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Angel Master

Spread the wing for new starting.

Archive for February, 2008

제국주의

Posted by Digital Angel Master on February 27, 2008

출처 : http://www.aspire7.net/english/reference-1-2-a.html

A. 제국주의의 의미와 역사

1. 제국주의의 의미

제국주의는 지난 4~5세기 동안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입니다.
제국주의로 인해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남 아메리카 등이 유럽의 식민화가 되었고, 세계 각국의 전쟁을 유발했으며, 유럽에서 두차례의 세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문명이 황폐해지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월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소를 이용하여 약소국의 토지, 노동력, 원자재, 농산물, 시장을 수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에서 농산물 수탈을 경험한 바 있고,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은 점령지에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고, 포로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통해 노동력 착취를 하였습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인 고대로부터 있어 왔는데 주로 피정복민을 노예화하고, 세금이나 공물 등을 바치게 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약소국을 선점하려는 제국주의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이후에는 대기업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기계, 기술, 투자, 차관의 형태로 자본수출이 이루어졌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생산기지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에 팽창주의적인 동인을 가지고 있는데, 자국에서 투자한만큼 기대한 이익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이익을 좇아 자본과 기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로 옮겨다닙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기 때문에 저렴한 생산기지와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은 정부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게됩니다.
그 결과 타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전쟁(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적국(중국)과도 수교·협력을 맺게 되며, 수 많은 비밀 공작이 수행됩니다.

현재 400개의 대기업들이 비 공산권의 세계 자본의 80%를 소유하고 있고, 제3세계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서방 기업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천연자원의 75%를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후진국의 낮은 임금과 노동과 환경에 대한 낮은 규제 덕분에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국 내 이익은 줄어들고 타국에서의 이익은 늘어나기 때문에 국가를 초월한 다국적 기업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늘려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의 빈곤과 정치적 혼란을 증대시켰습니다.
제 3세계 국가들은 원래 대부분 풍부한 자원과 농산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냈었은데 서방 기업의 수탈이 진행되면서 국내 산업은 쇠퇴하였고, 실업자는 늘어났으며, 복지혜택은 줄어들고, 기아와 가난은 증대되었습니다.
각 국의 자급자족 시스템과 전통산업은 무너지고, 대기업의 하청공장 내지는 집단농장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제 3세계의 부(富)는 천연자원의 수탈, 차관의 이자를 갚기 위한 세금, 외국인 소유 부동산에 대한 임대료, 과중한 로얄티, 고가의 공산품 강매 등의 방법으로 외국 대기업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식민화된 국가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 받고, 외국 대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우게 되며, 빚에 허덕이고, 스스로 살아 나갈 수 있는 산업의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에 충성하는 포악한 군사 독재 정권에 시달리거나, 공기업을 외국에 팔아 먹는 부패한 정권으로 인해 사회복지는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심화됩니다.
현재 제국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초월해 대기업 연합의 이익을 위해 각종 무역협정과 조약이 체결되고, 국민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이 우선되는 각종 정책이 수립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상대적 힘의 우월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지배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입니다.
제국주의의 어원이 된 임페리움(imperium)은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의 법에 의한 명령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임페리움’이 근대에 다시 쓰여진 동기는 영국 신문 ‘데일리 뉴스’가 1870년 6월 8일자 신문에서 나폴레올 3세의 전제적 제2제정을 제국주의라 지칭하면서부터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성격이 자유경쟁단계의 산업자본에서 독점·금융자본으로 변화함으로써 ‘제국주의’는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대립과 분쟁을 가르키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근대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던 영국은 세계 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토를 병합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국 영토의 100배에 달하는 55개의 식민지를 경영하여 번영을 누렸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독일·프랑스·미국 등의 도전을 받아 그 지위가 흔들렸습니다.

세계는 자본주의 제국간의 경쟁시대를 맞이했고, 특히 1873년부터 23년동안 유럽을 강타한 경제 대불황은 경쟁을 더욱 가속시켰습니다.
이에 영국은 그동안의 자유무역정책을 보호무역정책으로 전환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긴밀하게 조직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수에즈운하 매수, 인도에 대한 지배 강화, 보호관세정책, 트란스발·오렌지 자유국과의 보어전쟁 등입니다.

장기적인 경제공황은 영국 이외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원료공급지와 소비시장으로서의 식민지 획득이라는 대외정책과 독점적 기업결합이라는 대내정책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자본주의 국가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아프리카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외교적 충돌과 군사적 대립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아프라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파쇼다 사건과,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한 모르코 문제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1차 세계대전도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선진자본주의국가와 그렇지 못한 후발자본주의국가 간의 식민지 분할을 둘러 싸고 벌어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국가 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출현하게 하였고, 독점자본에 의한 과잉생산은 소비시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자본 투자지로서의 식민지를 더욱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열강들이 충돌하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점자본주의로 변모했기 때문이며,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자본주의국가들이 각축을 벌렸던 1870년부터 1차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고전적 제국주의시대’라고 합니다.

a) 고전적 제국주의 비판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국가를 착취하면서도 식민지 경영이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 이전보다 더 어려운 경제적 상태로 가난과 기아를 유발했고,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고무 채집권을 가진 회사가 채집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주민의 팔다리를 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3년간 남 아프리카의 보어인과 싸우면서 민간인까지 무참히 희생시키는 전략으로 국제여론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보어전쟁을 계기로 사람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J.A. 홉슨은 남아프리카를 방문해 보어전쟁의 배후에 금융업자들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고, 귀국하여 제국주의를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한 ‘제국주의론’(1902)을 썼습니다.
그는 저서에서 제국주의가 성립된 경제적 요인은 국내상품의 과잉생산과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 의한 무력적 대외정책에 있다고 보고, 평등한 소득분배와 소비의 증대를 통해 과잉생산 및 과잉자본을 해소하면 제국주의 정책이 불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R. 힐퍼딩은 ‘금융자본론’(1910)을 통하여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은행자본을 금융자본이라고 규정하고,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과 카르텔·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자본주의의 새로운 특징이라고 논함으로써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이 대외적으로 취하는 정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독일의 K.J. 카우츠키는 힐퍼팅의 이론을 발전시켜 초(超)제국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초제국주의론에선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으로 독점이윤을 획득하려는 선진공업국가의 후진농업지역에 대한 정책체계로 보고, 자본가들이 경쟁의 결과가 비참한 전쟁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국제적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 트러스트를 형성시켜야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이 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정부 수립과 유사)

이에 대해 독일의 R.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1913)을 통해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은 비자본주의 지역의 수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보호관세와 군국주의 같은 제국주의 경향과 비자본주의 지역의 축소화가 초래되어 자본주의는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b) 레닌의 제국주의론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레닌입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년) 일명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로 규정하고 그 특징을 5가지로 기술하였습니다.

자유경쟁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시장경쟁을 통하여 생산과 자본이 점차 소수의 대기업에 집중되며, 생산과 자본의 고도 집중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으로 발전한다. 이는 다시 시장과 가격의 지배를 통해 독점적 고이윤을 생산함으로써 한층 더 발전된 소수의 기업결합체로 발전한다.

지배적 자본형태로서의 금융자본의 존재: 기업독점은 자금융자와 주식발행 등을 통하여 거대산업과 거대은행의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기서 금융자본이 형성된다. 금융자본은 생산과 자본을 지배하고 독점이윤을 취득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걸쳐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를 가능하게 한다.

후진국에 대한 자본수출: 독점과 금융자본에 의해 형성되는 과잉자본은 높은 이윤과 유리한 투자기회를 찾아 후진지역으로 수출된다.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거래조건(특혜적 통상조약, 철도와 항만의 배타적 점유, 유리한 조건의 증권발행 등)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수출은 금융자본의 막대한 이윤의 원천이다.

시계시장의 분할·지배: 전기산업·석유산업·국제금융자본 등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 등을 통해 세계시장을 분할·재배한다.

열강에 의한 식민지 분할의 완료: 세계시장의 재분할은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경제적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1914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등 6대열강에 의해 아프리카의 90%와 남태평양 군도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영토확장이 끝나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무력충돌과 세계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의 독점적 지배와 정치적 장악 위에 성립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제국주의는 소수 금융재벌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지만 민중의 빈곤화와 사회불만을 증대시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비판을 가했지만 자신이 만든 공산주의는 공산당 1당독재를 허용해 정치권력에게만 힘을 실어줘 국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핍박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c) 현대의 ‘신 제국주의’ 비판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식민지가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나서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 이상 식민지 수탈이 아닌 현대적 경제체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 때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 간의 정치적·군사적 대립인 냉전이 진행되었습니다.
독립을 쟁취한 과거 식민지 국가는 UN 가입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적 다수파로 등장하여 발언권을 증대시켰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선진국의 금융자본이 투자, 채무, 무역관계 등을 통해 후진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수탈한다는 ‘신 제국주의’ 이론이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신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친미정권 지원, 정치공작, 군사적 개입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금융자본은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여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에게 피해를 주며 성장하고 군림하고 있습니다. 

3.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

19세기 들어서 세계는 독일, 이탈리아, 미국, 일본, 러시아의 민족적 통일을 이루었고,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국가주의가 독점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대외팽창적인 제국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고전적 제국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국내에 축적된 잉여자본의 투자를 위해 독점금융자본가가 근대국가의 정치를 장악하고 후진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값싼 원료와 노동력, 넓은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입니다.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고도화되면 자유경쟁이 심화되어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흡수하고, 트러스트(기업협동), 카르텔(기업연합)이 등장합니다.
독점자본의 최고형태로는 재벌 즉 콘체른(Konzern, Holding Company)으로 원자재로부터 완제품 생산, 유통, 금융까지 동일자본에 의한 전체산업의 지배가 가능해집니다.

독점자본이 은행을 장악함으로써 의한 자본의 집중화는 절정에 달하고, 독점자본가는 정치인을 매수하고 조종해 의회정치에 개입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라테나우(Walter Rathenau)는 1909년에 “서로 잘 알고 있는 300명의 인간이 전 유럽대륙의 경제적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럽열강은 자본의 수출과 식민지 분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적 자립을 부정하고, 전통사회의 해체과정에서 반동세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내부적 분쟁을 격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전통가치, 사회주의적 경향 등을 억압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전 세계적인 규모로 실현한 정치적 지배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①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소개되자, 유럽 열강이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②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로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clip_image001

(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① 영국의 종단 정책 : 수에즈 운하를 매수하고, 남쪽의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의 카이로를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② 프랑스의 횡단 정책 : 알제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진출하여, 아프리카를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파쇼다 사건(1898) :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였다.

clip_image002

c) 유럽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시아 분할

   ① 영국 :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미얀마,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② 프랑스 :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③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2) 유럽 열강의 태평양 분할

   ①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② 미국의 태평양 분할 : 미국은 에스파냐와 싸워 필리핀을 얻었고, 1898년에는 하와이 제도를 병합하였다.

clip_image003

d) 제국주의 유럽 열강의 대립

(1) 삼국 동맹

① 배경 : 통일 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삼국동맹을 맺었다.

② 동맹국 :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가담하였다.

(2) 삼국 협상

① 배경 : 독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삼국 협상을 맺었다.

② 협상국 : 프랑스는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응하였다.

(3) 유럽 열강의 대립 : 유럽 열강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clip_image004

e)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1) 발칸 반도

   ① 발칸 반도 :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②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 : 슬라브 족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오래 전부터 이 곳을 탐내던 세르비아가 분개하였다.

(2)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clip_image005

clip_image006

4. 신 제국주의

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항상 강대국에게 이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제국을 보호하려다가 2차례의 세계전쟁을 치루었고, 이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를 억압하고 경영하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 효용을 얻는 것이 비용이 적게들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채택된 전략이 ‘신 제국주의’로 50년 전 미국이 쿠바에서 가장 먼저 실시히였는데, 정치적 독립을 인정해 주는 대신 어용정부를 통해 경제적 수탈을 하였습니다.

1946년 필리핀이 독립되었을 때도 미국인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법에 따라 필리핀의 천연자원 개발과 공공 시설 운영에 대해 필리핀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았습니다.
자유무역 협정으로 인해 필리핀인들은 자국 산업을 육성할 기회를 잃어 버렸고, 덤핑으로 들어 온 미국 상품은 필리핀 산업을 붕괴시켰습니다.

금융거래와 대부는 외국 기업에 장악되었고, 필리핀의 대 달러 환율은 2:1로 고정되었으며, 미군은 주요 토지와 해군기지에 대한 조차를 승인받았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식민지에 대한 행정적 지배에 대한 부담을 피하면서도 경제적 군사적 잇권을 취했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패한 독재 정권을 지원하였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생산력을 잃지 않은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은 대기업을 위한 세계 자본주의의 보호자가 되어 각국의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국적 기업이 전세계에 투자한 자본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였고, 제 3세계의 민주화를 방해했으며, 현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무력을 휘두르는 초강대 제국이 되었습니다.

* 신 제국주의의 유형과 특징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a) 불평등 무역 관계

제 3세계의 경제는 주로 노동 집약적인 공산품이나 농산물의 수출에 의존하는데, 이를 수입해 줄 강대국은 많지 않으므로 자연히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성립하게 됩니다.
가난한 나라의 수출품은 수입 제재를 당하거나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고, 강대국의 수출품은 제한 없이 낮은 세율로 수입되게 됩니다.

만약 약소국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역제재를 가하게 되는데 피해는 당연히 약소국이 더 많이 입게 됩니다.
약소국은 약소국끼리의 경쟁과 강대국의 압력으로 인해 수출품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값 비싼 공산품, 기계, 부품 등을 수입하기 위해 그들의 천연자원과 농산물을 헐값에 내다 팔게 됩니다.

b) 산업화에 대한 방해

약소국은 천연자원을 강대국에게 수출할 때는 면세 혜택을 받지만, 공산품을 수출할 때는 높은 세율을 적용 받습니다.
여기에 선진국에서 기술이전과 자본투자를 꺼림으로써 약소국의 산업 발전은 지연됩니다.
선진 기업들은 후진국에서 우수한 재정, 고도의 마케팅, 높은 상표 인지도, 높은 품질, 잦은 광고 등을 통해 토착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막고 산업화를 지연시킵니다.

제 3세계 국가의 제조업 분야의 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고, 주식 소유를 통해 경영의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기업 간 합병과 투자 유치를 통해 점점 더 많은 토착 기업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가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은 기술개발을 외면한 채 단순한 하청 공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c) 해외 원조

후진국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 중 일부를 선진국의 원조에 의존하는데 이 자금은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됩니다.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국가는 미국 제품을 고가에 구입하고, 미국 상선을 이용하도록 강요 받습니다.
해외 원조는 후진국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소수 정치인과 재벌에게만 주어짐으로써 빈부 격차를 가속합니다.
만약 선진국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해외 원조는 줄어들므로 정치인은 외국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세웁게 됩니다.

d) 채무를 통한 지배

제 3세계는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서방 은행이나 IMF, 세계은행 등의 차관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빚의 이자도 갚기 힘들어 빚을 갚기 위해 고율의 단기 자금을 차용하게 되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1990년에 제 3세계의 채무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경인 2조달러에 달했습니다.

채무 국가는 수출액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사용하므로 국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만약 채무 불이행이라도 선언하면 가혹한 무역제재와 금융제재를 받게 됩니다.
자본 유출로 외환위기가 닥치면 긴급 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IMF와 협상을 하게 되는데, 공기업 민영화, 노동법 완화, 환경법 완화, 복지 혜택 축소, 시장 개방, 각종 규제 철폐 등의 조건을 받아 들이게 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외국 기업은 경제위기로 폭락한 부동산과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게 되고, 각종 유리한 조건과 세금 혜택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토착 기업에게 주어지던 혜택과 보조금은 줄어듭니다.
이와 같이 인위적인 외환 위기는 다국적 기업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다 주며, 후진국의 산업화와 지속적인 발전을 막아 1석2조의 효과를 얻게 됩니다.

금 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제공 받는 차관은 근거 없이 찍어낸 가짜돈이며, 이자를 갚아 나가는 것은 그 나라의 국부(國富)를 유출하는 것으로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국부(國富)는 한 나라가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고, 화폐를 매개체로 순환하며, 부의 근원은 노동력, 지하자원, 토지, 사회 인프라, 교육, 과학 기술 등입니다.

e) 불균형한 개발

약소국의 균형 잡힌 경제 개발은 왜곡되고, 다국적 기업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몇몇 분야에만 집중됩니다.
다국적 기업은 약소국에서 값 싼 노동력으로 채취한 원료나 가공한 상품을 선진국에 비싼 값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거둡니다.
국가에서는 이들 주력 산업에게만 각종 특혜와 지원을 줌으로써 다른 산업은 몰락하게 됩니다.

f) 문화적 침투

세계 각국 사람들은 영화와 팝송, 음식 의류 등 미국의 보편적이고 실용적이며 쾌락 지향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미국의 지배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과 통신사와 방송에 의해 미국적인 관점과 가치관에 의해 보도된 각종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미국 CIA는 세계 전역에 200 종류가 넘는 신문, 잡지, 통신업체, 출판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각 국의 친미 언론인을 관리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각종 재단은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각종 자료를 제공하며 제 3세계 대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약소국의 국민은 당연히 교육과 언론에서 미국적인 가치를 교육 받으며, 친미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g) 정치적 침투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보수적이고 친미적인 정당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반 사회주의적 정책을 가지고, 서방 자본의 침투에 우호적이어야 합니다.
CIA는 많은 국가의 주요 정치 조직에 침투하였고, 정보원을 두고 있습니다.
CIA는 각 국에서 감청을 실시하고 있고, 친미 정부를 위한 각종 정치공작에도 협력하여 왔습니다.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세계 각국에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미국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레바논, 도미니키 공화국, 그라나다, 파나마 등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각 국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부를 세움으로써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현상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미국은 제 3세계의 친미 무장세력, 정보부대, 헌병대, 테러단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반동적 요소를 억압하고 반미 인사에 테러를 가해 왔습니다.
CIA로부터 자금지원과 무기지원을 받고 군사 기술을 전수 받은 나라로는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이란, 칠레,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니카라과, 아프카니스탄 등입니다.

h) 신 제국주의로 인한 피해

신 제국주의로 인해 제 3세계에서 개발된 것은 치명적이고 착취적인 형태의 의존적 자본주의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적 여건은 다국적 기업의 투자 증가와 더불어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저임금과 실업난에 고통 받으며, 적절한 의료 혜택과 생활 보장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난과 가아에 허덕이며, 가정은 파괴되고, 실업 수당도 없이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됩니다.

미국 국민도 신 제국주의의 피해자인데 높은 국방비(2004년 480조원)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고, 국내의 제조 업체가 해외의 값 싼 노동 시장으로 옮겨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미국 국내에서도 기업의 편의를 위한 정책이 우선됨으로써 노동법과 환경법이 약화되 쉽게 실직자가 되고, 기본적인 의료혜택과 사회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 제국주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국민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으며, 오직 다국적 기업만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냉전시대의 구 소련보다 악날한데, 냉전시대 소련은 동유럽의 연방국가의 땅이나 공장이나 유전을 소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물자와 에너지를 원조해 줘 사회복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B. 강대국의 흥망

역사적으로 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강대국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소는 군사력입니다.
강한 군사력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도한 국방비를 투입하다 보면 그에 비례해 경제가 희생되고, 결국 쇠퇴와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과도한 군사력 경쟁을 벌였고, 소련은 이미 몰락했으며, 미국 또한 몰락하는 중입니다.

역사학자이자 미국 예일대 교수인 폴 케네디 교수는 5년동안 전 세계의 역사, 정치, 경제, 군사 행태를 분석하고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찾아 내었습니다.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들이 전성기에 군비경쟁으로 힘에 부치는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하다 국력이 쇠퇴하였고, 적정한 군사력을 유지해 경제성장에 치중한 국가는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합니다.

1,2차 대전 중에 전쟁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소모하며 탈진한 유럽은 몰락하였고, 전쟁물자를 대며 피해를 입지 않고 경제성장을 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과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였고, 구 소련은 몰락해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국방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고, 경제성장에만 전념한 결과 눈 부신 발전을 이루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경제력이 쇠퇴하고 제조업이 기울은 상태에서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군사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국방비(2004년 480조)를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몰락하기 이전에 세계정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1.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 (A.D. 1815~1885)

유럽에서 중세 이후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합스부르크 왕국이 권세를 쥐었고, 18세기에는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쥐었습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부터는 강한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중상주의적인 정책으로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았지만 19세기 들어서면서 자유무역과 국제적 화합이 강조되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는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원료와 큰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기관총, 신 대포, 증기기관, 무장 군함을 갖추게 된 영국은 해외로 진출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산업혁명은 열을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820년의 동력직기는 베틀을 이용하는 직공에 비해 20배나 많은 일을 했고, 동력에 의해 운전되는 뮬(mule) 정방기는 물레보다 200배나 많은 일을 했습니다.
철도 기관차 1대는 수백마리의 말이 운반하는 짐을 더 빠른 속도로 운반하였습니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유럽의 인구는 1750년 1억 4천만명에서 1850년 2억 6600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영국의 인구는 1801년 1050만명에서 1911년 4180만명으로 증사하였고, 19세기 동안 국민생산은 14배나 증가했습니다.
이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도시사회로 변모하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은 방적의 기계화로 생산성이 몇배나 증가하였고, 인도나 중국은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랭커셔 직물공장에서 나오는 값싸고 질 좋은 제품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역 산업화’(deindustrialize)를 초래하였습니다.
전통 면 생산국이었던 인도는 영국에서 수입된 엄청난 양의 면제품 때문에 전통적인 국내 생산자들을 몰락시켜 오히려 산업을 쇠퇴시켰습니다.

1860년경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의 53%, 석탄과 갈탄 생산의 50%를 차지했으며, 세계 원면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소비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제품무역의 2/5를 차지했고, 세계 상선의 1/3이 영국 국적선이었으며, 근대산업의 세계 잠재력의 45%를 차지했습니다.

경제적 우위와 함께 군사적 우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통치를 더 쉽게 하였습니다.
사격속도가 빠른 후장식 소총, 개틀링(Gatling) 기관총과 맥심(Maxim) 기관총, 경형 대포, 철갑 군함 등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후진국의 군대와 원주민들을 가볍게 제압하였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 군대는 인도와 중동, 중국 등에서 전통 왕조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1860년대에 영국의 국민총생산은 10억 파운드에 달했으나, 국방비는 국민 총생산의 2~3%를 소비하는데 그쳤고, 중상주의적인 보호무역 정책보다는 자유무역조치를 취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영국은 1815년과 1865년 사이 연평균 10만 평방마일 꼴로 팽창했고, 싱가포르, 아덴, 포클랜드 제도, 홍콩, 라고스 등을 전략적·상업적 목적에 따라 취득하였습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원료와 식량을 수입해 또한 막대한 양의 직물과 철강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해외에 투자되어 또한 큰 소득을 올려 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또한 금본위제를 바탕으로한 금융산업이 발달해 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고, 런던에서 발행한 어음을 바탕으로 한 국제적인 환·지불 메카니즘이 발달하여 산업의 증진을 도왔습니다.

2.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 (1885~1914)

19세기 말에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미국, 러시아도 산업화를 이루었고, 해외 식민지를 놓고 대립을 벌였습니다.
경쟁은 차츰 치열해졌고,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정책이 다시 도입되었으며, 강대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의 팽창은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주변국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이 잦았는데 1885년에는 콩고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1890년대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1898년에는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대립했습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영국 다음 가는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세네갈의 다카르나 베트남의 사이공 등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영국은 1900년에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 1200만평방마일의 땅과 세계인구의 1/4을 지배하였습니다.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했고, 전 세계에 해군기지와 전신중계송망과 해저케이블을 확보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해운국이자 무역국이었고, 런던은 세계 금융과 보험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차츰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주변국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영국의 전통산업인 석탄, 직물, 철강 산업의 세계적인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고, 화학, 기계공구, 전기제품 등의 산업에서 선두 지위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수출품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보호무역으로 인해 유리한 지위를 잃어 갔고, 영국 국내에는 보다 많은 수입품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생산성 저이브 경쟁력 약화는 빈약한 투자, 생산시설의 낙후, 국민성, 교육제도 등에 기인합니다.
1880년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22.9%를 차지했지만 1913년 13.6%로 줄어들었고, 세계무역 비중은 1880년 23.2%에서 1912년 14.1%로 떨어졌습니다.
산업력에 있어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앞질렀는데, 이는 다른 나라가 영국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내고 ‘비옥한 농토’, ‘막대한 원료’, ‘풍부한 자원’, ‘근대 기술의 발전’, ‘철도 건설’, ‘외국 투자자본의 유입’ 등을 힘입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산업과 농업은 능률과 규모를 겸비하였고, 191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면화나 금 등 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으나, 남북전쟁 이후에는 산업이 발달하여 농기계, 철강제품, 기계공구, 전기장비 등 공산품을 수출하였습니다.
또한 수송 혁명에 힘입어 수송단가가 낮아짐으로 옥수수, 소맥, 밀가루 등 농산물과 축산물이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3. 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열강들의 총력전 (1914~1918)

clip_image007

1차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 ·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 ·미국과 프랑스 ·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 ·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 ·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 ·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b)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c)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d)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e) 전쟁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 ·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덩 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f) 교전국의 국내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 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 감자 2,500g, 버터 80g, 고기 250g, 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g) 대전 중의 비밀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 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h) 전쟁의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i)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j) 1차 세계대전의 종합적 고찰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된 총력전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과 자원을 얼마나 잘 뒷바침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린 전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식민지를 점유하고 산업화를 이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 측이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경쟁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동맹국 측보다 다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1913) 27.9% 19.2%
에너지 소비,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1913)
311.8 236.4
강철생산, 단원 100만톤 (1913) 17.1 20.2
총산업잠재력 (1900년의 영국=100) 261.1 178.4

협상국 측은 식민지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동맹국 측은 해외 식민지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룩셈부르크의 원광석과 루마니아의 소맥과 석유로 원료의 부족을 채웠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막강한 해군으로 독일 북해 해안과 오스트리아 지중해 해안을 봉쇄했지만 동맹국 측은 이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고, 전쟁기간 중 식량 부족을 겪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의 상선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은 중립국 상선까지 동원하면서 이를 만회했습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에는 각 국이 국민소득의 4%를 군비 지출에 사용하였지만, 전쟁 중에는 무려 25~33%를 군비에 지출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역량이 군수산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막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남부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세르비아를 점령함으로써 초반 승세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반에 독일의 프랑스 베르덩 요세에 대한 총력전이 실패하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합스부르크 육군을 붕괴시키고, 영국군의 솜 공세에서 양쪽이 엄청난 소모전을 치루면서 협상국과 동맹국은 모두 탈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라아-헝기라군과는 잘 싸웠으나 훈련부족과 물자부족으로 독일군에게 연패했습니다.
1916년 말까지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360만명에 이르렀고, 210만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1917년 러시아 왕조가 가장 먼저 막대한 군비와 인적 희생, 경제난, 식량난, 극심한 인플레이션, 파업 등을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 혁명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일부 영토를 점령 당해 강철생산능력의 24%와 석탄생산능력의 40%가 떨어진 상태에서 영국과 미국의 자금, 식량, 자원 원조를 받아 가며 무기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독일군과 정면으로 맞 붙은 프랑스군은 1917년 니벨 공세 이전에 이미 300만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1918년에 미군의 보충으로 프랑스군 102개 사단, 영국군 60개 사단, 미국군 42개 사단, 벨기에군 12개 사단 등 총 216개 사단이 정원 미달의 독일군 197개 사단과 대결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전쟁 이후 모든 경제적 역량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제조했는데, 군사비가 1913년 9,100 파운드에서 1918년 19억 5,600만 파운드로 증가하여 정부지출의 80%, 국민총생산의 52%를 차지했습니다.
영국군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1916년 솜 전투에서는 무리한 진격으로 40만명이 희생되었고, 1917년 이프로 전투에서는 3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뿐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가 차용하는 돈에 대해 보증을 섬으로써 경제적 지원을 했고, 일례로 1917년 협상국들의 43억에 달하는 전쟁차관 가운데 88%를 영국정부가 보증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영국은 미국의 군수지원에 의존했는데, 금의 이전이나 달러표시 증권의 매도에 의해서도 무역적자를 메울 수 없어, 미국 군수업자에게 달러를 지불하기 위해 뉴욕과 시카고의 자금시장에서 차입에 의존하였습니다.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능률적인 작전, 잘 갖춰진 통신망, 유리한 지형의 서부 진지 등을 토대로 전쟁을 벌여 대영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을 거의 항복 직전까지 몰아 넣었습니다.
독일은 해상 봉쇄된 가운데서도 부족한 자원의 대용품들을 만들어 내었고, 북부 프랑스에서 원광석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루마니아의 소맥과 원유를 약탈하였습니다.

