준은 게이꼬의 옆에 섰다. 게이꼬는 준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다…
다시 묘한 분위기. 주위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동경역에서 내리십시오. 그런 뒤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게이꼬는 무의식중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영화같은 장면이다…
게이꼬는 준을 힐끔힐끔 돌아보며 플랫폼을 통과했다.

춘해는 여차하면 권총을 뽑아 들 양으로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지하철을 잡아탔을까…
춘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통로로 진입했다. 순간 날카로운 주먹이 춘해의 얼굴을 가격해왔다.

—퍽—

침을 뱉었다. 이빨 두개가 부러져 나가 있다.
…인간 임춘해가…이게 뭔가…
춘해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쳐다보았다. 불쑥 화가 났다. 지금 심정이라면 놈에게 권총 몇십발 쏘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춘해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회색 양복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춘해는 통로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양복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상운을 호출했다.

이상운. 안기부의 신참 에이전트인 이상운은 방금 나루미의 상체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빌어먹을 놈의 핸드폰은 꼭 오르가즘이 시작될때마다 울린단 말야. 이상운은 허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댔다. 나루미는 아쉬운 듯 상운의 밑에서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루미는 이상운이 오늘 영사관 앞에서 만난 대학 1학년짜리 여자였다.
섹시하긴 했지만 머리가 나쁜 여자. 지금 나루미는 곰인형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녀의 하체는 알몸이었다.

게이꼬는 지쳐 있었다. 바짝 피곤한 모습의 샐러리맨 몇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한밤중에 여자 혼자서 지하철역 구내에 들어오다니.
게이꼬는 그제야 자신의 미니스커트가 빗물에 젖어 허벅지 위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사내들은 그런 게이꼬의 하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게이꼬는 서둘러 자신의 미니스커트를 아래로 내렸다. 그런 뒤 정신을 집중할 양으로 핸드백에서 보그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정말 그 디스켓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게이꼬로서도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었지만 아직 채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게이꼬는 의아했다. 이미 10분이 지났는데…지하철은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다시 2분쯤 흐르자 그제야 터널에서 들어오는 지하철이 보였다. 게이꼬는 지하철이 멈추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열리는 문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지하철에 올라타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면서.

준이 게이꼬의 모습을 본 것은 그 순간이다. 준은 안전기획부에서 나왔다는 남자의 얼굴을 강하게 올려 친 후 지금 막 구내로 뛰어 들어왔다. 그때 지하철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녹색 불빛을 전멸하며.
순간 준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분명 긴좌銀座선 지하철이 아니라 동서선東西線 지하철이었다.
니혼바시日本橋역을 관통해야 할 지하철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준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게이꼬에게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 히스테릭칼한 음성…올라타는 순간 게이꼬는 준의 음성을 들었다.
게이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지하철문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일순간이었다. 게이꼬가 다리를 빼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지하철 문에 보기 나쁘게 그대로 끼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바로 지하철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이꼬의 몸은 달리는 지하철과 함께 허공으로 붕 떴다.

4초 뒤. 게이꼬의 하체는 깔데기형으로 좁혀져 있는 터널의 벽에 그대로 부딪치더니 파편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준은 무지개 빛 선열을 토하며 게이꼬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모습을 보았다. 눈 앞이 캄캄했다. 사람들은 모두 괴성을 지르며 사고 현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준은 그것을 자각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돼가고 있다…..

간다神田역 천장에 설치된 폐쇄카메라 18호는 사고가 발생한 장소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르르…소리를 내며 좌우로 왕복을 시작했다.
분명 폐쇄회로 카메라는 김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 시각. 하야시 후꾸오는 어둠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다가 마일드 세븐을 집었다. 이윽고 하야시는 담배를 입에 물고 터보라이터의 불을 당겼다.
치직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도 불꽃이 일어났다. 머리를 감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넘어서인지 하야시의 손끝은 온통 비듬으로 절어 있었다.

하야시는 다시 머리를 긁었다. 그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그의 등까지 화려하게 내려와 있었지만 냄새가 많이 났다. 하야시는 히쭉 뇌까렸다.
사람을 죽인 건 오랜만이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말이다.

하야시는 자신의 다락방 전면에 설치된 7개의 모니터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하야시의 할머니가 잠꼬대를 할 시간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전범으로 총살당한 것을 온통 가슴에 한처럼 묻고 살았다. 하야시는 그런 할머니가 밉지도 싫지도 않았다. 하기야 하야시는 할머니의 인생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야시는 다시 한번 6번째 모니터 화면을 주시했다. 그 놈–키가 이상하게 크고,머리에 무스를 잔뜩 처바른 그 한국남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는 듯 당황하면서 말이다.

하야시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방석에서 일어 났다. 그런 뒤 기타를 집어 존 레논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런 하야시의 등 뒤로는 (파워 유저 저팬)이란 글자가 일본어 배너로 프린팅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는 존 레논의 전신사진에는 (작지만 귀여운…살인마 BBS) 라는 글자가 매직펜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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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꼬, 위기에 몰린 김준을 구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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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섹션 V실의 월드타임 테이블은 서울 시각을 새벽 2시로 기록하고 있었지만 18명이나 되는 전 정보팀 직원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이틀째 강행군이다.
고종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컴퓨터팬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틈바구니에서 팩시밀리 전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정보팀의 메인 데스크는 일일이 걸려오는 전화에 답변하느라 여직원 6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핑크색 유니폼의 단발머리 여직원은 그중 가장 중요한 전화를 담당했다. 그녀가 김준의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2시 08분 경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한대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한대리는 총알같이 섹션 V실로 달려갔다.

이미 고종수는 전화수화기를 들고 연결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분명 김준이었다. 종수는 울컥 화가 나서 외쳤다.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준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종수는 타임테이블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3초다… 종수는 탁선미에게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제야 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매우 낮았다.
"안기부가…왜 나에게 따라붙은 거지?… 말해봐라… 종수야."
제길…
종수는 순간적으로 눈 앞에 캄캄해졌다.
역시 안기부까지 붙었단 말인가…?

종수는 힐끔 유광남 과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제자리로 옮겼다.
이젠 더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유과장에게 손짓을 했다. 유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프린터 용지를 종수의 책상 위에다 펼쳤다. 종수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19일 0시 49분 25초. 사라사테 시스템 개방…동 02시 31분 17초 국방부 메인 컴퓨터 개방…동 34초 병참사령부 개방…동 48분경 합참본부 중앙자료실 개방. 동 59분 17초 대전 공군사령부 메인 컴퓨터 개방…"

후우… 종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더이상 제대로 읽어 나갈수가 없을것 같았다. 어느덧 앞이마 어딘가에서 뿌옇게 무엇인가를 밀려오면서 종수의 신경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종수는 말했다.
"그런 뒤 19일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네… 벌써 아홉군데나 뚫렸어! 대한 민국 국방부 컴퓨터는 온전한데가 없이 모두 뚫렸단 말야!"

"설마…"
다시 수화기에서 준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종수는 알았다. 준이 지금 어떤 기분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회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모두 네놈 핸드폰 암호가 해체된 이후에 발생했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우리 둘이 사용하는 이 핫라인이 침투 루트로 이용된 거야. 게다가 놈은 네 놈 아이디를 사용해서 침투했단 말야,이 밥통아!"
"뭐라고?"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안기부가 너에게 붙은 거야! 어젯밤 우리 둘의 전화를 도청하고 널 따라 붙은 거란 말야! 그런데 난 이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다니. 허허…"

이때 유과장이 무엇인가 손짓을 했다. 종수는 그것을 무시했다. 한대리는 종수를 쳐다보다가 유과장에게 걸어가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한 짓인가? 사라사테 건 말야."
"….."
"그럼 우리 둘만 사용하는 핫라인이 어쩌다 이용된거지? 뭔가 이유가 있어야 나도 자넬 믿을게 아닌가?"
"모르겠네. 나도…"

유과장은 한대리의 말에 불쑥 화가 났다. 유과장의 생각은 김준을 잡아 들이는 것이었다. 일이 더 커지게 전에 말이다. 하지만 한대리는 고종수에게 모든 걸 맡기자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과장은 한대리의 얼굴을 한방 처 올리려는 욕구를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이때 고종수가 다시 탁선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유과장은 입이 벌어졌다.

그것은 전화추적을 중지하라는 지시였다. 그런 뒤 고종수는 다시 싸인을 바꾸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대리가 급하게 교환기에 부착된 스위치를 올렸다. 도청방지 장치였다. 유과장은 갑자기 모든 게 썰렁하게 느껴졌다.
이젠 갈 때까지 갔구나. 제일그룹 정보팀은 미친 거야. 안기부가 도청하는걸 알면서도 방해를 하다니…

종수는 전화버튼 옆에 붙은 다이오드가 점등하는 것을 응시하면서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좋아. 이제 솔직히 말해보게. 뭐 이상한 점은 없었나? 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말야…"

"글쎄…한가지가 있다면…"
"뭔가 있긴 있었나?"
"그날 사라사테가 뚫렸을 때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여자가 나에게 암호 하나를 해킹해 달라고 부탁해왔네…자살한 여자가 유서를 디스켓안에 남겼다는데,암호가 걸려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러브라는 암호였네."
종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라사테 시스템에 걸어놓은 암호와 동일하다. 종수는 식은 땀이 났다.

"그랬었군. 그럼 그렇다 치고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후루겔스 게이꼬 말인가?"
"그래. 너에게 디스켓을 건네준 게이꼬인지 뭔지 하는 여자 말야."
"방금 죽었네."
"뭐?"

종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
"그래. 방금전 지하철 역에서 즉사했어. 이상한 사고였네. 아무래도…"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었나?"

준은 대답이 없었다. 종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라이터를 찾았다.
그러자 재빠르게 한대리가 라이터 불을 당겨 종수의 코앞에 갔다댔다. 한대리의 손도 낙엽처럼 떨리고 있었다.
"누구야? 네 정체를 아는 녀석이?"
"모르겠네. 그 전에… 디스켓을 해킹하기 전에 누군가가 날 매장하겠다고 하는 경고문을 내 컴퓨터에 인스톨한적이 있었네. 난 바이러스인줄 알았지…"

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비로소 종수는 무엇인가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느 놈이 김준의 정체가 알고 있고 있는 것이다. 김준이 파워유저 코리아라는 것을. 파워유저코리아…일본내에게 정보를 훔치는 한국인들…
놈은 그 사실을 알고 김준에게 게임을 걸어왔던 것이다.
정말 운이 나쁘다. 자네는….

종수는 입안이 바짝 타 들어갔다. 이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종수가 할말을 잃고 가만히 있자 준이 말했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지난 이틀동안의 일은 아무래도…"
종수는 벌래 씹은 듯한 표정으로 준의 말을 잘랐다.
"알았네. 자넬 의심한 거 미안하네. 난 또 혹시나 했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종수는 유과장을 바라보았다. 유과장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송환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종수는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김준은 종수의 친구였다. 종수는 허탈하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뒤 종수는 속삭이듯 말했다.
"도망가게…"

유과장은 얼굴이 빨개진 채 이번에는 종수에게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종수는 유과장을 무시했다. 한대리 역시 손으로 싸인을 보냈지만 종수는 본체만체도 하지 않았다. 종수는 말을 계속했다.

"김준…내 말 잘 들어. 잡히지 말고 도망 다녀야 하네. 하지만 네가 벌여놓은 일은 네놈을 해결해야 해. 우리 한두번 이런 경험이 있는게 아니잖아.
그렇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놈을 찾으란 말야. 그래서 박살내란 말야, 이 바보자식아!"

2시 17분 정각. 종수는 다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보팀 직원들이 모두 종수에게 몰려와 그를 쳐다보았다. 종수는 그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이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수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 뒤 고개를 쳐들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02시 30분 정각에 사라사테 시스템을 옵라인으로 차단하고 모두 퇴근한다. 섹션 V는 그 시각 이후 해체되니까 그리들 아시오!"
갑자기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광남 과장은 눈이 대문짝만하게 커졌다.
"종수씨. 이건 위험한 방법이요. 옵라인이라뇨?"

유과장은 종수보다 7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보팀 통설권은 종수에게 있었다. 종수는 유과장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전직원을 향해 말했다.

"내 말대로 하시오. 중공업 전산라인은 오늘부터 모두 폐쇄되니까 그리들 아시오. 그리고 앞으로 섹션 V는 유과장님이 여직원 하나 뽑아 담당하시오. 아시겠소 모두들? 지금 이 시간 이후 사라사테 시스템 건은 아예 없던 일로 합시다."

——-
종수는 화장실로 향했다. 한대리가 엉거주춤거리며 종수의 뒤를 따라왔다.
종수는 슬쩍 손으로 한대리를 밀쳤다. 피곤하니까 잠시 날 놔두게…
한대리는 헤프게 미소를 지으며 꾸벅 절을 했다. 한대리에게 있어 고종수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나이 29살에 부장대우…그런 인물은 제일그룹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런 고종수가 지금 화장실에 가고 있다.

종수는 양변기에 대고 바지 자크를 내렸다.
안기부에 맡깁시다. 사건이 커지기 전에…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이미 고종수는 박이사에게서 안기부가 달라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박이사가 결정한 판단도 매우 합리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고종수는 인정했다. 이제부턴 모든 것을 안기부에 맡기는 것이다….

종수는 박이사 못지않게 자신의 판단력도 정확하다고 믿고 있었다. 김준이 사라사테 시스템에 침투할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다. 어떤 개자식인지는 모르지만…그 일본놈은 사라사테 시스템 외에는 접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사라사테 시스템만 묶어 놓으면 더이상 계열사 단말기가 뚫리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종수는 세면대 거울을 쳐다보며 추리를 했다.
해커는 다른 것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단지 국방부만 노리고 있는 것일까?
종수는 한기가 일어났다. 밤바람이 써늘하게 화장실 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종수는 수도꼭지를 틀고 차가운 물에 자신의 손을 담갔다.

——–
준꼬는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며 듄을 하고 있었다. 듄 최후의 전쟁은 준꼬가 지금까지 해 본 오락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준꼬는 숨이 가프게 마우스를 끼릭했고,온 몸을 떨었다. 엄마는 그 옆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끼아 하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준꼬는 가나에의 숙면을 의식하며 자신의 입을 막고 비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새벽 2시 30분이었다. 준꼬는 또 다른 행성 하나를 정복하다가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걸 느꼈다. 준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휠체어 버튼을 눌렀다. 윙윙 소리를 내며 휠체어는 방향을 바꾸어 문쪽으로 갔다.
준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그 아저씨였다. 그 한국인 아저씨…

준꼬는 다시 비명이 나오려 하는 걸 참았지만 이번에는 잘되지 않았다.
"아저씨야,엄마…그 아저씨가 오늘도 밤늦게 놀다 왔나봐…"
준꼬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나에는 깊숙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수밀도 높은 가슴은 아이보리색 잠옷안에서 조심스럽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이상운은 나루미와 함께 가나기원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나루미도 폴짝거리며 이상운을 뒤따라 내렸다. 이상운은 기가 막혔다. 쳇…머리 나쁜 건 마를린 몬로를 뺨치는 군. 이 여자는…

"차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나 지금…"
"아저씨 정말 대사관 직원이야? 한국 대사관?"
"그렇다니까 나참. 나 대사관 헌병이다 헌병."
"지금 누굴 잡을 건데?"

나루미가 다시 그렇게 묻자 이상운은 뺨이라도 한대 올려 쳐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쉬워서 데리고 온 건데… 후… 이상운은 슬며시 나루미의 스커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이 여잔 역시 팬티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이게 마음에 든단 말야.

이상운은 체격조건이 좋았다. 안기부에 발탁되려면 우선 체격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첫째조건이듯 이상운의 체격은 실버스타 스텔론을 무색케 했다.
게다가 오늘은 비번이었지만 권총까지 차고 나왔다. 여차하면 한방 날리겠다는 심산으로 이상운은 가나기원의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어가면서 이상운은 수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짤막한 목소리로 나루미가 떠드는 게 들렸다.
"화이팅 아저씨. 여기로 몰아주세용~~"

이상운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쩐지 자기가 정상이 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일본 여자는 분명 정상일 터이지만 말이다.

준은 펜티엄 본체에다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커피포트의 물을 모조리 컴퓨터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바쁠 때 흔적을 지우는 것은 이 방법이 최고였다.

그런 다음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케이스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방안을 다시 둘러 보았다. 준은 씁쓸했다.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이틀전 그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데 준은 그저 우습게만 생각을 했었다.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번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른 상황이다.

지금은 실제상황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가 준을 파멸시키려고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은 마지막으로 콤퍼넌트에서 로저 워터스의 음악테입을 꺼내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뒤 방 문을 열었다.
준꼬 그 꼬마아가씨는 아까 내가 귀가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제발 경찰에게 내가 돌아온 시각을 말하지 말아야 할텐데… 준은 자신의 발을 문지방 너머로 옮겼다.

순간 이상운은 날카롭게 자신의 주먹을 김준을 향해 날렸다. 춘해 형이 시킨대로 우선 때려눕히고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주먹은 꼴 나쁘게 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김준은 어느새 2미터 뒤쪽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이상운의 입에선 저절로 농담이 나왔다.
"이런… 역시 센츄리온이었나?"
준도 이상운의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남자는 오랜만이군 친구."
"어쭈구리?"

이상운도 지지 않는 성미라 그렇게 되받아 쳤지만 실상 머리속은 날카롭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복도의 폭과 준이 도망갈 문이 있나 없나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은 없었다.

이상운은 비로소 여유를 갖고,어깨를 들썩들썩 거렸다.
"얌전히 날 따라 오시죠. 김준씨."
준은 긴장했다. 아까 지하철역에서 만난 놈과는 분명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이 놈은.

"따라가면 날 무슨 죄목으로 집어넣을 작정이요?"
"내가 알겠소? 춘해형이 잡아오라니까 잡아가는 게지."
"안 따라가면?"
"그럼 심각하지. 형씨는 우리 안기부하고 원수를 질 테니까."
준은 피식 웃었다.
"그럼 한판 붙읍시다… 안기부 양반."
그렇게 말한 뒤 준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이상운도 어느새 럭비선수 포즈를 취한 채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빈틈이 없었다. 이상운이 천천히 몸을 움직일때마다 수갑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열쇠고리가 부딪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준은 긴장했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운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 도망가려면 천상 이상운을 처치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어떻게 처치한단 말인가.

그 순간 이미 이상운은 결심을 했다. 오른팔에 안 걸리면 뒤돌려 차기에 걸린다. 이상운은 잽싸게 오른쪽 주먹을 처 들었다.

그때였다. 준꼬가 복도로 나온 것이다. 나오는 동시에 준꼬는 들고 있던 CD롬 타이틀을 힘차게 거인의 뒤통수를 향해 내던졌다. 그것은 이상운의 목덜미에 보기 좋게 명중되었다. 이상운은 이게 뭔가 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금속으로 된 노트북 케이스가 이상운의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퍽—

이상운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아픈 건 생전 처음인 것 같았다. 온통 신경이 오른쪽 어깨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운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준이 자신의 머리를 넘어타는 순간 이상운은 잽싸게 준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불행히도 형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다시 그놈의 금속 케이스가 이상운의 팔목을 가격해왔기 때문이다.
이상운은 팔목에서 거의 기절할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준은 이상운을 뛰어 넘은 뒤 정원으로 나가다 말고 준꼬를 돌아다보았다.
준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어린 아이는 이게 소꼽장난인줄 알고 있는게다. 준은 슬며시 비애를 느꼈다. 가끔가다 준은 밤중에 자신을 기다리는 준꼬를 본적이 있었다. 준꼬 자신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지만,어린 아이의 마음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준은 준꼬에게 슬쩍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가나기원의 대문을 향해 뛰어 나갔다. 도망가자.

나루미는 짜증나는 시간을 참기 힘들었다. 불쑥 화가 나서 나루미는 그 인간 이상운이 몰고 온 차의 본 네트에 자신의 기다란 다리를 올려놓고 에어로빅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왠 남자가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루미는 순간적으로 긴장하고 남자를 돌아다보았다. …미남이다…라고 나루미가 생각했을 때 남자는 나루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밀쳤다. 나루미는 그 자리에서 갈대처럼 휘청이다가 힘없이 넘어졌다.

나루미가 약이 올라서 고개를 바짝 쳐들었을 때는 이미 자가용에서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루미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뒤로 기어갔다. 차는 힘차게 도로끝으로 달려갔다.

이상운은 할 말을 잃었다. 팔목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운은 팔목을 어루만지며 별안간 자신을 방해했던 그 꼬마 애를 쳐다보았다. 조명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꼬마의 얼굴은 이상야릇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엇이더라…

이상운은 주춤거리며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이상운은 꼬마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탄의 인형인가…하는 공포 영화에서 본적이 있다는 생각.

이상운은 괴이한 생각을 하면서 가나기원의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루미는 자신의 핸드백을 이상운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올려쳤다.

이상운이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때는 여자도,자신의 자가용도 그곳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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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후꾸오와 벙어리 여동생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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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하야시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모니터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아침 9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야시는 일본내에서 제일의 시스템 해킹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니터하는 것은 대개 도쿄도 지하철 라인이었는데,지하실에 있는 철도 모형처럼 지하철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도쿄도 조차장을 사용하지 않고 터널 중간에서 철로를 변동시켜서 열차를 마구 뒤섞어 놓는 작업이 하야시의 전문 분야였다.

실상 하야시 후꾸오는 1년전만 해도 야마테山手라인의 관리자였다.
도쿄도 지하철 라인은 1995년을 기점으로 해서 완벽하게 컴퓨터 자동제어 체제로 들어갔는데,야마테 라인의 일부 지하철은 승무원 없이 무인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 무인지하철은 하야시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야마테라인에서 퇴직한 건 한가지 고질적인 병 때문이었다. 가끔가다 지하철에 올라타는 여자를 죽이는 버릇… 이것은 하야시의 못된 버릇 중 하나였다.
그는 최초에는 야마테라인의 6도어 지하철에서 이러한 계획을 시도해 보았다. 6도어 문의 개폐 시간을 임의적으로 조종해 문사이에 몸이 끼어 울부짓는 여자들이 생겨나는 빈도를 파악한 하야시는 본격적으로 심야 시간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런 뒤 3명의 여자 승객을 사고사를 위장시켜서 성공적으로 살해했다.
이러한 교묘한 숫법의 사고사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몇몇 동료들이 하야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야시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퇴직하면 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실제로 하야시는 자기 스스로 야마테 시스템 본부에서 퇴직을 했다. 그런 뒤 그가 구입한 것은 3대의 컴퓨터 본체와 7대의 모니터였다. 그 이전에도 이미 (살인마 bbs)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퇴직한 다음부터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하야시로서는 사업을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야시가 모니터하고 있을 때 밑에 층 거실에서는 미나가 막 나이트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퇴근한지 채 20분이 되지 않았지만 미나의 얼굴은 왠지 생길발랄해 있다.

미나는 숏커팅된 단발 머리의 미녀였다. (졸업)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여러 주인공처럼 미나는 풋풋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체는 의외로 상당한 글래머였다. 이건 미나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녀는 같은 또래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부담을 주지 않는 인상. 허나 파격적으로 섹시한 몸매를 가진 미나. 미나를 좋아하는 여자만큼 그녀를 좋아하는 샐러리맨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미나는 (에콜 드 신주쿠)에서 파트타임으로 춤을 추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야한 춤은 아니었다. 뱀춤이라니. 그건 시시하지 않는가.
그녀가 에콜 드 신주쿠의 스테이지에 올라가 흥을 돋구면 대개 오피스걸들이 흠뻑 도취되어 미나처럼 춤을 추기 위해 스테이지로 올라온다. 미나는 그러니까 호객 행위를 하는 디스코택의 영업사원이라 할 수 있었다.

제 춤을 보고 올라오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 남성들이 당신의 춤을 지켜보고 있답니다…

미나는 춤을 출 때마다 자기 또래의 오피스걸을 이런식으로 유혹을 했다.
그러면 직장상사에게 성적 희롱을 당했거나,월급이 쥐꼬리만해서,맨션 임대비가 벅차서 고민하는 오피스걸들이 미나의 스테이지로 올라왔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그림이 좋은 여자는 미나 후꾸오 자신이었다.

미나가 하야시의 집안으로 양녀로 입양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유괴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하야시의 할머니.
전쟁후에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허드렛 일을 했던 이 할머니는 늙어가면서부터 신문을 읽는 버릇을 챙겼다.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드는 기사가 있으면 신문지를 돌돌 말아서 들고 다니곤 했는데,이때는 지나가는 개나,전신주를 신문으로 툭툭 치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의 별명은 이즈의 노파였다.

미나의 나이가 5살이었을때,노파는 거리에서 울고 있는 미나를 발견했다.
노파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 무심히 미나의 머리를 신문지로 뚝 쳤다. 그러자 미나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노파의 마음이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파는 장바구니를 팽개치고, 미나를 등에 업더니,정신없이 집으로 뛰어왔다.
눈치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은 노파가 또 무슨 해괴한 일을 꾸미나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 미나는 처음에는 말을 아주 잘했다. 그러다 어느 날 미나는 벙어리가 되었는데,이것은 어떤 강압적인 충격에 의한 실어증 증세였지만 노파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나의 실어증 증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점차 심해졌는데,마침내는 입을 열지 않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표현하고 싶은 권리를 자기 스스로 버린 것이었다. 한참 후에야,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주일 전인 토요일 밤에야, 노파-미나를 줏어온 할머니는 미나가 왜 벙어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그날밤에 살해당했고,토막토막 분시되었다.

미나는 오늘도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있는 대형 냉장고의 문을 열어 본다.
어렴풋이 무엇인가가 미나의 머리속을 괴롭혔지만 미나는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 아니 미나는 할머니를 자신이 살해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그땐 머리가 잠시 돌았던 게야.

하야시는 다시금 할머니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락방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야시는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이상해. 아무래도 할머니는…
요즘도 신문을 읽고 있는 걸까…

하야시는 담뱃불을 당겼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2주일전 일이다. 어쩐지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도 그놈의 좁은 방에서 시체처럼 잠을 자고 있을까. 시체처럼 말이다.
하야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나가 잘하겠지…

별안간 미나가 아까 한 행동이 하야시에게 떠올랐다. 10분전에 담배를 가져다 주면서 미나는 슬쩍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들었다.
하야시 오빠…나 피곤해…

하야시는 미나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는 미나와의 관계에 대해 이젠 신경을 끄고 싶었다. 할머니가 주워 온 아이. 미나는 지금 할머니처럼 미쳐가고 있는 게다.
별안간 하야시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냐. 생각을 말자. 이런 생각은 미친 짓이야. 미나는…

하야시는 울컥 자신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나의 육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다시금 되살아 나는 것이었다.

——-
하야시의 시스템에 전화가 걸려 온 것은 3일전이었다. 그날 의뢰자는 젊은 여자 사진 한 장을 전송해오며 그녀를 살해해 달라고 요구를 해왔다.
곧바로 하야시는 의뢰자가 전송해온 여자-후루겔스 게이꼬의 사진을 (에프원 파일)에 걸었다. 복잡할 건 없었다. 야마테 시스템라인의 폐쇄회로 카메라에 게이꼬의 얼굴을 심어 놓기만 하면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었다.

어쩌면,운이 나쁘면 게이꼬 대신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다른 여자가 죽을지도 몰랐다. 이 점에 하야시는 조심해야 했다. 하야시는 이미 7명의 여자를 죽인 바 있었지만,실수로 다른 이들을 살해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하야시의 자존심과도 관련돼 있는 일이었다.

먼저 하야시는 C언어로 제작한 (암호크랙용 프로그램)으로 야마테 라인의 중앙컴퓨터에 걸려있는 암호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그런 뒤 게이꼬의 사진을 폐쇄회로 카메라의 검색 시스템에 걸어 놓았다. 한편으론 야마테시스템 컴퓨터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게이꼬 모습을 확인하면 동시에 무인지하철이 바뀐 선로를 타고 게이꼬를 찾아가야만 했으니까 이번 일은 지극히 세세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건 바로 어제 밤의 일이었다. 적어도 10분이면 상황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야시는 기타를 튕기며 게이꼬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운이 좋았다. 방금 두시간 전 새벽에 간다 역구내로 뛰어 들어오는 게이꼬의 모습을 폐쇄회로 카메라가 감지한 것이다. 기다리기 시작한지 겨우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미나는 다시마를 우동에 넣었다. 어디에서 이런 풍속이 전해져 왔는지 모른다.
미나는 쓴 맛의 우동을 좋아했지만,오빠 하야시는 다시마로 맛을 낸 우동을 즐겨 먹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냉장고안엔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있단 말야….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을 때 미나는 냉장고를 새로 한대 구입할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미나는 깜짝 놀랬다. 자기 자신이 어느새 할머니의 음성을 흉내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야시 오빠가 지금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하야시는 신경쇠약인것 같던데…

미나는 젓가락으로 우동을 리드미컬하게 저어갔다.
무의식중에 미나의 입에서 또다시 죽은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 나왔지만, 이번에는 미나 자신도 그것을 깨닭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 원 투…킬…민나… 올…캉고구진와 민나…

(—모두…죽이고 싶어… 모든…한국인들은 모두…)

———
새벽 5시. 이상운은 터벅터벅 걸어서 지부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어이가 없어 춘해형에게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할지 대책이 없었다. 아니 변명이고 나발이건 간에 지금은 그저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명색에 대한민국 안기부에 소속된 엘리트가 아닌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이상운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잠시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찬바람이 차갑게 이상운의 귓가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
임춘해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침 7시였다. 이상운은 싸우나를 끝내고 선박회사로 위장된 안기부 도쿄 3 브렌치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임춘해는 퉁퉁 부은 입술 가를 계란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상운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도 당했나 보군요…?"
"넌 뭐하다 왔어? 핸드폰을 어디다 버리고 말야,응?"
"나참. 나 비번 아니오. 그래서 좀 놀아보려고 했더니 날 호출하오?"
"멍청한 자식. 한건 물게 하려고 했더니…"

춘해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이상운의 팔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운의 팔목은 붕대로 꼴나쁘게 감겨있었다. 춘해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상운은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놓쳤습니다… 미안해요 형."
춘해는 눈앞이 캄캄했다. 간밤에 안기부 요원 두 명이 김준에게 당했던 것이다.
이상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곧 소식 있을 거요. 그 놈 내 차 몰고 다니잖아요. 지금."

춘해는 팩스용지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놈 자가용은 저기에 있다! 그래 차까지 놈에게 줬냐?"
이상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춘해가 가리키는 팩스용지를 집어 읽었다.

[도난 차량 발견. 아끼하바라 지서.]

이번에는 이상운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저 실실 바람소리만 흘러 나왔다.
"이자식…겁먹었나 보군요. 벌써 차를 버리고 도망갔네요…?"
"겁먹은 게 아니라 똑똑한 거겠지!"
임춘해는 책상위에 걸터앉았다.
"이따 오전중에 경시청에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넌 아끼하바라를 훑어봐.
사람 모자르면 대사관에서 채우든 아니면 오사카에 있는 영진이를 호출해라.
영진이보고는 애들 다 데리고 오라고 해라. 알았냐?"
막상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 애들론 안되겠어. 다섯명가지고 뭘 하라는 거야. 도데체가."

이상운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다가 슬적 임춘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거,정말 그 친구가 한 겁니까?"
"뭘?"
"컴퓨터 말이요. 국방부에…"
"그 녀석이 했다. 분명해."
"그래요? 제 생각엔 전혀…"
별안간 임춘해는 눈을 부라리고 이상운을 노려보았다. 이빨 부러진 것만 해도 놈을 잡아들이고 싶은 욕구가 왕왕한데,지금 이 친구가 누구 약을 올리나 라는 생각일 게다.

——-
김준은 도쿄 외각에서 환상선 지하철을 집어타고 시내로 돌아오고 있었다.
쓰쿠바로 잠적을 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한가지 알아둘 게 있었다.

거리로 나오자 준은 곧바로 도쿄도 인 호텔에 체크인 했다. 그런 뒤 노트북을 흔들어 보이며 중요한 작업을 할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지배인에게 말했다.
호텔 52층에서는 벨보이가 할 일 없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객실에 들어온 뒤 준은 곧장 TV를 켰다. NHK 방송이 지하철 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침 7시 12분이었다.

룸서비스로 카푸치노 커피와 샌드위치가 도착하자 준은 우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먹었다. 그런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5분 뒤였다. 준은 타월로 머리를 닦으며 노트북을 금속 케이스에서 꺼냈다.
그런데 의외로 노트북에서도 그 놈의 경고문이 떠 다니고 있었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한동안 긴 충격이 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3일전에는 데스크탑 컴퓨터에서 메세지가 떠올라 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노트북 컴퓨터에서도 이놈의 메시시가 떠 오른다. 준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가닥을 잡지 못했다. 해커와 해커간의 추격 공방전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는 있다지만,그가 직접 이러한 상황에 접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메시지를 보내온 놈은 김준을 계속 추적하고 있는것 같았다.

준은 경고문이 다시 인스톨된 과정을 찾기 위해 성급하게 키보드를 두둘겼다.
원인은 스타트업(부팅과 동시에 특정 파일을 여는 프로그램)에 걸려있는 통 에물레이터 때문이었다. 준의 노트북은 부팅이 되면 통신 에물레이터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는데,이 에뮬레이터에는 에릭슨 핸드폰이 무선모뎀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연결돼 있었다.

아마 어젯밤 이상운과 한바탕 붙을 때 노트북에 충격이 발생 부팅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뒤,노트북이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놈은 다시금 경고 메시지를 날려온 것이다.
안되겠군…
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계속 놈에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준은 경고문이 떠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도쿄도 지하철망 조사를 시작했다.
7시간 뒤인 오후 3시경. 김준은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바탕 비라도 내리려는지 서북편 스카이 라인을 가르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윤춘해는 경시청의 오니쓰라 경감과 함께 사건이 발생했던 간다 지하철역 구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춘해로써는 게이꼬가 죽은 이유가 왠지 모르게 심각한 의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오후 2시부터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야마테 시스템에 해커가 침투했다는 뜻이군요."
그가 다시 유도성 질문을 던지자 오니쓰라는 보기좋게 넉살을 부렸다.
"허허.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춘해씨도 알다시피 난 전산요원이 아닌데요…"

춘해는 슬쩍 웃었다.
"이러지 맙시다. 내 다 알고 왔다고 하지 않소…"
"이런 춘해씨도 보기보단 끈질기시군 요."
춘해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개피를 오니쓰라에게 권했다.
"한번 밀어주쇼. 누구요? 침투했다는 그 해커는…"
"이거 말씀드리긴 곤란한데…"
오니쓰라 경감은 굳어진 얼굴로 춘해가 건네준 담배를 자신의 포켓안으로 집어 넣었다. 여긴 금연지역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외비입니다…물론 다른 쪽으로 흘리시면 안됩니다."
"염려 놓으시라니까. 그 점은…"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야마테 시스템에는 3만여 종류의 바이러스에 대해 방비책을 획득해 놓고 있다고 합디다. 물론 3단의 암호코드가 걸려있기도 하지요. 헌데 어제 저녁에 침투한 놈은 굉장했대요. 채 몇 분도 안되어 선로 교란과 열차교대 시간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음..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런 뒤,춘해씨가 추측했듯 그 놈도 자기 이름을 남기고 떠났죠.
요즘 신인류 해커들은 마구 두들겨 부셔 놓은 뒤 아이디를 남기는가 봅니다만."
"아이디가…뭐라고 합디까?"
"(동급해커)라고 하더군요. 꽤 유명한 악질 해커라고 합디다."

순간 춘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급해커는 김준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가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준은 대한민국 국방부 컴퓨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시시하게 야마테 시스템까지 침투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황으로 보아 후루겔스 게이꼬의 죽음은 계획적인 일이었다. 누군가가 야마테 시스템 라인을 혼란시키고 게이꼬가 걸려들길 기다렸을 터이다. 그런데 그자가 김준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앞 뒤가 안 맞아…
녀석은 게이꼬를 살해할 리가 없다.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턱 아래쪽 상처를 다시 문질러 보았다. 오니쓰라 경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춘해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었다. 춘해는 고개를 돌려 사건현장을 응시했다. 이미 사건현장은 깨끗하게 페인트 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춘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건이 일어난 구석으로 걸어갔다. 이때 지하철이 춘해의 등뒤에서 들어와서 멈추었다.
동시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춘해가 서있는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빌어먹을 놈들…

춘해는 쏟아지는 인파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짜증이 났다. 어느새 손수건이 춘해의 손에서 떨어졌다. 춘해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오니쓰라 경감이 서둘러 춘해가 있는 쪽으로 걸어 왔다.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을 쳐다보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춘혜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춘해는 손수건을 집다말고 서둘러 지하철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

김준이었다. 김준은 지하철 문에서 나오다 말고 다시 문안으로 뒤돌아가고 있었다. 춘해는 흥분한 얼굴로 정신없이 외쳤다.
"경감. 놈을 잡으시오. 저 놈 말이요!"
아니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임춘해는 잽싸게 몸을 던져서 지하철 안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오니쓰라 경감은 정신이 퍼떡 들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춘해가 말한 인물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뒤쪽이었다.

지하철 뒤칸으로 훤칠한 키의 사내가 막 도망을 가는게 보이자 오니쓰라 경감은 바짝 긴장했다. 어느새 오니쓰라의 손에는 아내 하야꼬가 (대포)라고 지칭하는 그의 45구경 권총이 들려 있었다.
오니쓰라는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이상운은 아끼하바라 거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탐문수사를 해서인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탐문수사의 결과는 예상했던대로 형편없었다. 김준이 자동차를 버리는 걸 본 증인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게다.
이상운은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따 마셨다. 120엔이다.

이상운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미나 후꾸오는 마쓰시다전자 양판점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부터 눈여겨 본 냉장고가 있는 양판점이었다. 미나는 양판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의 몸매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미나는 신경을 쓰지 앉았다.
흔한 거야. 저런 남자는…

미나는 한참동안 대형 냉장고 앞에서 냉장고의 사양을 읽었다. 그러다가 점원에게 걸어가 쪽지를 내 밀었다. 그제야 점원은 미나가 벙어리임을 알아 차렸다.

이상운은 캔맥주를 마시다 말고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모의 여자가 건너편 마쓰시다 양판점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이상운의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어제밤 나루미와 있었던 정사가 떠 올랐다.
이런..주책없군…갑자기 왜…
이상운은 쓴 웃음을 지으며 도로로 나왔다.

방금 전 이상운이 보았던 미모의 여자 미나 후꾸오는 막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이상운은 택시가 떠난 방향과는 반대방향인 3번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슬비가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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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가는 남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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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뒤쪽으로 뛰어갔다. 퇴근시간 전이었지만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죠오반선常磐線처럼 2층 차량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6도어 차량이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임춘해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 준은 순간적으로 몸이 듬직해 보이는 승객을 눈으로 찾았다. 바로 옆쪽에 있다. 준은 슬쩍 그의 다리 앞에다 발을 갖다 댔다. 그런 뒤 힘차게 임춘해를 향해 남자의 등을 밀었다. 곧바로 둘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준은 지하철 밖으로 몸을 굴렸다.

오니쓰라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준에게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빈틈이 없었다. 오니쓰라가 권총을 겨누는 것을 봤는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준의 뒤에서 물결처럼 갈라졌다.
헌데 이상했다. 오니쓰라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뭐라고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실상 오니쓰라는 김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임춘해가 체포하라니까 거들어 주는 것이다.
오니쓰라가 이 문제로 잠깐 주춤하고 있을 때었다. 별안간 김준이 전광석화같이 몸을 날려갔다.

이런…심한 보디체크가…
오니쓰라는 강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굴렀다. 동시에 권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은 오니쓰라의 45 구경 권총이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잡혔구나 라고 생각을 했었다. 헌데 권총이 현실적으로 준의 시야로 바짝 다가오자 준은 눈앞이 캄캄했다.
방금전 상황은 잡힐뻔 한게 아니라,시체말로 죽을뻔 했던 상황인 것이다.

오니쓰라는 약이 바짝 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으려고 손을 더듬었다.
권총까지는 손이 닿지 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니쓰라는 힐끔 준의 올려다 보았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얼빠진 채 서 있었다. 기회였다. 오니쓰라는 쏜살같이 자신의 몸을 옆으로 굴려 이동했다. 그런 뒤 권총을 잡았다. 아니 권총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빠르게 김준이 축구선수가 페널티킥을 차듯 사정없이 권총을 발로 차내고 있었다.

헛발질이었다.
그러나 권총은 약간 빌빌거리는가 했더니 그대로 지하철 문안으로 퉁겨 들어갔다. 동시에 자동문이 닫히면서 지하철은 그곳을 떠나 달려 나갔다.

이때 임춘해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지하철에서 탈출해 나와 있었다. 그의 심장은 요란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숨소리가 심상치 않을걸 보니 또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하나 보다.
김준은 오니쓰라를 상대하느라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문에 춘해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춘해는 홀스트에서 권총을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 김준… 이제 그만하지. 게임은 끝났네."

아차… 준은 바짝 긴장했다. 춘해가 지하철에서 뛰어 내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춘해 역시 권총을 꺼내 든게 분명했다. 준의 등뒤에서는 요란하게 사람들이 몸을 피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한편으론 머리속을 재빠르게 회전시켜 보았다. 춘해가 요구하는 대로 뒤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포기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놈이…놈이 내쪽으로 걸어올까…?
운이 좋았다. 김준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있자 임춘해는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을 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이상 놈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다.
춘해는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여가며 준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뭐하자는 거야? 어서 뒤로 돌아서지 못해? 손 올리고 말야!"

순간 춘해는 보았다. 준의 한쪽 다리가 살짝 구부리는 것 같았다.
제길 뭘 하자는 거야…?
동시에 준이 몸을 돌리는 거 같았다. 춘해는 걸어가다 말고 잽싸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에 김준의 노트북 케이스가 날카롭게 반원을 그으며 춘해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임춘해도 빨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을 뒤로 젖히며 준이 휘두르는 노트북 케이스를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준이 날카롭게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놓칠수 없었다. 임춘해는 권총을 반대로 잡고 달려드는 준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올려쳤다.
퍽——-
그것은 꼴사납게 준의 노트북에 의해 차단 당하고 말았다. 춘해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몸을 다시 뒤로 빼려고 했다. 순간 춘해의 시야 아래쪽에서 김준이 어퍼컷을 날려왔다.

퍽——!!

춘해는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벌써 두번째였다.
이거 또 이빨이 부러져 나간 게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하면서 춘해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슴이었다.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급류치듯 올라오고 있다.
"경감…놈을 잡으시오, 놈이 동급해커란 말이요…"
춘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이 뒤집어 질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이미 오니쓰라 경감은 김준을 쫓아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겐쪼 경사. 그놈을 잡아! 잡으란 말야!"
오니쓰라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겐쪼와 부하 경찰 두명이 건너편 계단에서 튀어 내려왔다. 50미터 전방이었다. 준은 뛰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노트북이 그의 오른손에서 심하게 흔들거렸다.

포위되었단 말인가…

준은 앞쪽에서 뛰어오는 겐쪼 일행을 바라보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수숫대처럼 통로 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길을 터주고 있었다.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춘해는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고,오니쓰라는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 성난 사자처럼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칙쇼…
오니쓰라 경감의 입에서 뱉어진 욕지거리가 준의 귀에도 들려왔다.

처참했다. 김준은 사건현장에 설치된 폐쇄카메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임춘해에게 걸려들다니. 이젠 도망갈 방법이고 뭐건간에 꼼작없이 잡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아쉬운 듯 준은 폐쇄회로 카메라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잡힐때 잡히더라도 그놈의 폐쇄회로카메라가 게이꼬의 죽음에 어떤 역활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 순간이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스르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김준을 향해 빙그르르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런 뒤 렌즈를 내보이며 김준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준은 불끈 심장이 터져나갈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저것인가?…게이꼬가 살해당한 건?…
후루겔스 게이꼬는 감시를 받고 있었단 말인가….?

몇초가 지났을까. 사람들은 모두 준의 시선을 쫓아 페쇄회로 카메라를 올려다
보기 시작했다. 겐쪼도. 춘해도. 오니쓰라 경감을 포함한 모두가…

이때 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시간을 헤아려보고 있었다. 1분 50초였다. 준은 호텔에서 검색했던 지하철 발차 스케줄을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다. 정확하다.
"이야압——"
준은 별안간 간다 지하철역 구내가 터저 나갈만큼 괴성을 질러대며 손에 들고있는 노트북을 철로 건너편 승강장으로 집어 던졌다. 춘해와 오니쓰라는 준의 괴이한 행동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별명이 제비인 겐쪼 경사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겐쪼는 어느새 김준을 향해 한방 쏘아대고 있었다. 동시에 김준이 승강장 아래 철로로 뛰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곧바로,1분 50초마다 연결되는 야마테 선 지하철 차량이 터널 속에서 녹색칸델라 등을 반짝이며 김준을 향해 돌진해왔다.

춘해는 황당했다. 권총을 바로 잡아 다시 겨누었지만 지하철 차량에 가려 건너편에 있는 준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귀신 같은 놈…어떻게 곧바로 지하철이 달려온다는 걸 알았을까…
춘해는 할말을 잃었다. 그저 끝없는 분노가 치솟아 오를 뿐이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춘해가 지하철역 밖 거리에서 혹시나하고 김준의 흔적을 찾고 있을 때였다. 김영진의 전화였다. 영진 일행이 도쿄에 방금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이미 김준은 가와사끼 호텔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폭우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준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비지니스맨을 위한 테이블이었기 때문에 그는 간단하게 요기를 때운뒤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도쿄도 지하철망이 아까부터 계속 떠 있었다.
아까 보았듯이 폐쇄회로 카메라는 야마테 시스템에서 무인관리 되고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나쁜 목적으로 점유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GIF파일이었다.
준은 게이꼬의 사진이 GIF 파일로 걸려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었다. 분명 놈은 대단했다. 동서선 지하철 차량을 강제이탈시킨 프로그래밍 워크는 김준 스스로가 감탄할 만큼 간단하게 작성되 있었다.
준은 다시 처음부터 시스템 관리자 명단을 일일이 파악해 보았다. 하지만 특별하게 의심이 갈만한 인물이 없다. 누가 이짓을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인 것이다.

밤 8시 40분이었다. 준은 손짓으로 웨이트리스를 부른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건네주었다. 창밖은 계속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계산대의 여자는 멍하니 준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준이 바로 앞에 멈추어 서자 이번에는 테이블 번호를 확인했다. 확실했다.
여자는 식은 땀이 나왔다. 왠지 불안했다. 여자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의 신용카드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준은 힐끔 여자를 응시했다.
"무슨 뜻입니까?"
여자는 이지체크기와 연결된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손님 카드는 사용할수 없는 겁니다. 모르셨나 보죠?"
준은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용할수 없다니.
"아… 그런가요… 그럼 다른 카드로 결제해 드리죠."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지갑을 꺼내 펼쳤다. 지갑안에는 11장의 신용 카드가 빽빽이 들어있었다. 준은 카드를 꺼내 내밀다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어느 놈이 카드에다가 기름칠을 한 것일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자 준은 신경이 수축되었다. 준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털어 11장의 카드를 계산대에 펼쳐 보았다. 그런 뒤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신용카드 2장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확인해 주시겠소? 어쩌면 이 두장도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만…"
여자는 준을 올려다보았다. 별 이상한 사람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이 건네주는 2장의 카드를 이지체크기에 통과시켰다.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둘 다 해지된 카드입니다. 묘하게도 오늘 오후 2시에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실례지만 이 단말기는 어디와 연결돼 있습니까?"
"니프티서브의 뱅크조인트입니다만. 왜요. 무슨 일이죠?"
"니프티서브라면…?"

니프티서브는 PC-VAN사와 함께 일본의 양대 통신망을 구성하는 공룡급 통신서비스 회사였다. 그러니까 조회가 잘못될 리는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준의 신용카드를 상대로 기름칠을 한 것이다. 아예 사용할수 없겠금…
준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여자에게 미소를 흘려 보냈다. 그런뒤 쩔쩔매는 표정으로 안주머니를 뒤졌다. 지폐 2장이 야구장 입장표와 함께 꾸겨져 나왔다.
준은 그걸로 음식값을 지불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이마가 후끈 거렸다. 오후 2시부터 구좌 농락을 시작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12장의 신용카드는 모두 사용이 정지되었을 것이다. 누굴까.
어떤 자식이 내 구좌를 상대로 작업을 했을까.
이 자식은 분명 (뱅크 시스템 교란)에도 능란한 해커일 것이다.

호텔 로비로 내려와 거리를 내다 보았다. 당장 움직이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고작 8천엔 밖에 없었으니까. 헌데 지금 이시간에 어디 도와줄만한 사람이 있을까…아니 지금 당장은 이놈의 폭우를 피할 거처도 없다.
불현듯 준의 뇌리에 나쓰에가 떠올랐다.
준은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그런 뒤 미와자와 리에의 알몸이 그려져 있는 전화카드를 전화기에 삽입했다.
나쓰에는 맨션에 없었다. 단지 자동응답기 소리만이 흘러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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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밤 폭우를 뚫고 나리타 공항에 아시아나 항공기가 착륙을 하고 있었다.
밤 9시 7분경이었다. 나리타 국제공항 대합실은 갑자기 아시아나 항공으로 입국한 22여명의 감색 신사복들로 소란스러워졌다. 입국심사요원인 쓰쓰에 역시 어안벙벙이 되어 사내들의 여권을 일일이 검사했다. 사내들은 모두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고 되어 있다.
서울 네트워크 리서치. 도대체 무슨 회사이기에…

22명의 사내들은 이미 공항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쓰쓰에는 그저 멍하니 그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임춘해는 우산을 들고 공항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초초했다. 김영진의 전화가 있은 직후 곧바로 서울에서 아주국장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몇명이나 보냈을까.
춘해는 담배를 피다말고 입이 벌어졌다.
뭐야, 지원군을 투입한다더니…

개 사단병력을 보내왔잖아…?

감색 양복의 사내들 22명이 곧장 춘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임춘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에 익은 친구였다.
"반갑습니다,임춘해씨. 지금 김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춘해는 얼굴이 후끈 거렸다. 두시간전에 놓쳤다고 말할수는 없었다.
잠시 머리를 빙빙돌리다가 임춘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오리무중입니다…하지만 김영진을 나쓰에의 맨션 앞에다 박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나기원에도 이상운을 붙혀으니까 조만간 소식이 올겁니다… 그런데 이건…허."
춘해는 다시 22명의 감색신사복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이건 너무 많군요… 서울에서 무슨 좋지 않은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사내는 임춘해를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먼곳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벌래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오후 2시에 캠프 데이비드가 뚫렸소."
사내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김준 그 자식… 손 좀 봐줘야 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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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12분. 서울 제일그룹 본사 섹션V실에서는 긴급 회의가 끝나고 있었다.
회의 브리핑은 유광남 과장이 하고 있었다. 고종수와 한일수 대리,전두완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틀림없는 정보입니다. 오산 미군 비행장은 오후 2시 32분에 뚫렸습니다. 물론 김준이 침투한 걸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며칠전과 같은 방법입니다만.
바이러스를 뭉탱이로 뿌린 뒤 자신의 아이디를 심어 놓은 겁니다. 이때문에 안기부 측에서 내일 오전중으로 전산요원 7명에 행동대원 15명을 일본 도쿄로 긴급특파한다고 하더군요…"
고종수는 싸늘하게 물었다.
"안기부 요원이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요?"
"그런것 같습니다…"
고종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지금 일본으로 날아가 있겠군요. 안기부 애들 하는게 그식이니까요."
유과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닙니다. 대사관에 아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물어오더군요. 서울 네트워크 리서치라는 회사가 뭐하는 데냐고…"
"아 그거 안기부 아닙니까?"
"내 말이 그말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고종수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산 미 비행장. 안기부측에선 캠프 데이비드라는 암호로 부르는 이 장소.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오산 비행장은 극동지역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미군 공군력의 주둔지였다. 무엇때문에 그놈의 해커는 그곳까지 침투했을까.
무언가 크게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종수의 뇌리를 스쳤다.
종수는 애써 그 예감을 떨쳤다. 유과장이 감을 잡았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얼 노리고 있는지는 지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나이키 주스 미사일 시스템에도 접촉을 시도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더군요."
고종수는 유과장을 응시했다.
"김준의 행방은 어떤것 같습니까. 파악된게 있습니까?"
"그게 말입니다…다른 건 모르겠고. 신용카드가 모두 거래정지 먹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래정지요?"
"사은진 양의 조사에 의하면 김준 스스로가 카드해지를 신청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김준 자신이 직접 구좌를 해지한 것이죠. 그리고 잔금은 이미 다 털어 간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나요?"
"이 점도 내가 보기엔 일본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놈은 철저하게 김준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자가 실제 있다면 말이죠."

"그럼 김준에겐…지금 돈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겠군요."
종수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듯 이 말을 하자 유과장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종수씨. 우린 이 사건에서 손 때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김준의 문제는 그가 스스로 해결하기로요. 이미 사장단 회의에서도 이문제는…"
"아뇨. 난 단지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종수는 듣기 싫은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만 합시다. 비서실에는 지금 이 정도 선에서 보고서를 작성에 올려 주십시오. 그리고 김준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도 그 밥통같은 놈은 싫으니까요."

종수는 그렇게 말을 한 뒤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곧바로 유과장 옆에 서있던 한일수 대리가 고종수의 뒤를 따라 나왔다. 나가면서 고종수가 살짝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한일수는 헤프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잘될 겁니다,부장님.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네 동생이 있다고 했지? 한현희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수배하게."
"수배라뇨…? 현희는 지금 도쿄에…"

한현희는 1992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바 있는 재원이었다. 지금은 일본 제일그룹 사업본부에서 할일 없이 텔렉스 감시나 하고 있지만 말이다.
종수는 어이가없었는지 잠시 자기 머리를 두들겼다.
"아 그렇군. 그럼 한대리만 일본으로 날아가면 되는군. 지금 당장 출발하게."
한대리는 벙찐 얼굴로 고종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종수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한대리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한일수가 자신의 속마음을 내 비친것은.
"부장님…어디 두명가지고 안기부와 싸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 부장님 친구분을 지키겠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한대리는 헥헥 거리며 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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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탕같이 힘든 날이였어…사뇨 나쓰에는 맨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긴 블랙원피스는 빗물에 젖어 종아리에 달라붙어 있다.
나쓰에는 약간 취해 있었다. 쓰쓰무 과장이 치근거리는 바람에 아침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후에는 오카자끼까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다.
보기 좋은데 나쓰에 양 가슴은…
나쓰에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불쑥 벽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꺼벙한 자식… 성불구자인 주제에… 흥…
나쓰에는 1년전엔가 배운적 있는 한국어 가요를 흥얼거리며 맨션 출입문에 열쇠를 꽂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나쓰에는 의아한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사즈메가 왔다 간건가?
사즈메는 나쓰에의 여동생이었다. 고교 3년생. 놀때는 화끈하게 노는게 나쓰에와는 아예 성격 자체가 틀렸다.

사즈메는 없었다. 나쓰에는 거실을 한바퀴 돌아다보았다. 반쯤 열려져 있는 창문사이로 커텐이 바람에 사납게 날리고 있었다. 빗방울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나쓰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고 창문을 닫고 침대에다가 핸드백을 던졌다. 그제야 탁자위의 자동응답전화기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나쓰에의 눈에 들어왔다.
나쓰에는 응답기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준… 김준이 누굴까….?
나쓰에는 별 이상한 놈 다보겠네 라고 생각하면서 녹음된 내용을 지웠다.
그제야 어렴풋이 김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남자다… 무슨 일일까?
나쓰에는 젖은 원피스를 벗고 타월을 들었다. 그런 뒤 욕실문을 열었다. 순간 나쓰에는 깜짝 놀랬다.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김준이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머리칼은 비에 흠뻑 젖어있고.
"어머 놀랬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방금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다뇨? 후후 그게 무슨 농담…?"
나쓰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 겁이 잔뜩 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속옷만 입고 있다.
"아 잠시만요. 저… 옷 좀 걸쳐 입겠습니다."

막상 말은 그렇게 하고 나왔지만 나쓰에는 온통 신경이 수축되는 것 같았다.
술기운은 어느새 확 달아났다. 무슨 일일까. 정말 이상한 남자야.
나쓰에는 냉철하게 생각을 했다.
그날 야구장에서의 데이트야 그때 기분에 좀 취해있었다고 치자.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저따위 한국인 남자에게는.

나쓰에는 신경질적으로 옷장을 뒤졌다. 박스형의 니트가 보였다. 나쓰에는 브래지어를 벗고 얼굴위로 니트를 껴입었다. 젖가슴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그런 다음에는 비에 젖은 머리를 말린 뒤,양손을 뒤로해서 머리칼을 슬쩍 허공으로 튕겨 보았다. 그러자 시세이도 광고모델처럼 나쓰에의 머리칼이 허공에서 펼쳐 지다가 부드럽게 가라 앉는다.
나쓰에는 히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있을때는 항상 자신을 시세이도 화장품의 광고모델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좌우를 두리번 거렸다. 차분히 생각을 해보자.
치한 퇴치법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니까.
나쓰에는 탁자를 보았다. 무기가 될 거라곤 가스분사기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해. 쓰러뜨린 뒤에는 맨션밖으로 끌고 나가야 하잖아…
나쓰에는 다시 옷장안을 들여다 보았다. 골프채가 있다. 나쓰에는 골프채를 집어들었다. 아직도 정신이 맹맹했지만 나쓰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김영진은 체로키 지프안에서 맨션 도면을 보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날아온뒤 급하게 나쓰에의 맨션앞에 캠프를 차려놓고 있었다. 오종식이 말했다.
"옥상이 아직 불안하군요. 다른쪽은 다 안에서 잠궈 두었습니다만,A동은 바깥쪽 에서 잠기어 있습니다. 어쨌든 거기도 안쪽에다 자물쇄를 걸어 놨습니다만."
"거긴 계단에서 육탄으로 막으면 될 것 같으니까 상관하지 말지."
"만일을 위해 그러는데…컴포지션도 준비할까요?"
"아냐. 그냥 액화가스폭약을 사용하게."
"알겠습니다."
"이젠 대충 준비가 된건가? 하기야 4층이라…뛰어 내릴수는 없겠어. 종식이는 영삼이와 같이 옥상 비상구에 붙어있고 영범이는 나를 따르지?"
"그럽시다. 한번 움직여 볼까요?"
윤영범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김영진은 어쩐지 썰렁했다. 자신을 포함해 동원 가능한 수는 총 4명이었다. 이 4명으로 김준을 잡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김영삼이 말했다.
"허. 둘이 싸우고 있네요? 여자쪽이 김준에게 뭐라고 하는 뎁쇼?"
김영진은 고개를 들어 영삼이가 응시하고 있는 티악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릴테입은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다.

대화소리를 듣다가 영진은 다시 김준의 사진을 응시했다.
제일그룹 정보팀이 제공한 사진이었다. 마지못해서 팩스로 전송해온 것을 임춘해가 가지고 있다가 브렌치 사무실에 보관해 둔 것이다.
영진은 사진을 응시하다말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손끝에서 빙그르 돌렸다.
임춘해와의 핸드폰 연락은 폭우때문에 불통이었다. 2시간째 연락이 닫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그때 김준이 맨션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10분전의 일이었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듯 퇴근해 돌아오는 사뇨 나쓰에의 모습도 보였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춘해형을 기다리다간…
영진은 체로키 94년식 지프차에서 내려섰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준은 두번째 빰을 얻어맞고 있었다. 나쓰에는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가세요. 이게 무슨 짓이죠? 내가 언제 당신을 초대했나요?"
준은 할 말이 없었다. 나쓰에는 많이 취해있었기 때문에 설명하거나 설득할 상대가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론 어디로도 도망갈 장소가 없었다.
준은 난처한듯 자신의 빰을 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을 많이 마신것 같습니다 나쓰에양."
준은 벌써 다섯번이나 이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뭐야,뭐야,뭐야? 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예요? 정말 이상해 당신. 우리가 몇번 만났다고 이러는 거죠? 나참… 두번인가요?"
나쓰에는 오른손에 골프채를 쥔 상태에서 이번에는 왼손으로 곰인형을 집었다.
골프채로 공격을 하고 곰인형으론 방어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상태로 나쓰에는 씩씩거리며 준을 노려 보았다.

이때 벨 소리가 울렸다. 나쓰에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너무 흥분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이 남자에겐.
나쓰에는 준을 한번 쳐다보고는 인터폰을 향해 걸어갔다. 김영진의 얼굴이 인터폰 화면에 떠 올라와 있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실례지만 같이 있는 분을 지금 만날까 합니다만."
나쓰에는 갑자기 신경이 수축되어갔다. 대한민국 대사관이라니. 무슨 일일까?
나쓰에는 엉겁결에 잘하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무슨 일이신대요?"
"한국어를 하실 줄 아는 군요. 말 그대로 입니다. 김준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나쓰에는 화가 나서 바락 인터폰 스위치를 껐다. 그런 뒤 준을 돌아다 보았다.
"뭘 잘못한 거예요? 당신?"
준은 비쩍 웃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준은 목례를 한뒤 창문가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쓰에가 빠르게 준의 등뒤로 따라 붙었다.
"이봐요 김준씨. 무얼 감추는 거죠?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정말?"
"미안합니다 나쓰에 양. 다음에 만납시다."
순간 문쪽에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쇠가 녹는 냄새. 곧이어 작은 소리로 펑 소리가 들려왔다. 소형 액화가스폭탄이다. 나쓰에는 흠질 놀라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문을 와락 열고 김영진이 성킁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당신들은? 정말 대사관이야?"
김영진은 잠자리같이 가날픈 나쓰에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나쓰에는 휘청거리며 벽에 몸을 부딪쳤다. 하지만 나쓰에는 지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골프채를 김영진을 향해 올려쳤다.
나이스 샷이었다.
골프채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김영진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 사이에 김준은 아까와는 반대로 창문 덩굴을 타고 옥상에 올라왔다.
그런 뒤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갔다. 하지만 그쪽 철문에서도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몸을 바꾸어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빨리 B동으로 가요. B동에 가면 도망갈수 있어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폭우속에서 가날프게 들려오자 준은 걸음을 멈추고 옥상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맨션은 모두 12개동이나 있다. 이쯤되니 어느게 B동이고 C동인지 종잡을수 없다. 그때 철문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두명이 비상구에서 뛰어 나왔다. 이때문에 준은 무작정 앞쪽에 있는 옥상으로 건너뛰었다.
B동이었다.

준은 B동 옥상에 있는 비상구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
김영진의 지시에 의해 이미 오종식이 잠거 둔 것이다.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나쓰에가 말한 걸 보니 비상구 말고 뭔가 다른것도 있을법 했다. 준은 빠르게 난간을 따라 뛰어가며 맨션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4층 위였다. 제정신이 아닌곤 뛰어내릴수가 없는 높이다. 헌데…
수영장이 있었다.
옥상의 북쪽 끝에 도달하자 커다란 수영장이 내려다 보였다. 빗물이 준의 시야를 가려 재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폭우가 사납게 수영장에 채워진 물을 쳐대고 있는것으로 보아 수영장은 만수로 꽉 채워져 있는게 분명했다.
그때 처음으로 총소리가 들려왔다. 준은 빠르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막 사내 4명이 B동 이쪽으로 건너 뛰어 오고 있었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었다.
준은 10여미터 정도 뒷걸음질을 하더니.이번에는 곧장 옥상 끝을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준의 몸이 허공으로 붕 솟아 올랐을때,다시 두번째 총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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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지하철 역에서의 격투와 신용카드를 조회한 기록까지…
하야시는 오늘 하루종일 있었던 김준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읽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웬일일까. 의뢰자는 48시간이 지났는데도 김준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다.
하기야 하야시는 김준을 살해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저따위 무스나 처바른 한국인을 살해하다니. 그런 건 형편없는 작업이다.
하야시는 핸드폰의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그런 뒤 (뱅커마니아 BBS)에 접속을 시도해 보았다. 운영자는 지금 자리를 비웠는지 하야시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야시는 벵커마니아 BBS에서 빠져 나온 뒤 자신의 전화라인을 도청하는 자가 있는지를 버릇처럼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런 놈은 보이지 안았다. 요즘들어선 내각조사실 놈들이 가끔씩 무선 전화를 도청하는것 같던데…

하야시는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헌데 영 재미가 없다. 이번에는 소형냉장고에서 기린 맥주를 꺼내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가 하야시는 자신의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비듬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목욕 좀 하자…이게 뭔가…

하야시는 거실로 내려왔다. 대충 일주일만에 다락방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거실 안쪽으로는 마쓰시다의 R타입 대형냉장고가 새롭게 들어와 있었지만 하야시는 그걸 보지 않았다.
하야시는 골목길로 나왔다. 긴좌 3정목. 폭우가 세차게 하야시의 얼굴을 두들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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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수영장에서 기어 올라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내 4명이 맨션 옥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누군가 하나가 옥상에서 뛰어 내리려는지 양복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준은 서둘러 덤불을 헤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을 지나가자 곧바로 비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지나다니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폭우. 그리고 정적. 길을 따라 준은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숨이 찼다. 이젠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사내들은 포기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않았다. 그때 맨션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반짝이며 총알같이 자동차가 튀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너무 심한데…

아예 날 죽이지 그래….

준은 좌우를 다시 살펴 보았다. 맨션 뒤는 만주벌판보다 넓은 들판이라 이젠 숨을 장소도 변변치 않았다. 준은 마른 침을 삼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미 자동차는 준의 등뒤까지 바짝 따라 붙어왔다.
그런 뒤 곧바로 준을 추월한 뒤 준의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덜컹——
자동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준은 절망어린 눈으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사뇨 나쓰에였다. 나쓰에가 폭우속으로 얼굴을 내밀고 준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빨리 올라타요! 잡히고 싶어요?"

그 순간 준은 그자리에서 털썩 쓰려졌다.
나쓰에는 당황했다.
"어머,당신 다쳤군요?"
준의 오른쪽 넓적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해병대에서 사격교관을 했던 김영진.
그가 쏘았던 총알 한발이 김준의 오른쪽 다리에 계속 박혀 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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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즈메 양의 폴 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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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 윤영범이 수영장으로 뛰어들겠다는 걸 제지하고 비상구로 돌아와보니 출입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 그제야 오종식이가 이 문을 잠궜다는 사실을 알고 김영진은 곧바로 A동으로 건너뛰었다. 자칫하면 놓칠것 같다.
김영진 일행이 맨션 밖으로 나왔을 때는 도요타 셀시오 자가용이 막 긴박하게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영진은 체로키로 뛰어가며 나쓰에의 맨션 발코니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다.
영진은 급히 체로키의 문을 열었다. 순간 야릇한 냄새가 차안에서 갑자기 튕겨 나왔다.
"뭐야 이거…"
영진은 삽시간에 마비된 코를 틀어막고 급히 체로키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가스총을 몇발이나 쏘아 댔는지 몰라도 차안은 온통 신경마비제로 가득차 있었다.
젠장할…
영진은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는 해병대 출신이었다. 해병대 요원이 신디 클로포드처럼 빼빼 마른 여자 하나를 못 이긴 것이다. 쓴 웃음이 나왔다.
종식이와 영범이는 허탈한 듯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에 있는 적을 못 잡을 걸 보니 이게 특정직 7급 출신자들의 한계인가 보다…
안기부의 특정직 7급 요원들은 책상에 앉아 정보를 관리하는 직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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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면은 비를 맞고 거리에 서 있다. 새벽 2시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게 언제였지… 3일전이던가. 아냐 그보다는 오래되었을 것이다.
경면은 오늘밤에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조바심이 났다. 아침엔 꼬박꼬박 출근을 해야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순찰을 도는 경찰은 없었다. 지금 이시간에는 주차단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경면은 자신의 자가용을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녀를 위한 장미꽃….
자가용안에는 경면이가 며칠전부터 준비한 장미꽃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고딕풍으로 녹아나듯.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경면의 가슴은 마냥 뛰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는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날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말라갔지만 경면의 머리 속은 온통 윙윙거렸다. 경면아. 넌 그녀를 처음 본거야. 헌데 그녀는 벙어리라고 하는 구나. 사랑을 속삭일 때 신음 소리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도 넌 그녀에게서 빠져 나올수가 없는 거냐. 이런 게 사랑이더냐.
경면은 혜숙이를 생각했다. 혜숙은 경면이가 군에 입대하는 날 고무신을 바꿔 신은 아가씨였다. 하지만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지 아마.
경면은 비를 맞으며 자동차에 몸을 기대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상태로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가길 경면은 바라고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가길 진심으로 원했다.
이때 후꾸오 미나가 에콜 드 신주쿠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경면은 나즈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다시 경면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경면은 자신의 자가용으로 미나를 뒤쫓아갔다. 그런 뒤 미나의 옆쪽에서 핸드브레이크를 걸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미나양… 댁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은데…"
사랑이란 이런 거다. 처음보는 여자에게 말을 붙일수 있다는 용기…
경면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미나를 응시했다. 미나는 흠짓 놀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천천히 경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미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경면의 얼굴은 오빠 하야시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미나는 잠시 거리 좌우를 살펴보았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발음을 보아 이 남자는 일본인이 아닌것 같은데.
붉은 색 스커트가 비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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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영진 일행은 아크힐스 오피스센터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춘해와 이상운은 33층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 영진은 김준을 놓쳤다는 죄책감보다는 아연 다른 것에 놀라고 있었다.
"흥미 있는데요. 우리가 언제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입닥쳐. 진광섭이가 기다리고 있다."
순간 영진 일행은 더럭 겁을 먹었다. 이젠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광섭은 출판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어찌해서 안기부 요원으로 발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군납출판업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과 북한정보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김현희 사건전만해도 그는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헌데 마유미…이른바 김현희의 정보를 입수하는 일에서부터 그의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족집게처럼 김현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는데 발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특히 진광섭은 치고 빠지는 일에 능숙했고,안기부장배 검도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체력도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조직력과 통솔력이 우수했다. 그런 진광섭의 별명은 독사였다.

그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영진의 뇌리에 스쳤다. 아크힐스가 아니겠지. 진광섭이라면 뉴욕무역센터 빌딩도 통째로 임대할 남자인 것이다.

아크힐스는 10여년전에 건축된 복합 미래형 도시였다. 산토리生뮤직홀과 全日空호텔 등이 근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개중 가장 세련되고 국제화된 공간이 바로 이곳 아크힐스 오피스빌딩이다. 그런 만큼 임대비도 비쌌다. 그런데 이 장소에다가 진광섭은 보란듯이 안기부 캠프를 세운 것이다. 역시 독사다운 행동일까. 아니면 무식한 것일까.
진광섭은 이날 아침 6시까지도 복도에 서있는 춘해 일행을 부르지 않았다.
그냥 사무실안에서 바쁘게 왔다갔다하면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6시 30분경이 되어서야,커피 타임이라고 말한 뒤,광섭은 춘해 일행을 호출했다. 그런 뒤 광섭은 책상 위에 앉았다. 다시 그의 콧등에는 이사벨 아자니 선글라스가 올라가 있다.
영진 일행은 떱떨한 표정을 지으며 춘해를 따라 진광섭 앞까지 갔다. 춘해가 진광섭에게 그 동안 있었던 실적을 보고할 시간이 결국 도래한 것이다.

진광섭은 예상외로 나긋나긋하게 춘해 일행을 맞이했다. 선글라스 양쪽 꼬리는 오만하게 위로 향해 있는데,그 너머로 흰머리가 히끗히끗 보였다. 광섭이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는 그의 매서운 눈 때문이었다. 부하들 사이에선 진광섭의 서슬 퍼런 눈빛에 여자 몇이 감전사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지만 광섭은 그런 소문을 일축하고 있었다. 광섭의 부인이 딸을 낳자마자 죽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17일부터 브렌치 3이 깨진 것입니까?"
"미안하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소이다."
춘해는 광섭 앞에서 그저께 밤부터 있었던 일들을 조목조목 설명해 나갔다.
그날 아침 춘해는 서울의 연락을 받고 가나기원의 김준을 감시하러 갔다.
당시까지만 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에 서울도 김준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그날 오전중에 김준은 은행에 들렸다. 뭔가 일이 안 풀렸는지 그는 하루종일 고민을 하는 듯했다. 오후가 되자 김준은 잠시 가나기원으로 돌아갔다. 10분후에 그는 빈손으로 나왔는데 이때 사뇨 나쓰에에게 야구장 입장표를 홈쇼핑 통신망을 통해 우송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5시경에 준은 도쿄돔으로 갔다. 이때 춘해는 그의 뒤쪽에 앉아있었는데 김준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퇴근한 나쓰에가 준을 만나러 왔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야구장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고가 끝나자 진광섭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그리 복잡해? 그러니까 송환 지시가 있은 이후로 오늘까지 모두 4차례나 그 놈을 놓쳤다는 거 아냐?"
진광섭이 대쪽같이 물어오자 춘해는 등골이 오싹했다. 식은땀이 났다.
"송환지시는…밤 11경에 있었습니다. 녀석이 방송국 리포터인 게이꼬를 만나러 미나미 주점안으로 들어갈 무렵인데…"
진광섭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안쪽 포켓에 손을 넣었다.
"아,화를 내서 미안하오. 게이꼬의 죽음이 이상하다고 했었나?"
진광섭은 포켓안에서 꺼낸 구강향수를 입안에 치익 뿌렸다. 박하향이 났다.
그는 씹어먹을 듯 입을 놀리고 있었다.
"게이꼬는 그만두고 사뇨 나쓰에가 궁금한데,그녀에 대해선 아는 게 있소?"
"없,없습니다. 아직 채 조사할 시간이…"
진광섭은 그럴줄 알았다는 미소를 흘린다. 진광섭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손뼉을 딱딱 쳤다. 이미 7명의 전산요원들은 서울에서 공수해온 노트북 컴퓨터를 밴케이블로 연결한 뒤 작업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봅시다. 전산팀은 24시간 내에 일본통신망을 확보하시오. 김준이 관련된 인덱스가 있다면 모조리 뒤집어 놓으란 말이요! 그리고 그 자식이 놀고 간 흔적이 있다면 끝까지 추적하시오. 그 놈의 작업 스타일을 24시간 내에 파악하란 말이요. 아시겠소?"
그런 뒤 진광섭은 자신이 깔고 앉았던 책상위의 서류를 손으로 집더니 그것을 응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사뇨 나쓰에는 임소봉 자네가 확보하게. 김영진씨가 임소봉을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소. 아참 나쓰에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여동생은 이상운이 확보하면 좋겠군. 상운이완 오랜만에 같이 뛰는 건가. 요즘도 땅바닥에 헤딩하고 다니나? 자넨 여잘 너무 밝혀서 탈이야. 하기야 자넨 버벅기는게 특기지. 황영달 자네는 가나기원에서 탐문수사를 시작해보게,그리고… 누구야 떠드는 게,엉? 김팔봉이 자네 셔트 내리지 못하겠나? 자네 말야,계속 그런식으로 나오면… 아냐 그만하지. 김팔봉이 넌 경시청에 가 있게. 알겠나?"
요원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진광섭의 선글라스를 응시했다. 이상하게 선글라스가 조명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우종이는 제일그룹 일본지사에 박혀 있어. 정해도 넌 사뇨 나쓰에의 셀시오 자가용을 수배하고. 김팔봉이 넌 정해도를 도와주라구. 경시청에서 일본어를 연습한다고 깝죽대지 말고 말야,알았나?"
김팔봉이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임춘해는 입안이 바짝 타올랐다. 광섭이가 자신에게는 좀처럼 임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해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난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나도 뭔가 해야 할게 있을 거 같은데…"

진광섭은 사람을 돌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아까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춘해는 자신과 동갑내기 동료였다.
"아…춘해씨는 TV도쿄를 가보시오. 혹 죽은 후루겔스 게이꼬의 동료들중에 김준을 아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요."
그런 다음에 진광섭은 다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천천히 시작해 봅시다. 다들 덜럴덜렁 뛰어 다닌 뒤 오후 7시 까지 보고서를 제출하시오, 아시겠소?"
덜렁덜렁이란 남자의 성기를 말하는 게다. 광섭의 유머는 재미없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중 덜렁덜렁은 가히 압권이었지만 이 말만 나오면 부하들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게다. 임춘해도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셔트 내린 뒤 뒤늦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요원이 있으면…한강 다리에서부터 버벅 기어올 각오를 하시오. 자 그럼 시작합시다."
지루한 커피 타임은 끝났다. 이날 아침 7시 정각. 안기부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진광섭 팀이 작업을 개시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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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뇨 사즈메. 사즈메라는 이름보다는 사유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방년 18세의 소녀.
사유리라는 이름은 어감상으로도 부드럽다. 하지만 언니는 반드시 사즈메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오늘도 그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즈메가 아침 일찍 세이신聖心 여고에 등교하기 전에 말이다. 사즈메는 히풋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창 밖에선 풋풋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즈메는 창밖을 응시하며 통화를 계속했다.
이제 봄이야…
불현듯 사즈메의 뇌리에 아련하게 봄 빛깔이 퍼져 나갔다. 통화가 끝나자 사즈메는 세라복형의 교복을 마저 입었다. 가슴이 타이트하게 사즈메의 교복 상의에 알맞게 달라붙는다.
난 요즘 완전히 지쳐 있단 말야…
사즈메는 금년만 넘기면 성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더 빨리 올지 모른다.
사즈메는 교복 상의 아래로 귀신같이 페이저(삐삐)를 집어넣었다. 이쯤 되면 언니가 원하건 원하지 않든 만반의 준비가 되는 게다. 사즈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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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는 욕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쳐 진 이웃집을 바라보았다. 이즈의 호랑이 할멈이 오늘 아침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2주일 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침마다 저쪽 창문에서 자신을 향해 코를 풀던 할머니였는데.
고바야시는 토토 스위치를 눌렀다. 시원했다. 아내가 출근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거실에서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고바야시가 좌변기에 허리를 일으켰을때는 가볍게 천둥이 울려는지 거울이 고바야시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밤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봄비치곤 상당히 길게 내려질 것 같다.
고바야시는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낸 뒤 고바야시는 타월을 꺼내 들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고바야시는 고개를 쳐들고 욕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넛집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는데,분명히…
후꾸오 하야시의 울음소리였다.
하지만 만화가인 가미야 고바야시는 하야시의 울음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날 오후 2시가 원고 마감 시간이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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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다. 잠에서 방금 깨어난 김준은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붕대로 감겨 있다. 붕대 밖으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준은 방안을 살펴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의 어느 별장인것 같았다.
침실 유리창으론 빗방울이 더덕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있다.
준은 침대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온몸에서 무슨 마취제라도 맞은 듯 느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도 들려온다. 출입문 옆에 놓여 있는 필립스 원두커피제조기였다. 준은 원두커피제조기를 응시하다가 무심히 침대 옆에 있는 사이드 탁자로 시선이 갔다. 메모지가 놓여있다.

– 저 출근해야 되거든요. 여기서 도쿄까지는 한시간 거리입니다. 사뇨 나쓰에가 메모 남깁니다… —

준은 간신히 왼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오후 2시 25분을 지나고 있다. 시간을 확인한 뒤에 준은 다시 한번 안간힘을 써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영 마음 대로 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시도를 한 끝에야 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 뒤편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이. 사뇨 사즈메입니다. 하지만 사유리라 불러주세요 아저씨."
준은 깜짝 놀래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뇨 사즈메…아니 사유리가 교복차림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그런 사유리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는데, 그녀의 소니 워크맨 해드폰에서는 뽕짝뽕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김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사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허벅지에서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쓰를 얼마나 많이 바르세요?"
준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유리는 토라진 표정으로 준의 머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 머린 여간 정성이 아닌데요?"
이번에는 준의 머리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척하기 위해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는 사유리. 교복치마 자락이 가볍게 살랑거린다. 사유리는 짓궂게 말했다.
"지금도 철사처럼 뻣뻣하군요 이 머리카락은…"

으음. 아저씨라니.

사유리의 호흡소리가 가깝게 들려 오자 김준은 얼굴이 빨개졌다. 나쓰에의 여동생인 것 같다.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지만 사유리와 나쓰에는 전혀 성격이 달라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현미경을 보듯 준의 머리칼을 관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돌적인 게 이 소녀의 특징인가 보다.
"아직 아마추어이지만 말이죠. 다시 한번 주사를 놓아 드릴까요?"
사유리는 그렇게 말한 뒤 턱짓으로 주사기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사이드 탁자 위에는 메모지외에도 주사기가 몇개 놓여있다.
"적당한 마취제를 구할수가 없어서 에테르를 사용할까 했는데,언니가 토끼가 아니래요. 다친 사람은 남자,아니 아저씨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하게 마취제를 구해왔어요. 효과는 꽤 있었던 걸로 아는 데…"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의사인가…? 사유리 양은?"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렸다. 귀여운 미소다.
"아뇨. 흐…세이신 고교의 간호사 취업반입니다. 공부를 못하거든요. 그렇다고 무시하진 마세요…"
사유리는 해드폰을 귀에서 빼며 말했다.
"미스 저팬에 나가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있으니까요. 진심이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그 자리에서 몸을 한바퀴 돌렸다. 미끈하게 빠진 사유리의 몸매가 한눈에 다가온다. 사유리는 워크맨과 함께 삐삐를 허리뒤에 차고 있었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심사위원을 하고 싶은데 사유리양."
사유리는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웃음이다. 준 역시 미소로 응답을 했지만 실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마취제를 투여했던 것일까. 온몸이 무겁다. 이러다가 몸이 엉망이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지금은 이따위 생각을 할 시간이 아니다. 준은 자신의 노트북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트북은 출입문 옆에 놓여 있다. 준은 손으로 노트북을 가리켰다.

별안간 사유리의 얼굴표정은 딱딱하게 긴장되었다. 힘겹게 사유리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침에 전화로 나쓰에가 무조건 아저씨를 도와주라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유리는 힐끔 눈치를 보면서 원두커피제조기 옆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집었다. 사유리의 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노트북을 두들겨 본 게 들통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유리는 노트북을 집어들다가 무심코 말했다. 이까짓 가지고 용기를 잃을 사유리는 아니었다. 할 말은 하는 게다.
"아저씨는 집 잃은 개처럼 가련해요. 다리는 언제 다치신 거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는 총알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 총알 빼느라구 저 사실…눈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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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25분. 임춘해는 후루겔스 게이꼬의 뉴스보도를 반복해서 모니터하고 있다. 별다르게 의문 나는 내용은 없다. 곤바야 제작 1부장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아 마침 있군요. 이겁니다. 이 디스켓을 그날 게이꼬양이 가지고 왔었죠. 김준이란 기자분도 이 디스켓을 찾던 것 같던데요."
곤바야는 오니쓰라 경감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임춘해에게 협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디스켓이 어째서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곤바야는 식은 땀이 났다.
"혹시 마끼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춘해는 곤바야가 내민 디스켓을 지퍼백(비닐봉투의 일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보도부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필요하다면 알아 드리겠습니다만."
"그럼 명함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요."
"가능하다면 협조해 드리죠. 헌데 무슨 일로 구보 마끼 양의 주소가 필요한지..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군요. 그 여잔 이미 자살한지가…"
이때 별안간 춘해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상운이었다. 이상운은 세이신 여고에서 비를 맞으며 사즈메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오전 수업중에 조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으며 상운은 춘해에게 전화를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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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에는 오늘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앞으로 3일안에 고마쓰小松 강철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끝내야 했다. 한번은 버그가 발생한 바람에, 또 한번은 사용상의 결함으로 인해 클레임이 걸려왔다. 이때문에 나쓰에는 오늘 아침부터 과장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질타를 받았다. 더구나 어제 밤에 봤던 체로키 지프차가 도로 저쪽 구석에서 한나절동안 주차해 있다. 어제 그 대사관 남자가 분명했다. 그는 나쓰에가 퇴근하기를 기다린다는 듯 지프차 옆에 서서 계속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쓰에는 창 밖을 내다보며 몇마디 알고 있는 한국어를 주절주절 반복해 보았다. 강도입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고 싶습니다… 어머…깍아주세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해 본다면 무슨 일인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게다.
그렇지만 그녀는 왠지 겁이 났다. 김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지금쯤이면 사즈메가 모든 걸 잘 해가고 있는 걸까.
아니 걱정하지 말자. 지금 당장은 이 지겨운 고마쓰건부터 처리하는 거야.
나쓰에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다시금 머리속은 김준의 대한 생각으로 돌아간다. 도와주고 싶었다. 도와줄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서류상자를 열고 휴가청원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를 얼마나 안다고…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젠 결정할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실상 나쓰에는 어젯밤의 그 대사관에서 왔다는 김영진에게 화가 나 있었다.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할수만 있으면 문짝 값이라도 배상 받을 생각이야 난.
마침내 나쓰에는 결심을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가 청원서를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4번째 손가락에서 황금색의 엠버(호박)가 빛을 반짝였다. 그녀가 작년 여름에 <오피스걸 투어>때 들렸던 홍콩에서 큰맘 먹고 구입한 반지였다.
나쓰에는 과장에게 걸어갔다. 과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쓰에의 휴가청원서에 사인을 했다.
"나쓰에씨. 벌써부터 3일이나 찾아먹다니 말야. 이제 겨우 초봄인데…"
그렇게 말하다가 과장은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나쓰에가 자신의 말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열심히 해 오시오… 하지만 휴가 끝난 뒤에도 클레임이 걸리면 모든 건 나쓰에양이 책임져야 할 거요. 이번 휴가는 이 일때문에 신청한거니까 봐주는 것이오만."
"하이.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쓰에는 일부로 헤프게 아양을 떨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녀의 스퀘어 네크라인 블랙원피스에서 은은하게 향수냄새가 풍겨 나왔다. 원피스 아래쪽은 미니 형태였는데,레이어드 스타일로 걸쳐입은 치렁치렁한 겉옷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각선미는 보이지 않았다.
색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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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한일수 대리는 대한항공편을 이용 나리타 공항에 입국하고 있었다.
제일그룹 도쿄 사업본부에서 한현희가 마중나와 있다. 일본물이 좋기 좋은가 보다.
현희는 무척 컬러플한 투피스 정장으로 한대리를 기다리고 있다. 논노 잡지에서 본적이 있을지 모른다. 저런 패션은 말이야. 일수는 헤프게 웃으며 동생의 손을 잡았다.
"너 많이 예뻐졌다. 달라져도 이건 너무 다른데?"
"지시는 받았습니다. 부장님이 직접 팩스를 보내왔더군요."
"그래? 고부장님이 벌써 메시지를 보냈구나. 근데 이거 난 일본말을 몰라서리… 그럼 사업본부로 갈까?"
"아뇨 갈 필요 없습니다. 아침부터 안기부에서 한사람 나와 있습니다. 전 휴가를 받은 걸루 하고 점심시간에 빠져 나온 거예요 오빠."
"그래? 염병할 안기부,눈치하난 빠르군. 그래 뭔가 찾아보았니?"

한대리는 현희가 가지고 온 지프에 올라탔다. 계열사인 제일자동차가 생산한 4륜 구동의 뉴로맨서 지프다. 일본에까지 어떻게 공수해왔을까.
"혹시나 해서 김준의 ID가 남아있는 통신망을 오전중에 찾아보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ID가 남아 있다니?"
"각 통신망을 연결해 인덱스파일에 기록된걸 검색해 본 겁니다…"
일수는 현희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의심스런 눈으로 차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동생이 요즘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 궁금했다.
일본남자는 아니겠지…
"간단히 설명해봐. 이 오빠는 뛰는 거 밖에 모르잖아."
현희는 힐끔 한일수를 응시했다. 철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로그인login은 접속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로그아웃logout할 때 까지의 움직임이 인덱스 DB(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남아지게 됩니다."
"어. 그래…?"
"처음에는 유료업자들이 시작한 거죠. 사용료를 산출하기 위해서요."
"그럼 ID를 심는 다는 게 뭐야? 본사는 이 문제로 시끄럽던데…"
"ID를 심는다는 건 접속에 이용한 ID를 버리고 중간에 다른 ID를 사용했다는 뜻일 겁니다."
일수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현희를 바라보았다. 현희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라는 심산인 게다.

"아 이런 뜻이에요 오빠. 만약에 말이죠. 제가 case란 ID를 이용해 통신망에 접속을 했다고 합시다. 제가 만약 이름난 해커라면 제 ID로는 접속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금방 추적당하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전 항상 타인의 ID를 사용하거나,아니면 ID를 사용하지 않고 침투합니다. 하지만 전 저를 알려야 합니다.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으면 곧 내 정체를 밝히고 싶겠죠. 그래야만 제 주가가 유지될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니까 빠져나오기 전에 훔친 ID인 case를 기술적으로 제 진짜 ID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태양>이나 <ガイト(가이드)>등의 해커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하죠. 침투할 때는 타인의 ID로 침투하지만요,나오기 전에 자신의 ID를 심어 놓는 해커들인 겁니다."

일수는 한국에서 통신을 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안시Ansi와는 다른 것 같다. 안시는 지극히 간단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현희의 이야기 뜻은 접속에 이용한 ID를 표면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속성까지 바꾼다는 뜻일 게다.
일수는 현희의 말을 새겨들으면서 다시 그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먼저 로그인 상태다. 이 상태에서 일수는 case란 ID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동급해커라는 ID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동급해커가 활동한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 작업을 끝낸 뒤 다시 case란 이름으로 돌아온 뒤 로그아웃을 하면 어떡케 될까. 중간에 case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고 동급해커라는 ID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이 남게 될 것이다. 이때문에 컴퓨터가 인덱스 작성에 심각한 곤란을 느끼게 될것이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생각해보아도 불가능해 보였다. 일수는 히쭉 웃었다.
"난 안되겠는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야?"
현희는 처음으로 밝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오빠. 제 ID를 버리고 오빠 이름을 사용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하고 난 뒤 한현희는 핸드백에서 프린팅 용지 한장을 꺼내 일수에게 내밀었다. 곧바로 지프차의 실내등이 켜졌다. 일수는 현희가 건네준 용지를 손에 쥐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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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名 Glory1 Login at 無限 Txt/2938 ### 東京 2938
…………………………………………………….
index name 接觸/回 index 接觸時間/分
陸上 7部 2 arm 7 12:10
記錄室 1 rxt 01:02
航空部 1 fxs 45:01
防衛廳 1部 1 dep 01:01
調査部 ??? res ??## 東急Hack ##??
靑年 3聯合 1 bud3 02:10
彈藥庫 0 boll/chatin 00:00
安全局 5 bis 21:34
女性 1局 1 syster 1 09:19
建國記念同志會 1 ourland 20:00
……..
———————————————————–

일수는 프린팅 용지를 읽는 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군. 이건 어느 단말기의 인덱스 기록이지?"
"방위청 컴퓨터중 하나입니다. 오빠."
일수는 눈이 뒤집어졌다.
"뭐? 방위청이라고?"
"네. 혹시나 해서 오전중에 방위청 컴퓨터에 들어가 보았죠. 그런데 방위청에도 동급해커가 침투한 흔적이 있더군요."

이해할 수가 없다. 놈은 무슨 이유로 일본 방위청까지 침입해 갔을까.

한일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때문에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다시 인덱스 기록을 살펴보았다. 접속에 이용된 아이디는 글로리1이라는 ID였고,호스트는 무한無限이다.
첫째줄을 읽어보면 글로리1이 육상 7부에서 12분 10초 동안 접속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아래쪽 기록실에 접촉한 걸 보자. 한차례 접촉에 1분 2초간 접촉 했다는 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좀 더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별안간 불쑥 <동급해커>라는 ID가 떠 올라와 있다. 그렇지만 접촉한 횟수와 접촉한 시간은 알 수가 없다. 인덱스가 기록상에 착오를 불러 일으켰거나,글로리1에 의해 ID가 동급해커로 바뀐 뒤 점유시간이 모조리 해킹되었다는 뜻일 게다.

한일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냐. 이건 김준이 한 게 아냐. 다른 녀석이 한거라구…"
현희는 일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에 스테인리스처럼 차갑게 말했다.
"그래요. 김준이 한 일이 아닙니다. 글로리1이라는 해커가 방위청 컴퓨터에 침투한 뒤 동급해커라는 ID를 그곳에 심어 놓은 겁니다. 그 때문에 인덱스 기록상에 별안간 <동급해커>라는 단어가 떠있는 거죠."
"언제 건데 그래? 이 방위청 인덱스는 얼마나 오래된 기록이지?"
현희는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오빠. 놀라지 마세요. 그건 4시간 전 기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희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현희는 알고 있었다.
글로리1은 제일그룹의 일본지사가 소유한 <방위청 방문용 ID>라는 것을.
바로 한현희 자신도 가끔가다 사용하는 ID였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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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뇨 나쓰에의 엑셀런트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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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아타미熱海 해안가 별장 안에서 김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다. 김준이 접속한 통신망은 니프티서브. 준은 니프티서브사에 합법적으로 kimjun이란 ID를 등록해 놓고 있었다.
니프티서브사 메일박스에는 그 동안 날아온 메일이 없었다. 그때문에 김준의 눈은 실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허벅지에서는 아직도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준은 로그아웃을 한 뒤 곧바로 jsko라는 ID로 재접속을 시도했다. jsko는 고종수가 인터넷망에 등록시킨 그의 개인 ID였지만 김준이 간혹가다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망에도 접수된 메일이 없다. 준이 위기에 빠졌을때는 고종수가 자신의 아이디 jsko 앞으로 비밀리에 전자메일을 보내왔는데 말이다.
준은 인터넷 망을 빠져 나오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인덱스 기록을 검색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2시간 전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마음껏 헤집고 다닌 흔적이 기록돼 있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종수의 이 ID는 김준과 종수 외에는 암호를 아는 자가 없는데.
누굴까…
준은 인터넷에서 이번에는 피시밴사로 접속을 시도했다. 이번에 사용한 아이디는 Glory12. 글로리는 제일그룹 일본사업본부가 가지고 있는 통신망 접속용 ID였다.
초창기에는 jeill이라는 아이디를 쓰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한국 냄새가 난다고 해서 사업본부장이 강제적으로 아이디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리>와 <제일>이라는 아이디가 일본 각 통신 망에 등록되어 있다.
준은 피시밴 안에서 곧바로 해커 포럼으로 이동을 한뒤 사설비비에스 명단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적당한 비비에스의 전화번호가 곧장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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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크 BBS는 사설 BBS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단체였다. 주로 인터넷 정보를 퍼와서 판매하는 게시판이었는데 나중에는 전문 심부름센터로 발전해갔다.
현재는 세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직업 프로그래머만 해도 300명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준은 피시밴사에서 로그아웃을 끝낸 뒤 곧바로 세크 BBS로 접속을 시도했다.
세크의 초기화면은 심부름센터 기능이라 그런지 아주 간단했다.

>> 귀하의 지불 방법은? 1 card 2 giro 3 cash
>> 귀하가 필요한 정보는?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준은 주문표를 응시하다가 문득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실에서 전화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가 했더니 사유리가 전화를 받는것 같았다.
나쓰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일까…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이드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아래로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이동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허벅지에서 아직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은 한숨을 쉬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5시 10분전. 피곤했는지 머리가 아파왔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마취제를 나에게 투여했던 것일까. 아직도 온 몸이 지끈거리고 무겁다.
준은 다시 노트북의 액정화면을 응시했다. 그런 뒤 자판 위에다 오른손을 올려 놓고 한손으로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1. 지하철 사고 사례
2. 지하철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해커와 작업 가능한 해커 명단
3. 구보 마끼 준사히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

막상 필요한 정보를 타이핑했지만,김준은 대금 지불방법 문제로 고심이 많았다.
지갑을 꺼내 펼쳐 보았다. 국제면허증과 가짜로 만든 기자신분증. 2장의 증권카드와 12장의 신용카드는 다시 조사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기껏해야 8천엔이던가…
푼돈이 들어있다.
준은 대금지불 방법을 카드로 선택했다. 최소한 이럴 경우에는 카드로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만 미리 밝혀두면 정보조사를 시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야 그때가면 어떻게든 구해볼수 있을 것이다.
준은 지불방법을 카드로 선택한 뒤 엔터 키를 눌렀다. 그러자 잠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메시지가 불쑥 떠올랐다.

>> 귀하의 정보사용료는 120,000엔 입니다.
>> 귀하가 주문한 정보는 6시간 내에 준비 가능합니다.
>> 6시간 후 재접속을 해 주십시오.

그런 뒤 자동으로 접속이 끊긴다. 경험없이 세크 BBS에 접속을 하는 이용자라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일방적으로 접속을 끊는 것이다. 그만큼 고객이 폭주하는 지 모른다.
접속을 끝낸 뒤 준은 다시 인터넷 호스트로 들어가 보았다. 역시 전자메일은 없다. 어떻게 된 걸까. 가끔가다 전자메일로 아내 자랑을 하던 팔불출이 아쉬울 때는 연락조차 없는 게다. 지금쯤이면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종수 이 자식 아무래도 날 너무 부려먹는단 말야…
인터넷에서 빠져나오다가 김준은 무심코 인터넷에 접속한 전체 이용자수를 확인해 보았다.
1996년 3월 21일 오후 4시 59분 44초 현재. 세계각국 인터넷 호스트에 접속을 하고 있는 총이용자의 수는 34,729,722명에 달하고 있었다.

준이 인터넷 호스트에서 접속을 끊는 순간 사유리가 침실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저씨 나 어때요? 이거 나쓰에 언니 옷인데…아참 언니는 좀 늦을 거래요. 대사관인가 뭔가에서 자길 쫓는다고 하네요. 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요."
준은 사유리를 바라보며 비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유리는 교복을 벗어던지고 배꼽 티를 입은 상태였다. 배꼽이 살짝 보이는 티셔츠. 하체는 알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진바지. 아마 사유리가 여기서 조금만 더 노출에 신경을 썼으면,김준의 머리는 맥가이버 바이러스에 걸린 것처럼 모든 사고능력에 장애가 발생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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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진광섭은 보고서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미 보고서를 제출한 이상운은 광섭의 옆에 앉아 그가 구술하는 것을 메모하고 있었다. 보고서가 잘못되면 족족 짜르고 다시 일을 시키고 있다. 상운은 그런 광섭의 모습에 식은땀이 났다.
자동차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상운은 광섭의 핸드폰 통화를 들으면서 차창 밖 거리 상황을 체크했다. 퇴근길 러시아워가 시작될 조짐이다.
상운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정각. 사뇨 나쓰에가 퇴근을 하려면 아직 한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나쓰에가 속아줄까…상운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 임대 헬기는 어디에 있나?"
갑자기 진광섭은 통화를 끝낸 뒤 상운에게 물어왔다. 상운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르켰다. 자가용 앞 유리창 너머로 55층의 최첨단 인텔리전스 빌딩인 저팬 인포메이션 센터가 올려다 보였다. 헬기장은 55층 꼭대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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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1시간전이었지만 사뇨 나쓰에는 서둘러 디스켓과 노트북을 박스에 집어 넣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지금 퇴근을 서두르는 게 좋을것 같았다.
체로키 지프의 사내는 자신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유리할 것이다. 아마 미행해 오겠지.
나쓰에는 동료들에게 적당히 둘러 댄뒤 과장앞으로 걸어갔다. 과장은 못마땅하게 나쓰에의 5시 퇴근을 허락했다. 3일 휴가에 1시간 일찍 퇴근이라니. 김준만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은 분명 멋진 순간일텐데.
나쓰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상쪽으로 걸어가 이즈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20인치 소니 모니터에는 도쿄도 도로망이 검색되어 있었다.
나쓰에가 점심식사 시간에 달달 외우다시피한 도로망이다.

나쓰에의 셀시오 자동차가 빌딩 지하주차장에서 스타트를 하는 그 시각.
김영진은 체로키의 운전석에 앉아 추적장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발광체가 처음으로 깜박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영진은 자신의 쿼츠손목시계를 보았다.
역시 겁을 먹은 것일까? 예상보다 1시간 일찍 퇴근을 서두르고 있다.
영진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람보 원. 나쓰에가 방금 출발했다. 예상대로 C 출구로 빠져 나갔소."
"방금 떠올랐습니다. 람보 원. 아무래도 릿카 미술관 방향인것 같은데…"
응답을 한 요원은 윤영범이다. 윤영범의 자동차는 체로키와는 다르게 빌딩 뒤편 도로에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곧장 셀시오 자동차가 도로로 올라오는 모습이 윤영범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이날 동원된 자동차는 모두 3대였다. 각 자동차에는 도쿄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춘해의 부하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윤영범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셀시오를 뒤따라 미행하면서 힐끔 백미러를 응시했다. 바로 뒤에서 람보 쓰리가 멍청하게 뒤따라오고 있다.
"람보 쓰리. 뭐하나? 이 밥통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넌 요요끼 공원으로 달려가란 말야!"
그러자 람보 쓰리인 오종식의 음성이 느리게 무전기를 타고 넘어왔다.
"거 대게 그러네…. 지금 이시간이면 요요끼 공원이 영…헌데 영진형은 어디에 있는 거요. 도대체?"
오종식은 영진을 호출하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영진의 체로키 지프차가 아슬아슬하게 두대의 버스 사이로 빠져나오더니,곧장 긴좌쪽으로 방향을 꺾고 있었다.

체로키를 운전하고 있는 영진의 표정은 아직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새벽부터 나쓰에가 체로키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문제로 체로키에 부착된 추적장치를 분해해서 다른 차에다 옮기려는 작업이 있었다. 하지만 작업 도중에 서너명이 기술부족으로 나가 자빠졌다. 체로키 지붕에 보이지 않게 설치된 추적용 레이다를 다른 자동차로 온전하게 이동시키는 게 불가능했던 게다.
이젠 어쩔수가 없다. 나쓰에는 이미 자신이 미행 당하는 걸 알고 있을 게다.
밀어 부칠 수밖에. 하지만 러시아워 시간에 이런 지겨운 레이스를 시작하다니.
영진은 전방을 주시하다가 다시 상자형의 추적장치를 응시했다. 전파장애 때문인지 붉은 색 불이 깜박이다가도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무래도 제국극장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그쪽이라면 사방팔방으로 이동할 수는 있는 로타리가 있다.
영진은 신경질적으로 크락숀을 누르며 서행하는 자동차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나쓰에는 교통체증때문에 숨이 막혀 왔다. 벌써 20분째 릿카 미술관 앞 도로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더구나 어제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사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전혀 소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간 어떻게 약속 시간까지 상지대학까지 갈 수 있을까.
나쓰에는 점심시간에 외우다시피 한 도쿄 지리를 다시 머리속에 떠 올려보았다.
체로키 지프는 근처 어딘가에서 비밀리에 미행을 해올 것이다. 최소한 상지대학에 도착할 때까지는 눈치를 채게 하면 안된다. 나쓰에는 자신의 어설픈 계획을 체로키 일당이 알아차릴까봐 은근히 겁이 났다.

체로키 지프의 김영진은 다시 빨간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역시 추측대로 나쓰에의 셀시오는 제국극장 로타리로 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로타리 부근에서 갑자기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영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혀 예상 밖의 이동이다. 그쪽은 국립근대미술관 방향인데…
요요끼 공원에서 지금 대기하고 있을 람보 쓰리는 허탕을 친 것이다.
영진은 기가막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오종식을 국립근대미술관으로 돌리기 위해 서둘러 무전기를 들었다.
그때 옆좌석에 앉아있던 임소봉이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국립근대미술관이 아니요. 산토리 미술관으로 돌리시요. 아무래도 그 여자 수상하구만…"
영진은 힐끔 임소봉을 쳐다보았다. 오늘 하루종일 같이 붙어다녔지만 처음으로 임소봉이 입을 열었던 게다. 영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임소봉은 히쭉 웃으며 허공에다가 손가락으로 S자로 그렸다. 셀시오가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임소봉의 추리는 맞는 말이었다. 역시 독사 진광섭이 아끼는 부하라 하더니 문무가 겸비되 있다. 영진은 그런 임소봉을 바라보며 머리속에 산토리 미술관 부근을 떠올려 보았다. 근처에는 눈에 띄는 장소가 없었다. 상지대학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상지 대학 뒤편으로는 고속도로가 연결되고 있다.
나쓰에는 어젯밤에 김준을 지방도시로 빼돌린게 분명했다. 점심에 주차장에 들어가 조사를 해 본 바 셀시오 자동차의 타이어 바퀴는 온통 진흙투성이었다.

상지대학의 이즈모는 기가 막혔다. 벌써 20분이나 지나고 있다.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즈모의 사브 자가용은 상지대학의 쌍둥이 건물 사이에 있는 좁은 주차장에 서 있다. 좌우로 건물이 있기 때문에 주차장이라기 보다는 골목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장소다.
사브 자가용은 이즈모가 인턴생활을 시작하자,그의 형들이 융자형식으로 빌려준 돈으로 이즈모가 구입한 차였다. 이때문에 사브안에는 이즈모가 수집한 카 액세서리로 가득차 있었다. 더구나 카폰까지 달려있고,축구선수 노정윤의 사인이 그려진 축구공도 하나 뒷좌석에 놓여 있었다.
노정윤은 이즈메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였다.
어쨌든 이놈의 축구공이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키긴 했다. 간혹 카섹스 도중에 축구공이 난데없이 고무줄처럼 퉁겨 올라 이즈메의 얼굴을 찼던 것이다.
하지만 이즈모는 그런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건 여자위에 올라간 상태에서,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고,조심스럽게 발끝으로 카스테레오의 녹음버튼을 누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난 뒤,여자의 귀에 입을 대고 허스키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흥분 해봐…. 난 신음소리가 좋아…
별다른 실수가 없는 한,파트너의 신음소리는 완벽하게 녹음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녹음된 카세트에는 <카섹스 뮤직>이라는 라벨이 붙혀진 후 박스에 차곡차곡 보관이 되었다. 그런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그걸 듣는 것이다.
이즈모의 이 증세는 아무래도 좀 심각한 편이었다. 간호사들이 진단서를 떼어줄 정도로.
이즈모는 얼굴을 찡그렸다. 6시 30분에 만나 아타미 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나쓰에의 차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누가 다쳤다고 하던데. 남자는 아니겠지.
이즈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캠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캠퍼스를 가로질러 올라오는 셀시오 자가용 한대가 이즈모의 시야에 들어왔다.

김영진은 상지대학 후문쪽 도로에서 셀시오 자가용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범이의 자동차가 나쓰에를 뒤따라 상지대학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후문쪽으로 체로키를 몰고 왔는데 그 사이에 영범이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영진은 다시 추적장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발광체는 3분 정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있다.
영진은 불안한 듯 옆좌석에 앉아있는 임소봉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홍금보처럼 둥글한 임소봉. 제법 점잔하게 보이지만 성격은 여간 깐깐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머리회전도 좋을 것이다. 소봉이가 지시한대로 아까 상지대학쪽으로 3번 차를 미리 돌려놓은 덕분에 나쓰에를 놓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임소봉이가 추리한대로 나쓰에는 S자형으로 움직이고 있다. 도대체 김준을 어디에다 감추어 둔채 저러고 있을까.

윤영범은 셀시오가 골목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차를 인도옆에 붙히고 셀시오가 다시 움직이길 기다렸다. 헌데 나쓰에는 셀시오에서 내려 왠 사내녀석을 만나고 있다. 나트륨등이 켜져 있기 때문에 윤영범은 그가 김준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식별하수 있었다. 5분이 지났을까. 빗방울이 점점 거칠어져가면서 시야가 정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영범은 초초하게 나쓰에와 사내놈을 응시했다. 순간 별안간 나쓰에가 영범이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건가?
영범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를 스타트시켰다. 그런 뒤 쌍둥이 건물을 돌아가는 산책길로 자동차를 몰고 갔다. 영범이가 쌍둥이 건물을 한바퀴 돌아 뒤쪽 광장으로 나왔을 때는 막 셀시오가 주차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영범은 깜짝 놀랬다.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나?
영범은 이상했다. 무슨 일로 상지대학안까지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것일까.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여긴 람보 투. 모두 듣고 있습니까?"
김영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을 했다.
"글쎄 여기선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람보원이 뒤따를 테니까 람보 투는 연금회관을,람보쓰리는 청산공원으로 이동하시오."
영진은 불안했다. 이러다간 김준이 있는 위치를 오늘중으론 파악하지 못할것 같았다. 아까부터 나쓰에의 셀시오는 계속 도쿄 외각을 돌고 있다. 마치 여우처럼.

엉망이었던 교통사정은 저녁 7시 30분을 넘어서자 시속 30Km까지 가능해 보였다.
천천히 자동차의 물결이 분산되고 있다. 영진은 계속 앞쪽에서 달려가는 셀시오를 응시하고 있었고,임소봉은 도쿄 도로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부터는 도로가 외각으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때문에 셀시오가 어느 방향으로 갑자기 튀어 도망갈지는 소봉이도 추측을 못하는 것 같다. 잠시후면,아니 지금 갑자기 셀시오 자동차는 미행자를 따돌리기 위해 튀어 도망갈 것이다.
"어디 이거 더러워서 해 먹겠습니까? 그냥 잡아서 족쳐 봅시다."
영진은 별안간 화가 나서 그렇게 외쳤다. 해병 근성이 조용히 잠자다가도 별안간 튀어나오는 것이다. 영진이가 그렇게 말하자 소봉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영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영진은 무안했는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런뒤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셀시오의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둑컴컴해졌기 때문에 셀시오에 누가 타고 있는지 이제는 식별이 되지 않는다. 소나기는 점점 거친 빗방울로 바뀌어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영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바로 뒤에서 따라 붙어 다니고 있는데도 셀시오가 서두르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쓰에라면 체로키 지프차를 알아 보고 도망을 칠 판인데 말이다.
"안되겠습니다. 한번 따라 붙어 봅시다."
그렇게 말한 뒤 영진은 곧장 핸들을 꺽었다. 동시에 그의 발이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셀시오는 도쿄 대학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수도고속화 도로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체로키가 갑자기 튀어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체로키 지프는 셀시오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다. 두 자동차는 서로 보디를 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임소봉도 뭔가 불안했는지 유리창을 내리고 셀시오 운전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임소봉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뭐야? 나쓰에가 아니잖아?"
어느새 임소봉은 영진의 무전기를 낚아채더니 정신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 년이 상지대학서 차를 바꿔 탔다! 모두 내 말 듣고 있나,지금?"

이때 영진은 튕기듯 핸들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미행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잡아 들인뒤 족치면 김준의 행방을 알수 있었을텐데 이게 뭔가. 제기랄. 영진은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차체가 둔탁하게 튕기며 속도를 내자 옆에 붙어서 달리던 셀시오 자가용은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멀어져갔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셀시오를 운전하고 있는 개자식을 잡아 족치자. 영진은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이 들자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그런뒤 브레이크를 밝았다. 셀시오의 진행방향을 앞쪽에서 미리 막아 버린 것이다.
셀시오 자동차는 날카롭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임소봉이가 권총을 꺼내 들고 체로키 밖으로 튀어 나갔다.
"뭐,뭐야 당신들?"
이즈메는 더럭 겁을 먹고 임소봉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는가 했더니 이즈메의 몸이 자동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야 짜샤 뭘 겁을 먹고 쳐다 봐? 네 놈 차는 어딨어 엉? 빨랑 말 안할래?"
임소봉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이즈메의 뒷덜미를 잡고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헌데 임소봉의 이 말은 이즈메와 같은 일본인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서울 표준말이었다. 이 때문에 이즈메는 영문을 모른채 임소봉과 영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봉이는 다시 화가 났다. 그는 어느새 이즈메의 뒷덜미를 잡은 상태에서 권총을 홀스트에 돌려넣더니,빈손으로 이즈메의 하체 중요부분을 와락 거머 쥐었다. 이건 임소봉이가 즐겨 사용하는 코브라 트위스트. 서 있는 상태에서 구사하기 때문에 폼이 나지 않았지만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이즈메는 켁켁 거리며 자신의 자가용 넘버를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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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해는 방송국을 떠나온 뒤 지하철사고 현장조사를 다시 하고 있었다.
춘해가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페쇄카메라의 움직임이었다. 페쇄카메라는 소형의 구동모터가 뒤쪽에 달려있는것으로 보아 좌우로 움직이며 피사체를 찾아다닐수 있다. 춘해는 몇몇 유능한 해커들이 폐쇄회로 감시망을 악용한다는 소문을 들은적 있었지만 그게 현실적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춘해는 이번에는 게이꼬의 몸이 산산조각 났던 지하철 터널쪽으로 걸어 갔다.
춘해의 뇌리에 별안간 일본속담이 떠올랐다.
犬も 步けは 棒にあたね…
(개도 쏘다니면 몽둥이에 맞는다던데…)
후루겔스 게이꼬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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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시각. 오종식의 람보 쓰리 요원들은 허탈했다. 람보 원이 나쓰에가 차를 바꾸어 타고 도망갔다는 정보와 자동차 넘버를 알려왔지만 이젠 추격이고 나발이고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이쪽 도로상황은 아직도 교통체증이 게속되고 있었다.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으니 직장인들이 일찍 퇴근을 서두는 것이다. 유일하게 시원스럽게 달리수 있는 도로는 건너편 수도 고속화도로 상단부밖에 없었다.
오종식은 옆좌석에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동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시 상지대학쪽으로 돌아가 볼까요? 혹시 아직도…."
그러자 그 작은 체구의 사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앞차는 뭐요? 번호판이 방금전 들은 그 번호 아닙니까?"
오종식은 깜짝 놀란얼굴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東京 70 あ 29-30

종식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방금전 임소봉이가 알려온 자동차 번호판이 행운의 복권처럼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게 무슨 기적인가.
오종식은 급히 무전기를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람보 투. 사브 자동차를 발견했습니다. 수도고속화도로요. 외각 고속도로로 빠져 나갈 생각입니다. 정확합니다!"
순간 빗물에 미끄러진 냉동차가 갑자기 종식의 자가용쪽으로 붙어 왔다.
행운 뒤에 불행이라더니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종식은 뒤에서 따라오던 자동차들이 멈추어 서있는 가운데 트럭운전사를 향해 욕을 한사발 한뒤 다시 엑셀레이터를 밝았다.
그 사이에 나쓰에가 운전하고 있는 사브 9000은 수도고속화 도로를 타고 넘은 뒤 외각 고속도로로 총알같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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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식들 다들 뭐하고 있었나 엉? 너희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진광섭은 임소봉과 두번째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울그락불그락 화가 나 있다.
"너 소봉이 이자식. 내 날아갈테니까 나쓰에를 당장 찾아! 한놈은 고속도로를 타고 두놈은 기어가던지 날아가던지 해서 나쓰에 앞에서 다리벌리고 기다리란 말야! 니네 그래 세팀이나 되면서 여자 하날 미행 못해? 앙?"
이상운은 벌개진 얼굴로 진광섭을 응시했다. 간신히 이상운은 입을 열었다.
"과장님. 지금 가셔야 겠습니다. 기상상태는 염려할 단계가 아니라는데요?"
"알았어 임마,나 지금 통화하는 거 안보이나?"
상운은 더럭 겁을 먹고 뒤걸음질을 쳤다. 진광섭은 상운을 노려보더니 다시 정신없이 핸드폰에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너네들 말야. 나쓰에를 놓치면 모두 죽을 각오하라고. 남산에 집어넣고 3년동안 버벅기도록 만들겠어,알겠나?"
그렇게 버럭 외친 뒤 진광섭은 일방적으로 핸드폰을 꺼 버렸다. 그러더니 귀신같이 핸드폰을 자신의 안쪽 포겟에 집어 넣었다.
상운을 포함해 5명의 부하들은 그런 진광섭의 번개같은 행동을 겁먹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진광섭은 싸늘하게 그들을 돌아다 보았다.
"뭐하고 있나? 도대체 헬기는 언제 준비된다는 거야?"
그러자 이상운이 다시 앞으로 걸어나왔다.
"30분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과장님…"

헬리콥터는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소음사이로 날카롭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진광섭은 걸어가다 말고 부하들 곁을 떠나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난간 한쪽 구석에는 <東京 스카이라인 에어 서비스>라는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정확하게 55층 높이를 가진 인포메이션 센타의 옥상에 있는 헬기장. 진광섭은 소나기속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쿄 야경을 보았다.
체포하는 건 시간문제겠군…
진광섭은 몸을 돌려 헬기쪽으로 뛰어갔다. 이상운이 헬기 옆에서 후쭐하게 비를 맞으면서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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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에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사즈메가 김준의 허벅지에 박혀 있는 총알을 뺐다고 하는데 진심일까. 사즈메의 말로는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총알이 육횬막 보였기 때문에,(언니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모험을 해 봤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믿을수가 없는 이야기다.
이즈메에게도 미안했다. 류오시 이즈메는 상지대학 의학부 외과과장이 인정하는 촉망받는 인턴이었다. 더구나 이즈메에는 매너가 좋았다. 고향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데이트 신청을 하듯 전화를 건뒤 김준을 치료하기 위해 무조건 아버지의 별장으로 이즈메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차를 바꾸어 타자고 말했을때 갑자기 놀라던 이즈메의 표정.
이런…벌써 사랑이 식은 건가. 할수 없지. 단 조건이 있어. 사브를 돌려줄때는 기름을 꽉 채운 뒤 발로 밟아서 돌려줘야 해. 나 오늘 나쓰에씨 별장에 가고 싶었는데 말야. 너무 섭섭하군.

이젠 아버지 별장이 아니었다. 별장은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나쓰에에게 고스란히 상속되었다. 평생을 작은 도시 구역소(구청) 관리에 만족하면서 홀애비로 두 딸을 키웠던 아버지. 나쓰에에게 아담한 별장을 유산으로 상속하고 돌아가신 게다. 나쓰에는 별안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갑자기 우동이 먹고 싶어졌다. 지금 이시간은 퇴근한 뒤에 다누끼(너구리)나 기즈네 종류의 우동을 먹으면서 친구들이랑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인 게다. 나쓰에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학창시절 이후로 나쓰에의 별명는 여우였다. 기즈네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여우처럼 머리가 잘돌아 가는 건지. 나쓰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까지 김준을 도와주려는 노력하는 것일까. 그는 정리되지 않는 이방인인데…
불현듯 테마마크에서의 첫 데이트가 나쓰에에게 떠 올랐다. 김준 그 사내.
그땐 그랬지. 신비할 정도로 클리퍼 프로그래밍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이다.
나쓰에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안을 살펴 보았다. 사브 9000 시리즈는 그녀가 처음 운전을 해보는 차종이다. 한달전에 구입했다고 했던가.
나쓰에는 차안을 살펴보다가 운전석 옆으로 금속상자가 있는 걸 알았다.
그녀는 백미러를 한번 힐끔 쳐다본뒤 상자를 열어 보았다. 카세트 테입이 가지런히 들어있다. 나쓰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테입 하나를 꺼내 카스테레오에 삽입했다. 그러자 무언가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여자의 신음 소리가 흘러 나오고,시트가 쿵작쿵작 리듬을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쓰에는 얼굴을 붉히고 급히 테입을 꺼냈다.
나쓰에는 전방을 주시했다. 이젠 폭우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사정이 영 않좋아 보였다. 자동차들도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자 나쓰에는 핸들에서 양손을 떼었다. 그런 뒤 상자속의 테입들을 하나하나 꺼낸 뒤,감겨진 자기 테입을 끄집어 냈다. 그런 뒤 돌돌말아서 힘차게 뒷좌석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뒷 쪽에서 해드라이트 불빛이 계속해서 사브안으로 쏘아 들어온다는 걸 깨닭았다.
나쓰에는 화들짝 놀래 뒤를 바라 보았다. 아까는 별로 이상하지 않았는데 별안간 왜 이런 생각이 들까.
나쓰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쪽에서 따라붙는 자동차는 아까 가볍게 접촉 사고를 냈던 그 자동차인것 같았다. 왼쪽 보디가 찌그러져 빛을 어지럽게 난사하는것이 백미러로도 쉽게 식별이 되었다. 분명 수도고속화 도로로 진입할때 바로 뒤쪽에서 접촉사고를 냈던 그 자동차다.
나쓰에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자동차는 전조등을 상향으로 켠채 계속 따라 붙고 있었다.
나쓰에는 고개를 돌려 전방을 응시했다. 이미 고속도로는 충분하게 넓어지고 있었다. 폭우가 거칠어지자 몇몇 자신없는 운전자들이 갖길에 자동차를 주차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 충분했다. 나쓰에는 생전처음으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해보자구…
나쓰에는 무의식중에 아토매틱 기아를 만졌다. 나쓰에가 모르는 사이에 사브 9000의 기아는 그 순간 스포츠타입으로 바뀌었다. 나쓰에가 까마득히 모르는 장치. 스포츠카를 컨셉트하기 위해 사브가 고심끝에 내놓은 시스템이다.
나쓰에는 기아가 바뀐 걸 확인하고 가볍게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았다.
순간 사브의 둔탁한 차체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밑으로 쭈욱 가라 앉기 시작했다.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를 흘렸다. 10초도 되지 않았는데 속도계가 시속 150Km까지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쓰에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건 너무 다른다.
나쓰에는 삽시간에 수십대의 자동차를 추월해갔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나쓰에는 알수 없었다. 마치 수중양륙장갑차안에 앉아있다는 느낌. 믿을수 없었지만 계기판의 속도계는 나쓰에의 눈앞에서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시속 220Km의 속도.
폭우가 앞 차창을 대포알처럼 처대고 있었지만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차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쓰에는 온통 신경을 전방을 향해 주시하면서 엑셀레이터를 밟아갔다. 이미 사브 9000의 최고속도인 시속 250Km의 한계점까지 속도계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쓰에는 숨을 몰아 쉬었다. 이제 뒤따라오던 그놈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는 저절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라앉았던 차체가 이번에는 반대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차체는 아직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쓰에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런 뒤 다시 전방 어두운 공간을 바라 보았다.
트럭 한대가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측으로 인터체인지가 보였다.
후지산 방향으로 연결된 고속도로였다. 그쪽에서 차들이 느릿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나쓰에는 실내등을 켜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고속도로를 탄지 벌써 40분이 지났다. 사즈메가 잘하고 있을까. 아니 사즈메는 9시에 도쿄로 돌아 간다고 했다.
별장에는 먹을 음식이 없었기에 사즈메를 시킨 것인데 아예 지금은 병간호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사즈메. 어린게 남자를 너무 밝혀서 탈이야 말야.
나쓰에는 다시 사즈메와 통화를 하기 위해 카폰을 손에 쥐었다. 이때 후지산쪽 인터체인지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내려오는 자동차가 보였다.
바로 김영진의 체로키 지프차다.
나쓰에는 깜짝 놀란 눈으로 인터체인지에서 튀어나오는 체로키를 바라 보았다.
믿을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잔뜩 겁을 먹고 순간적으로 핸들을 꺽었다. 실수였다.
핸들은 반대로 꺽이면서 차체는 급작스럽게 진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빗길을 미끄러지면서 고속도로 가운데에서 보기 나쁘게 한바뀌 회전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체로키 지프가 나쓰에의 사브 자동차를 덮쳐왔다.
쾅 소리와 함께 사브 9000은 다시 도로 저쪽 끝으로 밀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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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스페이스 헬기는 고속도로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헬기는 허공에서 20각도로 비스듬히 자세를 잡더니 어느 한공간에서 머물고 있었다.
진광섭이었다. 광섭은 헬기 뒷좌석에 앉아 사브와 체로키가 접촉사고를 일으키는 광경을 경마구경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앞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 응얼거리고 있었다.
"뭡니까,저건..? 영진이 저 녀석이 일을 다 망친거 아닙니까…?"
진광섭은 이상운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헬기 조종사를 향해 빠르게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후에 헬기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고속도로를 향해 떨어져 나갔다. 불빛을 받으며 나쓰에가 급히 사브 밖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체로키에서도 김영진과 임소봉이가 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광섭은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일 치고는 상당히 빌어먹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잡아 들이다가는 여자쪽에서 아무것도 불지 않을 것이다.
광섭은 허탈했다. 보아하니 접촉사고는 나쓰에 때문에 발생한 것 같았다.
임소봉이나 김영진 정도면 땅바닦에 헤딩을 할 친구가 아닌 것이다. 광섭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 뒤 아크힐스의 전산팀 요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아직도 모른다고? 사뇨 나쓰에가 소유한게 아니라도 좋아! 친인척이 소유한 도쿄 남쪽 방면 부동산은 모두 조사해보란 말야. 이 새끼들아!"
그렇게 말한 뒤 진광섭은 핸드폰 통화를 끊었다. 그런 뒤 다시 접촉사고가 일어난 고속도로 현장을 내려다 보았다. 여기서 다시 나쓰에를 놓아주라고 지시할수는 없었다. 김준 놈을 만나러 가는 나쓰에를 안전거릴 확보하며 미행을 해야 했던 것인데….
그때 별안간 이상운이 핸드폰을 진광섭에게 내밀었다.
"빠르군요. 전산팀 연락입니다. 나쓰에에게 별장이 있다고 합니다!"
광섭은 힐끔 놀란 얼굴로 이상운의 핸드폰을 받았다. 폭우가 세차게 헬기의 창틀 안까지 치고 들어왔다.
광섭은 비로서 히쭉 웃었다. 그는 입에 소형 후레쉬를 물고 있는 상태에서 무릅팍에 놓여있는 지도를 펼쳤다. 그런 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지명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후레쉬를 손에 쥐었다.
진광섭은 버럭 외치고 있었다.
"이봐 조종사 양반! 수고스럽지만 지금 당장 아타미 해안으로 날아갑시다!"
체포는 싱겁게 끝날것 같았다. 아타미 해안까지는 헬기로 단 5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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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전화수화기를 손에 쥐고 울먹이고 있었다. 나쓰에가 오면 자신은 도쿄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나쓰에 언니는 오지 않고 방금전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오다가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하던데…언니 나쓰에가 말하는 도중에 카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었다. 이즈메 오빠의 사브 자동차였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후에는 누군가가 자동차문을 여닫는것 같았다. 그런 뒤 들려온 나쓰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사유리는 창백한 표정으로 전화수화기를 다시 귀에다 대 보았다.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환청처럼 방금 전 언니의 목소리가 반복될 뿐이다.

김준은 충열된 눈으로 계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세크 BBS에 접속을 해보니 아까 주문한 자료는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헌데 자료를 읽으려면 돈을 지불해야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48시간이 지나면 조사한 자료는 자동으로 삭제 된다는 경고문이 떠 있다.
준은 난감했다. 당장은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종수에게 어떻게 도움을 구해볼까 생각했지만 그 친구도 많은 곤란을 느끼고 있는것 같았다.
준은 우울한 마음으로 세크 BBS를 빠져 나온 뒤 곧장 인터넷으로 접속을 했다. 5분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전자메일 한통이 고종수의 ID 앞으로 수신되 있다.

……………………………………………….
Mail version 4.18 02/31/96. Type ? for help.
"/usr/spool/mail/student": 1 messages 1 new
>N 1 hanhh Tue March 21 21:42 ??/??? "letter"
……………………………………………….

준은 물끄러미 hanhh이라는 아이디를 응시했다. 처음보는 아이디였다. 누굴까.
수신시간을 보니 바로 15초 전에 수신이 된 편지다. 준은 초초한 마음을 억누르고 폴더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V키를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전자편지의 내용이 개봉되어 떠 올랐다. 놀랍게도 영어문장 아래로는 한글이 떠 있다.
인터넷에서 한글이라니 여간 반갑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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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Tue 21 March 1996 21:21:42
From: ‘hanhh’ <hanhh@akirajpn.com>
To: jsko@jeill.net
Subject: letter

이제 인사드립니다. 한현희입니다.
이 메일은 자체 소각됩니다.
………………………………………..

IP(주소)를 보니 한현희는 제일그룹 제펜지사의 직원인것 같다.
아키라제펜은 일본에 있는 수백개의 인터넷 호스트중 하나였는데 제일그룹 일본지사가 인터넷과 연결할때 주로 이용하는 호스트였다.
어쨌든 준은 한현희를 만나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화면을 응시했다. 다시 담배를 고처 물고 두줄 짜리에 불과한 편지 내용을 읽어 보았다.

>> 이제 인사를 드립니다. 한현희입니다.
>> 이 메일은 자체 소각됩니다.

편지 내용치곤 참으로 이상하다. 단 두줄 그것도 인사말 밖에 없다. 장난을 치는 건가? 이게 뭔가…형사 가제트를 흉낸 내고 있는 이 여자. 제법 엉뚱하다. 폰팅을 하자는 건 아닐텐데.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한현희는 이 편지를 고종수에게 보내온 것일까.
준은 씁쓸하게 액정화면을 쳐다보다가 전자메일을 빠져 나왔다. 순간 갑자기 노트북 컴퓨터가 진동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노특북이 진동한게 아니다. 스카시 하드디스크가 윙윙 거리며 돌아가는가 했더니,곧바로 액정 화면에서 빛이 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현희의 얼굴이 화면 중앙에서 부웅 떠 올랐다.

한현희는 히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놀라셨군요…머 저도 실력있는 해커라면 해커라고 할수있죠.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그래픽이다. 한현희가 아름다운 건지 그래픽이 아름다운 건지 김준에게는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본사 고부장님의 지원이 시작됩니다."
여기까지 말하다가 잠시 스크롤이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 하드 디스크가 윙윙 돌아가면서 현희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교수님 이름으로 구좌를 만들었습니다. 1만 2천불입니다. 시티뱅크에 가서 구좌번호를 제시하시면 현금이 준비 될 겁니다. 그럼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런 뒤 한현희의 얼굴은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시티뱅크 구좌가 화면 상단부에서 떠 올랐다.
체 김준이 외우기 전이었다. 구좌는 그대로 불태워지듯 화면 안으로 사그라 들어갔다. 준은 멍한 눈으로 텅 빈 화면을 응시했다. 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는 고퍼 안에 있었다. 고퍼쪽에다가 메크로를 잔뜩 걸어놓았던 것 같다… 이건 너무 하잖아…

이런 영특한 해커가 나말고 제일그룹에 또 있었단 말인가.

준은 현희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그때문에 구좌를 외우기 보다는 그 여운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때 사유리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유리를 바라 보았다. 사유리는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도망치래요… 방금 전 언니의 전화가 왔었어요…"
사유리는 베꼽 티 위에 분홍색 우비를 걸치고 있었다. 아예 도망 갈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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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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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가 처음 미나를 보았을 때 그녀는 할머니의 등 뒤에 서있었다. 커다랗고 서글서글한,그때문에 왕방울만한 눈으로 미나는 하야시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야시가 손을 내밀자 미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얌전히 손을 주었다.
그때 하야시의 손은 미나의 손길을 피해 그녀의 머리위로 올라가더니,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하야시가 9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야시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맥주를 마셨다. 밤 9시 55분이었다. 아직까지도 미나는 귀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겁먹은 얼굴로 다락방 아래로 귀를 기울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다. 계속 불길한
폭우가 내릴 뿐.
하야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은행간 온라인 망에 연결된 펌뱅킹firm banking의 차가운 화면이 눈이 시릴 정도로 하야시의 앞에서 어른거렸다. 하야시는 지금 일본 각 기업 망과 연결된 펌뱅킹이라는 법인용 금융서비스 망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하야시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뱅크마니아 BBS>와 접속된 상태에서 그쪽에서 진행중인 작업이 생방송처럼 하야시에게 중계되고 있었던 게다.
물론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모니터에서 문자가 올라갈 때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머리 속에 재빨리 해킹 기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김준의 은행구좌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하야시는 FX로 연결된 화면에서 빠져 나왔다. 이제 자신의 작업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가 지금 접속하려는 통신망은 방위청이 일반인을 위해 구축한 통신망중 하나였다. 오전에 작업을 끝낸 뒤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아직까진 추적을 당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지카데쯔地下鐵라는 ID를 가지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전 작업보다는 신경을 써야 했다. 하야시는 담배에 라이터불을 당기는 상태에서 한자어 地下鐵를 또박똑박 타이핑했다. 곧바로 모니터가 암호를 물어온다.

제기랄… 등록된 아이디도 아닌데 암호를 물어온다…
하야시는 불쑥 화가 나서 무의식중에 키보드의 F12 키를 눌렀다. 그러자 소프트아이스가 호출되어 나타났다. 소프트아이스는 램상주형 해킹 프로그램이다.
하야시는 별안간 놀란듯 소프트아이스를 멍히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비음이 터져 나왔다.

뭐하고 있나… 지금 필요한 건 소프트아이스가 아니잖나…!!

하야시는 속으로 뇌까리면서 다시 빠르게 키를 눌러갔다. 마치 손끝에 모터를 단듯한 인상이다. 모두 12개의 키. 이 12개의 핫키에는 각각 매크로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하야시가 핫키를 모두 누르자 곧바로 암호를 물어오는 박스가 하야시의 눈앞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삽시간에 암호박스를 구동시키는 프로그램을 역추적해 완전히 날려 버린 것이다.
소프트아이스라니…그건 2HD 디스켓을 해킹할 때나 사용하는 게다.
하야시는 자신이 미나 때문에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는 걸 알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식은 땀이 났다.
하야시의 기억으로는 미나가 외박을 한적이 없었다. 헌데 오늘 처음으로 새벽에 귀가를 하지 않고 있다. 20시간동안이나… 전화 한통화 없다.
하야시는 다시 울컥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았다.
그런 뒤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계집. 또 어디 가서 춤이나 추겠지. 오피스 걸을 유혹한다고…
그게 아니야. 너의 춤은 남자를 유혹하는 춤이다. 그게 너의 약점이지.
아무나… 멍청한 남자들이 네 곁에 꼬이는 거야.

하야시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형냉장고에서 다시 기린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런 뒤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미 후꾸오 하야시는 방위청 자체 통신망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는 무한 호스트 안에 들어가 있다.
차가운 맥주가 몸안에 흡수되자 그는 다시 제정신을 차렸다. 작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이미 의뢰자는 상당한 금액을 송금해왔다. 무엇인가를 해 보여야 했다.
예의인 것이다.

하야시는 조심스럽게 <地下鐵>이라는 ID를 김준이 사용하는 <동급해커>로 바꾸어 보았다.
순간 모니터 화면 왼쪽 하단부에서 슬래시가 급작스럽게 역회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랐다. 하야시는 불끈 호흡을 멈춘 상태로 슬래시의 회전력을 추측해 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하야시는 컴퓨터의 파워 스위치를 내렸다.
분명…수상직속의 내각정보국이 역추적을 개시한 게다.
하야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눈빛은 교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이클 히트다…!

——— – ———— – ———— – ———–

김준은 사유리를 따라 별장 뒤로 걸어 나왔다. 폭우가 몰아치며서 바다쪽에선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 밤 10시였다. 찌그러진 알미늄 캔들이 요란스럽게 별장 주위에서 날아 다녔다. 준은 별장 뒤에서 방수포를 찾아낸 뒤 자신의 노트북을 포장하고 사유리를 따라 걸어갔다. 왼편 해안가에서 검은 바다 파도가 세차게 춤을 추며 올라 오고 있다. 악몽 같은 밤이다.
"어딜 가는 건가?"
준이 묻자 사유리는 힘차게 다시 준의 손목을 잡았다.
"도쿄로 안 가세요? 전 내일 학교에 등교해야 하죠."
"도쿄?…"
"도쿄요. 아참 아저씬 그곳에 도망온거라 했나요?"
사유리는 앞장서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실 거죠?"
그녀의 이마에 알게 모르게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사유리양은 도쿄로 돌아가시오. 난 다른 곳으로 가야겠소…"
"어딘 데요?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그 다리로?"
이제부턴 반말이 나온다. 사유리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오토바이가 있소?"
준이 묻자 사유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타신 거예요. 이 별장 사실 고향집이에요.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신 뒤 별장으로 개조된 거죠. 필요하세요? 그 오토바이라는 게?"
"사유리는 어때?"
"전 상관없어요. 택시를 불렀으니까 택시가 오면 역으로 가야죠. JR을 잡아타고 도쿄로 돌아가면 되는 데요."
"그렇군. 오토바이 키를 주시오. 난 아무래도…"
"잠깐만요. 그건 별장 안에 있어요. 저 창고 안에서 기다리세요. 오토바이는 창고 안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별장으로 다시 뛰어갔다. 준은 사유리를 쳐다보다가 창고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혼다 제니 50 cc

그는 오토바이를 내려다보다가 기가 막혔는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혼다 제니 50cc는 가정주부가 타는 스쿠터였다.
우선 폼이 나지 않았다.
이걸 타고 도망가란 말인가…

준은 다리를 절뚝이며 스쿠터 주변을 맴돌다가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유리였다.
"그건 뭔가?"
사유리는 준에게 열쇠고리를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저씨가 원하는 열쇠죠."
준은 눈을 반짝이며 사유리가 건네주는 열쇠를 낚아챘다. 독수리 문장.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레이다비죤 95년식이군. 이 최신형 오토바이는 어디에 있지?…"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렸다.
"제 등뒤에 있어요. 푸들이라고 이 동네 친구 거에요. 고향친구죠. 게도 공부를 못해요."
"내가 빌려 타도 되나?"
"그럼요. 벌써 빌려왔는 걸요. 대신 저를 역까지 바래다 줘야 합니다. 역전 주차장에 세워 두기로 했으니까요."
"고맙군…사유리양."
"고맙긴요. 언니에게 키스 한번 해주세요. 나쓰에는 그 문제에선 좀 멍청이죠."

음. 키스라니…

그 시각. 에어로스페이스 SA330 푸마 헬리콥터는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오고 있다.
원래 프랑스군의 진중 수송헬기였던 SA330 푸마 헬기는 기동성이 좋았다. 하지만 폭우가 심상치 않자 조종사는 아까부터 잔득 겁을 먹고 있었다. 라디오 트렌스미트(항공기간 무선통신)는 이미 동작도 되지 않았다. 기상레이다로 체크한 현재의 기상상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착륙을 한 뒤,한시간후에 리테이크옵(re-take-off 재이륙)을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몇 번인가를 이문제를 요구했지만 진광섭은 싸늘하게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붉은 색 지붕을 찾으면 되었다. 아타미 경찰서의 도움으로 나쓰에의 별장이 붉은색 지붕이라는 것은 가까스레 알아냈지만,이놈의 해안 주택가는 도대체 뭐가 먼지 모를 지경이다. 계속 서치라이트 아래로 주택가 지붕들이 어른거렸지만 모든 지붕이 같아 보인다. 진광섭의 입에선 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종사 양반. 좀 더 밀착 비행을 할 수 없겠나? 도대체 뭐가 뭔지 알아야지 않겠나?"
"불가능합니다. 해안수목림이 울창합니다. 이 이상은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조종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헬기 밑으론 나뭇가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게 높고 낮은 나무인지 육안으론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다.
"안되겠군! 상운이 넌 애들을 데리고 뛰어 내릴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여기서요?"
"그래 임마,자꾸 말 두번 하게 할래?"
진광섭은 온통 신경이 곤두선 모습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시 임소봉을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임소봉과 김영진은 오종식의 차로 바꾸어타고 아타미 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쓰에는 오종식이가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도쿄로 압송해간 후였다.
임소봉은 광섭의 연락을 받은 뒤 곧바로 윤영범을 호출했다. 윤영범의 차는 바로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고 있다.

헬리콥터가 지면 1미터까지 하강하자 이상운은 서둘러 부하 둘과 함께 화물칸에서 뛰어 내렸다. 헬기의 주主로터가 펑펑거리며 폭우를 튕겨내고 있었다. 상운은 물벼락을 피해 곧장 헬기의 앞쪽으로 뛰어 갔다. 그때 골목 저쪽에서 한대의 오토바이가 그곳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운은 오토바이를 쳐다보다가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런 뒤 무턱대고 눈앞에 보이는 집 대문을 두들겼다. 어부인듯한 촌노가 부스럭거리며 나와서 나쓰에의 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금전 오토바이가 떠난 그 집이다.
제기랄.
그는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별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옆 오솔길로 오토바이가 도망간 흔적이 보였다. 상운은 서두르며 핸드폰을 품에서 꺼냈다. 헬기가 상운의 머리 위에서 서치라이트를 내려 쏘고 있었다. 서치라이트 빛을 의식했는지 상운은 헬기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방금 그 오토바이입니다! 과장님 제 말 들리십니까?"
그러자 곧바로 진광섭의 욕설이 핸드폰이 터쳐나갈듯 튀어나오는가 했더니, 헬기는 하늘로 수직상승을 했다. 그런 뒤 내리막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잠시후에 저쪽 끝으로 날아가는 헬기의 항법등이 상운에게 보였다.
상운은 물끄러미 헬기를 바라보다가 부하 둘을 데리고 별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창고안에는 오래된 혼다 제니 스쿠터가 있었다. 상운은 버럭 화가 나서 스쿠터를 발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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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하레이다비죤 Tx-990은 폭우속을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뒤에는 사유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배꼽 티 아래로 빗방울이 치고 들어오자 야릇한 쾌감에 젖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니 나쓰에의 소식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토바이가 이처럼 빨리 달린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폭풍처럼 몰아치는 빗방울이 사유리의 몸을 감쌓자 온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준의 등에 고개를 댔다. 그의 체온이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사유리는 붕붕 뛰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큰 소리로 준에게 물었다.
"아저씨 노트북 컴퓨터요. 아까 점심에 잠깐 쳐보았어요!"
준은 대답을 할수 없었다. 빗방울에 노출된 오른쪽 허벅지가 통증을 전해오고 있었다. 몸도 생각보다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도로에 미끄러지지 않기위해 온 정신을 전방에 응시하고 있었다.
"뭐죠? 그 노트북은 정말 굉장하던데요. 사양이 어떻게 되나요?"
준은 그제야 사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얼굴을 뒤로 돌려 사유리를 응시했다.
준의 코등에는 황색의 고글이 걸려있다. 야간운전중에는 황색을 써야했다.
황색의 선글라스가 신호등을 안전하게 식별할 수 있으니까.
준은 전방을 다시 주시하며 대답했다.
"100Mhz DX4 저전력 프로세서야. 팩스모뎀은 PCMCIA 카드를 이용하는 거지. 하드디스크는 1.2기가 스카시야! 내말 알아듣겠나,사유리?"
"그럼요. 언니가 전산쟁이잖아요. 굉장하네요. 또 다른 것도 있던데…."
"기본적으로 압전마이크로폰이 부착돼 있어. 녹음 가능하고 32비트로 음악을 재생할수가 있지. 그리고 커버는 양쪽으로 벌어지게 되어 있지!"
"맞아요. 그건 무슨 장치죠?"
"칼라스캐너. 복사기라 할 수 있지."
"흐…정말 굉장한 노트북이군요. 기자님들 컴퓨터는 다 그렇게 좋은 가요?"
기자라니.
해커니까 컴퓨터가 좋을 수밖에.
"그건 아니야,나만 예외인 것 같아. 월급타면 컴퓨터에다 부니까 그럴 수밖에.."

일본에 오기 전에 김준은 용산 상가에서 한달동안 생활하면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조립하려고 많은 고민을 했다. 통상적인 아키텍처를 모조리 무시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준에겐 필요했다. 하지만 케이스마저 튼튼한 것을 구할수 없었다.
밧데리의 수명도 가장 긴 것이 고작 15시간 정도 유지되는 것 밖에 없었다.
할수없이 준은 IBM 싱크패드 최신형을 구입하기로 계약을 했다. 미국에서 막 출시되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따로 우편주문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새 고종수가 김준이 사용할 수 있겠금 노트북 컴퓨터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일명 히드라 77.
제일전자 산하 연구소가 2년동안 애플과 아이비엠 두 기종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서 조립한 히드라 77 노트북… 준에겐 컴퓨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준은 불현듯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 이렇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나.

지난 1년동안 일본내에서 준의 삶은 참으로 조용했다. 고종수가 작업을 지시해 오면 하루나 이틀동안 핵킹할 준비를 한 뒤 10여분 정도를 투자해서 정보를 복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뒤에는 불쑥 자가용을 타고 심야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드라이브가 싫으면 리무진 택시를 호출하거나,벨로드롬장을 찾아갔고, 모터사이클링을 즐기거나,경정 도박을 구경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이브가 준에겐 가장 보편한 취미였다. 항상 심야 드라이브 말미에는 도쿄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들,예를 들자면 마이 시티의 8층에 있는 에드호크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소바(모밀)집에 들려 밤참을 먹곤 하였다.
간혹 가다가는 에드호크에서 내려와서 1층 뿌띠 파크로 곧장 입장하곤 했다.
뿌띠 파크는 지금은 고전이 된 DJ가 있는 신인류를 위한 시끄러운 디스코장이었다.
그는 아무나 붙잡고,대개는 풋풋한 소녀들이었지만,부담없이 어울려 춤을 추었다.

도쿄는 지난 1년간 그런 식으로 김준과 밀접해지고 있었다.

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박같은 폭우가 자신의 얼굴을 치고 있었다.
고글이 없었다면 아마 앞을 보지 못할 상황일게다. JR 상행선이 들판 저쪽에서 아타미 항구로 달려가고 있다. 준은 우울했다. 아타미 역에 도착하면 자신은 또 어딘가로 피신을 해야한다. 스쿠바로 가야 할까. 아무래도 그 쪽엔 아는 사람이 몇명 있을 것 같다.
"아저씨 헬기가 뒤따라와요…"
별안간 사유리가 뒤에서 외쳤다.

준은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상태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에어로스페이스사에서 제작한 중형 헬리콥터가 긴박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1천미터 정도 후방이었다.
준은 침을 삼키고 헬기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 폭우 속에 헬기라니.

"하레이다비죤 모르나? 영진이 너. 코앞에 달려오는 거 있잖아! 미제 사이카를 잡으란 말야!!"
김영진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진광섭의 음성을 듣고 전방을 주시했다.
어두웠다. 영진은 잽싸게 전조등을 상향으로 올렸다. 순간 앞 도로에서 무서운 속도로 오토바이가 튀어 나오고 있었다. 임소봉이 외쳤다.
"저거다! 잡아!"
영진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콰콰콰———-!!!
일제 시빅 자동차는 왼쪽으로 휘청이는가 했더니 그 자리에서 30도 각도로 급회전을 했다. 그 사이에 하레이다비죤은 건너편 차선에서 스쳐 지나갔다. 영진은 급히 후진 기아를 넣고 자동차를 뒤로 뺐다. 이미 윤영범의 자동차가 차선을 바꾸어 타고 오토바이를 쫓아가고 있다.

"저 자식들 말야! 뭐하는 거야? 저놈들 안기부 맞아?"
진광섭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 보며 외쳤다. 심장이 터질듯 울렁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김준을 잡는가 했다. 빠른 시간안에 놈을 서울로 압송해야 했다. 그런 뒤 업어치든 족치든 놈이 가진 불순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놈은 전과 1범의 범죄경력이 있는 자였다. 앞으론 전업범죄자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녀석인 게다.
더구나 외동딸 혜숙이가 아침마다 밥을 먹지 않고 혜화중학교로 등교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광섭은 복장이 터졌다.
진광섭은 집에 돌아가면 인자한 가장이었다. 혜숙이에게 엄마가 없기 때문에 간혹은 다시 재혼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광섭은 첫부인을 사랑했다.
안기부 초창기였을 때부터 말없이 눈물만 삼키곤 했던 부인을 광섭은 잊을 수가 없었다. 시류가 그랬던 것인데…역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마 몇번인가를 미끈하게 잘빠진,고양이 눈처럼 따분한 눈빛을 가진 노처녀와 맞선을 보았을 것이다.

눈이 호리호리해서 좋아 보이네요….
어머 아저씬 선글라스
잘 어울려요…

광섭에 대한 여자들의 평은 제법 관대했다. 하지만 막상 광섭의 직업에 대해 말이 나오다보면 여자 쪽에서 지레 겁을 먹었다. 안기부이셨군요…
진광섭은 다시 핸드폰에다 입을 대고 날카롭게 외쳤다.
"너 이 자식들. 이번에 놓치면 두번 죽는 줄 알아! 각오하라고!"
그런 게 말한 뒤 광섭은 헬기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넌 뭐하는 거야? 택시도 못 타나? 너 헬기 조종사 맞아?"
헬기 조종사는 찔끔했다. 아까부터 저 한국녀석이 반말이다.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택시Taxi를 감행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었다. 택시는 조종사들간의 은어로 지상활주를 의미했다. 지면에 바짝 붙어서 저공으로 비행하는 일.
지금은 기압조차 불안했다. 선더스톰하에서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다.
조종사는 패널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엄청난 폭우였다.
이런 폭우속에 비행을 하는 건 프랙티스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참담한 일인데 택시를 타라니.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다시 번개가 지평선 저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앞쪽에서 냉동차가 달려오자 조종사는 급히 레버를 잡아 잡아 당겼다. 그런뒤 헬기는 지상 30미터 허공에서 서서히 메디엄 턴(40도 경사각)으로 회전을 했다.
300미터 앞쪽에서 도망가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제발… 스핀을 잃고 폭우에 휘말리지만 말아다오.
조종사는 침을 삼켰다.
신문에 나긴 싫으니까.
조정간을 잡아당기자 헬리콥터는 주로터 소리를 둔탁하게 토해내며 아까보다는 빠르게 어둠속을 전진해갔다. 다시 서치라이트가 오토바이를 쫓아가고 있다.

"뭐예요? 우릴 쫓아오는 거 같은데요?"
사뇨 사유리는 겁을 먹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비가 출렁이듯 날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헬기의 서치라이트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유리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맞아요? 헬기가 아저씨를 쫓아오는 건 가요?"
"그래 맞아…"
준은 힐끔 백미러를 응시했다. 서치라이트 빛 때문에 헬기의 형체가 제대로 식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른쪽 뒤에서는 두대의 자가용이 맹추격을 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걸려도 된 통 걸린 모양이다.
"야쿠자인가요?"
"아냐. 한국인이야."
"아……"
사유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야쿠자가 아니라니까 우선 다행이었다. 사유리는 야쿠자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오금이 저렸다.
사유리는 준의 허리를 안아 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앞을 보았다.
폭우가 사유리의 얼굴을 때렸다. 이미 JR 열차는 시내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여기서는 꽁무니가 보이지 않았다. 차츰 항구 건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내로…시내로 들어가세요! 그러면 헬기가 뒤쫓아오지 못할 거예요!"
"어느쪽으로 가야 하지?"
"조금 더요. 곧 교차로가 나와요. 거기서 왼쪽으로 타세요!"
"탱큐, 사뇨 사유리…"
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서서히 늦추기 시작했다. 뜨겁게 열을 받은 엔진에 빗방울이 불꽃처럼 튀고 있었다.
"저거군?"
위험하게 보였다. 교차로가 아니라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인터체인지의 초입구로 여겨졌다. 준은 긴박하게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어느사이 그의 왼발이 아스팔트 지면을 긁으며 중심을 잡고 있었다. 미끄러웠다.

임소봉은 앞쪽에서 달리는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저 자식 저거 안되겠군…"
그런 뒤 임소봉은 영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영진씨가 가진 건 무슨 총이요?"
"왜 묻소?"
"롱보디 없소? 이럴 때는 한방 날려야 하는데 말야."
"전 짧은 겁니다. 헌병들이 차는 껄렁한 총이죠."
"아,콜트구만. 할수 없지. 난 롱보디가 취미요. 안기부에서는 총 두 자루 가지고 다니는 놈이 나밖에 없을 거요."
그렇게 말한 뒤 임소봉은 무릎에 놓여 있는 자신의 007가방을 열어 젖혔다.
임소봉의 총은 말 그대로의 롱보디가 아니었다.
러시아제 저격총.
드라그노프 (Samozariyadnyia Vintovka Dragunova)가 분해되어 가방안에 들어 있다.

구경 : 7.62mm (0.3 inch)
길이 : 1,225mm (48.23 inch)
총신길이 : 547mm (21.53 inch)
속도 : 초속 830미터 (2,723피트)

가스피스톤식의 반자동인 드라그노프는 임소봉이가 소련에서 근무할 당시 단골창녀에게서 구입한 총이었다. 스코프는 4배율이었나 소봉이가 개량한 것을 부착한 뒤로는 100미터 전방에 있는 개미까지 보이겠금 배율이 높아졌다.
소봉이가 드라그노프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며 영진은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
해병대 사격 교관이었을때 영진이 조차 한번 밖에 만져 보았던 유명한 저격총이었다.
그런데 소봉이는 자유자재로 귀신같이 조립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상자형으로 생긴 탄창안에 총알 10발을 채운 뒤,드라그노프에 삽입했다.
완전히 조립이 끝난 드라그노프는 완벽할 정도로 스마트했다. 총신만 소봉이의 말대로 롱보디-여자의 다리처럼 길어 보였지만,전체적으론 상당히 가볍게 여겨졌다.
총신도 제법 정성을 드렸는지 깨끗이 닦여 있다. 아니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겨우 두번 정도 사용했을 것이다.
임소봉이가 지난 겨울 휴가때 오대산에서 곰을 잡을 생각을 했는데 곰 대신 멧돼지 두마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확인해 보았기 때문에 성능에는 자신이 있었다. 임소봉은 힐쭉 웃으며 영진을 응시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한방이면 된다.
영진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김준을 죽일 생각이요?"
"아니지. 그냥 겁을 줄 생각이요. 내 생각엔 오토바이를 좀 못쓰게 만들 생각인데 잘 될라나 모르겠소."
임소봉은 파워윈도우를 열어 젖힌 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폭우가 매섭게 소봉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고,드라그노프를 전방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앞서 가던 영범이의 차가 잽싸게 2차선 쪽으로 피해주고 있다. 이미 영진이가 핸드폰으로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했던 게다.
임소봉은 스코프에 눈을 댔다. 스코프는 매우 작고 접안식 고무패드가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간 고생을 하는 듯했다.
타앙——-!!
그가 처음 한방을 쏜 것은 오토바이가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꺽어 들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준은 가슴이 뜨끔했다. 방금 뒷쪽에서 날카롭게 무엇인가가 튕겨올라왔기 때문이다. 준은 서둘러 뒤를 돌아다 보았다. 사유리가 울쌍이 된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더니 말한다.

"아저씨… 나… 맞을뻔 했쪄…"

"뭐라고??"
"방금 저 뒤에서 나를 향해 총을 쏘았단 말이에요!"
사유리는 이글루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아스팔트에 총탄이 박히면서 튀어 오른 흙더미가 사유리의 배꼽 티 아래쪽에 붙어 있었다. 사유리는 아까보다 더 힘차게 두 팔로 준의 몸을 감싸고 있다. 이제 사유리도 본격적으로 겁이 났던 게다.
사유리가 축은하게 느껴졌다. 준은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말고 오른손을 뒤로 돌려 사유리를 자신의 등으로 바짝 끌어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사유리는 준의 등에 달라 붙었다. 곧바로 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습니다. 더이상 시내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회항을…"
헬기 조종사가 지레 겁을 먹고 진광섭에게 외치자 광섭은 덥석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뒤 손아귀에다 살짝 힘을 주었다. 광섭의 이빨은 으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종사는 황당하다는 듯 뒤를 돌아다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진광섭의 손바닥이 조종사의 볼을 토닥토닥거리고 시작했다.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진광섭은 조종사의 빰을 어루만지는 게다.
"한번 해봅시다. 내 체면도 생각해 주어야지…시내 중심부로 들어가 봅시다."
"큰일납니다. 시내는 비행금지 구역입니다…"
헬기 전방으로 NHK 지방 방송국의 송신탑이 보였다. 송신탑은 항구 중심가에 공룡처럼 떠 있었고,그 위로 낙뢰가 내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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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후꾸오 하야시는 다락방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번개가 다시 한번 울려치고 있다. 하야시는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작업은 전체적으로도 윤곽 보기 좋았다. 김준을 보기 좋게 함정에 집어 넣은 것이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야시는 거실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다시금 미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르고 있다.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불쑥 미나의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로겐 전등을 켰다. 컴퓨터 책상 하나에 서가. 왼쪽으로는 침대. 그 옆으로는 붉은색의 티크 가구. 방바닦엔 미나가 자주 읽는 문에춘추 잡지가 놓여 있다.
하야시는 미나의 방에서 그녀의 체취를 느끼자 다시금 온 몸이 떨려왔다. 우디 향의 향수. 그녀가 잘 사용하는 냄새를 맡으며 하야시는 사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놈인가. 미나를 유혹한 남자는 어떤 놈인가. 분명 무엇인가 남아 있을 게다.
하야시는 울컥 울음이 넘어 오르는 것을 참고 미나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응시했다.
별안간 시시하게도 미나의 컴퓨터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지 하야시는 궁금했다.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를 부팅 시켰다. 초키 화면은 윈도우 시카코 버전. 하야시는 스타트업 프로그램이 오픈되자 입을 벌리며 놀랬다.

이게 뭔가…. 왜 내 자료가…미나의 컴퓨터안에 들어가 있는 거지?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의자에 그대로 털썩 기대어앉았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키보드의 F12 키를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모니터에서 소프트아이스가 떠 올랐다. 마치 자신의 컴퓨터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하야시는 의심스런 눈으로 미나의 컴퓨터를 두둘기기 시작했다. 똑같았다.
완벽하게 복제한듯 자신의 컴퓨터와 미나의 컴퓨터는 똑같았던 것이다.
불안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컴퓨터 본체의 뒤쪽을 확인해 보았다. 랜 선이 포트에 꽃혀 있다. 그리고 전기줄로 위장이 되어 방 천정으로 올라가 있다. 다락방 바로 자신의 방으로.
미나가 나를 감시했던 말인가.
하야시는 울컥 구토가 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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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고도 1천미터 상공에서 아타미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밤 10시 30분인데도 도시는 불야성이다. 개미떼처럼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직까지도 김준의 오토바이는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양의 나폴리. 아타미 해안을 내려다보며 광섭은 분통이 일으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헬기로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곳에 김준이 숨어 있는 게다. 조종사 역시 다시 회항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섭의 독사 눈은 아직도 계속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김준을 찾고 있었다.

김영진은 불안했다. 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오토바이를 추적하는게 예상밖으로 어려워 지고 있다. 영업용 택시들이 많았다. 항구와 온천지대가 같이 끼어 있어서 그런지 행인들도 모두 관광객이거나 선원들이었다.
임소봉은 아예 침묵이었다. 도시는 대낮같이 밝은 네온싸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니 거리에다 대고 함부로 총을 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저격총을 손에 쥔 채로 윤영범을 호출했다.

윤영범의 자가용은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JR 열차가 막 요코하마를 향해 발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타미역 앞이었다. 그는 역전을 응시하며 자동차를 천천히 몰았다. 역전 앞 광장에서는 폭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다.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니 그에게만 그런지 모른다. 영범은 어두운 표정으로 옆좌석에 앉아있는 김영삼을 바라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둘 다 떠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곳엔 없는 거 같아."
그때 영범의 눈에 광장 한복판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영범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서서히 자가용을 광장 옆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시계탑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하레이다비죤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영범은 차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왔다. 어느새 김영삼은 권총을 손에 들고 시계탑으로 뛰어가고 있다. 영범은 그런 영삼에게 뒤쪽으로 돌아가라고 버럭 외쳤다.

준은 아타미 역 광장에 도착한뒤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있었다. 그때 사유리가 뒤좌석에서 내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행운을 빌께요. 전 도쿄에 돌아가면 나쓰에 언니를 찾아 봐야해요. 아까 너무 걱정이 되던데…"
"맨션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보시오. 어쩌면 그쪽에서 소식을 알려올 것이오."
"대사관이요? 시간 남으면 그렇게 하죠. 전 경시청에 신고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사유리. 별안간 김준의 가슴에 낙지처럼 안긴다. 그리고 기습 키스.
김준 역시 엉겹결에 사유리를 껴안았다. 사유리는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사유리는 키스가 끝나자 히풋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언니 몫이예요. 제것은 세이신 고교를 졸업하면 해 주세요. 제 졸업식날 오실 거죠? 이 오토바이 또 타고 싶은데… 흐…"

음.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은데.

"아저씨 먼저 떠나세요. 전 이 오토바이 적당한 데다 팔아먹고 갈께요."
"팔아 먹다니? 이건 친구 오토바이가 아니었나?"
"친구라뇨? 이거 훔친 거예요. 아까 나오다가 별장 앞에 오토바이가 서있길래 애라 모르겠다 하구 굴려온 거죠… 흐."
그 순간 사유리의 뒤쪽에서 별안간 윤영범이 뛰어 들었다. 준은 순간적으로 사유리를 옆으로 젖히고 달려드는 윤영범의 복부를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영범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 무릅을 꿇었다. 영범의 품에서 권총이 떨어 졌다.
준은 영범을 내려다 보다가 또다른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측이었다.
우측에서 갑자기 김영삼이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왔다. 준은 살짝 몸을 뛰로 빼면서 영삼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 뒤 광장바닥에 떨어진 윤영범의 권총을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김준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진광섭을 태운 에어로스페이스 헬기가 착륙할 공간을 찾다가,역광장에서 부하들과 격투중인 김준을 발견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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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양의 하드보일드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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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안에서 하나 둘 걸음을 멈추어 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해상자위대 군복 차림의 패거리들도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허공에서는 강렬한 서치라이트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폭우는 세차게 준의 얼굴을 때리고 있고.
준은 현기증을 느끼며 권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적이 누군 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난. 이 권총을 집어든 것일까.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권총을 광장 바닥에 크게 팽개쳤다.
그러자 고영삼이가 권총을 겨누면서 걸어오다 말고 우똑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영삼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자신의 홀스트에 집어넣었다.
2 대 1.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영삼의 뇌리에 스쳤다.

"뭐야 저 자식들. 지금 쇼하는 거야,뭐야. 야 너. 빨리 헬기를 착륙시켜!"
헬기 조종사는 겁을 잔뜩 먹고 진광섭을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여기는…"
"입닥쳐 이 자식아! 너 자꾸 어보트할래? 내가 어소라이즈 한다고 했잖아? 너 도대체 두티 정신 있는 놈이야,없는 놈이야?"
팍팍팍—–
에어로스페이스 푸마 헬기는 7.5톤의 육중한 덩치를 회전시켰다. 폭우로 인해 생긴 물안개가 꼬리날개의 로터에 힘차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헬기는 총연장이 15미터에 달했기 때문에 마땅하게 착륙할 장소가 없었다.
헬기는 다시 아타미역 광장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런 뒤 레프트 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섭은 조종사에게 착륙장소를 지정해 준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김준을 내려다보았다. 아파치 헬기였다면 스트레이프(기총소사)라도 갈기고 싶을 정도로 진광섭은 화가 나 있었다.

준은 다시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폭우 속에 헬기의 소음이 심하게 들려왔다.
아찔했다. 준은 자신의 체온이 시속 백마일로 급강하하는 것을 느꼈다.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컴퓨터를 만지기 전에는 복싱도 해보았고,태권도에도 심취해 고등학교때 3단 자격증까지 따기도 했다. 하지만 앞의 두 남자는 빈틈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불안했다. 준은 다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도망가는 방법은 없을까.
윤영범은 김준을 노려보다가 그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을 알았다.
그제야 영범은 맨션옥상에서의 일을 떠 올렸다. 이놈은 김영진의 총에 부상을 당했던 게다.
준은 노트북으로 앞 가슴을 가린 상태에서 영범이와 영삼을 바라보았다.
둘은 식식거리며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아무래도 영범이 쪽이 화가 잔뜩 난 것 같다. 그는 땅바닥에 팽개쳐진 자신의 권총을 발로 차 낸뒤 양복 상의를 벗어 젖혔다. 이브생로랑 와이셔츠 밑에서 짤막하지만 튼튼한 근육이 움직이고 있다.
"뭐야! 한판 붙자는 거야? 그럼 그 상자는 치워!"

상자라니…
이건 노트북이다…

준은 묘한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영범을 쏘아보았다. 그 옆에서 사뇨 나쓰에는 잔뜩 당황한 눈으로 헬기를 쫓아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빗방울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씬 범죄자에요?"
"몰라. 넌 이곳에서 피해라. 가서 다이어트 해야 할 시간이잖아."
"싫은데요, 저보고 사내들 눈요기 감이나 되라는 건 가요?"
급할 때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 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그럼 싸울 수 있겠니?"
"당연하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준의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뒤 당수도인지 공수도인지 헷갈리는 포즈를 취했다. 허리는 휘청이듯 가녀렸지만 앙칼지게 힘이 들어가 있다. 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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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어지러웠다. 연거푸 구역질이 나왔다.
미나가 자신의 작업을 지금까지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가느다란 입에서 흘러 나왔다.
하야시는 불쑥 얼굴을 들더니 타월을 꺼내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무지개 빛을 보이며 등 뒤에서 출렁거렸다.

꼴 보기 싫다. 이런 모습은.

하야시는 칫솔질을 시작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다. 잠이나 잘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피곤했다. 하야시는 욕실의 불을 끈 뒤 변기 뚜껑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쉬고 싶었다.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그런 뒤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야시는 알았다. 닥치는 대로 어둠 속에서 손에 집히는 것을 집어들었다.
50센치 길이의 백블러시(등 닦는 솔)가 손에 잡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 욕실 문을 안에서 열었다.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미나가 막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붉게 홍조를 띈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오빠 나 왔어…
하야시는 충혈된 눈으로 미나를 노려보면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이 때문에 거실용 스탠드 등이 와락 소리를 내며 쓰려졌다. 그러자 별안간 하야시의 눈에 스탠드 대가 바짝 다가왔다. 그는 스탠드 대를 내려다보다가 백블러시를 버리고 1미터 길이의 스탠드 대를 집어들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미나는 와락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소파가 발에 걸렸다. 그녀는 소파 뒤쪽으로 도망을 가려다가,안되겠는지 조심스럽게 소파 위로 올라섰다. 그런 뒤 무릎을 꿇었다. 두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하야시는 미나를 응시하다가 스탠드 대를 휘둘렀다.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뭐하다 온 거야?"
"말해봐!"
"어느 놈을 만난 거지?"
뭐가…?
"이게…어디다 대고 눈알 부릅뜨는 거야!"
다시 하야시가 힘차게 스탠드 대를 야구방망이처럼 내려쳤다. 스탠드 대는 곧장 미나의 옆쪽 소파에 걸렸다. 퍽 소리가 났다. 그제야 미나는 안색이 변했다.
냉혹하게. 미나는 하야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오빠와 비슷한 남자와 데이트를 했을 뿐이야. 이게 잘못인가…잘못이냐구…"
하야시는 별안간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전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던 게다. 그것도 실어증에 걸린 미나의 입에서 들려왔던 게다.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거실 벽에 몸을 납작하게 붙였다. 어쩌면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멍하니 미나를 쳐다보다가,급히 몸을 돌려 할머니가 누워있는 방 문을 열고 뛰어 들어 갔다.
할머니는 없었다.
출입문 앞에는 그녀가 즐겨보는 마이니찌 신문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신문 하나를 집어들었다. 15일전 신문이다.
하야시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미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서 쪽지가 발견되었다.

출근할 겁니다. 오빠.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하야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욕설이 다시 하야시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 벽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하야시에게 붙어오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아서 그러는 게다.
하야시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다시 스탠드 대를 집었다. 그런 뒤 마구 스탠드 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야시의 앞에서 부서져 내려갔다.
하야시는 땀을 억수같이 흘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별안간 할머니의 행방이 궁금했다.
하야시는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주방 앞에 있는 신형 냉장고가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쪽 옆으로 서 있는 구형 냉장고.
하야시는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마쓰시다 제품의 신형 냉장고는 포장지만 뜯겨진 상태로 아직 전기콘센트가 꽂혀 있지 않았다. 하야시는 연두색 냉장고 표면을 바라보다가 거실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구형 냉장고가 있는 주방 안쪽으로 뒤돌아 걸어갔다. 차가운 음료수가 마시고 싶었다.
하야시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순간 하야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 냉장고 안에 있다.
하야시는 잔뜩 겁을 먹은 눈으로 검은 비닐을 응시하다가 슬며시 오른손으로 봉투를 잡아 당겨보았다.
툭—–!!
토막 난 사람의 손 하나가 하야시의 발 밑으로 굴러 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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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범은 돌려차기를 하다가 우뚝 멈추었다. 사유리가 자신의 발끝에서 휘청 이며 쓰러지고 있다. 어린 여자를 때리다니. 무식한 남자라는 소리를 듣겠군.
영범은 미안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유리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순간 사유리가 벌떡 일어나면서 날카롭게 영범의 손을 입으로 물어왔다.
아악—-!!
영범은 깜짝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손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뭐야,이거! 미친 여자 아냐?"
"나 미쳤다. 어쩔래? 한번 세이신걸 솜씨 보여줄까?"
사유리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영범을 향해 자신의 몸을 이동해 갔다. 영범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재차 뒷걸음질을 쳤다. 사유리의 눈은 아까 와는 다르게 예사롭지가 않았다. 잔뜩 독기를 품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역시 여자는 때리는 게 아닌데…
어느 순간에 사유리의 오른손이 영범의 와이셔츠 깃을 잡는가 했는데 날쌔게 잡아 당겼다. 동시에 쿵 소리와 함께 영범의 몸이 사유리의 어깨 위에서 가위를 그리며 굴러 떨어졌다. 귀신같은 솜씨였다.
준은 얼빠진 얼굴로 사유리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사뇨 사유리. 그 소녀가 이번에는 김영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발은 뱀이 기어가듯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유도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합에 임하는 자세 같다.
영삼은 갑자기 다크호스가 나타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겁을 먹을 영삼이가 아니었다. 어린 여자가 아닌가.
영삼은 다리를 뒤로 뺀 상태에서 갑자기 앞쪽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 번개같이 몸을 옆으로 이동한 사유리가 영삼에게 안장다리 공격을 시도했다.
쿵—- 소리와 함께 영삼의 몸은 땅바닥으로 굴렀다. 동시에 사유리의 음성이 묻어 나왔다.
"뭐해요? 빨리 시동 거세요! 이 녀석들은 제가 상대할께요!!"

읔…이래도 되는 거야?

김준은 잽싸게 사유리가 던져 주는 열쇠를 한 손으로 낚아 챈 뒤 오토바이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또다시 등위에서 사유리의 공격에 누군가 한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곧바로 하레이다비존의 시동을 걸었다. 부다닥 소리가 머플러를 통해 힘차게 튀어 나왔다. 폭우때문에 엔진이 잠시 먹통인 것 같았는데,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꽈쾅—–
오토바이가 그 자리에서 스타트를 끊는 동시에 사유리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와 뒷좌석에 올라탔다.
"잡아! 놈을 잡으란 말야!"
윤영범이 버럭 외치자 영삼은 다시 홀스트에서 번개같이 권총을 꺼냈다.
그런 뒤 다짜고짜 한방 쏘아 대었다.
"엄마야—–!!"
사유리는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화들짝 놀래 뒤를 돌아다보았다. 총알 한발이 뒷바퀴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다시 윤영범이 연거푸 권총을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총알은 광장 바닥에 질퍽하게 고여 있는 물에 박히면서 요란하게 네온 싸인 빛을 토했다.
다시 한방.
윤영범은 사격을 멈춘 뒤 입을 벌린 채 앞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진광섭의 헬기였다.
헬기는 광장 앞 도로에 있는 상가 빌딩을 끼고 허공 3시방향에서 급속하게 하강을 하고 있었다.
"헬기예요! 아저씨!!"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준은 바로 머리 위에서 헬기가 하강하는 모습이 보이자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그런 뒤 잽싸게 브레이크를 풀어헤치는 동시에 다시 엔진 출력을 높였다. 다행이었다. 뒷바퀴에 두가지 동작이 그대로 흡수되면서 일제 혼다 CBR 오토바이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육중했을 것이다. 준이 핸들을 돌리며 자신의 몸무게를 옆으로 굴리자, 하레이다비존 오토바이까지 그림같이 옆으로 쓰러져 내려갔다. 그런 뒤 헬기의 좌현항법등 아래로 날카롭게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에도 헬기는 아래쪽 사각을 죽이며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공간이 1미터 남짓했을 것이다. 진광섭의 눈에 하레이다비존 오토바이가 귀신까지 도로를 긁으며 쓰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충돌하기 전에 포기했단 말인가?
광섭은 권총을 손에 쥔 상태에서 반대편으로 달려가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었다. 오토바이는 도로 바닥에 몸통을 붙인 상태로 일직선을 그으며 이쪽으로 미끄러져 나오는가 했는데,그대로 휘청이듯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 뒤 인도 위의 쓰레기통을 박차고 아타미 역전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헬기의 뒤쪽이었다.
광섭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자식 저거…어쩐지 잘 탄다고 했더니…오토바이 선수였구만!

사유리는 방금전 경험한 것이 믿을 수 없는지 준의 목덜미를 와락 안은 상태에서 외쳤다.
"아저씨,나 죽는 줄 알았어요!"
온몸이 긴장되었는지 사유리는 어느새 뒷좌석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헬기와 충돌한 게 아니었나요?"
"아냐! CBR 400cc 오토바이보다는 나쁘군. 이 오토바이 말야!"
"어머. 오토바이 레이서였어요?"
준은 히쭉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냥 폼이야! 할리와 말보로맨을 재밌게 본 적이 있었어. 그걸 흉내내려고 경부고속도로를 효성 크루즈를 타고 달린 적이 많았지!"
"뭐라고요? 안 들려요!"
"아,사유리는 한국지리를 모르나? 맞아. 고속도로를 탈수는 없어. 하지만 일부 특권층은 그게 가능했어!"
"특권층이라뇨!"
"음. 몰랐나? 나 폭주족 출신이야."
한동안 김준은 오보바이레이스에 미친 적이 있었다. 남들보다 멋있어 보이려고 소바를 30센치나 높여보기도 했다. 그런 뒤 번쩍번쩍하는 안개등을 달고,경찰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경적기를 달아보기도 했다.
9년전 서울에서의 일이다.

진광섭의 헬기는 역전 앞 도로에서 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 폭이 15미터 될까 말까한 공간에 끼어 있는 상태에서 헬기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그대로 착륙을 감행해야 했다.
광섭은 화가 났다. 앞 뒤에서 자동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하자 광섭은 헬기를 이륙시키라고 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그때 번개가 내려치는 모습이 보였다.
광장 시계탑이 크게 흔들렸다.
광섭은 헬기에서 내렸다. 이미 순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대기 중이었다.
여경찰 한 명이 광섭에게 다가와 경례를 했다.
광섭은 잽싸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신분증 중에서 인터폴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인터폴은 상시하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간에 조직하는 국제경찰이었다. 여순경은 증명서를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헬기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헬기가 주차위반을 했군요. 벌금을 얼마나 먹일까요?"
"차라리 헬기를 끌고 가시오! 저 놈의 조종사를 교도소에 처 넣을 수 있다면 내 대사관까지 동원해서라도 협조를 하겠소만!"
그렇게 말한 뒤 광섭은 성큼성큼 광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윤영범과 고영삼이가 비를 후쭐하게 맞으며 광섭을 기다리고 있다. 광섭의 주먹에 빰을 맞은 쪽은 고영삼이었다. 영삼의 빰에 면도칼 자국이 날 정도로 광섭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니네들 안기부 맞아? 엉? 어느 나라 사람이야? 애국심은 있는 거냐? 엉?"
"죄,죄송합니다. 저희가 놓쳤습니다…"
"면목없습니다."
"몸을 그 따위로 아끼다니 말야! 굴려. 이 노무 자식들! 당장 굴리지 못해?"
진광섭이가 그렇게 외치자,광섭의 직속 부하가 아닌 영범은 와락 겁을 먹고 광장바닥에 덥석 엎드렸다. 그러더니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김영진과 임소봉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피곤죽으로 엉망이 된 영범이가 혼자서 기다 있었다. 이미 진광섭은 아타미항구를 떠나 도쿄로 이동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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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의 춤은 이날 밤 왠지 달라 보였다. 그것을 아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다. 경면은 좌측 복도 끝 테이블에 앉아 미나를 관찰하고 있다.
어제 밤부터 한숨도 자지 않았던 경면. 미나와의 뜨거운 정사가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경면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미나는 애프터 신청을 받아 주었고,저녁에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했다. 그 때문에 경면은 이미 4시간 전부터 미나를 지켜보며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면은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 30분… 미나가 퇴근할 시간인 게다. 경면은 아까 4시간 전에 정문 출입문에서 만났을 때 미나가 슬며시 건네 준 라이터의 광고 문안을 다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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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끼 러브 호텔
초특급 걸프렌드가 아이스맨을 녹인다.
각종 섹스 용구 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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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끼 러브 호텔은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까지 경면과 미나가 함께 투숙했던 호텔이다. 벽 천장에 거울이 붙어있고,소니 오디오와 뉴저지에서 가져왔다는 인디언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는 아늑한 호텔로 <저팬 팬트하우스> 잡지에 자주 소개될 정도로 그 방면에선 정평이 난 호텔였다.
그곳에서 간밤에 미나와 경면은 몇번을 같이 몸을 섞었는지 모른다. 미나는 미친 여자였다. 최소한 경면의 상식으로는 말이다. 처음에 경면은 그녀를 칵테일 글라스에 스티어 하듯 접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옷을 벗기자 그때 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오히려 미나가 할딱이며 경면을 압도해온 것이다. 경면도 미친 듯 그녀를 탐했다.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아무래도 좋았다. 아까 오후에 헤어질때 경면은 미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행복했다.
이 몸이…정력맨이란 걸 안 거지.
경면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소파에서 일어났다. 타탄체크 무늬의 스코틀랜드 풍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경면의 앞쪽에서 걸어갔다.
경면은 슬쩍 웨이트리스의 히프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이고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모여있는 스테이지를 통해 <에콜 드 신주쿠>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이틀동안 폭우로 도시는 온통 습기에 차있다.
경면은 주차장안에 있는 자신의 차 앞에서 미나가 나오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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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햄머드릴로 바닥 콘크리트를 부수고 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상체에 붙어있다. 벌써 몇번째인가. 하야시는 자신의 몸이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이겨내가며 바닥을 햄머드릴로 부수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적당한 크기가 완성된 거 같다. 하야시는 삽으로 바닥 밑으로 보이는 흙을 파 올리기 시작했다. 이틀동안 비가 내려서인지 흙은 물기로 촉촉했다.
흙을 다 파 낸 뒤 하야시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할머니의 시체를 구덩이 안에 쏟아 부었다. 그런 뒤 흙을 다시 덮기 시작했다. 삽질을 하다 말고 하야시는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지만 눈빛만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다.
할머니 시체가 온전하게 들어가자 하야시는 시멘트 가루를 흙더미 위에 부어 덮었다. 밀실 안은 시멘트가루로 자욱했지만 하야시는 하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하야시가 할 수 있는 친할머니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였다.
그리고 미나를 위한 최선의 배래인 게다.
이제 하야시는 미나를 증오하지 않았다. 미나가 무슨 이유로 할머니를 살해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깨끗이 잊자. 할머니가 가족이듯 미나 역시 그에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가족인 게다.
일을 하는 게다.
하야시는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태초의 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가 서있는 장소가 다락방과는 다른 새로운 장소라서 그런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장소는 다락방보다 아늑했다.
하야시는 콘센트에 전기코드를 꽂았다. 그런 뒤 컴퓨터를 켜 보았다.
그러자 10평 남짓한 지하공간에서 그의 작업도구인 컴퓨터 3대가 요란하게 작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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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20분. 경면은 불안한 듯 자신의 카시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틀동안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서서히 이슬비로 바뀌면서 주차장안은 고즈넉한 정적이 감돌았다. 미나는 오지 않았다. 경면은 다시금 자신의 자가용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 된 걸까…
경면은 물끄러미 에콜 드 신주쿠를 바라보았다. 옆문은 잠겨 있다. 네온사인도 멈춘지 벌써 20분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미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곧장 호텔로 가볼까… 어쩌면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른다. 경면은 아무래도 약속장소가 헷갈리는지 고개를 갸웃 뚱했다.
경면은 담배를 자동차 본 네트에 비벼 끄고 자동차 문을 열었다. 그런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롭게 무엇인가가 경면의 뒤통수로 날아왔다.
날카로왔다.
경면은 자신의 머리가 쩌억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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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손도끼를 핸드백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면장갑을 벗어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았다. 붉은 색의 원피스였다. 그 때문에 옷에 뭍은 피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옷에 뭍은 피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빗방울이 다시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긴좌까지 걸어가다 보면 깨끗이 닦여지리라.
미나는 흥얼거리며 새벽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하야시 오빠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자기자신에게 있었다고 그녀는 깨달았다.
미나는 슬펐다. 아까 보았던 오빠의 모습. 그때문에 오빠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그것을 증명하기 위해,미나는 지금 방금전에 이경면을 살해한 것이다.

새벽 6시 20분. 미나는 마이니찌 신문을 사들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런 뒤 언제나 그랬듯 마일드세븐 한 보루를 거실 탁자에 올려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는 많이 신경이 쓰였다. 미나는 자신의 몸을 정성 들여 닦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속에서 그녀의 알맞게 익은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미나는 알몸으로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 나이트 가운으로 옷을 갈아 입고 우동을 끓이기 위해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런 뒤 10여분 정도 지났을까.
미나는 탁자위의 담배를 가슴에 품고 다락방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갔다.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미나는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다락방 출입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야시 오빠도. 7대의 모니터도. 3대의 컴퓨터 본체도…
다락방은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미나는 울컥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타고 뛰어 내려와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곧장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천장 구멍으로 연결된 랜 케이블 선이 끊어져 있다.

"이런 나쁜 자식…!"

미나는 화가 버럭 났다. 이마가 후끈거렸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차단스를 잡아 당겼고,그러자 차단스는 미나 쪽으로 와르륵 무너져 내렸다.
아냐,오빠가 날 배신할 리가 없어,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어느새 미나는 눈 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미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거실로 나온 뒤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냉장고문을 와락 열었다. 역시 추측했던 대로 였다. 검은색 봉투에 담아 있어야 할 할머니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냉장고 안에서 흘러 나왔다.
이번에는 서둘러 냉동실 문을 열어 보았다. 냉동실 안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힌 서리가 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미나를 노려보고 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은 죽은 뒤에도 내 사랑을 망친 거야!"

미나는 냉동실 문을 꽈당 닫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닥치는 대로 발에 걸리는 책들을 걷어차면서 전기 콘센트를 찾았다.
잠시 후. 미나의 구형 486 컴퓨터는 웅 거리며 부팅을 시작했다.

컴퓨터는 오랜만이었다. 오빠의 솜씨를 지켜보 좋아했는데도 말이다.

미나는 생각나는 데로 키보드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후꾸오 미나.
그녀는 오빠 하야시보다 뛰어난 해커였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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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쥐 죽은 듯 놀란 얼굴로 지하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미나가 귀가한 게 분명했다. 거실을 뛰어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다락방 출입문이 꽈당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문에 하야시는 손전등을 들고 다시 지하실 출입문으로 올라갔다. 강철로 된 지하실 출입문은 하야시가 아까 걸어 놓은 대로 튼튼하게 잠겨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스럽게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그런 뒤 컴퓨터가 설치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발끝 에서는 새벽 4시에 편의점에서 배달되어온 인스턴트 식품들이 걸리적거렸다.
하야시는 물끄러미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다시 천장으로 귀를 기울였다.
미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이 끝난 뒤에는 미국이건 어디건 미나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게 그녀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만 일본에서 사라진다면 미나가 할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본 안에 존재하지 않을 터이니까 말이다.
하야시는 의뢰인이 보내온 작업 목록이 프린팅된 용지를 집어들어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은 아무래도 좀 난해한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터보라이터 불을 붙이다가 별안간 쥐색 눈을 번쩍였다.
갑자기 4번째 모니터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4번째 모니터 화면에는 니프티서브 통신망이 연결되어 톱화면이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그 톱화면 상단부에 별안간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문자가 떠 올라와 있었다.

== 오빠. 돌아와 주세요. 어디에 있는 거죠. ==

하야시는 서둘러 키보드를 두들겨 보았다. 어떻게 미나가 니프티서브의 톱화면에 메시지를 남겼는지 궁금했다.
인바운드 서비스였다.
미나는 MIT 인터넷망에 침투 한뒤,그곳을 경유해 일본 국내 통신망 전체에,동시다발적으로 문제의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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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마끼 준사히-히드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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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오니쓰라 경감은 담배를 입에 물고 현장검시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살인치고는 지독한 살인이다. 두개골이 깨져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겨우 시체의 양복안에서 신분증을 찾아냈다. 李慶勉. 그럭저럭 한국어를 한다는 부하가 있어서 시체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을 수가 있다. 67년생. TM KOREA라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피는 자동차안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첫눈에 손도끼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사망 추정시각은 이날 새벽 4시부터 5시 사이.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다. 오니쓰라는 코를 틀어막고 다시 자동차안을 들여다보았다.
후루겔스 게이꼬 문제만 해도 두통인데 이게 뭔가. 오니쓰라는 과학수사반에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쉬라고 말한 뒤 주차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에콜드 신주쿠의 아침 풍경이 시작되고 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출근을 서두르는 샐러리맨들이 가끔 고개를 돌려 오니쓰라 일행을 지켜본다는 점이다.
오니쓰라는 부하가 뽑아다 준 종이커피를 한 손에 쥐고 입으로 훌훌 불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윤춘해가 이슬비를 맞으며 건너오는 모습이 보였다.

윤춘해는 오니쓰라를 만난 뒤 비를 맞으며 아크힐스 빌딩까지 걸어갔다.
간밤에 김영진의 연락을 들어보니 진광섭이가 깨져도 한참 깨진 모양이다.
오늘은 대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이 방금전 건네준 디스켓 지문에 대한 자료를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길을 걸었다.
전산 팀이 작업중인 아크힐스 북동편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는 복잡하게 엉켜있는 사무가구 사이에서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뇨 나쓰에였다. 그녀의 몸에는 레이어드 스타일의 검은 색 옷이 비에 젖어 찰싹 달라붙었고,앞이마에는 생머리가 엉켜 있었다. 하지만 핑크색 입술은 오만하게 닫혀 있다. 입술만 보아도 나쓰에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보통 오피스걸들이 그렇듯 절약할 때는 악바리처럼 절약하고,무너질 때는 하룻밤에 무너지는 부류인 게다.
춘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쓰에의 옆을 지나가다 말고 문득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검게 멍 자국이 나 있다. 맞은 건지 다친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춘해는 안타까운 기분에 담배를 꺼내 나쓰에에게 내밀었다.
"한대 피워 보겠소?"
춘해가 그렇게 물어보자 나쓰에는 순순히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춘해는 뭉툭한 손으로 라이터 불을 당겨 나쓰에에게 내밀었다.
"조심하시오. 우리 팀장은 독사라고 하오만…"
"독사요?…"
나쓰에는 그렇게 되물어보며 춘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곰 발바닥이군요."
춘해는 빨개진 얼굴로 나쓰에를 응시했다. 춘해의 별명이 영락없이 곰발바닥였던 게다.
춘해는 허탈한듯 한기를 느끼며 다시 나쓰에를 응시했다. 꽉 다문 입에 눈빛이 써늘한 것을 보니 라이프스타일을 하나꼬(여성용 상품정보 잡지)족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거 같다. 무엇인가가 머리속에 든 여자일 게다.
하지만… 독신녀는 국력낭비란 말야.