독일도 군수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1916년 8월 힌덴부르크 계획에 돌입했는데,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가했고, 정부차입이 증가했으며, 과도한 화폐의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습니다.
산업 생산에 필요한 부족한 숙련 노동자를 보충하기 위해 1916년 120만명을 제대시켰고, 1917년 190만명을 제대시켰는데 이는 서부전선에 심각한 병력부족을 초래했습니다.

힌덴부르크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농업을 경시해 농업 부문의 인력과 말, 연료 등을 군대나 군수산업으로 돌림으로써 농업생산이 급격히 줄면서 국민들에게 배급제를 실시할만큼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했습니다.
독일의 가장 큰 실수는 무제한 유보트 작전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물과 멕시코와의 비밀동맹 제의로 미국을 자극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의회가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미국의 참전과 원조는 탈진한 협상국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산업 잠재력은 독일의 2.5배였고, 미국은 수 많은 상선과 군함과 무기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한계상황에 이른 독일을 압박하였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세력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투입된 미군의 숫자와 무기지원은 러시아의 붕괴를 보완하고도 남았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 (1931)

51.7

19.2

에너지 소비량,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 (1931)

798.8

236.4

강철생산, 단위 100만톤(1931)

44.1

20.2

총산업 잠재력 (1931)

472.6

178.4

 

 

전비 (1913년 시가, 단위 10억달러)

총동원 병력 (단위 100만)

협상국측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등)

57.7

40.7

동맹국측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투르크)

24.7

25.1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다급해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영불해엽으로 몰아내기 위해 1918년 3월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루덴도르프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측에 막대한 희생만 남기고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독일은 20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남겼고, 협상국의 반격을 받게 되었으며, 불가리아 터키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고 독일 내부에 혼란이 일자 독일왕실은 무너지고 무조건 항복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이었고,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고 영토가 축소됨으로써 몰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였고, 미국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1차 대전의 영향으로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실이 무너졌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전쟁배상금은 또 다른 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4.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정세 (1919~1942)

clip_image008

1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피해는 엄청났는데, 군인 중 사망 800만명, 불구 700만명, 중경상 1500만명이었고, 500만명의 민간인이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피폐된 지역은 1918~1919년에 인플루엔자 전염병으로 또 다시 수백만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전후 전체 희생자수는 6000만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절반이 러시아인이었습니다.

물질적 피해도 극심해 프랑스, 세르비아, 폴란드 등 전쟁터였던 곳은 수십만채의 집이 파괴되고, 농촌은 약탈당했으며, 가축은 도살되고, 도로 철도 전신망 등은 엉망이 되었고, 농지는 불발탄과 지뢰로 쓸모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의 물질적 피해액은 2,6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국가부채 총액의 6.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제조업 생산은 1920년에 1913년에 비해 7%에 불과했고, 농업생산은 평균치의 1/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지리적 변화는 예전의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엘촐레른 제국의 자리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국민국가가 탄생한 점입니다.
오스트리아에 비해 독일은 영토를 적게 잃었지만, 프랑스의 경제적 착취, 엄격한 비무장화(해군, 공군, 잠수함, 전차 보유 금지),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차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를 잃지 않고, 국제연맹을 주도함으로써 여전히 강대국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는 경쟁자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멸망했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내부문제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1920년 이후 고립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국제무대에 힘을 크게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금융외교의 시기로 독일의 배상금과 협상국의 전시부채가 맞물려 전승국과 패전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긴장이 높아지자 1924년 도즈계획(Dawes Plan)으로 금융적 타협을 서둘러 분란을 완화하였고, 1929년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파리부전조약(Pact of Paris)에서 많은 국가들이 장래 분규를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이 금본위제를 도입하지 않고, 허술한 화폐·재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어 경제난에 휩싸였고, 수출 촉진을 위한 경쟁적인 화폐의 평가절하는 재정적 불안과 정치적 반목을 야기시켰습니다.
특히 국가 채무를 두고 국가간 충돌이 잦았는데, 소련의 볼세비키들은 대미채무 36억달라 변제를 거부했으며,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하기 전에는 미국의 채무를 갚을 수 없다고 하고, 독일은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갚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럽이 경제불안과 국가채무에 허덕이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산업국이 되면서 세계 금융의 중심은 자연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투자와 소비가 모두 위축되었고, 산업화된 국가들은 수출부진과 가격폭락으로 동반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각국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금본위제 폐지, 화폐가치의 평가절하, 자본에 대한 제한조치, 국가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등 비책을 사용했지만 세계무역과 신용체제에 더 큰 문제를 주었을 뿐입니다.
미국이 미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owley Tariff)을 통과시켜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자 유럽 각국도 이에 보복을 가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어 산업생산은 절반으로 줄고, 세계무역은 1/3로 줄었습니다.

경제불황과 장기실업으로 각국은 극심한 정치불안에 시달렸고, 국가주의와 군국주의가 득세했습니다.
1933년 세계경제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의 달러·파운드화 환율 조정 실패는 어두운 상황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러자 세계는 적대적인 경제 불록화를 겪게 되었는데, 영국 제국 내의 파운드화 불록, 미국의 달러화 블록, 일본의 극동지역의 엔화 블록, 프랑스의 금본위 블록 등입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 즉 전체주의 국가들이 反볼세비키주의와 反자유·자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식민 각국에도 민족주의가 등장해 이집트에서는 와프드당(Warfd Party)이 결성되었고,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으며, 인도에서는 간디가 영국의 지배에 대한 각계의 저항을 일원화했습니다.

a) 독일

폭격으로 피폐해졌던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산업과 기간망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독일이 예전과 같은 강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를 불안히 여긴 프랑스는 배상금 완납을 주장하고,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으며, 국제연맹을 무력화시키고, 독일의 재무장을 극력 저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인에게 한을 품게 했고, 독일의 극우세력을 자극했습니다.

전 후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29~1933년의 금융·상업 위기로 인기 없던 바이마르 정부가 좌초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 국민에게 민족 우월주의와 절대적 충성을 선동해 지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1938년 독일은 정부지출의 52%, 국민총생산의 17%를 군비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영국·프랑스·미국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1939년 독일 육군은 103개 사단에 이르렀고, 항공기는 5000대 이상이었으며, 해군도 재건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높은 세금과 적자 차입, 정부의 노동통제, 임금과 개인 소비 억제 등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무기산업을 일으키려면 철광석, 구리, 보크사이트, 니켈, 석유, 고무 등의 자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수입하기 위한 수출이나 외환, 식민지, 금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외환통제, 물물교환, 합성 대체품 발명 등 편법을 동원했지만, 원료재고는 바닥나기 일수였습니다.
경제력에 비해 무리한 군비증강으로 경제난과 원료난은 심화되었고,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나찌는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은 5개 사단의 병력과 철광석, 유전과 2억달러 상당의 금과 외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국립은행의 금과 외환 외에도 철광석과 금속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친 군비증강은 경제난과 원료부족, 침략전쟁을 유발하며, 현시대의 미국에서도 교훈을 찾게 됩니다.
결국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의 침략전쟁을 묵과할 수 없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b) 일본

1930년대 들어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식량부족과 자원난, 낮은 생산성과 수출부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와 만주, 동남아시아 등을 점령했고, 정부예산의 70%를 군사비로 지출함으로써 군사강국이 되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세계 최대의 야마토(大和)급 군함을 제조하였고, 10척의 항공모함과 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1941년에 51개 현역 사단과 133개 항공대를 갖추어 100만대군과 200만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70만명이나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합니다.

일본의 중국 침력을 반대해 온 미국은 1938년 6월 항공자재의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다음 해의 미·일 무역협정 파기, 1941년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석유 및 철광석의 수출금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미국이 일본에 비해 인구는 2배, 국민소득은 17배, 강철생산은 5배, 자동차는 8배, 산업잠재력은 거의 10배에 달할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본 내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군사 지도자들은 밀어 붙혔습니다.

c) 프랑스

프랑스는 1919년 이후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고 독일의 배상금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경제적 혼란을 겪었지만 1926년 푸앵카레(Raymond Poincare)의 통화 안정책으로 산업은 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화학, 염료, 전기제품에서 독일의 재배를 벗어났고, 프랑화의 유리한 환율로 무역이 활기를 띠었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방대한 금 보유고로 대공황의 영향도 적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다른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프랑화의 가치하락을 피해보려 애쓰는 바람에 프랑화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수입은 60%, 수출은 70%가 줄었습니다.
1935년 디플레이션 정책은 빈사상태의 프랑스 산업을 강타했으며, 1936년 인민전선(Front Populaire) 내각이 주 40시간 노동과 임금인상을 강행함으로써 기진맥진했습니다.

독일의 재무장에 겁먹은 프랑스는 1930년대부터 국방비 지출을 늘렸으나 경제력이 약해 절대액은 적었습니다.
1937년 독일이 5606대의 항공기를 생산할 때 프랑스는 겨우 37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가장 좋은 지원을 받아 현대적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육지에서 전격전이 진행되었을 때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독일군이 현대화를 추진하였을 때 프랑스에서 현대적인 기갑부대를 건설하자는 드골(Charles De Gaulle)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현대적인 지휘통신 체계와 항공기의 역할도 외면당했습니다.
독일의 구데리안이(Heinz Wilhelm Guderian)이 쓴 ‘전차를 주목하자’(Achtung Panzer) 번역본이 프랑스군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읽혀지지 않았고,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전술체계가 없었습니다.

d) 영국

1차대전 이후에도 영국은 강대국이었지만 정신적 인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의 안정보다는 국내의 경제·사회문제나 제국관리 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영국 경제 역시 1929년 이후 세계적인 불황에 의해 크게 흔들렸는데, 직물생산은 2/3로 축소되었고, 강철생산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조선산업은 1933년의 생산이 1차대전 전의 7%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34년이 되자 경제는 조끔씩 회복되었지만 전통산업은 쇠퇴한 반면 항공, 자동차, 석유화학, 전기제품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영국은 국내의 정치·경제적 압력으로 1930년대 초에 국방비를 삭감했는데,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충격을 받은 1936년이 되서야 국방비를 증액했으나 독일의 1/3 수준이었습니다.

영국은 군사비를 국민총생산에서 1937년 5.5%, 1939년 12.5%로 증액했지만, 숙련공과 시설 부족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생산부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이나 스웨덴 등에서 엄청난 무기와 철판, 볼베어링 등을 수입했는데,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국제수지가 위협 받았습니다.

e) 소련

소련은 1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14년 1억 7100만명이던 인구가 1921년 1억 3200만명으로 줄었고, 폴란드와 핀란드 등 연안국가를 잃었으며, 많은 공장과 철도와 농장을 상실했습니다.
제조업은 엄청나게 쇠퇴했는데 1920년의 생산량이 1913년의 생산량의 13%에 불과했습니다.
해외무역은 자취를 감추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60% 이상 감소하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개인농 제도를 집단농장으로 바꾸었고, 착취를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은 피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대공황 중에도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국민소득이나 산업생산이 몇배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만주사변으로 위협을 느낀 소련은 1935년 군인원을 1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하였으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한 스탈린의 광적인 탄압으로 많은 기술자와 공무원이 숙청되었고, 붉은 군대 장교의 많은 수를 제거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 가뜩이나 부족한 고급 인적자원을 줄임으로써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f) 미국

1차대전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미국은 세계 금융과 산업의 중심국이 되고, 세계 최대의 금을 보유한 채권국이 되어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인의 높은 생활수준과 활발한 투자활동은 제조업의 호황을 지속시켰고, 많은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생산해 다른 6대 강대국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가폭락과 금융위기로 인한 1920년대 대공황을 겪고 나서는 1930년대 다른 어느 강대국보다 쇠약해졌는데 이로 인해 세계정치의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유럽의 정세를 악화시켰습니다.
1929년 경제공황으로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3년 뒤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50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수출은 1/3 정도로 급감했습니다.

1930년대 다른 국가들은 어느정도 정상을 회복했지만, 미국은 1937년에 재차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폭삭 주저 앉았으며, 세계는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로 다시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미국은 1934년 전시부채를 갚지 않는 외국정부에 대해 차관을 금지했고, 1935년 전쟁시의 무기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영국 프랑스와도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2차 세계대전 – 대영제국의 멸망 (1939~1945)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이들 전쟁은 각각 독자적 요인을 안고 발전했는데, 1939년 9월에 유기적인 연관에 놓여져서 미·영·프·소·중의 연합국과 독·이·일의 동맹국(同盟國)이라는, 이 전쟁을 일관하는 기본적 대항 관계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또 이 전쟁에서 전체로서의 지배적인 성격은 반(反)파시즘 전쟁이었다.

a) 2차 세계대전의 전사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1933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反)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일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 ·이 ·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다(宥和政策).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b) 영독 전쟁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戰) 종료 후 히틀러는 영 ·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 ·프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 ·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 ·프는 독 ·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線)에 의존하고, 해상봉쇄 ·경제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영 ·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 ·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19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다(소련-핀란드 전쟁).

이 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처분하였고, 영 ·프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 ·프군을 격퇴하였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덩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동방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다.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다.

c) 독소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대소전의 단기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한다. 더욱이 독 ·소전이 발발하자 영 ·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 ·미가 ‘대서양헌장’으로 전쟁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 ·미 ·소의 반(反)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 ·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 ·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1941년 6월 독 ·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 ·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월 11일 독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성격)는 명료해졌다. 1942년 1월 1일, 미 ·영 ·중 ·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다.

d) 대동아 공영권과 신질서

일본은 진주만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對英) 이간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남방작전은 일단락을 보았다. 하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중국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체제는 강화되어 갔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滅絶)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브링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연합군의 반공(反攻)은 동 ·서에서도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다.

e) 전국의 전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 ·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 ·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 ·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 ·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 ·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 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 ·미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 ·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1943년 7월 영 ·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 ·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해군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 ·솔로몬제도 ·길버트 제도 ·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 ·영 ·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다. 마리아나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f) 유럽에서의 전쟁 종결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저항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제국(同盟諸國)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對獨) 참전으로 방향전환하였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 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다. 홀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도 결정되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만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강(江), 4월 나이세강(江)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江)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江)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交歡)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g) 일본의 항복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h) 전후세계와 전후처리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 이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전비(戰費),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대립(國共對立)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정권의 성립을 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도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i) 양극체제의 대립과 평화조약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6. 미·소 냉전시대 (1945~1990)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영국, 소련, 미국 등 강대국과 한꺼번에 전쟁을 함으로써 전술과 무기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으나 생산력과 인력, 보급이 뒷받침 하지 못함으로써 패망하였습니다.
일본 역시 중국, 만주, 태평양 등 광대한 전선을 형성했고, 부족한 자원과 기술, 낮은 전략과 전술(항공모함보다 전함에 치중), 생산력 차이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a) 전 후 미국

2차대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유럽 강대국은 산업이 피폐해지고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음으로써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2차대전으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어 뉴딜정책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대공황의 잔재를 말끔히 걷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산업 및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전쟁 종결 당시 미국의 금 보유고는 200억달러로 세계 금보유고의 2/3에 달했고,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담당했으며, 세계 수출의 1/3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군은 주력 군함 1,200척과 수십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함으로써 영국을 압도하는 해군력을 갖게 되었고, 유럽의 나치를 분쇄한 2,000여대의 중 폭격기와 일본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1,000여대의 B 29 장거리 폭격기를 소유하였습니다.

미국은 전후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는데, 1942~1946년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국제협정을 마련했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 체결되었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해 약간의 돈이라도 차입하고자 하는 국가는 자유태환과 공개경쟁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체제에 이질감을 느낀 소련은 일찍이 이 체제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경쟁 체제는 미국과 같이 경쟁력이 강한 나라에는 유리하였지만, 2차 대전을 겪어 폐허가 되고 빚더미에 올라 앉은 나라에는 불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은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경제적 원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b) 전 후 소련

2차대전 당시 독일군 506개 사단을 격파하였지만 자국민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어 전쟁을 정면으로 치루어냈던 소련은 전 후 동유럽과 만주, 한반도 등에 군대를 파견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소련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는데, 북쪽으로는 핀란드, 중부유럽에서는 폴란드의 영토를 침해했고, 남쪽에서는 루마니아를 침식했으며, 발트해 연안 3국은 합병하였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에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위성국을 세워 서방세력을 견제했고, 극동에서 만주, 사할린, 북한 등을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했습니다.
하지만 전 후 소련은 군사상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피폐하고 가난했는데, 미국의 무기대여와 경제지원이 끊힘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소련은 1945~1950년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생활과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중공업과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군 현대화에도 투자를 해 1948년 미그(MIG)-15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였고, 장거리 전략공군을 창설하였으며, 독일의 과학·기술자를 활용하여 유도 미사일과 원자폭탄을 개발하였습니다.

c) 냉전 (Cold War)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전쟁상황 같은 첨예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하여 ‘냉전’(cold war)이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냉전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더욱 심해졌으며,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일으켰고,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미사일 위기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이면에는 미국 군산 복합체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산업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미국의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는 초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무드가 정착되자 의회에서 군비를 대폭 삭감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짜고 한국전쟁을 일으켜 소련과 공산주의란 새로운 적을 만들어냈고 군사비도 대폭 증액되었습니다.

연도 미국 소련
1948 109 131
1950 145 155
1951 333 201
1953 496 255
1955 405 295
1958 455 302
1961 478 436
1962 523 499
1965 518 623
1966 675 697
1970 778 720
2004 4013 약 600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 지출(단위 1억달러, 출처:강대국의 흥망)

미국의 군사비는 한국전쟁(1950) 발발 이후 급격히 늘었으며, 1953년 이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사회와 경제를 망치기 전에 이를 통제해야겠다는 노력이 반영되었지만, 1962년 쿠바 위기로 다시 증액되었고 1966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구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는데도 테러와의 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비는 대폭 증가되어 2004년 군사비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인 4013억달러(450조원)에 달합니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1950년대 소련이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자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막을 내리고 양국간의 핵무기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 소련도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을 하였고, 소련이 1957년 대륙간 탄도탄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미국은 긴장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은 잠수함에서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온갖 종류의 전술 핵무기와 단거리 로킷을 제조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1961년 베를린 위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에서 충돌했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직·간접적으로 부딛혔고,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서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소 양국은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태를 유지했는데, 우발적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핫라인(Hot-Line)을 설치했고, 1963년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 수를 제한하고, 여러 군축협상을 벌였으나 군비경쟁은 멈추지 않았고, 다탄두 로켓 같은 새로운 무기체계를 도입하였으며, 미사일 적재 잠수함을 늘렸습니다.

소련은 해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그라나다의 좌익정권을 지원하고,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기니, 콩고 등 서아프리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팽창주의를 일삼자 1980년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소련을 ‘악의 제국’(Devil Empire)이라고 비난하면서 대규모 군사력과 비타협적인 정책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쏟아 붓고도 실패했고,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방위비도 삭감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가 행정부 들어서면서 강한 미국을 슬로건으로 국방비를 증액했고, 인공위성으로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하는 SDI(스타워즈 계획)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경기부양을 위해 세금은 줄이면서도 예산은 늘려 미국 정부를 만성적자의 늪에 빠뜨렸습니다.

미국의 도전에 자극 받은 소련은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과 과학·기술 분야에 예산을 집중했고,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패까지 겹쳐 국가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소련은 군사 분야에 모든 경제력을 투입한 결과 만성적인 가난과 비능률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자본주의를 도입했지만 결국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991년 붕괴합니다.  

소련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입했고, 개인소비를 억제하는 경제체제와 산업의 비효율성, 낮은 농업 생산성 등의 문제가 쌓여 자본주의 국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 역시 1960년대 이후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와 산업 경쟁력 약화로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금보유고가 줄어들어 브레튼우드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붕괴됩니다.

  미국 소련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2,118 6,420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5,536 2,787
항공기 적재 탄두 2,520 680
10,174 9,987

‘국제 전략 연구소’(IISS)가 밝힌 미국과 소련의 전략 핵탄두 보유수 (1986)

C. 대영제국의 흥망

로마제국에 이어 17~19세기에 결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흥망사는 이 시대에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현재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인 미국도 대영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영제국이 지나친 군비와 산업경쟁력 약화, 잦은 전쟁 등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듯이 미국 또한 그러합니다.
원래 영국은 잉글랜드만을 가르키는데 17세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통합하면서 브리튼(Britain)이 됩니다.

1. 대영제국의 개관

대영제국은 한 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지배하였으며, 세계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럽의 외딴 섬에 있는 혼열민족(이베리안, 켈트, 앨글로 색슨, 데인, 노르만 등)이 장기간에 걸쳐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학문 등을 주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영국은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8세기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의 강자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으로 제국주의의 자성론이 일었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거의 소모하였으며, 미국과의 수에즈 운하 분쟁(1956)으로 제국주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서서히 융성하였다가 절정에 올랐고, 다시 200년에 걸쳐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세기가 대영제국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은 제국 초창기에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중상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제국 중반기인 19세기에는 강한 산업 경쟁력으로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번영기를 가졌으며, 제국 말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과 과잉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를 실행해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영국의 힘을 지탱한 것은 막강한 해군력, 거대한 공업 생산력, 광대한 식민지, 금융 보험 해운의 발달 등입니다.

대영제국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1,2차 세계대전때문인데 전쟁기간동안 국민소득의 60% 이상을 전비로 쏟아부었고, 영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영국의 부채는 33억 6천만 파운드에 달했고, 11억 2천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영국의 해외자산이 매각되어 중동의 석유 이권 등 해외자산을 미국 기업에 헐값에 넘겼습니다.

과도한 군비지출이 강대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단원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영국이 오랫동안 제국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전성기인 19세기에도 국민생산의 2%만 군사비로 지출했다는 점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적은 군사비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란 외교정책을 썼기 때문인데, 세력균형 정책은 한 나라가 강대해지면 다른 경쟁 국가가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도모하는 정책입니다.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도 한 때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1558년)하기 전에 영국은 유럽에 남은 최후의 영토인 칼레를 상실하고 섬나라로 고립됬습니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 수장이 되었고, 세심한 국정과 세련된 외교로 나라를 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와 재상 세실은 즉위 다름 해 스코틀랜드를 점령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하여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였습니다.

1567년 스페인 정예 육군 5만명이 명장 알바 공작의 인솔 하에 네델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스페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건너편인 네델란드에 진주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델란드를 스페인군이 점령하고, 그 곳이 영국 켄트 주의 해안까지 불과 48km밖에 안된다는 것은 영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네델란드의 반군을 지원하며, 해적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합니다.
결국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참모들의 치밀한 준비와 지도 끝에 130척의 함선과 3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학식과 차분한 인품을 갖춘 엘리트들인데 이들은 폭 넓은 정보수집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약점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엘리트가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영국의 귀족제도, 옥스퍼드 대학 같은 우수한 교육 시스템, 인격을 중시하는 영국의 신사(Gentleman) 정신 등이 있습니다.

3. 대영제국의 위기

영국은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50년부터 1879년까지 영국의 대외무역은 3배나 신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선박이나 철도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북미와 동유럽의 농산물이 싸게 들어와 영국 내 농산물 생산은 저하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 투자가 급증해 영국의 경제적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1820년대까지 보호무역을 시행했던 영국은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자 해외 시장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외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유무역은 영국은 공업은 발전시켰지만, 농업시장의 개방으로 대량의 식량 수입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무역적자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말의 20년 동안 세계를 덮은 경제불황은 각 국을 보호무역주의로 몰아 넣었고, 면제품 등 영국의 수출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경쟁력이 저하된 자국 산업의 유지를 위해 식민국가와 경제 블록화를 형성했고, 개방적 블록으로서의 대영제국의 세력권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노력은 제국의 과잉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이 증가되었고, 고전적인 제국의 피폐로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세계적인 ‘대경쟁의 시대’를 격화시켜 선진국과 후발 공업국과의 마찰을 빚었고, 식민지에 대한 무리한 억압은 식민 지배에 대한 도덕성과 명분의 상실을 가져 왔습니다.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하는 보어전쟁은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켰고, 그 북방에는 네덜란드인의 자손인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예자유국이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기도하여,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였다. 따라서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1881∼84년 제1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 후 트란스발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오렌예자유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99년 10월 마침내 양측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연합보어군은 그 후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 반항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 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에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하여,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이 강제수용소의 설비 ·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 백과사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50만 대군으로 총력전을 펼치고도 3만5천명의 보어군과 오랫동안 접전을 벌렸고, 야만적인 민간인 학대는 국제적인 비난과 제국주의에 대한 영국내 자성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없었고, 단지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금광이 탐이 나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영국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고, 대영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전초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3일만에 보어 정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국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입니다.
20세기 들어 첫 전쟁인 보어전쟁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사상 처음 패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이었는데 보어군의 용감한 반격과 매복공격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는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지휘는 49세의 참모장인 키치너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조직에 의한 ‘기계 전쟁’을 위해 총동을 체제를 지휘하였습니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1차대전의 솜 전투나 파센텔의 대량전사라는 결과로 연결되고, 영국군의 궤멸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된 전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엘리트 중 양식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환멸과 반발을 일으켜 ‘제국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하였으며,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부도덕한 전쟁에 대해 전쟁을 찬동하는 측은 좋든 싫든 우리 조국의 전쟁이라는 ‘애국주의’와 배타적 맹목적 광신적 애국주의이자 대외 강경론인 ‘징고이즘’(jingoism), 인류 평등을 위한 전쟁이라는 호전론(好戰論) 등으로 옹호하였습니다.
양자간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엘리트 가운데서도 친구 가족 사제 간에도 분열을 일으켜 ‘양심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됨으로 영국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자유당의 붕괴와 노동당의 대두라는 20세기 영국 정치사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지식인들 가운데 냉소주의를 심었으며, 이 후 스패인 내전과 수에즈 전쟁에서의 국론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어 전쟁은 영국군 5만명의 사상자와 보어군의 4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2만명의 부녀자가 희생되었고, 2억 3천만 파운드(1900년 국민 총소득은 17억 5천만 파운드)의 전비를 들인 끝에 3년만에 끝이 났습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제국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나 도덕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활력의 쇠퇴를 가져와 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쇠퇴기인 에드워드 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근엄했던 빅토리아와 방탕했던 에드워드의 성격만큼이나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후하고 성실하며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무책임하고 허무주의적이며 향락적인 에드워드 시대는 ‘마음의 상처’와 ‘자기 확신의 상실’을 초래한 보어전쟁으로 기점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5. 미국의 도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앵글로색슨의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러부터 20년만에 미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북미에서 지위를 잃어 버렸고, 영국인들은 심한 배신감을 맛 보아야만 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미국 공화국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으며, 이후로 1세기 동안 영국과 대립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1820년대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가 독립 움직임을 보일 때 프랑스가 개입하려 하자 영국은 미국에 ‘아메리카에 유럽의 개입을 허용하지 말자’는 성명을 공동 발표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영국을 빼돌린 채 먼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국경문제, 파나마 운하 구상, 영해군의 전시 봉쇄권 등을 놓고 대립했는데, 미국은 영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굴복하지는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영국은 1861년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에 남부의 편을 들어 참전함으로써 미국을 분할하거나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30년만에 공업생산과 무역액이 두 배로 증가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인구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서부 개척이 끝나자 미국은 해외에 눈을 돌려 1890년부터 불과 10년만에 세계 3위의 해군국이 될 정도로 성장해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였습니다.