왼편으로 연결된 사무실로 들어가자 진광섭 앞에 16명의 신사복들이 일렬로 쭈욱 서있다. 양복은 각기 취향이었지만,버튼다운 셔츠와 붉은 색 넥타이를 통일해서 매고 있는 부하 16명의 모습은 완전히 그림같은 풍경이다. 역시 진광섭팀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광섭은 부하들의 복장중에서 넥타이만은 일일히 통제하며 다니고 있었다. 넥타이에 자존심이 걸린 남자처럼.
진광섭은 이만저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 광섭의 앞으로 불려나와 어젯밤 움직임을 문책 당하고 있다. 춘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사내들 맨 뒤에 걸어가 섰다. 문책이 끝나자 광섭은 요코하마로 두명,고베로 두명,쓰쿠바로 7명, 각각 인원을 분배하여 다시 투입을 하고 있다. 김준이 도망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지시가 끝낸 뒤에도 광섭은 애들보고 움직이라는 지시를 하지 않고, 계속 벌 세우듯 부동자세로 서있게 했다. 잠시후에 이상운을 향해 광섭은 걸어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이상운을 향해 쪼인트를 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광섭의 입에서 신랄하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너 이 자식. 헬기 한대 구해보라고 했더니 그래 그따위 헬기를 구한 거냐? 이 세상에 몇 종류의 인간이 있는지 알아? 네 종류야. 근데 넌 그래 팔푼이 조종사가 딸린 헬기를 구할 수밖에 없었냐? 너 애국심은 있는 거냐? 엉?"
쿠욱,하고 이상운은 진광섭의 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쪼인트를 가하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복부에 더블 펀치를 날려온 게다. 통증이 와도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다.
"황영달이 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야? 왜 어제 연락이 없었나? 앙?"
진광섭이 묻자 가나기원을 감시하러 갔던 황영달이가 총알같이 튀어나와 보고를 시작했다.
"가나기원은 문제없습니다. 24실 다다미 방이 있는 평범한 하숙집입니다. 모리타 가나에라는 여주인,그저 평범한 미망인입니다. 남편은 전산쟁이 였다는데,2년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더군요. 이들 사이에 딸 하나가 있는데 준꼬라고 합니다만…"
광섭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영달을 노려보았다.
"뭐야…지금 나에게 말한 게 밥상이야 보고서야? 너 정말 안기부 요원 맞아?"
동시에 진광섭은 번개같이 황영달의 뺨을 돌려 쳤다. 황영달은 붉어진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밥,밥상이 아니라…보고서입니다. 면목없습니다."
"까불지 말고,밥상 계속 해봐!"
"예. 김준 옆방에 마에다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습니다…역시 프로그래머입니다. 아니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도메인 운영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떤 도메인domain인데 그래?"
"방위청 도메인을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7세의 나이. 인터넷용으로 오픈된 방위청 컴퓨터 하나를 관리한다고 합니다. 유닉스도 빠삭한 녀석인데, 이 녀석의 유일한 취미가 AV(adult video)에 심취하는 거랍니다. 이 때문에 하루에도 서너편씩 빌려 보는 괴짜라는 군요. 제생각입니만,아마 그 나머지 시간을 컴퓨터작업에 투자하는 걸로 느껴집니다."
이때 윤춘해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광섭씨. 이 디스켓 말이요. 이 디스켓에도 마에다 그 친구의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에다가 이 디스켓과 연관이 있는거 같은데…"
"디스켓이라뇨? 그건 뭐요? 춘해씨?"
"김준이 찾아 다녔던 디스켓이오. 어제 오후에 TV도쿄 보도실에서 발견했는데,간밤에 혹시나 해서 경시청 도움으로 지문을 추적해 보았소.
사망한 후루겔스 게이꼬의 지문과 함께 마에다의 지문도 있더군요."
"그런데요?"
"마끼 준사히의 지문도 발견되었습니다. 헌데…"
"마끼라면 자살한 여자가 아닙니까?"
"마끼 준사히 그 여자 자살한 게 아닌 거 같소. 오늘 새벽에 미국에서 귀국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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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김준은 시티뱅크 요코하마 지점 현관에서 사유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유리가 돈 봉투를 들고 걸어 나왔다. 붉게 홍조를 띈 얼굴이다.
"아저씨. 이거 정말 아저씨 돈이에요?"
"그래."
"음… 넘 많다. 흐."
"카드는 만들었니?"
"옜썰. 이거죠. 너무 빨리 만들었나요?"
사유리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드디어 카드가 생긴 게다. 준은 사유리와 함께 다운타운거리로 향했다.
"비밀번호는?"
"말해줄께. 키스 해주면."
또 키스라니…
"자요. 이렇게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잽싸게 김준의 입술을 낚아챘다. 이쯤 되니까 김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사실 이런 데이트는…
얼마나 고대했던 데이트인가.
가만히 있어도 여자 쪽이 알아서 해주다니 말야…
준은 붉어진 얼굴로 카드를 받아 지갑에 챙겼다. 사유리는 이미 아침에 세이신 여고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 뒤 준을 돌아다보며 하는 말이 몸이 무지 아프걸랑요,며칠 쉴게요,라고 말한다. 준은 그런 사유리를 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일본 교육제도가 이젠 타락할 만큼 타락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날 따라 다닐 생각이니?"
"하이."
"난 너같이 어린 애는 질색인데?"
"이런 데이트는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학교야 뭐 월요일부터 다시 나가면 되죠. 사실 전 현금가방,아차…돈 많은 남자가 좋아요."
"난 현금가방이 아니야… 이 돈도 친구가 꿔준 돈이지. 죽지 말라고."
찔끔 이마를 찡그리는 사유리.
"그런 건 관심 없어요. 하여간 나쓰에가 왜 아저씨와 데이트를 했는지 알겠네요. 우리 언니,남자 무지 가리죠. 그러니까 나쓰에가 고른 파트너는 그냥… 제가 집어삼키는 경우가 많아요. 헤헤."
"그래. 강요하지는 않겠어. 다 자기 마음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나 옷 사줘요. 이 배꼽티 입고 거리 돌아다니기 싫어요. 근사한 미녀로 만들어 주세요. 저 오늘 새벽에 고생 많이 했으니까 보답은 하셔야죠."
"그보다는 먼저 병원에 가봐야 겠는데. 난 지금."
"먼저 옷부터 사주세요."
"그럼 책을 사주지. 저기 서점이 보이는 군."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사이에 김준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오른쪽 허벅지에서 신사복 바지를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인다.
통증이 심했다. 걷는 것은 지장이 없을 거 같았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상처자국이 악화될 거 같다. 준은 쇼윈도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폭우 대신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피곤했을 게다. 김준은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잠깐 졸았다가 깨어났다. 날카롭고도 속삭이는 듯한 여자 앵커의 음성.
서점 쇼윈도에 설치된 TV에서 스파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준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자살극을 벌리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마끼 준사히에 대한 뉴스였던 게다.
준은 급히 서점 밖으로 뛰어 나와 쇼윈도 앞에 붙어 섰다.
마끼 준사히. 창백하게 생긴 여자가 조용히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런 뒤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파워스위치를 올렸다. 부팅과 동시에 준은 곧바로 세크 BBS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 뒤 지불방법을 카드지불로 선택하고,방금전 사유리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아멕스 카드의 구좌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세크 BBS가 조사한 자료가 준의 눈앞에서 떠올랐다. 준은 서둘러 조사된 자료를 다운 받았다. 사유리가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구입한 책은 <完全自殺マニュアル> 이라는 책이었다.
<자살 매뉴얼> 정도로 해석해야 할까.
사유리는 자살 매뉴얼을 심각하게 들쳐 보며 걸어와서는 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자살하려고 안달이 난 소녀같은 표정이다.
서점 점원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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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거실로 나왔다. 간밤에 오빠가 무슨 짓을 하고 이곳을 떠났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정원에서 들어오는 빛이 난장판이 된 거실을 싸늘하게 비치고 있다. 미나는 반쯤 깨진 탁자로 걸어갔다. 두께 10미리의 탁자유리는 데칼코마니 형으로 금이 가 있다. 그녀는 탁자 위에서 마일드세븐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복잡해…
실로 오랜만이었다. 담배를 피기 시작한 것은 여중 3학년 때부터였다.
오빠가 해킹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다가 자신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생긴 흡연 습관이었는데 그만 여고 1학년때 오빠 하야시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부터 3일 동안 하야시는 미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끊었던 담배인데…
다시 하야시때문에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복수하겠어!

미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도마질을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뭔가 먹어야 했다. 새벽에 귀가한 이후로 입에 음식을 대지 않았다. 미나는 요리를 하다말고 주방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집 욕실창문에서 만화가 고바야시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미나는 버럭 화가 났다. 그녀는 주방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다.
고바야시는 화들짝 놀라며 욕실 창문에서 고개를 내렸다. 뭔가 잘못 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가 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다니 말야. 고바야시는 면도질을 그만 두고 잠시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뚱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라도 한참이나 놀란 모양이다. 고바야시는 떨리는 손으로 손거울을 찾았다. 그런 뒤 창 밖을 향해 손거울을 비쳐 보았다.
미나가 요리용 칼로 뒷마당에서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쑤시고 있다.
무엇을 할까…
고바야시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아내는 이미 출근을 한 모양이다. 아니군. 벌써 오전 10시나 되었나?
고바야시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네로. 네로야? 너 어디에 있는 거냐?"

고양이는 미나의 발아래쪽에서 단말마의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고바야시의 고양이었다. 가끔은 미나네 집으로 넘어와서 놀기도 했는데 오늘은 재수가 없었다. 미나가 분노했을 때 하필이면 이쪽으로 산책을 나왔던 게다.
고양이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숨이 끊어졌다. 미나의 눈은 다시 조용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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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10분. 김준과 사유리는 신간선을 타고 고베로 이동을 하고 있다.
작년 1995년에 큰 지진이 발생했던 도시라 아직도 어수선할 분위기일 것이다.
고베쪽이 유리했다. 가까운곳애 간사히 국제공항이 있었으니까,여차하면 외국으로 곧바로 튈 수가 있다.
그보다는 마끼 준사히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게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자살극으로 위장했을까. 준은 아까 서점안에서 작업을 했던 노트북 컴퓨터를 무릅팍에 올려놓고 세크BBS가 조사한 내용을 오픈했다. 사유리는 시름시름 앓는 거 같더니 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을 자고 있다. 호흡소리가 세액세액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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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하철 사고사례
>> 도쿄도 통근전차는 출 퇴근 피크시에 정원의 2배를 넘는 대단한 포화 상태에 있다. 도쿄도 도심부로 들어가는 통근자 중 6할이 통근하는 데에 60분 이상 걸리고 있음을 생각할 때 통근사정의 개선은 초미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도쿄도 지하철은 최고 1분 10초 간격,최대 20량 편성으로 운영되고 있고…기존노선에서는 1본의 증발도 1결의 증결도 할 수가 없는 한계상황이다…
>> 복합적으로 지하철신선,신교통시스템,통근신선,복복선화 등의 건설공사도 진행되고 있지만 모두가 완성까지는 수년이 소요될 것이다. 이 때문에 도쿄도 지하철 망은 난잡한 상황에 빠져 있고,절묘한 사고나,사고를 위장한 조직적이고 불합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 특히 94년,95년 양해에 투입된 2종류의 테스트차량 야마테 선의 6도어 차량과 죠오반선의 2층 차량에서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그리고 러시아워 시에는 좌석이 들어가고,러시아워가 지나면 좌석이 나오는 아이디어 차량에서도 의문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여기까지 읽다가 자료 검색을 중단하고 신간선 창 밖을 내다보았다.
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는 농촌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빗방울이 며칠째 날리고 있던차라 꽃잎은 대부분 만개하던 중 떨어져 버렸다.
준은 첫 번째 자료를 크로즈한 뒤 두 번째 자료를 읽어 들였다. 내용은 지하철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해커와 작업가능한 해커의 명단.
총 37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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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陽 (도쿄도 야마테선 발착시간 조작 2회)
>> 孔雀王 (군마현 제3섹터선 연착 조작 33회)
>> MKj (아이디어 차량 상대로 조작 1회)
>> 地下鐵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회. 도쿄도 죠오반선 조작 2회)
>> カウンタ (산요오 신간선 연착 117회. 도쿄도 죠오반선 연착 47회)
>> …
>> 東急HACK (야마테선 조작 1회)
>> morina (도오카이도오 신간선 사건 조작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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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에는 김준의 닉네임인 <동급HACK>도 들어가 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세크BBS가 동급해커에 대해 조사한 세부내용을 오픈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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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急HACK
>> 국적: — 성별: — 추정나이: —
>> 작업 목적 : 후루겔스 게이꼬 살해
>> 작업 내역 : 야마테선 조작 1회
>> 동 1996년 3월 17일. 도쿄도 지하철망중 하나인
>> 야마테선 컴퓨터에 침투 선로변경을 성공적으로 시도.
>> 니혼바시 역을 통과할 동서선 지하철 차량에 긴밀하게
>> 선로변경을 시도한 뒤 동 차량을 긴좌선 지하철역중
>> 하나인 간다역으로 이동하는데 성공.
>> 엽기적 조작의 맨 후루겔스 게이꼬 사망
>> 작업 방법 : 경시청 파일대장 290383호 참고.
>> 야마테선 본부 자체 조사에 따르면
>> 야마테선 중앙 컴퓨터에 후루겔스 게이꼬의 사진을
>> 입력,유사 방법으로 폐쇄회로 카메라를 제어한 뒤,살해했다.
>> 작업 도구 : Sourcer V6.09
>> ASMtool
>> Converts OBJ files to ASM
>> View-It
>> Turbo Debuger
>> C언어 프로그램 File 1. Gif File 1
>> 12개의 판별 불가능한 File
>> 침투 경로 : 모두 3개의 핸드폰 번호 사용
>> 참고 : 악질해커중 하나. 동급HACK의 본국내 첫 작업은
>> 1994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명.
>> 최초에는 산업데이터 해킹 범죄자로 간주되었으나…
…………………………………………………………..

준은 흐릿하게 미소를 흘렸다. 자신이 고급 산업스파이에서 졸지에 야마테선을 해킹한 3류 해커로 추락했다고 생각을 하니 할 말이 없다.
준은 다시 일일히 작업가능한 해커들의 활동내역을 읽기 시작했다.
신간선이 시즈오카에 도착하기 20분전에 김준은 구보 마끼 준사히에 대해 조사된 내용을 읽고 있었다.

………………………………………………………….
>> 문예춘추 93년 7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자살시도하다가 실패하다
>> 논노 95년 기사 3회 연재 – 구보 마끼 준사히. 패션계에 진출하다
>> 문예춘추 96년 1월 – 구보 마끼 준사히. 미야자야 리에와 절교 선언하다
>> 문예춘추 96년 2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자신의 동성애설 극구 부인.
>> 주간 화제 96년 2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인기 만회 위해 자살극 시도하다
>> 은행원 25시 – 은행원 독신남성들. 인기여성으로 구보 마끼 준사히 선택.
>> …
>> 마이니찌 96년 3월 7일 – 구보 마끼 준사히. 이즈반도에서 자살하다.
>> 요미우리 96년 3월 8일 – 경시청. 불에 탄 마끼의 시체를 요트안에서 발견하다.
>> 일간스포츠 96년 3월 8일 – 구보 마끼 자살. 20대 청년들을 공황상태로 만들다.
>> 니혼게이자이 96년 3월 9일 – 경시청. 구보 마끼 유서를 찾기 시작하다.
……………………………………………………………

호기심이 가는 내용은 없다. 마끼는 구보 부동산 회장의 외동딸로 수수하게 성장한 여자였다. 대학시절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 마끼 준사히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지적인 동시에 수수했다. 화장을 안하는 게 그녀의 매력이었다. 아마 화장을 하였다면 놀랄 정도로 이미지업을 할수 있을 것이다.
준의 뇌리에 마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언젠가 한번 TV에서 본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덤덤하게 여겨졌는데…
준은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흥미 있는 기사 하나를 찾아냈다.
마끼 준사히가 매거진하우스를 통해 발표한 인터뷰성 기사였다.

……………………………………………………….
>> Q: 취미는?
>> A: PC통신이에요. 아시죠? 제 아이디는 저보다 유명하던데…
>> Q: 아. MK라는 아이디 유명하죠. 그런데 왜 하필 피시통신을 취미로…
>> A: 외로운 거죠. 이야기할 상대를 그때 그때 조달할 수는 없으니까요. 간혹은 그래요. 밤 4시경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죠. 아마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 무턱대고 컴퓨터를 켜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환상이 보인답니다.
>> Q: 본지가 알기로는 마끼양의 통신생활은 꽤 난잡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 A: 아,그 점은 피시밴에서만 그래요. 저팬서브나 다른 통신망에선 비교적 얌전하게 활동을 하죠. 채팅이나 머드 게임중에 만난 파트너들은 제가 마끼라고 하면 놀라죠. 전 그 점이 재미있었어요. 어쩌면 그것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죠.
>> Q: 그럼 피시밴에 올려놓은 자료는 소문이 아닌 사실입니까?
>> A: 결국 오늘 인터뷰의 중심이군요. 네 사실입니다. 전 피시밴에 글을 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제 글을 안 읽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미지파일을 올려본 겁니다. 다음날 밤에 전 놀랬어요.
>> 제 이미지 파일을 다운 받아간 사람이 무려 7천명이나 되더군요.
>> 기뻤죠. 그날 하루는.
…………………………………………………………

준은 잠시 검색을 중단하고 폴더를 전환했다. 노트북 화면에 피시밴 통신망이 곧바로 떠올랐다. 자료실로 이동을 했다. 마끼 준사히가 올려놓은 이미지 파일이 검색되어 나타났다. 인터뷰 내용대로 마끼는 3개의 이미지 파일을 피시밴 자료실에 등록시켜 놓았다.

>> mkjsexy1.exe 마끼 준사히의 봄입니다
>> mkjsexy2.exe 마끼 준사히의 나른한 오후입니다
>> mkjsexy3.exe 마끼 준사히의 해변입니다

이미지 파일답지 않게 EXE형식의 실행파일로 올라가 있다. 애니메이션 파일을 아예 실행파일로 바꾸어 놓은 모양이다. 다운 받아 가는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려 했는지 모른다.
준은 3개의 EXE 파일을 자신의 노트북컴퓨터로 다운을 받았다. 그런 뒤 하나하나 실행을 시켜 보았다.
mkjsexy1.
파일을 실행시키자 곧바로 노트북 화면은 영화화면처럼 바뀌었다. 음성지원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마끼는 어느 호화로운 거실에 앉아 있다. 도쿄도 전문학원 출신인 자신의 과거를 나른하게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말하는 듯 했는데 곧바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마끼의 젖가슴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준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이마가 뜨거워졌다.
섹시 2 파일도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 각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탁월한 실력이었다.
전혀 패치 할 구석이 없다. 아주 깨끗했고 화려하고,섹시한 마끼의 모습이 영화처럼 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렇지만 섹시1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감탄할만한 여자였다. 마끼 준사히는 저급 포르노그래픽 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섹시 3에서 보이는 마끼의 모습은 예상외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마끼는 자신의 남자 파트너들과 난교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뒤 이미지 파일로 전환시킨거 같다. 과연 이런 내용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준은 온통 혼돈을 느끼며 신간선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밤,후루겔스 게이꼬가 가지고 왔던 디스켓안에는 마끼가 작성한 유언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끼는 죽은게 아니다. 자살극으로 위장하고 유언장을 남겼던 게다. 그런뒤 오늘 새벽에 갑자기 그동안 숨어 지냈던 미국에서 귀국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마끼의 디스켓에 걸려 있는 암호 LOVE가 제일그룹 중공업 컴퓨터망인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와 동일했을까.
누굴까. 나를 괴롭히는 해커는.
해커를 잡는 데는 해커밖에 없다. 이건 준 스스로의 문제인 것이다.
준은 액정화면을 응시하다가 문득 <해커 명단>을 다시 오픈시켜 보았다.

>> MKj (아이디어 차량을 상대로 조작 1회)
>> 地下鐵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회. 도쿄도 죠오반선 조작 2회)
>> カウンタ (산요오 신간선 연착 117회.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7회)

마끼 준사히가 피시밴에 등록한 아이디인 MK…
그것과 유사한 아이디 MKj가 준의 동공 안으로 바짝 다가왔다.
준은 다시 마끼에 대해 조사된 자료를 읽어 보았다.
그런 뒤 사유리의 허벅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열차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부스로 걸어갔다.
마끼 준사히의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후지산 별장. 오후 5시.
마끼 준사히가 오후에 후지산 별장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 낸 준은 시즈오카 역에서 뛰어 내렸다. 어느새 자고 있는줄 알았던 사유리가 뒤따라 뛰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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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과 황영달은 가나기원 앞에서 마에다가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 나갔다던데 어디로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상운은 다시 불길한 생각에 가나기원 주인인 가나에를 만나러 정원안으로 들어섰다.
가나기원은 고풍스러운 일본풍의 저택이었다. 좌우로 정원이 있고,우측 건물 앞쪽으로 연못과 정자가 있다. 주변은 도심지에서는 볼 수가 없는 울창한 관상목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말그대로 이상운은 금빛 찬란한 정원안에 자신이 서있다는 착각을 받았다.
확실히 사흘전 밤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상한 정적과 장엄함 속에서 상운은 등뒤를 돌아다보았다. 세우細雨가 연못 표면에 떨어지고 있다. 가나기원의 대문은 신사식으로 높은 지주가 좌우로 설치되 있기 때문에 울컥 괴물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운은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치며 정자로 걸어갔다. 가나에가 딸 준꼬의 등을 토닥이며 정원을 응시하고 있다. 이슬비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가나에는 혼혈아답지 않게 기모노 차림으로 서 있다. 기모노는 4월 8일 佛陀誕生祭(석가탄신일)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미망인이라니. 믿을수 없단 말야. 신은 불공평한 거야. 내겐 저런 여자가 손짓을 하는 법이 없어. 다. 날나리들이나 손짓을 하지.
상운은 가나에의 미모에 반해있었기 때문에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다시 정원 구경을 하러 왔습니다. 가나에."
"예. 알고 있습니다. 아직 마에다 군이 귀가를 하지 않는 군요."
"전화 연락은 없었습니까?"
"네. 없었습니다. 마에다 군은 저에게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곳에서 생활하니까,특별하게 전화를 해 올 이유도 없겠죠.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군요.
마에다 군은 이토록 오랜 시간 방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요."
"아. 그렇군요…"
이상운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머릿속을 굴렸다. 그의 일본어 솜씨는 일본인들이 놀랄 정도로 탁월했다. 그러나 가나에의 일본어는 알아듣기 힘들다. 혼혈아.
어쩌면 북구쪽인지 모른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일까. 유럽악센트에 불교적인 냄새가 가미돼 있다.
상운은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앉아있는 준꼬 앞에 멈추어 섰다. 빈말이라도 준꼬를 칭찬해 주고 싶다. 미망인에게 점수를 따는 최고의 방법인 게다.
"아. 아가씨. 나 또 왔어요. 나 기억나지요?"
별안간 준꼬는 고개를 바짝 들어 상운을 노려보았다.
상운은 오싹했다.
애가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나?
상운은 두려움을 느끼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김준을 잡으러 왔을때 방해를 했던 이 꼬마…준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그렇지만 그날 문제때문에 나에게 감정이 있을까…음.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 겠군…
상운은 주머니에게 지폐를 꺼내 준꼬에게 내밀었다.
준꼬는 와락 분노한 표정으로 상운의 손에 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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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정보국 에이전트인 하라다 게이조는 닛산 임해공장에서 생산한 신형 맥시마 자동차안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 그의 눈 앞으로는 후지산 산록에 위치한 마끼의 거대 별장이 올려다 보였다. 오후 4시였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산자락 너머 하늘 끝에선 반달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때문에 마끼의 별장 4만평은 마치 18홀 골프장을 보는 듯 장엄한 분위기에 빠져 있다.
벌써 1시간전부터 마끼 준사히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 유명인을 만나다니.
더구나 마끼는 게이조가 좋아하는 직업 모델이다.
상부에서 지시한 몇가지 작업을 조사하던 중 후루겔스 게이꼬가 마끼의 유서가 들어있는 디스켓을 입수하는 과정이 의심이 되었다. 이문제로 5시 정각에 마끼와 후지산 별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곳은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는 장소였다.
어쨌든 약속시간까지는 1시간 가량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좋았다. 자동차도 고급이라고 할수 있는 닛산 맥시마로 골라온 터였다.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돌아온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흔쾌히 내각정보국 사건조사에 협조를 하고 있는 게다.
게이조는 논노 잡지에 실린 마끼 준사히의 얼굴을 응시했다. 부드럽다.
작고 앙증맞은 얼굴이었지만 퍼머넌트의 풍부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
이 작은 요정 때문에 남자들이 흥분을 하는 게다.
마끼의 장점은 화장을 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화장을 하면 어떻게 변할까.
작은 얼굴은 가꾸기 나름이니까 요부가 되던가 지성적인 여성이 되는가는 그녀의 마음에 달려있을지 모른다.
게이조는 뒷좌석에서 졸고 있는 두명의 동료들을 돌아다보다가 다시 자동차 전방을 응시했다. 택시가 멈추어 서고 있다. 두 남녀가 택시에서 내려서고 있다.
가까운 거리였다. 게이조는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걸쳤다. 두 남녀는 게이조의 세단을 힐끔 응시하더니 별장 쪽으로 걸어올라 가고 있다.
게이조는 그들중 남자가 별장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보다가 백미러를 응시했다. 도로를 타고 날카롭게 달려오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 스포츠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게이조는 흥분한 얼굴로 선글라스는 벗어 젖혔다. 승차정원 2명의 2도어 쿠페형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는 최고속도가 시속 320Km를 넘는 골때리는 자동차였다. 게이조는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참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러분… 마끼 준사히양이 오고 있습니다. 환영을 나가 봅시다."
게이조가 그렇게 말하자 뒷좌석에 졸고 있던 두명의 신사복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마끼를 실제로 볼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다.

마끼 준사히는 람보르기니 안에서 물끄러미 전방을 응시하고 있다. 올이 고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스무스하게 콧 등에 걸려있다. 마끼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녀는 별장 정문에 서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힐끔 운전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 너. 내려."
"뭐?"
"됐어. 걸어가던지 뛰어가던지 알아서 해.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복잡하겠어."
"너 정말 내 성질 돋굴래?"
"성질 나게 한건 내가 아니라 너야. 두번 말하지 않겠어. 당장 내려."
그런 뒤 마끼는 손에 쥐고 있던 카라이터를 사내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라이터는 톡 소리를 내며 핸들 밑으로 떨어졌다.
사내는 운전을 하면서 히쭉 뇌까렸다.
"알았어, 우리 공주님. 하지만 람보르기니의 소유자는 나라는 걸 모르나?"
"선물이라고 했잖아?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게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이 스포츠카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핏자맨처럼 별장 앞까진 배달해 주고 가야겠어! 이게 내 진심이지."
"웃기고 있군. 너 제법 귀엽구나. 누가 너를 핏자맨으로 캐스팅 한다던?"
"알았어. 좀 참아보자. 정문 앞까지만 같이 가자. 저기 사내들중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운전대 맞기라면 맞기겠어. 하지만 말야.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사랑 좋아하시네. 핏자맨씨."
"야? 너 정말 이럴래? 분위기 좀 잡아보자. 내 체면도 생각해 주어야지?"
"알았어. 나 방금 분위기 잡았어. 그러니까,너 당장 이 차에서 꺼저!"
사내는 얼굴이 벌개진 채로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겼다. 이미 별장의 철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있다.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끼를 껴안았다. 마끼는 저항하지 않았다. 가볍게 둘 사이에 키스가 오고 갔다.
마끼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3천만엔밖에 안하지만 이 람보르기니 선물은 영원히 잊지 않을께."
"고맙긴…앞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자살은 위대한 일이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람보르기니의 운전석에서 걸어나왔다.
람보르기니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패거리가 서있다.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별장문 왼쪽으론 베꼽티에 롱코트를 걸친 소녀와 키가 훤칠한 남자. 오른편엔 신사복 사내들 3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있다.
사내는 시선을 닛산 맥시마 자동차를 향해 옮겼다. 아마 신사복들이 타고 온 자동차인 거 같다. 사내는 허탈한 듯 다시 람보르기니 안으로 고개를 들이댔다.
마끼는 이미 람보르기니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마끼는 말했다.
"어느 쪽이십니까? 내각정보국에서 오신 손님은?"
게이조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뒤에 서있는 신사복 2명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끼는 게이조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왼편으로 옮겼다.
배꼽티를 입은 불쌍한 소녀와 제법 미남인 남자가 서있다.
마끼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렸다.
"당신들은 뭐죠? 제 사인이 필요하신가요?"
준은 비쩍 웃었다. 아까 신간선에서 내릴 때 이발을 하고 워셔블 신사복을 구입한 건 잘한 일인지 모른다. 준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여유가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도쿄 특파원입니다. 별안간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합니다."
순간 마끼는 긴장했다. 한국에서 기자가 방문해 온다고는 전혀 에상하지 못했던 게다. 의심이 갔다.
"신분증은 있으신 가요? 기자님이시라면…"
"아. 제가 실례를 했군요."
준은 급히 명함을 꺼내 마끼에게 건네주었다. 마끼는 명함을 읽은 뒤 땅바닥에 흘리듯 버리면서 준의 왼손에 들려있는 노트북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뜻밖이군요. 저에 대한 소문이 한국에까지 알려지다니요. 설마 해외토픽감으로 초라하게 다루어지는 건 아니겠죠?"
김준은 거짓말을 잘한다.
"데스크는 일본 신세대 모델을 중점으로 특집 기사를 준비중입니다. 그중에 마끼 준사히 양이 1번으로 당첨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데스크는 당신이 자살한 원인을 중점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지요. 헌데 오늘 보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꽤 급하시겠군요. 그럼."
마끼는 그렇게 말하다가 사유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아가씨는 누구죠? 정말 대단히 추워 보이는 아가씨군요."
사뇨 사유리는 얼이 빠져 있었다. 마끼 준사히. 유명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별관심이 없었던 모델이었다. 헌데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같은 여자라도 질투가 날 정도로 미인이다. 사유리는 질투심을 억제하며 히풋 미소를 지었다.
"아…전 사뇨 사유리… 통역담당입니다. 아르바이트걸이죠. 흐…"
마끼는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그러시구나. 그럼 사유리양도 같이 들어 가실까요. 그리고…"
마끼는 게이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회색 빛이 도는 동공이다.
"미안하군요. 내각정보국 손님들과는 1시간 뒤에 만나뵙고 싶군요. 가급적이면 이분들과 빨리 이야기를 끝내보도록 하겠어요."
"그러십시오. 오히려 저희가 방해를…"
게이조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끼의 음성은 부드러워졌지만 총알같이 게이조의 뇌리에 파고들고 있었다.

게이조는 람보르기니가 별장 정원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적적했다.
하지만 잠시 후의 만남을 위해선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끼와 같이 왔던 사내는 철문이 닫힌 뒤에도 계속 람보르기니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가까운곳에서 왔는지 사내는 와이셔츠에 멜빵 차림이다.
람보르기니가 별장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사내는 게이조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맥시마 자가용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들판에서 보리 싹이 나고 있다.
사내는 침을 딱 뱉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악어가죽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게이조에게 말했다.
"이 똥차 가격이 얼마지? 지금 당장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걸어가기가 귀찮군. 나에게 팔지 않겠나?"
게이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게이조는 육상레인저 출신이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법이다.
"전화를 빌려드릴테니 쓰시지? 아니면 걸어가시던가."
"아,카폰까지 설치되 있나? 이거 똥차는 아니었구만?"
울컥 화가 나는 걸 참으며 게이조는 운전대 옆에 부착된 무선팩스기의 수화기를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곧바로 콜택시를 호출했다.
10분 후에 택시가 도착했다. 사내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게이조 일행은 그런 사내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돈 많은 부자들. 아니 재벌 2세들이 이 나라를 망치는 게다. 우리같은 레인저 출신의 정보원들은 그저 후지산에서 생존술이나 익히다가 저런 놈 지랄하는 거 구경하는 게지.
게이조는 다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뒤에 서있던 동료가 자동차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게이조는 힐끔 동료를 돌아다보았다. 열린 자동차 창 사이로 팩스가 수신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게이조는 급히 운전석 문을 열었다.
츠츠츠….
캐논 Rx 무선팩스는 불길을 토하듯 감열지 4장을 토해내고 있다.

== 동 수배자 사진 전송 1. 김 준 2. 사뇨 사즈메 3. 사뇨 나쓰에 ==
== 1. 2. 3. 이하 몽타쥬 사진 참고 ==

감열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게이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별장 앞에 서 있던 두남녀였던 것이다.
게이조는 눈알이 뒤집어 질것 같이 흥분한 얼굴로 버럭 외쳤다.
"빠가야로! 동급해커다! 놈이야 놈!!"
게이조의 외침소리를 듣고 두명의 동료는 긴박하게 별장 철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뒤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별장 철문은 철통같이 잠겨 있었다.
오후 5시 정각. 빗방울이 점점 거칠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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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각정보부 시나노 곤베이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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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희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비쩍 마른 입술을 달착 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두시간째 김준을 찾고 있지만 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비련.
고부장이 보내온 핸드폰 번호는 이미 통화정지된 번호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준의 노트북안으로 직접 치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노트북의 파워스위치를 끄고 다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릴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준에게 현상황을 알려 주고 싶었다. 복잡하고 난해한 현 상황을.
그녀는 주스를 홀짝이며 다시 IBM형 컴퓨터를 응시했다.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는 컴퓨터는 NEC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PC-9801 기종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애플 컴퓨터며 IBM 클론(복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현재도 일본안에서는 NEC형 컴퓨터가 강세였다. 이 때문에 현희의 컴퓨터안 확장 슬롯에는 NEC-9801 카드가 삽입되어 있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 골치 아프게 두 종류의 컴퓨터를 놓고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IBM과 NEC용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구현시키는 카드를 끼어놓은 것이다.
오빠 한일수는 아까부터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가뜩이나 좁은 아파트인데 불편한 게 이만저만 아니다. 불현듯 한현희는 저 양반도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가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몰라.
현희는 오빠가 땀을 흘리며 자는 것을 알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타월을 손에 들고 오빠가 누워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런 뒤 양 팔을 워밍업 하듯 흔들어 대다가 다시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급히 노벨도스 화면으로 빠져 나온 뒤 곧바로 피시밴 통신망으로 접속을 시도했다.
오늘 새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문자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떠오른다.

>> 오빠. 돌아와 주세요. 어디에 있는 거죠.

현희는 파도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통신망에는 예절이라는 게 있었다.
저따위 이상한 문자를 퍼트리는 여자는 누굴까. 겁대가리를 상실한 여자가 분명해.
현희는 문자를 퍼트리고 돌아다니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왠지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야릇한 환상과 도전 욕이 일어났다. 현희는 일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힐끔 응시하다가 다시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홈뱅킹 화면이 떠올랐다. 오전중에는 보이지 않았는데,지금 들어가 보니까 시티뱅크 요코하마 지점에서 돈을 찾아간 흔적이 있다. 김준이 돈을 찾아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찾아간 것일까. 호기심을 억제할 수가 없다.
급히 접속을 끊고 사설 BBS인 <뱅크마니아>로 재접속을 시도했다.
<뱅크마니아>는 노무라野村종합연구소가 별도로 연구를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은행 해킹분야에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보망을 가진 BBS였다.
접속이 되면서 암호를 물어오자 현희는 야릇하게 눈빛을 반짝였다. 이까짓것 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 뒤,말 그대로 암호를 뽀작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타자수같은 손가락 놀림이다. 그만큼 그녀는 머리가 좋은 지도 모른다.
10분정도 지났을까. 오후 5시 40분이었다.
크랙작업중에 초인종 벨이 울렸다. 현희는 급히 멀티태스킹(다중작업)으로 통신망 화면을 뒤로 감춘 뒤 의자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다.
감기에 걸린 듯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오빠가 부시시 잠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었다. 3명의 사내가 서 있다.
"한현희 씨입니까? 일본 내각정보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저희 사무실로 가실까요?"
현희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머릿속을 제트기처럼 파고 들었다.
내각정보국까지 김준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다면 일본 방위청에도 동급 해커가 침투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날 새벽에 서울의 고종수가 알려온 정보였다.
현희는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약간 추운데요?"
그렇게 말한 뒤 현희는 뒤를 돌아 거실 안으로 걸어갔다. 오빠 한일수는 번개같이 20인치 TV뒤에 몸을 구부리고 숨어 있다. 현희는 슬쩍 윙크를 했다.
그런 뒤 가까이에서 손에 잡히는 코트를 무턱대고 집어들었다. 지체할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혹을 주면 사내들이 거실안까지 치고 들어올 것이다.
현희는 실쭉 웃으며 반코트를 걸치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가시죠. 하지만 두시간후엔 저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데이트가 있어요."
"그러시죠.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단하게 끝날 겁니다."
사내들과 밖으로 나가면서 현희가 현관문을 닫자,일수는 곧바로 전화통으로 걸어갔다. 본사 정보팀의 고부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전화수화기를 거머쥐다가 일수는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도청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공중전화가 안전했다. 일수는 긴박하게 양복상의를 걸쳐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일수의 복부를 가격해왔다.
퍽———-!!
한일수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굴렸다. 사내 한 놈이 울부짖고 있는 한현희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두명의 사내들이 포위하여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빠가야로! 내각정보부를 속이려고 했나! 우리가 멍청인줄 알았나! 너희 남매가 함께 있는 걸 알고 왔단 말이다!"
정말이지…한일수는 정신이 없었다. 구둣발에 의해 앞 이마가 찢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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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수상직할 내각정보부 특별 수사팀은 긴급 회의를 하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시나노 곤베이와 무로부시 데쓰로 방위청 정보과장, 간료 무라다 내각정보부 정보수사과장이었다. 이들 중 시나노 곤베이는 육상자위대 동북방면대 제1공정단의 육군 육좌 출신이었다. 제1공정단은 유사시에 방위청 직활로 운영되는데,이번 경우에는 내각정보부와 방위청이 합동작전을 준비중이었다.
이 때문에 방위청안에서 최고의 두뇌라 불리는 곤베이가 배치되었다.
시나노 곤베이는 지능지수뿐만 아니라,컴퓨터에 대해서도 귀신같은 자였다.
그 자 역시 젊은 시절 대부분은 컴퓨터에 인생을 허비한 자이기도 했다. 한때 훗가이도 남동쪽 섬에서 말도 안되는 세어웨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통신망에 배포하기도 했는데 그 실력이 아직도 유감없이 남아있다. 하기야 그건 10년전 과거의 일이다. 현재 나이 35세. 4년전에는 북한의 전방부대에 위치한 저격여단에서 6개월간 특공훈련을 받았는데 이때도 그의 머리는 녹슬지 않았다. 아니 나이가 들어 가면서 그의 두뇌는 구두약으로 광을 낸 것처럼 반짝임을 더해갔고, 완숙미를 더해갔다.
곤베이는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GIGN(de Group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이라는 프랑스 국가헌병특공대 내에서도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여기서 훈련중 습득한 GIGN 시스템은 내각정보국에 영향을 주었다.
내각정보국 일부 파트는 자위대 공정단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사시에는 헬리콥터와 소형 제트기로 구성된 소탕 조를 구축할 수 있게끔 조직체계화를 시작했는데,이는 모두 곤베이 자신의 활약에 의해서였다.
이 시스템이 오늘 새벽에 갑자기 구축되었다. 그리고 팀장은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시나노 곤베이 자신이었다.
곤베이가 한가지 아쉬워하는 점은 한국측에서 대쪽같은 <진광섭 팀>을 투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문이었다. 진광섭이라면 북조선에서도 인정하는 탱크이자,대쪽이었다. 진광섭과 경쟁하는 것은 불도자 앞에서 삽질하는 일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곤베이 자신도 만만치 않았다. 곤베이는 자신을 칼이라고 생각했고,일본을 국화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국화를 지키기 위해 서라면 칼이라도 뽑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만큼 자만심이 강했는데,일처리에 있어서도 분명 남다른데가 있었다.
어쨌든 정보수집에 혼란이 많았다. 지난 이틀동안 불합리한 정보가 많이 입수되고 있었는데 이 중 <동급해커>가 한국 국방부 컴퓨터에도 침투했다는 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동급해커>는 이미 무한 시스템을 경유 이날 새벽부터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경유,해상자위대와 오끼나와 미군 사령부의 컴퓨터망안에 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워게임War Game이란 말인가.

곤베이의 보고가 끝나자 데스로와 무라다는 식은 땀을 흘렸다. 곤베이의 브리핑 대로라면 지난 이틀 동안 <동급해커>는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완전히 박살냈다는 뜻이다. 그런 뒤 쥐새끼처럼 숨을 죽이고 있다. 어떡게 된 일일까.
동급해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곤베이는 간단하게 사건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소니레이저비젼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때 곤베이의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한현희를 체포 압송중이라는 보고였다. 통화를 끝내자 다시 5초 뒤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몽타쥬 사진을 전송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하급 부하가 김준의 행방을 포착했다는 전갈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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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 준사히는 자신이 흠뻑 취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생각보다 인터뷰가 길어지고 있었다. 집사가 접대용으로 가져온 정통위스키 잭 다니엘을 사유리에게 권한 것이 일을 점점 복잡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취한 사유리는 헤프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누구에게 아양을 떠는 건지 횡설수설 떠들고 있었다. 마끼 역시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외가 있다면 테이블 앞쪽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밖에 없었다. 그는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레코딩 기능이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조작해가며 마끼의 대답을 하나하나 녹음해 가고 있었다.
손가락마디가 가느다랗다.
마끼는 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불현듯 사유리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여운 아가씨였다. 뭐라고 탓할 개재는 아닌 것이다.
별안간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마끼는 인터뷰 도중에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짧게 박수를 두번 쳤다. 번개같이 늙은 집사가 달려왔다.
"모모와. 저 아가씨에게 맞는 옷이 있나 찾아다 줄래요? 그래요,2층 의상실에 가서 적당한 옷이 있나 찾아봐요."
마끼의 말에 준은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끼는 창백한 얼굴로 사유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유리는 어안 벙벙이 되어 마끼를 올려다보고 있다.
약간 당황을 했는지 빈 이마를 찡그린다.
"옷이라뇨? 전 이거면 되요. 옷은 필요없다구요. 흐…"
사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빈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거란 술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아가씨. 잠깐 일어나 봐요. 사이즈가 어떤지 알 수 있을지 모르 겠군요. 32-23-31 인가? 풀 사이즈는 아니시구나. 하지만 보기 좋은 몸매에요."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감탄한 듯 말을 덧 붙였다.
"키도 상당히 크구나. 머리 모양만 바꾸면 정말 예쁘겠어요."
그 사이에 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붉은색 벽난로 위로 거대한 창이 있다. 창 밖으로는 밤하늘이 한눈에 올려다 보였는데, 도시가 결코 단일案에 따라 제한된 시간 안에,한번의 역사로서,건설되지 않는 것처럼 마끼의 별장은 서양건축 양식과 일본 풍토성이 교묘하게 융화되어 있다.
웅장했다. 준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무덤같은 공간안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작은 연회 홀에 들어와 서있는듯 했다. 준은 시선을 벽난로 반대쪽,현관문의 우측으로 옮겼다. 나무 결이 살아있는 조그만 가구가 준의 시야로 들어왔다.
가구가 아니라 컴퓨터였다.
준의 시선에서는 컴퓨터의 본체 뒷면이 보였는데,그 앞쪽은 교묘하게 서재라는 공간이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크그린의 융통성 있는 서재였는데, 서가의 장서들이 대부분 가구인지 아니면 별장 자체의 부속품인지 알수가 없다.
서재안의 조명은 주름이 잡힌 아트지 밑에서 날카롭게 빛을 토하는 할로겐 전등 하나 밖에 없는듯 했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컴퓨터를 구경할 수 있을까요? 마끼씨의 컴퓨터 라이프는 상당히 매력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오셨군요. 한국분들 준비성이 이렇게 대단한지는 미처 몰랐는데요."
준이 대답을 안하자 마끼는 다시 말을 계속 했다.
"구경하고 싶다면 구경하세요. 디렉토리 몇개는 암호가 걸려 있을 겁니다.
남자 친구들이 컴퓨터를 자주 만지길래 암호를 걸어 놓았죠."
"흥미 있군요."
마끼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김준이 당황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끼는 사유리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김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TSR(램상주)해킹 프로그램을 만져 보셨나요?"
"글쎄요. 그런 것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소문만 들은 게 아닌 거 같군요. 유능한 기자라면 TSR 해킹 프로그램 정도는 기본적으로 만질 줄 안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선생은 엘리트인거 같아요. 좋아요. 정식으로 제 컴퓨터를 만지는 걸 허락하겠어요. 그동안 전 이 아가씨와 함께 2층 의상실에 다녀오지요. 이 아가씨,아니 아르바이트 걸에게 옷 한벌 기증할 능력은 있으니까요. 이 아가씨는…직업관념이 없는 걸 보니 선생이 거리에서 줏어온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사유리는 마끼가 자신의 팔목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히풋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취해 있었기 때문에 사유리는 마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계단을 올라가는 두 여자는 분명 취해 있었다. 어느 쪽이라고 따질 필요가 없이.
준은 여자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급히 노트북 케이스안에서 소형 무선 랜LAN 발신장치를 꺼내 마끼의 컴퓨터 프린터포트에 연결했다.
말할 것도 없다. 먼저 마끼의 가구같이 생긴 컴퓨터를 부팅시킨 다음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부팅시켰다.
하나 둘. 하나…둘…
다시금 어워드 바이오스가 램용량을 읽어가다. 무선 랜 장치의 도움으로 마끼의 컴퓨터 내용은 준의 노특북 화면에서도 똑같이 떠오른다. 준은 재빠르게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를 찾아 나섰다.
문제의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에는 사설 BBS망처럼 S/Key라고 하는 휘발성 패스워드가 걸려있다.

S/key로 암호를 걸다니…이 여자 역시 엘리트인가.
아니면 패킷 스니핑Packet Sniffing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일까.

S/key는 메인 호스트가 하부 클라이언트 컴퓨터를 감시하는 체제의 일종으로,각각의 클라이언트 컴퓨터는 메인호스트와 랜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암호를 지니지 않는다.
하부의 각 클라이언트 컴퓨터에 암호가 없다고 해서 불안전한것은 아니다. 클라이언트 컴퓨터는 자신에게 접근을 시도하는 사용자에게 우선적으로 암호를 물어보는데,그런뒤 메인 호스트에 암호를 문의하는 작업을 거친 뒤 사용자의 접근유무를 결정하는 것이 S/key였다. 일종의 리모트콘트롤 체제라고 할수 있다.
즉 클라이언트 컴퓨터에 접근한 해커는 메인 호스트에 저장된 암호를 알아야만 예의 클라이언트 컴퓨터로 로그인이 가능했다. 이때 메인호스트,리모트 호스트는 수시로 암호를 바꾸어가면서 하부 클라이언트 컴퓨터로 해커들이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 나간다.
준은 다시 디렉토리에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S/key가 걸려 있다. 마끼의 가구같이 생긴 컴퓨터는 준이 암호를 입력할때마다 어딘가에 있을 리모트 호스트로 암호문의를 반복하고 있었다.
준은 서둘로 탁자형으로 생긴 컴퓨터 책상 밑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랜 케이블은 보이지 않는다. 리모트 호스트와 연결되어 있다면,랜케이블선이 분명이 보일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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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조는 불안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미 2시간 가량이 지났다. 동료가 다가와 마끼와 통화를 시도하라고 요구해왔지만 게이조는 무표정하게 별장을 올려 보았다. 인터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끼의 디스켓.
디스켓 때문에 김준은 이곳에 나타난게 분명했다. 정황으로 보면 확실했다.
다시 시티즌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15분. 게이조는 초조한 눈으로 산자락을 올려다보았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뿌연 물안개가 사납게 아스팔트 위에서 야릇한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고 있다. 비는 게이조의 머리위로도 퍼붓고 있다.
게이조의 팬티까지 젖게 하는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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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로 접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드디스크 안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성과는 없었다. 마끼의 모습이 디지타이즈로 처리된 그래픽 파일이 발견되었고,워크방안에서는 누가 사용하는지 몰라도 랭귀지 소프트웨어가 상당하게 많이 발견된다. 소프트아이스나 인터넷 암호크랙용 프로그램도 여러종류 발견되었다.
준은 다시한번 모뎀 테스트를 시도해 보았다. 모뎀을 통해 랜이 연결되어 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준은 녹초가 된 몸을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당신은 기자가 아니었군요."
별안간 마끼의 음성이 들려오자 준은 서둘러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느새 이브닝 드레스로 갈아입은 마끼가 서있다. 스커트는 복사뼈까지 내려와있고,아이보리색 브라우스를 껴입은 쉬크한 포멀(정장). 그녀의 오른쪽 손은 올드패션 글라스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올드패션드 칵테일. 버본 위스키에 붉은 마라스키노 체리의 황홀.
"정체가 뭐죠? 난 댁같은 사고뭉치를 많이 보았지만 댁은 매우 이질적이군요."
지오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마끼를 올려다보다가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계단 중간쯤에서 사유리는 내려오다 말고 일본 빅터사에서 시판한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곧바로 거실 우측 벽에 설치된 80인치 HD비젼 화면에서 로봇고양이 <도라에몬>이라는 만화영화가 떠 올랐다.
사유리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일까. 어디에다 스피커를 감추어 두었는지 거실 사방에서 꽝꽝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사유리 역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파티복이라기 보다는 외출 겸용의 간편한 드레스로 허리가 꽉 조여 있었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마끼에게 물었다. 마끼는 휘청 였다. 다시 지오의 은은한 향기가 준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몇 개의 대답이 준비되어 있기에 그렇게 묻는 거죠? 날 기쁘게 하는 대답은 기자라는 말 밖에 없다는 거 모르시나?"
"그럼 기자라고 믿어주십시오. 난 인정받는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까."
"농담이 지나치시군."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기사는 이미 方雌曼胄 되어 있소. 농담이 아니요."
"그러지 말고 원하는 게 뭐죠? 무얼 훔치러 온 건가 말해봐요."
식은 땀이 났다. 이젠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준은 의자에서 일어난 뒤 마끼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후루겔스 게이꼬 문제로 왔소. 당신이 작성한 유서 디스켓을 가지고 있던 여자 말이요."
"경찰인가? 시시하군. 왜 내 디스켓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후루겔스 게이꼬를 아십니까?"
"내가 그런 여자까지 알아야 하나?"
그렇게 말한뒤 별안간 마끼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렸다. 뇌쇄적인 미소. 김준의 심장은 갑자기 마라톤 주자처럼 뛰기 시작했다.
"당신이 건네 준 것이 아닙니까?"
마끼는 다시 말투를 바꾸었다. 변신에 능한 것일까.
"내가 아니겠죠. 난 게이꼬가 누군지도 몰라요. 내 디스켓이 어째서 그녀에게 넘어갔는지도 모르죠. 난 경시청에서 디스켓을 찾기를 바랬어요. 사실 그걸 원했어요. 싸구려 리포터보다는 하급 경찰이 영향력이 강하니까."
준은 지오향수 때문에 자신이 혼란되는 것을 느꼈다.
"컴퓨터는 누구에게 조종당하는 겁니까? 다지점공유회선 방식으로 다른 호스트에 접속된 거 같지는 않군요."
"눈치가 빠르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랜 케이블을 찾아내지 못했나요?"
"그렇소. 내가 보기엔 랜이 아니군요."
"랜 케이블이 아니에요. 전선이죠. 일반 전기를 송전해오는 전선을 통해 랜이 연결되어 있어요. 이런 거 처음 보았나요?"
준은 비쩍 미소를 흘렸다. KIST 연구진에 의해 전기콘센트를 통한 랜이 성공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실용화되지 않고 있었다. 기껏해야 무선 랜이 개발되고 실용화되는 단계였는데,이미 전기선을 통한 랜시스템이 사용 되고 있다.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방법으로 호스트가 클라이언트 컴퓨터를 찾아내죠? 컨버터인가요?"
"정확하군요. 호스트는 도쿄에 있어요. 채팅 프랜드입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전화번호나 랜케이블이 없어도 클라이언트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어요.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아답타라고 그러나요,저 전기콘센트를 한번 보시겠어요?"
준은 고개를 돌려 컴퓨터 파워 케이블이 꽂혀있는 전기콘센트를 응시했다.
검은색의 소형 블랙박스가 콘센트와 컴퓨터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다.
"재미있군요."
"그런 셈입니다. 위성 TV로 친다면 컨버터나 혹은 수신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도쿄의 친구는 저 컨버터 번호를 찾아 제 컴퓨터로 들어옵니다. 전화보다 간편하고,불성실한 무선 랜보다는 확실하게 두대의 컴퓨터를 연결해 주죠."
만화영화 도라에몬이 끝나고 있었다. 준은 HD비젼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은 NHK방송으로 막 바뀌고 있었고,사유리는 하품을 하며 HD비전을 바라보고 있다.
"도쿄의 친구는 누굽니까?"
"아직도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리모트 호스트의 운영자가 당신을 얼마나 도와주는지 궁금하군요."
"알고 싶어요?"
"그렇소."
"그럼 여긴 불편하네요. 내 방으로 올라가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말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끼는 다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 올드패션드를 입에 갖다 댔다. 술에 취해 있었다. 화가 나는 것을 억지로 참는 거 같기도 했다. 준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남자를 놓쳐본 적이 없는 여자 분 같군요. 당신."
"남자들이 나를 안 놓아주는 거겠지. 당신의 눈빛 역시 부정하지는 못하는데."
슬며시 마끼의 가느다란 손이 준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더니 벌래처럼 준의 얼굴 선을 타고 내려온다.
"왜 불쌍한 추적자 역에 만족하는 거지? 후루겔스 게이꼬가 당신 애인이었나?"
"아니요."
"실망이 크군요. 장대 같은 남자가 무슨 이유로 내 디스켓을 찾아 다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거짓말로 오욕이 된 내 디스켓을? 군중이 열광하는 디스켓? 난 즐겨요. 나의 자살극을 즐기고 있지요."
준은 마끼의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게이꼬는 살해되었소."
갑자기 마끼는 준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런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희뿌연 무언인가가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거 같다.
"말이 안 통하는 군요. 난 어느 누구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아요. 내가 궁금한 건 지금 내 기분을 당신이 어떡케 처리해주냐는 거야."
준은 의자에 털석 앉았다.
마끼…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가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컴퓨터를 리모트하면서 당신의 컴퓨터 라이프를 도와주는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 역시 살해될지 모릅니다."
꽝. 갑자기 올드패션드 글라스가 준의 의자를 향해 날아왔다.
"내가 말해 준다고 생각했나? 이 건방진 한국인아! 당장 여기서 꺼지지 못해?"
툭 소리를 내며 글라스는 거실 양탄자로 떨어졌다. 마끼는 이미 뒤로 돌아 거실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화가 난 건지 일부로 그러는 건지 종잡을 수 없다. 준은 힐끔 사유리를 바라보다가 마끼를 따라 걸어갔다.
사유리는 HD비전을 응시하다가 졸린 눈을 손으로 비볐다. 머리 속이 띵했다. 이렇게 계속 계단에 앉아있을 수는 없다.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입어보는 정장 차림이었다. 기분이 붕 뜨고,옷감도 이만 저만 촉감이 좋은 게 아니다. 사유리는 TV화면을 응시하며 내려오다가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었다. 비싼 술이기에 욕심을 내고 마음껏 마셨는데 흠씬 취해 버렸다. 울컥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다. 사유리는 계단을 다 내려온 뒤 서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과 마끼 준사히가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유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질투심이라는 거…
팡팡걸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사유리는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이젠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다.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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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나쓰에를 오후 2시부터 신문하고 있었다. 다섯 시간째. 도중에 커피 타임을 빼면 아마 4시간 이상 신문을 하고 있을 게다.
그 사이에 몇가지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다. 마끼의 디스켓 내용을 분석한 전산 팀의 보고서도 이상했고,마에다를 잡으러 가나기원으로 출동한 이상운과 황영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건은 무언가 장기전 양산을 띄고 있었다.
오후 5시에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역시 별다른 게 없었다. 정적. 상황은 물속으로 요동치듯 잠수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계속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당장은 이 여자와 김준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설명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게 많다. 게이오 대학에서 만났다는 것과 김준이 클리퍼 프로그래밍 천재라는 말. 이건 바보자식도 아는 내용이다. 그리고 진광섭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가지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다. 방금 전에 들어온 소식 중에 내각정보국이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 특히 시나노 곤베이의 등장.
시나노 곤베이라면 진광섭과는 원수 같은 사이였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광섭은 식은 땀을 흘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쓰에는 차가운 눈으로 광섭을 노려보고 있다.
7시 20분까지도 광섭은 나쓰에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막 7시 20분이 지났을까.
전산요원 한 명이 급히 프린팅 용지를 들고 광섭에게 뛰어왔다.
사뇨 사즈메…
사유리의 모토롤라 익스프레스 캡 삐삐 번호가 프린팅 용지에 적혀 있었다.
광섭은 히쭉 웃으며 나쓰에에게 용지를 내 보였다.
"여동생 삐삐 번호가 맞습니까?"
나쓰에는 흠질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섭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맙소. 내 1시간 내에 김준과 당신을 만나게 해주리다."
광섭은 몸을 돌려 전산팀이 있는 사무실로 걸어갔다.
"어딘가? 연락은 왔나?"
전산팀 팀장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후지산입니다. 구보 노스케라는 사내가 소유한 별장 전화로 연락이 왔다가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눈치를 챈 건가? 뭐하고 있나! 당장 구보 노스케를 확보해 봐!"
그렇게 묻자 뒤따라 들어온 춘해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구보 노스께라면 마끼의 아버지요. 구보 부동산 회장."
춘해의 말에 진광섭은 얼굴표정이 경직되었다. 그의 얇은 입술사이로 가느다랗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10분 뒤. 아크힐스는 급히 출동하는 진광섭 팀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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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팀이 아크힐스 빌딩을 떠나자,이 정보는 곧바로 곤베이에게 전달 되었다. 곤베이는 방위청 빌딩 로비에서 핸드폰 보고에 응답을 하고 있었다.
이미 동북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사브엔진을 장착한 제트기가 나리타 공항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급조된 스태프만도 70명에 달하고 있고,아래 지하센터안에도 40명이 넘는 전산요원들이 <동급해커>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선데이 리스크 Sunday Risk.
이날 새벽부터 시작된 놈의 난동에 대비하는 사상 최고의 비밀 작전이었다.
곤베이는 재차 산하 부하를 통해 오키나와에 긴급 투입된 공정단의 상황을 체크하며 지하 전산실로 방향을 바꾸었다. 7시 20분이었다. 곤베이는 계단을 내려서자 우측 복도로 향했다. 할로겐 빛이 복도 좌우 천정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해치형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위청 전산실의 살벌한 분위기가 한눈에 느껴졌다. 곧바로 히로세 전산실장이 곤베이를 알아보고 뛰어왔다.
"이겁니다. 정확합니다. 확실히."
곤베이는 로그인 데이터가 프린팅된 용지를 읽어보았다.

17차례나 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도 15군데의 방위청 컴퓨터에 침입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동급해커> 라는 아이디를 심어놓았다. 접속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집중되었다. 그 이후로는 활동한 흔적이 없다.
곤베이가 로그인 데이터를 다 읽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히로세가 입을 열었다.
"도오카이도선인거 같습니다. 작년말에 투입된 노조미望선을 타고 이동한 거 같습니다. 보십시오. 시즈오카 역에서 200여명이 신간선을 갈아탔는데,거기에 파 묻혀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침에는 아타미 해안에서 요코하마로 이동한 뒤 시티뱅크에 들렸습니다. 이건 아타미 경찰서의 보고입니다. 방금전 보고에 의하면 시티뱅크 폐쇄회로 카메라에 사유리의 얼굴이 잡혀 있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아멕스 카드를 새로 만들었다는 군요."
"알았어. 방위청 컴퓨터는 어떤가?"
"10분전에도 다시 들어왔습니다. 인바운드(유닉스를 통해 자국으로 침투하는 작업)로 들어와서 곧바로 오키나와 기지로 이동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암호크랙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이미 15차례나 시도했는데 번번히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이쪽에서 옵라인으로 전환해 버리니까 놈도 별수 없더군요. 어쨌든 피해가 막심합니다. 펜타곤에선 이 문제로 지금…"
"미사일 발사 시스템에 벌써 접촉한 게 아닐까? 그쪽에다가는 자신의 아이디를 남길 필요가 없겠지. 그러다간 추적을 당할 테니까 말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우리가 새벽부터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지 모릅니다만."
"다시 들어올 가능성은?"
"지금은 휴식이겠죠. 아마 또 다시…"
"역시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노리고 있는 거 같나?"
"정확합니다. 놈은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노리고 있습니다."
별안간 곤베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항공자위대에서 투입한 제트기가 날아오다 말고 선회를 했다는 보고였다.
통화를 하면서 곤베이는 기상상황을 모니터했다. 센다이 현 이북 지방 상층부에서 비구름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제트기 사용은 어쨌거나 접어두어야 할 상황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제트기가 없다면,별수 없이 육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두시간이 더 경과된다는 뜻이다.
곤베이는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른 시간을 보았다. 현재시각 7시 35분. 진광섭 팀은 밤 10경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곤베이는 핸드폰으로 헬기를 수배했다.
그런 뒤 다시 확인할 생각으로 전산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소니 모니터에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중앙컴퓨터가 떠 올라와 있었다. 시간을 보았다. 아직까지는 오키나와 기지의 미사일 발사시스템이 크랙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곤베이는 다시 히로세 실장의 보고를 들으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가 소유한 미사일 체계를 주의 깊게 검색했다. 어느거 하나 크랙에 성공하지 않은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도대체 놈이 노리는 미사일이 무언지 궁금했다. 하기야 이제
놈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곤베이는 전산팀 스테프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전산실을 성큼성큼 빠져 나왔다. 1층 로비로 나왔을때는 사나운 폭우가 도쿄 시가지를 때리고 있었다.
곧바로 방위청 간부용 차량이 곤베이가 서있는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헬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국립자연교육원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알았어. 당장 가지."
곤베이는 자동차에 올라타면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후지산 별장에 있는 게이조가 호출되어 나왔다.
"상황은 어떤가?"
"예. 7명의 지원군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총 10명입니다. 부족하지만 별장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습니다. 고공침투조는 언제 오는 겁니까? 여긴 정말 폭우가 지독합니다!"
"알았어. 진광섭팀이 올지도 모르니까 나타나면 즉시 연락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이 놈의 별장 철통같기는 하지만, 경비견 정도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냐. 별장 크기가 7만평이라고 하지 않았나. 10명가지고 놈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두들기지 마. 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놓치지만 말아. 그런데 도청 상황은 어떤가?"
"도청은 폭우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장비를 가져오긴 했는데 이거 말고 고급 장비가 필요합니다. 전화선은 이미 잡았습니다."
"통화량을 계속 파악해.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생각되면 잽싸게 짤라버리고. 핸드폰은 방해전파를 쏘아대면서 막을 수 있는대까지 막아 봐. 알겠나?"
곤베이는 식은 땀을 흘렸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지금까지 17차례나 오키나와 기지 컴퓨터가 뚫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정 안에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혹은 잠시 후에,바로 머리 위에서 어떤 음모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곤베이는 핸드폰을 놓고,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PDA를 꺼내 들었다. 소니가 개발한 매직 링크에 파나소닉의 플루언스를 교묘하게 연결해서 조립한 휴대용 통신단말기였다. 4MG 롬에는 방금전 전산센터에서 히로세가 잡아 준 메시지 2개가 떠 있다. 동급해커가 오키나와 사령부 컴퓨터에 남긴 메시지 17개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

>> 오키나와 사령부의 미사일 시스템이 인상적입니다.
東急HACK
>> DSCS-2 위성의 8기가 헤르츠 SHF를 잡았습니다.
FLTSATCOM이나 AFSATCOM 채널을 이용해 오늘 밤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東急HACK

DSCS는 미美 펜타곤 전용의 위성통신체계를 말한다. 미 국방부는 전세계와 유동적인 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해 공군 산하 우주국으로 하여금 1단계로 모두 26기에 달하는 통신위성을 발사했다. 2단계에서는 6기의 통신위성을 발사했고,1982년부터 시작한 3단계 기간 중에는 총 12기의 통신위성을 발사했다. 이중 지금도 사용되는 것은 DSCS-2에서 4기,DSCS-3에서 4기 등 총 8기의 통신위성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중 일부는 미 해군의 함대통신용(FLTSATCOM)으로 운용되고 있지만,다른 일부는 공군용 회선(AFSATCOM)으로 사용된다. 이 위성만 잡을 수 있다면 구차하게 전화선을 이용해 미군 기지로 침투할 필요가 없다. 곧장 전세계 미군기지 안으로 마음껏 치고 들어갈 수 있는 테니까 말이다.
녀석이 과연 위성통신망을 잡았을까…
곤베이는 자동차 창밖을 내 보았다. 도쿄의 밤하늘도 다른 여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산더미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곤베이의 자동차가 경찰 사이렌을 울리며 국립자연교육원으로 진입했을 때는 주차장안에서 3대의 가와사끼川綺 MBB 118 헬기가 이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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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라 불리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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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는 어떡케 된 건가. 앙?"
진광섭은 달리는 자동차안에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상운과 통화 중이었다. 밤 7시 55분. 아직도 마에다가 가나기원에 귀가를 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진광섭은 울화통을 터졌다.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임소봉을 호출했다.
임소봉 일행은 후지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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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는 준의 손을 뿌리쳤다. 간신히 긴 키스를 끝낸 것이다. 마끼는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 상황은 자기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마끼는 입술에 조금 미소를 띠고 준을 향해 돌아다보았다. 개가 짓고 있었다.
"아.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요."
준은 방향을 바꾸어 사유리에게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음성이 들렸다.
"울프인가요?"
마끼는 억울한 듯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울프 맞겠죠? 울프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적이 있겠지?"
준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내가 사용하는 아이디는 12개나 있소. 어쩌면 울프라는 아이디가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울프라는 아이디를 들은 적이 있어요. 우익 정보를 입수하려다가 실패한 산업스파이라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이쪽 우익단체 사이에서 비상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게요?"
"당신이 울프인가 아닌가 그걸 물었을 뿐이에요."
"난 울프가 아니오."
"그러신가? 그럼 도와주려고 했던 걸 철회할 수밖에 없군요."
"도와주겠다니?"
"울프는 한가지 실수를 했어요. 아니 실수를 한게 아니죠. 너무 많이 파고 들어왔던 거죠. 그는 겁도 없이 정보를 수집했어요. 수집한 게 아니죠. 파괴 했어요. 45종 92건의 정보를 파괴했어요. 그게 울프였어요."
"언제 그랬소?"
"95년 여름이었을 거에요. 울프 때문에 문제가 많았죠. 이 때문에 우파 단체에선 디펜스 막을 설치했어요. 하지만 울프를 잡지 못했어요. 그는 정확하게 세달 동안 활동한 뒤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금년 초에 내 보이프랜드가 그러더군요. 울프를 찾았다고. 그가 사용하는 모든 전화선을 찾았고,로그인 방식을 분석했고,그가 하던 작업을 샅샅히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이유가 뭐지?"
"울프는 우익단체의 신경조직을 건들었어요. 명백히 반칙을 구사하였고, 일본의 자존심을 건들었어요."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체온이 급속히 냉각되어갔다.
"그가 하던 작업은 중단되었소. 울프가 우익단체의 자존심을 건들었다고 생각 하오? 울프는 단지 방어를 했을 뿐이오."
"그렇군요. 울프. 당신이 사용하는 12개의 아이디중에는 울프가 있는 것이 분명하군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하지 않는게 아니겠지. 할 수 없었겠지요. 겁이 났을 테니까."
"겁이 난 건 사실이오. 난 많은 정보를 입수했소. 하지만 효과적으로 이용한 건 몇종류의 산업정보 밖에 없었소. 그것도 작업 중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소. 대개는 급속히 철수를 하는 일이 허다했으니까."
"그러시나? 그럼 일본강관(NKK)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죠? 2백20억 엔에 상당하는 제철플랜트 공사를 울프 당신은 가느다란 열 손가락으로 막았어요. 데이터를 하루 전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뒤에 거미줄처럼 짜놓은 팩스 망까지 당신이 직접 컨트롤했어요. 그 결과가 어땠죠?"
"제일중공업이 말레이지아 국유 제철플랜트의 수주권을 따냈소."
"기억하는 군요. 그 때문에 당신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울프. 당신은 최고였어요. 해킹에 관해서는. 하지만 모든 게 제일그룹의 농간이라는 건 곧바로 들통이 났어요. 이익을 보는 자가 항상 의심을 받게 되니까."
"오버 센스군."
"그 때문에 당신은 실패한 거에요. 3달 동안 당신이 한 작업은 모두 제일 그룹에 도움을 주었어요. 이 때문에 우익계 기업들이 제일그룹을 견제하기 시작했지. 당신을 잡아내지를 못했지만 배후에 제일 저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건 당신을 추적하는 것보다 쉬웠을 겁니다만."
"당신은 어느 단체의 팬이지? 대비회(大悲會;일본우파테러단체)인가 아니면 국민위원회 소속인가?"
"재미있군요. 난 나를 믿어요. 내가 시시하게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도취되어 흥얼거리는 여자로 보이나?"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뒤로 돌아 걸어갔다. 복사뼈가 보였고,맨발이었다.
페르시아 양탄자가 조용히 소리를 냈다.
"아니요. 마끼 당신은 여러가지로 잘못 알고 있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기억도 없소. 두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할 생각도 없소."
"어쩔 수 없군요."
"궁금하군. 대비회가 아니라면 어떤 경로로 내 이야기를 전해들었소?"
"보이프랜드가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에 근무합니다."
방위청 기술연구본부라면 일본 방위청 산하 정보분석팀이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쉰 목소리였다.
"그쪽에서 나온 정보인가? 당신 보이프랜드 이름을 알고 싶은데?"
"하사 마에다. 아까 말한 채팅 프랜드죠."
김준은 마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끼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사유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준은 마끼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노트북컴퓨터를 챙기기 위해 서재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하사 마에다.
하숙집 가나기원에서 바로 옆 방에 살고 있던 일본인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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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햄버거를 씹어먹으며 후꾸오 하야시는 이번주중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살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똑같은 작업을 또 다시 시도할 수 있을까 라는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변전소라면 가능할지 몰랐다. 지하철이 스타트할 때 변전소의 전원을 끊어버리는 작업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건 마지막 작업이었다. 미나를 위해서라면 이 작업을 끝으로 영원히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그쯤까지 생각이 가자 하야시는 욕심이 생겼다. 열차를 통째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작업치고는 화려하게 끝나게 될 것이다.
추적을 해와도 의심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동급해커가 의심을 받을 것이다. 사건은 확대되가겟지만,자신은 그저 캐나다로 튀어 버리면 된다.
골치 아픈 것은 이번에 살해해야 할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사 마에다. 방위청 도메인을 관리하는 자. 어지간해서는 방바닥을 떠나지 않는 자인데 이 자를 과연 지하철을 이용해 살해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거금이 걸려 있었다.
어느때에 마에다가 폐쇄회로 카메라에 걸려들지는 하야시 자신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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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노트북을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손끝이 떨렸다. 아직도 준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하사 마에다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노트북 케이스를 닫은 뒤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마끼가 술에 취해 쿨럭이고 있는 사유리에게 걸어가더니,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 대단한 애정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일까. 준은 두 여자를 관찰하다가 고개를 돌려 마끼의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불현듯 또다시 의문이 시작되었다.

하사 마에다가 후루겔스 게이꼬를 살해했을까.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 게이꼬를 통해 협박을 해 온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게이꼬를 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한참 만에야 준은 하사 마에다가 3개월전에 갑자기 가나기원으로 이사를 해온 것을 깨달았다. 다시 처음부터 날짜를 조심스럽게 따져 보았다. 분명했다.
하사 마에다는 준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는지 모른다.
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1년전 고종수의 기분이 어땠는지 헤아려 보았다.
처음에 고종수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뒤집어 놓을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라고 독촉을 했다. 그날부터 김준은 울프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3개월 동안 준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을 알았던 것일까.

1년전 봄에 김준은 가와사끼 제철의 컴퓨터 망을 조사하고 있었다. 일본안에서 시작한 처음 세 번째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해킹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 걸려든 것이 방위청 컴퓨터였다.
준은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이유로 해서 방위청 안으로 치고 들어가려고 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준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일본 방위청의 <자국 방위비밀>은 9,722건 165,000점에 달했다. 이는 일본 방위를 위한 중대한 비밀로 이중 <극비>는 762건 3,290점이었다.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다. 준은 대개의 낮과 밤을 일본 방위청 컴퓨터와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과도했는지 모른다.
어느날 준은 불현듯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곧바로 고종수에게 보고를 했다.
고종수는 당황했다. 김준이 의외로 재미없는 정보를 수집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종수 역시 겁을 집어먹었다. 방위비밀이라는 것이 알면 안되는 정보였고,그것을 알자 이제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누어 가지기에는 너무 크나큰 비밀이었다.
고종수는 준에게 이 사실을 둘 사이의 비밀로 하자고 다짐을 했다. 그 뒤 울프라는 아이디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준은 다시금 본래의 작업을 진행했다.
일반적인 산업기밀 입수에 치중했고,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거나, 밤에는 무작정 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하지만 3개월동안 파악했던 정보는 이미 잊기 어려운 정보들이었다.
처음부터 기묘한 호기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정보였는지 모른다. 한 꺼풀 벗겨진 비밀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이쇼핑은 서서히 실제상황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것들이 김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인지 아니면 두 민족간 혼란에서 비롯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두들기다 보니 문이 열린다,라는 심정이었다. 준은 다시금 밤마다 금지된 영역을 침입해 들어갔다.
운이 나쁘게 주일미군 사령부까지 김준의 해킹 대상으로 떠 올랐다.
바로 한달 전만 해도 김준은 함대통신망 통신위성을 통해 서태평양 함대항공부대 휘하의 오키나와 가테나 해군기지 컴퓨터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김준의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일안전보장 조약과 관계된 방위청 극비 사항중에는 이에 대한 좋지 않은 내용이 다분히 있었다. 준은 혼란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거래가 양국간에 진행중이었다.
어쩌면 우익단체의 교묘한 공작이었는지 모른다.
첫 3개월동안 입수했던 초기 서류들은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든 서류들은 한가지 사실에서부터 여러가지 추측을 유발하게끔 교묘하게 작성되어져 있었다. 그런 뒤 극비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 준에게 필요했다. 아니 사실을 알아낼때까지 준은 전세계 미군기지를 모두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날도 준이 사용한 아이디는 울프였다. 9개월전 사용을 중단했던 아이디로 준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작업은 이미 그만 두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제 누군가가 김준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고,지금 하사 마에다를 통해 김준을 추적해오는 것이다.
준은 식을 땀을 흘리며 마끼의 컴퓨터를 응시하다가 뒤로 몸을 돌렸다.
마끼가 걸어오고 있다.
"일본에서 떠나요. 지금 당장. 아니 내일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가시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에요."
"떠나지 않겠다면?"
"이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이 할 일이 없어요. 더구나 당신은 이미 정체가 발각되었어요. 야쿠자를 동원해 당신을 살해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요.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는 즐기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최소한 내 친구는 그런다고 하더군요."
"몇명이 붙어 있소?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최소한 2명…아니 그보다 많겠군요.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사유리가 별안간 끼어 들었다.
"김짱. 작년 봄에 일본에 왔다고 했나요?"
"그건 왜?"
"그럼 고베 지진 때 오셨군요…?"
"그래."
"뭘 했어요?"
준은 마끼를 응시하다가 사유리의 손목을 잡았다.
"가야겠소."
사유리가 앙탈을 부렸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거죠? 기자가 아니라구요? 정말 산업스파이에요?"

사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작년에 한 건 지진으로 박살 난 8비트 CPU를 연구한 거 밖에 없어. 내가 산업스파이로 보이나? 사유리 눈에는?"
사유리가 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8비트 CPU가 뭐에요?"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중전화 롬(ROM)이야."
마끼가 싸늘한 음성으로 끼어 들었다.
"당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게 어때? 이 별장을 어떤 방법으로 빠져 나갈 건지 생각해보세요."
"무슨 뜻입니까?"
마끼는 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창밖을 응시했다.
"창 밖을 봐요. 저들은 내각정보조사실 사람들이죠. 한시간 후에 만나기로 했는데…3시간이 지나도록 저곳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나요?"
"저들이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이요?"
"당신과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게이꼬에게 디스켓이 전해진 과정을 궁금해 하더군요."
준은 벽난로로 걸어갔다. 대형 유리창 너머로 별장 아래가 내려다 보였다.
무엇을 뜻하는 가. 폭우가 쏟아지고 있지만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뜻일까. 어떡케 상황이 바뀌었을까.
준은 씁쓸하게 말했다.
"저 친구들도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사유리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짱. 또 도망가야해요?"
준은 벌래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한평생 뻐꾸기 시계나 만들면서 살고 싶었는데 말야. 이렇게 도망다니는 게 내 인생인가봐."
사유리는 몸을 떨었다. 아니 사실상 겁이 났다. 사유리는 처음으로 진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지쳤어요. 김짱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다니? 무슨 뜻이야. 사유리?"
"끝까지 저를 책임지라는 소리죠. 흐."

발목 잡혔군…
벌써부터 기어오르는 구나.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마끼가 저쪽에서 걸어왔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망갈 수 있을 거 같나요?"
"나를 도와줄 생각이오?"
"원한다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면 좋을까요?"
"저들을 유인해 주시오."
"보답은?"
"일본을 떠나겠소."
"이제야 겁을 먹었군요."
"물론이요. 하지만 내 일은 내가 해결한 뒤에 떠나겠소."
"자신만만하군요."
준은 비쩍 웃으며 마끼를 응시했다. 마끼의 검은 드레스가 바스락 거리면서 움직였다.
"핵이군요. 사회당이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당신도 어쩔 수가 없나 보군요."
"난 아는 게 없소."
미끼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잡아 땔 필요 없어요. 핵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 밀었다. 팔찌에 걸려있는 무엇인가가 빙그르 돌아 마끼의 손끝으로 올라왔다.
"이게 필요할 거에요. 살아서 이곳을 탈출한다면 나에게 두배로 보상을 하세요."
마끼의 손끝에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 스포츠카의 시동키가 대롱 대롱 매달려 있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것이오?"
준이 자동차키를 받지않고 되묻자 마끼는 히쭉 웃었다.
"부자들의 여유입니다. 난 당신이 살아나가는데 50%를 걸겠어요. 당신은 얼마?"
"난 100%요."
준은 짧게 대답한 뒤 마끼의 손끝에 걸려있는 자동차 키를 날카롭게 낚아챘다.
어느사이에 마끼의 몸이 빙그르 당겨왔다. 그런 뒤 키스.
마끼는 어이가 없었는지 멍히 두 눈을 뜬 상태로 준을 응시했다.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호의에 대한 답례요. 이 정도면 되나?"
마끼는 싸늘하게 표정이 굳었다.
"형편없군요. 겨우 이 정도인가?"
"그만하시고 떠나요 김짱. 소녀 사유리는 더 이상 참을수 없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사유리가 별안간 준의 다리에 테클하듯 뛰어들었다. 반쯤 씩씩거리는 것이 이제부턴 도저히 못봐주겠다는 심정이다. 준은 붉어진 얼굴로 사유리에게 이끌려 거실 옆문으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마끼는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집사가 뛰어오자 마끼는 불쑥 말을 내 뱉었다.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쩌지?"
"우선은 연락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락할 필요 없어. 우선은 저 친구들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지 구경하고 싶어…"
"도와줄 생각입니까?"
"어느 쪽도 나와는 관계가 없어. 그런데 지금 산책을 나갈 시간인가?"
"그렇죠. 우비를 준비하겠습니다. 자동차는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이즈 숲에 자동차가 있다고 있지?"
"예."
"그 자동차를 타고 싶군."

———– – ———— – ———– – ———–

게이조는 적외선 쌍안경으로 별장을 관찰하고 있다. 두개의 그림자가 별장 우측 문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45분. 게이조의 몸은 온통 젖어 있었다.
게이조의 등 뒤에는 두대의 노란색 밴이 서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각정보 조사실 4부 <통신정보팀>에서 긴급특파한 요원 두명이 타고 있다. 그들은 계속 핸드폰 통화에 대응하는 방해전파를 쏘아 올리고 있다가 게이조의 지시가 내려지가 급히 방해전파 발사를 중단했다. 놈이 움직이는 동안은 핸드폰 사용을 자제할게 분명했다.
별장 동쪽 담벼락 너머의 밤나무 줄기 사이에는 방위청 <별실>에서 특파된 요원 한명이 올라가 있다. 저격요원이다. 그 역시 게이조와 마찬가지로 적외선 망원경으로 별장 안을 관측하고 있다. 어두었다. 그의 좌측 허벅지에는 저격용 라이플이 놓여 있는데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게이조는 밤나무의 사내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적외선 쌍안경을 눈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별안간 별장 현관문에서 두명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게이조는 급히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뭐야. 현관문 감시조! 방금 나온 두 사람이 누군가 당장 알아봐!"
좌측에서 타닥 뛰어가는 소리가 폭우에 파 묻혀 들려왔다. 게이조는 식은 땀을 흘렸다. 무언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시나노 곤베이가 도착하려면 아직 30분 가량이 남아있다. 시나노 곤베이. 방위청 육상막료감부의 조사부 출신으로 내각정보조사실 6부의 중추적 인물로 부각된 괴물. 곧이어 차장급 으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행동대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가 여기까지 날아온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이 탔다. 밤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저격수가 커다랗게 외쳤다.
"별장 카고입니다. 자동차가 한대 빠져 나오고 있습니다!"
게이조는 정문으로 뛰어 갔다. 1천미터 전방 어둠 속에서 자동차 한대가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뭐야! 누가 탄 건가?"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 우측에 서있는 요원이 줌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박고 있었다.
"로드스타입니다. 이상한데요. 여기 자료에는 없는 자동차입니다."
불쑥 현기증이 일어났다. 게이조의 뇌리에 아까 마끼가 타고 왔던 스포츠카가 떠올랐다.
"마끼 준사히양인가?"
"모르겠습니다. 현관에서 나온 두 사람이 별장 왼쪽 이즈 숲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숲 앞에는 또 다른 자동차가 보입니다. 미치겠는데요. 한쪽은 우릴 유인하려는 생각인거 같습니다."
염병할…
게이조는 얼굴이 빨개졌다. 부하의 말대로 한쪽이 유인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이조는 힘차게 별장의 철제 대문에 몸을 부딪쳐 보았다. 철문은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 나타났는데,갑자기 경비견 두마리가 껑껑 거리며 빗속을 달려 나왔다.
"빠가야로. 저 똥개 당장 처리해! 그리고 너! 당장 밴으로 바리케이트를 쳐!"
풋슈—- 소리와 함께 게이조의 옆에서 소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시에 두 마리의 개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풀쩍 쓰러졌다.
곧바로 뒷쪽에서 밴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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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입이 벌어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장 정문 밖에서 두대의 밴이 바리게이트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김짱. 무슨 일이에요? 저들이 내각정보실 그 사람들인가요?"
"몰라. 이상하군. 다 들 난리인데 왜 그런 거지?"
사유리의 입에서 알코올냄새가 풍겨 왔다.
"흐응…제 소견이지만 영화 촬영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이 시트 너무 부드러워요 흐…"
그렇게 말하며 사유리는 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준은 얼굴을 붉히며 사유리의 몸을 떼어놓았다. 사유리는 싫은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거실에서야 마끼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입이 딱 벌어지는 80인치 HD비전이 있는 거실은 말 그대로 마끼의 홈그라운드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김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반발심리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무조건 앙탈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유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은 차갑게 말을 내 뱉었다.
"마끼가 준 리모콘은 어디에 있지?"
"이거요?"
사유리는 토라진 얼굴로 왼손에 쥐고 있는 리모콘을 준의 코앞에 불쑥 내밀었다. 그런 뒤 천천히 앞쪽으로 리모콘의 방향을 바꾸었다. 동시에 리모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가녀린 소리를 내며 별장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50미터 전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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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김영진과 임소봉,고영삼은 두대의 렌트카로 후지산 동쪽 능선 도로를 넘어오고 있었다. 폭우가 심했다. 오는 도중에 다리 하나가 끊어져 내렸다. 이 때문에 30분여 시간을 우회 도로를 타는데 소비했다. 이제 막 후지산 초입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미 임소봉은 두차례나 진광섭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진광섭의 말대로 라면 아무래도 심각했다. 소봉은 진광섭의 말을 되세기며 수첩을 꺼내 펼쳐 읽었다.
시나노 곤베이.
곤베이는 방위청이 내각정보조사실에다 박아 둔 일급 베테랑 수사요원이었다. 이해할수 없지만 내각정보조사실은 공식 직원 수가 111명에 불과한 소규모 단체였다. 그렇지만 경시청,자위대,외무성에서 인원이 파견되어 풍부한 자금력으로 외곽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중 시나노 곤베이는 걸작이었다.
임소봉과 곤베이는 몇번 안면이 있기도 했다. 진광섭을 따라 다니며 진광섭과 곤베이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 보았던 것이다. 용호상박. 진광섭과 곤베이는 불과 물같은 사이였다.
곤베이는 분명 조심해야할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 자가 지금 이곳으로 날아온다는 게 임소봉은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김준 놈이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진광섭의 설명에 의하면 내각정보조사실 직할단체인 <세계정경조사회>의 제2부 5반에서 특공조가 투입되었다는 정보가 있다. 세계정경조사회 2부 5반은 외따로 떨어져 남북한의 공개자료를 조사 분석하는 팀이었다. 여기다가 법무성 외청의 하나인 <공안조사청> 외사팀까지 김준을 쫓고 있다고 한다.
이쯤되면 일본의 모든 정보단체가 김준 하나를 잡기 위해 얽히고 설켜 있다는 뜻이 된다. 김준이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임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딸가닥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거요. 김형. 빨리 좀 갑시다."
"저도 서두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셋으로 되겠습니까?"
"낸들 아나."
임소봉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패니즈 시크리트 서비스(일본정보단체를 말함)끼리 싸우라고 그래.
우리야 뒤쪽에서 구경하다가 빼 오면 되는 거지만 그 친구들 왜 이리 뒤집어진거지?"
"글쎄요. 녀석이 본국 국방부 말고 일본 방위청에도 침투를 했다면 문제가 정말 심각해 지겠지요."
"혹시 이러다 북한까지 꼬여드는게 아닌지 모르겠어."
"주한미군에…주일미군 기지까지 가지고 논 것은 확실한가 보군요.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요. 김준이란 놈 한번 연구해보아야 할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영진이나 임소봉은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식은 땀이 났다. 상황이 교묘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도대체 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임소봉은 다시 자신의 저격총을 만지작거렸다. 일본 정보팀 앞에서 이런걸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대사관으로 항의문이 날아들 것이다.
임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왈셔권총. 다람쥐같이 작은 총이다.
"살 맛 안 나는군…"
임소봉은 창밖으로 침을 탁 뱉으며 뇌까렸다. 빗방울이 잠시 자동차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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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카가 후진하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서 저격요원이 버럭 외쳤다. 게이조는 다급히 열려진 정문으로 뛰어 갔다. 확실했다. 150미터 전방에서 내려오던 스포츠카가 이번에는 뒤쪽으로 후진을 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서둘러 무전기를 빼들었다.
"이즈 숲 속의 차는 어디에 있나? 찾을 수 있나?"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안 보입니다. 후문 방향입니다."
제기랄.
게이조는 화가 났다. 어느쪽 자동차에 김준이 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서둘러 뒤를 돌아다 보며 손짓을 했다. 바리게이트 형으로 정차해 있는 밴 두대가 곧바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쫓아가. 쫓아가서 잡으란 말야!"
시동소리와 함께 빗속을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 빛이 날카롭게 별장 건물 아래로 펼쳐진 융단같은 잔디밭을 더듬어 올라갔다.
겨우 10명이었다. 이들중 4명은 후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다. 역부족이었다.
이놈의 별장은 고래처럼 크다. 고래의 배를 가르면 1겔론의 피가 나온다고 하지. 게이조는 레인저 시절에 읽었던 소설 <모비 딕>의 내용을 더듬다가 다시 적외선 쌍안경에 갖다 댔다. 빗방울이 안구까지 치고 들어왔지만 게이조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 서 있다.
"후문 감시조! 지금 듣고 있나?"
"예! 어떻게 할까요?"
"문 부셔! 치고 들어가서 앞 쪽서 달려드는 자동차를 잡아! 되도록 빨리 확인한 뒤 연락 바란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동시에 이즈 숲 너머 후문 부근에서 날카롭게 섬광이 번쩍였다. 컴포지션이었다.
생각같아선 육상자위대 탱크라도 동원하고 싶었다. 18홀 골프장 크기의 별장이라 할지라도 육상자위대의 MLRS(다연장 로켓 시스템) 한대면 충분히 커버할수 있다.
게이조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옆에 멈추어 서는 밴에 서둘러 올라탔다.
그런 뒤 다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저격요원. 놈이 정문으로 접근하면 무조건 잡아! 곤베이가 올 때까지 놈을 잡아둔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게이조는 응답을 들은 뒤 곧바로 무전기를 양복 상의 안에 집어넣었다.
밴 자동차는 털털거리며 발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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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거 보세요. 앞에서 두대나…"
"알아. 보고 있어."
준은 그렇게 대답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을 천천히 놓았다. 로드스타 내부는 사유리가 켜놓은 카스테레오때문에 시끄럽게 음악이 흐르고 있다.
"안전벨트는 맺니?"
"넵."
사유리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붕붕 뜨는 거 같았다.
무조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더구나 꽉 조여지는 마끼의 옷이 사유리를 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사유리는 자신의 각석미를 의식하다가 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은 콧등에 황색 고글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뒤 어디다 감추어두었는지 박하 냄새가 나는 네모난 민트 껌을 하나 꺼내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얼굴빛은 창백했다.
사유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석같이 굳어있는 얼굴표정의 남자. 갑자기 한 남자의 본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준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김짱?"
"그 문제는 사유리가 걱정할게 아냐."
"왜요?"
"난 잡혀본 경험이 없어. 자수한 적은 있지만 말야."
"잉?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음. 별거 아니야. 해커의 생활신조지."
"잉잉잉… 말해줘요. 뭐에요? 아저씨 산업스파이 맞죠?"
윽…들켰구나…
"히잉…그래도 상관없어요. 날 사랑해주면 되자나."
윽…
"안전벨트 맺나 다시 확인해 봐."
"자요. 아저씨가 직접 확인하세요. 응?"
준은 전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사유리를 보았다.
"훌륭하구나. 사유리."
"흥."
준은 스포츠카를 세운 상태에서 기어를 바꾸었다. 아래쪽에서 두대의 밴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다시 사유리를 보았다. 사유리는 밴에서 토해져 나오는 헤드라이트 빛에 눈이 부신 지 고개를 돌리다가 김준과 두 눈이 마주쳤다. 사유리는 이글루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사유리의 볼에 얼굴에 갖다 댔다. 가벼운 키스가 끝났다. 그런 뒤 브레이크를 풀어 헤쳤다.
동시에 준의 손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꺽었고,오른발은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부르릉…..
람보르기니 로드스타는 뜨겁게 엔진을 가열하더니 오른쪽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최고 출력이었다.
사유리는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별안간 김준을 향해 외쳤다.
"아저씨? 무얼 알고 있는 거죠?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들에게 쫓기는 거죠?"
"쫓기다니? 난 아무것도 몰라."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도망다니는 거지. 몰랐나?"
사유리는 준의 대답을 음미하다가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수 있을거 같았다. 아니 사유리는 자신이 지금 한 남자에게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좋았다.
스포츠카가 무섭게 잔디밭 위로 날아오르자,둔탁하게 사유리의 몸도 좌석에서 떠올랐다. 그러자 잽싸게 준의 손이 사유리의 몸을 잡아 주었다. 이 남자는 친절한 것이다. 사유리는 행복했다.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그래. 19살의 나이. 드디어 고대하던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한국인이면 어떻고 필리핀 남자인들 어쩌랴.
사랑하는데.
사뇨 사유리는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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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봉은 차에서 내려 쌍안경으로 마끼의 별장을 관찰했다. 어두웠다. 별장안 왼쪽 언덕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도망을 가고 있었고,그 뒷쪽으로 두대의 밴이 따라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임소봉은 싸늘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별장이야,골프장이야? 후지산 산록을 전세 낸 모양인데?"
영진은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도 누군가가 있군요."
소봉은 김영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커다란 나무였다. 나무 중간쯤에서 적외선 레이저 빛이 잠시 반짝였다. 저격라이플이다. 총구는 40도 각도로 땅바닥을 향하다가 다시 별장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피라미임에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기다릴까요?"
"글쎄…곧 있으면 과장님이 올텐데 말이야. 이대로 곤베이에게 넘겨 줄 수는 없지 않나. 안 그런가?"
소봉은 어젯밤 실수를 의식했다. 오늘은 김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왔군요."
김영진은 서둘러 자신의 야광시계를 보았다. 밤 9시 정각. 북쪽하늘에서 헬기 3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나노 곤베이 일행이었다.
동시에 양쪽에서 펑 소리가 들려왔다.
영진과 소봉은 급히 별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우 속이었다. 조명탄 한발이 별장 상공에서 태양처럼 뜨겁게 불길을 토하며 작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스포츠카가 미친 사자처럼 별장 정문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이미 곤베이 팀의 체포작전은 시작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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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스피드 웨이 富士 Speed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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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유리의 몸이 붕 떴다. 와락 겁이 났다. 사유리는 준의 품에 안겨 붙었다. 심장박동이 들려왔다.
준은 백미러를 보았다. 잔디밭을 내려오다가 밴 한대가 기우뚱하는 거 같았다. 밴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조명탄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김짱. 정문을 닫고 있어요. 방향 바꾸세요!"
사유리는 화들짝 놀래 비명을 질렀다. 준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공처럼 차체가 튀어 오르며 왼쪽으로 방향이 꺾였다. 오른쪽 창으로 급속하게 조명탄 빛이 파고 들어왔다. 빗방울이 튀었다.
"어떡할거죠? 자신 있어요?"
"뭐가?"
"탈출하는 거요."
"그럼 스터디인줄 알았나? 정신 차려!"
"나 참,누가 정신을 차려야 할지 모르겠네. 어머!"
사유리는 입을 벌렸다. 김준이 이번에 또 다시 후진 기어를 넣고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수동 5단 기어를 가지고 있었다. 보디는 굉음을 토하며 뒤로 달려갔다. 잔디가 타이어에 먹혀 빨려 올라왔다. 오르막길이었다.
"피해!"
게이조는 잽싸게 외쳤다. 동시에 두대의 밴은 언덕 위에서 좌우로 갈라져 내리며 스키 고글에서 굴러 떨어지듯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사유리의 몸도 마찬가지로 곤두박질 쳤다.
"흐…이거 ABS나 에어 백은 있는지 몰라. 정말 캡 무섭네!"
"겁먹을 건 없어! 측면 에어 백까지 장착되어 있는 걸 모르나?"
"정말요??"
사유리는 우측으로 갈라지는 밴을 돌아다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난 작가의 파이프이에요.
아비시니아 또는 카프라리아 여자와 같은
새카만 내 얼굴 들여다보면
우리 주인이 골초인줄 당장 알지오…
주인 양반 고민이 막심하면은,
나는 뻐끔뻐끔 연기를 품지요.
일하고 돌아오는 농부를 위해
저녁밥 준비하는 초가집처럼요…

흙더미가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그것은 람보르기니의 차체를 타고 앞으로 날아 오르다가 폭우에 의해 파편처럼 세력이 약화되었다. 계속 람보르기니는 괴물같은 힘을 발휘하며 후진으로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불타는 내 입에서 솟아오르는…
흐믈거리는 푸른 빛 그물은
그분의 넋을 껴안고 재워주지요…

별안간 람보르기니의 앞 차체가 둔탁하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또 다시 시작된 요동이었다. 우측으로 보디가 기우뚱했다. 사유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창백하게 백미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 얼굴 너머로 무지개 포물선을 그으며 진흙과 잔디가 뿌리째 밤하늘로 복잡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털끝 하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표정이었다.
사유리는 가까스레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는 잠시 콜록이다가 외우던 시의 나머지 부분을 조심스럽게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세찬 향기 감돌게 하여…주인 마음 황홀케 해요…고달픈 그분 머리 어루만지며…

사유리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준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뒷트렁크 쪽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사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와락 준의 품에 안겼다. 그 상태로 사유리는 사색이 되어 방금전 외운 시를 다시 반복했다.
준은 고개를 숙여 사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유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시를 알고 있군요…?"
준은 고개를 돌려 자동차 후방을 바라보았다. 별장까지 람보르기니가 급속하게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방을 응시했다. 조명탄은 빛을 잃고 어딘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두대의 밴이 방향을 트는 모습이 보였다.
"보들레르를 좋아하나?"
준은 핸드 브레이크를 걸며 입을 열었다. 사유리는 별안간 눈물을 글썽였다.
"네. 유치하다고 하지만 전 좋아해요…좋은걸 어떻해요…캡 재밌잖아요."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문 가까이 가면 리모콘을 눌러. 문이 열리면 동시에 이 정글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야."
"정말이요?"
"그래. 나의 귀여운 마르그리뜨."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유리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마르그리뜨…실국화…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가을의 소네트. 나의 쌀쌀한 마르그리뜨여…

사유리의 가느다란 손에는 다시 리모콘이 쥐어 졌다. 아래쪽 1천미터 전방에 별장 정문이 있었다. 날개를 단 듯 벤 자동차 두대가 언덕으로 치고 올라 오고 있다. 폭우에 꺽인 헤드라이트 빛은 발퀴레적인 환영을 만들고 있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우측으로 이동하면 밴이 곧바로 뒤따라 붙을 꺼야. 저쪽 숲으로 들어간 뒤 후진을 하겠어. 그러다 기회가 닿으면 방향을 바꾸어 곧장 정문으로 치고나갈 생각이야. 명심해. 날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로 만들지 말라고. 알았니?"
"히잉…알았쪄."
막상 대답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로 이쪽 별장으로 치고 올라 오는 벤 두대가 바짝 당겨오자 별안간 덜썩 겁이 났다. 무서운 속도였다.
불안하고 섭섭하고 황당한 기분이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비쩍 마른 미소. 이 남자는 오딘계열의 신神 중 하나일까.
"아,정문이 아니라 후문이야. 후문으로 탈출할 생각이니까 머릿속에 외워 두라고. 알겠나?"
"후문요? 후문으로 도망간다고요?"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대의 헬기가 별장 정원에 착륙을 시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싸늘히 헬기를 바라보다가 별장 우측으로 람보르기니를 움직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이 넘어졌다. 곧바로 이즈 숲 너머에 있는 별장 후문이 보였다. 후문쪽에는 어둠 속에 두대의 차가 서 있다.
준은 심호흡을 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별장 앞에서 U턴을 한 뒤 중앙도로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시속 100Km 속도까지는 단지 5초 정도의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저 놈,돌았군!"
게이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급히 무전기를 빼 들었다.
"뭐하나! 당장 갈기지 않고! 이즈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놈을 박살내란 말야!"
곧바로 정문 밤나무 위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요란한 총성이 폭우에 파 묻혀 들려 왔다. 빗나갔다.
"개자식! 어디다 갈기는 거야? 후문이다. 후문!"
게이조는 그렇게 외친 뒤 차 창 밖을 내다보았다. 오른편으로 헬기 한대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고,밴 전방으론 헬기 두대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중 오른편 2호 헬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서치라이트 빛이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를 쫓아가고 있었다. 게이조는 문을 열고 벤 밖으로 뛰어 내렸다. 폭우가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곤베이 육좌님. 늦었습니다!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후문입니다!!"
다시 총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붉은 선이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며 람보르기니의 꽁무니로 달라붙었다. 요란한 소리였다. 이틈에 특공요원 두명이 헬기에서 뛰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밴 자동차를 향해 뛰어 오더니,냅다 운전석의 사내를 끌어내리고 밴에 올라탔다. 게이조 역시 서둘러 올라탔다. 시동이 걸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3호 헬기가 다시 조명탄 한발을 2시 방향 허공으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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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는 조명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숲 너머였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집사가 우산을 받쳐주고 있었고,두명의 사내가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사내 하나의 얼굴은 불행해 보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 왔다.
"죄송합니다. 작전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양해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끼는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페라리 스포츠카로 시선을 옮겼다. 꼴 나쁘게 앞 본 네트에 총알 몇발이 박혀 있다. 쓴웃음이 나왔다. 숲에서 나오는 순간 어이없게도 총탄 몇 발이 날아오며 유리창을 크게 부수기 시작했다.
죽는 줄 알았던 게다. 서늘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마끼는 피다 만 담배를 손끝에 걸었다. 담배 꽁초가 그녀의 손 끝에서 빙그르 돌아갔다. 손가락 놀림이 좋았다. 사내는 마끼의 손놀림을 경탄한 듯 바라 보고 있었다.
틱.
어느새 담배꽁초가 포물선을 그으며 사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슬쩍 웃으며 땅바닥 고인 물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그런 뒤 이번에도 마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숲 너머에서 헬기 두대가 날아 오는 모습이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게이조의 음성이 무전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 놈 잡아! 람보르기니를 잡으란 말야!"
사내는 서둘러 앞쪽으로 뛰어갔다. 동시에 이즈 숲이 크게 울려 퍼지면서 람보르기니 한대가 잣나무 사이에서 총알같이 튀어 나왔다. 우측에 서있는 사내가 번개같이 권총을 꺼내 한방 쏘았다.
타앙———-
람보르기니의 오른쪽 백미러 부근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때문에 람보르기니는 방향 감각을 잃었는지 둔탁하게 급정거를 했다. 사내들은 총격을 멈추고 람보르기니를 조용히 응시했다.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했다.
사유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뿌연 수증기가 백미러 부근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브레이크를 밟았어요? 네?"
"마끼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사유리는 수축되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오른편을 응시하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멀리 페라리 앞에 서 있는 마끼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기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빗물에 젖어 투명한 굴곡을 내 비치고 있었다. 또 다시 서치라이트 빛이 람보르기니를 찾아 떨어지자 사유리는 당황스레 입을 열었다.
"김짱…인사는…다 하셨겠지요?"
"인사를 안 받아주는 군. 다시 출발해 볼까? 이놈의 12기통 벨브가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할텐데 말야."
준은 전방을 응시했다. 급하게 다이하쓰 자동차 한대가 후문 중앙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다.
"어머? 다이하쓰까지 난리네? 우린 포위된 건가요?"
"포위된 게 아니야. 다이하쓰 알토 자동차가 분명하지? 3기통이던가?"
"히잉. 손톱만한 차라고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면 여기서 어머니라도 만날 생각이신가요? 빨리 도망이나 가자구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다이 영. 지금 죽기에는 사유리 넘 젊어. 흐…"
준은 사유리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유리 양. 두려움은 의식할 필요가 없어. 의식을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굴레에 가두어 두는 행위가 되니까 말야."
"흥.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백치라는 거 아시잖아요."
"백치 아가씨. 내 말이 어려운가?"
"히잉. 캡 어렵다니까 그러시네."
"캡은 무슨 뜻이지?"
라고 되물으며 김준은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그러자 곧바로 총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면서 우측 보디를 시끄럽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염병할. 콩알볶이듯 총탄이 날아오고 박히고 있었다.
사유리는 우측 보디쪽 좌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심장마비에 걸린 듯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돌비 서라운드 입체 음향이 실감날 지경이었다.
총을 벌집 쑤시듯 쏘아대다니 말야. 사유리는 허리를 굽혀 좌석 아래쪽으로 몸을 숨기다 말고 다시 비명을 지르며 준의 옆꾸리에 엉겨 붙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끝이 났다. 사내 4명이 좌우에서 걸어오며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달려나가는 람보르기니를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후문 앞에 정차해 있는 다이하쓰 옵티 자동차를 그대로 들이 박고 있었다.
쾅——————-
다이하쓰 옵티는 허공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마끼는 담배를 피다 말고 입이 벌어졌다. 자신이 선물 받은 차가 벌집 쑤시듯 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설사 소형차라고 하지만,3기통 엔진을 장착한 다이하쓰 옵티가 충돌에 의해 밤하늘로 붕 떠오르는 모습은 생전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놀란 건 마끼 뿐만이 아니었다. 권총을 정신없이 쏘아대던 사내 넷도 난데없는 광경에 입이 쩌억 벌어졌다. 두 자동차가 충돌했는데 한쪽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다니. 도대체가 믿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사이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다이하쓰 옵티를 일방적으로 KO 시킨뒤,별장 뒷길을 따라 쏜살같이 도망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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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끌끌 차는 저격요원을 응시하다가 곤베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고 있나?"
헬기 조종사가 대답했다.
"고텐바 방향입니다."
"고텐바라면 후지고원이 아닌가?"
시나노 곤베이의 질문에 우측에 앉아있는 사내가 서둘러 후지산 지도를 펼쳤다.
얼굴이 싸늘히 굳어 있었다. 불안했다.
"이상하군요…"
사내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곤베이를 올려다보았다.
"스피드 웨이인거 같습니다. 아니 스피드 웨이가 분명합니다!"
사내의 말에 곤베이는 안면근육이 차갑게 경색되었다. 오른손이 떨렸다.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오른쪽 귀에 갖다 댔다.
"이봐! 오늘 야간경기가 있나 조사해 봐. 스피드 웨이야!"
핸드폰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랜드 챔피언 쉽 경기가 있었습니다만 주간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오후 6시에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관중이 있겠나? 정확하게 체크해 봐!"
"조사해 보겠습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헬기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쪽 산자락을 응시했다.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호수를 끼고 자동차의 행렬이 보였다. 폭우는 지랄같이 후지산을 괴롭히고 있었다.
"챔피언쉽 출전선수들은 모두 스피드 웨이 경기장을 떠났다고 합니다! 확실합니다. 이 자식. 폭우라 이놈의 진행요원도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폭우속에 바로 4시간 전에 자동차 랠리가 있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울컥 화가 났다. 다 잡아 놓은 김준을 놓쳤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던 차였다. 후문을 봉쇄해야 했던 것인데.
곤베이는 핸드폰을 바지 뒤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벨소리가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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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는 잠수정처럼 빗길을 달리고 있다. 속도계는 준의 눈앞에서 계속 올라가고 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 34분 정각.
준은 속도계를 응시하다가 힐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헬기 한대가 뒤따라 날아오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여긴 후지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인데요?"
"스피드 웨이야."
"스피드 웨이?"
사유리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헬기는 계속 거리를 두고 날아 오고 있었다.
"오늘 경기가 있나요? 이 밤에?"
"아니. 하꼬네로 빠져나갈 생각이야."
"하꼬네라고요?"
"그쪽이 편하지. 곧바로 138 국도와 연결돼 있어."
"그렇군요…아,참…"
"왜?"
"오늘 페라리 미팅이 있어요. 마쓰다 페라리 콜렉션 주최로 열린다는데요?"
낙뢰가 내리 쳤다.
㏏ⁿ 호이에산寶永山의 화산재를 뒤집어 쓴 자갈들이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준은 힐끔 호에이산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페라리 미팅이 있다는 거 사실인가?"
"아까 마끼가 그랬어요. 의상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오늘 밤에 페라리 미팅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여자군."
"페라리 미팅은 정말인가 봐요. 오늘 밤 미팅엔 페라리끼리 야간 서키트 경기가 있데요. 나보고 운전할 수 있냐고 물어오더군요."
"운전?"
"흐. 운전을 할 수 있다니까 자신의 페라리를 빌려줄까,라고 했어요. 난 믿을수 없었어요. 운전이야 할수 있지만 페라리를 몰다뇨. 그러다보면 제 몸 값까지 천정부지로 올라가겠더군요."
"페라리 때문에 사유리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뜻인가?"
"그렇죠 뭐. 저같이 변변치 않은 여자가 뭐 몸값이 있겠어요? 하지만 페라리 스포츠카만 있다면 저도 공주로 변신할수 있죠. 흐."
"아까 의상실에서 무엇을 했지?"
사유리는 별안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김짱. 무슨 의도로 그 질문을 하는 거에요?"
"아냐. 난 단지."
"흥. 그 여자 레즈였어요. 솔직히 당황했지요. 레즈는 처음이었거든요."

윽…
처음이라니.
무엇이 처음이라는 것일까.

"자신과 놀아주면 페라리 스포츠카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필요없다고 했어요. 히잉. 전 레즈가 아니잖아요. 별 미친여자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은 얼굴이 빨개진 채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발랄한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도대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준은 백미러를 응시하다가 다시 자동차 전방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의 페라리 미팅…
후지산 기슭에 있는 마쓰다 페라리 박물관은 매년마다 유명차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중 람보르기니 미팅과 페라리 미팅은 전설적으로 유명한 미팅이었다.
미팅은 대개 토요일 오후에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중에는 간단한 티파티를 즐긴 뒤 일요일 오전중에 하꼬네나,스피트 웨이에서 친선경기로 서키트 레이스를 벌이는 게다. 이 때문에 페라리 미팅에는 일본의 부유층이나,혹은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며 페라리를 유지하는 괴물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준은 예전에 한번 스피트 웨이에 온 적이 있었다. 1년 전 이었다.
아마 원 메이크One Make 자동차 경기에 참가했을 것이다.
원 메이크 자동차경기란 출고된 차량이 다르게 개조를 하지 않고 참가하는 자동차 경기를 말한다. 포뮬라Formular나 그룹 A,그룹 C,투어링카Touring Car,랠리 등의 경기에 참가하는 자동차는 대부분 여러 각도로 개조가 허락 되었다. 하지만 원 메이크 경기는 말 그대로 개조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동종의 자동차끼리 레이스 경쟁을 펼치는 경기였다.
불현듯 1년 전 일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준이 구입한 자동차는 르노 아르헨티나 공장에서 생산한 르노 R 21였다. 중고차였다. 준은 이 자동차를 가지고 스피드 웨이 주 경기장에서 열린 르노 원 메이크 경기에 참가를 했다.
2.5Km 구간을 15분 동안 달렸는데 이날 가장 좋은 랩타임은 1분 12초 34 였다. 참가한 선수중 김준의 기록은 2위였다. 직업적인 카레이서가 아니었지만 김준은 다재다능했다.
그 뒤로는 스피드 웨이에 온 적이 없었다. 서키트 전용 경기장이 새롭게 건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도 그만이었다. 준에게는 한국돈으로 2억원에 달하는 스포츠카를 구입할 능력이 없었고,구입할 생각도 없었다. 그 때문에 마쓰다 박물관에서 열리는 명차들의 미팅이나 친선경기에 대한 신문기사도 그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페라리 미팅이라고 했던가.
김준이 지금 운전하고 있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1.7톤의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지만,그럭저럭 빠른 차였다. 아니 상당히 빠른 차였다.
준은 다시 한번 백미러를 응시했다. 헬기는 택시 자세로 람보르기니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머지 두대의 헬기는 어디론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스피드 웨이까지 무사히 간다면 뒤쫓아오는 헬기를 따돌릴 묘안이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반격을 해야 했다.
이 상태로 계속 도망 다닌다. 이젠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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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모리야마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지만 그의 늘씬한 팔등신 애인은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페라리 F 512 M 안에서 옷을 반쯤 벗어제치고 누워 있었다. 모리야마는 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는 섹스를 거절하고 있었다.
잠시후면 친선 서키트 레이스가 시작될 것이다. 1주 4.2km. 코너 20개의 후지 서키트 경기장은 직선코스에서 시속 300K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다.
누가뭐래도 일본이 자랑하는 멋진 경기장이었다.
더구나 트랙 안쪽으론 짐카나 경기장과 오토바이 선수들을 위한 모터크로스 코스까지 구비되있다.
모리야마는 여자의 젖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우측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측 피트pit안에서 경기진행 스태프들이 일렬로 서 있다. 피트 박스는 레이스중에 경주차의 세팅과 정비,타이어 교체,연료공급 등을 하는 장소였지만 오늘은 폭우 때문에 스태프들이 우왕좌왕 몰려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대부분 긴장하다기 보다는 갑자기 몰려온 70여대의 페라리 오너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폭우까지 을씨년스럽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있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폭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야간 서키트 경기. 충분히 매력적인 스포츠였다.
메디컬 센터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패독 안에서 검차요원들이 차의 안전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스탠딩 스타트 라인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비 차림에 손에 후레쉬를 들고 있었다.
이날 밤 경기는 분명 친선 경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차요원들은 용의 주도하게 각각의 페라리 스포츠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막상 서키트 레이스가 시작되면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우승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검차는 세심하게 거행되었다.
하꼬네까지 138 국도를 타고 달린 뒤 다시 되돌아오는 경기인데,스타트 라인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 매력. 이 점이 서키트 레이스의 매력이었다.
모리야마는 이번에는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인 스탠드 위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날카롭게 경기장 안으로 떨어지고 있다. 관중은 없다. 100여명 남짓한 기자들이 후쭐그리하게 비를 맞으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간간이 카메라 후레쉬가 터지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뜻을 파악하고 조용히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빈 게 안타까웠지만 이 점이 이 여자의 매력이었다. 골치 아픈 여자를 붙잡고 인생을 즐길수는 없었다. 파트너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그가 원하는 파트너는 머리가 나쁘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중 이번 여자가 가장 나았다.
모리야마는 여자와 1년 전에 약혼을 했다. 결혼할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를 잡아두자는 생각에서 했던 약혼이었다.
그 1년동안 여자는 모리야마의 뜻대로 잡히는듯 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여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모리야마는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건전하지 않는 게 여자와 말馬이라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사무라이의 말이다.
어쩌면 이젠 떠날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럭저럭 한 여자를 상대로 1년 동안 만나고 있었다는 게 모리야마 자신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리야마는 무엇이든 빨리 해결하고,끝장을 내는 성격이었다. 그의 천성적인 성격.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오늘 페라리 미팅에서 가장 빠른 차는 바로 자신이 타고 온 F 512 M이었다. 눈부실 것이다. 슬쩍 개조를 해 놓았으니까 오늘 그의 페라리는 당연히 가장 빠를 스포츠카였다. 아마 시속 330Km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혹은 모른다. 갑자기 부가티 스포츠카가 나타나지 않을까 모리야마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저 단순한 고민일까. 오늘은 말 그대로 페라리 미팅인데 말야. 페라리 미팅에 부가티나 카운타크가 별안간 나타날 리 없다.
모리야마는 의식하고 있었다. 부가티가 없다면 그의 페라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라는 사실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74대의 페라리가 스탠딩 스타트 라인에 뒤죽박죽 정차해 있었다. 전국에서 논다는 친구들이 이번 미팅에 모두 참석했는지 훗가이도 출신의 뚱보 카미야의 모습도 보였다. 카미야는 3대의 페라리를 가진 오너였다.
모리야마는 다시 애인의 육체 위로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런 뒤 긴 키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대로 그저 이 여자를 안고 시간을 죽이고 싶었다. 모리야마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 여자의 젖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가냘프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모리야마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5분 뒤였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을 했다. 애인이 고개를 젖히고 창밖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손을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모리야마는 애인의 손가락을 따라 자동차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쪽 어둠 속에서 한대의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뒤 헬기는 허공 한 지점에 멈추었다.

저게 뭐야? 중계 방송용 헬기인가?

모리야마는 고개를 갸웃 뚱하다가 서둘러 자신의 노란색 페라리 승용차 안에서 내렸다. 그런 뒤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은 지성인의 품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헬리콥터가 중계방송용 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뻘개진 얼굴로 다시 페라리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여자가 옷을 추스리고 있다가 그에게 불쑥 말을 내 뱉었다.
"저 임신했어요."
"뭐?"
여자는 잔뜩 독이 올랐는지 양미간을 꿈틀거렸다.
"우습더군요. 멀대같이 누워 있었는데 그만 당신 아기를 가졌어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섹스는 불건전해요. 당신은 그 맛에 사는 거겠지만."
"어떻게 할거야?"
"아기를 낳고 싶어요."
"무슨 이유지?"
"내 마음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 육체가 아이를 원하는 군요. 난 우리 관계는 아이가 있으면 사랑으로 승화될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거 이상하군. 정신 이상자의 논리인가?"
말은 엉겁결에 그렇게 했지만 모리야마는 당황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다.
약혼은 했지만,아버지가 된다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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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임소봉의 연락을 받고 등골이 오싹했다. 헬기 3대가 김준을 쫓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키트 경기장이 뭐야? 여기 아는 사람 있나?"
임춘해가 뒷좌석에서 대답했다.
"고텐바 북쪽에 있는 스피드 웨이를 말하는 겁니다. 138번 국도와 연결돼 있지요."
"스피드 웨이라? 그거 국제 레이스장 아니오?"
"그렇소. 헌데 이상하군요. 다시 도쿄로 돌아갈 생각인가? 그쪽은 온통 산악지방이라고 알고 있소만…"
"이거 하꼬네 아냐? 스피드 웨이에서 곧바로 하꼬네로 빠져나갈 생각인가본데."
진광섭은 핸드폰을 빼 들었다. 그런 뒤 요코하마에 있는 요원 두명을 하꼬네로 불러 들였다. 밤 10시 10분이었다. 진광섭 일행이 분승한 자동차 2대는 막 고텐바 페밀리랜드 앞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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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다시 백미러를 응시했다. 왼쪽에서 한대의 헬기가 따라붙으면서 뒤따라오는 헬기는 두대로 늘어나 있었다. 준은 숲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자작나무가 터널을 만들고 있는 조용한 도로였다.
핸들을 돌리자 숲이 사라지고 곧바로 스피드 웨이 주경기장이 나타났다. 준은 고개를 바짝 처 들었다. 사유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거 봐요. 또 헬기에요! 스피드웨이 상공이 떠 있어요. 김짱!"
준은 전방에 떠 있는 헬기를 바라보다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런 뒤 후진기아를 넣었다. 람보르기니는 곧바로 숲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빗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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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습니다!"
"뭐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잣나무 숲으로 쥐새끼처럼 숨었습니다!"
"이런 망할 자식…"
곤베이는 핸드폰을 급히 껐다. 그런 뒤 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138 국도로 이동한다. 통신요원은 지금 이 시각부터 반경 2Km안을 모두 커버한다. 알겠나?"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스피드웨이로 비상착륙을 해야 합니다. 육좌님!"
"입 닥쳐! 놈이 하꼬네로 탈출하는 걸 보고 싶나?"
곤베이는 불안했다. 10분전에 내각정보실 차장의 직권으로 수송 헬기 10기가 후쿠오카에서 나하 방향으로 향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산팀이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지한 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알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때문에 곤베이는 잔뜩 혼란되고 있었다. 자위대 별반別班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써 그것을 떨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퍼뜩 정신이 차렸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스피드웨이에서 갑자가 74대의 페라리가 쏜살같이 스타트를 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곤베이는 눈알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너.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구별할 수 있겠나?"
부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글쎄요… 제 눈엔 다 똑같이 보입니다만."
빌어먹을.
늦었군…
곤베이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꼬네를 봉쇄한다. 경찰서 인원을 증원시켜. 지금 당장!"
곤베이는 식은 땀을 흘렸다.
"그리고 당장 고공 침투조 조장에게 전화 연결해. 지금 어디에 있나?"
그렇게 물으며 곤베이는 PDA를 두들겼다. 곧바로 고공침투조 조장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뭐야? 이 자식들! 당장 하꼬네로 이동하지 않겠나? 외각도로를 봉쇄하란 말야. 알겠나?"
곤베이는 그렇게 말한 뒤 스피드웨이를 일주하고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페라리 스포츠카들을 내려다보았다. 폭우 속. 나이트 게임으로 열리는 자동차 서키트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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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일행이 스피드 웨이에서 138번 국도로 진입할 무렵이었다. 잣나무 숲에서 한대의 스포츠카가 슬며시 페라리 일행에 끼어 들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리야마는 후방 맨 뒤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여자가 아기를 가진 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보아왔던 터였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우리 관계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양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시를 사랑하기도 했고,후리꼬를 사랑하기도 했다.
하지마 그것은 잠시 머무는 관계였다. 결코 익숙한 관계가 아니었다. 익숙한 건 섹스밖에 없었다. 모리야마의 신조였다.
제시가 가장 좋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모리야마의 눈에 어른거리자 모리야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자. 지금은 서키트 경기인 것이다.
모리야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백밀러를 응시했다. 페라리 F 512 M의 둥근 리어 램프 뒤로 눈에 익은 스포츠카가 보였다. 불안했다. 아까부터 무엇인가가 모리야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이미 대여섯 대의 다른 차들을 추월해가고 있었다. 점점 가속이 붙고 있었다.
아마도 고텐바 인터체인지에 도달할 무렵이면 선두자리를 차지할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떨구어 가면 가능했다. 모리야마는 여자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엑셀레이터를 밟다가 백미러를 응시했다. 순간 모리야마의 희고 고운 얼굴이 서서히 납빛으로 변해갔다.

악마…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이태리어로 악마라는 뜻)…
그러고보니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스포츠카는 페라리가 아니었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가 분명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른 차.
모리야마는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리야마는 꺼지라는 심정으로 리어 램프를 몇번 반복해서 깜빡여 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 붙는 람보르기니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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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텐바 7정목의 지서장인 이시야마는 선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아내 히로꼬가 불쑥 팩스 용지를 내밀고 있었다. 이시야마의 단추 눈이 팩스 용지를 향해 불안하게 움직였다. 밤 10시 35분이었다.
이시야마는 정복으로 갈아입고 우비를 걸쳤다. 아내가 우산을 들고 정원까지 따라 나왔다. 주책바가지 아내가 또 키스를 원하는 것이다. CNN 영향인지 케이블 TV의 영향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시야마는 아내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한 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말이 주차장이었지 두대의 자전거와 한대의 스즈끼 알토 자동차가 있다.
이시야마는 스즈끼 알토 자동차를 볼때 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이웃 한국에서 알토를 쏙 빼 닮은 국민차라는 것이 굴러다니는 것을 며칠전 TV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애국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게 그때처럼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이시야마는 후레쉬를 들고 주차장안을 살펴보았다. 경찰 습성은 어쩔 수가 없다. 달라진 것이 없다고 확인한 뒤 이시야마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MTB 산악 자전거였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팩스 용지에서 보았던 사내의 얼굴을 머리 속에 외우며 집결장소인 인터체인지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의 허리 뒤에서 차갑게 권총 한 자루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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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마는 페라리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어갔다. 그러자 옆차선으로 람보르기니가 따라 붙었다. 모리야마는 윈도우를 열고 버럭 외치기 시작했다.
"꺼져! 너 무례하지 않는가! 오늘은 페라리 미팅이라는 걸 모르나?"
대답이 없었다. 운전석의 그림자는 힐끔 모리야마 쪽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곧장 람보르기니는 모리야마의 페라리를 제치고 앞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모리야마는 화가 났다.
헤드 램프를 상향으로 올린 뒤 신경질적으로 깜박였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버릴거 같았다.
흥분하면 안된다…
람보르기니는 당연히 나보다 빠르다…
막상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모리야마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밖으로 침을 탁 뱉고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곧바로 개조한 엔진이 뜨겁게 달구어져갔다.
시속 150Km. 폭풍처럼 속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페라리의 속도체크 센스가 자동으로 타닥거리며 광폭타이어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불길하게 빗방울이 차 창을 튕겨 왔다.
람보르기니가 탱크라면 페라리는 장갑차라고 할 수 있었다. 후발주자인 람보르기니에게 당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리야마는 차분함을 잃었다.
그는 람보르기니에 따라 붙는다 생각이 들자 곧바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옆 보디에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람보르기니는 반대편 차선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겁을 먹고 속도를 갑자기 올리기 시작했다.
좌측에서는 다른 페라리들이 겁을 먹고 뒤로 빠지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다른 차들이 헤드라이트 빛으로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 왔다. 모리야마는 신호를 무시했다. 그는 도망가는 람보르기니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곧바로 페라리는 람보르기니의 꽁무니에 바짝 다가섰다.
이번에도 람보르기니가 눈치를 챘는지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파워윈도우를 뚫고 굉음이 빨려 들어왔다. 왼쪽 벼랑 아래로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오는 거북이 행렬이 보였다.
욕심이 생겼다. 인터체인지에 도달하기 전에 모리야마는 끝장을 내고 싶었다.
모리야마는 다시 힘차게 속도를 올렸다. 이번에도 앞에서 달려가는 페라리 대여섯 대가 잔뜩 겁을 먹고 도로 왼편으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아까부터 어린 아기의 형상이 모리야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모리야마는 하드보일드 했다. 당연히 그랬다. 결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도 애초부터 없었다. 추호도.
모리야마는 독기를 뿜은 눈을 반짝이며 람보르기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번에는 놈이 겁을 먹고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람보르기니가 겁을 먹고 있는 게 모리야마에게 느껴졌다.
R-30 각도의 회전도로였다.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와 똑같이 템포를 죽이며 바짝 람보르기니 옆으로 페라리의 차체를 붙였다. 그런 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차하면 허공으로 날아오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꽝 소리가 들렸다. 람보르기니는 중심을 잃고 잠시 기우뚱하는 거 같더니 도로 가운데에서 한바뀌 회전을 했다.
모리야마는 희열을 느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백밀러로 람보르기니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 보였다. 모리야마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잠시 숨통이 막혀오는 거 같았다. 다른 차들은 잔뜩 겁을 먹고 주행을 포기한채 후방에 정차해 있었다. 모리야마는 득의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인터체인지와 함께 왼편으로 하꼬네 시가지로 연결된 도로가 보였다.
모리야마가 담뱃불을 붙힐때 백밀러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가 다시 시동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모리야마 역시 시동을 걸었다. 아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람보르기니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것도 어린 여자.
모리야마는 시내로 진입하기 전에 람보르기니를 박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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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김준은 고텐바 역 앞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아직도 오른쪽 다리에서 통증이 왔다. 그는 방금전 자신을 태워준 노인과 헤어진 뒤 고텐바 역전 冗 20분 뒤에 도착하는 로컬 선 패스를 구입한 뒤 길을 건너고 있었다. 길을 건너며 김준은 포켓안에서 모토롤라 삐삐를 꺼내 들었다.
사유리가 헤어지기 전에 준에게 준 선물이었다. 아니 선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무사하다면 이 삐삐에 메시지를 남기겠다고 말하며 사유리가 강제로 떠 넘긴 삐삐였다.
그러다 어찌 하다가 키스를 했다. 사유리와 그쯤까지 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사유리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렇지만 능숙하게 혀를 놀렸다. 오히려 준이 압도당했다. 장자 말대로 김준이 나비 꿈을 꾼 건지,나비의 꿈속에 그가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유리와 다시 만날런지는 장담할수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시원스레 보답을 하고 싶었다.
김준은 우선 간사히 공항 부근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작업을 할 공간이 필요했다.
2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준은 역 건너편에 있는 간이 식당에 들려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을 주문했다. 그런 뒤 돈을 지불하는데 등 뒤에서 자전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정복 차림의 경찰이 투덜거리며 포장 안으로 들어왔다.
준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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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씩씩거렸다. 헬기를 따돌려 본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페라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화가 났다. 삐삐와 바꾼 스포츠카.
도쿄까지 끌고 간다고 김준과 약속을 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꼬네에 도착하면 람보르기니를 버리고 곧바로 온천에 숨어들 생각이었다. 그런 뒤 모래 아침에 조용히 학교에 등교하면 그만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가 없다.
하꼬네에 가지도 전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설 것 같았다.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너. 각오하라고."
한편으로 사유리는 무작정 차 밖으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런 뒤 이 폭우속에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 미친듯이.
사유리는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안에서 자살가이드가 흘러 나왔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은 인기 6위의 자살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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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VS 방위청 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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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최고야."
사유리는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지 못했다. 액셀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빗방울이 부서져 나갔다. 후방에 정차해있는 페라리들이 사유리의 람보르기니를 따라 시동을 걸었다.
왕복 6차선도로였다. 사유리가 움직이자 전방에서 기다리던 페라리 F512 M도 후미 램프를 깜박이며 느릿하게 직진을 시작했다.
"저게 뭐하는 건가?"
곤베이는 헬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치라이트가 138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두 자동차중 하나가 뚜렷하게 식별이 되었다. 노란색의 스포츠카였다.
"어느게 람보르기니야? 양쪽 보디에 빗살무늬가 있는 게 람보르기니인가?"
"글쎄요. 제 눈엔 둘 다 빗살무늬가 없는 걸로…"
부하는 쌍안경으로 페라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이 붙었나 봅니다. 아까부터 티격태격하는 거 같습니다만."
"뒤에 있는 게 람보르기니 맞나? 누구 아는 사람 없나?"
반대편 차선에서 두대의 차가 날카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진광섭 일행이었지만 곤베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쉽게 보이니? 응?"
사유리는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모리야마에게 외쳤다.
"흥미있는 말이군. 다시 한판 붙겠다는 거야. 아가씨?"
"그런 너는? 철저하게 망가지고 싶니? 너?"
모리야마의 써늘하게 두 눈을 반짝였다.
"몸을 망치는 건 아가씨야. 정식으로 초청하지. 속도경쟁에 자신 있나?"
"사업을 도모해보겠다고요? 음냐. 난 아저씨 같은 임포텐스 환자에겐 관심 없는데 어떻하지? 어린 여자에게 치근거리는 것을 보니 아저씬 임포텐스가 분명해. 그러니 덤벼 봐. 응? 어서? 히잉."
사유리는 따분한 눈빛으로 말을 하더니 곧바로 액셀레이터를 거칠게 밟았다.
둔탁하게 차체가 튀었다. 동시에 헬기 한대가 남쪽 끝으로 긴박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사유리의 눈에 들어왔다. 곤베이가 자리 배치를 다시 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한대. 하꼬네 야경을 향해 세번째 헬기가 빨려갈듯 날아가고 있었다.
사유리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전방의 헬기를 쫓아 시선을 움직였다. 좌측에 붙어서 달리는 페라리가 사유리의 눈에 다시 들어왔다. 사유리는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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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텐바 역 대합실로 걸어가면서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경관이 우동집에서 걸어나오다가 술에 취한 행인과 부딪치고 있었다. 자전거가 넘어 졌다.
한바탕 요란하게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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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번 국도 아래로 246번 국도가 흐르고 있었다. 두대의 스포츠카가 동시에 그곳을 통과하자 138번 국도는 곧바로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왼쪽 도로는 어두었고 오른쪽은 밝았다. 모리야마는 급히 브레이크를 밝았다. 그 때문에 우측에서 달리던 람보르기니가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다. 겁이 없었다.
대담한 것인지,누군가에게 쫓기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폭우속에 또다시 뇌전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사유리의 람보르기니는 두갈래 길 중 왼쪽 도로를 탔다. 오른쪽 길은 복잡하게 보였다. 모리야마는 곧바로 람보르기를 쫓아 방향을 바꾸었다. 180Km의 속도 였다. 폭우가 둔탁하게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와이퍼가 복잡하게 차창을 닦아 나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모리야마는 기아를 바꾸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후방에서 뒤따라오던 페라리들은 한결같이 오른쪽 도로를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왼쪽 도로가 외각도로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대나무 숲 길이었다. 아스팔트 한 귀퉁이가 부서져 나간 곳을 거칠게 달리면서 람보르기니는 허공에 붕 떴다. 그 영향으로 대나무 숲이 연거푸 무너지고 있다.
사유리는 쓰러지는 대나무를 보다가 뒤를 보았다. 어느새 바로 꽁무니까지 모리야마의 페라리가 따라 붙고 있었다. 핸들이 무거웠다. 폭우속을 이런 속도로 달리다니. 속도계 바늘이 시속 190을 가리키자 사유리는 와락 겁이 났다.
아무래도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의 꽁무니에 차를 바짝 갖다 대놓고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행선 JR 열차가 고텐바 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에 슬쩍 힘을 가했다. 쾅 소리가 들리면서 전방에서 람보르기니가 한번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사유리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후방을 돌아다보았다. 종아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 했다. 온 신경이 다리에 집중되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사유리는 발에 힘을 준 상태에서 핸들을 조심스럽게 비틀어 보았다.
간신히 페라리의 진행방향에서 바깥으로 람보르기니를 빼내는데 성공한 거 같았다.
고텐바 시내까지는 4Km정도 여유가 있었다. 사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추어갔다. 이 틈에 페라리가 람보르기니의 좌측을 치고 올라왔다. 사유리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불현듯 언니 나쓰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동차는 좋은 것을 타야 해. 자동차는 튼튼한 게 좋지. 셀시오는 빠르잖아.
안 그러니?
사유리가 처음 운전을 배운 것은 2년전이었다. 나쓰에는 셀시오를 활부로 구입하는 날 사유리와 함께 도쿄 남쪽 가나가와 지방으로 드라이빙을 나섰다.
바로 그 첫날부터 사유리는 자동차를 겁도 없이 몰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는데, 사유리는 요코하마까지 제트기 조종사처럼 액셀레이터를 밟아보았던 것이다.
나쓰에가 겁을 먹다 못해 험악하게 화를 낼 정도로.
지금은 달랐다. 셀시오는 오토매틱 기어였지만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수동 5단 기어였다. 이 때문에 미쯔비시 트럭으로 운전을 배우지 못한게 사유리는 후회가 되었다. 고급 자동차일수록 수동기어를 달고 있다는 게 사유리는 믿어지지 알았다.
잠시 사유리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고텐바 시가지가 복잡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유리는 잔뜩 수축이 되어 람보르기니의 속도를 늦추었다.
여전히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좌측에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히잉. 난 지금 취해 있나 봐…
그녀는 우울하게 미소를 지으며 백미러를 응시했다. 헬기 한대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사유리의 눈에는 헬기가 보이지 않았다.
모리야마의 페라리도 보이지 않았다. 울컥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사유리는 서둘러 페라리를 찾았다. 우측으로 꺽어지는 도로였다. 페라리는 이미 람보르기니의 뒤를 돌아서 오른쪽의 바늘같은 공간으로 다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사유리는 잔뜩 긴장한 채 급히 좌측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뒷바퀴가 허공에 뜬 상태에서 트렁크가 페라리를 향해 쏠려 갔다. 아차 하면 충돌할 위기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재빠르게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인인아웃 주법을 구사하며 충돌을 피해가고 있었다. 인인아웃은 코너를 돌 때 안쪽으로 돌다가 바깥쪽으로 추월하는 주행법인데,이번에는 드리프트Drift까지 겹쳐 있었다. 페라리는 앞 차체를 안쪽으로 향하고 뒤 차체는 바깥쪽으로 향한채 람보르기니의 뒤쪽으로 밀려가면서 코너링을 하더니,삽시간에 람보르기니의 좌측으로 달려 나왔다. 사유리는 겁을 먹고 속도를 120Km 아래로 떨구었다. 그틈에 페라리가 번개같이 람보르기니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반대 차선에서는 버스가 지나가다 말고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사유리는 시가지 끝에서 페라리를 쫓아 좌측으로 핸들을 돌렸다. 왜 그랬는지는 사유리 자신도 알지 못했다. 도망갈 생각은 염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견인되듯 페라리를 멍하니 쫓아가고 있었다.
가만이 보니까 138번 국도로 다시 돌아온거 같았다. 이미 다른 페라리들이 저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것이 사유리의 눈에 들어왔다.
진광섭은 뒤늦게 138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오다가 시내 쪽에서 튀어나온 람보르기니를 울그락불그락 화가 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람보르기니에는 김준이 타고 있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건 나쓰에의 동생인 사뇨 사즈메가 분명했다. 이때문에 진광섭은 불이나게 핸드폰을 뽑았다. 붉은 넥타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허공으로 튀었다.
"뭐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김준이 없잖아!!! 앙?"
"그럴리가요!! 김준이 없다뇨?"
인터체인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임소봉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인도 옆에 자동차를 대놓고 페라리 일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말야! 안기부에 들어오기 전에 시력테스트를 하긴 했냐? 앙? 그래,여자와 남자도 구별못하냐? 머리가 길면 여자고 치마를 입으면 여자지만 서서 오줌을 누면 남자란 말야,이 새끼들아!"
"면,면목없습니다. 과장님."
"당장 철수해! 놈은 이곳에 없다! 없단 말이다,이 밥통들아!"
다시 핸드폰에서 진광섭의 음성이 터져 나오자 소봉은 얼굴이 빨개진 채 자동차에서 급히 뛰어 내렸다. 첫 번째 페라리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무서운 속도였다. 임소봉은 달려오는 페라리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형님. 이대로 끝낸다 말입니까? 빗속에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물러나라고요?"
"너 이 새끼. 넌 거기 박혀 있다가 사즈메를 잡아오면 될 거 아냐! 곤베이에게 뺐기지 말고 사즈메를 잡아 들여! 내 말 알겠나?"
곤베이의 헬기는 진광섭의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시가지가 기우뚱하게 곤베이의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혔다. 아까부터 스포츠카 두대가 레이스를 거듭하고 있었다. 분명 둘중 하나에 김준이 타고 있는 거 같았는데 둘 다 노란색이라 번번히 헥갈리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밴 두대가 어디에 처 박혀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4기통 밴으로 12기통 스포츠카를 추적하라고 했으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곤베이는 우측 창으로 이동하다 말고 다시 고텐바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시가지 북쪽과 남쪽에서 열차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는 하행선이고 다른 하나는 상행선. 곤베이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뭍은 빗방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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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기차 시간표를 보았다. 요코하마행 JR 열차가 같은 시간때에 교차하고 있다. 11시 8분. 그는 우측주머니에서 1만원엔 권을 꺼내 요코하마행 기차표를 구입했다. 몇몇 사람들이 대합실에서 서성이다가 온 몸이 비에 젖어 있는 준을 응시했다. 폭우가 대합실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준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역무원이 플랫폼으로 나와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동시에 스테인리스 같은 여자 음성이 열차의 도착을 알려왔다.
이시야마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빗속에 우산도 없이 007 가방을 들고 다니는 자. 그제야 이시야마는 사내가 팩스용지에 그려져 있는 몽타주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시야마는 서둘러 공중전화박스로 걸어갔다. 도중에 다시 역전을 보았다. 11시 8분 정각. 상행선 JR선이 역전안으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이시야마는 10미터 전방에 있는 전화박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둘러 역전 앞 도로를 건너뛰었다. 대합실 문을 막차고 뛰어 들었을때는 놈이 플랫폼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짱. 무슨 일입니까? 도둑입니까?"
역무원이 이시야마에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전 그 남자 목적지가 어디였소?"
"요코하마행입니다만 왜요?"
이시야마는 잽싸게 뒤주머니에서 팩스 용지를 꺼냈다.
"여기로 전화를 걸어 주시오. 이 자가 고텐바에 나타났다고 말이요. 부탁하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 거 같았다. 이시야마가 철로로 나왔을 때는 요코하마행 JR선이 승객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포켓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비가 거추장스러웠다.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시야마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김준을 찾았다. 남자 몇이 우산을 접은 뒤 열차에 올라타고 있었지만 놈과 비슷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할로겐 등이 열차를 따라 드문 드문 비추고 있었지만, 폭우때문에 제대로 식별이 되지 않았다. 빗방울은 팔뚝보다 굵었고,바람까지 미친듯이 불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1분정도 멍청하게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그때였다. 이시야마의 바로 등 뒤. 어둠속에서 갑자기 김준이 튀어나오면서 이시야마의 등을 떠밀었다. 동시에 이시야마의 곤봉이 노련하게 허공을 한바퀴 그렸다. 빗방울이 튀었다. 열차안에서 승객들이 두 사내의 격투를 지켜보았다.
우비를 입은 쪽이 덩치도 작았고 힘도 없었다. 우비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이더니,키 큰 남자가 서둘러 열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는 비틀거리며 바닦에서 일어 섰다. 김준이 열차에 올라탄 뒤 앞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열차를 따라 뛰어갔다.
이번에는 권총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시야마는 3번째 칸에서 급히 열차에 올라탔다.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면서 저쪽 선로에서 오사카행 하행선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거 같았다. 이시야마는 진흑으로 범벅이된 우비를 쳐다보는 승객들 사이를 식식거리며 헤쳐갔다. 마지막 칸이었다. 놈은 보이지 않았다. 이시야마는 뒤로 걸어나오다가 화장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왼손에 권총을 쥔 상태에서 무턱대고 화장실 문을 잡아 당겼다.
잠겨있는줄 알았는데 문이 의외로 손쉽게 열리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이게 웬일인가 싶어 화장실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이시야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퍽–!!!
이시야마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화장실 안에서 무릎을 꿇었다. 팩스용지에서 보았던 사내가 이시야마를 내려다보고 있더니,그의 손에 쥐어 있는 권총을 낚아 챘다. 이시야마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건…경관 총이야…그걸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일본경찰은 너를.."
그러자 이번에는 금속으로 된 가방이 이시야마의 얼굴로 떨어졌다. 아찔했다.

가방인지 10톤 짜리 햄머인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시야마는 정신을 잃었다.
김준은 이시야마가 기절한 것을 보더니 그의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았다.
그런 뒤 품속을 뒤졌다. 총알 12개가 쏟아져 나왔다. 준은 물끄러미 총알을 내려다보더니 그 중 3개를 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반대편 선로로 뛰어 내렸다. 오사카 행 JR 열차가 김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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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숲이 있었다. 아까부터 폭우속에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임소봉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으려 했다. 헬기였다. 소봉의 느낌에는 헬기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곤베이의 작전이 이 근처에서 벌어진다는 뜻이 된다.
불안했다.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우 사이로 헬기 두대가 날아오다가 멈추고,날아오다가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헬기 한대는 분명 이 근처에 숨어 있는 거 같았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6대의 페라리가 임소봉 앞을 지나갔다. 그 뒤로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쌍둥이처럼 달라붙은 채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임소봉은 적외선 쌍안경을 자동차안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분명했다. 둘 중 하나는 별장안에서 미친 말처럼 날뛰던 그 스포츠카였다. 임소봉은 화급히 자동차에 올라탔다.
김영진이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저기야! 우선은 저 산으로 올라가 봅시다."
영진은 급히 후진기어를 넣었다. 톨게이트 옆으로 후진해서 올라가자 우측으로 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였다. 자동차는 곧장 방향을 바꾸어서 비포장 도로를 올라 가기 시작했다. 숲 중간쯤에서 별안간 꽝 소리가 들려왔다. 소봉은 급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달려오다 말고 서로 보디를 부딪치고 있었다. 소봉은 창 밖으로 침을 탁 뱉었다. 저것들이 무슨 지랄을 하나,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리야마는 크게 흔들리는 람보르기니를 응시하며 묘한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충격이 컸는지 좌측의 람보르기니가 이번에는 속도를 20Km 아래로 늦추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시끄럽게 경적을 눌렀다.
"뭐야? 포기하는 거야? 얌전한 공주 아가씨. 이제야 겁이 났나 보지?"
그렇게 말하다가 모리야마는 전방을 응시했다. 이정표가 보였다. 인터체인지였다.
그제야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가 아까부터 속도를 늦춘 이유를 알았다.
람보르기니는 하꼬네가 아니라 고속도로로 나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모리야마는 써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쨉싸게 차체가 앞으로 튀어 나가자 동시에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턱.
보기좋게 페라리는 람보르기니의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달리기 시작했다.
모리야마는 히쭉 웃으며 백미러를 응시했다. 이렇게 하면 중간에 인터체인지 쪽으로 방향을 틀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꽝——–
처음으로 람보르기니쪽에서 페라리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유리가 써늘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등골이 오싹했다. 뒤에서 박히기는 처음이었다. 저 꼬마가 미친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리야마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핸들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이 떨렸다. 잠시 한눈을 팔았던거 같았다. 이번에는 람보르기니가 모리야마의 우측을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모리야마를 추월한 뒤 왼쪽으로 다시 들어오겠다는 계산이었다. 톨게이트 입구는 50미터 전방 왼쪽에 있었다.
톨게이트를 내 줄 수 없었다. 모리야마 역시 람보르기니를 따라 속도를 높였다.
"미첬군…저것들…"
헬기안에서 곤베이는 양미간이 수축되었다. 하꼬네에 진입하는 순간 체포할 생각이었다.
"왜 저러는 건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군요. 그 한국 놈이 아닌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곤베이는 서둘러 부하의 쌍안경을 뺐어 들었다. 서치라이트가 스포츠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운전석은 보이지 않았다. 모호했고 참담했다. 이번에는 왼쪽의 스포츠카가 우측 스포츠카를 향해 보디를 움직여 가고 있었다. 폭우속에 붉은 불꽃이 스포츠카 사이에서 발생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람보르기니가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려는 생각인 거 같은데요? 그걸 알고 페라리가 방해하는 거 아닙니까?"
아차 하고 곤베이는 놀랬다. 급히 헬기 앞쪽으로 뛰어갔다. 발 아래로 톨게이트와 인터체인지가 한꺼번에 내려다 보였다. 곤베이는 불끈했다.
"막아! 고속도로를 진입하는 것을 막으란 말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놈이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갈기고 싶었다.
"고공 요원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앙?"
"246번 국도 10Km 남쪽에서 상승중입니다! 10분 정도 더 필요합니다!"
"이 자식들! 게이조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 거야?"
곧바로 게이조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텐바 시내입니다. 밴이 펑크가 났습니다. 이 차로는 역부족입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핸드폰을 와락 집어 던졌다. 그런 뒤 헬기 조종사의 교신기를 뺐어 들었다.
"3번 헬기 듣고 있나! 당장 인터체인지를 방어해. 지금 당장!"
"잡겠습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잡앗!! 람보르기니가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싶으면 타이어에다 대고 갈기란 말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뒤 곤베이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스포츠카 두대는 사이좋게 인터체인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노란색 톨게이트가 반파되어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군…저것들. 아예 톨게이트를 깔아 뭉게 버린거 아냐?"
곤베이는 교신기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귀를 기울였다. 곤베이의 헬기는 로터 소리를 내며 20도 각도로 회전하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상행선 인터체인지의 교각 밑에 숨어있는 3호 헬기가 곤베이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내가 지시한다! 뒤로 움직여! 1미터 뒤로 후진한 뒤 내 지시가 떨어지면 놈을 잡는다. 절대 사고 일으키지 말아. 놈을 생포해야 한다. 알겠나?"
번개가 치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지나면서부터 두 스포츠카는 속도를 높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둘 다 미친 게 분명했다. 인터체인지의 급커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이다! 준비해!"
곤베이가 교신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을 때 모리야마는 다시 왼쪽으로 핸들을 꺾고 있었다. 쾅 소리가 들려 오면서 람보르기니가 인터체인지 교각 왼쪽 난간에 보디를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하늘에서 조명탄이 연커퍼 터지면서 사방이 대낮같이 밝아왔다. 모리야마는 어안벙벙이 되어 조명탄이 터지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순간 펑 소리가 들려오면서 모리야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급히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떼며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람보르기니는 왼쪽 난간을 긁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상했다. 모리야마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50미터 전방에서,인터체인지의 교각 아래쪽에 숨어있던 가와사끼 헬기 한대가 유령처럼 떠오르는게 보였다. 황당했다. 저격총을 겨누는 사내의 모습이 바짝 당겨오자 모리야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속도를 올리려고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그제야 좌측 앞 바뀌에 펑크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늦었다.
오른발이 브레이크를 발작적으로 밟고 있었지만 페라리는 허공으로 붕 떠 오르며 한바퀴 몸을 굴리고 있었다. 그런 뒤 난간 쪽으로 밀려나갔다. 곧이어 큰 충돌이 있었다.
모리야마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페라리는 거꾸로 뒤집어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시트를 꽉 잡은 상태에서 모리야마는 힘겹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번에는 난간을 긁으며 달려오는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의 꽁무니를 힘차게 박아오고 있었다.
페라리는 다시 크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악—!"
모리야마는 뒤집어진 페라리 운전석 안에서 두 눈을 부릅떴다. 페라리는 난간 상단부를 부수며 인터체인지 밖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뒤 헬기의 저격병을 향해 세차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콰쾅————-!!!!

모리야마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크게 뜬 두 눈안으로 눈부신 화염이 황홀하게 몰려왔다. 동시에 헬기가 폭발하면서 생겨난 파편들이 모리야마의 얼굴을 향해 복잡하게 날아왔다. 아직은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불이 붙은 쇠붙이 하나가 모리야마의 목에 사정없이 박혀오는거 같았다. 눈깜짝할 사이였다. 모리야마의 머리는 부서진 차창 밖으로 수박덩어리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큰 폭발이었다.
동부 고속도로 상공은 삽시간에 불덩이에 휩싸였다.
사유리는 불똥을 피해 람보르기니의 핸들을 돌렸다. 화염을 피할수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람보르기니가 반대편 드리프트 현상에 말려 들었다.
팍팍팍——-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사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측 잔디밭 끝에 람보르기니가 박혀 있었다.
사유리는 밤하늘의 헬기를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람보르기니 안에서 기어 나왔다.
폭우가 사유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사유리는 급히 가까이에 있는 숲으로 몸을 숨겼다.
곤베이는 허탈했다. 지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곤베이는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떨구었다. 빌어먹을 역무원 자식이 이제야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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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은 축축했다. 하사 마에다는 헌책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책방 안의 비좁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뿔테 안경은 야릇하게 반짝였다. 와세다 대학 앞에 있는 헌 책방 중 하나였다.
하사 마에다는 원래부터 소심한 남자였다. 형이 운영하는 헌 책방에도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전부터 헌책방에 찾아왔다. 그런 뒤 책방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오전 11시에 눈을 떳을때 마에다는 마끼 준사히가 살아 돌아온 뉴스를 처음 접했다. 믿을 수 없었다. 마끼가 자살극으로 위장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미칠거 같았다. 그녀를 한동안 사모했기에 이제는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즈반도의 요트에서 마끼를 만났을때 그녀는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뒤 불쑥 디스켓 하나를 마에다에게 내밀었다. 지금 읽을 필요는 없어요.
나 당신을 잊지 않을 거에요. 당신은 좋은 친구였지요.
왜…나에게 이것을 주는 거지?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마끼. 너무 과분하군요.
필요한 시기가 되면 디스켓을 읽어 보세요.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합니다.
요트에서의 만남은 행복했다. 로마의 휴일 같은 만남이었다. 마끼가 자신을 불러 준 것 자체가 마에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채팅 프랜드로써는 이렇게 가까워질수 없는 법인데.
마에다는 마끼와 키스를 나누었다. 그런 뒤 요트에서 내려 해안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 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이었다. 요트가 등 뒤에서 폭팔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자살한 줄 알았던 마끼 준사히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에다는 텔레비젼 뉴스를 보면서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컥 겁이 났다. 게이꼬의 죽음까지 겹처서 문제가 보통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숨어 지내고 싶었다. 이대로 책방안에서 화석처럼 굳어 있고 싶었다.
마에다는 일어서다 말고 몸을 비틀거렸다. 그제야 한 가닥 흐름이 잡혔다.
자위대 별반이 역조종을 한다는 뜻일까…
마에다는 온 몸이 떨렸다. 이건 이해하느냐 마느냐의 수준이 아니었다.
설사 자신이 이용당한다 하더라도 군에 대한 충성은 포기할수 없었다. 실상 누가 뭐라고해도 하사 마에다는 육상자위대 1위(대위) 계급을 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별반 요원중 가장 뛰어난 프로그래머였다. 한국인 하나를 지옥속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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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상한 숲은 본 적이 없었다. 사유리는 숨을 할딱이며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처음 입어 보는 정장 투피스가 진흙에 더렵혀지고 있었다.
울컥 울음이 나왔다. 시끄럽게 헬기 소리가 들렸고,왁자지껄 자위대 요원들이 자신를 찾아 숲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페트롤카의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사유리는 무작정 덤불을 헤쳐 갔다. 테니스화가 벗겨졌다. 맨발이었다.
사유리는 화가 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들오들 몸이 떨려왔다. 폭우가 세차게 젖가슴 사이로 흘러 내렸다.
발자국 소리에 사유리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바로 앞에서 사내 둘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오른쪽 키 작은 사내의 손에는 저격용 라이플 총이 들려 있었다. 시큼한 비냄새와 함께 화약냄새가 풍겨왔다.
"당신들은…누구죠?"
"대한민국 안기부요."
"저희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키 작은 사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자,옆에 있는 사내가 일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그 새끼 드럽게 아가씨를 괴롭히더구만."
"페라리 그 친구가 당신을 괴롭혀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잘못하다간 아가씨가 변을 당할 거 같아서 그 자식 내가 혼내줬지."
영진은 소봉의 말을 통역하다가 소봉을 돌아다보았다.
"임형. 지금 이 말도 통역해야 합니까?"
"알아서 하쇼. 영진씨가 어떻게 통역을 하건 난 알아들을 수 없지 않소?"
"임형은 러시아어 외에는 자신있는게 없다는 뜻입니까?"
"워 웨이런 쩡즈 하오쌍 주쯔. 르원 타오엔. 아,쩌 쓰 쭝원."
(내 성격이 대쪽같아서 말이요.일본말은 싫어죽겠다 이거요. 아,이건 중국어요.)
영진은 슬며시 웃으며 다시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경제적인 제의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지켜 드리지요.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설마…? 당신들이 타이어를 펑크 냈나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와락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 중 키가 큰 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와 같이 가시죠. 언니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만."
"나쓰에를 요?"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언니를 위해서라도 우리와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영진을 응시하다가 인터체인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총알 하나로 헬기와 스포츠카를 동시에 박살내다니 말야.
한국에 돌아가면 신사동의 미스 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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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25분. 준은 택시를 타고 오사카 비지니스 파크로 향했다. 폭우가 택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신간선 노조미로 바꾸어 탔기 때문에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창 밖으로 오사카 성이 보였다. 성 위로 폭우를 뚫고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의 테일라이트가 보였다.
비지니스 파크는 오사카 성 뒤에 있었다. 친구는 없었다. 오사카에 기반을 둔 일본 기업의 정보를 전문적으로 훔치는 한국인 동료들는 이미 이곳을 떠나 본국으로 귀국한 뒤였다. 실상 몇년전부터 한국측 스파이의 활동은 상당히 세련되게 변해갔다. 일본친구들 하는 식으로,한국도 <관측 임무를 띈 상사원>을 파견하는 것이다. 이들은 팀을 만들어 특수한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에 접근을 한다. 그런 뒤 구매의사를 먼저 타진한 뒤,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공장을 방문한다. 이때부터 구입할 물건을 관측한다. 카메라 후레쉬가 요란하게 터지고 한편으론 네고세이션(협상)에 들어간다. 물론 실제 협상이 아니다. 협상은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펑크가 난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측은 다량의 사진과 녹음테입을 소유하게 된다. 오사카에 있는 김준의 친구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정보원들이었다.
준은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우메다梅田로 향했다. 동료들이 잘 가는 술집이 소네자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면 누군가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았다. 삼성이나,현대에서 투입한 스파이들 말이다. 어쩌면 지금은 모두 쓰쿠바나 도쿄로 무대를 옮겼을지 모른다. 오사카에 기반을 둔 거대 기업들이 서서히 도쿄로 이주하면서부터 정보원들도 철새처럼 이동을 시작했을 터이니까.
신소네자끼 거리에 도착하자 지금과는 다르게 지저분한 유흥가 야경이 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도쿄의 긴좌 못지 않은 유흥가인 신소네자끼. 폭우속에 행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다니고 있었고,그중 이상하게 깨끗하게 보이는 클럽 바
아메리칸이 보였다.
준이 아메리칸에 들어섰을 때는 베리 메닐로우의 <코파카바나>가 홀안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 융단에 캐나다산 목재 장식,쇼걸은 없고 술냄새도 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무대 위에서 베리 메닐로우처럼 금장 옷을 입은 일본인 가수가 되지도 않는 혀를 놀리며 코파카바나를 영어로 부른다는 점이다.
준은 DAT 워커맨의 스포츠타입 해드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 뒤 한국 상사원으로 보이는 남자를 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없었다. 김준이 스탠드로 다가서자 미국인 바텐더가 그를 알아보았다. 준은 해드폰을 귀에서 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지금도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나?"
"지난 여름 이후로 처음이지요? 여기도 물이 바뀌었습니다. 많이 지저분해 졌지요…"
준은 슬며시 웃으며 투박하게 생긴 잔을 가리켰다. 바텐더는 슬며시 웃었다.
그런 뒤 준이 지난 여름에 즐겨 마시던 마티니를 만들었다.
나디아라는 호스티스는 없었다.
오가타 나디아는 유일하게 김준과 같이 잠을 잔 일본여자였다.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제일그룹 지사 직원이 오사카를 처음 방문한 김준에게 호텔을 잡아 주면서 22살의 나디아를 객실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디아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가슴이 작았다. 바에 있는 여자들은 대개 체리짱이나 캔디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좋아했기에,나디아라는 예명은 준의 기억에 남았다. 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팁은 이미 어젯밤 받았다고 말한 뒤 객실을 나갔다. 그날 밤을 어떻게 지냈는지는 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디아…
왜 하필 그녀는 흑인 여자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을까.
클럽 아메리칸은 1년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변해 있었다. 간사이 국제공항때문에 탈바꿈을 했는지 병맥주도 작은 것이 2,500엔으로 가격이 올랐다. 준은 작은 병 하나를 더 마시고 클럽 밖으로 나왔다. 한국식으로 하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셈이다. 진을 소주로 친다면 말이다.
새벽 4시 23분에 김준은 호텔 니코오사카日航大阪 로비에 서 있었다.
21층. 더블 침대.
산업 스파이 습성이 붙은 뒤로는 호텔에 투숙을 해도 항상 더블룸에 투숙했다.
더블룸은 의심을 받을 확률이 그만큼 적었다. 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카운터에다 찾아오는 여자는 적당히 돌려보내라 말한 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물론 여자가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간혹은 준 스스로가 지하 바에 내려가 여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바에서 끝난다. 바에서 만난 여자는 바에서 해결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온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끝낸 뒤에는 지갑의 돈을 확인해 보았다. 5천불 정도 여유가 있다.
부피가 나갔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수표로 바꾸어 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룸서비스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테이블 위를 보았다. 노트북을 만진 흔적은 없다. 단지 그 위에 올려놓았던 2천엔을 팁으로 알고 눈치 것 가져가 버렸다.
주문했던 대로 폴로 와이셔츠와 내의,워셔블 양복이 도착해 있다. 준은 와이셔츠를 입으며 음식을 응시했다. 계란 스크램블 접시와 치킨 누들 스프,야채 샐러드.
샌드위치는 두 종류였다. 준은 안심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밀어 두고 참치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이번 참치는 일본산이었다.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쿄 신주꾸에는 준의 단골 샌드위치 바가 있었다. 한번은 그곳의 주인이 고래 고기를 샌드위치에 넣어 준의 미각을 시험한 적이 있었다. 준은 그때 일을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일본산 참치가 돌처럼 씹혀 왔다.
준은 침대에 앉아 오른쪽 허벅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어제 오전 중에 병원에 들려 다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 살가죽은 빗물에 부어 있었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 여자와 키 큰 남자. 그러고 보니까 의사는 총탄 자국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야쿠자 하수인 정도로 알았을지 모른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우선은 한국 국방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
사다 마에다가 국방부 컴퓨터를 상대로 모호한 공작을 했다면 이건 김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어쩌면 마에다 그 친구가 김준의 핸드폰을 이용해 사라사테 시스템을 경유 국방부 컴퓨터로 침투한 놈인지도 몰랐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한 손으론 트랙볼 마우스를 조작했다. 곧바로 그가 입력한 인터넷 도메인 네임 2천개가 컬러 액정화면에서 빠르게 스크롤 되었다.

amto.co.jp <日,아지노모토> bpc.co.uk <英. 영국석유>
duksung.ac.kr <덕성 여대> dwe.co.kr <대우 통신>
fanuc.co.jp <日,파낙> goldstar.co.kr <금성>
hyundai.co.kr <현대> dabo.postech.ac.kr <포항 공대 도서관>
jeil.co.kr <제일전자> kaist.ac.kr <카이스트>
ring.kotel.co.kr <하이텔> microsoft.com <美,마이크로소프트사>
nce.nm.kr <한국전산원> nec.re.jp <日,NEC 연구소>
nkk.co.jp <日,일본강관> nowcom.co.kr <나우컴>
rhone.re.fr <佛,롱프랑 연구소> samsung.co.kr <삼성>
spacelink.msfc.nasa.gov <美,NASA> stis.nsf.gov. <美,과학기술정보>
…………

제일그룹과 마찬가지로 금성,대우,삼성,현대 등 기업들은 자체 인터넷 도메인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대개의 대학도 자체적인 인터넷 도메인을 보유하고 있고,각 연구소도 마찬가지다. co는 회사를,ac는 학교를 의미했고,re과 gov는 연구단체와 정부기관을 의미한다. 뒤에 있는 kr은 코리아,즉 한국에 있는 도메인을 뜻한다.
준은 도메인 이름을 훑어보았다. 국방부로 침투할때 걸어 놓을수 있는 도메인을 찾고 있었지만 다시금 쓴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 국방부에 침입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에다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예 화이도넷Fido-Net에 돈을 퍼주고 의뢰할 수 있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뒤 유닉스라는 OS(오퍼레이팅 시스템)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통신망인 인터넷은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은 자의건 타의건 유닉스라는 공통분모로 구축된 게릴라적인 통신망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화이도넷은 그 의미가 달랐다. 화이도넷은 사설 BBS의 하나로,전세계에 퍼져있는 사설 BBS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설 BBS였다. 한국에서는 주로 미 8군에 의해 화이도넷망이 형성돼 가고 있었는데,아쉽게도 화이도넷 망에는 김준의 친구가 없었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김준은 화이도넷과는 견원지간이라 할수 있었다. 10년전만 해도 김준은 하이도넷을 놀이터로 알고 있었으니까.
준은 현기증이 일어났다. 인간관계에는 적당한 인터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
준은 머리를 식힐 겸 고종수에게 전자편지를 보냈다.

>> jsko$jeil.co.kr
>> 현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설명해 주시오.
>> +<:-( <난 수녀처럼 울고 있다…>

준은 타이핑을 끝낸 뒤 창 밖을 보았다. 한현희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유리의 상황도 궁금했다. 무사히 탈출하면 삐삐를 쳐 오기로 했는데 삐삐는 울리지 않았다. 비쩍 입천장이 말라갔다.
준은 노트북을 덮고 양복을 걸친 뒤 객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곧바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32층으로 올라갔다. 제트 스트림에서 시끄럽게 음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오사카 야경은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준은 오사카에 올때마다 이 호텔에 투숙한 뒤 제트 스트림으로 산책을 나왔다. 더구나 제트 스트림은 롯본기에 있는 일류 디스코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아침. 6시.
준은 고글을 걸친 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고글을 쓰는 습관은 모니터에 눈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반 사람들은 모니터에서 튀어나오는 전자파를 의식하는데 실상 전자파보다는 자외선이 오히려 나쁜 것이었다. 자외선은 시력을 급속도로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UV 코팅이 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모니터를 응시하는 버릇이 어렸을 때부터 생겨났는데,이게 후에는 오토바이 취미와 맞물리면서 고글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고글을 착용한다는 것은 준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업은 오사카 스카이라인 위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가운데 한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 – ———— – ———– – ————

호리시마 3위(소위)는 방수(傍受:도청)장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호리시마는 자위대 육상막료감부 조사 2부 별실의 전파방수요원이었다. 교대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안타까운듯 신음을 토하며 어젯밤 도청한 내용을 중간중간에 컴퓨터에 입력을 했다.
북한,러시아의 동태를 감시하는 미호 통신소나,한국정보를 전방위로 체크하는 다치아라이 통신소처럼 호리시마 3위가 소속된 기카이지마喜界島 통신소는 고유한 목적이 있었다. 중국 육해군의 움직임을 방수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해상자위대가 소유한 해저고정형 청음기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의해 잠수함의 움직임까지 파악 분석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전수방위라는 개념에 의해 YS-11전자첩보기와 RF-4c 정찰기가 각종 카메라장비와 나이키 등 지대공 미사일의 전파를 방해하는 장비를 실고 떠 다녔다.
그렇게 육해공 자위대가 날려오는 정보를 종합적으로 관리 분석하는 것이 호리시마의 임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호리시마는 이날 오후부터 8시간 동안 기존 임무와는 다르게 캠프 슈와프를 비롯한 캠프 한센,캠프 코토니 등 오키나와 주둔의 주일 미군기지를 집중 방수하고 있었다. 성과는 없었다. 동급해커가 주일 미군기지에 침투한다는 정보가 있은 뒤로 계속된 방수작업이었다. 하지만 동급해커는 어잿밤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호리시마는 졸린 듯 창 밖을 내다보았다. 3개소의 안테나 어레이(CDAA)가 회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테나 어레이 3개가 복잡하게 교차하면 통신발신지는 물론 통신내용까지 파악할수 있었는데,이는 1983년에 발생한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에서 이미 입증이 되었다. 아니 일본 자위대의 전파 도청 능력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이미 1905년 이전에 동해에서는 마르코니식 통신장비를 사용하는 일본 해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함대간의 통신을 도청해 내기도 했다.
따분했는지 호리시마는 좌우로 근무중인 10명의 동료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자신의 방수장비를 응시했다. 그때 낮익은 전파 파형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단파라고 생각했지만 단파 파형이 아니었다.
급히 호리시마 3위는 전화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는 신속하게 내각정보국 전산실로 연결되었다. 이 전화는 자위대 별반이 도청할수 없는 전화였지만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놀렸다.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코끼리라 불리는 안테나 어레이 사이로 시린 바다가 보였다. 아침 7시를 기해 태풍은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그 바다 위로 날렵하게 생긴 시 해리어가 날아오다가 호리시마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서 오키나와 가테나 기지로 이주한 미 18 항공단 소속의 수직이착륙기였다.
아침 폭우때문에 항로를 잃은 것 같았다.
통화 중간에 호리시마는 엉겁결에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인터넷의 텔네트Telnet를 이용한 원격 시스템 접속Login. 누군가가 리모트로 호리시마가 응시하고 있는 컴퓨터에 침입한 뒤 데이터를 급속하게 먹어 오고 있었다. 호리시마는 그저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짧게 신음을 토했다.
"동급해커다…!!"
호리시마는 급히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런 뒤 동료들을 돌아다보았다.
그들도 모두 얼굴이 빨개진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료들 컴퓨터도 모두 동급해커의 기습을 받고 있었던 게다.
그로부터 10분 뒤. 한국정보를 강압적으로 도청하는 다치아라이 통신소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자,기다렸다는 듯이 방위청 지하센터 스태프 70명이 동시에 동급해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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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위성 모양의 아이콘이 반짝였다. 준은 긴급히 하던 작업을 중단했다.
1년전 과는 뭔가 달랐다. 어느 쪽에서 추적을 해오는지 김준은 알지 못했다.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이번에는 자위대 통신소가 핸드폰 발신지를 서슴없이 추적해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다치아라이 통신소는 지금 이 시각 일본 국내에 있는 모든 핸드폰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준은 식은 땀을 흘렸다.
시간을 다시 채크해 보았다. 이들은 김준이 남긴 아이디를 곧바로 발견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다른 쪽에서 동급해커가 움직이고 있었다면 이들도 동급해커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에다. 한방 먹이고 싶었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방금전 했던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키보드를 두들겼다. 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극동지역을 포괄적으로 감시하는 자위대 통신소 자료가 차갑게 액정화면에 떠올랐다.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다치아라이 통신소는 며칠전부터 대한민국 상황을 매우 정밀하게 관측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비상사태인지 구분할수는 없었다. 매우 정밀했기 때문에 준은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미 8군과 연합으로 한국 상황을 관측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비로소 준은 자신이 철저하게 함정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아이디 12개는 철저하게 누군가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는데,그중 일부는 대한민국 국방부를 공략했고,다른 일부는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그리고 다른 일부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공략하는데 이용되고 있었다. 이것이 지난 이틀동안 벌어진 일인거 같았다.
준은 난감했다. 머리 속이 지끈거렸다. 온 몸이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배후에 사다 마에다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숙집에서 한두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마에다는 그릇이 큰 친구가 아니었다.
준은 마에다의 아이디가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니프티서브에 접속을 시도했다.
접속하자마자 화면 하단부에 <오빠. 돌아와 주세요…> 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준은 20도 각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게시판으로 이동해보니까 메시지에 대한 항의성 게시물이 어제 아침부터 올라와 있다.
준은 의문을 접어 둔 채,하사 마에다를 찾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니프티서브에는 그의 아이디가 존재하지 않았다.

방위청 직원이라면…

준은 마끼의 말을 뒤늦게 생각하며 급히 접속을 끊었다. 곧바로 방위청 컴퓨터 플랫폼이 준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준은 바짝 긴장한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고글을 벗으며 짧게 들어오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왼손은 어느새 권총을 쥐고 허리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여차 하면 한방 쏠 기분이었다.
크림색 모피 코트에,입술은 분홍색. 크고 맑은 눈을 가진 가진 여자가 불쑥 출입문을 열고 들어 왔다.
나디아였다.
"하이. 오랜만이군요. 저 기억나시나요?"
준은 허탈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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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저 이야기 SOLDIER’S 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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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이 오카다 나디아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고 있을 때 아크힐스 33층의 국가 안전 기획부 임시캠프는 뜨겁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처단자> 바이러스를 안기부 망에 유포한 해커를 역추적해서 실제로 처단했다는 7명의 전산 요원들은 각각 A,B,C조로 나뉘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A팀은 한국 정세를,B팀은 일본 정보를 조사중이었고,C팀은 북경대학 단말기를 경유해 북한의 평양정보센터(PIC)와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가히 안기부 최강의 메이저리그 전산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라핑버드 작전((operation laughing bird:안기부가 미국,일본을 상대로 벌인 산업스파이 공작중 하나.) 이후로 가장 강력한 전산팀인지 모른다.

== 경고. 그런 아이디는 없습네다. ==

C조 전산요원 두명은 아까부터 평양정보센터에 접속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예전에 사용해 본 <인민무력>이라는 아이디가 계속 먹통이었던 것이다.
식은 땀이 났다. 이것들이 우리들이 안기부라는 것을 눈치 챈 건가?…

== 경고. 동무의 당성이 의심스럽습네다. ==

이 친구야. 그건 당연한 거야. 우린 남조선 안기부라니까 그라네…
C조 전산요원 두명은 바짝 긴장했다. 가끔씩 평양정보센터 전산망에 침투할 때마다 떠오르는 엉뚱한 문구들…60대식 문구였지만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처 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10여분정도 흐르자 이들은 아이디 하나를 해킹한 뒤 북한의 평양정보센터로 침투할 수 있었다. 5분 정도 여유가 있을 거 같았다. 왼쪽에 앉아있는 요원은 초속 100마일로 로그 파일을 추적하기 시작했고,오른쪽 요원은 감시를 했다. 그런 뒤 막 작업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초침이 돌아가는 가 싶더니 별안간 모니터 하단부에서 붉은 문자가 불쑥 떠올랐다.

== 동무의 하드디스크를 접수하겠습네다. ==

의외로 빨랐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요원이 번개에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리고 있자, 왼쪽 요원이 잽싸게 전화선을 뽑았다. 동시에 평양정보센터 측에서 하드디스크를 먹어오다가 차단되는 것이 보였다.
같은 시각. 진광섭은 엘리베이터에서 축축한 양복차림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윤춘해와 다른 기관원이 따르고 있었다.
광섭은 사무실로 들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남쪽 복도를 따라 요원 둘이 이곳에서 잠을 잔 뒤 깨어난 나쓰에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광섭은 나쓰에를 바라보다가,다시 아까부터 머릿속을 괴롭힌 것을 정리해 보았다.
오늘 새벽 후지산에서 돌아오던 중에 7과 과장의 긴급 연락이 있었다. 북한측에서 지역공작을 강화했다는 소식과 함께 북한의 군사력이 이틀전부터 은밀하게 전방배치 되어 왔다는 연락이었다. 이로 보아 북한측에서도 한국 측 사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가까운 시간 내에 남한 쪽이 미사일 하나를 날려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지 모른다.
진광섭은 불안했다. 일본에 오기 전 장관 면담시에 확언했었다. 사건이 확대되기 전에 김준을 송환하겠다 했는데.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젠 김준이 동급해커인지 아닌지 조차 단정할수 없었다.
오늘 아침 마이니찌 신문 내용도 그랬다. 한반도 상황을 조심스럽게 예측했다는 기사인데 해커 이야기를 슬며시 암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시답지 않은 기사도 다 보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놈이 쥐새끼 같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 과장의 말로는 일본 측 컴퓨터 망에도 <동급해커>가 야릇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광섭은 쓴 웃음을 지으며 예의 이사벨 아자니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콧등에 착용했다. 나쓰에가 끌려가다 말고 그에게 불쑥 말을 던져왔다.
"사즈메는…내 동생은 어떻게 된 거죠?"
광섭은 물끄러미 선글라스 너머로 나쓰에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무시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쓰에는 한방 맞은 듯 진광섭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구 비명을 지르며 소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차력인가 뭔가를 했다는 안기부 요원 하나가 나쓰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팔을 꺾었다가 다시 온전하게 펴는 기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쓰에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광섭은 나쓰에가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좌측 끝방으로 끌려가는 것을 본뒤, 몸을 돌려 전산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곧바로 오른쪽에서부터 전산요원 7명이 스프링처럼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연락 없었나?"
"없습니다. 국방부나 캠프 데이비드는 지금도 비상이 걸려있는 상태입니다.
어제는 다시 10명의 전산 요원이 투입되어 총력전을 벌였습니다만 국방부 라인은 여지껏 먹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별 잡범까지 다 들락날락한다고 합니다만."
광섭은 벌래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선글라스가 야릇하게 빛을 반사했다.
"새벽에는 오산 미군기지에 들어 왔다더니,아까 일본 컴퓨터 망에도 침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거야? 인덱스 데이터를 분석해 보았나?"
"방금 끝났습니다."
서둘러 B조 요원 하나가 프린팅 용지를 읽어 내려갔다.
"동급해커는 모두 5군데에다 순차적으로 아이디를 남겨 놓았습니다. 시간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시15분 정각에 미호 통신소 주컴퓨터에 침투 아이디를 남겼고,6시 25분에 고후나토통신소로 이동,2분 뒤에는 경시청 컴퓨터로 이동한 뒤 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45분 경에는 기카이지마 통신소에 침투한 뒤 아이디를 남겼고,53분 경에는 다치아라이 통신소로 급히 이동한 뒤 아이디를 남겼습니다."
다시 얼굴이 후끈거렸다. 광섭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건 모두 자위대가 소유한 전파도청시설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한국 국방부를 노리고 일본 자위대를 노리는 것일까.
어쩌면 두사람이란 뜻도 있는지 모른다.
"혹시 두사람 아냐? 하나는 진짜고,하나는 가짜 아냐?"
윤춘해가 끼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요. 다른 사람이 김준의 아이디를 사용 안한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그럼 문제가 더 커진다는 건데. 김준의 정체를 알고 그의 아이디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해커라면 김준보다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오?"
"글쎄요. 거기까지는…"
전산요원이 말했다.
"이건 다른 각도입니다만. 트로이목마(위장 파일)를 사용하면 한사람이 동시에 양쪽 컴퓨터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시한폭탄을 걸어 논다는 뜻인가?"
"그런 셈입니다. 비디오의 예약녹화처럼,시간을 정해놓고 아이디가 자동으로 인덱스에 걸리게금 하는 잔기술이 있습니다. 물론 전문가나 할수 있습니다만…"
"그럼 그 가능성도 찾아봐. 그런데 가나기원에서는 아직 연락 없었나?"
"있었습니다만. 마에다는 지금까지 귀가를 하지 않았답니다."
"이상운 그 자식,또 그 잘난 전봇대 자랑하려고 터키탕에 간 거 아냐? 그 자식 당장 호출하지 못하겠나? 앙?"
광섭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 하사 마에다가 복잡하게 관련된 거 같은데 어제 오전부터 오리무중이었다. 윤춘해가 뽑아온 디스켓에 마에다의 지문이 있는 이상 그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혹시 방위청에서 마에다를 뒤로 빼돌린 것이 아닐까.
다시 이마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일본 자위대 청년장교단이 관련된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일본 극우파까지 사정거리가 된다. 진광섭은 식은 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정밀한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는것 같았다.
광섭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임소봉을 호출했다. 임소봉과 통화를 끝낸 뒤 이번에는 윤춘해를 불렀다.
"윤형이 한번 더 수고해야겠소. 하사 마에다의 가족관계를 파악한 뒤,다른 각도로 수배를 해 보시오. 적어도 11시까지는 끝내 주어야겠소만."
"노력해 보겠소. 하지만 별 기대는 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뒤 춘해는 서둘러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20분. 11시까지는 4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그 4시간 안에 하사 마에다를 잡으라니 이건 엿먹으라는 소리다.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잔뜩 부어있는 입가를 문지르며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윤춘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광섭은 몸을 돌려 전산실 왼쪽 벽에 있는 정수기를 향해 걸어갔다. 종이컵에 물이 가득 찼다. 차가웠다.
역시 김준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이 불안했다. 놈이 한국과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상대로 동시에 농간을 부리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어쩌면 북한 측 컴퓨터에도 접근을 했는지 모른다.
진광섭이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나쓰에가 앉아있는 사무실로 발을 옮길 무렵이었다. 아까부터 평양정보센터와 씨름을 하던 C조 전산요원중 한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과장님! 북한 쪽도 이상한데요?"
"뭐야?"
"방금 평양정보센터 중앙 시스템을 잡아 보았는데요. 그쪽에도 동급해커가 놀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럴리가 있나!!"
광섭은 C조 요원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양정보센터 컴퓨터에 기록된 인텍스파일이 그의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스크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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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나디아는 20평 남짓한 객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다리는 하이힐의 굽을 이기지 못하는지 묘하게 흔들렸다. 10여분 정도 그렇게 말이 없더니 나디아는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니 잠깐 어색했던거 같군요."
"지난 겨울 이후로는 처음인것 같군. 마지막은 바에서 만난 걸로 아는데."
준은 슬며시 권총을 허리 뒤 벨트 안에 감추었다. 나디아는 보지 못했다.
"이 호텔이었죠. 3번…아니 4번 정도 만났던가요."
"요즘은 어때? 아직도 바에 출근하나?"
준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로 걸어갔다. 나디아는 준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요? 어젯밤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나 보죠?"
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트북이 그의 등뒤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친구가 비지니스 파크에 없더군. 사실 나디아를 만날 시간이 없었지만."
"그 분은 이곳을 떠났어요. 본국으로 돌아가 무역업무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어떻게 내가 오사카에 온 것을 안 거지? 바텐더가 알려 주었나?"
"이번에는 아니에요."
"비지니스 파크에 있는 오피스텔은?"
"짐을 옮겼어요."
준은 나디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있을거야. 아침식사를 안했으면 같이 한큐에 가볼까?"
"그럴 시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준은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나디아를 보았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디아는 차갑게 얼굴을 찡그렸다.
"저 제일그룹 일본지사에서 보내서 왔어요. 이틀 전부터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고?"
"한현희라는 분이 메시지를 보내왔더군요."
준은 둔기에라도 얻어맞은 듯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나디아가 제일그룹이 포섭한 현지 스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디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술집 여자들은 대개 각국 스파이로 포섭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저는 바 여자가 아닙니다. 처음에 교육받기를 술집 여자로 교육을 받은 거지요.
그것보다는 우선 식사를 하죠. 사실 저 역시 배가 고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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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동해에서 이동해오는 먹구름 대가 지나가면서 비를 뿌리고 있었다.
고종수는 이날 아침도 일찍 출근하자마자 정보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을 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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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Sun 24 March 1996 04:56:17
From: ‘wolf’ <wolf@sexygirl.co.jp>
To: jsko@jeil.co.kr
Subject: letter

현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설명해 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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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뭔지..
고종수는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를 악 물었다. 종수는 마우스를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뒤 <수녀가 울고 있다>라는 뜻을 가진 인터넷 용어 +<:-( 를 크릭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감추어 진 편지가 떠 올랐다.
10초 간격을 두고 전자메일을 겹쳐보내는 수법은 김준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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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Sun 24 March 1996 04:56:27
From: ‘wolf’ <wolf@sexygirl.co.jp>
To: jsko@jeil.co.kr
Subject: letter

오늘 오후에 네덜란드로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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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초록색 와이셔츠에 물기가 촉촉하게 젖은 상태에서 두번째 메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뒤 멜빵을 풀어 책상 서랍안에 넣고 머리 속을 정리했다.
한현희 남매와는 이틀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한대리를 통해 준을 도와줄 만한 인물들 명단을 보내긴 했지만 이 전자메일을 보내올 때까지는 아직 접촉을 하지 않은 거 같았다. 불안했다. 한대리같이 여린 친구를 믿어야 했을까.
고종수는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튼튼한 체격을 가진 장년 두명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종수는 급히 모니터 전원을 끄고 두 장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기부 측에서 이틀전부터 파견한 기관원이었다.
"네덜란드로 간다는 메시지,옆방에서 보았소. 근데 그거 속임수 아니요?"
종수는 울컥 화가 나려는 것을 참았다.
"글쎄요. 그 친구 생각을 제가 알겠습니까."
"이러지 맙시다.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이젠 송환하는데 협조를 해 주시오."
"말하지 않았소? 난 그 친구 연락처를 알 수 없소. 그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단 말이요."
갑자기 오른쪽에 서있는 키 큰 사내가 발길질을 해왔다.
"이 새끼. 이거 제정신 있는 거야? 너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전쟁이 일어난다 뭐한다 하는 그런 상황이란 말야!!"
고종수는 키 큰 사내를 올려다보다가,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앞으로 내 책상을 차려면 구두나 닦고 차시오."
이미 고종수는 젊잔은 무늬가 있는 트위드 재킷을 걸친 뒤 사내들 사이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내는 종수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키 작은 쪽이 불쑥 키 큰 사내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구두가 더러운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형. 지금 내 구두를 쳐다볼 때입니까? 아침에 연락 안 받았어요? 김준 그 자식이 어젯밤에도 국방부 컴퓨터에 들어왔다는 거 말이요."
"김준이 아니야. 우린 고종수만 밀착 감시하면 되."
구두가 깨끗한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한 뒤 고종수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런 뒤 수첩을 꺼내 <멜빵> 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 외에는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윽고 조사가 끝나자 그는 안기부 7과에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전자메일의 내용이 자세하게 보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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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루 사이에 각 통신망에서 사냥을 나오고 있었다.
한두명이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그물을 걸고 그녀가 걸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피시 밴에 뿌린 바이러스는 이미 제거된 후였다. 미나는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꺾었다. 화가 났다. 또 다시 그녀의 입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꾸쯔가노 히토타치가 와타시다지오 센노오시타. 와다시와 막가사아노 가와다따. 지붕다치오 지세키사세,미즈카라노 진세이오 다메니시타.
(몇 놈이 우릴 세뇌시켰어. 맥아더와 손잡고 우릴 자책시켰고,내 인생을 망쳤지.)
미로,고노박가야로메! 니혼노 GNP와 아지아가크코크노 GNP오아와세타요리 삼바이모스른다. 니혼가 세까이이찌다. 신지라레루모노와 오사노 세스께 시카이나이…
(보라,멍청이들아. 일본 GNP는 아시아 각국의 GNP 전부를 합친 것의 3배에 달하고 있다. 일본은 최고다. 믿을 사람은 오사노 세스케 밖에 없다.)
니혼와 한세이스르리유우가나이. 와다시와 소우신지테이루…"
(일본은 반성할 이유가 없다. 난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다….)
미나는 잔뜩 열을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가 났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말고 미나는 라이터를 던졌다. 팍,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서있는 차단스가 다시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노박가야로메…고노박가야로메…
미나는 머리카락을 미친 여자처럼 산발한 채 쉴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누구를 향한 욕설인지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저 죄의식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할머니의 의식이 그녀에게 이미 옮겨갔는지도 모른다.
후꾸오 미나는 그렇게 울었다. 오빠 하야시를 찾고 싶었다. 이 사랑은 오빠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오빠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었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죽이는 수 밖에 없었다.
미나는 불끈 고개를 처 들었다. 우선은 하야시가 숨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미나는 풍만한 몸을 비틀거리며 다락방으로 올라 갔다.
라면박스. 기타….작은 냉장고…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미나는 다락방 내부를 빠른 속도로 훑어 보았다. 그러다가 냉장고 위에 구겨져 버려져 있는 프린팅 용지를 발견했다. 미나는 서둘러 프린팅 용지를 펴 보았다.