1895년 미국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의 국경분쟁 때에 먼로 선언을 내세워 자신의 강제적 중재권을 인정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일축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같은 앵글로 색슨족끼리의 충돌을 꺼려 1901년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게 넘겼고, 알래스카 국경 문제를 미국에 양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영국에 당시 급격히 성장하는 독일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세계 각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 유럽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프랑스나 러시아, 미국에 대해 양보해 협상을 맺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는 독일과는 계속 충돌을 빗어, 1905년 탕헤르 사건(1차 모르코 사건)과 1911년 아가디르 사건(2차 모르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을 과대 평가하고 독일과의 공존 가능성을 포기하고 억지와 봉쇄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1차세계대전 이란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대국의 포용력을 잃어버리고 조급하게 대응했는데, 영국이 미국에게 양보한 것의 절반만 독일에게 양보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영국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다 가지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과 ‘쥐도 코너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는 값비싼 교훈만 얻게 됩니다.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으로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은 신흥 공업국에 대한 가격과 품질의 우위를 점점 잃어 버리고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기업가들은 해외에 공장을 세워 투자하거나 금융산업에 집중했는데, 이는 영국의 산업 공동화와 무역적자, 인력의 유출과 교육수준의 저하 등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개혁파들이 제조업의 기반유지와 관세수입에 의한 재원확보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창하였으나,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보수파에 밀려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거대육군을 창설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삼국협상을 맺었는데, 이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거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 중심의 사회였는데,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서는 세제(稅制)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토지 귀족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로써 사회 활력의 고갈, 자유무역을 둘러싼 대립, 그리고 부족한 재원이라는 세가지 장벽이 대영제국의 개혁을 좌절시키게 됩니다.

1906년 구성된 자유당 내각에서 보어전쟁의 반대와 복지사회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로이드 조지가 재무장관에 취임해 1910년 ‘민중 예산’(peoples budget)에 의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개혁’ 노선은 1차세계대전과 그것이 몰고온 여파에 의해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맙니다.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의 전사자는 무려 90만명으로 2차 세계대전 전사자 40만명의 두배가 넘습니다.
독일 또한 1차 대전 때 180만명과 2차 대전 때 350만명의 전사자를 낳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탈진시켰고, 비인간적인 작전은 영국인들에게 전쟁에 대한 환멸을 가져왔습니다.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독일의 강대국화와 해외진출을 대영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군사 외교 경제적 수단을 통한 억제와 압박으로 독일을 유럽 안으로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1914년 8월 거대한 독일 육군이 성난 파도처럼 벨기에를 지나 파리로 쇄도했지만 9월 4일 프랑스가 파리 근교 마른 강가에서 반격에 성공하여 간신히 프랑스를 지켜내었고, 전선은 프랑스 내에서 고착되었습니다.

전쟁은 철조망과 참호로 대치한 지루한 참호전이었고, 공격하는 쪽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방어하는 쪽은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는데, 적의 집중 포화를 받아 그 곳에서만 20만명이 사상했습니다.

유럽 전장의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해 영국은 1916년 6월 솜 전투에서 25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공세를 펼쳤는데, 수십만명의 보병이 광대한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진한 무모한 전술은 첫날 7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영국은 3개월 동안의 솜 전투에서 50만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원병이었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출전한 사람의 1/3이 집에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8.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은 모든 식민지를 유지하고 독일 식민지까지 취합함으로써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인적, 재정적, 정신적으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제국의 이상에 환멸을 느꼈고, 1925년의 총파업을 비롯해 상습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렸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문명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대영제국의 명분을 흔들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석유수요가 높아겼기 때문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솜전투의 실패 등으로 좌절을 맛 보았던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앨런비 장군이 지휘하는 중동 파견군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십자군이 철수한지 700년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습니다.

clip_image009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로도 유명한 토머스 애드워드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고고학자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카이로 주둔 육군 정보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통치 하에 있던 아랍인들을 메카의 족장인 하시미테 가(家)의 후사인을 중심으로 결집시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도록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916년 연락장교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헤자즈 지방에 파견된 로렌스는 그곳에서 후사인의 아들 파이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협력하여 투르크군에 대항하는 아랍-베두인군의 사막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고, 50기의 베두인 낙타 부대를 이끌고 죽음의 네프트 사막을 기적적으로 건너 난공불락의 요충항인 아카바 요새 기습에 성공합니다.

그 후 로렌스의 아랍 군단은 수에즈 운하에서 가자로 진출하여, 아라비아의 정규군 우익과 합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영국은 이미 메카의 족장 후사인과 만일 아랍인이 영국군과 협력해 투르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랍인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해 주겠다는 밀약을 맺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 프랑스와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밀약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 로렌스는 도리상 중동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아랍의 기병군단을 재촉하여 사라센 제국의 수도이자 아랍의 상징적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낙타와 말로 구성된 로렌스의 부대는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니는 영국군을 앞지르기 위해 투르크 군의 저항이 적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영국군보다 하루 먼저 다마스커스 입성에 성공합니다.
대영제국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에 맞서 영국의 신의와 도덕을 지키고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던 로렌스의 작은 반란으로 인해 사람들은 로렌스를 이상주의자로 기억합니다.

로렌스의 아랍 군단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시리아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인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후에 벨푸어 선언이라고 불리게 된 이 약속은 영국과 미국의 유럭한 유대인 금융가로부터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자금을 순조롭게 조달 받기 위한 것입니다.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벨푸어는 아랍에 독립국가 건설을 원치 않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의 유지라는 영국의 전 후 구상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아랍 통일국가를 약속한 맥마흔 편지, 프랑스와 중동 분할을 약속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이라는 서로 모순된 세가지 약속을 한 채 1차 세계대전을 끝냅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벨푸어와 처칠 그리고 권력의 사제로 변신한 로이드 조지 등의 제국 유지에 대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서로 모순된 것을 뒤섞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앵글로 색슨의 행동양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도덕으로 지탱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과는 다른 제국 정신의 명백한 후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clip_image010

현재 중동지역 지도

1919년 인도에서 출정한 10만명의 영국-인도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서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다시 북상하여 키르크크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확보함으로써 페르시아만과 이라크 전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제국의 야욕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옥스퍼드 대학의 고고학 연구원으로 돌아 갔지만 전장을 누볐던 로렌스는 적응하지 못하였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거부한 채 살다가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1919년 4월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이주가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80년 이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분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려야 했고, 아프카니스탄의 충돌과 이라크의 반란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919년 4월에 북인도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수천명의 무저항 인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잔혹함과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간디와 네루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1920년 4월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인도 식민정부의 예상을 깨고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6년 전 세포이의 반란 이후 ‘대반란의 계절’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 있어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생명선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1차 대전 중에 출정한 군인 390만명 중 150만명이 인도 식민정부의 자체 비용에 의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이 ‘로렌스의 환멸’이나 ‘앨런비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대한 노골적인 지배의 야욕을 드러낸 이유도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국이 무려 700년동안 오직 무력으로 지배해온 아일랜드도 1919년 자치권을 획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영국 왕권의 부정과 완전 독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영국이 1916년 아일랜드의 이스턴 봉기 참가자에 대해 잔혹안 처형을 실시하고, 로이드조지가 투입한 특수부대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학살은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도취했던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열기와 반란에 휩싸였고, 과연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영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가 되었고 이 가운데 새로 등장한 개념이 유화(有和, appeasement)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의 나약함을 느끼면서도 깨끗하게 화해하지 않는,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는데, 로렌스에게 환멸을 심어 주었던 속임수적인 대응 방식이 대영제국의 ‘유화’정책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유화정책은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점차 주변 유럽에 대한 정책에도 적용되었습니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억압으로 발발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피폐해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 요구로 발발하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공황까지 겹치자 독일은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 경제부흥과 함께 금지된 재무장을 실시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집중한 군국주의적인 정책은 단기간 내에 독일을 다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은 독일은 마음 놓고 서부로 진격할 수 있었고, 안일하게 안주했던 프랑스는 참패했고, 됭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영국은 뒤늦게 제국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영국에 비해 영불 해협을 무사히 건널 해군력이 없었던 독일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런던을 비롯한 영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이 군수품을 생산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영국이 항복하지 않고 새로 개발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 경보망과 허리케인과 스피트파이어 같은 우수한 전투기로 대등한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순식간에 밀려 모스크바 앞까지 진격을 허용했지만 추운 겨울과 대대적인 반격으로 방어에 성공합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의 유전과 곡창지대를 노려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노렸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오히려 포위되어 대군을 잃었고, 이후로 계속 소련군에 밀리게 됩니다.

독일이 소련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영국은 직접 대응을 피하고 주로 중동에서 롬멜의 기갑사단과 전쟁을 벌여 보급이 빈약한 롬멜 사단을 물량전으로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됩니다.
미국이 진주만 피해로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격한 소련군에 포위된 독일군은 끝내 다시 패망하고 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영국은 엄청난 물직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나머지 빚더미에 올랐으며,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고 미국에 제국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 방어에 소홀히 하게 되는데, 아시아의 거점이었던 싱가포르를 일본에게 뺏김으로써 13만 5천명 이라는 전례 없는 영국군 포로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처칠은 하원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고 환희에 빠졌지만 수주일 뒤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960년 1월 사망합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대규모 경제지원으로 생활을 영위했지만 전 후 미국은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고, 영국은 식량수입에 대한 대금지불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무기 대여법’의 규정에는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물자와 비슷한 제품은 어떤 것도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 공업제품의 수출을 막아 영국 경제를 망가뜨린 독소로 작용합니다.
1944년 영국의 수출액은 1938년의 1/3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그 해 6월에 영국 상무부는 ‘전 후 영국은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 없으며 영국 산업의 경쟁력 저하는 피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1억 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모두 잃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7억 6천만 파운드였던 대외채무는 33억 파운드로 늘어났습니다. (1938년 영국의 국민 총소득은 46억 파운드였습니다.)
전 후 미국의 무기 대여법 정지로 영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아 배신감을 느꼈지만, 미국에 계속적인 거액의 융자를 구걸하는 것 이외에는 살 방도가 없었습니다.

1945년 영국과 미국의 재무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37억 5천만 달러를 2%의 이자로 대여해 주는 대신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tial tariff) 제도를 철폐하여 미국에 수출문호를 개방하고, 파운드 대 달러 교환율을 1939년 당시의 4달러 3센트라는 고율로 정하고, 조속한 시기에 파운드의 교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영국은 1945년 12월 12개조로 된 영미 차관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협정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영·미간의 지위 역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협정에 의해 파운드화와 경제적 유대에 의해 형성되었던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이 붕괴되어 대영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대영제국의 해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영국의 재무부 고문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 지도부의 대응은 영국의 객관적인 입장이 고려되서인지 숙명적인 체념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원동력을 잃고, 중세시대의 가난한 섬나라로 주저 앉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재건을 돕고, 히틀러가 재무장 하는데 가장 큰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미국의 록펠러를 비록한 금융세력이란 보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연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국은 전후에도 수년동안 식량, 의약품, 연료 등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고, 레스토랑의 메뉴는 제한되었으며, 성인의 1주당 배당량은 버터 170그램, 치즈 40그램, 달걀 1개가 전부였습니다.

영국은 전후에도 세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군사비를 줄일 수 없었고, 1946년의 군사비는 16억 파운드로 1938년의 7배에 달했습니다.
피폐해진 경제로 제국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한 영국은 전후에도 수에즈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 제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퇴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미얀마 국경까지 다가온 1942년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반영 폭동은 영국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지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게 했고, 미국마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1943년 인도 총독이 된 영국의 웨이벌은 인도인의 독립 요구의 정당성을 깊히 인식해 인도인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인도 사수’를 반복하는 처칠의 훈령 때문에 고뇌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인도 육박을 간신히 격퇴하였지만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무력충돌은 점차 심각해졌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요람인 인도에서의 단순한 퇴각은 제국의 미학과 위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모양새좋게 퇴진해야만 했습니다.

clip_image011

1947년 2월 20일 영국 수상 애틀리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고, 정권을 인도에게 양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도의 불신을 해소함과 동시에 ‘최후의 총독’이란 단서를 붙혀 46세의 마운트배튼을 임명합니다.
2차대전 후반에 동남 아시아 연합군 총 사령군으로서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동남 아시아에서 다시 유니온 잭을 펄럭이게 한 마운트배튼은 이미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함께 승리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였던 그는 영국 왕족 신분이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신봉하는 진보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최후의 인도 총독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종말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습니다.
인도 현지인에게 최대한 잘 보인 마운트배튼은 인도와 파카스탄의 분할을 이루고, 예정보다 1년이나 앞당긴 1947년 8월 15일에 명예로운 퇴진을 실시하여 인도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게 됩니다.

8월 15일 이전의 초여름 동안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대한 군악대가 연주하는 동안 친영 인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 병사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위풍을 간직한 채 서서히 부두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품위의 승리였습니다.
1947년 8월 15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해 인도 전역에서 유니언 잭이 내려졌고, 3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도 철수한 영국은 어렵게 점령한 팔레스타인에서도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반영 테러를 계속하는 유대인 세력과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걸프 지역의 석유 이권을 지키기 위해 친아랍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영국이었지만, 미국과 국제연합은 유대인 입장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계속 압력을 가했습니다.

유대 세력과의 유격전으로 탈진한 영국군은 아랍인의 불신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고, 국제 여론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본국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신음하였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1947년 12월 품위 있고 명예로운 퇴진과는 거리가 먼 큰 환멸과 굴욕 속에서 UN과 미국에게 모든것을 맡기고 철수하였습니다.

한편 1956년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는데, 수에즈 운하야말로 1875년 디즈레일리가 사들인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생명선이 된 중요한 권익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최후의 보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영국의 이든 수상은 수에즈 운하 탈환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 채 이집트 파병을 결심합니다.

단독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한 영국은 프랑스를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을 포섭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 그 충돌에 끼어 들어 정전을 강제하기 위한 다국적군으로 영국-프랑스군을 수에즈 운하에 파견하는 방법에 열중합니다.
대영제국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유약하고 치졸한 음모는 보어 전쟁 못지 않은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냈는데, 이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던 영국은 비참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도덕의 근본을 짓밟은 영국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워싱턴의 반발은 격렬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수에즈 파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고, 뉴욕 시장에서 투매로 인한 파운드화의 대폭락은 과대 평가된 파운드화에 의해 간신히 모양새를 유지한 영국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미국의 비난에 이어 수련 흐루시초프는 영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마저 내비침으로써 영국은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단독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수에즈 사건은 대영제국의 완벽한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건이었으며, 수에즈 운하 북쪽 끝에 있는 도시 포트사이드에 걸려 있던 유니언 잭은 영원히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남아 있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사태가 이어졌는데, 영국은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순수히 물러나게 됩니다.
1971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싱가포르의 영국 극동 사랑부에 마지막으로 나부끼고 있던 유니언 잭이 내려짐으로써 영국은 영원히 제국의 깃발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D.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의 특징

1.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미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노예문제로 일어난 50년대의 위기와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의 재건과 대서부의 개척, 그리고 혁신주의적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었기 때문에 북미대륙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 국력을 진출시키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간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의 후진지역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제국주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1890년대에 들어서 자국의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취하게 되자 늦게나마 제국주의적 조류에 참가하여 해외영토의 팽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1890년대 이전에 해외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의 팽창주의자들 가운데는 유럽국가들의 남아메리카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팽창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팽창주의자들은 우월한 국민으로서 미국인이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니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측면에서 팽창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업가 가운데는 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상 해외시장이 필요하다는 경제적인 논리로 팽창을 주장하였습니다.

a) 소극적인 해외진출
이러한 주장들이 남북전쟁 후 1880년대 말까지 소극적이나마 미국의 해외진출을 가져왔습니다.
1867년에 링컨-앤드류 존슨시대에 국무장관을 지낸 시워드(William H. Seward)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라(에이커당 2센트)의 싼값으로 사들였고, 그란트 대통령은 1870년에 카리브해역에 있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를 합병하려다가 상원의 반대로 실패한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하와이는 1875년에 제3국이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어 1878년에는 태평양무역의 중계요지인 사모아군도 내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1882년에 중국의 알선으로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b) 적극적인 해외진출론의 대두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유럽열강의 제국주의 진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도 1880넌대 말에 이르면 해외진출에 대한 종래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정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팽창의 요구에 대해 지식인들과 정치가들도 열열히 옹호하였습니다.

사회학자인 존 피스크는 우수한 앵글로색슨족의 언어 정치 종교제도가 전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치가인 핸리 케봇 로지(Henry Cabot Lodge)도 미국이 열강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해군력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알프래드 머핸(Alfred T. Mahan)이었습니다.
그는 1886년에 해군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영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게된 원인을 분석하여 그 바탕이 무역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상선대의 무역을 보호하려면 대해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강연은 “제해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이라는 저서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이어 1897년에 “제해권과 미국의 이해, 현재와 미래(The Interest of American in Sea Power :Present and Future)’라는 저서를 통해 카리브해를 세력범위로 해야 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고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입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머핸의 이론은 해외진출을 갈망하는 팽창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파나마 운하 건설, 캐나다 합병,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요구하는 대정책(Large Policy)을 내세웠으며, 공화당은 1896년 선거에서 그 정책을 정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c) 미·스페인전쟁 -제국주의로의 진입
1898년에 일어난 미·스페인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5년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에서는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장기화하면서 스페인의 혁명탄압도 가열되어 20만 명의 양민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미국의 언론은 쿠바인에 동정적이었고, 뉴욕에 소재하는 허어스트계의 “져널”지와 “월드”지는 이 사실들을 과장 보도함으로써 미국 국민을 분노케 하였고, 미국의 쿠바혁명에 대한 간섭을 요구하는 여론을 크게 형성시켰습니다.

미국의 쿠바간섭은 인도주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의 농민문제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또한 쿠바가 미국의 시장으로서의 가치성, 국민적 유대감과 실업자 문제의 해결 등의 다양한 요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클리브랜드 대통령이나 그를 계승한 맥킨리 대통령은 다 같이 쿠바사태를 신중히 대처하려 하였으나 1898년 1월에 허어스트계(Hearst)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맥킨리 대통령을 모욕하는 사신을 공표하여 미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으며, 2월에는 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아바나에 파견된 메인호(Maine)가 원인 불명의 폭팔 사건으로 침몰하여 266명의 장병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여론은 “메인호를 잊지 말자”(Remember the Maine)고 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의 압력으로 매킨리정부는 1898년 3월에 스페인에게 쿠바의 독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개전을 두려워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자치부여를 수락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통고하였으나 이 통고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4월 11일 대통령은 선전포고 교서를 의회에 보냈고, 19일에 상.하양원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의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에 인접한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와 태평양의 구암(Guam)을 정복하고 다시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필리핀에 대한 공격은 선전포고 2개월 전에 해군차관보 데오도어 루스벨트가 미국동양함대사령관인 존 듀이(John Dewey)에게 스페인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체없이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도록 극비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제의로 12월에 강화조약(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배상으로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구암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에 대하여서는 2천만 달러에 매수하였습니다.
존 해이는 이 전쟁을 ‘눈부신 소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평가하였습니다.

c)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
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할 당시 중국에서는 열강들이 세력범위(sphers of influence)라는 이름 아래 영토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중국 무역은 전체무역량에서 2%에 불과했으나 얼마든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중국의 분할을 막으려 했고, 그에 따라 1899년 9월에 국무장관 존 헤이는 제1차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이미 세력권을 구축한 열강에 대하여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권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제안을 승인할 경우에는 그 원칙에 찬의를 표한다는 애매 모호한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이와 같이 각국의 회답은 조건부였으나 헤이는 각국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1900년 3월에 문호개방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이 소요 속에서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을까 우려한 헤이는 7월에 제2차 문호개방통첩을 각국(11개국)에게 발송하였습니다.

제1차의 경우와 같이 각국에 회답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각국은 이 통첩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내 왔습니다.
해이의 선언은 중국의 영토보존과 독립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기회는 열리게 되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유린당하는 중국의 영토보존을 도의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d) 파나마 운하문제
미국은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를 얻기 위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계획하고, 1902년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프랑스 회사로부터 건설허가권을 사들였으나 콜롬비아 의회가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의 계획은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나마지역에서 1903년에 콜롬비아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도와 공화국을 수립케 하였고, 콜롬비아는 파나마를 잃은 대가로 2천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어 각국 선박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개방되었습니다.

e) 베네수엘라 문제
1902년에 베네수엘라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많은 차관을 얻어 왔습니다.
그러나 차관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두 나라는 항구들을 포격하고 세관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독일과 영국이 먼로주의를 위반하였다 하여 베네수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f) 멕시코 내전 개입
미국은 1911년도에 멕시코의 석유자원의 2분의 1 이상, 철도의 3분의 2 이상 , 광산의 4분의 3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도에 반동적인 후에르타(Huerta)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윌슨 대통령은 후에르타 정권의 승인을 거부하였고, 입헌주의자 카란자(Carranza)를 도와 새로운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카란자 정부는 반미주의자이며 빈민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판쵸 빌라(Pancho Villa)의 반란에 직면하였습니다.
미국의 보수세력- 카톨릭 교회, 허스트계 신문들, 기업가들 -은 멕시코에 대한 응징을 요구하였으나 윌슨 행정부는 당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할 가능성이 높아 1917년에 이곳에서 철수하였습니다.

그 외에 미국의 태프트 정권은 1912년에 니카라과에, 그리고 1915년에 윌슨은 아이티에 군대를 파견하여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또한 1916년에는 도미니카에 군대를 파견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2. 미 제국주의의 특징

고전적 제국주의가 국가의 이익을 위하고 무력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고 시장 개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후진 국가를 예속시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뒤로는 CIA를 통해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주인사 탄압과 군사 쿠테타, 경제적 혼란과 공기업 민영화 등을 조장합니다.

911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무력을 통한 침공과 점령을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영향력의 감쇠를 군사력으로 상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석유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석유자원과 달러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를 점령하였으며, 리비아와 이란이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핵무기를 포기하였고, 현재 북한만 남은 상태입니다.

1958년 이란의 모사테크 체제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통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자 미국은 쿠테타를 일으켜 친미 왕정을 복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란은 왕정체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국가 발전이 지연되었고, 이란의 막대한 미국 산 무기 구입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와 결국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샤 체제가 붕과됩니다.

미국은 1954년 토지개혁을 주도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 군부정권을 세웠으며, 1961년 쿠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침공과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명분 없는 경제봉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70년에 선거로 집권한 칠레의 아옌데 체제를 무너뜨리고,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사독재 정부를 세움으로써 인권탄압이 극에 달한 칠레의 암흑시대를 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1998년 선거로 집권하여 개혁을 단행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고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석유기업의 민영화를 차단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2002년 4월 군부 쿠테타를 지원하여 성공하였만 2일 천하로 끝나 실패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부시 정권의 관계자들이 반차베스 쿠테타 주도세력과 회합을 가졌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시 중의 학살, 강간 등 전쟁범죄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기구로 2002년 4월 66개국이 인준함으로써 발족되었지만, 미국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군이 개입하는 전쟁이 워낙 많다 보니 미군과 관련자가 전범 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전범처리 대상을 국가나 정부 뿐만 아니라 일반군인이나 민간인도 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3. CIA – 미 제국주의의 첨병

미국은 겉으로는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더러운 일은 주로 CIA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마치 한국의 군사정권이 정의로운 척 하면서도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안기부를 통해 각종 정치공작과 민주인사 고문과 테러를 자행한 것과 비슷합니다.

CIA는 냉전 분위기가 시작된 1947년 7월 트루먼 정권 때 창설되었는데, 국가안보국(NSC)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지는 기구로 탄생합니다.
CIA는 대통령의 외교전략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정보활동기구며, 1947년 12월에는 정보활동에 비밀심리전 수행이라는 임무를 추가로 부여 받아 비밀정보 및 공작기구로 전환됩니다.

CIA는 주로 제 3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활동을 수행해 왔는데, NSC 비밀명령 10/2 문서에 의하면 비밀활동은 프로파간다(선동), 경제전, 사보타주와 반사보타주, 파괴와 철수작전 등을 포함하는 혁명 예방조지, 적대국 내의 지하 게릴라에 대한 지원 등을 포함한 반미정권 붕괴, 반공세력 지원 등을 의미하고 이 외에 요인 암살 등이 실제적으로 추가되었는데 이 내용은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밝혀져 미국 내 여론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NSC 10/2에 미국 정부의 정치공작 비밀개입을 은폐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점인데, 이 조항은 CIA의 제3세계 정치공작에 대해 미국의 개입을 불분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작전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관계자 이외에는 미국의 책임이 분명하지 않도록 계획되고 시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작전이 적발되더라도 미국 정부가 이에 대하 관련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입니다.

특이한 사항은 CIA가 독일 나치의 대소 첩보망을 고스란히 넘겨 받아 냉전정책의 수행에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elen)은 대소 첩보기구 책임자로 그가 관할했던 첩보망을 미국에 넘져주는 대신 전범 처리에서 빠졌습니다.
CIA는 나치가 다차우(Dachau)에서 행한 인체 대상 생화학 실험을 토대로 심리통제를 위한 약물실험을 해 왔습니다.

CIA가 약물실험을 정책적 관심사로 삼은 것은 나치 독일의 인체 생화학 실험 결과를 인수하여 1953년 MK-Ultra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부터입니다.
CIA 앨런 덜레스 국장 밑에서 이 계획을 추진한 리처드 핼럼스는 이를 가르켜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실험으로 생화학 물질을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CIA가 제3세계 비밀공작 활동을 추진한 대표적인 예는 이란의 민족주의 체제 모사테크 정권의 전복과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의 붕괴작전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CIA는 제3세계 정치공작 비밀개입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이후 CIA 활동의 전술적 지침과 경험을 얻게 됩니다.

1941년 영국의 후원으로 이란을 통치해 온 팔레비는1951년 민족주의자 모사테크에 의해 축출당하였고, 모사테크는 영국 투자기업인 영-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합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해 모사테크 정권 전복작전(암호명 AJAX)을 추진하는데, 이란 군부 내 왕당파를 지원해 1953년 쿠테타로 모사테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팔레비를 재옹립 하게 됩니다.

CIA의 다음 작전 대상은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s)의 비경작 토지를 국유화 과정을 통해 몰수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입니다.
1954년 1월부터 6월까지 CIA가 아르벤스 제거 작전에 들인 자금은 2000만 달러로 이는 반란군 조직, 비밀 공군 폭격대조직, 비밀 라디오 방송국 설치, 대체 군부 지도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중령의 발굴 등에 쓰였습니다.

심리전이 주요한 작전에서 1854년 6월 아르마스는 소수의 군부대를 아끌고 미군의 공군 폭격 지원과 비밀 라디오 방송의 흑색선전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아르벤스 정권을 함락시켰습니다.
CIA는 아르마스에게 300만 달러의 군자금과, 군사훈련, 훈련기지, 군수물자 등을 제공하고, 쿠테타 지도자 선발에서 구체적인 작전지도까지 지원함으로써 정치공작의 표본을 완성했습니다.

캐네디 정권 들어서 행한 CIA 비밀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쿠바의 피그만 침공과 이것이 실패한 후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직접 지위한 몽구스 작전, 베트남전 개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피그만 침공은 미국으로 망명한 소모사 정권의 잔류부대를 동원하면 쿠바의 민중이 호응할 것으로 보고 전개했으나 무참히 실패했고, 카스트로 암살 계획은 마피아까지 관련시켰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전에도 개입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만여 명에 달하는 특전사와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3만명의 산악부족을 훈련·지원하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설립한 디엠 정권이 오히려 미국의 외교전략 수행에 방해가 되자 CIA는 군부의 쿠테타를 부추켜 1963년 11월 쿠테타가 일어났고, 디엠은 부하의 손에 저격 당하게 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에서 통비(通匪)분자 색출과 처단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 작전’(Phoenix Operation)을 실시하여 2~3년 사이 4만명의 민간인을 억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유격 근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자행한 베트남 민간인 대량 학살 작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민간인 학살을 도맡은 ‘죽음의 군단’(Death Squads)의 기본 모델이 되었고, 한국군도 동원되어 역사에 오욕을 남깁니다.

베트남전 패전 이후 CIA의 대중적 위상 하락과 미국의 제3세계 군사개입을 거부하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Vietnam Syndrome) 현상으로 닉슨 정권은 간접 개입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CIA는 비밀개입의 군사적 성격을 완화하고, 주로 정치공작 차원에 주력하게 됩니다.
키신저는 CIA를 정책을 결정하는 조직이 아니라 ‘40인 위원회’ 감독 아래 정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칠레의 아엔더 정권 전복 계획은 칠레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ITT와 코카콜라사의 요청에 따라 닉슨과 키신저가 NSC의 결정으로 CIA를 동원하여 추진했습니다.
CIA를 통해 칠레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1973년 쿠테타를 성공시킨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뒤 사임하게 됩니다.

1975년 포드 정권 때에는 미 의회 내에 정보기구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상원의 특별위원회는 CIA의 비밀활동 역사와 카스트로 암살 등 암살 계획을 밝혀 냈습니다.
의회 청문회를 통해 CIA의 창설 과정과 제3세계 비밀공작이 상당 부분 공개되었고, CIA는 의회의 제도적 견제를 받게 되면서 카터 정권 들어 비밀활동이 약화되었습니다.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는 정보수집과 분석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비밀공작 기능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조취를 취해 820개의 직책을 폐지하고, 200명의 비말활동 경력요원과 600명의 대체요원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란 인질사태가 벌어지자 카터 정권은 현실주의 외교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전 CIA 비밀요원을 소환해 인질구출작전을 벌였지만 실패해 강력한 군사주의 노선을 제창한 레이건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CIA는 다시 살아났으며, 1980년 CIA는 9,200명의 요원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15만명이 넘는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CIA의 비밀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 레이건은 CIA의 예산을 대폭 늘려 주었고, CIA의 캐시 국장은 의회의 감시 때문에 공식 루트가 아닌 제3자에게 일을 맡기는 청부작전을 구사하게 됩니다.

이란-콘트라 작전이 대표적인 청부작전의 사례로 이스라엘의 무기를 이란에 팔아 인질문제를 해결하고, 그 무기 판매 수익금을 니카라과 반군 원조자금으로 활용한 1석 2조의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무기 판매가 금지된 국가였으므로, 국가안보 보좌관 맥팔레인은 이스라엘 군사외교 책임자 데이비드킴츠를 접촉하고, 판매 경로에 사우디 거부 카쇼기를 내세웠습니다.

레이건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노리에가를 제거한 파나마 침공과 같은 군사개입과 심리전을 위주로 한 정치공작을 함께 펼칩니다.
현 부시 대통령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국민감시를 강화하고, CIA와 FBI의 기능을 통괄하는 국토안보국(Homeland Security Department)를 창설함으로써 정보 및 비밀공작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4.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 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 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 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 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콜롬비아의 식민지로 독립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파나마인들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의 일로 1963년에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려던 학생 23명이 미군과의 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반미운동의 물결은 파나마에도 몰아쳐 1971년부터 파나마 운하 사용과 관련된 협상에서 파나마측은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1968년 아리아스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 정권은 1973년 이 문제를 국제 문제화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였지만 1969년 군부 반란 움직임이 미국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국내 기반을 강화하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구조를 개선하려 했다. 토리오스는 미 CIA의 지휘 아래 있는 정보요원 출신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대한 좌익운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3세계 국가의 많은 군부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운영하는 군사학교13)를 다니면서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마누엘 노리에가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파나마 운하 문제를 UN에 상정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 문제를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나마의 토리에스 정권은 정보기구 G-2를 동원해 파나마 운하 일대에서 반미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G-2의 책임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대표로 삼아 워싱턴에 파견하여 사용료 인상에 합의하는 등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 CIA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 위치한 남부사령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시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과 중남미 마약 조직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레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 ‘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 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 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 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 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 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 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 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 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 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 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 했다.

5. “개도국 富유출 경제공작 있다” 前 美안보국 직원의 양심선언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지음 / 황금가지::)

미국 국방부가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한국 전자업체들에 전략적 제휴를 비밀리에 제의해왔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국방부까지 나서 세세하게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산업전쟁으로까지표현되는 현재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 책은 ‘산업스파이’의 수준을 뛰어넘어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국익을 위해 국가적으로 ‘비밀공작’을 펼치고 있는지를 그중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저자는 실제로 1971년부터 10년 동안 인도네시아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Economic Hit Man)’로 미국 기업과 정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뉴햄프셔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보스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부친의 지나친 기대에 좌절을 경험했다.

경제저격수란 겉으로는 국제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 개발도상국을 돕는 경제전문가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해당 국가의 국고(國庫)를 미국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공작을 벌이는 사람이다.

그 선발 과정부터 섬뜩하다.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도덕적 가치나 심지어 애국심도 오히려 선발에 장애가 된다. 그 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겪은 좌절을 통해 얼마나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여자를 원하고, 근사한 삶을 꿈꾸는지가 더 중요하다. 공작에는 숭고한 가치는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선발되면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공작원으로서의 삶이시작된다. 목표로 정한 국가에 민간인 신분으로 들어가 경제성장률을 부풀려 예측하고 그에 따라 기간산업의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도록 표적 국가의 정·재계 요인에게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회계부정과 선거조작, 뇌물, 섹스가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엔 ‘자칼’이라는 미 중앙정보국의암살자가 나선다. 저자는 1981년 원인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이이들 자칼에게 살해 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칼이 동원돼도 공작이 성사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젊은 미국 군인을 동원한 전쟁으로간다.

개발도상국들이 이같은 경제저격수의 마수에 걸려 일단 차관을도입하면 그 차관으로 이뤄지는 모든 개발계획은 미국 기업에 돌아간다. 개발이 된다한들 부풀려진 경제적 예측에 의한 것이 제대로 운용될 수 없다. 결국 이들 나라는 국부를 미국 기업에 유출하고 극심한 경제적 파탄에 시달리게 된다. 책은 그같은 사례를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저자는 이같은 미국의 경제적 공작의 근원을 거대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돼있는 미국 특유의정치체제인 ‘기업정치’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저격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혼을 했으며, 친구였던 파나마와 에콰도르 대통령의 의문사를 경험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1980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엄주엽기자

문화일보   2005-04-08

우리는 제국주의 단원을 통해 인간의 끝 없는 탐욕이 각종 음모와 전쟁과 학살과 경제적 혼란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상호존중의 대등한 국제질서가 무너지면, 곧바로 보호무역과 보복관세 같은 경제적 전쟁이 벌어지고 곧이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야고보서 1/14~15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 참고 서적

1. 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한국경제신문)

2. 대영제국 쇠망사 (나카니시 테루마사, 까치)

3. 밀실의 제국 (김민웅, 한겨레 신문사)

4. 국부론 (아담 스미스, 범우사)

5. 세계 제2차대전사 (이대영, HOBBIST)

* 참고 사이트

1. http://www.encyber.com/

2. http://www.greatwar.pe.kr/

Posted in Life News | Leave a Comment »

‘윤리 부재와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와 자멸’

Posted by Digital Angel Master on February 27, 2008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을 가진 사람이 몇몇 있었다.

다들, ‘생각보다 나쁜것은 아니다’ 라고만 말을 했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1970년대, 1980년대에 데모가 그렇게 활성화 되었었는지,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지 대충 알거 같은 느낌이다.

읽어보니, 아무래도 군부독재보다 문민정부가 그렇게 나아보이진 않은것 같다.

이미 우리역시 다국적기업의 경제식민지가 되어버린건 아닐까.

취업난이 만약, 한국외의 기업에서 외압하는 결과라면 우리 어른들은 이미 그 앞잡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글쓴이의 주관이 많이 들어가있다해도, 객관적인 내용을 가지고 글쓰려 노력한듯하니 읽어볼 가치는 있다고 본다.

제발 흑백논리로만 모든걸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요즘 나도 그렇고 어린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논리가 팽배해져있다고 느낀다.

 

 

출처 : http://www.aspire7.net/english/reference-1-3-a.html

 

‘윤리 부재와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와 자멸’(줄여서 자본주의의 붕괴)
위 명제는 제가 성경과 역사, 사상, 정치, 경제학 등을 연구하면서 이끌어 낸 하나의 이론입니다.
즉 공산주와 자본주의 모두 ‘윤리 부재와 힘의 불균형’이라는 같은 이유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몰락했고, 중국은 자본주의를 채택해 형식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유일한 공산국가인 쿠바와 북한은 대다수 국민들이 빈민 이하의 삶을 삶으로써 실질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도 또한 수 많은 폐해를 드러내며 단계적으로 몰락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1. 자본주의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현재 서유럽과 미국,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자본주의체제’라는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체제가 발생한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이 경제체제는 16세기 무렵부터 점차로 봉건제도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중엽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점차 발달하여 산업혁명에 의해서 확립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독일과 미국 등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처음에 사회주의자가 쓰기 시작하여 점차 보급된 용어인데,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명확한 정의(定義)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란 말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윤획득(利潤獲得)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도, 단순히 화폐경제(貨幣經濟)와 동의어로도 쓰이며(이 경우 부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에도 자본주의가 존재하였다고 가정),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대하여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K.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으로 보았습니다.
W.좀바르트는 자본주의체제란 ‘서로 다른 두 인구군(人口群), 즉 지배권을 가지며 동시에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가 시장에서 결합되어 함께 활동하는, 그리고 영리주의(營利主義)와 경제적 합리주의(經濟的合理主義)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 경제적 조직(流通經濟的組織)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M.베버는 근대자본주의는 ‘직업으로서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란 상품생산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하며, 자본주의체제 또는 자본주의경제란, 이와 같은 태도하에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는 유통 경제조직을 말합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①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②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
③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
④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⑤ 생산은 전체로서볼 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덧 붙이면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 경쟁 체제가 허락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각 기업은 가격과 서비스로 경쟁을 벌이는데, 이에 그 누구(국가)도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K.마르크스는 자유경쟁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독점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2. 공산주의
사유재산제도의 부정과 공유재산제도의 실현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려는 사상.
‘코뮤니즘(communism)’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코뮤네(commune)’라는 라틴어의 조어(造語)로서,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하였습니다.
사유재산제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간파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기초로 하여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사색이 시작된 때부터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원은 멀리 고대 유대인들의 에세네파교도(Essenes), 플라톤의 《국가론》,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세 말 T.모어의 《유토피아 Utopia》, 근세 초 T.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Civitassolis》(1623) 등에까지 소급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할 때는 문헌에만 남아 있는 죽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共産黨)이 수립한 과거 소련·동유럽·중국대륙·북한·인도차이나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서유럽의 의식과 양심 속에 인간평등의 관념을 심어 놓았으며, 이것은 그 후에 일어난 각종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문제는 자유, 평등, 박애는 일루미나티의 사상이었고, 이들의 의도는 권력을 민중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제정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프랑스혁명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마르크스는 절대주의국가인 독일에서 프랑스식 민주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실천적 과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가 취약하고 무력하였던 독일의 상황에서,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주체는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근대 노동계급)를 혁명의 주체로 간주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해방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인간적 해방만이 독일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 이 인간적 해방을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1840년대의 전반기에 형성된 것인데, 여기에서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F.헤겔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철학과 L.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주의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적 해방이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疎外)의 극복과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유재산이란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對象化)된 것, 즉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 사유재산이 되면서, 거꾸로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노동자)을 지배하는 현상을 그는 인간의 자기소외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그에게서 공산주의란, 단순한 재산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소외의 극복, 인간성(인간의 본질)의 적극적인 회복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자극에 의하여 촉발되었지만, 동시에 헤겔과 포이어바흐 철학의 주제였던 소외의 개념을 핵심(核心)으로 하여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습니다.
그는 1845∼46년 엥겔스와 더불어 《독일 이데올로기 Deutsche Ideologie》를 집필, 여기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구명하고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적(史的) 유물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그들은 헤겔에서 파생된 독일의 각종 관념론(觀念論)과 포이어바흐의 사회의식 없는 유물론적 휴머니즘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옮아갔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간과 인간의 의식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유물론은 자기들에 선행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나 기계적(機械的) 유물론을 극복한 사회적 유물론이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의 성립으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그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인간은 생산을 중심으로 서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생산력과 그에 따른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요인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제도·법률·사상·종교·문화 등은 이 경제적 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上部構造)입니다.
따라서 토대가 바뀔 때는 이에 걸맞도록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산력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발전합니다.
그 때는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고 이 모순은 계급관계로 이전됩니다.
다시 말하면 낡은 생산관계의 유지에서 이득을 보는 유산계급(지배계급)과,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설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무산계급(피지배계급) 간에는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종래의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 내려는 사회혁명이 피지배계급측에 의하여 일어나, 마침내 새로운 생산관계(경제제도)가 창설되고, 이에 따라 정치제도를 비롯한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에 나타난 원시 공산주의사회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 등 여러 사회제도의 출현과 붕괴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사회발전의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도 이 법칙에 따라 붕괴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데 그치는 일반적인 경제사관(經濟史觀)과는 구별됩니다.
사적 유물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파괴되며, 마침내 생산수단의 공유를 기초로 하는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적 유물론은 이와 같이 일종의 계급투쟁사관(階級鬪爭史觀)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가 계급투쟁사관을 더 간명하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1848년 2월혁명 직후에 발표한《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사회가 출현하기까지의 유럽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인류의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역할을 높이 찬양하였습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이룩한 자본주의 사회도 그 내재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혁명에 의하여 붕괴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자본주의사회가 왜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관한 경제학적 이론을 자세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 《자본론(資本論)》입니다.
마르크스는 2월혁명이 좌절된 후 영국으로 망명,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고전경제학의 여러 범주(範疇)를 비판하는 한편, 그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기초로 잉여가치(剩餘價値)의 이론을 도출하였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그 대가를 임금으로 받아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노동자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의 노동력을 재생산(再生産)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합니다.
이 지불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시간에 창조한 가치, 즉 잉여가치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돌아와야 하는데도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 이윤이 됩니다.
이윤은 곧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자유경쟁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지 않고서는 경쟁에 이길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입니다.

여기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이해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숫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계급의식으로 단결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여, 그 힘으로 부르주아지가 사유하였던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한 것이 1867년에 출간된 《자본론》 제1권입니다.

마르크스는 그의 생애에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엥겔스가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뒤에 출판하였습니다.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과 잉여가치론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자부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선구적인 사회주의에는 과학적 이론이 없다고 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습니다.

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은 엄밀한 구별 없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1875년 《고타 강령(綱領) 비판》에서 계급 없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를 ‘보다 낮은 단계’와 ‘보다 높은 단계’의 2단계로 구별하였습니다.
제1단계는 아직 초보적 단계로서 여기에서는 완전한 분배상의 평등은 실현될 수 없으며,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제1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계급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레닌은 이 공산주의의 제1단계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수립되는 ‘사회주의’ 정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정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레닌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지 않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는 결코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서는 전혀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에 반대되는 말로, 자본주의의 병폐가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개인주의에 있다고 보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를 통해 사회 공익을 우선시 하는 사상입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제 2단계, 즉 ‘보다 높은 단계’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이 분업(分業)에 노예처럼 예속되는 상태가 소멸되며, 따라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가 없어지고, 노동이 단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제일의 욕구(欲求)’로 되고,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낭만적인 공산주의의 미래상은 20세기를 관류(貫流)한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주국인 소련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연방을 해체하였으며, 이어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90년대 초까지 그대로 잔존한 공산국가들의 절박한 현실을 볼 때,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가 꿈꾸었던 그러한 미래는 도저히 도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3. 윤리적 국가관
윤리(Moral Princeples)는 사회 구성원으로써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도리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거나 약자를 괴롭히자 말고 도와주는 것 등입니다.
윤리는 과학과 달리 논리적이지 않고, 의지적이고 당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학에서는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 간의 올바른 인간 관계인 오륜을 윤리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윤리학(ethics)을 제안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해 자연학, 논리학과 함께 철학의 한 분야가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에서 구약 새대에는 십계명을 통해 인간이 지켜야할 기본 도리를 받았고, 예수님이 오셔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윤리는 건전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입니다.
사회에 윤리가 없으면 서로 해를 끼치고, 약탈하고, 사기 치고, 부정·부패하고, 가정이 파탄나고, 성적으로 문란하다가 결국 자멸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 살면 당장 손해나는 것 같지만 서로 돕는 윤리적 사회가 서로 해를 끼치는 비 윤리적 사회보다 전체적인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윤리를 지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나 선하게 산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인간이 가진 본능은 욕심이 끝도 없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지 악한 지에 대해서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대립을 이루었습니다.
맹자는 사람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근원을 이루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등의 4단(四端)이라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불의한 일을 보면 의로운 마음이 발동하고, 자신을 낮춰 상대방을 공경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감성적(感性的)인 욕망에 주목하고, 이러한 악한 마음을 방임해 두면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격 수양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것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가르침이나
예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쌓아올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인간은 욕망으로 인해 악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사회적 가르침에 의해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명의 상반된 주장이 다 틀리지 않는데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은 우리 나라의 퇴계 이황이 명쾌하게 제시하였습니다.
퇴계 이황은 인간은 사단(四端) 이외에 중용(中庸)에 나오는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심(慾)이라는 칠정(七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주장하였습니다.
퇴계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고,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습니다.
4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선한 마음이고, 7정은 감각 기관이 외부와 접촉한 후 발로되며 중용을 지킬때는 선하지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악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미움, 욕심, 노여움 등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인간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4단의 마음을 키워 7정을 제어해야 하는데, 퇴계 이황은 엄숙, 차분한 자세로 항상 옳은 일에만 몰두하는 경(敬)의 실천을 통해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기이원론이란 우주와 인간이 이(理, 원리적 개념, 절대적 선, 존귀한 것)와 기(氣, 현상적 개념, 선악 혼재, 비천한 것)로 나뉘어 있다는 것으로 서양에서 우주를 형이상학(본질적, 완벽, 영원)과 형이하학(현상적, 불완전, 일시적)으로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퇴계 이황은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를 주장해 理의 작용하고 氣의 따른다고 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4인설(四因說)을 주장하며 형상인에서 동력인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영과 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데살 5/23)
영은 내면 깊숙히 자리한 본질적인 ‘나’로 선하고 의로운 마음인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은 겉으로 드러난 실제적인 ‘나’로 생존본능과 생식본능을 가지고 있고 7정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은 내 의식이 있는 곳으로 영과 육신을 연결해 주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곳입니다.
육신의 본능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감정은 계속 자극받아 쾌락을 누리기 원하기 때문에 악해질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 육신의 비교적 악한 감정(본능)과 영의 선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개역 한글)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한글 킹제임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육신의 본능대로 살면 악에 빠져 멸망으로 치닫게 되지만, 영이 살아나 육신을 제어하면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 게 되 생명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헌데 내 영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기(잠자는 상태) 때문에 우리는 보통 내 영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릅니다.
죄사함을 받아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는 것이 거듭남이며, 거듭남으로써 쾌락을 추구하는 육신을 억제시키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국가관을 가지고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한 철학자는 서양의 플라톤과 동양의 맹자입니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서 철인이 다스리는 나라를 제시했고, 맹자는 ‘덕치사상’ 통해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마키아벨리가 ‘백성을 사악한 존재로 보고 권모술수와 권력으로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군주론이나, 제후가 실력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패도정치가 관심을 끌고 실제로 실현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상적 사회를 이룬 적이 두 번 있는데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그리스도교의 초대 교회입니다.
스파르타는 교육과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서, 초대 교회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윤리적 사회를 구현하였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윤리적 사회를 이룬 곳은 이슬람교를 믿는 중동지역과 철저한 법치국가인 싱가포르입니다.
중동지역은 범죄, 도박, 술 취함, 성 범죄 등이 거의 없으며, 싱가포르는 거리에 담배 꽁초 하나 없을 정도로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중동지역은 회교 원리주의가 독재 권력과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점에서, 싱가포르는 범법자를 살점이 튈 정도로 채찍질을 가해 공포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이상국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플라톤의 국가’. ‘맹자의 덕치 사상’, ‘그리스의 스파르타’, ‘그리스도교의 초대 교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a) 플라톤의 ‘국가’
그리스 철학자로 원래 정치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스승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참된 인간 존재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는 학원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청년들을 모아 지식을 사랑하는 학문인 철학(philosophia)을 가르쳤습니다.
소피스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하면서 진리와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했지만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진리의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희곡 형식의 대화편이라 불리는 플라톤의 30여편의 저작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0권으로 이루어졌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국가’ 입니다.
이 저서는 저술 양이 워낙 많은 만큼 형이상학, 인식론, 정치사상, 심리학, 교육학, 예술론 등 철학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1권과 2권은 ‘정의’에 대해서 논의하며 국가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또한 시가(詩歌)의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3권에서는 시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모방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또 교육을 통해 선발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논의합니다.
4권에서는 지혜로운 자, 용기 있는 자, 절제하는 자들을 구분하여 이들이 국가에서 맡는 지위와 역할에 대해 논의합니다.
5권은 수호자들의 공동생활, 재산과 어린이와 여자의 공유, 남녀의 평등과 권리, 철인 통치자의 필요성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동생활과 공동소유를 주장한 것은 플라톤은 개인주의를 악으로 보고 아얘 사회적 존재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6권에서는 철학자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善)의 이데아를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또 가시적인 대상과 가지적 대상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주관의 능력들에 대한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7권은 6권에 이어서 선의 이데아와 앎의 대상들, 그리고 앎의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를 완벽하고 근원적인 세계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은 이데아를 본 떠 만든 불완전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동굴 비유를 통해 동굴 벽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뒤의 빛에 의해 앞에 생긴 그림자만 보게 되고, 자신이 팔을 들면 그림자도 팔을 듦으로 그림자가 자신인 줄 착각하듯이, 우리도 본질적인 자아와 세계를 잊고 산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철학자는 자신의 무지를 깨닭고 이데아에 있는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애지(愛知)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8권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 체제에 대해 논의합니다.
귀족정치를 최상의 정치 체제로 보고 귀족 정치제의 변질 정도에 따라 금권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 참주정치 등의 정치 체제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0권에서는 시(詩)와 훌륭함(덕)에 대해 논의합니다.
시는 모방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에서는 시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앎을 주는 철학이 교육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 혼이 지혜에 대한 사랑에로 정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합니다.
플라톤은 약 5,000 가구 정도로 제한되는 규모의 도시 국가 안에 보편적 진리가 통치 질서로서 관철되는 완전한 공동체를 제시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하나의 이상적 국가이고 플라톤 자신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한 그 나라는 그 나라를 원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국가가 지향해야 할 이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는데 특히 민주 정치를 타락한 국가 형태로 간주하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플라톤의 민주 정치에 대한 생각은 소피스트들 부패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타락이 소피스트들이 법률과 진리를 전도시키는 무책임한 자유에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올바른 인격 형성을 위해 절제와 올바른 마음, 이데아를 아는 지혜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타고난 능력에 따라 생산자, 수호자, 지배자 계급을 형성하고, 각 계급이 조화롭게 기능을 적절히
수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에 의해서만 실천될 수 있는 최고의 덕을 갖춘 위정자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입니다.(철인정치)
이를 위해 위정자로 채택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체육, 음악, 시, 수학, 군사 교육 등을 받고, 몇 번의 선발과정을 겪고서야 50대가 되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혹독한 경쟁체제를 도입한 것은 위정자가 무능하거나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다면 나라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사를 보면 무능한 대통령이 밑에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끈 예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얼굴만 잘 생겼던 레이건 대통령으로 세금을 줄이면서 국방비를 대폭 증강시켜 미국을 헤어나올 수 없는 빚 더미에 올려 놓았고, 악의 화신인 CIA가 예산 부족으로 허덕일 때 예산을 대폭 증강시켜 CIA를 부활시켰고, 냉전이 종식될 무렵 미사일 방어 계획(MD)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어 군사적 긴장을 높였습니다.

b) 맹자의 덕치사상
공맹학(孔孟學)의 중심사상인데,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걸음 발전시켜 덕치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한(漢)나라 이후의 중국을 비롯하여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각국에서 치자(治者)의 으뜸 정치사상이 되어 왔습니다.

덕치사상은 치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이 점에서 전국시대 말기의 군권강화사상(君權强化思想)에서 나온 순자(荀子)의 성악설과는 대비가 됩니다.
또 이것이 덕치사상이 패권사상과 상치되는 연유이기도 하며, 동양정치사상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는 기본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덕치사상은 맹자의 왕도론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맹자는 인간본성(성선설)에 바탕을 둔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실천하는 치자(통치자)의 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사욕에 의한 강권지배를 배격하며, 치자의 지위는 민심의 향배에 따르는 것이라는 민본주의적 혁명시인론(革命是認論)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상생활을 보장해 주면서 백성을 장악하는 정전법(井田法), 신분계층적인 분업설, 유가(儒家) 본래의 이념인 예질서(禮秩序)를 유지하기 위한 효제적(孝悌的) 교육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시대가 끝난 현대에 와서도 유교권 여러 나라 사람들의 정치적 관념 속에 잠재해 있어 선거 때 입후보자의 평가나 외교문제에 대한 일반 논평 등에서 나타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덕을 정치의 원리로 삼는 사상은 이미 《서경(書經)》이나 《논어》 등에서도 보이지만, 왕도를 패도(覇道)와 대비시켜 명확하게 말한 것은 전국시대의 맹자(孟子)입니다.
인의(仁義)라는 덕에 의하여 난세를 통일하고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오려 하였던 왕도사상은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맹자는 왕도와 패도를 엄격히 구별하여 “힘으로써 인을 가식하는 자는 패(覇)이다. 패는 반드시 대국(大國)을 가진다.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자는 왕이다. 왕자는 대(大)를 기대하지 않는다. 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심복(心服)시키는 것이 아니며, 덕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 속에서 참되게 복종시키는 것이다”(公孫丑篇)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의의 덕이 안으로 충실하여 그것이 선정(善政)으로 나타나는 것이 왕도이며, 인정(仁政)을 가장하고 권력정치를 행하는 것은 패도라 하였습니다.
맹자는 왕도를 이루는 전제로서 경제적 조건에 주목하고, 그 조건의 한계와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여 “항산(恒産)이 있는 자는 항심(恒心)이 있으며,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도 없다”고 말하면서 인민에게 일정한 재산, 즉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그들에게 도덕적 생활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토지를 인민에게 공평히 분배하는 정전법(井田法)을 주장하는 한편, 교육제도도 언급하여 모든 국민이 안정된 생활과 풍부한 교양을 지니고 도덕적 질서를 지켜 나간다면 그것이 곧 왕도정치의 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맹자의 왕패론이 관념적인 것이라면, 전국시대 말기에 나타난 순자(荀子)의 왕패론은 보다 현실적입니다.