하야시는 귀를 쫑긋했다. 쥐처럼 그의 눈알이 반짝였다. 소화불량에 걸린 거 같았다. 어제 오전부터 먹어온 밀가루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바닥에 물기가 고이면서 지하실은 습기가 가득차 오고 있었다.
하야시는 어제 하루종일 미나가 걸어 놓은 덧을 피해 니프티서브 통신망안을 돌아 다녔다. 미나는 교묘하게 하야시가 이용하는 전화선을 알아내 그것에다가 역추적 소프트웨어를 걸어놓고 있었다. 이때문에 하야시는 또 다시 다른 핸드폰 하나를 해킹해야만 했다. 그런 뒤 니프티서브사 자료실을 돌아다니며 지하철 철로망에 관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는데,불현듯 작년에 발생한 진리교 사건이 떠올랐다. 지하철 전복이 불가능하다면 화학가스로 하사 마에다를 공격하는 것은 어떨까. 이 때문에 하야시는 이날 새벽부터 작업방향을 전향했다. 우선은 수십종의 서적을 다운 받기 시작했다. 법의학,생화학,추리소설,만화. 그리고 매춘과 관계된 책자였다.
매춘과 관계된 책자를 다운 받을때는 다시 미나가 뿌려 놓은 메시지가 하야시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야 하야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미나가 하야시의 취미를 알고 <매춘 파일>을 다운 받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추적하는것이 분명했다. 집요한 추적이었다.
"미나. 내가 미운가…"
하야시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 철문에 귀를 기울였다. 항상 들려오던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고,얇게 비를 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미나가 다락방을 내려와 자기 방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꽝꽝거리는 발소리였다.
하야시는 계단에서 내려온 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제야 하야시는 또 다른 날의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풍겨오는데…
하야시는 모니터를 응시하다가,얼굴을 발작적으로 찡그렸다.
하사 마에다.
그를 살해하지 못한다면 난 이 지하실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야시는 다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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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성 공원안은 노란 개나리꽃 유니폼을 입은 유치원 원아들이 이슬비를 피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준과 나디아는 한큐 3번가에서 아침을 먹은 뒤 이곳으로 왔다. 아까부터 나디아는 현상황을 김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빗방울이 미세하게 걸려 있었다.
"한국은 지금 준 전시상태에요. 새벽판 마이니찌 신문 읽지 않았어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요. 이는 3일전부터 보이는 거라는 군요,"
"지사 상황은 어떤거 같소?"
"제일그룹 도쿄지사는 엉망이에요. 한현희는 그저께 밤부터 행방불명입니다.
나에게 연락을 한 뒤 3시간 후에 사라진 거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제일지사는 안기부쪽이 장악했다는 거 같아요. 저도 그 이상 알아내지 못했어요."
"한현희가 나에게 알려주라는 메모는 없었소?"
"세가지였어요. 첫째 괌에서 미 8군 항공모함이 이쪽으로 이동중이라고 하는군요. 둘째. 이러한 미 8군 병력이 어느쪽에 투입이 될지 모른다고 합니다.
세째. 북한 컴퓨터에도 해커가 준동을 한다고 해요. 그쪽 컴퓨터에도 당신 아이디가 이용되고 있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언제 연락을 받았다고 했소? 정확하게 알려 주겠소?"
"이틀전 오후였어요. 어떻게 내 전화를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런 뒤 팩스를 날려 왔었죠."
"당신이 알아낸 정보는 없소?"
"글쎄요. 당신이 오사카에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을 뿐이에요. 하기야 이 정보를 전달하는 조건으로 난 50만엔을 이미 받았어요. 돈은 챙겼고,이젠 저도 할 일이 없는 거군요."
"내가 배팅을 높인다면?"
"내가 가진 정보를 사겠다는 건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요. 나를 도와달라는 뜻이요."
"좋아요. 그럼 배팅을 한번 걸어보시죠."
"두배…"
"마음에 안드는 군요. 하지만 계약을 하지요."
"고맙소. 이제 당신이 조사한 것을 알려주시오. 아니 감추고 있는 것을…"
"눈치가 빠르군요."
"난 눈치로는 먹고 살 능력이 없는 남자요."
"한현희씨가 알려준 메시지로는 상황을 정확히 알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틀동안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보았어요. 첫쩨. 제가 알기로 괌에서 이동중인 미 8군 함대는 이지스급이에요. 그러니까 막대한 화력이라는 거죠. 이 화력이 움직이는 이유를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어요. 공식적으론 어제 밤에 미 국무부쪽에서 브리핑이 있었지요. 10일전에 끝났어야 할 일미연합훈련을 연장한다는 발표였지만 그것만은 아닌거 같아요. 내가 보기엔 일종의 참전 의사로 보였어요. 그러니까 극동사태를 미리 준비한다는 거에요. 즉 곧 전쟁이 발발한다는 생각인거 같았어요.
둘째. 한현희씨는 미 8군이 어느쪽에 투입되는지 모른다고 했지요. 저는 이게 무슨 말인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도서관을 들어가 뒤져보았지요. 이유는 간단하더군요. 남북한이 개전했을때 미국의 입장이 갈라지는 거 같았어요. 무슨 말이냐면 미 8군은 현재 북조선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한다는 뜻이지요. 이걸 한현희씨가 미리 알아낸 거 같았어요. 똑똑한 여자지요. 해커가 북조선 미사일을 한국에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일본에다가도 여차하면 날린다고 계산한 거에요. 그 이유를 알수 없지만 한현희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어요."
셋째. 북조선 컴퓨터에도 당신 아이디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이것은 제가 조사를 할수 없었어요. 제 전공이 국제정치학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래요."
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여자를 술집 여자라고 오해했던 자기 자신이 이상했다. 그땐 아마도 머리가 돌았던 게야.
"내 아이디가 그런 방향으로 이용된다고는 생각 못했는데?"
"확실해요. 그 해커는 당신 아이디를 빌려 공작을 하고 있어요. 그가 곤란을 느끼는 것은 어느쪽 미사일을 먼저 발사시켜서 이 단추전쟁을 시작하는 거냐는 것이죠."
준은 나디아를 보았다. 어디서 정보를 얻어 왔을까. 준은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결국 미치광이 해커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거군."
"그래요. 하지만 이해할수 없어요. 무얼 잘못했길래 당신 아이디가 이용되는 것이죠?"
"호텔로 가 봅시다. 내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준은 택시를 잡았다. 나디아가 먼저 택시에 올라탔다. 이슬비가 택시 차창을 가볍게 두들겼다. 나디아는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거라니?"
"그날밤 저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모르겠는데. 난 기억이 나지 않소."
"술집 여자를 싫어하나요?"
"솔직히 가슴이 작았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탁구공 만했거든."
나디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준을 응시했다. 준은 나디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배팅을 걸었는데 난 참는 쪽에 걸었던 거 같소."
"난 당신을 흥분시킨 뒤 거절하는 쪽으로 배팅을 걸었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요? 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모르겠는데."
"당신은 종마처럼 덤벼 들었어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현듯 겁이 나더군요.
그래서 욕실에 들어가서 수면제를 탔어요. 당신은 곧바로 기절했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우울한 눈은 나디아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디아의 작은 가슴으로 이동을 했다.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다.
"결국 당신은 돈을 받아 냈나? 나를 잔뜩 흥분시킨 뒤 그냥 나갔을 테니까."
"아니에요. 당신이 그 친구에게 돈을 주는 바람에 난 돈을 받아내지 못했어요. 그 친구는 아직도 내가 당신과 잠을 잔걸로 알고 있어요."
"그랬구만."
준은 비쩍 웃으며 다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어디 출신이요? 아무래도 한국계인거 같은데?"
나디아는 짧게 대답했다.
"부모님이 북조선 출신이에요. 조총련계."
준은 왼쪽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북한은 공기가 좋은 건가?"
그러자 나디아의 음성이 준의 귀에 들려왔다.
"물이 좋아요. 하지만…남조선도 물이 좋은가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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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었다. 이슬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가운데 윤춘해와 이상운을 태운 랜드 크루즈 한대가 빠른 속도로 와세다 대학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춘해형? 사실이요? 북한에서 군대를 전방 배치한다는 거 말이요."
이상운은 잔득 피로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춘해에게 물었다.
"몰라. 이거 그 자식 때문에 나라 꼴이 영 말이 아니란 말야."
"마에다를 잡아들인다고 되겠소? 한놈 잡는 다고 이거…"
"본국만 문제가 있는게 아닌거 같아. 이쪽 방위청도 지금 비상사태야. 이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마에다 이놈 잡으면 당장 요절을 내서라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야겠어…"
랜드 크루저는 오전 11시 정각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서점 앞에 멈추었다.
윤춘해와 이상운,황영달은 서둘러 랜드 크루저에서 뛰어 내렸다. 그런 뒤 서점 문을 꽝꽝 두들겼다.
같은 시각. 하사 마에다를 태운 르노 에스파스 밴은 고속도로를 타고 도쿄 외각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하사 마에다는 에스파스의 뒤좌석에 앉아 있었고, 에스파스 운전석에는 단발머리의 여군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제1교육단 소속의 호리시마 란조 2위였다.
란조 2위가 마에다를 찾아 온것은 오전 9시경이었다.
"란조 2위. 나보고 에스파스 안에서 작업을 하란 말인가…?"
마에다는 봉고차처럼 생긴 에스파스 밴에 올라타면서 군인 정신을 되찾았다. 불쑥 화가 났다.
"별반 지시입니다. 한국측에서 1위님을 추적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런가? 거기 뿐만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내각정보국도 곧 1위님을 추적해 올 겁니다."
마에다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는 란조 2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란조 2위와는 3년만에 대면하는 거였다. 별반 전산팀이 한참 주가를 높이고 있을 때 란조 2위는 그의 파트너였다. 그런 그녀가 3년만에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에다는 다시 에스파스 안을 둘러보았다. 뒷좌석에는 휴대용 위성송수신망을 비롯해 중형 컴퓨터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들어차 있다. 우울했다. 이제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마에다는 느낄 수 있었다. 마에다가 죽지 않는다면 지하철이 그를 죽일 것이고,그렇지 않는다면 지금 운전하고 있는 여자가 그를 죽일 것이다.
마에다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중형컴퓨터와 연결했다.

그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은 하사 마에다가 진정으로 바랬던—
메이저리그 경기였다.

———- – ———– – ———— – ———–

나디아는 김준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손은 DAT 워커맨의 밧데리 케이스를 열어 젖힌 뒤 무엇인가를 그 안에서 뽑아내고 있었다.
휴대용 하드디스크에서 볼 수 있는 케이블선이었다.
"그걸 컴퓨터에 연결한다는 것인가요?"
나디아는 어안벙벙이 된 얼굴로 준에게 물었다.
"그렇소. DAT 백업 드라이브요. 유닉스를 사용하는 프로그래머들은 대개 DAT 테입을 백업 드라이브로 사용하오. 일반 광자기 디스켓보다 작으면서 용량도 무시 못하니까 말이요."
준은 워커맨에서 나온 케이블을 노트북 컴퓨터 뒤에 있는 프린터 포트에 연결했다. 그런 다음에 노트북 케이스 바닥 부분을 손으로 열었다. 조그만 상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DAT 녹음테입이 들어 있었다.
준은 작고 정밀하게 생긴 DAT 테입을 워커맨에 삽입한 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노트북 화면으로 문자가 스크롤되어 올라갔다.
"믿을 수가 없군요. 이건 정말…"
"백과사전 한권 분량의 문건이요. 방위청 일급 비밀 중 몇가지를 필요에 의해 백업을 받아 놓았소. 1년 전 일입니다만."
"일미 방위협력 가이드라인이군요."
"일미 안보합동위원회는 95년도 중반까지 회의를 한 뒤 해체되었소. 그 다음에 생긴 게 일미 안보강화협의였소. 지금 이 서류는 그들이 남긴 조약중 일부요."
그렇게 말을 이으면서 준은 계속 키보드를 두들겨 나갔다. 모호하고,판독이 어려울거 같은 서류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은밀하게 화면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초록색 문건에서 화면은 갑자기 정지했다.

>> 한반도 사태가 일본으로 파급되는 경우
>> 극동사태에 대비하는 일미 방위체계는
>> 연합전쟁지도회의의 조정하에
>> 핵에 의한 자위 책임을 갖는다.

"핵을……"
"일본이 핵폭탄을 공식적으로 소유하겠다는 뜻이요."
나디아는 준을 바라보았다. 한참 북조선 핵 문제가 시끄러웠던 95년도에도 이런 이야기를 정식으로 요구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그런데 이미 일본과 미국간에는 내부적으로 합의가 되었다는 것일까.
"이미 결정이 난 문건인가요?"
"결정 난 게 아니요."
"왜죠?"
"이건 가짜 서류요. 누군가가 문장 여러군데를 수정을 했소."
"설마…"
준은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
>> 오다카大高 회의 유보留保 ———— 방위청 극비極秘
— 이 회의록은 이시바시 고이치 청장과 청년 자위대원간의 신년 만남에서 이어진다.

>> 청장 : 일본은 진정 핵을 가질 수 있겠는가?
>> 대원 : 질문이 이상하군요. 우린 핵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청장 : 제군들. 난 핵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내 아내도 그런 건 없지.
>> 대원 : 하하… 대단한 위트이십니다. 고이치 청장님.
>> 청장 : 실상 명문이 있어야 해. 옆에서 창으로 찌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 대원 : 청장님. 이건 제 의견이 아닌 별반 내에서 논의중인 내용입니다.
>> 청장 : 어디 말해 보게.
>> 대원 : 1..2년후면 북조선과 수교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한반도에다 위기 조장을 하자는 내용입니다.
>> 청장 : 그걸로 핵을 소유할 명분이 되겠는가?
>> 대원 : 별반내에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 청장 : 그렇다면 지금 자세하게 논의를 해 보지. 그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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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의 두 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믿어지지 않는 군요. 이건 지금 벌어지는 상황하고 똑같군요."
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렇소. 중요한 것은 일미 방위조약이 한국 유사사태에서 지휘력을 박탈당하면 곧바로 가이드라인 체제로 돌입하게 되는데,극동지역 모두를 포기해서라도 일본만은 사수하겠다는 미국측의 이 전략도 핵 소유권까지는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소. 이때문에 별반은 아주 복잡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소."
"그렇군요. 1995년을 기해서 극동지역은 어느 정도 긴장감이 해소되었지요. 이 기회에 일본은 자위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활용하고자 했었지만,그것은 뜻대로 할수가 없었지요. 일본 우파 쪽은 핵을 소유할 명분을 찾고자 난리를 치고 있고."
"그렇소."
"그래서 자위대 별반이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군요."
"그건 예전부터요."
"정말 별반 대원중에서 한반도 전쟁을 원하는 미친 놈이 있을까요?"
그렇게 물으며 나디아는 김준을 응시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이요. 가장 빠른 시간안에 일본이 핵무장을 할수 있다는 도박…자위대를 더 이상 위축시키지 않겠다는 도박…"
다시 나디아는 시선을 돌려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 핵에 의한 자위 책임을 갖는다. ==

"누구에 의해 수정된 것이죠? 단언할수 있어요?"
"단언할 수 있소. 하사 마에다라는 자위대 별반 요원이 했을 것이오만."
"그것으로는 부족하군요."
준은 비쩍 웃었다.
"서류가 수정되기 전부터 난 서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소. 95년 4월 27일부터 우연히 접근중이었으니까. 서류가 바뀐 것은 6월 29일였소. 미 펜타곤에 보관된 문건 내용 역시 감쪽같이 새롭게 바뀌어 있었소. 그로부터 3일 뒤에 위 서류를 작성했던 양국 책임자는 하루 간격으로 사망했소. 하나는 교통사고 였고,다른 한쪽은 등산중에 낙반사했소. 우연이라고는 할수가 없었소. 서류 내용을 바꾼 자위대 별반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그들을 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소."
"당신 말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본사 정보팀의 고종수 부장이요."
"왜 막을 생각을 안했죠? 충분히 막을 수 있었잖아요?"
"나로써는 막을 방법이 없었소. 단지 언제 시작되느냐 그것을 기다렸을 뿐이요."
"그럼 이제부터는?"
"당연히 막아야지. 자위대 쓰레기 쯤이야 그들이 슈퍼컴퓨터 10대로 나를 공격 해와도 난 눈썹 하나 끄덕하지 않소."
나디아는 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축축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여자들은 국가의 장래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있는…키 큰 남자를 좋아하죠…"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보이더니,나디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벽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새벽에 고종수 부장에게 일본을 떠난다고 전자메일을 보냈소. 지금 곧바로 공항으로 갈 생각인데 어떻게 하겠소? 나를 계속 도와줄 생각이요?"
"어디로 갈 생각인데요?"
"네덜란드요."
나디아는 호텔 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개어 가는 조짐이다.
"막아보겠다면서 네덜란드로 도망갈 궁리를 하다니…일본 정보팀을 네덜란드로 유인하겠다는 뜻이 되겠군요."
"그렇소. 난 일본에 머무를 수가 없소. 양쪽 에서 나를 찾고 있소. 안전기획부야 편법을 사용하면 오해를 풀리게 할수 있겠지만,자위대 별반이나 수상정보국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오. 아마 죽이려 들겠지."
"좋아요. 당신을 도울수 있다면 도와 보도록 하지요. 그럼 보수를 다시 책정해 볼까요?"
"나디아…"
준은 나디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난 돈이 없소."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왜 돈이 없는 거죠? 은행해킹은 당신 같은 남자에게는 간단한 일일텐데."
"난 남의 돈을 가로채지 않소."
"정보는 공유하는 것과 돈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의미인가요?"
"그렇게 말하니…당신이 별안간 지적인 여성으로 보이는 군."
"그럼 옷을 벗어요."
준은 얼굴이 후끈거렸다. 나디아가 벌떡 일어나 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는 갈대처럼 휘청이면서 오데코 향수를 풍겨냈다.
"난 와이셔츠 차림이요. 오히려 당신의 모피코트가 더 무겁게 보이는 군."
"여자가 먼저 벗기를 원하나요?"
"난 로맨스를 바라는 남자임을 밝히고 싶소."
"미 투."
"사실 비행기 표를 아직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거 같소."
"비행기 표 끊지 않았어요?"
"카운트에 들어갔소."
"빈 자리가 있으면 올라탄다는 뜻이군요."
"그렇소."
"이봐요. 김준씨. 작년 이후로 나도 빈 자리에요. 이렇게 말하는데도,아직도 내가 먼저 옷을 벗기를 바라나요?"
준은 아직도 내가 먼저 옷을 벗기를 바라나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껴안았다.
창 밖으로 보잉 747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나디아의 스타킹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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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쳤습니다!"
곤베이는 간사이 공항에 파견한 요원이 보고를 해오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간사이 공항에다만 지방 경찰서 지원을 받아 총 40명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몽타쥬,인력 부족한게 있었나? 그런데도 놈을 놓쳤다는게 말이 되나?"
"저희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방금 이륙했습니다. 네덜란드행 보잉 747입니다. 귀신입니다! 좌석이 꽈 차있었는데도 귀신같이 예약 취소된 좌석을 집어타고 일본을 탈출했습니다!"
"몇시야? 경유지는?"
"7시 40분 홍콩 경유입니다. 그 다음은 네덜란드까지 논스톱입니다!"
"알았어. 너희들은 빨리 귀대한다. 알겠나?"
속이 시원한 건지 씁쓸한 건지 곤베이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 있다 해도 인터넷을 경유해 다시 치고 들어올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른다. 시나노 곤베이는 홍콩 지부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40명의 정보요원이 긴급 소집되었다.
홍콩에서는 김준을 잡아야 했다.
이 지겨운 레이스 끝장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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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상공은 빗방울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일본쪽 기상과는 반대 현상이다.
먹구름이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부터 이번에는 한국이 폭우에 휩싸이고 있었다. 때아닌 봄 장마였다.
순례와 정숙이는 비를 맞으며 귤나무 단지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순례는 바닥에 떨어진 귤을 집어들었다. 지난 겨울에는 한창이었는데 봄이 되면서 귤 농장은 을씨년스럽게 변해갔다. 순례는 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쪽 하늘에서 날카롭게 F 16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한대도 아니고 다섯대. 아주 낮게 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보잉 747 비행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순례와 정숙은 의아한 얼굴로 뒤따라 날아오는 비행기를 보았다. 마치 고비에 매인 소처럼 보잉 747은 다섯대의 전투기에 포위되어 제주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순례가 조금만 의젓했다면 그 비행기는 일본에서 홍콩으로 날아가다가 한국공군에 의해 나포되는 비행기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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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는 다시 김준의 가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디아가 위에 있었다. 나디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젖가슴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김준의 노트북은 아까부터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김준이 항공기 예약망을 자동실행 파일로 해킹 한뒤 747 보잉기로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다시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웨이브된 머리카락이 준의 얼굴로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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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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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47기는 녹음을 뚫고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곧바로 4대의 페트롤카와 한국산 4WD 자동차가 보잉 747의 앞문으로 접근해 왔고,동체 우측으로는 서치라이트를 높게 매단 조명차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 뒤로 군수송 차량이 따라 붙고 있었다.
네덜란드인 기장 칼은 당황한 얼굴 빛이었다. 처음에는 국제항공협회에 제소를 해서라도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키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군수송차량에서 제주방위국 소속의 완전 무장 병사들이 속속히 뛰어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겁이 났다. 공항 상공에는 다섯 대의 F-16 전투기가 계속 선회를 하고 있었기에 어쩐지 살벌한 기분까지 들었다.
기장이 앞문으로 걸어나오자 빗방울이 거칠게 그의 하얀 유니폼에 타닥타닥 떨어졌다. 그의 왼쪽 어깨로 KLM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왓 더 뻑 이즈 고잉 온. 왓아 난센스!"
"프리즈 셧업! 위아 서칭포 어 테러리스트."
김달영 안기부 차장은 기장의 말을 재빨리 자르고 기내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뒤따라 갈색 양복을 입은 안기부 기관원들이 쫓아갔다.
"A-9번 좌석. 비지니스클래스야! 김준을 잡아!!"
김달영의 음성이 기내 안에서 울려 퍼지자 기관원 셋은 서둘러 비지니스 클래스로 뛰어갔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김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A-9번 좌석은 오른쪽 창가의 날개 앞 편에 있었는데,웬 시커먼 흑인이 앉아 있었다.
"차장님 이게 뭡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요원 셋은 기가 막힌 듯 붉은 색 양복을 입은 흑인을 응시했다. 서둘러 스튜어디스가 승객 명단을 들고 김달영 안기부 차장을 향해 뛰어 왔다. 달영은 승객명단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입술이 떨렸다.
"뭔가 이거는…승객명단에는 분명 김준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나? 그런데 이놈 어디에 있는 거야?…"
믿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한기가 김달영의 목덜미를 타고 넘어왔다. 달영은 서둘러 기내 안을 훑었다. 몇몇 승객이 겁먹은 얼굴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자, 달영은 비로소 첩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준에게 속았던 것이었다. 놈은 항공기 예약체계에 침투한 뒤 이 비행기에 올라 탄 것처럼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울화통이 터졌다.
"진광섭이 자네. 이게 뭔가,이게 무슨 창피한 일인가?"
김달영은 핸드폰을 입을 대고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이 친구야,자네 때문에 나 후두암 또 재발하겠어. 그 새낀 아직 일본에 있는거 같아. 그러니까 풍선을 날려서 당장 놈을 찾아봐. 알겠나?"
사상 최악의 미스였다. 현 국방부 사태에 밋밋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기부 사상 최고의 총력전을 펼친 것인데 놈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진광섭은 김달영 차장의 전화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우스운 건지 아니면 자신이 한심한 건지.
전산요원 7명은 겁을 잔뜩 먹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잘못이 있었다면 전산팀에 있었다. 전산팀은 진광섭의 지시를 따라 꼬박 세시간 동안 일본 항공 망을 뒤지다가 예약취소된 빈자리를 잡아 탄 김준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인데,이건 오히려 김준에게 속았던 것이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광섭은 다시 쓴 웃음을 지으며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백설처럼 하얀 그의 옆머리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사뇨 나쓰에와 사즈메를 이리 당장 끌고 와. 아니다…내가 가지."
광섭은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 다시 기운을 내보자. 12시간 안에 놈을 송환해 보는 거야."
진광섭이 예상외로 나긋나긋하게 말하자 윤춘해와 요원 20여명은 영문을 모르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그러자 광섭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사무실안을 갈랐다.
"아니,이 시끼들 뭐하나? 지금 당장 풍선 띄우지 못하겠나? 앙?"
풍선을 띄우자는 이 말. 말하자면 인공위성을 포함해 동원할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총력전을 펼치자는 뜻이다. 그만큼 상황이 악화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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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는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움직였는데,그 눈동자에서는 푸른 광채가 쇠를 녹일 듯 강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매서웠다.
미나가 다락방에서 발견한 A4 프린팅 용지에는 모두 3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나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후루겔스 게이꼬
하사 마에다
김준

미나는 오빠 하야시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줄곧 지켜보았기 때문에 첫눈에 이들이 오빠의 사냥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더구나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여자…
그녀의 죽음은 며칠전 TV를 통해 이미 접하고 있었다.
미나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추추추…
소리가 들리더니 김준의 프로필이 적힌 <외국인등록증명서>가 화면에 떠올랐다.
미나는 불안한 눈으로 김준의 상륙허가일上陸許可日과 체류자격滯留資格 등을 빠르게 훑어 보았다. 동시에 우측 윈도우 화면에 떠있는 마에다에 대한 기록도 머릿속에 외우기 시작했다. 마에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모두 9명에 달했기에 전부를 외울수는 없었다. 미나는 김준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다시 오른쪽 화면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하사 마에다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중 8번째 인물…
어쩐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직업도 평범하지 않았다.

>> 8. 하사 마에다 육상자위대 1위. 현 방위청 파견 전산 요원

미나는 거실로 걸어 나왔다. 사흘째 거실은 정리되지 않고 난장판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미나는 거실을 지나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신주쿠 거리로 나왔다.
얇게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도시의 석양이 황량하게 펼쳐졌다. 미나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긴뒤 휘청이듯 신주쿠 거리를 걸어갔다. 펑크족 사내들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응시했다. 미나는 우측 골목으로 걸어갔다.
다시 우측 길로 접어들자 골목 안쪽으로 하숙집 가나기원이 보였다. 미나는 걸음을 멈춘 뒤 가나기원의 울창한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이번에는 좌측 빈 골목으로 걸어갔다. 왕복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는 비디오 숍이 눈에 들어왔다.
미나의 몸유병은 거기서 깨어났다. 뿔테 안경을 쓴 스웨터 차림의 남자가 비디오 숍을 빠져 나와 가나기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미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나는 당황스러운듯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거리를 핥으며 세차게 역풍이 불어오자 그녀의 머리칼이 어깨쪽에서 하늘의 빈공간으로 스산하게 퍼져 올라갔다. 그러자,골목 안쪽에서 사내 하나가 제풀에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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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울먹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언니 나 결백해. 김짱하고 잠 안 잤다니까 그러내."
"그렇겠구나. 네 성미에 잠 안 잤을려구."
"히잉. 자면 머 안되나. 그게 뭐 언니 건가? 먼저 자는 게 임자지."
"그만 뚝. 잤다고 해도 난 안 믿으니까…그래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다칠 뻔했어. 오다가 휴게소에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세번이나 실패했쪄."
"세번이나? 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아이이기에 겁도 없는 거니?"
"두 남자가 나를 잡았는데 휴게소에서 뒤따라오는 자동차에다가 나를 인계 했어. 저 치."
나쓰에는 사유리가 가리키는 남자를 보았다. 눈이 작은 고영삼 요원이 출입문 앞에서 코를 킁킁거리다가 얼굴을 돌렸다.
"어휴. 저 남자가 다리를 만지잖아. 참을 수가 있어야지. 만지는 건 좋아. 하지만 저 얼굴로 더듬으니까 캡 기분 나쁘더라."
"농담 그만하구. 그런데 너 그 옷은 어디서 났니?"
징징 짜던 사유리. 금방 눈빛을 반짝인다.
"음냐. 언니도 눈이 제법 높네?…흐…이 옷은 말야. 마끼 준사이라는…. "
"저 아가씨인가?"
사유리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이가 이상운과 함께 들어오면서 불쑥 말을 던지고 있었다.
"으…언니,저 독사는 누구야?"
사유리는 잔뜩 겁을 먹고 그렇게 말하다가 진광섭과 두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체온이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거 같았다.
진광섭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쪽은 그저께부터 잡혀 있던 여자고,다른 한쪽은 앙증맞게 생겼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는 삐삐를 김준에게 줬나?"
광섭의 선글라스가 사유리의 몸에 꽂히자 사유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난 아가씨의 삐삐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사유리는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눈물부터 나왔지만 사유리는 간신히 겁이 나는 걸 참아냈다. 그런 뒤 흐느끼듯 말했다.
"흐엉…난 삐삐 같은 거 안 키워요…"
철썩—-!!
소리가 들렸다.
진광섭의 손에 의해 사유리의 얼굴이 반 바퀴 회전을 했다. 곧바로 사유리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흥분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손부터 나가는 것이 진광섭이었다.
광섭의 쇠소리같은 음성이 곧이어 들려왔다.
"인간은 네 종류가 있어. 첫째는 팔불출이고,둘째는 바보. 셋째는 백치이고 넷째는 정신이상자야. 너희들은 그 중 어느 부류의 속한다고 보나?"
두 여자는 겁을 먹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광섭은 나쓰에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이 감춘 김준이란 사내는 이웃 나라의 국시를 위협하는 범죄자다.
그걸 모르는 걸 보니 너희들은 우선 바보라고 할수 있다. 더구나 그자와 같은 범죄자를 계속 옹호하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팔불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신사답게 대했는데도 아직 내 정성을 모르는 것 같다. 이 점은 백치와 일맥상통한다. 이제 나로써는 간단한 제안을 할수 밖에 없다. 나한테 맞은 뒤 정신병자가 되고 싶나,아니면 맞지않는 선에서 정신을 차리겠나? 앙?"
두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 광섭을 올려다보았다.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잘못 본 게 아닌것 같았다. 광섭의 머리 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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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잠이었다. 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5시 55분이었다.
나디아는 원목으로 된 작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준의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 거 같았다.
준은 와이셔츠를 집어들고 나디아에게 걸어갔다. 석양 빛이 창을 통해 부챗살처럼 떨어졌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래저래 남들 하는 만큼 다루기는 해요."
"인터넷인가?"
"백악관 브리핑을 웹(WWW)으로 검색하고 있었어요."
"그런가?"
준은 나디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나디아의 손이 올라왔다.
"저 있죠…아까 괜찮았어요…"
나디아는 고개를 돌려 준을 올려다보았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으…???

"아무래도 국방부로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쪽 사정을 먼저 파악하는 게 여러모로 상황판단에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좋은 생각이군."
"국방부에 접근해 보았어요?"
"아니 한번도 없어."
"그럼 길을 모르겠군요. 침투 경로…"
준은 슬쩍 웃으면서 나디아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나디아는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에 준이 의자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화면이 바뀌더니,무엇인가를 찾는 듯 복잡한 스크롤을 일으켰다.
"뭘 하는 거지요?"
"군수업자를 먼저 찾아내는 거야."
"군수업자라…"
"일종의 추측항법이라고 할 수 있어. 국방부로 직접 침투할 경로를 모르니까 우선은 국방부와 관련된 방위산업체를 찾아낸 뒤 접속을 시도하는 거야…"
"믿을수 없네요. 좀 엉터리로 보여요."
"엉터리도 가끔은 통하지. 하지만 사라사테 시스템이 뚫린 뒤 국방부가 뚫린것이 감히 엉터리라고 할수 있겠나?"
"당신을 믿느니 차라리 방울뱀을 믿는 게 낳겠어요."
"내가 방울뱀이야."
그렇게 말하며 준은 고글을 걸쳤다. 이미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모터를 단 듯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마치 타이피스트의 손놀림 같았다. 사실 문자 타이핑이 아닌 상태에서 이토록 빨리 키보드를 두들겨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나디아는 입을 벌린 채 준의 손놀림을 응시했다. 그만큼 준의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는 뜻인지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이때 김준의 뇌는 전광석화같이 회전하고 있었다.
김준이 한국 국방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을 때 하사 마에다의 손가락은 잔잔하게 키보드 위에서 구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프레이즈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왼손이 멜로디를 치고 오른손이 불규칙한 반주를 넣듯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파스 안에는 존 케이지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빌 에반스가 시작될 것이고,듀크 엘린턴과 마일즈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란조 2위가 좋아하는 재즈곡이었다. 그녀는 운전중에도 가끔 등 뒤를 돌아다보며 마에다의 작업을 감시하고 있었다.
란조는 우울했다. 3년전의 마에다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란조는 깊숙이 한숨을 몰아쉬고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한손은 핸들을 잡고 있었다.

>> telnet milim.ac (미림공과대학)

마에다는 재즈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경이 거슬렸다. 그는 물끄러미 란조 2위의 목덜미를 응시하다가 다시 노트북 액정화면과 17인치 모니터를 번갈아 응시했다. 평양정보센터를 빠져 나온 뒤 곧바로 인민무력부 산하의 미림대학 중앙컴퓨터로 원격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 모니터에 표시되고 있었다.
중간에 평양정보센터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느끼고 마에다는 역추적을 시도해 보았다. 도쿄였다. 도쿄에서 누군가가 <동급해커>를 추적하고 있는 것을 마에다는 감지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에다가 지금 접근하려는 북조선 미림대학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각별하게 애정을 기하는 대학으로 노동 미사일 계열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한 대학이었다.
전쟁을 유도할 수 있을까…..
마에다는 미림대학 플랫폼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한번 그 생각을 머리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간은 겁이 났다. 그때문에 마에다는 전쟁을 유도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쪽 단추에 우선권이 있는지 그 문제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북쪽으로…아니 북한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일본국.
이 선택이 마에다에게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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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를 태운 리무진이 내각정보국 주차장 안에서 멈추었다.
"전산실 상황은 어떤가?"
곤베이가 리무진에서 내려서며 묻자 기다리고 있던 부하 장교가 설명을 시작했다.
"고요합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컴퓨터 망은 완전히 뚫렸습니다. 실제로 미군용 DSCS-2 통신위성을 이용해 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수습할 차원이 아닌 거 같습니다…"
"한국 상황도 마찬가지 인가?"
"그쪽도 갈때까지 간 모양입니다. 북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까 전투기까지 동원해 김준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아. 놈은 일본 어딘가에 있어. 나도 깜박하면 속아넘어갈 뻔했지."
"그 놈이 실제로 미사일을 쏜다고 보십니까?"
"오늘 밤에는 쏘게 될지도 모르지… 이미 작업은 다 끝난거 같으니까."
"네? 육좌님은 어떻게 남 이야기하듯이 말씀하십니까? 혹시…무언가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이봐. 내가 아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네. 우리가 김준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네.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는 말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곤베이는 김준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을수 없었다.

지하벙커의 차가운 형광등 빛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면은 우측으로 반쯤 기울어졌다. 곧바로 초점이 좁혀 지면서 한대리를 깨우는 현희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한대리는 이마가 절반쯤 찢어진 상태로 현희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은 꼴나쁘게 퉁퉁 부어 올라 있다. 현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국말이다.
"오빠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냐…내가 얼마만큼…?"
"24시간 동안 잠을 잤어요. 어제 저녁부터요. 이들이 무슨 조치를 취하는거 같았는데…많이 아팠어요?"
한대리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와이셔츠가 더렵혀져 있다.
"넌 어때…설마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었어요…"
현희의 얼굴은 헬쭉하게 말라 있었다.
"고부장님은…? 고부장과는 연락이 되었니?"
"아니에요.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해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게 하네요."
"그럼…어떻게 된 거야? 김준과는 전혀 연락이 안 된 거야…?"
"오빠 불어 알아듣지요?"
한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한대리의 귀에 입술을 대고 짧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곤베이는 모니터로 보이는 현희 남매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반복해봐…"
곤베이가 짧게 끊어서 말하자 담당요원이 다시금 현희 남매의 대화를 리와인드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분명 불란서어였다.
"불가능합니다. 불어에다가 목소리까지 낮게 깔아 판별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해석했나?"
"대충…오사카… 라는 것만 파악했습니다. 그 이상은 전혀…"
"자네. 여자의 입을 확대해 봐."
"알겠습니다."
곧바로 모니터에 한현희의 입술이 확대되었다. 작게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 현희의 입술을 곤베이는 뚫어지게 응시하더니,조심스럽게 현희의 입모양을 따라서 자신의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어와 불어… 양쪽을 섞어서 말하는 게 분명했다. 언어분석팀의 요원하나가 곤베이가 과거에 프랑스와 북조선에서 활동한 것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육좌님?"
"이게 저들의 대화인가?"
"예. 어제 오후 대화입니다. 그 뒤로는 전혀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저 대화도 간신히 잡아낸 것입니다만."
"한번 더 느린 속도로 재생해 봐."
한현희의 얼굴이 다시 크로즈업 되었다. 곤베이는 양미간을 꿈틀거리며 한현희의 입모양을 관찰하더니 불쑥 말을 내뱉었다.
"나…디…아… 나디아가 뭔가?"
"예?"
"나디아가 뭐냐고 물었다."
"글,글쎄요…나디아는 만화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인걸로 압니다만…"
"그런가?"
곤베이는 양미간을 찔끔거렸다. 아까부터 무엇인가 감이 잡힐 듯 말듯 하면서도 무어라고 자신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곤베이는 가까스레 입을 열었다.
"오사카에 있는 비지니스 파크에 요원을 지금 당장 투입시켜. 그리고 그 근처에 나디아라는 여자가 소유한 오피스텔이 있는지 확인하고. 북조선 여자라고 말하는 거 같으니까 공안조사청 2부 협조를 구해 조총련계도 샅샅히 뒤져봐. 나도 곧 뒤따라 오사카로 날아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한 뒤 곤베이는 모니터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아까 리무진을 기다리고 있던 부하 장교가 복도 반대편에서 급히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육좌님! 진광섭 팀이 방금전 오사카로 향발했습니다. 8시 40분 간사이 공항착 입니다."
"뭐야? 벌써 진광섭이가 알아냈단 말인가?"
"그런거 같습니다. 간사이 공항에다가는 급히 경찰인력을 풀었습니다만."
곤베이는 식은 땀이 났다. 헬기 한대를 날려가면서 추적했던 김준. 다시 겨우 김준의 위치를 어림잡은 거 같은데 진광섭 팀이 이미 오사카로 향발했다고 한다.
진광섭에게 준을 넘겨줄수는 없었다.
상황이 복잡미묘했다. 처음부터 김준에게는 동기가 없었다. 이 때문에 별반의 음모일 것이라는 감을 잡았지만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별반을 들쑤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한국측에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점이 불안했다. 만약 김준이 한국측으로 넘어간다면 차후 어떻게 되겠는가. 이 사태는 일본과 한국간에 중대한 외교파국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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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가나에 모녀가 뚫어지게 자신을 응시했다. 미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락없이 비디오숍 배달원 모습이었다.
미나는 가나기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뒤 마에다가 빌려 본 비디오의 제목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해 종이 백에서 비디오 테입을 꺼냈다.
<펜트하우스의 금발 여성들 3부>
이 자는 금발 취향인가. 미나는 울컥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둠속에 괴물같이 입을 벌리고 서있는 가나기원의 정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신경질적으로 허리 뒤에 차고 있는 리모콘을 뽑아 들었다. 그런 뒤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하사 마에다의 방에 있는 컴퓨터가 윙윙거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프린터포트에 꽂혀 있는 무선랜 장치가 붉은 등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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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추측항법이 통할 때가 있군요."
"여긴 쑥대밭인데…?"
나디아는 활짝 열려있는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을 응시하였다.
"어떤 것을 보고 쑥대밭이라고 하는 거지요?"
"여길 봐. 엔지니어1 부터 30까지의 아이디를 가진 사람들. 한꺼번에 30명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이지?"
"그렇군요…."
"대책반인거 같아. 아무래도 요 며칠동안 갱신된 파일이 있는지 찾아 봐야겠어. 절반은 해커들이 농락을 했을 테니까."
"갱신된 파일을 어떻게 알아내죠?"
"GIF 파일을 사냥하는 솜씨야. 예전에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야한 그림을 찾아다녔던 경험이지. 솔직히 말한다면 내 실력은 그때부터 늘어났어. 지금은 노턴데스크탑보다 내가 더 빠르지."
"심하군요. 야한 그래픽 파일을 찾아다니다가 해커가 되었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무엇이던지 호기심이 있어야 해. 난 어떻게 보면 건강한 편이었어. 내 호기심은 대부분 여자쪽으로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솔직해요. 당신은."
"나디아가 더 솔직하지."
"난 외로운 거에요."
"외롭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군.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다 받치는 남자가 많았을텐데…"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을 만나려고 23살이 될 때까지 외로움과 싸워야 했나 보죠."
준은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보았다.
"사랑 고백치곤 매우 심오하군. 내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나. 나디아?"
"그래요. 그것도 처음 만난 날부터…"
"어떤 인상이? 난 그날 이후로 당신을 만나면 조심해야 했는데."
"그날 수면제를 먹이기 전이었어요. 당신은 취해 있었고,제가 들어가자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요. 저를 보고 술집여자처럼 복잡하게 생겼다면서 걸쭉하게 18번 노래를 한번 뽑아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나디아는 노래를 불렀나?"
"제가 그랬을 리 있나요. 노래를 부른 건 오히려 당신였어요."
"내가 노래를 불렀다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나디아는 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는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
여기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나디아는 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그날 부른 노래였어요. 당신은 술에 취해서 침대에 누워 있었죠. 그 상태에서 남조선 국가를 신나게 불러 젖히더군요… 당신은 정말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어요."
"꼴불견이었군. 술에 취한 상태 애국가를 부르다니…난 비애국자가 분명해."
"그게 당신 모습이겠지요."
준은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역시 마찬가지야. 지금 당신 모습도 유난히 마음에 드는군. 그러니까 이따위 작업 집어치우고…우리…다시 빠방 할까?"
"빠방이라뇨?"
"<푸코의 추>라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야. 여자와 자고 싶을 때는 그녀에게 손가락을 권총모양으로 쥐고 빠방이라고 말하면 돼."
"난 그런 빠방은 하기 싫어요."
"비싼 외교술이 안 먹히는 군. 여자들은 문학도를 좋아하는데 말야."
"푸코의 추가 문학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오락소설이야."
나디아는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다시 김준의 머리를 안으려고 하다가, 문득 준의 머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신 머리도 오락소설 같군요. 뻐꾸기가 집을 짓겠어요."
"잠깐만…"
준은 서둘러 모니터를 향해 바짝 다가앉았다. 무스를 잔득 처바른 그의 머리가 철사처럼 부르르 떨었다.

>> 동급해커 > 위치 > 제 3 자료실 – 미사일 시스템부

국방부 컴퓨터 접속자 명단에서 <동급해커>라는 한글 아이디가 떠올라오고 있었다.
"뭐에요? 저건?"
"침투 전화선을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김준은 재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화면이 갈라지면서 영문자가 스파크를 일으키듯 스크롤을 일으켰다. 눈부신 속도로 추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개자식!
준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 나왔다.
"귀신같은 녀석이군. 어디로 도망간 거지?"
"설마?"
"시스템 버그가 아냐. 아까는 사용 중이었는데 지금은 없어. 이 자식,시스템을 제법 농간할 줄 아는 놈이야. 추적해온다는 것을 눈치채고 도망을 간 거 같아."
"당신 아이디를 이용해 대한민국 국방부를 농락했다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였군요."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흘렸다.
"그런 거 같아."
"어떻게 할 거에요?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에요?"
"녀석에게 메모를 남겨야 겠어."
"메모를 남긴다고요?"
"전달된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말야."
"누구에게 남긴다는 거에요?"
"동급해커 앞으로 남기는 거야. 그 친구가 다시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면 메모가 전달될 거야."
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 하사 마에다군. 나를 흉내내는 가?
>> 너를 찾아내겠다.

"무척 험악한 경고문이군요…"
"험악한 게 아냐. 진지한 거지."
"화났군요?"
"화 안낼 사람이 있을까. 내 아이디를 몰래 사용하는 자를 내 눈으로 목격했는데 말야. 이건 자동차를 빌려주었더니 교통사고를 낸 것과 같은 이치야."
"흥분하지 말아요. 저까지 놀라잖아요…"
준은 화가 났다. 직접 자신의 아이디가 행동하는 것은 난생 처음 보았던 것이다.
"준…"
"왜?"
"정말 화가 났나요."
"심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 눈은 이미 뒤집어져 머리 뒤에 붙어있는거 같군."
"위로해 줄까요?"
준이 대답이 없자 나디아는 그의 몸을 등뒤에서 안았다.
"아까 저를 원한다고 했지요? 좋아요… 우리… 빠방 해요."
윽…
나디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재킷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당연하겠지만,사랑에 빠진 이 두 남녀는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하사 마에다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이용해 미사일에다 발사시각을 지정했다는 사실을.
목표는 백령도 이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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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40분 정각. 진광섭은 기내 안에서 긴급 전문을 받고 마른 침을 삼켰다.
등골이 오싹했다. 전문내용은 간단했다.

7기의 발사 시스템에 <동급해커> 접근
상황 정밀 파악중

광섭은 오한을 느끼며 일행 10명과 함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왔다.
어둠속에서 40여명의 일본경찰이 진을 치고 광섭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어이가 없었다.
"누가 시킨 건가."
"상부의 지시입니다. 여권과 소지하고 있는 총기류를 압수하라는 지시입니다."
"상부라니? 어떤 상부를 말하는가? 대한민국 상부인가,아니면 그대들 상부인가?"
"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조치에 응하시지 않으면 강제 송환 하겠습니다."
설마하는 심정이었지만,진광섭은 곤베이가 시킨 짓임을 눈치했다.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지금 당장 곤베이의 얼굴이 눈 앞에 보이면 아작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곤베이건 누구건 아작 낼 시간이 없었다. 급했다.
"어이 이상운 무관. 자네 권총 가진 거 있으면 인계해. 아 뭐해? 춘해씨도 수류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잖아. 그거 이 친구들에게 주라구."
춘해와 이상운,몇명의 부하들이 썩은 벌레를 씹은 표정을 지으며 홀스트에서 권총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이 끝나자 몸수색이 시작되었다. 경찰 둘이 기관원 한명에 붙어 정밀하게 몸수색을 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더이상 소지한 총기류가 없는 거 같군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오사카에서는 며칠동안 머무를 생각인지 미리 귀뜸을 해 주시는게 좋을겁니다."
이상운이 멋모르고 끼어 들었다.
"이거 너무 하는군. 물 좋으면 놀만큼 놀다 갈거요. 돈 좀 뿌리라면 오사카가 잠길 정도로 뿌려 볼텐데 시간이 중요하겠소?"
"상운이 너! 가만히 있지 못하겠나!!"
진광섭이 일갈하자 상운은 금방 꺼내온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광섭은 어느새 책임자로 보이는 일본인 경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우리도 이러고 싶지는…"
이미 진광섭의 햄머펀치가 뒷걸음치는 경관의 얼굴을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따라 붙더니,그의 콧등에서 크게 작열하고 있었다.
"이 새꺄!! 니네 이러면 뭐 좋을 줄 알아? 인터폴 공조수사면 총기류 소지하는건 당연한건데 이렇게 수사 방해해도 되는 거야? 너희 일본놈들 말야. 이런식으로 내 목 조이면 말야. 특전단을 투입해 오사카를 통째로 점령해 버릴 거다. 알아듣겠나!!!"
40여명의 일본경찰은 영문을 모르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진광섭은 한국말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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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쓰라 경감은 머리가 아팠다. 신주쿠 3정목 쓰레기통에서 문제의 손도끼를 발견한 후 만 이틀이 지났다. 오니쓰라 경감은 이미 <야마테선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신주쿠 도끼살인사건>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미 경찰인력 30명을 투입해 이 근방을 샅샅이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날 새벽에 손도끼를 버린 범인을 목격한 증인은 없었다.
오니쓰라 경감은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보고서를 들쳐 읽기 시작했다.
신주쿠 3정목 지서 안. 아까부터 자신을 만화가 고바야시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부하 경찰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오니쓰라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오니쓰라는 보고서를 다 읽은 뒤 지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슬비 속에 30명의 경찰이 도열해 있었다. 모두 피곤하거나 상당히 허기진 얼굴이다.
오니쓰라는 입을 열었다.
"좋아. 오늘은 이만하지. 내일 아침에 다시 모이도록 하고. 모두 귀가한다."
가벼운 탄성이 들려왔다. 경찰들은 오니쓰라 경감 앞에서 개미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오니쓰라는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우측 빌딩 숲을 올려다보았다. 8시까지는 경시청에 들어가야 했다. 오니쓰라는 페트롤카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만화가 고바야시가 지서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오니쓰라 경감의 눈에 들어왔다. 오니쓰라는 무의식중에 고바야시를 불렀다.
"이봐. 당신."
"아…예?"
"당신 정말 만화가 고바야시 맞아?"
"아,예…그렇습니다. 소학사 만화잡지에 연재를 하지요…"
오니쓰라는 약간 놀랬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사인 한장 부탁드립니다. 제 딸아이가 선생님 만화를 좋아합니다만."
"그러시군요. 저도 영광입니다."
고바야시는 오니쓰라가 내미는 수첩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오니쓰라는 그런 고바야시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뭔가 주눅이 든 표정이다.
오니쓰라는 궁금했다.
"아,본의 아니게 아까 이야기를 옅들은 거 같은데…그래 옆집에 사이코가 산다고 말씀하셨나요?"
"벌거 아닙니다. 요즘 스트레스를 계속 받다보니…"
"옆집에 누가 살기에 그런 말을 하시는 지요. 제가 도와드릴수 있을까 하는데."
고바야시는 구세주를 만난 듯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며,옆 집 노파가 3주일째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세세히 설명해갔다.
"흥미 있군요."
오니쓰라 경감은 수첩에 깨알같이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네로라는 고양이가 죽었는데 이웃 집 아가씨가 믿을수 없을 정도로 광폭했다는 이야기군요. 그리고 3주전부터 이즈의 할멈이란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조용한 집안이었는데…하지만 네로가 그 집 뒷마당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게 목격이 되니까 기분이 상당히 묘했습니다. 분명 칼입니다.
그 집 손녀딸이 주방용 칼로 제 고양이를 마구 찔러 죽였습니다."
"수사를 진행해 보지요. 그밖에 말씀해줄 내용은 없습니까?"
"제 고양이를 살해한 여자는 후꾸오 미나라는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오빠는 후꾸오 하야시라고 하지요. 전에 야마테 라인 전산요원였다고 합니다만…"
"그렇군요. 야마테 라인때문에 저도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미나라는 아가씨는 직업이 없는 겁니까?"
"글쎄요…디스코장에 나가 춤을 추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에콜 드 신주쿠 라는 디스코장입니다."
갑자기 오니쓰라 경감의 눈이 반짝였다. 에콜 드 신주쿠라면 <손도끼 살인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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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인 미사일 프리킷 함정이 보였다. 종래의 호위함과는 달리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함정에는 대공,대함 미사일인 Mk13 미사일 발사기 1기가 추가되어 있다. 후미쪽으로는 다목적 헬기인 SH-60B 두대가 어둠속에 잠을 자고 있는데,이 헬기는 유사시에 대잠수함 공격용으로 활용된다.
길은 멀었다. 평갑판형인 선체 압부분에서 전방을 보면 어두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 온다. 사방이 어두었고,함정은 속도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병은 바다쪽으로 바지 자크를 열어 재치고 소변을 보았다. 美日 연합훈련이 연장된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올시다 였다. 소문을 들으니 한반도쪽에서 개전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 같다.
수병은 소변을 다 본뒤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우측에서 따라오던 이지스함에서 서치라이트가 강하게 그의 몸을 포착하다가 돌아 간다.
수병은 얼굴이 후끈 거렸다. 저 자식들이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지스 함에는 대개 여군이 숭선한다고 했다. 수병은 다시 바지 자크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7시 방향 어둠속에서 시 헤리어 전투기가 날카롭게 괴음을 토하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병은 졸린듯 시 헤리어기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시 해리어기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함정 후미쪽에서 뒤따라오는 두척의 항공모함중 오른쪽 항모에 부드럽게 착륙을 하고 있었다. 각 항모마다 평균 50대의 시 해리어기가 대기중이었으니까,분명 미일연합훈련이라고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엄청난 화력이 지금 극동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수병은 항공모함의 위용을 천천히 관찰하다가 밤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별빛이 황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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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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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엄 승용차는 숲 끝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폭우가 내렸다. 브로엄은 거기서 100미터를 더 달리다가 단층의 비밀스런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곧이어 헌병 둘이 저택의 서터문을 올리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의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김달영은 안기부 장관 서석재에게 눈인사를 한뒤 그 옆으로 포진해 있는 국방부장관과 각 군 사령관을 응시했다. 모두들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푸석푸석한 얼굴들이다.
달영은 이곳에 오기전 공항에서 받은 서류를 조심스럽게 서석재에게 내 밀었다.
서석재의 입에서 가날프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석재는 보고서를 읽다 말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방탄 유리로 된 회의실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헬기 한대가 폭우를 뚫고 느리게 착륙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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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서 얼른 일어섰다.
이건 좀 거친데…
많이 거칠단 말야…
미나는 혀를 핥다가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문에 미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혀를 움직이거나,입을 오므리거나 하는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많았다. 의도하는 데로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미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겼다. 하사 마에다가 긴급히 지운 파일들을 복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 가량이었다. 그후부터는 무선랜을 이용 이쪽 컴퓨터에다 잔뜩 카피를 떴다. 그런 뒤 작업을 시작한 게 벌써 한시간
가량이 지났다.
처음에는 하사 마에다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간파할수 없었지만,지금은 달랐다. 미나의 머리는 이미 여러 각도로 해결점을 찾고 있었는데,이 때문에 다시 마에다가 했던 방식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번에는 10분전과는 달리 손쉽게 침투가 가능했다.
미나는 국방부 전산망 화면을 3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뒤 오른쪽에 떠있는 두개의 화면과 일렬로 배열을 했다. 그러자 왼쪽부터 순서대로 한국 국방부와 일본 방위청,주일 미군 전산망이 한 화면 안에서 사이좋게 자리를 잡는다.
미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화면을 왼쪽부터 주의 깊게 읽어 나갔다.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이상야릇한 호기심이 생겨나고 있다.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방향이 있었는지,그녀는 하사 마에다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이용해 모종의 작업을 하였다는 것을 정확하게 추리해 냈다.
그러고 보니 몇년전에 보았던 <워게임>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오락게임인줄 알고 버튼을 눌렀는데 실제로 핵폭탄이 발사되었다던가,아무튼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미나는 화면 셋을 닫고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화면을 앞쪽으로 잡아 당긴 뒤 마우스의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김준의 얼굴이 떠올라왔고, 하사 마에다가 입수한 김준에 대한 정보들이 붉은 문자로 나타났다. 그제야 <동급해커>라는 아이디의 원래 사용자가 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미나는 깨달았다.
오빠가 무슨 이유로 이들을 노리고 있을까.
미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그건 오빠의 작업이니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옅은 푸른색 조명등을 따라서 담배 연기가 스산하게 날아올랐다.
오빠의 행방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찾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오빠 대신에 미나 자신이 이들을 찾아내 처리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들을 오빠 하야시가 있는 곳으로 몰라 세우던가 하면 될 것이다.
그전에 좀 더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미나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하사 마에다가 했던 방법을 따라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 안에서 아이디를 <동급해커>로 리메이크remake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하사 마에다 군. 나를 흉내내는가. ==
== 너를 찾아내겠다… ==

미나는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경고문을 불안스레 응시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니 무엇인가 감이 잡힐 듯 말듯 했지만 선뜩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나의 얼굴은 별안간 붉게 경색되어 갔다.
"빡가야로!!!"
그러고 보니 이 두남자는 오빠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해커 대 해커.
미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오빠 하야시만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해커였다.
그런데 이 두 남자는 오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워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녀는 성난 살쾡이처럼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겨갔다. 이미 하사 마에다가 조사해둔 자료를 읽었기 때문에 이들 남자간의 공방전을 방해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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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40분이었다. 나디아가 발코니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면서 그녀의 스커트가 커튼처럼 휘날렸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한 남자를 소유하는 게 나디아는 어떤 건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나디아는 사람들이 너무 빠른게 아닌가,라고 물어오기를 바랬다. 진정으로 빠를수록 좋다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사실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김준이 자신의 품에서 안주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디아는 지금 이 행복을 지속하고 싶었다.

준은 셔츠 차림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는 인공위성을 경유해 이번에는 오키나와 미군 전산망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이미 7기의 미사일 시스템이 해킹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북한 쪽도 마찬가지였다. 마에다는 평양전산센터와 미림대학 루트를 복합 침투루트로 이용해가면서 각 전방부대 컴퓨터 망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지뢰가 부설된 것처럼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하사 마에다의 짓이었다.
북한에도 역시 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7기의 미사일 시스템이 해킹되어 있었는데,각각의 시스템에는 하나의 타임지정 파일과 하나의 트로이목마 파일이 중복되어 걸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타임지정 파일에는 발사시간이 지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필요한 시기에 패치(patch:수정)를 하려는 계산인지 모른다. 아니면 <아메바 파일>일까.
<아메바 파일>이란 스스로를 변형시키고,자체 번식을 하고,롬바이오스가 기록 하는 시간을 측정하면서 자체 성장을 하는 고지능형 파일을 말한다. 이 때문에 준은 식은 땀이 났다. <아메바파일>이라면 전산망이 차단되어도 작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치이다.

나디아는 준의 커다란 등을 응시하다가 이번에는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마쓰리 경영대회가 오사카 밤거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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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옵니다."
진광섭은 자동차 안에서 오사카 지도를 보다가 운전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운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광섭은 자동차 문을 열었다.
"확실합니다. 각 호텔마다 내각정보국 요원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도로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마쓰리 행렬을 보호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김준이 이 근처 호텔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삐삐를 눌러보죠. 그 자식,분명히 사즈메가 삐삐를 친 줄 알고 응답을 해 올 겁니다."
"좋아. 전산 팀에게 연락해서 당장 시작하라고 해."
지시는 그렇게 했지만 진광섭은 한풀 꺽인 상태였다. 10분전에 갑자기 걸려온 김달영 안기부 차장의 전화때문이 아니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다고 하니 그저 송구스러웠을 뿐이다.
너…진광섭이 너는 역적인 것이다…
진광섭답지 않게 울컥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다. 딸 혜숙이까지 갑자기 보고 싶어 지니 이건 미칠 지경이다.
진광섭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예의 이사벨 아자니 선글라스를 포켓에서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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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 육좌님. 찾았습니다!"
사내는 니코오사카 호텔 앞에서 곤베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사내의 시선은 계속 21층 발코니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여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보고를 끝낸 뒤 사내는 곧장 왼손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호텔 현관에 주차해 있는 두대의 밴에서 10여명의 신사복들이 사삭거리며 뛰어 내렸다.
모두 내각정보국 오사카 지부가 자랑하는 베테랑 기관원이었다.

나디아는 발코니에서 밑을 내려다보다가 두대의 밴에서 검은 양복들이 내리는 것을 보았지만 별다르게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니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도오톤보리 운하를 바라보았다. 운하 중심가를 중심으로 붉은 제등과 인파가 집중되고 있었다. 흐릿한 가로등 사이로 몰려다니는 조그만 점들은 이번 마쓰리 경연대회를 구경하러 일본 곳곳에서 몰려온 관광객이 분명한데 대충 어림잡아도 10만명이 넘는 인파인거 같았다. 도오톤보리와는 다르게 이곳은 너무도 조용해 나디아는 슬며시 웃음까지 나왔다.
그러고보니 30분 가량을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일어났다. 나디아는 발코니 창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문득 나디아의 눈에 준이 전화 수화기를 놓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인가 불안했다. 나디아는 한참만에야 방금전 들린 소리가 삐삐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요? 아는 사람인가요?"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준의 시선은 멍하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유리의 모토롤라 삐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나가야 겠어."
"네?"
"호텔이 발각된 거 같아. 당장 나가자구. 어서!"
"설마…."

이상운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과장님. 찾았습니다. 니코오사카 호텔입니다!"
"알았어! 스탠바이 됐나? 당장 출발해 모두!!"
그러자 4대의 승용차가 동시에 시동을 걸었다. 주 오사카 한국영사관 안이었다.

"뭐라고? 2138호실을 볼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내는 호텔 모니터실 안에서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자 보안담당자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론 카메라가 닿지 않습니다. 죄,죄송합니다."
"이런 제기랄! 육좌님. 2138호 객실은 볼 수 없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곧바로 곤베이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각 엘리베이터마다 인원을 배치해. 비상계단도 틀어막고. 내가 곧 갈테니까 1시간만 막아봐. 알았나?"
"알겠습니다."
"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얌전히 감시하란 말야!"
"명심하겠습니다. 육좌님."
사내는 써늘하게 굳은 얼굴로 핸드폰 통화를 끝냈다. 다시 사내의 눈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22개의 모니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2138호실 객실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설치된 카메라는 어느 건가?"
사내가 묻자 보안요원이 대답했다.
"맨 왼쪽 화면입니다. 21층 비상계단 앞에 설치되어 있습니다만."
"카메라를 콘트롤할수 있겠나? 저걸로 2138호실을 볼 수 있나 이 말이다."
"글쎄요…여기 객실은 격자형으로 위치하고 있는데…한번 해보죠."
보안요원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은 계속 화면 하나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응시하고 있는 모니터의 내용물이 조심스럽게 떨리면서 앞으로 당겨졌다. 흐릿했다. 다시 몇 초가 흐르자 뚜렷하지는 않지만 멀리 2138호 객실 출입문이 화면에 잡혀 들어왔다.
그때 모니터를 응시하던 사내의 입에서 갑자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저건…"
놈이다….
사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무전기를 급히 빼 들었다.

준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2명의 양복이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나디아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인가 봐요. 아까 밴에서 내리던데…"
준은 나디아의 입을 틀어막고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는 복도였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난 가명을 사용했는데…혹시 오후에 식대를 무엇으로 지불했지?"
"카드요."
"그것때문에 들킨 거 같군."
"미안해요. 전 부자가 아니잖아요…"
비상계단으로 연결된 출입문이 보였다. 준은 빠른 속도로 복도와 비상계단을 훑어보았다. 별안간 준은 수축되었다. 비상계단 출입문 위에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묘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준은 손에 들고 있는 노트북 가방을 카메라를 향해 잽싸게 날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카메라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하는 군요. 그래도 되는 거에요?"
"나디아도 알잖아? 난 영화배우가 아냐. 개런티도 없는데 카메라에 찍히란 말야?"
"그럼 전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라 이거군요."
"저 뒤쪽으로 가야겠어."
등뒤에서 무전기 교신음이 들려왔다. 두 남녀는 모퉁이를 돈 뒤 이번에는 우측 복도로 달려갔다. 뒤쪽에서는 사내들의 발자국소리가 숨가쁘게 들려오고 있었다.
"완전히 갇혔군요. 미로 같아요."
"이 점이 니코오사카 호텔의 장점이야."
"이 호텔 잘 알아요?"
"나디아가 아는 만큼은 알지. 저 앞쪽에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
나디아는 준의 말을 듣고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곧장 화물 엘리베이터가 나디아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모니터를 올려다보면서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보안요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내는 묘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화물 엘리베이터다. 모두 15층에 집결한다. 지금 당장 눈썹 날리란 말야!"
"15층이요? 왜 하필 15층을?"
"입 닥치고 15층에다가 엘리베이터를 묶어 주시오. 지금 당장!"
"해,해보겠습니다."
보안요원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렸다. 순간 화물엘리베이터가 20층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뭡니까? 20층에서 내린 겁니까?"
"아냐. 잠깐만…"
사내는 무전기를 손에 든 상태에서 엘리베이터 상황이 체크되고 있는 화면을 응시했다.
어이가 없었다. 화물엘리베이터는 각층마다 멈추고 있었다. 그것은 17층까지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21층으로 다시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된거야? 왜 내려오다가 올라가는 거지?"

나디아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정도 체력이면 올림픽에 나가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는 등 뒤에 서있는 준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호텔 로비로 고개를 돌렸다. 로비는 한산해 보였다.
나디아가 먼저 호텔 현관 쪽으로 걸어나갔다. 무사히 빠져나오자 나디아는 주차장에서 김준을 기다렸다. 잠시 후에 준이 호텔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곧바로 도로 쪽으로 뛰어갔다.
도로 앞까지 나오자 나디아는 식은 땀을 흘리며 호텔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불쑥 준에게 물었다.
"왜 안 쫓아오는 거죠? 이상하네요."
"그 친구들 지금쯤이면 17층이나 21층에서 사우나를 하고 있을 거야."
"아….! 그렇겠군요…."
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거리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나? 택시가 보이지 않는데?"
나디아가 말했다.
"마쓰리 때문인가 봐요. 아까 보니까 운하건너편에서 마쓰리 경연대회가 있었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자구. 거기서 택시를 기다리려면 당구대가 필요하겠어."
준과 나디아는 한적한 도로를 일직선으로 건너뛰었다. 건물 숲 사이에서 마쓰리 패의 함성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사내 3명은 울쌍이 된 얼굴로 엘리베이터 단추에 꽂혀있는 드라이버를 빼 집었다.
"빠가야로. 드라이버로 우릴 안전히 속여 넘겼군!"
화가 잔뜩 난 사내를 뒤로 두고 다소 멍청하게 보이는 사내 하나가 급히 창 쪽으로 다가 섰다. 그러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했다.
"저 놈들 아닙니까?…아 뭐합니까?…. 아까 그 놈들 저 밑에 있다니까용??"
그런 사내의 눈에 호텔 현관 앞을 긴급히 달려나가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까 모니터 실에서 명령을 내리던 오사카 지부의 팀장이었다.
사내가 다시 김준과 나디아를 찾아 시선을 옮기고 있을 때는 호텔 우측에서 정체불명의 자동차가 긴급히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는 모두 4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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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마쓰리 축제였다.
김준과 나디아는 인파에 밀려 도로 중앙에까지 걸어나왔다. 마쓰리 행렬은 도오톤보리 운하를 끼고 거리 좌우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니혼마쓰 제등 행렬을 따라 후지 TV 중계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여기가 바로 중심이었다.
앞쪽으로는 일본 3대 마쓰리중 하나인 간옹마쓰리 패가 거대한 미꼬시(가마의 일종)를 메고 거리를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도로 양쪽 마쓰리패까지 합쳐서 일본의 명물 마쓰리 패가 모두 이 장소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김준과 나디아가 서 있는 교차로 한복판이 집결장소 인거 같았다. 나디아도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차갑게 외쳤다.
"저쪽으로 가야해요!"
"덴덴타운?"
도로 중앙에 몰려있던 관광객들은 마쓰리 패를 환영하기 위해 다시 도로 좌우로 물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일대 혼란이었다.
"거기 알아요?"
"알아. 오사카의 아끼하바라."
"그래요. 잠시 후에 거기서 만나요."
"아가씨?"
"갑자기 왜요?"
"코트는 벗고 가야지. 녀석들이 알아보잖아."
나디아는 주춤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오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 벗으라는 말로 들려요."
"난 아무래도 좋아."
"마음 약해지니까 제발 유혹하지 말아요. 자요."
준은 나디아가 벗어 던져주는 밍크코트를 잡아챘다. 순간 사내 하나가 갑자기 인파 사이에서 총알같이 뛰어 나오며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준이 빨랐다. 준의 뒤돌려차기가 전광석화처럼 반원을 그렸고,사내는 꽈다당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자 축제를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김준을 응시했다. 나디아는 이미 인파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준은 나디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좌측에서 나타난 또 따른 사내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는 아까 모니터 실에서 곤베이와 통화를 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묘한 포즈를 취하며 말을 시작했다.
"김준씨. 우린 수상 직할 내각정보국 소속 수사요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국 수상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나?"
준의 얼굴에서 갑자기 독기가 품어 나왔다.
"문제는 이미 발생했네. 요즘 내각정보국에 필요한 건 소방관이란걸 모르나?"
"시시한 말은 집어 치시지. 넌 소방관이 아냐!"
"뚜껑이나 열어 둬. 3분 뒤에는 너의 뇌에서 쥐가 날테니까!"
"건방진! 빡가야로!!!"
한순간에 사내는 김준을 덮쳐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준은 구둣발을 사삭거리며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그 틈에 사내의 몸이 붕 떠오르는 거 같더니 뒤로 사라지는 거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사내의 손이 곧바로 김준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빡가야로—————!"
사내는 준의 뒷덜미를 잡은 상태에서 몸을 한바퀴 앞으로 굴렸다. 준의 몸은 꼴 나쁘게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면서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내는 땅바닥에 누워있는 김준의 몸위로 자신을 날렸다. 싸움을 구경하던 행인들 사이에서 경탄의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후…소방관 나리. 내가 좀 빨랐지…?"
사내는 비열하게 웃으며 준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런 뒤 준의 하복부를 무릅팍으로 누른 상태에서 엉덩이 쪽에 있는 수갑을 꺼내 들었다.
순간 권총이 사내의 이마를 겨누었다.
사내는 간덩이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뭐,뭐야?"
준은 권총을 사내의 이마에 겨눈 상태에서 비쩍 미소를 지었다.
"뚜껑이나 열어 두라고 했잖아."
"이런 제길!!"
사내는 잔뜩 겁을 먹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
퍽———–!!
기다렸다는 듯이 김준의 구둣발이 사내의 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왓쇼이! 왓쇼이!!"
함성이 양쪽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후지 TV 중계차는 싸움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싸움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준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내를 쳐다보다가 도로 가운데에 나동그라져 있는 노트북과 밍크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때 갑자기 인파 사이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게가히또가 이마스!"
인파 쪽에 파묻혀 있던 수녀였다. 그녀는 피를 흘리는 사내를 보호하기 위해 보도블록에서 뛰어 나왔다. 그러자 몇몇 행인이 준을 불안한 눈으로 노려보며 덩달아 걸어 나왔다. 준은 아차 하는 생각으로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을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우측 마쓰리 행렬에서 왓쇼이 왓쇼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스테레오였다. 깃발이 보였고,부모를 따라 나온 어린 아이들이 준의 얼굴을 향해 손전등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준은 손전등 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수녀가 이번에는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 자가…이 남자를 습격했어요. 저 남자를 잡아요. 권총을 가지고 있어요!"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지으며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바짝 치켜세우고 준을 노려보더니,성호를 그었다. 준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미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내들이 준을 포위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북소리가 들려 왔고,우측에서는 간온마쓰리 패가 춤을 추면서 서서히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때문에 도로에 모여있던 인파가 다시 파도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당신들에겐 볼 일 없소. 길을 막지 마시오."
준이 말하자 스모 선수 체격을 가진 사내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너 조선인 아냐? 관광객이면 관광객답게 굴어! 어디서 싸움질이야?"
준은 울컥했다.
척!
어느새 준은 다시 권총을 꺼내 들고 사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자네도 뇌에 쥐가 나고 싶나?"
사내는 그만 오줌을 질질 흘렸다.
준은 오줌을 싸는 사내를 손으로 가볍게 밀고 인파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때 좌측 기온 마쓰리 패의 깃발이 밤하늘을 찌를 듯 높이 흔들리는 거 같더니 좌우로 물결처럼 갈라지면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형 알토 자동차였다. 교통순경이 타고 다니는 소형 경찰차가 축제 행렬을 뚫고 갑자기 달려나온 것이다.
동시에 요란하게 총성이 울려 왔다.

나디아는 골목길로 접어들다 말고 총소리를 들었다. 움찔 겁이 났다. 나디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까 첫번째로 준을 습격했던 사내가 계속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뛰어가다 말고 쓰레기통을 발로 차 골목길을 막았다.
냄새가 나는 골목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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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데…
하사 마에다는 작업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 측에서 이미 4개의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7개의 작업파일중 6개는 유인용이었으니까 시시한 프로그래머 두놈만 붙어도 간단하게 해결을 볼수 있으리라 짐작을 했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였다. 이른바 트로이목마 형식을 가진 아메바파일였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눈치채고 만진 흔적이 있었다.
"설마…"
마에다는 떨리는 손으로 암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File Update(갱신)>이라는 문구가 별안간 떠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마에다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재빠르게 접속자 명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빠가야로.
화면에서 갑자기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붕 떠올라 오고 있었다.

누굴까….
마에다는 커튼을 열어 젖혔다. 에스파스 창 밖으로 저팬 알프스의 산자락이 올려다 보였다.
시모노세키로 간다던데…지름길인가…?
마에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뒤 담배를 입에 물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란조 2위를 바라보았다. 이번 음악은 스윙 풍이었다.
마에다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조수석 뒤쪽 선반에 있는 17인치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두 눈을 17인치 모니터에 고정했다.
오사카 마쓰리 대축제가 후지 TV를 통해 생방송 되는 장면이었는데 무엇인가 못볼것을 보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마에다의 뇌리에 스쳤다.
마에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세이브된 화면을 다시 읽어 들였다. 그의 다른 한 손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으로 다시 재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방금전에 후지 TV 카메라에 김준의 모습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파들에 포위되어 잔득 지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에다는 어떻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마쓰리 대축제에 괴한 난입. ==

마에다는 강한 승리감을 만끽했다.
어디로 도망갔나 했는데…오사카에서 들개처럼 헤매고 있었단 말인가…
마에다의 두 눈은 다시 야비하게 반짝였다. 느낌이 이상했는지 란조 2위가 핸드 브레이크를 걸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1위님. 방금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란조 2위. 지금 당장 오사카로 갈 수 있겠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침에 말했듯 이 차는 시모노세키로…"
"란조 2위… 난 감시를 받고 싶지 않아…"
란조는 움찔 놀란 눈으로 마에다를 바라 보았다. 하사 마에다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머리가 크고,돗수 높은 안경안에서 괴이한 눈을 내보이고 있는 마에다는 어딘가 다르게 별세계에서 날아온 인간 같았다. 아니 독종이었다.
란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지만,그녀의 손은 어느새 홀스트에서 콜트 권총을 꺼내 마에다에게 내밀고 있었다.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1위님… 권총으로 저를 협박해 주십시오."
란조는 비감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후에 보고서를 제출할때 저는 정당한 사유를 달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저를 협박하십시오. 그럼 오사카로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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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미나는 자신이 했던 작업을 세이브한 화면을 다시 불러 들인 뒤 읽고 있었다.
처음에 보이는 화면은 마에다의 컴퓨터에 남아 있는 정체불명의 미사일 탄두의 설계도면이었다. 화살표는 미사일 탄두의 몸속에 있는 소형 컴퓨터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복잡한 난수표를 화살표가 찾아내고 있었다.
그런뒤 미나가 마에다의 컴퓨터에서 보았던 작업계획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진행했던 파일 패치 광경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패치는 쉬웠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었다. 미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화면과 벽시게를 번갈아 보았다. 벽시계의 바늘은 밤 10시 4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벽시계에서 눈을 뗀 그녀는 마에다의 작업 파일을 다시금 컴퓨터 화면에 불러 들였다. 어쩐지 겁이 잔뜩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도 없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미사일 발사시각을 4시간 앞 당겨 입력을 했다.
바로 15분 뒤였다.
마침내 미나는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 우측 하단부에 있는 작은 화면에서 갑자기 붉은 화살표가 빙글빙글 회전을 시작했다.
동시에 대한민국 컴퓨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아메바파일>도 눈부시게 작동을 시작했다. 아니 미나가 지금 보고 있는 <아메바파일>은 실상 컴퓨터 안에 있는 파일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하사 마에다가 제작한 <아메바파일>은 전산망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몸체안에 장착되어 있는 고성능 컴퓨터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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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캠프 데이비드의 초소 탐조등이 맹일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측 비행장쪽으로 탐조등이 방향을 바꾸었다.
맹일병은 탐조등을 힐끔 쳐다보다가 내무반을 행해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산 하나를 타고 넘어야 했으니까 아직도 10여분을 더 걸어가야 했다.
이슬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맹일병은 오솔길을 접어 들다가 우측 숲 속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맹일병은 불빛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군화 밑창으로 자갈돌이 밟혀왔다.
츠츠츠츠…..
맹일병은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작은 언덕이 있었다. 접근 근지 구역.
맹일병은 잡풀을 밟으며 언덕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맹일병은 움찔 놀랐다.
언덕쪽에서 10여명의 미군 전산요원들이 우중에 야간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대형사고가 발생한 거 같았다.
캠프 어딘가에 신병기가 있다고 하던데…..
언덕아래 쪽에 있었나?…
맹일병은 몸을 뒤로 돌렸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그는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순간 다시 미군들이 와짝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일병은 서둘로 언덕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맹일병이 보는 앞에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더니,별안간 잔디의 일부분이 허공으로 붕 솟아 오르고 있었다.
맹일병은 긴장한 얼굴로 급히 가까운 나무로 기어올라갔다.
그때 별안간 지축을 흔드는 큰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언덕 한편에서 붉은 불꽃이 용광로처럼 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퍼싱 2 미사일였다.
한때 유럽배치 당시에 실용성을 의심받은바 있었던 퍼싱 2 탄도 미사일이 지축을 흔들어대며 밤 하늘로 무섭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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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악지대의 1만미터 상공이었다. 한대의 비행기가 6시간째 휴전선을 따라 왕복하고 있었다. B707 몸체에 미 웨스팅 하우스사가 제작한 원반을 탑재한 미 공군의 조기경보기(AWACS)였다. 조깅경보기는 긴급 전문을 받자마자 후미 날개를 뒤로 잡아 당겼다. 곧바로 반원을 그리며 조기경보기는 백령도로 방향을 틀었다.

같은 시각. 대전 공군 기지에서는 폭우를 뚫고 5대의 전투기가 긴급 발진을 하고 있었다. LANTIRN(야간저고도 항법장치)가 부착된 C/D block 50 기종의 F-16 전투기였다.

마하 0.7의 속도였다. 조기경보기가 철원 상공을 통과할 무렵 오른쪽에서 북한의 미그기가 따라 붙었지만 잠시 후에 그것은 짙푸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뒤 3분이 지났을까. 조기경보기의 첨단장비는 퍼싱 투 미사일의 진행방향을 포착한 뒤 진행방향을 산출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오산과 나와 미군기지,대전 공군기지로 긴급 전송되었고,대전 공군기지에서는 그것을 또 다시 5대의 F-16 조종사에게 재빠르게 전송을 했다.
조기경보기가 속도를 늦춘 것은 백령도 상공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낙뢰가 조기경보기의 버섯모양 원반 바깥으로 튕겨 나가면서,한번에 600대의 적기를 포착할 수 있는 조기경보기의 첨단 레이더망에 정체불명의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퍼싱 투가 아니었다. 대전에서 날아오는 5개의 점은 F-16이 분명했지만,지금 보이는 3대의 비행물체는 백령도 서단 자유항공 지역에서 손살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낙뢰가 떨어지자 비행물체 3대의 윤곽이 똑바르게 식별되었다.
미국산 조기경보기보다 성능이 우수한 E-767 조기경보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대는 미쯔비시산 F-1 지원전투기로 한국 상황을 긴급 관측하기 위해 제주도 남단을 우회하여 서해로 올라오는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정찰비행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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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차. 용의자를 포착했다. 다카시마 백화점 앞이다!!"
경찰차의 확성기에서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경찰차가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지하 쇼핑가 앞 도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심장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존은 도로 한가운데에 멈추어 서 있었다.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가 사방에서 나타나듯,경찰차들이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지축을 흔들었다. 등 뒤로는 3대. 그리고 백화점 방향으로는 5대의 경찰차가 김준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버려라. 가방을 버려라."
우측 3번째 경찰차에서 내린 사내가 확성기를 통해 김준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앞 뒤로 10명의 경찰이 모두 김준을 향해 권총을 겨누어 왔다.

진광섭의 자동차는 나니와 전철역 앞에 막 도착하고 있었다. 광섭의 눈에 붉은 경관등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내의 모습도 보였다.
"미쳤군요…!"
진광섭의 옆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가 어이가 없었는지 탄식을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거 눈감아야 합니까,아니면 도와주어야 합니까?"
이상운이 다시 묻자 광섭은 얼굴을 잔득 찡그렸다. 김준을 빼내오기 위해 일본경찰을 곧장 덮칠 수는 없었다. 자동차 넘버만 보면 영사관 자동차라는 것을 손쉽게 알아낼 터이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김준이 내각정보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준을 강력송환하라는 김달영 안기부 차장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이건 진광섭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었다.
광섭은 골치가 아픈지 잔뜩 구겨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무라구미田村組는 어디에 있나?"
"10분 거리에 있습니다만. 다무라구미를 투입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지금 연락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이상운은 곧바로 핸드폰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다무라구미는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작업을 할 시에 안기부측에서 고용하는 야쿠자 조직이었다.
실상 강력 안기부라고 하지만 해외에서의 수사활동은 많은 제약이 있었다.
특히 일본 경찰과 맞불을 할 경우에는 많은 조심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가끔 한국계 야쿠자를 동원해 수사를 하거나,일본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곤 했는데 이중 다무라구미는 광섭과 몇 차례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광섭은 섭섭한건지 화가 난 건지 자신의 감정을 알수 없었다. 방금전에 미사일 한발이 북쪽으로 발사되었다는 전갈을 들어서인지 타이슨에게 한방 맞은 기분이 들어 있었다. 이 어려운 순간에,용의자로 지목된 김준은 일본 경찰로 넘어갈 위기에 빠져 있다. 그걸 알면서도 빼 내지를 못하는 건 어쩌면 국력의 차이인지 모른다. 대쪽 진광섭마저 이럴때는 머리가 바이러스에 걸린듯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상운도 광섭의 기분을 아는지 조용한 음성으로 다무라구미의 한국인 보스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화가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다카시마 백화점 저쪽에서 초스피드로 트럭 한대가 달려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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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 마에다의 파일을 패치한 뒤 미사일을 발사시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니쓰라 경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주쿠 주택가를 올라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를 했는지 2층 양옥으로 된 고바야시의 저택은 멀리서도 분위기가 색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미나의 집은 고바야시의 저택 뒤쪽이었다. 재래식 일본 가옥으로 비온 뒤에 바라보는 것이라 한층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미나의 집을 한바퀴 돈 뒤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구두를 신고 오다니….아식스를 준비하는 건데 말야…
오니쓰라는 사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썰렁했다.
오니쓰라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쓰레기통 위로 올라섰다. 밤 11시경인데도 뒷마당 쪽에 있는 방에만 불이 켜져 있다. 푸른색이었다.
오니쓰라는 미나의 의붓오빠인 하야시가 기거한다는 다락방을 눈짐작으로 찾아 보았다. 다락방 불은 꺼져 있었다. 오니쓰라는 길게 호흡을 조종하고 주위를 살피더니,홀스트의 권총을 허리뒤 벨트 안으로 삽입했다. 문득 북쪽 주택가 너머로 유서 깊은 하숙집 가나기원의 울창한 정원수가 보였다.
오니쓰라는 가볍게 호흡을 조종하더니,40대 답지 않게 잽싸게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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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야?"
경찰 하나가 등뒤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트럭을 막아! 막으란 말야!!"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트럭 한대가 백화점 뒤쪽에서 손살같이 튀어 나오는가 했더니,곧장 경찰차를 향해 폭풍노도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총구가 불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자를 10발을 헤아리기도 전에 경찰들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흩어져! 미친 놈이다!!!"
콰콰콰——–
이미 두대의 경찰차가 트럭에 들이박혀 뒤집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트럭은 도로 중앙에 서있는 김준의 코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준은 황당한 얼굴로 트럭을 올려다보았다.
척!
트럭 문이 준의 눈앞에서 열렸다.
나디아였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나디아가 분명했다.
"김준씨. 여자를 속타게 하는 게 장기인가 보군요. 어서 올라 타시죠."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트럭의 좌우를 보았다. 두대의 경찰차가 꼴 나쁘게 부서져 있었고,10여명의 경찰들은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은 서둘러 트럭에 올라탔다. 아니 유유히 올라탔을 것이다. 준이 트럭에 올라 타자 나디아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다시금 트럭은 두대의 경찰차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이번에는 불도저처럼 우악스럽게 경찰차를 밀고 나가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측에서 경찰차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랑 뒤집어 졌다.
준은 멍한 눈으로 백미러를 응시하다가 어쩐지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명의 경찰중 쫓아오려고 생각을 가진 경찰은 한 사람도 없어 보였고, 모두 블랙마술에라도 걸렸는지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총을 안 쏘는 거지? 나디아가 경찰들에게 최면술이라도 걸었나?"
나디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짧게 말했다.
"왕자님. 이 차 유조차에요. 저라면 유조차를 상태로 총을 쏘지는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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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렉터 콜렉터 콜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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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랐다. 3대의 경찰차가 우당탕거리며 유조차 뒤를 따라 붙는다.
우측으로는 오사카 사카이선 고속도로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방금 일본 수상이라도 살해한 거에요?"
신속하게 따라 붙는 일본 경찰들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나디아는 백미러를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이번에는 자책을 하는 거 같다.
"어휴,이상하네! 난 콘도를 사겠다고 꼬박꼬박 저축을 했는데…왜 경찰에게 쫓겨야 하는 거지?"
그 사이에 따라 붙는 경찰차는 7대로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지금 공부를 하는 거에요?"
이 와중에도 컴퓨터다.
김준은 라이터 점화기와 노트북을 카잭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런 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굴러갔지만 나디아는 약이 바짝 올랐다.
"나 피곤해요! 운전을 대신 해주던가,아니면 제트기를 예약해 주세요!"
유조차 우측에서 막 경찰차 한대가 긴박하게 달려나오고 있었다. 준은 경찰차를 보다가 나디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로 상황을 파악했어! 가다가 우측으로 꺾으면 오사카 만이 나온 다는 군."
"그건 나도 알아요!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 경찰차를 따돌릴 방법이에요!"
나디아가 말하자 준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에 연결된 마이크로폰의 볼륨을 높였다. 곧바로 복잡한 교신음이 마이크로폰에서 터져 나왔다.
"제트기가 없다는 군. 대신 경찰 교신을 도청했는데 이건 어때?"
그러고보니 경찰 교신음이 노트북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설마? 지금까지 경찰 교신을 도청하고 있었어요?"
나디아는 깜짝 놀랬다. 이제 보니까 김준은 오른쪽 귀에 워커맨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헤드폰 선은 노트북의 마이크로폰 단자에 달려 있는 잭과 연결 되어 있었다.
"경찰들은 마쓰리 축제때문에 모두 도오톤보리 운하에 몰려 있어! 이 때문에 항구 쪽은 텅텅 비어 있을 거야."
지금도 김준은 핸드폰을 이용해 경찰 교신음을 도청하고 있었다. 우선은 경시청 컴퓨터에 접속을 한 뒤,오사카 교통 관리 시스템과 오사카 경찰청 무선 관리국 전파를 잡은 것이다.
"자신할 수 있어요? 오사카 항에는 경찰이 없는 거?"
준은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뒤에는 경찰이 많군."
"그래요. 정답이네요. 여기서 도망가는 게 급선무에요!"
"그런가?"
김준은 차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두대의 경찰차가 유조차를 추훨해가고 있었다. 추월한 뒤에는,꼴 나쁘게도 유조차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경관 두놈이 권총을 꺼내는 모습이 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우릴 벌집으로 만들 생각인가?"
준은 나디아를 응시하며 비쩍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해커가 된 게 후회가 되는 군! 차라리 뻐꾸기 시계나 만들면서 사는 건데 말야!"
나디아는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인간이 한 것은 뻐꾸기 시계를 만든 거 밖에 없다는 거에요? 그런 말 이제 하지 마세요. 나 정말 뚜껑 열 거에요!"
나디아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신경질적으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이번에는 좌측에서 시속 90Km의 속도로 경찰차 한대가 따라붙고 있었다.
시나노 곤베이를 태운 헬기는 막 오사카 상공에 진입을 하고 있었다. 곤베이의 눈에 오사카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막아! 속도를 떨구어 놓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야! 곧 고공침투조를 투입할 것이다!"
곤베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4대의 헬기가 복잡하게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곤베이는 헬기를 돌아다보다가 다시 핸드폰 스위치를 올렸다. 곧바로 방위청 지하에 있는 전산실이 연결되었다.
궁금했다. 한국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던데…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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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님. 미사일의 벡타가 지금도 수상합니다!"
"이해할수 없군. 아직도 벡타를 산출하지 못했단 말인가?"
오산 미군 기지 안은 계속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30명이나 되는 기지 요원들이 퍼싱 투 미사일을 추적하고 있었지만,벡타때문에 아직도 미사일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속도 때문이었다. 마하 12까지 가능한 퍼싱 투 미사일이 지금은 마하 0.2에서 마하 3 사이를 왕복하면서 저속 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동 네비게이트 화면이 미사일의 목적지를 추적하다가도 5초 간격으로 착오를 보이고 있었다.
음성이 들려 왔다.
"처음부터 비행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날아가는 속도가 빨랐다 느렸다 하기 때문에 도무지 미사일이 떨어질 장소를 파악할수 없습니다!"
탄도 미사일의 표적지는 벡타에 의해 찾아낼수 있었다. 벡타란 탄도 미사일의 발사속도를 말하는 것으로 속도가 빠를 수록 큰 포물선을 긋기 때문에 먼거리까지 날아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덕저도와 연평도 중간 밤하늘 어딘가에 있을 퍼싱 투 미사일의 비행 속도는 전혀 일정하지가 않았다. 더구나 퍼싱 투는 관성 유도방식과 레이더 유도방식을 복합적으로 채용하는 골치덩이였다. 이 때문에 벡타를 측정해 보았자,예정 목적지가 어디인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저러다 정말 평양에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사령관이 일갈을 하자 다시 기지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개미떼가 나타났습니다!!"
중앙 모니터는 23시 45분부터 서해 상공에 나타난 일본 국적기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금 휴전선 저쪽에 나타난 30대의 미그기를 쫓기 위해 화면이 바뀌었다.
"공군 사령부는 뭐하고 있소? 미사일을 찾아낸다고 하지 않았소?"
뒤에 서 있는 공군 소장이 대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폭우속에 미사일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모두 잔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불안했다. 이미 전방 부대는 데프콘 2의 강경 비상 체제에 돌입을 했는데,탄현에 있는 9사단 포대의 대포들 역시 임진강 건너를 겨눈 상태에서 혹시나 벌어질지 모르는 개전 상황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미사일의 향방이었다. 지금은 어디로 떨어지느냐가 아니었다.
구차했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북쪽 영공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격에 성공해야 했다. 그게 한국 대통령의 지시었다.
사령관이 침묵에 빠져 있을 때 요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퍼싱 투 미사일을 콘택트contact했다는 연락이 공군사령부에서 왔습니다!"
아연 사령실 안은 회색 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기쁨에 넘쳐 외쳤다.
"미사일을 무링(mooring:항공기 용어.계류)할 방법이 있으니까 게속 콘택트 비행을 하라고 전해!"
"공군사령부를 연결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군사령부 회선이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자 F-16 조종사 간의 교신이 들려 왔다.
"퍼싱 투는 전방 7.5NM 우측에 있습니다. 로저."
7.5NM이면 약 12Km 정도의 거리였다.
"웅진 반도입니다. 미사일이 곧 휴전선을 넘어 갈 거 같은데요…"
조종사들간의 교신이 들려 오면서 중앙상황판은 곧바로 TACAN이 모니터링되기 시작했다. 전투기가 발사한 전파를 잡은 대전 공군 사령부가 그 전파를 이용해서 현재 전투기의 방위와 위치를 산출해 내는 화면이었다.
퍼싱 투 미사일의 움직임도 오른쪽 화면에서 잡혀 오고 있었다. 이 화면은 다섯대의 F-16 전투기가 잡은 퍼싱 투 미사일의 움직임이었다. 폭우가 심한 거 같았다. 다시 조종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지금 35노트의 남동풍이 불고 있습니다. 계산해 주십시오!"
조종사의 음성이 끝나자 사령관은 공군 소장을 돌아다보았다.
"계산해 달라니,무슨 뜻이오?"
소장이 대답했다.
"바람 때문에 미사일에 글라이드(동력 없이 비행하는 일)가 걸린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바주카폭탄도 날아가다가 방향이 꺾이는 경우가 종종있지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오?"
"국방부가 결정했던대로 입니다. 폭우때문에 열추적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레이저 추적도 신뢰를 할 수 없으니…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아야겠지요."
"좋소. 계속 콘택트 플라잉을 하라고 지시하시오!"
콘택트 프라잉Contact Flying이란 조종사가 지상참조물에 의해 비행 자세나 위치를 결정하여 공중 조작을 수행하는 비행행위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퍼싱 투 미사일을 눈으로 쫓아가면서 비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럽시다. 이제 위치를 알았으니까 빨리 요격기를 발진시켜 봅시다."
사령관은 소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령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미사일이 아니라 지금 같아선 미사일 할아비라도 쫓아가서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기야 한갓 해커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면 이 또한 무슨 창피인가…
사령관은 전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는 곧장 용산 국방부로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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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는 콘택트렌즈를 교체하다가 불안스럽게 두 눈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그녀의 입에서는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지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수영 선수같이 딱 벌어진 어깨가 흔들 거렷다.
첫번째 방해 공작은 생각보다 만족할 만했다. 비록 미사일의 표적지를 해킹하는 일은 실패를 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는 단지 시간만 당겨보겠다는 생각을 했었을 뿐이니까.
미나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는 북한의 평양전산센터 전산망을 재빠르게 찾아갔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두 눈은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었다.
평양전산센터로 들어가는 일은 간단했다. 역시 하사 마에다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은 사방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미 그가 길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미나는 한시간전과 마찬가지로 아이디를 <東急HACK>로 바꾸었다.
이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 왔다. 미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거실로 나 있는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오니쓰라 경감은 정원 옆쪽에 있는 목조건물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침소리가 들려 왔지만 다시 조용해진다. 오니쓰라는 소리를 쫓아 몸을 손살같이 움직여 갔다. 거실 유리창이 보였다. 오니쓰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거실 안을 살피다가 다시 본체 뒤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뛰어가다 말고 오니쓰라는 냄새를 맡았다. 지하실 환풍구였다. 나무 판자로 막혀 있는 지하실 환풍구 안에서 담배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재빠르게 45구경 권총을 꺼내 들었다.

후꾸오 미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거실의 어둠속에서 오니쓰라 경감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니쓰라가 뒤쪽으로 사라지자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주방에서 뒷마당으로 나 있는 문을 유령처럼 응시하다가 그 우측에 있는 다용도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처음에는 자잘한 공구박스가 미나의 손에 만져지고 있었다. 미나는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아얏!"
미나는 눈을 부라렸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고,유방이 수축되었다. 손가락을 치켜세우니까 검지손가락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에 문 상태에서 이번에는 다른 쪽 손으로 공구실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긴 줄이 달려 있는 낫이 그녀의 손에 잡혀 왔다. 그 아래쪽으로는 자동 못박는 기계가 있었다.
미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낫 손잡이에 달려 있는 줄을 잡았다.
츄릿릿릿릿—–
낫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그러다가 요요처럼 미나의 손으로 다시 뒤돌아 온다. 마치 부메랑이 날아가다가 돌아오는 것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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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었다. 고작 10여대에 불과했던 경찰차는 이미 20여대로 늘어나 유조차를 거미줄처럼 포위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들중 유조차의 진행방행을 막으며 달려가는 경찰차는 4대였고,유조차의 좌측과 우측에도 경찰차가 진로를 막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신호를 했던 모양이다. 유조차의 앞쪽에서 달리던 4대의 경찰차가 동시에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좌측과 우측에서 달리던 경찰차도 속도를 늦추면서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더럭 겁이 났다. 이상했다. 전방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속도를 늦추고 있었는데,이제 보니까 경찰차들이 사방에서 병풍을 치듯 포위하면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왜 속도를 늦추는 거죠?"
경찰차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나디아는 유조차의 속도를 시속 70Km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우리를 완전히 잡을 생각인거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대로 돌파할 수 있겠어?"
"자신이 없어요. 지금 생각을 해 보니까,난 뻐꾸기 시계를 만들어 본 경험도 없어요."
한국에서는 뻐꾸기 시계를 만들다가 도산한 기업이 많다.
"방법이 없어. 앞 차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농담하지 마세요. 앞 차는 경찰차란 말에요."
"아까는 경찰차가 아니었나?"
"아까는 내 정신이 아니었죠. 그리고 행운이 두번 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경찰차가 앞 뒤에서 거리를 좁혀 오자 나디아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방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는 다시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나디아 역시 경찰차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유조차의 속도를 급격하게 늦추고 있었다. 그녀는 곤베이가 파 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 같다.
간사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비행기를 힐끔 올려다보다가 비쩍 마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 이젠 그만 항복할까요?"
나디아는 속도계를 내려다보았다. 속도는 시속 40Km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뭐해요? 또?"
나디아는 내심 불안한지 김준을 돌아다보았다. 준은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죽을 때까지 책임지라는 말은 안하겠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책임을 져야 해요. 제발… 그 컴퓨터 오락은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말을 한 뒤 나디아는 슬며시 액셀레이터를 밟아 보았다. 뒷바퀴에서 요란하게 자갈 하나가 튀어 오르더니,우측에서 달리는 경찰차의 유리창을 두들겨 댔다.
준은 우측에서 달리는 경찰차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한국 말이 들려 오는데? 어떻게 된거지?"
"예?"
준은 빠르게 마이크로폰의 볼륨을 높였다. 이상운과 동료들 간의 핸드폰 통화가 혼선되어 들려 오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글쎄…"
준은 고개를 가웃뚱했다. 그러고보니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음성이다.
불쑥 가나기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안기부가 오사카에 와 있단 말인가….?
나디아의 음성이 들렸다.
"설마 안기부가…?"
"이 근처에 있는 거 같은데?"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모르겠어. 그 친구들을 찾아봐야겠어."
그렇게 말을 하다가,준은 생각을 바꾸고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곧바로 서울에 있는 안기부의 인터넷 사이트 IP(주소)가 떠올랐다.
"뭐하는 거에요?"
나디아가 되물었지만,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워커맨의 DAT 테입을 바꾸어 끼고 있었다. 그런 뒤 노트북의 프린터포트에 워커맨을 연결했다. 나디아가 다시 물었다.
"설마…자료를 보낼 생각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준은 빠르게 자신의 54,400bps 파워 모뎀을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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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싱 투 미사일은 대연평도 상공을 이제 막 벗어나고 있다. 자정 정각. 곧장 탄두 아래로 청린도 지역이 내려다 보였다.
이 상황은 오산 기지 상황판에 나타나고 있었다. F-16의 자동카메라가 미사일의 스테인리스같은 후미 불꽃을 계속 찍어 가고 있었는데,그 자료를 전송받은 컴퓨터는 계속 미사일의 위치를 스크랩하고 있었다.
계속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대기권밖에 있는 미제 군사위성이 퍼싱 투의 정확한 항로를 추적해낼때까지는 이 긴장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령관의 시선은 다시 웅진반도 지역이 모니터되는 화면으로 이동했다.
웅진반도는 흡사 배부른 임신부처럼 아래쪽으로 튀어 나와 있다. 그곳을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니…사령관은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꿈인가.
불안했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웅진반도는 반쯤 날아갈 것이다. 아니 실제로는 단 몇 킬로그램 밖에 안되는 폭약이 장착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퍼싱 투 미사일은 핵폭탄을 유동적으로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였다. 핵은 없다고 했었지…분명히 그렇게 전해 들은거 같다. 국방부 장관 말로는 오산기지에는 핵이 없다고 했었다.
"아직 소식이 없나?"
"지금 이동중이랍니다!"
"몇 분 남았나?"
"45초입니다. 45초 뒤면 퍼싱 투는 북한 영공으로 진입을 합니다!"
사령관은 바르르 입술을 떨었다.
"요격은 언제 시작되나?"
"15초 뒤입니다!"
부관의 말이 끝난 뒤 5초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대기권밖에 떠 있던 군사위성이 사방에서 전달받은 자료의 연산을 막 끝내고 있었다. 이중에는 조기경계기가 잡은 전파자료와 5대의 F-16 전투기가 콘택트한 화상자료가 있었다.
2초 뒤. 이번에는 대연평도 상공 폭우속에서 느리게 비행을 하던 5대의 F-16 전투기 밑에서 별안간 검은색 물체가 불쑥 떠올랐다. 한시간전부터 휴전선을 따라 잠행을 하던 두대의 A-10 선더볼트 공격기였다. 이들이 나타나자 F-16 전투기는 약속이나 한 듯 우측으로 뱅크비행에 들어갔다. 그들이 폭우 속으로 종적을 감추기에는 채 1초도 필요하지가 않았다.
동시에 두대의 선더볼트기중 오른쪽에 있는 공격기의 하드포인트 미사일 런처에서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세미액티브 유도방식의 미사일.
장갑차를 뚫을 수 있다는 API(철갑소이탄)이 매분마다 4,200발 자동발사되는 장치가 교묘하게 부착된 세미액티브유도방식의 이 미사일은 퍼싱 투 미사일을 찾아 폭우속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55초 뒤.
연평도 북방 휴전선 너머의 밤하늘에서 스테인리스 불꽃이 잠깐 작렬했다.
세미엑티브 유도방식의 미사일이 북한 영공으로 진출하는 퍼싱 투 미사일을 쫓아간 뒤에,4,200발의 철갑소이탄으로 퍼싱 투를 무차별하게 요격한 것이다.
요격에 성공하자 오산 기지안은 떠들석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간에 벌어졌던 최첨단 추격전에 성공을 하다니.
모두들 믿을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얌전하게 생긴 한 사내는 자신의 모니터를 묵묵히 응시한채 불안한듯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던 거 같았다.
사내의 별명은 숏다리였다. 소심한 건 아니었는데,사내는 이 별명이 싫었다.
이 숏다리라 불리는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사령관님… 방금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동급해컵니다!!!"
갑자기 상황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갖은 고생끝에 미사일을 잡았는가 했더니,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이미 상황실에 있는 30대의 모니터는 동시에 같은 동화상을 불꽃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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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작업을 끝낸 뒤 DAT 워커맨에서 테입을 꺼냈다. 나디아는 운전을 하다말고 불안한 듯 DAT 테입을 응시했다.
"한국으로 전송했어요?"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조차는 시속 30km로 달리고 있었고,이제는 속도가 만만했는지 가끔씩 경찰차들이 보디를 부딪쳐 왔다.
"정말 난리군요. 이젠 정말 포기해야 할까 봐요."
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콘도를 구입할 생각을 포기할 생각인가?"
"농담이 아니에요. 이러다 유조탱크에 불이라도 붙으면…."
"지금부터 내가 운전을 하지."
나디아는 허탈했다. 김준이 운전을 하겠다고 해서 자리를 바꿀 형편도 아니었다. 좁았다. 유조차 꼴도 말이 아니었지만,사람 꼴도 말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팔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겠다니…
"필요없어요. 운전은 나도 할수 있고,지금까지 해 온것도 바로 나에요!"
나디아는 화가 났는지 급하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곧바로 콰쾅 하면서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 한대가 땅콩처럼 퉁겨 올랐다.
"앞이 아니야!"
준이 서둘러 핸들을 잡아왔다. 그런 뒤 옆으로 꺾었다.
이번에는 유조차의 우측에서 악착같이 버티면서 따라오던 경찰차 한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쟁반처럼 뒤집어지고 있었다. 황당했다. 여유를 가지며 뒤따라 오던 경찰차들이 급하게 경관등을 반짝이며 싸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멈춰! 너희들은 도망갈 수 없다! 차를 멈추란 말이다!!!"
요란하게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좌측에서 따라 붙는 경찰차에서는 권총을 급하게 뻬어드는 경관의 모습이 보였다.
나디아는 우울했다.
"틀렸어요…이젠 총을 사용할 생각인가 보네요. 왜 지금까지 안쏘는지 모르겠네요. 그쵸?…"
나디아는 전의를 잃은거 같았다. 그녀는 유조차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웃음이 나왔다. 나디아는 씁쓰레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그때 갑자기 나디아의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퍼엉——————–!!!!

믿을수 없는 광경이었다. 갑자기 앞쪽에서 달리던 경찰차 한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염을 토하고 있었다.
"뭐에요? 저건?"

나디아가 입을 벌리며 놀라고 있을 때 이상운은 오사카 페리터미날 앞에 주차한 자가용안에서 쌍안경으로 어둠 속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이상운은 풀이 죽은 얼굴로 진광섭을 향해 돌아다보았다.
"여기서는 안보입니다. 설마 우리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해 진 것은 아니겠지요?"
진광섭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릎팍에 올려져 있는 노트북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구강향수를 꺼내 입안에 치익 뿌렸다.
"다무라구미 조장에게 두번째 로켓탄이 장탄 되었나 물어 봐."
이상운이 대답했다.
"예. 이미 준비했습니다.."
"한방 더 쏘라고 해라."
광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상운은 핸드폰에 대고 크게 외쳤다.
"파이어!"

다시 밤하늘을 가르는 무쇠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퍼엉————-!!!!!
미제 RPG 7 대전차 로켓 발사기에서 날아온 82mm 히트탄이 이번에는 유조차의 오른편에서 달려가는 경찰차의 보디에 힘차게 박혀 왔다.
동시에 경찰차는 요란하게 타이어 바퀴를 토해 낸다. 화염은 방금 전보다 컸다.
밤하늘을 향해 무섭게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게 뭐에요? 누가 로켓탄을 쏘아 대고 있어요!!!"
나디아는 겁을 먹고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불꽃이 유조탱크를 덮쳐 오고 있었다.
"안기부의 지원이야."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옆쪽에서 불이 붙은채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경찰차를 보았다. 그러다가 눈길을 사카이 고속도로로 옮겼다. 로켓탄은 사카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콘테이너 트럭 상단 부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정말 안기부에요?"
"그래. 제법 빠른데?"
준은 히쭉 웃으면서 이상운의 얼굴을 떠 올렸다. 그러다가 노트북의 핸드폰 전화 라인을 열어 놓았다. 곧바로 마이크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이상운이 아니라 진광섭였다.
"과장님. 깨 부십시다! 더 깨부숩시다!"
이상운은 무전기에서 들려 오는 폭발음을 들으며 신나게 외치고 있었다.
진광섭은 그 옆에 서서 김준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김준. 길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확인할게 있어."
광섭은 자세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자네가 날려 온 방위청 극비는 사실인가?"
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광섭은 묵묵히 김준의 설명을 들었다. 그의 선글라스는 야릇하게 빛을 반사한다.
"왜 이제야 알려 주는 것인가? 그동안 나에게 손을 내밀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텐데?"
광섭은 그렇게 말을 하다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아냐,좋아.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는 게 좋겠군."
광섭은 느린 속도로 핸드폰 스위치를 내렸다. 밤하늘에서 헬기 다섯 대가 긴급히 날아오는 것이 진광섭의 선글라스에 비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헬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종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4시방향,사카이 고속도로 위에 있는 콘테이너 트럭입니다. 육좌님!"
빡가야로…
곤베이는 이마가 후끈거렸다.
방위청 전산팀이 미군 함대통신망을 도청한 결과,한국 측에서 미사일을 교묘하게 요격을 했다는 소식을 방금 들은 터였다. 하지만 오키나와 시스템은 생각과는 달리 7개의 시스템중 6개를 건졌고,1개의 내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아메바> 파일인거 같은데 아무래도 오산에 심어져 있는 것과 같은 종류였다. 이 때문에 곤베이는 슬며시 겁이 나던 차였다.
아메바 파일까지 동원하다니. 이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곤베이는 종잡을 수 없었다. 별반 음모가 아니라 미치광이 프로그래머가 개입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이제는 김준이 지독하게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또다른 전문가가 붙어 있던지…
어쩌면 오키나와 기지에 심어져 있는 아메바 파일 역시 미사일을 실제로 발사시키는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사카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뒤 김준인지 뭔지 하는 한국놈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자신의 눈 앞에서 두대의 경찰차가 불태워지고 있었다.
화가 났다.
"지시 변경한다! 고공침투조는 양쪽으로 분산 이동하라. 하나는 콘테이너 트럭을 커버하고 다른 한 팀은 유조차를 쫓아! 뭐하고 있나, 당장 시작하지 않고!"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자세 그대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엔 핸드폰,왼쪽손엔 무전기가 들려 있고 혁대 뒤로는 삐삐가 보인다.
4대의 헬기는 곤베이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복잡하게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측 두대는 레프트 턴으로 돌았고,다른 두대는 라이트 턴으로 긴박하게 하강을 했다.
라이트 턴으로 돌았던 두대의 헬기는 곧장 유조차를 쫓아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82mm 히트탄의 모터가 날카롭게 밤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12초 뒤. 이번에는 유조차를 쫓아가던 두대의 헬기중 오른쪽에 있는 헬기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이 곤베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할 말이 없었다.

이상운은 입이 벌어졌다. 아니 이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진광섭이 곤베이와 맞불할때 끝까지 간다는 소문을 들어왔지만 이정도일줄이야. 이젠 슬며시 겁이 났다. 이상운은 밤하늘에서 크게 작렬하는 헬기를 못내 떨구며 진광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은 자판기에서 종이커피를 뽑아 오고 있었다.
"과장님…지금 너무 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수습을 하시려고 내각정보국 헬기까지 잡으십니까?"
광섭의 흰머리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됐어. 이제 다무라구미 애들에게는 철수를 하라고 해라. 나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트륨 등 때문인지 모른다. 상운의 눈에는 광섭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희미하게 보인다.
"알,알겠습니다…"
상운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콘테이너 트럭에 연락을 했다.
잠시 뒤,이번에는 콘테이너 트럭이 고속도로 위에서 크게 폭발을 시작했다.
정확했다. 항상 다무라구미가 하는 수법인 것이다.
진광섭은 폭팔하는 콘테이너를 응시하다가 자가용으로 걸어갔다. 이상운이 한발자국 앞서 뛰어가서 뒷좌석 문을 열어 준다. 광섭은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하사 마에다라…어쩐지 이상하다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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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쓰라 경감은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방에 있는 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아까는 분명이 불이 켜져 있었는데…
미나라는 아가씨의 방이었을 것이다.
오니쓰라는 커튼이 내려져 있는 창을 응시하다가 다시 인기척 소리를 들었다.
등 뒤였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철문 안에서 들리는 소리다. 누군가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다가 멈춘 게 분명했다.
오니쓰라는 권총을 두손으로 쥐고,철문으로 조심스럽게 접근을 했다.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무언인가가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쥐였다. 쥐새끼가 앞 발톱으로 철문을 갈아대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이때 이번에는 주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니쓰라는 잽싸게 벽에다가 몸을 붙였다.
그런 뒤 포복을 하듯 주방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바로 앞에는 만화가 고바야시의 집이 있었다. 욕실 창이었다. 욕실 안에서 고바야시가 이쪽을 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등 뒤가 바로 이즈의 할멈 방이라는 뜻인데…
이상했다. 바람이 오니쓰라의 등 뒤에서 흐믈흐믈 불어오고 있었다. 머리 위였다. 겁이 났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오니쓰라의 뇌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때 철커덕하는 소리가 오니쓰라의 귀에 들려왔다. 곧바로 오니쓰라의 다리 밑으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뒤 한참이 지났다.
오니쓰라의 몸은 벽에 그대로 붙어 있었고,그의 권총 역시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붙어 있지 않았다.

미나는 방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오니쓰라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미나는 그것을 축구볼 차듯 맨발로 툭툭 차기 시작했다.
그런 뒤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평양전산센터 일이 더 궁금했다.
미나가 평양전산센터로 다시 접속을 했을 때는 이미 누군가가 다녀가 흔적이 있었다. 하사 마에다가 북조선 미사일에 심어 놓은 아메바 파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욕설이 나왔다. 그녀는 피가 뭍어있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들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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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가 끼어 있는 가운데 에스파스 밴이 급정거를 하고 있었다.
하사 마에다의 낌새가 이상했다. 호리시마 란조는 잔득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흐릿한 실내등 아래로 마에다 1위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란조가 묻자 마에다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다시 뜨거운 국물같은 신음소리가 그의 목에서 흘러 나왔다.
"란조 2위… 지금 어느 놈이 별반 계획을 망치고 있다…"
"설마…? 그럴리가요?"
란조는 서둘러 마에다가 응시하고 있는 17인치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 ACCESS OK
>> 3928-2927
>> 신주쿠 3정목…

란조는 모니터 화면에 떠있는 전화번호를 응시하다가 잔득 수축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전화번호는 누구 것입니까? 아는 사람입니까?"
"모른다."
"그,그럼…?"
"내가 아는 것은 이 개자식이 내 계획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퍼억—–
마에다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17인치 소니 모니터가 란조의 눈앞에서 크게 작렬을 했다.
마에다의 주먹이 소니 모니터를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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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본 김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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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날개 로터를 가지고 있는 소련제 밀 후크 헬기가 폐쇄된 해주항로를 날아오는게 보였다. 군인들은 용당포 포구에 도열해 있었다.
잠시 뒤. 헬기는 2.5톤의 동체를 비스듬히 꺽으며 폭우속에 임시가설된 헬기장으로 내려 섰다. 곧바로 헬기안에서 인민무력 부장 윤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미사일 잔해를 건졌다 이 말이지?"
"그럽습네다. 1시간 20분 가량 되었습니다!"
"그래,수고했다. 어느 동무가 건졌는지 이리 와보라고 하라우."
헬기에서 인민무력부 부장 윤철이 내려서자 곧바로 국방위원회 위원인 하평좌와 김광진이 따라 내렸다. 우측으로는 잭 니콜라우스 골프 파라솔을 받쳐주는 부관이 뒤따라 내리고 있었다.
정각 아침 7시였다.
미사일 잔해를 건진 문제의 경비선은 포구 앞 50미터 전방에 떠 있었다.
폭우는 다소 잠잠했지만 아직도 빗방울이 굵었다.
"그래 사상자는 없었나? 내래 그게 궁금해. 빤스보단 빤스 속이 더 궁금한 거 아니갔어?"
그렇게 말을 한 뒤 윤철은 부관이 건네 주는 쌍안경을 양미간에 갇다 댔다.
희뿌연 어둠속에서 탐조등을 밝힌 어선의 후미 갑판이 당겨왔다. 갑판 위에는 잠수복을 입은 인민무력부 산하 해군특수부대원들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폭우가 세차게 그들을 때리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대원 하나가 사색이 되어 윤철에게 경례를 해왔다.
"남조선 아새끼들 대단하구만. 그래 날아가는 미사일을 뒤쫓아가서 잡았다 이 말이가?"
윤철은 히쭉 웃었다. 하지만 그의 충열된 눈은 붉은색 항공도료가 칠해져 있는 쇠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4시간 전에 휴전선을 넘어오다가 격추된 퍼싱 투 미사일의 잔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평좌의 음성이 들렸다.
"큰일날 뻔 했지요. 저 물건이 웅진반도를 때리면 큰일이라면서 간밤에 호위총국 대장이 눈깔 뒤집어 진 거 모르오? 나도 간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소만."
"글쎄 말이오. 저도 사실은 좀 놀랬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거요? 소문을 들으니까 이쪽에도 그 싸가지없는 해커 쌔끼래 들락달락 한다는데…평양전산센터는 정말 무사한 것이오?"
"이쪽은 문제 없시요. 어잿밤 무사히 해체 했수다. 그건 그렇고 그 새끼래 일본 방위청에도 들어갔다고 하더구만요. 참 신비한 놈이야요.
어쨌든 이 일때문에 간밤에 저와 대남사업담당비서,국가보위부 부장동무 이렇게 셋이서 지도자 동지께 불려가 질타를 당했드랬지요. 이젠 뚫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러라 빗방울이 너무 굵은데요? 동무 빤스는 괜찬소?"
그렇게 말을 하며 윤철은 신사복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런 윤철의 얼굴엔 10년 감수했다는 표정이 남모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8군단 아이들은 지금도 여차하면 남조선으로 밀고 내려가려고 긴급 대기중이었다. 못내 불안했다. 간밤에 미사일이 웅진반도를 때릴 경우를 대비해 8군단 경보병여단과 공수여단,저격여단을 휴전선으로 밀착 배치를 하지
않았던가?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윤철이 이끄는 인민무력부가 앞장 서야 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공수여단을 군산에 투입해 남조선 허리를 자른 뒤,휴전선을 테니스 코트 옮기듯 밀고 내려가는 것이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대전까지는 밀고 내려갈 자신이 있는데…
윤철은 두려운 건지 아쉬운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쨌든 미사일이 웅진반도를 때리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쳐갔다. 전쟁은…어찌되었던 간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윤철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쌍안경을 얼굴에 갖다 댔다. 그때 부관 하나가 헬기 안에서 뛰어 나오며 윤철에게 외치고 있었다.
"부장 동지! 그 남조선 해커 새끼가 또 평양전산센터를 뚫었다고 합니다! 빨리 급거 귀환하라는 지시입니다!"
윤철은 화가 났다.
"알았어! 통일전선부 쌔끼들은 뭐하는 거야? 아직도 그 해커 새끼를 찾아 없애지 못했나??"
"모,모르겠습니다. 어잿밤 일본 측에서 놈을 추적하다가 오사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소식외에는…아무래도 우린 정보가 좀 늦지 않습니까?"
"입닥치라우,우리가 뭘 늦다는 건가? 어쨌든 빨랑 갑시다. 이거 이번에는 우리쪽이 미사일을 쏘아대는거 아냐? 큰일인데?…."
윤철은 씁쓸하게 말을 내뱉은 뒤 헬기를 향해 걸어갔다. 군인들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가며 윤철을 보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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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사뇨 나쓰에와 사유리 자매는 랜트카 안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새벽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 올랐다. 2시경에 아크힐스에서 급작스러운 철수소동이 벌어졌는데,이들 남매는 고영삼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눈을 떠보니 렌트카는 청산학원 캠퍼스안에 버려져 있다. 나쓰에는 서둘러 손목시계를 본다.
동생 사유리의 음성이 들렸다.
"음냐라…언니…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징?"
사유리는 자못 추운지 징징 짜며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나쓰에는 어이가 없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니? 3일 휴가 받았다고 좋아했는데 말짱 황이네? 오늘 월요일 맞니?"
"응. 언니는 괜찮은 거야?…난 말야…흐엉…도무지 머가 먼지 모르겠쪄…"
사유리는 아직도 마취제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랜트카 뒷자석에서 맹맹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나쓰에는 사유리를 부축하면서 렌트카에서 내려섰다. 우스웠다. 지난 며칠동안 벌어진 일들이 도무지 어떤 일이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했다.
"넌 학교에 가야지? 이젠 땡땡이 치지 말아. 왜 하필이면…"
"김짱이 따라오라고 한 걸 어떻게 해. 머 김짱도 나에게 키스까지 해 주드라. 흐응."
"너 정말…?"
"흐…언니 것도 내가 대신 했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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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거야? 오끼나와 기지가 또다시 구멍이 났다고?"
시나노 곤베이는 오사카 경찰정 내에 있는 무선관리국 복도를 걸어나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메바 파일>이 간밤에 자진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같은 놈입니다! 방금 6시 55분에 또다시 침투를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미 8군 카테나 기지에다가 두번째 아메바 파일을 남겨 두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 도대체가!!"
"지금 현재는 전혀 감을 잡을수 없습니다. 전부터 심어놓은 파일 같기도 합니다. 북조선에서도 같은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남한 컴퓨터 망은 지금 조사중인데 여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시나노 곤베이는 화가 나고 창피스럽기도 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지난 이틀동안 김준을 필사적으로 추적했었다. 그런데 떨어진 헬기만 해도 두대나 되었다. 속담에 있듯이 벼룩의 머리는 도끼로 쪼개는 것이 아닌데, 무리수를 두다가 화근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유조차를 놓친 뒤부터 곤베이는 오사카 경찰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 4시 50분경에야 아크힐스에 있는 진광섭 팀이 이상하다는 전갈을 받고 뒤늦게 그들을 강제 폐쇄시키기 위해 도쿄 경시청 경찰을 긴급 동원했다.
하지만 진광섭은 이미 아크힐스 전산팀을 새벽 2시경에 패쇄한 뒤 지바 현으로 후퇴시켜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곤베이는 울화통이 터졌다. 진광섭이가 이젠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니며 지 할일을 하겠다는 계산이다.
생각해보면 진광섭만큼 곤베이와 사이가 나쁜 친구도 없었다.
곤베이가 북한 저격여단에서 훈련을 받을때 진광섭은 곤베이를 밀착마크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일본에 귀국을 하니 곤베이의 책상 위에는 디자인이 제법 예쁜 독일제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저 별일이다 싶었지 누가 보낸 시계인지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으며 곤베이는 자신의 방에서 회의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보기좋게 도청을 당했던 것이다.
칙쇼…
그때 일을 회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첩보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신했는데 탁상시계를 누가 보내는 지도 몰랐고,도청장치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어제 밤에 벌어진 일도 그렇다. 진광섭이는 바주카포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헬기가 눈 앞에서 떨어지는 순간 곤베이의 기분은 어땠는가.
이 따위로 엉키다니…
그저 눈 앞이 캄캄했고 화가 났었다.
10분전에는 곤베이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보냈던 항의서한의 답신이 날아왔었다. 내용은 안기부가 야쿠자를 동원한 것에 대한 항의성 서한이었는데, 날아온 답신은 그런 사실 모른다,라는 내용이다. 화가 났다.
그래서 분노를 억누르고자 잠시 무선관리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덜컥 <동급해커>가 카테나 기지에 재침투를 해왔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임시 캠프가 설치된 4층으로 올라갔다.
7시부터 팩스가 요란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곤베이는 팩스 전문을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소식은 내각정보조사실에서 날아온 것으로,일미연합 훈련이 이날 새벽 6시부터 다시 개시된다는 전갈이었다. 이건 충분히 예측했기에 곤베이는 쓴웃음이 나왔다. 훈련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는 것일테지…
그로써는 짐작이 가는 바가 많았다.
두번째 팩스는 1과 특수부에 착출된 2부 <국외정보팀>과 4부 <통신정보팀> 요원들이 어잿밤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퍼싱 투 미사일의 격침과정을 시물레이트한 서류였다. 그것과 함께 어제 하룻동안 있었던 진광섭 팀의 핸드폰 통화 내역이 분석되어 날아왔다.
진광섭 팀은 간밤에 한국으로 스물 두번,일본내에서 45차례 핸드폰 통화를 했는데 모두 구식 음향 스크래프토그래프와 신형 컴퓨터를 이용해서 성문聲紋 추적을 하고 있었다. 성문추적 결과는 9시에 나온다고 했는데,이 결과가 나와야만 자세한 통화내용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곤베이는 핸드폰 통화내역이 적힌 서류를 읽으면서 김준과 진광섭이 어떤 방법으로 오사카 지역을 탈출할지 추리를 했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진광섭은 새벽에 도쿄로 돌아간 게 확실했으니까 그 부하중 하나가 김준을 픽업할 가능성이 컸다.
곤베이가 간단하게 식사를 떼우고 난 뒤 간사이 공항으로 향할때 시각은 아침 8시였다. 이번에는 방위청 전산실장이 긴급전문을 노트북을 통해 날려왔다.
동급해커가 10일 전에 있었던 일미연합훈련 당시에 자위대의 비밀훈련을 방해했다는 보고서다.
그러고보니 10일전에 발생했던 의문의 사건이 곤베이의 뇌리에 떠 올랐다.
북부 해안가에서 있었던 마지막 연합훈련중 방위청 장관이 보는 앞에서 다연장 로켓이 바이러스를 먹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밤하늘을 비행하던 30대의 전투기중 3대인가 4대인가가 그대로 다연장 로켓에 의해 격추된 참사가 있었다.
동급해커가 다연장 로켓에 바이러스를 먹였단 말인가?…
곤베이는 도대체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예측할수 없었다.
전산팀의 두번째 보고는 하사 마에다라는 인물을 추적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곤베이는 급히 하사 마에다의 신원이 적힌 팩스용지를 읽어 나갔다.
별반이었다.
별안간 곤베이는 눈 앞이 캄캄했다. 이제야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예측대로 별반의 짓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체적인 구도가 이상했다. 이 이전에 날아온 보고에 의하면 항공자위대 참사에 바이러스를 먹인 자가 동급해커라고 했는데,이것도 별반이 꾸민 일일까? 쉽사리 연관되지 않았다.
곤베이는 잠시 머리를 돌리다가 핸드폰에 입을 대고 버럭 외쳤다.
"넌 언제 올꺼야? 지금 당장 날아오지 않고!"
전산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두시간만 참아 주십시오. 컴퓨터를 젯트기에 설치하고 있는데 시간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세이신 여고에서 전갈이 왔는데…"
곤베이는 잠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10분이었다.
"좋아. 10시 정각에 본다! 지원기 수배 건도 빨리 해결해! 성문추적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연락해주고,하사 마에다라는 작자의 위치는 밝혀지는대로 나에게 연락한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육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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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방위청 전산팀이 추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하사 마에다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14인치 모니터에서는 그가 준비한 12개의 아메바 파일이 Hex 형태로 펼쳐져 있었는데,화면 왼쪽 구석에는 후꾸오 미나가 보내온 전자편지가 떠 있었다.

>> 방해하겠어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노트북에서는 <파이어데모fire-demo>가 흐르고 있었다.
파이어데모는 세컨드 리얼리티 팀의 주도로 생겨난 어셈블리 콩크르 대회에서 스페인의 반젤리스팀이 출품했던 작품이었다. 그는 방금 전에도 작업 도중에 월드와이드웹(WWW;윈도우용 인터넷 접속프로그램)을 이용 미국의 eng.ufl.edu에 접속을 했었다. eng는 어셈블리 데모 대회에서 우승한 작품을 받을수 있는 여러 사이트중 하나였다. 이렇게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선 라이징 팀이라든가, 세컨드 리얼리티 팀 등 유명 데모팀들이 만든 작품을 수집하는게 그의 취미였다.
물론 이들 데모 화면은 그래픽이 아니었다. 오로지 어셈블리 언어를 동원한 리얼타임 캘쿨레이트real-time calculated로 작성된 것이지만 이런 데모작품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보듯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했다.
이런 데모 작품중에는 음악도 좋은 것이 많았다. 실력이 없는 프로그래머들은 음악을 직접 샘플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우스운 일이었다. 음악 역시 컴퓨터 언어로 직접 코딩을 해야 했다. 그게 정석이었다.
하사 마에다가 유독 좋아하는 <파이어데모>는 불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실행을 시키면 곧바로 모니터 화면에서 불이 일어나는 장면이 진행되는데,이것은 키보드를 중간에 만지지 않고,컴퓨터를 끄지 않는한 계속 연속되어 보여진다. 뭐니뭐니해도 반젤리스 팀은 이름값을 했다. 저음의 음악은 불길하면서도 박력이 있었다.
이 음악소리를 란조 2위는 싫어했다. 가득이나 이상한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이후로 하사 마에다는 괴이한 데모 화면을 죽은 듯 응시하고 있다. 정말 미나라는 여자가 1위님의 계획을 방해한 것일까?
란조는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듣더라도 멜 토메가 82년에 마티클럽에서 불렀던 고엽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재즈가 아니면 만사 귀찮았는데,시체말로 총으로 갈기고 싶은 욕구를 가질 정도로 복잡한 여자였다.
그래…솔직히 지금 나오는 반젤리스 풍의 음악은 불길해서 듣기가 싫었다.
우선은 재즈가 아니었기에 듣기 싫었고,걸래처럼 부서져있는 소니모니터가 에스파스 안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기에 이 분위기가 싫었다. 란조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보니 아침 8시 20분이었다.
란조는 우측으로 인가가 있는 도로에 에스파스를 세우고 난 뒤 뒤를 돌아다 보았다.
"마에다 1위님. 식사를 하셔야겠군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때 막 파이어데모 화면이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 란조의 동공에 들어왔다. 화면 중앙에서 버섯 구름이 만들어지는 그림이었다.
란조는 다시 수축되었다.
설마…저게 오늘 새벽에 심은 아메바 파일은 아니겠지…
란조는 겁을 먹은 얼굴로 에스파스 안에서 내려섰다.
안개가 지독하게 끼어 있는 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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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하야시는 담배를 급히 끈 뒤 지하실 철문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미나가 철문을 열려고 하다가 안되겠는지 꽝꽝 두들기고 있다. 아침인거 같았다.
하야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모니터의 명암을 어둡게 했다. 그런 뒤 삽을 집어 들었다. 아니 삽을 집어 드는 것이 아닌데…
미나를 때릴 셈인가.
그럴수는 없었다.
하야시는 빠르게 지하실 안을 살펴보았다. 아직 이른 철인데 나방 몇마리가 어둠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야시는 나방을 손으로 처 올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걸을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질퍽거리기 시작하자,하야시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미나가 빠르게 본체를 돌아 앞 마당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야시는 넋이 나간 듯 미나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잠시 뒤. 지하실 왼편 벽 위에 있는 환풍구의 나무판자가 들썩이는게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다. 하야시는 와락 겁을 집어 먹었다.
들통 난 것이다.
대비책이 없었다.
이번에는 미나가 후다닥 철문으로 뒤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문 열어…."
철문 밖에서 미나의 음성이 들려오자 하야시는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갔고,몸은 꼼짝할 수 없었다. 지금 들려오는 음성은 죽은 할머니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듣는 미나의 음성이었다.
미나가…실어증에서 벗어났단 말인가?
하야시는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하야시의 귀를 파고 들더니,어느새 가슴안에서 펌프질을 한다. 하야시는 참기 힘들었다.
"꺼져. 내 앞에서 당장 꺼지란 말야!"
하야시는 자신이 다시 삽을 집어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욕망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제 제발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미나."
"오빤 왜… 숨어 있는 거야?…난 오빠가 보고 싶어…"
"가란 말이다!"
"왜 그래… 난 다시 돌아온 거야. 이젠 아무렇지 않아. 오빠. 나랑 같이 살자. 응…?"
바보같은 계집.
하야시는 울컥 구역질을 했다. 썩은 시체에서 품어져 나오는 냄새는 지하실 안에 거미줄처럼 엉켜 있다가 하야시의 콧구멍으로 빨려오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울컷 쏟아지려는 것을 하야시는 가까스레 억제했다.
"왜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지? 무슨 이유야…?"
음성이 들려왔다.
"알고 있었어… 할머니는 내가 임신할 걸 알고 있었어…"
하야시는 비통했다.
"멋있군! 그래서 할머니를 살해한 거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넌 바보다,미나! 몇번이나 경고했니! 아기를 임신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일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거지? 응?"
"바보자식! 넌 날 사랑한다고 했어! 우린 친남매가 아니니까 가능하다고 했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오빠였다는 것 몰라?"
미나는 불끈 화가 나서 하야시를 힐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나의 음성이 아니라 할머니의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쇠조각처럼 흩어져 나왔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자 하야시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셔갔다.
"입 닥쳐! 난 그런 말을 한적이 없어.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네가 원했던 거야. 넌 욕심이 많았어. 알잖아. 너무 많았어…"
하야시는 의자에 털석 앉았다.
"난 두려웠다. 내 아기를 가졌다기에 이게 웬 바보같은 짓인가 생각을 했었어. 난 너와의 관계에 추호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네가 아기를 가졌다고 말하니까 보기 싫었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
꽝 소리가 들렸다. 철문이 와창창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쁜 자식,그랬구나! 할머니가 알게 된 건 오빠때문이구나!"
하야시는 피할수 없었다. 이젠 맞부딪칠 시간이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내가 말했어! 널 할머니의 도움으로 내 곁에서 쫓아내려고 했었다!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넌 할머니를 살해했어! 그럴수가 있었던 거냐!"
꽝——-!!!
다시 둔탁하게 철문이 흔들렸다.
"나쁜 사람! 넌 나쁜 놈이야,하야시! 나쁜 놈이라구!"
그렇게 말을 한 뒤 미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젠 미나도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후끈거렸고,알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을 뿐이였다.
처음 이 집에 양녀로 들어왔을때 미나는 하야시가 마냥 좋았다. 그는 친절했다. 그때문에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중 2 겨울이었을때였다. 미나는 처음으로 하야시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녀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었는데,순간 하야시의 손이 미나의 빰을 때려왔었다.
미나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
후에 알았지만 그것은 하야시의 자기보호 본능이었다. 그는 내심 미나를 좋아 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문에 미나는 실어증에 걸렸다. 몇차례 하야시를 만났지만 그는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하야시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어야 했다. 하야시는 두개의 서로 틀린 자아와 싸움을 계속했다.
그렇게 의남매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서로 눈치를 보면서 보냈다. 하야시가 무너진 것은 미나의 여고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하야시는 미나를 강렬하게 원했다.
미나가 하야시의 아기를 가진 것은 요 3개월전이었다.
철문 밖에서 미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하야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우는지,왜 울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문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이 상태로,서로는 떠나야 한다고 하야시는 생각을 했다.
하야시는 다시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 사이에 새로운 작업지시가 날아와 있었다.

>> 하사 마에다 청부살해 건 신속 해결 요망.
>> 김준의 현재 위치를 파악해 주시오.
>> vealy@vector.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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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정각.
내각정보조사실의 의해 유조차의 행방이 일본 전국으로 확장 수배되고 있을때, 나디아가 운전하는 유조차는 간사이關西 학술문화연구도시의 피라밋처럼 생긴 건물 옆에 멈추고 있었다. 일본이 기초과학 분야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오사카,교오토,나라 3개 현 중심부에 건설하고 있는 것이 간사이 학술문화연구단지였는데,단지 내부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 아침엔 안개까지 복잡하게 끼어 있었다.
준과 나디아는 짙께 깔려있는 안개를 살피다가 유조차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원통형으로 생긴 건물의 주차장에 있는 미쯔비시 파제로에서 문이 열리면서 정장차림의 윤춘해가 걸어 나왔다.
윤춘해는 안개를 따라 두 남녀를 향해 걸어왔다.
"잠자는 귀에 물이 들어온다더니 섭섭하겠소. 내가 당신을 마중나왔소이다."
준 역시 춘해를 따라 비쩍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간다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우스꽝스러운 격투가 불현듯 떠올랐다.
"일같지 않는 일로 우린 싸운적이 있지요. 좀 어떻습니까?"
준이 묻자 춘해는 손으로 준의 허벅지를 가르켰다.
"상처야 총 맞은 다리에 비하면 어디 비교가 되겠소. 어쨌든 지나간 과거는 잊읍니다. 김준씨도 대단하오. 막강 안기부를 상대로 프레쉬맨처럼 도망도 잘 다니더구만요. 그건 그렇고,어떻게 그 와중에 진광섭 손을 빌릴 수가 있었소?"
준은 춘해와 함께 파제로를 향해 걸어갔다. 미쓰비시 파제로는 쌍롱 무쏘보다 크기가 큰 7인승의 롱보디 버전이었는데,유리창은 검은색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진과장님의 송환조치에 응한다고 했습니다. 양쪽 정보팀이 벌떼처럼 덤벼드니 정신이 있어야지요."
"송한조치에 응했구만? 그래서 독사가 대포까지 동원한 것인가?"
춘해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오만상을 찌뿌렸다.
"아,참.수갑을 채우라고 하던데…미안하지만 그 양손을 묶어야겠소."
갑자기 나디아의 음성이 들렸다.
"거래가 이상하군요. 김준씨가 범죄자라는 겁니까?"
"이건 송환의 한 절차요. 이해해 주기 바래요. 아직은 범죄자일지 모르니까."
턱.
"정 필요하다면 제가 대신 그 팔지를 차겠어요."
나디아는 잔뜩 억울한지 자신의 가날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춘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봐요 아가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이미 아가씨 것도 준비되 있단 말이요!"
“어머,왜 제가…?”
"당신도 한국으로 가는 거요. 여기 있어봤자 일본 놈들에게 시달림을 당할테니까 같이 가 봅시다. 잠시 피난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나디아는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국으로 가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술을 깨물며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양손을 춘해에게 내밀고 있었다.
"이런 건 경험이 있는 사람이 차는게 좋겠지요. 나디아는 생략합시다. 헌데 나에게 하루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지금 진과장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춘해는 김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진과장은 하사 마에다를 잡겠다면서 새벽에 도쿄로 날아갔소. 물론 약속은 지킬것이오. 우린 내일 저녁에 쓰루가 항에서 한국으로 가게될 것이오. 그때 까지는 김준씨가 요구한 하루 동안의 시간을 줄수 있을 것이오."
수갑을 채운뒤 춘해는 파제로의 옆문을 열었다. 그러자 알카텔 알스톰사에서 제작한 휴대용 위성송수신 장비가 파제로 뒷좌석에 꽉 들어차 있는게 보였다.
"이건 당신이 수배해 달라는 장비요. 위성통신용 장비라는데 오늘 새벽에 오사카 브렌치가 필사적으로 구했소. 이거면 마에다를 저지할수 있겠소?"
이미 준의 눈은 자동차 안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접이식 파라볼라 안테나와 햄HAM 장비도 보였는데,이 정도의 장비면 음성부터 텔레타이프,그밖에 전파 도청은 물론 인공위성 전파까지 곧장 장악할 수 있는 물건이라 할수 있었다.
아마 미 펜타곤이 공중파 통신망을 장악하기 위해 건조한 통신중계함 아나폴리스 1척과 비교가 되는 위력을 가졌으리라.
준은 춘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장비는 훌륭한데 수갑때문에 일을 못하겠군요. 이 수갑 게속 차고 있을까요?"
춘해는 멋적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저걸 못만진다고 생각했는데…저걸 당장 사용 할 수 있다면 수갑을 풀어 주겠소. 무사히 마에다를 저지한다면야 훈장까지 줄수 있지."
"그럼 훈장 먼저 주십시오."
나디아가 먼저 파제로에 올라타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노태우가 앉아 있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몇가지 조사해줄수 있겠소?"
"말해보시오."
준은 춘해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에게 지하철 사고를 조작한 해커 명단이 있는데 그들을 한번 조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현희 행방도 알아봐 주시면 고맙겠소. 한현희는 제일그룹 도쿄 지사 직원입니다. 또 뱅크 마니아 BBS의 의뢰자 명단이 필요하오. 그쪽 자료를 입수하면 내 은행구좌가 동결된 이유를 알아낼수 있을 것이오."
"꽤 복잡하구만. 하지만 협조를 할수 있을 것이오. 또 다른 것은 없소?"
"하사 마에다와 마끼 준사이라는 여자의 관계입니다. 하사 마에다는 방위청 직원인거 같습니다. 마끼는 아시다시피…"
춘해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자가 어떻게 안기부가 쫓고 있는 인물을 줄줄이 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소. 어쨌든 빨리 출발해 봅시다. 긴 여행이 될것이오만."
두 남자가 올라타자 파제로는 털털거리며 과학도시 진입로로 달려 나갔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입로에는 비포장도로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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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습니다! 감식반 직원중에 자동차에 빠삭한 놈을 붙혔더니 무연휘발류가 흘려 있는 것을 보고 금새 감지했습니다. 앞,뒤바퀴 간격과 4륜구동 스타트 자국으로 보아 미쯔비시 파제로 롱보디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곤베이는 공항 로비안에서 걸어가며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멋있군! 파제로라면 요 몇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7인승 지프차가 아닌가?"
"네. 그게 좀 걸리긴 하지만,랜트카 업소에도 문의를 해보았습니다. 오늘 새벽에 한국인 오파상이 미쯔비시 파제로를 랜트한 서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항구를 이용해 탈출하겠다는 뜻인가? 항구는 봉쇄하고 도로에다 경찰을 깔아 봐! 혹시 산악지방으로 숨을지 모르니까 요소요소에 자위대원을 풀고.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아침 10시 정각이었다. 곤베이는 핸드폰 통화를 끝내고 난 뒤 활주로로 걸어 나왔다. 곤베이 일행이 나온 장소는 관제탑 아래쪽이었다.
활주로에는 아직도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곤베이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각정보조사실로 전화가 연결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치토세에서 지원기를 투입한다더니 보낸 건가?"
곧 부하 요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가능합니다. 치토세에 있는 제2 항공단은 오늘 새벽에 일미 연합작전에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이때문에 지원기를 돌릴수가 없답니다!"
일본 자위대는 전투기를 지원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개자식들! 이건 군작전이란걸 모르나! 지금 당장 다른 지원기를 찾아봐! 북부 항공대가 아니면 다른데에다 연락해보란 말이다!"
"하쿠리에서 몇대 수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쿠리의 제7 항공대는 이번 훈련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말만 앞세우지 말고 지금 당장 항공막료감부에 압력을 넣어 F-16 3대를 요구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통화를 끝내고 난 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기 때문에 헬기로는 파제로의 도주로를 전체적으로 커버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지금 당장 서너대의 지원기가 필요했다. 그런 뒤 적외선 카메라로 산악지방을 활영하면 소득이 있을것 같았다.
실상 지금은 파제로가 오사카 북쭉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추리를 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아침 일찍 헬기 대신에 수색용 지원기를 요구했는데,지원기를 투입하기로 한 제2 항공자위대가 일미연합훈련에 갑자기 투입되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곤베이가 활주로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이번에는 우측에서 요원 하나가 다급히 뛰어오면서 외쳤다.
"방금 윤춘해와 진광섭 간의 핸드폰 통화내용이 성문추적까지 끝났습니다.
간사이 학술도시에서 김준을 픽업한 자는 윤춘해라는 놈입니다. 목적지는 쓰루카 항이라고 합니다!"
"멋있군! 그럼 오사카 북부가 아닌가! 지금 당장 헬기수색팀을 오사카 북부로 돌려! 근데 10시에 오겠다던 이놈의 히로세 전산실장은 왜 안 오는 거야?"
곤베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젯트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프로펠러식 젯트기가 안개를 뚫고 착륙하는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전부터 미자와에서 대기중이었던 사브엔진을 장착한 제트기였는데,이날 아침 도쿄에서 방위청 전산요원을 급히 실고 날아온 것이다.
곤베이는 요원 10여명과 함께 급히 젯트기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젯트기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크게 외치고 있었다.
"여자는,여자는 어디에 있나!!"
철컥 문이 열리더니 사뇨 사유리가 요원 둘에 의해 끌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다른 하나는 안 보이잖아?"
전산팀장인 히로세가 얼굴을 내보이며 크게 외쳤다.
"다른 하나는 픽업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중간에 고마쓰 본사로 향했다고 하는데 모두지 시간을 맞출수가 없었습니다!"
"알았다. 뭣들 하나? 다시 이륙하라고 해. 오사카 북부다!"
사유리는 왕창 겁을 집어 먹은 눈으로 젯트기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이신 여고에 등교하려고 교문을 들어서는데 사내들이 나타나 자신을 강제로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젯트기 안에서 식사를 주길래 맛있게 먹고 있는데,수저를 놓기도 전에 오사카라고 한다.
이건 영 뭐가뭔지 모르겠다…
사유리는 정말 겁이 났다.
"아저씨,미리 자수하지만요…전 삐삐 같은거 안 키워요. 흐엉…엉엉엉."
"주둥아리 닥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곤베이의 손이 사유리의 빰에 작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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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미쯔비시 파제로는 오사카 북부 산악지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음습한 안개가 끼어있는 산악지방이었다.
운전대는 노태우가 잡았고,중앙엔 윤춘해,그 옆 창가에는 나디아가 앉아있었다.
김준은 파제로에 올라탔을때 시작한 작업을 아직도 계속 하고 있다. 나디아가 김준을 힐끔 돌아다 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식은 땀이 났다.
"나 뒷좌석으로 가겠어요. 여긴 너무 좁아요."
"작업 방해 마시오. 저 친구는 지금 바쁘단 말이요."
윤춘해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젊은 여자가 도망을 갈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냄새가 좋다. 이런 여자는 보기 드믄데…
"어휴…여긴 꼭 닭장 같군요. 도대체 이 차 안에서 컴퓨터를 몇대나 돌리기에 이렇게 더운 거에요?"
"그건 뒤에 있는 컴퓨터때문이 아닙니다. 인간 컴퓨터…춘해 형님이 지금 흥분했나봐…"
노태우가 피식 웃으며 댓구를 하자 춘해는 씁쓸하게 웃었다.
"운전대나 잘 잡아. 내 나이 돼 봐라. 여자가 젖가슴으로 눌러도 흥분을 안하는 8비트가 된다…."
"미안하우. 농담 한번 했는데 거 대개 자책하네."
파제로는 기후지방에서 혼슈지방을 옆으로 끼고 달리고 있었다. 오전이었지만 울창한 숲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산속이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짙게 깔려 있는 안개때문인것 같았다.
춘해는 은근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숲을 따라 이동을 하고 있고,안개까지 끼어있으니 여간 행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나마나 각 도로에는 경찰들이 깔려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형님,힘들겠는데요. 우리 어디서 밥이나 먹고 갑시다."
"임마,여기에 밥 처먹을때가 어디 있다고 그래?"
춘해는 태우에게 핀잔을 주고 주위 경관을 바라 보았다. 자갈과 잡목이 뒤엉켜 있는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밭에서는 오전 일을 하는 아낙들이 보였다. 가끔은 식물원처럼 생긴 유리 돔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시형 재배단지가 이 근처에 많이 있는 모양이다.
춘해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히다 말고 나디아를 보았다. 나디아는 아까부터 비쩍 마른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담배 피고 싶으면 마음껏 피세요. 저두 한대 주시구요."
춘해는 슬며시 웃으며 나디아에게 담배를 내 밀었다. 나디아는 잔뜩 화가 났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춘해는 한참동안 나디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이 데스크 톱 컴퓨터와 자신의 노트북을 랜으로 연결하고 작업을 하는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꽤 복잡한 화면이 데스크톱의 모니터에 떠올라와 있었다.
궁금했다. 지금 저 놈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만나면 복수한답시고 하복부에 손이 들어갈만한 큰 구멍을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렵소…
김준을 얌전하게 후송하라니. 진광섭의 지시가 무슨 청천벽력인지 몰랐다.
"정말 아무래도 안되겠다…네 말대로 저기 어디가서 식사를 할수 있나 물어보자."
파제로 우측으로 안개가 낀 호수가 보였다. 호수 옆으론 네델란드식 풍자를 달고 있는 식당이 덜렁 놓여 있다.
"알았어요. 내가 주문하고 오지요."
노태우는 파제로에서 내리다 말고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이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에는 손바닥 그림이 하나 떠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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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지문이 아닙니다."
곤베이는 모니터 화면에 떠있는 손바닥 그림을 보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지문이 화면 안에서 확대된 뒤 김준의 외국인 등록증에 기록된 지문과 대조가 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김준의 지문도 아닙니다. 지문 스위치의 일종입니다만 가공으로 만들어진 지문인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 아침에 심어진 아메바 파일의 스위치입니다."
제트기 안은 복잡했다. 제 1 객실은 전산팀이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전산팀 앞쪽 조종석 입구에는 추적팀이 위치했다. 제 2객실 안에는 곤베이가 아끼는 자위대 공정대원들이 좌우로 앉아있었는데,사유리는 그 중앙에서 오페라의 소녀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곤베이의 음성이 들렸다.
"아침에 심어진 아메바 파일의 내용이 뭔지 알겠나?"
"추적중입니다. 이 놈의 손바닥 지문이 있어야 개봉을 할수 있는데…"
다시 전산실장의 음성이 이어졌다.
"다른 방법으로 개봉해 보겠습니다. 약간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만."
"좋아. 계속 수고해 봐."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조종석 뒤쪽에 있는 추적팀이 작업을 하는게 보였다.
"F-16기 수배건은 어떻게 되었나? 하쿠리 건 말이다!"
"F-16 지원은 방금 시작되었습니다. 저쪽 히다 산맥부터 뒤져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개가 영 많은지라…"
"적외선으로 촬영한 뒤 전송하라고 해! 안개는 정오경에 개일 것이다!"
말한 뒤 곤베이는 제 2객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놈 지문인지 모르지만…그 자식 손목이 필요하다면 잘라오고 말겠다…
어쨌든 김준의 지문이 아닌게 이상했다.
예전에는 낙타털로 만는 브러쉬나 건조한 분말이 있으면 지문을 채취해서 초등수사를 개시할수 있었다. 닌히드린을 사용하면 50년 전에 뭍은 지문까지 채취가 가능했다. 그런 뒤 경시청 지문대장과 대조를 하면 손쉽게 범인을 추적할수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했다. 위조지페는 스캐너로 스캔한 뒤 캐논 R-1938 컬러프린트로 프린팅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수 없었다. 지문 역시 스캐너로 잡은 뒤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수정을 하면 가공의 지문을 만들수 있다. 암호 대신에 그런 식으로 만든 지문 스위치를 사용하면…
곤베이는 아메바 파일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사일이 언제,어떻게,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추적팀 요원이 벌떡 일어나 외친 것은 곤베이가 제 2객실로 들어설때였다.
"기후 지방에서 헬기팀이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아침에 파제로를 본 농부가 있다고 하는데요?…"
"뭐야?"
곤베이는 몸을 돌려 추적팀을 향해 걸어갔다. 방금 말을 한 요원이 컴퓨터를 두들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산악지방입니다. 비포장 도로가 있다고 감안하고,시속 60Km를 평균속도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쪽…이쪽…이 부근 어딘가에 있겠군요!"
곤베이는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파제로의 이동 반경이 추적되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지도에 나타난 붉은 색의 타원은 뭔가? 왜 붉은 색 타원이 있는 거지?"
"항공기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무슨 소린가? 항공기가 접근을 못하다니?"
"이 장소는 오늘 새벽에 시작된 일미연합 훈련장입니다. 정오경부터 저녁까지 지원기 방어훈련이 있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장소지요."
"제기랄,하필이면?"
"혼슈 지방과 기후 지방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수색을 끝내 달라는 통보가 아까 새벽에 날아왔습니다."
곤베이는 울그락불그락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는 등 뒤로 돌아보며 외쳤다.
"전화 당장 연결해! 방위청이건 항공자위대이건 책임자에게 전화 연결하란 말이다! 그리고 넌 F-16에 연락해서 이쪽을 뒤지라고 해! 히다산맥 하단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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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인이 물고기 하나를 그물로 들어 올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사시미(회요리) 종류 밖에 없는데 준비할까요?"
태우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식당이라 그런지 먹을 것은 회요리 밖에 없는것 같았다. 태우는 화가 났는지 뒤를 돌아다 보며 버럭 외쳤다.
"형님! 회 한접시 드시겠습니까? 이 친구가 회 전문가라 합니다!"
대답이 없었다. 흐믈흐믈 떠다니는 안개속으로 파제로에서 내려 서는 나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나디아는 파제로 뒷문을 열고 김준에게 뭐라고 말을 붙히고 있었다.
"몇 접시 준비해 주쇼. 아,가쓰돈 류도 있습니까? 덮밥은 들고 다닐수 있겠금 싸주면 좋겠소. 새벽부터 산악 여행을 하다보니까 배가 고프군요."
"하이. 곧 준비하겠습니다."
식당 주인의 목소리에 준은 고개를 들고 식당을 보았다. 고글 너머로 식당과 호수가 보였다. 나디아는 잠시 그를 지켜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파제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준은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등 뒤로 젖히고 자동차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목덜미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준은 씁스레하게 입을 열었다.
"춘해씨. 한국 국방부가 아침에 또 뚫렸다고 하는 군요."
"뭐라고요?"
"방금 임달영 안기부 차장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일본 카테나 기지와 북한 평양센터,한국 태백에서 해커의 침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에다 그 자식 미친 거 아냐?"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안개가 끼어있는데 폭염인것처럼 날씨가 후끈거리고 있다. 다시 준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왔고,하드디스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왜? 뭔가 이상한게 있소?"
춘해는 준의 모습이 이상한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준의 음성이 들렸다.
"아메바 파일에 남겨진 스위치가 있는데…."
모니터 화면에서 손바닥 그림의 스위치가 떠 올랐다.
"지문이 좀 이상하군요. 위조된 지문을 가진 손바닥입니다."
"그게 왜 있는거요?"
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암호 대신에 사용하는 거지요. 이 손바닦에 맞는 손을 대면 아메바 파일이 작동을 하나 봅니다."
"미쳤군….하사 마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글쎄요…여기서는 실험을 할수 없군요. 제 컴퓨터는 터치스크린이 부착되지 않았는데….아마 감지기가 달린 모니터를 사용하나 봅니다."
"북한에도 그런 지문 스위치가 남겨져 있는 거요?"
"예. 똑같습니다. 한번 들어가 볼까요?"
준은 빠르게 평양전산센터로 접속을 했다.
잠시 뒤. 글자가 빠르게 떠 오르기 시작했다.

== 남조선 해커의 침입이 연일 계속되고 있습네다. 해커를 잡은 동무는 평양전산센터의 074-7000 직방 라인으로 소식 주시오. ==
== 공화국 전산망을 애뜻하게 사랑하시는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특별교시가 오늘 정오에 있습네다. 우리 전산원 동무들을…. ==
== 남조선 해커 새끼래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

윤춘해의 음성이 들렸다.
"남조선 해커라면…당신을 지칭하는 것 아니요?"
준은 비쩍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봅니다. 남조선에서 북한에 침투할 해커라면 저 밖에 없을테니까요."
춘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가 농담을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사 마에다를 찾을 방법은 없소? 남북한이 동시에 뚫렸다면 아무래도 미사일 쇼가 또 벌어진다는 뜻인데…"
"국방부 전산요원과 협동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오경에는 소식이 있겠지요."
"그러지 말고 이 방법 어떻소? 우리가 직접 마에다를 유인하는 거 말이요."
"유인이라뇨?"
"며칠전에 보니까 피신밴에 웬 여자가 오빠를 찾는다는 호소문을 강제로 심은 것을 보았소. 그런 식으로 하사 마에다에게 메시지를 날려보면 어떻겠소?"
"니프티서브나 피신 밴에 유인 메시지를 남긴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다행히 우린 하사 마에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광섭씨가 그를 찾고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요? 아예 유인을 해 봅시다."
"좋은 생각이군요. 정말 좋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니 다행이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그럼 용산에 전화를 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준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압전마이크로폰을 작동시켰다.
"임차장님? 지금 제 작업광경 보입니까?"

임달영은 아까부터 열려있는 전화를 다시 귀에 댔다. 김준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작업입니까?"
달영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등뒤로 고개를 돌렸다.
용산 국방부 건물 지하에 있는 전산센터였다.
30명에 가까운 전산요원이 김준을 도와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메인 모니터는 통신위성을 통해 일본에 있는 김준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인하겠다고? 어떻게 말이오?"
임달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인 모니터를 응시했다. 준의 설명과 함께 메인 모니터 화면에 김준이 지금 하는 작업이 떠 오르고 있었다. C 언어 프로그래밍인것 같았다.
한참동안 김준의 설명을 듣더니 임달영은 간신히 대답을 했다.
"알겠소. 그렇게 해 봅시다."
달영은 전화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 놓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전산요원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함정을 만든다고 한다. 모두 전화추적을 대기할 것. 함정은 아침에 뚫린 태백 미사일 기지다. 자 모두 함께 가 봅시다!"

춘해의 음성이 들렸다.
"그게 뭐요?"
준은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답을 했다.
"간단합니다. 피시 밴이나 니프티서브에 등록된 A라는 아이디를 찾아서 A의 프로필 내용을 메시지 내용으로 전환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뒤 프로필을 자동 공개시키는 작업인데…이러면 접속한 사람들은 모두 A의 프로필에 쓰여있는 메시지를 자연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간단하구만?"
"전 뻐꾸기가 아닙니다,춘해씨. 사실 이런 건 용산 친구들이 잘합니다만…"
곧바로 김준이 만든 유인용 메시지가 화면에 떠 오르고 있었다.

>> 하사 마에다군.
>> 태백에 심은 두번째 아메바 파일 선물을 고맙게 받았다.
>> 아메바 파일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연락 바란다.
>> kimjun@playboy.co.hk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요?"
춘해가 묻자 준은 슬며시 웃었다.
"이제 이 메시지를 일본 각 통신망에 배포 해야지요. 아마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 친구도 일본 통신망을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엔터키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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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 마에다는 입을 벌린채 14인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미나를 유인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는데,피시 밴 화면에서 별안간 김준이 날려온 메시지가 떠 올라온 것이다. 마에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손목시계를 봤다.
칙쇼…
태백에 심은 아메바 파일을 해체했단 말인가…?
kimjun@playboy.co.hk 이라는 IP 이름은 홍콩에 있는 성인전용의 인터넷 사이트였다. 그쪽에다가 연락을 해 달라는 뜻인데…
웃기지 마….
감히,나에게 덤비겠단 말인가———!
마에다는 빠르게 욕지껄이를 내 뱉으며 충열된 눈을 액정화면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태백 미사일 기지의 전산망이 개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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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은 강원도 내부 전화라인입니다!"
요원 하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8번…9번….10번…. 원주,오산,용산과 연결된 전화라인입니다…"
태백기지에 접속된 전화선은 총 21개였는데 방금 22개로 늘어나고 있었다.
아까부터 전산요원들은 계속 접속상황을 추적중이었다.
"11번 라인은 미 8군으로 연결되 있습니다. 그 밑까지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좋아. 다른 건 어때?"
임달영은 그렇게 말한 뒤 우측에 있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태백 미사일 기지 플랫폼이 떠올라와 있다.
"사용자 아이디 검색은 지금도 변화가 없나?"
"아직 없습니다.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는 나타나지….어?"
22명의 접속자중에서 갑자기 <東急HACK>라는 아이디가 불쑥 떠 올랐다.
"잡았습니다! 방금 접속한 인물이 하사 마에다입니다!"
용산 전산실의 소란스런 분위기가 곧바로 핸드폰을 통해 김준과 윤춘해에게 들려오자 두 사람의 눈은 무섭게 모니터 화면으로 꽃혀 들어갔다. 화면은 곧바로 태백기지 플랫폼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에다가 들어왔단 말이요??"
"아직 장담할수 없습니다. 한번 붙잡아 볼까요?"
그렇게 말을 한 뒤 김준은 빠르게 태백기지에 접속을 했다. 그런 뒤 키보드를 두들겼다.

>> 마에다상. 담배를 피워도 되나…

마에다의 두 눈은 총알같이 모니터에 꽃혀 들어갔다.
"칙쇼…."
마에다는 두 눈을 부라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란조가 다시 겁을 먹었는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오고 있었다.
마에다는 모니터를 잡아먹을듯 노려보다가 접속자 명단을 확인했다.

>> user 23명
>> ……
>> 東急HACK
>> 東急HACK

분명 두개의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접속을 하고 있었다. 마에다는 이를 악물었다. 누굴까? 미나일까…아니면 김준일까?
마에다는 자세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키보드를 천천히 두들겼다.

>> 환영하오. 담배 피우시오.

"차장님,이게 웬 일입니까? 동급해커가 한명 더 있습니다!"
임달영은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30대의 모니터가 같은 화면을 긴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들 자석처럼 임달영 차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건 일본에서 김준이 들어간 거니까 상관하지마! 다른 전화라인은 어떤가?
뭐하나? 나에게 고개 돌리지 말고 각 전화선의 출발지를 찾으란 말야!"
"아니,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동급해커가 방금 전에는 두명이었는데 지금은 3명이란 뜻입니다!"
"뭐라고?"
임달영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3명이었다.
새로운 접속자가 있었는데 그자도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다.
"저 놈도 잡아! 사라지기 전에 잡으란 말야!!"
한 녀석이 더 있었단 말인가…
임달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빅게임이다.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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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과 국방부 전산팀이 하사 마에다를 추적하기 위해 함정을 만들고 있을때 나디아는 파제로를 떠나 언덕 위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기 때문에 이젠 호수가 보이지 않았다. 나디아는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그런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비행기 소리를 따라 몸을 일으킨 뒤 다시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갔다. 안개가 걷히고,뜨거운 태양이 올려다 보였다.
비행기는 F-16 계열의 지원기로 히다 산맥에서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목적지는 오사카 방향인것 같았다.
그녀는 지원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안개속에 파 뭍힌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불현듯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 궁금했다.
한국이라니…
이런 식으로 김준과 억매이는 것일까…
준과의 관계를 나디아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지난 1년동안 말없이 그의 모습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아쉬울때마다 그냥저냥 생각나는 남자였을 것이다.
나디아는 한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의 삶에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런다고 스처지나가는 여자로 남는것도 싫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여기서 떠날까…
그래 말없이 떠나는 것이 좋은지 모른다.
나디아의 자신의 복장이 의심스러워졌다. 이런 복장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경찰이 많이 깔려 있을텐데. 벌써 맨션에 침투해 내 사물들을 샅샅히 조사한 것은 아닐까…
아,참치를 줘야 하는데…내 고양이…
나디아는 긴머리를 뒤로 날렸다. 그런 뒤 올라왔던 언덕 아래로 몸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포 소리인것 같았다.
어딘선가 쿵쿵 거리며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재빠르게 포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운무아래 저쪽 어딘가에서 검은 포연이 난무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군대 훈련이 있는것 같았다.
나디아는 포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절벽 아래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붕 떠 오르고 있었다.
헬기였다.
"아악———-!!!!!!"
나디아의 비명소리는 회접시를 들고 걸어가던 노태우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태우는 걸음을 멈추고 파제로쪽을 보았다. 파제로에서 윤춘해가 긴박하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태우는 접시를 집어 던지고 파제로를 향해 뛰어갔다.
"뭡니까! 방금 나디아가 비명이…!"
"글쎄 말야! 이 근처에 훈련장이 있나? 이 대포소리는 또 뭐야?"
춘해는 손살같이 권총을 꺼내 들고 언덕 위로 몸을 움직였다. 이때 김준은 하사 마에다에게 <담배를 피워도 돼나>라고 막 질문을 던지고 있던 차였다. 준은 하사 마에다의 첫번째 대답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서둘러 파제로에서 뛰어 내렸다. 다시 나디아의 비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안개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헬기는 로터 소리를 감춘 채 그녀의 등 뒤를 자석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저격병은 헬기 안에서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저쪽입니다!"
준은 포 소리를 들으며 안개속을 헤쳐갔다. 사방이 시끄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나디아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헬기의 로터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다연장 포의 발사소리에 파뭍혀 판별이 되지 않았다. 불길했다. 준은 양복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앞서 올라가는 춘해를 바라 보았다.
"흩어져서 찾아 봅시다! 이건 도무지…"
그렇게 말을 한 뒤 준은 바위 하나를 훌쩍 뛰어 넘었다. 잠시 뒤. 다시 나디아가 음성이 들렸다. 준은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가 흐릿한 안개속에서 비틀 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또다시 대포 소리가 산자락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디아는 안개속에서 흐믈거리듯 접근해오는 남자가 김준이길 바랬다.
아니 그가 아닌들 어떤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통증은 아까부터 그녀의 허벅지 에서 게속되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렸는데,눈까풀도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안개속을 헤쳐 나왔을때 그녀는 김준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10미터쯤 전방이었다.
"준…나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나디아는 그 다음 말은 영원히 할수 없었다.
이미 저격병이 쏜 두번째 총알이 나디아의 허리를 둔탁하게 휘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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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용산 국방부 지하 전산센터 안은 침묵이 기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모두 한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를 했다. 이윽고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상한데요…? 김준이 접속을 끊은것 같습니다…."
"그럴리가 있나? 다른 사람이 아닌가?"
"맨 나중에 들어온 자도 방금 접속을 끊었습니다. 이젠 처음 그 아이디만 남아 있습니다."
"전화 추적은 어디까지 했나?"
"미 펜타곤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경유해 침투해 왔습니다. 그 전 전화는 일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핸드폰입니다."
"그자가 확실한가? 처음부터 들어와 있던 놈인가?"
"그렇습니다! 20분째 머물러 있습니다!"
20분 동안 머물러 있다면 하사 마에다가 분명했다.

"차단해!"
"알겠습니다!"
임달영 차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원들은 전산망 차단 작업에 들어갔다.

마에다는 전산망이 차단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귀에서 해드폰을 뽑았다. 그의 눈은 노트북의 액정화면에 꽃혀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14인치 모니터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14인치 모니터 옆으로는 위성송수신 장비가 놓여 있었다.
마에다는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몇초 동안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방금 끊었던 전화라인이 미공군 통신전용의 인공위성 단자로 접속이 되었다.
잠시 뒤. 손바닥 하나가 화면 중앙에서 떠 올아왔다.
마에다는 란조를 힐끔 쳐다보더니,노트북 케이스 안에서 장갑 한벌을 꺼냈다.
장갑에는 손금이 가는 열선으로 그려져 있다. 마에다는 장갑을 끼고 난 뒤
노트북의 모니터에 나타난 손바닥 그림에 장갑 바닥 부분을 그대로 맞추었다.
곧바로 아메파 파일의 입구가 풀리면서 프로그램 내부가 개봉되는 모습이 모니터에 투영되었다.
지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시작하자…
내일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항상 내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마에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메파 파일에다가 시간을 입력했다. 곧바로 화면이 바귀면서 다시 손바닥 그림이 노트북 화면에 떠 올랐다.
"지금 무슨 작업을 하고 있으십니까?
란조가 겁을 먹고 마에다에게 질문을 했다.
"아냐. 별거 아냐!"
"그런데 그건…?"
"난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어. 과연 3에서 4만명을 살해하고 더 큰 정의를 얻으면 누가 나에게 훈장을 줄 것인가…이런 게 난 궁금해."
"이상한 말씀이군요. 도대체 무슨…"
"아무것도 아냐! 한국 고성의 인구는 4만명 안팍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에다는 그렇게 대답을 한 뒤 엔터키를 눌렀다.
그런 뒤 한참동안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란조는 불길한 생각에 마에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번에는 노트북 화면이 바짝 당겨왔다.
붉은 선이 지표면에서 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방 쏘셨군요. 1위님!"
란조는 슬며시 웃으며 다시 마에다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했다.
마에다의 얼굴 빛은 서서히 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잖아! 이게 뭔가——!!"
소리와 함께 노트북이 꽝 소리를 내며 마에다의 얼굴 앞에서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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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는 두번째 연락을 받고 있었다. 나디아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젯트기의 우측 동채 창 밖을 내려다 보며 교신기를 꺼내 들었다.
"멋있군. 그 밖에 김준이란 놈은 어디에 있나?"
곤베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요원 하나가 붉게 물든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뭐야?"
"육,육좌님…이상한 소식이 있습니다. 이 전화…당장 육좌님을 바꿔달라는 내각정보 수사과장님 전화입니다."
"알았다. 이리 줘 봐!"
곤베이는 서둘러 핸드폰을 받아 쥐었다.
곤베이를 태운 젯트기는 웅장하게 펼쳐진 히다산맥 상층부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뒤로 30여대의 지원기 편대가 굉음을 토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일미연합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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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디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총알은 그녀의 등을 뚫고 허리를 관통하고 있다.
울컥 눈물을 쏟으려고 했다. 비행기의 굉음까지 겹쳐 준의 청각은 여지없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나디아를 안아 일으켰다.
우측에서 윤춘해가 안개를 헤지면서 걸어왔다.
"이건 뭐야? 대포 소리에 전투기 소리…게다가 헬기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앞이 보여야 말이지…"
춘해는 그렇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준이 나디아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된거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춘해는 빠르게 권총을 홀스트 안에 집어 넣었다. 직감적으로 나디아가 죽었음을 춘해는 깨달았다. 그는 김준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노태우는 뛰어오다 말고 다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김준씨,빨리 갑시다! 빨리!"
여기까지 곤베이 일행이 추적을 해오다니…
춘해는 빠르게 준의 어깨를 잡았다. 그때 처음으로 헬기 소리가 자세하게 춘해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춘해씨가 이 여자를 데리고 가 주시오."
"데리고 가 달라니? 이미…."
춘해는 김준이 안고있는 나디아를 받아 안았다.
이 사이에 김준은 권총을 꺼내들더니,헬기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딨나? 나와 봐! 나와서 나를 보란 말이다!!"
"미친거요? 가야 합니다. 김준씨. 빨리!!"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헬기는 이들의 머리 위에서 안개를 뚫고 천천히 하강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핸드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김준! 손들고 꼼작마라!! 움직이면 쏜다! 반복한다. 넌 포위되 있다!!"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준이 쥐고 있는 권총에서 불꽃이 튀었다.
탕—–!
"제기랄!"
조종사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저 자식 미친것 아냐? 총이다! 빨리 헬기를 상승시켜!!"
헬기는 30도 각도로 기울러지며 김준의 머리위에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기 때문에 시계가 정확하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곧장 저격수의 모습이 준의 시야에 당겨오고 있었다. 그는 거미처럼 헬기 문짝에 매달려서 김준을 향해 저격총을 겨누고 있었다.
춘해는 나디아를 안고 걸어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저격수의 모습이 바짝 당겨왔고,김준이 땅바닥에서 헬기 바닦을 쫓아 몸을 다람쥐같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춘해는 외쳤다.
"이 봐! 거기가 아니야! 헬기는 밑바닥이 제일 약해! 철판이란 말야!"
아니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춘해는 뭐가뭔지 몰랐다. 그저 저놈의 헬기를 박살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는 나디아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곧바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곧장 그의 눈 안으로 헬기 뒤쪽에 있는 나무가 바짝 당겨왔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미부 날개였다. 그렇다. 바로 저거다!
속사였다.
춘해는 헬기의 미부尾部 로터를 향해 연커푸 권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당했다!"
조종사의 음성이 헬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미부 로터 감속기가 파편을 토하며 회전력을 일어가는 것이 조종사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옆에 붙어있는 수평 안정판마저 꼴나쁘게 휘어져 가고 있었다.
"상승하겠다. 꽉 잡아!"
팍팍팍팍팍——–!!!
조종사의 의지와는 다르게 헬기는 이미 추력推力을 잃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준의 머리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준은 식은 땀을 흘리며 바위 밑으로 몸을 굴렸다.
그 사이에 헬기는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빙빙 돌고 있었다. 캐빈석 출입문이 덜컹이며 흔들렸고,저격수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상태로 헬기는 우측 3시 방향 안개속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는데,헬기의 주 로터는 안개를
무섭게 빨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 그대로.
팍팍팍팍팍팍 파 앙—————-!!!
헬기는 자신의 꼬리날개를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나무에 그대로 들이박고 있었다. 곧바로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대나무처럼 휘어지면서 헬기를 덥쳐 왔다.
텅.
윤춘해는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헬기를 올려다보다가 깜짝 놀래 뒤를 돌아다 보았다. 노태우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서 있는게 보였다.
"너..너 방금 헬기를 향해 뭘 던지 거냐?"
태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화력지원입니다. 아무래도 부족할거 같아서,수류탄을 가져와서 던졌는데요?.."
동시에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꽈—–앙————-!!

———— – ————- – ———— – ————

"뭐라고?"
인민무력 부장 윤철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방금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노동 3호입니다!"
"어디야? 어디로 떨어지는 건가?"
"그게…"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하단 말이다. 동무!"
"남,남조선이 아닙네다…! 일본으로 날아갔시요!"
"일본이라고? 아니,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 일본으로 날아갔다는…뜻입니다…."

———— – ————- – ————- – ————

마에다는 납빛이 된 얼굴로 부서져 있는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었다.
칙쇼!
마에다는 짐승처럼 포효를 했다.
"미나… 너 이년….. 네 년이…내 파일을……"
란조가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어 젖히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1위님? 무슨 일이기에?"
마에다의 음성이 들렸다.
"9번 아메바 파일을 그년이 앞당긴것 같아. 6번 아메바 파일을 없애고 9번 파일을 그년이 훔쳐서 이용했단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이냐고? 방금 발사시킨 북조선 미사일이 한국 고성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지금 일본을 향해 날아온다는 뜻이다! 아직도 내 말 이해 못하겠나,넌!!"
"그럴리가요?…"

이즈 반도에 가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나는 담배를 손끝으로 빙빙 돌리며 가냘프게 속삭이고 있었다.
춤을 춰야 하지요. 그 가려한 무희처럼…
그녀는 씁쓸히 웃으며 컴퓨터 모니터의 파워스위치를 내렸다. 그런 뒤 담배 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어 허공에 내 뿜었다.
방금 미사일이 발사 된것 같았는데,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미사일이 발사되었는지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저 하사 마에다의 컴퓨터에서 발견했던 12개의 아메바 파일을 여러군데다 섞어 놓았는데…그 결과가 어떨지…
이제 이 문제에 그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하복부 아래쪽에서 통증이 왔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닐꺼야…아기가 벌써 발길질을 할까봐…
미나는 냉장고에서 참치 통조림을 꺼내 유리접시에 담았다. 그런 뒤 찬바람이 불고 있는 뒷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슬며시 야릇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러는 거다.
오빠가 나를 싫어하면 평생을 지하실에 가두어 두고 고양이처럼 기를테다…
미나는 후끈 달아오는 얼굴로 철문을 천천히 두들겼다.
하야시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미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자물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물쇠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철문을 두들겼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오빠—-!"
미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물쇠를 열어 젖혔다. 그런 뒤 철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아침 무렵에는 열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 활짝 문이 열린다.
하야시는 없었다.
질퍽하게 고여 있는 물을 따라서 할머니의 손가락이 둥둥 떠나니고 있을 뿐이다.
미나는 생전 처음인것 같았다. 세상이 이토록 심한 악취가 나는 공간이 있을까.
미나는 임신한 이후로 가장 심하게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난…너를 위해 최선을 다 했는데.
"넌 나쁜 놈이야,하야시——!!"
미나는 절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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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로보스-브라질 풍의 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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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로 나오자 안개가 걷혀 가면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있었다.
후꾸오 하야시. 그는 진홍빛의 거리를 절뚝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 하야시의 긴머리는 이상하게 치렁치렁했는데,청바지는 흙으로 범벅이었다. 어쩌면 그의 매서운 두 눈동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하야시는 옷차림 그대로 신주쿠 번화가에 있는 깅끼 은행에 들어섰다.
그런 뒤 카드를 꺼내 돈을 조회한 뒤 필요한 양의 돈을 찾았다. 필요한 만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야시가 현금으로 500만엔을 출금하자 등 뒤에 서있는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하야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야시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여자는 사색이 되어 시선을 거둔다.
턱…
하야시는 야비하게 웃더니 여자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여자는 울수도 없었고 비명을 지를수도 없었다. 그 사이에 하야시는 은행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는데,여자는 마냥 얼빠진 얼굴로 하야시가 들고 있는 노트북과 돈봉투를 응시할 뿐이었다.
여자가 울음을 터 트린 것은 하야시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때였다.
도로에서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하야시를 향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는 무단횡단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파괴된 남자가 흔히 그렇듯 어깨를 웅크린 채 도로를 건너갔다. 이윽고,그의 눈에 러브호텔 간판이 보였다.
하야시가 호텔안으로 사라지자 황영달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 수상했다. 출금한 돈의 액수가 많은 것도 이상했는데,은행 안에서 있었던 행동은 미친 사람의 그것이 아닌가?
어쩌면…저 놈인지 몰랐다. 저 놈이 후루겔스 게이꼬를 살해한 지하철 해커일 것이다.
황영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진광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광섭은 이미 김준이 보내왔던 지하철 해커 명단을 기초로 기관원들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하야시가 세번째 중요 용의자였다.
황영달이 진광섭에게 보고를 할 때 정주영은 홀로 하야시의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 30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나가 뒷마당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처음으로 정주영의 귀에 들려 왔다.
어찌나 등골이 오싹한 울음소리였는지,정주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속한 채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황영달의 핸드폰은 통화중인지 신호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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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황영달 넌 하야시를 계속 감시하고,정주영에게는 집안을 뒤져보라고 해. 필요하다면 미나라는 여자를 엎어와도 좋다. 알겠나?"
진광섭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전 황영달의 보고에 의하면 하야시가 일시불로 500만 엔을 찾아갔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심이 갔다.
"전산팀인가? 후쿠오 하야시의 은행잔고를 조회해 봐. 그래 맞았어. 돈을 누가 보냈는지 찾아보고,놈의 여동생 은행잔고도 조사를 해봐. 아무래도 이들 남매에게 뭔가 있는것 같다."
진광섭은 발빠르게 작업 지시를 끝냈다. 이젠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섭은 다시 하야시의 신원조회서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동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별안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서울의 임달영 차장이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방금 북한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는데 곧장 일본으로 날아갔다는 소식이다.
"그럴 리가 있나요? 해커가 한국으로 떨어질 미사일을 일본으로 진로를 바꾸었단 말입니까?"
"그래,바로 그거야! 멋있는 이야기지. 불똥이 일본으로 튀었으니 우린 장구나 치면서 기다리자구!"
"그,그래 봅시다. 하지만…"
"놀랄 필요 없어! 이건 김준의 복안이야. 가만히 보니까 그 친구 제법 믿을 만한 친구더군…"
"네? 무슨 뜻입니까?"
"잔말 말고,마에다는 김준이 찾아보겠다고 했으니까 넌 오늘 아침에 말했듯 곤베이를 유인해라! 오늘 밤 쓰루카 항에서 접촉하기 전에 넌 책임지고 곤베이를 잡아 보란 말이다!"
"그,그게 제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곤베이야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둘 수 있습니다만,그후 문제는…"
"이미 네 생각을 김준과 토의를 해보았다.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넌 곤베이를 잡아 두는 거야. 녀석은 지금 김준을 잡으려고 혈안이니까 네가 먼저 그놈을 묶어 두란 말야! 전에 박살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좋습니다. 그럼 형님을 믿겠습니다.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광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를 끝냈다. 어이가 없었다. 곤베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테이션 호텔에다 엮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사일이 지금 이 순간 일본으로 날아온다고 하니까 믿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현희는 내각정보조사실에 잡혀 있다고 합니다."
옆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 갑자기 통화를 하다말고 광섭에게 말했다.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오빠도 잡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근데 간밤에 다른 장소로 이송해 갔다는 군요."
"다른 장소로 이송해 갔다고?…"
"네. 지금은 도무지…"
"곤베이가 사용하는 안가를 탐문해 봐. 도쿄 북쪽에 많이들 있잖나!"
"알,알겠습니다…"
정리할 일이 많았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로 광섭은 생각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사 마에다의 위치였지만 그 문제는 일단 김준에게 맡기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은 미사일이 문제였다. 지금쯤이면 어디까지 날아 왔을까. 실제로 북한 미사일이 일본땅을 두들길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로 유인하는 문제도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곤베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놈을 이번 기회에 요절내고 말테다…
광섭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때 이번에는 후지산의 마끼 별장 앞에서 이틀째 마끼를 감시하던 임소봉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마끼가 후지산 별장을 떠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야? 갑자기 왜들 이래? 어디로 가는 거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전화 도청을 실패했습니다…"
"놓치지 말고 쫓아가."
그렇게 말을 한 뒤 진광섭은 잠시 머리를 숙였다.
"아니다,소봉이 넌 말야! 마끼를 대충 정리한 뒤 스테이션 호텔로 달려와야 한다. 아무래도 곤베이가 난리를 칠것 같아. 내 말 알겠나?"
스테이션 호텔로 곤베이를 유인하는 것은 바꿔말해서 곤베이를 잡겠다는 뜻이었다. 소봉은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왜 곤베이를 잡으려고 하십니까?"
"미사일이 날아온다고 한다! 미사일이 실제로 일본 땅을 두들기면 곤베이 그 놈,머리가 돌아 버릴게 분명하다 이 말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 쪽이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3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임소봉은 짤막하게 대답을 한 뒤 통화를 끝냈다. 그는 김영진이 운전을 하는 자동차 안에 앉아 있었다. 방금 마끼 준사히가 별장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지만,미사일 이야기때문에 임소봉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리 걱정할 문제도 아닌것 같았다. 북한의 노동3호 미사일이라면 최대 사정거리가 800Km 안팍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날아온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일본 해안까지 도달하다가 도중하차를 할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라디오에서는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조용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클래식 프로그램과 증권투자의 진실이라는 대담프로가 흘러나온다.
별장을 나온 뒤부터 마끼의 스포츠카는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집사가 운전을 하는 모양인데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영진과 임소봉을 태운 자동차는 안개속을 아슬아슬하게 비틀어 가면서 계속 그녀의 스포츠카를 추적해 갔다. 미행은 1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
잠시 뒤. 마끼의 스포츠카가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 옆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호수 지역은 이쪽과는 달리 안개가 빠르게 걷히고 있다. 영진은 스포츠카가 보이는 후방 500미터 뒤에다가 자동차를 정차했다. 임소봉이가 내려선 뒤 쌍안경으로 마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고 있군요…"
"우리 위치가 쉽게 들통난다는 뜻이기도 할꺼요. 근데 김형은 알고 있소?
저 여자가 말이오,무슨 이유로 이곳에 온 것 같소? 뭔가 집히는 것이 없소?"
"집사에게 접근해 녀석을 족쳐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럼 마끼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수 있겠지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럼 빨리 시작해 봅시다. 여기서 지체하다간 스테이션 호텔까지 갈 시간이 없겠소."
그렇게 말을 하다가 임소봉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바짝 긴장을 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쌍안경 안으로 뭔가 이상한 게 잡혔습니까?"
"젠장할…!"
임소봉은 묘하게 신음을 흘리더니,잽싸게 쌍안경을 집어던지고 안개 속을 해쳐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미 젠장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끼와 그녀의 집사가 대기하고 있던 수상비행정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이래도 되는 거야? 되는 거냐구!!"
임소봉과 김영진이 선착장까지 뛰어왔을 때는,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상 비행정이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서쪽이었다.
마끼가 수상비행정을 이용 서쪽 하늘로 종적을 감추고 있을때 진광섭을 태운 자동차는 도쿄를 떠나 마에바시 현으로 연결된 503번 국도를 타고 있었다. 이 자동차 역시 서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곤베이 내 말 듣고 있나? 이제 시시한 숨바꼭질은 그만 하자. 니혼라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에서 만나고 싶다. 네 녀석 머리 뚜껑이 열릴 만한 정보가 나에게 있단 말이다."
광섭은 차 창 밖을 가끔씩 내다 보면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곤베이였다. 대화는 5분여 동안 계속되고 있었는데,둘은 싸우는 것 같기도 했고 협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그럼 오후 3시 정각에 보세. 난 지금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지."
곤베이가 쉽게 승락을 하자 진광섭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진광섭였다. 그는 거드름을 피워가면서 곤베이를 유인하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진광섭은 다시 차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때마침, 곤베이가 타고 있는 사브 제트기가 허공 1만 2천미터 상공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었지만,진광섭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차 창을 두들기는 제트기 소리에 물끄러미 귀를 기울이더니,선글라스를 콧 등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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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씨. 시간이 없소. 나디아를 두고 갑시다."
준은 걸음을 멈추고 윤춘해를 바라보았다. 춘해의 등 뒤에서 나디아를 안고 걸어오던 노태우가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준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왼편으로 식당이 보였다.
"생각해 보시오. 나디아는 이미 죽었소. 죽은 여자를 건지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는 우리까지 줄초상이란 말이요. 물론 그녀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오."
노태우도 춘해의 말을 거들고 있었다.
"그렇게 합시다. 나디아는 여기에 두고 갑시다. 곧바로 오사카 영사관에 연락을 할 테니 추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11시 20분이었다. 준은 차갑게 식어 있는 나디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안개속에서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와,포격 소리가 들려 왔다. 준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녀를 저에게 주십시오."
준은 그렇게 말을 하며 태우에게 걸어갔다. 태우는 나디아를 안은 상태에서 준에게 걸어왔다. 준은 나디아를 받아 안았다. 자욱한 안개가 죽은 여자와 산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식당 주인은 덮밥을 만들다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덮밥을 하지 말라는 주문 같았다. 하지만 아까 그 사내의 음성이 아니었다. 주인은 도마질을 하다 말고 서둘러 주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저쪽에서 파제로가 스타트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식당주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칼을 휘두르며 뛰어갔다.
"이보시오! 돈을 주고 가셔야지. 난 흙을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란 말이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식당 주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쪽 야외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떠나는 파제로 자동차를 바라보다가,호수 쪽을 응시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의 울이 고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돈은 그녀의 발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음식 값 치고는 상당히 많은 10만엔권 수표 한 장이었다. 주인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의 모습을 본 순간 주인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여자는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주인은 여자를 멍히 바라보다가,바람에 뒹굴고 있는 종이 쪽지를 집어들었다.
"됐습니다. 대사관에 연락을 해 달라는 쪽지를 남겼으니까 잘 처리될 것이오. 이제 우리가 사는 방법을 강구해 봅니다. 헬기 소리 안 들립니까?"
춘해는 태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디아쪽으로 걸어가는 식당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회도로를 타고 있다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우리 위치는 이미 발각이 났소. 이와는 다르게 마에다 그 자식은 또 다시 미사일을 쏘았다고 하오. 공교롭게도 이쪽 일본을 향해 쏘아 댔다고 하는데…"
춘해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보니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침에…아침에 이쪽 산악지방으로 들어올 때 김준이 했던 작업이 별안간 춘해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래…아침에 김준은 북한의 노동3호 미사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설마…
춘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에서 준이 창백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한 짓이요? 북한 미사일을 일본에다 쏘아 올린 사람 말이요!"
춘해는 더 이상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컴퓨터 작업을 하다 말고 김준이 춘해를 돌아보더니,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기 때문이다. 춘해는 기가 차다는 듯 눈으로 준을 응시하다가,작업중인 컴퓨터로 눈길을 옮겼다. 준은 하사 마에다를 찾고 있었다.

>> 하사 마에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 모습을 보고 있나?

하사 마에다는 고장난 노트북의 상태를 관찰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14인치 모니터에서 글자가 떠 오른게 보였다. 재미가 없었다. 방금 전 안기부측에 의해 핸드폰 번호가 들통난 것 같더니,김준이 메시지를 계속 날려오고 있다. 화가 나는 것은 김준이 사용하는 아이디가 <HASA>라는 아이디였다는 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사 마에다의 방위청 아이디를 그대로 도용해서 메모를 날려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마에다는 골치가 아팠다. 미나가 작업을 방해한 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0분전에는 난데없이 마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보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 때문에 온통 머릿 속이 혼란 되고 있었다. 그래,죽기 전에,모든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마끼를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녀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 문제로 마에다는 심각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핸드폰 번호가 발각나더니,새로운 핸드폰 번호를 텀블링(Tumbling: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번호를 만들어 사용하는 행위)하거나 복제하기도 전에,이 질문,방금 모니터에 떠 오른 질문이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 김준. 내 작업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바쁘다는 것 모르나?

마에다가 처 올린 문장은 춘해의 눈에도 보였다. 춘해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이쪽으로 날아오는 마에다의 문장들을 읽어 가다가 김준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반짝인다.

>> 방해할 생각은 없다. 만나는 것이 어떤가?

김준이 문장을 처 올리자,잠시 뒤,일본 어딘가에 숨어 있는 하사 마에다의 대답이 다시 이쪽 컴퓨터 화면으로 날아왔다.

>> 구로자와 아끼라의 영화를 같이 구경하고 싶다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이젠 너 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네 놈 같은 시시한 한국인이 아니야.
방위청 극비에 접근했을 때 난 네 놈에게 우리의 반격이 어떤 것인지 똑똑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똑똑히 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3번째 미사일을 발사할 생각이다. 끝장을 볼 것이다.

준은 모니터 상에 떠오르는 글자를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식은 땀이 났다.
파제로는 아직도 털털거리며 안개 속을 달리고 있다.
이제 도박을 해야 할 시간임을 준은 깨 달고 있었다. 아니,도박은 김준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더니,키보드를 가볍게 두들겼다.

>> 아직도 미나가 북한 미사일을 해킹했다고 생각하나?

순간 하사 마에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
녀석도 후꾸오 미나를 알고 있단 말인가?
마에다는 2만볼트 정도의 번개에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경색되었다.

>> 미나를 알고 있나?

>> 알고 있다. 민영화된 정보수집작업이 빠르다는 것은 너도 알텐데?

>> 네 녀석이 했던 일을 합리화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
네 녀석이 해킹을 했단 말인가!
아메바 파일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놈은 미나가 아니라 네 놈였단 말인가?

>> 난 아메바 파일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건 돈으로 구입하지 못했으니까.
한가지 내가 한 일이 있다.

>> 칙쇼!
뭐야 뭐야? 네 놈은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속였단 말인가?
말해 봐! 뭘 한 건가? 내 베이비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준은 반대쪽에서 처 올리는 문장을 읽으면서 하사 마에다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 자는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준은 담배를 고쳐 물었다.

>> 이제야 나를 만날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한가지 힌트를 주겠네.
35분 전에 발사된 노동 3호 미사일에 탑재된 Jx-6 파일은 사정거리가 바뀐 채 발사되었다.
물론 후꾸오 미나는 자신이 그 작업을 했다고 믿고 있다.
난 그녀를 속였지.
너 역시 속았어.
최초의 네 놈 계획은 쓰시마 섬이었지? 아니 대한민국 고성이었나?
난 모두를 속일수 있었다.

>> 입 닥쳐! 내 베이비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나?
지금 일본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 대한해협의 폭을 생각해 봐. 일본은 전체가 위험해.

준은 여기까지 타이핑을 하다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다시 그는 타이핑을 계속했다.

>> 도쿄가 타켓이라면 내 말을 믿겠나?

마에다는 흠질 놀란 눈으로 모니터 상에 떠 오른 글자를 읽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농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반격을 해 올 것이고,도쿄를 해치우겠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놈이 실제로 대한민국 고성으로 날아갈 미사일을 해킹한 뒤 도쿄를 향해 발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날 놀라게 하는 너의 상상력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너에겐 2천만 인구를 때릴 능력이 없어!

>> 전화를 끊겠다.
나는 지금 저팬 알프스를 오른쪽에 끼고 283번 국도를 타고 있다.
기다리겠다. 내 최종 목적지는 쓰루카 항이다.

>> 빡가야로! 전화 끊지마! 넌 날 속이는데 실패했어. 노동 3호의 비행 거리는 800Km에 불과하다! 노동 3호는 도쿄까지 날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이제 10초 뒤면 대한민국 안기부가 너의 작업도구를 점거할 것이다. 그러니 불운한 행운이 연속되기를…
내 위치를 빠른 시간내에 찾아내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네 놈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 입 닥쳐! 약속장소는 내가 정한다! 283번 국도가 아니라 나고야다!
진정으로 나를 만나고 싶다면 나고야로 나를 찾아 와!
나고야에서 기다리겠다!