그는 왕도의 요인으로 인에다가 위(威)를 더함으로써 패도정치의 존재의의를 시인하였습니다.
‘의(義)가 정립되면 왕, 신(信)이 정립되면 패, 권모(權謀)가 정립되면 망(亡)’이라 하였고, 또 ‘법을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면 패’라고 하여 패도를 왕도에 버금가는 차선책으로 내세웠습니다.

c) 그리스의 스파르타
우리는 보통 스파르타 하면 혹독한 교육을 떠 올리지만 스파르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경쟁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로 한 때 그리스를 제패하였습니다.
스파르타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개인주의의 반대 개념) 국가이자 금욕적 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에는 정복자인 자유민 스파르타인과 피정복자인 헬로트 외에 반(半)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가 있었습니다.
자유시민(스파르타인) 전원으로 구성된 민회(民會)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원로회(元老會)와 5명의 민선장관(民選長官)을 선출하였습니다. (과두정치)
자유시민은 토지를 헬로트에게 경작시켜서 수확의 절반을 징수하고, 자신은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남자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과 육체단련에만 열중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리크르고스 왕은 토지 개혁을 해 부자가 가진 토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했습니다.
또한 화폐개혁을 해 금화와 은화를 없애고 철로 만든 동전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돈의 운반과 사용이 간편해지고, 돈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경제가 원활해지고 사치가 사라졌습니다.
남자들은 거대한 식당에 모여 공동으로 똑같은 식사를 함으로써 재물에 대한 욕망이 없게 하였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의 교육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스파르타 시민으로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장로들의 검사를 받았습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들만 양육이 허가되었고 그렇지 못한 아기는 타이게투스 산에 버려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7세 까지 집에서 양육되고 이 후에는 집을 떠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7세된 소년들은 아고개라고 불리우는 교육기관에서 페이도노모스의 감독 아래 생활하였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 목적은 강철 같은 기강, 명령에 대한 복종, 기아와 고통에 대한 인내심, 후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떠한 형태의 경쟁 혹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간의 육성에 있었습니다.
화법과 음악을 배웠으며, 나라를 위해 협동하는 애국주의자로 키웠습니다.
짐내스틱은 군사훈련과 신체훈련의 기본적 의미가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청소년들은 수영, 달리기, 격투술, 레슬링, 권투, 공놀이, 승마, 활쏘기, 투창, 투원반, 야지행군, 판크라티움(권투와 레슬링의 혼합) 등에 대해 훈련을 받았습니다.
청소년들은 20세에 이르면 스파르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실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체육활동은 여성에게도 권장되 여자도 달리기나 레슬링, 창던지기를 했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벌거 벗고 행진했습니다.
이는 남자 시민들이 전투에 나갈 경우 헬로트의 반란을 여자만으로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파르타 여성의 지위를 높여 주었습니다.
스파르타는 플라톤과 맹자가 주장한 이상국가 요소 중 개인주의 배격, 사회적 인간 양성, 재산 공유, 사치를 금하고 금욕적 생활,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대우, 교육의 중요성, 체육 교육을 통한 강인한 인간 양성, 공동생활, 도덕적 질서 유지, 생산자 수호자 지배자 계급 형성 등을 충족시키는 나라입니다.
이는 전설적 인물인 리쿠르고스가 개혁을 통해 ‘리쿠르고스 제도’라고 불리는 특이한 국가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인정이 없어 병약한 어린 아이를 버렸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d) 그리스도교의 초대교회
초대 교회는 예수님 사 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이끌던 교회를 말합니다.
이들은 윤리적 사회를 교육과 사회시스템이 아닌 종교적 신념으로 이룩하였습니다.
기독교회의 인간 사이에 적용된 핵심 교리는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형제를 비판하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니 서로 싸우거나 남의 것을 탐낼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초대 교회는 놀랍게도 사회주의적 사회였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데 공산주의가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가 관리하는데 비해, 사회주의는 고소득자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 저소득자에게 생활비로 나누어주거나 무료진료 등을 실시하는 복지국가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19세기 사회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과 병폐들, 즉 ·자본의 집중·자원의 낭비·실업과 빈곤의 증대·주기적 공황·제국주의와 전쟁 등이 나타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기 위하여서는 개인주의를 폐지하고 반대 원리로 대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새로 만들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는 처음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하여 자유·평등·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운동으로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를 주장하는 사상의 종류는 19세기 이후만으로도 200여 종에 달할정도로 많으며, 이들의 주장은 세세한 차이점은 있으나, 1950년 이전에 나타난 모든 사회주의는 사회개조의 근본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업의 편의를 최 우선으로 하는 추세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법 완화, 임시직 근로자 증가, 외국 기업에 대한 세금혜택, 복지 예산의 축소 등 사회적 공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4. 힘의 균형과 불균형
만약 국가에 윤리적인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면 국가의 각 이익 집단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다른 집단을 위협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시카고에 폭력조직이 넷 있다면, 이들이 공존하는 길은 힘의 균형을 이루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조직이 권총을 휴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조직이 기관총을 소유하면 다른 조직도 기관총을 소유해야 합니다.
국가에는 크게 4개의 권력집단이 존재합니다.
정치권력, 경제권력, 정보권력, 소비권력입니다.
정치권력은 정부에 해당하고, 경제권력은 기업에 해당하며, 정보권력은 언론사이고, 소비권력은 민중입니다.
이들 집단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매우 이기적이기 때문에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4 집단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동지이면서 굴복시켜야할 적이 됩니다.
이 4개의 권력집단이 힘의 균형을 이루면 국가는 안정되지만, 힘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권력의 독재가 시작되고 많은 문제점을 보이면서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럼 국가의 4 권력 집단에 대해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clip_image001

a) 정부 (政府, Government, 정치 권력)
정부란 국가의 존속이나 활동을 위해 국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기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법을 제정하고, 법을 집행하고, 법을 적용하는 입법, 행정, 사법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군사와 치안 권력을 가져 4 집단 중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부 내의 입법, 행정, 사법부가 권력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3권분립이라는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3권 분립이란 국가권력의 작용을 입법 ·행정 ·사법의 셋으로 나누어, 각각 별개의 기관에 이것을 분담시켜 상호간 견제 ·균형을 유지시킴으로서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려는 통치 조직원리입니다.
국가권력의 전횡(專橫)을 방지하여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 이론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1787년 미국연방헌법이었으며, 1791년 및 공화력(共和曆) 3년의 프랑스헌법 등이 이를 채택하였습니다.
영국은 불문헌법국가이기 때문에, 1688년의 명예혁명이 있을 때까지 대헌장(마그나카르타)·권리청원·권리장전 등에 의한 헌법적 원칙이 문서화됨으로써 이 원칙이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한국 헌법도 입법권은 국회에(40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66조 4항),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101조) 속한다고 규정하여 3권 분립주의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정부는 의회에 간섭하거나 사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되며, 입법부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올바른 길을 가는지 항상 감시해야 하고, 사법부는 행정부와 사법부에 부정·부패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3권분립은 행정부의 권한 강화로 깨지기 쉬우며, 행정부 관료와 국회 의원이 결탁한다면 속수 무책입니다.
정부는 기업과 언론과 민중을 통솔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 이내에서 중립적으로 관리해야지 너무 강하게 압박하면 나머지 권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 정부와 다른 권력의 관계
정부는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해 각종 기업 활동에 편의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기업이 소비자를 우롱하거나, 독점 또는 단합을 하거나, 탈세를 하거나, 주가 조작을 하거나, 매점·매석 등 범법 행위를 하면 이를 단속하고 세무조사를 하는 등 견제를 합니다.
즉, 정부가 경제권력의 팽창을 제어하는 수단은 각종 규제와 세무조사입니다.
정부는 방송·신문사에게 각종 정부정책과 주요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어떠한 형태로든 방송·언론의 보도에 제재하거나 검열해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보통 독재 정부로 나아가는 전 단계는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거짓된 여론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언론사가 과당 경쟁이나 탈세로 법을 위반했다면 악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감독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민중에게 치안(경찰)과 민원 서비스(동사무소와 구청)와 법률 서비스(법원), 재난 구호 서비스(119) 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고 국방과 외교를 통해 외세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는 만약 국민이 범법 행위를 할 경우 경찰력을 동원해 구속하고, 검찰의 기소를 통해 법원의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재 정부 하에서는 이러한 권리가 남용되 민주 인사를 국가 보안법 등을 동원해 탄압한 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검찰이나 사법부의 판단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정부는 국민이 전체적으로 올바른 길로 가도록 선도할 의무도 가지고 있는데 음란물이나 자살 사이트, 마약과 매춘의 단속 등을 통해서 민중이 부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로또 복권 같은 것을 발행해 국민을 사행심과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러한 의무에 역행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기업에 비해 힘이 약한 민중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통해 근로자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고, 저소득층이나 장애인이 최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정치권력이 강한 나라는 공산당 1당 독재를 실시하는 중국과 북한이며, 중국은 공안을 통해 민중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고, 북한은 감시조직과 정치범 수용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b) 기업 (企業, Enterprise, 경제 권력)
기업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운용하는 자본의 조직 단위입니다.
기업은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기본적 단위이며, 생산수단의 소유와 노동의 분리를 기초로 하여 영리목적을 추구하는 독립적인 생산 경제단위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⑴ 소유와 노동의 분리: 중세의 수공업자나 현재의 소규모 생업의 경우, 생산자는 자신이 소유하는 생산수단에 자신의 노동력을 가하여 생산함으로써 소유와 노동이 일치하는데 비하여, 기업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노동의 분리를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 점에서 전자와 구별됩니다.
⑵ 영리 목적: 기업은 영리목적을 추구하는 경제사업이라는 점에서 정부 ·교회 등의 비 영리경제조직과 구별됩니다.
영리의 원칙은 중세의 수공업자나 상인의 시대에도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가족의 생활유지를 위해서 영리를 추구한다는 다분히 생활적 영리원칙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업은 소유와 노동의 분리에 의하여 기업가의 가계와는 별도로 독립된 자본 계산단위를 이루고,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하여 영리를 추구합니다.
⑶ 개별성: 이윤 획득을 동기로 하는 사회적 생산을 위하여 사용되는 갖가지 생산요소는 곧 자본입니다.
건물 ·기계 ·재료, 그 밖에 노동력(인간)까지가 이윤획득이라는 목적에 따라서 통일적으로 이용되며 규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요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결합에 의하여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고, 이를 통해서 궁극의 목적인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는 일정량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축적된 자본은 개별적이 아닌, 하나로 집적된 양으로서 전체를 위해서 운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기업이, 한편에서는 일정량의 자본을 집중하는 기구로서, 다른 한편에서는 단일의 지휘 아래 통일적으로 운영되는 기구로서, 즉 두 가지 측면의 통일체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곧 기업을 일정량의 자본의 단위로서, 즉 개별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합니다.
⑷ 독립성: 기업은 생산 ·유통을 통하여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며, 여기서 얻어진 수익을 생산에 대한 대가로서 대금 ·임금 ·세금 ·배당 ·이자 등의 형태로 분배합니다.
기업이 이러한 시장경제의 메커니즘 안에서 존재하느냐 않느냐는 기업의 자기책임에 맡겨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기업은 조합 구성원인 생산자나 가계(家計)를 보조하는 목적을 가진 협동조합과 구별됩니다.
⑸ 생산경제의 단위체(單位體): 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財) 또는 서비스를 생산, 배급하는 경제적 조직의 단위체이므로 소비경제의 단위체인 정부 ·가계와 구별됩니다.
생산경제란, 유형의 재를 생산하는 제조업뿐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를 생산하는 금융업 ·보험업 ·해운업 ·창고업 ·운수업 등이 속합니다.
기업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영리 추구이고, 이윤을 얼마나 내는가에 따라 기업의 가치와 주가가 결정됩니다.
주주 총회에서는 분기별로 얼마나 순익을 발생시켰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이고, 이사들은 기업 실적에 따라 연봉이 조정됩니다.
따라서 인격이나 양심이 없는 조직인 기업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본질적으로 악(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업의 비 윤리적인 사례
1. 일본 최고의 육가공 제품 회사인 니혼 햄이 수입 쇠고기를 일본산으로 속여 제품에 사용해오다 물의를 빚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2. 일본의 엡손 프린터는 프린터 잉크 카드리지의 잉크가 20%나 남았는데도 프로그램상으로 다 떨어졌다고 표시되도록 조작해 부당이득을 취해 왔습니다.
3. 미국 에너지 기업인 엔론은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과 공모해 회계장부를 조작해 부채를 감추고, 순익을 부풀리고, 수 백만 달러의 돈을 빼돌려 C.E.O.와 이사진이 착복하였습니다.
미 의회 보고서에 의하면 엔론은 1996~199년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 20억 달러를 탈루했는데, 이 과정에 최고의 세무 전문가, 은행가, 회계사, 변호사가 관여하였습니다.
4. 우리나라 대기업은 예전에 명절 전 명태 사재기에 관여했습니다.
5. S 그룹은 아파트를 짓기 위해 서민들을 강제로 내 쫓은 적이 있습니다.
6. H 자동차는 자동차 결함으로 수십 번 수리해도 고칠 수 없는 자동차를 교환하거나 보상해 주지 않습니다.
7. L 그룹은 그룹 경쟁력 강화를 위해 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8. S 그룹은 분식회계와 이면계약 혐의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 기업의 비 윤리적인 활동 유형
독점, 덤핑(경쟁자 제거 위해), 담합, 카르텔, 저질원료 사용, 불량식품 제조, 초과 이윤(정유사), 허위 과장 광고, 회계 부정, 탈세, 주가 조작, 허위 공시, 불법 상습, 이중 장부, 근로자 감시 및 탄압, 임시직 근로자 채용, 건설사재 하도급, 하청업체에게 불리한 결제, 카드사의 고액 이자 및 협박, 홈쇼핑의 가짜 상품 판매, 모델 하우스와 다른 아파트, 부풀려진 분양원가, 병이 걸리고 사고가 나도 갖은 핑계를 대며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 이런데도 우리가 대기업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광고에 의해 세뇌 당했기 때문입니다.
* 기업과 다른 권력의 관계
기업은 정부에 부가가치세, 소득세, 법인세 등 세금을 납부하면서 정부 재정에 기여합니다.
기업은 정부가 규체를 철폐하고 노동법을 완화하기 위해 전경련 등의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로비를 합니다.
퇴직 정치인을 이사로 영입해 정치권에 지속적으로 로비를 하거나 거액을 기부합니다.
정치인을 움직이기 위해선 뇌물을 주고 그래도 안되면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암살합니다.(미국의 경우)
기업은 방송 신문사에게 광고를 하면서 수익을 안겨줍니다.
만약 신문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내면 광고를 끊으며 실력을 행사합니다.
아얘 대 기업이 신문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하거나 주식을 보유합니다.
방송·신문사를 장악하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도록 합니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합니다.
기업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도록 요란한 광고를 내 보냅니다.
소비자가 불량품이나 불량 서비스 등으로 항의하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약관을 들이대며 무시합니다.
민중은 소비자인 동시에 기업에게 인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되며, 기업은 최저 임금으로 생산하기 위해 임시직을 고용하거나 해외로 공장을 이전합니다.
세계적으로 경제권력이 강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며 근세 이후 금융가들이 이들 나라의 중앙은행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정부가 엄청난 빚을 짊으로써 정부는 기업의 말 잘 듣는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석유, 군수, 광물, 식량, 금융 등의 다국적 기업은 의회와 행정부의 정치인을 매수하고, 주요 언론사를 소유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고, 정부의 정책과 군사 배치를 결정합니다.

c) 방송·신문사 (言論, Speech, 정보 권력)
방송·신문사는 국민에게 새로운 정보를 사실 그대로 전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공익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방송·신문사가 단합해 거짓 정보를 제공한다면 일반 시민은 정보의 원류가 이들 기관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정보도 하나의 큰 권력이고, 국가와 대기업마다 정보를 전담하는 기구와 부서를 두고 있습니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인류는 정보 혁명이라는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을 겪고 있고, 권력이 단순히 개인·기업·국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기존의 차원과 달리, 권력 본질 자체가 변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지식 정보 계층으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분석하었습니다.
즉, 세계가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옮겨가면서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의 원천이 과거의 물리적 힘과 돈에서 컴퓨터로 대변되는 지식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권력 이동(Power Shift)’론은 정부와 기업 집단이 일반 민중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가동해 자료화 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습니다.
* 방송·신문사(언론)와 다른 권력과의 관계
언론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부정·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정부의 권력 남용과 오판을 견제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정부와 결탁해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은 현재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론은 기업의 비리와 소비자 기만 행위를 고발할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광고로 먹고 사는 언론에게 이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기업의 독단과 권력을 견제할 시민운동이나 시민연합이 필요합니다.
또한 다른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정보 제공처가 요구됩니다.
언론은 국민에게 바른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해외 통신사부터 다국적 기업의 소유에 있으므로 정확한 정보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언론은 정부나 기업과 결탁해 국민에게 잘못된 정보와 의도된 정보를 주기 쉽습니다.
이러한 언론과 다른 권력집단들의 결탁은 게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게임이론은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판단을 할 때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판단을 예측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언론사는 정부와 기업을 비판해 각종 위협과 광고 수주의 어려움으로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들과 결탁하고 다른 언론사와 연합해 거짓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각종 특혜와 수익을 챙기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기 때문에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정보권력이 강한 나라는 우리나라로 대형 언론사가 족벌체제란 이름으로 개인회사처럼 독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정치권과 결탁해 정치권에서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리면 다음날 1면 톱기사로 아무 증거 없이 이를 실음으로써 지원사격하고, 다른 곳에서 문제 제기를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쏙 들어갑니다.

d) 민중 (民衆, People, 소비권력)
민중이란 백성의 무리 또는 다수의 국민이란 뜻으로 국민과의 차이점은 국민은 정치가나 재벌도 국민에 속하지만, 민중은 특정 권력을 소유하지 않은 일반적인 국민을 말합니다.
민중은 국가의 구성원 중 절대 다수이면서도 가장 권력이 약한 집단입니다.
이들은 언론에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서 부는 바로 민중의 노동력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에 권력집단은 민중을 이용하기 위해서 정보 권력과 결탁해 온갖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또한 민중이 올바른 판단력을 소유할 수 없도록 TV 등 시청각 도구와 스포츠, 연예, 오락 등을 통해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사람을 만들어 나갑니다.
* 민중과 다른 권력과의 관계
민중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기여합니다.
또한 군역이나 자원봉사에 참여함으로써 국가를 위해 헌신합니다.
민중은 선거나 투표를 통해 국정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후보자가 거짓말을 하고 여론도 거짓 정보를 준다면 올바른 후보를 선택하기 힘듭니다.
미국은 양당 체제인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부패하였고, 금권 체제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느 당이 권력을 잡더라도 사정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민중은 소비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 중 광고를 보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를 곧 잘 하므로 민중은 소비자 운동 등을 통해 이를 감시하고, 참여 연대 등을 통해 기업의 권력 남용을 제지합니다.
민중은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해 소득을 얻고, 기업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노동쟁의와 파업입니다.
민중은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여론을 파악하며, 유행을 쫓습니다.
민중은 방송·신문사에 대해 시청권과 구독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중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여론 기관을 밀어줌으로써 유일한 정보 제공처인 언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구 언론은 잡다한 양과 재미로 밀어 붙혀 민중이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주류 언론일수록 대기업의 광고를 받기 때문에 대기업을 비판하는 기사를 쓸 수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주류 언론보다는 B급 신문이 더 많은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류 언론이 진실을 호도(糊塗)하는 방법은 사실을 보도하더라도 의도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실만 보도합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경제 봉쇄 조치로 수십만명이 굶어 죽은 것은 거의 보도를 안하고, 후세인이 독재를 하고 양민 학살한 것만 보도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 시킵니다.
세계적으로 민중의 권력이 강한 나라는 완벽한 복지 사회를 실현한 호주와 스웨덴입니다.
이 곳에서는 일을 하지 않아도 실업 수당이 먹고 살 만큼 나오며,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거의 무료이고, 노동법과 환경법이 강해 인권이 보호됩니다.
물론 이러한 이상적 사회에 도달하려면 국가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뒷 받침 되어야 합니다.

5. 공산주의의 폐해
공산주의는 유물론을 통해 정신 세계와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사회 윤리를 무너뜨렸고, 공산당 1당 독재를 함으로써 권력 잡단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렸습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윤리 부재와 권력독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자 비극입니다.
그럼 변증법적 유물론, 공산당 1당 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a) 변증법적 유물론 (辨證法的 唯物論, Dialectical Materialism)
유물론은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형이상학(정신 세계)이 원류이고, 형이하학(물질)은 파생된 현상이라고한 유심론에 반대됩니다.
변증법은 원래 문답법에 의해 상대방의 모순을 제거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이었고, 칸트에 와서는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었습니다.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정립 ·반정립 ·종합)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가는데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됩니다.
이 변증법은 진화론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사물(생물)은 자기 모순을 스스로 발견하고, 이 모순을 분리한 다음, 이상적인 형태로 재결합된다는 내용입니다.
진화론적 유물론을 제창한 사람은 엥겔스로 물질을 제1차 실재(實在)로 보고 물질의 물질적 ·화학적 변화마저도 변증법적 변화와 발전으로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주 만물은 자연 상태에서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 2 법칙에 위배됩니다.
예를 들면 새로 지은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 낡게 되 있고, 육신은 다 성장하면 늙게 되어 있습니다.
낡은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워지거나, 나이가 들면서 젊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즉, 형이하학은 스스로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이상적으로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구상으로 새로 창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육신이 조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세포 안에 있는 DNA 정보 때문이며, 복잡한 빌딩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완벽하고 이상적인 구상인 설계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은 63 빌딩을 설계도 없이 지었다는 것과 같고, 눈 감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니 소설책이 완성됐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계에서 자기 모순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레닌은 의식이 물질의 반영이거나 불완전한 모사(模寫)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사유는 물질인 뇌수의 분비물인듯이 표현하였습니다.
‘의식은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이다’ 라는 생각은 ‘물질이 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한 소크라테스와 정 반대의 생각이고 다음과 같은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즉, 수학적 지식이나 그 밖의 온갖 과학이론들이 물질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마이너스나 허수의 개념은 물질의 어떤 반영이며 만유인력은 어떤 반영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전제가 아주 소박한 반영론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약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레닌이 볼셰비키당(黨)의 교조(敎條)로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교조이고, 스탈린은 이를 1936년 그의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에서 국정철학(國定哲學)으로 공식화 하였습니다.
그 이후 소련학계에서는 이 철학교조 이외의 모든 철학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대용종교(代用宗敎)의 도그마로서 스탈린철학의 독점적 지배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철학교조는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 철학 이데올로기로서 반복적인 학습을 위한 사상 강제주입의 교정이었고, ‘DIAMAT’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는 ‘공산경전(共産經典)’의 중심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물질 ·자연 ·존재는 의식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물질이 1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감각 ·관념 ·의식의 근원이며 따라서 의식은 2차적 ·파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물질은 감각의 근원이 되기는 하지만 관념과 의식의 근원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의식하는데 있어서 물질과 감각은 필수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물질이 존재한다 하여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없으면 그 물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이 먼저이고 물질이 나중일 순 있어도, 물질이 먼저이고 의식이 나중일 순 없습니다.
또한 의식이 물질과 존재의 반영이라 말은 전혀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주장입니다.
스탈린은《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4가지로 공식화하여
①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②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 ·변화 ·발전,
③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移行)으로서의 발전,
④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비(非) 스탈린화 이후 이 ‘DIAMAT’의 교조는 소련과 그 밖의 공산권 내에서마저도 수많은 철학논쟁을 통해 그 이론적 허점과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성이 드러났고, 이 교조의 당적 권위를 장악하고 있던 소련 관학계(官學界)에서도 수차에 걸친 자기 수정에 의해 많은 부분에 걸쳐 대폭 수정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핵이 크게 변조되었습니다.
이 교조의 철학적 기초를 동요케 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으로 유물론의 실재개념이던 ‘물질개념의 소멸’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물질은 원자와 전자로 되 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에너지로 물질을 만들 수 있고, 물질이란 에너지가 안정적으로 결합된 임시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1955∼1958년에 ‘사회주의하의 모순논쟁’이 있었는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주된 모순인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었다고 전제할 때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소련은 이제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고 침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설적 상황이 야기되었습니다.
N.S.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도 공산권과 자본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모순대립으로 파악하지 않고 경쟁적 공존관계로 인정한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시대에는 자연과학자도 그의 과학연구에 ‘DIAMAT’의 인용이 의무화되었으나 소련 과학문헌의 조사연구에서 소련 과학자들이 그들의 전문적 저작 속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법칙을 이용한 예는 단 1건도 없었습니다.
그럼 스탈린이 도그마(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얼마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로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냈고 본명은 그루지야어로 Ioseb Dzhugashvili 입니다.
스탈린은 그루지야의 고리(Gori)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Mesame Dazi)’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카프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후 10 년간에 체포 7회, 유형 6회, 도망 5회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으로 인정을 받아 1912년 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뷰로》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913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그곳에서 2월혁명(1917)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습니다.
4월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어 제(諸)민족 공화국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인 ‘소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습니다.
1919∼1922년 국가통제위원, 이어서 초대 당 서기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 동안 독재적으로 전(全) 소련을 통치하였습니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난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 서기장직에서 경질할 것을 시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KGB(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 이상의 자기 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유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스탈린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 국제적 파시즘의 대두로 ‘대소전쟁(對蘇戰爭)’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하여 잇따른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G.E.지노비예프 등 반대파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 ·군인 ·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 ·투옥 ·제명되었습니다.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제기하여 소위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파시즘의 총구를 일시 서유럽 쪽으로 돌려놓았습니다.
1941년 V.M.몰로토프 대신에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을 겸하여 비로소 정치정면에 나섰는데, 그로부터 l개월 후에 독일의 기습을 받아 독 ·소전쟁(1941∼1945)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는 국방회의 의장, 적군(赤軍) 최고사령관이 되어 개전 초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임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 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테헤란 ·얄타 ·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 연합국(미국 ·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히고, 그들과 밀담을 통해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음모를 짜기도 했습니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되어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였고 동구(東歐)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다가 1953년 뇌일혈로 급사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N.S.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유발하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특히 1991년의 소련정변 이후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는 종전의 신(神)적 숭배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습니다.
정신 세계를 부정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윤리나 도덕은 구 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혁명을 위해서 사람을 핍박하고 처형하는 일은 뜻있는 일이며, 이로 인해 스탈린은 1000만명의 자국 국민을 양심의 가책 없이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b) 공산당 1당 독재
공산당은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지침으로 삼는 공산주의자의 정당입니다.
레닌은 혁명을 위해 공산당 1당 독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힘의 균형을 깨뜨린 독재 권력은 부패했고, 독단 속에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학살 같은 만행을 가능하게 하며 아무도 이를 저지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공산당의 조직기반은 산업 노동자계급에 두고 있으나 지식인 ·농민 ·중산층까지를 포함합니다.
계보(系譜)상으로 볼 때 공산당은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의 한 분파이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공산당과 사회당 또는 사회민주당의 관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이라는 이름은 1848년 2월 발표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유래합니다.
1847년 2월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League of Communists)이 주로 독일의 망명 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을때 마르크스-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촉을 받아 그 강령(綱領)으로서 《공산당선언》을 썼습니다.
1864년 9월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즉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의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국제 노동자협회의 창립선언 ·결의문 ·성명 ·선언문 등을 기초하는 한편, 각국의 노동운동을 결합시키고 여러 사회주의 세력들, 즉 이탈리아의 마치니파(派), 프랑스의 P.J.프루동파, 독일의 F.라살레파, 러시아의 M.A.바쿠닌파 및 영국의 노동조합주의자들과 이론투쟁을 전개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결성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노동자협회는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반목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구체적인 공산당 조직이 등장하지 않았던 1875년 독일에서는 라살레파의 ‘전독일노동자협회’와 W.리프크네흐트 및 A.베버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독일사회민주당’과 고타에서 합당하여 ‘독일사회민주당’을 결성하면서 라살레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타협의 산물인 고타강령(Der Gothaer Programm)을 채택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즉각 《고타강령 비판》(1875)을 써서 이를 통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독일사회민주당이 생긴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사회당 또는 사회민주당이 조직되어 1889년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시대(1889~1914)에 독일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자인 K.J.카우츠키의 지도하에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사회민주당은 다른 여러 국가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혁명의 방법을 달리하는 개량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 대중정당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나 국가의 소멸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강령으로 채택하지 않고, 당은 대중을 이끌고 노동자들은 당의 지도와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전위당(前衛黨) 이론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정당을 직업혁명가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은 1900년부터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에 의하여 전개되었습니다.
일체의 합법적 정치운동이 금지되고 있던 전제주의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정치의식이 투철하고 이론으로 무장된 직업혁명가들의 비밀결사가 되어야만 혁명에 성공할 수 있음을 레닌은 강조하였습니다.
더욱이 지적(知的) 수준이 낮은 노동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의 혁명의식이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컨대 레닌은 혁명의식이 투철한 직업혁명가와 정치의식이 희박한 일반대중을 명백히 구별하고, 당은
① 일반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대중정당이 되어서는 안 되며 소수정예(少數精銳)의 직업혁명가가 핵심을 이루고 중앙집권적 원칙에 의하여 조직된 비밀결사이어야 하며,
②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지도될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당조직론을 전개하였습니다.
레닌의 전위당 조직방침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대회에서 당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17년 11월 혁명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자파를 멘셰비키 및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당명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이라고 고쳤다가 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는 다시 소련공산당으로 바꾸었습니다.
레닌의 전위당 원칙은 ‘제3인터내셔널’의 조직원칙으로 채택되면서 세계의 모든 공산당의 조직과 활동원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당원의 엄격한 정예주의(精銳主義), 철저한 중앙집권제, 전위당의 성격은 20세기를 통틀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노동자정당이 노동자를 위하는 정당이 되기보다는 소수 당간부들의 독선적 관료기구로 타락할 위험성은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실제 소련공산당을 위시한 동유럽의 공산당들은 관료적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는 국민들의 저항에 밀려 해체되거나 다당제로 전환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c) 모택동(마오쩌둥)의 문화 혁명 (1966~1969)
문화 혁명은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한 일종의 권력투쟁이었습니다.
즉,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권력을 내준 모택동이 말년에 다시 권력에 복귀하기 위해선 유소기,등소평같은 개혁 세력을 몰아내야 했는데, 민중의 힘을 빌어 개혁세력을 기득권층으로 몰아 축출함으로써 다시 권좌에 복귀한 쿠테타적 사건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복귀하고 봉건 사상을 타파하자는 문화혁명은 핑계에 불구하고 한 사람의 권력 욕심을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전통 문화는 말살되었습니다.
모택동은 한 무리의 자산계급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중국공산당, 정부, 군대와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섞여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영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에 있지 않다고 민중을 선동했습니다.
모택동은 4인방(강청,요문원,왕홍교,장춘교)을 시켜서 개혁파의 약점을 잡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탐문 끝에 해서파관이란 연극이 눈에 띄웠고 개혁파의 연결고리를 거기에서 찾아 냈습니다.
그 내용중에 은근히 모택동을 비판한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권을 장악한 모택동은 북경대을 중심으로 문화 대혁명을 확산 시켰고 그 와중에 홍위병을 조직하여 중국전체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렸습니다.
홍위병은 학생, 농민, 노동자로 구성되었고, 기득 세력(당 관료)과 대립시켰습니다.
문화 대혁명 기간에 수 많은 당 간부와 지식인이 비판을 받고 투옥되거나 추방되었고 살해당했습니다.
또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지는 구호아래 불상, 문화재, 도자기 등이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대규모 군중운동이 지속되었고 한 손에는 빨간 모택동어록을 들고 매일같이 문화대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부르짖었습니다.
모든 생산활동은 정지되고 파괴와 비난은 미덕이 되었으며, 전 인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학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모택동은 1967년 초 “모든 권위를 반대하며 그들로부터 권력을 뺏어오자”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모택동의 이러한 호소가 있고 난 뒤, 당시 중국의 수상이었던 유소기, 중국혁명의 노간부이자 군부의 최고지도자였던 팽덕회로부터 시작해서 전국적인 모든 당기구는 혁명위원로 대체됨으로써 국가기구는 거의 마비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회는 극도의 혼란, 불안,무질서의 상태속으로 전락되었으며 경제는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모택동은 군의 개입을 요청했고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홍위병의 난동을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산업과 군대의 모든 기구를 통제 감시하기 위해 군사통제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어느정도 진정국면이 되자 1969년 제9회 전대를 개최하고 4인방 중심으로 권력구조 체제로 변화 시킵니다.
문화대혁명은 10년 동안 중공을 혼란에 몰아넣었고, 장기간 대학을 폐쇄하여 교육 과학 기술 등 전문분야의 지도를 당성이 강한 비전문가가 장악하여 전문성보다 당성을 중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문분야의 지식 수준이 저하되었고 老 전문가의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여 사회 발전에 큰 장애를 초래하였습니다.
중국(당시 중공)은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건국이래의 몇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를 통하여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면서 이는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 규정하였습니다.
또한 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사형당하거나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clip_image002

대규모 군중들은 모택동어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였습니다.
플랭카드는 “목숨바쳐 모주석을 보위하자”라는 내용이 있어 문화 혁명이 모택동을 위한 것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clip_image003

흑룡강성 당 간부가 군중 집회에서 공개적인 비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비판운동이 끝난 뒤 당사자는 자살을 했습니다.

clip_image004

모택동의 호소에 뒤따라 흑룡강성에 성립된 혁명위원회를 축하하기 위하여 열린 군중집회의 모습입니다.

clip_image005

사원 앞에 불상을 내놓고 공개비판할 때 사용하던 고깔모자를 씨운 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놓았습니다. 불상의 머리와 팔다리는 잘려지고 얼굴에는 모욕적인 선을 그어놓았습니다.

문화 혁명은 의도적으로 민중(홍위병)에게 권력을 실어줘 힘의 균형을 깨뜨렸는데, 문제는 이들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죄 없는 사람을 핍박, 살해하게 되었고, 급기야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 군부로 진압한, 윤리 부재와 힘의 불균형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문화 혁명 당시의 상황은 영화 ‘패왕별희’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정치권력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공산국가에서 일어난 대량할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구 소련 스탈린 : 75,000,000 명 학살
2. 중국 모택동 : 60,000,000 명 학살
3. 캄보디아 공산화 이후 : 3.000.000 명 학살
4. 월남 공산화 이후 : 15,000,000 명 학살

6. 자본주의의 폐해
a) 물질주의 (物質主義, Materialism)
물질주의는 유물론과 같이 정신세계보다는 물질세계를 중시하고, 물질 소유를 갈망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물질주의는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물질 만능 주의로 발전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돈으로 못하는 것이 없고, 돈이 많으면 어디서나 대우 받고, 돈이 많음은 사회적 성공의 잣대가 됩니다.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돈은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이나 사람이 돈을 위해 산다면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사는 것 입니다.
화폐란 경제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한 매개체로, 금본위제에 근본을 두고 있지 않은 요즘 화폐는 천재지변이나 세계전쟁, 국가부도 등의 상황이 일어나면 무용지물이 될 가짜 돈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경제혼란이 일어나면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금 값이 오르게 됩니다.
돈에 집착하게 되면 지나치게 돈을 아끼는 구두쇠가 되거나, 돈을 벌기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돈=행복이라는 공식이 머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국에서도 로또 복권은 인기라서 수 백억원씩 당첨되는 사람이 나오지만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대부분 가정이 파괴되고, 각종 소송에 휘말리고, 사기 피해를 당하면서 오히려 빚더미에 앉고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문서)
돈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나 필요 충분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물질에 집착하고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정신 세계를 멀리하게 됩니다.
또한 정당하게 일해서 돈을 벌지 않고 도박이나 투기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진리를 벗어난 행동이며,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는 정신 세계를 간과시키고, 윤리를 파괴하면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붕괴시킵니다.
물질 만능주의→사치,교만→쾌락주의→성적 타락,마약→윤리 도덕의 파괴→가정 파괴, 사회범죄 증가→사회 붕괴 우리도 만약 큰 돈이 주어진다면 먼저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차를 산 다음,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다닐 것이고, 그것도 싫증나면 좀 더 쇼킹한 것을 찾게 되고, 윤리 의식이 실종된 채 바람을 피거나 수시로 애인을 바꾸다가 돈이 떨어지면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급기야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없어서 바라던 것이 주어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물질 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퀴즈 문제 하나하나에 돈을 걸고, 퀴즈를 풀 때마다 돈이 불어나는 것을 보고 환호하고, 만약 돈이 걸려 있지 않다면 문제를 풀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더라도 서로 내기를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혼 시 상대방의 인격이나 사랑보다는 상대방의 능력(돈이 많거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변호사와 결혼했는데 변호사가 신혼여행에서 혼수가 너무 적다고 핀잔 준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호텔에서 뛰어내려 죽은 여자를 보면 돈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은 것은 사회적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내가 돈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명품 의류와 명품 시계, 명품 가방을 찾게 되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상대방 기를 죽이며 쾌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 육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쫓아다니는데 술,음악,전자 오락,도박,영화 등 뇌를 자극해서 도파민을 분비시킴으로써 쾌감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점점 시시해지고, 좀 더 짜릿한 쾌감을 줄 수 있는 마약이나 쎅스를 원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중에 윤리나 도덕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 됩니다.
국민 소득이 높은 선진국일수록 마약 문제가 심각한 것은 마약이 쾌락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쾌락을 위해서 성매매나 원조교제가 성행하고, 퇴폐적 음란물이 번성합니다.
쎅스도 일반적인 것은 성에 안차고, 각종 변태적인 행위나 동성연예로 묘한 쾌감을 즐깁니다.
가정에 있어서 청소년들은 점점 반항적으로 변하고 쾌락만 추구하다가 결국은 가출하게 되고, 남편은 술이나 도박에 중독되거나 바람을 피우면서 속을 썩이고 한 술 더 떠 손찌검까지 하게 되고, 아내는 홈쇼핑에 중독되어 집안을 발명품 전시장으로 만들거나 사치하고 놀러다니기에 바쁘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학대하고(부모 돈 많으면 효도 하고), 이혼율은 급증하는데 아무도 아이를 맡지 않아 아이들은 고아원에 버려집니다.
사회 범죄도 날로 증가해 택시로 위장한 강도가 목 졸라 죽인 여자를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다른 여자를 태우고, 딸이 과외비 안 준다고 엄마를 찔러 죽이고, 은행 지점장이 고객 돈을 빼돌려 달아나고, 현금 수송원이 현금인출기를 털고, 정치권은 부정 부패로 연일 비리 사건이 터지고, 금융 다단계나 쇼핑몰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벤처 기업 사장은 투자자들의 돈을 가로채 달아납니다.
선진국인 미국 교도소에는 180만명이 수감되 있고, 교도소가 모자라 매년 새로 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 범죄가 증가하면서 그 사회는 경쟁력을 잃고 점점 몰락하게 됩니다.
살인 강도 사건이 일어나 피의자를 구속하면 보통 카드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카드 빚이 보통 먹고 살기 위해 진 것이 아니라 유흥비로 몇 십만원짜리 술자리를 벌이다 진 것이고, 범행을 저지르고 난 후 벌은 돈 역시 유흥비로 사용합니다.
사람이 항상 감사하고, 검소하며 성실히 산다면 죄 짓고 남에게 피해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라는 경제 서적은 성실히 일하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고 투기적으로 돈을 버는 미국식 자본가를 선망의 대상으로 올려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고, 10여권의 유사 책을 발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투기 자본 때문에 미국의 제조업이 흔들리면서 몰락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수 조 달러에 이르는 투기 자본이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후진국 경제를 파탄내고 선진국 경제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b) 개인주의 (個人主義, individualism)
개인주의는 국가나 사회의 공익보다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최 우선시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후 발전하였습니다.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Egoism)와 깊은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타인을 위한 선행을 우선하는 이타주의(Altruism)의 반대 되는 개념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회적 공익을 무시할 수 있는 상태로 발전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는 이기주의는 인간이 가진 동물적인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로 인해 많은 악이 생겨나고, 사회적 모순을 초래하기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단체생활과 공동식사, 공동소유를 하며 이기적 본능을 잊고 사회적 공익을 우선하는 사회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군대의 소대는 한 명만 잘 한다고 칭찬 받는 것도 아니고, 한 명이 잘못하면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하고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형성이 됩니다.
19세기 사회 사상가들은 자본주의는 기본원리인 개인주의로 인해 자본의 집중 ·자원의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제국주의와 전쟁 등의 병폐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밤 늦게 몰래 쓰레기 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행태입니다.
개인주의로 인한 혼란이 심해지자 사회는 ‘질서’라는 최소한의 예의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버스가 왔을 때 서로 먼저 타겠다고 몸 싸움을 벌이는 것 보다 줄을 서서 타는 것이 훨씬 더 힘들이지 않고 빨리 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개인주의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며 국가를 붕괴시킵니다.
개인주의(이기주의)→집단 이기주의→권력집단의 권력다툼→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금권지배→국가 붕괴집단 이기주의란 개인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니까 주민들이 집 값이 떨어진다고 결사 반대한다던가, 핵 폐기장은 한국 어딘가에는 꼭 지어야 하는데 다른 곳은 되도 우리 고장 만큼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 등 입니다.
원래 설립 목적이 영리 추구인 기업이 조직된 집단 이기주의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부 부서도 자신의 이익과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서로 알력 다툼을 벌이고, 노동자도 가끔 회사가 망할 때까지 파업을 합니다.
영국의 아편전쟁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국가적 이기주의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미국의 니부어가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대해 깜짝 놀랐습니다.
니부어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한 개인은 도덕적인데 패거리가 되면 부도덕하거나 비도덕적이 된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그에 따른 공범자 의식이 자리잡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원래는 이해심도 많고, 따뜻한 마음이 많았던 사람도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 한 사회 집단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회집단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까지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집단의 범위 안에서 이타적인 행동이 집단 밖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부어는 “사회집단의 이기심 등 악을 견재하는데 설득이 소용없고 악을 제거하기 위해선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폭력과 강제력을 동원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기 때문에 바람직 하지 않고, 개인적 도덕 가치판단에 의해서는 물론, 사회 구조나 제도자체의 개선이 뒤따를 때 해결이 가능해 질수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신념이나 교육과 사회 시스템으로 사회 악을 해결해야 한다는 저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의 4 권력 집단은 집단 이기주의가 발동되 권력 투쟁을 벌입니다.
이 과정 중에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부 권력과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실시하기도 하고, 피 흘린 민주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성공해 민중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기도 합니다.
김석중 전경련 상무는 2003년 1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의 경제정책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다” 라고 발언해 파문이 일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재벌 규제를 강화하려는 대통령직 인수 위원회의 활동에 제동을 가하려는 고도의 권력투쟁적 표현입니다.
즉, 사회주의적인 것이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식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통해 민중을 위한 복지적 정책(예를 들어 노동법 강화)에 제동을 가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현대의 사회주의는 스웨던, 노루웨이, 덴마크, 프랑스 등 서유럽 선진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채택하는 선진 시스템입니다.
사회주의는 대기업과 자본가의 횡포로부터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예를들어 복지사회에서 누진세를 적용해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사회주의적 방식입니다.
순수 자본주의에서는 실업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이 굶어 죽더라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미국이 요즘 주창하는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경제 개입을 차단하고, 자유무역을 실시하며, 복지혜택을 줄이고, 노동자의 권익을 축소시키는 것인데 이 모두가 대기업을 위한 순수 자본주의적 발상입니다.
민중은 오히려 대기업을 위한 규제개혁이나 자유무역은 찬성하면서 민중을 위한 제도는 반대합니다.
이는 민중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정부나 기업의 홍보에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궁극적으로 경제권력이 전권을 잡고 국가를 장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권력은 집단 이기주의의 가장 좋은 당근인 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면 공자나 맹자 같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를 외면할 사람이 없고, 언론기관은 인수하거나 새로 설립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민중을 제외한 세 권력이 민중의 피를 빨아 먹고 자신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기 위해 야합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언론은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찬양하고, 정부는 대기업을 위한 규제 해제에 앞장 섭니다.
정보력이 뒤진 민중은 진상을 알기 힘들고, 자신의 권익이 점점 줄어 들며, 생활이 점점 바빠지면서도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미 미국은 금권정치 하에 들어 갔고 정부의 정책과 군사배치, 전쟁이 다국적 기업과 금융기관을 위해 결정되고 언론기관은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기사만 내 보냅니다.
미국에서 기업 활동의 규제는 거의 없으며 노동자는 아무 때나 이유 없이 해고 당할 수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의 목표는 국제 경제기구나 협정을 통해 전 세계에 손을 뻗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것 입니다.

7. 자본주의의 붕괴 과정
1) 독점, 과점, 담합 (獨占, 寡占, 談合, Monopoly, Oligopoly, Consultation)
독점이란 한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이 단일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장조직 형태입니다.
독점 기업은 시장 지배력(Market Power)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격 결정자(Price Setter)로서 시장 가격을 임의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면 생산량을 늘릴수록 평균 비용이 감소하므로 대기업일수록 유리합니다.
때문에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업 확장과 인수 합병을 하고 있습니다.
즉, 완전 경쟁 체제 하에서는 높은 생산성과 기술력을 가진 소수의 기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퇴되거나 틈새시장을 노리는 군소 업체로 전락합니다.
독점 기업은 공급량 조절을 통해 시장 가격을 변화시킬 수 있고, 정상 이윤을 웃 도는 초과 이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대포적인 독점 기업은 세계 다이아몬드시장의 80% 이상을 석권한 드비어스, PC용 운영체제와 사무용 프로그램을 거의 독점하는 마이크로 소프트사가 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통합 사무용 프로그램인 Office XP는 70만원이 넘으며, 이는 초과 이윤을 달성할 수 있는 가격이고, 경쟁 제품인 한컴 오피스 2003의 17만원 보다 4배 정도 비쌉니다.
보통 제조업의 순 이익률은 잘해야 5% 내외인데 비해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순 이익률은 40%에 육박합니다.
독점은 소비자에게 불리하고 사회적으로 많은 폐해를 끼치기 때문에 각 국에서는 독점을 규제하고, 자연 독점이 발생하는 철도, 통신, 전기, 수도 등 공익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장합니다.
아르헨티나는 국가 기간 산업을 외국 자본에 매각해 민영화 했다가 전기.전화.수도료 등 공공요금이 일제히 올라 서민생활이 압박을 받았고 전기 요금은 무려 3~4배나 올랐습니다.
과점이란 소수의 거대기업이 시장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산업에서는
① 소수의 거대기업이 공급량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② 이들 대기업은 서로 가격인하경쟁 등으로는 경쟁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카르텔이나 담합과 같은 각종 협정으로 공존(共存)을 꾀하고 있으며,
③ 한편으로는, 가격경쟁 이외의 다른 수단(광고나 상품 차별화)을 이용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④ 이 경쟁은 서로 자사(自社)의 행동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와 반응을 고려하면서 행해집니다.
이와 같은 시장형태가 과점이며, 과점이 일반화된 경제를 과점경제라 합니다.
과점경제에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극심해지며, 가격수준은 과점기업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가격하락요인이 있어도 값을 내리려 하지 않고[이것을 하방경직성(下方硬直性)이라고 한다], 반대로 임금상승과 함께 가격인상이 이루어져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의 과점 기업은 자동차, 전자, 식품, 이동 통신 등 이며 정유업체는 국제 유가가 오르면 바로 휘발유 값을 올리면서도(유가 인상이 소비자가에 반영되려면 한참 걸립니다.) 국제 유가가 내리면 휘발유 값을 잘 내리지 않는 습성을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과점 기업은 석유, CPU, 군수 업체 등이며, 세계화가 짐행되면 각 산업별로 2~3개 업체만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담합이란 과점 기업들이 가격이나 생산량을 가격이나 생산량을 조절함에 있어 서로 상의하여 공동 보조를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점기업은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담합을 통해 가격을 협정해 초과 이윤을 성취하는 비경쟁 행위를 하게 됩니다.
과점 기업들은 담합을 통해 독점 기업과 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이동 통신 회사들은 요금 담합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독점금지법(獨占禁止法)이나 공정거래법(公正去來法) 등의 법적 조치로써 독점이나 담합을 규제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국제협정 등을 통해 이러한 규제가 완화되고 있고, 교묘한 담합행위는 막기 힘든 실정입니다.

2) 금권 정치
이렇게 독점과 과점으로 성장한 세계적인 기업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은 매출액기준으로는 미국의 엑슨 석유(2100억달러)이고, 종업원 기준으로는 미국의 월마트사로 무려 124만명이 넘습니다.
우리나라 예산이 2000년 기준으로 154조 이므로 엑슨 석유는 우리나라 예산보다 많은 돈을 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대해진 대기업들은 정부 정책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결정되도록 정치인을 매수하거나 정당에 거액을 기부하고 아얘 고위 정치인을 임원으로 앉혀 로비를 시키거나 주식을 안겨줍니다.
군·산 복합체인 보잉사는 매년 80만 달러를 의회에 공식 로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석유, 군수, 식량, 자원, 금융 등 대기업의 뜻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군사를 배치시키며, 전쟁까지도 감행하게 되는 것 입니다.
미국 정부를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대기업 집단이지만 그 핵심 세력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일루미나티입니다.
그들은 미국에선 외교안보위원회(CFR)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영국의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와 협력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유대인들은 JP 모건 체이스 같은 거대 금융기관을 소유하고 있고, 대형 석유, 군수업체도 이들 소유입니다.

3) 금권의 언론 장악
대기업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언론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해 주류 언론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같은 목소리를 내게 합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어떤 사건이 터지면 처음엔 다른 목소리를 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목소리를 냅니다.
미국 국방부가 호의적인 국제 여론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공작 전담반인 ‘전략영향사무소’(OSI)를 운영하고 있고, 뉴욕 타임즈는 OSI가 테러와의 전쟁 기간 동안 날조된 기사까지 싣게 할 수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언론재벌인 루퍼스 머독은 신문, 방송, 잡지 출판,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보유한 다국적 미디어 그룹의 경영주입니다.
그는 합병을 통해 기업을 키워 왔는데 영국 BBC를 무너뜨리기 위해 손해를 보면서 영화 판권과 스포츠 중계권을 비싼 값에 사들였고, 신문 가격 인하로 경쟁사를 파산시켰습니다.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기존의 관행과 전통, 역사성을 무시하면서 대중 지향적이고 오락과 선정성을 바탕으로 일관했습니다.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포르노 사진을 매일 싣기까지 하면서 철저한 상업성으로 기존 언론들이 다루지 않는 오락과 연예를 주무기로 대중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등 언론이 맡아야할 사명을 잃어버린 채 방송, 신문등을 단순히 상업적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신문과 방송을 쓰레기로 만들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각국 정부와 언론 등으로부터 많은 경계를 받고 있습니다.

4) 민중의 노예화
노예란 죽도록 일만 하고 겨우 먹고 살 만큼의 보상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현재의 미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1920년대 보다 결코 낳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가장 혼자 벌어 5~6 식구가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맞 벌이를 해야 겨우 자녀 1~2명 키워 가며 먹고 삽니다.
또한 미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탄압과 사회보장 축소, 자유로운 해고 등으로 점점 노동의 자유를 잃고 있습니다.

미국 전체 인구의 2%가 국부(國富)의 54%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미국 전체 가구의 55%는 순자산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거나 마이너스 상태에 있습니다.
1998년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1973년에 비해 고작 1달러가 늘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임금격차는 42%에서 89%로 벌어졌습니다.

미국인들은 25년 전보다 1년에 1개월을 더 일하고 있지만 임금은 정체되고, 사회 안전망은 위축되었으며, 근로조건은 악화되었습니다.
미국의 노동비용(Labor Cost)은 선진국 중에서 영국 다음으로 낮습니다.
최근 들어 노동자를 불법으로 해고하는 비율이 1980년대에 비해서 3배나 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200만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3천만명 이상이 배고픔의 고통을 겪고 있고, 1천2백만명의 아이들이 성장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UNICEF(유엔 아동 기금)에 의하면 미국 국방비의 10%만 투자해도 시간당 천명씩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노동 생산성이 향상 되었는데도 임금 수준이 저하된 것은 이들의 잉여 노동력이 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기업에 순익이 발생해도 C.E.O.나 이사진이 엄청난 연봉과 스톡옵션 등으로 나눠 갖기에 바쁘지 직원들에게는 거의 혜택이 돌아 가지 않습니다.