마에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짧은 비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고,마끼 준사히의 섹시한 몸매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에다는 후회가 되었다. 왜 하필 나고야라고 타이핑을 했을까. 나고야는 마끼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아닌가…
그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때 14인지 모니터의 화면은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키보드 역시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김준의 말처럼 대한민국 안기부가 입출력 포트를 점거했는지 화면은 회색으로 바뀌었고,어두운 심연속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보니까 입출력포트가 강제적으로 제압된 것이 아니었다.
에볼라 형 바이러스였다.
입력과 출력이 먹히지 않는 상태에서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롬 바이오스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종 바이러스였다.
이 때문에 마에다의 컴퓨터는 키를 누를 때마다 삑삑 거리며 금속음을 토해 낸다.
빌어먹을. 완전히 당했군…
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처음부터 대비를 했어야 했다. 핸드폰의 번호는 공중파였기 때문에 도용이 얼마든지 가능했고,추적도 당하기 쉬웠다. 그러니 전화번호가 들통난 상태에서 통신을 계속하다보면 중학 1년짜리 학생이라도 침투를 해 올수 있었다. 이런 것이 핸드폰을 이용한 컴퓨터 통신의 약점이었다.
마에다는 동작이 중단된 데스크탑 컴퓨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알파칩을 채용한 데스크탑 컴퓨터는 초당 처리 속도가 200백만 밉스에 육박하는 괴물 컴퓨터였는데,1 바이트도 안되는 에볼라 바이러스에게 무기력하게 당해 버리다니…
그는 지치기 시작했고,화가 나기도 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자신은 알지 못했다. 이미 대한민국 안기부는 그가 동급해커로 위장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김준을 도와주면서 협공을 해오는 것일 테지….
갑자기 상황이 비틀어진 것은 후꾸오 미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전화 연락을 해 온 마끼 준사히…
두 여자를 정리하기 전에,김준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것이 마에다는 아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 나고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서 이용가치가 없는 녀석을 먼저 제압하자.
왜 베짱을 부리지 못하는가.
마에다는 속으로 뇌까리면서 마지막 작업을 염두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으면,그는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핵폭탄을 일방적으로 한국으로 날려 버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뒤 자결을 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별반 계획이 아니라 그 혼자만의 계획이었지만,이젠 그 가능성이 서서히 마에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넌 할 수 있다…
마에다의 생각은 가장 간단한 논리에서 파생되는 듯했다. 65년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간 기본관계에 대한 조약>에서 이미 일본은 한국에 대해 전후배상을 다했다고 마에다는 믿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당시 일본측 협상대표인 구보다久保田의 말처럼 배상이 아니라 시혜에 가깝다고 믿었다.
총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이 60년대 중반에 한국에 지불되었으니까 배상이 아니라 시혜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것은 마에다가 속해있는 별반을 장악하는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젠 축구도 한국을 이기고 있으니까,한국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인 것이다. 그 식민지가 주권국가의 국방에 관여를 하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인 것이다.
일본이 핵폭탄을 제조하건 한국을 공격하건 그것은 어떤 나라도 간섭할수 없다. 보스니아와 체첸 공화국 사태를 보면 강자가 곧 정의라는 것은 얼마든지 눈으로 확인할수 있다.
마에다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세상 이치이니까 그가 미사일을 쏘아 대도 탓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흐믈흐믈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시선이 컴퓨터에서 액정화면이 부서진 채 옆좌석에 놓여 있는 노트북으로 옮겨갈 때 란조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작업을 중단하십니까?"
"작업을 중단한게 아니다. 저쪽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이쪽 컴퓨터를 장악한 것 같다."
"저쪽이라뇨?"
"대한민국 안기부야. 시시한 곰만 있는줄 알았는데 제법 민첩하게 대응하는 놈들도 있다."
마에다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에스파스 밖을 내다보았다. 에스파스는 292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김준을 태운 파제로와는 달리 저팬 알프스의 산봉우리가 왼편으로 올려다 보인다.
"그럼 우리 위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안기부에게 발각난 겁니까?"
"염려할것 없다. 안기부 녀석들이 알아 낸 것은 핸드폰 번호에 불과하다.
우리 위치는 내 자신도 모르니까 녀석들은 추적을 해 올 수 없다."
어쨌든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이쪽 전화번호가 발각되었을 때 에볼라 바이러스를 날려올 것이라는 점은 예측했어야 했는데 한발 늦은 것이다.
"컴퓨터가 동작이 안된다면 큰일이군요. 이젠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노트북 컴퓨터는 액정화면을 교체하면 사용할 수 있다. 아니다. 액정화면 대신 일반 모니터를 노트북에 연결하면 다시 정상적으로 사용할수 있으니까 이 문제는 신경 쓸 일이 아냐."
"그럼 어떤 점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북조선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지금 어느 쪽으로 날아오는지 확인해 봐.
내가 만든 프로그램에 의하면 지금 이 시간에 쓰시마 섬 앞에 있는 무인도에 떨어져야 한다. 헌데 도쿄로 발사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제를 알아볼 수 있겠나?"
"상부에 문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마에다는 란조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에스파스 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저팬 알프스 자락을 품고 안개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283번 국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왜 그러십니까?"
"283번 국도로 이동했으면 좋겠다. 내 명예를 걸겠다. 오늘 당장 한 놈 처 죽일 놈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283번 국도를 이용 나고야로 가자."
그렇게 말을 한 뒤 마에다는 노트북 컴퓨터를 집어들었다. 그의 왼손은 노트북 컴퓨터를 잡고 있었고,오른손은 조립식으로 부착된 액정화면을 노트북 본체에서 뜯어내고 있었다.
잠시 뒤. 마에다의 손은 14인치 모니터의 케이블 선을 노트북과 연결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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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 2000 터보 프롭기는 나고야名古屋 공항에 착륙을 하고 있었다.
후퇴각 6엽식의 프로펠러를 가진 이 제트기는 50인승과 58인승이 있었다.
곤베이가 내려서자 그 뒤를 따라 레인저 부대원들이 내려섰다. 사뇨 사유리는 맨 뒤에서 히로세 전산팀장에 의해 기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미 12대의 마쓰시다 MVP와 8대의 스즈끼 사무라이 벤,영국산 재규어 자동차가 곤베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곤베이는 재규어에 올라타기 전 후미에 서 있는 히로세 전산팀장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사뇨 사유리를 끌고 왔다. 곤베이는 휘청이듯 끌려오는 사유리를 바라보다가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사내를 보았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였는데 곤베이의 오른팔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고 알고 있다. 좋은 소식부터 말해!"
"미사일을 잡았습니다. 도쿄로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을 노토반도 서북방 100Km에서 해상자위대가 잡았다고 하는데 아직은 미확인 보고입니다!"
"미쳤군. 실제로 도쿄로 날아오려고 했단 말인가? 북조선 놈들 어디가 어떻게 된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도쿄까지는 날아올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 분석에 의하면 바다에 떨어지는 미사일 였다고 합니다. 그저 위협사격였던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 문제로 황제 폐하는 유럽순방을 중단하셨고,내각은 흥분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나 역시 채널이 복잡하기 때문에 입수된 정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 자위대나 방위청,외무성 장관 놈들이 미사일 때문에 무슨 난리를 부리고 있나?"
"아직은 별달리 말이 없습니다만 이 기회에 한반도를 예속시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흥미 있군. 북조선은 어떤가? 뭔가 브리핑이 있었다고 하던데?"
"비합리적인 실수라는 코멘트가 10분 전에 있었습니다. 지지時事통신에 의하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사준한이가 직접 나와서 해명을 했답니다.
바람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해에서 노동미사일 실험을 하다가,순전히 바람 때문에 노토 반도까지 날아갔다고 하는데,이거 정말 억울하지 않습니까?"
"해커 이야기는?"
"공식적으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새로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한국 측과 북조선의 김정일이 만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북경에서입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입을 맞추겠다는 뜻이겠군. 하여간 양국 간의 전례를 보아 지금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다. 나쁜 소식이 있다는데 그것은 뭔가?"
"하사 마에다의 상관을 한시간 전에 체포했습니다. 이 문서를 읽어보시겠 습니까? 팩스 전문과 그 밖에 부수적인 문서입니다만."
곤베이는 사내가 내민 서류 3장을 재빨리 뺏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얀 백지 위에 깨알같이 일본 글자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직인은 없었다.
곤베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류 밑에 있는 팩스 용지는 란조가 그녀의 상관에게 보내는 팩스전문인데 5분전에 수신된 내용이다.
"별거 아니었군. 이 서류를 읽은 사람은?"
"지금 현재론 세사람입니다. 아니 둘입니다. 육좌님과 저 밖에 없습니다."
"좋아. 마음에 든다. 그래 한시간 전에 잡았다던 마에다의 직속상관은 지금 어디에 있나?"
"자살했습니다."
"자살?"
"네. 란조 2위가 팩스를 날린 것을 역추적해서 잡았는데,의외로 피래미 였습니다. 동북방면대 6사단 소속의 1위(대위) 계급을 달고 있는 녀석인데, 우리가 치고 들어가자마자 총구를 자기 목구멍에 들이 박았습니다."
"그랬나? 아깝게 됐군…역시 별반 골수분자들은 하다가 안되면 스스로 자살을 한단 말야…"
곤베이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제 사건의 윤곽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배후는 김준이 아니라 하사 마에다의 별반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별반까지 치고 들어가느냐 아니면 지금 여기서 중단을 하느냐.
아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별반이라는 것이 건들어 보았자 이익이 없었다. 오히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솔직히 말하면 곤베이는 별반을 수사할 용기가 없었다. 별반은 우파 최대의 실세 조직이니 곤베이로써는 매우 조심을 해야 했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서류는 내가 보관하는 게 좋겠군. 불태우던지 알아서 하겠네. 그런데 이 팩스는 뭔가? 마에다가 나고야로 이동을 하고 있다니 무슨 뜻인가?"
"란조는 자신의 상관이 자살한 사실을 모르고 팩스를 계속 날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접수를 했던 겁니다. 팩스 내용을 보니까, 마에다가 김준을 나고야에서 만나려 하는것 같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재미있군. 지금 김준은 어디에 있는데 그래?"
"놈은 아직 츄부中部 지방 내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에다는 근거리에서 추적중입니다만,김준의 움직임은 아직 윤곽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JR 노선엔 경찰병력을 깔았고,말씀하신 쓰루카 항구에도 해상 자위대를 동원해서 한국 어선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합니다. 저팬 알프스 등산로에도 육상자위대 예비 병력을 투입했으니까 김준이나 마에다는 이제 츄부 지방을 빠져 나갈수 없습니다."
곤베이는 방금 읽었던 팩스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이제보니 두 녀석이 나고야에서 만나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지금,내가 서있는 이 도시에서…
"멋있군. 10분전엔 다카야마高山 부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나디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니까 그 쪽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포위망을 좁힌다. 중간에 놈들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가미코치,도야마,가나자와 방향도 물샐 틈 없이 막도록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쪽 나고야 안에다가 김준과 마에다를 가두겠다는 뜻이겠군요…"
"3시까지다. 3시까지는 두 놈을 발견해도 모른척 해야 한다. 난 지금 당장 이누야마에 있는 니혼라인으로 가야하니까 그 이후에 보도록 하자. 헌데 니혼라인에 스테이션 호텔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예? 무슨 말씀인지?"
"만날 사람이 있어. 그 자가 스테이션 호텔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 군."
"누군데 그러십니까? 그쪽은 지저분한 급류가 흐르는 실개천 지역입니다.
스테이션 호텔도 육좌님이 몸소 가시기에는…"
"진광섭이다. 그 자가 나에게 인사를 해 오겠다고 한다."
"놈…간덩이가 부어 있군요! 스테이션 호텔에서 보자고 한다면 한판 붙자는 뜻일 겁니다. 거긴 야쿠자들 놀이터이지요."
"그런가? 듣던중 반가운 소리군. 나역시 이 기회에 진광섭과 붙을 생각이다."
그때 히로세 전산팀장이 사유리를 재규어 뒷좌석에 집어넣고 곤베이에게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로세는 긴급히 제트기로 뛰어갔다.
다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진광섭이가 단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놈도 마에다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곤베이는 재규어에 올라타고 있었다. 뒷좌석 안쪽에는 사유리가 앉아 있다.
"분명히 하지만 마에다나 별반은 이 일에 상관이 없다. 미사일을 쏘아대고, 오키나와 기지의 전산망을 해킹한 놈은 동급해커다. 우린 그렇게 알아야 한다. 알겠나?"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유리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는 우울한 표정이군. 우울할 필요가 없는데 말야. 잠시 뒤면 김준이 나고야로 온다니까 이 손수건으로 눈물부터 닦으라구."
"정말이에요? 아찌 말은 거짓말이 아니죠?…"
"그래. 아가씨는 우리 상품이니까 몸을 깨끗이 정화시켜 놓아야 해. 아가씨같이 귀여운 여자는 거래를 할때도 가격을 높게 책정할수 있지."
"흐음…거래라구요?…누가 저를 사는 건데요? 쯔압…"
"김준이 사는 거야."
사유리는 오싹 몸이 달아올랐다.
"싫어욧! 나 이 손수건 필요 없어요. 나 진흙탕에서 뒹굴거야. 밤새도록 뒹굴어서 내 몸 값 깎을 거란 말야!"
"진정해 아가씨. 아가씨를 판다는 게 아냐. 정 상황이 안 좋으면 아가씨를 이용 김준을 유인 하겠다는 거지. 그러니 어쨌거나 아가씨는 김준과 만날수 있을거야."
"그래도 싫어! 네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니? 응? 이 옆구리 터진 김밥아!!"
곤베이는 수축되었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사유리의 볼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아가씨 나이라면 지금 아가씨가 처한 상황이 어떤것이라는 것 쯤은 알텐데? "
"흐응. 알았쪄. 까불지 안을껭…그러니 이 징그러운 손 치워,발퀴벌래야!"
재규어는 공항을 떠나더니,잠시 뒤 나고야 공항 전철역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나고야에서 이누야마의 급류 지역인 니혼라인日本line까지는 50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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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방금 곤베이가 나고야를 떠났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역시 추측 대로군."
이상운과 진광섭을 태운 자가용은 마쓰모토 현을 통과하고 있었다.
"멋진 생각입니다만 녀석을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두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레인저 부대원 10여명이 곤베이를 뒤따라가고 있다는데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10명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바로 나다."
"알고 있습니다만… 과장님도 정말 스테이션 호텔에 가실 생각입니까? 전 걱정이 됩니다…"
광섭은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인이라고 생각했나? 놈은 내가 유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나 놈이나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가 원하면 한 침대안에도 같이 들어가지. 그리고 이번엔 중대한 협상을 해야하니 나도 직접 가야 한다. 녀석도 마에다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면 김준을 더 이상 쫓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을…? 과장님답지 않게 슈베르트적인 발언을 하시는 군요. 윽…죄송합니다."
"난 곤베이를 피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 이 문제는 그만 접어두게."
"솔직히 말하십시오! 과장님은 단판지으려고 가는 게 아니잖습니까? 곤베이를 잡아 없애려고…"
이상운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찝찔한 표정으로 자동차 밖을 내다 보았다.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사태는 피상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쏘아 올렸던 미사일을 일본 해상자위대가 바다 위에서 잡았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던 터였다. 때마침 지저분한 안개도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개고 있었는데 이 점이 그나마 좋은 징조였다.
여러가지로 불안한 점이 많았다. 쓰루카 항에서 대기중인 선박에 김준 일행이 올라타는 것도 내일 밤이 아니라 오늘밤이었다. 이 사실은 윤춘해와 이상운 그리고 진광섭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때문에 정오경부터는 눈코 쉴 수 없이 바빠지고 있었다. 무사히 윤춘해가 김준을 쓰루카 항까지 픽업한다 하더라도 언제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몰랐다. 이것에 대비해 광섭은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두고자 노력을 하는데…
이상운은 시계를 보았다. 곤베이와의 약속시간은 오후 3시였다. 앞으로 1시간 30분 안에 스테이션 호텔에 도착해야 했다.
이상운과는 다르게 정작 진광섭 자신은 다른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상 레인저라면 일본 자위대가 자랑하는 특수부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운이 좋아 레인저 대원들이 훗가이도에서 동계 훈련을 하는 것을 한국 국방부 참관인 자격으로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설동(雪洞:설상 주거지)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었다.
설동은 이글루와 비슷한 형태였는데,이들 레인저 대원들이 만든 이글루는 눈더미 속에 만든 다다미 방과 유사했다. 이들은 음료수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스틱통에 물을 담고 땅 밑으로 1미터까지 내려 판 뒤 저장을 했는데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설동 안의 환기구는 스키스톡을 이용해 뚫는것 같았다. 그런 뒤,최소 식량으로 3박 4일 동안 설동 안에서 견디어 내는 훈련을 한다.
광섭이가 4일후에 다시 훈련장에 갔을 때는 쓰레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광섭의 날카로운 눈 마저 설동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진광섭은 그 지옥훈련의 책임자가 곤베이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왜 이런 악연이 그 친구와 계속되는 것일까…
곤베이가 북한에서 연수를 받을때 광섭은 곤베이를 감시해야 했는데, 한일간 정보팀의 친선 체육대회가 있으면 그때마다 곤베이와 진광섭은 검도로 서로의 실력을 교환하기도 했다.
어느해에는 광섭의 외동 딸 혜숙의 생일을 곤베이가 케이크로 축하를 한적이 있었다. 그날 진광섭은 딸이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발로 밟았다.
말하자면 광섭과 곤베이의 관계는 축소판 한일 관계라고 할수 있었다.
이상운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진광섭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 두대에 분승한 부하 직원들 모습이 보였다. 상운이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윤춘해의 전화였다.
윤춘해…나쁜 소식을 전할때는 항상 이상운을 통해 소식을 전해오는 것이다.
이상운은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절래 절래 저었다. 그는 통화를 끝낸 뒤 간신히 진광섭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윤춘해도 지금 나고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나고야라니…
지금 진광섭과 곤베이가 만나기로 한 스테이션 호텔은 이누야마의 니혼라인에 있었는데,이는 나고야의 변두리 도시중 하나였다. 저팬알프스에서 나고야 방향으로 오다보면 그 길목에 있는 것이 바로 니혼라인였던 것이다.
"뭐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곤베이의 시선이 김준에게 집중된 것을 차단하고자 내가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로 유인하는 것을 모르나?
춘해는 픽업을 어찌 그 모양으로 하는 거야? 다시 쓰루카 항구로 가라고 그래.
지금 당장!"
"그게 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하사 마에다와 김준이 나고야에서 만나기로 했답니다! 이때문에 지금은 도저히…"
"이런 망할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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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마지막 대혼전 그리고 수상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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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흠질 놀랬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번갈아 날아온 것이다. 김준이 하사 마에다를 잡겠다는 생각은 훌륭했지만,왜 하필 나고야일까?  
광섭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니혼라인이나,스테이션 호텔이나 모두 나고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으니 큰일이 나도 이만저만 큰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곤베이를 유인하려했던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갈것 같았다.  
다시 이상운의 음성이 들렸다.  
"나디아라는 여자는…죽었다고 합니다…."  
"뭐?"  
광섭은 눈알이 뒤집어질것 같았다. 오전에 통화를 했을 때는 나디아가 죽었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다른 피해는 없었나?"   "곤베이 측에서 헬기를 날려 왔다고 합니다. 나디아는 산악지방에서  헬기에 타고있는 저격수에게 살해당했고,이들만이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하는 군요."  
"빌어먹을 자식!"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해 형은 쓰루카 항으로 가고 싶은데 김준이  나고야 행을 계속 주장한다는 군요. 지시 내려 주십시오."  
"아냐. 지시는 없다."   진광섭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이 곤베이를 만나러 가듯,김준과 마에다는 나고야에서 합류를 하려고 한다. 
무언가 함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이젠 이판사판이란 생각도 들었다.  
광섭은 이판사판끝에 오기가 발동했다.  
"안되겠군. 우리도 야구팀을 만들어야겠어. 선수는 몇명으로 구성하면 될 것 같은가?"  
"예…?"  
"아무래도 안되겠어. 곤베이가 니혼라인으로 오는 것은 내가 유인했기 때문이 아냐. 녀석은 뭔가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 측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도 몰라…"  
"선수가 부족하면 북한의 통일전선부 애들은 어떻습니까?"  
"통일전선부?"  
그러고보니 좋은 생각인것 같다.  
광섭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임달영 차장이라면 북한의 윤철과 전화 통화를 할수 있는 거물이었다. 그래. 한번 기대를 해보자. 통일전선부  애들이 도와준다면 스테이션 호텔에서 곤베이를 아작 낼 수 있을것 같았다.  
광섭은 핸드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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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모니터에서 떠다니는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한시간 전부터  메시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마에다가 날려 온 메시지는 아니었다. 마에다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였으니까 이는 다른 쪽에서 날려 온 메시지라고 할 수 있었다.  
미나는 메시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하실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하야시의 컴퓨터를 마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디에 있을까…  
미나는 온통 혼란되고 격앙된 상태였다. 볼에는 홍조가 떠올랐고,가슴은 호흡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오빠를 사랑하는 건지 저주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요즘 들어선 스테이지 위에서 자신있게 춤을 출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직업을 가진 여자의 무기는 가벼운 몸이 첫째였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선 몸이 무거워지고 현기증이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음속으론 오빠 하야시만을 의지했고 오직 그만을 믿었는데….  
미나가 맨 처음 임신한 사실을 고백했을때 오빠의 반응은 이상했다. 창백 해진 표정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맨 처음 보였던 오빠의  반응은 줄곧 기억의 저편에서 미나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던 오빠 하야시. 그것은 묵시적인 합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빠의 창백한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야비한 미소로 바뀌어 갔다.  
나쁜 자식.  
그녀의 임신을 그는 저주했던 것이다.  
화가 났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야시. 말 해봐. 응?  
미나는 아직도 자신이 하야시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피로 범벅이 된 아이보리색 브라우스를 바스락거리며 지하실 밖으로 걸어 올라갔다. 진광섭이 보낸 정주영 기관원이 정원 한쪽에 숨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미나는 거실 차단스에서 CD 롬 타이틀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하야시의 컴퓨터를 완벽하게 CD에 복사를 해 둔 적이 있었다. 맨처음,그러니까 6개월 전쯤에 오빠의 작업이 태반은 청부살인이라는 것을 안 뒤로 미나 역시 남자 하나를 오빠의 작업을 흉내내며 살해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작업을 미나는 다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3남자중 두 남자가 죽건 말건 그것은 상광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빠 하야시의 행적이었다. 오빠를 찾아내려면…일본 안에 있는 모든 폐쇄회로 카메라를 자동으로 감시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미나는 CD를 찾아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빠 하야시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어디에 있더라…   미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더니,다시 거실로 내려왔고, 이번에는 뒷마당으로 나온 뒤 지하실로 내려갔다.  
정주영은 미나가 지하실로 내려가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입에선 짧은 한국말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정말 아까운데…저 여자는 미친 여자야… 미친게 분명해…"   

———–  -  ———–  -  ————  -  ———–   

곤베이는 기소가와木會川의 급류를 눈대중으로 훑어보았다. 총 연장은 13Km에 불과했지만,생김새나 물결의 흐름이 독일 라인강 협곡과 비슷 하다고 해서 일명 니혼라인으로 불리는 일본 3대 격류지역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곤베이는 급류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스테이션 호텔로 걸어갔다. 말이 호텔이었지 스테이션 호텔은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목조건물을 라인강 근처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으로 건축을 한 모양인데 영업을 중단 한지도 벌써 3,4년은 되 보였다. 스테이션 호텔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말 그대로 유령의 집이었던 것이다.  
역시 진광섭의 전략은 이것이었나?  
곤베이는 스테이션 호텔을 응시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이곳에서 한판 붙어 보자는 뜻이었겠군…  
곤베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이미 스테이션 호텔 안에는 30여명의 레인저 대원들이 몸을 감추고 대기중이었다. 그리고 우측 숲과 좌측 숲에도 나머지 100여명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3시 정각이 되자 곤베이의 핸드폰 벨이 정확하게 울렸다.  
그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놈….  
그러고 보니 진광섭 일행은 이쪽 언덕에 없었다. 니혼라인 건너편,동쪽 계곡 숲속에서 3대의 자동차가 천천히 달려나오는 것이 곤베이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역시 진광섭답다는 생각을 하며 곤베이는 천천히 급류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로 올라갔다.  
곤베이는 히쭉 웃었다.  
"여전하군. 약속 장소는 스테이션 호텔이 아니라 그쪽 숲이었나? 왜 나를 보자고 했나?"  
광섭은 자동차 밖으로 나온뒤,건너편 절벽 위에 서있는 곤베이에게 슬적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있었다.  
"30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뭐가 아쉬운가? 기다리느라고 수고했네."  
"허튼 수작 하지마. 한방 먹일 생각으로 날 유인한 것이라면 지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물론 상황은 자네가 더 빠삭하게 읽겠지."  
"내가 너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한가지다."  
"협상인가?"  
"다 알텐데? 김준과 하사 마에다…하사 마에다와 김준의 관계를 말야."  
"잘잘못을 따질 생각이라면 이야기를 중단하세. 난 협상을 할 생각이 없어!"  
"인사치레는 그만 하지.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린 서로가 김준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너희들 일본인들 우파의 계획이야. 충고하겠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수사를 정식으로 다시 시작해 보게."  
"협박인가?"  
"이건 협박이 아냐. 난 길을 만들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구하는 것이네. 쓰루카 항까지는 무슨 이유가 있건 간에 김준을 데려가야겠어. 그러니 그쪽 항구에 진을 친 해상자위대도 모두 뒤로 돌려줬으면 좋겠어!"  
"대가는 무엇인가?"  
"하사 마에다를 한국 측이 잡으면 인도를 하겠네."  
"우습군. 마에다는 이미 우리가 확보했어."  
"반가운 소식이군. 그럼 모든 음모가 별반의 짓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다는 뜻일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직 접하지 않았네. 내가 내 배를 스스로 칼로 째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으니 조사할 생각도 없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지?"  
"이봐. 노력을 해 보게. 최신 정보를 들으니 너희들 정보팀이 방위청 관할로 통합된다는 소식이 있더군. 그곳에 별반 같은 쓰레기들이 끼어드는 것이 과연 좋겠나?"  
"말 함부로 하지 말게."  
"함부로가 아냐! 별반은 위험한 방법으로 핵폭탄을 소유하려고 하고 있어. 과연 그들이 저질렀던 일이 정당하다고 자넨 생각하나?"  
곤베이는 냉철했다.  
"이 봐,진광섭이. 핵을 일본국이 소유하건 말건 그건 일본 내부의 문제야. 너희들은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어. 도덕적으로 호소를 하는데 말야. 국제간 문제는 다자간 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별반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일본인 사이에서는 우리가 핵폭탄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치들이 많다는 뜻이네. 아무도 방해할수 없지."  
곤베이는 거기까지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는 신속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상황 판단을 잘못했고,전혀 관계가 없는 적을 쫓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지금 모든 것을 까발릴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곤베이 역시 핵폭탄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일은 정책 입안자들이 결정하는 일이니,그 내밀한 문제까지는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핵을 소유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점. 별반의 생각은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추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러니 죄를 뒤집어 쓸 사람은 아직도 계속 필요했고,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곤베이는 입을 열었다.  
"하사 마에다를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보게. 대신 우린 김준을 포기하지 않겠네. 정부간의 협상이야 우리가 알 바 아니네. 너나 나나 밑바닥 인생이야. 옳은 게 뭔지는 알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기에는 너무 밑바닥이란 말씀야."  
"난 밑바닥이 아냐. 네 놈이 길바닥 청춘였다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일이고."  
"재미있군. 이만 끝내는 것이 어떤가? 그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게. 난 너를 정리하고자 이곳에 왔다."  
역시 추측대로다. 진광섭은 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곤베이에게 물었다.  
"몇명을 등 뒤에 차고 왔나? 자네가 이끌고 온 선수의 숫자를 말해보게."  
곤베이는 야비하게 미소를 흘렸다.  
"200명. 이 쪽 숲은 내 부하들이 장악했네. 언제라도 명령을 내리면 그쪽 계곡을 치고 올라갈 씩씩한 놈들이다. 마침 장소도 훌륭해. 보는 사람은 없고,시체는 급류를 타고 떠내려가지."  
"그래,내 부하 10명을 잡으려고 200명을 달고 왔단 말인가? 자넨 멍청이인가?"  
"아가리 조심해서 놀리게. 좀 조용히 죽어 주면 안되겠나!"  
"그래,좋다. 하지만 한가지 알려줄게 있어. 숲 속에는 네 놈 부하만 있는 게 아냐. 내 부하들도 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못해. 하지만 숫자는 비스무리할것 같군. 내 야구팀은 막강해."  
"허풍이 심하군. 차라리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 어떤가?"  
곤베이가 그렇게 말을 하자 진광섭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잠시후면 모든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곤베이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내가 한가지 제안을 하겠네. 개인전은 어떤가?"  
"개인전?"  
"검도. 옛 추억을 되살려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일테니까…자네와 내가 다시 1대1로 솜씨를 겨루어 보는 것이네…"  
"그게 가능할까? 광섭이 넌 전에 한번 나에게 진적이 있었을 텐데?"  
곤베이가 불쑥 그렇게 말을 하자 진광섭은 별안간 화가 나서 핸드폰을 이상운에게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은 전기오븐에서 꺼낸 통닭처럼 울그락 불그락했다.  
"그때 일은 내가 진 게 아냐! 난 그때 일을 증명하기 위해 너와 또다시 1대1로 붙고 싶단 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검은 준비를 했나? 물론 내가 항상 죽도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을테니 자네도 검을 준비를 했겠군…"  
두 사내의 격투는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한일韓日 정보 실무팀 간에 있었던 친선 검도 대회에서 곤베이와 진광섭은 양국 대표로 일전을 벌였는데 이때 승자는 곤베이였다.  
이것은 진광섭에게 남모를 상처를 주었다. 광섭이 생각하기에 그날 대결의 승자는 분명히 진광섭 자신이었다. 하지만 신판진은 편파적이었고,건장한 사내들이 꽥꽥 고함을 질러대며 곤베이를 일방적으로 응원을 했으니 도무지 헷갈리는 일이었다.  
광섭이가 계곡 아래로 내려왔을 때 곤베이는 이미 급류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섭은 한국산 죽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곤베이는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곤베이가 짧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리자,갑자기 어딘가에서 추리릿 소리와 함께 죽도 한자루가 곤베이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날쌔게 죽도를 낚아챘다.  
비로소 곤베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메뉴에 1대1일 검술까지 준비되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걸? 말하게. 자넨 우리 둘의 대결에다가 베팅을 걸고 싶어 하잖아?"  
광섭은 이를 우두둑 갈았다.  
"배팅은 네 녀석이 걸어! 내가 원하는 것이 뭐라는 것쯤은 쉽게 알잖아!"  
"흥분은 금물이네. 좋아 내가 베팅을 걸어 보도록 하지. 나를 꺽는다면 한시간 동안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죽이겠네. 그 사이에 김준을 남조선으로 데려가든지 북조선으로 데려가게나. 허나,내가 자네를 꺽으면 광섭이 넌 나에게 체포되는 거야. 혐의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역시 편파적이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듯이 말야! 넌 아직도 너희 나라가 핵을 소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나? 그걸 위해 어떤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감추려 한단 말인가?"  
"나 곤베이는 그 문제가 네 놈이 관여할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넌 외지인이야.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넌 외지인에 불과하단 말이다!"  
"임마! 그래도 난 끝까지 간섭을 하겠다! 우리 우정을 위해,이웃 일본이 핵성냥 공장으로 전락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난 너에게 충고를 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장이면 장인 것이고 멍이면 멍이다! 내가 허락을 해야만 지구가 옳바르게 움직인단 말이다. 곤베이!!"  
다혈질인 진광섭은 그렇게 말을 한 뒤 날카롭게 죽도를 잡아챘다. 빠르게 광섭의 셔츠 위에서 그의 붉은 넥타이가 푸른 하늘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순간,광섭의 턱에 먼저 곤베이의 죽도가 그림같이 박혀 왔다.  
총알같이 빨랐고,위협적인 기습이었다.  
진광섭은 입에서 피를 흘리더니,맥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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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각. 밀실 밖에서 두 남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현희와 한대리는 귀를 쫑긋했다.
침입자의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이들 남매는 그들이 누군인지 감을 잡을수 없었다.  
이윽고 문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때 한현희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다. 한대리가 그런 현희를 보호한 채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일본 말이 들려 왔다.  
"우리 의뢰자가 당신들을 보고 싶다는 군. 함께 가시겠소?"  
한대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뒷골목 야쿠자패거리라고 보기엔 단정한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한대리 남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어디요? 우릴 죽일 생각이요?"  
한대리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사내는 그에게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밤 9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가시오. 그런 뒤 아침에 출근을 하시오. 아시겠소?"  
"당신들은 누구기에…?"  
"그것까지 말해주면 곤란한데…?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오? 우린 무꽃피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일본 사람들이란 말요. 쩝…사실은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요. 민단계 야쿠자라고 할 수 있소만…"  
한대리는 영문을 모른 채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건네준 편지봉투를 보았다. 한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들은 일본 내각 정보 조사실 기관원도 아니었고,안기부가 투입한 야쿠자 조직도 아니었다. 서울에서,제일 그룹 본사에서 고종수 부장이 직접 투입한 특공대인 것이다.  
한대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미 사내들중에서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한대리의 동생인 현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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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제로는 시속 90Km의 속도로 182번 국도를 달려나오더니 207번 국도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김준의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작업은 약간 이상한 것이었다. 안기부의 임달영 차장 부탁대로 김준은 일본 방위청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후배들을 위해 길을 만드는 셈이었지만 춘해는 준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춘해는 궁금했다. 하지만 쉽사리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미사일을 일본으로 쏘아 댄 사람이 김준였다니. 이제는 김준이 어떤 인물일까 겁이 나기도 했다.  
파제로가 막 207번 국도로 진입을 할때 좌측에서 자동차 한대가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시속 200Km는 될 것 같았다. 노태우는 와락 긴장한 표정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때 춘해의 음성이 튀어 나왔다.  
"뭐야? 저 차는 김영진이 운전하는 차 아냐? 어떻게 영진이가 이곳에 있는 거지?"  
춘해의 음성을 듣고,태우는 급하게 크락숀을 눌렀다.  
하지만 김영진은 크락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백미러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옆좌석에 앉아 있는 임소봉은 저격총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저 친구들 귀가 먹혔나? 왜 저래? 크락숀 소리가 안 들리나?"  
춘해는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준이 담배를 바꾸어 물더니,입을 연다.  
"춘해씨. 앞에 가는 자동차가 동료라고 했습니까?"  
"그렇소만. 김영진과 임소봉이란 친군데 왜요?"  
"한번 따라가 봅시다."  
"갑자기 왜 그렇소? 나고야로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앞 차를 따라가 보십시오. 진과장님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나고야로 가지요."  
"무슨 소리요? 진과장이라니? 진광섭씨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요?"  
"니혼라인이라고 하는군요. 저 자동차는 니혼라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설마…?"  
운전대를 잡고 있는 노태우까지 믿어지지 않는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파제로의 속도를 높였다. 파제로 안은 아까부터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라질 풍의 바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듣기에는 너무 가슴이 시린 음악…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준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했고,무엇인가 걱정을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왜 그렇소? 음악 소리가 귀에 거슬리오?"  
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차 창 밖으로 멀리 니혼라인의 물결이 희미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김준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불쑥 임달영 차장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해커란 무엇인가? 마치 톨스토이와 도스토엡스키에게 빵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질문였습니다."  
"근데요?"  
"저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해커와 데커,그리고 크랙커…해커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준의 눈빛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춘해는 물끄러미 김준을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술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거 괜히 센치해지는 군. 이게 다 일본 놈들 때문이요. 왜 벚꽃이 피다가 지는 꽃인지 아시오? 일본놈들이 가만 안 놨두거든. 원숭이 엉덩이가 붉은건 말이요. 일본놈들이 손으로 긁기 때문이요. 술 한잔 어떻겠소? 국화주요."  
"좋습니다. 술을 마시며 불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지요…"  
"불구경이라뇨? 거 이상한 소리 작작하시오. 술 마시면서 불 구경을 하다니 누구 복장 터지게 할 일이 있소?"  
준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받아 쥐었다. 그런 뒤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국화주의 차가한 향이 그의 후각을 마비시킨다.  
해커와 크래커의 차이점은 구구절절했다. 해커란 순수한 의미로 컴퓨터에 미친 사람을 의미했는데,이와 다르게 크래커는 말 그대로 시스템을 마구 농락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방금 김준이 한 작업은 크랙 행위에 가까웠다. 임달영 차장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김준은 한국 국방부 전산팀과 공동으로 일본 방위청 전산망을 해킹하고 있었다.  
이제 작업이 끝나자 준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선은 적당한 량의 알콜을 홉수함으로써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디아를 위해서도 그에겐 술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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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광섭의 우측 어깨에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광섭은 급류에 몸을 척 박고 앉아 있었다. 셔츠가 물결에 흔들렸다. 급류는 그의 콧구멍안으로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는데,그는 제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안돼…너 광섭이 뭐하는 짓이냐. 이게 무슨 꼴이냐 말이다…  
진광섭은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지탱하듯이 유지하며 급류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곤베이의 죽검이 날카롭게 그의 복부를 파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는지,진광섭은 일방적으로 곤베이에게 난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연기였는지 모른다. 곤베이를 잡아두기 위한 연극…  
광섭은 죽도를 똑바로 일직선으로 세운뒤 처음으로 곤베이의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광섭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생각을 했는지 곤베이는 공격을 멈추었다.  
"이런,아직도 싸울 힘이 남아 있었나? 이제 약속을 지키시지? 넌 나에게 체포되는 거야.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진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인가?"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네 놈이다. 난 분명히 10명을 달고 오라고 했다. 10명!"  
"왜 그래? 내가 네 놈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것 같은가? 난 네가 전화를 걸어온 순간부터 네 녀석을 요절 낼 생각을 했다. 그걸 알아야 해. 지금 까지는 증거불충분으로 네 놈을 놓친 적이 많지만 말야. 오늘은 놓치지 않겠다. 아니,오늘은 법조문을 동원할 생각이 없어!"  
"착각하지 마!"  
소리와 함께 광섭의 독사같은 몸이 급류에서 솟아올랐다.  
터엉—–   하지만 곤베이는 귀신이었고,광섭은 역부족이었다. 곤베이는 상채를 옆으로 이동시키며 파죽지세로 떨어지는 진광섭의 죽도를 자신의 죽도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 뒤 곤베이의 스트레이트성 어퍼 컷.  
어퍼 컷은 또 다시 광섭의 턱에 작렬했다. 광섭은 첨벙,소리를 내며 수면으로 굴러 떨어졌다.  
"칙쇼! 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여긴 내 홈그라운드야! 한반도가 아니라 대일본국 땅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 홈그라운드에서 네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내 귀중한 헬기를 3대나 말아먹었어! 내 얼굴에 똥칠을 했단 말이다!!"  
"입 닥쳐! 너라면 해커 한 놈이 나라 살림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가만히 참고 구경하겠나? 법이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난 한국인이라는 것을 명심해! 내가 너 따위 나라의 법을 준수할 것 같은가!!"  
"칙쇼! 칙쇼!! 칙쇼!!!"  
곤베이는 무섭게 죽도를 휘두렀다. 그것은 진광섭의 어깨와 허리와 팔을 무지게처럼 가격해 나갔다. 불을 보듯 훤했다. 광섭은 곤베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 곤베이. 항상 무표정하고,항상 조용하게만 보이는 이 사내는 실상 무서운 놈이었던 것이다.   
탕—–!   
총소리가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상운이 총 한발을 쏘았고,3명의 기관원이 이상운을 따라 계곡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상운이…총을 쏘지 말라고 했잖아. 총을…!"  
진광섭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상운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앞쪽에서는 곤베이가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냥 위협사격 였습니다. 안 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상운은 곤베이의 눈치를 보다가 진광섭을 부추겨 안았다. 광섭은 싸늘하게 말을 내 뱉고 있었다.  
"빌어먹을…녀석은 정보국 소속이란 말야. 등 뒤에서야 머리에 칼을 찍어도 되지만 눈앞에서는 어떤 짓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모르나? 넌?"  
곤베이는 잔인하게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젠 끝났군. 자네들이 일본 정보국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것이 검증이 되었네. 이건 명확한 일이다. 너희들을 지금 이순간 모두 체포하겠다. 꼼짝하지 마!"  
광섭의 음성이 들렸다.  
"이건 실수야,곤베이. 눈감아 주게."  
"입 닥쳐! 다시 반복하지만 내 명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 꼼짝 말고 손들어. 한국인들!"  
사태가 이렇게 변하자 진광섭도 은근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이 친구야…황소도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를 밟는 법이야. 우리가 무슨 감정이 있다고 일본 정보원에게 총을 쏘겠나? 앙?"  
그는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몸을 돌려 내려왔던 기슭으로 향했다. 지금 까지 피를 흘리며 당했던 것이 모두 연기였다는 듯이.  
빡가야로…!!!   곤베이는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건너편 기슭으로 올라가는 광섭 일행을 지켜보았다. 놓칠 수 없었다. 몇 번을 잡아 처넣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적당한 구실이 없어 진광섭 팀을 체포하지 못하던 차였다. 그는 서편 절벽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런 뒤 햇빛을 반사하는 급류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그의 손은 무전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모두 송환해! 건너편 언덕에 있는 진광섭 팀을 모두 체포 송환하란 말이다!"  
동시에 곤베이의 등 뒤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 안에서 대기중인 레인저 부대원들이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움직임은 서쪽 기슭 뿐 아니라 동쪽 절벽에 있는 숲 속에서도 벌어졌다. 곧이어,난데없는 육박전이 양국 정보원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번에는 곤베이 측에서 위협사격을 해왔다. 총 소리가 다시 산자락에 울려 퍼지자 광섭 일행은 디귿 자 형으로 주차를 시킨 자신들의 자동차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곧이어 자동차에 요란하게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여긴 불바다입니다!"  
광섭은 자동차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임달영 차장의 음성이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뭐야?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이 놈아!"  
"형님,큰일났습니다. 곤베이 저 새끼가 글쎄 UN 다국적군을 끌고 온 모양 입니다. 제발 약속하신 구멍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이런 멍청한 자식…"  
임달영은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멍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한국에 있는데,일본에 있는 진광섭이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곤베이를 유인하라고 했지만 왠지 얼굴이 후끈거리고 화가 났다.  
"저 여기서 죽습니다! 약속하신 지원사격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아침에 김준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방법으로 저를 도와달란 말입니다!!"  
임달영은 수화기에서 튀어나오는 진광섭의 음성을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살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경할 것은 다 하겠다는 것이 진광섭의 속셈인 것 같아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래.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임달영은 이제부터가 최고의 첩보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테크 첩보전. 이런 걸 경험하기 위해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다.  
달영은 이마에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확보한 자위대 병기는 무엇이 있는가?"  
"다연장 로켓 시스템(MLRS) 12문와 나이키 미사일 22기,203mm 자주포 등이 있습니다만,다연장 로켓 시스템과 나이키 미사일만이 원거리에서 해킹이 가능합니다."  
"사고사로 위장할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하기야 당신들은 안기부 최정예 전산요원들이지. 좋소. 방위청 라인으로 침투해 들어갈 때는 <HAS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마에다가 김준의 아이디를 도용했듯 우리는 마에다의 아이디를 도용해서 방위청에 접속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포격 지역은 곧 일본에서 선정해 줄 것이요. 그럼 그 위치를 찾아서 포격을 개시하시오."  
"알겠습니다."  
곧바로 국방부 전산센터의 모니터는 일본 방위청 전산망을 화면에 담았다. 이윽고 누군가에 의해 마에다의 아이디인 <HASA>가 타이핑되었다. 그러자 방위청 전산망은 곧바로 열렸고,3초 뒤에는 타칸이나 레이저 추적,열추적 등의 레이더망이 화면에 떠올랐다. 한국산 병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어가 컴퓨터 화면에서 빠르게 스크롤되고 있었다.  
"설명합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화면은 일본 방위청의 레이더망입니다. 그리고 우측 화면은 나고야 시가지와 이누야마 지역의 니혼라인의 급류를 인공위성으로 잡은 겁니다. 이 화면은 인공위성 단자를 이용해 입수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진지하면서도 들 떠 있었다.  
진지한 것은 진광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급류를 건너오는 레인저 대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쪽 기관원중 몇 명이 그들과 엉켜 붙은 채 싸우고 있었는데 결코 밀리는 구석이 아니었다. 광섭은 희열을 느끼며 그들에게 외쳤다.  
"후퇴해! 아까 작전대로 뒤로 물러난다. 곧 포격이 있을 것이다,포격!"  
그렇게 외친 뒤 광섭은 시선을 건너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쪽으로 옮겼다. 30여명의 레인저 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섭은 식은 땀이 흘렀다. 자칫하다간 부하들이 모두 개밥 신세로 전락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불쑥 북서쪽 숲 아래쪽 간선도로에서 파제로 자동차가 총알같이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진광섭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신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임소봉였다.  
광섭은 임소봉의 말을 들으며 슬적 건너면 기슭으로 시선을 옮겼다. 곤베이가 서 있는 서편 절벽 위에서 헬기 한대가 막 착륙을 하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등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이상운의 음성이 들렸다.  
"과장님,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그냥 도망갑시다. 여기서 우물대다간…"  
"아냐!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라는 것을 모르나? 그러나 저러나 저 영감탱이, 윤춘해는 어쩌다가 이곳까지 다시 굴러 온 거야. 앙?"  
파제로 자동차는 숲 길을 따라 날카롭게 달려 나오고 있었다. 총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광섭은 파제로의 움직임을 쳐다보다 말고 자동차 사이에서 몸을 빠르게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파제로를 운전하고 있는 노태우에게 등 뒤로 꺼지라는 손짓을 빠르게 했다. 그런 뒤 잽싸게 몸을 굴리면서 급류가 흐르는 개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바로 좌측 급류 아래로 바위가 있는 것이 보였다. 광섭은 번개같이 바위 밑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상운은 진광섭을 엄호하며 뒤따라 달려나오고 있었는데,기다렸다는 듯이 총소리가 진광섭과 이상운을 쫓아온다.  
바위 밑에서 적당한 엄호물을 찾아 몸을 감춘 뒤 광섭은 급류의 건너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리다이얼 스위치를 눌렀고 다른 한손은 절박할 정도로 빠르게 지갑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갑 안에는 각도기가 들어 있었다. 그는 각도기로 태양의 각도를 잰 뒤 손목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손목시계의 디지털 감응기는 이미 이곳 방위를 자동으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런 진광섭의 행동을 이상운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뭡니까? 정말 임달영 차장님이 우릴 도와준 데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120mm 대포라도 쏘아 주겠다는 겁니까?"  
"한국이 아냐!"  
광섭은 빠르게 지껄인 뒤,오랜지 색을 가진 리모콘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그런 뒤 스위치를 누르자 곧이어 리모콘에서 삑삑 거리는 발신음이 들려 나왔다. 분명 스테이션 호텔 서편 별관 지붕에 감추어 두었던 레이저유도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광섭은 식은 땀을 흘렸다. 이젠 한방이면 상황이 종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한국에 있는 임달영 차장을 다시 호출했다.  
"반응이 왔습니다!"  
전산요원 하나가 급하게 일어서며 외쳤다. 곧바로 30대의 모니터 화면은 인공위성이 잡은 이누야마 지역의 니혼라인 급류지역을 크로즈업했다.  
"붉은 점을 주시해 주십시오. 아마 저것이 스테이션 호텔인것 같습니다. 레이저유도장치인데,모든 게 100퍼센트 정상입니다."  
묘한 흥분이 흐르고 있었다.  
"사고사로 위장해야 합니다. 포격은 1회. 3대의 다연장포와 2기의 나이키 미사일이 동원되지만 나이키 미사일은 위장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 기관원이 있다고 하니까 포격은 단 1회로 끝내야 합니다."  
중앙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전산요원이 입을 열었다.  
"사인 내려주십시오. 차장님."  
달영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해주시오. 내가 사인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분들도 알 것이오. 그저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그럼 모든 작업을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작업을 끝낸 뒤에는 반드시 바이러스를 뿌리고 탈출해야 합니다. 자,그럼 15초 뒤에 출발합시다!"  
발빠른 해킹이었다. 어떤 전산요원은 후지쯔 레이더만 5년동안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일본제 군수물자에 설치된 컴퓨터 레이더망을 역분해하는 작업으로 3년을 허송세월 보내듯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들이 30분전에 김준이 만들어 놓은 루트를 따라  3대의 다연장포와 2기의 나이키 미사일 컴퓨터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곧이어 OK 사인이 컴퓨터 화면에서 떠올랐다.  
"접근했습니다!"  
안기부 최정예 전산팀만이 구사할수 있는 난해하고도 눈부신 하이테크 해킹. 지금부터는 30명의 전산요원들이 각자 전담지역에서 개인전을 하기 시작했다. 몇은 역추적해오는 일본 전산팀을 다른 쪽으로 유인을 했고,몇은 인스턴스식 바이러스를 뿌리기 시작했고,그중 가장 뛰어난 몇은 곧장 일본 츄부지방에서 훈련중인 육상자위대의 전산망을 리모트로 제어했다.  
그리고 다시 15 초 뒤.   
퍼엉——   
츄부지방에 있는 육상자위대 마이즈루 경비구 합동 훈련장은 난데없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 8군 트럭에 장착된 나이키 미사일이 갑자기 태양을 향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모두 2기였다. 그리고,그것이 날아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육상자위대의 다연장 트럭에서 로켓 탄두가 요란하게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낮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참극이었기에, 텐트 안에서 식사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은 모두 혼비백산이 되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팍팍팍팍팍————-   
곤베이는 헬기에 올라타려다 말고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다연장  로켓탄의 소리를 들었다. 곤베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다연장로켓의  자탄들이 요란하게 스테이션 호텔 지붕에 처박히고 있었다.   
콰앙——————————————–!!!   
엄청난 불덩이였다. 2천도는 될 것 같은 폭염이 한꺼번에 스테이션 호텔에서 터져 나왔고,삽시간에 뒤쪽 숲은 불바다로 변했다. 나무가 쓰려져 내렸고,레인저 대원들의 시체가 하늘로 떠올랐다.  
"뭐야? 저건 다연장 로켓탄이 아닌가?"  
곤베이는 폭염을 팔로 가리며 외쳤다. 붉어진 얼굴로 헬기 조종사가 대답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츄부지방에서 날아온 겁니다. 방금 육상자위대 훈련중에 다연장 로켓이 오발을 했다고 합니다! 오발이래요!"  
곤베이는 조종사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하늘로 고개를 바짝 처 들었다. 또 다시 같은 방향에서 같은 장소로 다연장 로켓탄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미친 자식들! 저건 오발이 아니다! 저건 레인저 대원들을 노리고 쏘아대는 것이란 말이다!"  
얼굴이 뜨거웠다. 곤베이는 좌측 숲이 흔들리자 급하게 자신의 몸을 굴렸다. 이번에는 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려 왔다.  
곤베이는 엎어져 있는 상태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믿을수 없었다. 나고야 현에서 북동쪽으로 120Km 전방에 있는 산자락에서 날아온 다연장 로켓이라고 한다. 그 미사일이 니혼라인의 서편 절벽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을 눈부시게 포격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 왔고,계곡 하나가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빡가야로! 너,진광섭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광섭이 저 놈이… 놈이 계획적으로 한방 먹인 것이 분명했다.  
이젠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곤베이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스테이션 호텔 사방에서 처참하게 뒹굴고 있는 레인저 대원들을 향해 뛰어 갔다. 호텔 뒤편 숲 속에서 번진 화염은 이제 우측과 좌측 숲을 먹어 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모른다. 곤베이가 숲 가까이 접근했을때 이번에는 숲 안쪽에서 북한 사투리가 들려 왔다.  
"동무들 뭐하나? 남조선 동무들을 도와 사정없이 깨부시라우!!"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북조선의 통일전선부 친구들까지 숲 속에서 매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총소리가 울리자,곤베이는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다시 헬기를 향해 뛰어갔다. 이번에는 다연장 로켓이 급류 표면을 무차별하게 두들기는 것이 보였다. 눈이 부시다 못해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한편. 계곡 반대편 도로에서 노태우는 파제로의 브레이크를 잡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계곡 이쪽으로 진광섭과 이상운이 올라오는 게 보였는데 난데없이 계곡 건너편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 왔던 것이다. 태우와 춘해는 서둘러 파제로에서 뛰어 내렸다. 뒤따라서 김준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넋 빼지 말고 빨리 도망가! 한시바삐 이 불바다를 빠져나가야 한다!"  
"북한 친구들은 뭡니까? 오다가 보니까 통일전선부 애들까지 숲 속에 있던데요?"  
"이 밥통아! 이럴때는 길림성 조선족도 딩가딩가 한 핏줄이라는 것을 모르나? 북한이 쥬라기 공원이라고 하지만 이럴 때 친구요 동료요 자매란 말이다! 뒤처리는 저 친구들이 해줄 테니 우린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 빨리!"  
광섭은 그렇게 말을 하다가 김준을 바라보았다. 김준과는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광섭은 어디서 여유가 생겼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김준의 오른손에는 노트북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악수를 할 수 없구먼? 당신을 직접 만나니 기쁘오. 내가 진광섭이요. 질기기는 나이롱빤스보다 더 질기다고 소문이 난 안기부내 일본통이오만, 당신 때문에 나 솔직히 고생 많이 했지…"  
"대단하군요. 지금 이 광경은 서울에서 미사일을 해킹한 것이 아닙니까?"  
"뭘 놀라시오? 임달영 차장 말에 의하면 모두 당신이 힌트를 준 것이라는데. 어쨌든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보시다시피 곤베이는 엿을 먹고 있소."  
그렇게 말을 한 뒤,진광섭은 준의 어깨를 잡았다. 준은 마지못해서 광섭을 따라 파제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김준이 무의식중에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서편 절벽 위에 서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스테이션 호텔 앞쪽에 있는 언덕.  
그곳에 서있는 여자는 사뇨 사유리였다.  
준은 번개에라도 맞은 듯 그대로 얼굴 표정이 굳어 버렸다.  
분명 사유리였다.  
확인을 시키듯 급류를 타고 그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김짱,걱정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꼭 편지하세요. 전 정말 김짱 편지를 기다릴 거에요…"  
사유리의 음성은 진광섭과 이상운을 포함 윤춘해에게도 들렸는데,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진광섭이었다.  
"뭐야 저건? 어떻게 된거야? 저 기집애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앙?"  
이미 김준은 급류 쪽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헬기의 핸드 마이크 소리가 귀가 터지게 들려 왔다.  
"사유리를 살리고 싶은가? 살리고 싶다면 김준은 이쪽으로 와라. 이쪽으로 오란 말이다!"  
곤베이의 음성이었다. 곤베이는 헬기 옆에 서 있는 상태에서 핸드 마이크를 빼 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지 마시오! 가면 죽는단 말이요!"  
춘해가 흥분된 얼굴로 앞으로 뛰어 나가려 하자 진광섭이가 춘해를 제지했다.  
"춘해씨. 움직이지 마시오. 죽는 건 김준이 아니라 춘해씨란 말요!"  
"하지만…"  
광섭의 말처럼 헬기 우측으로는 두명의 저격 요원이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사유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련한 오페라의 소녀처럼 서 있고.  
그들은 자세 그대로였고,그 상태에서 곤베이는 헬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곧장 헬기는 이륙을 한 뒤 급류 중앙을 향해 날아왔다. 사유리는 아직도 절벽 위에 서 있었는데,울듯 말 듯한 그녀의 얼굴은 시커멓게 잿더미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준은 허탈했다. 그는 급류 가운데에서 멈추어 선 채 헬기가 날아오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앞으로 전진할 방법이 없었고,뒤로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다시 사유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이젠 바로 앞 허공에 떠 있는 헬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두명의 저격요원은 아직도 그 절벽 위에서 김준을 향해 저격총을 겨눈 상태였다.  
"사다리에 매달려! 도망갈 생각 말고 사다리를 내려 주면 잡아타고 기어오란 말이다! 알겠나?"  
소리와 함께 헬기에서 사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사다리는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헬기를 쫓아서 준의 얼굴 주위를 돌았다.  
이때 진광섭은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춘해가 식은 땀을 흘리며 광섭을 응시했다.  
광섭으로써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곤베이가 김준을 이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김준이 사다리에 올라타면 총을 쏘아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마음의 결정이 나지 않았다.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로써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김준의 신병이 곤베이 측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수 있었다. 진광섭은 권총을 손에 든 채 무표정한 눈으로 김준을 응시했다.  
아니 그럴수는 없었다. 광섭은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김준이 사다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 권총을 포켓안으로 집어 넣었다.  
순간 연거푸 두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건너편 절벽 위에 있는 저격요원의 어깨에서 급류를 치듯 핏방울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30미터나 떨어져있는 이쪽 언덕에서도 똑똑히 식별이 되었다.  
"됐다! 임소봉이다. 임소봉이가 저격병을 잡았다!"  
광섭은 주먹을 불끈 처 들더니,선글라스를 벗어 젖히고 급류로 뛰어 내려갔다. 숲 사방이 불타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계곡 아래쪽은 연기가 자욱했다.  
그 연기를 뚫고,수상비행정 CL-415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산불이나,연안초계 등의 임무로 개발된 CL-415 수륙 양용기의 장점은 6피드 이하의 낮은 수면에서도 착륙이 가능하다는 점인데,이 수상 비행정이 굉음을 토하며 급류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착륙을 하고 있었다.  
광섭은 별안간 벌어진 광경이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 앞에서 날카롭게 물살을 가르며 착륙하는 것은 분명히 수상비행정이었고, 곤베이를 태운 헬기는 갑자기 나타난 수상비행정 때문에 중심을 잃고 있었다. 광섭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는 정신없이 외쳤다.  
"무엇들 하나? 급류로 뛰어가서 김준을 보호해! 보호하란 말이다!"  
진광섭이 호통을 치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사방에서 기관원들이 급류로 뛰어내려 왔다. 마찬가지로 계곡 건너편에서 다람쥐처럼 급류를 건너오는 레인저 대원들의 모습도 보였고,북조선에서 보낸 통일전선부 애들도 보였다. 다시 그들 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모든 것은 난데없는 일이었다. 통일전선부 요원까지 온 것은 이날 오후 1시에 있었던 핫라인 통화에서 비롯되었다. 임달영은 1시 정각에 북한의 윤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뒤 일본 별반의 계획과 그 증거물을 윤철에게 팩스로 날렸던 것이다.  
준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온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헬기에서 떨어져 내린 사다리를 올려다보다가 사방에서 뒹굴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을 보았다. 사다리는 힘차게 춤을 추고 있었는데,사내들 역시 춤을 추고 있었다.  
준의 시야로 반대편 절벽 위에 서있는 김영진과 임소봉의 모습이 보인것은 그로부터 1분 뒤였다. 그는 임소봉과 김영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 두 남자 사이에 서있는 사유리를 봤다. 그는 그쪽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그렇다. 김준의 생각은 사유리를 우선 살려두고 보자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불안당 같은 상황…사유리가 나디아처럼 죽어 가는 것을 그는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김준의 마음을 방해한 것은 마끼의 스테인리스 같은 음성이었다.  
"이곳은 정말 대단하군요! 비행정에 올라타도록 해요.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나까지 위험하겠어요…"  
수상 비행정 문이 열리더니 마끼가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위험하니 당장 자신의 수상비행정으로 이곳을 탈출하자는 눈빛이었다.  
준은 묘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끼를 응시했다. 마끼는 차분한 아이보리색 컬러의 니트 폴오버에 롱베스트를 걸치고 있었는데,아마도 김준이 지금까지 본 여자중에서 가장 세련된 옷차림였을 것이다.  
준은 마비되었다.  
그는 노트북을 우측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언덕 편에 붙어 있는 진광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고,그의 손은 정신없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준은 슬며시 웃었다.  
별안간 무엇인가가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누가 하사 마에다를 조종했고,지하철 해커를 조종했는지 그 배후를 알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끼다…  
배후에 있는 인물은 구보 마끼 준사히-바로 지금 내 눈 앞에 당당히 서있는 바로 저 여자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내 비행정에 올라타라고 했다! 어서!"  
다시 스테인리스같은 마끼의 음성이 준에게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새 권총을 빼들고 김준을 겨누고 있었다.  
권총을 보자 준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상비행정 위에서 맴돌고 있는 곤베이의 헬기를 올려다보다가,수상비행정의 옆구리로 몸을 이동해 갔다. 마끼의 수상비행정은 이미 이륙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그가 막 수상비행정의 날개에 올라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수상비행정의 엔진소리를 뚫고 사뇨 사유리의 비명이 요란하게 들려 왔다.  
"나도 갈거야! 나도 저 비행정에 타고 싶어 미치겠단 말야. 씽~!"  
준은 고개를 돌렸다.  
사뇨 사유리.  
그녀가 서편절벽 위에서 수면을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수가 나쁘게도 사유리가 다이빙을 한 장소는 이 근처에서는 볼 수가 없는 가장 물살이 쌘 지역이었다.  
어쩔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수상비행정 쪽에서,김준이 사유리를 구출하기 위해 날카롭게 다이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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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란조는 우측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산자락을 쳐다보며 에스파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고야까지는 30Km 남짓 거리가 남아 있었다. 란조는 궁금했다. 산불이 일어난 이유도 궁금했고,10분전에 있었던 포격 소리도 궁금했다.  
그녀는 운전을 하다 말고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사 마에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란조가 다시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을 때는 숲이 열리면서 니혼라인의 급류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 급류 중앙에는 수상비행정과, 헬기와,사내들이 개미떼처럼 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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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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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뭐야!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곤베이는 헬기 안에서 급류를 내려다보았다. 헬기는 수상 비행정이 착수를 하면서 생겨난 바람 때문에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매캐하고도 이상한 냄새까지 수상 비행정에서 올라온다.
"연막탄입니다! 비행정에서 연막탄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시끄럽다! 저건 봄바디사의 CL-415다. 누가 빨리 비행정의 소유자를 확인해 봐! 그리고 너희들은…"
곤베이는 눈알을 부릅뜨고 급류 지역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개미떼처럼 엉켜 있는 안기부 요원들이 레인저 팀을 뚫고 빠르게 후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레인저! 뭐하나. 쥐구멍을 틀어막고,나머지는 비행정으로 접근하란 말야!"
이번에는 비행정에서 붉은 색 연막과 푸른색 연막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곤베이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곤베이는 권총을 꺼내 들고,연막탄 아래로 보이는 비행정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지만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비행정의 꼬리 날개가 그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육좌님,이쪽입니다. 이쪽!"
곤베이는 목소리를 듣고 캐빈 반대편 창으로 뛰어갔다. 헬기 아래로 비행정의 발판이 내려다 보였는데,사내 하나가 사유리를 잡아 올리고 있었다. 김준은 발판 우측 아래에 있었다.
빙고…
곤베이는 총구를 정확하게 김준을 향해 겨누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헬기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이런 제기랄!"
곤베이는 딸깍이며 떨어진 최루탄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눈두덩이가 부어오를 정도로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품어져 나온다. 염화피크린였다.
"너 이 개 자식! 너 진광섭이–!"
곤베이는 눈알이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이도 저도 하지를 못했다.
그저 권총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급하게 최루탄을 헬기 밖으로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CL-415 수상 비행정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막탄과 산림을 불태운 연기가 적당하게 구름 층을 형성하면서 비행정의 움직임을 차폐하고 있었는데,비행정의 프로펠러가 서서히 마력을 높여가자 이번에는 연기층이 무섭게 소용돌이를 긋기 시작했다.
빨랐다. 좌우 프로펠러가 돌아가자,기체는 수면을 박차며 앞으로 전진을 했다. 동시에 계곡 가운데를 장악한 연기는 비행정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갈라졌다가 합치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레인저 대원들도 마찬가지었다. 그들은 달려오는 수상 비행정을 피하느라 물결처럼 갈라져갔다.
동시에,연거푸 총소리가 들려 왔지만 수상 비행정의 육중한 동체는 날새게 급류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남,남쪽이다! 히로세 전산실장은 내 말 듣고 있나? 앙?"
이미 비행정은 푸른 하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곤베이는 잡아먹을 듯 수상 비행정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 물었다.
널 잡겠다. 김준…항공자위대를 동원해서라도 네 놈을 잡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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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실 안에 설치된 콜린즈사의 프로라인 4 항공전자장비가 시끄럽게 곤베이의 음성을 토한다. 교신은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곤베이가 찾았던 히로세 전산실장은 지금 하늘을 날아가는 사브 2000 제트기 내부의 조종실에 서 있었다.
레이더의 점이 불길했다. 이번에는 동쪽에서 붉은 점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러다가,레이더 화면의 절반이 붉은 점으로 가득 차자 히로세는 떨리는 손으로 교신기를 들었다.
"곤란합니다,육좌님. 지금 그 방향은 항공자위대의 훈련 지역입니다!"
"명령 불복종인가? 항공자위대엔 내가 연락을 할 테니까 넌 놈을 쫓아!"
"하,하지만…"
"반복하지만 CL-415는 수상 비행정이다! 수면을 따라 저공비행을 하면 레이더로는 쫓을 수 없으니까 반드시 네가 놈을 확보해야 한다! 곧 지원기를 투입하겠단 말이다!"
히로세는 고개를 절대 절래 흔들었다. 기체가 크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신기를 손에 든 채 식은 땀을 닦았다.
"지시대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찾는 즉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뒤 히로세 전산실장은 기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재 비행 속도는 220노트. 기장이 조종간을 당기자,사브 터보프롭기는 1만8천 피트 상공에서 남서쪽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부터 기체 아래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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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분정도 뒤였다. 사유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티크 무늬의 가구가 놓여 있는 밀실 안에 누워 있었다. 수상 비행정 안이었다. 바람이 기체의 표면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사유리는 팅팅 부은 눈을 한 채 반쯤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는데,콜록 이며 기침까지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 가에서 마끼의 음성이 들렸다.
"오키나와의 아버지 별장으로 가라고 해! 연료는 충분하다고 들었다."
인터폰에서 들려 왔다. 사유리는 멍한 상태에서 인터폰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밀실 안에는 사유리 외에도 집사가 있었다. 집사,늙어 보였지만 사무라이처럼 싸늘하게 생긴 그가 객실 의자에서 일어서며 사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사유리 양.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이오. 조종실에 다녀오리다."
사유리는 물끄러미 집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일어날 생각도 없었고, 집사를 때려눕힐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쳐 있었고,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무턱대고 급류로 뛰어 들었을 때, 사유리는 수렁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준이 나타났었다.
꿈이던가…
사유리는 히프를 양탄자에 붙인 상태에서,두 무릎을 안았다. 그런 뒤 무릎팍에 얼굴을 붙인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보니 꿈은 아니었나 봐…
어디에 있는 거징…
김준은 사유리가 앉아 있는 객실로부터 4칸이 떨어져 있는 메인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쪽 눈은 넥타이로 감겨져 있었는데,팔은 의자 뒤로 돌려진 채 수갑으로 채워져 있다.
"인상적이에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군."
마끼는 바스락거리며 라운지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이 게임을 끝내고 싶었어. 이 이상 복잡해지면 나 자신마저 혼란을 느꼈을 테지."
준은 마끼의 음성을 쫓아 얼굴을 움직였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정확하게 마끼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 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마지막이 힘들었어. 난 네 녀석이 일본 밖으로 탈출하는 줄 알았으니까."
"이유가 무엇이오? 날 함정에 넣은 이유를 알고 싶소만."
"아직도 모르나? 난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몰랐소. 당신의 연기는 아주 훌륭했으니까."
"연기가 아니었어. 나에겐 당신 사진도 없었고,이름도 없었으니까. 고작 해야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당신 아이디…울프라는 아이디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 밖에 없었지."
"증권 때문이오?"
마끼는 수축이 되었다. 그녀는 걸어오다 말고 빙그르 몸을 돌려 우측으로 걸어갔다. 탬블러 컵이 놓여 있었다. 나무무늬가 살아 있는 목제테이블 위에.
그녀는 탬블러 컵에다 빨대를 꽂았다.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맞아. 증권 때문이었어.
일본강관(NKK)의 주식이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 965포인트나 떨어져 있었지. 닛케이 지수는 평균 200 포인트가 상승을 했는데도 말야. 어이가 없었지만,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
"얼마나 손해가 발생한 거요? 20억엔? 아니면 30억엔?"
마끼는 창백했다. 그녀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340억엔 이야. 내 아버지와 나는 일본강관의 지배주주 자리를 놓고 무리한 매입을 하고 있었으니까 예상 밖으로 큰 손해가 발생했던 게지."
6개월 전이었다. 준은 95년 가을에 자신이 했던 작업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말레이지아의 국유 제철플랜트 공사권을 수주하기 위해 일본강관의 입찰가격을 체크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서너 가지가 더 있었는데…
"기억나는군. 제일 중공업이 수주를 하는 바람에 우량주가 곤두박질을 쳤지. 그러다가 뉴욕의 합병 전문가들까지 나타나 일본강관을 해체 매입하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
"넌 실수를 한 거야. 그건 내 아버지 최고의 사업이었어. 우에노의 빌딩을 팔았고 하코네의 온천단지,훗가이도의 스키장까지 팔아가며 준비를 했는데 네 놈이 끼여든 거야. 게다가 끝장을 보려고 했는지 합병전문가까지 투입을 했어. 깨끗했어. 너무나 깨끗해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지."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언제였지?"
"금년 1월 초. 난 자살을 하려고 했어. 아버지의 부동산업은 이미 나에게 절반 이상이 넘어왔지만 쓰레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지. 그 분이 불쌍하더군. 무남독녀 외동딸인 난 색광에다가 레즈비언 사이를 왕복했는데 투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무능아였어."
1월 4일에 있었던 파티였다. 마끼의 아버지 구보는 후지산 별장에서 정치계 거물들을 모아 놓고 파티를 했다. 그날,방위청 거물중 하나인 구보의 친구가 마끼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다. 울프. 방위청 비밀에 접근한 해커인데,조사를 해보니 일본강관 증권을 교묘하게 조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말하더군. 울프를 용광로 안에 처넣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귀가 솔깃했지. 난 자청을 했고,그의 부하인 마에다를 소개받았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소…"
"마에다는 이미 가나기원에서 너를 감시하고 있었어. 하지만 나에겐 이야기를 하지 않더군. 지휘 계통도 혼란스러웠지. 방위청의 그 분이 너를 한방에 날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난 애걸하다시피 하소연을 해야 했지.
내가 울프를 잡아 보겠다고 했으니까."
"미사일은 어쩌다 관련이 된 거지?"
"그 문제는 나와 관련이 없었어. 난 미사일을 쏘아 올리겠다기에 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 이쯤 되니 심각하더군. 난 마에다에게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회피했어. 고작해야 하숙집에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기자가 있다는 사실만 알아 냈지."
"교묘한 방법이군…"
마끼의 계획은 교묘하다 못해 절묘했다. 마에다가 김준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자,마끼는 김준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기로 했다. 우선은 함정이 필요했다. 그 점은 마끼와 별반의 음모가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마끼는 유언장을 만든 뒤 제일중공업의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를 디스켓에 차용했다.
그 후 자살을 가장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다음부터는 마끼의 집사가 떠맡아서 조작을 했다. 요트가 폭발을 하자 집사는 마끼의 대용품인 시체를 요트 잔해 속에 던져 놓고,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마에다는 당황을 했다. 그는 통신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거리를 방황했고,그 틈을 노려 집사는 마에다의 컴퓨터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미,게이꼬의 사진은 있었으니까,집사는 준의 사진을 재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사진이 입수되자,집사는 게이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옆 방에 있는 마에다라는 청년에게 마끼의 유서가 있으니 한번 기사화 해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게이꼬가 마끼의 유서를 요구하자,마에다는 당황했다. 그는 게이꼬가 마끼의 디스켓에 대해 아는 것이 이상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끼 자신이 그에게 유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하철 해커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고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텐데? 아니,난 미국에 있었으니까 집사가 대신 작업을 했지…"
"그러다가 일이 너무 커진 것인가?"
"재대로 파악을 하고 있군. 마에다는 내가 콘트롤할수 있는 상태가 아냐. 더구나 중간에 다른 해커가 끼어 든 인상이 짙었지. 큰일났다 싶었어. 난 단지 돈을 복구하고 싶었는데 말야,실제로 미사일까지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황당하더군. 어쨌거나,난 마침내 내 돈을 찾을 기회를 만들었어. 난 네 놈을 다시 찾았으니까."
마끼는 준을 향해 걸어왔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얼굴 표정은 창백했다.
"기회를 주겠어. 어떤 식이었는지 모르지만 난 네 녀석이 증권을 조작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 물론 내가 이익을 얻는 한도에서 작업을 해야 해."
준은 마끼의 음성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천정을 향해 얼굴을 멍히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마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난 스미모토 금속을 원해. NEC나 후지쓰도 나쁘지는 않아. 몇 포인트까지 가격을 떨어뜨릴 수가 있지? 가격을 올리는 것도 좋아. 난 현재도 1천억 엔까지는 현금을 동원할 수 있으니까."
준은 천정을 향해 얼굴을 고정한 채,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넥타이로 감겨져 있었는데,얼굴은 10년쯤 늙어 보였다.
"내가 거절한다면? 아니 난 증권 조작을 하지 못해. 그건 너무 위험해."
"사유리의 생명을 걸면 어떨까? 한가지 더 있군. 마에다를 내가 잡아 주지. 그는 미친 놈이야.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자신하지."
준은 비쩍 웃었다.
"마에다는 우리도 잡을 수 있어."
"무슨 뜻이야?"
"마에다는 오후에 죽게 되어 있지."
"믿을 수 없는데?"
준은 창백하게 웃었다.
"대한민국 안기부는 깡통이 아냐. 이미 마에다를 잡기 위해 5명의 지하철 해커를 고용했어. 잠시 뒤면 소식이 있겠지."
마끼는 깜짝 놀란 듯 준을 응시했다. 템블러 컵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그건 곤란해. 마에다는 이미 마지막 작업을 끝냈어. 그러니까 그가 죽으면…"
마끼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는 상관없겠군. 어쨌든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은 정해진 것 같으니까. 자 이제 네가 선택해. 나를 도와준다면,난 너에게 마에다의 전화번호를 넘겨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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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의 수상 비행정을 찾을 수 없답니다!"
이상운이 외치자 진광섭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비행정에 올라탔을까.
"알았어. 곧 연락이 오겠지. 이젠 그 친구에게 모든 걸 맞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군."
파제로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준비를 했는지 운전중이던 윤춘해가 경관등을 운전석 앞 본네트에 올려놓고 삐까삐까 사이렌까지 울려 대고 있었다.
진광섭은 윤춘해의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은 기관원들로 북새통이었는데,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상운이 크게 외쳤다.
"과장님. 황영달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놈이 그놈이래요. 하야시. 놈이 게이꼬를 살해한 지하철 해커라고 합니다!"
"확실한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은행 구좌를 추적한 결과가 나왔는데…돈은 모모아라는 자가 보냈습니다. 바로 마끼 준사히의 집사입니다."
"뭐??"
"잡읍시다! 히트맨을 수배하고 있습니다. 월남치마를 동원할까요 아님 개구리 참외를 동원할깝쇼?"
진광섭은 전방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우두둑 꺾었다. 그제야 김준이 마끼의 수상 비행정에 올라 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김준이 제법 마음에 들기도 했다. 녀석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다.
"좋아! 대충 감이 잡힌 것 같군. 시작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한가지 더 있다. 임달영 차장님에게 연락해서 제주도 남부로 전투기를 발진시키라고 해. 혹시 조난신호가 있을 지 모르니까 해군 구축함도 준비해주십사 말씀 드려!"
"알겠습니다. 과장님!"
광섭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하야시를 잡고 마에다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마끼는 분명히 김준이 잡아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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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아직도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까와는 달랐다.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마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준은 마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마끼. 작년에 했던 내 작업은 증권 조작이 아니었소. 난 시시한 자료를 수집해 건네준 것이고,대부분은 본사 정보팀과 뉴욕의 기업 합병 전문가들이 했소. 하지만 우린 실패를 했소. 일본강관,그 놈의 덤핑귀신을 해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요."
준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난 당신 돈을 복구할 능력이 없소. 설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당신이 지금 한 말은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이군."
그렇게 말을 한 뒤,마끼는 양탄자에 떨어진 탬블러 잔을 집어들고 준을 향해 걸어왔다. 그런 뒤,느닷없이 준의 얼굴을 향해 탬블러 잔을 휘둘렀다.
퍽 소리가 들려 왔다.
준의 얼굴은 뒤로 젖혀졌고,그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난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마에다가 살해되어도 난 상관하지 않겠어. 분명한 것은 마에다가 이미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했다는 점이야. 그걸 막을 사람은 지금 현재론 나밖에 없어. 내 제안에 동의를 하면 내가 마에다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가 있으니까 넌 선택을 해 봐."
그렇게 말을 한 뒤 마끼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준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결정해 봐. 10분 동안 생각할 여유를 줄 테니까."
준은 마끼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마끼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런 준의 얼굴에서는 슬쩍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날 죽이는 게 어때?"
"그건 내가 결정해. 네가 나에게 어느 정도로 보상을 하느냐에 따라 함량이 결정이 되지."
"마끼. 난 나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러면 후회를 할텐데?"
"정 원한다면 태평양 한가운데에 처박아 줄 수 있지. 하지만 모든 건 내 돈을 찾은 뒤의 일이야. 아니 말장난은 그만 하자. 이젠 결정을 해 보시지? 마에다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을 보고 싶은가?"
마끼는 약간 취해 있었다. 후지산 별장에서부터 그녀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준의 바로 왼쪽 편에 멈추어 섰다.
그때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김준이 오른발을 날카롭게 들어올리는 것이 마끼의 눈에 보였다. 그 다리는 마끼의 종아리를 보기 좋게 꺾고 있었다. 마끼는 종아리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너…!"
마끼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고개를 들었다. 준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준의 손목에 채워져 있어야 할 수갑이 풀어 헤쳐진 채 그의 오른손에서 대롱대롱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끼는 깜짝 놀랬다.
"어,어떻게 수갑을…?"
준은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내가 해커라는 것을 몰랐나?"
준은 그렇게 말을 하며 시야를 가리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마끼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잔뜩 수축이 되어 있다가,테이블에 놓여 있는 권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끼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권총을 집어들었다. 순간,준의 구둣발이 이번에는 마끼의 옆구리로 날아오면서 마끼의 몸은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사이에 그녀가 집은 권총이 이번에는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준은 쓰러져 있는 마끼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뒤 마끼 앞에 멈추어 선 채 입을 열었다.
"마끼.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오. 마에다가 사용하는 전화번호를 알고 싶소 만."
마끼는 이를 악물고 준을 올려다보았다. 권총은 1미터 우측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같은 질문을 두번하기 전에 먼저 설명을 해 주겠소. 한국 전산팀은 마에다가 미사일을 해킹한다면 이번엔 오키나와에 있는 미사일을 해킹한다고 추측을 하고 있었소. 남북한은 오후부터 미사일 발사 체계를 모두 옵라인으로 차단한다고 했으니까,마에다에겐 남북한 미사일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던거요. 그러니 그가 선택하는 것은 러시아제 미사일이나,중국,아니면 일본 땅에 있는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소."
"그래서?"
"마에다가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하건 중국 산둥성 미사일을 해킹하건 안기부 해커전담반의 추적이 빠르게 시작될 것이요. 그런 뒤 역핵킹 작업이 시작될 것이오. 이 작업은 어쩌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지 모르오."
"무슨 뜻이지?"
"마끼. 내가 일본의 핵미사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러니,마에다가 핵미사일을 쏘아 댈 계획이라면 한국 측은 필사적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요."
"과연 그럴까? 너희들이 과연 마에다를 막을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해. 그의 작업은 이미 끝났어. 끝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
"마끼. 아무래도 당신은 안되겠소."
"아무래도 안되겠다니?"
마끼는 당황했다. 김준은 어느새 얼굴에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준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차가웠다. 마끼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내 몸을 더럽힐 생각인가?"
"그래."
준은 차갑게 말을 내 뱉었는데,이미 그의 구둣발은 마끼의 얼굴로 날아들고 있었다.
퍽 소리와 함께 마끼의 고개는 45도 각도로 꺾여졌다. 자세 그대로, 마끼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아랫 입술에서 면도칼을 댄 듯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런 마끼를,김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비열한 자식!"
마끼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숨을 헉헉 몰아 쉬며 준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마끼는 고통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준은 그런 마끼를 벌래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현력이 나쁘군. 내 행동은 비열한 게 아니라 정당한 거야. 처음부터 수갑을 나에게 채우는 것이 아니었어. 난 수갑 푸는 방법을 본사에서 배웠지. 교육의 목적이 부정당한 것에서의 방어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내가 익힌 기술은 동물적이라고 할 수가 있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자에게 마음을 안 준다는 점이야. 그러니 가끔 내 주먹이 함부로 행동을 하곤 하지."
준은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마끼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모토롤라 핸드폰였다.
"좋은 핸드폰이군. 리다이얼 번호를 50개까지 기억하는 핸드폰이라고 알고 있는데…맞소?"
"안,안돼!"
준은 마끼가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으로 마끼의 몸을 미는 상태에서,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들었다. 마끼는 겁을 먹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사이에 준의 손가락은 핸드폰의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노트북 컴퓨터가 펼쳐졌고,노트북은 핸드폰 신호를 읽어들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암호는 3초 뒤에 노트북에서 푸른 글씨로 떠올랐다.
준은 짧게 말했다.
"별로 사용하지 않았군. 입력된 전화번호가 3개밖에 없는데 어느 것이 마에다의 전화번호지? 빨리 말해 주시오. 마에다의 컴퓨터를 찾아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말이요."
"넌 할 수 없어. 마에다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것뿐이었다. 준은 빈틈이 없었다. 마끼는 그저 멍히 준의 작업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준은 고속모뎀을 이용해 서울에 있는 안기부 전산팀에게 마끼의 핸드폰에 기억된 전화번호를 전송하고 있었다.
막 전송 작업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라운지의 티크 출입문이 별안간 열렸다.
사유리였다. 사유리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음성이 들려 왔는데,그건 집사 모모아의 음성이었다.
"이봐,한국인!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나? 마끼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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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사유리를 끌고 라운지로 들어갔을때,황영달 일행은 하야시가 투숙한 러브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광섭은 방금 임달영 차장의 연락으로 김준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기에 이들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쉽게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외국에서 첩보 활동을 한다는 것. 더구나 사람을 없애야 하는 일에 직면했을 때는 상당히 조심을 해야 했다.
"여긴 마스크 원이다. 마스크 쓰리는 듣고 있나?"
핸드폰을 타고 진광섭의 음성이 들리자 황영달은 서둘러 대답을 했다.
"진압작전 완료입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진광섭 음성.
"다시 한번 확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놈이 게이꼬를 살해한 해커인게 확실한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작업을 했으면 좋겠는 걸?"
황영달.
"이미 끝났습니다. 전산팀의 화면 도청 결과를 전송해 드릴까요? 필요하시다면 디지털 주파수로 전환해서 과장님 노트북으로 날려보내겠습니다. 놈,지금 이 시간에도 열차를 상대로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 이거 혹시 우리가 고용한 지하철 해커 아냐?"
"아닙니다. 이 친구는 나고야 역을 중심으로 열차를 해킹하고 있습니다. 굉장합니다. 나고야 역을 아예 불바다로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염병할. 대낮에 역을 불태운다고? 하여간 일본엔 별 잡놈이 다 있다니까."
"저 잡놈,제가 잡겠습니다. 아니 잡을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광섭은 입맛을 다시며 물끄러미 파제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탄 파제로 벤은 나고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10여분만 더 달리면 나고야 영사관이 준비한 다른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너희들은 모두 휴가를 간다!"
"예? 갑자기 웬 휴가입니까…?"
"곤베이가 열 받았어. 김준이 하늘로 떠 버렸으니까,이젠 너흴 잡으려고 안달을 할거다. 내 말 이해하겠나?"
"과장님은 요? 과장님은 어떡하시려고요?"
"내 밥은 내가 퍼먹는다. 난 마에다를 잡은 뒤 떠나겠다. 그게 속 편해!"
"알,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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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사유리의 머리에다 권총을 처박은 상태에서 서 있었다. 사유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아가씨에게 수건을 갖다 드려! 하인처럼 공손히 움직이란 말야!"
"아냐,필요 없어."
마끼는 양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입술 밑으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끼는 그 상태로 또각또각 걸어간 뒤에 준에게 손을 내 밀었다.
준은 쥐고 있던 권총을 마끼에게 던졌다. 똑바로 던진 것은 아니었다.
권총은 마끼의 바로 앞에서 양탄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끼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인 뒤 권총을 집었다. 늘씬한 그녀의 다리가 잠깐 보였다.
"저 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집사는 소파 뒤로 붙어 있어."
준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마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사유리는 반쯤 울먹이는 표정으로 라운지 우측에 있는 소파로 끌려가더니 소파에 주저앉듯 앉혀졌다. 다시 집사가 사유리의 이마에 권총을 겨눈다.
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춤이라도 추고 싶군. 이번에는 그쪽이 나를 잡은 것인가?…"
자세는 그대로였고,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사유리가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저번처럼 해요. 제가 김짱을 도울께요…"
사유리가 울먹이며 말을 하자 마끼가 분노하듯 외쳤다.
"저 계집애 말에는 신경 쓰지 말고 넌 어서 두 손을 들어! 내가 볼 수 있겠끔 똑똑히 들란 말야!"
준은 지시대로 두 손을 들었다. 마끼는 3미터 앞에 서 있었고,사유리는 우측으로 5미터쯤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 앞에는 테이블이 있었는데,테이블 위에는 스크류 드라이브의 재료인 보드카 병이 놓여 있었다.
"저도 할 수 있다니까요. 어서요…"
다시 울먹이는 듯한 사유리의 음성이 들려오자,준은 그제야 사유리의 속셈을 눈치챘다. 사유리는 아까부터 계속 보드카 병을 턱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준은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우선은 집사와 마끼의 시선을 잡아두는게 최선이었다. 준은 몸을 돌려 마끼를 똑바로 응시했다.
"담배를 피워도 되겠소?"
마끼는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화가 나기도 했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피고 싶으면 피워도 좋다. 하지만 허튼 수작을 하면…"
그렇게 말을 하며 마끼는 담배를 자신의 발 아래로 떨어뜨리더니,라이터 역시 발 아래로 떨어 뜨렷다. 그런 뒤 발로 처 냈다.
준은 한 손을 든 상태에서 허리를 숙이고 담배를 집어들었다.
잠시 뒤. 라이터 불이 담배로 옮겨간 후,첫 한모금이 기내 안에 퍼저갈 무렵이었다. 준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공주님. 그럼 시작해 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준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사유리가 보드카 병을 집어들더니,있는 힘을 다해 등 뒤로 돌려 쳤다.
소리는 둔탁했다. 집사는 왼팔에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마끼의 시선은 집사에게서 준을 향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준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준은 이미 1미터 앞까지 근접해 오더니,마끼의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주먹을 날려 오고 있었다.
퍽—-
해비급 복서의 주먹같은 강한 힘이 마끼의 턱에서 작열을 했다. 마끼는 휘청이며 라운지 벽에 몸을 부딪쳤다. 이때 사유리는 집사의 발 밑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었고,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끼의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고 마끼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끼는 겁을 먹었다.
"이러지 마. 이성을 찾아. 전화를 원하면 걸어 주겠어. 설마…"
그 입에 준의 구둣발이 처박혔다. 마끼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앞으로 굴렸는데,사유리는 깜짝 놀란 모양이다.
너무 심하다…저렇게 여자를 때릴 수 있을까?
이때 사유리의 눈을 피해 집사는 김준의 등 뒤를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나이프였다. 사유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준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집사의 나이프가 준의 가슴에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휘청…
준은 쓰러졌고,사유리는 지구의 종말이라도 본 듯 당황을 했다.
"움,움직이지 마! 다 죽일거야! 개미새끼까지 다 죽일거랑 말야!!"
사유리는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권총을 집사에게 겨누다가,마끼에게 겨누더니,이번에는 김준을 향해 겨누기도 했다. 정신이 없었다. 집사는 마끼를 부축하다 말고 사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측으로보니, 준이 가슴에 난 상처때문에 무릎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5초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집사는 사유리를 향해 걸어갔다.
"권총 이리 내 놔라… 그건 꼬마가 만지는 것이 아냐…!"
준은 나이프를 떨구고 있었다. 셔츠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준은 사유리를 찾았다. 집사의 모습이 먼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집사는 큰 손을 사유리를 향해 뻗은 상태에서 비열하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는데,권총 소리가 요란하게 기내 안을 가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미 집사의 골통은 반쯤 부서진 채 기내 천정에 철퍼덕 붙어 있었다.
처참했다.
제정신을 차린 마끼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울프!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마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고,피투성이었다. 그녀는 권총이 준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찾았다.
이번에는 준이 담배를 마끼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미사일은 5시 정각에 발사된다고 했어. 난 5시 정각에 나고야 역에서 마에다를 만나기로 했지. 하지만 말야. 지금 시간을 보라구. 4시 20분 이야. 어쩌면 미사일이 발사되었을지도 모르지."
"어디에 있는 미사일이지? 오키나와인가 훗가이도인가?"
"이미 늦었어. 핵미사일을 쏘아 올린다면 둘 중 하나겠지. 다이토아 3호나 어쩌면 퍼싱 투 미사일인지도 모르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군납업체에 투자를 할 때부터 그런 소문은 듣고 있었지."
마끼는 담배연기를 짙게 내 품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시체가,그녀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던 집사의 시체가 그녀의 기를 모두 빨아먹은 듯했다.
"자위대 별반 조직의 생각은 한가지밖에 없어.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재패할수 있다는 생각이지. 이 때문에 훗가이도와 오키나와에 핵미사일을 비밀리에 배치를 했는데,여차하면 러시아와 인도차이나 그리고 중국 본토를 쑥밭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야…"
"모두 알고 있었군."
"마에다는 골수분자야. 나 같은 나쁜 여자도 그의 본심을 읽을 수 없지. 그는 무슨 일이건 충분히 저지를 놈이야. 아니 일이 끝난 뒤에,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변명을 하겠지. 어쩌면 몰라. 그가 원하는 일인지도 몰라."
마끼는 피투성이었다. 그녀는 집사의 시체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내 잘못이겠지. 마에다는 내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몰랐어.
아니 어쩌면 이해를 하려고 노력 중인 지도 모르겠지만…"
"미사일이 서울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나?"
마끼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탁자로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김준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막을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나? 난 할수가 없어. 난 5시 정각에 하야시를 이용 마에다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단 말야…"
준은 서둘러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의 쿼츠시계는 충격에 의해 멈추어 있었다. 스위스산 특제 시계였는데…
준은 빠르게 핸드폰의 단추를 눌렀다.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임달영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준이 대화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유리의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해요? 제트기가 쫓아 왔어요. 김짱!"
증명이나 하듯이 라운지 창 밖으로 사브 제트기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제트기는 수상비행정의 바로 옆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제트기를 보자,마끼는 응원군이라도 만난 듯 히쭉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지? 미안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데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나 보군."
준은 물끄러미 마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글을 벗더니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그런 뒤 키보드를 두들겼다.
"사유리? 기장보고 한국 영공으로 들어가라고 해. 필요하다면 권총으로 협조를 구해 봐."
그렇게 말을 하며 준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헤밍웨이가 코로나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는 모습과 흡사했다. 나쁘게 말하면, 아돌프 히틀러가 소설을 쓰기 위해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는 모습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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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하야시 진압 작전은 신속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내 3명이 하야시가 투숙한 객실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의 총신을 객실의 열쇠구멍에 처박았다. 곧이어 짧은 불꽃이 발생했다.
문이 슬며시 열리자 하야시는 작업을 중단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3명의 사내가 서있는 것이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노트북의 키보드 위에서 굴러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구의 종말이 와도 중단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적은 10여초 동안 계속되었다. 입을 연 것은 하야시 자신이었다.
"왜 이제야 온 건가…?"
권총을 하야시에게 겨눈 사내의 옆에 서있던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미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나?"
하야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때도 그의 왼쪽 손은 키보드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됐지만 난 당신들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어."
"제법이군. 알고 있으면서 왜 도망을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야시의 입가에서는 부드럽게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그의 장발머리는 부드럽게 물결을 친다.
"작업이 끝나면 해외로 도피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당신들이 나보다 빨랐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야."
이 분위기…나쁜 분위기였다. 황영달은 자신들이 하야시가 파 놓은 함정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일어서! 손을 들고 말야."
"늦었어."
하야시의 대답은 간단했고,몸 움직임은 번개같이 빨랐다. 그는 노트북의 엔터기를 재빠르게 누른 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황영달은 당황한 눈으로 하야시를 응시했다.
하야시는 천천히 황영달 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는데 얼굴엔 야비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하야시는 그 상태 그대로에서 갑자기 두손을 번쩍 들고 포효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잠시 뿐. 10초 가량의 침묵이 다시 지나갔다.
"뭐,뭐야? 아무일도 안 일어났잖아?"
황영달 일행은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래 있다가 얼굴 표정을 풀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야시 역시 당황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니야…이게 아니야…어떻게 된 거지…
이럴 수가 없어…이럴 수가 없단 말야….
하야시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고,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저 자식 아무래도 안되겠군!"
황영달의 오른쪽에 서있는 복면 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히트맨이었다.
그는 하야시가 의자쪽으로 비틀거리며 앉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싱거웠고,예상보다 큰 효과를 보였다.
하야시는 쿵 소리를 내며 의자와 함께 무너져 내렸는데,간이 책상위에 놓여있는 그의 노트북까지 굴러 떨어져 내렸다.
복면을 벗고 호텔 밖으로 나오는 황영달 일행의 표정은 찜찜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하야시의 마지막 모습이 왠지 불길했다. 총알이 옆이마에 박히는 순간에도 하야시는 절규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황영달은 자동차에 올라타기 전 히트맨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정주영은 운전석으로 올라타고 있었다. 히트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동차 뒤편으로 있는 횡단보도로 유유히 걸어갔다.
요요키 공원에서 새가 날아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 요요끼 공원만이 아니었다. 수백,수천마리의 비둘기가 요요키공원과 도청 빌딩,KDD 빌딩
에서 신주쿠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황영달의 차가 시동을 걸었을 때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가 갑자기 천지를 진동했다.
황영달은 깜짝 놀래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히트맨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갑자기 그 도로 한가운데서 분수처럼 흙더미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저,저럴수가?
황영달과 정주영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폭팔은 4차선 중앙에서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은 지진과도 흡사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정주영은 액셀레이터를 급하게
밟았고 정신없이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이미 지하에서 튀어 올라온 지하철이 그의 자동차를 향해 무섭게 질주를 해 왔다.
간신히 피했을 것이다. 황영달을 태운 자동차가 달려드는 지하철을 간신히 피하자,이번에는 하야시가 투숙했던 러브호텔을 향해 지하철이 요란하게 처 박혀 갔다.
후꾸오 하야시…
일본 제일의 시스템 해킹 전문가의 마지막 작업은 1분의 허용오차를 가지고 뒤늦게 발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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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마에다는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나고야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자신이 값어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란조를 세워두고 마끼와 만나기로 한 제 1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마끼가 자신을 만나러 이곳에 온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도시인의 사랑이기도 하고,소시민의 사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것이다.
오후 3시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니혼라인에서 마끼의 수상 비행정을 보았을때 마에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김준을 태우는 것을 목격 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는가?
죽이고 싶었다. 머리는 돌아버릴것 같았고,가슴속에선 다이너마이트가 작렬을 했고,피가 역류를 했다.
이제 확인하고 싶었다. 마에다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신간센을 기다렸다.
당연한 거야. 마끼는 신간센을 타고 이곳에 온다…
마에다와 헤어진 란조 2위는 3층 화장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 아래로 마에다의 모습이 45도 각도로 내려다 보였는데,그녀는 권총을 꺼내 들고 소음기를 부착하고 있었다. 그런 뒤 군복을 벗고 여행 가방에서 꺼낸 스커트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란조는 아쉬웠다. 마끼와 마에다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것을 그녀는 달가워 하지 않았는데…아니 마끼라는 여자는 눈깜짝하지 않고 죽일 수 있었지만 마에다까지 그렇게 하기에는 차마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시대로 해야 했다. 마끼가 도착하면 두 남녀를 멋있게 처리하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는데,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순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4시 55분.
란조는 신간센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세면대에서 세수를 한 뒤 짙은 계통의 루즈를 입술에 발랐다. 그런 뒤 긴 차양이 달린 모자를 썼다.
권총은 핸드백 안에 감추기도 했다. 란조는 마지막으로 7cm 높이를 가진 하이힐을 가방에서 꺼냈다. 수에즈 가죽으로 된 고급 하이힐이다.
선로가 아무도 모르게 바뀐 것은 란쪼가 막 3층 화장실에서 2층 화장실로 자리를 바꾸었을 때었다. 신간센 히카리는 무서운 속도로 나고야 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일어섰고,가방을 들었고,담배를 휴지통에 버리면서 신간센 열차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정각 5시였다. 마에다는 담배를 버린 뒤 구둣발로 밟았다. 그런 뒤 플랫폼 가까이로 접근을 했다. 이미 열차가 100미터 전방까지 접근해오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그래. 정각 5시다…
마끼가 내 품에 영원히 안기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마에다는 주머니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두발의 총알이 장착된 권총이 손끝에서 만져진다. 그는 호흡을 조종하고,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50미터 전방에서 열차가 탈선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탈선이 아니었다. 달려오는 신간센 열차의 중간 측면을 뚫고 갑자기 또 다른 열차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여파로 신간센은 두쪽으로 갈라지면서 강하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인파들은 괴성을 지르며 흩어져 갔지만,기둥이 무너져 내렸고 천정이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저건…!!
마에다는 깜짝 놀란 듯 뒷걸음을 쳤지만 이미 전 폭이 20미터에 달하는 신간센 열차의 한 량이 그의 몸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마에다의 몸이 열차에 처박혀 등 뒤로 붕 떠 올랐을 때,란조도 타켓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이번에는 신간센의 측면을 들이박았던 LPG 운반열차가 크게 폭팔을 시작했다. 삽시간였다.
나고야 역은 섭씨 1만도의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을 배경으로 이상운의 음성이 조용하게 들려왔다.
"결국 해 냈군요. 하야시,그 친구도 정말 대단합니다…"
광섭을 태운 자동차는 나고야 역이 보이는 도로 끝에 주차해 있었다.
나고야 역은 연쇄적으로 폭팔을 하고 있었는데,이때문에 진광섭이나 윤춘해, 이상운의 얼굴에선 안쓰러운듯한 표정이 떠 오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지. 이런 식의 자멸이 원래 신이 계획했던 일이 아닐까?"
광섭은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오마 샤리프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웬일이십니까? 과장님이 천사표 같은 말씀을 다하시고? 우리야 돈 안 들어가서 좋지 않습니까요."
"하여간 시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군. 방위청 그 놈은 한강 다리까지 끌고 가고 싶었는데 말야…"
상운은 광섭을 멍히 바라보다가 다시 전방에서 불타오르는 나고야 역을 바라보았다. 페트롤카가 빠르게 역전 앞으로 운집을 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태양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어서 피합시다. 선텐은 그만 합시다요."
"그러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다…김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아직도 수상 비행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일까?"
광섭은 자동차를 몰라고 신호를 보냈다. 춘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는데, 화염 때문에 얼굴이 반쯤은 익어 있었다.
막 광섭의 자동차가 스타트를 할 때 또 다른 경찰차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곤베이를 태운 경찰차가 달려갔지만,광섭이나 곤베이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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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1945년 이후로 한일간에 벌어졌던 일중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마리의 새처럼 수상 비행정이 한국 영공으로 진입을 했을 때는 5기의 항공자위대 지원기가 수상 비행정을 쫓아 월경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 항공자위대 지원기에 대한민국 공군의 경고신호가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5초 뒤였다. 언제부터 대기를 했는지 몰라도 황혼을 가르고 대한민국 공군 편대가 그들을 찾아 날아오고 있었다.
양쪽다 F-16 전투기. 항공자위대는 수상 비행정에 중대한 범법자가 있다고 주장을 했지만,한국 공군이 답신으로 날려온 것은 사이더 와인더 미사일였다. 미사일 한방의 효과는 지대했다. 항공자위대 소속 지원기중 한대가 그대로 바다로 척 박히고 있었다.
사태는 심상치 않았다. 화가 난 일본 방위청은 후쿠오카福岡에 있는 항공자위대 제 4사단 F-16 지원기 편대를 긴급히 투입을 했지만, 이젠 한국 영공으로 자신 있게 진입을 시도하는 지원기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무력시위는 한국 쪽이 앞서갔다. 한국 공군은 수상 비행정이 제주도를 향해 북상해 올때까지 무려 300여대의 전투기를 동원,쓰시마 해협에서 주코쿠 지방까지 그로테스크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키나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1시간 동안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안기부 전산팀은 줄초상을 준비하듯 오키나와 기지의 동태를 살폈지만 핵미사일이 발사되거나,그것이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는 징조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종결되는 듯했다.
태양은 서서히 황해로 떨어졌고,잠시 뒤 어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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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나고야 역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곤베이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아직도 불타고 있는 나고야 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웠다. 수상 비행정을 추적하다가 지원기 한대가 격추당했다는 보고를 이미 접했고,숫검댕이로 발견된 시체중 하나가 하사 마에다의 시체라는 것도 검증이 되었다.
그리고,같은 시간 대에 도쿄를 비롯해서 나고야,오사카,요코하마의 지하철 라인에 전기를 대 주던 변전소에 과부하가 걸려 지하철 역마다 중대한 탈선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었다.
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곤베이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손바닥 보듯 알 것 같았지만 손을 쓰거나 고함을 지를 수도 없었고,자결을 할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오키나와 기지가 해킹되지 않고,보안에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곤베이는 갑자기 10년쯤 늙은 것처럼 얼굴 가죽이 축 늘어졌다.
그저 지금 당장은 저 놈의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문에 곤베이는 외투 깃을 세운 뒤,불길이 계속 번지고 있는 나고야 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처연한 기분을 아는지,소방호수에서 품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그의 외투 자락을 향해 떨어져 왔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시시했다.
고작 화재 진압이나 하려고 내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곤베이는 그대로 주저 않고 싶었다.
아니야…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곤베이는 걸어가다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등 뒤로 몸을 돌렸다.
그런 뒤 어깨에 힘을 주고,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 가능성.
진광섭을 잡아 뼈를 바숴 버리는 것. 그것이 곤베이는 하고 싶었다.
곤베이는 페트롤카에 올라탔다. 그러자,기다렸다는 듯이 히로세 전산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육,육좌님….긴급 상황입니다…"
곤베이는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은 상태에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툴툴 털어 말리고 있었다.
"뭔가? 지하철이 황궁을 덮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아닙니다…미사일이 살아있었습니다!…오키나와에서 방금 전에 미사일이 발사되었단 말입니다!"
곤베이는 머리카락을 털다 말고 행동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못 들었겠다 싶었다. 아니 이제는 실없이 웃음까지 나왔다.
"결국 마에다가 해 낸 것인가?"
"글,글쎄요…"
"글쎄 라니? 무슨 뜻인가,히로세 실장. 정확하게 설명을 해봐."
"미사일은 한국으로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뭐..?"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미국으로 날아갔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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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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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산더미같은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별안간 동체를 덮쳐 온 파도때문에 여자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림이 멈추자 여자는 남자의 상처가 난 가슴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런 뒤 여자는 비틀거리며 출입문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또 한번 객실이 요란스럽게 요동을 쳤다.
여자가 출입문을 열었을 때는 CL-415 수상비행정의 터보프롭엔진이 탁탁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가득 매운 암갈색 구름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이젠 틀린 것일까…? 여자는 아까부터 별빛이 보고 싶었지만 먹구름때문에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기다릴께…난 기다릴 수 있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여자의 얼굴은 순결했고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객실 출입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남자는 객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제발 한마디만…한마디만이라도 설명을 해 주세요…"
남자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씁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여자는 남자의 앞에 어색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자는 타이트한 스커트에 쇼트 베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는 앞부분이 플리츠로 처리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옷은 절반정도가 물에 젖어 있었다.
"이야기해줄수 없나요?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마끼처럼 저도 한국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아니 전 죄가 없다고 했었나요?"
여자가 애원하듯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여자의 볼을 더듬었다. 그런 남자의 가슴에선 지금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그 피는 여자의 스커트 자락과 재킷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는,수상 비행정의 열려진 출입문 밖에서 붉은 빛 줄기가 밤하늘을 반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어쩌면 신기루였는지 모른다. 남자의 시선은 한참 동안 밤하늘을 맴돌았는데,결국은 다시금 어딘가에 있을 그 빛 줄기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빛 줄기가 밤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남자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비로소,남자는 안심이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핵미사일이 오키나와에서 발사되었어. 사유리…"
"정말요?"
"그랬을 거야… 스위치를 누른 것은 이 손가락이니까…"
"히잉…나 어떻게 해…핵 미사일을 발사하다니 김짱은 미친 거에요?"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여자를 응시하다가,고글을 꺼내 얼굴에 착용했다.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후,수상 비행정은 이틀 동안 바다 위를 떠 다녔다. 마끼는 두번이나 자해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성공하지 못했다.
그다음 10여일 동안 사유리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는데,그리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생각해 보니,이것은 벌써 몇년전의 과거 일이었다.
아마도,그때 일들이 사뇨 사유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짧다면 짧은 인생은 여러 가지가 그 혹은 그녀를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존재하는데,사유리는 자신을 생육시키는 추억들을 그해 1996년 봄에 경험을 했던 것이다.
지금 현재의 사뇨 사유리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그렇다고,수축되거나 성장을 중단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을 성장시켜 갔는데,이웃나라인 한국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조목조목 따져 볼 생각은 없었다.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아무래도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 같았기에.
계속 사유리의 마음중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늘같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될 때면,그날 이후로,그녀는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만남인데도 말이다.
김준은 그녀의 생일을 꼬박꼬박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뒤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카드를 보내 오거나 단정하게 생긴 목각인형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대개는 프랑스 파리나 티벳 등의 우표가 붙어 있었다. 사유리는 울적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그따위 우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니 나쓰에는 이즈메라는 의사와 작년에 결혼을 했다. 지금은 의사의 부인이 되었으니 시집 하나는 잘 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에도 언니는 변하지 않았다. 사과 그림이 그려진 컴퓨터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겼는데,간혹은 밤마다 이즈메 몰래 드라이브를 나오곤 했다. 그리고,맨션에서 홀로 살고 있는 사유리를 찾아와서는 별안간 우동이 먹고 싶다고 성화를 부린다.
그 사이에 하야시의 여동생 미나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사유리는 딱 한번 준의 말을 기억하고,가나기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오는 중에 골목길이 복잡해 여러번 헤매야 했는데,그러다가 골목 제일 안쪽에 있는 미나의 집을 우연히 발견했다.
미나의 집을 본 순간,사유리는 그 해 봄에 읽었던 마이니찌 신문을 환기했다. 두구의 썩어 가는 시체가 발견되는 통에 마이니찌 신문이 한참동안 떠들었던 공포의 집. 집주인인 젊은 아가씨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미친 듯이 컴퓨터를 두들겼다고 했다. 경관 시체가 썩어 가고 있었고, 지하실에도 시체가 썩어 가는 통에 온 동네가 냄새로 진동을 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사유리는 미나나,러브호텔에서 죽은 하야시가 남매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들이 김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몰랐다. 그저,그날 같은 시간대에 벌어졌던 또 다른 사건 였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 그때의 여자,사뇨 사유리는 벌써 23살이 되었다. 그녀는 그녀의 계획대로 간호사가 되었고,일요일이면 신주쿠를 방황하는 여자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그날 오후에 왜 그녀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그토록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다른 이들이 모르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사유리는 아직도 김준을 잊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해 1996년 봄에,일본 정부는 미국 워싱턴에서 그들을 불러낸 미국인 각료들을 만 난적이 있었다. 회의는 길었는데,태반이 완벽한 보안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회의가 끝났을 때,일본 각료 들은 그들 자신이 최소한 향후 10년간은 국제적인 핵 감시단체의 감시하에 들어간다는 조약에 사인을 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기억을 했다. 감히, 일본으로써는,거부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된 것은,마에다가 서울을 향해 날리려 했던 오키나와의 핵미사일이 예상과는 달리 불발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 밤엔 분명히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하와이 앞 바다에 떠있는 무인도로 떨어졌다.
아무도 몰랐다. 제 2의 진주만 공습이라고 소문이 났던 이 사건 때문에 자위대 별반조직은 미친듯이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한 인물을 찾아 나섰지만 누가,어떻게,어떤 방법으로 해킹을 했는지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별반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와이 앞바다로 떨어진 핵미사일이 도화선이 되어,태평양 미 8군이 일본 본토에 강제 주둔되었고,자위대 조직은 50% 가량이 축소가 되는 수모를 격고,일본 경제가 10년 뒤로 후퇴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일본 자위대 최대의 우파조직인 별반은 자신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김준은 1997년 봄에 김포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버튼다운 셔츠와 워셔블 신사복, 그리고 톰행크스 상표를 가진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이번에는 좀 더 보강이 된 노트북 컴퓨터가 그의 오른손 아래에서 멋없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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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프 제1부 동급해커 파워유저저팬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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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

<지은이 소개/댄 브라운>
한때는 평범한 교사이던 <다 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이 작품으로 일거에 세계적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 빈치 코드>를 발표하기 전에 세 개의 작품에서 자신의 능력을 탄탄히 쌓아왔다.
첫 책은 1998년에 출간된 Desital Fortress이며, 다음 작품은 Deception Point와  Angels & Demons가 있다. 바로 Angels & Demons에 하버드 대학교의 예술사, 종교 기호학 교수 로버트 랭던이 등장한다. <다 빈치 코드>에서 인류의 비밀을 파헤치는 핵심 인물인 랭던은 전작에서 이미 창조된 인물인 것이다. <다 빈치 코드>의 주인공 소피 누뵈 또한 전작에서 창조된 주인공 이다. 이렇듯 댄 브라운은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전작에서 발전시켜, 완벽한 블록버스터 <다 빈치 코드>를 탄생시켰다.
댄  브라운은 소설의 상상력이 얼마나 방대할수 있는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그를 소설계의 빅뱅이라고 부른다. 이제 댄 브라운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될 것이다.

<소개글 , 서평>
<다 빈치 코드>는 2003년 3월 출간 이후 미국에서 하나의 신드롬이 되었다. <다 빈치 코드>는 미국에서 약 7백만 부 판매되었고, 아마존에 독자서평은 3천 개를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다 빈치 코드>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40여 개국에서 판권을 계약했고, 10여 개국에서 출간하여 모두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USA Today>지는 <다 빈치 코드>가 유일하게 <해리포터> 시리즈의 판매량을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베스트셀러 소설은 단지 그 한 책만 판매되는데 그치고 마는데, <다 빈치 코드>는 이 책에서 언급하거나 이 책과 관련 있는 다양한 도서의 판매량까지 끌어올려 독서시장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출간한 더블데이 출판사는 이 책이 시장에 나온 날을 ‘다 빈치 코드의 날’이라고 부른다.
미국 ABC 방송사는 뉴스 스페셜에서 <예수, 마리아 그리고 다 빈치>라는 제목으로 <다 빈치 코드>에서 언급한 내용을 추적했다. 이 소설의 파장은 <뉴스위크>를 포함한 주요 언론에서 크게 기사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계까지 파장이 이어져 SONY사와 영화 판권을 계약해 2005년 개봉할 예정이다. 이렇듯 <다 빈치 코드>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주목을 받자 <다 빈치 코드>를 소재로 한 다양한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이제 <다 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은 세계의 화제 인물로 꼽히게 되었다.

사실 109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단체, 시온 수도회는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다. 파리 국립 도서관은 1975년에 기밀문서로 알려진 양피지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작 뉴턴,보티첼리,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한 수많은 시온 수도 회의 회원들 이름이 있었다.
  ‘오푸스 데이’ 라는 바티칸의 성직 자치단은 아주 독실한 가톨릭 분파다. 세뇌와 강압, ‘육체의 고행’으로 알려진 위험한 종교의식들이 보도되면서, 이 교파는 최근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푸스 데이는 미국 뉴욕 시 렉싱턴 가 243번지에 4천 7백만 달러짜리 미국본사 건물을 얼마 전에 완공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 종교의식들에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

프롤로그

파리,루브르 박물관
오후 10시 46분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 자크 소니에르는 대화랑의 아치형 천장 아래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제일 가까이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돌진했다. 일흔여섯 살의 이 노인은 도금된 그림 액자가 벽에서 떨어질 때까지 잡아당겼다. 소니에르가 뒤로 넘어지자 그림이 몸을 덮쳤다. 소니에르의 예상대로 화랑의 출입을 봉쇄하는 철문이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룻바닥이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벨이 울려댔다.
  소니에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잠시 누워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
  캔버스 아래에서 기어나오며 소니에르는 몸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냉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소니에르는 손과 무릎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4,5미터 떨어진 철문 밖에서 소니에르를 공격하던 남자의, 산처럼 큰 그림자가 철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몸집이 큰 사내였다.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에 가늘고 하얀 머리카락을 뒤집어쓴 사내의 눈동자는 암적색이고 홍채는 분홍색이었다. 색소결핍증인 듯한 사내는 외투에서 권총을 꺼내 철창 사이로 소니에르를 겨누었다.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소.”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억양이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시오.”
  “무슨 얘긴지 도통 모르겠소.”
  화랑 마룻바닥에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관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남자는 소니에르를 바라보았다. 유령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외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당신과 당신 형제들이 갖고 있는 그것은 당신들 게 아니오.”
  소니에르는 일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 작자가 그걸 알지?’
  “오늘 밤 정통 수호자들이 복귀하실 것이오.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말하시오. 그럼 당신은 살수 있소.”
  남자는 권총을 낮춰 소니에르의 머리에 겨누었다.
  “그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비밀이오?”
  소니에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남자는 총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소니에르는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잠깐 당신이 원하는 걸 얘기해 주겠소.”
  관장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 하려는 거짓말은 수없이 연습하던 것이다…… 기도하는 매순간, 결코 쓸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소니에르가 말을 마쳤을 때, 남자는 뽐내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사람들이 말한 그대로군.”
  소니에르는 움찔했다.
  ‘그 사람들?’
  “그들을 찾아냈지. 세 명 다. 그들도 당신이 방금 말한 대로 얘기하더군.”
거대한 몸집의 남자는 빈정거렸다.
  ‘그럴 리 없어!’
  세 명의 집사와 관장의 진짜 신분은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고대 비밀만큼이나 신성한 것이다. 소니에르는 집사들이 죽기 전에 엄격한 절차에 따라 똑같은 거짓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조직의 규정이기도 했다.
  남자는 다시 권총을 겨누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내가 되겠군.”
  ‘진실.’
  순간 소니에르는 진짜 공포에 맞닥뜨려졌다.
  ‘내가 죽으면 진실은 영원히 사라진다.’
  관장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권총이 발포되었다. 총알이 복부에 박힐 때 소니에르는 타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 관장은 쓰러졌다. 천천히 몸을 움츠리며 소니에르는 철창 사이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이제 소니에르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눈을 감았다. 두려움과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빈 화랑에 딸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니에르는 눈을 번쩍 떴다.
  남자는 즐겁다는 듯이 권총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권총의 둘째 핀으로 손을 뻗던 남자는 순간 생각을 바꿨는지, 소니에르를 비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내 일은 끝났군.”
  관장은 하얀 셔츠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흉골 아래가 5,6 센티미터 가량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위장.’
  무참하게 총알은 심장을 비껴갔다. 알제리 전쟁에 참가한 베테랑으로서 소니에르는 이런 끔찍한 죽음을 목겼했었다. 고작 15분 정도만 살 수 있을 터였다. 위산이 흉강에 스며들면, 독 때문에 천천히 독살될 것이다.
  “고통이란 좋은 것이오. 선생.”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혼자가 된 자크 소니에르는 고개를 다시 철문으로 돌렸다. 덫에 갇힌 꼴이었다. 적어도 20분동안 저 철문은 열리지 않을것이다. 누군가 다가오더라도 소니에르는 이미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소니에르를 사로잡는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반드시 비밀을 전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니에르는 살해된 세 형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먼저 활동한 윗세대와 그들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을 생각했다.
  ‘깨져서는 안 될 지식의 사슬.’
  그리고 이제, 갑자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소니에르는 유일하게 남은 연결고리이자 지금까지 지켜온 엄청난 비밀의 외로운 수호자이다.
  소니에르는 떨리는 몸을 이끌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 .’
  박물관 대화랑에 갇힌 소니에르는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사람이다. 소니에르는 이 고상한 감옥의 벽들을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이 오랜 친구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니에르는 모든 힘과 재능을 끌어모았다. 소니에르는 그의 필사적인 임무를 위해 얼마 남지않은 자신의 시간을 다 써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

  로버트 랭던은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속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작고 익숙하지 않은 울림이었다. 손으로 침대옆을 더듬어 불을 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본 랭던은 루이 16세 시대의 가구들과 수작업으로 된 프레스코 벽화, 거대한 마호가니 기둥이 침대 네 귀퉁이에 서 있는 호화로운 르네상스풍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침대 기둥에 걸려 있는 자카드 천의 목욕 가운데는 ‘리츠 파리 호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느리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랭던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랭던씨? 제가 손님을 깨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침대 옆의 시계를 본 랭던은 망연자실했다. 밤 12시 32분. 겨우 한 시간 정도 잤는데 죽은 듯이 잔 것 같았다.
  “저는 호텔 안내인입니다. 손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방문객이 와 계십니다. 몹시 급한 일이라고 하시는데요.”
  랭던은 아직도 의식이 흐릿했다.
  ‘방문객?’
  침대 옆 탁자 위의 구겨진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 아메리칸 대학이 자랑스럽게 제안하는 로버트 랭던과의 밤
  하버드 대학, 종교 기호학 교수
  랭던은 신음했다. 오늘 밤에 그는 사르트르 대성당의 돌들에 숨겨진 이교도의 상징에 관한 슬라이드를 가지고 강의했다. 아마 청중 가운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심사가 뒤틀렸을 것이다. 일부 종교학자들은 그의 숙소까지 쫓아왔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무척 피곤하고 또 ……”
  “하지만 손님, 아주 중요한 분입니다.”
  안내인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
  랭던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종교화와 종교의식의 기호에 관한 그의 책들은 예술계에서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버렸다. 지난해, 바티칸에서 공표된 사건에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유명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이후 자칭 대단한 역사학자나 예술가 나부랭이들이 랭던의 방문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랭던은 되도록 공손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 방문객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좀 받아놓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분께 제가 화요일 파리를 떠나기 전에 전화드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그럼 수고하십시오.”
  안내인이 뭐라고 항의하려는데 랭던은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침대 옆에 놓인 호텔의 ‘숙박고객 안내서’를 본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내서의 표지는 ‘빛의 도시에서 아기처럼 자는 법, 리츠 파리 호텔에서의 포근한 잠’ 따위의 선전 문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랭던은 방을 가로지르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헝클어지고 지친 남자가 낯설어 보였다.
  ‘넌 좀 쉬어야 해. 로버트.’
  지난 몇 년 간 그는 과도하게 일했다. 하지만 랭던은 거울에 나타난 그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날카롭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오늘 밤에는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강한 턱과 보조개가 팬 뺨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라 있었다. 관자놀이 근처에는 회색 머리카락들이 굵고 거친 흑발 사이로 깊게 길을 내었다. 학교의 여자동료들은 그 회색 머리카락이 랭던의 문학적인 외모를ㄹ 강조해 준다고들 했다.
  ‘<보스턴 매거진>이라면 당장이라도 만날 텐데.’
  당황스럽게도 지난달. <보스턴 매거진>은 랭던을 보스턴의 가장 흥미로운 인사 열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영광인지 뭔지 모를 그 선정 때문에 랭던은 하버드 동료들의 끊임없는 놀림에 시달려야 했다. 집에서 5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에서 가진 오늘 밤 강의는 그에게 또 다른 명예를 안겨주었다.
  만원을 이룬 파비용 도핀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주최자가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우리의 손님은 소개가 따로 필요 없는 분입니다. 이분은 수많은 책의 저자입니다. <비밀 분파의 기호학>,<조명학의 예술>,<표의문자의 잃어버린 언어> 그리고 <종교적인 도상학(그리스도나 성모, 성화에 나타난 기호를 풀이하고 연구하는 학문)>등 다수의 책을 집필하셨는데, 말 그대로 대단한 책들입니다. 여러분 중 대다수가 수업 교재로 이분의 책을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관중석에 있던 학생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늘밤, 인상적이고 다양한 이분의 관심 분야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분을 소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 ”
  주최자는 무대에 앉아 있는 랭던을 장난스럽게 쳐다보았다.
  “청중 가운데 한 분이 방금 제게 이것을 건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 흥미로운 소개라고나 할까요.”
  주최자가 들고 있는 것은 <보스톤 매거진>이었다.
  랭던은 몸을 움츠렸다.
  ‘제기랄, 저게 어디서 났지?’
  여자는 얼빠진 기사의 일부를 발췌해 읽기 시작했다. 랭던은 의자속으로 몸이 점점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30초 정도 지나자 청중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해 바티칸 비밀회의에서 자신의 이례적인 역할에 대해 랭던 씨가 공개적인 설명을 거절한 일은, 우리 잡지가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랭던 씨를 꼽는 일에 확실한 점수를 보탰다.”
  여자는 청중을 선동했다.
  “여러분, 더 듣고 싶어요?”
  청중은 갈채를 보냈다.
  주최자가 다시 기사로 고개를 숙이자 랭던은 누군가 저 여자를 막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비록 랭던 교수가 우리의 일부 젊은 수상자들처럼 외모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 사십대의 학자는 학자로서의 매력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사로잡는 랭던 교수의 외모는 이례적으로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완성된다. 랭던 교수의 여학생들은 이 목소리를 ‘귀를 위한 초콜릿’ 이라고 표현한다.”
  강당에 폭소가 터졌다.
  랭던은 서투른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해리스 트위드를 입은 해리슨 포드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기사 몇 줄이 더 나올 터였다. 더구나 오늘 밤 랭던은 해리스 트위드와 바바리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랭던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랭던은 어정쩡하게 서서 주최자를 연단에서 밀어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모니크 씨. <보스턴 매거진>은 말을 꾸미는 데 확실히 재능이 있죠.”
  당황스러운 한숨을 쉬며 랭던은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여러분 중 누가 저 기사를 제공했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영사관을 통해 그 사람을 추방하게 하겠습니다.”
  청중들은 웃어댔다.
  “자,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오늘 밤 기호의 힘에 대해 얘기하려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
  전화기가 침묵을 깨며 다시 한 번 울렸다.
  호텔에 대한 불신으로 신음하면서 랭던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예상한 대로 호텔 안내인이었다.
  “랭던 씨.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방문객이 지금 손님 방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랭던은 이제 잠이 완전히 깨었다.
  “방문객을 지금 내 방으로 보냈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이런 분은 …… 이분을 막을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요?”
  하지만 안내인은 이미 전화기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육중한 주먹이 랭던의 방문을 두드렸다.
  랭던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목욕가운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누구요?”
  “랭던 씨? 당신과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제롬 콜레 부관입니다. 중앙사법경찰국(DCPJ)에서 나왔습니다.”
  남자의 영어에는 날카롭고 권위적인 울림이 배어 있었다.
  랭던은 멈칫했다.
  ‘사법경찰?’
  DCPJ라면 미국의 FBI와 비슷한 기관이다.
  안전고리를 걸어 둔 채 랭던은 문을 조금 열었다. 랭던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는 무척 말랐고 공무원 차림인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랭던은 망설였다. 낯선 사람의 누르께한 눈이 자기를 쳐다보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희 반장님이 비공식적인 문제로 당신의 전문적인 능력을 원하십니다.”
  “지금요? 자정이 넘었는데요”
  랭던은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오늘 밤 루브르 박물관 관장을 만날 예정이었다는데, 맞습니까?”
  랭던은 의아함이 치밀어 올랐다. 오늘 밤 강의가 끝나면 자크 소니에르와 술 한잔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소니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관장의 수첩에서 발견했습니다.”
  “저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DCPJ 요원은 절박한 한숨을 내쉬더니, 열린 문틈 사이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들이 밀었다.
  사진을 본 랭던은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 사진은 사건이 발생한 지 한 시간도 채 되기 전에 찍은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요.”
  사진의 이상한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니 강한 혐오와 충격이 부풀어 오르는 분노로 바뀌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관장을 만날 계획이었다는 것과 기호학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참고로 말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느낀 공포가 이제는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사진의 광경은 끔찍하고도 기이했다. 불편한 데자뷔 감각마저 몰고 왔다. 1년하고 조금 더 전에 지금과 비슷한 도움을 요청받았다. 24시간이 지난 뒤, 그는 바티칸 시티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전혀 달랐다. 사진의 장면이 불안할 정도로 익숙했다.
  DCPJ 요원은 시계를 보았다.
  “반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랭던은 요원의 얘기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사진에 꽂힌 채였다.
  “여기 이 기호와 시체가 아주 이상하게……”
  “시체의 자세 말인가요?”
  요원이 물었다.
  한기를 느끼며 랭던은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대체 누가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군요.”
  요원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랭던씨. 이 사진의 모습은 ……”
  요원은 뜸을 들였다.
  “소니에르 관장이 직접 한 것입니다.”

2

  1.6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예르 가에 있는 고급 저택의 입구에서는 사일래스라는 이름을 가진 덩치 큰 알비노(알비노: 선천성 색소결핍증, 즉 백피증인 사람)가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못이 박힌 말총 허리띠가 허벅지에 매달려 살을 파고 들었지만, 사일래스의 영혼은 주인에 대한 봉사의 만족감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저택으로 들어서던 사일래스는 로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이 깨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곳에서는 문을 잠그는 것이 금지되었다. 사일래스는 침실로 들어가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방은 검소했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소나무 옷장과 침대로 쓰는 삼베 매트가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번 주에 사일래스는 이곳 방문객이다. 하지만 뉴욕에 이와 비슷한 은신처를 갖는 축복을 수년 동안 누리고 있었다.
  ‘주님 내게 쉴 곳과 삶의 목적을 제공하신다.’
  마침내 오늘 밤 사일래스는 그 빚을 갚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그는 옷장으로 서둘러 다가가 맨 아래 서랍에 숨겨져 있던 휴대 전화기를 찾아서 번호를 눌렀다.
  “네?”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스승님, 막 돌아왔습니다.”
  “말해라.”
  사일래스의 연락을 받게 되어 몹시 즐겁다는 투로 전화의 목소리는 명령했다.
  “네 명 모두 죽었습니다. 세 명의 집사들 …… 그리고 우두머리인 마스터도요.”
  마치 애도하는 듯한 침묵의 순간이 이어졌다.
  “그럼 자네가 정보를 갖고 있겠군.”
  “네 명 모두 일치했습니다. 각각 따로따로 말입니다.”
  “그럼 자넨 그들의 말을 믿는다는 건가?”
  “그들의 일치된 증언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흥분된 숨소리가 이어졌다.
  “훌륭해. 비밀 엄수에 대한 조직의 명성이 너무 자자해서 걱정했는데 말이야.”
  “죽음에 대한 예감이 강력한 동기였습니다.”
  “그래, 제자여 내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거라.”
  사일래스는 희생자들에게서 모은 정보가 충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승님, 네 사람 모두 클레 드 부트(clef de voute:금고를 여는 열쇠)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 전설의 쐐기돌 말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급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일래스는 그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쐐기돌이라…… 정확히 우리가 예상한 대로군.”
  전설에 따르면, 조직은 ‘클레 드 부트’ 또는 ‘쐐기돌’이라고 알려진 돌로된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직의 가장 큰 비밀이 잠든, 최후의 장소를 밝혀줄 정보가 새겨진 석관이다. 그 비밀은 매우 엄청난 것이어서 그것을 보호하는 일이 조직의 존립 이유가 되었다.
  “그 쐐기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다.”
  스승이 말했다.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쐐기돌은 여기 파리에 있습니다.”
  “파리? 믿어지지 않는군. 그렇게 간단하다니.”
  사일래스는 오늘 밤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네 명의 희생자들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허망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기 바로 직전에 비밀을 실토한 일들을 말이다. 네 명 모두 같은 얘기를 했다. 쐐기돌은 파리의 오래된 생 쉴피스 교회 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말이다.
  “주님의 집에 말이냐? 감히 우리를 이렇게 조롱하다니!”
  스승이 소리쳤다.
  “그자들이 수백년을 숨겨온 것처럼 말이죠.”
  승리의 기쁨을 가라앉히기라도 하듯 스승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늘 신께 아주 훌륭한 예배를 드린 것이네. 우리는 이를 위해 수백년을 기다려 왔어. 자네는 반드시 그 돌을 내게 가져와야 해. 즉시! 오늘밤 안으로. 거기에 걸린 대가는 알고 있겠지.”
  그 대가는 계산할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사일래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요구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교회는 요새와 같습니다. 특히 밤에는요. 제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확신에 찬 스승의 목소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난 사일래스는 기대감에 온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사일래스는 중얼거렸다. 고맙게도 스승은 신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참회할 시간을 준 것이다.
  ‘오늘 저지른 죄에 대해 내 영혼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오늘 벌어진 죄악은 신성한 목적하에 행한 것이었다. 적들에 대한 신의 전쟁은 수백년 동안 있어 왔다. 용서는 보장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면죄는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그림자를 끌면서 알몸으로 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대못이 박힌 말총 허리띠가 허벅지를 옥죄는 것을 살폈다. <길>의 신실한 추종자들은 모두 이 장치를 착용한다.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도구로는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금속 갈고리가 박힌 가죽 채찍도 있다. 이런 도구들이 불러오는 고통은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기본 착용시간인 두 시간 넘게 하고 있었지만 ,사일래스는 오늘이 보통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리띠의 버클을 잡고 한 단계 더 조이자, 허리띠의 갈고리들이 살 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천천히 숨을 토해 내면서 사일래스는 고통의 정화 의식을 음미했다.
  ‘고통은 좋은 것이다.’
  스승 중의 스승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의 신성한 부문을 되뇌면서 사일래스는 속삭였다. 에스크리바는 1975년에 죽었지만 그의 지혜는 계속 살아있고, 그의 말은 이 땅의 수천 명의 신실한 충복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육체의 고행’으로 알려진 신성한 의식을 수행할 때 여전히 속삭여지고 있다.
  사일래스는 마룻바닥에 정결하게 말려 있는 두꺼운 밧줄로 고개를 돌렸다.
  ‘원칙.’
  밧줄의 굵은 매듭에는 마른 피가 붙어 있었다. 자기의 고뇌가 정화되기를 고대하며 사일래스는 짧은 기도문을 외웠다. 그런 뒤 밧줄의 한 쪽 끝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어깨 너머로 휘둘렀다. 밧줄의 매듭이 등을 찍어 대는 아픔이 느껴졌다. 사일래스는 밧줄로 자기 살을 난도질하면서 한 번 더, 한 번 더 외쳤다.
  “Castigo corpus menu(내 몸에 체벌을 내려라)!”
  마침내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3

  시트로엥 ZX의 열린 창문으로 상쾌한 4월의 공기가 느껴졌다. 오페라 하우스의 남쪽을 지나 방돔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자동차의 보조석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던 로버트 랭던은 이 도시가 자기 옆을 지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빨리 마친 샤워와 면도는 랭던을 말쑥해 보이게 했지만 그의 근심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참혹한 관장의 시체 사진이 랭던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가 죽었다.’
  랭던은 관장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소니에르는 운둔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헌신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푸생과 테니르스의 그림들 속에 숨겨진 비밀부호에 관한 소니에르의 책들은 랭던이 즐겨 사용하는 교재이기도 했다. 오늘 밤의 만남을 몹시 고대하던 랭던은 관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망했었다.
  다시 관장의 시체사진이 떠올랐다.
  ‘자크 소니에르가 직접 그렇게 했다?’
  사진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쳐내며 랭던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는 이제 꾸불꾸불한 아랫길로 이어졌다. 수레의 사탕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 쓰레기 봉지를 거리에 내놓는 식당 종업원들 , 재스민 향이 묻어나는 산들바람에서 늦은 밤의 온기를 느끼려고 서로 감싸안는 연인들. 시트로엥 자동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이 혼돈속을 누볐다. 2음조의 거슬리는 사이렌 소리는 칼처럼 교통의 흐름을 갈랐다.
  “랭던 씨가 아직 파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장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호텔을 떠난 후 요원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본질적으로 다른 표상과 이념들의 숨겨진 상관성을 탐구하는 데 일생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랭던은 세계를 역사와 사건들이 서로 심오하게 짜여진 거미집으로 보였다. 랭던은 하버드에서 기호학 수업시간에 종종 이렇게 말했다.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항상 거기에 있다. 표면 바로 아래에 묻힌채 말이다.’
  “파리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겠군요?”
  랭던이 말했다.
  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인터폴입니다.”
  ‘인터폴, 물론 그랬겠군.’
  랭던은 생각했다. 모든 유럽의 호텔들이 숙박 수속을 밟을 때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요청이 공식적인 행동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랭던은 깜박 잊고 있었다. 그것은 법이기도 했다. 유럽 어디에 있든, 인터폴 수사관들은 누가 어디에서 자는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리츠 호텔에 묵고 있는 랭던을 찾아내는 데는 아마 5초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트로엥이 도시를 남쪽으로 가로지르자, 조명을 받고 있는 에펠 탑이 오른쪽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펠 탑을 보며 1년 전의 장난기 어린 약속을 떠올린 랭던은 비토리아를 생각했다. 6개월마다 지구상의 낭만적인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에펠 탑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1년 전에 로마의 시끄러운 공항에서 키스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다.
  “그녀를 올라가 봤습니까?”
  요원이 고개 너머로 물었다.
  랭던은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흘끗 쳐다보았다.
  “뭐라구요?”
  요원은 창 밖으로 에펠 탑을 가리켰다.
  랭던은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흘끗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요원은 창밖으로 에펠 탑을 가리켰다.
  “무척 아름답죠. 안 그런가요? 그녀는 프랑스의 상징입니다. 저는 그녀가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랭던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호학자들은 프랑스에서 저 3백 미터짜리 남근상보다 적절한 국가적 상징을 찾을 수 없다고 종종 말한다. 프랑스는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 나폴레옹이나 난쟁이 페팽처럼 불안하고 왜소한 지도자들로 유명한 나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리볼리 가의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트로앵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요원은 앞에 가던 세단을 앞질러 카스트글리온 가의 숲이 우거진 구역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카스티글리온 가는 파리의 센트럴 파크로 불리는 유명한 튈르리 정원의 북쪽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튈르리 정원을 여기 피어난 수천 송이의 튤립과 연관시켜서 잘못 이해한다. 튈르리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공원은 한 태 이 도시의 유명한 붉은 기와, 즉 튈르를 만들기 위해 진흙을 채굴하던 엄청나게 크고 오염된 채굴장이었다.
  황량한 공원에 들어서자, 요원은 계기판 아래로 손을 뻗어 사이렌을 껐다. 랭던은 갑작스러운 정적을 음미하며 안도했다. 자동차의 창백한 할로겐 헤드라이트가 공원의 자갈길을 훑었다. 타이어는 졸린 듯한 리듬으로 억양을 실어 노래하듯 윙윙 굴러간다. 랭던은 항상 튈르리를 신성한 땅으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클로드 모네는 형식과 색을 실험했고, 문자 그대로 인상파 운동의 탄생이 고무되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상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시트로엥은 공원 중앙 가로수 길의 서쪽 아래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형 분수를 돌아 한적한 나무 길을 통과하자 널찍한 사각형 공간이 나타났다. 랭던은 아치 모양의 거대한 돌로 표시된 튈르리 정원의 끝을 바라보았다.
  케러젤의 아치.
  케러젤의 아치에서 주신제 의식이 한 번 열리긴 했어도,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이 장소를 전혀 다른 이유로 숭배했다. 튈르리 끝의 산책길에서는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계에서 가장 훌륭한 미술 박물관이 모두 보였기 때문이다.
  센 강과 볼테르 부두를 건너 남쪽인 오른쪽 창문 밖으로는, 옛날 철도역사로 쓰이던 오르세 미술관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파리국립근대 미술관이 있는 퐁피두 예술 문화 센터의 초현대적인 건물의 꼭대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뒤편 서쪽으로는 죄 드 폼 국립 미술관의 고대 람세스의 오벨리스크가 나무들 위로 솟아 있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아치 길을 통과해서 곧게 뻗은 동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ㄷ자형의 르네상스 궁전인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랭던이 눈동자로 거대한 건축물을 흡수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는 사이, 익숙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찔할 정도로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루브르의 당당한 정면이 파리의 하늘을 배경으로 성체처럼 서 있었다. 거대한 편자 모양으로 생긴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에서 가장 긴 건물이다. 이 편자 모양의 건물을 펼치면 에펠 탑을 세 개 늘어놓은 것보다 길다. 심지어 박물관 양 날개 사이에 있는 수백만 평방미터의 광장도 박물관 정면의 폭에는  도전하지 못한다. 랭던은 한때 루브르 박물관 주변을 한 바퀴 걸어보았다. 길이가 약 5킬로미터나 되었다.
  대략 6만 5천 3백 점이나 되는 루브르의 예술품들을 모두 감상하는 데는 5주 정도 걸리지만, 여행객들은 대부분 랭던이 ‘ 루브르의 보물찾기’ 라고 부르는 축약된 코스를 선택한다. 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세 가지 미술품에 눈도장을 찍고 가려는 단거리 경주 같은 것이다. 이 보물들은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승리의 날개>다. 아트 부치왈드는 5분 56초 안에 이 명작들을 모두 보았다고 자랑삼아 떠벌렸다.
  요원이 무전기를 꺼내 빠르게 프랑스어로 말했다.
  “랭던 씨가 도착했습니다. 이 분 전입니다.”
  해독하기 어려운 대답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요원은 무전기를 넣은 뒤 랭던을 돌아보았다.
  “출입문에서 반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요원은 루브르 광장의 자동차 출입 금지 표지판을 무시했다. 그리고 도로의 연석 위로 시트로엥을 몰고 갔다. 조명 빛을 받으며 분수를 뿜어내는 일곱 개의 삼각형 연못에 위풍당당하게 둘러싸인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입구는 박물관만큼이나 유명했다. 중국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가 디자인한 신현대적인 유리 피라미드 입구는, 르네상스 앞마당의 품위를 해친다고 믿는 전통주의 신봉자들의 냉소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괴테는 건축물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페이를 비평하는 이들은 이 피라미드를 칠판 위의 손톱자국이라고 비꼬았지만, 진보적 옹호론자들은 22미터 가까운 높이의 투명한 피라미드를 고대 구조와 현대 방식의 빛나는 결합, 그 이상이라며 환영했다. 새 천년으로 루브르를 이끄는 신구(新舊)의 상징적 연결고리로서 말이다.
  “저 피라미드가 마음에 드십니까?”
  요원이 물었다.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함축적인 질문이다. 피라미드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안목없는 미국인이 되어 버리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프랑스인에게 모욕이 되는 식이다.
  “미테랑은 대담한 남자였죠.”
  랭던은 다소 엉뚱하게 대답했다. 피라미드를 의뢰한 이 대통령은 ‘파라오 콤플렉스’로 고통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단독으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이집트 예술, 그 인공물로 파리를 채우려 한 프랑수아 미테랑은 이집트 문화에 애착이 강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프랑스 사람들은 작고한 미테랑 대통령을 여전히 스핑크스라 부르고 있었다.
  “반장은 누구입니까?”
  화제를 바꾸려고 랭던이 물었다.
  “부쥐 파슈. 우리는 토로라고 부릅니다.”
  피라미드 정문으로 다가가면서 요원은 말했다.
  모든 프랑스인의 별명이 이상한 동물 이름일까 궁금해 하면서 랭던은 요원을 슬쩍 쳐다보았다.
  “반장을 ‘황소’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요원의 눈썹이 활처럼 치켜 올라갔다.
  “랭던 씨의 프랑스어 실력은 생각보다 훌륭하군요.”
  ‘프랑스어 실력은 시시하지만, 12궁도 도상학은 꽤 쓸 만하지.’
  타우루스자리는 황소를 의미한다. 점성술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상징의 정수다.
  요원은 차를 세우고 두 분수 사이에 있는 피라미드 한 면의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저게 입구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선생.”
  “함께 안 갑니까?”
  “제 임무는 선생을 여기까지 모시는 겁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습니다.”
  랭던은 한숨을 내쉰 뒤 차에서 내렸다.
  ‘이건 당신네 서커스로군.’
  요원은 시동을 걸고 속도를 냈다.
  혼자 남은 랭던은 떠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을 지켜보며 이 광장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침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것은 불순한 생각이라고 랭던에게 말하고 있었다.
  분수의 안개 속으로 다가가며 랭던은 전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상상의 문턱을 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결 같기만 한 이밤의 묘한 분위기가 랭던 주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호텔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소라고 불리는 경찰 반장을 기다리며 스핑크스의 지시로 지어진 투명한 피라미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에 갇힌거야.’
  랭던은 생각했다.
  거대한 회전문이 달린 정문으로 랭던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로비에는 흐릿한 불이 켜져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노크해야 하나?’
  하버드의 저명한 이집트 학자들 중 일찍이 피라미드의 정문을 두드리고 답을 구해본 자가 있는지 궁금했다. 손을 들어 유리를 두드리려는 순간, 아래쪽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인물이 있었다. 땅딸막한 남자는 어둠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처럼 보였다. 어깨에 두줄 단추가 달린 짙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한치의 실수도 없을 것 같은 권위를 풍기며 다가왔다. 휴대 전화기로 통화하던 남자는 문에 도착하자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랭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랭던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자 남자가 말했다.
  “저는 브쥐 파슈입니다. 중앙사법경찰국의 반장입니다.”
  남자의 어조는 귀에 거슬리는 굉음으로, 마치 폭풍이 몰려드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랭던은 손을 내밀었다.
  “로버트 랭던입니다.”
  파슈의 큰 손바닥이 랭던의 손을 으깰 듯이 감쌌다.
  “사진을 보았습니다. 당신네 요원은 자크 소니에르가 스스로 그런 것을 ……”
  흑단처럼 새까만 파슈의 눈동자는 잠겨 있었다.
  “랭던 씨. 당신이 사진에서 본 것은 소니에르가 한 일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4

  브쥐 파슈 반장은 넓은 어깨를 뒤로 젖히고, 턱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성난 황소처럼 몸을 움직였다. 검은 머리에 오일을 발라 뒤로 매끄럽게 넘겨 화살 모양의 앞머리가 두드러져 보였다. 돌출된 이마를 둘로 가르는 듯 한 중앙의 v자 모양의 머리는 함선의 뱃머리를 연상시켰다. 반장의 눈은 밟고 있는 바닥을 태우기라도 할 것 같았다. 모든 문제를 철저하고 엄격하게 다룬다는 명성 그대로, 반장의 눈은 화염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랭던은 반장을 따라서 유리 피라미드 아래의 낮은 중앙홀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두 명의 사법경찰 앞을 지나갔다. 메시지는 명료했다. 오늘 밤 파슈 반장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여기를 드나들 수 없는 것이다.
  홀로 내려오면서 랭던은 점점 치밀어 오르는 전율과 싸워야 했다. 파슈의 존재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 시간의 루브르는 묘지 같은 음산한 분위기 였다. 어두운 영화관의 통로처럼 계단은 발판마다 깔린 조명으로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랭던은 머리위의 유리에 닿아 진동하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투명한 지붕 바깥으로 분수에서 피어난 안개가 조명을 받아 흐릿하게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마음에 듭니까?”
  파슈는 넓은 턱으로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랭던은 이 말장난에 싫증이 나서 한숨만 내쉬었다.
  “예, 당신네 피라미드는 대단합니다.”
  파슈는 투덜거렸다.
  “파리의 얼굴에 난 흉터일 뿐이죠.”
  ‘원 스트라이크.’
  이 반장이란 작자는 재미라곤 없는 경직된 사고방식의 인간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랭던은 파슈가 미테랑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정확히 666장의 유리판을 사용해 이 피라미드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이상한 요청은 666이 사탄의 숫자라고 주장하는 음모론 애호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얘깃거리가 되었다.
  지하 로비로 더 내려가자, 입을 크게 벌린 것 같은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 로비로 더 내려가자, 입을 크게 벌린 것 같은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 17미터 아래에 건설된 6천 5백 평방미터의 새로운 로비가 끝없는 동굴처럼 뻗어 있었다. 루브르의 외관과 어울리도록 따뜻한 느낌의 황토색 대리석으로 건설된 지하 홀은, 보통 때엔 햇빛과 관광객들로 힘차게 맥박치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홀 전체가 차가운 교회당의 지하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어둡고 황량했다.
  “박물관의 보안 요원들은?”
  랭던이 물었다.
  “조사.”
  랭던이 자기 팀의 성실성에 의문이라도 제기한 것처럼 파슈는 간단히 대꾸했다.
  “명백하게, 출입이 금지된 누군가가 오늘밤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박물관의 모든 야간 경비원들은 지금 쉴리 관에서 조사받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 요원들이 박물관을 접수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랭던은 파슈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빨리 움직였다.
  “자크 소니에르 관장과 잘 아는 사이입니까?”
  반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파슈는 놀란 듯했다.
  “첫 만남이 오늘 밤이 될 뻔했다는 얘깁니까?”
  “예. 제 강의가 끝난 후 아메리칸 대학의 리셉션 자리에서 만날 작정이었죠. 하지만 관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파슈는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걸어가면서 랭던은 다른 피라미드를 언뜻 보았다.
  ‘역 피라미드.’
  중간층의 접합 부분에서 종유석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채광창이었다. 파슈는 아치 모양의 터널 입구로 통하는 짧은 계단으로 안내했다. 터널의 입구 위에는 ‘드농’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드농 관은 루브르의 3대구역(드농,쉴리,리슐리외)중 가장 유명한 구역이다.
  “오늘 만남은 누가 제안했습니까? 당신인가요. 아니면 관장인가요?”
  갑자기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질문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터널로 들어서면서 대답했다.
  “소니에르 씨가 제안한 것입니다. 몇 주 전의 관장의 비서가 전자메일로 연락해 왔습니다. 이번 달에 파리에서 강의가 있다는 얘기를 관장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뭘 의논하려 했지요?”
  “저도 모르죠. 하지만 예술에 관해서가 아니겠어요? 우리는 관심사가 비슷하니까요.”
  파슈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관장이 왜 만남을 제안했는지 당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얘기군요.”
  그랬다. 그 당시 랭던은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사생활이 알려지지 않기로 유명했고, 참석하는 자리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랭던은 자크 소니에르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랭던 씨, 관장이 살해된 오늘 밤에 당신과 무엇을 의논하려 했는지 짐작가는게 있습니까?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질문의 신랄함에 랭던은 불쾌했다.
  “정말이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물어보지 않았거든요. 연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저는 소니에르 씨의 작업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제 수업 시간에 소니에르 씨의 원문을 종종 사용할 정도로요.”
  파슈는 수첩에 이 사실도 적어 넣었다.
  두 사람은 드농 관을 절반 정도 걸어왔다. 랭던은 벽 쪽에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소니에르 씨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해의 대부분을 소니에르 씨의 주요 전문 분야를 다루는 책의 초고를 쓰는데 보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니에르 씨의 뇌를 끄집어내고 싶었지요.”
  파슈가 힐끗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파슈는 잘 이해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 주제에 관해서 소니에르 씨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는 얘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주제였습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랭던은 잠시 망설였다.
  “본질적으로, 원고 내용은 여신숭배에 관한 도상학입니다. 여성의 고결함에 대한 개념과 그와 연관된 예술과 상징들을 다루는 것이죠.”
  파슈는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니에르 씨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만 ……”
  “알겠습니다.”
  랭던은 파슈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지상에 나타난 최초의 여신을 다룬 도상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소니에르는 다산, 여신숭배,위카(땅 혹은 대지에 바탕을 둔 종교로, 새로운 이교도의 하나) , 신성한 여성에만 열정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장으로서 20년의 재임 기간 동안, 소니에르는 박물관에 여신과 관련된 지상의 예술품들을 최대한 수집하는 데 일조했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델피 신전의 여제사장의 쌍도끼부터 시작해 금 지팡이, 서 있는 작은 천사들 같은 티예 앙크(여성의 생식기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고리가 달린 T자 모양. 생식과 장수를 상징하며, 오늘 날 여성을 나타내는 기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백 점, 고대 이집트에서 사악한 영혼을 쫒아내는 데 쓰인 시스트럼(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여신 이시스 제사 때에 쓰던 금속악기) , 호루스를 기르는 여신 이시스의 모습을 묘사한 입상들의 당당한 진용에 이르기까지 루브르의 수집품은 엄청난 것이었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당신의 원고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당신 책에 도움을 주려고 만나자는 전화를 한 게 아닐까요?”
  랭던은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제 원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직 초고 상태이니까요. 그리고 편집장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파슈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랭던은 다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원고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신성한 여성의 기호들>이란 가제를 달아둔 3백 페이지가량의 초고는 기존의 종교적 도해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논쟁거리가 될 새로운 해석을 들이대고 있었다.
  랭던은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했다. 하지만 파슈가 더 이상 옆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돌아보자, 파슈는 5미터 정도 뒤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겠습니다. 아시겠지만 , 화랑은 걸어가기에는 꽤 머니까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파슈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드농 관의 기다란 두 층을 오르는 수고는 덜어줄 터였다. 그러나 랭던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성마른 얼굴로 파슈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뒤돌아보며 랭던은 한숨을 토해 냈다.
  ‘잘못 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랭던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랭던은 소년이었을 때 쓸모 없어진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구출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좁은 공간 안에서 철벅거리며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했었다. 그 후 폐쇄된 공간에서 병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스쿼시 코트 같은 곳 말이다.
  ‘엘리베이터는 안전한 기계다. 줄에 매달린 작은 금속상자일 뿐이야!’
  랭던은 스스로 타일렀지만, 결코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숨을 참으며 랭던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익숙한 아드레날린의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고작 이 층일 뿐이다. 십 초면 돼.’
  “당신과 소니에르 씨. 한번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까? 편지 왕래도 없었습니까? 우편으로 뭔가를 주고받은 적은 없습니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파슈가 물었다.
  역시 이상한 질문이었다.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없습니다.”
  그 사실을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처럼 파슈는 머리를 곧추세웠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파슈는 눈앞의 문짝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랭던은 자기를 둘러싼 네 벽들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쓰려고 노력했다.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반장의 넥타이 핀이 반사되어 비쳤다. 칠흑 같은 마노 보석 열세 개가 박힌 은제 십자가 모양이었다. 랭던은 적이 놀랐다. 열세 개의 보석이 박힌 십자가라는 뜻의 크룩스 젬마타(crux gemmata)라 불리는 상징이었다. 열세 개의 보석은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를 나타내는 기독교적인 표의문자였다. 경위야 어떻든 간에 랭던은 프랑스 경찰 반장이 자기의 종교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여기는 프랑스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 나라에서 기독교는 종교도 특권도 아니다.
  “이건 크룩스 젬마타입니다.”
  갑자기 파슈가 말했다.
  깜짝 놀란 랭던은 문에 반사된 파슈의 모습을 마주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멈추고 문이 열렸다.
  천장이 높기로 유명한 루브르 화랑의 확 트인 공간을 기대하면서, 랭던은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가 걸음을 내디딘 세계는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랭던은 놀라서 멈칫했다.
  파슈가 흘끗 쳐다보았다.
  “랭던 씨, 관람 시간 이후의 루브르는 본 적이 없겠지요?”
  ‘그런 적은 없죠.’
  태도를 바로하려고 애쓰면서 랭던은 생각했다.
  빠짐없이 조명을 받는 루브르 화랑들이 오늘 밤엔 놀라울 정도로 어두었다. 위에서 비추는 관람용 흰색 조명 대신에, 조도가 낮은 붉은 조명이 바닥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간헐적인 붉은 조명 조각들이 타일 바닥위로 엎질러진 것 같았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쳐다보며, 랭던은 이런 장면을 예상했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대부분 일류 화랑들은 전략적으로 밤에는 조도가 낮고 , 덜 위협적인 붉은 조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간에 경비요원들이 복도를 순찰할 때 , 그림이 빛에 과다 노출되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품을 상대적으로 어두운 곳에 두기 위한 배려였다. 오늘 밤 박물관 안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통 때라면 솟구쳐 보이는 아치형 천장이 낮고 어두운 공허한 공간으로만 보였다.
  “이쪽으로”
  파슈는 오른쪽으로 홱 돌더니 연결된 여러 개의 화랑을 지나갔다.
  파슈를 뒤따라가면서 랭던의 시력은 점차 어둠에 적응해갔다. 거대한 암실에서 현상되고 있는 사진들처럼 커다란 유화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랭던이 화랑을 지나갈 때, 그림들의 눈도 그를 따라왔다. 랭던은 박물관 특유의 익숙한 공기를 느낄수 있었다. 탄소 향이 희미하게 감도는 메마르고 탈이온화된 향기였다. 관람객들이 토해 놓은 부식성 강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사방에 설치된 석탄 필터가 장착된 산업용 습기 제거기 때문이었다.
  벽을 따라 올라간 높은 곳에서는 보안용 카메라들이 관람객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따.
  ‘우리가 당신을 보고 있다. 어느 것에도 손대지 마시오.’
  “모두 진짜인가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랭던이 물었다.
  “물론 아닙니다.”
  파슈는 고개를 저었다.
  랭던은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 크기의 박물관을 비디오로 감시한다는 것은 비용면에서도 말이 안되고, 효과 차원에서도 신통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비디오로 감시하려면, 몇백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큰 박물관들은 이제 봉쇄 정책을 펴고 있다. ‘도둑이 오지 못하게 막는 일은 그만두자. 차라리 도둑을 안에 가두어 버리자’는 의미다. 침입자가 예술품을 옮기려고 하면, 예술품이 있는 화랑 주변이 봉쇄되는 것이다. 도둑은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철창 안에 갇힌 자기 꼴을 보게 될 터였다.
  대리석 화랑 앞쪽에서 목소리들이 울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오른쪽으로 쑥 들어간 큰 방에서 나오는 듯했다. 밝은 불빛이 복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장실입니다.”
  반장이 말했다.
  관장실로 다가가면서 랭던은 소니에르의 우아한 취미를 엿보았다. 따뜻한 재질의 목재, 나이든 거장의 그림들, 엄청나게 큰 골동품 스타일의 책상, 그 위에는 완전 무장한 60센티미터 정도의 중세 기사상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은 전화를 하고 뭔가를 받아 적는 경찰 요원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중 한명은 소니에르의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 컴퓨터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관장실은 오늘 저녁 DCPJ의 임시 본부가 된 모양이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듣고 계십니까?”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랭던은 호텔 문 앞에서부터 출입 허가증을 달고 있었다. 파슈와 랭던은 어떤 상황에서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한 무리의 요원들을 남겨두고, 파슈는 랭던을 어두운 홀 아래로 안내했다. 루브르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인 대화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30미터정도 앞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랑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이탈리아 걸작품들이 모여 있는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방이다. 랭던은 이미 이곳에 소니에르의 시신이 누워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명한 기하학 문양의 마룻바닥이 폴라로이드 사진에 한치의 실수도 없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출입구는 거대한 강철 격자로 막혀 있었다. 중세의 성채들에서나 이용 했을 법한 격자다.
  “봉쇄용 보안 철창입니다.”
  격자 가까이 다가가서 파슈가 말했다.
  어둠 속의 철창은 탱크라도 가둘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랭던은 희미하게 불을 밝힌 동굴같은 대화랑을 철창 사이로 들여다보았다.
  “먼저 들어가십시요. 랭던 씨.”
  랭던은 돌아섰다.
  ‘나 먼저 들어가라고? 어디로’
  파슈는 격자 밑부분의 바닥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랭던은 아래를 보았다. 어둠속이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철창은 60센티미터가량 들어 올려져 있었다.
  “이곳은 루브르 보안요원들에게는 아직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경찰 과학수사국(PTS)에서 나온 저희 팀이 지금 막 조사를 끝냈습니다.”
  파슈가 입구를 가리켰다.
  “아래로 들어가십시오.”
  랭던은 겨우 기어 들어갈 좁은 공간을 응시하다고, 위에 매달린 육중한 철문을 올려다보았다.
   ‘농담이겠지?‘
  철문은 침입자를 내리치려고 기다리는 단두대 같았다.
  파슈가 프랑스어로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시간을 체크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덩치 큰 몸을 숙여 철창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파슈는 철창 사이로 랭던을 뒤돌아보았다.
  랭던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을 반질반질한 마룻바닥에 짚은 채, 배를 바닥에 깔고 앞으로 끌었다. 그러나 입고 있던 해리스 트위드의 목덜미가 철창에 걸려 찢어지고, 뒤통수를 철문에 박고 말았다.
  ‘아주 우아하군. 로버트.’
  서투르게 철창 밑을 빠져나온 후 일어서면서, 랭던은 오늘 밤이 아주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오푸스 데이의 새로운 미국 본사이자 회담 센터인 머리 힐은 뉴욕의 렉싱턴 가 243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1만 2천 평방미터짜리 빌딩은 4천 7백만 달러 이상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고, 붉은 벽돌과 인디애나 석회암으로 치장되어 있다. 메이 앤 핀스카가 디자인했고, 빌딩 안에는 백 개가 넘는 침실과 여섯 개의 식당, 도서실 거실 회의실 사무실이 있다. 2층과 8층,16층에는 목공예와 대리석으로 장식된 교회가 있고, 17층은 모두 주거 지역이다. 남자들은 렉싱턴 가에 위치한 정문으로 드나들었지만, 여자들은 다른 쪽에 있는 출입문을 사용해야 했다. 이 건물 안에서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항상 분리되어 있었다.
  이른 저녁,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는 자신의 아파트 펜트하우스에서 전통적인 검정 사제복을 입고 작은 여행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허리에 자줏빛 띠를 둘렀을 테지만, 오늘 밤은 일반인들과 섞여서 여행할 참이었다. 주교는 자신의 높은 지위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예리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만이 14캐럿짜리 자수정과 커다란 다이아몬드들, 그리고 수공예로 만든 미트라(주교들이 의식 때 쓰는 관)모양의 홀이 박힌 금반지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여행가방을 어깨에 짊어지면서 주교는짧은 기도를 올리고 아파트를 나섰다. 운전사가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은 아링가로사는 창문을 통해 어두운 대서양을 내려다보았다. 해는 이미 졌지만, 주교는 자기만의 별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전투는 승리할 것이다.’
  한 달 전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아무런 힘도 쓸수 없던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아찔할 뿐이었다.
  오푸스 데이의 수장으로서, 아링가로사는 지난 10년 간 자신의 삶을 오푸스 데이. 즉 ‘신의 사업’에 관한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바쳐왔다. 1928년 스페인 사제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보수적인 카톨릭 가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는 신의 사업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할 것을 권고했다.
  오푸스 데이의 전통철학은 프랑코 독재시절 이전의 스페인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1934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정신이 담긴 <길>의 출간과 함께 에스크리바의 메시지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책에는 평소 생활하면서 신의 사업을 행할 수 있는 999개의 명상이 수록되어 있었다. 현재 42개 언어로 번역되어 4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므로 오푸스 데이의 힘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오푸스 데이의 건물과 교육센터, 심지어 대학교까지 찾아볼 수 있다. 오푸스 데이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재정도 가장 안정된 가톨릭 교파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종교적인 냉소와 예찬, 텔레비전 선교사들이 판치는 요즘 시대에 날로 확장되는 오푸스 데이의 부와 힘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아링가로사는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푸스 데이를 뇌를 세척하는 종교의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초보수적인 기독교의 비밀 분파라고도 합니다. 어느 쪽입니까?”
  기자들이 가끔 묻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주교는 끈기 있게 대답했다.
  “그 어느쪽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한 가톨릭 교리를 열심히 따르는 일을 우선시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의 사업이란 게 반드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헌금으로 내고, 순결에 대한 서약과 채찍질이나 말총 허리띠를 통한 속죄를 포함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오푸스 데이의 극히 일부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푸스 데이에는 여러 참여 단계가 있습니다. 수천 명의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으며,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신의 일을 행합니다. 그밖의 사람들은 오푸스 데이의 수도원에서 고행의 삶을 선택했지요. 이러한 선택은 모두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푸스 데이의 모든 사람들은 신의 사업을 행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확실히 경탄할 만 한 원정이지요.”
  하지만 이런 이성적인 논리가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미디어는 항상 스캔들을 파고 들었다. 대부분의 큰 조직들처럼 오푸스 데이 역시 조직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잘못 인도된 몇몇 영혼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두 달 전, 오푸스 데이 그룹은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환락 상태를 종교 체험이라 믿고 환각제에 취한 신입회원들을 붙잡았다. 또 다른 대학교의 학생은 갈고리가 박힌 말총 허리띠를 하루 권장시간인 두 시간 넘게 사용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얼마전에는 삶에 환멸을 느낀 보스턴의 한 젊은 금융투자자가 자살을 기도하기 전에, 자기의 전 재산을 오푸스 데이에 넘긴다고 서명한 사건도 있었다.
  ‘잘못 인도된 양 떼 무리들.’
  마음은 신도들에게 향한 채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물론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FBI스파이. 로버트 한센의 공개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로버트 한센이 오푸스 데이의 신실한 회원이라는 것과, 자기방에 비디오 카메라를 몰래 설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센의 친구들은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한센이 자기 부인과 성행위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판사는 ‘독실한 가톨릭 교인의 유희로는 보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슬프게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오푸스 데이의 감시 네트워크(ODAN)라고 알려진 새로운 감시단체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단체의 인기 웹사이트인 www.odan.org는 오푸스 데이 구회원들의 증언을 빌려 ,오푸스 데이 가입을 경고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이제 미디어는 오푸스 데이를 ‘신의 마피아’ 혹은 ‘그리스도의 제사’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아링가로사는 오푸스 데이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는지 비평가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오푸스 데이는 바티칸의 전적인 승인과 축복을 받고 있었다.
  ‘오푸스 데이는 교황 자신의 개인적인 교파다.’
  하지만 최근에 오푸스 데이는 미디어보다 훨씬 강력한 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아링가로사 자신도 몸을 숨길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적 …… 다섯달 전에 힘의 균형이 변화무쌍하게 흔들린 사건이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그 충격에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시작한 전쟁을 아직 모르고 있어.”
  비행기 창문 밖으로 어두운 대서양을 내려다보며 아링가로사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순간 아링가로사의 눈은 비행기 창에 비친 낯선 자기 얼굴에 머물렀다. 납작하게 흰 코가 어두운 장방형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코는 젊은 선교사 시절 , 스페인에서 한방 얻어맞아 주저앉은 것이다. 신체 결함은 이제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아링가로사는 영혼의 세계에 있지, 육체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가 포르투칼의 해안을 통과할 때, 아링가로사의 사제복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 전화기가 진동했다. 비행 도중 휴대 전화기의 사용을 금하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 통화는 놓칠 수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이 번호를 알고 있고, 그 사람이 이 휴대 전화기를 우편으로 보내준 것이다.
  흥분된 감정으로 주교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사일래스가 쐐기돌의 행방을 알아냈소. 돌은 파리에 있소. 생 쉴피스 교회 안이오.”
  전화를 건 사람이 말했다.
  아링가로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까이 있군요.”
  “즉시 쐐기돌을 얻을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의 힘이 필요하오.”
  “물론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휴대 전화기의 전원을 껐을 때, 아링가로사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공허한 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주교는 자신이 벌이기 시작한 일 때문에 난쟁이처럼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8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일래스라는 이름을 가진 알비노는 물이 담긴 작은 대야 앞에 서 있었다. 등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문질러, 붉은 피가 물에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히솝(히솝풀. 성서의 우술초로 , 유대인은 부정을 없애는 의식에 그 가지를 썼다.)으로 나를 정화시키리라. 그럼 나는 깨끗해질 것이다.’
  찬송가를 인용하면서 사일래스는 기도했다.
  ‘나를 씻자. 그럼 나는 눈보다 하얗게 될 것이다.’
  사일래스는 한동안 느끼지 못하던 어떤 예감이 솟아남을 알 수 있었다. 그 예감은 사일래스를 전율케 했다. 지난 10년간 사일래스는 자기의 죄를 씻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 과거의 폭력성을 지우면서 <길>의 내용을 따랐다. 하지만 오늘밤, 모든 것이 힘차게 돌아오고 있었다. 묻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싸우던 증오가 다시 샘솟고 있었다. 자기의 과거가 이토록 빠르게 떠오르는 것에 사일래스는 놀라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기억과 함께 기술도 생각났다. 거칠지만 아주 유용한 기술이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평화…… 비폭력……사랑.’
  이것은 사일래스가 처음으로 받은 가르침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적들이 이 말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힘으로 신을 위협하는 자들은 힘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확고 부동한 힘과 말이다.’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꺾으려는 자들에 대항해 그들의 신념을 지켜왔다. 오늘 밤 사일래스는 그 전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상처를 말리면서 사일래스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었다. 양모로 만들어진 어두운 색깔의 망토는 사일래스의 흰 피부와 머리카락을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허리에 매단 밧줄을 꽉 죄면서, 사일래스는 후드를 머리위로 뒤집어썼다. 거울 속에서 사일래스의 붉은 두 눈은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6

  보안 철문을 기어 나온 로버트 랭던은 대화랑의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랭던은 길고 깊은 협곡 같은 화랑 입구를 응시했다. 화랑의 양쪽에는 9미터 높이의 벽이 어둠 속에서 증발하듯 솟아 있었다. 천장 케이블에 매달린 다 빈치와 티치아노, 카라바조의 멋진 작품들 사이로 야간 조명등이 부자연스러운 붉은 불빛을 발산하며 위를 향해 있었다. 귀족과 정치인의 초상화를 비롯해 정물화와 종교적인 장면, 풍경화 들이었다.
  대화랑은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많은 관람객에게 더 놀라운 경험은 기하학 패턴으로 유명한 마룻바닥이다. 대각선의 참나무 널빤지를 눈부신 기하학 디자인으로 배열한 마룻바닥은 시각적인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닥의 다차원적인 네트워크는 관람객들에게 매 걸음 변하는 표면위로 화랑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마룻바닥의 무늬를 따라가던 랭던의 눈에 예기치 못한 물체가 잡혔다. 랭던 왼쪽으로 2,3미터 앞에 떨어져 있는 물체 주위에는 경찰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랭던은 파슈를 향해 돌아섰다.
  “바닥에 있는 저것 …… 카라바조의 작품입니까?”
  쳐다보지도 않고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하건대, 그 그림은 2백만 달러도 더 나갈 터였다. 그런데 폐기된 포스터 그림처럼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저 그림이 왜 바닥에 누워 있는 겁니까?”
  파슈는 움직이지 않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곳은 범죄 현장입니다. 랭던 씨, 우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저 캔버스는 관장이 벽에서 잡아 뜯어낸 것입니다. 관장은 그렇게 해서 보안 시스템이 움직이게 한 거죠.”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마음에 그려보며 랭던은 입구를 뒤돌아보았다.
  “관장은 자기 사무실에서 공격을 받고, 이 대화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벽에서 잡아떼어, 보안 철문을 작동시킨 겁니다. 즉시 모든 출입구가 차단되면서 철문이 떨어졌을 겁니다. 철문이 내려진 여기가 대화랑으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랭던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 관장이 대화랑 안에서 범인을 잡았단 말입니까?”
  파슈는 고개를 저었다.
  “보안 철문은 소니에르와 범인을 갈라놓았습니다. 살인범은 홀 저쪽에 있었죠. 그리고 이 철문을 통해 소니에르를 쐈습니다.”
  파슈는 그들이 막 기어서 통과한 철문의 쇠창살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렌지색 딱지가  매달려 있었다.
  “PTS 팀이 철문에서 탄흔 잔재를 찾아냈습니다. 범인은 쇠창살 사이로 총을 쐈고, 소니에르 씨는 여기서 홀로 죽어갔습니다.”
  랭던은 소니에르의 시신이 담긴 사진을 떠올렸다.
  ‘경찰은 소니에르 스스로 했다고 하는데……’
  랭던은 앞에 펼쳐진 광대한 규모의 화랑을 쳐다보았다.
  “그럼 소니에르 씨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파슈는 십자형의 넥타이 핀을 바로잡은 뒤 걷기 시작했다.
  “잘 아시겠지만, 대화랑은 상당히 깁니다.”
  랭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화랑의 길이는 대략 450미터, 워싱턴 기념비 세 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다. 화랑의 폭 역시 숨을 들이쉴 만은 했다. 열차 두량을 나란히 세워 놓은 넓이 정도는 되었다. 화랑의 중앙에는 군데군데 입상들과 거대한 도기품들이 전시되어 복도를 멋스럽게 가르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한쪽 벽을 따라 관람하다가, 반대편 벽으로 돌아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파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면을 주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많은 걸작들을 일별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랭던은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야.’
  랭던은 자신을 달랬다.
  조도가 낮은 붉은색 조명등은 불행히도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소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 겪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밤은 로마에서 죽을 뻔한 그날과 매우 유사했다. 랭던은 다시 비토리아를 떠올렸다. 수개월 동안 비토리아는 랭던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에서 겪은 일이 겨우 1년 전이라는 것을 랭던은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수십년은 지난 것 같았다.
  ‘또 다른 삶.’
  비토리아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지난 12월이었다. 엽서에는 분규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자바해로 떠난다는 내용이 씌어있었다. 쥐가오리의 이동을 추적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이용하는 무슨 물리학이라고 했다. 랭던은 비토리아 베트라 같은 여자가 대학 캠퍼스에서 자기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은 결코 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로마에서의 만남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열망을 마음에 심어놓았다. 독신생활에 대한 오랜 애착과 거기서 얻는 자유로움이 어느틈엔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예상치 못한 공허감이 랭던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랭던과 파슈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이렇게 멀리까지 갔습니까?”
  “소니에르 씨는 위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서서히 죽어 갔을 겁니다. 십 오분에서 이십 분 정도 걸렸겠지요. 분명히 소니에르 씨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랭던은 섬뜩해서 돌아보았다.
  “보안요원이 도착하는 데 십오 분이나 걸렸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경보음이 울리면 박물관 보안요원은 즉시 행동합니다. 그들은 대화랑이 봉쇄되었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쇠창살을 통해 화랑안.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지요.  보안요원들이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고 합니다. 필시 범인일 거라 가정하고, 규정대로 사법경찰에 연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착해서 철문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들어올리고, 저는 무장한 요원 부대를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요원들은 화랑을 점거해 가면서 침입자를 구석으로 몰아갔지요.”
  “그리고요?”
  “안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니에르 씨외에는요.”
  파슈는 저 멀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랭던의 시선이 파슈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파슈가 화랑 중앙의 커다란 대리석 입상을 가리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상을 지나, 30미터쯤 지난 지점에 휴대용 조명기구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마룻바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진홍색 화랑 안에서 하얀 조명을 받고 있는 부분은 정말이지 섬처럼 보였다. 빛 한가운데에는 현미경 밑에 놓인 벌레처럼 관장의 시신이 마룻바닥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사진을 봤을 테니,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겁니다.”
  파슈가 말했다.
  시체로 다가가면서 랭던은 차디찬 냉기를 느꼈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가장 기이한 장면이 앞에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의 핏기 없는 시신은 사진에서처럼 바닥에 누워있었다. 랭던은 강한 조명 불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신 위로 몸을 숙였다. 기묘한 형태로 자기 몸을 배열하느라 삶의 마지막 몇 분을 써버렸을 소니에르가 다시금 놀라웠다.
  소니에르는 제 나이에 맞는 노인으로 보였다. 모든 근육조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가지들은 벗어서, 마루 위에 단정하게 놓아두었다. 소니에르는 자기 등을 화랑의 긴 축과 정확히 일치시켜 폭 넓은 화랑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는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나 아이들이 만든 눈 천사처럼 바깥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사지를 벌린 사람처럼 보였다.
  총알이 살을 뚫고 지나간 듯 갈비뼈 바로 아래에는 피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바닥에 흘러내린 양이 적은 것을 보니, 놀랍게도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니에르의 왼쪽 집게손가락은 피투성이였다. 자기 손가락을 상처 부위로 쑤셔 넣은 게 틀림없었다. 소니에르는 자신의 피를 잉크삼고 벌거벗은 복부를 캔버스 삼아, 배 위에 기호 하나를 그려놓은 것이다. 오각형의 별 모양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직선이었다.
  ‘별표.’
  소니에르의 배꼽에 중심을 둔 별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는데, 현장을 직접 목격하니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소니에르가 직접 했다.’
  “랭던씨?”
   파슈의 짙은 눈동자가 다시 랭던에게 머물렀다.
  답하는 랭던의 목소리는 거대한 공간의 내부가 텅 빈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은 별표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호 중 하나입니다. 기원전 사천 년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을 겁니다.”
  “무엇을 뜻하는 거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랭던은 항상 망설였다. 하나의 기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얘기한다는 것은 노래가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지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미는 달랐다. 미국에서 KKK(Ku Klux Klan) 집단의 하얀 모자는 증오와 인종차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종교적 신념의 의미를 갖는 의복의 하나다.
  “기호를 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기본적으로 별표는 이교도의 종교적 기호입니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숭배로군요.”
  “아닙니다.”
  어휘 선택이 더 명확했어야 함을 깨닫고 랭던은 즉시 말을 고쳤다.
  요즘들어, ‘이교도(pagan)’라는 용어는 악마숭배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몰이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시골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파가누스(paganus)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교도‘는 자연 숭배처럼 오래된 시골풍의 종교를 고집하면서, 기독교에서 볼 때 아직 교화되지 않았거나 교리 따위를 주입받지 않은, 문자 그대로 시골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 시골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두려움은 너무커서, 한 때 시골 사람(villager)을 뜻하던 무해한 단어가 악당(villain)이라는 사악한 영혼을 나타내는 단어를 낳기까지 했다.
  “별표는 자연숭배와 관련된 기독교 이전의 기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세상을 두 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죠. 신과 여신이 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양이라고도 하죠. 음양이 균형을 잘 이룰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룹니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혼돈이 생기죠.”
  랭던은 소니에르의 복부를 가리켰다.
  “이 별표는 모든 것의 반쪽인 여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종교 역사가들이 ‘신성한 여성’ 또는 ‘성스러운 여신’이라고 부르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소니에르 씨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소니에르 씨가 자기 배 위에다 여신의 기호를 그렸다는 말입니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랭던은 그렇다고 해야만 했다.
  “가장 구체적으로 해석하자면, 별표는 성애와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기호화한 것입니다.”
  알몸의 시신을 바라보며 파슈는 신음소리를 냈다.
  “초기 종교는 자연의 신성한 질서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여신 비너스와 행성인 비너스, 즉 금성같은 것이었죠. 여신은 밤시간 동안 하늘을 지배했고, 수많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너스,동방의 별, 이슈타르, 아스타르테. 모두 자연과 어머니인 지구와 연결된 강력한 여성형 개념입니다.”
  파슈는 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든 간에 악마숭배라는 개념이 더 마음에 드는 듯 말이다.
  랭던은 별표의 가장 놀라운 의미는 설명하지 않았다. 비너스와 관련된 그래픽의 기원이었다. 천문학도 시절, 8년마다 황도를 가로지르는 금성, 즉 비너스의 자취가 완벽하게 별 모양을 그린다는 것을 배우고 랭던은 기절할 뻔했다. 이 현상을 관찰한 옛날 사람들도 랭던처럼 매우 놀랐고, 비너스와 그 별 모양은 완벽, 아름다움 그리고 성애의 순환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마법 같은 비너스의 매력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리스인들은 올림픽 게임을 조직할 때 비너스의 8년 주기를 도입했다. 현대 올림픽 게임의 스케줄이 여전히 비너스 주기의 절반을 따른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오각형의 별 모양이 공식 올림픽 휘장이 될 뻔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조화와 포용이라는 올림픽 게임의 정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오각형 별은 교차하는 다섯 개의 고리로 바뀐 것이다.
  파슈가 불쑥 끼어들었다.
  “랭던 씨, 저 별은 분명히 악마와 관계가 있습니다. 당신네 미국 공포영화들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맙군, 할리우드.’
  악마 같은 연쇄 살인범 영화에서 오각형 별은 이제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다. 다른 악마부호들과 함께 사탄 추종자들의 아파트 벽에 휘갈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쓰인 기호를 보면, 랭던은 항상 실망스러웠다. 별의 진짜 기원은 아주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과는 달리, 별 모양에 대한 악마적인 해석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별이 상징하는 개념은 수천년을 거치며 왜곡되어 왔지요. 이번 경우에는 유혈 참사에서 쓰였고요.”
  “제가 설명을 잘 따라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랭던은 파슈의 십자형 넥타이 핀을 흘끗 쳐다보았다. 말의 요점을 어떻게 잘 표현해서 이해시켜야 할지 난감했다.
  “교회 말입니다. 반장님. 기호들은 아주 복원력이 강합니다. 하지만 별 모양의 의미는 초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바뀌어 버렸지요. 이교도를 뿌리뽑고 대중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목적으로 바티칸이 캠페인을 벌였는데, 그 일부가 이교도의 신과 여신들에 대한 더러운 캠페인이었습니다. 신성한 상징들을 악한 것으로 둔갑시킨 겁니다.”
  “계속하십시오.”
  “난리통인 시대엔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롭게 출현한 권력은 기존의 기호들을 접수해서, 그 의미를 지워버리기 위한 시도로 두고두고 기존의 기호들을 폄하합니다. 이교도의 상징과 기독교의 상징이 맞붙은 전쟁에서, 이교도가 진 것이죠.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악마의 갈퀴가 되고, 지혜로운 할머니의 뾰족한 모자는 마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비너스의 별이 악마의 기호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랭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불행하게도, 미국 육군 역시 별 모양의 의미를 오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별 모양은 전쟁을 나타내는 첫쨰 상징이 되어 버렸죠. 모든 전투기에 별을 그려 넣었고, 모든 군 장성들의 어깨에는 별이 달려 있으니까요.”
  ‘사랑과 미의 여신에게 너무한 일이지.’
  파슈는 독수리처럼 펼쳐진 시신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그럼 이 시신의 자세는요? 뭔가 짐작되는 거라도 있습니까?”
  랭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자세는 별 모양과 신성한 여성의 관계를 단지 보강하고 있습니다.”
  파슈의 표정이 흐려졌다.
  “무슨 말씀인가요?”
  “반복입니다. 기호를 반복하는 것은 의미를 강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소니에르씨는 자기 몸으로 별 모양을 만든 겁니다.”
  ‘별 하나가 좋은 거면, 두 개는 더 좋으니까.’
  매끄러운 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 넘기면서, 파슈의 눈은 소니에르의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의 다섯 꼭지점을 훑고 지나갔다.
  “흥미로운 분석이군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저 알몸은?”
  파슈는 늙은 남자의 벌거벗은 몸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소니에르 씨는 왜 옷을 벗었을까요?”
  ‘빌어먹을, 좋은 질문이군.’
  랭던 역시 사진을 본 순간부터 궁금했다. 랭던의 추측은 전라의 육체 역시 성애의 여신인 비너스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 문화는 남녀의 육체 결합과 비너스의 관계를 많은 부분 지워버리고 있지만, 날카로운 어원학의 눈으로 보면 비니리얼(venereal : ‘성교의 , 성교로 일어나는’의 뜻)이라는 단어에서 비너스의 본래 의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랭던은 여기까지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파슈 씨, 소니에르 씨가 왜 자기 몸에 기호를 그렸는지, 왜 이런식으로 자기 몸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명백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크 소니에르 같은 분은 별을 여성 신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호와 신성한 여성의 상관관계는 역사가들이나 기호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자기 피를 잉크로 쓴 것은요?”
  “쓸 수 있는 다른 도구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파슈는 잠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나는 …… 경찰이 어떤 법정 절차를 따를지를 예상하고 소니에르씨가 피를 사용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
  “이 왼손을 보십시오.”
  랭던은 관장의 창백한 팔을 지나 왼손까지 살펴보았지만 ,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몸을 숙여 들여다보다가, 놀랍게도 관장이 커다란 펠트펜을 꽉 쥐고 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소니에르 씨를 발견했을 떄 이것을 쥐고 있어습니다.”
  파슈는 랭던을 남겨두고 5,6미터 떨어진 곳에 놓인 이동식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여러 전선과 전자기구, 수사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탁자 둘레를 걸으며 파슈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펜을 잘 아십니까?”
  펜의 상표를 보기 위해 랭던은 더 깊숙이 몸을 숙였다.
  ‘뤼미에르 누아르 스타일.’
  랭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적외선이나 자외선 같은 불가시(不可視)광선 펜 또는 워터마크 첨필로 알려진 특수 펠트펜은 원래 박물관 사람이나 예술품 복원가, 위조 감식 경찰관들이 고안한 것으로, 물건에 보이지 않는 표시를 해둘 때 사용한다. 부식되지 않는 알코올 바탕의 형광 잉크로 쓰인 첨필은 오로지 불가시광선에서만 보인다. 요즘의 박물관 보수 유지 직원들은 매일매일 박물관을 순찰할 때 이 펜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복원이 필요한 미술품들의 액자에 보이자 않게 V표시를 해둔다.
  랭던이 일어서자, 파슈는 하얀 조명기로 걸어가서 전원을 꺼버렸다. 화랑은 순식간에 어둠에 파묻혔다.
  랭던은 불안했다. 파슈의 몸이 밝은 자주색 조명 아래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파슈는 휴대용 전등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자주색 빛이 안개처럼 파슈를 감싸고 있었다.
  자줏빛으로 눈을 빛내면서 파슈가 말했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경찰은 피나 다른 법정 증거를 찾기 위해 범죄 현장을 조사합니다. 이때 불가시광선 조명을 사용하죠. 이제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이 되실 겁니다……”
  파슈는 불쑥 시체의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를 보던 랭던은 놀라 펄쩍 뛰었다.
  자기 앞 마룻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기묘한 광경을 보았을 때, 랭던의 심장은 무섭게 뛰었다. 관장이 휘갈겨쓴 필기체 글씨가 관장의 몸뚱아리 옆에서 보라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관장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바라볼수록, 랭던은 오늘 밤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문장을 다시 한 번 읽고 난 랭던은 파슈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이죠?”
  파슈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났다.
  “선생, 정확하게 그서이 당신이 여기에서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소니에르의 사무실에서는 콜레 부관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와, 관장의 거대한 책상 위에 설치된 오디오 계기판 위로 몸을 웅크렸다. 콜레는 AKG 헤드폰을 조절하고, 하드 디스크의 녹화 시스템에 붙은 입력 레벨을 살폈다. 모든 시스템은 제대로였다. 마이크는 아무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오디오도 수정처럼 깨끗했다.
  ‘진실의 순간이로군.’
  콜레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미소지으면서 눈을 감은 콜레는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대화랑의 마지막 대화를 즐기는 기분으로 들었다.

7

  생 쉴피스 교회 2층, 성가대의 발코니 왼쪽에는 소박한 방이 있었다. 돌로 된 바닥에 최소한의 가구들만 갖춘 두 칸짜리 방은 지난 10년 동안 상드린 비에유 수녀의 숙소였다. 누군가 물어보면 근처의 수도원이 공식 집이라고 말했을테지만, 수녀는 교회의 조용함을 더 좋아했다. 침대와 전화기, 전기 히터가 있는 2층과 더불어 조용한 교회가 수녀는 편했다.
  교회의 보수 유지 관리자로서, 상드린 수녀는 교회 운영에 비종교적인 모든 일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회의 일반 보수 유지를 비롯해서 보조 인력과 안내원들의 고용 문제,폐관 후의 문단속, 성체 포도주나 성체 빵 같은 필수품 주문도 상드린 수녀의 몫이었다.
  작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수녀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피곤해하며 수녀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생 쉴피스 교회의 상드린 수녀입니다.”
  “여보세요? 수녀님.”
  상드린 수녀는 일어나 앉았다.
  ‘대체 몇 시 지?’
  자기 상관인 신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신부는 한 번도 밤중에 깨운 적이 없다. 신부는 미사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서 곧장 잠을 청하는 무척 경건한 사람이었다.
  신부는 불안하고 조바심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방금 영향력있는 미국인 주교 한 분께서 전화를 하셨는데, 수녀님도 아시죠?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라고.”
  “오푸스 데이의 수장 말인가요?”
  ‘물론 그 사람을 알고 있지. 교회에 있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
  오푸스 데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성장했다. 은총을 입었다고 할 정도로 그 성장은 비약적이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오푸스 데이를 ‘교황의 사적 자치단’으로 승격시킨 1982년 부터였다. 이때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모든 예배 관행을 승인한 셈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통상 바티칸 은행으로 불리는 ‘종교업무를 위한 바티칸 협회’에 오푸스 데이가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보냈다고 알려진 그해에 오푸스 데이가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 돈이 도산 위기에 놓여 있던 바티칸 은행을 구했다고 한다. 눈썹을 몇 번 들어 올림으로써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창시자를 성인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급행열차에 앉힌 것이다. 죽은 사람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려면 백 년 정도를 기다려야 했지만, 이 경우에는 고작 20년으로 시간을 단축해 버린 것이다. 로마에서 오푸스 데이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상드린 수녀는 왠지 의심스럽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교황에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링가로사 주교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기 신도중 한 사람이 오늘 밤 파리에 있다고……”
  신부의 목소리는 불안했다.
  이상한 요청을 듣고 있던 상드린 수녀는 혼란스러웠다.
  “죄송합니다만, 그 오푸스 데이 신도가 교회 방문을 내일 아침까지 미룰 수 없다고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링가로사 주교를 태운 비행기가 벌써 떠났답니다. 주교가 부탁한 신도는 생 쉴피스를 둘러보기를 꿈꿔 왔다는군요.”
  “하지만 낮에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텐데요. 둥근 창을 통과하는 햇살이라든가, 해시계에 드리워진 그림자들, 이런 게 우리 교회를 독특하게 만들잖아요.”
  “수녀님,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신도가 교회 안으로 들어 갈수 있게끔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 사람이 거기로 갈 겁니다. 한 시쯤이라고 하던가? 이십 분밖에 안 남았군요.”
  상드린 수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습니다. 신부님,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신부는 고맙다고 얘기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리둥절한 수녀는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침대에 잠시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잠의 흔적을 떨치려고 애쓰면서, 예순 살 먹은 몸은 쉽게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 한 통은 수녀의 감각을 확실히 깨워 놓았다. 수녀는 오푸스 데이가 항상 불편했다. 육체의 고행이라는 비밀의식을 고수하는 것 외에도 여성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중세 시대나 다름 없었다. 오푸스 데이의 남자 신도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동안에 여성 신도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남자 신도들의 방을 청소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상드린 수녀는 충격을 받았다. 또 남자들은 짚으로 만든 매트에서 잠을 자지만, 여자들은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잔다고 한다. 여자들은 육체의 고행을 위해 남자들보다 많은 조건을 참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브가 지식의 사과를 한 입 깨물었을 때부터, 여성에게는 영원히 그 빚을 갚아야 할 어두운 운명이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들이 점진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오푸스 데이는 그런 흐름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수녀는 부탁을 받은 입장이었다.
  침대에서 다리를 빼내면서 상드린 수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맨발에 닿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냉기가 몸을 타고 올라올 때 수녀는 예기치 못한 두려움을 느꼈다.
  ‘여자의 직감?’
  신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상드린 수녀는 자기의 영혼의 고요한 목소리 안에서 평화를 찾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오늘 밤 그 목소리는 수녀를 둘러싼 텅 빈 교회만큼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8

  랭던은 마룻바닥에 휘갈겨 쓴 자줏빛의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크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는 랭던의 상상에서 벗어난,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랭던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별 모양이 악마 숭배와 관련되었을 거라는 파슈의 직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소니에르는 악마라는 표현을 그대로 남긴 것이다.
  파슈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암호해독 요원이 벌써 작업을 마쳤을 겁니다. 우리는 이 숫자들이 소니에르를 죽인 자를 밝혀줄 열쇠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전화 교환국이나 무슨 신분증에 나와 있는 번호일지도 모르죠. 이 숫자들이 뭔가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랭던은 숫자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떤 상징을 도출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니에르가 의도한 바가 있다 해도 랭던에게는 숫자들 모두 무작위로 뽑힌 것 같았다. 감각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상징의 해석 절차를 밟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여기 있는 별 모양과 글자, 숫자들은 모두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도 전혀 다른 별개의 것들로 보였다.
  “랭던 씨가 앞서 단언한 대로, 소니에르의 행위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여신숭배라든가, 뭐 그런 연장선에 있는 뭔가를 말이죠. 그런데 이 메시지가 어떻게 들어맞는 겁니까?”
  랭던은 파슈의 얘기가 입에 발린 칭찬임을 알고 있었다. 이 기괴한 메시지는 여신숭배라는 랭던의 시나리오와는 조금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저 구절은 무슨 규탄처럼 보이는데요, 안 그런가요”
  파슈가 말했다.
  랭던은 대화랑에 홀로 갇힌 관장의 마지막 몇 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관장은 자기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의 글은 논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자기를 살해한 범인에 대한 규탄이라…… 이치에 맞는 것 같군요.”
  “물론 제 직업은 그놈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랭던씨,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 눈에는 저 숫자들말고, 문자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이상합니까?”
  ‘제일 이상한 것?’
  화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남자가 자기 몸에 별모양을 그렸다. 바닥에는 이상한 비난의 글을 휘갈겨 놓았다. 이런 장면에서 이상하지 않은 게 무엇이겠는가?
  “드라코 같은? ‘드라코 같은 악마’라는 어휘를 선택한 게 이상해 보이는 군요”
  랭던은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했다. 기원전 7세기의 무자비한 정치가 드라코를 언급한 것이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드라코 같은? 여기에서 소니에르 씨의 어휘 선택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파슈의 목소리에는 이제 성급함이 묻어났다.
  파슈의 마음에 어떤 문제들이 들어 있는지 랭던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드라코와 파슈는 서로 사이 좋게 지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파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니에르 씨는 프랑스인입니다. 그리고 파리에 삽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남기려고 소니에르 씨는……”
  “영어를 사용했죠”
  반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랭던은 말을 받았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니에르가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말을 남길 때 왜 영어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랭던은 어깨를 움츠렸다.
  파슈는 소니에르의 복부에 그려진 별을 다시 가리켰다.
  “악마숭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직도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랭던은 이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 기호와 문자는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분명하게 해줄 수도 있겠군요.”
  시체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파슈가 불가시광선 조명등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더 넓게 주위를 비추기 시작했다.
  “자, 지금은요?”
  놀랍게도 미완성의 원이 관장의 몸 둘레에서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 관장은 누워서, 자기 둘레에 여러 차례 호(弧)를 그렸을 것이다. 원 안에 자기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순간 번쩍 생각이 나면서 의미가 명료해졌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랭던은 숨이 막혔다. 소니에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스케치를 자기 몸으로 묘사한 것이다.
  해부학에서 그 당시의 가장 정확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는 세계 도처에서 티셔츠에, 포스터에, 컴퓨터의 마우스패드에 그려진 근대 문화의 상징이다. 이 축복받은 스케치에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팔다리를 쭉 뻗은 알몸의 남자가 완벽한 원 안에 들어가 있다.
  ‘다 빈치’
  랭던은 전율을 느꼈다. 소니에르의 의도는 명백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장은 옷을 벗고, 비트루비우스의 이미지대로 자기 몸을 펼쳐 보인 것이다.
  원은 놓쳐 버린 중요한 요소였다. 원은 보호를 나타내는 여성적인 상징이다. 알몸의 남자 둘레에 쳐진 원은 다 빈치의 메시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알몸의 남자 둘레에 쳐진 원은 다 빈치의 메시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 이제 질문은 왜 소니에르가 이 유명한 스케치를 모방하려고 했는가였다.
  “랭던 씨, 당신 같은 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흑예술(성서에서 유래된 종교인 기독교나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면 신을 통하거나 신을 위한 예술은 백예술이지만, 악마나 사탄을 위한 예술은 흑에술이다.)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아실테죠?”
  랭던은 다 빈치에 관한 파슈의 지식에 놀랐다. 확실히 이 사건이 악마숭배와 관련 있으리라는 반장의 의심을 설명해 주는 면목이기도 했다. 다 빈치는 역사가들에게, 특히 기독교에서는 다루기 힘든 주제다. 다 빈치는 미래를 내다보던 천재였지만 동성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신성한 질서를 숭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끊임없이 다 빈치를 신에게 대적하는 죄악의 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술가로서 기이한 괴벽은 악마적 분위기를 풍기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시체를 도굴한다든지, 남들이 읽을 수 없게 글자를 거꾸로 쓴 불가사의한 일기를 간직한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다 빈치는 자기가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연금술이 있다고 믿었고, 죽음을 지연시킬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개발해 신을 속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 빈치의 발명품 중에는 끔찍하고, 누구도 결코 상상하지 못한 전쟁 무기와 고문도구들도 있었다.
  ‘오해는 불신을 낳는 법이다.’
  랭던은 생각했다.
  심지어 숨이 멎을 정도의 엄청난 기독교적 작품들마저, 정신의 위선으로 유명하던 이 예술가의 명성을 더 키워 놓았을 뿐이다. 다 빈치는 바티칸에서 돈벌이가 되는 수백 건을 의뢰받아서 기독교적 주제들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의 믿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사업 수완, 즉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다 빈치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즐거움을 위해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의뢰인의 손을 콱 깨물기도 했다. 많은 기독교적인 그림들에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기호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의 믿음에 대한 헌정사나 교회에 대한 미묘한 경멸을 기호로 숨겨 놓은 것이다. 랭던은 영국 런던의 국립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의 비밀생활: 기독교 예술에 나타나는 이교도적 상징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한 적도 있다.
  “반장님의 염려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 빈치는 실제로 흑예술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외적일 정도로 정신적인 인간이었지요. 비록 교회와 끊임없이 투쟁을 했지만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랭던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랭던은 바닥에 있는 메시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그래서요?”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신중하게 말에 무게를 실었다.
  “방금…… 소니에르 씨가 다 빈치의 많은 정신적 이념을 공유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현대 종교에서 신성한 여성을 자꾸 배제하려고 하는데에 따른 걱정을 포함해서 말이죠. 단지 현대 교회가 여신을 악마로 둔갑시킨 데 대한 좌절감을 다 빈치의 좌절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다 빈치의 유명한 그림을 모방해서 말입니다.”
  파슈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그럼 랭던 씨는, 소니에르가 교회를 불구의 성인이자 드라코 같은 악마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의견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지만, 별 모양은 자기 생각을 어느 정도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제 말은 소니에르 씨가 여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만큼 그러한 역사를 지워버리려고 한 집단도 없습니다. 소니에르 씨가 마지막 작별인사로 자기의 깊은 실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실망이라고요? 이 메시지는 실망보다는 분노에 가깝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파슈의 목소리는 적대적으로 들렸다.
  랭던은 인내심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장님, 반장님은 소니에르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제 직관을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에 관한 제 나름의 답을 드린 겁니다.”
  “그럼 이것이 교회를 고발하는 얘기란 말입니까?”
  이를 악물고 말해서 그런지, 파슈의 턱은 뻣뻣해 보였다.
  “랭던 씨,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죽음을 보았소만, 이것 한 가지만은 얘기해 두겠소.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될 때,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모호한 정신적인 진술서를 쓰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일 겁니다.”
  속삭이는 것 같은 파슈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복수, 저는 소니에르 씨가 우리에게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말해 주기 위해 이런 표현을 남겼다고 믿습니다.”
  랭던은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맞지 않다고요?”
  랭던은 지치고 화도 난 상태에서 되받아쳤다.
  “예, 반장님은 분명히 소니에르 씨가 관장실에서 자신이 초대했을 누군가에게 저격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관장은 자기를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결론짓는게 이치에 맞습니다.”
  파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십시오”
  “만일 소니에르가 자기를 죽인 사람을 알고 있었다면, 이게 대체 다 뭐란 말입니까? 숫자,기호? 불구의 성인? 드라코 같은 악마? 배에 그려진 별? 모든 것이 다 수수께끼투성이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파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핵심을 찔렀군요.”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볼 때, 만일 소니에르 씨가 자기를 죽인 자를 알리고 싶어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바닥에 적어 놓았을 겁니다.”
  랭던이 말을 마치자, 이 밤 내내 웃음이라곤 없던 파슈의 입술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해요,정확해.”
  ‘나는 지금 반장의 작업을 목격하고 있다.’
  오디오 장비를 조절하면서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파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콜레 부관은 즐거웠다. 부관인 콜레는 이 같은 순간들이 반장을 프랑스 법 집행의 정점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슈는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것이다.’
  사람을 감언으로 꾀려면 심한 압박 아래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꾀는 이 미묘한 기술은 현대의 법 집행에서는 사라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업무를 수행하면서 침착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파슈는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파슈의 자제력과 인내는 로봇과 비슷했다.
  오늘 밤 파슈가 보인 유일한 감정은 확고한 결의였다. 마치 범인의 체포가 파슈에게 사적인 일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한 시간 전 파슈가 요원들에게 내린 지시는 보통 때와 달리 간결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파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가 자크 소니에르 씨를 죽였는지 알고 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오늘 밤엔 어떤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의자의 유죄를 확신하는 파슈의 증거에 콜레는 아직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소의 본능에 의문을 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파슈의 직관은 거의 신기에 가까워 보였다.
  “신이 파슈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파슈의 육감에 따른 아주 인상적인 작전을 본 후에 한 요원이 한 말이다.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의 우선 목록에 파슈의 이름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을 콜레도 인정했다. PR이라는 명목하에 다른 관료들도 휴일에 교회에 나가지만, 반장은 그들보다 자주 미사와 고해성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몇 년 전 파리를 방문한 교황이 관중들과 대면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얻기 위해 파슈는 온힘을 기울였다. 그때 교황과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도 파슈의 사무실에 걸려 있다. 요원들은 은밀히 파슈를 ‘교황의 황소’라고 불렀다.
  최근 몇 년 동안 파슈가 공인으로서 보인 자세중, 아동 성추행에 관한 가톨릭 사제들의 스캔들에 대한 반응은 콜레에게는 꽤 뜻밖이었다. 파슈는 단언했다.
  “이런 사제들은 두 번씩 교수형에 처해야 해! 한 번은 어린이에게 저지른 죄 때문이고, 또 한번은 가톨릭 교회의 이름에 먹칠을 한 대가야.”
  콜레는 반장을 더 화나게 한 것이 후자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면서, 콜레는 오늘 밤 여기서 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일에 착수했다. GPS 추적 시스템을 이용하는 일이었다. 컴퓨터 스크린에는 루브르 박물관 보안사무실에서 보내준 드농 관의 세세한 구조 모형도가 떠 있었다. 미로 같은 화랑들과 복도를 추적하던 콜레의 눈이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대화랑의 깊숙한 중심부에서 조그마한 붉은 점이 깜박였다.
  ‘여기 마크가 있군.’
  파슈는 오늘 밤 자기 먹잇감을 잘 가둬 놓고 있었다. 현명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로버트 랭던은 자신이 멋진 손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9

  랭던과 대화하기 위해 브쥐 파슈는 휴대 전화기를 꺼버렸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이 전화기는 파슈의 주문과 반대로 쌍방향 라디오 기능까지 갖춘 고급 모델이라서, 요원 한 명이 파슈를 호출했다.
  “반장님?”
  휴대 전화기가 무전기처럼 지직거렸다.
  화가 난 파슈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비밀 감시작업을 방해받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도 없었다.
  파슈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랭던을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허리띠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어 라디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왜?”
  “반장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요원이 도착했습니다.”
  파슈의 분노는 순간 가라앉았다.
  ‘암호 해독가?’
  타이밍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마룻바닥의 수수께끼 같은 소니에르의 글을 발견하고 나서, 파슈는 범죄 현장의 전체 사진을 암호 해독부의 컴퓨터에 올렸다. 빌어먹을, 소니에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누군가 얘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암호 해독가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은 누군가 소니에르의 메시지를 거의 풀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바쁘네. 그 암호 해독가에게 지휘 본부에서 기다리라고 하게. 일이 끝나면 내가 직접 그 남자를 만나볼 테니까.”
  파슈는 반론의 여지가 없게 되받았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파슈의 말을 고쳤다.
  “여자입니다. 느뵈 요원입니다.”
  이 말에 파슈는 불쾌해졌다. 소피 느뵈는 DCPJ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이 젊은 파리지엥 해독가는 영국 로열 홀로웨이에서 암호 표기법을 공부했다. 2년 전 더 많은 여성을 경찰 인력에 포함시키려는 해당 부처의 의도에 따라, 느뵈는 파슈에게 은근슬쩍 떠넘겨진 것과 같은 존재였다.
  경찰본부의 이런 계속적인 간섭은 부처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파슈는 주장해왔다. 여자는 경찰 업무에 필요한 체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현장에서 일하는 남자 요원들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파슈가 두려워하던 대로 느뵈는 그 누구보다 가장 심란한 존재였다.
  서른두 살의 느뵈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끈기가 있었다. 영국의 새로운 해독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상관이자 베테랑인 프랑스 암호 해독가들을 끊임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파슈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피할 수 없는 우주의 진리다. 중년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사무실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은 남자들의 눈을 업무에서 떼놓게 만들기 일쑤였다.
  전화기 속의 남자가 말했다.
  “느뵈 요원이 당장 반장님과 이야기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막으려고 해봤지만 , 벌써 그쪽 화랑으로 갔습니다.”
  파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움찔했다.
  “말도 안 돼! 이건 분명히……”
  순간, 로버트 랭던은 브쥐 파슈가 뇌출혈을 일으킨 게 아닌가 생각했다. 말하는 도중에 턱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파슈의 불타는 눈동자는 랭던의 어깨 너머의 뭔가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랭던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랭던은 돌아서서 젊은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길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검은색 레깅스 위에 무릎까지 오는 크림색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매력적이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는 포도주 빛깔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져 있었다. 하버드 기숙사의 벽을 동경하는 히피풍의 골빈 금발 미인들과는 달리, 자신감을 온몸에서 풍기며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과 진실성을 갖춘 건강한 미인이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곧장 랭던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랭던 씨, 저는 DCPJ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느뵈 요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프랑스식 영어 억양으로 여자는 말을 부드럽게 굴렸다.
  랭던은 여자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여자의 강한 시선이 자신에게 잠시 꽂히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눈동자는 날카롭고 깨끗한 올리브그린색 이었다.
  파슈는 질책의 말을 날리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는 재빨리 돌아서서 파슈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반장님, 방해했다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파슈는 침까지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랭던에게 예의를 갖추려는 것처럼 소피는 계속 영어로 이야기했다.
  “전화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반장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고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꺼놓았지. 랭던 씨와 얘기 중이었어.”
  파슈가 핀잔을 주었다.
  “그 숫자 코드를 해독했어요.”
  소피는 단조롭게 말했다.
  랭던은 한줄기 흥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기호를 풀었다고?’
  파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 태도를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설명드리기 전에, 랭던씨에게 전해 드릴 급한 메시지가 있어요.”
  파슈의 표정이 짙은 우려를 드러냈다
  “랭던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는 랭던에게로 돌아섰다.
  “미국 대사관에 연락해 보세요. 랭던 씨, 미국에서 당신에게 보낸 메시지가 거기 있답니다.”
  랭던은 코드에 대한 흥분보다 갑작스러운 걱정이 들어 놀랐다.
  ‘미국에서 보낸 메시지?’
  누가 연락을 해왔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의 동료 중 단지 몇 명만이 랭던이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슈의 넓적한 턱이 뻣뻣하게 굳었다. 의심스럽다는 듯 파슈가 물었다.
  “미국 대사관? 랭던씨가 여기 있는 것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소피는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히 대사관에서 랭던 씨 호텔에 전화를 했을 테고, 호텔 안내인은 DCPJ요원이 랭던 씨를 데려갔다고 얘기했겠지요.”
  파슈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사관에서 DCPJ 암호부서에 연락한 거야?”
  “아닙니다. 반장님. 반장님에게 연락하려고 DCPJ의 교환국에 제가 전화 했을때, 교환국에서 랭던씨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반장님을 만나면 전해달라고 제게 부탁하던걸요.”
  혼란스러워하는 파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파슈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피는 이미 랭던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소피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를 의도하는 시선으로 랭던에게 건넸다.
  “랭던 씨, 이건 당신네 대사관의 메시지 서비스센터 전화번호예요. 가능하면 빨리 전화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반장님게 코드를 설명하는 동안 전화를 걸어 보시죠.”
  랭던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파리를 나타내는 지역번호 뒤에 번호가 몇 개 더 적혀있었다. 랭던은 이제 걱정스러웠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전화기가 어디에 있죠?”
  소피가 스웨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내자 파슈가 손을 저었다. 파슈는 막 폭발하려는 베수비오 화산처럼 보였다. 소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반장은 자기 휴대 전화기를 내밀었다.
  “이 라인이 안전합니다. 랭던 씨, 이걸 사용하십시오.”
  젊은 여자에 대한 파슈의 분노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랭던은 반장의 전화기를 받았다. 파슈는 즉시 소피를 대여섯 걸음 끌고 가서, 쉰 목소리로 힐문하기 시작했다. 랭던은 반장을 더욱더 혐오하면서 두 사람의 이상한 대결에서 시선을 거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소피가 건네준 종이를 확인하며 랭던은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랭던은 대사관 교환원의 목소리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어떤 전화기의 자동응답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바로 소피 느뵈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소피 느뵈입니다. 저는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만……”
  당황해서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만, 느뵈 양? 당신이 제게 준 것은……”
  랭던의 혼란을 예상이나 한 듯 소피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예요. 맞는 번호예요. 대사관은 자동 메시지 시스템이더군요. 당신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들으려면 접속 코드를 눌러야 할 거예요.”
  랭던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드린 종이에 세 자리 숫자가 있죠? 바로 그거예요.”
  이 이상한 실수를 설명하려고 랭던이 입을 여는 순간, 소피의 눈빛이 절박하게 빛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수정처럼 투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묻지 마세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랭던은 종이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454’
  자동응답기에서 흘러나오던 소피의 인사말은 즉시 끊어졌다. 그리고 기계음으로 된 프랑스어 안내가 들렸다.
  “새로운 메시지가 한 개 있습니다.”
  분명이 이 454라는 번호는 소피가 집 밖에 있을때, 집 전화기에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때 필요한 원거리 접속 코드였다.
  ‘내가 저 여자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듣게 되는 건가?’
  테이프가 뒤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테이프가 멈추고,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랭던은 귀를 기울였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소피의 목소리였다.
  메시지는 두려움에 찬 속삭임으로 시작했다.
  “랭던 씨, 이 메시지에 반응하지 마세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지금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지시를 정확하게 따르세요.”

10

  사일래스는 스승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 안에 앉아서, 위대한 생 쉴피스 교회를 내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설치된 조명을 받고 있는 교회의 두 종탑이 기다란 건물 위로 충실한 보초처럼 솟아 있었다. 양쪽 측면에는 아름다운 야수의 갈비뼈처럼 매끄러운 버팀목들이 그림자 속에서 줄지어 있었다.
  ‘미개인들이 우리의 쐐기돌을 감추는 데 신의 집을 이용하다니.’
  환각과 기만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조직의 명성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사일래스는 쐐기돌을 찾아서 스승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면 오래 전에 조직이 충실한 신자들에게서 빼앗긴 것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푸스 데이를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 것인가?’
  생 쉴피스 교회 앞 공터에 아우디를 주차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사일래스는 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에 행한 육체 고행으로 등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푸스 데이가 자기를 구원하기 전에 겪던 삶의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들은 사일래스의 영혼을 찾아왔다.
  사일래스는 자신에게 주문했다.
  ‘증오를 놓아라. 너를 짓밟고 간 자들을 용서해라.’
  생 쉴피스 석탑을 올려다보면서 사일래스는 떠밀려 오는 익숙한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 기억들은 종종 시간을 거슬러서, 젊은 시절의 세계나 다름없던 감옥에 사일래스를 가둬 놓았다. 지옥과도 같던 그곳의 기억들은 바로 눈앞의 일처럼 되살아났다. 썩어빠진 양배추 냄새, 시체와 오줌똥에서 나는 악취, 피레네 산맥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에 맞서 희망을 잃은 자들의 울음소리와 잊혀진 자들의 가냘픈 흐느낌.
  ‘안도라.’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황량하고 버려진 국가다. 돌로 만들어진 감방에서, 덜덜 떨며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일래스는 구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빛은 천둥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사일래스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사일래스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집을 떠났다. 덩치 큰 부두 노동자이던 사일래스의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있었고, 아들이 알비노로 태어나자 아내를 패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내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아들이 엄마를 변호하고 나서면, 아들 역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어느 날 밤, 심하게 얻어맞은 엄마는 깨어나질 못했다. 엄마와 시신 위에 서서 소년은 이런 일의 근원이 된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어떤 악마가 소년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소년은 부엌으로 걸어가서 식칼을 집어들었다.
취해서 자고 있는 아버지의 방으로 최면에 걸린 듯 다가가, 한마디 말도 없이 소년은 뒤에서 아버지를 찔렀다. 아버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데굴데굴 굴렀지만, 아들은 방이 조용해 질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다.
  소년은 집을 떠났다. 그러나 마르세유의 길거리도 편한 곳이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기이한 외모는 떠도는 젊은 부랑자들 틈에서도 소년을 외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버려진 공장 지하에서 혼자 지내며 부두에서 훔친 과일이나 날생선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너덜너덜한 잡지들이었고, 그런 잡지들을 통해 스스로 읽는 법을 배웠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였다. 소년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은 다른 부랑자가 소년을 조롱하면서 소년의 음식을 훔치려고 했다. 소년은 그 부랑자를 죽을 만큼 구타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소년의 몸을 떼어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당국은 소년에게 최후 통첩을 내렸다. 청소년 감옥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해안을 따라 툴롱까지 내려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두려워하는 시선으로 변했다. 소년은 힘센 젊은이로 자랐다. 사람들은 몹시 놀란 눈으로 젊은이의 허연 피부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유령 같아.”
  “악마의 눈을 가진 유령이야.”
  청년도 자신이 유령처럼 여겨졌다. 투명하고 ……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떠도는 ……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여덟 살 때, 어느 항구 마을에서였다. 화물선에서 햄 통조림 한개를 훔치려다가 선원 두 명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년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두 선원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청년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공포와 증오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곳에서 괴물처럼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맨손으로 선원 한 명의 목을 부러뜨렸고, 다른 선원은 때마침 도착한 경찰 덕분에 비슷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두 달 후, 청년은 쇠고랑을 차고 안도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알몸으로 추위에 떠는 청년을 간수들이 데리고 들어서자 감방의 다른 죄수들이 조롱했다.
  “네 놈은 유령처럼 허옇구나.”
  “저 유령을 좀 봐! 저놈의 유령은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2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청년의 영혼과 육체는 스스로 투명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유령이다.’
  ‘나는 무게가 전혀 없다.’
  ‘나는 유령이다…… 유령처럼 창백하고…… 홀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
  어느 날 밤, 유령은 다른 감방 죄수들의 비명에 잠을 깼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자고 있는 방바닥을 흔드는 건지, 어떤 거대한 손이 돌로 만들어진 감방의 회벽을 흔드는 건지 유령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어섰을 때, 커다란 둥근 돌이 유령이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떨어졌다.돌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벽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 지난 10년 동안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달이었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좁은 갱도를 기어서 바깥세상으로 비틀비틀 나아갔다. 황량한 산 옆자락을 구르고 굴러서 숲으로 달아났다. 유령은 굶주림과 피로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밤새도록 달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령은 숲 개간지에서 기차가 풀을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 바퀴자국을 따라갔다. 빈 화물 운송칸을 발견하고 은신처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 기어들었다. 잠이 깼을 때 기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잤지? 얼마나 멀리 온 거지?’
  뱃속의 고통이 커져갔다.
  ‘난 죽는걸까?’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깼을 때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때리며, 화물칸에서 그를 끌어내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 유령은 음식을 찾아 작은 시골마을의 변두리를 어슬렁거렸다. 마침내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의식을 잃고 길가에 쓰러졌다.
  서서히 빛이 다가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죽어 지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사흘? 상관없었다. 침대는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주위의 공기는 양초들 때문에 밝고 달콤했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있다. 돌은 옆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너는 다시 태어났다.”
  유령은 자다가 깨어났다. 안개가 의식을 감싸고 있었다. 유령은 결코 천국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셨다. 침대 옆에는 음식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먹었다. 뼈에 살이 다시 붙는 것 같았다. 또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웃으며 내려다보다가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너는 구원되었다. 내 길을 따른 이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를 선잠에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유령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소리 나는 곳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부엌으로 들어섰을 때, 덩치 큰 남자가 작은 남자를 때리는 것이 보였다.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유령은 큰 남자를 붙잡아 벽에다 내팽개쳤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와 버티고 서 있는 유령을 남겨두고 덩치 큰 남자는 도망쳐 버렸다. 사제의 코뼈는 심하게 주저앉았다. 유령은 피투성이가 된 사제를 안고서 소파로 옮겼다.
  사제는 서툰 프랑스어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의 친구여, 교회 헌금은 도둑들을 유혹하는 법입니다. 자면서 프랑스어를 하던데, 스페인어도 할 줄 압니까?”
  유령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제는 계속해서 서툰 프랑스어로 물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들은 것이라곤 간수들의 조롱이 전부였다.
  사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내 이름은 마누엘 아링가로사 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온 선교사지요. 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지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유령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오비에도라고, 스페인 북부 지역입니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어떤 사람이 문간에 당신을 두고 갔습니다. 당신은 아팠어요 제가 당신을 보살폈습니다. 여기에 꽤 오랫동안 있었지요.”
  그는 자기를 돌봐준 젊은 사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친절을 받는다는게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사제는 맞아서 터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친구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를 둘러싼 세계가 좀더 분명해진 것 같았다. 유령은 침대 위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십자가는 자기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 존재에 마음이 놓였다. 일어나 앉아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오려진 신문을 보고 유령은 깜짝 놀랐다. 기사는 1주일 전 것으로 프랑스어로 씌어 있었다. 기사를 읽고 난 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문은 피레네 산맥에서 발생한 지진이 감옥 시설을 파괴했고, 그 결과 위험한 많은 죄수들이 달아났다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저 사제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유령이 느낀 감정은 한동안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부끄러움, 죄의식, 이런 감정들이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밀려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행동 지침서입니다.”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본 유령은 깜짝 놀랐다.
  젊은 사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웃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코에 붕대를 싸매고 들어온 사제는 낡은 성경책을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서 프랑스어로 된 성경책을 찾았습니다. 읽을 부분은 표시해 두었어요.”
  16장.
  성서 구절은 사일래스라는 죄수에 관한 얘기였다.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진 채 감방에 누운 사일래스는 신에게 찬송가를 불렀다. 26절에 이르렀을 때, 유령은 충격을 받았다.
  ‘…… 그리고 엄청난 지진이 있었다. 감옥의 기반이 흔들리고 모든 문이 열렸다.’
  유령은 사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제는 따뜻하게 웃었다.
  “친구여, 이름이 없다면 지금부터 당신을 사일래스라고 부르겠습니다.”
  유령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래스. 살을 부여받은 것이다.
  ‘내 이름은 사일래스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지중해 상공 6킬로미터 위에서는 승객들이 불안을 느낄 정도로, 알이탈리아 항공 1618편이 난기류에 들썩이며 날고 있었다. 하지만 아링가로사 주교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주교는 오푸스 데이의 앞날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파리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사일래스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승은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했다.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스승은 설명했다.
  “이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요. 요즘 전자통신은 우리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소. 그 결과는 당신에게 재앙이 될 것이오.”
  스승이 옳다는 것을 아링가로사는 알고 있었다. 스승은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아링가로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복종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스승은 매우 비밀스러운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조직의 고위직 인사 네 사람의 이름을!’
  이 사건은 스승이 놀라운 영광을 가져다줄 진정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교에게 확신시켜 준 일 중 하나다.
  스승은 아링가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교, 모든 준비는 다 마쳤소. 내 계획이 성공하려면, 요 며칠 간 사일래스가 오직 나에게만 대답하게 해야 하오. 그리고 사일래스와 주교,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마시오. 나는 다른 안전한 채널을 통해서 사일래스와 연락할 것이오.”
  “사일래스를 존중해 주실 겁니까?”
  “신념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최고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소.”
  “훌륭하십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사일래스와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분과 사일래스의 신분, 그리고 내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투자?”
  “주교, 만일 일의 진전을 세세하게 알고 싶은 당신의 열망 때문에 자칫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주교는 내게 돈을 지불하지 못할 것이오.”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우리의 열망은 한 가지니까요. 성공을 기원합니다.”
  ‘이천만 유로.’
  이제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주교는 생각했다. 이 액수는 미국 달러 가치와 거의 비슷한 금액이다.
  ‘아주 엄청난 것의 대가치곤 푼돈이지.’
  스승과 사일래스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력하게 들었다. 돈과 신념은 강력한 동기유발 요인이다.

11

  “숫자로 된 농담? 소니에르 씨의 기호에 대한 자네의 해석이라는 것이, 일종의 숫자 장난일 뿐이란 말인가?”
  브쥐 파슈는 불신으로 가득 차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소피 느뵈를 노려보았다.
  파슈는 이 여자의 설명을 전적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허락 없이 주제넘게 참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소니에르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기호가 그저 숫자로 된 장난질일 뿐이라고 파슈를 설득하려는 것이다.
  소피는 빠른 프랑스어로 설명했다.
  “이 기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간단한 거예요. 자크 소니에르는 우리가 즉시 꿰뚫어볼 것을 알았을 거에요. 여기 해독한 내용이예요.”
  그녀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파슈에게 건넸다.
  파슈는 종이를 보았다.
  1-1-2-3-5-8-13-21
  “이게 다인가? 자네가 한 것이라곤 숫자를 커지는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 뿐이잖은가?”
  소피는 이 상황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일 줄 아는 배짱이 있었다.
  “정확해요.”
  파슈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끓는 것처럼 낮아졌다.
  “느뵈 요원, 자네가 이걸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난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 빨리 알아듣게 얘기해봐.”
  파슈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서 있는 랭던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미국 대사관에서 온 메시지를 듣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랭던의 어두운 표정으로 보아,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닌 모양이라고 파슈는 생각했다.
  “반장님 손에 들고 있는 숫자들의 순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학 수열이예요.”
  소피의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불손했다.
  파슈는 유명하다고 할 정도의 수학 수열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소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파슈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소피는 말했다.
  “이것은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거예요. 이 수열에서는 한 숫자가 그 앞의 숫자 두개를 더한 합과 같아요.”
  파슈는 숫자들을 관찰했다. 각각의 숫자는 정말로 앞의 숫자 두 개를 더한 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소내에르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13세기에 이 숫자들의 배열을 창조했어요. 소니에르 씨가 마룻바닥에 적은 모든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유명한 수열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예요.”
  파슈는 잠깐 소피를 응시했다.
  “좋아, 만일 우연이 아니라면, 자크 소니에르 씨가 왜 이 수열을 선택했는지 설명할 수 있겠어?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거지? 대체 이 수열은 무슨 의미란 거야?”
  소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게 요점이예요. 이것은 가장 간단한 암호로 된 농담이라고요. 유명한 시에서 몇 마디 골라낸 뒤에, 다시 아무렇게나 섞어서 누군가 그 시를 알아보는지 시험하는 거예요.”
  파슈가 위협이라도 하듯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파슈의 얼굴과 소피의 얼굴이 마주한 거리는 불과 1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소피의 부드러운 얼굴이 앞으로 기울수록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장님, 저는 오늘 밤 여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크 소니에르 씨가 반장님과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게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분명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저희 부장님께 반장님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구두를 돌려서 왔던 길로 걸어나갔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파슈는 소피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여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소피 느뵈는 지금 막 ‘전문적 자살’을 다시 정의내린 것이다.
  파슈는 랭던을 향해 돌아섰다. 랭던은 아직도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저 주의 깊게 들으면서 아까보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미국 대사관.’
  브쥐 파슈는 많은 것을 경멸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대사관만큼 불쾌한 것이 없었다.
  파슈와 미국 대사관은 정기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편이었다. 싸움은 프랑스를 방문 중인 미국 사람들에 대한 법 집행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마약을 소지한 미국 교환학생들. 미성년을 상대로 매춘을 구하는 미국 사업가들, 물건을 훔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미국 관광객들, 이런 사람들을 DCPJ는 거의 매일 잡아들이고 있었다. 법적으로 미국 대사관은 프랑스의 법 집행에 끼어들어 유죄를 받은 자기네 시민들을 인도받을 수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고작해야 손목 한 대 맞으면 그만이었다.
  ‘사법경찰의 거세.’
  파슈는 이렇게 불렀다. 최근 <파리 마치> 신문에 파슈를 미국인 범죄자를 물어뜯으려는 경찰견으로 묘사한 만화가 게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파슈는 미국인에게 닿 지 못했다.미국 대사관에 사슬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파슈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니야.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어.’
  그 순간 로버트 랭던이 전화를 끊었다. 랭던은 어디가 아파 보였다.
  “괜찮습니까?”
  파슈가 물었다.
  랭던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서 나쁜 소식이 온 모양이군.’
  파슈는 휴대 전화기를 돌려받으면서 랭던이 땀을 약간 흘리는 것을 보고 짐작했다.
  이상한 표정으로 파슈를 바라보면서 랭던은 말을 더듬거렸다.
  “사고가…… 친구가…… 아침 일찍 집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랭던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이 진짜라는 것을 파슈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뭔가가 있었다. 이 미국인의 눈동자에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 참 유감입니다.”
  파슈는 랭던을 좀더 관찰하며 말했다. 그리고 화랑 안의 관람용 의자를 가리켰다.
  “좀 앉으시겠습니까?”
  랭던은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다가 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멈춰섰다.
  “사실은 화장실에 좀 갔으면 합니다.”
  파슈는 속으로 찡그렸다.
  “화장실이라, 물론입니다. 몇 분간 쉬었다가 하지요.”
  그리고 그들이 들어왔던 쪽의 긴 복도를 가리켰다.
  “화장실은 광장의 사무실 쪽으로 가다 보면 저 뒤에 있습니다.”
  랭던은 망설였다. 그리고 대화랑의 다른 쪽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끝에 더 가까운 화장실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랭던의 말이 옳다는 것을 파슈는 깨달았다. 그들은 대화랑을 따라 쭉 걸어 내려와 3분의2 정도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대화랑의 막다른 끝에 화장실 두 개가 있었다.
  “같이 가드릴까요?”
  벌써 화랑의 안쪽으로 움직이면서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파슈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랭던이 걸어가는 길은 막다른 곳이고, 대화랑의 유일한 출구는 그들이 들어온 입구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소방법에  따르면 비상 공간의 확보를 위해 여러 개의 비상계단을 두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소니에르가 비상 시스템을 작동 시켰을때 모든 비상계단은 자동으로 잠겨 버렸다. 지금은 시스템이 다시 설정되어, 비상계단은 모두 풀렸지만, 그게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게 되면 화재 경보기가 울리도록 되어 있었고, 또 DCPJ 요원들이 문 밖을 지키고 있었다. 파슈 모르게 랭던이 루브르를 떠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저는 잠시 소니에르 씨의 사무실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그곳으로 오십시오. 랭던 씨 의논해야 할 것이 더 있으니까요.”
  어둠속으로 사라지면서 랭던은 조용히 알았다는 뜻을 전했다.
  파슈는 랭던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화난 걸음으로 걸어갔다. 출입구에 이르러서는 다시 바닥을 기어서 대화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홀을 가로질러 지휘 본부가 차려진 소니에르의 사무실로 폭풍처럼 들어갔다.
  “누가 소피 느뵈를 이 건물에 들여보내라고 승인했나?”
  파슈는 고함을 질렀다.
  콜레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바깥을 지키고 있는 우리 요원에게 느뵈 요원이 암호를 풀었다고 말했답니다.”
  파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뵈는 갔나?”
  “반장님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먼저 나갔네.”
  파슈는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분명 소피는 나가는 길에 여기 들러서 다른 요원들과 잡담할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파슈는 소피가 건물을 나가기 전에, 중간층에 있는 요원에게 연락해 소피를 붙잡아 데려오라고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파슈는 잘 알고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란 그저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말뿐이라는 것을 …… 오늘 밤 그는 정신이 몹시 산란했다.
  ‘느뵈 문제는 나중에 다루자.’
  그녀를 해고시키리라 마음먹으면서 파슈는 자신에게 말했다.
  파슈는 소피를 마음에서 몰아내며 소니에르의 책상에 서 있는 기사의 모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뒤 콜레에게 돌아섰다.
  “그를 찾았나?”
  콜레는 짧고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북 컴퓨터를 파슈 쪽으로 돌렸다. 건물 도안 위에서 ‘화장실’이라고 표시된 방안에서 빨간 점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파슈는 말했다.
  “좋아. 나는 전화할 곳이 있네. 화장실에 있는 랭던을 확실히 지키고 있게.”

12

  대화랑의 끝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로버트 랭던은 현기증을 느꼈다. 소피의 전화 메시지가 마음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가리개 같은 이탈리아 그림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는 화랑끝에는, 화장실임을 알리는 국제 부호인 막대인간 그림의 조명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남자용 문을 열고 들어간 랭던은 화장실의 불을 켰다.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세면대로 걸어간 랭던은 정신을 차리려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강렬한 형광등이 화장실 바닥의 타일을 비추고, 암모니아 냄새가 풍겼다. 종이 수건을 잡아당기는 순간, 랭던 뒤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랭던은 돌아섰다.
  두려움에 가득 찬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소피 느뵈가 들어왔다.
  “오, 하느님! 다행스럽게도 여기로 왔군요. 우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DCPJ의 암호 해독요원인 소피 느뵈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랭던은 세면대 옆으로 비켜섰다. 몇 분 전만 해도 랭던은 그녀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전화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소피 느뵈가 정직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 메시지에 반응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당신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어요. 제 지시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세요.”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랭던은 소피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전화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랭던은 파슈에게 사고를 당한 고향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뒤에 대화랑 끝에 있는 화장실을 쓰겠다고 말했다.
  소피는 화장실로 서둘러서 되돌아오느라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랭던 앞에 서 있었다. 형광등 아래, 부드러운 용모에서 뿜어나오는 소피의 강인한 기운이 랭던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소피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르누아르의 초상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베일로 가려진 듯하지만 뚜렷하고, 신비함을 가득 담은 듯하지만 대담함이 함께 어우러진……
  여전히 숨을 가다듬으며 소피가 말했다.
  “랭던 씨, 당신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당신이 비밀 감시작업하에 있다는 것을요. 당신은 감시받고 있어요.”
  소피의 영어 억양은 타일 벽에 반사되어 공허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 왜?”
  전화에서 소피는 이미 그에게 설명했지만, 그는 직접 듣고 싶었다.
  “파슈가 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당신을 점찍고 있거든요.”
  소피는 랭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 말은 랭던을 바짝 긴장시켰지만,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다. 소피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밤 랭던이 루브르까지 불려 온 까닭은 기호학자여서가 아니라 사건의 용의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랭던은 부지중에 비밀 감시작업이라고 불리는 DCPJ가 선호하는 심문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비밀 감시작업이란 경찰이 용의자를 범죄 현장으로 조용히 불러 인터뷰하면서, 용의자의 신경이 불안정해져 실수로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속임수였다.
  “당신 재킷의 왼쪽 주머니를 보세요. 경찰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거예요.”
  ‘내 주머니를 보라고?’
  무슨 싸구려 마술 속임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한번 보세요.”
  랭던은 당혹해하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트위드 재킷의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뭘 기대한 거지?’
  혹시 소피란 저 여자가 미친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손가락에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작고 단단한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조그마한 물체를 끄집어낸 랭던은 그것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손목시계의 배터리만한 크기의 단추처럼 생긴 금속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추적장치예요. DCPJ가 모니터하는 GPS위성으로 그 위치를 끊임없이 전송하는 거죠. 사람들의 위치를 모니터할 때 그 장치를 써요. 지구 어디에 있든 60센티미터 범위 내 위치를 알려주니까요. 경찰이 당신에게 목줄을 매어 둔거나 마찬가지예요. 호텔로 당신을 데리러 간 요원이 방을 나서기 전에 그 주머니에 슬쩍 떨어뜨렸을 거예요.”
  랭던은 호텔 방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 DCPJ요원이 공손하게 트위드 재킷을 랭던에게 내밀며 말했었다.
  “밖은 춥습니다. 랭던씨, 파리의 봄은 당신네 노래 가사에서 떠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답니다.”
  랭던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재킷을 입었다.
  소피의 올리브색 시선은 예리했다.
  “그 추적 장치에 대해서는 일부러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파슈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주머니를 뒤질까봐 걱정되었거든요. 당신이 그것을 찾아 냈다는 것을 파슈는 모를 거예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랭던은 알수 없었다.
  “경찰은 당신이 도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 장치를 붙인 거예요. 사실, 경찰은 당신이 도망치기를 바랄거예요. 그러면 자기네 주장이 옳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왜 도망을 칩니까? 난 결백합니다.”
  “파슈반장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분노한 랭던은 추적 장치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피는 랭던의 팔을 잡고 그를 막았다.
  “안 돼요! 장치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 두세요. 만일 버리면 장치는 작동을 멈추고, 경찰은 당신이 추적 장치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파슈가 당신을 홀로 내버려 두는 이유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모니터할 수 있기 때문이예요. 자기가 한 짓을 당신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면……”
  소피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랭던의 손에서 동그란 금속 물체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살핀 후에 다시 트위드 재킷 주머니 안으로 흘려 넣었다.
  “이 장치는 적어도 당분간 당신과 함께 있어야 돼요.”
  랭던은 아찔했다.
  “파슈는 왜 내가 자크 소니에를 씨를 죽였다고 믿고 있는 겁니까?”
  “그 사람은 당신을 의심할 만한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 보지 못한 증거가 여기 있어요. 파슈는 신중하게 그 증거를 당신에게 감춘거고요.”
  랭던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소니에르 씨가 마룻바닥에 적어 놓은 세 줄의 문구를 기억해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와 문자들은 랭던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소피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낮아졌다.
  “불행하게도 당신이 본 것은 메시지 전체가 아니예요. 거기에는 한 줄이 더 있었어요. 파슈가 사진을 찍고 나서, 당신이 오기 전에 넷째 줄을 지워버린 거예요.”
  워터마크 펜의 가용성 잉크는 쉽게 지울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왜 파슈가 증거를 지워버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소니에르 씨가 남긴 메시지와 마지막 줄은 파슈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어요.”
  소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적어도 파슈가 당신과 볼 일을 마칠 때까지는요.”
  소피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컴퓨터로 출력된 사진 한 장을 꺼내 펼쳐 보였다.
  “파슈는 오늘 밤 일찍 범죄 현장의 사진을 암호 해독부서의 컴퓨터에 올려놓았어요. 소니에르 씨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 중 누군가가 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이게 그 사진이예요.”
  소피는 랭던에게 프린트를 건넸다.
  사진을 본 랭던은 당황했다. 근접 촬영으로 찍은 사진은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누군가 배를 걷어찬 것처럼, 메시지의 마지막 줄이 랭던을 쳤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13

  랭던은 몇 초 간 마지막 줄에 적힌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라는 문구를 의아하게 응시했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소니에르가 내 이름을 마지막 줄에 남겼다’
  랭던은 그 이유를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급박한 시선으로 소피는 말했다.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파슈가 오늘 밤 왜 당신을 여기로 불렀는지를요. 그리고 왜 당신이 파슈의 일급 용의자인지를요.”
  그 순간 랭던은 자신이 소니에르가 범인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파슈가 짓던 거만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그의 혼란은 이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소니에르 씨가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내가 왜 자크 소니에르 씨를 죽이려 했겠습니까?”
  “파슈는 살해 동기를 찾아야 해요. 그래서 그 사람은 오늘 밤 있었던 당신과의 대화를 전부 녹음했을 거예요. 당신이 하나의 단서라도 흘리길 희망하면서 말이예요.”
  랭던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소피가 설명했다.
  “파슈는 소형 마이크를 달고 있었어요. 그 마이크는 파슈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송신기와 연결되어 있고, 송신기는 신호를 지휘 본부로 전달하죠.”
  랭던은 더듬거렸다.
  “이건 말도 안돼. 난 알리바이가 있소. 강의를 끝낸 후에 곧장 호텔로 돌아갔어요.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면 알겁니다.”
  “파슈가 벌써 물어봤어요. 반장님의 보고서에는 대략 밤 열 시 삼십 분쯤에 직원에게서 열쇠를 받았다고 되어 있더군요. 운 나쁘게도 살해 시간은 밤 열한 시 가까운 때였어요. 당신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죠.”
  “이건 말도 안 돼! 파슈는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소!”
  소피의 두 눈이. ‘증거가 없다고요?’라고 말하듯 커졌다.
  “랭던 씨. 당신 이름이 시체 옆 바닥에 적혀 있었어요. 또 소니에르 씨의 수첩에 살인이 일어난 그 시간쯤에 당신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요. 파슈는 당신을 구금해서 심문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 아니 그 이상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거예요.”
  랭던은 갑자기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소.”
  소피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미국 텔레비전이 아니예요. 랭던씨, 프랑스에서는 법이 범죄자가 아니라 경찰을 보호하지요. 불행하게도, 이 경우는 미디어까지 고려해야 해요. 자크 소니에르 씨는 파리의 저명 인사이고,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인물이예요.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아침 뉴스가 되지요. 파슈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라는 압박을 받을 테고, 용의자를 이미 구금시켜 놓았다고 하면 보기 좋겠지요. 당신에게 죄가 있든 없든, DCPJ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때까지는 DCPJ에 붙들려 있어야만 할 겁니다.”
  랭던은 우리에 갇힌 짐승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다 해주는 겁니까?”
  “왜나하면, 랭던씨, 저는 당신이 결백하다고 믿으니까요.”
  소피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랭던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곤란에 빠지게 된 것에는 부분적으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소니에르 씨가 나를 엮어 넣은 것이 당신 잘못이란 말입니까?”
  “소니에르 씨는 당신을 엮어 넣으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그건 실수였어요. 바닥에 있던 메시지는 나를 위한 거예요.”
  랭던은 사태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뭐요?”
  “그 메시지는 경찰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소니에르 씨는 나를 위해 쓴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경찰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소니에르 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숫자 코드는 아무 의미도 없는거예요. 현장 조사에 암호 해독가를 포함시키기 위해 그 숫자들을 적었을 거예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가능한 빨리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말이예요.”
  랭던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게 되었다. 소피 느뵈가 제정신이든 아니든, 이 여자가 왜 자기를 도우려고 하는지 이유는 알게 된 것이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소피는 랭던을 찾으라는 관장의 마지막 구절이 자기에게 남겨진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소니에르 씨의 메시지가 왜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소피는 힘없이 말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그 특별한 스케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다 빈치의 작품이예요. 오늘 밤 소니에르 씨는 제 주의를 끌기 위해서 그 그림을 이용한 거예요.”
  “잠깐만, 지금 관장이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모든게 엉망인 것 같죠. 자크 소니에르 씨는 나와……”
  소피의 목소리가 끊겼다. 랭던은 그 목소리에서 갑작스러운 슬픔과 고통스러운 과거가 표면 아래에서 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와 자크 소니에르는 어떤 특별한 관계임이 분명했다. 랭던은 자기 앞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관찰했다. 프랑스에서는 나이 든 남자가 종종 젊은 정부를 두기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피 느뵈를 그런 여자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소피는 속삭이는  말투로 말했다.
  “십 년 전에 우리는 크게 싸웠어요. 그 뒤로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아요. 오늘 밤 소니에르 씨가 살해됐다는 전화를 받고, 사진으로 시체와 바닥에 적힌 글을 보았어요. 그리고 제게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덕분에?”
  “예. 그것과 P.S.라는 글자 때문에요.”
  “추신을 뜻하는 P.S. 말이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P.S. 는 제 이니셜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소피 느뵈잖소?”
  소피는 시선을 돌렸다. 소피의 얼굴이 붉어졌다.
  “P.S. 는 그와 함께 살 때 그가 불렀던 제 별명이예요. 프린세스 소피의 앞글자를 딴거죠.”
  랭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웃긴다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십 년 전의 일이예요.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니까.”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소니에르 씨를 알고 있었나요?”
  소피의 눈에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잘 알았죠. 자크 소니에르 씨는 제 할아버지세요.”                       

14

  “랭던은 어디에 있나?”
  지휘 본부로 다시 돌아온 파슈가 마지막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물었다.
  “아직 남자 화장실에 있습니다.”
  콜레 부관은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파슈는 투덜거렸다.
  “아직도 시간을 끌고 있군.”
  반장의 눈은 콜레의 어깨 너머에 있는 GPS 점에 박혀 있었다. 콜레는 파슈가 몸을 홱 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장은 직접 가서 랭던을 살펴보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관찰 대상은 스스로 경계를 허물도록 충분한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 좋았다. 랭던은 스스로 돌아와야 했다. 10여분이 흘렀다.
  ‘너무 오래 있는군.’
  “랭던이 돌아올 것 같나?”
  콜레는 머리를 저었다.
  “남자 화장실에서 여전히 작은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GPS 장치는 분명 랭던에게 부착되어 있습니다. 아픈 게 아닐까요? 랭던이 장치를 발견했다면, 떼버리고 도주하려고 할 겁니다.”
  파슈는 자기 시게를 체크했다.
  “좋아.”
  파슈는 여전히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콜레는 오늘 밤 반장에게서 전혀 볼수 없었던 이상한 강박증 같은 것을 느꼈다. 상부로부터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항상 침착하고 초연하던 파슈가 오늘 밤은 저 일이 자기 개인적인 일이라 도 되는 양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었다.
  ‘놀랄 일도 아니지. 파슈는 이 체포를 성사시키려고 필사적이니까.‘
  콜레는 생각했다. 최근 부처 이사회와 신문 방송은 파슈의 공격적인 전술과 힘있는 외국 대사관과의 잦은 충돌, 새로운 기술의 과다예산 책정 등에 관한 일로 파슈를 점점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오늘 밤 저 미국인을 첨단 기술과 고자세로 체포하게 되면, 파슈를 비판하는 무리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 터였다. 특히 연금을 받고 은퇴할 때까지, 파슈는 자기 지위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슈 반장에게 연금이 필요하다는 것은 신도 알고 계시지.’
  콜레는 생각했다. 수사 기술에 대한 파슈의 열의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몇 년 전, 파슈가 저축한 모든 돈을 어떤 기술에 투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입고 있던 셔츠까지 잃었다고 했다.
  ‘파슈 반장은 최고급 셔츠만 입는 사람인데 말이야.’
  오늘 밤 시간은 충분했다. 소피 느뵈의 이상한 개인은 그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녀도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슈는 아직 돌릴 수 있는 카드 패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파슈는 랭던에게 희생자가 마루 위에 랭던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그 증거에 대한 미국인의 반응은 볼 만할 터였다.
  DCPJ 요원 한 명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오면서 파슈를 불렀다.
  “반장님, 전화 좀 받아 보십시오.”
  요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밀었다.
  “누군데?”
  요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암호 해독부서의 부장입니다.”
  “그런데?”
  “소피 느뵈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15

  때가 되었다.
  사일래스는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 밖으로 나왔다. 밤 바람이 사일래스의 외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변화의 바람은 이 대기 속에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임무가 힘보다 정교함을 더 요하는 것임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총은 차 안에 두고 내렸다. 13구경 헤클러 앤 코크 UPS 40으로 스승이 준 것이었다.
  ‘신의 집에 죽음의 무기가 있을 자리는 없다.’
  교회 앞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보이는 영혼이라곤 저 멀리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몸뚱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10대 매춘부들이 전부였다. 그들의 육체는 사일래스의 허리에 익숙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본능적으로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자, 매고 있던 갈고리 허리띠가 살 속으로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사일래스는 신실하게 모든 성적 탐닉을 외면했다. 그것이 <길>이었다. 오푸스 데이를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돌려받았다. 금욕과 모든 개인 재산을 양도한다는 서약을 희생이라고 보지 않았다. 감옥에서 견뎌야 했던 성적인 공포와 평생 지고 살았던 가난을 생각해 보면 금욕은 오히려 호강이었다.
  안도라에 있는 감옥에 갇혀 지낸 후 프랑스에 돌아온 사일래스는 고향땅이 구원받은 자기 영혼에서 폭력적인 기억을 끄집어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너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일래스는 자기 자신을 일깨웠다. 신에 대한 그의 봉사는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자기 가슴에 묻어야 하는 희생임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네 신념을 측정하는 것은 네가 참고 있는 고통을 측정하는 것과 같다.”
  스승은 그에게 말했었다. 사일래스는 고통에 익숙했다. 그는 스승에게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스승은 사일래스에게 그의 행위가 더 높으신 힘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었다.
  “Hago la obra de Dios(나는 신의 사업을 행하는 몸이다)”
  교회 입구로 들어서면서 사일래스는 중얼거렸다.
  육중한 문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멈춰서서, 사일래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저 안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사일래스가 꺠닫는 데에는 일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쐐기돌 그것이 우리를 최종 목표로 인도할 것이다.’
  사일래스는 유령처럼 하얀 주먹을 들어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잠시후, 거대한 나무 문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6

  자신이 루브르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파슈가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 소피는 궁금했다. 넋이 나간 랭던을 보면서, 랭던을 남자 화장실로 몰아넣은 것이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의 시체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서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소피는 놀랐다. 이제 자크 소니에르는 그녀에게 남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소피가 스물두 살이었던 3월의 어느 날 밤, 한 가지 사건으로 끝나 버렸다.
  ‘십 년 전이군.’
  소피는 영국의 대학원에서 예정보다 며칠 일찍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될 어떤 일에 할아버지가 연루되어 있는 것을 실수로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까지도 믿을 수 없는 이미지였다.
  ‘내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는 설명하려고 했지만, 너무 수치스럽고 몹시 놀란 탓에 그녀는 저축해둔 돈을 찾아 집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자기가 본 것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소피는 맹세했다. 할아버지는 카드와 편지를 보내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었다.
  ‘어떻게 설명하겠단 말인가?’
  소피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곤 응답하지 않았다. 그때 소피는 다시는 전화 걸지 말라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전했다. 할아버지의 설명이 사건 자체보다 끔찍한 것일까 봐 소피는 두려웠다.
  소니에르는 결코 소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서랍 속에 감추어 두었던 10년 묵은 일이, 서랍이 열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소니에르는 소피의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결국 소피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소피? 나는 오랫동안 네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전화를 하는 게 고통스럽구나. 하지만 네게 꼭 해야 될 말이 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단다.”
  자동응답기에서 울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파트 부엌에 서 있던 소피는 너무 오랜만에 소니에르의 목소리를 듣자 한기를 느꼈다.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 그러던 것처럼 소니에르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소니에르의 온화한 목소리는 즐겁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몰고 왔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로 말하고, 집에서는 영어로 말하거라.’
  “소피 제발 들어다오. 소피, 영원히 나에게 화를 내면서 살 수는 없다. 내가 지난 세월동안 보낸 편지들을 읽지 않은 게냐? 아직도 이해를 못한게냐? 한 번은 얘기해야만 한다. 제발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다오. 루브르에 있으니 전화해라. 지금 당장, 너와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구나.”
  소피는 자동응답기를 쳐다보았다.
  ‘위험?’
  도대체 할아버지는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감정이 격한 나머지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프린세스…… 나는 네게 어떤 일들을 감춰 왔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대가로 네 사랑을 잃은 것도 안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네 안전을 위해서였다. 이제 너도 진실을 알아야 해. 가족에 관한 진실을 말해 주려고 한단다.”
  갑자기 심장 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족?’
  소피의 부모는 그녀가 네 살 때 죽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다리 위를 달리다 물살이 빠른 물속으로 추락한 것이다. 소피의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도 그 차에 함께 있었다. 소피의 전 가족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이 보도된 신문기사를 소피는 아직도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얘기는 기대치 못한 갈망을 뼛속 깊이 불러일으켰다.
  ‘우리 가족?’
  순간 소피는 어린아이였을 때 수없이 꾸던 환상을 보았다.
  ‘가족들이 살아 있다! 식구들이 집으로 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서의 환상일 뿐이었다.
  ‘가족은 죽었다. 소피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자동응답기에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었다.
  “소피…… 네게 말해 주려고 난 오랜 세월을 기다렸단다. 적당한 순간을 찾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루브르에 있으니 전화하거라. 오늘 밤 내내 여기 있을게야. 우리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했다는 두려움이 드는구나. 네가 알아야 할 게 참 많단다.”
  전화 메시지는 끝났다.
  침묵 속에서 소피는 몸을 떨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를 곱씹어 볼수록 한 가지 가능성만이 그럴듯해 보였다. 할아버지의 진정한 의도가 점점 분명해졌다.
  미끼였따.
  분명 할아버지는 소피를 너무나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뭐든지 할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소피의 거부감은 아주 깊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마지막으로 자기가 찾아오도록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선택은 현명했다.
  ‘우리 가족.’
  루브르 박물관, 남자화장실의 어둠 속에 서서, 소피는 오후에 들었던 전화 메시지를 다시 기억했다.
  ‘소피, 우리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구나. 전화하거라.’
  그녀는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전화 메시지에 대한 의심은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기 박물관 바닥에 살해된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적어놓았다. 그 기호들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바닥의 메시지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메시지가 암호로 되어 있다는 것이 소니에르가 자기를 염두에 둔 또 다른 증거라고 소피는 확신했다. 암호 해독학에 대한 소피의 열정과 재능은 자크 소니에르와 함께 살면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다. 할아버지는 기호, 낱말 게임, 수수께끼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요일을 신문에 난 암호문과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게임을 함께 풀며 시간을 보냈던가?’
  열두 살, 소피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르 몽드>지의 가로세로 낱말 퍼즐을 끝냈을 때, 할아버지는 영어로 된 낱말 퍼즐과 수학적인 수수께끼, 대체 암호들의 분야로 소피를 안내했다. 소피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결국 소피는 그 열정을 직업으로 연결시켜, 사법경찰을 위해서 일하는 암호 해독가가 된 것이다.
  오늘 밤, 자신과 로버트 랭던이라는 두 이방인을 결합시킨 할아버지의 간단한 코드를 소피는 존중해야만 했다.
  질문은 ‘왜?’였다.
  랭던의 눈에 어린 당황스러운 표정은, 이 미국인도 그녀만큼이나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들을 함께 엮어 놓은 것일까?
  소피는 다시 물었다.
  “당신과 할아버지는 오늘 밤 만나기로 돼 있었어요. 무엇 때문이죠?”
  랭던은 진짜 혼란스러웠다.
  “그분 비서가 정한 것이고, 특별한 이유를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저 내가 프랑스 성당들의 이교도적인 도상학에 관한 강의할 거라는 것을 듣고서, 소니에르 씨가 그 주제에 흥미를 가졌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얘기 후에 술 한잔하러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았고요.”
  소피는 그저 흘려들었다. 그 정도로는 빈약했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교도적인 도상하게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일개 미국인 교수와 잡담이나 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소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할아버지가 오늘 오후에 제게 전화했었어요. 할아버지와 내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더군요. 뭔가 와 닿는게 없나요?”
  랭던의 푸른 눈이 근심으로 뒤덮였다.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이러난 일을 생각해보면……”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보면, 놀랍기보다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소피는 화장실 끝에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걸어갔다. 유리창에는 경보장치 테이프가 그물망처럼 덮여 있었다.소피는 창문을 통해 밖을 응시했다. 적어도 지상에서 15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소피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 파리의 멋진 야경을 쳐다보았다. 왼쪽으로 센 강을 가로질러 조명을 받고 서 있는 에펠 탑이 보였다. 정면에는 개선문이 있었다. 오른쪽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는 사크레쾨르의 우아한 아라베스크 양식의 둥근 지붕이 보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둥근 석조 지붕은 휘황찬란한 성역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서쪽 끝인 이 드농 관에서 보면, 캐러젤 광장의 도로가 드농 관과 나란히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루브르의 외벽과 도로를 분리하는 것은 오직 작은 보도뿐이다. 저 아래로 밤 시간에 움직이는 운송 트레일러들의 행렬이 보였다.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느라 멈춰 있었다. 차량의 주행등이 소피를 조롱하듯 깜박거렸다.
  랭던이 소피 뒤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분명 당신 할아버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랭던의 깊은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유감을 느끼며, 소피는 창문에서 돌아섰다. 자신을 둘러싼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랭던은 분명 소피를 돕고 싶어했다.
  ‘그는 대학교수다.’
  용의자에 대한 DCPJ의 수사보고서를 읽으면서 소피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분명히 무지를 경멸하는 학자이다.
  ‘우리는 그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암호 해독가로서 소피는 의미 없이 보이는 자료에서 의미를 추출해 내는 일을 한다. 로버트 랭던이 알고 모르는 것을 떠나, 분명 이 남자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소피의 추측이었다.
  ‘프린세스 소피,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할아버지의 메시지가 이보다 어떻게 명료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생각할 시간. 이 미스터리를 함께 정리할 시간.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시간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랭던을 올려다보며 소피는 자기가 생각한 일을 말했다.
  “조금 있으면 브쥐 파슈가 당신을 구금할 거예요. 난 당신이 박물관을 빠져나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해요.”
  랭던의 눈이 커졌다.
  “나보고 도망치란 말입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예요. 만일 파슈가 당신을 구금하게 되면 프랑스 감옥에서 몇 주는 보내야 할 거예요. DCPJ와 미국 대사관이 어느 나라 법정에 당신을 세울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 싸움을 끝낼 때까지는요. 하지만 여기서 바로 빠져나가 당신네 대사관으로 간다면, 당신이 이 살인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당신과 내가 증명하는 동안 당신네 정부가 당신의 권리를 보호해 주겠죠.”
  랭던은 그다지 탐탁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만둡시다! 파슈는 모든 입구에 무장한 요원들을 세워 두었어요. 만일 우리가 총에 맞지 않고 빠져나간다 쳐도, 도망가면 내가 유죄라고 말하는 꼴과 같습니다. 바닥에 적힌 메시지가 당신에게 남겨진 거라고 파슈에게 말하십시오. 그리고 거기 있는 내 이름은 소니에르 씨가 나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할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미국 대사관으로 안전하게 돌아간 후에 말할 거예요. 대사관은 여기서 이 킬로미터도 안 돼요. 박물관 밖에 내 차가 주차되어 있고요. 여기서 파슈와 거래를 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어요. 이해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오늘 밤 안으로 당신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혈안이 돼 있어요. 체포를 미루는 유일한 이유는 혹시 당신이 실수로 자기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단서를 흘리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요.”
  “맞아요. 도주하는 것처럼 말이죠!”
  갑자기 소피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파슈일 거야’
  소피는 손을 뻗어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랭던씨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요.”
  소피는 서둘러 말했다.
  ‘어쩌면 당신의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바닥에 적힌 글은 분명이 당신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지만 파슈는 확실하게 당신이 범인이라고 우리 팀에게 말했어요. 파슈가 당신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셨나요?”
  랭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소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로군’
  하지만 왜 그랬는지 소피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파슈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오늘 밤 안으로 랭던을 철창 안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소피는 랭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소피에게는 유일한 논리적인 결론이자 딜레마였다.
  ‘랭던을 미국 대사관으로 데려가야 해.’
  소피는 창문으로 돌아서서, 둥근 유리창에 붙어 있는 비상경보기의 그물망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15미터 아래로 포장도로가 아찔하게 보였다.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껏해야 다리가 부러지는 것뿐이다.
  결국 소피는 결정을 내렸다.
  로버트 랭던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탈출시키는 것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17

  “느뵈가 응답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그 여자의 휴대 전화기로 전화 건 거 확실한 건가? 분명히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있는데.”
  파슈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콜레는 대여섯 차례나 소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마 전원이 다되었거나, 전화기를 꺼버린 것 같은데요.”
  파슈는 암호 해독부 부장과 전화통화한 후 줄곧 저기압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파슈는 느뵈 요원에게 연락하라며 콜레를 닦달했다. 연락이 안되자 파슈는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쪽 부장님이 왜 전화하신 겁니까?”
  콜레는 그제야 물어보았다.
  파슈는 돌아섰다.
  “드라코 같은 악마들과 불구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없다는 말을 해주려고.”
  “그게 다입니까?”
  “아닐세. 메시지의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숫자라고 하더군.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다고 했어.”
  콜레는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미 느뵈 요원을 보내서 알리지 않았습니까.”
  파슈는 머리를 저었다.
  “느뵈를 보내지 않았다더군.”
  “예?”
  “부장 말로는 내 부탁에 따라 자기네 부서의 모든 요원을 호출해서 내가 전송한 이미지를 보게 했다는군 그런데 느뵈 요원은 도착하자마자 소니에르의 모습과 그가 남긴 코드를 보더니,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는 게야. 부장 말이, 느뵈 요원이 사진 때문에 극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녀의 행동을 문제삼지 않았다는군.”
  “동요를 해요? 죽은 시체를 본 적이 없나 보죠?”
  파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몰랐지만, 부장도 몰랐대. 다른 요원이 부장에게 알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소피 느뵈는 자크 소니에르 씨의 손녀야.”
  콜레는 말을 잃었다.
  “부장은 느뵈가 한 번도 소니에르 씨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그러더군. 아마 유명한 할아버지 덕에 생길 수도 있는 특별 대접을 느뵈 요원이 원치 않은 게 아니겠느냐고 부장은 추측하던데.”
  ‘느뵈가 사진을 보고 동요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
  죽은 가족이 남긴 코드를 해독하기 위해 젊은 여인이 소집된, 운도 지지리 없는 이런 우연을 가정하기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느뵈의 행동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들이 피보나치의 숫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 와서 우리에게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느뵈 요원이 왜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사무실을 떠났는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콜레는 명확하지 않은 정황을 설명하는 시나리오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소니에르는 바닥에 숫자로 된 코드를 적었다. 경찰 조사에 암호 해독가를 포함시키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손녀에게 닿게 된다. 메시지의 남은 부분은 소니에르가 자기 손녀와 어떤 식으로 의사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느뵈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랭던은 어떻게 끼어들게 되었을까?
  콜레가 좀더 생각을 펼치기 전에, 경보음이 적막에 갇힌 박물관을 흔들어 놓았다. 경보음은 대화랑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경보다! 대화랑! 남자화장실입니다.”
  요원 한 명이 루브르 보안센터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파슈가 콜레에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랭던은 어디 있나?”
  “아직 남자 화장실 안입니다!”
  콜레는 컴퓨터 모니터 위의 깜박이는 빨간 점을 가리켰다.
  “랭던이 창문을 깬 모양입니다!”
  랭던이 멀리 갈 수 없다는 것을 콜레는 알고 있었다. 파리의 소방 규정에 따라 공공건물에서 15미터 이상 높이에 있는 창문은 화제에 대비해 깨지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2층 창문에서 밧줄이나 사다리 없이 빠져나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드농 관이 있는 서쪽 끝은 떨어질 때의 충격을 완화시켜 줄 나무나 풀밭도 없었다. 화장실 창문 바로 아래에는 박물관 외벽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캐러젤 광장의 2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맙소사. 랭던이 창문의 돌출 부분으로 움직였습니다!”
  모니터에 눈을 박고 콜레가 소리쳤다.
  파슈는 어깨에 두른 권총집에서 MR 93 리볼버를 꺼내 움켜쥐고 사무실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당황한 콜레는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깜박이는 붉은 점이 창문 돌출부로 가더니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빨간 점이 건물 바깥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게 뭐야? 랭던이 창문에서 떨어졌거나, 아니면……’
  “맙소사!”
  콜레는 벌떡 일어났다. 빨간 점은 외벽 바깥으로 움직였다. 신호가 잠시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건물 주변 9미터 정도에서 갑자기 멈춰 버렸다.
  콜레는 컴퓨터를 조작해서 파리 지도를 끌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 GPS 시스템을 다시 설정했다. 영상을 확대하자 신호를 보내는 정확한 위치를 볼 수 있었다.
  점은 움직이지 않았다. 캐러젤 광장의 도로 한가운데에 죽은 듯이 멈춰 있었다.
  랭던이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18

  파슈가 대화랑으로 화살처럼 달리고 있을 때, 그의 무전기를 통해 콜레의 목소리가 멀리 들리는 경보음 사이로 울려 퍼졌다.
  콜레는 소리를 질렀다.
  “랭던이 뛰어내렸습니다! 캐러젤 광장 도로에서 신호를 찾아냈습니다! 화장실 창문 바깥입니다! 그런데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맙소사, 랭던이 자살한 것 같습니다!”
  파슈는 듣고 있었지만,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파슈는 계속 달렸다. 화랑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소니에르의 시체 옆을 지나자, 저 멀리 드농 관 끝에 있는 칸막이들이 보였다. 경보음은 더욱 커졌다.
  무전을 통해 콜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기다리십쇼! 랭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나 봅니다. 랭던이 움직이고 있어요.”
  화랑의 길이를 저주하면서 파슈는 계속 달렸다.
  콜레는 아직도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랭던이 더 빠르게 움직입니다! 캐러젤 아래 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기다려…… 랭던이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요!”
  칸막이에 다다른 파슈는 화장실 문으로 돌진했다.
  무전기 소리는 경보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랭던이 차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차를 탄 것 같아요! 제가……”
  파슈가 총을 꺼내 들고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자 경보음이 콜레의 말을 삼켜버렸다. 날카로운 경보음에 주춤거리면서 파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파슈의 눈은 즉시 화장실 끝에 있는 깨진 창문으로 향했다. 정문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랭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 높이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내리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뛰어내렸다 해도 심하게 다쳤을 터였다.
  마침내 경보음이 멎고, 콜레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 남쪽으로 움직입니다…… 더 빨라 …… 캐러젤 다리를 지나 센 강을 건너갑니다!”
  파슈는 왼쪽을 둘러보았다. 캐러젤 다리를 지나는 차량은 2단으로 된 거대한 트레일러뿐이었다. 루브르에서 남쪽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비밀 방수포로 덮여 있는 트레일러의 위칸은 거대한 해먹처럼 보였다. 파슈는 순간 몸을 떨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저 트레일러는 화장실 창문 바로 밑에서 정지 신호를 받고 멈춰 있었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이야!’
  파슈는 속으로 외쳤다. 방수포를 덮은 트레일러가 무엇을 싣고 있는지 랭던은 알 길이 없다. 만일 트레일러가 철강을 싣고 있었다면? 혹은 시멘트를? 아니면 그저 그런 쓰레기를? 15미터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콜레가 소리를 질렀다.
  “점이 방향을 틀었습니다! 생 페르 다리를 향해. 오른쪽입니다!”
  다리를 건넌 트레일러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 생 페르 다리가 있는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다. 파슈는 놀란 시선으로 트레일러가 구석을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콜레는 무슨 생방송이라도 하는 양 트레일러의 위치를 시시각각 안내하면서, 외부에 있는 요원들을 무전기로 호출. 루브르 박물관 주위로 소집했다. 그리고 트레일러를 추적하도록 경찰차를 보냈다.
  ‘끝났군.’
  파슈는 자기 요원들이 몇 분 안에 트레일러를 에워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랭던은 어디로도 도망 칠 수 없을 것이다.
  권총을 집어넣으면서 파슈는 화장실을 빠져나와 콜레에게 무전으로 연락했다.
  “내 차를 가져와. 내가 직접 현장에 가봐야겠어.”
  대화랑을 다시 터벅터벅 걸어나오면서, 파슈는 랭던이 아직 살아 있을지 궁금했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랭던은 달아났다. 이제 죄를 씌우기만 하면 된다.’
  화장실에서 겨우 14미터 떨어진 대화랑의 어둠 속에 랭던과 소피는 서있었다. 그들은 화장실 입구를 가리고 있는 칸막이들 중 하나에 등을 바싹 밀착시키고 있었다. 파슈가 총을 꺼내 들고 화살처럼 화장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랭던과 소피는 가까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난 60초가 몽롱했다.
  랭던이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현장에서 도주하는 것을 거절하고 남자 화장실 안에 있을 때, 소피는 창문 유리에 눈을 고정시키고 유리를 감싸고 있는 경보장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 뒤 낙하 거리를 재기라도 하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표적만 있으면,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요.”
  소피가 말했다.
  ‘표적?’
  랭던은 불안하게 화장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길 위쪽으로 18륜의 거대한 2단 트레일러가 화장실 창문 바로 아래의 정지 신호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트레일러의 육중한 화물은 푸른 방수포로 느슨하게 덮여 있었다. 랭던은 소피가 일을 실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소피, 난 뛰어내릴 수 없……”
  “추적장치를 꺼내봐요.”
  당황한 랭던은 작은 금속장치가 잡힐 때까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소피는 추적장치를 랭던에게서 받아 들고 세면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두꺼운 비누 위에 추적장치를 얹고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금속이 부드러운 비누의 표면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추적장치가 비누 속에 안전하게 박히도록 매만졌다.
  비누를 랭던에게 건넨 소피는 세면대 아래에 있는 실린더 모양의 쓰레기통을 집어 들었다. 랭던이 미처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소피는 쓰레기통으로 유리창을 박살냈다.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비누를 이리 줘요!”
  경보음 때문에 소피는 고함을 질렀다.
  랭던은 소피의 손에 비누를 넘겼다.
  비누를 꼭 쥐고서, 소피는 부서진 창 밖으로 18륜 트레일러가 아주 서서히 멈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표적은 상당히 컸다. 값이 꽤 나가는 방수포. 건물에서 3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교통신호가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피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비누를 아래로 천천히 던졌다.
  비누는 트럭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다가, 방수포 가장자리에 안착했다. 교통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을 때, 비누는 화물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축하해요. 당신은 지금 막 루브르를 탈출했어요.”
  랭던을 문으로 잡아끌면서 소피는 말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막 자리 잡았을때, 파슈가 휙 지나갔다.
  이제 경보음은 멎었다. DCPJ 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멀어지는 것을 랭던은 들을 수 있었다.
  ‘경찰 대탈출이로군.’
  파슈 역시 대화랑을 비워 놓고 서둘러 나갔을 것이다.
  “대화랑 쪽으로 다시 오십 미터 정도 들어가면 비상계단이 있어요. 경비원들은 이 주변을 떠났을 테니까, 우린 여기에서 나갈 수 있어요.”
  오늘 밤 랭던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피 느뵈는 자기보다 훨씬 똑똑한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19

  생 쉴피스 교회는 파리에 있는 어떤 건물보다 역사가 기이하다고들 말한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위한 고대 사원의 폐허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건축학 면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노트르담 사원과 쌍벽을 이루는 발자취를 지니고 있다. 이 성역은 마르키 드 사드와 보들레르의 세례, 빅토르 위고의 결혼식을 주관한 곳이었다. 이곳의 부속 신학교는 정설이 아닌 역사 자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어서, 한때는 셀 수 없이 많은 비밀단체들의 은밀한 모임 장소가 되기도 했다.
  오늘 밤 생 쉴피스의 동굴 같은 본당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생명을 암시하는 것은 오로지 초저녁 미사 때 피웠던 희미한 향 냄새뿐이었다. 상드린 수녀가 사일래스를 교회 안으로 안내할 때, 수녀의 태도가 편치 않다는 것을 사일래스는 눈치 챘다. 사일래스는 이런 일에 놀라지 않았다. 자기 외모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미국인이지요?”
  수녀가 물었다.
  사일래스는 대답했다.
  “태생은 프랑스입니다. 스페인에서 그분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리고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상드린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한 눈을 가진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그런데 생 쉴피스를 보신 적이 없다고요?”
  “보지 않은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낮에 보면 더 멋지답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오늘 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부탁하시더군요. 당신은 분명히 힘있는 친구들을 둔 모양이네요.”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상드린 수녀의 뒤를 따라 중앙복도를 걸어가면서, 사일래스는 이 성역의 검소함에 놀랐다. 다채로운 프레스코화와 금도금을 한 제단, 따뜻한 느낌의 목재로 치장된 노트르담 사원과는 달리, 생 쉴피스는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스페인 고행자들의 성당을 생각나게 하는 황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식을 배제해 교회의 내부가 더 고상하게 느껴졌다. 격자형의 재목이 치솟은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일래스는 전복된 거대한 선체 아래에 서있는 상상을 했다.
  ‘잘 들어맞는 이미지야.’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조직의 배는 영원히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어서 일에 착수하고 싶은 열망을 느끼면서, 사일래스는 수녀가 자기를 홀로 내버려 두기를 바랐다. 수녀는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조그마한 여자였다. 하지만 불필요한 힘은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이 여자는 성직자다. 그리고 쐐기돌을 숨겨 놓은 장소로 조직이 이 교회를 선택한 것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남이 저지른 죄 때문에 여자가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송구하군요. 수녀님. 저 때문에 일어나셨을 텐데.”
  “천만에요. 파리에 머무는 시간이 아주 짧다고 했지요? 그럼 생 쉴피스를 놓쳐서는 안 되지요. 교회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건축학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역사적인 것인가요?”
  “사실 수녀님. 제 관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수녀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이 필요없겠네요. 저는 그저 당신을 어디서부터 안내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답니다.”
  사일래스는 제단으로 눈길을 보냈다.
  “교회 구경은 필요 없습니다. 수녀님은 정말 친절하시군요. 저 혼자서 잠깐 둘러보겠습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잠도 다 깼으니까.”
  사일래스는 걸음을 멈췄다. 수녀와 사일래스는 맨앞의 좌석에 이르렀다.제단은 고작 14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일래스는 육중한 몸을 돌려 작은 체구의 수녀앞에 막아섰다. 수녀가 자기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다가 뒷걸음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무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수녀님, 저는 신의 성전을 그저 구경하는 일이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일 따위엔 익숙하지 않습니다. 둘러보기 전에 ,제가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가져도 되겠습니까?”
  상드린 수녀는 망설였다.
  “아, 물론이지요. 그럼 저는 저 뒤쪽에서 기다리지요.”
  사일래스는 수녀의 어깨 위에 부드럽지만 힘이 들어간 손을 얹고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수녀님, 수녀님을 깨운 것도 너무 죄송한데, 계속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무례입니다. 그러니 침대로 돌아가십시오. 수녀님의 성전인 이곳을 혼자 즐기다가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수녀는 불편한 표정이었다.
  “혼자 있어도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요. 기도는 은밀한 즐거움이니까요.”
  “그럼 좋으실 대로”
  사일래스는 수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수녀님, 주님의 평화가 수녀님과 함께하길.”
  “주님의 평화가 당신과도 함께하길. 나갈 때 문을 꼭 닫아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사일래스는 수녀가 계단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자리에 앉아 허벅지에 매단 갈고리 허리띠가 다리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신이여, 오늘 제가 하는 이 일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제단 위 상당히 높은 곳에는 성가대의 발코니가 있었다. 상드린 수녀는 이 발코니의 어둠에 몸을 웅크리고서, 망토를 뒤집어쓴 수도승이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난간 사이로 훔쳐보고 있었다. 마음속의 순간적인 공포가 몸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잠깐 동안, 수녀는 이 수상한 방문객이 그들이 자기에게 경고한 적일 수도 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긴 시간 품고 있던 명령을 오늘 밤 실행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수녀는 어둠 속에 숨어서 남자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20

  어둠속에서 나온 랭던과 소피는 비상계단을 향해 고요한 대화랑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랭던은 어둠에서 조각 그림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 미스터리는 아주 골치 아팠다.
  ‘사법경찰의 반장이 내게 살인 혐의를 씌우려 하고 있다.’
  랭던은 속삭였다.
  “어쩌면 파슈가 바닥에 메시지를 적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소피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불가능해요.”
  랭던은 여전히 미심쩍었다.
  “반장이 나를 유죄로 만드는 데 아주 열심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쩌면 내 이름을 바닥에 적어 놓으면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피보나치 수열은요? 그리고 P.S는? 다 빈치와 여신을 나타내는 모든 상징들은요? 그것은 분명히 할아버지가 남긴거예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단서인 상징들은 너무 완벽하게 서로 엮여 있었다. 별 모양과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다 빈치, 여신, 심지어 피보나치 수열까지. 도상학자로서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상징 세트라고 할수 있었다. 모든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아까 오후에 할아버지가 내게 한 전화요.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를 얘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루브르 바닥에 남긴 메시지가 내게 뭔가 중요한 것을 알리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노력이었다고 확신해요. 할아버지는 내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랭던은 소피의 행복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를 풀고 싶었다. 저 암호문 같은 글자를 처음 본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화장실 창문에서 거짓말로 뛰어내린 행위는 파슈가 랭던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 경찰 반장이 자기가 추적해서 체포한 것이 비누조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문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에 있던 숫자들이 다른 행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랭던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총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 원고에는 비문(碑文)의 암호들이 들어 있었는데, 어떤 줄의 기호들은 다른 줄을 해독하는 단서가 되었었다.
  “전 오늘 밤 내내 그 숫자들을 안고 고민했어요. 더하고, 나누고, 곱하고, 하지만 아무것도 풀지 못했어요. 수학적으로 볼 때, 그 숫자들은 무작위로 배열된 거예요. 암호 표기법으로 보면 쓸데없는 장난질 같은 거죠.”
  “결국 피보나치 숫자를 사용한 것은 할아버지가 내게 다른 신호를 보낸 것과 같아요. 영어로 메시지를 남긴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예술 형태로 자기 몸을 만든 것이나, 몸에 별표를 그린 것처럼 말이죠. 이 모든 것은 제 관심을 끌기 위한 거예요.”
  “별표가 당신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제가 자랄 때 별표는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특별한 상징이었어요. 우리는 재미삼아 타로 카드 놀이를 했는데, 제 패에는 항상 별표가 있는 카드들이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몰래 준비한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 후 별표는 우리만의 장난이 되어 버렸지요.”
  랭던은 한기를 느꼈다.
  ‘타로 카드 놀이를 했다?’
  타로 카드는 중세 이탈리아 카드로 이교도의 상징이 풍부하게 숨겨진 게임이다. 랭던은 새 원고에 타로에 관해서 한 장 전체를 할애했을 정도였다. 스물두 장의 카드 중에서 ‘여자 교황’,‘여황제’, ‘별’ 같은 이름을 가진 카드도 있다. 원래 타로 카드는 교회에서 금지한 이념들을 몰래 전달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타로 카드의 신비스러운 매력은 현대 점술가들의 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성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타로 카드는 별표이다.’
  만일 소니에르가 자기 손녀를 위해 재미로 카드를 미리 준비했다면, 별표가 들어간 카드들이 적절한 장난이었다는 것을 랭던은 깨달았다.
  두 사람은 비상계단에 다다랐다. 소피는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오직 외부로 연결된 문에만 경보장치가 달려 있었다. 소피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지그재그 모양의 계단으로 랭던을 이끌었다. 그들은 속력을 냈다.
  소피를 따라 서둘러 내려가던 랭던은 입을 열었다.
  “당신 할아버님 말입니다. 당신에게 별표에 대해서 얘기할 때, 여신숭배라든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분개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나요?”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난 수학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황금비율이라든가, PHI, 피보나치 수열, 그런 것들요.”
  랭던은 놀랐다.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PHI 숫자를 가르쳤다는 겁니까?”
  소피의 표정이 수줍게 변했다.
  “물론이죠. 황금비율도요. 사실 할아버지는 내가 반은 황금이나 다름없다는 농담을 했어요 …… 있잖아요. 내 이름에 들어간 글자들 때문에.”
  랭던은 잠시 생각하다가 신음했다.
  ‘소피…… s-o-PHI-e’
  계단을 내려가며, 랭던은 PHI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생각한 것보다 소니에르의 단서들이 훨씬 일관성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빈치 …… 피보나치 수열…… 별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한 가지 개념에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사에서 가장 기본 개념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랭던은 종종 몇 주에 걸쳐 강의를 했다.
  ‘PHI’
  갑자가 기억이 하버드로 되돌아가, <예술의상징> 수업시간에 서있는 것 같았다. 랭던은 칠판에 자기가 좋아하는 숫자를 적고 있었다.
  ‘1.618’
  랭던은 학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숫자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뒤에서 수학과의 다리 긴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PHI(그리스 알파벳의 21번째) 숫자입니다.”
  학생은 ‘피-’라고 발음했다.
  “잘했네. 스테트너. 여러분, PHI입니다.”
  싱글거리면서 스테트너가 덧붙였다.
  “PI(그리스 알파벳의 16번째)와 혼동해서는 안되죠. 우리 수학자들은 ‘PHI’의 하나밖에 없는 H가 PI보다 훨씬 멋있다!고 말하길 좋아하죠.”
  랭던은 웃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스테트너는 풀이 죽었다.
  “이 숫자 PHI는 1.618이다. 예술에서 아주 중요한 숫자지. 그 이유를 말해 줄수 있는 사람 있나?”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 아닌가요?”
  스테트너가 생기를 되찾으며 물었다.
  모두가 웃었다.
  랭던이 말했다.
  “사실, 스테트너가 맞다. 일반적으로 PHI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숫자로 간주된다.”
  웃음은 즉시 가라앉았다. 스테트너 혼자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슬라이드 영사기를 설치하면서, 랭던은 이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에서 나온 것임을 설명했다. 연속된 두 숫자의 합이 다음 숫자와 같아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연속된 두 숫자를 서로 나누어 보면 그 몫이 거의 1.618, 즉 PHI 값과 항상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에 더 유명한 수열이다. PHI!
  PHI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신비로운 수학적인 면모에 기원이 있는 것 같지만, PHI의 진정한 매력은 자연의 일부를 이루는 그 역할에 있었다. 식물,동물 심지어 인체에서도 ‘PHI:1′ 이라는 기이한 비율을 찾아볼 수 있다.
  강의실의 불을 끄면서 랭던은 설명했다.
  “PHI는 자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우연과는 거리가 멀지, 그래서 고대인들은 PHI를 신이 미리 정해 놓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옛날 과학자들은 1:1.618을 황금비율이라고 불렀지.”
  앞줄에 앉은 젊은 여학생이 말했다.
  “잠깐만요. 전 생물학 전공인데요, 자연에서 이런 황금비율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요.”
  랭던은 싱긋 웃었다.
  “없어? 그럼 꿀벌 집단에서 수벌과 암벌의 관계를 공부했나?”
  “물론이죠. 암벌의 수가항상 수벌보다 많죠.”
  “정확해. 그럼 수벌의 수로 암벌의 수를 나누면, 항상 똑같은 숫자가 나온다는 것을 아나?”
  “그런가요?”
  “그래, 바로 PHI지”
  여학생은 숨을 멈추었다.
  “말도 안 돼요!”
  “말이 돼. 이걸 알아볼 수 있겠나?”
  랭던은 웃으면서 곧바로 되받았다. 그리고 나선형의 조개 사진을 영사기 위에 올렸다.
  생물학 전공 학생이 말했다.
  “앵무조개네요. 조개 속 빈 공간으로 가스를 뿜어서, 바닷속에서 떠다닐 수 있게 자기를 조정하는 두족형 연체동물이예요.”
  “정확해. 여기 조개 껍질의 나선들이 보이는데 말이야. 한 나선과 그 다음 나선의 직경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맞힐 수 있겠나?”
  앵무조개의 소용돌이 모양의 나선에 눈을 붙이고 있는 여학생의 표정은 자신이 없어보였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PHI. 황금비율이야. 1:1.618”
  학생은 놀란 표정이었다.
  랭던은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해바라기의 씨받이를 근접 촬영한 것이었다.
  “해바라기씨들은 앵무조개의 나선형과는 반대로 자라지. 각 나선의 직경은 다음 나선의 직경과 어떤 비율을 이룰까?”
  “PHI?”
  모두가 대답했다.
  “빙고.”
  랭던은 다음 슬라이드로 손을 뻗었다. 나선형으로 자라는 솔방울. 식물줄기의 잎새 배열. 곤충 분할. 놀랍게도 모두가 황금비율에 들어맞았다.
  “정말 놀라운데!”
  누군가 외쳤다.
  “정말 놀라워요. 그런데 그게 예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하! 드디어 물어보셨군.”
  랭던은 다른 슬라이드를 꺼냈다. 노랗게 바랜 양피지 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알몸의 남자가 들어있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이름을 딴 유명한 스케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였다. 비트루비우스는 저서 <건축학>에서 황금 비율을 찬탄한 로마 시대의 뛰어난 건축가다.
  “다 빈치보다 인체의 황금구조를 잘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빈치는 인간의 뼈 구조의 정확한 비율을 알아내기 위해서 실제로 시체를 파내기도 했지. 그는 말 그대로 인체가 항상 PHI를 이루는 덩어리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야.”
  모든 학생들이 랭던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랭던은 제안했다.
  “날 믿지 못하겠나 보지? 다음에 샤워할 일이 있으면 자기 몸을 재보게.”
  몇몇 풋볼 선수들이 킬킬거렸다.
  “운동선수들만이 아니야. 여러분 모두, 남학생 여학생 모두, 한번 재봐. 먼저 머리끝에서부터 바닥까지 재고, 그 길이를 배꼽에서 바닥까지 잰 길이로 나누는 거지. 어떤 숫자가 나올까?”
  “PHI는 아닐 겁니다!”
  운동선수들 가운데 하나가 불신에 찬 목소리로 불쑥 내뱉었다.
  랭던은 대답했다.
  “아니. PHI야. 1.618이지. 다른 예를 더 원하나? 어깨에서 손가락 끝까지 잰 후에. 그 길이를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 잰 길이로 나눠 봐. 다시 PHI야. 하나 더? 엉덩이에서 바닥까지 잰 뒤 무릎에서 바닥까지 잰 길이로 나눈다. PHI? 물론이지. 손가락 마디, 발가락 마디, 척추관절 마디, 모두 PHI, PHI, PHI야. 여러분, 여러분 각자의 몸은 걸어다니는 황금비율의 기념품이다.”
  어둠 속에서도 랭던은 학생들이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랭던은 몸안에서 익숙한 열기를 느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가르치는 이유였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혼돈의 세상에도 그 바닥에는 질서가 흐른다. 고대인들이 PHI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신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 놓은 덩어리들 사이로 서툴게 돌아다닐 뿐이라고 믿었지.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숭배한 거야. 지금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지. 신의 손은 분명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심지어 오늘날에도 어머니인 지구를 경배하는 종교들이 존재한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교들이 하는 식으로 자연을 찬미하지. 다만 그런 줄 모르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야. 메이 데이 같은 경우가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봄이 다시 찾아온 것을 축하하고, 땅이 생명을 되찾게 해준 자연의 관대함에 감사를 드리는 거지. 황금비율에 대한 신비로운 마술은 태초부터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그저 자연의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거든. 왜냐하면 조물주의 손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여러분은 예술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황금비율의 예를 만나게 될 거야.”
  나머지 30분을, 랭던은 학생들에게 미켈란젤로, 알브레이트 뒤러, 다 빈치 그 외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슬라이드로 보여 주었다. 모두들 작품속에서 황금비율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열성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이집트의 피라미드, 심지어 뉴욕에 있는 UN빌딩 같은 건축물에서도 PHI를 볼수 있다는 것을 랭던은 제시했다. PHI는 작곡에서도 나타나는데, 버르토크, 드뷔시, 슈베르트를 비롯해 모차르트의 소나타들과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명장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바이올린을 제작할 때, F홀의 정확한 자리를 계산해 내기 위해서 PHI 숫자를 이용했다는 얘기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랭던은 칠판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끝으로 칠판에 다섯 개의 선을 그어 오각형의 별을 만들었다.
  “이 기호는 이번 학기에 여러분이 보게 될 기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기호다. 별표라고 불리는 이 기호는 여러 문화에서 신성하면서도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그런지 말해 볼 사람?”
  스테트너가 손을 들었다.
  “왜냐하면 별 모양을 그릴 때, 선들이 황금비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분할되기 때문입니다.”
  랭던은 뿌듯한 표정으로 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래, 별에 있는 모든 선들의 비율은 정확히 PHI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기호를 황금비율의 궁극적인 상징이라고 하지. 이러한 이유로 오각형의 별 모양은 여신과 신성한 여성을 나타내는 아름다움의 완벽의 상징이 되어 왔다.”
  여학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 가지만 말해두자. 오늘 우리는 그저 다 빈치를 슬쩍 건드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우리는 훨씬 더 자주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여신을 고대 방식으로 숭배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까 . 내일은 그의 유명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보여줄거야. 여러분이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신성한 여성에 대해 가장 놀라운 찬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누군가 말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최후의 만찬>은 예수에 관한 그림으로 알고 있는데요.”
  랭던은 윙크했다.
  “여러분이 결코 상상도 못할 상징들이 그림에 숨겨져 있지.”
  소피가 속삭였다.
  “이봐요. 뭐가 잘못됐어요? 거의 다 왔어요. 서둘러요.”
  딴생각에 빠져든 마음을 추스르며 랭던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계단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랭던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이 굳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소피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어.’
  랭던은 생각했다.
  하지만 랭던은 알아냈다.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큰 그릇 속에…… PHI와 다 빈치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치면서 랭던의 마음으로 밀려 들어왔다. 랭던은 자기도 모르게 소니에르의 코드를 풀어 버린 것이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건 가장 간단한 코드야!”
  랭던보다 아래 계단에 있던 소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랭던을 올려다보면서 멈춰 섰다.
  ‘코드?’
  밤새도록 숙고했지만, 어떤 기호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한 것도.
  랭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말했소. 피보나치의 숫자들은 올바른 순서로 있어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일 뿐이라고 말이오.”
  랭던이 무슨 얘길 하려는지 소피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피보나치 숫자들?’
  소피는 그 숫자들이 단지 오늘 밤 벌어진 사건에 암호 해독부서를 참여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종이를 꺼내 들고, 소니에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살폈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 숫자들이 뭐 어떻다는 거지?’
  종이를 가져가며 랭던이 말했다.
  “뒤섞어 놓은 피보나치 수열이 단서입니다. 이 숫자들이 다른 부분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에 대한 단서인 거죠. 아무 의미 없이 숫자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같은 식으로 글자들을 해석하라는 의미인 겁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이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글자들일 뿐이지요.”
  소피는 랭던의 암시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무척 간단한 얘기였다.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은. 이 메시지가…… 아나그램(철자 바꾸기)? 신문에서 아무 말이나 골라낸 것처럼요?”
  랭던은 소피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아나그램이 기호학에서 얼마나 풍부한 역사를 지녔는지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카발라(중세 유대교의 신비철학 또는 밀교)의 신비한 가르침은 아나그램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 헤브라이어 글자들을 재배치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프랑스 왕들은 아나그램에 마법의 힘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왕들은 왕립 아나그램 전문가들을 임명해, 중요한 자료를 분석할 때 돕도록 했다. 로마 사람들은 실제로 아나그램에 관한 학문을 아르스 마그나, 즉 위대한 예술이라고 불렀다.
  랭던의 눈동자는 소피의 눈을 붙들고 있었다.
  “당신 할아버님의 뜻은 바로 우리 코앞에 있었소. 그분은 충분한 단서를 우리에게 남긴 거요.”
  아무 말 없이 랭던은 외투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고, 각 줄의 글자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O,Draconian devil!)
  오, 불구의 성인이여!(Oh, lame saint!)
  이 글자들은 완벽한 아나그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The Mona Lisa!)

21

  모나리자.
  출구 계단에 서 있던 소피는 순간, 루브르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아나그램에 대한 그녀의 충격에는 그 메시지를 스스로 풀지 못했다는 창피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복잡한 암호 해독법에 관한 한 전문가인 그녀의 지식이 가장 단순한 말장난을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다. 당연히 알아냈어야  했다고 소피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나그램에 무지하지 않았다. 특히 영어로 된 아나그램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어 철자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소니에르는 종종 아나그램 게임을 사용했다. 한번은 ‘행성들(planets)’이란 단어를 불러주고, 각 철자의 순서를 바꾸면서 조합하면 무려 92개의 다른 영어 단어들이 생긴다고 소피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어 사전을 안고 사흘을 꼬박 투자한 끝에 92개의 단어를 모두 찾아냈다.  종이를 들여다보며 랭던이 말했다.
  “당신 할아버님은 죽기 전 고작 몇 분 동안에 어떻게 이런 복잡한 아나그램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군요.”
  소피는 랭던의 호기심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그녀의 기분을 더 악화시켰다.
  ‘내가 당연히 알아냈어야 했어!’
  말장난 애호가이자 예술을 사랑한 할아버지가 유명한 예술작품들의 제목으로 아나그램 만들기를 즐겼다는 것을 소피는 기억하고 있었다. 소피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만든 아나그램 중 하나는 할아버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미국의 한 예술잡지와 인터뷰하면서, 소니에르는 현대 큐비즘 운동에 대한 혐오를 표한한 적이 있었다. 이때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더럽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vile meaningless doodles)’라는 완벽한 아나그램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피카소 애호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는 모나리자의 아나그램을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 두었을 거예요.”
  랭던을 흘끗 올려다보며 소피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 밤 임시변통의 암호로 그것을 썼을 거고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차갑고 정확하게 들려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왜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유명한 그림에 관한 언급인지 소피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었다. 심란한 가능성이었다.
  ‘이 메시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모니리자>를 찾아가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거기에 할아버지는 다른 메시지를 남긴 것일까? 이 생각은 그럴듯해 보였다. 어쨌든 이 유명한 그림은 살 데 제타에 걸려 있는데, 살 데 제타는 오직 대화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모나리자> 전용 관람실이었다. 소피는 이제야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죽은 장소에서, 겨우 20미터 떨어진 곳에 살 데 제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모나리자>에게 다녀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내려온 비상계단을 다시 올려다보며 소피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랭던을 즉시 박물관에서 빼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본능은 반대로 움직이라고 그녀를 재촉했다. 소피는 드농 관을 처음 방문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만일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말해 줄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다 빈치의 <모나리자>보다 적당한 만남의 장소는 없음을 소피는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 멀리 있단다.”
  소피의 작은 손을 꼭 쥐고서 할아버지는 속삭이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관람시간이 지난 한적한 박물관 안을 그녀를 데리고 걷고 있었다.
  소피는 여섯 살이었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어지러운 바닥을 내려다본 어린 소피는 자기가 작고 하찮게 느껴졌다. 텅 빈 박물관은 어린 그녀를 겁나게 했지만, 할아버지가 눈치 채지 않게 애쓰고 있었다. 턱을 단단히 죄고 할아버지의 손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살데 제타란다.”
  루브르의 가장 유명한 방에 거의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드러나게 즐거워하는 듯했지만, 어린 소피는 집에 가고 싶었다. 책에서 이미 <모나리자>를 보았지만, 소피는 그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분해요.”
  소피가 툴툴거렸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집에서는 영어를 쓰라고 했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집이 아냐!”
  소피는 반항적으로 외쳤다.
  할아버지는 피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구나. 그럼 그저 재미삼아 영어로 얘기해 볼까.”
  소피는 입을 삐죽 내밀고 계속 걸었다. 두 사람이 전용 관람실에 들어갔을때, 소피의 눈이 작은 방을 훑어보다가 가장 유명한 지점에 딱 멈췄다. 오른쪽 벽 중앙에 초상화 하나가 보호용 유리벽에 둘러싸여 외롭게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문가에 서서, 그림 쪽으로 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가봐라, 소피. 그녀를 혼자 볼 수 있는 기회란 그리 흔치 않단다.”
  불안감을 참고서, 어린 소피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갔다. <모나리자>에 관해 모든 것을 들은 뒤라, 소피는 마치 왕족을 알현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보호 유리벽에 이르자, 소피는 숨을 참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림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에서 무얼 기대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흥분의 도가니도 아니었고, 순간의 감동도 아니었다. 그림의 유명한 얼굴은 책에 나온 그대로였다. 뭔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 속에 소피는 서 있었다.
  조용히 소피 뒤로 다가와 할아버지는 속삭였다.
  “그래, 어떻니? 아름답지, 그렇지?”
  “그녀도 작아요.”
  소니에르는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작고, 또 아름답지.”
  ‘난 아름답지 않아.’
  소피는 자기의 빨간 머리와 얼굴의 주근깨가 싫었다. 게다가 같은 반의 남자애들보다 키도 컸다. 소피는 <모나리자>를 뒤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는 책에서 본 것보다 못생겼어요. 얼굴이……”
  “안개가 낀.”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었다.
  “안개가 낀.”
  새 단어를 배웠을 때 반복해서 말하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계속 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피는 얼른 따라했다.
  할아버지는 소피에게 말했다.
  “저건 회화에서 스푸마토(인물을 어스름한 안개로 감싸는 기법. 몽환적 효과를 나타낸다)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매우 하기 어려운 거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른 누구보다 저 기법에 뛰어났단다.”
  소피는 여전히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요.”
  할아버지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게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란다. 사람들은 왜 <모나리자>가 미소짓고 있는지 추측하기를 좋아하지.”
  “할아버지는 왜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지 알아요?”
  할아버지는 윙크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네게 모든 것을 말해 줄게.”
  소피는 발을 굴렀다.
  “할아버지, 말했잖아요. 난 비밀이 싫어요!”
  “프린세스, 삶은 항상 비밀로 가득 차 있는 거란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단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난 다시 위로 올라가 봐야겠어요.”
  소피의 목소리는 계단 통로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모나리자>한테 말입니까? 지금?”
  랭던이 되물었다.
  소피는 위험을 고려해 보았다.
  “나는 살인 용의자가 아니예요.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이해해야 해요.”
  “그럼 대사관은?”
  소피는 랭던을 도망자로 만들어 버린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제는 혼자 버려 두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소피는 계단 아래의 금속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랭던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넸다.
  “저 문을 통해서 가세요. 출구 표시등을 계속 따라가면 돼요. 할아버지는 저를 이리로 내보내곤 했어요. 출구 표시등을 따라가면 보안 회전문이 나올거예요. 일방 통행문인데 열려 있어요.제 차는 직원용 주차장의 빨간색 스마트카예요. 이 벽 바로 너머예요. 대사관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나요?”
  손에 든 열쇠를 바라보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할아버지가 <모나리자>가 있는 방에 메시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단서 같은 거요. 아니면 내가 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알려주거나.”
  ‘아니면,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거나.’
  “나는 올라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하지만 소니에르 씨가 당신이 왜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면, 왜 죽은 자리에 그냥 적어 두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런 복잡한 말장난을 남겼을까요?”
  “할아버지가 제게 말하려던 게 무엇이든 간에.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할아버지가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심지어 경찰이라 해도 말이예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가보기 전에 제가 <모나리자>에게 다녀가기를 할아버지가 원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직 그녀를 통해서만 비밀스러운 내용이 직접 전달될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모든 힘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비밀 이니셜을 포함해서, 코드화된 문장을 바닥에 적었고, 로버트 랭던을 찾으라고 그녀에게 요청한 것이다. 이 미국인 기호학자가 할아버지의 코드를 풀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현명한 요청인 셈이다.
  “나도 함께 가겠소.”
  “안 돼요! 대화랑이 얼마나 오래 비어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당신은 나가야 해요.”
  학문적인 호기심이 이성적인 판단을 위협해, 결국 파슈의 손에 끌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랭던은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가세요. 랭던씨, 대사관에서 만나요.”
  소피는 랭던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랭던은 시무룩해 보였다.
  “그럼 거기서 한 가지 조건으로 만나겠소.”
  확고한 목소리로 랭던은 응답했다.
  소피는 놀란 듯 머뭇거렸다.
  “그게 뭔데요?”
  “나를 랭던 씨라고 부르지 않는 겁니다.”
  시원한 웃음이 랭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소피는 느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소피가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로버트”
  계단 아래로 내려서자, 의심할 여지없는 아마인유 냄새와 석고 먼지들이 랭던의 콧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앞쪽에는 출구 표시등이 긴 복도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랭던은 복도로 들어섰다. 오른쪽에는 어둑어둑한 작품 복원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보수가 필요한 조각상들이 한 무더기 서 있는 게 보였다. 왼쪽으로는 하버드의 미술교실을 닮은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 안에는 이젤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림과 팔레트, 액자 도구들이 보였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랭던은 어느 순간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놀라 잠이 깨는 것은 아닌지 의아했다. 이 밤 전체가 기묘한 꿈만 같았다.
  ‘나는 지금 루브르 박물관을 절박하게 빠져나가는 중이다…… 그것도 도망자가 되어서.’
  랭던은 여전히 소니에르의 재치 있는 아나그램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피가 <모나리자>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만일 뭔가가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소니에르가 그 유명한 그림을 방문하도록 자신을 유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이지만, 랭던은 뭔가 찜찜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소니에르는 마룻바닥에 랭던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소피에게 랭던을 찾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저 소피가 아나그램을 풀도록 돕기 위해서? 그것은 매우 이상했다. 랭던이 아나그램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소니에르가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소피가 당연히 자신의 힘으로 아나그램을 풀었어야 했다고 말한 점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생각해 낸 것도 소피고, 의심할 여지없이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랭던의 도움 없이도 메시지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혼자서 아나그램을 풀게 되어 있었다.’
  랭던은 확신했다. 하지만 소니에르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었다.
  복도를 내려가면서 랭던은 궁금했다.
  ‘왜 나지? 왜 소니에르 씨는 관계가 소원한 손녀에게 나를 찾아내기를 절실히 원했을까? 소니에르 씨는 내가 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동요로 랭던은 걸음을 멈췄다. 랭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머니를 뒤져 프린트물을 꺼냈다. 랭던은 소니에르가 남긴 마지막 줄을 응시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랭던은 두 글자에 눈을 고정시켰다.
  ‘P.S.’
  순간, 랭던은 소니에르의 수수께끼 같은 기호들이 렌즈의 초점을 맞춘것처럼 뚜렷하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둥소리처럼 기호학과 역사에 대해 가치 있는 그의 경력이 주위로 부서져 내렸다. 오늘 밤 자크 소니에르가 저지른 모든 일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랭던의 생각은 계속 달려갔다. 랭던은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암시들을 조합해 보려고 노력했다. 몸을 빙 돌려, 랭던은 자기가 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시간이 될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랭던은 계단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22

  첫째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일래스는 기도하는 척하며 교회 내부의 배치를 관찰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생 쉴피스도 거대한 로마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생 쉴피스도 거대한 로마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앙의 본당은 곧장 제단으로 향하고, 제단은 수랑(袖廊:십자형 회당의 좌우 날개부분)이라고 불리는 구역과 교차되었다. 본당과 수랑이 만나는 지점은 정확히 교회의 둥근 지붕 바로 밑이며, 교회의 심장부로 간주되는 곳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신성하고 신비로운 지점.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다. 생 쉴피스는 어딘가에 비밀을 감추고 있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사일래스는 남쪽 수랑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른쪽 뒤편, 마지막 줄의 의자 너머로 보이는 차가운 교회 바닥에서 희생자들이 묘사한 물체를 찾았다.
  ‘저기 있다.’
  회색 화강암 바닥에 윤기 나게 잘 닦인 가는 황동 선이 반짝거렸다…… 황동색 선이 교회 바닥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에는 자처럼 눈금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선은 해시계였다. 이교도적인 천문 관측기라고 들었다. 세계 도처에서 관광객과 과학자, 역사가 그리고 이교도 들은 이 유명한 선을 보기위해 생 쉴피스 교회로 몰려들었다.
  ‘로즈 라인(Rose Line)’
  사일래스는 천천히 황동선의 궤적을 추적했다. 선은 사일래스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 앞으로 교회 바닥을 가로지르는데, 사일래스 앞에서 약간 이상한 각도로 틀어지는 바람에 대칭형인 교회와는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제단을 자르면서 지나가는 선이 사일래스에게는 고운 얼굴에 난 상처처럼 보였다. 선은 교회를 둘로 나누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 폭을 가로지르는 셈이었다. 결국 선이 끝나는 곳은 북쪽 수랑이 있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혀 예기치 못한 구조물이 서있었다.
  거대한 이집트 오벨리스크.
  여기에서 로즈 라인은 90도로 방향을 틀어 수직으로 올라갔다. 오벨리스크 자체를 직접 타고 오르는 것이다. 오벨리스크를 타고 10미터를 올라간 로즈 라인은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서 마침내 진행을 멈추었다.
  ‘로즈 라인. 이 라인에 조직은 쐐기돌을 숨겼다.’
  오늘 밤 일찍, 스승에게 쐐기돌이 생 쉴피스 교회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을 때, 스승은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사일래스가 생 쉴피스 바닥을 지나는 황동 선과 관련해, 형제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덧붙이자, 스승은 뜻밖의 사실에 숨을 들이켰다.
  “지금 로즈 라인을 말한 것이냐!”
  스승은 재빨리 사일래스에게 생 쉴피스 교회의 유명한, 그러면서도 기이한 건축 특성에 대해 알려주었다. 정확히 남북을 축으로 서 있는 교회를 로즈 라인이 분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즈 라인은 고대 해시계의 일종이며, 한때 이교도의 사원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던 흔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극점에서 극점으로 움직이는 태양광선이 남쪽 벽의 둥근 창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매일 선 아래를 따라 움직인다는 거였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선이 로즈 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수세기 동안, 장미는 영혼을 바른 곳으로 인도한다는 지도와 관련된 상징이었다. 거의 모든 지도에 그려져 있는 ‘로즈 나침반’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원래는 ‘바람의 로즈’라고 불렸는데, 이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나침반에서 서른 두 개의 바람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덟 개의 주요 바람. 주요 바람들 사이에 또 여덟 개의 중간 바람, 그리고 여덟 개 중간바람들 사이에 열 여섯 개의 바람들. 하나의 원 안에 나침반의 서른 두 개 방향의 점을 찍어 원들을 그려내면, 서른 두 장의 꽃잎을 가진 전통적인 장미 모양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본적인 항해 도구를 로즈 나침반이라고 하는데, 북쪽은 항상 화살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아니 좀더 보편적으로는 붓꽃의 상징이다.
  지구에서 자오선 또는 경선이라고 불리는 로즈 라인은 북극과 남극을 잇는 상상의 선이다. 지구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북극과 남극을 잇는 경선이 있기 때문에 로즈 라인의 수는 사실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초기 항해사들의 의문은 무한한 경선들 가운데, 어느 것을 로즈 라인, 즉 경도0으로 불러야 하느냐였다.
  오늘날 이 라인은 영국의 그리니치에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제1자오선으로 그리니치가 선정되기 전에, 전세계의 경도0은 프랑스 파리의 생 쉴피스 교회를 통과했다. 생 쉴피스의 황동 선은 세계의 첫째 주요 자오선이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비록 1888년에 그리니치가 그 영광을 가져갔지만, 본래의 로즈 라인은 여기 남아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볼 수가 있다.
  스승은 사일래스에게 말했다.
  “그래, 전설이 사실이었군. 쐐기돌은 장미의 표식 아래 누워있을 것이다.”
  벤치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일래스는 교회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순간, 성가대 발코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사일래스는 몸을 돌려 잠시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 혼자다’
  사일래스는 일어서서 제단을 마주했다. 그리고 세 번 무릎을 꿇었다. 그런 뒤에 왼쪽으로 돌아서서 오벨리스크로 향한 황동 선을 따라갔다.
  그때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 공항에서는, 착륙하는 비행기의 타이어 소리가 아링가로사 주교의 선잠을 깨웠다.
  ‘잠이 들었었군.’
  잠이 들 정도로 자신이 편안한 상태라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인상적이었다.
  “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행기의 안내방송이었다.
  자리에 앉아 아링가로사는 검정 사제복의 주름을 펴고, 좀처럼 짓지 않는 웃음까지 지었다. 행복한 여행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방어적으로 지내왔어.’
  하지만 오늘 밤 규칙은 바뀔 것이다. 겨우 다섯 달 전만 해도, 아링가로사는 자기 신념의 미래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마치 신의 뜻인 것처럼 해답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개입’
  오늘 밤 파리에서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이루어진다면, 아링가로사는 기독교 세계에서 그를 가장 강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뭔가를 곧 갖게 될 터였다.

23

  숨을 헐떡이며 소피는 살 데 제타의 커다랗고 육중한 문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소피는 홀 아래쪽을 마지못해 바라보았다.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할아버지가 지중 조명을 받으며 조용히 누워 있었다.
  갑자기 강한 후회가 그녀를 붙들었다. 죄책감과 함께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동안 할아버지는 수천 번이나 그녀와 접촉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피는 할아버지의 편지와 소포들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할아버지의 노력을 부인하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끔찍한 비밀을 감추고 있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자기에게서 몰아냈다. 완전히.
  이제 할아버지는 죽었고, 무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모나리자.’
  소피는 거대한 목재 문을 밀었다. 입구가 하품하듯이 살짝 열렸다. 소피는 문턱에 서서, 잠시 사각형의 큰 방을 살펴보았다. 이 방 역시 부드러운 붉은 조명 아래에 있었다. 대화랑 한가운데에 있는 살 데 제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몇 개밖에 되지 않는 막다른 방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 밀고 들어간 이 문이 전용 관람실의 유일한 출입문이었다. 문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4.5미터나 되는 보티첼리의 그림이 걸려있다. 그 아래 방 중앙에는 팔각형 모양의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다. 루브르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피는 한 가지 빼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가시광선.’
  저기 아래에서 여러 전자기구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가 여기에 뭔가를 적었다면, 워터마크펜으로 적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피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환한 범죄 현장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할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PTS 도구를 찾는 데 집중했다. 작은 자외선 만년필형 손전등을 찾아내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전용실의 열린 문으로 돌아갔다.
  문턱을 넘어 들어가려는 순간, 소피는 방 안에서 서둘러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안에 있다.’
  어두컴컴한 붉은 조명에서 유령 같은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소피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여기 있었군!”
  그녀 앞으로 다가오며 랭던의 거친 속삭임이 공기를 갈랐다.
  소피가 안도감을 느낀 건 순간뿐이었다.
  “로버트, 빠져나가라고 말했을 텐데요! 만일 파슈가……”
  “어디 있었어요?”
  “불가시광선이 필요해서요. 할아버지가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면……”
  랭던의 푸른 눈이 그녀를 확고하게 붙들었다.
  “소피, 들어봐요. P.S.라는 글자들…… 그 글자들이 당신에게 다른 의미는 없어요? 전혀?”
  그들의 목소리가 홀 아래로 울려퍼질 것이 두려워, 소피는 랭던을 전용 관람실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육중한 문을 가만히 닫았다.
  “말했잖아요. 그 이니셜은 프린세스 소피라고.”
  “압니다. 그런데 그게 다른 곳에 쓰인 것을 본 적이 없냐고요? 당신 할아버지가 다른 식으로는 P.S.를 사용한 적이 없느냔 말입니다? 가령, 모노그램으로라든가 아니면 문서라든가, 무슨 개인 물품 같은 것에 말이오.”
  랭던의 질문은 소피를 놀라게 했다.
  ‘랭던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지?’
  정말로 소피는 전에 한 번 P.S.를 모노그램의 형태로 본 적이 있었다.
  아홉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숨긴 생일 선물을 찾아서 소피는 집 안을 몰래 훑고 있었다. 그때는 자기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싫었다.
  ‘할아버지가 올해에는 어떤 선물을 주실까?’
  소피는 벽장과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내가 갖고 싶어하는 인형을 주시겠지? 그런데 그걸 어디에 숨기신 거야?’
  집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자, 소피는 용기를 내 할아버지의 침실로 살며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침실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아래층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얼른 둘러만 봐야지!’
  발끝을 들고 삐걱거리는 나무 마룻바닥을 가로 질러 할아버지의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들 뒤에 있는 선반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아래도 살폈지만 역시 없었다. 할아버지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소피는 사람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여기에 있을 거야!’
  서랍 하나만 남아 있을 때까지 인형의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낙담한 소피는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입은 적이 없는 검은 색 옷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안쪽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뭔가가 소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계줄처럼 보였지만, 할아버지에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소피는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를 깨닫자 소피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목걸이!’
  소피는 조심스럽게 줄을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줄 끝에는 반짝이는 황금열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는 묵직하고 아른아른하게 빛났다. 마법에 걸린듯, 소피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대부분의 열쇠들은 납작한 다리에 톱니 모양의 이빨 자국들이 나 있지만 이 열쇠는 삼각기둥 모양의 다리에 온통 작은 곰보 자국뿐이었다. 큰 열쇠 머리는 시자가 모양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십자가는 아니었다. 팔길이가 다 같은 더하기(+) 모양이었다. 십자의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기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꽃처럼 생긴 디자인과 두 글자가 서로 얽혀 있었다.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뭐지?’
  “소피?”
  할아버지가 문가에 서 계셨다.
  너무 놀란 소피는 돌아보다가 쨍, 소리를 내며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무서워 소피는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저…… 생일 선물을 찾고 있었어요.”
  소피는 머리를 숙였다. 자기가 할아버지의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침묵을 지키며 문가에 서 있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열쇠를 주워라. 소피.”
  소피는 열쇠를 집었다.
  할아버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온화하게 무릎을 꿇고 , 할아버지는 소피에게서 열쇠를 가져갔다.
  “소피, 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열쇠는 아주 특별한 거란다. 만일 내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할아버지의 조용한 목소리가 소피의 기분을 더 처참하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난 이게 제 생일 선물인 목걸이라고 생각했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소피를 쳐다보았다.
  “소피, 이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한번 더 네게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 할아버지.”
  “나중에 더 얘기하자. 지금은 정원에서 잡초를 좀 뽑아야 할 것 같구나.”
  소피는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음 날 아침, 소피는 할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선물도 받지 못했다. 어제일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생일날 밤, 슬픈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려던 소피는 침대에 기어오르다가 베개 위에 놓은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위에는 단순한 수수께끼가 적혀 있었다.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소피는 벌써 웃고 있었다.
  ‘뭔지 알아!’
  지난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소피를 위해 할아버지가 이런 장난을 했다.
  ‘보물찾기!’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소피는 카드에 골몰했다. 해답은 집 안의 다른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고, 거기에는 다른 수수께끼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걸 풀고 ,소피는 다음 장소로 또 달려갔다. 단서들을 쫓아 집 안 여기저기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던 소피는 마침내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었다. 해답은 다시 자기 침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뛰어든 소피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방 한가운데에 손잡이에 빨간 리본이 달린 빨간 자전거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피는 탄성을 내질렀다.
  “네가 인형을 바란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
  구석에서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소피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소피가 무성한 잔디 위로 자전거를 몰고 가다 균형을 잃으면, 둘은 함께 잔디 위로 구르면서 웃었다.
  할아버지를 껴안으며 소피는 말했다.
  “할아버지, 그 열쇠는 정말 미안해요.”
  “안다. 얘야. 난 널 용서했단다. 내가 어떻게 계속 화낼 수 있겠니. 할아버지와 손녀는 항상 서로 용서하는 거란다.”
  소피는 물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열쇠는 뭘 여는 거예요? 그런 열쇠는 본 적이 없어요. 아주 예쁘던데.”
  할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소피는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마침내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 열쇠는 어떤 상자를 여는 거란다. 그 안에 이 할아비는 많은 비밀을 보관하고 있거든.”
  소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비밀이 싫어요!”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중요한 비밀이란다.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그 비밀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게다.”
  “열쇠 위에 글자와 꽃이 있는 걸 봤어요.”
  “그래. 그 꽃은 할아비가 좋아하는 꽃이지. 붓꽃이란다. 우리 집 정원에도 있지.”
  “나도 그 꽃 알아요! 나도 좋아해요!”
  소피에게 뭔가 도전적인 일을 시킬 때면 항상 그랬듯이, 할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좋아, 그럼 우리 계약을 하나 맺을까. 네가 내 열쇠를 비밀로 간직하고, 나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도 절대로 열쇠 얘기를 하지 않겠다면, 언젠가 그 열쇠를 네게 주마.”
  소피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요?”
  “내 약속하지. 때가 되면, 그 열쇠는 네 것이 될 거야. 그 열쇠에는 이미 네 이름도 있잖아.”
  소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예요. 열쇠에는 P.S.라고 써 있었어요. 내 이름은 P.S.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듣는 사람이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 소피. 네가 꼭 알아야 하겠다면 말해주마. P.S는 암호란다. 네 비밀 이니셜이야.”
  그녀는 눈이 둥그레졌다.
  “내 비밀 이니셜이 있어요?”
  “물론이지. 모든 손녀들에게는 오직 할아버지만 아는 비밀 이니셜이 있단다.”
  “P.S.?”
  할아버지는 그녀를 간질였다.
  “프린세스 소피”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프린세스가 아니야!”
  “넌 나의 프린세스란다.”
  그후로 둘은 다시는 열쇠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피는 할아버지의 프린세스 소피가 되었다.
  살 데 제타안에서 소피는 깊은 상실감에 젖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 이니셜을 본 적이 있소?”
  소피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랭던은 속삭였다.
  소피는 박물관 화랑에서 할아버지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열쇠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내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소피는 할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할아버지의 신뢰를 자신이 어길 수 있을지 궁금했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할아버지는 랭던이 돕기를 원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 한 번 봤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때요.”
  “어디에서요?”
  소피는 망설였다.
  “할아버지에게 아주 중요한 어떤 물건에서.”
  랭던의 눈이 소피의 눈과 얽혔다.
  “소피,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요. 그 이니셜이 다른 상징과 함께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요? 붓꽃인가요?”
  소피는 너무 놀라 뒤로 비틀거렸다.
  “아니…… 어떻게 당신이 그걸 알죠!”
  랭던은 숨을 토해 내며 소리를 낮췄다.
  “내 장담하건데, 당신 할아버지는 비밀단체의 일원이었을 거예요. 아주 오래되고 은밀한 조직 말이오.”
  소피는 뱃속에 딱딱한 응어리가 뭉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끔찍한 이 사실을 그녀에게 확인시켜 준 사건을 잊기 위해 지난 10년동안 노력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어떤 일을 목격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어.’
  “붓꽃, P.S라는 이니셜과 결합된 붓꽃은 어떤 조직의 공식적인 의장이죠. 조직의 문장이자 로고인 셈이예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랭던이 자신도 그 조직의 일원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소피는 기도했다.
  “그 조직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비밀단체들의 상징을 연구하는 것이 내 전공이죠. 그들은 자기들을 시온 수도회(Priory of sion) 라고 불렀어요.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유럽 전역에서 힘있는 멤버들을 끌어들였죠. 사실 이 조직은 지구상에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비밀조직이예요.”
  랭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소피는 이런 것들에 관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랭던은 속사포처럼 말하고 있었다.
  “시온 수도회의 회원들을 보면 역사상 가장 고결한 인물들이 몇몇 포함되어 있어요. 예를 들자면, 보티첼리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그런 사람들이죠.”
  랭던은 학문적 열정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잠시 말을 쉬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어요.”
  소피는 멍하는 쳐다볼 뿐이었다.
  “다 빈치가 비밀단체의 일원이었다고요?”
  “다 빈치는 1510년부터 1519년 사이, 조직의 회장. 즉 그랜드 마스터로서 시온을 이끌었어요 .이 점이 당신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열정을 보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거요. 당신 할아버지는 레오나르도에게서 역사적으로 맺어진 형제애 같은 것을 공유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사상은 여신 도상학에 대한 열정이나 이교주의,여신의 신성, 교회에 대한 혐오 등 여러 면에서 완벽하게 들어맞아요. 시온 수도회는 역사적으로 신성한 여성을 찬양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지금 저한테 그 조직이 이교도적인 여신숭배 집단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이교도적인 여성숭배 집단 그 이상이에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대 비밀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다는 거죠. 조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만든 비밀.”
  확신에 찬 랭던의 눈을 보면서도, 소피의 솔직한 반응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비밀스러운 이교도 집단이라고? 한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조직을 이끌었다고?’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만 들렸다. 하지만 랭던의 얘기를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려 해도,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 사건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실수로 할아버지를 놀라게 하고 ,그녀가 아직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날 밤의 일.
  ‘그걸 설명할 수 있을까?’
  랭던은 말했다.
  “살아 있는 시온 회원들의 신분은 최상급 비밀이예요. 하지만 당신이 아이였을 때 보았다는 P.S와 붓꽃이 증거요. 그것들은 오로지 시온수도회와 관련이 있을 뿐이죠.”
  소피는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 랭던이 할아버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미국인은 그녀와 공유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경찰이 당신을 잡아가게 둘 수는 없어요. 로버트, 우리가 서로 의논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나가야 해요!”
  랭던은 소피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정신은 지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고대의 비밀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곳. 역사에서 잊혀진 장소가 어둠에서 나오는 곳이었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랭던은 머리를 천천히 돌려 붉은 안개같은 조명 속에 있는 <모나리자>를 응시했다.
  붓꽃은 불어로 fleur-de-lis다.
  ‘fleru-de-lis…… flower of Lisa (리자의 꽃)……Mona Lisa(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었다. 시온 수도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역할에 공명하는 소리 없는 교향악처럼 말이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앵발리드 너머 강둑에서, 트레일러를 몰던 운전사가 경찰이 들이댄 총 끝에 둘러싸여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법경찰 반장이 분노에 찬 욕설을 내지르며 넘실대는 센 강에 비누를 던져 버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24

  사일래스는 육중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의 길이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흥분으로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교회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혼자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 오벨리스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쐐기돌은 로즈 라인 아래에 숨겨져 있다,’
  ‘쉴피스의 오벨리스크 아래에.’
  희생자들의 말이 일치했다.
  무릎을 꿇은 채, 사일래스는 돌바닥을 더듬어 나갔다. 타일을 움직일 만 한 틈이나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사일래스는 손가락 마디로 바닥을 부드럽게 톡톡 쳐보기 시작했다. 오벨리스크에 가까이 있는 황동 선을 따라서, 선 근처에 있는 타일들을 두드려 보았다. 마침내 한 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이 있다!’
  사일래스는 미소를 지었다. 희생자들이 진실을 말한 것이다.
  사일래스는 바닥의 타일을 깰 만한 도구를 찾기 위해 교회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단 위 높을 발코니에서 상드린 수녀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것이다. 이 방문객은 평범한 방문객이 아니었다. 수상한 오푸스데이 신도가 다른 목적을 품고 생 쉴피스에 들어온 것이다.
  비밀스러운 목적.
  ‘당신만 비밀을 갖고 있는게 아냐.’
  수녀는 생각했다.
  상드린 비에유 수녀는 교회의 관리인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는 파수꾼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고대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낯선 방문객이 오벨리스크 바닥에서 서성인다는 것은 조직에서 보낸 신호인 셈이었다.
  ‘재난이 시작됐다는 소리 없는 신호다.’

25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샹젤리 제의 오른쪽, 가브리엘 가에 있는 자그마한 복합건물이었다. 1만2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영역은 미국 땅으로 간주되었다. 즉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국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법과 보호하에 있다는 의미다.
  대사관의 야간 교환원이 <타임>지의 국제판을 읽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 대사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대사관 자동 전화 시스템에 저한테 온 전화 메시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은 랭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접속 코드인 세 자리 숫자를 잊어버렸습니다. 도와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랑스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공손한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남자의 어조는 퉁명스럽고 관료적이었다.
  교환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손님의 메시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군요. 그 시스템은 보안상의 문제로 이 년전에 폐기되었습니다.게다가 지금 모든 접속 코드는 다섯자리고요. 그런데 당신에게 온 메시지가 있다는 얘기를 누가 했죠?”
  “자동 전화 시스템이 없단 말입니까?”
  “예, 손님에게 온 메시지라면 저희 서비스 부서에 메모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하지만 남자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센 강을 따라 달리며, 브쥐 파슈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랭던이 지역번호를 누르고 세 자리 코드를 누르고 나서, 녹음된 메시지를 듣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랭던이 대사관에 전화한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한테 한 거지?’
  휴대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파슈는, 순간. 답이 자기 손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랭던이 내 휴대 전화기를 사용했지.’
  휴대 전화기의 메뉴 버튼을 눌러, 파슈는 최근 통화목록을 열었다. 랭던이 건 전화번호도 그대로 나와 있었다.
  파리 지역번호와 어떤 전화번호 뒤에 세자리 코드(454)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른 파슈는 신호가 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한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소피 느뵈입니다. 저는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만……”
  파슈는 피가 끓어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4…5…4.

26

  불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 <모나리자> 그림은 고작 가로 53, 세로 79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루브르 박물관의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포스터보다 작다. 그녀는 5센티미터 두께의 보호용 유리벽에 둘러싸여 전용 관람실의 북서쪽 벽에 걸려 있다. 포플러 나무판 위에 그려진 모나리자의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의 대가이던 다 빈치의 능력 덕분이었다. 이 기법에서 형상은 증기처럼 사라져 없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잡은 이래, <모나리자>는 두 번 도둑맞았다. 최근에 일어난 것은 1911년 이었는데,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에서 였다. 모든 파리 시민들은 슬퍼했고, 도둑에게 그림을 돌려 달라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 게재했다. 2 년 후, 피렌체의 한 모텔이 있던 트렁크 밑바닥에서 숨겨져 있던 <모나리자>를 찾아냈다.
  랭던은 떠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소피를 따라 전용 관람실로 들어갔다. <모나리자>는 20미터 앞에 있었다. 소피가 펜 전등을 켜자, 펜에서 흘러나오는 초승달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바닥을 비추었다. 소피는 지뢰라도 찾는 것처럼 어딘가에 잉크의 흔적이 없는지 이리저리 맞추기 비추기 시작했다.
  소피 옆에서 걸으면서, 랭던은 위대한 작품과의 재회를 앞둔 기대감이 온몸에 번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소피의 손에서 나오는 자주색 불빛 너머의 것을 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왼쪽으로 팔각형의 휴식용 의자가 어두운 섬처럼 보였다.
  이젠 어두운 유리벽도 볼수 있었다. 저 유리 뒤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독방에 갇혀 있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의 지위는 그녀의 불가피한 미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많은 역사가들이나 음모론 애호가들이 내놓는 난해한 해석 따위와도 상관없다.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녀를 자기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가지고 다녔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기품 있게 표현한 그녀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라고 대답한 것이다.
  많은 예술사가들은 <모나리자>에 대한 다 빈치의 애정이, 숙련된 예술기법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모나리자>는 극히 평범한 스푸마토 초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이 작품에 대한 다 빈치의 숭배는 좀 더 의미심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림의 여러 겹들 사이에 숨겨진 메시지가 그것이다. 사실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와 해학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두툼한 예술사 책들은 이 그림에 잘 드러나 이중 의미의 콜라주와 장난기 넘치는 은유를 설명하고 있다. 대중들은 여전히 <모나리자>의 미소를 가장 큰 신비로 여기지만 말이다.
  ‘미스터리란 없다. 미스터리는 없어.’
  랭던이 좀더 앞으로 다가서자, 그림의 희미한 외곽선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랭던은 카운티 연방교도소에 있는 열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모나리자>의 비밀을 나눈 적이 있었다. 교도소에서 가진 이 세미나의 교육을 교도소 시스템에까지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하버드 대학의 사회 협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하버드의 동료들은 이 세미나를 ‘죄수를 위한 문화강좌’라고 불렀다.
  불을 끈 연방교도소 도서관에서, 영사기 앞에 선 랭던은 수업에 참여한 죄수들과 <모나리자>의 비밀을 공유했다. 랭던은 이들에게 꽤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도서관 벽에 투영된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랭던은 말했다.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 모나리자의 얼굴 뒤에 있는 배경은 서로 다릅니다.”
  랭던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배경을 가리켰다.
  “다 빈치는 왼쪽의 수평선을 오른쪽보다 일부러 낮게 그렸습니다.”
  “다 빈치가 그림을 망친 겁니까?”
  죄수 중 한 명이 물었다.
  랭던은 소리내어 웃었다.
  “아닙니다. 다 빈치는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다 빈치가 살짝 장난을 친 것입니다. 왼쪽에 있는 시골 풍경을 낮게 그려서, 오른쪽보다 왼쪽의 모나리자가 더 커보이게 한 겁니다. 이 것은 다빈치 나름대로의 해학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은 한쪽씩을 차지하는 거였습니다. 왼쪽이 여자, 오른쪽은 남자였지요. 다 빈치는 여성이 가진 본질을 매우 아꼈기 때문에,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보이는 모나리자를 더 크게 보이게 한 겁니다.”
  “다 빈치가 호모였다는 얘길 들었어요.”
  염소수염을 기른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말했다.
  랭던은 싱긋 웃었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다 빈치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게 그  사람이 여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유였나요?”
  “사실, 다 빈치는 남자와 여자의 균형을 맞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 이 두 요소를 다 갖추지 못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결코 깨우칠 수 없다고 믿었지요.”
  “남자 성기를 가진 계집을 말하는 거요?”
  누군가 물었다.
  이 질문은 소란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냈다. 랭던은 자웅동체를 뜻하는 단어. 헤르마프로디테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가 결합된 것이라는 어원학적인 설명을 해줄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어이, 해리슨 포드를 닮은 랭포드 씨, 다 빈치가 여장을 하고서 그린 자기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게 사실이오? 그렇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근육질의 남자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 빈치는 장난꾸러기였습니다. 모나리자와 다 빈치의 초상화들을 컴퓨터로 비교 분석해보면, 얼굴에서 놀랄 만큼 일치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 빈치가 무엇을 하고자 했든, 그의 모나리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즉 모나리자는 남녀 양성을 모두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아니면 그들을 섞고 있든지요.”
  랭던이 대답했다.
  “하버드 식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모나리자가 못생긴 계집이라는 소립니까?”
  랭던은 그만 웃고 말았다.
  “아마도요. 하지만 실제로 다 빈치는 이 그림이 양성임을 암시하는 큰 단서를 남겨두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혹시 아몬이라는 이집트 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염병할, 그래요! 남성적인 정력의 신이죠!”
  몸집이 큰 사내가 말했다.
  랭던은 놀랐다.
  “아몬 콘돔 상자에 적혀 있소. 상자 앞에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내가 그려저 있는데, 이집트의 다산의 신이라고 합디다.”
  근육질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랭던은 들어보지 못한 상표였다. 하지만 콘돔 회사가 이집트의 표의문자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대단한데요. 정말로 아몬은 양의 머리를 가진 남자로 그려집니다. 아몬의 난교와 곡선 뿔은 현대 우리 사회의 성적 속어인 ‘호색한( 뿔을 나타내는 단어 ’horn’에서 호색을 나타내는 속어 ‘homy’가 나오게 된 것을 말한다.)’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잇, 엿 같군!”
  “엿 같죠. 그럼 아몬의 상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다산을 상징하는 이집트 여신은요?”
  몇 초 간 침묵이 흘렀다. 펜을 잡으며 랭던이 말했다.
  “이시스입니다. 자, 여기 남성 신, 아몬(AMON)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신, 이시스. 이시스는 고대 그림문자로 한때 ‘리자(LISA)’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다 적고, 랭던은 영사기에서 몇 걸음 물러섰다.
  AMON L’ISA
  “생각나는 게 있습니까?“
  “모나리자…… 오,맙소사.”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모나리자의 얼굴만 양성처럼 보이는 게 아니고, 그녀의 이름 또한 남자와 여자의 신성한 결합인 아나그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 빈치의 작은 비밀입니다. 모나리자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유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여기 있었어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소피가 말했다. <모나리자>와 열 걸음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마룻바닥의 한 점을 불빛으로 가리켰다.
  처음에 랭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소피 곁에 무릎을 꿇고서야, 말라버린 액체 방울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잉크인가?’
  갑자기 불가시광선이 실제로 무엇에 쓰이는 도구인지 생각났다.
  ‘피다.’
  그의 감각이 욱신거렸다. 소피가 옳았다. 자크 소니에르는 죽기 전에 정말로 <모나리자>를 방문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이유 없이 여기에 오진 않았을 거예요. 여기에 분명히 나를 위한 메시지를 남겼을 거예요.”
  일어서면서 소피는 속삭였다. 그녀는 <모나리자>에게로 몇 걸음 더 걸어가서 그림 앞의 바닥을 불빛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 순간, 랭던은 <모나리자> 바로 앞에 있는 보호 유리벽 위에서 자줏빛의 희미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소피의 손목을 자고 랭던은 그림 자체에 천천히 전등을 비췄다. 두 사람은 얼어붙고 말았다.
  유리 위에 휘갈겨 쓴 여섯 글자가 모나리자의 얼굴 바로 위를 가로지르며 자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27

  소니에르의 책상에 앉아 있던 콜레 부관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비누 조각이었다고요 ? 하지만 랭던이 어떻게 GPS장치를 알았을까요?”
  “소피 느뵈. 그 여자가 말해 준거야.”
  파슈가 응답했다.
  “예? 아니, 왜요?”
  “빌어먹을.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나도 방금 전에야 그 여자가 랭던에게 귀띔해 준 사실을 확인했어.”
  콜레는 할 말을 잃었다.
  ‘느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파슈는 소피가 DCPJ의 수사를 방해한 증거를 확보한 건가? 소피 느뵈는 이제 해고당할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반장님…… 랭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경보기가 울렸었지?”
  “예.”
  “대화랑 출입구로 누구 나온 사람 없었나?”
  “없습니다. 박물관 경비원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반장님이 지시하신 대로요.”
  “좋아, 랭던은 아직 대화랑 안에 있어.”
  “안에요? 하지만 랭던이 왜?”
  “박물관 경비원은 무장하고 있나?”
  “예, 반장님. 선임 경비원입니다.”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우리 요원들이 몇 분 안에 거기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랭던이 출구를 뚫지 못하게 해. 그리고 그 경비원에게 느뵈 요원이 그 놈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좋겠어.”
  “느뵈 요원은 나간 걸로 생각되는데요.”
  “정말로 나가는 것을 자네가 봤나?”
  “아닙니다. 반장님 하지만……”
  “그래, 아무도 그년이 나가는 걸 보지 못했어. 오직 들어오는 것만 봤네.”
  콜레는 소피 느뵈의 허세에 기가 막혔다.
  “느뵈가 아직 건물 안에 있다고?”
  “잘하고 있게나. 돌아가면 랭던과 느뵈가 총 끝에 서 있는 걸 보고 싶네.”
  트레일러를 보낸 후, 파슈 반장은 자기 팀을 소집했다. 오늘 밤 랭던은 잡기 어려운 사냥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더구나 느뵈 요원이 그를 돕고 있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구석으로 몰아넣기가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파슈는 어떤 요행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위험을 반으로 줄이기 위해, 파슈는 요원들을 둘로 나눠 반은 루브르 주변으로 보내고 나머지 반은 랭던이 파리에서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길 만한 유일한 장소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했다.

28

  살 데 제타 안에서는 랭던이 유리 위에 빛나는 여섯 글자를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자들은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 위에 지그재그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랭던은 속삭였다.
  “시온 수도회. 이것은 당신 할아버지가 그 일원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피는 랭던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해한단 말이예요?”
  생각을 휘저으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잡을 데가 없소. 이것은 시온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을 선언한 것 중 하나요.”
  모나리자의 얼굴 위로 갈겨쓴 메시지에 소피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
  “소피. 불멸의 여신숭배라는 시온의 전통은 어떤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그 믿음이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강한 힘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고, 남성의 편의대로 저울질한 거짓말들을 널리 선전하면서 세상에 진로를 조종하기 시작했다는 거요.”
  글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소피는 말이 없었다.
  “시온 수도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뒤를 이은 남성 계승자들이 세상을 모계 중심의 종교에서 가부장제의 기독교로 성공적으로 개조했다고 믿고 있어요. 신성한 여성을 악마같이 만들어 버리는 선전, 선동에 열을 올림으로써, 현대 종교에서 여신의 존재를 영원히 소멸시켜 버렸다는 얘기요.”
  소피의 표정은 확신이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이걸 보라고 날 이곳에 보냈어요. 그렇다면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을 내게 말하려고 하셨을 거예요.”
  랭던은 소피의 뜻을 이해했다.
  ‘소피는 이것이 또 하나의 코드라고 생각하고 있군.’
  숨겨진 뜻이 여기에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랭던은 즉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랭던의 마음은 여전히 소니에르의 외관상의 메시지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의미를 붙들고 있었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나 어둡다. 정말로 어둡군.’
  랭던은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오늘의 세상에서 현대 교회가 행한 엄청난 선행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가 기만과 폭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교도와 여성숭배 종교들을 재교육시킨다는 명목하에 벌인 잔인한 십자군 전쟁은 3백 년 동안이나 자행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끔찍한 방법들을 이용해 가면서 말이다.
  가톨릭 종교재판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핏물을 적셨다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책을 발간했었다. 그 책 <마녀의 망치>는 자유로이 사고하는 여자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세상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이런 여자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고문하고, 파멸시키는지  가르쳤다. 교회에 의해서 마녀가 된 여자들은 학자, 여사제, 집시, 신비주의자, 자연 예찬론자, 약초를 모으는 자,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모든 여자 들이었다. 산파들 역시 출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이교도적인 의학지식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출산의 고통은 지혜의 사과를 먹는 데 한몫한 이브의 행동에 대해서 신이 내린 정당한 벌이라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었다. 3백년에 걸친 마녀 사냥으로 교회는 5백만 명에 달하는 여성을 말뚝 위에서 태워 죽인 것이다.
  이 선동과 유혈의 참사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다.
  오늘날의 세계가 그 살아 있는 증거다.
  한때, 영혼의 계몽을 위해 필수적인 반쪽으로 찬양받던 여성은 세계 모든 신전에서 추방당했다. 유대교의 랍비, 가톨릭의 사제, 이슬람 성직자 그중 여성은 없다. 신성 결합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성적 결합을 통해서 각자의 영혼이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신성 결합의 강령은 부끄러운 강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신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때 상대 여성과 성적 결합을 요구하던 고결한 남자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성적 충동을 악마의 작업, 특히 악마가 선호하는 공범자와 협력해서 만들어 내는 충동으로 여겨 두려워했다. 그 공범자란 …… 여자였다.
  왼쪽과 여성의 연관 역시 교회의 비방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왼쪽을 나타내는 말들은 아주 부정적인 어조를 갖게 되었다. 그 반면에 오른쪽은 정직하고, 영리하고, 정확하다는 뜻이 있다. 오늘날에도 급진적인 사고는 좌파, 비이성적인 행동은 좌뇌라고 불리며, 왼쪽은 사악하고 불길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신의 시대는 끝났다. 세력이 바뀐 것이다. 어머니인 지구는 남자들의 세계가 되어 버렸고, 파괴와 전쟁의 신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남자의 자아는 그 짝인 여자의 견제를 받지 않은 채 2천 년을 소비해 버렸다. 시온 수도회는 현대적인 삶에서 신성한 여성의  소멸이 아메리칸 인디언인 호피 부족이 말한 ‘코야니스쿠아치’ 즉 균형이 맞지 않는 삶을 야기했다고 보았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의 일종)이라는 연료로 빚어지는 전쟁들. 여자를 폄하하는 사회. 그리고 어머니인 지구를 불손하게 대하는 인간들의 증가.
  소피의 속삭임이 랭던의 생각을 다시 되돌렸다.
  “로버트! 누가 오고 있어요!”
  랭던도 홀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리로!”
  소피가 손전등을 꺼버리자 눈앞에서 소피가 증발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랭던의 눈은 완전히 장님이었다.
  ‘어디로?’
  눈이 어둠에 익자, 방 한가운데에 있는 팔각형 의자 밑으로 소피가 숨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따라 막 움직이려는 순간, 시끄러운 목소리가 랭던을 차갑게 막았다.
  “멈춰!”
  문가에서 한 남자가 명령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경비원이 전용 관람실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똑바로 뻗은 경비원의 권총은 정확히 랭던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랭던은 자기 팔이 본능적으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진 것을 알았다.
  “엎드려! 바닥에 엎드려!”
  요원은 명령했다.
  몇 초 후에 랭던의 얼굴은 바닥에 닿았다. 경비원이 서둘러 다가와, 양 다리를 벌리라며 다리를 찼다.
  “허튼 생각이오. 랭던 씨. 허튼 생각!”
  총으로 랭던의 등을 누르며 요원이 말했다.
  팔과 다리를 좍 벌리고 얼굴을 바닥에 붙이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세가 랭던은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가 생각나는군. 얼굴이 아래로 향해 있긴 하지만 말이야.’

29

  생 쉴피스 교회 안에서는 상일래스가 봉헌된 무거운 철제 촛대를 들고 제단에서 오벨리스크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닥을 파는 데 쓰기 위해서였다. 빈 공간을 덮고 있는 것이 분명한 회색 대리석 타일을 노려보며, 사일래스는 시끄럽지 않게 타일을 깨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리석의 쇳조각을 들이대면, 둥근 천장까지 소리가 울릴 것이다.
  수녀가 듣지 않을까? 지금쯤이면 수녀는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일래스는 일을 실행하지 않기로 했다. 촛대 끝을 감쌀 만한 천이 없나 둘러 보았지만, 제단을 덮고 있는 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단의 천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망토’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어차피 교회 안에는 혼자뿐이었다. 사일래스는 끈을 풀고, 망토를 벗어 내렸다. 모로 된 망토의 섬유조직이 등에 갓 생긴 상처에 들러붙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사일래스는 이제 허리에 찬 기저귀 같은 속옷 외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촛대의 끝을 망토로 감싸고, 눈여겨 봐둔 타일 중앙에 촛대의 끝을 들어밀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돌은 깨지지 않았다. 다시 촛대로 눌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금이 갔다. 세번의 시도 만에 타일은 마침내 산산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바닥 아래의 빈 공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간이 나왔다.!’
  남은 조각들을 빨리 치우고, 사일래스는 빈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자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창백한 팔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빈 공간의 바닥은 매끈한 돌이었다. 로즈 라인 아래로 팔을 더 집어넣자 뭔가 만져졌다! 두꺼운 석판이었다. 손가락으로 석판의 가장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일래스는 일어서서 석판을 살펴보았다. 가장자리가 우둘투둘하게 잘리고,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일래스는 순간 현대판 모세가 된 기분이었다.
  석판 위에 적힌 글을 읽으면서 사일래스는 놀랐다. 석판에는 지도나 복잡한 지시들, 아니면 암호로 된 뭔가가 적혀 있을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판에 있는 글은 너무나 간단했다.
  욥기 38:11
  ‘성경구절?’
  순간 사일래스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비밀 장소가 성경 구절에 들어있다? 조직은 정의의 사람들을 속이는 일엔 결국 실패했다!
  ‘욥기 38장 11절’
  비록 정확한 구절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성서의 욥기는 반복되는 시련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뚫고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들어맞는군.’
  흥분을 간신히 감추면서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사일래스는 어깨 너머로 은은하게 빛나는 로즈 라인을 내려다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의 재단 위에는 거대한 가죽 장정의 성경이 도금된 책 받침대 위에 얹혀 있었다.
  발코니 안에서 상드린 수녀는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망토를 벗었을 때, 수녀는 달아나서 자기의 의무를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석고처럼 하얀 사내의 살갗을 본 순간, 수녀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내의 널찍하고 창백한 등은 핏자국이 선연한 상처들로 덮여 있었다. 심지어 수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상처들이 얼마 전에 생긴 것임을 알수 있었다.
  ‘저 남자는 회초리로 무자비하게 맞았다.’
  수녀는 사내의 허벅지에 묶인 말총 허리띠에서도 피가 떨어지는 걸 보았다.
  ‘대체 어떤 신이 이런 식으로 육체를 벌하기를 원한단 말인가?’
  오푸스 데이의 의식이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드린 수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순간 수녀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오푸스 데이가 쐐기돌을 찾고 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수녀는 상상할 수 가 없었다.
  피투성이 사내는 다시 망토를 입고 있었다. 전리품을 꼭 쥐고서 제단의 성경책으로 다가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수녀는 서둘러 발코니를 떠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손과 무릎을 들이밀어서, 침대 아래 숨겨 놓았던 봉인된 봉투를 끄집어 냈다. 지난 10년간 수녀가 감춰 온 것이었다.
  봉투를 찢자, 파리 전화번호 네 개가 나왔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수녀는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는 사일래스가 석판을 재단 위에 놓고 성경책에 손을 뻗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길고 하얀 손가락은 땀에 젖었다. 구약성서 편을 넘기다가 욥기를 찾아냈다. 38장을 찾아낸 손이 11절을 따라 달려 내려갔다. 이제 읽게 될 구절을 사일래스는 예상했다.
  ‘이 구절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11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사일래스는 읽기 시작했다. 고작 일곱 단어에 불과했다. 혼란을 느끼면서 사일래스는 다시 읽었다. 뭔가 심하게 잘못되었다는 감이 왔다. 구절은 간단했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30

  <모나리자>앞에 엎드린 포로를 내려다보며, 경비원 클로드 그루아르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악당이 관장님을 죽였다.’
  그루아르를 비롯한 경비 팀에게 있어 소니에르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루아르는 방아쇠를 잡아당겨 로버트 랭던의 등에 총알을 들이박고 싶었다. 선임 경비원으로 그는 실제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경비원 가운데 하나였다.하지만 여기서 랭던을 죽여버리는 것은 브쥐 파슈와 프랑스 형무소를 대면하는 참혹한 시간에 비교하면 관대한 운명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루아르는 허리띠에서 무전기를 뽑아들고, 지원을 부탁하는 무전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이 방에서는 부가적인 전자 보안장치 때문에, 요원들간의 무전이 항상 어려웠다.
  ‘문가로 나가야 하는데.’
  랭던에게 계속 총을 겨누면서, 그루아르는 천천히 입구 쪽으로 물러섰다. 세 걸음 옮겼을 때, 경비원은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기랄, 뭐지?’
  설명하기 어려운 형체가 방 가운데에 나타났다. 그림자. 방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여자 하나가 왼쪽 벽을 향해 어둠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는 자주색 광선 빔으로 바닥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그 빛으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냐?”
  30초 만에 두 번째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경비원은 물었다 어디로 총을 겨눠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그루아르는 순간 알 수가 없었다.
  “PTS”
  손에 들고 있는 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면서 여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루아르는 땀이 났다.
  ‘경찰과학 수사국? 모든 요원은 가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야 그루아르는 보라색 빛이 PTS팀이 항상 휴대하는 자외선광선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DCPJ가 왜 여기서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름을 말하시오!”
  “저예요. 소피 느뵈예요.”
  소피는 차분한 프랑스어로 응답했다.
  그 이름은 그루아르의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었다.
  ‘소피 느뵈?’
  소니에르의 손녀 이름이지 않은가? 그녀는 꼬마였을 때 여기에 가끔 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느뵈일 리가 없어!’
  그리고 설령 저 여자가 소피 느뵈라 할지라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소니에르와 손녀 사이가 아주 소원하다는 소문을 그루아르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아시죠? 그리고 로버트 랭던은 할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요. 저를 믿으세요.”
  경비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원이 필요해!’
  무전기를 다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의 입구는 그루아르 뒤로 족히 20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총구를 바닥에 있는 남자에게 겨누기로 결심하고, 경비원은 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루아르가 아주 조금 뒤로 움직였을 때, 여자가 방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자외선 빔을 쳐들고 <모나리자>의 맞은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그루아르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대체 저 여자가 뭘하는 거야?’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소피는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를 가르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랭던은 여전히 바닥에 날개를 펼친 독수리처럼  엎어져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로버트. 거의 다 됐어요.’
  경비원은 두 사람중 누구에게도 실제로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라고 소피는 짐작했다. 소피는 이제 손에 들린 문제로 관심을 집중했다. 다 빈치의 또 다른 걸작인 그림 하나를 구석구석 조사하고 있지만, 자외선 빛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바닥에도, 벽에도, 캔버스 위에도 없었다.
  ‘틀림없이 여기 뭔가가 있을 텐데!’
  소피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기려고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걸작품은 150센티미터 크기의 캔버스였다. 위험하게 드러난 바위들 위에서 서투른 자세의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 세례요한, 천사 우리엘과 함께 앉아 있는 이 이상한 그림은 다 빈치의 작품이었다. 소피가 어린 꼬마였을때, 할아버지는 <모나리자> 다음으로 이 그림을 보지 않고서는 박물관을 나서지 못하게 했었다.
  ‘할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자기 뒤에서, 경비원이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다시 시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집중하자!’
  소피는 <모나리자>를 보호하는 유리벽에 휘갈겨 쓴 메시지를 떠올렸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나 어둡다.’
  지금 소피 앞에 있는 그림은 메시지를 남길 만한 보호 유리벽이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림 자체에 글을 써서 위대한 작품을 훼손시킬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멈춰섰다.
  ‘적어도 정면은 아니야.’
  그녀의 눈동자는 캔버스를 붙들기 위해 천장에서 내려온 기다란 케이블을 따라 올라갔다.
  ‘그게 가능했을까?’
  그림 액자의 왼쪽을 붙들고 소피는 그림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림이 커서 케이블이 휘었다. 벽에서 그림을 살짝 들어내고, 소피는 머리와 어깨를 그림 뒤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뒤를 조사하기 위해 손전등을 들어올렸다.
  자기 본능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림 뒤에는 비어 있었다. 자주색 글씨는 없고, 오래된 캔버스 뒷면에는 얼룩덜룩한 갈색 자국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다려.’
  목재 액자 아래에서 금속물질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체는 작았다. 캔버스가 액자와 만나는 틈에 살짝 끼어, 은은하게 빛을 내는 금사슬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사슬에는 금으로 된 열쇠가 붙어 있었다. 십자 모양의 넓고, 조각된 머리에 문양이 새겨진, 그녀가 아홉 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그 열쇠였다. P.S.라는 이니셜과 함께 붓꽃, 그 순간 소피는 할아버지가 자기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때가 되면 이 열쇠는 네 것이다.’
  할아버지가 목숨을 잃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깨닫자 딱딱한 응어리가 목구멍에 맺혔다.
  ‘이 열쇠는 내가 많은 비밀을 보관한 상자를 여는 거란다.’
  오늘 밤 낱말 게임의 목적은 바로 이 열쇠였다는 것을 소피는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살해될 때 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열쇠가 경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 그림 뒤에 숨겼다. 그런 뒤에 오직 소피만이 찾을 수 있도록 보물찾기 게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원 요청!”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소피는 그림 뒤에서 열쇠를 집어 자외선 전등과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캔버스 뒤에서 보니, 그루아르가 연결도 되지 않는 무전기에 대고 지원 요청을 하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총은 랭던을 겨눈 채였다.
  “지원 바람!”
  경비원이 다시 고함을 쳤다.
  아무 답변도 없었다.
  ‘경비원은 지원 요청을 할 수 없어.’
  <모나리자>를 보러온 관광객들이 자랑하려고 집에 전화를 걸지만 거의 대부분 좌절하고 만다는 것을 소피는 기억해 냈다. 전용 관람실의 벽을 감싸고 있는 추가 보안장치들이, 전화 통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비원은 이제 재빨리 출입구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피는 즉시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숨겼던 커다란 그림을 올려다보며, 소피는 오늘 밤 두 번째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신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미터만 더 가면.’ 총을 바로 들고 그루아르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멈춰요! 그렇지 않으면 부수겠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루아르는 흘끗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이구 ,안 돼!”
  붉은 안개 같은 조명 속에서, 여자가 그림을 매달고 있는 줄에서 그림을 떼어내 자기 몸앞에 갖다 놓은 게 보였다. 150센티미터 가까운 크기의 캔버스는 여자의 몸을 거의 감출 정도였다. 그루아르의 첫 번째 생각은 왜 작품을 매달고 있는 케이블의 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느냐였다. 하지만 곧, 오늘 밤에 케이블 감지기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여자가 뭘 하려는 거지?’
  그림을 본 경비원은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림 한가운데가 부풀어 오르더니,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의 형태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값을 매길 수 없는 다 빈치의 그림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며 공포에 사로잡힌 경비원은 비명을 질렀다. 여자가 그림 뒤에서 무릎으로 그림 한가운데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루아르는 서둘러 총구를 여자에게 겨눴지만, 즉시 이것은 아무 쓸모없는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캔버스는 그저 직물에 불과했지만, 단순히 총알로 뚫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5백만 달러짜리 갑옷인 셈이었다.
  ‘다 빈치의 그림에 총알을 박을 수는 없어.’
  여자가 차분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총과 무전기를 내려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무릎으로 이 그림을 뚫어 버릴 거예요. 제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느끼실지는 잘 알고계실 거라 생각해요.”
  그루아르는 현기증을 느꼈다.
  “제발…… 안 돼. 그 그림은 <암굴의 마돈나>야.”
  경비원은 총과 무전기를 떨어뜨리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고마워요. 이제 제가 말하는 대로 정확히 움직이세요. 그럼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잠시 후, 소피를 따라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랭던의 맥박은 아직도 천둥치듯 뛰고 있었다. 떨고 있는 루브르 경비원을 전용 관람실에 남겨두고 나온 뒤로 그들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비원의 권총은 이제 랭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랭던은 이 물건을 빨리 없애 버리고 싶었다. 권총에서 무겁고 위험스러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 번에 두 계단씩  내려오면서, 랭던은 소피가 거의 훼손할 뻔했던 그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그녀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작품 선택은 오늘 밤의 모험과 이상하리만큼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잡은 다 빈치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마찬가지로, 숨겨진 이교도의 상징들이 너무 풍부해서 예술사가들에게 악명 높은 작품이었다.
  “아주 귀중한 인질을 선택했소.”
  달리면서 랭던이 말했다.
  “<암굴의 마돈나(Madonna of the Rocks)> 말이군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예요. 할아버지가 한 것이지. 그 그림 뒤에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를 남겼어요.”
  랭던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요? 어떻게 그게 그 그림인줄 알았소? 왜 <암굴의 마돈나>요?”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So dark the con of man). 처음 두개의 아나그램은 놓쳤어요. 로버트. 하지만 세 번째는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소피는 승리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31

  “그들이 죽었어요! 제발 전화기를 들어요.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요!”
  상드린 수녀는 자기 방에서 전화기에 대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중이었다.
  목록에 있던 처음 세 번호는 모두 끔찍한 결과만을 알려주었다. 신경질적인 과부, 살해현장에서 늦게까지 일하는 형사,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을 위로하는 엄숙한 사제. 이 세명의 연락원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수녀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번호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 번호는 앞의 세 번호들로 연락이 되면, 이용해서는 안 되는 번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들리는 자동응답 안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만 했다.
  “바닥 한 칸이 깨졌어요!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죽었나 봐요!”
  메시지를 남기며 수녀는 간청했다.
  상드린 수녀는 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네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침대 밑에 보관된 이 사적인 전화번호들은 오직 한 가지 조건에서만 쓰일 수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은 전달자가 수녀에게 말했었다.
  ‘바닥의 타일이 깨지면, 상부 계층이 돌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중 한사람이 치명적인 위협 앞에서 필사적인 거짓말을 하게 강요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번호들로 전화하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십시오. 이 일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게 말입니다.’
  침묵의 경고였다.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간단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계획은 수녀를 놀라게 했다 .한 형제의 정체가 드러났다면, 그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경고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한 사람 이상이 합의한 것처럼 보였다.
  “제발 대답해요. 어디 있나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수녀는 속삭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으시오.”
  문가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포를 느끼며 돌아선 수녀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쇠촛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죽었소. 네 사람 모두 죽어 버렸지. 그리고 날 바보로 만들었어. 쐐기돌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시오.”
  “난 몰라요! 그 비밀은 다른 자들이 지키고 있어요.”
  상드린 수녀는 진실하게 말했다.
  ‘죽어 버린 그 사람들이!’
  사내는 앞으로 다가서며 촛대를 하얀 손으로 꽉 쥐었다.
  “당신은 교회의 수녀요. 그런데 그놈들을 위해 일해?”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진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예요. 나는 그 메시지를 오푸스 데이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수녀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사내의 눈에서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했다. 사내는 몸을 날려 방망이처럼 촛대를 휘둘렀다. 쓰러지면서 상드린 수녀는 불길한 예감이 덮쳐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사람 모두 죽었다.’
  ‘귀중한 진실은 영원히 사라졌다.’

32

  랭던과 소피가 건물을 빠져나와 파리의 밤거리로 뛰어들 때, 드농 관 서쪽 끝에서 울린 비상벨 소리는 근처 튀르리 정원에서 쉬고 있던 비둘기들을 내쫓았다. 소피의 차가 세워져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며, 랭던은 멀리서 경찰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기 있어요.”
  땅딸막한 2인승 빨간 차를 가리키며 소피가 소리쳤다.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그렇지?’
  소피의 차는 랭던이 지금까지 본 차들 중에 가장 작은 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스마트카예요. 리터당 백 킬로미터를 간다고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이 보조석에 앉자마자, 자갈로 구분되어 있는 연석 위에 걸쳐져 있던 소피의 스마트카가 튀어나갔다. 차가 보도를 건너 루브르 박물관의 캐러젤에 있는 작은 로터리를 향해 무섭게 내달리자, 랭던은 자동차의 계기판을 붙잡았다.
  순간 랭던은 소피가 로터리를 그냥 가로질러 가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앙에 있는 커다란 원형 풀밭의 울타리를 곧장 뚫고 지날 수만 있다면 가장 빠른 지름길일 터였다.
  “안 돼!”
  랭던은 캐러젤 주위에 도사린 위험을 알고 있었다. 중앙에 위험한 공간이 있다. 역 피라미드. 박물관 안에서 이미 보았던 아래로 향한 채광창이었다. 그 공간은 그들이 타고 있는 스마트카를 한입에 꿀꺽 삼킬 정도로 컸다. 다행히 소피는 더 안전한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바퀴를 오른쪽으로 확 꺾어 로터리를 적당히 돌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난 길을 잡아 리볼리 가 방향으로 속도를 냈다.
  2음조의 경찰 사이렌 소리가 그들 뒤에서 크게 울어대고 있었다. 랭던은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에서 빛나는 사이렌을 볼 수 있었다. 루브르에서 더 빨리 빠져나가려고 소피가 엔진을 밟을수록, 스마트카에서 항의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45미터 정도 앞에 있는 교통신호는 빨간색이었다. 소피는 숨소리 아래로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했다. 랭던은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피?”
  교차로에 이르러 약간 속력을 줄인 소피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렸다. 교차로는 비어 있었다. 엑셀러레이터를 더 밟기 전에 양쪽 길ㅇ르 흘끗 본 소피는 리볼리로 접어드는 왼쪽으로 차를 급하게 틀었다. 서쪽으로 4백 미터쯤 한껏 속도를 내어 달리다가, 커다란 로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다. 그러자 샹젤리제의 길이 나왔다.
  차가 똑바로 달리자, 랭던은 목을 학처럼 뽑고 리어 뷰 미러를 통해 루브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자기들을 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푸른빛의 바다가 박물관을 메우고 있었다.
  마침내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자 랭던이 소피를 보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소피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앞에 뻗은 샹젤리제의 긴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파리의 5번가로 불리는 샹젤리제에는 호화로운 가게들이 3킬로미터 가량 늘어서 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은 겨우 1.6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랭던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간의 진로는 너무 어둡다.’
  소피의 빠른 사고가 인상적이었다.
  ‘암굴의 마돈나.’
  소피는 그 그림 뒤에 할아버지가 뭔가를 남겼다고 말했다.
  ‘마지막 메시지?’
  랭던은 소니에르가 메시지를 숨긴 장소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암굴의 마돈나>라는 그림은 오늘 밤 드러난 상징들과 서로 연결되어 꼭 들어맞았다. 소니에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둡고 장난스러운 측면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모든 면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 같았다.
  <암굴의 마돈나>를 그린 다 빈치의 원래 보수는 ‘순결한 관념의 협회’라고 알려진 단체에서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협회는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제단의 세 폭짜리 그림 중 중앙에 들어갈 그림이 필요했다. 수녀들은 레오나르도에게 구체적인 치수와 그림에 들어갈 주제도 미리 알려주었다. 성모 마리아, 아기 세례 요한, 우리엘. 아기 예수가 동굴에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 빈치는 그들의 요구대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품을 전달했을 때 협회의 반응은 공포에 가까웠다. 다 빈치는 폭발적이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부적인 묘사들로 그림을 채워 놓았던 것이다.
  그림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로 보이는 갓난애를 팔에 두르고 앉아있다. 마리아의 맞은편에는 우리엘이 앉아 있는데, 마찬가지로 아기 요한과 함께다. 예수가 요한을 축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그림에서 예수를 축복하는 것은 요한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의 권위를 양도하고 있다! 더욱 심란한 것은 마리아가 아기 요한의 머리 위에 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손가락들은 보이지 않는 머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분명하고 놀라운 이미지는 마리아의 굽은 손가락들 바로 아래에 있다. 우리엘이 자기 손으로 뭔가를 자르는 모습이다. 마치 마리아의 손 같은 발톱에 잡힌 보이지 않는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말이다.
  랭던의 학생들은 다 빈치가 결국 두 번째 그림을 새로 그려서 협회를 달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면 항상 즐거워했다. <암굴의 마돈나>의 묽어진 버전은 <암굴의 성모>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런던 국립 박물관에 걸려있다. 하지만 랭던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도발적인 원래 작품을 더 좋아했다.
  소피가 차의 속력을 높이자 랭던이 물었다.
  “그림 말이오. 그 뒤에 뭐가 있었소?”
  그녀의 눈은 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대사관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면 보여줄게요.”
  “내게 보여준단 말입니까? 소니에르 씨가 구체적인 물건을 남겼습니까?”
  랭던은 놀랐다.
  소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붓꽃과 P.S라는 이니셜이 양각되어 있어요.”
  랭던은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해냈어’
  오른쪽으로 스마트카를 돌리며 소피는 생각했다. 호화로운 크릴롱 호텔을 지나, 나무들이 담장을 이룬 지역으로 들어갔다. 대사관은 이제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았다. 소피는 자신이 다시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도 소피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든 열쇠와 오래 전에 그것을 본 기억에 가 있었다. 팔길이가 같은 십자 모양의 머리와 삼각 기둥의 다리, 움푹파인 자국들, 양각으로 새겨진 꽃 봉인과 P.S라는 글자.
  지난 세월 동안 이 열쇠가 소피의 마음에 떠오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정보 부처에서 일하는 그녀의 업무는 보안에 대해서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이제 이 열쇠는 특이한 도구일 뿐 그렇게 신비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레이저 도구로 바뀌는 주형이다. 이 열쇠는 복사가 불가능해.’
  자물쇠의 공간에서 서로 맞물려야 움직이는 이빨을 가진 열쇠들과 달리 이 열쇠는 레이저로 새겨진 복잡한 수두 자국 모양들은 전자장치로 검사된다. 만일 전자장치의 눈이 열쇠의 육각형 모양의 수두 자국의 위치와 배열과 깊이가 정확하다고 판단하면, 자물쇠는 열릴 것이다.
  이렇게 생긴 열쇠가 무엇을 열 것인지 소피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라면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열쇠를 보지 않고서도 열쇠 위에 양각된 문장을 알아맞히지 않았던가. 열쇠 머리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열쇠가 어떤 기독교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런데 소피는 레이저 도구로 변하는 주형 열쇠를 사용하는 어떤 교회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소피는 10년 전에 그 증거를 목격했다. 뜻밖에도 그 목격이 또 다른 열쇠가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진짜 본성을 보여준 것이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 것은 따뜻한 오후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할아버지는 날 보면 놀라실 거야.’ 소피는 생각했다. 영국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피는 봄 방학을 맞아 며칠 일찍 나선 길이었다. 소피는 할아버지를 만나서 자기가 배운 해독기법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예정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파리에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지만 소피는 할아버지가 자신이 오늘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할아버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 오후잖아.’
  그녀는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주말에는 좀처럼 일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보통……
  씨익 웃으며 소피는 차고로 달려갔다. 역시 차고는 비어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는 시내 드라이브를 싫어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차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휴가 때 이용하는 파리 북쪽에 있는 노르망디의 별장. 런던의 꽉 막힌 교통지옥 속에서 몇 달을 지내다 온 소피로서는 자연의 향기가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곧바로 방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초저녁이었다. 그녀는 즉시 출발해서 할아버지를 놀래 주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의 차를 빌려 북쪽, 달이 쓸고 지나는 크뢸리 근처의 황량한 언덕들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10시가 막 지난 후에야 소피는 할아버지의 별장으로 향하는 사유지의 긴 길로 접어들 수가 있었다. 진입로는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이었다. 반쯤 지났을 때, 나무들 사이로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 덕 한 면의 나무들 사이에 자리잡은 거대하고 오래된 석조 저택이었다.
  이 시간쯤이며 할아버지는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불빛이 깜박거리는 저택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도로에 가득히 주차된 차들을 발견한 순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메르세데스, BMW,아우디,롤스로이스 등등.
  소피는 순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한 은둔자인 우리 할아버지!’
  자크 소니에르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런 은둔자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소피가 멀리 가 있는 동안 할아버지는 파티를 주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들의 외관으로 보아, 파리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놀라게 할 생각에 들떠, 소피는 서둘러 정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그녀는 노크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며, 뒤로 돌아가서 뒷문을 찾았다. 뒷문도 잠겨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잠시 서 있다가 소피는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소리라곤 계곡을 지나면서 뱉어내는, 낮은 신음소리 같은 차가운 노르망디의 공기뿐이었다.
  음악도 없다.
  말소리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소피는 저택 한 면에 쌓여 있는 장작 더미위로 힘들게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얼굴을 거실 창문에 갖다 댔다.
  “아무도 없잖아!”
  2층 전체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지?’
  심장 박동이 줄달음치면서, 소피는 장작을 넣어 둔 헛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불쏘시개 상자 밑에서 할아버지가 숨겨둔 열쇠를 찾아냈다. 그녀는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쓸쓸한 응접실로 들어서자, 보안 시스템의 통제 패널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온 사람이 10초 안에 정확한 코드를 누르지 않으면 보안 경보기가 작동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파티 중인데도 경보기를 작동시켜 놓았나?’
  소피는 재빨리 코드를 눌러 시스템을 해제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소피는 집 안 전체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2층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응접실로 내려와서 그녀는 정적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소피가 뭔가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들. 그 소리는 바닥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피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엎드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다. 소리는 분명 아래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노래, 혹은…… 읊조리는 소리? 순간 그녀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소리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집에 지하실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적어도 난 못 봤어.’
  소피는 돌아서서 거실을 살폈다. 그때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물건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아끼는 골동품인 오뷔송 융단이 구겨져 있었다. 보통 때라면 벽난로 옆 동쪽 벽에 걸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밤엔 융단을 매단 막대 한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벽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말이다.
  벽쪽으로 걸어가며, 소피는 읊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망설이던 소피는 귀를 벽에 대보았다. 목소리가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분명 읊조리고 있었다…… 소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이상한 억양으로 노래했다.
  ‘이 벽 뒤는 비어있다!’
  벽을 이루고 있는 나무판들의 가장자리를 더듬어 나가다가, 소피는 움푹 들어간 구멍을 발견했다. 구멍은 은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미닫이 문이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소피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옆으로 밀어 보았다. 어둠 저편에서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소피는 문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나선형 모양의 돌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아이 때부터 이 저택에 놀러왔지만, 이런 계단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고 목소리는 뚜렷해졌다. 이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나선형 계단이라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계단을 돌면 보일 것이다. 저 너머로 지하 바닥이 보였다. 오렌지 빛깔의 불빛이 깜박거리며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숨을 참으며, 소피는 조금 더 내려갔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자기가 본 것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방은 지하 석굴이었다. 언덕의 화강암을 뚫어서 만든 거친 석실이었다. 빛이라곤 벽에 걸어 놓은 횃불에서 나오는게 전부였다. 불빛속에서 서른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 한가운데에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난 꿈을 꾸고 있는거야. 꿈. 그렇지 않으면 이게 대체 뭐지?’
  소피는 자신에게 말했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여자들은 황금색 신발에 하얀 비옷 같은 가운을 입은 채 하얀 가면을 쓰고 손에는 둥그런 물체를 들고 있었다. 남자들은 검은색 긴 가운을 입고,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체스판의 말들 같았다. 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 앞의 바닥에 놓은 뭔가를 향해 엄숙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읊조림은 계속되고 점점 커졌다. 이제 천둥처럼 울렸다. 그리고 더 빨라졌다. 참가자들은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소피는 마침내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공포에 젖어 그녀는 뒤로 비틀거렸지만, 그 이미지는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다. 구역질을 참아내며 소피는 석벽을 붙잡고 계단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채 파리로 차를 몰았다.
  그날 밤 환멸과 배신으로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소피는 짐을 모두 챙겨들고 집을 떠났다. 부엌 식탁 위에 한 장의 쪽지만 남겨둔 채,
  저도 거기 있었어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쪽지 옆에는 별장의 장작 헛간에서 가져온 비상 열쇠를 놓아 두었다.
  “소피! 멈춰요! 멈춰!”
  랭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회상에서 깨어나며 소피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다 정지했다.
  “뭐예요? 무슨 일이죠?”
  랭던은 길 아래 저 너머를 가리켰다.
  랭던이 가리키는 곳을 본 소피는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90미터 앞 교차로에 DCPJ 경찰차 두 대가 엇갈리게 주차되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경찰들이 가브리엘 가를 봉쇄했군.’
  랭던은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대사관은 출입금지인 모양이죠?”
  길 아래에는 두 명의 DCPJ 경관이 경찰차 옆에 서서, 그들을 향해 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멈춰 서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랭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소피,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거야.’
  소피는 차를 세 번이나 움직인 후에야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소피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리자,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타이어 소리가 났다. 사이렌이 큰 소리로 울려퍼졌다.
  욕을 내뱉으며 소피는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33
  소피의 스마트카는 대사관과 영사관들이 모여있는 외교 구역을 가르며 지나갔다. 골목길을 질주하다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샹젤리제의 넓은 한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랭던은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 몸을 뒤로 돌려 뒤따라오는 차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는 갑자기 도망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랭던은 자기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소피가 화장실 창문으로 GPS 장치를 던져 버렸을 때, 소피가 그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제 그들은 대사관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지면서 차량이 드문 샹젤리제의 거리를 꾸불꾸불하게 달리고 있었다. 랭던은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선택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소피가 경찰을 거의 따돌린 듯 보였지만, 그것은 잠시뿐일것이다. 랭던은 자신들의 행운이 오래 지속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운전대를 쥔 소피는 스웨터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아 랭던에게 내밀었다.
  “로버트, 이걸 한번 봐요. 할아버지가 <암굴의 마돈나> 뒤에 남겨놓은 거예요.”
  떨리는 기대감으로 랭던은 건네받은 물건을 살펴보았다. 꽤 묵직하고,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첫인상은 장례식 때 묘지에 박기 위해 디자인된 기념 대못의 모형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 삼각형 모양의 각기둥이었다. 그리고 기둥에는 마마 자국처럼 보이는 수백 개의 작은 육각형 자국들이 있었다. 점들은 아주 섬세하게 찍혀 있고,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다.
  “레이저로 다듬어진 열쇠예요. 거기 있는 육각형들은 전자장치를 통해야만 읽힐 거예요.”
  소피가 랭던에게 말했다.
  ‘열쇠?’
  랭던은 이런 열쇠를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쪽을 봐요.”
  차선을 바꾸어 교차로를 지나면서 소피가 말했다.
  열쇠를 돌린 랭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십자가의 중앙에는 붓꽃과 P.S. 라는 이니셜이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소피,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봉인입니다. 시온 수도회에 공식적인 문장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얘기했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 열쇠를 보았어요. 할아버지가 다시는 열쇠 얘기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랭던의 눈은 여전히 열쇠에 못박혀 있었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열쇠와 그 위에 그려진 오래된 상징은 고대와 현대 세계를 기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이것이 어떤 상자를 여는 열쇠라고 말했어요. 자기 비밀을 많이 넣어둔 상자요.”
  자크 소니에르 같은 사람이 간직한 비밀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랭던은 한기를 느꼈다. 고대의 비밀단체가 이런 첨단 열쇠를 가지고 무얼 하려고 했는지 랭던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온은 비밀을 보호하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했다. 엄청난 힘에 관한 비밀이었다.
  ‘이 열쇠가 그 비밀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랭던은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열쇠로 무엇을 열어야 하는지 알고 있소?”
  소피의 표정은 실망스러웠다.
  “당신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손바닥 위에서 열쇠를 돌려가며 조사만 할 뿐 랭던은 아무 말도 없었다.
  “기독교 물건 같아 보여요.”
  소피가 단언했다.
  랭던은 그 말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열쇠의 머리는 한쪽 다리가 긴 전통적인 기독교 십자가가 아니라, 팔길이가 모두 같은 정사각형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이 정사각형 십자가는 기독교보다 1천 5백 년 앞서 나타났는데,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된 기독교적인 의미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기독교의 상징이 된 한쪽 다리가 긴 라틴 십자가는 원래 로마인들이 쓰던 고문 도구였다. 랭던은 항상 놀라웠다. 십자가 위에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잔혹한 상징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crucifix)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 ‘크루시에르(cruciare)’에서 왔는데, 이 말은 ’고문하다‘라는 뜻이다.
  “소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는 평화로운 십자가로 간주된다는 거요. 이 사각형 모양은 십자가 처형에는 전혀 쓸모가 없소. 그리고 균형을 이룬 수직과 수평의 요소들은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합일의 뜻을 내 포하고 있소. 그러니까 시온의 철학과 상징적으로 일치하는 셈이오.”
  소피는 랭던에게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모르는 거죠. 그렇죠?”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소피는 자동차의 리어 뷰 미러로 뒤를 살폈다.
  “좋아요. 내려야 해요. 이것이 무엇을 여는 열쇠인지 파악할 안전한 장소가 필요해요.”
  랭던은 리츠 호텔의 안락한 자기 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은 좋은 장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강의를 주최한 아메리칸 대학의 인사들은 어떻소?”
  “너무 뚜렷해요. 파슈가 그 사람들을 조사할 거예요.”
  “당신이 사람들을 많이 알겠지. 여기 사니까 말이오.”
  “파슈는 내 전화와 전자메일을 모두 기록하고, 내 동료들에게도 모두 연락했을 거예요. 내가 접촉할수 있는 사람들은 오염됐을 거예요. 호텔을 찾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네요. 신분증을 요구할테니까.”
  파슈가 자기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체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땠을까. 랭던은 다시 궁금해졌다.
  “대사관에 전화합시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고, 대사관 측에서 사람을 내보내면 어딘가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이 남자가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만나요? 로버트. 지금 꿈꾸고 있어요? 당신네 대사관은 대사관 구역외에서는 아무런 사법적 힘을 갖고 있지 않아요. 누군가를 보내서 우리를 데려가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의 도망자를 돕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제 발로 대사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일시적인 보호를 요청한다면, 그래요, 그건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프랑스 땅 안에서 프랑스 법 집행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해달라고 대사관에 부탁하자고요? 대사관에 지금 당장 전화해 보세요. 그럼 그쪽에서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파수에게 가서 자수하라고 말할 거예요. 그 후에는 외교 채널을 통해서 당신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설득하겠노라고는 약속이나 하겠죠.”
  소피는 샹젤리제에 우아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들을 쳐다보았다.
  “현금은 얼마나 있어요?”
  랭던은 지갑을 열었다.
  “백 달러와 약간의 유로요. 왜요?”
  “신용카드는요?”
  “물론 가지고 있소.”
  소피가 차의 속력을 내자, 랭던은 그녀가 뭔가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앞. 샹젤리제의 끝에는 개선문이 서 있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50미터짜리 기념물이었다. 이 개선문 둘레로 9차선이 돌아가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로터리가 있었다.
  개선문으로 다가가며 소피는 다시 자동차 리어 뷰 미러를 살폈다.
  “잠깐 동안은 경찰을 따돌릴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 차안에 계속 머무른다면 오 분 후에는 잡히고 말 거예요.”
  ‘그럼 다른 차를 훔치려나. 이제 우리는 모두 범죄자가 되는군.’ 하고 생각하니 랭던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쩔 작정이오?”
  소피는 개선문의 로터리로 차를 몰았다.
  “날 믿어요.”
  랭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신뢰라는 말은 그다지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재킷의 소매를 걷어올려 시계를 살폈다. 이 시계는 열 살 생일때 부모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수집가들을 위해 그 해에 특별히 제작된 미키 마우스 손목시계. 어린애 같은 다이얼은 종종 이상한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랭던은 결코 다른 시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디즈니 만화는 색과 형태의 마술로 랭던은 처음 이끌었다. 이제 미키 마우스는 매일같이 젊은 가슴을 지닐수 있도록 랭던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미키의 팔이 이상한 시간을 나타내며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졌다.
  2:51 A.M.
  “재미있는 시계군요.“
  로터리에 접어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면서, 랭던의 손목을 흘끗 본 소피가 말했다.
  “이야기가 깁니다.”
  소매를 다시 끌어내리며 랭던은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피는 랭던에게 짧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시내 중심을 떠나 북쪽을 향해 로터리를 재빨리 돌아 나갔다. 푸른 신호등인 교차로 두 개를 간신히 지나 세 번째 교차로에 이르러, 소피는 오른쪽 말셰르브 가로 접어들었다.나무들이 울창한 외교관 밀집 구역을 지나서 어두컴컴한 공업지구로 들어섰다. 소피가 재빨리 왼쪽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 랭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생라자르 철도역.
  그들 앞에는 비행기 격납고나 온실의 후손처럼 보이는 유리 지붕의 철도 터미널이 있었다. 유럽의 철도역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대여섯 대의 택시들이 터미널 정문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 앞에는 행상들이 수레에 생수와 샌드위치를 올려놓고 팔고 있고, 역에서 막 나온 배낭을 짊어진 넝마꼴의 아이들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어느 도시에 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 위쪽에는 두세 명의 순경들이 연석 위에 서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일부 관광객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피는 스마트카를 택시들의 행렬 뒤로 끌고 가서, 주차금지 구역 안에 세웠다. 길 건너에 합법적으로 차를 주차할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랭던이 무얼 하려는 거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소피는 차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서둘러 바로 앞에 있는 택시로 달려가 운전사에게 뭔가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랭던이 스마트카에서 빠져나올 때, 소피가 운전사에게 지폐 뭉치를 건네주는 것이 보였다.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놔두고 가 버렸다. 랭던은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요?”
  택시가 사라진 후, 보도 위에 올라가 있는 소피 곁으로 가서 랭던은 물었다.
  소피는 철도역 입구로 벌써 걸어가고 있었다.
  “이리 와요. 우리는 파리를 떠나는 다음 기차표 두 장을 살 거예요.”
  랭던은 서둘러 소피 옆으로 걸어갔다. 루브르 박물관을 떠나 2킬로미터 정도만 가면 되는 미국 대사관으로 간다는 것이 파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철수가 되고 말았다. 랭던은 이런 식의 행동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34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에서 아링가로사 주교를 태운 운전사는 작고 볼품 없는 검은색 피아트 세단을 몰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모든 바티칸 수송 차량들이 교황의 봉인을 수놓은 깃발과 금속제 메달 모양의 번호판을 뽐내던 호화로운 대형 차량이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 시절은 가버렸구나.’
  바티칸의 차들은 이제 허세도 줄었고 아무런 특징도 없었다. 바티칸은 이러한 조치가 비용을 절감해서 교구에 더 많은 봉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링가로사는 보안문제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는 미쳐가고 있었고,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광고하는 일은 자동차 지붕 위에 과녁을 그려 놓는 것과 같았다.
  아링가로사는 검은 사제복을 잘 추스른 뒤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좌석에 편히 앉아 간돌포 성까지의 긴 여정을 준비했다.
  ‘작년 로마로의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었지.’
  주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달 전, 바티칸에서 주교에게 급히 로마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설명도 없었다.
  “당신의 비행기표는 공항에 있습니다.”
  교황청은 고위 성직자들에게조차 신비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이 이상한 소환에 대해 아링가로사는 최근 오푸스 데이의 성공, 즉 뉴욕에 지어진 오푸스 데이 세계 본사의 완공을 두고, 이를 등에 업으려는 교황과 바티칸 관료들의 사진 촬영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잡지 <건축의 다이제스트>에서 오푸스 데이 건물을 ‘현대적인 조경과 우아하게 어울리는 빛나는 가톨릭의 등대’라고 부른 것이다. 최근 바티칸은 ‘현대’ 라는 말이 붙은 것이면 어느 것에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어쩔 수 없이 이 초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행 교황체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링가로사로서는 대다수의 보수적인 성직자들처럼 신임 교황의 재임 첫해를 지대한 우려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전례없이 자유주의자인 교황은 바티칸 역사상 가장 말 많고 이상한 비밀 투표를 통해 교황직을 보장받았던 것이다.이제 교황은 기대하지도 못했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을 겸손해하지도 않았고, 기독교 세력 안의 고위 관료들과 연계해서 힘을 과시하는데 시간을 쓰지도 않았다. 추기경 대학에서 비롯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유주의 조류를 타고, 교황은 ‘바티칸 교리의 쇄신과 세 번째 밀레니엄의 시대에 맞게 가톨릭을 갱신하자.‘는 사명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 말은 교황이란 존재가, 신의 법을 다시 쓸 수도 있고 진정한 가톨릭의 요구가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주장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뻔뻔스러운 생각이 아링가로사는 두려웠다.
  아링가로사는 오푸스 데이의 무시 못할 규모와 자금력 등 자신의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교황과 그의 조언자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교회의 법을 부드럽게 고치는 것은 믿음도 없는 겁쟁이 짓이며 정치적인 자살이라고 말이다. 아링가로사는 예전에 시행된 ‘바티칸2(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12월 8일까지 이루어진 2차 바티칸 평화회의)의 대실패’ 같은 교회법의 순화는 훼손된 유산만 남겼을 뿐임을 환기시켰다. 교회 참석자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헌금은 메말라가고 있었다. 교회를 담당할 가톨릭 사제들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지도와 구체적인 틀이 필요한 것이지, 응석이나 받아주고 면죄나 주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링가로사는 주장했다.
  몇 달 전 밤, 자신을 태운 피아트 자동차가 공항을 출발할 때 아링가로사는 놀랐다. 차가 바티칸이 아닌 동쪽으로 꾸불꾸불한 산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링가로사는 운전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알반 언덕입니다. 회의 장소는 간돌포 성입니다.”
  “교황의 여름 거주지?”
  아링가로사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바티칸 천문대가 있는 이 16세기 성채는 교황의 여름 휴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천체 관측소이기도 했다. 시대적인 필요성 때문에 과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바티칸의 입장이 아링가로사는 늘 불만이었다. 과학과 믿음을 섞어 놓은 논리적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산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편견 없는 과학을 수행할 수 없다.믿음 역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별로 가득한 11월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간돌포 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믿음은 존재한다.’
  진입로에서 바라본 성은 무분별한 도약을 꿈꾸는 거대한 석조 괴물 같았다. 벼랑 끝에 자리잡은 성은 이탈리아 문명의 요람 위를 굽어보고 있었다. 로마를 건설하기 전, 쿠리아치 부족과 오라치 부족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이었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간돌포 성은 시선을 붙들만 했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방어적인 형태의 성채는 벼랑 위에 세워져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상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붕위에 세워진 거대한 알루미늄 망원경 돔은 건물의 외관을 망치고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한때 근엄한 성채였던 이 건물이 마치 자랑스러운 투사가 파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링가로사가 차에서 내리자, 젊은 예수회 수사가 서둘러 다가와 그를 맞이했다.
  “주교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망가노 신부입니다. 여기 천문학자이기도 하고요.”
  ‘자네에겐 잘된 일이군.’
  아링가로사는 인사말을 중얼거리고, 수사를 따라 성 안의 홀로 들어갔다. 홀은 르네상스 예술과 천문학 이미지를 무자비하게 섞어 놓은 넓은 공간이었다. 석회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층계를 오르자, 회의실과 강의실, 관광 안내 서비스 표지들이 보였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 일관되고 근엄한 안내를 제공하는 데 실패한 바티칸이 관광객들에게 천체물리학 강의 시간을 마련하는게 아링가로사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봐요. 언제부터 꼬리가 개를 흔들게 되었소?”
  아링가로사는 젊은 사제에게 말했다.
  사제는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아링가로사는 손을 내젓고, 이 밤에 대해서 특별한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티칸은 미쳐가고 있어.’
  버르장머리 없게 슬피 우는 아이를 꼿꼿이 세워 놓고 가치를 가르쳐 주는 것보다, 그저 묵인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아차린 게으른 부모처럼 교회는 모든 것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빗나간 문화에 자신을 맞추느라 아예 교회를 다시 짓는 것 같았다.
  제일 상층의 복도는 널찍하고, 오직 한 곳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거대한 참나무 문에는 황동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천문학 도서관.
  아링가로사는 이 장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케플러,뉴턴,그리고 세키의 위대한 업적을 포함해 2만 5천권이 넘는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교황의 고위급 관료들이 사적인 회의를 여는 장소이기도 했다…… 바티칸 시티의 벽 안에서 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모임들 말이다.
  아링가로사는 도서관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곧 듣게 될 충격적인 소식과 움직이기 시작한 사건들의 고리를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주교가 비틀거리며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가혹한 암시를 받아들인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지금부터 육 개월이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피아트에 앉은 아링가로사는 첫 회의를 앞둔 자신이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을 펴고,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근육을 완화시켰다.
  ‘모든 것이 잘될거야.’
  피아트가 산으로 높이 올라갈때, 주교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직도 주교는 휴대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승은 왜 아직 전화하지 않는 걸까? 지금쯤 사일래스는 쐐기돌을 얻었을텐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아링가로사는 반지에 끼워진 보라색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의 단면들과 반지에 붙은 아플리케의 질감을 느끼며 아링가로사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 반지는 곧 그가 얻게 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힘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이다.