2002년미국 500대 기업의 CEO 평균 연봉은 1천 83만달러(130억원)인데 반해 생산직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2만 7천 달러로 400백배에 이릅니다.
세계 최대의 에너지 기업인 미국의 엔론사는 파산하기 직전 케네스 레이 회장에게 급여와 스톡옵션으로 1억 5천 3백만달러(1천 8백 36억원)를 연봉으로 지급했습니다.
또한 연봉이 많아질수록 엄청난 세금에 시달리는데 이들이 낸 세금의 대부분이 연방정부가 유대인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고, 군수 업체를 배불려 주기 위해 쓰여지고 국민을 위한 복지 혜택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임시직이 늘어 점점 박봉에 시달리고, 기업이 아무 때나 해고가 가능해 언제 짤릴 지 모르는 불안감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노동자의 90%가 고용 불안을 느끼고 살고 있고, 79%가 노동운동이 해고의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시직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심각해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가 임시직이 되었고, 대 기업들은 정규직을 거의 뽑지 않고 인력 송출 회사를 통해 임시직을 고용합니다.
아무런 복지 혜택도 없고, 정규직의 절반도 안되는 임금을 받는 임시직 근로자들은 신혼여행도 무급휴가를 내고 다녀와야 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5) 투기자본의 극성
투기자본이란 산업 활동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 금융 이익을 위해 몰려 다니는 돈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쉽게 돈을 벌려는 투기자본은 많아지고, 전통적인 산업활동은 위축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투기자본으로 인해 각 나라의 경제가 불안정해지고, 남미와 동남아 등지의 국가들이 외환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투기자본이 활동하는 금융업에 대해 알려면 먼저 부(富)의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돈이 많으면 부(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방 안에 10억을 쌓아 놓아도 밖에서 문을 잠그면 돈 냄새만 맡다가 굶어 죽습니다.
은행에 10억을 예금해 놓아도 은행 전산망 하드 드라이브의 메모리에 불과하며, 은행이 부도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돈의 효용을 느낄 때에는 돈을 주고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를 받을 때입니다.
경제학적으로 부(富)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천연자원이나 농산물에 있고, 노동을 더해 가치를 높힐 때도 발생합니다.
다이아몬드 원석보다 노동력을 투입해 반지로 만든 것이 더 가치가 있으므로 원석을 가공해 부(富)를 증대시킵니다.
유통업도 부를 증대시키는데 바닷가에 있는 생선보다 이를 수요가 있는 도시로 운반한 생선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즉 부(富)는 전통적인 산업활동에서 발생하며, 금융업은 이러한 산업활동에 자본을 제공하기 위한 협력기관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금융업이 발달해 금융업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각종 금융기법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금융업 자체는 부를 증대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금융업 자체에서 누군가가 이익을 보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자금력과 높은 정보력을 가진 외국자본은 국내 증시에서 높은 수익률을 올리지만, 자금력과 정보력이 모두 뒤진 국내 개미군단은 거의 손해를 봅니다.
따라서 어리숙한 지식으로 주식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내 재산을 들어다 고스란히 외국인에게 넘겨주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습니다.
증권사 직원과 자본가 등이 개입한 소위 ‘작전’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손해를 통해 이득을 보겠다는 의도입니다.
얼마 전 증권 방송에서 허위 추천정보를 방송한 것이나 금융 피라미드 사기 사업도 같은 유형입니다.

* 그럼 투기자본 유형인 헤지펀드, 환투기, 파생금융상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헤지펀드(Hedge Fund)는 국제증권 및 외환시장에 투자해 단기이익을 올리는 민간 투자기금 입니다.
헤지는 울타리란 뜻이있고, 펀드는 기금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어떤 위험으로부터 도망친 자금이란 뜻인데 그 위험은 세금과 정부의 규제입니다.
따라서 세금이 없는 나라에 본사를 차리고 운영하는 투기자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지펀드는 100명 미만의 투자가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partnership)을 결성한 후에 카리브해의 버뮤다제도와 같은 조세회피(租稅回避) 지역에 위장거점을 설치하고 자금을 운영하는 투자신탁입니다.
헤지펀드는 파생금융상품을 교묘하게 조합해서 도박성이 큰 신종상품을 개발하는데, 이것이 국제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전세계 헤지펀드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조지 소로스의 ‘퀀텀그룹’이 특히 유명합니다.
1996년 말 현재 운용규모는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의 8배에 이르는 3조 7000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 헤지펀드는 파생금융상품을 집중적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이들이 일제히 준동할 경우에는 국제금융계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하루 1조 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서방 7개국(G7)을 포함한 OECD의 모든 중앙은행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500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헤지펀드가 국제금융 시장에 미치는 위력이 얼마나 큰 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996년 9월 금융기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남아메리카와 동유럽 등 투자위험성이 비교적 높은 신흥시장에 집중 투자하는 헤지펀드가 최초로 생겼습니다.
환투기(exchange speculation)는 외국환시세, 즉 환율의 장차의 변동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하여 금리차 또는 환차익(換差益)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외국환매매를 말합니다.
환투기가들은 환율이 상승할 것이 예상되면 외국환을 매입하고, 하락할 것이 예상되면 매각합니다.
그래서 환율이 예상대로 변동하면 이익을 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환투기가 환율변동을 안정화하는가 불안정화하는가는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투기가들의 행위가 환율의 변동을 더욱 자극하여 환율변동 폭을 증대시킬 때 불안정화한다고 하고, 투기가들의 행위가 환율변동의 진폭을 감축시킬 때 안정화한다고 합니다.
M.프리드먼은 이윤적(利潤的) 투기는 환율을 안정화한다는 명제를 내세운 반면, W.J.보몰은 이윤을 실현하는 투기행위가 반드시 환율을 안정시키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현재 외환 거래의 97% 이상이 환투기일 정도로 투기적 외환거래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환투기는 선물환거래(先物換去來)를 일방적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환율에 중대한 교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투기대상국의 통화를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조작할 수도 있으므로, 최근 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선물환시장에 직접 개입하거나 국제적 협조를 얻는 등의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파생금융상품(financial derivatives)은 외환·예금·채권·주식 등과 같은 기초자산으로부터 파생된 금융상품입니다.
경제여건 변화에 민감한 금리·환율·주가 등의 장래 가격을 예상하여 만든 상품으로, 변동에 따른 위험을 소액의 투자로 사전에 방지, 위험을 최소화하는 목적에서 개발되었습니다.
발행자가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발행하는 전통적인 금융상품과 달리 계약 당시 거래당사자 사이에 자금의 흐름이 일어나지 않는 부외거래를 특징으로 합니다.
국제통화체제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면서 환차손을 피하기 위하여 1972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되었으며, 계약의 형태와 거래시장의 특성, 기초자산의 종류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선물(future)·옵션(option)·스왑(swap)·선도(forward) 등이 있는데, 이들 파생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선물 옵션, 스왑 선물, 스왑 옵션 등 2차 파생상품 이외에도 약 1200여 종의 상품이 있습니다.
세계시장 규모는 1980년 중반부터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커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약 60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파생금융상품의 시장규모가 크게 증대한 이유는, 경제의 국제화·자율화·증권화 등이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리스크 증가에 따른 헤지(hedge : 위험회피)수요의 증가와 자산증가가 수반되지 않는 수수료 수익원으로서 파생상품 수요증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아시아 금융위기, 유럽단일통화 출범, 달러 강세 지속 등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파생금융상품의 시장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투자에 따른 위험 또한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자본시장의 국제화가 확대되면서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성 자금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며, 컴퓨터 및 인터넷 등 통신수단의 기술적 발전, 대형 은행 및 증권사간의 경쟁 격화, 금융산업에 대한 각국 정부의 규제 완화 추세 등도 파생금융상품이 급신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러한 파생금융상품 거래의 확대는 경제주체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줄임으로써 경제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투기적 목적에 의한 거래의 증가와 더불어 이에 따른 제반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적절한 규제와 감독이 필요합니다.
‘투자의 현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억만장자 워렌 버핏이 “파생상품은 금융계의 대량살상무기” 라며 파생금융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금명간 금융계에 초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FRB 의장인 그린스펀의 옹호에 힘입어 파생상품은 금융규제의 사각지대로서 1백28조달러규모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파생상품 운용사인 J.P 모건 체이스 은행의 경우 계약고만 27조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지면서 사고도 잇따랐습니다.
95년 영국의 베어링은행이 파생상품을 취급하다가 하루아침에 파산했으며 98년에는 미국의 롱텀캐피탈 매니지먼트가 파산해 세계경제가 휘청거릴 정도였습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01년 미국의 거대에너지기업 엔론의 파산을 들 수 있습니다.
파생상품에서 한 번 사고가 터지면 초대형이라는 점에서 금융규제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번번히 그린스펀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워싱턴의 금융 싱크탱크인 파생상품연구센터의 랜달 도드 소장은 “파생상품은 양날의 칼과 같다”면서 “파생상품은 위험관리에 매우 유용하지만 경제전체를 잠재적인 금융시장 붕괴에 노출시키는 새로운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워렌 버핏이 경고하듯 파생상품이 투자액의 수십배를 투입할 수 있는 고난도의 머니게임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규모가 커질수록 소수의 대형딜러가 시장을 지배하고 이들은 또다시 일반금융사나 기업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단 한 곳이 파산에 이르면 시장 전체가 거의 동시에 무너지는 가공할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은 상존한다는 것이 금융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입니다.

6) 제국주의
제국주의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해서 식민지로 삼은 다음 경제적 효용을 얻는 것 입니다.
로마 제국과 대영 제국이 이 같은 방식으로 번성했지만 말년에 끊임 없는 반란에 시달리다가 멸망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를 거울 삼아 반미 정권을 공작으로 뒤 엎고, 친미 정권을 세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WTO 같은 경제기구나 우르과이라운드 같은 협정을 통해 후진국의 무역장벽을 허물어 다국적 기업의 비싼 공산품을 팔고, 농산물이나 천연자원을 헐 값에 사들이는 것도 제국주의의 한 유형입니다.
우리 나라 같이 농산물이 비싼 나라는 우르과이라운드 협정으로 수입이 개방되면 세계적 곡물회사의 훨씬 저렴한 농산물이 밀려들어오게 되고 농민은 몰락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유무역은 대기업에게만 유리하며 한 나라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파괴해 수입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의존적 체제로 바꾸어 놓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은 석유를 위한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며, 대영 제국이 아편을 팔기 위해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7) 세계전쟁, 세계경제 대공황
현재는 미국 제국주의의 말기적인 현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40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천문학적인 방위비를 쏟아 붓다 연방정부는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자유무역을 통해 오히려 중국 등지로부터 값 싼 공산품이 밀려들어와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부채 총액은 무려 6조3920여 달러로, 미 연방법에서 정해 놓은 총 부채 한도액 6조4천억 달러에서 80억달러를 남겨놓은 상태으로 미 의회내에서는 부채최대 한도금액을 늘려 주지 않으면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이 파산하면 새롭게 떠 오르는 중국에게 종주국 자리를 내 주고, 대영 제국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며, 이는 다국적 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기 전에 세계를 정복해 완벽한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고, 이를 위해 심각한 재정 적자에도 국방비를 증액했고, 미사일 방어계획(MD)을 추진해 왔던 것 입니다.
미국은 먼저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을 칠 것이고, 중국이 쏜 핵 탄두를 모두 우주에서 요격 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것 입니다.
미국은 각 나라에게 세계의 평화를 위해 주권을 포기하고 세계정부의 일원이 되라고 촉구할 것이고, 이에 반항하는 나라를 하나씩 점령해 나갈 것입니다.
이 과정 중에 세계경제 대공황이 일어나 각 국 정부는 기아와 폭동에 시달릴 것이고, 미국 정부는 파산한 상태에서 주권을 포기하고,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인 유대인에게 나라를 들어다 받칠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태를 해결해 주면서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나라는 유대인 일루미나티의 모토인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환호 속에 받아드릴 것입니다.

8) 세계정부 수립, 신공산화
유대인은 100년 이전에 작성한 시온 의정서 대로 세계정부를 수립하고 관리해 세계의 주인이 될 것 입니다.
각 나라는 미국에서 파견한 관리를 총독으로 맞아 강력한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시온 의정서에 의하면 그들이 꿈 꾸는 사회는 공산주의와 파시즘과 헤게모니가 조합된 사회입니다.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금지되고, 사유재산은 박탈되며, 이들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게 될 것 입니다.
왜 하필 공산주의 일까요?
공산주의가 민중을 억압하고, 잉여 노동력을 갈취해 부를 축적하는데 가장 좋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민중)의 혁명에 의한 공산화가 아니고, 브루조아(자본가)에 의한 공산 혁명이기 때문에 ‘신공산화’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앞서 공산주의가 몰락했던 것을 거울 삼아 그들은 헤게모니(정신적 지도)를 강조해 국민에게 거짓종교를 강요할 것입니다.
그들의 사조직처럼 이용되고 있는 CIA의 에셜론 시스템으로 120개 첩보 위성을 이용해 전 세계 전화, 펙스, 음성, E-Mail 등을 도·감청할 것 입니다.
또한 사람들 몸 속에 신용카드 역할과 주민등록증 역할을 하는 생체칩을 삽입시켜 인공위성으로 우리의 위치를 추적할 것입니다.
때문에 반란이란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데, 만약 10명 이상이 지정되지 않는 장소에 모이면 인공위성의 위치 추적 시스템이 작동해 즉각 경찰이 출동해서 이들을 진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엄격한 사회 감시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이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체제를 전복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 참고 서적: 현대 경제학 원론 (김대식 외, 전영사)
불량국가 (노암 촘스키, 두레)
                   Rule by Secrecy (짐 마스, 창과창) 

* 참고 사이트: http://www.encyber.com/

Posted in Life News | 1 Comment »

Visual Studio 6.0에서 2005이상으로 넘어가야 하는 이유..

Posted by Digital Angel Master on February 26, 2008

정말 아직 VB6, VC6를 쓰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아직 닷넷은 시기상조라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사실 VC의 경우는 아무래도, 2003정도는 써주는게 낫지 않을까..

언제까지 98과의 호환성을 염두에 둘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직도, MS-DOS와의 호환이 필요한 몇몇 프로그래머를 제외하고, 일반 사용자 대상의 프로그램을 작성한다고 하면..

Microsoft는 업데이트에 꾸준히 .net framework를 배포중이고, Vista에는 이미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본인 역시도 Vista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나, 닷넷에 관해서는 환영이다.

(사실 닷넷보다는, Mono Project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직 VC6, VB6을 쓴다면 2005로 갈아타는걸 한번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인쇄시장에서 만들어진지 15년이 지난 Quark 3.3k를 아직도 사용하는것처럼..

(최신형 매킨토시를 구입해서 OSX를 밀고 OS9을 설치하는 작업을 한다. 일반 PC로 따지자면, 쿼드코어에 MS-DOS 6.22 설치하는 격이랄까)

그래서 이래저래 설명을 하던중, 의미있는 문서를 찾았다.

 

출처 : http://www.microsoft.com/korea/msdn/msdnmag/issues/06/06/CAtWork/default.aspx

많은 분들이 현재 Visual Studio® 2005로 업그레이드 중일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야 말로 새 컴파일러와 저의 경험담에 대한 글을 쓰기에 좋은 시기인 것으로 생각 되어 이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왜 이제서야 쓰게 되었냐고요? 늦었다고 생각 될 때가 가장 빠른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Visual Studio 2005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이 바로 버전 관리자 입니다. 이 버전 관리자는 여러분의 프로젝트를 열어본 뒤 어떤 버전을 실행 시킬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Visual Studio 2005를 Visual Studio 2003과 나란히 설치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은 여러분의 컴퓨터에서 사이 좋게 동거를 하게 되므로 이는 여러분이 한가 할 때 원하는 프로젝트를 따로 업그레이드 하기에 좋겠죠. 2003 버전의 프로젝트를 열면 Visual Studio 2005는 프로젝트를 변환을 하기 전에 복사본을 만들 지를 물어보고 난 이후 변환을 합니다. 변환 중에는 발견되는 모든 문제를 기술한 XML 보고서를 생성 합니다.

언어의 작은 변화

Visual Studio 2005를 간단히 사용해 보기 위해 이전 기사들의 프로젝트 몇 개를 불러와 컴파일 해 보았습니다. Visual Studio 2005는 최신 언어 표준을 따르는 최신 컴파일러 이기 때문에 모든 프로젝트들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 했습니다. 대부분의 “새로운” 문법들은 C++ 표준에 올라 간지 꽤 되었으나 Visual Studio는 이제서야 이를 따르게 되었네요.

for loop 안의 지역 변수는 loop 밖에서는 더 이상 유효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다음과 같이 작성 할 수 있었습니다

for (int i=0; i<max; i++) {

// do something

}

if (i>0) {

// do something else

}

이 예제에서 변수 i 의 scope는 for 문 안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 밖에서 다시 사용됩니다. 공식적으로 C++는 이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이제는 이 코드를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int i; // for loop 밖으로 뺍니다

for (i=0; i<max; i++) {

// do something

}

if (i>0) {

// do something else

}

선언 되지 않은 정적 변수(지역 또는 전역 변수) 들은 더 이상 default로 정수 형을 갖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고

const BUFLEN=255;

컴파일러는 암묵적으로 BUFLEN 에 int 형을 지정했습니다. 암묵적 int 는 이제 허용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아래와 같이 선언을 해주어야 합니다:

const int BUFLEN=255;

이는 모든 종류의 변수에 적용 됩니다 – 정적, 전역, 멤버 데이터 그리고 함수의 반환형. int 를 빠트리면 이젠 컴파일러는 “error C4430: 형식 지정자가 없습니다. int로 가정합니다. 참고: C++에서는 기본 int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라는 에러 메시지를 보냅니다.

C/C++에 대한 변화의 다른 카테고리로 새로운 Safe C 와 Safe C++ 라이브러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라이브러리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고 애용 하시는 기존의 유행 지난C 런타임(CRT) 함수 보다 안전한 버전을 제공 합니다. strcpy, fopen 등등. Safe C++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좀더 다루려고 합니다. 그 때까지 못 기다리시는 분들을 위해 Martyn Lovell 이 쓴 2005년 5월호의 “Safe! Repel Attacks on Your Code with the Visual Studio 2005 Safe C and C++ Libraries”를 소개해 드립니다.

(msdn.microsoft.com/msdnmag/issues/05/05/SafeCandC (영문)).

C++는 그렇다 치고 MFC 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Visual Studio 2005에는 MFC 에는 큰 변화가 없고 이는 제가 전에 말 했던 것처럼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MFC 가 안정적이란 뜻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CWnd::OnNcHitTest 의 리턴 형이 UINT에서 LRESULT로 바뀌는 등 이과 같은 다른 작은 변화들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의 기존 MFC 프로그램과 호환이 안 되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clip_image001페이지 맨 위로

관리 세계로 이동

C+ +와 MFC는 프로그래밍에 있어 이미 안정화된 부분이므로 이 부분에서 업그레이드를 통한 문제가 발생 하리라 생각 되진 않습니다. Visual Studio 2003과 Visual Studio 2005 간의 큰 변화가 들어간 부분은 관리 코드의 영역입니다. 이 변화 중 하나로 여러분들이 많이 읽어 봤을 새 C++/CLI 구문이 있습니다. 이는 Managed Extension 의 버전 V2 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를 사용하기에 아직 준비가 안 되셨다고 생각하면 /clr:oldSyntax 옵션을 이용해 이전의 Managed Extension 을 그대로 사용하면 됩니다. 이 옵션은 관리 또는 관리/네이티브 프로젝트를 Visual Studio .NET 2003 에서 Visual Studio 2005로 업그레이드 하면 기본으로 사용됩니다.

새 컴파일러에서 관리 코드를 테스트 해보기 위해 지난 2005년 4월호의 기사 “Wrappers: Use Our ManWrap Library to Get the Best of .NET in Native C++ Code”의 ManWrap 라이브러리를 사용 해보았습니다. ManWrap 은 wrapper DLL (regexWrap.dll)과 RegexText, RegexForm 그리고 WordMess 테스트 프로그램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그림 1 참조) ManWrap은 작으면서 수행하는 일이 – 관리/비관리(Managed/Unmanaged) 코드를 한 DLL에 넣음으로 – 꽤 복잡한 편이라 이 글에 사용하기에 좋은 예제라 판단이 됩니다. RegexWrap 은 공용 언어 런타임(CLR)의 Regex 클래스를 wrapping 하는 네이티브 DLL 입니다.

clip_image002
그림 1 관리 코드 테스트 하기

기 존의 구문을 그대로 두고 컴파일러를 돌렸습니다. 곧바로 스크린에는 다음과 같은 에러 메시지들이 죽 올라 왔고요. “C3395 … __declspec(dllexport)를 __clrcall 호출 규칙이 있는 함수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뭐시라고?

ManWrap은 순수 네이티브 C++ 코드에 관리 클래스를 wrapping 할 수 있게 해주는 라이브러리 입니다. /clr 옵션 없이도 네이티브 C++ 코드에서 CLR을 호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죠. 예를 들어 Visual C++® 6.0 컴파일러를 사용하는 기존의 프로그램이 있는데 CLR 을 사용하는 특정 기능을 추가 하고자 한다고 합시다. /clr 옵션을 사용하지 않고는 C++에서 관리 클래스를 직접 호출 할 수 없습니다. (Visual C++ 6.0 은 이 옵션을 지원 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관리 클래스를 호출 하기 위해서는 이를 네이티브 entry point가 있는 DLL에 wrapping 하는 방법을 사용 해야 합니다.

ManWrap 이 사용하는 꼼수는 _MANAGED 라는 미리 정의된 전처리 심볼을 이용하여 내부 사용이나 외부 사용에 따라 다른 코드를 생성 하게 하는 방법 입니다. 각 wrapper 클래스는 한 개의 데이터 멤버 – 관리 객체의 핸들 – 를 갖습니다:

#ifdef _MANAGED

# define GCHANDLE(T) gcroot<T*>

#else

# define GCHANDLE(T) intptr_t

#endif

Wrapper 클래스들은 GCHANDLE을 이용해 객체 핸들을 다음과 같이 선언 합니다:

// wrapper for managed Object

class CMObject {

GCHANDLE(Object) m_handle;

};

CMObject가 정의된 헤더 파일은 두 가지 방법으로 컴파일 됩니다. Wapper DLL을 빌드 할 때에는 _MANAGED 가 정의 되도록 /clr 옵션을 주고 컴파일 하면 컴파일러는 m_handle 을 gcroot<Object*>로 판단 하게 됩니다. Wrapper를 호출 하는 네이티브 프로그램을 빌드 할 때에는 _MANAGED 가 정의 되지 않도록 /clr 옵션이 없이 컴파일 하고 이때 컴파일러는 m_handle을 intptr_t로 판단 합니다. 이게 제대로 작동 하는 이유는 gcroot<Object*>가 intptr_t 와 동일한 크기를 갖는다는 것이 보장 되기 때문입니다. Wrapper DLL 만이 그 핸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깥 (네이티브) 에서 봤을 땐 m_handle 은 HWND, HINSTANCE나 다른 핸들과 비슷한 매직 쿠키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여기서 주의 할 점은 복사 생성자와 대입 연산자가 인라인 함수가 아닌 실제 함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제 wrapper로 호출이 들어가서 그 핸들을 실제 객체로 보고 다루게 됩니다. (intptr_t 핸들을 복사 하면 안되고 gcroot를 통해야 합니다.)

이 핸들을 갖고 있는 것과 더불어 ManWrap은 객체를 생성하고 복사하는 함수들을 정의 합니다. 또한 각 Wrapper 클래스는 ctor 와 -> 연산자를 정의 하여 wrapper가 해당 관리 형으로부터 네이티브 wrapper 객체 들을 생성 하고 접근할 수 있게 금 합니다. 예를 들어 관리 Regex 에서 네이티브 CMRegex를 생성 하는 생성자가 있습니다. 관리 클래스들은 ctor와 -> 연산자를 내부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림 2 에서 ManWrap.h의 일부 코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관리 Method들이 #ifdef _MANAGED 안에 있는 것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클래스 전체가 WREXPORT로 익스포트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C3395 에러가 나는 것 입니다. 네이티브 함수와 관리 함수들은 서로 다른 호출 규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__declspec(dllexport)를 이용해 관리 method(관리 인자 들을 갖고 있는 method들)들을 익스포트 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말이 되는 말이죠. 네이티브 DLL에서 관리 함수들을 익스포트 하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니까요.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익스포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인라인으로 정의 되어 있습니다. 이 관리 method 들은 네이티브 interface에 필요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컴파일러는 이를 모릅니다. Visual Studio 2005가 이전 컴파일러만큼 똑똑 하지 않아 클래스 전체를 익스포트 할 수 있게 허용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라면 너무 똑똑 하여 관리 method를 네이트브 코드에서 익스포트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판단 하는 건지.. 어쨌든 Visual Studio 2005는 관리 method를 갖는 클래스가 익스포트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가 컴파일러에게 명령하고 싶은 것은, “클래스 전체를 익스포트 하되 이 세 method 들만은 제외 시켜라.” 입니다. 다시 말해 특정 method 에 대해서 __declspec(dllexport)를 적용 안되게 하는 방법을 원하는 것이죠. 이런, 그런 옵션은 존재 하지 않는 군요. 따라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 WREXPORT를 클래스 선언에서 제거 하고 이를 각 네이티브 method 앞에 붙이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method 들을 완전히 제거 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방법이 더 간단 하여 전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WREXPORT를 method 선언으로 옮기는 것이 좀 반복적이고 새 method를 추가 할 때 WREXPORT를 추가 하는 것을 잊어 버려 실수 할 여지가 많이 보이지만 컴파일러가 알아서 알려 주겠죠.

두 번째 방법으로 정말, 꼭 클래스 전체를 익스포트 하고 싶다면 문제가 되는 관리 복사 생성자와 -> 연산자method 들을 모두 제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 연산자를 자동으로 호출 하는 다음과 같은 코드 대신에

// MClass의 내부 wrapper 클래스

(*this)->ManagedMethod();

다음과 같이 코드를 작성 해주셔야 합니다:

(static_cast<MClass*>((Object*)m_handle))->ManagedMethod();

정말 깁니다. 다음과 같은 매크로를 사용하면 타이핑을 좀 덜 수 있겠네요:

THISOBJ(MClass*)->ManagedMethod();

이렇게 해도 약간은 거추장스럽거니와 아직 생성자도 직접 건드려 주셔야 합니다. 지금 설명이 잘 안 와 닿는 다면(많은 독자 분들이 그러시리라 생각 됩니다.) 걱정 마시라. 전 좀더 간단한 방법인 첫 번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림 3을 보시면 WREXPORT를 모든 method에 추가한 수정된 코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정 한 후엔 ManWrap은 문제 없이 컴파일 됩니다.

 

ManWrap 실행 하기

코드를 제대로 컴파일 되게 하였는데 이젠 이 코드가 제대로 실행 되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막혔던 부분 입니다. dbgheap.c 속 깊은 곳의 ASSERT 폭탄 입니다:

ASSERTE(_CrtIsValidHeapPointer(pUserData));

으악! 디버그 심볼 없이 시스템 DLL만 잔뜩 보여주는 stack trace는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런 버그가 가장 나쁘고 가장 추적하기 힘든 버그입니다. 프로그램이 시스템 코드 깊은 곳 어딘가에서 죽고 무엇이 문제인지 실마리 조차 없는 경우죠. 그래도 잘 찾으면 실마리는 있습니다. Stack trace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약 50 frame 앞에 제 코드가 g_Allocator라는 정적 ATL 변수를 접근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하! 이것이 바로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 였습니다.

g_Allocator는 전역으로 선언된 정적 변수 입니다. C++에서 정적 변수 초기화는 언제나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일중 하나로 DLL에서 특별히 더욱 그렇습니다. 컴파일러는 DllMain을 호출 하기 전에 정적 변수들을 초기화 하는 CRT 초기화 함수를 호출하도록 코드를 생성 합니다. 네이티브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잘 작동 하나 여러분의 DLL 이 관리 클래스들을 호출 한다면 Loader-lock 문제에 걸릴 수 있습니다: Windows® 는 여러분의 DLL을 로드 하려고 하고 이는 CLR 을 로드 하려고 합니다. 이는 다시 여러분의 DLL을 로드 하려고 하고 – 즉, loader lock 이라고 알려진 데드락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DLL이 로드 될 때에 다른 DLL을 로드 하면 안됩니다.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예로는 DllMain 또는 정적 객체 생성자에서 ::MessageBox를 호출하여 진단 메시지를 표시할 경우입니다. 이렇게는 결코 제대로 작동 하지 않죠.