35

  생 라자르 철도역은 유럽의 다른 역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역사(驛舍)문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마분지를 들고 있는 노숙자들이 있고, 몇몇 대학생 녀석들이 휴대용 MP3 플레이어를 틀어 놓은 채 배낭 위에서 자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짐꾼들도 보였다.
  소피는 거대한 출발안내 표지판으로 눈을 돌렸다. 랭던도 표지판을 올려보았다. 가장 빠른 열차는 3시 6분 릴리 행 열차였다.
  “빠를수록 좋겠어요. 그리고 릴리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소피가 말했다.
  ‘빠를수록?’
  랭던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시 59분이었다.열차는 7분후에 떠날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직 표도 사지 않았다.
  소피는 랭던을 매표소 창문으로 이끌며 말했다.
  “당신 신용카드로 표 두 장을 사요.”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추적을 받을……”
  “바로 그거예요.”
  랭던은 비자카드로 객실 차표 두 장을 구입하고, 표를 소피에게 건넸다.
  소피는 랭던을 열차 선로로 안내했다. 머리 위로 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리고, 릴리 행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승객용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들 앞에는 열여섯 개의 선로가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 멀리, 3번 철로에서 릴리 행 기차가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피는 랭던의 팔을 끼고 기차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로비를 통과해 밤새도록 문을 여는 카페를 지나갔다. 마침내 철도 역사의 서쪽에 있는 옆문으로 빠져나오자 인적이 없는 거리가 나왔다.
  문 근처에서 택시 한 대가 빈둥거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소피를 보더니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렸다.
  소피가 뒷자석으로 올라탔다. 랭던은 그녀를 따라 차에 들어갔다.
  택시가 출발하자, 소피는 기차표를 꺼내 찢어버렸다.
  랭던은 한숨을 쉬었다.
  ‘칠십 달러가 날아가 버렸군.’
  택시가 클리시 가로 이르는 단조로운 북쪽 길로 접어들자 랭던은 자기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른쪽 창으로 몽마르트와 사크레 쾨르의 아름다운 돔이 보였다. 반대편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번쩍거리며 그들 옆을 휙 지나갔다.
  랭던과 소피는 사이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숙이고 있었다.
  소피는 택시 운전사에게 시 외곽으로 나가 달라고 짧게 말했다. 소피의 굳어진 턱을 보며, 랭던은 그녀가 다음 행보를 구상중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랭던은 십자 모양의 열쇠를 다시 살펴보았다. 창에 가까이 가져가 보기도 하고, 열쇠가 만들어진 곳을 알려주는 어떤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대보기도 했다. 간간이 빛나는 가로등 불빛 속에서, 랭던은 시온의 문장(紋章)외에는 어떤 표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도 안되오.”
  랭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떤 부분이요?”
  “당신 할아버지는 이 열쇠를 당신에게 주기 위해서 무척 고생했을 텐데, 당신은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오.”
  “동감이예요.”
  “할아버지가 그림 뒤에 아무것도 써놓지 않은 게 확실하오?”
  “샅샅히 조사했어요. 이것뿐이었어요. 이 열쇠도 그림 뒤에 쑤셔 넣어져 있었다고요. 열쇠 머리의 시온 문장을 보고는 주머니에 넣은채, 당신과 함께 박물관을 나온 거예요.”
  랭던은 삼각형 다리의 뭉툭한 끝을 들여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열쇠 머리의 테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에 누군가 이 열쇠를 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요?”
  “알코올로 문지른 냄새가 나요.”
  소피가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랭던은 열쇠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누군가 열쇠를 클리너로 문지른 냄새가 난단 말이오. 반대쪽에서 더 강하게 나는군. 그래, 알코올 성분의 물질이야. 클리너로 문질렀든지, 아니면……”
  “뭐죠?”
  랭던은 열쇠를 빛에 대더니 십자가의 넓은 팔 위의 부드러운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부분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젖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머니에 열쇠를 넣기 전에 뒷면을 잘 들여다보았소?”
  “왜요? 글쎄요, 그건 잘 …… 서둘러야 해서.”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그 펜 등을 아직도 가지고 있소?”
  소피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외선 펜 등을 꺼냈다. 랭던은 등으로 열쇠 뒷면을 비췄다.
  열쇠의 뒷면이 순간 빛났다. 거기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읽을 수는 있지만 급하게 적은 필적이었다.
  “자, 우리는 알코올 냄새가 무엇인지 이제 알 게 되었군요.”
  랭던이 웃으며 말했다.
  소피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열쇠 뒷면의 자줏빛 글씨를 응시했다.
  악소 가 24번지.
  ‘주소! 할아버지가 주소를 적어 놓았어!’
  “이게 어딥니까?”
  랭던이 물었다.
  소피도 몰랐다. 소피가 운전사에게 묻자 운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 곳은 파리의 서쪽 교외에 있는 테니스 경기장 근처라고 말했다. 소피는 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부아 드 불로뉴를 지나가면 더 빠릅니다. 괜찮습니까?”
  운전사가 프랑스어로 소피에게 물었다.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덜 수치스러운 길을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오늘 밤은 까다롭게 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좋아요.”
  ‘우리가 이 미국 방문객에게 충격을 주겠군.’
  소피는 다시 열쇠를 들여다보며, 악소가 24번지에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했다.
  ‘교회? 일종의 시온 본부?’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에 지하 석굴에서 목격했던 비밀스러운 의식의 이미지들로 다시 메워지고 있었다. 소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버트, 당신에게 할 얘기가 아주 많아요. 하지만 먼저 시온 수도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개 말해 줬으면 해요.”
  택시는 서쪽으로 달라고, 소피의 눈동자는 랭던의 눈과 마주쳤다.

36

<모나리자>의 전용 관람실 밖에서, 브쥐 파슈는 씨근거리고 있었다. 소피와 랭던이 어떻게 자신을 무장해제시켰는지 설명하는 경비원 그루아르의 얘기를 들으며 파슈는 생각했다.
  ‘그냥 그 축복받은 그림을 쏴버리지 그랬나?’
  “반장님?”
  부관 콜레가 지휘 본부 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반장님, 사람들이 느뵈 요원의 차를 찾았다고 합니다.”
  “대사관으로 간 모양이지?”
  “아닙니다. 철도역입니다. 막 출발한 기차표를 두 장 샀다고 합니다.”
  파슈는 경비원에게 가라고 손짓하고, 콜레를 근처 구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목적지가 어딘가?”
  “릴리입니다.”
  파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끼일 거야. 좋아, 만일을 위해 다음 역에 연락하고 열차를 세워 조사하라고 해. 느뵈의 차는 그대로 두고, 그들이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사복 차림의 요원들을 배치시켜놔. 맨발로 도주할지도 모르니까, 사람을 보내서 역 주변을 뒤지라고 해. 역에서 떠나는 버스들이 있나?”
  “지금 이 시간엔 없습니다. 오직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뿐입니다.”
  “잘됐군. 운전사들에게 물어봐. 뭔가 본게 있는지 말이야. 택시회사 발차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설명해. 난 인터폴에 연락하겠네.”
  콜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장님, 이 일을 전화로 알릴 겁니까?”
  파슈는 후회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물망을 좁혀야 해. 더욱 꽉 죄도록 말이야.’
  처음 한 시간이 중요했다. 탈주 후 첫 한 시간을 보내는 도망자들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필요로 했다.
  ‘여행, 숙박, 현금.’
  훌륭한 삼위일체였다. 인터폴은 눈 한번 깜박이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도망자에게서 빼앗을 수 있었다. 랭던과 소피의 사진을 파리의 여행사와 호텔,은행에 전송함으로써 인터폴은 이 두사람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두사람은 파리를 떠날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며, 신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돈을 인출할 수도 없다. 도망자는 차를 훔치거나, 가게를 털거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된다. 어떤 짓이건,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금세 그 지역 경찰서에서 파악할 것이다.
  “오직 랭던만 알리는 거지요. 그렇죠? 소피 느뵈까지 들추는 겁니까? 그녀는 우리측 요원입니다.”
  콜레가 말했다.
  파슈는 냉큼 말을 잡아챘다.
  “물론 그 여자도 포함이야. 그 여자가 랭던의 더러운 일을 다 돌봐주는 마당에 랭던만 잡아넣어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느뵈의 인사 기록을 훑어보고 친구나 가족, 안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파악해야겠어.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할지도 모르니까.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밖에서 저 지랄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이제 느뵈는 이 일로 직업을 잃는 것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저는 전화기 옆에 있을까요. 아니면 현장으로 나갈까요?”
  “현장으로 가. 역으로 가서 팀을 꾸리게. 자네가 고삐를 쥐고 있는 거지만, 내게 말 없이 움직이지 마.”
  “알겠습니다. 반장님.”
  콜레는 달려나갔다.
  구석에 선 파슈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창문 밖으로 유리 피라미드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이는 연못에 반사된 피라미드의 모습이 물 위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군.”
  안정을 취하며 파슈는 혼자말을 했다.
  잘 숙련된 현장 요원이라면 인터폴이 가하는 압력을 운 좋게 이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 암호 해독가와 대학 교수라?’
  동이 트기도 전에 그들은 잡힐 것이다.

37

  나무들이 울창한 공원은 부아 드 불로뉴 외에도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의 예술품 감정가들은 이곳을 ‘지상의 즐거움이 모인 정원’이라고 불렀다. 거창한 별명과 공원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같은 제목을 가진 보슈의 선정적인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어둡고 비틀린 이 숲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원은 변태와 성도착자들의 쉼터였다. 밤이 되면 숲의 바람결을 타고, 말로 할 수 없는 깊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타난 수백의 몸뚱어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자, 여자 그 중간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랭던이 시온 수도회에 관해서 말하려고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택시는 공원의 입구를 통과해 자갈이 깔린 서쪽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랭던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공원의 야간 거주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자신들이 걸친 옷을 뽐내고 있었다. 앞에서는 가슴을 풀어헤친 두 명의 소녀들이 자동차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녀들 뒤에서는 번들거리는 흑인이 국부만 가린 채 엉덩이를 돌려댔다. 흑인 옆에는 눈부시게 황홀한 금발미인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를 들어 올리자 그 금발 여인은 여자가 아니란 것이 드러났다.
  ‘하느님 맙소사!’
  랭던은 시선을 차 안으로 거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온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기가 말하려는 전설과 이처럼 안 어울리는 배경이 또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랭던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였다. 조직의 역사는 천 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비밀과 협박, 배신, 분노한 교황의 손에서 일어난 잔인한 고문 등이 지난 천 년에 걸쳐 놀라운 연대기를 이루었다.
  랭던은 입을 열었다.
  “시온 수도회는 1099년 프랑스 왕 부이용의 고드프루아가 만든 것이오. 왕이 이 도시를 정복한 직후죠.”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은 랭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드프루아 왕은 엄청난 비밀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져 있소.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그 가족들에게 전해진 비밀인데, 자기가 죽으면 그 비밀이 사라질까 두려워한 왕은 비밀조직, 그러니까 시온 수도회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 조직이 세대를 거쳐 비밀을 조용히 전수하고, 자기 비밀을 보호하도록 말이오. 예루살렘 시절에, 시온은 폐허가 된 헤롯 신전 밑에 문서 상자가 숨겨진  채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헤롯 신전은 일찍이 솔로몬 신전의 폐허 위에 세우진 거였소. 그 문서들은 고드프루아의 엄청난 비밀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고, 교회가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라고 시온은 믿었소.”
  소피의 표정이 어두웠다.
  “시온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이 문서들을 신전 밑의 돌 속에서 회수해야 한다고 맹세했어요. 그리고 진실이 영원히 죽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이오. 폐허 밑에서 문서를 끄집어내기 위해 시온은 군사조직을 만들었소.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한 기사들의 부르심‘ 이라고 불리는 아홉 명의 기사집단이오.“
  랭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성전 기사단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거요.”
  소피는 놀랍다는 시선을 던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귓결에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성전 기사단에 관해서 랭던은 종종 강의했다. 학자들에게 성전 기사단의 역사는 사실과 전설, 잘못된 정보가 서로 뒤섞인 불안정한 세계였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인 진실들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요즈음 들어 랭던은 강의도중 성전기사단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 잘못하다간 음모이론에 휩쓸린 한 무더기의 질문들과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피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성전 기사단을 비밀 문서를 회수하려는 시온 수도회가 만들었다는 얘긴가요? 전 기사단이 성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로 아는데요.”
  “그건 일반적인 오해요.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일반적인 개념은 기사단이 자기들의 임무를 위장한 거란 말이오. 성지에서 기사단의 진짜 목적은 신전 폐허 밑에 깔려 있는 문서들을 회수하는 거였소.”
  “그럼 그들이 문서를 찾아냈나요?”
  랭던은 싱긋 웃었다.
  “아무도 확신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기사단이 폐허 밑에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것이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무엇, 기사들에게 부와 권력을 가져다줄 그 뭔가를 말이오.”
  랭던은 재빨리 성전 기사단에 얽힌 보편적인 학설을 대충 얘기했다. 기사단이 2차 십자군 전쟁동안 어떻게 성지에 머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왕인 볼드윈 2세에게 기독교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 등을 말이다.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없이 청빈을 맹세한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은 왕에게 쉴 곳을 부탁했고  신전의 폐허 속에 마구간과 거처를 마련하겠노라며 왕의 허락을 구했다. 볼드윈 왕은 그 요청을 수락했다. 기사들은 황폐한 성전 안에 누추한 거취를 마련했던 것이다.
  기사들의 이상한 거처는 별 생각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은 시온이 찾는 문서들이 폐허 깊숙이 묻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신이 거주했다고 믿어지는 신전 속의 신성한 방 안에 말이다. 문자 그대로 유대인들의 믿음 한가운데였다. 아홉명의 기사들은 10년 동안을 폐허 속에서 살았다. 단단한 바위들 사이에서 비밀을 파내면서 말이다.
  소피가 시선을 들었다.
  “그럼 기사단이 뭔가를 찾았다는 얘기예요?”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찾아냈소.”
  비록 9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기사단은 그들이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보물을 성전에서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 이로써 유럽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
  기사단이 바티칸을 협박했는지, 아니면 교회가 단순히 기사단의 침묵을 사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교황 이노센트 2세는 즉시 기사단에게 무제한의 힘을 부여했고, 그들이 곧 법이라는 유례없는 교황청의 교서를 발표했다. 즉 기사단은 왕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모든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자적인 군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사단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유로워진 것을 의미했다.
  바티칸에서 부여받은 이 백지 위임장으로 성전 기사단은 열두 개가 넘는 나라에서 광대한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숫자나 정치적인 면에서도 급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사단은 왕가에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이자를 물어 왕가를 파산시켜 버렸다. 현대와 같은 은행 시스템을 통해 자기들의 부와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1300년경, 바티칸의 인가가 기사단에게 너무 많은 힘을 몰아주었다고 판단한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공모해, 교황은 바티칸을 짓누르고 있는 비밀을 통제함으로써 기사단을 뭉개 버리고, 그들의 부를 빼앗을 계획을 고안해 냈다. 교황 클레멘트는 CIA같은 군사 책략을 통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유럽 전역에 있는 교황의 군사들에게 동시에 열어보도록 봉인된 비밀 지령을 내렸다.
  13일 새벽, 봉인은 풀리고 무시무시한 교황의 지령이 드러났다.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신이 자신을 찾아와 계시를 내렸는데, 성전 기사단이 악마숭배와 동성애, 십자가 모독, 남색, 그 외 불경한 행동의 이단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교황 클레멘트에게 모든 기사들을 소환해서 신에 거역한 그들의 죄를 실토할때까지 고문하고, 지상을 깨끗하게 하라는 요청을 내렸다고 했다. 클레멘트의 마키아벨리식 작전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됐다. 그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들이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이단자로서 말뚝에 세워져 화형당했다. 그 비극의 메아리는 현대 문화에까지 울리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13일의 금요일은 운이 나쁜 날로 인식되고 있다.
  소피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성전 기사단이 사라졌다는 거죠? 하지만 기사단의 형제애는 지금도 존재하는 걸로 아는데?”
  “그렇소.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말이오. 기사단을 뿌리뽑으려던 클레멘트의 노력과 거짓 혐의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강력한 동지애를 가지고 있었고 또 몇몇은 바티칸의 처형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소. 기사단의 보물인 문서들은 명백히 기사단의 힘의 원천이었고, 클레멘트의 진짜 목표도 이것이었소. 하지만 이 보물은 클레멘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 거요. 이 문서들은 기사단의 그림자 같은 설계자인 시온 수도회에 쭉 맡겨져 있었소. 그리고 시온의 비밀스러운 장막은 바티칸의 살육에서 조직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가 있었던 거요. 바티칸이 살육을 끝냈을 때, 시온은 한밤중에 파리의 성전 기사단 건물에서 문서들을 몰래 빼내 라로셸에 있는 기사단의 배에 실었다고 해요.”
  “그 문서들은 어디로 갔지요?”
  랭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미스터리에 대한 답은 오직 시온만이 알고 있을 거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수색과 탐색의 대상이니 말이오. 문서들은 여러 번 옮겨지고 다시 숨겨진 것 같소. 현재는 영국 어딘가에 있다는 추정이 지배적이오.”
  소피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천 년 동안 이 비밀의 전설이 전해져 왔소. 문서 전체와 그 힘, 문서가 가진 비밀은 하나의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바로 상그리엘이오. 이것에 관한 수백 권의 책들이 씌어졌고, 상그리엘에 관한 학자들의 큰 관심만큼이나 그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소.”
  “상그리엘? 이 단어가 프랑스어인 ‘상’과 스페인어인 ‘상그리’와 관련이 있나요? 이 단어들은 모두 피를 뜻하는데……?”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상그리엘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소피가 상상하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전설은 복잡해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시온이 증거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고, 그 진실을 역사에 드러낼 적절한 순간을 의식적으로 기다려 왔다는 것이오.”
  “무슨 진실요? 어떤 진실이 그렇게 엄청날 수 있죠?”
  랭던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곁눈질로 어둠에 잠긴 파리의 하층부를 바라보았다.
  “소피, 상그리엘이라는 말은 고대 언어요.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른 용어로 진화해 왔소……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말이오. 내가 그 현대적인 이름을 말하면, 당신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거요. 사실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상그리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거예요.”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난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랭던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들어봤을 거요. 성배(聖杯)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말이오.”

38

  소피는 랭던의 표정을 살폈다.
  ‘이 사람,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성배라고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성배는 상그리엘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오. 이 말은 프랑스어 상그랄(sangraal)에서 유래된 거요. 이게 상그리엘(sangreal)로 진화했고, 결국 상(san)과 그리엘(greal)로 나뉜 것이오.”
  ‘성배.’
  소피는 자신이 그 언어의 결합을 즉시 눈치 채지 못한 데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랭던의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난 성배가 잔인 줄 알았는데, 당신은 조금 전에 상그리엘이 어두운 비밀을 드러내는 문서 뭉치라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하지만 상그리엘에 관한 문서는 성배라는 보물의 절반에 지나지 않소. 문서는 성배와 함께 묻혀 있었으니까…… 그 진정한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오. 문서들은 성전 기사단에게 굉장한 힘을 주었소. 왜냐하면 그 종이들은 성배의 본질을 밝히고 있으니까.”
  ‘성배의 본질?’
  소피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배란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잔이었고, 그 잔으로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피를 받았던 것이다.
  “성배는 그리스도의 잔이에요. 어떻게 그보다 간단할 수 있죠.”
  그녀에게 기대면서 랭던이 속삭였다.
  “소피, 시온에 의하면 성배는 잔이 아니오. 성배가 그저 잔이라는 전설은 어떤 암시를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주장이오. 즉 성배 이야기는 더 강력한 뭔가를 대신하는 은유로 잔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요. 그것은 당신 할아버지가 오늘 밤 우리에게 말하려고 애쓴 것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어떤 것일 거요. 신성한 여성을 언급하는 모든 상징들을 포함해서 말이오.”
  소피는 랭던의 끈기 어린 미소가 자신의 혼란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랭던의 눈빛은 정직했다.
  “성배가 잔이 아니라면 대체 뭐죠?”  랭던은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떻게 얘기해 줘야 할지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절한 역사적 배경에서 대답하지 않는다면, 소피는 더 당황할게 분명했다. 몇 달 전, 자신의 편집장에게 원고를 건넸을 때, 편집장이 지어 보인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소피의 얼굴에서 보게 될 터였다.
  “이 원고에서 주장하는 게 뭐죠? 심각한 건 아니겠죠?”
  포도주 잔을 내려놓고 반쯤 먹어치운 점심 식사 너머로 랭던을 바라보며, 편집장은 숨막히는 소리로 물었다.
  “이걸 조사하느라 일 년을 투자했을 정도로 심각한 겁니다.”
  뉴욕의 저명한 편집장인 조나스 파우크만은 신경질적으로 자기의 염소수염을 말아 올렸다. 그 동안 파우크만은 별의별 주제를 다룬 책들을 만나 보았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파우크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로버트,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의 작업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함께 멋진 길을 달려왔어요. 하지만 내가 이 같은 아이디어를 출간하기로 동의한다면,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내 사무실 밖에서 시위를 할 거요. 게다가 이 일은 당신의 명성을 떨어뜨릴 거요. 당신은 하버드의 역사학자이지, 빨리 몇 푼 벌려는 싸구려 잡상인이 아니잖소. 이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신뢰할 만한 증거들을 분명히 찾은 거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랭던은 트위드 코트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파우크만에게 건넸다. 종이에는 50개 이상의 참 고문헌 목록이 망라되어 있었다. 모두 저명한 역사가들의 저서로 일부는 동시대 인물들의 것이고, 일부는 몇 세기 전 인물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저서의 상당수는 인문학 도서의 베스트 셀러들이었다. 모든 책들의 제목은 랭던이 방금 제시한 것과 같은 명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목록을 읽어 내려가면서, 파우크만은 지구가 실제로 평평하다는 것을 막 발견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저자들 중의 일부를 알고 있어. 이들은…… 진짜 역사가들인데!”
  랭던은 싱긋 웃었다.
  “조나스, 지금 보다시피, 이것은 나 혼자만의 이론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주위에 있었던 거예요. 난 그저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겁니다. 어느 책도 기호학적인 각도에서 성배의 전설을 탐험해 보지는 않았어요. 내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내가 찾아낸 도상학적인 증거들은 무척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파우크만은 여전히 도서 목록을 보고 있었다.
  “오, 하느님, 이 책들 중 한 권은 영국의 왕립 역사가인 레이 티빙 경이 쓴 거잖아.”
  “티빙은 성배를 연구하는 데 자기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지요. 이 인물은 실제로 제 영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나스, 티빙은 이 목록의 다른 사람들처럼 믿는 사람이죠.”
  “당신은 지금 이 모든 역사가들이 실제로 믿는다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파우크만은 침을 삼켰다.
  랭던은 다시 싱긋 웃었다.
  “성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맨 보물입니다. 성배는 전설을 퍼뜨렸고, 이를 둘러싼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생을 걸고 찾아 헤매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그저 단순한 잔이라면 말이 되는 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다른 유산들, 예를 들어 면류관이나 진짜 십자가, 현판(예수의 범죄 사실을 기록한 판. 형장에서 십자가 꼭대기에 부착했다)같은 것도 비슷하거나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죠. 역사를 통틀어 성배는 가장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유를 알겠죠?”
  파우크만은 여전히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들이 모두 성배에 관한 것을 쓰고 있다면, 왜 이 이론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거요?”    
  “이 책들은 당시에 지지를 받고 있던 역사와 싸울 수는 없었던 거죠. 특히 그 역사가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보장받을 때는 말입니다.”
  파우크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실제로는 성배에 관한 책이라는 얘기만은 하지 말아요.”
  “전 성경을 말한 겁니다.”
  파우크만은 움찔했다.
  “나도 알아요.”
  “내려놔!”
  소피의 고함이 택시안의 공기를 갈랐다.
  소피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택시 운전사에게 고함을 지르자 랭던은 놀라 펄쩍 뛰었다. 운전사는 라디오 마우스피스를 잡고 있었다.
  소피는 돌아서서 랭던의 트위드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랭던이 미쳐 깨닫기도 전에, 소피가 권총을 꺼내 한 바퀴 돌리더니 운전사의 뒤통수에 갖다댔다. 운전사는 즉시 마우스피스를 떨어뜨리고 한 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렸다.
  “소피! 도대체 무슨?”
  랭던은 말이 막혔다.
  “멈춰!”
  소피가 운전사에게 명령했다.
  운전사는 떨면서 공원 한 귀퉁이에 차를 세웠다.
  랭던이 자동차 계기판에서 흘러나오는 택시회사 배차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 소피 느뵈라는 요원을……”
  무선 라디오는 잡음이 심했다.
  “그리고 미국인 한 명, 로버트 랭던……”
  랭던은 근육이 굳는 듯 했다.
  ‘저들이 우리를 벌써 찾아냈단 말인가?’
  “내려요.”
  소피가 명령했다.
  떨고 있는 운전사는 두 팔을 머리로 올린 채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피는 창문을 내려서 당황한 운전사를 권총으로 계속 겨누고 있었다. 소피는 조용히 말했다.
  “로버트, 운전대를 잡아요. 당신이 운전하세요.”
  랭던은 총을 휘두르는 이 여인과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차 밖으로 뛰어나가서 운전대 앞에 앉았다. 운전사는 여전히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저주에 찬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로버트, 난 당신이 우리의 마법의 숲을 충분히 봤으리라고 믿어요.”
  뒷좌석에서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많이 봤지.’
  “좋아요. 우리 여기서 나가요.”
  랭던은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더듬었다.
  “소피?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가요!”
  소피가 소리쳤다.
  밖에서는 대여섯 명의 매춘부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여자는 자기 휴대 전화기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랭던은 클러치를 밟고 기어 스틱을 1단으로 놓은 뒤 가속기를 만지작거리며 소리를 시험했다.
  클러치를 놓자, 타이어가 포효하는 소리를 내며 택시가 앞으로 돌진했다. 좌우로 요동을 치며 택시가 급격히 움직이자, 모여든 군중이 이를 피하기 위해 좌우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대 전화기를 들고 있던 여자는 차에 치일 뻔하다가 가까스로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차가 비틀거리며 달리자 소피가 말했다.
  “부드럽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말하려고 했소. 난 오토매틱만 몰아 봤단 말이오!”
  이를 가는 듯한 엔진 소리 너머로 랭던은 소리쳤다.

39

  라 브뤼에르 가의 고급 주택 안의 검소한 방은 많은 고통을 목격했겠지만, 사일래스는 지금 자신의 창백한 몸뚱어리를 휘어잡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것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속았다. 모든 게 사라져 버렸어.’
  사일래스는 속았다. 시온의 회원들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에 죽음을 택하는 거짓말을 했다. 사일래스는 스승에게 전화할 힘도 없었다. 쐐기돌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네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생 쉴피스 교회의 수녀도 죽였다.
  ‘그 여자는 신에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 오푸스 데이의 사업을 비웃었단 말이다!’
  범죄의 충동과 여자의 죽음이 일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링가로사 주교는 사일래스를 생 쉴피스에 들여보내기 위해 전화를 거는 수고까지 했다. 수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생 쉴피스의 신부는 어떻게 생각할까? 수녀를 침대에 잘 눕혀 놓고 나왔지만, 수녀의 머리에 난 상처는 너무나 분명했다. 교회 바닥의 깨진 타일도 수습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파손이 컸다. 사람들은 여기에 누군가가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일래스는 자기 임무를 마치고 나면, 오푸스 데이에 숨을 작정이었다.
  ‘아링가로사 주교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다.’
  사일래스는 뉴욕에 있는 오푸스 데이 본사의 담장 안에서 올리는 기도와 명상의 삶보다 축복받은 존재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다시는 밖으로 발을 내딛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그곳에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링가로사 주교 같은 유명한 인물은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사일래스는 알고 있었다.
  ‘내가 주교님을 위험에 빠뜨렸다.’
  사일래스는 멍한 시선으로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 처음에 사일래스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링가로사였다…… 스페인에 있는 작은 사제관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다.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에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알비노로 태어났습니다. 이 일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폄하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게 당신을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까? 노아도 알비노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그 노아 말입니까?”
  사일래스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링가로사는 웃고 있었다.
  “맞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노아도 알비노였지요. 당신처럼 천사같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세요. 노아는 지상의 모든 생명을 구했습니다. 사일래스, 당신은 위대한 일을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은 당신을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당신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의 사업을 하기 위해, 신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일래스는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난 순수하다. 하얗고 아름답다. 천사처럼.’
  하지만 그 순간, 자기가 머물고 있는 방에서 사일래스에게 속삭이는 것은 실망스러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넌 실패작이야. 유령이라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일래스는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 그런 뒤 외투를 벗고, 징벌의 수단들에 손을 뻗었다.

40

  기어 조작에 애를 먹으면서도 랭던은 탈취한 택시를 부아 드 불로뉴의 끝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 겨우 두 번 덜컹거렸을 뿐이다. 불행히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택시 배차 안내원이 무전을 통해 운전사를 계속 부르는 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차량번호 563, 어디에 있습니까? 응답하시오!”
  랭던이 공원의 출입구에 이르렀을 때, 랭던은 자신의 남성다움을 버리기로 작심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당신이 운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소.”
  운전석으로 뛰어들면서 소피는 안심하는 듯 보였다. 몇 초 후에 소피는 공원을 떠나 롱샹의 오솔길을 따라 서쪽으로 차를 부드럽게 몰았다.
  “어느 쪽이 악소 가요?”
  소피가 속력을 1백 킬로미터 가까이 올리는 것을 지켜보며 랭던이 물었다.
  소피의 눈동자는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다.
  “악소 가는 롤랑 가로의 테니스 스타디움 바로 옆에 있다고 운전사가 말했잖아요. 그 지역을 알고 있어요.”
  랭던은 묵직한 열쇠의 무게를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주머니에서 다시 꺼냈다. 이 열쇠는 어마어마한 결과물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제 열쇠는 자신의 자유와도 상당히 관계가 있었다.
  조금 전에 소피에게 성전 기사단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랭던은 열쇠가 시온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것 이외에도 조직과 좀 더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은 균형과 조화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성전 기사단의 상징이기도 했다. 누구나 성전 기사단이 입고 있는 하얀 튜닉 위에 붉은 십자가가 수놓아진 그림을 봤을 것이다. 기사단의 십자가들은 그 끝이 살짝 부풀려져 있긴 해도 같은 길이의 팔들로 되어 있다.
  ‘정사각의 십자가. 이 열쇠의 십자가와 같다.’
  기사단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랭던은 자신의 상상력이 줄달음쳐 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성배.’
  그 터무니없음에 랭던은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성배는 영국 어딘가, 적어도 1천 5백 개가 넘는 기사단 교회들 중 한 곳의 은밀한 방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 빈치가 시온의 수장으로 있던 시대였지.’
  시온은 조직의 강력한 문서들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문서들을 여러 차례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성배가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이래 여섯 번이나 이동했다고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47년 수많은 목격자들이 문서들을 태워 버릴 뻔한 화재를 묘사한 때였다. 하나를 옮기는 데도 장정 여섯 명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궤짝 네 개를 미처 안으로 안전하게 옮기기 전이었다고 한다. 그후 누구도 성배를 보지 못했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나라인 영국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성배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생전에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숨겨진 장소는 아마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배에 미친 사람들은 다 빈치의 그림이나 그의 일기를 여전히 숙고하는 것이다. 성배의 현재 위치를 알려줄 숨겨진 단서를 찾을 희망으로 말이다. 일부는 <암굴의 마돈나>의 산악 배경이 스코틀랜드의 굴이 많은 언덕 지형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제자들의 수상스러운 자리 배치가 일종의 암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나리자> 그림을 엑스레이로 비춰 보면, 모나리자가 원래는 이시스의 청금석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다 빈치가 죽은 후에 고의적으로 덧칠해서 없애 버렸다고 주장한다. 랭던은 팬던트의 흔적을 못봤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이 어떻게 성배를 나타내는 것인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성배 숭배론자들은 이에 관해서 인터넷 게시판이나 채팅방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모두가 음모를 좋아한다.’
  그리고 음모는 계속되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깜짝 놀랄 만한 발전으로는 유명한 다 빈치의 그림인 <매기에 대한 찬사>가 있다. 이 그림은 여러 겹의 채색 밑에 어두운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예술 진단가인 마우리치오 세라치니가 이 사실을 밝혀냈고,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은폐된 레오나르도’라는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떠들썩하게 실었다.
  녹회색으로 스케치한 밑그림은 진짜 다 빈치의 작품이지만, 채색 자체는 다 빈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세라치니가 밝혀낸 분명한 사실이었다. 진실은 어떤 무명화가가 다 빈치 사망 이후 그 햇수만큼 스케치에 색을 칠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더 심란한 것은 가짜 사기꾼 그림 밑에 과연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적외선 반사경과 엑스레이로 촬영된 사진들은 이 뻔뻔한 화가가 다 빈치의 습작에 색칠을 해가면서, 밑그림에서부터 수상한 출발을 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마치 다 빈치의 진정한 의도를 바꾸려는 것처럼 말이다. 밑그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그림은 대중 앞으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의 당황한 관리들은 즉시 이 그림을 길 건너 창고로 추방시키고 말았다. 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방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에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오만한 안내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복원을 위해 진단 테스트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성배를 추적하는 현대인들의 기묘한 지하세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위대한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은 비밀을 막 터뜨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비밀이 거기에 숨겨져 있든, 한 겹의 채색 밑에 있든, 그저 평범한 시각 속에 암호로 숨겨져 있든, 아니면 숨겨진 것이라곤 전혀 없든 간에 말이다. 어쩌면 애를 태우는 듯한 다 빈치의 풍부한 단서들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모나리자의 얼굴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조롱을 불러 모으기 위한 공허한 약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할까요? 당신이 들고 있는 열쇠가 성배의 숨겨진 장소를 풀어 줄까요?”
  랭던을 돌아보며 소피가 물었다.
  랭던의 웃음소리는 자신에게조차 억지스럽게 들렸다. 랭던은 소피에게 역사에 대해 짧게 얘기해 주었다.
  “정말 잘 모르겠소. 더욱이 성배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어지니까.”
  소피가 주장했다.
  “하지만 성배가 유일하게 합리적인 결론 같아요. 우린 극도로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고, 이 열쇠에는 시온의 문장이 각인되어 있어요. 그리고 시온의 회원으로부터 이 열쇠를 건네받았고요. 당신이 내게 말한 대로라면, 조직은 성배 수호자들인 거잖아요.”
  랭던은 소피의 추론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소문에는 시온이 언젠가는 성배를 마지막 안식처인 프랑스로 가져오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줄 만한 역사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시온이 성배를 어떻게든 프랑스로 가져왔다 쳐도, 테니스 스타디움 근처에 있다는 악소가 24번지가 고귀한 성배의 마지막 안식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피, 난 정말 이 열쇠가 성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성배가 영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인가요?”
  “그것뿐만이 아니오. 성배의 위치는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지켜진 비밀들 중 하나요. 시온에 가입한 회원들은 자신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수십 년을 기다려야만 해요. 조직의 상층부로 올라가서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를 배우기 전까지는 말이오. 이 비밀은 칸막이로 구분된 지식처럼 교묘한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있었을 것이오. 조직의 규모는 매우 컸겠지만, 당대에는 오직 네 사람만이 성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수장인 그랜드 마스터와 세 명의 집사들. 당신 할아버지가 이 네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요.”
  ‘할아버지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어요.“
  가속기를 밟으며 소피는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조직 안에서 할아버지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 이미지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만일 당신 할아버지가 조직의 상위 계층이었다고 해도, 조직 외부의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밝혀서는 안될 입장이었을 거요. 할아버지가 당신을 조직 안으로 데려갈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소.”
  ‘난 이미 거기 있었어요.’
  지하실의 의식을 떠올리며 소피는 생각했다. 소피는 지금 이 순간 노르망디의 저택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것을 랭던에게 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수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피는 몸이 떨렸다. 저 멀리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소피는 무거운 피로가 전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저기!”
  앞에 어렴풋이 나타난 거대한 테니스 스타디움을 보고 흥분한 랭던이 소리쳤다.
  소피는 슬며시 스타디움 쪽으로 차를 몰았다. 교차로를 몇 개 지나자, 악소 가를 알리는 교차로에 도달했다. 번지수가 낮은 쪽으로 차를 돌렸다. 도로는 점점 상업 건물들로 잘 정비된 산업화 지구처럼 바뀌었다.
  랭던은 ‘24’라는 숫자를 찾으면서 자신이 은밀히 수평선에서 교회의 첨탑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석게 굴지 말자. 이런 지역이 잊혀진 기사단의 성전이라니?’
  “저기 있네요.”
  소피가 뭔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내질렀다.
  랭던은 소피가 가리키는 구조물로 눈을 돌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팔길이가 같은 거대한 네온 십자가로 화려하게 정면을 장식한 현대식 건물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십자가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
  랭던의 기사단의 교회에 대한 그의 희망을 소피에게 알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숨겨진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 기호학자들의 직업 성향이었다. 이 경우, 팔길이가 같은 십자가가 중립국인 스위스의 깃발 상징으로 차용되어 쓰인다는 것을 랭던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적어도 미스터리는 풀렸다.
  소피와 랭던은 스위스 은행의 금고 열쇠를 들고 있는 것이다.

41

  간돌포 성 밖에서는, 차가운 산 공기의 상승 기류가 벼랑을 타고 넘어와 피아트에서 내리는 아링가로사 주교에게 냉기를 안겼다.
  ‘사제복 위에 뭘 더 껴입을걸 그랬군.’
  반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주교는 생각했다. 어쨌든 오늘 밤 아링가로사가 보여야 할 태도는 약하고 두려움에 찬 모습이었다.
  꼭대기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제외하면 성은 어둡고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서관이군, 깨어서 기다리고들 있는 모양이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링가로사는 돔 모양의 관측소를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문에서 주교를 맞이한 사제는 졸려보였다. 사제는 다섯 달 전에 아링가로사를 맞이한 그 사람이었지만, 오늘 밤은 그다지 공손해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제의 표정에는불쾌함이 역력했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교님.”
  “미안합니다. 요즘 비행기는 워낙 믿을 수가 없어서.”
  사제는 들리지 않게 뭐라고 중얼거린 뒤 말했다.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도서관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나무로 된 거대한 사각형 방이다. 모든 벽에는 장서들이 빽빽이 꽂힌 책장들이 솟아 있었다. 바닥은 가장자리가 검은 현무암으로 장식된 호박색 대리석이었는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 건물이 한때 궁전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
  방을 가로질러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지만 방안의 조명이 너무 어두웠다. 아링가로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듯 환했다.
  ‘긴장된 밤이 시작되었군.’
  오늘 밤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발설하려는 것에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어둠에 앉아 있었다.
  아링가로사는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탁자 뒤인 방 끝에서 세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가운데 앉은 남자의 형체는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바티칸 시티에서 모든 법적인 문제들을 총괄하는, 몹시 뚱뚱한 바티칸 서기관이었다. 나머지 둘은 높은 자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추기경들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도서관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에 늦어 죄송할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어서, 여러분들께서는 필시 피곤하시겠습니다.”
  거대한 배 위에 손을 포개면서 서기관이 말했다.
  “아닙니다. 주교가 이곳까지 와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작 한 일이라곤 일어나서 당신을 만나는 일뿐인데요. 뭘. 커피나 다른 마실 것을 갖다드릴까요?”
  “사교적인 방문인 척하지 않는 것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잡아 타야할 다른 비행기가 또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이시는군요.”
  서기관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을 텐데요.”
  “다섯 달 전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심을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링가로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주교의 빠른 행보가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아링가로사의 눈이 긴 탁자를 따라가다가 커다란 검은색 서류가방에 멎었다.
  “저게 제가 요구한 것입니까?”
  서기관의 목소리는 불편했다.
  “그렇소. 하지만, 우리가 그 요청에 대해서 염려하고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소. 그것은 아주……”
  “위험해 보입니다.”
  추기경 중 한 명이 서기관의 말을 끝맺었다.
  “어딘가로 전송해 드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금액입니다.”
  ‘자유란 비싼 법이지.’
  “제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신이 저와 함께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금액은 제가 요구한 대로 정확하겠죠?”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티칸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 채권이오. 세계 어디에서나 현금으로 바꿀 수 있소.”
  아링가로사는 탁자 끝으로 걸어가서 서류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두꺼운 채권 뭉치 두 다발이 들어 있었다. 각각의 채권에는 바티칸 문장과 ‘포르타토레’라는 타이틀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것이 채권을 소지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현금과 상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서기관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교, 이 말을 꼭 해야겠소. 만일 이 돈이 현찰이라면, 우리들이 이렇게까지 걱정스럽지는 않을 거요.”
  ‘내가 그 많은 현금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가방을 닫으며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채권도 현금처럼 쓰일 수 있다. 바로 서기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추기경들은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채권들은 곧장 바티칸 은행으로 추적됩니다.”
  아링가로사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 점이 바로 스승이 아링가로사에게 돈을 바티칸 은행의 채권으로 받으라고 지시한 이유였다. 이 채권은 보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한배를 탄 거야.’
  “이 일은 합법적인 거래입니다. 오푸스 데이는 바티칸 시티의 개인적인 분과입니다. 교황은 어떻게 하든 돈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링가로사는 변호했다.
  서기관이 몸을 앞으로 내밀자, 그 몸무게를 못 이겨 의자가 삐걱거렸다.
  “맞소, 하지만…… 당신이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소. 만일 이 돈이 불법적인 일에 쓰인다면……”
  “서기관님이 제게 묻고 계신 것을 고려해 볼때, 제가 이 돈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겠지.’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제가 서명해야 할 것을 가지고 오셨겠지요?”
  그들은 아링가로사 앞으로 서류 한 장을 열성적으로 내밀었다. 아링가로사가 그저 조용히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링가로사는 앞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았다. 거기엔 교황의 문장이 있었다.
  “제게 보낸 서류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서류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링가로사는 놀랐다. 하지만 앞에 있는 세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고맙소. 주교. 교회에 대한 당신의 봉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오.”
  서기관이 말했다.
  서류 가방을 집어들며 아링가로사는 그 무게에서 권위와 약속을 느꼈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주교?”
  추기경 한 명이 문지방에 다다른 아링가로사를 불렀다.
  아링가로사는 멈칫하며 돌아섰다.
  “네?”
  “여기서 어디로 가십니까?”
  아링가로사는 그 물음이 지정학적 물음이라기보다는 영혼과 관련된 물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멸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파리로 갑니다.” 

42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스위스 숫자 계좌의 전통 안에서, 익명의 서비스를 현대적으로 제공하는 24시간 운영제의 안전금고 은행이다. 취리히, 콸라룸푸르, 뉴욕 그리고 파리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취리히 은행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익명의 컴퓨터 코드로 된 미완날인증서 서비스와 디지털화 된 백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은행의 주요 업무는 지금까지도 가장 오래되고 간단한 익명의 안전금고 상자의 제공이다. 고객은 주식 증서에서부터 고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든 익명을 보장받고 소유물을 맡길 수 있었다. 사생활을 보호하는 고도의 기술로 이루어진 차단장치를 통해서, 고객은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언제든지 물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소피는 목적지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랭던은 타협의 여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건축물을 내다보았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은 유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확고한 인상을 주었다. 창문 하나 없는 건물은 전체가 강철로 주조된 듯한 느낌이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은 5미터 크기의 번쩍거리는 네온 십자가를 정면에 단 채 길에서 물러나 앉아 있었다.
  비밀 엄수를 고수하는 스위스 은행의 명성은 스위스의 가장 돈이 되는 수출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설비가 예술계에서는 시빗거리가 되고 있었다 훔친 미술품을 숨길 수  있는 완벽한 장소를 은행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치된 물품은 사생활 보호법에 따라 경찰 수사에서도 보호받았고, 사람의 이름 대신 숫자로 된 계좌만 붙어 있기 때문에 도둑들은 훔친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자기들이 결코 추적당할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물 밑으로 진입로가 있었다. 소피는 진입로를 막고 있는 문 앞에 택시를 세웠다. 머리 위에서는 비디오 카메라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랭던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감시 카메라와는 달리 저 카메라는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피는 택시의 창문을 내리고, 운전자 쪽에 붙은 전자 계기판을 살폈다. 액정 자막 화면이 7개 국어로 안내사항을 보여주었다. 첫째 줄은 영어였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주머니에서 마마 자국이 있는 황금열쇠를 꺼낸 소피는 안내 계기판에 다시 주의를 돌렸다. 화면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열쇠와 저 구멍이 맞을 것 같소.”
  랭던이 말했다.
  소피는 열쇠의 다리를 구멍과 맞춘 후에 열쇠의 다리가 모두 들어갈 때까지 깊숙이 집어넣었다. 열쇠를 돌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즉시 문이 돌아가며 열렸다. 소피는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을 떼고, 두 번째 문의 계기판으로 차를 몰았다. 뒤에서 첫째 문이 닫히자, 그들은 수문 사이에 갇힌 배처럼 덫에 걸린 꼴이 되었다.
  랭던은 갇힌 느낌이 정말 싫었다.
  ‘둘째 문에서도 작동해 주길 빌어야겠군.’
  두 번째 안내 계기판도 익숙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열쇠를 넣으십시오.
  소피가 열쇠를 꽂자, 두 번째 문도 즉시 열렸다. 잠시 후 그들은 진입로를 따라 건물의 중앙에 이르렀다.
  고객용 주차장은 작고 어두웠다. 약 열두 대 정도의 차들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저쪽 끝에 건물의 입구가 있었다. 방문자들을 환영하는 붉은 카펫이 거대한 금속 문 앞까지 깔려 있었다.
  ‘혼합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군. 환영한다, 하지만 조심해라.’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는 출입구 근처에 택시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총은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좌석 밑에 총을 내려놓으며 랭던은 생각했다.
  소피와 랭던은 택시 밖으로 나와 강철 문으로 향하는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갔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문 옆의 벽에 삼각형의 열쇠 구멍이 나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배우는 게 더딘 사람은 들이지 않겠다는 얘기로군.”
  랭던이 말했다.
  소피가 불안한 얼굴로 웃었다.
  “한번 가보죠.”
  소피가 열쇠를 구멍에 꽂자, 문이 낮은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열렸다. 시선을 서로 주고 받으며 소피와 랭던은 안으로 들어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그들 뒤에서 닫혔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응접실은 랭던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실내 장식이었따. 대부분의 은행들은 윤기 흐르는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내부를 꾸미는데, 이 은행은 바닥에서부터 벽까지 금속과 대못만을 선택했다.
  ‘이 은행을 장식한 사람은 누구일까? 철강업계 협력 업체 사람인가?’
  랭던은 의아했다.
  로비를 살펴보는 소피도 겁먹은 표정이었다.
  바닥, 벽 카운터, 문 심지어 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회색 금속 일색이었다. 틀에 부어 만든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인상적이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당신은 지하금고로 들어온 것 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 뒤에서 몸집이 큰 남자가 보고 있던 작은 텔레비전을 끄고,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장대한 근육과 굵은 팔뚝에도 불구하고, 경비원의 목소리는 스위스 벨보이처럼 공손함을 갖추며 맑게 울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2개 국어로 인사하는 것은 유럽에서 공손함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손님에게 어느 쪽 언어가 더 편리한가를 알아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피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카운터 위에 황금열쇠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열쇠를 내려다보더니, 즉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물론입니다. 손님의 엘리베이터는 홀 끝에 있습니다.손님이 가고 있다고 제가 직원에게 알려 놓겠습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열쇠를 다시 집었다.
  “몇 층이죠?”
  남자는 소피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손님의 열쇠가 몇 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워야 하는지 알려줄 겁니다.”
  소피는 미소로 답했다.
  “아, 그렇군요.”
  경비원은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다가가서 열쇠를 꽂고, 승강기에 올라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자, 경비원은 전화를 움켜쥐었다. 그들의 도착을 직원에게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객의 열쇠가 출입문 바깥에서 꽂혔을 때, 이미 금고 안내원은 자동적으로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비원은 대신 은행의 야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들으며, 경비원은 텔레비전을 다시 켜고 시청했다. 보고 있던 뉴스가 이제 막 끝나려던 참이었다. 경비원은 텔레비전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기 아래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오늘 밤 프랑스 경찰이 탈주자 두 사람을 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사람이 방금 우리 은행으로 들어왔습니다.”
  매니저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좋아. 내가 즉시 베르네 씨에게 연락하지.”
  경비원은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인터폴이었다.
  승강기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랭던은 놀랐다.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건물에서, 지금 몇 층이나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층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랭던은 승강기 밖으로 나오게 되어 행복했다.
  은행의 민첩함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안내 직원이 이미 그들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직원은 나이가 지긋하며 쾌활한 사람이었다. 깔끔한 플란넬 양복을 입은 모습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마치 하이테크 세계에 온 구시대의 은행가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원은 발을 돌려 좁은 복도를 경쾌하게 걸어 내려갔다.
  랭던은 소피와 함께, 깜박이는 컴퓨터들이 들어찬 커다란 방 몇 개를 지나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자, 다 왔습니다.”
  어떤 금속 문 앞에 이르러 문을 열어주면서 직원이 말했다.
  랭던과 소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그들 앞에 있는 방은 작았지만, 고급 호텔의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금속과 대못은 사라지고, 참나무로 만든 가구와 동양산 카펫, 쿠션을 받친 의자들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넓은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뚜껑을 따놓은 페리에 병과 함께 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 페리에는 방금 딴 것인지 기포가 아직도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뜨거운 커피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시계처럼 정확하군. 이런 일은 스위스에 맡기라는 얘긴가.’
  랭던은 생각했다.
  직원은 랭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은행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시죠?”
  소피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종종 열쇠들은 대를 이어 물려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은행에 처음 오신 고객들은 규정을 확실히 모르는 경우도 있답니다.”
  직원은 몸짓으로 탁자 위의 음료수를 가리켰다.
  “이 방은 손님이 계시고 싶을 때까지 손님의 방입니다.”
  “열쇠가 가끔은 상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소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손님께서 가지고 계신 열쇠는 스위스 숫자로 된 계좌 같습니다. 그런 열쇠는 종종 대를 이어 물려받습니다. 우리 은행의 황금계좌의 경우, 안전금고 상자의 가장 짧은 임대 기간이 오십 년입니다. 미리 돈을 지불하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가족들이 바뀌는 것을 흔하게 본답니다.”
  랭던은 직원을 쳐다보았다.
  “지금 오십 년이라고 그랬습니까?”
  “최소한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보다 길게 임대 기간을 구입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계약 조건이 없다면, 오십년 동안 계좌에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 경우에는 안전금고 안의 내용물은 폐기처분됩니다. 손님의 금고에 접속하는 과정을 설명해 드릴까요?”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주세요.”
  안내원을 팔을 뻗어 호화로운 방 내부를 가리켰다.
  “이 방은 손님의 개인 전용실입니다. 일단 제가 이 방을 나가면, 손님께선 여기에서 안전금고의 내용물을 살피고 정리하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안전금고는…… 여기로 도착합니다.”
  안내원은 랭던과 소피를 지나 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넓은 컨베이어 벨트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공항의 수화물 컨베이어와 흡사했다.
  “손님의 열쇠를 저기에 꽂으면……”
  안내원은 컨베이어 벨트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전자 계기판을 가리켰다. 계기판에 이제는 낯익은 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보였다.
  “컴퓨터가 손님 열쇠를 확인하고 나면, 손님의 계좌번호를 누르십시오. 그러면 손님의 안전금고는 지하창고에서 자동으로 이 방으로 오게 됩니다. 손님이 볼일을 다 마치신 후에는, 안전금고를 다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열쇠를 꽂으면 이 과정이 거꾸로 진행됩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손님의 사적인 용무는 이곳 직원으로부터도 보호되는 것입니다. 뭔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방 가운데 있는 탁자 위의 버튼을 누르십시오.”
  소피가 막 질문을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직원은 당황스럽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네?”
  전화 통화를 하는 직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안내원은 불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나가 봐야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직원은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그때 소피가 직원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가기 전에 뭔가 확실히 좀 알려주시겠어요? 계좌번호를 눌러야 한다고 말했나요?”
  직원은 창백한 얼굴로 문에서 멈춰 섰다.
  “물론입니다. 대부분의 스위스 은행들처럼, 우리 은행의 안전금고도 이름이 아닌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열쇠와 오직 손님만이 알고 있는 개인 계좌번호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 열쇠는 손님이 금고의 주인임을 반밖에 증명해 주지 않거든요. 손님의 개인 계좌번호가 나머지 반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님이 열쇠를 잃어버렸을때, 누구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요.”
  소피는 주저했다.
  “그럼 만일 이 열쇠를 제게 물려준 사람이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면요?”
  안내원의 가슴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분명히 이곳에서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얘기지!’
  직원은 랭던과 소피에게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을 돕도록 누군가를 부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즉시 이 자리에 오도록 하지요.”
  방을 나선 직원은 문을 닫고 방문을 잠갔다. 랭던과 소피를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시내 건너편에서는 콜레가 노르 기차 역에 서 있었다. 그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파슈였다.
  “인터폴이 단서를 잡았네. 열차는 잊어버리게. 랭던과 느뵈가 방금 전 안전금고 은행의 파리 지점에 들어갔다는군. 즉시 그곳으로 사람들을 보내게.”
  “소니에르 씨가 느뵈 요원과 로버트 랭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어떤 단서를 잡은 걸까요?”
  파슈의 어조는 냉담했다.
  “콜레 부관. 자네가 그들을 체포하면 그때 내가 직접 물어보겠네.”
  콜레는 즉시 눈치챘다.
  “악소 가 이십사 번지로 곧 출동하겠습니다. 반장님”
  콜레는 전화를 끊고 요원들에게 무전을 쳤다.

43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파리 지점장 앙드레 베르네는 은행 건물의 호화로운 위층에 살고 있었다. 풍족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베르네는 항상 생루이 강변의 아파트를 갖는게 꿈이었다. 이곳에서는 그저 졸부들이나 만날 수 있지만 거기에서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을 사귈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르네는 늘 자신에게 말했다.
  ‘은퇴하면, 지하실을 희귀한 보르도 산 포도주로 가득 채워 놓고, 프라고나르와 부세의 그림으로 응접실을 꾸며야지. 그리고 라탱 지구에서 희귀한 고서들과 골동품 가구를 수집하며 나날을 보내는 거야.’
  오늘 밤 지점장은 겨우 6분 30초 전에 일어났다. 베르네는 은행의 지하 복도로 서둘러 내려갔지만, 개인 재단사나 미용사가 방금 단장을 해준 것처럼 그의 모습에서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실크 양복을 입은 베르네는 걸어가면서, 입 안에 구강제 스프레이를 뿌리고 넥타이를 단단하게 맸다. 다른 시간대에서 날아오는 국제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에 익숙한 베르네의 수면 습관은 마사이 부족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마사이 부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전투 태세로 돌입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전투는 준비됐다.’
  오늘 밤에 어울리는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황금열쇠를 가진 손님은 항상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황금열쇠의 주인이 사법경찰이 찾고 있는 인물이라면 극도로 미묘한 문제였다. 은행은 고객이 범죄자라는 증거가 없을 경우에, 고객의 개인적인 권리에 대한 사법 당국의 법 집행을 막아낸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오 분 남았군.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이 사람들을 은행 밖으로 몰아내야 해.’
  베르네는 속으로 말했다.
  재빨리 움직인다면, 이 재앙을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네는 경찰에게 보고한 대로 도망자들이 은행으로 걸어 들어왔지만, 계좌 번호도 갖고 있지 않았고 고객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보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빌어먹을, 그 경비원이 인터폴에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시간당 15유로를 받는 경비원에게 사리분별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어휘였다.
  문가에 선 베르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 뒤에 억지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잠긴 문을 열었다. 베르네는 따뜻한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방으로 들어갔다.
  베르네의 눈동자는 그의 고객을 찾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앙드레 베르네입니다. 어떻게 도와……”
  마지막 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렸다. 자기 앞에 있는 여자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기대하지 않은 방문객이었다.  “미안합니다만,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소피가 물었다. 그녀는 이 은행가를 알지 못했지만, 남자는 잠시 유령이라도 본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는……모릅니다. 우리 은행 서비스는 익명입니다.”
  지점장은 말을 더듬었다. 그런 뒤 크게 숨을 내쉬더니, 억지로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직원이 말하길, 황금열쇠를 가지고 계시는데 계좌번호가 없다고요? 그 열쇠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제게 주셨어요.”
  소피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남자가 더욱 불편해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정말입니까? 손님의 할아버님이 손님에게 열쇠는 주었는데, 계좌번호는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늘 밤 살해되셨거든요.”
  그녀의 말은 흥행가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공포를 가득 담은 눈으로 은행가가 물었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죽어요? 그런데……어떻게?”
  이제 충격으로 뒤로 물러선 사람은 소피였다.
  “할아버지를 아세요?”
  앙드레 베르네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탁자 끝에 몸을 기댔다.
  “자크와 난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밤에요. 루브르 박물관에서요.”
  베르네는 가죽 의자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베르네는 랭던을 올려다본 뒤 다시 소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든 소니에르의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소피가 선언하듯 말했다.
  베르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느라 말을 멈췄다.
  “당신들 사진이 인터폴에서 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당신을 알아본 겁니다. 당신들은 살인혐의로 수배중이예요.”
  소피는 침울해졌다.
  ‘파슈가 벌써 인터폴을 돌려?’
  파슈는 소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 같았다. 소피는 재빨리 베르네에게 랭던이 누구이며, 오늘 밤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했다.
  베르네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소니에르가 죽어 가면서 당신에게 랭던 씨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겁니까?”
  “예. 그리고 이 열쇠도요.”
  소피는 베르네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시온의 봉인이 찍힌 면을 아래로 해서 열쇠를 내려놓았다.
  베르네는 열쇠를 응시했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소니에르가 오직 열쇠만을 당신에게 남겼습니까? 다른 것은요? 종이 한 장도 없습니까?”
  소피는 자신이 급하게 루브르를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암굴의 마돈나>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뇨. 그냥 열쇠만 있었어요.”
  베르네는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열쇠는 열 자리로 된 계좌번호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열 자리 번호는 암호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번호가 없으면 열쇠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열 자리 숫자.’
  소피는 마지못해 숫자 결합을 계산해 보았다.
  ‘무려 천억 개의 숫자 조합이 가능한 거로군.’
  설사 DCPJ의 강력한 병렬컴퓨터를 가져온다고 해도, 이 코드를 깨려면 몇주가 걸릴 판이었다.
  “베르네 씨. 확실히 이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당신이 우리를 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미안합니다.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고객들은 안전 경로를 통해서 자기들만의 계좌번호를 고릅니다. 그 번호는 오직 고객과 컴퓨터에게만 의미가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의 안전까지도요.”
  소피는 베르네의 말을 알아들었다. 동네 편의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스위스 은행도 분명히 누군가가 금고 열쇠를 훔쳐와서, 은행 직원을 인질로 붙잡고 계좌번호를 말하라고 요구당하는 그런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을 터였다.
  소피는 랭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열쇠를 내려다보다가 베르네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여기 은행에 무엇을 보관하고 있었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무엇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것은 안전금고 은행의 기본 규칙이기도 합니다.”
  소피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베르네 씨, 저희들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려고 해요.”
  그녀는 손을 뻗어 열쇠를 뒤집었다. 시온의 문장을 드러내 보이며 소피는 남자의 눈을 살폈다.
  “이 열쇠의 상징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베르네는 붓꽃 문장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니오. 하지만 우리의 많은 고객들은 자신의 열쇠에 회사 로고나 이니셜 등을 새겨 넣기도 합니다.”
  소피는 여전히 베르네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 상징은 시온 수도회라고 알려진 비밀조직의 상징이예요.”
  베르네는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모르는 얘깁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내 친구였지만, 우리는 주로 사업 얘기를 했습니다.”
  지점장은 넥타이를 고쳐 맸다. 그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소피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네 씨, 할아버지는 오늘 밤 제게 전화해서, 할아버지와 제가 큰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어요. 제게 뭔가 줄 것이 있다고도 했고요. 그리고 이 은행의 열쇠를 주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당신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뭐든지 도움이 될 겁니다.”
  베르네는 땀을 닦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경찰이 곧 도착할 거예요. 은행의 경비원이 인터폴에 연락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소피는 무척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
  “할아버지는 제 가족에 얽힌 진실을 제게 얘기해 줄 필요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가씨, 당신 가족은 당신이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미안해요. 당신 할아버지가 당신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멀어져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그를 고통스럽게 했는지 소니에르는 여러 차례 얘기했지요.”
  소피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랭던이 물었다.
  “계좌의 내용이 상그리엘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베르네는 랭던에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바로 그때, 베르네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베르네는 허리띠에서 전화를 잡아 뺐다.
  “네?”
  베르네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베르네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근심으로 변해갔다.
  “경찰? 이렇게 빨리?”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프랑스어로 뭔가를 짧게 지시했다. 그리고 1분 안에 로비로 올라가겠노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베르네는 소피를 향해 돌아섰다.
  “경찰이 평소보다 빨리 움직이는군요.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소피는 빈손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경찰에게 우리가 왔다가, 벌써 갔다고 얘기해 주세요. 은행을 수색하고 싶어하면 수색영장을 요구하세요. 그럼 시간을 좀더 벌 수 있을 거예요.”
  “이봐요. 자크는 내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은행은 이런 종류의 압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 면전에서 당신들이 체포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게 시간을 좀 주세요. 경찰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당신들이 은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이 있을겁니다. 그 이상은 나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어요. 일을 처리하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베르네는 서둘러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안전금고는? 그냥 떠날 수는 없어요.”
  소피가 소리쳤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해줄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문 밖으로 서둘러 나가면서 베르네가 말했다.
  소피는 잠시 베르네를 눈으로 뒤쫓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수년 간에 걸쳐 보낸 그 많은 편지나 꾸러미들 속에 계좌번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자신이 뜯지도 않고 버려둔 편지들 속에 말이다.
  랭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소피는 랭던의 눈이 예기치 못한 만족감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로버트? 당신 웃고 있네요?”
  “당신 할아버지는 천재요.”
  “뭐요?”
  “열 자리 숫자.”
  랭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소피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소피에게 익숙한,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랭던의 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좌번호 말이오. 당신 할아버지가 결국엔 그 번호들을 우리에게 남겼다고 확신하오.”
  “어디에요?”
  랭던은 범죄 현장을 찍은 사진을 꺼내서 탁자 위에 펼쳤다. 소피는 첫 줄만 읽고서도 랭던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13-3-2-21-1-1-8-5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44

  “열 자리 숫자.”
  현장 사진을 내려다보면서, 소피의 암호 감각이 꿈틀거렸다.
  13-3-2-21-1-1-8-5
  ‘할아버지는 루브르 박물관 바닥에 계좌번호를 남긴거야!’
  소피가 바닥에 휘갈겨쓴 피보나치 수열을 처음 보았을때, 이 숫자의 유일한 목적은 DCPJ가 암호 해독가를 부르게 해서 소피를 사건에 끌어들이려는 것으로만 알았다. 좀 지나서는 이 숫자들이 다른 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단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의미 없는 순서…… 숫자로 된 아나그램.’
  이제 놀랍게도, 이 숫자들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숫자들은 할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안전금고 상자를 여는 마지막 열쇠가 될 것이 확실했다.
  랭던을 향해 돌아서며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중 의미의 대가였어요. 할아버지는 여러 겹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했지요. 암호에 숨겨진 또다른 암호 같은 것 말이예요.”
  랭던은 이미 컨베이어 벨트 근처에 있는 전자 계기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피는 사진을 움켜쥐고 따라갔다.
  계기판은 은행은 ATM 기계와 유사한 키보드를 가지고 있었다. 화면에는 은행의 로고인 십자가가 떠 있고, 키보드 옆에는 삼각형의 구멍이 있었다. 소피는 망설이지 않고 열쇠를 구멍에 집어 넣었다.
  화면이 즉시 바뀌었다.
  계좌번호:————
  커서가 깜박거렸다. 입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자리’
  소피가 사진을 보며 숫자를 읽었고, 랭던이 차례로 입력했다.
  계좌번호 : 1332211185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자, 화면이 새롭게 바뀌었다.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메시지가 나타났다. 영어가 제일 먼저였다.
  주의 : 엔터 키를 누르기 전에, 계좌번호가 정확한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손님의 비밀 보장을 위해서 만일 컴퓨터가 계좌번호를 인식하지 못할 경우, 이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꺼집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소피가 말했다.
  “기능이 멈춘다. 오직 한 번만 시도할 수 있게 돼 있는 것 같군요.”
  은행의 일반 ATM 기계들은 고객의 카드를 먹어버리기 전에, 코드를 입력할 수 있는 기회를 사용자에게 세 번 준다. 하지만 이 안전금고의 시스템은 평범한 은행 기계와는 분명히 달랐다.
  랭던은 자기가 입력한 숫자와 프린트를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서 결정했다.그리고 엔터 키를 가리켰다.
  “숫자가 맞는 것 같소. 누릅시다.”
  소피는 검지손가락을 키보드로 내밀었으나 망설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해요. 베르네가 곧 돌아올 거요.”
  랭던이 재촉했다.
  소피는 손을 뒤로 잡아 뺐다.
  “아니에요. 이건 맞는 번호가 아니예요.”
  “맞는 번호요! 봐요. 열 자리잖소. 다른 게 또 뭐가 있겠소?”
  “너무 무작위로 보여요.”
  ‘너무 무작위로 보인다고?’
  랭던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은행은 고객에게,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암호를 무작위로 고르라고 충고한다. 분명 이 은행의 고객들도 계좌번호를 무작위로 고르라는 충고를 들었을 것이다.
  소피는 방금 입력한 숫자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랭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엔 확신이 있었다.
  랭던은 소피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소피는 이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로 재정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수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소피는 다시 키보드 앞에 서서 ,마치 뭔가를 기억해 내는 것처럼 다른 숫자를 입력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암호와 상징을 사랑하는 분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쉽게 기억할 수 있고, 또 할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번호를 골랐을 거라고 보는게 타당해요. 무작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것.”
  그녀는 숫자 입력을 마치고, 은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랭던은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계좌번호: 1 1 2 3 5 8 1 3 2 1
  숫자를 보고, 랭던은 즉시 소피가 옳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보나치 수열.’
  피보나치 수열이 열자리로 변형되자, 시각적으로는 수열을 인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기억하기는 쉽지만 무작위로 보인다.’
  이 훌륭한 열자리 숫자를 소니에르는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루브르 박물관 바닥에 휘갈겨쓴 숫자들이 왜 유명한 수열로 전환될 수 있는지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소피는 손을 뻗어 엔터 키를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들 밑에 있는 은행의 지하 저장실에서는 로봇 발톱이 움직이며 기지개를 폈다. 천장에 붙은 두 개의 축을 따라 미끄러지며, 발톱은 적절한 대상을 찾아 움직였다. 아래 시멘트 바닥에는 동일한 모양의 플라스틱 상자 수백 개가 거대한 격자 모양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마치 교회의 지하 납골당 안에 작은 관들이 열을 지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한 지점에서 발톱이 윙윙 소리를 내며 멈추고, 로봇 발톱이 아래로 내려와 상자 위에 있는 바코드를 전자장치로 확인했다. 정확하게 들어맞자, 발톱은 상자의 무거운 손잡이를 붙잡고 수직으로 상자를 들어올렸다. 발톱은 상자를 지하실의 한 쪽 면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 있었다.
  회수용 팔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상자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일단 팔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컨베이어 벨트가 윙윙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피와 랭던은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컨베이어 옆에 서서, 그들은 공항의 수하물 창구에서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상한 가방을 기다리는 여행객이 된 기분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그들의 오른쪽 벽에 난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금속 문이 젖혀지더니,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깊숙이 실려 나타났다. 상자는 주형을 떠서 만든 검은색으로 이음새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상자는 소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상자는 그들 앞에까지 와서 멈춰 섰다.
  랭던과 소피는 수수께끼 상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바코드, 금속 고리에 묵직해 보이는 손잡이까지 이 은행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치밀해 보였다. 소피는 상자가 연장 도구함처럼 보였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소피는 앞에 보이는 두 개의 걸쇠를 풀었다. 그러고서 랭던을 응시했다. 둘은 함께 무거운 상자 뚜껑을 들어서 뒤로 젖혔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 소피는 상자가 비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뭔가를 보았다. 상자 바닥에 물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신발상자 크기의 광택이 흐르는 나무상자는 화려한 경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재질은 단단해 보였고, 빛깔은 우아한 짙은 자주색이었다.
  ‘장미목이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거였다. 상자 뚜꺼에는 장미 디자인이 아름답게 상감되어 있었다. 소피와 랭던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소피는 몸을 기울여 상자를 들어올렸다.
  ‘세상에, 아주 무겁잖아!’
  소피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탁자로 옮겼다. 랭던은 그녀 곁에 서서, 그들이 회수한 작은 보물상자를 바라보았다.
  랭던은 찬탄하는 마음으로 수작업으로 새겨진 상자의 무늬를 응시했다. 다섯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였다. 그는 이런 형태의 장미를 수도 없이 보았다. 랭던은 속삭였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는 성배를 나타내는 상징이오.”
  소피는 랭던을 쳐다보았다. 랭던은 소피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자의 크기나 무게, 성배의 상징이 새겨진 뚜껑 등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오직 한 가지 결론만을 암시하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그리스도의 잔이 들어 있다.’
  랭던은 다시 한 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완벽한 크기예요. 잔이……. 들어가기에 말이예요.”
  소피가 속삭였다.
  ‘성배가 잔일 리 없어.’
  소피가 상자를 끌어당겨 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상자를 당길때, 안에서 뭔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랭던은 뒤늦게 깨달았다.
  ‘안에 액체가 들어있는 건가?’
  소피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방금 그 소리 들었어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액체요.”
  손을 내밀어, 소피는 천천히 걸쇠를 풀고 뚜껑을 올렸다.
  안에 든 물체는 랭던이 지금까지 봐온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잔이 아니었다.

45

  방으로 들어오면서 앙드레 베르네가 말했다.
  “경찰이 길을 막고 있어요. 당신을 빼내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면서, 베르네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플라스틱 가방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느님 맙소사! 소니에르의 계좌번호를 알아낸 모양이네?’
  소피와 랭던은 탁자 옆에 서서 커다란 보석상자 같은 것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소피는 즉시 뚜껑을 닫고 베르네를 쳐다보았다.
  “결국 계좌번호를 알아냈어요.”
  베르네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일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베르네는 사려 깊게 상자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다음 행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을 은행에서 내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경찰이 이미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느뵈 양, 만일 내가 당신들을 은행에서 안전하게 빼낸다면 그 물품을 가져갈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맡기고 갈 겁니까?”
  소피는 랭던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베르네를 바라보았다.
  “가져갈 거예요.”
  베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그 물건이 무엇이 됐든지 간에 당신 재킷으로 싸서 복도까지 이동하도록 합시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랭던이 재킷을 벗자, 베르네는 컨베이어 벨트로 서둘러 걸어가서 빈 플라스틱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몇 가지 단순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플라스틱 상자를 싣고 다시 지하 저장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르네는 계기판에서 황금 열쇠를 꺼내 소피에게 건냈다.
  “자, 이쪽으로 서두릅시다.”
  그들이 뒤쪽에 있는 화물 적하장에 이르렀을때, 베르네는 지하 주차장을 여과해서 들어오는 경찰차의 불빛들을 볼 수 있었다. 베르네는 얼굴을 찡그렸다. 경찰은 진입로를 막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이짓을 하려는 것인가?’
  베르네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베르네는 은행의 작은 장갑 트럭들 중 한 대를 가리켰다. 운송 업무는 취리히 은행이 제공하는 또 다른 서비스였다.
  베르네는 장갑 트럭의 육중한 뒷문을 들어올리며 두 사람에게 번쩍이는 강철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취했다.
  “화물칸에 타요. 곧 돌아오겠어요.”
  소피와 랭던이 화물칸으로 기어 올라갈 때, 베르네는 적하장을 가로질러 적하장 감독관의 사무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리고 트럭 열쇠와 운전사 제복, 모자를 찾아냈다. 양복과 타이를 벗어 던지고, 베르네는 운전사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유니폼 아래에는 어깨에 메는 권총 가죽 케이스를 둘렀다. 사무실을 나가면서, 베르네는 선반에서 운전사용 권총을 집어들고 탄환을 채웠다. 그리고 권총을 권총집에 넣고, 유니폼의 단추를 잠갔다. 베르네는 운전사용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트럭으로 돌아왔다. 텅빈 화물칸 안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베르네는 안쪽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화물칸 천장에 달린 전구의 불을 밝혔다.
  “불을 켜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앉는게 좋겠습니다. 완전히 밖으로 나갈때까지 어떤 소리도 내선 안 됩니다.”
  소피와 랭던은 금속 바닥에 앉았다. 랭던은 트위드 재킷으로 감싼 보물을 품에 안고 있었다. 베르네는 트럭의 무거운 문을 닫은 뒤 잠갔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장갑 트럭이 밖으로 나가는 진입로의 입구로 털털거리며 올라가자, 베르네는 모자 밑으로 땀이 차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많은 경찰차들의 불빛이 보였다. 트럭이 진입로로 올라서자, 내부의 문이 안쪽으로 열리면서 트럭이 지나가도록 했다. 베르네는 트럭을 앞으로 전진시키고 기다렸다. 다음 센서가 작동하기 전에 문이 다시 닫혔다. 두 번째 문이 열리면서 출차를 알리는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진입로 입구를 막고 있는 경찰차만 없다면.’
  베르네는 이마를 문지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도로를 몇 미터 앞에 두고, 삐쩍 마른 경관이 걸어나와 베르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경찰차 네 대가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베르네는 트럭을 세웠다. 운전사용 모자를 더 눌러쓰면서, 베르네는 자신이 거친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운전석에서 꼼짝 않고 앉은 채, 베르네는 트럭의 문을 열어 요원을 내려다보았다. 요원의 누리끼리한 얼굴은 완고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요원은 말했다. 거친 목소리로 베르네가 물었다.
  “나는 제롬 콜레요. 사법경찰 부관입니다.”
  콜레 부관은 트럭의 화물칸을 가리켰다.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베르네가 교양 없는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내가 어떻게 알겠소. 난 그저 운전사일 뿐이오.”
  콜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린 범죄자 둘을 찾고 있소.”
  베르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옳게 찾아왔군요. 내가 운전을 해주는 악당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 범죄자임이 틀림없을 거요.”
  요원은 로버트 랭던의 여권 사진을 들이밀었다.
  “오늘 밤 이 남자가 은행 안에 있었습니까?”
  베르네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르겠소. 난 적하장에서만 일하는 쥐새끼 같은 놈이오. 은행 직원들은 고객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요. 안으로 들어가서, 안내 직원에게 물어보쇼.”
  “당신네 은행이 수색 영장을 요구하고 있소.”
  베르네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행정 직원들이란! 날 발동 걸리게 하지 마쇼.”
  “화물칸을 여시오.”
  콜레는 화물칸으로 다가갔다.
  베르네는 요원을 바라보다가 억지로 역겨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화물칸을 열라고? 내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저 사람들이 날 믿을 것 같소? 이일을 하면서 얼마나 받는지, 댁이 내 월급봉투를 꼭 봐야 할 것 같수다.”
  요원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의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금 몰고 있는 트럭의 열쇠를 운전사인 당신이 안가지고 있다는 얘기요?”
  베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화물칸은 아니오. 이 트럭 엔진을 켜는 열쇠만 가지고 있소. 이런 트럭들은 적하장에서 감독들이 직접 봉인을 해요. 그런 뒤에 트럭에다 화물을 싣고, 그 동안 다른 누군가가 화물칸 열쇠를 어디론가 가져가서 떨어뜨려 놓지. 화물칸 열쇠가 고객에게 전달 됐다는 전화를 받으면, 그제야 이 트럭을 몰고 나갈 수 있는 오케이 신호를 받는 거요. 그 전에는 나갈래야 나갈 수도 없지. 내가 무엇을 운반하는지 나도 몰라요.”
  “이 트럭은 언제 봉인되었소?”
  “분명히 한 시간 전일꺼요. 날이 밝기 전 생 튀리일까지 몰고 가야 합니다. 화물칸 열쇠는 이미 거기에 가 있을 거요.”
  요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네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요원의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땀 한 방울이 베르네의 콧등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려고 했다.
  “그럼 가도 되겠소? 나도 스케쥴이 빡빡한 사람이외다.”
  소매로 코를 훔쳤다.
  “모든 운전사들이 롤렉스를 찹니까?”
  베르네의 손목을 지적하며 요원이 물었다.
  소매 밑으로 터무니없이 비싼 시계줄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베르네는 내려다 보았다.
  ‘빌어먹을’
  “이 똥시계 말이오? 생 제르맹 데 프레에서 대만인 행상에게 이십 유로를 주고 산 거요. 당신에게 사십 유로만 받고 팔겠소.”
  요원은 망설이다가 마침내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지만 됐습니다. 안전하게 운전하시오.”
  거리를 50미터는 족히 내려온 후에야 베르네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트럭의 화물칸.
  ‘이들을 어디로 데려간담?’

46

  사일래스는 자기 방의 매트 위에 엎드려 있었다. 채찍으로 등을 내리칠 때마다 상처에 맺힌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오늘밤 두 번째로 행하는 체벌로, 이제 사일래스는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허벅지에 매고 있는 말총을 하지만 채찍을 놓을 정당한 이유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교회를 망쳤다.’
  ‘더욱 나쁜 일은 내가 주교님을 망친 것이다.’
  오늘 밤은 아링가로사 주교에게 구원의 밤이 되어야만 했다. 다섯 달 전, 주교가 바티칸 천문대 회의에서 돌아왔을때, 그곳에서 알게 된 뭔가가 아링가로사를 완전히 딴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몇 주일 동안 풀죽어 지내던 아링가로사는 마침내 사일래스에게 그 내용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사일새스는 고함을 질렀었다.
  “사실이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야. 여섯 달 밖에 남지 않았어.”
  주교의 말은 사일래스를 공포에 떨게 했다. 사일래스는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암울하던 그 시절에도 신과 신의 길에 대한 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구름이 걷히고, 가능성의 빛이 비친 것은 한달이 지난 뒤였다.
  ‘신성한 개입’
  아링가로사는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주교는 처음으로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주교는 속삭였다.
  “사일래스, 신은 우리에게 길을 보호하기 위한 기회를 부여하신 것일세. 다른 모든 전투처럼 우리의 전투는 희생을 요구할 거야. 자네가 신의 병사가 되어 줄 수 있겠는가?”
  사일래스는 아링가로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교는 자기에게 새로운 삶을 준 사람이었다.
  “전 신의 양입니다. 주교님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저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링가로사가 스스로 찾아온 기회에 대해 설명했을 때, 사일래스는 그 기회가 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적같은 운명!’
  아링가로사는 계획을 제공한 인물과 사일래스가 접촉하게 했다. 그 인물은 자신을 스스로 스승이라고 했다. 비록 그 스승이란 인물과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고 전화로만 얘기했지만, 사일래스는 스승이 가진 신념의 심오함과 여러 방면에 미치는 힘 때문에 경외감을 느꼈다.스승은 어디에나 눈과 귀를 두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스승이 정보를 어떻게 구하는지 사일래스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링가로사는 스승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일래스에게도 자기와 똑같이 하라고 얘기했다.
  “스승이 요구하는 대로 하거라. 그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승리한다.’
  사일래스는 바닥을 응시하다가, 승리가 그들을 잘못 이끌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스승은 속은 것이다. 쐐기돌은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기만과 함께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사일래스는 아링가로사 주교에게 전화를 걸어서 경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밤 스승은 주교와 직접 통화할 수 있는 모든 선을 없애버렸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무시무시한 전율을 이겨내며, 사일래스는 네 발로 기어서 바닥에 널브러진 외투를 찾았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떨군 채 사일래스는 다이얼을 눌렀다.
  “스승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일래스는 자기가 어떻게 속았는지 진실하게 얘기했다.
  스승이 응답했다.
  “믿음을 너무 빨리 잃었구먼. 지금 막 새로운 뉴스를 받았네. 전혀 기대치 못한 반가운 소식일세. 그 비밀은 아직 살아있어. 자크 소니에르는 죽기 전에 정보를 전달한 모양이야. 내가 다시 전화하겠네. 오늘 밤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47

  장갑 트럭의 어둑어둑한 화물칸을 타고 가는 것ㅇ느 형무소의 독방 감옥으로 이송되는 것과 비슷했다. 랭던은 고립된 공간에서 그를 엄습하는 익숙한 불안과 싸워야만 했다.
  ‘베르네는 우리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는데. 그곳이 어디일까? 얼마나 멀리 가는 것일까?’
  금속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인지 랭던은 다리가 뻣뻣해졌다. 랭던은 자세를 바꾸다가, 하체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자 움찔했다. 랭던은 은행에서 가져온 기이한 보물을 아직도 팔에 안고 있었다.
  “이제 고속도로를 탄 것 같아요.”
  소피가 속삭였다.
  랭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은행 진입로에서 몇 번인가 멈춘 후에 트럭은 1,2분 정도 왼쪽으로 돌았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하며 꾸불꾸불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아래에서는 방탄 타이어가 매끄러운 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부드러운 소음을 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장미목 상자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랭던은 상자를 바닥에 놓았다. 재킷을 젖히고 상자를 꺼내 자기 앞으로 당겼다. 소피는 랭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랭던은 갑자기 자신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피는 아이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장미목 상자의 따스한 색깔과는 대조적으로, 상감된 장미 문양은 옅은 나무색이었다. 아마도 물푸레나무인 듯싶었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장미 문양이 또렷하게 빛났다.
  ‘장미.’
  비밀단체들처럼 모든 군대와 종교는 이 상징 위에 세워졌다.
  ‘장미 십자회원. 장미 십자가의 기사들.’
  “어서 열어봐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뚜껑에 손을 뻗으며 랭던은 정교한 목공 작업에 다시 한 번 찬탄의 시선을 보냈다. 걸쇠를 풀고 뚜껑을 들어올리자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의 물건에 대해 랭던은 몇 가지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랭던의 상상은 모든 면에서 빗나갔다. 진홍색의 비단으로 속을 두껍게 댄 상자 안에는 랭던이 이해할 수 없는 물체가 편안히 누워 있었던 것이다.
  물체의 크기는 대략 테니스 공들이 들어가 있는 캔 정도만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물체는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었다. 원통은 돌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넛 크기만한 대리석 디스크 다섯 개가 차곡차곡 쌓여서, 정교한 놋쇠얼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물건은 여러 디스크가 각각 회전하게 만들어진 일종의 만화경 같았다. 원통의 양쪽 끝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마개가 달려 있었는데,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액체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랭던은 원통 안이 비어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원통의 구조만큼이나 이상한 것은 원통 둘레에 새겨진 글자들이었다. 이 글자들이 랭던의 관심을 끌었다. 다섯 개 각각의 디스크에는 알파벳이 한 줄로 새겨져 있었다. 글자가 새겨진 원통은 랭던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남감을 떠올리게 했다. 철자가 박힌 회전판들을 엮은 막대로, 회전판을 돌리면 철자에 따라 여러 단어들이 만들어졌다.
  “놀랍지 않아요?”
  소피가 속삭였다.
  랭던은 눈을 치켜떴다.
  “난 잘 모르겠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소피의 눈에 반짝임이 일었다.
  “할아버지는 취미로 이것들을 만들었어요. 이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발명한 거예요.”
  침침한 불빛에서도 소피는 랭던이 놀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 빈치?”
  통을 다시 쳐다보며 랭던은 중얼거렸다.
  “그래요. 이건 ‘크립텍스’라는 거예요.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다 빈치의 비밀일기에 그 청사진이 나와 있대요.”
  “무엇에 쓰는 겁니까?”
  오늘 밤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소피는 자기의 대답이 흥미로운 암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보관함이에요. 비밀스러운 정보를 보관하기 위한 거죠.”
  랭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소피는 다 빈치의 발명품들을 만드는 게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신 취미였다고 설명했다. 목재와 금속을 가지고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던 자크 소니에르는 재능 있는 장인이었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을 즐겼는데, 칠보자기 공예로 유명한 파베르제와 덜 예술적이긴 하지만 더 실용적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다 빈치의 일기를 대충만 보아도, 이 선구자의 독창성과 천재성에 비해 완성도가 낮아서 여러모로 악명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크 소니에르가 좋아하던 일 중 하나는 다 빈치의 모호한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들이란 생명-시간 조각, 물펌프,크립텍스, 심지어 중세 프랑스 기사상의 정교한 조립 등이었다. 지금 이 기사상은 소니에르의 사무실에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1495년 다 빈치가, 초기 해부학과 근 운동학 연구의 결과물로 디자인한 로봇 기사의 내부 구조는 정확한 관절과 힘줄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사상은 앉을 수도 있고, 팔을 흔들 수도 있고, 유연한 몸을 통해 머리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해부학적으로는 정확하게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서 말이다. 갑옷을 입은 이 기사상은 할아버지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소피는 믿고 있었다…… 장미목 상자 안에 든 크립텍스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크립텍스를 만들어 주셨어요. 하지만 이렇게 정교하고 큰 것은 처음 보는데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의 눈은 상자를 떠나지 않았다.
  “난 크립텍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
  소피는 놀라지 않았다. 레오나로도의 미완의 발명품들 대부분은 연구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다. 크립텍스라는 용어는 이 물건의 특성에 어울리는 제목으로, 아마 할아버지가 고안해 냈을 것이다. 이 물건은 두루마리에 적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 암호표기라는 과학을 이용해 만든 장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소피는 다 빈치를 암호표기의 선구자로 알고 있었다. 소피의 대학교수들은 데이터 보안을 위해 컴퓨터 암호표기법을 제시하면서, 치머만과 슈나이어 같은 현대 암호학자들을 칭송했다. 하지만 수백년 전에 초보 형태의 암호표기법을 고안한 레오나르도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에 관해 소피에게 얘기해 준 사람은 물론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장갑 트럭이 고속도로를 내달릴 때, 소피는 랭던에게 크립텍스란 보안이 필요한 메시지를 멀리 보낼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풀기위한 다빈치의 해법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전화나 전자메일이 없던 시대에, 사적인 정보를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보내려는 사람은 그 내용을 적은 서신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일 운반자가 서신의 내용이 가치 있는 정보라고 의심해, 적에게 팔아 버릴 수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러 사람들이 데이터의 보호를 위한 해법으로 암호표기를 발명한 것을 볼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는 시저 상자라고 불리는 암호 표기 체계를 고안했고,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치환암호를 만들어 감옥에서 중요한 공문을 보냈다. 뛰어난 아랍 과학자였던 아부 유수프 이스마일 알 칸디는 다중 알파벳 치환 암호라는 기법을 통해 자기 비밀을 보호했다.
  하지만 다 빈치는 기계적인 해법을 위해 수학과 암호표기법을 멀리했다. 바로 크립텍스였다. 편지나 지도,도표, 어느 것이든 안전하게 보관해서 옮길수 있는 휴대용 용기였다. 일단 정보가 크립텍스 안에 봉인되면, 정확한 패스워드를 알고 있는 자만이 크립텍스를 열수 있었다.
  철자가 박힌 원통의 다이얼을 가리키며 소피가 말했다.
  “우린 패스워드가 필요해요. 크립텍스는 자전거의 조합자물쇠와 매우 비슷하게 작동하는 거예요. 제대로 글자를 맞추면 열쇠가 풀리잖아요? 이 크립텍스의 경우는 다섯 개의 철자 다이얼들이 있네요. 원통의 디스크를 회전시키면서 올바른 순서에 따라 철자를 맞추는 거예요. 그러면 내부 회전판이 맞춰지면서 원통이 열리는 거죠.”
  “그리고 안에는?”
  “일단 원통이 열리면 내부의 빈 공간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 안에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정보를 담은 종이 두루마리를 집어 넣는 거예요.”
  랭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어릴 때, 할아버지가 이걸 당신에게 만들어 주었다고 했소?”
  “그래요. 크기가 더 작긴 하지만, 생일 때 몇 번인가 할아버지는 내게 이걸 주었어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크립텍스를 여는 패스워드였죠. 일단 풀고 나면, 나는 그 안에서 생일 카드를 발견하곤 했어요.”
  “카드 한 장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겠군.”
  “아니예요. 카드에는 항상 다른 수수께끼나 단서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공들인 보물찾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기를 좋아했죠. 단서의 끈이 결국은 진짜 선물로 날 이끌고 가는 거예요. 각각의 보물찾기는 내 성격과 장점을 시험하는 거였어요. 시험을 잘 통과하면 상을 받는거죠. 그리고 그 시험들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고요.”
  랭던은 여전히 회의적인 눈빛으로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냥 억지로 열면 어떨까? 아니면 부숴 버리든지? 이 금속은 약해 보이고, 대리석도 연약한 암석이니까 말이오.”
  소피는 미소를 지었다.
  소피는 상자로 손을 뻗어 원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다 빈치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다 빈치는 억지로 크립텍스를 열려고 하면, 안에 든 정보가 저절로 파기되도록 만들었어요. 보세요. 우선 이 안에 들어갈 정보는 어떤 것이 됐든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어야만 해요.”
  “양피지가 아니고?”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파피루스. 양피지가 더 내구성이 강하고,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쓰였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 들어가는 종이는 파피루스여야만 해요. 종이가 얇을 수록 더 좋죠.”
  “좋아요.”
  소피는 크립텍스를 손가락 끝으로 튀겼다. 내부에서 액체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파피루스를 크립텍스 내부에 집어넣을 때는 파피루스로 액체가 든 유리병을 둘둘 말아서 함께 넣었어요.”
  “무슨 액체요?”
  소피가 웃었다.
  “식초.”
  랭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정말 총명하군.”
  ‘식초와 파피루스’
  소피는 생각했다. 만일 누군가가 억지로 크립텍스를 열려고 하면, 유리병은 깨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병 안에 든 식초가 즉시 파피루스를 녹여 버릴 터였다. 비밀 메시지를 꺼내려던 누군가는 아무 의미 없는 종이 덩어리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안에 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확하게 다섯 글자로 된 패스워드를 알아내는 거예요. 다이얼이 다섯 개고, 각 다이얼에 알파벳 스물 여섯글자. 이 스물여섯을 다섯 번 곱한 것이 바로 크립텍스의 힘인 거죠.”
  소피는 재빨리 암산을 해보았다.
  “대충 천이백만 개의 조합이 나오네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안에 어떤 정보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머릿속에 1천 2백만개의 질문이 지나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랭던이 물었다.
  “뭐가 됐든. 할아버지가 분명히 몹시 지키고 싶은 비밀이겠죠.”
  소피는 상자의 뚜껑을 닫고, 뚜껑에 새겨진 다섯 개의 장미 꽃잎을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뭔가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조금 전에 장미가 성배의 상징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요?”
  “맞소, 시온의 상징론에서 장미와 성배는 동의어요.”
  소피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거 이상하네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항상 내게 장미는 비밀을 의미한다고 말했거든요. 할아버지는 기밀전화를 할 때나,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에는 방문에 장미를 걸어 두셨어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게 했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에는 서로의 방문을 잠그는 것보다 장미를 문에 걸도록 하자꾸나. 이 방법은 서로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 줄 거다. 장미를 거는 것은 고대 로마의 관습이기도 하지.’
  랭던이 입을 열었다.
  “서브 로사(sub rosa) 우리말로는 ‘장미 아래’라는 뜻이오. 로마인들은 기밀을 요하는 회의가 있을 경우, 회의 장소에 장미를 매달았소.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장미 아래에서 말한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이해했답니다.”
  랭던은 재빨리 시온이 성배의 상징으로 장미를 사용한 유일한 이유는 장미에 비밀스러운 느낌이 있어서가 아니란 것을 설명했다. 로사 루고사는 가장 오래된 장미 종의 하나로 다섯 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샛별이라고 부르는 금성, 즉 비너스와 대칭을 이루는 별 모양이다. 비너스는 장미에게 여자다움을 뜻하는 강한 상징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장미는 길을 찾아주는 ‘진실한 방향’이라는 개념과도 강한 연대를 맺고 있다. 지도의 경선인 로즈 라인이 그렇듯, 로즈 나침반은 여행자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장미는 여러 면에서 성배를 의미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비밀, 여성다움, 길잡이, 묻힌 진실에 이르도록 안내하는 별과 여성의 잔.
  설명을 끝낸 랭던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로버트? 당신 . 괜찮아요?”
  랭던의 눈은 장미목 상자에 박혀 있었다.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며, 목이메었다.
  “장미…… 아래…… 그럴 리가 없어.”
  “뭐가요?”
  랭던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장미의 표식 아래에 있는 이 크립텍스…… 이게 뭔지 알 것 같소.”

48

  자신이 세운 가설이었지만 랭던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누가 이 석조 원통을 그들에게 건냈으며, 그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전했는지, 이제 상자에 새겨진 장미를 생각하니 오직 한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난 시온의 쐐기돌을 들고 있는 것이다.’
  전설은 구체적이었다.
  ‘쐐기돌은 장미의 표식 아래 누워 있는 암호가 새겨진 돌이다.’
  “로버트? 무슨 일이예요?”
  소피가 랭던을 바라보고 있었다.
  랭던은 생각을 모을 시간이 필요했다.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클레 드 부트 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소?”
  “금고를 여는 열쇠?”
  소피가 번역했다.
  “아니, 그것은 그저 직역한 말이오. 클레 드 부트는 건축에서 쓰이는 용어요. 부트라는 말은 은행의 금고를 뜻하는 게 아니고, 아치처럼 둥글게 흰 것을 나타내는 말이오. 돔처럼 둥글게 흰 천장 같은 거요.”
  “하지만 둥근 천장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사실 가지고 있소. 돌로 이루어진 모든 아치들은 가장 높은 곳 중앙에 쐐기 형태의 돌을 필요로 해요. 이 쐐기돌은 모든 조각들을 한데로 묶고, 모든 무게를 지탱하는 거요. 건축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이 돌은 둥근 천장의 열쇠나 다름이 없어요. 영어로 우리는 이것을 쐐기돌이라고 하오.”
  랭던은 소피의 눈에서 이해하는 빛을 읽었다.
  소피는 크립텍스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쐐기돌이 아니예요.”
  랭던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돌로 된 아치형 건물을 지을 때 쐐기돌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 쐐기돌에 관련된 석공기술은 초창기 석공 조직이 보유한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다. ‘왕립 아치라는 칭호. 건축, 쐐기돌’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둥근 천장을 가진 건물을 지을때 쐐기돌을 이용하는 법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은 석공들을 부유한 장인으로 만든 지혜의 일부였다. 그리고 석공들은 그 지식을 조심스럽게 비밀로 지켜왔던 것이다. 쐐기돌은 항상 비밀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미목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석조 원통은 명백히 다른 무엇이었다. 시온의 쐐기돌, 만일 두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이 정말 시온의 쐐기돌이라면, 이것은 랭던이 상상하던 것과는 판이했다.
  랭던은 시인했다.
  “시온의 쐐기돌은 내 전공이 아니오. 성배의 대한 내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상징에 관련된 거요. 그래서 나는 실제로 성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에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나 학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소.”
  소피의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성배를 찾아요?”
  랭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에 꺼낼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소피, 시온의 전설에 따르면, 쐐기돌은 암호화된 지도라고 하오…… 성배를 감춘 장소를 알려주는 지도.”
  소피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럼 당신은 이게 그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랭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자신조차 이 얘기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쐐기돌이라는 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결론이었다. 
  ‘장미의 표식 아래 숨겨진 암호화된 돌.’
  크립텍스가 시온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서 디자인되었다는 것은 이 물건이 진짜 시온의 쐐기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단서로 빛나고 있었다.
  ‘이전 그랜드 마스터의 청사진…… 이것이 다른 시온의 회원에 의해서 수백년이 지난 지금 생명을 얻어 태어났다.’
  그 관계는 놓치기 어려울 정도로 뚜렷했다.
  지난 10년 동안,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모든 교회 안에서 쐐기돌을 찾아 헤맸다. 성배를 쫓는 사람들은 이중 의미를 가진 시온의 역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클레 드 부트가 실제로 건축에서 쓰이는 쐐기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암호가 새겨진 쐐기돌이 어떤 교회의 둥근 천장에 끼워져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장미의 표식 아래에.’
  건축에서 장미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장미 창, 장미 문양의 돋을새김, 그리고 물론 오판(五辦) 장식도 흔했다. 다섯 개의 꽃잎 모양을 한 건축물 장식들이 쐐기돌 바로 위에 있는 천장 중앙에서 보이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문제의 쐐기돌이 숨겨진 장소는 지독히 간단했다. 성배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는 교회 안에서 무시되기 일쑤인 천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아래를 왔다 갔다 하는 맹목적인 인간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크립텍스가 쐐기돌일 리는 없어요. 이것은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아요. 나는 할아버지가 이것을 만들었다고 확신해요. 고대 성배 전설의 일부일 수는 없어요.”
  소피는 주장했다.
몸에서 흥분의 물결이 이는 것을 느끼며 랭던은 대꾸했다.
  “사실, 쐐기돌은 지난 이삼십 년 전 어느 때인가 시온이 만든 것이라는 말이 있소.”
  소피의 눈은 불신으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만일 이 크립텍스가 성배의 숨겨진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왜 할아버지가 이걸 나에게 주려고 했을까요? 나는 이것을 어떻게 여는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심지어 성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잖아요!”
  랭던은 그녀가 옳다는 것을 가슴이 시리도록 깨달았다. 그는 아직 성배의 본성에 대해 소피에게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좀더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쐐기돌에만 신경을 써야했다.
  ‘만일 이게 정말로 그것이라면……’
  방탄 타이어 소리를 배경으로, 랭던은 소피에게 쐐기돌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빨리 설명했다. 단언하건대, 지난 수백년 동안 시온의 가장 큰 비밀은 성배의 위치였다. 이 비밀은 결코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안을 이유로, 비밀 은 은밀한 의식에서 새로 선출된 각각의 집사에게 구두로 전해졌다. 하지만 지난 세기 어느 시점에서 구두 전송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새로운 전자장치들의 도청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성배가 숨겨진 신성한 장소에 대해서 다시는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비밀을 전했을까요?”
  소피가 물었다.
  “그래서 쐐기돌이 등장하게 된 거요. 조직의 고위층 멤버 네 사람 중 한명이 죽으면, 나머지 세 사람은 하위 계층에서 한 사람을 골라 집사로 승격시키는 거요. 그리고 성배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새로 선출된 집사에게 말하는 것보다, 신참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시험을 맡겼던 것 같소.”
  소피는 이 말에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랭던은 갑자기 소피의 할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보물찾기 게임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떠올렸다. 자질 검증. 말하자면 쐐기돌도 비슷한 개념이었다. 이런 시험은 비밀단체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프리메이슨 조직이다.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는 멤버들은 자신들이 비밀을 지킬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고, 자신들이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시험과 의식을 거쳐야만 했다. 프리메이슨 조직의 32번째 순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점점 혹독해지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쐐기돌은 자질 검증인 셈이군요. 만일 새로 선출된 시온의 집사가 이것을 열 수 있다면, 자기고 손에 들고 있는 정보만큼 스스로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는 거죠?”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소.”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예요. 암호표기법에서 우리는 이걸 ‘자기승인 언어’라고 불러요. 즉, 당신이 그것을 풀어낼 정도로 영리하다면, 거기에 씌어 있는 것을 알 자격이 당신에게 있다는 거죠.”
  랭던은 잠시 망설였다.
  “소피, 이것이 진짜 쐐기돌이라면, 당신 할아버지가 이것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할아버지가 시온 수도회 안에서 예외적으로 힘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오. 소니에르 씨는 가장 높은 네 사람 중 한 명 이었던 것이 틀림없소.”
  소피는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비밀단체의 영향력 있는 분이었어요. 확실해요. 그것이 시온 수도회라는 걸 지금 알게 된 것뿐이에요”
  랭던은 주춤했다.
  “할아버지가 비밀단체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 년 전에 내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얘기하지 않았고요. 할아버지는 조직의 고위층 회원일 뿐만 아니라…… 제일 우두머리였다고 나는 믿어요.”
  랭던은 소피가 방금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라고? 하지만…… 당신이 그걸 알 수는 없었을 텐데?”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피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랭던은 충격의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 그랜드 마스터?’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결국 예전의 그랜드 마스터들도 예술적 영혼을 가진 공인으로 드러났었다. 몇 년 전에 파리 국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기밀 서류에 그 증거가 있었다.
  시온을 연구하는 모든 역사가들과 성배 추종자들은 그 서류를 읽었다. 넘버 4lm249 아래의 목록에 나온 기록들은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검증되었고,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의심해 오던 것을 단정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시온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해 보티첼리, 아이작 뉴턴 경, 빅토르 위고 그리고 최근 사람으로는 저명한 파리 예술가 장 콕토가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가 아니란 법이 있는가?’
  오늘 밤 소니에르와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깨닫자 랭던의 의심은 커졌다.
  ‘시온의 그랜드 마스터가 나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왜? 예술에 얽힌 잡담이나 하려고?’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랭던의 본능이 옳다면, 결국 시온의 그랜드 마스터는 조직의 전설인 쐐기돌을 손녀에게 건네주고, 동시에 로버트 랭던을 찾으라고 요구한 셈이다.
  ‘말도 안돼!’
  랭던의 상상은 소니에르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상황과 맞지 않았다. 소니에르가 자신의 죽음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조직에 비밀을 보유한 사람이 세 사람이나 더 있다. 그래서 조직의 보안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왜 소니에르는 손녀에게 쐐기돌을 건네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던 것일까? 특히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 말이다. 그리고 이방인인 자신을 왜 결부시킨 것일까?
  ‘퍼즐 조각 하나가 어디에선가 빠졌어.’
  랭던은 생각했다.
  그 답은 분명히 기다려야 나올 것이다. 속도를 줄이는 엔진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타이어 밑에서 자갈들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베르네가 왜 벌써 차를 세우는 거지?’
  랭던은 의아했다. 베르네는 두 사람을 시 외곽으로 안전하게 데려가겠다고 말했었다. 트럭이 점차 속도를 늦추고 기어가더니, 매우 울퉁불퉁한 지역에 멈춰섰다. 소피는 랭던에게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크립텍스 상자를 서둘러 닫고 잠갔다. 랭던은 다시 재킷으로 상자를 감쌌다.
  트럭은 정지했지만, 엔진 소리는 계속해서 낮게 돌아가고 있었다. 화물칸 뒤의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을 때, 트럭이 길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에 정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랭던은 놀랐다. 베르네가 눈을 이상하게 빛내며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베르네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미안합니다. 난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군요.”

49

  권총을 들고 있는 앙드레 베르네는 서툴러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랭던은 그를 시험해 보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 안의 두 사람에게 권총을 겨누면서 베르네는 말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자를 내려놓으십시오.”
  소피는 상자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할아버지와 당신은 서로 친구라고 했잖아요.”
  “난 당신 할아버지의 자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상자를 바닥에 놓으십시오.”
  “할아버지가 내게 이걸 넘겼다고요!”
  소피가 소리쳤다.
  “어서 시키는 대로 해요.”
  총을 들어 올리며 베르네가 명령했다.
  소피는 상자를 발 밑에 내려놓았다.
  랭던은 총신이 자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랭던 씨, 상자를 내쪽으로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난 망설이지 않고 당신을 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랭던은 불신에 찬 눈으로 은행가를 응시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야무진 목소리로 베르네가 말을 잡아챘다.
  “왜라고 생각합니까? 내 고객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지금 당신의 고객은 우리라고요.”
  소피가 대답했다.
  베르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차갑게 변했다.
  “느뵈양, 오늘 밤에 당신이 어떻게 그 열쇠와 계좌번호를 갖게 되었는지 난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네 사람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들의 범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당신들이 은행을 떠날 수 있도록 결코 돕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말했잖아요. 할아버지의 죽음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요!”
  소피가 외쳤다.
  베르네가 랭던을 쳐다보았다.
  “라디오에서 자크 소니에르 씨뿐만 아니라 다른 세 사람의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당신들을 지목하고 있는데도 말입니까?”
  “뭐요!”
  랭던은 비틀거렸다.
  ‘살해당한 사람이 세 사람 더?’
  자신이 주요 용의자로 몰린 사실보다 이 우연의 숫자가 랭던을 더 강하게 흔들었다.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세명의 집사들?’
  랭던의 눈이 장미목 상자로 쏠렸다.
  ‘만일 집사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면, 소니에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쐐기돌을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했을 거야.’
  “내가 당신들을 인도하면 경찰이 밝혀내겠지요. 나는 이미 우리 은행을 너무 깊이 관여시켰습니다.”
  소피는 베르네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분명히 우릴 넘길 의도가 없어요. 우리를 데리고 다시 은행으로 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려와서 총을 겨누고 있어요.”
  “당신 할아버지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나를 고용했습니다. 그것은 재산을 안전하고 은밀하게 보관하기 위해서였어요. 그 상자에 든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물건이 경찰 조사에서 증거품의 목록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랭던 씨, 상자를 내게 가져와요.”
  소피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아요.”
  총이 폭발하고, 탄환이 랭던의 머리 위에 있는 벽을 찧었다. 그 전동으로 화물칸이 흔들리고, 탄피가 바닥으로 쨍그랑 떨어졌다.
  ‘젠장!’
  랭던은 얼어붙었다.
  베르네는 더욱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랭던씨, 상자를 드시오.”
  랭던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이제 그걸 내게 가져오십시오.”
  베르네는 트럭 범퍼 뒤에 서서 정확하게 랭던을 조준했다.
  랭던은 손에 상자를 들고 ,화물칸의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해! 시온의 쐐기돌을 건네는 중이란 말이다!’
  문으로 다가가면서, 랭던은 자신이 베르네보다 훨씬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점을 어떻게 이용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베르네의 총은 들어올려지긴 했지만 랭던의 무릎 높이밖에 오지 않았다.
  ‘발차기를 하면 어떨까?’
  랭던이 가까이 가자, 베르네는 위험한 낌새를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랭던과의 거리는 2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너무 멀었다.
  베르네가 명령했다.
  “상자를 문 앞에 두시오.”
  기회를 잡지 못한 랭던은 무릎을 꿇고 장미목 상자를 화물칸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이제 일어서요.”
  일어서려던 순간 랭던은 멈칫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작은 총알 탄피가 트럭의 문턱, 정교하게 파인 홈 옆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어나요. 상자에서 떨어지시오.”
  랭던은 금속으로 된 문턱을 살피며 좀더 머뭇거리다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랭던은 탄피를 폭이 좁은 문턱의 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쳤다.
  “안쪽 벽으로 가서 돌아서시오.”
  랭던은 그대로 따랐다.
  베르네는 자기 심장이 무섭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른손에 총을 들고, 왼손을 상자에 뻗었다. 하지만 상자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두 손이 필요하군.’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베르네는 위험을 계산했다. 두 사람 모두 화물칸 맨 안쪽에서 베르네에게 얼굴을 돌리고 서 있었다. 베르네는 마음을 정했다. 재빨리 권총을 트럭 범퍼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상자를 들어올려 땅에 놓았다. 그리고 즉시 총을 다시 잡고 화물칸 안쪽을 겨눴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완벽하군.’
  이제 남은 일은 화물칸의 문을 닫고 잠그는 일뿐이었다. 상자를 땅에 내려놓은 베르네는 금속 문을 닫으려고 빗장에 손을 뻗었다. 문을 쿵 소리나게 닫고, 재빨리 빗장을 왼쪽으로 찔러 넣었다. 빗장은 몇 센티미터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러지?’
  다시 밀어 보았지만, 역시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다. 문짝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모양이군.’
  당혹감을 느끼며, 베르네는 문을 어깨로 밀었다. 하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뭔가에 걸렸어!’
  베르네가 어깨 전체로 문을 밀어보려고 몸을 던지는 순간 문이 바깥으로 벌컥 열리면서 베르네의 얼굴을 쳤다. 땅바닥에 고꾸라져 뒤로 구르면서 베르네는 코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총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코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로버트 랭던이 땅을 차고 있었다. 베르네는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시야가 흐려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베르네는 뒤로 다시 고꾸라졌다. 소피 느뵈가 소리치고 있었다. 잠시 후 베르네는 자기 머리 위로 먼지와 트럭의 배기가스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자갈을 뭉개는 타이어 소리를 들으며 일어선 베르네는 트럭의 굵은 바퀴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트럭의 앞 범퍼가 나무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엔진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나무는 휘어져 버렸다. 트럭의 앞 범퍼도 반이나 떨어져 나갔다. 장갑 트럭이 범퍼를 매달고 갈지자로 멀어져 갔다. 마침내 트럭이 포장도로로 올라서자, 매달린 범퍼가 도로 바닥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면서 밤을 밝혔다. 트럭은 속력을 내어 사라졌다.
  베르네는 트럭이 주차되어 있던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무상자는 가버린 것이다.

50

  간돌포 성을 출발한 피아트는 알반 언덕을 따라 계곡 아래로 이어진 꾸불꾸불한 길을 내려왔다. 뒷자석에 앉은 아링가로사는 무릎에 놓인 가방안의 채권 무게를 즐기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스승과 자신이 교환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궁금해했다.
  ‘이천만 유로’
  이 금액으로 보다 가치 있는 아링가로사의 힘을 사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로마를 향해 다시 속력을 높일 때, 아링가로사는 왜 스승에게서 아직도 연락이 없는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제복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내 들고, 아링가로사는 전화기의 수신 감도를 살펴보았다. 수신 감도는 극히 낮았다.
  리어 뷰 미러로 주교를 흘끗 쳐다보며 운전사가 말했다.
  “여기서는 통화가 잘 안 될 겁니다. 오 분 정도 지나면 산을 벗어날 테니, 그때쯤에는 통화가 가능할 겁니다.”
  “고맙소.”
  아링가로사는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산에서는 통화가 안 된다?’
  어쩌면 스승은 자기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이 아주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링가로사는 재빨리 전화기의 음성사서함을 조회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스승은 절대로 기록을 남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은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스승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스승이 수집한 놀라운 비밀 정보들 모두 전자 도청장치의 역할이 컸다.
  ‘이런 이유로 스승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지.’
  신중을 위한 스승의 규정은 아링가로사에게 어떤 연락처를 주는 것도 삼갔다.
  “내 쪽에서 접촉을 시도할 것이오.”
  스승은 아링가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전화기를 항상 가까이 두고 있으시오.”
  이제 아링가로사는 자기 전화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만일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응답이 없었다면, 스승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스승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내가 채권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주교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면 더 나쁜 상황…… 내가 돈을 가지고 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51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데도, 장갑 트럭에 흔들흔들 매달린 앞 범퍼가 한적한 시골 도로를 시끄럽게 긁어대며 트럭 후드까지 불꽃을 튀겼다.
  ‘길에서 벗어나야만 해.’
  랭던은 생각했다.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랭던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달릴 뿐이었다. 더욱이 트럭의 한쪽 헤드라이트는 도로 중앙을 비추지도 못하고, 길 옆의 숲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분명히 장갑 트럭의 장갑이란 말은 뒤쪽 화물칸을 의미하는 것이지 트럭 앞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피는 보조석에 앉아, 무릎 위에 있는 장미목 상자를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소?”
  랭던이 물었다.
  소피는 안정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사람 말을 믿어요?”
  “살해된 사람이 세 명 더 있다는 얘기 말이오? 물론이오. 그 사건은 많은 의문에 답을 해주고 있으니까. 파슈가 나를 잡으려고 열심인 것만큼이나, 당신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쐐기돌을 건네려고 했느냐 하는 문제 말이오.”
  “그게 아니라, 베르네가 자기네 은행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말 말이에요.”
  랭던은 소피를 슬쩍 보았다.
  “그게 아니면?”
  “베르네가 자기를 위해서 쐐기돌을 가지려는 것이었다면.”
  랭던은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베르네가 어떻게 상자 안에 든 물건을 알았겠소?”
  “그 사람의 은행에서 상자를 보관했잖아요. 그리고 그는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어요. 어쩌면 다른 것도 더 알고 있을지 모르죠. 자기를 위해 성배를 갖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잖아요.”
  랭던은 머리를 저었다. 베르네는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 경험으로는, 세상 사람들은 오직 두 가지 이유로 성배를 쫓고 있소. 한쪽은 너무 순진해서,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잔을 자기들이 찾아 헤맨다고 믿는거요……”
  “다른 쪽은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알고 있고, 그 진실 때문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오. 역사적으로 많은 단체들이 성배를 파괴할 목적으로 성배를 쫓았던 것을 볼 수 있소.”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바닥을 긁는 범퍼 소리를 더 강조했다. 몇 킬로미터는 족히 달려왔을 것이다. 랭던은 트럭 앞쪽에서 피어나는 불꽃들을 보며, 이대로 계속 가다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분명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랭던은 마음을 정했다.
  “범퍼를 구부릴 수 있는지 좀 살펴봐야겠소.”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마침내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트럭 앞으로 걸어가는 랭던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오늘 밤 자신을 겨눈 또 하나의 총구를 대면한 일은 가쁜 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사냥감이 되었다는 중압감과 함께 랭던은 책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와 소피는 오랜 세월 수수께끼였던 성배의 행방을 알려주는 암호화된 물건을 실제로 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지고 있는 부담이 그리 크지 않다 해도, 랭던은 쐐기돌을 시온에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이제 증발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해된 세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은 절박한 암시나 다름없었다.
  ‘시온에 구멍이 뚫렸다. 누군가 조직을 배신한 것이다.’
  시온은 감시당하고 있으며, 그 안에 두더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 소니에르가 소피와 랭던에게 쐐기돌을 넘기려 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다. 조직 밖의 사람들, 소니에르가 알기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았던 것이다.
  ‘쐐기돌을 시온에 돌려주는 일은 쉽지 않겠군.’
  랭던이 시온 멤버를 찾아낼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쐐기돌을 받으려고 나온 사람이 바로 적군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쐐기돌은 소피와 랭던의 손에 당분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트럭 앞부분은 랭던의 상상보다 심했다. 왼쪽 헤드라이트는 완전히 맛이 갔고, 오른쪽 전구는 소켓에서 빠져나와 흔들거리며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집어넣어 보았지만 다시 떨어져 버렸다. 범퍼가 끊어질 정도로 파손돼 있었다. 한 번 세차게 걷어차면 완전히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범퍼를 발로 차면서, 랭던은 조금 전에 소피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내게 전화 메시지를 남겼어요. 내 가족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줄 필요가 있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시온 수도회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새로운 가능성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범퍼가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랭던은 숨을 골랐다. 적어도 이제 트럭은 7월 4일(미국 독립기념일)의 폭죽처럼 불꽃을 튀기지 않을 터였다. 어디로 가야 할 지를 걱정하며, 랭던은 범퍼를 숲에다 던져 버렸다. 크립텍스를 어떻게 여는지, 소니에르가 왜 그들에게 크립텍스를 주었는지, 랭던과 소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그들의 생존은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듯했다.
  ‘도움이 필요해. 전문적인 도움이.’
  랭던은 결정했다.
  성배와 시온 수도회의 세계에서 그것은 오직 한 사람을 의미했다. 물론 이 발상은 소피에게 달려 있었다.
  장갑 트럭 안에서 랭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소피는 무릎 위에 놓인 장미목 상자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났다.
  ‘할아버지는 왜 이걸 나에게 주었을까?’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하는지 그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소피, 생각하는 거야! 머리를 쓰라고, 할아버지는 너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거야!’
  상자를 열어 크립텍스의 다이얼을 보았다.
  ‘자질 검증’
  소피는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쐐기돌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이 따라갈 수 있는 지도란다.’
  할아버지가 자기 마음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자에서 크립텍스를 꺼내들고, 소피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만지작거렸다.
  ‘다섯 글자’
  그녀는 다이얼을 하나씩 차례로 돌렸다. 다이얼은 부드럽게 돌아갔다. 소피는 자기가 고른 철자들을 원통의 양쪽 끝에 있는 놋쇠 화살표 모양에 맞춰서 정렬시켰다. 소피는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다이얼들은 다섯 철자로 된 단어를 만들어냈다.
  성배(G-R-A-I-L)
  소피는 원통의 양쪽 끝을 잡고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힘을 가했다. 크립텍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피는 안에서 식초가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잡아당기던 짓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도했다.
  빈치(V-I-N-C-I)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부트(V-O-U-T-E)
  마찬가지였다. 크립텍스는 굳건히 닫혀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소피는 크립텍스를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밖에 있는 랭던을 바라보며, 그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고마웠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할아버지가 그를 포함시킨 이유는 이제 분명했다. 소피는 할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안내자로 로버트 랭던을 부른것이다. 그녀의 교육을 감독할 가정교사처럼 말이다. 랭던에겐 안된 일이지만, 지금 그는 교사 이상의 존재이다. 브쥐 파슈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배를 차지하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도 그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성배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자기 목숨만큼이나 값어치가 있을지 소피는 의아했다.
  트럭이 훨씬 시원스럽게 달리자 랭던은 기분이 좋아졌다.
  “베르사유로 가는 길을 알고 있소?”
  소피는 랭던을 쳐다보았다.
  “관광하러요?”
  “아니오. 계획이 있소. 베르사유 근처에 유명한 역사가 한 명이 살고 있소. 거기가 어딘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가보면  찾을 수 있을 거요. 그 사람 집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으니까. 그 사람 이름은 레이 티빙이오. 영국 왕립 사학자협회의 전 회원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파리에 살고 있나요?”
  “티빙의 삶에 있어 열정의 대상은 성배였소. 약 십오 년 전 시온의 쐐기돌에 관한 얘기가 표면으로 나왔을 때, 쐐기돌을 찾을 희망으로 교회를 뒤지려고 프랑스로 이사했지요. 성배와 쐐기돌에 관한 책도 몇 권 펴냈소. 아마 그 사람이라면 크립텍스를 어떻게 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와줄 것이오.”
  소피의 눈동자는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어요?”
  “무엇에 대해서 그를 신뢰한단 말이오? 그가 우리의 정보를 훔치지 않을거다?”
  “그리고 우리를 경찰에 넘기지 않는다.”
  “우리가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그가 우리를 돌봐주길 바라고 있소.”
  “로버트, 프랑스에 있는 모든 텔레비전이 우리 얼굴을 내보냈으리라는 것을 모르겠어요? 브쥐 파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항상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이에요. 파슈가 눈치 채지 않게 우리가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훌륭하군. 프랑스 텔레비전의 첫 출연이 파리의 지명수배자라니.’
  적어도 조나스 파우크만은 기뻐할 것이다. 랭던이 뉴스거리를 만들어 낼 때마다 그의  책 판매는 껑충 뛰어오를 테니까.
  “그 사람. 정말 괜찮은 친구예요?”
  티빙이 이런 시간에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인지 랭던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소피의 질문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랭던의 본능은 티빙이 전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피난처가 될 것이다. 티빙이 이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가능한 한 두 사람을 도와줄 것 같았다. 랭던에게 신세를 갚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티빙 스스로 성배 연구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피의 할아버지가 시온 수도회의 진짜 그랜드 마스터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돕는다는 생각에 침을 흘릴지도 몰랐다.
  “티빙은 강력한 조력자가 될 거요.”
  랭던이 말했다.
  ‘당신이 그에게 얼마만큼 얘기하느냐에 달려 있긴 하지만.’
  “파슈는 아마 우릴 신고하면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한다고 할 거예요.”
  랭던은 소리내어 웃었다.
  “날 믿어요. 돈이라면 이 사람의 관심사 밖에 있는 거니까.”
  레이 티빙은 소규모 국가와 맞먹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영국 최초의 랭커스터 공작의 후손인 티빙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즉 대단한 상속을 받은 것이다. 파리 외곽에 있는 그의 집은 두 개의 호수를 가지고 있는 17세기의 성이었다.
  랭던은 몇 년 전 영국 방송사인 BBC의 주선으로 티빙을 만났다. 티빙은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성배에 관한 놀라운 역사를 제공한다는 역사 다큐멘터리 기획서를 가지고 BBC를 찾아갔었다. BBC 제작자들은 티빙의 뜨거운 전제와 그의 연구, 경력을 모두 좋아했지만, 티빙의 개념들이 일반인들이 삼키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지 않을까 우려했다. 자칫하면 일류 방송사의 명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티빙의 제안에 따라, BBC는 프로그램의 신뢰성 문제를 높이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존경받는 역사학자들을 카메오로 초빙하기로 했다. 초빙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연구와 함께 성배의 놀라운 본성을 풀기 위해 서로 협력했다. 랭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BBC는 촬영을 위해 랭던을 티빙의 파리 저택으로 보냈다. 랭던은 티빙의 멋스러운 화실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성배 이야기를 티빙과 공유했다. 또 다른 성배 이야기를 듣는 데 대한 자신의 불신을 시인하고, 그 뒤에는 성배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게 된 수십 년 동안의 연구들을 설명했다. 결국 랭던은 자기 연구의 일부를 제안하기도 했다. 논쟁의 소지가 있는 주장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일련의 기호학적인 연관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영국에서 방송되었을 때, 프로그램의 조화로운 출연진과 문서화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의 전제는 보편적인 기독교 사고방식과 심하게 부딪혀 즉시 격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는 방송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반향은 대서양을 건너 메아리쳤다. 방송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랭던은 오랜 친구로부터 엽서를 한 장 받았다. 필라델피아의 가톨릭 주교였다. 엽서에는 간단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로버트, 자네는?’
  “로버트,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확신해요?”
  “물론이오. 우리는 동료이고, 그는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당국을 경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유적지를 샀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가 터무니없는 세금을 매겼다고 했어요. 티빙이 파슈에게 협력할 것 같지는 않소.”
  소피는 어두운 길을 응시했다.
  “그 사람에게 어디까지 얘기할 거예요?”
  랭던은 태평스러워 보였다.
  “날 믿어요. 레이 티빙은 시온 수도회와 성배에 대해서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오.”
  소피는 랭던을 흘끔 보았다.
  “내 할아버지보다도?”
  “내 말은 조직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거요.”
  “티빙이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고 어떻게 알 수 있죠?”
  “티빙은 성배의 진실을 알리는 데 전 생애를 보내고 있소. 시온의 맹세는 성배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것이지.”
  “내게는 이해의 투쟁으로 들리는군요.”
  랭던은 소피의 걱정을 이해했다. 소피가 크립텍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비록 알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소니에르는 크립텍스를 그녀에게 준 것이다. 전혀 낯선 사람을 관련시키는 일에 소피가 주저하는 것은 당연했다. 잠자고 있는 정보를 생각하면, 본능이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
  “쐐기돌에 대해서 즉시 말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면 아예 말하지 않아도 되고. 그의 저택은 우리가 숨어서 생각할 장소를 제공해 줄 거요. 우리가 티빙에게 성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을 때쯤에는 할아버지가 왜 당신에게 이걸 주었는지 당신이 이유를 찾게 될지도 모르오.”
  “우리에게 준 거예요.”
  소피가 랭던의 말을 고쳤다.
  랭던은 미약한 자존심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니에르가 왜 자신을 포함시켰는지 궁금했다.
  “티빙 씨가 어디에 사는지 더 아는 거 없어요?”
  “그의 저택은 빌레트 성이라고 불리오.”
  소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빌레트 성?”
  “그래요.”
  “좋은 친구를 두었군요.”
  “그곳을 알고 있소?”
  “지나간 적이 있어요. 그곳은 성 구역 안에 있어요. 여기서 이십 분 정도 걸려요.”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멀리?”
  “그래요. 성배가 정말 무엇인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은 되겠네요.”
  랭던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티빙의 집에서 얘기해 주겠소. 그와 나는 전설의 다른 부분들에 각각 전문이오.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당신은 완벽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거요. 게다가 성배는 티빙의 삶이오. 레이 티빙으로부터 성배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 이론을 직접 듣는 것과 같아요.”
  “티빙 씨가 늦은 밤의 방문객들을 귀찮아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요.”
  “원칙대로라면, 그는 레이 티빙 경이오”
  랭던도 딱 한 번 실수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 꽤나 걸물이오. 몇 년 전에 요크 성에 관한 방대한 역사를 저술한 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어요.
  소피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그렇죠? 우리가 지금 기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요?”
  랭던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성배 원정길에 있는거요. 소피. 기사보다 우리를 더 잘 도울 사람이 누가 있겠소?”

52

  7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빌레트 성의 영지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5분 정도 떨어진 베르사유 근교에 있다. 1668년 오플레 백작을 위해서 프랑수아 망사르가 디자인한 빌레트 성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지 성들 가운데 하나다. 르노트르가 디자인한 두 개의 직사각형 호수와 정원들이 있는 빌레트 성은 대저택이라기 보다는 수수한 성의 분위기를 풍겼다. 이 영지는 ‘작은 베르사유’라고도 알려져 있다.
  랭던은 장갑 트럭을 영지의 문 앞에 덜컹거리며 세웠다. 문 뒤로는 긴 진입로가 이어져 있었다. 보안문 너머로 멀리 목초지 위에 서 있는 레이 티빙의 저택이 보였다. 문에는 ‘사유지, 진입금지’ 라는 영어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자기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티빙은 안내판만 영어로 적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저택 출입문에 붙은 인터콤 시스템도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영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에서 자동차의 오른쪽은 운전석이 아니라 보조석이다.
  소피는 잘못 달린 인터콤을 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보조석에 사람을 태우지 않고 오면 어떻게 해요?”
  “묻지 말아요. 그는 자기 나라 식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랭던은 이미 티빙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소피가 창문을 내렸다.
  “로버트, 당신이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랭던은 몸을 일으켜, 인터콤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소피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유혹하는 듯한 소피의 향수가 랭던의 코끝에 스쳤다. 랭던은 그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깨달았다. 작은 스피커에서 신호가 울리는 동안 그는 불편한 자세로 기다렸다.
  마침내 인터콤이 지직 거리더니, 성난 듯한 어조의 프랑스 말이 튀어나왔다.
  “빌레트 성입니다. 누구십니까?”
  “로버트 랭던이라고 합니다. 레이 티빙 경의 친구입니다. 그분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랭던은 소피의 무릎을 피해 몸을 지탱하며 소리를 질렀다.
  “주인님은 주무십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사적인 문제입니다만, 그분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아침에 다시 찾아오면 주인님께서 반가워하실 것 같군요.”
  랭던은 체중을 옮겼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레이 경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손님이 친구라면 그분 건강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레이 티빙은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지금은 더 악화되어 다리 교정기를 차고, 목발에 의지해 걸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랭던이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 레이는 활기차고 생생한 모습이어서 쇠약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제발 부탁입니다만, 경에게 성배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고 전해 주십쇼.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는 정보입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시끄럽게 흔들거리는 트럭 안에서 랭던과 소피는 기다렸다.
  1분 정도 지났을 때, 인터콤 저편에서 메마르고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사람아, 자네 하버드 표준시간으로 움직이고 있구먼.”
  심한 영국 억양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고 랭던은 활짝 웃었다.
  “레이 경, 이런 불쾌한 시간에 깨워서 정말 미안합니다.”
  “집사가 그러는데, 자네가 파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성배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한다고?”
  “그래야 당신을 침대에서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건 그러네.”
  “오랜 친구를 위해서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진실을 좇는 자들은 친구 이상이지. 그들은 형제야.”
  티빙이 익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랭던은 소피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물론 나는 문을 열어줄 거네. 하지만 먼저 자네의 마음이 진실한가를 확인해야 겠어. 자네의 명예에 대한 시험일세.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게나.”
  랭던은 신음하면서 소피에게 속삭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아까 말했듯이. 이분 은 괴짜요.”
  “첫째 질문일세. 커피를 마실 텐가. 차를 마실텐가?”
  티빙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랭던은 무조건 커피만 마시는 미국인들에 대한 티빙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차, 얼 그레이.”
  “좋아, 두 번째 질문. 우유를 넣을까, 설탕을 넣을까?”
  랭던은 망설였다. 그러자 소피가 랭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유. 영국인들은 우유를 넣는다고 생각해요.”
  “우유.”
  침묵.
  “설탕?”
  티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랭던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쓰디쓴 음료를 마신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함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랭던은 소리쳤다.
  “레몬! 레몬을 넣은 얼 그레이 차!”
  “잘했네”
  티빙의 목소리는 매우 즐거운 것처럼 들렸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것을 물어봐야겠네.”
  티빙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엄숙한 어조로 얘기했다.
  “헨리에서 하버드 보트 팀이 옥스퍼드 팀을 마지막으로 앞지른 것이 어느 해였는가?”
  랭던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은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불상사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문이 열렸다.
  “자네의 마음은 진실하군. 친구여. 들어오게나.”

53

  전화선을 통해 은행장의 목소리를확인한 취리히 금고은행의 야간 매니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베르네 씨, 어딜 가신 겁니까? 경찰이 와 있습니다. 모두가 지점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은 문제가 생겼네. 당장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풀죽은 목소리로 은행장은 말했다.
  ‘작은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지.’
  매니저는 생각했다. 경찰이 은행 전체를 에워싸고, 은행이 요구한 수색영장을 경찰 반장이 직접 들고 나타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삼 번 장갑차이네. 그걸 찾아주게.”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매니저는 운송 수송표를 살폈다.
  “그 트럭은 여기 있는데요. 아래층 적하장에 있습니다.”
  “아닐세. 경찰이  추적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도둑 맞았네.”
  “뭐라고요? 어떻게 그들이 몰고 나갈 수 있었죠?”
  “전화로 구체적인 얘기는 할 수가 없네. 하지만 은행으로서는 지금 극도로 불행한 상황을 맞고 있어.”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트럭의 비상 자동 무선 레이더를 작동시키게.”
  야간 매니저의 눈동자가 방을 가로질러 로잭 통제상자로 향했다. 많은 장갑차들처럼 은행의 트럭들에도 각각 무선으로 통제되는 발신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 발신장치는 은행에서 원격으로 작동시킬 수 있었다. 매니저는 예전에 딱 한 번 트럭 탈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비상 시스템을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시스템은 결함 없이 작동했다. 트럭의 위치를 파악해 내고, 자동으로 프랑스 경찰에 연락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지점장은 보다 더 신중함을 바라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지점장님, 제가 로잭 시스템을 작동시키면, 동시에 자동무선 레이더가 당국에도 연락이 닿는다는 점을 알고 계시겠죠.”
  베르네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래, 알고 있네. 어쨌든 내가 지시한 대로 하게. 삼 번 트럭이네.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릴테니, 트럭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대로 내게 알려주게.”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장갑 트럭은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30초 정도가 지난 후, 장갑 트럭 밑에 숨겨진 조그마한 자동 무선 레이더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54

  랭던과 소피는 포플러가 양쪽에 늘어서 있는 빌레트 성의 진입로로 트럭을 몰았다. 소피는 벌써 근육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구원이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외국인이 소유한 사유지보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란 어려울 거라고 소피는 생각했다.
  두 사람이 곡선으로 이어진 진입로를 돌아가자, 빌레트 성이 오른쪽 시야에 나타났다. 60미터 정도 높이의 3층짜리 잿빛 석조건물은 외부에 설치된 조명기구의 불빛을 받고 있었다. 건물의 정면은 풍경화 같은 정원과 유리 같은 연못과는 판이한 대비를 보이며 우악스럽게 서 있었다.
  건물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정문으로 가지 않고, 랭던은 상록수들 옆에 마련된 주차장소로 차를 끌고 갔다.
  “길에 두어서 일부러 눈에 띄게 할 필요는 없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부서진 장갑차를 타고 나타났는지 레이가 의아하게 생각할 거요.”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립텍스는 어떻게 할 거예요? 차에 두고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레이가 본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할 텐데.”
  “걱정하지 말아요.”
  재킷을 벗고 트럭 밖으로 나가면서 랭던이 말했다. 그는 상자를 트위드 재킷으로 감싸서 아기처럼 팔에 안았다.
  소피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요.”
  “티빙은 절대로 현관문에서 인사하지 않소. 안으로 들여서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가 우리와 만나기 전에, 이걸 숨길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그를 만나기 전에 미리 경고해 둘 일이 있소. 레이 경은 사람들이 종종 ……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오.”
  오늘 밤 벌어진 일들만큼이나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 소피는 의심스러웠다.
  현관으로 이르는 길에는 조약돌이 깔려 있고, 참나무와 벚나무를 깎아서 만든 문에는 포도 송이만한 놋쇠 딱딱이가 달려 있었다. 소피가 문을 두드리기 위해 딱딱이를 집으려고 하는데 문이 안으로 활짝 열렸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의 집사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하얀 타이와 턱시도를 매만지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에 차려입은 듯 했다. 쉰 살가량 되어 보이는 집사는 세련된 용모와 근엄한 표정으로 보아 두 사람의 방문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 경은 곧 내려오실 겁니다. 지금 옷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잠옷 차림으로 손님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죠. 외투를 받아 드릴까요?”
  집사는 심한 프랑스 억양을 쓰고 있었다. 집사는 랭던의 팔에 뭉쳐져 있는 트위드 재킷을 쏘아보았다.
  “고맙습니다만, 전 괜찮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이쪽으로.”
  집사는 호화로운 대리석 응접실을 지나 고상하게 꾸며진 화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화실은 술이 달린 빅토리아 양식의 램프로 방을 밝히고 있었다. 파이프 담배 연기와 찻잎, 조리한 버찌, 석조건축물의 흙 냄새 등이 어우러진 방은 고풍스럽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쪽 벽에는 번쩍거리는 두 벌의 쇠미늘 갑옷 사이로 황소라도 구울 수 있을 듯한 거대한 벽난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사는 벽난로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고, 성냥을 그어 미리 쌓아둔 참나무 장작 밑에 불을 붙였다. 불은 금방 피어올랐다.
  집사는 옷을 바로잡으며 일어섰다.
  “집처럼 편히 계시라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는 랭던과 소피를 남겨 두고 방을 떠났다.
  소피는 난로 주위에 있는 골동품들 중 어디에 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 식의 벨벳 침대의자가 있었고, 소박한 독수리 발톱 모양의 흔들의자도 있었다. 비잔틴 사원에서 가져온 듯한 긴 석조 의자도 두 개나 됐다.
  벨벳 침대의자로 걸어간 랭던은 외투로 감쌌던 상자를 꺼내 의자 밑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런 뒤 재킷을 털어 다시 입었다. 옷깃을 매만지고 소피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랭던은 상자를 숨겨 놓은 의자 위에 바로 앉았다.
  ‘침대의자라면 괜찮겠군.’
  랭던 옆에 앉으면서 소피는 생각했다.
  소피는 피어나는 불길을 바라보며 온기를 즐기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이 방을 마음에 들어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두운 목재로 이루어진 벽은 거장들의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중 한 점은 소피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푸생의 작품이었다. 푸생은 할아버지가 두 번째로 좋아한 화가였다. 벽난로 위의 선반에는 이시스의 하얀 석고 흉상이 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벽난로 안에는 괴수의 머리통 모양을 한 석고 가고일(고딕 건축에서 괴수의 머리 모양을 한 지붕의 홈통 주둥이.) 한 쌍이 장작 받침쇠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위협적인 목구멍을 드러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 가고일은 항상 그녀를 무섭게 했다. 폭풍우가 치던 날, 할아버지가 노트르담 대성당의 꼭대기로 데려가서 그녀의 공포를 치료해 줄때까지는 그랬다.
  “이 어리석은 창조물을 좀 보거라.”
  할아버지는 가고일의 주둥이가 물로 가득 차서 빗물을 게워내는 모습을 가리켰다.
  “이 가고일의 목구멍에서 나는 우스운 소리가 들리니?”
  괴수의 목구멍으로 꾸룩꾸룩 넘어가는 물 소리는 트림 소리 같았다. 소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은 지금 가글이를 하고 있단다. 그래서 이놈의 어리석은 이름도 가고일이란다.”
  그 뒤로 소피는 가고일이 무섭지 않았다.
  즐거운 추억이 소피에게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살인이라는 현실이 그녀를 다시 사로잡았다.
  ‘할아버지는 떠났다.’
  소피는 의자 밑에 있는 크립텍스를 떠올리고, 레이 티빙이 그것을 열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우리가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소피에게 남긴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로버트 랭던을 찾으라는 지시였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없었다.
  ‘우리는 숨을 곳이 필요했어.’
  랭던의 판단을 믿기로 결심하면서 소피는 생각했다.
  그들 뒤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로버트! 아가씨와 여행하는 중이었군.”
  랭던이 일어섰다. 소피도 벌떡 일어섰다. 목소리는 2층에서 뱀처럼 휘어져 내려오는 계단 위 어둠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어떤 형체가 어렴풋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 경. 이쪽은 소피 느뵈 양입니다.”
  “영광이오.”
  티빙은 빛 속으로 들어왔다.
  “저희를 안으로 들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소피는 발에 교정기를 차고, 목발을 짚은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남자는 한번에 한 계단씩 내려오고 있었다.
  “아주 늦었지요, 아가씨. 하지만 이른 시간이기도 하오. 아가씨는 미국인이 아니죠?”
  티빙은 웃었다.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파리지엥입니다.”
  “아가씨의 영어는 탁월하군.”
  “고맙습니다. 로열 홀로웨이에서 공부했어요.”
  “음, 그랬구먼. 내가 길 하나 아래에 있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로버트가 이미 얘기했겠지요. 물론, 안전을 위해 하버드에도 지원했었지.”
  어둠을 절름거리며 내려온 티빙은 랭던에게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단을 다 내려온 집주인의 모습은 기사 작위를 받은 가수 엘턴 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레이 티빙은 포동포동한 붉은 얼굴에 부스스한 붉은 머리, 말할 때 마다 반짝거리는 쾌활한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주름진 바지와 페이즐리 조끼 밑에 넉넉한 실크 셔츠를 입었는데, 알루미늄 교정기가 다리에 연결되어 있음에도 꼿꼿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티빙의 풍채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고귀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산물 같았다.
  티빙은 랭던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로버트, 자넨 살이 더 빠진 것 같군.”
  랭던은 싱긋 웃었다.
  “경은 좀 느신 것 같군요.”
  불룩한 배를 두드리며 티빙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 방 맞았구먼. 요즘 나의 유일한 세속적인 즐거움은 요리라네.”
  소피를 향해 돌아선 티빙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 티빙의 숨결이 가볍게 느껴졌다. 티빙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숙녀님”
  소피는 뒤로 물러서야 하는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랭던을 응시했다.
  문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집사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화로 앞에 있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쪽은 레미 르갈뤼데크일세.”
  호리호리한 집사는 고개를 숙인뒤 다시 사라졌다.
  “레미는 리옹 사람이지. 하지만 소스는 제법 잘 만들어.”
  재수없는 질병이라도 되는 양 티빙은 속삭였다.
  랭던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영국에서 가져오신 줄 알았는데요?”
  “천만에. 아니야! 영국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은 프랑스 세금 징수원에게만 먹이고 싶네.”
  티빙은 소피를 슬쩍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느뵈 양. 내가 프랑스에 대해 싫어하는 것은 정치와 축구 열기, 단 두가지뿐이라오. 당신네 정부가 내 돈을 훔쳐가고 있고, 최근에는 당신네 축구 팀이 우리를 깔아뭉겠으니까.”
  소피는 편안한 미소를 던졌다.
  티빙은 그녀를 잠시 살펴보다가 랭던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군. 두 사람 모두 지쳐보여.”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꽤 흥미로운 밤을 보냈습니다. 레이 경.”
  “의심의 여지가 없군. 성배에 대해 말하면서,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내 집 문 앞에 나타났으니. 말해 보게, 정말로 성배에 관한 일인가, 아니면 한밤중에 나를 깨울 일이 오직 그 주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해본 얘긴가?”
  ‘둘 모두겠네요.’
  의자밑에 숨긴 크립텍스를 떠올리며 소피는 생각했다.
  “레이 경, 우린 당신에게 시온 수도회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랭던이 말했다.
  티빙의 덥수룩한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그들은 파수꾼들이지. 그럼 정말로 성배에 관한 얘기로구먼.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을 텐데? 새로운 것인가, 랭던?”
  “아마도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경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습니다.”
  티빙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교활한 미국인이로구먼. 주고받기 게임을 하자는 얘기군. 좋아, 내가 먼저 하도록 하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뭔가?”
  랭던은 한숨을 쉬었다.
  “느뵈 양에게 성배의 본성에 관해서 충분히 설명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티빙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이 숙녀분은 모르고 있나?”
  랭던은 머리를 끄덕였다.
  티빙의 얼굴에 피어오르던 미소가 점점 야비하게 변해갔다.
  “로버트, 자네 내게 처녀를 데려온 겐가?”
  소피를 흘끗 보며 랭던은 주춤했다.
  “소피, 처녀란 말은 성배 광신자들이 진짜 성배 이야기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묘사할 때 쓰는 용어요.”
  티빙은 소피를 열성적으로 돌아보았다.
  “얼마나 알고 있소, 아가씨?”
  소피는 재빨리 랭던이 설명해 준 것을 대충 얘기했다. 시온 수도회와 성전 기사단, 상그리엘에 얽힌 문서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잔이 아니고…… 더 강력한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성배.
  티빙은 랭던에게 괘씸하다는 표정을 날렸다.
  “그게 다야? 로버트, 난 자네가 신사인 줄 알았는데. 이 숙녀분에게서 절정을 빼앗아 버렸군그려.”
  “압니다. 저는 아마 레이 경과 제가……”
  랭던은 꼴사나운 은유를 지나치게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티빙은 이미 반짝이는 시선으로 소피를 가둬 놓고 있었다.
  “아가씨는 성배 처녀로구먼. 날 믿게나 . 첫 경험은 결코 잊지 못할 걸세.”

55

  랭던 옆. 침대의자에 앉아 소피는 차를 마시며 빵을 집어 먹었다. 몸이 카페인과 음식을 환영하는 기분이었다. 벽난로 앞을 서툴게 지나가던 레이 티빙의 다리 교정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티빙이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내게 묻는다오. 하지만 그 질문엔 결코 대답할 수가 없소.”
  티빙은 돌아서서 곧바로 소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적절한 질문은 이것이오. 성배란 무엇인가?”
  소피는 자기 옆에 있는 두 남자 사이에서 학문적인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빙은 말을 이어 갔다.
  “성배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이해해야만 하오. 신약 성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소?”
  소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모릅니다. 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숭배하는 사람의 손에 키워졌거든요.”
  티빙은 놀라면서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눈뜬 영혼이로군. 훌륭해! 그럼 아가씨는 레오나르도가 성배의 비밀을 지키던 파수꾼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겠구먼. 그리고 그가 작품 안에 단서를 숨겼다는 것도.”
  “예. 로버트가 그렇게 얘기해 주었어요.”
  “그리고 신약성서에 대한 다 빈치의 견해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티빙의 눈동자가 즐겁게 빛나더니, 건너편에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로버트. 수고 좀 해주겠나? 제일 아래 칸에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라는 책이 있네.”
  랭던은 커다란 예술서적을 찾아가지고 와서, 그들 사이에 있는 탁자 위에 놓았다. 티빙은 책을 소피에게 향하도록 돌리고, 무거워 보이는 표지를 젖혔다. 그리고 표지 뒤에 있는 여러 인용구를 가리켰다.
  “논쟁과 고찰에 대해서 다 빈치가 공책에 적어 놓았던 것들이오.”
  티빙은 특별히 한 구절을 짚었다.
  “이 인용구가 우리의 토론에 적절할 거라고 보네.”
  소피는 그 구절을 읽었다.
  어리석은 대중을 속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허위로 이루어진 기적과 망상이라는 거래를 만들어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여기 또 다름 구절이 있네”
  다른 인용구를 가리키며 티빙이 말했다.
  맹목적인 무지가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오! 가엾은 인간들이여. 눈을 떠라!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소피는 약간의 냉기를 느꼈다.
  “다 빈치가 성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건가요?”
  티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서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감정은 곧장 성배와 연관되어 있어요. 사실 다 빈치는 진짜 성배를 그렸지. 잠시 후에 보여줄 걸세. 먼저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티빙이 미소를 지었다.
  “성서에 대한 자네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위대한 성전 박사인 마틴 퍼시가 모은 것일세.”
  티빙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성서는 하늘에서 팩스로 도착한 것이 아니야.”
  “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신의 작품이 아니고. 성서는 구름에서 기적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기록이지. 그리고 그것은 수도 없는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 역사는 결코 신뢰할 만한 판본이 아니야.”
  “그렇군요.”
  “예수 그리스도는 놀랄 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역사적인 인물이지. 아마 이 세상이 지켜본 사람들 중에 가장 수수께끼 같고 영감을 불어넣는 지도자였을 거야. 예언의 메시아로서, 예수는 왕들을 쓰러뜨리고 수백만 사람들을 고무시켰지. 그리고 새로운 철학을 찾아냈어. 솔로몬 왕과 다윗 왕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으로서,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들의 왕이고 그 왕관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쳤지. 당연히 그의 삶은 전국을 누비며 그를 추종하던 수천 명의 인간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어요.”
  티빙은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벽난로 선반 위에 놓았다.
  “그 당시 여든 개 이상의 복음서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 하지만 오직 몇 개만이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도록 뽑혔다네.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등이 거기에 속하지.”
  “누가 어떤 복음서를 고른 거지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의 열정이 튀어나왔다.
  “아하! 그게 기독교의 기본적인 아이러니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이교도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짜맞춘 것이거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인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소피가 말했다.
  티빙은 웃었다.
  “글쎄, 콘스탄티누스는 평생 동안 이교도였지. 그러다가 자기가 죽은 침대에서 세례를 받았어. 너무 허약해서 저항할 힘도 없었을 때 말이야.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로마의 공식 종교는 태양숭배였네. 무적 태양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랬지. 콘스탄티누스는 우두머리 사제였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새로운 종교의 소용돌이가 로마를 휘어잡았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지 삼백 년이 지난 후에, 그 추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거야. 기독교와 이교도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투쟁이 격화되어 로마를 둘로 가르자는 위협적인 발언까지 나왔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했어. 325년에 그는 단일 종교하에 로마를 통합한다는 결정을 내렸지. 바로 기독교였다네.”
  소피는 놀랐다.
  “왜 이교도인 황제가 공식 종교로 기독교를 골랐을까요?”
  티빙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매우 뛰어난 비즈니스맨이었다오. 황제는 기독교가 상승세에 있다는 것을 보고, 그저 우세한 말로 갈아탄 것 뿐이야.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숭배라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보고, 그의 영민함에 아직도 감탄하고 있지. 이교도의 상징과 날짜, 여러 종교의식들을 자라나는 기독교 전통에 섞어 버린 거야.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잡종 종교를 만들어 낸 거지.”
  랭던이 말했다.
  “모습의 변형. 기독교적인 상징들에 남아 있는 이교도의 흔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태양을 나타내는 이집트 식의 얇은 원반은 가톨릭 성인들의 후광이 되었소. 이시스가 아들 호루스를 안고 돌보는 그림문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현대적인 이미지의 청사진이 되었고, 가톨릭 의식에서 필요한 모든 요소. 주교관, 성찬대,영송가,성체 배령, 신이 먹은 것을 흉내내는 행위. 이것들은 초기 신비로운 이교도 행사에서 따온 것이었소.”
  티빙이 신음소리를 냈다.
  “기호학자가 기독교의 상징에 대해서 말하게 하지는 말자고. 기독교에 있는 것은 다 원래 기독교의 것이 아니오.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의 신, 미트라는 ‘신의 아들’ 또는 ‘세상의 빛’이라고 불렀어요. 미트라는 12월 25일에 태어났고, 죽어서는 암석 무덤에 묻혔소. 그리고 사흘 후에 부활했지. 그런데 12월 25일은 오시리스(고대 이집트의 저승을 지배하고,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신)와 아도니스, 디오니소스의 생일이기도 하오. 새로 태어난 크리슈나(힌두교의 신 이름)는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선물받았지. 심지어 기독교의 주일이라는 것도 이교도에서 훔쳐온 것이라오.”
  “무슨 뜻이에요?”
  랭던이 입을 열었다.
  “원래 기독교는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을 기념했소.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날을 이교도의 태양숭배일과 일치시키기 위해 옮겨 버린거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이교도의 태양숭배일. 즉 선데이(sun-day)에 참석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요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고 있죠.”
  소피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 이 모든 것이 성배와 관련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내 말을 놓치지 말아요. 종교들을 섞으면서, 황제는 새로운 기독교 전통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라고 알려진 교파를 초월한 그 유명한 회의를 소지했던 거라오.”
  소피는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서는 오직 니케아 신경(信經)의 탄생지로만 알고 있었다.
  “이 의회에서 기독교의 많은 부분들이 토론되고 투표에 부쳐졌소. 부활절 날짜와 주교의 역할, 종교 성사의 행정적인 체계, 그리고 물론 예수의 ‘신성’까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예수의 신성이라니요?”
  티빙은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 그때까지 역사에서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저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었다오…… 위대하고 힘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일 뿐이었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신의 아들이 아니고요?”
  “그래요.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위상 수립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투표’에 부쳐진 거였다오.”
  “잠깐만요. 지금 예수의 신성이 투표의 결과라고 말하는 거예요?”
  “비밀 투표에 가까운 거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는 위상 수립은 로마 제국을 단일화하는 데도, 또 새로운 바티칸의 권력을 다지는 데도 중요한 일이었어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수를 인간 세계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존재하는 신으로, 그의 힘을 결코 도전받을 수 없는 존재로 변모시킨 거요. 이 일은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의 도전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조차 신성한 채널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소. 그 신성한 채널이란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였지.”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랭던은 맞다는 표시로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빙은 계속했다.
  “이것은 모두 권력에 관련된 일이었지.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능과 유지에 필수적인 거였소. 많은 학자들은 초기 교회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에게서 예수를 훔쳤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인간적인 메시지를 없앴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리고 교회가 신성이라는 뚫을 수 없는 장막을 펼쳐서 자기들의 힘을 넓히는 데 사용했다고 보고 지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나도 여러 책에서 기술한 적이 있소.”
  “매일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서 항의 편지를 받으셨겠군요?”
  “그들이 왜 그러겠소? 교육받은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믿음의 역사를 알고 있어요. 예수는 정말로 위대하고 훌륭한 인간이었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은밀하게 행한 정치적은 수법도 예수의 삶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는 못했어요. 누구도 그리스도가 가짜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또 그가 세상으로 걸어와 더 나은 삶은 살 수 있도록 수백만 명을 고무시켰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의 잠재적인 영향력과 중요성을 이용했다는 것이오. 그렇게 함으로써 황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얼굴을 형성한 거요.”
  소피는 자기 앞에 놓인 예술서적을 바라보며, 다 빈치가 그렸다는 성배 그림을 빨리 보고 싶었다.
  티빙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왜곡은 이거라오. 예수가 죽은 지 사백 년이나 지나서 그의 위치를 승격시켰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삶을 연대기로 기록한 문서들이 이미 수천 개나 존재했다는 거요.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고 있었소. 이 같은 배경에서 기독교 역사의 가장 심오한 순간이 튀어나오게 되는 거요.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 제작을 의뢰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소.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했지요.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
  랭던이 덧붙였다.
  “흥미로운 기록 하나는 콘스탄티누스의 버전 외에 금지된 복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단자로 간주되었다는 겁니다. 이단(heretic)이란 단어는 이 시점의 역사에서 나온 말인 셈이죠. 하이레티쿠스(haereticus)라는 라틴어는 ‘선택’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오리지널 이야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세계 최초의 이단자가 되었던 거요.”
  티빙이 말을 받았다.
  “역사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뿌리를 뽑으려고 했던 복음서들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 후딘 사막에 있는 쿰란 근처 동굴에 숨겨진 사해의 두루마리가 1950년대에 발견되었고, 이 두루마리들은 진짜 성배 이야기뿐만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거짓 정보의 전통을 지키려는 바티칸은 이 두루마리를 공개하는 것을 강력히 막고 있소. 왜 바티칸은 그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현대 성서는 정치적인 의제를 내건 인간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꾸며진, 역사적인 허구와 편견임을 두루마리들이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라오.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신격화해서, 자기네들의 권력 바탕을 굳히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말이오.”
  랭던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문서를 감추려는 현대 교회의 욕구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네의 견해를 충실히 믿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해요. 바티칸은 성서와 상반된 이런 문서들이 허위 증언이라고 진실로 믿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소피의 앞에 있는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으며 티빙은 껄껄 웃었다.
  “보다시피, 우리 교수님은 로마 교회에 대해서 나보다는 더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현대 성직자들이 성서와 상반된 내용을 가진 문서들을 허위 증언으로 믿는다는 랭던 교수의 지적은 옳아요. 이해할 만한 일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성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네들의 진실이었으니까. 주입하는 사람보다 주입을 더 강하게 받는 사람은 없는 법이라오.”
  랭던이 말했다.
  “레이 경의 말은 우리 아버지들의 신을 우리가 숭배하고 있다는 얘기요.”
  티빙이 끼어들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거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거요. 성배에 대한 얘기도 마찬가지요.”
  소피는 앞에 놓은 다 빈치의 인용구를 다시 쳐다보았다.
  맹목적인 무지가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오! 가엾은 인간들이여, 눈을 떠라!
  티빙은 책을 펼쳐 양면에 가득히 들어찬 그림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성배를 그린 다 빈치의 그림을 보여주기 전에, 이걸 먼저 보았으면 싶소. 이 프레스코 벽화를 알 거라고 생각하오만?”
  ‘지금 농담하는 거겠지?’
  소피는 가장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를 응시했다. <최후의 만찬> 밀라노 근처 그라체의 산타마리아 벽에 있는 다 빈치의 전설적인 그림이었다. 부식하고 있는 이 프레스코 벽화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의 예수와 그의 열두 제자들을 그린 것이었다.
  “예, 이 벽화를 알아요.”
  “그럼 작은 게임을 하나 해볼까? 괜찮다면 눈을 감아요.”
  불확실한 마음으로 소피는 눈을 감았다.
  “예수는 어디에 앉아 있소?”
  티빙이 물었다.
  “중앙에요”
  “좋아요. 그와 그의 제자들이 자르고 먹는 음식은 무엇이오?”
  “빵.”
  분명히 빵이다.
  “훌륭해요. 그럼 마시는 것은?”
  “포도주.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어요.”
  “대단해요. 마지막 질문이오. 탁자 위에 얼마나 많은 포도주 잔이 있소?”
  이 질문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소피는 잠시 멈칫했다.
  ‘저녁 식사 후에 예수는 포도주 잔을 들어서, 그것을 제자들과 나누어 마신다.‘
  “한 개. 하나의 잔이요.”
  소피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잔. 성배.’
  “예수는 포도주 잔 하나를 돌렸어요. 현대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에서 그렇게 하듯이 말이죠.”
  티빙은 한숨을 쉬었다.
  “눈을 떠요.”
  소피는 눈을 떴다. 티빙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그림을 내려다본 소피는 놀랐다. 그리스도를 포함해서 탁자에 앉은 모두가 잔을  가지고 있었다. 열 세 개의 컵. 더구나 컵들은 작고 대도 없으며,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멋진 잔은 그림에 없었다. 성배는 없는 것이다.
  티빙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성서와 일반적인 성배 이야기에서 성배가 출현하는 이 순간을 경축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기이하게도 다빈치는 그리스도의 잔을 그리는 것을 잊은 것 같소이다.”
  “예술 사학자들도 분명 이 점을 눈치챘겠지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그냥 무시해 버리기 일쑤인 예외적인 것을 다 빈치가 이 안에 집어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가씨는 충격을 받을거요. 사실 이 프레스코 벽화는 성배의 비밀을 푸는 열쇠 그 자체요.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에 열쇠를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소.”
  소피는 그림을 열심히 조사했다.
  “이 그림이 성배가 진짜로 무엇인지 말해  준다는 건가요?”
  티빙은 속삭였다.
  “무엇이 아니고, 누구냐는 것이오. 성배는 물건이 아니오. 사실 그것은 …… ‘사람’이오”

56

  소피는 꽤 오랫동안 티빙을 응시하다가 랭던을 돌아보았다.
  “성배가 사람이라고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자입니다.”
  멍한 소피의 얼굴을 보며, 랭던은 소피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랭던은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이 보였던 반응을 회상했다. 성배 뒤에 숨은 상징을 이해하고 나서야, 여성과의 연관성이 명확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티빙도 분명히 같은 생각이 든 모양이다.
  “로버트, 이제 기호학자가 나서서 정리할 시점인 것 같은데?”
  티빙은 탁자 끝으로 가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랭던 앞에 놓았다.
  랭던은 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소피, 남성과 여성을 나타나는 현대 기호들을 잘 알고 있소?”
  랭던은 보편화된 상징인 (화살표 모양 밑에 동그라미) 와 (동그라미 밑에 십자형)을 그렸다.
  “물론이예요.”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기호들은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본래 기호들이 아니오. 많은 사람들은 남자의 기호가 창과 방패 모양에서 기인했고, 여자의 기호는 미를 반영하는 거울을 본떴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기호들은 화성인 마르스와 금성인 비너스를 나타내는 고대 천문학의 상징에서 유래된 것들이오. 본래의 상징들은 훨씬 단순해요.”
  랭던은 종이 위에 다른 기호를 그렸다.
  ^ (시옷형태의 꺾쇠모양)
  랭던이 소피에게 말했다.
  “이 기호가 남자를 나타내는 본래 기호요. 가장 기본적인 남근상이요.”
  “꽤나 직설적이군요.”
  소피가 말했다.
  “보이는 대로, 그렇구먼.”
  티빙이 끼어들었다.
  랭던은 계속했다.
  “이 기호는 공식적으로 ‘칼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공격과 남자다움을 대표하지요. 사실 이 남근 기호는 현대 미국 군인들의 군복에서도 볼 수 있소.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말이오.”
  티빙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구먼. 남근을 더 많이 가진 놈일수록 계급이 더 높지. 남자들은 항상 애들이라니까.”
  랭던은 주춤했다.
  “여자의 상징으로 넘어가면,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확히 반대 모양입니다.”
  랭던은 종이에 다른 기호를 그렸다.
  “이 기호는 ‘잔’이라고 불려요.”
  V (시옷 형태의 꺽쇠를 뒤집은 V모양)
  소피는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랭던은 소피가 연관을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랭던은 소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잔은 컵이라든가 담는 용기를 흉내낸 거요. 이 상징은 여성스러움과 여자다움. 다산의 의미와 상통하는 겁니다. 소피는 전설의 성배가 잔, 즉 컵이라고 했소. 하지만 성배를 잔으로 묘사한 것은 성배의 본질을 보호하기 위한 우화에 불과해요. 말하자면 더 중요한 뭔가를 가리기 위한 은유로써 전설에서 잔을 사용한 겁니다.”
  “여자”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웃었다.
  “맞아요. 잔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고대 상징이고, 성배는 신성한 여성, 신성한 여신을 나타내는 것이오. 바로 교회가 제거하고 삭제시킨 개념들입니다. 여성의 힘과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능력은 한때 매우 신성한 것이었소. 하지만 이런 개념은 남성적인 교회의 성장에 위협이 되었어요. 결국 신성한 여성은 악마화되고 불결하다고 여겨졌소. 이브가 사과를 먹고 인류를 타락시켰다는 ‘원죄’의 개념을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거요. 생명을 주는 신성한 존재였던 여자가 이제 적이 된 겁니다.”
  티빙이 끼어들었다.
  “내가 몇 마디 덧붙여야겠네. 생명을 출산하는 자로서의 여성의 개념은 고대 종교의 기본이었네. 출산은 신비롭고 강력한 일이었지. 슬프게도 기독교 철학은 엄연한 생물학적인 진실을 무시하고, 남자를 창조자로 만들어 여자의 창조적인 힘을 퇴색시키기로 결정해 버렸어요. 창세기를 보면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소. 여자는 남자의 곁가지가 된 거라오. 거기에다 죄 많은 몸이었지. 분명히 창세기는 여신 종말의 시작이었던 거요.”
  랭던이 말했다.
  “잔은 잃어버린 여신을 상징하는 겁니다. 기독교가 꾸준히 자랄 때, 오랜 역사를 가진 이교도의 종교는 쉽게 죽지 않았어요. 잃어버린 성배를 찾는 기사들의 원정 전설은 사실 잃어버린 신성한 여성을 찾기 위한 금지된 탐험 이야기였던 거요.  교회는 여자들을 정복하고, 여신을 추방하고, 비신도들을 불에 태워죽이고, 신성한 여성을 숭배하는 이교도를 금했지요. 이런 교회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던 방책으로, 기사들은 ‘성배를 찾는 중’이라는 암호를 사용했던 겁니다.”
  소피는 머리를 저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성배가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난 그게 진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했어요.”
  “그래요.”
  랭던이 말했다.
  티빙이 불쑥 말했다.
  “그리고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오. 아주 강력한 비밀을 가진 여자지. 만일 그게 공개되면, 기독교의 기초를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로 아주 위협적인 인물이야!”
  소피는 어안이 벙벙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자인가요?”
  “상당히”
  티빙은 알루미늄 목발들을 모아서 방 아래쪽을 가리켰다.
  “친구여, 서재로 자리를 옮기자고, 내게 다 빈치의 그림을 아가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광을 주게나.”
  방 두 칸 너머 부엌에서는 집사 레미 르갈뤼데크가 텔레비전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사진을 내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전에 차를 갖다준 두 사람이었다.

57

  콜레는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 바깥에 둘러쳐진 바리케이드에 서서, 파슈 반장이 수색 영장을 가지고 나타나는 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은행 사람들은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직원은 랭던과 느뵈가 조금 전에 찾아오긴 했지만, 은행계좌 정보를 몰라서 내보냈다고 말했다.
  ‘그럼 왜 우리가 은행 안을 둘러보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때 콜레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루브르 박물관에 설치된 지휘 본부에서 온 거였다. 콜레가 물었다.
  “수색 영장을 받았습니까?”
  한 요원이 말했다.
  “은행 쪽은 잊어버리십시오. 부관님. 방금 새로운 단서를 잡았습니다.”
  랭던과 느뵈가 숨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콜레는 자동차의 단단한 후드 위에 걸터앉았다.
  “농담하는 거지?”
  “파리 교외의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르사유 근처예요.”
  “파슈 반장님도 알고 있나?”
  “아직입니다. 다른 중요한 전화를 받고 계세요.”
  “당장 출동하도록 하지. 반장님께서 전화통화를 끝내시면 내게 연락해 달라고 전해주게.”
  콜레는 주소를 받아적고 자기 차로 뛰어들었다. 은행에서 멀어지면서, 콜레는 누가 DCPJ에 랭던의 위치를 알려주었는지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콜레는 자신의 의심과 초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긴 게 기뻤다. 그는 지금 자기 경력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를 체포하려는 참이었다.
  콜레는 자기를 따르는 다섯 대의 자동차에 무전을 쳤다.
  “사이렌은 절대 울리지 말게. 랭던이 우리가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란 말이야.”
  4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길을 달리던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가 어두운 그늘에 멈춰 섰다. 아우디 밖으로 나온 사일래스는 넓은 토지를 에워싸고 있는 긴 담장의 연철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멀리 성에 이르는 언덕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1층의 불이 모두 켜져 있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이상한 일이군.’
  사일래스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스승이 준 정보는 정확했다.
  ‘쐐기돌 없이는 이 저택을 떠나지 않으리라. 주교와 스승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사일래스는 맹세했다.
  열세 발이 들어 있는 헤클러 앤 코크 권총을 살펴본 사일래스는 권총을 창살 안으로 넣어 이끼가 가득한 땅에 떨어뜨렸다. 그런 뒤 담장의 꼭대기를 잡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허벅지에 매단 말총 허리띠의 고통을 무시하며 사일래스는 총을 집어들고, 풀이 무성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58

  티빙의 서재는 소피가 일찍이 봐왔던 서재와는 달랐다. 최고로 호화롭게 치장한 사무실들보다 예닐곱 배나 더 큰 서재는 기사의 노고를 모아놓은 창고였다. 과학 실험실과 도서관, 벼룩시장을 함께 섞어놓은 듯했다. 머리 위에서는 샹들리에 세 개가 빛을 발하고, 타일 바닥에는 책과 예술작품, 여러 구조물들을 비롯한 컴퓨터, 영사기, 현미경, 복사기, 수평식 스캐너와 같은 전자도구들이 여기저기 섬처럼 박힌 책상들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티빙은 수줍게 말했다.
  “내가 무도회장을 바꾸어 버렸소. 난 춤을 출 일이 별로 없거든.”
  소피는 오늘 밤이 온통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심해의 박명층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이 경의 작업인가요?”
  “진실을 배우는 것이 내 삶의 즐거움이오. 그리고 상그리엘은 내가 좋아하는 애인이고.”
  티빙이 말했다.
  ‘성배는 여자다.’
  말이 안 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소피의 마음에서 서로 연결되어 짜이고 있었다.
  “성배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그림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셨지요?”
  “그래요. 하지만 성배가 여자라고 주장한 것은 내가 아니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주장한 거지.”
  “어떤 그림인가요?”
  벽을 둘러보며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뭔가를 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성배. 성스러운 잔. 잔. 저기에 그녀가 있소!”
  티빙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 벽에는 소피가 조금 전에 보았던 <최후의 만찬> 그림이 높이 15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소피는 자기가 뭔가를 놓쳤다고 확신했다.
  “경이 조금 전에 제게 보여준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잖아요.”
  티빙은 윙크를 보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크게 보면 훨씬 더 좋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소피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랭던에게 돌아섰다.
  “잘 모르겠어요.”
  랭던은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 대로, 성배는 <최후의 만찬>에서 진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다 빈치가 그녀를 눈에 띄게 포함시켜 놓았거든요.”
  “잠깐만요. 당신은 내게 성배가 여자라고 얘기했어요. 하지만 <최후의 만찬>은 열 세명의 남자를 그린 그림이예요.”
  소피가 말했다.
  티빙의 눈썹이 들썩였다.
  “과연 그럴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봐요.”
  불확실한 마음으로, 소피는 그림 앞으로 다가가 열세 명의 인물을 조사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운데 앉아 있고, 그의 왼쪽에 여섯 명, 오른쪽에 여섯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남자예요.”
  소피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오, 그리스도 바로 오른쪽에 앉는 영광을 차지한 사람은 어때요?”
  소피는 예수의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인물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인물의 얼굴과 몸을 살피는 동안, 그녀 내부에서 충격이 일어났다. 그 인물은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섬세하게 모아쥔 손, 그리고 살짝 솟은 가슴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 없는……여자였다.
  “여자예요!”
  소피가 외쳤다.
  티빙은 웃고 있었다.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야. 날 믿어요. 그것은 실수가 아니오. 레오나르도는 남녀의 차이를 그리는데 익숙했으니까.”
  소피는 그리스도 옆에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최후의 만찬>은 열세 명의 남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여자는 누굴까?’
  이 그림을 수없이 봐오면서도, 이런 놀라운 차이를 한 번도알아챈 적이 없었다.
  “모두가 놓치는 부분이오. 이 장면에 대한 선입관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의 마음이 저 차이를 보는 눈을 막아 버리는 거지. 보더라도 그냥 지나치게 되지요.”
  랭던이 덧붙였다.
  “스코토마라는 거요. 강력한 상징으로 덮여 있으면 뇌는 종종 그런 일을 저지르지요.”
  티빙이 말을 이었다.
  “이 여인을 놓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술서적에 실린 많은 사진들이 1954년 전에 찍은 것들이기 때문이라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그림의 자세한 부분들은 여러 겹의 먼지와 18세기의 서투른 손들이 덧칠한 보존 채색 밑에 깔려 있었거든. 마침내 이 프레스코 벽화는 깨끗하게 복구되어 다 빈치의 원래 그림을 드러내게 되었지.”
  티빙은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이상이오!”
  소피는 사진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예수의 오른쪽에 있는 여자는 젊고 경건해 보였다. 품위 있는 얼굴과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손을 얌전히 포개고 있었다.
  ‘이 여자가 한 손으로 교회를 박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
  “이 여자는 누구지요?”
  소피가 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
  티빙이 대답했다.
  소피가 돌아서며 말했다.
  “창녀?”
  그 말에 개인적인 상처라도 받은 드 티빙은 잠시 숨을 멈췄다.
  “막달레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오. 그런 불행한 오해는 초기교회들이 벌인 더러운 캠페인의 유산이라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가진 위험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의 명예를 더럽힐 필요가 있었지. 그 비밀이란 성배로서의 그녀의 역할이었소.”
  “그녀의 역할?”
  티빙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초기 교회는 인간 예언자인 예수가 신성한 존재라고 세상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따라서 예수의 삶 중에 세속적인 면모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는 어떤 것이든 성서에서 제외시켜야만 했지. 성서의 초기 편집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겠지만, 세속적인 특정 주제가 복음서들에서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다오. 마리아 막달레나였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녀의 결혼 문제였어요.”
  “뭐라고요?”
  소피의 눈이 랭던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티빙에게 돌아왔다.
  “그건 역사 기록의 문제요. 다 빈치는 분명히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소. <최후의 만찬>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예수와 막달레나가 한 쌍이라고 외치고 있는 거요.”
  소피는 벽화 사진을 뒤돌아보았다.
  “예수와 막달레나가 서로 거울처럼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봐요.”
  티빙은 벽화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소피는 마술에 걸린 듯했다. 분명 두 사람의 옷 색깔은 서로 바뀌어 있었다. 예수는 붉은 겉옷에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푸른색 겉옷에 붉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음과 양.
  “더 기이한 부분을 파고들자면, 예수와 그의 신부가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처럼 앉아서, 서로 반대쪽으로 몸을 슬며시 내밀고 있는 거요. 마치 그들 사이에 어두운 공간을 일부러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말이오.”
  티빙이 그 윤곽을 설명하기 전에 소피는 V의 뜻을 알아챘다. 그림의 초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모양이 있었다. 성배와 잔, 여자의 자궁을 나타내는 것으로 랭던이 조금 전에 그려 보인 상징과 같았다.
  티빙이 말했다.
  “예수와 막달레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구성 요소로 본다면, 명백하고 또 다른 형체를 볼 수 있을 거요. 알파벳 중 한 글자지.”
  소피는 즉시 알아챘다. 하지만 그 철자를 이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철자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 한가운데에 철자 M의 형태가 뚜렷하게 그 윤곽을 드러냈다.
  “조금은 너무 완벽한 우연의 일치 같아. 그렇지 않소?”
  티빙이 물었다.
  소피는 놀라웠다.
  “그게 왜 저기 있지요?”
  티빙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모론자들은 철자 M이 결혼(Matrimonio)이나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e)를 나타내는 거라고 말할 거요. 솔직하게 말해서, 아무도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기에 숨겨진 M은 실수가 아니라는 거요. 성배와 관련된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M이라는 글자를 숨기고 있으니까. 종이에 비치는 무늬라든지. 밑그림이라든지. 혹은 복합적인 암시로 말이오. 물론 가장 뻔뻔스러운 M은 런던에 있는 교회 ‘파리의 성모’ 제단에 꾸며진 작품이지. 시온 수도회의 전 그랜드 마스터인 장 콕토가 디자인 한 것이오.”
  소피는 그 정보를 숙고했다.
  “숨겨진 M이란 철자가 흥미롭다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M이 막달레나와 예수의 결혼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거예요.”
  책들이 놓인 근처 책상으로 걸어가며 티빙이 말했다.
  “그래요. 그렇지. 내가 조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결혼은 역사적인 기록의 일부요.”
  티빙은 장서들 가운데서 한 권을 고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혼한 남자로서의 예수가, ‘그는 독신이었다’고 말하는 보편적인 성서의 시각보다 더 상식에 맞아요.”
  “왜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이 책을 찾고 있는 동안 랭던이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요. 그리고 당시의 사회규범은 유대인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을 금하고 있었소. 유대교 관습에 따르면 독신생활은 비난받아 마땅한 짓이었고, 유대인 아버지의 의무는 아들과 어울리는 신부를 찾아주는 것이었소. 만일 예수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복음서들 가운데 하나는 그 점을 언급하고 독신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제시해야만 했어요.”
  탁자 너머에서 티빙은 커다란 책한 권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포스터 크기의 거대한 도해서처럼 보이는 책은 가죽 장정이었다. <지식의 복음서들>. 티빙이 책을 펼치자, 랭던과 소피는 그의 곁에 앉았다. 소피는 고대 문서의 구절들을 크게 확대해 놓은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글자들을 손으로 직접 쓴 너덜너덜해진 파피루스였다. 고대 언어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번역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내가 아까 언급한 나그함마디와 사해의 두루마리들을 찍은 사본들이오. 초기 기독교의 기록들이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서들이 성서에 있는 복음서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요.”
  티빙은 책 가운데를 펼쳐 한 구절을 가리켰다.
  “빌립 복음은 시작하기에 항상 좋지.”
  소피는 그 구절을 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짝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자주 키스를 하곤 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런 일에 반대했고, 인정할수 없다고 표현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말했다.
  “왜 주님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시는 겁니까?”
  글은 소피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어요.”
  첫 줄을 가리키며 티빙은 웃었다.
  “그와는 반대로, 고대 시리아 언어인 아랍어 학자들은 ‘짝’이란 말이 당시에는 말 그대로 ‘부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아가씨에게 말해 줄 거요.”
  랭던이 동의의 표시로 고래를 끄덕였다.
  소피는 첫 줄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짝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티빙은 책을 뒤적거려 다른 구절들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그 구절들은 막달레나와 예수가 연인 사이였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구절을 읽는 동안, 소피는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리던 성난 사제가 떠올랐다.
  소피가 문을 열자,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제가 물었다.
  “이 집이 자크 소니에르의 집이냐? 소니에르가 신문에 쓴 사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왔다.”
  사제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
  두 남자는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신문에 뭔가를 썼다고?’
  소피는 즉시 부엌으로 달려가 조간 신문을 뒤적거렸다. 소피는 할아버지의 이름이 2면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기사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제들의 압력으로 프랑스 정부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리는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예수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기사에서 교회가 너무 거만하며, 영화 상영을 금지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사제가 미칠 만도 했군.’
  소피는 생각했다.
  “그 영화는 포르노요! 신성모독이란 말이오!”
  서재에서 나와 현관으로 폭풍처럼 걸어가면서 사제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영화를 지지할 수가 있소? 마틴 스콜세지라는 미국인은 불경스러운 작자요. 교회는 프랑스 땅에 그런 작자가 발붙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할아버지는 부엌으로 들어와서, 신문을 들고 있는 소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재빠르구나.”
  소피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애인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란다. 얘야. 나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겨서는 안 될 것을 교회가 우리에게 지시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거란다.”
  “예수에게 애인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만일 애인이 있었다면 나쁜 일이겠니?”
  소피는 잠시 생각한 후에 어깨를 으쓱했다.
  “난 상관없을 것 같아요.”
  레이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예수와 막달레나의 결합에 대한 많은 참조문들을 일일이 보여줄 수는 없어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서 구역질이 날 만큼 탐구되었으니까. 다만 이 구절만큼은 보여주고 싶소.”
  티빙은 다른 구절을 가리켰다.
  “이 구절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복음서에서 나온 거요.”
  소피는 막달레나의 말들이 존재하는 복음서가 있는지 몰랐다. 소피는 구절을 읽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길. “그리스도가 정말로 우리 모르게 그 여자와 얘기했나? 우리가 모두 돌아서서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단 말인가? 주님은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인가?”
  그리고 레이가 말하길. “베드로, 자네는 항상 성질이 불 같았지. 이제보니 자네는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에게 대항하려 드는군. 주님이 그녀를 가치 있게 만드신 거라면. 그녀를거부하는 자네는 정말로 누구인가? 분명히 주님은 그녀를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주님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는 것일세.”
  티빙이 설명했다.
  “그들이 얘기하는 여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요. 베드로는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지.”
  “예수가 마리아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것뿐만이 아니오. 단순한 애정 이상의 문제였던 거지. 복음서에 나온 이 시점은, 예수가 곧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 자신이 알고 있던 때였소.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죽은 뒤에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한 지시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었어요. 그 결과, 베드로는 여자 밑에서 단역을 맡게 된 것에 불만을 표현한 거요. 나는 베드로가 성 차별주의 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소.”
  소피는 이야기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이 성 베드로인가요? 그의 반석 위에 예수가 교회를 세우리라고 했던?”
  “맞소. 하나만 제외하면 그렇지. 각색되지 않은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기독교 교회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었다오. 그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지.”
  소피는 티빙을 쳐다보았다.
  “지금 기독교 교회가 여자의 손에 전수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의 계획이었소. 예수는 원래 페미니스트였거든. 예수는 자기 교회의 미래를 ‘마리아 막달레나’의 손에 둘 의도였지.”
  <최후의 만찬>을 가리키며 랭던이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일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저기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다 빈치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거요.”
  다시 소파는 말을 잃었다. 그림에서 베드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몸을 기대며, 칼날 같은 손을 그녀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암굴의 마돈나>에서 본 것과 같은 위협적인 자세였다.
  베드로 근처에 있는 제자들 무더기를 지적하며 랭던이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또, 좀 불길하죠. 안그래요?”
  소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자들 사이에서 불쑥 나온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손에 ‘단검’이 들려 있는 거예요?”
  “그래요. 여전히 이상하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 손은…… 누구의 손도 아닙니다. 잘려 나온 손이지. 익명의 손이오.”
  소피는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성배로 만드는지 난 모르겠어요.”
  티빙은 소리쳤다.
  “아하! 아직도 장애물이 있구먼!.”
  티빙은 다시 탁자로 가서 커다란 차트를 들고 와 소피앞에 펼쳤다. 차트는 공들여 만든 가계도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리스도의 오른팔이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그녀가 힘있는 가문의 여자였다는 것을 몰라요.”
  소피는 가계도의 제목을 보았다.
  베냐민족.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기 있다오.”
  가계도의 윗부분을 가리키며 티빙이 말했다.
  소피는 놀랐다.
  “그녀가 베냐민 가문의 한 사람이었다고요?”
  “정말이오. 마리아 막달레나는 왕족의 후손이었지.”
  티빙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막달레나가 가난한 여자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어요.”
  티빙은 머리를 흔들었다.
  “막달레나가 대단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창녀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버린 거요.”
  소피는 자신이 다시 랭던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랭던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는 티빙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왜 초기 교회들은 막달레나가 왕족의 피를 가졌는지에 신경을 썼을까요?”
  영국인은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교회를 걱정시킨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왕족의 피가 아니었다오. 막달레나가 그리스도와 어울려 다닌 것만큼은 아니었지. 그리스도 역시 왕족의 피를 가졌으니까.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예수가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의 왕인 솔로몬의 후손 말이오. 예수가 세력가인 베냐민 가문과 결혼하는 일은, 두 왕족의 피를 섞는 일이었지. 솔로몬 밑에서 그랬던 것처럼 왕가의 혈통을 회복하고, 왕관을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정치적인 결합을 만들어 냈던 거요.”
  소피는 티빙이 마지막 요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티빙은 몹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성배에 대한 전설은 왕족의 피에 대한 전설이오. 성배 전설이 ‘그리스도의 피를 담은 잔’ 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가 왕족의 혈통을 품은 여자의 자궁. 마리아 막달레나였소.”
  티빙의 얘기는 소피의 마음에 충분히 와 닿기 전에, 서재를 한 바퀴 울리고 다시 돌아온 듯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족의 혈통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스도가 혈통을 가질 수 ……?”
  소피는 말을 멈추고 랭던을 쳐다보았다.
  랭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들에게 아이가 없다면.”
  소피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티빙이 선언했다.
  “그대로 있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은폐를 지켜보구려. 예수 그리스도는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였다오. 아가씨.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스러운 그릇이었지.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족의 혈통을 담은 잔이었던 거요. 혈통을 품은 자궁이자, 신성한 열매를 퍼뜨릴 줄기였지!”
  소피는 팔의 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엄청난 비밀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묻혀 있었던 거죠?”
  “하느님! 조용했다고는 할 수 없지!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은 항상 지속되어 온 전설. 즉 성배의 근원이라오. 막달레나에 관한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은유와 언어로 수백년 동안 지붕에서부터 소리치고 있었지. 아가씨가 눈을 뜨면 막달레나 얘기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그럼 상그리엘 문서요? 그 문서에는 예수가 왕족의 혈통을 이어 갔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들어 있나요?”
  “그렇다오.”
  “그럼 성배 전설에 관한 모든 것은 오직 왕족의 피에 관한 것이란 말인가요?”
  “말 그대로라면 그렇다오. 상그리엘이란 말은 성배를 나타내는 말. 상(san)과 그리엘(greal)이 합쳐진 거요. 하지만 가장 고대적인 형태로 보면, 상그리엘은 다른 지점에서 갈라지오.”
  티빙은 공책 한 장에 뭔가를 적어서 소피에게 건넸다.
  소피는 티빙이 적은 것을 읽었다.
  상 리엘 (sang real)
  소피는 이 단어를 즉시 번역했다.
  ‘상 리엘’은 문자 그대로 ‘왕족의 피’를 뜻했다.