이 loader lock을 피하기 위해 Visual Studio .NET 2003 은 관리 DLL들을 /NOENTRY DLL(DllMain Entry point가 없는 DLL)로 만드는 것을 의무화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DLL은 _DllMainCRTStartup이 없게 되어 정적 정적 변수들이 초기화가 안됩니다. loader lock은 피 할 수 있지만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되어 버린 거죠. 제 2005년 2월 기사에 이 수수께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msdn.microsoft.com/msdnmag/issues/05/02/CATWork (영문)). MFC와 ATL 에서 정적 객체를 사용 하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DllMain 없이는 ATL 또는 MFC를 사용하는 혼합 DLL 을 만들 수 없으니까요. 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친절한 Redmond 사람들은 __crt_dll_initialize 와 __crt_dll_terminate()가 들어 있는 <_vcclrit.h>를 만들어 제공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냥 거추장스럽게만 들리실 겁니다. 반갑게도 Visual Studio 2005는 혼합 assembly loader-lock 문제를 해결해 출시 되었습니다. 더 이상 _vcclrit.h 나 /NOENTRY 가 없이 혼합 DLL 들을 평소 대로 컴파일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http://msdn2.microsoft.com/ko-kr/library/ms173266(vs.80).aspx” 에 “혼합 어셈블리 초기화 ” 글을 참조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ManWrap이 dbgheap.c 에서 죽었을 까요? 이 이유는 이전 프로젝트의 /NOENTRY 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을 상황이 였죠. DllMain도 없었으며 따라서 ATL의 g_Allocator가 초기화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NOENTRY를 없애니, 휴! 제대로 작동 하는 군요.

 

새 모자(hat)로 새로 시작

이 런 어려운 버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축복 이라면 그 버그를 고친 후 맛 볼 수 있는 날아 갈 것 같은 좋은 기분 일 겁니다. ManWrap의 세 test 프로그램(RegexTest, RegexForm, and WordMess) 을 성공적으로 컴파일 하고 실행 시킨 후 전 꽤나 싱글 벙글 했죠. 지난 몇 년간을 겨울잠을 자고 오신 분을 위해 설명 드리자면 C++/CLI의 핵심은 ^(hat) 심볼로 표시 되는 tracking handle 이라는 새 타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clr:oldSyntax(그림 4 참조)를 없애고 ManWrap.h의 * 를 ^ 로 변경 했습니다:

#ifdef _MANAGED

# define GCHANDLE(T) gcroot<T^>

#else

# define GCHANDLE(T) intptr_t

#endif

clip_image003
그림 4 새로운 구문 사용하기

이 렇게 하여 변경하고 컴파일 한 이후 컴파일러가 뱉어 내는 에러를 하나씩 고쳐 나갔습니다. 대부분의 에러는 Mumble *를 Mumble ^로 고치는 정도 였죠. 물론 고쳐야 하는 다른 구문들도 있었습니다. 다음이 ManWarp을 컴파일 하면서 나온 특유의 구문 에러 목록 입니다. C++/CLI 에 능통한 독자들에겐 진부해 보일 지도 모르니 CLI 전문가 이신 분들은 그냥 훑어 보시고 넘기시기 바랍니다.

• 관리 클래스들은 이제 __gc 또는 __value 대신 ref 또는 value로 선언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__managed 키워드들은 문맥에 더 맞는 키워드로 교체 되었습니다.

• Default 인덱서들은 이제 Item 대신 “default” 로 불립니다. 전엔 이랬던 것을:

x = m->Item[name];

이젠 이렇게 해야 합니다:

x = m->default[i];

이는 Regex 라이브러리의 MatchCollection에서처럼 복수의 인덱서들이 있을 때에도 작동 합니다.

MatchCollection* mc;

mc->default[0]; // int

mc->default["alpha"]; // string

• 관리 객체들은 이제 gcnew로 할당 되어야 합니다. 관리 객체를 할당 하는 곳에는 new를 gcnew로 변경 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변환 들은 더 이상 암시적이지 않습니다. 다음 코드를 보면:

// 네이티브 Entry

void Foo(LPCTSTR lpsz)

{

// 관리 ctor 는 String을 받는다

Mumble *m = new Mumble(lpsz);

}

이전 Managed Extensions 에서는 컴파일러가 Mumble 을 생성 하기 위해 lpsz로 초기화 한 관리 String 객체를 암시적으로 생성 하였습니다. Visual Studio 2005 에서는 다음처럼 String을 명시적으로 할당 해주어야 합니다:

void Foo(LPCTSTR lpsz)

{

Mumble ^m = gcnew Mumble(gcnew String(lpsz));

}

약간의 타이핑이 더 들어 가지만 이전 보다 좀더 의미가 명료 해졌습니다. 저는 언제 어디서 관리 힙에서 할당 하는지 알게 해주기 때문에 gcnew를 좋아 합니다. 암시적 변환은 코드를 단순하고 깨끗하게 보이게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기 때문입니다. C++는 상대적으로 low-level 언어에 속하며(전 이점을 좋은 점이라 생각 합니다.) 따라서 코드 뒷면에서 많은 일을 수행 하게 하는 것 보다 눈에 직접 보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RegexWrap에서 여기 저기서 String을 생성 하기 때문에 전 타이핑을 덜어주기 위해 다음의 매크로를 작성 했습니다:

#define S(s) (gcnew String(s))

S“Hello, world.” 에서처럼 관리 string의 S modifier처럼 닮아 보이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젠 다음처럼 쓸 수 있습니다:

Mumble ^m = gcnew Mumble(S(lpsz));

C++/CLI 는 관리 배열의 구문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아래의 선언 대신

ManagedType* myarray[];

이젠 이렇게 작성하셔야 합니다:

array <ManagedType^>^ myarray;

전 두 번째 ^ 때문에 처음엔 약간 의아해 했었습니다. 그 것을 빼고 컴파일 하면 “error C3149: 여기에 이 형식을 사용하려면 최상위 ‘^’이(가) 있어야 합니다.”라는 약간은 애매한 에러가 나옵니다(최상위 뭐??). 그러나 규칙을 이해 하시면 당연히 나야 할 에러죠. 컴파일러는 이 배열이 “array” 키워드의 효능에 의해 관리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왜 최상위 hat이 필요 한지는 저도 확실히 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언어를 만들어 낸 분들이 그렇게 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 또 말이 되긴 한다는 것이죠. 관리되는 것들은 hat을 갖습니다. 기본 형의 관리 배열에서도 최상위 hat 이 필요 합니다. 예를 들어:

// int 형 관리 배열

array<int>^ foo;

• Count 대신 Length를 이용해 배열의 길이를 얻습니다.

• 관리 NULL 포인터에 대한 검사를 해야 한다면 NULL 대신 nullptr을 사용합니다.

• 템플릿은 관리 클래스와 사용될 때 더 잘 작동 합니다. 이 것이 C++/CLI를 사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 입니다. 관리 클래스와 네이티브 클래스들은 각자 자신만의 구문을 갖게 되고 (overload 된 *를 공유하는 대신) 템플릿 생성자는 이를 쉽게 구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 하지 않은 구문 변화들이 더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선 여러분들도 자연히 알게 되겠죠. 이에 대한 개요로 Stan Lippman이 쓴 “Hello C++/CLI”를 보시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MSDN Magazine의 특별 Visual Studio 2005 판에 있습니다(msdn.microsoft.com/msdnmag/issues/06/00/PureC (영문)). 이 글과 Stan의 다른 기사 “A Baker’s Dozen: Thirteen Things You Should Know Before Porting Your Visual C++ .NET Programs to Visual Studio 2005″ (msdn.microsoft.com/library/en-us/dnvs05/html/BakerDozen.asp (영문))도 추천 해드립니다.

새로운 구문 때문에 너무 겁 먹지는 마시고요. * 를 ^ 로 /clr:oldSyntac를 /clr로 바꾸기만 하니 나머지는 컴파일러 에러 고치는 수준 이였습니다. ManWrap이 컴파일러를 통과 하고 나니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 하더군요. Redmond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만 합니다. 컴파일러가 코드의 정확함을 보장 할 수 있다면 그 보다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 로의 변환이 너무 쉽게 끝나 너무 싱글벙글 한 나머지 GCHANDLE을 MANHANDLE로 바꿀까 까지 생각 했지만. 안 하기로 했습니다.

 

두 가지 작은 불평

전체적으로 Visual Studio .NET 2003에서 Visual Studio 2005로의 이동은 큰 문제 없이 진행 되었습니다. 전 Emacs 같은 에디터 이외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텍스트 해커 이기 때문에 IDE 에 대해서는 크게 말씀 드릴 것이 없군요. 그러나 Visual Studio 2005에 대해 두 가지 불평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내 문서” 폴더를 제가 필요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을 폴더로 더럽히더군요. 이것 저것 뒤지다 보니 이 폴더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레지트스리 키를 찾아 대부분의 폴더들을 제 눈에 안 띄는 TEMP 디렉터리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전 제 컴퓨터의 폴더를 정리 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드리는 지라 어떤 권위적인 프로그램이 제 하드디스크를 맘대로 고쳐 버리는 것이 싫더군요. 그래서 경고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프로그램이 폴더를 필요로 한다면 그 폴더들을 어디에 만들지 사용자들이 직접 선택 하게 하십시오.

제 다른 불만은 Visual Studio 2005가 더 이상 sound schemes 을 지원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도 시끄러운 프로그램을 좋아라 하진 않습니다만 이런 경우엔 유용하더군요. Visual Studio 2003에서는 빌드를 시작시킨 후 다른 창에서 작업을 하러 갑니다. 컴파일이 끝났을 때 나는 소리에 따라 컴파일이 성공 했는지 실패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으나 Visual Studio 2005 에서는 결과 창을 읽어 봐야 알 수 있죠. 별로 재미 없는 일 중에 하나가 결과 창을 읽어 보는 것 입니다. 경고 하나 더 갑니다: 절대 기존의 기능을 제거 하지 마십시오.

이 두 개의 작은 불만과 /NOENTRY 에러를 제외 하고는 Visual Studio 2005로 업그레이드 하기가 상당히 쉬웠습니다. 아직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셨다면 바로 해보세요. 혼합/관리 assembly를 작성 하신다면 더더욱 추천 해드립니다. 새 구문이 더 좋습니다. 물론 어떤 변화에서든 약간의 수정은 필요 합니다. 그러나 한번 적응 되신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죠.

ManWrap은 MSDN Magazine 웹사이트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해당 다운로드는 세 버전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Visual Studio .NET 2003 버전, Visual Studio 2005 버전 용의 이전 C++/CLI 구문을 사용한 버전과 새 C++/CLI 구문을 사용한 버전을 제공 합니다. 즐거운 프로그래밍 하세요~!

Posted in C# | Leave a Comment »

필리핀 저급언어

Posted by Digital Angel Master on February 24, 2008

바바에 : girl 아가씨를 말함

GRO(Guest Relations Officer) : 업소에서 손님 접대하는 바바애

GRM (Guest Relations Manager) : 흔히 마마상 이라고 합니다. 파파상도 있지요
손님에게 주로 GRO들을 소개시켜 주는 일을 합니다

MODEL,SOLO : 진짜 모델은 아니지만 업소에서 모델링을 합니다
GRO처럼 바에서 손님 접대하는 바바에지만, 차이점은 둘다 무대에서
모델링을 하는데 솔로는 혼자서 무대에서 춤을 추는 바바에를 말합니다
모델보다 솔로가 GRO보단 모델이 레이디스 드링크도 비쌉니다

Dancer/Show Girl : GRO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바바에를 말하며 대부분 GRO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바디샷 – 데낄라나 보드카를 마실때 레몬과 소금을 서로의 원하는 부위에 바르고 안주 삼아 햝아 먹는것

레이디스 드링크 : 바바에를 옆에 앉히는 댓가로 사주는 음료. 보통 한잔에 15분-30분(업소마다 차이가 큼)

KTV : 노래방 시설이있는 룸이있고 홀에 무대가 있어 야한 쇼를하는 술집입니다.

프로모션 : 일종의 보도방. 바바애(GRO,MODEL,DANCER)들을 모아 합숙시키며,교육시켜
업소나 외국으로 보내는등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카사를 겸하기도 하죠…
업소에서 파트너가 프로모션 소속이라고 하면 일 끝나고 단체로 귀가 하므로 2차가 힘듬

Bar Fine : 바파인은 2차비가 아닙니다. 직역하면 Bar(술집) Fine(벌금)이고요,
바파인에 2차비 포함된 업소도 있는데요(엥겔레스나 사방비치)

엄밀히 따지면 바파인은 GRO를 영업시간 끝나기 전에 델꾸 나올때
업소에 물어 주는 보상금입니다.

술집에 지불하는 GRO차지나 레이디 드링크는 GRO들이 전부 가져가는게 아니고
업소나 프로모션과 나누어 가져갑니다.

그래서 업소에서는 GRO들이 일찍 나가면 그만큼 장사를 못하니까 손해를 보게 되지요.
그래서 손님이 대신 그 손실분을 업소에 물어주고 나오는거지요.

LA나 랑데뷰에 있는 바바애들은 GRO가 아니고 프리랜서 이기때문에
델꾸나오는데 주는 돈은 바파인이 아닙니다. 그냥 2차비지요.

칙스 (Chicks) : 업소이름도 아니고 업소의 종류도아닙니다. 매춘부를 뜻하는 영어 비속어입니다.
울 나라말로 하면 냄비, 깔치 등등… 여자들한테 함부로 쓰시면 큰일 납니다.

컨슈머블 – 업소에서 룸으로 들어갈때 룸의 종류에 따라 정해지는 일종의 미니멈 매상.
컨슈머블 금액을 따로 내는 것이 아니고 업소에서 이방에 들어 가시면은
기본적으로 이정도는 팔아 주셔야 합니다 라고 정해 놓은 금액 입니다

예를 들어, 컨슈머블 3,000페소짜리 방을 이용한다면, 그 룸에서 최소 3,000 페소의 매상을 올려줘야 함.
실제 먹은 것이 3,000 페소보다 적을 경우에도 3,000 페소를 내야 함.

말리복 : 짖궂은 손님 흉보는 대표적인 말로 대충 색마라는 뜻

기믹 : 원래 뜻은 “뭔가 신나고 재미 있는것”인데 룸안에 일행이 많아서 쑥스러울때
빈룸에 파트너랑 단둘이 옮겨서 즐기는 것을 말하거나 룸에서 불끄고 즐기는걸 말함

빠로빠로, 바바에로, 버터플라이 : 바람둥이 라는 뜻.

날라께로 : 여자 바람둥이              체리걸 : 숫처녀

쏙쏙, 붐붐 : 따갈로그로 sex          쑤소 : 유방

볼레로 : 아첨장이                        볼라볼라 : 입에 발린 말뿐인 아부

마간다 : 이쁘다                            빵잇 : 못생겼다

뽀기 : hand-some boy                구아뽀 : 잘생긴 성인 남자에게 쓰는말

꼬리뽓 :  구두쇠                          마베엣 : 친절하고 좋은사람

살라맛 : Thank you                    씨알(CR:comfort room) : 화장실

꾸무스다까 : 안녕하십니까            마간당 가비 : 밤에 하는 인사말

마할끼따 : I love you                  꾸스또 끼따 : I like you

로꼬로꼬 : 미쳤다는말                아니또,소고,롱우드: 시간제 러브호텔

투어가이드 : 크럽이나,바에서 일하는 여자와 놀러갈때 여자를 부르는 말

띠띠 : 남자의 성기                    마야방 : 건방진 넘
쇼업 : KTV에서 파트너를 고르기 위해 바바에를 쭉 세워놓고 선보는 것

빠끌라 : (박선생)게이(몸은 남자, 마음은 여자)   톰보이: 남자역할 하는 레즈비언

브로우 잡(BJ) : 사까시              마꼴릿 : 짖궂은 넘

Posted in Diary | Leave a Comment »

필리핀 사람들 습성에 대해

Posted by Digital Angel Master on February 23, 2008

제가 현지에 오래 있어 경험들을 하고, 힘든 사업 이끌어 가시는 수 많은 한국 분들을 만나면서..여러 문제들을 보고 들어 왔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의 고민거리는 “믿을 수 없는 필리핀 사람” 입니다.
솔직히 한국 사람들은 이곳 중국 사람들에 비해 잔 정과 동정심이 많다 보니, 필리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배풀고 그로 인해 상처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한국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다스릴때 마음을 많이 써주며, 정을 주는 편이지만, 이곳 중국 사람들은 최소로 주고 받을 것만 받기에, 나름대로 최고의 효율을 창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남에게 마음을 함부로 주지 않으며, 누구도 믿지 않으며, 특히 직원들에 아주 엄격한 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반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적 태도 때문에 수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소위 말해서, 필리핀 사람들이 뒷 통수를 떼린다는 것이죠. 평소에 너무도 잘 해 주었기에 그 상처는 이루 말할수가 없는 것이 되고, 그러한 결과가 반복되다 보니, 이곳 사람들에 대한 막연하고도 무조건적인 “HATE”가 생기며, 필리핀 사람들 믿으면 안된다는 예기가 나오는 겁니다.
필리핀에서 정떨어진 다는 예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곳에서 사업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느낌이고, 이는 잠시 왔다 가며.. 아름다운 필리핀만을 생각하는 학생들이나 여행객들은 알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마음이 여리다 보니, 항상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족같은 정을 많이 주었는데, 애정을 쏟으면 쏟을수록, 나중에 돌아오는 더 큰 상처와 실망은 너무도 고통스런 이곳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는 이곳 필리핀 생활의 공식이 된지 오래이고, 많은 필리핀 선배님들이 하시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 저것 하다 보니 지금 저에겐 많은 직원들이 있고, 예전에 거쳐간 직원들도 많지만 요즘엔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싫지만, 불필요한 애정은 주지 말고, 불필요한 배신감이나 증오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배웠으며.. 전 이와 같은 현실의 삶을 이곳에서 배워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전 필리핀 사람들이 이러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노예적 마인드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그러한 마인드를 가진 이유가 오랜 식민생활에서도 찾아 볼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중국의 공산주의 마인드와도 너무도 흡사하단 생각도 들구요.
때문에 전 가끔은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필리핀 사람들의 피 지배계급은 너무나도 사회주의 공산주의화 되어 있단 느낌도 지울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제가 공산주의 집단농장에서 그들과 함께 일한다는 생각도 들곤 합求? 기본 사회 보장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지배 형태로서만 말입니다.
사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같은 지배 논리일 뿐인데, 피 지배자의 입장에선 한끝 차이라고 말할수 있죠. 이것은 다른 말이지만 지금 러시아나 중국에 일어나는 상황만을 봐도 알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곳의 일반 사람들은 오히려 공산주의 사상에 오랬동안 길들여진 사람들보다도 더 심한 공산당이란 생각도 해 왔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금력에 지배받고, 멸시받으며, 관료들은 썩어 있고, 사람들의 마인드는 노예화되어 있지 않나 생각도 듭니다. 그것이 생활화 되다 보니, 필리핀 사람들은 직장과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행동하려 하고, 좀더 나은 이득을 위해 배신도 서슴치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것은 한국 보다 분명 심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생산성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고, 일찍이 이러한 제도를 만들고, 이러한 습성을 알아온 중국 사람들은 최소 임금을 통한 인해전술로 저렴하게 사람들을 투입해야 된다는 결론을 얻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는 뒤 늦게 이것을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죠.
때문에 경험 있는 분들은 필요이상으로 배풀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교민들을 보면 착취자 취급하며 바라보는 경우도 있고,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모든 분들이 곧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의 상식관 너무도 틀립니다.
한국 사람들은 많이 주고, 잘 해주면 더 잘따라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필리핀 사람에 접근을 하고, 왠만하면 몇 푼 차이나지 않으니 더 주어야 된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한 이유로 수도 없이 뒷 통수를 맞으면서 천성을 버리지 못해 그러한 상처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인데요.
저도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피는 어디 못가나 봅니다.
이곳 중국인,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이런 한국 사람을 조롱하고 이해 할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필리핀에서 돈만 뿌리고 맨날 실패한다는 것이죠.. 실패하기에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도 맨날 찌지고 볶고 싸우니, 얼마나 재미 있는 관경이란 생각을 하며, 그들은 그 속에서 계속 국물만 속속 뽑아 먹으니, 얼마나 찌질이 같은 종족이라 생각할까요…이곳에선 필리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곳 한국 사람들 인식이 좋지 못한 이유가 되는 것도 사실이구요..
분명 비즈마인드완 차이가 난다는 점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비즈니스는 감정적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인데, 한국은 너무도 잔정이 많습니다.
전  중국 사람들 심지어 필리핀 사람들로 부터 ” 한국 사람들 이해 할수 없단 예기를 너무도 많이 들어 왔고 이러한 예기를 들을때 마다, 그 부당한 처지에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우린 봉사하러 온것도 아니고, 봉사활동만 할 여우가 있는 것도 아니며, 봉사를 하더라도 좋은 소리 들으며 하고 싶은데…
하지만 전 요즘에 필리핀 사람들을 보면 이런 말들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 이곳은 돼지가 돼지를 관리하는 나라이고 이나라가 이러한 꼴이니..돼지가 돼지들을 관리해선 안된다”, “돼지에게 더 주면 고마워하긴 커녕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는 것인데, 필리핀 사람들에게 넘 많은 것을 바라는 그 자체가 크나큰 실수란 생각도 듭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노예와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거지와도 비슷하기도 합니다.(극단적인 표현인데 이것은 단지 사업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 달리 해석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사탕을 더 주면 고마워 하지 않고, 더 많은 사탕을 달라고 아우성 치며 몰려 들고, 개인의 욕심을 위해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것이죠. 그들은 권력, 힘, 돈에 억압 받고 멸시 받기에, 그들 또한 이것이 생활화 되고, 본인들은 보다 더한 약자에게 같은 행동들을 반복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선 믿음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고, 서로가 항상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친구도 없는 것이죠.
필리핀 사람들에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국물까지 빨아 먹으려 하고, 사탕 하나 주면 더 내놔라고 아우성입니다. 잘해주고 친절하면, 저 사람은 나약하고, 만만하다고 생각하기에, 사탕 더 내놔라 배신을 하며 밟을 생각도 서슴치 않는다는거 여러분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THEY WILL STEP ON YOU, IF YOU JUST SHOW KINDNESS TO THEM….
중국 사람들은 헛점을 보이지 않으려 하고, 줄것만 주고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직원들에게 어느 정도 차별성을 가지며 거리를 두고, 기본 이상의 것은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가끔은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중국인이 잔인하고 매정하다고 생각도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중국 사람의 그런 모습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리고 너무도 상처 받는 상황이지만 이것은 노예 만이드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한국 사람은 잘해 주면 줄수록 상처 받기 일수다….. 이것은 공식이 되었습니다.
간단한 예로 중국사람들은 헬퍼를 노예 치급하지만, 여러분은 헬퍼를 가족처럼 대우합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노예 마인드가 바로 공산주의 버금가는 일의 능률을 만들어 내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사회보장은 없고 줄것은 안줘도 되니 얼마나 훌륭한 지배체제입니까. 그러니 그들은 걸음 걸이 하나도 세어가며 일하는데, 이것은 이곳 사회의 책임이지, 한국 사람의 책임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질수도 없으며 그런 능력도 없는 것이죠.
중국인 소유 가게는 필리핀 국가의 결집판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스템이 너무도 동일하기에
이곳 나라 돌아가는 상황 중국가게에서 그들이 필리핀 다루는 것만 봐도 간단하게도 해석할수 있는 것이죠.
이곳은 많이 일할 필요도 없고, 많이 줄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그것은 내가 작은 가게의 오너이든, 정치가 심지어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찮가지의 결론에 도달 할수 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SM에서 중국 사람들이 직원을 어떻게 부리는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린 돈을 맨날 쏟아 부으며 빚더미를 않고 실패하지만, 그들은 성공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제하셔야 님들은 뒷 통수를 덜 맞는다고 감히 말하고 쉽군요.
그렇지 않으면, 맨날 회계 빵꾸나고, 물건 도둑 맞고, 학원에선 학생들 방패막이로 월급 올려 달라고 시위하고, 한국 사람들 봉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필리핀에서 돈 까먹고, 건강 버려 가며, 일하는 한국 사람들 봉사 활동 하는 것도 아닌데…정말 화나고 불쌍하기 조차 합니다.
이것은 제가 겪고 수도 없이 들은 스토리인데, 가끔은 천지 모르는 한국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 불쌍하다며 한국 업체가 착취자 인냥 월급 올려 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피 빨아 먹는 것이죠…그런 사람들 가끔있죠. 인터넷 가지고 협박하고, 학생들 공부를 방패막이로 필리핀 직원과 같이 협박하고 어떻하면 학원 약점 파헤처 협박할 궁리만 하는 경우도 있는데.. 배운 사람들이 더 그러하고, 이런 한국 사람, 정말 가련하단 생각 조차 들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보는 필리핀 사람들은 뒤에서 멍청한 한국 놈들을 욕할테니깐요…
그 필리핀 사람들은 어디가나 한국 사람들 이해 할수 없다라고, 한국 사람들 욕하는데..한국 사람들이 장단을 맞추는 겪이죠.
어제 어느 학원에서 튜터 십여명을 이끌고 왔더군요. 학원명은 거론하기 힘들지만, 이유는 학원과 그들 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얼마전에 다른 한국인으로 부터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학생들 방패막이로 학원에서 월급 올리기 위해 시위 한다는 말도 들은바 있기에 거절하였는데, 그 오너 필 사람에게 없는돈 빚 내서 뿌려가며 두 다리 뻗고 잠 이루지 못할것 생각하면 정말 열받습니다.
또한 다른 사업하시는 분들로 부터 말도 안되는 직원들과의 문제에 대한 하소연도 들었는데..다음에 그런 인간들 생기면, 내가 이곳 생활 접는 한이 있더라도..직접 멱살 잡는다고 하였죠…
어쨋든 오늘 기분 더럽기도하고, 수 많은 경험들이 갑자기 떠올라 이러한 글을 적었습니다.
이곳 필리핀에서 한국 사람들 처지는..
필리핀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은 항상 한국 사람들 이해 못한다고 하면서, 자기돈 털어가며 빚내서 봉사 활동만 하다 가란 말 처럼 들리더군요.. 중국 사람들은 한국인 피 쏙쏙 빨아 먹고 있는 것이죠..
독종인 중국 사람한테나 시위하고 피 뽑아 먹을 생각하지..
맨날 돈 잃고 벌지도 못하며, 필 사람 조금이라도 생각해주고,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하는 우리 동포에게 그렇게 하니.. 넘 열받는 거죠..
전 이런 더러운 경험 다시 겪느니, 언제든지 사업 접으라면 바로 접을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필리핀에서 사업하시랴, 직원들에게 뒷 통수 맞으랴.. 등등으로 몇 푼 안되는 수익때문에, 힘든 고생 하는 분들, 힘내시라는 말씀 드립니다.
돈 벌로 왔는데.. 세 월 까먹고, 빚 쌓여 가며 더러운 예기 들어가면서 봉사활동 하는 분들도 힘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 자료 출처 – 필리핀 카페24( http://philcafe24.com ) – 글쓴이 : 일로하늘

Posted in Diary | Leave a Comment »