59

  뉴욕 렉싱턴 가. 오푸스 데이 본부 로비에서 전화를 받은 남자 안내원은 아링가로사 주교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주교님.”
  “내게 온 메시지가 혹시 있는가?”
  이상하리만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주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주교님이 전화를 걸어주셔서 매우 다행입니다. 주교님의 아파트에 연락이 되어야 말이죠. 삼십 분 전쯤에 급한 전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래? 전화를 건 사람이 이름을 남겼나?”
  주교는 안도하는 듯했다.
  “아닙니다. 주교님 . 그저 전화번호뿐입니다.”
  안내원은 번호를 불렀다.
  “앞 번호가 삼십삼? 이건 프랑스 국가번호 아닌가, 맞나?”
  “그렇습니다. 전화 거신 분이 그러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니 즉시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고맙네. 내가 기다리던 전화일세.”
  아링가로사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안내원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아링가로사의 전화 연결 상태가 왜이렇게 좋지 않은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주교의 일정표를 보면 이번 주말에는 뉴욕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교는 어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안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근 몇 달 간 아링가로사 주교가 매우 이상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 휴대 전화기가 전화를 수신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군.’
  피아트 승용차에 앉아 로마의 참피노 전세기 비행장 출입구를 통과하면서 아링가로사는 생각했다.
  ‘스승은 나에게 연락하려고 했었어.’
  아링가로사는 전화를 놓쳤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직접 오푸스데이에 전화를 걸 정도로 풀어져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오늘 밤 파리에서의 일이 잘 풀린 모양이야.’
  번호를 누르면서, 곧 파리에 도착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아링가로사는 흥분을 느꼈다.
  ‘날이 밝기 전에 파리에 도착하게 될 거야.’
  아링가로사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터보 프로펠러 전세기를 대기시켜 놓았다. 이런 시간에 특히 귀중한 가방을 들고 일반 비행기를 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중앙사법경찰국입니다.”
  아링가로사는 머뭇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아, 그래요……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소만?”
  “누구시죠? 당신의 이름은요?”
  아링가로사는 자기 이름을 밝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프랑스 사법경찰?’
  “이름이, 미스터?”
  여자가 재촉했다.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전화선이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참을 기다린 후 어떤 남자가 나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고 근심이 어려 있었다.
  “주교님, 마침내 연락이 닿아서 다행입니다. 주교님과 제가 의논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60

  ‘상그리엘…… 상 리엘…… 상 그리엘…… 왕족의 피…… 성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성배는 마리아 막달레나였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어 갈 어머니.’
  소피는 새로운 혼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침묵에 잠긴 서재에 서서 소피는 랭던을 응시했다. 티빙과 랭던이 더 많은 조각들을 탁자에 올려 놓을수록. 오늘 밤의 수수께끼는 더욱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책장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가면서 티빙이 말했다.
  “이제 알겠지만, 세상에 대고 성배의 진실을 말하려고 했던 사람은 레오나르도만이 아니야.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연대기 순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었지.”
  티빙은 일렬로 늘어선 수십 권의 책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소피는 고개를 들어 제목을 훑었다.
  <성전의 폭로: 그리스도의 진짜 정체에 대한 비밀의 파수꾼들>
  <석고 단지를 가진 여인 :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배>
  <복음서의 여신 :신성한 여성을 찾아서>
  “여기 이것이 가장 유명한 책일 거요.”
  책장에서 너덜너덜한 표지의 책을 한 권 꺼내 소피에게 건네며 티빙이 말했다.
  표지는 다음과 같았다.
  <신성한 피, 신성한 잔 :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소피는 고개를 들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 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아가씨가 어렸을 때였기 때문일거요. 이 책은 1980년대에 대단한 소동을 불러일으켰지. 내 취향에 맞게 저자들은 믿음을 분석하는 일에 좀 모호한 도약을 시도했지만, 그네들의 기본적인 전제는 합리적이었다오. 마침내 그리스도의 혈통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까.”
  “이 책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어땠나요?”
  “물론 격노했지. 하지만 그런 반응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어. 어쨌든 이것은 초기 사백 년 동안 바티칸이 묻으려고 했던 비밀이었으니까. 십자군이 한 일의 일부이기도 하고. 정보를 모으고 파괴하는 일 따위 말이야. 초기 교회의 남자들에게 그들 앞에 놓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든 것을 파괴할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였지. 예수가 교회를 세우라는 과업을 여자인 그녀에게 맡겼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새롭게 내세우는 예수라는 신이 사실은 인간의 혈통을 이어 가고 있다는 실질적은 증거가 그녀였으니까. 막달레나의 힘에 대항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녀의 이미지를 창녀로 만들고 그녀와 예수가 결혼한 증거를 묻어 버리려고 했어요. 그래서 훗날에 그리스도에게 자기 혈통이 있고,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었다는 주장이 나오지 못하도록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한 게야.”
  소피가 랭던을 쳐다보자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티빙이 말했다.
  “이 주장이 절박하게 들린다는 것을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런 위장을 행한 교회의 강력한 동기를 이해해야만 하오. 교회는 혈통에 대한 공식적인 지식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어요. 예수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가진 신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손상시키는 존재였지. 그래서 기독교 교회는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있고, 천국으로 가는 문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자기들이라고 선언한 거라오.”
  갑자기 티빙의 장서들 가운데 한 권을 가리키며 소피가 말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
  ‘장미목 상자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야.’
  티빙은 랭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소피를 향해 돌아섰다.
  “아가씨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군 그래. 저건 성배를 나타내는 시온의 상징이오. 마리아 막달레나지. 교회가 그녀의 이름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많은 가명으로 은밀하게 불려졌어요. 예를 들어 잔. 성배. 장미.”
  티빙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장미는 비너스를 나타내는 오각형의 별 모양과도 관련이 있고, 안내를 맡는 로즈 나침반과도 연관이 있어요. 그리고 로즈라는 단어는 영어든, 프랑스어든, 독일어든, 많은 다른 언어권에서 동일하니까.”
  랭던이 덧붙였다.
  “로즈(rose)는 또한 에로스(eros)라는 말의 아나그램입니다.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 말이오.”
  티빙이 다가올 때 소피는 랭던에게 놀라는 시선을 던졌다.
  “장미는 항상 여성의 성을 나타내는 원시적인 상징이었지. 초기의 원시적인 여신 제사에서 다섯 장의 꽃잎은 여성의 일생을 표현한 다섯 개의 정류장이었어요. 출생, 월경,잉태,폐경 그리고 죽음. 현대에 와서 피어난 장미와 여성스러움은 보다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티빙은 랭던을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 기호학자가 설명을 잘하겠지.”
  그러나 랭던은 한참 동안 망설이기만 할 뿐이었다.
  티빙이 발끈했다.
  “오, 이런! 자네 같은 미국인들은 얌전한 체하는 데 선수로구먼.”
  티빙은 소피를 뒤돌아보았다.
  “랭던이 망설이는 것은, 활짝 핀 장미꽃이 여성의 외음부를 닮았기 때문이라오. 모든 인류가 세상으로 나오는 고귀한 통로지 .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적이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즉시 알 수 있을거요.”
  책장을 다시 가리키며 랭던이 말했다.
  “요점은 이거요. 여기 있는 모든 책들은 동일한 역사적 주장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가 아빠였다는 얘기로군요.”
  소피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티빙이 말했다.
  “그렇다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혈통을 품은 자궁이었지. 시온 수도회는 이날까지 마리아 막달레나를 여신, 성배, 장미 그리고 신성한 어머니로서 여전히 숭배한다오.”
  소피는 노르망디 별장의 지하실에서 보았던 의식이 번쩍 떠올랐다.
  티빙은 계속했다.
  “시온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할 당시 마리아 막달레나는 임신 중이었다고 해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그녀는 성스러운 땅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 예수의 신실한 삼촌이 아리마테아의 요셉의 도움을 받아, 막달레나는 프랑스로 은밀하게 몸을 옮겼다오. 당시에 프랑스는 골이라고 불렸지. 그녀는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전한 장소를 찾았어. 그녀가 딸을 낳은 것도 여기 프랑스 였어요. 아이의 이름은 사라였지.”
  소피는 눈을 들었다.
  “시온이 실제로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요?”
  “그 이상이지. 막달레나와 사라의 삶은 그들을 보호하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꼼꼼하게 기록되었지. 막달레나의 아이는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유대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기억해요. 이런 이유로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들은 막달레나를 신성한 왕족으로 여기고, 왕가의 혈통을 유지한 그녀를 존경했지. 많은 학자들이 사라의 출산과 그 이후의 가계도를 포함해서, 프랑스에 있던 막달레나의 일상을 기록했다오.”
  소피는 깜짝 놀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가 존재한다고요?”
  “정말이오. 그리고 그것은 상그리엘 문서의 한 주춧돌이지. 그리스도의 초기 후손들을 밝힌 완벽한 가계도요.”
  소피가 물었다.
  “그리스도의 혈통을 보여주는 문서화된 가계도가 뭐 그리 좋을 것이 있나요? 그건 증거가 아닐 수도 있어요. 역사가들은 가계도가 진짜인지 아닌지 당연히 의심할 거라고요.”
  티빙은 소리내어 웃었다.
  “역사가들이 성경의 진위를 놓고 이게 진짜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무슨 뜻이죠?”
  “역사란 항상 승자에 의해서 씌어진다는 뜻이오. 두 문화가 충돌했을 때, 진 쪽은 잊혀지는 법이지. 승자는 자신들의 이유를 정당화하고, 패자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역사를 쓰기 마련이라오. 나폴레옹도 말한 적이 있지. ‘역사란 합의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본질을 볼 때, 역사란 항상 한쪽의 설명일 뿐이라오.”
  티빙은 웃었다.
  소피는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상그리엘 문서들은 그리스도의 다른 면을 단순히 얘기해 주는 거요. 결국 어느 쪽 이야기를 아가씨가 믿을 것인가는 믿음과 개인 탐구의 문제라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보는 살아 있지. 상그리엘 문서는 정보를 담은 수만 부의 기록들이오. 상그리엘의 보물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네 개의 커다란 궤짝으로 그것들이 옮겨졌다고 적고 있어요. 그 궤짝 안에 든 ‘가장 순수한 문서들’은 변형을 거치지 않은 수천 장의 종이라오.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기록이지. 그리고 예수를 인간적인 스승과 예언자로서 존경한 초기 추종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오. 게다가 보물의 일부는 전설적인 ‘Q’문서라는 소문이 있어요. 이 문서는 바티칸조차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인정하는 원고요. 예수 자신이 직접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가르침을 담은 책이라오.”
  “예수가 직접 써요?”
  “물론이오. 왜 자기 행적을 자기가 기록하지 않았겠소?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했는데, 보물상자 안에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문서는 ‘막달레나의 일기’라고 불리는 원고라오.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그녀가 프랑스에서 보낸 일 등을 적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개인적인 기록이지.”
  소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럼 그 네 개의 궤짝이 솔로몬의 신전 밑에서 성전 기사단이 발견한 보물인가요?”
  “맞아요. 그 문서는 기사들을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지. 그리고 역사에 걸쳐 끊임없는 성배 원정의 표적이 되었던 거요.”
  “하지만 성배는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했잖아요. 만일 사람들이 문서를 찾아 헤맨 거라면, 왜 성배를 찾는다고 했던 거죠?”
  티빙은 표정을 부드럽게 가라앉히며 소피를 보았다.
  “성배를 숨긴 장소가 돌로 만들어진 관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오.”
  밖에서는 바람이 나무 사이로 울며 지나가고 있었다.
  티빙은 더욱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성배를 찾아 떠난 원정은 말 그대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뼈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해 떠난 원정이었지. 쫓겨난 여성이자 잃어버린 신성한 여성의 발에 기도를 드리기 위한 여행이었던 거요.”
  소피는 놀라움을 느꼈다.
  “성배를 숨긴 장소가 실제로는 …… 무덤이라고요?”
  티빙의 갈색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렇다오.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의 진실을 전하는 문서와 그녀의 시신을 담은 무덤이지. 본질적으로 성배를 위한 원정은 항상 막달레나를 위한 원정이었던 거요. 그녀의 가족이 정당하게 권력을 요구할 수 있는 증거와 함께 묻힌 모욕당한 여왕.”
  티빙이 자신을 추스르는 동안 소피는 기다렸다. 할아버지에 관한 많은 부분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소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온의 멤버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그리엘 문서들과 막달레나의 무덤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나요?”
  “그래요, 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지. 가장 중요한 의무는 혈통. 그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었어. 그리스도의 자손은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었거든. 초기 교회는 예수의 혈통이 자라도록 승인한다면 ,결국 예수와 막달레나 사이의 비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고 기본적인 가톨릭 교리는 도전 받을 거라는 두려움에 떨었을 거요.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신성한 메시아는 여자와 어울려 다니지도 않고, 성관계도 갖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티빙은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혈통은 프랑스에서 보호 아래 조용히 자라났어요. 오 세기경 프랑스 왕가와 결혼을 통해서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오. 두 왕족의 피는 메로빙거 왕조라는 가계를 창조했지.”
  이 말은 소피를 놀라게 했다. 메로빙거라는 말은 프랑스에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용어였다.
  “메로빙거 왕조라면 파리를 세운 왕조예요.”
  “그래요 .성배 전설이 프랑스에서 풍부한 이유 중 하나라오. 바티칸에서 내보낸 성배 탐색가들이 여기 프랑스에 많이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없애려는 은밀한 사명을 띠고 있지요. 다고베르 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소피는 역사수업 시간에 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에서 그 이름을 희미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다고베르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잠을 자다가 칼에 눈이 찔렸지요.”
  “정확해요. 왕은 페팽 데리스탈과 공모한 바티칸에 의해서 암살된 거라오. 최근 칠백 년 동안, 다고베르의 암살과 함께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은 거의 전멸되었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고베르의 아들, 시지스베르가 공격을 은밀히 피해서 혈통을 이어 갔어요. 이 혈통은 나중에 부이용의 고드프루아에게 이어지는 것이라오. 시온 수도회의 설립자 말이오.”
  랭던이 말을 이어받았다.
  “성전 기사단에게 솔로몬의 신전 아래에 있는 상그리엘 문서들을 회수해 오라고 명령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문서로 메로빙거 왕조가 예수 그리스도와 피로 맺어져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려고 했었어요.”
  깊은 한숨을 쉬며 티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의 시온 수도회는 중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어요. 그 의무는 세 가지인데, 하나는 상그리엘 문서를 보호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을 보호하는 거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혈통을 양육하고 보호할 의무요. 현재까지 살아남은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말이오.”
  티빙의 말이 넓은 공간에 떠돌고, 뼈들이 새로운 사실에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소피는 기이한 진동을 느꼈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예수의 후손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프린세스, 가족에 관한 진실을 네게 얘기해야만 한단다.’
  냉기가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왕족의 피.’
  그녀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프린세스 소피.’
  “주인님? 부엌에서 저를 잠깐 보시겠습니까?”
  벽에 걸린 인터콤을 통해 집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소피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티빙은 뜻밖의 간섭에 눈을 부라렸다. 티빙은 인터콤으로 걸어가서 버튼을 눌렀다.
  “레미, 자네도 알다시피 난 손님들 때문에 바쁘네. 부엌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가 알아서 가져다 먹겠네. 고맙네. 그럼 잘 자게나.”
  “물러가기 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주인님.”
  티빙은 툴툴대며 버튼을 눌렀다.
  “빨리 말하게나, 레미.”
  “집안 문제입니다. 주인님. 손님들이 들으시기엔 좀 그런데요.”
  티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아침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나?”
  “안 됩니다. 주인님. 급한 일입니다.”
  티빙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랭던과 소피를 보았다.
  “가끔은 누가 누구에게 봉사하는지 의문이 든다니까.”
  티빙은 다시 버튼을 눌렀다.
  “곧 가겠네. 그리고 갈 때 내가 가져다줄 것은 없나?”
  “오직 압제로부터의 자유만 있으면 됩니다. 주인님.”
  “레미, 자네가 날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네의 스테이크 요리 솜씨 때문이란 걸 명심하게나.”
  “그럼요. 주인님, 그러믄요.”

61

  프린세스 소피.
  홀 아래로 사라져 가는 티빙의 목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피는 멍한 기분이었다. 마비된 듯한 표정으로 소피는 랭던을 돌아보았다. 그는 소피의 마음을 읽은 듯이 벌써 고개를 젓고 있었다.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랭던은 속삭였다.
  “아니오. 소피, 당신할아버지가 시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당신과 같은 생각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소.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가족에 대한 비밀을 말하고 싶어했다고 얘기했을 때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소니에르라는 성은 메로빙거 이름이 아니오.”
  소피는 자신이 안심하는 것인지, 실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랭던은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이 무엇이냐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물은 적이 있었다.
  쇼벨. 이제야 그 질문이 이해되었다. 소피는 긴장했다.
  “그럼 쇼벨은?”
  랭던은 다시 머리를 저었다.
  “미안하오. 그게 당신의 궁금증에 답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소. 메로빙거 핏줄은 오직 두 성씨로만 남아 있어요. 바로 플랑타르와 생클레르요. 양쪽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숨어서 살고 있고. 아마도 시온의 보호를 받고 있을 거요.”
  소피는 그 이름들을 속으로 반복해서 불러본 후 머리를 저었다. 플랑타르나 생클레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녀의 가족 가운데 없었다. 소피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드러내고자 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루브르 박물관 안에 있을 때보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오늘 오후에 가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고통을 느끼고 있는 오랜 상처를 할아버지가 찢어발긴 것이다.
  ‘그들은 죽었다. 소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엄마가 노래를 불러준 일과 어깨에 무등을 태워주던 아버지. 빛나는 녹색 눈으로 자기를 보며 웃던 할머니와 남동생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도둑맞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할아버지 뿐이었다.
  ‘이제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난 혼자야.’
  소피는 재빨리 <최후의 만찬>을 향해 돌아서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붉은 머리와 차분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여자의 표정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이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소피는 그 감정을 느낄수 있었다.
  “로버트?”
  소피가 부드럽게 말했다.
  랭던은 소피 가까이 다가갔다.
  “성배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고 레이 경이 얘기했어요.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은 오늘 밤이 처음이예요.”
  랭던은 소피의 어깨에 위로의 손을 올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성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거요. 소피. 모두가 그래요.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오.”
  “잘 모르겠어요.”
  “성배 이야기는 도처에 있소. 다만 숨겨져 있을 뿐이지. 교회가 피신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언급을 금했을 때, 그녀의 이야기와 중요성은 아주 신중하게 전래되었소……은유와 상징을 지지하는 채널들을 통해서 말이오.”
  “그렇군요. 예술이로군요.”
  랭던은 <최후의 만찬>을 손짓했다.
  “완벽한 예요. 오늘날 예술, 문학, 음악의 일부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에 관한 역사를 얘기하고 있소.”
  랭던은 재빨리 다 빈치와 보티첼리, 푸생, 베르니니, 모차르트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했다. 모두들 추방당한 신성한 여성을 복원하려는 원정에 대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거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 <아서왕> 그리고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같은 얘기들은 모두 성배에 대한 비유였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나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는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성배의 비밀로 가득한 작품들이었다.
  “일단 성배에 대해서 눈을 뜨면, 어디에서나 그녀를 찾을 수 있소. 그림, 음악, 책 심지어 만화나 테마 파크, 인기 있는 영화에서도 말이오.”
  랭던은 미키마우스 손목시계를 들어보이며 소피에게 말했다. 월트 디즈니의 경우 성배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한 사람이었다. 디즈니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찬사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시대보다 몇 세대 앞서 살았고, 아주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예술가들이었으며, 비밀단체의 회원이었고, 확실히 장난꾸러기들이었다. 레오나르도처럼 월트 디즈니는 숨겨진 메시지와 상징을 자기 예술 속에 섞어 놓기를 좋아했다. 훈련된 기호학자가 디즈니의 초기 영화들을 보는 일은 암시와 은유의 눈사태를 만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디즈니가 숨긴 메시지들 대부분은 종교, 이교도의 신화, 추방당한 여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디즈니가 <신데렐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백설공주> 이야기 등을 다시 꺼내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신성한 여성을 유폐하는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독이 든 사과를 한 입 먹고 쓰러진 백설공주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브라는 분명한 암시를 이해하기 위해 기호학이란 배경을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오로라 공주가 사악한 마녀의 손길을 피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숲 깊이 숨어 있다는 내용도 아이들을 위한 성배 이야기였던 것이다.
  회사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디즈니 사의 직원들은 여전히 재치있고 장난기 넘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예술가들은 작품에 은밀한 상징을 끼워 넣는 일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랭던은 자기 학생들 중 한 명이 <라이온 킹> 이라는 DVD를 가지고 와서, 섹스(SEX)라는 단어가 분명히 떠 있는 프레임 하나를 정지시켜 보여준 일을 결코 잊지 못했다. 이 단어는 심바의 머리 위에서 떠도는 먼지 조각들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랭던은 이 장면이 인간의 성애를 다루는 이교도에 대한 계몽적인 암시라기보다는 만화가의 미숙한 장난질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상징을 파악하는 디즈니의 능력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인어공주>는 특히 여신과 관련된 영적인 상징들로 가득 짜인 융단과도 같아서,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랭던은 <인어공주>를 처음 보았을 때, 아리엘의 바닷속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이 바로 17세기 화가, 조르주 드 라 루트의 <참회하는 막달레나>라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그림은 추방당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경의를 표한 작품이었다. 이 같은 배경을 만화에 그려 넣음으로써, 90분짜리 <인어공주> 만화영화는 이시스,이브,물고기의 여신인 피세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잃어버린 거룩한 여성을 언급하는 야무진 상징들로 가득 찬 콜라주가 된 것이다. 인어공주의 이름인 아리엘은 신성한 여성과 강한 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사야 서를 보면 ‘포위당한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어공주의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티빙의 목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발걸음에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침내 서재로 돌아온 주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티빙은 차갑게 말했다.
  “로버트, 자네 입으로 직접 설명하는 것이 좋겠네. 내게 정직하지 않았군 그래.”

62

  “레이 경, 우린 죄를 뒤집어 쓴 겁니다.”
  차분하려고 애쓰면서 랭던은 말했다.
  ‘나를 알잖아요. 난 누구도 죽이질 못합니다.’
  티빙의 어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로버트, 자네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왔네. 당국이 자네를 수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예.”
  “그럼 자넨 나의 신뢰를 이용한 셈이군. 여기에 와서 나를 곤경에 밀어넣다니. 정말 놀랐네. 내가 성배에 대해서 늘어놓는 동안 내 집 안에 숨으려 들다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티빙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자크 소니에르 씨가 죽었네. 경찰은 그게 자네 짓이라고 말했어. 예술에 그렇게 공헌을 한 사람을……”
  집사가 나타나 서재 문가에 있는 티빙 뒤에 섰다.
  “주인님, 저들을 내쫓을까요?”
  “내게 맡기게.”
  티빙은 서재를 절름거리며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커다란 유리 창문의 빗장을 풀고 밖으로 활짝 열었다.
  “자네 차를 찾아서 떠나주게나.”
  소피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린 ‘클레 드 부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시온의 쐐기돌 말이에요.”
  티빙은 소피를 몇 초 간 빤히 쳐다보다가 조소하는 코웃음을 쳤다.
  “결사적으로 꾸며대는구먼. 내가 그것을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로버트는 알고 있지.”
  랭던이 말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쐐기돌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말입니다.”
  집사가 끼어들었다.
  “떠나시오. 안 그러면 당국에 전화하겠소.”
  랭던이 속삭였다.
  “레이 경, 우리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티빙이 지탱하고 있던 몸의 균형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집사가 방을 가로질러 단호한 자세로 다가왔다.
  “즉시 떠나시오. 안 그러면 내가 강제로……”
  티빙이 돌아서서 집사를 붙잡았다.
  “레미!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게.”
  집사의 턱이 벌어졌다.
  “주인님? 분명히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저 사람들은……”
  “내가 처리하겠네.”
  티빙은 홀 쪽을 가리켰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레미는 쫓겨난 강아지처럼 방을 나갔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소피와 랭던을 향해 돌아선 티빙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이게 훨씬 낫군. 쐐기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 건가?”
  티빙의 서재 바깥. 무성한 덤불 속에서 사일래스는 권총을 빼든 채 유리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몇 분 전만 해도 넓은 서재에서 랭던과 여자가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목발을 짚은 남자가 들어와서 랭던에게 고함을 쳤다. 그런 뒤에 창문을 열고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때 여자가 쐐기돌 얘기를 꺼냈고, 모든 것이 바뀌었지.’
  고함은 속삭이는 소리로 변했다.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유리 창문은 재빨리 닫혔다.
  사일래스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유리창을 통해 안을 살폈다.
  ‘쐐기돌은 이 집 어딘가에 있다.’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일래스는 창문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듣고 싶었다. 사일래스는 저 사람들에게 앞으로 5분을 줄 생각이었다. 만일 저들이 쐐기돌을 어디에 숨겼는지 대화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안으로 들어가 무력으로 실토하게 할 작정이었다.
  서재에서, 랭던은 집주인이 당황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소피를 바라보며 티빙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랜드 마스터? 자크 소니에르 씨가?”
  티빙의 눈에 깃든 충격을 바라보며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지?”
  “자크 소니에르 씨는 제 할아버지세요.”
  티빙은 목발을 짚은 채 뒤로 비틀거렸다. 랭던에게 시선을 던지자,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빙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느뵈 양, 할 말이 없소.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를 잃은 일은 정말로 유감이오. 나는 연구를 목적으로 시온 수도회에 관여할 만한 후보자들을 상상하면서, 파리에 사는 인물들의 목록을 만든 적이 있었다오. 자크 소니에르 씨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속에 끼어 있었지.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라고 했소? 그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오.”
  티빙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말이 안돼. 설사 아가씨의 할아버지가 시온의 수장이고 스스로 쐐기돌을 창조해 냈다 하더라도, 쐐기돌을 찾아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결코 아가씨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요. 쐐기돌은 조직의 궁극적인 보물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거니까. 손녀이든 아니든, 아가씨는 그런 지식을 전수 받을 자격이 없어요.”
  랭던이 말했다.
  “소니에르 씨는 정보를 전달할 때 죽어 가고 있었어요. 그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죠.”
  티빙이 목소리를 높였다.
  “소니에르는 선택이 필요 없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세 명의 집사들이 있으니까. 그 점이 시온 수도회의 시스템의 백미지. 한  사람이 그랜드 마스터 자리에 오르게 되면, 새로운 집사를 뽑아 쐐기돌에 관한 비밀을 공유하거든.”
  “뉴스를 다 보신 게 아닌 것 같네요. 제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세명의 파리 저명인사들이 오늘 살해되었어요. 세 사람 다 비슷한 방법으로요. 모두들 심문당한 것처럼 보이죠.”
  티빙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자네들은 그 사람들이……”
  “집사들.”
  랭던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범인이 시온의 최상층에 있는 네 사람의 신분을 알기란 불가능해! 날 보게나. 수십 년 동안 시온의 조직을 연구했지만, 단 한 명의 회원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네. 세 명의 집사 모두와 그랜드 마스터의 신분이 탄로나서, 한날에 살해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소피가 말했다.
  “저는 그 정보고 단 하루에 수집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어요. 마치 잘 계획된 ‘참수형’ 같아요. 조직화된 범죄단과 싸울때 우리가 이용하는 수법이예요. DCPJ가 어떤 조직을 일망타진시키려 할 때면 우선 몇 달간 은밀하게 듣고 감시만 하죠. 주요 멤버들의 신분이 파악되면, 들어가서 동시에 모두를 잡아들이는 거예요. 조직의 목을 베어 버리는 것. 바로 참수라고 하는 거죠. 리더십을 잃은 조직은 혼란에 빠지고 다른 정보들도 누설되기 마련이예요. 누군가가 시온을 끈기 있게 지켜보고 있다가 공격하는 일은 가능해요. 최상층 멤버들이 쐐기돌의 위치를 밝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티빙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시온의 형제들은 절대로 얘기하지 않아요.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한 사람들이니까. 심지어 죽음을 앞에 두고서라도 말이지.”
  랭던이 말했다.
  “맞습니다. 만일 그들이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모두 살해당했다면……”
  티빙은 숨을 멈추었다.
  “그럼 쐐기돌의 위치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돼!”
  “그리고 성배의 위치도요.”
  랭던이 덧붙였다.
  랭던이 얘기한 단어의 무게에 티빙의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도 서 있기가 힘들다는 듯. 티빙은 의자에 몸을 털썩 던지더니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소피가 다가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처함 곤경을 생각해 보면, 절망 속에서 할아버지는 조직 바깥에 있는 누군가에게 비밀을 건네려고 애쓰신 것 같아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족 중 한 사람.”
  티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런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직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공포를 느끼며 티빙은 말을 멈췄다.
  “그건 오직 하나밖에 없어. 이런 식의 침투는 시온의 오랜 적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랭던이 고개를 들었다.
  “교회.”
  “그 외에 누가 있겠나? 로마는 수세기 동안 성배를 찾아다녔어.”
  소피는 회의적이었다.
  “교회가 제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티빙이 대답했다.
  “교회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역사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라오. 성배를 다루는 문서는 위험한 물건이지. 교회는 수년 동안 그런 문서들을 없애고 싶어했으니까.”
  성배 관련 문서를 얻기 위해 교회가 뻔뻔스럽게 사람을 살해한다는 티빙의 전제를 랭던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새 교황과 여러 추기경들을 만나본 랭던으로서는, 그들이 암살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매우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 됐든지 간에 말이야.’
  소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시온 멤버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기는 불가능한가요? 성배가 정말 무엇인지 이해 못한 사람이라면? 어쨌든 그리스도의 잔은 꽤나 매혹적인 보물일 거예요. 보물 사냥꾼은 별것도 아닌 것을 위해 사람을 죽이곤 하잖아요.”
  티빙이 말했다.
  “내 경험으로는 말이오. 인간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더 노력하는 법이라오. 시온에 가해진 이 폭행에서 난 필사적인 뭔가를 느끼오.”
  랭던이 말했다.
  “레이 경, 이런 논쟁은 모순입니다. 왜 가톨릭 성직자들이 문서를 찾아내서 없애려는 수고를 하려고 시온 멤버들을 살해하겠습니까? 어쨌든 그 사람들은 문서가 가짜 증언이라고 믿고 있는데요.”
  티빙이 킬킬 웃었다.
  “로버트, 하버드의 상아탑이 자네를 연약하게 만들었구먼. 그래. 로마에 있는 성직자들은 강력한 믿음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이지. 그리고 그런 믿음 때문에 그들은 어떤 폭풍우라도 헤치고 나갈 수 있어. 그들이 쥐고 있는 믿음과 상반된 문서들을 포함해서 말일세. 하지만 나머지 세계는 과연 어떨까?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은 어쩌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악함을 보고, ‘오늘날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외치는 사람은 어떨까? 교회의 사제가 아이들을 성추행한 것을 덮어씌우느라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에 관해 진실을 얘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그 같은 교회의 추문을 보고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나. 로버트? 만일 설득력 있는 과학적인 증거가 나와서,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시각이 정확하지 않다고 얘기한다면? 우리가 들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가장 많이 팔린 허구일 뿐이라면 말일세.”
  랭던은 대답하지 않았다. 티빙이 계속 말을 이었다.
  “문서가 세상에 노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네에게 말한 것뿐일세. 바티칸은 이천 년 역사에서 전례 없는 믿음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네.”
  긴 침묵 후에 소피가 말했다.
  “만일 이 일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면, 왜 이제 와서야 행동을 취한 것일까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요. 시온은 숨겨진 상그리엘 문서를 지키고 있었어요. 하지만 교회를 즉시 위협하거나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잖아요.”
  티빙은 불길한 한숨을 내쉬고 랭던을 응시했다.
  “로버트, 자네는 시온의 마지막 책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랭던은 그 생각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티빙이 말했다.
  “느뵈양. 교회와 시온은 수년 동안 암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교회가 시온을 공격하지 않고, 시온은 상그리엘 문서들을 공개하지 않고 숨겨 둔다는 거였소. 하지만 시온의 역사 일부는 비밀을 밝힐 계획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어떤 구체적인 날이 오면, 시온은 침묵을 깨고 상그리엘 문서들을 세상에 알려 궁극적인 승리를 취할 계획이었지. 산 꼭대기 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외치는 거요.”
  소피는 말없이 티빙을 응시했다. 마침내 그녀도 자리에 앉았다.
  “그럼 레이 경은 그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가 그것을 알았다?”
  “추측일 뿐이오. 하지만 너무 늦기 전에 성배 문서를 찾아내려고, 교회가 공격을 취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가능해요.”
  랭던은 티빙의 추론이 불편했다.
  “교회가 시온이 정한 날짜를 구체적으로 알아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못하겠는가?교회가 시온 멤버들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가정하면, 확실히 시온의 계획도 알아낼 수 있었을 걸세. 만일 교회가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미신은 최선의 방책을 취하게 했을 걸세.”
  “미신이라니요?”
  소피가 물었다.
  “예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현재 커다란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네. 최근에 천 년이 지나갔고, 그걸로 이천 년에 걸친 물고기자리의 시대는 끝이 났어요.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 물고기 자리의 이상은 ‘인간은 더 높은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오. 그래서 지난 이천 년은 강렬한 종교의 시대였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물병자리에 들어서고 있어요. 물을 가진 자라는 뜻이지. 물병자리의 이상은 ‘인간은 진실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 라고 주장하는 것이오. 이 같은 이념의 변동은 엄청난 것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오.”
  랭던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점성학의 예언은 그에게 그다지 많은 흥미와 신뢰를 불러이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그것을 강하게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회는 이런 과도기를 ‘말일’이라고 부릅니다.”
  소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종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랭던이 대답했다.
  “아니오. 그것은 보통 오해요. 많은 종교들이 말일에 대해서 떠들지만, 그것은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현재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거요. 그리스도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 물고기자리는 지난 이천 년 동안이었소. 얼마 전에 이천 년이 지났고, 우리는 이제 물병자리로 들어서게 된 거요. 말일이 도래한 거지.”
  티빙이 덧붙였다.
  “많은 성배 역사가들은 시온 수도회가 정말로 비밀을 밝힐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그 시점은 역사에서 상징적으로 적절한 때일 것이라고 믿었어요. 나를 포함해서 시온을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조직의 발표가 지난 천 년이 끝나는 시점과 정확하게 일치할 거라고 기대했었다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물론 로마 달력이 점성학의 이정표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오. 그래서 예측을 하는 데 분명히 오차 범위가 있을 거요. 교회에서 정확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내부 정보를 수립했는지 아닌지. 점성학 예언에 교회가 불안진 것인지 아닌지, 난 모르오. 어찌 됐든 그것은 무형의 것이오. 어느 쪽 시나리오도 교회가 시온에 선제 공격을 취할 동기가 되어 줄 수 있어요.”
  티빙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날 믿어요. 교회가 성배를 찾아내면, 그들은 그것을 파괴할 것이오. 축복받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기록과 그 유산도 함께 말이오.”
  티빙의 눈매가 무거움을 더했다.
  “상그리엘 문서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증거도 사라지는 것이오. 교회는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고, 역사를 다시 쓰겠지. 과거는 영원히 지워질 것이오.”
  소피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십자 모양의 열쇠를 꺼내 티빙에게 내밀었다.
  티빙은 열쇠를 받아 조사했다.
  “이런 세상에나, 시온의 문장이로군! 이걸 어디서 났소?”
  “오늘 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주었어요.”
  티빙은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어루만졌다.
  “교회로 들어가는 열쇠?”
  소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쐐기돌에 근접하는 열쇠예요.”
  티빙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능했다.
  “불가능해! 어느 교회를 빠뜨렸을까? 난 프랑스의 모든 교회를 조사했다오!”
  소피가 말했다.
  “그건 교회에 있지 않았어요. 스위스 안전금고 은행에 있었어요.”
  흥분하던 티빙의 안색이 누그러졌다.
  “쐐기돌이 은행에?”
  “지하금고”
  랭던이 덧붙였다.
  티빙은 머리를 격력하게 저었다.
  “은행의 지하금고? 그건 불가능해. 쐐기돌은 장미의 표식 아래 묻혀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
  랭던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장미가 상감된 장미목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었어요.”
  티빙은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자네, 쐐기돌을 보았나?”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을 찾아갔었어요.”
  티빙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했다.
  “친구들,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해. 쐐기돌이 위험에 처해 있어! 우린 그걸 보호할 의무가 있네. 다른 열쇠들이 또 있다면 어떡하지? 살해된 집사들에게서 훔쳐냈다면? 자네들처럼 교회도 은행에 가서……”
  소피가 말을 막았다.
  “그럼 그들은 너무 늦은 거예요. 우리가 쐐기돌을 치워 놨거든요.”
  “뭐라고! 숨겨진 장소에서 쐐기돌을 옮겨 놓았다고?”
  랭던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쐐기돌은 잘 감춰져 있습니다.”
  “아주 잘 숨겨 놓았기를 바라네!”
  웃음을 억제하며 랭던이 말했다.
  “사실 소파 밑을 레이 경이 얼마나 자주 청소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빌레트 성 바깥에서는 바람이 심해졌다. 사일래스가 창문에서 허리를 낮출때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춤을 추었다. 대화의 많은 부분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쐐기돌이라는 단어는 유리창 너머로 자주 들려왔다.
  ‘쐐기돌은 건물 안에 있다.’
  스승의 말이 새롭게 생각났다.
  ‘빌레트 성으로 들어가서 쐐기돌을 가져와라. 누구도 해쳐선 안 된다.’
  랭던과 나머지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나가면서 서재의 불을 껐다. 먹이를 살금살금 뒤쫓는 표범이 된 기분으로 사일래스는 유리 창문으로 기어 올라갔다. 창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사일래스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닫았다. 다른 방에서 새나오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사일래스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홀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63

  콜레 부관은 레이 티빙의 거대한 저택을 올려다보며 혼자 서 있었다.
  ‘고립되어 있고 어두운 곳이다. 숨기에 딱 좋은 장소로군.’
  콜레는 여섯 명의 요원들이 긴 담장을 따라서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요원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저택을 둘러싸는 데는 몇 분도 안 걸릴 터였다. 콜레의 요원들이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랭던은 더 이상 숨을 장소를 찾지 못할 것이다.
  콜레는 파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파슈는 그리 즐거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랭던의 꼬리를 잡았다고 왜 아무도 내게 얘기하지 않았나?”
  “반장님은 통화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콜레는 파슈에게 주소를 말했다.
  “이곳은 영국 국적을 가진 티빙이라는 사람의 땅입니다. 랭던은 꽤 먼 거리를 운전해 여기까지 왔고, 차량은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문 안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강제로 들어간 흔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랭던은 집주인을 사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슈가 말했다.
  “내가 그리고 가겠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게. 이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네.”
  콜레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반장님, 반장님이 오시는 데 이십 분 정도는 걸릴 텐데요! 우리는 즉시 행동해야만 합니다. 제가 랭던을 잡겠습니다. 지금 총 여덟 명의 요원들과 함께 있는데, 네 명을 라이플로 무장했고, 나머지는 권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리게.”
  “반장님, 랭던이 여기에서 인질이라도 잡으면요? 우리를 보고 맨발로 도주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제 요원들은 출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콜레 부관, 내가 도착할 때까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게. 이건 명령일세.”
  파슈는 전화를 끊었다.
  콜레는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반장은 자기가 체포해서 점수를 따고 싶은 거야.’
  미국인 얼굴을 텔레비전에 도배해 놓은 후에 반장은 자기 얼굴도 같이 내보내고 싶은 것이다. 콜레의 역할은 두목이 나타나 상황을 수습할 때까지 그저 요새를 지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서, 콜렌는 반장이 왜 범인의 체포를 보류하라고 하는지 두 번째 가정을 떠올려보았다.
  ‘손실 통제.’
  용의자의 체포를 주저하는 일은 용의자의 죄가 점점 불확실해질 때 발생한다.
  ‘랭던이 무죄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자기가 생각해도 이 가정은 놀라웠다. 로버트 랭던을 체포하기 위해서 파슈 반장은 지금까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였다. 비밀 감시작업, 인터폴, 그리고 텔레비전까지 끌어들였다. 저명한 미국인을 살인자로 만들어 그의 얼굴을 모든 프랑스 텔레비전에 올려놓는 일이 실수였다면, 위대한 브쥐 파슈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파슈가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면, 콜레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한 명령이 이해되었다. 파슈가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은 무고한 영국인의 사유지에 폭풍처럼 치고 들어가서, 총 끝에 랭던을 세우는 일일터였다.
  게다가 만일 랭던이 무죄라면 이 사건의 가장 이상한 모순도 설명이 된다. 희생자의 손녀인 소피 느뵈는 왜 용의자의 탈출을 도왔을까? 랭던이 억울하게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소피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파슈는 온갖 종류의 설명을 단정적으로 늘어놓았다. 소니에르의 유일한 상속자인 소피가 상속받을 돈을 노리고, 비밀 연인인 로버트 랭던을 설득해 소니에르를 살해했다는 가정도 거기 들어있었다. 소니에르가 이를 눈치 챘기 때문에 경찰에게 ‘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라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주장이었다. 콜레는 이 사건에서 분명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소피 느뵈는 굉장히 강직한 성격이어서, 반장이 상상한 그런 더러운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요원 한 명이 달려왔다.
  “부관님? 차 한대를 발견했습니다.”
  콜레는 요원을 따라 45미터 정도를 내려갔다. 요원은 도로 건녀편의 넓은 노견을 가리켰다. 검은색 아우디 승용차가 안 보이게 덤불 속에 주차되어 있었다. 렌터카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달려 있었다. 콜레는 자동차 후드에 손을 얹었다. 아직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콜레가 말했다.
  “랭던이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분명하군. 렌터카 회사에 전화 걸어서, 저 차가 절도 차량인지 조사해 보게.”
  “예.”
  담장 쪽에서 다른 요원 하나가 콜레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요원은 콜레에게 야간용 쌍안경을 건넸다.
  “부관님, 이걸 좀 보십시오. 저택의 차도, 제일 끝부분 근처의 작은 숲입니다.”
  콜레는 쌍안경을 언덕 쪽으로 향하게 한 뒤, 상을 맞추기 위해 다이얼을 조절했다. 서서히 녹색의 형체가 초점에 들어왔다. 차도가 흰 부분을 천천히 따라가자 작은 나무 숲이 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는 것뿐이었다. 푸른 초목 속에 장갑 트럭 한 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콜레가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을 떠나도록 승인한 트럭과 동일한 것이었다. 콜레는 기이한 우연의 일치이길 기도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트럭으로 랭던과 느뵈가 은행을 빠져나간 듯합니다.”
  요원이 말했다.
  콜레는 말이 없었다. 콜레는 바리케이드 앞에 멈춰 섰던 장갑 트럭의 운전사를 떠올렸다. 롤랙스 시계. 떠나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트럭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 결코 조사할 수가 없었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은행에 있는 누군가가 소피와 랭던의 행보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누가? 왜?’
  콜레는 이 때문에 파슈가 아직 행동을 취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어쩌면 단순히 랭던과 소피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반장이 알게 됐는지도 모른다.
  ‘랭던과 느뵈가 저 장갑 트럭으로 도착했다면, 이 아우디를 몰고 온 사람은 대체 누구란 거지?’
  남쪽 수백 킬로미터 아래에서는 전세를 낸 비치크래프트 바론58이 티레니아 바다를 지나 북쪽을 향해 날고 있었다. 창공은 고요했지만, 멀미 봉투를 붙잡고 앉은 아링가로사 주교는 즉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리와의 통화 내용은 주교가 예상하던 바가 아니었다.
  작은 객실에 홀로 앉아서, 아링가로사는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를 돌렸다. 그리고 덮쳐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은 심히 잘못되었어.’
  아링가로사는 눈을 감으면서 브쥐 파슈가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게 되길 빌었다.

64

  나무 상자를 무릎에 얹고 티빙은 침대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뚜껑에 섬세하게 상감된 장미를 찬탄의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이하고 마술 같은 밤이 될 거야.’
  “뚜껑을 열어요.”
  소피가 랭던과 함께 티빙 앞에 서서 속삭였다.
  티빙은 미소를 지었다.
  ‘날 몰아붙이지 말게나.’
  쐐기돌을 찾아 수십 년을 허비한 티빙으로서는 이 순간의 1백만 분의 1이라도 음미하고 싶었다. 상감된 장미의 질감을 느끼면서 티빙은 손바닥으로 상자의 뚜껑을 쓸었다.
  “장미로군.”
  티빙이 속삭였다.
  ‘장미는 막달레나이고, 막달레나는 성배지. 장미는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기도 하지.’
  티빙은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수년 동안 프랑스 전역의 성당과 교회들을 찾아다녔다. 특별한 접근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장미 무늬 창문 아래에 있는 수백 개의 아치를 조사하고, 암호화된 쐐기돌이 있는지를 찾았다.
  ‘클레 드 부트, 장미의 표식 아래에 있는 돌.’
  티빙은 천천히 빗장을 풀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마침내 티빙의 눈이 안의 내용물에 닿았을 때, 티빙은 즉시 그것이 쐐기돌임을 확신했다. 티빙은 문자가 박힌 다이얼들이 서로 연결된 석조 원통을 응시했다. 이 장치는 놀랍게도 어딘지 낯이 익었다.
  “다 빈치의 일기를 보고 디자인한 거예요. 할아버지는 취미로 이것들을 만들곤 했어요.”
  ‘물론이야.’
  티빙은 깨달았다. 크립텍스의 스케치와 청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성배를 찾는 열쇠가 이 돌 안에 들어 있다.’
  티빙은 무거운 크립텍스를 상자에서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원통을 어떻게 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운명이 그 안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세월 실패를 맛본 매순간마다, 티빙은 자신의 삶을 건 성배 탐험이 과연 보상받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이제 그런 의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티빙은 성배 전설의 기초에 관한 오래된 구절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성배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성배가 너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믿을 수 없게도 성배를 찾아낼 열쇠가 그의 현관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소피와 티빙이 크립텍스를 가지고 식초와 다이얼, 패스워드가 무엇일까 얘기하는 동안, 랭던은 장미목 상자를 조명이 밝은 탁자로 가져갔다. 상자를 좀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다. 티빙이 방금 말한 뭔가가 랭던의 마음을 지나가고 있었다.
  ‘성배를 찾아낼 열쇠는 장미의 표식 아래 숨어 있다.’
  랭던은 상자를 들어올려 불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상감으로 된 장미 문양을 조사했다. 목공예나 목조가구 쪽에 전문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스페인 수도원의 타일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떨어진 자리에 수도승들이 휘갈겨쓴 성스러운 글자들이 보였던 것이다.
  랭던은 다시 장미를 보았다.
  ‘장미 아래에.’
  ‘서브 로사.’
  ‘비밀.’
  홀 쪽에서 뭔가가 움직인 것 같아 랭던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둠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티빙의 집사가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랭던은 다시 상자로 돌아섰다. 랭던은 혹시 장미를 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장미 문양이 들어간 부위의 부드러운 가장자리를 쓸어보았다. 하지만 장인의 기술은 완벽했다. 장미가 들어앉은 자리와 장미 문양 사이에는 오직 레이저 날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랭던은 상자를 열고 뚜껑의 안쪽을 조사했다. 부드러웠다. 하지만 상자의 위치를 바꾸자, 뚜껑 안쪽 정확히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랭던은 뚜껑을 닫고 위쪽의 장미를 조사했다. 위쪽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뚫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군.’
  상자를 탁자 위에 놓고 랭던은 방을 둘러보았다. 종이 뭉치 사이에 끼워진 클립이 눈에 들어왔다. 랭던은 클립을 빼들고 다시 상자를 열어 구멍을 관찰했다. 랭던은 클립을 펴서, 끝을 구멍으로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가볍게 밀어 보았다. 별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 탁자 위로 뭔가 떨어졌다. 랭던은 뚜껑을 다시 닫았다. 퍼즐 조각 같은 나무 조각 하나가 탁자 에 떨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나무로 만든 장미 문양이었다. 뚜껑에 상감되어 있던 장미 문양이 튕겨져 나와 책상에 떨어진 것이다.
  할 말을 잃은 채, 랭던은 장미가 박혀 있던 뚜껑의 홈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그가 결코 본 적이 없는 언어로 네 줄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필기체였다.
  ‘셈 족의 언어 같은데, 알아볼 수가 없군!’
  랭던은 생각했다.
  그때 머리에 갑작스러운 타격을 입는 바람에 랭던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랭던은 쓰러지면서, 순간 권총을 들고 자기 몸 위로 떠도는 창백한 유령을 보았다.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캄캄했다.

65

  그 동안 법을 집행해 왔지만, 소피 느뵈는 총구 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었다. 믿기 어렵게도, 소피가 보고 있는 총은 거대한 몸집에 길고 하얀 머리를 가진 알비노의 창백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알비노는 영혼이 떠난 위협적인 눈빛으로 소피를 쳐다 보았다. 모로 된 헐렁한 옷을 걸치고, 그 위에 밧줄을 맨 사내는 중세의 성직자 같았다. 소피는 이 사내가 누구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티빙의 정확한 의혹에 존경심이 일었다.
  “내가 무엇을 찾아 여기에 왔는지 알 것이오.”
  공허한 목소리로 사내가 말했다.
  소피와 티빙은 알비노인 수도승이 시키는 대로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침대의자에 앉았다. 랭던은 바닥에 누워 신음소리를 냈다. 사내의 눈이 즉시 티빙의 무릎 위에 있는 쐐기돌로 향했다.
  티빙의 어조는 경건했다.
  “자넨 이것을 열 수 없을 걸세.”
  “내 스승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이시오.”
  티빙과 소피 사이에 총을 겨누고 수도승은 쐐기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소피는 티빙의 집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집사는 로버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티빙이 물었다.
  “자네 스승이 누구인가? 아마 우리는 돈으로 해결을 볼 수 있을 걸세.”
  “성배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사내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피를 흘리고 있구먼. 그리고 다리를 절고 있군 그래.”
  수도승의 오른쪽 발목을 보고 티빙이 차분하게 말했다. 다리를 타고 한줄기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티빙 옆에 세워져 있는 알루미늄 목발을 가리키며 사내가 대꾸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요. 이제 쐐기돌을 내게 건네시오.”
  “자네, 쐐기돌에 대해서 알고 있기나 한 건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티빙이 말했다.
  “내가 뭘 알고 있는지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천천히 일어서서 내게 건네시오.”
  “나 같은 인간에게 일어서는 일은 버거운 일이라네.”
  “잘됐군. 아무도 움직이지 마시오.”
  티빙은 오른손으로는 목발 하나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쐐기돌을 잡았다.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무거운 원통을 왼쪽 손바닥에 쥐고, 불안정하게 오른쪽 목발에 몸을 기댔다.
  사내가 권총을 곧바로 티빙의 머리에 겨누고,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소피는 수도승이 석조 원통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었다.
  티빙이 말했다.
  “자넨 성공하지 못할거야. 오직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만이 이 돌을 열 수 있거든.”
  ‘오직 신만이 가치 있는 자를 판단하신다.’
  사일래스는 생각했다.
  팔을 흔들거리며 목발을 짚은 티빙이 말했다.
  “이건 꽤 무겁다네. 빨리 받지 않으면, 떨어뜨릴지도 모르겠네.”
  노인은 위험하게 팔을 휘청거렸다.
  사일래스는 돌을 받아 들기 위해 재빨리 앞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목발을 짚은 노인이 균형을 잃었다. 알루미늄 목발이 아래로 미끄러지고, 노인의 몸은 오른쪽으로 쓰러질 듯이 기울었다.
  ‘안 돼!’
  사일래스는 돌을 구하기 위해 총을 아래로 내린 채 몸을 던졌다. 하지만 쐐기돌은 사일래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노인이 오른쪽으로 쓰러지면서, 쐐기돌을 들고 있던 왼쪽 팔을 뒤로 휘둘렀기 때문이다. 노인의 손바닥을 떠난 대리석 원통은 소파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몸 아래로 떨어져 있던 금속제 목발이 가속이라도 붙은 듯이 공기를 가르며 사일래스의 다리로 날아들었다.
  목발은 사일래스가 허벅지에 묶어 둔 말총 허리띠에 정확히 부딪혔고, 사일래스는 고통으로 몸이 찢겨지는 것 같았다. 맨살뿐인 허벅지에 말총 허리띠의 갈고리들이 파고들었다. 몸을 구부린 채 무릎으로 넘어지자 허리띠는 더욱 깊이 살로 파고들었다. 사일래스가 쓰러질 때 귀가 멍할 정도의 소리와 함께 권총이 발사되었지만, 총알은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 박혔다. 사일래스가 총을 들어 다시 쏘기 전에, 소피의 발이 사일래스의 턱을 걷어찼다.
  도로 아래에 있던 콜레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의 혀로간에 막혀 있던 공포가 퍼져 나갔다. 파슈가 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랭던을 찾아내 공을 세우려던 희망은 이미 버린 후였다. 하지만 만일 반장이 변덕을 부려 재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자기를 평가위원회에 세운다면, 자신만 비난 받을 것이 뻔했다.
  ‘개인 집에서 총기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너는 차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콜레는 지나가 버린 기회가 다시 은밀하게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더 꾸물거리고 서 있다간, 아침이면 자기의 모든 경력이 그저 지나간 역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사유지의 철문을 응시하며 콜레는 결정을 내렸다.
  “철문을 매서 잡아당겨라.”
  혼미한 의식 먼 곳에서 로버트 랭던은 총탄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다.그리고 고통에 찬 비명 소리도 들렸다.
  ‘내가 내는 소리인가?’
  굴착기로 두개골 뒤에 구멍을 낸 것 같았다. 주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넨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티빙이 소릴 질렀다.
  집사가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오, 하느님, 맙소사! 이자는 누굽니까? 경찰에 전화하겠습니다”
  “지랄하네! 전화는 그만둬. 좀 쓸모 있게 굴어봐. 이 괴물을 묶을 만한 것을 찾아가지고 오게나.”
  “그리고 약간의 얼음도요!”
  소피가 집사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랭던의 의식은 다시 표류했다. 더 많은 목소리. 움직임. 이제 그는 침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피가 랭던의 머리에 얼음팩을 갖다 얹었다. 그는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랭던은 바닥에 있는 몸뚱어리 하나를 자신이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걸까?’
  송수관 테이프로 입이 틀어막힌 거대한 몸집의 알비노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입은 살짝 벌어졌고, 사내의 오른쪽 허벅지 위의 겉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내 역시 지금 막 그런 꼴이 된 듯했다.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저자는 누구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티빙이 절룩거리며 다가왔다.
  “자넨 최고의 정형외과에서 만든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는 기사에게 구조되었다네.”
  ‘허?’
  랭던은 곧추앉으려고 애를 썼다.
  소피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조금만 더 쉬어요. 로버트.”
  티빙이 말했다.
  “내 신체조건의 불행한 이점을 숙녀분 앞에서 휘둘러 미안하네. 모두들 자네를 과소평가한 것 같구먼.”
  랭던은 침대의자에 앉아서, 수도승 차림의 사내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듬어 보려고 했다.
  “저자는 말총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네.”
  티빙이 설명했다.
  “네?”
  티빙은 갈고리들이 달린 가죽 허리띠가 피에 젖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가리켰다.
  “체벌용 허리띠라네. 저 작자는 저걸 허벅지에 두르고 있었지. 내가 떼어 버렸네.”
  랭던은 머리를 문질렀다. 그도 체벌용 허리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 아셨습니까?”
  티빙이 싱긋 웃었다.
  “기독교는 내 연구 분야지. 로버트. 가진 것을 숨김없이 말해버리는 그런 교파들도 있다네. 이것처럼 말이야.”
  티빙은 목발로 사내의 피에 젖은 겉옷을 가리켰다.
  “오푸스 데이.”
  랭던은 속삭였다. 최근에 보스턴의 저명한 비즈니스맨 몇 사람이 오푸스 데이의 회원이라는 내용을 다룬 방송보도를 본 것이 기억났다. 회사 동료들이 양복 정장 아래에 말총 허리띠를 차고 있던 이들을 공개적으로 고소한 사건이었다. 오푸스 데이의 많은 신도들처럼 이들은  ‘임시’ 단계에 있던 사람이었고, 육체의 고행을 겪지는 않았다. 방송에 나온 사람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아이를 보살피는 아버지였으며, 사회에 깊이 공헌하는 사람이었다. 더 한정된 오푸스 데이 정식 회원들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로 들어가기 전에, 방송은 그저 간단하게 이들의 정신적인 몰입에만 초점을 맞췄다. 정식 회원이란…… 지금 바닥에 누워 있는 저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었다.
  티빙은 피에 젖은 허리띠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왜 오푸스 데이가 성배를 찾으려고 애쓰는 걸까?”
  랭던은 그걸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피로한 상태였다.
  장미목 상자로 걸어간 소피가 불렀다.
  “로버트, 이게 뭐예요?”
  소피는 뚜껑에서 빠져나온 작은 장미 문양을 들고 있었다.
  “상자 뚜껑에 상감되어 있던 장미 조각이 빠져나온 거요. 내 생각에는 장미 조각이 있던 자리에 적힌 글귀가 쐐기돌을 어떻게 여는지 알려줄 것 같소.”
  소피와 티빙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언덕 아래에서 경찰차의 푸른 불빛과 사이렌 소리가 1킬로미터가량 되는 차도를 뱀처럼 휘감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티빙은 얼굴을 찌푸렸다.
  “친구들, 우린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네. 빠를수록 좋겠군.”

66

  콜레와 그의 요원들은 총을 꺼내 들고 레이 티빙의 저택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사람들은 흩어져서 1층에 있는 모든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원들은 화실로 보이는 방에서 탄환 구멍과 싸운 흔적, 소량의 피, 갈고리가 달린 이상한 허리띠, 그리고 쓰다 남은 송수관 테이프를 발견했다. 1층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콜레가 요원을 두 편으로 나누어 지하실과 집 뒤편을 수사하고 있을 때,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층이다!”
  요원들은 2층으로 향하는 넓은 계단으로 달려갔다. 2층의 어두운 침심들과 복도를 확인하면서 요원들은 소리가 나는 방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소리는 기다란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침실에서 새나오는 듯했다. 요원들은 복도의 출입구를 봉쇄하면서 복도를 따라 조금씩 내려갔다.
  마지막 침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콜레는 침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목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그리고 엔진처럼 이상한 중얼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권총을 치켜든 콜레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문짝으로 접근해 전기 스위치를 발견하고 얼른 켰다. 뒤따르는 요원들과 함께 콜레는 방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객실이었다. 손 댄 흔적도 없었다.
  침대 옆, 벽에 붙은 검은색의 전자 계기판에서 털털거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계기판은 저택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일종의 인터콤 시스템 같았다. 콜레는 계기판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계기판에는 이름표가 적힌 대략 열두 개 정도의 버튼이 달려 있었다.
  서재…… 부엌…… 세탁실…… 지하 저장실……
  ‘그럼 차 소리가 어디에서 난 것일까?’
  주인님 치실…… 일광욕실…… 헛간……도서실……
  ‘헛간!’
  콜레는 순식간에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뒷문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요원 한 명과 마주친 콜레는 그를 데리고 저택 뒤쪽에 있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두 사람은 숨도 쉬지 않고 낡은 잿빛의 헛간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콜레는 점점 멀어져 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레는 총을 꺼내 들고 헛간으로 들어가서 불을 찾아 켰다.
  헛간의 오른쪽은 기본적인 작업실이었다. 잔디깎이 기계와 자동 기구들, 정원 손질에 필요한 장비들이 보였다. 눈에 익은 인터콤 계기판도 가까운 벽에 붙어 있었다. ‘객실 2’ 버튼이 눌린 채, 소리를 전송하고 있었다.
  콜레는 돌아섰다.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인터콤을 이용해 우리를 2층으로 꾀어낸 거였구나!’
  헛간의 다른 쪽을 살펴보다가 콜레는 길게 늘어선 마구간의 칸막이들을 발견했다. 말은 없었다. 집주인은 명백히 다른 종류의 마력을 좋아하는 듯했다. 마구간의 칸막이는 멋진 자동차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거기에 있는 자동차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낼 만한 차량이었다. 검은색 페라리. 오래된 롤스로이스,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아스톤 마틴 스포츠 쿠페, 빈티지 포르셰 356.
  제일 마지막 칸은 비어 있었다.
  콜레는 바닥에 기름 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영지를 벗어나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저택의 보안문과 차도를 경찰차 두 대가 막고 있었다.
  “부관님?”
  요원이 마구간 끝을 가리켰다. 헛간의 뒷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뒤로 어둡고 뿌연 등성이들이 펼쳐져 있었다. 콜레는 뒷문으로 달려나가 눈에 띄는 것이 있는지 살폈다. 보이는 것은 멀리 떨어진 숲의 희미한 그림자뿐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골짜기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수십 개의 소방도로들과 사냥길로 얽혀 있을것이다. 하지만 콜레는 자신의 사냥감이 숲으로 달아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요원들을 데려와서 저기 아래로 추적하라고 해. 도망자들은 근처 어딘가에서 이미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거야. 이런 우아한 스포츠카로는 숲속을 돌아다닐 수가 없지.”
  “저, 부관님?”
  요원이 여러 벌의 열쇠들이 매달린 나무못 말판을 가리켰다. 열쇠들에 달린 꼬리표는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다임러……롤스로이스……아스톤 마틴……포르셰……
  마지막 못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비어 있는 못 위에 붙은 이름표를 본 콜레는 자신이 곤경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67

  레인지로버는 자바 블랙 진주색깔로 사륜구동 차량이었다. 표준 트렌스미션에 강화 폴리프로필렌 램프, 브레이크 등에는 클러스터 피팅을 장착했고 운전대는 오른쪽에 있었다.
  랭던은 자신이 운전을 하지 않아서 즐거웠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집사인 레미가 운전대를 잡고 빌레트 성을 뒤로한 채 달빛에서 차량을 운전하는 인상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레미는 작은 언덕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긴 경사를 내려가며 영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레미는 멀리 보이는 들쑥날쑥한 숲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쐐기돌을 껴안은 채 보조석에 앉은 랭던은 뒷좌석에 앉은 티빙과 소피를 돌아보았다.
  “머린 어때요, 로버트?”
  걱정스러운 말투로 소피가 물었다.
  랭던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결 나아졌소. 고마워요.”
  사실은 무척이나 아팠다.
  소피 옆에 앉아 있던 티빙이 어깨 너머로 뒷좌석 짐칸에 구겨진 채 누워있는 수도승을 돌아보았다. 티빙의 무릎에는 수도승이 가지고 있던 권총이 놓여 있었다. 티빙의 모습은 사냥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낡은 사진의 영국인 사냥꾼 같았다.
  “자네가 나타나서 매우 즐겁네, 로버트”
  아주 오랜만에 즐거움을 맛본 사람처럼 티빙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에 연관시켜서 죄송합니다. 레이 경.”
  “어허, 내 인생 전체가 이런 일에 연관되기를 기다려 왔다네.”
  티빙은 앞 창문으로 보이는 긴 관목 울타리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티빙은 뒤에서 레미의 어깨를 두드렸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필요할 때에만 비상 브레이크를 쓰도록 해. 나무 사이로 살짝 지나갔으면 하네. 저택에서 우리를 보게 되는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으니까.”
  레미는 아주 천천히 레인지로버를 울타리 입구로 몰고 갔다. 차가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로 들어가자 달빛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앞에 있는 형체를 구분하려고 애쓰며 랭던은 생각했다. 밖은 컴컴했다. 나뭇가지들이 차량의 왼쪽에 와서 부딪히자, 레미는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그러고는 30미터 정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티빙이 말했다.
  “아주 잘하고 있구먼, 레미. 이제 꽤 벗어났을 거야. 로버트, 거기 구부러진 곳 아래에 있는 작은 파란색 버튼을 누를 수 있겠나? 거기 보이지?”
  랭던은 버튼을 찾아내서 눌렀다.
  조도가 낮은 노란 불빛이 그들 앞의 길을 비추었다.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관목들이 보였다.
  ‘안개등이로군.’
  랭던은 깨달았다. 똑바로 길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숲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빛이 멀리 퍼지지는 못할 것이다.
  티빙이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미, 불이 켜졌네. 우리 목숨은 자네 손에 달려 있어.”
  “어디로 가는 거죠?”
  소피가 물었다.
  “이 길은 숲으로 삼 킬로미터 정도 계속 된다네. 영지를 가로질러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지. 물 웅동이나 쓰러진 나무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오번 고속도로와 별 탈 없이 만나게 될 걸세.”
  ‘별 탈 없이.’
  랭던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무릎에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쐐기돌은 상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 있었다. 뚜껑의 장미문양 조각도 다시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랭던은 장미 조각을 떼어내 그 아래 새겨진 글자들을 좀더 가까이서 조사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랭던은 상자의 빗장을 풀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이때 티빙의 손이 랭던의 어깨 위에 닿았다.
  “참게나, 로버트. 이 길은 어둡고 울퉁불퉁하네. 우리가 어느 것을 망가뜨려도 신은 우릴 구해 주실 걸세. 밝은 데서도 자네가 그 언어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둠에서 더 잘 할 수는 없을거야. 모두 무사히 빠져나가는 데만 신경을 쓰자고. 안 그런가? 곧 자세히 조사해 볼 시간이 생길 걸세.”
  티빙의 말이 옳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랭던은 상자를 다시 닫았다.
  꽁꽁 묵인 수도승이 몸부림치며 신음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험악하게 발길질을 해댔다.
  티빙은 돌아앉아 권총을 겨눴다.
  “네놈이 불평을 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군. 네놈은 내 집으로 침입해서, 사랑하는 내 친구의 머리통에 일격을 가했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자넬 쏠 권리가 있고, 자넬 숲에 던져 놓고 그냥 썩도록 내버려두고 갈 수도 있네.”
  수도승이 조용해졌다.
  “저자를 정말 데려갈 겁니까?”
  랭던이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자넨 살인범으로 몰리고 있어. 로버트. 이 깡패는 자유를 얻기 위한 자네의 티켓이야. 경찰은 내 집까지 쫓아올 정도로 자넬 잡으려고 안달이 나 있네.”
  소피가 말했다.
  “제 잘못이예요. 아마 장갑 트럭에 자동발신 장치가 있었을 거예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경찰이 자네를 찾아낸 것 때문에 내가 놀란 것이 아니야. 날 놀라게 한 것은 오푸스 데이 인물이 자넬 찾아낸 것이네. 자네가 나에게 해준 모든 얘기를 되짚어 봐도, 이 작자가 어떻게 내 집까지 자네를 따라올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어. 혹시 사법경찰이나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에 끈이 있다면 몰라도.”
  랭던도 그 점을 생각했다. 브쥐 파슈는 확실히 오늘밤 일어난 살인사건의 희생양을 찾을 의도가 강해 보였다. 그리고 은행장인 베르네는 네 사람의 살인범이 랭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빼냈다가 다시 경찰에 넘기려 했다. 베르네의 심정 변화는 이해되었다.
  “이 수도승은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니야, 로버트. 이 뒤에 누가 있는지를 알기 전까지, 자네 둘은 위험에 처해 있는 걸세. 좋은 소식은 자네들이 이제 힘있는 위치에 있다는 거지. 내 뒤에 있는 괴물은 정보를 쥐고 있고, 이 괴물을 조종하던 사람은 지금 똥줄깨나 타고 있을 거야.”
  길에 익숙해진 레미가 속력을 냈다. 차는 물을 튀기며 작은 언덕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로버트, 전화기 좀 건네주겠나?”
  티빙이 자동차 계기판 위에 있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랭던이 뒤로 건네주자, 티빙이 번호를 눌렀다. 누군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티빙은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리처드? 내가 깨웠는가? 물론 그렇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구먼. 미안하네. 내게 작은 문제가 생겼어. 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치료를 위해서 레미와 내가 영국으로 가야 할 것 같네. 그래, 사실은 지금 당장. 너무 급하게 알려줘서 미안하구먼. 이십 분 후에 엘리자베스를 준비시켜 줄 수 있겠는가? 그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주게. 그럼 이따가 보세.”
  “엘리자베스?”
  랭던이 물었다.
  “내 비행기야. 여왕의 몸값만큼이나 돈이 들었지.”
  랭던은 완전히 돌아앉아서 티빙을 쳐다보았다.
  “뭔가? 사법경찰 전체가 자네 둘을 쫓고 있는 마당에, 여기 프랑스에 있을 수는 없어. 런던이 훨씬 안전할 거네.”
  소피 역시 티빙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친구들, 여기 프랑스말고 문명화된 세상에서 난 훨씬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네. 거기에다 성배는 영국에 있는 걸로 알려져 있고, 만일 쐐기돌을 풀게 되면, 우리가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지 알려주는 지도를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네.”
  소피가 말햇다.
  “우리를 도우면 큰 위험이 따를 거예요. 앞으로 프랑스 경찰과는 어떤 친분 관계도 맺을 수 없을 텐데.”
  티빙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에서의 볼일은 다 끝났네. 여기엔 쐐기돌을 찾으러 온 것이니까. 이제 일이 끝났으니, 다시는 빌레트 성을 보지 못해도 상관없네.”
  소피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공항 경비를 어떻게 뚫고 지나가죠?”
  티빙은 소리내어 웃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르부르제라는 비행장에서 날아갈 거야. 프랑스 의사들은 날 신경질나게 하거든.그래서 이 주일 마다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날아가지. 확실한 특권을 위해서 양쪽에다 돈을 좀 썼지. 일단 우리가 이륙하면, 영국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사람을 나오게 할지 말지는 자네가 결정하게나.”
  랭던은 갑자기 대사관과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쐐기돌과 장미목 상자에 새겨진 글자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그를 성배로 이끌어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랭던은 성배가 영국에 있다는 티빙의 확신이 진정 맞는지 의아했다. 대부분의 현대 전설은 성배가 영국 어딘가에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성배 이야기기 풍부한 아서왕의 신비스러운 아발론 섬은 영국의 글래스턴베리에 비하면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배가 어디에 누워 있든 간에, 랭던은 자기가 실제로 그걸 찾는 중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그리엘 문서들.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이야기.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
  랭던은 갑자기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짜 세상은 그에게 닿을 수 없는 곳, 물거품이었다.
  레미가 말했다.
  “주인님, 진짜 영국으로 돌아가실 작정입니까?”
  “레미, 자넨 걱정할 필요 없네. 여왕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소시지와 으깬 감자요리에 미각을 맞추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거기서도 자네가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줬으면 싶네. 데번셔에 멋진 빌라를 살 작정이야. 자네 물건을 즉시 몽땅 옮겨 오자고. 모험이야, 레미. 모험이라고!”
  랭던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티빙은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영국에서의 계획을 펼치는 것을 보며, 랭던은 티빙의 열정에 자기 역시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랭던은 유령처럼 창백한 안개등 불빛 사이로 나무들이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들 때문에 랭던 쪽의 사이드 미러는 안쪽으로 살짝 꺾여 있었다. 랭던은 거울에서 소피가 뒷자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예기치 못한 만족감이 솟아올랐다. 자신이 처한 곤경에도 불구하고, 멋진 동료와 함께하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었다.
  몇 분 후에 자신을 쳐다보는 랭던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소피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랭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예, 그럭저럭.”
  다시 물러나 앉는 소피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랭던은 보았다. 그 역시 싱긋 웃고 있었다.
  레인지로버 뒤에 구겨진 채로 처박힌 사일래스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팔은 뒤로 비틀어져 있고, 발목은 삼끈과 송수관 테이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마다 비틀린 어깨에서 고통이 전해졌다. 자기를 체포한 사람이 그나마 말총 허리띠를 떼어내 준 것이 다행이었다.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 때문에, 사일래스는 오직 콧구멍으로만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갇혀 있는 짐칸의 먼지들로 코가 서서히 막히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재채기를 시작했다.
  “저 사람, 숨이 막히는 모양인데요.”
  걱정스러운 어투로 프랑스 운전사가 말했다.
  목발로 사일래스를 후려친 영군인이 돌아앉아서, 차갑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일래스를 내려다보았다.
  “자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구먼. 우리 영국인들은 친구를 위한 연민이 아니라, 적을 위한 연민을 보고 인간의 예의를 판단한다네.”
  영국인은 손을 뻗어 사일래스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테이프를 뜯어내 버렸다.
  사일래스는 입술이 불에 덴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 보내준 공기가 폐로 흘러 들어왔다.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가?”
  영군인이 물었다.
  “난 신의 사업을 위해 일하오.”
  사일래스는 여자가 턱을 걷어차서 입 안에 고여 있던 침과 피를 뱉어냈다.
  “자네는 오푸스 데이에 속해 있지.”
  노인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 하나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오.”
  “왜 오푸스 데이가 쐐기돌을 원하는가?”
  사일래스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쐐기돌은 성배와의 연결고리이고, 성배는 믿음을 보호하기 위한 열쇠였다.
  ‘난 신의 일을 한다. 그 길이 위험에 처해 있다.’
  레인지로버 안에서 발버둥치며 사일래스는 자신이 스승과 주교의 기대를 영원히 저버린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과 연락할 길도 없었고, 일이 틀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저들이 쐐기돌을 가지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성배를 손에 넣을 것이다!’
  숨막히는 어둠에서 사일래스는 기도했다. 몸의 고통으로 인해 자기의 간청이 더욱 간절해지기를 빌었다.
  ‘주여, 기적을! 전 기적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몇 시간 후에, 자신이 기적을 체험하게 되리란 것을 사일래스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소피는 여전히 랭던을 보고 있었다.
  “로버트, 우스운 표정이 방금 당신 얼굴에 지나갔어요.”
  랭던은 소피를 돌아보았다. 그의 턱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심장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생각이 방금 떠올랐던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있을까?’
  “당신 휴대 전화기를 사용해도 되겠소?”
  “지금요?”
  “지금 막 생각난 게 있소.”
  “뭔데요?”
  소피는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파슈가 추적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만약을 위해 일 분 안에 끝내요.”
  소피는 랭던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미국으로는 어떻게 거는 거요?”
  “요금을 물어야 할 거예요. 내 전화기로는 대서양을 건너지 못해요.”
  랭던은 0번을 눌렀다. 오늘 밤 내내 그에게 수수께끼였던 질문에 대한 답이 다음 60초
안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68

  뉴욕에 있는 편집장 조나스 파우크만은 침대로 기어들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의 집에 전화를 걸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군.’
  조나스는 투덜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교환원의 목소리가 물었다.
  “로버트 랭던 씨의 수신자 부담 전화를 받으시겠습니까?”
  어리둥절한 조나스는 방의 불을 켰다.
  “어라…… 물론입니다, 좋아요.”
  딸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나스?”
  “로버트? 깨우는 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전화비까지 물려?”
  “조나스, 미안해요. 짧게 얘기해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내가 당신에게 준 원고 말입니다. 당신 혹시……”
  “로버트, 미안하네. 이번 주말에 편집을 해서 자네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했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진짜 바빴어. 다음 주 월요일에는 꼭, 약속하지.”
  “편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천사를 부탁하려고 내게 말없이, 혹시 원고 사본을 다른 사람에게 보냈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
  파우크만은 망설였다. 여신숭배의 역사를 탐구하는 랭던의 새로운 원고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여러 내용이 있었다. 이부분들은 일부 사람들의 눈썹을 치켜뜨게 할 만한 그런 내용이었다. 랭던의 원고가 논리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다른 책들의 내용을 인용했다 하더라도, 파우크만은 이름 있는 역사가들과 예술가들의 추천 없이는 랭던의 급진적인 원고를 출간할 의도가 없었다. 파우크만은 예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10인을 골라, 그들에게 책 표지에 쓸 짧은 추천사를 써줄 수 있겠냐는 공손한 편지와 함께 원고의 사본을 보냈던 것이다. 파우크만의 경험으로 볼 때, 추천인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보는 것 만으로도 펄쩍 뛸 만한 인물들이었다.
  랭던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조나스? 내 원고를 내보냈죠, 그렇죠?”
  랭던이 이 일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감을 잡고, 파우크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원고는 깨끗하다네, 로버트. 난 멋진 추천사를 가지고 자넬 놀라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잠시 말이 없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관장에게도 한 부 보냈습니까?”
  “자네 원고는 그 사람의 루브르 수집품을 여러 차례 참고로 하고 있었어. 그의 저서들이 참고 문헌 목록에도 올라 있고 말이야.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은 해외판매 측면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할 거라고. 소니에르 씨한테는 누어서 떡 먹기란 말이야.”
  침묵이 꽤 길었다.
  “사본을 언제 보냈습니까?”
  “한 달 전쯤에. 그리고 자네가 곧 파리에 가게 될 것 같으니까. 둘이서 얘기를 나눠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 그가 자네에게 만나자고 전화했던가?”
  눈을 문지르면서 파우크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잠깐만, 자네 이번 주말에 파리에 있기로 되어 있지 않나?”
  “지금 파리에 있습니다.” 
  파우크만은 똑바로 앉았다.
  “파리에서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고 있는거야?”
  “내 인세에서 요금만큼 빼요. 조나스. 소니에르한테서 별 얘기 없습니까? 그가 내 원고를 맘에 들어하던가요?”
  “나야 모르지. 그로부터는 아직 연락을 못 받았으니까.”
  “그럼, 조나스. 긴장하지 말아요. 그만 끊어야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군요. 고맙습니다.”
  “로버트…..”
  하지만 랭던은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의혹감에 머리를 저으며 파우크만은 머리를 흔들었다.
  ‘작가들이란 정신이 온전한 작고도 괴짜이긴 마찬가지야.’
  레인지로버 안에서 레이 티빙은 킬킬 웃었다.
  “로버트, 자네 지금 비밀조직을 연구한 원고를 썼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자네 편집장이 그 사본을 비밀조직에 보냈다고?”
  랭던은 풀이 죽었다.
  “그런 모양입니다.”
  “잔인한 우연의 일치로구먼. 친구.”
  ‘우연의 일치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랭던은 알고 있었다. 자크 소니에르에게 여신숭배에 관한 원고의 추천사를 부탁하는 것은 타이거 우즈에게 골프책의 추천사를 부탁하는 것과 같았다. 더욱이 여신숭배에 관한 책이라면 시온 수도회를 언급해야만 했다.
  여전히 킬킬거리며 티빙이 말했다.
  “여기 백만 달러짜리 질문이 있네. 시온에 대한 자네의 입장은 우호적인가, 비우호적인가?”
  랭던은 티빙의 진짜 의도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왜 시온 수도회가 아직도 상그리엘 문서를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일부는 오래 전에 세상과 함께 문서의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시온의 행동에 대해 저는 아무런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단 뜻이구먼.”
  랭던은 어깨를 움츠렸다. 티빙은 명백히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저는 그저 시온의 역사를 제시하고, 시온을 현대의 여신숭배 단체, 성배의 수호자, 고대 문서의 파수꾼들로 묘사했을 뿐 입니다.”
  소피가 랭던을 쳐다보았다.
  랭던은 주춤했다. 언급했다. 그것도 아주 자주.
  “난 시온이 상그리엘 문서를 그렇게 오랫동안 보호할 수 있었던 예로, 쐐기돌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소피는 놀라는 것 같았다.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 그 말이 이제 이해되네요.”
  랭던은 실제로 원고에 있는 뭔가가 소니에르의 관심을 끌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소피와 단둘이 있을 때 의논하고 싶었다.
  소피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파슈 반장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군요.”
  “뭘요?”
  “할아버지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었잖아요.”
  “난 그런 적이 없소! 내 편집장이 보낸 거요.”
  “생각해 봐요, 로버트. 만일 파슈 반장이 당신 편집장이 보낸 원고의 봉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이 그걸 보냈다고 결론지을 거예요. 더욱 심하게 얘기하자면, 당신이 그걸 손수 전달하고서 거짓말을 했다고 믿을 수도 있어요.”
  레인지로버가 르 부르제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레미는 비행장 제일 끝에 있는 작은 격납고로 차를 몰고 갔다. 그들이 다가가자, 구겨진 카키색 군복을 입은 헝클어진 머리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격납고에서 나왔다. 남자가 주름 접힌 거대한 금속문을 밀어내자, 늘씬한 하얀색 제트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랭던은 반짝이는 비행기의 동체를 바라보았다.
  “저게 엘리자베스입니까?”
  티빙이 빙긋이 웃었다.
  “지랄 같은 해저터널을 이겨버려야지.”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헤드라이트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거의 준비되었습니다. 선생님.”
  남자는 영국식 억양을 쓰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너무 급작스럽게 연락을 주셨고,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더니 남자는 말을 멈췄다. 남자는 소피와 랭던을 쳐다본 뒤 티빙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 동료들과 나는 런던에 급한 용무가 있다네. 시간이 없어.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나.”
  티빙은 얘기를 하면서, 차에서 권총을 꺼내 랭던에게 건넸다.
  무기를 본 비행기 조종사의 눈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티빙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 외교 비행은 오직 선생님과 선생님의 집사만 모시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손님들은 태울 수가 없습니다.”
  티빙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리처드, 이만 파운드와 장전된 저 총이라면, 자넨 내 손님들을 태울 수 있을 걸세.”
  티빙은 레인지로버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뒤에 있는 불행한 친구도.”

69

  호커 731의 쌍발 엔진 가렛 TFE-73이 불을 뿜자, 비행기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땅을 박차고 치솟았다. 비행기 창문으로 부르제 비행장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 나라에서 도망치고 있다.’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며 소피는 생각했다. 그 동안은 파슈와의 게임에서, 자기의 행동을 방위청에 어떻게든 정당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서류도 없이 수배자에다 인질까지 타국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정당성의 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지금 막 그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음속의 속도로.
  ‘나는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절박한 소망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 기회의 창이 닫혔다는 것을 소피는 깨달았다.
  소피는 랭던, 티빙과 함께 객실 앞쪽에 앉아 있었다. 객실 문에 붙은 금빛 메달에는 ‘팬 제트 엘리트 디자인’ 이라는 회사가 객실을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었다. 의자는 바닥의 트랙에 나사가 달려 있어서 회전시킬 수가 있었다. 의자를 돌리면 사각 나무탁자 둘레로 의자들이 모여 작은 회의실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품위 있는 실내 디자인은 객실 뒤쪽 화장실 근처의 살벌한 상황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티빙의 집사 레미는 권총을 손에 들고 앉아, 발 밑에 짐짝처럼 묶여 있는 피투성이 수도승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막 성교육을 시작하려는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목소리로 티빙이 입을 열었다.
  “쐐기돌에 관심을 쏟기 전에, 내가 몇 마디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 친구들, 나는 그저 이 여행의 손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매우 영광일세. 하지만 성배를 찾아 일생을 보낸 사람으로서,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든지 간에 자네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막 걸음을 내디뎠다고 경고해 주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느뵈양, 아가씨의 할아버지는 성배에 대한 비밀을 살리기 위해 이 크립텍스를 아가씨에게 주었소.”
  “예.”
  “이것이 어디로 아가씨를 이끌든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겠죠. 이해해요.”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두 번째 동기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가족에 관한 진실.’
  쐐기돌이 그녀의 과거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랭던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좀더 개인적인 뭔가가 이 수수께끼와 깊이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품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크립텍스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고, 지난 세월동안 그녀를 엄습했던 공허함을 치료할 수 있는 뭔가를 줄 것만 같았다.
  “아가씨의 할아버지와 세 사람이 오늘 밤에 죽었어요. 그들은 죽음으로써 이 쐐기돌을 교회로부터 지켜냈소. 오늘 밤 오푸스 데이가 이것을 손에 넣을 뻔했지. 나는 이 쐐기돌에 이례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아가씨가 이해하기를 바라오. 아가씬 횃불을 건네받은것이오. 이천 년 동안 타오른 불꽃이 꺼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 횃불은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것이오.”
  티빙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장미목 상자를 응시했다.
  “이 일에 아가씨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나도 알아요. 느뵈양, 하지만 여기에 걸린 일을 생각하면 이 책임을 완전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넘겨야만 할 거요.”
  “할아버지는 크립텍스를 제게 주셨어요. 할아버진 제가 그 책임을 잘 소화해 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티빙은 고무된 표정이었지만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좋아요. 강한 의지가 필요하지. 하지만 만일 쐐기돌을 제대로 열게 되면, 더 큰 시련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가씨가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어떻게요?”
  “아가씨가 성배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를 갑자기 손에 쥐게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 순간, 아가씨는 역사를 영원히 바꿔 놓을 수 있는 진실을 갖게 되는 거요. 아가씨는 사람들이 수백년 동안 찾아 헤맨 진실의 수호자가 되는 거요. 그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책임과 마주하게 된단 뜻이오. 그 일로 한 개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아가씨에게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는 거요.”
  소피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제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인지 확신이 없어요.”
  티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없다고?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비밀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보호해 왔던 조직.”
  티빙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온? 하지만 어떻게? 조직은 오늘 밤 와해됐소. ‘참수당했다.’ 바로 아가씨가 적절하게 표현했지. 시온에 구멍이 뚫린 것이 도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직 내부의 스파이에 의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남은 진실은 누군가 조직에 접근해서 최고위층 네 사람의 신분을 알아냈다는 것이오. 이 시점에서는 조직의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 누구도 신뢰할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랭던이 물었다.
  “로버트, 자네도 나만큼이나 잘 알지 않나. 시온은 진실을 영원히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았지. 그들은 비밀을 공유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세상이 이 진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는 때를 말이야.”
  “그럼 레이 경은 그 순간이 왔다고 믿는 겁니까?”
  “물론이지. 이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어. 모든 역사적인 표식이 한자리에 있으니까. 그리고 시온이 그들의 비밀을 곧 공개할 의도가 아니었다면, 왜 교회가 이제야 공격을 했겠나?”
  소피가 끼어들었다.
  “저 수도승은 자기 목적에 대해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요.”
  “수도승의 목적이 바로 교회의 목적이야. 문서를 파괴해서 위대한 거짓말을 계속 보존하자는 거지. 오늘 밤에 교회는 다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왔어요. 느뵈 양, 시온은 당신을 믿은 거요. 성배를 구하는 임무는 세상과 진실을 공유하려던 시온의 마지막 소원을 수행하는 일도 분명 포함하고 있는거요.”
  랭던이 끼어들었다.
  “레이 경, 지금 결정을 내리라고 소피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작 한 시간전에 상그리엘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겁니다.”
  티빙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나쳤다면 사과하리다. 느뵈양, 분명히 나는 그 문서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오. 하지만 결국 결정은 아가씨에게 달려 있소. 난 그저 우리가 쐐기돌을 성공적으로 열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가씨가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길 뿐이오.”
  소피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 경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배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성배가 너를 찾을 것이다.’ 성배가 어떤 이유로든 저를 찾아내리라고 믿어요. 때가 되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티빙과 랭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피는 장미목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70

  빌레트 성의 화실에 선 콜레 부관은 꺼져 가는 벽난로의 불을 바라보며 의기소침해 있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파슈 반장은 옆방에 있었다.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자취를 감춘 레인지로버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헛된 시도를 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지금쯤이라면 어디로든 달아났겠지.’
  콜레는 생각했다.
  파슈의 직접적인 지시를 어기고, 랭던마저 두 번째로 놓친 지금, 콜레는 PTS가 바닥에서 탄환 구멍을 찾아낸 것이 그나마 고마웠다. 총알이 발사됐다는 콜레의 주장은 적어도 입증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파슈의 기분은 사나웠다. 이 먼지가 가라앉을 때쯤이면, 바로 불똥이 튈 거라고 콜레는 생각했다.
  불행히도 성 안에 있는 증거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관련됐는지 아무런 단서도 주지 못했다. 밖에 있는 아우디 승용차는 가짜 신용카드와 가명으로 빌린 거였다. 그리고 차에 있는 지문은 인터폴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었다.
  다급한 표정으로 한 요원이 황급히 들어왔다.
  “파슈 반장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콜레는 타고 있는 장작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전화 통화중이시네.”
  방으로 들어서며 파슈가 말을 잡아챘다.
  “통화는 끝났어. 무슨 용건인가?”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앙드레 베르네로부터 중앙본부에 연락이 왔답니다. 그 사람이 반장님과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는데요. 자기 진술을 바꾸고 있습니다.”
  “흠?”
  파슈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제야 콜레는 고개를 들었다.
  “랭던과 느뵈가 오늘 밤 자기 은행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인정한답니다.”
  파슈가 말했다.
  “우리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한 거래?”
  “반장님께만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수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던가?”
  “뉴스에 자기네 은행 이름이 나가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소유물을 찾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랭던과 느뵈가 소니에르 씨의 계좌에서 뭔가를 훔쳐 간 모양입니다.”
  콜레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라고? 어떻게?”
  파슈는 시선을 요원에게 고정시킨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훔쳤는데?”
  “배르네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태세였습니다.”
  콜레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해 보았다. 랭던과 느뵈가 총끝으로 은행 직원을 움직인 것일까? 베르네를 위협해 강제로 소니에르의 계좌를 열게 하고, 장갑 트럭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협박한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소피 느뵈 같은 여자가 이런 일에 연관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부엌에서 다른 요원이 소리를 질렀다.
  “반장님! 티빙 씨 전화기의 자동 단축 번호를 조사하다가 , 르 부르제 비행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나쁜 소식인데요.”
  30초 후에 파슈는 팀을 정리해 빌레트 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파슈는 티빙이 르 부르제 비행장 근처에서 개인 제트기를 타고 30분 전에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장 관계자는 전화로 누가 비행기에 탔으며, 또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비행기 이륙은 예정에 없었으며, 비행 스케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비행장이었지만 분명 불법 행위였다. 파슈는 정당한 압력을 행사해 해답을 얻으리라고 확신했다.
  문으로 향하면서 파슈가 고함을 쳤다.
  ‘콜레 부관 여기서 PTS조사를 자네에게 맡길 수 밖에 없군. 일을 좀 제대로 하게나.“

71

  비행기가 수평을 이루고 영국으로 방향을 정하자, 랭던은 비행기가 기록하는 동안 무릎에 올려 두었던 장미목 상자를 들어 올렸다. 탁자에 상자를 놓을 때, 소피와 티빙이 기대감을 몸을 앞으로 내미는 것이 느껴졌다.
  랭던은 뚜껑의 빗장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의 관심은 크립텍스의 문자 다이얼이 아니라 상자 뚜껑의 작은 구멍이었다.  펜 끝을  이용해 위에 박힌 장미 문양을 조심스레 밀어내자. 그 아래에 있던 문자들이 드러났다. ‘장미 아래.’ 제대로 다시 보면 알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랭던은 즐거운 기분이었다. 모든 에너지를 모아서 랭던은 이상한 문자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휘갈겨 쓴거 같은 내용 4줄 그림 >
  다 읽고 난 랭던은 처음 느꼈던 좌절감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레이 경,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탁자 건녀편에 앉은 소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랭던이 언어를 해독하는 데  실패하자 놀랐다.
  ‘심지어 기호학자도 해독할 수 없는 모호한 언어를 할아버지가 사용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곧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자크 소니에르가 손녀에게 남긴 최초의 비밀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피 맞은 편에 앉은 레이 티빙은 터질듯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글자를 보고 싶은 열망으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티빙은 랭던에게 몸을 기대며 글자를 보려고 애썼다. 랭던은 아직도 상자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랭던이 속삭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첫째 추측은 셈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치 않아요. 모든 기본적인 셈어에는 네쿠닷이 있는데, 여기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고대어겠지.”
  티빙이 추측했다.
  “네쿠닷이 뭐예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현대 셈어의 알파벳을 보면 모음이 없고 네쿠닷을 이용하지. 자음 아래 혹은 자음 안에 쓰인 작은 점들과 줄을 네쿠닷이라고 하는데, 자음을 동반하면서 모음 역할을 하는 거요. 역사적으로 보면, 네쿠닷은 비교적 현대에 첨가된 것들이라오.”
  랭던은 아직도 필적에 골몰하고 있었다.
  “어쩌면 스페인계 유대어를 음역한 것일까……?”
  티빙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좀……”
  티빙은 손을 뻗어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랭던이 표준 고대 언어들, 그리스어, 라틴어, 고대로마어 등에 익숙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티빙은 흘끗 보고 나서, 이 언어가 좀더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쉬(Rashi) 글씨체이거나 STA”M(Sifrei, Torah, Tefillin, Mezuzo의 약자로  ,까마귀 발 같은 마크를 가진 특별한 헤브라이어 필기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티빙은 즐겁게 뚜껑에 새겨진 자국을 들여다 보았다. 티빙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빙은 점점 확신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티빙이 말했다.
  “정말 놀라운걸.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언어야.”
  랭던은 침울했다.
  “제가 좀 볼까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로버트, 자네 조금 전에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던 것 같다고 얘기했지?”
  랭던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는 않아요. 어쨌든 필적이 낯익습니다.”
  소피가 재차 말했다.
  “레이 경, 제 할아버지가 만든 상자를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아가씨.”
  상자를 소피에게 밀며 티비이 말했다. 그녀를 우습게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소피 느뵈는 이 자리에 잇는 그녀의 동료들에 비해 수십 광년은 떨어져 있었다. 영국의 왕립 역사가와 하버드의 기호학자가 해독하지 못한 언어라면……
  “아, 이럴 줄 짐작했어야 했는데.”
  상자를 조사한 지 몇 초 후에 소피가 말했다.
  티빙과 랭던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뭔가 알아냈나?”
  티빙이 물었다.
  소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아버지가 쓰던 언어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어요.”
  “지금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요?”
  티빙이 외쳤다.
  이 상황을 즐기면서 소피는 명랑하게 말했다.
  “꽤 쉬워요. 할아버지는 제가 겨우 여섯 살이었을 때 이 언어를 배우도록 했어요. 전 꽤나 유창한 편이죠.”
  소피는 탁자 앞으로 몸을 기대며, 질책의 눈빛으로 티빙을 응시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군주에 충성을 맹세한 경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경이 이 언어를 해석하지 못하다니 조금 놀라운 걸요.”
  순간적으로 랭던은 깨달았다.
  ‘이 필적이 익숙해 보인 것이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었군.’
  몇 년 전에 랭던은 하버드의 포그 박물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하버드 자퇴생인 빌 게이츠가 모교에 돌아와, 값을 매길 수 없는 그의 경매품 중 하나를 박물관에 대여해 준 것이다. 빌 게이츠가 경매를 통해 아르망 함마르 재단으로부터 구입한 열여섯 장의 종이들이었다.
  게이츠의 낙찰가는 3천 80만 달러.
  종이들의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열 여섯 장의 종이는 레스터의 백작이라는 유명한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도의 ‘레스터의 사본’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존하는 레오나르도의 가장 매혹적인 공책중 일부였다. 천문학, 지질학, 고고학, 수리학에 관한 다 빈치의 급진적인 이론들을 전개한 수필과 드로잉이 거기에 들어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이 진귀한 양피지를 마침내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이 보인 반응을 랭던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환멸. 양피지는 전혀 지적이지 않았다. 크림색 종이 위에 진홍색 잉크로 씌어진 다 빈치의 필기체는 나무랄 데 없이 아주 깔끔했고 공책의 보존 상태도 아주 훌륭했지만, 글은 그저 뜻 모를 횡설수설이었다. 처음에는 다 빈치가 고대 이탈리어로 적어서 자신이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더 가까이서 살펴본 후에, 이탈리아어는 한 단어, 심지어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사용해 보시죠.”
  전시관 옆에 있던 여자 안내원이 속삭였다. 여자는 전시물 옆에 사슬로 매달려 있는 손거울을 가리켰다. 랭던은 거울을 집어 들고, 거울의 표면에 나타난 글자들을 조사했다.
  즉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랭던은 위대한 사상가의 아이디어의 일부를 탐독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 위대한 남자의 예술적인 재능 중 하나가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읽을 수 있는 필기체 기법이었다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다. 거울로 비추어야만 하는 다 빈치의 필적은 무심코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으로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역사가들은 다 빈치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인지, 사람들이 그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거나 자기 아이디어를 훔쳐가지 못하게 이런 방식을 사용한 것인지 아직도 논쟁하고 있다. 하지만 논쟁은 미결이었다. 다 빈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것이다.
  소피는 랭던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소피가 말했다.
  “처음 단어 몇 개를 읽어 드릴게요. 이건 영어예요.”
  티빙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랭던이 말했다.
  “거꾸로 쓴 글자들입니다. 우린 거울이 필요해요.”
  소피가 말했다.
  “아니오, 그럴 필요없어요. 이 합판이 아주 얇다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
  소피는 상자를 들어 천장의 조명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상자 뚜껑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실제로 글을 거꾸로 쓰지는 않았다. 정상적으로 글을 쓴 후에 그것을 뒤집어서 마치 거꾸로 쓴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냈다. 소피는 할아버지가 나무판에 낙인을 찍듯 글자들을 태워서 새기고, 그 뒤 종이처럼 얇아질 때까지 나무판을 대패나 사포 따위로 밀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낙인이 된 글자들은 얇은 나뭇결을 통해서도 쉽게 보일 터였다. 그런 뒤에 할아버지는 종이처럼 얇아진 나무판을 간단히 뒤지어서 뚜껑 안쪽에 붙였을 것이다.
  뚜껑을 빛에 가까이 가져간 소피는 자기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밝은 조명이 얇은 나뭇결을 통과해서, 뚜껑 안쪽의 글자가 반대로 나타났다.
  즉시 읽을 수 있었다.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구면서 티빙이 목쉰 소리로 말했다.
  “영어라, 내 모국어로구먼.”
  비행기 뒤쪽에 앉은 레미는 시끄러운 엔진 소음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앞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레미는 발 밑에 누워있는 수도승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구출을 바라는 조용한 기도를 올리기라도 하는지 사내는 전혀 움직임 없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72

  4천 5백 킬로미터 상공에 떠 있는 랭던은 소니에르의 거울이미지 시에 정신을 집중할수록 물리적인 세계가 사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니에르의 시는 상자 뚜껑을 통해 빛나고 있었다.
  <영어로 휘갈겨 쓴거 같은 내용 4줄 그림 >
  소피는 재빨리 종이를 찾아와서 보통 필기체로 시를 받아 적었다. 다 받아 적자. 세 사람은 돌아가며 글을 읽었다. 글은 고고학적인 낱말 게임의 일종 같았다….. 크립텍스를 여는 법을 알려주는 수수께끼. 랭던은 천천히 글을 읽었다.
  “지혜로운 고대의 낱말이 이 두루마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고 그녀의 흩어진 가족 전체를 우리가 지킬 수 있게 도우리라……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이 열쇠이리라…… 아트배쉬가 너희에게 진실을 드러내리라.”
  시가 드러내려는 고대의 암호가 무엇일까 생각해 내기 전에, 랭던은 보다 기본적인 무엇이 자기 안에서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시의 운율이었다.
  ‘강약5보격의 시.’
  유럽 전역에 퍼진 비밀단체들을 조사하면서 랭던은 이런 운율과 자주 마주쳤었다. 지난해 바티칸 문서보관소에서도 그랬다. 수백년 동안 강약 5보 시는 고대 그리스의 작가 아르킬로쿠스로부터 시작해서 셰익스피어,밀턴, 초서,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문학가들이 애호한 운율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운율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런 운율에 사회적 논평을 담아냈으니 이들은 대담한 영혼의 소유자인 셈이었다. 강약5보시의 근원은 이교도적인 색채가 아주 강했다.
  ‘강약의 운율. 서로 다른 강조를 두는 두 음절. 강조와 비강조. 음양. 균형을 이루 쌍. 다섯줄로 정렬. 5보시. 신성한 여성과 비너스의 별을 나타내는 숫자. 다섯.’
  랭던을 돌아보며 티빙이 불쑥 말했다.
  “오 보격 시로구먼! 그리고 시 구절은 영어로 씌어졌어! 순수한 언어지!”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에 반대하는 유럽의 많은 비밀단체들처럼 시온 수도회는 수백년 동안 영어만이 유럽의 ‘순수한 언어’라고 믿어 왔다. 바티칸의 언어인 라틴어에 뿌리를 둔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어와는 달리 영어는 문자 그대로 로마의 선동적인 언어 영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어를 배울 정도로 충분히 교육을 받은 비밀단체 회원들에게 영어는 신성하고 은밀한 용어가 되었다.
  티빙이 지껄였다.
  “이 시는 성배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성전 기사단과 마리아 막달레나의 흩어진 가족들도 말하고 있다고! 무엇을 더 바라겠나?”
  시를 다시 들여다보며 소피가 말했다.
  “패스워드. 지혜로운 고대의 낱말 같은 것이 필요한 모양인데요.”
  “주문?”
  눈을 반짝이며 티빙이 눈알을 굴렸다.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한 낱말,’
  랭던은 생각했다. 지혜로운 낱말은 신비로운 송가에서부터 점성학적인 예언. 비밀단체의 가르침, 위카의 주술, 이집트의 마술 용어, 이교도적인 주문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패스워드는 기사단과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소피는 큰 목소리로 글을 읽었다.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이 열쇠이리라.”
  랭던이 말했다.
  “레이 경, 당신이 성전 기사단 전문가잖아요. 뭐 생각나는 것 없어요?”
  티빙은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묘석은 분명히 무덤 앞에 세운 돌에 뭔가를 새겨 놓은 것이지. 이 시가 막달레나의 무덤에 있던 비석을 기사단이 찬양하고 있다는 추리는 가능하네. 하지만 막달레나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겠구먼.”
  소피가 말했다.
  “마지막 줄 말이예요. 아트배쉬(Atbash)가 진실을 드러내리라.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아트배쉬.‘
  랭던이 대꾸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오. 아마 암호 해독학 기본 강의 시간에 들었을 거요. 아트배쉬는 인간에게 알려진 암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니까.”
  ‘물론이야! 유명한 헤브라이어 해독 시스템이지.’
  소피는 생각했다.
  아트배쉬 암호는 소피의 초기 암호 해독 훈련의 일부였다. 이 암호의 연원은 기원전 5백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는 기본적인 치환기법의 예로 강의실에서 사용된다.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암호문 형태인 아트배쉬 암호는 스물두 개의 헤브라이어 철자에 바탕을 둔 간단한 치환기법이다. 아트배쉬 암호에서 첫 글자는 제일 끝에 있는 글자와 자리를 바꾸고, 두 번째 글자는 끝에서 두 번째 있는 글자와 자리를 바꾸는 식이었다.
  티빙이 말했다.
  “아트배쉬는 아주 그럴듯해. 아트배쉬로 쓰인 글들은 카발라와 사해의 두루마리 심지어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니까. 유대인 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아직도 아트배쉬를 이용해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있지. 시온 수도회도 분명히 가르침의 일부로 아트배쉬를 포함시켰을 걸세.”
  랭던이 말했다.
  “유일한 문제는 암호를 적용시킬 만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티빙은 한숨을 쉬었다.
  “묘석에 힌트가 되어 줄 낱말이 있을 텐데. 우린 기사들이 찬양한 묘석을 반드시 찾아야만 하네.”
  기사들의 묘석을 찾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소피는 랭던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아트배쉬가 열쇠다. 하지만 우리는 열 수 있는 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소피는 생각했다.
  3분 정도 흐른 후에 티빙이 좌절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들, 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군. 먹을 것을 좀 가져오겠네. 레미와 우리 손님을 살펴본 뒤 계속 생각해 보자고.”
  티빙은 일어서서 비행기 뒤쪽으로 향했다.
  티빙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소피는 피곤함을 느꼈다.
  창 밖은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지 여전히 캄캄했다. 소피는 어디에 착륙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우주 공간을 돌진하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란 소피로서는, 앞에 놓인 시가 그들이 아직 보지 못한 정보를 담고 있으리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더 있어. 아주 철저하게 숨겨진……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또 하나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들이 크립텍스 안에서 결국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성배를 찾는 지도 ’만은 아닐 것이다. 진실이 대리석 원통 안에 누워 있을 것이라고 믿는 티빙과 랭던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보물사냥 게임을 충분히 풀어 본 소피로서는 자크 소니에르가 비밀을 그렇게 쉽사리 끝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3

  사법경찰 반장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르 부르제 비행장 관제탑의 야간 직원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빈 레이더 스크린 앞에서 졸고 있었다.
  작은 관제탑 안으로 행진하듯 들어오며 브쥐 파슈가 소리를 질렀다.
  “티빙의 제트기는 어디로 갔어?”
  관제탑 직원의 첫 반응은 영국인 고객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미약하게 항의하는 것이었다. 그 영국인은 비행장 이용 고객 중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직원의 시도는 비참하게 끝났다.
  “좋아. 비행 시간표를 기록하지 않고 개인 비행기의 이륙을 승인한 대가로 자네를 체포하겠네.”
  파슈가 다른 요원에게 몸짓을 하자, 요원이 수갑을 들고 다가왔다. 관제탑 직원은 공포에 떨며, 프랑스 경찰 반장이 영웅인지 아니면 폭군인지를 다투는 신문기사들을 떠올렸다. 이 물음에 곧 답이 나왔다.
  “기다려요!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레이 티빙 경은 치료를 목적으로 런던에 자주 갑니다. 그분은 켄트의 비긴힐 사설 비행장에 격납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런던 교외입니다.”
  수갑 앞에서 직원은 자기 목소리가 힘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파슈는 수갑을 들고 있는 요원에게 손을 저었다.
  “비긴힐이 오늘 그 작자의 종착지인가?”
  직원이 정직하게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비행기는 평소 이용하던 궤도로 움직였고, 마지막 레이더 교신은 영국임을 나타냈습니다. 비긴힐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 영국인이 다른 사람들도 태웠나?”
  “맹세합니다만, 저는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우리 고객들은 격납고로 직접 차를 몰고 가서, 마음대로 탈 수 있습니다.누가 타고 있느냐는 도착지 공항 세관 직원들의 몫입니다.”
  파슈는 자기 시계를 살피고, 비행장에 흩어져 있는 제트기들을 응시했다.
  “만일 그들이 비긴힐로 간다면 착륙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나?”
  직원은 기록을 뒤적였다.
  “짧은 비행이라서, 티빙 경의 비행기는 아마…… 여섯 시 반이면 착륙할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분 뒤입니다.”
  파슈는 얼굴을 찡그리며 요원들 중 한명에게 돌아섰다.
  “수송선을 한 대 가져와. 런던으로 가야겠어. 그리고 켄트 지방경찰과 연결해줘. 영국의 MI5(테러방지, 보완정보 활동 등을 주 업무로 하는 영국의 보안국)가 아니야. 이 일을 조용하게 처리했으면 좋겠네. 켄트 지방경찰이야 그쪽 경찰에게 티빙의 비행기에 착륙 허가를 내리라고 말해 . 도로에서 그들을 포위하고 싶으니까.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비행기를 떠나지 못하게 해.”

74

  “조용하군요.”
  건너편에 앉아서 소피를 바라보며 랭던이 말했다.
  “그냥 피곤해요. 그리고 그 시도, 잘 모르겠어요.”
  랭던도 같은 느낌이었다. 엔진 소리와 비행기의 부드러운 진동은 졸음을 몰고 왔다. 그리고 수도승에게 한 대 얻어맞은 머리는 여전히 쑤셨다. 티빙은 아직 비행기 뒤편에 있었다. 랭던은 단둘이 있는 이 순간에 자기 마음에 맺힌 것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당신 할아버지가 우리 둘을 엮어 놓은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생각에 소니에르 씨는 당신에게 내가 뭔가를 설명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아요.”
  “성배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사로는 충분하지 않나요?”
  랭던은 얘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막막했다.
  “당신들 두 사람 사이의 불화, 십 년 동안 당신이 할아버지와 얘기하지 않은 이유, 당신을 멀어져 가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어떻게든 내가 바로잡아 주기를 그분은 희망했던 것 같소.”
  소피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꿈틀했다.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이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요.”
  랭던은 주의깊게 소피를 살폈다.
  “당신은 성(性)의식을 목격했어요. 그렇죠?”
  소피는 주춤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소피, 당신은 할아버지가 비밀단체의 회원임을 확인시켜 주는 뭔가를 보았다고 내게 말했소. 그리고 당신이 본 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후 당신은 할아버지와 얘기하기 싫을 정도로 분노했소. 난 비밀단체에 대해서 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무얼 보았는지 추측하기 위해서 다 빈치의 두뇌까지 빌릴 필요도 없소.”
  소피는 아무 말 없이 랭던을 응시할 뿐이었다. 랭던이 물었다.
  “그때가 봄이었소? 춘분에 가까운 그런 때? 삼월 중순?”
  소피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대학에서 봄방학을 맞았을 때였어요. 며칠 일찍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소?”
  소피는 갑자기 랭던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고여 있었다.
  “안 하는게 좋겠어요.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어요.”
  “남자와 여자들이 같이 있었소?”
  몇 초 후,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과 검은색 옷을 입고?”
  눈에 작은 티 가들어간 것처럼 소피는 눈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가운을 걸쳤어요…… 금색 신발에. 손에는 금색 구슬을 들고 있었어요. 남자들은 검은색 신발에 검은색 가운을 입었고요.”
  랭던은 자기 감정을 가까스로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듣고 있는 얘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소피 느뵈는 뜻하지 않게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한 의식을 목격한 것이다.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랭던이 물었다.
  “가면은? 자웅양성의 가면은?”
  “그래요. 모두들,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여자들은 흰색, 남자들은 검은색.”
  랭던은 이 의식에 관한 설명을 읽은 적이 있었고, 그 신비로운 기원을 이해했다. 랭던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은 ‘히에로스 가모스(Hieros Gamos)’라는 거요. 그 의식의 기원은 이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오. 이집트의 남자 사제와 여사제들이 여성의 창조적인 힘을 축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 의식을 수행했었소.”
  랭던은 말을 멈추고 소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당신이 히에로스 가모스를 보았다면, 꽤나 충격적이었을 거요.”
  소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랭던은 말을 이었다.
  “히에로스 가모스는 그리스어요. ‘신성한 결혼’을 뜻하는 말이오.”
  “내가 본 의식은 전혀 결혼이 아니었어요.”
  “결합으로서의 결혼이오. 소피.”
  “성교를 뜻하는군요.”
  “아니오.”
  “아니라고요?”
  소피의 올리브색 눈동자는 랭던을 시험하고 있었다. 랭던은 뒤로 물러났다.
  “글쎄…… 그래요. 어떤 식으로 본다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오.”
  소피가 본 것이 성 의식처럼 보였을지라도, 히에로스 가모스는 성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랭던은 설명했다. 그것은 정신적인 행위였다. 역사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성교를 통해 신을 경험하는 행위였다. 고대인은 남자가 신성한 여성에 대한 육체의 지식을 알기 전까지는 정신적으로 불완전하다고 믿었다. 여성과의 육체 결합은 남자가 정신적으로 완벽해지고, 궁극적인 영적 직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여신 이시스 시절부터 성 의식은 인간을 땅에서 천국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로 인식되었다.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 남자들은 절정의 순간을 획득할 수가 있었소. 그 순간에 마음은 완전히 무가 되고, 신을 볼 수 가 있었던 거요.”
  소피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오르가슴을 기도로 이용해요?”
  소피의 말이 본질적으로 맞기는 했지만, 랭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생리적으로 얘기하자면, 남자의 절정은 전적으로 무의 상태인 찰나의 순간이다. 짧은 정신적인 진공 상태. 신이 번득이며 나타날 수 있는 명료한 순간. 명상의 대가들은 성교 없이도 이와 비슷한 무념의 상태를 얻으며, 종종 끝없는 영적 기쁨을 주는 열반의 상태를 묘사하곤 한다.
  “소피, 성에 대한 고대인의 시각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성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거요. 그리고 기적은 오직 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오. 자궁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능력은 여성을 신성하게 만들었소. 신처럼 말이오. 성교는 남자와 여자라는 인간 영혼의 두 반쪽들이 신성하게 결합하는 거였소. 그 결합을 통해 남자는 영혼의 완벽함을 찾았고, 신과 접할 수 있었던 거요. 당신이 본 것은 육욕의 성이 아니오. 그것은 영적인 거였소. 히에로스 가모스는 변태적인 행위가 아니오. 그 의식은 아주 신성한 겁니다.”
  랭던의 말이 소피의 신경을 건드렸다. 오늘 밤 소피는 내내 잘 가장하고 있었지만, 랭던은 처음으로 뭔가 깨지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소피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고,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랭던은 소피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분명 신에게 이르는 길로서의 성이란 처음에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강의시간에 초기 유대교 전통이 성 의식과 관련 있다는 얘기를 하면, 유대인 학생들은 항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신전에서.’
  초기 유대인은 신 중의 신인 솔로몬의 사원에 남자 신뿐만 아니라 그와 대등한 상대의 여신 셰키나도 함께 머물렀다고 믿었다. 영혼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남자는 여사제를 방문하기 위해 신전에 왔다. 여사제와 사랑을 나누었고, 육체의 합일을 통해 신성함을 경험했던 것이다. 유대 용어인 야훼(YHWH)는 신을 기호화한 것이다. 이것은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야’와 입의 헤브라이어 이전 이름인 ‘하와’가 자웅동체의 물리적 결합을 한 여호와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랭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신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 인간이 성을 이용하는 것은 초기 교회의 권력 바탕에 심각한 위협이었소. 교회만이 신과의 유일한 통로라는 그들의 주장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일이었을 거요. 이런 명백한 이유로 교회는 을 악마로 묘사하고, 더럽고 불결한 행위로 주입시켰소. 다른 주요 종교들도 마찬가지요.”
  소피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랭던은 그녀가 자기 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랭던은 이번 학기초에 이와 똑같은 요지의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랭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성에 대해 우리가 혼란을 느낀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고대 유산과 생리학은 우리에게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을 채우기 위해 내재된 길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현대 종교는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성에 대한 욕망을 악마의 손길이라도 되는 양 가르칩니다.”
  전세계적으로 열두 개 이상의 비밀단체들이 아직도 성 의식을 행하며, 이를 통해 고대의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랭던은 이 같은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려 더 이상 충격을 주지는 말자고 결심했었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 나온 톰 크루즈는 이 같은 의식을 어렵사리 밝혀내고 있다. 맨해튼 상류층의 은밀한 사적 모임에 몰래 들어간 남자 주인공이 히에로스 가모스를 목격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세세한 사항들 대부분을 틀리게 그렸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성결합의 신비를 찬양하기 위해 서로 교제하는 비밀 단체.
  뒤에 앉은 한 남학생이 손을 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랭던 교수님? 지금 교회에 가는 대신 우리가 더 많은 섹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랭던은 그 말에 담긴 미끼를 물지 않으려고 소리내어 웃었다. 하버드 파티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학교 학생들은 섹스 이상의 행동을 충분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알고서 랭던은 말했다.
  “남학생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혼전 섹스의 용서를 구한다고 뻔뻔해지지도 말고 ,여러분이 모두 정숙한 천사라고 순진한 척하지도 마십쇼. 그럼 여러분의 성생활에 작은 충고 하나를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주의 깊게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에 여자와 함께 있게 될 때면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을 신비롭고 영적인 행위로 접근할 수 있는지 보는 겁니다. 오직 신성한 여성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성스러운 불꽃을 여러분 자신이 찾아 낼 수 있는지 도전해 보십시오.”
  여학생들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남학생들은 의심스러운 미소와 상스러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랭던은 한숨을 쉬었다. 대학생이라 해도 아직 소년에 불과했다.
  비행기 창문에 이마를 대자 몹시 차가웠다. 랭던이 방금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소피는 멍하니 밖을 응시했다. 소피는 새로운 후회가 내부에서 일어났다.
  ‘십 년’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낸 뜯지도 않은 편지 뭉치들이 떠올랐다.
  ‘로버트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어.’
  창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소피는 얘기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두려운 목소리로.
  그날 일어난 일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소피는 자신이 과거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의 노르망디 성 외곽 숲에서 내린 일……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조용한 집을 수색하던 일……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일…… 그리고 마침내 숨겨진 문을 찾아낸 일.
  돌 계단을 한번에 하나씩 내려가서 지하 동굴에 이르렀다. 흙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차갑고 가벼웠다. 봄이었다. 자신이 몸을 숨긴 계단 그늘에서, 소피는 깜박이는 오렌지색 촛불 옆에서 낯선 사람들이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꿈이야. 꿈이 아니면 대체 뭐겠어?’
  남자와 여자들이 검은색, 흰색, 검은색, 흰색으로 서서 비틀거렸다. 여자들이 오른손에 든 금색 구슬을 들어올리자, 아름다운 가운 자락들이 펄럭였다. 그리고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시작부터 그대와 함께 있었네. 신성한 모든 것들의 새벽에도,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그대를 자궁에서부터 품었네.”
  여자들이 구슬을 내리자, 모두 황홀경에 젖은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원 안에 있는 뭔가를 숭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점점 크고 빨라졌다.
  “그대가 안고 있는 여인은 사랑이라!”
  여자들이 다시 구슬을 올리며 소리쳤다.
  남자들이 응답했다.
  “그녀는 영원 속에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노라!”
  노래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가속이 붙은 듯했다. 이제는 천둥 소리처럼 빨라졌다. 참가한 사람들이 한 걸음 원 안으로 내딛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소피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마침내 알게 됐다.
  원 중심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낮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알몸으로 엎드린 남자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소피는 즉시 몸과 어깨의 점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소피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할아버지!‘
  이 이미지만으로도 소피의 믿음을 넘어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텐데, 거기에는 뭔가 더 있었다.
  하얀 가면을 쓴 알몸의 여인이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있었다. 여자의 우아한 은발이 가면 뒤로 흘러내렸다. 여자의 몸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포동포동한 몸집이었다. 그리고 노랫가락에 맞추어 리듬을 타듯 소용돌이쳤다. 소피의 할아버지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소피는 돌아서서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노래가 더 열정적으로 높아지면서 동굴의 석벽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았다. 원을 이룬 사람들이 이제 시끄러울 정도로 노래를 부르고, 소음이 광란의 상태로 커졌다. 갑작스러운 고함과 함께 방이 절정에서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소피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용히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피는 몸을 돌려 조용히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밖으로 나와 떨리는 몸으로 파리를 향해 다시 차를 몰았다.

75

  아링가로사가 파슈와 두 번째 통화를 끝냈을 때, 전세 프로펠러 비행기는 모나코에서 이제 빛나기 시작한 태양 위를 지나고 있었다. 주교는 멀미 주머니에 다시 손을 뻗었지만, 토할 기력도 없이 너무 탈진해 있었다.
  ‘그저 끝나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파슈의 최신 정보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간밤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상식에 들어맞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돼 가는 거지?’
  모든 일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뻗어가고 있었다.
  ‘내가 사일래스를 무엇에다 집어넣은 걸까? 나는 내 자신을 어디에 집어넣은 것일까?’
  떨리는 다리로 아링가로사는 조종석으로 걸어갔다.
  “목적지를 바꿔야겠소.”
  조종사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웃었다.
  “농담하시는 거겠죠, 그렇죠?”
  “아니오, 즉시 런던으로 가야겠소.”
  “신부님, 이건 전세 비행기지, 택시가 아니랍니다.”
  “물론 돈을 더 지불하겠소. 얼마면 되겠소? 런던은 북쪽으로 겨우 한 시간만 더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방향을 거의 바꿀 필요도 없고, 그러니……”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부님. 다른 문제들이 있어요.”
  “일만 유로. 지금 당장 주겠소”
  돌아보는 조종사의 눈에는 충격이 가득했다.
  “얼마요? 무슨 사제가 그렇게 많은 현금을 들고 다닌답니까?”
  아링가로사는 서류가방으로 걸어가서, 가방을 열고 뭉치에서 채권 한 장을 꺼냈다. 주교는 채권을 조종사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바티칸 은행에서 발행된 일만 유로짜리 채권이오. 현금과 같은 거요.”
  조종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오직 현금만이 현금이지요.”
  아링가로사는 조종실 문을 등지고 서서, 힘없는 자신을 느꼈다.
  “이건 생사가 걸린 문제요. 당신은 나를 도와야만 합니다. 난 꼭 런던에 가야만 하오.”
  조종사의 시선이 주교의 금반지에 머물렀다.
  “진짜 다이아몬드인가요?”
  아링가로사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난 이 반지를 몸에서 뗄 수 없소.”
  조종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몸을 돌려 조종석 앞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아링가로사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주교는 반지를 보았다. 반지가 나타내는 모든 것을 잃게 될 참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 주교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 조종석 계기판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아링가로사는 조종실에서 조용히 걸어나와 자리에 앉았다. 15초 정도 지난 후에, 조종사가 북쪽으로 각도를 약간 조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링가로사의 영광의 순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성스러운 이유로 시작되었다. 너무나 훌륭하게 짜맞춰진 계획. 그러나 이제 카드로 만든 집처럼 계획은 무너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76

  랭던은 히에로스 가모스의 기억을 되살린 소피가 아직도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소피는 완벽한 의식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할아버지가 사제였던 것이다…… 시온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 그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다.
  ‘다 빈치, 보티첼리,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장 콕토, 자크 소니에르.’
  랭던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소피의 눈동자는 눈물을 머금어 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친딸처럼 키웠어요.”
  랭던은 소피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보았다. 그것은 후회였다. 길고 깊은 후회. 소피 느뵈는 이제야 할아버지를 전혀 다른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밖에서는 아침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비행기 우측으로 진홍색 빛이 퍼져나갔다. 그들 아래에 펼쳐진 지상은 여전히 캄캄했다.
  “뭐 좀 들겠나?”
  티빙이 콜라 캔 몇 개와 오래된 크래커 상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두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티빙은 음식이 보잘것없음에 사과했다.
  “우리 친구인 저 수도승은 아직 입을 열지 않는군. 하지만 그놈에게 시간을 좀 주자고.”
  티빙은 크래커를 한 입 깨물고 시를 보았다.
  “그래, 아름다운 아가씨, 무슨 진척이라도?”
  티빙은 소피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할아버지가 여기에서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 묘석은 어디에 있을 것 같나?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 말이야.”
  소피는 고개를 젓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티빙이 다시 시 구절을 파고드는 동안, 랭던은 콜라 캔을 따서 창문으로 돌아섰다. 랭던의 머릿속은 은밀한 의식의 이미지와 깨어지지 않은 암호로 가득했다.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이 열쇠이리라.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
  랭던은 콜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콜라는 미지근했다.
  밤의 장막이 재빨리 증발하고 있었다. 랭던은 그들 아래에서 바다가 은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영국 해협.’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랭던은 아침 햇살이 다른 생각을 일깨워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깥이 밝아질수록, 그는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랭던은 제트기의 웅얼거리는 소음과 함께 히에로스 가모스와 비밀의식, 낮은 찬송가락과 강약 5보격 시의 리듬을 듣고 있었다.
  ‘기사단이 찬양한 묘석.’
  어떤 생각이 랭던을 치고 지나갈 때, 비행기는 땅위를 날고 있었다. 랭던은 빈 콜라 캔을 힘차게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기사단의 묘석, 이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티빙의 눈은 접시에 가 있었다.
  “묘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고?”
  랭던은 미소를 지었다.
  “묘석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냐는 겁니다.”
  소피는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랭던은 학문 탐구의 난관에서 돌파구를 찾았을 때 느끼는 익숙한 흥분을 맛보며 설명해 나갔다.
  “제 생각에 묘석(headstone)은 문자 그대로 돌 머리(stone head)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글자를 새겨놓은 비석이 아니란 얘깁니다.”
  “돌 머리?”
  티빙이 물었다.
  소피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돌아보며 랭던이 말했다.
  “레이 경, 종교재판 동안에 교회는 성전 기사단을 모든 종류의 이단으로 고발했습니다. 맞죠?”
  “정확하네. 교회는 모든 종류의 죄상을 날조했지. 남색, 십자가에 대한 방뇨. 악마숭배 등 다 얘기하자면 꽤 긴 목록이 될 거네.”
  “그리고 그 목록에 가짜 우상숭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기사단이 은밀한 의식을 행하는 것을 고발했고, 그 의식에서 기사단이 조각된 돌머리에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교도의 신……”
  티빙이 불쑥 끼어들었다.
  “바포멧! 하느님 맙소사, 로버트, 자네가 옳아! 기사단이 찬양한 머릿돌!”
  랭던은 재빨리 소피에게 바포멧이 재생산의 창조적인 힘을 가진 이교도의 다산의 신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바포멧의 머리는 출산과 다산의 일반적인 상징인 염소나 양의 머리로 그려졌다. 기사단은 바포멧의 머리 모양을 한 돌로 둘러싸고, 기도문을 찬송하면서 바포멧을 기렸다고 했다.
  티빙은 킬킬거렸다.
  “바포멧, 그 의식은 성의 합일을 이루는 창조적인 마법을 기리는 거였지. 하지만 클레멘트 교황은 바포멧의 머리가 사실은 악마의 머리라고 사람들에게 주입시켰어. 교황은 기사단에 적대적인 자기 입지를 위해서 바포멧의 머리를 핵심으로 사용했던 걸세.”
  랭던은 동의했다. 사탄을 뿔 달린 악마로 알고 있는 현대적인 믿음은 바포멧이 그 기원이다. 뿔을 가진 다산의 신을 악의 상징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교회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뜻 보면 교회가 성공한 듯 보이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가정의 전통적인 추수감사절 식탁에는 뿔 달린 다산의 상징인 이교도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풍요의 뿔은 바포멧의 다산 능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 뿔은 염소의 젖을 빨아먹었다는 제우스 신에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염소의 뿔이 부러지면 마술처럼 과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바포멧은 단체 사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일부 장난꾸러기들이 친구의 머리 뒤에 손가락 두개를 들어 뿔 모양인 V형태를 만드는 짓 말이다. 자기들의 장난질이 사실 희생자인 친구의 왕성한 정자 개수를 광고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짓이지만.
  티빙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래 .분명 시가 언급하는 것은 바포멧이야. 기사단이 찬양한 머릿돌.”
  “좋아요. 만일 바포멧이 기사단이 찬양한 머릿돌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하게 돼요.”
  소피는 크립텍스의 다이얼을 가리켰다.
  “바포멧(Baphomet)은 철자가 여덟 개예요. 우리는 다섯 글자만 필요하고요.”
  티빙이 활짝 웃었다.
  “귀여운 아가씨, 이제 아트배쉬 암호가 나와서 활약할 때라오.” 

77

  랭던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티빙은 기억만으로 스물두 개의 헤브라이어 문자를 써내려 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티빙은 헤브라이어 문자 보다는 그에 상응하는 로마자를 대신 사용했다. 하지만 티빙은 흠잡을 데 없는 발음으로 문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A B G D H V Z Ch T Y K L M N S O P Tz Q R Sh Th
  “알레프, 베이트, 기멜, 달렛, 헤이,바브,자인,체트,테트,유드,카프,라메드,멤,넌,사메흐,아인,페인,차디크, 커프,레이쉬, 쉰 그리고 타브“
  티빙은 이마를 훔쳤다가 다시 주름을 잡았다.
  “헤브라이어 문자에서 공식적으로 모음은 안 적혀 있지. 그래서 바포멧이란 단어를 헤브라이어로 적으면, 세 개의 모음이 빠지게 되는 거요. 그럼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섯 자.”
  소피가 불쑥 끼어들었다.
  티빙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적었다.
  “좋아요. 여기 헤브라이어로 된 바포멧의 철자가 있소. 빠진 모음들은 나중에 다룰 거요.”
  B a P V o M e Th
  티빙은 덧붙였다.
  “물론 헤브라이어는 보통 우리가 글을 쓰는 방향과는 반대로 씌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요. 하지만 우린 이런 식으로 아트배쉬를 쉽게 이용할 수가 있소.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치환작업을 위해 헤브라이어 문자들을 순서대로 거꾸로 적는 것이야.”
  티빙에게서 펜을 건네받으며 소피가 말했다.
  “쉬운 방법이 있어요. 아트배쉬를 포함해서 모든 치환암호에 유용하게 쓰이는 방법이예요.”
  소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헤브라이어 반을 적고, 그 밑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머지 반을 적었다.
  “암호분석가들은 이것을 ‘접기 방식’ 이라고 불러요 반만으로는 복잡하지만 두 배로는 깨끗하게 보이는 법이죠.”
  A  B  G  D  H  V  Z  Ch  T Y  K
  Th Sh R  Q  Tz P  O  S   N M  L
  (윗줄과 아랫줄 대응 시키는 표임)
  티빙은 소피의 수작업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구먼. 홀로웨이에 있는 친구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아 기쁘구먼.”
  소피의 치환행렬을 바라보며, 랭던은 그 유명한 ‘셰사흐(Sheshach)의  수수께끼’를 떠올렸다. 이것을 해독하기 위해 처음으로 아트배쉬 암호를 사용하던 초기 학자들이 느꼈을 전율과 견줄 만한 감정이 내부에서 타올랐다. 수년 동안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셰사흐’라고 불리는 도시를 언급하는데 당황스러워했다. 이 도시는 어느 지도, 어느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이름은 예레미아의 책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셰사흐의 왕, 셰사흐라는 도시, 셰사흐의 백성들, 마침내 한 학자가 이 단어에 아트배쉬 암호를 적용시켰다. 해독 결과는 셰사흐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도시의 암호화된 이름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해독과정은 간단했다.
  헤브라이어로 셰샤흐는 Sh-Sh-K이다.
  Sh-Sh-K를 치환행렬로 보고 자리를 바꾸면 B-B-L이 된다.
  헤브라이어로 B-B-L은 바벨(Babel)이다.
  셰사흐라는 수수께끼의 도시는 바벨이었던 것이다. 성경을 조사하다 보면 이런 흥분은 잇따라 일어난다. 학자들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수만 개의 숨겨진 의미들이 활보하고 있는 구약성서에서 몇 주 만에 아트배쉬 암호 대여섯 개가 밝혀졌다.
  “우리는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며 랭던이 속삭였다. 그러자 티빙이 말했다.
  “조금씩 말이야. 로버트.”
  그리고 소피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아가씨, 준비됐소?”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헤브라이어로 바포멧은 모음 없이 이렇게 읽어요. B-P-V-M-Th. 이제 이 철자를 다섯 글자로 된 패스워드로 바꾸기 위해, 아가씨의 치환행렬표를 간단히 적용해 보자고.”
  랭던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B-P-V-M-Th. 이제 창문으로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랭던은 소피의 치환행렬표를 보고, 천천히 바꾸기 시작했다.
  ‘B는 Sh가 되고 …… P는 V가 되고……’
  티빙은 크리스마스를 맞은 학생처럼 웃고  있었다.
  “그럼 아트배쉬 암호는 이렇게 말하지……”
  티빙은 잠시 말을 끊었다.
  “신이여!”
  티빙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랭던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소피를 응시했다.
  “자네들은 이걸 믿지 못할 거야. 특히 아가씨는 말이야.”
  “무슨 뜻이죠?”
  “이건…… 천재야. 진짜 천재야!”
  티빙은 다시 종이에 적었다.
  “머릴 굴리라고. 여기 자네들을 위한 패스워드가 있네.”
  티빙은 자기가 쓴 것을 보여주었다.
  Sh-V-P-Y-A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뭐죠?”
  랭던 역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티빙의 목소리는 경이로움으로 떨고 있었다.
  “이건 말일세. 친구들, 실제로 지혜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라네.”
  랭던은 다시 장미목 상자 뚜껑에 적힌 글귀들을 읽어 보았다.
  ‘지혜로운 고대 낱말이 이 두루마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즉시 깨닫는게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인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지혜로운 고대의 낱말!”
  티빙은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말 그대로이지 않나!”
  소피는 단어를 쳐다보고, 크립텍스의 다이얼을 살펴보았다. 즉시 그녀는 랭던과 티빙이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이 단어가 패스워드일 수는 없어요. 다이얼에 Sh라는 철자는 없답니다. 크립텍스는 보통 로마 철자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랭던이 촉구했다.
  “이 단어를 읽어 봐요. 그리고 두 가지를 명심해요. 헤브라이어에서 Sh는 S로도 발음할 수 있다는 것과 철자 P또한 F로 발음할 수 있다는 거요.”
  ‘SVFYA?’
  그래도 소피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빙이 덧붙였다.
  “천재야! 철자 V는 종종 모음인 O역할을 하거든!”
  소피는 발음을 해보려고 다시 철자들을 내려다보았다.
  “s…o…f…y…a. 소-피-아.”
  소피는 자기 목소리를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소피아? 이 말이 소피아(sophia)로 풀이되는 거예요?”
  랭던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피아는 말 그대로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소피, 당신 이름의 뿌리가 문자 그대로 ‘지혜로운 단여’ 였던 거요.”
  소피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수도회의 쐐기돌에 내 이름을 암호로 만들었구나.’
  소피는 울컥 목이 메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서자 다섯 글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크립텍스의 다이얼을 본 소피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다려 봐요…… 소피아(sophia)는 철자가 여섯 개예요.”
  티빙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를 다시 봐요. 당신 할아버지는 ‘지혜로운 고대의 낱말’이라고 적었소.”
  “그래서요?”
  티빙이 윙크를 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는 소피아(SOFIA)라고 쓰거든요.”

78

  크립텍스를 껴안고 다이얼을 돌리면서, 소피는 거친 흥분을 느꼈다.
  ‘지혜로운 고대의 낱말이 이 두루마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켜보는 랭던과 티빙도 숨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S…O…F…
  티빙이 말했다.
  “조심하시오. 아주 조심해야 해요.”
  …I…A
  소피는 마지막 다이얼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소피는 속삭였다.
  “좋아, 이제 이걸 분해할 거예요.”
  두려움에 찬 기대를 안고 랭던이 속삭였다.
  “식초를 잊지 말아요. 조심하시오.”
  이 크립텍스도 그녀가 어릴 때 열어본 다른 크립텍스들과 비슷하리라는 걸 소피는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크립텍스 양쪽을 잡고, 천천히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일정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일이었다. 만일 맞춘 다이얼들이 패스워드와 일치한다면, 사진기 렌즈의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크립텍스의 한쪽 끝이 살짝 돌아가며 부드럽게 열릴 터였다. 그럼 손을 안으로 넣어 식초병을 감싸고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꺼낼 수 있다. 하지만 패스워드가 틀렸다면 소피가 바깥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내부의 관절 구실을 하는 레버에 전달되고, 내부 빈 공간의 아래쪽으로 선회해서 유리병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결국 크립텍스를 세게 잡아당기면 유리병은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부드럽게 잡아당겨야 해.’
  소피가 손바닥으로 크립텍스의 양끝을 감싸자, 티빙과 랭던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패스워드를 알아냈다는 흥분에 휩싸여, 소피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크립텍스는 시온의 쐐기돌이다.’
  티빙에 따르면, 이것은 성배의 행방을 알려주는 지도를 담고 있다고 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과 상그리엘의 보물을 드러내는…… 은밀한 진실의 궁극적인 발견.
  석조 원통을 단단히 잡고, 소피는 모든 글자가 눈금에 맞게 늘어서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피는 힘을 약간 더 가했다. 갑자기 돌이 잘 만들어진 망원경처럼 살짝 돌아갔다. 두꺼운 크립텍스 뚜껑이 소피의 손에 쥐어졌다. 랭던과 티빙은 펄쩍 뛸 뻔했다. 뚜껑을 탁자에 놓자 소피의 심장 박동수가 빠르게 올라갔다. 소피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원통을 기울였다.
  ‘두루마리다!’
  둘둘 말린 종이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며, 소피는 종이가 원통 비슷한 물체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식초가 든 유리병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식초를 감싸고 있는 종이는 섬세한 파피루스가 아니라 양피지였다.
  ‘이거 이상한데. 식초로는 양피지를 녹일 수가 없을 텐데.’
  두루마리 속의 공간을 다시 들여다보며, 소피는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 식초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뭐가 잘못됐소? 두루마리를 꺼내 봐요.”
  티빙이 물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소피는 양피지 두루마리와 양피지가 감싸고 있는 물체를 잡고 원통에서 끄집어냈다.
  “이건 파피루스가 아니잖아. 너무 무겁군.”
  티빙이 말했다.
  “그래요. 덧대어져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 식초병 때문에?”
  소피는 두루마리를 풀어서 양피지가 안에 감싸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아니예요. 이것 때문에요.”
  양피지 안에 있던 물체를 보는 순간, 랭던의 심장은 가라앉았다.
  티빙이 침울하게 말했다.
  “신이여, 우릴 도우소서! 아가씨 할아버지는 무자비한 건축가였군.”
  랭던은 놀란 마음으로 응시했다.
  ‘소니에르는 이 일을 쉽게 끌고 갈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제 알겠군.’
  탁자에는 둘째 크립텍스가 놓여 있었다. 검은 마노로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크립텍스가 첫째 것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중성에 대한 소니에르의 열정이었다.
  ‘두 개의 크립텍스.’
  모든 것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해석. 남자와 여자. 하얀색 안에 깃든 검은색.’
  랭던은 상징주의의 거미줄이 사방으로 뻗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흰색은 검은색을 낳았다.’
  ‘모든 남자는 여자로부터 나왔다.’
  ‘흰색-여자’
  ‘검은색-남자’
  손을 뻗어 랭던은 더 작은 크립텍스를 집어들었다. 크기가 반으로 줄고 색이 검정이라는 것만 빼면, 첫째 크립텍스와 똑같아 보였다. 랭던은 다시 출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전에 들었던 액체 소리는 분명 이 작은 크립텍스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리라.
  양피지를 랭던에게 내밀며 티빙이 말했다.
  “자, 로버트. 적어도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걸세.”
  랭던은 두꺼운 양피지를 조사했다. 깔끔한 필적으로 네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역시 강약 5보격의 시였다. 시는 수수께끼 같았지만, 랭던은 처음 한 줄만 읽고서도 영국으로 향하는 티빙의 비행기가 제값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시의 나머지 부분은 두 번째 크립텍스를 열 수 있는 패스워드가 런던 어딘가에 있는 기사의 무덤을 방문하면 찾을 수 있다는 분명한 암시를 주고 있었다.
  랭던은 걱정스럽게 티빙을 돌아보았다.
  “이 시에서 말하는 기사가 누구인지 떠오르는 게 있습니까?”
  티빙이 슬며시 웃었다.
  “그렇게 막막한 것만은 아닐세. 하지만 우리가 어느 교회당의 지하실을 봐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그 순간, 비행기의 25킬로미터 앞에서는 여섯 대의 켄트 경찰 차량들이 비긴힐 사설 비행장을 향해 비에 젖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79

  콜레 부관은 티빙의 냉장고에서 페리에 한 병을 꺼내 마시며 화실을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런던으로 파슈와 함께 가지 않고, 콜레는 빌레트 성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 PTS팀을 책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요원들이 발견한 증거들은 별 쓸모가 없었다. 바닥에 박힌 총알 하나, 칼날과 잔이라는 말과 함께 여러 상징들이 그려진 종이 한 장. PTS팀이 콜레에게 말한 대로 보수적인 가톨릭 단체인 오푸스 데이를 연상시키는 피 묻은 갈고리 허리띠 하나. 최근 어떤 뉴스 프로그램이 파리에서 오푸스 데이가 벌이는 공격적인 신도 모집 활동을 보도했을 때, 이 단체는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콜레는 한숨을 쉬었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잡동사니들을 이해하려면 행운이 있어야겠군.’
  호화로운 복도를 내려가다가 콜레는 서재로 쓰이는 거대한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서재에서는 PTS 조사 팀장이 조사 팀장이 지문을 조사하느라 바빴다. 팀장은 멜빵바지를 입은 뚱뚱한 남자였다.
  “뭐 새로 나온 거 없습니까?”
  콜레가 들어서며 물었다.
  팀장이 머리를 저었다.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 개의 지문들은 저택 다른 곳에 있는 지문들과 일치해요.”
  “말총 허리띠에 있는 지문들은 어때요?”
  “인터폴이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모든 것을 거기로 보냈거든요.”
  콜레는 책상에 놓인 두 개의 증거품 봉투를 가리켰다.
  “그럼 이것들은?”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습관입니다. 이상하게 보이는 게 있다 싶으면 일단 봉투에 집어넣고 보는 거죠.”
  콜레는 다가갔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
  팀장은 봉투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골라 콜레에게 내밀었다.
  “이 영국인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걸 한 번 보십쇼.”
  사진은 고딕 성당의 입구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개의 늑재층(갈비뼈 모양의 뼈대를 이루는 재목으로 만들어진 층 구조)이 아치 모양을 그리면서 작은 문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전통적인 성당 내부의 모습이었다.
  콜레는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내밀었다.
  “이게 이상합니까?”
  “뒤집어 보십쇼.”
  사진 뒤에서 콜레는 영어로 휘갈겨쓴 메모를 발견했다. 대성당 안의 길고 빈 본당은 여자의 자궁에 대한 은밀한 이교도의 헌사라는 내용이었다.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성당의 통로를 묘사한 이 메모는 콜레를 놀라게 했다.
  “잠깐만! 그럼 이 영국인은 성당의 입구가 여성의……”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 모양의 용마루와 통로 위에 있는 음핵 모양의 작은 다섯잎 꽃장식으로 완성된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시 가보고 싶게 만드는 군요.”
  콜레는 다른 증거품 봉투를 집었다. 비닐 봉투 속에서 이상한 문서처럼 보이는 커다란 광택 사진 한 장이 두드러졌다. 사진 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기밀 서류 넘버 4(도)lm(1)249′
  “이게 뭡니까?“
  콜레가 물었다.
  “저도 몰라요. 영국인이 저택 여기저기에 이 종이의 사본을 갖다 놓았더군요. 그래서 한 장 집어넣었습니다.”
  콜레는 문서를 읽었다.
  시온 수도회 뱃사공들 / 그랜드 마스터
  장 드 기소르      1188-1220
  마리 드 생클레르  1220-1266
  기욤 드 지소와    1266-1307
  에두아르 드 바     1307-1336
  잔 드 바           1336-1351
  장 드 셍클레르     1351-1366
  블랑 데브로        1366-1398
  니콜라스 플라멜    1398-1418
  르네 당주          1418-1480
  이오란드 드 바     1480-1483
  산드로 보티첼리    1483-1510
  레오나르도 다빈치  1510-1519
  코네타블 드 루브봉 1519-1527
  페르디낭 드 곤자크 1527-1575
  루이 드 느베르     1575-1595
  로버트 플러드      1595-1637
  J.발렌틴 안드레아   1637-1654
  로버트 보일        1654-1691
  아이작 뉴턴        1691-1727
  찰스 래드클리프    1727-1746
  샤를 드 로레인     1746-1780
  맥시밀리앙 드 로렌 1780-1801
  샤를 노디에        1801-1844
  빅토르 위고        1844-1885
  클로드 드뷔시      1885-1918
  장 콕토            1918-1963
  ‘시온 수도회?’
  콜레는 의아했다.
  요원 한 명이 서재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부관님? 전화 교환대에서 파슈 반장님을 찾는 긴급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반장님과 연락이 안 됩니다. 부관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콜레는 부엌으로 돌아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앙드레 베르네였다.
  은행장의 세련된 억양도 그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을 지우지는 못했다.
  “파슈 반장과 통화하고 싶다고 얘기한 걸로 아는데, 아직 반장에게서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장님은 무척 바쁩니다. 제가 도울 일이라도?”
  “오늘 밤 경찰 수사 진행과 병행해야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순간 콜레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베르네 씨, 현재는 제가 파리 수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콜레 부관입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부관, 다른 전화가 걸려와서 그럼 실례합니다. 제가 나중에 다시 걸도록 하지요.”
  베르네는 전화를 끊었다.
  몇 초 동안 콜레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생각이 났다.
  ‘그래, 그 목소리야!’
  콜레는 숨이 멎을 정도였다.
  ‘장갑 트럭 운전사. 가짜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던 운전사.’
  콜레는 은행장이 왜 그리 서둘러 전화를 끊었는지 이해가 됐다. 간밤에 자신이 거짓말을 했던 경찰관 콜레 부관이라는 이름을 베르네도 기억해 냈을 것이다.
  콜레는 이 이상한 사건의 추이가 주는 암시를 곰곰이 생각했다.
  ‘베르네가 관련되어 있었군.’
  본능적으로 콜레는 파슈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감정적으로는 이 일이 자신을 빛내줄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콜레는 즉시 인터폴에 전화를 걸어,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과 은행장 앙드레 베르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요구했다.

80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주십쇼. 오 분 후에 착륙할 것입니다.”
  티빙의 조종사가 안내 방송을 했다. 비행기는 비가 내리는 어둑어둑한 아침 속으로 기체를 내리고 있었다.
  하강하는 비행기 아래로 펼쳐진 안개 낀 켄트의 언덕을 바라보며, 티빙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즐거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은 파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였다. 오늘 아침, 봄의 녹색이 감도는 축축한 그의 고향 땅은 특별히 더 자신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의 내 시간은 끝났다. 나는 승리를 안고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쐐기돌을 찾아내다니.’
  물론 쐐기돌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영국 어디겠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티빙은 벌써부터 영광을 맛보고 있었다. 랭던과 소피가 지켜보는 가운데 티빙은 일어나서 객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벽에 붙은 판을 한쪽으로 밀치자 교묘하게 숨겨진 벽장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빙은 금고의 다이얼을 맞추고, 금고를 열어서 두 개의 여권은 꺼냈다. 그리고 티빙은 50파운드 지폐들이 묶인 두꺼운 돈뭉치를 끄집어냈다.
  “레미와 나를 위한 문서일세. 그리고 이건 자네 둘을 위한 문서라네.“
  소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뇌물?”
  “창조적인 외교 수법이지. 사설 비행장에서는 확실히 통할 거야. 내 격납고에서 영국 세관원이 우리를 맞이할 걸세. 그리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겠지. 세관원을 안으로 들이기보다는 이렇게 말할 거네. 지금 프랑스 여성 유명인사와 여행하는 중인데, 아무도 그녀가 영국에 있는 걸 모르기를 바란다고 말이야. 왜 자네들도 알잖는가, 언론이나 기자회견 따위 말일세. 이를 묵인해 주는 관용의 대가로 세관원에게 후한 팁을 주는 거지.”
  랭던은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관원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티빙은 빙긋 웃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받으려 들지 않겠지. 하지만 비행장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거든. 어쨌거나 나는 무기 중개상도 아닌데다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니까. 멤버쉽엔 특권이 따르는 법이지.”
  레미가 손에 권총을 들고 복도로 올라와서 말했다.
  “주인님, 제가 할 일은?”
  티빙은 그의 집사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손님과 함께 비행기에 남아 있도록 하게. 저놈을 런던 여기저기로 끌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소피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레이 경,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경찰이 이 비행기를 찾아낼 거예요.”
  티빙은 웃었다.
  “그래요. 프랑스 경찰이 탑승해서 레미를 찾아냈을 때, 놀랄 모습을 상상해 봐요.”
  소피는 티빙의 대범한 태도에 놀랐다.
  “당신은 인질을 묶어서 국가 경계선을 넘어왔어요.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요.”
  “내 변호사들도 심각하다오.”
  티빙은 비행기 뒤편에 있는 수도승에게 눈을 부라렸다.
  “저 짐승 같은 놈이 내 집에 침입해서 나를 죽일 뻔했지. 그것은 사실이오. 레미가 증언해 줄 거요.”
  랭던이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을 묶어서 런던으로 싣고 왔잖습니까?”
  티빙은 오른손을 들어 법정에서 선서하는 모습을 흉내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영국 사법제도에 어리석은 편견이 있는 이 괴짜 늙은 기사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프랑스 당국에 전화를 했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압니다. 하지만 난 속물이어서, 자유방임주의인 프랑스 경찰이 적절한 고소를 취해 줄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남자는 나를 죽일 뻔했어요. 그래요, 이 놈을 영국까지 데려온 건 성급한 결정이었어요. 하지만 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어요. Mea culpa. Mea culpa.(내탓이오).”
  랭던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서 나온 얘기라면, 레이경. 일이 풀릴 수도 있겠군요.”
  조종사가 다시 불렀다.
  “선생님? 관제탑에서 막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의 격납고 근처에서 보수 작업이 있답니다. 그래서 격납고 대신 터미널로 곧장 비행기를 가져 오라는데요.”
  10년 넘게 비긴힐 사설 비행장을 이용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슨 문제인지 그 사람들이 얘기하던가?”
  “그게, 관제탑 직원의 말이 모호합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이 샜다나 뭐라는데요. 터미널 앞에 비행기를 세우고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두 비행기 안에 대기하라고 합니다. 안전조치겠죠. 관제탑으로부터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지시를 받을 때까지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안 됩니다.”
  티빙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름유출 사고가 벌어진 거겠지.’
  주유소는 티빙의 격납고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레미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주인님, 매우 수상하게 들리는데요.”
  티빙은 소피와 랭던을 돌아보았다.
  “친구들,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드는군. 환영위원회를 만나게 될 것 같아.”
  랭던은 침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슈는 아직도 내가 용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소피가 말했다.
  “그렇든가, 아니면 파슈는 자기 실수를 인정하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어요.”
  티빙은 듣고 있지 않았다. 파슈의 정신상태와는 상관없이,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 잊지 말아야 해. 성배. 우리는 매우 가까이 왔어.’
  둔한 소리와 함께 착륙 기어가 발을 내렸다.
  깊이 후회하는 목소리로 랭던이 말했다.
  “레이 경, 내가 나서서 법적으로 이 일을 해결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에서 모두 빠지도록 해요.”
  티빙이 손을 저었다.
  “오, 맙소사. 로버트! 그렇다고 저들이 우리를 그냥 가게 내버려 둘 것 같은가? 나는 자네를 불법적으로 데려왔소. 느뵈 양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네의 도주를 도왔고, 비행기 뒤에는 사지가 묶인 남자를 데리고 있네. 이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야! 우리는 모두 함께일세.”
  소피가 말했다.
  “어쩌면 다른 비행장은?”
  티빙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금 물러나서 다른 곳에 내릴 때쯤에는, 우리 환영 파티에 군대의 탱크들이 끼어 있을 거요.”
  소피는 의기소침해졌다.
  만일 성배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영국 당국과의 대면을 지연시킬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대담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티빙은 느꼈다.
  “잠깐만 기다려들 보게나.”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조종실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무얼 하시게요?”
  랭던이 물었다.
  “세일즈 회의라네.”
  티빙은 비정상적인 계획을 수행하도록 조종사를 설득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지 궁금했다.

81

  마침내 티빙의 비행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비긴힐 비행장의 서비스 대표이사인 사이먼 에드워즈는 비에 젖은 활주로를 신경질적으로 흘끔거리며 서둘러 관제탑으로 가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특히 재수 없는 날이었다. 가장 부유한 고객 중 한 명이 체포당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레이 티빙 경은 개인 격납고에 대해서만 돈을 지불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비행기는 잦은 이착륙으로 인해, 비행기가 내리고 뜰 때마다 착륙 비용이라는 것을 내고 있었다. 보통은 티빙의 스케줄을 미리 통보받고, 그의 도착을 위한 엄격한 규정을 따르면 되었다. 티빙은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을 좋아했다. 개인 격납고에 세워둔 고객 맞춤형 리무진에는 항상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했고, 차체는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흘러야 했다. 그리고 그날의 <런던 타임스>가 뒷좌석에 놓여 있으면 되었다. 세관원이 격납고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기본적인 서류와 가방들을 검사했다. 가끔씩 티빙이 무해한 농산물을 가져오면, 이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세관원은 후한 팁을 받아 챙길 수가 있었다. 대부분 비싼 음식으로 프랑스산 식용 달팽이, 잘 숙성된 가공되지 않은 로크포르 치즈, 과일들이었다. 어쨌든 관세법은 터무니없는 것이 많았다. 비긴힐이 고객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다면, 분명 경쟁사인 다른 비행장에서 이 짓을 할 것이다. 티빙은 여기 비긴힐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공받았고, 비행장 직원들은 그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제트기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던 에드워즈는 신경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돈을 뿌리고 다니는 티빙의 기호가 그를 어떤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프랑스 당국은 티빙을 비행장에 묶어두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티빙에게 씌워진 죄목이 무엇인지 에드워즈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경찰을 분명 심각해 보였다. 프랑스 당국의 요청에 따라 켄트 경찰이 비긴힐 통제 센터에 명령을 내렸다. 티빙의 제트기 조종사에게 연락해 격납고가 아닌 터미널로 곧장 오라는 지시였다. 조종사는 동의했고, 기름 누출이라는 황당한 얘기를 믿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영국 경찰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무장한 경찰 팀을 내보냈다. 지금 터미널 건물 안에는 권총을 든 여덟 명의 경찰이 비행기의 엔진이 꺼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엔진이 멈추면, 활주로에 있는 직원이 비행기 타이어 고정용 쐐기를 설치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행기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럼 경찰이 상황을 파악하러 나서고, 프랑스 경찰이 일을 처리하러 올 때까지 탑승객을 비행기 안에 잡아두면 되었다.
  티빙의 비행기는 이제 오른쪽 나무 위를 스치듯 지나면서 하늘을 낮게 날고 있었다. 사이먼 에드워즈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 켄트 경찰이 자리를 잡고 있고, 쐐기를 든 보수 유지 직원도 대기하고 있었다. 저 멀리 활주로 끝에서 제트기가 코를 약간 들고 내려앉아 타이어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비행기는 터미널 전방에서 오른쪽 왼쪽으로 이동하면 속력을 줄였다. 비행기의 하얀 동체가 젖은 날씨에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아 터미널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는 멀리 떨어진 티빙의 격납고를 향해 조용히 나아갔다.
  모든 경찰들이 돌아서서 에드워즈를 응시했다.
  “터미널로 오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드워즈는 당황했다.
  “그랬습니다!”
  몇 초 후, 활주로를 가로질러 멀리 떨어진 격납고를 향해 달리는 경찰차 안에 에드워즈도 쑤셔박혀 있었다. 티빙의 제트기가 개인 격납고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사라질 때, 경찰 수송대는 5백 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경찰차들이 미끄러지듯 격납고 문 앞에 이르자, 총을 꺼내 든 경찰들이 차에서 쏟아져 내렸다.
  에드워즈도 뛰어내렸다.
  소음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제트기는 격납고 안에서 방향을 바꾸며 아직도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음 출발을 위해서 비행기 코를 다시 격납고 입구로 내놓는 작업이었다. 비행기가 180도 회전을 마치고, 격납고 입구로 들어올 때, 에드워즈는 바리케이드를 친 경찰차를 보고 놀라서 겁먹은 조종사의 얼굴을 보았다.
  조종사가 엔진을 내리자, 경찰들은 흩어져서 주위를 포위했다. 켄트 경찰 서장을 따라서 에드워즈는 걱정스럽게 비행기의 문으로 향했다. 동체의 문이 활짝 열렸다.
  비행기의 전자식 계단이 부드럽게 아래로 뻗어 내리자, 레이 티빙이 문가에 나타났다. 자기를 겨누고 있는 권총의 바다를 응시하며, 레이 티빙은 목발에 몸을 의지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이먼, 내가 없는 동안 경찰 복권에 당첨이라도 됐는가?”
  걱정스럽다기보다는 당황한 말투였다.
  사이먼 에드워즈는 쉰 목소리를 내며 한걸음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레이 경. 혼란을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비행장에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의 조종사에게 터미널로 오라고 했지요.”
  “그래, 그래. 조종사에게 내가 이리로 오자고 그랬네. 내가 약속에 늦었거든. 난 이 격납고에 돈을 지불했고, 기름 유출이라는 하찮은 일 따위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말일세.”
  “경이 이곳으로 오시는 바람에 저희 경비에 약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도 아네. 스케줄에 따른 일이 아니지. 자네와 나 사이니 말인데, 새로운 약물치료가 나와서 나를 들뜨게 하고 있다네. 하지만 비행기 정비를 위해서도 한 번 와야 했어.”
  경찰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에드워즈는 주춤했다.
  “그거 잘된 일이군요. 티빙 경.”
  켄트 경찰 서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티빙 경, 한 시간 정도 탑승한 채로 계셔 주셔야겠는데요.”
  절룩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던 티빙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티빙이 도로에 내려서더니 말했다.
  “그 일은 불가능할 것 같소이다. 난 병원 약속이 있어요. 놓칠 수 없는 약속이오.”
  비행기에서 멀어지려는 티빙의 행보를 서장이 가로막았다.
  “저는 여기에 프랑스 사법경찰의 지시로 왔습니다. 그쪽에서는 경이 이 비행기로 도망자들을 실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티빙은 서장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몰래 카메라 찍는 거요?꽤나 재미있구먼!”
  서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프랑스 경찰은 경의 비행기에 인질도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계단 꼭대기 문가에 티빙의 집사인 레미가 나타났다.
  “제가 레이 경을 위해 일하는 인질입니다. 하지만 경은 제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십니다.”
  레미는 자기 시계를 체크했다.
  “주인님, 까딱하다간 정말 늦겠습니다.”
  레미는 격나고 구석에 세워진 재규어 리무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팅된 유리창과 흰 타이어로 측면이 멋지게 꾸며진 거대한 자동차였다.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레미가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장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비행기로 돌아가 주십시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경찰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티빙은 사이먼 에드워즈를 돌아보았다.
  “사이먼, 하느님 맙소사. 이거 우스꽝스러운 일이구먼! 우리는 비행기에 아무도 태우지 않았소. 보통 때처럼 나와 레미. 내 조종사뿐이오. 자네가 중재자로 나서 주지 않겠는가? 올라가서 비행기에 누가 또 타고 있는지 확인하게나.”
  에드워즈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살펴보지요.”
  “잘도 그러시겠지! 내 눈으로 보겠습니다.”
  비행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장이 소리를 질렀다. 비긴힐 비행장에서 티빙과 거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사이먼 에드워즈가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장은 잘 알고 있었다.
  티빙은 머리를 저었다.
  “안 되오. 당신은 안되오. 이건 개인 소유물이고, 서장이 수색 영장을 가져오기 전까진 내 비행기에서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소. 난 지금 서장에게 합리적인 제안을 했소. 에드워즈 씨가 안을 살펴보도록 말이오.”
  “안 됩니다.”
  티빙의 자세가 굳어졌다.
  “서장, 당신의 게임에 놀아날 시간이 없소이다. 난 늦었고, 지금 가야 하오. 나를 막는 일이 서장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날 쏘시오.”
  그 말을 남긴 채 티빙과 레미는 서장 앞을 지나 격납고를 가로질러 주차된 리무진으로 향했다.
  켄트 경찰 서장을 자기 앞에 있는 불손한 절름발이 레이 티빙이 밥맛이라고 생각했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여겼다.
  ‘법 위에 있을 수는 없지.’
  서장을 돌아서서 티빙의 등을 겨누었다.
  “멈춰요! 쏘겠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거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티빙이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내 변호사들이 서장의 불알을 아침 식사로 요리해 먹을테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만일 영장 없이 내 비행기에 감히 오른다면, 당신 비장이 그 다음 코스가 될 거요.”
  이런 힘 겨루기에 서장은 초보가 아니었고, 티빙의 말에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티빙의 말이 옳았다. 경찰이 티빙의 제트기에 오르려면 영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프랑스에서 왔고, DCPJ의 반장인 브쥐 파슈가 다짐을 준 일이었다. 켄트 경찰 서장은 티빙이 비행기 안에 의도적으로 숨기는 게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자기 경력이 더 화려해질 것이라 확신했다.
  서장이 지시했다.
  “저들을 막아라. 내가 비행기를 조사하겠다.”
  리무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경찰들이 총을 들고 티빙과 집사를 가로막았다.
  그제야 티빙은 돌아섰다.
  “서장, 이것이 마지막 경고요. 비행기에 오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시오. 후회하게 될 거요.”
  티빙의 위협을 무시하고, 서장은 권총을 꼭 쥐고 계단을 씩씩하게 올라갔다. 문 앞에서 서장은 안을 살폈다. 그런 뒤 객실에 들어갔다.
  ‘제기랄, 이게 뭐야?’
  조종실에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조종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과 의자, 짐칸을 재빨리 둘러본 서장은 여러 사람은 고사하고 한 명도 숨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브쥐 파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레이 티빙은 진실을 말한 듯했다.
  켄트 경찰 서장은 힘들게 침을 삼키며 버려진 객실에 홀로 서 있었다.
  ‘염병할!’
  서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계단을 다시 내려와서, 서장은 리무진 근처에서 있는 레이 티빙과 그의 집사를 쳐다보았다.
  서장이 지시했다.
  “가게 둬라. 잘못된 정보를 받은 모양이다.”
  격납고를 가로지르는 티빙의 눈이 험악했다.
  “내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기대하고 계시오. 그리고 참고로 하는 얘긴데. 프랑스 경찰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오.”
  그 말과 함께 티빙의 집사가 리무진 뒷좌석의 문을 열고 절룩거리는 자기 주인이 뒤에 앉는 것을 도왔다. 그런 뒤 집사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재규어 리무진이 격납고를 빠져나가자 경찰들은 흩어졌다.
  “잘해줬네. 이 사람아.”
  공항을 빠져나온 리무진이 속력을 내자 뒷좌석에 앉은 티빙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빙은 넓은 리무진 내부의 후미진 구석에 시선을 보냈다.
  “모두들 편안한가?”
  랭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묶인 채로 몸이 구겨진 알비노 옆에서 랭던과 소피는 아직도 엎드려 있었다.
  제트기가 격납고 안으로 들어와서 선체를 돌리느라 잠깐 멈췄을 때, 레미가 비행기 문을 열었다. 경찰차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랭던과 소피는 수도승을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가 리무진 뒤에 안 보이게 숨었다. 그 뒤 비행기의 제트엔진이 다시 으르렁거리며 선체를 회전시키고, 완전히 돌아섰을 때 경찰차들이 격납고 안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이제 리무진은 켄트를 향하고 있었다. 랭던과 소피는 수도승을 바닥에 내버려 둔 채 리무진 뒷좌석으로 기어 나왔다. 두 사람은 티빙 앞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영국인은 둘에게 익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리무진 바의 냉장고 문을 열고 말했다.
  “마실 것을 좀 줄까? 뭔가 씹을 거리라도? 비스킷? 땅콩? 탄산수?”
  소피와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티빙은 씨익 웃으며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자, 그럼 기사들의 무덤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82

  “플리트 가?”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티빙에게 눈길을 보내며 랭던이 물었다.
  ‘플리트 가에 교회당 지하실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티빙은 어디에서 기사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주의 깊게 행동해 왔다. 시에 따르면, ‘기사의 무덤’이 작은 검은색 크립텍스를 열 수 있는 패스워드를 제공해 줄 것 같았다.
  티빙은 활짝 웃으며 소피를 바라보았다.
  “느뵈 양, 우리 하버드 친구에게 시를 한 번 더 보여주는 것이 어때요?”
  소피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검은색 크립텍스를 꺼냈다. 크립텍스는 양피지로 말려 있었다. 장미목 상자와 큰 크립텍스는 비행기의 금고 안에 두고 휴대하기 편리한 작은 검은색 크립텍스만 가져왔다. 소피는 양피지를 벗겨서 랭던에게 건네주었다.
  비행기 안에서 여러 번 읽었지만, 랭던은 특정 위치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시를 읽었다. 땅 위에서 5보격의 리듬이 좀더 분명히 의미를 드러내기를 바라며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글을 살폈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그의 노력의 결실이 성스러운 분노를 일으켰노라.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球)를 찾아라.
  그것이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용어는 매우 간단했다. 런던에 묻힌 기사가 있다. 기사가 공들인 뭔가가 교회를 노엽게 만들었다. 기사의 무덤은 거기 있어야 할 구를 잃어버렸다. 시의 마지막 구절,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은 예수의 씨를 잉태한 장미, 즉 마리아 막달레나를 암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시의 명백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랭던은 이 기사가 누구이며, 그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무덤의 위치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거기에 없는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나?”
  실망스러워하며 티빙이 킬킬 웃었다. 랭던은 왕립 역사가가 자신이 한 수 위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느뵈 양은?”
  소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없었다면 자네 둘은 어쨌을꼬? 그래, 내 곧장 얘기해 주지. 사실 아주 간단하다네. 첫째 줄이 열쇠야. 로버트, 자네가 다시 읽어주겠나?”
  랭던이 크게 읽었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티빙은 랭던을 쳐다보았다.
  “정확해. 교황이 묻은 기사, 이게 무슨 의미 같은가?”
  랭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교황에 의해 묻힌 기사? 교황이 장례식을 주관한 기사?”
  티빙은 크게 웃었다.
  “오, 그럴싸하군. 자넨 항상 낙관주의자로구먼. 로버트. 두 번째 줄을 보게. 기사는 명백히 교회의 성스러운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뭔가를 했어요. 다시 생각해 보게. 교회와 성전 기사단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고려해 봐. 교황이 묻은 기사?”
  “교황이 죽인 기사?”
  소피가 물었다.
  티빙은 웃으며 소피의 무릎을 토닥거렸다.
  “잘했어요, 아가씨. 교황이 매장한 기사, 아니면 죽인 기사인 거지.”
  랭던은 1307년에 일어난 악명 높은 기사단 소집을 떠올렸다. 불행한 13일의 금요일 사건이다. 교황 클레멘트는 성전 기사단 수백명을 죽이고 매장했다.
  “하지만 교황 때문에 살해당한 기사들의 무덤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아하, 그렇지 않네! 기사들 중 상당수는 말뚝 위에서 화형당한 뒤 그대로 티버 강에 던져졌지. 그런데 이 시는 무덤을 말하고 있어요. 런던에 있는 무덤. 그리고 런던에 묻힌 기사는 별로 없다네.”
  티빙은 말을 멈추고 랭던을 응시했다. 마침내 티빙은 헛기침을 했다.
  “로버트, 하느님 맙소사! 성전 기사단, 그들이 런던에 세운 교회 말일세.”
  랭던은 깜짝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템플 교회? 그 교회에 지하실이 있습니까?”
  “가장 놀라운 무덤 열 두개를 자넨 보게 될 걸세.”
  시온 수도회를 연구하면서 랭던은 이 교회의 이름을 수도 없이 지나쳤지만, 정작 템플 교회를 찾아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때 모든 기사단과 시온의 영국에서의 활동 중심지였던 템플 교회는 성전 기사단이 그 이름을 딴 솔로몬의 신전, 즉 템플을 기려 이 이름이 붙었다. 뿐만 아니라 상그리엘 문서는 기사단이 로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해주었다. 기사들이 템플 교회의 이상한 장소 안에서 은밀한 의식을 수행했다는 전설은 풍부했다.
  “템플 교회가 플리트 가에 있습니까?”
  티빙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네, 플리트 가에서 조금 떨어진 안쪽, 템플 거리에 있지. 이렇게 다 얘기해 주기 전에 자네가 좀더 진땀빼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고맙습니다.”
  “두 사람 모두 거기에 가본 적이 있나?”
  소피와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놀랍지는 않네. 교회는 현재 커다란 빌딩 숲 뒤에 숨어 있거든. 교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지. 괴상하고 오래된 곳이니까. 그 건물은 확실히 이교도적이거든.”
  소피는 놀란 모양이었다.
  “이교도?”
  “판테온 같은 이교도 말일세. 교회 건물이 둥근 모양이거든. 성전 기사단은 전통적인 십자가 형태의 설계를 무시하고, 태양을 기리는 완벽하게 둥근형태의 교회를 건설한 거지. 로마에 있는 소년들에게 인사나 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일세. 기사단은 런던 중심부에 스톤헨지를 다시 세운 거라네.”
  소피는 티빙을 쳐다보았다.
  “시의 나머지 부분은요?”
  역사가의 즐거운 기분은 차차 가라앉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수수께끼야. 우린 무덤 열 개를 주의 깊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요. 운이 따르면, 구가 없는 무덤을 발견할 수 있겠지.”
  랭던은 그들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깨달았다. 꼭 초보적인 낱말 맞추기 게임 같았다.
  ‘다섯 자로 된 단어란 성배(Grail)를 말하는 것일까?’
  비행기에 있을 때, 그들은 이미 가능한 모든 낱말을 시험해 보았다. 성배(GRAIL), 그랄(GRAAL),그리엘(GREAL),비너스(VENUS) ,마리아(MARIA) ,예수(JESUS), 사라(SARAH). 하지만 크립텍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분명해.’
  장미와 씨를 품은 자궁을 나타내는 다섯 자로 된 다른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 티빙 같은 전문가가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은 패스워드가 평범한 성배 용어가 아니라는 인상을 랭던에게 깊이 심어주었다.
  어깨 너머로 레미가 불렀다. 레미는 자동차의 리어 뷰 미러로 열린 칸막이를 통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레이 경, 플리트 가가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근처에 있다고 하셨나요?”
  “응, 빅토리아 제방길을 타게나.”
  “죄송합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병원으로만 다녔으니까요.”
  티빙은 랭던과 소피에게 눈을 굴리고 툴툴거렸다.
  “날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 같다니까. 잠깐 기다리고들 있게나. 자내들은 뭘 좀 마시며 스낵을 들고 있게.”
  티빙은 레미와 얘기하기 위해 열린 칸막이로 다가갔다.
  소피는 랭던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로버트, 아무도 당신과 내가 영국에 있다는 것을 모를 거예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켄트 경찰은 파슈에게 비행기는 비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파슈는 그들이 아직 프랑스에 있다고 추정할 것이다.
  ‘우린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 된 거로군.’
  티빙의 빼어난 연기가 그들에게 많은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소피가 말했다.
  “파슈는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은 당신을 체포하는 일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어요.”
  랭던은 파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 일이 끝나면, 소피는 랭던의 혐의를 푸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랭던은 그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파슈가 이 음모의 일부일 수도 있다.’
  프랑스 사법경찰이 성배 문제에 얽혀 있다고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파슈가 공모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만큼 많은 우연의 일치를 랭던은 경험했다.
  ‘파슈는 종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나에게 덮어 씌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소피는 반장이 이 체포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저 과도하게 몰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랭던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 바닥에는 랭던의 이름이 휘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원고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고 그 뒤에 도망을 쳤다.
  ‘소피의 견해는 이렇단 말이지.’
  손을 랭던의 무릎에 놓으면서 소피가 말했다.
  “로버트, 당신을 이렇게 깊이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여기 있어서 제겐 너무나 다행이예요.”
  소피의 말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랭던은 둘 사이에서 예기치 않은 애정이 깜박이는 것을 느꼈다. 랭던은 소피에게 조금은 지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자고 있을 때, 더 재미있는 사람이오.”
  소피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제게 당신을 믿으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말에 한 번은 귀를 기울이게 돼서 기뻐요.”
  “당신 할아버지는 날 알지도 못했소.”
  “그렇다 해도, 할아버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신이 해주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어요. 당신은 내가 쐐기돌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줬고, 상그리엘에 대해서 설명해 줬어요. 그리고 지하실에서 일어난 의식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지요. 어쨌든 지난 시간들보다 할아버지가 더 가깝게 느껴져요. 할아버지가 이 일에 기뻐할 거라고 믿어요.”
  이른 아침의 가라이 속에 런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때 빅벤과 타워 브리지가 지배하던 런던의 명물은 이제 거대하고 초현대적인 밀레니엄 눈동자에 자리를 내주었다. 15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는 페리스 회전 관람차는 런던의 전경 전체를 조망하게 해주었다. 랭던 역시 한 번 타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전망 캡슐’이 봉인된 석관을 떠오르게 해서 그냥 땅에 발을 붙이는 쪽을 선택하고 말았었다. 그 대신 랭던은 시원한 템스 강 강둑에서 전망을 즐겼다.
  랭던은 자기를 끌어당기며 무릎을 누르는 힘을 느꼈다. 소피의 녹색 눈동자가 랭던을 보고 있었다. 소피가 자기에게 얘기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가 속삭였다.
  “만일 우리가 상그리엘 문서를 발견한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랭던이 말했다.
  “내 생각엔 지금 논의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오. 당신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크립텍스를 주었고, 당신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할아버지가 바라는 바를 하면 되는 거요.”
  “난 당신의 의견을 묻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당신의 판단을 신뢰하도록 만든 뭔가를 당신은 원고 안에 분명히 적어 놓았던 거예요. 더구나 할아버지는 당신과 사적인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죠. 그것은 드문 일이예요.”
  “어쩌면 그는 내가 가진 정보가 모두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할아버지가 당신의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왜 당신을 찾으라고 내게 말했겠어요? 당신은 그 원고에서 상그리엘 문서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쪽을 지지했나요. 아니면 묻혀 있어야 된다는 쪽을 지지했나요?”
  “어느 쪽도 아니오. 난 어느 쪽으로도 판단을 내리지 않았소. 그 원고는 신성한 여성의 상징을 다루고 있을 뿐이오. 역사를 거슬러 그녀의 도상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추적한 거요. 난 성배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그것을 드러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가정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은 결국 성배에 관한 책을 썼어요. 그것은 분명히 정보가 공유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두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소. 그리스도의 또 다른 역사를 가설로 토론하는 것과……”
  랭던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죠?”
  “신약성서가 가짜 증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과학적인 증거로서 수천 장의 고대 문서를 세상에 내놓는 일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내게 신약성서가 날조에 바탕을 둔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랭던은 웃었다.
  “소피, 세상에 있는 모든 믿음은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그것이 믿음의 정의요.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진실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모든 종교에서 신은 은유와 암시, 과장을 통해서 묘사해요. 초기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일요 예배학교까지 말이오. 은유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우리의 마음이 맏아들이도록 돕는 수단이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은유를 말 그대로 믿기 시작할 때 발생 하는거요.”
  “그럼 당신은 상그리엘 문서가 영원히 묻혀 있어야 된다는 쪽이에요?”
  “난 역사가요. 따라서 문서를 파괴하는 일에 반대하는 입장이오. 그리고 종교학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외적인 삶을 숙고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쪽 입장을 모두 지지하는군요.”
  “내가 그렇소? 성서는 세상에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코란이나 토라, 팔리 캐논이 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안내하듯이 말이오. 만일 당신과 내가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다른 이교도들의 성스러운 이야기를 모두 뒤엎는 문서를 파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소? 깃발을 흔들며 불교 신자에게 부처가 연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예수는 문자 그대로 처녀의 몸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자기들의 믿음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들이 은유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 거요.”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충실한 기독교 신자인 내 친구들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걷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처녀의 몸에서 났다고 믿고 있는데요.”
  “내 요점이 바로 그거요. 종교적인 암시는 현실을 이루는 일부가 되어왔소. 그리고 현실에서 살아 숨쉬며,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이겨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왔어요.”
  “하지만 현실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났잖아요.”
  랭던은 소리내어 웃었다.
  “암호를 깨기 위해 허수(虛數)의 존재를 상정하는 수학적인 암호 해독가보다 더 가짜 같지는 않소.”
  소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공정한 비유가 아니예요.”
  잠시 시간이 흘렀다.
  “당신 질문이 뭐였소?”
  “잊어 버렸어요.”
  랭던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지 얘기할 수 있으니까.”

83

  랭던이 소피, 티빙과 함께 재규어 리무진에서 내렸을 때, 랭던의 미키마우스 손목시계는 7시 30분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빌딩들의 미로를 지나서야 템플 교회의 작은 마당에 닿을 수 있었다. 거친 석조 건물이 빗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건물 위에서는 비둘기들이 구구소리를 냈다.
  런던의 고대 건물인 템플 교회는 전체가 캉 스톤(주로 교회에서 사용되는 곱게 연마한 석회암) 으로 지어져 있었다. 위압적인 정면과 중앙 탑. 한쪽으로 불쑥 뻗은 본당이 있는 이 원형 건축물은 예배 장소라기 보다는 군사 요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예루살렘의 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1185년 2월 10일 완공된 템플 교회는 정치적인 소동과 런던 대화재,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8백 년의 세월을 버티며 살아남았다. 단지, 1940년 독일 나치 공군의 소이탄에 심하게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전쟁 후, 교회는 본래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가장 단순한 형태는 원이다.’
  랭던은 처음으로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교회는 간결하고, 어떤 면에서는 거칠어 보였다. 세련된 판테온이라기보다는 로마의 울퉁불퉁한 산트안젤로 성을 떠오르게 했다. 건물 오른쪽으로 툭 튀어나온 네모난 신축 별관만이 불행히도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별관은 이교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본래의 건물 구조를 허물어뜨리지는 못했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티빙이 말했다.
  “이른 토요일 아침이구먼. 그럼 우리가 치러야 할 예배는 없겠군.”
  교회 입구는 움푹 들어간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커다란 나무 문이 있었다. 문 왼쪽에는 이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안내판이 콘서트 일정표와 예배 고지서 따위로 뒤덮인 채 걸려 있었다.
  안내판을 읽으며 티빙은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관광객들에게 문을 열지 않겠는걸.”
  티빙은 문으로 다가가서 밀어 보았다. 문은 꿈쩍도 안 했다. 티빙은 나무 문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뒤로 물러난 티빙은 뭔가를 꾸미는 얼굴로 안내판을 가리켰다.
  “로버트, 예배 일정표를 좀 살펴봐 주겠나? 이번 주에는 누가 예배를 주재하는가?”
  교회 안에서는 어린 복사가 성채 배령식 방석의 청소를 거의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때 교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소리를 무시했다. 하비 놀즈 신부는 따로 열쇠를 가지고 있고, 몇 시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아마 호기심이 왕성한 관광객이거나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소년은 청소를 마저 하려고 했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글도 읽을 줄 모르나?’
  문에 있는 안내판에는 분명히 토요일은 아침 9시 30분에 교회 문을 연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소년 복사는 자기 일을 계속 해나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쾅쾅 차는 소리로 바뀌었다. 마치 누군가 금속 막대기로 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청소기의 전원을 끄고, 화가 나서 문으로 달려갔다. 빗장을 풀고 문을 안으로 열었다. 입구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관광객들이로군.’
  소년은 투덜거렸다.
  “교회는 아홉 시 삼십 분에 엽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금속 목발을 이용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늙은이는 앵글로 색슨계의 지식인인 체하는 말투로 얘기했다.
  “난 레이 티빙 경이다. 너도 틀림없이 알고 있겠지만, 난 지금 크리스토퍼 렌 사 부부를 모시고 왔다.”
  늙은이는 옆으로 비켜서며 자기 뒤에 서 있는 매력적인 남녀에게로 우아하게 팔을 뻗었다. 여자는 풍성한 자줏빛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어두운 머리 색깔에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소년은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은 교회의 가장 유명한 시혜자였다. 대화재로 손실을 입었을 때 렌 경이 모든 복구를 후원했던 것이다. 물론 렌 경은 18세기 초기에 죽었다.
  “예……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목발을 짚은 늙은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막돼먹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로구먼, 꼬마야. 넌 아직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인데, 놀즈 신부님은 어디 계시냐?”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늦게까지 나오지 않으실 거예요.”
  절름발이 남자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감사의 마음이 이거로군. 이 시간, 이 자리에 있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더니만, 하지만 신부님 없이도 우리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소년은 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무엇이 오래 걸리지 않아요?”
  방문객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늙은이는 모두를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내기라도 하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얘야, 분명 너는 여기 신참이로구나. 매년 크리스토퍼 렌 경의 후손들은 렌 경의 재 한 줌을 가져와서 교회 안에 뿌린단다. 이 일은 렌 경의 마지막 유서이자 유언장의 일부지. 이런 일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하지만 우리가 어쩌겠니?”
  이 교회에서 지낸 지 몇 년이 됐지만, 소년은 이런 관습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홉 시 삼십 분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어요. 교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저 역시 아직 청소를 끝내지 못했거든요.”
  목발을 짚은 늙은이가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얘야, 네가 이 건물을 청소할 수 있게 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저 여자분의 주머니에 든 아저씨 덕분이야.”
  “네?”
  목발의 남자가 말했다.
  “렌 여사, 이 무례한 소년에게 재가 든 유골함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미몽에서 깨어난 듯 주머니에서 보호용 헝겊에 싸인 작은 원통을 꺼냈다.
  목발의 늙은이가 냉큼 말했다.
  “저거 봤지? 이제 네가 렌 경의 절박한 소원을 들어주어 우리가 교회 안에 그분의 재를 뿌리게 해주든지. 아니면 우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놀즈 신부에게 내가 말하는 일만 남았다.”
  소년은 망설였다. 놀즈 신부가 교회 전통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오래된 성지에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이 내비쳤을 때 신부가 부릴 못된 성질이었다. 아마도 놀즈 신부는 이 가족들이 찾아 온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이들을 들이는 것보다 돌려보내는 것이 더 위험했다.
  ‘고작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잖아. 그렇게 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라고?’
  한걸음 비켜서서 세 사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을 때, 소년은 자기처럼 렌 부부도 당황했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소년은 자기 일로 돌아가서 곁눈질로 그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교회 안으로 한층 더 깊이 들어왔을 때 랭던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랭던이 속삭였다.
  “레이 경, 거짓말을 너무 잘 하시는군요.”
  티빙의 눈이 반짝거렸다.
  “옥스퍼드 연극반 출신이지. 학생들은 아직도 내가 맡은 줄리어스 시저 얘기를 한다네. 그 누구도 제삼장 일막의 장면을 나만큼 연기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지.”
  랭던은 흘끔 쳐다보았다.
  “그 장면에서 시저가 죽지 않습니까?”
  티빙은 억지로 웃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쓰러질 때 입고 있던 토가가 찢어졌지. 그리고 삼십 분 동안이나 거시기를 밖에 내놓은 채 무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네. 하지만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어. 난 아주 멋있었다고.”
  랭던은 움찔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하고 말았군.’
  교회의 본당으로 이르는 아치길을 따라 그들은 네모난 형태의 별관을 지나갔다. 랭던은 황량해 보일 정도로 교회 내부가 엄격하다는 것에 놀랐다. 제단의 배치는 직선 양식의 기독교 예배당을 본떴지만, 가구들은 전통적인 장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갑고 경직된 것들이었다. 랭던이 속삭였다.
  “황량하군요.”
  티빙이 웃었다.
  “영국의 교회지. 영국 국교회는 자기들 종교를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지. 그들의 고난에서 더 이상 빼낼 것이 없었거든.”
  소피가 교회의 원형 공간에 이르는 거대한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는 것은 마치 요새처럼 보여요.”
  랭던도 동의했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봐도 벽들은 이상하리 만큼 튼튼해 보였다.
  반향이 잘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알루미늄 목발 소리를 울리며 티빙이 일깨웠다.
  “성전 기사단은 전사들이었네. 종교적인 군사단체였지. 템플 교회는 그들의 요새이자 은행이었어.”
  “은행이었다고요?”
  레이를 쳐다보며 소피가 물었다.
  “그렇다네. 기사단은 현대 은행의 개념을 고안해 냈지. 옛날에 유럽 귀족들이 금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어. 그래서 기사단은 귀족들이 근처에 있는 템플 교회에 금을 맡길 수 있도록 허용했다네. 유럽 전역에 있는 다른 어떤 템플교회에서라도 금을 인출할 수가 있었지. 필요한 것은 적절한 문서뿐이었어. 그리고 약간의 수수료였지. 템플 교회들은 ATM의 원조라고 볼수 있어요.”
  티빙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창문을 가리켰다. 장미색의 말을 탄 하얀 옷의 기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태양빛이 굴절되고 있었다.
  “알라누스 마르셀. 1200년대 초기 템플 교회의 수장이야. 그와 그의 계승자들은 실제로 의회의 의장직을 맡았지.”
  랭던은 놀랐다.
  “왕국의 첫 남작?”
  티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들은 템플 교회의 수장이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하지.”
  원형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티빙은 어깨 너머로 소년을 흘끔 쳐다보았다. 소년은 멀리서 청소하고 있었다. 티빙이 소피에게 속삭였다.
  “한번은 성배가 밤새 이곳에 머물렀다는 말이 있어요. 기사단이 성배를 원래 숨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도중에 말이야. 마리아 막달레나의 석관과 함께 상그리엘 문서들이 든 네 개의 궤짝이 바로 여기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나? 이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네.”
  원형의 방으로 들어서면서 랭던 역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랭던의 눈이 엷은 빛깔의 돌로 이루어진 방의 완만한 곡선을 훑고 지나갔다. 벽에는 이무기와 악마, 괴물, 고통스러운 인간의 얼굴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방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각 밑에는 긴 의자가 이 방 전체를 따라 둥그렇게 있었다.
  “원형 극장이로군요.”
  랭던이 속삭였다.
  티빙이 목발을 들어, 방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가리켰다. 랭던은 이미 그들을 보았다.
  ‘열 명의 돌 기사들.’
  ‘왼쪽에 다섯, 오른쪽에 다섯.’
  실제 사람 크기만한 석상들이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기사들은 방패와 갑옷, 칼로 완전 무장을 했다. 랭던은 기사들이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와 그들의 몸 위에 회반죽을 부어 놓은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기사들은 심하게 풍화되었지만, 제각각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서로 다른 장비를 착용하고 있거나, 다리와 팔의 위치, 얼굴 모양, 방패에 새겨진 문양들이 별개였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있노라.’
  원형의 방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랭던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어야만 했다.

84

  템플 교회 근처 지저분한 길목에서 재규어 리무진을 몰던 레미는 산업용 쓰레기통이 줄지어 늘어선 뒤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엔진을 끄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레미는 차에서 내려 수도승이 누워 있는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레미의 존재를 느낀 수도승이 비몽사몽 상태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사내의 붉은 눈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에 차 있었다. 레미는 포박당하고도 밤새도록 차분함을 잃지 않는 사내의 능력에 감탄했다. 처음에는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자신의 곤경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이제 수도승은 자신의 운명을 더 큰 힘에 내맡긴 듯했다.
  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레미는 빳빳이 풀먹인 높은 칼라의 단추를 풀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레미는 리무진의 바에서 스미노프 보드카를 꺼내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미신 후, 두 번째 병을 또 꺼내 마셨다.
  ‘나는 곧 자유로워질 것이다.’
  레미는 바를 뒤져 서비스로 나눠주는 포도주 병따개용 칼을 찾아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 세웠다. 칼은 보통 값비싼 포도주 병의 코르크 마개에 붙어 있는 호일을 살며시 도려내는 데 쓰이지만,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극적인 용도로 쓰일 참이었다. 레미는 반짝이는 칼날을 쥐고 사일래스를 마주 보았다.
  사일래스의 붉은 눈이 공포로 번들거렸다.
  레미는 미소를 짓다가 리무진 뒤로 다가갔다. 수도승은 발버둥치며 몸을 웅크렸다.
  “얌전히 있어.”
  칼날을 세우며, 레미가 속삭였다.
  신이 자기를 저버리다니, 사일래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오히려 영혼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면 되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생긴 근육의 떨림은 그리스도가 참아야 했던 고통을 생각나게 했다.
  ‘자유를 위해 온밤을 기도했다.’
  칼이 다가오자, 사일래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일래스의 어깨를 가르며 칼에 베인 아픔이 번져 나갔다. 사일래스는 자신을 지킬 수도 없고, 여기 리무진 뒤편에서 이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난 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스승이 나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일래스는 따뜻한 온기가 등과 어깨로 번져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피가 살 위로 쏟아지는 장면을 그렸다. 날카로운 아픔이 허벅지를 관통하자, 익숙한 감각의 상실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고통에 대한 신체의 방어 체계인 셈이었다.
  따끔따끔한 열기가 몸 전체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자기 삶의 마지막 모습이 이 살인자와 같을 수는 없으리라 믿고서 눈을 더욱 꼭 감았다. 대신 그는 젊은 시절의 아링가로사 주교의 모습을 떠올렸다. 스페인 작은 교회 앞에 서 있는 아링가로사…… 사일래스와 아링가로사가 직접 세운 교회.
  ‘내 삶의 시작이었지.’
  사일래스는 자기 몸이 불 위에 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프랑스 억양으로,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속삭였다.
  “마셔요.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될 겁니다.”
  사일래스는 놀라서 눈을 떴다. 자기에게 몸을 숙이고 있는 흐릿한 형체가 술이 담긴 잔을 내밀고 있었다. 바닥에는 핏방울이라곤 전혀 묻지도 않은 칼과 갈기갈기 찢어진 송수관 테이프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이걸 마셔요.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피가 근육으로 순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일래스는 불같이 뜨거웠던 진통이 이제는 따끔따끔 쑤시는 통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드카의 맛은 형편없었지만, 사일래스는 감사히 여기면서 마셨다. 운명은 지난밤 사일래스를 거칠게 다루었지만, 신은 모든 것을 한 번의 기적으로 풀어 버렸다.
  ‘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일래스는 이 순간을 아링가로사 주교가 어떻게 부를 것인지 알고 있었다.
  ‘신성한 개입’
  집사가 사과했다.
  “당신을 좀더 일찍 풀어주고 싶었소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빌레트 성에서는 경찰이 들이닥쳤고, 그 뒤 비긴힐 비행장에서도 그랬습니다. 지금이 처음으로 온 기회입니다. 이해하겠지요, 사일래스?”
  사일래스는 몸을 움츠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 이름을 압니까?”
  집사가 웃었다.
  사일래스는 이제 일어나 앉아서 뻣뻣한 근육을 문질렀다. 사일래스의 감정은 혼란과 이해, 불신이 뒤섞인 급류타기 였다.
  “당신이……스승입니까?”
  사일래스의 전제에 웃음을 터뜨리며 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런 힘을 가졌다면 좋겠습니다. 난 스승이 아니오. 당신처럼 그 분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당신을 칭찬했소. 내 이름은 레미요.”
  사일래스는 놀랐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스승님을 위해 일한다면, 왜 랭던이 당신 집에 쐐기돌을 가지고 갔습니까?”
  “내 집이 아니오. 그 집은 세계에서 첫째가는 성배 역사가, 레이 티빙 경의 집이오.”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랭던이 숨을 장소로 티빙의 집을 선택했다는 명백한 우연의 일치에 레미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로버트 랭던은 쐐기돌을 가졌고, 도움을 필요로 했지요. 레이 티빙의 집말고 갈 데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스승이 내게 접근한 이유도 내가 우연히 거기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성배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 모든 것이 명확했다. 사일래스는 기절할 것 같았다. 스승은 레이 티빙 경의 모든 연구에 접근할 수 있는 집사를 일꾼으로 뽑은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당신에게 얘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먼저, 당신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헤클러 앤 코크 권총을 사일래스에게 다시 건네주며 레미는 말했다. 그 뒤 레미는 칸막이 너머로 손을 뻗어 장각 상자 안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권총을 꺼냈다.
  파슈 반장은 비긴힐 비행장에서 노여움을 참으며 티빙의 격납고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켄트 경찰 서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서장을 주장했다.
  “내가 직접 그 비행기를 수색했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이제 서장의 말투는 오만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덧붙여야겠소. 만일 레이 티빙 경이 날 고소하면, 나는……”
  “조종사는 심문했습니까?”
  “물론 안 했소. 그는 프랑스인이고, 우리 사법권은……”
  “날 비행기로 안내하시오.”
  파슈가 격납고에 도착해, 리무진이 주차되어 있던 도로에서 이상한 핏자국을 발견하기까지는 6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파슈는 비행기로 걸어가 선체를 힘껏 두들겼다.
  “프랑스 사법경찰 반장이다. 문 열어라!”
  겁에 질린 조종사가 비행기 문을 열고 사다리를 내렸다.
  파슈가 올라갔다. 3분이 지난 후 권총의 도움으로 파슈는 모든 자백을 받아냈다. 자백 중에는 포박당한 알비노에 대한 얘기도 들어 있었다. 게다가 파슈는 랭던과 소피가 나무상자 같은 것을 티빙의 금고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런던으로 오는 비행 도중 랭던의 관심은 온통 그 상자에 있었다고 조종사는 밝혔다.
  “금고를 여시오.”
  파슈가 요구했다.
  조종사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난 비밀번호를 모릅니다!”
  “그거 안됐군. 조종사 자격증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제안할 참이었는데 말이야.”
  조종사가 손을 움켜쥐었다.
  “여기 보수 유지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금고를 뚫을수 있지 않을까요?”
  “삼십 분의 시간을 주겠소.”
  조종사는 무전기로 뛰어갔다.
  파슈는 비행기 뒤로 걸어가서 술을 꺼내 마셨다. 오전에 술을 마시기란 파슈에게 드문 일이었다. 지금은 이른 아침인데다, 밤새도록 잠도 자지 못했는데 말이다. 눈을 감고 자리에 앉은 파슈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정리해 보았다.
  ‘켄트 경찰의 터무니없는 실수 때문에 큰 대가를 치르게 생겼군.’
  이제 모두가 검은색 재규어 리무진을 찾고 있었다.
  휴대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파슈는 잠시 동안의 휴식을 바라며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링가로사 주교였다.
  “런던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는 도착할 겁니다.”
  파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로 가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난 심히 걱정됩니다. 계획을 바꿨지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일래스를 데리고 있습니까?”
  “아니오. 사일래스를 생포한 사람들이 제가 도착하기 전에 여기 지방경찰을 따돌리고 달아났습니다.”
  아링가로사의 분노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 비행기를 잡을 수 있다고 내게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파슈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교님, 주교님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제 참을성을 시험하지 말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사일래스와 나머지 인물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어디에 내리실 겁니까?”
  “잠깐만 기다리시오.”
  아링가로사는 보류 버튼을 눌렀다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조종사는 히스로 공항에 빈자리를 찾으려고 한답니다. 나는 이 비행기의 유일한 승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방향을 튼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조종사에게 켄트에 있는 비긴힐 사설 비행장으로 오라고 하십시오.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주교님이 내리실 때 제가 여기 없더라도, 주교님을 위한 차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고맙소.”
  “처음 얘기했을 때 제가 말했듯이, 주교님만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잘 기억해 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85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아라.’
  템플 교회 안에 있는 기사 조각상들은 사각형의 베개를 베고, 등을 바닥에 댄 채 누워 있었다. 소피는 냉기를 느꼈다. ‘ 구’를 언급하는 시 구절이 별장 지하실에 있던 할아버지와 그날 밤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히에로스 가모스. 구슬들.’
  소피는 성 의식이 바로 이 성역에서도 행해졌는지 궁금했다. 원형은 방은 그 같은 이교도 의식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중앙에 넓은 공간을 남겨두고, 돌로 만든 긴 의자가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원형 극장,’
  로버트가 말한 대로였다. 한밤중에 횃불 가에서 찬송을 부르며 방 한가운데에서 ‘신성한 교접’을 목격하는 가면 속의 사람들. 소피는 비밀단체의 회원들로 가득 찬 방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이미지를 억지로 마음에서 몰아내며, 소피는 왼쪽 그룹으로 향하고 있는 랭던과 티빙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는 티빙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그들을 앞질러 왼쪽에 있는 다섯 기사들 앞을 대충 지나갔다.
  왼쪽 무덤들을 살피고 나서, 소피는 무덤들 사이의 유사점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모두 등을 대고 누워 있지만, 셋은 다리를 곧게 폈고 둘은 다리를 엇갈리게 했다. 누운 석상들의 기이함은 사라진 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였다. 옷을 조사하다가, 소피는 기사 둘은 갑옷 위에 튜닉을 입고 있는 반면, 다른 셋은 발목 길이의 외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 또한 그다지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 손 동작에 관심을 두었다. 기사 둘은 검을 꽉 쥐고 있었고, 다른 둘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옆에 무기를 두었다. 오랫동안 기사의 손을 들여다보며 소피는 어깨를 으쓱했다. 구와 관련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스웨터 주머니에 들어 있는 크립텍스의 무게를 느끼며, 소피는 티빙과 랭던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아직도 세 번째 기사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기다릴 기분이 들지 않아, 소피는 몸을 돌려 오른쪽 그룹의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방을 가로질러 가며, 소피는 이제 너무 많이 읽어서 외워버린 시를 암송했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그의 노력의 결실이 성스러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노라.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아라.
  그것이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오른쪽 그룹의 기사들에 도착했을 때, 소피는 이 기사들이 왼쪽 그룹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갑옷과 검을 차고, 여러 자세로 누워 있었다.
  마지막에 있는 열 번째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랬다.
  마지막 무덤으로 서둘러 다가간 소피는 너무나 놀랐다.
  ‘베개도 없고, 갑옷도 없고, 튜닉도 없고, 검도 없다.’
  소피의 목소리가 방에 메아리쳤다.
  “로버트? 레이 경? 여기에 없어진 것이 있어요.”
  두 남자는 고개를 들고 즉시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구? 구를 잃어버린 것인가?”
  티빙이 흥분된 목소리로 불렀다. 서둘러 방을 가로지르는 티빙의 목발이 빠른 스타카토로 움직였다.
  열 번째 무덤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소피가 말했다.
  “정확히 그렇지는 않아요. 기사 전체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소피 옆에 도착한 두 남자는 혼란에 휩싸여 열 번째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개방된 공간에 누워 있는 것은 기사라기 보다는 봉인된 석관 같았다. 뾰족한 뚜껑이 달린 석관은 위로 갈수록 넓어지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왜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까?”
  랭던이 물었다.
  턱을 두드리며 티빙이 말했다.
  “매력적이야. 이 기괴한 것을 내가 잊고 있었구먼. 여기에 와본지 수년이나 되었으니 말이야.”
  소피가 말했다.
  “이 관은 다른 아홉 개의 무덤처럼 같은 조각가가 동시에 만든 것 같아요. 왜 열 번째 기사는 밖에 있지 않고 관 속에 들어 있을까요?”
  티빙은 고개를 저었다.
  “이 교회의 수수께끼 중 하나라오. 내가 아는 바로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설명을 못 찾았어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복사가 다가왔다.
  “저기요? 무례하다면 용서해 주세요. 여러분은 재를 뿌리길 원한다고 말했는데, 마치 구경하는 사람들 같아요.”
  티빙은 소년을 노려보며 랭던에게 돌아섰다.
  “렌 씨, 분명히 당신 조상의 박애주의는 시간을 얻는 데는 소용이 없나봅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마 재를 꺼내서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티빙은 소피에게 돌아섰다.
  “렌 여사?”
  소피는 주머니에서 양피지로 말린 크립텍스를 꺼냈다.
  티빙이 소년에게 냉큼 말했다.
  “자, 그럼 우리에게 시간을 조그만 더 주겠느냐?”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랭던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낯이 익어요.”
  티빙이 기침을했다.
  “그거야 렌 씨가 매년 이곳에 오기 때문이지.”
  소피는 이제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면, 지난해 바티칸에서 텔레비전에 나온 랭던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저는 렌 씨를 결코 만난 적이 없어요.”
  소년이 단정지었다.
  “네가 실수한 거란다. 지난해 지나가다가 우린 서로 만난 적이 있는 걸로 난 알고 있다. 놀즈 신부님이 우리를 공식적으로 소개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 난 네 얼굴을 알아보았단다. 이 일이 네게 방해가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구나, 몇 분만 시간을 더 줄 수 있겠니? 이 무덤들에 재를 뿌리러 난 멀리서 왔거든.”
  랭던은 티빙과 비슷한 수준으로 공손하게 얘기했다.
  소년의 표정은 더욱 의심으로 가득해졌다.
  “이것들은 무덤이 아니에요.”
  “뭐라고?”
  랭던이 말했다.
  “이것들은 무덤이야.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게냐?”
  티빙이 끼어들었다.
  복사 일을 하고 있는 소년은 머리를 저었다.
  “시체를 담고 있어야 무덤이지요. 이것들은 그냥 조각상일 뿐이에요. 진짜 사람들에게 바쳐진 돌로 만든 진상품이라고요. 이 조각상들 밑에는 시체가 한 구도 없어요.”
  티빙이 말했다.
  “여긴 납골당이야!”
  “오래된 역사책에서나 그렇죠. 이곳이 납골당으로 믿어지기도 했지만, 1950년 교회를 복구했을 때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소년은 랭던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렌 씨는 그 점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렌 씨의 일가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요.”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별관에서 문을 쾅 닫는 소리에 깨졌다.
  티빙이 말했다.
  “놀즈 신부님이실 게다. 너는 어서 가봐야겠지?”
  소년은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어두운 시선으로 서로 쳐다보는 랭던과 소피, 티빙을 남겨두고서 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랭던이 속삭였다.
  “레이 경, 시신이 없다고요? 저 소년이 무슨 얘길 하는 겁니까?”
  티빙은 헤매는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나는 항상…… 분명히, 여기가 그곳이야. 자기가 무엇에 관해서 얘기한 건지 저 녀석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군. 그건 말도 안돼!”
  랭던이 말했다.
  “시를 다시 볼 수 있겠소?”
  소피는 주머니에서 크립텍스를 꺼내 조심스럽게 랭던에게 건넸다.
  랭던은 양피지를 풀고, 크립텍스를 한 손에 든 채 시를 읽었다.
  “그래요. 시는 분명히 무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각상이 아닙니다.”
  티빙이 말했다.
  “시가 틀릴 수도 있을까? 자크 소니에르 씨도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 경, 당신이 직접 말했어요. 이 교회는 시온 수도회의 군대인 성전 기사단이 지었다고요. 만일 여기에 기사들이 묻혀 있다면, 시온의 그랜드 마스터는 꽤 좋은 생각을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티빙은 어리둥절했다. 티빙은 기사들을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장소는 완벽해. 우린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별관으로 들어서면서, 소년은 아무도 없는 데에 놀랐다.
  “놀즈 신부님?”
  ‘문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입구의 통로가 보일 때까지 소년은 앞으로 나아갔다.
  문 근처에서 턱시도를 입은 마른 몸매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길을 잃은 모습처럼 보였다. 소년은 화가 나서 기침을 했다. 안에 있는 저 세 사람을 들이면서, 문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행색으로 보아 결혼식장을 찾는 듯한 가련한 표정의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기둥 옆을 지날 때, 소년이 소리쳤다.
  “미안합니다. 교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소년의 뒤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소년이 돌아보기도 전에, 소년의 머리가 뒤로 홱 낚아채졌다. 비명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뒤에서 나온 강한 손이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의 입을 덮고 있는 손은 눈처럼 하얗고 술 냄새가 났다.
  소년은 가랑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줌을 지린 것이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잘 들어라. 조용히 이 교회를 나가서 무조건 달려라. 멈춰선 안 된다. 알겠어?”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총을 소년의 얼굴에 대고 협박했다.
  “만일 경찰에 전화를 걸면…… 널 반드시 찾아낼 거야.”
  소년이 기억하는 다음 일은, 마당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다리가 풀릴때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다는 것 뿐이다.

86

  유령처럼 사일래스는 목표물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소피 느뵈가 사일래스를 알아차린 것은 너무 늦은 뒤였다. 소피가 돌아보기도 전에, 사일래스는 총대를 그녀의 등뼈에 누르고 힘센 팔로 소피의 가슴을 감쌌다. 그리고 건장한 체구로 소피를 끌어당겼다. 소피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티빙과 랭던이 동시에 돌아섰다. 그들도 두려운 표정이었다.
  티빙은 목에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레미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사일래스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이 유일하게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쐐기돌을 가지고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하는 거요.”
  레미가 설명한 대로 이 회수 작전은 깨끗하고 간단해야 했다.
  ‘교회로 들어가서 쐐기돌을 가지고 나오시오. 누구도 죽여서는 안 되고, 싸움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소피를 꽉 껴안은 사일래스는 소피의 가슴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려 그녀가 입고 있는 스웨터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사일래스는 술 냄새가 밴 자신의 숨결에서 소피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 있소?”
  사일래스가 속삭였다.
  ‘쐐기돌은 이 여자의 주머니에 있었는데,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여기요.”
  랭던의 깊은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일래스는 검은색 크립텍스를 들고 있는 랭던에게로 몸을 틀었다. 미련한 동물을 유혹하는 투우사처럼 랭던은 크립텍스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사일래스가 명령했다.
  “내려 놓으시오.”
  “소피와 티빙은 교회를 나가게 해주시요. 당신과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사일래스는 소피를 밀어내고, 총을 랭던에게 겨누며 다가갔다.
  “한 발짝도 가까이 오지 마시오. 저 두 사람이 건물을 떠나기 전까지는.”
  “당신은 요구할 처지가 아니오.”
  랭던은 크립텍스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이것을 바닥에 내던져 안에 든 병을 깨뜨릴 것이오.”
  사일래스는 이 협박에 겉으로는 비웃었지만,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일래스는 랭던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쐐기돌을 깨지 못할 것이오. 나만큼이나 당신도 성배를 찾고 싶어하니까.”
  “틀렸소. 당신이 더 원하지. 성배 때문에 당신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으니까요.”
  12미터 정도 떨어진 별관 쪽에 있던 레미 르갈뤼테크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도 사일래스가 상황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승의 요청에 따라, 레미는 사일래스가 총을 발사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저들을 나가게 하시오.”
  크립텍스를 높이 쳐들고, 사일래스의 총을 바라보며 랭던이 다시 요구했다. 수도승의 붉은 눈이 분노와 좌절로 가득 찼다. 랭던이 크립텍스를 들고 있는 동안, 사일래스가 정말로 랭던을 쏴버릴까 봐 레미는 온 몸이 뻣뻣해졌다.
  ‘크립텍스가 깨지면 안 돼!’
  크립텍스는 레미에게 자유와 부를 약속한 티켓이었다. 1년 전 어느 날까지 레미는 빌레트 성에 살고 있는 쉰다섯 살의 집사일뿐이었다. 절름발이 레이 티빙의 견디기 힘든 변덕을 감당해 내며 지내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이 엄청난 제안을 하며 접근했다. 지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배 역사가인 레이 티빙 경과 레미의 관계는, 레미가 평생 꿈꾸어 왔던 모든 것을 갖게 할 수 있었다. 그후 레미가 빌레트 성에서 보낸 시간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난 매우 가까이 있어.’
  템플 교회의 성역과 로버트 랭던의 손에 들린 쐐기돌을 바라보며 레미는 자신에게 말했다. 만일 랭던이 쐐기돌을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것이다.
  ‘내 얼굴을 드러내 버릴까?’
  이 일은 스승이 엄격히 금지한 일이었다. 레미는 스승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 일은 사일래스에게 시키시려는 게 확실합니까? 제가 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요.”
  30분 전쯤에 레미는 쐐기돌을 훔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은 완고했다.
  “사일래스는 네 명의 시온 회원들을 잘 처리했어. 그녀석은 쐐기돌을 가져올 수 있을 거야. 자넨 익명의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해. 만일 다른 사람이 자네를 보게 되면, 그 사람들까지 제거해야 되니까. 이미 사람들은 충분히 죽었어. 자네는 얼굴을 드러내지 말게.”
  ‘내 얼굴은 변할 것이다. 당신이 내게 약속한 돈으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레미는 생각했다. 수술로 지문조차 바꿀 수 있다고 스승은 그에게 말했었다. 자신은 곧 자유로워질 것이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멋진 얼굴로 해변에서 햇볕에 얼굴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레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늘에서 사일래스를 돕겠습니다.”
  “레미, 자네가 좀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인데, 문제의 무덤은 템플 교회에 있지 않아. 그러니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잘못된 장소를 뒤지고 있으니까.”
  레미는 기절할 듯이 놀랬다.
  “그럼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 나중에 자네한테 얘기할 거야. 잠깐이긴 하지만, 자네들은 재빨리 행동해야 하네. 자네들이 크립텍스를 되찾기 전에 그자들이 무덤의 진짜 위치를 파악하고 교회를 떠난다면, 우린 영원히 성배를 잃을 수도 있어.”
  성배를 찾을 때까지는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스승의 말을 제외하면, 레미는 성배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곧 수중에 들어올 돈을 생각할 때마다 레미는 조바심을 느꼈다.
  ‘2천만 유로의 3분의 1이다. 영원히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돈이지.’
  레미는 코트다쥐르에 있는 해변 마을을 마음에 그렸다. 그곳에서 햇빛에 몸을 태우고,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기 템플 교회 안에서, 쐐기돌을 깨버리겠다는 랭던의 위협으로 그의 미래가 위험해졌다. 여기까지 와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레미는 대담한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레미의 손에 들린 소형 권총은 J자 모양의 메두사 리볼버였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충분히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늘에서 걸어 나오며 레미는 총을 곧장 티빙의 머리에 겨누고, 원형의 방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레미가 자기에게 총을 겨누자 레이 티빙 경의 심장은 말 그대로 멈추는 듯했다.
  ‘이놈이 지금 뭘 하는 거야!’ 
  티빙은 자신의 권총인 작은 메두사 리볼버를 알아보았다. 안전을 위해 리무진의 장갑상자 안에 넣어둔 것이었다.
  티빙은 충격으로 침을 튀기며 말했다.
  “레미? 무슨 일인가?”
  랭던과 소피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미는 티빙의 뒤로 돌아가, 티빙의 심장이 있는 등 왼쪽 윗부분에 권총을 들이댔다.
  티빙은 자기 근육이 공포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레미, 난……”
  티빙의 어깨 너머로 랭던을 바라보며 레미가 말했다.
  “간단히 말하겠소. 쐐기돌을 내려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기겠소.”
  랭던은 순간 온몸이 마비된 듯했다. 랭던은 말을 더듬었다.
  “이 쐐기돌은 당신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열지도 못할 거요.”
  레미가 비꼬았다.
  “오만한 자들이군. 당신들이 시를 논의할 때 내가 귀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못 챘나 보지? 내가 들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졌지. 당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야. 당신은 심지어 장소를 제대로 찾아내지도 못했어. 당신이 찾고 있는 무덤은 전혀 다른 장소에 있단 말이야!”
  티빙은 겁에 질렸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왜 성배를 원합니까? 파괴하기 위해서? 말일이 오기 전에?”
  랭던이 물었다.
  레미는 사일래스를 불렀다.
  “사일래스, 랭던씨에게서 쐐기돌을 가져오시오.”
  수도승이 다가오자, 랭던은 결심을 끝낸 얼굴로 쐐기돌을 높이 쳐들고 뒤로 물러났다.
  “이것이 나쁜 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깨버리겠소.”
  티빙은 공포의 물결을 느꼈다. 티빙은 자기 눈 앞에서 일생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장면을 보게 될 참이었다. 자기의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날 상황이었다.
  티빙이 소리쳤다.
  “로버트, 안 돼! 그러지 말게! 자네가 들고 있는 것은 성배야! 레미는 결코 나를 쏘지 못할 걸세. 우리는 서로 십 년을……”
  레미가 천장에 대고 메두사를 발사했다. 그렇게 작은 무기에서 나온 폭발치고는 대단했다. 석실 안이 천둥처럼 메아리쳤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레미가 말했다.
  “난 장난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다음은 이 사람 등이오. 쐐기돌을 사일레스에게 건네시오.”
  랭던은 마지못해 크립텍스를 내밀었다. 사일래스는 한 걸음 다가서서 크립텍스를 받았다. 사일래스의 붉은 눈이 복수에 대한 자기 만족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쐐기돌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사일래스는 랭던과 소피에게 총을 겨눈 채 뒤로 물러났다.
  티빙은 레미의 팔이 자기 목을 강하게 죄는 것을 느꼈다. 건물을 나가면서 레미는 티빙 끌고 가려 했다. 총은 여전히 티빙의 등 뒤에 있었다.
  “레이 경을 놔주시오.”
  랭던이 요구했다.
  계속 뒷걸음질치며 레미가 말했다.
  “길 안내를 위해 티빙 씨를 데려가겠다. 만일 경찰을 부르면, 이 늙은이는 죽는다. 방해되는 일을 하면 이 사람은 죽을 것이야. 알겠나?”
  랭던은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날 데려가시오. 레이 경은 보내줘요.”
  레미는 소리내어 웃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이 늙은이와 나는 좋은 과거를 가지고 있거든. 게다가 아직 이 늙은이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레미가 목발을 질질 끄는 티빙을 데리고 출입구로 향하자, 사일래스도 랭던과 소피에게 총을 겨눈 채 물러서기 시작했다.
  소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누굴 위해 일하는 거죠?”
  그 질문을 듣고 레미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느뵈 양, 내가 입을 열면, 아마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 거요.”

87

  빌레트 성 화실의 난로는 차가웠다. 하지만 인터폴이 보내온 팩스를 읽으며 콜레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그가 기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앙드레 베르네는 모범 시민이었다. 경찰 기록도 없고, 심지어 주차 위반 딱지 한 번 떼인 적이 없었다. 사립고등학교와 소르본에서 교육을 받은 베르네는 국제재무학 분야에서 우등으로 졸업했다. 인터폴은 베르네의 이름이 신문에도 때때로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내용의 기사들이었다. 확실히 이 인간은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을 초현대적인 전자 보안장치의 리더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베르네의 신용카드 기록은 이 남자가 예술서적, 고급 포도주, 클래식 CD 그것도 주로 브람스 애호가임을 보여주었다. 사실 베르네는 수년 전에 구입한 고가의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자기 취미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빵점이로군.’
  콜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인터폴이 보내온 유일한 위험 신호는 티빙의 집사 것으로 보이는 남자의 지문이었다. PTS 조사 팀의 팀장은 방 건너편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인터폴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콜레가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뭐라도 있습니까?”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레미 르갈뤼테크에 관한 겁니다. 사소한 범죄들의 지명 수배자로군요.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서비스를 공짜로 받으려고 전화선 배선을 다시 깔았다가 들통이 나서 대학에서 쫓겨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 후 사소한 도둑질을 좀 했고요. 감옥에 몇 번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응급 기관절개 수술을 받고 병원 수술비를 떼어 먹은 전력도 있네요.”
  팀장은 웃으며 콜레를 올려다보았다.
  “땅콩 알레르기 랍니다.”
  콜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리 요리에 들어간 오일이 땅콩오일이라고 메뉴에 써놓지 않은 레스토랑을 대상으로 경찰 조사를 벌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식당 손님이 테이블에서 음식을 한 입 먹고, 단백질 과민반응으로 그 자리에서 죽은 사건이었다.
  팀장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르갈뤼테크는 아마도 수배를 피해 여기에 숨어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에게는 운 좋은 날이었네요.”
  콜레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파슈 반장에게 이 정보를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움직이려는 순간 다른 PTS요원이 거실로 들이닥쳤다.
  “부관님! 헛간에서 뭔가를 찾아냈습니다.”
  요원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며 콜레는 한 가지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시체라도 나왔나?”
  요원은 망설였다.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예상 밖의 것입니다.”
  눈을 비비며 콜레는 요원을 따라 헛간으로 향했다. 곰팡내 나는 동굴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요원이 헛간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나무 사다리가 건초 다락의 돌출부에 걸쳐져 있었다.
  “아까는 사다리가 없었는데.”
  콜레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걸쳐 놓았습니다. 롤스로이스 자동차 근처에서 지문을 조사하다고, 바닥에 있는 사다리를 찾아냈습니다. 사다리의 난간들이 낡고 진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면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사다리는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건초다락의 높이와 사다리의 길이도 맞습니다. 그래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봤습니다.”
  콜레의 눈이 건초다락으로 이르는 사다리의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갔다.
  ‘누군가가 저 위를 정기적으로 올라갔다는 얘긴가?’
  여기 아래에서 볼 때, 다락은 버려진 장소 같았다. 하지만 다락 위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고참 PTS 요원이 사다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관님, 이것을 반드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참 요원은 라텍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콜레에게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피곤하게 고개를 끄덕인 콜레는 낡은 사다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는 구식 사다리꼴 디자인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졌다. 거의 끝까지 올라갔을 때, 콜레는 얇은 단에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했다. 아래로 헛간 바닥이 빙그르르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콜레는 마침내 끝에 도착했다. 위에 있던 요원이 손을 내밀었다. 콜레는 그 손을 잡고 다락으로 서툴게 올라섰다.
  PTS 요원이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다락의 깊숙한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오직 한 사람의 지문만 발견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곧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콜레는 흐릿한 불빛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다락 끝에 있는 벽을 살펴보았다.
  ‘대체 저게 뭐야?’
  벽 끝에는 공들인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두 개의 CPU, 스피커가 달린 평면 모니터, 줄지어 늘어선 하드 드라이브들, 자가 발전 공급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멀티채널 오디오 콘솔도 있었다.
  ‘세상에, 누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일한단 말인가?’
  콜레는 컴퓨터 장치들로 다가갔다.
  “시스템을 조사해 봤나?”
  “이건 청취 기지국입니다.”
  콜레가 빙그르르 돌아섰다.
  “도청?”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신 감시 장치입니다.”
  요원은 전자 부품과 안내서, 연장, 철사, 땜질 인두와 다른 전자 부속품들이 어지럽게 널린 긴 탁자를 가리켰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장치들은 우리 장비처럼 정교합니다. 소형 마이크, 광전자 충전 전지, 대용량의 RAM 칩들. 이 작자는 새로운 나노 드라이브도 몇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완성된 시스템이 있습니다.”
  요원은 콜레에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계산기보다 크지 않은 조립품을 건넸다. 이 이상한 장치에는 3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전선이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전선 끝에는 우표 크기만한 얇은 호일이 달려 있었다.
  “재충전 배터리를 가진 대용량의 하드 디스크 오디오 녹음 시스템입니다. 전선 끝의 호일에 나 있는 줄들은 마이크와 광전자 재충전 전지의 배합입니다.”
  콜레는 이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호일처럼 생긴 광전자 마이크는 몇 년 전 경찰 당국에 엄청난 돌파구가 되어 준 장치였다. 예를 들어, 설치할 장소의 바닥 굴곡에 맞추어 모양을 만들고 주변의 색깔과 맞추어 염색한 호일 마이크를 하드 디스크 녹음기와 함께 조명등 아래에 붙여두는 것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일광을 받을 수 있게 마이크를 설치하는 한, 광전지는 계속 시스템을 충전시켰다. 이 장치로는 모든 도청이 가능했다.
  “수신 방법은?”
  콜레가 물었다.
  요원은 컴퓨터 뒤로 뻗은 절연된 전선을 가리켰다. 전선은 벽을 타고 올라가 헛간 지붕에 난 작은 구멍으로 사라졌다.
  “단순한 라디오 파장입니다. 지붕에 작은 안테나가 있습니다.”
  콜레는 이 같은 수신 장치들이 하드 디스크 공간을 아끼기 위해 음성이 있을 때만 작동되며, 하루에 일어나는 전체 대화 중 토막토막을 기록하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밤 시간에 압축된 오디오 파일을 기지국으로 전송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송이 끝나면 하드 드라이브는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 다음날을 위해 모든 것을 다시 준비하는 것이다.
  콜레의 시선이 수백 개의 오디오 카세트가 꽂힌 선반으로 향했다. 모든 카세트에는 날짜와 숫자가 적힌 라벨이 붙어있었다.
  ‘누군가 몹시 바빴던 모양이군.’
  콜레는 요원에게 돌아섰다.
  “누가 도청 대상인지 알아냈나?”
  요원이 컴퓨터로 걸어가서 프로그램 하나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글쎄, 그게 , 가장 이상한 일입니다……”

88

  템플 지하철 역의 회전식 문을 넘어 미로 같은 지하철 터널과 플랫폼 속으로 들어선 랭던은 완전히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찢어 놓고 있었다.
  ‘내가 레이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다.’
  레미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됐다. 성배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내부에서 사람을 뽑는다.
  ‘나와 같은 이유로 그들도 티빙에게 접근한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성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도둑이나 학자를 끌어당기는 자석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에게나 티빙이 항상 목표물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이 사건에 끌어들였다는 랭던의 죄책감을 줄여주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레이를 도와야 한다. 즉시.’
  랭던은 서부 순환선 플랫폼으로 가는 소피를 따라갔다. 레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플랫폼에 있는 공중전화기에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랭던은 후회하면서 근처에 있는 더러운 벤치에 앉았다.
  소피는 전화를 걸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레이를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영국 경찰에 한시라도 빨리 알리는 거예요. 날 믿어요.”
  랭던은 처음에는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계획을 짜면서 소피의 논리가 이해되었다. 티빙은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설사 레미와 다른 자들이 기사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안다 하더라도, 구에 관한 언급을 해독하려면 티빙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랭던이 걱정하는 것은 성배 지도가 발견된 후에 일어날 일이었다.
  ‘레이는 막대한 부담을 안게 될 텐데.’
  랭던이 티빙을 돕거나 쐐기돌을 다시 볼 기회를 가지려면, 무덤을 먼저 찾아내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불행히도 레미가 저만치 앞서 먼저 출발한 셈이다.’
  레미의 행보를 늦추는 일은 소피의 임무였다.
  무덤을 찾아내는 일은 자신의 임무였다.
  소피는 레미와 사일래스를 영국 경찰의 용의자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놈들이 몸을 사리게 하거나, 일이 잘 풀리면 체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랭던의 계획은 불분명했다. 근처에 있는 킹 대학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것. 킹 대학은 신학 이론 데이터베이스로 유명했다.
  ‘궁극적인 연구 도구. 어떤 종교역사적인 질문에도 답이 즉각 나온다.’
  랭던은 이렇게 들었다. 랭던은 ‘교황이 묻은 기사’라는 말에 대해 데이터베이스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열차가 빨리 들어오기를 바라며 랭던은 일어섰다.
  공중전화기를 통해 소피는 마침내 런던 경찰과 연결되었다.
  안내원이 말했다.
  “스노힐 구역입니다. 어디로 연결해 드릴까요?”
  “유괴 사건을 신고하려고 해요.”
  소피는 간결하게 말했다.
  “이름은?”
  소피는 잠시 망설였다.
  “프랑스 사법경찰인 소피 느뵈입니다.”
  그 직함은 원하던 효과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수사관을 대드리지요.”
  기다리는 동안 경찰이 티빙을 끌고 간 자들에 대한 자기의 진술을 믿어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턱시도를 입은 남자.’
  용의자를 알아내는 데 이보다 쉬운 표현이 또 있을까? 설사 레미가 옷을 갈아입는다 해도 알비노 수도승이 그와 함께 있었다.
  ‘이 커플을 놓친다는 것은 불가능해.’
  게다가 그들은 몸이 불편한 인질을 데리고 있어서,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도 없다. 소피는 런던에 얼마나 많은 재규어 리무진이 있는지 궁금했다.
  수사관을 연결해 준다는 전화 대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제발 빨리 받아요!’
  소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전화음이 딸각거리고  붕 하는 소리를 들었다.
50초 정도 지났을때 드디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뵈 요원?”
  깜짝 놀라며, 소피는 즉시 쉰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느뵈 요원,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소피는 할 말을 잃었다. 파슈 반장은 영국 경찰에게 소피가 전화를 걸면 즉시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음이 분명했다.
  간결한 프랑스어로 파슈가 말했다.
  “잘 들으라고. 난 간밤에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 로버트 랭던은 무죄야. 그의 모든 혐의는 없어졌어.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은 지금 위험한 상황이야. 자네는 이리 오게.”
  소피의 턱이 벌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파슈는 어느 경우에도 사과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슈가 계속해서 말했다.
  “요원은 자크 소니에르 씨가 할아버지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요원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을 감안해서, 간밤에 자네가 행한 명령 불복종은 그냥 넘어갈 참이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장 랭던 씨와 함께 가까운 영국 경찰서를 찾아가서 보호를 요청하라고.”
  ‘내가 런던에 있다는 것을 파슈가 알고 있어? 그 외에 무엇을 더 알고 있을까?’
  소피는 뒤에서 드릴을 가는 듯한 기계음이 나는 것을 들었다. 또한 전화선에서 이상하게 딸각거리는 소음이 울리는 것도 들었다.
  “이 전화를 추적하고 있나요, 반장님?”
  파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요원과 나는 협력해야 해. 우리 두 사람은 여기에서 잃을 것이 많아. 그러니 서로의 손실을 통제해 보자는 거야. 난 지난 밤에 판단 실수를 했어. 만일 이 실수가 미국인 교수와 DCPJ암호 해독가의 죽음으로 끝난다면, 내 경력은 그것으로 끝장날 거야. 난 지난 몇 시간 동안 당신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다고.”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설 때, 따뜻한 바람이 지하철 안으로 밀려왔다. 소피는 기차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랭던도 분명히 같은 생각이었다. 랭던은 몸을 추스르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반장님이 찾을 사람은 레미 르갈뤼데크예요. 그는 티빙의 집사예요. 그가 템플 교회 안에서 티빙을 납치했어요. 그리고……”
  “느뵈 요원!”
  열차가 역으로 천둥소리를 내며 들어오자 파슈가 고함을 질렀다.
  “이 일은 공개된 전화선으로 얘기할 사항이 아니야. 요원과 랭던은 즉시 안으로 들어와야 해. 바로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건 명령이야!”
  소피는 전화를 끊고, 랭던과 함께 지하철로 뛰어들었다.

89

  티 하나 없이 깨끗했던 티빙의 제트기 객실 안은 강철 톱밥과 압축 공기, 프로판 가스 냄새로 가득했다. 브쥐 파슈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술과 함께 홀로 앉아 있었다. 티빙의 금고에서 발견한 무거운 나무상자가 그의 옆에 있었다.
  상감된 장미 문양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파슈는 뚜껑을 들어올렸다. 상자에는 여러 개의 다이얼로 이루어진 하얀 대리석 원통이 들어 있었다. 다섯 개의 다이얼에는 소피아(SOFIA)라는 철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파슈는 오랫동안 단어를 응시했다. 그리고 안감이 대진 상자 안에서 원통을 들어올려 구석구석을 조사했다. 그런 뒤 양쪽 끝을 아주 천천히 잡아당겼다. 한 쪽 끝이 돌아가며 벗겨졌다.원통 안은 비어 있었다.
  파슈는 원통을 다시 상자에 넣고 나서, 제트기의 창문으로 격납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빌레트 성의 PTS팀으로부터 받은 정보와 함께 소피와의 짧은 대화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낮꿈을 꾸고 있는 듯한 파슈를 깨웠다.
  DCPJ의 전화 교환대였다. 교환원은 사과의 말부터 했다. 반장이 용무로 런던에 있다고 여러 차례 말했으나, 취리히 안전금고 은행의 은행장이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였다. 지금도 막 은행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파슈는 마지못해 전화를 연결시키라고 교환원에게 말했다.
  전화상의 남자가 입을 열기 전에 파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베르네 씨, 제가 먼저 전화를 걸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좀 바빴습니다. 약속한 대로 당신네 은행 이름은 언론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걱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랭던과 소피가 어떻게 작은 나무상자를 은행에서 빼내 갔는지, 또 어떻게 그들의 탈출을 돕게 됐는지 파슈에게 설명하는 베르네의 목소리는 열정적이었다.
  “그런 뒤에 저는 라디오에서 그들이 범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차를 세우고 상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저를 공격하고 트럭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파슈는 뚜껑에 새겨진 장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뚜껑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나무상자를 걱정하고 있군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내용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은행의 명성을 걱정하는 겁니다. 우리는 결코 약탈물을 보관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제 고객을 대신해서 그 물건을 회수하지 못하면 이 일은 우리 은행의 명성을 떨어뜨릴 겁니다.”
  “느뵈 요원과 로버트 랭던 씨가 계좌번호와 열쇠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점 때문에 그들이 상자를 훔쳤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들은 지난 밤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소피 느뵈 양의 할아버지를 포함해서요. 열쇠와 계좌번호는 분명히 불법으로 얻은 것입니다.”
  “베르네 씨, 제 부하들이 당신 배경과 취미에 대해서 조사를 좀 했더군요. 분명 당신은 고상한 취미와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사법경찰의 반장으로서 당신 은행의 명성과 그 상자는 가장 안전한 손 안에 있다고 약속드립니다.”

90

  빌레트 성의 건초 다락방에 올라간 콜레 부관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스템이 이 모든 장소를 도청하고 있었단 말인가?”
  요원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일 년 넘게 데이터를 수집한 것 같습니다.”
  콜레는 말 없이 다시 목록을 읽었다.
  콜베르 소르타크 – 국회의장
  장 샤페 – 죄 드 폼 박물관 관장
  에두아르 데스로셰르 – 미테랑 도서관 선임 기록 보관자
  자크 소니에르 -루브르 박물관 관장
  미셸 브르통 -DAS(프랑스 정보부)대표
  요원이 스크린을 가리켰다.
  “네 번째가 제일 걱정스럽습니다.”
  콜레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의 지적을 즉시 알아차렸다.
  ‘자크 소니에르는 도청당하고 있었다.’
  콜레는 목록의 나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인사들을 도청했을까?’
  “오디오 파일을 들어 보았나?”
  “약간요. 여기 가장 최근 것이 있습니다.”
  요원은 컴퓨터 자판을 몇 개 두드렸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반장님, 암호 해독부서에서 나온 요원이 막 도착했습니다.”
  콜레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나야! 내 목소리잖아!”
  콜레는 소니에르의 책상에 앉아서 대화랑에 있던 파슈에게 소피 느뵈의 도착을 알리는 무전을 쳤던 일이 기억났다.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우리의 루브르 박물관 조사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많은 것을 들었을 겁니다.”
  “도청장치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나?”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요원은 낡은 노트와 청사진들이 쌓인 책상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종이 한 장을 골라 콜레에게 건넸다.
  “눈에 익지 않습니까?”
  콜레는 놀랐다. 원시적인 기계를 묘사한 고대의 모형도를 복사한 것이었다. 필기체로 적힌 이탈리아어 제목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금방 알아차렸다.
  ‘소니에르의 책상에 놓여 있던 기사다!’
  콜레의 눈이 사진의 가장자리로 옮겨 갔다. 누군가 빨간 펜으로 사진에 메모를 휘갈겨 놓았다. 메모는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고, 어떻게 하면 도청 장치를 기사의 몸에 가장 잘 집어넣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 것처럼 보였다.

91

  사일래스는 템플 교회 근처에 주차된 재규어 리무진의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레미는 차 트렁크에서 찾아낸 밧줄로 티빙을 묶어 리무진 뒷좌석에 구겨넣었다. 레미를 기다리며, 사일래스는 쐐기돌에 얹은 자신의 손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레미가 운전석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전합니까?”
  사일래스가 물었다.
  빗물을 털어내며 레미가 킬킬 웃었다. 그리고 열린 칸막이를 통해 구겨진 레이 티빙의 모습을 어깨 너머로 응시했다. 그러나 뒷좌석은 어두워서 티빙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인간은 어디에도 가지 못해요.”
  사일래스는 억눌린 듯한 티빙의 외침을 들으며 레미가 자신에게 사용했던 송수관 테이프로 티빙의 입을 틀어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 닥쳐!”
  레미는 어깨 너머로 티빙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자동차 계기판에 있는 어떤 버튼을 눌렀다. 그들 뒤로 불투명한 칸막이가 올라와서 뒤를 차단했다. 티빙은 사라지고,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레미가 사일래스를 슬쩍 보며 말했다.
  “난 저 인간의 끔찍한 변덕을 지겨울 만큼 들었답니다.”
  재규어 리무진이 거리들을 지나며 속력을 낼 때 사일래스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스승님이다.’
  사일래스는 흥분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제는 익숙한 스승의 프랑스 억양이었다.
  “사일래스, 자네 목소리를 듣게 되어 안심이네. 자네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사일래스도 스승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 안심이 됐다. 지난 몇 시간 동안은 작전이 궤도를 이탈해 이상하게 흘러갔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쐐기돌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상의 소식이로군. 레미도 자네와 함께 있는가?”
  스승이 레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듣고 사일래스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레미가 저를 풀어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지. 그렇게 오랫동안 포로로 잡혀 있게 해서 미안하네.”
  “육체적인 불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쐐기돌이 우리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 즉시 내게 그것을 보내주게나. 시간이 중요한 요소거든.”
  사일래스는 마침내 스승을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알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사일래스, 쐐기돌을 레미한테서 받았으면 싶네.”
  ‘레미? 스승님은 레미를 신뢰하는가?’
  사일래스는 풀이 죽었다. 스승을 위해 모든 것을 처리한 후, 자기가 직접 이 쐐기돌을 전달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스승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자네가 실망한 이유를 알겠네. 내 뜻을 자네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사일래스, 나 역시 자네에게서 쐐기돌을 받고 싶다네. 범죄자가 아니라 신의 사람인 자네에게서 말이야. 하지만 레미가 이 일을 처리해야만 해. 그는 내 지시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명을 위험에 빠뜨릴 뻔한 큰 실수를 저질렀어.”
  사일래스는 냉기를 느끼며 레미를 흘끗 쳐다보았다. 티빙을 납치하는 것은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티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자네와 나는 신의 사람이야. 우리 목표는 어떤 이유로든 멈출 수 없어.”
  스승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일래스는 그 시간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단지 그 이유로 레미에게 쐐기돌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네. 이해하겠나?”
  사일래스는 스승의 목소리에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스승이 레미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데 놀랐다.
  ‘레미가 얼굴을 보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레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가 쐐기돌을 구해냈는데.’
  사일래스는 가까스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좋아, 안전을 위해 자네는 즉시 길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 경찰이 리무진을 곧 찾아낼 거야. 난 자네가 잡히는 것을 원치 않네. 오푸스 데이는 런던에도 거주지를 가지고 있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자네는 거기에서 환영을 받겠지?”
  “형제로서요.”
  “그럼 거기에 가서 숨어 있게나. 내 손에 쐐기돌이 들어오는 순간 자네에게 전화하겠네. 지금은 코앞에 닥친 문제를 처리해야겠어.”
  “런던에 계십니까?”
  “내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해. 모든 일이 잘될 거야.”
  “예, 스승님.”
  스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이제부터 하려는 일이 몹시 후회스럽다는 듯 말이다.
  “레미와 얘기할 시간이네.”
  사일래스는 레미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이 전화가 레미 르갈뤼데크가 받는 마지막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기를 건네 받으며 레미는, 이 가련한 수도승은 어떤 운명이 자기를 기다리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사일래스는 자기의 쓰임을 다 한 것이다.
  ‘스승은 널 이용한 거야. 사일래스.’
  ‘그리고 너의 주교는 장기의 졸이었지.’
  레미는 아직도 스승의 놀라운 설득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링가로사 주교는 모든 것을 믿었다. 자신이 처한 절박함 때문에 주교는 맹목적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너무 지나치게 믿었지.’
  레미는 스승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인간의 신뢰를 얻고, 실질적으로 그를 돕게 되어 자부심을 느꼈다.
  ‘돈 받을 날을 결정해야겠군.’
  “잘 들어라. 사일래스를 오푸스 데이 거주지역으로 데려가되, 몇 블록 떨어진 곳에다 내려줘라. 그 뒤 세인트제임스 공원으로 차를 몰아, 국회의사당과 빅벤 옆에 있는 곳이다. 기마병 퍼레이드 광장에 리무진을 세울 수 있을 거야. 거기에서 얘기하자.”
  그것으로 전화는 끊겼다.

92

  황실이 하사한 부지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옆에 자리잡은 킹 대학은 1829년 조지 4세가 설립하였다. 킹 대학의 종교학 분야는 150년 연구와 강의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1982년에 설립된 체계적인 신학 연구기관으로 유명했다. 이 기관에는 종교연구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진보적인 전자도서관이 있었다.
  비를 맞으며 소피와 함께 도서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랭던은 여전히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기본적인 조사실은 티빙이 말한 그대로였다. 열 두 개의 평면 스크린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이 없었다면, 아서 왕과 그의 기사들이 편안해했을 거대한 원탁이 팔각형 모양의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안쪽 끝에서 도서관 직원이 차를 따르며, 하루 업무의 시작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차를 놔두고 다가오며, 직원이 명랑한 영국식 억양으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와드릴까요?”
  랭던이 대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로버트 랭던, 댁이 누군지 알고 있어요.”
  도서관 직원이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랭던은 파슈가 자기 얼굴을 영국 텔레비전에도 내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직원의 미소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랭던은 기대치 않은 순간에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만일 세상 누군가가 자기 얼굴을 알아본다면, 바로 종교학 연구시설의 도서관 사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멜라 게텀이에요.”
  손을 내밀며 사서가 말했다. 상쾌한 목소리에 따뜻하고 박식한 얼굴의 여자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이 여자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쪽은 친구인 소피 느뵈입니다.”
  두 여자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게텀은 즉시 랭던에게로 돌아섰다.
  “랭던 씨가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만일 큰 폐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떤 정보를 찾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통상적으로 청탁과 예약을 해야만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어요. 만일 랭던 씨가 대학 누군가의 손님이 아니라면 말이죠.”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정말 미안합니다. 제 친구가 당신에 대해 무척 좋게 말하더군요. 레이 티빙 경이라고? 영국 왕립사학자입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랭던은 우울한 아픔을 느꼈다.
  게텀의 얼굴이 밝아지며 웃음을 지었다.
  “맙소사!  그분은 괴짜인 데다 광신도예요. 여기 올 때마다 항상 똑같은 것만 찾지요. 성배,성배, 성배! 성배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기 전엔 돌아가시고 말 거라고 난 맹세해요. 시간과 돈이 그런 호사스러운 취미를 제공해 주는 거겠죠.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딱 돈키호테 같은 분이세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매우 중요한 일이랍니다.”
  소피가 물었다.
  게텀은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서 두 사람에게 윙크했다.
  “글쎄 , 제가 바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네요. 그렇죠? 두 분이 서명하고 들어온 이상,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무엇이 궁금한 거죠?” 
  “우린 런던에 있는 무덤을 찾으려고 해요.”
  게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런던에는 대략 이만 개의 무덤이 있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어요?”
  “기사의 무덤이에요. 하지만 이름은 몰라요.”
  “기사라, 그건 그물을 확실히 좁혀 주겠네요. 그렇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찾는 기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뿐이에요.”
  소피는 시의 첫 두 줄만을 쓴 종이를 꺼냈다.
  외부인에게 시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망설여져 소피는 기사라는 말이 나오는 처음 두 줄만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칸막이 해독’
  소피는 이렇게 불렀다 .정보부에서 매우 민감한 자료가 담긴 암호를 가로챘을 때, 그것의 일부분만을 암호 해독가들에게 할당해서 풀게 한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면, 일개 요원들은 전체 메시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지금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설사 도서관 사서가 시 전체를 보고 기사의 무덤과 어떤 구를 잃어버렸는지 알아낸다 하더라도, 크립텍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게텀은 이 유명한 미국인 학자의 눈에서 다급함을 읽었다 무덤을 찾아 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인 것 같았다. 랭던이 동반한 녹색 눈의 여자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게텀은 의아해하며, 안경을 쓰고 두 사람이 방금 건네준 종이를 조사했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그의 노력의 결실이 성스러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노라.
  게텀은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하버드의 웬 청소부가 사냥한 건가요?”
  랭던은 억지로 웃음소리를 지어냈다.
  “예, 그런 겁니다.”
  게텀은 망설였다. 전체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텀은 주의 깊게 시 구절을 숙고했다.
  “이 운을 보면, 어떤 기사가 신을 불쾌하게 만든 일을 저질렀군요. 하지만 교황은 런던에 기사를 묻어줄 정도로 친절했다.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까?”
  게텀은 어떤 워크스테이션 앞으로 걸어갔다.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서 무엇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한번 봅시다.”
  지난 20년 동안, 킹 대학의 연구기관은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디지털화 하고 그 목록을 만드는 데, 언어 번역기와 조화를 이루는 광학 문자인식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왔다. 종교학에 관한 백과사전, 종교적인 일대기, 여러 언어로 씌어진 신성한 경전, 역사서 바티칸의 편지, 성직자의 일기,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이 연구기관의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었다. 이 방대한 양의 문서가 종이로 되어 있지 않고, 비트와 바이트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거의 무한정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워크스테이션 앞에 앉아서, 게텀은 종이를 눈으로 읽으며 말했다.
  “우선, 여기 나온 말을 그대로 시험해 보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게텀이 몇 단어를 입력했다.
  런던,기사,포프(Pope)
  탐색 버튼을 누르자, 게텀은 아래층에서 초당 500MB 속도로 자료를 검색하는 육중한 메인 컴퓨터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시스템에게 이 단어들이 모두 들어간 문서는 어느 것이나 보여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료가 나오겠지만, 어쨌든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화면에서는 벌써 첫 번째 자료가 보이기 시작했다.
  교황 그리기.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초상화 수집품들. 런던 대학 출판사.
  게텀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당신들이 찾고 있는 것은 아니네요.”
  게텀은 다음에 나온 자료를 보았다.
  알렉산더 포프(포프:Pope는 교황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의 성으로 쓰였다.)의 런던 저서들.G.윌슨 나이트 지음.
  게텀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이 빠르게 돌아가자, 자료들이 화면에 더 빨리 나타났다. 열두 개의 자료가 떴는데, 대부분은 18세기 영국 작가였던 알렉산더 포프의 반종교적이고 조롱하는 듯한 서사시가 대상이었다. 포프의 작품들은 영국과 기사들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었다.
  게텀은 스크린 밑의 숫자창을 재빨리 확인했다. 숫자창은 컴퓨터 스크린에 아직 뜨지 않은 정보의 양을 알려주었다. 너무 많은 검색 단어를 불러 모은 것 같았다.
  전체 자료 중 해당 검색어의 수 : 2,692
  검색을 멈추고 게텀이 말했다.
  “검색어를 좀더 다듬어야겠네요. 무덤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이게 다예요? 다른 것은 더 없어요?”
  불안한 표정으로 랭던은 소피를 보았다.
  ‘이건 청소부 따위가 사냥한 것이 아니야.’
  게텀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게텀은 지난해, 로마에서 일어난 로버트 랭던의 일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이 미국인은 지상에서 가장 출입이 까다롭다는 도서관에 들어갔다. 바로 바티칸의 비밀문서 보관소였다. 게텀은 그 안에서 랭던이 어떤 종류의 비밀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런던 무덤을 찾아 헤매는 절박한 이 일이, 바티칸에서 랭던이 얻은 정보와 관련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게텀은 기사를 찾으러 영국에 오는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성배.’
  게텀은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팔짱을 꼈다.
  “당신은 레이 티빙 경의 친구지요. 그리고 지금 영국에 있고 기사를 찾고 있어요. 성배를 찾아 당신이 여기 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랭던과 소피는 놀라움에 찬 시선을 교환했다.
  게텀이 웃었다.
  “여러분, 이 도서관은 성배를 찾는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 같은 곳이에요. 레이 티빙 경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죠. 장미, 마리아 막달레나, 상그리엘, 메로빙거, 시온 수도회, 기타등등, 기타 등등. 이런 단어들을 찾을 때마다 일 실링씩 받았으면 난 부자가 되었을 거예요. 모두들 음모를 좋아하죠.”
  게텀은 안경을 벗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정보가 더 필요하단 뜻이에요.”
  방문객의 침묵에서, 게텀은 빠른 결과를 얻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이 신중을 기하는 욕구를 눌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소피 느뵈가 불쑥 말했다.
  “여기, 이게 우리가 아는 모든 거예요.”
  랭던에게 펜을 빌려, 소피는 종이 위에 두 줄의 글을 더 썼다. 그리고 다시 게텀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아라.
  그것이 장밋 및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게텀은 속으로 웃었다.
  ‘정말로 성배에 관한 거였군.’
  종이에서 시선을 떼며 게텀이 말했다.
  “도와드리지요. 이 시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리고 왜 당신들이 구를 찾는지도요?”
  우호적인 미소와 함께 랭던이 답했다.
  “괜찮습니다만, 아주 긴 얘기입니다. 그리고 우린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우리 일에 신경 쓰지 마라’의 공손한 표현법으로 들리는 군요.”
  “파멜라, 우리는 당신에게 영원히 큰 빚을 지게 될 겁니다. 만일 이 기사가 누구이고, 어디 묻혀 있는지 알아내 준다면요.”
  게텀은 낱말을 다시 입력했다.
  “좋아요. 계속 해보죠. 만일 이것이 성배와 관련된 주제라면, 성배와 주요 검색어들이 겹치는 문서들을 찾아야 할 거예요. 검색 범위를 정해 줘서 쓸데없는 것까지 딸려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성배와 관련된 주요 단어들과 지금 입력한 단어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문서들로만 검색을 제한하는 거예요.”
  찾기: 기사, 런던, 교황, 무덤
  100 단어 범위에서 :성배, 장미, 상그리엘, 잔
  “이렇게 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소피가 물었다.
  “다중 교차검색 방면으로는 이삼백 테라바이트?”
  검색 키를 누르는 게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고작 십오 분 정도예요.”
  랭던과 소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게텀은 이 짧은 시간이 그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일어나서 미리 만들어 둔 찻주전자로 걸어가며 게텀이 물었다.
  “차 드실래요? 티빙 경은 항상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지요.”

93

  런던의 오푸스 데이는 켄싱턴 가든의 북쪽 산책길을 굽어보는 오르메코트 5번가에 세워진 수수한 벽돌 건물이다. 사일래스는 여기에 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건물로 걸어가면서, 사일래스는 안식과 피난처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솟아올랐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레미는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리무진을 세웠다. 그러나 사일래스는 개의치 않았다. 비는 씻기위해 내리는 것이다.
  레미의 제안대로, 사일래스는 총을 꺼내 하수구 구멍에 버렸다. 총을 치워 버려서 사일래스는 기뻤다. 몸이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묶여 있었기 때문인지 사일래스는 여전히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고통도 참아냈었다. 사일래스는 레미가 리무진 뒤에 묶어둔 티빙이 걱정됐다. 그 영국인은 지금쯤 분명히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운전해 오는 동안 사일래스가 물어보았다.
  레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스승이 결정할 문제요.”
  레미의 목소리에는 뭔가 야릇한 결정적인 어조가 묻어 있었다.
  오푸스 데이 건물에 다가갈수록 빗줄기는 더욱 심해졌다. 외투가 흠뻑 젖어 전날에 입었던 상처를 쑤셔댔다. 사일래스는 지난 24시간 동안 저지른 죄를 뒤로하고 영혼을 정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은 다 끝났다.
  자그마한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면서, 사일래스는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문을 열고 장식이라곤 없는 수수한 홀로 들어갔다. 카펫을 밟고 들어설 때, 낮은 음의 전자벨이 2층에서 울렸다. 거주자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방에서 기도로 보내는 이런 장소에서 음을 죽인 벨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사일래스는 위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도와드릴까요?”
  사일래스의 희한한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친절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사일래스입니다. 오푸스 데이 신도입니다.”
  “미국인입니까?”
  사일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만 쉬어 가도 되겠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삼층에 빈방이 두 개 있습니다. 차와 빵을 갖다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사일래스는 배가 고팠다.
  사일래스는 계단을 올라가 창문이 있는 소박한 방으로 들어갔다. 젖은 외투를 벗고 무릎을 꿇은 채 속옷 차림으로 기도했다. 자신을 맞이해 주던 남자가 올라와서, 방문 앞에 쟁반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사일래스는 기도를 끝내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해 드러누웠다.
  아래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사일래스를 맞았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말했다.
  “여긴 런던 경찰국입니다. 알비노 수도승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제보를 받았는데, 본 적이 있습니까?”
  남자는 놀랐다.
  “그렇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가 지금도 거기 있습니까?”
  “예, 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누구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경찰들을 거기로 보낼 겁니다.”

94

  세인트 제임스 공원은 런던 한가운데에 있는 녹색의 바다다. 웨스트민스터와 버킹엄, 세인트제임스 궁전과 경계를 이루는 시민 공원이다. 한때 헨리 8세가 사냥을 위해 공원을 막고 사슴들로 채워 놓은 적이 있었지만, 이제 세인트제임스 공원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일요일 오후에 런던 시민들은 버드나무 밑으로 소풍을 나와, 연못에 사는 펠리컨들에게 먹이를 주곤 했다. 이 펠리컨들의 조상은 러시아 대사가 찰스 2세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스승은 오늘 펠리컨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대신 악천후가 바다에서 갈매기를 몰고 왔다. 잔디밭은 갈매기로 뒤덮여 있었다. 하얀 몸통의 수백 마리 갈매기들은 축축한 바람을 참고 견디며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아침 안개에도 불구하고, 공원에서는 국회의사당과 빅벤의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리가 있는 연못과 구슬피 우는 버드나무의 섬세한 그림자를 지나 비탈진 잔디를 응시하던 스승은 기사의 무덤이 있는 건물의 중추를 볼 수 있었다. 레미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한 진짜 이유가 거기 있었다.
  스승이 주차된 리무진의 보조석으로 다가가자, 레미가 몸을 기울여 문을 열었다. 스승은 밖에 잠시 서서, 들고 있던 코냑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을 문지른 뒤, 스승은 레미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차 문을 닫았다.
  레미는 트로피처럼 쐐기돌을 들어올렸다.
  “하마터면 잃을 뻔했습니다.”
  “자네가 잘해 주었어.”
  “우리가 잘한 거지요.”
  스승의 열성적인 손에 쐐기돌을 얹으며 레미가 대꾸했다.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오랫동안 쐐기돌을 찬탄했다.
  “그리고 총은 없애 버렸는가?”  “원래 있었던 장갑상자 안에 다시 넣었습니다.”
  스승은 코냑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병을 레미에게 건넸다.
  “훌륭해, 우리의 성공을 위해 건배하자고. 거의 끝에 다다랐어.”
  레미는 감사히 병을 받았다. 코냑에선 짠맛이 났다. 하지만 레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와 스승은 이제 진정한 파트너가 된 것이다. 레미는 인생에서 지금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고 느꼈다.
  ‘다시는 하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있는 오리 연못 제방을 내려다보자 빌레트 성이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모금을 더 마시자, 레미는 코냑이 몸의 피를 따뜻하게 데우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레미의 목에 걸린 따뜻함은 곧 불편한 열기로 바뀌었다. 목에 매고 있던 나비 넥타이를 풀며, 레미는 불쾌한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들었다. 레미는 병을 스승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충분히 마신 것 같습니다.”
  가까스로 말할 수 있었다.
  병을 받아 든 스승이 말했다.
  “레미,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는 내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세. 난 자네에게 엄청난 신뢰를 품고 있네.”
  “예.”
  타이를 조금 더 풀어헤치며 레미는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그리고 당신의 정체는 나와 함께 무덤까지 가는 거죠.”
  스승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자네를 믿네.”
  병과 쐐기돌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스승은 장갑상자에 손을 뻗어 소형 메두사 리볼버를 꺼냈다. 순간 레미는 공포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스승은 권총을 자기 바지주머니에 넣을 뿐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레미는 갑자기 몸에서 땀이 솟는 것 같았다.
  “자네에게 자유를 약속했다는 것을 내 알지. 하지만 자네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세.”
  스승의 목소리는 후회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레미의 목이 부풀어올랐다. 레미는 목을 움켜쥐고 줄어든 호흡관에서 게워낸 구토물을 맛보며 운전대로 몸을 숙였다. 입이 틀어막힌 듯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차 밖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코냑에서 맛본 짠맛이 뭔지 이제야 깨달았다.
  ‘난 살해당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레미는 자기 옆에 고요히 앉아 있는 스승을 돌아보았다. 스승은 차창 밖을 똑바로 내다보고 있었다. 레미는 시야가 흐려지고, 숨을 쉬기가 힘겨워졌다.
  ‘나는 이 작자를 위해 모든 것을 했다! 그런 내게 이럴 수가!’
  어쨌든 결국에는 자기를 죽일 작정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템플 교회에서의 행동이 신뢰를 잃게 한 것인지 레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공포와 분노가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레미는 스승에게 자신의 몸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뻣뻣해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난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믿었어!’
  레미는 꼭 쥔 주먹을 들어올려 자동차의 경적을 울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옆으로 미끄러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몸을 움켜쥔 레미는 옆구리를 바닥에 댄 채 스승 옆에 쓰러졌다.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레미는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자신의 뇌가 마지막으로 명료한 사고의 조각들에 매달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정신을 잃으면서, 레미 르갈뤼데크는 부드러운 리비에라의 파도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리무진에서 내린 스승은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자 안도감을 느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방금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를 느끼지 않는 것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레미는 스스로 자기 명을 재촉한 거야.’
  모든 일이 끝나면, 레미를 제거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템플 교회에서 뻔뻔스럽게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레미는 그 필요성을 극적으로 가속화시킨 것이다. 예기치 않게 빌레트 성을 방문한 로버트 랭던은 스승에게 뜻밖의 횡재인 동시에 복잡한 딜레마였다. 랭던은 작전의 중심부로 직접 쐐기돌을 가져왔는데, 그 사건은 즐거운 놀라움이었다. 하지만 랭던은 경찰을 꼬리에 달고 왔다. 레미의 지문은 도청작업을 했던 헛간 기지뿐만 아니라 빌레트 성 도처에 널려 있었다. 스승은 레미의 활동과 자신이 연관되지 않도록 거듭 조심했다. 레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스승을 연결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리무진의 뒷문으로 걸어가며 스승은 생각했다.
  ‘느슨한 끈을 하나 매듭지었을 뿐이야. 경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게 말해줄 증인도 없다.’
  아무도 주위에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스승은 널찍한 리무진의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에, 스승은 세인트제임스 공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 랭던과 느뵈.’
  이들은 더 복잡했다. 하지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쐐기돌이 있으니까.
  공원을 가로지르며, 스승은 승리에 찬 눈빛으로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그 시를 듣자마자, 스승은 답을 눈치 챘다.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해도 그에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난 불공정한 이익을 취한 셈이지.’
  지금부터 몇 달 전 소니에르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스승은 그랜드마스터인 소니에르가 우연히 이 유명한 기사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소니에르는 이 기사에게 다 빈치에 대해 품고 있던 애정과 맞먹을 정도의 존경심을 표현했었다. 일단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기사에 대해 언급한 시구절은 단순 명료했다. 소니에르의 재치에 대한 명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무덤이 마지막 패스워드를 어떻게 드러낼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아라,’
  스승은 이 유명한 무덤의 사진을 희미하게 기억해 냈다. 거기엔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거대한 구.’
  무덤 위에 있는 거대한 구는 무덤만큼이나 컸다. 구의 존재는 스승에게 희망적이기도 했지만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거대한 구가 어떤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시에 따르면 수수께끼에서 빠진 부분은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이지…… 이미 거기에 있는 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답을 찾기 위해 스승은 무덤을 자세히 조사할 작정이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스승은 습기가 차지 않도록 크립텍스를 오늘쪽 주머니에 아주 깊숙이 밀어넣었다. 왼쪽 주머니에는 보이지 않게 메두사 리볼버를 넣어 두었다. 몇 분 후에 스승은 9백 년의 역사를 지닌, 런던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의 조용한 성소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스승이 빗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아링가로사 주교는 빗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비긴힐 사설 비행장에 도착한 아링가로사는 축축한 빗물을 피해 사제복을 들어올린 채 답답한 비행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교는 파슈 반장이 마중 나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젊은 영국 경찰관이 반장 대신 우산을 들고 다가왔다.
  “아링가로사 주교님? 파슈 반장님은 볼일이 있어 가셨습니다. 반장님이 주교님을 돌봐드리라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주교님을 스코틀랜드 야드로 모셔가라고 하던데요. 반장님은 그곳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안전해?’
  아링가로사는 손에 꼭 쥐고 있는 바티칸의 채권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내려다 보았다. 주교는 가방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알겠소. 고맙습니다.”
  사일래스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하며 아링가로사는 경찰차에 올라탔다. 잠시 후, 경찰의 스캐너가 지직거리며 주교에게 답을 주었다.
  ‘오르메 코트 오 번가’
  아링가로사는 즉시 그 주소를 인식했다.
  ‘런던의 오푸스 데이 센터.’
  아링가로사는 운전사에게 몸을 돌렸다.
  “날 그리로 데려다 주시오.”

95

  검색이 시작된 이래 랭던의 눈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다. 5분동안 겨우 두 개를 찾았다. 하지만 두 개 모두 상관없는 것이었다. 랭던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파멜라 게텀은 옆에 붙어 있는 방에서 뜨거운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랭던과 소피는 눈치 없게 게텀이 만든 차 외에 따로 뽑아 놓은 커피가 있는지 물었다. 옆방에서 나는 전자레인지의 삐삐거리는 소리를 듣고, 랭던은 자신들의 요청이 인스턴트 네스카페로 보상받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컴퓨터가 행복하게 결과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게텀이 옆방에서 소리쳤다.
  “다른 결과물이 또 나온 것 같은데요. 제목이 뭐예요?”
  랭던은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중세 문학에서의 성배 우화 :거웨인 경과 녹색 기사단에 대한 보고서.
  “녹색 기사단에 대한 우화.”
  랭던이 게텀을 향해 소리쳤다.
  “좋지 않네요. 런던에 묻힌 신화상의 녹색 거인들은 별로 많지 않은데.”
  랭던과 소피는 스크린 앞에 끈기 있게 앉아 의심스러운 검색 결과물 두개를 기다렸다. 컴퓨터가 다시 보여줄 검색된 자료들은 기대치 않은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들.
  “바그너의 오페라들?”
  소피가 물었다.
  인스턴트 커피 봉지를 들고서 게텀이 문가에서 내다보았다.
  “그것은 이상한 연관이네요. 바그너가 기사였나요?”
  랭던은 갑작스러운 흥분을 느끼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바그너는 잘 알려진 프리메이슨이었죠.”
  모차르트,베토벤,세익스피어,거슈인,후디니,디즈니 등과 함께 바그너는 실제로 프리메이슨이었다. 성전 기사단, 시온 수도회, 그리고 성배와 프리메이슨 사이의 유대에 관해 쓴 책들도 있었다.
  “이 검색 결과를 더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체 문서를 볼 수 있습니까?”
  “전체 문서를 보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하이퍼 텍스트로 된 제목을 클릭하세요. 컴퓨터가 문맥 안에 있는 개별 프렐로그와 복합 포스트로그를 따라서 당신의 검색으로 보여줄 거예요.”
  랭던은 게텀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제목을 클릭했다.
  스크린에 새로운 창이 튀어나왔다.
  …… 파르시팔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화상의 기사……
  …… 은유적인 성배 원정은 논쟁이……
  …… 1855년 런던 필하모닉은……
  레베카 포프의 오페라 작품집<여신들의……
  ……독일, 바이로스에 있는 바그너의 무덤은……
  “잘못된 포프입니다.”
  실망스러운 어조로 랭던이 말했다. 그렇다 해도 랭던은 시스템의 쉬운 사용법에 감탄했다. 문맥에 나와 있는 키워드만으로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헌정한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시팔>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이 오페라는 진실을 찾아 원정을 떠나는 젊은 기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게텀이 다독거렸다.
  “인내심을 가져요. 이것은 숫자 게임이에요. 기계가 제 할일을 다 하도록 내버려 두자고요.”
  그리고 몇 분 간, 컴퓨터는 서너 개의 성배 관련 문전들을 제시했다. 거기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에 관한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음유시인(minstrel)과 목사(minister)가 어원학적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음유시인은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의 여행하는 ‘목사’이자 시종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음악을 이용해 보통 사람들에게 신성한 여성의 이야기를 퍼뜨렸다. 오늘날까지도 음유시인들은 자신을 영원히 바치기로 맹세한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미덕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
  랭던은 하이퍼 텍스트를 열심히 살펴봤지만, 그다지 신통한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컴퓨터는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기사,본당,교황,별 :타로 카드를 통해 본 성배의 역사
  랭던이 소피에게 말했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오. 우리의 검색어들 일부는 타로 카드들의 일부와 이름이 같으니까.”
  랭던은 마우스에 손을 뻗어 하이퍼링크를 클릭했다.
  “당신이 할아버지와 타로 카드 놀이를 할 때,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소. 소피, 타로 카드 게임은 잃어버린 신부(新婦)와 사악한 교회에 굴복한 그녀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플래시카드 같은 교리 문답집이오.”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랭던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바로 핵심이오. 은유적인 게임을 통해 가르치면서, 성배의 추종자들은 교회의 감시의 눈길로부터 자기들의 메시지를 위장할 수 있었으니까.”
  랭던은 현대적인 카드 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카드의 네 패, 스페이드,하트,클로버,다이아몬드가 성배와 관련된 상징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끔 궁금했다. 그 상징들은 검,컵,홀,별로 된 타로 카드의 네 패에서 따온 것이다.
  ‘스페이드는 검 -칼날, 남성,’
  ‘하트는 컵 – 잔, 여성.’
  ‘클로버는 홀(笏) -왕가의 혈통, 번성’
  ‘다이아몬드는 별 – 여신, 신성한 여성.’
  4분 정도 지나고, 랭던이 바라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컴퓨터가 또 하나의 결과를 내놓았다.
  천재의 중력: 현대 기사의 일대기
  랭던은 게텀에게 소리쳤다.
  “천재의 중력? 현대 기사의 일대기?”
  게텀은 방에서 머리도 내밀지 않고 소리쳤다.
  “얼마나 현대적인 거지요? 제발 그 기사가 당신네 루디 줄리아니(전 뉴욕 시장. 2002년 2월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라고 말하지는 말아요. 개인적으로 난 그 일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랭던 역시 얼마 전에 기사 작위를 받은 믹 재거(롤링 스톤스의 멤버. 2002년 6월에 기사작위를 받았다.)에 대해서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국의 현대 기사 제도에 대한 정치성을 논할 시점이 아니었다.
  “한번 봅시다.”
  랭던은 하이퍼링크를 눌렀다.
  …… 명예로운 기사. 아이작 뉴턴 경……
  …… 1727년 런던에……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그의 무덤은……
  …… 친구이자 동료인 알렉산더 포프가……
  소피가 게텀에게 소리쳤다.
  “‘현대’라는 말은 상대적인 용어 같아요. 이건 오래된 책이네요. 아이작 뉴턴 경에 관한.”
  문가에서 게텀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안 좋은데요. 뉴턴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어요. 바로 영국 신교도들의 자리죠. 가톨릭 교황이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곳이에요. 크림하고 설탕?”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텀은 기다렸다.
  “로버트?”
  랭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뗀 랭던이 일어섰다.
  “아이작 뉴턴 경이 우리의 기사요.”
  소피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뉴턴은 런던에 묻혀 있소. 그의 노력은 교회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 냈소. 그리고 그는 시온 수도회의 그랜드 마스터였어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더 이상?”
  소피는 시를 가리켰다.
  “교황이 묻은 기사는 어떻게 하고요? 게텀 양이 한 말을 들었죠? 가톨릭 교황은 뉴턴을 묻지 않았어요.”
  랭던은 마우스에 손을 뻗었다.
  “누가 가톨릭 교황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했소?”
  랭던은 알렉산더 포프 중 ‘포프’의 하이퍼링크를 클릭했다. 완벽한 문장이 나타났다.
  아이작 뉴턴 경의 장례식은 왕과 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친구이자 동료인 알렉산더 포프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포프는 무덤에 흙을 끼얹기 전에 심금을 울리는 연설을 했다.
  랭던은 소피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용케 두 번 만에 정확한 교황을 찾아낸 거요. 알렉산더.”
  랭던은 잠시 뜸을 들였다.
  “포프.”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소피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중 의미의 대가인 자크 소니에르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랄 만한 재치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96

  사일래스는 놀라 일어났다.
  무엇이 자기를 깨웠는지, 얼마나 잠을 잔 것인지 사일래스는 알지 못했다.
  ‘꿈을 꾼 것일까?’
  밀짚 매트 위에 앉아, 사일래스는 런던 오푸스 데이 홀의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홀의 정적은 바로 아래층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기도 소리로 부드럽게 채워져 있었다. 이 기도 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일래스를 안정시키는 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일래스는 갑작스러운 뭔가 예기치 못한 불길함을 느꼈다.
  속옷 차림으로 일어서서 사일래스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미행당한 걸까?’
  아래에 보이는 마당은 자신이 들어올 때처럼 그대로 비어 있었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
  오래 전부터 사일래스는 자신의 직관을 믿도록 배워 왔다. 직관은 감옥살이 시작 전부터, 마르세유 거리의 아이 때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다…… 아링가로사 주교의 손으로 다시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창 밖을 살피던 사일래스는 울타리를 통해 희미한 차량의 모습을 보았다. 차의 지붕에는 경찰 사이렌이 붙어 있었다. 복도 쪽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 손잡이가 움직였다.
  사일래스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방을 재빠르게 가로질러 가서,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문 뒤로 붙었다. 경찰관 한 명이 폭풍처럼 들이닥치며, 비어 있는 방 안을 향해 총을 좌우로 휘둘렀다. 경관이 사일래스가 어디 있는지 미처 깨닫기 전에, 사일래스가 먼저 어깨로 문을 밀어붙였다. 막 들어오려던 두 번째 경관이 문에 부딪혔다. 먼저 들어온 경관이 총을 발사하려고 몸을 돌릴 때, 사일래스는 다리를 구부렸다. 총알은 사일래스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사일래스는 발로 경관의 정강이를 차 넘겼다. 경관은 쓰러지며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두 번째 경관이 문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무릎으로 경관의 사타구니를 차버렸다. 그리고 쓰러져 몸을 비트는 경관의 몸을 넘어갔다.
  거의 벌거 벗은 사일래스는 계단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일래스는 자신이 배반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누가? 현관의 홀에 이르자 더 많은 경관들이 입구로 밀어닥쳤다. 사일래스는 방향을 틀어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자 출입구. 모든 오푸스 데이 건물 뒤에는 여자 출입구가 있다.’
  좁은 복도를 쏜살같이 달려가며, 사일래스는 부엌에서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일꾼들을 지나쳤다. 일꾼들은 알몸의 알비노가 그릇과 은제품을 뒤집어엎으며 보일러실 근처에 있는 어두운 복도로 뛰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쪽으로 비켜섰다. 사일래스는 여자 출입구 표지가 저 끝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속력으로 문을 밀어젖히고 빗속으로 뛰어든 사일래스는 다른 쪽에서 경관이 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낮게 뛰어내렸다. 경관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두 사람은 충돌했다. 사일래스의 널찍한 어깨가 경관의 흉골을 으깰 듯이 짓눌렀다. 사일래스는 경관을 연석 위로 끌어 올려 위에 타고 앉았다. 경관이 총을 폭발했다. 사일래스는 사람들이 고함치며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경관들이 막 나타난 순간, 사일래스는 몸을 굴려 떨어진 권총을 잡았다. 계단에서 총성 한 발이 울려퍼졌다. 사일래스는 갈비뼈 아래에서 불타는 고통을 느꼈다. 분노로 가득 찬 사일래스는 세 명의 경관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사방으로 그들의 핏방울이 튀었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뒤에 내려앉았다. 사일래스의 벌거벗은 어깨를 붙잡은 성난 손이 악마의 힘으로 그의 몸뚱이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한 남자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사일래스의 귀에 들렸다.
  “사일래스, 안 돼!”
  사일래스는 돌아서서 총을 쐈다. 그들의 눈이 서로 부딪쳤다. 아링가로사 주교가 쓰러질 때, 사일래스는 공포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97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5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거대한 석조 건물 내부는 왕,정치가,과학자,시인 그리고 음악가 들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무덤들은 개인 전용 교회당이 들어 있을 정도로 웅장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능에서부터, 수백년동안 사람들의 발길로 바닥에 새긴 글귀들일 닳아 없어진 아주 소박한 타일로 만들어진 묘들도 있었다. 방문객에게 이런 무덤은 저 타일 밑에 과연 누구의 유골이 누워 있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미앵, 샤르트르, 캔터베리 같은 위대한 성당과 같은 양식으로 디자인 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당도 교회도 아니다. 웨스트민스터는 왕가의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국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1066년 크리스마스에 정복왕 윌리엄의 대관식이 거행된 이래, 이 눈부신 성역은 국가의 끝없는 황실 행사와 의식들을 목격했다. 참회왕 에드워드의 시성식에서부터 앤드루 왕자와 사라 퍼거슨의 결혼, 헨리 5세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까지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로버트 랭던은 지금 한 가지 사건만을 제외하고는 사원의 고대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바로 영국 기사, 아이작 뉴턴 경의 무덤이었다.
  ‘런던에 교황이 묻은 기사가 누워 있노라.’
  북쪽 회랑에 있는 웅장한 현관으로 서둘러 들어가면서 랭던과 소피는 사원의 경비원들과 마주쳤다. 경비원들은 공손하게 두 사람을 사원의 새로운 장치로 가게 했다. 금속 탐지기였다. 이제 이런 금속 탐지기는 런던의 유적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별 무리 없이 탐지기를 통과해 사원 입구로 걸어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문턱을 넘어서자, 랭던은 바깥 세계가 갑자기 증발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의 소음도 없었다.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요한 적막이 내부에 가득했다.
  다른 방문객처럼 랭던과 소피의 눈도 즉시 위로 향했다. 사원의 거대한 심연이 천장에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림자 속에서 회색 돌기둥들이 삼나무처럼 솟아올라, 아치를 그리며 아찔하게 넓은 공간에서 휘어졌다가 다시 석조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두 사람 앞에는 북쪽 회랑의 넓은 복도가 깊은 계곡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복도 양 옆으로는 투명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다채로운 빛으로 사원 바닥을 수놓겠지만 오늘은 비도 내리고 어두워서, 빈 복도는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지하 납골당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아무도 없네요.”
  소피가 속삭였다.
  랭던은 실망스러웠다. 사원 안에 사람들이 많기를 기대했었다.
  ‘좀더 공공장소다운 분위기를 바랐는데.’
  템플 교회에서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관광 명소라는 사실에 랭던은 안도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햇빛이 잘 들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사원에 대한 기대는 한여름 관광 시즌에나 해당되었다. 오늘은 비 내리는 4월의 아침이다. 군중들과 아른아른하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 대신 황량한 복도와 어둡고 텅 빈 실내뿐이었다.
  랭던의 기분을 눈치 챈 소피가 일깨웠다.
  “우린 금속 탐지기를 지나왔잖아요. 여기 들어온 사람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어요.”
  랭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랭던은 런던 경찰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소피는 런던 경찰 당국 인사 중에 이 일에 연관 있는 자가 있을까 봐 두려워했다.
  ‘우린 먼저 쐐기돌을 회수해야 해요. 그것이 모든 일의 열쇠예요.’
  그것이 소피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옳았다.
  ‘레이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열쇠.’
  ‘성배를 찾는 열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알아내는 열쇠.’
  불행하게도 쐐기돌을 회수할 유일한 기회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작 뉴턴의 무덤, 누가 쐐기돌을 들고 있든 간에, 마지막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무덤을 방문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소피와 랭던은 그들을 차단할 작정이었다.
  왼쪽 벽을 따라 걸어가서 두 사람은 개방된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벽기둥 뒤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갔다. 랭던은 인질로 잡힌 레이 티빙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 리무진 뒤에 묶여 있을 것이다. 시온 수도회의 고위 멤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이라면, 그 길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을 터였다.과거 영국 기사인 아이작 뉴턴 경을 찾고 있는데, 현대 영국 기사인 티빙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였다.
  “어느 길로 가죠?”
  주위를 둘러보며 소피가 물었다.
  ‘무덤.’
  랭던도 알지 못했다.
  “안내원을 찾아서 물어봐야 할 것 같소.”
  하릴없이 헤매는 것보다 그 편이 낫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왕릉과 묘실, 구석구석에 숨은 묘지들로 얽힌 복잡한 미로였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화랑처럼 사원의 입구는 단 하나였다. 두 사람이 지금 막 통과한 문이었다. 이렇게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는 길을 찾기란 어려웠다.
  ‘말 그래도 관광객의 덫이라고 할 수 있지.’
  랭던의 동료 한 명은 사원 내부를 이렇게 불렀다. 전통대로 사원은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교회들이 본당 아래의 널따란 홀을 경유해 끝에 입구를 두는 것과는 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옆에 입구를 두었다. 게다가 사원에는 여러 개의 회랑들이 붙어 있었다. 발을 한번 잘못 들여놓으면, 관광객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미로 같은 복도에서 길을 잃고 만다.
  “안내원들은 진홍색 가운을 입고 있소.”
  사원 중앙으로 걸어가며 랭던이 말했다. 남쪽 회랑 끝에 높이 치솟은 계단을 흘끗 살피다가, 랭던은 서너 명의 사람이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엎드린 참배의 모습은 시인들의 구역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성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관광객들이 탁본을 뜨는 모양이군.’
  소피가 말했다.
  “안내원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 힘으로 무덤을 찾으면 안 될까요?”
  랭던은 아무 말 없이 소피를 이끌고, 사원 중앙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쪽을 가리켰다.
  소피는 사원 본당의 길이를 내려다보며 숨을 멈췄다. 건물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피가 말했다.
  “아아, 안내원을 찾도록 해요.”
  그때, 본당 90미터쯤 아래에 있는 아이작 뉴턴 경의 무덤은 칸막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외로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스승은 10분 동안이나 무덤을 조사하고 있었다.
  뉴턴의 무덤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관이다. 관 위에는 고전적인 의상을 입고 자신의 책 더미로 몸을 자연스럽게 기댄 아이작 뉴턴 경의 조각상이 있었다. <신학><연대기><광학><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였다. 뉴턴의 발치에는 날개를 단 두 명의 소년이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었다. 구부정한 뉴턴의 몸 뒤로는 준엄한 피라미드가 솟아 있었다. 피라미드 자체도 이상했지만,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피라미드 중간쯤에 박힌 거대한 형체였다.
  ‘구.’
  일단 무덤을 찾아내면, 사라진 구를 가려내는 일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확실치 않았다. 스승은 천계의 복잡한 지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빠진 행성이라도 있는 건가? 성좌에서 빠진 별자리라도 있는 건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답은 놀라우리만치 단순명료하리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교황이 묻은 기사. 어떤 구를 찾아내야 하는 걸까?’
  분명 천체 물리학에 관한 진보적인 지식이 성배를 찾는 일의 우선 과목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이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스승의 집중은 다가오는 서너 명의 관광객들 때문에 깨졌다. 스승은 크립텍스를 주머니에 다시 넣고, 관광객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근처의 탁자로 가서 컵 안에 현금을 넣었다. 그리고 사원 측이 마련한 탁본 도구들을 다시 챙겨들었다. 목탄 연필과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종이들로 무장한 관광객들은 사원 앞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인기 있는 장소의 시인들의 구역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초서라든가 테니슨,디킨스 등의 무덤으로 가서 열심히 무덤 위에 새겨진 글들을 탁본 뜨며 자신들의 존경심을 표할 것이다.
  다시 혼자가 되자 스승은 뉴턴의 무덤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위까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석관을 받치고 있는 발에서부터 시작해 뉴턴을 지나 과학에 대한 뉴턴의 저서들, 수학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두 소년을 거쳐, 피라미드의 표면과 성좌가 그려진 거대한 구를 살폈다. 마침내 별들로 가득찬 묘실의 천장에까지 이르렀다.
  ‘어떤 구가 여기 있어야만 하는가…… 어느 것이 빠진 것일까?’
  스승은 주머니에 있는 크립텍스를 어루만졌다. 마치 소니에르의 대리석 조각을 통해 답을 점쳐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오직 다섯 글자만이 나와 성배를 갈라 놓고 있구나.’
  묘실 칸막이의 구석으로 나오면서, 스승은 깊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긴 본당을 따라 멀리 떨어진 제단으로 시선을 던졌다. 스승의 시선은 제단 아래에서 밝은 진홍색 가운을 입은 안내원에게로 향했다. 안내원은 아주 익숙한 두 얼굴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랭던과 느뵈.
  스승은 침착하게 칸막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빨리도 움직였군.’
  랭던과 소피가 결국에는 시의 의미를 해독하고 뉴턴의 무덤으로 올 것이란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깊이 숨을 들이킨 스승은 자신의 선택을 고려했다. 스승은 다급한 일을 처리하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쐐기돌을 쥐고 있는 것은 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승은 자기에게 확신을 주는 두 번째 물건을 매만졌다. 메두사 리볼버. 예상한 대로, 사원의 금속 탐지기는 총을 숨기고 지날 때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러나 스승이 분개하며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경비원들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공식적인 지위는 항상 그에 걸맞는 존경심을 부르는 법이다.
  스승은 자기 힘으로 크립텍스를 풀어 일이 더 이상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랭던과 느뵈의 등장은 사실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구’에 관련된 구절에는 자신이 없던 터라, 스승은 두 사람의 지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랭던이 시에 나오는 무덤이 무엇인지 알아냈다면, 구에 관해서도 뭔가를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랭던이 암호를 알아내면, 적당한 압력을 가하는 문제만이 남을 뿐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안 되지.’
  ‘좀더 은밀한 곳이어야 해.’
  스승은 사원으로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조그마한 안내 표지판이 떠올랐다. 그는 즉시 두 사람을 유인할 완벽한 장소를 생각해 냈다.
  이제 문제는 단 하나……. 미끼로 무엇을 사용하느냐였다.

98

  랭던과 소피는 북쪽 복도로 천천히 내려갔다. 넓은 본당을 구분짓는 널찍한 기둥 뒤로 두 사람은 움직였다. 본당을 반 이상 내려갔지만, 아직 뉴턴의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이 각도에서는 움푹 들어간 묘실에 위치한 뉴턴의 석관이 보이지 않았다.
  소피가 속삭였다.
  “적어도 저기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랭던은 마음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턴 무덤 근처의 본당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랭던이 속삭였다.
  “내가 가보겠소. 당신은 여기 숨어 있어요. 만일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소피는 이미 널찍한 본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랭던은 한숨을 쉬고 서둘러 소피를 따라갔다.
  널찍한 본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공들인 무덤이 감질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뉴턴의 조각상…… 날개 달린 두 소년…… 웅장한 피라미드…… 그리고…… 거대한 구.
  “이 무덤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놀란 목소리로 소피가 물었다.
  랭던 역시 놀라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소피가 말했다.
  “구 위에 성좌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아요.”
  뉴턴의 무덤이 있는 석실로 다가갈수록, 랭던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덤은 구로 뒤덮여 있었다. 별, 혜성, 행성.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아라?’
  이것은 마치 골프 코스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 같았다.
  소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천체 같아요. 그리고 행성들이 아주 많군요.”
  랭던은 눈살을 찌푸렸다. 랭던이 상상할 수 있는 성배와 행성들간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비너스 별이었다. 그리고 랭던은 템플 교회로 가는 길에 ‘비너스(venus)’라는 패스워드를 이미 시험해 보았다.
  소피는 석관으로 곧장 다가갔다. 하지만 랭던은 몇 발짝 뒤에 떨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피는 머리를 갸웃이 숙이고 뉴턴이 기대고 있는 책의 제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신학><연대기><광학><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
  소피는 랭던을 돌아보았다.
  “뭐 떠오르는 거 없어요?”
  랭던은 소피가 불러주는 책 제목들을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원리 수학은 행성의 중력과 관계 있는 거요…… 물론 행성들은 구이긴 하지만, 별 상관은 없어 보이는군요.”
  구에 있는 성좌를 가리키며 소피가 물었다.
  “십이 궁도표는 어때요? 전에 물고기 자리와 물병자리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잖아요. 안 그래요?”
  ‘말일.’
  랭던은 생각했다.
  “물고기자리의 끝과 물병자리의 시작은 시온이 상그리엘 문서들을 세상에 공표하기로 계획한 역사적인 표식이었소.”
  ‘하지만 새 천년은 왔고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지. 진실이 언제 오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역사가들을 뒤로 남겨 둔 채 말이야.’
  “진실을 밝히려는 시온의 계획은 시의 마지막 줄과 관계 있을지도 몰라요.”
  ‘그것이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랭던은 잠재된 말의 의미에 전율을 느꼈다. 전에는 그런 식으로 마지막 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에 내게 얘기했잖아요. ‘장미’와 그녀와 풍요로운 자궁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는 시온 계획의 시기가 행성의 위치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요, 행성은 바로 구잖아요.”
  랭던은 희미한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랭던의 직관은 천문학이 열쇠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이전 답안들은 모두 풍부하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암굴의 마돈나, 소피아가 그랬다. 이런 유려함이 행성이나 12궁도의 개념에서는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자크 소니에르는 자신이 세심한 암호 작업가임을 증명했다. 랭던은 시온의 궁극적인 비밀을 푸는 다섯 글자, 마지막 패스워드 역시 상징적으로 꼭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수정처럼 그 의미도 분명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만일 마지막 해답이 밝혀지면,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해답들처럼 아주 또렷할 것이다.
  랭던의 생각을 깨뜨리며, 소피가 랭던의 팔을 잡고 숨을 죽였다. 소피의 갑작스러운 접촉에서 공포감을 느낀 랭던은 누군가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랭던이 소피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검은색의 석관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쭉 뻗은 뉴턴의 오른발 근처, 석관 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소피가 속삭였다.
  “봐요! 누군가 여기 다녀갔어요.”
  랭던은 소피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주의한 관광객이 뉴턴의 발 근처에 있는 석관 뚜껑의 탁본을 뜨다가 목탄을 남겼을 것이다.
  ‘별 것 아니겠지.’
  랭던은 목탄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석관 쪽으로 몸을 기울인 랭던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소피가 왜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뉴턴의 발 근처 석관 뚜껑에는 목탄 연필로 휘갈겨 쓴 메시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티빙을 데리고 있다.
  챕터하우스를 지나 남쪽 출구로 나와서, 칼리지 가든으로 와라.
  랭던은 다시 한 번 읽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었다. 또한 전율이 온 몸을 뒤덮었다.
  소피는 돌아서서 본당을 살폈다.
  랭던은 스스로에게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다.
  ‘레이 경이 아직 살아 있다.’
  또한 이 글에는 다른 암시도 들어 있었다.
  ‘그들 역시 패스워드를 모르고 있소.’
  랭던이 속삭였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들의 존재를 알렸겠는가?
  “레이 경과 패스워드를 바꾸자는 것 같소.”
  “아니면 함정이든지요.”
  랭던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든은 사원 담장 바깥에 있소. 매우 공적인 장소지.”
  랭던은 사원의 유명한 칼리지 가든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조그마한 과수원과 허브 가든으로, 수도사들이 자연 약재를 재배하던 시절부터 있었던 곳이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과실수임을 자랑하는 칼리지 가든은 사원으로 안 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방문 장소였다.
  “우리를 바깥으로 불러낸 것은 신뢰를 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낄 테니까.”
  소피는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바깥이라면, 금속 탐지기가 없는 곳을 말하는 거 아니예요?”
  랭던은 눈을 부라렸다. 소피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구로 가득 찬 무덤을 응시하며, 랭던은 크립텍스의 패스워드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협상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내가 레이를 이 일에 끌어들였다. 그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뭐든지 해야 한다.’
  “메시지는 챕터 하우스를 지나 남쪽 출구로 나오라고 되어 있어요. 출구에서 가든을 볼 수 있나요? 가든으로 곧장 가면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텐데. 그 전에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소피의 생각이 옳았다. 랭던은 챕터 하우스를 거대한 팔각형의 홀로 기억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국회의사당 건물이 마련되기 전에는 그곳에서 영국 국회가 소집되었다. 랭던이 여기 와본 것은 수년 전이었지만, 회랑 어딘가를 지나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덤에서 서너 걸음 물러나면서, 랭던은 오른쪽에 있는 칸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본당을 가로질러 그들이 내려온 길의 반대편을 살폈다.
  입을 벌린 아치형 복도 근처에 커다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이 길은 다음으로 향함 : 회랑들
                          공관
                          칼리지 홀
                          박물관
                          픽스 챔버
                          세인트페이스 예배당
                          챕터 하우스
  랭던과 소피는 표지판 밑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두 사람은 너무 급하게 지나가느라 복원 공사를 위해 일부 지역은 폐쇄되었다는 양해문구를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즉시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비가 쏟아져 내리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들 위에서 누가 주둥이에 대고 바람을 불어대는 것처럼 바람이 낮게 윙윙거렸다. 폭이 좁고 낮은 통로가 마당과 경계를 이루었다. 랭던은 통로로 들어서며 갇힌 공간에서 항상 느끼는 불편함을 맛보았다. 이 통로들이 회랑이라는 복도였다. 랭던은 이 특별한 회랑(cloisters)이 밀실 공포증(claustrophobic)이라는 라틴어와 유대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불편한 마음으로 깨달았다.
  터널 끝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랭던은 챕터 하우스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갔다. 비가 후드득 내리고 있었다. 화랑의 유일한 빛의 출처인 낮은 벽기둥은 불어닥친 돌풍을 막지 못해 복도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반대 방향에서 남녀 한 쌍이 험악해진 날씨를 피해 서둘러 소피와 랭던 곁을 지나갔다. 회랑에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이 치는 이런 날씨에 사원에서 가장 매력 없는 장소는 단연 이 회랑일 것이다.
  동쪽 회랑 40미터 아래 지점에는 아치 길이 왼쪽으로 휘어지며 다른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찾고 있던 입구에는 출입을 금하는 줄과 표지판이 둘러쳐져 있었다.
  수리로 인해 폐쇄되었음 : 픽스 챔버
                           세인트페이스 예배당
                           챕터 하우스
  경계선 너머로 보이는 길고 황량한 회랑에는 여기저기 버려진 발판과 천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둘러쳐진 줄 너머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픽스 챔버와 세인트페이스 예배당의 입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챕터 하우스의 입구는 훨씬 멀리, 긴 복도 끝에 있었다. 서 있는 자리에서도 챕터 하우스의 묵직한 나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넓은 팔각형 모양의 실내가 거대한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회색빛 자연광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챕터 하우스의 창문에서는 칼리지 가든이 내다보였다.
  ‘챕터 하우스를 지나 남쪽 출구로 나와서, 칼리지 가든으로 오라.’
  “우리는 지금 막 동쪽 회랑을 지났소. 가든으로 향하는 남쪽 출구는 저기를 지나서 오른쪽에 있을 거요.”
  소피는 이미 경계선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서둘러 내려가자, 열린 회랑에서 들려오던 비바람 소리가 두 사람 뒤로 점차 희미해졌다. 챕터 하우스는 일종의 위성 구조였다. 거기에서 진행되는 국회 진행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기 위해 긴 복도 끝에 위치한 별관이었다.
  “무척 커보이는데요.”
  챕터하우스로 다가가며 소피가 말했다.
  랭던은 이 방이 얼마나 큰지 잊고 있었다. 입구 밖에서 보더라도 드넓은 바닥을 가로질러 팔각형 각 면에 위치한 창문들은 숨을 참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창문들은 둥근 천장까지 5층 높이로 솟아 있었다. 저 창문에서는 가든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문지방을 넘어선 랭던과 소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살폈다. 어두운 회랑을 지나와서인지 챕터 하우스는 마치 일광욕실 같았다. 두 사람이 남쪽 벽을 찾아 열 걸음 정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남쪽으로 나가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막다른 방에 서 있는 셈이었다.
  육중한 문이 움직이는 소리에 두 사람은 돌아보았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빗장이 내려졌다. 문 앞에서 한 남자가 권총을 겨눈 채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남자는 뚱뚱했고, 알루미늄 목발 한 벌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순간 랭던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레이 티빙이었다.

99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뵈를 겨누고 있는 메두사 리볼버의 총신을 내려다보며, 레이 티빙은 침울해했다.
  “친구들, 지난밤 자네들이 내 집안으로 걸어 들어온 순간부터 자네들을 위험한 길에서 떼놓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네. 하지만 자네들의 고집이 이제 나를 어려운 상황에 쳐넣어 버렸군.”
  티빙은 소피와 랭던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과 배신의 표정을 읽었다. 하지만 티빙은 두 사람이 곧 사건의 사슬을 이해하리라고 확신했다. 이 사건의 사슬이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세 사람을 한 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 할 말이 많아…… 자네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지.’
  티빙은 말했다.
  “결코 자네들을 끌어들일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믿어주게. 자네들이 먼저 내 집으로 왔지. 나를 찾아서 자네들이 온 거야.”
  랭던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레이 경? 대체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우리는 당신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당신을 도우러 여기 왔다고요!”
  “그랬을 테지. 우리는 의논해야 할 것이 많아.”
  랭던과 소피는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리볼버에서 놀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총은 단순히 자네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끌기 위한 거네. 만일 내가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자네들은 이미 죽었을 거야. 지난밤 자네들이 내 집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나는 자네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지. 난 명예를 지키는 사람일세. 양심을 걸고 말하건데, 오직 성배를 배반한 사람들만 희생시켰다고 맹세할 수 있네.”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성배를 배반한 사람들?”
  한숨을 쉬며 티빙이 말했다.
  “난 끔찍한 진실을 알아냈다네. 왜 상그리엘 문서가 세상에 결코 공개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거야. 시온은 결국 진실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 그 때문에 지난 1999년과 2000년에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말일에 접어들었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거였어.”
  랭던은 항의하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티빙은 말을 계속했다.
  “시온은 세상과 진실을 공유할 성실한 책임을 부여받은 조직이야. 말일이 도래했을 때, 상그리엘 문서를 공개하는 것이 그 일이지. 수백년 동안 다 빈치나 보티첼리,뉴턴 같은 인물들은 문서를 보호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네. 그런데 궁극의 순간에 자크 소니에르가 마음을 바꾸어 버렸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진 영광을 안은 사람이 자기 의무를 저버린 거야. 소니에르는 시기가 좋지 않다고 결정했지.”
  티빙은 소피를 향했다.
  “소니에르는 성배를 망쳤소. 시온도 망쳐 놓았지. 그리고 그 순간이 있게한 모든 세대의 기억들을 망쳐 버렸소.”
  소피는 티빙에 대한 분노와 상황을 깨달은 녹색 눈으로 티빙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외쳤다.
  “당신이? 당신이 할아버지를 죽이게 한 사람인가요?”
  티빙은 코웃음을 쳤다.
  “아가씨 할아버지와 그의 집사들은 성배를 배신한 자들이었어.”
  소피는 내부 깊숙한 곳에서 격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이야!”
  티빙의 목소리에는 후회가 없었다.
  “아가씨 할아버지는 교회에 팔아 넘겨진 작자였어. 교회가 소니에르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압박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야.”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교회는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어요!”
  티빙은 차갑게 웃었다.
  “아가씨, 교회는 자기네 거짓말을 밝히겠다고 위협하는 자들을 이천 년 동안이나 압박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부터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에 관한 진실을 성공적으로 감추어 왔지. 지금이라고 놀랄 필요는 없어. 다시 한 번 교회는 세상을 암흑에 묶어둘 방법을 찾아낸 것뿐이니까. 비신도들을 살해하기 위해 교회가 더 이상 십자군을 고용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교회의 영향력은 설득력이 있지. 게다가 음흉스럽기까지 하고.”
  다음 말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티빙은 뜸을 들였다.
  “느뵈 양, 언젠가는 자네 할아버지가 가족에 관한 진실을 자네에게 말하고 싶어했을 걸세.”
  소피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죠?”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치 않아. 자네가 지금 파악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거지.”
  티빙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자네 어머니,아버지, 할머니, 남동생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야.”
  그 말은 소피의 감정을 휘저어 놓었다. 소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랭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로버트, 그 일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네. 모든 조각들이 들어맞지.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상그리엘을 침묵시킬 필요가 있을 때, 교회는 살인을 저지른 선례를 가지고 있지. 말일이 임박해지자, 그랜드 마스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 것일세. 조용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소피가 그 다음이다.”
  어린 시절의 고통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피는 비틀거렸다.
  “그건 자동차 사고였어요. 사고라고요!”
  “자네의 순진함을 보호하기 위한 침대 머리맡 이야기지. 가족 중에 오직 두 사람만 손대지 않고 놔두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시온의 그랜드 마스터와 그의 손녀. 교회가 시온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만한 완벽한 한 쌍이지. 감히 상그리엘의 비밀들을 공표한다면 아가씨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지난 세월 동안 교회가 자네 할아버지에게 휘둘렸을 테러를 상상해 보게. 조직의 고대 맹세를 재고하도록 시온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면, 교회는 자기들이 시작한 일을 끝내 버리겠다고 소니에르를 위협 했을 테지.”
  랭던은 몹시 화난 모습으로 대들었다.
  “레이 경, 소피 가족의 죽음에 교회가 어떤 일을 했다는 증거는 확실히 없습니다. 게다가 시온이 조용히 입을 다물도록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도 없고요.”
  “증거? 시온이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원하나? 새 천년이 도래했어. 하지만 세상은 아직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이게 충분한 증거가 아니면 뭔가?”
  티빙의 말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소피는 다른 목소리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소피, 네 가족에 관한 진실을 얘기해야만 한단다.’
  소피는 자신이 전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빙의 얘기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일까? 그녀의 가족은 살해당한 것일까? 가족을 앗아간 사고에 대해서 소피가 진실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직 간단한 설명들. 심지어 신문에 난 이야기도 모호했었다. 사고? 침대 머리맡 이야기? 소피는 갑자기 할아버지의 과잉보호가 생각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그녀를 홀로 두는 것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대학에 다니느라 떨어져 있을 때조차, 그녀는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는 그림자 속에서 시온 회원들이 자기의 모든 생활을 돌봐 주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아했다.
  불신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랭던은 티빙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소니에르가 조종당하고 있다고 의심했군요. 그래서 소니에르를 살해했습니까?”
  “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네. 소니에르는 진작에 죽었지. 교회가 그의 가족들을 앗아갔을 때 말일세. 그는 변절했어. 이제 소니에르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거야. 신성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부끄러운 무능력에서 벗어난 거지. 다른면을 생각해 보게. 어떤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어. 세상이 영원히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어야 되겠는가? 교회가 영원히 우리의 역사책에 자기네의 거짓말을 공고히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겠는가? 교회가 살인과 고문으로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해야 하겠는가? 아니야, 어떤 조치가 필요했어! 그리고 이제 우리가 소니에르의 유산을 수행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위치에 오게 된 걸세.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소피는 믿을 수 없었다.
  “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아가씨. 시온이 문서의 공표를 포기한 것은 바로 자네 때문이지. 자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소니에르는 교회에 도전하지 못했어. 오직 하나 남은 가족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그는 불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자네가 그를 거부하고, 그의 손을 묶고, 기다리게했기 때문에 소니에르는 결코  진실을 설명할 기회도 갖지 못했네. 이제 아가씨는 세상에 진실을 알릴 빚을 지고 있는 거야. 자네 할아버지의 추억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
  로버트 랭던은 인내심을 포기했다. 수많은 질문이 마음에서 솟구쳤지만, 지금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소피를 여기서 무사히 빼내야 한다. 티빙을 끌어들였던 일로 죄책감을 느꼈던 조금 전의 자책감은 이제 소피에게로 전이되었다.
  ‘내가 소피를 빌레트 성으로 데려갔다. 내 책임이다.’
  레이 티빙이 챕터 하우스 안에서 자기들을 죽일 정도로 차가운 피를 가진 사람인지 랭던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티빙은 비뚤어진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살해한 일과 이미 연관이 있었다. 외떨어지고 두꺼운 벽이 둘러쳐진 이 방에서 총성이 울린다 해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그리고 레이는 방금 자신의 죄를 우리에게 인정했다.’
  랭던은 떨고 있는 소피를 바라보았다.
  ‘시온을 침묵시키려고 교회가 소피의 가족을 살해했다?’
  현대 교회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는다고 랭던은 확신했다. 거기에는 다른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레이를 쳐다보며 랭던이 말했다.
  “소피는 가게 해주십쇼. 우리 둘이서만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합시다.”
  티빙은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요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자네들에게 보여 달라는 얘기일세. 하지만 자네에게 이걸 줄 수는 있지.”
  티빙은 목발에 온몸을 기대고, 무자비하게 소피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쐐기돌을 꺼냈다. 티빙은 돌을 살짝 흔들어 보이다가 랭던에게 내밀었다.
  “신뢰의 증표일세. 로버트.”
  로버트는 걱정스러웠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쐐기돌을 돌려줘?’
  “받게.”
  불편한 자세로 랭던 쪽으로 돌을 내밀며 티빙이 말했다.
  랭던은 티빙이 쐐기돌을 돌려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열었군요. 지도는 꺼냈을 테지요?”
  티빙은 고개를 저었다.
  “로버트, 내가 쐐기돌을 열었다면, 자네들을 불러들이지도 않고 성배를 찾으러 이미 떠났을거야. 아니야. 난 답을 모르네. 나는 그 사실을 거리낌없이 인정할 수 있어. 진정한 기사는 성배 앞에서 겸손해하는 법이니까. 기사는 자기 앞에 놓인 표식에 순종하는 법이거든. 자네가 사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깨달았지. 자네가 여기 있는 이유가 다 있다고, 이 일을 돕기 위해서지. 나는 혼자만의 영광을 구하러 여기 있는 것은 아닐세. 내 자존심보다 더 위대한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게야. 바로 진실이지. 인류는 마땅히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성배는 우리 모두를 찾아냈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달라고 사정하고 있어. 우리는 반드시 함께 일해야만 하네.”
  랭던은 차가운 대리석 크립텍스를 받으러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협력과 신뢰를 위한 티빙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티빙의 권총은 여전히 소피를 향하고 있었다. 랭던이 쐐기돌을 잡고 뒤로 물러설 때, 안에 든 식초가 출렁거렸다. 쐐기돌의 다이얼은 무작위로 돌아간 채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랭던은 티빙을 보았다.
  “내가 지금 당장 이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티빙은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템플 교회 안에서 쐐기돌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자네의 위협은 헛소리였다는 것을 내 알고 있네. 로버트 랭던은 결코 쐐기돌을 깨뜨릴 사람이 아니지. 자네는 역사가야. 로버트. 자넨 이천 년의 역사를 담은 열쇠를 들고 있는 거라고. 상그리엘을 여는 잃어버린 열쇠지. 그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말뚝에 매달려 불에 타 죽은 모든 기사들의 영혼을 자네는 느낄 수 있을 걸세.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참인가? 아니야. 자넨 그들을 옹호하고 싶을 거야. 자넨 자네가 존경하는 다 빈치, 보티첼리, 뉴턴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반열에 합류하고 싶을 걸세. 그 인물들도 지금 당장 자네의 입장이 되고픈 영광을 누리고 싶을 거야. 쐐기돌 안에 든 내용물이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어. 자유를 갈망하면서 말이야. 때는 왔네. 운명이 우리를 이 순간으로 이끈 것이야.”
  “난 도울 수가 없어요. 레이 경. 이것을 어떻게 여는지 저도 모릅니다. 잠깐 동안 뉴턴의 무덤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설령 제가 패스워드를 안다고 하더라도……”
  랭던은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티빙은 한숨을 쉬었다.
  “내게는 말하지 않을 테다? 실망했네. 그리고 놀라워. 로버트. 자네가 내게 진 빚을 고려하지 않다니 말이야. 자네 둘이 빌레트 성으로 들어왔을 때, 레미와 내가 자네들을 없애 버렸다면 일은 훨씬 간단했을 텐데. 하지만 나는 고상한 길을 택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했네.”
  “지금 이게 고상한 겁니까?”
  총에 눈길을 보내며 랭던이 물었다.
  “소니에르의 잘못이야. 그와 그의 집사들이 사일래스에게 거짓말을 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별 소란 없이 쐐기돌이 내 손에 들어왔을 텐데. 그랜드 마스터가 인생의 끝에서 나를 속이고, 쐐기돌을 자신과 사이도 나쁜 손녀에게 줘버릴지 상상이나 했겠나?”
  경멸의 눈빛을 담고 티빙은 소피를 쳐다보았다.
  “기호학자를 보모로 둬야 할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은, 자질도 없는 사람에게 말이야.”
  티빙은 다시 랭던을 돌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로버트 자네가 이 일에 개입된 것은 내게 축복이었지. 안전금고 은행에 영원히 쐐기돌을 가둬 놓은 채로 있는 것보다, 자네가 꺼내서 내 집으로 갖고 왔으니 말이야.”
  랭던은 생각했다.
  ‘달리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성배 역사가의 사회는 좁다. 그리고 티빙과 나는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다.’
  티빙은 이제 잘난 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니에르가 자네에게 절박한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값나가는 시온의 정보를 자네가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정보가 쐐기돌 자체인지, 쐐기돌의 위치를 찾아낼 정보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 뒤에 붙은 경찰들 때문에, 자네가 내 집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
  “만일 우리가 가지 않았다면?”
  “자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계획을 짜놓고 있었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쐐기돌은 빌레트 성으로 오게 되어 있었어. 기다리던 내 손에 자네가 쐐기돌을 전달했다는 사실은 나의 이유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야.”
  “뭐라고요?”
  랭던은 소름이 끼쳤다.
  “사일래스는 빌레트 성에 침입해서 자네로부터 쐐기돌을 훔쳐낼 작정이었네. 자네를 해치지 않고 쐐기돌을 훔쳐내면, 내게서 어떤 공모의 혐의도 찾을 수 없게 되지. 하지만 소니에르의 암호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성배 원정에 두 사람을 좀더 참여시키도록 결정했지. 나중에라도 사일래스에게 쐐기돌을 훔치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일단 내가 혼자서라도 충분히 갖고 다닐 수 있게 되면 말이야.”
  배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피가 말했다.
  “템플 교회.”
  ‘빛은 새벽이 되었지.’
  티빙은 생각했다. 템플 교회는 로버트와 소피에게서 쐐기돌을 뺏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명백해 보이는 시 구절은 그럴듯한 미끼가 되어 주었다. 레미에게 내린 지시는 분명했다. 사일래스가 돌을 회수하는 동안 보이지 않게 숨어 있어라. 하지만 불행히도 바닥에 돌을 던져 깨뜨려 버리겠다는 랭던의 위협은 레미를 공포의 상태로 몰고 갔다.
‘만일 레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자작 납치극을 떠올리며 티빙은 침울하게 생각했다.
  ‘레미가 나의 유일한 고리였는데, 스스로 얼굴을 내보이다니!’
  다행스럽게도 사일래스는 티빙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바보같이 티빙을 교회에서 데리고 나와, 레미가 리무진 뒤에 티빙을 인질처럼 묶는 척하는 것을 순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리무진 내부의 칸막이가 올라갔을 때, 티빙은 앞 좌석에 앉은 사일래스에게 스승의 가짜 프랑스 억양의 말투를 이용해 전화했다. 사일래스에게는 곧장 오푸스 데이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사일래스를 이 사건에서 빼버리기 위해, 경찰에 익명으로 전화를 걸어 단서를 제공했던 것이다.
  ‘느슨한 끝을 하나 매듭지은 거지.’
  느슨한 다른 한 끝은 좀더 힘들었다.
  ‘레미 녀석.’
  티빙은 그 결정에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레미는 신뢰성에 문제를 드러냈다.
  ‘모든 성배 원정은 희생을 요구한다.’
  가장 깨끗한 해결책은 리무진의 바 안에 있었다. 병, 꼬냑, 땅콩 한 캔. 땅콩 캔의 밑바닥에 있는 가루는 레미의 치명적인 알레르기를 충분히 유발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레미가 리무진을 기마병 퍼레이드 광장에 주차 시켰을 때, 티빙은 뒷좌석에서 걸어나와 레미 옆에 앉았다. 잠시 후 티빙은 차에서 내려, 다시 뒷좌석으로 들어가 모든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티빙의 다리 교정기와 알루미늄 목발들. 권총은 동시에 금속 탐지기를 작동시켰지만, 청원 경찰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발의 교정기를 빼고 기어서 통과하라고 해야 하나? 불구인 늙은이의 몸을 수색해야 할 필요가 있나?’
  티빙은 한 무더기의 경비원들에게 보다 쉬운 해법을 제시했다. 자신이 기사임을 증명하는 엠보싱 처리된 신분증을 내보인 것이다. 가련한 이 친구들은 티빙을 안으로 모시기 위해 서로 야단들이었다.
  당황한 랭던과 느뵈를 바라보며, 티빙은 얼마나 영리하게 오푸스 데이를 이 음모에 끌어들였는지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곧 있으면 오푸스 데이 때문에 교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것은 기다리면 된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티빙이 흠잡을 데 없는 프랑스어로 얘기했다.
  “친구들, 성배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성배가 너희를 찾을 것이다. 우리의 길이 이보다 분명할 수는 없네. 성배가 우리를 찾아낸 걸세.”
  티빙은 미소를 지었다.
  침묵이 흘렀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티빙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들어보게. 들리지 않는가? 수백년을 건너 성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네. 시온의 우매함에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나는 두 사람에게 이 기회를 깨달으라고 간청하고 싶네. 마지막 코드를 풀고 크립텍스를 여는 이 순간에 우리 세 사람이 이렇게 모인 것은 우연일 리가 없어. 우리는 서로 맹세할 필요가 있네. 서로에 대한 믿음의 서약이야.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기사의 의무일세.”
  소피는 티빙의 눈을 쏘아보며 강철 같은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를 살해한 사람과 맹세 따위를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을 감옥에 보내고 말겠다는 맹세 외에는요.”
  티빙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느끼다니 유감이로군. 아가씨.”
  티빙은 돌아서서 랭던에게 총을 겨눴다.
  “그럼 자네는? 로버트. 나와 함께할 텐가, 아니면 맞설 텐가?”

100

  마누엘 아링가로사 주교의 몸은 많은 고통을 감내해왔다. 하지만 가슴에 박힌 총상의 달구는 듯한 열기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깊고 무거웠다.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에 더 가까웠다.
  아링가로사는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그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걸까?’
  주교는 힘센 팔이 자신을 안고, 봉제 인형처럼 힘없이 축 늘어진 자기 몸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사제복이 펄럭거렸다.
  힘없는 팔을 들어올려 아링가로사는 눈을 닦고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사일래스였다. 거대한 몸집의 아리노가 병원을 찾아 외치며 안개 낀 보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사일래스의 목소리에는 단장(斷腸)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앞으로만 고정되어 있고, 피가 튄 창백한 얼굴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링가로사가 속삭였다.
  “내 자식, 네가 다쳤구나.”
  사일래스는 주교를 내려다보았다. 사일래스의 눈이 고통으로 흐려졌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주교님.”
  사일래스는 너무 고통스러워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다. 사일래스. 미안해할 사람은 나다. 이 일은 모두 내 잘못이야. 난 네가 너무 걱정되었다. 너무 두려웠지. 너와 난 속은 거였어.”
  ‘스승이란 사람은 내게 살인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단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르라고 말했던 거야. 스승은 애초부터 결코 우리에게 성배를 가져오게 할 작정이 아니었어.’
  지난 긴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 한 사일래스의 팔에 안겨, 아링가로사 주교는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사일래스와 함께 오비에도에 작은 가톨릭 교회를 짓고 소박한 출발을 시작했던 스페인, 그리고 나중에는 오푸스 데이 본부 빌딩을 세우고 신의 영광을 선언했던 뉴욕의 렉싱턴 가.
  다섯달 전, 아링가로사는 재앙과도 같은 소식을 접했다. 그의 일생의 업적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링가로사는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기억했다. 간돌포 성에서의 회합이 자신의 생을 바꾸어버렸다는 것을…… 재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링가로사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간돌포의 천문학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아메리카에 가톨릭을 새롭게 전파한 그의 뛰어난 능력을 칭찬하며, 자기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는 손길과 환영의 무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오직 세 사람뿐이었다.
  뚱뚱하고 시무룩한 얼굴의 바티칸 서기관과 잘난 척하는 얼굴에 신성한 체하는 고위급의 이탈리아 추기경 두 명.
  “서기관님?”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아링가로사가 서기관을 불렀다.
  법적인 안건들을 다루는 땅딸막한 서기관이 아링가로사와 악수를 나누며 반대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편히 앉으십시오.”
  자리에 앉으며 아링가로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기관이 말했다.
  “난 인사치레에는 익숙하지 못하오. 주교. 주교를 부른 이유를 곧장 말하겠소.”
  “그럼, 공개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독선적인 자세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듯한 두 명의 추기경을 응시하며 아링가로사는 말했다.
  서기관이 말했다.
  “주교도 알겠지만, 로마에 계신 교황과 다른 몇 분들이 최근 논쟁이 일고 있는 오푸스 데이의 강령들로부터 비롯된 정치적인 문제들을 걱정하고 계시오.”
  아링가로사는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새로 선출된 교황과 여러 차례로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었다. 무척 실망스럽게도, 교황은 교회 내부의 자유로운 변화를 옹호하는 데 완강한 목소리를 가진 것으로 판명됐다.
  서기관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교황은 주교의 임무에 어떤 변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싶소.”
  ‘나도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뚱뚱한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주교, 이 일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이틀 전, 오푸스 데이에 대한 바티칸의 인가를 철회하자는 법안이 서기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소.”
  아링가로사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확신했다.
  “뭐라고요?”
  “간단히 말해 오늘부터 여섯 달 후면 오푸스 데이는 더 이상 바티칸의 한 교파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오. 주교 자신의 교회가 될 거란 말이오. 교황은 주교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시오. 교황청의 동의에 따라 우리는 벌써 법적인 서류까지 작성하고 있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보면, 분명 가능한 일이오. 그리고 필요한 일이지. 교황청은 당신네의 공격적인 신도 모집 정책과 육체 고행에 대해서 불편해하고 있소.”
  서기관은 잠시 뜸을 들였다.
  “또 여성에 대한 당신네 정책도 문제요. 솔직히 말해서 오푸스 데이는 우릴 부끄럽게 하고 있소.”
  아링가로사 주교는 멍한 기분이었다.
  “부끄럽다고요?”
  “일이 이렇게 된 것을 가지고 놀랄 필요는 없소.”
  “오푸스 데이는 신자 수가 늘고 있는 유일한 가톨릭 조직입니다! 우리 교단에는 이제 천백 명 이상의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실이오. 그건 우리 모두에게 골치 아픈 문제지.”
  아링가로사는 발에 힘을 주었다.
  “교황청에 물어봅시다. 우리가 바티칸 은행을 도와주던 1982년에도 오푸스 데이가 부끄러운 대상이었는지 말입니다!”
  달래는 목소리로 서기관이 말했다.
  “바티칸은 항상 그 일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1982년에 당신네가 베푼 금전적인 혜택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당신이 성직을 받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서기관의 비아냥이 아링가로사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다.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좋은 믿음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소. 그 돈을 상환하는 것을 포함해서 분리 절차를 밟으려고 하오. 돈은 다섯 번에 걸쳐 갚을 것이오.”
  “나를 돈으로 사겠다는 것입니까? 돈을 줄테니 조용히 가라는 말입니까? 오푸스 데이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이성(理性)의 목소리’인 이때에!”
  추기경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성이라고 말했습니까?”
  아링가로사는 탁자에 몸을 기대며 목소리를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여러분은 가톨릭 신자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 정말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주위를 둘러보시오. 추기경, 사람들은 존경을 잃었습니다. 믿음의 열성이 사라진 겁니다. 교리는 뷔페 상차림처럼 변했습니다. 정진, 고해,성찬,세례,미사 등등. 입맛대로 고르고 나머지는 무시해라. 교회가 제공하는 정신적인 지도가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추기경이 말했다.
  “초기 삼백 년의 법들이 현대 신도들에게는 들어맞지 않소. 그런 법칙들은 현대 사회에서는 작동하지 않아요.”
  “글쎄요, 오푸스 데이에서는 그 규칙들이 잘 작동합니다!”
  서기관이 단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아링가로사 주교, 이전 교황과 당신네 조직간의 관계를 생각해서, 교황청은 오푸스 데이에게 바티칸에서 자발적으로 분리해 나갈 육 개월의 시간을 준 것이오. 지금 당신은 교황청과 다른 견해를 밝혔소. 그러니 당신 자신의 기독교 조직을 세우도록 하시오.”
  아링가로사가 선언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황을 직접 만나서 얘기하겠소!”
  “안됐지만, 교황청은 더 이상 당신을 만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을 거요.”
  아링가로사는 벌떡 일어섰다.
  “이전 교황이 설립한 개인적인 교파를 감히 현 교황이 폐지할 수는 없을겁니다!”
  서기관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유감이오. 신이 주신 것은 그분이 거둬 가는 법이오.”
  아링가로사는 당황과 공포에 휩싸여 비틀거리며 회합에서 빠져나왔다. 뉴욕으로 돌아온 아링가로사는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슬픔 때문에 며칠동안 환멸에 찬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바꾼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뒤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랑스 말투를 썼고, 자신을 스승이라고 소개했다. 그 호칭은 성직에서는 흔한 것이었다. 스승이란 사람은 오푸스 데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려는 바티칸의 계획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을까?’
  아링가로사는 의아했다. 사실 아링가로사는 바티칸 권력의 중개인들 몇몇만이 임박한 오푸스 데이의 무효화 처분을 알게 되기를 원했다. 말이 새나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소문이 퍼지면, 바티칸 시티를 둘러싼 벽만큼이나 구멍이 많은 벽도 세상에 없었다.
  스승은 속삭였다.
  “나는 어디에나 귀를 두고 있소. 주교. 그리고 그 귀로 어떤 정보를 얻었소. 주교가 날 도와준다면, 주교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성스러운 유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아낼수가 있소…… 당신 앞에 바티칸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오. 믿음을 구해 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이지. 단지 오푸스 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오.”
  ‘신이 거둬 가고 …… 그리고 신이 보내준다.’
  아링가로사는 희망의 빛을 느꼈다.
  “당신의 계획을 말해 보십시오.”
  세인트메리 병원 문이 휙 소리를 내며 열릴 때, 아링가로사 주교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사일래스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일래스는 도와달라고 외쳤다. 거의 벌거벗은 알비노가 피를 흘리는 성직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병원 접수구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일래스를 도와 실신한 주교를 이동침대에 눕힌 의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의사는 아링가로사의 맥박을 확인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그리 희망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아링가로사의 눈이 깜박거렸다. 잠시 의식을 찾은 주교의 시선이 사일래스에게 머물렀다.
  “내 어린 양……”
  사일래스의 영혼은 후회와 분노로 소용돌이쳤다.
  “주교님, 제 평생을 걸고 우릴 속인 자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기필코 죽이겠습니다.”
  슬픈 표정으로 아링가로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주교를 데려갈 준비를 했다.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의 손을 꼭 쥐었다.
  “사일래스…… 만일 네가 내게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제발……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라. 용서는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란다.”
  “하지만 주교님……”
  아링가로사는 눈을 감았다.
  “사일래스, 반드시 기도하거라.”

101

  로버트 랭던은 적막한 챕터 하우스의 높은 천장 아래에 서 있었다. 그리고 레이 티빙의 총신을 응시했다.  “로버트, 나와 함께할 텐가, 아니면 맞설 텐가?”
  영국 왕립 역사가의 말이 고요한 랭던의 마음에 메아리치고 있엇다.
  티빙의 질문에 대답할 적당한 말이 없다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예’라고 대답하면 소피를 팔아 넘기는 일이 될 것이고,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티빙은 두 사람을 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의실에서 랭던은 총 끝의 위협에 대처하는 기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는 법은 가르친 바가 있다.
  ‘질문에 정확한 답이 없을 때, 정직한 대답은 오직 하나다.’
  ‘예’와 ‘아니오’의 중간에 위치한 회색지대, 침묵.
  크립텍스를 바라보며, 랭던은 그저 걷기로 했다.
  랭던을 눈을 들지 않고, 방의 거대한 빈 공간으로 물러났다.
  ‘중립 지대’
  랭던은 크립텍스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이 티빙에게는 협력할지도 모른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또 그의 침묵이 그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임을 소피가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티빙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닐까. 티빙이 크립텍스를 건네준 이유가 여기에 있어. 그렇게 하면 내가 내리는 결정의 무게를 스스로 느낄수 있을 테니까.’
  영국 역사가는 랭던이 그랜드 마스터의 크립텍스를 만지면서 그 안에든 내용물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촉감이 다른 모든 생각을 압도할 정도로 랭던의 학문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쐐기돌을 열지 못하는 일 자체가 역사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가 깨우치기를 바랐다.
  총구 앞에 서 있는 소피를 보며, 랭던은 크립텍스의 난해한 패스워드를 찾아내는 일만이 소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만일 내가 쐐기돌 안에서 지도를 꺼내면 티빙은 협상할 것이다.’
  이 중요한 임무에 마음을 집중시키며 랭던은 천천히 창가로 움직였다……. 그리고 뉴턴의 무덤 위에 있는 수많은 천문학적 이미지들로 마음을 채웠다.
  그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할 구를 찾으라.
  그것이 장밋빛 살과 씨를 품은 자궁에 대해서 말하리라.
  랭던은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높이 치솟은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 모자이크에서 영감이 될 만한 것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네 자신을 소니에르의 마음에 두어라.’
  랭던은 칼리지 가든을 내다보며 스스로 재촉했다.
  ‘뉴턴의 무덤 위에 있어야만 한다고 소니에르가 믿었던 구는 무엇이었을까?’
  별,혜성,혹성 등의 이미지가 떨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반짝거렸다. 하지만 랭던은 그 이미지들을 무시했다. 소니에르는 과학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애와 예술,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신성한 여성…… 잔…… 장미……쫓겨난 마리아 막달레나……여신의 몰락……성배.’
  전설은 항상 성배를 잔인한 애인처럼 그려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춤을 추고,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당신을 한걸음 더 꾀어내고, 그리고 나서 안개 속으로 증발해 버리는 것이 성배였다.
  칼리지 가든의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랭던은 성배의 장난기 어린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표식은 어디에나 있었다. 안개 속에서 조롱하듯 피어나는 그림자처럼,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과 나뭇가지에서는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사과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비너스처럼 반짝이면서 말이다. 여신은 이제 정원 안에 있었다. 그녀는 빗속에서 춤을 추고, 오래된 노래를 부르며, 꽃망울이 가득한 나뭇가지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랭던에게 지식의 과일이 그의 손 너머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이.
  방 건너편에서는 티빙이 확산에 찬 눈으로,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창문 밖을 내다보는 랭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내가 바라던 대로 랭던이 움직이는군.’
  지금까지 몇 번이나 티빙은 랭던이 성배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랭던이 자크 소니에르를 만나기로 한 그날 밤, 티빙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소니에르의 사무실을 도청하면서, 티빙은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 랭던과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랭던의 수수께끼 같은 원고가 시온의 신경을 건드린게 틀림없어. 랭던이 저도 모르게 진실을 건드린 거고, 소니에르는 그 원고가 알려질까 봐 겁을 먹은 거지.’
  티빙은 그랜드 마스터가 랭던을 부른 것은 랭던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진실은 너무 오랫동안 침묵해 왔어!’
  티빙은 자신이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일래스의 공격은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나는 랭던이 입을 다물도록 소니에르가 설득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단 쐐기돌이 티빙의 손 안에 들어오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티빙이 랭던을 필요로 한다면 랭던을 파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소니에르가 사일래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은 너무 쉬웠다.
  ‘나는 소니에르가 가장 두려워하는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
  어제 오후, 사일래스는 박물관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정신이 반쯤 나간 사제처럼 굴었다.
  “소니에르 씨, 날 용서하십시오. 당신에게 말할 것이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신성함을 깨서는 안 되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방금 당신의 가족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고해를 들었습니다.”
  소니에르는 놀란 듯했지만 신중을 기했다.
  “제 가족들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도 그렇게 결론이 났고요.”
  사일래스는 미끼를 던지며 말했다.
  “그래요, 차 사고라. 제게 말한 남자는 자동차를 강으로 강제로 밀었다고 하던데요.”
  소니에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소니에르 씨, 이 남자가 선생님의 안전에 공포를 느낄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선생님께 전화할 일은 결코 없었을 겁니다. 그 남자는 선생님의 손녀따님인 소피양에 대해서도 말했답니다.”
  소피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촉매제가 되었다. 관장은 즉시 행동을 취했다. 사일래스에게 자신이 알고 잇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즉시 찾아오라고 말했다. 바로 루브르 박물관 내에 있는 소니에르의 사무실이었다. 그런 뒤 소니에르는 소피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 것이다. 로버트 랭던과 만나 한잔하려던 일은 즉시 취소되었다.
  소피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랭던은 지켜보며, 티빙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데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피 느뵈는 불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랭던은 분명히 더 큰 그림을 볼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 패스워드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랭던은 성배를 찾는 일과 성배를 속박에서 풀어내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어.’
  소피가 차갑게 말했다.
  “랭던은 당신을 위해서 크립텍스를 열지는 않을 거예요. 설사 그가 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죠.”
  티빙은 소피에게 총을 겨눈 채 랭던을 응시했다 .티빙은 이제 무기를 사용해야만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확신이 그를 괴롭혔지만,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소피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성배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야.’
  그 순간 랭던이 창문에서 돌아섰다. 눈에 희미한 희망의 빛을 담고 랭던이 말했다.
  “무덤은…… 뉴턴의 무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래요, 패스워드를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티빙의 심장 박동을 빨라졌다.
  “어딘가, 로버트? 말해 보게!”
  소피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로버트, 안 돼요! 티빙을 도울 작정은 아니죠. 그렇죠?”
  랭던은 크립텍스를 앞으로 들고 티빙에게 단호하게 다가갔다. 딱딱해진 랭던의 시선이 티빙에게로 향했다.
  “아니오, 레이 경이 당신을 보내주기 전까지는 아니오.”
  티빙의 낙관적인 생각에 그늘이 졌다.
  “우린 거의 다 왔네. 로버트. 감히 나와 게임을 하려 들지는 말게나!”
  “게임이 아닙니다. 소피를 보내주십쇼. 그럼 제가 레이 경을 뉴턴의 무덤으로 모셔 가겠습니다. 함께 크립텍스를 여는 겁니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피가 선언했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그 크립텍스는 할아버지가 제게 준 거예요. 당신들이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랭던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돌아섰다.
  “소피, 제발!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소. 난 당신을 도우려는 거요!”
  “어떻게요? 할아버지가 죽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비밀을 밝혀내는 것으로? 할아버지는 당신을 믿었어요. 로버트. 나도 당신을 믿었고요!”
  랭던의 푸른 눈이 고통으로 젖어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 대적하는 모습을 보며 티빙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용감해지려는 랭던의 시도가 그저 불쌍하게만 보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밀을 밝히려는 순간에, 이 일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자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군 그래.’
  랭던이 애원했다.
  “소피, 제발…… 당신은 가야만 하오.”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크립텍스를 건네주든지, 아니면 바닥에 던져 버리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가지 않겠어요.”
  “뭐요?”
  랭던이 숨을 죽였다.
  “로버트, 할아버지는 자신의 비밀이 자기를 살해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영원히 잠자는 쪽을 원하실 거예요. 차라리 날 쏴요! 난 할아버지의 유물을 당신 손에 넘기고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소피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눈물을 쏟지는 않았다. 소피는 티빙을 똑바로 응시했다.
  ‘잘됐군.’
  티빙이 총을 조준했다.
  손을 들어올리며 랭던이 외쳤다. 크립텍스가 딱딱한 돌 바닥에 떨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놓여 있었다.
  “안 됩니다! 레이 경, 만일 쏠 생각이라면, 이걸 떨어뜨리겠습니다.”
  티빙은 웃었다.
  “그 허풍은 레미에게나 먹혀들었지. 내겐 아닐세. 그보다는 자네를 더 잘 알고 있거든.”
  “그렇습니까, 레이 경?”
  ‘그렇다네. 자네의 포커 페이스는 좀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군. 그래. 시간이 걸렸지만, 자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자네 뉴턴의 무덤 어디에 답이 있는지 몰라.’
  “진심인가, 로버트? 어디에 답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겐가?”
  “그렇습니다.”
  랭던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스치는 것을 티빙은 놓치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소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고 가련한 계획이었다. 티빙은 로버트 랭던에게서 강한 실망감을 느꼈다.
  ‘나는 무가치한 영혼들에 둘러싸인 외로운 기사군. 혼자힘으로 쐐기돌을 해독해야겠어.’
  랭던과 소피는 이제 티빙과…… 성배에게 위협일 뿐이었다. 이 해법은 고통스러웠지만, 티빙은 깨끗한 양심으로 일을 해낼 작정이었다. 한 가지 남은 문제는 랭던에게 쐐기돌을 내려놓으라고 설득하는 일이다. 그래야 이 장난 같은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다.
  소피에게 겨눈 총을 낮추면서 티빙이 말했다.
  “믿음을 보여주게. 쐐기돌을 내려놓게나. 그리고 얘길 좀 하지.”
  랭던은 자신의 거짓말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랭던은 티빙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그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돌을 내려놓을 때, 티빙은 우리 둘 모두 죽일 것이다.’
  굳이 소피를 쳐다보지 않아도 고요한 절박함 속에 소피의 마음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로버트, 이 사람은 성배를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제발 쐐기돌을 이 자의 손에 넘기지 말아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에요.’
  랭던은 칼리지 가든을 내다보며 창문 가에 홀로 서 있는 동안 이미 마음을 정했다.
  ‘소피를 보호하자.’
  ‘성배를 보호하자.’
  랭던은 절박함에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궁지에 몰린 다급한 순간이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명료한 사고를 몰고 왔다.
  ‘진실은 바로 네 눈앞에 있다. 로버트.’
  랭던은 이 같은 통찰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했다.
  ‘성배는 너를 조롱하지 않는다. 성배는 가치 있는 영혼에 대답할 뿐이다.’  레이 티빙과 4.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랭던은 부하처럼 몸을 숙이며 크립텍스를 바닥 가까이까지 내렸다.
  권총을 랭던에게 겨누며 티빙은 속삭였다.
  “그래, 로버트. 바닥에 내려놓게나.”
  랭던의 시선이 위로 움직이며, 챕터 하우스의 둥근 천장을 응시했다. 몸을 더욱 낮게 숙이던 랭던은 자기를 겨누고 있는 티빙의 총으로 시선을 낮추었다.
  “미안하군요. 레이 경.”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랭던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크립텍스가 둥근 천장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레이 티빙은 자기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메두사 리볼버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총알을 발사했다 .웅크렸던 랭던의 자세는 이제 수직으로 서 있었고, 총알은 랭던의 발 근처에서 폭발했다. 티빙의 반쪽 뇌는 분노에 휩싸여 목표물을 조준해서 다시 총을 발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강력한 다른 반쪽 뇌는 티빙의 눈을 천장으로 이끌었다.
  ‘쐐기돌!’
  티빙의 인생 전체가 허공에 떠 있는 쐐기돌이라도 된 것처럼 시간이 얼어붙고 느린 동작으로 이루어진 꿈결 같았다. 티빙은 쐐기돌이 그 정점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허공에 순간 머물렀다가….. 구르면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끝에서 끝으로, 돌 바닥을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티빙의 모든 희망과 꿈이 수직으로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지면 깨질 거야! 저걸 잡아야 해!’
  티빙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티빙은 권총을 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부드럽게 잘 다듬어진 손을 내밀자 목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과 손가락을 쭉 뻗어 티빙은 가까스로 쐐기돌을 낚아챘다.
  자랑스럽게 쐐기돌을 손에 꽉 쥐고 앞으로 쓰러지면서, 티빙은 자신이 너무 빠른 속도로 넘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을 지탱해 줄 아무것도 없이, 쭉 뻗은 티빙의 팔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크립텍스가 바닥에 심하게 충돌했다.
  크립텍스 안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티빙은 숨을 쉬지 않았다. 차가운 돌 바닥에 몸을 쭉 뻗고 누워서, 맨손으로 쥐고 있는 대리석 원통을 응시했다. 티빙이 안에 든 유리병을 살피려고 할 때 시큼한 식초 냄새가 허공에 퍼졌다. 차가운 액체가 다이얼 사이를 통해 자신의 손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광포한 감정이 티빙을 사로잡았다.
  ‘안 돼!’
  식초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티빙은 크립텍스 안에서 파피루스가 용해되는 장면을 떠올렸다.
  ‘로버트, 이 어리석은 인간! 비밀이 영원히 사라지는 구나!’
  티빙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성배는 사라져 버렸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말았어.’
  랭던의 행동을 믿지 못한 채, 티빙은 어깨를 떨며 원통을 열어 보려고 했다. 파피루스가 영원히 녹아 버리기 전에 역사의 흔적이라도 잡을 수 있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티빙이 쐐기돌의 양끝을 잡아당기자 원통은 부드럽게 열렸다.
  티빙은 숨을 죽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깨지고 젖은 유리 조각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파피루스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티빙은 눈을 굴려 랭던을 올려다보았다. 소피가 랭던 곁에 서서 티빙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당황한 티빙은 다시 쐐기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크립텍스의 다이얼들이 더 이상 무작위로 배열되 있지 않았던 것이다. 크립텍스의 다섯 글자가 티빙을 보고 있었다. 사과(APPLE).
  랭던이 차갑게 말했다.
   “이브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는 신의 성스러운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원죄 말입니다. 신성한 여성의 추락을 상징하는 거지요.”
  티빙은 진실이 가혹한 고문처럼 자신을 짓밟는 것을 느꼈다. 뉴턴의 무덤에 있어야만 할 구는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장밋빛 사과였던 것이다. 그 사과가 뉴턴의 머리에 부딪혀, 뉴턴은 일생의 업적을 이룰 영감을 받았다.
  ‘그의 노력의 결실! 씨를 품은 장밋빛 살!’
  쇠잔한 티빙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로버트, 자네가 쐐기돌을 열었군. 지도는…… 어디에 있나?”
  눈도 깜박이지 않고 랭던은 트위드 재킷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섬세한 파피루스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티빙으로부터 2,3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서서, 랭던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알 것 같은 미소가 랭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랭던은 알고 있어!’
  티빙의 가슴은 그 지식을 갈구했다. 일생의 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내게 말해 주게! 제발, 오, 신이여! 제발 ! 아직 늦지 않았어!”
  챕터 하우스로 향하는 복도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랭던은 재빨리 파피루스를 말아서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안 돼!”
  일어서려고 헛된 노력을 하며 티빙이 소리쳤다.
  문이 활짝 열리고, 황소처럼 브쥐 파슈가 나타났다. 방을 조사하던 파슈의 흉포한 눈동자가 목표물을 찾아냈다. 바닥에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레이 티빙. 파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권총을 다시 집어넣으며 소피에게 돌아섰다.
  “느뵈 요원, 자네와 랭던 씨가 모두 무사해서 안심이야. 하지만 내가 명령했을 때, 자네는 본부로 들어왔어야 했어.”
  파슈의 뒤를 따라 영국 경찰이 들어와서, 분노한 죄인을 포위하고 수갑을 채웠다.
  소피는 파슈를 보자 놀란 듯했다.
  “우리를 어떻게 찾아냈어요?”
  파슈는 티빙을 가리켰다.
  “저자가 사원에 들어올 때, 자기 신분증을 내보이는 실수를 저질렀어. 경찰이 저자를 쫓고 있다는 방송을 경비원들이 들었거든.”
  티빙이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랭던의 주머니에 있소! 성배의 위치를 알리는 지도 말이오!”
  경찰들이 티빙을 끌어올려 데리고 나갈 때, 티빙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으르렁거렸다.
  “로버트!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말하게!”
  티빙이 지나쳐갈 때 랭던은 티빙과 눈이 마주쳤다.
  “레이 경, 오직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만이 성배를 찾아냅니다.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 주었지요.”

102

  안개가 켄싱턴 가든 위로 잦아들 때, 사일래스는 다리를 절며 아무도 없는 빈 공터로 사라졌다. 젖은 풀 위에 무릎을 꿇은 사일래스는 갈비뼈 아래에 입은 총상에서 따뜻한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사일래스는 똑바로 앞을 응시했다.
  안개는 여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기도하기 위해 피 묻은 손을 들어올린 사일래스는 빗방울이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깨끗하게 씻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등과 어깨 위로 비가 더 심하게 쏟아질수록, 사일래스는 자신의 육체가 조금씩 조금씩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난 유령이다.’
  새 생명의 촉촉한 흙냄새를 실은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서진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아 사일래스는 기도를 올렸다. 용서를 위해 기도했다. 자비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일래스는 자신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했다. 아링가로사 주교…… 신은 주교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이 땅에서 그분을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주교님은 아직 할 일이 많은 분이다.’
  안개가 사일래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일래스는 자기의 몸이 너무 가벼워져서, 비질 한 번에도 쓸려갈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안개 속 어딘가에서 아링가로사 주교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신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다.’
  마침내 고통이 사라졌다. 사일래스는 주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103

  해가 나와 런던 시내를 말리기 시작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취조실에서 나와 택시를 부르며 브쥐 파슈는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레이 티빙은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성배와 비밀문서, 신비한 단체 등등에 관한 두서 없는 얘기들은 이 교활한 영국인 역사가가 자기 변호사들을 통해서 정신적 문제를 들고 나와 청원하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니야.’
  파슈는 생각했다. 티빙은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계획을 세워 놓는 정교함을 보였다.  티빙은 바티칸과 오푸스 데이를 몰아세웠지만, 양쪽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티빙의 더러운 작업은 광적인 수도승과 필사적인 주교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졌다. 더욱 교활한 것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에 전자 도청기지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실제 도청 작업은 티빙의 집사인 레미가 했다. 유일하게 티빙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레미는, 참 편리하게도 알레르기 반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 능력이 결여된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작업이지.’
  파슈는 생각했다.
  빌레트 성에서 나온 콜레의 정보에 따르면, 이 영국인의 교활함은 너무 대단해서 파슈 자신이 한수 배워야 할 정도였다. 파리의 주요 사무실들에 도청장치를 성공적으로 숨겨놓은 이 영국인 역사가는 그리스인에 비유할만했다.
  ‘트로이의 목마 수법이지.’
  의도적으로 타깃이 된 티빙의 손님들 중 일부는 사치스러운 예술품을 선물로 받았다. 일부는 아무 생각 없이, 티빙이 구체적으로 물품을 배치한 경매에 참가해 물건을 가져갔다. 소니에르의 경우,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다 빈치 관(館)’에 대해 티빙이 자금을 댈 수 있는지를 의논하기 위해 빌레트 성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다. 티빙의 초대장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추신을 달고있었다. 소니에르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로봇 기사를 보고 싶다고 썼던 것이다.
  ‘기사를 저녁 식사에 데려와 주십시오.’
  소니에르는 그대로 했고, 문제는 레미 르갈뤼데크가 눈에 띄지 않게 부속품을 달아 놓을 정도로 기사를 오랫동안 홀로 두었다는 데 있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파슈는 눈을 감았다.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세인트메리 병원의 회복실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아링가로사를 내려다보며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주교님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어요. 기적 같다고나 할까요.”
  주교는 연약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항상 축복을 받았지요.”
  간호사는 일을 마치고 떠났다. 햇살이 주교의 얼굴을 따뜻하고 환하게 비추었다. 지난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밤이었다.
  낙담한 채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에 대해 생각했다. 사일래스의 시체는 공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거라, 내 자식아.’
  아링가로사는 사일래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획의 일부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난밤 브쥐 파슈가 전화를 걸어, 생 쉴피스 교회 안에서 살해된 수녀와 주교와의 관계를 물었다. 그때 아링가로사는 그 밤이 무섭게 변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사람이나 더 살해됐다는 소식은 공포를 분노로 변질시켰다.
  ‘사일래스,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스승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아링가로사는 자신이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용당했다.’
  자신이 일으킨 끔찍한 사건의 고리들을 끊을 유일한 방법은 파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아링가로사와 파슈는 스승이 다시 살인을 부추기기 전에, 사일래스를 붙잡으려고 했다.
  뼈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링가로사는 눈을 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유명한 영국 기사인 레이 티빙을 체포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스승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 벌거벗고 누워 있구나.’
  티빙은 바티칸이 오푸스 데이와 결별하려는 계획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기 계획의 완벽한 장기의 졸로 아링가로사를 고른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성배를 쫓아 맹목적으로 뛰어들 자가 누가 있겠는가? 성배는 그것을 가진 자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 줄 테니까.’
  레이 티빙은 자기 정체를 교활하게 감추었다. 프랑스 말투를 쓰고 신앙심이 깊은 척했다. 그리고 주교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한 가지를 대가로 요구했다. 돈이었다. 아링가로사는 의심을 하기에는 너무 몰두해 있었다. 2천만 유로라는 가격표는 성배를 얻고, 바티칸이 오푸스 데이에 결별의 대가로 지불하는 액수에 비하면 하찮은 돈이었다. 계산은 깨끗했다.
  ‘장님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물론 티빙이 저지른 최고의 모욕은 돈을 바티칸 채권으로 지불해 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일이 잘 되면, 범죄 수사는 로마를 향하게 될 터였다.
  “많이 나아지셔서 기쁩니다. 주교님.”
  아링가로사는 문가에서 들리는 우락부락한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얼굴은 생각과 달랐다. 완고하고 힘이 넘치는 외모에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매끄럽게 넘긴 남자는 짙은 색상의 양복 위로 두꺼운 목이 보였다.
  “파슈 반장?”
  아링가로사가 물었다. 지난밤 아링가로사의 비행을 위해 반장이 보여준 연민과 걱정스러운 어투는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의 인물을 연상시켰다.
  반장은 침대로 다가와서, 무거워 보이는 낯익은 검정 서류가방을 들어올렸다.
  “이 가방은 주교님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아링가로사는 채권으로 가득 찬 가방을 바라보다가, 부끄러움이 일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손가락으로 침대보의 솔기만 어루만질 뿐 아링가로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반장, 난 이것을 어떻게 할까 깊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습니다.”
  “물론이지요, 말씀하십시오.”
  “파리에 사일래스의 가족들이……”
  감정을 삼키며 주교는 말을 멈추었다.
  “어떤 금액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장이 이 가방에 든 내용물을 나누어서……남겨진 가족들에게……”  파슈의 짙은 눈동자가 오랫동안 주교를 응시했다.
  “아름다운 생각입니다. 주교님. 주교님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지켜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삐쩍 마른 프랑스 경찰관이 대저택 앞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었다. 파슈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BBC기자의 어조는 비난에 가까웠다.
  “콜레 부관, 지난밤 프랑스 경찰국의 반장은 무고한 두 사람에게 공공연히 살인죄를 씌웠습니다.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뵈가 경찰국에 책임을 물을 것 같습니까? 파슈 반장은 이 일로 파직되는 겁니까?”
  콜레 부관은 피곤해 보였지만 침착했다.
  “제 경험상 브쥐 파슈 반장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반장님과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반장님이 어떻게 수사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느뵈 요원과 랭던 씨를 범인 수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진짜 살인범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의 일부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콜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랭던 씨와 느뵈 요원이 이 작전에 의도적으로 참여한 것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파슈 반장님은 항상 창조적인 수사기법을 행해 오셨으니까요.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반장님이 범인을 체포했고, 랭던씨와 느뵈 요원은 모두 안전하며 무고하다는 것입니다.”
  아링가로사를 향해 돌아설 때, 파슈의 입술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좋은 사람이지요. 저 콜레라는 사람 말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링가로사를 내려다보던 파슈는 마침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이마를 문질렀다.
  “주교님, 제가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의논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주교님이 하늘에서 런던으로 방향을 튼 일 말입니다. 항로를 변경하기 위해 조종사에게 뇌물을 주셨더군요. 그렇게 하면 국제법을 일부 위반하는 일이 됩니다.”
  아링가로사는 풀이 죽었다.
  “난 아주 절박했습니다.”
  “압니다. 제 부하들이 조종사를 심문해 보니, 조종사도 그렇게 말했다더군요.”
  파슈는 주머니에 손을 뻗어 수공예 홀이 박힌 낯익은 자수정 반지를 꺼내놓았다.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다시 끼울때, 아링가로사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교는 손을 내밀어 파슈의 손을 쥐었다.
  “매우 친절하군요. 고맙소.”
  파슈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창가로 걸어가서 시내를 내다보았다. 파슈의 마음은 멀리 어딘가로 떠나 있었다. 그가 돌아섰을 때,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주교님, 여기에서 나가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전날 밤, 아링가로사는 간돌포성을 떠나며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내 길도 반장의 길처럼 불확실하다오.”
  “그렇군요. 저는 좀 일찍 은퇴할 것 같습니다.”
  아링가로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은 믿음도 경이로운 일을 해낼 수 있답니다. 반장.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말이오.”

104

  로슬린 예배당은 종종 암호로 이루어진 예배당이라 불린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남쪽으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슬린 예배당은 고대 미트라교 사원 터에 자리잡고 있다. 1446년 성전 기사단이 지은 예배당에는 유대교, 기독교,이집트,프리메이슨,그리고 이교도의 전통에서 비롯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상징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예배당의 지정학적 위치도 글래스턴베리를 지나는 남북의 자오선 위에 정확히 자리잡고 있다. 이 로즈 라인은 아서왕의 아발론 섬을 전통적으로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고, 영국의 신성한 기하학의 중앙 기둥으로 간주되었다. 로슬린 예배당의 이름은 신성한 로즈 라인에서 따온 것이었다.
  랭던과 소피가 렌트한 자동차를 절벽의 아래쪽에 있는 주차 구역에 세울 때, 로슬린 예배당의 낡은 첨탑은 긴 저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의 짧은 비행은 편안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 앞에 놓여 있을 것에 대한 기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쓸쓸하게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랭던은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꿈일 거야.’
  하지만 랭던은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가 이보다 구체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랭던은 소니에르의 ‘성배 지도’가 도표일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X표시가 된 그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시온의 마지막 비밀은 소니에르가 처음부터 그들에게 준 해답과 같은 형식이었다.
  ‘단순한 글귀’
  시의 네 줄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으로도 로슬린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시는 예배당의 유명한 건축학적인 특징을 여러 가지 언급했다.
  소니에르의 마지막 메시지가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랭던은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랭던에게 로슬린 예배당은 너무나 명백한 장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수백년 동안, 이 석조 예배당에 성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지질 침투 레이더로 예배당 밑에 존재하는 놀라운 구조물을 밝혀냈을 때, 최근 몇십년 간 이 소문은 속삭임에서 외침으로 변해 버렸다. 예배당 밑에 거대한 밀실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예배당 아래에는 깊은 지하실만 있을 뿐, 지하실로 이르는 출입구나 통로가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신비한 밀실에 도달하기 위해 기반암을 폭파시키자는 청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슬린의 신탁관리재단은 성역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공론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로슬린 재단이 숨기려는 것은 무엇일까?
  로슬린 예배당은 이제 미스터리 신봉자들에게는 성지 참배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좌표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자기장에 이끌린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는 지하실의 숨은 입구를 찾아 언덕을 조사하러 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이 땅을 돌아보고, 성배의 전설을 느끼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랭던은 로슬린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이 예배당이 현재 성배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묘사될 때마다 웃고 말았다. 하긴 오래 전에 성배가 여기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오래가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로슬린은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끌었고, 조만간 누군가는 지하실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진짜 성배학자들은 로슬린이 미끼라는 것에 동의한다. 시온 수도회가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가짜 종착지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시온의 쐐기돌이 제시하는 시는 곧장 이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랭던은 더 이상 잘난 체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심란한 질문이 그의 마음을 달리고 있었다.
  ‘소니에르는 왜 이렇게 명백한 위치를 안내하고자 그런 수고를 들여야만 했을까?’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논리적인 대답만이 가능했다.
  ‘여기에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로슬린에 관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로버트? 같이 갈래요?”
  차 밖으로 나온 소피가 랭던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피는 파슈 반장이 돌려준 장미목 상자를 들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크립텍스 두 개가 원래 상태 그대로 조립되어 쉬고 있었다. 파피루스 시는 가장 핵심에 안전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물론 깨진 식초병은 제거되고 말이다.
  긴 자갈길을 따라 올라가며, 랭던과 소피는 예배당의 유명한 서쪽 벽을 지나쳤다. 일반 방문객들은 이상하게 튀어나온 이 벽이 예배당이 완공되지 않은 증거라고 보았다. 진실은 더 흥미롭다는 것을 랭던은 기억했다.
  ‘솔로몬 신전의 서쪽 벽.’
  성전 기사단은 로슬린 예배당을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신전과 같은 건축 도안으로 디자인했다. 서쪽 벽. 좁은 직사각형의 성역, 그리고 성배가 들어 있던 지하 저장실. 원래 성전 기사단 아홉 명은 솔로몬 신전의 지하실에서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발굴했다. 성배가 원래 숨겨져 있던 장소와 일맥상통하는 성배 보관소를 지으려 했던 기사단의 아이디어는 위대하다는 것을 랭던은 인정했다.
  로슬린 예배당의 입구는 랭던의 기대보다 훨씬 수수했다. 작은 나무 문에는 두개의 경첩이 있고, 참나무로 된 간단한 표지판이 있었다.
  로슬린
  이 옛날 이름은 예배당이 앉아 있는 로즈 라인, 즉 자오선에서 유래한 것임을 랭던은 소피에게 설명했다. 성배 학자들은 로즈 라인이 장미의 혈통, 즉 마리아 막달레나의 조상 가계도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했다.
  문을 열자, 예배당 안의 따뜻한 공기가 훅 하며 빠져나왔다. 마치 고대의 건축물이 긴 하루를 끝내고 지친 한숨을 내쉬는듯했다. 예배당 입구의 아치는 장미 꽃잎으로 새겨져 있었다.
  ‘장미들. 여신의 자궁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며, 랭던은 한눈에 유명한 성역을 둘러보았다. 로슬린 예배당의 정교한 돌 세공에 관한 자료들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보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기호학의 천국.’
  랭던의 동료는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
  예배당의 모든 면에는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의 십자가, 유대교의 별, 프리메이슨의 봉인, 기사단의 십자가, 풍요의 뿔, 피라미드, 점성술의 기호, 식물,채소,별 그리고 장미. 유럽 전역에 교회를 세운 성전 기사단은 석공의 대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로슬린은 기사단의 사랑과 존경이 담긴 가장 고상한 노력의 결실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석공의 대가들이 새기지 않고 남겨둔 돌이란 없었다. 로슬린 예배당은 모든 믿음의 성지였던 것이다…… 모든 전통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과 여신에 대한 성지였다.
  예배당에는 오늘의 마지막 안내를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밖에 없었다. 청년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고, 예배당의 유명한 바닥선을 따라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예배당 내부의 주요 지점 여섯 군데를 연결한 길이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각 꼭지점을 연결하는 라인을 걸어가며, 끊임없이 발자국으로 예배당 바닥에 거대한 상징을 새겼다.
  (별그림 육각형 모양의 별그림 있음)
  랭던은 생각했다.
  ‘다윗의 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솔로몬의 봉인으로도 알려진 이 육각형은 한때 별을 연구하는 사제들의 은밀한 상징이었다. 그후에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솔로몬이 이 상징을 채택했다.
  청년이 들어오는 랭던과 소피를 바라보았다. 예배당의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청년은 명랑한 미소를 건네며 두 사람에게 마음껏 둘러보라는 몸짓을 보냈다.
  랭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예배당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소피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왜 그래요?”
  랭던이 물었다.
  소피는 예배당을 둘러보았다.
  “여기…… 와본적이 있는 것 같아요.”
  랭던은 놀랐다.
  “하지만 로슬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소피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예배당을 살폈다.
  “그래요……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데리고 왔던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익숙한 느낌이에요.”
  예배당을 살피던 소피가 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소피는 예배당 앞쪽을 가리켰다.
  “그래요. 저 두 개의 기둥…… 본 적이 있어요.”
  랭던은 예배당 저편 끝에 있는 정교하게 조각된 한 쌍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레이스 모양으로 안이 비치게 세공한 기둥들은 서쪽 창을 통해 들어온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통 제단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기둥들은 이상하게 맺어진 한 쌍이었다. 왼쪽에 있는 기둥에는 수직선이 간단하게 그어져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기둥은 화려한 꽃무늬들이 나선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소피는 이미 기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랭던은 서둘러 그녀를 쫓아갔다. 기둥에 다다랐을 때, 소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확실해요. 이것들을 봤었어요!”
  “당신이 이 기둥을 보았다는 걸 의심하지는 않소. 하지만 이런 기둥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소피가 돌아섰다.
  “무슨 뜻이에요?”
  “이런 기둥은 역사적인 건축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오. 복제품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오.”
  “로슬린의 복제품?”
  소피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아니, 기둥의 복제품. 좀 전에 내가 로슬린 예배당 자체가 솔로몬 신전의 복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오? 이 두 기둥은 정확하게 솔로몬 신전의 머리에 세워져 있던 두 기둥의 복제품이오.”
  랭던은 왼쪽에 있는 기둥을 가리켰다.
  “저건 ‘보아즈’라는 거요. 또는 석공의 기둥이라고도하지. 오른쪽에 있는 것은 ‘제이신’이라고 불러요. 도제의 기둥이라고도 하고, 사실, 세상의 모든 프리메이슨 교회에는 저런 기둥들이 두개 있어요.”
  랭던은 이미 성전 기사단과 현대 프리메이슨 비밀 단체들과의 강한 역사적 유대를 소피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현대 프리메이슨 비밀조직들의 직위는 도제 프리메이슨, 동료 프리메이슨, 마스터 메이슨으로 그 명칭은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피의 할아버지의 마지막 구절은 마스터 메이슨을 직접 언급하고 있었다. 마스터 메이슨은 그들의 예술적인 세공 기술로 로슬린을 꾸민 사람들이었다. 시는 또한 로슬린의 중앙 천장에 대해서도 적고 있는데, 로슬린의 천장은 별과 행성들로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기둥을 쳐다보며 소피가 말했다.
  “난 한 번도 프리메이슨의 사원에 가보지 않았어요. 분명 여기에서 본게 확실해요.”
  소피는 기억을 되새길 뭔가를 찾는 것처럼 예배당으로 돌아섰다.
  관광객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젊은 안내원은 명랑한 미소를 띠며 예배당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걸어왔다. 안내원은 20대 후반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스코틀랜드 사투리에 딸기나무 빛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이제 예배당의 문을 닫으려고 합니다. 뭔가를 찾으시는 것 같은데 도와드릴까요?”
  ‘성배는 어떻습니까?’
  랭던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소피가 불쑥 말했다.
  “기호, 여기 기호가 있어요!”
  청년은 소피의 열성에 즐거운 표정이었다.
  “예, 거기 있습니다.”
  소피는 오른쪽 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것은 천장에 있었어요. 저 위 어딘가…… 저기.”
  청년이 웃었다.
  “로슬린에 처음 오신 분이 아니군요.”
  ‘기호.’
  랭던은 전설의 일부를 잊고 있었다. 로슬린의 수많은 미스터리들 가운데 수백 개의 돌덩어리들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며 기묘한 다면 표면을 만드는 둥근 아치형 천장이 있었다. 각각의 덩어리들에는 하나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상징들은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새겨진 것 같지만, 헤아릴 수 없는 비율로 암호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천장의 기호들이 예배당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타내고 있다고 믿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성배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암호 해독가들은 수백년 동안 그 의미를 풀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오늘날까지 로슬린 재단은 은밀한 의미를 밝힌 누구에게나 보상을 해주고 있었지만, 기호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걸 보여주게 되어……”
  안내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의 첫째 암호.’
  암호가 새겨진 아치형 길을 따라 홀로 걸어가며 소피는 생각했다. 장미목 상자를 랭던에게 건네주고, 잠시나마 성배와 시온 수도회, 며칠 간의 수수께끼들에 대해 잊을 수 있었다. 천장 아래에 이르러 머리 위에 있는 상징들을 보았을 때, 옛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소피는 여기를 처음 찾아왔던 때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예기치 못한 슬픈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소피는 어린아이였다…… 1년이나 그 전쯤, 소피의 가족들은 죽었다. 짧은 휴가를 얻은 할아버지가 그녀를 스코틀랜드에 데리고 왔다. 그들은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로슬린 예배당을 보러 왔던 것이다.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예배당은 닫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안에 남아 있었다.
  “집에 가요, 할아버지.”
  피곤함을 느끼며 소피는 애원했다.
  “곧 갈 거야, 우리 귀염둥이. 곧 떠날 거란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남겨두고 있단다. 차에 가서 기다리련?”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어른들이 하는 볼일이에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오마.”
  “아치형 길에 있는 암호를 다시 한 번 봐도 돼요? 그거 재미있어요.”
  “잘 모르겠구나. 할아비는 밖으로 나가야만 하거든. 여기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겠니?”
  소피는 발끈하며 말했다.
  “물론 안 무서워요! 아직 어둡지도 않은 걸요!”
  “잘됐구나, 그럼.”
  할아버지는 소피를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정교한 아치 길로 데려갔다.
  소피는 즉시 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는 퍼즐 조각들의 콜라주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이 암호를 깨버릴 거예요!”
  “그럼 경주하자꾸나.”
  할아버지는 몸을 구부려 소피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옆문으로 걸어갔다.
  “할아비는 요 밖에 있을 거다. 문을 열어 둘 테니. 만일 내가 필요하면 부르거라.”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저녁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소피는 바닥에 누워 암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졸기 시작했다. 얼마 후, 상징들이 뒤죽박죽 섞이더니 모두 사라져 버렸다.
  소피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바닥이 차가웠다.  “할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소피는 일어나서 몸을 털었다. 옆문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밤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으로 걸어나간 소피는 할아버지가 교회 바로 뒤에 있는 돌집의 현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망이 쳐진 문 뒤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몸짓을 했다. 그런 뒤에 할아버지는 천천히 안에 있는 사람과 마지막 몇 마디를 나누고 망이 쳐진 문 안으로 키스를 보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피에게로 돌아왔다.
  “왜 울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소피를 들어올려 꼭 안았다.
  “오, 소피, 너와 나는 올해 많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구나. 너무 힘든 일이야.”
  소피는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고와 엄마, 아빠, 할머니, 어린 남동생에게 한 작별인사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왔어요?”
  “내가 무척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고 왔단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할 것 같아 두렵구나.”
  깊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안내원과 함께 서서, 랭던은 예배당의 벽들을 살펴보았다. 막다른 골목이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피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암호를 보고 있었다. 장미목 상자는 랭던에게 맡겨둔 채였다. 상자 안에 든 성배 지도는 이제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니에르의 시는 분명히 로슬린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랭던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에는 ‘칼날과 잔’이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랭던은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그녀의 입구를 지키는 칼날과 잔.
  랭던은 다시금 이 수수께끼의 일부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만, 이 상자……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랭던의 손에 있는 장미목 상자를 보며 안내원이 말했다.
  랭던은 지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주 긴 얘기라서.”
  다시 상자에 눈길을 보내며, 청년은 망설였다.
  “이상한 일이군요. 제 할머니도 이것과 똑같은 상자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보석 상자인데, 윤기 나는 장미목에 똑같이 상감된 장미 문양, 심지어 경첩의 모양까지 같아요.”
  랭던은 청년이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상자는 수도회의 쐐기돌을 위해 고객 주문형으로 제작된 것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상자였다.
  “두 상자가 매우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옆문이 시끄럽게 닫혔다. 아무 말도 없이 예배당을 나간 소피는 근처에 있는 돌집을향해 서성거리고 있었다. 랭던의 소피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그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온 이래, 소피는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랭던은 안내원에게 돌아섰다.
  “저 집이 무슨 집인지 아십니까?”
  소피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집은 교구 사제관입니다. 교회 관장이 살고 있지요. 관장은 로슬린 재단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청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 할머니이시기도 하고요.”
  “당신의 할머님이 로슬린 재단의 대표란 말씀입니까?”
  청년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할머니와 사제관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지키고 관광 안내하는 일을 돕고 있지요. 저는 제 생애를 온통 여기서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 저 집에서 저를 키우셨지요.”
  소피가 걱정된 랭던은 예배당을 가로질러서 문으로 다가갔다. 반쯤 걸어갔을 때, 랭던은 걸음을 멈췄다. 젊은이가 얘기한 뭔가가 마음에 남았다.
  ‘할머니께서 저를 키우셨지요.’
  랭던은 절벽에 있는 소피를 내다보았다. 그런 뒤에 손에 든 장미목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랭던은 천천히 청년에게로 돌아섰다.
  “할머님이 이런 상자를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까?”
  “거의 똑같아요.”
  “할머님은 상자를 어디에서 구하셨답니까?”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아기일 때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시지요. 할아버지는 손으로 뭐든지 만들어 내는 천재라고 말하곤 하세요. 별의별 것을 다 만드셨답니다.”
  랭던은 상상하기 어려운 거미줄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가 당신을 키웠다고 했지요? 부모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청년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고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분들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도 함께요.”
  랭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동차 사고로?”
  청년의 올리브 빛 눈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그렇습니다. 차 사고로요. 그날 가족이 모두 죽었습니다.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청년은 망설였다.
  “당신의 누나.”
  벼랑 위, 돌집은 소피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제 밤이 내리고 있었다. 따뜻하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집이었다. 빵 냄새가 열린 망사 문을 통해 퍼져 나오고, 창문에는 황금색 불이 비쳤다. 가까이 가다간 소피는 집 안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망사 문을 통해, 소피는 나이든 여인이 복도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등은 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소피는 여인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길고 우아한 은발 머리는 예기치 않은 기억을 몰고 왔다. 안으로 이끌리며, 소피는 현관 계단으로 올라섰다. 여인은 한 남자의 사진이 든 액자를 꼭 쥐고, 사랑이 담긴 슬픈 손가락으로 사진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소피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여인은 지난밤,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슬픈 뉴스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소피의 발 아래에서 발판이 삐걱거리자, 여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슬픈 눈동자가 소피의 눈과 마주쳤다. 소피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내려 놓고 망사 문으로 다가오는 동안, 여인의 뜨거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여자가 얇은 망사를 통해 서로 바라볼 때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났다. 천천히 파도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여인의 얼굴에 의혹에서…… 불신으로…… 희망으로……그리고 마침내 기쁨으로 변해갔다.
  문을 밀고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 벼락을 맞은 듯한 소피의 얼굴을 감쌌다.
  “오, 우리 아이…… 이걸 봐!”
  소피는 여인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조차 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
  여인이 흐느끼며 소피의 이마에 키스했다.
  소피의 말은 속삭임으로 막혀 버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어, 당신이……”
  여인은 소피의 어깨에 부드러운 손을 얹으며 낯익은 눈동자로 소피를 응시했다.
  “안다. 네 할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하게 강요받았단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였단다. 프린세스.”
  소피는 여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즉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프린세스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로슬린의 고대 돌들 속에서 메아리치다가, 땅속으로 자리를 잡으며 알려지지 않은 지하실 안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여인은 소피의 어깨를 팔로 안았다. 눈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네 할아버지는 너에게 모든 것을 얘기하고 싶어했단다. 하지만 너희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어려웠지. 그는 노력했어. 설명할 것이 아주 많구나. 그래, 설명해야할 것이 아주 많아. 더 이상의 비밀은 없다. 프린세스. 가족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온 거야.”
  여인은 다시 한 번 소피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소피와 그녀의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껴안고 현관 계단에 앉아 있을 때, 안내원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청년의 눈은 희망과 불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누나?”
  눈물을 흘리며, 소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소피는 청년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껴안았을 때, 청년의 정맥에서 힘차게 흐르는 핏줄의 힘을 느꼈다…… 그녀가 이해하는, 그들이 공유하는 핏줄이었다.
  랭던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들과 자리를 함께했을 때, 소피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기는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낯선 곳에서 잘 알지 못하는 세 사람과 함께 앉아, 소피는 마침내 집에 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105

  로슬린에 밤이 내렸다.
  로버트 랭던은 사제관의 현관에 홀로 서서, 뒤에 있는 망사 문을 통해 들리는 웃음소리와 화합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머그잔에 담긴 브라질 커피가 그동안 쌓인 피로를 일시적으로나마 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한순간이라는 것을 랭던은 알고 있었다. 몸에 가득한 피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빠져나왔군요.”
  랭던은 돌아섰다. 은발을 아른아른하게 빛내며 소피의 할머니가 나타났다. 적어도 지난 28년 동안 그녀의 이름은 마리 쇼벨이었다.
  랭던은 피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창문을 통해서, 소피가 남동생과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족들에게 함께할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가 다가와 랭던 옆에 섰다.
  “랭던 씨, 처음 자크의 살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소피의 안전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오늘 밤 내 집 문 앞에 서있는 소피를 본 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답니다.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군요.”
  랭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랭던은 소피와 그녀의 할머니에게 서로 조용히 얘기할 시간을 주고자 했지만, 마리는 랭던도 함께 자리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내 남편은 분명히 당신을 신뢰했군요. 랭던 씨. 그렇다면 나도 그렇답니다.’
  마리가 세상을 떠난 소피의 부모 애기를 하는 동안, 랭던은 소피 곁에 서서 경탄하는 자세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소피의 부모는 메로빙거 가 사람들이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후손들이다. 신변 보호를 위해 소피의 부모와 조상들은 플랑타르나 생클레르와 같은 가족 성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들의 아이들은 바로 살아 있는 왕가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시온에 의해서 사려 깊게 보호를 받았다. 소피의 부모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때도 누가 그랬는지 밝힐 수가 없었다. 시온은 왕가의 혈통에 대한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다.
  고통에 젖은 목소리로 마리는 설명했다.
  “네 할아버지와 나는 전화를 받는 순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단다. 네 부모의 차가 강에서 발견되었다는 전화였어.”
  마리는 눈물을 훔쳤다.
  “우리 여섯은, 물론 너희들을 포함해서, 그날 밤 차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계획을 바꾸었단다. 그래서 네 부모만 가기로 했지. 사고 소식을 듣고, 자크와 나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단다…… 그 일이 진짜 사고인지.”
  마리는 소피를 바라보았다.
  “우린 손자들을 보호해야 했어. 그래서 최선의 방법 대로 행동한 거란다. 자크는 경찰에 네 동생과 내가 그 차에 함께 있었다고 진술했지…… 우리 두 사람의 시체는 물살에 떠내려간 것으로 얘기되었지. 그런 뒤에 네 동생과 나는 시온 수도회 밑으로 숨었단다. 자크는 유명한 사람이어서 나처럼 사라지는 사치를 누릴 수가 없었지. 맏이인 네가 파리에 남아, 자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키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시온의 심장과 가까운 곳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마리의 목소리는 속삭임으로 변했다.
  “가족을 떼어놓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단다. 자크와 나는 아주 가끔 서로 볼 수 있었어. 항상 은밀한 주선하에서였지…… 시온의 보호 아래서 말이다. 항상 조직의 신실한 어떤 의식들에서였어.”
  랭던은 얘기가 좀더 깊어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랭던은 로슬린 예배당의 첨탑을 바라보며, 로슬린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인 빈 지하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성배가 정말로 여기 로슬린에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소니에르가 시에서 언급한 칼날과 잔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이걸 가져가겠어요.”
  랭던의 손을 가리키며 마리가 말했다.
  “아, 고맙습니다.”
  랭던은 빈 커피잔을 내밀었다.
  마리가 랭던을 응시했다.
  “난 랭던 씨의 다른 손에 든 것을 말한 겁니다.”
  랭던은 아래를 보고, 자신이 소니에르의 파피루스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놓쳤을지도 모를 뭔가를 찾아낼 희망으로 랭던이 다시 크립텍스에서 꺼낸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죄송합니다.”
  종이를 가져가며 마리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파리 은행에 있는 한 남자를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이 장미목 상자가 돌아오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앙드레 베르네는 자크의 절친한 친구랍니다. 자크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지요. 이 상자를 돌봐 달라는 자크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앙드레는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
  ‘나를 쏘는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자신이 그 남자의 코를 부러뜨렸을 것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은 채 랭던은 지난 일을 회상했다.파리를 생각하자, 전날 밤에 살해 당한 세 명의 집사들이 떠올랐다.
  “그럼 시온은? 시온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퀴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랭던씨. 조직은 수백 년 동안 많은 일들을 견뎌 왔지요. 이번 일도 이겨낼 겁니다. 항상 조직을 새로이 건설하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랭던은 내내 소피의 할머니가 시온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과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전통적으로 집사들은 남자, 즉 보초들이었다. 하지만 시온에서 여성은 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랭던은 레이 티빙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았다.
  “말일이 다가왔을 때, 교회가 소니에르 씨에게 상그리엘 문서를 공개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습니까?”
  “물론, 아니예요. 말일은 편집병에 걸린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랍니다. 성배의 공개 날짜를 규정한 시온의 교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사실, 시온은 성배가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유지해 왔답니다.”
  “결코?”
  랭던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봉사하는 수수께끼이자 경탄이지요. 성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배의 아름다움은 우아한 그 천성에 존재하는 거에요.”
  마리 쇼벨은 로슬린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성배는 영생을 가져다주는 잔이지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문서와 비밀 역사를 찾아내는 원정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배는 단순히 위대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를 고무시키는, 얻을 수 없는 빛나는 보물 말입니다.”
  “하지만 상그리엘 문서들이 숨겨진 채로 있다면,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럴까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막달레나에 관한 이야기는 예술과 음악, 책들을 통해 얘기되고 있어요. 매일 그렇지요. 추는 흔들립니다. 우린 역사의 위험을 감지하고 있어요…… 우리의 파괴적인 길도. 우리는 신성한 여성을 다시 보존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답니다.”
  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신성한 여성의 상징에 관한 글을 썼다지요. 그렇지 않나요?”
  “맞습니다.”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 원고를 완성하세요. 랭던 씨. 막달레나의 노래를 부르세요. 세상에는 현대적인 음유시인이 필요하니까.”
  랭던은 마리의 말이 담고 있는 무게를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하늘 저편에서는 달이 나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로슬린으로 시선을 돌리며, 랭던은 마리의 진실을 알아내고 싶은 소년 같은 욕구를 느꼈다.
  ‘묻지 말자. 지금은 때가 아니다.’
  랭던은 자신에게 말했다. 랭던은 마리의 손에 있는 파피루스를 슬쩍 바라보다가 로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어보세요. 랭던씨. 당신은 들을 권리가 있어요.”
  즐거운 얼굴로 마리가 말했다.
  랭던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성배가 여기 로슬린에 있는지 알고 싶은 거겠지요.”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마리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사람들은 성배가 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요? 당신은 왜 성배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요?”
  말하는 내내 마리는 웃고 있었다.
  랭던은 마리의 손에 들린 파피루스를 가리켰다.
  “소니에르 씨의 시는 구체적으로 로슬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칼날과 잔이 성배를 지켜보고 있다는 부분만 빼면 말입니다. 예배당에서 칼날과 잔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칼날과 잔?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나요?”
  마리가 물었다.
  랭던은 마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랭던은 재빨리 상징들을 그리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리의 얼굴에 희미하게 기억해 내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래요. 물론이에요. 칼날은 남성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는 거지요. 이렇게 그리는게 맞죠, 아닌가요?”
  마리는 검지를 이용해 손바닥에 모양을 그렸다.
  (삼각형)
  “맞습니다.”
  랭던이 말했다. 마리는 막힌 형태의 덜 보편적인 칼날의 상징을 그렸다. 하지만 랭던은 양쪽 모두의 상징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꾸로 하면, 여성을 나타내는 잔이 되지요.”
  마리는 손바닥에 다시 그렸다.
  (역삼각형)
  “정확합니다.”
  “로슬린 예배당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백 개의 상징들 중에서 이 두 모양이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가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것들을 보여주면, 잠을 좀 자겠어요?”
  랭던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리 쇼벨은 계단을 내려가 예배당으로 향했다. 랭던은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성소로 들어서며 마리는 불을 켜고 예배당 바닥의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랭던 씨. 칼날과 잔.”
  랭던은 닳고 닳은 돌 바닥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한숨을 내쉰 마리는 발걸음에 닳은 예배당 바닥을 걷기 시작했다. 초저녁에 관광객들이 걷던 바로 그 길이었다. 랭던의 눈이 거대한 상징을 파악한 순간, 그는 아찔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의 별이……”
  마음에 떠오른 경이로운 생각에 랭던은 말을 멈추고 말았다.
  (육각별)
  ‘칼날과 잔’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다.’
  ‘다윗의 별…… 남자와 여자의 완벽한 결합…… 솔로몬의 봉인…… 남신과 여신, 야훼와 세키나가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가장 신성한 곳을 나타내는 표식.’
  랭던은 다음 말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는 여기 로슬린을 가리키는 겁니다. 완전하게,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그래요.”
  그 암시가 랭던을 떨게 만들었다.
  “그럼 성배는 우리 밑에 있는 지하실에 있는 겁니까?”
  마리는 웃었다.
  “오직 정신적인 측면에서만 그래요. 수도회의 가장 오래된 임무 중 하나는 성배를 그녀의 고국인 프랑스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어요. 그녀가 영원히 안식을 취할수 있는 곳이죠. 수백년 동안, 그녀는 안전을 위해 이리저리 끌려다녔어요. 가장 불경스러운 짓이었죠. 자크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 자크의 책임은 그녀를 프랑스로 돌려보내서 여왕에 걸맞은 안식처를 짓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했습니까?”
  마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랭던 씨, 로슬린 재단의 관장으로서 오늘 밤 당신이 내게 해준 일을 고려해 보면, 성배가 더 이상 여기 없다고 확실히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랭던은 좀더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쐐기돌은 성배가 지금 숨겨져 있는 장소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쐐기돌의 지도는 왜 로슬린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까?”
  “어쩌면 랭던 씨가 그 의미를 잘못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기억하세요. 성배는 겉보기와 다를 수 있답니다. 죽은 내 남편이 그랬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이보다 명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칼날과 잔으로 표식을 이룬 지하실 위에 서 있습니다. 프리메이슨 마스터의 예술로 둘러싸인 별들로 가득찬 천장 밑에 말입니다. 모든 것이 로슬린을 말하고 있어요.”
  “그래요? 이 수수께끼 같은 시를 한 번 봅시다.”
  마리는 파피루스를 펼쳐서 차분하게 큰 목소리로 시를 읽었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그녀의 입구를 지키는 칼날과 잔.
  대가들이 사랑하는 예술로 치장한 그녀가 누워 있노라.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마침내 그녀는 안식을 취하노라.
  시를 다 읽고 난 마리는 뭔가를 안 듯한 미소가 입술을 스치고 지나갈 때까지 몇 초간 그대로 있었다.
  “아, 자크!”
  랭던은 기대에 찬 눈으로 마리를 지켜보았다.
  “이 시를 이해하십니까?”
  “랭던씨, 예배당 바닥에서 목격한 대로, 간단한 것을 보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답니다.”
  랭던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자크 소니에르에 관한 모든 것은 이중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랭던은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마리는 피곤한 하품을 했다.
  “랭던 씨, 당신에게 실토해야만 할 것 같군요. 난 성배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관여해 본 적이 없답니다. 물론 난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과 결혼했지요…… 그리고 내 여성적 직관은 강하답니다.”
  랭던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마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들을 겪었는데 아무 소득 없이 로슬린을 떠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이 찾는 것을 결국 발견하게 되리라는 강한 예감이 드는군요. 어느 날 문득 떠오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비밀을 지킬 것이라고 난 믿어요.”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문가에 누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소피가 들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여기 있었군요.”
  문에 서 있는 소피에게로 걸어가며 마리가 대답했다.
  “곧 나가려던 참이었단다. 잘 자거라. 프린세스. 너무 늦게까지 랭던 씨를 밖에 잡아두지 마라.”
  마리는 소피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랭던과 소피는 소피의 할머니가 사제관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피가 랭던에게 돌아섰을 때,, 그녀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정확히 내가 기대하던 결말은 아니네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그렇소.’
  랭던은 소피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밤 그녀가 들은 소식은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괜찮소?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주 많았는데.”
  소피는 조용히 웃었다.
  “내게 가족이 있어요. 가족에서부터 시작할래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오늘밤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있을래요? 적어도 며칠 동안만이라도?”
  소피가 물었다.
  더 이상 바라지 않으려고 랭던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할 거요. 소피, 난 아침에 파리로 돌아가리다.”
  소피는 실망한 듯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애기를 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소피가 랭던의 손을 잡고 예배당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절벽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들 앞에는 흩어진 구름들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가득한 스코틀랜드의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서서히 덮쳐오는 피로와 싸우며 말없이 서 있었다.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쪽에 다른 어느 별들보다 더 밝게 빛나는 별이 있었다. 랭던은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샛별, 비너스였다. 꾸준히 빛을 밝히는 고대의 여신.
  밤은 점점 차가워지고, 서늘한 바람이 저지대에서부터 불어 올라왔다. 잠시동안 랭던은 소피를 바라보았다. 소피의 눈은 감겨 있고, 입술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어 편안해 보였다. 랭던은 자신의 눈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못해 랭던은 소피의 손을 쥐었다.
  “소피?”
  서서히 눈을 뜨면서, 소피가 랭던에게 돌아섰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다. 소피는 랭던에게 졸린 미소를 던졌다.
  “안녕.”
  그녀 없이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랭던은 갑자기 슬픔이 몰려왔다.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떠날지도 모르겠소. 미안하오, 난 그다지 잘하지……”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아 랭던은 말을 멈췄다.
  소피가 부드러운 손으로 랭던의 얼굴을 감쌌다. 그런 뒤 몸을 앞으로 기울여, 랭던의 볼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언제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랭던은 소피의 눈동자 속에서 잠시 길을 잃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언제?”
  자신이 같은 생각을 얼마나 하고 있었는지 소피가 알까 궁금해하며 랭던은 뜸을 들였다.
  “글쎄, 사실 다음 달 피렌체에서 열리는 학회에서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소. 거기에서 일주일 정도 있을 예정이오.”
  “그 말은 초대인가요?”
  “우린 꽤 괜찮은 숙소에 묵을 거요. 주최측에서 브루넬레스키에 방을 잡아주기로 했거든.”
  소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군요. 랭던씨.”
  그 말이 주는 의미에 랭던은 주춤했다.
  “내 뜻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피렌체에서 당신을 만나는 거예요. 로버트,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박물관도 안 되고, 교회도 안 되고, 무덤도 안 되고, 예술과 관련된 장소나 유적지도 안 돼요.”
  그녀의 어조는 사뭇 심각했다.
  “피렌체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그럼 거기에서 할 일이 없을텐데.”
  소피는 몸을 내밀며 랭던에게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고는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포개졌다. 몸이 서로 떨어졌을 때, 소피의 눈에는 약속으로 가득했다.
  랭던은 가까스로 말했다.
  “좋아요. 그때는 데이트를 하는 거요.”

에필로그

  로버트 랭던은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꿈을 꾸었다. 침대 옆에 있는 목욕 가운에는 ‘리츠 파리 호텔’ 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블라인드를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황혼 무렵인가, 아니면 새벽녘인가?’
  랭던은 의아했다.
  랭던의 몸은 따뜻하고 아주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랭던은 지난 이틀 동안 대부분을 잠을 자며 보냈다. 천천히 일어나 앉은 랭던은 무엇이 자기를 깨웠는지 깨달았다…… 이상한 생각. 랭던은 며칠 동안 막대한 양의 정보를 정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순간, 전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뭔가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을까?’
  랭던은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대리석 욕조로 걸어갔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서, 강력한 제트 마사지가 어깨를 두드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랭던을 사로잡고 있었다.
  ‘불가능해.’
  20분 후, 랭던은 리츠 파리 호텔을 빠져나와 방돔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밤이 찾아들고 있었다. 며칠 간의 숙면은 랭던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했지만…… 그의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서 카페오레 한 잔을 마실 계획이었지만, 랭던의 다리는 그를 호텔 문으로 이끌더니 곧장 떠들썩한 파리의 밤거리로 내몰았다.
  프티 샹 가의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랭던은 흥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남쪽으로 돌아 리슐리외 거리를 향했다. 팔레 로얄의 웅장한 정원에서 피어난 재스민 향 덕택에 공기가 달콤했다.
  랭던은 자신이 찾는 것이 보일 때까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윤기 흐르는 흑색 대리석으로 값비싸게 치장한 유명한 호화 아케이드 였다. 그 위를 지나며 랭던은 발 아래의 표면을 살폈다. 몇 초 만에 랭던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개의 청동 메달들이 완벽하게 일직선을 그리며 땅에 박혀 있었다. 각각의 메달들은 13센티미터 정도의 직경에 N과 S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북쪽(N)과 남쪽(S)’
  원형 메달로 쭉 이어진 선을 눈으로 좇으며 랭던은 남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취를 따라 다시 움직였다. 랭던은 걸어가면서 연석을 살폈다. 프랑스 극장의 코너를 돌아 길을 건널 때, 또 다른 청동 메달이 그의 발 밑으로 지나갔다.
  ‘그래!’
  랭던도 몇 년 전에 안 것이지만, 파리의 거리들은 135개의 이런 청동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보도나 호텔의 안뜰, 도로들에 박혀서 파리 시를 가로지르는 남북의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랭던은 이 선을 따라 사크레쾨르에서부터 센 강을 지나 북쪽으로 마침내 프랑스 천문대까지 가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랭던은 이 선이 갖는 중요성을 알아냈다.
  ‘지구의 본원적인 자오선.’
  ‘경도 0에 해당하는 세상의 첫 라인.’
  ‘파리의 고대 로즈 라인.’
  리볼리 가를 바삐 지나며, 랭던은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 블록도 남지 않았다.
  고대 로슬린 아래에 성배는 기다리노라.
  이 구절이 파도처럼 다가왔다. 로슬린을 고대적으로 서술한 소니에르…… 칼날과 잔…… 대가의 예술로 치장한 무덤.
  ‘그게 소니에르가 나와 얘기하려고 했던 이유일까? 뜻하지 않게 내가 진실을 추측했던 것일까?’
  랭던은 목적지를 향해 그를 잡아당기고, 그를 안내하고, 그의 발 밑에 있는 로즈 라인을 느끼며 걸음을 서둘렀다. 리슐리외의 긴 터널로 들어설 때는 기대감으로 목 뒤의 털이 곤두섰다. 이 터널 끝에는 파리의 기념 건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작품이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리의 기념물들은 1980년대, 스핑크스라 불렸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기획하고 의뢰했다. 비밀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미테랑이 파리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은 며칠 전 랭던이 방문한 장소였다.
  ‘또 다른 일생.’
  충만한 에너지로 통로를 벗어나 낯익은 안뜰로 들어서며 랭던은 걸음을 멈췄다. 숨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들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빛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루브르 피라미드.’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잠깐 동안 정면의 피라미드를 찬양했다. 랭던이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른쪽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돌아선 랭던은 그의 발이 다시 보이지 않는 고대의 로즈라인을 따라 걷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로즈 라인은 안뜰을 가로질러 루브르의 캐러젤 쪽으로 랭던을 이끌었다. 루브르의 캐러젤은 거대한 원형 풀밭인데, 잘 다듬어진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한때 파리의 원시 자연숭배 축제가 열렸던 장소이기도 했다. 다산과 여신을 축복하는 즐거운 의식.
  관목들 위를 넘어 풀이 무성한 안쪽으로 발을 옮길 때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텅 빈 지면에는 파리에서 가장 이상한 기념물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가 캐러젤 중앙에서 갈라진 수정 조각처럼 땅속으로 푹 처박혀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밤, 루브르의 지하를 지날 때 보았던 거꾸로 뒤집힌 피라미드였다.
  ‘역 피라미드’
  전율을 느끼며, 랭던은 가장자리로 걸어가 역 피라미드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루브르 박물관의 지하 건물 내부가 여기저기로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랭던의 눈은 피라미드 바로 아래에 놓여 있는 물체에 가서 멈췄다. 아래 보이는 건물의 바닥에는 조그마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 랭던이 원고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구조물이었다.
  생각할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긴장감으로 그의 정신이 깨어나는 듯했다. 눈을 들어 다시 루브르를 바라보며, 랭던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박물관의 거대한 날개를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치장한 복도들.
  다 빈치…… 보티첼리……
  내가 사랑하는 예술로 치장한 그녀가 누워 있노라.
  경이로움을 가득 안은 채 랭던은 유리를 통해 보이는 아래의 조그마한 구조물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저기로 내려가서 봐야만 한다!’
  캐러젤 풀밭을 빠져나온 랭던은 급히 안뜰을 가로질러, 루브르 박물관의 입구인 피라미드 건물로 향했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객들이 박물관에서 서서히 나오고 있었다.
  회전문을 밀고, 랭던은 피라미드 내부의 곡선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의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 루브르의 안뜰, 역 피라미드가 있는 뒤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 끝은 커다란 방이었다. 랭던 바로 앞에는 위에서 내려온 역 피라미드가 빛을 내고 있었다. 숨을 멎게 하는 V 형태의 유리.
  ‘잔.’
  역 피라미드의 꼭지점은 바닥에서 불과 2미터 정도 떨어진 채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조그마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고작 1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피라미드 모형이었다. 모든 것이 거대한 이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작은 규모로 지어진 구조물이 이 모형 피라미드 였다.
  자신의 원고에서 랭던은 여신 예술과 관련된 루브르 박물관의 정성스러운 수집품들을 논하면서, 이 소박한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형 구조물 자체가 마치 빙산의 일각인 것처럼 바닥에서 튀어나와 있다. 그 밑에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지하실이 밀실처럼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적막한 중간층의 부드러운 불빛을 받아, 두 개의 피라미드는 서로 꼭지점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피라미드의 몸통은 완벽하게 일직선을 이루고 있고, 그 끝은 서로 거의 닿을 둣이 보였다.
  위에는 잔, 아래에는 칼날.
  그녀의 입구를 지키는 칼날과 잔.
  랭던은 마리 쇼벨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날 문득 떠오를 거예요.’
  랭던은 대가들의 작품에 둘러싸인 고대 로즈 라인 밑에 서 있었다.
  ‘소니에르가 지켜보기에 더 나은 장소가 어디이겠는가?’
  마침내 랭던은 그랜드 마스터의 시에 담긴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랭던은 눈을 들어 별로 가득한 빛나는 밤 하늘을 유리를 통해 응시했다.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마침내 그녀는 안식을 취하노라.
  어둠에서 영혼들의 중얼거림처럼 잊혀진 말들이 울려퍼졌다.
  ‘성배를 찾는 원정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뼈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한 원정이다. 추방당한 자의 발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기 위한 여행.’
  갑자기 외경의 마음이 북받쳐, 로버트 랭던은 무릎을 꿇었다.
  순간, 랭던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땅의 틈새로부터 속삭이며 올라오는 세월의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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